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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중급반이면 6, 7급 정도 되는 겁 니까?"

숙소로 돌아오는 길.

제이비스의 물음에 에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걸? 제국에 그 수준이라고 보 고했으니 거기에 맞춰야지."

"대단도 하십니다. 일부러 다 평균 으로 맞추면 오히려 티 나지 않습니 까?"

제이비스가 혀를 내둘렀다.

무색무취도 극한에 이르면 특색이 된다.

그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언제까지 실력을 감추실 겁니까?"

"제국을 감당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

"허, 그거 참… 광오하시군요."

건방지다는데도 에른은 별로 기분 나빠하지 않았고 제이비스도 말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려 제국이다.

대륙 최강의 세력.

다른 열여섯 살이 이런 말을 했다 면 꿈꾸는 소리 하지 말라고 뒤통수 를 후려갈겼을 터이나.

제이비스는 가능성이 없지만은 않 다고 보았다.

'그야말로 잠룡이지. 잠재력만큼은

라제칸 못지않다. 어쩌면, 스틸가드 가 한 번 더 제국의 발목을 잡을지 도...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평가가 바뀌는 건 최소한으로 잡 아도 4년 뒤이겠군요. 저라면 답답 하고 억울해서 못 견딜 겁니다. 아 까 그 시험관 눈빛 보셨어요? 어 우 "

"그런 시선에는 익숙하지. 근데 웬 4 년?"

"아카데미는 4년제 아닙니까?"

에른은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저 었다.

"맞는데, 난 4년 다 채울 생각이 없어서."

"예...?"

"조기졸업 할 생각이거든."

에른은 흰 치아를 드러내 보였다.

앞으로 2년이다.

내년이 지나기 전에 사람들은 알게 될 것이다.

누가 진정한 라제칸의 계승자인지.

"어… 그건 좀."

"왜, 못할 것 같아?"

"당연히 가능하시죠. 지금도 수석 졸업은 따놓은 거나 다름없는데. 제 말은 그 제국 부분...

에른은 피식 웃었다.

제이비스는 자신의 진면목을 아는, 아니 안다고 착각하는 유일한 사람 이다.

뭐가 진실인지는 그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4년이 아니라 2년

이다."

"에이, 도련님도 참."

"2년. 사업을 확장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지. 나는 나대로 노력하겠지 만, 너도 쉴 새 없이 일해야 할 거 다. 노새처럼!"

그 말에 제이비스의 안색이 변했다.

[54 화]

아카디오에서, 제이비스는 그 자 신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했다.

바로 얌전히 이중 스파이 역할을 받아들인 것.

제국을 배신한 게 뭐가 최선이냐 고 하겠지만, 덕분에 목숨을 건졌 으니까.

제이비스는 에른을 검술 천재 정 도로만 알고 있지만, 그의 진가는 검술 따위에 있는 게 아니다.

제이비스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1계에서 구매한 백리지청술.

에른이 정보부 요원과의 대화를 전부 듣고 있었다는 것을.

만약 접선 도중에 마음을 바꿔 정보부에 도움을 요청했다면?

'슥삭이지 뭐.'

말하는 도중 음고를 짓눌러 모든 걸 끝냈을 것이다.

아무튼, 목숨이 아까워서인지, 다른 의도가 있어서인지.

제이비스는 협조하기로 결정했고

그 덕에 에른의 신뢰… 까지는 아 니더라도 최소한 의심의 눈초리는 많이 덜었다.

'꺾이느니 부러지는 스타일은… 원래 아니었고. 당분간은 시키는 대로 하겠지.'

제이비스는 이용 가치가 있다.

그를 포섭해서 얻을 수 있는 것 은 세 가지다.

우선 제국의 동정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

제국은 [영웅의 실종] 사건의 유

력 용의자다.

황제가 아버지를 주시한다!

전대 황제가 스틸가드 때문에 개고 생한 것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또한, 스틸가드에 자기 사람 한 명 쯤은 심어두는 것이 좋았다.

앞으로 2년.

파국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영지 에 딱히 큰일이 발생한다거나 하 지는 않지만, 혹시 모른다.

무심코 넘어간 사건, 흘려보냈던 일들에 어떤 단서가 숨겨져 있을

지도.

"다들 고생했다."

호위대가 떠나는 날.

에른은 기사와 하인들의 노고를 치하해 줬다.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했음에도 표정들이 하나 같이 좋았다.

숙소에 머물 때마다 아낌없이 골 드 팍팍 쓴 덕이 아닌가 싶다.

특히 기사들은 에른을 바라보는 눈빛이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충성심? 경외감?

'거기까지는 아니고.'

약간의 존경심 정도인 것 같다.

알브레트의 기사들을 몇 마디 말 로 제압한 효과였다.

"도련님, 입학 축하드립니다!"

"몸 건강히 지내십시오."

"큰 성취 있으시길 바랍니다!"

에른은 고개를 끄덕이곤 제이비 스에게 눈짓했다.

'잠깐 보자.'

두 사람은 마차 뒤편에서 독대했다.

"경과보고서 있지? 제국에 보내는 거."

"예… 그게 왜?"

"나한테도 보내."

"제국에 보내는 보고서를요?"

"그럴 리가 있겠어? 뭐… 영지의 이런저런 소식들 말이야. 스틸가드 에 없는 동안 흐름 정도는 숙지하 고 있어야 하니까."

"그 정도는 쉽지요."

제이비스는 선선히 승낙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에른의 말을 듣 고는 표정이 변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신변에 대해서."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신다 싶 으면 기록해 두고, 외유를 나가신 다면 목적지도 알아보고."

"...백작님을 감시하란 말입니 까? 왜죠?"

"오늘따라 질문이 많다?"

"백작님은, 존경할 만한 분입니 다. 한 사람의 기사로든, 인간적으

로든."

"그래서 마음에 걸린다?"

제이비스는 무언으로 대답했다.

"허."

헛웃음이 나온다. 첩자가 이래도 되는 건가?

에른은 하는 수 없이 음고가 든 병을 흔들어 보였다.

제이비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거 너무 자주 쓰시는 거 아닙 니까? 무슨 만병통치약도 아니고."

"누군 협박이 취미라서 이러는 줄 알아? 다 사정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시키는 대로 하기나 해."

"...알겠습니다. 매달 보내 드리 면 됩니까?"

"보름에 한 번씩."

"예...

에른은 병을 집어넣고 품에서 자 루 하나를 꺼냈다.

" 받아."

"뭡니까?"

"골드."

받아들고 보니 묵직한 게 보통 금액이 아닌 것 같았다.

제이비스는 주둥이를 살짝 열어 서 안을 봤다.

번쩍.

일렁이는 황금빛이 눈을 찌른다.

"이… 이게 다 얼맙니까?"

"3만 골드. 다 골드는 아니고 보 석하고 이것저것 섞여 있어."

"어...

제이비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 라졌다.

3만 골드! 그가 평생을 벌어도 모 을 수 없는 금액이었다.

보통 사람도 아니고 오러 유저인 데도 그렇다.

"마, 마나석 거래로 번 전액이잖 습니까!"

"전액까지는 아니고. 아카데미 다 니면서 쓸 정도는 남겨 놨어."

"너무... 너무 많은데요. 이건."

하얗게 된 제이비스의 안색이 퍼 렇게 변하고 있었다.

"고독의 저주에서 벗어나고 싶어?"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그럼 이 3만 골드, 잘 불릴 생각 이나 해."

제이비스의 세 번째 쓰임새다.

자산운용 및 스틸가드 주변의 거 점 확보.

이제 에른에게 3만 골드는 그리 큰 금액은 아니라서 후자 쪽에 더 무게를 두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종잣돈이 몸집 을 크게 불려서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쪽박 차는 건 전생에 지긋지긋하 게 해본 것으로 충분하니까.

"저, 전 기사입니다. 정보부 요원 이고. 투자에 재능이 있을 리 없잖 습니까."

"자신 없으면 어디 묻어 두고 있다 가 2년 뒤에 고스란히 돌려주든지."

"그, 그래도 됩니까?"

"안 될 건 없지. 그러면 고독도 그 대로 있겠지만."

"만약에... 잃게 되면요?"

"잃어? 내 돈을?"

고개를 갸우뚱하는 에른.

이내 환한 웃음이 안면 가득 번 진다.

"그럼 죽어야지."

'젠장! 농담이 아니잖아!'

제이비스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뭘 그래. 다 된 밥상에 숟가락만 올리면 되는 건데. 다미안 상회하 고만 쭉 거래해도 마이너스는 안 날 거다."

영지를 떠나기 전, 제이비스에게 인피면구와 대량 구매한 변성단을

넘겼다.

그는 이제 제국의 첩자인 동시에 스틸가드의 기사, 여기에 더해 정 체불명의 상인 율라프로 살아가야 한다.

"삼중 신분이라니… 지금도 충분 히 버거운데 밤에는 돈을 벌어야 한다니...

제이비스는 살짝 멘탈이 나갔는 지 넋두리하듯 중얼거렸다.

'압박이 너무 심했나?'

에른은 그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정 힘들면 다렌한테 도움을 구 해. 누나가 성격은 나빠도 상재는 뛰어나단 말이지."

"둘째 아가씨요? 부탁이야 해볼 수 있지만… 들어 줄까요?"

"율라프하고는 안면도 있고. 얘기 도 잘 통할걸? 아마도."

에른은 호위대와 작별하고 아카 데미로 돌아왔다.

테아로스 기사 아카데미의 전반 적인 구조는 이렇다.

정문으로 들어와 넓은 교정을 가 로지르면 커다란 돔형 구조물이 눈에 들어온다.

아카데미의 상징인 이곳은 [지혜관]

교관들의 사무실과 원장, 부원장 실, 각종 위원회실들이 모여 있는 중심 시설인데, 그보다는 도서관 건물로 더 유명했다.

이곳의 장서량은 많지 않은 편.

예산이 부족해서는 아니고 카테

고리가 한정되어 그렇다.

보유 서적 대부분이 검술과 체술, 마나 연공 등의 무술서라서.

이 분야에서만큼은 대륙 어디에 내놓아도 밀리지 않는 깊이를 자 랑했다.

지혜관을 중심으로 각 학년 건물 과 훈련장 등이 드문드문 배치되 어 있다.

'이게 다 동선 낭비지. 좀 작게 지었어도 됐잖아.'

경신술을 쓴다면 한달음이겠으나,

아직도 무공은 봉인된 상태였다.

['현천태을신공(7성)' 흡수 진행,

75%....]

『벌모세수' 진행 중, 83%....]

물론 흡수가 끝난다 해도 보는 눈 때문에 평범하게 다녀야 했다.

터덜터덜 걷다 보니 기숙사가 나 왔다.

높다란 바위산을 등진 위치에 세 워진 회색 건물들.

턱을 든 에른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저 산이 원래 저렇게 낮았던가?"

바위산.

다시 보면 치가 떨릴 줄 알았다.

4년 동안 지겹도록 오르내린 곳!

졸업한 뒤로도 꿈에 나올까 무섭 던… 아니 실제로도 많이 나왔다.

그런데 무슨 조화일까.

지옥의 계단처럼 느껴졌던 산길이 그냥 평범한 등산로처럼 보였다.

"산이 낮아진 게 아니라 내가 높 아진... 뭐 이런 건가?"

