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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지르칼은 에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성적 관련은 불가, 그 외 사안에서 적당히 챙겨 주는 정도.

이것까지 거절하기에는 에른의 폭 로로 그가 잃을 게 너무 많았다.

그뿐 아니라, 실비아의 앞날까지 걸려 있으니.

에른은 다시 인피면구를 뒤집어쓰 고 홍등가로 돌아왔다.

'지르칼, 이 인간… 알던 거랑 너 무 다른데.'

원래 그를 써먹으려고 했던 건, 접 대부에 빠져서 인생 망친 교관인 줄

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말 그대로 진짜 '로맨티스트'였고, 은근 직업의식도 있는 것 같다.

협박 대상으로는 매우 부적절한 성 향. 그런 사람에게는....

'은혜를 입히는 것보다 좋은 게 없지.'

유곽에 들어서자 아까 봤던 기도가 다가와서 느물거렸다.

"엥, 또 오셨네? 두 탕 뛰시는 겁 니까?"

"실비아를 찾으러 왔다."

골드를 건네자 기도의 허리가 90 도로 꺾였다.

"어이구, 매번 감사합니다."

"먼저 온 손님은?"

"운이 좋으시네요. 막 자리가 났거 든요? 3층 2번방입니다. 조심히 올 라가십쇼!"

드르륵.

방안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붉은 테이블 옆, 실비아는 바닥에 앉아 다음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푹 파인 드레스에 짙은 화장.

나이를 가늠할 수 없게 하는 차림 새지만 에른의 눈썰미는 감춰진 원 래의 모습을 캐치해 냈다.

'진짜 앳되군. 많아야 스물? 스물 하나?'

그리고 엄청난 미인이었다.

지르칼이 괜히 첫사랑을 못 잊는 게 아니구나 싶을 만큼.

하지만 에른은 전생에 미인이라면 워낙 많이 만나본 터라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어서 오세요. 실비아에요."

그녀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아...

인피면구를 본 실비아의 얼굴에 놀 란 기색이 떠올랐다.

"왜,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아니, 아니에요…. 죄송해요, 손님."

"일어나."

"예?"

"여기서 나가자."

"그, 그게 무슨...?"

에른이 다가가서 실비아의 손목을

붙잡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 쳤다.

"이러지 마세요!"

"지르칼이 보내서 왔다."

"아저씨가요?"

"그래."

지르칼과 관련이 있다면 진상 손님 은 아니리라.

실비아가 물었다.

"아저씨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 니죠?"

"생기기야 생겼지. 그 인간이 나하 고 거래를 했거든. 여차저차해서… 널 여기서 빼내 주기로 했어."

"네?"

사슴 같은 눈망울에 불신이 떠오른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 하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 다 두 번 말하게 하는 재 주가 있네. 여기서 나갈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왜, 유곽에 계속 있고 싶 어?"

"그건 아니지만..

"그럼 가자."

에른은 실비아를 앞장서게 했다.

"어, 어디로?"

"그쪽 주인 만나러. 어디 있는지 알지?"

실비아는 에른을 사무실이 있는 꼭 대기 층으로 인도했다.

두 사람은 문 앞에 섰다.

실비아가 불안한 듯 물었다.

"무… 무슨 수가 있는 거죠?"

"일단은. 뭘 그렇게 겁먹고 그래?"

"잘못되면 저 죽어요."

"잘 될 거니까 걱정하지 마."

똑똑.

에른이 노크하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 와라."

사무실은 휘황찬란했다.

비싼 가구들로 꾸며져 있고, 바닥 은 대리석이었다.

접대부들의 웃음과 눈물을 팔아 이 룩한 성채의 꼭대기.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은 인상 좋 게 생긴 중년 남자였다.

'그 사람은 헤이브에요. 블랙 스네 이크의 간부고, 아주 무서운 사람이 니까 조심해야 할 거에요.'

올라오면서 실비아가 한 말이다.

헤이브는 원목 책상에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그 옆으로 험상궂게 생긴 남자들이 늘어서 있는데, 에른이 실비아를 데 리고 나타나자 다들 성희롱에 가까 운 말들을 툭툭 던졌다.

"다물어."

헤이브가 나직하게 말하자 사무실 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실비아 아니냐? 옆에 달고 온 놈 은 뭐지?"

에른이 손을 흔들었다.

"반갑."

"...이름을 말해라."

본명을 댈 수는 없고.

에른은 즉석에서 가명을 지어냈다.

"필라프다."

"괴상한 이름이군. 우리 애가 그쪽 에 뭐 실수라도 했나 보지?"

"그런 건 아니고. 실비아를 사고 싶어서."

" 또야?"

헤이브는 지겹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잊을 만하면 이런 놈들이 찾아온 단 말이야. 1만 골드 가지고 와. 그 러면 팔아 주지."

척.

에른은 헤이브의 책상 위에 돈 자 루를 내려놓았다.

" 음?"

"정확히 1만 골드다. 됐나?"

"허...

자루 안을 본 헤이브가 입을 떡 벌렸다.

"이걸 진짜 들고 오는 놈이 있네?"

"그럼 성사된 걸로 알고 데리고 가 겠다."

에른은 실비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잠깐."

그 말에, 부하들이 길을 막았다.

뒤돌아보니 헤이브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치고 있었다.

"이봐.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1만 골드 가지고 왔잖아. 뭐가 문 젠데?"

"그건 그냥 떨거지들 걸러 내기 위 한 말이고. 난 사업가다. 손해 보는 짓은 하지 않아."

헤이브가 두 손을 벌려 보였다.

"자, 정확히 계산해 보자고. 보아하 니 돈깨나 있는 거 같은데… 이거 맞춰 주면 그쪽한테 넘겨줄 수 있으

니까."

"실비아는 우리 유곽의 에이스다. 하루에 5, 6탕은 충분히 채우고 화 대도 비싸지. 잠깐 노는데 5골드, 하룻밤엔 10골드. 1년 굴리면 얼마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나?"

"한 8천 골드?"

"수완이 부족한 친구군. 앞으로 기 회 생겨도 사업은 안 벌이는 게 좋 을 거야. 나는 1만 2천 골드까지 뽑 을 수 있다. 1년이면 회수할 수 있 는데, 1만에 에이스를 넘긴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돌았군… 그게 무슨 수완이야? 휴 식도 없이 그냥 갈아 넣는 거지."

헤이브가 눈살을 찌푸렸다.

"말투가 좀 거슬리는군."

"더 낼 수 있다. 얼마를 원하지?"

"앞으로 10년은 써먹고도 남을 나 이고… 늙어서 인기 떨어지면 어딘 가의 졸부한테 후첩으로 보내 버리 지. 한 2만은 받을 수 있을걸? 그러 면 14만이지만… 인심 썼다. 13만으 로 해주지."

앞으로 10년.

한계까지 부려 먹겠단 얘기를 자랑 스럽게 하고 있다.

거기다가, 단물 다 빠지면 헌신짝 처럼 버리겠다고.

에른은 말없이 헤이브를 노려봤다.

"어우 무서워라. 왜, 13만은 없어? 없으면 이거 갖고 꺼져."

찰랑.

돈 자루가 옆으로 떨어졌다.

헤이브가 눈짓하자 부하들이 에른 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어, 어떡해요...

실비아가 떨리는 손으로 소맷자락 을 꼭 붙잡아 왔다.

"어떡하긴."

이렇게 될 줄 몰랐던 게 아니다.

1만 골드로 협상이 된다면 트러블 없이 끝내려고 했는데.

"암흑가 놈들이 그렇지 뭐. 나도 착한 사람은 못 되지만… 아무래도 이것들은 교육이 필요할 거 같아."

에른은 자루에서 골드를 한 움큼 꺼내 쥐고는, 실비아에게 말했다.

"내 뒤에 꼭 붙어 있어."

헤이브가 코웃음을 쳤다.

"얘들아, 손님이 교육 받고 싶으시 댄다. 본때를 보여 줘라."

"예, 보스!"

헤이브의 부하들이 달려들어 왔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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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공이 가득 실린 금화들이 사방으 로 비산했다.

[61 화]

암흑가 조직이라고 해 봐야 보호세 뜯고 사채업이나 하는 양아치일 뿐 이다.

보통 사람에게는 공포의 대상일지 몰라도, 국가에서 보면 귀찮은 해충 일 따름.

한 나라가 보유한 전투력에 비하면 암흑가의 무력이라는 건 너무도 하 찮다.

'비교 자체가 민망한 일이지.'

그 국가의 무력을 상징하는 대표적 인 존재, 기사.

오러 유저만 떠도 혼비백산하는 게 암흑가 놈들이다.

그런 놈들이 에른을 담그려고 했으니.

"으어... 으어어?!"

헤이브의 부하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제히 아래를 내려다본다.

동전만 한 구멍, 그런 게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

자기 몸에 바람구멍이 나 있다니.

손가락을 넣으면 쏙 들어갈 것 같 다니.

너무도 비현실적인, 꿈에서나 일어 날 법한 광경.

그러나 곧이어 엄습해 오는 고통은 이게 현실임을 똑똑히 일깨워 주고 있었다.

"으아아악!"

비명을 지를 수 있다면 그나마 나 은 편이었다.

목과 흉부, 미간이나 인중이 뚫린 놈들은 그 즉시 절명해 단말마조차

내지 못했으니까.

"미친!"

헤이브는 상황 파악이 빨랐다.

그는 바로 서랍에서 검은 단검을 꺼냈다.

기회는 단 한 번.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의 적에게 지옥의 화염을! 인 페르노!"

막 시동어를 끝마치려는 순간, 뭔 가가 탁! 하고 손목을 때리는 바람 에 단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에른의 금륜지였다.

"으악]"

시큰한 손목을 감싸 쥘 틈도 없이, 얼른 허리를 굽히는데 단검이 에른 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법… 아니, 마검사?!"

"넌 허공섭물도 모르냐?"

실비아에게 단검을 쥐여 주고.

"잠깐 들고 있어."

"네? 네…!"

에른은 헤이브에게 다가가서 책상

에 놓인 재떨이로 그의 머리를 내리 쳤다.

쨍강!

"크억!"

"이게 어디서 암흑 마법이야? 암흑 가라고 라임 맞추는 건가?"

"라, 라임?"

헤이브의 머리에서 피가 땀처럼 흘러나왔다.

허공섭물? 라임?

그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지만 영문 모를 소리는 알아서 흘려 넘겼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이 필라프라는 불청객.

부하들을 일거에 쓸어버릴 정도의 압도적인 무력의 소유자가, 왜 자신 들을 방문한 것일까.

무기를 쓴 것도 아니다.

고작 골드 한 줌을 던져 부하들을 몰살시킨 기상천외한 수법.

허리춤을 보면 애초에 검도 안 들 고 왔다.

블랙 스네이크 따위는 한주먹 거리 에 불과하다는 듯한 태도....

죽은 부하들처럼 되지 않으려면 떠 올려야 했다.

생각을 해야 한다, 생각을!

"...레드 트라이앵글에서 보냈지? 그치?"

"뭐라는 거야?"

"아, 아닌가? 어디든 상관없어. 어 쨌든, 해결사인 거잖아?"

"얼마 받았냐. 그 금액의 2배! 아 니 3배를 주겠다."

"정말? 3배나?"

헤이브의 눈에 안도가 떠올랐다.

돈에 반응하는 걸 보면 대화가 통 하는 놈이었다.

"배후까지 알려주면 4배를 주지. 나 돈 많아. 아까 들었잖아. 내 수완."

"으음... 이거 어쩌나."

에른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0골드의 4배면 0골드지. 이거 의 뢰라도 받고 왔어야 하나."

"뭐?"

"말했잖아. 실비아 풀어주러 왔다고."

"정, 정말? 진짜로 그거 때문에?"

"진짜지, 그럼."

에른이 검지를 내밀어 부하 한 명 을 가리켰다.

이 때 헤 이 브는.

'생긴 건 저래도 손은 예쁘네.'

급박한 상황임에도 순간 떠오르는 엉뚱한 생각.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정말로 섬 섬옥수였다.

푸른 핏줄이 보일 정도로 하얗고, 손가락은 길고 가느다랗다.

피융!

파공음이 들리고.

흐느적거리던 부하의 머리에 구멍 이 뚫렸다.

겨우 살아만 있는 상태여서 굳이 죽일 필요는 없었는데.

피융! 피융! 피융!

에른이 지풍을 쏠 때마다 부하들의 생명이 꺼졌다.

헤이브가 악을 썼다.

"데, 데려가도 좋아!"

"뭐?"

"실비아 말이야! 누, 누구 또 원하 는 애 없어? 다 데려가도 되니까!"

"흠."

에른은 헤이브의 멱살을 붙잡았다.

발끝이 땅에서 떨어졌다.

부드러운 손이 그의 목덜미를 우악 스럽게 쥐고 흔들었다.

"부하들은 다 죽었는데 너만 살겠 다는 거냐?"

"나, 나는 그냥 여기 관리인일 뿐 이야. 쟤들은 블랙 스네이크에서 보

낸 애들이고."

"웃기고 있네."

빠각!

주먹 한 방에, 헤이브의 앞니가 모 조리 날아갔다.

"흐어…! 사, 사려줘...

"그러게 1만 골드 받고 끝냈으면 됐 잖아. 왜 욕심부려서 화를 자초하나?"

"자, 자까만...!"

뿌드득!

에른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헤이브

의 목뼈를 부러뜨려 버렸다.

"흐음."

놈을 내려놓고 방안을 둘러보니 생 존자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살아 있는 사람은 에른과 낯빛이 하얗게 질린 실비아뿐.

"당, 당신… 대체 누구세요?"

"말했다시피 지르칼을 아는 사람. 그리고, 널 자유롭게 해줄 사람."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교육하고는 거리가 먼 결말이었다.

다들 저승으로 떠나 버려서 변화나

개선점 같은 걸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어쩔 수 없지. 충돌이 일어난 이 상, 다 죽어야 하니까.'

다만, 실비아에게는 못 볼 꼴을 보 여준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골드 날리는 게 처음에는 좋은 생 각인 줄 알았는데, 이거 너무 잔인 하네."

"아니에요."

고개를 젓는 실비아의 눈에 원독이 어렸다.

그녀는 죽은 헤이브에게 가서 그의

머리를 단검으로 마구 찔렀다.

급기야는.

"우리의 적에게 지옥의 화염을 ...

"에이."

놀란 에른이 얼른 손을 뻗어 실비 아의 입을 막았다.

"읍읍!"

"암흑 마법은 시전자의 생명을 갉아 먹는다. 저 인간이 아무리 미워도 이 미 죽은 놈인데 그럴 가치가 있어?"

에른은 단검을 빼앗고 실비아의 눈

을 쳐다봤다.

"앞으로 남은 네 인생. 1분, 아니 1초뿐이라도 저딴 놈 때문에 날리기 는 너무 아까워."

"아...

실비아의 눈망울이 흔들린다.

눈가에 맺힌 이슬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울기는. 이제 웃을 일만 남았는데."

"...네?"

"지금까지 부당하게 착취만 당했잖 아. 그거 돌려받아야지."

헤이브의 책상 아래에 비밀 금고가 있었다.

오러를 머금은 단검으로 쑤시자 철 판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와...

금고 안에서 금빛이 넘실댔다.

"이러니 암흑가를 밟고 또 밟아도 없어지질 않지. 돈이 되는데."

실비아를 시켜 금고의 내용물을 담 게 했다.

그녀가 그러는 동안, 에른은 시체 를 한곳으로 모으고 군데군데 튄 피

를 닦았다.

"이만하면 됐나? 먼저 나가 있어."

"네?"

"잠깐이면 돼."

에른은 시체들에 남은 화골산을 탈 탈 털어 전부 뿌리고 뒤따라 나갔다.

5층 복도.

실비아는 불안으로 발을 동동 구르 고 있었다.

얼결에 찾아온 복수의 순간은 지나 가 버렸고 이제는 현실적인 걱정이

앞선다.

"무, 무슨 계획이 있기는 한 거죠?"

"계획?"

"블랙 스네이크는 보통 조직이 아 니에요. 홍등가의 대부분을 장악하 고 있고, 집요하기 이를 데 없어요. 어떻게든 범인을 찾아내려 할 텐 데...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일단 업혀."

"네?"

"업히라고. 수뇌부 날려 놓고 당당

하게 대문으로 나갈 거야?"

"아, 아뇨...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여긴 5층이다.

의구심을 가득 안고 에른의 등에

업힌 실비아.

에른은 잠깐의 고민도 없이 창밖으

로 몸을 날렸다.

"꺄악!"

놀라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한밤의 찬 공기가 긴 머리카락을

나부끼게 했다.

