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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인생의 시작점 (1)

나는 종종 비현실적인 꿈을 꾼다.

꿈의 내용은 언제나 똑같다.

아무것도 없는 하늘에서 계속, 계속해서 추락하는 것이다.

빠르게 구름이 시야 위로 스쳐가는 가운데 생각한다.

언제까지 떨어지는 걸까?

하지만 아무리 오래 떨어져도 지상이나 바다가 보일 기미조차 없다.

광활한 하늘엔 위쪽에도, 아래쪽에도 새하얀 구름만이 가득할 뿐.

끝까지 추락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추락하기 전에는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는 전혀 모른다.

잠에서 깨면 꿈의 조각들은 매우 흐릿해지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이어져 온 이 이상한 꿈은 언제까지 계속되는 걸까?

* * *

"자네, 오늘까지 자리 정리해주게."

입사한지 3개월 만에 받은 해고 통보.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그 한마디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것이다.

아마 상사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 그래요?"

정작 해고당한 혜성의 반응은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게 다였다.

오히려 곧장 대답하는 얼굴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임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

"그럼 퇴근…이 아니라, 그냥 가도 되는 거죠?"

"...."

덜컹, 부장실의 문이 열리자 사무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그 흔한 타자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다들 자신들의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지만, 신경은 온통 혜성의 발걸음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쓰러움, 질투, 부러움, 우월감 등의 감정들을 떠올리면서.

회사 분위기에 적응 못 하더니 결국 나가는군.

갈 곳이 있으니까 미련 없이 퇴사하는 거겠지?

다른 곳에 뒷배라도 있는 건가?

아니면 집안이 금수저인 걸지도…

그러나 모두의 예상과 달리 혜성에겐 빽도 계획도 없었다.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아르바이트 정도, 가족이라곤 평범한 회사원인 누나 한 명 뿐이었다.

그럼에도 회사를 그만두는 이유는 두 가지.

첫째는 퇴사에 대한 위기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어차피 자신은 이 회사에서 살아남을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규칙 외의 암묵적인 룰을 지키고, 상사의 눈치를 보며, 직원들 사이의 신경전에서 미묘한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니.

원래도 타인과 의사소통이 힘든 자신에겐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혜성은 가슴에 손을 얹어 보았다.

마음은 신기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부장실의 문을 나올 때는 정말로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도 조금 들었지만, 그런 위기감 또한 짐을 챙기는 동안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감정이 격해져서 저지른 일이라기보다, 오히려 그 반대.

감정을 느끼지 못했기에 담담히 해고를 받아들인 것이다.

'조금 더 버텨봤어야 했을까?'

스스로가 정상이 아니란 건 알고 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이 남들과 같지 않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다른'게 아니라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건 중학생 때였다. 이혼한 부모님이 누나와 자신을 버리고 잠적했을 시기.

주변 사람들은 우리에게 안타까움과 동정을 보냈지만, 그 때도 딱히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누군가는 너무 큰 충격으로 사람이 변했다고 했지만, 그 말은 틀렸다.

그 사건 전에도 자신은 똑같았으니까.

'역시 내가 이상한 거겠지.'

그렇다, 이것은 일종의 정신병.

내면에 정해진 용량 이상의 감정을 담지 못하는 병이다.

기쁨, 공포, 두려움, 따분함, 호기심 등… 모든 종류의 감정들은 일정 크기를 넘는 순간 자연스레 소멸해 버렸다.

잔잔한 떨림만이 허락될 뿐, 가슴이 요동칠 정도의 감정은 느낄 수 없었으니 살면서 크게 웃어보거나, 눈물 흘려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여럿의 눈치를 봐야하는 회사에서 적응할 수도 없었고, 무계획으로 퇴사해도 아무런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로또에 당첨되거나, 눈앞에서 사람이라도 죽으면 좀 다를까?

하지만 어지간해선 그런 일을 겪을 리가 없으니 혜성의 일상은 그저 단조로움의 연속이었다.

그날 밤.

혜성은 누나에게 낮에 있던 일을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7살 차이의 누나는 혜성이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상대였다.

"할 말이 있어."

"응? 설마 또 그 떨어지는 꿈이야?!"

누나는 유독 자신의 이상한 꿈에 관심이 많았다.

종종 꿈에 변화가 생겨나는지 묻기도 했다.

정신병이 꿈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두 가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증상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니… 이번엔 다른 거야."

혜성은 최근의 일을 말해 주었다.

누나의 반응은…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아, 그래서 회사를 그만뒀다고?"

"해고된 거지."

혜성은 약간 말을 흐렸다.

너무 미안해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죄책감 또한 일종의 감정이니 어느 선을 넘는 순간 완전히 사라져 버릴 지도 몰라. 딱 지금 정도의 잔잔한 기분을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당분간은 알바나 하려고."

그런 혜성의 대답에 누나는 질책은커녕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위로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 동생아. 넌 아직 너의 '진짜'를 발휘하지 않았잖아?"

"놀리지 말고."

과장스런 누나의 몸짓에 혜성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차라리 따끔한 소리를 듣는 게 낫지, 저런 식의 빈정거림을 듣는 건 아무래도 기분이 상하기 마련이다.

물론, 그러한 짜증은 일어나는 즉시 사라져 버렸지만.

이런 증상도 가끔씩은 참 편리했다.

"진지하게 하는 말이야. 너한테 이 세상은 너무 따분하잖아. 가슴 뛰는 일이 뭐가 있겠어? 네가 아무런 감흥을 못 느끼는 것도 당연해."

"...."

"그래도 난 널 믿어. 네 안의 진짜 능력을 발휘하게 될 날이 분명 올 거야."

"중요한 때? 언제?"

"음, 예를 들면 갑자기 이 세상이 지옥으로 변해버렸다고 가정해 보자고. 살아남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해야 하는데 가만히 있을 바보는 없겠지? 모두가 최선을 다해야 하는 세상에서 혜성이 네 진가가 드러나는 거야!"

"또 바보 같은 소리 말고…."

혜성은 부엌에서 요리를 하며 혀를 찼다.

저렇게 꿈같은 공상이 머릿속에 가득한 걸 누나와 자신은 어떻게 한 배에서 태어났나 싶을 정도로 정반대의 성격이다.

"그건 그렇고, 회사 관뒀으니까 내일부턴 쭉 쉬겠네?"

"아니, 다시 취직하기 전까지 알바라도 해야지."

"그냥 몇 개월만 쉬자. 아니, 몇 주만!"

"왜?"

"왜긴, 누나가 부탁 하나만 하려고 그러지."

그렇게 묘한 웃음을 흘린 누나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혜성의 폰으로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Sky_Islands_Test.apk

"이게 뭐야? 스카이 아일랜즈…?"

"응. 우리 회사에서 이번에 개발한 신작. 네가 먼저 플레이해보고 소감을 알려줬으면 해."

"그래도 되는 거야? 이런 건 나한테 맡기기보단 테스터를 모집하거나 회사 직원에게 부탁하는 게."

시큰둥한 혜성의 반응에 오히려 격하게 반응한 건 그녀였다.

"너만큼 냉정하게 판단해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래? 그리고, 또 내가 총괄한 첫 작품이니까 동생의 평가를 한번 듣고 싶기도 하고…."

"누나 작품이라고?"

"몰랐어? 누나가 이번 프로젝트 총괄기획팀장이라고!"

"그래?"

혜성은 누나의 표정을 힐끔 살폈다.

그것도 몰랐냐는 듯 서운한 얼굴을 하는 걸 보니 거짓말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다른 이의 부탁이라면 아무 감흥도 들지 않았겠지만….

"내가 테스트해 주는 게 도움이 되긴 하는 거야?"

"응, 분명히!"

"그렇다면 뭐."

혜성은 게임이 설치되는 중인 스마트폰을 식탁 한 쪽으로 치워 두었다.

누나의 부탁이니 들어는 주겠지만, 지금은 식사가 우선이니까.

"알바하면서 천천히 해 볼게."

"알바는 꼭 해야 하는 거야? 집에서 게임만 해도 된다니깐?"

누나의 얼토당토않은 억지를 받아주던 탓에 혜성은 스마트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푸른 기운이 감도는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누나의 얼굴을 보는 게 오늘이 마지막이 될 거란 사실도 이때는 알지 못했다.

* * *

-미안 혜성아, 몇 주 동안은 집에 못 들어올 것 같아! 혼자서도 밥 잘 챙겨먹고, 테스트 끝나는 대로 꼭 누나한테 연락하고!

메시지를 확인한 혜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을 해고시킨 곳보다 누나의 회사가 더한 블랙기업이 아닐까?

신작 게임의 출시를 앞둔 시기엔 직원들을 철야로 갈아 넣는다는 말은 익히 들었지만, 몇 주 동안이나 집에 못 들어오게 만들다니.

총괄기획자라는 누나이기에 남들보다 더 바쁜 걸지도 모른다.

사정이 어쨌든, 혜성은 서로 떨어진 채로도 누나의 부탁을 잊지 않고 편의점 알바와 게임 플레이를 꾸준히 병행하는 중이었다.

'나름대로 재미는 있네.'

누나가 전송해 준 파일은 흔하디흔한 모바일 게임이었다.

배경은 하늘과 수많은 부유섬들!

하늘을 나는 함선의 선장이 되어 보다 높은 섬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게임의 주된 목표였고, 최종 목적지인 '꼭대기 섬'에 도달하는 자는 모든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설정이었다.

점점 높은 곳을 목표로 나아간다는 점은 수많은 양산형 '탑 등반물'과 다를 바 없었지만, 게임을 구성하는 스토리는 양산형이라고 하기에 미안할 정도로 훌륭했다.

혜성은 금방 정교하고 방대한 세계관에 빠져들었다.

착각일까? 이 게임을 하는 순간만큼은 감정이 소멸하는 역치가 조금 높아진 것 같기도 했다.

마치 실존하는 세계인 듯, 눈앞에 가상의 세계가 아른거리는 듯한 두근거림이 일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몇 주가 흘러.

혜성은 여러 밤을 세워가며 첫 번째 플레이를 완료했다.

꼭대기 섬, 모든 이뤄준다는 그 장소에 도달한 것이다.

[하늘의 꼭대기에 도달하였습니다!]

[…엔딩 미구현…]

아쉽게도 정식 출시가 되지 않았기에 엔딩 스토리는 구현되지 못한 모양.

[죽은 횟수 : 1053]

[에피소드 달성률 : 11%]

첫 테스트 플레이가 끝나자 자연스레 정산 창이 떠올랐다.

'음? 달성률이 이것밖에 안 되나?'

플레이 통계는 의외였다.

저 말은 자신이 이 세계의 극히 일부만을 엿보았다는 소리 아닌가.

귀찮다고 스토리를 다 스킵하면서 한 것도 아니었고, 가끔은 테스트 버전만의 치트키로 '시간가속'까지 해가며 플레이했는데, 대체 얼마나 세계관을 크게 만든 거지?

'초반 부분만 빠르게 한 번만 더 해볼까?'

혜성의 손가락이 서서히 '다시 하기'버튼으로 향했다.

