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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선수를 치러..."

"아, 잠시만요."

로필렌 교수의 말을 끊고는 연구실의 암막을 걷어냈다.

알 수 없는 마나 회로가 새겨진 창문 너머로 황실 마탑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납득이 안 갔다.

제한적이나마 이만한 발전을 이룬 문명에서 고작 학부생 수준의 수학적 지식으로 대단한 진리를 설파하듯 까불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마법의 기초는 룬 문자다.

내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개념이다.

룬 문자와 관련된 학문은 일종의 신학처럼 느껴지고는 했으니까.

허나 룬 문자 때문에 수학이 퇴보했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룬 문자는 마법에 한정된 개념이었지만, 수학은 모든 공학의 기초였다.

"패러다임의 변화를 감안해도..."

우리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쟁이들과 같기 때문에 고대인들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멀리 볼 수 있다.

지구의 격언이다.

수십 수백 년 동안 쌓인 데이터를 토대로 세기의 천재가 혁신적인 이론을 내놓으면 패러다임의 변화가 찾아온다.

이 세계에서 성립할지는 차치하고라도 20세기 지구의 관통한 이론 정도라면 여기서도 혁신으로 통할 터다.

예컨데 상대성 이론 같은 것 말이다.

허나 지구에서 17~18세기에 발견된 수학 이론이 아직 논의도 되지 않았다?

믿기 힘들었다.

다시 로필렌의 연구 일지를 훑어봤다.

로필렌은 확실히 나보다도 훨씬 뛰어나며 천재적인 학자였다.

비록 오답일지언정 정답을 찾기 위해 여러 아이디어를 동원해 길을 헤맸는데, 권능을 사용하고도 그녀가 무슨 의도로 수식을 전개했는지 쫓아가기 버거웠다.

가만히 두어도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고 답을 찾았겠지.

로필렌이 연구하고 있는 개념은 이미 발견되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됐다.

허나 철저히 통제된 환경에서 독점되고 있겠지.

마탑 간에 서로 다른 기호를 사용하며 마법과 수학 공식들을 일일이 암호화해서 기록한다는 걸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결벽을 떠는가.

그건 아마도 마법의 존재 때문일 것이다.

마법이 하나의 권력으로 작용하는 세상이다.

마법과 긴밀히 연결된 수학적 지식 또한 독점적인 지위를 지닐 터다.

생각을 정리한 후 다시 로필렌을 바라봤다.

낯빛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날 죽이러 온 거냐."

"그건 아닙니다. 우리 오벨리스크에서 얼굴 한 번 봤죠?"

로필렌이 눈가를 가늘게 떨며 뒤로 숨긴 손을 꼼지락댔다.

나는 곧장 허리춤에서 검을 풀러 로필렌을 향해 던졌다.

"교수님을 해치러 온 건 아닙니다. 아, 물론 오벨리스크에서의 일은 비밀로 해주시면 좋겠네요. 제가 특이체질이라는 건 최근에 알았어요. 혹시 이 연구실도 오벨..."

"순진한 척 말고 본론을 말해."

"제의할 게 있어 찾아왔어요."

본래라면 좀 더 길게 고민한 후 적임자를 골라 제의를 건넸겠지만.

오벨리스크의 일 때문에 로필렌은 반드시 제거하거나 회유해야 할 대상이 되어버렸다.

"일단 들어보실래요?"

"...말해."

로필렌에게 건넨 제안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알레시아와 플로리아는 황실 마탑에 단기 유학을 왔다. 오래 머물지는 못한다.

그녀들이 귀향한 후에도, 마법을 가르쳐줄 훌륭한 스승을 찾고 있다.

당신이 그 적임자처럼 보이니 백작가에서 신변을 보장해주겠다.

대신 문제가 되었던 연구를 폐기하고 백작령에 정착해 아가씨들을 충실히 가르쳐라.

"나쁜 제안은 아니죠?"

"닥쳐. 시골 바닥에서 애새끼나 가르치다 늙어 죽으라고?"

로필렌은 예상된 반응을 보였다.

"너야말로 내게 협력해. 오벨리스크에 침입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싫다면 말이야."

그녀가 지닌 광적인 탐구욕이 안전하고 편안한 여생 따위를 선택지 못하게 만들었다.

로필렌의 성향은 익히 들었기에, 그녀가 혹할만한 여러 대가를 고민했었다.

허나 연구실에 와서 생각이 바뀌었다.

"마탑에서 압박을 받는 이유가, 여기 진행하는 연구 때문입니까?"

"..."

미간을 거칠게 접은 로필렌이 이내 표정을 풀었다.

감정을 다스렸다기보다 자포자기한 모양새였다.

"그걸 원래 연구하던 놈은 죽었어!! 나는 그놈이랑 편지 좀 몇 통 주고받았다고 이 꼴이 됐지!!"

"교수님을 압박한 놈들이 누굽니까?"

"몰라!! 힘 있는 마탑 중 하나겠지!! 너도 내가 하던 연구를 봤으니, 똑같이 표적이 되겠군!!"

억눌린 분노가 가빠지는 숨에 섞여 터져 나왔다.

나는 연구실을 울리는 고함을 대충 한 귀로 흘리며 책상을 톡톡 두들겼다.

로필렌을 노리는 마탑이 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 마탑이라 해도, 원활하게 문제를 풀어낼 수단은 존재했다.

마법사는 계약 각인으로 신뢰를 살 수 있었으니까.

로필렌만 잘 설득하면 됐다.

"지금 연구하시는 개념에 대한 새로운 해석 관점을 제공해 드릴게요. 그리고 필립스 백작령에 오신 후에도 교수님의 개인적인 연구를 지원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로필렌은 코웃음을 쳤다.

"이 무식한 기사 놈이 나에게 사기를 치려 하는군."

로필렌이 충동적으로 마나를 쏟아내려는 순간.

흐릿한 노크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똑똑!

내 계획이 어그러지지 않았다면, 지금 노크를 할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플로리아 님이네요."

로필렌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사라지기 전에 선수를 쳤다.

"진정하고 이야기를 마저 들어보시죠?"

*

첨벙!

레이가 로필렌과 담판을 짓고 사흘이 흘렀다.

황실 마탑에 존재하는 공용 목욕탕을 찾은 젠킨슨이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후우..."

젠킨슨의 입가가 기분 좋게 풀어졌다.

위아래로 물이 퐁퐁 솟아나는 목욕탕의 시스템은 몇 번을 봐도 썩 새롭게 다가왔다.

화려하고 거대한 황실 마탑의 목욕탕은 제국의 기술력을 은연중에 과시하고 있었다.

젠킨슨은 탕에 등을 기댄 채 느긋이 몸을 불렸다.

첨벙!

맞은편에 물소리가 나기에 눈을 뜨니 레이가 탕 속에 몸을 집어넣고 있었다.

레이의 인사를 받은 젠킨슨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로필렌님의 협력을 약속받은 게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마스터."

"걱정을 덜었군. 알레시아님과 플로리아님이 유학을 끝내고 귀향하신 후에도 배움을 이어나갈 수 있으시겠어."

젠킨슨은 로필렌을 영입하는 대외적인 사유를 입에 담았다.

공용목욕탕이니 만큼 듣는 귀가 꽤 있었다.

레이와 젠킨슨은 일부로 로필렌의 일을 떠벌이고 있었다.

"계약 각인을 언제 새기기로 하셨지?"

"열흘 안으로 일정이 잡힐 겁니다."

황실 마탑을 떠나는 마법사들은 지식을 외부로 유출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계약 각인에 묶인다.

로필렌은 가정교사 역할을 부탁받은 만큼 계약 각인의 조건이 조금 복잡해지겠지만, 오랜 마탑 역사에 그런 경우는 수두룩했다.

적합한 절차를 거쳐 황실 마탑에서 나간다면, 다른 마탑들이 로필렌을 견제할 실리적인 이유는 사라진다.

고위 귀족이 신변을 보호해주겠다고 나선다면 감정적인 사유 때문에 불필요하게 날을 세우진 않을 터다.

'아마도, 말이지.'

레이와 젠킨슨이 이 대화를 이어가는 이유는 간을 보기 위해서다.

로필렌을 필립스 백작령으로 영입한다고 떠들어댔을 때 예상 이상의 압박이 들어온다면 계획을 취소해야 했다.

소문이 번질 만큼 충분히 로필렌에 대해 떠들은 레이와 젠킨슨이 이내 침묵했다.

준비했던 대본이 다 떨어졌다.

"..."

"..."

레이와 젠킨슨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갈 만큼 사이가 가깝지 않았다.

어색함에 빠져 괜히 얼굴에 물을 찍어 바르던 젠킨슨이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가 깜짝 놀랐다.

"...종자야."

"네?"

젠신슨의 시선이 레이의 하반신으로 향했다.

물에 잠긴 탓에 왜곡되어 보이긴 했으나 기사의 감각으로 충분히 보정 가능했다.

"몸집은 작으면서 물건은 꽤 실하구나."

기껏 꺼낸 화제가 이따위라니.

젠킨슨이 자괴감에 빠져 미간을 구기는 사이.

자기 물건을 내려다본 레이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뒤로 꺾었다.

"후... 이게 다 유전자 덕분 아니겠습니까."

"유전자?"

"그거 아십니까? 제 유전자의 절반은 금태양, 남은 절반은 탕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금태... 뭐? 대체 무슨 뜻이냐?"

"제 생물학적 애미애비가 십새끼였다는 소립니다."

레이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시발, 아랫도리 크기에 개연성이라니.'

참 좆 같은 부분에서 섬세한 세계였다.

"거지 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거 치고 제가 참 번듯하게 자라지 않았습니까?"

이게 다 영혼이 맑아서 그렇습니다, 껄껄.

혼잣말을 지껄이는 레이를 보고 젠킨슨이 떫은 얼굴을 했다.

천장을 보고 궁시렁거리던 레이가 머리 위로 물을 끼얹었다.

"하아... 마스터. 제가 아침마다 어지럼증을 느낍니다. 이유를 뭔지 아십니까?"

"모른다."

"아랫도리에 피가 너무 많이 쏠린 탓에 머리로 갈 피가 부족해져서 그렇습니다."

"큭큭큭..."

전생에서나 현생에서나 음담패설은 쉽게 웃음을 살 수 있는 주제였다.

한동안 시답잖은 소리를 하며 낄낄거린 레이와 젠킨슨은 욕탕을 나왔다.

개인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던 레이는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오벨리스크 밖으로도 나올 수 있는 거였어?"

[오벨리스크 안으로 오십시오. 보안 탓에 외부에서 전달 가능한 정보가 극히 제한됩니다.]

"미안한데 거기 들어갔다가 걸리면 잡혀 죽어."

[계승자의 흔적을 은폐할 수 있도록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그러니 찾아오십시오. 계승자가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이건 권유가 아닙니다.]

"600년 전 죽은 할머니한테 협박도 들어보는군."

걸렸으니 가보긴 해야 했다.

레이가 짧게 혀를 찼다.

"며칠 기다려봐."

*

화르륵!

아직 잉크도 덜 마른 종이가 한순간에 재로 변한다.

로필렌은 책 몇 권 분량의 자료를 아낌없이 태우며 고민에 잠겼다.

로필렌은 사흘 전 플로리아와 계약 각인을 맺었다.

레이가 로필렌이 찾던 '답'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날 일을 비밀에 부침과 함께 레이의 제안에 긍정적으로 응하겠다는 계약이었다.

로필렌은 레이가 개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무식한 기사가 사람을 현혹하려 혀를 놀린다고 생각했다.

로필렌은 레이를 비웃으며 욕설을 쏟아냈다.

그러면서도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계약에 응했다. 사실 손해 볼 게 없는 계약이었다.

그리고 레이에게 답을 받아든 로필렌은,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가 건넨 건 작은 아이디어이자 숫자를 뒤틀린 관점으로 보는 법이었다.

'이건 새로운 개념이 아니야.'

복소수에 관한 개념. 그리고 복소평면.

지구에서도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이 되어서야 완벽히 적립된 개념.

막상 답을 놓고 보니 몇몇 암호화되어 있던 마법 이론에서 이에 관한 개념의 흔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은색 마탑 놈들이었군.'

자신의 연구를 방해한 범인을 알 것 같았다.

공간에 관련된 마법을 주로 탐구하는 은색 마탑 놈들.

룬어와 경험에 의지하는 경향이 큰 원소 마법과 달리 공간 마법은 복잡한 수학적 계산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복소평면을 시작으로 이와 관련된 개념을 꾸준히 발전시켜 나가면 훨씬 효율적이고 빠르게 공간 마법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고,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고 로필렌은 판단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이건...'

아는 만큼 보인다.

마법적 지식이 일천한 레이는 지식을 전하면서도 그게 어떻게 마법에 활용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개념을 연구하던 수학자, 아토르도 그렇기에 멋모르고 로필렌에게 편지를 써 보낸 것이다.

하지만 로필렌은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극독이군.'

제국과 황실 마탑은 다른 마탑들의 마법 지식 독점을 견제하며 지식을 공유하고 발전시켜 나갈 것을 권장한다.

때문에 본래 황실 마탑은 로필렌을 보호했어야 한다.

로필렌은, 세력이 강한 마탑이 우회적으로 자신을 압박하는 줄 알았으나, 이제 보니 아니었다.

황실과 은색 마탑은 한몸이었다.

황실은 공간 마법에 사용될 지식이 외부로 유출되는 걸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그래, 이거라면 제국이 병적으로 경계할만하지.'

공간 계열의 대마법 중에 허락 없이 시도했다간 곧장 반역죄로 처형되는 마법이 두 가지 존재한다.

하나는 게이트.

다른 하나는-

"메테오(Meteor)."

영지 몇 개를 날려버릴 수 있는 파괴 마법.

대마법사가 여럿 모여도 한 번 전개하기 위해선 오랜 준비 기간을 필요로 하지만.

공간 마법 이론이 발전되면 필연적으로 메테오를 전개하기 위한 조건과 시간이 축소된다.

제국이 거품을 물만 했다.

발전된 마법 지식이 외부로 빠져나가 제국에 적대적인 대마법사가 제국이 대비도 하기 전에 메테오로 선공을 가했다간 도시 몇 개는 바로 괴멸될 테니까.

'제국이 나를 놓아주려나.'

연구 일지는 전부 태웠고 계약 각인도 충실하게 맺을 생각이다.

로필렌이 지식을 유출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제국이 로필렌을 껄끄럽게 여긴다면 어찌 나올지 몰랐다.

물론 냉철함이 돌아온 로필렌은, 이러한 사실을 레이에게 공유할 생각이 없었다.

제국이 부디 마음 넓길 바랄 뿐이었다.

제의 (3)

64화

로필렌이 교수 직위를 내려놓고 변두리 영주의 아래로 들어가게 됐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졌다.

마탑 관계자들은 식사를 하다 한 번쯤은 로필렌의 이름을 입에 담았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교수가 황실 마탑의 눈 밖에 나 사임하는 일은 종종 있어왔으니까.

황실 마탑 출신의 마법사가 귀족가 영애의 가정교사 노릇이나 하게 되었다는 건 굴욕적인 일이었으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측면에선 가장 현명한 선택이기도 했다.

로필렌은 정식으로 교수직을 사임하고 황실 마탑과 계약 각인을 맺기 위한 절차를 밟았다.

최소 열흘은 걸릴 일이었는데, 로필렌은 그 사이 플로리아나 알레시아와 여러 번 같이 식당에서 만났다.

이 또한 고의로 소문을 부채질해 외부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한 의도였다.

로필렌과 각 백작가의 관계자들은 날을 바짝 세운 채 시간을 보냈다.

허나 일주일이 지나도록 특별한 외부의 압박은 확인할 수 없었다.

로필렌의 사임 절차도 무난하게 진행됐으니, 순조롭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냥 물러나기엔... 기회가 아깝단 말이야.'

로필렌이 개인 연구실 의자에 앉아 숨을 크게 내쉬었다.

로필렌은 근래 완전히 차분함을 되찾았다. 말인즉슨 지극히 마법사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로필렌은 레이를 떠올렸다.

나이에 비해선 똑똑했지만, 아직 어수룩하고 마법에 무지한 녀석이었다.

마법에 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면 절대 그리 행동할 수 없었다.

'대체 누구한테 배운 걸까?'

확실한 건 레이의 스승 또한 마법에 대해선 문외한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대체 어떤 마법사가 기사의 길을 걷는 스콰이어에게 기밀에 부쳐야 할 수학적 지식을 가르쳐준단 말인가.

로필렌은 입을 다셨다.

레이의 스승이 탐났다. 그가 이루었을 학문적 성취가 탐났다.

귀족이 아니면 책도 구하기 힘든 시골구석에 복소평면의 개념을 완성할 수 있는 수학자라면 대단한 천재성을 타고났음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오벨리스크.'

교수 직위를 완전히 내려놓게 되면 더 이상 오벨리스크에 발을 들이미는 건 불가능해진다.

리실로테가 남긴 지식도, 영영 손에 쥘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아직 며칠 시간이 남았을 때, 어떻게든 그 편린이라도 훔쳐보고 싶었다.

'레이, 레이, 레이.'

모든 열쇠를 레이가 쥐고 있다.

마음 같아선 그 어수룩한 스콰이어를 감금한 채 지니고 있는 모든 비밀을 토해내게 만들고 싶었다.

허나 너무 과격하게 일을 벌여선 안 됐다.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로필렌은 어떻게 하면 레이를 속여서 이용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레이는 아직 어렸으며 마법에 무지했다.

그 틈을 파고들어 그럴듯한 말로 회유한다면, 충분히 약점을 잡고 협박할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로필렌은 계획을 세워가며 잔잔하게 웃었다.

무지는 죄였으니 이제부터 죄를 지을 건 로필렌이 아닌 레이가 될 터였다.

로필렌은 참으로, 전형적인 마법사였다.

*

"며칠 뒤면 나는 평생 오벨리스크에 출입할 수 없게 될 거야."

로필렌이 레이를 데려다 놓고 입을 열었다.

"리실로테 레코드가 아니더라도 오벨리스크엔 외부 반출이 불가능한 마법서가 산처럼 쌓여있지."

개중엔 로필렌의 권한으로도 열람 못할 마법서가 꽤 되었다.

"그걸 살펴보려면 네 협력이 필요해."

"로필렌 님의 지적 호기심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은데요."

"위험하지 않아. 내 도움을 받는다면 오벨리스크 중층까지는 아무 문제 없이 올라갈 수 있어."

"문제가 없다 해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무슨 이득을 얻을 게 있다고 거기 어울립니까?"

"너는 충실한 기사잖아? 나의 지식이 곧 네 주인 아가씨의 것이 될 텐데, 기사 된 도리로써 노력은 해봐야 하지 않겠어?"

"..."

침묵하는 레이를 향해 로필렌이 눈을 가까이했다.

"두 번 없을 기회야. 잘 생각해봐. 그리고 난 은혜를 잊지 않아. 이번 일을 도와준다면, 계약 각인과는 별개로 최선을 다해 아가씨를 보필하겠다 약속하지."

레이는 뚱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척'을 했다.

로필렌은 정말 레이를 낮잡아 보고 말도 안 되는 제의를 하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개소리 말라며 진작에 뺨을 후렸을 터다.

'근데 마침 안내자가 필요하니...'

리실로테 형상을 한 빛 무리는 오벨리스크 하층에선 길게 모습을 유지할 수도 없고, 직접적인 도움도 줄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중층까지는 자력으로 올라오라고 통보했는데, 오벨리스크에 연구실을 두고 있는 마법사의 도움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레이는 로필렌의 저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지만.

순진한 아이를 연기하며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를 위해서라면요. 그런데 정말 안전한 것 맞나요?"

"걱정할 것 없어."

로필렌은 자신만만했다.

오벨리스크 하층 구조는 이미 전부 파악해두었다.

더군다나 다른 마법사들은 오벨리스크의 보안을 굉장히 신뢰했다.

레이가 로브만 깊숙이 쓰고 돌아다니면 외부인이라 의심하기 힘들었다.

"넌 내 말만 잘 따르면 돼."

*

레이는 로필렌의 지시를 따라 해가 하늘 끝에 걸쳤을 때 오벨리스크의 숨겨진 복도로 진입했다.

인기척이 없는 복도 끝에 다다르니 계단이 나타났다.

레이는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지나치기를 몇 번 반복했다.

계단을 오르던 중 마법사를 두 차례 마주쳤다.

숨을 곳이 없어 자연히 스쳐 지나가야 했다.

마법사들은 로브를 뒤집어쓴 레이를 다른 학파의 마법사라 여기고 신경 쓰지 않았다.

내심 긴장했던 레이는, 오벨리스크 내부에 로필렌에게 할당된 연구실을 찾아 가 문을 두드렸다.

로필렌이 문을 열고 나와 주위를 확인한 후 레이에게 손짓했다.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

레이는 침묵한 채 로필렌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뚜벅뚜벅 걸었다.

남들의 눈에 둘은 그저 방향이 같을 뿐, 일행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로필렌은 인기척이 적은 곳을 골라 안내하며 오벨리시크의 하층을 벗어나 중층으로 향했다.

중간중간 자잘한 보안 절차가 있었으나, 레이는 로필렌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로필렌은 속으로 웃었다.

'쉽네.'

오벨리스크의 보안은 공간 왜곡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공간 왜곡장만 무력화할 수 있다면 손쉽게 남은 보안을 뚫어낼 수 있었다.

레이는 결국 들키지 않고 오벨리스크의 중층에 도착했다.

로필렌은 레이를 중층 도서관의 뒷문으로 안내했다.

로필렌이 주변을 훑었다.

중층 도서관의 후문과 이어져 있는 복도는 가끔 짐을 옮길 때 빼고는 사용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레이, 저곳은 공간왜곡장으로 보호받는 중층 도서관이야. 내 권한으로는 출입할 수 없어."

거짓말이다.

오벨리스크 중층 도서관은 로필렌도 얼마든지 이용 가능한 공간이었다.

허나 레이가 이 사실을 알아챌 방도는 없었다.

로필렌이 레이의 손에 종이를 쥐여주었다.

"자, 중층 도서관에서 여기 적힌 마법서를 찾아서 나와줘."

"마법서를 그냥 들고 나오라고요?"

대여 절차도 없단 말인가.

의문을 표하는 레이를 로필렌이 안심시켰다.

"출입만 가능하면 자유롭게 마법서를 빌릴 수 있어. 책이 훼손되거나 오벨리스크 밖으로 반출되면 추적 마법이 발동하지만, 무사히 돌려놓기만 하면 꼬리가 잡힐 일은 없어."

이 또한 거짓말이었다.

마법서에 손을 대는 순간 황실 마탑에 출입할 때 새겼던 각인이 발동된다.

이를 통해 중층 도서관의 기록 장치에 책을 빌린 자의 신원이 기록되는데, 담당자가 주기적으로 기록 장치에 적힌 신원을 확인했다.

만약 외부인의 신원이 기록 장치에서 발견된다면 마법사들은 곧장 조사대를 파견하리라.

로필렌이라면 한 번쯤은 그 기록을 덮어씌울 수 있었다.

로필렌은 레이가 책을 들고 나왔을 때, 이 사실을 밝히며 레이를 협박해 원하는 정보를 알아낼 생각이었다.

레이는 분노하겠지만, 당장의 상황을 타파할 뾰족할 수단이 없다는 걸 깨달으면 순순히 협력하리라.

사실 굉장히 위험한 시도였다.