낙하하는 느낌에 실비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러다 사이좋게 납작 눌린 개구리 처럼 돼 버리는 건...?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 고, 잠시 뒤 몸이 솟구쳐 올랐다.

마치, 때마침 불어온 순풍이 자신들 을 위로 띄워 올려주는 것만 같다.

그런데 사람은 깃털이 아니고 이게 이럴 수가 없는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실눈을 떠보니.

'날, 날고 있어...?'

실비아의 얼굴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도약과 착지가 초인적일 뿐이고, 때때로 어기충소로 몸을 띄 우고 있을 뿐이지만.

내공이 바뀐 이후로 천변보에도 향 상이 있었다.

충분히 경지에 오른 경신술은 점점 비행과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에른은 이 말을 실감하고 있었다.

'이러면 7성 정도 되려나? 역시 무 공의 근간은 내공심법이란 말이지.'

*

*

밤이 깊어져 오니 묵을 데가 필요 했다.

에른은 근처 여관으로 들어가 숙박 비를 지불했다.

실비아를 흘끗 본 주인이 능글맞게 웃었다.

"방 하나죠?"

그녀에게 로브를 입혀서 누군지 알 아볼 수 없게 했지만, 옷태만 봐도

여자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둘. 식사는 저쪽만 챙겨다 주고. 내 방에는 얼씬도 하지 마."

팁을 두둑이 챙겨주자 주인의 얼굴 이 활짝 펴졌다.

에른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정좌하 고 앉았다.

오늘 일로 깨달은 바가 있었기 때 문이었다.

지르칼과의 오러 격돌, 조직원들에 게 금화를 날린 상승의 수법과.

또 실비아를 업고 천변보로 내달리

면서 내공을 왕창 쓰기도 했다.

아카데미에서는 항상 실력을 숨겨 야 했기에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꼈다.

'지르칼은 날 1급 수준으로 봤다. 그렇다는 건.'

에른은 스스로를 평가하기를.

'무공은 1급 탑, 마나 기반은 2급 상위 정도.'

이렇게 봤고 꽤 객관적인 평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러 대결만으로 지르칼을

압도한 데다 1급 아니냐는 말까지 들었다.

그렇다면 설마 무공이?

에른은 헤이브의 단검을 쥐고 내공 을 끌어올려 봤다.

츠앗!

푸른 검기가 단검을 감쌌다.

이 검기는 단순히 검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고 원한다면 마음먹은 곳으 로 쏘는 것도 가능했다.

그랬다간 여관이 무너지겠지만.

이것이 일류의 경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정신을 집중하고 현 천검법의 가르침을 따라 봐도 이 이 상의 무언가는 일어나지 않았다.

분명히 머리로는 알고 있고, 때가 무르익었다는 것도 알겠는데 단계를 넘어갈 수가 없었다.

'[추출] 탓이다.'

천위신공과 현천태을신공은 한 뿌 리라 비슷한 구결을 많이 공유했다.

덕분에 천위신공이 뜯겨 나가고 현 천태을신공이 들어왔어도 별다른 부

작용이 없었다.

오히려, 현천검법은 현천의 이치를 담은 현천태을신공과 찰떡이라 검법 에 진전이 있었다.

'문제는, 천위신공에는 있고 현천 태을신공에 없는 기초적인 이치를 몇 개 놓쳤다는 거지.'

그 이치가 뭔지도 안다.

다만, 무엇이 다음 경지를 위한 발 판인지를 모르고 있을 뿐.

에른은 밤새도록 천위신공의 구결 을 참오하며 운공을 계속했다.

새로운 가닥이 잡히면 현천태을신 공과 비교, 대조하고.

'이미 있는 깨달음이다. 필요 없으 니 넘어가자… 없지만 꼭 알아야 하 는 가닥들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수 시간.

창밖으로 부옇게 동이 터오고 있었다.

하지만 무아지경에 도달한 터라 시 간의 흐름을 잊었다.

배가 고픈 줄도 몰랐고 다리가 저 린 줄도 몰랐다.

"아!"

문득, 에른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가닥들이 하나로 모이고 있었다.

마침내.

콰광!

머릿속에서 천둥이 일었다.

굉음이 여러 번 울려 퍼졌다.

그럴 때마다, 멍해진 얼굴 위로 깨 달음의 미소가 덧입혀졌다.

벌모세수로 터를 닦았고 7성에 이 른 현천태을신공이 그 위에 씨를 뿌 렸다.

그리고 비로소, 열매가 맺혔다.

에른이 눈을 떴다.

"이제는 될 거야."

헤이브의 단검을 쥐고 내기를 운용 해 봤다.

당연한 듯 생성되는 것은 푸른 검 기.

'여기에 한 번의 변화를.'

화라락!

정신을 집중하자 너무도 선명한 푸 른 검화(劍花)가 피어올랐다.

"드디어...

에른의 몸이 떨렸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는 것 은 바라던 경지에 올라서?

물론 그것도 있지만, 더 큰 의미를 만드는 것은.

'페이웨어 랑드라이즈, 특급에 오른 나이 17세 89일… 그리고 나는!'

에른 스틸가드, 오늘로 16세 225일.

불멸의 기록이 경신되고야 말았다.

[62 화]

큰형 키르안은 삼형제 중에서 유 일한 오러 유저였다.

죽기 전에는 1급까지 올라가서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데어 숨] 졸업자 치고는 발전이 늦은 편이었고 가문의 위상을 생각 하면 여러모로 아쉬운 감이 있었지 만.

스틸가드 3대째에서는 어찌 됐든 최고 경지였기에 목이 그렇게 뻣

뻣할 수 없었다.

"건국황제 페이웨어는 열일곱에 특 급 기사가 됐다. 넌 스물일곱인데 언제 2급이라도 될 거냐?"

"그땐 [인간의 시대]가 아니었고, 건국황제는 기사 중에서 역대 1위인 데'?"

"엿/ 기사들이 더 강했다고는 해도 그 나이에 특급은 그때도 없었지. 가장 말도 안 되는 건 초월급에 올 랐다는 거지만. "

"영웅급, 전설급, 신화급 모두 최연 소로 뚫었고 최종적으론 인류 유일

초월급… 아니, 왜 뜬금없이 건국황 제를 칭송하고 있는 거지?"

"그 발끝이라도 따라갔으면 해서 하는 말이다."

"...…비교질 하는 건 좋아. 좋은데 페이웨어는, 비교 대상을 잘못 골랐 거든?"

"아무튼. 열심히 해서 성과를 보이 라는 거다. "

"형이나 잘하지? 요즘 영지 꼴이 말이 아니던데.... "

전생에, 키르안과 나눈 대화의 한

조각이다.

두 번째 삶은 많이 달라졌다.

활짝 피어난 검화가 증명하고 있다.

빛으로 이루어진 꽃잎.

단검 끝에 매달린 푸른 검화는 정말 한 떨기 꽃 같았다.

검날은 마치 줄기 같고 자루는 잎사귀처럼 보인다.

아름답지만, 강력한 동시에 치명 적이기까지 하다.

"꺾으려고 하다간 손모가지 날아 가겠지."

검화는 검기의 상위 경지다.

정확히는, 검기로 꽃잎처럼 복잡 한 형상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일류와 일류를 넘어선 경지를 구 분 짓는 것.

일류의 무인은 검기를 생성하고 발출할 수 있다.

일류의 벽을 넘어서면, 기존의 틀 에서 벗어나 검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다.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바로 이렇게.'

검화가 산산이 흩어졌다.

장미는 안개꽃이 되었고, 곧 진짜 안개로, 아지랑이로 변해 단검을 부드럽게 감쌌다.

원한다면, 다시 형상을 갖출 수도 있다.

이것이 초일류의 경지.

"나도 이제 각성급이군."

고작 한 송이를 피워냈을 뿐이지 만, 에른에게는 의미가 컸다.

물론 노력과 재능으로 일구어냈다 고 볼 수는 없고 막힐 때마다 코인

으로 해결한 거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자존심이 상 한다거나 콤플렉스로 남는다거나 하는 건 전혀 없었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대로, 아버지 는 아버지대로.

'나는 나대로.'

본인의 강점을 활용해 강해지면 되는 거다.

아버지는 스틸가드가 배출한 진짜 천재였지만, 세상은 신화급에 도달 한 할아버지를 더 위대한 기사로 평

가한다.

뭐가 됐든 모로 가도 수도로만 가면 되는 법.

그건 그렇고.

'이걸 혼자 힘으로 이뤄낸 페이웨 어는 얼마나 괴물인 거냐.'

건국황제는 노예 출신이었다.

어릴 때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닌데 대륙 최연소 특급이 라니.

오늘로써 그 기록이 깨지긴 했지 만 비공식 기록일 따름이다.

기록을 깬 장본인, 에른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

제5 무림계, 태산 근처 천화루.

"에이, 이거 또 늦네. 상습이야, 아주."

용신구가 투덜거렸다.

고급 주루의 최고급 방.

보통 사람이라면 헤벌어진 얼굴로

내부 구경에 여념이 없을 터이다.

하지만 태산보신원 원주쯤 되면 동네 찻집 수준에 불과했다.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먼 데 서 원주님 뵈러 오시는 거잖습니까."

나상귀가 비위를 맞췄다.

"나 보러 오긴 무슨. 지나가는 길 에 들리는 건데. 딱히 하는 일도 없으면서 바쁜 척은 지 혼자 다 한단 말이지."

용신구가 젓가락을 놀렸다.

식탁에는 온갖 산해진미가 가득

차려져 있는데, 한 젓가락씩 맛봐 도 표정은 소태를 씹은 것처럼 쓰 기만 했다.

"어… 오셨습니까!"

인기척을 느낀 나상귀가 문가로 달려갔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어험, 용 원주 오랜만일세."

나타난 사람은 수염이 허옇게 센 노인이었다.

"조 회주… 시간 약속 좀 지키지?"

"아, 미안허이. 태산이 워낙 험해 서 말일세. 늙으면 산행도 조심해 서 해야 돼. 삐끗했다가 골로 가는 수가 있다네."

"어디서 약을 팔아? 언덕 하나만 넘으면 되는데 뭔 산행?"

조 회주라 불린 노인, 조근남이 허허 웃었다.

"내가 실수했군. 약장수한테 약을 팔다니."

"그놈의 약장수 타령! 하지 말라 고 했지!"

"약 파는 일 하는 거 맞잖아."

"영약이야, 영약!"

"영약은 약 아닌가?"

조근남은 조곤조곤 먹이고, 용신 구는 목에 핏대를 세우지만 그리 험악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용신구는 조근남에 비하면 한참 젊어 보인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같은 연배였고 어떻게 보면 친구 비슷한 사이이 기도 했다.

"언제나 혈기왕성이야 용 원주는.

참 부러운 일이지."

"부러우면 지금이라도 무공 익히 든가."

"난 재능이 없어."

"누가 천하제일인 되래? 벌모세수 받고 영약만 몇 개 주워 먹어도 무병장수할 텐데."

"귀찮더군. 땀 뻘뻘 홀리고 골방 에 틀어박혀서 참선하고… 이 나이 에는 못 할 짓이야."

"정 귀찮으면 차원거래서 하나 구 하든가. 돈 많으면 안 되는 게 없

는 세상인데. 조 회주 돈 많잖아? 아니, 썩어 넘치잖아?"

용신구도 돈이라면 장난 아니게 벌었지만, 조근남 앞에서는 한 수 접어줘야 했다.

영약계의 거목에게 돈이 썩어 넘 친다는 말을 듣는 사람.

금왕 조근남.

중원제일상회라 불리는 만금상회 의 주인이었다.

"글쎄...

미적지근한 조근남의 반응에 용

신구가 가슴을 탕탕 쳤다.

"답답하다, 답답해. 싫으면 그냥 싫다고 흐fl. 다른 이유 대지 말고."

조근남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나 곧, 얼굴을 펴고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 싫은 거 맞다. 물건은 가 지고 왔겠지?"

"물론."

용신구가 손짓하자 나상귀가 탁 자 위에 보자기를 올려놓았다.

보자기가 감싸고 있는 것은 묵직

한 목함.

뚜껑을 열자 청량한 향기가 방안 을 가득 채웠다.

"으음.…"!"

조근남이 내용물을 확인했다.

"크기도 그렇고."

어지간한 장정의 팔뚝만 한 대왕삼.

"뿌리 길이, 주름… 만년삼왕이 맞는 거 같군."

"뭘 감정씩이나. 거래소에서 선급 이라고 인증 딱 해준 거니까 걱정 붙들어 매."

"돌아가서 확인해 보면 알겠지."

"어디에 쓰려고? 아, 그 천재라는 손주?"

"그릇을 넓혀야 한다고 하더군. 할애비가 이 정도는 해 줘야지."

"걔는 복도 많지… 태어나보니 할 아버지가 금왕이라."

용신구는 슬슬 눈치를 살피면서 말을 꺼냈다.

"값은, 그때 부른 그 가격으로 쳐 줄 거지?"

"한 뿌리에 40관."

"에이, 조 회주. 그건 아니지. 처 음엔 70관 불러 놓고."

이들이 말하는 40관, 70관이란 은자 기준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황금!

황금 70관이면 거래소에 수수료 다 떼고도 1만 5천 코인이 넘는다.

이런 게 세 뿌리라.

총 4만 5천 코인.

엄청난 금액이지만, 용신구에게는 조금 큰돈일 뿐이다.

문제는 당장의 자금 흐름이 나빠져

서 이 몇만 코인이 꼭 필요하다는 것.

'에이 씨… 40관이면 3만 코인도 안 되잖아. 이거라도 해야 하나.'

조근남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하고 지금은 사정이 다르지. 호구 물어서 100관에 팔 거라며? 팔아 달라고 사정사정하는데도 콧 방귀만 뀌더니만, 이제는 그때의 70관이 아쉬운가 봐?"

평범한 촌로처럼 보이는 조근남.

하지만 괜히 금왕이 된 게 아니었다.

협상을 시작하자 사람 좋은 얼굴

에서 날카로움이 배어 나왔다.

"그, 그래도 40관은 너무하잖아. 나 급전 필요하거든? 좀 봐줘라."

"왜, 최근에 애송이 하나한테 물 려서?"

"이런 말이 들리더라고. 천하의 용신구가 수술 제대로 당했다고. 아니, 지금도 당하고 있다고 해야 맞겠지?"

"에른 이 개자식!"

용신구가 탁자를 내리치자 조근 남이 얼른 목함을 잡아끌었다.

"조심하게. 만년삼왕 상할라."

"내가… 그 새끼만 생각하면 속에 서 천불이 올라와!"

"뭐 하는 녀석이길래?"

"나도 몰라. 뜬금없이 나타나서 거래가보다 약간씩 싸게 파는데. 아주 미쳐 버리겠어."

"우리 용 원주, 신규 진입자 골탕 먹이는 건 누구보다 잘하잖아. 뭐 가 잘 안됐던 거지?"

용신구의 시선이 천장을 향했다.

에른이란 놈을 언제 처음 봤더라?

지급, 인급이나 팔고 있을 때는 귀엽게 봐주고 넘어갔다.

돈도 안 되는 자잘한 영약 따위 야 파이 좀 뺏긴들 어떤가.

하지만 천급부터는 얘기가 달라진다.

큰손들과 상의해 알바를 동원하 기로 했고, 처음에는 효과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피 같은 내 코인만 뜯기고 끝났지.'

무려 1만 2천 코인!

다음 작전은 상점 이벤트였다.

2000코인짜리 영약을 구매하면

300P를 돌려주는 환급 이벤트.

이것도 초기에는 성과를 보였다.

진작 이렇게 해서 천천히 말려 죽일 걸 싶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이 자식, 보란 듯이 가격 을 내려 버린다.

용신구도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 없어 대응했다.

"1750코인이라 이거지? 환급 포

인트 400P로 올려!"

그렇게 치킨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팔면 팔수록 손해 보는 장사를 계속하니, 빵빵한 코인 계좌도 잔 고가 줄어만 가고… 무엇보다 천급 물량이 부족해졌다.

결국, 용신구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이 새끼 뭐야… 뒷산에 잡초 대 신 영약이 자라나? 어떻게 태산에 서 나오는 물량을 이기냔 말이야! 이게 말이 돼?"

말이 안 되는 일을 웬 0계의 애 송이가 해내고 있다.

용신구도 괜히 큰손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니어서 곧 현실을 직시했다.

영약 거래에는 잔삐가 굵은 몸.

일단은 물러나 재정비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환급 이벤트를 긴급 종료하고, 천 급 가격을 올려 시장을 정상화시 킨 게 바로 어제 일이었다.

"...더 열 받는 건. 가격을 올리 자마자 그 새끼도 똑같이 올렸다

는 거지. 그것도 딱 50코인 싸게."

"재밌는 친구군."