천변보를 최대한 전개하면 차 마 실 시간 안에 정상 찍고 내려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꼭 발전한 무공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연륜이 쌓이면 시각도, 시야도 달 라지는 법이니까.

확실한 건 하나다.

'첫 입학할 때의 나와 지금의 나 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겉모습만 빼고…. 엄밀히 따지면 외모도 그때보다 좀 더 낫긴 하다.

하지만 아주 미세한 차이였다.

현재까지는.

*

1학년 남자 기숙사.

에른에게 배정된 방은 2층 구석

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막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착, 착하지? 이거 놓고 얘기하면 안 될까?"

"캬오!"

"너… 너 그러다 맞는다? 나 7급 이라고! 7급 주먹에 맞으면 죽을 지도 모른다고?"

"캬아악!"

덜컥.

문을 열고 들어가니 처음 보는

소년이 쩔쩔매고 있는 게 보였다.

작고 붉은 뭔가가 그의 바짓가랑 이를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다름 아닌 사리였다.

"으아악!"

허둥대는 소년과 상황 파악이 끝 난 에른.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룸, 룸메이트?"

"그런 거 같네."

"나, 나 좀 도와줄래? 좀 떨어져라!"

"어렵지 않지."

에른은 조용히 사리의 이름을 불 렀다.

"그만하고 이리 와."

그러자 사납게 으르렁거리던 사 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해져 서는 에른의 어깨 위로 쪼르르 올 라왔다.

"어어..?"

소년은 어이없어하며 에른과 사 리를 번갈아 봤다.

"너… 네가 키우는 동물이야?"

"그런 셈이지."

"뭐야! 저, 저거 이상해!"

"호들갑 떠는 네가 더 이상하다."

에른은 자기 침대로 가서 앉았다.

방 하나에 침대 두 개, 그리고 옷 장과 테이블 하나씩.

좁지도 않고 넓지도 않은, 그럭저럭 두 사람이 지낼 만한 환경이었다.

"야!"

무심한 태도에 화가 났는지 소년 이 빽 소리를 질렀다.

에른이 고개를 돌렸다.

"왜?"

"민폐를 끼쳤으면 최소한 사과는 해야 하는 거 아냐?"

"민폐?"

"그래, 민폐. 이거 보}, 바지 찢어 진 거. 다 네가 데리고 온 저거 때 문이라고! 근데 뭐 호들갑?"

"사리한테 얘기해 뒀어. 룸메이트 란 애가 오늘 들어올 거 같으니까 소 닭 보듯이 하라고."

에른은 사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근데 왜 사리가 널 공격했을까? 답은 하나겠지. 먼저 시비를 걸어서."

"이거 도라이 아니야?"

소년이 비웃듯 입술을 일그러뜨 렸다.

"누가 보면 족제비가 아니고 사람 인 줄 알겠어?"

"사람보다 낫지. 사리야, 무슨 일 이 있었지?"

"뀨엥!"

사리는 에른의 몸에서 내려와서 침대 한가운데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러곤 돌아와서 에른의 소맷자락 을 물고는 그 자리로 잡아끌었다.

"이게 무슨 뜻이지?"

"뀨와앙!"

에른의 손가락에 몸을 갖다 댄 사리가 몹시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손가락에 몸을 부딪쳐 댔다.

"쟤가 너한테 이렇게 했다는 건가?"

끄덕!

다음으로는 에른의 손바닥을 천

장으로 향하게 하고는 그 위로 올 라와서 펄쩍펄쩍 뛰었다.

"짜증나게 하는데도 겨우 참았는 데… 널 공깃돌처럼 공중에 던지기 까지 했다? 그것도 여러 번?"

끄덕끄덕!

"어.…"

소년은 할 말을 잃었다.

이 마임쇼.

연습해서 하는 거라고 해도 거의 묘기에 가까울 지경인데 그게 아 니고 실제 일어난 일을 정확히 재

현했다.

에른은 조금 전에 받은 비웃음을 되돌려 줬다.

"이러면 누가 민폐인지 모르겠네."

"아니, 그게… 어디서 온 지 모를 애가 방에 있으니까. 내 딴에는 놀 아 주려고 한 건데."

"그딴 짓, 다시는 안 하는 게 좋을 걸. 사리한테 물어뜯기기 싫으면."

방 안 공기가 급 무거워졌다.

소년은 겸연쩍은 낯빛으로 한참 을 가만히 있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미, 미안하다. 괴롭히려고 그런 건 아니었어."

"사과할 거면 사리한테 해."

"음… 미안해, 족제베야. 아니, 사 리야."

"뀨읏!"

사리는 소년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우, 우리 통성명 할까? 그래도 앞으로 1년 동안 같은 방 써야 하 는데."

"그러든가."

"난 드미트리 톨레브리만이라고 해. 톨레브리만 가의 사남이지."

드미트리는 자못 자랑스러운 어 조로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였다.

"톨레브리만은 자작가야."

"에른 스틸가드다."

"와! 너도 귀족이구나. 잠, 잠깐… 스틸가드?"

드미트리의 눈이 커졌다.

"스틸가드! 노스플랫에서 제국 5개 기사단을 박살 낸 라제칸 님을 시조 로 하는, 대륙에서 명맥이 끊긴 신

화급을 배출했고 현재는 영웅급을 보유한 기사 명가! 하급 귀족에서 시작해 이제는 백작령을 다스리는, 개천에서 드래곤 난 대표적인 가문! 그 스틸가드를 말하는 거야?"

흥분해서는 누구나 다 아는 스토리 를 침까지 튀기며 쏟아내고 있다.

에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필 룸메이트가 설명충...

뒷말은 속으로 삼켰다.

'걸려도 왜 이딴 애가 걸리냐.'

[55 화]

전생과 현생, 무엇이 다른가.

전생에 스틸가드를 떠나 테아로 스에 왔을 때, 그러니까 첫 열여섯 시절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 였다.

그거면 다행이지.

더심한말을 찾자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비대한 자아를 주체하지 못하는 철부지 나르시스트. 하지만 한 꺼풀

벗겨내면 열등감에 찌들어 있는.'

8급에 불과한 검술 실력 탓이었다. 이건 뭐 자기최면을 걸어도 자부

심이란 게 생길 수가 없는 수준.

그래도 하급반치고는 덜 무시당

하고 다녔다.

가문의 후광.

그리고 잘난 외모 덕분이었다.

테아로스 기사 아카데미 737],

다시 시작하는 수련생 생활은.

'아니… 이건 난이도가 심하게 낮

은데?'

낮아도 너무 낮았다.

쉬워도 너무 쉬웠다.

그게 문제였다.

*

입학식을 마친 다음 날부터 학기 가 시작되었다.

지옥의 레이스라 불리는 아카데미 의 커리큘럼도 동시에 시작이었다.

기상 시간은 새벽 6시.

아카데미 수련생이라면 누구나, 이 시간에 일어나 바위산을 올라 야 한다.

"헉, 헉… 같이 좀 가!"

묵묵히 뛰고 있는데 뒤에서 드미 트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같은 시간에 같이 기 숙사를 나왔다.

이번에도 에른은 딱 평균만 유지 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

그런데도 드미트리는 뒤처지고 있 으니 그의 수준을 알 만 했다.

'중급반에 들어온 것도 용하군.'

드미트리는 계속 에른의 이름을 불러 댔다.

"에른! 같이 가자니까!"

"내가 왜?"

속도를 줄인 에른이 고개를 돌려 묻자 드미트리가 당연하다는 듯 소리쳤다.

"우린 친구잖아!"

고작 이틀 봐 놓고 무슨 친구?

에른은 전생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친구에 대한 기준이 좀 높았다.

드미트리 톨레브리만.

기억을 더듬어도 세부 사항이 떠 오르지 않는 녀석이다.

별로 중요한 인물이 아닌 것 같 고 첫인상도 그닥이어서 딱히 친 해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버리고 가자.'

에른이 원래 속도를 되찾자 거리 가 점점 벌어졌다.

"야, 이 매정한 놈아!"

드미트리의 외침은 귓등에도 닿 지 않았다.

경사 높은 바위산을 오르는데도 에른의 호흡은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경신술을 못 써서 마나만 운용하 고 있는 상태다.

아직 무공빨도 안 세웠는데.

' 가뿐하구만.'

땀 한 방울 안 난다.

전생에는 이게 너무 힘들어서 아침

이 오길 바라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근력이 붙고 심폐 능력이 길러지면 서 등반 자체는 할 만해 졌지만,

이어지는 훈련 스케줄에도 적응 하기까지는 거의 몇 년이란 시간 이 걸렸다.

'나, 마나 기반만 놓고 보면 일반 적인 [카르 숨] 수준쯤 되려나?'

오러 유저만 되면 4학년 기준으 로도 얼마든지 수석이 가능했다.

특출난 천재가 있는 기수라면 좀 어렵겠지만.

최소한, 1학년 톱은 무조건이다.

다른 수재들의 시선도 이러했을까.

이 훈련이 시간 낭비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졸업하려면 어쩔 수 없지.'

곧 바위산의 1/3 지점에 다다라 갔다.

한 무리의 1학년들이 위에서 내 려오고 있었다.

"에휴, 이 짓을 매일 해야 한다고?"

"수업 없는 날에도 등반은 꼭 해 야 한다면서? 안 그러면 나태해진

다나 뭐라나?"

"나태한 건 가만히 앉아서 꿀 빠 는 교관들이고."

먼저 도착해서 출석을 마치고 하 산하는 중급반 선두 그룹이다.

위를 향하는 에른의 시선과 깔보는 듯 내려 보는 선두 그룹의 시선.

종류가 다른 눈빛들이 부딪혔다.

씨익.

선두 그룹 중 한 명이 비웃음을 보냈다.

에른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바란 다리우스.'

다리우스 백작가의 삼남인데, 별 로 대단한 놈은 아니다.

그래도 한 가지 특이사항.

다리우스 가의 연년생 삼형제가 모두 한 학년 차이로 재학 중이라 는 점.

이게 유니크해서 반이 다른데도 그 존재를 알게 됐다.

"쟤까지가 딱 사람 새끼지."

바란이 친구에게 귓속말을 했다.

굳이 백리지청술을 사용하지 않

아도 되는 거리.

바란은 자기 말이 에른에게 들리 는 줄 모르고 있었다.

"아래쪽에 쟤들 봐라. 아직도 저 밑에 있어."

비웃음을 넘어선 어딘가 일그러진 감정…. 바란의 눈에 떠오른 것은 경멸이었다.

"밑바닥 새끼들. 박박 긴다고 애 쓴다."

유유상종이라고, 친구들도 그에 동조했다.

"지금이야 몇 분차이지만 앞으로는 계속 벌어질걸."

"3학년 되면 정상까지 올라가야 한다고 하던데. 저 속도면 수업도 못 들어가겠다, 야."

'지들도 중급반인 주제에 뭐 그리 대단하다고.'

에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정해진 지점으로 향했다.

바위산 중턱.

출석부를 든 교관이 간이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저기, 교관님?"

"음? 아, 스읍...

교관은 침을 닦으며 멍한 눈으로 에른을 봤다.

"이름이?"

"에른 스틸가드입니다."

*

아침 등반을 마치면 잠깐의 여유 시간이 주어진다.

이 사이에 조식을 해결하고 등교 할 준비도 끝내야 하는데, 모든 걸 다 하기에는 약간 빠듯한 감이 있었다.

