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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화련이 전투를 지켜보던 그때, 그들과 마찬가지로 진현우를 유심히 보던 이들이 있었다.

네메시스 길드의 윤서희와 유민혁이었다.

"유민혁 스카우터님, 저 남자가 맞나요?"

"인상착의는 일치합니다. 저희 길드의 신입들을 카오틱으로부터 구해준 남자입니다."

"그렇단 말이죠...."

윤서희의 손가락이 입술을 매만졌다.

"그러니까 튜토리얼에서 고블린들을 학살하고, 우리 신입들을 구해준 사람이... A등급 게이트를 혼자서 공략한 저 남자다."

"맞습니다."

"솔직히 믿기가 힘들긴 하네요."

만약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았더라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윤서희는 봤다.

진현우가 어떻게 싸우는지를.

"효율적이고 빨라요. 골렘의 약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더군요. 겁도 없고요. 신인이라기 보다는 경험 많은 베테랑 같았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능력치나 숙련도도 저 레벨에서는 최고 수준이 아닐지...."

"평범한 플레이어가 아닐 수 있겠네요."

"그 말씀은?"

윤서희는 최상위 랭킹에 이름을 올린 플레이어다. 처음 플레이어가 됐을 때부터 지금까지 빠른 속도로, 효율적으로 성장해왔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가?

"유저일 수도 있겠죠."

브로큰 월드의 유저이기 때문이었다.

전 세계에서 100명 남짓한 숫자만 플레이했다는 브로큰 월드를 직접 즐겼던 유저.

그렇기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길드장님."

"정보를 파악하고 접근하세요. 분명 아그니스도 움직일 겁니다. 그들한테 지지 않을 제안을 가지고 가서, 저 남자를 영입하세요."

"오버페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어요."

윤서희는 등을 돌렸다.

"그럴 가치가 있으니까요."

* * *

그리고 다음날.

진현우는 플레이어 협회로 향했다. 게이트 공략의 포상금을 얻기 위함이었다.

"어, 그, 그러니까... 네?"

플레이어 협회에서 데스크 업무를 맡은 직원, 이선영은 귀를 의심했다.

처음 진현우가 협회에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를 응대하는 직원이었다.

"제가 들은 게, 음, 맞는 거죠? 기여도 99%로, 그러니까, A등급 게이트를...."

"예. 레서 골렘 군단의 습격이요."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직원은 황급히 키보드를 두들겼다.

모니터 화면에 나오는 게이트들에 대한 정보들. 그중에 하나 이색적인 것이 있었다.

"기여도 99%... 사, 사실이었네요."

A등급의 게이트에 기여도 99%.

여태껏 본 적이 없는 수치였다. 사실상 게이트를 혼자서 공략했다는 얘기 아닌가.

직원이 놀란 나머지 입을 헤 벌렸다.

"포상금은 어떻게 됩니까?"

"아, 네. 포상금이요. 어어, 원래 아그니스 길드가 받기로 한 포상금이 있었는데...."

직원이 볼을 긁적였다.

정작 아그니스 길드가 게이트에서 한 일이 없어서 포상금을 다 받지 못했다. 대신, 그들이 못 받은 포상금이 진현우에게 돌아갔다.

"...3억이네요."

직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현우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이 레벨대의 게이트에서는 받기 힘든 금액이다.

"포상금은 내일까지 입금될 거예요. 그리고 A등급 게이트를 공략하셨으니, 아마 이번 주 안으로 플레이어 등급도 바뀔 겁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지금 진현우의 플레이어 등급은 D등급이다.

전생에서 고생했던 것보다는 제법 빠르게 최하 등급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뭐, 나쁘지 않네.'

하지만 이미 최고 등급인 EX등급에 도달한 적이 있는 진현우였기에 별 감흥은 없었다.

그는 플레이어 협회를 나섰다.

"얘, 저 사람이 그 사람이지?"

"네?"

"아니, 누군지도 몰라? 뉴스도 안 보니?"

떠나는 진현우를 여전히 놀란 눈으로 보던 직원에게 선배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선배는 자신의 노트북을 보여줬다. 화면에는 플레이어 관련 기사가 가득했다.

그런데 기사의 주제가 모두 똑같았다.

ㅡ여러 길드가 꺼리던 A등급 게이트 [레서 골렘 군단의 습격] 공략에 성공. 기여도 99%를 달성한 플레이어가 나타나 큰 화제.

ㅡ공략에 참가한 플레이어들 曰, '자신들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누군지도 모를 플레이어가 나오더니 혼자서 몬스터를 다 처리했다.'

ㅡA등급 게이트에서 최초로 기여도 99%를 달성한 플레이어는 대체 누구인가?

바로 진현우에 대한 기사였다.

직원은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봤다.

ㅡA등급 게이트라길래 뭔가 했더니 최대 레벨 20밖에 안 되잖아. 쉬운 거 아님?

ㅡ쉽기는 뭐가 쉬워 ㅋㅋ 저 레벨이면 스킬도 없고 특성도 없으니까 더 어렵지. 지도 저 레벨 돌아가서 깨라고 하면 못 깰 거면서.

ㅡ동영상 풀린 거 보니까 골렘을 주먹으로 한 방에 잡던데, 저게 가능한 건가?

ㅡ방어력 무시 옵션이라도 있나?

플레이어들은 진현우가 게이트에서 한 것들을 두고 격한 토론을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일부, 비웃는 댓글도 있었다.

ㅡ아그니스 개웃기네 ㅋㅋ 게이트 공략해달라고 비싼 돈 받더니 그대로 먹튀했네;

ㅡ근데 돈 절반은 못 받았다더라. 계약 조건을 충족 못 해서 그냥 날아갔다고 함.

ㅡ한성원? 유망주라고 밀어주더니 ㅋㅋㅋㅋ 골렘 하나 못 잡는 마법사가 유망주?

바로 아그니스를 비웃는 댓글들이었다.

아그니스가 곧바로 언론 통제를 시도하기는 했지만, 한성원과 다른 길드원들이 게이트에서 보였던 추태는 이미 퍼지고 난 뒤였다.

"아그니스가 화가 좀 났겠는데?"

"가만 안 있겠죠?"

"그럴 걸. 자기들 유망주가 하나 날아갔으니까 새로운 유망주를 얻어야 하지 않겠니?"

둘은 진현우가 떠난 방향을 동시에 봤다.

"길드들끼리 경쟁하고 난리 나겠네요."

"우리는 강 건너 불구경이나 하자."

후룩, 선배는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 * *

그리고 그들의 말은 정확했다.

ㅡ우웅! 우우웅! 우우우웅!

"문자 더럽게도 많이 오네, 진짜."

스마트폰이 연신 울리고 있다.

진현우는 자신의 휴대폰을 확인했다. 볼 것도 없이 온갖 길드들의 영입 문자였다.

ㅡ안녕하세요! 전화를 안 받으셔서 대신 문자로 남깁니다. 저희는 XX 컴퍼니로....

ㅡ진현우 씨, 시간 괜찮으신가요?

ㅡ지금 댁으로 가고 있습니다!

"얘는 뭔데 내 집으로 오고 있다는 거지?"

진현우가 레서 골렘들을 사냥하던 모습이 언론을 통해서 사방에 퍼졌다.

그걸 본 길드들이 군침을 흘리는 거고.

'이미 겪었던 일이기는 한데, 참.'

전생에서도 겪었던 일이다.

마스터 스킬을 익힌 진현우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솟았고, 많은 길드가 탐냈으니까.

그래서 더더욱 잘 알고 있다.

'지금 길드에 가입해서 득 될 건 없다.'

아직 몸값이 부족하다.

여기서 더 명성을 쌓아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조건을 모두 받아낼 수 있을 정도로.

사실 그래도 길드에 들어갈 생각은 없지만.

"자, 그럼 집에 들어가야 하는데...."

진현우는 자신의 원룸에 도착했다.

원룸 앞에는 온갖 길드의 스카우터가 있었다. 그를 영입하기 위해서 온 이들이었다.

저들을 피해서 어떻게 들어갈 것이냐.

"...응?"

다행스럽게도, 그 고민은 할 필요가 없었다.

저 너머에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고급스러운 차가 다가왔다. 단순히 지나가는 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차가 원룸 앞에 멈췄다.

스카우터들의 시선이 차를 향했다.

"저 차는 뭐야?"

"스카우터인가? 아니, 어떤 스카우터가 건방지게 저런 차를 타고 다녀?"

쑥덕거리는 스카우터들.

고급 승용차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나타난 이는.

"쓰레기 같은 집이군."

아그니스의 부길드장.

박현진이었다.

28화

네메시스, 아그니스 (2)

원룸 앞에 정적이 감돌았다.

스카우터들이 서로를 보면서 눈을 굴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나타나서였다.

'야, 박현진이 여기를 왜 온 거야?'

'몰라. 진현우 그 사람 영입하러 온 건가?'

'설마, 유망주 하나 영입한다고 부길드장이 직접 나선다고? 스카우터가 아니라?'

말이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그게 아니면 박현진이 여기 나타난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따로 없었다.

박현진은 원룸을 보며 혀를 찼다.

"플레이어라는 놈이 어지간히도 가난한 모양이군. 이런 쓰레기 같은 집에서 살다니."

"가정이 유복하진 않다고 합니다. 조사해본 결과 가족은 없고 고아라고 하더군요."

"고아? 흥...."

박현진의 곁에 선 비서가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박현진은 시시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최대한 돈으로 유혹해봐야겠군. 그나저나, 날파리들이 너무 많은데. 모두 치워라."

"알겠습니다."

박현진은 주변의 스카우터들을 벌레 보듯이 쳐다봤다. 그가 손짓하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경호원들이 스카우터들을 쫓아냈다.

"아니, 잠깐... 왜 밀어요! 어딜 만져!"

"아무리 아그니스 길드라도 그렇지, 다른 길드 스카우터를 이렇게 쫓아내도 됩니까!"

"어디서 개가 짖는군."

스카우터들이 분노를 터트렸지만 박현진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저중에 아그니스에게 길드 차원으로 항의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길드는 없었으니까.

"주제도 모르는 놈들이 너무 많아. 쓰레기 같은 길드들이 욕심이 너무 많단 말이지."

"맞습니다."

"근데, 저 폐가의 주인은 아직 안 왔나?"

"여기 있는데요."

박현진은 목소리가 들린 곳을 봤다.

그가 찾는 진현우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것도 얼굴에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채로.

"진현우, 맞나."

"예. 폐가 주인은 아니고 세입자긴 한데요."

진현우는 박현진의 인상을 관찰했다.

뱀처럼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척 봐도 비싸 보이는 고급 정장을 갖춰 입었지만, 사업가보다는 조폭 같은 인상이 들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아그니스의 부길드장 박현진이다. 어제 있었던 게이트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했더군."

박현진은 진현우를 내려다 봤다.

명백하게 깔보는 듯한 눈빛. 까닭은 알 수 없으나 그 눈빛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아니, 사실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래서 몇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만."

"어떤 제안입니까?"

"여기서 말할 건 아닌 것 같군. 지켜보는 눈이 많지 않나. 조용한 곳으로 가서 얘기하지."

"여기서 말씀하시죠."

"뭐?"

박현진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오금이 떨릴 만한 눈빛이지만, 진현우는 태연스럽기 그지 없었다.

"어제 게이트를 공략하고 나왔더니 아직 피곤해서요. 여기서 얘기하고 쉬고 싶네요."

"...."

박현진이 진현우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곁에 있던 경호원들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부길드장님 말에 토 달지 말고 얌전히...."

"아니, 됐다. 그럴 만도 하지. 무려 A등급의 게이트를 혼자서 공략한 인재니까 말이야."

박현진이 조용히 웃었다.

칭찬하는 것 같지만 말투는 그렇지 않다. 사람 신경을 긁는 것 같은 비꼬는 어조.

그가 입을 열었다.

"널 우리 길드에 초대하고 싶다."

진현우가 예상했듯이 박현진은 그를 영입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온 것이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아그니스 길드는 탑에서 여러 지역과 사냥터, 던전을 보유하고 있는 길드다. 우리 길드에 가입한다면 그것들을 모두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흠, 그럼 빠르게 성장할 수 있겠군요."

"물론. 원한다면 네가 성장하는 걸 도와줄 사람들을 붙여줄 수도 있다. 우리 길드는 재능이 있는 플레이어를 우대하는 곳이니까."

"그거참 매력적인 제안이긴 한데."

이야기가 긍정적으로 흘러간다.

박현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그래, 다른 길드도 아니고 아그니스 길드다.

그런 길드의 제안을 거절할 플레이어가.

"싫은데요?"

"...뭐?"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한 박현진의 반문에, 진현우가 확언하듯 다시 말했다.

"싫다고요.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박현진은 귀를 의심했다.

자신이 들은 걸 믿을 수가 없어서였다. 아그니스 길드에 가입하는 것이 싫다니.

그런 플레이어가 있을 리가.

"...내 귀가 잘못된 건가? 지금, 아그니스 길드에 가입하기 싫다고 말한 건가?"

"정확하게 들으셨네요. 맞습니다."

박현진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눈빛이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워졌다.

"왜지?"

"가입하기 싫은데 따로 이유가 있습니까? 굳이 말하자면 지금은 길드에 가입할 생각이 없습니다. 아그니스 길드도 마찬가지고요."

"...."

당장은 길드에 가입할 생각이 없다.

이유는 알 것 같았다. 본인의 실력에 정말로 자신이 있다면, 시간을 들여서 성장한 다음에 더 좋은 조건으로 가입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생각을 지금 바꿔야 할 거다."

박현진은 그렇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한성원 때문에 화련 앞에서 추태를 보인 상황이다. 반드시 이 실책을 만회해야 한다.

그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진현우라고 했던가."

진현우의 어깨를 붙잡는 박현진의 손.

꽈아악, 강한 악력이 어깨를 옥죄었다.

"더는 묻지 않겠다. 마지막 기회를 주마. 아그니스 길드에 가입해라. 네가 무엇을 바라든 그 이상의 대우를 해줄 의향이 있다."

"아무런 대가가 없지는 않을 텐데요."

"그만큼 길드를 위해서 일해야겠지. 그걸 감안하더라도 네게 매력적인 기회일 텐데."

"매력적이라...."

진현우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원하지도 않는 길드에 가입해서 길드를 위해서 일하라고?

그것도 아그니스를 위해서.

"저한테는 매력적이지가 않은데요?"

"뭐라고?"

진현우는 여전히 시큰둥했다.

그걸 눈치챘는지, 그의 어깨를 옥죄는 박현진의 악력이 점점 더 강해졌다.

"아그니스 길드의 제안을 무시할 생각은 하지 마라. 탑의 1층은 우리가 장악하고 있다. 네놈을 말려 죽이는 건 일도 아니야."

"아니, 쓰레기 같은 집에 사는 고아한테 왜 이리 집착하십니까? 자존심 상하게."

"뭐?"

박현진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말 조심해라. 그 입을...."

"근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진현우가 뜬금없는 말을 했다. 박현진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어 인상을 찡그렸다.

진현우는 도로 저 너머를 흘깃 봤다

"누가 오고 있는데요."

"...뭐라고?"

박현진이 고개를 돌렸다.

도로 저 너머에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정장 차림에, 표정 하나 없는 남자.

"...네메시스의 개가 왔군."

"개가 아니라 스카우터입니다, 박현진 부길드장님. 덤으로 유민혁이라는 이름도 있죠."

"건방진 놈이...."

네메시스의 스카우터, 유민혁이었다.

여유롭게 걸어온 유민혁은 진현우의 어깨를 붙잡은 박현진의 손을 가볍게 떼어냈다.

"아그니스의 부길드장 씩이나 되시는 분이 자라날 새싹한테 이러시면 되겠습니까."

"네놈, 나한테 설교라도 하는 거냐?"

"보기에 안 좋습니다, 박현진 부길드장님."

"이놈이...."

박현진의 곁에 있던 경호원들이 나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유민혁의 날카로운 눈빛과 마주하자 그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제길, 왜 여기에 저놈이 나타난 거지?'

박현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 네메시스 소속이라는 것도 거슬리지만, 유민혁은 일반적인 스카우터와는 달라서 상대하기 까다롭다.

'스카우터인 주제에 랭커급 플레이어라니.'

개인의 무력도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여기 있는 경호원들로는 상대할 수 없다. 박현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그니스의 부길드장이지만, 실력은 뛰어나지 않았으니까.

"여기까지 하시지요. 지켜보는 눈이 많습니다. 저희끼리 다퉈서 좋을 건 없잖습니까?"

"...."

탑에서의 영역 다툼도 아니고, 일개 신인 플레이어를 영입하기 위해서 싸운다.

그것도 네메시스와 아그니스가.

박현진은 등을 돌렸다.

"수지타산에 안 맞군."

박현진은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오늘은 여기서 물러나겠다. 하지만 진현우, 명심해라. 우린 널 반드시 영입할 테니까."

"기대하지 않고 기다리겠습니다."

진현우를 성난 눈으로 노려보는 박현진. 그가 탄 고급 승용차가 도로를 달렸다.

그들의 모습이 금방 사라졌다.

"...."

"...."

원룸 앞에는 진현우와 유민혁만이 남았다.

순간 흐르는 정적. 진현우가 입을 열었다.

"감사하다고 해야 합니까?"

"괜찮습니다. 저희 길드의 신입들이 진현우 씨한테 빚진 게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유민혁이 진현우를 흘깃 봤다.

"알고 계셨던 거 아닙니까? 제가 근처에서 두 분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 말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현진이다.

대형 길드인 아그니스의 부길드장.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는 신인이 누가 있겠는가?

그것도 반쯤 협박하듯이 제안하는데.

"그럴 리가요.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흠,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다만 유민혁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고, 그가 개입할 것임을 미리 짐작했으면 가능하다.

그걸 감안해도 말도 안 되는 배짱이지만.

'나쁘지 않아. 마음에 드는군.'

유민혁은 그 배짱이 마음에 들었다.

그의 상사인 윤서희처럼, 그도 아그니스 길드를 혐오하는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저도 오늘 진현우 씨에게 제안을 드릴 게 있어서 온 겁니다. 아쉽지만 지금 상황이 이러니 제안을 드리기는 힘들겠군요."

유민혁은 품속에서 명함을 꺼냈다.

"제 명함입니다. 다음에 언제든, 저희 길드의 제안을 듣고 싶으시다면 연락 주십시오.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 그때까지 기다리죠."

"예."

진현우는 명함을 받았다.

유민혁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면서 자리를 떠났다. 조금 전의 박현진과는 상반된 태도다.

본인도 어느 정도 의도한 행동일 것이다.

'박현진, 화가 잔뜩 났던데.'

이유는 간단하다.

한성원이 그의 라인이기 때문이다. 전생의 아그니스 길드는 한성원을 굉장히 밀어줬는데, 거기에는 박현진의 입김이 컸다.

'그렇게 키운 한성원을 제 칼로 써먹었지.'

박현진은 화련이 모르게, 길드 내부에서 자신의 라인을 늘려가고 있는 중이다.

아그니스 길드를 키우기 위함이 아니라.

'박현진 자신의 길드를 만들기 위해서.'

아그니스 길드는 미래에 무너진다.

박현진은 화련을 배신하고 자신만의 길드를 만든다. 치명상을 입은 화련을 뒤로 하고 자신의 파벌을 빼낸 후에 새로운 길드를 만들었다.

'미래에 박현진이 만들 길드에 비하면 아그니스 길드는 양반 수준이지.'

무너진 아그니스 길드를 차지한 뒤 어마어마한 통제와 악행을 저지르는 길드다.

그 길드의 탄생을 막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럴 방법이 있단 말이지."

무엇보다도 박현진은 가만히 뒀다가는 두고두고 자신을 귀찮게 할 것이다.

지금 처리해둘 필요가 있다.

"알헨 묘지로 가야겠어."

세계의 탑 1층.

아그니스 길드가 지배하지 않는, 그러면서 엄청난 악명을 떨치는 사냥터로.

'일단 그전에.'

진현우는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공간 주머니 속에 소중히 간직해뒀던 두 가지 아이템을 꺼냈다.

마법사의 심장과 마력의 결정체였다.

"오랜만에 조합이나 해볼까."

29화

고맙다, 한성원

아이템 조합.

어느 게임이나 다 그렇듯이 브로큰 월드에도 있는 시스템이다. 두 가지, 혹은 더 많은 아이템을 조합해서 아이템을 만드는 시스템.

하지만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그 가짓수가 정말 다양하다는 점이지.'

조합 방식과 그 결과물이 정해진 여타 게임과는 다르게, 브로큰 월드는 수많은 아이템을 조합해서 다양한 아이템을 만들 수 있었다.

가짓수가 제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조합이라, 오랜만인데."

진현우는 세 가지 아이템을 내려놨다.

마력의 결정체와 마법사의 심장. 마지막으로 이 둘을 조합하는 데 쓰는 도구였다.

도구는 작은 항아리처럼 생겼다.

'뭐, 질질 끌 필요 있나.'

진현우는 마력의 결정체와 마법사의 심장을 작은 항아리에 넣었다.

그리고 항아리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ㅡ아이템 조합을 시작합니다.

ㅡ스으으으!

진현우의 마력을 탐욕스럽게 흡수하는 항아리. 그 몸체가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ㅡ퍼어엉!

뻥튀기가 터지는 것 같은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항아리의 뚜껑이 열렸다.

진현우는 내부를 들여다봤다.

ㅡ아이템 조합에 성공했습니다.

ㅡ마력의 결정체와 마법사의 심장을 조합하여 '대마법사의 심장 (전설)'을 만들었습니다.

항아리 안에는 조금 전까지 있던 아이템들은 사라지고 새로운 아이템이 보였다.

핏빛으로 빛나는 보석.

푸르른 기운이 보석을 맴돌고 있었다.

[대마법사의 심장 (전설)]

· 설명: 마력의 결정체를 흡수하여 강화된 마법사의 심장이다. 눈으로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마력을 내뿜고 있다.

· 옵션: 두 가지 선택, 귀속

* 두 가지 선택: 복용할 경우 모든 능력치를 +7 상승시키며 새로운 특성을 부여한다. 제작에 사용할 경우 완성된 아이템을 크게 강화하며 특수한 효과를 부여한다.

* 귀속: 획득자 외에는 사용할 수 없다.

대마법사의 심장.

원래는 모든 능력치를 3만큼만 올려줬었는데, 지금은 그 수치가 7까지 올랐다.

게다가 새로운 특성까지 부여한다니.

'한성원이 이름을 날린 이유가 있군.'

전설 아이템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층에서 얻었느냐에 따라서 성능이 달라진다.

대마법사의 심장은 탑 1층에서 나온 전설 아이템 치고는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이런 걸 먹었으니 잘 나갈 수밖에.

"고맙다, 한성원."

사실 딱히 고마울 것도 없지만.

진현우는 대마법사의 심장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마력을 불어넣자, 심장에 맴돌던 마력이 진현우에게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ㅡ스으으으!

심장이 사라진다.

진현우에게 흡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흡수한 마력은 그의 심장으로 모였고, 심장에 마력으로 특수한 각인을 새겼다.

그리고 다시금 눈을 떴을 때.

ㅡ화아악!

대마법사의 심장은 사라지고 없었다.

심장에 담긴 마력을 온전히 흡수한 진현우의 몸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ㅡ대마법사의 심장 (전설)을 흡수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7 상승했습니다!

ㅡ특성 '각인된 심장 (B)'을 익혔습니다.

진현우는 새하얀 숨결을 내뱉었다.

마력이 담긴 숨결이었다. 그는 눈앞에 뜬 메시지를 지운 후, 바로 상태창을 열었다.

[진현우]

· 레벨: 17

· 클래스: 웨펀 마스터

· 칭호: 시간을 거스른 자

· 근력: 52 (+17) · 민첩: 51 (+17)

· 체력: 47 (+17) · 마력: 34 (+8)

모든 능력치가 상승한 게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특성.

· 각인된 심장 (B): 보유할 수 있는 마력의 최대량이 1.5배 상승한다. 마법 스킬의 데미지가 15% 상승하며, 마력 소모량이 감소한다. 이 특성은 레벨에 맞춰서 성장한다.

휘파람이 절로 나오는 특성이었다.

