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은 더 안 부를 거냐?"
공터로 향하는 길에 하무스가 레이에게 물었다.
구경꾼 부르자는 소리에 잠시 눈을 깜박인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피코르 경께서 참관해주시는 걸로 족하지. 사람을 더 부를 필요가 있겠어?"
"겁쟁이 놈."
얕은 도발에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빅토르와 하무스에게 원수를 진 것도 아닌데 굳이 창피를 줘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할 생각은 없었다.
"애들 상대라고 너무 방심들 하지 마."
"아까부터 지껄이는 실없는 소리, 도발이라고 하는 거냐?"
"카렌과 요하나가 만만해 보이는 건 아는데..."
신분 천하고 나이 어리고 얼굴 예쁘장한 여자애들이다.
직접 붙어보기 전까지는 낮추어보는 마음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그래도, 기사님들이 꾸준히 검술을 가르쳐 온 아이들이야. 재능이 없다면 기사님들도 진즉 그만두셨겠지. 너무 마음 놓고 있다가 식겁하지 말고, 긴장 좀 하라고."
"..."
하무스가 혀를 차며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더 말싸움을 이어가면 필립스 가의 기사들을 모욕하는 모양새가 될 터다.
말을 아껴야 했다.
한편 빅토르는 노골적으로 카렌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꼴깝 떤다 싶긴 했으나 레이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빅토르가 아니더라도 근래 들어 카렌의 뒤를 쫓아다니는 남자아이들이 많아졌다.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으니 선을 넘지 않는 이상 먼저 손댈 문제는 아니었다.
공터에 도착한 후, 빅토르의 열렬한 바람에 따라 카렌의 대련 상대는 빅토르로 정해졌다.
레이가 카렌과 요하나에게 충고했다.
"처음 30초 정도는 방어적으로 검을 운용해봐."
빅토르와 하무스는 여전히 카렌과 요하나를 우습게 보고 있었다.
초장부터 공세를 가한다면 당황해서 제 실력을 못 낼 가능성이 컸다.
'애들 경험 쌓아야 하는데 니들도 실력 발휘는 해 줘야지.'
카렌과 요하나가 30초간 수세를 취한다면 저쪽도 카렌과 요하나의 실력이 만만치 않음을 파악할 수 있을 터다.
레이의 충고에 카렌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물론 요하나는 들은 척도 안 하고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피코르가 레이의 눈치를 보다가 레이가 했던 말을 반복했다.
"30초 간은 수세를 취하거라."
"알겠습니다."
순순히 답하는 요하나를 보고 레이가 다시 뒷목을 잡았다.
이윽고 공터 중앙에서 빅토르와 카렌이 서로를 마주 보고 검을 뽑았다.
빅토르가 고개를 까닥였다.
"잘 부탁 할게. 다치지 않도록 조심할 테니까 너무 겁먹지는 말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검날에 안전장치를 씌운 걸 확인한 피코르가 한발 물러섰다.
"시작하도록."
대련이 시작됐지만 곧장 쇳소리가 울려 퍼지진 않았다.
빅토르가 가만히 서서 카렌을 바라봤다.
카렌이 움직임에 방해되는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등 뒤로 내린 탓에, 하얀 목덜미가 고스란히 드러나 빅토르의 눈을 어지럽혔다.
잠시 입을 벌리고 있던 빅토르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검을 다잡았다.
카렌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카렌이 겁을 먹었다고 여긴 빅토르는 평소의 반도 안 되는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그제야 카렌이 움직였다.
카앙!
"오...!"
생각보다 잘 막아낸다.
빅토르는 조금 안심하며 한 단계씩 검속을 끌어올렸다.
카앙! 카가각!!
잘 막는다. 되게 잘 막는다.
생각보다...
'너무 잘 막는데?'
검을 좀 느슨하게 휘두른 감이 있다 해도, 카렌은 완벽하게 빅토르의 공격을 막아내는 중이었다.
흐물거리던 빅토르의 입가가 진중해졌다.
'검을 제대로 배웠군.'
레이가 그토록 자신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빅토르가 본격적으로 검에 힘을 싣기 시작했다.
카앙!
빅토르의 공격을 좌측으로 밀어낸 카렌이 빅토르의 겨드랑이 아래를 기습적으로 찔렀다.
허나 빅토르는 당황하지 않고 허리를 조금 틀었다.
기긱!
카렌의 찌르기가 빅토르의 어깨 갑옷을 미세하게 긁고 지나갔다.
카렌이 황급히 검을 거둔다. 허나 빅토르가 한발 빠르게 카렌의 허리를 베어왔다.
까앙!!!
묵직한 일격을 검면으로 막아낸 카렌이 지면을 굴렀다.
빅토르는 한 번 잡은 기세를 놓치지 않고 카렌을 추격해 검을 내리그었다.
카가각!!
카렌은 또다시 지면을 굴러야 했다.
오시리스 가의 검술은 직선적이고 공격적이며 강맹하다.
반면에 필립스 가의 검술은, 수세를 유지하다 상대의 허를 찌르는 검식이 많았다.
상성을 따지자면 필립스 가의 검술이 조금 우세했으나.
빅토르와 카렌은 실력 차가 분명하게 났다.
까강!
"윽...!"
카렌이 힘겨운 신음을 흘렸다.
우직하고 직선적인 빅토르의 공격은, 막아낼 때마다 무슨 돌덩이를 치는 것 같았다.
손아귀과 워낙 아려오는 탓에 어떻게든 빅토르의 검을 흘려내 보려 노력했지만 아직 기교가 부족했다.
결국 카렌은 공격 한 번 적중시키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밀려났다.
빅토르가 카렌에게 숨을 고를 시간을 주지 않았더라면 벌써 검을 놓쳤을지도 모른다.
허나 이만해도 대단한 성과였다.
카렌은 아직 13살이었고, 체중과 근력이 빅토르에 비해 한참 떨어졌다.
그럼에도 정면에서 빅토르의 검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나이에 비해 대단한 기량을 보여준 셈이었다.
대련은 5분 정도 더 이어졌다.
끝에 갈수록 카렌의 검이 흔들리더니, 결국 카렌이 검을 놓쳤다.
까앙!
"아윽!"
검을 놓친 카렌이 지면에 주저앉았다.
허나 빅토르는 카렌을 비웃긴커녕 진심으로 감탄한 얼굴로 탄성을 삼켰다.
"좋은 대련이었다."
빅토르가 검을 집어넣은 후 카렌에게 손을 뻗었다.
카렌이 손을 잡고 일어서자 빅토르의 입꼬리가 흐물흐물 풀렸다.
카렌은 아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정말 강하시네요."
"너도 훌륭했어. 이름이 카렌이라고 했나?"
"네."
"큼, 그 나이가 어떻게 되지?"
"열셋이요."
"그래, 열셋... 뭐? 열셋?!"
내심 카렌을 열여섯 정도로 생각했던 빅토르가 입을 쩍 벌렸다.
뭐야, 나 지금 나보다 4살은 어린 꼬맹이한테 반한 거였어?
아니, 그보다 열셋 먹은 소녀가 내 검을 정면에서 받아내며 5분을 버텼다고?
아이들은 하루하루 발전한다.
카렌이 1년만 더 검을 단련해도 지금의 빅토르에게 밀리지 않고 검을 겨룰 수 있게 될 것이다.
카렌의 잠재력을 깨달은 빅토르가 탄식했다.
"...허언이 아니었군."
필립스 가의 기사들이 명예와 부끄러움을 몰라 보육원에서 검술을 가르치는 게 아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하무스가 빅토르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낮게 속삭였다.
"야이 병신아, 지금 뭐하자는 거야? 아까부터 좀 불안하더니, 여자라고 헤벌레거리며 봐준 거냐?"
"아, 아니..."
카렌이 숨을 돌릴 시간을 주기는 했지만.
처음 몇 번을 빼고는 검을 휘두를 때 크게 손대중을 하지 않았다.
허나 하무스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는지, 하무스가 이빨을 갈며 분개했다.
"저 새끼 콧대 좀 꺾어주자고 했더니 여자한테 눈이 돌아가서 일을 망쳐?"
"어, 그, 미안."
빅토르가 순순히 사과했다.
같은 스콰이어 신분이었지만 하무스가 나이도 하나 많고 실력도 더 좋았다.
빅토르가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자 하무스가 어깨를 옆으로 밀치며 공터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바로 시작하지?"
하무스는 시간을 끌 생각이 없었다.
어깨 아래에 오는 계집 같은 건 단번에 날려버리고, 레이와 대련을 펼쳐 반드시 다리 하나는 부러뜨려 줄 생각이었다.
하무스와 요하나가 마주 서자, 재차 검날에 채워진 안전장치를 확인한 피코르가 뒤로 물러섰다.
"시작하도록."
콱!
하무스가 곧장 앞으로 돌진했다.
요하나의 명치를 겨누고 있던 검이 땅으로 꺼지더니, 하무스의 오른발이 지면을 찍어누름과 동시에 사선으로 베어 올려졌다.
요하나가 흉갑을 착용하고 있음을 감안해, 정말 일말의 손속도 두지 않은 일격이었다.
하무스는 이번 일격으로 요하나의 흉갑이 찌그러지며 요하나가 땅을 구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요하나는 쇄도하는 하무스의 공격을 차분히 지켜보더니, 검을 반시계방향으로 살짝 회전시켰다.
카각!
요하나의 검과 맞닿은 하무스의 검이 제멋대로 하늘로 치솟더니 요하나의 머리 위를 간발의 차로 스치고 지나갔다.
"?!"
삽시간에 허공을 베어버린 하무스가 관성을 이용해 한 바퀴 회전하며 뒤로 물러났다.
억지로 몸을 멈춰 세우려 했다면 더욱 큰 틈을 내주었을 것이다.
하무스의 판단은 현명했으나, 지금 그따위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하무스가 얼이 빠진 채 요하나를 바라봤다.
'요행인가?'
아니다.
요행이 아니다.
요하나는 대련이 시작되고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차분한 얼굴로 하무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무스는 등골을 타고 오르는 한기를 느끼며 검을 다잡았다.
그꼴을 보며 레이가 낄낄거렸다.
"어이, 하무스."
"?"
"정신 바짝 차려."
네 상대는 '유니크'니까.
레어와는 다르다. 레어와는.
경고 (3)
53화
하무스가 숨을 고르며 정신을 집중했다.
요하나는 아주 능숙하게 하무스의 공격을 흘려냈었다.
힘을 흘리는데 익숙한 검사를 뚫어내기 위해 필요한 건 더 빠른 속도와 더 강한 힘이었다.
허나 방금 전 요하나는 하무스가 자아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일격을 흘려냈다.
방심했고, 지나치게 직선적인 공격이었다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
입을 다문 하무스가 요하나의 명치를 향해 검을 찔렀다.
힘이 빠져있는 찌르기를 요하나는 쉽사리 옆으로 흘려냈다.
하무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거리를 좁히며 두 손목을 강하게 끌어당겨 요하나의 어깨를 내려 벴다.
촤악!!
요하나가 받아내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검격이었다.
요하나와 하무스는 근력은 물론이고 체중만 2배 가까이 차이 났다.
겁을 먹을만도 하건만, 요하나는 침착하게 허리를 뒤틀었다.
스륵!
하무스의 일격이 요하나를 종이 한 장 차이로 빗겨갔다.
요하나는 공격을 피해냄과 동시에 하무스의 검면을 검 자루로 두들겼다.
깡!
"큭!"
균형을 잃고 휘청거린 하무스가 다시 거리를 벌렸다.
'이 빌어먹을 년이 벌써부터 오만을 부리는군...!'
종이 한 장 차이로 공격을 회피할 자신이 있다 해도 실전에서 저런 행동은 지양해야 한다.
변수가 발생했을 때 대처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요하나의 거리 감각은 인정할만했지만, 너무 건방을 떨어댔다.
으득!
이빨을 잘게 간 하무스가 손목에 힘을 풀고 기민하게 검을 휘둘렀다.
요하나가 검을 맞대는 순간 단번에 힘을 쏟아 찍어눌러 버릴 생각이었다.
요하나는 그 사실을 꿰뚫고 몸을 조금씩 움직여 수월하게 공격을 피해냈다.
심지어, 하무스가 견제를 위해 몇 밀리 짧게 휘두른 공격은 아예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하무스는 8번의 공격을 실패한 뒤 9번째 공격에서 손아귀에 살짝 힘을 뺐다.
횡으로 휘둘러진 검이 원심력에 의해 손아귀에서 미끄러지며 불쑥 튀어나왔다.
촤악!
검 끝이 요하나의 흉갑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하무스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나름 비장의 한 수였는데 요하나는 그마저도 쉽게 피해냈다.
'대체 어떻게... 설마?'
하무스는 깨달았다.
요하나의 눈동자는 끊임없이 위아래를 왕복하며 하무스의 전신을 훑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요하나가 하무스의 '검'을 신경 쓰지 않는 이유는 단순했다.
이미 검의 길이는 측정이 끝났다.
그걸 잡고 휘두르는 하무스의 동작만 파악하면 검이 어떤 궤적을 그릴지 훤히 예측할 수 있었다.
하무스가 저도 모르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젠장."
압도적인 재능이다.
검사로서 경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타고난 감각과 동체 시력이 하무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다.
하무스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복잡한 감정을 씹어 삼키며 대련에 집중했다.
쩍쩍 금이 가는 자존심은 잠시 접어두고 냉정히 상황을 파악했다.
하무스가 요하나보다 분명히 앞서는 것.
힘, 무게, 맷집, 검술 약간.
'가장 유리한 선택지는 근접 박투로 몰고 가는 것.'
최대한 접근해서 힘으로 찍어눌러야 한다.
어쭙잖은 공격은 몸으로 받아내고 돌진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때.
30초가 지났고, 요하나가 움직였다.
쐐액!
빠르고 가벼운 찌르기.
하무스가 검을 틀어 찌르기를 흘려내자 요하나가 나풀나풀 하무스의 주변을 뛰어다니며 연이어 검을 찔러넣었다.
하무스는 공격을 받아내면서도 기가 찼다.
'지금 장난하나?'
검사가 가장 중요시해야 할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무게중심이었다.
무게중심을 최대한 낮춰 안정감을 얻어야 검 끝에 제대로 된 힘을 실을 수 있다.
요하나는 검술의 기본을 역행하고 있었다.
하무스가 훤히 보이는 요하나의 틈을 파고들었다.
투욱!
허공을 거닐었던 요하나의 발이 지면에 닿는 그 순간.
아직 균형이 불안정한 타이밍을 노려 하무스가 검을 앞으로 겨눈 채 어깨를 내밀고 돌격했다.
요하나가 대항하듯 검을 내질렀다.
끼기긱!!
서로의 목을 노린 두 자루의 검신이 허공에서 마찰한다.
힘에서 밀린 요하나의 찌르기가 궤적이 뒤틀렸다.
허나 낭패한 기색을 보인 건 하무스였다.
올곧이 나아간 하무스의 검을 요하나는 손쉽게 피해냈고, 뒤틀린 요하나의 찌르기는 하무스의 오른쪽 견갑을 파고들었다.
파각!!
하무스는 통증을 참아내며 왼쪽 어깨로 요하나를 들이받았다.
위력적인 숄더 차지였으나, 공격이 적중하기 직전 요하나가 다시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퍼억!
몇 미터를 날아간 요하나가 낙법을 취한 후 표정 변화 없이 검을 들어 올렸다.
충격이 없진 않았으나 공중에 몸을 띄우며 대부분 해소했다.
하무스는 뜨겁게 달궈진 공기가 너무나 갑갑하게 느껴졌다.
수싸움에서 이기고 들어가도 도리어 타격을 당하는 건 이쪽이다.
경지의 격차를 느낀 적은 많으나, 이리 재능의 격차를 느껴보긴 하무스도 처음이었다.
요하나가 다시 거리를 좁힌다.
하무스는 수세를 취하며 확실히 깨달았다.
요하나의 검술은 일견 근본 없어 보였지만, 결국은 변형을 가미한 필립스 가의 검술이었다.
화려한 움직임으로 정신을 산만하게 만든 후 은밀하고도 치명적인 일격을 부지불식 간에 끼워 넣는다.
까가가가강!!
사방에서 빗발치는 맹격을 막아내기 위해 시야가 분산되며 집중력이 떨어진다.
하무스의 전신에 자그마한 상처가 늘어났다.
쐐액!!
하무스가 요하나의 팔목을 노리고 올려벤 공격이 빗나간다.
직후 하무스의 얼굴을 향해 반격이 들어온다.
하무스는 황급히 손목을 꺾어 당기며 방어 자세를 취했으나 요하나의 검 끝이 뺨을 길게 찢고 지나갔다.
주르륵
"..."
피가 뺨을 타고 흐른다.
얼굴이 가격당했기에, 하무스는 도리어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무스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내가 상대보다 검술이 부족하냐? 아니다. 그것만은 아니었다.
하무스는 요하나에 비해 훨씬 많은 경험과 훈련을 거쳐왔다.
얼마 안 가 역전당할지언정 아직은 검술로서 하무스가 우세였다.
하무스는 눈을 반개한 채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요하나의 검은 화려했지만, 빈틈이 다수 존재했다.
그 빈틈을 범인은 쫓아갈 수 없는 직관으로 메워내 하무스를 농락했다.
'현혹되지 마라.'
자잘한 공격에 일일이 반응해서는 안 된다.
빈틈을 찾아내, 변수를 만들어, 그 사이로 단 한 번의 일격을 구겨 넣어야 한다.
요하나의 재능을 짓누를 수 있는, 그저 무겁고 곧은 일격을.
"흐읍!"