부욱.

하는 수 없이 몇 개 안 남은 [바 디 클린] 스크롤을 찢었다.

'내일부터는 등반 속도를 좀 올려 야겠어.'

아침 식사도, 씻을 시간도 둘 다 포기할 수 없다.

아직 이 몸은 성장기.

신체가 완성되기 전에는 영양 공 급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물론 그 이상으로 중요한 피부와 모발 관리도.

"그럼… 다시 시작이군."

에른은 짧은 케이프를 옷 위에 걸쳤다.

아카데미의 복장 규정은 하나다.

무슨 옷을 입고 다니건 자유이지 만, 입학과 함께 배부 받은 케이프 는 꼭 걸치고 다녀야 한다.

교관들은 케이프 색깔로 학년을

구분했다.

1학년부터 4학년까지 현재는 순서 대로 붉은색, 녹색, 회색, 검은색이 다.

"뀨엥!"

막 기숙사를 떠나려는데 사리가 앞을 막아섰다.

"미안한데 사리야. 앞으로는 이 시간에 너 혼자 있어야 하거든?"

"뀨우웅?"

"교실에 널 데려갈 수가 없어. 기 숙사에서 같이 살게 해준 것만 해

도 편의를 봐주는 거라고 하더라."

"뀨에엥...

"읏차."

에른은 사리를 손바닥 위에 올려 눈높이를 맞췄다.

"침대 밑에 쇠붙이 넉넉하게 놔뒀 어. 배고플 때 먹고...

"뀨왕!"

"심심하면 나가서 바깥 구경이라 도 하고 그래. 단, 사고는 치면 안 된다."

"뀨...

그렇게 사리와 헤어졌다.

중급반 교실.

[바디 클린]을 쓴 게 유효해서 그래도 10분 전에는 도착할 수 있었다.

얼마 뒤, 하위 그룹 학생들이 헉 헉거리며 반으로 들어왔다.

"쟤들 얼굴 잘 봐 둬. 앞으로 바 닥 깔아줄 놈들이니까."

바란이 비아냥거렸다.

그 '바닥 깔아줄 놈들'에는 드미 트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이, 친구!"

드미트리는 에른의 옆자리가 비 어 있는걸 보곤 반색하며 와서 앉았다.

"먼저 간 건, 자리 맡아 주려고 그런 거였구나?"

"아닌데."

"아니긴, 네 마음 다 알아."

"참, 그거 알아?"

"모른다."

"야, 그러지 말고. 졸업생 형한테 들은 따끈따끈한 정보야. 우리끼리 대련을 하는 게 첫 수업일 거래. 이른바 중급반 내부 서열전!"

" 알아."

에른이 모를 리가 있겠나.

전생에 지겹도록 해본 게 서열전 인데.

입학식 다음 날, 그때 매겨진 첫 서열은 하급반에서도 하위권이었다.

"이 서열전이라는 게 말이야. 테 아로스 아카데미만의 독창적인 점

이거든. 전교생은 다른 모든 학생 에게 대련을 신청할 권리를 가진 다. 대련을 거부하는 건 불가능. 최대 3전까지 할 수 있는데, 2승을 따면 그 사람의 서열을 빼앗을 수 있고...

"야, 설명충. 안다니까."

"자꾸 나한테 설명충, 설명충 하 는데… 그게 뭐야 대체?"

설명충.

교류자들이 자주 쓰는 용어다.

뻔히 아이템 정보 보면 다 나오

는 내용을 주저리주저리 읊어대는 놈들.

쓸데없이 말이 많다는 건 물품에 자신이 없다는 거고, 어떻게 잘 속 여서 거래를 성사시킨다 해도 나 중에 꼭 불만이 터져 나오고 만다.

'그 판매자 자식, 설명충 짓 할 때 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

'설명충은 과학입니다, 여러분. 말 많은 놈들을 조심하십쇼. '

이런 용례.

'이걸 설명하면 내가 설명충이지.'

다른 차원의 유행어를 알려준들 드미트리가 알아듣겠나.

그때.

드르륵 문이 열리고 교관이 들어 왔다.

순간 교실이 조용해졌다.

"반갑다. 앞으로 이 반 담임을 맡 게 됐다."

교탁 앞에 선 사람은 지르칼이었다.

에른의 반 배정 테스트를 담당했 던 그 교관.

그가 1학년 중급반을 맡았다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지르칼이 담 임으로 온 게 전혀 놀랍지 않았다.

"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이런 건 차차 알아가도록 하고."

지르칼이 수련생들을 둘러봤다.

그리고 느닷없이 소리쳤다.

"일단은 대련부터다! 상급반에 올 라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고 있나?"

바란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서열전에서 이겨라! 상급반 수련

생을 대련에서 이기면 된다."

"상급반이 되면 지혜관 안쪽까지 들어갈 수 있다는 게 사실입니까?"

"사실이다."

" 오오...

학생들의 얼굴에 열기가 떠올랐다.

왕실 비고의 무술 파트는 알베스 3세의 명에 의해 아카데미로 이전 되었다.

그렇게 수련생들에게 개방된 지 도 이제 70년.

그런데도 아직 몇몇 서적은 여전

히 탐독할 가치가 있었다.

정말 수준 높은 연공서와 검술서 는 일부 수련생에게만 허락되어 왔기 때문이다.

가문의 비기를 전수받지 못했거 나 애초에 그런 비기가 없는 출신 이라면, 지혜관의 무술서가 유일한 희망.

나름 빵빵한 집안에서 가르침을 몰빵받았다 하더라도 색다른 시각 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경험은 소중했다.

타악!

지르칼이 교단을 내리쳤다.

"입만 벌리고 있을 때가 아니겠 지? 대련하러 간다!"

*

내부 서열전을 돌리는 이유.

수련생들에게 기준점을 제시해 주기 위해서였다.

아카데미에서는 노력을 엄청 강 조하지만 사실 교관들도 다 알고 있었다.

타고난 놈은 못 이긴다!

아무리 노력해도 가진 재능이 두 급간 이상 차이나 버리면 뭔 수를 써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하위권이 상위권에 도전하는 일 만큼은 피하게 하고 싶다.

가장 이상적인 그림은 하위권은 중위권, 중위권은 상위권을 목표로 삼고 수련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면 상위권과 중위권에도 자 연스레 동기부여가 된다.

아래 급에 추월당하는 건 수치스러

운 일이니까.

'누가 만든 시스템인진 몰라도 기 가 막히지.,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여야 겨우 현상 유지가 된다.

여기서 더 치고 올라가려면 영혼 까지 갈아 넣어야 한다.

훌륭한 기사들을 족족 배출해 낸 테아로스 아카데미의 검증된 노하 우였다.

"어디 쓸 만한 놈이 있나...

지르칼은 팔짱을 끼고 곳곳에서

일어나는 대련을 지켜봤다.

방식은 반 전체가 참여하는 풀 토너먼트.

1라운드 탈락이면 하위권 확정이 라 다들이를 악물고 대련에 임하 고 있었다.

하위권이 되는 것만은 피해야 했다.

하급반 상위권들이 틈만 나면 대 련 신청하면서 귀찮게 굴 게 뻔하 니까.

문득, 지르칼의 시선이 한 학생에 게로 향했다.

에른 스틸가드.

그의 대련 상대는 중위권 급 실력 이었다.

두 사람은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 고 있었다.

'역시 잘못 보지 않았어.'

7人 77,

才CX.

절로 혀를 차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평민 출신이 저 정도면 집안의 자랑이겠지만, 스틸가드면 그 이상 을 보여줘야 한다.

'나중이라도 상급반에 갈 수 있으

려나 모르겠네.'

그런데,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다.

에른은 속으로 절규하고 있었다.

'약해! 약해도 너무 약해! 이거 아예 마나를 쓰지 말아야 하나?'

갑자기 암담함이 몰려왔다.

'이런 애들하고 동급인 척을 해야 한다고? 그것도 2년이나?'

[56 화]

'이만하면 됐겠지?'

동수(同手)인 척해주는 것도 너무 실력 차이가 나니까 쉽지 않다.

아니, 그걸 넘어서서 고역이었다.

'끝내자.'

달려드는 녀석의 이름은 프란츠.

에른은 한숨을 쉬면서 프란츠의 빈 틈으로 목검을 찔러넣었다.

억!"

마나는 별로 싣지 않았다.

하지만 중급반 수준에선 견디기 어

려운 타격.

자세가 무너지자 에른은 비스듬히 돌면서 프란츠의 무릎 뒤를 찔렀다.

"크악!"

버틸 도리가 없다.

프란츠는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지켜보던 지르칼이 목청을 높였다.

"그만. 에른 승!"

"아, 아닌데."

프란츠는 벌떡 일어나서 지르칼에 게로 갔다.

"아, 아직 안 끝났어요!"

패자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항변한다.

전생에 많이 본 광경이다.

'내가 저러기도 했고.'

지르칼이 픽 웃었다.

"그렇게 말하려면 다리나 절룩거리 지 말든가."

"그, 그래도 더 싸울 수 있어요!"

"이건 사생결단이 아니고 대련이 다. 그리고… 내가 그만이라고 했으 면 그만인 거야."

프란츠는 아무 말도 못 했다. 풀이 죽어선 몸을 돌리는 것밖에는. 교관의 권위에는 도전할 수 없다.

"...씨발. 두고 보자 너!" 프란츠는 돌아와선 눈을 부라렸다.

에른은 복잡한 심경이 됐다.

'6급이 1급한테 두고 보자니.'

두 번 살다 보니 별일을 다 겪는다.

긴장 하나도 안 되는 위협은 무시 하면 그만.

에른은 대진표를 보러 갔다.

바로 옆 날개는.

〈바란 VS 드미트리〉

둘 중에서 승자가 다음 상대가 된 다.

'이건 안 봐도 뻔하겠는데.'

드미트리는 명백한 중급반 하위권.

바란은 바위산을 오르는 속도로 보

건대 특별히 전투 센스가 없지 않고 선 상위권일 것 같다.

에른이 예상한 대로.

빠각! 빠악! 빡!

대련하는 두 사람을 찾으니 드미트 리가 흠씬 두들겨 맞고 있었다.

"그쪽도 그만! 바란 승!"

그 말을 듣고도 바란은 목검을 휘 두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지르칼이 얼른 달려가 바란을 뜯어 말렸다.

이 사이에 드미트리는 서너 대는

더 직격 당했다.

"그만하라고 했지!"

지르칼이 눈을 부라리자 바란은 그 제야 손을 거두었다.

"아, 죄송해요. 흥분해서 안 들렸어 요...

"한 번만 봐준다. 승패 결정 났는 데 또 이러면 실격패시킬 거니까."

"명심하죠."

바란은 싱글거리며 대진표를 확인 하러 갔다.

드미트리는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옷자락 밖으로 드러난 부분만 봐도 여기저기 선홍색 멍 자국이 나 있 고, 눈두덩은 어쩌다 맞았는지 퉁퉁 부어올랐다.

몸도 못 가누는 걸 보면 데미지가 상당한 모양.

지르칼이 드미트리를 일으켜 세워 줬다.

"괜찮나? 어디 부러진 데는?"

"그,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럼 다행이고. 치료실 가서 연고 라도 바르고 와라."

지르칼은 사무적인 대화만을 나누 고 다른 대련으로 눈길을 옮겼다.