사실 마법사한테 제일 적합한 특성이었지만, 진현우에게는 기억 감정이 있다.

기억 감정으로 유용한 마법 스킬을 익혔을 때 이 특성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게다가 레벨에 맞춰서 성장한다니.'

지금은 B등급이지만, 나중에 레벨이 오르면 A등급 이상이 될 수도 있다는 뜻.

마음에 들 수밖에 없었다.

"좋아. 그럼 챙길 건 다 챙겼고."

이제 알헨 묘지로 갈 때다.

진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알헨 묘지라는 사냥터가 있다.

오래전에 버려진 묘지로,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안개가 짙게 낀 곳이다.

거기에 내부에는 '사령'이라 불리는 강력한 유령 몬스터들이 돌아다니기까지 한다.

ㅡ혹시 알헨 묘지 가실 분 계신가요?

ㅡ미쳤음? 거기 가서 죽으려고? 저번에 어떤 파티 갔다가 그냥 전멸했다던데?

ㅡ아, 위험한 건 저도 알죠. 근데....

복잡한 미로, 강력한 몬스터까지.

알헨 묘지에는 적지 않은 숫자의 플레이어가 죽었다. 그런데도 묘지로 가려는 플레이어들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ㅡ상자 하나만 챙기면 인생 역전임.

ㅡ골드에 눈이 멀었네 ㅉㅉ;

ㅡ하; 골드 없어서 빌빌거리는 거 너무 힘듬 ㅠㅠ; 진짜 하나만 챙길 수 있으면....

ㅡ거기 칭호도 개사기라던데?

진귀한 보물이 있으니까.

묘지 곳곳에 보물 상자가 숨겨져 있는데, 그중 일부에 희귀한 아이템이 들어 있다.

가지고 나올 수만 있다면 현재 레벨에서는 상상 못 할 골드를 벌 정도의 아이템들이.

ㅡ님 저랑 가실래요? 저도 알헨 묘지 칭호 못 얻어서 한 번 가기는 해야 하는데.

ㅡ스펙이?

ㅡ잠깐만요.

거기에 알헨 묘지에는 퀘스트가 하나 있는데, 그걸 깨면 귀한 칭호를 얻을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알헨 묘지는 말도 안 되는 난이도에도 많은 플레이어가 찾고 있었다.

"으, 으으.... 더럽게 으스스하네."

"우리 말고 아무도 없는 건 아니겠죠?"

"아냐, 조금 전에 파티 하나 들어가는 거 봤어. 아마 다른 사람들도 있을 거야."

오늘도 그러했다.

네 명으로 이루어진 파티가 알헨 묘지에 진입했다. 그들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묘지를 횃불에 의지한 채 나아가고 있었다.

"퀘스트... 깰 수 있을까요?"

"몰라. 묘지 최심부까지 횃불 가지고 가야 하는데 이게 될까 걱정되긴 해."

"가다가 사령 만나면...."

파티원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칭호를 얻을 수 있는 퀘스트를 깨려면 이 묘지의 최심부로 가야만 한다.

문제는 거기까지 가는데 수많은 사령, 다른 말로 몬스터를 만나게 된다는 것.

"위험하면 바로 도망치자."

"네, 네.... 가능하면요."

"자꾸 재수 없는 소리 할래?"

파티원들은 불안한 눈치였지만, 파티장인 성기사는 자신만만하게 나아갔다.

모두가 침묵 속에서 전진했다.

그리고 그때.

ㅡ스으으....

"히이이익!"

"바람 소리야. 뭘 그리 놀라?"

"아니, 바람 소리라기에는...."

스산한 소리가 들렸다.

성기사는 비명을 지른 파티원을 타박하면서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ㅡ인간.... 여기가 어딘지 아느냐....

"...!"

바로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음산한 목소리. 성기사는 방패를 치켜세우면서 목소리가 들린 곳을 노려봤다.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자욱한 안개.

그 사이에 누군가가 있었다.

"나왔군. 모습을 드러내라! 사령아!"

성기사는 신성 마법을 사용했다.

앞으로 내세운 방패에 빛이 모여들었고, 빠르게 응축되면서 곧바로 폭발....

ㅡ서걱!

"어?"

폭발하지 않았다.

대신에 들린 것은 날카로운 절삭음.

성기사는 빛을 머금은 방패가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걸 봤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 내 팔이...? 으아아악!"

"오, 오빠!"

성기사의 오른팔이 떨어져 나갔다.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 것처럼, 아무런 저항도 없이. 뒤늦게 그 사실을 인지한 성기사가 비명을 내지르면서 무릎을 꿇었다.

"저, 저거...."

안개 너머로 형체가 나타났다.

하나, 둘. 처음 나타난 형체는 이윽고 수십이 되었고, 놈들이 파티를 포위했다.

전신을 헤진 로브로 가린 이들. 알헨 묘지에 나타나는 몬스터, 사령들이었다.

"우, 우아아악!"

"죽여! 저것들 빨리 죽여!"

파티원들이 발작적으로 사령들을 공격했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사령들의 흐릿한 몸체는 물리적인 공격으로는 피해를 입힐 수가 없었다.

ㅡ여긴 산 자가 와서는 안 되는 곳....

ㅡ여기에 발을 디딘 이상....

사령들이 서서히 거리를 좁혔다.

ㅡ살아서 나가지는 못하리라...!

"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

묘지에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 * *

"...파티 하나 또 죽었나 본데."

알헨 묘지의 입구.

비명을 들은 플레이어들이 몸을 떨었다.

"으아, 갑자기 떨리네."

"우리도 저렇게 되는 거 아냐?"

"야, 야. 긴장하지 마. 생각보다 플레이어 사망률이 높지는 않은 사냥터야."

"어쨌든 사람이 죽는다는 거잖아."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알헨 묘지는 탑 1층에서 어렵고 위험하기로 유명한 사냥터다. 사망률이 높지는 않다고 하지만, 적지 않은 플레이어가 죽었다.

확실히 위험한 사냥터다. 하지만.

"흐흐, 심 봤다!"

"와, 이게 얼마짜리냐?"

"칭호도 개사기네. 오길 잘했다."

그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

아침에 알헨 묘지에 들어갔던 파티가 척 봐도 비싸 보이는 아이템을 갖고 나왔다.

묘지의 보물 상자에서 얻은 것이다.

"부럽다, 저 사람들...."

"데미지 올려주는 칭호라던데. 하, 어쩌지."

"...가자. 시발, 우리도 하나 먹고 와야지. 제대로 챙기면 인생 역전이라니까!"

"그, 그래. 맞아!"

아이템을 보고 눈이 돌아간 플레이어들이 하나둘씩 묘지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바라보던 이가 있었다.

"불나방이 따로 없구만, 아주."

진현우였다.

그는 혀를 찼다.

"이 묘지 전체가 가짜인 것도 모르고."

알헨 묘지.

그리고 이곳에 있는 '사령'들의 진실을 잘 아는 진현우에게는 우스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묘지의 구석으로 향했다.

"야, 저 늙은이 맞지?"

"늙은이가 뭐냐, 늙은이가. 저 사람 맞아."

"어차피 NPC인데 뭐 어때? 가자."

묘지 구석에 유독 사람이 많이 모여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 노인이 있었다.

눈이 먼 노인이었다.

'알헨 묘지의 퀘스트를 주는 NPC.'

알헨 묘지에는 퀘스트가 있다.

묘지의 내부에 늙은 묘지기가 앉아 있는데, 그에게 말을 걸면 퀘스트를 준다.

"어르신,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눈이... 눈이 보이질 않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횃불을 가져가야만 하는데...."

"횃불 말입니까?"

"그래. 이것 말일세."

그러면서 묘지기가 꺼내는 건 횃불.

신비롭게도 새하얗게 불타는 횃불이다.

"묘지의 안쪽에 거대한 성화가 있네. 그곳에 이 횃불을 가져가서 불을 붙여야 해. 그래야지 묘지의 영혼들이 편히 쉴 수 있어...."

"그럼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오오, 정말인가?"

묘지기가 건네준 횃불을 받은 플레이어는 묘지를 나아가 성화를 밝혀야 한다.

그러면 칭호를 얻을 수 있다.

무려 영웅 등급의 칭호를.

'문제가 하나 있다면....'

묘지가 위험하다는 것이다.

성화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에 수많은 유령 몬스터가 공격해온다. 보통은 성기사나 사제들로 대처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하는데.

'이 묘지의 몬스터는 너무 강해.'

론데 지역의 플레이어로는 대처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사령들이다.

아무리 언데드에 강한 성기사나 사제라고 할지라도 어떻게 할 수가 없을 정도.

"난이도 조절에 실패한 사냥터...."

하지만 진현우는 '진실'을 알고 있다.

'잘 꾸며진 거짓말이지.'

저 묘지에 '몬스터'는 없다.

알헨 묘지의 컨셉은 어디까지나 미로.

자욱하게 깔린 안개 때문에 길을 찾기가 어렵고, 여러 장치가 길을 헤매게끔 만든다.

'묘지의 목표는 제대로 된 길을 찾아서 성화에 도달하는 것. 몬스터와 싸우는 게 아냐.'

그리고 또 하나.

'이곳에는 원래 보물 상자가 없다.'

그럼 이곳에 있는 몬스터는 대체 무엇이고, 묘지에 있는 보물 상자는 또 무엇인가?

진현우는 묘지의 입구를 지켜봤다. 꽤 많은 플레이어가 묘지를 드나들고 있었다.

'묘지 출입구가 여기만 있는 게 아니지.'

알헨 묘지로 드나들 수 있는 출입구가 하나 있다. 그것도 아주 잘 숨겨진 곳이.

진현우는 바닥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묘지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ㅡ스으윽!

노련한 사냥꾼의 감각이 발자국들을 감지했다. 진현우는 발자국을 좇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여기네."

아무것도 없는 흙바닥에 수많은 발자국이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진현우는 흙바닥을 여기저기 눌렀다.

ㅡ달칵!

그러자 버튼을 누르는 것 같은 소리가 나더니, 흙바닥에 나무 문이 나타났다.

마법으로 감춰둔 문이다.

'묘지로 들어갈 수 있는 지하 문.'

당연하지만, 원래부터 있던 문은 아니다.

누군가 필요에 의해서 만든 것.

"좋아. 그럼...."

진현우는 미리 사온 로브로 몸 전체를 가린 후, 갑옷의 보호색 옵션을 사용했다.

그의 갑옷에서 안개처럼 희끄무레한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전신을 휘감았다.

ㅡ스으으....

군단 개미의 보호색.

놈들은 주변 환경의 색상을 자신의 갑피에 입혀서 모습을 감추는 놈들이었다.

마치 암살자가 은신하는 것처럼.

'이 정도면 누가 봐도 모르겠지.'

현재 진현우는 안개와 완전히 동화되어서 모습을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묘지 근처는 안개가 자욱하니 그의 모습을 찾는 건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여기서 지켜볼까."

분명 이 문으로 오는 무리가 있을 터.

언제 올지는 알 수 없지만, 기다리는 건 자신 있었기에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

진현우는 눈을 감았다.

언젠가 올 무리를 기다리면서.

30화

알헨 묘지 (1)

얼마나 기다렸을까.

멀지 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오, 시발. 무거워 죽겠네."

"야, 여기 맞지?"

"몰라. 어디 표식 남아있지 않냐?"

남자들의 목소리였다.

눈을 뜬 진현우는 기척을 감춘 후, 여기로 오기 전에 산 '수정구'를 품속에서 꺼냈다.

[기록용 수정구 (일반)]

· 설명: 사용자가 본 것을 기록할 수 있는 수정구다. 특수한 절차를 걸쳐서 기록된 영상을 현대의 매체로 전송하는 게 가능하다.

탑이나 게이트 내부에서는 전자기기나 현대화기 같은 것들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걸 대신해서 탑 내부에서 카메라 대신으로 쓸 수 있게끔, 유명한 마법사와 연금술사들이 힘을 합쳐서 개발한 아이템이다.

'카메라를 완전히 대신할 수는 없지만.'

단점이 많은 아이템이다.

기록할 수 있는 영상의 기간이 짧고, 일회용이며, 쓰는 데 여러 제약도 있다.

그래서 보통은 짧은 영상을 기록하는 용도로 쓰지만 다른 용도로도 쓸 수 있다.

이를테면 '증거'를 기록하는 용도로.

"어디 보자... 아, 여기 있네."

"읏차!"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걸어온 로브를 입은 남자들이 짐을 한가득 내려놓았다.

대부분이 식량이었다.

"후, 많이도 처먹네. 진짜."

"이게 보름치 식량이었던가? 맞지?"

"다시 확인해봐. 양 모자라면 부 길드장하고 쌍으로 지랄할 건데 감당 못 한다."

"음... 양은 맞아."

남자가 짐을 확인했다.

진현우는 기록용 수정구를 작동해 그들의 행동을 하나하나 촬영하고 있었다.

"상자가 7개 비었다던데 보물은?"

"어, 그건 내가 가지고 있어. 채워야지."

"이번엔 운이 좋은 놈들이 많구만."

짐들의 확인을 끝낸 일행은 바닥의 문을 열고 지하로 내려갔다.

진현우는 그들을 추적했다.

'뭘 하는지 볼까.'

* * *

"아, 여기 오는 것도 지겹다."

"너 몇 번 남았냐?"

"3번만 더 하면 졸업하고 다른 지역으로 가도 된다더라. 딴 놈들이 대신 할 거라던데."

"그래?"

남자들은 수다를 떨면서 지하를 나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상으로 올라갔다.

자욱한 묘지의 안개가 그들을 반겼다.

ㅡ흐으으으....

ㅡ꺄아아아악!

"으아, 여긴 언제 와도 으스스하네."

사령의 스산한 목소리와 플레이어의 처절한 비명이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남자들은 고개를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일단 보물부터 채우고 가자."

"어. 이쪽이었지?"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묘지인데 그들은 길을 아는 것처럼 움직였다.

"여긴 꽝 아이템 넣으면 되나?"

"어. 서쪽에는 비싼 아이템 넣고. 그쪽이 사령이 많아서 관리하기가 편하거든."

"오케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들은 비어있는 상자를 발견했고, 그 안에 아이템을 채웠다.

'역시. 바뀐 게 없네.'

진현우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알헨 묘지에는 귀중한 아이템이 든 보물 상자가 있다. 이 레벨 대의 플레이어라면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는 아이템들.

'사실은 저놈들이 만든 것들이지.'

원래 알헨 묘지에 보물 상자는 없다.

저 무리가, 배후에 있는 누군가가 의도해서 만든 '가짜' 보물 상자만 있을 뿐이지.

그럼 그 상자들은 왜 만든 걸까?

"좋아, 여기가 마지막이지?"

"어. 이제 보급품 주러... 응? 잠깐만."

비어있는 보물 상자들을 다 챙긴 남자들은 자리를 떠나려다가 멈췄다.

바닥에 플레이어들이 쓰러져 있었다.

"으, 으으... 살려... 살려주세요...."

"뭐야, 생존자네?"

남자들을 본 플레이어들의 얼굴이 안도감에 젖었다. 자신들을 구해주러 온 이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감사... 커헉!"

"봤으니 어쩔 수 없지. 다 죽여."

"아아악!"

남자들은 플레이어들을 죽였다.

그 손놀림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생존자들을 처리한 남자들이 떠나려는 순간, 안개 너머에서 무언가가 다가왔다.

ㅡ스으으으....

"...."

사령들이었다.

묘지에 들어온 자들을 사냥하는 사령들. 당연히 남자들과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ㅡ우우우우....

사령들은 남자들을 그냥 지나치더니, 바닥에 쓰러진 시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마치 그들은 적이 아니라는 것처럼.

"무서운 새끼들."

"저런 걸 어떻게 부리는지 모르겠네."

남자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고, 한참을 걸은 끝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아무것도 없는 공터로.

"어디 보자, 이거였던가...."

하지만 일행 중 한 명이 특정 장치를 건드리자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아무것도 없는 공터에, 자그마한 오두막 하나가 유령처럼 모습을 나타낸 것이었다.

"야, 네가 가라."

"크흠, 큼! 아오, 만나기 싫은데...."

남자는 조심스레 문을 두들겼다.

그러자 오두막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ㅡ누구냐?

"박연호 님! 보급품 가져왔습니다!"

ㅡ나는 누구냐고 물었다.

스산한 목소리.

오두막 근처의 안개에서 여러 사령이 나타나더니 일행을 감싸듯이 포위했다.

남자가 다급하게 외쳤다.

"아, 아그니스입니다! 부 길드장님께서 보급품하고 지령을 전달하라고 보내셨습니다!"

ㅡ흠, 그래. 가지고 들어와라.

"예? 아뇨, 그냥 문 앞에 두고...."

ㅡ난 가지고 들어오라고 말했을 텐데.

오두막 안에서 살짝 노기가 섞인 목소리가 들렸고, 사령들이 적의를 드러냈다.

"예, 예! 알겠습니다! 가지고 가겠습니다!"

"야, 빨리 옮겨!"

남자들은 허겁지겁 짐을 챙겼다.

그리고 오두막의 문을 연 순간, 그들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새하얗게 질렸다.

"으, 으으...."

ㅡ빨리 짐부터 옮기고 꺼져라.

남자들은 황급히 짐을 옮겼다.

허나 그것도 잠시.

ㅡ뭐야? 내가 가져오라 했던 재료가 없잖아! 3일 전에 가져오라고 전달했을 텐데!

"예? 분명 적힌 건 다 챙... 커헉!"

ㅡ그럼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거냐!

오두막에서 누군가 맞는 소리가 났다.

진현우는 기록용 수정구로 일련의 과정을 촬영하면서 오두막의 문을 바라봤다.

ㅡ죽기 싫으면 지금 당장 가져와라. 꺼져!

"크흑... 아, 알겠습니다!"

문에서 남자들이 뛰쳐나왔다.

콰앙! 격하게 닫히는 문.

"으으, 시발...."

"뼈, 뼈가 부러진 거 같은데...."

어디를 다치기라도 했는지, 남자들은 몸을 휘청거리면서 오두막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충분히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욕을 내뱉었다.

"개 같은 새끼. 맨날 이 지랄이야."

"부 길드장 동생이라고, 아오. 진짜."

"야, 여기서 잠깐만 치료하고 가자."

오두막에서 충분히 멀어진 남자들은 앉아서 부상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슬슬 움직여볼까.'

안개 속에서 진현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남자들이 부상을 치료하는 사이, 주변에 각종 덫을 빠르게 설치했다.

'적들의 숫자는 일곱 명.'

혼자서 상대하기에는 많은 숫자지만, 적들은 때마침 부상까지 당한 상황.

치료하기 전에 기습하면 할 만하다.

'가장 먼저 노릴 놈은.'

저들 중에서 일행을 이끄는 남자가 있었다. 진현우는 놈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도끼를 쥔 손아귀에 붉은 기운이 모였다. 그리고 기운이 한계치에 달했을 때.

"아야야야! 조심해! 뼈 부러...!"

도끼가 쏘아졌다.

격하게 회전하는 도끼가 정확하게 일직선으로, 목표를 향해서 거세게 쇄도했다.

바로 남자의 머리로 향해.

ㅡ뻐어억!

살점이 짓뭉개지는 끔찍한 소리.

피가 사방으로 튀었고, 얼굴이 말 그대로 박살 난 남자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 몸뚱어리가 이윽고 쓰러졌다.

"어, 어어...?"

"이게 무슨...."

남자들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바닥에 쓰러진 동료를 멍하니 바라봤다.

상황을 필사적으로 파악하려는 눈빛.

하지만 놈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ㅡ우드득!

"카, 학...!"

진현우가 돌진했다.

내뻗은 손아귀로 도끼가 돌아왔다. 그는 이를 악물면서 다시금 도끼를 투척했다.

쏘아지는 도끼가 분열하면서 여러 자루로 나뉘었고 적들을 동시에 덮쳤다.

"아악! 도대체 어떤 새끼가!"

"적이다! 적... 크허억!"

진현우는 적 앞에 멈추면서 진각을 밟았다. 그의 주먹에 힘이 집중되면서 푸른 기운이 한가득 모이기 시작했다.

그는 크게 숨을 삼켰다.

ㅡ쿠웅!

"허억!"

그리고 충돌.

내지른 주먹이 암습조원의 복부를, 강철로 된 갑옷이 보호하는 부위를 강타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머, 멍청한 새끼! 이거 강철 갑옷이야...!"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요란스럽게 주먹을 내지르길래 긴장했는데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주먹이 갑옷에 막힌 것이다.

그리 판단했다.

ㅡ퍼어엉!

"...!"

굉음이 들리기 전까지는.

진현우의 주먹에 어린 기운이 빠르게 응집했다. 이윽고 한계치까지 응축된 기운이 주먹을 통해서 방출되었고.

ㅡ콰드득!

"끄, 으아아악!"

엄청난 충격파를 일으켰다.

복부를 보호하는 갑옷이 굉음을 내며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강력한 힘을 머금은 충격파가 갑옷을 찢고, 복부를 강타했다.

우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카학...! 꺽, 으윽...!"

남자가 피를 토하면서 쓰러졌다.

내장이 상한 것이다. 진현우는 쓰러지는 적을 넘어서 다른 적들을 노렸다.

안개 사이를 누비는 그의 모습은 눈으로 좇기도 힘들 정도로 재빨랐다.

그리고 또 하나.

"젠장! 안 보여!"

진현우가 전신에 두른 보호색 때문에 그 모습을 파악하는 것조차 힘겨웠다.

남자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어느새 남은 건 둘 뿐.

"으, 으으... 으아아아!"

겁에 질린 남자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다른 동료들을 불러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ㅡ쩌저적!

"컥...!"

이미 주변에는 특제 덫이 가득했으니까.

진현우가 설치한 빙결 덫이 작동하면서, 도망치려던 남자의 발을 묶었다.

또 한 명의 적을 쓰러트린 진현우가 덫에 걸린 남자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오, 오지 마... 살려줘! 살려달라고!"

남자가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후드를 눌러 쓴 진현우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일하게 그의 두 눈은 지독히도 차갑게 번뜩이고 있었다.

"조금 전에 살려달라고 하던 사람들도 살려주지 그랬냐?"

콰드득!

도끼가 남자의 머리를 내리쳤다.

"역시 그놈이었나."

진현우는 도끼에 묻은 피를 털어내면서 오두막에서 들린 목소리를 떠올렸다.

'박연호.'

미래에 '사령왕'이라 불렸던 랭커.

지금 반드시 처리해둬야 할 적이다.

* * *

알헨 묘지의 퀘스트, 속칭 '횃불'이라 불리는 퀘스트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

'반복해서 깰 수 있는 퀘스트라는 것.'

처음 깨면 영웅 등급의 칭호를.

그다음부터는 '봉사의 증거'라는, 당장은 쓸 곳이 없는 아이템을 준다.

그 아이템의 진가는 나중에 갈 수 있는 4층의 대륙에서 비로소 드러났다.

'4층의 대륙에 있는 교회.'

그곳에서 퀘스트를 수행하면 특수한 상점이 열리는데, 거기서 화폐 대신 봉사의 증거를 써서 아이템을 구매할 수가 있다.

그것도 아주 진귀한 아이템들을.

ㅡ봉사의 증거? 어디서 얻는 거야?

ㅡ아무리 찾아봐도 없는데?

워낙 좋은 아이템들이었기에 많은 플레이어가 봉사의 증거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찾지 못했다.

딱 한 사람, 아그니스의 부 길드장을 빼고.

ㅡ운이 좋았지. 초보 시절에 우연히 발견했는데, 그걸 이렇게 쓸 수 있을 줄이야.

아그니스의 부 길드장, 박현진.

그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이 묘지의 가치를 깨달았고 계획을 꾸미기 시작했다.

ㅡ유저들도 모르는 아이템이라니. 이곳에서 나오는 이득은 반드시 내가 독점해야 한다.

박현진은 자신을 따르는, 그리고 자신이 약점을 움켜쥔 이들을 이용했다.

ㅡ연호야, 네 도움이 필요하다.

그중에는 박현진의 동생.

박연호도 있었다.

'박연호.... 그놈은 네크로맨서 계통의 히든 클래스를 가진 놈이었지.'

오두막에서 들렸던 목소리의 주인이다.

