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2

피넨스 블레디안 (3)

하급정령은 가장 기본적인 물건들을 판매한다.

여기서 물건이란 형체를 지니지 않는 것까지 포함한다.

물, 음식, 옷 등의 생필품들이 목록이 가장 먼저 떠올랐지만 그쪽은 당장의 관심이 아니다.

피넨스는 지금 필요한 목록들만 간추려 살펴보았다.

[목록 : 보너스 스탯 +1]

-하급정령에겐 최대 10회까지만 구매할 수 있다.

-구매할 때마다 가격이 100C만큼 상승한다.

(현재 가격 : 500C)

우선 스탯.

500크레딧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아니, 초반의 자원 치곤 상당히 많은 양이었다.

기억하기로 첫 번째 섬에 도착하기 전엔 균열에서 얻을 수 있는 기본보상은 대략 10크레딧.

업적 보상을 제외한다는 가정 하에 하루 종일 균열을 찾아다니며 모을 수 있는 크레딧의 양은 약 50C.

그런 식으로 500 크레딧을 모으려면 꼬박 10일 동안 균열 노가다를 해야 할 테지만, 게임이 아닌 현실의 10일이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스탯은 다른 목록들을 살펴본 뒤에 천천히 구매를 결정해도 충분했다.

[목록 : 각성 (1단계)]

-본인의 특성을 한층 강화할 수 있다.

(가격 : 10000C)

다음 살펴본 목록은 각성.

쉽게 말해, 특성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는 것이며 그 와중 등급이 상승하는 경우도 잦았다.

물론 이미 S급인 '철의 군주'의 등급이 더 오를 가능성은 거의 없을 테지만.

어떤 방식의 업그레이드일지는 각성 전까지 확인할 수 없다.

황금빛, 핏빛 외의 색깔도 생겨날 수도, 원하는 때 사용할 수 있도록 바뀔 수도, 혹은 완전히 새로운 능력이 추가될 가능성도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가격.

피넨스는 1만 크레딧이라는 수치를 확인하는 순간 깊게 고민하지 않고 다음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번엔 장비.'

소혜에게 추천해 준 물건들도 장비였다.

마법이 깃든 아티펙트는 하나에 1000 크레딧이 훌쩍 넘어가기 때문에 고려대상 밖이다.

초반의 유저가 구매할 수 있는 것은 [강철 검], [모험가 갑옷], [견습 활], [전투용 망치]같은 일반장비뿐.

분수에 맞는 물건들을 잘만 고른다면 기본으로 주어지는 100크레딧으로도 충분히 풀 세트를 맞출 수 있다.

초반 구간에 방어구는 중요하다.

재미로 플레이하는 게임이라면 모를까, 한 번 죽으면 끝인 이곳에서 방패와 갑주는 여분의 생명과도 같기 때문이다.

자신의 크레딧으로 구매한 물건은 자신만 누릴 수 있다는 이 세계의 법칙 덕분에 누군가에게 장비를 빼앗길 걱정도 없었다.

'이것도 일단 넘어가지.'

하지만 장비도 최우선의 고려사항은 아니었다.

피넨스는 1000크레딧이라는 거금을 얻었을 때부터 구매하려고 정해둔 것이 있었다.

'당장은 스킬부터 익히는 게 중요하다.'

스카이 아일랜드의 세계관에서 스킬을 획득하는 방식은 두 가지다.

첫째는 스스로 깨우치는 것.

선실에서 자고 있을 마법사 노인이 대표적인 예시지만, 혼자서 무언가를 깨우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인간들은 보다 일반적인 두 번째 방법, 스킬 북의 활용을 더 선호한다.

그 생각은 피넨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장 배울 수 있는 스킬 책들을 살펴보았다.

[면역강화], [초연함], [바람개비], [열기 방출], [일렁임 방패]….

하급 정령에게 구매할 수 있는 스킬 북은 기초마법뿐임에도 대부분 비쌌다.

1000크레딧보다 저렴한 스킬들은 쓸모가 없었고, 조금이라도 유용할 것 같은 스킬 북의 가격은 2~3천 크레딧을 훌쩍 넘어갔다.

스킬이 본격적으로 전투에 활용되는 것은 첫 번째 섬에 도착한 이후. 막 튜토리얼을 마친 플레이어로선 손에 닿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그럼 초반엔 스킬을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게 좋은가?

그렇게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영원의 도서관 입장권]

-도서관에서 단 한권의 책을 펼쳐볼 수 있습니다.

-구매할 때마다 입장료가 2배로 증가합니다.

(가격 : 500C)

'이거로군.'

원하는 물건을 찾아낸 피넨스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사실 이 입장권은 함정이다.

영원의 도서관이란 장소는 말 그대로 수많은 책들을 모아둔 도서관이지만 그곳에서 제대로 된 스킬 북을 얻을 확률은 아주 낮기 때문이다.

경험에 따르면 당첨확률은 5퍼센트 미만.

당첨의 기준을 '그나마 활용할 수는 있는' 스킬로 잡아도 그렇게 낮았으니 크레딧 사용처의 효율을 따지자면 입장권이란 물건은 없다고 치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웠다.

그럼에도 자신이 도서관의 입장권을 구매하려는 이유는 오직 하나.

5퍼센트, 아니, 그 이상의 확률을 뚫고 제대로 된 것을 골라낼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잠깐 혼자 연습하고 있어라."

"네…?"

"다녀올 곳이 있어."

"어디요?"

피넨스는 소혜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파지직!

보다 먼저 눈앞의 공간이 깨져나간 까닭이다.

거미줄같은 푸른빛의 균열.

튜토리얼이 진입할 때 나타났던 것과 비슷하게 생긴 차원의 균열이었다.

놀란 소혜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균열은 순식간에 피넨스의 몸을 집어삼켰다.

* * *

[영원의 도서관에 입장하였습니다!]

[제한시간 내에 하나의 스킬 책을 펼쳐 주세요!]

[그대에게 행운이 깃들기를.]

수많은 책들의 숲.

혹은 책의 미로.

피넨스는 시야가 아득해질 만큼 광활한 도서관을 올려다봤다.

'아무것도 빛나지 않는군.'

'황금빛'이 앞길을 이끌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없진 않았다.

여태껏 철의 군주의 능력은 올바른 판단의 이정표가 되어주었으니까.

그러나 꼼꼼히 주위를 둘러봐도 황금빛은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아무 때나 발동되는 능력은 아닌 거겠지.

그래도 상관없다.

오로지 눈동자에만 의지할 도박이었다면 고민 없이 500크레딧이라는 거금을 선뜻 사용하지 못했으리라.

'찾았다.'

끝없는 도서관을 걷던 피넨스의 걸음이 뚝 멎었다.

화려한 책상에 덩그러니 놓인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판단의 근거는 '눈동자'가 아닌 '자신의 기억'.

어째선지 1회차의 플레이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생생하게 기억났다.

아니, 완전히 잊어버린 것마저 시간이 지날수록 수면위로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기억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확신한다.

'이 책이 분명해.'

해당 스킬 북의 가치를 매기자면 최소 5000크레딧.

특별한 상황에선 10000크레딧 이상의 가치를 지닐 수도 있는 물건이었다.

초반에 얻을 수 있는 스킬 치곤 성능이 과할 정도다.

잘만 활용하면 생존확률은 대폭 올라가겠지.

[남은 시간 : 63초]

피넨스는 곧바로 책을 펼치려 했다.

스킬을 획득하면 자신은 이 도서관에서 빠져나가게 될 테고, 다른 스킬 북을 기억해 둔 것은 없으니 다시는 이곳에 올 일이 없을 것이다.

그 순간이었다.

"…?"

갑자기 코가 움찔거렸다.

어디선가 이상한 냄새가 났다.

낡은 종이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 짙은 냄새가.

피넨스는 한 손에 책을 쥔 채 홀린 듯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자신을 유혹하는 정체모를 냄새를 따라서.

드르르륵- 

커다란 책꽂이 서랍 하나를 치워낸 순간.

'이건….'

피넨스의 눈이 커졌다.

잠잠하던 자신의 눈동자 위에 한 가지 색채가 덧씌워졌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책꽂이에 꽂힌 평범한 책에서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불꽃의 색깔은…

예상했던 황금색이 아니었다.

핏빛처럼 새빨간 불꽃.

'…!'

깜짝 놀랐다.

그건 아마도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움직임이었으리라.

어느새 자신의 손에는 핏빛이 일렁이는 책이 들려 있었다.

'무슨 스킬이지?'

책을 펼쳐보고 싶은 유혹이 솟아올랐다.

조금 전, 자신은 불꽃의 색을 이렇게 정의했다.

황금색은 기회. 붉은색은 경고.

그런데 정말 그게 맞을까?

모든 건 정황상의 추측일 뿐이지 않은가?

다시 생각해 보면 '대장 고블린'도 기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녀석을 잡아냄으로서 다른 방식으로 튜토리얼을 클리어하는 길이 열린 셈이니까.

만약 핏빛의 불꽃이 황금빛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기회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남은 시간 : 10초]

째깍- 째깍-.

도서관에 초침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더 길게 고민할 수 없어.

500크레딧을 허공에 날리기 싫다면 이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왼손엔 평범한 책. 오른손엔 핏빛으로 타오르는 책.

피넨스는 자신도 모르게 오른쪽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최면에 빠져든 것처럼, 붉은 책을 펼치려던 그 찰나.

'내가 무슨….'

들끓던 호기심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호기심 또한 일종의 감정.

그리고 자신은 일정 선의 감정을 넘을 수 없는 병에 걸려 있다.

호기심의 크기가 역치를 넘어서는 즉시 마음은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았다.

[스킬 : '인챈트'를 익혔습니다!]

[영원의 도서관을 빠져나갑니다!]

화악! 왼손의 책을 펼치자 시야가 순식간에 변화했고.

피넨스의 눈앞엔 한 명의 여자가 어쩔 줄 몰라 주저앉아 있었다.

"어어어…!"

"음?"

"어디 갔다 오신 거에요? 말도 없이…."

한소혜의 눈가엔 눈물이 가득했다.

갑자기 균열이 생겨나며 혼자 남았을 그녀가 불안에 떠는 것은 당연했다.

후우, 배로 돌아온 피넨스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선택은 정확했던 것일까?

군주의 눈동자가 지닌 효과에 관해선 좀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 * *

피넨스와 한소혜는 새벽까지 수련을 했다.

자주 근육을 쓰고 많이 맞다보면 자연스레 힘과 내구등의 스탯이 오르기 때문… 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게 노력만으로 강해질 수 있는 세상이었다면 1천 번 넘게 죽을 필요도 없었겠지.

스탯을 올리는 방법은 오직 두 가지. 

크레딧으로 정령에게 구매하는 것과, 각성 도중 저절로 상승하는 경우뿐.

수련의 의미는 그저 전투의 감각을 끌어올리기 위함이다.

두려움에 잡아먹힌 인간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무의식 속에 담긴 본능밖에 없을 테니까.

"어… 잘 어울리세요."

"그런가?"

"네. 깜짝 놀랐어요."

스킬 북을 구매하고 남은 크레딧으론 전부 장비를 구매했다.

가능한 최상품으로.

마법적 기능이 없는 물건들 중엔 가장 튼튼할 것이다.

성능 뿐 아니라 디자인까지 뛰어난 덕분에 장비를 모두 갖춰 입은 피넨스는 막 전쟁을 앞둔 왕처럼 보였다.

소혜는 갑옷의 용 문양과 피넨스의 이미지가 너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속으로 감탄했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다.

잠들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모두는 눈을 깜빡거리는 동안 각자의 처지를 이해한 듯했다.

이곳은 꿈이 아닌 현실. 앞으로 자신이 살아가야 할 세상이라고.

인간은 적응의 동물, 불안과 혼란은 익숙함에 서서히 풍화될 것이다.

휴게실에 둘러앉아 각자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덕분에 모두의 정보를 조금 더 파악할 수 있었다.

양아치의 이름은 김태성.

나이는 33세. 특성은 검사.

클럽을 운영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땐, 양아치가 아니라 정말로 깡패였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학생의 이름은 이세형.

보유 특성은 방패기사.

고등학교 2학년이라 자신을 소개한 그도 정상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아픈 게 싫으니까 앞으로 모든 스탯을 내구에 투자하겠다는 황당한 소리를 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런 마음가짐으론 살아남는 것도 어려울 것이 뻔한데.

한소혜. 21세. 궁수.

평범하게 대학을 다니던 그녀는 특별히 더 설명할 것이 없었다.

"라프헬이라고 하네. 마법사지."

가장 수상쩍은 노인은 나이도, 정체도 밝히지 않고 자신을 마법사라고만 소개했다.

귀족과 평민이 구분되지 않는 세상에서 왔다는 나머지의 말엔 상당히 놀란 기색을 보여주었다.

그래도 스스로의 가치관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걸 보면 꽉 막힌 꼰대는 아닌듯했다.

아니면 새로운 세계의 구조를 파악하기 전까진 몸을 사리는 걸지도.

"피넨스다."

그리고 마지막 피넨스의 소개는 그 한 마디가 전부였다.

다들 궁금한 것이 많은 표정임에도 섣불리 질문할 수 없는 것은 피넨스의 곁엔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풍기는 까닭이다.

튜토리얼의 전투를 이끌었을 때부터 그는 암묵적인 리더가 되어 있었다.

"…."

피넨스는 본래 타인과 의사소통이 서툴렀다.

자신이 타인에게 공감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제의 한소혜처럼, 상대가 계속 화제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면 대화는 금방 정적에 휩싸이고 만다.

그래, 마치 지금처럼.

이런 어색함은 익숙하기에 상관없다.

그보다, 피넨스는 어제 깨달은 '눈동자'의 사용법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일행의 면면을 유심히 훑어보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들은 과연 나에게 필요한 사람인가?

화아악! 마침 눈동자가 그 물음에 답했다.

역시, 황금빛 광휘를 두른 것은 한소혜 한 명 뿐이었다.

* * *

배는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인간의 생존에 대한 열망은 강하다. 생소한 환경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뭘 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모두는 소혜처럼 각자의 무기와 방어구를 구매했고, 기관실에서 항로도 다시 확인했다.

배의 목적지는 '첫 번째 섬'.

하늘지도에 적힌 대로의 이름은 '밑바닥 도시'.

도시란 일반적으로 여러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장소다.

아무것도 없는 이곳의 하늘보단 나을 거라고 생각하며 일행은 한시 빨리 2주라는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부유석의 잔량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주의! 부유석은 함선의 연료입니다! 연료를 모두 소진하면 함선은 나락으로 추락할 것입니다!]

하지만 섬까지 향하는 항로는 순탄치 않았다.

[차원의 균열로부터 부유석을 획득해 배의 연료를 보충해 주세요!]

[지도를 통해 근처에 존재하는 균열을 탐색합니다!]

항법 시스템은 배의 방향을 자동으로 틀었다.

잠깐의 정비를 마치기 무섭게 일행을 태운 배는 일그러진 빛의 거미줄을 향해 서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또 이 X같은 곳을 들어가야 하는군…."

양아치, 김태성이 지긋지긋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튜토리얼 전투는 모두의 뇌리에 강렬한 트라우마를 남겼다.

"저희 살아서 다시 만나요! 꼭이요!"

고등학생, 이세형이 비장한 외침과 함께 배는 입을 쩍 벌린 균열을 향해 빨려들었다.

함선의 선체가 일그러지는 동시, 일행은 다시 한 번 새로운 차원에 진입했다.

어두운 도시에서의 사투 (1)

균열이란 또 다른 차원으로 향하는 통로.

어떤 문명의 어떠한 시간대로 이동할 지는 입장하기 전까지 알 수 없다.

광휘가 사라지고 시야가 회복되자마자 피넨스는 이 세상의 배경부터 파악했다.

"여기는…."

일행은 폐허가 되어 버린 빌딩의 옥상에 서 있었다.

사방엔 심하게 파괴된 고층빌딩의 흔적들이 가득했다.

마치 멸망한 듯한 도시와도 같은 이 풍경은.

"세상에, 이런 세계가 존재한다니, 이 높은 성들은 대체 무엇인가…!"

"설마 여기… 지구인가요?"

"그럴 리가 있겠냐…."

이세형의 중얼거림에 김태성이 반박했다.

위를 올려다보면 밤하늘엔 두 개의 달이 떠 있었다.

하나는 초록색, 또 하나는 보라색.

얼핏 익숙해 보이는 이 차원은 지구와 전혀 다른 문명이다.

피넨스는 부서진 난간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낭떠러지의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 않아, 솟아오른 빌딩들의 높이는 하나하나가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듯했다.

지구에는 이런 건축물을 쌓아올릴 기술이 존재하지 않으니, 이 세계는 보다 발전된 문명을 지닌 차원일 것이다.

폐도시를 바라보던 한소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난번보다는 쉬운 거… 맞겠죠?"

"보통은 그렇지."

후우웅.

강한 바람이 불어오는 폐도시의 옥상.

마침내 일행의 앞에 임무의 내용이 펼쳐졌다.

[스테이지 : 탈출]

-근처의 빌딩들이 곧 완전히 무너집니다!

-10분 내에 목적지에 도달하세요!

(기본 보상 : 10C)

(기여도 비례 분배 보상 : 30C)

'어렵지 않다.'

메시지를 확인한 피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으로 보상의 크기는 균열의 난이도에 비례한다.

기본보상이 10크레딧인 임무는 아마도 딱 평균 정도의 난이도.

사나운 몬스터들과 싸울 필요도, 새로 배운 스킬을 사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저 곳이 목적지로군.'

다시, 눈매를 가늘여 먼 곳을 내다보았다.

500미터쯤 떨어진 건물의 꼭대기에 반짝이는 빛의 기둥이 보였다.

그렇다, 10분 안에 500미터를 이동하는 것만으로 자신들은 균열의 보상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목적지까지의 길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인간의 점프력으로 빌딩과 빌딩 사이의 간격을 뛰어넘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아…?"

옥상의 가장자리에 선 한소혜가 얼빠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빌딩과 빌딩 꼭대기를 연결하는 무수한 '다리'들을 목격한 순간이었다.

아니, 양팔로 움켜쥘 난간이나 손잡이도 없는 것엔 다리보다 발판이란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여길 지나야 하나요?"

"다른 길이 있나?"