하무스가 숨을 들이마신다.
요하나가 지면을 미끄러지며 우측에서 검을 찔러넣었다.
노리는 건 허리. 물론 하무스가 반응하기에 따라 언제든지 궤적이 변화할 터다.
하무스는 하체를 숙이며 어깨를 가져다 댔다.
요하나의 검로가 다시 한 번 변하려는 순간.
끄득!
요하나의 검 끝이 하무스의 견갑을 타고 미끄러지다 견갑 사이를 뚫고 들어갔다.
대련 도중 이미 공격을 허용해 작은 구멍이 났던 견갑이다.
하무스는 그 틈 사이로 요하나의 검을 유도했다.
견갑을 뚫고 들어온 검날이 어깨를 헤집었지만, 하무스는 개의치 않고 두 팔을 높게 들어올렸다.
그드득!
겹갑 사이에 끼어 뒤틀린 요하나의 검이 속절없이 하무스에게 딸려갔다.
하무스는 혼신의 힘을 다해 요하나의 머리를 노리고 검을 내려 베었다.
티디딕!
하무스의 의지에 반응한 마나가 검에 깃든다.
검날을 두르고 있었던 나무로 된 안전장치가 마나의 기류를 이겨내지 못하고 바스러졌다.
갑작스레 거대해진 것만 같은 하무스의 기운에, 요하나의 안광이 빛났다.
회전하는 코어에서 뿜어져나온 마나가 요하나의 손아귀를 넘어 검신에 휘몰아친다.
티디딕!
요하나의 검이 안전장치와 하무스의 견갑을 동시에 부수며 빠져나왔다.
한 발 늦게 휘둘러진 요하나의 검이 하무스의 일격을 빗겨내기 위해 움직인다.
"...!"
대련을 참관하던 피코르가, 무심코 팔을 뻗었다가 그만두었다.
둘 중 하나가 크게 다칠 수도 있었고, 특히나 하무스가 위험했지만, 이건 둘 모두에게도 얻어갈 게 많은 대련이었다.
결과를 지켜본다.
그리 마음먹은 순간 피코르의 시야 끝에 무언가가 휙 지나갔다.
레이였다.
꽈드득!!!
레이가 갑자기 나타나 아래에서 위로 휘둘러지던 요하나의 검을 짓밟았다.
갑작스레 손목이 뒤틀린 요하나가 고통을 느끼며 경악했지만, 그보다 더욱 기겁한 건 하무스였다.
레이는 하무스가 인지도 못한 찰나 코앞에 나타났다.
이대로면 하무스의 일격이 레이의 상체를 양단할 모양새였다.
하무스가 급히 제동을 걸어봤지만 눈 깜짝할 새에 검의 궤적이 레이의 상체를 훑고 지나갔다.
"허억!"
공격을 끝낸 후 하무스가 깜짝 놀라 뒷걸음질쳤다.
금방이라도 레이의 상체가 갈라지며 내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허억! 허억! 허억?"
허나 호흡을 몇 번이나 골라도 레이는 멀쩡하게 선 채 하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무스는 얼을 타다 위화감을 느꼈다. 손에 쥔 검이 너무 가벼웠다.
검을 들어 살피자, 검신의 중간이 잘려나가 길이가 채 절반도 남아있지 않았다.
"?"
그제야 하무스가 레이를 돌아봤다.
레이의 왼손엔 검 한 자루가, 오른손엔 잘려나간 검신이 얌전히 쥐어져 있었다.
"??"
하무스가 입을 뻐끔거렸다.
레이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건 요하나에게 집중하느라 인기척을 놓쳤다고 납득한다 해도.
대체 어떻게 해야 마나가 가득 담겼던 검을 저리 한순간에 양단해서 손에 쥐고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 지금 대체 무슨...?"
하무스가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렀을 피코르를 향해 답을 구했다.
피코르는 세상 진중한 얼굴로 하무스를 마주 보다 고개를 돌렸다.
하무스는 조금 실망했다.
필립스 백작가의 기사인 피코르가 하무스에게 가르침을 아낀다고 생각한 것이다.
허나 피코르 또한 레이가 벌인 일에 대한 감상은 하무스와 비슷했다.
몰라 뭐야 저거 무서워...
피코르는 대답을 안 해준 게 아닌 못 해준 거였다.
피코르 또한 레이의 움직임을 거의 놓치다시피 했다.
마나가 가득 담긴 검을 어떻게 양단했는지도 감이 잘 안 잡혔고 말이다.
열기가 가득했던 공터의 분위기가 차게 식었다.
갑작스러운 난입으로 대련을 파탄 내놓은 레이는 잠깐 머쓱해하더니 오른손에 쥔 잘려나간 검신을 내려놓았다.
"어, 음."
턱을 긁적인 레이가 하무스와 빅토르에게 손짓했다.
"너희 둘 다 일로 와봐."
"네, 네?"
하무스가 무심코 존댓말로 되물었다.
대련을 집중해서 지켜본 빅토르 또한 흠칫 대며 레이의 눈치를 살폈다.
레이가 다시 한번 손짓했다.
"일로 와보라고."
하무스와 빅토르가 우물쭈물하며 다가오자 레이가 두 사람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속삭였다.
"어때? 우리 애들 만만치 않지?"
"네, 넵..."
"대단...하네요."
레이가 낄낄거렸다.
주워다 키운 고아들이 성과를 보인다는 건 레이에게 있어서도 솔직하게 기쁜 일이었다.
요즘 들어 틱틱 대는 년이 하나 있긴 했지만 자랑스럽긴 매한가지였다.
"알았으면 됐다."
잠시 고민한 레이가 말을 이었다.
"기왕 이리된 거, 딱 하나만 당부하자."
"...?"
"나한테는 얼마든지 까불어도 돼. 근데 한 번만 더 알레시아님한테 건방 떨면 반 죽여놓을 거야. 필립스 백작령 안에서든 밖에서든. 알아들어?"
"...넵."
"...알겠습니다."
"좋아."
흡족한 얼굴로 둘의 등을 쳐준 레이가 피코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피코르 경, 대련에 참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죄송하지만 급한 일이 생겨, 먼저 가보아도 되겠습니까?"
"알겠네."
상황 정리를 끝낸 레이의 입가에 웃음이 사라졌다.
레이는 스산한 눈빛으로 공터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본래 레이 또한, 피코르와 마찬가지로 대련에 난입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무스와 요하나가 다음 경지로 나아가며 힘을 주체하지 못해 양쪽 다 부상을 각오해야 할 상황이긴 했으나.
실력 향상을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레이가 대련에 개입한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다.
레이의 시선이 향한 곳에.
늑대를 닮은 정령이 입꼬리를 길게 찢은 채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저 정령은 분명 요하나와 하무스가 최후의 일격을 나누기 직전 둘 사이에 끼어들어 수작을 부리려 했다.
정령의 정확한 의도와 별개로.
서로를 향해 모든 정신을 집중한 상태에서 늑대 정령이 훼방을 놓았다면.
둘 모두 정말 크게 다칠 수 있었다.
레이가 욕설을 중얼거렸다.
"이런 씹어먹을 개새끼를 봤나. 주인이 누구야?"
바람을 타고 도주하는 늑대 정령을 레이가 검을 뽑아들고 추격했다.
*
"레이! 레이!"
카렌이 달려나가는 레이를 애타게 불렀으나 레이는 대꾸도 안 하고 공터를 벗어났다.
레이에게 할 말이 많았던 카렌은 실망한 얼굴로 씩씩거리다 피코르를 홱 돌아봤다.
그 기백이 상당하여 피코르는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입을 우물거린 카렌이 피코르에게 불만을 내보였다.
"레이가 요즘 우리한테 소홀해요!"
"소홀?"
피코르는 내심 감탄했다.
과연 레이 밑에서 수학한 덕분인지 또래보다 어휘력이 좋은 카렌이었다.
카렌이 계속해서 찡얼거렸다.
"보육원에도 잘 안 들리고 가끔 만나도 지금처럼 홱홱 가버리고! 요즘 우리한테 너무 소홀해요!"
"네가 이해해라. 레이가 지금 한창 바쁘긴 할 거다."
피코르가 기특한 제자에게 레이의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아가씨께서 유학을 가시기로 했는데, 레이가 아가씨의 곁을 수행하기로 했다. 그거 준비하려면..."
"유학?"
카렌이 유학이란 단어를 곱씹었다.
공부하러 멀리 있는 나라로 오랜 기간 떠나는 것.
카렌의 머릿속에 유학의 의미는 대충 그러했다.
"유...학?"
카렌의 심장 박동이 급격하게 빨라졌다.
불현듯 찾아온 공포에 고개를 저은 카렌이 다급한 얼굴로 되물었다.
"유학이요? 멀리 공부하러 떠나는 거요?"
"그래, 그 유학이 맞다."
"레, 레이도 유학 가는 거예요? 머, 멀리 떠나요?"
"그런 셈이지."
"그럼 언제 돌아와요?"
카렌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으나 피코르는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고민에 빠졌다.
"글쎄."
황실 마탑에서의 유학은 인맥을 넓히기에 대단히 좋은 기회였다.
단기 유학이라 보내놓고 여러 방면으로 힘을 써 몇 년씩 눌러앉게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물론 필립스 백작도, 알레시아도, 레이도 몇 개월 반짝 떠났다가 귀환할 생각이었지만.
피코르는 거기까지 알고 있지는 못했다.
"몇 년은 걸리지 않을까? 길면 5년까지도..."
"어... 5년... 5년..."
다리에서 힘이 풀린 카렌이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관심 없는 척 등을 돌리고도 귀를 쫑긋 세워 이야기를 엿듣던 요하나가 갑자기 딸꾹질을 시작했다.
"으끅! 5년...? 으끅! 레이가 5년 없어...? 으끅!"
끅끅거리는 요하나 옆에서는 루나가 정색을 한 채 은색 눈동자에서 시푸른 안광을 흘려냈다.
그제야 피코르가 기겁했다.
"어어, 얘들아! 아직 확정 난 사안은 아니란다!!"
뒤늦게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아이들은 진정하지 못했다.
얼마 안 가 카렌이 먼저 오열을 시작했다.
이별 (1)
54화
늑대를 닮은 바람 정령은 기민하게 도주했다.
정령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자 레이는 오버드라이브라도 사용할까 고민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실체화한 정령이 계약자의 동의도 얻지 않고 멋대로 행동할 확률은 극히 낮았다.
일단 계약자의 정체와 의도를 파악하고 정령을 찢어버리든가 해야 했다.
바람 정령이 영주성으로 향한다.
레이는 한숨을 삼키며 영주성을 두르고 있는 철제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정령을 쫓던 레이는, 얼마 안 가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플로리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플로리아가 곁으로 다가온 바람 정령을 쓰다듬어주고는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이 아이가 내 정령이야."
맞은 편에 앉아있던 알레시아가 입을 크게 벌리며 감탄했다.
"신기하구나!"
"귀엽지?"
연거푸 고개를 끄덕인 알레시아가 축 처진 얼굴을 했다.
"나도 정령이 가지고 싶구나아..."
"힘들걸? 알레시아는 '모너클'이잖아."
모너클은 서클을 타고난 자가 아닌, 인공적으로 서클을 만들어낸 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대다수의 정령은 모너클과의 계약을 꺼렸다.
알레시아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아쉬움을 참아내며 플로리아의 정령에게 손을 흔들었다.
레이가 그 광경을 지켜보다 다른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
레이의 인기척이 사라지자 플로리아가 정령을 쓰다듬던 손을 멈췄다.
깊게 숨을 들이쉰 플로리아가 마음을 다잡았다.
'내 것이, 아니야.'
플로리아는 어린 시절 잘못 맺은 계약 탓에 정령의 감정을 '일방통행'으로 '여과 없이' 전달받았다.
이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정령의 감정이 여과를 거치지 않고 머릿속을 파고들면 정령술사는 그 감정의 주체가 본인인지 정령인지 판별할 수가 없다.
때문에 플로리아는 정령과 계약을 맺은 그 순간부터 '정령의 감정'과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분별치 못하고 혼란 속에서 살아왔다.
지금도 플로리아는 알레시아를 향해 어떤 살인 충동에 가까운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는데.
이런한 충동이 정령에서 비롯된 건지 아니면 악한 본성을 본인이 타고난 건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아니야, 이건 내 것이 아니야.'
남 몰래 혀를 씹어가며 스스로를 설득한다.
플로리아는 비교적 최근 들어서야 모든 충동을 짓누르고 이성만을 날카롭게 세워 돌발적인 행동을 제어할 수 있게 되었으나.
잠깐만 정신을 흩트려도 정령의 욕구에 공명해 꼭두각시 놀음을 해야했다.
"차 향이 좋네."
플로리아는 주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헤집는 걸 느끼며 알레시아를 향해 활짝 웃었다.
유쾌하고, 공포스러운 나날이었다.
*
레이가 입을 열었다.
"플로리아, 죽여도 됩니까?"
"크흡..."
차를 마시던 백작이 잠깐 침묵하더니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았다.
"자중하게."
몇 년 사이 백작은 레이의 화법에 꽤 익숙해졌다.
방금 전 질문도, 플로리아에게 어떤 하자가 있고, 그걸 감당키 힘든 상황이 찾아왔을 때 내가 플로리아를 제거해도 되겠느냐는 의미가 담겨 있을 터다.
허나 레이의 저의를 고려해도 허락해주기 힘들었다.
"플로리아는 오시리스 백작의 독녀로서 많이 사랑받고 있네.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간단히 덮고 지나갈 수는 없을 거야."
백작은 찻잔을 옆으로 치운 후 허리를 살짝 기울였다.
"무엇이 문제인가?"
레이는 가감 없이 본인과 지미가 겪었던 상황을 설명했다.
"...라는 일이 있었는데, 그 '짓궂은 장난질'이 필립스 백작령을 벗어나서도 이어지거나 심해지면, 더 나아가 알레시아가 장난질의 표적이 된다면 조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후우."
드물게 한숨을 내쉰 백작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이 이야기를 해주어야 할까 고민했네만, 역시 그대도 알아두어야겠군. 지금부터의 대화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주의하게."
"알겠습니다."
"플로리아는 '네추럴'일세."
네추럴은 서클의 축복을 타고난 자를 가리킨다.
모너클과 반대되는 개념이었다.
"그대가 보호하고 있는 루나라는 아이와 같지. 재능이야 플로리아 쪽이 떨어지겠지만."
"뭐, 그렇겠지요."
"헌데 과거, 플로리아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소문이 잠시 돌았네. 공식적으로 확인된 정보는 아니지만, 아마 사실일 걸세."
플로리아는 좋은 재능을 타고난 것에 비해 외부 활동이 굉장히 늦었다.
또한 오시리스 가에선 최대한 숨기려고 했지만, 플로리아가 기행을 벌인다는 소문이 최근까지 간간히 주변 영지에 들려오고는 했다.
레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문제라면 어떤...?"
"어린 나이에 멋대로 정령과 계약을 맺었다고 하네. 제대로 된 계약은 아니었겠지. 추측이지만, 플로리아는 정령과의 계약에 묶여 정령에게 휘둘리고 있는 상태일 확률이 높네."
"흠..."
레이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로커스트 토벌 이후, 레이는 정령사와 정령에 관한 정보를 많이 찾아봤다.
레이는 천천히 머릿속의 정보를 되새겼다.
마법사는 서클을 지닌다.
서클의 심부엔 영혼과 긴밀하게 연결된 일부 구간이 존재하는데, 이를 '셀로미어'라고 부른다.
셀로미어엔 상호 간의 합의를 거쳐 '계약 각인'을 새길 수 있다.
계약 각인은 서클 소유자 간에 중대한 합의를 성사시키기 위해 활용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정령 혹은 악마와 계약을 맺기 위해 사용한다.
계약 각인을 합의 없이 파기하면 각인이 새겨진 셀로미어가 통째로 증발함은 물론, 계약 내용에 따라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개인 편차가 있지만 셀로미어의 용량은 한정되어 있다.
정령과 계약을 맺을 경우, 강력한 정령일수록, 또한 복잡하고 강제력이 강한 계약일수록 더 많은 셀로미어의 용량을 필요로 한다.
셀로미어에 각인이 가득 차면 더는 계약 각인을 새길 수 없다.
로커스트의 경우 굉장히 방대한 용량의 셀로미어를 타고났고, 때문에 그토록 강력한 암흑정령사가 될 수 있었다.
'정령과의 계약을 잘못했다라...'
계약 각인은 상호 합의 아래 이루어진다.
더군다나 한쪽이 일방적으로 대가를 요구할 수도 없었다.
허나 약간의 우회를 통하면 불공정한 계약이야 얼마든지 맺을 수 있었고 이에 대한 예시는 굉장히 많았다.
그렇기에 귀족가에 '네추럴'이 태어나면 함부로 정령이 접근하지 못하게 예의주시하는데, 오시리스 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플로리아에게 사고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제가..."
"그래, 그대가 플로리아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도 있겠지."
백작이 말을 이었다.
"허나 나서지 말게."
"알겠습니다."
오시리스 백작가 측이 먼저 도움을 청했다면 모를까.
괜히 나섰다가 일이 꼬이면 수습할 수도 없고, 설령 일이 잘 풀린다 해도 플로리아가 적반하장으로 나올 가능성도 충분했다.
레이에 관한 정보가 유출됨은 당연하고 말이다.
백작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하지만."
"?"
"정 안 되겠다 싶으면 플로리아에게 '조치'를 취하게."
백작은 알레시아와 레이를 위해 무리해서 황실 마탑에 유학을 떠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문제는 유학 기간 동안 알레시아와 레이가 플로리아와 동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학을 성사시키기 위한 조건이었지만, 백작 또한 불안정한 상태인 플로리아를 경계하고 있었다.