에피소드 달성률이 이것밖에 안 되서야 게임을 테스트했다는 명분이 서질 않는다.

무엇보다, 스카이 아일랜즈에 빠져있던 순간만큼은 가슴이 두근거리던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래, 마치 꿈을 꿀 때처럼.

그 감각이 진짜인지 착각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

띠리링~!

오프닝 화면이 끝나자 캐릭터 설정 창이 떠올랐다.

플레이어는 앞으로 자신의 분신이 될 기본 캐릭터를 설정할 수 있다.

이 설정은 다시 처음부터 게임을 시작하기 전까진 바꿀 수 없으며, 게임이 진행됨에 따라 캐릭터에 걸맞은 무궁무진한 특성 및 스킬을 개화하게 된다.

첫 번째 플레이에 평범한 캐릭터를 골랐던 혜성은 이번엔 조금 별난 것이 나올 때까지 리셋을 반복해 볼 생각이었다.

그 순간.

'응? 뭐야, 왜이래?'

혜성의 머리위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아무리 화살표를 터치해도 캐릭터 창이 바뀌지 않는다.

넘어가야 할 화면은 저절로 원래대로 되돌아가고만 있었다.

'오류인가…?'

혜성은 스마트폰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화면 정중앙의 옥좌에 앉은 고풍스런 옷의 남자.

한쪽 다리를 꼰 고아한 자태에선 군주의 위엄이 넘쳐난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 남자의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에 알 수 없는 떨림이 일어났다.

'뭐지…?'

혜성은 가슴에 손을 가져다댔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감정의 떨림.

홀린 듯 옥좌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던 혜성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해당 캐릭터의 정보를 살폈다.

이름 : 피넨스 블레디안

고유 특성 : [철의 군주] (등급 : S)

<만인을 다스리는 자는 감정에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조에 위엄이, 몸짓엔 격조가 깃듭니다.>

-철의 군주는 세상의 모든 이치를 꿰뚫어 봅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해야만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유한 고유 특성은 S급.

다행히, 첫 번째 플레이에 골랐던 것과 같거나, 컨셉이 겹치는 캐릭터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솔직히, 세상의 이치를 꿰뚫어 본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알 수 없었다.

아이템을 감정하는 건가? 아니면 타인의 정보창을 꿰뚫어보는 눈? 혹은 게임 속에 숨겨진 히든피스들을 밝혀내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평정이라고.'

마저 설명을 읽던 혜성은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어떤 상황에도 평정을 유지하는 것은 자신의 원치 않는 특기가 아닌가?

문득 이게 모바일 게임이란 사실이 조금 아쉬웠다.

현실이었다면 자신은 누구보다 철의 군주의 능력을 잘 활용해 줄 텐데.

'나쁘진 않아 보이네.'

사실, 어떤 능력이든 깊게 고민할 필요는 없다.

1회차 플레이에서 보았던 S급 특성은 열 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었다.

시작부터 S급 특성을 지닐 수 있다는 건 테스트 버전만의 특혜겠지. 그렇다면 굳이 다른 캐릭터를 선택할 필요는 없으리라.

'좋아, 2회차는 이걸로 가자.'

세상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눈.

보다 빠르고 효과적인 테스트 플레이를 위해서도 이만한 특성은 또 없을 테니, 혜성은 철의 군주, 피넨스 블레디안을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후우, 그래도 일단 오늘은 좀 쉬고.'

캐릭터 선택을 마친 혜성은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스마트폰 상단의 시계는 새벽 4시를 알리고 있다.

누나는 지금쯤 자고 있을까? 아니면 프로젝트 마감을 앞두고 철야근무 중이려나?

문득 1회차 플레이를 마치는 대로 연락을 달라던 누나의 전언이 떠올랐다.

'늦었으니까, 자고 일어나서 전화하는 편이 낫겠지.'

누나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던 혜성은 이내 다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밤늦게 보내봤자 못 볼 테고, 메시지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면 그거대로 문제였다.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자 온몸에 피로가 엄습했다.

띠릭.

마지막으로 알람 설정을 확인한 혜성은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것이 혜성이 현실의 세계에서 보낸 마지막 밤이었다.

 두 번째 인생의 시작점 (2)

또 추락하는 꿈을 꿨다.

언제나와 같은 꿈은 이전의 것과 미묘하게 달랐다.

배경은 하늘. 등에 검 세 자루가 박힌 채 끝도 없이 떨어진다는 점은 동일한데, 뭐가 달라진 걸까?

곧 깨달았다.

자신은 추락하는 와중에도 하늘로 한 팔을 뻗고 있었다.

그리고 손을 위에서 아래로 휘두르는 순간, 갑자기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석양이 지는 것인가?

아니, 그런 단순한 현상이 아니었다.

하늘에 가득한 것은 셀 수도 없이 내리꽂히는 운석들.

손짓과 동시 무수한 화염 덩어리들이 하늘을 뒤덮으며 구름을 불태우는 탓에 온 세상이 붉어진 것이었다.

'뭐지?'

수백, 수천 번의 꿈을 꾸며 처음 보는 광경.

그럼에도 묘하게 기시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왜일까?

'…!'

문득 얼굴을 만져본 혜성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발견했다.

꿈속의 자신은 소름끼치는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감정이 미미한 내가 이런 얼굴을 가질 수 있었던가?

"하하…."

이번엔 의지와 관계없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추락하면서도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하하하하! 

그 웃음소리는 곧 온 세상을 집어삼킨 불꽃과 함께 사라졌다.

...

...

"...!"

혜성은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눈을 깜빡거렸다.

'뭐였지?'

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꿈에서 중요한 것을 본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진 않는다.

'기분 탓인가.'

꿈은 언제나 모호하다.

점점 이미지가 흐릿해져 갔기에 혜성은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어차피 하늘에서 추락하는 꿈이라면 그것 하나뿐일 테니까.

* * *

그날은 모든 것이 어색했다.

씻으면서도, 편의점으로 출근할 준비를 하면서도 아침의 이상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지하철 역에 도착한 순간 혜성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스크린도어 옆의 광고판에서 흘러나오는 영상이 너무도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잠깐만 저 게임은….'

몇 층인지 모를 만큼 겹겹이 쌓인 무수한 하늘의 부유섬.

그 꼭대기로 항해하려는 비행선들이 갖가지 적들을 맞닥뜨리는 광경은….

'스카이 아일랜즈?'

<6월 1일 오전 10시, 전 세계 동시 OPEN! (GMT +9)>

"스카이 아일랜즈! 지금 사전예약 안 하면 인생의 절반이 손해~!"

혜성은 지하철역의 광고에 시선을 빼앗겼다.

진짜인가?

요즘 가장 잘나간다는, 이름만 말하면 누구나 아는 연예인이 자신이 오늘 새벽까지 플레이했던 스카이 아일랜즈를 홍보하고 있다니.

동시에 여러 의문들이 솟아올랐다.

'벌써 오픈인가? 저런 거물급 연예인을 쓰다니. 엄청난 투자네.'

누나가 다니는 중소기업에선 게임이 아무리 잘 뽑혀도 홍보에 과한 돈을 투자하긴 어려울 텐데.

'잠깐, 6월 1일이면 오늘… 같은데?'

스마트폰의 바탕화면을 확인한 혜성은 보다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시각은 오전 8시 30분.

스카이 아일랜즈의 오픈까지 앞으로 1시간 30분밖에 남지 않았음에 의문이 솟아올랐다.

'이렇게 빨리 낼 거였다면 왜 내게 테스트를 맡긴 거지?'

발견한 버그 및 감상을 누나에게 알려줄 시간도, 출시 전에 게임 내 개선점들을 수정할 여유도 없었다.

오늘 서비스를 시작할 게임의 피드백을 당장 적용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름만 똑같은 게임은 아닐까?

혹시나 하는 생각에 스마트폰으로 누나가 전송해 준 게임을 실행시켜 봤지만, 오프닝 화면은 물론 개발사 로고까지 영상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가슴에 슬쩍 손을 대봤다.

심장은 아주 오랜만에 놀라움과 의심으로 두근거리다 다시 멎은 상태.

'안 받아.'

뚜르르르- 2번쯤 통화를 시도해 봤지만 신호음만 갈 뿐이어서 혜성은 누나에게 전화할 생각을 멈췄다.

시간 되면 연락하라는 메시지만 남겨두었다.

정말로 이게 누나가 총괄한 프로젝트라면 누나는 회사에서 생각보다 더 대단한 직책을 맡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기껏 얻은 일자리를 내팽개치고 알바나 하는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허나, 놀라움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뭐야 이건….'

잠시 후 도착한 번화가의 사거리.

혜성은 주위를 둘러보며 눈을 여러 번 깜빡거렸다.

사방에서 스카이 아일랜즈의 광고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렇다, '쏟아진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빌딩 전체를 뒤덮는 스크린, 그리고 편의점 앞의 작은 TV에서도 지하철에서 보았던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쪽 거리에 익숙한 캐릭터들의 등신대의 피규어들이 정렬된 광경이 특히나 장관이었다.

"스카이 아일랜즈? 새로 나온 게임인가?"

"오, 할 만한 것 같은데."

옆에서 들려오는 대화에도 '스카이 아일랜즈'란 단어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상해….'

자신의 누나가 총괄한 게임이 이런 반응을 얻는다는다면 조금 뿌듯한 기분이 들까?

아니, 오히려 혜성은 위화감을 느꼈다.

그만큼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비현실적이었다.

언젠가부터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스카이 아일랜즈'를 화두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심지어 게임에 관심이 전혀 없을 듯한 할아버지까지 홀린 듯이 광고 스크린을 바라보는 중.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최면에 빠져든 것 같았다.

'이건… 불가능해.'

스마트폰을 켜보니 인터넷은 이미 스카이 아일랜즈를 주제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자세히 알아보니 광고에 참여한 연예인도 한 두 명이 아니었다.

한국의 3대 게임사라 불리는 곳도, 아니 그 어떤 대기업도 이 정도 스케일의 홍보는 할 수 없다.

젊은 연령층만이 주요 대상인 모바일 게임에 이런 홍보는 수지가 맞지 않으니까.

더욱 말이 안 되는 것은 실제로 이 광고가 사람들에게 먹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번에도 내가 이상한 건가?'

혜성은 스스로를 의심했다.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 같아.

정신병이 악화되어 새로운 증상이 생겨난 게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들었다.

"아, 혜성씨 교대하러 오셨군요!"

"어, 그건…?"

알바를 하러 온 편의점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혜성의 시선이 알바 교대자의 스마트폰으로 향했다.

"아하, 이거요?"

혜성의 시선을 알아차린 여자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스카이 아일랜즈'의 사전예약 페이지를 보여주었다.

"재밌어 보여서 한번 해보려고요."

"…원래 게임 좋아하셨나요?"

"아뇨, 전 이번이 처음이에요. 모바일게임은 물론 PC게임도 해본 적 없거든요."

'처음….'

"예약 안하면 인생의 절반이 손해~!"