"그런 건 아니지만…."

"바로 이동하지."

거두절미하고 피넨스는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꼭대기와 꼭대기를 연결하는 폭 1미터의 발판.

아찔한 높이의 허공을 태연히 걷는 그는 마치 고소공포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도시가 붕괴하기까지 : 9분 25초]

남겨질 것이 두려운 일행은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걸음은 피넨스보다 몇 배는 느렸다.

까마득히 높은 곳을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걷는다는 심리적 압박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아…!"

"허억, 헉."

"제길, 조금만 천천히 가면 안 되는 겁니까?"

겨우 반대편 옥상에 도착한 일행이 안도하여 숨을 골랐다.

의외로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지만, 나머지 세 명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특히 소혜의 얼굴은 창백할 정도로 새하얬다. 벌써 다리가 풀려 주저앉은 걸 보면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떠밀려온 것일지도.

확실히, 평범한 감정을 지닌 사람들에겐 저게 평범한 반응일 터였다.

'신체능력을 높이면 해결될 일이다.'

피넨스는 쉽게 해결방안을 찾아냈다.

본래의 용도는 아니지만, 새롭게 배운 스킬은 이 상황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스킬 : 인챈트 (하급)]

-지정한 대상의 모든 스탯을 5만큼 상승시킨다.

-단, 상승한 각각의 스탯은 20을 넘어갈 수 없다.

-최대 1명에게만 유지할 수 있다.

"어머…! 꺄악!"

"얌전히 있어라."

화악! 옅은 빛이 온몸을 감싸고도는 찰나.

피넨스는 소혜를 번쩍 안아든 채 하늘 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단 5번의 도약만으로 30미터의 다리를 건너뛰는 모습에 모두는 잠시 말을 잊었다.

마법사 노인만이 무언가를 이해한 듯 작게 중얼거렸다.

"강화 계열 마법인 것 같구만…."

그렇게 한소혜를 안고 반대편의 옥상에 도착한 피넨스는 일행이 넘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내가 모두 옮겨 줄 순 없다.'

단순히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아니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에 가까운 상황에 익숙해져야만 한다.

"아래를 봐."

"...!"

피넨스의 말대로 낭떠러지를 내려다 본 소혜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후욱거리며 숨을 내쉬다 겨우 입을 열었다.

"…아래를 보면 안 되는 게 아니고요?"

"그래, 외면하지 마라."

소혜도 나머지와 마찬가지. 

지금은 너무도 위태롭게 휘청거리고 있어서 잠시 도와줬을 뿐이지, 결국엔 그녀 스스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저 사실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배에서도 하늘 밖을 내다본 적 없어요."

"앞으론 없애야 할 거다."

"…그렇겠죠?"

그의 말대로, 언제까지나 변명을 대며 위험을 회피할 순 없어.

이곳은 어리광이 통하지 않는 세계니까.

낭떠러지의 가장자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현기증이 나서 다급히 시선을 올렸다.

아직, 아래를 바라보며 걷는 것까지는 무리인 듯했다.

"이번엔 혼자서 가 봐라."

"네."

다시 떨어진 피넨스의 지시.

후우, 크게 심호흡을 하여 마음을 진정시킨 소혜는 천천히 폭 1미터의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한 발짝…. 다시 한 발짝.

순간, 소혜는 사물이 두 개로 보이는 것 같은 현상을 느꼈다.

이것도 고소공포증 때문에 일어나는 환상일까?

"어어…?!"

뒤늦게 시선을 올리고 깜짝 놀랐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환상 따위가 아니다.

캬아악!

동물의 울음소리를 내며 하늘에서 자신을 덮쳐오는 저 거뭇하고 거대한 새의 정체는….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갑자기 접근해온 탓에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무게중심을 완전히 잃은 몸과 발판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져 간다.

'이대로 죽는 건가?'

주마등이 스쳐가던 찰나.

서걱! 눈앞에 피가 튀었다.

우우웅- 우우웅-.

공명하는 빛이 가까이서 느껴지는 가운데, 소혜는 어린애 몸통만한 몬스터가 반으로 갈라진 채 나락으로 추락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피넨스는 한 손으로 소혜의 허리를 받친 채, 멀어져가는 '괴조'를 바라보았다.

저 비행 몬스터의 정체는 분명….

'몬스터가 왜.'

하지만 지금은 몬스터의 등장보다 더 급한 문제가 있었다.

'시야가 갈라진다…!'

피넨스는 눈을 찌푸렸다.

눈앞의 모든 사물이 두 개로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소혜가 겪었던 것과 같은 현상. 고소공포증으로 인한 착각이라 여겼던 현상은 지금 피넨스에게도 동일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이거 왜 이래…?"

"읏, 저도 눈이 이상해진 것 같아요!"

한 발 뒤에 옥상에 도착한 김태성과 이세형 또한 자신들의 눈을 마구 비볐다.

하지만 아무리 다시 봐도 보이는 풍경은 변하지 않는다.

세상 곳곳의 일그러짐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해지더니.

콰득! 콰드득!

어디선가 유리에 금이 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좋지 않아.'

사고는 언제나 생각지 못한 순간에 발생한다.

튜토리얼을 제외한 초반구간의 균열들은 안전하다?

일반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항상 맞지는 않다.

인간은 누구나 희박한 확률의 사건을 배재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으니.

'설마….'

피넨스는 드디어 이 현상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차원끼리의 간섭 현상.

근접한 두 차원은 서로를 끌어당기며 결국엔 중첩된다.

그러면 기존의 차원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게 되는데, 그런 특징을 지닌 균열들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곤 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은.

'중첩 균열로 들어온 것이었나?'

중첩 균열.

그런 식으로 불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균열이 겹쳐지는 동시, 달성해야 하는 임무도 두 개로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경고! 2개의 스테이지 중첩!]

[클리어 보상이 대폭 증가합니다!]

[2nd 스테이지 : 은신]

두 번째 임무가 주어졌고.

[스테이지 : 탈출]

[스테이지 : 은신]

...

[스테이지 : 탈은출신]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임무가 서로 겹쳐졌다.

피넨스는 새롭게 떠오르는 문장들을 찬찬히 읽었다.

몇 군데의 글자가 조금 일그러지긴 했지만, 그래도 메시지는 대강 해석할 수 있었다.

-당□들은 흉■한 '바람 까마귀' 떼를 마주□습니다! 

-힌트를 하■ 드리■면 이 까마귀들은 아주 추운 지■에만 서식■□니다. 그런 특□을 잘만 이용■면 굳이 싸울 필□ 없을지도…?

-그럼, 제한■간동안 생존■세요!

(기본 ■상 : 15C)

(기여□ 비례 분배 보□ : 50C)

그리고 카운트가 시작되었다

[도시가 붕괴하기까지 : …]

[적들이 사라지기까지 : …]

[도적시들가이 붕사괴라하지기까지 : 8분 24초]

어느새 주위의 풍경이 변했다.

모두의 눈앞에 드러난 세상은 더 이상 평범한 폐도시의 모습이 아니었다.

홀로그램의 텍스트가 겹쳐진 것처럼, 공간의 일부 또한 겹쳐지고 일그러져 있었다.

비유하자면, 마치 버그가 일어난 게임 속 세상.

주변엔 형태를 짐작할 수 없는 폴리곤 덩어리들이 가득했고, 빛의 기둥이 가리키던 목적지도 어딘지 가늠할 수 없었다.

까아악- 까아악-!

창공을 날아다니는 새들의 울음소리만 들려오고 있을 뿐.

"갑자기 주위가 이상해요…."

한소혜의 떨리는 목소리에 피넨스가 고개를 돌렸다.

초점이 맞지 않는 것처럼, 그녀의 모습은 둘로 나뉘어 있었다.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린 것 같아요, 갑자기 환각이…."

"아니. 이건 환각이 아니야."

"네?"

피넨스는 영문을 몰라 당황하는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일단 그들에게 사과했다.

자신의 잘못이 있다면 완벽하게 모든 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했던 것.

"안일한 판단으로 내가 거짓말을 한 셈이 되어 버렸군."

튜토리얼의 바로 다음에 중첩균열을 맞닥뜨릴 확률은 거의 0퍼센트지만, 완전히 0이 아닌 이상 조금 더 주의했어야 한다.

"여기… 위험한 건가요?"

"아마도 튜토리얼보다 더."

"...."

잠시 침묵.

가장 먼저 상황을 받아들인 것은 김태성이었다.

일행 중 생존본능은 그가 가장 뛰어난 듯했다.

"쳇,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어, 그래서 우린 뭘 하면 되는 거요?"

"전과 똑같다. 내 말대로만 하면 살 수 있어."

팟! 피넨스의 눈동자에 황금빛 불꽃이 켜졌다.

일그러진 세상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지금은 철의 군주의 능력만이 유일한 나침판이었다.

"너흰 그저 믿고 따라와라."

얼핏 오만해보이기까지 하는 말투.

허나, 피넨스의 목소리가 전해지는 순간 모두의 마음속엔 튜토리얼때와 같은 근거 없는 믿음이 생겨났다.

"내가 앞장서지."

파악! 피넨스의 손에 들린 검이 까마귀를 가르고.

캬아아! 카아아…. 끔찍한 새들의 비명이 점점 잦아들자, 일행은 곧바로 그의 발걸음을 따라 나아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거지?'

뒤따르던 소혜는 순간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발밑을 내려다봤다.

'나, 지금 뛰어가고 있는 거야…?'

자신은 까마득한 높이의 발판 위를 달리고 있었다.

상공 수 킬로미터의 높이에서 지상을 바라봐도 아무런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은 기분.

방금 전까지 고소공포증에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던 사람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앞을 똑바로 봐라."

무사히 도착한 다음 건물의 옥상.

피넨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모두의 정신이 바짝 돌아왔다.

"몬스터들이 덮쳐올 거야."

까악! 까악!

인간의 절반만한 몸통의 까마귀들이 주위를 선회하고 있어도 그리 별로 두렵지 않다.

오히려, 괜찮을 거란 믿음이 온몸에 가득 채워졌다.

모두의 머릿속엔 고블린과의 전투에서 한 번 겪었던 승리의 기억이 겹쳐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두운 도시에서의 사투 (2)

중첩균열.

쉽게 설명하자면, 중첩 스테이지.

동시에 주어지는 두 개 이상의 임무목표를 동시에 만족시켜야만 균열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

그러면 그 난이도는 어떨까?

두 개의 스테이지가 겹쳐지면 난이도도 두 배만큼 상승하는 것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중첩균열 안에서 1 더하기 1이 2라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위험해.'

임무를 다시 확인한 피넨스의 표정이 굳었다.

[스테이지 : 탈출], [스테이지 : 은신]

두 목표의 상성은 그야말로 최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일행은 외줄타기를 하는 아슬아슬한 기분으로 창공에 놓인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그렇게 위태로운 곡예를 하는 와중, 난데없이 사방에서 몬스터들이 덮쳐오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제한시간 내에, 강력한 비행 몬스터들의 위협을 뚫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리라.

쿵, 쿵. 죽음의 위기를 직감한 피넨스의 가슴이 다시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잘못하면 여기서 끝난다.'

피넨스의 몸이 빛에 휩싸였다.

인챈트.

약간의 치트를 써서 얻은 그 스킬만이 사방에서 달려드는 까마귀들의 공격을 버텨낼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촤악! 

붉은 피가 솟구치고, 밤하늘에 혈향이 스며든다.

검이 그려내는 반월에 옆에서 날아들던 까마귀 한 마리는 깔끔하게 반으로 갈라진 순간이었다.

5만큼 늘어난 힘과 기교는 일시적으로 피넨스를 검의 달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강하다.'

한 합 만에 피넨스는 깨달았다.

속도, 내구도, 비행 속성까지. 이 까마귀 몬스터들의 위험도는 고블린 따위에 비할 수 없었다.

애초에 두 번째 스테이지의 목표는 은신. 

적들의 약점을 최대한 이용해 제한시간을 버텨내는 것이지, 정면에서 맞대결을 펼치라는 것이 아니었다.

[도적시들가이 붕사괴라하지기까지  : 7분 27초]

문제는 그것을 알면서도 함정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밖에 선택지가 없다는 사실.

'수가 몇이나 되는 거지?'

까악! 꺄악!

순식간에 까마귀들의 울음소리가 늘어났다.

동료의 피냄새를 맡은 녀석들이 일행이 서있는 빌딩의 옥상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녀석들은 고블린처럼 영악하기보단, 저돌적이었다.

목표를 발견하자마자 녀석들은 매가 먹이를 낚아채듯 한순간에 피넨스에게로 육박했다.

그 순간.

"…!"

피넨스는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기분을 느꼈다.

상승한 힘과 기교는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불가능한 기술까지 가능하게 만들었다.

카르르릉!

전방에서 덮쳐온 까마귀들의 발톱은 갑옷의 표면만을 긁어내렸고.

그와 동시, X자의 광휘를 번쩍이는 피넨스의 검격!

그 궤도에 걸린 두 마리의 까마귀들은 피를 흩뿌리다가, 까마득한 나락으로 추락해 결국 보이지 않게 되었다.

'칫…!'

하지만 까마귀들의 공세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녀석들은 동료의 죽음에 아랑곳 않고 끊임없이 피넨스만을 노렸다.

스스로의 몸을 가누기도 어려운 이 건물의 꼭대기에서 이지(理智)를 지니지 못한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아내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끔찍한 일이었다.

카르르릉! 

쇠붙이 소리가 울리는 찰나, 피넨스의 등에 화끈함이 아렸다.

갑옷의 틈새를 뚫고 들어온 발톱이 살갗을 쓸어내린 것이었다.

'이대론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눈을 깜빡일 시간조차 없다.

힘껏 허리를 젖힌 순간, 날카로운 바람이 피넨스의 앞머리를 스쳐갔다.

허리를 젖히는 것은 무게중심을 고려하지 않은 회피 방법.

하지만 목숨이 오가는 상황엔 자세의 불안정함 따위를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아니, 버티는 것도 곧 한계다!'

카앙! 예상치 못한 쇳소리에 피넨스의 눈이 커졌다.

한 마리의 까마귀를 베어내는 동시에 들고 있던 검이 부러져 버린 것이다.

까아악!

동강난 검을 가슴에 박은 까마귀는 그래픽이 깨진 듯한 빌딩의 아래로 추락했다.

'뭐…? 무기가.'

피넨스의 장검은 튜토리얼에서 죽은 용병의 것이었다.

평균적인 힘을 지닌 인간이 사용하기엔 충분할지 몰라도, 스카이 아일랜즈의 세계관에서 그 검의 강도는 무르기 그지없었다.

'이런…!'

한 발 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1회차 플레이에선 '다른 차원의 무기'를 사용해 본 적이 없던 탓에 새로 검을 장만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것은 게임과 현실의 괴리에서 벌어진 실수.

허나, 이 세계에서 한 번의 실수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다섯 마리의 까마귀들은 완전히 무장이 해제된 피넨스에게 달려들었고.

콰아아아아앙-!

그 순간 거대한 폭음이 들려왔다.

"큭…!"

피넨스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갑자기 얼굴에 확 불어오는 열풍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재빨리 장갑으로 열기를 씻어내고 다시 눈을 떴다.

곧바로 보이는 것은 불꽃으로 가득한 옥상의 풍경.

화르륵! 화르륵! 

그리고 그 화염 너머엔 한 명의 노인이 이쪽을 향해 지팡이를 뻗고 있었다.

"뒤에, 조심해요!"

마법사의 옆에 붙어있던 소혜가 소리쳤고.

파앙!

매서운 파공음과 함께 화살 한 발이 피넨스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뒤를 돌아본 피넨스는 화살이 꽂힌 채 벽에 박혀 발버둥치는 까마귀 한 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 맞췄어요! 여덟 발 만에 처음으로…."

피넨스는 소혜의 말에 답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대신, 가슴에 손을 짚었다.

쿵! 쿵!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심장박동은 분명 감정의 요동!

지금 자신은 이 상황 속에서 온전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게 분명했다.

'내가 이성을 잃었다고…?'

믿을 수 없었다.

이 세계로 넘어온 순간부터 감정의 떨림이 잦아지기는 했지만, 평정을 잃어버렸던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피넨스님?"

"…!"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피넨스의 동요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지금은 다른 생각에 빠질 때가 아니다.

까악! 까악!

거대한 까마귀들은 여전히 빌딩의 옥상을 배회하는 중.

'불꽃이 약점이었던 모양이군.'

주위에서 타오르는 불꽃 덕에 당장은 얌전하지만, 녀석들이 언제까지나 조용할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차분히 일행들의 진형을 파악해 봤다.

검과 방패를 든 김태성과 이세형은 아군의 보호에 집중하고, 나머지 둘은 원거리에서 공격을 시도하던 것인가?

그렇다면 훌륭하다.

저 진형은 비행 몬스터를 상대하는 데 효율적이니까.

자신이 잠시나마 정신을 잃었던 와중에도 나머지 일행들은 냉철하게 최선의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화악!

피넨스의 두 눈동자가 새로이 타오르는 황금빛 불꽃을 목격한 것도 그 때였다.

[마법사 라프헬]

-이전 차원에서의 힘을 아직 다 되찾지 못한 상태.

-마력이 회복될수록 다양하고 강력한 마법을 구사할 수 있다.

-특기인 불꽃과 바람의 조합은 전장을 통째로 불바다로 만들어 버린다고 한다.

"괜찮소?"

피넨스의 멍한 시선을 본 마법사가 물었다.

그의 정신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인가 하는 생각에.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뭘 해야 살 수 있는지 모르오. 당신이 무사하지 못한다면…."

"걱정 마."

피넨스는 무릎을 펴고 일어나며 답했고.

"크게 다치진 않았다. 잠시 생각할 게 있었을 뿐이야."

황금빛의 광휘를 내뿜는 노인을 잠시 바라보던 피넨스는 목적지까지 이어지는 황금빛의 경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두 개의 광휘가 떠오른 지금, 해답으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여길 빠져나갈 수 있다."

"정말요?"

누군가의 목소리에 피넨스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지."

피넨스는 반쯤 부러진 검을 낭떠러지 아래로 던져버렸다.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 자신의 검은 불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턱-.

이어서 가만히 마법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의미 모를 행동에 모두가 의문을 떠올리던 때.

'인챈트.'

"헙…!"