에른도 자기 할 일이나 하러 가려 고 하는데.

드미트리와 눈이 마주쳤다.

일그러진 표정과, 부어오른 눈가에 고인 눈물.

곤죽처럼 뒤섞인 감정이 전달되어 왔다.

쓰라린 패배감에 부끄러움이 왕창 끼얹어져 있다.

어차피 실력 차 때문에 무슨 짓을 했어도 졌을 텐데 왜 분해하는 걸 까.

에른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패배한 순간의 감정을 자기보다 잘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 다.

'스스로에게 화가 나지. 이렇게 태 어난 나한테. 재능을 극복하지 못하 는 내 한계에.'

이럴 때는, 모른 척 지나가 주는 게 도와주는 거다.

어차피 말 걸 생각도 없었고.

에른이 몸을 돌리자 바란이 이쪽으 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너냐? 후딱 끝내자."

바란은 자신만만한 듯 웃었다.

대진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 은데....

이 착각은 불과 몇 분 지나지 않 아 깨졌다.

"대련 X 같이 하네!"

바란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철벽처럼 방어만 하면서 깔짝깔짝 잔타 위주로 날리고 있어서 그러는 듯.

"극찬 고맙다."

"닥쳐!"

감사 인사를 욕으로 받다니.

에른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너도 1라운드에서 상대 가지고 놀 았잖아."

"내가 언제!"

"일부러 질질 끌던데… 일부러가

아니었으면 실력이 엇비슷했던 거였 나?"

"약한 새끼가 입만 나불대긴!"

바란은 도발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었다.

말이 길다는 건 약자라는 자기 고 백이다.

방어 능력이 은근히 좋긴 하지만, 그게 다일 것.

바위산에서도 자기보다 느렸고… 이 새끼는 하수가 틀림없다!

꼼수를 써서 버티는 것일 뿐, 금세

밑천이 드러날 것으로 봤다.

"그 얍삽이, 언제까지 통하나 보자!"

바란은 마나를 끌어올리고 전력을 다했다.

이때, 에른은 한 가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역시 상위권 실력이네. 이거 이겨 야 하나?'

중급반에서도 중간만 가자는 게 현 재의 구상인데, 바란을 이긴다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는 셈이 된다.

하지만.

'2라운드 광탈하면 하위권 확정… 이게 더 귀찮겠군.'

중급반 하위권은 하급반 상위권의 주요 타깃이 된다.

어떻게든 대련 3전에서 2판을 따 내고 상위 반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 혜택을 하나라도 더 챙길 수 있으니까.

대련 신청이 밀려들 것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졌다.

'일단 이건 이기고 보자.'

에른은 공세로 전환하고 프란츠에

게 그랬던 것처럼 바란의 빈틈을 찾 았다.

실력을 따지자면 바란>프란츠다.

하지만 에른이 보기에는 거기서 거 기고 그놈이 그놈.

산 위에서 보면 단층집이든 이층집 이든 어차피 도토리 키 재기인 것과 같다.

목검이 바란의 명치 부분을 찌르고 들어갔다.

커억!"

바란이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꾜… 뭐, 뭐야… 끅!"

"이거도 얍삽해? 그쪽이 비어 있는 걸 어떡하냐. 찔러 달라고 손짓하는 데."

"개새끼가!"

찡그린 얼굴에서 고통이 배어 나왔 다.

바란은 숨을 몰아쉬면서 다시 자세 를 잡았다.

그러나 급소를 타격당한 탓에 온몸 이 빈틈투성이였다.

'원래도 빈틈투성이였지만.'

바란이 뭘 어떻게 하건 에른은 억 지로 빈틈을 만들어 낼 능력이 있 다.

실력 차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비교 불가한 격차.

바란이 검을 휘둘러 왔다.

탁!

가볍게 걷어내고.

콰악

명치를 또 찌른다.

"헉, 헉...

바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래도 녀석의 전의는 꺼지지 않아 서 숨을 고르고 또 달려들었다.

"죽어, 새끼야!"

"한 방으론 안 되나 보네."

에른은 현천검법의 초식으로 바란 의 검을 날리고 명치를 또 찔렀다.

쓰러질 듯 말 듯 하면서 버티니까 계속 명치에 집착하게 된다.

쿡! 콰악! 콱!

연속 세 방!

« o O «

-厂=『..

바란이 무릎을 꿇었다.

이번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한참을 끅끅거리던 그가 침과 뒤섞

인 위액을 토해냈다.

"으, 드러...

"에른 승!"

어느새 지르칼이 곁으로 와 있었다.

"뭐, 뭐냐… 너?"

지르칼은 프란츠를 이겼을 때와는

다른 눈빛을 보였다.

의구심과 불신이 뒤섞인.

중위권이라 평가한 에른이 상위권 인 바란을 이겼다.

집념의 승리, 끝까지 버텨 이긴 것 이었다면 그 투혼에 박수를 보냈을 터이나.

처음부터 끝까지 명치만 찔러댄 것 은 가지고 놀았다고 보].야 한다.

'내 눈이 잘못된 건가? 아니, 에른 은 중위권이고 바란은 상위권이 맞 다. 이건 틀리지 않았어.'

지르칼은 좀 더 분명한 질문을 던 졌다.

"어떻게 한 거지?"

"아버님께선 말씀하시곤 했죠."

에른은 별 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 다.

"상대방의 감정을 자극해라. 실력 이 부족하면 실력 외적인 요소를 찾 아라."

"백작님께서 그런 말씀을?"

레바단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정 석적인 기사 그 자체다.

변칙으로 승리하라는 말은 그와 어 울리지 않지만.

아들이 그렇게 들었다는 데 아니라 고 할 수도 없고, 영웅급의 말에 일 개 교관 따위가 반박하기도 뭐하다.

'그렇다곤 해도 상위권을 가지고 놀 다니…. 이 자식, 보통내기가 아닌데.'

에른에 대한 평가가 '실망'에서 '관 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지르칼은 헛기침을 하며 충고했다.

"험험, 그래도 계책으로 이기는 건 오래 가지 못한다. 결국은 실력이

중요하지."

"그런가요? 지켜보시죠."

이때, 바란이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더, 더 싸울 수 있어요!"

지르칼이 눈살을 찌푸렸다.

"검도 날아갔는데 뭘 더 싸우겠다는 거냐. 이것들이 승복할 줄을 몰라."

"비겁한 새끼! 제대로 붙어 보자!"

"대련을 신청한다. 교관님, 대련할 수 있는 거 맞죠? 3번까지 가능하

니까."

지르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장난하나? 토너먼트 진행 중에 대 련은 무슨. 그리고 연속해서 한 사 람하고 붙을 수 없다. 최소 일주일 뒤에나 신청할 수 있고."

"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젠장!"

바란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지 이상한 소리를 쏟아냈다.

"내가 어떻게 하위권? 난 다리우스 백작가의 삼남, 바란 다리우스다!

네가 뭔데...

바란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너 따위가 감히 날 떨어뜨려?"

"끄, 끄하하핫...!"

지르칼은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고 야 말았다.

"...왜 웃으시죠? 다리우스가 우 습습니까?"

"웃기지 그럼. 다리우스가 스틸가드에 가문 빨을 세우는 꼴이라니."

"스, 스틸가드?"

바란의 눈이 커졌다.

믿을 수 없다는 반응.

"그... 럼?"

"에른 스틸가드. 공교롭게도 저쪽 도 삼남이군."

같은 백작가여도 수준 차이가 난다.

스틸가드와 다리우스.

혈통 말곤 내세울 게 없어서 더더 욱

"왜, 왜 스틸가드인 걸 말하지 않 았지?"

떨리는 목소리에 에른은 감정 없이 대답했다.

"언제는, 물어보기나 했나?"

*

에른은 3라운드에서 기권했다.

중위권을 확보한 이상, 더 올라갈 이유가 없어서였다.

우승은 레너드라는 녀석이 했다.

이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고 움직

임에서도 특별함이 안 느껴졌던 걸 보면 딱히 특출 난 녀석은 아닌 것 같다.

애초에, 진흙 속의 진주라면 상급반 에 가 있겠지 이 반에 배정됐겠나.

'너무할 정도로 시시하군.'

토너먼트가 끝난 뒤로도 생각은 바 뀌지 않았다.

하품하다 죽을 것 같다.

수준 낮은 이론 수업, 왜 하는지 모를 훈련도 물론 지루하지만.

무의미한 커리큘럼보다도 이거조차

못 따라가고 절절매는 동급생들의 모습에 더 한숨이 나온다.

지금 에른은 사슴 무리와 생활하는 사자와도 같았다.

사냥감을 쫓고 그들의 목덜미를 물 고 늘어져도 모자랄 판에, 풀이나 뜯고 있으니.

하루도 못 가 지겨움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상급반으로 갈 걸 그랬나?'

아니, 상급반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 봐야 사슴이 순록으로 변하는

정도의 차이?

'여기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겠어.'

[57 화]

일과를 마치고 에른은 기숙사로 돌 아왔다.

"꿔와앙!"

"잘 놀았냐? 뭐 하면서 보냈어?"

반가워하는 사리를 무릎 위에 앉 히고, 차원거래를 시작했다.

"뀨에엥...

사리가 꼬리를 내렸다.

에른의 관심이 자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아챈 탓 이다.

주인의 눈빛이 번쩍하면 한동안 은 주변 일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 지 않는다.

"아, 미안, 미안."

에른은 봐달라는 듯 사리의 머리 를 쓰다듬었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 야. 좀 봐줘라."

교실과 훈련장에서, 틈날 때마다 차원거래를 하긴 했지만 보는 눈

이 있어 여의치가 않았다.

확인 정도는 가능해도 본격적인 거래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마음 놓고 거래할 수 있는 시간 은 지금뿐.

[다정검객님으로부터 1850코인을

받았습니다.]

'겨우 한 건?'

에른은 거래가보다 10% 가까이 싸게 팔고 있다.

5대 큰손 중 2명이 30일 정지 처 분을 받았고, 알바들의 꼬리말은 싹 다 지워지면서 천급 판매에 탄 력이 붙었다.

악성 재고로 쌓여 있던 천급들을 다 판매한 것은 물론이고.

다음 재고를 확보한 뒤로도 하루 3, 4건 정도는 거래가 성사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그게 3, 4토막 났다.

'자동거래라 그런가? 아무래도 흥 정 못 하는 게 크긴 하지?'

그러나 거래 모드를 수동으로 돌리 고 저녁 시간 내내 기다려 봤지만 문의 자체가 들어오지 않았다.

'이건 뭔가 있다.'

시세보다 150코인이나 싸게 팔고 있는데 입질이 없다는 건 둘 중 하나다.

영약 못 구해서 안달인 무림인들이 다 싸우다 죽었거나, 아니면 더 좋 은 매물이 시중에 나와 있거나.

당연히 전자일 리는 없지만 후자 도 아니었다.

정확히는, 용신구가 연 이벤트 때 문이었다.

[태산보신원 특별 이벤트! 천급 영약을 구매하면 상점 포인트 300P 를 드립니다! (단 태산보신원에서만 사용 가능)]

"용신구 이 인간이 머리 좀 썼군."

태산보신원의 천급 판매가는 딱 정가인 2000코인 정도.

300P 할인받으면 1700코인… 인

것은 아니다.

상점 포인트는 코인보다 범용성 이 떨어지고 일반적으로 상점가가 거래가보다 비싸기 때문에.