허나 로필렌은 원하는 지식을 얻기 위해선 위험부담쯤은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자, 빨리 가져와 줘."

"알겠어요."

로필렌의 요구에 레이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중층 도서관을 향해 몸을 돌리는 레이의 뒷모습을 보고 로필렌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허나 레이가 미처 발걸음을 떼기 전에.

허공에서 빛이 집약되기 시작했다.

"...?!"

로필렌이 깜짝 놀라 한발 물러섰다.

집약된 빛 무리가 사람의 형상을 취한다.

로필렌은 경악했다.

리실로테.

빛 무리의 윤곽은 오벨리스크 입구에 걸려있는 초상화를 똑 닮아 있었다.

'서, 설마...?!'

저건 마법적인 현상이다.

오벨리스크 내부에서 허락 없이 마법을 사용했다간 곧장 보안 시스템이 발동한다.

헌데도 주변이 조용했다.

이 상황이 뜻하는 건 하나였다.

저 빛 무리가, 오벨리스크 보안 시스템의 일부였다.

'이런 맙소사...!'

리실로테의 분신.

리실로테가 오벨리스크에 안배해두었다고 전해지는 감시자의 별명이었다.

실제로 목격한 사람이 없어 괴담 취급받는 존재였으나, 로필렌은 그 괴담이 진실임을 이제야 깨달았다.

로필렌은 연거푸 뒷걸음질쳤다.

오벨리스크에 외부의 침입자를 끌어들였다는 사실이 들켰다.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였다. 탐욕이 타오르던 자리에 뒤늦게 공포와 후회가 쏟아졌다.

허나 리실로테의 분신은 로필렌에게 관심이 없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드레스 끝자락을 잡은 리실로테의 분신이, 레이를 향해 격식에 맞게 허리를 숙였다.

[인사 올리겠습니다, 하르시아님.]

"...?"

뒷걸음치던 로필렌이 다리를 멈추었다.

"하르...?"

지금 리실로테의 분신이 레이에게 무어라 했지?

하르시아. 하르시아라 했나? 하르시아가 레이의 본명인 걸까?

그게 아니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말이 안 되는 가설을 떠올린 로필렌이 자기 머리카락을 붙드는 순간.

리실로테의 분신이 말을 이었다.

[환생하신 이후로는 처음 뵙는군요.]

로필렌의 눈동자가 바들바들 떨리며 레이에게 기울어졌다.

하르시아. 환생. 공간 왜곡장에 대한 극한의 내성.

제국이 외부로 유출하기 극도로 경계하는 지식을 훤히 알고 있는데다, 괴담이라 여겨졌던 리실로테의 분신이 모습을 드러내 인사를 해온다.

각각 따로 놀던 퍼즐이 하나하나 머릿속에서 맞춰진다.

로필렌의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설마. 설마 그럴 리가.

"..."

레이가 제자리에 선 채로 고개만을 옆으로 천천히 돌린다.

반쯤 드러난 레이의 얼굴은, 지극히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길게 뻗은 레이의 검지가 입술 위에 붙는다.

공포스러운 전율이 로필렌의 심장을 헤집어 놓았다.

*

로필렌이 중층 도서관에 가서 마법서를 가져오라 요구했을 했을 때.

레이는 로필렌의 말을 신뢰하지도 않았고, 하물며 요구를 들어줄 생각도 없었다.

중층까지 올랐으니, 도서관에 가는 척하며 로필렌과 거리를 벌릴 생각이었다.

홀로 남는다면 리실로테 형상의 빛 무리가 접촉해 올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허나 리실로테의 분신은 로필렌이 보는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도 모자라.

레이가 생각지도 못한 개소리를 지껄였다.

[하르시아님.]

'아니, 무슨...'

어이가 없어 당황하는 와중 로필렌이 하도 꺽꺽대기에 조용히 하란 뜻으로 입술 위에 검지를 붙였다.

그 순간 레이와 리실로테의 분신을 감싸듯이 반투명한 구가 전개됐다.

[외부와의 소리를 차단했습니다.]

"이봐, 노망났어? 난 하르시아가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시스템의 권한 문제 때문에 제가 임의로 계승자님의 신원을 하르시아로 덮어씌웠습니다.]

"아니... 그거랑 로필렌 앞에서 헛소리한거랑 무슨 상관관계인데?"

[저건 마법사입니다.]

"그래, 마법사지."

[마법사란 음습하고 이기적이며 필요하다면 언제나 신뢰를 저버릴 수 있는 족속입니다.]

"...?"

레이가 얼을 탔다.

600년전의 대마법사 형상을 하고 저런 말을 하니 호응을 해야 할지 순간 헷갈렸다.

리실로테의 분신은 레이의 반응과 상관없이 말을 이었다.

[마법사, 로필렌의 배반 행위를 확인했습니다. 제거하지 않고 옆에 두실 거라면, 감히 도전 못할 권위로 찍어 누르시는 게 좋습니다.]

"야, 내가 하르시아 환생이란 걸 저 마법사가 믿겠냐?"

[예, 믿을 겁니다. 공간검의 계승자여. 아니면 저 경멸스러운 족속을 굴종시킬 더 좋은 수단이 있습니까?]

레이는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이봐. 너는... 아니, 널 만든 주인도 마법사 아니었나? 왜 이렇게 마법사를 싫어해?"

[제 현명한 주인님은 자신을 포함한 대부분의 마법사가 심각한 성격 파탄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제 인격은 리실로테 님 본인이 아닌 제삼자의 인격을 베이스로 제작되었습니다.]

"제삼자가 누군데?"

[모릅니다.]

"아이씨... 됐다. 일단 날 여기까지 부른 이유나 답해."

[여기서는 보안 문제로 답할 수 없습니다.]

리실로테의 분신이 벽을 향해 손을 뻗자 작은 진동과 함께 비밀 통로가 드러났다.

리실로테의 분신은 허공을 미끄러지며 레이에게 당부했다.

[저 마법사는 동행시켜야겠군요. 차단막을 풀겠습니다. 무게 좀 잡아보시죠. 하르시아 님처럼.]

"진짜로 하르시아 흉내를 내라고?"

[그게 저 마법사를 다루기 위한 가장 효율적이고 완벽한 수단입니다. 어색한 점이 있다면 제가 보조해 드리겠습니다.]

"...대체 누구 인격을 집어넣어 놓은 거야?"

레이는 중얼거리면서도 얼굴에 표정을 지웠다.

이게 갑자기 뭐 하는 짓거리인가 싶었지만, 여기서 해명하기 위해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차단막이 사라진 후 제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로필렌을 바라본 레이가 낮게 명령했다.

"따라와."

"...!"

아직까지 반신반의하고 있던 로필렌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레이가 하르시아의 환생이든 뭐든 당장 죽기 싫으면 명령을 따라야 했다.

대화 (1)

65화

자그마한 비밀 통로로 들어서자 주변이 칠흑같이 어두웠다.

리실로테의 분신이 내뿜는 빛에 의지해 발걸음을 옮기니 얼마 안 가 막다른 길이 나왔다.

쿠구궁-

벽을 마주 보고 서자 작은 진동과 함께 바닥이 상승하기 시작한다.

벽면에 파인 홈을 따라 저 위에서부터 마나가 흘러내리며 옅게 빛났다.

천장까지 거리가 50 m는 넘어 보였는데, 승강기는 천장과 맞닿기 직전이 되어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레이는 찰랑이며 떨어지는 마나의 근원이 저 앞에 있음을 깨달았다.

'흠...'

레이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로필렌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몸을 벌벌 떨었다.

능력 좋은 마법사랍시고 고개 꼿꼿하던 양반이 완전히 기가 죽어 설설 기어 대는 꼴을 보자, 레이는 참으로...

기분이 흡족했다.

'이거 괜찮은 방법인 것 같아.'

신분과 작위가 깡패인 세상이다.

아무리 같잖은 귀족이라 해도 조용히 담글 자신 없으면 비위를 맞춰야 했다.

헌데 내가 하르시아의 환생?

당장 황궁에 쳐들어가 황제 뺨을 후려도 황제가 꺄르르 웃으며 재롱을 떨어야 하는 항렬이었다.

'그야말로 신분의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

레이는 황제가 따라주는 잔을 받으며 껄껄 웃는 자신을 떠올리다 이내 인상을 구겼다.

이런 사기 함부로 쳤다간 목 떨어지는 거 순식간이었다.

'로필렌의 아가리를 어떻게 다물게 할 지나 고민해야지.'

지금은 설설 기고 있지만 뒤로는 딴생각을 품는 게 마법사란 족속 아니겠는가.

혀를 차는 시늉을 한 레이가 긴장을 끌어올렸다.

협력적으로 보이는 리실로테의 분신 또한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제삼자의 인격을 베이스로 제작되었다지만 어쨌든 저걸 만든 년도 마법사였다.

초면인 상대에게 능숙하게 사기를 치는 걸 보니 절대 방심하면 안 됐다.

[여깁니다, 하르시아님.]

복도의 끝에 도착했다.

푸른색으로 빛나는 정사각형의 아티펙트를 반투명한 방어막이 넓게 감싸고 있었다.

[리실로테 님이 오직 하르시아 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한 절차입니다.]

"절차?"

[저 정사각형 아티펙트는 이 구역에 동력을 공급하는 코어입니다. 실드에 타격을 가하지 말고 내부의 코어만을 부수십시오.]

불가능한 일이다.

대개의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레이는 자신에게 향해 있는 로필렌의 시선을 느꼈다.

'뭐, 기왕 사기 칠 거면 제대로 쳐야지.'

레이의 허리춤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파스스스!

푸른 검기가 검날에 집약된다.

레이가 검을 휘두르는 순간 검기가 허공에서 증발됐다.

로필렌을 호흡조차 멈춘 채 검기의 행방을 쫓았다.

주변에선 그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로필렌의 눈동자에 불신이 새겨지려는 순간.

앱솔루트 실드 내부에서 짙푸른 검기가 공간을 찢고 모습을 드러냈다.

"...!"

로필렌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떠졌다.

도약 검기가 코어를 향해 떨어져 내린다.

다리 힘이 풀린 로필렌은 버티지 못하고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콰앙!

정사각형 형태의 코어가 산산이 박살 났다.

터져나간 충격파가 좁은 공간을 뒤흔들었다.

로필렌이 숨을 턱턱 몰아쉬었다.

'마, 말도 안 되는...'

이제는 완전히 실전되었다고 알려진 제국검술의 정점.

하르시아 류 공간검.

그 전설적인 검술이... 6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아... 이, 이럴... 이럴 수가..."

로필렌이 혼이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로필렌은 한참을 방황하다, 차갑게 굳은 레이의 시선을 느끼고 일어섰다.

"제,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로필렌이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로 무릎을 꿇더니 먼지가 가득한 바닥에 고개를 조아렸다.

"하르시아 님. 부디, 부디 제 잘못을...!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600년의 세월 동안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었던 절기가 소년으로부터 재현됐다.

더는 의심할 수 없다.

하르시아.

위대한 영웅이자 제국의 정점이 지금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왜 진작 눈치채지 못했을까.

돌이켜 보면 그토록 많은 힌트가 있었는데.

탐욕에 잡아먹혀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지난날이 너무나 후회됐다.

"제, 제발 자비를...!"

"..."

레이가 뚜벅뚜벅 다가온다.

로필렌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툭!

레이가 로필렌의 머리 위에 발을 얹었다.

생전 처음 당해보는 굴욕이었으나.

로필렌은 도리어 황송하다는 듯이 바닥에 이마를 찍었다.

레이는 생각했다.

'쓰읍, 진짜 제국 상대로 사기를 쳐봐?'

몽롱한 쾌감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입 꼬리가 자꾸만 실룩대서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혀를 씹어야 했다.

레이는 그동안 가진 걸 드러낼 기회가 극히 드물었다.

계속 답답함을 참고 살아야 했는데, 이렇게 남 앞에서 대놓고 도약 검기를 뽐내니 꽤나 흡족했다.

"여기서..."

레이가 억지로 묵직한 목소리를 뽑아냈다.

"가만히 대기하도록."

"알겠습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바닥에 아예 얼굴을 박아 넣은 로필렌이 호흡조차 낮게 죽였다.

레이는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돌렸다.

코어가 박살 나자 복도 끝이 갈라지며 새로운 장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가 좁은 틈 사이로 몸을 밀어 넣자 반짝이는 장막이 입구를 가렸다.

"그래서."

레이가 리실로테의 분신을 마주 봤다.

"여긴 어디야?"

[오벨리스크에 존재하는 여러 컨트롤 룸 중 하나입니다.]

"알았어. 근데 너는... 리실로테가 만들어낸 AI인가?"

[무슨 의미신지?]

"인공 지능이란 뜻이야."

[제게 부합하는 정의로군요. 맞습니다.]

"인격을 가지고 있는 건가?"

[사고는 가능합니다. 허나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으니 온전한 인격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감정이 없어 보이진 않던데."

정말로 감정이 없다면, 인간처럼 보일 수 있게 프로그래밍 되었다는 뜻이다.

레이는 내심 감탄하며 의자를 찾아 앉았다.

"널 뭐라고 부르면 되지?"

[리실로테 님은 저를 아프텔이라 칭하셨습니다.]

"좋아, 아프텔. 날 여기까지 부른 이유는?"

[제가 자유로운 발언이 가능한 공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건 알아들었어. 그래서, 불러서 하고 싶었던 말이 대체 뭔데?"

[공간검의 계승자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함축적인 의미가 담긴 질문에 레이 또한 함축적인 의미를 담아 답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 내려온 신의 사도지."

[알겠습니다.]

"지금 내 말을 믿어?"

레이가 실소를 터뜨렸으나, 아프텔의 반응은 무섭도록 진중했다.

[제국이 총력을 다해 모은 인재들 중 천재라 거들먹거리던 작자만 수백이었지만, 단 한 명도 공간검을 계승하지 못하고 병신이 되었습니다. 이곳 또한 본래 제국이 기른 계승자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지만, 역할을 잃었습니다.]

"..."

[저는 동면에 들었습니다. 수백 년이 지나, 당신이 찾아왔죠. 드디어 황실이 적법한 계승자를 길러 냈다 판단했으나, 아니더군요.]

"그건..."

[온갖 우연이 겹쳤다고 해도, 당신과 같은 존재가 자연 발생할 수는 없습니다.]

아프텔은 단언했다.

[당신은, 필연적인 존재입니다. 당신이 세상의 의지가 내린 존재라면, 협력해야겠죠. 리실로테 님은 지금과 같은 상황까지 고려하여 제게 자율권을 부여하셨습니다.]

"...날 돕겠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공간검의 계승자이자 하르시아의 후계자여.]

한쪽 무릎을 꿇은 아프텔이 고개를 숙였다.

[부디 우리의 미래를 빛으로 인도하여 주소서.]

"..."

잠시 침묵한 레이가 머리를 긁적였다.

의심을 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했지만, 당장 아프텔을 경계한다 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없었다.

마음을 내려놓은 레이가 물었다.

"궁금한 게 있어."

[말씀하십쇼.]

"신이 구원자를 보낸 이유가 뭘까?"

의도가 명확지 않고 멍청해 보이는 질문이었으나.

아프텔은 레이의 저의를 꿰뚫었다.

스스로를 구원자라 자각하고 있으나, 무엇으로부터 세상을 구원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모순이 가득한 상황이었다.

"마경으로부터? 마족으로부터? 아니면 흑마법사 집단이라도 궐기할까? 대체 나는 무엇과 싸워야 하지? 무엇을 경계해야 하지?"

레이는 쌓아왔던 답답함을 아프텔에게 토해내고 있었다.

미래를 알지 못하는 세계에 환생했고 적의 정체조차 뚜렷하지 않다.

차라리 인류를 적대하고 있는 세력과 격렬한 전쟁이라도 벌이고 있었다면 답이 명쾌했겠으나, 아직 대륙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내 적은 누구야? 무엇을 보고 승리를, 패배를 판단해야 하지? 넌 답을 알고 있나?"

침묵이 일었다.

무기질적인 시선이 레이를 훑었다.

아프텔은 기계적으로, 가장 확률 높은 답을 도출했다.

[Dimension Alignment.]

"...그게 뭐지?"

[하나의 시기입니다. 또한 전조 없이 찾아오는 특정 재해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 재해를 막아내야 한다고?"

[이건 막을 수 있는 재해가 아닙니다. 견뎌야 하는 재해지요. 당신이 정녕 신께서 내려보낸 구원의 사도라면, 얼마 안 가...]

가늘어진 아프텔의 시야가 과거를 눈에 담았다.

[타락한 자의 광기가 대륙을 집어삼킬 겁니다.]

차가운 정적이 흘렀다.

레이는 텁텁한 공기를 삼키며, 마른 한숨을 내쉬었다.

무거운 미래에 대해 왈가왈부하기 전에 희망한 얘기를 좀 나누고 싶었다.

"너라면 오벨리스크에 존재하는 마법서나 지식을 공유해줄 수 있겠지?"

[가능합니다.]

"그 리실로테 레코드인가 뭔가도 공유해줄 수 있어? 오벨리스크 안에 보관되어 있다며?"

[어디에 쓰실 생각이십니까?]

"리실로테보다 몇 배는 대단한 대마법사의 재목을 내가 데리고 있거든."

루나를 떠올린 레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아이에게 리실로테 레코드를 제공할 수 있다면 훨씬 빠르게 실력이 늘지 않겠어?"

우리 착한 루나라면 분명 인격에 하자 없는 강대한 대마법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레이는 그리 기대했다.

허나 아프텔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리실로테 레코드를 제공할 수 없습니다.]

"...보안 문제인가?"

[일단 리실로테 레코드는 문자로 이루어진 지식이 아닙니다.]

"...?"

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프텔이 설명을 이어갔다.

[리실로테 님은 마법의 '극의'에 달한 자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여러 '현상'을 아공간에 새겨 놓으셨습니다. 이를 통틀어 리실로테 레코드라 칭합니다.]

"새겨 놓았다?"

[해당 공간에 의식을 진입시키면 무한히 반복되는 '극의'를 원하는 만큼 관측할 수 있습니다.]

"...혹시 깨달음을 위해 창조된 공간인가?"

[대략 그렇습니다.]

"그럼 그 공간에 진입하기 위해선 어떡해야 하지?"

[현상이 새겨진 아공간의 '좌표값'이 필요합니다. 간단한 결계만 만들어낼 수 있는 마법사도 좌표가 있다면 아공간에 진입해 극의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한 박자 쉰 아프텔이 아련한 눈을 했다.

[리실로테 님은 리실로테 레코드에 진입할 수 있는 좌표 정보를 세상에 뿌려 어느 마법사든 극의를 체험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조치하려고 하셨습니다. 미래를 위해, 마법사들의 수준을 올리려고 하셨죠.]

"근데... 어째서 리실로테 레코드를 제국이 독점하고 있지? 혹시...?"

레이는 순간 비극적인 사연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리실로테가 미처 좌표 정보를 배포하기 전에 제국에게 암살당했다던가 하는.

아프텔이 말을 이었다.

[헌데 막상 자신의 성취를 공짜로 뿌려 남 좋은 일을 해주려고 하니 배가 아프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국에게 팔아먹었습니다.]

미친년 아니야.

무심코 중얼거린 레이가 손가락으로 미간을 눌렀다.

"그럼 너도 좌표 정보가 없는 거야?"

[아니요. 리실로테 레코드에 접속 가능한 좌표 정보는 제공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허나 멋대로 극의가 새겨진 공간에 진입하면 제국에게 역추적 당할 겁니다.]

답이 없군.

레이가 포기하고 주제를 돌리려는 데 아프텔이 거리를 좁혔다.

[허나 이런 때를 대비해 리실로테 님이 남겨둔 백도어가 있습니다.]

"...?"

[계승자님이 찾아가셔야 할 장소가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셔야, 리실로테 님이 계승자에게 남겨둔 안배와 백도어 코드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대화 (2)

66화

"백도어를 만들어 놨다고?"

[그렇습니다.]

"..."

레이가 다시 미간을 짚었다.

뭐, 그래. 자기가 공들여 만든 게 아까워 제국에 팔아먹은 건 그렇다고 치자.

근데 거기서 또 백도어를 만들어놔?

'마법사와는 되도록 중고 거래도 하지 말아야겠다.'

깨달음을 얻은 레이가 고개를 젓는 사이 아프텔이 컨트롤 룸의 원탁을 향해 움직였다.

공간이 갑자기 밝아지며 원탁의 중앙이 반으로 갈라졌다.

드르르륵!

거친 마찰음과 함께 원탁이 있던 중앙에서 돌기둥이 솟아올랐다.

돌기둥 위에는 보라색 팔찌 하나가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계승자를 위해 제작된 아티펙트입니다.]

"기능은?"

[착용하시는 순간 제 마스터로 등록됩니다. 저에게 허가된 정보를 아티펙트를 통해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어디에 계시든 제 도움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이 안에 너를 포함한 방대한 데이터가 전부 들어가 있을 것 같진 않고. 일종의 중계 장치인가?"

[비슷합니다.]

"다른 기능은 없어?"

마법사가 만든 물건이다.

음습한 기능이 다수 숨어있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아프텔은 잠시 침묵하다 답했다.

[백도어를 활용하시기 위해선 아티펙트를 착용하셔야 합니다.]

"그래, 여기까지 와서 무슨 사양을 하겠냐."

레이가 포기하고 팔찌를 들어 올렸다.

왼 손에 집어넣자 한 차례 박동한 팔찌가 팔목에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계승자님의 생체 정보가 등록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스터.]

"이거 은폐는 가능한 거야?"

[아티펙트임을 은폐할 수는 없습니다만, 고성능 탐지 마법을 써도 발광 기능 정도만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아프텔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바로 들렸다.

"이제 주위에 네 목소리는 안 들리는 건가?"

[그렇습니다.]

"혹시 내 생각도 읽을 수 있어?"

[불가능합니다.]

"그건 다행이고."

레이가 컨트롤 룸의 입구 앞에 섰다.

이제 어디에서도 아프텔과 대화 가능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오벨리스크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로필렌은 뭐라고 구워삶아야 하나."

[하르시아의 권위는 제국민에게 절대적입니다. 마스터를 하르시아라 믿는 이상 함부로 움직이진 못할 겁니다. 공명심을 자극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죠.]

"배신하면? 수습 못 할 텐데?"

[황실 마탑 내부에선 수작을 부려도 미리 관측 가능합니다. 여의치 않으면 제거하십쇼. 제가 돕겠습니다.]

"그래, 잘 부탁할게."

레이가 컨트롤 룸 밖으로 나오자 여전히 바닥에 얼굴을 붙이고 있던 로필렌이 몸을 움찔 떨었다.

로필렌의 앞에 선 레이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일어서."

몸을 일으킨 로필렌이 고개를 발밑으로 깔았다.

얼굴을 타고 흐른 식은땀이 턱 끝에서 똑똑 떨어졌다.

"지금부터 하는 말, 새겨들어."

"예, 알겠습니다."

"곧 멸망이 찾아온다."

"...!"

하르시아가 입에 담는 '멸망'은 여느 예언쟁이들의 헛소리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무게감을 지니고 있었다.

로필렌의 시야가 잠시 까마득해졌다.

"나는 멸망을 막기 위해 안식을 포기하고 귀환했다."

"...!"

"로필렌."

레이가 로필렌의 턱을 붙잡아 시선을 맞췄다.

푸르게 일렁이는 눈동자가 로필렌의 시야에 가득 담긴다.