"플로리아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 가능하겠나?"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어 확답은 못 드립니다. 일단 해봐야 알지 알겠습니까."
"현명하게 처신해줄 것이라 믿네. 문제가 생기면 최대한 그대를 변호해 줄 테니, 조치를 취할거면 확실하게 '마무리'하게."
"마무리요."
레이가 턱을 긁적였다.
"아시겠지만, 마무리를 위해선 알레시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허락하겠네."
"알겠습니다."
레이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레이는 정령과의 계약과 관련하여 실험해보고 싶은 게 몇 개 있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유보하고 있었다.
'정령과의 계약은 본래 굉장히 까다롭다고 알려져 있지.'
일단 서클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네추럴이어야 했다.
모너클도 계약 각인은 가능했지만 대부분의 정령이 모너클을 배척했다.
운 좋게 네추럴로 태어났다고 해도 정령과 접촉해 계약 조건을 조율하고 계약 각인을 맺기까지는 보통 굉장히 험난한 과정을 필요로 했다.
"으흐흐..."
레이의 전생에서는 이런 농담이 있었다.
총 들고 협상했냐?
프로 스포츠 팀이 값비싼 선수를 굉장히 싼 값으로 영입했을 때 스포츠 팬들 사이에서 종종 쓰이는 표현이었다.
'아, 재밌을 거 같은데.'
마법사와 정령이 계약을 맺을 때는 서로에게 물리적으로 위해를 가할 수단이 없다.
때문에 멋모르는 인간을 정령이 등쳐먹는 경우가 아니면, 마법사와 정령은 조건이 맞는 상대를 찾아 떠돌거나 오랜 시간에 거쳐 계약을 조율하고는 했다.
하지만 총이든 검이든 대가리에 들이대고 계약을 조율할 수 있다면.
"으흐흐흐, 크음!"
레이는 실실 쪼개다 말고 백작의 눈치를 보고 헛기침을 했다.
플로리아는 여러모로 레이가 정령에 대한 '실험'을 해보기 적절한 대상이었지만 레이 또한 다짜고짜 일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레이는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플로리아가 먼저 선을 넘지 않는 이상 레이 또한 칼을 들이대진 않을 터다.
때문에 백작과 레이 둘 다 예상하지 못했다.
마탑으로 출발한 지 며칠도 안 되어.
레이가 플로리아를 거꾸로 매달아 묶어놓은 후 뺨을 후리게 될 줄은.
*
백작과 대화를 끝낸 레이가 기지개를 피며 영주성을 나섰다.
사흘 뒤면 필립스 백작령을 떠나야 했다.
레이는 턱을 매만지며 단기 유학을 떠나기 전 해결해야 할 일이 더 있나 고민했다.
'...굵직한 건 다 해결했지?'
이제 마지막으로 자작령을 한번 둘러본 후.
보육원 아이들에게 몇 개월 여행을 다녀와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단기 유학 사실을 보육원 아이들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은 건, 아이들이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고집을 부릴까 걱정돼서였다.
'무조건이지.'
보육원 운영하며 애들이랑 워낙 지지고 볶은 탓에 이제는 애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빤히 예상이 갔다.
단체로 징징거리는 꼴을 보는 건 하루 이틀이면 족했다.
레이가 끌끌 혀를 차며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누군가 옷깃을 잡아왔다.
돌아보니 요하나였다.
"?"
레이가 당황했다.
요하나는 오래 울기라도 했는지 눈 주위가 퉁퉁 부어있었다.
레이가 다급히 요하나의 어깨를 잡아채며 무슨 일이 있었나 물어보려는데 요하나가 선수를 쳤다.
"...했어요."
"뭐?"
"잘못했어요."
"?"
레이가 당혹에 빠져 눈을 깜박이자 요하나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잘못했어요. 흐에에엥... 그러니까 떠나지 마요. 흐윽!"
"???"
갑작스럽게 뒤바뀐 요하나의 태도에 레이가 인상을 찌푸리다 간신히 상황을 이해했다.
'누가 알려줬구만. 몇 달 떠나있는다고.'
굉장히 어처구니없긴 했다.
평소에는 그리 틱틱대던 애가 길어봤자 네다섯 달 떠나 있는다고 하니 태도가 이리 바뀐다고?
'사춘기 애들 상대하기 진짜 더럽게 어렵다.'
레이가 고개를 저으면서도 요하나가 하는 짓이 귀여워 싱글벙글 웃으며 되물었다.
"떠나지 말까?"
"흐윽! 잘못했으니까, 떠나지 마요. 앞으로 말 잘 들을게요. 흐아앙..."
'크으.'
레이가 속으로 탄성을 흘렸다.
이렇게 질질 짤 거면 평소에 말 좀 잘 듣지 그랬냐.
레이는 요하나를 달래줄까 고민하다, 지금까지 겪어왔던 수모를 떠올리곤 생각을 고쳐먹고 짝다리를 짚었다.
"싫은데?"
"...으끅!"
차갑기 그지없는 레이의 목소리에 요하나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허나 이미 신이 나버린 레이는 이제껏 요하나가 그래 왔듯, 끝까지 삐딱선을 탔다.
"나 떠날 거야. 요하나가 말 안 들어서 도망가는 거야."
"흐아아아아앙!"
요하나가 오열하며 레이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이별 (2)
55화
레이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요하나를 보고 몇 번 더 튕겨볼까 고민하는 사이.
수풀 사이에서 요하나의 설득을 지켜보던 카렌이 불쑥 튀어나와 레이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늘어졌다.
"가면 안 돼!! 갈 거면 나도 데려가아!!"
카렌이 눈을 통째로 붉게 물들인 채 애원하자 레이가 짐짓 화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못 데려가. 나 혼자 갈 거야."
"흐에에엥!! 가지 마아!!"
"??"
요하나에 이어 카렌까지 오열하기 시작하자 슬슬 레이도 위화감을 느꼈다.
영영 보지 말자는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몇 개월 여행 좀 다녀오겠다는데 이게 그렇게 울고 불며 매달릴 사안인가?
레이가 고개를 돌려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 루나와 마주 봤다.
얘들 왜 이렇게 과민반응하느냐고 루나에게 물어보려던 찰나.
레이는 공기가 더워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레이가 허리와 다리에 달라붙은 카렌과 요하나를 질질 끌고 걸어가 루나의 뺨을 잡아 쥐었다.
"야이씨, 이게 어디서 협박질이야. 서클 안 집어넣어?"
"아우으으..."
잠시 몸을 뒤틀며 반항한 루나가 얼마 못 가 주변의 마나를 안정시켰다.
레이는 뻐근해져 오는 뒷목을 매만지며 물었다.
"아니, 길어봤자 다섯 달 정도 자리 비운다는데, 왜 이렇게 과민반응이야?"
카렌이 항변했다.
"거짓말하지 마! 기사님에게 다 들었어! 유학 가면 5년은 안 돌아올 거라며! 그러니까 나도 데려가아! 레이 옆에 있을래!"
"야야, 5년은 무슨...! 하아..."
레이는 한참을 투자해 유학을 다녀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라고 반복해 설명했다.
카렌과 요하나는 영 레이의 말을 믿지 못했지만, 계속된 설득 끝에 어찌저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 수 있었다.
훌쩍이는 카렌과 요하나를 뒤로 하고 루나가 레이의 팔목을 붙잡았다.
"정말 돌아와요?"
"아이고, 걱정 마라. 내가 너희를 두고 어딜 가겠냐."
"..."
무표정하게 레이를 바라보던 루나가 응석 부리듯 레이의 가슴에 머리를 콩콩 박았다.
루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준 레이가 카렌과 요하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 잠깐 사이에 진이 다 빠진 기분이었다.
*
"...해서, 3~5개월 정도 보육원을 비우게 될 거 같아."
"정말요?!"
내친김에 보육원에 들른 레이가 단기 유학에 관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통보했다.
나도 데려가 달라고 졸라대는 아이들도 많았고, 내심 레이의 부재를 환영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레이는 손바닥을 맞부딪쳐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고는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다들 잘 지내고 있어.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사고 치지 말고. 혹시 사고 치면 바로바로 선생님께 말씀드려. 괜히 숨기고 있다가 일 커지게 하지 말고. 알겠어?"
"네엡!"
"나 없다고 건방 떨고 다니지 마라. 경고했어."
"네엡!"
"그래, 다들 몸조심해라."
인사를 마친 레이가 등을 돌렸다.
보육원 입구에서 지미와 매튜가 레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가 며칠 사이 주름이 많이 사라진 지미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요즘 살맛 좀 나나 봐요?"
"어흠, 살맛은 무슨..."
지미가 입꼬리를 흐물거리며 가슴에 달아놓은 휘장을 만지작거렸다.
비록 제대로 된 작위가 아닌 단순 훈장에 가까운 명예 작위였지만, 지미와 매튜에게는 충분히 영광스러운 수훈이었다.
지미는 요 며칠간 가슴에 휘장을 단 채 이곳저곳 쏘다니며 주책을 떨곤 했다.
우울한 얼굴로 밭을 갈고 있을 때보다는 훨씬 좋아 보였다.
레이가 삐딱하게 선 채 물었다.
"내 얼굴 안 본다니까 좋아죽겠죠?"
"큼, 그럴 리가 있겠냐.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데?"
레이의 공을 대신 뒤집어쓴 덕분에 명예 작위를 수훈할 수 있었음을 알고 있는 지미는 괜히 헛기침하며 겸양을 떨었다.
낄낄 웃은 레이가 뒤돌아서 보육원을 바라봤다.
"나 없는 동안, 보육원이랑 용주골 좀 잘 부탁할게요."
"걱정하지 마라. 근데 용주골이 대체 무슨 뜻이냐?"
레이는 간간이 홍등가를 '용주골'이라 바꿔 부르곤 했다.
새삼스러운 지미의 질문에 잠시 고민한 레이가 떠오르는 단어를 아무렇게나 가져다 붙였다.
"용주골... dragon princess lair란 뜻입니다."
레이는 자기가 말해놓고도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왔으나, 지미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너는 가끔씩 나이에 맞는 행동을 하더라."
어린 아이들이 자신만의 멋진 이름을 만들어 장소나 물건을 바꿔 부르는 경우는 흔했다.
지미도 어린 시절 노랗게 변색된 나뭇가지를 '썬더 호크'라고 칭하며 검 대신 휘둘렀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어쨌든 걱정하지 마라.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
"고마워요. 지미와 매튜도 몸조심하고요."
"너는 사고치지 말고 잘 다녀와라."
"노력은 해 볼게요."
고개를 끄덕인 레이가 옆에서 손가락을 쪽쪽 빨고 있는 티티를 끌어당겼다.
마지막으로 가디 자작가를 들려볼 생각이었다.
*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군."
디나르 지역의 행정 전반을 담당하고 있으며, 실질적인 영주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피에트로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간간이 좀 들리지 그랬나."
"바빴습니다."
레이는 짧게 답했다.
피에트로에게 레이는 분명 은인이었지만, 어쨌든 레이는 피에트로의 하나뿐인 아들을 죽였다.
자식을 죽인 자의 얼굴을 어찌 편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겠는가.
때문에 레이는 웬만하면 가디 자작가를 찾아오지 않았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 후.
회갈색 머리를 하나로 묶어 앞으로 넘긴 소녀가 다과 접시를 든 채 문을 열었다.
레이에게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오랜만이야, 리파."
"오랜만에 뵙네요."
눈웃음을 흘린 리파가 다과 접시를 내려놓고는 고개를 숙였다.
"좋은 시간 되세요."
리파가 문을 닫고 나갔다.
다과를 하나 집어든 레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디나르에서 수집한 고아 중에서도 괜찮은 재능을 지닌 아이가 몇 있었다.
O.P.S를 통해 레어로 승급한 고아는 총 다섯이었는데, 그중 셋은 필립스 백작령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둘은 그대로 디나르 지부에 남았다.
리파는 후자의 경우였다.
리파는 몸을 쓰는 능력은 그저 그랬으나 숫자에 대한 감각이 비상했다.
2년전쯤에 실무를 익혀보라고 영주성으로 보냈었는데, 굉장히 빠르게 능력을 인정받아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리파는 여전히 잘하고 있나요?"
"참 우수한 아이야. 이제는 디나르 지역에 집행되는 예산 대부분이 한 번쯤은 저 아이의 눈을 거치고 있지."
"좋은 소식이네요."
"리파에게라도 자주 얼굴 좀 보여주게. 그 아이는 자네를 은인이라 여기고 있으니."
"은인이라. 그녀의 부친이 아마..."
"흑마법사에게 죽었지."
피에트로가 말을 끊었다.
로커스트를 토벌하기까지 희생된 모든 민간인은 흑마법사의 주술에 희생됐다고 발표됐다.
레이의 경우 공식적으로 세운 공로는 없었지만.
당시 필립스 백작과 동행하는 모습이 많은 사람들에게 목격되어 레이가 흑마법사 토벌에 일조한 거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었다.
그러니 리파가 레이를 은인이라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머리를 긁적인 레이가 피에트로에게 물었다.
"리파 부친의 이름이 분명... '칼'이었죠?"
"정확하네."
"칼, 칼이라."
추억 속의 이름을 떠올린 레이가 창문을 통해 아련한 눈으로 저물어 가는 태양을 바라봤다.
4년 전 술집에서 보았던 칼의 얼굴이 태양 위로 어렴풋이 비친다.
'칼, 거기서 잘 보고 있나요? 당신 딸이 이렇게 훌륭하게 자랐어요.'
태양 위로 비친 칼이 흐뭇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레이가 창문을 향해 찻잔을 들어올렸다.
'나한테 너무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요. 그날 칼의 희생이 없었다면, 리파 또한 지금처럼 올곧고 뛰어난 인재로 성장할 수 없었을 거예요.'
칼을 레이에게 딸을 맡겼고, 레이는 훌륭히 그날의 약속을 이행했다.
칼은 딸의 성장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점점 흐릿해졌다.
레이가 칼과 잔을 나누려는 듯 찻잔을 앞으로 뻗는데, 피에트로가 떫은 얼굴로 물었다.
"자네... 뭐하는가?"
"아, 죄송합니다. 잠시 옛 생각이 나서."
찻잔을 내려놓은 레이가 본제를 꺼냈다.
"울트 님은 언제 귀환하신답니까?"
"소식은 다았지만, 글쎄. 잘 모르겠네."
피에트로가 착잡한 얼굴을 했다.
울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었다.
울트는 여전히 세상을 떠돌며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허나 시간을 내고자 했다면 울트는 분명 잠시라도 디나르에 들릴 수 있었을 것이다.
레이는 옆방에서 메이드와 함께 다과를 집어먹고 있을 티티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소중한 인물이 하루하루 기억을 잃어가며 점점 더 작아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그 자체로 고문이었다.
영지에 찾아오지 않는 울트의 심정이 이해가 됐다.
"어쨌든 무사하시다니 다행이군요."
"그래, 다행이지."
피에트로는 조금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이전보다 우울한 기색은 많이 줄어든 편이었다.
실무를 견학하라고 영주성에 파견한 아이들에게 정을 붙인 모양이었다.
이야기를 마친 레이가 피에트로에게 펜을 빌렸다.
마탑에 가기 전 세리아에게 답장을 쓸 생각이었다.
세리아는 3년 전에 성(姓)을 얻었다.
알슈테인 가의 가주가 세리아가 얻은 위명을 활용하기 위해 세리아를 양녀로 들인 것이다.
그로 인해 세리아는 알슈테인 가에 발이 묶이게 됐지만, 그만큼 세리아가 얻게 된 것도 많았다.
울트의 소식을 포함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적어낸 레이는 밤이 되어서야 고모에게 보낼 편지를 완성했다.
펜을 내려놓은 레이가 한숨을 한 번 쉬었다.
마탑으로 떠나기 전에 정리해야 할 일은 전부 끝냈다.
레이는 약간의 두근거림을 느끼며 의자 위에서 눈을 감았다.
*
황실 마탑으로 향하기 위한 인원이 전부 필립스 백작가의 영주성 앞에 집결했다.
이동수단은 마차였는데, 레이의 생각보다 황실 마탑으로 동행하는 인원이 많았다.
알레시아와 플로리아를 필두로, 그녀들을 시중들 보조 인력이 여럿이었고, 오시리스 가에서 호위로 붙여준 기사와 종자만 여섯이었다.
여기에 젠킨슨과 레이까지 동행하니 일행만 20명이 넘었다.
출발을 기다리다 보니 카렌이 불쑥 나타나 레이의 허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흐윽! 레이랑 헤어지기 싫어어..."
"아이고, 되도록 빨리 돌아올 거라니까."
레이가 눈이 탱탱 부어있는 카렌을 달래주었다.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빅토르가 가슴을 움켜쥔 채 실연의 아픔을 달래고 있었다.
어느새 보육원의 아이들이 하나둘 나타나 레이를 마중했다.
요하나는 그새 또 마음이 바뀌었는지 말도 안 붙인 채 구석에서 미간을 구기고 있었고, 루나는 볼을 빵빵하게 만든 채 레이의 품에 한 번 안겼다가 떨어졌다.
슬그머니 다가온 알레시아가 팔짱을 낀 채 목에 힘을 주고 레이 곁에 섰다.
대놓고 맥이는 행동에 카렌은 팔다리를 부들거리며 씩씩대더니 결국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께서도 잘 다녀오세요오..."
옛날보다는 그래도 철이 든 카렌이었다.
인사를 전부 나눈 레이가 손을 흔들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서서히 마차가 멀어진다.