"남의 일이니까 재밌겠지. 조 회 주도 내 상황 돼 보]'. 미치고 팔짝 뛸걸?"

"그건 그렇겠지."

"난 아직도 모르겠다. 0계 새끼가 어떻게 제휴 상점에다 맞불을 놓 을 수가 있는 거냐고.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한테!"

"흐음."

조근남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는 다른 부분에 관심을 보였다.

"그 알바들 적발한 부분 말일세. 0계인이 어떻게 거래소 리포트를 얻었지? 혹시… 특전?"

용신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있겠냐는 거였다.

"차원거래 안 하니까 남들 다 아는 데서 무디군. 거래소가 작성하는 리 포트, 그거 받으려면 [섭리의 눈] 레 벨 9를 찍어야 하는데 내가 레벨 3 이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러면..?"

"궁금해? 궁금하면 알려주지. 대 신 만년삼왕, 뿌리당 70관에 사 가."

"45 관."

"60 관."

"50관."

"...55관. 이 아래로는 안 돼!"

" 알았다."

용신구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55관도 기대치에는 못 미치지만,

40관에 비하면야.

"별건 아니고. 채널 마스터가 귀 띔해 줬거든. 이벤트에 당첨된 거 라고 하대?"

"이벤트?"

"뭐 랜덤박스 같은 거겠지. 교류 자들 코인만 쏙 빨아먹고 내용물 은 부실한 그거. 거기서 리포트 제 공 10회권을 뽑았다더군."

용신구는 조소하며 말했다.

"운 하나는 억세게 좋은 놈이야. 당첨된 것도 그렇고, 그 귀한 걸 알바 따위에 쓰고도 3만 코인 들 고 갔으니."

같이 비웃자는 듯 은근한 시선을 던져 봤지만, 조근남은 멍한 얼굴 로 찻잔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에잉, 뭘 알아야 대화가 되지."

"뭐라고 했지?"

"아니, 왜 정색하고 그래?"

"그게 아니고."

조근남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교류자 이름. 아까 말했던 거 같은데. 누구라고?"

*

"느리다! 속도를 올려! 최대한 빨리!"

조근남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만년삼왕 거래를 마쳤다.

마차로 돌아온 뒤로는 마부를 닦 달해 미친 듯이 달리게 했다.

'알바 확인에 다섯 번 썼다고 했 지. 그러면 남은 횟수는.'

단 5회.

그러나 그 사건 이후로 시일이 꽤 지났고 그때 본 리포트가 첫 5

회가 아닐 가능성이 있었다.

...지금으로선 희망에 기대는 수 밖에 없다.

조근남은 교류자가 아니지만, 만금 상회에는 차원거래서가 존재했다.

'어찌 됐든 연락해 보는 수밖에 없어.'

얼마 만에 찾아온 기회인가.

조근남은 절대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시라도 빨리 회에 도착해야 한다!"

[63 화]

-CM묘암 : 말씀하신 부분은, 잘 처리해 뒀습니다.

-에른 : 큰손들이 납득하던가?

-CM 묘암 : 자기들 세계에서나 큰손으로 불리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 봐야 하위 차원의 존재.

-CM묘암 : 개미나 풍뎅이나, 아 웅다웅해 봐야 그놈이 그놈인 것을.

-CM묘암 : 하위 세계의 교류자 들은 까마득히 높은 곳에 뭐가 있

는지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CM묘암 : 어차피 그들의 인식 수준으로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 이죠. 믿고 싶어 하는 걸 주었으 니, 믿을 겁니다.

'개미? 풍뎅이? 걔들한테 코인 받 아먹는 놈이 할 소리냐.'

에른은 속으로 혀를 찼지만 언짢 은 심사를 표현하지 않았다.

CM묘암은 자신을 거래소가 파견

한 모니터 요원으로 착각하고 있다.

채널 마스터의 권한을 사용해도 꿰뚫어 볼 수 없는 의문의 교류자.

신고 건을 막 뭉개고 넘어가려는 순간, 거래소 리포트를 꺼내 드는 걸 보고 확신했다고 했다.

큰손들에게 코인을 뜯어낸 뒤, CM묘암과 독대하며 나눈 대화.

-CM묘암 : 모니터 요원인 걸 어 떻게 알았냐구요?

-CM묘암 : 요즘 모니터링 기간

이란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티를 내시면, 제가 어 떻게 모르고 넘어갑니까.

-에른 : 뭐 얼마나 티를 냈다고.

-CM묘암 : 일부러 큰손들 자극 하고, 사건 키우고… 사인 주신 거 잖아요?

-CM묘암 : 덕분에 인사평가에서 참사 나는 일은 피할 수 있게 됐 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일반 교류자에게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두르는 채널 마스터이지 만, 그들도 거래소의 부속품일 뿐

인 것 같았다.

덕분에, CM 으로부터 융숭한 대 접을 받고 있으니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아니, 상당히 괜찮았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CM묘암 : 문의하신 마나석 거래 제한 건 말입니다. 0계 CM 중에 후배가 있어서… 조치해 뒀습니다.

-CM묘암 : 그리고 제휴 상점 등 록 심사는, 이건 제 권한 밖이라

뭐라 확답을 드릴 수가 없어요. 긍 정적인 의견을 전달하는 정도?

-CM묘암 : 아, 심사회에서 중요 하게 보는 요건이 있거든요. 몇 가 지 팁 정도는 드릴 수 있습니다.

-에른 : 고맙군.

-CM묘암 : 그,이런 말이 있잖 습니까.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 도 있다는...?

-에른 : 난 기브 앤 테이크가 확 실한 사람이지.

-CM묘암 : 감, 감사합니다!

'마음껏 오해해라...

알아서 밥상 차려 주고 입에 음 식 떠주고 하고 있으니 이쪽은 그 저 씹어 삼키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에른은 CM 묘암과의 대화를 마치 고 태산보신원 상점을 찾았다.

['포인트 환급' 특별 이벤트가 조 기 종료되었습니다. 이후 거래부터 는 환급 포인트가 제공되지 않으 니 구매에 참고 바랍니다.]

"벌써 백기 들었어? 포기가 빠르 네."

에른이 입맛을 다셨다.

용신구는 음흉하고 적반하장인 데가 있지만, 꽉 막힌 인간은 아니 었다.

계속 찍어 눌러 줬으면 고마웠을 텐데, 불리함을 인정하고 물러나니 뭔가 좀 아쉽다.

[물량 소진으로 포인트 사용이 일 시 제한됩니다.]

"타격이 꽤 큰가 봐?"

용신구는 최악의 선택을 했다.

못 보던 놈이 천급을 팔든 말든, 가만 내버려 뒀으면 지금 같은 상 황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에른은 영약 공급자가 아니고, 태 산보신원의 물건을 떼서 약간 더 싸게 팔 뿐인 중개인의 입장.

여기서 발생하는 시세 차익은 특 전 덕분이지 뭐 다른 게 있는 게 아니다.

결국 모든 천급 물량은 원래 채

널에서 돌던 양을 넘어설 수 없고, 그 대부분을 틀어쥔 것이 5대 큰 손이라.

'윈윈할 수도 있었는데… 나만 이 득 봤고 저쪽은 손해만 왕창 봤네.'

에른은 태산보신원에서 천급을 구 매, [에누리를 누리리]로 10% 할 인받고, [정신없는 정산]으로 15% 캐시백 적용

이후 환급 포인트를 챙기고 포인 트가 적당히 쌓이면 그걸로 천급 을 또 구매했다.

그런 뒤, 태산보신원보다 살짝 함

리적인 가격으로 판매하니 거래량 이 내내 유지되었다.

용신구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

환급 이벤트가 효과를 봐서 이쪽 도 매출이 유지는 되는데 에른은 무너질 낌새를 보이지 않고.

환급액 조정으로 맞불을 놔 봤지 만 그럴 때마다 적자만 늘어났다.

용신구는 알지 못했다.

태산보신원에서 천급을 사간 숱 한 교류자들은 [정보의 비대칭]을 활용한 에른의 분신들이었다는 걸.

씨익.

아무것도 모르고 잘 팔린다고 좋 아했을 그를 생각하니까 절로 미 소가 지어졌다.

그건 그렇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보유 포인트 : 11000P]

"이거 어떡할 건데?"

남은 포인트 털러 왔구만 웬 사

용 제한?

이거 따져 물어야 하나 하는데 그 아래 다른 공지가 보였다.

[환급 포인트를 다른 제휴 상점에 서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양해 부 탁드립니다.]

"이러면 화낼 일은 아니군."

영약에만 한정되지 않고 다양하 게 쓸 수 있으니 나쁘지 않다.

에른은 간만에 과소비 타임을 가

졌다.

돈이 돈을 낳는다.

코인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는 코인 쌓이는 재미 때 문에 최대한 구매를 자제해 왔는데.

상점 포인트는 언젠가는 써야 하 는 거라 부담 없이 팍팍 사용했다.

〈뇌정검〉

〈묵철괴 (20개)〉

〈패왕군림보 (비급)〉

〈역용술(5성)〉

에른은 구매한 물건을 차례로 살 폈다.

먼저 뇌정검.

사리에게 애병을 먹인 이후로 쭉 무기 없이 다녔다.

웬만한 건 주먹으로 해결이 돼서 크게 필요를 느끼지 못했지만.

기사가 검 한 자루 없다는 게 말이 안 되기도 해서, 하나 장만했다.

-뇌정검 : 검자루는 벼락 맞은 나무로, 칼날은 천년뇌지(千年雷地)

에서 제련된 현철로 만들어졌다. 가 장 안쪽에 뇌정이 박혀 있어 평상시 에도 은은한 뇌기를 뿌린다. 이 뇌 기는 내력을 주입하는 것으로 증폭 시킬 수 있다.

우르릉.

검집에서 꺼내자 우레와 함께 스 파크가 튀었다.

"막 과하진 않군. 이 정도면 마법 검으로 봐주겠지?"

가격은 3000P.

코인으로 환산해도 할아버지의 검보다 훨씬 비싸다.

묵천검은 무지하게 단단하다는 것을 빼면 딱히 특별할 게 없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묵철괴는 사리를 위해 쟁여둔 거 고, 패왕군림보는 상승의 보법이 필요해서 샀다.

현재의 경지를 생각하면 천변보 로는 좀 모자란 감이 있어서 충동 구매를 했는데.

'비급만 보고 익힐 수 있을지.'

그건 일단 해봐야 알겠고.

역용술은, 이거야말로 진짜 과소 비였다.

내공으로 얼굴 근육과 뼈를 미세 조정해 원하는 얼굴로 바꾸는 공부.

배워서 나쁠 것은 없지만 인피면 구가 그 역할을 해 주기 때문에 굳이 살 필요는 없었다.

'당분간 필라프로 살아야 하는데 못생긴 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번 인피면구를 썼다 벗었다 하 는 것도 고역이었다.

해서 기왕 포인트 남는 김에 큰 맘 먹고 샀다.

에른은 [흡수]로 역용술을 습득 하고 정말 쓰여 진 대로의 효과가 있는지 확인해 봤다.

"음...!"

거울에 비친 얼굴은.

서글서글해 보이는 청년이 그 안 에 있었다.

눈초리와 턱을 부드럽게 하고, 콧 날과 다른 몇 군데를 만졌더니 그 것만으로도 인상이 확 바뀌었다.

"겨우 5성인데 쓸 만하군."

여전히 같은 얼굴형, 같은 머리 스타일임에도 이목구비가 바뀌니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도 에른 스틸가드를 연상 할 수 있는 얼굴이었다.

동일인까진 아니더라도 혈연관계 가 아닌가 하고 느낄 만한?

'뭔가 더 추가해 볼까?'

에른은 필라프의 얼굴을 확정하 고 방에서 나왔다.

" 나야."

옆방 문을 두드리자 눈 밑이 검 게 변한 실비아가 빼꼼 고개를 내 밀었다.

"...앗!"

처음 보는 남자?!

놀란 실비아가 얼른 문을 닫으려 하자 에른은 문틈으로 발을 넣으 면서 비집고 들어갔다.

"나라니까. 필라프."

" 아?"

목소리는 똑같았다.

문제는 생긴 게 완전 딴판이라는 것.

그녀가 어제 본 필라프는 잠깐 본 걸로도 뇌리에 각인될 정도로 못생겼다.

그런데 이 남자는 상당한 호감형.

눈 아래부터 턱까지 길게 난 흉 터 때문에 순간 멈칫하게 되지만, 그것만 빼면 꽤 좋은 인상이었다.

"어제 그건 변신 마법이었고. 이 게 내 원래 얼굴이다."

"아...

실비아는 금세 납득했다.

블랙 스네이크의 간부를 쳐 죽인

간덩이 부은 행동.

그런 짓을 하려면 변신 마법 정 도는 당연한 게 아닌가 싶었다.

"하룻밤 사이에 얼굴이 많이 상했 군. 못 잤나?"

"한숨도요. 불안해 죽는 줄 알았 어요."

« O "

에른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실 비아를 봤다.

각성급의 벽을 깨느라 밤새 꼼짝 도 하지 않았고, 날 샌 다음에도

차원거래에 빠져 있느라 낮 시간 을 다 보냈다.

이렇게나 불안에 떨었으면 한 번 쯤 문을 두드릴 법도 한데.

"왜 나한테 오지 않았지?"

"방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하셨 잖아요."

"내가 도망치기라도 했다면?"

"어차피 달라질 건 없으니까요. 딱히 갈 곳도 없고… 그냥 믿는 수 밖에요."

실비아는 처연한 미소를 지어 보

였다.

체념으로 가득한.

그 웃음에는 그녀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부평초처럼, 대양에 뜬 돛단배처 럼 타인이라는 거센 물결에 좌지 우지되어온 삶.

"난 말한 건 지키는 사람이야. 자 유롭게 해준다고 했으니, 해준다."

"어떻게요?"

"자."

에른은 가지고 온 물건을 보여줬다.

미용 가위와 염색약이 든 통.

그 외 다른 변장 물품들도.

" 뭔가요?"

"이대로 다닐 수는 없지. 일단 외

모부터 바꾸자."

*

실비아는 딴 사람처럼 보였다.

금빛 폭포수 같던 머리카락은 갈 색 단발로 변해 아름다운 빛을 잃

었고.

사파이어를 깎은 듯한 파란 눈은 흑요석으로.

수업을 마친 지르칼은 에른과 만 나기로 한 여관으로 찾아왔다가 생판 처음 보는 남녀가 맞이하자 당황해하며 사과했다.

"아, 방을 잘못 찾아왔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아저씨, 저 맞아요."

"o o 으.....?"

' _ 11 .

지르칼의 벙찐 얼굴을 보고 실비

아가 키득거렸다.

"저에요, 실비아. 염색하고 머리 자른 거예요."

"정, 정말...?"

그때, 지르칼의 품에서 붉은 무언 가가 튀어나왔다.

"뀨에엥!"

사리 였다.

하루 안 봤다고 미친 듯이 꼬리를 흔들며 에른의 품으로 들어왔다.

외모가 달라졌어도 본능적으로 주인을 알아보는 것.

"어머... 얘는 누구에요?"

"인사해. 이 사람은 실비아고, 얘 는 사리."

"안녕, 사리!"

사리의 까만 눈이 실비아를 훑었다.

가장 먼저 돌아가는 사고 회로는.

주인과 적대 관계인가?

- 아닌 것 같다.

사이는?

- 호의적으로 보임.

여기까지 이르자 곧 경계를 풀었다.

실비아가 눈을 빛냈다.

"만, 만져 봐도 되나요?"

만난 뒤로 처음 듣는 밝은 목소 리였다.

"사리가 원한다면."

"쓰다듬어도 괜찮겠니?"

까닥.

사리는 맘대로 하라는 듯 가만히 있었다.

실비아는 사리를 껴안고 볼을 비 비는 등 정말로 하고 싶은 걸 다 하기 시작했다.

"꺅! 너무 귀엽잖아!"

둘이 그러는 동안, 지르칼은 의문 가득한 눈빛으로 연달아 물었다.

"염색하고 눈 색깔 바꾼 거 말고 도 뭐가 더 있는 거죠? 나만큼 실 비아를 잘 아는 사람이 없을 텐데. 지금도 다른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간단한 위장 마법이지. 관찰자의 인식에 영향을 끼쳐서 낯설게 느 끼도록 하는 거야. 스타일도 확 바 꿨으니까, 어지간해선 실비아라는 걸 알 수 없겠지."

"이러면 블랙 스네이크도 추적할

수 없겠군요."

지르칼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나저나."

에른은 실비아가 들을 수 없도록 목소리를 낮췄다.

사리와 노는데 정신이 팔려서 귀 기울여 들을 것 같지도 않았지만.

