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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네메시스

포탈은 바깥으로 이어졌다.

진현우와 일행은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나타났고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흑!"

"아야야! 개미가 내 발 물었나 봐!"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일행이 제각각 다른 반응을 보였다.

"와, 진짜 살아남은 게 용하다."

"그러니까. 그 개새끼 때문에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

이대건과 일행은 동시에 진현우를 봤다.

혼자서 세 명을 제압했던 김차훈을 순식간에 제압했고, 누구도 찾지 못한 히든 던전을 발견했으며, 보스 몬스터를 혼자서 잡았다.

'우리가 도왔다고는 하지만....'

'도왔다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잖아.'

그냥 몬스터들의 시선만 끌어줬을 뿐.

처리한 것은 진현우 혼자였다.

'도대체 능력치가 얼마나 높은 거지? 아니, 능력치가 높아도 저렇게 싸우는 건....'

'가입한 길드는 있을까?'

'없지 않을까? 있으면 파티 사냥을 했겠지.'

이대건과 다른 일행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진현우는 하늘을 바라봤다.

격하게 움직였더니 몸이 무겁다.

'젠장, 은퇴하고 죽을 때까지 쉴랬는데.'

결국 다시 똑같은 짓거리를 하고 있다.

한숨을 푹 내쉬는 진현우의 눈앞에 여러 메시지가 나타났다.

ㅡ레벨이 상승했습니다. 일정 레벨에 도달하여 새로운 특성을 익혔습니다!

ㅡ강타 (C, Lv.2)와 돌진 (C, Lv.1) 스킬의 숙련도가 상승했습니다!

ㅡ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처음으로 여왕의 개미굴을 공략할 것.

ㅡ보상으로 고급 등급 칭호 [군단의 학살자 (효과: 곤충형 몬스터에게 주는 데미지가 5% 상승합니다.)]을 획득했습니다.

다행히도 보상은 만족스러웠다.

히든 던전을 처음으로 공략할 때는 괜찮은 칭호를 보상으로 주는데, 이번 여왕의 개미굴 역시 괜찮은 칭호를 줬다.

그리고 또 하나.

'벌써 15레벨이 됐나?'

진현우는 상태창을 열었다.

[진현우]

· 레벨: 15

· 클래스: 웨펀 마스터

· 칭호: 시간을 거스른 자

· 근력: 42 (+4) · 민첩: 44 (+4)

· 체력: 37 (+4) · 마력: 27

[특성]

· 노련한 사냥꾼 (B), 야만 전사 (B), 무기의 달인 (B), 약점 파악 (B), 재능 개화 (B), 격투의 달인 (B)

[스킬]

· 기억 감정 (Master)

· 특제 덫 (B, Lv.2), 분열 투척 (B, Lv. 2)

· 강타 (C, Lv.3), 돌진 (C, Lv.2)

"미쳤군, 미쳤어."

상태창을 본 진현우는 혀를 내둘렀다.

재능 개화 특성 덕분에 레벨이 오를 때마다 능력치가 하나씩 더 오르게끔 됐다.

그렇게 오른 능력치가 다섯 개.

'아직은 다섯 개지만, 레벨이 오르면 오를수록 다른 플레이어와의 격차는 커지겠지.'

든든한 특성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특성이 생겼다.

· 격투기의 달인 (B): 이 몸 또한 무기일지니, 육체를 이용한 전투법을 깨달았다. 격투기로 싸울 때 데미지가 50% 상승하며, 적의 방어력을 항시 20% 무시한다.

말할 것도 없이 좋은 특성이었다.

전생의 진현우는 격투기도 애용했었다.

사념 중에서 격투기와 관련된 스킬을 주는 사념들도 제법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게이트를 들려야 하나.'

때마침 이 시기에 열리는 게이트가 하나 있었다. 거기를 들러서 격투기 스킬을 얻어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진현우는 드롭된 아이템을 확인했다.

[군단 여왕의 갑옷 (영웅)]

· 설명: 특수한 갑피로 만들어진 갑옷. 보석 같은 검은색이 눈길을 끈다.

· 착용 제한: 레벨 15.

· 옵션: 개미 갑피, 여왕의 정수, 보호색

* 개미 갑피: 강철보다도 단단하다.

* 여왕의 정수: 갑옷에 깃든 정수의 힘으로 모든 능력치가 +3 상승한다.

* 보호색: 갑옷이 주변의 색으로 변하면서 착용자의 모습을 감춘다.

속으로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좋은 아이템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옵션은 단연 보호색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재밌는 게 있었다.

[여왕개미의 페로몬 (영웅)]

· 설명: 여왕개미의 페로몬이 담긴 주머니다. 뭐라 형용하기 힘든 향이 난다.

· 옵션: 길 표지, 여왕의 부름

* 길 표지: 원하는 상대에게 묻혔을 경우, 대상을 일주일 동안 추적할 수 있다. 하지만 추적하는 건 당신 만이 아닐 수도 있다.

* 여왕의 부름: 페로몬을 모두 사용하여 근처에 있는 군단 개미들을 불러들인다.

굉장히 재밌는 아이템이었다.

쓰려고 한다면 다양한 방법으로 쓸 수 있는 소모 아이템. 역시나 만족스러웠다.

'여기로 온 보람이 있네.'

그가 여기로 온 이유이기도 했다.

진현우는 갑옷을 챙기고, 군단 여왕이 드롭한 여러 가지 재료들도 챙겼다.

'이걸로 할 수 있는 게 있었지.'

정확하게는 퀘스트가 하나 있다.

재료만 다 갖춰놨으면 날로 먹을 수 있는 퀘스트. 거기에 이것들이 필요하다.

진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여기서 헤어집시다."

"아! 잠깐만요!"

이대건과 정지유가 떠나려던 진현우를 붙잡았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얘기하더니 결론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받아주세요."

"음, 이건...."

이대건 파티가 내민 건 주머니였다.

그것도 골드가 한가득 담긴 주머니.

"잘 쓰겠습니다."

"예."

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다.

진현우는 흔쾌히 주머니를 받았다. 대강 3천 골드 정도는 든 것 같았다.

"그리고 바깥으로 나가면 저희 길드로 찾아와주십시오. 저희가 소속해있는 길드 차원에서 추가로 더 보답할 겁니다."

"어느 길드 소속이죠?"

"네메시스입니다."

이건 또 뜻밖의 얘기였다.

이대건을 보던 진현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설마 네메시스 길드 소속일 줄이야.

'꽤 자질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건데.'

대전쟁 이후에 길드 수뇌부가 죽으면서 폭삭 망하기는 했지만, 이 시기의 네메시스면 손꼽히는 명문 길드 중 하나다.

거기에 속할 정도면 유망주라는 것.

'결과적으로는 잘 구한 셈이 된 건가?'

원래라면 여기서 유망주 사냥꾼의 희생양이 됐을 파티다. 이름도 남기지 못했겠지.

진현우는 턱을 매만졌다.

"재밌네."

"예?"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대건은 더 묻지 않고 일어났다.

"아,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떠나기 전, 이대건이 불쑥 물었다.

진현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클래스가 어떻게 되십니까? 전사입니까? 도끼를 쓰는 분은 처음 봐서...."

"전사입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이대건은 가볍게 웃더니, 진현우에게 고개를 푹 숙인 후 자리를 떠났다.

진현우는 앉은 채 그들을 배웅했다.

"후우, 이번에는 진짜 운이 좋았네."

"예. 다 같이 신께 감사드리죠."

"그, 그건 다음에...."

폐광으로부터 멀어진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로 대화를 나눴다.

정지유는 박동욱의 말에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가 조금 전의 말을 떠올렸다.

"있잖아. 그 사람, 진짜 전사일까?"

"그럴 리가. 내가 전사인 거 잊었냐?"

이대건이 단호히 부정했다.

자신 역시 전사 클래스다. 하지만 진현우만큼의 신체 능력은 발휘할 수가 없다.

스킬 역시도 그러했고.

"자기 클래스를 감췄다. 그래야 할 정도로 클래스가 특별하다는 뜻이야."

"히든 클래스...."

이대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길드장님한테 보고해야겠어. 저 정도 플레이어면 떼돈을 줘서라도 영입해야 해."

"영업맨 다 됐네, 이 오빠."

"내가 또 한때는...."

그들은 빠르게 탑을 벗어났다.

* * *

이대건 파티와 헤어진 후, 진현우는 혼자서 론데 마을로 돌아왔다.

여기서 할 일이 있어서였다.

"전사라는 말을 믿지는 않겠지."

그는 이대건에게 자신이 전사라고 말했다. 하지만 통할 리가 없는 거짓말이다.

그걸 알고서 한 말이었다.

'내 클래스가 특별하다는 추측을 했으면 자기 길드장한테 무조건 보고할 거고.'

네메시스에서 접촉해올 것이다.

그게 필요하다.

'딱히 길드에 들어갈 생각은 없다만, 앞으로 있을 일들을 생각하면 인맥은 필요해.'

시작의 대륙을 장악한 아그니스.

네메시스 길드는 놈들과 사이가 안 좋다.

그걸 이용해서 할 일이 있었다.

'플로어 마스터를 공략하려면 필요하지.'

진현우는 마을의 광장으로 갔다.

광장에는 여러 플레이어가 모여서 아이템을 파는 시장 같은 게 열렸다.

'일단 필요한 것들부터 사고.'

진현우는 거기서 몇 가지 재료와 철괴들을 구매했다. 대금은 이대건 파티가 준 것이 있었기에 여유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마을의 대장간으로 향했다.

ㅡ깡! 까앙!

"사장님! 무기 만들러 왔는데요!"

대장간에는 선객이 있었다.

이제 막 전직한 것 같은 플레이어들이 망치질하는 중년 남성에게 말을 걸었다.

"사장님! 사장님! 제 말 들려요?"

"듣고 있네. 재료는 가지고 왔나?"

"재료요? 아, 네. 여기요."

플레이어들이 자신만만하게 재료를 꺼냈다.

"광장에서 비싼 돈을 주고...."

"흥미 없네. 가져가게."

"예?! 왜요!"

하지만 대장장이는 코웃음을 치면서 다시 망치를 움직였다. 그는 대신 가판대에 전시된 무기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일이 바빠서 뭘 만들 시간도 없네. 저것들도 쓸만한 것들이니 골라서 하나 사가게."

"아씨, 제작 아이템 쓰고 싶은데...."

"실력 좋다고 해서 왔는데...."

대장장이의 태도는 완고했다. 플레이어들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가게를 떠났다.

그리고 진현우가 들어섰다.

"...응? 어서 오쇼."

대장장이가 땀을 닦으면서 진현우를 반겼다. 진현우는 대뜸 골드를 한가득 꺼냈다.

"제가 쓸 장비를 구하고 싶은데요."

"흠, 저기서 골라보시오."

"아뇨."

대장장이는 아이템이 있는 진열대를 가리켰지만, 진현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직접 만들어줬으면 합니다."

"미안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소. 요즘 이 마을에 찾아오는 여행자가 많아서 말이지. 내가 만들고 싶은 아이템이라면 모를까."

실제로 그렇게 보였다.

대장장이는 땀을 흘리면서 쉴 시간도 없이 일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위해서 개인 장비를 만들어줄 시간 따위는 없었다.

'제작 의뢰는 받지 않는 대장장이.'

저 대장장이는 실력이 좋지만 제작 의뢰를 안 받기로 유명했다.

매번 여러 플레이어가 제작 의뢰를 하러 왔다가 거절당해서 돌아갈 정도.

"이거면 어떨까요?"

"음, 이건...."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진현우는 배낭에서 아이템을 꺼냈다.

군단 여왕의 갑옷이다. 그걸 본 대장장이의 눈빛에 강한 흥미가 어리기 시작했다.

"놀랍군. 몹시... 뛰어난 아이템이야."

"이번에 사냥으로 얻었습니다."

"그런가? 이런 뛰어난 갑옷을 가지고 있으면 내 장비는 필요가 없을 것 같네만."

"이걸 좀 더 강화해줬으면 합니다."

"강화라니, 이 아이템을 말인가? 음, 그거참 구미가 당기... 크흠! 아니지. 그러려면 재료가 필요하네. 아주 특수한 재료가 말이야."

이미 예측했던 대답이다.

진현우는 다시금 배낭을 뒤지더니, 거기서 군단 여왕이 드롭한 재료들을 꺼냈다.

여왕의 갑피 같은 제작용 재료들. 시장에서 구할 수 없는 진귀한 아이템들이었다.

"이것들이 있으면 어떨까요?"

"흠, 흐으음...!"

등급이 높은 재료들이다.

대장장이의 눈이 흥미로 빛났다.

'퀘스트가 하나 있었지.'

열의라는 이름의 퀘스트였다.

이 대장장이는 오랫동안 틀에 박힌 장비들만 만드느라 지친 상태. 그의 열의를 되살리느라 여기저기 돌아다녀야만 한다.

'중간에 보상으로 여왕의 개미굴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연계 퀘스트.'

거기서 얻은 아이템들을 대장장이에게 보여줘서 열의를 되살리게끔 해야 한다.

원래라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일주일 넘는 시간을 써야만 하는 퀘스트지만.

'그럴 필요가 있나.'

뭘 얻어야 하는지 알고 있는데.

브로큰 월드는 퀘스트의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보상만 얻는 것도 가능했다.

조건이 뭔지만 알면 충분히 가능하다.

실제로.

"저래봤자 안 해줄...."

"음! 이건 이렇게 써서 이걸... 그리고 이건... 머릿속에서 영감이 마구 떠오르는군!"

대장장이가 재료들을 황급히 챙겼다. 그 모습에 플레이어들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3일만 시간을 주게. 그러면 자네가 원하는대로 이 아이템을 강화해주지. 어떤가?"

"좋습니다. 이 재료면 됩니까?"

"아니, 필요한 게 더 있네. 그러니까...."

진현우가 그의 앞에 보따리를 내려놓았다. 남자가 놀라서 안에 뭐가 들었는지 살폈다.

보따리에는 진현우가 미리 광장에서 샀던 철괴와 여러 재료가 담겨 있었다.

"이것들 아닙니까?"

"아니, 이게...."

대장장이가 황당해했다.

맞다. 지금 대장간에 재료가 부족한 상황이라서 구해오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설마 미리 가지고 왔을 줄이야.

"허, 귀신이라도 본 기분이군. 알겠네. 일단 재료를 가공해야 하니 3일 뒤에 오게."

"갑옷은 두고 갈까요?"

"아니, 가지고 가게. 이미 머릿속에 구상은 다 생각해뒀으니 강화할 때만 있으면 돼."

대장장이는 대장간 입구에 휴식이라는 팻말을 걸더니 안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재료들을 자기 앞에 나열한 후, 그것들을 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알아서 잘 만들겠지.'

실력은 확실한 대장장이다.

저 남자가 강화해주는 갑옷까지 착용하고 나면 한동안 갑옷 걱정은 없을 터.

진현우는 등을 돌렸다.

"아니, 우리는 안 만들어주더니...."

"저 사람 의뢰는 들어 준다고?"

조금 전 쫓겨났던 플레이어들이 바깥에서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진현우를 놀란 눈을 봤다.

'도대체 어떤 재료길래?'

저 까탈스러운 대장장이가 자기가 나서서 아이템을 만들어주겠다고 한단 말인가.

그들은 진현우가 있던 곳을 봤지만, 그는 이미 대장간을 떠나고 난 뒤였다.

"자, 그럼."

대장간을 떠난 진현우는 길을 걸었다.

'4일이라는 시간 여유도 생겼고.'

그 시간 동안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마침 이 시기에 유명하던 퀘스트가 하나 있다. 정확하게는 악명을 떨치던 퀘스트가.

'아그니스 때문에 유명해진 퀘스트였지.'

콧대 높은 아그니스 소속의 길드원들이 제대로 당해서 이름을 알린 '함정' 퀘스트.

거기서 얻을 것들이 많다.

"함정 퀘스트나 한 번 깨러 가볼까."

마을의 상점에서 필요한 아이템들을 몇 가지 산 후, 진현우는 걸음을 옮겼다.

18화

함정 퀘스트

소도시 론데의 중심부.

그곳에 유독 눈에 띄는 건물이 있었다. 고급 자재로 지어진 몹시 호화스러운 건물.

아그니스의 길드 하우스다.

"이번 주 수입은 장부로 다 정리했지?"

"예. 화련 길드장님한테 바로 올릴까요?"

"아니, 박현진 부길드장님한테 보내. 화련 님은 탑 공략 때문에 바쁘실 테니까. 그리고 '알헨 묘지'로 보낼 보급품들도 준비하고."

"알겠습니다."

길드 하우스 내부는 분주했다.

시작의 대륙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은 길드원들이 제각기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지부장님, 이번에 고블린의 평야에 몰래 침입했다가 걸린 놈들은 어떻게 할까요?"

"어쩌긴 뭘 어째? 노동으로 갚게끔 해야지. 골드 값 두 배 갚기 전까지는 풀어주지 마."

"예, 버섯 노가다나 시킬게요."

"하여튼, 새끼들이.... 준법정신이 없어."

준법정신.

원래는 주인이 없었던 던전과 사냥터를 멋대로 지배한 이들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진지하게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못 갚겠다고 하면 손 좀 봐주고."

"네. 그러고도 말을 안 들으면...."

1층의 아그니스 길드 하우스를 담당하고 있는 지부장, 조승원이 서늘하게 웃었다.

"그럼 조용히 죽여야지."

이게 그들의 법이다.

지구와는 다른 세계. 오직 플레이어만이 들어올 수 있는 세계의 탑이기에 가능한 규칙.

가혹하게 집행해야지만 규칙을 따른다.

"아, 지부장님. 이번에 론데에 신규 퀘스트 떴는데 어떻게 할까요? 확인해볼까요?"

"신규 퀘스트라고?"

"네. 난이도는 B등급이고 인원 제한은 8명까지더라고요. 보상은 좋은 거 같던데."

아그니스는 퀘스트 역시 통제한다.

자잘한 퀘스트는 누구나 하게끔 놔두지만, 보상이 좋은 반복 퀘스트는 통제했다.

새로운 퀘스트가 생겼으면 확인해야 할 일.

"흠, 야! 안태준!"

"네! 지부장님!"

조승원은 최근에 가입한 신입 중에서 가장 활약이 좋은 길드원을 불렀다.

안태준이라 불린 남자가 황급히 다가왔다.

"네가 가서 해결해봐라. 혹시나 퀘스트 노리는 놈들 있으면 다 쫓아내고."

"예, 알겠습니다."