그 순간, 갑자기 편의점 알바가 방금 광고에서 흘러나오던 목소리를 따라하며,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혜성을 향해 훗, 하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라는데, 혜성씨도 괜찮다면 해보는 거 어때요?"

이상하다.

상식적으로, 어제까지 스카이 아일랜즈의 존재조차 모르던 사람들이 하루 만에 이렇게 폭발적인 반응을 보일 수는 없다.

무슨 현상이지? 단체로 몰래카메라라도 하는 건가?

혜성의 눈엔 세상의 모두가 무언가에 홀린 사람들처럼 보였다.

뚜르르르-.

교대가 끝나자마자 혜성은 재차 누나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선 누나에게 묻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

우우웅!

그때 갑자기 울리는 진동소리.

'누나다!'

재빨리 스마트폰을 확인한 혜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누나로부터 도착한 메시지는 실시간으로 전송된 것이 아니었다.

-[부재중 예약 메시지입니다!] 혜성아 아까 전화 못 받아서 미안해 ㅠㅠ 너무 바빠서 메시지 보내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구나.

-시간이 없으니까 중요한 것만 말할게. 혜성이 네가 모든 일에 무감각한 이유는 말이지… 이곳이 네 세계가 아니기 때문일 거야.

이해하기도 힘들었고.

-게임에선 자신이 영웅이 되어도, 혹은 동료가 죽어버려도, 기쁘거나 슬픈 건 아주 잠깐이지? 당연한 거야. 높은 차원의 존재는 낮은 차원의 존재에게 쉽게 공감할 수 없거든. 그때 널 정신병이라고 진단한 의사가 돌팔이였다는 거지.

또 낯설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네. 하지만 누나가 곁에 없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밥도 꼭 잘 챙겨 먹고…. 음, 마지막으로 하나 충고해 주자면, 새로운 세상에선 네 진짜를 다 사용해야 할 거야. 앞으로의 세상은… 그동안 살아온 것처럼 밋밋하지 않을 거거든.

누나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자신이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럼 동생아, 꼭대기에서 다시 보자꾸나. 아마 그때쯤이면 모든 걸 말해줄 수 있겠지.

메시지는 그걸로 끝.

혜성은 멍한 나머지 한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정신을 차린 뒤 다시 누나에게 연락을 했지만, 돌아오는 목소리는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확인 후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

당혹감과 함께 정적이 찾아왔다.

째깍. 째깍.

적막한 편의점에 초침이 흐르는 소리만 울렸다.

근처에 시계가 있지도 않았는데 어디서 나는 소리일까?

그 순간, 주위를 둘러보던 혜성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편의점 한쪽 구석.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푸른빛 홀로그램의 디지털시계가 둥둥 떠 있었다.

마치 VR 게임 속 인터페이스의 일부처럼.

[남은 시간 : 53초]

이윽고, 저건 뭐지? 라는 생각을 떠올릴 새도 없이, 눈앞으로 메시지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사전예약이 곧 종료됩니다!]

[차원계의 통합이 시작되기 전에 모두 사전예약을 마쳐 주세요! 아니면 인생의 절반이 손해~!]

갑자기 나타난 홀로그램의 문장들.

덜컹! 불길한 예감을 느낀 혜성은 편의점 문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평화롭던 번화가엔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무슨 상황인 거야?

아… 위를 올려다본 찰나,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구름 너머로 낙하하는 수천 개의 운석들은 서울의 하늘을 그 어느 때보다도 붉게 만들고 있었기에.

[남은 시간 : 38초]

"사전… 예약…."

미친 듯이 뛰어오르던 심장은 금세 잠잠해졌다.

이때만큼은 혜성도 자신의 병에 감사했다.

순식간에 평정심을 되찾자, 그제야 조금 머리가 굴러갔다.

도시 곳곳에서 비명과 아우성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혜성 또한 주머니를 더듬어 스마트폰을 꺼냈다.

사전예약 페이지에 접속하고, 예약 버튼을 클릭하는데만 10초가 더 걸렸다.

하지만.

[당신의 계정은 이미 등록되어 있습니다!]

'뭐…?'

[당신의 계정은 이미 등록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계정은 이미 등록되어 있습니다!]

몇 번을 클릭해 봐도 마찬가지.

그 와중에도 비처럼 쏟아지는 불꽃과 지상과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붉게 뒤덮인 하늘을 올려다보는 혜성은 처음으로 두려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어오르는 것과 잠잠해지기를 반복했다.

'죽는다…?'

의지와 상관없이 감정이 튀어오르고, 가라앉으면 또다시 폭발한다.

그렇게 1초에도 여러 번의 평정과 공포의 사이를 오가던 와중.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상위 차원에 진입합니다! 일시적으로 두 차원이 중첩상태에 놓입니다! 서둘러 본래의 차원을 벗어나세요!]

[미지의 힘이 당신을 상위 차원으로 끌어당겼습니다! 더 이상 기존 차원으로부터 물리적, 마법적 간섭을 받지 않습니다!]

[남은 시간 : 1초]

"큭…!"

쿠우웅! 쿠우우웅! 하나하나가 집채보다 거대한 운석들이 대지와 충돌하는 순간, 혜성은 질끈 눈을 감았다.

땅이 통째로 뒤집히며 숨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였다.

'살아 있어…?'

의식이 남아있음을 깨닫자 혜성은 눈을 떴다.

평화롭던 서울의 거리는… 아니, 아마도 지구는 통째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놀라운 사실은 불지옥이 되어버린 잔해 속에서도 자신을 포함한 몇몇 사람들이 살아있다는 점.

생존자들은 운석을 맞고도 멀쩡한 자신의 신체를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중엔 자신이 이미 죽어서 영혼이 되어버렸다고 착각하는 자들도 있었다.

꺄아아악!

옆에서 들려온 비명소리에 혜성은 고개를 돌렸다.

종말의 소음 속에서도 어째선지 그 비명소리는 굉장히 또렷하게 들렸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세상의 인간들의 운명은 둘로 나뉘어 있다.

한쪽은 불지옥 속에서도 멀쩡한 자들.

그리고 나머지 한쪽은 상반신, 혹은 하반신이 없거나, 수직으로 녹아버리거나, 몸 군데군데가 조각나는 등, 어떤 식으로든 신체의 절반이 열기에 증발해 흉측하게 부서진 자들로.

[사전예약 종료!]

[예약을 놓치신 분은 다음 기회를 노려 주세요!]

[언제 또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메시지가 혜성이 지구에서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쩌어어엉! 

거대한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눈앞의 풍경은 산산이 부서졌다.

* *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눈앞의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종말의 열기가 사라진 대신, 차가운 바람이 뺨을 때린다.

그리고 조금 전에도 보았던 푸른색 홀로그램 속 글자가 눈앞을 스쳐가고 있었다.

[상위 차원에 도착했습니다!]

혜성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부터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여긴….'

곧 상황을 파악했다.

자신이 서있는 발판은 중세와 현대의 양식미가 뒤섞인 거대한 배의 갑판 위.

배란 본래 바다를 건너기 위해 만들어진 이동수단이나, 어찌된 일인지 주위에 바다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사방에 펼쳐진 것은 하늘과 새햐안 구름.

그렇다,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배는 지금 드넓은 하늘 위를 항해하는 중이었다.

혼란함을 정리하기도 전에 재차 메시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 세상은 차원의 바다(Dimension Sea). 모든 차원들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종착지이기도 합니다.]

익숙한 설명.

익숙하다 느껴진 것은 최근에도 똑같은 문장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리라.

꿈인지 망상인지는 아직도 확실치 않다.

하지만 만약 이것이 꿈도, 망상도 아니라면…. 인간들은 수 만년 동안 살아온 터전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것이다.

[차원의 파편들이 떠도는 이 세상의 꼭대기엔 모든 영혼들의 소망이 잠들어 있나니, 그대에게 행운이 깃들기를.]

도착한 곳은 스카이 아일랜즈의 세계관.

하지만 이 세상은 인간들이 살아온 지구처럼 만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몇 번을 죽어도 세이브 로드를 반복 할 수 있는 게임 속에선 환상과 스릴이 가득한 모험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현실로 닥친다면….

[잠시 후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

이곳은 지옥이다.

지구의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인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

살아남기 위해선 타인을, 혹은 동료를 잡아먹어야만 하는 절망적인 세상.

그것이 바로 스카이 아일랜즈의 배경인 '차원의 바다'이니까.

절반의 생존자 (1)

가만히만 있어도 들끓는 감정은 순식간에 씻겨 내려간다.

현대 사회에선 대인관계의 장애물이던 혜성의 병은 이 세계에서 최고의 무기나 다름없었다.

동요를 가라앉힌 혜성은 우선 상황부터 파악했다.

'이게 지금의 나인가?'

시선을 내려 보니 몇 가지 사실을 더 알 수 있었다.

편의점 알바를 하던 중 입고 있던 옷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대신 입고 있는 것은 중세시대에서나 입었을법한 고풍스런 로브.

감촉은 조잡한 코스프레용 복장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매끄럽다.

옷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지난 새벽에 만든 2회차 캐릭터.

철의 군주, 피넨스 블레디안의 것이리라.

'상태 창'이라 의식하는 순간 홀로그램의 텍스트가 펼쳐졌다.

이름 : 피넨스 블레디안

고유 특성 : [철의 군주] (등급 : S)

<만인을 다스리는 자는 감정에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조에 위엄이, 몸짓엔 격조가 깃듭니다.>

-철의 군주는 세상의 모든 이치를 꿰뚫어 봅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해야만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화감이 들어 얼굴을 슬쩍 만져보니 이전과 형태가 다르다.

시선마저 높아진 걸 보면 키도 달라진 듯했다.

그렇다, 지금의 나는 피넨스 블레디안. 차원의 바다 위를 떠다니는 한 명의 선원.

지구에서 살던 김혜성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음을 알 수 있었다.

"…."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해버린 당황은 길지 않다.

공포, 불안, 의문의 감정들이 순식간에 가라앉자 뇌리에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만이 남았다.

이번엔 갑판 주위를 살펴보았다.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뭐야… 이거, 몰래카메라지…?"

여전히 상황파악을 못 하는 바보부터.

"흐, 흐으으, 으윽…."

완전히 패닉에 빠져버려 덜덜 떨고 있는 평범한 이들.

"날 어디로 데려온 것이냐? 당장 설명하지 않으면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거기에 판타지스런 옷을 걸치고 있는 노인까지.

주위엔 약 열 명의 사람들이 갑작스런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채 웅성거리고 있었다.

"내가 죽은 거야…?"

"그렇다면 여긴 천국인가?"

"이 평민 놈들이… 감히 내 말을 무시하는 것이냐!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사람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그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나라의 언어였는데도, 모두는 서로의 말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지장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 세계의 공용어겠군."

작게 중얼거린 혜성, 아니 피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입에서 나온 언어 또한 한국어가 아니었기에.

차원의 바다.

스카이 아일랜즈의 배경은 모든 차원의 출발점이자 종착지라는 설정이다.