지금까지는 두 사람에게 베푼 부 분. 이제는 받아내야 할 때였다.

"부탁한 건 어떻게 됐지? 내 출석은?"

"오늘부터 폐관 수련에 들어가는 걸로 해 뒀습니다. 당분간은 자리

를 비워도 아무도 모를 겁니다."

에른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되면 도와준 보람이 있다.

"당분간이 정확히 며칠인데?"

"보름입니다."

[64 화]

"겨우 보름? 너무 짧아."

에른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쩔 수 없습니다. 중급반이 한 번에 받을 수 있는 일수는 그게 최 대입니다."

지르칼의 말은 길고 에른은 더없이 짧았다.

수련생과 교관의 대화가 맞나 싶을 정도.

그러나 둘 다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필라프가 에른이라는 것을 아는 사 람은 그 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좋았다.

해서 단둘이 아닐 때는 필라프가 되어 행동하는 건데.

지르칼도 이런 관계에 불만이 없어 보였다.

"뭐, 그래도… 폐관이 한 번으로 끝나는 건 아니니까요. 교칙만 놓고 보자면 3차까지도 가능합니다."

폐관 수련.

아카데미에서 배려 차원에서 마련 한 장치다.

천재들의 성취를 우I해.

또래들의 수준을 아득히 앞서는 진 짜 천재들은 아카데미 수준에서 딱 히 얻을 게 없었다.

가만 내버려 두는 게 도와주는 것 일 때가 있다.

그때를 위한 공간이 특별 수련실.

이 안에서의 수련을 다들 폐관 수 련이라고 불렀다.

당연히 이 기간에는 출석과 훈련

참여가 인정된다.

이런 식으로 악용하는 수련생이 나 올 것이라고는 아카데미에서도 예상 못했을 테지만.

"안에서 수련 제대로 하는지 확인 하고 그러지는 않나?"

지르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하지요. 연공 중에 내상을 입는다거나 할 수 있으니까요. 근데 그건 뭐… 들여다보는 사람이 저라 서.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계속 힘 좀 써 보}. 보름 자유로워

지자고 이렇게까지 하는 건 아니니

까."

"예...

둘 사이에 침묵이 끼어들자 실비아 가 다가왔다.

머리에는 사리를 얹은 채다.

"뀨우웅...

"무슨 대화를 그렇게 열심히들 나 누세요?"

"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이 런저런 거...

지르칼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

이 떠올랐다.

"일단 한숨 돌리긴 했지만, 수도에 계속 머무는 것은 위험하다. 아무래 도 다른 도시로 떠야 할 거야."

"그, 그건 안 돼요!"

실비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문을 생각 하면… 테아로스를 떠날 수 없어요.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 데."

"네 심정은 알지만, 블랙 스네이크 에서 눈에 불을 켜고 찾을 거야."

지르칼의 시선이 침대 위에 놓인 금괴 무더기와 보석들로 향했다.

유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 봐도 뻔하다.

에른의 무위를 생각하면 분명 난장 판이 벌어졌을 것이다.

"다시 놈들의 손아귀에 들어간다면 이번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처 지가 될지도 모른다."

"아...

실비아가 떨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고통으로 가득한 삶이

었는데, 더 나락으로 떨어진다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옥죄 어 오는 것 같다.

지르칼이 타이르듯 말했다.

"너희 어머니도 네가 무탈하게 살 아가기를 더 바랄 게다."

"..그, 그러실까요?"

"내가 아는 그녀라면."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대화다.

이게 웬 신파극?

에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끼어들어서 미안한데… 그냥 수도 에 있어도 되잖아. 누가 실비아를 알아본다고."

"지금이야 그렇죠. 근데 마법이 언 제까지 가겠습니까. 결국은 블랙 스 네이크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으 로 떠나야 함니다."

"언제까지 가겠냐고?"

에른이 입꼬리를 올렸다.

"내 말에 그렇게 무게감이 없나?"

그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실비아, 그거 줘 봐."

목에 건 펜던트를 벗어내자 위장 마법이 풀렸다.

다시 원래의 얼굴로 보이는 그녀.

그렇다는 건.

지르칼이 놀라 말을 더듬었다.

"매, 매직 아이템?"

"마력 공급만 주기적으로 해 주면 30년은 문제없지. 암흑가에 고서클 마법사가 있을 리도 없고… 굳이 안 떠나도 될 거 같은데?"

에른은 침대로 가서 뿌려 놓은 금 괴를 양손으로 퍼 올렸다.

"받아, 실비아."

"네...?"

"마나석 값."

그녀 앞에 내려놓고 보석도 몇 개 더 챙겨 줬다.

"너, 너무 많은데요."

"지금까지 착취당한 데 대한 보상 이라고 생각해. 헤이브인가, 그 인간 말하는 거 들었지? 1년에 1만 2천 골드? 그렇게 따지면 이거도 적다."

에른은 지르칼에게도 금괴 몇 개를 건넸다.

"뭡니까?"

"그쪽도 뭔가 얻어 가는 건 있어야 지."

"...받,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유곽에 퍼다 준 거, 돌 려받는 거라고 생각해. 나 혼자 다 먹긴 그렇잖아."

지르칼은 얼빠진 표정으로 주머니 에 금괴가 들어오는 걸 보고만 있었다.

'이, 이게 이렇게 될 수가 있는 거 였나...

그것도 너무 쉽게.

고작 하루 만에!

실비아에 씌워진 굴레.

영원할 줄 알았던 저주와 같은 속 박.

속박된 것은 실비아 혼자만이 아니 었다.

지르칼도 그러했다.

그녀의 딸을 두고만 볼 수가 없어 서, 가련함을 참을 수 없어서 교관 신분임에도 흥등가를 드나들었다.

'정, 정말 자유의 몸이 된 건가?

실비아가? 수도를 떠나지 않아도 되

고?'

멍하니 한참을 생각해 본다.

에른의 말에 허점은 없었다.

그는 변장의 명수.

어제오늘 벌써 두 번이나 얼굴을 바뀠고 그럴 때마다 못 알아봤으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신변의 자유뿐 아니라 돈 도, 새로운 신분도 얻은 상황.

와장창!

뭔가가 시원스레 부서지는 느낌이

든다.

'아.…"

두 사람을 구속하는 모든 굴레와.

마음의 빚.

그리고 각종 강압과 억압.

"이 은혜는… 꼭! 어떻게 해서든, 무슨 수를 써서든 갚도록 하겠습니 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지르칼은 머리를 숙였다.

눈물을 보이지 않기 우]해.

그리고 깊은 감사를 담아예를 표 하기 위해.

그의 제자, 에른 스틸가드가 고개 를 끄덕였다.

"부탁한 거나 잘 해줘."

격동은 격동을 불러왔다.

실비아 또한, 벅찬 해방감에 휩싸 여 있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었다.

"은공… 은공이라 부르겠습니다."

"아니, 그건 좀."

"네?"

"낯간지럽다. 그냥 필라프 님이라 고 불러."

"예, 필라프 님."

상황이 대강 정리됐다.

실비아는 자기 삶을 살 수 있게 됐고, 지르칼은 '홍등가 개근왕'이라 는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에른이 얻은 것은?

15일간의 자유.

'아니, 사실상 14일이지...

입맛이 썼다.

지르칼의 감동 먹은 얼굴을 보아하 니, 앞으로 계속 신경 써줄 것은 확 실했고.

에른이 한 일이라고 해 보}야.

암흑가 떨거지들 처치한 거, 실비 아에게 필요한 변장 물품을 차원거 래로 구매한 것 정도.

그것들도 다 헤이브의 금고에서 나 온 것들로 커버 되는 금액이고, 그 몇 배로 벌었으면 벌었지 손해는 안 봤지만.

두 사람의 인생을 구해준 대가가 겨우 15일이라니 뭔가 불공평하다 고 느껴졌다.

'공평하게 가자. 공평하게.'

에른은 실비아에게 물었다.

"그럼, 앞으로 뭐 할 거지? 생각해 둔 거라도 있나?"

"아뇨… 당장은."

"하고 싶은 게 있긴 있었을 거잖 아. 뭐라도."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럼 당분간 날 도와주는 건 어

때? 정식으로 고용하지."

실비아의 눈이 커졌다.

"예? 뭘로요?"

"비서? 총관? 집사? 직책이야 아 무거나 좋을 대로."

"좋… 좋아요, 전!"

"안 주셔도 돼요! 어차피 이것만 해도 평생 써도 못 쓸 금액인데요, 뭐."

"안 그래도 그 말 하려고 했어."

실비아가 지르칼을 쳐다봤다.

허락을 구하는 눈빛.

지르칼은 어깨를 으쓱했다.

"너만 좋다면 나야 아무래도 좋다. 그런데 뭘 하시려고?"

에른이 눈을 빛냈다.

뇌리에서 청사진이 그려졌다.

"일단은 집을 하나 구할 생각인 데."

"집… 을요?"

"계속 여관에만 묵을 수는 없잖아.

정착을 하려고."

*

"이 새끼들, 잠수 탔구만."

"기다려 봐."

"넌 그 신중한 척하는 버릇을 좀 고쳐야 해. 잠수가 확실하잖아."

거대한 몸집의 남자, 타이탄이 덩 치에 안 맞게 계속 종알거렸다.

"네 말 믿고 참고 또 참았다가 지

금 이 신세 된 거 아니냐. 난 네가 왜 '검은 브레인'이라 불리는 건지 모르겠어. 곁에서 보면 영 맹탕인데. 그렇게 똑똑하면 카마잔이 칼 빼들 것도 예상했어야지."

"닥쳐, 좀."

타이탄과 대비되어 보이는 깡마른 人b내, 베스가 짜증을 냈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매일 들으면 신물이 난다.

근데 이 자식은 만날 때마다 비난 에, 책망에, 탓탓탓… 지겨워 죽겠 다.

"귀에 딱지 앉겠어. 넌 질리지도 않냐?"

타이탄이 툴툴거렸다.

"내가 왜? 카마잔이 보스 먹어서 이따위 뒤치다꺼리나 하고 다녀야 하는데? 매일매일이 새롭다고, 이 X 같은 상황이!"

그는 책상으로 가서 그 위에 벌러 덩 드러누웠다.

"일할 땐 일 좀 하자. 타이탄."

"이보다 뻔할 수가 있어? 상납금 계속 밀리고 있었잖아. 카마잔 그

새끼가 좀 많이 뜯어가니? 헤이브도 수가 없어지니까 부하들 데리고 내 뺀 거지."

책상 밑을 본 베스의 표정이 변했 다.

"...이래도 잠수라고?"

그는 뜯겨진 금고 문을 주워서 타 이탄에게 보여줬다.

" O "

M....

타이탄은 책상에서 내려와 문짝이 떨어진 금고 안을 살폈다.

"아무것도 없네. 역시 잠수야."

"강제로 연 흔적이라는 거, 이런 간단한 것까지 설명해 줘야 하냐?"

"그거네. 부하들이 헤이브 담근 거야. 금고 털고 잠수 탄 거지."

베스가 고개를 저었다.

"봐. 절단면이 날카롭지? 억지로 연 흔적이 아니야. 철판을 이렇게 깔끔하게 잘라내는 솜씨… 헤이브가 데리고 있는 놈들이 이런 걸 할 수 있을까?"

" o _o_...."

— 1=1 .

"설혹 반란이 있었다 해도 뭐라도

해보지 않았겠어? 헤이브가 무투파 는 아니지만… 단검이 있잖아."

인페르노 단검.

블랙 스네이크의 간부들에게 주어 지는 물건이다.

사용할 때마다 시전자의 생명을 갉 아 먹지만 당장 배때기에 칼이 꽂히 는 것보단 낫기에, 분쟁이 생길 때 마다 간부들이 애용한다.

"최소한, 불에 타 죽은 몇 명이라 도 있어야 해. 시체를 치웠다 해도 인페르노로 그을린 자국은 쉽게 없 어지지 않아."

"그건 그러네."

타이탄은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오러 유저일까?"

"오러 말고는 설명이 안 되지."

의문은 의문을 불러왔다.

"오러 유저가 왜 헤이브를 덮쳤을 까? 시체는 다 어디로 갔고?"

방안은 깨끗했다.

쿰쿰한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그거야 원래 청소 같은 건 안 하고 사 는 놈들이니까.

"글쎄다...

베스는 책상 밑 틈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봐."

손가락 끝에 뭔가가 걸려 나왔다.

검붉은 막으로 뒤덮인 금화였다.

".피?"

"이 장소에서 살인이 있었어. 살인 자는 아무도 모르게 현장을 정리했 고. 보통 놈이 아니다."

타이탄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 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수상한 건 못 봤다고 했잖아. 기도들도 그렇고 접대부들도

"나도 모르겠다."

베스는 턱을 긁적이며 생각을 정리 했다.

"금화를 던져서 사람을 죽였어. 금 고 문을 무 자르듯이 잘랐고. 헤이 브는 인페르노를 써볼 새도 없이 당 했던 거야. 엄청난 실력자가 분명 해."

"우선 보고부터 해야지! 그, 근데 우리가 상대할 수 있을까?"

타이탄이 우려를 표했다.

"카마잔 그 새끼가 이런 기회를 놓 칠 리가 없어. 얼씨구나 하고 우리 한테 추적을 맡길 게 뻔하다고."

"철저히 파악하고 준비해야지. 이 건 블랙 스네이크에 대한 도전이야. 놈을 찾아서 응징해 줘야 해."

베스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감돌 았다.

[65 화]

쏴아아아!

영약의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에른의 이마에 굵은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현천태을신공의 가르침을 따라 기 운을 신체 중심부로 이동시키자 아 랫배로 폭포수가 쏟아졌다.

쩌저저적!

'됐다!'

에른의 주위에는 한기가 채 가시지 않은 빈 목함과 단약을 감쌌던 포장 지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목함 안으로 눈처럼 흰 설삼의 잔 뿌리들이 보이고, 포장지에는〈대환 단〉,〈태청단〉이란 글자가 1계 문 자로 쓰여 있다.

1계인들이 봤다면 부스러기라도 좋 으니 남은 거 달라고 아우성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여긴 1계가 아니다.

이 귀물들의 가치를 알아볼 사람이…

없다.

천급 이상의 영약은, 지급, 인급과 는 비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다.

지급과 비하면 한 단계 차이이지만 가격 차이는 최소 5배 이상!

천급이 아무리 좋다 해도 지급의 5배 기운을 품은 것은 아니다.

이 가격 차는, 양적이 아닌 질적 차이 때문에 발생한다.

지급과 인급에는 없고, 천급에는 있는 것.

천급을 천급으로 불리게 하는 효능은.

'단전 확장.'

경지에 오른 무림인들이 천급과 선 급을 찾아 헤매고, 큰손들이 에른을 집중 견제한 이유가 다 있다.

내공을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는 시 대에도 최고급 영약은 여전히 전과 같은, 아니 그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

쩌저저저적!

에른의 단전이 한계를 넘어 확장되었다.

인형설삼과 대환단, 태청단이 품은 선천지기가 훌륭한 양분이 되어 주 었고.

현천태을신공 7성의 깨달음은 거칠 게 파도치는 내력을 능히 제어할 수 있게 해줬다.

고오오오-

에른의 머리 위로 푸른 기류가 모 이기 시작했다.

넘실거리는 기운은 곧 형태를 갖춰 갔다.

이번에도 푸른 꽃, 그러나 검화와 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채 피어나지 않은 꽃망울 세 개가 만들어졌다.

정신을 집중하자 그중 하나가.

톡, 토톡!

꽃망울을 터뜨리며 푸르게 개화했다.

여기까지는 일사천리.

'혹시?'

설마 하며 다른 꽃망울도 트이게 해 보려 했지만 두 번째 꽃망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후우...

에른이 숨을 골랐다.

꽃망울들은 다시 푸른 기운이 되어

에른의 콧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운공을 마치고, 몸 상태를 점검했다.

끝마무리가 잘 되지 않았음에도 에른의 표정은 밝았다.

'벌써부터 삼화취정을 기대하는 건 욕심이긴 하지?'

현실적으로 가능한 부분까지는 다 얻었다.

한계에 도달한 단전은 더 큰 그릇 이 되어 추가적인 내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고.

천급을 그렇게 복용했으니 당연히

내공에도 진전을 보았다.

단전에 잠재된 거력은.

'... 내공!'

정확히는 조금 더 넘지만, 100년이 라는 게 상징성이 있다.

강산이 10번 바뀔 세월 아닌가.

개운한 얼굴로 연공실에서 나오자 복도에 앉아 있던 실비아가 수건을 들고 달려왔다.

"어…! 끝나셨나요?"

고개를 끄덕이자 실비아가 땀을 닦 아 준다.

"내가 닦을게."

에른은 수건을 받아서 흥건해진 이 마를 쓱쓱 닦았다.