안태준이 고개를 숙였다.

던전과 사냥터 통제에 이어서 퀘스트까지. 아그니스의 통제는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안태준은 그걸 즐기는 남자였다.

'다른 놈들이 못 크든 뭔 상관이야?'

나만 잘 크면 된다.

탑은 힘이 가장 중요한 곳. 강해지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아그니스는 그에게 빠르게 성장할 길을 제공할 수 있는 곳이었다.

"형, 여기 같은데요?"

안태준은 다른 아그니스 길드원들과 함께 신규 퀘스트가 발생한 곳으로 갔다.

론데 도시의 구석진 곳.

그곳에 남자와 플레이어가 있었다.

"으으, 도와... 도와주십시오...."

"어? 이거 퀘스트인가? 아저씨. 무슨 일이신데요? 저한테 한번 말씀해보세요."

"고, 고맙습니다. 그러니까...."

추레한 차림의 남자.

퀘스트 냄새를 맡은 플레이어가 그에게서 퀘스트를 받으려고 하고 있었다.

안태준이 인상을 확 구겼다.

"야, 저거 뭐냐?"

"퀘스트 받는 거 같은데요."

"누가 뭐 하냐고 물어봤냐? 뭔데 저 새끼가 우리가 받을 퀘스트를 받고 있냐고."

안태준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치울까요?"

"당연히 치워야지."

안태준과 일행이 플레이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어깨를 붙잡고 홱 돌려버렸다.

"야, 미쳤냐? 안 꺼져?"

"뭐야? 누가... 헉!"

갑작스러운 욕설.

화를 내려고 했던 플레이어는 안태준의 가슴께를 보고는 바로 꼬리를 말았다.

아그니스의 표식이 붙어 있다.

"그래도 눈을 달려 있나 보네. 이 표식을 보니까 이제 정신이 좀 드냐? 엉?"

"아, 아니, 아그니스가 갑자기 왜...."

"신규 퀘스트를 아그니스 허락도 없이 멋대로 받아? 엉? 너 쫓겨나고 싶냐?"

"네, 네? 죄송합니다, 몰랐... 커억!"

콰당탕!

안태준의 주먹이 플레이어의 뺨을 갈겼다. 요란스럽게 바닥을 나뒹구는 몸뚱어리.

"끄, 으으윽...."

"다음에 또 내 눈에 보이면 죽...."

"형님, 이 새끼 기절했는데요?"

안태준이 으름장을 놓으려고 했지만, 플레이어는 일격에 기절한 상태였다.

안태준과 일행이 그를 비웃었다.

"더럽게 약한 놈이네."

"입고 다니는 꼴을 보십쇼, 형님. 이제 막 전직한 초보자 같은데요. 참나."

"야, 대충 아무 데나 버려놔."

이제 막 전직한 듯한 허접한 차림새. 그걸 본 안태준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그는 기절한 플레이어를 근처에 버려둔 후, 놀란 눈으로 보는 NPC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아저씨. 퀘스트 있지?"

"예? 예에. 저는 서쪽의 바람 고원에서 왔습니다. 거기 있는 마을에서 살았는데요...."

"본론만 말해. 바쁘니까."

"아,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이 모조리 사라졌습니다. 제가 어딜 갔다 온 사이에 흔적도 없이 모두 사라졌어요."

"사라졌다고?"

안태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저, 저도 이유는 모릅죠. 그걸 좀 조사해달라, 부탁하고 싶어서 모험가님들께...."

"흠, 보상은 뭘 줄 거지?"

"저희 마을의 보물을 드리겠습니다."

"보물? 별거 아닐 거 같은데."

그렇게 생각한 안태준의 앞에 퀘스트 창이 나타났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행방불명된 사람들.]

· 난이도: B.

· 설명: 바람 고원에 살던 마을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원인을 알아낸 후 구출해야만 한다.

· 보상: 경험치, 칭호, 영웅 등급 아이템.

보상이 무려 영웅 등급 아이템이었다.

사실 아그니스 입장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보상이다. 허나 안태준은 아니었다.

'이게 얼마짜리야?'

영웅 등급이면 기본이 억 단위다.

좋은 옵션이 떴다면 그 시세는 몇 배로 뛴다. 골드로 팔 때도 비싸게 팔릴 터.

아그니스 소속이지만 아직 신입이라 돈이 부족한 안태준에게는 매혹적인 퀘스트였다.

'좋은 게 떴으면 내가 쓰고, 아니면 팔아서 더 좋은 아이템을 살 밑천으로 쓰면 된다.'

게다가 칭호 보상까지.

안태준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좋아, 내가 하지. 아이템은 확실하겠지?"

"예, 물론입죠.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요. 위치는 여기입니다. 지도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안태준은 남자가 내민 지도를 확인했다.

서쪽의 바람 고원에 있는 한 마을.

"마을은 조사했나?"

"예. 혹시나 마을 사람들이 어디 갔나 해서 오랫동안 머물러봤는데 아무도 안 오더군요. 마을도 조사해봤는데 아무것도 없었습죠."

남자가 고개를 조아렸다.

"근데 전 아무런 재주가 없는 무지렁이라서, 모험가님들이 조사하신다면...."

"귀찮게, 마을부터 조사해야겠군."

입으로는 귀찮다고 말하지만, 안태준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흐흐, 횡재했네. 설마 론데 마을에서 영웅 등급 아이템을 주는 퀘스트가 뜰 줄이야."

"그러니까요, 형님. 빨리 가죠."

"어. 바로 출... 엣취! 푸엣취!"

떠나려던 안태준이 재채기를 했다. 묘한 냄새를 맡으면서 코가 간지러워진 탓이었다.

"왜 그래요? 감기 걸리셨어요?"

"아니, 갑자기 코가 간지러워서. 뭔가 이상한 향도 나는데, 꽃가루 때문인가?"

"뭐, 근처에 꽃밭이 많기는 하죠."

안태준과 그 일행들은 론데를 떠났다.

그들이 떠나자마자 근처의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플레이어가 몸을 일으켰다.

"아오, 새끼들. 더럽게 세게 때리네."

진현우였다.

그는 뺨을 매만졌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이빨이 나갔을 거다.

'어쨌든 잘 됐어. 생각대로 됐네.'

터놓고 말해서, 조금 전 안태준이 한 공격은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왜 안 피했는가?

'페로몬은 잘 묻었고... 좋아.'

여왕개미의 페로몬을 묻히기 위해서였다.

괜히 어설프게 접근하다가 의심을 사는 것보다는 이런 식으로 묻히는 게 확실하다.

실제로도 성공적이었고.

"읏차, 이봐요. 아저씨. 저놈들이 했던 퀘스트 저도 해도 됩니까? 하고 싶은데요."

"예? 예에, 물론입죠. 누구든 간에 도와만 주신다면 약속한 보상을 드립죠. 제발."

"알겠습니다, 저도 하죠."

진현우는 퀘스트를 받았다.

안태준이 받았던 것과 똑같은 퀘스트였다.

"고맙습니다, 모험가님! 고맙습니다!"

고개를 연신 숙이면서 감사하는 남자.

진현우는 그를 두고 떠났다.

"...."

그렇게 모두가 떠나고 조용해진 골목.

연신 감사를 표하던 남자는 모두가 떠난 걸 확인한 후,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흐흐."

그리고 안태준 무리와 진현우가 떠난 방향을 보면서 히죽, 불길하게 웃었다.

* * *

안태준은 길드에 퀘스트 내용을 보고했다.

지부장인 조승원은 흔쾌히 허락했다.

"영웅 등급 아이템이라고? 다른 놈이 먹는 것보다는 우리 길드원이 먹는 게 낫지."

그런 의도에서였다.

안태준은 곧바로 출발했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서쪽의 바람 고원, 그곳에 있는 마을로.

"야, 여기 맞지?"

"그 남자가 말한 곳은 여기가 맞아요."

안태준은 마을을 돌아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았을 것 같은 마을은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

"뭐야, 진짜로 아무도 없네."

"별다른 흔적은 안 보이는데요."

"몬스터 발자국 같은 것도 없는 것 같지?"

"예. 최근에 온 사람이 아예 없어요."

휘이이잉!

거센 바람이 불었다. 바람 고원이라는 이름답게 이 지역에는 바람이 세게 불었다.

바람 사이로 뭔가 매캐한 냄새가 났다.

"어오, 망할 놈의 바람. 야, 일단 마을부터 수색해보자. 그 허접한 NPC가 조사해봤자 뭐 제대로 조사했겠냐? 뭔가를 놓쳤겠지."

"알겠습니다."

"조심하세요, 형."

혹시나 마을에 단서가 남았을지도 모른다.

안태준과 그 일행은 마을을 수색하기로 했다. 흩어지는 것은 위험하니까 뭉쳐서.

"일단 가장 큰 건물부터 조사하자고."

"예."

안태준은 마을 회관으로 보이는 건물로 향했다. 끼이익, 굉음을 내며 열리는 문.

내부는 잘 정돈되어 있었다.

"뭐야, 깨끗한데?"

"누가 납치한 거면 납치한 흔적이 있을 텐데 그런 것도 없네요. 어떻게 된 거지?"

"쓰읍, 영웅 등급 아이템을 주는 퀘스트라서 그런가. 일이 귀찮아질 것 같은데."

안태준은 혀를 차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모든 일행이 건물 안으로 들어간 순간.

ㅡ쿠우웅! 철컥!

"뭐, 뭐야!"

그들이 들어온 문이 갑자기 닫혔다. 그리고 바닥에서 뭔가 작동하는 소리가 나더니.

ㅡ파지지지직!

"큭, 으으아아아아악!"

강렬한 전격이 안태준과 일행을 덮쳤다.

바닥에 숨겨진 마법진이 작동하면서 마법이 발동한 것이다. 반응할 새도 없었다.

'마법진이라고?! 대체 언제!'

안태준이 경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자신을 비롯한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마법진을 눈치 못 챘다고? 내가?'

뭔가 이상하다.

안태준은 머리가 무거움을 느꼈다. 이 전기 때문이 아니다. 다른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할까.

"어, 으어억...."

"흐어어...."

이미 상황은 다 끝났는데.

마법진이 내뿜던 전격이 멈췄다. 안태준과 그 일행은 다행히도 누구도 죽지 않았다.

아니, 사실 다행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쿠웅!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크하핫! 멍청한 놈들!"

"얘들아, 이 머저리들 다 잡아라! 장비 다 벗기고, 가지고 있는 건 다 털고!"

문 너머에서 나타난 건 도적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을 본 안태준은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그것도 아주 잘못됐음을.

도적이 안태준을 보더니 웃었다.

"흐흐, 아주 건장한 놈들이구만. 걱정 마라. 너희는 좋은 곳에 팔아줄 테니까."

노예로 팔겠다는 선포.

안태준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걸 멀리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뭐, 옛날하고 딱히 달라진 건 없네."

진현우였다.

19화

거절할 이유가 없다

"사, 살려줘!"

"으아아악! 뭐야! 이 미친놈들은!"

"크하핫! 얘들아, 끌고 가라! 돈이다!"

"예, 형님!"

안태준과 그 일행이 끌려가고 있었다.

한 무리의 도적 떼들이 그들을 짐승처럼 이끄는 중이었다. 숫자는 50명 정도.

거구의 남자가 그들을 이끌었다.

"흐하하! 이것들 몸에 두른 것 좀 봐라. 더럽게 비싸 보이지 않냐? 횡재했구만!"

"이거 팔면 제대로 챙기겠는데요, 형님!"

"그러니까! 몸뚱어리는 다른 놈들하고 같이 노예로 팔아먹으면 알차게 벌 수 있겠어!"

"예, 맞습니다."

온몸에 가득한 흉터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저 도적들을 이끄는 대장, 칼레드였다. 진현우는 칼레드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아, 안돼! 아무나 살려줘!"

"으아아아아아!"

도적들이 떠났다.

안태준과 그 일행이 처절하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걸 들어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진현우는 그럴 생각이 없었고.

'쟤들이 끌려가는 게 도와주는 거지.'

마을이 조용해졌다.

도적들은 이미 멀리 떠난 상태. 하지만 아직 몸을 드러내기에는 너무 이르다.

이곳에서는 신중하게 움직여야 한다.

"행방불명된 사람들. 유명한 퀘스트였지."

대표적인 함정 퀘스트로 유명했다.

시작의 대륙에서 활동하는, 이제 막 플레이어가 된 이들을 제대로 물 먹이는 퀘스트.

ㅡNPC는 날 속이지 않는다.

초보 플레이어가 흔히 가지는 착각이다.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프로그램된 인공지능이 조작하는 존재라고 생각해서, NPC가 주는 퀘스트를 의심할 생각을 않는다.

하지만 아니다.

'NPC도 사기를 친단 말이지.'

세계의 탑의 NPC는 사람이나 다를 바 없다. 당연하지만 개중에는 나쁜 심성을 가진 이들도 있고, 사기를 치는 이도 있다.

이 '행방불명된 사람들' 퀘스트가 그렇다.

'저 마을 자체가 함정이다.'

진현우에게 퀘스트를 줬던 NPC는 저 마을로 먹잇감을 보내기 위한 호객꾼이다.

마을에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는 것처럼 말해서 방심을 유도하고, 도적들이 만든 함정이 가득한 마을로 플레이어들을 보낸다.

'거기에 아이템을 써서 마을에 진입한 플레이어들의 사고 능력을 떨어트린다.'

바로 향이다.

안태준과 그 일행이 맡았던 독특한 향. 그걸 맡은 탓에 사고 능력이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함정을 아예 눈치도 못 챘고.

"말 그대로, 잘 만들어진 작업장."

ㅡ스르륵!

진현우가 그림자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전에 개미굴에서 얻었던 군단 여왕의 갑옷이 가진 옵션, '보호색'의 효과였다.

일종의 은신 효과를 가진 옵션이다.

'저 마을은 안 들어가는 게 맞긴 한데.'

그럴 수도 없다.

바로 저기에 사념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함정이 있든 말든 상관있나."

진현우는 마을에 들어섰다.

잡혀간 안태준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진현우에게는 마을의 함정들이 보였다.

가장 먼저 입구에 있는 경보 함정.

ㅡ스으윽!

밟으면 마을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을 도적들에게 바로 경보가 울릴 것이다.

거기에 마비 함정, 포획 함정....

수많은 함정이 있었다. 하지만.

'뻔해.'

그래봤자 탑 1층의 도적들이다.

10년이 넘도록 플레이어 생활을 해온 진현우에게는 너무도 뻔한 함정들이었다.

그는 모든 함정을 순식간에 답파했다.

'이쪽일 텐데.'

진현우는 마을 구석으로 향했다.

가장 구석진 곳, 사람이 잘 오지 않는 곳에 낡은 집 하나가 우두커니 세워져 있었다.

끼이익, 문이 소음을 내며 열렸다.

"흠, 여기는 함정이 없네."

진현우는 집 안을 이리저리 돌아봤다.

간소한 집이었다. 물욕이 없는 사람이 머무르던 곳인지 물건도 많지 않았다.

뭔가 무도를 닦는 사람의 집 같달까.

'그야 뭐, 무도가가 살던 곳이니까.'

진현우는 눈을 감았다.

그의 감각이 집 안에 강한 사념이 남아 있음을 알려 줬다. 그리고 그 사념이 머물러 있는 아이템이 도대체 어디로 향했는지도.

그는 집을 나섰다.

'바깥이다.'

마을 근처에는 숲이 있었다.

진현우는 도끼를 쥔 채 숲속으로 향했다. 깊은 곳으로 그리고 더더욱 깊은 곳으로.

어느 순간, 짙은 혈향이 났다.

그 혈향의 근원지에.

"으음... 처참하군."

시체들이 보였다.

사방에 유혈이 낭자한 가운데, 피를 잔뜩 머금은 장갑이 버려진 것이 보였다.

'이거다.'

강한 사념이 담긴 아이템이었다.

진현우는 아이템을 들었다.

[피로 물든 쇠 장갑 (일반)]

-설명: 피로 물들고 부서진 쇠 장갑이다. 섬세하게 관리한 듯한 흔적이 남아 있다.

-착용 제한: 없음.

-효과: 없음.

* 강한 사념이 남아 있다.

사념이 남은 아이템이었다.

진현우는 주변을 둘러봤다.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다. 하지만 시간이 많지는 않다.

빠르게 끝내야 한다.

"기억 감정."

진현우는 눈을 감았다.

누군가의 기억이 어둠 너머로 보였다.

'이 사념도 오랜만이네.'

사념은 은퇴한 무투가의 것이었다.

도시에서 명성을 떨칠 정도로 실력이 좋았지만, 나이가 들어서 은퇴한 무투가.

그는 오랜 모험가 생활을 끝마치고 어릴 때 자랐던 마을로 돌아가 정착했다.

'그리고 마을을 공격한 도적들한테 죽었다.'

무투가는 마을의 남자들과 협력해서 최대한 싸웠지만, 수적 열세는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무투가는 죽었고.

-여행자여.

무투가는 강한 원한을 갖게 되었다.

때때로 사념이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비교적 최근에 죽었거나, 강한 원한을 가졌을 때.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원한을.

-이름 모를 여행자여, 날 도와다오.

사념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진현우는 낡은 건틀릿을 바라봤다.

"내가 뭘 해 줬으면 합니까?"

-원한을, 그놈들을 죽여 다오.

"도적들 말입니까?"

ㅡ그렇다! 그 도적놈들을!

사념의 목소리가 분노로 물들었다.

ㅡ칼레드! 그놈의 부하들까지 모조리! 놈들이 우리를 죽이고 마을 사람들을 끌고 갔다!

"그놈들을 처리하면 됩니까?"

ㅡ그렇다. 모두 죽여야 한다. 그리고 놈들의 야영지에 붙잡힌 사람들을 구해다오.

"저 혼자서 말이죠."

ㅡ아니.

사념이 그 말을 부정했다.

ㅡ내가 함께 할 것이다.

바로 그때, 빛이 일어났다.

진현우가 가진 건틀렛. 그게 빛을 내뿜더니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눈앞에 여러 메시지가 나타났다.

ㅡ기억 감정에 성공했습니다.

ㅡ은퇴한 무투가, '벡스'의 사념이 가지고 있던 힘을 전승합니다. 피로 물든 쇠 장갑 (일반)이 새로운 형태로 변화합니다.

ㅡ스킬 '진각 (C)'과 '정권 지르기 (C)'를 새로이 익혔습니다!

· 진각 (C, Lv.1): 바닥을 짓밟으면서 체중을 이동한다. 이 스킬 다음에 사용하는 스킬의 위력이 다소 증가한다.