다른 차원들로부터 흘러들어온 사람들 중엔 지구 출신이 아닌 자가 있을 게 분명하니, 의사소통을 위해선 언어의 통합이 필요한 것이다.

당장 이곳에도 근육질의 용병이나 마법사 코스프레를 한 노인처럼 '현실'에서 벗어난 몇몇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은가?

"어어어? 어째서 내 마법이…."

지팡이로 허공을 휘젓던 노인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의 심정을 대강 눈치챌 수 있었다.

본래 세계에서 사용하던 힘이 발동하지 않는 거겠지.

그 이유는 간단하다.

피넨스 블레디안 (철의 군주)

[힘 1] [기교 1] [내구 1] [마력 1]

스카이 아일랜즈의 기본 4종 스탯은 차원을 넘어오는 순간 모두가 동일하게 고정된다.

본래 세계에서의 격투기 선수도, 용사, 영웅 대마법사도, 모두 동일한 출발선에 다시 서게 된다는 뜻이다.

"어떻게 된 거냐? 나의 마법이 움직이지 않다니…."

"거 조용히 좀 하쇼. 시끄러워서."

"뭐라고? 용병 나부랭이가 감히!"

마법사의 혼잣말에 옆의 용병이 응수하자, 난데없이 지구 출신이 아닌 듯한 두 사람의 언쟁이 시작되었다.

"그렇소. 이미 망자가 되어버린 우리에게 왕이니 귀족이니 뭐가 중요하단 말이오."

"망자라니?"

"잘나신 나리께선 모르는 것 같은데, 이곳이 바로 헬헤임이요!"

가죽갑옷을 입은 우락부락한 청년이 양팔을 피며 소리쳤다.

"생전에 쌓아온 죗값에 따라 발할라로 갈지 지옥으로 보내질지 심판을 받는 장소겠지. 내가 보기에 댁은 후자일 것 같소만!"

"큭, 무슨…!"

띠링!

[시험이 곧 시작됩니다! 전투를 준비하세요!]

"이것 보시오! 곧 발할라의 문을 여는 신성한 시험이 시작된다고 하지 않소!"

메시지가 떠오르는 즉시 용병 청년은 양손을 겹치며 무어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기독교에서 성호를 긋는 것과 비슷한 의식인 듯했다.

하지만 피넨스는 앞으로 일어날 일이 신성함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남을 짓밟고 올라서는 무자비함뿐이니까.

'이제 곧 들어간다…!'

부우우우- 거대한 함선은 경적을 울리며 하늘 한가운데 거미줄처럼 일그러진 빛무리를 향해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 세상의 하늘에 산재한 '균열'들 중 하나.

직접 들어가 보기 전까진 그 안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렇게 균열로 빨려 들어간 배는 열 명의 인간을 태운 채 하늘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 * *

[차원의 균열에 입장하였습니다!]

피넨스는 가만히 주위를 살폈다.

배가 사라진 대신 드넓은 평원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렇다, 자신을 포함한 10명의 사람들은 지금 아무것도 없는 평원 위에 서 있었다.

차원의 균열이란 어딘가의 차원이 소멸한 흔적이라는 설정이었다.

그대로라면 이 평원 또한 멸망하기 전의 어느 평화롭던 차원의 풍경이었으리라.

마치 한때의 지구처럼.

[튜토리얼 : 첫 번째 전투!]

-하늘을 항해하다보면 당신은 필연적으로 '균열'에 진입하게 될 겁니다. 균열이란 한마디로 다른 차원이 붕괴한 흔적! 그 안에 진귀한 보물이 숨겨져 있을지, 무시무시한 적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누구도 모르죠.

-이번엔 운이 나빴네요! 당신의 함선은 균열 안에서 흉악한 고블린 떼를 맞닥뜨리고 말았습니다! 행운을… 빕니다.

(승리조건 1 : 최후의 생존자가 될 것)

(승리조건 2 : 적들을 전멸시켜라!)

캬르륵! 캬르륵!

스테이지가 시작되자마자 사방에서 고블린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수는 약 서른.

순식간에 일행을 둘러싼 고블린들을 바라보는 피넨스의 머릿속에 1회차 플레이의 기억이 스쳐갔다.

'역시 이렇게 나오는군.'

튜토리얼 전투는 여러 번 재시도해 보았다.

클리어 목표는 두 가지 승리조건 중 하나를 만족시키는 것.

겉보기엔 플레이어에게 선택권을 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완전히 다르다.

'두 번째는 함정이다.'

고블린.

어린아이만한 몸집을 지닌 RPG류 게임의 최약체로 유명한 몬스터지만, 이 세상에 막 넘어온 플레이어들에게 그 작은 괴물들은 초록색 악마와도 같다.

제대로 된 살의를 받아 본 적도 없는 현대의 인간들은 직접 살인을 경험해 본 녀석들의 상대가 될 수 없으니까.

이능을 다루는 이세계 출신들이 몇몇 섞여 있다지만, 그들도 본래의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다.

그런 오합지졸 열 명이서 서른 가량의 고블린을 상대로 승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올바른 선택지는 첫 번째겠지.'

일반적인 방법으론 클리어가 불가능한 튜토리얼.

약 10번의 시도 끝에 제대로 된 공략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도망만 다니다가, 마지막 순간 고블린과 싸우는 중인 아군을 기습해 죽이는 게 유일한 방법이라니.

그 당시엔 게임 제작자의 악의에 쓴웃음을 흘렸지만, 게임이 현실이 되어버린 지금은 조금의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살인….'

내면에 퍼져나가던 동요의 파문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하루 동안 너무 많은 감정을 처리하느라 과부하라도 걸렸는지, 평소보다 감정이 식는 속도가 느려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다.'

후우, 심호흡을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살아남으려면…!'

감정과 본능은 다르다.

곤충, 심지어 미생물조차도 번식과 생존본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

하물며 피넨스는 감정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니라, 빠르게 식어버리는 것이다.

살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앞으로의 일을 준비하던 때.

'음…?'

피넨스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다가오던 고블린 무리들 사이에 껴있는 한 마리.

한 고블린의 온몸에 핏빛의 오라가 휘감겨 있었다.

'뭐지? 붉은 빛?'

일렁이는 핏빛에 시선을 맞춘 순간.

[군주의 눈동자가 당신의 의지에 답합니다!]

[냉철한 시야로 적들의 위험요소를 간파했습니다!]

뇌리로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블린 대장]

-교묘히 숨어 무리를 이끌고 있다. 대상을 쓰러뜨리면 무리를 잠시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

-겉모습과 신체능력은 일반 고블린과 다르지 않아 고블린의 습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대장을 쉽게 구별해 낼 수 없다.

'…이런 게 있었던가?'

고블린 대장의 존재도, 황금빛 광휘도, 1회차 플레이에선 전혀 등장하지 않았던 정보였다.

피넨스는 방금 떠올렸던 생각의 과정을 되짚었다.

심호흡을 하며 동요를 가라앉히는 찰나, 핏빛의 오오라가 자신의 의지에 답하듯 빛을 내뿜었다.

그렇다면 오오라의 의미란.

'철의 군주의 능력.'

군주는 평정 속에서 세상의 이치를 꿰뚫어 본다고 한다.

피넨스 블레디안의 눈동자가 고블린 무리의 취약점을 꿰뚫어 보았다는 것이다.

'이 빛은 나만 볼 수 있는 것 같다.'

슬쩍 주위를 살펴본 결과 한 가지 사실을 더 알게 되었다.

저토록 짙은 핏빛이 일렁이고 있는데도 사람들의 시선은 무작위의 고블린에게 맞춰져 있었다.

"싸우라고…? 우리가…?"

"으으으…."

물론 대개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제대로 고개를 들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피넨스는 재빨리 아군의 전력을 분석해 봤다.

지구인 8명, 이세계인 2명이었지만, 자신과 이세계 용병을 제외한 모두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하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늙은 마법사도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부턴 패닉에 빠졌으니, 처음으로 생명의 위기를 느낀 지구인들의 상태는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불리하다. 많이.'

확산되는 공포는 인간의 의지를 좀먹는다.

영악한 고블린들 또한 인간들의 의지가 가장 약해질 때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이대론 시간이 지날수록 아군의 승산은 희미해진다.

"새로운 세상에선 네 진짜를 다 사용해야 할 거야." 

이 순간 누나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이유는 왜일까?

[죽은 횟수 : 1053]

다시, 1회차 종료 시점의 통계창이 기억의 수면 위로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 조금이라도 안일한 마음가짐은 그대로 죽음과 이어진다.

살아남고 싶다면 이전의 방식을 버려야만 한다.

주어지는 모든 기회를 잡아내며 아득바득 올라가야만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에피소드 달성률 : 11%]

다행히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은 잔뜩 있었다.

스카이 아일랜즈의 임무들은 어렵고 불가능한 것일수록 높은 보상이 주어진다는 점을 상기하며, 피넨스는 처음의 계획을 변경하기로 결심했다.

'두 번째로 가자.'

우연히 찾아온 행운.

성장할 수 있는 기회!

좀 더 높은 곳으로 향하는 길이 보였음에도 넋 놓고 바라만 보는 것은 바보 아니겠는가.

'나는 전투에서 승리한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잠시나마 내면에 남아있는 김혜성을 전부 버리고, 피넨스 블레디안이란 남자의 의식을 빌리기로 했다.

승리를 위해선 철의 군주가 되어 모두를 이끌어야만 하는 것이다.

"모두 앞을 보아라."

절망으로 점철된 들판에 차가운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위엄 넘치는 군주의 명령은 공포를 뚫고 모두의 고막까지 닿았다.

방금 내 입에서 나온 말인가?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 생소한 말투.

잠시나마 자신이 진짜 피넨스 블레디안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솟아올랐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 둘씩 돌아갔다.

잠시나마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 또한 군주가 지닌 고유 특성들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지금 피넨스의 말투와 손짓 하나하나엔 기품이 넘치고 있었으니.

'저 사람은…?'

'아까부터 조용하던 NPC잖아.'

딱 보기에도 피넨스의 복장은 특이했다.

누구도 그가 지구에서 넘어온 현대인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처음부터 특이한 로브를 입고 있었으니 용병과 마법사와 같은 종류의 이질적인 존재라 여기는 게 당연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마법사 노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지구인들을 평민이라 무시하던 그도 좌중을 압도하는 피넨스의 분위기 앞에선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너희보단 조금 더 알고 있는 사람이지."

거짓말은 아니었다.

한 번 스카이 아일랜즈의 꼭대기에 올라본 경험도 있었고, 군주의 눈으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도 있었으니.

"단 한 번만 설명하겠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것도 오로지 자신뿐이리라.

"이 세계는 꿈도 환상도 아니며."

곧 모두의 시선이 한 군데로 모였고.

"게임도, 가상현실도 아니다."

"…!"

몇몇 인간들이 놀란 듯 흠칫거렸다.

NPC처럼 생긴 사내의 입에서 지구의 단어가 튀어나오리라곤 예상 못했기 때문이었다.

"현실은 보는 그대로. 죽음을 앞둔 상황이지."

이제 모두는 숨죽인 채 피넨스의 말만을 경청하고 있었다.