"언제부터 기다린 거야?"

"얼마 안 됐어요."

"그 얼마가 얼마가 아닌 거 같은데?"

온종일 틀어박혀 있었으니 타이밍 을 맞추려면 반나절은 서성거렸을 터이다.

"땀이야 내가 닦으면 되는 건데."

"은공께 이런 거라도 해 드리고 싶 어서...

"또 그 은공 소리. 난 필라프라니까?"

"죄송해요. 필라프 님."

뭐가 죄송한 건진 모르겠지만, 실비 아는 사과부터 하고 머리를 숙인다.

"실비아."

"네?"

"부담스럽다."

".…"예?"

뜻밖의 말.

건조한 다섯 음절이 그녀의 가슴을 쿡쿡 쑤셨다.

"널 고용한 게, 몸종 역할이나 하 라는 게 아니야."

"아...

실비아의 눈망울이 흔들렸다.

에른이 눈가를 좁혔다.

알게 된 지 겨우 며칠 된 사이.

그녀가 자기한테 급속도로 의존하 는 게 너무 눈에 보였다.

그래서 따끔하게 말해 본 건데, 상 처받은 눈으로 쳐다보니까 솔직히 마음이 좀 약해진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관계 설정을 확

실히 하고 가야 한다.

"진짜 나한테 필요한 일을 해 줬으 면 좋겠어.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 잖아?"

"네...

실비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명심할게요, 필라프 님."

"잠깐 걸을까?"

"네, 좋아요!"

에른이 산 저택은 테아로스의 남쪽 에 위치해 있었다.

왕궁과는 거리가 좀 떨어져 있어 그렇게 선호되는 입지는 아니었다.

입궁을 위해 수도에 거주하는 귀족 들에게는 크나큰 단점이나, 에른은 그럴 일이 없어서 별문제가 아니었다.

아카데미하고는 또 가까워서 오히 려 좋았다.

구매가는 5만 골드.

드넓고 웅장하다고는 할 수 없지 만, 혼자 살기에는 차고 넘치는 크 기다.

게다가 수도에 나온 매물임을 생각

하면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두 사람은 바깥으로 나와 정원을 산책했다.

정원수 옆에서, 사리가 으르렁거리며 뭔가를 물어뜯고 있었다.

동그란 공처럼 보이는 것은 에른이 준 묵철괴.

낑낑거리며 안간힘을 쓰는데도 조 각나지 않아서 심술이 난 것 같았다.

'묵철로 넘어가는 건 아직 일렀나?'

피식 웃으며 지나가려는데.

"음? 사리야, 뭐 하는 거야?"

실비아가 관심을 보이자 에른이 얼 른 그녀를 끌어당겼다.

" 앗."

"놀라긴. 하인하고 관리인들. 언제 부터 들어오기로 했지?"

"아까 면접 끝냈어요. 인적사항을 적어 놨는데… 필라프 님께서 결정 하시면 될 것 같아요."

실비아가 품에서 곱게 접은 종이를 꺼내 펼쳤다.

에른이 고개를 저었다.

"아, 됐어. 실비아가 원하는 사람으

로 뽑아."

"그래도 필라프 님 마음에 들어야 나중에도 좋을 텐데...

"귀찮게 무슨. 어차피 난 자리 비 우는 날이 더 많을 테니까. 최우선 은 실비아하고 잘 맞는 거지. 알아 서 해."

"아, 알겠습니다."

영주직을 수행해 봐서 알지만, 인 사 관리라는 게 보통 마음 쓰이는 일이 아니다.

스트레스도 엄청 받고.

실비아라면 간섭 안 해도 잘할 것 이다.

그녀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두는 게 깔끔하고 편했다.

'이게 참 이상하단 말이지...

실비아는 너무 유능했다.

처음 그녀에게 기대한 것은 자잘한 일 대신해 주는 역할 정도.

그런데 어디까지 하나 보자 하고 전 권을 일임하는데도 척척 다 해낸다.

에른이 입을 열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

"네, 물론이죠."

"글은 언제 배운 거지?"

"예?"

"나는 아주 어릴 때, 회초리 맞아 가면서 배웠거든. 집안이 엄해서. 너 도 그랬나?"

실비아가 입을 다물었다.

에른에게로 치우친 자세가 원래대 로 돌아갔다.

"그때 지르칼한테 가문 얘기를 하 던데, 혹시."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죄, 죄송해요. 필라프 님은 절 밑 바닥에서 건져 올려 주셨죠. 이런 말하기 너무 부끄럽지만… 무슨 궂 은일이라도 은혜에 보답할 수만 있 다면 다 하고 싶어요. 뭐든요. 전 그렇게 다짐했어요."

실비아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니, 뭐 그럴 것까지는."

"그렇지만 이것만큼은 양해해 주셨 으면 해요. 엄마와의 약속이고… 지

르칼 아저씨도 원하지 않는 일이니 까."

"알았다. 더 묻지 않으마."

듣지 않아도 대강 짐작은 하고 있었다.

'몰락 귀족이겠지. 실비아도 원래 이름이 아닐 테고.'

비슷한 일을 겪어 본 입장이라 이 해가 갔다.

쉽지가 않다.

몰락 가문의 후손으로 살아간다는 건 밝히고 싶지 않은 게 당연했다.

"들어가자. 벌써 어두워지는군."

실비아와 단둘이 저녁을 먹고 차원 거래를 시작했다.

파밧!

좌안을 가득 채우는 것은 붉은빛이 아닌 푸른빛.

간만에 0계 채널을 방문한 에른이었다.

'슬슬 낚싯대를 건져 올릴 때가 됐 지.'

때가 무르익었음을 느낀다.

문득 떠오르는 것은 잘 익은 홍시

의 이미지.

가장 먼저 [흐름 파악]으로 마나석 중급가를 확인했다.

[현재 채널의 마나석(중급)의 평균 거래가는 25코인.]

[현재 채널의 마나석(중급)의 거래 량은 희귀.]

"와

에른의 눈동자에 순수한 경탄이 어 렸다.

"하트스톤… 성장했구나."

다마협이 아무리 마나석 상인들을 규합해 고가 정책을 밀어붙인다 한 들,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

한 20코인에서 꺾일 줄 알았는데 그새 한계치를 뚫고 25% 더 올리 다니.

무슨 수를 쓴 건진 모르겠지만 에른에겐 잘된 일이었다.

'더 오르길 기다려 볼까?'

아니다.

너무 뜸을 들였다가는 익다 못해 터져 버리고 말 것이다.

뭐든 적당할 때가 좋은 법.

에른은 이때를 위해 남겨뒀던 중급 마나석을 거의 다 털었다.

무려 500개를 자동거래로!

-에른 :〈중급가 20코인!〉소비자 를 생각하는 상생의 아이콘, 마나석 대란의 '그 판매자'가 돌아왔습니다. 다마협의 횡포에 지치셨나요? 그랬

겠죠. 내가 보기에도 미친 거 같은 데.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미친개 한테는 매가 약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 약, 제가 나눠드립니다.

일부러 호들갑스럽게 게시글을 써 봤다.

'에른'이란 닉네임이 0계에서 꽤 유명하긴 하지만 뇌리에 각인될 정 도는 아니다.

하지만 마나석 구매자라면 최근의 마나석 대란을 모를 수가 없고, 그 중심에 한 판매자가 있었음을 떠올 리게 된다.

"20코인 떴다!"

"드디어 하락세인가? 하락폭이 크네?"

"내가 그랬잖아. 25코인은 말이 안 된다고. 다마협도 물건이 안 팔리면 결국 가격을 내릴 수밖에 없어. 나, 재평가."

"아니, 다마협이 아니야."

"그 교류자가 돌아왔어. 다마협하 고 맞짱 뜬 놈!"

"걔 결국 다마협한테 밀려서 빤쓰 런한 거 아니었나?"

"몰라. 근데 어디서 물량을 확보해 온 건지 재고가 엄청나. 날개 돋친 듯이 팔리고 있는데...

"...얘들아? 내 말 듣고들 있는 거냐?"

[두족류는싫어님이 대화방을 나가 셨습니다.]

[수리부엉이님이 대화방을 나가셨 습니다.]

[허니스파클링님이 대화방을 나가 셨습니다.]

*

0계에서 마나석의 인기는 여전했다.

무수한 대화 요청과 쪽지가 쏟아졌다.

대부분 조금 더 깎아주면 안 되냐 는 네고 메시지라 오는 족족 씹었다.

' 오호?'

그런데 이건 대응할 가치가 있었다.

-하트스톤 : 야, 이 새끼야! 왜 또 돌아온 거냐!

-에른 : 고맙다. 덕분에 4코인짜리 20코인에 팔 수 있게 됐네.

-하트스톤 : 너, 너… 설마 그때 싹쓸이해 간...? 어, 어떻게?

-에른 : 다 방법이 있지.

—하트스톤 : 0卜 . . 으아아..' 아아 아악!

혹 떼러 왔다가 근심만 안고 간다 는 게 이런 건가?

절규가 계속 이어졌다.

에른이 달래듯이 말했다.

-에른 : 나 싸우려고 온 거 아니 야. 다마협에도 별로 감정 없고. 아 니, 오히려 고마우면 고마웠지.

-에른 : 그러니까 딱 1만 코인만 먹고 갈게.

-하트스톤 : 개소리 집어치워!

-에른 : 싫으면 또 가격 경쟁 가 든가. 어떻게 올린 25코인인데… 다 시 저점 찍어 볼까? 4코인?

-하트스톤 : 그,그건....

-하트스톤 : 아… 아니지. 너 우리 비방하고 흑색선전했어. 이거 다 신 고 대상인 거 알지?

-에른 : 해 보}. 어떻게 되는지.

0계 CM이 거래 제한까지 풀어줬다.

엄밀히 따지자면 작성한 판매글은 선을 좀 넘은 편이었다.

그래도, CM이 잘 커버해줄 것이다.

-하트스톤 : 너 딱 기다려.

-하트스톤 : 정식으로 이의 제기 하고 온다.

한참을 기다려 봐도 메시지가 없었다.

'신고 먹힐 리가 없지. CM 빽이 좋기는 좋네.'

삐빅.

생각하기가 무섭게 쪽지가 날아왔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우리 호랑이가 또 뭐라고 하려나.'

가끔 보면 재밌는 놈이다.

하트스톤은.

그런데 메시지함을 보니, 이번 쪽 지는 처음 보는 교류자가 보낸 것이었다.

-옥면금룡 조검휘 : 잠시 대화 가 능하십니까? 알바 건으로 제안 드릴 게 있습니다.

'알바? 큰손이 보낸 사람인가?'

[섭리의 눈]을 사용한 에른의 눈이

커졌다.

'...이 인간, 거물이네?'

[66 화]

[닉네임 : 옥면금룡 조검휘

종족 : 인간.

접속 장소 : 1계, 제5 무림계.

거래 등급 : level 1

혼의 위상 : 초월적인 무공을 보

유한 자.

보유 코인 : 50000

거래소 리포트 : 만금상회의 주

인, 금왕 조근남의 손자이자 유일

한 혈육이다. 타고난 재능에 금왕 의 전폭적인 지원이 더해져 약관의 나이에 초절정에 올랐다. 그 실력과 재력에 부러움을 담아 금룡(金龍). 넋을 잃게 하는 수려한 외모에 감탄 하여 옥면(玉面). 둘을 합친 옥면금 룡이란 별호로 무림에서 통한다 ....]

'뭐가 이렇게 길어?'

여태껏 본 리포트 중에서 가장 길었을뿐더러 한 줄, 한 줄이 주옥 같다.

초절정에, 5만 코인에.

만금상회?

처음 들어봤지만, 이름값 하는 곳 이라는 것 정도는 알겠다.

무림계에서 날리는 집단인 듯.

'근데 옥면금룡이라 불리는 건 불 리는 거지 닉네임에 자기 별호를 당당히 박아 넣는 건...

뭐지? 자기과시?

에른은 피식피식 올라오는 입꼬 리를 매만지며 뒷부분을 읽었다.

[...후기지수 중에서 최고로 꼽히 고 있지만 감춰진 실제 무위는 현역 초고수들을 위협하는 수준. 근래에 한 번의 성취를 더 봐서 벽을 넘어 섰다. 부모님의 복수를 위해 본 실 력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여유로움 과 매너를 겸비한 성격이나 복수 얘 기만 나오면 눈이 돌아간다. 기승전 복수로 흐르지 않도록 단어 선택에 유의하도록 하자.]

'부모님의 복수…? 이게 알바하고

관련이 있나?'

절로 의문이 떠오르지만 리포트 덕분에 다른 궁금증 하나가 해결 됐다.

조검휘의 위상인 〈초월적인 무공 을 보유한 자〉.

획득 조건이 불명확하기 짝이 없었다.

[초월의 경지에 도달하십시오.]

현재 에른의 혼의 위상은 〈내세 울 만한 무공을 보유한 자〉였다.

초일류의 경지에 접어들면서 위 상 변화가 일어난 건데, 확인하고 좀 실망했었다.

〈강력한 무공을 보유한 자〉로 바뀔 줄 알았는데.

그렇다는 건, 기존에 저 위상을 보유했던 1계인들....

탁준필이란 닉네임을 쓰는 제갈성 호와 태산보신원주 용신구는 초일류 위의 경지, 절정이란 얘기겠고.

'획득 조건이 초절정이라. 초월이라 는 게, 절정을 초월하란 뜻이었군.'

당연히 일류급 정도를 넘어서란 건 원래부터 아닐 줄 알았다.

걱정했던 건 신화급이나 초월급 수준을 요구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는데.

초절정이면 전설급 정도라 두 단 계 위일 뿐이다.

〈초월적인 무공은 보유한 자〉는 등급 상승을 위해 필요한 위상 중 하나.

충분히 사정권에 있는 목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당장 올라서기에는 무리 가 따른다.

'2계로 가려면 다른 위상을 노려 야겠군.'

리포트를 보는 동안, 조검휘가 메 시지를 몇 통 더 보내왔다.

-옥면금룡 조검휘 : 시급을 다투 는 일이라 실례를 무릅쓰고 또 쪽 지를 드립니다.

-옥면금룡 조검휘 : 말씀드린 제 안은... 자세한 조건은 차차 알려드

릴 테지만 교류자님께도 충분히 이득이 될 것이라 장담합니다.

-옥면금룡 조검휘 : 그럼, 대답 기다리겠습니다.

'왜 이렇게 매달리지?'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

저자세로 나오는 걸 보니까 밀당 을 하고 싶어진다.

에른은 마나석이 팔려나가는 걸 흐 뭇하게 지켜보다가 밤이 깊어지자 조검휘에게 말을 걸었다.

-에른 : 지금 확인했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1초 만에 칼답이 왔다.

-옥면금룡 조검휘 : 휴우… 감사 합니다. 답변 주셨군요.

-에른 : 제가 조금 바빠서요. 이 제야 시간이 나네요.

-옥면금룡 조검휘 : 괜찮습니다. 바쁘신데 방해해서 죄송할 따름이 죠. 그러면, 대화 가능하신가요?

-에른 : 예, 뭐.... 알바 얘기는 어디서 들었습니까?

-옥면금룡 조검휘 : 아, 제가 마 음이 급해서 조리 없이 다급함만 드러냈군요. 사과드립니다.

-에른 : 뭐 그런 걸로 사과씩이나.

'예의를 좀 차리네?'

가식일까? 아니면 리포트 말대로 몸에 밴 깍듯함인지?

지금까지 겪은 교류자들은 정중 하다 싶으면 다 꾸민 모습이었고,

원하는 것을 얻었거나 본색이 들통 났을 경우, 곧바로 가면을 벗고 돌 변했다.

백이면 백이 그랬다.

-옥면금룡 조검휘 : 말씀드리겠 습니다. 최근에 영약 판매자들과 마찰이 있었다죠?

-에른 : 누구한테 들었지?

-옥면금룡 조검휘 : 덕분에 용신 구 원주가 곤욕을 치렀다고 하더 군요.

-에른 : 그 인간도 참 입 싸네. 그래서, 혼자 힘으로 안 되니까 그 쪽을 끌어들인 건가?

-옥면금룡 조검휘 : 아뇨, 용신구 원주하고는, 안면은 있지만 가까운 사이라고는 할 수 없고. 그냥 한 다리 건너 듣게 되었을 뿐입니다.

-에른 : 그러면?

-옥면금룡 조검휘 : 제가 관심 있 는 건 알바를 적발한 방식입니다.

-옥면금룡 조검휘 : 리포트 제공 10회권을 가지고 있다 들었습니다. 정말입니까?

'CM의 말이 무게감이 있긴 한가 보군. 개소리를 다 믿고 있어.'