· 정권 지르기 (C, Lv.1): 정권을 내질러 강력한 힘으로 적을 타격한다.

기억 감정에 성공했다는 메시지.

벡스라는 사념이 가졌던 힘이 진현우에게로 흘러들어왔다. 하지만 부족하다.

이 사념은 더 강한 힘을 갖고 있다.

ㅡ네가 날 도와준다면, 지금 네가 익힌 기술의 완전한 형태를 가르쳐주지.

"그러니까 도와라?"

진현우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거절할 이유가 없군요."

만족스러운 제안이었다.

* * *

[도적 떼 퇴치.]

· 난이도: A.

· 설명: 한 사념이 당신에게 마을을 멸망시킨 도적 떼를 퇴치해달라고 의뢰했다. 붙잡힌 사람들이 살아있을 경우, 그들을 구출하고 도적 떼를 완전히 퇴치해야 한다.

· 보상: 스킬 및 아이템 강화.

사념이 진현우에게 준 퀘스트였다.

그는 건틀릿을 확인했다. 피를 잔뜩 머금었던 건틀릿은 과거의 모습을 되찾았다.

[분쇄자 (희귀)]

ㅡ설명: 무엇이든 분쇄하는 힘이 담긴 건틀릿이다. 놀라울 정도로 튼튼하다.

ㅡ착용 제한: 진현우 외 착용 불가.

ㅡ효과: 분쇄, 경량화.

* 분쇄: 적의 방어력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욱 강한 데미지를 입힐 수 있다.

* 경량화: 강철로 되어있음에도 천으로 만든 것처럼 가볍고 착용감이 좋다.

진현우는 휘파람을 불었다.

건틀렛에 붙은 분쇄 옵션. 이 옵션 때문에 전생에서도 한동안 애용했었다.

'특히 탱커들 상대로는 최고지.'

방어력을 과신하는 탱커들한테 불의의 일격을 넣기에 최적의 옵션이다.

진현우는 건틀릿을 챙겨뒀다.

'일단은 사냥꾼의 장갑부터 쓰고.'

장갑의 옵션, 함정 전문가가 필요하다.

진현우는 도적들이 향한 곳을 봤다.

"자, 슬슬 추적해볼까."

도적 떼가 떠나고 한참이 지난 후, 그는 특성을 이용하여 적들의 흔적을 찾았다.

거기에 안태준에게 묻은 페로몬도 있었다.

ㅡ스스슥!

진현우는 자세를 낮춘 채 흔적을 쫓았다.

그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더럽게 멀리도 있군.'

도적들은 멀리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호수를 지나고, 언덕을 지나서. 구석진 곳에 있는 숲에 자그마한 요새가 나타났다.

ㅡ던전: 버려진 요새에 진입합니다.

ㅡ권장 레벨: Lv 20.

ㅡ혼자서는 공략할 수 없는 던전입니다. 파티를 갖추고 다시 오는 것을 권합니다.

버려진 요새.

한때는 군대가 쓰던 곳이지만 지금은 버려졌다. 그곳을 도적들이 차지한 것이다.

요새는 혼자서 공략하기에는 너무 까다롭다. 저런 경고 메시지가 나올 만도 하다.

"새로 잡은 놈들은 감옥 안에 넣어둬라! 장비 다 벗기고, 가진 것도 탈탈 털어서!"

"예, 형님!"

도적들이 아직 몸을 못 추스르는 안태준 파티를 요새의 감옥으로 끌고 갔다.

요새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는데, 포로들을 모아두는 장소인 듯했다.

"제길, 노예상 이놈들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남은 놈들도 빨리 팔아야 하는데."

도적 떼의 대장, 칼레드는 욕을 내뱉으면서 부하들과 함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마을을 덮치면서 얻은 전리품이리라.

'숫자가 제법 많다. 150명은 되겠는데.'

진현우는 나무 위로 올라가서 요새 내부의 상황을 살폈다. 꽤 큰 무리인지, 요새에 있는 도적의 숫자가 제법 많다.

'이게 B등급 퀘스트란 말이지.'

진현우의 입가에 썩은 미소가 어렸다.

난이도 B등급은 개뿔이. 이 정도면 '공격대'를 꾸려서 공략해야 할 정도다.

A등급은 족히 될 것이다.

'이러니까 그리 악명을 떨쳤지.'

전생에서는 여러 플레이어들을 잡아 먹었던 퀘스트다. 그중에 아그니스 길드도 있었고.

대부분 첫 함정에서 크게 당했지만, 그걸 피한다고 한들 요새를 공략하는 것도 문제다.

거기에 상대가 지성이 떨어지는 몬스터가 아니라 인간형 적이라는 것도 큰 문제였다.

'자존심이 상했던 아그니스 길드가 실제로 공격대를 꾸려서 요새를 털어버렸던가.'

그러면서 아그니스 길드는 저 요새에 숨겨져 있던 보물을 하나 발견하게 됐다.

진현우가 이 퀘스트를 깨기로 한 이유다.

공격대를 꾸려서 공략했던 퀘스트를 혼자서 공략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다 방법이 있다.

'그래서 준비한 게 있지.'

진현우는 여왕개미의 페로몬을 꺼냈다.

군단 개미의 페로몬은 먼 곳까지 닿는다.

도적들에게 끌려다닌 안태준이 놈들을 유혹할 길 표지 역할을 제대로 했을 것이다.

'난 놈들을 부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지금 시간은 낮. 도적놈들이 최대한 방심하고 있을 시각, 새벽을 노려야 한다.

진현우는 그림자 속에 모습을 감췄다.

20화

군단

해가 저물었다.

짙은 어둠이 내리고, 마침내 저녁이 됐다.

ㅡ흐하하하! 마셔라, 마셔!

ㅡ어이, 노예들! 먹을 게 다 떨어졌잖아!

도적들은 술을 마시며 노는 중이었다.

요새는 잘 숨겨진 곳에 있었다. 몬스터도 거의 없는 지역이고 찾아오는 이도 없는 곳.

도적들의 경계가 느슨할 만도 했다.

그게 진현우에게는 기회였다.

'여기 놔두고, 이건 여기에.... 좋아.'

사전 작업을 끝마친 진현우는 여기로 오기 전, 마을에서 산 아이템들을 꺼냈다.

하나는 얼굴을 가릴 수 있는 후드.

그리고 또 하나는 암벽 등반용 장비였다.

'은퇴하고 편하게 살 생각이었는데.'

진현우는 재빠르게 벽을 타고 올랐다.

요새의 벽 위에는 도적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는데, 대부분 술에 취해서 졸고 있었다.

놈들을 무시하고 요새 내부로 진입했다.

"드르렁, 퓨우우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서 졸고 있는 도적도. 진현우는 놈의 머리를 겨냥하고, 도끼를 던졌다.

ㅡ퍼어억!

"끅...!"

도끼가 놈의 머리통을 강타했다.

진현우는 쓰러지려는 도적의 몸을 감싸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 따로 숨겨뒀다.

그리고 곧장 지하로 향했다.

"...."

추적 스킬로 여러 발자국을 감지했다.

내부에는 최소 다섯 명의 도적이 있다.

ㅡ쿵! 쿠웅!

"뭐야?"

진현우는 바닥에 속박의 덫을 설치한 후 지하 감옥의 문을 두들겼다.

안을 지키던 도적이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놈이 문을 연 순간.

ㅡ끼리릭!

"윽... 케헥?!"

속박의 덫이 발동하면서 마력으로 된 그물 같은 것이 도적의 다리를 묶었다.

진현우는 놈의 명치를 강타하면서 문 너머를 확인했다. 안에 있는 적은 넷.

'의자에 앉아있는 놈이 둘, 감옥을 지키고 있는 놈이 둘. 먼저 처리할 건.'

진현우는 도끼를 투척했다.

번개처럼 투척한 도끼가 분열하더니 의자에 앉아있던 도적 둘을 덮쳤다.

ㅡ콰직!

"커허억!"

진현우는 손을 내뻗으면서 돌진했다.

순간적이지만 한계 이상으로 가속한 몸이 감옥을 지키던 도적에게로 쏘아졌다.

"뭐, 뭐 하는 새...!"

도적이 일어나려 하고 있다.

그 앞으로 돌진한 진현우는 오른발을 크게 내디디면서 진각을 밟았다. 그리고 숨을 크게 삼키면서 주먹을 힘껏 내질렀다.

ㅡ쿠우웅!

"꺼억...!"

묵직한 굉음이 울렸다.

주먹이 낸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소리.

가죽 갑옷이 찢어졌고 뼈가 부러졌다. 날아가던 도적의 몸이 벽으로 날아갔다.

ㅡ콰앙!

"미, 미친...."

벽에 부딪힌 도적이 축 늘어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도적은 하나. 놈은 겁에 잔뜩 질린 채 바깥으로 달아나려 했다.

진현우가 그걸 놔둘 리가 만무했다.

차악! 내뻗은 손에 도끼가 돌아왔다.

ㅡ퍼억! 퍽!

"억! 크악! 끄르르륵!"

도끼가 도망치던 도적의 다리를 꿰뚫었다. 비명을 내지르면서 쓰러지는 도적.

진현우는 그의 숨통을 끊었다.

"자, 그럼 남은 놈들은...."

뒤를 돌아보자 아직 살아있는 도적 둘이 보였다. 목덜미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놈들, 명치를 맞아 숨을 못 쉬고 있는 놈.

마지막 놈이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히, 히익! 안돼, 안...!"

ㅡ콰드득!

진현우는 남은 도적들을 마무리했다.

놈들이 앉아있던 책상을 보니 이 세상의 것으로 보이는 카드 같은 것이 보였다.

"카드 게임이라도 하고 있었나?"

진현우는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도적들의 품을 뒤졌다. 열쇠가 하나 있었다.

감옥의 열쇠다.

"누, 누구... 누구요...."

"으, 으으으...."

감옥 안에는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대강 서른 명 정도 되어 보이는데, 모두 다 상태가 안 좋았다. 오랫동안 굶었는지 얼굴이든 몸이든 비쩍 마른 상태였다.

"구하러 왔습니다."

"구, 구하러 왔다고...? 대체 누가...."

끼이익, 진현우는 감옥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악취가 진동했다. 먹지도, 씻지도 못한 채 갇혀 있었나 보다.

"그런 게 있습니다. 일단 바깥으로 나오세요. 근데 움직일 수는 있겠어요?"

"못 움직여도 움직여야지...."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밖으로 나왔다.

누가 구해주러 올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는지 모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진현우는 다른 감옥도 살펴봤다.

"그놈들도 여기 있을 텐데."

다른 감옥에 갇힌 이들이 있었다.

안태준과 그의 동료들. 팔과 다리가 묶인 채 쓰러져 있던 그들이 진현우를 바라봤다.

"너, 너, 너는 대체...."

경악과 두려움이 담긴 눈빛으로.

* * *

안태준은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들린 노크 소리, 도적 하나를 제압하면서 실내로 뛰어든 후드를 쓴 남자.

그가 도적들을 순식간에 처리하는 것을.

'뭐, 뭐가 저리 세?'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다.

혼자서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건 금물. 다수의 적과 싸울 때는 파티를 해야 한다.

안태준이 시작의 대륙에서 배운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러라고 했는데.'

그의 상식이 무너지고 있었다.

진현우는 다섯 명의 적을 혼자서, 그것도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제압했다.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야, 야. 저게 뭐냐?"

"나도 모르지. 혹시 레벨이 높은 건가?"

"보정이 있는데 레벨이 높아봤자...."

보정 시스템.

세계의 탑은 층마다 입장 가능 레벨이 있다. 그 레벨을 넘어선 플레이어라도 입장은 할 수 있지만, 그럴 경우에 레벨이 보정된다.

40레벨의 플레이어가 1층에 오면 최대 레벨인 20레벨로 보정되는 형식으로 말이다.

"애초에 장비가... 고레벨은 아닌 거 같아."

"아니, 그럼 대체 어떻게...."

안태준의 동료들이 속닥댔다. 반면 안태준은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진현우가 그들의 앞에 섰다.

"너, 너는 누구냐?"

"...."

끼이익.

진현우가 문을 열고 안태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무심한 눈으로 그를 보더니.

ㅡ뻐어억!

"크하악!"

안태준의 얼굴을 주먹으로 갈겼다.

엄청난 힘이었다. 시작의 대륙에서는 뛰어난 플레이어인 안태준도 못 버틸 정도로.

그의 몸이 단번에 뒤로 넘어갔다.

"컥, 케헥! 가, 갑자기 왜...!"

"존댓말."

"뭐? 이 미친... 아악!"

안태준의 복부에 발길질이 꽂혔다. 연이어서 무자비한 주먹이 얼굴을 덮쳤다.

후두둑! 떨어지는 이빨들.

"그, 그만! 알았어! 알겠습니다!"

"...."

그제야 주먹질이 멈췄다.

안태준은 끔찍한 고통에 신음하면서 두려움에 젖은 눈으로 진현우를 올려다 봤다.

그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단어 선택 잘해라. 더 맞기 싫으면."

후드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눈동자는 보였다. 지독하게 차가운 눈빛을 마주한 안태준은 덜컥 겁에 질렸다.

"너희 장비는 내가 갖고 있다. 돌려받고 싶다면 여기 있는 동안 내 명령대로 움직여라."

"아, 아니, 그럼 우리는 뭘 쓰라고...."

"저 도적들 장비를 쓰면 되잖아."

사실 거짓말이다.

요새로 들어오자마자 감옥으로 왔는데 안태준 일행의 장비를 챙겼을 리가.

하지만 어디에 있는 지는 알고 있다.

"...우리가 뭘 하면 되는데요?"

"조금 있으면 요새에 큰 소란이 일어날 거다. 그때 저 사람들을 데리고 도망쳐라."

"큰 소란이 일어난다고요?"

"그래."

진현우가 안태준을 사납게 노려봤다.

"만약에 마을 사람 중에 한 명이라도 죽으면 너희 장비는 없다고 생각해라. 꽤 좋은 장비를 쓰던데, 팔면 비싸게 팔리겠군."

"이, 이익...!"

안태준과 그 일행은 분노했지만, 그래봤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명령에 따르는 것 말고는.

"...예, 그렇게 할게요."

"좋아. 눈치가 빨라서 마음에 드네."

진현우는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여왕개미의 페로몬이 담긴 주머니. 안태준은 여기까지 페로몬을 묻힌 채 끌려 왔다.

[여왕개미의 페로몬 (영웅)]

· 설명: 여왕개미의 페로몬이 담긴 주머니다. 뭐라 형용하기 힘든 향이 난다.

· 옵션: 길 표지, 여왕의 부름

* 길 표지: 원하는 상대에게 묻혔을 경우, 대상을 일주일 동안 추적할 수 있다. 하지만 추적하는 건 당신만이 아닐 수도 있다.

* 여왕의 부름: 페로몬을 모두 사용하여 근처에 있는 군단 개미들을 불러들인다.

이 아이템에 있는 길 표지 옵션.

페로몬을 추적할 수 있는 건 진현우 만이 아니다. 군단 개미들도 추적할 수 있다.

특히 진현우 때문에 여왕개미를 잃은 개미굴의 군단 개미들이라면 더더욱 집요하게.

'이제 개미들은 충분히 모였겠지.'

진현우는 여왕개미의 페로몬을 사용했다.

그러자 주머니가 빛나더니, 안에 담겨 있던 페로몬이 기체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ㅡ쿠르르르!

"이, 이게 무슨 소리야?"

지하에서 불길한 굉음이 들렸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는 땅. 진현우는 당황한 안태준에게 명령했다.

"5분 뒤에 마을 사람들 데리고 떠나라."

"예? 아, 예. 그럼 당신은...."

"여기 있는 도적 대장을 죽여야지."

스으윽!

진현우의 신형이 단숨에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방향을 보던 안태준이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놈이야...."

* * *

깊은 밤.

거나하게 취한 칼레드는 휘청거리며 천막으로 향했다. 그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나지를 않고 있었다.

"흐흐, 노다지구만. 노다지야."

칼레드는 이 근방 출신이 아니다.

원래 다른 곳에서 활동하던 도적 떼였는데, 적대 세력과 싸우다가 여기로 쫓겨났다.

처음에는 막막했지만, 마을과 함정에 빠진 모험가들을 털면서 꽤 여유가 생겼다.

'주먹 쓰는 늙은이 때문에 부하가 좀 줄기는 했다만, 입이 줄었으니 오히려 잘 됐지.'

여기는 훌륭한 작업장이다.

마을로 보낸 부하를 이용하여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모두 얻어내리라.

그러고 난 다음에 이곳을 뜨면 된다.

"후우, 일단 좀 쉬어야겠군."

술기운 때문에 기분이 좋다.

칼레드는 두꺼운 모피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빠르게 수마가 몰려오는 순간.

ㅡ쿠르르르!

"뭐, 뭐야?!"

갑자기 굉음이 울렸다.

지하에서부터 들려오는 불길한 굉음. 동시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뒤흔들렸다.

그리고 소리가 들렸다.

ㅡ으아아아악!

ㅡ이, 이것들은 뭐... 커헉!

부하들의 고통에 찬 비명이었다. 그 소리에 칼레드가 경악하며 뛰쳐나갔다.

그런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이, 이게... 뭐야?"

수많은 개미들이었다.

어지간한 짐승만 한 크기를 한, 강철 같은 갑피를 가진 수많은 군단 개미들이.

"대, 대장! 우아아악!"

"미친! 이것들이 어디서 나온 거야!"

칼레드의 부하들을 잡아먹고 있었다.

지금껏 보지 못했고, 상상도 못 한 광경. 칼레드는 당황한 나머지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럴 때가 아니다.

"이놈들아, 침... 크으윽!"

ㅡ카아앙!

다급히 명령을 내리려던 칼레드에게 도끼가 날아들었다. 정확히 목을 노리는 도끼.

대검으로 황급히 쳐냈다.

'무슨 힘이!'

도끼를 쳐낸 칼레드의 팔이 떨렸다.

예상치 못한 힘에 근육이 놀란 탓이었다. 칼레드는 분노를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웬 놈이냐! 모습을 드러내라!"

대답 대신 도끼가 날아들었다.

칼레드는 침착하게 도끼의 궤적을 읽으며 쳐내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쏘아지던 도끼가 중간에 여러 개로 분열했다.

"크으으윽!"

모든 도끼를 쳐낼 수는 없었다.

강력한 힘이 담긴 도끼가 칼레드의 복부를 강타했다. 갑옷을 입었기에 살을 베이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충격이 엄습했다.