"한 가지 약속하마. 내 말을 따르면 절반 정도는 살 수 있다."

"...."

신기했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 목소리엔 어떻게 믿음이 실리는 걸까?

사실 이유 따윈 필요 없다.

군주가 부하를 이끄는 데는 구구절절한 설명이 뒤따르지 않은 법이니.

"그러니, 살길 원한다면 내 말을 따라라."

절망으로 뒤덮인 들판에 조그만 희망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절반의 생존자 (2)

캬오오! 고블린들의 울음소리가 험악해졌다.

몬스터들은 기세에 민감하다.

인간들이 공포에 잡아먹히기만을 기다리던 그들의 입장에선 분위기가 변해가는 게 달가울 리 없었다.

움찔거리는 인간들을 뒤로하고, 피넨스는 한 발짝 앞으로 걸어 나갔다.

"무기를."

옆쪽의 용병에게 손을 뻗어 검을 건네받았다.

그 동작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아무도 어색하게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검을 넘겨준 용병 자신조차도.

"남는 무기는 더 없나?"

"검 하나랑 투척용 단검이 5자루 있소…."

"다 같이 싸우려면 단검은 골고루 나눠주는 게 좋겠군."

"…그러지요."

이번에도 용병은 순순히 부탁을 들어 주었다.

아까 중얼거린 대로 발할라로 가기 위한 시험이라 여기는 걸까? 어찌됐든 협조적인 태도는 잘 된 일이었다.

장검 2자루, 단검 5자루, 거기에 마법사가 지닌 지팡이를 합하면 아군의 무기는 8개.

그렇게 10명 중 2명을 제외한 일행은 기본적인 무장를 지닐 수 있었다.

'여자들을 제외했나.'

힐끔 뒤를 살핀 피넨스는 무장을 갖추지 못한 자들의 공통점을 찾아냈다.

둘 다 여자.

단검을 들고 있는 자들 중에도 여자가 한 명 있긴 했지만, 그녀는 남자가 한 명 모자란 탓에 어쩔 수 없이 떠밀려 선택된 듯했다.

'하긴, 그게 이성적인 판단이었겠지.'

법이나 사회적 통념이 약자를 보해 주던 세상의 상식으론 힘이 약한 여성을 전투인원에서 제외하는 게 합리적이겠지만…. 이곳은 상식은 모두가 알던 대로가 아니다.

[힘 1] [기교 1] [내구 1] [마력 1]

차원의 바다로 넘어오는 순간 모두는 동일 출발선상에 놓인다.

약간의 격차는 있겠지만, 평균적인 전투력은 다들 비슷해진다는 이야기다.

스스로가 강해지지 못한다면 앞으로 살아남기는 점점 힘들어질 테니, 전투에서 열외 된 2명은 특혜를 누리는 게 아니라 '첫 전투'라는 경험의 기회를 박탈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시 빨리 이 세계의 법칙을 이해하는 게 유리할 텐데.

…피넨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쓸데없는 생각을 접었다.

당장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도 급급한 상황에 남들의 사정까지 생각해 줄 여유는 없겠지.

"..."

쿵, 쿵. 가슴 근처에서 잔잔한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살면서 경험해 본 가장 큰 심장박동.

하지만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니다.

원래부터 앓던 정신적인 특질이 끊임없이 자신을 강제적인 평정으로 이끌어 주는 덕분이다.

'…!'

바로 그 때, 아까와 같은 알 수 없는 현상이 또 벌어졌다.

화아악! 갑자기 용병의 전신에서 광휘가 피어오른 것이다.

이번의 광휘는 핏빛의 일렁임이 아니라.

'황금빛…?'

[중급 용병 베이단]

-차원을 넘어오며 모든 힘을 잃어버린 상태.

-몬스터를 상대할 때의 기본적인 전략과, 전투의 감각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튜토리얼 전투를 발할라로 가기 위한 시험이라 착각하는 중. 희생과 헌신은 그 스스로가 원하는 바이다.

피넨스는 빠르게 황금빛 메시지를 읽었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용병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광휘 또한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 틀림없었다.

고블린과 용병.

핏빛과 황금빛이 같은 시야에 잡히는 순간 피넨스의 사고가 번쩍였다.

"저것이 놈들의 대장이다."

피넨스는 검으로 한 곳을 가리켰고.

다시 용병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베이단."

"…!"

"네 선택을 지켜보지."

용병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짓던 것도 잠시.

"그렇군… 기꺼이."

황금빛 섬광이 적진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의 돌발적인 움직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키륵….

한 고블린의 입에서 힘없는 단말마가 흘러나온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아군도, 적군도 인식이 따라오지 못해 멍하니 눈만 깜빡거렸다.

상황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한차례의 움직임이 끝난 뒤였다.

힘과 속도가 초기화된 세상에서도 용병이 쌓아온 전투감각은 쉬이 무시할 것이 아니었다.

용병의 검은 정확히 고블린 대장의 가슴을 관통했고.

그와 동시, 고블린들의 병장기들 또한 그의 온몸을 고슴도치처럼 꿰뚫고 있었다.

주르륵-

난자당한 한 남자의 전신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발할…라로…."

큭… 큭. 용병의 입가에서 옅은 웃음이 흐르는 순간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털썩.

심장이 뚫린 고블린이 먼저 쓰러졌고.

파칭!

이어서 용병이 산산이 부서졌다.

한때 인간의 몸이었던 형체는 수백의 폴리곤 조각이 되어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렸다.

피넨스가 수도 없이 보았고, 또 직접 겪었던 형태의 죽음.

차원의 균열 안에서 목숨을 잃은 자는 시체도, 영혼도 남지 않는다.

"...."

붉은색과 황금색. 두 종류의 광휘가 모두 시들었다.

캬악! 캬악?

대장을 잃은 고블린들은 당황스런 울음소리를 내는 와중에도 인간들 몇몇은 아직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생생히 움직이던 자의 육신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은 단순한 죽음보다 더 충격적인 광경이리라.

정신력이 약한 녀석들은 당장 한 발짝 움직이기도 힘들겠지.

"적들은 통제를 잃었다."

발이 떼어지지 않는 자들을 움직이는 건 군주의 몫이리라.

피넨스는 전방에서 검을 들고 소리쳤다.

고블린들이 가장 약해진 이 순간을 잡아내는 것이 승리로 향하는 유일한 길!

"지금이다, 모두 공격하라!"

검을 겨누며 직접 전장으로 달려 나갔다.

기적이라 불릴 만한 일이다.

오늘 처음으로 생사의 경계를 오가는 싸움을 겪은 인간들이 공포를 떨치고 적들에게 돌격할 수 있다니.

얼어붙은 자들의 발을 저절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 또한 군주로서의 능력일까?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아니면 정체모를 남자를 따르는 것만이 유일한 동아줄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절망에서 희망을 이끌어 낸 유일한 존재.

피넨스의 한 마디 한 마디엔 알 수 없는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담겨 있었다.

"이 X발 새끼들!"

"죽어! 죽어! 개자식들아!"

시작은 어려웠지만 그 다음은 비교적 수월했다.

촤아악! 녹색 피가 허공을 수놓기 시작하자 전장에 어려 있던 공포는 광기로 변화했다.

상처가 늘어가도 미친 듯이 적을 죽이는 것에만 집중할 뿐.

누군가는 단검을 버리고 죽은 고블린의 몽둥이를 들어 붕 붕 휘두르기도 했다.

이제 전장에서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피넨스 한 명 뿐이었다.

'아직도 아슬아슬하다.'

피넨스는 냉정하게 전황을 파악했다.

현대의 인간들은 목숨을 걸고 싸울 일이 없다.

[힘 1]

게다가 대부분의 남자들은 이쪽 차원으로 넘어오는 동시 본래 지니던 근력조차 잃어버렸으리라.

그런 초짜들은 혼란에 빠진 적들을 청소하는 것도 쉽지 않아서, 고블린들의 눈먼 공격에 아군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커헉…!"

인간들의 연약한 피부 위에 창과 화살이 박히고.

촤라라락!

그들의 신체는 조금 전의 용병처럼 깨진 조각상이 되어 무너져 내린다.

'최대한 피해를 줄이려면…!'

화아악!

피넨스의 시야 내에 핏빛과 황금빛 불꽃이 동시에 피어올랐다.

핏빛은 석궁을 들고 있는 고블린.

황금빛은 그 고블린을 등진 채 미친 듯 무기를 휘두르고 있는 한 명의 여자!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피넨스가 여자의 목덜미를 잡고 확 끌어당기는 찰나.

쐐액! 화살 한 발이 그녀의 눈썹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

눈물이 가득한 여자의 눈썹이 크게 올라갔다.

그녀의 눈동자엔 광기로 물든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무표정한 남자의 얼굴이 비추고 있었다.

"고… 고맙습니…."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눌 틈은 없다.

피넨스는 힘껏 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여자의 뺨을 스치며 지나간 검은 그녀의 머리카락 몇 올을 가르고 뒤쪽에서 기습해 오던 또 한 마리 고블린의 머리를 관통했다.

촤아악!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고블린의 체액이 여자의 머리 위로 쏟아졌지만, 그녀는 지금 그 냄새를 인지할 정신조차 없는 듯했다.

"시야가 좁군."

"...."

"뒤를 조심해라."

짧은 충고를 남긴 피넨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촤르르륵!

어디선가 다시 인간의 몸이 조각이 되어 흩어져가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전장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선 자신이 지닌 능력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크악! 캬아악!

사방에서 괴물과 인간의 비명소리가 뒤섞였다.

한 명을 제외한 모두는 자신이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눈앞의 적을 없애기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고블린과 싸운 시간은 약 10분이었지만, 감각이 맛이 가버린 모두에겐 그 시간이 찰나처럼, 혹은 끝나지 않을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광기로 물들었던 들판에도 고요가 찾아왔다.

고블린들이 모두 쓰러졌음에도 살아남은 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승리의 함성을 지르는 일도 없었다.

그저 헉헉 거리는 숨소리만 내뱉을 뿐.

그 순간이었다.

띠링!

[전투가 종료되었습니다!]

[세상에, 적의 전멸이라니… 다크호스들의 등장일까요? 당신들의 앞날이 기대가 됩니다!]

시야 상단의 홀로그램에서 문장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모든 생존자들에게 100C의 크레딧이 주어집니다!]

[크레딧은 그저 진리! 뭐든 구매할 수 있는 이 세상의 화폐지요. 사용방법은 천천히 직접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막 튜토리얼이 끝난지라 메시지는 평소보다 더 수다스러웠다.

[배에 부유석 100Kg가 축적되었습니다!]

[부유석은 함선이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기 위해 필요한 연료입니다. 아참, 연료가 다 떨어지면 어떻게 될지는… 말 안 해도 아시죠?]

[이처럼 '균열'에서는 플레이어들에게 필요한 크레딧과 부유석을 얻을 수 있으니 꼭 기억하세요!]

피넨스는 시야에 어른거리는 문장들을 한쪽으로 밀어 치워버렸다.

이미 한 번 들었던 설명들.