"내게 충성하라. 네 충성에 상응하는 대가를 약속하마. 날 위해 목숨을 바쳐라. 멸망을 이겨냈을 때, 네 이름을 오벨리스크의 가장 높은 곳에 새겨주겠다."

"여, 영광..."

거의 울먹이던 로필렌이 무릎을 꿇었다.

"여, 영광입니다. 하르시아님."

이 정도면 되었겠지.

고개를 끄덕인 레이가 로필렌을 지나쳤다.

로필렌이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하, 하르시아님! 계약 각인은 새겨주시지 않는 겁니까?"

로필렌은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설령 영혼이 통째로 종속당한다 해도, 로필렌은 계약 각인을 새겨 하르시아의 신뢰를 사고 싶었다.

그러지 못하면 언제 목이 떨어질지 몰라 불안에 떨며 밤을 지새워야 할 게 분명했다.

"..."

레이는 침묵했다.

레이에겐 서클이 없었기에, 계약 각인을 맺고 싶어도 맺을 수가 없었다.

아직 서클을 만들지 않았다고 밝혀?

안 된다. 로필렌 앞에서만은 허세를 유지해야 했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레이가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고작 네년 따위에 나의 셀로미어를 할당하란 의미냐?"

"...! 죄송합니다!"

식겁한 로필렌이 고개를 숙이자, 레이가 조금 풀린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믿겠다. 그러니 보답하라."

"감사합니다."

레이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이마를 찧은 로필렌이 황급히 일어서서 레이의 뒤를 따랐다.

레이는 부디, 지금의 공갈이 오래 통하기를 바랐다.

*

레이는 아프텔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오벨리스크를 벗어났다.

레이와 나란히 오벨리스크를 빠져나온 로필렌은 헤어지기 전 허리를 깊게 숙이려다 황급히 자세를 교정했다.

"다, 다음에 보지."

어색한 인사에 레이가 깍듯하게 화답했다.

"잘 들어가세요, 교수님."

"으, 응."

로필렌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레이에게서 멀어졌다.

시야에서 완전히 로필렌이 사라지자 레이가 한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진이 다 빠지네."

그래도 성과는 괜찮았다.

불안 요소는 많았지만.

아프텔을 얻었고 로필렌에겐 심리적 목줄을 채웠으며 리실로테 레코드에 접속할 단서를 확보했다.

황실 마탑에 발을 들이기 전에 생각했던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격이었다.

이제 유학 기간이 끝날 때까지 적당히 몸을 사리다 필립스 백작령으로 귀환하면 됐다.

"...조심하자."

꼭 이런 타이밍에 사건 사고가 터지고는 했다.

레이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 레이."

숙소 앞에 도착하자 빅토르와 하무스가 아는 체를 해왔다.

유학 오고 얼마 동안은 미궁에서 일 때문에 좀 서먹서먹했다만.

알레시아와 플로리아가 끈끈하게 어울리며 지내자 자연히 스콰이어 간의 감정을 해소할 기회도 많아졌다.

이제는 썩 친구처럼 어울릴 수 있던 터라 레이도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서 뭐해?"

"열흘 후에 열릴 컨퍼런스에 관해 할 이야기가... 아, 그래. 레이 너도 같이 컨퍼런스에 참석하는 게 어때?"

"음..."

황실 마탑에서 진행되는 연구 중엔 '제작'에 관련된 연구도 활발하다.

반드시 마법적인 기능이 들어간 아티펙트가 아니라 해도, 마법의 도움이 있다면 더 고품질의 물건을 생산하는 게 가능했다.

황실 마탑에 상주하는 학파 중 제작과 관련된 학파들은 몇 달에 한 번씩 모여 컨퍼런스를 열었다.

이때 황실 마탑에 출입을 허락받은 외부인들도 컨퍼런스에 참석하여 마법사들이나 장인들이 내놓은 물건을 구경하고, 그 자리에서 구매할 수도 있었다.

말이 컨퍼런스였지, 레이와 같은 외부인의 시선에는 볼거리 많은 장터에 가까웠다.

레이가 물었다.

"가서 검이라도 구하게?"

"컨퍼런스에 나오는 도검은 너무 비싸서 못 사. 기념품 될 만한 거 몇 개 사서 가져가게."

"음... 그래?"

레이가 꽤 혹한 얼굴을 했다.

몇 달 만에 필립스 백작령으로 돌아가면 찡찡거릴 녀석들 숫자가 꽤 됐다.

기념품 좀 챙겨가면 기분을 풀어줄 수 있을 터다.

"괜찮네. 같이 가자."

*

아침 하늘이 맑았다.

마차에 앉은 안젤로는 바깥을 보며 무심코 휘파람을 불었다가 무안한 듯 헛기침을 했다.

어린 시절엔 곧잘 입술을 오므려 휘파람을 불곤 했다.

허나 상스러운 행동이라고 모친에게 크게 혼난 후 습관을 교정했었다.

어색하게 눈치를 살피는 안젤로를 보고 호위 기사인 안달루네가 작게 웃었다.

"기분이 좋으신가 봅니다."

"큼, 못 들은 걸로 해."

"예,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안젤로가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안달루네는 적당히 안젤로의 시선을 피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이제라도 아가씨께 연락을 넣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됐어. 예상치 못한 선물이 더 기쁜 법 아니겠어?"

"음..."

안달루네가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다.

안젤로의 마차는 황실 마탑을 향해 이동하는 중이었는데, 현재 안젤로의 동생인 멜리가 황실 마탑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안젤로는 동생을 깜짝 놀래켜 주겠다고 방문 일정을 멜리에게 알리지 않았다.

선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가고 있었지만, 안달루네는 멜리가 안젤로의 방문을 기뻐할지 회의적이었다.

멜리에게 지극정성인 안젤로는 동생을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멜리는 안젤로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했고 말이다.

남매 사이가 나쁜 것보다야 나았지만, 안달루네는 곤란해할 멜리의 표정이 훤히 예상됐다.

'뭐, 어쩔 수 없군.'

멜리의 불편함보단, 작위를 계승 받을 안젤로의 의중이 먼저였다.

마음을 편하게 먹은 안달루네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황실 마탑 근방에 도착하자 마법사가 마중을 나왔다.

신분 확인 절차를 거쳐 황실 마탑에 들어서니 멜리를 시중들던 가문의 고용인들이 허겁지겁 마중 나왔다.

"도련님을 뵙습니다."

"다들 고생하고 있어. 내가 도착했다는 건 비밀로 했겠지?"

"전부 입단속 시켰습니다."

"훌륭해. 멜리는 지금 어디 있지?"

"이반 교수님의 지도 하에 훈련실에서 마법 실습을 진행하고 있을 겁니다."

"하하! 예나 지금이나 참 성실한 동생이야."

흐뭇하게 웃은 안젤로가 시종에게 명령했다.

"멜리에게 안내해줘."

"도련님, 훈련실 안으로 들어가는 건 힘드실 겁니다."

"내가 그걸 모르겠어. 수업 끝날 때까지 바깥에서 기다릴 테니 걱정 마."

고개를 숙인 시종이 길을 안내했다. 부지가 넓어 마차를 타고 움직여야 했다.

"멜리가 벌써 3서클에 들었다고?"

"그렇습니다."

"이야, 역시 내 동생이야. 멜리가 말이야, 어릴 때는..."

동생 자랑을 이어가는 사이 마차가 훈련소 앞에 도착했다.

출입구 근처에 다가간 안젤로는 가방을 들고 서 있는 시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안젤로가 다가가자, 잠시 눈을 깜박이던 시녀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안젤로는 대충 인사를 받아주곤 시녀가 들고 있던 가방을 가리켰다.

"멜리의 짐이야?"

"예, 수업이 진행되는 사이 제가 잠시 맡아두고 있습니다."

"이리 줘봐."

시녀가 곤란해했다.

멜리가 안젤로를 부담스러워하는 건 이런 부분이 컸다.

사생활에 가까운 영역을 안젤로가 배려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멜리가 짜증을 내도, 안젤로는 '그게 다 널 지키기 위한 행동'이라 주장하며 태도를 고치지 않았다.

"어디 보자."

멜리의 가방을 받아든 안젤로가 책을 한 권 한 권 꺼내보았다.

마법서가 다수였고 멜리가 작성한 것처럼 보이는 필기도 잔뜩 있었다.

"흠..."

안젤로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멜리는 유학을 와서도 영지에 있을 때처럼 성실하게 공부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하긴 예전부터 범생이 아니었던가.

책을 전부 확인해본 안젤로가 가방에서 묵직한 종이봉투를 꺼냈다.

지켜보던 시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안젤로는 의아해하며 종이 봉투를 펼쳤다. 웬 서책이 한 권 들어 있었다.

안젤로가 서책의 제목을 살폈다.

"귀축... 기사와 악당 영애?"

제목의 뜻을 이해하는데 잠시 시간이 걸렸다.

눈을 깜박이던 안젤로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시녀가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저, 전연령판이옵니다!"

"...뭐라?"

그제야 책의 커버를 자세히 살핀 안젤로는 책 하단에 적힌 '전연령판'이라는 글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안젤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멜리가 질 떨어지는 통속소설을 읽는다는 건 실망스러웠지만, 이 정도면 허용범위 안이었다.

물론 얼굴 보고 잔소리는 한 번 할 생각이었다.

"벌써부터 이런 책이나 찾아보면 안 되는..."

안젤로는 애들 보는 로맨스 소설을 생각하며 책을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책 속에서 목줄에 묶인 아나스타샤가 개처럼 짖고 있었다.

"...?"

탁!

당황해서 책을 덮은 안젤로가 잠시 공황 상태에 빠졌다.

내가 지금 뭘 읽은 거지?

'자, 잘못 본 것일 터다.'

스스로를 다독인 안젤로가 책 후반부를 다시 폈다.

야밤에 길거리에 나온 아나스타샤가 땅에 엎드린 채 다리 하나를 옆으로 들고 나무에다...

"익, 이익...!"

제자리서 부들부들 떨던 안젤로가 뒷목을 잡았다.

안달루네가 기겁하며 거품을 무는 안젤로를 붙들었다.

"도련님!!"

"이거 놓아라!!"

곧바로 안달루네의 손을 쳐낸 안젤로가 눈이 뒤집힌 채 고함쳤다.

"지, 지금 당장...!!"

"...?"

"지금 당장 멜리를 데려와!! 지금 당자앙!!!!"

컨퍼런스 (1)

67화

컨퍼런스가 열리는 날짜가 다가왔다.

몸을 가볍게 푼 레이가 외출할 채비를 했다.

최근 며칠은 꽤 여유로웠다.

아프텔이 언급한 백도어를 구하기 위해선 황실 마탑 밖으로 나가야 했기에, 유학 기간이 끝나길 기다려야 했다.

로필렌의 교수 직위 사임 건은 아직 진행 중이었다.

계약 각인 내용을 조율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는 듯했지만, 불온한 움직임은 없었다.

레이는 남는 시간 동안 마법서를 둘러보며 난해한 부분을 플로리아에게 물어보곤 했다.

물론 플로리아의 설명을 들어도 이해가 안 갔다.

서클을 만든다 해도 마법을 적극적으로 써먹기는 영 글러 보였다.

"어디 보자..."

레이가 책상을 뒤져 황실 마탑이 보증한 수표를 꺼냈다.

와일드호그 탈출 건으로 황실 마탑이 건넨 보상금이었다.

2만 골드 쯤 되었는데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물가가 천지 차이라 전생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기엔 이래저래 부적절했으나, 굳이 따지자면 2억 원 정도 되는 금액이었다.

알레시아는 젠킨슨과 레이에게 수표를 통째로 넘겼다.

젠킨슨 또한 와일드호그를 사냥한 사람이 가져가라며 자기 몫을 조금도 떼지 않았다.

덕분에 레이는 나름의 거금을 들고 컨퍼런스에 참가할 수 있었다.

숙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빅토르가 레이를 보고 손을 들어 올렸다.

"나왔냐? 빨리 출발하자."

"그래."

레이는 빅토르와 하무스를 따라 컨퍼런스가 열리는 거리로 이동했다.

컨퍼런스에 참가하기 위한 신원 확인 절차를 받으며 스콰이어 간의 들뜬 대화가 이어졌다.

여러 잡담이 지나가다 빅토르의 입에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왔다.

"요즘 재밌는 소문이 돌더라?"

"무슨 소문인데?"

"귀족 영애님이 외설스러운 소설을 반입해 보다가 걸렸다는데."

"하하."

레이가 몇 년 전 알레시아를 생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근데 외설스러운 책을 영애님들끼리 돌려봤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

"잘못하면 줄줄이 엮여 나오겠네."

그게 설마 우리 아가씨겠어.

낄낄거린 세 명의 스콰이어가 절차를 마치고 컨퍼런스 거리로 들어섰다.

수많은 마법사와 장인이 거리에 부스를 마련해 자신들의 작품을 전시한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컨퍼런스 거리 사이사이 존재하는 공터에선, 컨퍼런스에 출품된 장비들의 성능 실험이 이어지는 중이었다.

콰앙!

기사가 쥔 검의 폼멜이 번쩍이더니 검신에서 불꽃이 흘러나와 바위를 강타했다.

그밖에도 얼음 방벽을 전개하거나 전류를 흘릴 수 있는 도검류 아티펙트도 성능을 선보였다.

꽤 위력적인 광경이라, 아직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하무스와 빅토르는 흥미롭게 성능 실험을 지켜봤다.

레이가 둘을 향해 물었다.

"저런 건 얼마나 해?"

"기능이 반영구적이라면 최소 몇만 골드부터 시작할걸?"

"쓸모도 없는 게 비싸긴 더럽게 비싸네."

"하하, 쥐여주면 쓸 거면서."

"에이, 기사가 저걸 어디다 써?"

저런 아티펙트보다 검기가 차라리 더 위력적이었다.

상대의 허를 한 번쯤은 찌를 수 있겠다만.

구조가 복잡한 아티펙트는 도검으로써 성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갑주에 저런 기능을 장비시키는 게 더 효율적일 것 같은데."

"누가 그걸 모르겠냐. 대신 훨씬 비싸."

빅토르가 툴툴거리자 하무스가 거들었다.

"가장 급 높은 건 무선 유도 병기인데, 이쪽은 수천만 골드도 가뿐히 넘어가는 물건이 수두룩하다. 자체 동력원을 가진 아티펙트는 거기서 더 비싸지고."

"헤일로나 멸리의 빛 같은 걸 말하는 거지?"

"..."

빅토르와 하무스가 일순 침묵했다.

레이가 영웅의 무구를 입에 담는 걸 보고 깨달을 수 있었다.

세리아와 로커스트의 전투는 필립스 영지 근방에서 이루어졌다.

레이가 운이 좋았다면 그 전투를 목격하거나 세리아와 마주쳤을 수도 있었다.

빅토르와 하무스가 흥분해서 레이의 팔을 붙들었다.

"그러고 보니 너라면 세리아님을 직접 뵈었을 수도 있겠네!"

"와! 이걸 왜 생각 못 했지?"

"어, 뭐... 몇 번 만났지."

레이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하무스가 탄식을 흘렸다.

"이야, 무지하게 부럽네. 혹시 세리아 님이랑 대화도 해 봤냐?"

"응."

"크으...!"

레이는, 빅토르와 하무스의 반응을 보고 새삼스레 세리아의 위명을 체감할 수 있었다.

빅토르와 하무스가 흥분에 겨워 호들갑을 떨었다.

"세리아님은 검강을 몇 미터씩 뽑아내신다며! 혹시 직접 봤어?"

"만났을 때 무섭지는 않았냐? 굉장히 과묵하고 냉철한 분이시라는데."

레이가 손을 휘저었다.

"아이 그거 헛소문이야. 던전에 오래 있었던 탓인지 사람이 좀 맹해. 그래도 나름 귀여운 면이 있더라."

이야기를 듣던 하무스가 정색을 했다.

"야."

"응?"

"세리아 님이 니 친구냐?"

뭐라는 거야 미친놈이.

레이가 어처구니가 없어 얼을 타는 사이 하무스가 어깨를 떨며 분노했다.

"예의를 지키라고, 예의를. 어디 감히 제국의 위대한 영웅 세리아 님께 맹하다느니 귀엽다느니...!"

"...그래, 내가 잘못했다."

여기서 고모니 조카니 밝혀봤자 더 귀찮아진다.

대충 사과한 레이가 손을 휘휘 저으며 앞서 걸었다.

컨퍼런스 거리 안쪽으로 들어가니 대장간처럼 도검류를 주렁주렁 전시해 놓은 부스도 발견할 수 있었다.

마법적인 기능이 없는 순수한 무구였으나, 레이는 이쪽이 더 관심이 갔다.

"흠..."

수십이 넘는 부스들 중 유난히 기사들의 발걸음이 잦은 부스가 하나 있었다.

기사들의 구경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쇠 냄새가 나는 부스로 다가간 레이가 가장 좌측에 전시되어 있는 검을 살폈다.

"이야..."

맑고 깨끗하다.

얼굴이 선명하게 비칠 만큼 매끄럽게 뻗어 나온 은색 검신을 보며 레이는 그리 느꼈다.

바라보기만 해도 검이 내뿜는 예기에 압도될 것만 같았다.

"어디..."

손가락을 검에 가져다 댄 레이가 마나를 살짝 흘렸다.

마나가, 완벽한 균일함을 자랑하는 금속을 타고 부드럽게 흐르다 증발했다.

절로 탄성이 나왔다.

"...이건 진짜 물건이네."

미스릴 합금으로 제작한 검 같은데, 사실 소재가 문제가 아니었다.

기사가 무기를 고를 때 가장 중요시하는 건 바로 균일함이었다.

'손꼽히는 장인이라 해도 금속을 제련할 때는 불순물이 섞이고, 망치질과 열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크랙이 발생하는 법인데...'

마법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이렇게까지 품질을 높일 수 있단 말인가.

레이가 연거푸 감탄하며 검을 살폈다.

꽤 욕심이 일었다.

이 검이라면 마나를 과격하게 운용해도 어지간하면 버텨줄 터였다.

요새 넘쳐 나는 재능을 주체 못해 검을 깨먹는 일이 많아진 요하나에게 선물해주면 딱 알맞을 것 같았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레이가 피식 웃었다.

요하나가 사춘기에 들어선 후 계속 틱틱거리긴 한다만.

그와 별개로 요하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검을 휘두르며 실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기사들의 훈련 중에는 더럽고 위험한 것도 참 많았지만, 요하나는 불평하지 않고 충실히 훈련에 임했다.

보고 있자면 자주 흐뭇해지고는 했다.

"어이."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 없이 검을 구경하고 있던 스콰이어 셋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우락부락한 근육을 자랑하는 남자가 팔짱을 낀 채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덩치만 보면 기사나 대장장이처럼 보였는데, 입고 있는 로브를 보면 마법사였다.

"꼬맹이들이 눈독 들일 만한 물건이 아니니 저리 꺼져."

꽤 날서 있는 반응이었으나 검에 빠져 있던 레이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직접 제작하신 겁니까?"

"그래."

"실력이 대단하시군요. 정말 훌륭한 검이네요."

"꼬맹이가 입만 살았군."

말과는 다르게 썩 싫어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레이는 햇살이 흘러내리는 은색 검신을 바라보며 주머니에 넣은 손을 만지작거렸다.

"얼마쯤 합니까? 이런 물건은."

"경매에 내놓을 물건이다. 적게 잡아도 20만 골드는 훌쩍 넘겠지."

레이의 표정이 떫어지자 남자가 실소를 흘렸다.

"그 검을 제작하는데 달려든 마법사만 나를 포함해서 열 명이 넘는다. 아티펙트가 아니라고 우습게 보였나?"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너희 같은 꼬맹이들에겐 저 오른쪽 검들도 과분하다. 일만 골드쯤 하니 확인해 보던가."

앓는 소리를 낸 레이가 우측에 전시되어 있는 검을 하나 잡았다.

이건 가격표가 붙어있었는데, 12,000 골드 짜리 검이었다.

마나를 슬쩍 흘려본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훌륭하지만, 못 쓰겠네요."

"뭐?"

남자의 미간이 대번 찌푸려졌다.

우측에 있는 검들도 어지간한 기사들에게 과분한 수준의 검이었다.

헌데 아직 스콰이어처럼 보이는 애새끼가 시원찮다는 반응을 보이니, 불쾌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레이가 검을 내려놓고 아쉬운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남자가 앞을 가로막았다.

"이 빌어먹을 꼬맹이가 날 우습게 봤군."

남자는 황실 마탑에서도 금속 제련 쪽으로는 알아주는 장인이자 마법사였다.

기사도 못된 애새끼들한테 희롱당할 위치가 결코 아니었다.

분노하는 남자를 앞에 두고 잠시 곤란해한 레이가 솔직히 말했다.

"다른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우측의 검은 아무래도 제 마나 운용을 길게 버티지는 못할 것 같아..."

"증명해라."

남자가 검을 바닥에 던졌다.

"어디 한 번 검을 쥐고 마음껏 마나를 운용해 봐라."

"..."

"검에 반드시 하자가 생겨야 할 거야. 아니면 내 물건을 모욕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

"...하자가 생기면, 어쩌실 겁니까?"

레이가 뚱한 얼굴로 묻자 남자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처음 보았던 검을 일만 이천 골드에 팔아주마."

레이가 되도 않는 허세를 부린다 판단한 남자는 판돈을 크게 걸었다.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

레이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당장 무릎을 꿇거나. 아니면 내기에 응해 크게 망신을 당하고 대가를 치르던가.

레이가 고른 선택지는 후자였다.

"후우."

한숨을 쉰 레이가 바닥에 떨어진 검을 붙잡았다.

남자의 입가에 조소가 드러나는 순간 레이가 검에 마나를 주입했다.

'확실히 좋은 검이긴 한데...'

과거 필립스 백작에게 받은 검과 얼추 품질이 비슷했다.

공간을 변질시키는 마나를 거칠게 회전시켜도 비교적 잘 버터 주었다.

옆에 있던 하무스와 빅토르가 안절부절하며 입술을 씹었다.

'그냥 무릎 한 번 꿇고 말지 왜 자존심을 부려선...!'

'잘못하면 우리까지 싸잡혀서 책임을 물어야겠는데...'

쏟아지는 시건을 느낀 레이가 검에 마나를 더욱 집중시켰다.

검에 미약한 광채가 어린다.

검기를 방출할 생각이 없었음에도, 금속을 따라 요동치는 마나가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검은 여전히 잘 버텨주었다.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작게나마 밀도 차이가 나던 부근에서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빅토르와 하무스는, 심지어 레이조차 눈치채지 못했으나.

남자는 들을 수 있었다.

금속에서 발생하기 시작한 미미하기 짝이 없는 파열음을.

남자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그만."

"..."

레이가 고개를 들어 빤히 남자를 쳐다봤다.

한동안 침묵하던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일만 이천 골드다."

"..."

레이가 순순히 주머니에서 수표를 꺼내 내밀었다.

수표를 받아든 남자가 부스로 걸어가더니 가장 우측에 있던 검에 검집을 씌워 레이에게 던졌다.

"서비스다."

"괜찮습니다."

"소문내기 전에 받아라."

"...감사합니다."

"이름이 뭐냐."

한 박자 쉰 레이가 답했다.

"레이입니다. 필립스 백작가의 기사, 젠킨슨 경을 마스터로 모시고 있습니다."

신분을 숨기는 건 소용이 없다. 때문에 솔직히 답했다.