"감히, 어떤 놈이...."

스으윽!

어둠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네가 알 필요가 있을까?"

진현우였다.

21화

불나방

군단 개미.

개미굴을 비롯하여 시작의 대륙 곳곳에 퍼진 몬스터. 그 몬스터들이 지금....

ㅡ키아아아악!

"우, 우아아악!"

"이 새끼들,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야!"

요새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단단한 앞발로 바닥을 깨부수고 나타난 군단 개미들이 도적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실 놈들은 싸울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죽여! 이것들 다 죽이라고!"

"빌어먹을 몬스터 놈들이, 여길 어디라고!"

ㅡ치이익...!

여왕의 페로몬에 이끌려서 온 개미들.

놈들의 목표인 여왕만 찾는다면 이곳을 얌전히 떠날 놈들이다. 하지만 당황한 도적들은 군단 개미들을 먼저 공격해버리고 말았고.

ㅡ시아아아아!

ㅡ캬아아악!

"끄어억...!"

군단은 도적들을 적으로 인식했다.

거대한 앞발로 도적들을 찢고, 물어뜯는 군단 개미들. 그에 반격하는 도적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화롭던 요새가 순식간에 혈흔이 낭자하는 아수라장이 됐다.

"사, 살려줘!"

ㅡ치이이익!

그리고 그 소란스러움과 정반대로 요새의 중심부에서는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

"...."

진현우와 칼레드.

두 남자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노려보면서 빈틈을 엿보고 있었다.

"저 개미들, 네놈이 부른 거냐?"

"곤충을 부리는 재주를 가진 사람도 있나?"

"나하고 말장난이라도 하자는 거냐!"

칼레드가 이를 드러냈다.

개미를 눈앞의 적이 불렀는가. 그건 그도 알 수 없었다. 저놈이 자신에게 진실을 가르쳐줄 생각이 없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그래, 말할 생각이 없다면 됐다. 네놈을 박살 내서 입을 열게끔 만들면 되니까."

칼레드가 재빠르게 갑옷을 장착했다.

척 보기에도 단단해 보이는 중갑옷.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상처도 못 입힐 것 같다.

'아주 중무장을 했군.'

칼레드는 중갑옷을 입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단단해 보이는 갑옷.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상처도 못 입힐 것 같다.

'이걸 쓸 때가 됐나.'

진현우는 건틀렛, 분쇄자를 착용했다.

그걸 본 칼레드가 비웃었다.

"그딴 건틀렛을 낀다고 뭐가 달라지나?"

"글쎄다, 그건...."

진현우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ㅡ카아앙!

"두고 보면 알겠지!"

"크윽!"

먼저 움직인 것은 진현우였다.

그는 도끼를 투척하면서 돌진했다. 대검이 도끼를 쳐냈지만, 튕겨져나간 도끼는 다시금 진현우의 손아귀로 되돌아왔다.

"이놈... 우욱!"

위에서부터 닥쳐오는 공격.

칼레드는 대검의 넓은 면으로 도끼를 막아냈다. 그런 그의 두 눈이 커졌다.

ㅡ카드드득!

'힘이...!'

공격을 막아낸 칼레드의 팔이 떨렸다.

그는 이를 악물면서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걸 축으로 삼으며, 오른팔에 힘을 집중하여 대검을 크게 휘둘렀다.

ㅡ부우웅!

허나 진현우에게 닿기에는 느렸다.

진현우는 피하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대검의 몸체를 정확히 강타했다.

ㅡ쿠웅!

"...!"

땅바닥에 처박히는 대검. 예상치 못한 힘에 칼레드의 자세가 순간 휘청거렸다.

그리고 진현우가 돌진했다.

ㅡ카앙! 캉!

"큭! 허억!"

무차별적인 공격이 이어졌다.

진현우는 우악스럽게 도끼를 휘둘렀다. 칼레드는 휘몰아치는 공격을 막기에 바빴다.

도끼를 막아낼 때마다 칼날을 타고 큰 충격이 가해졌고, 손의 힘이 빠져갔다.

'빠르고 강하다! 어떻게 이런 힘이!'

칼레드는 상대의 강함을 알아챘다.

별다른 근육도 보이지 않는 놈인데 자신 못지않은 근력을 가지고 있다. 아니, 어쩌면 자신보다 더 근력이 강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큭, 으으윽!"

도끼를 다루는 솜씨가 매섭다.

우악스럽지만 그 투박함 속에 정교함이 느껴졌다. 우스운 말이나 오랫동안 도끼를 애용한 듯한 노련함마저 느껴졌다.

'이대로면 위험하다.'

칼레드는 위기를 직감했다.

죽는다. 이대로면 죽을 수도 있다.

"아, 아무나! 거기 누구 없나!"

"형님!"

그는 황급히 도움을 요청했다.

다행히도 요새 안에는 도적들이 남아있었고 그들이 소란을 듣고 달려왔다.

"날 도와라! 저놈을 죽여!"

도적들의 숫자는 10명 남짓.

진현우 혼자서 상대하기에는 벅찬 숫자다. 칼레드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어렸다.

"아무리 잘난 놈이라도 이 숫자를...."

ㅡ찌이익!

바로 그때, 진현우가 뭔가를 찢었다.

여기로 오기 전 비싼 돈을 주고 산 스크롤. 그 안에 담겨있던 마력이 해방되었다.

ㅡ화르르륵!

"허, 허어억!"

"형님! 으아악!"

주변으로 퍼져나간 마력이 열기를 띠었고 순식간에 형체를 갖추었다.

이글거리는 불길의 벽으로.

바닥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화염이 벽으로 화하면서 진현우와 칼레드를 에워쌌다.

"이, 이... 미친...."

칼레드는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저 화염 벽이 사라질 때까지 버티는 것.

그는 크게 숨을 삼켰다.

"덤벼라!"

진현우가 말없이 땅을 박찼다.

그에 맞서는 칼레드가 근육을 쥐어 짜내며 힘을 모았다. 둘의 거리가 좁혀졌다.

"죽여주마!"

거리가 좁혀진다. 대검이 닿을 사거리까지 앞으로 세 걸음, 그리고 마지막 걸음.

칼레드가 두 팔의 근육이 부풀었다.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디면서 축으로 삼고, 한계치의 힘을 담은 대검을 적에게 내질렀다.

그리고 그때.

'무슨...?!'

진현우가 도끼를 투척했다.

내던진 도끼가 대검을 강타했고 그 충격에 궤적이 흐트러졌다. 힘이 가득 실린 대검이 목표를 잃고 땅을 강타했다.

하지만.

"멍청한 놈! 무기를 제 손으로 버리다니!"

대검을 강타한 도끼가 멀리 날아갔다.

저놈에게 도끼를 회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다.

도끼가 놈의 손에 돌아가는 것보다 대검이 놈을 베어내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죽어라!"

칼레드는 광소를 터트렸다.

하지만 그가 대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진현우가 스탭을 밟으며 거리를 좁혔다.

순식간에 좁혀지는 거리.

ㅡ쿠우웅!

진현우의 발이 진각을 밟았다.

체중을 이동하면서 관절을 회전하고, 온몸의 에너지를 순간적으로 주먹에 집중했다.

그리고 크게 숨을 삼키면서.

"그딴 건틀렛으로 뭘...!"

주먹을 내질렀다.

특별한 것 없는 정권 내지르기.

하지만 그 위력은 평범하지 않았다.

ㅡ콰드드득!

"허, 억...!"

건틀렛이 칼레드의 복부를 강타했다.

순간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복부를 보호하던 갑옷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칼날조차도 튕겨내는 갑옷인데도.

'이, 이게 사람의 힘이라고?'

칼레드가 입에서 피를 토했다.

진현우는 그 피를 뒤집어쓰면서 더욱 거리를 좁혔고 무자비한 연격을 이어나갔다.

구겨진 갑옷이 칼레드의 복부를 찔렀다.

"으, 어억...."

고통을 못 이긴 칼레드가 무릎을 꿇었다.

진현우는 손을 뻗었고, 칼레드는 겁에 질린 눈으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사, 살려...."

손아귀로 돌아오는 도끼.

푸욱! 도끼가 칼레드의 목에 꽂혔다.

"끄륵...."

그게 끝이었다.

도적들을 이끌던 대장, 칼레드는 절명했다.

ㅡ레벨이 상승했습니다!

ㅡ진각, 정권 지르기, 분열 투척, 특제 덫의 숙련도가 상승했습니다!

ㅡ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다수의 인간형 적을 상대로 놀라운 성과를 보일 것.

ㅡ보상으로 고급 등급 칭호 [일당백 (효과: 인간형 적에게 주는 데미지가 5% 상승합니다.)]을 획득했습니다.

눈앞에 여러 메시지가 나타났다.

하지만 지금은 이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진현우 주변의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그 너머로 도적들의 모습이 보였다.

"형님... 히이익!"

"으, 으아악!"

뒤늦게 도우려고 왔던 도적들은 대장의 처참한 몰골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진현우가 그들을 응시했다.

그 시선에서 뭘 느낀 것인지, 도적들이 겁에 질린 채 달아나기 시작했다.

ㅡ퍼어억!

"끄아악!"

진현우가 그걸 놔둘 리가 만무했다.

그는 도끼를 투척했고, 여러 개로 분열한 도끼가 도망치던 도적들의 등을 강타했다.

'마력이 얼마 안 남았군.'

마을 사람들을 안전하게 도망치게끔 하기 위해서 요새 근처에 덫을 많이 깐 탓이었다.

우드득! 진현우는 목을 꺾었다.

"이 요새를 싸그리 불태워야 하는데."

그전에 할 일이 있다.

진현우는 칼레드의 방을 이리저리 뒤졌다.

"오, 이게 여기 있었네."

안태준과 그 일행이 쓰던 장비가 칼레드의 방에 있었다. 하지만 목적은 이게 아니다.

따로 찾을 것이 있다.

'전생에서 아그니스는 이 도적들 때문에 자존심을 구겼었지. 그래서 직접 나섰고.'

공격대를 꾸리면서 본격적으로 공략했다.

그렇게 요새를 공략하고, 내부를 조사하던 아그니스는 예상치 못한 수확을 얻었다.

아주 값진 보물을.

"어디 보자. 방안에 숨겨뒀을 텐데...."

진현우는 칼레드의 방을 뒤졌다. 그러다가 불현듯 느낌이 와서 놈의 침대를 뒤집었다.

침대 밑에 주머니가 붙어 있었다.

"잘 숨겨놨네."

진현우는 침대에서 주머니를 떼어냈다. 주머니를 열자 빛을 내뿜는 결정이 그를 반겼다.

[마력의 결정체 (영웅)]

· 설명: 강력한 마력이 느껴지는 결정체다. 오랜 시간 동안 마력을 흡수하면서 더욱 영험해졌다. 잘 조합해서 쓴다면....

마력의 결정체다.

조합용 아이템인데, 이걸 특정 아이템들하고 조합하면 능력치를 올릴 수가 있다.

영웅 등급이면 제법 오를 것이다.

'칼레드가 뇌물용으로 챙겨둔 거였던가?'

마력의 결정체는 칼레드가 다른 지역에서 사람들을 털다가 운 좋게 얻은 것이다.

척 봐도 귀한 물건이니, 일단은 챙겨뒀다가 필요할 때가 생기면 뇌물로 써먹으려고.

아니면 팔아먹으면 되니까.

"덕분에 내가 잘 쓴다."

이 시기에 열리는 게이트가 있다.

그곳을 공략하면 마력의 결정체와 조합할 수 있는 아이템을 하나 얻을 수 있다.

진현우는 마력의 결정체를 챙겼다.

"그럼...."

그리고 품속에서 기름을 꺼냈다.

"화끈하게 불이나 질러볼까."

* * *

바깥의 전투는 더욱 격해졌다.

하지만 상황은 도적들에게 좋지 않았다. 군단 개미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고, 무엇보다 놈들의 갑피가 너무도 단단했기 때문이었다.

"젠장, 이대로는...."

"이봐! 저, 저것 좀 봐! 요새가!"

이대로면 죽는다.

도적들의 얼굴이 어두워지려던 찰나, 갑자기 요새에서 거센 불길이 치솟았다.

"부, 불? 저기서 왜 불이...."

"잠깐만. 저 개미들, 갑자기 발악하는데?"

ㅡ키이이이익!

그러자 개미들이 이상 행동을 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적들을 죽일 듯이 공격하던 놈들이 요새로 뛰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몹시 다급하게.

"뭐, 뭐지?"

"몰라. 일단...."

도적들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튀자!"

"야, 빨리 튀어!"

"대장은! 저 요새 안에 있을 텐데!"

"대장이고 나발이고 우리부터 살아야지!"

고민은 짧았고 결심은 빨랐다.

도적들은 재빠르게 요새를 벗어났다. 불도 난 상황에 헛되게 목숨을 버릴 필요는 없다.

하지만 군단 개미들의 상황은 달랐다.

ㅡ치이이익!

ㅡ캬아아아아!

군단 개미들은 자신들의 몸이 불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요새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러는 이유는 간단했다.

'요새 안에 여왕개미가 있으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왕개미는 없고 놈의 페로몬만 있는 거지만, 그걸 놈들이 알리가.

그렇기에 군단 개미들은, 놈들이 생각하기에 요새 안에 갇혀있을 여왕을 구하기 위해서.

"마치 불나방 같구만."

스스로 목숨을 내던지는 것이다.

요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방화범, 진현우는 씨익 웃었다.

이제 개미들은 신경 쓸 필요 없다.

"도적 놈들만 처리하면 되겠군."

진현우는 등을 돌렸다.

도망친 도적들을 추적해야 한다.

22화

마지막 보상

"헉, 허억! 시발, 못 해먹겠네!"

날이 밝았다.

안태준과 그의 파티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중이었다.

도적들은 끈질기게 추적해왔다.

"형, 그냥 저것들 버리고 가면 안 돼요?"

"NPC 살리겠다고 목숨 걸 필요 없잖아!"

"멍청아! 그놈이 우리 장비 가지고 있는 거 몰라? 내 장비 팔면 억 단위는 충분히 나와!"

안태준이 노성을 터트렸다.

어떻게 모은 장비인데. 그걸 팔았다가는 앞으로의 플레이어 생활이 제대로 꼬인다.

무조건 장비는 되찾아야 한다.

"되찾으면! 그 새끼 그냥 둘 거예요?!"

"야, 목소리 낮춰! 저놈들이 듣잖아!"

"...크흠, 장비 받고 그냥 끝낼 거예요?"

"내가 그렇게 성격이 좋아 보이냐?"

안태준이 코웃음을 쳤다.

"강한 놈이긴 한데 그래봤자 20레벨은 못 넘어. 체력적 한계가 있을 거라고. 저 요새에서 싸우고 온 놈이 멀쩡할 거 같냐?"

"그럼...."

씨익, 안태준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틈을 봐서 죽여야지."

플레이어를 죽이는 건 처음이 아니다.

아이템을 얻기 위해서 몇 번 죽였던 적이 있다. 카오틱이 되지 않게끔, 아주 은밀하게.

진현우를 죽이는 건 일도 아니다.

"역시 형이야. 믿고 있었다고요."

"그 새끼 장비도 좋겠죠?"

"저 정도로 센 놈인데 장비도 좋겠지. 딱 봐도 견적 나오잖아. 죽여서 제대로 털자고."

그 장비들을 다 뺏는다면, 그리고 그것들로 성장할 수 있다면. 아그니스 내부에서 자신의 입지를 지금보다 더 끌어 올릴 수 있다.

안태준의 얼굴이 기대감에 젖었다.

"형! 이제 안 쫓아오는 거 같은데요!"

"조용한 거 같지?"

"예."

추적도 날이 밝자 끊겼다.

끈질기게 좇아오던 도적들의 고함이 안 들렸다. 어쩌면 속이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서 경계했지만.

"...진짜 조용하네?"

"이, 이제 괜찮은 겁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너흰 좀 닥쳐."

마을의 촌장이 걱정스레 한 말에 안태준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이 사람들을 구하는 건 그가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형, 그 새끼 이쪽으로 오겠죠?"

"어. 야, 무기 꽉 쥐고 있어라. 내가 틈을 봐서 신호를 보낼 테니까, 그때 일단 찔러."

"예."

당하고만 살 수는 없다.

안태준과 그 일행은 진현우에게 받은 수모를 반드시 되갚아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ㅡ퍼어억!

"끄어어억!"

"형... 커헉!"

진현우가 그걸 모를 리가 만무했다.

수풀에서 날아온 도끼가 안태준의 목덜미를 정확하게 강타했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엄청난 충격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끄르륵...."

"어어억...."

"히, 히이익! 이게 무슨!"

뇌가 뒤흔들린 안태준이 기절했다. 그를 뒤쫓던 일행 역시 충격을 못 버티고 기절했다.

그 모습에 마을 사람들이 기겁했다. 그리고 수풀 사이에서 진현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 도적!"

"아아, 진정하세요. 접니다, 저."

진현우는 마을 사람들을 안정시켰다.

놀랄 만도 하다. 안태준과 그 일행이 갑자기 도끼 자루에 얻어 맞고 기절해버렸으니까.

"너 같은 놈들이 생각하는 거야 뻔하지."

진현우는 혀를 차면서 주머니를 뒤졌다.

거기에는 안태준과 그 일행이 쓰던 장비들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이걸 돌려줄 것이냐?

아니, 그럴 생각은 없었다.

"대신에 이걸 선물로 주마."

"끄으응...."

진현우는 기절한 안태준 무리를 근처의 나무에 단단히 묶어뒀다. 이 정도면 나중에 돌아올 때까지 풀리지 않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그 모습을 멍하니 봤다.

"다들 괜찮으십니까?"

"예, 예에. 덕분에 살았습니다. 도적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계속 쫓아오던데요."

"다 죽였습니다."

"그, 그 많은 도적을 말입니까?"

도적들을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미리 놈들이 도망칠 법한 경로에 함정을 설치해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놈들의 발자국이 남았기에 추적하기도 쉬웠다.

"예. 마을로 돌아가도 문제 없을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로.... 근데 저희가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도와주셨으니 뭐라도 보답을 해야 하는데...."

"보답은 됐습니다. 대신에 지금 본 것들은 모두 잊으십시오. 아무 일도 없었던 겁니다."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진현우는 쓰고 있던 후드를 눌렀다.

마을 주민들에게 얼굴이 노출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꼼꼼히 가리고 있었으니까.

입단속만 시켜두면 된다.