카렌은 힘이 빠진 채 터덜터덜 걷다가 여전히 인상을 구기고 있는 요하나를 발견했다.
요하나는 짜증과 분함, 그리고 본인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여러 감정에 빠져 숨을 몰아쉬며 답답해하고 있었다.
카렌은 망설였다.
본디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는 본인이 당장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판별하지 못하고는 했다.
이는 요하나도 마찬가지였는데, 도리어 요하나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던 카렌이 요하나가 왜 그리 레이를 향해 틱틱대는 지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요하나는 2차 성징이 찾아오기 직전까지 '이성'이란 개념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때문에 '우리 모두 서로를 좋아하면 돼!'와 같은 속 편한 이야기를 외치며 순수하게 카렌과 레이의 거리가 더 좁아지길 응원하곤 했다.
허나 2차 성징이 찾아오면서, 요하나는 'like'와 'love'의 의미를 구분할 수 있게 됐다.
때문에 요하나는 옛날처럼 카렌 앞에서 마음 편하게 '나도 레이가 정말 좋아!'를 외치지 못하게 됐다.
요하나 자신은 몰랐지만.
카렌이 보기에 요하나가 삐딱선을 타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시점이었다.
우정과 사랑 사이의 고민은 사춘기 소녀의 마음을 헤집어 놓기에 충분했고.
이는 카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입을 우물거리던 카렌이 조용히 요하나의 손을 잡았다.
아직은, 이대로가 좋았다.
요하나의 등을 밀어주기엔, 카렌은 아직 레이의 옆자리에 있고 싶었다.
*
필립스 백작령을 떠나고 며칠 뒤, 미궁 내부.
"후우..."
한숨을 내쉰 레이가 뒤집어진 플로리아의 드레스를 대충 잘라냈다.
사지가 포박된 채 거꾸로 매달린 플로리아의 얼굴이 그제야 훤히 드러났다.
쫘악!!
이미 잔뜩 부풀어 오른 플로리아의 뺨을 거리낌 없이 후린 레이가 대롱대롱 흔들리는 플로리아를 붙잡아서 경고했다.
"야, 정신 안 차려? 정신 못 차리면 넌 내 손에 뒈진다니까?"
쫘악!
다시 한 번 플로리아 뺨이 옆으로 돌아갔다.
그꼴을 바라보던 젠킨슨이 진지하게 이 자리에서 도망쳐야하나 고뇌했다.
계약 (1)
56화
영맥.
세상에 불균일하게 퍼져있는 마나가 특히 집약된 장소를 가리키는 단어다.
얼마나 넓은 범위에 얼마나 고농도의 마나가 집약되었느냐에 따라 영맥의 가치가 달라진다.
대규모 영맥 위에는 종종 도시가 건설되기도 하는데, 이는 황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영맥 위에 세워진 제국의 수도는, 영맥을 동력으로 하는 강력한 방위 병기를 다수 개발해 운용하고 있었다.
미궁 또한 영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영맥에 이끌린 마물이 굴을 파서 둥지를 틀거나, 국가의 허락 없이 영맥 아래 불법적으로 건설된 시설들이 대개 미궁으로 분류된다.
후자의 경우 은둔한 마법사가 영맥 아래 요새화된 아지트를 만들어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대부분의 미궁은 그리 위험하지 않았다.
몇백년에 한두 번쯤은 발레리우스의 미궁과 같이 대륙을 격동시키는 미궁이 발견되기도 하나, 정말 드문 경우였다.
공략이 완료된 미궁은 상황에 따라 그냥 방치되고는 했다.
영맥을 활용할 방법이야 무궁무진했지만 도시와 너무 멀리 떨어진 영맥은 수익성이 낮았기 때문이다.
필립스 백작령에서 황실 마탑으로 가는 경로 근방에도 이처럼 수익성이 낮아 방치된 공략된 미궁이 하나 있었다.
마탑으로 향하는 길에서, 플로리아가 먼저 알레시아에게 바람을 불어넣었다.
"이 근방에 공략된 미궁이 있다는데, 한번 구경해볼래?"
"오! 꼭 한번 가보고 싶구나!"
본래 호기심이 많았던 알레시아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공략된 후에 방치된 미궁이기에 그리 위험하진 않았다.
마물이 몇 마리 꼬여있을 수는 있겠지만 엑스퍼트 여럿이면 단번에 쓸어버릴 수 있었다.
허나 백작가 영애들을 수행하는 자들은 굳이 위험한 장소를 찾아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오시리스 가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플로리아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알레시아도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레이와 젠킨슨에게 징징대기 시작했다.
젠킨슨은 알레시아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헌데 레이가 나서서 도리어 알레시아의 의욕을 부채질했다.
"미궁이 위험한 장소이긴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제가 옆에서 잘 지켜 드릴게요."
"역시 나의 기사로다! 날이 갈수록 믿음직해지는구나!"
알레시아가 싱글벙글 웃으며 좋아했다.
젠킨슨이 잠시 마차를 세운 후 레이를 불러 둘만의 자리를 마련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냐?"
"지금 찾아갈 미궁이 그리 위험한 장소는 아니잖아요? 들어보니 기껏해야 마물 몇 마리 돌아다니고 있을 텐데, 아가씨 부탁을 들어드리는 것도 괜찮지 않나요? 오랜만의 나들이잖아요?"
그럴 듯한 소리였다.
허나 젠킨슨은 이미 레이의 성격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다.
눈가를 가늘게 좁힌 젠킨슨이 레이를 추궁했다.
"말장난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라. 내가 아는 너라면 괜한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 아가씨를 설득했을 거다."
"하하."
작게 웃은 레이가 답했다.
"마스터, 저희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나요?"
"...황실 마탑이지."
"그래요, 마탑. 눈치 보는 정신병자 소굴 말입니다."
레이가 잠깐 마차를 돌아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마탑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간 좀 봅시다."
"간?"
"플로리아 얘기하는 겁니다. 필립스 백작령 밖에서는 행실이 어떠할지, 미리 좀 알아보자고요.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 작은 무대를 하나 마련해서요."
"..."
젠킨슨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플로리아에 관한 이야기는 젠킨슨 또한 백작에게 전해 들었다.
확실히, 마탑에 가기 전 플로리아에 대해 미리 파악해놓을 필요가 있었다.
젠킨슨이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이틀 뒤.
알레시아와 플로리아를 태운 마차가 미궁 앞에 도착했다.
작은 산맥 옆에 동굴처럼 생긴 입구가 하나 뚫려 있었다. 미궁의 입구였다.
나무 판자로 경고문이 새워져 있었는데, 워낙 오래된 탓인지 글자를 제대로 읽기 힘들었다.
레이가 나무판자를 살피며 오는 길에 들었던 미궁에 관한 정보를 상기했다.
수십 년 전 고위 마법사가 만든 미궁.
공략된지는 한참 지났고, 마법사가 만들어놓은 함정은 전부 해제되거나 파괴되어 있다.
별 볼일 없는 곳이었다.
허나 분위기 하나는 꽤 그럴듯해, 어두컴컴한 미궁의 입구를 앞에 두고 알레시아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정말 재밌겠구나아아..."
이제 와서 겁을 조금 먹은 모양이었다.
레이가 입꼬리를 올린 채 알레시아의 손을 잡아주었다.
"제가 잘 지켜드릴테니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가씨."
"나는 두려워한 적이 없느니라! 그래도 믿음직스럽구나!"
"..."
오시리스 가의 기사인 아벤시오가 히죽거리는 알레시아를 쳐다보며 고개를 휘저었다.
출신 천한 스콰이어에게 놀아나는 알레시아가 어지간히 한심한 모양이었다.
누구나 알아챌 수 있는 무시였지만 젠킨슨과 레이는 대응하지 않았다.
괜히 하무스와 빅토르만 긴장한 채 이리저리 눈치를 보고 있었다.
레옹이 입을 열었다.
"그럼 호위 인원은 이렇게 하시죠."
짧은 회의 끝에 미궁을 탐방할 인원이 나뉘었다.
알레시아와 플로리아. 그리고 그녀들을 호위할 기사 셋과 종자 셋.
오시리스 가의 기사 레옹이 미궁 밖에 남아 사용인들과 마차를 지키기로 했다.
미궁 앞에서 플로리아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라이트."
둥근 구체가 손가락 위에 떠오르며 어두컴컴한 미궁 내부를 비춘다.
마법을 계속 사용할 수는 없으니 빛을 내는 아티펙트를 몇 개 챙겼는데, 사용할 일은 없었다.
미궁 안쪽으로 들어가자 영맥에서 흐른 마나가 천장을 타고 흐르며 은은한 빛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광경에 알레시아 두 손을 마주치며 기뻐했다.
"오오... 여기가 바로 책에서만 보았던 미궁이로구나...! 정말 아름답구나!"
"그러게요."
레이 또한 우중충한 동굴을 상상하고 들어왔는지라 빛이 흐르는 천장을 보며 감탄했다.
더군다나 레이의 예상보다 미궁이 꽤 넓었다.
'분명 복층 구조로 이루어진 미궁이라했는데... 아래에 이만한 장소가 또 있다는 건가?'
레이가 생각에 빠진 사이 신이 난 알레시아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그 순간 레이의 시야 끝에 벽면에 새겨진 마법진이 스쳐 갔다.
치지직!
누군가 양단해놓은 마법진의 이음새 사이로 작은 섬광이 파고든다.
침묵하던 마법진에 영맥의 마나가 깃들며 삽시간에 빛이 솟구쳤다.
레이가 곧장 알레시아를 끌어당겼다.
콰앙!!
"히익!"
갑작스레 코앞에서 터져 나오는 폭발에 알레시아가 깜짝 놀라 레이에게 매달렸다.
레이가 손을 휘휘 저어 연기를 날려보내고는 알레시아를 내려놓았다.
"아직 남아 있는 함정이 있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노, 놀랐구나!"
알레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작 마법진 하나가 알레시아의 호기심을 억누를 순 없었다.
알레시아와 플로리아의 미궁 탐험은 계속됐다.
그 과정에서 해제되었던 함정 마법진이 종종 발현되기도 하고, 미궁에 터를 잡은 마물을 사냥할 때 바람이 불어와 레이의 무게중심을 흩트리고는 했다.
작은 사건 사고가 이어졌지만 레이는 개의치 않았다.
알레시아를 보호하며 계속해서 전진하자 얼마 안 가 미궁의 끝을 볼 수 있었다.
"여기가 마지막이구나!"
벽을 마주한 알레시아가 두 팔을 벌린 채 아쉬워했다.
얼핏 보면 더는 남은 공간이 없어 보였다. 허나 이 미궁이 복층 구조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레이가 미리 들었던 대로 미궁 끝에 놓여 있는 돌덩이를 움직이자 작은 진동과 함께 바닥이 열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약 10 m에 달하는 공간이 열리며 지하가 훤히 드러나자 다들 썩 흥미로운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봤다.
지하는 꽤 깊었는데, 지하로 내려가기 위한 계단 같은 것은 따로 안배되어 있지 않았다.
"오늘 구경은 여기까지만 하시는 게 어떻...?"
젠킨슨이 그만 복귀하자고 백작가 영애들을 설득하려던 찰나.
지하를 향해 얼굴을 빤히 내민 채 무릎 꿇고 있는 알레시아를 향해, 강풍이 훅 불었다.
"후악?!"
일순 균형을 잃은 알레시아의 몸이 아래로 훅 꺼졌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레이가 곧장 몸을 던져 알레시아를 붙잡고 벽면에 칼을 박아 넣었다.
알레시아가 허공에서 두 다리를 달랑거리다 안도했다.
"레이가 있어 다행이로구나!"
"아가씨께선 안전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레이가 알레시아를 끌어올리자 젠킨슨이 받아주었다.
레이가 벽면을 타고 상층으로 올라오니 분위기가 차게 굳어 있었다.
깊은 동굴 안에서 무슨 바람이란 말인가.
미궁 내에서 망가진 마법진이 발동된 이유 또한 다들 눈치 챈지 오래였다.
허나 모른 척 넘어갔고, 넘어갈 예정이었다. 알레시아가 다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저 친우 간에 짓궂은 장난일 뿐이었다.
레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뒷머리를 긁적인 레이가 젠킨슨을 쳐다봤다.
"안 되겠네요. 제압합시다."
"...꼭 그래야겠냐?"
"네."
미궁에서 하는 짓을 보니 플로리아는 마탑에 가서도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킬 게 분명했다.
마탑은 미궁보다 훨씬 위험한 물건과 사람이 가득한 장소다.
지금이야 레이 혼자서도 플로리아의 장난질을 감당 가능했지만 마탑에서는 절대 불가했다.
사실 플로리아가 마탑에 가 사고를 쳐서 혼자 책임을 지고 끝난다면 레이 또한 굳이 나서진 않았을 것이다.
'근데 이번 유학은 알레시아가 플로리아 꽁무니에 껴서 가는 거란 말이야.'
황실 마탑 입장에서 둘이 한 세트란 의미였다.
플로리아가 사고를 치면 알레시아가 연대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어쩌면 오시리스 백작이 딸아이의 책임을 분산시키거나, 죄를 떠넘기기 위해 알레시아의 동행을 허락했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알레시아는 플로리아와 가까운 곳에서 지내며 자주 마주치게 될 것이다.
만약 플로리아가 알레시아를 계속해서 위협하면 언젠가는 알레시아가 크게 다칠 수 있었다.
레이는 결론을 내렸다.
"마탑에 도착하기 전에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어요."
젠킨슨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안'에 관해선 필립스 백작이 레이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레이가 까라면 젠킨슨도 까야 했다.
"...완벽히 '해결'할 자신이 있냐?"
"일단 해봐야 알지 않겠어요?"
"후우."
스릉!
한숨을 내쉰 젠킨슨이 검을 뽑아들었다.
오시리스 가의 기사들이 기함했다.
"젠킨슨 경!! 진정하시오!!"
"너무 흥분하셨소! 검을 내려놓으시오!!"
그들의 걱정과 달리 레이와 젠킨슨은 아주 차분했다.
젠킨슨이 플로리아를 바라보더니 레이에게 물었다.
"일을 복잡하게 하는 것보다... 그냥 죽이는 게 났지 않겠냐? 너라면 가능하잖냐."
바람 정령 이야기였다.
허나 플로리아를 죽이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오시리스 가의 기사들이 마주 검을 뽑아내며 분노를 토해냈다.
격렬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레이는 플로리아가 정령과 맺은 계약의 내용을 몰랐다.
확률은 낮지만 정령을 죽였다가 플로리아도 같이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레이는 이번 기회에 정령과 계약에 관한 실험을 시도해볼 생각이었다.
사실 그쪽이 메인이었다.
레이가 표정을 굳힌 채 명령했다.
"젠킨슨, 제압하세요."
츠즉!
검기를 뽑아낸 젠킨슨이 플로리아를 향해 돌격했다.
멘데스가 젠킨슨의 앞을 가로막았다.
파가가각!!
검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하자 아벤시오가 종자들에게 소리쳤다.
"아가씨를 보호하고 있어라!"
하무스와 빅토르가 플로리아의 곁에 선 채 마나를 끌어올렸다.
레이가 달려들자 아벤시오가 마주 검을 휘둘렀다.
아벤시오는 빠르게 레이를 베어내고 멘데스와 합류해 젠킨슨을 제압할 생각이었다.
서로의 검이 맞부딪친다.
카가각!!
"이놈...!!"
카강!! 카가각!!
검을 몇 번 더 휘두른 아벤시오가 당혹스러워 했다.
아벤시오의 예상보다 레이의 실력이 뛰어났다.
비록 검기는 뽑아내지 못하지만, 검에 마나를 주입해 아벤시오의 검기를 어떻게든 막아내고 있었다.
승부가 늘어지기 시작한다.
카강!! 카가각!! 까앙!!
'이런...!'
옆을 돌아보니 멘데스가 젠킨슨에게 밀리고 있었다.
더 이상 스콰이어 따위에게 시간을 끌리면 안 된다.
아벤시오는 레이를 힘으로 찍어누르기 위해 검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한 층 거대해진 검기가 다가오자 레이자 짐짓 긴장한 듯 자세를 다시 잡았다.
그 순간 바람이 불어와 레이의 균형을 흩트렸다.
"윽...?!"
레이가 중심을 잡지 못해 휘청였다.
아벤시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레이를 내려 베었다.
레이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졌다.
츠즈즉!
일순 레이의 검에 시푸른 검기가 실처럼 응축된다.
벼락 같이 휘둘러진 일격이 아벤시오의 검을 박살 내고 흉갑을 찍어눌렀다.
콰앙!!!!!
튕겨져나간 아벤시오가 벽에 틀어박힌 채 의식을 잃었다.
동시에 멘데스의 품을 파고든 젠킨슨이 검 자루로 턱을 후려쳐 멘데스를 기절시켰다.
레이의 고개로 뒤로 돌아간다.
늑대 형상을 한 바람 정령이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주춤거리고 있었다.
레이가 쭉 찢어진 입꼬리로 낄낄거렸다.
"뭔가 아차 싶을 거야?"
공간검이 정령의 복부를 향해 휘둘러졌다.
"넌 좆 됐어, 새끼야."
푸욱!!
계약 (2)
57화
다른 검사들은 말한다. 정령을 베어내는 촉감은, 케이크를 썰 때보다 못할 때가 많다고.
겉으로 투영된 허상을 베어봤자 정령은 금세 힘을 회복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악을 써가며 정령사를 죽여봤자 정령은 새로운 정령사와 계약해 세상을 유린하곤 했다.
불사와 불멸의 존재로 여겨지는 정령과의 싸움은 그토록 불합리했다.