만약 남자가 딴생각을 품는다면, 아프텔이 경고해줄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은 제플린이다. 네 이름이 어서 빨리 내 귀에 들려오길 기대해보지."

"그때가 되면 꼭 한 번 더 찾아뵙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레이가 멀어졌다.

제플린은 잠시 제자리를 서성이다, 웃음을 한 번 터뜨리곤 부스로 돌아갔다.

오늘의 손해는 개인 자산으로 메워야 했다.

*

"오우오오오...!"

"우아아아아...!"

레이에게 건네받은 은색 검을 구경하며 하무스와 빅토르가 탄성을 흘렸다.

아티펙트는 아니었으나, 그에 비견될 만큼 참으로 매혹적인 검이었다.

둘은 감탄하면서도 슬금슬금 레이의 눈치를 보았다.

'대체 뭐하는 새끼야?'

둘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무슨 수작을 부렸기에 제플린이 순순히 검을 넘겨주었나 이해가 안 갔다.

처음엔 사기 당한 게 아닐까 싶었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검은 진짜 명품이었다.

한편 레이는 다른 고민에 빠져 있었다.

검 한 자루 사는데 예산의 60퍼센트를 태웠다.

서비스까지 해 총 두 자루의 검을 받긴 했으나, 하나는 이미 균열이 갔기에 선물로 주긴 뭐했다.

'그냥 내가 써야지.'

여튼 남은 예산으로 일백이 넘어가는 아이들의 선물을 구매해야 했는데, 아무래도 볼멘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카렌이 많이 실망할 텐데...'

여전히 카렌은 아이들의 중심이자 보육원의 기둥이었다.

카렌이 평소 하는 노력을 감안하면 요하나보다 못한 선물을 준비할 수는 없었다.

허나 이미 일만 이천 골드를 태웠으니, 카렌에게 할당할 수 있는 예산은 기껏해야 일천 골드 아래였다.

"으음..."

길을 걷던 레이 눈에 장신구를 판매하는 부스가 눈에 띄었다.

다가가서 구경하자 여자 직원이 친절히 응대해주었다.

"어떤 물건을 찾으시나요?"

"여기 있는 게 전부 아티펙트인가요?"

"아티펙트인 것도 있고, 평범한 장신구도 있습니다."

직원이 푸른 보석이 박힌 장신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건 약한 강도의 실드를 전개할 수 있는 아티펙트입니다."

"그건 가격이..."

"20,000 골드입니다."

단념한 레이가 평범한 장신구를 찾았다.

아티펙트는 아니더라도 마법을 활용한 가공을 거쳐 매혹적으로 반짝이는 장신구가 많았다.

"선물할 건데... 붉은 머리에는 어떤 색이 어울릴까요?"

"여성분이시죠?"

"예."

"그럼 이건 어떠신가요?"

여자가 서랍에서 목걸이를 하나 꺼내 보여주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작은 보석과 은색 체인으로 이루어진 목걸이였다.

아름답게 가공된 목걸이에 시선을 빼앗긴 레이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이건 얼마인가요?"

"후후. 특별히, 일천 골드에 드릴게요."

바가지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 목걸이가 카렌에게 썩 어울릴 거란 확신은 분명히 들었다.

레이는 일천 골드를 지불하고는 잘 포장된 목걸이를 받아들었다.

부스를 나온 레이가 턱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이래도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레이가 하무스와 빅토르에게 자기 고민을 털어놨다.

"은색 검은 요하나에게 선물할 생각이거든?"

"근데?"

"카렌에겐 이 목걸이를 선물할 생각이야."

"..."

하무스와 빅토르가 서로 눈을 마주 보는 사이 레이가 혀를 찼다.

"카렌이 삐치지 않을까 걱정이네."

잠시 눈을 깜박이던 하무스가 혹시나 싶어 되물었다.

"레이, 잠깐만. 요하나에겐 검을 선물할 생각이라고?"

"응."

"카렌에겐 그 아름다운 목걸이를 선물하고?"

"응."

"근데 누가 삐칠까봐 걱정된다고?"

"카렌이."

"왜?"

"검이 목걸이보다 열 배는 더 비싸니까."

정확히 따지자면 백 배 더 비싼 물건이었다.

레이의 완벽한 논리에 콧잔등을 매만진 하무스가 정색하며 쏘아붙였다.

"너 이 새끼 사실 기사 아니고 마법사지?"

"아니 왜 욕을 하고 그래?"

"아오...!"

하무스가 자기 가슴을 두들겼다.

"레이, 잘 생각해봐. 넌 좀 더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거야."

"더 비싼 목걸이를 준비하라고? 미안한데 예산이 부족해서 안 돼."

"..."

뒷목을 붙잡은 하무스가 새삼스레 레이를 내려봤다.

워낙 잘난 놈이라 까먹고는 했지만 레이는 13살이었다.

'그래, 여자 마음을 모를만한 나이긴 하지.'

사실 육체에 비해 정신 연령이 높은 레이가 13살 아이들을 '여자'라고 고려하지 못한 거지만.

어쨌든 결과는 같았다.

충고를 이어가려던 하무스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꼬라지를 보니 한 번 크게 데어봐야 정신을 차릴 기세였다.

"그래, 한번 잘 달래봐."

달래야 될 대상이 카렌이 될지 요하나가 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요하나의 사춘기는, 더 길어질 것 같았다.

컨퍼런스 (2)

68화

몇 군데 더 부스를 둘러본 레이가 고개를 저으며 주머니를 닫았다.

현재 컨퍼런스에서 판매하는 물건들은 한 번씩은 마법사의 손을 거친 물건들이었다.

비슷한 품질의 물건이라도 마법사가 제작에 관여했다면 가격이 2배 이상 오른다.

마냥 의미 없는 프리미엄은 아니었다.

레이가 산 목걸이의 경우에도 마법사가 직접 세공에 참여해 마감의 완성도를 크게 높인 장신구였다.

전문가가 고배율 확대경을 사용해 살펴야 간신히 구분 가능한 차이였지만, 어쨌든 사치품에 있어 중요한 요소였다.

'남은 예산 싹 끌어모으면...'

아이 한 명의 선물에 대략 50~100 골드 정도 할당할 수 있다.

이 정도 예산이면 마탑 밖에서 물건을 구하는 게 가성비가 좋았다.

마탑에서 100 골드면 나무 깎아 만든 기념품 정도 구할 수 있었다.

'데런이란 이안한테 줄 선물엔 300 골드 정도 투자하고...'

레이는 재능과 성과를 중시했다.

애들 면전에서 노멀 고아 레어 고아 떠들진 않았지만, 노력과 성과에 따라 점점 더 뚜렷하게 보상에 차등을 두었다.

호의만 가지고 가족놀이 하려고 만든 보육원이 아니기에 불가피한 차별이었다.

이런 시스템 때문에 상처받는 녀석들도 있었다만, 카렌을 비롯한 몇몇 아이들이 잘 케어해주었다.

근 2년 정도는 카렌이 받은 쿠키 대부분이 남의 입에 들어갔다는 걸, 레이는 모른 척하며 지켜보는 중이었다.

어쨌든 레이는 예산을 남길 생각이 없었다.

추후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백작이나 지미를 통해 구하면 된다.

레이는 전생에서나 현생에서나 사치에 관심이 없었고, 정말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요구를 하면 되는 위치였다.

더군다나 필립스 백작령 근방에선 수표를 써먹기도 쉽지 않았다.

"어디... 루나에게 줄 선물은 따로 안 사도 될 것 같고."

필사한 마법서가 가득이고 과외 선생까지 모셔갈 예정이니 굳이 뭘 더 준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레이의 혼잣말을 듣던 하무스가 고개를 저었다.

'이 새끼 지금 일부러 이러나?'

사람 속 긁으려고 작정한 게 아니면 저럴 수가 없다.

물론 레이는 요하나와 루나가 진심으로 검술과 공부를 즐기고 있다 생각해 지금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

허나 웬만큼 공부를 좋아하는 아이도, 부모가 동생한테 변신 로보트를 사주고 자신에게 값비싼 백과사전 세트를 선물하면 거품을 무는 법이다.

레이는 애매하게 정신연령이 높아진 탓에 아이들의 감수성에 대해 감이 좀 떨어져 있었다.

'뭐, 알아서 해라.'

하무스는 혀를 짧게 찬 후 신경을 껐다. 고생은 레이의 몫이었다.

예산이 없다 해도 스콰이어 셋은 컨퍼런스 거리를 걸으며 구경을 계속했다.

황실 마탑을 나가서는 쉽게 구경하기 힘든 아티펙트가 다수였다.

헌데 발걸음을 옮길수록 주변의 시선이 쏠렸다.

셋의 행색이 결코 특이하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원인은 하나였다.

은색 검.

마법사 장인이 만들었다는 물건을 안목 좋은 자들은 바로 알아본 모양이었다.

몇몇 기사와 마법사는 대놓고 거리를 좁혀 레이의 허리춤을 뚫어져라 살폈다.

빅토르와 하무스는 불안하다는 듯 침을 꿀꺽 삼켰다.

컨퍼런스 거리 한가운데서 보물 좀 들고 다녔다고 습격당하진 않겠다만, 쏟아지는 관심이 꽤 부담스러웠다.

"너, 그거 어디서 난 거냐?"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의 질문에 레이가 순순히 답했다.

"제플린 님의 부스에서 구매했습니다."

"구매? 오늘?"

"네."

마법사의 눈가에 불신의 기색이 어렸다.

'경매에 올라갈 물건이 분명한데 스콰이어에게 팔았다고?'

대체 얼마를 건넸길래?

마음 같아선 훔쳤느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그것도 여러모로 말이 안 됐다.

제플린이 자기 물건을 도둑맞을 위인도 아니었고, 도둑맞았다면 이미 난리가 났을 터다.

"혹시 검집을 바꿔 끼운 것이냐?"

끼긱!

레이가 엄지손가락에 힘을 줘 검신을 살짝 빼냈다.

마법사가 눈을 깜박이다 입을 다물었다.

'대체 얼마를 쥐여준 거지?'

경매라는 게 분위기를 타면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경우도 많다.

평소 20만 골드 내외로 거래되던 물건도 때에 따라 40~50만 골드에 거래되기도 한다.

"저게 대체..."

"진품이라고...?"

수군거림이 점점 더 퍼져 나갔다.

컨퍼런스 거리에는 레이의 신원을 알고 있는 자들도 꽤 있었다.

알레시아는 유학을 온 지 얼마 안 되어 교수들의 관심을 잔뜩 끌었고, 비록 동성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고 하나 시기 어린 시선은 많이 남아 있었다.

알레시아의 가장 큰 흠이라면 역시 레이의 존재였다.

필립스 백작령에서와 마찬가지로 알레시아는 레이와 가까운 거리를 유지했고, 이는 추문이 돌기 좋은 소재 거리였다.

레이가 갑자기 수십만 골드에 달하는 검을 구매했으니, 그 자금 출처가 어디인지는 남들에게 명확해 보였다.

"필립스 백작가? 변방에 있는 쥐꼬리만한 가문이라며? 종자에게 저런 거금을 투자할 여유가 있어?"

"백작 영애의 사랑이 과하시군."

"쯧, 하나 있다는 계승자 정신머리가 저래서야..."

컨퍼런스 거리를 구경 나온 스콰이어들의 수군거림이 특히나 컸다.

기사들은 체면 때문에 대놓고 입을 열지는 못했으나, 묘한 질시와 멸시가 섞인 시선을 레이에게 보냈다.

빅토르와 하무스는 깨달았다.

'아, 이거 어디서 보던 상황인데.'

물론 지금은 환경이 전혀 달랐다.

오시리스 가 기사들과 레이가 충돌한 건 필립스 백작령 안이었고, 지금은 황실 마탑 내부였다.

수근거리는 스콰이어들 중 오시리스 가보다 강력한 가문에 속한 종자들도 많았다.

레이가 함부로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레이도 그걸 알고서 적당히 몸을 빼려 할 때, 굵은 목소리가 레이를 붙잡았다.

"레이, 여기 있었구나."

먼저 뒤를 돌아본 하무스와 빅토르가 깜짝 놀라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레이를 부른 건 오시리스 백작가의 기사, 리옹이었다.

리옹은 품속을 뒤지다 말고 레이의 허리춤을 보고 깜짝 놀랐다.

"...? 레이, 지금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이 혹시...?"

"알아보시겠나요? 제플린 님께서 제작하신..."

"알아보고말고. 게다가 X 등급이잖느냐?"

"?"

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리옹이 검집을 가리켰다.

"제플린 님은 이름 높은 마법사이자 장인이시다. 제작한 도검의 품질에 따라 등급을 매겨 검집에 표기하시지. X 등급이면 거의 최상급 라인이라는 건데... 혹시 진품이냐?"

"아하."

그래서 검집만 보고 다들 관심을 가졌구만.

레이는 그제야 검집을 꾸미고 있는, 두 자루의 검이 서로 교차하는 문양이 단순 장식이 아님을 깨달았다.

"확인해보실래요?"

"음...?"

리옹이 레이에게서 검을 받아 한 번 뽑아보더니, 입을 쩍 벌리며 기겁했다.

"맙소사, 진품이군."

이걸 어떻게 구매했는지 이 자리에서 물어보는 건 적절치 않았다.

리옹은 검을 돌려준 후 레이에게 당부했다.

"레이, 황실 마탑 안에서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만, 빠르게 다른 검집을 구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이런 걸 대놓고 들고 다니면 표적이 되기 십상이다."

"알겠습니다. 충고 감사드려요."

고개를 끄덕인 리옹이 잠시 레이의 검집에 새겨진 X자 문양을 감상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품속에 손을 넣었다.

"아, 그리고 이걸 필립스 백작 영애께서 전해 달라 하시더구나. 중요한 편지인 것 같군."

리옹이 편지를 내밀었다.

레이는 찝찝한 감정을 숨긴 채 예의 바르게 편지를 받았다.

'알레시아라면 당연히 컨퍼런스를 같이 둘러보자고 조를 거라 생각했는데...'

허나 알레시아는 컨퍼런스에 참석하긴커녕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며칠 전부터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낑낑 앓고 있단 말이지?'

얼핏 보기에 어떤 압박에 시달리는 것 같았는데, 알레시아는 불안에 떠는 이유를 순순히 고백하지 않았다.

레이는 일단 리옹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부탁 받은 일을 끝마친 리옹이 몸을 돌렸다.

"나는 다른 곳을 살펴보겠다. 재밌게들 구경 하거라."

종자들이 불편해할까 봐 자리를 비켜 주는 거였다.

리옹이 사라지자 다시 수군거림이 커졌다.

개중에는 노골적으로 필립스 백작가의 비하를 입에 담는 자들도 있었는데, 레이의 귀에는 아주 잘 들렸다.

레이는 일단 자신에게 왔다는 편지를 뜯어봤다.

레이가 편지를 읽는 사이 하무스와 빅토르는 불안에 떨었다.

레이가 상황을 가려가며 지랄을 하는 작자임을 알고 있음에도, 어쩨 불길함을 떨쳐낼 수 없었다.

한편 편지를 읽던 레이가 머리를 쓸어넘겼다.

"후우..."

레이가 한숨을 쉬자 하무스와 빅토르가 움찔 몸을 떨었다.

레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모멸과 핍박의 시간... 지긋지긋했다.'

사실 그다지 큰 모멸과 핍박을 받은 것도 아니고, 지긋지긋할 만큼 마탑에 오래 머문 것도 아니었지만.

고위 귀족의 자제들과 마법사들 사이에 낑겨 있다 보니 몸을 엄청 사렸던 건 맞다.

허나 눈치 보는 것도 여기까지.

"이제 '고아 수집가' 레이로 돌아갈 때다."

"뭔 개소리야, 미친놈아."

불길함을 느낀 하무스가 식겁하며 한발 물러섰다.

레이가 입꼬리를 길게 찢었다.

"고모가 내 얼굴 보러 마탑에 들리신 다네? 이틀 안에 도착하실 것 같아."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인데?"

하무스와 빅토르는 의아함을 내비쳤다.

레이는 내세울 가문도 없는 순수한 평민이었고, 이는 레이의 고모 또한 평민임을 뜻했다.

레이는 둘의 의문을 풀어주지 않고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까앙!!!

"?!"

대놓고 들리라고 알레시아에 관해 주절거리던 스콰이어의 흉갑에 돌멩이가 충돌했다.

우스르딘 백작가의 기사를 섬기는 스콰이어, 루블이 당혹을 떨치지 못하고 레이를 쳐다봤다.

레이가 루블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야 이 씹새야, 너 일로 와봐. 아가리를 찢어버릴..."

"레이! 미쳤어?!"

"레이, 네 신분으로 잘못 까불었다간 큰일 난다니까...! 여긴 필립스 백작령이 아니야!"

급발진하는 레이를 하무스와 빅토르가 끌어당겼다.

허나 레이는 팔을 털어내며 둘에게만 들리도록 중얼거렸다.

"잘 들어. 나는 '평민'이 아니야."

"?"

"이제부터 내 신분은 '제국 영웅 세리아 님의 조카'다."

레이가 허공에다 자신이 세리아의 조카라 떠들어봤자 믿는 사람 몇 없었을 터다.

만약 믿는다고 해도, 운 좋게 피 조금 이어진 먼 친척 관계라 생각할 확률이 높았다.

허나 세리아가 직접 찾아와 레이를 둥가둥가하는 모습을 보면 생각이 꽤 바뀔 터다.

레이는 오랜만에 혈육(아님) 덕을 볼 생각에 신이 났다.

"일로 와보라고, 씹새꺄."

*

"그렇다면..."

싸구려 목제 탁자를 중심에 두고 앉은 세 사람 중 가장 왜소한 체격의 여자가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로필렌을 제거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그렇소."

은색 마탑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 정보국 소속의 세타가 안경을 벗으며 적색 눈을 빛냈다.

"결과에 책임을 지실 수 있겠습니까?"

"로필렌은 연구 자료를 폐기하고 계약 각인을 조율하는데 적극 협조하고 있소. 위치 추적과 정기 보고에 관한 문제도 동의했소."

"그 연구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눈치챘다는 의미 아닙니까."

"그렇기에 적극적으로 목숨을 구걸하고 있소. 위협은 되지 않을 거요.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면 다른 이들이 파고들 여지를 주게 되오."

마탑주의 주장에 서류를 살피던 로얄 가드 소속의 기사 미하엘이 몸을 일으켰다.

"결론도 난 것 같은데 이쯤 하지."

잠시 침묵한 세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결론은 이미 나온 상태고, 마지막으로 약간의 기 싸움을 동반해 의견 조율을 했을 뿐이었다.

세 사람이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는 순간 회의실 문이 드르륵 열렸다.

허리춤에 손을 숨겼던 미하엘이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세타와 은색 마탑주도 급히 미하엘을 따라 무릎을 꿇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흘러내리는 은발에 태양처럼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

황족의 특성을 고스란히 나타내는 외견을 지닌 황태자, 카리우스가 술병을 들고 껄껄 웃었다.

"그래그래, 우리 제국의 기둥들이 긴밀히 모여 또 무엇을 상의하고 있었나?"

셋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세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방금 논의하던 사안을 설명했다.

몽롱하던 카리우스의 눈동자에 갑작스레 안광이 일었다.

"이런 괘씸한 년을 봤나. 제국의 은혜를 저버린 죗값도 치르지 않고 도주하려 해?"

세타, 미하엘, 마탑주가 짧은 시간 시선을 나누었다.

본디 사람의 목숨이라는 게 권력자의 즉흥적인 감상에 따라 휙휙 잘려나가기도 하는 법이었다.

아무래도 로필렌은 운이 나쁜 듯싶었다.

"...처리하겠습니다."

"누구를?"

"마법사를..."

"마법사만?"

"...?"

"감히 제국의 은혜를 입었으며 제국의 배신자와 야합하려 한 이 괘씸한 놈들은 어찌할 거지?"

표정 변화 없는 세타의 미간에서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고작 그딴 이유로 제국에 충성하는 귀족가의 사람을 건드렸다간 굉장히 곤란해진다.

애초에 세타는 황제에게 소규모 작전권을 부여받은 특임대 소속이었다.

황태자라 해도 이런 간섭은 곤란했다.

황태자, 카리우스.

이 망나니 새끼의 고집을 꺾기 위해선 황제의 도움이 필요했다.

기록 (1)

69화

하무스는 마음을 비우고 레이가 길길이 날뛰는 꼴을 바라봤다.

레이는 알레시아를 입에 담은 놈들에게 돌멩이를 던져 가며 검을 뽑으라고 소리쳤는데, 일종의 결투 신청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먼저 욕을 먹은 루블이 실소를 참지 못하고 공터를 가리켰다.

"따라와라."

공터는 본래 아티펙트의 성능 실험을 위해 마련된 장소였다.

쓰고 싶다고 쓸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으나, 주변에 있던 구경꾼들은 다들 흥미진진한 얼굴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본디 완숙한 엑스퍼트 급 기사보다 스콰이어 간의 결투가 인기가 많은 편이다.

미숙함이 돌발 상황으로 이어져 여러 재밌는 상황을 연출했기 때문이다.

하무스와 빅토르는 벌레 씹은 얼굴로 구경꾼들 틈에 끼어들었다.

수군거리는 구경꾼 사이로 레이의 방자함을 비웃는 목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루블 또한 혀를 차며 레이를 도발했다.

"과분한 무기를 손에 쥐었다고 네놈이 뭐라도 된 것 같으냐?"

목소리를 낮춘 루블이 낮게 속삭였다.

"까불지 말고 네 주인에게 가서 엉덩이나 열심히 흔들거라."

레이가 말없이 하무스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요하나에게 선물할 검을 하무스에게 맡긴 레이가 평소에 쓰던 싸구려 검을 뽑았다.

그 꼴을 보고 루블이 고개를 저었다.

"같잖은 새끼가 꼴에 자존심은."

계속되는 도발에 분위기가 한층 더 달아오른다.

하무스는 은색 검을 품에 안은 채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마나를 잔뜩 집어넣었던 자신의 검이 레이에게 양단된 그 순간을.

'아마도 미궁에서도...'

미궁에서 젠킨슨이 오시리스 가 기사 두 명을 동시에 제압했다고 했지만.

하무스가 생각하기엔 거짓이었다.

쿵!

레이가 검을 아래로 내린 채 몸을 날렸다.

루블은 빠르게 다가오는 레이를 향해 마주 검을 휘둘렀다.

그게 끝이었다.

꽈앙!!

예기치 못한 반동이 루블의 손아귀를 헤집었다.

루블은 한발 늦게 본인이 검을 놓쳤음을 깨달았다.

"어?"

루블이 당혹을 즐길 새도 없이 레이가 검을 버렸다.

레이는 상대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대는 것으로 깔끔하게 싸움을 끝맺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레이의 주먹이 루블의 턱에 꽂혔다.

쩌억!!

"컥?!"

"이 씹새가 어디 아가리를 함부로 놀려?"

쩌억!!

다시 한 번 턱주가리가 돌아간 루블이 휘청거리며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자, 잠깐...!"

"잠깐은 시발아."

파각!!

레이가 루블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 자리에서 반 바퀴 회전한 루블이 머리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어억!!"

"이게! 어디서! 우리 아가씨를! 우습게 보고!"

퍽!퍽!퍽!퍽!퍽!

레이의 발길질이 이어졌다.

루블은 지면을 데굴데굴 굴러가며 레이의 발길질에 얻어맞아야 했다.