'어차피 따로 받을 것도 없고.'

가진 게 없다는 말은 사실일 것이다.

도적들한테 있는 대로 다 털렸을 테니까. 저들한테 보상을 받아봤자 의미도 없다.

보상을 받을 대상은 따로 있다.

'이 퀘스트를 준 놈한테 받아야지.'

무려 영웅 등급 아이템을 준다고 했다.

그 아이템의 진실을 아는 진현우로서는 쓴웃음이 지어지는 보상이지만, 어쨌든.

그것 말고도 보상은 있으니까.

ㅡ여행자.

진현우의 건틀릿이 빛났다.

안에 남은 사념이 말을 건네고 있었다.

ㅡ내 부탁을 이뤄줘서 고맙네.

그 말이 끝이었다.

건틀릿에 남았던 사념이 사라지고, 진현우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ㅡ퀘스트 [도적 떼 퇴치]를 완수하셨습니다. 보상으로 아이템 [분쇄자 (희귀)]와 스킬 [진각, 정권 지르기]가 강화됩니다.

퀘스트의 보상은 무투가의 사념이 준 스킬과 아이템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진현우는 건틀릿을 확인했다.

[분쇄자 (고급)]

ㅡ설명: 무엇이든 분쇄하는 힘이 담긴 건틀릿이다. 놀라울 정도로 튼튼하다.

ㅡ착용 제한: 진현우 외 착용 불가.

ㅡ효과: 분쇄, 무투가의 혼, 경량화.

* 무투가의 혼: 격투 스킬의 데미지가 10% 증가한다. 근력, 민첩, 체력이 +5 상승한다.

추가된 옵션은 무투가의 혼.

브로큰 월드라는 게임에서 데미지라는 옵션은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분쇄자라는 아이템은 굉장히 좋은 아이템이었다.

판다면 어마어마한 값에 팔릴 것이다.

'새삼스럽게 웨펀 마스터의 특성들이 얼마나 사기인지를 느끼게 되네.'

그런 데미지 증가 옵션을 10%도 아니고 50%씩 올려주는 특성이 있다니.

한둘도 아니고 세 개씩이나.

· 진각 (B, Lv.2): 바닥을 짓밟으면서 체중을 이동한다. 진각이 땅을 울리게 만들어 적의 자세를 흐트러지게 만든다. 이 스킬 다음에 사용하는 스킬의 위력이 증가한다.

· 파쇄권 (B, Lv.2): 순간적으로 주먹에 힘을 집중하여 상대에게 큰 피해를 입힌다.

거기에 스킬들이 강화되기까지.

이 보상만 해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이제 마지막 보상을 얻으러 가야 하는데.'

그전에 할 일이 있다.

진현우는 안태준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뒤.

ㅡ까악, 깍!

"으, 으으음...."

깊은 밤.

까마귀가 우는 가운데, 기절했던 안태준과 그의 일행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주변은 어둡고 아무도 없다.

"뭐, 뭐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혀, 형! 우리 몸이...."

몸이 움직이지가 않는다.

안태준은 자신의 몸을 봤다. 단단한 밧줄로 나무에 묶여 있는 상태. 풀 수가 없을 정도다.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새끼가!"

"누구긴 누구야, 그 새끼겠지."

안태준은 범인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기억이 흐릿하지만 도끼가 날아왔다는 건 알고 있었다. 후드로 얼굴을 가렸던 남자 말고는 자신들을 이렇게 만들 사람은 없다.

"그 새끼가...!"

"형, 지금 바로 쫓아가죠!"

"쫓아가자고? 걔 얼굴은 알고?"

"...."

일행은 당장 복수하자고 난리였지만, 그것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진현우는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 젠장... 시이발! 안 풀리잖아!"

"크으윽!"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상황.

밧줄이 도무지 풀리지가 않는다. 안태준은 발버둥 치면서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바로 그때.

ㅡ바스락.

"거, 거기 누구냐!"

나뭇잎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봤다. 수풀 너머에서 흐릿한 신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 도적일까요?"

"내가 어떻게 알아...."

달빛이 상대방의 모습을 비췄다. 보이는 것은 후드를 깊게 써서 얼굴을 감춘 남자.

진현우였다.

"너, 너 이 새끼! 야! 네 말에 따르면 장비 돌려준다며! 약속을 어기는 거냐!"

"장비? 아, 그래. 돌려준다고 했었지."

진현우는 안태준의 앞에 장비들을 던졌다.

하지만 그런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안태준은 몸이 묶여서 움직일 수가 없는 상태인데.

"이걸 풀어줘야지 장비를 챙길 거 아냐!"

"그, 그래! 네 말대로 했잖아! 풀어줘!"

안태준과 그 일행이 분노를 터트렸다.

진현우는 그게 우스운지 헛웃음을 터트리더니, 쓰고 있던 후드를 천천히 벗었다.

"내가 그것까지 약속했던가?"

"뭐, 뭐라고?"

터벅, 터벅.

진현우가 안태준을 향해 걸어갔다.

"내 명령을 따르면 장비는 돌려주겠다고 했지. 그래서 지금 너희들한테 돌려줬고."

"무, 무슨 말 장난을...."

"그것 말고는 약속한 게 없거든."

점점 거리가 좁혀진다.

진현우의 얼굴이 보인다. 비웃음이 어린 얼굴. 안태준은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얼굴을 숨기려고 후드를 썼던 놈이다. 그런 놈이, 이제 와서 후드를 벗었다는 것은....'

얼굴을 보여줘도 상관없다는 것.

즉.

"아, 안돼! 오지 마! 하지 말라고!"

"혀, 형? 갑자기 왜 그래요?"

"시발! 죽기 싫어! 난 죽기 싫다고!"

안태준 일행을 여기서 죽이겠다는 것.

그가 발작적으로 몸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밧줄은 풀리지 않는다. 거리가 점점 좁혀진다.

어느새 진현우가 그의 앞에 섰다.

"내가 후환을 안 남기는 성격이거든."

"안...!"

천천히 올라가는 도끼.

안태준이 구걸의 말을 내뱉기도 전에.

ㅡ퍼억!

도끼가 안태준의 목숨을 빼앗았다.

놈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적막한 숲에 도끼가 뼈를 으깨는 소리가 연신 울렸다.

그걸로 끝이었다.

"한동안 생활비로 쓸 수 있겠군."

조금 전 안태준에게 던져줬던 장비들을 다시 챙기면서, 진현우는 그리 중얼거렸다.

"이제 마지막 놈을 처리하러 가볼까."

진현우는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퀘스트를 준 남자를 만나기 위해서.

* * *

소도시 론데.

진현우와 안태준에게 '행방불명된 사람들' 퀘스트를 줬던 남자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것도 한껏 술에 취한 채.

"꺼억, 끄으윽...."

휘청거리는 발걸음.

남자의 얼굴에는 미소가 만연했다.

"흐흐, 이게 얼마야. 이 돈이면 한동안 할 수 있는 건 다 하면서 지낼 수 있겠어."

주머니가 무겁다.

안에 가득 담긴 골드 때문이다. 그가 도적들에게 마을을 팔아먹고 대가로 받은 돈이다.

남자는 원래 마을 사람이었다.

'멍청한 놈들. 시골에서 백날 농사를 지어봐라. 뭐가 달라지나. 난 그렇게 살기 싫어.'

하지만 남자는 욕심이 많은 남자였고, 많은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가 자란 마을을 팔았다.

깊은 밤. 마을의 정문을 몰래 열어서 도적들이 아무 저항 없이 들어오게끔 하는 걸로.

ㅡ이놈 연기력이 꽤 쓸만하군. 어이, 넌 론데로 가라. 가서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남자의 행동이 마음에 든 칼레드는 그를 론데로 보냈고, 중요한 역할을 시켰다.

사람들에게 함정 의뢰를 주는 역할을.

"이번 일도 성공하면 돈을 주겠지...."

이번에 받을 돈으로는 뭘 할까.

남자는 히죽 웃으면서 위태로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누군가 그의 앞을 가로 막았다.

"뭐야? 어떤 놈이야?"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앞을 막은 것은 도시의 경비병들이었다.

"이름 크룩스, 바람 고원 마을 출신. 맞나?"

"예, 예에? 그건 갑자기 왜...."

"조사할 것이 있다. 따라오도록."

"조, 조사라고요? 대체 뭘 말입니까?"

느낌이 안 좋다.

남자가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경비병들이 이미 그를 포위한 상태였다.

"도적들과 내통한 죄."

"예?! 아, 아닙니다! 그건 모함...!"

"사실인지 아닌지는 감옥에 가면 알게 되겠지. 네 입으로 말하게 될 거다. 데리고 가!"

"아냐! 아니라고! 나는, 이거 놔!"

남자가 격렬한 저항을 했다.

이대로 감옥에 끌려간다면 죽을 거라는 걸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의미했다.

경비병들한테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으아아아아아!"

절망에 찬 비명을 지르는 남자.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진현우가 씨익 웃었다.

23화

고위험 게이트

바람 고원의 마을을 도적들에게 팔아먹은 남자, 크룩스는 감옥에 갇혔다.

진현우는 크룩스가 팔아먹은 마을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놈을 고발하게끔 했다.

그게 감옥에 갇히게 된 이유였다.

'멍청하게, 아그니스의 길드원들을 건드렸으니 살아서 나오지는 못하겠지.'

실제로 죽인 건 진현우였지만 누가 알겠는가. 자신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는데.

그나마 크룩스가 그의 얼굴을 보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진현우가 그들을 죽였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할 것이다.

"음, 아마 이 숲에 있었던 걸로 아는데."

소도시 론데에서 조금 떨어진 곳.

진현우는 자그마한 숲 내부를 걷고 있었다. 이곳에 크룩스가 숨겨둔 아이템이 있다.

저 안에 작은 오두막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진현우는 내딛던 발걸음을 멈췄다.

ㅡ푸슈욱!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화살이 쏘아졌다.

장치를 밟으면 화살을 쏘는 함정이다. 아마 누가 오지 못하게끔 크룩스가 설치해뒀겠지.

ㅡ퍼어엉! 촤르르륵!

"뻔하다, 뻔해."

오두막으로 가는 길목에는 여러 함정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너무 뻔하다.

초보 플레이어라면 충분히 당할 만도 하지만 진현우는 초보라기에는 너무 썩었다.

ㅡ끼이익.

금방 오두막에 도달한 진현우는 문을 열었다. 내부는 특별할 것 없는 허름한 집이었다.

하지만 숨겨진 장치가 있다.

"음... 여기인가."

침대를 뒤엎은 진현우는 그 아래에 숨겨져있던 장치를 가동했다. 그러자 드르륵, 소리를 내면서 나무 바닥이 열렸다.

그 안에 아이템이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몇 장의 쪽지도.

'칼레드가 내린 지령이군.'

남자가 어떻게 움직여야 할 지를 적어둔 쪽지들이었다. 진현우는 쪽지를 챙겼다.

그리고 검을 들었다.

[마르실의 검 (영웅)]

· 착용 제한: 근력 40, 체력 35.

· 옵션: 생명 존중, 사자를 베는 검, 믿음의 힘

* 생명 존중: 살아있는 자를 상대로는 제대로 된 피해를 입힐 수 없다.

* 사자를 베는 검: 언데드에게 20%의 추가 데미지를 입힌다. 유령형의 몬스터에게 제대로 된 피해를 입힐 수 있다.

* 믿음의 힘: 신성 계통의 스킬의 데미지가 10% 강화하며 마력 소모량이 감소한다.

검을 챙긴 순간, 메시지가 나타났다.

ㅡ'행방불명된 사람들'을 완수하셨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와 칭호가 주어집니다.

ㅡ레벨이 상승했습니다!

ㅡ퀘스트에 숨겨진 진실을 파헤쳤습니다. 칭호의 등급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퀘스트를 완수했다는 메시지였다.

그리고 보상으로 얻은 칭호가 나타났다.

[요새 정복자 (영웅)]

ㅡ효과: 이동 속도가 3% 상승한다. 성, 요새에서 싸울 때 데미지가 10% 상승한다.

조건이 붙은 칭호였다.

나쁘지 않다. 성이나 요새에서 싸울 일도 제법 많고, 무엇보다 이동 속도가 올랐으니까.

브로큰 월드에서는 빠를 수록 좋다.

'반면에 검은 좀 애매하기는 한데.'

쓸 데는 있다.

진현우가 조만간 갈 장소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쓸모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검에는 숨겨진 퀘스트가 있단 말이지.'

여기는 아니고 다음 층으로 넘어가야지 깰 수 있는 퀘스트다. 그걸 깨면 마르실의 검을 강화하면서 아이템을 더 얻을 수 있다.

그걸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진현우는 검을 챙겼다.

"슬슬 대장장이한테 가야겠군."

군단 여왕의 갑옷을 강화해야 한다.

* * *

그리고 그날 밤.

진현우는 대장장이에게 갑옷을 맡겼다.

"이틀 뒤에 오게. 모든 작업을 끝마쳐두지."

"예."

대장장이는 여러 재료를 갖춰둔 상태였다.

그리고 공방 내부를 둘러보니 실험용으로 만든 것 같은 갑옷과 투구들이 여럿 보였다.

'믿고 맡겨도 되겠지.'

진현우는 론데의 숙소에 방을 잡고 대장장이와 약속한 날이 될 때까지 쉬었다.

최근 바쁘게 움직였더니 몸이 지쳤다.

그리고 다음 날.

"슬슬 가볼까."

진현우는 신인 플레이어들로 북적거리는 광장을 지나서 대장간으로 향했다.

ㅡ까앙, 깡!

대장간은 망치 소리로 가득했다.

웃통을 벗은 대장장이가 집중한 표정으로 망치를 내리치고 있었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누가 들어왔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방해하면 안 되겠지.'

진현우는 대장간의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지켜봤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후우!"

대장장이가 거친 숨을 토해냈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아이템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마무리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금 몇 시간 후.

"...완성이다."

"드디어 완성하신 겁니까?"

"허억! 누, 누구... 도둑이냐!"

화들짝 놀란 대장장이가 망치를 쥐었다. 진현우는 양손을 들어서 그를 진정시켰다.

"휴, 당신이었나. 말 좀 하고 들어오게."

"방해했다가는 큰일 날 것 같아서 그냥 지켜봤죠. 망치로 때리려고 할 줄은 몰랐지만."

"크흠, 진짜로 때리지는 않았을 거요."

대장장이가 헛기침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눈길이 자신이 만들어낸 아이템으로 향했다.

그의 얼굴에 만족감이 어렸다.

"잘 만들어졌나요?"

"물론이지. 내 안에 아직까지 열정이 남아있다는 걸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네."

"자신이 있으신가 보군요."

대장장이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직접 확인해보라는 듯 아이템을 내밀었다.

강화된 갑옷, 그리고 망토였다.

망토는 가죽을 베이스로 검은색의 키틴질이 군데군데 덧붙여져 있는 형태였다.

[군단 여왕의 망토 (영웅)]

· 설명: 특수한 갑피로 만들어진 망토. 보석 같은 검은색이 눈길을 끈다.

· 착용 제한: 레벨 15.

· 옵션: 인지 저해, 저항, 군단 여왕 (2/2).

* 인지 저해: 망토의 후드를 쓸 경우 어둠의 장막이 얼굴을 가려서 인식할 수 없게 한다.

* 저항: 마법 저항력이 20% 상승한다.

괜찮은 아이템이었다.

특히 인지 저해 옵션이 마음에 들었다. 보호색과 활용하면 신상을 숨기기 좋을 것 같다.

'갑옷은 바뀐 게 없기는 한데.'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라면 실망하겠지만, 진현우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감이 증폭됐을 뿐.

"실망했나? 얼핏 갑옷이 바뀐 게 없을 것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착용해보면 알게 될 거요. 왜 내가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지 말이야."

진현우는 그의 말대로 망토와 갑옷을 착용했다. 그러자 변화가 일어났다.

갑옷을 중심으로 어두운 빛이 일어나더니 망토가 공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ㅡ[군단 여왕] 세트 옵션이 적용됩니다.

ㅡ모든 능력치 +5.

ㅡ이동 속도 +10%.

ㅡ보스 몬스터에게 주는 데미지 +20%.

ㅡ순간적으로 근력을 대폭 강화하는 [개미의 괴력] 옵션을 발동할 수 있다.

ㅡ보호색 옵션의 은신 효과가 한층 더 강화하며, 보호색 옵션 발동 시 처음 가하는 공격이 더욱 치명적인 피해를 준다.

브로큰 월드에는 세트 아이템이 있다.

특정 세트에 해당하는 아이템을 모두 착용하면 특수한 옵션이 발동하는 아이템들.

대장장이가 만든 망토에 붙은 옵션, 군단 여왕이 바로 그 세트 옵션의 증거였다.

'말할 것도 없이 좋은 옵션이지.'

대장장이와 관련된 퀘스트, [열의]의 최종 보상이 이 세트 옵션이라 할 수 있다.

원래는 꽤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하는 퀘스트지만 진현우는 너무도 쉽게 끝냈다.

'뭐가 필요한지 다 알고 있는데 귀찮게 빙빙 돌아갈 필요가 있나.'

단언컨대 없다.

장비를 착용한 진현우는 상태창을 열었다.

[진현우]

· 레벨: 17

· 클래스: 웨펀 마스터

· 칭호: 시간을 거스른 자

· 근력: 44 (+17) · 민첩: 46 (+17)

· 체력: 39 (+17) · 마력: 27 (+8)

이번에 행방불명된 사람들 퀘스트를 깨면서 레벨이 두 개 상승했다.

거기에 군단 여왕의 세트 옵션 효과로 모든 능력치가 +5 상승하기까지.

'지금 레벨 대에서는 그냥 괴물이구만.'

이 아이템 세트를 착용한 상태라면 1층의 플로어 마스터를 상대하기도 쉬워질 터.

일단 그전에 해야 할 것들이 있다.

진현우는 상태창을 껐다.

"좋습니다. 마음에 쏙 들어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네. 당신의 얼굴에 만족감이 가득 담겨 있거든."

대장장이가 클클거리며 웃었다.

"흠, 나쁘지 않은 기분이군. 내가 공을 들여서 만든 아이템에 만족하는 걸 보는 게... 왠지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거 같아."

"대금은...."

"됐네. 어차피 대장간의 재료는 안 쓰고 당신이 갖다 준 재료들만 썼으니까."

진현우는 그래도 대금을 챙겨주려고 했지만, 대장장이가 완고하게 거절했다.

"정 고맙거든 잘 쓰기나 하게."