은은한 빛에 휘감긴 마법사가 갑자기 숨을 들이켰다.

젊을 때 이상으로 몸에 힘이 넘쳐나는 기분.

그리고 난생 처음 느껴보는 마력이 일시에 차오르는 감각에.

군주의 힘이 불어넣어진 동시 마법사는 전신이 터질듯한 고양감을 느꼈다.

"이 힘은…?"

"혹시 비행마법을 사용할 수 있나?"

"…안타깝게도 그쪽은 내 계통이 아니오."

마법사의 대답에 피넨스가 혀를 찼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선 결국 1미터 폭의 다리를 건너야 할 듯했다.

"그럼 방금 그 마법을 얼마나 더 사용할 수 있지?"

"몇 번이든 충분하오!"

"그건 좋군."

재빨리 주위를 훑어본 피넨스는 일행을 이끌었다.

중첩된 세계의 일그러진 빌딩들. 그 위의 얇은 다리를 따라 이어지는 황금의 길을 따라서!

"다리는 절대 파괴되어선 안 돼."

"명심하겠소."

일행이 불꽃으로부터 빠져나오자 까마귀 떼가 다시 근처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적들이 덮쳐오기 시작한 뒤는 이미 늦다!

그 사실을 직감한 마법사는 자신이 먼저 지팡이를 겨누었고.

콰아아앙! 

화염의 구체가 날개를 퍼덕이던 녀석에게 명중하자 수 킬로미터의 상공 위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새빨간 불꽃놀이가 하늘을 장식하는 사이, 일행은 발 빠르게 하늘에 놓인 가느다란 다리를 따라 이동했다.

"더 빠르게."

가장 위태로운 것은 다리를 건너는 그 잠깐의 순간이다.

그 이유는, 다리 위에서 마법을 사용하다간 폭발의 충격으로 인해 일행이 날아가 버릴 수도 있기 때문.

안전하게 다리를 건너기 위해선 하늘을 수놓은 화염이 다 사라지기 전에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생각보다 많다!'

어느 순간, 피넨스는 일행을 멈추었다.

십여 마리의 까마귀 떼가 일행이 지나야 할 다리 위의 하늘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런 식으로 다리에 딱 달라붙어 있으면 함부로 불꽃의 폭발을 일으키기 어렵다.

피넨스가 어떻게 적들을 멀리 떨어진 곳으로 유인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그 때.

화르륵! 마법사의 지팡이 끝에 불꽃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다른 마법?'

화아악!

불꽃은 점점 빠르게 회전하더니, 어느새 섬광처럼 가느다랗게 변했고, 다시 그 불꽃의 줄기는 두꺼운 회오리로 변해 근처에 있던 까마귀들을 일제히 삼켜버렸다.

콰아아아-!

잠시 후 열기가 그친 뒤.

불꽃의 회오리가 지나갔던 자리엔 조금 까맣게 그을린 다리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플레임 토네이도(Flame tornado).

그저 바람의 흐름에 불꽃을 담아 내뿜는 기술.

두 속성을 마구잡이로 뒤섞어 폭발을 일으키는 것보다 한 단계 높은 경지의 마법이었다.

"성공… 했다…."

지팡이를 든 노인의 손끝이 떨렸다.

마법에 인생을 바쳐온 자로서 한 번도 닿아보지 못했던 경지를 처음으로 엿본 기분은 그 어떤 쾌락에도 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성공했어…! 이 라프헬이 드디어 성공했다고!"

노인의 거친 뺨에는 눈물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금 마법사 라프헬의 마음속에 차오르는 것은 온몸이 오싹할 정도의 고양감과 성취감.

"좋아, 이 틈에 이동한다."

"크흣, 하하하…."

그 때부턴 일사천리였다.

피넨스가 길을 인도하고, 마법사 라프헬이 도중에 방해되는 것들을 모조리 불태웠다.

화륵! 화륵!

불꽃의 소용돌이가 몰아칠 때마다 몬스터들의 비명이 울리고, 고기 타는 냄새가 풍겼다.

그렇게 앞길을 가로막는 적들이 사라지자 일행의 발걸음엔 가속이 붙었다.

'엄청나다….'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마법의 향연에 이세형은 끝없이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사실 저 남자의 능력 덕이겠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여러 종류의 게임 시스템에도 익숙했다.

피넨스라는 남자가 노인에게 무언가를 한 뒤부터 노인의 몸에 은은한 빛이 생겨났던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버프계 마법.

노인이 강력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 준 힘의 근원일 것이다.

'이 정도면 질 것 같지 않아.'

이세형은 방패를 바짝 끌어올렸다.

미약한 힘이라도 보태 남자와 노인의 사각을 보호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래, 둘만 멀쩡하다면 이 빌어먹을 장소에서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어두운 도시에서의 사투 (3)

'거의 다 왔어.'

모든 것은 완벽했다.

초반 구간에 가장 강력한 효율을 자랑하는 인챈트.

그 스킬이 마법사 라프헬의 한계를 극복해 준 덕분에 까마귀 몬스터들은 감히 근처에 접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군주, 피넨스가 방향을 인도하고, 마법사 라프헬은 앞길을 뚫는 가운데, 나머지 일행들은 진형을 갖추어 앞으로 나아갔다.

'앞으로 남은 다리는 하나. 그것만 건너면 된다!'

[도적시들가이 붕사괴라하지기까지  : 58초] 

시간도 충분했다.

실제로, 흐릿해졌던 빛의 기둥도 다시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이 지옥 같은 중첩균열을 나갈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차원의 바다에 들어온 이상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무수한 종류의 세상이 엮인 이곳에선 언제나 예상치 못한 위기가 계속해서 찾아온다는 사실을.

'좋진 않군.'

깍깍거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피넨스가 신음을 흘렸다.

일행의 후방에서 쫓아오는 바글바글한 몬스터 떼를 목격한 순간엔 쉽게 평정을 잃지 않는 그 역시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대충 보이는 수는 백여 마리.

'적들의 수가 너무 많다.'

하필 일행은 마지막의 긴 다리를 건너는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 백여 마리의 몬스터가 한꺼번에 덮쳐온다면 꼼짝없이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알겠소. 내가 왜 이 세계에 떠밀려왔는지."

그 순간, 마법사가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더 높은 진리에 닿는 것…. 마법사란 오직 그것만을 염원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이요."

"…."

피넨스와 라프헬의 시선이 아주 잠깐 얽혔고.

"나의 염원을 이뤄준 그대에게 감사하오."

마법사의 지팡이 앞에, 여태껏 없던 화려한 마법진이 생겨났다.

화르르르륵! 마법진의 끝에 걸린 세 덩이의 불꽃은 점점 빠르게 회전하더니 곧 하나의 고리가 되었다.

불꽃의 창이 까마귀 무리들의 정 중앙을 겨누는 찰나.

홍염의 섬광이 어두운 밤하늘을 꿰뚫었다.

"웃…!"

"크윽…."

후방에서 덮쳐오는 어마어마한 열기에 일행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살짝 뜬 실눈 사이로 보이는 것은 검은 새떼들을 집어삼키는 화염의 소용돌이.

까악- 까아악!

겨우 살아남은 몬스터들이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도망치는 녀석들 중 깃털에 불이 붙지 않은 녀석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하늘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불꽃마법을 사용한 대가는 결코 작지 않았다.

"…!"

휘청! 노인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지팡이를 놓친 마법사가 다리 아래로 추락하려는 그 찰나.

파악! 억센 손길이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큭, 빌어먹은 늙은이…!"

마법사의 팔을 낚아챈 김태성은 이를 악물었다.

한손으로 끌어올릴 힘은 없는 탓에 마법사는 벼랑 위에 대롱대롱 매달린 꼴이 되었다.

김태성이 '힘' 스탯을 올려두지 않았다면 의식을 잃고 떨어지는 사람의 몸뚱이를 붙잡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야, 고딩! 보고만 있지 말고 같이 잡아!"

"아, 넷!"

이세형이 합세한 뒤에야 노인의 몸뚱이는 조금씩 다리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피넨스님, 앞쪽에…!"

"보고 있다."

소혜의 외침에 피넨스의 눈이 전방을 훑었다.

노인의 무지막지한 마법에도 살아남은 몬스터들은 아직 남아 있었다.

'세 마리인가.'

피넨스는 순식간에 판단을 내렸다.

이곳은 위태로운 다리 위.

협소한 곳에서 세 마리의 적들이 동시에 덮쳐온다면 일행은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인챈트.'

몸에 빛이 깃드는 즉시, 피넨스는 곁에 있던 소혜를 안고서 힘껏 뛰어올랐다.

카앙! 그와 동시에 한 마리의 발톱이 자신이 서있던 발판을 찍어 내리며 거친 쇳소리를 울렸다.

다리 위 5미터의 상공.

피넨스는 소혜의 등을 짚은 채 자신의 힘을 불어넣었다.

지금 자세히 설명할 시간은 없다.

상대가 의도를 이해해 주길 바랄 수밖에.

"아…."

비명을 지르려던 한소혜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손가락 마디 사이사이에 세 발의 화살이 끼워져 있었다.

그걸로 뭘 하려는 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넘치는 힘이 온몸을 가득 채우는 순간 본능이 사고를 앞질렀을 뿐.

'약점은… 머리!'

높이 뛰어오른 덕분에 모든 적들이 비슷한 각도에 놓여 있었다.

누군가의 조언을 속으로 되새기며, 세 발의 화살을 한꺼번에 시위에 걸었다.

머릿속에 떠올린 말도 안 되는 묘기.

이상하게도, 지금은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쐐애액! 시간이 멈춘 듯한 감각 속에서 세 가닥의 섬광이 파공성을 내뿜었고.

'맞췄어!!'

기적이 일어났다.

둘을 제외한 일행들은 자신의 일에 바빠 그 기적을 목도하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었다.

멀어지는 몬스터의 괴성과 함께, 두 남녀는 뛰어올랐을 때와 마찬가지로, 함께 착지했다.

"...."

소혜는 어안이 벙벙한 듯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봤다.

잠깐 깃들었던 정체불명의 힘은 이미 사라져 버린 뒤였다.

방금 스스로의 손으로 일으킨 기적은 아직도 믿겨지지 않았다.

"이거, 제가 한 거 맞죠?"

"그래. 잘했다."

소혜의 얼빠진 물음에 피넨스가 답했다.

이번의 그녀의 활약은 정말로 훌륭했다.

적당히 상처만 입히는 것으로도 충분했는데, 세 발을 동시에 쏴서 모두 머리를 맞추다니.

단순히 기교가 올라서 가능한 것 같지는 않다.

새벽의 궁수라고 했던가? 어쩌면 그 C급 특성이 생각보다 도움을 준 것일지도 모른다.

"다 왔군."

피넨스와 소혜는 먼저 다리를 건너 마지막 건물의 옥상에 발을 디뎠고.

"헉, 헉…!"

잠시 후 나머지 일행도 노인을 부축한 채 빛의 기둥이 위치한 목적지에 도착했다.

주변에 적들이 없음을 확인하곤 숨을 골랐다.

[도적시들가이 붕사괴라하지기까지 : 24초] 

아직 버텨야 할 시간은 조금 남아 있었지만, 근처에 몬스터라곤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 일행은 제자리에 서서 카운트가 다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쿠구구궁-! 거대한 땅울림과 함께 눈앞의 도시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시야가 일그러진 탓에 선명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일행이 지나온 빌딩들과, 그 옥상에 실처럼 놓여 있던 가느다란 다리들이 일제히 붕괴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지진인가…?"

"…세상에."

붕괴는 한참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난생 처음 보는 장관에 일행은 쉽게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저곳에서 함께 추락하는 것은 자신들이었으리라.

굉음이 멎고, 먼지가 가라앉은 뒤에도 멀쩡한 건물은 오직 하나.

빛의 기둥이 내리쬐고 있는 옥상뿐이었다.

[스테이지 : '탈은출신' 클리어!]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하자 일행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살아남기 급급해 잠시 잊고 있었던 클리어 보상들이 정산되기 시작했다.

[도시를 탈출하여 10C를 획득하였습니다!]

[바람 까마귀로부터 살아남아 15C를 획득하였습니다!]

['60%'의 기여도를 달성하여 분배 보상 중 48C를 추가로 획득합니다!]

[총 합계 : 73C]

두 스테이지의 합계 보상.

하지만 메시지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좀 더 이어졌다.

이번엔 '중첩균열'의 특징으로 인해 추가되는 보상이다.

[통합된 두 스테이지의 일치율을 분석중입니다….]

[판정 : 12% (매우 나쁨)]

[모든 크레딧 보상이 (100/12)배 증가합니다!]

[최종 정산 : 608C]

608크레딧. 뉴비가 약 2주 동안 목숨을 걸고 모아야 간신히 얻을 수 있는 보상이다.

나머지 일행들이 얻은 크레딧은 200C 초반대였지만, 그것도 결코 적은 양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아직 그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때문에 모두는 흘러가는 메시지를 바라보며 눈만 깜빡이고 있을 뿐.

화아악! 

이윽고 눈앞의 세상이 빛으로 가득 찼다.

"여기는…?"

"돌아왔군."

광휘가 완전히 잦아들었을 땐 일행의 앞엔 새하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중첩균열에 빨려들었던 모두는 가벼운 바람이 옷깃을 펄럭이는 배의 갑판 위로 되돌아온 것이었다.

* * *

모든 곳이 그렇듯, 이 지옥에도 절망과 평화가 공존한다.

조금 전 겪은 중첩균열이 지옥의 밑바닥이었다면, 지금 이곳은 비교적 평화로운 곳이었다.

'첫 균열이 중첩균열이라….'

피넨스는 냉정하게 방금 전의 일을 되짚어 봤다.

첫 번째 섬에 도착하기 전엔 중첩균열을 마주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산산이 깨져버렸다.

경험에 의한 정보를 너무 과신한 결과다.

어차피 대비할 수 없었다고 해도, 모두에게 다음 균열이 '튜토리얼'보다 쉬울 거라 말했던 것은 분명한 실수였다.

하나의 반례만 등장해도 자신의 발언에 빈틈이 생기는 것이니까.

'앞으론 말조심해야겠군.'

그래도 아직은 일행 중 누구의 불평도 나오지 않았다.

다들 이 세계의 지식이 얕은 탓이리라.

어쩌면 누군가는 '튜토리얼보다 쉽다'는 자신의 발언이 모두의 멘탈관리를 위한 거짓말이었다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게임은 튜토리얼 다음의 스테이지가 더 어려운 게 보통이니까.

어쨌든 한 번은 잘 넘어갔다 쳐도, 계속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다.

피넨스는 앞으로의 발언과 행동을 주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피넨스님 여기 계셨군요!"

"음."

갑작스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그녀의 목소리도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다.

"저…."

살짝 머뭇거리던 한소혜의 입이 열렸다.

"조촐하게 축하를 하려고 하는데, 피넨스님도 오시겠어요?"

"축하?"

"생존 축하요! 다 같이 살아남았잖아요."

이어서 소혜의 시선을 따라간 피넨스는 한군데 모여 있는 나머지 일행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테이블엔 음식까지 준비되어 있는 듯했다.

정령과의 거래로 음식은 남에게 나눠줄 수 없을 텐데?

방금 중첩균열에서 얻은 각자의 크레딧을 사용한 건가?

"아끼는 편이 좋아."

"네? 그, 그렇긴 하죠…."

소혜는 단번에 피넨스의 말뜻을 알아듣고 말을 흐렸다.

얼마 전 크레딧의 소중함을 알려주었던 한밤중의 대화를 떠올린 것이다.

"하지만 언제 죽을 줄도 모르는데… 가끔은 이런 날도 괜찮지 않을까요? 다 같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두려움도 조금 가시는 기분이 들거든요. 아, 물론 제가 남들보다 겁쟁이라 그런 거겠지만…."

갑자기 횡설수설하며 말하는 소혜.

대화가 어긋나기 전에 피넨스가 말을 이었다.

"낭비라는 뜻은 아니다."

"아, 그런가요?!"

"도움이 된다면 그것도 나쁜 방법은 아니겠지."

피넨스는 잠깐 사이에도 여러 번 변하는 소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순간, 궁금증이 솟아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녀처럼 변화무쌍한 표정을 지닌 사람의 심장은 어떻게 뛰고 있을까?

하지만 그 궁금증은 떠오르자마자 곧바로 가라앉았다.

까마귀들과의 전투에서 잠시나마 이성을 잃었던 자신의 모습을 상기한 탓이다.

쓸데없는 감정은 이 세계에서 방해만 될 뿐이겠지.

후우,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내쉰 피넨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되겠어."

어차피 오늘 더 움직일 수는 없었다.

한 번의 균열 탐사로 진이 다 빠진 일행에게 움직일 힘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휴식이 필요한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

까마귀 몬스터들이 갑옷을 긁어내리는 와중 여러 곳에 상처가 생겨났다.

균열에 있을 땐 몰랐는데, 맨살에도 옅은 화상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육체에 생겨난 상처는 정령에게 '회복약'을 구매해 치료한다 해도, 정신적인 피로까지 다 없앨 수는 없는 법이었다.

1회차 플레이에서도 '질병'이라는 상태이상이 여럿 존재했던 만큼 무리해서 움직이는 일은 피하는 편이 좋았다.

"그래, 가지."

"네…!"

소혜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피넨스는 지난번에 다 말해주지 못한 것들을 오늘 다 설명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스탯과 스킬. 하늘 섬과 균열들.

그리고 그들이 균열에서 얻은 크레딧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도 말이다.

길 잃은 자들은 어디로? (1)

배의 분위기는 묘했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나서도 일행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아니, 애써 밝은 표정을 유지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라도 자신의 마음을 속여야만 앞으로의 불안을 떨쳐낼 수 있는 것이리라.

'음?'

문득 피넨스는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혼절에서 깨어난 마법사 라프헬이 할 말이 있는 듯 근처로 다가와 있었었기에

"무슨 일이지?"

"그대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소."

마법사는 굉장히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평민이니 뭐니 신분타령을 하던 오만한 얼굴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당신을 구한 건 내가 아니라 저쪽이다."

피넨스는 먼 곳에서 혼자 검을 휘두르는 양아치, 김태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다리에서 추락하려던 동료를 붙잡아 구한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 사실은 라프헬에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김태성을 바라보는 라프헬의 휘둥그레졌다.