놈은 '사령'을 소환하는 히든 클래스, '사령술사'로 전직했다. 즉, 지금 알헨 묘지에 있는 사령들은 모두 놈이 소환했다는 것이다.

ㅡ좋은 기회야. 네 클래스는 숙련도가 무엇보다 중요하잖아. 여기서 플레이어들을 죽이면서 최대한 숙련도를 쌓아라.

일반적으로 스킬의 숙련도를 올리면 위력이 강해지고 마력 소모량이 줄어든다.

네크로맨서 계통의 클래스의 경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효과가 추가된다.

'소환하는 언데드의 숫자가 증가한다.'

숙련도가 하나씩 오를 때마다 더 많은 언데드를 소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령술사 역시 그러했다.

ㅡ네 숙련도를 키우려면 플레이어들을 유인해야겠지. 일단 칭호에 대한 정보를 퍼트리고... 아니, 그걸로는 부족할 거야.

네크로맨서 같은 경우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가장 숙련도가 빠르게 오른다.

거기서 박현진은 방법을 떠올렸다.

ㅡ보물 상자를 만들어야겠군.

가짜 보물 상자를 만들기로.

자신들이 직접 아이템을 넣고, 소문을 내서 사람들을 유인하는 수단으로 쓴 것이다.

그 효과는 아주 뛰어났다.

'거기에 박연호의 사령을 이용해서 반복 퀘스트에 대한 진실도 성공적으로 숨겼고.'

퀘스트를 주는 NPC는 묘지 안에 있다.

박연호는 퀘스트를 깼음에도 NPC에게 접근하는 플레이어들을 사령으로 차단했다.

"잘 만들어진 작업장...."

그게 알헨 묘지였다.

박연호는 이곳에서 엄청난 숙련도를 쌓았고 빠르게 랭커의 직위에 올랐다.

그 후 박현진은 동생, 동료들과 함께 아그니스를 떠나 새로운 길드를 만들었다.

'아주 악명이 높은 길드였지.'

지금의 아그니스는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길드였다.

사람을 죽이는 건 예삿일로 여길 정도.

통제는 말할 것도 없었다.

'박현진도 미리 처리해둬야겠어.'

진현우는 죽은 아그니스의 길드원 중 한 명이 입던 옷을 빼앗아 입었다.

"그리고 박연호, 그놈도."

미래에 '사령왕'이라는 이명의 랭커로 성장하는 박연호는 악명이 자자했다.

온갖 악행과 갑질을 일삼지만, 본인의 힘과 배후의 길드 때문에 누구도 막지 못하는.

카오틱이나 다름없는 놈이 된다.

'이번에는 그렇게 안 될 거다.'

그 전에 처리해야 한다.

진현우는 오두막을 향해 걸었다.

31화

알헨 묘지 (2)

"흠, 흐흠...."

알헨 묘지의 숨겨진 오두막.

그곳에서 남자의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흐흠, 흐으음...."

허름하기 그지없는 오두막 내부에는, 콧노래가 흘러나옴에도 아무도 없었다.

소리가 들리는 곳은 지하였다.

"오, 이놈은 꽤 건장한데."

오두막과 연결된 지하.

초라한 지상과는 다르게 잘 꾸며져 있었지만, 그 꾸밈새를 느끼기는 힘들었다.

"이번 물건은 상태가 좋네."

지하에 있는 수많은 시체 때문이었다.

기괴한 장식물처럼 쌓아놓은 시체들. 바닥에 흥건한 핏물과 지독한 혈향까지.

이곳은 마경이나 다름없었다.

"좋아, 이놈은 언데드로 쓰고...."

마경 같은 지하에, 음침한 로브를 입은 남자가 한 명 있었다. 바로 박연호였다.

그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시발, 혼자 있으니까 혼잣말만 느네. 누가 보면 아주 정신병자인 줄 알겠어."

박연호는 널브러진 시체를 하나 챙겨서 마법진처럼 보이는 곳에 올려뒀다.

그가 뭔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성기사도 과연 언데드가 될까...."

"읍, 으으읍...!"

그때,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박연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바닥에 여성이 묶인 채 쓰러져 있었다.

"흐흐, 멍청한 년. 이 묘지의 악명을 알고도 겨우 넷이서 들어올 생각이 들던?"

"으읍, 으으으읍!"

"뭐라는지 하나도 모르겠네."

박연호가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이 여자 말고도 포획한 인간들이 더 있다.

"심심했는데 장난감들이 생겨서 좋네. 여기서 혼자 지내는 건 심심하거든."

그의 형, 박현진의 제안을 받고 이 오두막에서 지낸 지 몇 개월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박연호는 빠르게 성장했다.

'딱 1년만 채우자. 그러면 후발주자인 나도 금방 랭커 플레이어가 될 수 있을 거야.'

박현진과 미리 얘기했던 것이다.

여기서 딱 1년만 챙길 수 있는 것들을 챙기고, 그다음부터는 흔적을 지우자고.

ㅡ아그니스는 발판이다. 우리는 이 길드보다 더 위대한 길드를 만들 거다. 연호야, 그러려면 반드시 네가 성장해야 해. 알지?

그걸로 우리만의 길드를 만들자고.

박현진이든 박연호든 인성은 개차반이었지만, 우습게도 형제애는 두터웠다.

박연호는 형의 계획을 도울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아그니스면 화련, 그 년 눈치를 봐야 하니까. 형이 만든 길드라면 누구 눈치 볼 거 없이 마음대로 놀 수 있겠지.'

그런 계산이 깔려있기도 했다.

박연호는 히죽 웃었다. 그의 눈에 부르르 떠는 여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자, 그럼 일단 너부터...."

"으으으으읍!"

박연호는 여자를 이용해서 몇 가지 실험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ㅡ쿵쿵!

"뭐야?"

누군가 오두막의 문을 두들겼다.

여기 올 사람은 형의 부하 말고는 없는데. 박연호는 인상을 구기며 위로 올라갔다.

"어떤 새끼야?"

문에는 누가 찾아왔는지 확인할 수 있는 틈이 있었다. 박연호는 바깥을 확인했다.

문 너머에는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조금 전 보급품을 줬던 놈이다.

"뭐야? 이놈들."

ㅡ저, 저희입니다! 박연호 님! 말씀하셨던 재료를 가지고 왔습니다!

"재료를 가져왔다고? 안 가져왔다며?"

ㅡ그, 그게....

길드원이 몸을 덜덜 떨었다.

ㅡ죄, 죄송합니다. 제가 따로 챙겨뒀었는데... 가지고 왔었다는 걸 깜빡했습니다.

"이 무능한 놈이...."

박연호가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혀를 차면서 분노를 삭였다. 좋은 장난감도 하나 얻었는데 이런 일로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들어와라. 빨리 물건만 놓고 꺼져."

ㅡ예, 예!

박연호는 언데드를 시켜 문을 열게끔 했다. 끼이익, 낡은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정말로."

검은 바람이 쇄도했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아그니스의 길드원이 벼락처럼 새하얀 검을 내질렀다.

그 검이 문을 연 언데드를 베었다.

ㅡ화아악!

ㅡ키아아악!

언데드가 베인 단면에서 새하얀 빛을 내뿜으면서 쓰러졌다. 그리고 아그니스의 길드원이 단번에 앞으로 돌진했다.

바로 박연호가 있는 곳으로.

"뭐, 뭐야! 이 새끼 미쳤어?!"

ㅡ스으으으....

박연호는 당황하면서 사령을 불렀다. 사령 한 마리가 그의 앞을 벽처럼 지켰다.

그걸 본 길드원의 눈이 번뜩였다.

ㅡ흐으아악...!

"아니, 이게 무슨...!"

단 일격.

박연호의 앞을 지키던 사령은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반으로 갈라져서 사라졌다.

'내 사령을 이렇게 쉽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유령형의 언데드이기에 마법을 이용한 공격이 아니면 거의 피해를 입지 않는데.

단 한 번의 칼질로 사라진다니.

"아, 아무나! 어서!"

박연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실책이다. 지하라면 모를까, 1층의 오두막에는 언데드들을 거의 두지 않았다.

황급히 언데드들을 불렀지만 늦었다.

"크, 으으윽!"

뒤늦게나마 마법이라도 쓰려는 박연호의 시야가 갑자기 새까맣게 물들었다.

길드원이 입고 있던 로브를 그의 얼굴을 향해서 내던졌기 때문이었다.

"감히!"

박연호가 얼굴을 덮은 로브를 치웠을 때, 길드원은 이미 그의 코앞까지 와 있었다.

아니.

'이놈은... 길드원이 아니야!'

독특한 후드를 깊게 눌러 써서 얼굴 전체를 가린,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

이건 박연호가 아는 길드원이 아니었다.

"너, 넌 누구...."

"처음 보는 얼굴이지?"

길드원으로 위장했던 진현우가 허리춤에서 도끼를 빼 들었다.

그리고 반응할 새도 없이.

"끄아아아아아악!"

도끼가 박연호의 어깨를 내리쳤다.

강력한 힘이 어깨를 말 그대로 찢어버렸고 박연호의 오른팔이 몸에서 분리됐다.

진현우는 곧바로 도끼를 투척해서 지하에서 막 올라오려는 언데드들을 공격했다.

"헉, 허억... 으으아악!"

ㅡ우드득!

순식간에 박연호의 왼팔을 낚아챈 진현우는 관절을 힘껏 역방향으로 꺾어버렸다.

뼈가 끔찍한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끄억, 끄으으으...."

박연호가 무릎을 꿇은 채 신음했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고통에 어떠한 생각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남은 것은 이대로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뿐.

"사, 사... 케흑!"

빠악! 어떻게든 사령을 부르려는 박연호의 얼굴에 매서운 발차기가 꽂혔다.

그게 끝이었다.

한계를 넘어선 고통을 견디지 못한 박연호는 그대로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그러니까 평소에 부하들한테 대화도 하면서 관심을 좀 주지 그랬냐."

박연호가 부하들의 목소리만 제대로 알았어도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진현우는 박연호의 인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모를 거라고 확신했지만.

ㅡ우우우....

"슬슬 오나."

진현우는 손을 뻗어 도끼를 받았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에서 하나둘씩 언데드가 올라오고 있었다. 일반적인 좀비나 해골 등, 그 종류도 꽤 다양했다.

ㅡ스으으으....

게다가 오두막 바깥을 박연호가 소환했던 사령들이 포위하고 있는 상태.

꽤 난감한 상황이었다.

'박연호를 죽이면 다 역소환되겠지만, 이놈을 지금 당장 죽일 수도 없으니.'

박연호는 살려둬서 탑에서 내보내야 한다. 증거로 써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말은, 여기 있는 언데드들을 진현우 혼자서 다 처리해야 한다는 뜻.

'그나마 다행인 건 박연호가 기절해서 저놈들을 지휘할 사람이 없다는 것.'

진현우는 검을 움켜쥐었다.

언데드에게 추가 데미지를 주는 옵션이 붙은 마르실의 검이다. 거기에 사령에게 제대로 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옵션도 붙었다.

"어려울 것 없지."

ㅡ캬아아아악!

몰려드는 언데드들.

진현우는 놈들을 향해 돌진했다.

* * *

ㅡ키아아악....

언데드들이 죽어가고 있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여성, 김수연은 자신이 본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내,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야?'

그리 넓지는 않은 오두막.

언데드와 사령이 지하의 계단과 바깥에서 들이닥치면서 공격해오는 상황이다.

그걸 저 남자, 진현우는 혼자 상대했다.

'저게 말이 돼?'

사령들과 싸우는 것이 특히 놀라웠다.

김수연이 속한 파티는 저 사령들을 이기지 못하고 패배했고, 여기까지 끌려왔다.

심지어 파티원 중에 성기사도 있었는데.

'그런 사령들을... 단칼에 죽인다고?'

진현우가 새하얀 검을 내지를 때마다 사령이 하나씩 사라졌다. 김수연이 속한 파티는 제대로 피해도 못 입혔던 괴물들인데.

ㅡ카드득!

하지만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진현우의 동 레벨을 아득히 넘어서는 능력치, 거기에 웨펀 마스터의 특성까지.

그런 그에게 지휘할 주인을 잃은 언데드들을 처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ㅡ스으으으....

"후우...."

마지막 언데드가 쓰러졌다.

진현우는 지친 듯 숨을 토해냈다.

"숫자 한번 더럽게 많네."

진현우는 사령들의 잔해를 봤다.

바닥에 흩뿌려진 액토플라즘 사이로 아주 자그마한 조각 같은 것이 있었다.

'사령들의 핵.'

이 묘지에 있는 사령들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게 아니라 박연호가 소환한 것이다.

그렇기에 놈들에게는 소환의 매개가 되는 핵이 있고, 그게 놈들의 약점이다.

'원래라면 찾기 힘든 약점인데.'

핵이 투명한 데다가 사령의 몸 곳곳을 돌아다니기 때문에 찾아내기가 힘들다.

하지만 진현우와는 무관한 얘기였다.

'약점 파악. 확실히 유용한 특성이야.'

웨펀 마스터의 특성 덕분이었다.

진현우는 액토플라즘이 묻은 검을 털어내고, 기절한 박연호에게 다가갔다.

"으, 으으... 으어어...."

"야, 아직은 죽지 마라."

진현우는 죽어가는 박연호에게 응급 처치를 하고 김수연의 구속을 풀었다.

이놈은 아직 쓸 데가 있다.

'다음에 할 일들을 생각하면 내 정체는 감춰야 하는데, 일단 얼굴은 가렸으니까.'

진현우는 얼굴을 매만졌다.

망토에 달린 후드 덕분에 얼굴이 가려진 상황. 정체가 들킬 일은 없을 것이다.

생존자들과 접촉해도 무방하다.

"생존자는 그쪽 말고 더 없어요?"

"예? 아, 아뇨! 두 명 더...."

김수연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라면서 붙잡힌 동료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철창 안에 두 명이 갇혀 있었다.

"으으으... 히이익!"

"오, 오지 마!"

김수연의 파티원들. 하지만 둘 다 지독한 참상에 반쯤 정신을 놓은 상태였다.

그럴 만도 했다.

"별의별 짓을 다 했구만."

피로 흥건한 바닥, 사방에 있는 시체들.

여기 지하실은 끔찍한 슬래셔 무비의 현장을 실제로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여기 두 사람은 그쪽이 달래주세요."

"네, 네. 그럴게요."

김수연은 동료들을 진정시켰다.

그동안 진현우는 지하의 모습을 기록용 수정구에 담았다. 이게 증거로 쓰일 것이다.

"움직일 수 있습니까?"

"아직 제정신은 아니지만... 네."

김수연의 동료들은 여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어찌 보면 저게 정상이다.

오히려 침착한 저 여자가 이상한 것이지.

"그쪽은 생각보다 침착하네요?"

"아, 아뇨. 그냥 겉으로 보기에만...."

김수연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너무 충격적인 일을 겪은 탓에 오히려 마음이 진정됐다. 마비된 건지도 모른다.

"한 명은 침착하니까 잘됐네요. 그럼 갑시다. 안전한 곳까지 안내해줄 테니까."

"네...!"

진현우는 우선 김수연과 그녀의 동료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아그니스의 길드원들이 묘지로 들어올 때 썼던 지하 통로. 바로 그곳이었다.

"일단 여기서 기다리세요."

"어? 기다려요?"

"네. 잠깐 확인하고 올 게 있어서. 한 시간 안으로 돌아올 거니까 걱정 마시고."

진현우는 등을 돌렸다.

알헨 묘지에서 꼭 얻어야 할 것이 있다.

'칭호는 얻고 가야지.'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칭호.

퀘스트의 보상을 얻기 위해서였다.

32화

성화를 밝히는 자

진현우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묘지 안, 횃불 퀘스트를 주는 노인이 있는 곳이었다.

퀘스트를 받기 위함이었다.

"아아, 누구든 좋으니 성화를...."

"어르신, 제가 성화를 밝히겠습니다."

"오, 오오... 고맙네, 젊은이."

노인이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그의 손아귀에 새하얀 불꽃이 피어올랐고, 그 불꽃이 횃불에 옮겨붙었다.

"묘지의 안쪽에 거대한 성화가 있네. 그곳에 이 횃불을 가져가서 불을 붙여야 해. 그래야지 묘지의 영혼들이 편히 쉴 수 있어...."

"그러겠습니다. 근데, 어르신. 혹시 그것 말고 더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필요한 것 말인가?"

노인의 탁한 눈이 동그래졌다.

"어쩜 이리 친절할 수가.... 그런 걸 물어보는 건 자네가 처음일세. 가능하다면 내가 잃어버린 지팡이도 찾아줄 수 있겠나?"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때,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횃불을 가지고.]

· 난이도: B.

· 설명: 시력을 잃은 노인이 성화의 불을 밝혀달라고 했다. 횃불을 들고 묘지의 안개를 돌파하여 성화를 밝혀라.

· 보상: 노인의 감사.

퀘스트 보상이 노인의 감사였다.

사실상 보상이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퀘스트를 깨면 업적을 달성하면서 자동으로 칭호를 얻을 수 있게 되니까.

'보상이 칭호인 셈이지.'

진현우는 횃불을 들고 길을 나섰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 성화의 위치를 찾는 것조차도 쉽지 않다.

하지만.

'흔적은 남아있다.'

바닥에는 흔적이 남아 있다.

먼저 갔던 사람들. 진현우보다 앞서서 성화가 있는 곳에 도달했던 사람들의 흔적.

그런 흔적들을 찾아서 추적했다.

"여긴 아니고, 여기도...."

성화로 이어지는 흔적을 바로 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간을 들인다면.

결국 찾을 수밖에 없다.

"찾았다."

짙은 안개 너머에 무언가가 보였다.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 자그마한 조각상. 그 앞에 거대한 성화가 세워져 있었다.

ㅡ화르륵!

진현우는 횃불을 성화에 던졌다.

성화의 불꽃이 피어오르고, 처음에는 미약하던 불길이 새하얗게 불타올랐다.

그렇게 성화가 완전히 타올랐을 때.

ㅡ퀘스트 '횃불을 가지고'를 완수하셨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와 칭호가 주어집니다.

ㅡ레벨이 상승했습니다!

ㅡ업적을 달성했습니다: 횃불을 가진 채 알헨 묘지를 돌파하여 성화를 밝힐 것.

ㅡ보상으로 영웅 등급 칭호 [횃불지기 (효과: 스킬 데미지 +10%)]을 획득했습니다.

횃불지기.

무려 영웅 등급의 칭호였다.

'스킬 데미지는 귀한 옵션이지.'

브로큰 월드라는 게임에서 데미지 증가 옵션은 귀한 취급을 받는 옵션이었다.

데미지 관련 옵션이 붙은 아이템은 경매장에서 훨씬 비싼 값에 팔릴 정도였다.

그걸 아무런 페널티 없이 영구히 제공하는 칭호라면 더더욱 귀할 수밖에.

'여기서 하나 더 챙길 게 있는데.'

진현우는 성화 근처의 안개 속을 헤집고 다녔다. 그렇게 얼마나 움직였을까.

"여기군."

낡은 폐가가 나타났다.

한때는 사람이 살았지만 최근에는 오랫동안 아무도 들리지 않은 것 같은 폐가.

진현우는 거기서 지팡이를 찾았다.

[묘지기의 지팡이 (일반)]

· 설명: 오랫동안 묘지기로 일했던 자가 아끼던 지팡이다. 세월이 흔적이 역력하다.

· 착용 제한: 없음

· 옵션: 없음

얼핏 보기에는 별다른 가치가 없어 보이는 아이템이고 실제로도 그렇지만.

이걸로 할 수 있는 게 있다.

"흠, 그리고 돌아가기 전에...."

진현우는 기억을 더듬었다.

조금 전 아그니스의 길드원들이 묘지의 보물 상자에 아이템을 채웠었다.

"그것들은 다 챙기고 가야지."

그의 입가의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 * *

눈이 먼 노인은 홀로 앉아있었다.

아무런 미동도 없이 숨만 쉬는 모습은 누가 보면 죽었나 착각할 정도였다.

ㅡ철컥, 절그럭.

노인은 갑작스런 소음에 고개를 들었다. 저 너머, 안개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다.

"어르신. 성화에 불을 밝히고 왔습니다."

"오, 오오.... 느껴지네, 느껴져...."

등에 온갖 아이템을 짊어진 진현우였다.

노인이 밝게 웃으면서 쭈글쭈글한 손을 내뻗었고, 진현우는 그 손을 맞잡았다.

"고맙네, 고마우이."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진현우는 묘지의 폐가에서 챙겨온 지팡이를 꺼내 노인의 손에 쥐여줬다.

노인의 탁한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감촉은...."

"어르신이 쓰시던 지팡이입니다. 잃어버렸다고 말씀하시는 걸 들어서요."

"이렇게 착한 젊은이가 있을 줄이야.... 잠깐만 기다려보게. 뭔가 보답할 것이...."

노인은 감동한 눈치였다. 그는 품속을 뒤적거리더니 낡은 목걸이를 꺼냈다.

"나한테 이런 호의를 베푼 것은 젊은이가 처음일세. 부디, 이걸 받아주게."

진현우는 거절하지 않았다.

노인이 건넨 목걸이를 조심스레 받았다.

[묘지기의 목걸이 (고급)]

· 착용 제한: 없음.

· 옵션: 찬란한 빛.

* 찬란한 빛: 하루 한 번, 순간적으로 밝은 빛을 터트려서 주변을 환하게 밝힌다. 짧은 시간 모든 능력치를 10% 강화한다.

옵션 자체는 심심한 감이 있었지만, 굉장히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일종의 섬광탄 같은 느낌이라 해야 하나.'

나쁘지 않은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진현우는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를 봤다.

ㅡ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처음으로 묘지기의 지팡이를 찾아서 되찾아줄 것.

ㅡ보상으로 영웅 등급 칭호 [횃불지기]의 성능이 강화되며, 칭호의 이름이 [성화를 밝히는 자]로 변경됩니다.

진현우가 지팡이를 찾아준 이유.

바로 이것이었다. 횃불지기라는 영웅 등급 칭호의 성능을 강화하기 위해서.

[성화를 밝힌 자 (영웅)]

ㅡ효과: 모든 능력치가 +5 상승한다. 스킬 데미지가 +10% 증가한다.

진현우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성화를 밝힌 자. 알헨 묘지에서 오직 한 명의 플레이어만 얻을 수 있는 칭호다.

'묘지기에서 가장 처음 지팡이를 갖다주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칭호.'

묘지기는 지팡이를 되찾았으니 앞으로 지팡이를 찾아달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진현우를 제외한 다른 플레이어는 성화를 밝힌 자를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탑에 이런 칭호들이 꽤 있단 말이야.'

한 명의 플레이어만 얻을 수 있는 칭호.

진현우가 본격적으로 활동할 시기에는 이미 많이 발굴되어서 사라졌었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시간은 많다.'

지금이면 발굴되지 않은 칭호들이 많다. 진현우는 그런 것들을 찾아낼 생각이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아닐세."

진현우는 묘지기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현하면서 자리를 떠났다.

이제 알헨 묘지에서 얻을 것은 없다.

'아이템들도 다 챙겼고.'

진현우가 등에 짊어진 아이템들은 아그니스가 보물 상자에 넣어둔 것들이었다.

슬프게도 대부분이 꽝. 소위 말하는 잡템이었지만, 두 개는 진귀한 아이템이었다.

팔면 큰 돈이 될 것이다.

"이제 박연호를 처리하러 가볼까."

진현우는 지하 통로로 향했다.

* * *

깊은 야밤.

오랫동안 운영했지만 최근 문을 닫은 훈련소에 불청객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뭐, 뭐야? 누구냐!"

"접니다, 교관님."

"어엉? 이 목소리는...."

진현우였다.

김수연과 그녀의 동료들, 그리고 기절한 박연호를 데리고 찾아온 불청객.

"그 후드는 뭐냐? 얼굴이 다 가려져 있으니 누군지 못 알아보겠잖나."

"사정이 좀 있어서요."

"뭔 사정이길래?"

교관은 의아해하면서 진현우의 뒤에 있는 사람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것들은 또 뭐야?"

"보면 모릅니까? 팔 잘린 놈은 포로고 나머지는 다친 사람들이죠. 보살펴주세요."