허나 레이는 달랐다.
정령의 허상을 지나친 공간검이 차원 너머에 존재하는 정령의 본체에 닿는다.
인간을 베어낼 때와 별다를 게 없는, 살갗을 갈라내고 내장을 헤집는 촉감이 똑똑히 검을 타고 흐른다.
바람 정령의 배를 파고든 검이 등을 꿰뚫고 나왔다.
뒤늦게 정령의 괴성이 공간을 쩌렁쩌렁 울렸다.
[끼에에에에엑!!]
"아아아아악!!"
정령과 공명하듯 플로리아가 비명을 토해냈다.
레이는 검을 정령에게 쑤셔 넣은 채 플로리아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빅토르와 하무스가 얼굴을 굳히며 레이에게 달려들었다.
가망 없는 돌격이었으나 레이는 나름 흡족하게 그들을 바라봤다.
'스콰이어가 그 정도 가오는 있어야지.'
쩌엉!!
빅토르와 하무스가 레이의 일격에 튕겨 나간 직후.
눈이 반쯤 뒤집힌 플로리아가 두 손으로 지면을 긁으며 뛰어오르더니 레이의 목덜미를 향해 이빨을 들이댔다.
레이가 혀를 끌끌 찼다.
"문제가 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정령의 감정이 일부 역류할 수는 있다.
허나 정령과 일체화라도 된 듯 레이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며 몸을 날리는 행위는 결코 평범하지 못했다.
"대화가 통할지 모르겠네."
쩌억!
레이가 주먹을 휘둘러 플로리아의 뺨을 후려쳤다.
약하게 친다고 쳤는데도 고개가 휙 돌아간 플로리아가 땅을 굴렀다.
그 찰나 바람 정령이 쩍 벌린 아가리를 레이의 머리에 들이댔다.
몸을 일으킨 플로리아 또한 레이를 향해 재차 달려든다.
레이는 곧장 정령의 턱을 붙잡은 후 복부에 박혀있는 칼을 비틀었다.
다시 한 번 정령과 플로리아의 비명이 공간을 쩌렁쩌렁 울렸다.
"젠킨슨, 일단 얘 좀 묶어야 할 것 같은데요."
레이가 플로리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정령과 감응해서 자꾸 덤벼드는 데, 매번 주먹으로 제압했다가는 반신불수를 만들 게 뻔했다.
정령이 배때기에 칼이 꽂혀 정신 못 차리는 사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어 놔야 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도록 잘 좀 묶어줘요."
"끄응..."
젠킨슨이 앓는 소리를 내며 준비해두었던 밧줄을 꺼냈다.
눈이 반쯤 돌아간 플로리아를 묶기 위해 꼼지락대기 시작한 젠킨슨이 얼마 안 가 눈가를 찌푸렸다.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병기와 무술, 잡기를 익혀야 하고, 그 안에는 포박술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허나 젠킨슨은 포박술을 배운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데다, 전신을 봉인하는 종류의 포박술은 생각보다 난도가 꽤 높았다.
이런 잡기는 보통 스콰이어가 담당하고는 하는데, 불행히도 젠킨슨의 스콰이어는 제대로 된 놈이 아니었다.
'이걸 이렇게 묶었나...?'
젠킨슨이 끙끙 앓아가며 이리 묶었다 저리 묶었다를 반복했다.
그때 슬그머니 플로리아 옆으로 다가온 알레시아가 젠킨슨을 타박했다.
"팔목을 그리 묶으면 헐거워서 풀리느니라."
"...?"
"매듭의 방향과 순서 또한 잘못되었구나. 매듭을 이렇게 묶어 다리 사이로 집어넣고... 드레스가 방해되는구나아..."
드레스를 반으로 쭉 찢은 알레시아가 능숙하게 플로리아의 몸을 밧줄로 칭칭 감았다.
"이제 아래로 내려 발목을 묶어 올리면..."
"...?"
빠르게 포박을 완성해가는 알레시아를 보며 젠킨슨이 눈을 껌벅였다.
늑대 정령의 배때지에 검을 반쯤 뽑았다 넣었다를 반복하던 레이도 그 꼴을 지켜보며 떫은 얼굴을 했다.
"요즘은 귀족 영애한테 포박술도 가르칩니까?"
"그럴 리가."
"그럼 저건 누구한테 배운 겁니까?"
"글쎄...?"
레이가 미간을 짚었다.
"요즘 아가씨 관리 제대로 하고 있는 것 맞습니까?"
"자신 있게 대답하기가 힘들군..."
레이와 젠킨슨이 서로를 향해 속삭이는 사이 포박을 완성한 알레시아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기뻐했다.
"다 되었구나! 남에게는 처음 해봤는데 잘 된 것 같구나!"
남에게는?
레이는 머릿속을 헤집는 의문을 뒤로 미루며 플로리아를 살폈다.
몸부림을 칠수록 밧줄이 더욱 강력하게 몸을 압박할 수 있도록 묶여 있어 어느 부위든 힘을 주기 어려워 보였다.
레이가 착잡한 얼굴로 플로리아의 발목과 이어진 밧줄의 끝을 커다란 바위에 묶은 후, 플로리아를 뻥 뚫린 지하를 향해 던져버렸다.
"커억!"
떨어지던 플로리아가 바닥과 충돌하기 전에 밧줄이 팽팽히 당겨지며 플로리아를 멈춰 세웠다.
플로리아를 따라 지하에 착지한 레이가 다시 한 번 정령에게 박혀 있는 검을 뒤틀었다.
정령이 경기를 하며 눈을 뒤집자 플로리아 또한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허나 알레시아가 어지간히 밧줄을 잘 묶어 놓았는지, 플로리아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하고 거친 숨만 컥컥 내뱉었다.
'준비는 됐는데...'
한숨을 내쉰 레이가 뒤집어진 플로리아의 드레스를 대충 잘라냈다.
뒤집어진 드레스에 가려져 있던 플로리아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레이가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
정령은 꼬챙이로 만들어 붙잡았고 플로리아도 허튼짓을 못하게 포박했다.
이제 재계약을 위한 수순을 밟아야 했는데, 이를 위해선 당연히 플로리아가 제정신이어야 했다.
쫘악!
주먹에 맞아 부풀어 오른 플로리아의 뺨을 레이가 거리낌 없이 후려쳤다.
"야, 뒈지기 싫으면 정신 좀 차려봐."
"끄르륵...!"
눈이 반쯤 돌아간 플로리아가 경기를 한다.
레이가 계속해서 플로리아의 뺨을 후려쳤다.
쫘악! 쫘악!
"야, 정신 안 차려? 정신 못 차리면 넌 내 손에 뒈진다니까?"
레이는 플로리아가 끝끝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정령을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확률은 낮았지만, 정령과 맺은 계약 내용에 따라 플로리아 또한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레이는 되도록이면 플로리아가 정신을 차려 재계약 절차를 한 번 밟아봤으면 싶었다.
쫘악!
플로리아의 고개가 연거푸 옆으로 돌아간다.
슬금슬금 지하를 향해 고개를 내밀어 보려는 알레시아를 붙잡은 젠킨슨이 진지하게 이 자리에서 도망쳐야 하나 고뇌했다.
*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고통과 공포, 살의뿐이었다.
요동치는 감정의 격류가 눈앞을 흐리게 하며 모든 사고를 앗아간다.
온몸에 뻗쳤던 감각이 멀어지며, 그저 뜨겁기 짝이 없는 격통만이 복부를 내달렸다.
플로리아는 그저 괴로워하며, 지금 자기가 무슨 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몸을 뒤흔들었다.
쫘악!
귀를 울리는 이명과 함께 검게 변한 세상에 작은 균열이 인다.
플로리아는 직감했다. 저것이야말로 나의 감각. 붙잡아야 된다. 붙잡아서 이정표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해내야만 한다.
감정과 이성을 분리해, 모든 충동과 고통을 뒤로 밀어 넣고 이성만을 내세워 앞을 바라봐야 한다.
이제껏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찐득한 고통, 공포, 그리고 살의가 휘몰아쳤지만.
플로리아는 느껴지지도 않는 이를 악물고 의지를 바로 세웠다.
"크윽, 큭...!"
멋대로 돌아가던 플로리아의 눈에 초점이 잡기 시작한다.
시야가 열리고, 귀가 사람의 목소리를 받아들여 해석하기 시작한다.
레이가 플로리아의 턱을 움켜쥔 채 눈을 마주쳤다.
"정신 차려, 플로리아. 정령이랑 재계약, 진행할 수 있겠어?"
"재계약..."
플로리아가 흐리멍텅한 사고로 단어를 곱씹었다.
정령과 최초로 계약을 맺은 이후, 얼마나 많은 후회를 했던가.
정령의 감정과 뒤섞여 희석되었음에도, 후회라는 감정은 여전히 뇌리 속에 강렬하게 남아 플로리아의 의식을 각성시켰다.
츠즈즈즉!
플로리아의 셀로미어에 새겨진 계약 각인이 겉으로 번져 나온다.
플로리아의 서클로부터 발산된 마나가 휘몰아치더니, 이내 룬어의 형상을 갖춰 계약 각인 위를 회전하기 시작한다.
레이가 권능을 사용해 새롭게 떠오른 룬어의 내용을 살폈다.
'...완벽하네.'
정령을 완전히 속박하고자 하는 의지가 플로리아가 만들어낸 룬어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저건 10년 동안 쌓인 플로리아의 울분이며 동시에 소망이었다.
정령의 동의만 얻는다면, 플로리아가 만들어낸 룬어가 과거에 맺었던 계약 각인을 덮어쓸 것이다.
레이가 정령을 돌아보았다.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레이는 눈으로 묻고 있었다.
재계약 할 거야? 안 할 거야?
정령의 눈빛이 흔들렸다. 레이가 낄낄거리며 반대쪽 검을 들어 올렸다.
"아, 이 새끼 이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찌릅니다?"
마지막 말은 정령이 아닌 플로리아에게 한 소리였다.
레이는 대답도 듣지 않고 정령의 가슴 아래에 검을 박아 넣었다.
[키에에에엑!!]
"아아아악!!!"
정령과 플로리아가 동시에 괴성을 질렀다.
허나 몰아치는 격통에도 불구하고 플로리아는 끝끝내 의식을 놓지 않고 새롭게 떠오른 룬어를 유지하고 있었다.
레이가 두 검을 교차한 채 정령을 끌어당긴 후 입꼬리를 길게 찢었다.
"여기서 뒈질래? 아니면 수십 년 노예 노릇 하는 걸로 퉁 칠래?"
레이는 확신했다.
이 정도 겁박이면 정령 새끼는 분명히, 자기 말을 따를 것이라고.
결국 울부짖는 정령의 몸에서 룬어가 흘러나왔다.
그 위로 플로리아가 만들어낸 룬어가 겹쳐 흐르며 계약을 고쳐 쓰기 시작했다.
츠즈즈즈즈즉!
플로리아를 그토록 속박했던 계약의 내용이 역전된다.
플로리아는 느낄 수 있었다.
뇌리를 함부로 파고들었던 정령의 충동과 욕구가 점점 지워져 나가는걸.
구석으로 밀려났던 본인의 감정이 점점 제자리를 찾아간다.
흘러나오는 희열을 느끼며 플로리아는 감복했다.
이제야 오롯이, 나의 감정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온전히 나의 안에서 비롯된 감정이.
"드디어... 드디어..."
이성이 완전히 돌아온다.
플로리아는 함박웃음을 지었다가, 이내 온몸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살짝 눈을 찌푸렸다.
밧줄에 묶인 채로 워낙 발버둥을 친 탓에 온몸에 시뻘겋게 멍이 올라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뺨이 더럽게 아팠는데, 워낙 퉁퉁 부어올라 입을 다물면 이빨에 씹힐 지경이었다.
허나 영민하게 상황을 파악한 플로리아는 일단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마어. 으네를 이벘네."
뺨이 부풀어 오른 탓에 발음이 줄줄 샜다.
플로리아는 시행착오를 거쳐 발음을 조정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은혜를 입었어. 정신을 차렸으니까 일단 나 좀 내려주면 안 될까?"
굳이 살펴보지 않아도 자기가 얼굴 화끈거리는 꼴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드레스는 찢긴 데다, 온몸을 묶은 매듭은 적나라하게 몸의 맵시를 드러냈다.
다 떠나서 거꾸로 매달려 있으니 머리 쪽에 피가 쏠려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뺨이 더욱 욱신거리는 건 덤이었고.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계약 각인 하나만 더 새깁시다."
"난 은혜는 모르는 사람이 아니야."
"말로는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말마따나 은혜를 입으셨으니 계약 각인 하나쯤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허락해주시죠."
"..."
플로리아가 얌전히 서클 위로 계약 각인을 새기기 위한 마나를 회전 시키기 시작했다.
레이의 요구가 합당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반항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젠킨슨의 도움을 받아 지하로 내려온 알레시아가 플로리아의 꼴을 보고 중얼거렸다.
"나의 기사는 생각보다 취향이 과격하구나아아..."
"야이씨."
꽁!
결국 레이에게 딱밤을 한 대 얻어맞은 알레시아가 정수리를 비비며 플로리아 앞에 섰다.
새로운 계약 각인이 플로리아와 알레시아의 셀로미어에 새겨졌다.
오늘의 일을 함구할 것.
필립스 백작가의 관계자들에게 위해를 끼치는 행위를 금할 것.
플로리아가 얻게 된 새로운 제약의 대략적인 내용이었다.
그 대가로 알레시아는 플로리아가 정령과의 계약을 조율할 때 협조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됐다.
계약 각인을 새긴 후 간신히 지면을 다시 딛게 된 플로리아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얼마나 오래 기다린 순간이었던가.
비록 온몸이 욱신대는 탓에 감흥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번져나가는 희열을 통제하기 힘들었다.
플로리아가 구석에서 몸을 웅크린 채 상처를 돌보고 있던 바람 정령에게 다가갔다.
"입장이 역전됐네?"
바람 정령이 흠칫 몸을 떤다.
플로리아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가는 순간 레이가 앞을 가로막았다.
"부탁 하나만 더 드릴게요."
"어떤 부탁?"
"이제 정령한테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릴 수 있으시죠?"
"그래."
"그럼 저 개새끼보고 친구 좀 데려오라고 해봐요."
"친구...? 어째서?"
레이가 고개를 돌려 알레시아에게 손짓했다.
"알레시아, 정령 가지고 싶다고 했지?"
"그러하다! 나도 귀엽고 말 잘 듣는 정령을 꼭 가지고 싶구나."
레이의 의도를 알아챈 플로리아가 무심코 고개를 저었다.
"알레시아는 모노클이라 정령이 계약을 맺기 꺼려..."
플로리아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레이가 허리춤에 찬 검을 다시 뽑았다.
플로리아는 깨달았다.
"아..."
정령과 좋은 계약을 맺기 위해서는 타고난 재능, 오랜 시간, 그리고 운이 따라줘야 한다.
정령마다 호불호가 확실했기에 아무리 뛰어난 정령술사도 모든 정령에게 환영받지는 못했다.
허나 레이에게 정령의 취향은 관심 밖이었다.
"아가씨, 어서 빨리..."
정령의 취향 따위는 칼 한 자루만 있으면 얼마든지 교정할 수 있었으니까.
"저 개새끼한테 친구 좀 데려오라 해봐요."
레이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졌다.
계약 (3)
58화
친구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은 바람 정령이 모습을 감췄다.
레이는 몸을 덮을 망토를 플로리아에게 건네주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정령들은 실체화를 안 하고도 우리를 관측할 수 있나요?"
"관측이라..."
플로리아가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
정령과 굉장히 깊게 연결되어있었던 플로리아이기에, 정령들의 생리에 대해서도 일부 이해하고 있었다.
"계약을 통해 실체화하지 않으면 우리 차원을 직접 관측하진 못해. 하지만 느낄 수는 있지."
고개를 든 플로리아가 중간이 뻥 뚫린 천장을 바라봤다.
"저 위에서 싸움이 벌어진다면, 직접 볼 수는 없지만 벽을 타고 흐르는 진동은 느낄 수 있잖아? 그런 원리가 아닐까... 싶어."
"그렇군요. 혹시 정령 간의 커뮤니티가 어떤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지는 아시나요?"
"서로 간의 소통이 활발하진 않을 거야. 무리를 짓는다 해도 같은 근원을 지닌 정령 중 격이 비슷한 이들끼리만 모인다고 해."
"그럼 그 개새끼도 비슷한 놈을 데려오겠네요."
"플랑."
"네?"
"플랑이었어. 그 개새끼한테 내가 지어준 이름."
"하하하."
레이가 낮게 웃었다.
늑대 정령의 이름을 입에 담는 플로리아의 얼굴엔 잠깐 사이에 다채로운 감정이 지나갔다.
레이가 대화를 이어가려는데, 마침 '플랑'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휘이익!
난데없이 바람이 인다.
플랑의 곁에, 흐릿한 무언가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알레시아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손을 뻗었다.
알레시아를 넓게 감싸듯 마나로 이루어진 원이 지면에 새겨지며, 흐릿했던 정령의 모습이 조금 더 뚜렷해진다.
플랑을 똑 닮은, 늑대 형상의 바람 정령이었다.
정령과 계약을 맺기 위한 첫 번째 절차를 성공한 알레시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목소리를 떨었다.
"아, 그, 그, 정령이여. 나와 계약을 맺어 주겠는가?"
알레시아의 서클 위로 룬어가 떠오른다.
마법사가 정령과 계약을 맺기 시작한 지도 까마득한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정령과의 계약도 종류별로 어느 정도 정형화되어 있었다.