장단에 맞춰 줘서 손해 볼 것은 없었다.

11대 특전은 에른의 가장 큰 무기.

비밀병기로 남아 있어야 최대한 활용할 수 있고, 현재의 파괴력이 유지 된다.

에른에게 맥스급 특전들이 있는 걸 알았다면 다마협과 큰손들의 대 응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에른 : 그, 그걸 어떻게...?

일부러 놀란 척, 연기해 줬다.

-옥면금룡 조검휘 : 다 아는 수 가 있지요.

-에른 :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 는데?

-옥면금룡 조검휘 : 그건 중요한 부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10회권, 가지고 계십니까?

-에른 : 있었지만, 지금은 써서

없는데.

-옥면금룡 조검휘 : 아....

안타까운 탄성.

점점이 찍히는 말줄임표가 그의 심경을 대변했다.

-옥면금룡 조검휘 : 그렇습니까.

-옥면금룡 조검휘 : 좋은 대화 나눴습니다. 그럼, 이만.

—에른 : 잠깐.

-옥면금룡 조검휘 : ...?

-에른 : 10회권이 없다는 거지 리포트 제공권 자체는 남아 있지.

-옥면금룡 조검휘 : 몇 회나?

-에른 : 알바들 잡는데 5회 썼 고, 그래서 5회.

-옥면금룡 조검휘 : 정, 정말이 오???

-에른 : 정말이지, 그럼.

-옥면금룡 조검휘 : 으하하하!

—에른 : ...?

조검휘의 폭소가 이어졌다.

-옥면금룡 조검휘 : 드디어 복수 의 기회가 찾아왔구나! 이 찢어 죽 일… 기름에 튀겨 죽일 악적들!

-옥면금룡 조검휘 :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고도 평생 두 다리 쭉 뻗고 살아갈 줄 알았더냐!

-옥면금룡 조검휘 : 오늘로써, 하 늘도 너희들을 버렸다. 하하하하핫!

-에른 : ????

이거 동일 인물 맞나?

독백이 끝나자 조검휘는 원래 상 태로 돌아왔다.

-옥면금룡 조검휘 : 실례했습니다. 흥분한 모습을 보였군요.

-옥면금룡 조검휘 : 나에게는, 같 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 들이 있습니다.

-옥면금룡 조검휘 : 살부살모의 원수! 놈들에 대한 복수만 생각하 면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드디어

오늘, 한 줄기 빛이 보이는군요.

-에른 : 내가? 내 5회권이 빛?

-옥면금룡 조검휘 : 예. 그 원수는.

조검휘가 까드득 이를 갈았다.

메시지로 표시될 정도의 깊은, 뼈 에 사무친 것 같은 원한.

-옥면금룡 조검휘 : ...교류자입 니다. 유력한 용의자들이 있고… 에른 님께 부탁드릴 것은, 그들 중 에서 누가 원수인지 확인해 주시

는 겁니다.

-에른 : 리포트에 그런 게 다 뜰 거라고 어떻게 확신히-지?

거래소는 흥신소가 아니다.

리포트에서 다루는 것은 의미 있 고 가치 있는 정보뿐.

조검휘의 리포트만 봐도 중요한 내 용만 딱딱 나와 있는데.

-옥면금룡 조검휘 : 전 확신합니다. 누가 흉수인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지 리포트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에른 : 대단한 자신감이군. 뭐, 나야 아무래도 좋지. 그래서, 5회 권을 사고 싶다?

-옥면금룡 조검휘 : 예.

-에른 : 이거 어쩌지. 리포트 제 공권은 양도 불가인데.

-옥면금룡 조검휘 : 괜찮습니다. 내용만 공유해 주시면 되니까요. 5 회 전부, 5만 코인에 구매하고 싶 습니다.

—에른 : 음.

리포트 5번 봐주고 5만 코인.

상당히 후한 가격이다.

리포트 제공권이라는 건 실재하 지 않고 에른에게는 곁눈질 한 번 일 뿐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 로 창조 경제.

그러나.

'금왕이 여기에 관련돼 있을까?'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금왕 조근남이 얼마나 대단한 사 람인지는 모른다.

이번 생에서도, 전생에서도 그의

이름을 들어본 바 없었으니까.

하지만 손자인 금룡이 5만 코인 을 턱턱 내는 것만 봐도 보통 집 안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고.

'1계도 부계 성을 물려받지 보통? 조검휘에게 부모의 원수면 조근남 에게는 아들 부부의 원수다.'

이 순간.

에른은 판단했다.

지금껏 단련된 거래 감각, 발달한 촉이 속삭이고 있었다.

'이거 단순 5만 코인으로 만족할

건이 아니다.'

-에른 : 겨우 그거밖에 안 됩니까?

-옥면금룡 조검휘 : 예?

-옥면금룡 조검휘: 5만 코인이 면 황금 200관이 넘습니다. 3대가 대를 이어 써도 못 쓸 금액인 데....

-옥면금룡 조검휘 : 그리고 5회 권을 써서 3만 코인 버신 걸로 알 고 있습니다. 이 제안이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에른이 씨익 웃어 보였다.

모든 걸 다 가진 이 잘난 친구를 어떻게 요리하면 좋을까.

조리 방법은 두 가지다.

-에른 : 우선, 5회권을 써서 번 금액은 정확히 3만 2천 10코인이 고.

-에른 : 그 이상의 이득을 봤습니다. 경쟁자 2명을 정지 먹였고 그 덕에 영약 시장에 자연스레 안 착. 5만 코인 값어치는 벌써 다 뽑

았어요.

-에른 : 앞으로 벌어들일 코인을 생각하면… 비교가 안 되죠? 이 모 든 게 리포트 덕분이라곤 할 수 없지만, 리포트가 있어 가능했던 겁니다. 이 5회권. 누가, 어떻게 사 용하냐에 따라 가치가 천차만별로 달라집니다.

-옥면금룡 조검휘 : 어....

조검휘가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계좌에 딱 5만 코인이 있는 걸

보면 이거면 넙죽 받아들일 줄 알 았나 본데.

에른은 이미 머리 꼭대기에 앉아 서 그를 파악하고 있다.

-에른 : 나도 복수를 해 보았습니다. 정말 좋더군요.

문득, 애원하는 쿤츠의 얼굴이 눈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확신이 선다.

이 맛을 보기 위해서라면, 조검휘

는 영혼이라도 기꺼이 팔 것이다.

-에른 : 옥면금룡 조검후]. 당신에 게 복수의 가치가 고작 5만 코인에 불고}합니까?

여기에 킬링 멘트를 덧붙이면.

-에른 : 그렇다면, 복수를 위해 평 생을 살아왔다는 건 거짓이겠군요.

-옥면금룡 조검휘 : 아, 아니야!

더 몰아붙여 볼까 하는데.

에른의 표정이 얼음처럼 굳었다.

수상한 기척이 저택으로 모여들 고 있었다.

-에른 : 나중에 다시 연락합니다.

-옥면금룡 조검휘 : 갑… 갑자기요?

-에른 : 급한 일이 생겨서. 이따 봅시다.

'한 놈이 아니군.'

에른은 차원거래를 종료하고 뇌정 검을 집어 들었다.

[67 화]

끼이 익.

"뀨엥.…"?"

문을 열고 나가자 잠에서 깬 사리가 뒤따라왔다.

에른이 작게 속삭였다.

"넌 실비아한테 가 있어."

"뀨우웅."

"왜, 내가 걱정돼?"

끄덕.

에른이 피식 웃었다.

"멀리서도 기척 다 잡히는 놈들이다. 날 어떻게 할 수 있을 거 같아?"

"크르르르!"

"좋아, 그 기세. 실비아한테도 보여 줘. 안전하게 보호해줄 수 있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사리였다.

" 믿는다."

사리와 헤어지고 혼자 남은 에른은 정신을 집중했다.

기척을 헤아리기 위함이다.

불청객? 침입자?

뭐가 됐든 십수 명이 넘어가고 있었다.

' O.'

사리에게는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이 정도 숫자면 장난이 아니다.

조직이 동원되지 않고선 나올 수 없 는 머릿수이고, 겨우 두 명 있는 텅 빈 저택에 이만큼 투입했다는 것은, 이쪽의 실력을 어느 정도는 파악했다 는 뜻이다.

'이것들이 노리는 게 에른인가, 필라 프인가.'

여러 가능성이 떠올랐지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직접 부딪혀 가면서 정보를 수집하 는 수밖에.

'불나방 작전으로 간다.'

우르릉.

뇌정검을 꺼내자 노란 뇌전이 번득 이며 어두운 복도를 밝혔다.

"무슨 소리 나지 않았어?"

"저쪽에서 불빛이 보였는데… 금방 사라졌어."

"가 보자."

복면인들이 다가왔다.

그 수는 모두 넷.

에른은 모퉁이 벽에 몸을 바짝 붙이 고 있다가 적당히 거리가 좁혀지자, 몸을 드러내는 동시에 내력을 담아 검을 휘둘렀다.

사앗!

굵은 뇌전이 공기를 태우며 날아갔다.

"저, 저게 뭐야?"

뇌전이 정면에 선 복면인의 몸을 때 렸다.

파지지직!

살 타는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미친!"

에른은 놀랄 시간도 주지 않았다.

찰나 만에 천변보로 접근해 둘의 목 을 베고 마지막 남은 복면인의 복부 에 뇌정검을 쑤셔 넣었다.

"크아아악!"

아랫배가 뚫린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새하얘지는데 검신에 흐르는 전류가 전신으로 퍼져 나가자 복면인의 눈이 까뒤집혔다.

"괴롭나? 묻는 말에 답하면 편히 보

내 주지."

"닥, 닥쳐...

"이야, 참을성 뭔데? 멋있다!"

에른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검자 루를 비틀었다.

"끄아아악!"

절명한 동료들이 부러워질 정도의 극심한 고통.

복면인의 목소리가 신음을 뚫고 겨 우 새어 나왔다.

"무… 뭐가 궁… 금...

"어디서 온 놈이냐?"

"브, 블랙 스네이크...

"내가 누군지 알고 있나?"

"헤이브… 형님을… 죽인 놈."

"정체는'?"

"...모, 몰라. 오러 유저라는 것밖 에는."

"고맙다. 진작 협조하지 그랬어."

뚜둑!

에른이 복면인의 목을 꺾었다.

손에 묻은 피를 털어내는 그의 입가

에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암흑가 조직 따위가 날? 이것들이 단체로 약을 먹었나?"

헛웃음이 오래 갔다.

간부인 헤이브와 그의 부하들을 죽 이고 수만 골드에 이르는 재물을 강 달해 간 에른이다.

이거 때문에 블랙 스네이크가 원한 을 품는다면, 그거야 당연한 일이 아 닌가 싶다.

그런데 자기 목 따려고 집까지 쳐들

어오다니?

'오러 유저인 걸 알면서?'

언제부터 암흑가 놈들이 이렇게 간 이 컸었나.

기사만 보면 쩔쩔매는 게 조직원들이고 특히 오러 유저는 놈들에겐 감 히 그림자도 못 밟는 존재다.

에른은 이 인간들의 간땡이가 얼마 나 부어 있는지 확인하기로 결심했다.

*

'이거 좋지 않은데… 애들이 당한 것 같다.'

베스가 미간을 우그러뜨렸다.

사방에서 들리던 발소리가 언젠가부 터 뚝 끊겼다.

그는 눈짓으로 타이탄과 부하들을 불러 모았다.

"놈이 움직이고 있다. 흩어지면 안 돼."

"우리가 오는 걸 알고 있었다는 거냐?"

타이탄의 눈에 의구심이 떠올랐다.

복면에 야행복을 입고 있어도 워낙 덩치가 커사I,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면

단번에 그가 타이탄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몰라. 지금 중요한 건 놈을 어떻게 상 대할 것이냐지. 이 전력을 유지해야 해."

베스는 그를 둘러싼 복면인들과 눈 을 맞췄다.

타이탄은 무식하고 폭급한 성격의 소유자지만, 전투력만큼은 조직 내에 서 1, 2위를 다투는 놈이다.

고르고 골라 뽑은 부하들, 모이스, 진, 하빅, 덴버… 모두 4급 수준의 실 력자였다.

'그리고 이거.'

베스는 품 안의 물건을 소중히 어루 만졌다.

"저, 저기!"

하빅이 손가락을 들었다.

금발의 남자가 로비 쪽으로 터벅터 벅 걸어오고 있었다.

조직원들이 일제히 검을 세웠다.

"누구냐!"

"누가 할 소리를."

볼에 난 흉터가 인상적인 미남자였다.

베스가 물었다.

"네뉴? 헤이브를 죽인 게?"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다른 애들은 다 헤이브 형님이라고 하던데. 그냥 헤이브라… 그쪽이 대장 인가?"

"공격해!"

베스는 명령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질질 끌어 좋을 게 없다. 통성명은 제압한 뒤에 해도 늦지 않고.

블랙 스네이크의 정예들이 금발 남 자를 덮쳐 갔다.

"이해가 안 가는군."

남자의 검에서 오러가 솟아올랐다. 그런데도 조직원들은 겁내지 않았다. 오러 유저라는 걸 모르고 온 게 아

니었다.

전면에 선 것은 타이탄이었다.

"흐아아압!"

천생 거력에 마나가 실렸다.

타이탄의 대검과 남자의 검이 부딪

혔다.

깡! 까앙! 깡!

"놀랍군!"

남자가 감탄사를 발했다.

타이탄을 처음 상대한 적들은 모두 이런 반응을 보인다.

오러 유저와도 함을 겨룰 수 있는 타고난 몸뚱이, 동급까지는 압도적인 힘으로 그냥 밀어 버린다.

지금은 한직으로 밀려나 수금 관리 나 하고 있지만 전대 보스가 살아 있 을 때만 해도 타이탄 하면 블랙 스네 이크의 선봉장으로 통했다.

"크흡!"

타이탄이 피를 토했다.

불가사의한 능력처럼 보이지만 상대 와의 격차를 그저 몸으로 받아 내는 것일 뿐.

맷집을 넘어서는 데미지가 들어오면 아무리 그라 해도 타격이 있다.

베스의 눈이 가라앉았다.

'생각보다 더 강자야.'

부하들이 합세하자 타이탄의 부담이 조금 줄어들었다.

'시간 조금만 벌어 줘라.'

'빨리 해!'

베스는 타이탄과 눈빛을 교환하고 남자의 뒤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시간이 없다.'

타이탄은 남자의 공세를 주로 담당 하느라 칠공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고, 부하들도 오래 버티긴 어려워 보였다.

문제는, 기회는 한 번뿐이라는 것!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휘익

베스의 입에서 휘파람 소리가 울렸다.

이건 신호였다.

사전에 입을 맞춰 둔.

소리의 의미는.

'모두 피해! 알아서 살아남아라!'

베스는 품에서 마법 스크롤을 꺼내 찢었다.

화앗!

빛이 터지며 허공에서 커다란 얼음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콰자자작!

얼음덩어리는 무수한 얼음 파편으로 변해 남자에게로 몰아쳐 갔다.

"됐어!"

아이스 블래스트다.

칼날보다 날카로운 얼음 폭풍을 불 러내는 5서클 마법.

전쟁터에서나 쓸 법한 대량 살상 마 법이지만 남자에게 쓰는 게 아깝지 않았다.

'목숨값에 비하면야.'

베스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남자가 얼음 폭풍에 휘말려 육편으 로 화할 것임을!

시전자인 그마저도 바로 기둥 뒤로

숨었고, 미리 알고 내뺀 타이탄마저도

파편에 베어 피를 철철 홀렸다.

그럴진대 이걸 정통으로 맞은 남자

1—.

콰콰콰쾅!

파편이 남자를 때리고, 얼음 파편은 다시 얼음 알갱이로 쪼개져 2차 폭발 을 일으켰다.

"1000골드짜리 스크롤이다. 맛이 어 떠냐!"

베스는 뿌듯함을 느꼈다.

카마잔이 자기를 사지로 내몰았지만

이번에도 보기 좋게 엿을 먹였다.

뭔 짓을 해서라도 살아남고 말리라.

그러나 의기양양한 빛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베, 베스… 어, 어떡하냐?"

타이탄의 눈에 절망이 깃들어 있었다.

폭발로 인한 먼지가 걷히자 베스도 상황을 파악했다.

뚜벅.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

육편이 되기는커녕 옷깃도 상하게 하지 못했다.

'데미지가… 전혀 없어?'

으슬으슬 소름이 돋는다.

얼음보다 차가운, 남자의 살벌한 눈빛.

다 틀렸다!

경고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아이스 블래스트를 정통으로 맞았는데?'

혹시 잘못 본 게 아닐까?

1000골드나 주고 사온 게 불량 스크

롤일지도?