"저 평민… 아니, 저 남자가 말이오?"

"그렇지."

"그건 몰랐구려."

침묵이 이어졌다.

그렇게 대화가 끝나나 싶던 찰나에 라프헬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그대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소."

"으음."

무엇이 고맙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음에도, 피넨스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 살면서 저절로 터득한 습관이었다.

그렇게 의미 모를 말을 건넨 노인이 떠난 뒤.

"정말 감사드립니다."

고등학생, 이세형이 피넨스를 찾아와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이번엔 궁금해진 피넨스도 질문을 던졌다.

"뭐가 말이지?"

"그야, 피넨스님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꼼짝없이 다 죽었을 테니까요."

"나 또한 살아남기 위해 너희들을 이용했던 것이다."

몬스터들의 포위를 뚫어내기 위해선 노인의 마법이 필요했다.

그가 정신을 잃었던 정체절명의 위기엔 궁수, 한소혜의 힘도 빌려야만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검과 방패를 들고 원거리 직업군을 지켜 주었으니, 각자 활약한 기여도의 차이만 존재할 뿐 균열에서 쓸모없던 사람은 아무도 없던 셈이다.

피넨스는 그런 예시를 들어 설명했지만.

"하지만 모두의 목숨을 지켰던 건 피넨스님이셨잖아요. 특히 그 몬스터들과 싸울 땐 굉장했어요."

"내가 지켰다고?"

이세형은 자신의 의견을 철회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네, 다들 말은 안해도 피넨스님에게 감사하고 있을 거예요."

"그런가…."

피넨스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행은 굳건한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신뢰가 가득 담긴 표정.

동시에, 의문이 솟아올랐다.

신뢰란 공감에서 비롯되는 것일 터인데, 저들은 무엇으로 자신을 신뢰하는 것인가?

타인에게 공감조차 할 수 없는 자신을….

이세형이 떠난 뒤에도 피넨스의 머릿속에 떠도는 의문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 * *

전투가 끝난 뒤엔 반드시 정비의 시간이 필요하다.

일행은 여신상 주변에 모여 있었다.

하급정령은 웬만한 잡화상점 이상으로 다양한 물건들을 팔기 때문이다.

피넨스는 치료약을 구매했고, 상처가 심한 부위는 좀 더 효과적인 약을 발라 붕대로 감쌌다.

이어서 수리용 마석을 구매해 부서진 장비들을 고쳤다.

실제 대장장이들이 하는 것처럼 망치질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천만다행이었다.

반짝이는 보석을 흡수시키는 것만으로 찌그러진 갑옷은 원래의 형태로 되돌아가는 모습은 제법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검을 하나 장만했다.

웬만해선 부러지지 않을 고급품으로.

'무기가 50크레딧, 나머지 잡다한 도구들은 총 20크레딧이군.'

약품이나 수리 마석은 넉넉하게 인벤토리에 넣어 두었으니 당분간은 재구매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대충 정비를 마친 피넨스는 나머지 일행들을 살펴보았다.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은 여전히 한소혜 한 명 뿐이었지만, 나머지 일행들끼리는 제법 대화가 활발해져서 배의 분위기도 조금 밝아졌다.

중첩균열은 일행을 죽음의 가까이로 몰아넣은 동시에 동질감이 확립되는 계기가 된 모양이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 사이엔 자연스레 전우애가 생겨난다고 하니 그것과 비슷한 거겠지.

물론 자신은 쉽게 느낄 수 없는 감정이겠지만 말이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저녁이 찾아오기 전에 피넨스는 모두를 불러 모았다.

"안 좋은 소식이지만,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이야기지."

"…무슨 일이죠?"

소혜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나를 따르면 살 수 있다. 이길 수 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적인 말만을 들려주던 피넨스가 안 좋다고 말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모두는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세한 설명은… 그래, 기관실에 가면서 하는 게 좋겠군."

이동하는 동안 피넨스는 설명을 시작했고, 나머지 일행은 바짝 귀를 기울였다.

"우리가 겪었던 장소는 중첩균열이다. 중첩균열의 특징이 뭔지 알고 있나?"

"두 개의 차원이 겹친 균열이라는 거요?"

이세형이 재빨리 답했다.

조금 전 피넨스에게 짤막한 강의를 들은 덕분에 간략하지만 이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한 그들이었다.

"맞아. 정확히는 '둘 이상'이 중첩된 것이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잠깐 뜸을 들인 피넨스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제부터 중요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중첩균열의 또 다른 특징은 입구가 여러 개 존재한다는 거다."

"입구요…?"

"워프 게이트…라고 하면 알아들을지 모르겠군. 어쨌든 그것과 비슷하다. 같은 차원으로 통하는 출입구가 여러 개라면 무슨 현상이 발생할까?"

허공을 올려다보던 일행이 숨을 삼켰다.

왠지 다음에 나올 피넨스의 말을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정답은,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좌표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 입구와 출구가 무작위로 결정되기 때문에 중첩균열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 자체가 '텔레포트'와 유사한 효과를 지닌다."

우우웅.

피넨스의 손이 기관실의 장치와 공명을 일으키자 모두의 눈앞엔 이전에도 등장했던 3D 홀로그램이 펼쳐졌다.

이전에도 보았던 '하늘지도'.

하지만 이전과 미묘하게 다르다.

일행은 곧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헛…!"

"이건 설마…."

현재 위치, 앞으로의 항해경로, 함선의 최종 목적지를 표시해 주던 푸르스름한 화살표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떠올라 있는 것은 하단의 붉은 색 메시지.

[경로 탐색 불가!]

[짧은 시간 급격한 좌표 변동이 발생했습니다!]

[현재 위치를 특정할 수 없습니다!]

[추정 변동 거리 : 약 154,000Km]

[고도 변화 : 없음]

의미는 굳이 피넨스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배는 중첩균열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전혀 엉뚱한 곳으로 이동했다.

"십오만 킬로미터…?"

김태성이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벌렸다.

지구의 반지름은 약 6400킬로미터, 둘레는 4만 킬로미터.

그런 구체적인 지식을 모르는 그라도 지금 보이는 수치가 비정상적이란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계기판이 고장 난 거요…? 아니면 이 세상이 빌어먹을 정도로 넓다는 뜻이요?"

"양쪽 다."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피넨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항법 시스템은 지도 위의 구역 내에서만 작동한다. 허나 우리는 중첩균열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지도에 입력된 구역과 완전히 동떨어진 곳으로 와 버렸지."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함을 알게 되었다.

좌표 변동은 약 15만4천 킬로미터. 배의 속도를 대충 시속 40킬로미터로 잡으면 약 반 년을 가야 하는 거리.

"돌아가려면 엄청 오래 걸리겠네요…."

"돌아갈 수 없어."

하지만 이어지는 피넨스의 말은 일행의 실낱같은 희망까지 빼앗아 버렸다.

"이 세상의 하늘은 너희의 생각보다 훨씬 위험하다."

"그건 알고 있소. 하늘 곳곳의 균열들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아니,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피넨스는 라프헬의 말을 끊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히 하늘에 지도가 존재하는 것 같나? 정해진 항로를 벗어난 곳으로 다니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자면…."

바로 그때, 어디선가 태풍이 몰아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쿠우우우우-!

반사적으로 창밖을 돌아본 일행은 거대한 형체를 목격하고 새하얗게 안색이 굳었다.

그것은 어마어마하게 큰 새.

아니, 새보단 '아귀'에 가까운 흉측한 생김새를 지닌 수백미터짜리 괴물!

정체모를 괴물의 그림자는 금세 배를 완전히 뒤덮었고.

덜컹! 덜컹!

녀석이 날개인지 지느러미인지 모를 무언가를 펄럭일 때마다 배는 폭풍우를 맞닥뜨린 듯 좌우로 흔들거렸다.

괴물의 그림자가 배를 완전히 지나칠 때까지 일행은 입도 벙끗하지 못했다.

압도적인 포식자 앞에선 작은 소리조차 낼 수 없는 법이니.

그렇게 한참 뒤. 

"운이 좋군, 녀석이 배고프지 않았던 모양이다."

"...."

"항로 밖의 위험은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되겠지."

모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자신들이 이 세계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지는 피넨스의 설명으로부터 더욱 충격적인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이 세계엔 대륙도, 바다도, 우주도 존재하지 않으며, 세상의 크기는 지구보다 훨씬 거대하다.

너무도 광활하기에 대략적인 방향을 아는 것만으론 정확한 섬의 위치를 찾을 수 없다.

또한, 중첩균열, 균열지대, 구역의 주인, 죽음의 안개 등… 얼핏 평화롭게 보이는 하늘엔 갖가지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었으니, 항로를 벗어나 항해하고 싶다면 반드시 지도와 항해사가 필요했다.

처음 기관실에 들어왔던 날, 괜히 일행에게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라 경고했던 것이 아니었다.

"대충 이 정도로군." 

"…."

설명이 끝났을 땐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의견을 내 봤자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지금은 조용히 시키는 대로만 따르자고 결정했다.

"저희가 뭘 해야 되죠?"

"간단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다른 배를 찾아야 돼."

"다른 배라고…?"

일행의 눈이 커졌다.

다른 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 봤지만,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건가요?"

"아마도…."

스카이 아일랜드의 주민들은 첫 번째 섬보다 낮은 고도까지 내려올 이유가 없다.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이 있다면 웬만해선 '다른 차원'으로부터 흘러들어온 존재일 것이다.

"항로를 잃어버린 지금,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지."

"아, 맞아 그 때도…!"

한소혜가 무언가 깨달은 듯 중얼거렸다.

균열을 빠져나온 이후, 갑판에 서서 먼 곳의 하늘만을 쭉 바라보던 피넨스의 모습을 떠올린 것이다.

피넨스님은 아마 그때부터 이런 상황의 해결책을 찾고 계신 것이겠지?

모두를 위한 계획을 짜는 동안 자신은 축하 파티를 한답시고 소란을 떨었던 것이 괜히 부끄러웠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알 리 없는 피넨스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을 뿐이었다.

"다른 배엔 다른 지도가 있을 거다. 배의 항로를 따라가면 무사히 첫 번째 섬까지 도착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첫 번째 섬까진 15만 킬로미터나 남았다는 건 똑같은 것 아니요?"

가만히 설명을 듣던 라프헬이 의문을 제기했고, 피넨스는 그 질문에 답했다.

"섬이란 편의상의 명칭일 뿐, 실상은 거대한 고리 형태의 군도(群島)에 가까워. 비슷한 고도까지만 올라가면 돼."

"흐음, 그런 구조였나."

라프헬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가운데 이세형이 다시 물었다.

"아직 방법은 있다는 뜻이죠?"

"다른 배만 찾을 수 있다면."

피넨스의 말에 모두의 눈빛이 진중해졌다.

중첩균열에서 겪은 위기는 일행의 유대감을 형성하는 동시, 강렬한 생존 열망을 불러 일으켰다.

살아남기 위해선 피넨스라는 이 남자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길 잃은 자들은 어디로? (2)

항로를 벗어난 뒤부턴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가끔씩 등장하는 수백미터가 넘는 크기의 괴물.

구역의 주인으로서 고유 이름을 지니고 있는 녀석이지만, 일행들 사이에서는 그냥 '아귀', 혹은 '괴물'이라는 단순한 호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온다, 아귀다!"

마침 보초를 서고 있던 김태성이 있는 힘껏 소리쳤다.

멀리서 아귀가 등장했다는 신호!

그와 동시, 배 안은 급격히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균열로 들어가!"

"넷…!"

피넨스의 명령에 기관실에 있던 이세형이 뱃머리를 틀었다.

자동항해가 불가능해진 순간부터 모든 일행은 배를 수동으로 조종하는 법을 익혀 둬야만 했다.

덜컹! 덜컹!

아귀의 지느러미가 펄럭거리는 바람 때문에 배가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어떻게든 균열로 진입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스테이지 : 습격]

-당신들은 식사중인 고블린 다섯 마리를 발견하였습니다. 힘을 합쳐…

임무 목표가 떠오르기 시작한 뒤에야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에 꼭 한 번 이상 아귀가 나타나는 걸 보면, 일행의 이곳은 상당히 위험한 구역이 틀림없었다.

"후우, 저 괴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군."

"그러게요…. 정말, 요즘엔 배가 살짝만 흔들려도 깜짝 놀란다니까요."

라프헬이 중얼거렸고, 소혜가 한 마디를 거들었다.

예고 없이 등장하는 아귀를 피하기 위해선 쭉 하늘을 감시하다가, 녀석을 발견하는 즉시 균열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두려워했던 균열이 그들의 안전지대가 되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아귀도 수면을 취한다는 점일까?

깜깜한 밤엔 큰 소란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녀석이 습격해 오는 일은 없는 듯했다.

아니었다면 아마 일행은 한밤중에도 쉬이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 스테이지도 쉽네요. 고블린 다섯 마리 정도라면요."

"방심하지 마라. 천천히 상대하지."

"넵."

하지만 피넨스는 이런 꼼수가 언제까지나 통하진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루에 발견하는 균열의 개수는 많지 않은데다, 한 번 클리어한 균열은 그대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만약 균열을 빠져나오는 동시에 아귀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일행의 입장에선 그 때처럼 녀석이 자비를 베풀어 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스테이지 클리어!]

[크레딧 5C를 획득하였습니다!]

[함선에 부유석 5Kg이 축척됩니다!]

일행은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텨가며 필사적으로 하늘을 탐색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하루빨리 다른 배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망원경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탐사는 다섯이서 순번을 정해 경계를 서는 방식이었지만, 본인의 차례가 아닐 때도 일행들은 습관처럼 하늘을 내다보곤 했다.

목숨이 달린 일엔 누구도 소홀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상한 걸 찾았어요!"

"뭐야, 고딩, 다른 배냐?!"

"아뇨, 배는 아닌데… 저도 뭔지 모르겠어요."

5일째 되는 날, 일행은 해가 저무는 무렵 특별한 것을 마주했다.

'이건….'

이세형의 외침에 밤중에 갑판으로 나온 피넨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균열은 여러 개가 중첩될수록 거미줄 같은 잔금의 개수가 늘어난다.

두 개까지는 큰 차이가 없지만, 세 개 이상부턴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징그럽게 변한다.

그리고 지금 일행의 눈앞에 등장한 균열의 모양은….

"또 중첩균열이군."

잔뜩 충혈 된 안구와 같은 형태.

저 안에 몇 개의 차원이 중첩된 것인지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쓸데없는 기대는 버려라."

피넨스는 일행에게 당부했다.

중첩균열을 통하면 원래의 좌표 근처로 되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품을지도 모르는 헛된 생각은 그저 망상에 불과할 테니까.

"저길 들어가면 절대 살아나올 수 없어."

"…딱 봐도 그럴 것 같아요."

"이해하니 다행이군."

그래도 중첩균열을 발견한 것이 아주 의미 없진 않았다.

미지의 장소, 스스로의 위치조차 가늠할 수 없는 광활한 하늘에서 새빨간 균열은 하나뿐인 '고정 좌표'가 되어 준 까닭이다.

이후, 일행은 그것을 기준점으로 두고 여러 곳을 탐사해 나가기 시작했다.

최우선 목표는 물론 '다른 배'를 찾는 것이었지만 성장에도 결코 소홀히 하진 않았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근본적인 강함이었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지나.

[보유 크레딧 : 1428C]

차원의 바다에 떨어진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날 무렵엔 피넨스의 인벤토리에 제법 많은 크레딧이 쌓였다.

중첩균열을 벗어난 이후에도 1회차 노하우를 십분 발휘해 400C의 업적 보상을 수급했고, 일반 균열에서 250C정도를 더 얻었다.

나머지 일행들이 보유한 크레딧도 슬슬 500C가 넘어가며 하급정령에게 구매할 수 있는 선택지가 늘어났다.

"점점 예전의 마력이 회복되어 가는군."

스탯을 구매한 라프헬은 제법 만족스러운 기색이었다.

500크레딧으로 마력을 올리는 것은 지금의 그로선 가장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마법을 포함한 대부분의 스킬들은 시전자의 마력에 따라 효율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니까.

물론 인챈트처럼 마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예외도 존재하지만 말이다.

최대 20까지 고정스탯을 올려주는 그 스킬은 후반으로 갈수록 쓸모없어지는 대신, 초반엔 다른 스킬들에 비할 수 없는 효율을 보여주니 각자의 장단점이 존재하는 셈이다.

"저희도 스탯을 올리나요?"

"그러는 편이 좋겠지."

"뭘 올리는 게 좋을까요? 역시 방패를 잘 쓰려면 내구를 더 올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선택장애에 빠진 몇몇 이들을 위해 피넨스는 약간의 도움을 주기로 했다.

스킬도, 고유마법도 없는 이들에겐 아무 쓸모가 없을 마력은 우선 제외하고.

공격 담당인 김태성과 한소혜는 '기교'를, 방패전사인 이세형은 '힘'을 1씩 올렸다.

그리고 가장 많은 크레딧을 보유한 피넨스는 아무것도 구매하지 않았다.

'앞으로 얼마 안 남았군.'

스탯을 올리고 싶은 유혹보단 더 필요한 것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스킬 보조 마법진이다.

[마법진 : 트윈- (하급)]

-'하급' 이하의 '단일'스킬을 다음과 같이 강화합니다.

-스킬의 타겟 수 1 증가.

(가격 : 2000C)

스킬과 달리, 마법진은 혼자서 발동시킬 수 없다.

주(Main) 스킬과 결합하는 것만이 마법진의 사용 방법이었다.

예를 들어, '트윈-'이라는 마법진을 더하면 인챈트는 '트윈 인챈트'로 강화되며 버프 대상이 하나에서 둘로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마법진 : 더블- (하급)]

-'하급' 이하의 '공격'스킬을 다음과 같이 강화합니다.

-적중 시 동일 공격 재발동.

(가격 : 2000C)

하지만 특정 마법진을 아무 스킬에나 갖다 붙일 수는 없었다.

스킬과 마법진을 결합시키기 위해선 '등급'과 '속성'이 모두 일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법진 : 더블-]

(등급 : 하급), (속성 : 공격)

[스킬 : 인챈트]

(등급 : 하급), (속성 : 버프)

인챈트와 '더블-' 마법진이 결합될 수 없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등급은 '하급'으로 동일한 반면, 속성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피넨스로서는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한 명에게 같은 버프를 두 번 중첩시킬 수 있다면 인챈트의 효과는 이전과 비교할 수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트윈- 마법진.