정확한 시세를 따지자면 200코인 할인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러면 1800코인.

'50코인 차이면 다 저쪽으로 달 려갈 만하지.'

1800코인이나 1850코인이나 2000 코인을 기준으로 하면 2.5% 차이밖 에는 안 된다.

할인율로 따지면 별 차이가 없지 만 막상 따지고 보면 50코인인데, 이게 엄청 큰 것이다.

그렇게 뿌린 공짜 포인트는 어차 피 태산보신원에서만 사용할 수 있기에 결국은 회수가 되는 금액 이다.

제휴 상점의 이점을 극대화한 견제 전략. 용신구의 노림수는 보기 좋게 적중했다.

"진작 이렇게 나왔으면 얼마나 좋아."

알바나 쓰는 더러운 수 대신에.

정당하게 강점을 살리면 누가 뭐 라 하겠나.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최소한의 예 우는 해줬을지도 모른다.

한동안 큰손들이 잠잠하면서 최 근 에른은 달달한 꿀통을 목구멍 에 들이붓다시피 하고 있었다.

천급 거래 1건의 마진은 300코인 이 조금 넘는다.

그걸 하루 3, 4건 쳤으니 매일 1000코인은 벌어들인 셈.

하지만 용신구가 칼을 빼 들었고

당분간은 이런 수익이 나올 수 없 을 것이다.

"덕분에 4만 코인 찍었으니까."

에른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보유 코인 : 41131]

계좌에 찍힌 숫자가 마음에 안정 을 주는 것도 있고.

큰손들이 움직일 거라는 건 예상 한 바이니까.

오히려, 에른의 입가에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두려울 이유가 없다.

자신도 없다.

이 경쟁에서 밀려날 자신이.

"가격 경쟁으로 가주겠다면 나야 땡큐지."

에른의 최고 강점, 가격 경쟁 아닌가.

유리한 판을 그려주겠다는데 사 양한다면 그거야말로 실례다.

"그쪽이 내리면 나도 내려야지. 얼마가 좋을까."

에른은 판매가를 1750코인으로 낮추고 차원거래를 종료시켰다.

"끝났다. 놀아줄게, 사리야."

"뀨와아아아!"

사리가 흥분하며 달려들었다.

이제 사리는 더 이상의 외형 변화 가 없었다. 외모도 성격도 이대로 쭉 갈 것 같았다.

'다행이지.'

생긴 건 당연히 모두에게 호감을 살 만한 귀여움의 결정체.

성격은… 약간의 공격성이 있기는

해도 트러블을 일으킬 정도는 아 니었다.

하나 문제가 있다면 에른에 대한 의존성, 이에 대해 그랑뷔트가 경고 하기는 했다.

'...…피를 먹일 경우 통제가 용이 해진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테이 머를 어미로 여기게 되기 때문에 언 제까지고 자신을 아기로 생각하고, 독립성이 많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존재함.'

"뀨왕! 뀨왕!"

이렇게나 매달리고 엄청 좋아하

는데.

매일 혼자 내버려 두고 이 시간 이 돌아오기를 손꼽… 아니 발꼽아 기다릴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좋 지 않았다.

*

다음날 새벽.

일어나 보니 드미트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침대가 정리되어 있는 걸 보면 일찌감치 등반하러 간 모양.

1라운드 패배가 충격으로 다가온 건가.

그러고 보니 어제 저녁, 드미트리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이불만 뒤집 어쓰고 있었다.

그 말 많던 설명충이.

'동기부여 제대로 됐나 보군.'

아카데미는 왜 학생들의 서열을 나누고 지속적인 서열전을 부추기 는가.

이 이유에서다.

에른도 채비를 하고 바위산으로

향했다.

후우우웅!

얼굴을 때리는 바람이 간지럽다.

속도를 조금 올려 본다.

이만하면 어제보다 한결 여유 있 겠다 싶은 참, 낯선 기척 하나가 다가들어 왔다.

'...프란츠?'

어제 대련했던 녀석.

그냥 가까이 오는 정도가 아니라 이건 뭐 코앞까지 쑥 들어오는데.

이쯤 되면 출수해도 정당방위다.

하지만 여긴 무림계도 전쟁터도 아닌 아카데미.

에른은 손이 근질거리는 걸 참으 면서 멈춰 섰다.

"뭐냐?"

"에, 에른 스틸가드?"

"알면서 뭘 물어?"

"어… 그러네...

프란츠가 머리를 긁적였다.

"무슨 일이냐고 묻잖아."

"그, 그게 잠깐 와 봐야 할 거 같

아서."

'?"

"드미트리 말이야. 네 친구지?"

"룸메이트."

" 응?"

"룸메이트라고."

"어...

어버버대던 프란츠의 목소리 톤 이 변했다.

"큰일 났어! 네 친구… 아니 룸메

이트 드미트리가!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이-. 가자!"

"알멩이는 다 어디로 갔냐. 무슨 큰일이 났다는 거고 가긴 어딜 가 자는 건데?"

프란츠의 시선이 왼쪽 위를 향했다.

"그… 뭐냐… 그래, 사고! 사고가 났어! 무슨 사고냐면, 어… 드미트 리가 낙석에 깔렸거든?"

"그건 진짜 큰일이긴 하네. 근데 사고가 났으면 교관을 불러야지 왜 날 찾는 건데?"

"그게… 교관님은 이미 부르러 갔 고, 드미트리가 널 찾아. 얼굴을 보면 힘이 날 것 같다고."

한숨이 나온다.

에른은 어디까지 하는지 보자는 심정으로 물었다.

"무슨 인간 힐링포션도 아니고… 알았다, 가자. 어딘데?"

"조금만 가면 돼."

프란츠의 얼굴이 확 펴졌다.

그는 에른을 으슥한 샛길로 데리 고 갔다.

학생들이 이용하는 등반 루트에 서 한참 벗어난 곳이다.

공터에서 세 사람이 에른을 기다 리고 있었다.

무릎 꿇은 드미트리, 그리고 그를 구타 중인 두 사람.

하나는 누군지 모르겠고.

다른 한 명이 중요했다.

' 바란.'

아니었다면 그게 더 놀랄 일이었다.

퍽! 퍼억!

찰진 소리가 연달이 귓가를 때렸다.

뒤에서 프란츠가 킥킥거린다.

"성공했어! 멍청한 건지, 순진한 건지… 야, 새끼야. 어제 두고 보자 고 했던 거 기억 나냐?"

바란도 웃고 있었다.

"친구한테 큰일이 났다는데, 안 오고 못 배기지. 더스틴, 이 자식 잡고 있어."

드미트리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 코와 입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린다.

바란이 다가와서 이죽거렸다.

"어때, 친구가 개 맞듯이 맞은 걸 본 소감이."

두 눈 가득 서린 것은 깊은 원한.

"이거 참...

이런 눈, 33년을 살면서 여러 번 봤다.

그런데 대부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였지 이런 되도 않는 원한 은 뭔가 새롭다.

새로운 동시에 한심하다는 게 문

제지만.

"어제 일이 이럴 정도였냐?"

"물론! 감히 나한테 굴욕을 줘? 너 때문에 난 하위권이 됐다고!"

"너 그래도 실력은 있는 편이던데. 대련해서 올라가면 되지 않나?"

"두 판을 따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줄 알아?"

"...일주일?"

"일주일 같은 소리 하네. 서열 떨 어질 거 같으면 컨디션 덜 돌아왔 다 어쩐다 하면서 시간을 끈다고.

교관들은 참관하기 귀찮아서 그 변명을 인정해 주고."

바란이 분통을 터뜨렸다.

"미친 새끼가! 날 이겼으면 우승 이라도 할 것이지 기권은 뭐 하자 는 거냐? 이러면 빼박 하위권 되 는 거잖아!"

바란은 드미트리를 가리켰다.

"너도 네 친구처럼 만들어 주지!"

"친구 아니라니까."

"웃기고 있어. 어제 그.거, 앙심 품고 그런 거잖아. 대련 중에 친구

좀 때렸기로서니, 그따위 치졸한 복수를 해?"

이때, 드미트리가 소리쳤다.

"에... 에른! 나 때문에 이럴 거 없어!"

"거봐."

룸메이트끼리는 무조건 친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나?

애들이 이상한 고정관념이 있다.

에른의 미간이 좁혀졌다.

"뭐… 됐고. 하나만 물어보자."

"너 포함 다섯이나 모았으면 자신 감이 생기는 것도 당연해. 그건 이 해하겠는데."

"...다섯인 걸 어떻게 알았지?"

그야 기척이 느껴지니까.

"숨을 거면 제대로 하지. 다 보이 던데."

에른의 말에, 뒤쪽에서 어설프게 은신하고 있던 바란의 친구 둘이 걸 어 나왔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이거야.

스틸가드가 그렇게 우스워? 날 건 드리고도 뒤탈이 없을 줄 알았나?"

"헹! 스틸가드라고 하면 쫄 줄 알 았나 본데. 다 알아봤거든? 내놓은 자식, 동생으로도 생각 안 한다… 너네 둘째 형이 한 말이야. 좀 얻 어터지는 정도로는 집안의 그 누 구도 신경 안 쓸 거라고 하더라."

" 아."

바란에게는 두 명의 형이 있다.

둘 다 아카데미 재학생이고.

작은형 제이슨과 친분이 있는 듯

한데, 제이슨은 자신의 예전 모습 만 기억할 테니.

"나름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은 거군."

"물론이지. 아, 이러다 수업 시작하

겠다. 후딱 끝내자고. 얘들이-, 쳐!" 바란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어제 그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분하고 원통해서였다.

혼자 있는 드미트리를 발견한 것은 천운이라고 해야 할까, 덕분에 에른 을 유인할 수 있었고 곧 놈의 명치

에 주먹 팍팍 꽂아 넣을 생각을 하 니 진한 흥분감이 전신을 감싸기 시 작했다.

그런데.

"아악!"

"칵!"

"으억!"

"크아악!"

갖가지 비명은 모두 친구들의 입 에서 나온 것이었다.

프란츠, 더스틴… 시몬스와 레브, 최소 중위권은 되는 애들이 눈 깜짝

할 사이에 나가떨어졌다.

에른 한 사람에게.

"뭐, 뭐야… 이거?"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바란은 어제보다 더한 충격에 횝 싸였다.

"뭐긴, 그 누울 자리가 네 관짝이 었던 거지."

에른이 가까이 다가온다.

바란은 그 자리에 붙박인 듯 굳 어 버렸다.

'움, 움직여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땅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금이 저리고 식은땀이 홀렀다.

이게 무슨 조화일까...?

바란은 알지 못했다.

말로만 듣던 [살기]라는 게 비유 가 아니라 실재하는 것임을.

경지에 오른 무인이 내뿜는 살기 는 그어떤 사기 저하 마법보다 강력하다는 것을.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에른이 사신처럼 느껴 졌다.

'오지 마… 오지 마 제발!'

저도 모르게 오줌을 지린 모양인 지 가랑이가 축축해졌다.

질끈 눈을 감은 바란, 그런데 곧 찾아올 줄 알았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

실눈을 떠봤다. 이상한 일이었다.

에른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왼손으로

한쪽 눈을 가린 채.

'하필이면 지금? 타이밍 한번 죽

이는군.'

에른의 왼쪽 눈이 붉게 빛났다.