그러나 베스의 인지부조화를 비웃기 라도 하듯, 에른의 전신은 서릿발로 뒤덮여 있었다.

그 위로 푸른 호신기가 넘실거린다.

'초일류가 좋긴 하군.'

얼음 폭풍이 날아드는 순간, 에른에 게는 선택지가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최근 수련 중인 패왕군림보 로 완벽 회피하는 것.

'미완인 무공을 펼치는 건 위험 부담 이 있지.'

충분히 막아낼 거라 보고 두 번째 선택지인 호신기를 끌어올렸는데 어 김없이 방어해 냈다.

그래도, 암흑가 놈들치고는 짜임새 있는 공격이었다.

'2급 정도는 잡아낼 만한 실력이야. 거기다 비장의 마법은, 1급도 까딱하 면 위험했겠는데?'

다만 마음에 안 드는 건.

손을 올리자 뾰족해진 머리카락이 만져졌다.

"다 얼었네. 이런 씨… 야! 내 머릿

결 손상되면 책임질 거야?"

에른이 뇌정검을 들었다.

번쩍!

예고 없이 뻗어져 나온 뇌전 줄기가 베스를 강타했다.

그가 떠올린 마지막 생각은.

'머, 머리카락 때문에 분노한다고? 다른 게 아니고?'

털썩!

베스가 쓰러졌다.

에른은 타이탄과 그의 부하들도 정

리한 다음, 실비아의 방으로 향했다.

복도 곳곳에 복면인들이 쓰러져 있

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복부에 관통상을 입은 채였다.

안에 든 선홍색 내장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다.

등까지 뚫린 상처는 원형이라 검에 찔린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히힝...!"

실비아의 방에서 온몸이 붉은 유니

콘이 또각또각 걸어 나왔다.

"...사리?"

사리일 수밖에 없었다.

윤기가 잘잘 흐르는 금속 피부.

언제나처럼 반가운 듯 달려드는 태 도 하며.

"너 이제 변신이 되는구나?"

에른은 옆으로 슬쩍 피하면서 사리 의 뿔을 만졌다.

끈적임이 느껴졌다.

붉은 뿔은 피에 젖은 것.

이 또한 상아질이 아니라 금속의 질 감이었다.

역시 이계의 생물.

변신 상태를 처음 본 소감은.

"이질감이 있긴 해도… 멋있는데?"

"히히힝!"

평소의 귀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대신 늠름한 자태로 변했고, 대륙 어

디에도 없을 유니크함이 있었다.

"네가 다 처리한 거야? 저것들?"

따닥, 따닥!

사리는 발굽을 두드려 긍정을 표했다.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옆으로 꺾는

게, 자못 자랑스러운 것 같았다.

"필, 필라프 님...!"

실비아도 방에서 나왔다.

그녀는 반쯤 패닉에 빠져 있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 상황을 쉽게 받아들인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겠지.

갑작스러운 침입만 해도 놀라운 일

인데.

"사, 사리가...

"몰랐어? 사리는 변신수야."

"변... 신수요?"

"내가 평범한 담비를 왜 데리고 다 니겠어? 사리는 다른 모습으로 변하 는 능력이 있어. 앞으로도 종종 보게 될 거니까 적응하도록 해."

"아...

실비아의 놀라움이 눈에 띄게 가라 앉았다.

하긴, 며칠 같이 지내면서 쭉 이상하 다고 생각했었다.

사람 말을 다 알아듣는 것 같은 뛰 어난 지능에, 음식을 챙겨 줘도 거들 떠보지도 않는 특이한 식습관.

변신수가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 만....

필라프의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 때 문일까?

실비아는 얼떨결에 이런 생물이 존 재하는가 보구나 하고 넘어갔다.

"지켜 줘서 고마워, 사리야."

그녀는 조심스레 사리의 등에 손을 올려 봤다.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 대신 느껴지 는 것은 생경한 촉감.

하지만 왠지 싫지 않았다.

"...그나저나 무슨 일인가요?"

"블랙 스네이크에서 쳐들어왔어."

"네...?"

실비아의 눈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 했다.

"와, 이런 게 진짜 동공지진이네."

"걱정하지 마. 이미 처리 끝났으니까.

심문하러 갈 건데, 너도 같이 갈래?"

"예?"

"궁금하지 않아? 우리를 어떻게 찾 아냈는지. 뭘 믿고 한밤중에 들이닥친 건지."

에른이 씨익 웃었다.

"난 궁금해 죽겠는데?"

[68 화]

" o o 으."

- T그 .

베스가 눈을 떴다.

시야에 펼쳐진 것은 아이스 블래스 트로 난장판이 된 저택의 풍경.

이런 사후세계가 있을까?

'죽지 않았어.'

분명 뇌전에 맞았던 것 같은데?

몸을 내려다보니 팔다리가 의자에 묶인 채이고 상체는 벗겨진 상태.

번개 모양 흉터가 가슴과 복부 전체 에 퍼져 있었다.

'모세혈관이 죄다 터졌군.'

아마 등판도 똑같이 개판이 되어 있 으리라.

베스는 의아함을 느꼈다.

전격 계열 마법에 당했다고 해서 꼭 죽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죽을 것 같 은 고통은 느껴져야 했다.

흉터가 이렇게나 선명한데도 몸이 너무 멀쩡했다.

문득, 입안에서 이상한 맛이 느껴졌다.

'...풀 냄새?'

그것도 쓰디쓴.

살면서 처음 맡아 보는 향이었다.

"정신 차렸나? 컨디션은 어때?"

에른은 싱글싱글 웃으며 베스의 상 태를 관찰했다.

죽활단의 효능은 놀라웠다.

죽산파 장문인의 딸이 감사를 표하 며 전해준 물건.

복용하면 어지간한 내, 외상은 순식 간에 낫게 해준다는데.

실험 삼아 베스에게 먹여보니 설명 이 과장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한 알을 다 쓴 것도 아니고, 1/4로 쪼개 먹인 건데도 다 죽어 가던 놈이 살아나서 머리를 굴리고 있다.

"내,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냐!"

에른은 소리치는 베스를 무시하고 타이탄에게도 죽활단을 먹였다.

깨어난 그 역시 베스와 비슷한 반응 을 보였다.

"하아아앗!"

타이탄이 안간힘을 써 보지만 의자

에 묶인 몸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힘 빼지 마. 타이탄 마법인 것 같다."

'점혈이란 거다.'

사지의 요혈을 점했으니 타이탄 같 은 장사라도 노끈 하나 풀지 못하고 쩔쩔맬 수밖에.

에른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 다.

"우리 인사나 할까? 난 필라프라고 한다."

순간 에른의 몸이 흐릿해지는가 싶 더니만.

철썩! 철썩!

베스와 타이탄의 목이 돌아갔다.

둘의 입안이 피로 가득 찼다.

"퉤!"

"분위기 파악 안 되지? 기껏 살려놨 더니 죽고 싶어서 쇼를 흐}네. 혹시 너 네, 원래부터 좀 삶에 미련이 없고 그 랬냐?"

우르릉.

에른이 뇌정검을 꺼냈다.

번쩍이는 뇌전을 본 베스의 표정이 변했다.

몸이 기억하고 있다.

전신을 훑고 지나간 짜릿한 전류의 느낌을.

짜릿하면서 끔찍했다.

"...베스, 베스다."

베스가 이렇게 나오니, 타이탄도 자 기 이름을 밝혔다.

"타이탄."

"이제야 협조할 생각이 드나 보군."

스릉.

뇌정검을 집어넣고.

먼저, 가벼운 질문부터 던져 봤다.

"블랙 스네이크에서 무슨 직책을 맡 고 있지? 중간 보스쯤 되나?"

"흐 "

흐.

타이탄이 코웃음을 쳤다.

"간부급이 사냥개 노릇 따위를 하겠어? 오러 유저 상대로 목숨을 걸겠냐고,"

"닥쳐, 타이탄."

베스가 눈을 부라려 보지만 타이탄

은 입을 다물지 않았다.

"뭘 그래. 블랙 스네이크란 것도, 우 리 이름까지 알고 있는데. 우리는 그 냥 카마잔의 버리는 패, 그 이상도 이 하도 아니다."

«..2"

에른이 놀라 물었다.

"너 3급은 충분히 될 것 같은데?"

베스를 보고는.

"넌 모르겠지만, 같이 온 애들도 4급 수준은 될 거 같고."

인간 자체가 강한 타입이다.

타이탄은.

전생의 자신과 비교해 보면 강철의 숨결을 익힌 이쪽이 기교나 마나의 순도 면에서는 우위를 점하겠으나 타 이탄의 초인적인 몸뚱이를 고려하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블랙 스네이크가 왕실 기사단이라 도 된다는 거냐? 3급이 왜 버리는 패?"

"그랬으면 이해라도 가지. 자기편에 서지 않았다고 인재들을 내던지고 있 어. 이대로라면… 카마잔은 오래 가지 못할 거다."

"카마잔이 보스인가 보군. 아마, 새로 바뀐 보스겠지? 너네는 다른 라인 을 타서 밉보인 거고."

대강 그림이 그려진다.

"이상했거든. 내가 누군 줄 알고 다 짜고짜 쳐들어왔을까. 오러 유저 상대 로는 살얼음 위를 걷듯 조심하는 게 암흑가의 생리 아니던가?"

에른이 손가락을 딱 부딪혔다.

"그런데 뭐. 내가 거슬리는 놈들 죽 여주면 좋고, 너희가 날 잡으면 잃은

돈 되찾아서 좋고. 이래도 좋고, 저래 도 좋다… 꽃놀이패가 따로 없네?"

본인의 권력 유지를 위해 일부러 조 직에 손상을 입힌다....

이해할 수 없지만 종종 벌어지곤 하 는 일이다.

"진짜 근본 없는 집단이군."

"큰형님께서 살아 계실 때만 해도 이러지 않았어! 테아로스에서 가장 유 서 깊은 암흑가 조직이었는데!"

"상인들 돈이나 뜯는 양아치들이 유 서는 뭔 유서."

궁금증이 하나 풀렸다.

에른은 다른 궁금증도 해결하기 위 해 물었다.

"날 어떻게 찾았지?"

"그건 베스한테 물어봐. 머리 쓰는 일은 쟤가 전문이니까."

"야!"

공이 넘어오자 베스가 황당해했다.

"말해."

"싫다."

"머리 좋다며? 내가 너네 입 열게

할 줄 몰라서 좋은 말로 부탁하고 있 는 거 같아?"

일리가 있다.

무슨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대단한 비밀도 아니고.

베스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일이 벌어지면 의미 부터 부여하고 보는 경향이 있지. 그 것도 가장 거창한 쪽으로. 그 의미 부 여가 맞을 때도 있지만, 아닐 경우엔 모든 게 미궁으로 빠져 버린다."

"잡설이 너무 길군."

에른이 눈살을 찌푸렸고 타이탄은 혀를 찼다.

"또 지 자랑이네. 이 상황에 그러고 싶냐?"

"넌 닥치고 있어. 다들 타 조직에서 저지른 일이라고 했을 때, 난 사소한 부분에 주목했다. 그날… 유곽에서 사 라진 접대부, 실비아."

"흐음."

여기까지는 에른도 예상한 바다.

그가 알고 싶은 것은 그 가느다란

실마리로 시작해 어떻게 여기까지 도 달할 수 있었는지.

"포주가 죽고 접대부가 사라졌다… 가 장 사소하지만, 그럴듯한 설명이 뭘까."

베스가 자랑스러운 듯 덧붙였다.

"치정이지."

"땡."

"그, 그럼?"

"알 거 없어."

동기가 틀렸지만 방향 자체는 맞았다.

에른은 계속하라는 듯 눈짓했다.

베스가 길게 말을 이었다.

"오러 유저가 실비아에 반해서, 아니 뭔가의 이유로 그녀를 데리고 도망쳤 다....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지. 수도를 빠져나갔거나, 테아로스 어딘 가에 숨어 있거나. 전자는 아닐 거라 고 생각했어."

"왜지?"

"출입 기록이 남잖아. 혼자라면 상관 이 없지만, 접대부를 데리고 암흑가에 서 탈취한 금품까지 싸 들고? 이거 위험하지."

"뇌물을 써서 입막음을 시도한다거

나, 권위로 찍어 누른다거나 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지체 높은 귀족이면 검문 없이 통과 가 되지. 근데 고위 귀족이 저런 짓을 할까? 그리고 수비대 쪽에 알아보기도 했거든. 의심 가는 인물은 없었어."

"몰래 성을 넘었을 가능성은?"

"그것도 같은 이유로 어렵다고 봤지. 혼자가 아니잖아. 그래서 여관이란 여 관은 다 뒤져 봤는데 나오질 않아 서… 그때 문득 떠오른 게."

베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거 아예 살림을 차려 버린 거 아 닌가? 돈도 많으니까 나라도 그랬을 거 같은데? 그때부터 부동산 거래를 캐고 다녔지."

"그냥 얻어걸린 거군."

긴 추론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 베 스가 흥분했다.

"얻어걸리긴! 그게 말이 되냐고 다 들 비웃는데도, 꿋꿋하게 파헤쳐서 실 체적 진실에 도달한 거다!"

여기에는 타이탄도 동의했다.

"그건 맞아. 전혀 다르게 생긴 여자

를 실비아라고 우길 때는 얘가 드디 어 미쳤구나 싶었는데...

"아, 그것도 있군. 실비아를 어떻게 알아본 거지?"

"제가 말씀드릴게요."

중저음의 목소리가 아닌, 맑고 높은 음성.

내내 뒤쪽에 서 있던 실비아가 베스 와 타이탄의 시야로 들어왔다.

두 사람 다 그녀가 실비아란 것을 아는 이상, 숨어 있을 까닭이 없었다.

"하녀로 일하고 싶다고 온 사람 중

에 옆집 언니가 있었어요. 바로 돌려 보내긴 했는데...

실비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우연인 줄 알았어요…. 날 알아보는 눈치도 아니었고. 그런데 블랙 스네이 크에서 보냈을 줄은...

"나름 머리를 썼군."

"죄송해요.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다 망쳤어요."

에른은 울상이 된 그녀를 탓하지 않 았지만 달래지도 않았다.

결과적으로 블랙 스네이크의 암습을

무난히 제압하긴 했지만, 그녀도 베스 처럼 사소함에 주목했어야 했다.

여기까지 알게 되니, 베스가 달리 보 였다.

"이웃까지 섭외라… 꼼꼼한데?"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자세히 보니까 알겠다더군. 외모나 목소리를 바꿀 수는 있어도 오랜 습관이나 몸 짓, 말버릇까지 다 바꾸긴 어렵지."

"나 하나 잡으려고 준비깨나 해 왔 더군. 내가 오러 유저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베스는 헤이브의 사무실에서 추리한 바를 말했다.

'확실히 암흑가 놈치곤 머리가 있어.'

얻어걸렸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 만, 단서를 쥐고도 쥔 줄 모르는 멍청 이들에 비하면 똑똑한 편이다.

'저 타이탄이란 놈은 무뇌지만, 몸뚱 이 하나는 타고났고. 잠깐. 둘을 붙이 면...?'

뇌리가 간질간질해지는 느낌이 든다.

뭔가 괜찮은 게 하나 나올 것 같은데.

"알고 싶은건다 알았다."

에른이 표정을 굳혔다.

"그럼, 잘 가라."

다시 뇌정검을 꺼내자 두 사람의 안 색이 변했다.

"뭐, 뭘 하려고?"

"뭐겠어?"

"우릴 죽이면 블랙 스네이크에서 가 만두지 않을 거다!"

에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버리는 패라며?"

베스가 악을 썼다.

"타이탄 이 멍청한 새끼! 너 때문에 죽게 생겼잖아!"

"동료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라. 버리는 패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죽일 작정이었으니까. 블랙 스네이크는 내 정체를 알고 있고, 난 숨기고 싶고. 어차피 다 죽어야 할 놈들이야."

광오한 말이다.

블랙 스네이크는 테아로스를 주름잡 는 최대 암흑가 조직.

그러나 베스는 터무니없다고 생각하 지 않았다.

몰살을 입에 올릴 자격이 있다.

이 필라프란 남자는.

"당신 실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겠 지. 아이스 블래스트를 맨몸으로 막아 낼 정도니. 하지만 세상일이 힘으로만 돌아가는 게 아니다."

베스가 말을 쏟아냈다.

"블랙 스네이크는 수도 곳곳에 연줄 이 있어. 돈 안 먹인 데가 없고. 블랙 스네이크를 전멸시킨다고 치자. 그다음 에 있을 후폭풍은? 그걸 감당할 수 있 을 거라 생각해? 뭐, 감당한다 치자. 그렇게 해서 그쪽이 얻을 게 뭔데?"

"일리가 없는 건 아니군."