알레시아가 내민 계약은 정형화된 계약 중에서도 정령에게 비교적 유리한 종류의 것이었다.
헌데도 바람 정령은 대번 아가리를 벌리더니 날카로운 이빨을 알레시아에게 들이댔다.
[크릉!]
"우왁!"
깜짝 놀란 알레시아가 엉덩방아를 찌었다.
정령은 계속해서 으르렁대며 알레시아에게 불만을 드러냈다.
알레시아가 모너클인 게 마음에 안 들었나 본데, 레이는 입꼬리를 길게 찢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알레시아에게 화풀이를 끝낸 정령이 임시 실체화를 풀고 사라지려는 순간.
공간검이 내리꽂혔다.
푸욱!!
[깨갱!! 깽깽!!]
등 뒤를 찔린 정령이 개처럼 울부짖었다.
발버둥치는 정령을 자기 품으로 끌어당긴 레이가 정령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거 알아?"
레이의 손가락이 미궁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플랑을 향한다.
"네 친구가 널 팔았어."
[크륵?!]
바람 정령의 눈에 분노가 불어닥치려는 순간 레이가 검을 비틀었다.
{깨갱!! 깽!! 깽!!]
다시 한 번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서 발버둥친 정령이 눈치껏 알레시아가 만들어낸 룬 문자와 공명하기 시작했다.
허나 계약 각인이 완성되기 전 레이가 알레시아를 멈춰 세웠다.
"알레시아, 계약 내용 좀 바꾸자."
"어떻게 바꾸면 되겠느냐?"
"그러니까..."
레이는 이미 한참 전에 이런 상황을 대비해 정령을 완전히 속박시킬 수 있는 계약을 필립스 백작의 도움을 받아 완성해두었다.
알레시아가 새로운 계약 각인을 그려내자 정령이 낑낑거리다 말고 고개를 돌려 레이를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냐. 내가 너한테 잘못한 것도 없잖냐.
대충 그런 감정이 정령의 눈빛에 담겨 있었다.
레이가 목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꼽냐? 꼬우면 어쩔 건데?"
[...]
정령은 깨달았다. 미친놈한테 단단히 잘못 걸렸다고.
결국 정령은 알레시아와 노예 계약을 체결해야 했다.
난데 없이 수십 년을 노예 노릇을 하게 된 정령이 플랑에게 가서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플랑 또한 뻔뻔하게 마주 이빨을 들이대며 성질을 냈는데, 그 순간 레이가 검을 뽑아들어 허공에 붕붕 휘둘렀다.
"어허, 이 새끼들이 어디서 주인 허락도 없이 아가리를 벌려? 칼침 한 번 더 맞을래?"
[...]
[...]
조용해진 정령을 보고 흡족하게 웃은 레이가 플로리아에게 부탁했다.
"이번엔 좀 더 강한 친구로 데려오라고 명령해주실래요?"
"어, 음...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었니?"
잠깐 망설인 플로리아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두 번째로 불려나온 정령은 거대한 독수리 형상을 지닌 바람 정령이었다.
중급 정령인 늑대 정령들과 달리, 중상급 정령인 독수리 정령은 꽤 완강하게 반항했으나.
날개가 달린 어깻죽지를 레이가 톱질하듯 썰어나가기 시작하자 결국 항복하고 노예 계약을 맺었다.
서글픈 표정으로 기어 다니는 정령들 사이를 알레시아가 감격한 얼굴로 파고들었다.
"나에게도 정령이 생겼구나!!"
늑대 정령과 독수리 정령을 끌어안은 알레시아가 양쪽에 뺨을 비비며 싱글벙글 웃었다.
"시작은 좀 거칠었지만 앞으로 잘 지내보자꾸나!"
잠시 망설인 늑대 정령이 배를 까뒤집고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알레시아가 꺄르르 웃으며 좋아하자 늑대 정령은 더욱 열심히 몸을 흔들었다.
"사회생활을 할 줄 아는 정령이군..."
솔직히 감탄한 레이가 알레시아에게 물었다.
"알레시아, 셀로미어는 어때?"
"으음... 이번 계약으로 가득 찬 것 같구나아..."
셀로미어에 새길 수 있는 계약 각인의 용량은 한정되어 있다.
중급 정령 하나, 중상급 정령 하나, 그리고 플로리아와의 계약으로 인해 알레시아의 셀로미어는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알레시아가 재능이 없는 건 아니었다.
대부분의 네추럴들도 중급 정령 두셋이나 상급 정령 하나와 계약하면 셀로미어의 용량이 대부분 차곤 했다.
알레시아는 더는 정령과 계약을 맺을 수 없단 사실에 잠시 아쉬워했으나, 이내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늑대 정령의 배를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정령들의 이름을 짓고 싶구나! 무엇이 좋을 것 같으냐?"
머리를 긁적인 레이가 되물었다.
"귀여운 게 좋아? 거창한 게 좋아?"
"고르자면 거창한 쪽이 좋겠구나!"
레이는 대충 답했다.
"펜리르랑 피닉스는 어때?"
"너무 과분한 느낌도 들지만 멋있는 이름이구나! 마음에 들었도다!"
알레시아가 해맑게 웃으며 정령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사이 레이가 플로리아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가씨께선 정령 더 필요 없으세요?"
"권유는 고맙지만 마음만 받을게."
플로리아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처럼 강압을 활용해 정령과 계약을 맺을 거면 필연적으로 강력한 제약을 정령에게 걸어야 한다.
자유를 허락했다가는 뒤통수를 맞을 게 뻔하니, 무조건 목줄을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
헌데 계약 각인의 특성상, 노예 계약에 가까운 제약을 불어넣으려면 막대한 용량의 셀로미어를 소모해야 한다.
노예 계약을 맺게 되면 정령의 힘을 100% 활용할 수 있기에 비효율적인 선택은 아니었으나, 플로리아는 지금 당장 정령의 수를 늘리고 싶지는 않았다.
"당분간은 이 녀석이랑 단둘이 대화를 좀 나누고 싶어."
플로리아의 시선을 받은 플랑이 낑낑거리며 지면에 머리를 박았다.
레이가 고개를 끄덕이곤 천장을 바라봤다.
플로리아의 일은 잘 마무리했으니, 이제는 벽에 틀어박혀 기절해 있을 기사들을 수습해야 했다.
*
머리의 특정 부위에 마나를 억지로 불어넣을 시 단기적으로 기억을 상실시킬 수 있다.
허나 외부의 마력에 저항력을 갖춘 기사의 경우, 마나로 머리를 좀 헤집는다 해도 기억의 혼란은 느낄지언정 대략적인 상황의 경위는 떠올릴 수 있었다.
레이에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오시리스 가의 기사들은 자신들이 젠킨슨과 레이에게 공격받았다는 사실은 기억했지만, 정확히 어떻게 제압당했는지는 떠올리지 못했다.
"이 미친놈들이...!!"
물론 정신을 차린 오시리스 가 기사들은 험악한 기세를 뿜어내며 검을 뽑았다.
선제 공격을 당한데다, 기절했다 일어나니 플로리아의 뺨이 어마무시하게 부풀어 있었으니, 거품을 물지 않는 게 이상했다.
플로리아는 꽤 오랜 시간을 들여 기사들을 설득했다.
정령과의 재계약을 하는데 알레시아가 도움을 주었다고 말이다.
도움의 방법이 과격했을지언정 큰 은혜를 입었다는 플로리아의 설명을, 오시리스 가 기사들은 영 납득하지 못했다.
허나 알레시아가 정령을 자유롭게 다루는 모습을 보여주자 그제야 오시리스 가 기사들은 불만스럽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모너클이 정령과 계약을 맺기 힘들다는 건 상식이다.
플로리아는 알레시아가 특이 체질을 지닌 덕분에 정령들과 계약할 수 있었으며, 그 체질을 활용해 자신의 재계약을 도왔다고 설명했다.
얼추 말은 되었기에, 오시리스 가 기사들을 칼을 집어넣었다.
물론 이를 갈며 경고하는 건 잊지 않았다.
"이번 일은 오시리스 백작님께 분명히 보고할 것이오."
젠킨슨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여기서 더 입을 놀려봤자 도발만 하는 꼴이었다.
미궁 밖으로 나가자 다시 난리가 났다.
플로리아의 얼굴은 빵빵하게 부어있지, 망토를 벗기니 드레스는 다 찢어져 있지, 드러난 살갗에는 밧줄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몇몇 시종들이 뒷목을 잡고 기절했고, 리옹이 격분하며 검을 뽑아들었다.
다시 플로리아의 오랜 설득이 이어지고, 리옹은 숨을 몰아쉬며 겨우겨우 검을 집어넣었다.
"최대한 빨리 가까운 도시로 가서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리옹이 설득했으나 플로리아는 포션만 하나 바른 채 고개를 저었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올게."
"아가씨...!!"
"잠시면 돼."
고집을 부린 플로리아가 산맥의 능선을 타고 걸어 올라가 주변 경치를 살폈다.
나무가 적은 산인지라 능선 아래가 훤히 시야에 들어왔다.
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끼며 플로리아가 두 팔을 넓게 벌렸다.
"정말로... 자유를 찾았네."
전신을 타고 흐르는 황홀감에 플로리아가 가볍게 몸을 떨었다.
플로리아는 여태까지 바람의 쾌감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바람을 근원으로 둔 정령과 감정을 공유했기에, 도리어 바람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져 있었다.
이제는 아니다.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바람의 손길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플로리아를 뒤따라온 레이가 물었다.
"영지로 돌아가실 건가요, 아니면 황실 마탑으로 가실 건가요?"
"무슨 의미야?"
"정령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탑으로 가시려던 게 아니었나요?"
"아하하."
플로리아가 쾌활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 말도 맞지만, 황실 마탑은 연줄을 만들어 놓기에 최적의 장소야. 굳이 기회를 놓칠 필요는 없잖니?"
하늘을 올려다본 플로리아가 말을 이었다.
"네 아가씨도, 곁에 내가 없으면 남들이 우습게 보고 무시할 거야. 필립스 백작령의 저력을 제대로 아는 이가 몇이나 되겠니?"
하늘에서 내려앉은 바람 정령, 피닉스가 플로리아와 레이의 사이를 가로막듯이 파고들었다.
능선 아래서 알레시아를 등 위에 태운 펜리르가 열심히 달려오고 있었다.
"우아아아아...!! 생각보다 빠르구나아아...!!"
바람을 다루는 펜리르의 속도는 말보다도 빨랐다.
삽시간에 플로리아의 곁에 도착한 알레시아는 비틀거리며 펜리르에서 내렸다.
잠시 균형을 잡지 못하던 알레시가가 레이의 팔을 훅 잡아당겼다.
"레이는 나의 기사이니라! 탐냈다가는 플로리아라 해도 용서치 않겠느니라!"
"우후후..."
새로운 부채를 펼쳐 입을 가린 플로리아가 언젠가 했던 말을 반복했다.
"알레시아, 정말 이자가 네 기사가 맞니?"
"그러하다!"
"남자 하나는 잘 잡았네."
산뜻한 미소를 건넨 플로리아가 설레는 마음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만 내려가자. 리옹의 눈빛도 점점 무서워지고 있으니까."
플로리아를 호위하기 위해 따라온 리옹이 검자루에 손을 올린 채 마나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더 어울렸다간 재차 다툼이 벌어질 것 같았기에 플로리아는 다시 리옹 곁에 가서 섰다.
레이가 아닌, 리옹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기대되네. 마탑은 어떤 곳일지."
10년 전에 상실했던 순수한 호기심이 다시 샘솟는다.
해맑게 웃는 플로리아를 보며 리옹은 손아귀에서 힘을 뺐다.
이리 자연스레 웃는 아가씨의 모습을, 리옹은 오늘 처음 보았다.
리옹은 그제야, 정말로 플로리아를 괴롭히던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깨달았다.
황실 마탑 (1)
59화
플로리아와 관련된 정령 문제가 해결된 이후.
알레시아와 플로리아의 일행은 순탄하게 황실 마탑으로 향했다.
중간중간 작은 해프닝도 있었고, 알레시아가 마차 대신 펜리르를 타고 이동하겠다고 고집을 부려 젠킨슨의 속을 썩이기도 했다만.
어쨌든 별 탈 없이 황실 마탑 인근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오..."
저 멀리, 150 m가 넘게 솟아올라 있는 탑을 바라보며 레이가 낮은 탄성을 흘렸다.
황도와 가까워질수록 유동 인구가 증가함은 물론 건물의 양식과 종류까지 급격히 변하였는데, 흡사 수백 년의 시간이 빠르게 흐른 느낌이었다.
'여기 문명 수준도 만만치는 않네.'
마나와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다.
특정 영역에 있어 21세기 지구에서도 구현 못 할 현상을 손쉽게 실현하여 레이를 놀랍게 만들고는 했다.
'하지만 발전은 훨씬 느리겠지.'
레이의 전생에 비해 정보·기술의 접근성과 양극화가 훨씬 심한 세계다.
지구보다 인구 또한 부족하니 발전이 훨씬 더딜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마법과 관련된 지식은 권력과 직결되어 있어 서로 독차지하기 위해 으르렁대니, 몇백 년 동안 제자리걸음이나 다름없는 꼴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레이가 생각에 잠긴 사이 알레시아가 펜리르 위에서 신나서 외쳤다.
"저기가 바로 황실 마탑이로구나!"
[크릉!]
펜리르가 알레시아의 감탄에 호응했다.
펜리르는 이제 익숙하게 바람 안장을 만들어 알레시아를 안전하게 떠받치고 있었다.
"저 탑은 정말로 높구나. 무얼 하는 곳이냐?"
"탑의 이름은 '오벨리스크'. '리실로테 레코드'를 보호하고 관리하는 곳이야."
플로리아가 답변을 해주었다.
일행끼리 자잘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황실 마탑에서 마중이 나왔다.
황실 마탑에서 파견된 마법사는 일행 전부의 피부 위로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마법 각인을 새겨주었다.
황실 마탑에 정상적으로 출입하기 위해선 반드시 소지하고 있어야 하는 각인이었다.
황실 마탑을 넓게 둘러싸고 있는 결계를 통과한 뒤 한 번 더 신원 확인 절차를 거쳤다.
신원 확인을 끝낸 레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각기 다른 세력과 역할을 지닌 건물이 여기저기 세워져서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부지 중앙을 차지한 '오벨리스크'를 제외하면, 황실 마탑은 거대한 대학 캠퍼스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기숙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신원 확인 절차가 전부 끝난 뒤 알레시아와 플로리아는 유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로 안내되었다.
알레시아와 플로리아는 같은 방에서 공동생활을 해야 했는데, 이것도 나름 귀족이라고 대접해준 것에 가까웠다.
시종과 시녀들은 유학생 기숙사와 조금 떨어져 있는 건물에서 하나의 방을 6명이서 사용해야 했다.
"플로리아! 앞으로 잘 지내보자꾸나!"
기숙사에 도착한 알레시아는 싱글벙글 웃으며 자기 방을 둘러봤다.
시중드는 사람 하나 없이 지내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다른 말로 하자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치 볼 것 없이 행동할 기회를 얻었다는 의미였다.
들뜬 얼굴로 침대에 걸터앉아본 알레시아가 곧장 시종이 두고 간 가방 하나를 풀어냈다.
가방에 들었던 옷가지를 뭉텅뭉텅 꺼내는 알레시아를 플로리아가 의아하게 바라봤다.
"뭐해?"
"잠시 기다려 보아라. 으흐흐흐... 이걸 몰래 챙기느라 참으로 고생했도다!"
"...?"
음침한 웃음을 흘리는 알레시아를 플로리아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옷을 모두 꺼낸 알레시아가 천으로 둘둘 말아 은폐해놨던 서적 몇 권을 가방에서 빼냈다.
잠시 감격스러운 표정을 한 알레시아가 책상 위에 책을 내려놓으며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내가 아끼는 서책들이니라! 남에게 비밀로 한다면 플로리아에게도 빌려주도록 하마!"
플로리아가 눈을 아래로 내려 서책들의 제목을 살폈다.
[귀축 기사와 악당 영애님]
[짐승을 주웠다]
[로피탈의 50가지 그림자]
"?"
생전 처음 보는 서책들의 제목에 플로리아가 얼을 타고 있자 슬그머니 곁으로 다가온 알레시아가 플로리아의 품에 '귀축 기사와 악당 영애님'을 안겨주었다.
"일단 읽어보고 감상을 들려다오! 내가 생각하기에 플로리아도 마음에 들어 할 것 같구나!"
"흠..."
플로리아가 호기심을 가지고 책의 첫 장을 펼쳤다.
플로리아가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이었다.
*
기사들의 경우 기사와 종자가 같은 방을 쓰게 됐다.
젠킨슨과 함께 짐을 풀어놓은 레이가 침대에 드러누운 채 기지개를 켰다.
태평해보이는 레이와 다르게 의자에 앉은 젠킨슨이 고민에 빠져 눈살을 찌푸렸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숙소가 이리 분리되어 버리면 아가씨 곁을 지키기 쉽지 않겠구나."
알레시아가 기숙사 바깥으로 외출할 때는 밀착 호위가 가능했지만 기숙사 안까지 따라갈 수는 없었다.
젠킨슨이 곤란해하자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기숙사 안에서 문제가 생기긴 힘들 거예요. 거리 관리하는 인원이 몇인데요."
"만약이라는 게 있지 않으냐."
"어지간한 위협은 아가씨 혼자 타파할 수 있으실 겁니다. 누구 덕분에 중급 정령이랑 중상급 정령을 자기 손발처럼 부릴 수 있게 되셨잖아요?"