스카이 아일랜즈의 꼭대기에 올랐던 몸이니 웬만한 지식들은 다 알고 있다.

지금 자신이 기다리는 메시지는 튜토리얼에 관한 설명이 아니라, 다음에 이어질 보상의 내용이었다.

[튜토리얼 종료!]

[그럼 당신들의 앞길에 행운이 따르길….]

하늘을 올려다보던 모두의 고개가 본인의 전방으로 돌아갔다.

피넨스 역시 눈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어지는 개별 업적보상은 본인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었다.

[첫 전투에서 당신은 무사히 살아남는데 그치지 않고 적들을 전멸시켰습니다! 그 대담함에 선물을 보냅니다!]

[업적 달성 : 무모한 뉴비]

[보너스 스탯 +1]

[당신은 싸움조차 모르는 인간들을 자발적으로 움직이도록 이끌었습니다! 벌써부터 사령관의 자질이 보입니다!]

[업적 달성 : 오합지졸의 지휘관]

[크레딧 +600C]

[기여도란 단순히 많은 적을 처치하는 것이 아니지요. 당신은 평균적인 아군의 10배 이상을 기여했습니다!]

[업적 달성 : 원 맨 캐리]

[크레딧 +300C]

메시지의 파도가 모두 지나가는 데는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업적을 하나도 달성하지 못했던 1회차 플레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큰 보상이었다.

초반에 아주 유용하게 쓰이는 크레딧만 무려 10배, 보너스로 더 중요한 스탯 포인트 하나까지 얻었으니 말이다.

'이제 시작이군.'

이전보다 훨씬 나은 시작점에 섰음에도 피넨스는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튜토리얼을 겪은 것만으로 이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 장소인지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세상에선 네 진짜를 다 사용해야 할 거야."

[죽은 횟수 : 1053]

전투 도중에 들려왔던 누나의 목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다.

1회차에서 겪었던 천여 번의 죽음들도 자꾸만 눈앞을 스쳐갔다.

여기서 만족한다면 안일하던 과거와 다를 바가 없겠지.

피넨스는 방금 전의 전투를 복기해 봤다.

보지 못한 것은 없었는지, 미숙한 탓에 더 나은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은 아닌지.

"…!"

부우우우-.

배의 고동이 피넨스를 상념 밖으로 이끌었다.

튜토리얼이 끝나고 '균열'이 사라지자 자신을 포함한 일행은 어느새 다시 하늘을 나는 배의 갑판에 앉아 있었다.

생존자들은 여전히 다들 아무 말도 없었다.

몇몇은 피범벅이 되어 구역질을 하고 있었고, 또 몇몇은 그저 이쪽을 바라보는 중.

남들이 모르던 정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자신이 뭐라도 말하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나까지 합해서 다섯 명밖에 안 남았군.'

피넨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입을 열거란 모두의 예상과 달리 배의 가장자리에 서서, 가만히 드넓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층층이 쌓인 구름 너머는 너무도 아름다운 지옥.

이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목숨을 버릴 각오로 자신을 채찍질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언젠가 진짜 목숨을 잃어버리고 말 테니까.

피넨스 블레디안 (1)

끝없이 펼쳐진 하늘.

지상도, 우주도 보이지 않는 어딘가의 배 위에선 막 튜토리얼 전투를 마친 5명의 사람들이 구름 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허억, 허억…! 내 불꽃이 돌아왔다!"

늙은 마법사의 목소리가 배 위의 적막을 깼다.

클리어 스탯 포인트로 마력을 1에서 2로 상승시킨 걸까?

마법의 위력은 다소 떨어질 게 분명한데, 자신의 힘을 되찾았다는 사실만으로 제법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보쇼, 선생님. 그쪽은 뭔가 알고 있는 것 아닙니까?"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린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피넨스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말을 건 것은 양아치와 깡패 중간쯤 되어 보이는 인상의 남자였다.

"날 부른 건가?"

"다들 당신 정체를 궁금해 하는 것 같은데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도 말좀…. 웃…!"

양아치는 숨을 삼켰다.

동요없는 남자의 시선을 받아내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 모두를 이끌며 싸울 때와는 다른 종류의 차가운 눈동자였다.

"무례하군."

"…!"

"전투 도중 네 녀석을 구해준 게 누구인지 기억해라."

순간, 피넨스는 스스로의 말투에, 그리고 사고방식에 놀랐다.

이쪽 세계에 오기 전이었다면 양아치의 말을 맞받아치기는커녕, 화를 피하기 위해 눈도 마주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전투의 여파 때문인가? 아니면 이 캐릭터의 설정에 잡아먹혀 버린 것인가?

어떻게 이런 말을 태어날 때부터 써오던 것처럼 자연스레 구사하고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하… 그, 그렇지. 감사를 깜빡했구먼요."

피넨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양아치는 재빨리 꼬리를 접었다.

쉽게 물러서는 것을 보면, 처음의 무례는 그저 간을 보려던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작은 소란이 끝났을 땐 모두가 가만히 목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바람 소리만이 들려오는 가운데 피넨스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생존자들의 면면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버릇없던 양아치.

늙은 마법사.

교복이 다 찢어진 남학생.

아직도 녹색 액체를 묻힌 채 손을 덜덜 떨고 있는 여자.

그리고 자신까지, 총 다섯 명이 튜토리얼에서 살아남은 모양이었다.

"하긴, 다들 궁금하겠군."

먼저 나섰던 것은 자신이니 몇 가지를 설명해 둬야 귀찮지 않겠지.

피넨스는 나머지 넷에게 이 세계의 기본적인 지식들을 조금 알려 주기로 했다.

"내가 너희를 이 세계로 끌고 왔냐는 물음에 답하자면, 그렇지 않아. 나 또한 영문을 모른 채 끌려왔으니까."

"...."

"그럼에도 너희보다 많은 걸 아는 이유는… 남들과 다른 눈썰미 덕분이라 해야겠군."

굳이 '테스트 플레이'나 '철의 군주'같은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당분간은 동료로 있겠지만, 언제 적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자들에게 많은 걸 알려줄 필요는 없으니.

"일그러진 공간의 빛을 통과하는 순간 세상이 갑자기 바뀌었던 걸 기억하나?"

몇몇 이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늘의 풍경이 갑자기 들판으로 변했던 것은 모두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투가 끝나는 동시 하늘을 나는 배 위로 되돌아온 것까지.

"그것이 '차원의 균열'이라 불리는 것이다. 좀 전에도 우리는 다른 차원에 진입했다가 다시 빠져나온 거야."

"다른 차원이라고요…?"

교복 입은 소년의 얼빠진 듯한 중얼거림에, 피넨스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정확히는 차원의 파편이다. 차원이 파괴되며 남겨진 흔적이지. 이 세계엔 비슷한 공간이 셀 수도 없이 많이 존재한다. 운이 좋으면 방금처럼 안에서 '크레딧'이나 '부유석'등의 부산물을 얻을 수도 있다만…. 운이 나쁘면 영문도 모른 채 죽는다."

"...."

"요약하자면, 균열은 랜덤 스테이지, 부산물들은 클리어 보상이라 할 수 있겠군."

대부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

하지만 분위기상 되묻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실,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별 상관없다.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설정도 아니었고, 오래 살아남는다면 자연스레 알게 될 정보이기도 하니까.

"저기요,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뒤쪽의 여자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용병에게 단검을 얻은 덕분에 살아난 일행 내의 유일한 여성이었다.

"앞으로도 방금 같은 싸움을 해야 하나요?"

그것은 당장 모두가 궁금한 질문.

절반이 사망한 튜토리얼과 비슷한 일을 몇 번만 더 겪어도 살아날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낮아진다.

앞으로의 미래가 걱정되는 것은 당연했다.

피넨스는 잠시 기억을 되짚어보고 말했다.

"초반 구간엔 튜토리얼처럼 악랄한 건 몇 개 없지."

"네…?"

"당분간은 괜찮을 거란 말이다."

말투는 안심하라는 기색이었지만, 정작 그 말을 듣는 모두는 결코 안심할 수 없었다.

당분간? 그러면 언젠간 큰일 난다는 거 아닌가? 그게 언제인데?

모두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피넨스는 일행을 이끌고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따라와라. 몇 가지를 더 알려주지."

"…."

갑판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배 안의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투박한 외견과 달리, 안쪽의 공간은 역사 깊은 유럽의 호텔처럼 고급지면서도 깔끔한 디자인이었다.

"여기가 선실이고, 저쪽은 동력장치."

피넨스는 다양한 장소들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짧은 설명을 보탰다.

마치 오랫동안 이 세계에서 지내온 선원처럼, 그는 배의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피넨스를 졸졸 따라가던 일행은 원형으로 이루어진 로비에 멈춰 섰다.

"여기는 배를 통제하는 기관이다."

로비엔 테이블인지, 잘린 기둥인지 모를 구조물 하나가 덩그러니 솟아 있었다.

피넨스가 그 구조물 위에 손을 올린 순간.

우우웅- 우우웅-.

음각된 문양이 빛나고 일어나며 3차원 홀로그램이 모두의 앞에 펼쳐졌다.

그것은 스카이 아일랜즈의 극히 일부 구역의 축소판.

"이건…."

"하늘지도다."

모두의 입이 벌어졌다.

중세보다 조금 나은 디자인의 배는 그 어떤 현대의 함선보다도 최첨단 시스템을 지니고 있었다.

설명이 없어도 모두는 한눈에 이것이 '지도'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3차원 지도 위엔 현재 위치, 앞으로의 항해경로, 마지막으로 함선의 최종 목적지가 푸르스름한 화살표로 이어져 있었다.

"함부로 건드리지 마."

"앗…!"

홀로그램에 손을 뻗던 여자가 움찔거리며 손을 뺐다.

"자동항해중이다. 잘못 건드려서 목적지를 잃으면 배가 통째로 하늘의 망령이 되어버려."

"죄, 죄송해요… 잘 몰라서…."

"모르면 가만히 있어라."

"네…."

피넨스는 지도와 계기판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첫 번째 섬에 도착하기까지 앞으로 340시간.

2주 하고도 조금 더.

모바일 게임 속에선 잠깐 만에도 며칠이 휙휙 지나갔지만, 실제로는 제법 오랫동안 배 안에서 시간을 보내야만 하리라.

"도착하는데 2주일이라면, 꽤 걸리겠군."

"그럼 지구로 돌아갈 수 있나요?"

"아니."

남학생의 물음에 피넨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 때부터가 진짜 지옥의 시작이겠지."

"...."

"살고 싶다면 원래 세상의 기억은 잊어버리는 게 좋아."

묘한 분위기 속에서 기관실을 빠져나온 피넨스는 일행에게 나머지 설비들도 설명해 주었다.

배 안의 환경은 생각보다 쾌적했다.

선실은 물론, 간단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휴게실, 몸을 풀 수 있는 수련장까지 구비되어 있었으니까.

대부분 시설들은 이세계 마법사를 제외한 모두에게 익숙한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크레딧의 사용법을 알려주지."

선실과 휴게실 사이의 공간.