"그, 그렇다니까?"

"난 후환을 남기고 싶지 않아. 그래 도 역시 조직 하나를 붕괴시키는 건 위험 부담이 있단 말이지?"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리고 너희 둘은 살고 싶고. 그런 게 있을까 모르겠네. 우리 셋이 원하 는걸다 이룰 방법."

베스는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다.

나름 브레인 소리를 듣는 그지만 아 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게 있을 턱이 없잖아!'

하지만 포기하는 순간 죽음이다.

생사를 결정하는 사신 앞에서, 그를 만족시킬 무언가를 내놓아야 했다.

그러나.

"...없어. 그런 완벽한 해결책은."

베스가 얼굴을 떨구었다.

타이탄은 탄식했다.

"나, 나도 모르겠어...

언제쯤 머리가 날아갈까.

체념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숨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완벽한 해결책이 없다고?"

고개를 들어 보니.

필라프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손바닥 위에 있는 것은 꾸물꾸물 움 직이는 하얀 무언가.

"나한테는 있거든."

"블랙 스네이크를 먹어라. 이것도 먹고,"

"그, 그게 무슨...?"

"시키는 대로만 하면 살 수 있어. 앞 으로 너희가 테아로스 밤거리의 주인 이다."

[69 화]

"이 인간은?"

"현 보스 라인이야. 카마잔이 감시 용도로 붙여둔 거지."

"...붙여둔 거지?"

에른이 되묻자 베스가 말끝을 수정했다.

"붙여둔… 붙여둔 겁니다."

" 얘는?"

"우리와 같은, 버리는 패죠. 믿을 수

있는 친구고. 살려야 합니다."

에른은 죽활단을 조금 떼어내 타이 탄에게 건넸다. 타이탄은 그걸 조심스 레 받아서 덴버의 입에 넣었다.

잠시 뒤.

"으음, 여기가...

덴버가 정신을 차렸다.

"어어? 어...?"

"좀 어떠냐. 움직일 수 있어?"

덴버가 몸을 일으켰다.

그가 경이로운 탄성을 토했다.

"내, 내가 왜 살아 있는 거죠?"

"나도 모르겠다."

타이탄은 안도하는 한편, 의구심을 가졌다.

'포션도 아닌 것이, 신성력이 느껴지 는 것도 아니고… 뭐가 이렇게 효과 가 좋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필라프는 어떻게 이런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걸까?

그걸 아무렇지 않게 턱턱 쓰는 배포 는 또 무엇이고.

생각할수록 불가사의한 남자였다.

온몸을 마비시키고, 손짓만으로 그걸 풀어버리질 않나.

무엇보다, 그가 대수롭지 않은 듯 툭 던진 제안 때문에 삶의 행로가 송두 리째 뒤바뀌게 생겼다.

'성공한다면 말이지.... 정말 그 말 대로 될까.'

확신은 없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눈금을 확인하는 일만 남았을 뿐.

문제는.

'6 아니면 1이라는 거지.'

죽활단을 아무렇지 않게 턱턱 쓴다

는 것은 타이탄의 착각이었다.

에른은 피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벌써 두 알 썼다.

300코인 날아간 셈.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약하게 쑤실걸.' 다들 빈사 상태라 살리려면 죽활단

을 꺼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쪼개 먹여도 효과가 있어 다 행이었다.

'조직 몰살이 아닌 장악이라면, 머릿

수 없이는 안 되니까.'

카마잔이 버린 패를 이용해 블랙 스 네이크를 흡수한다는 아이디어.

그래도 운이 따른 편이었다.

에른에게 죽었거나 사리에게 당했거 나... 이미 숨이 끊어져 죽활단으로도 살릴 수 없는 조직원들은 대부분이 카마잔 라인.

베스와 타이탄의 곁을 지킨 정예들 은 다 살려냈다.

모이스, 진, 하빅, 덴버, 그리고 그 외 부하들.

그들의 시선이 베스에게로 모였다.

"카마잔을 치자구요...?"

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임무는 실패했어. 다시 덤빈다 해도 저 인간,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어렵겠죠...

"아이스 블래스트도 써 버렸어. 어려 운 게 아니라 어림도 없다."

흐흐L "

n r그 .

뒤돌아 서 있던 에른이 헛기침을 했다.

"다 들린다."

베스가 부하들을 둘러봤다.

"뭐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다들 멀뚱멀뚱 눈치만 봤다.

"그래도… 저 인간 말을 어떻게 믿 습니까."

필라프라는 남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적이었고, 놈의 칼이 살을 파고들어 오는 걸 느끼기 도 했다.

부하들은 저항감을 느꼈다.

타이탄이 말했다.

"못 믿으면 어쩔 건데? 실력 봤잖아. 우리가 가진 최고의 카드야."

베스가 동의하며 말을 받았다.

"이건 기회일 수도 있어. 어떻게 운 이 좋아서 이 건을 잘 넘긴다 치자. 카마잔은 계속해서 우릴 버리는 패로 쓰겠지. 그런데 다음에도 오늘처럼 운 이 좋을까?"

논리로 무장한 베스의 말은 설득력 이 있었다.

타이탄이 드넓은 가슴을 탕탕 쳤다.

"기왕 죽다 살아난 거. 멋지게 살아

봐야지. 뒈지면 하는 수 없고! 언제까 지 카마잔 밑 닦아주면서 살 거야?"

그리고 논리가 품지 못한 울림.

"인생 어차피 대박 아니면 쪽박이야. 지금도 개쪽인데 여기서 더 나빠져 봐야 얼마나 나빠지겠어?"

둘의 말에, 부하들이 반응을 보였다.

물결처럼 번지는 웅성거림.

'확실히 잘 맞는 짝이야.'

에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는.…"

하빅이 입을 열었다.

"모르는 남자를 위해 목숨을 걸 수 는 없습니다. 하지만, 형님들을 믿습니다. 전 하겠습니다."

그가 물꼬를 트자 다른 수가 없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베스 형님 말이 맞아요. 실력도 제대 로 모르면서 오러 유저를 잡아 오라니, 이게 죽으라고 보낸 거지 뭡니까?"

"따지고 보면 우리가 정통 중의 정 통이죠. 큰형님 살아계실 적엔 찍소리 도 못하던 놈이 보스라고 앉아선 자 기 사람만 챙기고."

"좋아요. 까짓 거, 갈아엎읍시다!"

*

테아로스 중심부의 저택.

늦은 밤임에도 카마잔의 집무실은 대낮처럼 밝았다.

"하, 징한 새끼들."

유곽 사건의 주범을 잡았다는 소식 에, 카마잔이 인상을 찡그렸다.

"재수 없는 것들이 능력은 또 좋단 말이지. 더 재수 없네…. 이것들을 어

떻게 처리하지?"

베스와 타이탄.

그에게는 앓는 이와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죽이려면 얼마든지 쥐도 새도 모르 게 보내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인망을 잃고 말 것이다.

암흑가 보스가 무슨 인망을 따지냐 하겠지만, 여기도 사람 사는 세계다.

아무 명분 없이 존경받는 조직원을 처형한다면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렵다.

'하루라도 빨리 조직 전체를 장악해 야 흐fl. 전대 보스 라인 다 뒷방으로 보내고. 요직에 동생들 꽂고.'

카마잔의 심복인 스레인이 그에게 와서 말했다.

"형님, 베스가 뵙자는데요."

"왜?"

"그… 잡은 놈이 오러 유저잖습니까. 뒷배경도 좀 있는 거 같고, 함부로 죽 일 수가 없어서. 형님하고 대면해야 결론이 날 거 같다는데요."

"상태는 어떤데?"

"초주검이죠."

카마잔은 앉아 있는 부하들의 면면 을살폈다.

고르고 고른 놈들이다.

"그 새끼들한테 당할 정도면 갓 3급 을 벗어난 수준이라는 건데."

그래서 별로 걱정되진 않지만, 그래 도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

오러 유저는.

"구속구, 사슬, 수갑… 죄다 빡세게 채우고 데려와. 혹시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카마잔이 혀를 쯧쯧 찼다.

"그냥 같이 죽었으면 얼마나 좋아. 에이... 유곽이나 터는 놈 수준이 그 러면 그렇지."

조금 두], 베스와 타이탄이 온몸이 피 투성이인, 꽁꽁 묶인 남자를 데리고 나타났다.

절그럭! 철컥!

걸을 때마다 쇠사슬이 바닥을 쳤다.

카마잔이 물었다.

"이 인간이냐?"

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디의 누구지? 이름이?"

"...필라프."

"들어본 적 없군."

카마잔은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내 돈 어딨냐."

"그게 왜 그쪽 돈? 헤이브 돈이지.

이제는 내 거지만."

이 필라프란 놈은 당장 죽어도 이상 하지 않은 상태다.

그런 주제에 눈빛은 도전적이고 말 도 매우 짧았다.

"미친놈. 그건 블랙 스네이크의 재산 이다. 블랙 스네이크는 나의 것이고. 베스, 돈은 찾았어?"

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마잔은 이상함을 느꼈다.

베스의 태도, 팔짱만 끼고 있는 타이탄.

원래가 오만불손한 놈들이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왜 말을 안 하지? 목이라도 다쳤나?"

베스가 입을 뗐다.

"난 무의미한 짓은 하지 않거든."

"시체하고 대화 나눠서 뭐 하겠어." 그 말에 카마잔이 멈칫하며 물러났다.

"뭐...?"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뭐라는 거야, 저 새끼?" 부하들이 우르르 일어났다.

베스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이 방에 살려야 하는 사람은 없습

니다."

"그거 참 반가운 소식이군."

에른이 내력을 끌어올리자 엄청난 힘이 폭사되면서 전신을 감은 쇠사슬 이 맥없이 끊어져 나갔다.

허리, 가슴, 어깨.

그뿐 아니라.

파앙! 파앙!

손목과 발목의 수갑도.

"어...

넋 놓고 바라보던 조직원들은 곧 현 실로 돌아왔다.

"큰형님을 지켜!"

쐐액!

쇠사슬이 날아와 소리치는 조직원의 입을 때렸다.

후두두둑!

피 묻은 강냉이가 우수수 튀어나왔다.

에른은 사방으로 쇠사슬을 날렸다.

초일류의 경지에 이르자 내공의 수 발이 손발 놀리듯 자유로워졌을 뿐 아니라.

쉬이이 익!

이런 식으로 운용할 수도 있게 되었다. 내력이 가득 실린 쇠사슬은 살아 있 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조직원들을 덮 쳐 갔다.

"크아아악!"

"끄… 끄억!"

쇠사슬에 맞아 어딘가 부러지거나, 목이 감겨 질식하거나.

잔챙이들은 그렇게 처리되도록 두고.

가장 중요한 건 우두머리, 카마잔이다.

에른의 시선은 처음부터 그에게 고 정되어 있었다.

"반, 반란이다! 이것들이 감히!"

"그러게 평소에 좀 잘 챙겨주지 그 랬냐. 얘기 들어보니까 서운한 게 많은가 보더라."

"닥... 닥쳬"

카마잔은 분을 삭이지 못했다.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했어. 갑자기 오러 유저는 무슨 오러 유저? 이것들이 몰래 붙어먹고 일을 꾸몄구나!"

카마잔이 검을 뽑았다.

에른은 피식 웃어 주고는 금륜지를 날렸다.

땅! 따당!

심상치 않음을 느낀 카마잔이 검을 들어 지풍을 방어해 냈다.

에른이 홀끗 뒤를 봤다.

타이탄과 베스가 잘 싸워주고 있긴 하지만, 막 죽다 살아난 터라 100% 컨디션이 아니었다.

자칫 크게 다치기라도 한다면 계획 에도 차질이 생기고.

'빨리 끝내자.'

따당! 땅! 푸욱!

연달아 지풍을 날려 대자 미처 막지 못한 한 줄기가 카마잔의 복부를 꿰 뚫었다.

"어..?"

아랫배에 손을 댄 카마잔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피, 피...?"

"아니. 뇌수!"

피융!

또 날아간 금륜지가 카마잔의 미간을 뚫고 그 안의 부드러운 뇌를 휘저었다.

테아로스의 뒷골목을 지배하는 블랙 스네이크.

그 피라미드 꼭대기에 위치한 보스 치고는 너무도 허망한 죽음이었다.

"우아아아아!"

타이탄은 거력을 발휘해 스레인의 척추를 반대로 접어 버리고 있었다.

베스는 최대한 몸을 사리며 공수를 병행하고 있고.

"둘 다 비켜라."

에른이 가세하자 상황이 순식간에 종료되었다.

집무실에서 전투가 일어나는 동안, 바깥에서도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곧 덴버가 밝은 표정으로 달려와 보 고했다.

"이쪽도 정리 끝났습니다."

베스가 물었다.

"얼마나 죽였지?"

"말씀하신 대로, 카마잔에 충성하는 조직원들만요. 가족하고 하인들, 애매 한 조직원들은… 일단 묶어 뒀습니다."

"잘했다."

"시체를 치울까요?"

에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시간 없어. 속도가 생명이다."

무릇 역사는 밤에 이루어지는 법.

해가 뜨기 전에 모든 걸 끝내 놓아 야 한다.

"유곽, 도박장, 상인회, 밀수조직… 이 정도가 알짜배기라고 했지."

오면서 베스에게 블랙 스네이크의 구성에 대해 대강 설명을 들었다.

유곽과 도박장은 확실한 카마잔 라인, 하지만 유곽 조직은 헤이브의 죽음으 로 다소 공백이 생겼고 상인회는 가

뜩이나 장사 안 되는데 상납금만 왕 창 뜯기는 중이라 카마잔에 대한 감 정이 나빠지고 있다고 했다.

"예."

베스는 에른의 명령을 기다렸다.

어쨌거나 여기까지는 그가 말한 대 로 됐다.

앞으로도 그렇게 되기만을 바랄 뿐.

"밀수 조직은, 아직 전대 보스 라인 이 유지되고 있다고?"

"그쪽은 함부로 갈아버릴 수 없으니 까요. 수십 년 이어온 노하우와 인맥

이 있어서."

"누가 가는 게 좋을까."

"타이탄이 적격입니다. 한때 몸담은 적이 있기도 해서 친구들이 많아요."

"그러면 타이탄이 밀수 조직을 포섭 하고... 베스, 네가 상인회를 설득한 다. 그러면 블랙 스네이크의 절반을 먹게 되는 거지."

" 명분은요?"

에른이 눈을 빛냈다.

"헤이브를 죽인 범인이 카마잔이라 는 소문을 퍼뜨려. 오러 유저를 고용

한 것도 카마잔이고… 금고에서 나온 돈은 개인적으로 착복해 뒷주머니를 찬 거라고."

"그, 그러면 유곽 쪽도 끌어들일 수 있겠군요."

"도박장만 고립되는 거지. 별수 없이 백기를 내 거는 수밖에 없을걸."

"조직원들이 그 말을 믿을까요?"

"카마잔은 죽었고 후계자가 될 놈들 도 죄다 사이좋게 뒤따라갔다. 조직이 박살나게 생겼는데 믿기 싫어도 믿어 야지."

"...해보겠습니다."

보스 살해라는 큰일을 저질러 버린 이상, 물러설 곳은 없다.

해 보는 수밖에 없다.

"뭐해? 어서 가 봐?"

"같, 같이 안 가십니까?"

"밥상 차려 줬으면 됐지, 입에까지 떠먹여 달라고? 나머지는 너희들이 알아서 해."

"난 할 일이 있어서."

에른은 카마잔의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두 다리를 올려놓았다.

"가, 가자."

타이탄이 눈짓했다.

두 사람은 부하들을 이끌고 황급히 저택을 빠져나갔다.

"그럼 어디… 금룡께서 결단을 내리 셨나 볼까?"

블랙 스네이크에서 들이닥치기 전까 지만 해도 차원거래를 하고 있었다.

조검휘를 막 쥐고 흔들려는 참이었 는데 오히려 잘 된 것일지도 모른다.

기다리는 동안 똥줄이 타서 마음이 더 급해졌을지도?

-에른 : 대화 가능하세요?

-옥면금룡 조검휘 : 그럼요. 내내 기다렸습니다!

' 역시.'

미소가 짙어졌다.

-옥면금룡 조검휘 : 어, 잠시만요. 할아버지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 십니다.

-에른 : ...?

-옥면금룡 조검휘 : 이제부터는 제 가 아닙니다.

-옥면금룡 조검휘 : 나 금왕 조근남 이오. 만나서 반갑소.

-옥면금룡 조검휘 : 손주를 제대로 구워삶으셨던데. 기둥뿌리라도 뽑아야 한다고 하는 거, 말리느라 혼났습니다.

'뭐야, 이건.'

갑작스러운 금왕의 등판에 에른의 입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70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