두 명에게 동시 인챈트를 걸기만 해도 앞으로의 전투는 훨씬 수월해질 테니 피넨스는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마법진의 구매까지 더 필요한 크레딧은 572C. 그때까지는 쓸데없는 낭비를 줄이는 편이 좋겠지.

'그 책은 뭐였을까?'

스킬과 마법진의 구상을 떠올리다 보니 불쑥 얼마 전의 기억이 솟아올랐다.

영원의 도서관 구석에서 핏빛 오오라를 뿜어내고 있던 책의 정체는 아직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모르겠군.'

지그시 눈을 감은 피넨스는 고개를 저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던 핏빛의 책은 어쩌면 독이 든 성배일지도 모른다.

'핏빛'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내기 전까진 섣불리 손대지 않는 편이 좋으리라.

'의문은 하나 더 있었지.'

마침 무언가 떠오른 피넨스는 시선을 돌렸다.

갑판 위에서 경계를 서는 한소혜의 전신은 이따금 찬란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황금빛은 기회, 핏빛은 경고… 인가?'

여태껏 황금빛을 내뿜은 것은 한소혜 한 명 뿐이었다.

네 명의 일행 중 그녀에게만 특별한 현상이일어나는 이유는 왜일까?

각성을 이루면 특성도 함께 업그레이드된다.

피넨스는 훗날 '철의 군주'라는 특성을 온전히 파악한 뒤에 눈동자의 능력을 제대로 알아보자고 다짐했다.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아귀로부터 도망치고 다른 배를 탐색하는 와중에도, 일행은 미래에 찾아올 위험을 대비해 성장을 계속해 나갔다.

배에서 보내는 모든 시간은 찰나 같으면서도 영원처럼 느껴졌다.

일행들은 이제 피넨스가 따로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본인을 위한 수련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열성적으로.

다함께 죽음의 경계에 발을 들인 이후 자연스레 형성된 분위기였다.

허수아비를 때리거나, 대련을 하는 등의 운동은 모두의 기본적인 일과가 되었고, 피넨스를 제외한 몇몇은 전투를 대비해 합을 맞추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동질감 때문일까? 얼마 안 되는 시간동안에도 일행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주의! 동력장치에 이상이 발생했습니다!]

[먼 거리를 항해하는 경우엔 지속적인 함선의 정비가 필요합니다! 주요 장치를 교체 및 수리해 주세요!]

콰드득!

어느 날, 동력실에서 금속이 찌그러지는 듯한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조난된 배에서 나름대로 적응해 나가던 모두의 일상을 깨부수는 소리였다.

"뭣…!"

"어, 어떻게 된 거에요?"

"움직이지 말고 기다려. 확인해 보마."

모두가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피넨스는 기관실과 동력실을 여러 번 드나들었다.

가만히 머리를 짚은 그의 입이 열린 것은 한참 만이었다.

"동력이 망가졌다."

"무슨 뜻이오…?"

"배가 곧 추락할 거야. 긴급조치는 해 두었다만 열흘 정도밖에 버티진 못해."

모두에게 피넨스의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추락'이라는 단어 하나만이 뇌리에 박혀 메아리쳤다.

잠시 후, 이세형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수리할 순 없는 거예요?"

"지금으로선."

긴 항해에는 반드시 항해사, 그리고 정비사가 필요하다.

둘 다 없는 일행의 배가 여태까지 무사한 것이 사실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허어, 열흘이라니."

"그럼 빨리 배를 찾아야겠어요!"

모두는 절망하기보단 자신들이 처한 상황부터 받아들였다.

튜토리얼, 중첩균열, 아귀의 구역에서 살아남고, 그 이후에도 수많은 균열들을 지나오다 보니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은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의미하게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일행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초조함은 점점 커져만 가고 있었다.

* * *

또 며칠이 더 흘렀다.

끼릭- 끼릭-.

동력실의 쇳소리가 점점 거추장스럽게 들려왔다.

비상용 부품이 거의 다 마모되어가고 있다는 증거.

'길어야 5일 정도 버티겠군.'

피넨스는 계단을 올라 밖으로 나왔다.

석양이 지고 어둠이 잦아드는 저녁.

소혜는 홀로 밤하늘을 살피고 있었다.

"오늘도 한 척도 못 봤어요…."

피넨스를 돌아보는 소혜의 눈가에서 물기가 떨어졌다.

"그만 들어가 쉬어라."

"그렇지만…!"

"어차피 밤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배가 정처 없이 하늘을 떠돌아다닌 이후로 벌써 3주째.

예정대로라면 이미 첫 번째 섬에 도착하고도 1주일이 더 지났어야 하지만 지금 일행의 앞엔 깜깜한 어둠만이 펼쳐져 있었다.

"휴식은 언제나 중요하다."

"…알겠어요."

입술을 달싹이던 소혜가 고개를 푹 숙였다.

선실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엔 힘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 다들 겉으로 내색하지 않을 뿐 희망은 상당히 옅어져 있다.

20일이 넘도록 아무런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는데, 앞으로 남은 시간은 그 반절조차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긴, 다른 배가 있을 리 없겠지.'

사실, 발견하지 못하는 게 정상이다.

하늘의 좌표계는 X,Y축에 Z축까지 더해진다.

안 그래도 지구보다 광활한 세상에서 우연히 누군가를 마주친다는 것은 거의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였다.

'결국 이 방법밖에 없는 것인가.'

피넨스는 어둠속에서 빛나는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새로운 지도의 영점으로 삼은 중첩균열은 한밤중에도 섬뜩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렇다, 피넨스는 그곳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중첩균열에서 빠져나올 땐 좌표가 급격하게 변한다.

만약 운이 좋아 원래 구역으로 돌아간다면 항법 시스템이 다시 작동할 테고, '하늘지도'를 활용해 근처의 배들을 탐색할 수도 있으리라.

'내일 출발한다.'

이론상으로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는 방법.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 희박한 확률에 기대는 것만이 유일하게 남은 선택지였다.

길 잃은 자들은 어디로? (3)

피넨스는 바람을 맞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나 균열 외의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지만, 역시 밤하늘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결심을 마친 피넨스는, 잠시 바람을 쐬다 계단을 내려갔다.

"피넨스님."

"음? 다들 안자고 있었나?"

배 안으로 들어온 피넨스는 일행이 모여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휴게실에 옹기종기 앉아 방금 전까지 어떤 대화를 나누던 걸까?

우물쭈물하던 소혜가 결심한 듯 대표로 나서서 말했다.

"저희끼리 의논을 하고 있었어요."

"무슨 의논?"

"만약의 상황을 대신할 방법이요"

"말해 봐라."

이윽고 눈치를 보던 그녀의 입이 열렸고.

"끝까지 배를 못 찾으면… 결국엔 중첩균열로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핫, 피넨스의 입가에서 옅은 웃음이 터졌다.

궁지까지 몰린 자는 최선의 방책을 찾아낸다고 하던가? 인간의 생각이란 다 거기서 거기인 모양이었다.

"그러도록 하지."

"물론 저희끼리 짜낸 방법이 조금 건방지게 들릴 지도 모르지만… 네, 네?!"

"일찍 자 둬라. 내일 지옥에 들어가려면."

다들 각오하고 있다면 굳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꺼낼 필요는 없겠지.

짧게 말을 마친 피넨스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부우우우우우-! 

갑자기 거대한 소리가 배 안에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어…?"

일행은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아?"

"설마…!"

우당탕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쓰러진 의자들을 정리하지도 못할 정도로 다급하게.

'뱃고동?'

방으로 들어가려던 피넨스의 발걸음도 우뚝 멎었다.

처음엔 배 안에서 나는 소리인 줄로 알았다.

균열에 진입하고 빠져나올 때마다 비슷한 소리가 들려오곤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이 소리는 분명 바깥에서 들려오는 것, 소리의 질감 또한 처음 들어보는 종류다.

밖에서 생소한 뱃고동소리가 울려 퍼지는 의미는 하나뿐이리라.

순간, 무언가에 생각이 미친 피넨스는 큰 목소리로 모두에게 소리쳤다.

"잠깐, 멈춰!"

"…!"

모두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피넨스의 목소리엔 주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신비한 마력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섣불리 움직이지 마라."

"네…?"

고요 속에서 피넨스는 옆을 돌아보았다.

창밖에 비추는 것은 '다른 배'. 배 안엔 사람도 존재할 것이 분명했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어."

피넨스는 일행의 착각을 되짚어 주었다.

"너희는 갑자기 정체도 알 수 없는 외부인들이 자신들의 배를 빌려달라고 말하면 순순히 협조해 줄 건가?"

"그건 좀…."

"그래, 입장을 바꿔보면 서로 불편한 게 당연하겠지."

냉정하게, 하지만 정확하게, 안일한 생각을 일깨웠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고장 난 배를 갈아타야 하는 입장이다."

"그렇죠."

상대는 십중팔구 튜토리얼을 겪어, 약육강식의 원리를 알고 있는 인간들.

만약 의견이 충돌한다면… 그 때는 한쪽의 의견을 우선하는 수밖에 없으리라.

"싸움까지 각오해 둬라."

"…."

짧게 말했어도 피넨스의 말뜻은 제대로 전해졌다.

'싸움'이란 어쩌면 목숨을 빼앗는 행위.

물론 싸우는 건 최악의 경우일 테지만, 그 가능성만으로도 모두의 표정은 이전에 비할 수 없이 진중해졌다.

앞에 나타난 배는 구조선이 아닌 것이다.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네요…."

소혜의 중얼거림에 모두는 동의했다.

몬스터에는 좀 익숙해졌다 쳐도, 살인을 경험하고 싶은 이는 아무도 없었기에.

일행은 숨죽인 채 갑판으로 나왔다.

나무로 만들어진 함선 하나가 일행이 타고 있는 배의 근처까지 다가와 있었다.

"저 배인가?"

"좀 낡은 것 같은데…."

"너무 조용하군. 마치 아무도 없는 것 같소."

뱃고동이 멎자 밤하늘은 정적에 휩싸였다.

붉은 중첩균열의 옆에 두 대의 함선이 둥둥 떠 있을 뿐.

'반응이 없나.'

잠시 생각에 잠겼던 피넨스는 이세형에게 지시했다.

"기관실로 가서 배를 돌려라."

"가까이 갈까요…?"

"그래."

잠시 기다리자 두 배 사이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쿠웅-. 배가 충돌하며 조금 큰 소리가 울려도 건너편에서는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도 없는 배인가?'

빈 배일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파티가 전멸하면 배도 함께 소멸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균열을 빠져나오는 동시에 마지막 생존자가 사망하는 경우 배만 달랑 남는 경우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상황이 좋다.

일행은 아무런 갈등 없이 새로운 배를 차지할 수 있을 테니까.

"넘어간다."

"…."

일행은 피넨스를 따라 조심스레 갑판에 놓인 난간을 통해 배를 건너갔다.

스릉. 각자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배의 크기는 조그마해서 금방 모든 곳을 다 살펴볼 수 있을 듯했다.

끼익- 끼익-. 낡은 나무판자의 발판이 거추장스럽게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상당히 신경 쓰였다.

그렇게 숨죽여 걷던 중.

"…!"

피넨스는 손을 들어 모두의 움직임을 제지했다.

배의 구석에 쓰러져 있는 인영 하나를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남자인가?'

의식은 없지만 숨을 쉬는 걸로 보아 죽지는 않은 상태.

조금 더 살펴봤지만 이 낡은 배에는 죽어가는 남자 외엔 아무도 없는 듯하다.

입은 복장으로 정체를 추측해 봤다.

'귀족… 그리고 여신의 신도로군.'

피넨스가 미간을 좁혔다.

1회차 플레이의 지식이 기억을 스쳐갔다.

설정대로라면, 이 세상엔 만물을 지탱하는 3대 신이 존재한다.

남자의 망토에 새겨진 문양은 그 중 하나인 여신, 아리스텔을 상징하는 것.

한 마디로, 그는 아리스텔을 섬기는 귀족이다.

또한, 막 튜토리얼을 마쳤을 거란 처음의 예상과 달리, 남자는 본래 이 세계에서 살던 주민이란 뜻이었다.

'귀족이 왜 여기에 있지?'

피넨스의 의문이 더욱 깊어졌다.

스카이 아일랜드의 귀족이 이런 곳까지 내려올 일은 없다.

수 만 크레딧을 우습게 아는 그들에게 첫 번째 섬보다 아래. 하급 균열들만이 가득한 구역은 아무 자원도 없는 황무지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 난데없이 이곳에 배와 함께 나타난 이유도 의문이었다.

차원 균열에 진입하고 나올 때 뱃고동이 울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남자는 이 중첩균열을 지나왔다는 뜻일까?

아니, 균열이 닫히지 않은 걸 보면 '클리어'되지 않았다. 남자는 단순히 운이 좋아 균열에서 탈출할 수 있던 것일지도.

그렇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때.

"으으…."

갑자기 남자가 신음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허나, 아직도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커헉!

앞이 보이지 않는 듯 허공에 손을 휘적거리던 사내가 울컥 피를 쏟아내며 경련을 일으켰다.

1회차 플레이 당시에도 본 적이 있던 증상.

그 순간 피넨스가 모두에게 경고했다.

"물러서! 독에 중독됐다."

"독이라고요?"

"예상이 맞다면, 쉽게 치료제를 구할 수 없는 극독이다."

"허억…!"

일행이 깜짝 놀라 물러서는 와중에도 남자는 고통스러운 듯 버둥거렸다.

귀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 듯 주위의 목소리에도 반응조차 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같은 혼잣말만 중얼거렸다.

"로자리아… 로자… 리아…."

로자리아? 사람 이름일까?

누군가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남자의 목소리는 곧바로 끊어질 듯 희미했다.

다시 의미 모를 말을 횡설수설하는 그의 상태는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그의 눈꺼풀이 올라갔다.

"여기… 는…?"

순간 남자의 시선이 옆쪽으로 휙 돌아갔다.

몇 겹이나 되는지 모를 차원이 겹쳐 있는, 허공에 떠있는 핏발 선 눈동자.

중첩균열을 목격한 남자는 그것을 뚫어질 듯 응시하다가, 비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실패했어… 결국 다 끝난 게야…."

실패했다? 끝났다? 일행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피넨스만이 약간의 추측을 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운 좋게 균열을 탈출한 건가?'

일단, 남자의 배가 난데없이 중첩균열 곁에 등장했다는 것은 그가 방금 전까지 균열 안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하지만 클리어하진 못한 것 같군.'

균열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모든 목표를 달성하는 것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존재했다.

차원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통로를 발견하는 것, 특별한 탈출 아이템을 사용하는 것.

혹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자연스레 두 차원이 통합되는 경우도 있었다.

'대략적인 상황은 이해했다.'

배가 낡고 허름한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균열을 탈출하지 못한 탓에 원래의 배는 아직 차원의 저편에 묶여 있는 것이리라.

이 배는 아마도 긴급 탈출용 보조 선박이겠지.

"위험한 것 아닌가요…?"

"음."

소혜의 물음에 피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르르륵-

남자는 눈동자를 포함한 모든 모공에서 검붉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피는 끊임없이 흘러, 어느새 흥건히 바닥을 적셨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소혜가 조심스레 물었다.

"치료하는 방법은…."

"없다."

피넨스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피를 역류시키는 극독.

해독제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유일한 치료법은 독이 퍼지기 전에 신체부위를 잘라내는 것이지만….

"뇌까지 독이 퍼졌을 거야. 엘릭서를 써도 아무런 소용이 없겠지."

"그럼 이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

이어지는 이세형의 물음엔 피넨스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 침묵의 의미를 해석하지 못할 이는 아무도 없다.

남자의 얼굴은 점점 검붉은 피로 뒤덮여갔다.

이대로 놔두면 얼마 안가 죽을 것이다.

흐윽, 크르륵.

계속 피가래 끓는 소리를 내던 그의 초점이 돌아온 것은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대는… 누구지?"

남자의 희미한 시선이 피넨스에게로 향했다.

피눈물을 흘리는 그의 눈동자는 이전에 비할 수 없이 또렷했다.

피넨스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군진 몰라도… 한 가지를 부탁하고 싶네."

"무엇을?"

"내가 가진 모든 걸 주겠소. 대신… 내 딸을…."

잠시 초점을 잃었던 남자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되찾으며 힘겹게 옆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 딸을 구해줄 수 있겠는가?"

허공에 떠올라 있는 불긴한 거미줄. 몇 겹인지 모를 차원의 구멍을 향해서.

"딸은 균열 안에 있나?"

"그렇소."

이젠 피네스도 대략적인 상황을 이해했다.

남자는 딸과 함께, 혹은 갇힌 딸을 구하기 위해 균열로 들어갔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혼자서 탈출한 것이다.

"…!"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머지 일행들이 마른 침을 삼켰다.

다음의 피넨스의 대답으로 앞으로 자신들의 행보가 결정될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초조한 기다림이 이어지던 그때.

"불가하다."

피넨스의 입이 열렸다.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

"한 명을 구하기 위해 넷을 희생시킬 순 없어."

"...."

명백한 거절.

허나 그 누구도 피넨스의 결정에 대해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못했다. 그와 자신들을 위해 내린 현명하고 잔혹한 결단이었으며, 그만큼 중첩균열이 위험하다는 방증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대답에 대한 남자의 반응은 절망, 분노 어떤 것도 아니었다.

마지막 질문을 던진 표정 그대로 침묵하고 있을 뿐.

"…숨이 멈췄어요."

잠시 후, 그의 호흡이 사라졌음을 깨달은 소혜의 떨리는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

딸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남자의 최후는 너무도 조용했다.

* * *

남자는 비교적 운이 좋은 편이였다.

균열 밖에서 죽은 덕분에 시신을 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신은 마법사 라프헬의 마법으로 화장(火葬)했다.

화르르륵-!

강렬한 불꽃은 인간의 독과 살점과 뼈를 순식간에 통째로 집어삼켰다.

재는 하늘에 흩뿌리기로 했다. 여신 아리스텔을 섬기는 신관들이 하는 방식 그대로.

"이젠 어떻게 하실 건가요?"