"보살피라고? 누가?"

"교관님이요."

"내가?"

교관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야밤에 대뜸 찾아오더니 하는 말이 다친 사람들을 보살펴주라니.

"여기 팔 잘린 놈은 절대로 내보내면 안 됩니다. 계속 기절시켜주시고요. 네크로맨서라서 방심하면 큰일 납니다."

"네크로맨서라고! 남의 집값 떨어지게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며칠만 맡아주세요. 금방 찾아갈게요."

교관은 황당함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진현우를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명심하게. 자네는 웨펀 마스터의...."

"예, 예. 압니다.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닌 건 그놈들이에요.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끄응, 알겠네."

교관은 툴툴거리면서 부탁을 들어줬고, 진현우는 곧바로 김수연을 바라봤다.

"부탁 하나만 좀 합시다. 여기서 한동안 머무르면서 저분하고 같이 박연호가 못 도망가게 감시해줄 수 있겠어요?"

"아, 네. 괜찮아요. 저도 이 자식이 도망치는 건 그냥 두고 볼 수 없으니까."

김수연이 박연호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진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돌렸다.

"어디 가시려는 거예요?"

"벌집 들쑤시러."

박연호.

그리고 이놈과 연관된 아그니스까지.

'조용히 넘어가지는 못할 거다.'

진현우는 박연호의 형, 이번 일을 계획한 박현진을 떠올리며 훈련소를 떠났다.

* * *

탑과 게이트가 나타나고, 온갖 몬스터가 나타나면서 세상은 혼란스러워졌지만.

서울의 땅값은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올랐다.

ㅡ안전지대.

한국에서 서울은 게이트가 나타나지 않는 유일한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안전하니 가격이 더 오를 수밖에.

그런 이유로, 여러 유명 길드의 길드 하우스 역시 서울에 대거 자리 잡고 있었다.

"...."

아그니스 길드 역시 그러했다.

큰 유명세를 떨치는 길드답게 아그니스는 고층 빌딩 하나를 통째로 사용했다.

그곳의 최상층, 바깥의 전망이 훤히 보이는 방에 한 남자가 야경을 보고 있었다.

ㅡ똑똑.

"박현진 부 길드장님, 계십니까."

"들어와라."

남자, 박현진이 대답했다.

그의 부하가 방으로 들어왔고, 뒤돈 채 서 있던 그에게 업무를 보고했다.

아그니스가 통제하는 점령지에서 나온 수입에 관한 얘기, 그리고 알헨 묘지까지.

"이번에 보물 상자에 아이템을 보충했습니다. 여섯 파티가 보물을 가져갔는데 커뮤니티에 후기를 잘 써서 올려줬더군요."

"회수할 준비는 해뒀겠지?"

"예. 파티 셋은 저희 측 인물이라서 반납 받을 예정입니다. 나머지 파티는 탑에 들어왔을 때 기회를 보고 회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알헨 묘지에 보물 상자들이 있다는 소식은 아그니스가 퍼트린 것이었다.

커뮤니티를 이용해서 가짜 후기를 올리고, 거기에 사람들이 꼬이게끔 했다.

결과는 아주 좋았다.

"박연호한테 지령은 전달했나?"

"오늘 보급품과 함께 전달하기로 했습니다. 아마 내일이면 보고가 올라올 겁니다."

"그래."

박현진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플레이어로서는 애매한 그와는 달리 동생, 박연호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

자신은 탑의 4층에서 멈췄지만, 녀석이라면 더 높은 층까지 도달할 수 있을 터.

'계획대로만 성장한다면 어마어마한 괴물이 될 거다. 그렇게 성장한 녀석은 내 길드를 만드는 데 큰 밑천이 되겠지.'

박현진은 욕심이 많았다.

화련과의 친분 덕분에 아그니스의 부 길드장이 되었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이것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다.

'그래, 화련처럼.'

랭커 플레이어이면서 대형 길드의 수장인 화련은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박현진 역시 그녀처럼 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플레이어로서의 재능이 애매하다. 직위 역시 부 길드장일 뿐.

'그렇다면 내가 길드장이 되면 된다.'

화련은 박현진을 신뢰하고 있다.

길드에 관한 업무는 대부분 그에게 맡기고 본인은 게이트만 공략할 정도였다.

그게 그에게는 기회였다.

'연호, 그 녀석을 랭커 플레이어로 만들어야지. 그리고 화련이 날 믿는 걸 이용해서 아그니스를 천천히 해체한다....'

박현진은 다시금 창밖을 바라봤다. 어두운 밤, 서울의 야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야경이야. 안 그래?"

"예. 그렇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여기서 보는 야경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

이 건물은 결국 화련의 것.

아그니스라는 대형 길드를 이끄는 길드장, 화련의 것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야경을 보던 박현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 여자한테 이 길드는 아까워."

아그니스.

이 길드는 언젠가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된다면, 화련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완전히 새로운 길드를 만들어낼 것이다.

5대 길드에 들 수 있는 길드를.

'오직 나만의 길드를.'

박현진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33화

물 먹일 정보

서울에 있는 한 카페.

네메시스의 스카우터, 유민혁은 카페의 룸에서 인터넷 기사를 확인하고 있었다.

ㅡ[레서 골렘 군단의 습격] 게이트 방어 성공. 기여도 99%를 달성한 사람은 누구?

ㅡ여러 점령지에서 악명을 떨치던 '유망주 헌터', 세계의 탑 1층의 던전에서 사망.

유민혁은 댓글을 확인했다.

위쪽의 기사에 달린 댓글들은 전반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반대로 아래쪽의 기사에는 누가 죽였는지는 몰라도 고맙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재밌군. 둘 다 같은 사람인데."

사람들은 사실상 전사 혼자서 게이트를 공략했다는 말을 믿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유민혁은 달랐다.

그 전사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진현우..., 그 남자라면 가능하다.'

튜토리얼에서 혼자 고블린들을 학살했고, 악명 높은 유망주 사냥꾼을 죽였다.

이제는 A등급 게이트를 공략하기까지.

'놓쳐서는 안 되는 인재.'

그리고 마침 오늘, 진현우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던 유민혁은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그를 만나기로 했다.

ㅡ끼이익.

'도착했나.'

룸의 문이 열렸다.

그 너머로 남자가 들어왔다. 크게 특별한 것 없는 20대 초반의 남성이었다.

유민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뵙는군요, 진현우 씨. 반갑습니다."

"예. 갑작스럽게 만나자고 했는데 흔쾌히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쁘실 텐데요."

"아뇨, 괜찮습니다."

유민혁이 웃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오히려 자신이 더 고맙다고 해야 할 상황이다.

"오히려 저희가 더 감사하다고 해야 겠지요. 저희 길드원들을 구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사람들 말로는 진현우 씨가 아니었다면 모두 던전에서 죽었을 거라더군요."

"그랬겠죠."

진현우는 딱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유민혁이 브리프 케이스를 열었다.

"길드 차원에서 크게 기대하는 유망주들이라서, 구해주신 보답을 어떻게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보상입니까?"

"예. 저희가 준비한 보상입니다."

브리프 케이스에는 카드가 담겨 있었다.

새하얀 카드였다.

"네메시스는 뛰어난 대장장이와 연금술사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 장인들이 만든 물건들을 1층의 상점에서 팔고 있습니다."

스윽, 유민혁이 카드를 내밀었다.

"상점에서 원하시는 물건을 하나 고르시고 직원한테 그 카드를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무료로 가져갈 수 있다."

"예, 그렇습니다."

"제가 원하는 거라면 무엇이든간에."

"맞습니다."

유민혁은 웃으며 화답했다.

네메시스에서 파는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가격이 어떻든 간에 가져갈 수 있다.

괜찮은 보상이었다.

"보상이 생각보다 후하군요. 제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라서 조금 놀라운데요."

"그만큼 저희가 이번 일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거라고 생각해주십시오."

"글쎄요. 따로 의도가 있을 것 같은데."

진현우는 책상 위에 놓인 카드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유민혁을 응시했다.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애초에 저한테 제안할 게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서로 그 제안이 뭔지 뻔히 아는데 빙빙 돌리지 말죠."

"...."

유민혁은 잠깐 침묵했다.

하지만 이내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저희 길드를 찾아오셨을 때 말씀드리려고 했던 거지만, 예. 그렇습니다. 저희는 진현우 님을 영입하고 싶습니다."

원래는 좀 더 자연스럽게 할 예정이었다.

네메시스라는 길드가 어떤 길드인지 보여줘서 호감을 가지게끔 만들고, 진현우 본인이 직접 가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려고.

지금은 생각을 바꿔야 한다.

'이미 여러 길드한테 다양한 제안을 받았을 확률이 높다. 길드장님은 나한테 전권을 맡기겠다고 했으니, 최대한 크게 질러서....'

유민혁은 빠르게 진현우를 판단했다.

히든 클래스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추정되면서 실력 역시 뛰어나다.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이 충만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눈치도 빠르다.

'강력한 히든 클래스라면 이 자리에서 무조건 영입해야 한다. 반드시.'

유민혁이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훤히 꿰뚫고 있었던 진현우의 태도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네메시스, 나쁘지 않네요."

"그럼...."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유민혁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긍정적인 대답이었기에, 어쩌면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드장을 만나고 싶은데요. 네메시스의 길드장, 윤서희 씨요. 가능하겠습니까?"

"그건...."

하지만 아니었다.

여태껏 냉정하던 유민혁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들어주기 곤란한 부탁이었다.

"당장 결정하기 힘듭니다. 지금 길드장님은 탑을 공략하시느라 많이 바쁘시고요."

유민혁은 난색을 표했다. 이 자리에서 바로 결정하기에는 곤란한 제안이었다.

"그러면 이렇게 전하세요. 그쪽이 싫어하는 아그니스 길드를 물 먹일 정보가 있는데, 들어볼 생각이 없느냐고."

"예?"

진현우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카드를 챙기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잘 먹었습니다. 연락 기다리죠."

진현우가 떠났고, 문이 닫혔다.

홀로 남은 유민혁은 멍하니 문을 바라봤다.

"이게 대체 무슨...."

여태껏 상대한 신인 플레이어 중에서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패턴이었다.

유민혁의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 * *

"날 만나고 싶다?"

ㅡ예, 길드장님.

네메시스의 길드장, 윤서희는 쉴 틈도 없이 일하는 중이었다. 조만간 있을 탑의 공략을 큰 사고 없이 성공하기 위함이었다.

그때, 유민혁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ㅡ진현우가 내건 조건입니다.

"흠, 저번에 박현진을 상대로 도발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했었죠. 거기에 이런 제안까지 하는 걸 보니 담력이 대단하군요."

ㅡ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유민혁이 고민하는 듯한 기색을 내보였다. 윤서희는 그에게 주저 없이 말하라 했다.

ㅡ그 남자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아그니스 길드를 물 먹일 정보가 있으니, 그걸 들어볼 생각이 없냐고 하더군요.

"아그니스를?"

윤서희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는 가까이 다가온 부하 길드원의 보고를 들으면서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런 정보가 있었나요?"

ㅡ모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아그니스는 선을 잘 타는 놈들입니다. 위법한 일을 하기는 하지만, 걸리지 않게끔 잘 처리하죠.

"그래서 캐낼 정보도 마땅히 없고요."

ㅡ예. 트집을 잡을 게 없지는 않지만, 사소해서 그냥 묻어버릴 수 있을 겁니다.

아그니스는 강한 영향력을 가진 길드.

어지간한 사안은 그들이 가진 영향력을 이용해서 아예 묻어버리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물을 먹일 수 있는 정보라니.

ㅡ지금 바로 조사해볼까요?

"조사하면 알아낼 수 있는 확률은?"

ㅡ솔직히, 힘들 것 같습니다.

"그 남자가 말한 '정보'라는 게 사실은 별다른 가치가 없는 정보일 확률은?"

ㅡ높다고 생각합니다. 히든 클래스고 재능은 뛰어나지만, 결국은 신인이니까요.

윤서희는 생각에 잠겼다.

'딱히 특별한 뒷배경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런 사람이 아그니스를 곤란하게 할 정보를 가지고 있다...?'

솔직히 믿기 힘든 말이었다.

하지만.

"좋아요. 잠깐 만나보죠."

ㅡ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짧게는 시간을 낼 수 있을 테니까. 모레 만나면 되겠네요. 시간은 그때로...."

ㅡ알겠습니다. 시간을 조율하겠습니다.

뚝, 전화가 끊겼다.

다시금 조용해진 집무실. 윤서희는 처리하던 서류에서 눈을 떼고 창밖을 봤다.

"진현우.... 흥미롭네."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 * *

다음 날, 진현우는 어떤 빌딩으로 향했다.

"이 건물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지상 25층 규모의 빌딩.

정문에는 검을 쥔 여성을 형상화한 듯한 문양이 멋들어지게 새겨져 있었다.

네메시스가 소유한 빌딩이었다.

'역시 네메시스. 돈이 많아.'

플레이어 간의 대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플레이어 사회의 선두주자를 달리던 길드다.

그 이후에 길드장을 비롯한 핵심 길드원들이 죄다 죽어서 쫄딱 망했지만.

'이 시기에는 아마 5대 길드 중 하나라고 불렸을 텐데. 지금이면 한창 전성기일 때지.'

진현우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1층에는 네메시스의 대장장이와 연금술사가 만든 아이템을 파는 가게들이 있었다.

그는 가드들에게 신분을 확인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으로 향했다.

"전망 좋네."

진현우는 바깥 풍경을 봤다.

이 정도 규모의 대형 빌딩을 소유할 정도로 큰 재력을 가진 것이 네메시스다.

'미래에 네메시스가 남아있었다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엘리베이터의 창문 너머에는 거의 복구가 끝난 서울의 풍경이 보였다.

하지만 진현우의 망막에는 이미 멸망한, 미래의 서울 풍경이 보이고 있었다.

"...."

침식률이 계속 높아지면서 결국 안전지대마저 박탈당했던 미래의 서울.

도시는 무너졌고, 복구할 여력도 없었다.

그대로 멸망하기를 기다릴 뿐.

"괜히 심란해지네, 이거."

진현우는 오랫동안 창밖을 바라봤다.

그의 상념이 멈춘 것은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도착했다는 알림음을 낸 후였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최상층에서 기다리는 것은 이전에 만났던 스카우터, 유민혁이었다.

그가 진현우를 방으로 안내했다.

"길드장님께서 영입 대상을 직접 만나는 건 처음입니다. 길드장님을 만나고 싶다고 말한 것도 진현우 님이 처음이고요."

"그래요?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유민혁은 한숨을 삼키면서 문을 열었다.

"부디 조심해주십시오."

그 너머에 보이는 것은 넓은 방.

필요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무적인 방에, 한 여성이 서류를 보고 있었다.

허벅지까지 닿는 풍성한 흑발과 뚜렷한 이목구비가 인상적인 여성이었다.

"절 만나고 싶다고 했다고요."

"예, 맞습니다."

"신인 중에 가끔 대담한 조건을 거는 사람들이 있죠. 자기의 분을 넘어서는...."

윤서희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입가에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눈빛은 지독할 정도로 무감정했다.

그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그런데 당신은 아닌 것 같군요. 재밌네요."

"칭찬으로 받아들여도 됩니까?"

"물론이죠."

윤서희가 맞은 편에 앉으라는 듯 손짓했고, 진현우는 고급스러운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차를 따랐다.

"서로 이름은 알고 있을 테니 자기소개는 넘어가죠. 제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서."

윤서희는 찻잔을 손가락으로 밀면서,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으로 진현우를 직시했다.

"제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아그니스 길드를 물 먹일 정보가 있다고 했죠. 그게 뭔가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좋네요."

어차피 서로 시간이 귀한 몸이다.

진현우와 윤서희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그니스가 비리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비리, 말인가요? 네, 그러고 있겠죠."

윤서희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건 지나가는 개도 안다. 아그니스가 깨끗하지 않은 길드임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증거 없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

"예. 확인해보시죠."

"이건...."

그렇기에 진현우는 증거를 제시했다.

여러 개의 기록용 수정구들. 그것들을 보는 윤서희의 시선이 미세하게 떨렸다.

"당신이 바라는 정보가 거기 있습니다."

"...."

윤서희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러자 작동하는 기록용 수정구들.

"이건...!"

윤서희가 눈을 크게 떴다.

수정구에 담긴 영상은 알헨 묘지의 진상.

그녀의 눈에 보이는 영상이, 그녀가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34화

당신과 같은 이유

한국에는 5대 길드라는 것이 있다.

가장 유명하면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길드들을 묶어서 부르는 칭호였다.

거기에 네메시스의 이름이 있다.

그리고 그 길드를 이끄는 플레이어.

ㅡ윤서희.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는 거대 길드, 네메시스를 직접 만들고 키워온 여장부.

그녀는 소유한 점령지를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끔 개방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ㅡ아니, 진짜로 그냥 써도 됨? 어깨 형님들 오셔서 꺼지라고 욕하는 거 아니고?

ㅡ안 하니까 걍 쓰셈; 오히려 카오틱 놈들 들어올까봐 정찰도 돌고 그러더라.

ㅡ뭐지? 제정신인가? 다른 길드는 점령지 통제 못 해서 안달이던데 얘네 왜 이래;

ㅡ나중에 마음 바뀌는 거 아냐?

그럴 일은 없었다.

네메시스는 점령지를 누구든 이용할 수 있게끔 하는 정책을 끝까지 유지했다.

윤서희가 죽기 전까지는.

ㅡ대전쟁.

플레이어끼리 일어난 대전쟁 때문이었다.

세계의 탑의 통제를 놓고 일어난 전쟁. 시간이 흐를수록 통제는 가혹해졌고, 신인은 길드 없이 성장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가 됐다.

ㅡ대형 길드는 통제를 멈춰야 합니다.

그때 목소리를 높인 게 윤서희였다.

ㅡ우리의 목표는 탑을 공략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이 세상에 일어난 이변을 제거하는 것 아니었나요? 지금 이 모습을 보십시오!

가혹한 통제.

탑의 공략을 앞장서서 이끌어야 할 대형 길드들은 점령지를 늘리는데 혈안이었다.

윤서희는 이래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고.

ㅡ저희는 탑을 해방하겠습니다.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길드들을 모아서 세력을 구축했다. 당연하지만 그걸 안 좋게 보던 대형 길드들도 거대한 세력을 구축했다.

두 세력은 탑에서 끊임없이 부딪혔고, 갈등은 점점 커졌으며,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게 대전쟁이었지.'

탑 내부에서 일어난 플레이어 간의 전쟁.

한국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플레이어가 휘말렸으며, 엄청난 인명 피해를 일으켰다.

'필요한 전쟁이긴 했어.'

탑 공략은 지지부진하고 침식률만 계속 올라가던 상황. 통제가 너무 가혹해서 신인 플레이어들이 성장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킨 거였고, 그 뜻은 좋았으나 결과는 너무도 치명적이었다.

'이상은 높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지.'

결과적으로 네메시스는 실패했다.

연합 내부에서 배신자가 나오면서 네메시스를 함정에 빠트렸는데, 그게 치명적이었다.

윤서희는 죽음을 맞이했다.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윤서희가 일으켰던 대전쟁은 그녀가 죽음으로써 비로소 마무리되었다.

미래에 치명상을 입힌 채로.

'그런 의미에서 윤서희는 믿을 만하다.'

지금의 아그니스는 진현우 혼자서 건드리기에는 규모가 너무 크고, 위험성이 높다.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거기에 적합한 플레이어가 윤서희였다. 대형 길드의 통제의 위험성을 잘 알고, 그걸 막기 위해서 전쟁까지 벌였던 사람이니까.

'잘 설득해봐야겠군.'

진현우는 윤서희를 바라봤다.

미래에 비참하게 죽었던 윤서희는 지금 수정구에서 나오는 영상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지하실은 대체...."

기록용 수정구에는 알헨 묘지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보물 상자에 아이템을 채우는 아그니스의 길드원들, 그리고 박연호의 악행까지.

"이 남자는 누구죠? 카오틱인가요?"

"아뇨, 플레이어입니다. 딱히 유명한 놈은 아닐 겁니다. 대신에 가족이 유명하죠."

"가족이라면?"

진현우는 사진을 두 장 건넸다.

하나는 박연호, 그리고 또 하나는 박현진.

"이 사람은...."

"누군지 아시지 않습니까?"

"모를 리가요. 아그니스의 부 길드장이잖아요. 그러고 보니 이 사람, 동생이...."

윤서희가 순간 침묵했다.

"...형제군요."

"예, 맞습니다. 박연호, 이놈의 직업이 네크로맨서 계통이거든요. PK를 하면서 숙련도를 빠르게 쌓으려고 했던 겁니다."

"PK가 숙련도를 가장 빠르게 올릴 수 있는 방법이긴 하죠. 게다가 네크로맨서면 묘지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을 테고."

알헨 묘지라는 장소는 네크로맨서인 박연호에게 있어서 최적의 장소였다.

시체나 영혼 수급도 쉬웠을 테고, 묘지 자체가 네크로맨서에게 이점이 많다.

"그리고 봉사의 증거까지."

윤서희도 아는 아이템이다.

탑 4층의 교회에서 아이템을 교환하는 용도로 쓰는 아이템. 하지만 어디서 얻는 건지 아무도 몰라서 모두 찾던 아이템이다.

"박현진, 운이 좋은 남자군요."

하지만 선을 넘었다.

박현진이 하는 행동은 카오틱과 다를 게 없다. 들키지 않았다면 문제 될 게 없었겠지만, 들켰으니 문제가 될 수밖에.

'그리고 욕심이 너무 많아.'

윤서희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어렸다.

이 일을 화련이 지시했을까? 그건 모른다. 아니, 애초에 알 필요도 없는 일이다.

"이걸 이용하면 얻을 수 있는 게 많을 거 같은데, 안 그렇습니까? 윤서희 길드장님."

"...."

그렇다.

화련이 지시했든 아니든, 이 정보는 아그니스를 크게 흔들 수 있는 정보다.

이걸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많다.

"좋아요, 진현우 씨. 이건 제가 싫어하는 아그니스 길드를 물 먹일 정보가 맞네요."

윤서희가 진현우를 직시했다.

확실히, 이건 만족스러운 정보였다.

"그럼, 제가 뭘 해줬으면 하나요?"

"네메시스가 가진 인맥을 이용해서 이 정보를 대중에게 공개했으면 합니다. 당연하지만 제가 드러나지 않게끔요. 그리고."

"그리고?"

진현우의 얼굴에 모호한 미소가 떠올랐다.

"세계의 탑 1층을 그 누구도 통제하지 못하게끔 네메시스가 관리해줬으면 합니다. 플레이어 협회와 협력하는 형태로요."

"저희가... 말인가요?"

"예. 그게 제 조건입니다."

윤서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신인 플레이어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조건이었다.

차라리 돈을 달라고 하면 모를까.

"그럼 당신한테 이득이 되는 게 없잖아요."

"상관없습니다. 이득을 볼려고 한 게 아니니까요. 그리고... 바라시던 거 아닙니까?"

"...."

윤서희가 침묵했다.

아그니스는 탑이 열린 초기에 세계의 탑 1층을 점령했고, 지금까지 다스려왔다.

몇 번이고 해방시키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도 없고 명분도 없어서 불가능했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맞아요. 제가 바라던 거긴 해요."

가능할 수도 있다.

그만큼 이번 사안은 크다. 아그니스 길드가 카오틱으로 몰려도 할 말이 없을 정도.

잘 이용한다면 1층을 해방할 수 있다.

"솔직히, 좀 놀랍네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조건이라서 진심인지 의심스럽고요."

"거짓말을 해서 뭐 하겠습니까?"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진현우는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당신과 같은 이유입니다."

"그게 무슨...."

"네메시스라는 대형 길드를 이끄는 당신이 점령지를 통제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죠."

탁, 호쾌하게 차를 다 마신 진현우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서희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박연호는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인수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내면 인계하죠."

"네? 잠깐만요."

"다음에 또 봅시다."

그 말을 남기고 진현우는 떠났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사무실.

"뭐야, 저 사람?"

윤서희는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 *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 진현우는 유리 너머를 보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동안은 혼자 움직이는 게 낫겠지.'