뻔뻔한 레이의 자랑에 젠킨슨이 실소를 터뜨렸다.
레이의 말마따나 충성스러운 중급 정령과 중상급 정령이면 상황에 따라 기사보다 나았다.
알레시아는 아직 2서클의 경지에 머물러 있었으나 실질적으론 4서클에 비견 되는 전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고맙다. 네가 아니었으면 많이 곤란할 뻔했다."
"뭐, 은혜를 입은 만큼 하는 거죠."
낄낄 웃은 레이가 다시 허리를 일으켰다.
며칠 간은 여행 동한 쌓인 피로를 풀 겸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지만 마냥 마음을 놓고 있는 건 아니었다.
여긴 마법사들 천지인 마탑 한가운데였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자들 대부분이 마법사라 생각하니 절로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우리 아가씨가 그다지 환영받지는 못하겠죠?"
"그렇겠지. 가문도 다른 이들에 비해 한미하고 아주 대단한 재능을 타고나신 것도 아니니."
황실 마탑에는 유학생들을 위한 커리큘럼이 몇 가지 준비되어 있었다.
황실의 지원을 받아 연구를 진행하는 마법학 교수들이 시간을 할애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구조에 가까웠고, 진정 배움을 원하는 학생들은 따로 교수들에게 연락해 거리를 좁혀야 했다.
교수들 또한 학생들의 출신과 자질을 고려해 학생들과 만남을 가졌다.
그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지식을 익히고 인맥을 넓혀갔다.
알레시아의 경우 가문의 힘도 약하고 재능이 유별나게 눈에 띄지도 못하니 교수들에게 제대로 대접받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허나 젠킨슨과 레이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정령의 존재였다.
알레시아가 커리큘럼에 따라 수업 몇 개를 참관한 이후.
교수들 간에 비슷한 내용의 대화가 한 번씩 돌았다.
"선생님, 이번에 새로 들어온 유학생 말입니다, 정령을 두 마리나 사역한다는데요?"
부교수 직급에 머물고 있던 와우트가 식사를 하다 말고 입을 뗐다.
수저를 내려놓은 정령학 교수 지노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게 뭐 대단하다고. 황실 마탑에서 정령 몇 마리 사역할 수 있는 인재는 쌔고 쌨잖아? 연구할 시간도 부족하니 그냥 신경 꺼."
"네추럴이 아니라 모노클이라는데요?"
"그걸 왜 이제 말해, 등신아!!"
네추럴이 아닌 모노클이 정령을 사역하는 경우는 굉장히 희귀했다.
소식을 들은 황실 마탑의 모든 마법사들이 알레시아에게 관심을 비쳤다.
갑자기 어마무시한 수의 러브콜이 알레시아에게 쏟아졌다.
레이가 알레시아를 불러다 앉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알레시아, 한동안 마법사들이 건네는 제안은 전부 다 거절해."
"알겠도다!"
"특히 뭐 어떤 실험을 같이 하자고 하거나 다른 마탑에 들려달라고 하거나 이러는 새끼들한테는 가까이 가지도 말고."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알아서 하겠다!"
목에 힘을 잔뜩 준 채 뻗대는 알레시아의 정수리를 레이가 힘껏 내려쳤다.
콩!
"아윽!"
"야이씨, 지금 네가 잘나서 인기 있는 줄 알아? 정신 안 차릴래?"
정수리를 쓰다듬는 알레시아를 보며 플로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플로리아는 커버를 갈아 끼운 책을 읽어가며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알레시아는 내가 옆에서 잘 지켜보고 있을게. 너무 걱정하지는 않아도 돼. 모너클이 정령을 사역하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니까."
굉장히 드문 확률이긴 하나 독특한 취향을 가진 정령이 가끔씩 모너클과 계약을 맺고는 한다.
"당장은 마법사들이 알레시아가 특이한 체질이나 비전을 가지고 있지는 않나 의심하고 있지만..."
그냥 다른 정령과 알레시아가 접촉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해결될 문제였다.
알레시아와 접촉한 정령은 당연히 모너클을 향한 적대감을 드러낼 것이고, 마법사들은 알레시아가 그저 운이 좋아 정령을 얻게 되었다고 판단할 확률이 높았다.
해명은 당장이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플로리아는 알레시아에게 대단한 비전이라도 숨긴 듯 허세를 떨며 마법사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라 조언했다.
조금 위험한 선택이긴 했지만 어쨌든 인맥을 쌓아나갈 기회였다.
레이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선을 잘 타야 할 텐데요. 알레시아가 잘할 수 있을까요?"
"기사된 자가 자기 아가씨를 너무 믿지 못하는 거 아니니?"
평상시에는 좀 얼빵해 보이는 알레시아였다만.
플로리아가 보기에 알레시아는 결코 눈치가 없지 않았다.
플로리아의 설득에 레이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레시아와 플로리아의 조합은 유학을 온 지 보름도 안 되어 마법사들의 입에 굉장히 자주 오르내리게 되었다.
모너클이면서 중급과 중상급 정령을 동시에 사역하는 알레시아.
오시리스 가의 영애이자 네추럴로 태어나 뛰어난 마법적 재능을 보유한 플로리아.
둘의 명성이 높아지자 당연히 견제가 들어올 기미도 보이기 시작했다.
레이는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전에 마탑을 한 번 둘러보기 위해서 따로 시간을 마련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역시나 오벨리스크였다.
*
"리실로테 레코드가 잠들어 있는 탑이라..."
리실로테.
600년 전 존재했던 대마법사이자 인류의 마법을 한 단계 더 진일보시켰다고 평가받는 불세출의 천재.
물론 레이에게 전혀 와 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 진일보시킨 마법 이론을 자기들끼리 꽁꽁 싸매고 있으니 말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레이는 아직 마법과 관련된 권력 구조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하지만 두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현대의 마법이 600년 전에 비해 크게 발전하지 못했으며, 리실로테가 남긴 유산을 적법한 절차를 거쳐 접하기는 거의 불가능 할 거란 것이다.
멸망을 막기 위해선 당장이라도 황실과 마탑의 지식을 모조리 끌어와 인재들에게 가르쳐야 하겠지만.
지식이 무엇보다 확고한 권력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그딴 게 가능할 리 없었다.
"이러다 다 좆 돼봐야 정신을 차리지."
레이가 끌끌 혀를 차며 오벨리스크에 입장했다.
오벨리스크의 일부 구역은 외부인에게도 출입이 허가되어 있었는데, 아주 기초적인 마도서를 몇 권 빌려 갈 수도 있었다.
'필사해서 가지고 나가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네.'
레이는 서클과 관련된 책 몇 권 집어 들었다.
서클을 익힐 각오도 했고, 사실 익히려고 작정했다면 주변의 도움을 받아 가능도 했을 테지만.
레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코어가 워낙 유별난 존재였던 탓에 신중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그렇다 치고 우리 루나는 어찌한담.'
아직은 알레시아를 따라다니며 황실 마탑의 분위기에 적응하고 있었다.
여기서 천천히 관계를 넓혀가며 회유 가능한 마법사를 찾아볼 생각이었는데, 남은 기간이 그리 넉넉지 못했다.
복잡한 마음으로 책을 빌린 레이는 오벨리스크의 안을 잠시 거닐었다.
하르시아의 전진을 이었으니, 리실로테의 귀신이라도 나타나서 말을 걸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아주 약간 있었다.
"너는 누구야?"
딴 생각을 하는 사이 생소한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로브를 입고 있는 중년 여성이 어느새 옆에 서 있었다.
레이가 곧장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필립스 백작가 영애님 곁을 수행하고 있는 레이라고 합니다. 젠킨슨 경을 마스터로 모시고 있습니다."
"오벨리스크에는 무슨 일이니?"
"작은 호기심 동해 들리게 되었습니다. 출입은 정식으로 허가받았습니다."
"정식으로 허가 받았다라... 알겠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렴."
레이가 대꾸 없이 고개를 숙였다.
초면인 사람을 오라 가라하는 게 불쾌했지만 굳이 마법사와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뒤돌아 걸어가는 레이의 뒷모습을 보며 마법사가 피곤해 보이는 눈가를 좁혔다.
"스콰이어...라고?"
오벨리스크 안은 대마법사 리실로테가 만들어놓은 공간 왜곡장이 여기저기 펼쳐져 있었다.
때문에 적합한 인증 없이는 앞을 향해 몸을 움직여도 결국 한정된 공간을 계속해서 맴돌게 됐다.
헌데 멀어져가는 스콰이어는 자연스레 공간 왜곡장을 통과해 오벨리스크 심부로 발을 들이려 했다.
"정체가 뭐지?"
여자가 잠시 고민에 잠겼다.
황실 마탑 (2)
60화
황실 마탑에서 정교수 직위를 지니고 있는 마법사, 로필렌은 레이가 사라지고도 오랜 시간 제자리를 지켰다.
현 위치는 오벨리스크 초입이기에 공간 왜곡장의 강도는 비교적 약한 편이었다.
레이가 고위 마법사거나 강력한 아티펙트를 지니고 있다면 공간 왜곡장을 뚫어내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허나 오벨리스크 안에서 마법을 펼치거나 아티펙트를 사용하면 무조건 감지당한다.
레이가 만약 함부로 수작을 부렸다면 진즉 잡혔을 것이다.
'정말 정체가 뭐지?'
특정 세력이 자본과 정보를 모아 오벨리시크의 보안 시스템을 농락해 레이를 첩자로 잠입시켰을 수도 있겠다만.
인기척이 들렸음에도 태평하게 복도를 산책하고 있던 레이의 모습을 상기하면 믿기 힘든 가정이었다.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전혀 모른다는 태도였는데...'
그게 기만을 위한 연기가 아니었다면, 과연 어떻게 된 일일까.
본인도 모르게 누군가의 실험 도구로 쓰였거나, 공간 왜곡에 대해 말도 안 되게 강한 내성을 지니고 있는 경우일 수도 있었다.
양쪽 다 믿기 힘든 가설이었으나 이미 로필렌은 '현상'을 목격한 후였다.
'반드시... 얻고 싶은데.'
욕망이 일었다.
내부자인 로필렌이 레이처럼 공간 왜곡장을 기만할 수단을 갖춘다면 오벨리스크 대부분의 구역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다.
어쪄면, 높으신 분들이 꽁꽁 싸매고 있을 '리실로테 레코드'와 접촉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살짝 어깨를 떤 로필렌이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당장은 흥분하지 말고 저 스콰이어에 대해 알아봐야 했다.
배경과 실력을 파악하고, 공간 왜곡장을 기만한 기술의 실체를 확인해야 했다.
협박 혹은 회유는 그다음이었다.
로필렌은 몸이 다는 것을 느꼈다.
남들이 눈독을 들이기 전에 먼저 차지해야 한다.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으나, 리실로테 레코드는 목숨을 걸 가치가 있었다.
'어차피 이미 간당간당한 목숨, 판돈을 더 올린다 해서 달라질 게 있나.'
짙게 내린 다크서클 사이로 탐욕 어린 총기가 반짝였다.
마법학에 관해서 만큼은,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로필렌이 레이의 뒤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
레이가 오벨리스크에 들르고도 며칠이 더 지났다.
레이의 걱정과 다르게 알레시아는 빠르게 교우 관계를 넓혀가며 충실한 유학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알레시아와 함께 몰려 다니는 귀족 영애들을 훔쳐본 레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알레시아는 수상할 정도로 동성 친구를 잘 사귀었다.
귀족 영애들의 성격이 부드러워 알레시아를 쉽게 받아들여 준 것일까?
'그럴 리가.'
유학 오자마자 어쭙잖은 정령 두 마리 사역한다고 교수들의 관심을 쏙 뺏어간 알레시아를 과연 다른 귀족들이 좋게 봐주겠는가.
절대 그럴 리 없었다.
대체 무슨 떡고물을 던져줬기에 저리 또래 친구들을 끌고 다니나 고민하던 레이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좋은 게 좋은 거였다.
상념을 털어낸 레이가 숙소를 찾아 들어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며칠 동안 마법서를 통해 서클에 관한 지식을 조금 더 보충할 수 있었다.
레이는 이론을 더 보강하기 전에, 자기 몸을 점검해볼 생각이었다.
"자... 정신 차리고 해보자고."
레이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렸다.
레이는 몇 년 전 코어의 마나량을 조금 늘리려 했다가 죽을 뻔했던 기억을 상기했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체험이었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낸 레이가 호흡을 골랐다.
코어는 심장 안에 자리한다. 마나량을 늘리겠다고 코어를 무작정 팽창시킬 수는 없다.
결국 체내의 마나량을 늘리기 위해선, 코어를 더욱 고밀도로 압축시켜야 한다.
이를 악 물은 레이가 심장의 코어를 억지로 압축시켰다.
끄드드드드득!
코어가 압축된다.
레이가 하고자만 하면, 당장도 코어를 쥐꼬리 뒤에 숨길 수 있을 만큼 고밀도로 압축할 수 있었다.
문제는 압축한 다음이었다.
끼기긱!
코어가 요동친다.
고밀도로 압축된 코어일수록 보통은 더 안정화되기 마련인데, 레이의 것은 거꾸로였다.
밀도가 높아질수록 그 특유의 성질을 더욱 강렬하게 드러냈다.
츠즈즉!
코어가 몸을 담은 차원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심층 차원에 발을 걸친 코어가 맞닿은 공간을 괴리시키며 주변을 일종의 아공간으로 변화시킨다.
심장 안에서 그 지랄을 해대니 몸뚱이가 버텨낼 리가 없었다.
"크륵!!"
핏물을 뱉어낸 레이가 곧장 압축된 코어를 풀었다.
가슴 주변이 뜯어질 것처럼 지끈거리며 심장 박동이 뛸 때마다 격통이 내달렸다.
"끄으으으으윽....!! 뒈질 것 같네, 진짜...!"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몇 년 전에 비해 변한 게 없었다.
간신히 뒤로 고꾸라지는 걸 막은 레이가 코어를 회전시켜 전신에 마나를 순환시켰다.
차츰 안정을 찾은 레이는 순환하던 마나를 오른쪽 팔뚝에 집약시키기 시작했다.
근육이 마나에 의해 강화되며 팔뚝에 힘이 넘쳤다.
허나 마나의 밀도가 계속해서 높아지자.
시푸르게 빛나던 팔뚝의 경계가 어느 순간 흐릿해졌다.
퍼버벅!!
살갗이 터져나가며 사방에 피가 튀었다.
레이는 피가 쏟아지는 팔뚝을 부여잡은 채 고통을 참기 위해 이를 갈았다.
"미치겠네."
팔뚝 주위로 공간 괴리 현상이 나타나며 발생한 참사였다.
금속은 이런 공간 괴리 현상을 버틸 수가 있었다. 안정되고 정지된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피가 흐르고 살아 숨 쉬는 세포로 구성된 신체는 공간이 괴리되며 발생하는 충격을 버티지 못했다.
그러니 이렇게 터져 나가는 것이다.
"아니 무슨 마나 성질이 이따위야?"
이건 뭐 몸속에 폭탄을 집어넣고 생활하는 격이었다.
까딱 실수해 신체 일부에 과하게 마나를 집약시키면 바로 터져나간다고 보면 됐다.
물론 거진 검강에 가까운 밀도로 마나를 집약시켜야했지만,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아예 전신에 한꺼번에 고밀도 마나를 불어넣으면 버틸 수 있다고는 하는데...'
당장 지닌 소량의 마나로는 꿈도 못 꿀 시도였다. 시도했다가 실패하면 황천길 직행이었고 말이다.
레이는 몇 년째 자신이 지닌 코어의 특수성과 관련된 문제를 고민했다.
과연 심장 주위에 만든 서클이 일종의 컨트롤러 역할을 해 코어를 제어해줄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장족의 발전을 이룰 수 있을 테지만.
부작용이라도 생긴다면 오래 사는 건 글렀다고 봐야 했다.
'굳이 서클을 만드는 도박을 해야 할까?'
자기 목숨을 판돈으로 올리는 건 레이에게 익숙했다.
허나 본인이 강해지기 위해서 목숨을 거는 행위는 레이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았다.
레이는 어디까지 영웅이나 악당의 운명을 타고난 재능 있는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목표였다.
목숨 걸고 강해져서 마왕을 직접 때려잡는 게 목표가 아니란 의미다.
레이가 고민에 잠겨 있는 사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피바다가 된 방을 확인한 젠킨슨이 미간을 찌푸렸다.
"침입자라도 있었던 거냐?"
"아니요. 수련 좀 하느라."
"수련을 왜 방안에서 하는데?"
"황실 마탑에는 기사가 이용 가능한 비공개 수련장이 없더라고요."
"해도 좀 얌전히 하던가. 피가 안 묻은 곳이 없네. 이건 다 어떻게 치우자고?"
"어쩔 수 없네요. 시종들 불러서 시키죠."
레이가 가볍게 답했다.
이게 다 세상 구하자고 하는 짓인데, 시종 좀 부려 먹는 걸 미안해할 생각은 없었다.
*
"빙결, 빙결 마법..."
다시 한 번 오벨리스크에 출입한 레이가 마법서가 모여 있는 도서관에 들렀다.
역사서에 하르시아는 한기를 몰고 다녔다고 쓰여 있었다.
'하르시아가 한기를 몰고 다닌 것이 그저 빙결 마법을 즐겨 사용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모종의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레이는 힌트를 얻기 위해 빙결 마법의 기초를 담고 있는 마법서를 찾았다.
"저기 있네."
마법서가 팔이 다을락말락한 곳에 꽂혀 있었다.
손을 위로 뻗어보니 조금 모자랐다.
레이가 점프를 하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가 손을 쭉 뻗어 책을 대신 뽑아주었다.