흙먼지가 잔뜩 올라올 정도로 루블을 걷어찬 레이가 씩씩거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다음. 너 이 새끼 일로 와봐."

레이의 손가락이 함부로 알레시아의 이름을 입에 담았던 다른 녀석을 향했다.

레이에게 지목된 스콰이어, 쿠단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루블이 방심한 탓에 망신을 당했다만.

쿠단은 엑스퍼트의 경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루블보다는 확실히 윗줄의 강자였다.

쿠단은 가슴을 넓게 펴고 당당한 걸음으로 레이 앞에 섰다.

그리고 레이의 검격을 딱 세 번 받아내고 개처럼 처맞기 시작했다.

퍽!퍽!퍽!퍽!퍽!

"엎드려! 빌지는! 못할망정! 누구 앞에서! 목에 힘을 줘?!"

"끼에에엑!!"

쿠단이 짐승 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지면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 꼴을 보며 하무스는 확신을 얻었다.

'저 새끼 엑스퍼트 급이다.'

레이가 정확히 어느 수준의 경지에 이르렀는지는 모른다.

허나 엑스퍼트 급 기사와 비견되는 무력을 갖췄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결국 쿠단 이후로도 스콰이어만 세 명이 더 레이에게 처맞았다.

구경꾼들 중에선 스콰이어들의 마스터도 있었지만, 직접 나서서 싸움을 중재하거나 레이를 압박하지는 않았다.

자존심 상할 일이기도 하고 명분 문제도 있었다.

결국 레이는 기절한 스콰이어 다섯을 남겨둔 채 공터를 떠났다.

하무스는 은색 검을 돌려주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쩌려고 이래?"

당장은 괜찮아 보여도 추후 갈등의 원인이 될 것이다.

레이 본인이 아닌 필립스 백작가에 문제가 갈 소지가 있는 행동이었다.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고모가 여기 오신다니까."

"네 고모가 누군데?"

"세리아."

"...제국 영웅 세리아?"

"어."

"제발 말이 되는 소리를..."

하무스가 따지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젊은 나이에 로커스트를 토벌하고 엄청난 위명을 얻은 세리아.

그리고 열셋의 나이에 웬만한 스콰이어는 찍어 누를 실력을 지닌 레이.

둘이 고모 조카 사이라고?

그게 말이...

"되네?"

하무스와 빅토르가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어디서 저런 놈이 튀어나왔나 했더니 세리아의 혈육이라면, 또한 세리아가 직접 지도했다면 저런 실력도 납득이 갔다.

하무스와 빅토르가 황급히 레이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세리아에 관해 듣고 싶은 이야기가 넘쳐났다.

*

숙소로 돌아온 레이가 짐을 정리하며 은색 검을 젠킨슨에게 보여주었다.

젠킨슨은 역시나 감탄하며 찬찬히 검을 살폈다.

"제플린의 위명이 헛된 게 아니군..."

"탐나요?"

"흐흐... 탐이야 나지. 하지만 내게 필요한 물건은 아니다."

그래듀에이트 정도 되면 확실히 검의 품질이 중요해진다.

검기를 수십 가닥 꼬아 검강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검의 품질이 바쳐주지 않으면 퍼포먼스에 제한이 생긴다.

그것도 일정 품질 이상만 되면 거기서 거기긴 하다만, 무기에 집착하는 건 무인의 본능과 마찬가지였다.

"너라면 얼마 안 가 이 검의 가치를 십분 발휘할 수 있겠지."

"제가 쓸 거 아닌데요?"

"...?"

"요하나 줄 거예요."

"아니..."

레이를 바라보던 젠킨슨이 별말 없이 검을 꽂아 넣었다.

요하나 또한 정말 훌륭한 재능을 타고났으니 이 정도 투자쯤이야 전혀 낭비가 아니었다.

다만 레이가 가끔 보여주는 저 초탈한 성정의 근원과 이유가 무엇인지, 젠킨슨은 궁금해지고는 했다.

레이는 은색 검을 옆으로 치운 후 검집에 일자 무늬가 두 줄 새겨진 검을 뽑아보았다.

12,000 골드를 주고 구매한 이 회색 검도 꽤 훌륭한 물건이었다.

허공에 몇 번 검을 휘둘러본 레이가 화제를 돌렸다.

"알레시아는 오늘도 계속 숙소에 있었나요?"

"그도 모자라 수석 교수가 숙소에 찾아왔다. 조사할 게 있다며 알레시아 님을 찾았는데, 알레시아 님이 응하지 않으셨다."

"크크큭..."

음침하게 웃은 레이가 미간을 짚었다.

"또 뭔 사고 치셨네."

"그래."

"아니! 대체! 황실 마탑까지 와서! 왜 또 사고를 칩니까?!"

"...그러게 말이다."

젠키슨 또한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사고를 쳤답니까?"

"그걸 아무래도 네가 한 번 여쭤봐야 할 것 같다. 이야기를 안 하시는군."

*

"소환에 응하지 않더군요."

황실 마탑 수석 교수 디오리카가 주변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디오리카 앞엔 쟁쟁한 귀족가의 관계자들이 뚱한 얼굴을 한 채 앉아 있었다.

열흘이 조금 넘는 조사 끝에 '타락한 문화'가 유학을 왔던 귀족가 영애들 사이에 범람하고 있음을 밝혀낼 수 있었다.

외설적인 소설을 돌려봤던 귀족 영애들을 조사한 끝에 이번 사태의 주동자라 여겨지는 인물을 색출할 수 있었다.

알레시아.

외설적인 소설로 또래 영애들을 끌어들여 세력을 구축하고 방만을 떤 악의 중심.

"당장 그년을 마탑에서 내쫓지 않고 무엇을 하는 거요? 그, 그 빌어먹을 년이 내 동생을...! 내 동생을...!"

안젤로가 가슴을 텅텅 치며 분노를 드러냈다.

꽤 민망한 이야기였기에 다들 눈치를 보는 중이었지만, 대개 알젤로의 의견에 동의하는 편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이번 일을 조용히 처리해야 한다는 거다.

혼인도 하지 않은 귀족 영애들끼리 외설스러운 소설을 돌려보다 문제가 생겼다는 소문이 퍼지면 개쪽도 그런 개쪽이 없었다.

디오리카는 처음에 알레시아를 소환해 입을 맞춘 후 야설 공유가 아닌 적당한 핑계를 대어 알레시아를 마탑 밖으로 내보내려 했다.

허나 분노한 안젤로를 비롯해 다른 귀족 영애들의 보호자는 이 사달을 낸 알레시아를 확실히 망신 주기를 원했다.

"황실 마탑에 이런 불온 서적을 반입해 문제를 일으킨 대가는 확실히 치르게 해야 할 것이오!"

사실 이번 사태를 접한 귀족가 관계자들은 처음에 안젤로가 과민 반응을 한다고 생각하곤 했다.

허나 직접 그 '불온 서적'을 읽어보고 난 후.

다들 적극적으로 안젤로의 주장에 동의했다.

헛기침을 한 번 한 디오리카가 물었다.

"이번 사건이 밖으로 드러나면 그... 다른 영애들의 평판에도 피해가 있지 않겠습니까?"

"어째서?"

"?"

"이 불온 서적은 알레시아 혼자 반입하고 혼자 즐기다가 다른 영애들에게 들킨 것이오! 그렇지 않소?"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디오리카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짧게 혀를 찼다.

사실 이 사안이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사안이냐 하면 또 애매했다만.

엮인 자들이 워낙 많은 탓에 누군가는 책임을 물어야 했다.

거기에 이 사달을 낸 알레시아는 비교적 한미한 가문에 속해 있었다.

알레시아 혼자 창피를 당하고 마탑에서 내보내는 정도로 마무리해도, 감히 항의하긴 힘들었다.

*

컨퍼런스 이후에도 알레시아는 최소한의 커리큘럼만 마치고 잽싸게 숙소로 도망치길 반복했다.

레이는 알레시아와 플로리아 둘이서 듣는 수업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교수가 강당을 나오자마자 곧장 안으로 쳐들어갔다.

가방을 싸매고 도망치려던 알레시아가 레이를 보고 흠칫 몸을 굳혔다.

레이가 외부와 통하는 강당의 문고리를 으스러뜨렸다.

"알레시아 님, 앉으세요."

"..."

알레시아가 뺀질거리며 눈치를 보자 대번 레이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야, 앉아."

"나의 기사가 오늘따라 박력이 넘치는구나아..."

알레시아가 마지 못해 자리에 앉았다.

레이가 플로리아에게도 손가락을 까닥였다.

"플로리아 님도 앉으세요."

"으음..."

도저히 귀족한테 보일 행태는 아니었으나 플로리아도 못 이기는 척 자리를 찾아 앉았다.

레이는 크게 숨을 내쉰 후 알레시아를 마주 봤다.

"야, 대체 무슨 사고를 친 거야?"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아..."

알레시아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레이는 제발 별 볼 일 없는 사고이길 바라며 이번엔 플로리아를 바라봤다.

알레시아가 사고를 쳤다면,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하는 플로리아 또한 무언가를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레이가 입을 열려는 순간, 문을 쾅쾅 치는 소리가 교실을 울렸다.

"레이, 나와봐야 할 것 같다."

젠킨슨의 목소리였다.

레이가 무슨 일인가 싶어 부서진 문고리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고 잡아당겼다.

밖을 나와보니 마법사 둘과 기사 다수, 그리고 귀족처럼 보이는 인간이 여럿 진 치고 있었다.

수석 교수 디오리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큼... 알레시아 님이 황실 마탑에 외설적인 소설을 반입하셨다는 의혹이 있어 찾아왔네."

"...?"

이게 무슨 소리야?

레이가 눈을 깜박이며 얼을 타자 디오리카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 외설적인 소설을...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감상하다 다른 학생들의 눈에 띄어... 신고가 접수됐네."

혈압이 오른 레이가 뒷목을 붙잡았다.

"이런 씨...! 돌아버리겠네."

욕설이 목구멍까지 솟구쳤다.

기록 (2)

70화

무슨 사고를 쳤나 했더니 야설을 황실 마탑에 반입해?

반입했으면 조용히 볼 것이지 시도 때도 없이 읽어대다가 남한테 들켜서 이 사달을 만들어?

젠킨슨 또한 어지간히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디오리카가 둘을 향해 책을 한 권 들어 보였다.

"이게 알레시아 님에게서 압수한 소설이네."

[귀축 기사와 악당 영애님]

레이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디오리카의 손에 들려 있었다.

몇 년 전에 저거보다 걸려서 며칠을 방 안에서 못 빠져나왔는데, 그때 버릇을 완전히 잡는데 실패한 모양이었다.

설마 마탑에까지 소설을 가져와 문제를 일으킬 줄이야.

단념한 레이가 하늘을 바라보며 욕을 중얼거리는데 알레시아가 교실에서 튀어나왔다.

"이건 모함이니라!!"

"?"

"나, 나는 숙소 안에서만 책을 감상했느니라!"

"숙소 안에서만 감상하셨는데 저건 왜 마법사님 손에 들려있습니까?"

"저 책은 멜리에게 빌려주었다가 돌려받지 못한 것이야!"

알레시아의 주장에 디오리카와 동행했던 안젤로가 목에 잔뜩 힘을 주며 분노했다.

"부끄러운 줄 아시오! 자신의 죄를 남에게 뒤집어씌우려 하다니! 증인이 한둘인 줄 아시오?!"

"으으...! 먼저 책을 빌려가겠다고 디저트를 대접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나에게 책임을 미루는구나...!"

배신감에 부들부들 떠는 알레시아를 쳐다보며 레이는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니까... 야설 돌려보다 들켜가지고 난리가 난 걸 알레시아 님한테 몽땅 뒤집어씌우고 끝내겠다는 거죠?"

굉장히 직설적인 발언에 잠시 침묵이 일었다.

알레시아가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억울하구나!"

"알레시아 님, 포기하세요."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높으신 분들끼리 이미 입도 다 맞춘 것 같고, 소설 돌려봤다는 물증도 없잖아요?"

객관적으로 뒤집기 힘든 상황이었다.

알레시아가 미리 자기 잘못을 고백하고 레이와 젠킨슨에게 상담했다면 대처를 할 수 있었으나, 이미 너무 늦었다.

굽신거리며 책을 빌려 갔던 귀족가 영애들도 알레시아와의 신의를 지켜주기 위해 자기 위신을 희생할 리 없었다.

허나 알레시아는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물증이 있느니라!"

"...네?"

"레이가 말해주지 않았더냐! 물질적인 거래가 있었을 때는 반드시 장부를 만들어 기록해 놓으라고!"

"?"

알레시아에게 그런 말을 하긴 했었다.

지미가 열심히 장부를 작성하는 모습을 보고 아이들에게 '기록'의 중요성을 가르친 적이 몇 번 있었다.

흥분한 알레시아가 교실로 쪼르르 달려가더니, 이내 노트 한 권을 가져와 건넸다.

"바로 이것이니라!"

"어디 보자..."

[책 대여 명부 - 알레시아 필립스 작성]

(추신*) 작성 시를 제외하고는 가방에 넣어 보관할 것.

(추신*) 우선적으로 보호하되, 상황이 여의치 않을 시 반드시 소각할 것.

"참 좋은 것만 골라 배우셨군..."

옛날에 가르쳐줬던 형식을 그대로 베껴놨다.

레이는 앓는 소리를 내며 다음 장을 넘겼다. 플로리아의 이름이 가장 처음에 기재되어 있었다.

"이런 씹..."

레이가 눈을 번뜩이자 플로리아가 얼른 시선을 피했다.

언니 된 자가 알레시아를 말리기는커녕 가장 먼저 희희낙락거리며 책을 빌려갔다는 사실에 레이는 깊은 빡침을 느꼈다.

"다음에 봅시다아..."

"..."

모른 척 고개를 돌리는 플로리아를 두고 재차 한숨 쉰 레이가 장부에 적힌 목록을 줄줄이 읽어 갔다.

누가, 언제, 무슨 책을, 디저트 몇 개를 사주고 빌려 갔는지 하나하나 자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심지어 지장까지 간간이 찍혀 있었다.

레이가 장부의 내용을 읽어나갈수록 디오리카와 동행했던 귀족들의 표정이 떫어졌다.

'이건 뭐 알레시아 게이트구만.'

이 장부 내용이 외부에 유출되면 장부에 기재된 영애들은 그야말로 개쪽을 당하게 된다.

처벌을 받을 일은 아니었다만, 그런 것과 별개로 명예를 중요시하는 귀족에게 있어 이건 분명한 역린이었다.

레이가 장부를 덮었다.

"물증도 남아있는데... 이리 된 거 그냥 덮고 넘어가시죠?"

레이가 장부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대놓고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누가 봐도 협박이었다.

다 같이 뒤질 것 아니면 그냥 없던 일로 하고 좋게좋게 넘어갑시다. 우리 영애님들 혼삿길에 추문을 얹을 필요는 없잖습니까?

대충 그런 이야기였다.

안젤로가 거품을 물었다.

"감히 내 동생의 순수한 영혼을 더럽혀 놓고선 잘도 뻔뻔히...!"

"에헤이, 사춘기 때 친구끼리 야설 좀 돌려볼 수도 있는 법이지, 왜 그리 깐깐하게 구십니까? 너무 가둬 두면 늦바람 들기 십상입니다."

"이, 이 미친놈이...!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그딴 망발을...!"

바들바들 떤 안젤로가 기사에게 명령했다.

"당장 저 시건방진 새끼를 무릎 꿇리고 저 장부를 가져오거라!!"

"크흠!"

분위기가 살벌해질 기미가 보이자 디오리카가 끼어들었다.

황실 마탑 내부에서 칼싸움을 하게둘 생각은 없었다.

"그 책은 내게 주시게."

"왜요?"

"이번 사건의 증거품 아닌가? 조사가 끝나면 다시 돌려주겠네."

"싫은데요?"

"...?"

"멀쩡한 책을 누가 태워드실 지 어찌 알고 제가 드립니까?"

잠시 저 멀리 시선을 두었던 레이가, 다들 그만 돌아가시라는 듯 손을 살랑살랑 휘저었다.

"이쯤에서 덮고 넘어갑시다. 여기 있는 내용 사방팔방 떠들고 다니기 전에."

쿵!

지면을 내리밟은 안젤로가 고함쳤다.

"당장 저 시건방진 새끼 잡아와!!"

자리에 있던 귀족들과 기사들이 눈을 맞췄다.

알레시아의 장부는 일이 어떻게 되든 간에 영애들의 명예를 위해 제거해야 할 문서였다.

마침 레이가 주제 파악도 못 하고 까불어댄 덕에 검을 뽑을 명분이 생겼다.

다가오는 기사들을 보고 검 자루를 만지작거리던 젠킨슨이 레이에게 속삭였다.

"대체 무슨 생각이냐...? 왜 이렇게 까불어 대?"

"왜 이렇게 까불긴요. 뒷배 밀고 까불죠."

"...장부는 이리 건네라. 내가 보관하겠다."

"괜찮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안 뺏겨요."

카가가강!

우르르 다가온 기사들이 거침없이 검을 뽑았다.

삽시간에 레이의 급소란 급소엔 전부 검 끝이 겨눠졌다.

"태도가 참으로 불손하구나."

기사들 중 일부는 레이가 며칠 전 컨퍼런스에서 겁 없이 다른 귀족가의 스콰이어를 때려눕혔던 녀석임을 알아챘다.

레이의 목을 겨눈 기사의 검에서 예기가 바짝 섰다.

"장부, 내놔."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자신만만한 태도에 열이 뻗친 기사 중 하나가 우악스러운 손길로 레이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꽈드득!

"으윽?!"

기사의 견갑이 누군가의 손아귀에 종잇장처럼 뭉개졌다.

기사의 귓가에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비켜."

콰앙!!

허공을 유영한 기사가 그대로 벽에 박혀 들었다.

"무슨?!"

레이를 압박하던 검이 회수 되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여자를 향해 겨눠졌다.

그럼에도 여자는, 유유히 도검을 헤치고 걸어와 두 손을 레이에게 뻗었다.

"조카!!"

"고모!!"

레이가 꺄르르 웃으며 세리아의 품에 뛰어들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디오리카 알슈테인이 눈을 찢어져라 크게 떴다.

*

황제에게 알현을 요청한 세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긴장을 풀었다.

이런 일이 처음 있는 건 아니었다. 도리어 굉장히 잦았다.

황태자는 과거부터 망나니 기질이 다분했다.

장자이기도 했으며 여러 정치적 요인이 겹쳐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나 시간이 흘러도 나아짐이 없었다.

황태자는 자주 자기 직위를 남용해 제국의 행정을 주무르곤 했고, 그 수위가 너무 지나치다 싶으면 황제가 제지했다.

세타는 황제가 마련한 황태자의 제동 장치 중 하나였다.

언젠가 황제가 될 자의 미움을 산다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허나 세타는 제국에 충성했고, 아직 황제가 정정했기에 일단은 스스로 어려운 역할을 자처했다.

"들어오시지요."

친위대의 안내를 받아 알현실에 들어선 세타가 곧장 황제를 향한 예를 표했다.

이미 보고서는 황제에게 제출했다. 세타는 황제의 명령을 듣고 그대로 이행하면 됐다.

황태자는 황실 마탑에 속한 로필렌을 영입한 것을 두고 황실의 권위에 도전했다며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지껄였는데, 미친 짓이었다.

물론 황실 마탑의 사람을 빼간다는 건 황실 입장에서 불쾌한 일이다.

때문에 황실에서도 이건 선을 넘었다 싶으면 우회적으로 경고하거나, 아예 영입 대상을 제거한다.

황실의 경고를 듣고도 귀족이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그때부터 갈등이 시작되는 것이다.

헌데 이런 중간 과정도 없이 다짜고짜 황실 권위에 도전했다고 귀족을 해쳤다간 후폭풍이 말도 안 될 것이다.

황실의 권위가 아무리 지엄하다 하여도 황실과 귀족은 서로를 존중해야 했다.

필립스 백작 영애는 백작가의 하나뿐인 적통한 계승자다.

플로리아의 가문은 제국 변방에서 가장 세력이 큰 귀족가 중 하나였다.

여기에 더해 세리아 알슈테인이 아끼는 혈육이, 알레시아의 일행 중에 포함되어 있다는 정보가 최근 전해졌다.

'그런데 이들을 경고 절차도 없이 기분 나쁘다고 치겠다고?'

고작 망나니 황태자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재고할 가치가 없었다.

'그 망나니를 어찌해야 할지.'

세타는 당장의 일은 걱정하지 않았다.

이번 일도 황제가 적절히 제동을 걸어줄 것이다.

구두 경고를 통해 필립스 가와 오시리스 가가 로필렌에게 손을 떼게 하던가.

아니면 로필렌의 영입을 눈감아주는 것으로 결론을 맺을 터다.

세타가 한참을 고개를 숙인 채 기다리니, 마침내 황제가 입을 열었다.

"짐의 육체가 노쇠해감을 느끼고 있어."

"?"

"다음 대 황제의 신뢰를 사기 위한 아래 것들의 경쟁이 시작돼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지."

갑작스러운 충성 경쟁 이야기.

세타의 두뇌가 급격히 회전하기 시작한다.

"황태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다들 열심히 꼬리를 흔들고 있더군."

"..."

"자네가 날 찾아오지 않았듯이 말이야."

'이 빌어먹을...!'

세타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황태자가 망나니짓을 한 기간이 너무 길었다.

개선되기는 커녕, 몇 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결국.

황제가 카리우스를 포기했다.

세타는 황제의 의중을 깨달았다.

황제는 카리우스의 황태자로서 직위를 박탈할 생각이었다.

허나 카리우스의 외가를 포함해, 황태자에게 줄을 댄 권력의 크기가 만만치 않았다.

단순히 무능하다는 이유로 황태자를 쳐내기엔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컸다.

황태자 직위를 박탈할 결정적인 사건이 있어야 한다.

'그걸 지금 나보고 꾸미라는 건가...!'

황제의 의중은 명확했다.

실제로 망나니 황태자를 향한 충성 경쟁도 존재했으니, 황제가 원하는 그림 자체는 어렵지 않게 그릴 수 있었다.

문제는 세타 본인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느냐다.

황태자가 벌인 실책의 책임을 황제가 세타에게 뒤집어씌운다고 해도, 세타는 항변할 수 없었다.

"..."

세타는 심란함에 휩싸인 채 알현실에서 뒷걸음질쳤다.

세타가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황제는 세타를 단 한 번도 바라보지 않았다.

귀환 (1)

71화

세리아가 레이의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끼운 채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자 기사들은 혼란에 빠졌다.

예기가 서린 기사들의 검날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지만 세리아는 개의치 않고 레이와 뺨을 비볐다.

안델루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신원을 밝혀라!"

마나가 주입된 검이 한 층 더 강렬한 예기를 뿜어냈다.

위협을 느낀 세리아가 한쪽 팔로 레이를 끌어안고선 남은 손을 뻗어 안델루네의 검신을 움켜쥐었다.

뿌드득!

마나를 머금었던 검이 어처구니 없도록 쉽사리 일그러진다.

비록 검기를 발현하진 않았다고 해도, 평범한 기사가 벌일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었다.

"이게 무슨...?!"

안델루네는 경악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허공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대검이 안델루네의 허리를 향해 스스로 휘둘러지고 있었다.

쩌억!!

"컥!!"

흉갑이 찌그러지며 충격을 이기지 못한 안델루네가 땅을 굴렀다.

몇몇 기사들이 기겁하며 검기를 발하려 했다.