아그니스와 네메시스의 제안을 받았지만, 두 길드 다 가입할 생각은 없었다.

길드에 소속되면 움직임에 제약이 생긴다.

'지금은 내가 혼자니까 상관 없지만, 길드에 소속되면 내 행동이 길드에 영향을 미친다.'

진현우가 어떤 길드를 건드려서 점령지를 포기하게끔 했는데, 네메시스에 소속됐다면?

네메시스가 점령지를 빼앗기 위해서 상대 길드를 먼저 공격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행동의 여파가 너무 커진다는 뜻이다.

'혼자 움직이면 책임질 것도 없으니까.'

가능하면 네메시스와의 친분은 유지하면서, 한동안은 혼자 움직이는 게 낫다.

그게 진현우의 판단이었다.

'이제 네메시스를 기다리면 되겠지.'

알아서 아그니스를 공격해줄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진현우는 빌딩을 떠나지 않고 1층의 가게를 둘러봤다.

"어서 오세요!"

"마음 편하게 둘러보고 가십시오."

1층에는 다양한 가게가 있었다.

네메시스의 대장장이와 연금술사들이 만든 아이템들을 파는 가게들. 그 이름값답게 파는 아이템들이 하나 같이 뛰어났다.

"와, 이런 아이템을 만들었다고?"

"가격도 생각보다... 저렴하다?"

손님들이 품질에 감탄했다.

최상위 길드로 꼽히는 네메시스는 여러 점령지를 보유하고 있다. 거기서 공급되는 재료 아이템들을 통해서 만든 것들이다.

'공급망이 안정적이니 비슷한 품질의 아이템보다 가격이 저렴할 수밖에.'

품질도 좋고 가성비도 뛰어나다. 하지만 진현우한테 필요한 아이템은 아니었다.

"흠, 나쁘지는 않은데."

진현우는 다른 가게를 둘러봤다.

그중에는 네메시스의 길드원들이 모험 중에 얻은 아이템을 파는 곳도 있었다.

'여긴 품질이 들쭉날쭉하네.'

아무래도 사냥터나 던전에서 얻은 아이템이다 보니 품질이 일정치 않았다.

그래서인지 사람도 적었다.

"손님. 찾는 게 따로 있으신가요?"

진현우에게 직원이 다가왔다.

영업용 미소를 얼굴에 장착한 남자였다.

"글쎄요... 여긴 뭐 하는 곳입니까?"

"음, 일종의 창고 같은 곳이죠. 상품성이 없는 아이템들을 주로 이쪽에 모아둡니다."

직원이 진열대에 있는 아이템을 가리켰다.

"일단 진열해서 필요한 분이 있으면 파는 거고, 아니면 모아서 재료로 바꿔버리죠."

"처분할 아이템들이라는 거군요."

"네, 그렇습니다."

진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진열대에 있는 아이템들의 확인을 끝마쳤다.

'기억이 담긴 아이템은 없군.'

이런 곳에서 기억이 담긴 아이템을 찾을 때도 있는데, 오늘은 운이 안 따라줬다.

진현우는 다른 가게에서 적당히 괜찮은 아이템을 하나 사서 돌아가려 했다.

"뭔가 찾으시는 물건이라도 있으십니까? 여기 말고 지하에 창고도 따로 있는데요."

"창고요? 안내해주세요."

"네... 응? 아, 예. 한 번 살펴보시죠."

직원이 화들짝 놀랐다. 설마 진짜로 지하로 내려갈 거라고는 생각치 않아서였다.

진현우는 창고로 내려갔다.

"아이템이 많네요."

"다 재고입니다. 지상의 진열대에도 못 올라갈 정도로 상품성이 없는 것들이죠."

"확실히...."

확실히 물건이 안 팔리는 가게라서 그런지 재고가 꽤 많이 쌓여 있었다.

터놓고 말해서 품질이 좋지는 않다.

쓰레기라고 불러도 될 수준.

'이게 웬 횡재냐.'

근데 진현우에게는 보물산으로 보였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의 스킬, 기억 감정이 이곳에 있는 사념을 감지했으니까.

그는 아이템 하나를 잡았다.

"이거 주세요."

"예? 그 대검 말입니까?"

별다른 가치도 없는 쓰레기 대검.

보통의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그리 생각할 것이다. 진현우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기억 감정이 없었더라면 그랬겠지.'

진현우는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했다.

[녹슨 모험가의 대검 (일반)]

· 설명: 피로 녹슨 대검이다.

· 착용 제한: 없음

· 옵션: 없음

* 강한 사념이 남아있다.

사념이 담긴 아이템이었다.

녹슨 모험가의 대검은 그 이름대로 심하게 녹슨 상태였다.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딘가 불길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저, 정말로 이걸 사시려는 건가요?"

"예. 이걸로 주세요."

"음, 어... 저야 상관없지만."

직원은 굳이 녹슨 대검을 사려는 진현우를 의아해하면서도 결제를 도와줬다.

재고품을 사겠다는데 막을 이유도 없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떠나는 진현우.

그의 입가에는 짙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운이 좋네.'

35화

파멸

진현우가 떠났다.

빌딩의 최상층에서, 윤서희는 멀어지는 그의 등을 아무런 말 없이 지켜봤다.

"길드장님."

때마침 유민혁이 문을 열고 들어왔지만, 윤서희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떠셨습니까?"

"어떻냐고요? 미친놈 같던데요."

윤서희가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억지를 부려서 만나자고 하더니 충격적인 소식을 전하고는 멋대로 나가버렸다.

폭풍이 한바탕 휩쓸고 간 느낌이다.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버리더라고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아무 말도 못 했어요."

"길드장님도 그러셨습니까?"

"그러면 스카우터님도?"

유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대화할 때도 진현우는 갑작스러운 말을 남기고 멋대로 떠나버렸었다.

윤서희는 혀를 찼다.

"자신감이 넘치네요. 아니, 자신감인지 유망주 특유의 오만함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윤서희는 진현우를 판단했다.

유망주 특유의 오만함? 아니, 자신에게 확고한 자신이 있기에 나올 수 있는 태도였다.

ㅡ당신과 같은 이유입니다. 네메시스라는 대형 길드를 이끄는 당신이 점령지를 통제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죠.

'나하고 같은 이유라고?'

윤서희는 진현우가 나가기 전, 그녀에게 남겼던 말을 떠올렸다.

그녀가, 그리고 네메시스가 점령지를 통제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미래를 생각하면 그렇게 해야 하니까.'

플레이어들이 자유롭게 성장해야 한다.

이 세계는 게임처럼 바뀌었지만, 진짜 게임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현실이다.

플레이어들은 침식률이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 탑을 등반해야만 한다.

'아직까지는 탑도 공략할 만해. 하지만 시간이 지난다면? 앞으로는 어떨까?'

상위 층으로 올라갈수록 탑의 입장 레벨이 높아지고 있고, 위험성도 커져가고 있다.

앞으로 사상자도 많아질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서 플레이어들이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게끔 해서 인재를 보충해야 해.'

그게 윤서희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른 길드장들의 생각은 달랐다.

'근시안적인 놈들.'

현재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건 힘이다. 플레이어로서의 힘을 쌓으면 필연적으로 재력과 권력이 따라오게 된다.

대형 길드를 이끄는 플레이어들은 재벌이면서, 정부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권력을 가진 사람으로 대접받게 된다.

'그걸 놓고 싶지 않으니까.'

점령지를 통제하는 것이다.

더 많은 재력을 얻기 위해, 그리고 통제에 굴복한 유망주들을 영입하기 위해.

그걸로 자신들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

'정의감 같은 것 때문이 아니야.'

혹자는 윤서희의 행보를 보고 선하다며, 정의롭다며 칭송하고는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자신은 딱히 선하지도, 정의로운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러는 이유는.

"살려고 이러는 것일 뿐이지."

"네? 못 들었습니다, 길드장님."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윤서희는 길게 숨을 토해냈다.

진현우는 그런 자신과 똑같은 이유라고 했다. 사실인지, 그냥 던진 말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에 대한 호기심은 들었다.

"진현우가 1층을 들렀다가 갔나요?"

"네. 꽤 오랫동안 머무르다가 갔습니다."

"뭘 샀죠?"

길드에서 준 카드로 어떤 아이템을 샀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었다.

유민혁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좀 특이하더군요. 저희 브랜드의 아이템은 사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대신에?"

"이상한 아이템을 하나 샀습니다."

유민혁은 태블릿으로 녹슬고 낡은 대검을 보여줬다. 윤서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이한 점은 없는 아이템이군요."

"네. 재료로 바꾸려고 모아뒀던 아이템 중 하나입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걸 샀다?"

윤서희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아무래도 뭔가 비밀이 있는 모양이다. 진현우에 대한 그녀의 흥미 역시 깊어졌다.

"뭐, 그건 나중에. 일단 회의부터 열죠."

"네."

윤서희는 네메시스의 간부들을 불러서 아그니스에 관한 회의를 열었다.

진현우가 준 정보를 활용해야 한다.

* * *

깊은 밤, 아그니스의 빌딩 최상층.

부 길드장인 박현진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방안을 초조하게 돌아다녔다.

"연락이 안 된다고?"

"예. 알헨 묘지에서...."

그에게 보고하는 부하가 침을 삼켰다.

"어제부터 연락이 안 됩니다. 묘지로 길드원들을 보냈는데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아무도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박현진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알헨 묘지에 보급품을 전달하러 간 이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오늘 밝혀졌다.

게다가 오두막에 있던 박연호까지.

"죄다 행방불명이라도 됐다는 거냐? 박연호는! 내 동생은 어디로 갔냔 말이다!"

"모, 모르겠습니다. 지금 서둘러서 찾아보고 있으니, 잠시만 기다리시면...."

"이 무능한 새끼가!"

"끄으윽!"

분을 못 이긴 박현진이 재떨이를 내던졌다. 안면을 맞은 부하가 휘청거렸다.

"인원 총동원해서 상황부터 파악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라고! 알았나!"

"예, 예! 알겠습니다!"

부하가 허겁지겁 방을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박현진의 비서가 들어왔다.

"부, 부 길드장님. 보고드릴 것이...."

"지금 그딴 거 들을 정신 없으니 나가!"

"아, 아뇨. 이건 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비서가 박현진에게 다가오더니 손에 쥔 태블릿을 다급하게 보여줬다.

태블릿이 허공에 화면을 띄웠다.

"내 말을 뭐로 듣...."

거기에 비치는 것은 한 동영상.

알헨 묘지에 숨겨진, 아니, 박현진이 의도적으로 숨겼던 진실에 대한 동영상.

"대체 시발, 이게 무슨...."

그리고 인터넷을 도배한 기사들이었다.

박현진의 얼굴이 굳었다.

* * *

그로부터 조금 전.

인터넷에 게시글이 하나 올라왔다.

ㅡ최근에 알헨 묘지 가신 분 계신가요? 시작의 대륙에 있는 사냥터요.

ㅡ거기 사람들 많이 죽는 곳 아님? 사령들 보고 쫄아서 그냥 도망쳤는데;

ㅡ저번 주에 갔다가 포기했어요.

크게 특이한 것 없는 게시글. 하지만 작성자가 어떤 댓글을 단 순간 분위기가 달라졌다.

ㅡ그죠? 근데 사령 하나도 없던데요?

ㅡ?? 사령이 왜 없음? 못 본 거 아님?

ㅡ아뇨, 보물 상자 찾는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는데 진짜 하나도 못 만났어요;;

ㅡㅋㅋ 거짓말하네.

처음에 사람들은 아무도 안 믿었다.

알헨 묘지에 대한 악명이 널리 퍼져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ㅡ억울해서 동영상 찍어옴.

동영상이 하나 올라왔다.

안개가 자욱한 알헨 묘지의 모습. 기록용 수정구를 쥔 사람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오랫동안 묘지를 걸었지만.

ㅡ어?

ㅡ사령이... 없네?

사령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을 알헨 묘지로 유혹하던 보물 상자도 텅 비어 있었다.

ㅡ누가 보물 상자 다 털어갔는데?

ㅡ뭐야? 누가 사령들 다 죽인 건가? 근데 걔네 그 레벨에서는 잡기 엄청 힘들잖아. 그리고 이것들 리젠되는 거 아니었어?

ㅡ어? 잠깐만. 동영상 하나 더 올라옴.

바로 그때, 또 다른 동영상이 올라왔다.

충격적이기 그지없는 동영상이.

ㅡ야, 이거 뭐냐?

ㅡ저 새끼들 보물 상자에 아이템 채워넣고 있는데 뭐임? 내가 보는 게 맞냐?

어떤 사람들이 묘지를 돌아다니면서 보물 상자에 아이템을 채우고 있었다.

동영상을 본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ㅡ저거 리젠되는 거 아니었어? 그럼 지금까지 계속 저놈들이 채웠다는 거임?

ㅡ아니, 대체 왜? 산타클로스야?

도대체 뭘 위해서?

저런 비싼 아이템들을 왜 보물 상자에 넣고 있단 말인가. 미친 게 아니고서야.

그 해답은 금방 나왔다.

"아, 아그니스입니다! 부 길드장님께서 보급품하고 지령을 전달하라고 보내셨습니다!"

ㅡ아그니스? 부 길드장?

ㅡ아그니스라고? 뭐?

오두막에 도착한 사람들이 문을 두들기면서 자신들의 정체를 밝혔다.

아그니스 길드가 알헨 묘지의 보물 상자에 아이템들을 보충하고 있었다.

그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혼란에 빠졌을 때, 갑자기 기사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ㅡ[속보] 플레이어 연쇄살인 혐의로 '박연호' 긴급 체포. 그는 아그니스의 부 길드장인 '박현진'의 동생으로 알려져 충격.

ㅡ박현진은 사령과 언데드를 다룰 수 있는 히든 클래스. 플레이어를 죽인 이유는 '스킬의 숙련도를 쌓기 위함'이라고 밝혀.

ㅡ박연호와 아그니스의 관계는?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온갖 기사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기사의 내용은 하나같이 충격적이었다.

ㅡ박연호에게 납치됐던 피해자, 알헨 묘지에 있던 보물 상자는 플레이어들을 유인하고 이목을 돌리기 위함이라 증언.

ㅡ여태껏 행방을 알 수 없었던 '봉사의 증거'를 알헨 묘지에서 얻을 수 있다? 아그니스가 이번 일에 관여한 진짜 이유.

봉사의 증거.

기사에는 알헨 묘지의 퀘스트가 반복 퀘스트이며, 반복해서 완수하면 봉사의 증거를 하나 얻을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아그니스는 그걸 숨기기 위해서 박연호의 사령을 이용해 플레이어를 죽였고.

ㅡ이제 알겠네. 봉사의 증거로 교환하는 아이템 돈 주고도 못 구한다며?

ㅡ역겨운 새끼들.

ㅡ아이템 때문에 이런 짓을 해?

게시판이 난리가 났고, 사람들은 동영상의 내용을 온갖 커뮤니티로 날랐다.

그리고 모두의 의견이 하나로 모아졌다.

ㅡ아그니스는 해명해라!

ㅡ개새끼들아! 빨리 해명해!

* * *

"이, 이게 무슨...."

여론이 들끓었다.

각종 신문사에서 아그니스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기사들을 내놓고 있었다.

커뮤니티는 말할 것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박현진은 넋을 잃은 채 중얼거렸다. 눈치를 보던 비서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박연호 님이 체포됐습니다. 아무래도 심문해서 정보를 다 캐낸 것 같습니다."

"연호가, 체포됐다고? 어떻게!"

"저, 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가 알헨 묘지의 일을 눈치챘다고밖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박현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사냥터에 몬스터가 있다는 걸 의심하는 놈은 없다. 아무리 예민한 놈이라도.'

박현진은 의식의 허점을 노렸다.

사냥터라는 인식만 박힌다면 그곳에 몬스터가 있다는 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일부러 정보를 퍼트리고.'

원래는 몬스터가 없던 알헨 묘지에 박연호를 이용하여 사령을 만들어냈다.

또 보물 상자를 이용하여 플레이어들이 퀘스트가 아닌 아이템에 집중하게끔 했다.

마지막으로 사령들을 써서 묘지의 퀘스트를 반복해서 깨는 사람이 없게끔 했다.

'몇 달 동안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는데.'

모든 게 성공적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봉사의 증거로 돈을 주고도 못 구하는 아이템들을 모았고, 랭커가 되고 남을 인재인 박연호를 PK를 통해서 육성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모든 일을 끝마치고, 알헨 묘지에서의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 있었을 텐데.

들켜버렸다. 하필이면 지금.

'아니, 아직이다. 탑으로 도망치면 돼.'

탑은 치외법권이다.

자신을 잡으려고 사람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그전에 도망쳐서 탑으로 숨는다면.

그러면 재기할 기회를 노릴 수 있다.

하지만.

"부, 부 길드장님! 바깥에...!"

"뭐?"

쿠우웅!

누군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가슴팍에 독특한 문양의 배지를 단 플레이어들이었다.

그중에는 협회 소속의 랭커도 있었다.

"박현진 씨. 플레이어 협회 수사국입니다. 이번 '박연호 사건'으로 수사할 게 있는데, 같이 협회까지 가주시겠습니까?"

"하...."

멍하니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던 박현진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이런 시발."

뭔가 잘못됐다.

박현진은 직감했다.

36화

피에는 피

세상이 시끄럽다.

ㅡ아그니스 부 길드장 박현진 구속! 박현진은 현재 묵비권을 행사하는 중이며, 알헨 묘지 관련자들에게 사정 청취 시작.

ㅡ[사진] 아그니스 규탄 시위 현장.

ㅡ랭커가 되고 싶었던 박연호의 망상.

박현진, 박연호 형제가 알헨 묘지에서 했던 짓들이 밝혀지면서 언론은 난리가 났다.

사건의 여파는 점점 커졌고, 아그니스의 힘으로도 덮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ㅡ아그니스 길드장 화련, '자신은 몰랐던 일. 부 길드장의 독단적인 행동.' 무책임한 변명에 여론의 질타는 더욱 거세져.

ㅡ플레이어 협회는 다른 길드와의 협의를 통해 아그니스 길드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페널티를 부여할 것이라 밝혔습니다.

실제로 화련은 몰랐을 것이다.

박현진이 자신을 따르는 소수의 인원들과 함께 독단적으로 저지른 게 맞으니까.

하지만 그걸 사람들이 믿어줄 리가 만무했고 애초에 몰랐다는 것도 죄다.

그렇기에.

ㅡ[속보] 아그니스 길드, 론데 지역의 지배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 피해자들에게 최선을 다해서 보상하겠다며 사죄.

ㅡ향후 론데 지역은 플레이어 협회와 네메시스가 공동으로 관리하는 형태가 될 것이라고 관계자는 밝혔습니다.

화련은 론데 지역을 포기했다.

네메시스가 플레이어 협회와 협력하여 아그니스를 강하게 압박한 결과였다.

"몰골이 엉망이 됐군."

진현우는 플레이어 협회로 끌려가는 박현진의 얼굴을 TV로 확인했다.

이전에 주차장에서 봤을 때의 오만한 모습은 떠오르지 않는 초췌한 안색.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판을 잘 짰네."

이번에 아그니스를 압박하는 과정은 전적으로 네메시스, 윤서희가 짰다.

박연호를 인수하고, 놈한테서 정보를 캐내고, 언론 작업을 끝마치고 압박까지.

모든 과정이 매끄러웠다.

'내 존재는 적절하게 묻혔고.'

그 과정에서 진현우의 존재가 드러나는 일은 없었다. 그게 가장 만족스러웠다.

증언 같은 것도 김수연 일행이 익명을 대가로 해줬던 지라 더더욱 그러했다.

'아그니스의 보복은 걱정할 필요 없겠지.'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네메시스가 도와주겠지만, 어쨌든 걱정할 필요는 없어졌다.

진현우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ㅡ우우웅!

진현우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누군지 볼 필요도 없었다. 네메시스의 스카우터, 유민혁의 전화였다.

'매일 지겹지도 않나.'

매일 같이 꾸준히 길드에 영입하고 싶다는 내용의 연락을 보내고 있었다.

아마 윤서희의 명령일 것이다.

"아직은 이르지."

길드에 가입할 생각은 있지만, 그건 자신의 몸값이 최대치에 달했을 때.

지금은 몸값을 올려야 할 때다.

"좋아. 그럼 어디...."

진현우는 바닥에 놓인 아이템을 봤다.

네메시스의 창고에서 구매한 대검. 여기 담긴 사념을 감정할 때가 왔다.

ㅡ아이템의 기억을 감정합니다.

그의 눈앞에 낯선 풍경이 보였다.

어딘지 모를 숲. 그곳에서 어떤 남자가 처절하게 울부짖으면서 싸우고 있었다.

ㅡ감히, 네놈들이 감히...!

ㅡ크르아악!

남자가 싸우는 상대는 오크였다.

녹색의 피부에 우람한 근육을 가진 괴물들. 하지만 놈들은 남자가 휘두르는 대검에 어떤 저항도 못 하고 무력하게 죽어갔다.

ㅡ괴, 괴물... 괴물이다!

ㅡ으아아아아!

분노에 찬 남자가 포효했다.

한 번 대검을 휘두를 때마다 오크들이 쓰러졌다. 분노에 찬 포효를 들은 오크들은 겁에 질린 나머지 도망치기까지 했다.

ㅡ네놈들이 내 아내를, 딸을!

남자가 싸우는 이유는 그것이었다.

오크들의 손에 가족을 잃은 것. 처참하게 죽은 가족들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했다.

ㅡ모두 죽일 것이다. 오크라면, 이 세상에 남은 오크라면 한 놈도 남김없이!

남자는 그 말을 지켰다.

중년을 넘어 노년에 접어들 때까지 멈추지 않고 오크들을 찾고, 죽여나갔다.

그의 명성은 모험가들 사이에서 퍼졌고, 어느새 '오크 슬레이어'라는 이명이 붙었다.

ㅡ원통하구나. 한 놈이라도 더....

그의 죽음 역시 싸움터에서였다.

어떤 마을을 침공한 오크들을 쫓아내기 위해서 싸웠던 남자는 그곳에서 죽었다.

마을을 오크들로부터 지켜낸 채로.

ㅡ부족하다. 더 많은 오크들을 죽여야 해. 내 아내와 딸의 피 값을 받기 위해서라도!

마을 사람들은 그를 위해서 성대한 장례를 치렀지만, 남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영혼이 된 남자는 아직도 복수심을 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 복수심은 미련으로 남았고, 이윽고 강한 사념으로 변했다.

ㅡ내 스스로 복수를 이룰 수 없다면, 이 대검이 되어서라도 놈들을 베어낼 것이다....

사념은 그가 쓰던 대검에 깃들었다.

그로부터 아득한 세월이 흘렀고, 한때는 강한 힘을 가졌던 대검도 녹슬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

"조만간 그렇게 될 거야."

진현우의 스킬, '기억 감정'의 효과로 녹슨 대검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ㅡ기억 감정에 성공했습니다.

ㅡ분노한 모험가, '호그림'의 사념이 가지고 있던 힘을 전승합니다. 녹슨 대검 (일반)이 새로운 형태로 변화합니다.

ㅡ스킬, '피에는 피 (B)'를 익혔습니다.

ㅡ근력이 +2 상승했습니다.

익숙한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중에 있는 근력이 상승했다는 메시지에 진현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것도 괜찮지."

기억 감정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특성과 스킬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는 특성만 주는 것도, 스킬만 주는 것도 있다. 혹은 둘 다 안 주거나.

'그럴 때는 대신에 능력치를 얻을 수 있다.'

이번 사념은 특성을 주지 않는 대신에 근력을 2만큼이나 선물로 줬다.

나쁘지 않다.

"스읍, 옛날 생각나네."

전생에서 진현우가 랭커였을 적.

그때는 레벨이 너무 높아서 더 올리기가 힘들었고, 대신 사념이 담긴 아이템을 찾아서 기억 감정으로 능력치를 올리려 했었다.

'끔찍할 정도로 비효율적이었지만.'

애초에 사념이 담긴 아이템 자체가 그리 흔치 않다. 재고가 산처럼 쌓인 창고에서도 겨우 하나 찾아내지 않았던가.