소혜가 힘이 다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간단한 장례를 치루는 동안 일행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그동안 어느 정도 죽음의 순간을 대비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서 직접 죽음을 목격하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이 배엔 항법 시스템이 없군."

곳곳을 둘러보고 돌아온 피넨스가 혀를 찼다.

긴급 탈출용 선박에 구역의 지도가 장착되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래도 지금은 이 배로 옮겨 타는 수밖에 없겠지."

피넨스가 모두를 돌아보며 지시했다.

"필요한 물건들을 이쪽으로 옮겨. 특히, 부유석과 여신상은 반드시 있어야 해."

추락이 예정된 고급 함선과 그저 낡고 허름할 뿐인 배.

둘 중 어느 쪽이 나은 선택인지는 명확했다.

"3주간 지내온 곳을 떠나려니 조금 복잡한 기분이네요…"

이세형은 아쉬워하면서도 불평하진 않았다.

이젠 피넨스의 말을 따르는 것만이 살 길임을 알기 때문이다.

방의 물건들, 휴게실에 놓인 소파와 테이블을 옮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새로운 배의 선실엔 방이 2개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조금 불편해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테지.

일행은 착잡한 마음을 거두고 언젠간 꼭 살아남아 첫 번째 섬에 도착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어…?"

계획은 언제나 예상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구오오오오-!

멀리서 들려오는 괴성.

덜컹! 덜컹!

동시에 들이닥치는 강풍에 배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일행은 사색이 되었다.

"왜… 지금 저게…?"

"아직 해도 안 떴잖아!"

이삿짐을 옮기던 모두의 머릿속에 긴급 경고등이 번쩍였다.

이 순간에도 하늘을 지배하는 거대한 아귀와 일행과의 거리는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균열 속의 균열 (1)

"아귀다-!"

김태성이 있는 힘껏 소리쳤다.

밤하늘에 서서히 뒤덮이는 거대한 그림자를 발견한 순간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허나 그의 외침이 아니라도 위기를 인지하지 못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두 척의 배는 뒤집힐 듯 흔들리고 있었기에.

'어떻게 된 거지? 아…!'

피넨스는 순간 자신이 간과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된 1회차 기억에 따르면 저 괴물은 한밤중에 활동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뱃고동 소리 때문이다!'

외부의 자극에 의해 잠에서 깨어난 경우.

수면을 방해받은 녀석은 매우 화가 나서 방해되는 것을 집어삼키기 전까진 얌전해지지 않는다.

여태껏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까닭은 일행도 한밤중엔 균열에 들어가는 행동을 자제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죽은 남자의 배가 균열에서 빠져나오며 울린 경적이 녀석의 화를 돋운 것이다.

'도망갈 곳은….'

문득, 붉게 타오르는 중첩균열이 피넨스의 눈에 들어왔다.

이 순간 반사적으로 그 안쪽을 바라보게 되는 이유는 왜일까?

더 이상 피할 구석은 없었다.

결단을 내린 피넨스가 말했다.

"각오해라. 균열로 들어갈 거다."

피넨스가 모두에게 알리며 직접 조종대를 잡았다.

지금 살아남기 위한 방법은 이것밖에 없겠지.

"세형이가 아직 안 탔어요!"

주위를 둘러본 소혜가 한 명이 모자라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윽고 이세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헉헉, 자, 잠깐만요…! 저 버리지 마세요!"

"뭘 꾸물거리고 있어, 이 새끼야! 손에 든 거 당장 다 던져버리고 뛰어!"

"지금 배를 돌리면 위험하오!"

라프헬은 냉정하게 계산을 마쳤다.

아귀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일행에게 다가오고 있어, 잠시라도 속도를 늦추면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10미터, 20미터… 배가 방향을 틀자 두 배 사이의 간격은 점점 멀어지는 중,

"묶어서 쏴라."

"아, 이건…?"

"밧줄이다."

피넨스가 발만 동동 구르던 소혜의 등을 짚자, 그녀의 몸이 화악 빛나기 시작했다.

인챈트. 평범한 인간의 신체를 초인으로 만들어 주는 기술이 발동하자 순간적으로 소혜의 시야가 확장되었다.

'목표는…!'

밧줄이 묶인 화살 한 발이 수십 미터의 하늘을 가로질렀고.

카앙! 세형이 언제나 등에 걸고 다니던 방패에 정확히 박혔다.

"…맞췄어요!"

콰직! 마침 근처까지 다가온 아귀가 벌렸던 입을 덥썩 다물자 일행이 원래 타던 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직전에 난간을 박차고 뛰어내린 세형의 몸은 밧줄에 걸려 추락을 멈추었다.

"우리도 도와주마, 꽉 잡고 있어!"

"제발… 제발 버리지 마세요!"

일행은 빠르게 생명줄을 힘껏 움켜쥔 세형을 끌어올렸다.

"다들 놔요! 저 혼자 당기는 게 빨라요!"

'인챈트'가 부여되지 않은 나머지는 방해만 된다는 사실을 곧 깨닫고, 소혜만 밧줄을 잡아당겼다.

"조금만 더…!"

부우우우- 숨 돌릴 새도 없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배가 균열로 진입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렇게 일행이 탄 목재 선박은 무수한 핏줄이 겹쳐진 듯한 중첩균열 속으로 사라졌다.

* * *

"헉, 헉…!"

이세형은 계속해서 숨을 몰아쉬었다.

쩍 벌어진 아귀의 입, 흔적도 없이 사라진 배, 홀로 남겨질 뻔한 절망감까지, 방금 전의 기억은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기억이었다.

호흡이 잠잠해진 것은 한참 시간이 지난 뒤였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

세형의 자책에 소혜는 양손을 내저었다.

"어쨌든 피넨스님이 밧줄도 찾아주셨고, 나한테 그 신기한 마법도 걸어주신 덕분에 살았잖아! 아무도 널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니깐?"

대략적인 이야기로 사정을 알게 되었음에도 이세형의 떨림은 쉽게 멎지 않았다.

눈물을 터뜨린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저… 죽고 싶지 않아요."

일행은 갑작스런 세형의 반응에 무어라 탓하지 않았다.

혼자만 남겨질 뻔했던 그의 심정이 어떠할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기에.

"살 수 있을 거야."

"...."

"그래, 지난번에도 무사했잖아."

소혜가 먼저 세형을 다독이자, 다른 이들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야, 고딩. 그만 울고 방패나 들어."

"그래도 이곳은 저번의 중첩균열보단 한결 나은 것 같군. 적어도 시야는 선명하니까. 그렇지 않소? 으음…?"

동의를 구하기 위해 피넨스를 돌아본 라프헬은 문득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을 유지하던 피넨스의 안색은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예감이 좋지 않군.'

피넨스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직경 50미터의 탑 꼭대기.

바닥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탑의 높이는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그 외의 특이한 점이라면, 탑 중앙에 그려진 요상한 문양과, 탑의 가장자리를 둘러싼 채 선명하게 타오르는 초록빛 횃불 정도였다.

그 어디에도 중첩균열의 '일그러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얼핏 보기엔 안전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실상은 완전히 다르다.

"조금 전 배가 균열에 진입할 때, 주위의 풍경이 여러 번 변했던 것을 기억하나?"

피넨스의 질문에 모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들 이세형을 구하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그런 것까지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방금 전 우리는 균열의 입구를 세 번 지나쳤다."

"…?"

"이 균열이 다중균열이었다는 뜻이지."

"다중…? 중첩균열이 아니고요?"

또 튀어나온 모르는 용어.

피넨스는 짤막하게 설명해 주었다.

"균열 안에 또 균열이 존재하는 경우 그렇게 부른다."

그렇다, 중첩균열이 여러 차원이 겹쳐진 것이라면, 다중균열은 차원 안에 또 다른 차원의 통로가 존재하는 것.

"'마트료시카'라고 말하면 이해가 빠르겠군. 다중균열을 빠져나가려면 지나온 차원의 수만큼 스테이지를 연속으로 클리어해야 돼."

"그 말은 여기가 중첩균열이 아니었단 말이오?"

"아니, 그 역시 틀리지 않은 말이다."

"그, 그게 무슨…."

"가끔씩 '중첩'과 '다중' 두 특징을 모두 지닌 균열도 존재하지."

피넨스의 설명이 계속될수록 일행의 표정은 점점 심각해져 갔다.

"최악의 형태에 가까운 균열. 우리가 들어선 차원은 지옥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다."

[스테이지 : 제물]

-당신들은 어둠의 탑 위에 도착했습니다! 

-중앙의 제단에서 총 3마리의 언데드들이 순차적으로 소환될 것입니다! 더 많은 언데드를 처치할수록 크레딧 보상이 증가합니다!

-하지만 적이 너무 강력해지면 상대할 수 없을지도 모르죠. 그럴 때의 팁을 드리자면….

-언데드의 소환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누군가를 제물로 바치는 것뿐입니다.

(승리조건 1 : 한 명의 육신을 제단의 불꽃에 바칠 것)

(승리조건 2 : 적을 전멸시켜라!)

화르르륵! 기하학적인 문양 위에 초록색 불꽃이 피어올랐다.

'임무의 내용도 악질이군.' 

그 와중 메시지를 읽어 내린 피넨스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튜토리얼의 기억이 머릿속에 겹쳐졌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승리조건이 여러 개인 경우, 더 어려운 조건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런 곳에서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순간 피넨스는 스스로의 생각에 놀랐다.

방금 난 타인의 안위를 걱정한 것인가?

남들과 공감조차 할 수 없었던 내가…?

'…!'

반사적으로 가슴에 손을 대어 본 피넨스는 잠시 스스로의 반응을 믿을 수 없었다.

평정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심장이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무슨 현상이지…?'

전투를 앞둔 긴장감일까? 아니면 곧 다가올 위험에 대한 두려움인가?

어떤 이유든 감정에 의해 가슴이 흔들리는 건 이상하다.

그래, 스카이 아일랜드의 세계로 넘어온 뒤부터 이상할 정도로 심장에 거세게 뛰는 빈도수가 많아졌다.

생각해 보면, 독에 중독된 남자의 부탁을 거절한 이유도 동료를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서였지.

동료… 함께 힘을 합쳐나가는 그런 존재.

언제부터 나는 그들을 동료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진정해라."

"예…?"

작은 혼잣말에 소혜가 되물었다. 피넨스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무시해도 돼. 너에게 한 말이 아니야."

화아악! 잠시 기다리자 제단의 초록 불꽃이 거세졌고.

콰드드득- 바닥의 문양에선 끔찍한 소리와 함께 언데드 한 마리가 솟아올랐다.

피와 살점을 지니지 못한 인간의 실루엣은 흔히 해골 병사라 부르는 녀석이었다.

"모두 침착하게 대응해라. 여태껏 싸워온 것들과는 차원이 다를 테니."

피넨스는 평소처럼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일행의 두려움을 없애는 동시,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 * *

어두운 탑 꼭대기에 그림자가 춤추었다.

해골병사(Skeleton Warrior).

일반적인 게임에선 약한 잡몹을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여기선 그렇지 않다.

언데드가 지닌 힘은 생전의 능력에 비례하기에, 차원의 바다에 막 넘어와 스탯이 초기화된 자들에겐 그야말로 악몽과도 같은 녀석이다.

"커흑…!"

해골의 검을 막아낸 이세형이 신음을 터뜨렸다.

단순하지만 강력한 일격에 방패로 받아냈음에도 버티지 못하고 벽에 처박힐 수밖에 없었다.

해골이 지닌 힘과 속도는 평범한 인간의 압도적 우위!

그럼에도 일행은 쉽게 밀리지 않았다. 그동안 하늘의 균열들을 배회하며 상당한 스펙을 갖춘 덕분이다.

"좋아…! 공격이 조금씩 먹힌다!

파삭! 김태성이 망치로 있는 힘껏 해골의 갈비뼈를 후려쳤다.

그는 여러 종류의 무기들을 다 가지고 다녔다.  수많은 균열들을 지나오며 상황마다 효과적인 무기가 다르다는 사실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화악! 거기에 피넨스의 인챈트까지 더해지자.

"뭐야, 이 마법 쩔잖아!"

은은한 빛을 부여받은 김태성은 잔뜩 흥분하여 미친놈처럼 망치를 휘둘렀다.

그가 '망치'라는 무기를 택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해골은 화살이나 불 마법엔 별 효과가 없지만, 둔중한 둔기에 잘 부서진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으니 말이다.

여러 번 망치에 얻어맞자 그 단단한 해골의 갈비뼈도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했고.

파사사삭!

이리저리 나뒹굴던 해골은 결국 산산조각이 나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첫 번째 언데드를 처치하였습니다! (1/3)]

[잠깐의 휴식시간이 주어집니다!]

"잡았어! 내가 잡았다고!"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에 김태성이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처음으로 자신의 활약으로 적을 쓰러뜨렸다는 고양감도 잠시.

팟! 탑의 가장자리에 타오르던 횃불의 색깔이 단번에 노란색으로 변했다.

다음의 언데드가 소환되는 전조 현상이다.

"물러서라."

피넨스의 지시에 모두는 황급히 제단과 거리를 벌렸다.

그 와중에도 진형을 유지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화르르륵- 잠시 기다리자 제단에선 다시 한 번 거센 불꽃이 피어올랐고, 문양이 새겨진 바닥 위엔 새로운 언데드가 소환되었다.

얼핏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실루엣.

하지만 그 괴상한 몸짓과 부자연스러운 관절의 뻣뻣함은 그것이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강시…!'

두 번째로 소환된 존재를 확인한 피넨스는 침을 한 번 삼켰다.

강시. 해골병사보다 월등한 힘과 내구를 지닌 동시, 약간의 지능까지 보유한 언데드.

녀석을 사냥하기 위해선 이쪽도 큰 위험을 각오해야만 한다.

'자칫하면 여기서 전멸할 수도 있겠군.'

앞니를 살짝 깨물며 상태 창을 힐끔 보았다.

[마법진 : 트윈- (하급)]

-'하급' 이하의 '단일'스킬을 다음과 같이 강화합니다.

-스킬의 타겟 수 1 증가.

아귀에게 쫓기던 급박한 상황에서, 모든 크레딧을 탈탈 털어 정령에게 구매한 하나의 물품.

해골을 잡을 때는 사용하지 않았다.

'마력'의 수치가 낮은 채로 마법진을 발동시키는 것은 정신력의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시는 평범하게는 쓰러뜨릴 수 없는 적이다. 그러니 지금이 바로 비장의 패를 사용할 때!

'트윈 인챈트!'

[마력이 부족합니다!]

[마법진의 발동으로 인해 정신력이 빠르게 고갈됩니다!]

순간 찾아온 현기증에 몸이 휘청거렸다.

한번 이를 질끈 문 피넨스는 정신을 다잡고 빠르게 몸을 가눴다.

우우웅- 

이윽고 허공에 떠오른 마법진이 빠르게 회전하며 두 명의 신체에 은은한 빛이 깃들었다.

하나는 피넨스 본인에게,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마법사 라프헬에게!

'잡을 수 있어!'

소환된 해골은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몇 초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만 서 있었다.

그 모습으로 추측컨대, 언데드는 소환된 직후가 약점! 

그 찰나의 빈틈을 찌르는 것이 언데드를 가장 효과적으로 죽일 수 있는 방법이리라.

'됐다…!'

강시의 소환이 끝나기 전에 피넨스는 제단을 향해 돌격했고.

예상은 적중했다.

푸욱! 날카로운 대검은 강시의 가슴과 제단의 벽을 동시에 꿰뚫었다.

"마법사, 지금이다!"

라프헬이 마법을 캐스팅하는 동안 피넨스는 있는 힘껏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제단에 박힌 강시를 그 자리에 고정해 두기 위해서였다.

인챈트를 사용해 잔뜩 증가한 피넨스의 힘으로도 발버둥치는 강시의 움직임을 붙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큭…!"

녀석의 발악을 까까스로 버티는 사이.

"끝났소!"

라프헬의 마법이 완성되었다.

위잉, 위이잉-. 강시를 겨눈 지팡이의 탄두엔 순식간에 만들어진 마법진이 회전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령에게 구매한 것이 아닌, 세월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기술.

"바로 쏴!"

마법이 발동되기 직전, 피넨스는 검의 손잡이를 놓고 옆으로 비켜섰다.

시퍼런 불꽃이 강시의 온몸을 덮은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균열 속의 균열 (2)

화르르륵!

제단에서 피어오르는 노란색 불꽃에 라프헬의 푸른 불꽃이 덧씌워졌다.

탑 중앙에선 멀리 떨어진 일행들의 피부에도 전해질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발생했다.

'한 방에 안 죽는다고?'

그러나 온몸이 불꽃에 뒤덮인 채로도 강시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녹아내리는 팔로 스스로 가슴에 박힌 검을 뽑아내고 있었다.

챙그랑-!

피넨스의 검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지자, 모두가 기함을 토했다.

"무슨, 저런 자식이!"

김태성은 기가 질렸다.

전신이 불타는 채 삐거덕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오는 강시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화력만으론 가장 강한 마법이었거늘…."

라프헬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그가 태어난 차원에도 저러한 괴물은 없었다.

물론 지구엔 강시를 비롯한 몬스터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기에 나머지 일행이 느끼는 오싹함은 라프헬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온다!"

하지만 넋 놓고 있을 틈은 없다.

천천히 걷던 강시는 순식간에 속도를 높이며 이쪽으로 돌진해 오기 시작했으니.

"엇, 이, 이쪽으로 와요…!"

방패를 들고 있던 이세형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상대의 목표가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즉시 방패를 들어 올려 온몸을 가렸다.

"막지 말고 물러서!"

그 모습을 목격한 피넨스가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콰직! 강시의 손가락은 방패를 너무나도 쉽게 뚫어버렸다.

이어서 거추장스럽다는 듯, 손날을 수평으로 휘두르자 굳건한 방패는 두부처럼 잘려나갔다.

"헙…!"

이세형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근 몇 주간 수많은 몬스터들의 공격을 막아내고도 멀쩡했던 자신의 방패가 이렇게 쉽게 파괴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허공에서 강시와 눈동자가 맞닿는 순간 이세형은 죽음을 예감했다.

"X발 새끼가!"

그 순간, 재빨리 움직인 김태성이 있는 힘껏 검을 내리쳤다.

"뭐, 뭐야… 안 들어가?"