피넨스는 원형 로비 한가운데 우뚝 놓인 여신의 조각상을 향해 다가갔다.

그것은 딱 봐도 평범한 조각상이 아니었다.

아니, 조각상 자체는 평범하지만 그 주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평범하지 않았다.

여신의 몸을 어루만지듯 맴도는 은은한 초록색 도깨비불.

그 기운을 느낀 마법사 노인이 놀라 소리쳤다.

"설마 정령인가…?!"

"맞아. 하급정령이다."

"오오… 정령을 이 눈으로 직접 보다니…."

"여기선 흔하다."

정령은 스카이 아일랜즈에서도 가장 핵심을 담당하는 시스템이었다.

"이번엔 말로 설명하기보단 직접 보여주는 게 낫겠군."

피넨스가 앞으로 손을 뻗자 은은한 초록빛 불빛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그의 손을 휘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크레딧 10C를 사용해 '원기 회복 스테이크'를 구매하였습니다!] (잔량 : 990C)

"뭐야…."

"어엇?"

"우와…!"

다양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허공에서 접시 째로 음식이 생겨나는 광경은 그야말로 마술 같았다.

크레딧을 사용해 정령과 거래를 한 것뿐이지만.

[원기 회복 스테이크]

-몸에 축척된 피로를 빠르게 회복시킨다.

-먹으면 하루 종일 배고프지 않을 것 같다.

"정령은 음식만 파는 게 아니다. 전투에 도움이 될 만한 도구나 약품, 장비, 혹은 스탯이나 스킬등의 추상적인 것까지 팔고 있지."

피넨스는 설명은 더 이상 모두의 귀엔 잘 들어오지 않았다.

치이이익!

막 구워지는 철판 위의 스테이크가 풍기는 향기로운 냄새는 후각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군침을 줄줄 흘리는 누군가의 시선을 눈치챈 그는 접시를 내밀며 물었다.

"먹어 보겠나?"

"…그래도 됩니까?"

"허락한다."

그 말에 양아치는 조심스럽게 접시 위의 포크를 집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어, 뭐야…?"

양아치는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이고 말았다.

빛으로 이루어진 홀로그램을 만지는 것처럼. 자신의 손이 접시를 그대로 통과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어리둥절한 가운데 피넨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봤다시피, 자신의 크레딧은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어. 그게 정령의 규칙이지."

"...."

"본인의 것은 스스로 챙기라는 말이다."

잠시 후, 양아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신이 농락당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한번 데인 게 있어서 뭐라 불평하지는 않았지만.

"난 이제 쉬러 가지."

방의 갯수는 총 10개. 5명이서 쓰기엔 차고 넘치는 숫자였다.

크레딧에 관한 설명을 마지막으로 피넨스는 선실을 향해 걸어가더니.

"너희도 충분히 쉬어 둬라. 오늘은 더 이상 아무 일도 없을 테니."

덜컹. 가장 안쪽의 방문을 닫고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수 시간이 지나도 로비로 돌아오지 않았다.

* * *

좁은 선실에도 기본적인 시설들은 전부 갖추어져 있었다.

식사를 하고, 샤워로 몸을 씻어낸 뒤, 여분의 옷을 걸친 피넨스는 오늘 있었던 일을 천천히 정리해 보기 시작했다.

'꿈이 아니겠지.'

게임 속 세상에 들어왔단 사실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태연한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까닭은 강제로 마음의 평정이 유지되는 덕분이다.

아니, 사실 이젠 평정을 유지하는 것도 자신이 없어졌다.

피넨스는 가슴에 손을 대봤다.

두근, 두근, 그 때를 떠올릴 때마다 한차례씩 심장이 거세게 뛰어오른다.

처음 느껴보는 크기의 감정은 너무도 생소한 것이었다.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군.'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또 있었다.

'넌 누구냐.'

양손을 벽에 올린 채 뚫어져라 전신거울을 바라보았다.

반대편엔 낯선 남자가 똑같은 눈동자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철의 군주, 피넨스 블레디안.

단숨에 아군의 사기를 고취시키는 카리스마, 좌중을 압도하는 분위기, 그리고 고아한 특유의 말투는 아마도 그가 지닌 군주 본연의 힘이리라.

다른 차원으로 흘러들어온 것까진 그렇다 쳐도, 왜 자신의 모습만 다르게 변해버렸는지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후우… 어렵군."

고민해도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아 피넨스는 침대에 주저앉았다.

누나라면 제대로 된 답을 줄 수 있을까?

누나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봤던 몇 주 전의 기억이 몇 년쯤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 동생아, 꼭대기에서 다시 보자꾸나. 아마 그때쯤이면 모든 걸 말해줄 수 있겠지.

스마트폰이 없는 지금도 누나가 보냈던 메시지는 아직까지도 선명히 기억났다.

기억력도 부쩍 좋아진 것 같다. 아마 그것 또한 피넨스 블레디안의 능력 중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하, 꼭대기라니."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첫 번째 섬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 거란 확신도 없는데.

나 한 몸 살아가기도 바쁜 지금은 꼭대기 섬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아쉽지만 당분간 누나와 만날 수 있다는 기대는 접어두자.

운이 좋아 오래 살아남는다면 언젠가 만날 날이 오겠지.

'일단 쉬자.'

피넨스는 선실의 침대에 몸을 눕혔다.

악몽이라면 깨어날 것이고, 현실이라면 충분히 몸을 쉬어 두어야 할 테니까.

* * *

꿈을 꿨다.

같은 배경의 하늘.

오늘은 어째선지 등에 검이 꽂혀있지 않았다.

또한, 언제나 추락하던 것과 달리 지금의 자신은 지면을 밟고 서있다.

문득 의문에 휩싸였다.

사방을 둘러봐도 하늘의 풍경만이 보인다면 자신이 밟고 선 땅은 대체 무엇인가?

확실히 알기 위해 낭떠러지 가까이로 다가가던 순간.

푸욱!

시퍼런 검날이 배를 뚫고 튀어나왔다.

언제나 꿈속에서 자신의 몸에 박혀 있던 그 검이었다.

뒤에 누군가 있다…! 대체 누가?

하지만 피넨스는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푸욱! 푸욱!

연달아 두 자루의 검이 추가로 등에 박혔기 때문이었다.

검날이 상처를 비틀었고. 폐에선 바람이 빠지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크…허…."

어마어마한 고통과 함께 낭떠러지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자신의 몸은 이전처럼 3자루의 검을 꽂은 채 구름 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상처에서 흘리는 피로 시퍼런 검신들을 새빨갛게 물들이면서….

떨어지는 와중 위를 올려다봤다.

세 명의 실루엣이 보인다. 아마도 등을 찌른 녀석들일 것이다.

자세한 얼굴이 안 보여도 대략적인 분위기는 알 수 있다.

큭, 큭큭큭. 한 명은 자신을 구경거리삼아 웃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벌레를 보는 듯한 기색으로 이쪽을 내려다보는 중.

"...."

그리고 마지막, 가장 머리칼이 긴 녀석은 혼자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

세 명의 실루엣을 보는 순간 피넨스는 마음 속의 무언가가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처음 느껴보는 분노.

...

...

벌떡!

피넨스는 솟구치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곧바로 양쪽 손바닥을 펼쳐 보니 꽉 쥔 주먹의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가 있었다.

멍하니 손의 상처를 바라보던 피넨스는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어떻게 된 거냐.'

꿈은 언제나 빠르게 흐릿해진다.

피넨스는 자신의 꿈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직감했지만 그 이상의 것들은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알 수 없었다.

어째선지 자신의 호흡이 거칠고, 몸까지 떨리고 있는지.

자꾸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 뭉치고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꼭대기…."

갑자기 피넨스가 중얼거렸다.

"꼭대기로 가야 돼."

스스로도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혼잣말이었다.

* * *

마음은 곧 잠잠해졌다.

시간이 지나자 피넨스는 스스로 벌인 행동을 믿을 수 없었다..

최면에라도 걸렸나?

살아남는 것도 급급한 지금 왜 꼭대기로 가야 한다고 중얼거린 것인가?

'모르겠군.'

머리를 한 번 비워야 할 것 같아.

생각을 환기할 겸, 피넨스는 방 밖으로 나왔다.

갑판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어두웠다.

이쪽 세계에도 시간이 흘러, 석양이 지고 밤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다들 자고 있나 보군.'

배는 고요하게 새벽의 하늘을 가로질렀다.

가끔씩 촤르륵, 촤르륵, 돌 부딪치는 소리만 들려왔다.

동력장치에 배의 연료인 '부유석'이 쏟아져 내리는 마찰음이리라.

'아니, 전부 자는 건 아닌가.'

원형 로비 옆의 휴게실에서 인기척을 발견한 피넨스가 미간을 좁혔다.

복도에 발걸음소리가 울려 퍼진 다음 순간. 두 남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피넨스 블레디안 (2)

'이 시간까지 깨어있는 건가?'

홀로 휴게실 의자에 앉아있는 여자.

피넨스는 그녀를 슬쩍 곁눈질하며 그대로 갑판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찬바람을 맞으며 머리라도 식히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순간.

"저기…."

가느다란 목소리가 피넨스의 발을 멈춰 세웠다.

마침 동력실로부터 들려오던 부유석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까지 멎어버려 배 안은 어색한 정적으로 가득 채워졌다.

여자의 입이 다시 열린 것은 한참 만이었다.

"아까는 감사했어요."

"…?"

피넨스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25년을 살면서 그런 이야기를 들어 본 건 손에 꼽을 정도였기에 자신을 향해 하는 말이 맞나 싶었다.

아까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인가?

'그렇군.'

선의에 의한 행동은 아니었다.

고블린들에게 맞서기 위해서 아군을 한명이라도 더 구해내는 게 효율적이다.

최선을 위한 전략이 그들에게 구원이 되었을 뿐인 거지.

그렇게 상황을 이해한 작은 끄덕임으로 인사를 대신한 뒤 다시 계단을 오르려했다.

허나, 여자가 말을 건 의도는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기 위한 것만이 아닌 듯했다.

"잠깐만요!"

재차 들려온 목소리.

전보다 조금 더 커진 목소리에 서서히 고개를 돌린 피넨스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그녀의 눈시울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잠깐만 같이 계셔주면 안 되나요?"

"왜지?"

"조금…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건 그저 변명에 불과했다.

그녀가 한밤중에 방에서 빠져나온 이유는 외로움과 두려움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니까.

지금은 곁에 대화할 상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안 될까요…?"

"…그러지."

피넨스는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어차피 바람을 쐬려던 이유도 복잡해진 머리를 완전히 비우기 위해서였다.

잠깐 대화하는 것으로도 같은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굳이 밖으로 나갈 필요는 없으리라.

맞은편의 소파에 몸을 기댔다.

자신에게 다리를 꼬는 습관이 생겼음을 깨닫고 잠시 움찔했다.

여자의 눈엔 그런 피넨스의 몸짓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처럼 느껴졌지만 말이다.

"뭐가 궁금한가?"

"그, 그러니까…."