디오리카가 다급히 기사들의 앞에 뛰어들었다.

"그만, 그만!!"

사방으로 마나를 퍼뜨려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킨 디오리카가 일갈했다.

"세리아 알슈테인 경입니다!! 예를 갖추십시오!"

기사들의 움직임이 덜컥 멈췄다.

모두의 시선이 세리아의 얼굴로 한 번 향했다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대검을 향해 돌아갔다.

허큘러스.

세리아가 현재 소유권을 지니고 있는 두 개의 최상급 아티펙트 중 하나.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기사와 귀족들이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황급히 물러섰다.

꺄륵꺄륵 웃으며 즐거워하는 레이를 보고 안젤로가 황망해했다.

"대, 대체 무슨..."

세리아는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고 세리아의 둥가둥가를 받으며 쪼개고 있는 저 새끼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디오리카가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나섰다.

"이번 사안에 대해서는 다음에 재차 논의하기로 합시다."

"아니, 이런 법이 어디 있소? 하다못해 저 장부라도 당장..."

"두 번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열이 뻗친 디오리카가 안광을 번뜩이며 씹어 말했다.

"지금은 자리를 비켜주시지요."

"..."

상황이 영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귀족들이 목소리를 낮췄다.

디오리카는 황실 마탑의 수석 교수였으며 알슈테인 공작가의 사람이었고, 이 자리엔 위명 높은 세리아까지 와있었다.

"후우."

귀족들이 하나둘 따지고 들기를 단념했다.

이번 일이 알슈테인 가와 얼굴을 붉히며 갈등을 빚을 만큼 중요한 사안은 아니었다.

"추문이 도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확답을 받은 귀족들이 서서히 자리를 떴다.

간신히 귀족들을 전부 돌려보낸 디오리카가 여전히 레이를 끌어안은 채 뺨을 비비고 있는 세리아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장소를 옮겨야 할 것 같았다.

*

디오리카는 마탑의 행정을 관리하는 본관의 사무실로 장소를 옮겼다.

숨을 고르는 디오리카의 맞은 편엔 필립스 백작가 사람들과 세리아가 앉아 있었다.

한편 계약 각인 건으로 본관에 들렀던 로필렌 또한 얼떨결에 레이와 만나 사무실 구석에 서 있게 되었다.

디오리카는 세리아를 바라보며 자기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세리아는 레이를 무릎 위에 앉혀 놓은 채 흡족한 얼굴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디오리카는 세리아가 저토록 크게 감정 변화를 드러내는 모습을 오늘 처음 보았다.

목을 가다듬은 디오리카가 세리아에게 고개 숙였다.

"고모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이야."

고모님.

디오리카가 세리아를 부른 호칭을 듣고 레이가 의아해했다.

"고모님이라고요...?"

"조카야. 새로 생긴."

세리아가 간략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알슈테인 가는 세리아를 확실히 붙잡기 위해 그녀를 전대 가주의 양녀로 들였다.

때문에 현재 세리아는 알슈테인 가의 가주, 즉 알슈테인 공작과 항렬이 똑같았다.

디오리카는 알슈테인 공작의 차남이었으니 세리아를 고모님이라 부른 것이다.

상황을 파악한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 분이... 우리 고모의 짭 조카 되시는 분이로군요."

"짭... 뭐?"

순간 얼을 탄 디오리카에게 레이가 손을 내밀며 해맑게 웃었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디오리카 님. 우리 고모의 찐 조카 되는 레이라고 합니다."

"..."

디오리카가 세상 떫은 얼굴로 레이의 손을 맞잡았다.

그꼴을 본 세리아가 레이를 타박했다.

"레이, 지켜야 해. 예의."

"히잉."

레이가 입을 삐죽 내밀며 앙탈을 부리자 세리아가 욕구를 참지 못하고 레이와 뺨을 조물딱거렸다.

"완전 귀여워. 우리 조카."

"..."

디오리카는 뒷목이 뻐근해짐을 느꼈다.

세리아의 찐 조카라는 녀석, 누울 자리 보고 다리 뻗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눈치가 빠른 건지 없는 건지...'

속으로 혀를 찬 디오리카가 입을 열었다.

"...레이, 자네의 이름은 한번 들었네. 자네가 지닌 실력과 자신의 근원이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알겠군."

"실력이요?"

"컨퍼런스 거리에서 스콰이어 다섯을 때려눕혔잖은가. 꽤 화제가 되었었네."

사실 반쯤 거짓말이었다.

황실 마탑 교수 대부분은 스콰이어 간의 주먹다짐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단지 제플린이 X 등급의 물건을 거저 준 스콰이어가 있다기에 관심을 가졌을 뿐이었다.

디오리카는 제플린이 노망이라도 났나 했는데, 이제야 답을 알 수 있었다.

'제플린, 이 사람 아주 뱀 같은 작자였구만.'

어디서 레이가 세리아가 아끼는 혈육임을 파악하고 일을 꾸민 듯했다.

레이의 호감을 사 세리아와의 끈을 만든 후, 발레리우스의 미궁에서 습득한 아티펙트를 연구할 기회를 얻어볼 심산이었을 것이다.

'쯧쯧. 평소에는 그리 깐깐하고 고결하게 굴더니, 속이 시커먼 건 다른 놈들이랑 마찬가지였군.'

고결한 장인이라 불렸던 제플린의 평판이 억울하게 깎여나가는 순간이었다.

디오리카는 동료 교수들과 제플린을 씹을 생각에 즐겁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고모님께서 자네를 가르쳤다면, 나이에 비해 좋은 실력을 갖췄음이 이해가 가네."

이야기를 엿듣던 로필렌이 속으로 비웃었다.

'멍청한 놈. 누가 누굴 가르쳐?'

하르시아가 세리아에게 배울 검술이 어디 있겠는가.

어처구니 없는 개소리였다.

차라리 세리아가 하르시아에게 검술을 배운 덕에 혁혁한 위명을 세울 수 있었다는 게 더 말이 됐다.

디오리카나 로필렌이나 헛다리를 짚은 건 마찬가지였지만, 레이와 세리아는 별말 없이 자리를 지켰다.

잡담을 조금 더 늘어놓은 디오리카가 본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알레시아님. 외설적인 소설을 마탑에 반입해 문제를 일으켰던 건은... 묻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귀족들의 반발이 있긴 할 터다.

허나 세리아가 레이와 알레시아에게 상당한 호의가 있음을 확인한 이상 세리아의 의중을 존중해야 했다.

'이딴 일로 고모님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다.'

알슈테인 가는 세리아를 양녀로 들임으로써 미궁에서 회수한 아티펙트의 지분을 더 크게 주장할 수 있었고, 로커스트를 토벌한 영광까지 나누었다.

더군다나 세리아는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으리라 평가받는 천재 검사였다.

늦게 들인 양녀랍시고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도리어 알슈테인 가에서 세리아의 발언권은 꽤 큰 편이었다.

"약간의 잡음은 있겠지만... 고모님이 신경 안 쓰실 수 있도록 제 선에서 처리하겠습니다. 여기 물증도 있으니, 다른 귀족들도 계속 고집만 부릴 수는 없을 겁니다."

달가운 소식에 알레시아가 장부를 품에 안으며 기뻐했다.

"과연 장부를 꼼꼼히 작성한 보람이 있구나!"

스스로가 대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알레시아를 레이가 도끼눈을 한 채 쳐다봤다.

디오리카가 목을 가다듬으며 분위기를 환기한 후 로필렌에게 손짓했다.

"로필렌 교수의 계약 각인은 이틀 안에 진행될 예정입니다. 로필렌 교수가 잘 협력해준 덕분에..."

디오리카는 말을 하다말고 로필렌을 위아래로 살폈다.

로필렌은 팔짱을 낀 채 턱을 치켜들고 디오리카를 내려보고 있었다.

디오리카는 이년이 미쳤나 싶었다.

'이년이 뭘 믿고 이렇게 목이 뻣뻣하지?'

아직 황실 마탑을 벗어나지도 못했다.

상식이 있다면 벌써부터 이러면 안 됐다.

디오리카가 째려보자, 로필렌은 한쪽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도리어 디오리카를 도발했다.

'내 뒷배가 하르시아 님이다, 병신아.'

하르시아 님이 옆에 계시는데 황제가 두려울쏘냐.

황제 할애비가 와도 꿇릴 게 전혀 없었다.

디오리카는 당장이라도 책상을 엎어버리고 싶었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화를 꾹꾹 눌러담았다.

"계약 각인 과정이 끝나면 로필렌은 정식으로 교수 직위를 내려놓게 됩니다. 알레시아 님이 영지로 귀환하실 때 동행시키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대답은 레이의 입에서 나왔다.

일개 스콰이어가 주인 허락도 없이 함부로 입을 놀리다니.

경을 칠 일이었으나 다들 조용했다.

알레시아도 젠킨슨도 레이의 잘못을 지적하긴커녕 레이가 대표 노릇 하는 걸 은연중에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디오리카는 이게 맞나 싶었지만.

여기서 대화를 질질 끌어봤자 골치만 더 아파질 것을 직감했기에 빠르게 자리를 마무리했다.

*

디오리카와 상담을 마친 레이가 세리아의 어깨 위에 올라탄 채 본관 밖으로 나왔다.

레이에게 목마를 해준 세리아는 썩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몸을 좌우로 흔들고는 했다.

로필렌의 레이가 펼치는 어린 아이의 연기에 깊게 감명받은 후 먼저 자리를 떴다.

만족할 만큼 건방을 떤 레이는 세리아의 어깨 위에서 슬금슬금 내려왔다.

세리아가 아쉽다는 듯 레이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고 들어 올려 당겼다 밀었다를 반복했다.

한참 후 레이를 지면에 내려 놓은 세리아가 품을 뒤적이더니 종이에 둘둘 말려져 있는 길쭉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거 선물."

"이게 뭐예요?"

"라푸마. 약재야. 키 크게 해주는."

"크흐..."

레이가 감격한 얼굴로 세리아를 바라봤다.

세리아가 슬그머니 다시 손을 뻗어오자 레이는 칼같이 한 발자국 물러났다.

비행기랑 목마는 충분히 즐겼다. 지금 잡히면 무조건 10분은 못 내려왔다.

레이는 당장이라도 약재를 갈아 입에 넣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이런 최고급 약재는 마나를 머금고 있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잘못 먹었다가 코어에 마나 늘어나면 그대로 비명횡사할 수도 있었다.

'리실로테가 남겼다는 안배를 믿어봐야겠네.'

유학 기간도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

세리아가 마탑으로 와준 덕분에 자잘한 문제도 해결되었고 눈치 볼 일도 줄었다.

유학을 잘 마치고 백작령으로 귀환하는 길에 리실로테의 안배를 찾아가 보면 되었다.

키가 클 생각에 히죽이던 레이가 이내 표정을 굳혔다.

어찌저찌 사건을 잘 마무리하긴 했지만 세리아가 없었다면 큰일 날 뻔 했다.

급격히 주름이 늘어나는 레이의 미간을 보고 알레시아가 슬금슬금 발을 뺐다.

레이가 알레시아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아가씨 일로 좀 와보세요."

"나, 나는 지금부터 바쁜 일이 있구나아..."

"야이씨, 일로 안 와?"

"우아아악! 펜리르! 도와다오!"

늑대 정령을 타고 도망치는 알레시아를 레이가 이를 악물고 쫓아갔다.

귀환 (2)

72화

"으우으으..."

침대에서 일어난 알레시아가 불룩 올라온 정수리를 매만지며 울상 지었다.

온 머리가 혹에 뒤덮인 탓에 잠자리에 눕고 나서도 한참을 낑낑 앓아야 했다.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거늘..."

어제 저녁에 펜리르를 타고 냅다 도망친 알레시아는 결국 레이에게 붙들렸다.

레이가 검을 뽑아드는 순간 펜리르가 거품을 물며 배를 까뒤집었기 때문이다.

펜리르는 정령 중 몇 안 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였다.

피닉스도 레이를 보면 기겁하는 건 마찬가지였기에, 결국 뒷덜미를 붙잡힌 알레시아는 얄짤없이 정수리를 내주었다.

"우울하구나아..."

알레시아가 축 처진 얼굴을 했다.

레이에게 얻어맞은 꿀밤이야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레이가 워낙 요령 좋게 때린 덕에 혹만 크게 났을 뿐 머리가 울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알레시아는, 하루아침에 친구와 권력을 모두 잃었다는 사실에 침통해 했다.

멜리를 시작으로 음란 서적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자마자 다른 귀족가 영애들은 알레시아를 빠르게 손절했다.

처음엔 자기가 먼저 책을 빌리겠다고 디저트까지 가져다 바쳐 놓고는 입을 싹 닦은 것이다.

"세상은 참 잔혹하구나..."

알레시아가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숙소를 나섰다.

황실 마탑에 처음 발을 들였던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친구라 부를 사람은 플로리아 하나 남았고, 교수들의 관심 또한 예전만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어깨를 축 늘어트린 알레시아가 약속을 잡아 놨던 교수를 찾아 황실 마탑 본관에 들렀다.

"으음..."

본관에 들어서자마자 복도를 걷고 있던 멜리와 눈이 마주쳤다.

알레시아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려는데, 멜리가 깜짝 놀란 얼굴로 다가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어머! 좋은 아침이에요, 알레시아 양. 수업 때문에 오셨나요?"

'...갑자기 왜 친한 척을 하는 것이냐?'

알레시아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고 있자 다른 귀족가 영애들도 알레시아에게 다가와 친한 척을 했다.

엊그제까지 인사도 안 받아주던 귀족가 영애들의 태세 전환에 알레시아는 잠시 혼란을 느꼈다.

'설마 또 책을 빌리려 하는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

그 난리를 겪고도 또다시 책을 빌릴 만큼 귀족가 영애들의 간덩어리가 비대하진 않았다.

고민하던 알레시아가 얼마 안 가 답을 찾았다.

'나의 기사 덕분이로구나!'

레이의 존재는 본래 알레시아의 오점이었다.

알레시아 본인은 그리 여기지 않았지만, 알레시아를 향한 추문의 원인은 항상 레이였다.

허나 어제를 기점으로, 레이가 사실 세리아의 혈육이었으며, 레이에게 함부로 검을 들어댔던 기사가 머리부터 벽에 처박혔다는 소문이 빠르게 번졌다.

세리아는 젊은 나이에 대단한 공로를 쌓은 기사이자 알슈테인 가의 실세 중 한 명이었다.

레이는 그런 세리아가 아끼는 조카였고, 레이는 자주 알레시아 곁을 지켰다.

이를 좀 극단적으로 해석하면.

알레시아에게 밉보였다가 알슈테인 가와의 사이까지 틀어질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귀족가 영애들이 허겁지겁 친한 척을 한 건 그 때문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알레시아가 탄식했다.

'이게 귀족들의 정치로구나!'

참으로 뻔뻔한 태도가 아닐 수 없었다.

하루 만에 가면을 바꿔 쓰고 이토록 염치없게 굴 수 있다니.

범부였다면 충분히 환멸을 느낄만한 상황이었지만.

알레시아는 귀족 사회가 지닌 천박한 일면을 대담하게 받아들이고 이용해먹기로 했다.

"입이 좀 심심하구나!"

"어머, 제가 자리를 빌려 다과를 준비해 놓도록 할게요."

"저도 그 자리에 함께해도 될까요?"

"이번에 동부에서 공수해 온 찻잎이..."

자신의 말 한마디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귀족가 영애들을 보며 알레시아는 흡족하게 웃었다.

남은 유학 생활, 나름 풍족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

몇 번이고 주변의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로필렌이 개인 연구실의 문을 열었다.

결계를 중첩시켜 공간 왜곡장을 통과하자, 앳된 소년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로필렌이 곧장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르시아 님을 뵙습니다."

"일일이 예의를 지킬 필요는 없다. 특히 남의 눈이 있을 법한 곳에선 더더욱."

레이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로필렌은 살짝 고개를 들어 레이를 살폈다.

세계의 구원이라는 거대한 짐을 짊어지고 있는 탓일까.

레이의 얼굴 위엔 어스름하게 내려앉은 고단함이 흉터를 타고 번져가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가, 하루 전만 해도 세리아에게 붙잡혀 애새끼마냥 애교를 떨어댔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로필렌은 일종의 경외감을 느꼈다.

'과연 역사에 새겨진 영웅이란 말인가.'

만인에게 영웅으로 추앙받던 하르시아다. 그에 상응하는 자아와 자존심을 지니고 있을 터다.

헌데도 필요에 따라 철없는 애새끼 흉내까지 서슴없이 감수한다.

가히 두렵고 경이로운 인물이었다.

"오늘 자로 계약 각인의 조율을 완료했습니다."

로필렌은 무릎을 굽힌 채 서클에 새긴 계약 각인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황실 마탑과 도중에 연을 끊은 마법사는 타인에게 지식을 전수하는 것이 금지된다.

허나 로필렌은 가정 교사직을 수행하기 위해 귀족가에 고용되었기에 이에 관해 세세한 조정이 이루어졌다.

"기초적인 마법 지식은 제약 없이 전수 가능합니다."

다만 본격적으로 마법을 가르치려면 제자들 또한 로필렌과 계약 각인을 맺어야 했다.

로필렌에게 전수받은 지식을 다른 이와 공유할 수 없도록 강제하는 계약 각인이었다.

"제가 지닌 셀로미어의 용량을 고려하면... 정식 제자로 들일 수 있는 인원은 기껏해야 한 명입니다."

"한 명이면 충분해."

"제게 맡기실 아이의 신원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디나르 산 레전드리 고아다."

"...네?"

로필렌이 얼빠진 목소리로 되묻자 레이가 낮게 웃었다.

레전드리 등급이 책정된 유일한 고아, 루나.

황실 마탑에서도 수재라 불리는 이들을 두루 살펴본 레이는 자신의 등급 책정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가서 직접 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하르시아 님."

"로필렌."

허리를 숙인 레이가 로필렌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허락할 때까지, 날 하르시아라 칭하지 마라."

"...주의하겠습니다."

"지금 내가 지닌 신분에 맞게 대하라."

"알겠습니다."

몸을 일으킨 레이가 창밖을 바라봤다.

하늘 높게 솟은 오벨리스크가 시야에 온전히 들어왔다.

"내게 충성하라, 로필렌."

그리하면.

"오벨리스크에 묶여있던 모든 지식을, 너와 나누겠다. 하늘 아래 모든 마법사가 염원하는 리실로테 레코드까지도."

"따르겠습니다, 대영웅이시여."

로필렌의 고개가 더욱 깊게 숙여졌다.

*

레이를 포함한 필립스 백작가 사람들은 얼마 남지 않은 유학 기간을 편하게 보낼 수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레이를 어깨 위에 태우고 돌아다닌 세리아 덕분이었다.

단기 유학이 끝날 때쯤, 황실 마탑 관계자가 유학 기간 연장 제의를 넌지시 알레시아에게 권했다.

물론 알레시아는 거절했고, 그렇게 단기 유학 종료 날짜가 다가왔다.

귀환하는 길에도 필립스 가와 오시리스 가는 함께하게 되었다.

며칠 동안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하기 바빴던 알레시아는 마탑을 떠나는 시간에 간신이 맞춰 마차 앞에 나타났다.

레이가 알레시아를 보고 눈가를 좁혔다.

한동안 세리아와 함께하는라 알레시아를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는데, 못 본 새 덩치가 꽤나 불어 있었다.

"알레시아 님."

"왜 부르느냐?"

"살쪘죠?"

"...!"

입을 쩍 벌린 알레시아가 황급히 부정했다.

"그, 그럴 리가 없잖느냐!"

"아니 얼굴부터 옆구리까지 아주 온몸에 살이 포동포동 올랐구만."

"레이! 나를 모함하지 말거라!"

"쯧쯧, 그러게 단 음식 좀 적당히 얻어드시지."

"으그극..."

안 그래도 근래 들어 허리를 조이는 끈이 짧아졌음을 눈치챘던 알레시아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부들부들 떨었다.

레이가 빵빵하게 올라온 알레시아의 볼살을 바라보다 한숨 쉬었다.

"그렇게 자꾸 무게 늘리시면 펜리르 허리 나갑니다."

"그만 놀리거라! 그리고 나의 정령은 그리 연약하지 않도다!"

씩씩댄 알레시아가 실체화한 펜리르를 타고 레이를 휙 지나쳤다.

레이가 착잡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백작령 돌아가면 검술 연습부터 다시 시켜야겠네..."

한편 마중을 나온 황실 마탑 수석 교수 디오리카가 레이와 마지막 악수를 나누었다.

"다음에 또 보세."

"그동안 신경 써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고모님의 찐 조카에게 그 정도는 해드려야지."

농담 아닌 농담을 건넨 디오리카는 마차를 한 번 둘러보곤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유익한 기간이 되셨길 바랍니다. 살펴 들어가십쇼."

다들 각자의 신분에 맞춰 디오리카의 인사를 받았다.

레이 또한 고개를 숙이고는 마차 문을 열었다가 깜짝 놀랐다.

"우악...!"

정체불명의 손아귀가 레이의 목덜미를 붙잡아 마차 안으로 잡아당겼다.

레이가 저항도 못 하고 마차 안으로 빨려 들어간 후 마차 문이 덜컹 닫혔다.

그꼴을 보며 디오리카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뭐, 괜찮겠지.'

세리아는 필립스 백작령까지 레이를 마중한 후 곧장 돌아온다고 하였다.

오랜만에 만난 조카이니 마지막까지 신경 써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이해가 갔다.

세리아는 조카를 마중 나가는 사실이 가문에 알려지면 호위니 뭐니 귀찮게 굴거라며 싫어했다.

때문에 자신이 황실 마탑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조치해달라고 부탁했고, 디오리카는 곤란해하면서도 세리아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좋은 여행되시길."

디오리카는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

"..."

싸구려 목제 탁자를 앞에 두고 앉은 세타가 침묵한 채 생각에 잠겼다.

필립스 백작 영애와 오시리스 백작 영애가 황실 마탑을 떠났다는 정보가 방금 들어왔다.

그들은 황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황실 마탑 소속의 마법사, 로필렌을 영입했다.

로필렌은 불법적인 연구를 시도하다 발각되어 징계 절차를 밟고 있던 마법사였다.

황태자는 그들이 황실의 권위를 짓밟았다 여기며 분노했고, 그 배반자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제는 암묵적으로 황태자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번 작전에 투입되는 황실 특임대 소속 로얄가드, 브리즈는 앞뒤 정황을 그렇게 알고 있었다.

'황태자의 명이니만큼, 충실히 이행하겠지.'

브리즈가 적을 두고 있는 그레나딘 가는 중앙에 진출하기엔 그 힘이 한미한 가문이었다.

때문에 황태자에게 줄을 대기 위해 열성이었는데, 브리즈는 이번 일을 황태자의 눈에 띌 기회라고 여겼다.

'다만 전력 차가 너무 나는군.'

세타는 황실과 계약 각인을 맺은 은색 마탑 출신 마법사 둘에 황실 특임대 소속 로얄가드 하나를 이번 일에 투입했다.

그에 반해 백작 영애 일행들의 전력은 높게 쳐줘야 중급 정령사 둘에 엑스퍼트 급 기사 서넛이었다.

압도적인 전력 차였다.

영애들을 지키는 기사들이 아무리 발악해봤자 브리즈의 갑주에는 흠집 하나 못 낼 확률이 높았다.

너무 완벽하게 그들을 학살해서는 도리어 곤란했다.