[벌모세수가 완료되었습니다.]

[흡수가 완료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현천태을신공의 깨달음 이 뇌리를 뒤덮었다.

[58 화]

'혹, 혹시...?'

공포에 질려 있던 바란의 얼굴.

두려움이 서서히 가시고, 곧이어 희망의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에른은 아직도 못 박힌 듯 서 있 기만 한다.

시선은 한곳에 고정되어 움직일 줄 을 모르고.

'마나 폭주라도 일어난 걸까?'

그렇다면 천운이다.

바란은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겨 우 뻗어서 에른 앞으로 갔다.

"으어어..

가슴 졸이며 손을 휘휘 저어 보는 데, 반응이 없었다.

바란이 만세를 불렀다.

"역시 하늘은 내 편이야!"

압도적인 실력을 뽐내다가 갑자기 동력이 끊긴 것처럼 멈춰 버린다는 건.

[마나 폭주] 말고는 설명이 불가능

했다.

바란의 얼굴에 승리감이 떠올랐다.

"죽어, 새끼야!"

심장의 마나를 있는 대로 긁어모은다. 마나 로드를 타고 흐르는 전율.

이 짜릿함을 전부 주먹으로.

6급 수준이긴 해도 이 정도면 필 살기다.

에른은, 예상외의 실력을 가진 것 같다.

왜 숨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선보인 무위를 보면 중급반 수준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더라도, 지금은 무방비 상태.

전력을 다한 주먹에 강타당한다면 어떻게 될지.

'알 게 뭐야!'

쓰잘데기 없는 생각 따위는 저편으 로 묻어 버렸다.

바란의 주먹이 에른의 관자놀이를 노리고 날아갔다.

척!

'.…"처억?'

둔탁한 타격음이 아닌 뭔가에 가로 막히는 소리.

마나를 잔뜩 실은 공격을 막아선 것은 에른의 손바닥이었다.

"대단도 하다. 오줌까지 지려 놓고 기습할 생각이 들더냐?"

"마, 마나 폭주가 아니었어?"

"폭주는 지금 네가 하는 게 폭주고."

일반적인 탈각, 느닷없이 찾아온 깨달음의 순간이었다면 위험했을지 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흡수]가 완료

된 것뿐.

한꺼번에 들어온 대량의 정보를 반 추해 봤을 뿐이다.

에른은 확신했다.

'한 단계 올라섰다.'

가볍게 운기해 보니 내공이 정상적 으로 움직였다.

한동안 마나만 쓰다가 주 무기인 내공을 되찾으니까 별 이유 없이 안 도감이 들었다.

이 기쁨을 어떻게 나누면 좋을까.

'일이 커지면 안 되니까.'

부수지는 않고, 적당히 골절 정도만. 뚜두두둑!

주먹을 감싼 손에 힘을 주자 바란

이 허물어졌다.

"크아아악!"

에른은 바란을 몇 번 더 밟아 주

고 그의 친구들을 불러모았다.

" 얘들아."

"대답 안 해? 내 말이 우습나?"

찌릿.

"흐억!"

"히에엑!"

미약한 살기일 뿐이나 그것으로 충 분했다.

"아... 아니, 그럴 리가!"

"미, 미안해...

에른이 입을 열었다.

"정렬해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네 사람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열을 맞춰 선 중급반 학생들.

"하나씩 말해 보E 무슨 생각으로 이딴 짓을 저질렀지?"

"나, 난… 바란이 시켜서."

" 나도...

"나도 그래."

대놓고 적의를 보였던 프란츠까지도.

"나, 나도 바란 때문에 억지로."

"에라이, 동료의식 없는 것들아."

에른의 발이 어지러이 움직였다.

빠바바 빡!

"으악!"

넷은 동시에 쓰러져선 정강이를 부 여잡고 끙끙거렸다.

"일어나."

어린 것들이 파 놓은 어설픈 함정 에 어떻게 대응했어야 했나.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도 방법이었 겠지만, 두고두고 귀찮게 할 것을 감 안하면 초장에 끊고 가는 게 맞았다.

그렇다면, 이 애들한테 힘의 차이 를 보여줘야 한다.

다시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그리고 입막음으로는.

에른의 전신에서 스멀스멀 살기가 피어올랐다.

'똑같이 해 줘야 공평하겠지.'

떨거지 4인방은 바란과 다를 것 없는 반응을 보였다.

곧 녀석들의 아랫도리가 축축해지 고 지린내가 사방으로 진동했다.

열여섯에 단체 실금이라니, 평생 남을 흑역사다.

하지만 당장은 그런 생각도 사치였다.

에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전의는 벌써 사라진 지 오래고, 무

서워 미칠 것만 같아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나 별로 바라는 것도 없어. 학점 잘 따서 우수 졸업하는 거 정도?"

에른이 인상을 찡그리자 4인방의 안색이 변했다.

"근데 웬 오줌싸개들이 방해를 하 니...

"흐, 흐엑!"

"나 조용히 살고 싶다. 건드리지 마라."

"아… 아라허..

"웬 옹알이? 제대로 말해."

입이 덜덜 떨려서 발음이 엉망으로 뭉개진다.

4인방은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했 다.

"알, 알았어. 건드리지 않을게."

이만하면 알아들었겠지.

다들 공포에 사로잡혀 자기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아, 이것도.'

심하게 얻어터진 드미트리.

에른의 시선이 그쪽에 잠깐 머물렀 다가 떨어졌다.

"내 주변인도 마찬가지고. 나 때문 에 누가 피 해 보는 건 기분 더러우 니까."

*

바위산에서의 참교육 이후로 중급 반 생활이 아주 편해졌다.

상위권을 이루는 바란 그룹은 에른 만 보면 눈치 슬슬 보면서 황급히

자리를 뜨기에 바빴다.

중하위권에서도 스틸가드란 이름 때문에 에른을 함부로 하는 수련생 은 존재하지 않았고.

하나 귀찮아진 게 있다면 자꾸 달 라붙는 드미트리.

"역시 넌 내 친구가 맞았어. 일부 러 쌀쌀맞게 구는 건 그만두지 않을 래?"

"아니라니까, 좀."

"그럼 왜 날 구해준 건데?"

"귀찮은 것들 정리한 거다."

"그게 구해준 거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설명충 치고는 입이 싸지 않다는 것.

바위산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함구 를 부탁하자 드미트리는 굳은 표정 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톨레브리만에서 입 무겁기로 소문 난 나야. 나만 믿으라구!"

그렇게 한 주가 지나갔다.

굴릴 때는 미친 듯이 굴려도 풀어 줄 땐 또 풀어주는 게 아카데미 스

타일.

주중에는 훈련, 훈련, 오로지 훈련 이지만 휴일에는 크게 터치하는 게 없었다.

휴식도, 외출도 자유다.

에른은 같이 놀자는 드미트리의 제 안을 묵살하고 아카데미를 떠났다.

*

나바로의 수도 테아로스.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도시다.

면적은 그리 넓지 않지만 대도시가 갖춰야 할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곳이었다.

잘 구획된 도로, 인구가 밀집된 주 택가, 발달된 상권.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이다.

대도시의 명암.

테아로스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는 없었다.

수도의 뒷골목, 허름한 로브를 걸

친 남자가 유곽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후드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얼굴 은 특색 없이 못생겼다.

나름 잘 싸매고 있는데도 생김새를 완전히 감출 수는 없어서 그와 눈이 마주친 행인들은 불쾌한 얼굴로 발 걸음을 재촉했다.

'차라리 무서운 얼굴이 낫나? 너무 멸시잖아, 이건.'

이 남자는 인피면구를 쓴 에른이었다.

아카데미 학생이 유곽에 출몰?

당장 징계 받고 근신 처분이 주어 진다 해도 할 말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인피면구를 써야만 했다.

그런데 전에 쓰던 건 제이비스한테 줘 버려서, 그렇게 다시 찾은 혈마 존자.

-에른 : 좀 멀쩡한 얼굴 없나요?

-신기하고 재미있는 혈마존자의 으 스스한 사술 공방 : 왜요, 구입하신 얼굴이 마음에 안 들었습니까?

-에른 : 너무 범죄상이라서요. 기 본적인 의사소통이 안 되는 얼굴입 니다. 지나가다 길만 물어도 경기를 일으키니.

-신기하고 재미있는 혈마존자의 으 스스한 사술 공방 : 음… 이게 약품 에 절이고 가공을 거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외모가 망가집니다.

-에른 : 못생겨도 상관없어요. 최 대한 착해 보이는 걸로요.

고르고 골라 구입한 게 이 얼굴이었다.

'진짜 죄다 붉은 등을 걸어 놨네.'

거리 전체에서 풍기는 퇴폐적인 느낌.

직접 와보는 건 처음이지만, 듣기 는 많이 들었다.

뒷골목 홍등가.

3, 4학년쯤 되면 하급반 수련생들 은 재능의 차이를 실감하게 된다.

본인의 한계를 인정하고 나면, 지 금까지 노력한 시간은 대체 뭐였는 지 허탈감에 빠지는 수순을 밟는데.

그런 아카데미의 방황하는 청춘들.

그중에는 퇴학도 불사하고 주색에

빠지는 놈들도 있곤 했다.

이때 에른은....

아직 정신 차리기 전이었지만, 홍등 가를 드나든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여자들이 꼬이던 시 절이라.

굳이 몰래 접대부를 만난다?

골드까지 쓰면서?

친구들이 동행하자고 할 때마다 코 웃음 치면서 뭐하러 그런 짓을 하냐 고 했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유곽 거리에

온 것일까.

'시야가 너무 제한되는군. 높은 곳 으로 올라갈까.'

보는 눈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스슷!

순간, 에른의 몸이 사라졌다.

천변보가 발동된 것이다.

벽을 타고 지붕으로 올라간 에른은 가장 높은 건물 위로 이동해서 거리 전체를 조망했다.

'그 사람'은 분명 오늘 나타난다.

아카데미에서 더 자유롭게 행동하 기 위해 꼭 필요한 사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카데미와 관련된 기억 중에서 꽤 강렬한 편으로 남은 그 스캔들.

아니, 아카데미뿐 아니라 수도에서 도 꽤나 화제가 됐었다.

'가십으로는 최고지. 기사와 접대 부의 사랑이라니.'

그래서 '그 사람'에게 붙은 별명이 유곽 거리의 로맨티스트.

풍문으로는 5년 동안 무려 500번

이 넘도록 방문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조롱 섞인 다른 별명도 생겼다.

홍등가 개근왕이라고.

어쨌든, 1년에 100회면, 휴일에는 무조건 나타난다고 봐야 한다.

에른은 감각을 확장시키고 행인들 을 하나하나 살폈다.

아직 낮 시간이라 인적이 드물어 거 리 전체를 한눈에 담아둘 수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시간이 지나면서 거리를 기웃거리

는 행인들이 늘어났지만, 현재까지 는 문제없었다.

'나름 알려진 사람인데. 맨얼굴로 나타나겠어?'

자기처럼 얼굴을 가린 사람들 위주 로 찾으면 된다.

기다림 끝에.

'...왔다.'

분명했다.

후드를 눌러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 지 않지만.

저 체구, 키와 걸음걸이.

오늘을 위해 몇 번이고 눈에 담아 둔 그 인물이 맞았다.

에른의 시선이 남자를 쫓았다.

' 음?'