"예, 그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동안은 이 세트만 쓰게 될 것이다.

진현우는 대장장이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대장간을 나섰다. 대장장이는 뿌듯함과 만족감이 담긴 얼굴로 그를 배웅했다.

"좋아, 일단 갑옷은 챙겼고."

쓸만한 아이템을 얻어서 만족스럽다.

이제 요새에서 얻었던 아이템, 마력의 결정체를 조합할 아이템을 찾으러 갈 때다.

'게이트를 하나 깨고 와야겠군.'

이 시기에 열리는 게이트가 있다.

거기서 마력의 결정체와 조합할 수 있는 재료를 얻을 수 있다. 그걸 얻어야 한다.

그것도 가능하다면.

'최대 기여도를 찍어서.'

진현우는 탑을 나섰다.

* * *

탑을 벗어난 진현우는 플레이어 협회로 향했다. 그런 그를 익숙한 직원이 반겼다.

이전에 그에게 자격증을 준 직원이었다.

"어머, 어서 오세요. 저번에 뵀었죠?"

"예. 게이트를 좀 가고 싶은데요. 지금 열린 게이트 목록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게이트 목록 말씀이시죠. 어... 음, 지금 레벨이 어떻게 되시죠? 전직은...."

"17레벨입니다. 전직은 했고요."

"벌써요?"

직원이 놀란 눈으로 진현우를 봤다.

탑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벌써 17레벨이 됐다니. 생각보다 성장이 빠르다.

"잠깐만요."

직원은 키보드를 두들겼고, 여러 게이트의 정보가 적힌 화면을 보여줬다.

진현우는 게이트 목록을 봤다.

'아무리 나라도 이 시기의 게이트들이 어떤 보상을 주는지 다 기억하는 건 아니야.'

기억하는 것은 특별한 게이트.

특이한 보상을 줘서 화제가 됐던 게이트다. 이걸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아그니스가 더럽게 자랑을 했었지.'

게이트 목록을 계속해서 읽어나가던 진현우의 눈길이 한 지점에서 멈췄다.

'그래, 고위험 게이트에서....'

진현우는 게이트 하나를 유심히 봤다.

"이걸 하고 싶은데요."

"네, 그러시군요. 이걸... 네헤?!"

아무 생각 없이 대꾸하던 직원이 게이트의 이름을 확인하더니 깜짝 놀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이 게이트 말씀이신가요?"

"예. 이거요. A등급 게이트요."

진현우가 가리킨 것은 난이도 A급 게이트.

[레서 골렘 군단의 습격.]

· 분류: 방출형 게이트.

· 난이도: A.

· 레벨: LV.1~Lv.20.

· 최대 인원: 50명.

· 목표: 보스 몬스터 제거.

· 게이트 오픈까지 남은 시간: 16:00.

· 설명: 고대 유적을 수호하던 레서 골렘들이 해방되었다. 놈들을 처리하고, 그 후에 나타날 보스 몬스터를 처리해야 한다.

* 추가 사항 1. 난이도가 굉장히 높은 게이트이므로 실력에 자신 있는 플레이어만 지원.

* 추가 사항 2. 방어전에 지원하는 플레이어가 없어 아그니스 길드에게 의뢰한 상황.

하려는 플레이어가 없어서 아그니스한테 거금을 주고 깨달라고 부탁한 게이트니까.

직원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저어, 원하신다면 심리 상담과하고 연결을...."

"예? 갑자기 뭔 소리에요?"

"아, 아뇨."

자살이라도 하려는 건가 싶어서.

직원은 무심코 나올 뻔한 뒷말을 삼켰다.

24화

누군가 봤더니

플레이어 협회의 최상층.

대회의실에 여러 사람이 모여있었다.

플레이어 사회에서 이름이 알려진 이들이었으며, 길드를 이끄는 길드장도 있었다.

"정기 회의에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점점 올라가는 침식률, 그리고 탑 공략 상황에 관해서 얘기해보려고... 그, 음."

그중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사람은 둘.

아그니스라는 대형 길드를 이끄는 화련, 그리고 네메시스의 길드장인 윤서희였다.

둘 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여장부였고, 사이가 극히 안 좋은 것으로도 유명했다.

'도대체 누가 이 둘을 부른 거야?'

'화련을 불렀으면 윤서희를 부르지 말아야지. 아니면 아예 윤서희만 부르던가....'

'두 길드 말고 다른 길드들은 안 왔다더라.'

'하긴, 협회 말을 따를 리가 없지.'

아그니스는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을 가혹하게 통제하는 길드. 네메시스는 그와는 정반대로 거의 통제하지 않는 걸로 유명한 길드다.

그런 성향 차이 때문에 윤서희는 평소에도 언론을 통해서 화련을 비난하고는 했다.

"...."

"...."

둘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고 회의장에는 북풍의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회의를 이끄는 플레이어 협회의 직원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진행을 이어나갔다.

"어, 음. 그래서, 지금 탑의 최전선에서 활동하시는 아그니스와 네메시스 분들을...."

"이번에 아그니스 길드에서 던전 입장 비용을 또 올렸다던데요. 사실인가요?"

"모셨, 아, 네. 두 분 말씀하시죠."

허벅지까지 닿을 정도로 긴 흑발을 지닌 여성, 윤서희가 대뜸 그리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맞은 편의 타오르는 듯한 적발을 지닌 화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지. 어쩌다 보니 그리됐네."

"어쩌다 보니, 라...."

윤서희의 입가에 냉소가 어렸다.

"그렇게 돈이 좋나요? 이미 돈은 평생 쓰고도 못 쓸 정도로 버셨을 텐데. 신인 플레이어들한테 베풀고 사시는 건 어떤가요?"

"어머, 놀라워라. 내 앞에 부처가 있네. 미안하지만 난 아직 달관하지 못해서. 세속스러운 욕심을 다 버리지 못했거든."

윤서희가 냉소하던 것처럼 화련 역시 차갑게 웃었다. 그 말이 우습다는 듯이.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잖니."

"탐욕. 참으로 하찮군요."

빠직.

화련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적어도 너처럼 가식적이지는 않잖아. 사람들한테 잘 보이려고 지역을 통제하지 않는 척하는 것보다는 솔직한 게 낫지 않니?"

"전 실제로 통제하지 않습니다. 당신 같은 역겨운 인간들하고는 다르게요."

"한국의 5대 길드라는 허황된 칭호로 불리더니 잘난 척이 심해졌네."

"그게 대단한 거였던가요? 이런, 그러고 보니 아그니스는 5대 길드에 못 들었었죠."

칼날을 품은 말이 오갔다.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이들이 몸을 떨었다.

"...."

"...."

싸늘할 정도로 무표정한 윤서희, 웃고 있으나 찬 바람이 부는 화련이 서로를 응시했다.

크흐흠, 누가 헛기침을 터트렸다.

"우리를 부른 이유는 협력해서 탑을 공략하라는 거지? 난 그럴 생각 없어. 뭐어, 네메시스가 굽히고 들어오면 모를까."

"예? 아뇨, 그게...."

"저희는 협력할 생각은 있습니다만, 누군가한테 굽히고 들어갈 생각은 전혀 없어요."

"저기, 두 분 다 진정하시고...."

"아직 침식률도 높지 않은데 공략할 필요가 있나? 이런 자리가 왜 필요한 지도 모르겠네."

화련은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여자하고 더 같이 있기도 싫어. 안 그래도 우리 유망주 보러 가야 하거든."

"자, 잠깐만요! 화련 님! 아직 회의가!"

"다음에는 만나지 말자, 윤서희."

또각, 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떠나는 화련.

직원은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유망주를 보러 간다니, 대체 무슨...."

"오늘 아그니스의 유망주가 A등급 게이트를 막으러 간다더군요. 그 얘기겠죠."

"그, 그렇습니까?"

윤서희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주변을 돌아봤다. 그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아그니스도 갔고, 다른 5대 길드는 안 왔고. 네메시스만 있어서는 회의가 의미가 없을 것 같군요. 여기서 그만 하는 게 어떨까요?"

"...예, 예. 그럴 거 같습니다."

회의는 거기서 끝났다.

모여있던 사람들은 빠르게 회의장을 벗어났다. 회식이나 뒷풀이 같은 건 없었다.

"후우...."

윤서희는 바깥으로 향했다.

그녀의 입가에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쓰레기 같은 놈들. 돈 욕심에 눈이 멀어서 눈앞의 것을 보지 못하는 꼴이라니."

지하에서 대기하던 차에 탄 윤서희는 혀를 찼다. 그녀는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지시했고 옆에 앉은 남자를 흘겨봤다.

고급스러운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 네메시스 길드의 스카우터인 유민혁을.

"회의가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언제나 그렇죠. 아, 화련. 그 망할 여자가. 아그니스도 그렇고 다 엎어버리고 싶네. 다른 5대 길드도 안 왔고, 의미 없는 회의였어요."

한국의 5대 길드.

세계의 탑 공략의 최전선에 있으면서, 한국에서 손 꼽히는 세력을 가진 길드들이다.

제우스, 추혼, 사자심, 아웃로우, 네메시스.

"타국의 길드와 경쟁하는 것도 지겨운데, 같은 나라의 길드와도 경쟁해야 한다니."

타국에도 한국의 5대 길드 같은 길드들이 있다. 한국에만 플레이어가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런 강대한 길드들이 탑 내부에 서로 얽히면서, 이권을 두고 다툼을 벌이는 상황이다.

"지치네요. 이럴 때가 아닌데."

탑을 공략해야 한다.

'침식률'을 낮춰야 한다는 사명을 잊고서, 대형 길드들은 욕망만을 쫓고 있었다.

"뭐, 이건 됐고요. 눈여겨보는 사람이 있다면서요. 저한테 보여주고 싶다고."

"예, 길드장님. 그전에 잠시...."

유민혁이 태블릿으로 사람들을 보여줬다. 이대건, 정지유, 박동욱의 얼굴이었다.

"기억하고 계십니까? 이 유망주들."

"네. 저번에 만났던 기억이 나네요. 유민혁 스카우터가 직접 추천하지 않았던가요?"

"맞습니다. 실력이 괜찮은 사람들이죠. 이 사람들이 얼마 전에 죽을 뻔했습니다."

"죽을 뻔했다고요?"

윤서희가 인상을 찡그렸다.

"던전 공략에 실패했나요?"

"아니요. 카오틱을 만났습니다."

"카오틱...."

최근 큰 문제로 부상한 이름이다.

플레이어 살해자. 자신들의 이익이나 욕심을 위해서 같은 플레이어를 죽이는 이들.

"그것도 꽤 유명한 카오틱이었습니다. 시체를 회수했는데, 최근에 여러 유망주들을 죽여서 '유망주 헌터'라 불리던 놈이더군요."

"죽어도 싼 놈이네요. 어쩌다가 그런 놈하고 파티를 맺게 된 거죠?"

"긴 시간 동안 함께 여행했던 도적이 카오틱이었다더군요. 그래서 죽을 뻔했었는데, 그걸 지나가던 사람이 구해줬답니다."

"흠, 지나가던 선비도 아니고. 그래서요?"

윤서희가 유민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유망주들이 죽다 살아난 건 다행이다. 근데 그걸 자신한테 보고할 이유가 있는가?

물론 있었다. 유민혁은 화제를 돌렸다.

"이전에 계약했던 유망주 말입니다. 정길상. 그 사람이 저한테 했던 말이 있습니다."

"뭔가요? 말해보세요."

"튜토리얼에서, 웬 노비스 하나가 도끼 하나로 고블린들을 학살했다는 말이었습니다."

"...."

윤서희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걸 저더러 믿으라는 건가요?"

"저도 처음에는 안 믿었습니다. 근데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지나가던 사람 말입니다. 그 사람의 인상착의가... 비슷합니다."

"튜토리얼에서 고블린을 학살한 노비스하고 우리 유망주들을 구해준 사람이 동일인물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건가요?"

"맞습니다, 길드장님."

톡, 톡.

윤서희의 손가락이 허벅지를 두들겼다.

"재밌네. 유민혁 스카우터는 튜토리얼 때 어땠죠? 고블린 상대로 잘 싸웠나요?"

"아뇨. 저는 유저가 아니었으니까요. 칭호도 얻지 못하고 빠르게 죽었습니다."

"그래요. 뭐, 전 유저라서 오래 버티기는 했는데, 그래도 학살과는 거리가 멀어요."

튜토리얼의 고블린들을 처리하는 것도 아니고 학살하는 건 자신도 하지 못했던 일.

거기에다가 유망주 헌터로 이름이 알려진 카오틱을 혼자서 죽이기까지 했다.

"그것도 최근에 플레이어가 된 노비스가."

"...지금은 전사라고 하더군요. 단 이대건의 말로는 전사가 아닐 거라고 합니다."

"클래스를 숨겼다."

허벅지를 두들기던 손가락이 멈췄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조사는 해봤나요?"

"물론입니다. 이번에 아그니스의 유망주가 A등급 게이트 방어전에 참석한다더군요."

"예, 저도 알아요. 그 핑계로 가더라고요."

"그 방어전에 제가 말한 유망주가 참석한다고 합니다. 바로 조금 전에 들은 정보입니다."

그 얘기를 들은 윤서희의 표정이 달라졌다.

플레이어 협회가 아그니스한테 거금을 주고 게이트 방어전을 의뢰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거기에 그 유망주가 참가한다고?

"아그니스가 눈독을 들일 수도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흐음...."

윤서희는 머릿속으로 스케쥴을 생각했다.

다행히도 오늘은 급한 스케쥴이 없다. 사소한 일이 있기는 하지만 미룰 수 있는 것들.

그녀는 금방 생각을 정리했다.

"한 번 만나러 가보죠. 차를 돌려주세요."

"예, 길드장님."

윤서희는 인재 욕심이 강했다.

그렇게 뛰어난 유망주라면 직접 만나서 제 눈으로 판단하고 싶다. 그리 생각했다.

방향을 꺾은 차가 도로를 달렸다.

* * *

진현우는 과천에 와 있었다.

과천은 안전지대 바깥이었지만, 사람들이 나름대로 일상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게이트와 몬스터가 나타나더라도 군인과 플레이어가 함께 처리하기 때문이었다.

"어디, 대형 마트가...."

과천에 있는 한 대형 마트.

진현우는 마트를 올려다 봤다. 푸른 장막이 마트 전체를 에워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게이트가 나타나면 저런 형태의 장막이 나타나면서 주변 일대를 포위하게 된다.

'저 장막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건 게이트의 레벨 제한에 맞는 플레이어들 뿐.'

게이트는 각각 레벨 제한이 존재한다.

저 마트의 게이트는 최대 20레벨까지. 그 이상의 플레이어는 장막에 막혀 못 들어간다.

들어가려면 '보정'을 적용받고 20레벨 수준으로 약해지고 난 뒤에야 들어갈 수 있다.

'고레벨 플레이어가 들어갈 수 있으면 게이트를 어렵지 않게 공략할 수 있으니까.'

그걸 막으려는 것이다.

어쨌든 저 마트가 게이트가 나타난 곳이다. 봉쇄돼서 플레이어 말고는 아무도 없다.

그랬어야 했는데.

"카메라 저쪽에 두라고! 각도가 별로잖아!"

"차가 저기서 들어올 거거든? 잘 찍어둬."

"네. 촬영 허가 장소가 저기 옥상이죠? 지금 미리 올라가서 세팅하고 대기할게요."

이상하게 기자들이 한가득 깔려 있었다.

우르르 몰려서는 촬영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조만간 몬스터가 나타날 곳인데도.

진현우는 금방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아, 맞다. 아그니스가 온다고 했었지.'

아그니스가 기대하는 유망주가 올 것이다.

그들을 제대로 띄워주기 위해서 기자들을 부른 것이다. 어려운 게이트에서 플레이어가 활약하는 것만큼 좋은 그림이 없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

"혜연아, 이번에는 특히 신경 써서 찍어라. 알지? 아그니스한테 투자 많이 받은 거."

"저도 알아요, 팀장님. 그만 좀 말해요."

"싸가지 없기는. 빨리 올라가!"

아그니스가 돈을 뿌린 것도 있었다.

크게 투자하거나, 광고를 뿌리거나. 대형 길드들은 그런 식으로 언론과 친분을 쌓는다.

전생에서도 그랬었다.

"야, 야! 온다! 저기!"

"찍어!"

그리고 저 멀리서 기자들이 기다리던 대상이 나타났다. 도로를 부드럽게 달리던 승용차가 멈추고, 한 무리의 플레이어가 내렸다.

남자 다섯, 여자 셋으로 된 플레이어들.

"안녕하세요! 아그니스 소속의 한성원입니다!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그니스의 길드원들이다.

선두에 있던 남자, 한성원이 카메라를 보며 웃더니 기자들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 우르르 몰리는 기자들.

"한성원 씨! 최근에 떠오르는 신성이라고 큰 기대를 받고 계신데요, 어떠십니까?"

"하하, 너무 과분한 칭호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그만큼 많은 분이 기대하고 계신다는 거니까, 부응할 수 있게끔 노력하겠습니다."

"이번 게이트에서 나올 몬스터는...."

한성원의 태도는 싹싹하기 그지없다.

만난 사람이라면 호감을 지닐 수밖에 없을 정도. 기자들의 얼굴에도 웃음이 만연했다.

딱 한 명.

"누군가 했더니 저놈이었어?"

진현우만 빼고.

25화

분쇄자

한성원.

아그니스 소속의 마법사다.

지금은 평범한 마법사지만, 나중에는 마법 계통의 히든 클래스로 전직할 놈이다.

'아그니스가 구해준 히든 클래스였지.'

브로큰 월드에는 클래스 체인지라는 시스템이 있다. 이미 전직한 사람이라도 조건을 달성하면 클래스를 바꿀 수 있는 시스템.

'이전 클래스에서 배웠던 스킬들의 대부분을 잊게 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

진현우가 감정사로 남은 이유다.

온갖 고생을 해서 기억 감정을 익혔는데, 그걸 버리고 다른 클래스로 전직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어쨌든, 흠... 한성원이라."

꽤 특이한 놈이다.

유명세에 집착한다고 해야 하나. 자신을 대중에게 노출하는 것을 굉장히 즐겼다.

겉으로는 좋은 이미지를.

그리고 뒤에서는 온갖 짓을 다 했었다.

"어오, 시발. 더럽게 힘드네."

아그니스를 위해 마련된 전용 휴게실.

한성원은 휴게실에 도착하자마자 욕을 내뱉었다. 기자들과 대화할 때의 싹싹한 표정은 온데간데 없이, 얼굴에는 짜증만 역력했다.