'지금은 감정으로 능력치를 얻는 것보다는 그냥 레벨을 올리는 게 더 낫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념이 담긴 아이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능력치를 욕심낼 필요는 없다.

[오크 슬레이어 (고급)]

ㅡ설명: 오크들에게 가족을 잃었던 복수귀가 사용했던 대검이다. 수많은 오크의 피로 새긴 룬 문자가 검신에 새겨져 있다.

ㅡ착용 제한: 진현우 외 착용 불가.

ㅡ효과: 오크 사냥꾼, 복수의 룬

* 오크 사냥꾼: 오크와 싸울 때 모든 능력치가 +5 상승하며 데미지가 20% 상승한다.

* 복수의 룬: 오크의 피를 머금을 때마다 대검에 새겨진 룬 문자가 진해진다. 피를 흡수할 때마다 대검이 강화되며, 모든 피를 흡수했을 때 대검이 새로운 형상으로 변한다.

* 공포: 오크들을 겁에 질리게 만든다.​

이번에 감정한 대검은 특이했다.

오로지 한 가지 목적, 오크를 죽인다는 목적에 맞춘 옵션을 가진 대검이었다.

'일반 몬스터 상대로 쓸 일은 없겠네.'

옵션은 굉장히 좋다.

복수의 룬 효과가 발동하면 대검이 강화될 텐데, 어떻게 바뀔지도 꽤 궁금했다.

진현우는 스킬을 확인했다.

· 피에는 피 (B, Lv.1): 사용자가 입은 부상의 정도에 따라서 신체 능력을 강화한다. 사용자가 다쳤을 때만 사용할 수 있다.

위험 부담이 큰 스킬이다.

다쳐야지만 쓸 수 있고, 심하게 다쳐야지만 효율이 올라가는 기괴한 스킬.

진현우는 상태창을 열었다.

[진현우]

· 레벨: 18

· 클래스: 웨펀 마스터

· 칭호: 시간을 거스른 자

· 근력: 62 (+17) · 민첩: 56 (+17)

· 체력: 53 (+17) · 마력: 39 (+8)

상태창을 본 진현우는 생각을 잠겼다.

지금 능력치, 그리고 스킬들. 여러 아이템들을 활용한다면, 어쩌면....

"그 업적을 얻을 수도 있겠는데?"

플로어 마스터에게서 얻을 수 있는 업적.

전생에서는 얻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현우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이 무기는 탑 2층에서 쓰면 되겠군.'

세계의 탑 2층에 오크와 관련된 대형 퀘스트가 하나 있다. 아마 지금 시기면 한창 공략할 인원을 모집하고 있을 것이다.

거기서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그전에 1층부터 끝내야지."

플로어 마스터. 놈을 죽인다면 더이상 론데 지역에 남은 용건은 없다.

진현우는 탑으로 향했다.

* * *

[론데 지역.]

ㅡ권장 레벨: Lv.1~Lv.20.

ㅡ설명: 이제 막 모험을 시작한 초보자들이 성장할 수 있는 지역이다. 소도시 '론데'를 중심으로 적당한 사냥터와 던전이 펼쳐져 있다.

ㅡ점령 길드: 없음.

론데 지역의 통제는 끝났다.

플레이어 협회는 네메시스와 협력하는 형태로 론데 지역을 관리하겠다고 발표했다.

네메시스는 점령지를 통제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길드였기에 사람들은 환호했다.

"와, 그럼 이 사냥터 가도 되는 거야? 간다고 아그니스 놈들이 뭐라 안 하는 거지?"

"걔네들 다 쫓겨난 거 모르냐? 당연하지."

신인 플레이어들은 여태껏 가지 못했던 던전과 사냥터를 마음껏 방문했다.

그들을 통제할 길드는 이제 없으니까.

'플로어 마스터에 사람이 몰렸겠는데.'

마을에 도착한 진현우는 지도를 펼쳤다.

론데 지역의 가장 구석진 곳에, 최근 아그니스가 통제하려고 했던 사냥터가 있다.

ㅡ어두운 숲.

이곳에 있는 몬스터가 경험치를 많이 줘서 통제한 것인가? 아니었다.

그럼 엄청난 보상이 있어서? 아니었다.

'숲 너머에 있는 봉인된 폐성 때문이지.'

어두운 숲을 지나면 나오는 폐성.

그곳에 론데 지역의 플로어 마스터인 강철의 오우거, '굴락'이 봉인되어 있다.

'굴락의 봉인을 풀려면 어두운 숲의 몬스터를 사냥해서 봉인의 조각을 모아야 한다.'

아그니스는 굴락을 통제하기 위해서 어두운 숲을 철저하게 통제한 것이다.

누구도 플로어 마스터를 못 잡게 하려고.

"아그니스가 없어졌으니 온갖 플레이어가 모여서 플로어 마스터를 잡으려고 하겠지."

아마 지금쯤이면 봉인된 숲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할 것이다. 몬스터 경쟁이 심해서 봉인의 조각을 모으기가 쉽지 않을 터.

하지만 언제나 방법은 있다.

"일단 가볼까."

진현우는 봉인된 숲으로 향했다.

울창한 나무가 빼곡하게 자라있는 어두운 숲은 그 이름대로 지독히도 어두웠다.

횃불이 없으면 앞을 볼 수 없을 정도.

"같이 봉인의 조각 모으실 분!"

"굴락 공략하실 분 찾습니다! 딜러랑 탱커 대기 중! 서포터 님만 오시면 바로 갑니다!"

"아, 사람들 더럽게 많네."

"경쟁 엄청 심하겠는데?"

하지만 숲의 입구는 밝았다.

평소에는 아그니스의 길드원 말고는 아무도 없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굴락을 공략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굴락 공략한 사람 없지?"

"없어. 조각 다 모은 사람 없다던데? 어쩔래, 우리도 지금 바로 들어갈까?"

"글쎄...."

어떤 파티가 숲을 보며 대화하고 있었다. 진현우는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일단 상황을 좀 보자. 아까 나온 사람한테 들은 건데, 지금 숲속 상황이 개판이란다."

"개판이라고? 왜?"

"몬스터 말고 플레이어들 공격해서 봉인의 조각 모으는 놈들이 있다더라."

"진짜로?"

"어. 들은 건데 카오틱도 있다던데...."

플레이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와는 정반대로 진현우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럼 그렇지. 없을 리가 없지.'

한정된 몬스터, 아이템을 두고 경쟁을 하면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보다 편하게 봉인의 조각을 모으려는 놈들이 나타날 수밖에.

'그리고 난 그것보다 더 편하게 모아야지.'

플레이어들에게서 봉인의 조각을 빼앗는 놈들한테서 역으로 봉인의 조각을 뺏는다.

그게 진현우의 계획이었다.

"좋아, 가볼까."

진현우는 어두운 숲에 진입했다.

37화

봉인의 조각

어두운 숲에는 여러 몬스터가 있다.

봉인의 조각 영향을 받아서 흉포하게 변한 수인 형태의 몬스터들. 그리고 그런 놈들을 사냥하는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그것도 엄청 많이.

"아! 이거 내가 먼저 쳤다고!"

"그런 게 어딨냐? 잡으면 임자지."

"이게 미쳤나!"

몬스터의 숫자는 한정됐고 플레이어는 많다. 분쟁이 일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런 분쟁을 피해서 조용히 봉인의 조각을 모으는 플레이어들도 있었다.

"좋아, 온다...."

"지금!"

숲의 외곽.

3인으로 구성된 파티가 몬스터를 사냥하고 있었다. 단번에 몬스터를 죽인 플레이어들은 놈이 드롭한 아이템을 확인했다.

"오, 봉인의 조각이다."

그중에 자그마한 결정이 있었다.

봉인의 조각이다. 남자는 누가 훔쳐갈까 재빠르게 결정을 주머니에 챙겼다.

"어후, 이제 몇 개째지?"

"여섯 개. 봉인 푸는 데 필요한 개수는 육십 개니까 아직 한참 멀었네."

"여섯 개라고?!"

봉인의 조각을 쥔 남자가 경악했다.

"아니, 통제 풀리자마자 바로 들어온 건데 여섯 개밖에 못 모았어? 진짜야?"

"어."

여자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최근 아그니스는 플로어 마스터까지 통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것도 비싸게.

덕분에 골드가 모자란 플레이어들은 레벨이 돼도 플로어 마스터를 공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통제가 끝난 지금 온갖 플레이어가 몰려들고 있었다.

'지금이 위험한 타이밍이긴 해.'

플레이어 협회와 네메시스는 협력해서 론데 지역을 관리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체계가 잡히려면 시간이 걸릴 터. 네메시스는 아그니스가 오랫동안 다스려온 론데를 재정비하느라고 바빴다.

자연스럽게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

'카오틱이 있을 수도 있어.'

특히 이곳.

플레이어 간의 분쟁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시 여겨지는 봉인된 숲이라면 더더욱.

"조심해서 가자."

"어."

파티는 경계하면서 사냥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조심히 움직이는 그들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야, 들었냐? 여섯 개란다."

"흐흐, 나쁘지 않네."

얼굴을 복면으로 가린 이들.

다른 플레이어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봉인의 조각을 모으던 이들이다.

차이가 하나 있다면.

"어쩔까, 지금 바로 칠까?"

"기다려봐. 저놈들이 몬스터하고 싸울 때 치자. 굳이 지금 싸울 필요는 없잖아."

"그건 그렇지."

이들은 몬스터를 사냥해서 얻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사냥해서 얻는다는 것.

플레이어들을 공격해서 그들이 얻은 봉인의 조각을 빼앗는 무리들이었다.

바로 카오틱이다.

"최대한 빠르게 플로어 마스터만 처리하고 빠지자고. 네메시스가 본격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하면 이 짓거리도 못 할 테니까."

카오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노리던 플레이어들이 몬스터와 조우했고 또 한 번의 전투를 펼쳤다.

"저 여자부터 쏜다. 기다려...."

카오틱들이 활을 쥐었다.

플레이어들의 전투가 격해지고, 몬스터가 그들의 손에 쓰러졌을 때.

"쏴!"

화살이 쏘아졌다.

순식간에 쏘아진 화살이 몬스터가 드롭한 아이템을 파밍하려던 파티를 덮쳤다.

"뭐... 아아악!"

"크윽! 몬스터... 아니!"

이건 몬스터가 할 법한 공격이 아니다.

화살에 당한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다급하게 뒤를 돌아본 다른 파티원에게도 똑같이 원거리 공격이 쏟아졌다.

"커헉!"

"끄으으으...."

파티가 쓰러졌다.

저항할 새도 없었다. 몬스터를 해치우고 경계심이 풀어질 때를 제대로 노렸으니까.

나무에서 카오틱들이 뛰어내렸다.

"우리가 누군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봉인의 조각하고 가진 아이템 다 내놔."

"이, 개새끼들이...!"

"어허, 허튼 짓거리는 하지 말고. 얌전히 넘겨주면 목숨은 살려줄 테니까."

카오틱들이 쥔 무기가 서늘하게 빛났다.

남자는 이를 까드득 악물었다. 파티는 모두 부상을 당한 상태. 할 수 있는 게 없다.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가 없다.

"...."

"그래, 그래야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

남자와 파티원들은 분한 얼굴로 봉인의 조각과 가진 아이템들을 내놓았다.

카오틱들은 그것들을 모조리 챙겼다. 그리고 서로 눈짓하더니 무기를 들었다.

"좋아, 그럼...."

"자, 잠깐만! 목숨은 살려준다며!"

"그 말을 믿었냐?"

히죽, 카오틱이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들의 인상착의, 목소리까지 들은 놈들이다. 굳이 살려둘 이유가 없다.

당연히 이 자리에서 죽여야 한다.

"아, 안돼... 살려줘!"

"그런다고 누가 도우러 올 거 같아?"

"흐흐, 조각 챙겨줘서 고맙다."

카오틱이 검을 치켜세웠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겁에 질려 눈물을 흘리는 남자를 내리쳤다.

푸욱! 핏물이 튀었다.

"커, 억...!"

남자의 얼굴에 핏물이 튀었다.

그 정도의 출혈. 그런데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눈을 꾹 감았던 남자는 의아해하면서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으으윽...!"

"...!"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보였다.

남자에게 검을 내리치려던 카오틱. 그의 손목에 날카로운 도끼가 꽂혀 있었다.

그리고 도끼가 제멋대로 떠오르더니 어두운 숲 저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뭐, 뭐야?! 어떤 새끼야!"

"적이다!"

카오틱들이 도끼가 날아온 방향으로 등을 돌렸다. 그리고 바로 그때.

"허억!"

"끄아아악!"

어둠 속에서 도끼가 날아들었다.

쏘아지던 도끼가 분열하더니 카오틱 무리를 덮쳤다. 일부는 가까스로 쳐냈지만, 피하지 못한 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누군가 돌진했다.

'빠르다!'

눈으로 좇기도 힘든 속도.

묵직한 타격음이 연속해서 울려 퍼졌고, 그때마다 카오틱이 하나씩 쓰러졌다.

모두 다 제대로 된 반격도 하지 못했다.

"누, 누구... 어떤 놈이야!"

어느새, 남자에게 검을 내리치려던 카오틱 말고는 모두가 쓰러지고 말았다.

홀로 남은 카오틱이 왼손으로 검을 쥐었고 발악하듯이 내질렀다.

"으아아아아!"

ㅡ카드득!

충돌하는 검과 도끼.

그러자 믿을 수 없게도 검이 끝부분부터 갈라지더니 완전히 부서져 버렸다.

"무, 무슨...!"

경악하는 카오틱.

진현우는 그 앞에서 진각을 힘껏 밟으면서 오른손에 힘을 가득 실었다.

그리고 주먹을 내질렀다.

ㅡ쿠우웅!

"꺼억...!"

파쇄권.

진현우의 주먹이 두꺼운 갑옷을 파괴하고 그 안에 있던 복부를 강타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어어어억...."

카오틱이 고통을 못 견디고 기절했다. 다른 카오틱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남자는 경악에 찬 눈으로 진현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진현우는.

"좋아, 이걸로 40개."

주섬주섬, 카오틱들의 호주머니를 뒤져서 봉인의 조각을 털고 있었다.

* * *

진현우가 단신으로 카오틱들과 싸우는 걸 지켜본 남자는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괴물이다.'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괴물이라고.

'저 인원을 혼자서 잡는다고?'

레벨 차이가 크게 나는 것도 아니고.

이 숲에서 놀 정도면 18~20레벨일 것이다. 그런데 그걸 혼자서 다 처리한다니.

말이 안 된다.

"야, 임마. 착하게 좀 살아. 엉? 사람들이 가진 거 뺏으려고 하지 말고, 좀."

"억! 끄어억! 자, 잠깐...!"

"어허, 팔 내놔."

우드득!

진현우는 쓰러진 카오틱들의 팔과 다리를 무자비하게 꺾고, 완전히 부숴버렸다.

"끄윽, 끄르르륵...."

"그, 그만! 그마안! 으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숲에 울려 퍼졌다.

요즘 세상은 현대 의료 기술과 신성 마법이 결합되면서 의료 수준이 크게 오른 상황이다.

어지간한 부상은 고칠 수 있을 정도.

"이 정도면 앞으로 팔다리는 못 쓰겠지."

"미, 미친... 미친 새끼...."

하지만 이 정도로 산산이 부숴버리면 발달한 현대 의료 기술로도 완치가 힘들다.

앞으로 카오틱으로 활동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게 진현우가 노린 것이기도 했다.

남자는 그 잔혹한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니까 착하게 살아, 자식들아. 아니, 뭐, 이게 내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진현우는 헛기침을 터트리면서, 카오틱들이 착용하고 있던 장비를 모두 뺏었다.

그러면서 남자 쪽을 흘깃 봤다.

"괜찮아요?"

"예? 아, 예! 괜찮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다음부터는 조심하세요. 이놈들은 묶어둘 테니까 플레이어 협회에 넘기고요."

"네, 네."

진현우는 카오틱들을 포획했다.

플레이어 협회에 넘기면 알아서 처벌할 것이다. 원래 그의 스타일대로 하면 여기서 카오틱들을 죽여버리는 게 속이 편하긴 한데.

'지켜보는 눈이 있어서 좀 그렇네.'

진현우는 등을 돌렸다.

동료들에게 포션을 먹이던 남자는 떠나려는 진현우를 황급히 불러세웠다.

"저기요! 잠시만요!"

"예?"

남자가 주머니에서 결정을 꺼냈다.

그가 모은 봉인의 조각이었다.

"저희가 따로 드릴 게 없네요. 이거라도 가져가세요. 어차피 쓸 일도 없으니까."

"플로어 마스터는 공략 안 하려고요?"

"네. 나중에 네메시스가 지역 관리하면 그때 와서 공략하던가 해야겠어요."

남자는 혀를 내둘렀다.

지금 보스 몬스터를 잡으려는 건 너무 위험하다. 그런 판단에서였다.

그는 동료들을 데리고 숲을 떠났다.

"...이건 뺏은 건 아니지?"

크흠, 진현우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자기들이 직접 준 거니까 뺏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주변의 숲을 바라봤다.

'좋아, 조금만 더 하면 되겠군.'

이제 몇 개 남지 않았다.

진현우는 다음 사냥감을 찾아 나섰다.

* * *

굴락의 봉인을 해제하려면 봉인의 조각 60개를 모아야 한다. 굉장히 많은 양이지만, 모으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숨어있다가 기습하면 되는데, 뭐.'

론데 지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숨어든 카오틱들이 제법 많았다.

그리고 상대를 협박해서 봉인의 조각을 빼앗으려는 플레이어들도 많았고.

진현우는 그런 이들을 노렸다.

"끄으으윽...."

"다음부터는 착하게 살아라."

플레이어를 노렸던 또 다른 카오틱이 쓰러졌다. 진현우는 놈들의 몸을 뒤져서 봉인의 조각들을 남김없이 챙겼다.

장비를 빼앗는 건 덤이었다.

'이걸로 마지막인가.'

필요한 조각을 다 채웠다.

이제 남은 건 폐성으로 가는 것뿐.

'아마 이쪽일 텐데.'

어두운 숲 가운데에는 봉인된 폐성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진현우는 길을 나아갔다.

얼마나 걸어갔을까.

'저기다.'

숲 너머에 거대한 성이 보였다.

한때는 웅장했을 거 같지만, 지금은 세월의 흐름에 완전히 무너져버린 성.

그 입구를 장막이 막고 있었다.

[무너진 폐성]

· 입장 가능 레벨: 최대 Lv.20.

· 인원 제한: 4명.

· 설명: 한때 영광을 자랑했으나 지금은 무너진 폐성이다. 내부에 과거 큰 파괴를 자행했던 괴물이 봉인되어 있다.

* 입장 가능 레벨 초과 시 업적 달성 불가.

무너진 폐성이다.

굴락이 봉인되어 있는 던전.

진현우는 감회에 젖은 눈으로 폐성을 봤다.

'얼마 만에 오는 던전인지 모르겠네.'

이미 전생에 깬 적이 있는 던전이다.

이 던전을 다시 깰 날이 올 줄이야. 진현우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폐성으로 향했다.

38화

죽으려고 환장했네

플로어 마스터.

말 그대로 해당 층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플레이어가 더 높은 층으로 올라가려면 반드시 플로어 마스터를 공략해야 한다. 그래야 상위 층으로 올라갈 자격을 얻을 수 있다.

'위층으로 올라갈 방법은 층마다 다르다.'

물론 모든 층이 플로어 마스터를 공략해야 하는 건 아니다. 어떤 층의 경우에는 특수한 퀘스트를 달성해야 할 때도 있다.

1층은 플로어 마스터, 강철의 오우거 굴락을 공략해야지만 위층으로 향할 수 있다.

[무너진 폐성]

· 입장 가능 레벨: 최대 Lv.20까지.

· 인원 제한: 4명.

· 설명: 한때 영광을 자랑했으나 지금은 무너진 폐성이다. 내부에 과거 큰 파괴를 자행했던 괴물이 봉인되어 있다.

* 입장 가능 레벨 초과 시 업적 달성 불가.

진현우는 눈앞의 시스템 창을 봤다.

제일 아래에 있는 입장 가능 레벨 초과 시 업적 달성 불가라는 페널티가 눈에 띄었다.

'칭호를 획득할 수 없다는 말이지.'

업적 달성은 곧 칭호 획득이니까.

브로큰 월드에는 뛰어난 칭호가 많다.

특히 보스 몬스터와 관련된 업적이면 더더욱 그런데, 얻기 까다로운 것들이 대다수다.

'레벨이 높은 플레이어라면 얘기가 달라.'

여기는 20레벨 대의 던전.

이미 상위 층에 도달한 플레이어가 내려와서, 더 발전한 실력으로 도전한다면?

물론 보정 시스템 때문에 이 레벨 대의 플레이어 수준으로 약해지겠지만, 그들이 상위 층에서 얻은 경험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다.

'그럼 어려운 업적도 쉽게 얻을 수 있다.'

달성하기 힘든 업적도 쉬워질 테고, 얻기 어려운 칭호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편법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지독한 놈들.'

브로큰 월드의 지독함이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보정 시스템이 적용되지 않을 때 필요한 것들을 모두 얻어야 한다.

그게 고인물의 필수 덕목이었다.

"좋아, 다 준비됐지?"

"스으읍, 후우우.... 그래, 준비됐어."

"...들어가자!"

장막 앞에 서 있던 한 무리의 파티가 봉인의 조각을 장막에 바쳤다.

그러자 장막이 열렸고, 파티가 진입하자 다시금 닫히더니 X자 표시가 나타났다.

'생각보다 사람이 꽤 있네.'

진현우도 빠르게 조각을 모았지만, 그보다 먼저 조각을 모은 이들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폐성 근처에서 대기하면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오, 이번에는 4인 파티인가?"

"인원수 꽉 채웠네. 전사에 궁수, 도적, 마법사... 정석적인 파티 조합인데."

"이번에는 성공하려나. 벌써 5번째잖아."

"보면 알겠지. 화면 안 나오나?"

어떤 남자가 그렇게 말한 순간, 갑자기 허공에 거대한 화면이 나타났다.

폐성 내부를 비추는 화면이었다.

거기에 조금 전 폐성에 진입했던 파티가 어두운 복도를 걷는 모습이 나왔다.

"떠는 거 보니까 이번에도 실패하겠는데."

"...."

화면에 비치는 파티는 떨고 있었다.

그들보다 먼저 들어갔던 파티가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러면 될 것도 안 되지.'

복도의 끝에는 거대한 문이 있었다.

파티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그러자 넓은 홀이 그들을 반겼다.

그리고 플레이어들은 인지했다.

ㅡ철컥, 드르륵!

홀의 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괴물을.

사지는 사슬로 구속되었으며, 거대한 강철 갑옷을 입은 오우거가 마법진 위에 있었다.

강철의 오우거, 굴락.

세계의 탑 1층의 플로어 마스터다.

ㅡ그르르....

오우거가 감았던 두 눈을 떴다.

이성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붉은 눈동자가 주변을 훑어봤다.

그리고 그 눈동자에 파티가 들어왔다.

ㅡ구오오오오오!

인간을 인지한 굴락이 괴성을 내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놈을 구속하던 사슬이 단번에 뜯어졌고 파티가 다급히 외쳤다.

ㅡ마법! 화염 마법, 얼른!

ㅡ놈이 풀려나기 전에 공격해!

플레이어들이 공격을 펼쳤다.

쏟아지는 마법과 스킬들. 굴락이 풀리기 전에 최대한 피해를 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ㅡ우오오오오!

"와, 무슨... 공격이 하나도 안 통하네."

굴락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놈을 감싸고 있는 갑옷이 쏟아지는 공격들을 모조리 흡수하고, 튕겨냈다.

그리고 굴락이 사슬을 벗어던졌다.

ㅡ오, 온다... 야! 거기 있으면...!

ㅡ어, 어어?!

공격에 열중하던 도적은 굴락이 사슬을 벗어던졌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ㅡ콰드득!

ㅡ끄아아아악!

강철을 두른 주먹이 도적을 강타했다.

아무런 기교도 없이 그저 힘만 실은 일격. 하지만 오우거의 괴력은 무시무시했다.