남자는 이쪽으로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에른이 올라와 있는 5층 건물.

남자가 걸음을 멈춘 곳이었다.

'비싼 데 다니는군.'

여긴 유곽 거리에서 가장 높고 화 려한 건물이다.

그 접대부가 누군지까지는 알지 못 해서 거리 전체를 대상으로 감시한 건데, 이런 우연이.

에른은 조용히 착지하고 뒤따라서 유곽으로 들어갔다.

"저기, 손님?"

2층으로 올라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여 쫓아가려는 참, 어깨가 떡 벌 어진, 힘깨나 쓸 법한 기도가 앞을 가로막았다.

"어디 가십니까, 손님?"

"아, 누굴 좀 만나려고."

그 말에, 기도가 인상을 확 구겼다.

"뭐냐, 뜨내기? 여자를 만나려면 값을 지불해야 한다. 그것도 모르고 유곽엘 왔어?"

"알고 왔다."

에른은 골드 몇 개를 꺼내서 남자 의 손에 쥐여 줬다.

번쩍이는 금빛을 본 기도의 태도가 원상 복구됐다.

"헛… 이거 몰라 뵀습니다. 손님. 방 잡아 드릴까요?"

"됐고. 올라가 봐도 되지?"

"무, 물론입죠!"

기도를 밀어내고 계단으로 향했다.

유곽 2층,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몇 층으로 갔을까.

에른은 귀를 활짝 열고 백리지청술 을 사용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야릇한 소리들.

귓속으로 파고드는 밀어와 신음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초저녁부터 아주 열심들이야.'

이런 사람들이 있어서 유곽 거리가 돌아가는 거겠지.

의미 없는 소리는 하나씩 차단하고. 위쪽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렸다. 에른이 찾는 그 목소리였다.

'이틀만이구나. '

上즘 부쩍 자주 오시네요. '

'그렇게 됐다. '

'식사는요?'

'아직.'

'차려드릴까요?'

'그래 주면 고맙지. '

'잠깐만 기다리세요. '

'...뭐야, 이거?'

너무나도 평범한 대화.

여기가 가정집이었다면 이상할 게 없겠지만, 장소가 장소라 위화감이 들었다.

곧, 여자가 음식을 차려 왔고, 두 런두런 대화 소리가 이어졌다.

주제는 일상.

주로 여자가 말하고 남자는 들어주 는 식이었다.

에른이 혀를 찼다.

'지르칼 이 인간… 진짜 로맨티스 트였네?'

그것도 순수하기 짝이 없는!

에른이 찾으러 온 '그 사람'은 지 르칼이었다.

아카데미에서 벗어나려면 담임의 협조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담임 교관이 수도를 떠들썩하게 한 스캔들의 주인공이라니.

어찌나 다행인지 모른다.

[59 화]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는가.'

후드를 눌러 쓴 지르칼의 이마에 깊은 고랑이 파였다.

귀가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그런데도 끊을 수가 없다.

발길이 향하는 걸 어쩌란 말인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자제해야 한 다고.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정신을 차리

고 보면 비상금을 털어서 홍등가로 향하는 자기 모습을 보곤 한다.

" 후우...

지르칼은 납처럼 무거운 한숨을 내 뱉었다.

어느새 바깥은 어둑하게 저물어 있었다.

유곽 거리의 하루는, 이제부터 시 작이다.

거리마다 울려 퍼지는 악기 소리.

흥청거리는 손님들과 그들을 불러 세우는 호객꾼들.

지르칼은 사방을 둘러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순간의 향락일 뿐일지언정, 주위에 는 즐거워하는 사람들뿐인데, 지르 칼 혼자 굳은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알려진다면, 끝장 이었다.

아카데미 교관이 홍등가를 드나든 다는 사실.

그의 시선이 거리 끝을 향했다.

'오늘도 무사히...

...라고 생각하는 순간,

로브를 입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멈칫.

지르칼이 발을 멈췄다.

하지만 긴장감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 일반인이군.'

불안한 눈빛만 봐도 알겠다.

기도도 평범할 따름이고.

드러난 하관만 봐도 느껴지는 건.

'진짜 못생겼네.'

왜 저런 행색으로 홍등가에 나타났 는지 알겠다.

지르칼은 딱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 보고는 거리를 빠져나왔다.

뒷골목을 구불구불 돌고, 막 큰길 로 접어드는 참.

앞을 본 지르칼의 표정이 굳었다.

"뭐냐, 너."

아까 본 로브 남자가 길을 막고 서 있었다.

일부러 동선을 이리저리 꼬았는데 도 다시 만났다는 건?

지르칼은 반사적으로 허리에 손을 가져다 댔지만,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이런.'

신분을 숨기기 위해 검을 놓고 다 닌 게 독이 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남자도 무기를 휴대하진 않았다는 거다.

지르칼은 얼른 주변을 살폈다.

"은신 같은 건 없다. 혼자 왔으니까."

흡사 쇠붙이를 긁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

이게 인간의 성대에서 나온 소리가 맞는가 싶다.

지르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세 번 묻지 않는다. 정체를 밝혀라."

"뭐 좋은 데서 만난 인연이라고 통 성명은."

"말로 해선 안 되겠군."

스슷!

지르칼의 몸이 사라졌다.

뭐 하는 놈인지는 차차 알아보면 되는 것.

쑤우웅!

지르칼의 주먹이 남자의 울퉁불퉁 한 턱을 노리고 날아갔다.

"이야, 묵직하네."

마나를 잔뜩 실었으니까 당연하지!

그러나 남자는 새털처럼 가볍다.

일견 단순해 보이는 동작만으로 지 르칼의 연타를 전부 회피해 냈다.

'보통이 아니다!'

본인의 기도를 완벽하게 숨긴 솜씨 도 그렇고 지금 보이는 움직임도 그 렇고.

뇌리에서 리스트가 주르륵 떠올랐다.

암살자, 첩자, 도둑?

하나 골라서 찔러 봤다.

"체술이 제법이군. 암살자인가?"

"체술? 이거 선 넘네. 그딴 거랑

비교하지 아라."

암살자라는 거야, 아니야?

전혀 읽을 수 없다.

엄청난 포커페이스.

'하는 수 없군.'

슈웅!

지르칼이 몸을 날리자 남자도 맞붙 어 왔다.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날랜 건 인정하는데… 간격을 내준 순간, 승패는 결정 난 거다.

"흐읍!"

힘을 주자 지르칼의 팔뚝에서 푸른 오러가 흘러나왔다.

오러가 실린 주먹은 그 자체로 살 인 무기!

무자비한 권격이 남자를 폭격했다.

쾅! 쾅! 콰앙!

정신 나간 타격음이 골목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런데 찌그러진 만두처럼 돼야 했 을 남자는.

"손이 좀 매운걸?"

"오, 오러 유저?"

지르칼의 눈이 커졌다.

눈부신 은빛이 남자의 상체를 휘감 고 있다.

아름다운 오러다.

일렁이는 달무리와도 같은.

절로 침음성이 홀러나왔다.

'... 2급이라고 하더라도 1급에 가까운 2급이겠군.'

지르칼은 2급 초입 수준.

오러를 양팔에 깃들게 하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는 한발 뒤로 물러나며 물었다.

"누구십니까? 보통 분이 아니신 거 같은데. 어쩐 일로 절 찾아오신 건 지요?"

손속을 나누긴 했으되, 살기가 없

는 걸로 봐서 암살자는 아니다.

첩자라면 이런 식으로 나타날 리 없고, 도둑도.

1급이 왜 도둑질을 한단 말인가.

불길한 예감.

꿀꺽.

마른 침이 독처럼 쓰다.

다시 올라온 긴장감이 전신을 감쌌다.

"어쩐 일이냐고? 그건 내가 물어볼 말이지. 아카데미 교관 지르칼."

천둥처럼 귓가에 꽂히는 말.

"실비아라고 했던가? 예쁜 이름이 더군."

"아...

모든 게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 든다.

지르칼은 이중적인 감정을 느꼈다.

끝을 알 수 없는 늪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아 머리가 핑 돌면서도, 언 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기에 덤 덤하기도 했다.

"감찰 기사단에서 나오셨습니까?"

"그건 뭔 자다가 옆 사람 다리 긁

는 소리지?"

"...아닙니까?"

"감찰은 무슨 감찰. 그렇게 안 봤는데

은근 자포자기하는 스타일인가 봐?"

"얼굴 풀어. 당신 개망신당할 일은 없을 테니까."

남자가 씩 웃었다.

"오히려, 비밀 지켜 주러 왔다고 해야 맞겠지. 그 전에… 일단 오러 부터 없애는 게 어때?"

갑작스런 굉음에 놀란 주민들이 집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행인들도 골목을 기웃거리기 시작 하고.

뒷골목에 나타난 오러 유저라.

얘깃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지르칼은 황급히 오러를 거두었다.

"여기서 말하긴 좀 그렇고… 어디

지붕 있는 데라도 가지."

남자가 앞장을 섰다.

지르칼은 뒤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 이었다.

그가 감찰 기사가 아니라는 건 다 행한 일이나, 무언가 꾸미는 게 있 어서 접근한 것일 터.

그것만은 분명한데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어서 답답할 따름이었다.

*

근처 주점.

두 사람은 사방이 막힌 방으로 들 어가 맥주를 시켰다.

지르칼은 목이 타는지 연신 맥주를

들이켜 댔다.

반면, 남자는 여유만만 그 자체.

그가 빈정대듯 물었다.

"지르칼 42세… 처자식까지 있는 몸이고. 대체 몇 살 차이지? 당신 기사 서임 받았을 띠I, 실비아는 태 어나지도 않았을 거 같은데?"

"좀 알아봤는데 2년 동안 200번도 넘게 왔다고 하더라? 그것도 매번 실비아만 찾으면서."

"그,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았는지는 알 거 없고. 한 번에 5골드라고 치면 이게 얼마 야.... 교관 봉급 생각하면 진짜 뻔질나게 드나든 셈이지."

뭐라 할 말이 없다.

20년만 젊었어도, 가정이 있지만 않았어도 조금은 떳떳했을 텐데.

이건 아무리 귀하신 오러 유저라고 해도 커버가 안 되는 수준이다.

"실비아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던 거지? 무슨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불타는 정열에 사로잡힐 나이는 지 났잖아?"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긴."

탁!

지르칼은 정색하고 맥주잔을 내려 놓았다.

"믿지 않을진 몰라도… 아닌 건 아 닌 거요. 나와 실비아는 그쪽이 생각 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란 말이오!"

"그거 참 설득력 있군."

"어머니의 무덤에 대고 맹세할 수 있소. 실비아의 몸이라면 털끝도, 그 리고 내 손끝 하나 대지 않았소!"

지르칼의 얼굴이 시벌게졌다.

격정에 휩싸여 내뱉었지만, 곧바로 후회했다.

반응이 예상되었기 때문.

당연히 비웃겠지.

목젖이 보이도록 웃어젖히리라.

그런데 의외였다.

남자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왜지? 지켜주고 싶었나?"

"놀리는 거라면 그만두시오."

"아니, 이상해서 그러지. 어차피 당

신 차례 끝나면 다른 남자들이 실비 아를 사잖아. 털끝, 손끝… 백번 양 보해서 그쪽 말이 맞는다고 해도, 이게 의미가 있나?"

"실비아를 모욕하지 마!"