"기레기 새끼들, 진짜 말 더럽게 많아. 돈 받아 처먹은 놈들이 쓰라는 대로 쓸 것이지."

"그, 그러게요. 말이 많더라고요."

"그치? 야, 근데...."

한성원의 눈이 동료들을 훑었다. 그중에 한 명, 눈길이 닿자 움찔거리는 남자가 있었다.

"너 아까 기자들 앞에서 왜 나댔냐?"

"예, 예? 나댄 게 아니라, 그게...."

"뭐라고 했더라? 감사합니다, 기자 여러분. 시민분들이 피해를 보지 않게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라고 했던가? 이거 맞지?"

"네, 네. 맞습니다."

조금 전의 회견장에서 남자가 한 말이었다.

기자가 게이트를 앞두고 할 말이 있느냐고 물어봐서 저도 모르게 그리 답한 것이었다.

그게 한성원의 신경을 건드렸다.

"아주 주인공 납셨어, 어? 그게 너 같은 떨거지가 할 말이냐? 내가 할 소리지. 아냐? 탱커 새끼가 골렘 앞에서 뭘 할 수 있다고."

"죄, 죄송합니다. 처음으로 공략하는 게이트라서, 그게, 저도 모르게... 들떠서...."

"아, 들떠서. 그럴 수 있지. 그래."

한성원이 팔을 뻗었다.

그 손길이 남자의 어깨를 붙잡았다. 겁을 먹었는지 남자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ㅡ화르륵!

"끄아아아악!"

남자의 어깨를 붙잡은 손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화르륵! 순식간에 옷을 태우는 불길.

살점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아아악! 죄, 죄송합... 으아아악!"

"야, 미안. 나도 모르게."

바닥을 나뒹굴며 고통스러워하는 남자.

한성원은 손아귀의 불길을 꺼트리면서, 남자의 몸부림을 만족스러운 듯 바라봤다.

"부길드장님이 너희를 왜 붙여준 거 같냐? 날 돋보이게 하려고 붙여준 거야, 멍청아."

한성원을 아그니스로 데리고 온 것은 아그니스의 부길드장, 박현진이었다.

극소수만 알고 있지만, 박현진은 최근 길드 내에서 자신의 라인을 늘리려 하고 있었다.

길드장이 의심하지 않게끔, 조심스럽게.

"이 게이트가 내 데뷔 무대야. 헛짓거리 하지 말고 부길드장님이 시킨 대로 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그러자 한성원의 표정이 단번에 바뀌었다. 그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문을 열었다.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게이트 오픈까지 얼마 안 남아서 이제 나오셔야 할 거 같습니다!"

"네, 괜찮습니다. 지금 바로 나갈게요!"

밝게 웃는 한성원에게서는 조금 전의 냉혹한 모습의 편린조차 찾을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면서 떠나는 직원.

한성원이 뒤를 돌아봤다.

"야, 저 새끼 치료해."

"네, 네. 지금 치료하겠습니다."

"준비하고 나가자고. 이 새끼 치료하고, 다친 티 안 나게끔 잘 처리하고. 알지?"

"아, 알겠습니다."

길드원들이 겁에 질린 채 대답했다. 한성원은 그 모습이 만족스러운지 씨익 웃었다.

"그래. 게이트에서도 최대한 내가 눈에 띄게끔 해라. 너희는 돋보일 필요 없으니까."

"예, 예."

휴식 공간을 떠나는 한성원과 길드원들.

진현우는 그 모습을 은신한 채 보고 있었다.

'한성원. 놔두면 좀 귀찮아지는 놈이긴 해.'

저 잔혹한 성격 때문에 여러 사고를 친다.

미래에 진현우와 부딪혔던 적도 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죽일 필요가 있는 건 아닌데.

'히든 클래스를 얻게 놔둘 수는 없지.'

지금도 저런 기행을 벌이는 놈이 히든 클래스를 얻고 강해지면 뭔 짓을 하겠는가.

진현우는 등을 돌렸다.

"인생 좀 꼬이게 만들어볼까."

* * *

"플레이어분들은 모두 모여주십시오!"

모든 플레이어가 창고에 모였다.

플레이어들의 인원 수를 세던 협회의 직원은 뭐가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팀장님, 사람들 왜 이렇게 많아요?"

"많으면 좋은 거지, 갑자기 왜?"

"아뇨. 이 게이트 원래 플레이어들 참석률이 저조해서 아그니스 부른 거 아니었어요?"

"아, 그거."

팀장의 얼굴에 썩은 미소가 어렸다.

"왜긴 왜야. 아그니스가 와서 그렇지."

"아그니스가 와서 그렇다고요?"

"어. 어쨌든 아그니스가 왔으니까 게이트 공략은 웬만하면 성공할 거잖아. 일단 안전하고, 만약에 여기서 활약을 한다고 쳐봐."

"아아... 무슨 얘긴지 알 거 같아요."

부하 직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의도인지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그니스한테 잘 보이고 싶다?"

"바로 그거야. 잘 보이면 아그니스에 들어갈 기회도 생기는 거고. 일석이조잖아."

"참, 어이가 없네요."

참가한 플레이어의 숫자는 50명.

최대 인원을 꽉 채운 수준이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대부분 어중이떠중이였다.

"아그니스가 잘 해주기를 믿는 수밖에."

"예...."

팀장과 직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어중이떠중이 중에 하나, 진현우는 저 멀리 있는 게이트를 지그시 바라봤다.

'게이트라....'

넓이가 어마어마한 대형 창고. 그 한복판에 명백하게 이질적인 포탈의 존재가 보였다.

게이트다.

'탑의 몬스터를 내보내는 출구.'

탑과 함께 나타났으며, 지구를 멸망으로 이끈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볼 수 있는 존재.

게이트의 몬스터 수준은 탑의 공략 정도를 따라간다. 7층까지 공략했다면 1층부터 7층까지의 몬스터가 고루고루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침식률이 높아진다면....'

그 공식이 깨지게 된다.

7층보다 더 높은 층의 몬스터가 나타나고, 강화되면서 숫자 또한 더욱 많아지게 된다.

플레이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게이트 오픈 10분 전입니다!"

게이트의 위에는 타이머가 존재했다.

00:10이라고 적힌 타이머. 저 숫자가 0을 가리키면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가 나온다.

그 몬스터들을 모두 처리해야 한다.

만약 처리하지 못한다면?

'게이트 안의 몬스터가 해방되고, 과천 지역 전체에 무작위로 떨어지게 된다.'

피해가 어마어마하게 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게이트는 반드시 막아야 한다. 협회가 비싼 돈을 주고 길드를 섭외하는 이유다.

'게이트를 보니까 기분이 안 좋아지네.'

세상이 멸망하던 광경이 떠올랐다.

탑이 나타나고, 수많은 게이트가 나타나면서 몬스터들이 세상을 멸망시키던 광경.

그걸 기억하는 사람은 진현우 뿐이다.

"여러분, 전 한성원이라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아그니스 길드에 소속된 플레이어입니다."

상념에 잠겨있던 진현우를 한성원의 목소리가 일깨웠다. 제각기 전투를 준비하던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모두 한성원에게로 쏠렸다.

"이번 게이트는 난이도 A등급의 게이트입니다. 몹시 위험한 게이트죠. 저희 길드 만으로는 공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도움이 있다면 쉽게 공략할 수 있습니다."

한성원이 지팡이로 땅을 찍었다.

콰르르! 그러자 바닥에서 돌로 된 벽이 솟구치더니, 바리케이드처럼 앞을 막았다.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희생자 없이 게이트를 공략할 수 있게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성원의 눈빛은 결연했고, 목소리에는 힘이 담겨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플레이어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기력 좋네.'

언변이 크게 대단한 건 아니다.

근데 호소력이 좋다고 해야 할까. 목소리에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힘이 담겨 있었다.

'모두가 따라줄 지는 모르겠다만.'

진현우는 플레이어들을 슥 훑어봤다.

아그니스한테 존재감을 어필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플레이어들이 일부지만 보였다.

뭐가 어찌 됐든.

ㅡ쿠우웅!

"게이트가 열립니다! 저희 협회는 여러분이 무사히 귀환하기를 기도하고 있겠습니다!"

게이트가 열린다.

거대한 돌덩이가 떨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닫혀 있던 포탈이 좌우로 갈라졌다.

ㅡ게이트가 열립니다. 통로 너머에 존재하는 이계의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ㅡ콰드드득!

공간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좌우로 갈라진 포탈. 그 너머로 이계의 풍경이 보였다. 바로 세계의 탑의 풍경이.

그리고.

ㅡ쿠웅, 쿵!

ㅡ구우우우....

이계의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이 암석으로 이루어진, 3m 정도 되는 근육질의 사람의 형태를 한 동상. 하지만 일반적인 동상들과 달리 놈들은 움직인다.

"저게, 레서 골렘...."

마법이 빚어낸 인공 생명체, 레서 골렘.

살아 움직이는 동상들이 게이트를 넘어 지구에 발을 내디뎠다. 쿠웅! 땅이 울렸다.

놈들의 무게를 증명하는 울림이었다.

"모두 저를 중심으로 모여주세요!"

한성원이 다급히 외쳤다.

그를 중심으로 모이는 플레이어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골렘을 보고 놀란 탓에 늦게 움직인 이들도 있었다.

ㅡ구우우우....

"이, 이 미친...."

낙오된 남자 플레이어는 앞을 가로막은 레서 골렘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너무 크다.

거대한 암벽이 앞을 막은 느낌.

"저, 저리 안 꺼져?!"

남자는 길을 트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레서 골렘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칼날을 바라볼 뿐.

사실, 반응할 필요도 없었다.

ㅡ카드득!

골렘은 물리 방어력이 뛰어난 놈들이다.

일반적인 골렘보다 작기는 하지만, 레서 골렘 역시 그런 골렘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ㅡ카아앙! 우드득!

"미, 미친...."

물리적인 공격이 거의 통하지 않는다는 것.

레서 골렘에게 휘두른 플레이어의 검이 무력하게 부러졌다. 플레이어는 반으로 동강 난 자신의 검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그리고 골렘이 움직였다.

ㅡ퍼어억!

"끄아아아악!"

단 일격.

레서 골렘의 주먹에 얻어맞은 플레이어가 멀리 날아가더니 볼링공처럼 굴렀다.

살점이 으깨지고 뼈가 부서진 상황.

"커헉, 어어억...."

"우, 우아악!"

남자가 피를 토했다.

그와 함께 움직인 플레이어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도와주는 이는 없었다.

모두 비웃고만 있을 뿐.

"저 병신."

"주변 사람들이 들어요."

"맞다. 크흠! 여러분, 보셨죠? 단독 행동을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저희를 믿어주세요!"

"네, 네!"

오히려 잘 됐다.

멍청한 놈이 레서 골렘한테 당해준 덕분에 다른 플레이어가 명령을 잘 따를 테니까.

한성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흐흐, 여긴 내 독무대란 말이지.'

한성원은 마법사였다.

그것도 꽤 뛰어난 마법사. 온갖 업적을 깨면서 여러 칭호를 얻었고, 능력치도 이 레벨 대의 플레이어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했다.

실력에도 자신 있었다.

'레서 골렘이라니. 최적의 상대잖아.'

레서 골렘에게 물리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 간단하다.

"여러분! 돌벽을 이용해서 진열을 갖추고 저 골렘들이 못 다가오게 해주십시오! 저희가 화력으로 골렘들을 모조리 처리하겠습니다!"

전방에 탱커들이 자리를 잡고, 그들의 보호를 받는 마법사가 공격을 퍼붓는 것.

레서 골렘에게는 '핵'이 있다.

일반적인 골렘과 달리 크기가 작은 레서 골렘의 핵은 마법의 영향을 쉽게 받는다.

"저를 믿어주세요!"

ㅡ화르륵!

한성원의 지팡이가 불길을 일으켰다.

이 레벨 대의 마법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화력을 가진 불길이었다.

그걸 본 플레이어들이 전의를 다졌다.

바로 그때였다.

"어, 어어! 저 사람!"

"단독 행동 하지 말라니까!"

한 남자가 앞으로 뛰쳐나갔다.

무기는 보이지 않는다. 손에 끼고 있는 건틀렛이 전부. 그걸 본 한성원이 황당해했다.

"미친놈인가?"

"저 새끼 뭐야? 죽으려고 환장했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는 골렘 상대로 맨손으로 달려든다니.

죽으려고 환장한 미친놈으로 보일 수밖에.

"저 사람은 무시하세요! 진형 절대 무너트리지 말고 시간만 벌어주십시오! 제가!"

마법으로 화려하게 골렘들을 처리하겠다.

한성원이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ㅡ구우우우!

남자가 레서 골렘의 앞에 섰다.

골렘은 조금 전처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아서였다.

남자는, 진현우는 발을 크게 내디뎠다.

ㅡ쿠우웅!

힘껏 진각을 밟는 오른발.

건틀렛을 낀 오른손이 뒤로 힘껏 젖혀졌다. 그 주먹에 푸르른 마력이 어렸다.

그리고 그 마력이 한계치에 달했을 때.

"흐읍!"

ㅡ콰아앙!

파쇄권이 골렘의 명치를 강타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한성원이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게 통할 것 같냐고, 멍청아.'

레서 골렘의 몸은 강철보다 단단하다. 저딴 건틀렛으로 부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래, 그래야만 했는데.

ㅡ콰아아앙!

"...!"

엄청난 충격파가 일어났다.

골렘을 강타한 주먹의 끝에 마력이 빠르게 응축했고, 한계치까지 모인 마력이 폭발했다.

그 마력이 충격파가 되어 골렘을 덮쳤다.

ㅡ콰드드득!

골렘의 몸체인 암석이 굉음을 내며 종잇장처럼 부서졌다. 강력한 힘을 머금은 충격파가 암석을 부수고, 내부를 강타했다.

ㅡ콰직!

소리가 들렸다.

단단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 순식간에 부서지고 움푹 패인 골렘의 명치.

그 안에 있던 '핵'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ㅡ구, 우우, 우우?

정확하게 일격이었다.

진현우가 내지른 주먹은 골렘의 몸체를 구성하는 암벽을 산산이 부숴버렸고.

더 나아가 놈의 핵까지 부숴버렸다.

마법도 아닌 주먹으로.

"어, 어어?"

단 일격으로.

온몸이 무너지면서 바위 조각으로 변하는 골렘. 그걸 한성원이 입을 헤 벌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이 레벨 대의 플레이어는 골렘을 물리적인 공격으로 파괴할 수 없다.

한성원의 상식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으니까.

26화

기여도 99%

레서 골렘이 쓰러졌다.

단 일격에 몸체도, 핵까지 부서진 채로.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만큼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마법으로 핵을 노리는 것이 정석적인 공략법인 골렘을.

주먹으로 때려잡는 미친놈이 있다니.

"어, 어어! 위험해요!"

ㅡ쿠우웅!

그때, 레서 골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돌덩이 같은 주먹이 진현우를 내리쳤다. 뒤흔들리는 땅.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모두 진현우가 곤죽이 됐을 거라 생각했다.

ㅡ구우, 우우우....

하지만 그 자리에 진현우는 없었다.

어느새 골렘의 등 뒤로 돌아간 그는 주먹을 움켜쥐면서, 눈에 보이는 '약점'을 강타했다.

ㅡ콰드득!

"미, 미친."

이번에도 일격이었다.

단 한 번의 주먹질이 레서 골렘의 몸체를 부수고, 그 안의 핵까지 파괴해버렸다.

지켜보던 협회의 직원들이 경악했다.

'두 마리의 레서 골렘을 일격에 처리했다.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실력이라는 뜻....'

하지만, 그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20레벨도 넘지 못한 플레이어가, 어마어마한 방어력을 가진 골렘을 일격에 파괴하는 게.

협회의 직원이 다급하게 외쳤다.

"저 사람 누군지 파악해. 빨리!"

"네, 네!"

그러는 동안에도 진현우는 싸우고 있었다.

여러 골렘 사이를 재빠르게 오가는 신형. 주먹이 놈들의 핵이 있는 곳을 정확히 타격했다.

공격을 버티지 못한 골렘들이 쓰러졌다.

ㅡ구우우우!

모든 골렘이 일격에 쓰러지는 건 아니었다.

그중에는 진현우의 공격을 막고 반격하는 놈들도 있었다. 하지만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ㅡ쿠우웅!

진현우는 땅을 박차면서 골렘의 주먹을 피했다. 그리고 놈의 팔을 주먹으로 강타했다.

콰드득! 골렘의 팔이 일격에 부러졌다.

순간 균형을 잃은 골렘이 쓰러졌고.

ㅡ콰직!

"아니, 저게 말이 되냐고...."

진현우는 골렘의 핵을 단번에 파괴했다.

조금의 어려움도 없이, 너무도 쉽게.

'골렘이 저렇게 쉬운 몬스터였나?'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레서 골렘은 절대 쉬운 몬스터가 아니다. 물리 공격을 하는 클래스라면 더더욱 그렇다.

저렇게 쉽게 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게 일반적인 플레이어였다면.

'웨펀 마스터로 전직한 보람이 있네.'

진현우에게는 쉬울 수밖에 없다.

레서 골렘은 무거운 암석으로 이루어졌기에 신체 구조 상 빠르게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런 단점을 압도적인 방어력으로 보충하는 건데, 그 방어력이 의미가 없게 됐다.

ㅡ콰드득!

진현우가 가진 '분쇄자' 때문이었다.

상대의 방어력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욱 강한 데미지를 입히는 옵션이 붙은 건틀렛.

거기에 격투의 달인 특성으로 적의 방어력을 20% 가까이 무시하는 것도 가능했다.

'약점은... 저 부위인가.'

그리고 또 하나.

약점을 공격할 때 데미지가 100% 증가하며 방어력을 50% 무시하는 약점 파악까지.

여러 상황이 겹치면서 레서 골렘을 일격에 처리하는 기행을 벌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야! 저거 찍어! 빨리!"

"팀장님, 아그니스 찍으라면서요?"

"하는 것도 없는데 뭘 찍어! 저거 편집해서 뷰튜브 올리면 무조건 대박이다. 찍어!"

멀리서 촬영하던 기자들도 바빠졌다.

아그니스의 한성원을 찍으려고 온 거였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촬영감을 만나게 됐다.

그것도 엄청난 뷰를 보장하는 촬영감이.

"이게... 뭐야?"

한성원도 흐름의 변화를 느꼈다.