카앙! 거대한 금속질의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검과 살이 부딪친 거라곤 생각할 수 없는 소리.

혼신의 힘을 다한 김태성의 일격은 강시의 어깨를 살짝 움찔거리게 만드는 데 그쳤다.

스르륵-. 무표정한 눈동자가 자신에게로 옮겨가는 순간 김태성은 형언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다음 순간, 강시의 손이 번쩍였다.

무게중심을 고려하지 않은 기괴한 움직임.

하지만, 김태형의 눈과 몸은 그 속도에 반응조차 할 수 없다.

커헉! 피를 토하는 비명과 함께 수 미터의 허공을 날아가던 그는 간신히 탑의 절벽 가장자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아직도 숨이 붙어있는 까닭은 그저 피넨스가 반사적으로 '인챈트'를 걸어 근력을 높여 준 덕분이었다.

"한소혜!"

"넷…!"

파악! 갑작스레 강렬한 피륙음이 들려왔다.

앞으로 고개를 젖힌 강시의 뒤통수엔 화살 한 발이 박혀 있었다.

순간적으로 인챈트를 부여받은 소혜가 멀리서 화살 한 발을 쏘아낸 것.

"어어어…?"

하지만 정작 화살을 명중시킨 소혜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지금의 자신은 그의 마법 덕분에 초인이 되었는데. 분명 머리를 뚫리면 죽어야 하는데…?

뚜둑.

강시는 대가리에 박힌 화살을 꺾어내면서도 아무런 데미지를 입지 않은 것 같았다.

화르륵!

때마침 다시 한 번 덮쳐오는 불꽃!

고개를 돌린 피넨스의 시야에 지팡이를 뻗고 있는 라프헬의 모습이 들어왔다.

"피했다고…?"

라프헬도 마찬가지의 신음을 흘렸다.

푸른 불꽃의 온도는 석재로 된 탑의 바닥을 녹일 만큼 뜨겁지만, 닿지 않아서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

해골과 달리 강시는 약간의 지능을 보유한 언데드.

약간의 지능이라도 무엇을 가장 경계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런!'

강시의 시선이 라프헬에게로 돌아간 순간, 피넨스의 머릿속에 비상종이 울렸다.

마법사인 라프헬은 가장 강력한 공격수단을 지닌 반면, 근접전에 취약해.

만약 그가 죽는다면 전력의 절반 정도가 사라지는 셈이다.

'그건 안 돼!'

곧바로 인챈트를 자신에게 옮겼고.

'지금은 나밖에 녀석을 붙들 수 없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검을 다시 집었다.

치이익! 금속에 남아있는 열기에 타들어가는 통증이 엄습했지만, 이를 악물며 고통을 견뎌냈다.

번쩍!

은빛의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

검날이 강시의 피부를 스치자 손아귀엔 둔중하지만 약간의 벤 감각이 전해져 왔고.

스르륵-. 이어서 녀석의 눈동자가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근력을 강화하면 벨 수 있어.'

공격이 먹힌다는 사실은 확인했다.

남은 건 머릿속의 계획을 실현시키는 것 뿐.

"와라."

피넨스는 검을 까딱거렸다.

뒤늦게 자신의 제스처에 놀랐다.

내가 상대를 도발하는 법을 알고 있었던가?

부웅- 그 즉시 강시의 손날이 허공을 갈랐다.

녀석의 손은 빠르고 단단하니 마주 검을 부딪치는 것보단 피하는 게 올바른 선택이다.

피넨스는 침착하게 공격의 궤도를 읽고 물러났다.

후웅! 그러자 강시의 손날은 덧없는 허공을 베었지만.

'한 번 더 온다…!'

녀석의 공격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관성을 이어받아 회전하는 두 번째 할퀴기!

피넨스는 그것에도 반응했다.

흥분하지 않고 평정을 유지하기만 한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다.

강시의 연격은 바람을 일으키며 피넨스의 눈썹을 살짝 흔들 뿐이었다.

파악!

갑자기 강시의 머리가 확 젖혀졌다.

멀리서 쏜 소혜의 화살이 적중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직 인챈트가 유지되고 있었는 그녀는 강시를 상대하는 데 있어 훌륭한 지원군이다.

'잘했다.'

피넨스는 그녀가 만들어 준 잠깐의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카앙! 검을 후려쳐 녀석의 팔을 옆으로 치워냈고.

'똑같이 돌려주마.'

관성을 이어받아 그대로 회전하며 팔을 내뻗었다.

은빛의 반월이 녀석의 시야를 반으로 갈랐다.

아무리 단단한 몸을 지닌 괴물도 안구까지 단단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파악! 섬광이 지나가는 동시 녀석의 한쪽 눈에선 피가 튀어 올랐다.

'후우….'

아찔한 현기증에 피넨스의 몸이 비틀거렸다.

낮은 마력으로 장시간 마법진을 사용한 반동이다.

하지만 입술을 깨물며 정신을 다잡았다.

지금 녀석을 맞상대할 수 있는 것은 자신 뿐.

나머지 네 명의 목숨은 오로지 이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제발… 조금만 더 버텨라.'

콰드득! 점프해서 내리친 녀석의 손바닥이 탑의 바닥을 쥐어뜯었다.

강시의 손은 스치는 것만으로 인간의 뼈를 아작 낼 만큼 강하고 단단하지만, 닿지 않아서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뒤쪽이 낭떠러지다.'

어쩌다보니 탑의 가장자리까지 몰리게 된 피넨스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높게 뛰어오르자 녀석의 손은 애꿎은 탑의 난간들만을 파괴할 뿐이었다.

단단한 벽돌로 이루어진 구조물들이 도미노처럼 부서져 나갔다.

'음?'

문득, 피넨스의 눈동자에 황금빛 광휘가 비추었다.

몇 번이고 발동시키려고 했지만 정작 원하는 때는 반응이 없던 '철의 군주'의 능력.

이번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것은 특정의 사물이 아니었다.

그저 공기 중에 흐르는 물결.

황금빛 물결은 마치 파도처럼 허공에 나타나고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금방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은 올바른 '검'이 지나가야 할 경로. 즉, 검로(劍路)다.

피넨스는 그 물결이 지나는 길을 따라 검을 움직였다.

아래서 위로.

각도를 비틀어 검을 올려 베는 순간, 깨달았다.

'이런 것이었군.'

자신의 몸은 제자리에 발을 딛고 선 반면, 강시의 몸뚱이는 허공에 살짝 떠서 밀려나고 있었다.

간단한 작용 반작용의 원리다.

충돌로 받는 힘은 양쪽이 동일하니 힘의 방향이 지면을 향할수록 자세는 안정되는 것.

강시의 몸이 아무리 단단해도 그 몸무게는 인간과 큰 차이가 없다면 기술을 통해 합의 우위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유용한 기술이다.'

무게중심을 아래에 두는 것만으로 충격의 방향이 바뀌었고, 싸움의 형세마저 바뀌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기뻐하긴 이르다.

피넨스는 평정을 유지하며 검로를 따라 검을 휘둘렀다.

파악!

이따금씩 강시의 몸에 박히는 소혜의 화살 또한 제법 도움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화아악!

또다시 피넨스의 눈에 한 가닥의 불꽃이 타올랐다.

이번엔 황금색이 아닌 핏빛의 불꽃이.

[하급 강시]

-아주 단단한 몸을 지니고 있다. 특히, 손과 팔의 강도는 강철과도 같다고 한다.

-기괴한 움직임으로 민첩하게 움직인다. 마나감지 능력도 수준급!

-그러나 경이로운 육체능력에 비해 마법의 저항력은 낮아,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아 둘 수만 있다면 비교적 쉽게 처치할 수 있다.

황금색, 핏빛.

광휘의 색깔만 다를 뿐 양쪽 모두 비슷한 능력이다.

피넨스는 이제 철의 군주의 특성이 언제 발동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해야만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성 설명엔 그렇게 적혀 있지만, 사실은 거기서 한 가지 조건이  추가된다.

'강한 감정을 억제할 때.'

튜토리얼에서 철의 군주의 능력이 가장 제대로 발휘됐던 이유 역시 같은 맥락이리라.

인간이라면 죽음의 위기엔 공포에 질려야 마땅할 텐데, 자신은 정신병 덕분에 강제적인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

소혜가 내뿜는 황금빛을 처음 발견한 것도 이 세계에 넘어와 마주한 상황들에 크게 동요하던 때였다.

그렇게 솟아나는 감정이 강제로 억제될 때마다 '철의 군주'의 능력이 발동되었던 것이겠지.

'처음의 방법이 정답이었나.'

메시지를 확인한 피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금의 길이 검을 가르쳐 주고, 핏빛의 경고등이 강시의 약점을 알려주는 지금, 녀석을 죽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카앙! 카아앙!

몇 번의 금속음 이후 어느새 강시는 탑 중앙의 제단까지 몰리게 되었다.

'붙잡았다.'

푸욱! 힘껏 찌른 피넨스의 검이 재차 강시와 제단을 통째로 꿰어냈고.

파바바박!

그 위에 소혜의 화살비가 쏟아졌다.

검뿐만 아니라 단단한 화살대까지 강시의 팔과 다리를 고정시키자 녀석은 벽에 박힌 채 옴짝달싹할 수 없는 꼴이 되었다.

"지금이다."

"계속 기다리고 있었소!"

지팡이를 겨눈 라프헬의 몸엔 은은한 일렁임이 감돌고 있었다.

그것은 스킬, '인챈트'가 지니는 고유의 이펙트!

화아아악-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릴 푸른 불꽃이 또 한 번 강시의 몸을 완전히 휘감았다.

이 싸움을 결정짓는 한 방이었다.

"으아아!"

파악! 파악! 소혜는 불꽃에 휘감긴 강시를 향해 끝도 없이 활을 쏘아댔다.

잠깐 만에 수십 발이 꽂히며 녀석의 몸은 고슴도치와 비슷한 형태가 되었다.

[두 번째 언데드를 처치하였습니다! (2/3)]

[조금 더 휴식시간이 주어집니다!]

"허억… 허억…!"

강시가 움직이지 않게 된 후에도 소혜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너무 집중한 탓에 메시지를 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만."

파바박! 강시의 머리에 꽂히는 화살의 수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그만! 이제 됐어."

"아."

재차 이어진 피넨스의 부름에 그제야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활시위를 놓았다.

팟! 때마침 탑의 가장자리를 둘러싼 횃불이 노란색에서 보라색으로 바뀌었다.

그렇다, 세 번에 걸친 언데드의 소환은 아직 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이걸로 끝이 아니니까."

"죄, 죄송해요…."

"일단 호흡부터 가다듬어."

"네…!"

싸움이 끝나고 일행이 정비를 마치는 사이.

피넨스는 방금 퇴치한 강시의 스펙을 냉정하게 분석해 보았다.

'너무 강해.'

힘 스탯은 대략 10. 내구는 최소로 잡아도 20 정도.

그런 적은 훨씬 나중에 등장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첫 번째 섬 이전의 구간에서 마주칠 만한 적이 아니다.

실제로 일행은 어제까지만 해도 고블린이나 까마귀 따위를 잡고 있지 않았던가?

아무리 다중균열이라 해도, 근처에 존재하던 다른 균열들에 비해 너무 수준차이가 컸다.

'처참하군.'

잠시 일행의 상태를 살펴본 피넨스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패전사인 이세형은 방패를 잃었고, 검사였던 김태성은 내장이 파열된 듯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는 중.

고위마법을 연속으로 사용한 부작용일까? 라프헬의 안색도 창백했다.

그나마 한소혜만이 비교적 멀쩡했다.

'만약 세 번째 적이 이 이상이라면….'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피넨스도 마찬가지였다.

현기증 때문에 눈을 감으면 그대로 잠들 것 같은 기분.

마력도 충분하지 않은 채 마법진을 결합한 스킬을 사용한 대가였다.

'이 다음은 절대로 이길 수 없다.'

다섯 명 모두가 무사하려면 다음의 적이 강시 이하의 스펙을 지니고 있어야만 했다.

문제는 더 강한 녀석이 등장할 것 같은 예감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침묵과 긴장이 흐른 것도 잠시.

화륵! 탑 중앙의 제단에선 세 번째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마음이 부서진 날 (1)

제단에서 활활 피어오르는 보랏빛의 불꽃.

일행은 중앙의 제단으로부터 쉽게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어떤 적이 등장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만약 저희가 이길 수 없는 적이라면… 그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거죠…?"

이세형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숨겨진 뜻을 짐작하지 못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승리조건 1 : 한 명의 육신을 제단의 불꽃에 바칠 것)

모두가 손쉽게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

하지만 아무도 그 방법을 입 밖으로 꺼내진 못한다.

한 명의 희생자가 자신이 될지도 모르는 까닭이다.

타닥, 타닥, 한동안 제단의 불꽃소리만 들려오던 그 때.

"최악의 경우엔 내가 희생하겠소."

"…!"

모두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예상치 못한 답변을 꺼낸 것은 바로 라프헬이었다.

"어차피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나보단 젊은 자네들이 살아남는 게 맞겠지."

"넷…?"

"할아버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 날 이후로 오랜 생각을 해봤소.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 이곳은 사자(死者)들의 세계가 아닐까."

일행의 외침에도 라프헬은 자신의 말만을 계속해 나갔다.

"평생을 추구했던 경지에 닿아보기도 했고."

잠깐 피넨스를 힐끗거리다가.

"한 번 죽어봤던 몸인데 두 번째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는가."

다시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라프헬은 고블린과의 전투에서 죽었던 이름 모를 용병을 회상하고 있었다.

발할라로 가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켜 여럿의 목숨을 구했던 그 남자.

머지않아 최후를 맞을 거라면 그와 비슷한 죽음을 직접 선택하고 싶었다.

"그런…!"

"하지만…."

순간, 몇몇 일행은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의 말에 슬퍼함과 동시에 치미는 안도감에 자기혐오를 느꼈기 때문이다.

혹여나 라프헬이 결심을 바꿀까 두려워 아무 말도 잇지 못하는 스스로가 역겨웠다.

피넨스의 목소리가 일행의 귓가에 박힌 것은 그렇게 어색한 정적이 계속되던 때였다.

"아직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돼. 일단 상대해 보고, 차선책을 찾는 건 그 다음이다."

"그, 그래요!"

"하긴. 아무도 안 죽는 게 제일 좋죠."

그렇게 어색한 기류는 가라앉았지만.

'뭐지.'

피넨스는 습관적으로 가슴에 손을 올렸다.

'이 기분은….'

자신의 상태도 나머지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곧 깨달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곧 동료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상실감, 그럼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 복잡한 기분까지.

어째선지, 이 세계로 넘어온 이후 감정의 역치가 점점 낮아져 가고 있는 듯했다.

'동요한 건가? 내가…?'

잦은 자극으로 정신병이 치료되어 가는 것일까?

죽음을 두려워하고, 타인을 사지로 내모는 것을 주저하고, 고작 3주간 함께해 온 이들을 자연스레 동료라 여기는 것.

자신은 평범한 인간이 당연하게 여기는 감정들을 절대 가질 수 없을 터인데.

'일단은 무시한다.'

피넨스는 상념을 떨치며 강제로 마음을 안정시켰다.

전보다 어려워졌을 뿐,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 것은 아직 충분히 가능했으니.

지금은 쓸데없는 감정을 내려놓고 적을 쓰러뜨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다들 준비해라."

피넨스는 불꽃을 향해 검을 겨누며 일행에게 지시를 내렸다.

"적이 나타나는 즉시 공격한다."

소환 직후의 언데드가 방어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강한 적도 기습을 성공시키면 쉽게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큿, 무슨 불꽃이…!"

"핫, 뜨거!"

화르르륵! 세 번째의 불꽃은 일행의 접근을 허용할 정도로 무르지 않았다.

제단에서부터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열기에 일행은 눈을 질끈 감으며 한 발짝 물러섰다.

"흐아악!"

활시위를 겨누던 소혜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뒤를 돌았다.

마치 한낮의 태양처럼, 보라색 불꽃은 시간이 갈수록 잦아들기는커녕 점점 그 기세를 더해갔다.

마치 탑 전체를 열기로 삼켜버리려는 것처럼.

불꽃이 멎은 것은 일행이 탑 가장자리까지 물러선 뒤였다.

'인챈트!'

열기가 사라지자마자 피넨스는 탑의 중앙으로 돌진했다.

언데드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기습을 한 방 먹이기 위해서였다.

은은한 빛에 감싸인 검이 쏜살같이 수십 미터를 질주해 허공을 찔렀고.

카앙-!

"웃…!"

강렬한 반발력과 함께 피넨스는 상당히 먼 곳까지 밀려났다.

적을 제대로 목격한 것은 그 뒤였다.

"어라…?"

활시위를 당기던 소혜의 손이 정지했다.

"저건… 사람 아니에요?"

"어린애 같은데?"

김태성과 이세형이 가만히 중얼거렸다.

탑 중앙에 가만히 눈을 감고 선 10살 남짓한 소녀의 생김새는 언데드라고 말하긴 너무도 평범했다.

'…이건.'

탑의 중앙에 가까웠던 피넨스는 소녀의 얼굴을 남들보다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그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꺼림칙한 위화감이 온몸의 모공을 찔러대는 기분이 느껴진다.

머지않아 소녀의 눈꺼풀이 올라가자 위화감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창백한 피부, 마네킹처럼 무표정한 얼굴, 보통 사람보다 1.5배는 더 큰 눈동자는 인간의 것이라고 말하기 힘들었기에.

'이게 뭐지…?'

소녀는 크고 동그란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다.

1회차 플레이 경험을 지닌 피넨스도 소녀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저토록 소름끼치는 생김새를 지닌 존재를 표현하는 단어는….

'귀신?'

그렇다, 귀신이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

소녀가 내뿜는 압도적인 분위기에 일행은 바짝 굳었다.

왠지 움직여선 안 될 것 같은 기분.

모든 움직임이 멎은 탑 꼭대기는 어색한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화아아악! 

갑작스런 불꽃이 소녀를 뒤덮은 것은 바로 그 때.

"허억, 허억…!"

옆을 돌아본 피넨스의 시야에 라프헬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전방으로 지팡이를 겨눈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방금의 불꽃은 라프헬의 공격이었던 듯했다.

라프헬의 안색은 소녀의 얼굴만큼이나 창백했다.