세타가 장갑 낀 손으로 잘려나간 갑주 조각을 매만졌다.

갑주 조각의 재질과 제련 방식에서 그 출처가 황실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일 처리를 돕고, 추후 조사가 빠르게 진행될 수 있도록, 충분한 흔적을 남기고 와."

세타가 뒤에 서 있던 남자에게 갑주 조각을 건넸다.

황실 특임대 소속 흑색 요원 '마우스'.

남자의 신분이었다.

"나야 뭐 흑색 요원이니 무사한다 쳐도..."

마우스가 갑주 조각을 품에 집어넣으며 세타의 맞은편에 앉았다.

"당신은 아닐 텐데."

황실 특임대가 백작 영애들과 로필렌을 제거한 이후 한바탕 태풍이 불어 닥칠 터다.

최소한의 경고와 의견 조율 과정도 없이 귀족을 공격하고 학살한 사건은 쉽게 덮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황태자가 월권행위를 저질렀고 아랫것들은 충성 경쟁 탓에 황제에게 보고도 올리지 않고 참사를 일으켰다.]

이야기가 그런 식으로 흘러가면 세타 또한 책임을 피할 수가 없다.

도리어 참사를 일으킨 주요 책임자로 지목될 터다.

"쓰임새가 다한 말은 버려지는 법인데. 이번 일이 끝나고도 폐하께서 과연 당신을 지켜 주시려나?"

"닥쳐."

황제가 황태자를 찍어내기로 작정한 이상 이번 일은 공론화될 것이다.

그럼 세타는 최소로 잡아도 섬에 몇 년은 갇혀 있어야 된다.

허나 황제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목숨보다 더한 것을 잃게 될 게 뻔했다.

세타는 조급함을 숨기려 노력하며 마우스를 마주 봤다.

"현장에서 판단은 네게 맡기지. 하지만 백작 영애들 측 생존자는 남기지 마."

피해자는 말이 없는 상황이 주무르기 더 쉽다.

고개를 끄덕인 마우스가 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지원은 더 없나?"

"재미없는 농담이군."

마우스를 포함하면, 이번 작전에 투입되는 그래듀에이트만 둘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황실에서 하사한 온갖 진귀하고 강력한 검술과 장비로 무장 되어 있었다.

어쭙잖은 엑스퍼트 급 무인이라면 수십이라도 압도할 전력이었다.

"지원은 더 없어. 무운을 빌지."

"이것 참 서운하네."

자리에서 일어선 마우스가 짓궂은 웃음과 함께 재차 물었다.

"그래도 만약이란 게 있잖아. 혹시라도 우리가 역으로 사냥당하는 신세가 되면, 어떻게 해야 돼?"

"...전부 황태자가 시킨 일이라고 외치고 자결해."

"알았어. 새겨두지."

세타가 고개를 저었다.

마우스가 항상 입에 담는 저 시답잖은 농담에 어울려주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일지 몰랐다.

귀환 (3)

73화

알레시아와 플로리아의 일행은 황실 마탑에 도착했을 때에 비해 그 숫자가 반절로 줄어 있었다.

사용인들 중 일부는 뒷정리를 위해 황실 마탑에 남았고, 또 몇 명은 미리 출발하여 아가씨들이 머물 숙소를 점검하는 등 자잘한 일 처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핵심적인 호위 전력은 대부분 알레시아와 플로리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황실 마탑을 출발한 마차는 며칠 간의 여정 끝에 글리비아스란 도시에 도착했다.

비교적 황도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고 그 크기도 거대했기에 필립스 백작령과는 견주기 미안할 만큼 잘 발달된 도시였다.

레이는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빠르게 마차를 탈출했다.

"흐우... 살겠다."

마차를 타기만 하면 세리아의 품에 붙잡혀 있어야 했다.

땀이 차서 찝찝할 지경이 되어서도 세리아는 레이를 잘 놓아주지 않았다.

그나마 마차 밖에서는 세리아의 손길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세리아는 조카를 배웅하는 자리까지 가문의 간섭을 받기 싫다며 디오리카의 도움을 받아 몰래 황실 마탑을 빠져나왔다.

밖에서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면 디오리카가 곤란해졌기에, 레이를 목마 태우고 돌아다니지는 못했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빠르게 골라야겠네.'

글리비아스에선 하루를 머물기로 했다.

앞으로 복귀 경로를 고려하면 글리비아스 만큼 발전된 도시를 두 번 만나기는 힘들었다.

애들 선물 사갈 거면 여기서 마저 사야 했다.

레이는 일단 대장간부터 들렀다.

"이거 얼마입니까?"

"어찌 알고 찾아왔는지 모르겠으나 손님은 운이 좋은 줄 아시오. 거기 전시된 검은..."

"얼마냐니까."

"본래 70골드는 받아야 하지만..."

익숙하게 바가지를 씌우려는 대장장이를 상대로 레이 또한 익숙하게 무력시위를 시작했다.

깡! 깡! 깡!

검 세 자루가 순서대로 반 토막이 나서 바닥을 굴렀다.

레이가 한참을 짧아진 검을 살랑살랑 흔들며 대장장이를 마주 봤다.

"야, 안 부러지는 걸로 가져와."

"...몇 자루 필요하쇼?"

"세 자루."

대장장이가 검을 새로 꺼내오자 품질을 확인해 본 레이가 삼백 골드를 내밀었다.

얼추 적정한 가격이었기에 대장장이는 떫은 얼굴로 돈을 받았다.

검집까지 손수 골라 챙긴 레이가 고급 필기구를 판매하는 가게를 찾아갔다.

보통 귀족이나 부유한 평민 계층이 쓰는 도구라 가격이 만만치 않았지만, 수십 골드면 괜찮은 물건을 구할 수 있었다.

물론 바가지를 씌우려는 시도는 있었다.

레이가 조금 어루만져주자 고분고분해졌다.

필기구 수십 세트를 산 레이가 장신구 가게를 앞에 두고 침음을 흘렸다.

"흠."

장신구를 선물해주면 좋아할 아이들이야 많았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사치품인 장신구는 남들의 표적이 될 확률도 높았고 잃어버리기도 쉬웠다.

괜히 장신구 쥐여줬다가 문제 생기면 레이만 골치 아팠다.

'카렌은, 음... 예외지.'

카렌은 성격도 꼼꼼하고 자기 몸 지킬 실력도 갖추고 있다. 그러니 목걸이 하나쯤은 선물해도 괜찮을 거라고, 뒤늦게 이유를 가져다 붙였다.

레이는 자신이 은근히 카렌을 편애하고 있다는 건 자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카렌은 고아 가챠 돌리다 처음 뽑은 레어였다.

오랜 가챠 끝에 카렌보다 성능 좋은 고아도 수집할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처음 뽑은 레어에 애착이 더 갔다.

"이 정도면 되겠지."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바리바리 싸든 레이가 알레시아가 머물고 있을 숙소로 향했다.

레이는 길을 따라 걸으며 혼잣말을 했다.

"뒷문을 만들어 놓은 진짜 이유가 뭐야?"

[리실로테 님은 예언자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백도어는 언젠가 써먹을 일이 있으리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만들어 놓으신 겁니다.]

"그러셨겠죠."

비꼬는 듯한 레이의 음색을 듣고 아프텔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허나 600년이 지난 현재까지 사용 가능한 단 하나의 백도어는, 리실로테 님이 명백한 목적을 지니고 안배해두신 장치입니다.]

"나와 같은 존재가 출현하는 때를 대비하신 건가?"

[그렇습니다.]

"하하..."

레이가 마른 웃음을 삼켰다.

불알 친구 놈이 읽었던 소설 속에서 리실로테의 안배를 취한 자가 있다면, 과연 누구였을까.

마왕에게 죽었던 용사가 안배의 주인이었을까?

만약 용사가 리실로테의 안배를 취했다면, 공간검을 어떻게 익힐 수 있었던 거지?

'어디 하르시아가 마련한 안배라도 남아있던가..."

그게 아니라면.

위기에 빠진 제국이 재능 좀 있어 보이는 아이들을 무식하게 긁어모아 공간검을 익히라고 강요했을 수도 있다.

레이는 리실로테의 안배를 자신이 취해도 되는가에 대해 고민했다.

'나는 용사가 아니야. 나는 정점에 달하지 못해.'

엄살이 아니었다.

레이는 소프트웨어적인 측면이 명백히 부족했다.

공간검의 부하를 버티고, 머리에 각인된 검술을 고스란히 재현할 수 있는 육체가 있었지만, 그 이상 나아갈 타고난 감각이 부족했다.

함부로 리실로테의 안배를 취했다가 용사의 기연을 뺏어 먹은 꼴이 되면 골치 아팠다.

'그럼 어떡할까.'

재능 좀 있어 보이는 애들 앉혀 놓고 공간검을 익힐 수 있나 실험이나 해볼까.

요하나가 첫 번째 실험 대상이 될 거다.

코어의 부하를 버티지 못하고 요하나가 죽으면, 과거 제국이 그러했듯 적합자가 나올 때까지 룰렛이라도 돌려야 할 터다.

퍼억!

대로변을 걷던 레이의 몸이 한차례 휘청였다.

반대편에서 다가오던 남자가 갑자기 몸을 틀어 레이를 밀친 탓이다.

레이의 품에 가득했던 짐이 땅에 우르르 쏟아졌다.

이때를 노렸다는 듯 골목에서 사람들이 무더기로 달려나왔다.

개중에는 꽤 앳돼 보이는 아이도 있었다.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바닥에 떨어진 레이의 짐에 손을 뻗으려던 순간.

검이 뽑혀 나왔다.

한 차례 검광이 번쩍이고, 레이에게 접근했던 모든 이들의 손발이 잘려나갔다.

레이는 자신과 부딪친 남자의 턱을 붙잡아 있는 힘껏 쥐었다.

이빨이 저들끼리 갈려나가며 잇몸을 뭉갠다.

비명이 울려 퍼지는 대로변 한가운데서 레이가 중얼거렸다.

"뭐, 안배든 뭐든... 내가 먼저 익혀 보고 가르쳐 주면 되겠지. 안배가 마련된 장소가 정확히 어디라고 했지?"

[데네프르 강 서쪽에 위치한 거대한 협곡에 리실로테 님의 안배가 잠들어 있습니다. 근처로 가시면 정확한 위치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실로테의 안배를 취하기로 결정한 이상 미루지 않고 빠르게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

"데네프르 강 근처에 들렸다 가자고?"

젠킨슨이 세리아의 품에 갇혀 있는 레이를 향해 의아함을 드러냈다.

데네프르 강은 글리비아스 동쪽에 흐르는 강이다.

데네프르 강 주변엔 거대한 협곡이 존재했는데, 여행객들이나 간간이 찾는 곳이었다.

"레이, 갑자기 이러면 곤란해."

이미 숙소 예약도 다 잡아 놨다.

갑자기 이동 경로가 틀어지면 여러모로 곤란했다.

젠킨슨은 연거푸 불만을 토해내려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살기에 옆을 돌아보았다.

로필렌이 얼굴에 거친 주름을 만들어 내며 젠킨슨을 노려보고 있었다.

젠킨슨은 로필렌의 도전을 마다 않고 눈싸움을 시작했다.

둘은 동시에 생각했다.

'이 새끼는 뭘 믿고 자꾸 깝치지?'

로필렌은 하르시아에게 개기는 젠킨슨이 이해 안 갔고, 젠킨슨은 이제 막 식객이 된 주제에 까부는 로필렌이 이해 안 갔다.

오랜 눈싸움 끝에 결국 로필렌이 먼저 시선을 내리깔았다.

허나 로필렌은 눈싸움에 패배했음에도 만족스럽게 웃었다.

레이의 정체를 아는 자는 이 자리에서 로필렌 혼자였다. 그로부터 찾아오는 우월감이 로필렌을 들뜨게 했다.

젠킨슨은 홀로 킥킥대는 로필렌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한 가닥 하는 마법쟁이 놈들은 죄다 정신병자군.'

신경전이 끝난 것 같자 레이가 세리아의 품에서 버둥대며 양해를 구했다.

"살짝 돌아가면 되잖아요. 이동하는 길에 잠깐 구경하고 간다고 생각해주세요. 언제 또 거길 가보겠어요."

열심히 움직이면 대충 일정에 맞출 수 있긴 하다.

세리아까지 동행하고 있던 탓에 레이의 발언권은 더욱 강력했다.

결국 데네프르 강을 살짝 돌아가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

"그래서 대체 무슨 꿍꿍이냐?"

데네프르 강으로 가는 길에 젠킨슨이 불쑥 물었다.

레이가 팔찌를 매만지다 말고 실소했다.

주변을 돌아보니 다들 궁금한 모양새였다.

동행하는 이상 완전히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나 레이는 적당히 둘러댔다.

"황실 마탑에서 보물 지도를 하나 발견해서요. 보물 찾으러 가요."

"농담...은 아닐 테고."

젠킨슨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궁 지도라도 주운 거냐? 진품이라 해도, 함부로 발을 들이밀었다간 비명횡사할 거다."

"주의하겠습니다."

한참을 가다 보니 마부가 말을 멈추고 곤란해했다.

"이 이상은 길이 닦여있지 않아 마차를 사용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

마부의 이야기를 들은 알레시아가 레이에게 물었다.

"레이! 미궁까지 얼마나 남은 것이냐?"

"음..."

아프텔을 슬쩍 바라본 레이가 답했다.

"지금 속도로 30분 정도 더 걸린다네요."

"그럼 내게 맡기거라!"

실체화된 펜리르와 피닉스가 바람을 일으킨다.

바람에 휩싸인 바퀴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퀴를 감싼 바람이 충격 흡수 장치처럼 작용하여 마차가 거친 지면을 수월하게 지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알레시아가 목에 힘을 주자 레이가 한마디 했다.

"아가씨, 목에도 살쪘어요."

"살쪘다고 그만 놀리거라!!"

부들대는 알레시아를 뒤로 하고 레이가 마부 곁에 앉아 직접 방향을 지시했다.

협곡 사이로 마차를 몰아 얼마쯤 들어가니... 비슷한 풍경이 계속 이어졌다.

마차를 세운 레이가 머리를 긁적였다.

"음... 도착한 것 같은데요?"

마차에서 내린 젠킨슨이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없군."

젠킨슨의 말마따나 협곡 근방에서 특별한 구석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레이가 길 안내를 해준 아프텔을 빤히 바라봤다.

아프텔이 날카로운 경사를 그리는 협곡의 절벽으로 다가갔다.

반투명한 아프텔의 손이 절벽을 파고드는 순간 굉음이 울렸다.

쿠웅-!!!

"?!"

갑작스러운 지진과 함께 절벽의 하단이 내려앉았다.

피닉스가 날개를 흔들어 먼지가 걷어내자 절벽 하단에 작은 입구가 드러났다.

젠킨슨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레이를 바라봤다.

"나는 네놈이 어디서 사기라도 당한 줄 알았다."

"제가 사기를 쳤으면 쳤지 당할 놈입니까, 마스터."

"종자놈아, 그건 자랑이 아니다."

마차 창문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세리아가 물었다.

"들어가? 같이?"

"아니요. 초대받은 사람이 저 하나인지라."

젠킨슨이 레이를 제지했다.

"위험하다. 특히 이런 정체도 모를 미궁은..."

"괜찮아요, 마스터. 제가 이런 일에 흰소리는 하지 않잖습니까."

"..."

모두를 둘러본 레이가 절벽에 드러난 입구를 향해 한 발 내디뎠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레이, 잠...!"

후욱!

레이가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레이의 모습이 통째로 사라졌다.

'결계...?!'

깜짝 놀란 젠킨슨이 무심코 레이가 사라졌던 입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허나 그보다 빨리.

찬란히 빛나는 검기의 폭풍이 절벽에 내리꽂혔다.

콰가가가가가가강!!!

"?!!!"

검기의 폭풍에 휩쓸린 절벽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젠킨슨이 뒤를 돌아봤을 땐 멘데스와 아벤시오가 각각 알레시아와 플로리아를 챙겨 황급히 물러서고 있었다.

젠킨슨 또한 흥분한 말에 깔리기 직전인 마부의 멱살을 잡고 지면을 굴렀다.

반대쪽 절벽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던 브리즈가 눈살을 찌푸렸다.

'추적을 눈치채고 도주로를 만들어 놓은 건가? 아니면 미궁에 관한 정보를 듣고 확인하기 위해 들린 건가?'

만약 저 절벽 아래 장소가 견고히 건축된 미궁이라면 절벽 일부가 무너졌다 해도 내부는 멀쩡할 수 있다.

'일단 눈에 보이는 제국의 배반자들을 처리하고 확인해보면 되겠지.'

브리즈가 신호를 하자 대기하던 두 마법사가 지면에 손을 꽂아넣고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알레시아와 플로리아가 타고 왔던 마차를 중심으로 지면이 깊숙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브리즈는 절벽을 타고 미끄러져 협곡 사이에 착지했다.

마법사가 만들어낸 거대한 개미지옥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브리즈는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제국의 배반자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베어버릴 작정이었다.

허나 그 순간.

콰가가가가강!!

마법사가 위치한 협곡 위로 원반 형태의 빛무리 수십 개가 떨어져 내렸다.

폭격을 얻어맞은 탓인지 마법사가 발동시킨 마법이 흐트러진다.

그 찰나 지면에 반쯤 묻혔던 마차가 통째로 터져나갔다.

콰앙!!!

로브에 가려진 브리즈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박살난 마차 안에서, 한 여자가 선명한 검강이 맺힌 검을 들고 걸어나오고 있었다.

*

'이건...'

완전한 고요에 잠긴 레이가 주변을 둘러봤다.

아니, 둘러봤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못했다.

육체를 잃은 레이는, 그저 의식만이 남아 주변을 '인식'하고 있었다.

얼어붙은 세계를 마주한 레이는 깨달았다.

'여긴... 리실로테 레코드 안이군.'

귀환 (4)

74화

레이는 얼어붙은 세계 속에서 몸을 움직여봤다. 아무 감각이 없었다.

자기가 지금 무슨 꼴을 하고 있는지,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한숨 쉬는 상상을 한 레이가 주변을 다시 인식했다.

온도가 낮아짐은 대체로 분자 운동이 느려짐을 뜻하니, 결국 빙결 마법의 정점이 지금 갇혀 있는 모든 것이 정지한 세계였다.

단 한 번도 경험치 못했던 완벽한 적막에 레이는 생소한 공포를 느꼈다.

레이는 공포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머리를 계속 굴렸다.

이 공간을 벗어날 방법이 대충은 예상이 갔다.

다만 리실로테의 안배를 향한 힌트가 혹시 이곳에 있진 않았을까 싶어 한동안 자리를 지켰다.

허나 얼어붙은 세계는, 그저 고요했다.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시간?'

시간.

문득 떠오른 시간이란 키워드에 레이가 얼어붙은 세계에 다시 깊숙이 몸을 담갔다.

시간이 정지한 세계.

모든 물질이 극한까지 얼어붙은 세계.

그 두 세계를 구분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레이는 이 기묘한 공간 속에서 고민에 빠졌다가 고개를 저었다.

구분할 방법이 없다. 적어도 레이가 지닌 감각으로는.

허나 시간의 정지와 물질의 정지는 등가하는 개념이 아니다.

레이가 권능을 발현했다.

적막이 으깨지며 정체를 알기 힘든 고통이 영혼을 달군다.

대부분의 감각이 사라진 덕분에, 차라리 권능으로부터 더 직관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코어가 회전한다.

불세출의 천재, 하르시아가 창조해냈던 공간을 변질시키는 힘이 레이를 감싼다.

여전히 그 원리는 알 수 없다.

허나 이 얼어붙은 세계에 들어서고 나서야, 그 본질이 무엇인지 미약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츠즈즈즈즉!

세계는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 그저 자리를 지켰다.

허나 변화가 발생한다. 그 변화의 지점이 어디인가.

"아..."

레이는, '보았다.'

이 독특한 장소의 특성과 초월자가 내려준 권능이 맞물려.

4차원 시공간만을 한평생 살아왔던 인간이, 찰나의 순간 그 너머의 차원을 인식했다.

레이는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하르시아가 만들어 낸 것.

더 상위 차원으로 도약할 수 있는 힘.

도약 검기는 공간을 도약하는 검기가 아니다.

더 상위 차원으로 발을 들여, 4차원 시공간을 살아가는 생물들의 인지를 벗어났을 뿐이었다.

그걸 이제야 깨닫는다.

"하르시아 이 미친 새끼..."

4차원 공간에는 3차원 공간이 네 개 존재한다.

더 상위 차원으로 가면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레이가 환생한 이 세계는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는 존재와 접촉할 수단이 존재했다.

정령, 악마, 혹은 다른 무언가.

그들을 죽이기 위해.

하르시아는 더 상위의 차원으로 도약할 수 있는 힘을 창조해냈다.

"하..."

레이가 헛웃음을 토했다.

이게 과연 인간이 이뤄낼 수 있는 업적이란 말인가.

황당해서 감탄도 나오지 않았다.

트드드득!

얼어붙은 세상이 깨져 간다.

레이는 몸에 감각이 돌아옴을 느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레이는 출구 없는 하얀 방에 앉아 있었다.

어린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아? 네가 하르시아의 계승자?"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소녀가 레이에게 다가왔다.

소녀는 다리 아래까지 오는 금발을 질질 끌어가며 인상을 찌푸렸다.

"황족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잖아?"

"그래, 고추 달린 건장한 남자지. 그래서, 그쪽은 리실로테 님이 남겨둔 사념이라도 되시나?"

깔깔 웃은 소녀가 답했다.

"그냥 프로그래밍 된 데이터 쪼가리야."

"아, 그래. 쪼가리 양반."

레이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얼어붙은 공간에서 시간을 얼마나 보냈는지 알 수 없으니 여기서 최대한 빨리 벗어날 생각이었다.

바깥에서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을 게 뻔했다.

"리실로테 레코드 백도어 코드랑 계승자에게 남겼다는 안배 좀 받으러 왔어."

"그걸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근데 너 진짜 어떻게 살아있는 거야?"

"운이 좋았나 보지."

레이는 긴장을 조금 내려놓은 채 답했다.

코앞까지 다가온 소녀가 레이의 명치를 지긋이 바라보다 고개를 기울였다.

"와, 너 심장 엄청 튼튼한가 보다. 인간이 이걸 버티네?"

"하르시아도 버텼잖아."

"걔는 선조 중에 드래곤의 피가 섞인 혼종인데다 심장을 드래곤 하트로 강화했으니까 버텼지. 그러고도 꽤 아슬아슬했어?"

황가에 드래곤의 피가 흐른다는 전설이 설마 사실이었나.

눈을 깜박이던 레이가 문득 의문을 느꼈다.

"야, 쪼가리. 처음에 여자 이야기는 왜 나온 거야?"

황족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다.

소녀는 처음에 레이를 보고 그리 말했다. 막 리실로테 레코드를 빠져나왔을 땐 정신없어서 신경을 못 썼는데, 돌이켜보니 이상한 말이었다.

"아~ 여자?"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고민하던 소녀가 허공에서 의자를 뽑아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원래 기밀이긴 한데, 뭐 600년 가까이 지났으니 그냥 말해줄게."

"?"

"하르시아가 사용한 코어 말이야, 워낙 부하가 심해서 사용자의 심장이 버티질 못했거든. 그래서 다른 장기에 코어를 생성하는 실험을 진행했었어."

"..."

"예전부터 이런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어쨌든 최종적으로 그나마 적합하다고 판정받은 장기가 자궁이었단 말이야?"