자신에게 주목하던 사람들의 이목이 저 남자, 진현우에게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아니라 저놈을 찍는다고? 왜?'

이 무대는 자신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화려한 마법으로 레서 골렘들을 처리하고,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화려하게 데뷔해야 하는데.

지금 이 상황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게 뭐냐고, 시발!"

진현우의 움직임은 점점 빨라지고 있다.

동시에 골렘들의 숫자도 빠르게 줄어들었다. 이대로면 자신이 나설 무대가 없어진다.

한성원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앞으로, 앞으로 갑시다! 빨리!"

"예? 바리케이트를 이용하라고...."

"지금 그럴 때가 아니잖아! 가라고!"

한성원은 떨떠름해하는 플레이어들을 강제로 이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저 앞에 골렘이 보인다.

'나도 저놈이 한 것처럼 할 수 있다고!'

화련과 박현진이 지켜보고 있다.

이 자리에서 반드시 자신의 가치를 보여줘야 한다. 한성원은 다급히 마법을 펼쳤다.

화르륵! 그의 지팡이 끝에서 나타난 불길을 휘감은 거대한 뱀이 골렘에게 쏘아졌다.

하지만.

ㅡ콰지지직!

"저, 저 새끼가!"

한성원의 마법은 골렘에게 닿지 못했다.

마치 그를 약올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보다 먼저 진현우의 주먹이 골렘을 덮쳤다.

마법이 채 닿기도 전에 쓰러지는 골렘.

"야, 개자식아! 왜 남의 몬스터를!"

한성원이 노성을 터트렸다.

하지만 진현우는 반응도 하지 않았다. 흡사 작업이라도 하듯 레서 골렘을 처리할 뿐.

"큭, 크으윽!"

한성원은 계속해서 마법을 사용했지만, 그 어떤 마법도 레서 골렘에게 닿지 못했다.

그의 마음이 점점 조급해졌다.

ㅡ한성원. 이건 내가 너한테 주는 기회다. 여기서 네 가치를 증명해라. 그럼 내가 직접 화련 길드장님한테 널 추천할 테니까.

아그니스의 부길드장, 박현진이 한 말이다.

한성원을 자신의 라인에 넣어서 키워주겠다고. 대신에 그럴 근거를 화련한테 보여주라고.

이 자리에서 뭐든 보여줘야만 한다.

'그래, 보스 몬스터!'

한성원은 게이트를 봤다.

이 게이트는 보스 몬스터를 제거하면 닫히는 게이트다. 보스 몬스터를 처리하는 데 성공하면 진현우 이상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

ㅡ게이트가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게이트 너머의 강대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바로 그때, 기다리던 메시지가 나왔다.

게이트가 한계치까지 벌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낡고 거대한 골렘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에 이끼가 낀 5m 남짓한 골렘.

"보스 몬스터, 올드 골렘입니다! 저놈만 잡으면 게이트가 닫힙니다! 조금만 더...."

"어, 어어! 성원이 형!"

협회 직원이 진현우에게 외쳤지만, 앞으로 뛰쳐나가는 것은 그가 아닌 한성원이었다.

아그니스 길드원들이 황급히 그를 쫓았다.

"여러분! 절 도와주십시오! 지금 힘을 모아서 저 보스 몬스터들을 우리끼리...!"

한성원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정확히는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진현우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 성원이 형. 어떻게...."

"시발, 우리끼리 해야지 뭘 어째! 앞으로 가! 돌벽을 바리케이드로 써서 저놈 막아!"

"저 거대한 놈을 저희끼리요?"

레서 골렘의 키는 3m.

보스 몬스터인 올드 골렘은 5m가 넘는다.

낡아서 금방 부서질 것 같지만, 그 덩치도 레서 골렘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컸다.

'저걸 우리끼리 막으라고?'

아그니스의 길드원들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들을 부리는 한성원은 막무가내였다.

그는 눈을 감고 마력을 집중했다.

'어차피 저놈이나 나나 레벨 차이는 없어. 나도 저놈처럼 한 방에 죽일 수 있어!'

화련과 박현진이 보고 있다. 여기서 뭐든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온갖 생각이 한성원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괜찮아. 돌벽하고 저놈들을 이용하면 골렘의 발을 붙잡을 수 있다. 그 틈에...!'

한성원이 최대치의 마력을 끌어모았다.

올드 골렘의 발이 묶일 때를 노려서, 자신이 쓸 수 있는 최고의 마법을 쓰려는 것이었다.

그 판단 자체가 안일했다.

ㅡ콰아앙!

"허, 허억! 벽이!"

돌벽은 올드 골렘을 조금도 막지 못했다.

골렘은 귀찮다는 듯이 돌벽을 걷어찼고, 굳건해 보이던 돌벽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부서진 돌 파편이 뒤에 있던 이들을 덮쳤다.

"아아악!"

"내, 내 팔...!"

"이 병신들아! 뭐 하는 거야!"

쓰러져서 신음하는 아그니스의 길드원들.

그러자 한성원의 앞이 텅 비게 됐다. 그를 지키던 돌벽도, 길드원들도 모두 쓰러졌다.

남은 것은 그에게 다가오는 올드 골렘 뿐.

ㅡ쿠웅! 쿵!

ㅡ화르르륵!

한성원의 지팡이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불꽃은 금방 불길을 휘감은 뱀으로 변했고, 목표인 올드 골렘에게 쏘아질 준비를 마쳤다.

이제 마법을 전개하기만 하면 되는 상황.

"한성원 씨! 위험합니다!"

하지만 전개할 수가 없었다.

올드 골렘이 부서진 돌벽의 파편을 줍더니 마치 야구공을 던지듯 한성원에게 던졌다.

거대한 파편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피해야 한다. 아니, 마법을 써야....'

한성원의 사고가 얼어붙었다.

피해야 한다. 하지만 피하면 기껏 완성한 마법을 취소해야 한다. 그럼 마법을 써서 저 파편을, 아니, 마법을 전개하기에는 시간이.

ㅡ콰아아앙!

"하, 한성원 씨!"

"꺄아아악!"

순간 망설인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거대한 돌 파편이 한성원을 덮쳤다. 사고가 얼어붙은 그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그의 몸이 돌에 파묻혔다.

"끄, 어억...."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후의 순간에 펼친 마법이 돌 파편을 조금이라도 파괴했다는 것.

하지만 부상을 피할 수는 없었다.

거대한 돌에 깔리는 것은 피했지만, 수많은 돌 파편이 한성원의 몸 곳곳을 파괴했다.

"어윽, 으으, 으윽...."

ㅡ쿠우웅! 쿵!

올드 골렘이 다가온다.

한성원은 도망치려고 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온몸이 부서진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지켜보는 것밖에 없었다.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올드 골렘이 한성원의 앞에 섰다.

놈이 거대한 발을 들었다. 거슬리는 날파리를 단번에 짓밟아서 없애려는 것이다.

한성원의 얼굴이 겁에 질렸다.

'이대로 죽는다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윽고 올드 골렘이 발을 힘껏 내리찍었다. 잔뜩 겁에 질린 한성원은 두 눈을 감았다.

쿠우웅! 거대한 돌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어?"

그런데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성원은 조심스레 두 눈을 떴다.

그 눈에 보인 것은.

ㅡ구, 우우우우!

산산이 부서진 올드 골렘의 오른발이었다.

한쪽 다리를 잃은 탓에 균형을 잃은 거인이 휘청거렸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올드 골렘의 등에 올라타려고 하는 이가 있었다.

진현우였다.

ㅡ퍼억! 퍽!

진현우는 올드 골렘의 몸체를 도끼로 찍어대면서 순식간에 등 위에 올라섰다.

그의 두 눈에 놈의 약점이 보였다.

꽉 움켜쥐는 주먹. 근육이 크게 부풀었다.

ㅡ[개미의 괴력] 옵션을 발동합니다.

ㅡ퍼어어엉!

건틀렛이 올드 골렘의 등을 꿰뚫고, 내부에 숨겨져 있던 골렘의 핵을 붙잡았다.

그리고 단번에 핵을 뽑아냈다.

ㅡ콰드득! 쿠우웅!

그걸로 끝이었다.

아그니스의 길드원들을 단번에 제압한, 압도적인 위용을 뽐내던 올드 골렘이.

진현우의 손에 너무도 간단히 처리됐다.

"어, 으으...."

한성원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진현우를 보는 눈빛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를 보는 것만 같았다.

조금 전의 적대감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ㅡ고대 유적을 수호하던 '올드 골렘'이 쓰러졌습니다. 게이트 공략에 성공했습니다.

ㅡ이계의 문이 닫힙니다.

모두의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 게이트는 몬스터를 사냥해도 경험치를 얻을 수 없다.

플레이어들이 게이트만 공략하면서 성장하는 걸 막고 탑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다.

그렇다고 해서 보상이 없는 건 아니다.

ㅡ플레이어들의 '기여도'를 측정합니다.

기여도.

게이트 공략에 얼마나 공헌했느냐를 뜻하는 수치다. 게이트 공략에 성공하면 보상을 주는데, 그 보상이 기여도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ㅡ축하드립니다. 플레이어 '진현우'. 99%로 최고 기여도를 달성했습니다.

ㅡ게이트에서 99% 이상의 기여도를 달성한 보상으로 칭호, 나 혼자서 한다 (영웅)을 획득했습니다.

[나 혼자서 한다 (영웅)]

ㅡ효과: 게이트 내부에 있을 때 능력치와 데미지 +10%가 증가함.

최고 기여도는 진현우였다.

1%는 아마 한성원일 것이다. 놈이 만들어낸 돌벽이 기여도로 측정된 거겠지.

그 정도 기여도는 딱히 상관없다.

ㅡ쿠웅!

99%든 100%든 최고 보상을 받으니까.

허공에 희뿌연 빛이 일어나더니 진현우의 앞에 자그마한 보물 상자가 나타났다.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상자를 열었다.

"우리는 아이템 안 주지?"

"한 게 뭐가 있다고 아이템을 주냐...."

보상을 얻지 못한 플레이어들이 진현우를 빤히 바라봤다. 그는 상자 내부를 확인했다.

안에 든 것은 핏빛처럼 붉은 보석이었다.

[마법사의 심장 (영웅)]

· 설명: 레서 골렘들이 수호하던 고대 유적에 보관되어 있던 심장이다. 특수한 과정을 거쳐서 보석 같은 형태로 정제되었다.

· 옵션: 두 가지 선택, 귀속

* 두 가지 선택: 복용할 경우 모든 능력치를 +3 상승시킨다. 제작에 사용할 경우 완성된 아이템에 특수한 효과를 부여한다.

* 귀속: 획득자 외에는 사용할 수 없다.

소비 아이템이면서 재료 아이템인 물건.

당연하지만 이런 귀한 물건을 아이템을 제작하는 데 쓸 이유는 없다. 무조건 먹어야지.

거기에다가 또 하나.

'마력의 결정체와 합치면 효과가 강화된다.'

그러니 조합해서 쓸 생각이었다.

진현우는 보석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전생에서는 한성원이 가졌던 물건인데.'

이 자리에 진현우가 없었더라면 한성원은 자신의 계획대로 게이트를 공략했을 것이다.

최고 기여도를 달성한 것도 그놈이었고.

"그게 지금은 내 손에 있네."

한성원은 이 아이템을 얻으면서 더욱 높은 가치를 얻게 됐고, 아그니스는 그를 밀어줬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생.

이번 생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뭐, 그래도 알아서 잘 하겠지.'

한성원이 재능이 없는 놈은 아니다.

성장할 가능성은 있는 놈이니 다른 길드에서 데려갈 수도 있다. 그래도 전생에서 아그니스에 있던 것처럼 성장하지는 못하겠지만.

"게이트 공략 확인했습니다!"

"일단 부상자부터! 그리고 포상금은, 어... 그건 일단 부장님한테 연락 드리고!"

"네!"

협회의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대기하고 있던 구조대원들이 부상자들을 후송했다. 그중에는 한성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진현우는 게이트를 뒤로 했다.

'한동안 시끄러워지겠군.'

그는 저 너머, 어딘가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을 화련과 박현진을 떠올렸다.

한동안 귀찮아질 것이다.

27화

네메시스, 아그니스 (1)

아그니스의 길드장, 화련은 별도로 마련된 공간에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지겨운 기색이 역력했다.

"저게 이번에 들어온 유망주야?"

"예, 그렇습니다."

그녀의 곁에는 키 큰 남성이 서 있었다.

최고급 정장을 멋스럽게 갖춰 입은 남자. 표독스러운 인상의 얼굴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그의 이름은 박현진.

아그니스의 부 길드장이었다.

"평범한 마법사 같은데, 맞나?"

"맞습니다. 다만 능력치는 비슷한 레벨의 플레이어 중에서 최상위권입니다. 스킬들의 숙련도도 굉장히 높은 편이더군요."

"그래서, 유망주로 키울 가치가 있다."

화련은 크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애초에 그녀부터가 마법사다. 랭커에 이름을 올린 히든 클래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어지간한 마법사는 눈에 차지 않을 수밖에.

적극적인 건 박현진이었다.

"예. 지금은 일반 마법사에 불과하지만, 히든 클래스로 전직하면 더 큰 포텐셜을 발휘할 플레이어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발견한 전직 퀘스트라도 있나 봐?"

"아직은 없지만, 기회만 주신다면."

"적극적이네."

화련은 다듬던 손가락을 후 불었다.

크게 내키지는 않지만, 부길드장인 박현진이 적극적으로 권유하니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게이트가 열렸다.

"사람들의 인망을 사는 능력이 있더군요. 대중 앞에서 이미지를 관리하는 능력도 괜찮습니다. 본인도 그걸 즐겨하는 편이지요."

"그래 보이네."

한성원이 사람들을 규합하는 게 보였다.

이윽고 열리는 게이트. 화련은 아주 조금의 흥미도 없었지만, 한성원의 활약을 지켜봤다.

아니, 지켜볼 생각이었다.

ㅡ퍼어엉!

어떤 남자가 뛰쳐나가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 남자가 정확하게 일격으로 골렘의 몸체를 산산조각 내기 전까지는.

"무, 무슨...."

박현진이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었다.

언제나 냉청한 그로서는 있을 수 없는 모습. 그만큼 지금 그가 당황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골렘을 주먹으로 부순다고?'

압도적인 방어력을 가진 골렘을?

몸체를 부순 걸로 모자라서 내부의 핵까지 부숴버렸다. 그것도 정확하게 일격으로.

저 레벨 대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그보다 높은 레벨에서도 힘든 일이다.'

진현우의 움직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골렘 하나를 박살 낸 그는 성난 짐승처럼 날뛰면서, 주변의 골렘들을 해치우고 있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화련님, 잠시...."

"재밌네."

이대로는 안 된다.

한성원을 밀어주려던 계획이 흔들리고 있다. 박현진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지만.

화련은 그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카메라, 저 남자한테만 집중해. 다른 놈은 보여줄 필요 없어. 저 녀석만 보여줘."

카메라가 진현우에게 집중했다.

의자에 등을 파묻고 있던 화련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지루함으로 죽어 있던 화련의 눈동자에 흥미라는 이름의 불꽃이 피어 올랐다.

'제길, 한성원... 이 멍청한 놈이.'

그걸 느낀 박현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후로도 한성원은 추태만 보였다. 무리해서 보스 몬스터를 처리하려다가 아그니스 길드원 모두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기까지.

화련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박현진."

"...예, 길드장님."

"저게 키울 가치가 있는 놈인가?"

한성원.

자기를 위해 만들어준 무대에서 아무런 활약도 하지 못하고, 조바심과 질투에 눈이 멀어서 해서는 안 되는 사고를 친 유망주.

아니, 이젠 유망주도 아니었다.

"넌 저놈이 길드 차원에서 밀어줄 가치가 있다고 했었지. 내 길드의 이름값을 깎아먹는 놈한테, 정말로 그런 가치가 있는 건가?"

"...죄송합니다."

박현진은 고개를 숙였다.

한성원이 재능이 있는 건 맞다. 잘 키운다면 훌륭하게 개화할 재능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도 태양 앞의 반딧불일 뿐.

"하지만 시간을 들인다면...."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박현진이 변명하려 했지만, 화련이 그의 말을 잘랐다. 변명을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눈빛이 어떤 남자를 향했다.

"저 남자가 밀어줄 가치가 있을 것 같네."

바로 진현우를.

화련의 눈빛에 탐욕이 어렸다. 어느 길드장이 그렇듯, 그녀도 인재 욕심이 강했다.

그녀의 마음이 바뀌었다.

그걸 느낀 박현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박현진."

"...네, 길드장님."

"저 남자를 영입해. 누군지 알아내고 나한테 보고해. 하나부터 열까지 남김없이."

화련이 입술을 혀로 핥았다.

"굉장히, 흥미가 생겼거든."

* * *

화련이 전투를 지켜보던 그때, 그들과 마찬가지로 진현우를 유심히 보던 이들이 있었다.

네메시스 길드의 윤서희와 유민혁이었다.

"유민혁 스카우터님, 저 남자가 맞나요?"

"인상착의는 일치합니다. 저희 길드의 신입들을 카오틱으로부터 구해준 남자입니다."

"그렇단 말이죠...."

윤서희의 손가락이 입술을 매만졌다.

"그러니까 튜토리얼에서 고블린들을 학살하고, 우리 신입들을 구해준 사람이... A등급 게이트를 혼자서 공략한 저 남자다."

"맞습니다."

"솔직히 믿기가 힘들긴 하네요."

만약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았더라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윤서희는 봤다.

진현우가 어떻게 싸우는지를.

"효율적이고 빨라요. 골렘의 약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더군요. 겁도 없고요. 신인이라기 보다는 경험 많은 베테랑 같았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능력치나 숙련도도 저 레벨에서는 최고 수준이 아닐지...."

"평범한 플레이어가 아닐 수 있겠네요."

"그 말씀은?"

윤서희는 최상위 랭킹에 이름을 올린 플레이어다. 처음 플레이어가 됐을 때부터 지금까지 빠른 속도로, 효율적으로 성장해왔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가?

"유저일 수도 있겠죠."

브로큰 월드의 유저이기 때문이었다.

전 세계에서 100명 남짓한 숫자만 플레이했다는 브로큰 월드를 직접 즐겼던 유저.

그렇기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길드장님."

"정보를 파악하고 접근하세요. 분명 아그니스도 움직일 겁니다. 그들한테 지지 않을 제안을 가지고 가서, 저 남자를 영입하세요."

"오버페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어요."

윤서희는 등을 돌렸다.

"그럴 가치가 있으니까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