"저것은…."

잠시 후 연기가 걷히자 소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씨익-.

입이 길게 찢어진 그녀는 잇몸이 훤히 보일 정도로 소름끼치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저것은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것이오!"

재차 마법을 준비하는 라프헬이 모두에게 외쳤다.

그 순간이었다.

파악!

갑자기 들려오는 기분 나쁜 소리.

모두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소녀가 움직이는 낌새조차 못 챘는데, 무언가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그건 바로, 라프헬의 머리였다.

"어어…?"

시간이 정지했다.

아니, 정지한 것처럼 느껴졌다.

데굴데굴 굴러가던 노인의 머리가 발치에 떨어져 내릴 때 까지도 일행은 멍한 표정이었다.

너무도 갑작스런 동료의 죽음.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모두가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인지하기까진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촤르르륵!

라프헬의 시체가 폴리곤 조각들로 변해 부서져 간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함께했던 동료가 그렇게 덧없이 사라지기 시작한 뒤에야 일행은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으아아아!"

김태성이 고함을 내지르더니, 갑자기 라프헬의 시체를 들고 탑의 중앙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시체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제단에 불태울 생각인 듯했지만.

팟!

다시 소녀의 눈꺼풀이 확 올라갔다.

커다란 눈동자는 김태성을 돌아보며 아까의 그 소름끼치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서걱!

끔찍한 파육음이 재차 들려온 것은 그 찰나.

김태성은 달리던 자세 그대로 휘청거리며 바닥에 엎어졌다.

양쪽 다리가 잘린 채론 한 발자국도 더 움직일 수 없다.

X발…X발…!

금방이라도 목소리가 사그라질 듯한 욕지거리를 내뱉던 그의 의식은 점차 희미해졌다.

하반신이 잘리는 쇼크로 인해 기절한 듯했다.

"...."

아무도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누군가 한명쯤 죽을 것을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너무 큰 두려움에 마음이 삼켜진 탓일까?

털썩-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는 소혜의 모습을 보면 일행의 심정은 후자에 가까우리라.

"어어…?"

소혜는 바닥을 짚으며 허우적거렸다.

몸에 힘이 빠져 제대로 서있을 수가 없었다.

뱀과 마주친 개구리가 움직이지 못하는 까닭은 움직이는 순간 자신이 잡아먹힐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일행의 심정이 딱 그러했다.

귀신은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데 그 누구도 털끝조차 움찔거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

쿵! 쿵!

피넨스의 전신에 떨림이 전해져 왔다.

굳이 가슴에 손을 대어보지 않아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후우, 심호흡을 하며 강제적으로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는 평소보다 약간 더 시간이 걸렸다.

"...."

간신히 평정을 되찾은 뒤엔 상황을 분석했다.

하반신이 사라진 인간이 오래 살진 못할 것이 분명하니 생존자는 자신을 포함해 세 명.

"저, 몸이 안 움직여요…."

팟! 소혜가 중얼거린 순간 또 귀신이 번쩍 눈을 떴다.

모두의 심장이 철렁했지만… 다행히 그 이상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쥐죽은 듯 숨죽여 기다리자 귀신의 눈꺼풀이 스르르 닫혔고.

…이제 더 이상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언제 귀신이 눈을 뜨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소리인가?'

소환 직후의 순간을 제외하면, 녀석은 소리에만 반응했다.

반대로,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으면 제자리에서 눈을 감은 채 얌전히 있는 듯했다.

'이러면 어떻게 해야….'

힐끗 시선을 돌려 한소혜와 이세형을 살펴보았다.

둘 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닌 듯했다.

이럴 때 철의 군주의 능력이라도 발동한다면 좋으련만, 원하는 대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철의 군주는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을 유지해야만 한다.

허나, 가라앉힌 심장이 자꾸만 요동치기 때문인지 지금은 핏빛, 황금빛, 그 어떤 빛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

하지만 가만히 서서 평정이 찾아오길 기다릴 수만은 없다.

기절한 김태성이 라프헬처럼 '시체'로 변해 흩어진다면 또 새로운 희생자가 생겨날 수밖에 없으니까.

그의 몸뚱이가 남아있는 지금이 그나마 최소의 희생으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때였다.

잠깐의 생각을 마친 피넨스는 천천히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든 듯 눈을 감은 소녀의 눈꺼풀이 올라가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 * *

'죽을 것 같아…!'

이세형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라프헬이 죽음을 맞이한 순간부터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여기서 죽는 건가? 죽겠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공포가 심하면 숨쉬기조차 힘들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죽고 싶지 않아!'

누군가처럼 시체를 제단에 태우거나, 활을 겨눌 엄두도 내지 못했다.

석상처럼. 가만히 선 채 어서 이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뿐.

'아….'

그래서 피넨스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모습을 봤을 때 너무도 신기했다.

어떻게 그는 이 상황에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인가?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없는 듯, 언제나 앞장서는 그를 바라보면 마음속의 떨림이 한결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래, 그의 뒤만 따라간다면 살 수 있다!'

이세형은 지난 일들을 상기하며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았다.

그 덕분인지, 피넨스가 기절한 김태성을 들어 올리는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촤라라락!

반쪽만 남은 김태성의 몸뚱이는 서서히 부서지는 중. 머지않아 라프헬처럼,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이세형은 이를 질끈 물며 자기혐오를 억눌렀다.

생사가 오가는 가운데의 죄책감은 사치라는 것을 피넨스가 알려주고 있었다.

'헙…!'

하지만 소녀는 고요 속의 작은 발걸음소리마저 인식하는 것인가?

팟! 다시 한 번 귀신이 안광이 번쩍이는 순간, 이세형은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

다행히 이번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도 죽지 않은 채 재차 소녀의 눈꺼풀이 닫혔다.

'너무 위험해!'

피넨스가 나서는 걸 보고 조금 용기를 얻자, 이번엔 위기감이 엄습했다.

만약 저 남자가 여기서 죽는다면? 남은 이들끼리 살아남을 수 있을까?

특히, 마법도, 검도, 활도 다루지 못하는 자신은, 부서진 방패 하나만으론….

'방패.'

순간, 이세형의 뇌리가 번쩍였다.

수십 미터 떨어진 발자국소리까지 감지하는 귀신의 경계를 뚫기 위한 방법.

'방패를 던져서 도와줄 수 있나?'

귀신은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니, 큰 소리를 내는 것으로 녀석의 시선을 잠시 분산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목소리를 전할 수 없으니 피넨스와 계획을 상의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남자라면…. 

이세형은 피넨스가 자신의 의도를 곧바로 이해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제발….'

이세형의 손에 쥔 방패가 포물선을 그렸다.

오히려 부서진 덕분에 가벼워진 방패는 제법 멀리 날아갔다.

'제발…!'

터엉!

까르르르릉-!

방패와 석벽이 부딪치고 갈렸다.

고요한 탑에 금속음이 울려 퍼지는 찰나 귀신의 고개가 휙 돌아갔고.

'됐다!'

이세형은 쾌재를 불렀다.

빈틈이 생겨난 사이 속도를 높이는 피넨스를 목격한 순간이었다.

자신의 바람대로 그는 무사히 제단근처에 도착했고, '시체'나 다름없는 몸뚱이를 제단의 불길 속에 던져 넣었다.

'어…?'

하지만 다음 순간.

소름끼치는 눈동자를 마주친 이세형의 몸이 우뚝 정지했다.

"어어…?"

씨익-, 어떻게 된 건지, 눈앞엔 가느다란 미소가 호선을 그렸고.

이어서 제단의 불꽃이 갑자기 밤하늘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보랏빛 불꽃과 은빛의 알갱이들이 일제히 검은 바탕 위에서 미친 듯이 춤추고 있었다.

'아니, 빙빙 돌고 있는 건 어쩌면 밤하늘이 아니라….'

이세형의 생각이 이어진 것은 거기까지.

이내 찾아온 어둠은 그의 시야와 의식을 통째로 뒤덮었다.

마음이 부서진 날 (2)

털썩.

이세형이 쓰러진 순간 한소혜는 입을 틀어막았다.

푸확!

피가 솟구쳤고. 이어서 머리가 달려있지 않은 몸뚱이는 조각조각 흩어져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 아…!"

운명은 사소한 것으로부터 결정된다.

한소혜도 이세형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활을 쏴서 귀신의 시선을 돌리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활시위에 화살을 올리던 사이 이세형이 먼저 방패를 내던졌던 것이다.

만약 소혜의 행동이 더 빨랐다면 목이 잘린 것은 그녀였을 것이다.

[성공적으로 제단에 공물을 바쳤습니다!]

[불타는 영혼이 망자의 혼을 달래니 곧 탑의 언데드가 역소환됩니다!]

'누군지 몰라도 잘했다!'

요란한 금속음이 들리는 순간 피넨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단을 향해 달렸다.

시야 뒤편에서 일어난 비극은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한 채.

'이런.'

스스스-. 고개를 돌린 귀신과 피넨스의 시선이 마주쳤다.

귀신은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세상 모든 살의를 담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절로 심장이 철렁였다.

마치, '두려움'이라는 감정의 근원을 자극당하는 기분.

'곧바로 사라지는 게 아닌가?'

피넨스는 이를 악물었다.

귀신의 움직임은 인챈트를 사용한 상태에서도 쫒기 힘들다. 그러니 지금 녀석의 공격을 막거나 피할 방법은 전무했다.

'죽을지도…!'

처음 느껴보는 죽음의 공포.

하지만 마음속에 요동치던 파도는 곧 호수처럼 잔잔해졌다.

감정이 한계에 도달한 반동인지, 갑자기 가슴이 차분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황금빛?'

다시 찾아온 평정 속에서 피넨스는 찬란히 빛나는 광휘를 목격했다.

갑자기 자신과 귀신 사이에 끼어들며 앞을 가로막은 금색의 광휘.

그 그림자의 정체가 한소혜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잠시 후였다.

"소혜…?"

피넨스는 멍한 얼굴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배애 커다란 상처가 나 있음을 발견했다.

귀신은 사라져 있었지만, 녀석이 남긴 무언가의 공격이 한소혜의 배를 관통한 듯했다.

[총 2마리의 언데드를 처치했습니다!]

[생존자(2명)의 기여도를 정산중입니다!]

'2명?'

피넨스는 뒤늦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쿠르르르르-

서서히 붕괴되어가는 탑의 꼭대기에 남아있는 사람은 자신과 그녀 둘 뿐이었다.

어느새 이렇게 된 걸까.

이 감정은 무엇일까. 무언가 가슴 속에서 뚝 떨어져 나간 듯한 공허함.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피넨스가 물었다.

"왜 그랬지?"

피넨스의 물음에 소혜가 답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

"그냥, 저절로 발이 움직여서…."

가죽갑옷의 틈으로 피가 계속 새어나왔다.

그녀의 몸이 붉게 물들어가는 와중에도 그녀가 내뿜는 황금빛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화악! 눈앞에 황금빛 메시지가 펼쳐진 것은 바로 그 때.

[한소혜]

-혼자 남기를 무엇보다 두려워하며, 타인의 말에 잘 이끌리는 여자.

-첫 만남 이후 당신을 동경하는 마음을 키워왔지만,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 않을 것임은 본인도 잘 알고 있다.

-유감스런 그녀의 성격과 상황이 잘 맞아떨어진 것은 그야말로 행운!

-당신이 목숨을 부지한 것은, 그대가 이러한 미래를 예견하고 그녀에게 마음을 열어준 덕분이다.

피넨스는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쿵. 쿵. 

황금빛 색채가 사라지고, 여전히 동요하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만 버텨라. 스테이지가 끝나고 크레딧을 충분하게 얻으면 이 정도 상처는 치료할 수 있어."

휘이이이-.

바람을 타고 온 정령 한 마리가 제단 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리면 크레딧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정산완료!]

[크레딧 1532C를 획득하였습니다!]

이윽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자신의 보상이 1500C가 조금 넘는 정도라면 기여도가 더 낮은 소혜의 보상은 훨씬 적을 것이 분명했다.

배의 상처를 치료하기엔 터무니없이 모자란 수치.

이대로라면 소혜는 다른 동료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아냐…!'

피넨스의 머리속에 번개가 내리친 것은 그 순간.

"잠시 기다려라."

피넨스는 정령과 교감하여 하나의 물건을 구매했다.

영원의 도서관 입장권.

인챈트를 얻었던 그 장소엔 정체불명의 핏빛 스킬 북이 존재한다.

[영원의 도서관에 입장했습니다!]

[시간 내에 한 권의 책을 펼쳐 주세요!]

피넨스는 온 힘을 다해 달렸다.

수천, 수만 권의 책들이 빠르게 시야를 지나갔다.

물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우연히 얻은 스킬이 '회복'계열인 동시, 극심한 외상을 치료할 수 있는 그런 스킬일 확률은… 아주 높게 잡아도 1퍼센트 미만.

하지만 지금의 피넨스는 그 아주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여긴가?'

심장이 들썩이는 채로 그 장소에 다시 도달했을 때.

핏빛의 책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다.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면 철의 군주의 능력을 발동시킬 수 없으니까.

피넨스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평정심이 찾아온 그 순간, 눈앞에 떠오른 순간적인 핏빛의 일렁임을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화악!

책을 펼치는 동시, 홀로그램의 메시지가 눈앞에 흘러나왔다.

[■□의 책을 읽었습니다!]

'이건….'

피넨스의 시야가 반전했다.

도서관에서 다시 탑의 꼭대기로.

장소가 바뀐 뒤에도 폰트가 깨진 듯한 문장들이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각성을 시■합니다!]

[당■이 지닌 잠□력을 파악 중입니다…]

[¼Ò°³. Àº ¾ÆÁCÇÑ ¶¾ð¾î°·Âõ °ÍÖ ±â…!]

'각성?'

아무래도 핏빛의 책은 스킬을 가르쳐 주는 책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동안 얻은 깨달음을 정산합니다!]

[다음과 같이 스탯이 강화되었습니다!]

[힘 +0],[기교 +2],[내구 +1],[마력 +5]

하급정령이 파는 강제 각성의 책을 구매하려면 10000C의 크레딧이 필요하다.

깨달음이 없는 그런 식의 각성은 스탯이 증가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핏빛의 책이 지니는 가치는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해석되지 않는 이상한 문장들이 출력되기는 했지만, 각성과 동시에 스탯이 오르고, 특성까지 강화되었으니까.

[특성이 강화되었습니다!]

고유 특성 : [철의 군주] (등급 : S+)

-철의 군주는 세상의 모든 이치를 꿰뚫어 봅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지 않아도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허나 완벽한 각성을 이룬 피넨스의 기색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입술을 깨무는 얼굴은 오히려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각성을 마친 즉시 새로운 정보가 흘러들어왔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황금빛 메시지는 지금 한소혜의 배에 뚫린 상처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한소혜]

-알 수 없는 독에 중독되어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상태.

-그녀는 곧 사라질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안식을 빌어줄 사람은 당신뿐입니다.

'독… 이라고?'

쉴 새 없이 피가 흘러나온다.

눈, 코, 입… 모든 곳에서.

균열에 들어오기 직전에 보았던 낡은 배의 주인.

이름 모를 귀족 남자의 최후가 지금의 한소혜와 겹쳐졌다.

그래도 그 남자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균열 안에서 죽었다면 온몸이 조각조각 흩어져 시체조차 남지 않을 테니 말이다.

마치 지금의 소혜처럼.

"피넨스님…?"

붉은 눈물을 흘리는 소혜의 눈동자엔 초점이 없었다.

허공에 헛손질하는 것을 보면 이미 시야가 어두워진 것 같았다.

"바로 옆에 있다."

휘적거리던 손이 피넨스의 손을 찾아내 맞잡았다.

생기를 잃어가는 차가운 감촉.

꽈악-.

하지만 손아귀에 실린 힘은 죽어가는 사람의 것이라 생각하기 힘들 만큼 강렬했다.

"너무 추워요…."

"...."

"부탁드릴게요. 손… 놓지 말아주세요."

쿠르르르-!

제단의 불꽃이 완전히 사그라지자 탑이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긴 꿈을 꾸고 있던 것 같아요…."

"…."

"악몽이면서… 좋은 점도 있었던 악몽이요…."

쿨럭! 한소혜가 한 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입가에선 피가 솟구쳤다.

손아귀의 힘 또한 점점 빠져나갔고.

"피넨스님은 꼭… 살아서 나가셨으면 좋겠어요."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촤라라락!

한소혜의 몸이 반투명한 결정이 되어 수백 조각으로 부서지기 시작했다.

하반신이 사라지고, 상반신이 흩어지고, 최후에는 피넨스와 마주잡고 있던 손까지 사라져 버렸다.

"...."

그렇게 빈손에 차가운 바람이 느껴질 때쯤 피넨스의 시야는 또다시 반전했다.

홀로 남은 피넨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딘지 모를 장소.

균열을 탈출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사방엔 여전히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 없는 차원의 통로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으니.

다중균열은 끝이 어딘지 모를 터널이며, 중첩균열은 출구가 어딘지 모를 미궁이다.

그리고 그 두 가지가 모두 합쳐진 이곳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이제 뭘 해야 되지?'

문득, 피넨스는 머릿속이 텅 빈 기분을 느꼈다.

왠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도 힘겨웠지만, 어떻게든 일어나야만 했다.

'앞으로 갈 방향은….'

황금빛.

무의식적으로 그것만을 쫓아가던 피넨스는 곧 익숙한 색채를 발견했다.

무수한 균열들 중 한 곳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더 이상 '빛'이나 '광휘'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없었다.

깜빡이는 미친 듯이 불이 켜지고 시들기를 반복하고 있었으니.

왜 저렇게 깜빡거리는 것일까?

간신히 깨달았다.

빛이 깜빡이는 것과 주기로, 자신의 감정 또한 역치를 넘어서고 진정되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마음속의 무언가 부서지는 기분과 함께, 미친 듯 깜빡거리던 황금빛 광휘도 아주 희미해져 버렸다.

'…!'

순식간에 시야가 뿌옇게 물들며 뺨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유 없이 숨이 가빠지며 호흡까지 어려워졌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고통.

몇 번이나 숨을 크게 들이켜 봐도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후욱, 후욱…!

아무도 없는 장소. 균열만이 즐비한 공간엔 한동안 거친 숨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