단 일격에 살이 짓이겨지면서 뼈가 부러졌고, 도적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ㅡ이 멍청아! 크윽! 마법 준비해! 혜연이, 너는 침착하게 저놈 눈부터 노려!

ㅡ아, 알았어!

남은 것은 셋.

전사는 고함을 내질렀다. 몬스터의 어그로를 자신에게 집중하는 도발 스킬이다.

굴락의 시선이 전사를 향했다.

ㅡ그래, 날 봐라. 나를...!

멀찍이 서 있던 굴락이 무릎을 구부렸다.

놈의 두 다리에 힘이 집중됐다. 그리고 붉은 눈동자가 도발하는 전사를 보더니.

ㅡ쿠우우웅!

ㅡ커억...!

굴락이 포탄처럼 쏘아졌다.

거대한 몸이 전사를 들이박았고, 마치 교통사고라도 난 것처럼 전사가 날아갔다.

콰앙! 그의 몸이 벽에 박혔다.

ㅡ아, 아아... 으아아악!

궁수가 비명을 지르며 화살을 쐈다.

전사보다 민첩한 그녀는 굴락의 공격을 피하면서 계속 공격했지만, 유효타는 없었다.

그만큼 놈의 방어는 튼튼했다.

"공격이 아예 안 통하잖아?"

"저 방어력을 뚫을 방법이 있기는 한 거야? 온몸을 강철로 덧댄 놈이잖아."

"마법으로 공격하면 그나마 데미지가 들어가기는 하는데, 저걸 언제 잡아."

화면을 보던 플레이어들이 겁에 질렸다.

아그니스의 통제가 끝난 틈을 타서 굴락을 공략할 셈으로 온 것이었지만, 굴락이 너무도 강해서 그게 가능할까 싶었다.

ㅡ그르르르....

굴락은 도망치는 궁수를 벌레처럼 쳐다보더니 두 손에 힘을 집중했다.

놈의 손아귀에 붉은 마력이 집중했다.

ㅡ우오오오오!

굴락이 땅을 미친 듯이 내리쳤다.

강철을 덧댄 주먹이 땅을 내리칠 때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성이 흔들렸다.

쿠르르, 쾅! 성의 천장에서 떨어진 거대한 돌덩어리가 궁수의 앞을 가로막았다.

ㅡ아, 으으...!

그걸로 끝이었다.

멈춘 궁수의 목을 굴락이 낚아챘고 그대로 땅에 내리꽂았다.

놈의 등에 마법이 적중했지만, 늦었다.

ㅡ으, 으으, 아아아아....

남은 것은 마법사뿐.

전사, 궁수, 도적, 모두 쓰러졌다. 마법사 혼자서는 굴락을 이길 방법이 없다.

굴락이 마법사에게 걸어오고 있다.

ㅡ포, 포기할게.

마법사는 굴락을 깰 수 없는 판단을 내렸다. 이대로라면 모두 죽고 말 것이다.

혼자 남은 마법사가 다급히 외쳤다.

ㅡ포, 포기할게! 보스 공략을 포기한다고!"

ㅡ구오오오오!

굴락이 돌진하면서 마법사를 낚아채려는 순간, 갑자기 사슬이 나타났다.

굴락에게서 떨어져 나갔던 사슬이 사방에서 나타나더니 놈의 사지를 묶었다.

ㅡ철컥! 드르르륵!

ㅡ구우우오오오오오!

놈이 무릎을 꿇음과 동시에 신비로운 빛이 파티를 감쌌고,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헉, 허억! 으, 으으으!"

파티가 다시 나타난 건 폐성 앞이었다.

처참한 몰골로 쓰러진 플레이어 셋. 홀로 남은 마법사가 겁에 질린 채 떨었다.

'긴급 탈출을 쓴 건가.'

세계의 탑 1층에만 있는 특권.

플로어 마스터를 공략할 때, 딱 한 번의 기회에 한해서 탈출할 수 있게끔 해주는 것.

초보자들이 자신의 힘을 과신해서 플로어 마스터를 공략하다 죽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아, 아무나! 아무나 도와주세요! 제발!"

"이쪽으로 오세요!"

때마침 근처에 있던 사제들이 그들을 도왔다. 그걸 지켜보던 이들이 혀를 내둘렀다.

"...야, 저거 깰 수 있는 거 맞냐?"

"모, 몰라. 못 깰 거 같은데...."

"다음에 장비 바꾸고 다시 올까요...?"

"그게 낫지 않을까?"

굴락에게 당한 이들의 몰골은 처참했다.

자신들이 저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살아나오기는 했지만, 저 상태면 한동안은 요양하며 치료해야 할 것이다.

"다, 다음 폐성 들어가실 분!"

"...."

"...."

침묵이 감돌았다.

순서대로 폐성에 들어가기로 합의를 한 상태였는데, 아무도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저기요, 이번에 들어가신다면서요? 레벨도 되게 높다고 하셨던 거 같은데요...."

"그, 글쎄요. 저희가 그랬었나요?"

"크흐흠! 다음에 가겠습니다. 다음에요."

다음 순번이었던 파티가 공략을 포기했다. 다른 파티들도 마찬가지였다.

폐성에 기이한 적막이 흘렀다.

"그럼 폐성 들어가실 분 없는 거죠?"

그때, 진현우가 앞으로 나섰다.

후드를 깊게 눌러 써서 얼굴을 가리고 망토로 전신을 뒤덮어서 전신을 가린 상황.

플레이어들의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예? 아, 예. 근데... 혼자신데? 다른 파티원들은 없어요? 아직 안 오셨나?"

"아뇨, 없습니다. 저 혼자 갈 겁니다."

"네에?"

플레이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금 전 네 명이서 들어갔다가 굴락한테 박살 났는데, 혼자서 들어가겠다고?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혹시 미치셨어요?"

"미쳐도 제대로 미쳤네. 죽으려나 봐."

"거기 후드 쓴 아저씨, 자살하고 싶으면 여기 말고 다른 데 가서 해요."

플레이어들은 미쳐도 제대로 미쳤다며 진현우를 비웃었다.

하지만 진현우는 개의치 않았다.

'신경 쓸 필요도 없지.'

진현우는 장막에 봉인의 조각을 바쳤고, 굳게 닫혀있던 장막이 천천히 열렸다.

그는 폐성에 발을 내디뎠다.

"뭐야, 혼자서 들어간다고?"

"미친놈인가? 죽으려고 환장했네."

진현우를 미친놈이라 생각한 플레이어들은 그에게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들어가도 얼마 못 가 죽을 것이다.

모두 그렇게 판단한 것이다.

"조용하네."

다시금 장막이 닫혔다.

폐성 내부는 어둡고 조용했다. 진현우는 횃불로 길을 밝히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강철의 오우거, 굴락. 옛날에 잡은 놈이기는 한데, 잡는 방법은 기억하고 있어.'

조금 전의 파티가 싸우는 걸 보면서 굴락의 패턴이 어땠는지도 떠올랐다.

머릿속에서 놈의 공략법이 생각났다.

'그냥 잡기만 하는 걸로는 부족하지.'

진현우는 론데 지역에서 뽑아낼 수 있는 건 모조리 뽑아낼 생각이었다.

플로어 마스터 역시도 마찬가지다.

놈한테서 얻을 수 있는 칭호가 많다.

ㅡ철컥.

진현우는 건틀렛을 장착했다.

어느새 복도의 끝이 보였다. 저 너머에 거대한 문이 보였고, 그는 그 앞에 섰다.

"스읍, 후우우...."

문에 들어가기 전, 진현우는 도끼를 들었다. 그리고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미쳐도 제대로 미치긴 했지."

자신의 몸에 상처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용자가 입은 부상의 정도에 따라서 신체 능력을 강화하는 스킬, 피에는 피.

그 스킬을 발동하기 위해서였다.

'칭호 얻으려고 별의별 짓을....'

진현우는 혀를 차며 문에 손을 뻗었다.

끼이익, 천천히 열리는 문.

"좋아, 해볼까."

저 너머, 굴락이 보인다.

39화

갑옷 파괴자

강철의 오우거, 굴락.

놈은 먼 옛날 소도시 론데를 공격한 몬스터 무리를 이끌었던 우두머리였다.

엄청난 괴력을 가졌던 놈은 론데를 비롯한 인근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나라에서 기사단과 모험가들을 보내서 토벌했다던가.'

그때 굴락은 죽었다. 분명히.

하지만 어떤 흑마법사가 놈을 부활시켰고, 자신의 입맛대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굴락의 피부에 덧대어진 강철이 바로 그것이다. 놈을 병기로 만들려던 시도.

'하지만 실패했지.'

흉포한 굴락은 자신을 다스리려던 흑마법사를 죽였다. 그리고 이곳을 벗어나서 다시금 인간을 공격하려고 했지만.

저 마법진이 놈을 구속하고 있었다.

'약점은... 안 보이는군.'

특성, 약점 파악도 굴락에게서는 마땅히 약점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약점이 없으면 만들면 되지."

그는 땅을 짓밟으면서 일부러 소리를 냈다. 그러자 굴락이 감았던 두 눈을 떴다.

ㅡ그르르르....

굴락의 이성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눈동자가 진현우를 인식했다.

그 눈동자에 증오가 어렸다.

ㅡ인간... 인간, 인가아아안!

"왜, 만나서 반갑냐?"

우드득! 굴락은 자신을 구속하던 사슬을 힘으로 뜯어내면서 크게 포효했다.

폐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ㅡ우오오오오오!

굴락이 무릎을 굽혔다.

다리에 힘이 집중됐고, 놈은 흡사 포탄처럼 진현우를 향해서 쏘아졌다.

그 덩치로는 믿을 수 없는 속도.

ㅡ그르르르...!

하지만 진현우는 침착하게 피했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굴락의 몸에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을 만큼만 움직여서.

그리고 오른손에 힘을 집중하더니 굴락의 다리를 파쇄권으로 힘껏 가격했다.

ㅡ콰아앙!

ㅡ그오오오오오!

하지만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

굴락은 더 크게 분노하면서 진현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거대한 주먹이 쇄도하는 것이 돌덩어리가 날아오는 것만 같았다.

ㅡ쿠우웅!

진현우는 또 다시 묘기를 부리는 것처럼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주먹을 피했다.

그리고 주먹을 되돌리려는 굴락의 팔을 있는 힘껏 파쇄권으로 강타했다.

ㅡ그르아아아아!

데미지는 없다.

하지만 인간에게 공격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굴락의 움직임이 더욱 거세졌다.

놈은 발을 땅에 고정하면서, 진현우를 향해 두 주먹을 미친듯이 내질렀다.

'침착하게.'

거의 10미터에 달하는 오우거는 상대하는 사람에게 엄청난 위압감을 안겨줬다.

거대한 몸에서 비롯되는 힘은 스치는 것만으로도 치명상. 진현우라고 예외는 없다.

"무식하게 맞상대할 필요는 없지."

진현우는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허공을 스치는 굴락의 주먹. 놈은 거리를 좁히면서 우악스럽게 공격해왔다.

그때, 놈의 발밑에서 소리가 났다.

ㅡ철컥!

ㅡ그르르... 크아아악!

덫이 발동하는 소리였다.

빙결 덫이 폭발하면서 굴락의 발을 얼어붙게끔 했다. 놈은 귀찮다는 듯 발을 움직였고, 그것만으로도 빙결 덫은 효력을 다했지만.

그 찰나의 순간으로도 충분했다.

ㅡ뻐어엉!

ㅡ우오오오오!

돌진 스킬로 거리를 좁힌 진현우의 주먹이 다시 한 번 굴락의 몸을 강타했다.

그리고 곧바로 빠지는 진현우. 그가 있던 자리를 굴락의 주먹이 가로질렀다.

'조금만 더.'

진현우는 똑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굴락의 시선을 끌고, 놈에게 틈이 생길 때마다 접근해서 공격을 가하는 작업.

제대로 된 데미지는 입히지 못했다.

그래서 이 작업이 의미가 없는가?

'아니.'

그렇지 않다.

지금 진현우는 굴락에게 차곡차곡 데미지를 입히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ㅡ인간... 날파리... 죽인다...!

날랜 진현우의 움직임에 약이 오를대로 오른 굴락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놈의 주먹에 붉은 마력이 어렸다.

ㅡ그오오오오오!

굴락의 주먹이 땅을 강타했다.

놈은 미친 듯이 땅을 내리쳤고, 폐성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세게 요동쳤다.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한 천장과 벽에서 수많은 낙석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많이도 떨어진다, 진짜."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낙석을 피하려던 진현우의 발이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다.

그는 황급하게 몸을 옆으로 던졌다.

ㅡ쿠우우웅!

진현우의 바로 옆에 낙석이 떨어졌다. 그는 재빠르게 일어나면서 혀를 찼다.

'슬슬 어지럽네.'

여기로 들어오기 전에 몸에 상처를 만들었다. 굴락의 공격을 피할 때마다 상처가 벌어지면서 피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진현우는 크게 숨을 삼켰다.

'더 미룰 필요는 없겠지. 지금....'

ㅡ'피에는 피' 스킬을 발동합니다.

진현우가 붉은 기운을 내뿜었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피가 기체로 변하면서 안개처럼 주변을 자욱하게 메웠다.

사용자가 입은 부상의 정도에 따라서 신체 능력을 강화하는 스킬, 피에는 피.

ㅡ쿠르르르... 쿠웅!

그 효과가 지금 발동하고 있었다.

진현우는 쏟아지는 낙석을 계속해서 피했다. 마치 궤적을 읽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굴락에게 집중했다.

ㅡ우오오오오오!

굴락은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자신의 공격을 모두 피하는 진현우의 모습에 약이 오를대로 올라서였다.

놈은 두 주먹에 온힘을 집중하면서 다시금 두 팔을 한껏 높이 들어올렸다.

ㅡ우득! 콰지직!

바로 그때였다.

굴락의 온몸을 갑옷처럼 보호하던 강철에서 무언가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진현우는 두 눈을 감았다.

"지금...!"

ㅡ파아아앗!

그리고 목걸이를 매만졌다.

묘지기의 목걸이에 마력이 모이더니 섬광탄처럼 강렬한 빛이 터졌다.

오랫동안 어두운 폐성에 있었던 굴락의 눈으로는 버틸 수가 없는 빛이었다.

ㅡ크아아아아악!

고통스러워하며 눈을 가리는 굴락.

진현우는 곧바로 땅을 박차면서 놈과의 거리를 좁혔고, 감았던 눈을 떴다.

'보인다.'

굴락의 가슴께.

조금 전, 진현우는 굴락의 공격을 피하면서 놈이 입은 갑옷 곳곳을 공격했다.

적의 방어력이 높을수록 더 큰 피해를 입히는 건틀렛, '분쇄자'는 갑옷에 데미지를 줬고, 미세한 갈라짐을 만들었다.

ㅡ콰득! 콰지직!

그렇게 갑옷에 피해가 누적된 상태에서 굴락은 땅을 내려치며 격하게 움직였다.

그걸 버티지 못한 갑옷이 갈라지기 시작했고, 가장 취약한 부분이 생긴 것이다.

바로 약점이.

'약점이 보인다.'

여태껏 보이지 않았던 굴락의 약점이 놈의 가슴께에 선명하게 나타났다.

진현우는 크게 숨을 삼켰다.

"흐읍!"

ㅡ쿠우웅!

진현우의 발이 힘차게 진각을 밟았다.

그는 몸을 움직이면서 무게 중심을 이동하고, 온몸의 힘을 오른손에 집중했다.

건틀릿, 분쇄자가 푸르게 빛났다.

ㅡ[개미의 괴력] 옵션을 발동합니다.

ㅡ끼익!

진현우의 근육이 터질 듯이 부풀었다.

그는 곧바로 몸을 힘껏 비틀었다. 그리고 눈을 감싼 굴락이 고통에 몸을 구부렸을 때.

ㅡ콰아아앙!

ㅡ컥...!

파쇄권이 굴락의 가슴께를 강타했다.

발작하던 놈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그리고 아주 잠깐, 정적이 흘렀다.

정적은 금방 깨졌다.

ㅡ크, 흐흐흐.

굴락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멍청한 인간이다. 저딴 주먹으로 자신의 갑옷에 피해를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

ㅡ멍, 청한 인간. 짓이겨주마...!

진현우를 비웃으면서, 굴락이 두 팔을 높게 들어올리려는 바로 그 순간.

ㅡ콰드드득!

ㅡ우, 오오?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진현우가 약점을 타격한 순간, 굴락의 몸을 감싸던 갑옷에 균열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아주 작던 균열이 서서히 커졌고, 갑옷 전체로 퍼져나갔다.

ㅡ우, 오오, 으오오오오!

ㅡ파스스슥!

이윽고 갑옷이 파괴되기 시작했다.

진현우가 타격한 갑옷의 취약점, 가슴께부터 시작해서 갑옷이 부서졌다.

굴락은 당황하면서 갑옷을 붙잡았지만, 그런다고 파괴를 막을 수는 없었다.

ㅡ우오오오오....

완전히 부서진 갑옷.

비로소 놈의 맨몸이 드러났다.

"흐읍!"

진현우는 도끼를 투척했다. 날아가면서 분열한 도끼가 굴락의 사지를 꿰뚫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돌진한 진현우가 도끼를 받으면서 놈의 발목을 갈랐다.

ㅡ크아아아아악!

원래라면 갑옷이 막아냈을 공격.

하지만 지금 굴락에게는 갑옷이 없었고, 도끼는 살점을 베기에 충분히 날카로웠다.

진현우는 다른 발목까지 베었다.

ㅡ쿠웅!

고통을 못 견딘 굴락이 무릎을 꿇었다. 진현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보호색을 발동하면서 땅을 박찼다.

발동했을 때, 처음 공격하는 적에게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히게끔 하는 옵션.

"후욱...!"

진현우는 숨을 삼키며 도끼를 높이 들었다. 그리고 굴락이 반응할 새도 없이.

ㅡ서걱!

ㅡ크아아아아악!

"피부 한 번 더럽게... 질기네!"

놈의 목을 내리쳤다.

강타 스킬에 온갖 버프가 더해진 일격은 굴락의 두꺼운 목의 절반을 갈랐다.

진현우는 다시 한번 도끼를 내리쳤고.

ㅡ커억, 끅, 끄르륵....

그게 끝이었다.

몸에서 떨어진 거대한 머리가 땅을 나뒹굴었다. 무릎을 꿇었던 굴락의 몸은 멍청하게 서 있다가 힘을 잃고 쓰러졌다.

"후우, 후...!"

진현우는 거친 숨을 내쉬며, 쓰러진 굴락의 몸 위에 착지했다.

그의 눈앞에 메시지들이 나타났다.

ㅡ레벨이 상승했습니다!

ㅡ모든 스킬의 숙련도가 상승했습니다!

나타난 메시지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 아래로 업적을 달성했다는 메시지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ㅡ업적을 달성했습니다: 강철의 오우거, 굴락이 입은 갑옷을 완전히 파괴할 것.

ㅡ보상으로 전설 등급 칭호 [갑옷 파괴자 (효과: 모든 능력치 +10, 방어력 무시 +5%)]을 획득했습니다.

ㅡ업적을 달성했습니다: 강철의 오우거, 굴락을 솔로 플레이로 공략할 것.

ㅡ보상으로 전설 등급 칭호 [겁을 상실한 (효과: 모든 능력치 +10, 보스 몬스터에게 주는 데미지 +5%)]을 획득했습니다.

ㅡ업적을 달성했습니다: 강철의 오우거, 굴락을 죽일 것.

ㅡ보상으로 고급 등급 칭호 [폐성의 정복자 (효과: 근력과 체력 +5)]을 획득했습니다.

진현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솔직히 말해서 단순히 굴락을 죽이려고만 했으면 더 빨리 끝냈을 것이다.

굳이 귀찮게 갑옷을 다 파괴했던 이유. 그게 바로 저 업적 때문이었다.

'갑옷 파괴자.'

전생의 진현우는 얻지 못했고, 누군가 얻었다는 얘기만 들었던 칭호다.

그게 지금 그의 손에 들어왔다.

[진현우]

· 레벨: 20

· 클래스: 웨펀 마스터

· 칭호: 폐성의 정복자

· 근력: 87 (+17) · 민첩: 79 (+17)

· 체력: 81 (+17) · 마력: 59 (+8)

[특성]

· 노련한 사냥꾼 (B), 야만 전사 (B), 무기의 달인 (B), 약점 파악 (B), 재능 개화 (B), 격투의 달인 (B), 각인된 심장 (B)

[스킬]

· 기억 감정 (Master)

· 특제 덫 (B, Lv.4), 분열 투척 (B, Lv. 4), 진각 (B, Lv.3), 파쇄권 (B, Lv.3), 피에는 피 (B, Lv.2)

· 강타 (C, Lv.4), 돌진 (C, Lv.3)

20레벨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능력치. 그것도 론데 지역에서만 얻은 성과다.

진현우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일단 약부터 좀 먹고."

피를 너무 흘렸더니 머리가 어지럽다.

진현우는 미리 챙겨온 포션으로 회복하면서, 굴락이 드롭한 아이템들을 확인했다.

[굴락의 갑옷 파편 (영웅)]

· 설명: 흑마법사의 마력으로 단련된 갑옷의 파편이다. 파편이라고는 하지만 워낙 커서 뭔가를 만드는 데 쓸 수 있을 것 같다.

[오래된 지팡이 (일반)]

· 착용 제한: 없음.

· 옵션: 없음.

* 미감정된 아이템이다.

* 강한 사념이 남아있다.

굴락이 드롭한 아이템은 둘.

근데 그중에 재밌는 아이템이 있었다.

'이건 또 웬 횡재야?'

사념이 담긴 아이템이다.

40화

루윈 대륙으로

폐성의 바깥에서는 플레이어들이 화면을 통해 진현우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비웃는 중이었다.

"제정신인가? 진짜 혼자서 들어가?"

"이게 무슨 소설인 줄 아나.... 4명이서도 못 잡는 보스 몬스터를 혼자서 어떻게 잡아."

그들 중에서 진현우가 굴락을 잡는 데 성공할 거라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실패할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그렇게 될 확률이 높았다.

"허, 이젠 자해까지 하는데?"

"빨리 죽으려고 저러나?"

도끼로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낸 진현우가 굴락이 갇힌 홀에 진입했다.

거대한 굴락의 앞에 선 진현우의 모습은 보기 안타까울 정도로 초라했다.

"에휴, 난 못 보겠다...."

누군가 그리 말한 순간, 전투가 시작됐다.

지켜보던 모든 이들은 굴락이 진현우를 일격에 제압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 생각보다 빠른데?"

"뭐야, 도적인가? 그래봤자 혼자서 뭐 해."

진현우는 재빠르게 공격을 피했다.

플레이어들은 그게 오래 가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번에도 그 생각은 틀렸다.

그는 계속 공격을 피했고 반격까지 가했다.

"아니, 계속 피하네?"

"저런다고 데미지가 들어가냐?"

"주먹으로 강철을 때리는 게 의미가 있나."

어차피 의미 없는 행동이다.

생각 이상이지만, 혼자서 뭘 할 수 있겠나.

플레이어들은 진현우가 조금 전 파티처럼 곤죽이 된 채 바깥으로 나올 거라 생각했고.

ㅡ콰드득!

"어, 어어...."

굴락이 입은 갑옷이 진현우의 주먹에 파괴됐을 때, 그 생각도 함께 부서졌다.

여태껏 진현우를 무시하던 플레이어들은 넋을 잃은 채 화면을 바라봤다.

"아니, 이게 무슨...."

"저 갑옷을... 주먹으로 부쉈다고?"

모든 공격을 막아내던 갑옷이다.

마법으로도 제대로 된 피해를 줄 수 없던 굴락의 갑옷이, 주먹질 한 방에 부서졌다.

그렇게 갑옷을 파괴한 진현우는 순식간에 굴락에게 돌진했고, 놈을 죽였다.

"...."

"...."

폐성에 침묵이 감돌았다.

플레이어들은 할 말을 잃었다. 자신들이 알던 굴락의 공략법과는 너무 다르다.

ㅡ물리적인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굴락이 지칠 때까지 공격을 피하면서 마법으로 차곡차곡 데미지를 쌓는 게 공략 방법.