"그래서 자궁에다 코어 만드는 실험을 진행하셨다?"

"응. 심장이 터지는 것보단 자궁이 터지는 게 낫잖아?"

미친년.

레이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실험은 성공했어?"

"부작용이 만만치는 않았어. 다들 불임은 기본에 한두 달도 못 버티고 내장이 파열되거나 하더라고. 그래도... 실험 성과는 괜찮은 편이었지."

"무슨 성과?"

"심장보다는 몸에 부하가 한참 덜 걸린다는 게 확인됐거든. 근데 코어를 컨트롤 하는 난이도가 심장에 있을 때에 비해 너무 높아져서 말이야, 그게 문제였어."

"자궁엔 심장처럼 피가 안 흐르니까."

"맞아. 마나를 다루는 센스가 극한까지 타고난 여자라면 얼추 제어가 가능할 것도 같았는데, 그때쯤 연구가 중지됐어. 인재 소모가 너무 크다고 황제가 지원을 다 끊었거든."

"..."

"제국이 벼랑 끝에 몰리면 그때나 연구가 다시 진행되지 않을까 싶어서, 언젠가 여길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면 황족 아니면 여자가 될 거라 생각했는데..."

의자에서 일어난 소녀가 레이의 명치를 콕 찔렀다.

"뭐,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그럼 뭐가 중요한데?"

"너 말이야, 단명할 거야."

레이의 눈가가 슬그머니 좁아졌다.

소녀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연거푸 입에 담으면서도 꽤 해맑아 보였다.

"심장이 꽤 튼튼하긴 한데, 그래 봐야 평범한 인간이잖아?"

"..."

"미리 말해주는데, 여기서 안배를 얻어가면 남은 수명도 절반 아래로 떨어질걸?"

소녀가 히죽거리며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서클을 만든다 해도 코어의 절대적인 부하를 줄여주진 않아. 심장이 버틸 수 있는 부하를 일시적으로 상승시켜줄 뿐이지. 결국 몸을 축내는 기술이야."

소녀가 발꿈치를 들어 올렸다.

간지러운 속삭임이 레이의 귓가를 타고 흘렀다.

"오래 살고 싶으면 그냥 돌아가는 게 어때? 꼭 네가 희생할 필요 없잖아."

"..."

"정 걱정되면 네 '역할'을 대신할 대체자를 직접 데려와. 찾아보면 하나쯤은 있지 않겠어?"

레이가 소녀를 내려보았다.

레이의 입꼬리가 소녀를 따라서 쭉 찢어졌다.

*

세리아는 무너진 절벽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

결계까지 존재하는 미궁이라면 내부 구조가 꽤 견고할 확률이 높았다.

당장은 절벽을 파헤치기보다 외부의 위협을 제거하는 게 먼저였다.

콰앙!

세리아가 내딛고 있던 지면이 으깨졌다.

짓푸른 폭풍이 사방으로 비산함과 동시에 세리아의 신형이 제자리서 증발했다.

섬광 하나가 유성처럼 꼬리를 그린다.

브리즈는 강렬한 압박을 느끼며 섬광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꽈앙!!!

"...!"

삽시간에 절벽까지 밀려난 브리즈가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의 외견과 실력, 장비 수준을 고려했을 때 추측되는 인물은 하나였다.

'세리아 알슈테인...?'

갑작스레 등장한 너무도 예상외의 인물에 브리즈는 당혹을 떨쳐내지 못했다.

이번 임무를 맡긴 세타는 알레시아의 일행 중에 세리아가 아끼는 혈육이 있다는 정보를 브리즈에게 고의로 누락했다.

또한 세리아가 레이와 동행했다는 사실은 일행들을 제외하면 디오리카만이 인지하고 있었다.

'대체 어째서...?'

혼란스러워 하는 브리즈를 향해 다시 섬광이 짓쳐 들었다.

그 틈을 타 젠킨슨은 빠르게 일행들의 역할을 나누었다.

"멘데스, 나와 함께 세리아 경을 지원한다. 아벤시오, 종자들과 함께 아가씨들을 지켜라."

명령권 가지고 자존심 싸움할 때가 아니었다.

멘데스와 아벤시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젠킨슨이 검기를 뽑아내며 로필렌에게 시선을 주었다.

"로필렌, 자리를 지켜라."

여러 의미가 함축된 지시에 로필렌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는 것으로 답했다.

알레시아가 종자들에게 붙잡혀 아벤시오 뒤로 끌려가며 외쳤다.

"젠킨슨 경! 나도 전투를 돕겠네!"

젠킨슨은 사양하지 않았다.

정령과 계약을 맺은 플로리아와 알레시아는 정면에 나서지 않아도 충분히 활약할 수 있었다.

"플로리아 님, 절벽 위의 마법사들을 견제해 주십시오. 알레시아 님, 피닉스를 활용해 주변을 정찰해 주십시오. 그리고..."

젠킨슨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당부했다.

"상황의 여의치 않을 시 두 분은 펜리르를 타고 이 지역에서 이탈하십시오."

중급 바람 정령 펜리르는 어지간한 말보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피닉스를 활용해 정찰을 마친 뒤라면, 적이 더 몰려온다 해도 몸을 뺄 수 있을 터다.

거기까지 계산을 마친 젠킨슨이 땅을 박찼다. 멘데스가 그 뒤를 따랐다.

저 앞에서 세리아가 브리즈를 향해 허큘러스를 철퇴처럼 내려치고 있었다.

콰앙!!

브리즈가 제자리에서 세리아의 공격을 받아냈다.

더럽게 무거운 일격이라 불평할 새도 없이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공방을 나눌 때마다 검강에서 떨어져 나온 마나의 파편이 사방으로 휘날린다.

강철조차 삽시간에 난자당할 그 위험천만한 폭풍 사이를, 세리아가 한 걸음 더 파고들었다.

"?"

도저히 허큘러스 같은 대검을 휘두를 간극이 아니다.

브리즈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드는 순간.

허큘러스가 자기 홀로 공중에 떠오름과 동시에 세리아의 허리춤에서 새로운 검이 뽑혀 나왔다.

다시 서로의 검격이 충돌한다.

카가가가각!!

지근거리에서 검강의 충돌은 서로의 살갗을 갈아먹었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섬광의 중심에서 세리아와 브리즈는 상대의 혈흔을 갑주에 새겼다.

거칠기 짝이 없는 세리아의 공세에 브리즈가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 찰나 세리아가 브리즈의 검을 아래로 쳐냈다.

브리즈가 중심을 다시 잡으려는 순간 허공을 유영하던 허큘러스가 떨어져 내렸다.

허큘러스의 모습은 기이하게 변형되어 있었다.

끝이 세 갈래로 나뉘어진 허큘러스는 브리즈의 팔을 강하게 옥죄더니 그대로 지면에 내리꽂혔다.

팔이 묶인 브리즈의 후방에서 젠킨슨과 멘데스가 뛰어들었다.

'이런.'

역시 기본 검술만으론 한계가 있었다.

결론을 내린 브리즈가 힘으로 땅에 박힌 허큘러스를 끌어당기며 후방을 향해 수십 가닥의 검기를 방출했다.

날카로운 검기였으나 두 팔이 허큘러스에 구속된 탓에 정밀하게 쏘아지지 못했다.

젠킨슨과 멘데스는 검기 다발을 무시하고 돌진을 계속하려 했다.

허나 그 순간.

검기의 궤적이 휘어졌다.

"...?!"

카가가가각!!

수십 가닥의 검기가 제각각 방향을 틀어 사방에서 쏟아진다.

젠킨슨과 멘데스가 황급히 검을 휘둘렀다.

세리아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자신에게 휘어져 들어오는 검기를 쳐냈다.

검기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발톱처럼 매서웠다.

'이건...'

유도 검기를 구현 가능한 검술 자체가 몇 존재하지 않았다만.

개중에서 이토록 정교하고 위협적인 검기를 방출 가능한 검술은 '아랑검'이 유일했다.

아랑검.

이름 높은 제국 검술 중 하나.

세리아는 과거에 한 번 아랑검을 견식할 기회가 있었기에 더더욱 몰라볼 수가 없었다.

"너, 뭐야?"

"..."

브리즈가 로브를 벗었다.

갑주를 검게 물들였던 위장이 지워진다.

갑주 위에 새겨진 마나회로가 번쩍이며 로얄가드에게 하사된 갑주의 성능을 완전히 드러냈다.

"세리아 알슈테인 경."

브리즈가 정중히 권했다.

"무슨 경위로 제국의 배반자들과 동행하시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깊게 묻지 않겠습니다. 자리를 비켜주실 수 있습니까?"

"..."

세리아의 검에 검강이 재차 피어올랐다.

브리즈가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

"황실의 집행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

콰앙!!!

브리즈의 머리 위로 화염구가 떨어져 내렸다.

마법을 쏘아냈던 로필렌이 흥분을 다스리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이, 이 미친놈들이..."

로필렌은 이번 기습이 기껏해야 자신을 노린 마탑의 독단쯤 될 것이라 생각했다.

헌데 황실이라니. 그도 모자라 로얄가드라니.

이 정신 나간 하극상을 앞에 두고 분노가 터져 나왔다.

"네놈들이 지금 누구에게 검을 들이댔는지 알고는 있는 것이냐?!"

귀환 (5)

75화

브리즈가 로필렌의 분노에 답할 새도 없이 세리아가 짓쳐 들었다.

아랑검의 사용자에게 거리를 내주면 안 됐다.

콰가강!!!

검이 맞닿는 순간 그 후폭풍만으로 절벽 일부가 무너졌다.

본격적으로 아랑검을 구사하기 시작한 브리즈의 검강은 한층 강맹해졌다.

서로의 검격이 충돌할 때마다 사방에 구멍이 패였다.

세리아의 갑주가 종잇장처럼 찢겨나가기 시작하자 허큘러스가 조각조각 나누어져 세리아의 몸을 뒤덮었다.

브리즈는 그제야 허큘러스의 숨겨진 기능 중 능동 방어 시스템이 존재함을 파악할 수 있었다.

까가가가가각!!!

서로의 호흡이 피부를 간질일 지경까지 거리가 좁혀졌다.

제 아무리 그래듀에이트라 해도 이 거리에서 검강을 휘둘러대는 건 미친 짓이었다.

브리즈는 위압을 느꼈다.

'내가... 밀린다고.'

로얄가드.

황실이 만들어낸 최정예 무력 집단.

익힌 검술의 우수성과 검술을 구사하는 정교함에 있어 브리즈는 분명 세리아를 앞섰다.

허나 '투쟁'의 영역에 한해 세리아는 브리즈를 한참 앞서 있었다.

찰나의 실수가 온몸을 찢어발길 폭풍 속에서 망설임 없이 한발을 더 내디딜 수 있는 그 지독함이 브리즈에겐 모자랐다.

파가각!!

서로의 검이 뒤엉켜 비산한다.

브리즈는 검을 놓치는 순간 유도 검기를 쏘아냈다.

세리아의 몸을 감쌌던 허큘러스가 벗겨져 나가며 유도 검기를 상쇄한다.

세리아의 무릎이 브리즈의 허리를 찍어 올렸다.

하늘로 붕 떴던 브리즈가 세리아에게 흉갑이 잡혀 지면에 내동댕이쳐졌다.

세리아의 주먹에 마나가 가득 깃들며 빛을 토해낸다.

콰앙!!

주먹이 내리꽂히는 순간 브리즈의 갑주가 번쩍이며 실드를 발생시켰다.

빗겨나간 주먹이 브리즈의 귀를 찢고 지면에 박힌다.

브리즈가 갑주의 동력을 활용해 황급히 옆으로 몸을 굴리자 가까이서 대기하던 젠킨슨과 멘데스가 검기를 방출했다.

콰앙!!

검기를 막아낸 브리즈의 갑주가 기능을 정지했다.

허리춤에서 호신용 단검을 뽑아낸 브리즈가 중얼거렸다.

"지겠군."

브리즈 혼자만 이곳을 찾아왔다면, 분명 그랬을 터다.

콰아앙!!!

"?!"

세리아가 눈을 돌렸다.

폭발은 마법사들을 폭격하던 헤일로에서 일어났다.

무언가에 직격당한 헤일로가 스파크를 일으키며 절벽에 추락했다.

공중에 있던 피닉스가 뒤늦게 위기를 감지했으나,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강렬한 섬광에 휩쓸렸다.

헤일로와 피닉스를 무력화시킨 마우스가 절벽에서 떨어져 내렸다.

쿠웅!!

아벤시오 앞에 착지한 마우스가 다짜고짜 오른손의 검을 옆으로 그었다.

검푸른 검강이 통째로 방출된다.

촤악!!

대부분의 검강은 방출 과정에서 형태를 유지 못 하고 검기로 분해된다.

아벤시오는 저리 온전한 형태로 방출되는 검강을 생전 처음 보았다.

아벤시오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뒤에는 아가씨들이 있다. 저건 몸으로라도 막아야 했다.

아벤시오가 검기에 휩싸인 검을 휘둘렀다.

파각!!

검강과 맞닿은 아벤시오의 검이 모래처럼 바스러졌다.

아벤시오는 검강을 향해 도리어 몸을 들이댔다.

그 찰나 투명한 막이 아벤시오 앞에 전개됐다.

끼기긱!!!

로필렌이 펼친 실드였다.

공간 왜곡장이 중첩된 실드가 검푸른 검강을 이리저리 뒤흔들었다.

결국 형태를 유지 못 한 검푸른 검강이 검기의 폭풍이 되어 쏟아졌다.

종자들과 정령까지 나서서 방어를 해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콰가가가가강!!

검기의 폭풍이 몰아치며 협곡 일대가 주저앉았다.

그 자리에 남아있던 모두가 피를 흩뿌리며 널브러졌다.

검강의 위력을 분산시키지 못했다면 시체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마우스는 확인 사살을 하겠다는 듯 왼손에 쥔 검에 검강을 덮어씌웠다.

검강이 쏘아지기 직전 젠킨슨과 멘데스가 들개처럼 달려들었다.

쩌엉!!

굉음을 들으며 세리아는 허큘러스를 뒤집어썼다.

로얄가드가 두 명.

발레리우스의 아티펙트 여섯 개를 전부 갖춰도 동시에 대적하기 힘든 전력이었다.

젠킨슨과 멘데스가 단 몇 초라도 시간을 끌어주는 사이 브리즈를 무력화시켜야 했다.

세리아는 허큘러스의 동력을 전부 추진을 위해 돌렸다.

콰앙!!!

폭발에 가까운 가속과 함께 세리아가 빛줄기처럼 쏘아졌다.

그 찰나 땅이 흔들리더니 바위로 이루어진 거대한 손이 튀어나와 세리아를 내리쳤다.

세리아의 행동을 예측한 마법사들의 방해 공작이었다.

세리아는 곧장 바위를 뚫고 나왔지만 이번엔 지면 일부가 통째로 융기했다.

융기한 지면 위에 올라 서 있던 브리즈는 세리아를 피해 도주하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은 계속해서 지면을 움직여 세리아의 가속을 방해하거나 화염 마법을 뿌려 시야를 가렸다.

세리아에게 피해를 끼칠 순 없지만 발목을 잡기엔 효율적인 선택이었다.

꽈앙!!

세리아는 제멋대로 날뛰는 지면을 힘으로 찍어누르며 다시 한 번 브리즈를 향해 가속했다.

삽시간에 가까워지는 세리아를 보고 브리즈는 도주를 포기했다.

마법사들의 방해 공작은 기껏해야 몇 초를 벌었을 뿐이다. 허나 그 정도면 충분했다.

"듣던 위명에 비해 좀 실망스럽군."

카가각!!

세리아의 돌진을 막아 세운 마우스가 양손의 검을 동시에 휘둘렀다.

"로커스트의 악명이 과장되었었나?"

쩌엉!!!!

튕겨져 나가 절벽에 박힌 세리아가 이를 갈아내며 몸을 일으켰다.

몸을 뒤덮은 허큘러스의 이음새가 삐걱대고 있었다.

황실 특임대의 최고 무력 중 한 명인 마우스.

제국 검술 중에서도 특히 익히기 난해하다는 리에스테 류 분해검의 사용자다.

거기에 로얄가드인 브리즈까지 합류했다.

세리아는 마우스와 브리즈의 정확한 정체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이 싸움이 승산 없음은 충분히 인식할 수 있었다.

피를 뱉어낸 세리아가 검강을 뽑아냈다.

마우스와 브리즈가 사양 없이 동시에 움직였다.

까가가각!!

유도 검기가 날아오는 와중 분해검이 휘둘러진다.

세리아는 격렬하게 검을 휘둘렀지만 3초도 지나지 못해 허벅지를 깊게 베였다.

철컥!

허큘러스가 대검 형태로 변형되어 크게 휘둘러진다.

브리즈가 허큘러스를 받아내는 사이 마우스가 세리아의 뒤를 잡아 허리를 노렸다.

세리아는 허큘러스를 놓아버리고 뒤를 향해 팔꿈치를 휘둘렀다.

콰앙!!

팔꿈치에 검면을 얻어맞은 마우스의 일격이 허공을 가른다.

허나 검강에 맞닿은 세리아의 팔꿈치 또한 안쪽으로 꺾였다.

다음 순간 안쪽으로 파고든 마우스의 무릎이 세리아의 명치 아래를 찍어눌렀다.

뻐억!!

땅을 거칠게 구른 세리아가 절벽에 처박혔다.

입가에서 피가 주르륵 쏟아졌다.

팔다리 하나씩은 박살 났고 내장까지 파열됐다.

당장 기절해도 이상치 않았으나 세리아는 덤덤하게 포션병을 꺼내 들이켰다.

마우스가 재차 검강이 서린 검을 들어 올리자 브리즈가 제지했다.

"그만."

"...?"

의아함을 내비치는 마우스를 브리즈는 무시했다.

'지금부터 상황을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이번 임무에서 세리아의 정보가 누락됐다.

황실 특임대 정보부에 대단한 혼선이 생겼거나, 아니면 누군가 수작질을 부렸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세리아 정도의 거물을 고려 못 할 리가 없었다.

귀족가 영애 몇을 정리하는 것과 세리아 알슈테인을 제거하는 건 일의 경중이 까마득히 차이 났다.

여기서 함부로 칼을 휘둘렀다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일단 암살 임무는 보류한다. 간단한 응급 처치 후 가까운 곳에 전부 비밀리에 구금하고... 그리고 누구를 찾아가야 하지?'

상황 돌아가는 꼴이 명백하게 이상했다.

작전 결과를 황실 특임대에 곧이곧대로 보고해도 될지조차 의심스러웠다.

브리즈의 고민이 깊어지던 찰나 세리아가 중얼거렸다.

"뒤."

"?!"

오랜 기간 갈고 닦은 감이 브리즈의 허리를 비틀게 했다.

허나 한 발 늦었다.

마우스의 검이 뒤에서부터 브리즈의 명치를 꿰뚫었다.

"커억!!"

"망설이면 안 되지. 왜 이렇게 생각이 많아?"

브리즈가 피 끓는 소리를 냈다.

동료라고 방심한데다 전투 중 갑주의 기능이 정지한 탓에 너무 쉽게 일격을 내주었다.

마우스는 검을 비틀며 중얼거렸다.

"지금 그림도 나쁘지 않군."

황태자 직위를 박탈하기 위해 이번 일을 꾸몄다.

황태자를 끌어내리기 위해선 확실한 명분이 필요했다.

황태자의 외가를 포함해 이미 황태자에게 줄을 댄 이들이 다수였다.

어쭙잖게 수작을 부렸다간 친 황태자 파의 성질만 자극해 정쟁이 심화될 거다.

황실의 정쟁은 혼란을 가중시키고, 그 과정에서 무고한 희생자들을 무수히 쏟아낼 거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감히 항의 못할, 황태자를 끌어내릴 강력한 명분이 필요했다.

황태자의 월권행위 탓에 로얄가드와 세리아 알슈테인이 정면에서 충돌하고 둘 모두 사망했다.

이 정도 그림이라면, 황태자는 스스로를 변호할 새도 없이 직위를 박탈당할 터다.

황실의 권위는 잠시 추락하겠지만, 황제는 그러한 피해를 감수할 생각이었다.

"크윽..."

브리즈가 가슴을 뚫고 나온 검을 붙들며 숨을 몰아쉬었다.

"네놈... 제국을... 배신한 거냐?"

"유감이군."

마우스는 제국에 충성했던 기사를 향한 예의와 동정을 담아 진실을 전해주었다.

"폐하의 명이시다. 황제 폐하께서 황태자를 버리셨다."

"...!"

경직됐던 브리즈의 몸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진실을 듣고 나니 어렵지 않게 사건의 전말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젠장..."

브리즈의 얼굴에 체념이 내려앉았다.

몹시 낙담한 브리즈가 고통도 잊고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줄을 잘못 섰군."

황태자, 그 빌어먹을 망나니 새끼 같으니.

그러게 진작 잘 좀 할 것이지.

가문에 남아 있는 가족들을 걱정한 브리즈가 의식을 잃었다.

퍼억!!

브리즈의 상체 절반이 풍선처럼 터져나갔다.

가슴에 남겨진 검흔 때문에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한 마우스의 조치였다.

브리즈의 검을 들어 올린 마우스가 세리아를 향해 다가갔다.

포션을 병째로 씹어먹은 세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그 마지막 발악을 보며 마우스가 한숨 쉬었다.

"받아들여라."

권력 구조가 개편될 때면 작든 크든 피바람이 분다.

그건 일종의 천재지변과 마찬가지였다. 운이 없어 맞닥뜨리면 얌전히 목을 내밀어야 하는, 그런 천재지변.

"억울하고 분하다고 해도, 그게 아랫것들의 운명 아니겠나."

"닥쳐!!!"

로필렌이 고함쳤다.

로필렌의 밑에선 알레시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로필렌은 알레시아의 배에 새겨진 자상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이를 갈았다.

"이 잡것들이...!!! 이, 이 빌어먹을 잡것들이 우리가 누구를 모시는지 알고...!!!"

"하, 나는 제국의 의지를 대변한다."

네놈이 모시는 주인 따위가 누구인지는 알 바가 아니다.

그런 의미가 담긴 마우스의 비웃음에 로필렌이 광분했다.

"닥쳐!! 닥치라고!! 이 버러지야!! 우리는...! 우리는...!! 우리는...?"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고함치던 로필렌이 문득 깨달았다.

지면과 맞닿은 무릎에서, 냉기가 느껴진다.

찬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간질인다.

그 근원을 찾아 헤맨 로필렌의 눈동자가 무너진 절벽에서 멈추었다.

로필렌의 입꼬리가, 천천히 찢어졌다.

"으히히히... 으흐흐..."

살을 저미는 듯한 전율이 등골을 타고 오른다.

허상일 게 분명한 전능감이 심장을 뒤흔들었다.

로필렌은 결국 자기감정을 주체 못하고 미친년처럼 웃어 재끼기 시작했다.

"으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

"공포에 미쳤나."

고개를 저은 마우스가 검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로필렌의 웃음이 뚝 그쳤다.

"경배하라, 버러지야."

쿠궁-!

무너졌던 절벽이 다시 흔들렸다.

의식이 남아 있던 모두의 시선이 살얼음이 끼기 시작한 절벽으로 향했다.

로필렌이 두 팔을 넓게 벌린 채 속삭였다.

"제국 역사의 정점이 귀환하셨다."

콰앙!!

재회 (1)

7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