맥주잔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당장이라도 남자를 후려갈기기라도 할 듯한 기세였다.

"이게 무슨 모욕? 진짜 모욕을 안 당해본 모양인데… 그건 내가 입만 벙긋하면 경험해볼 수 있을걸?"

"무슨 말인진 알겠어. 애정… 아니 애정은 있겠지. 그러니까 매주 방문 했을 테고. 정확히는, 연애 감정으로 만나는 게 아니다?"

"내, 내 말을 믿어주는 거요?"

"반만. 나머지 절반은 사정을 들어 보고 믿든지 말든지 하지."

지르칼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 민하다가… 마침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한 남자가 있었소. 그 남자는 기

사 지망생이었지. 그리고 한 여자가 있었소."

지르칼의 눈이 추억에 젖었다.

"아름답고 현명한… 두 사람은 연 인이었소...

"잠깐."

"서두만 들어도 알겠다. 뻔하네. 이 루어지지 못한 러브 스토리?"

"어, 어떻게?"

"삶이라는 게 대개 전형적인 법이 지만... 그쪽은 좀 심한데?"

"뒷얘기도 뻔해. 숨겨둔 당신 딸이 지? 실비아?"

지르칼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오. 절대!"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그, 그건."

"뭐?"

"씨를 뿌려야 싹이 트지! 우리 사 이엔 아무 일도 없었소."

"그러면, 피도 안 섞인 첫사랑의

딸을 위해서 유곽을 들락거렸다는 건가?"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그거밖에 없었소...

일주일에 겨우 몇 시간 남짓.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그때 만이라도 실비아가 마음 편히 쉴 수 있기를 바랐다.

유곽에서 억지로 웃음을 파는 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고되고 힘든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자기가 방문할 때만은 실비

아의 꾸밈없는 웃음을 볼 수 있었다.

그때마다 지르칼은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불가능했던 거다.

몇 번이고 결심했지만, 도저히 발 길을 끊을 수가.

"지금까지 한 1000골드 썼잖아. 보 아하니 앞으로도 계속 퍼다 줄 거 같고. 그럴 바에는 그냥 목돈 줘서 자유의 몸으로 만들지?"

"내 봉급으론 불가능하오. 포주는 1만 골드를 요구하더군."

"사채라도 끌어 쓰면 되잖아. 기사 신용이면 얼추 가능하지."

"나도 가정이 있는 몸이오. 실비아 를 위해서 처자식을 내버릴 수는 없 었소."

"...본인 행동에 자각이 없나? 지 금 하는 짓이 그건데?"

지르칼이 고개를 숙였다.

"가족들한테는 미안하지만… 그래 도 나 자신에게는 떳떳하오."

"자랑이다. 그럼 포주를 조지는 거 는? 기사 끗발이면 포주 하나 날리

는 건 일도 아닐 텐데?"

"실비아가 일하는 유곽은 블랙 스 네이크가 관리하는 업장이오. 혼자 서 어떻게 해볼 상대가 아니란 말이 오."

"흐음."

"다시 묻겠소. 내 말, 믿어주는 거요?"

"그럭저럭."

" 휴우...

지르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남 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안심하고 그러나? 나야 얼마든

지 믿어줄 수 있지. 솔직히, 한 9할 정도는 진실일 거라고 생각해. 근 데...

남자의 눈빛이 사악해졌다.

"다른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 다면 뭐라고 할까? 우리 지르칼 교 관은 지고지순한 순정파지. 어쩜 그 렇게 따뜻한 마음을 지녔을까〜 이 런 반응? 절대 아니지."

"추하다 지르칼. 인정이라도 했으 면 덜 추했을 텐데, 되도 않는 첫사 랑 팔이라니…. 원래 저렇게 추한

인간이었어?"

남자는 품에서 골드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내기할까? 난 후자에 걸지."

남자의 입꼬리가 쭉 올라갔다.

누가 봐도 이쪽이 정배당이다.

인피면구 안, 에른의 입가도 마찬 가지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지르칼의 스토리.

알던 사실과 너무 달라서 놀랐다.

지저분한 염문인 줄 알았는데, 이 거 완전 눈물겨운 순애보 아닌가?

그렇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여전히 실비아는 지르칼의 가장 큰 취약점.

이쪽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

[60 화]

"아...

지르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긴, 그렇다.

이 남자가 자길 믿는다고 해도 달 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래 봐야 세인들은 손가락질할 테 고, 애초에 이 남자가 뭘 원하는지 도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

"나, 나한테 바라는 게 뭐요."

남자가 비죽 웃었다.

"에른 스틸가드라고, 알고 있나?"

"에른? 그 애가 왜?"

"알아, 몰라."

"알죠, 내가 담임 교관인데."

교관들 사이에서 꽤 화제가 됐었다.

신입생 중에 스틸가드의 막내가 있 다는 소식, 딱히 이름을 못 들어본 걸로 봐서는 아주 뛰어난 재능은 아 닐 거라고 판단됐다.

그래도 호랑이가 개를 낳지는 않을 테니까… 하고 기대하는 바가 없지

는 않았다.

지르칼도 그런 입장이었고.

결과는?

'애매했지.'

분명 개는 아닌데 호랑이도 아니고.

늑대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그래도 이상하게 눈길을 끄는 점이 있는 아이였다.

그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올까.

"당신이 에른의 뒤를 봐줘야겠어."

아!"

지르칼이 탄성을 뱉었다.

'어떻게?'는 아직 몰라도 '왜?', 그 리고 '누구?' 인지는 이제 알겠다.

"스틸가드에서 왔군! 마스터 레바 단의 지시인가?"

지르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분은 아니지. 아니라고 보고... 삼공자 쪽 사람이겠군? 이 봐, 이래서 좋을 거 하나 없어. 과 잉 충성이든, 에른의 지시든."

"왜지?"

"수련생의 성취는 다른 교관들도

같이 평가한다. 내 과목만 조작해 봐야 대세엔 영향 없어. 그리고, 가 장 중요한 건 대련이지. 암만 성적 좋아봐야 뭐하나. 대련에서 못 이기 면 말짱 황인데."

지르칼이 비웃었다.

"당신, 시간 낭비한 거야."

"글쎄, 난 생각이 좀 다른데."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적 조작이 왜 필요해? 편의만 봐 달라고."

"여마으 "

지르칼은 이런 사람들을 잘 안다.

가진 권한이 많은 만큼, 교관을 매 수하고자 하는 시도는 항상 있어 왔 다.

유력 가문일수록 자식의 아카데미 성적에 민감하다.

그들에게는 시간과 돈, 부릴 손발이 있고, 명문가의 하수인들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교관들을 유혹했다.

향응 접대, 금품 제공, 스카웃 제 의 등등.

'그래도 협박은 처음이군...

다들 처음에는 그저 잘 봐달라는 의미일 뿐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번 받아주기 시작하면 요 구는 점점 늘어나서 나중에는 감당 할 수 없게 된다.

그걸 잘 알기에.

지르칼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결심 한 듯 선언했다.

"실비아로 협박한다 해도 날 매수 할 수 없을 것이다. 평생을 깨끗하 게 살아왔어. 내 사전에 조작 따위 는 없다."

"내가 폭로하고 다니면 아카데미에 서 쫓겨날 텐데? 국경으로 좌천되거 나, 어디 이름 없는 영지에서 평생 썩을 수도 있어."

"상관없다."

"가족들은 생각 안 해? 당신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실비아는?"

고집스런 얼굴에 고뇌에 찬 주름이 잡혔다.

"사람은 살던 대로 살아야 해. 후 회할지도 모르지만…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 O "

남자는 달라진 눈빛으로 지르칼을 쳐다봤다.

"의외로 지조 있는 캐릭터네. 전혀 몰랐어."

"그러면 이렇게 하지. 실비아를 유 곽에서 빼내 줄게."

"뭐, 뭐요?"

"말한 그대로. 자유의 몸이 되도록 해 준다고."

지르칼은 믿을 수 없어 눈을 끔벅 였다.

바라 마지않던 일이었다.

꿈에서나 이루어질 줄 알았던.

"어… 어떤 식으로?"

"자유의 몸이 자유의 몸이지 뭐야? 아무도 억지로 뭘 시키지 않고. 자 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도망자로 만들겠다는 건 아니죠? 실비아는… 블랙 스네이크의 집요한 추적을 피할 정도로 강인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없을 거다. 테아로스를 떠나지 않아도 돼."

" O 으."

—.

지르칼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 그래도 성적 조작은 안 되는 데...

"몇 번 말하지? 조작 필요 없다니 까? 정 못 믿겠으면, 증명이라도 해 줘'?"

증명은 무슨 증명.

그걸 무슨 수로 증명한단 말인가.

달콤한 제의는 언제라도 날카로운

덫으로 변해 발목을 옥죌 수 있다.

"이 말도 못 믿는 눈치네."

"1 초."

"1초면 충분하지. 이것도 내기 걸 까?"

문득, 지르칼은 이상함을 느꼈다.

남자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성대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싶 을 만큼 듣기 안 좋은 음성이, 갑자

기 미성처럼 느껴졌다.

"아, 아니...

잘못 들은 걸까?

귀를 의심하는 그때.

"감 좋으시네. 걸었으면 잃었어요."

"어... 어.?"

촤악

남자가 자기 얼굴을 뜯어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마, 마법?"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얼굴 아래 또 다른 얼굴이 있었다.

비호감 그 자체에서 어둑한 방안을 환하게 만드는 엄청난 미소년으로.

그야말로 극과 극.

"에른?!"

지르칼이 부르짖었다.

의문의 남자, 에른, 폭로 협박, 스틸가드의 하수인, 담당 학생, 알고 보니 동일인....

두 사람이 막 겹쳐 보이려는 순간, 더 놀라운 사실이 지르칼의 뇌리를 때렸다.

"엇, 오러! 오러 유저였잖아! 어, 어떻게?"

"제가 원래 남들보다 좀 빨라요."

에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대수롭지 않은 게 아니다.

"그, 그냥 빠른 수준이 아니잖아! 1학년이면 간신히 오러만 만들어도 역사에 남을 천재다! 근데, 넌...!"

지르칼은 어찌나 흥분했는지 입이 아니라 분수인 줄 알았다.

대량으로 튄 침이 맥주잔 안으로

빠져들자 에른이 자기 맥주를 지르 칼에게 넘겼다.

"이거 마시고 좀 진정하시죠."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열여섯에 오러 유저… 2급도 아니고 1급이야. 맞지, 1급?"

"그럴걸요."

의문의 남자가 정체를 밝혔음에도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무수한 질문이 꼬리 를 물었다.

"왜 실력을 숨겼지? 상급반이 아니

라 월반도 가능한 수준 아닌가? 그 리고 실비아에 대한 건 어떻게?"

"교관님. 궁금한 게 많으면 꿈자리 가 사나워집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뭐지?"

"제가 [카르 숨]을 못 딸 거 같으 세요?"

지르칼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 개를 저었다.

"내심 수석으로 찍어둔 애가 있었 는데… 걔가 4년 동안 밥만 먹고

수련한다고 해도..... 지금 네 수준

이 될 수 없겠군."

"그런데 성적 조작을 왜 해야 할까 요?"

"...필요 없지. 그럼 편의를 봐달 라는 건?"

"별거 아니에요. 수업에서 빠질 수 있게만 해 주세요. 물론 합법적으 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