그게 굴락의 정석적인 공략법이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시간이 엄청 많이 걸리는 공략법인 데다가 딱히 안전한 방법도 아니라는 것.'

굴락이 지칠 때까지 버텨야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아그니스도 비슷한 방식으로 공략했다.

그들의 경우에는 최상급 아이템으로 무장해서 조금 더 안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런 보스를 십여분만에....'

플레이어들의 앞에 떠 있던 화면이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폐성의 장막이 열렸다.

"나, 나왔다."

그때, 진현우가 바깥으로 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하나 같이 경악으로 가득 물든 눈빛이었다.

"내가 뭘 본 거지...?"

"굴락을... 진짜로 혼자서 잡았다고?"

"저, 저게 가능한 거야?"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미 몇 개의 파티가 굴락에게 도전했고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 정도로 어려운 플로어 마스터를 혼자서 공략하는 사람이 있다니.

"...."

진현우는 시선을 느꼈다.

여기 있다가는 플레이어들의 질문이 쏟아질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러기 전에 그는 폐성을 떠났다.

"갔다."

"하씨, 물어볼 게 있었는데."

"야. 너 화면 녹화해뒀냐? 기록용 수정구 들고 다니잖아. 사이트에 올릴 거라고."

"녹화? 아, 맞다!"

진현우에게 질문할 기회만 노리던 플레이어들이 아쉬움에 찬 탄식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떤 플레이어가 화면을 녹화한 기록용 수정구를 꺼냈고.

"도대체 어떻게 잡은 거지?"

"그러니까. 이거 나중에 동영상 사이트에 올려서 사람들한테 물어볼까?"

"그것도 괜찮고."

진현우가 굴락을 잡은 동영상을 보면서 어떻게 잡은 건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 * *

ㅡ축하드립니다. 1층의 플로어 마스터, 강철의 오우거 '굴락'을 처리했습니다.

ㅡ2층 '루윈 대륙'으로 올라갈 자격을 얻었습니다. 탑을 나가 2층으로 향하십시오.

진현우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알려주는 메시지. 물론, 메시지를 봐도 별 감흥은 없었다.

오히려 귀찮은 마음만 들었다.

'루윈 대륙. 쓰읍, 귀찮은 곳인데.'

평온한 분위기인 탑 1층과는 정반대로 삭막하고 황량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곳이다.

나오는 몬스터들도 그렇고.

그렇다고 안 올라갈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바로 2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진현우는 메시지를 지웠다.

아직은 2층으로 올라갈 때가 아니다. 여기 론데 지역에 남아서 처리할 일들이 있다.

'그 칭호는 여기서 얻어두고 가야지.'

진현우는 론데 마을을 돌아봤다.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마을. 저중에는 플레이어도 있고, NPC들도 있다.

저 NPC들에게 용무가 있었다.

"퀘스트 노가다나 뛰어볼까."

진현우는 NPC들에게로 향했다.

* * *

그로부터 며칠 동안.

진현우는 론데 마을에 머무르면서 NPC들이 주는 퀘스트들을 모두 해결했다.

대부분 사소하기 그지없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플레이어들도 꺼리는 퀘스트들.

'근데 여기에 숨겨진 게 있단 말이지.'

사람들이 가치가 없다고 무시하는 퀘스트들에 한 가지, 숨겨진 업적이 있었다.

진현우는 아줌마에게 꽃을 건넸다.

"아이고, 고마우이. 총각. 우리 딸한테 줄 꽃이 사라져서 어쩌나 했는데."

"아닙니다."

정말로 사소한 퀘스트다.

꽃을 잃어버린 아줌마에게 아름다운 꽃을 구해서 전달해주는 게 다인 퀘스트.

보상도 대단하지 않다.

ㅡ퀘스트 '꽃 선물'을 완수하셨습니다. 보상으로 아줌마가 준 10골드를 얻었습니다.

아니, 사실상 없는 수준이다.

다른 플레이어라면 짜증을 냈을 것이다. 하지만 진현우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이게 마지막이다.'

꽃 선물 퀘스트를 완료한 순간, 진현우의 눈앞에 기다리던 메시지가 나타났으니까.

ㅡ업적을 달성했습니다: 탑 1층의 소도시 '론데'에 존재하는 퀘스트를 모두 깰 것.

ㅡ보상으로 영웅 등급 칭호 [우리들의 친절한 이웃 (효과: 처음 만나는 NPC들의 경계를 누그러트리며 더 쉽게 호감을 살 수 있다.)]을 획득했습니다.

론데에서 얻을 수 있는 칭호다.

이곳에 있는 NPC들의 퀘스트를 모두 깨면 얻을 수 있는 칭호인데, 꽤 유용하다.

'호감을 사서 나쁠 건 없지.'

사람들이 많이 무시하는 칭호다.

나중에 이런 칭호가 있다는 게 알려져도 얻으러 오는 사람이 몇 없었을 정도였으니.

그래도 인식과는 달리 유용한 칭호다.

"얻어두면 언젠가는 도움이 된단 말이야."

전생에서 여러 번 느꼈었다.

진현우는 메시지 창을 닫았다.

"좋아, 어디...."

진현우는 목을 이리저리 꺾었다.

더이상 론데 지역에서 얻을 건 없다. 정말로 이곳을 떠날 때가 온 것이다.

그는 소도시 론데를 돌아봤다.

'교관한테 작별 인사를 할 필요는 없고.'

박연호를 감시하고 김수연 일행을 보호해줬던 교관은 마침내 훈련소를 처분했다.

ㅡ물 좋은 곳에서 살아야지. 언젠가 기회가 되면 또 만날 일이 생길 걸세.

마지막에 교관이 남긴 말이었다.

"그래, 기회가 되면 또 만나겠지."

진현우는 지구로 돌아가는 게이트 앞에 섰고, 거대한 포털에 몸을 내던졌다.

* * *

지구로 귀환한 진현우는 알헨 묘지에서 얻었던 아이템들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사실 바로 팔아버리고는 싶었지만.

"잘못 팔았다가는 위험해진단 말이지."

아그니스 길드가 알헨 묘지의 보물 상자에 넣기 위해서 구했던 아이템들이다.

이것들을 팔겠다고 경매장 같은 곳에 올렸다가는 진현우의 신상이 드러난다.

괜히 아그니스와 얽히고 싶지는 않다.

"이럴 때 적당한 방법은...."

있었다.

진현우는 휴대폰을 들었다.

ㅡ유민혁입니다.

"네, 유민혁 스카우터님. 접니다. 제가 처리하고 싶은 아이템이 좀 있어서요."

ㅡ예?

네메시스한테 떠넘겨야겠다.

전화를 받은 유민혁은 적잖게 당황한 눈치였다. 플레이어를 영입하는 스카우터인 자신한테 아이템을 처분해달라니.

ㅡ경매장에 올리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고는 싶은데, 이게 알헨 묘지에서 얻은 아이템들이라서요. 아시잖아요?"

ㅡ보물 상자에서 챙긴 것들이군요.

그제야 어떤 상황인지 파악한 유민혁이 잠깐 고민했다가 이내 수락했다.

생각해보니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

ㅡ알겠습니다. 어디 계십니까? 저희 길드에서 매입하도록 하죠.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지금 막 탑에서 나왔는데... 플레이어 협회로 돌아갈 거니 거기서 보죠."

ㅡ예.

이런 사소한 일로 진현우의 호감을 살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유민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좋아, 귀찮은 아이템은 처리했고."

진현우는 버스를 탔다.

슬슬 차를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내친 김에 오늘 해결해야겠다.

"차나 사러 가볼까... 아니, 잠깐만."

그전에 할 일이 있다.

진현우는 플로어 마스터 굴락을 잡으면서 얻었던 아이템, 오래된 지팡이를 꺼냈다.

"지팡이라서 좀 애매하긴 한데."

그래도 마법 스킬을 줄 확률이 높다.

마법을 익혀두면 유용하게 쓸 수 있다. 그렇기에 진현우는 기억 감정을 사용했다.

"으음...."

오래된 지팡이에 담긴 사념은 강철의 오우거, 굴락을 부활시켰던 흑마법사였다.

온갖 악행을 저질렀던 놈. 굴락을 부활시킨 것도 누군가를 죽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는 굴락의 손에 죽었고.

ㅡ굴락! 그놈을, 그놈을 죽여다오!

굴락에 대한 원한으로 가득 찼다.

진현우가 이미 굴락을 죽였다고 말하자 흑마법사는 웃음을 터트리며 만족했고.

ㅡ좋다, 그럼 기꺼이 힘을 빌려주지.

진현우에게 힘을 빌려줬다.

그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ㅡ기억 감정에 성공했습니다.

ㅡ타락한 흑마법사, '베라쿤'의 사념이 가지고 있던 힘을 전승합니다. 오래된 지팡이 (일반)가 새로운 형태로 변화합니다.

ㅡ스킬 '검은 화살 (B)'을 익혔습니다.

ㅡ마력이 +4 상승했습니다.

지팡이의 생김새가 변했다.

새까맣고 비틀어진 나무 지팡이로. 게다가 끝에는 해골까지 달려 있었다.

[금기의 지팡이 (고급)]

ㅡ설명: 악명을 떨쳤던 흑마법사가 썼던 지팡이다. 사악한 마력이 담겨 있다.

ㅡ착용 제한: 진현우 외 착용 불가.

ㅡ효과: 흑마법 강화, 마력 증가.

* 흑마법 강화: 지팡이를 착용한 상태에서 사용하는 흑마법들을 모두 강화한다.

* 마력 재생: 지팡이에 담긴 마력을 이용하여 소진한 마력을 빠르게 재생한다.

지팡이의 옵션을 확인한 진현우의 표정이 묘해졌다. 나쁘지는 않은데....

'내가 쓸 일은 없겠는 걸.'

근접전을 위주로 싸우는 진현우로서는 지팡이를 쓸 일은 거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 검은 화살 (B, Lv.1): 마력을 이용하여 검은 화살을 만들어낸다. 적에게 적중할 경우 짧은 시간 '신체 능력 저하' 디버프를 가한다.

사념이 가지고 있던 스킬.

이게 또 물건이었다.

"심 봤네."

진현우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41화

네메시스의 제안

네메시스 빌딩의 최상층.

윤서희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모니터를 몇 시간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이 모니터를 삼킬 것만 같다.

"...."

그녀가 보는 것은 동영상이었다.

최근 플레이어 커뮤니티에서 큰 화제가 된, 동영상 플랫폼에 올라온 한 동영상.

―님들, 이 동영상 한 번만 봐 주세요.

―설명: 1층의 플로어 마스터 굴락을 혼자서 잡는 영상인데요. 이게 가능한 건가요? 여러분도 한번 보시고 의견 좀 남겨 주세요.

어떤 남자가 혼자서 폐성에 진입해서 보스인 굴락을 처리하는 내용의 동영상이었다.

덩치에 안 맞는 속도를 가진 굴락의 공격을 피하면서 주먹으로 반격하는 남자.

그리고 건틀릿을 낀 주먹으로, 굴락이 전신에 두른 강철 갑옷을 파괴해 버렸다.

―굴락의 갑옷을 파괴했다고? 주먹으로?

―탑 1층이잖아. 저기서 노는 플레이어면 레벨이 많아 봤자 20레벨인데 그게 됨? 레벨 높은 놈이 와서 양학 한 거 아님?

―바보냐? 업적 얻는 이펙트 뜬 거 못 봄? 최대 레벨 안 넘었다는 증거잖아, 저게.

―응, 내가 폐성에서 직접 봤어. 주작 아냐.

솔직히 믿기 힘든 내용의 동영상이었다.

단순히 '굴락을 잡았다'는 내용의 동영상이었다면 크게 놀랍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굴락을 혼자서 잡았고, 갑옷을 파괴했다는 점이 몹시 놀라운 부분이었다.

―저게… 가능하나?

"그러게. 저게 가능한가?"

윤서희는 댓글에 공감했다.

아직 아그니스가 론데 지역을 점령하기 전, 그녀도 굴락을 잡아 본 적이 있었다.

시간을 최대한 끌어서 놈이 지치게끔 만든 후에 잡았던 걸로 기억한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모르긴 몰라도 저 사람 능력치는 개높을 듯.

―ㅇㅇ; 히든 클래스인가?

―근데 얼굴 왜 가렸지? 저 정도면 길드들이 영입하려고 난리가 날 텐데.

―몸값 엄청 뛰겠다.

윤서희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나 다를까.

―마루 길드입니다. 동영상에 나온 플레이어 누군지 아시는 분 연락해 주세요.

―저희 길드 들어오시면....

―오, 벌써 길드들 난리 났네.

댓글창은 남자의 신상을 파악하려는 스카우터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나마 그가 눌러 쓴 후드 때문에 신상이 노출이 안 돼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그의 휴대폰으로 온갖 연락이 쏟아졌을 것이다.

"아 씨, 내가 먼저 알았는데."

윤서희가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그녀는 동영상에 나온 남자가 누구인지 대충, 아니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끼이익.

"길드장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때마침 유민혁이 들어왔다.

"마침 잘 왔어요, 유민혁 스카우터님. 이것 좀 보세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예?"

윤서희는 보고할 게 있어서 온 유민혁을 붙잡고 자신이 본 동영상을 보여 줬다.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놀랍군요. 혼자서 굴락을 잡다니."

"어딘가 익숙하지 않나요?"

"...."

동영상의 화질이 좋지 않아서 남자가 누구인지 파악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주먹을 이용한 전투 방식.

"진현우, 그 사람입니까?"

"저는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후드와 망토 때문에 누군지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윤서희는 확신하고 있었다.

유민혁도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쯤이면 레벨 제한이 걸릴 시기겠군요. 아그니스가 통제를 포기했으니, 막혀 있던 플로어 마스터도 공략할 수 있었을 테고요."

"그렇겠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진현우 말고는 저런 기행을 벌일 만한 사람이 없다.

하지만.

'저 정도였나?'

유민혁은 생각에 잠겼다.

뛰어난 유망주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저 정도의 강함을 가졌단 말인가.

그의 상념을 윤서희가 깨웠다.

"근데, 보고할 게 있다면서요?"

"아, 네. 아그니스 건 때문입니다."

윤서희는 유민혁의 보고를 들었다.

박현진 형제는 수사가 끝나는 대로 플레이어 구치소에 수감될 예정이다.

그리고 김수연 일행은 신상이 노출되지 않게끔 했고, 최대한의 보상을 했다.

"아그니스는 반대하지 않던가요?"

"예. 오히려 박현진 형제를 처벌하는 걸 원하는 듯한 인상까지 받았습니다."

"그렇겠죠. 화련 입장에서도 박현진한테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셈이니."

이번 기회에 분란의 씨앗을 제대로 털어 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 대가가 너무 크지만.

"그리고… 진현우가 아이템 처리를 저희한테 부탁했습니다. 알헨 묘지에서 얻은 거라서 처리하기가 어렵다더군요."

"그래요? 그럼 해 줘요."

"예. 그래서 사람을 보낼...."

"잠깐만요."

윤서희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갈게요."

"예?"

"제가 간다고요. 마침 할 일도 없는데."

"…예?"

할 일이 없다니. 게이트 공략 전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지만 윤서희는 완고했다.

"위치 가르쳐 주세요."

"그, 예. 알겠습니다."

유민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차 파는 곳이… 여긴가."

진현우는 자동차 판매점으로 향했다.

여기저기 비싸고 화려한 자동차가 많았지만, 진현우는 그런 거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적재량.

'이왕이면 내부가 넓고, 차박 하는 용도로도 쓸 수 있는 차가 제일 적당해.'

거기에 딱 맞는 차가 있었다.

'SUV로 해야겠어.'

진현우는 적당한 가격의 SUV를 골랐다. 재고가 있고 스케줄이 맞아서 당일 출고가 가능한 차량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덩치가 굉장히 큰 점도 그렇다.

"오후 3시에 오시면 됩니다."

"예."

진현우는 계약서를 작성했다.

돈은 저번에 '레서 골렘 군단의 습격' 게이트의 보상으로 얻은 돈으로 결제했다.

계약을 끝마친 그는 곧바로 부동산으로 향했다. 집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원룸… 뭐, 나쁘지는 않은데.'

공간이 넓은 집이 필요하다.

아파트보다는 주택. 진현우는 부동산 사무소에서 여러 주택의 시세를 알아봤다.

"쓰읍, 더럽게 비싸네."

그리고 혀를 내둘렀다.

현재 서울은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안전지대로 선정된 도시다. 몬스터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난동을 부릴 일은 없다는 뜻.

덕분에 부동산 시세가 더럽게 비쌌다.

"...."

진현우는 부동산 사무소를 나왔다.

살 수 있는 집이 없다.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로또 번호나 외워 둘걸. 진현우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일단 아이템부터 처분하고, 영혼을 끌어모아서라도 하나 장만하는 수밖에.'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면서 플레이어 협회로 향했다. 아이템을 처분해야 한다.

그리고 약속 장소로 향하자.

"응?"

뭔가 낯익은 여자가 서 있었다.

얼굴을 철저하게 가리기는 했는데, 몸의 실루엣이 어째 익숙하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주변에 뭐가 많은데?'

약속 장소는 주차장이었다.

주차장 인근에 있는 나무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것도 꽤 강한.

저 여자를 경호하려는 목적이다.

'이거, 설마....'

느낌이 안 좋다.

진현우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윤서희 길드장님 맞습니까?"

"어떻게 알았지?"

마스크를 쓴 윤서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제로 외형으로는 알아보기 힘들다.

하도 정황이 수상해서 알아챈 거지.

"왜 여기 계신 거죠?"

"처분할 아이템이 있다고 들었어요. 마침 협회에 갈 일이 있어서 제가 왔죠."

"길드장이 직접요?"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윤서희가 그렇게 나사 빠진 사람일 리도 없고, 아무래도 영입 때문인 듯하다.

그래도 의아하긴 했다.

"…혹시 한가하십니까?"

"한가하겠어요? 탑 공략 때문에 많이 바빠요. 생각처럼 안 풀리고 있거든요."

"그리 바쁘신 분이 어째서 여기에...."

"일단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요."

윤서희는 헛기침하며 손짓했다.

둘은 주차장 근처에 있는 공원으로 향했다.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은 곳이었다.

"음, 잠깐...."

윤서희가 손가락을 튕겼다.

마력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다음으로 알 수 없는 괴리감이 느껴졌다.

"마법이군요."

"네. 눈치가 좋네요. 사람들이 저희를 알아보지 못하게끔 마법을 썼어요."

윤서희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고는 진현우를 독촉하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처분할 아이템이나 보여 주세요."

"여기 있습니다."

"괜찮은 아이템들이네요. 그냥 쓰시죠?"

진현우는 알헨 묘지에서 얻었던 아이템들을 꺼내서 윤서희에게 보여 줬다.

알헨 묘지의 보물 상자에는 꽝이 많았다. 대박인 아이템은 딱 2개만 건질 수 있었다.

"딱히 필요가 없어서."

"좋아요. 저희가 처분하죠. 이 정도면… 자세하게 알아봐야겠지만, 10억은 족히 넘게 받을 수 있을 것 같네요."

"어마어마하군요."

"예. 1층에서는 벌 수 없는 금액이죠."

진현우가 추측한 것과 비슷한 금액.

아이템 두 개를 팔아서 10억을 번다? 위험한 묘지에 플레이어들이 모일 만도 했다.

플레이어가 많은 돈을 벌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레벨이 높은 플레이어들이다.

'탑 1층에서 억 단위를 벌기는 힘들지.'

A 등급 게이트에서 기여도 99%를 달성해도 받은 포상금이 2억이었다.

그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금액이니 플레이어들이 눈이 돌아가서 모일 수밖에.

'이 비싼 아이템들이 정말로 일반 플레이어들 손에 들어갔을까 의아하기는 한데....'

이런 아이템을 매번 묘지의 보물 상자에 채워 넣는 건 아그니스라도 부담이 크다.

극히 일부의 아이템만 일반 플레이어들의 손에 들어가게 하고, 나머지는 아그니스가 일반 플레이어인 척 회수하지 않았을까.

진현우의 추측으로는 그러했다.

"가격 책정하고 모레 입금하죠. 계약서?"

"아뇨, 됐습니다. 설마 그 네메시스가 이런 푼돈을 먹고 튀겠습니까?"

"…도발적이군요."

윤서희는 실소를 터트렸다.

네메시스를 이끄는 자신 앞에서 저렇게 당당한 사람이 몇이나 있었던가.

신기할 정도였다.

"그럼 용무는...."

"하나 물어볼 게 있어요."

냉큼 떠나려는 진현우를 윤서희가 막았다.

"동영상을 봤어요."

"동영상이라면… 아, 뭔지 알겠네요."

"알고 계셨나요? 요즘 화제던데."

"예. 인터넷에 제가 굴락을 잡았던 동영상이 떠돌아다니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플레이어 커뮤니티에서 워낙 시끄러워서 진현우도 알 수밖에 없었다.

아마 기록용 수정구로 화면을 녹화했겠지. 탑 내부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앞서 들어간 사람의 화면을 녹화해서 그걸 이용하여 공략법을 찾아내려는 거니까.

"어떻게 잡았는가… 사실 그런 건 궁금하지 않아요.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요."

윤서희가 여기로 온 이유는 동영상에 대해서 물어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녀가 진현우를 직시했다.

"네메시스에 들어올 생각, 없나요?"

"흠...."

역시.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윤서희는 진현우를 영입하기 위해서 온 모양이었다.

그것도 길드장이 직접.

'대형 길드에서는 몹시 드문 일이지만.'

상대방을 정말로 영입하고 싶을 때는 길드장이 직접 나서서 영입할 때도 있다.

길드장이 직접 나설 정도로 해당 플레이어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는 거니까.

"유민혁 스카우터가 이미 제안했던 걸로 알아요. 그때 당신은 대답 대신에 저를 만나고 싶다고 했었죠. 그래서 다시 묻는 거예요."

윤서희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네메시스는 당신이 원하는 어떤 조건이든 응할 생각입니다. 여태껏 유망주들이 받지 못했던 최고의 대우를 약속할 거고요."

"그거 괜찮은 제안이네요."

오히려 놀라울 정도였다.

대형 길드로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저자세다. 그것도 길드장이 직접 나선 건데.

하지만.

'길드에 가입하는 건 너무 위험하다.'

진현우에게나, 네메시스에게나.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길드에 가입할 생각은 없습니다."

"왜죠? 이유가 궁금하군요."

"저한테 제약이 생길 테니까요."

그 말에 윤서희는 침묵했다.

제약이 생긴다. 그걸 듣자마자 그녀의 머릿속에 얼마 전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과 같은 이유입니다.

―네메시스라는 대형 길드를 이끄는 당신이 점령지를 통제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죠.

진현우는 탑 1층의 통제를 끝냈다.

아그니스 길드가 저지르던 비리에 대한 정보를 네메시스에게 넘겨주고, 고발하는 걸로.

그렇기에 그와 윤서희의 목적은 같다.

'대형 길드의 통제를 멈추는 것.'

진현우가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길드에 가입하는 건 위험한 일인 게 맞다.

'길드에 소속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생기든 저 남자 선에서 끝나겠지. 하지만....'

만약 네메시스에 소속되어 있다면?

그런 상태에서 이번 일처럼 대형 길드의 비리를 고발하고, 통제를 끝마치게끔 한다면?

다른 이들에게는 네메시스가 사주한 것처럼 보일 것이고, 길드에도 여파가 미칠 것이다.

'길드 간의 전쟁으로 번질 수 있어.'

엄밀히 말하자면 윤서희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진현우를 영입할 의향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원하지 않을 것이다.

움직일 때마다 네메시스를 신경 써야 하고, 그의 움직임에 제약이 생기게 될 테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제 길드에 가입하기를 원하지만, 강요할 수는 없겠군요."

그렇기에 윤서희는 납득했다.

하지만 내면의 욕심은 더욱 커졌다.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내뻗었다.

"그래도 우호적인 관계는 이어 나갈 수 있겠죠? 이번에 아그니스 때 그랬던 것처럼, 서로한테 도움이 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졌고, 그걸 행동으로 옮기면서 실현할 수 있는 사람. 윤서희가 여태껏 만난 사람 중에 그런 이는 없었다.

관계를 유지하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예, 물론이죠."

진현우는 그 손을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