피넨스에겐 당연히 중요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은 없다.

튜토리얼에선 생존을 위해 힘을 합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의 일행 개개인은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여자가 훗날 자신의 도움이 될지, 적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기에 피넨스는 쓸데없이 엮일 생각은 없었다.

'…!'

그 순간.

다소곳이 앉아있는 여자를 바라보던 피넨스의 눈이 흠칫 떨렸다.

무슨 조화일까? 불안한 듯 입술을 달싹이는 그녀의 온몸은 찬란한 황금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여자는 스스로가 빛에 휩싸여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기색이었다.

이번에도 황금빛 불꽃은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것.

'군주의 눈동자.'

지난 기억을 되짚어 봤다.

고블린들과 사투를 승리로 이끌어 준 것은 '철의 군주'의 능력이었다.

핏빛으로 물든 대장 고블린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튜토리얼 공략법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황금빛으로 타오르는 용병 남자가 고블린 대장을 해치워 주지 않았다면 공략법을 알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겠지.

군주의 눈은 전투의 승패를 좌지우지하는 열쇠와 열쇠구멍 두 가지를 모두 발견한 셈이다.

이후에도 눈동자의 능력 덕분에 자신은 핏빛과 황금빛을 오가며 '결정타를 날리려는 적'과 '죽음의 위기에 처한 아군'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금 진지해진 눈으로 피넨스는 다시 여자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이번엔 튜토리얼에서 그랬듯, 대상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는 메시지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저 황금의 광휘만이 번쩍이고 있을 뿐.

'황금빛이군.'

피넨스는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쓸어내렸다.

전투가 끝난 뒤 같은 능력을 사용해 보려 시도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언제, 어떤 원리로 발동되는지는 알 수 없어도, 한 가지는 추측해 볼 수 있었다.

불꽃의 색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하여.

아마도 붉은색은 경고, 황금색은 기회!

여태까지 겪은 패턴대로라면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 여자가 내겐 기회라는 것인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 순간.

화아아악!

여자의 전신에서 황금빛 불꽃이 더욱 거세가 타올랐다.

마치 불꽃 스스로가 자신의 물음에 답을 한 것처럼.

'…뭐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봤지만 이번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메시지도 역시 떠오르지 않았다.

눈동자가 말하길, 자신은 앞길을 비춰줄 뿐 그 길을 가야 하는 이유는 직접 찾으라 말한다.

선택은 결국 본인의 몫이라는 것.

황금빛 불꽃을 가만히 지켜보는 피넨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 *

여자의 이름은 한소혜.

자신이 편의점 알바를 하던 거리 근처의 주민이었다고 한다.

같은 장소, 같은 배.

방에서 자고 있을 양아치와 고딩도 지구가 멸망하던 순간, 근처에 있던 이들인 걸까?

그녀의 말로 미루어 보면 가까운 위치에 있던 사람들끼리 함께 전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이제 지구의 일은 어찌되든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피넨스 블레디안님이요?"

"그냥 피넨스라고 불러도 상관없어."

"네, 피넨스님!"

'님'이라는 호칭을 붙일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는데, 들어보니 의외로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뭐, 편한 대로 부르는 게 낫겠지.'

둘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소혜의 입에서 나오는 질문은 딱히 이 세계의 생존에 필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사실, 화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인간은 본래 외로움을 타는 동물이다.

그녀가 한밤중 로비의 휴게실에 나와 있던 이유도 홀로 방안에 있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낯선 곳에 떨어진 그녀로서는 대화를 나눌 상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는 것이다.

"여기… 조금 춥네요."

대화가 삼십 분쯤 오갔을 때 소혜가 자신의 몸을 감싸며 중얼거렸다.

"저 그쪽에 앉아도 되나요?"

"상관없다."

피넨스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별로 추위를 타지 않았기에, 자리를 바꾸는 것 정도는 상관없었다.

"아…? 일어서실 필요 없는데?"

"춥다면서? 이쪽에 앉고 싶다는 말 아니었나?"

"아, 마, 맞아요…!"

두세 명이 앉아도 충분한 소파인데… 라는 생각을 덧붙이면서. 횡설수설하던 소혜는 넓은 소파에 파묻히듯 앉았다. 

엉덩이에 느껴지는 따뜻한 감촉에 조금 마음이 풀어졌다.

차갑기 그지없던 남자도 평범한 인간과 다르지 않은 온기를 지니고 있음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지구는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요?"

대답을 바란 물음이 아니었다.

이세계의 남자가 지구의 사정을 알 수도, 신경 쓸 필요도 없으니.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 달리, 피넨스는 그 중얼거림에 답했다.

"사라졌겠지."

잠시 침묵.

소혜가 정적을 깨고 되물었다.

"정말요…?"

"그래."

사실 확실한 정보는 아니다.

수천의 운석이 떨어지던 광경과 간간히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로부터 지구란 차원이 사라졌다고 추론했을 뿐.

하지만 앞으로 살아남기 위해선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이로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쓸데없는 미련은 버려라."

"...."

"이전 세계의 일이나 돌아가는 방법… 그런 걸 생각할 정도로 이곳은 한가하지 않아."

이건 눈앞의 여자 뿐 아니라 본인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이 세계가 무엇인지, 어떻게 누나를 만날 수 있을지, 또 피넨스라는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지금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 스카이 아일랜드의 배경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선 오로지 생존에만 신경 써야 할 것이다.

'황금빛이라.'

피넨스는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소혜가 침을 꿀꺽 삼켰다.

"한소혜라고 했던가?"

"네."

첫인상은 별로 약삭빠르지 않은 여자였다.

그 성격 탓인지, 여자임에도 유일하게 전투에 떠밀려 참전했고, 고블린과 싸우는 와중에도 좀처럼 뒤를 보지 못해 여러 번 죽을 위기에 처했지.

좋게 표현하면 순수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미련하다.

행운이 계속되지 않는 한 그녀는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하리라.

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황금빛…. 그 빛이 기회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약간의 도움을 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짧은 생각을 마친 피넨스가 입을 열었다.

"따라와라.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을 조금 알려주지."

"아, 넷…!"

소혜가 졸졸 뒤따르는 가운데 피넨스는 로비와 복도 사이에 세워진 조각상으로 다가갔다.

평소보다 어두운 한밤중에 조각상을 맴도는 형광빛은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정령.

스카이 아일랜드의 설정에 따르면, 정령은 성스럽거나 신비스러운 장소를 좋아한다고 한다.

'마침 잘 됐군. 다음 균열에 들어가기 전까지 크레딧을 사용해야 했는데.'

정령은 이 세계의 행상인이고, 형체가 존재하지 않는 화폐인 크레딧은 정령과의 유일한 교감 수단이다.

"여태까지 구입한 물건은 있나?"

"아까 스테이크를…."

"이런."

피넨스는 잠시 혀를 찼다.

그래, 아까 설명이 부족했던 모양이군.

그들은 초기자금인 100 크레딧이 얼마나 큰돈인지 모른다.

튜토리얼을 클리어한 후 메시지가 분명 '후한 보상'이라고 말했을 텐데 말이다.

"식료품에는 크레딧을 아끼는 게 좋아. 감자포대는 1크레딧 어치만 구매해도 보름은 먹을 수 있지."

"감자… 만요?"

조금 질린 표정의 소혜에게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내 입장에선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하지만, 너희들은 크레딧을 모으는 게 우선이다."

"…그, 그렇겠네요!"

"어쨌든, 지금 남은 건 90크레딧이란 뜻이겟군."

"맞아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뒤로하고 피넨스는 몇 가지를 더 물어보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특성.

자신의 몸에 깃든 '철의 군주'처럼, 모든 존재는 이 세계에 넘어오는 동시에 특별한 힘을 부여받는다.

자신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주먹구구식으로 성장하는 이들은 결국 생존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네 특성은 뭐지?"

"궁수에요, 새벽의 궁수… 등급은 C급이래요."

소혜는 상태 창을 열어 대답했다.

상태 창의 사용법과, 스탯, 특성의 설명은 튜토리얼에서 언급된 뒤였다.

"등급까지 말해줄 필요는 없다. 너의 모든 패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건 지양해라."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건 아니지."

군주의 눈동자도 남의 상태 창을 엿볼 순 없었기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궁수.

생존자가 혼자뿐이었다면 최악의 직업이겠지만, 파티로서는 나름대로 괜찮은 역할이다.

전방의 전투를 맡아주는 팀원이 있는 궁수는 안전하게 원거리 공격을 날릴 수 있기 때문이다.

등급도, 시작 특성이 D급이면 상위 10퍼센트에 들어가는 정도인데 C급이라니, 아마 운도 좋은 편이겠지.

피넨스는 소혜에게 구매해야 할 장비들의 목록을 알려 주었다.

활과 화살, 갑옷과 나무방패를 구매하고 나니 남은 건 5크레딧 정도였다.

'나쁘지 않군.'

갑옷과 활을 만지작거리는 소혜의 모습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궁수인데 방패가 왜 필요하냐는 의문을 떠올릴 법도 한데. 소혜는 아무런 불평도 없었다.

방패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기보다, 그저 피넨스의 지시를 곧이곧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지만.

어쨌든, 결과가 괜찮다면 과정은 중요하지 않으리라.

"화살을 쏴 봐라."

"여기서요?"

"저쪽, 훈련장에 허수아비가 있을 거야."

활시위를 힘껏 당기는 소혜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거리는 화살촉.

낑낑거리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피넨스는 그녀의 팔을 내리며 물었다.

"스탯 포인트는 사용했나?"

"아뇨, 아직이요."

"힘을 올려 봐라."

초반엔 힘을 올리는 게 최고의 선택지다.

기교는 올려봤자 크게 차이나지 않고, 내구를 올려도 칼이나 창에 맞으면 죽는 건 똑같다.

처음부터 스킬을 지니고 있는 이세계 마법사 같은 존재가 아니라면 힘의 효율을 따라올 스탯은 없었다.

파악!

"어머…!"

허수아비의 몸통 정 중앙에 화살이 박혔다.

꽂히고 나서도 부르르 떨리는 화살대를 보던 소혜가 작은 감탄을 터뜨렸다.

힘을 하나 올렸을 뿐인데 너무도 달라진 자신에 놀란 것이다.

'과연 C급 특성인가.'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피넨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평범한 현대인이 첫 발을 과녁의 정중앙에 맞추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새벽의 궁수라는 특성이 명중률을 보정해 주고 있다는 방증이리라.

이 정도면 기교는 천천히 올려도 되겠군.

"다음엔 몸통보단 머리를 맞추는 게 좋아. 몬스터든 인간이든, 보통 머리가 약점이니까."

"해 볼게요…!"

그렇게 소혜가 혼자만의 연습에 빠진 동안 피넨스는 다시 정령에게로 다가갔다.

당장 여자의 뒷바라지는 이정도면 충분했다.

이번엔 자신의 크레딧을 사용할 차례.

손을 뻗자 정령과의 교감이 시작되며 크레딧으로 구입할 수 있는 물건들의 목록이 시야에 펼쳐졌다.

피넨스 블레디안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