"이걸 찾니?"
플로리아가 마법서를 내밀었다.
레이가 내심 떫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받았다.
"감사해요."
"감사한 얼굴이 아닌데?"
"제 표정이 원래 험악해서요."
성장기, 빌어먹을 성장기가 빨리 찾아와야 했다.
빙결 마법서가 대부분 구석 상단에 박혀 있었기에 레이는 계속 플로리아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굴욕 속에서 마법서의 대여 절차를 마친 레이가 플로리아와 함께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이거 필사해서 가져갈 수 있을까요?"
"설마. 그래도 꼭 필요하다면 나나 알레시아의 도움을 받으렴. 기본서 몇 권쯤은 필사해서 가져간다 해도 눈 감아줄 거야."
"그렇군요."
루나의 스승을 구하지 못한다면 책이라도 몇 권 필사해야 했다.
플로리아가 생각이 많아 보이는 레이에게 물었다.
"호기심이 많구나? 기사인 네게는 활용 못 할 학문일 텐데."
"예전부터 관심이 많았어요. 마법이란 게 신비롭고 강력한 학문이잖아요?"
"후후..."
산뜻하게 웃음을 흘린 플로리아가 레이의 책을 한 권 대신 들어주었다.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봐도 돼. 이래 봬도 마법에 있어선 꽤 박식하단다?"
"으음..."
잠시 고민한 레이가 먼지가 쌓인 조금 쌓여 있는 책을 살피며 물었다.
"빙결 마법이 비주류에 속하나 보죠?"
"원소 마법 중에 인기가 없는 편이긴 해. 다른 원소 마법에 비해 아무래도..."
"효율이 떨어져서요?"
"어머, 정답이야. 어떻게 알았니?"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때려 맞춘 것이었다.
열역학적인 측면에서 난방보다 냉방이 에너지 효율이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마법에다 진심으로 공학 지식을 들이댈 생각은 아니었지만, 잠깐 옛 추억이 떠올라 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는 레이를 보며 플로리아가 말을 이었다.
"화염 마법을 빙결 마법으로 식히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훨씬 많은 마나가 필요해. 화염 마법으로 공격을 받았을 때는, 동일한 계통의 화염 마법을 쏘아내 위력을 상쇄시키는 게 효율적이야."
"그렇군요."
"물이 흥건한 전장이라면 빙결 마법을 더 위력적으로 활용할 수 있겠지만, 결국 환경의 제한을 받는다는 의미니까."
"인기가 없을 만 하네요."
"마법에 무지한 사람들은 빙결 마법을 얼음 마법이라고 부르며 얼음을 생성하는 마법이라고 착각하고는 해. 하지만 그 본질은..."
"정지겠죠."
"정확해."
플로리아는 살짝 당황했다.
레이가 출신에 비해 굉장히 능력 있고 똑똑하다는 건 알았지만.
예상보다도 굉장히 예리하게 마법의 본질을 짚어나가고 있었다.
이미 누구한테 마법에 관한 지식을 배운 걸까?
플로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레이가 이미 배운 내용을 가지고 통찰력 있는 척 허세를 부리는 인간이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부채를 펼쳐 작게 바람을 일으키는 플로리아에게 레이가 부탁했다.
"아가씨, 궁금한 것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될까요?"
"얼마든지."
"빙결 마법으로 서클이나 코어도 '정지'시킬 수 있나요?"
"...어려운 질문이네."
잠시 고민한 플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할 거야. 마나는 일반적인 물질과 다른 성질을 지녔고, 서클과 코어는 특히 더 그러하지만... 제자리에 고정쯤은 시킬 수 있을 거야."
"그렇군요..."
레이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빠졌다.
하르시아가 지나간 전장에 항상 한기가 휘몰아쳤던 이유.
어쩌면, 하르시아는 적을 해치기 위해 빙결 마법은 운용하게 아닐지도 몰랐다.
체내의 코어를 제어하고 날뛰는 마나를 억지로 고정시키기 위해 필연적으로 서클과 마법의 운용이 필요했을지도 몰랐다.
점점 더 자기 생각에 빠져가는 레이를 플로리아의 목소리가 일깨웠다.
"레이! 어디 갔니?"
"...?"
레이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 레이 곁에 있었던 플로리아가, 10 m가량 떨어진 곳에서 레이를 찾지 못해 헤매고 있었다.
레이가 잠시 눈가를 좁혔다.
플로리아와 레이는 분명 가까이 붙어 직선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헌데 잠깐 사이에 이토록 거리가 벌어져 버렸다.
레이가 복도를 걷는 다른 이들에게 눈을 돌렸다.
그들은 전부 직선으로 걸어가는 듯했지만, 주기적으로 몸의 각도가 어색하게 뒤틀리고 있었다.
'뭐야...?'
레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 하나 없는 복도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황실 마탑 (3)
61화
"..."
레이는 굉장히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결계와 비슷한 무언가가 외부인을 일정 영역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다는 것은 알아챌 수 있었다.
문제는 이걸 자신이 어떻게 통과했느냐다.
'오벨리스크 보안 시스템에 오류가 생겼거나, 내 신원이 관리자 등급으로 잘못 등록되었거나, 누군가 의도를 지니고 통과시켜주었거나, 그도 아니면...'
오벨리스크 내부에 펼쳐진, 사람들의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힘에 대해 자신이 강력한 내성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었다.
레이는 골치가 아팠다.
이제야 며칠 전에 오벨리스크 내부에서 마주친 마법사가 보였던 반응이 이해가 갔다.
출입이 불가한 공간에 웬 기사 종자 하나가 천연덕스럽게 돌아다니고 있었으니 그야 어처구니없을 만했다.
'당시엔 그냥 보내줬다고 해도 분명 흥미를 가질 텐데...'
지금쯤 열심히 뒷조사를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당장은 다행이긴 해.'
레이가 오벨리스크의 출입이 금지된 지역을 거닐었던 사실이 공론화됐다면 진즉 구금되었을 수도 있었다.
허나 레이를 보았던 마법사가 입을 다문 것은, 호의가 아닌 음습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았다.
레이는 잠시 잠깐 마법사가 일을 벌이기 전에 먼저 제거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미친 짓이지.'
여기는 황실 마탑 한가운데였다.
마법사 살해 사건이 발생하면 살해당한 마법의 위상과 관계없이 제국은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아, 머리 아프네.'
그냥 숙소에 조용히 박혀있다가 유학 기간이 끝나고 일행들 사이에 끼어 도망가는 게 가장 안전하게 생각되긴 했다.
입술을 지긋이 씹은 레이가 다시 플로리아를 향해 몸을 돌렸다.
여기서 더 들어가서 다른 마법사를 마주쳤다간 일이 더욱 복잡해진다.
오벨리스크 안쪽에 무엇이 있을지 호기심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 목적과 준비도 없이 다짜고짜 고개를 들이밀 수는 없었다.
츠즉!
레이가 공간을 왜곡시키고 있는 어떤 '선'을 넘으려는 순간.
어두웠던 복도에 한 줄기 빛이 떨어졌다.
레이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복도 구석에 빛 무리가 집약되더니 흐릿하게나마 사람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얼핏 홀로그램을 떠올리게 하는 그 빛 무리가 레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계승자여.]
레이의 눈가가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탑을 오르지 않고 무엇을 하십니까?]
"..."
고민은 길지 않았다.
레이는 빛 무리를 무시한 채 황급히 플로리아를 향해 몸을 던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플로리아가 갑자기 허리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깜짝 놀라 한발 물러섰다.
"어머, 어디 갔었던 거니?"
"어, 음..."
레이가 남들은 인식하지 못하던 복도를 되돌아봤다.
사람 형상의 빛 무리가 어느새 허공으로 증발하고 없었다.
"...멍하니 있다가 뒤처졌었어요."
"그랬니?"
대충 납득한 플로리아가 다시 레이와 나란히 출입구를 향해 걸었다.
레이는 바싹 긴장한 채 다리를 움직였다.
빠르게 오벨리스크를 벗어나야 했다.
출입구에 다다른 레이가 항상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출입구 옆에 걸린 거대한 초상화를 바라봤다.
"아가씨, 저 초상화의 모델이..."
"젊은 시절의 리실로테 님이시라고 해."
"아, 시발..."
레이가 낮게 욕설을 흘렸다.
*
홀로그램이 운운한 계승자.
레이가 당장 예상 가는 건 '하르시아의 계승자' 하나뿐이었다.
리실로테 또한 과거 하르시아와 친분이 있었다고 하니 하르시아의 후예를 위한 어떤 안배가 있었다고 해도 이상치는 않았다.
'코어를 알아본 건가?'
레이가 하르시아의 혈족은 아니니, '계승자'의 여부를 판별할 수단이 있었다면 코어 하나였다.
레이는 심란함을 감추기 위해 애썼다.
리실로테가 공간검의 후계자를 위해 작거나 큰 안배를 준비해두었다는 것.
일견 레이에게 좋아 보이는 소식이었다.
허나 그 안배를, 과연 조용하고 은밀하게 전달받을 수 있을까?
하르시아는 황족이었고, 누군가 정상적인 절차로 공간검을 계승 받았다면 분명 황실의 비호를 받고 있었을 것이다.
리실로테가 계승자에게 준비해둔 안배의 종류가 무엇이든 황실이나 마탑 관계자가 이를 파악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만약 안배가 계승자에게 전달되는 순간 황실에 알림이 가도록 설정이라도 되어 있다면 리실로테의 안배에 손을 대는 건 미친 짓이었다.
'아까 본 그 홀로그램, 사람이 다루는 게 아니었다면 일종의 AI와 유사한 존재일 텐데... 설마 다른 마법사를 찾아가 계승자 운운하는 건 아니겠지?'
이래저래 오벨리스크에 찾아가지 말아야 할 이유만 쌓이고 있었다.
떫은 표정을 한 레이에게 플로리아가 물었다.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니? 얼굴이 안 좋아 보이네."
"방금 전에 귀신을 봐서요."
"귀신?"
"600년 묵은 귀신이 갑자기 친한 척 말을 걸더라고요."
"...혹시 열이라도 있니?"
"열은 없고, 요즘 고민이 좀 많아서 머리가 아프긴 하네요."
"괜찮다면 내가 상담해줄까?"
레이가 플로리아를 돌아봤다.
루나에 관해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허나 회유를 시도해볼 마법사 명단을 추리기 위해선 플로리아의 조력이 절실했다.
원래 알레시아의 도움을 받아볼까 싶었지만, 솔직히 믿음직스럽지가 않았다.
"영지에 등용할 수 있는 마법사 님을 찾고 있어요."
"흠..."
플로리아는 부채를 펼친 채 레이의 설명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레이는 자기에게 필요한 마법사의 조건을 하나하나 나열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플로리아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백작령에 오랜 기간 머물며 평민에게도 마법을 가르쳐줄 실력 좋고 입 무거운 마법사를 찾는구나?"
레이가 루나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플로리아는 레이의 목적을 꿰뚫었다.
"너무 과한 욕심을 부리네."
조건이 말이 안 됐다.
어설픈 마법사라면 재화를 가득 안겨 백작령에 붙들어 놓고 애들 교육을 시킬 수 있겠지만.
황실 마탑에 발을 들여놓을 만큼 실력을 인정받은 마법사를 레이의 바람대로 제국 구석으로 끌고 가 멋대로 다루는 건 불가능했다.
약점을 잡아 협박한다 해도 고분고분 따를 마법사는 몇 없었고 주위의 의심을 살 게 분명했다.
"실력 좋은 마법사가 너무 장기적인 계약을 맺거나 계약 기간이 끝나고도 특정 지역에 묶여 있다면 마탑에서는 사람을 보내 강압적인 계약 각인 절차가 이루어지진 않았는지 확인하고는 해."
계약 각인이 악용될 상황에 대해선 마탑도 대비하고 있었다.
물론 정령을 상대로 노예 계약을 맺을 수 있으리란 건 아무도 예상치 못했지만.
"급을 낮추는 게 좋을 같아. 당장은 네가 원하는 수준의 마법사를 장기적으로 고용하는 건 힘들 거야."
"역시 그런가요?"
"음... 잠깐만."
고민하던 플로리아가 천천히 입을 뗐다.
"네가 말한 기준에 적합한 교수님이 한 분 계시기는 해."
"?"
눈을 크게 뜨는 레이를 보고 미소 지은 플로리아가 말을 이었다.
"로필렌 교수님이라고, 학문적인 탐구를 중시하시는 분이야. 마법 이론에 관해서는 웬만한 고위 마법사보다 통달하셨지만, 경지는 아직 4서클에 머물고 계시지."
"황실 마탑에 그런 분은 많으시잖아요?"
서클을 올리는 것보다 학문적인 탐구를 중시하는 마법사들.
'이론 마법학자'로 불리기도 하는 그들은 황실 마탑의 주축 중 하나였다.
강압적인 수단을 써 그들 중 하나를 빼내 온다 해도 황실 마탑의 의심을 사버리면 얼마 못 가 들킬 터였다.
"후후, 네게 필요한 건 '아쉬운 게 존재하는 마법사' 아니니? 그래야 설득하기도 쉽고, 설득한 후에도 남들을 쉬이 납득시킬 수 있을 테니."
"로필렌 교수님이 그 조건에 부합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유학을 온 지 얼마 안 된 나조차 소문을 익히 접할 수 있을 만큼, 유명하신 분이야.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시는 것 같아."
"...'스스로'요?"
어째 뉘앙스가 이상하다.
피해망상 환자에 관해 얘기하는 것 같지 않은가.
잠시 침묵한 플로리아가 부채를 접었다.
"나도 잘은 모르겠어. 그 교수님이 정말로 피해 망상적인 사고에 갇혀 계시는지, 아니면 정말 위협에 직면하신 건지."
"하긴 몇 번 만나보지도 못하셨을 테니까요."
"두 번 정도 뵈었어. 마법에 대한 열정이 느껴지는 만큼 많이 까칠한 성격이셨지. 어쨌든."
플로리아가 걸음을 멈추고 레이를 마주 봤다.
"후자라면, 네가 회유하기 괜찮은 대상이지 않니? 근래 들어 실적이 부족하긴 하지만, 실력은 정말 뛰어나신 분이야. 물론 그분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누군가와 반목하는 위험을 감수해야겠지."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전을 대가로 로필렌을 회유할 수 있다면 큰 마찰 없이 협의에 이를 수 있었다. 남들의 의심도 피할 수 있고 말이다.
'문제는 로필렌이 누구에게 원한을 샀냐는 건데.'
너무 거물이면 안 됐다.
허나 오시리스 가와 필립스 가가 같이 나서서 로필렌의 신변을 보장해준다면 웬만하면 위협을 끊어낼 수 있을 터였다.
'정령 족쳐준 대가로 이 정도 요구는 해도 될 것 같은데...'
레이가 부탁을 입에 담으려는 순간.
굉음과 함께 커다란 화염이 눈앞의 건물에서 터져 나왔다.
*
"식사는 하셨습니까?"
"..."
친한 척 말을 걸어오는 지노 교수를 로필렌은 외면했다.
지노는 과거부터 마법 이론에 관해 심도 있게 토론도 나누던 동료였지만, 이제 로필렌은 지노에게 적의밖에 느끼지 못했다.
무시 당한 지노가 혀를 차는 소리를 뒤로하며.
로필렌은 지끈거리는 두통과 함께 로브를 더 깊게 썼다.
'빌어먹을 것들...'
중요한 자료가 분실되거나 진행하던 실험이 누군가에 의해 방해받기 시작한 지 벌써 2년이 흘렀다.
혹자는 로필렌이 본인의 실수 때문에 실험을 망쳐놓고 피해망상에 빠져 헛소리를 한다고 떠들었다.
그 주장의 진위야 어떻든 간에, 근래 로필렌의 실적이 크게 부진한 것은 사실이었다.
로필렌은 이미 입지를 많이 상실했고, 얼마 안 가 황실 마탑에서도 방을 빼야 할 확률이 컸다.
실적이 좀 떨어지더라도 5년은 넉넉히 교수의 재기를 기다려주었던 마탑의 관행을 감안하면, 분명 특정 세력이 황실 마탑에 압박을 넣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대체 그 새끼가 연구하던 게 뭐길래!'
로필렌은 과거부터 마법 이론에 푹 빠져 있었고, 때문에 다양한 학자들과 관계를 쌓아 놓고 지식을 공유했다.
그들 중엔 아토르란 수학자도 있었다.
수학은 마법을 수월하고 정확하게 발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 중 하나였다.
로필렌은 수학에 관해 굉장히 오랫동안 아토르와 의견을 나누며 지내왔다.
그리고 아토르가 특정 개념에 관한 연구를 시작한 이후.
연락이 끊겼다.
얼마 안 가 로필렌은 아토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그의 연구가 아깝긴 했으나 처음엔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로필렌을 감시하는 시선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남들은 그저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그리 느낀 것이라 했지만, 로필렌은 확신했다.
감시의 시선이 많아진 뒤부터 누군가 방에 침입하거나 실험을 방해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그 여파로 실적이 떨어지니 곧장 황실 마탑을 나가라는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10년 넘게 누구나 인정할 만큼 괜찮은 학문적 성과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냉정한 처사였다.
로필렌은 자신이 황실 마탑을 벗어나는 순간 살해당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래,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그토록 갈망했던 리실로테 레코드의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보고 죽어야 했다.
청색 마탑에서 관리 중인 건물을 나와 본인의 연구실을 향해 걸어가는 로필렌의 눈에 광기가 번뜩였다.
그 찰나.
바로 옆 실험동에서 터져 나온 거대한 폭발이 로필렌을 덮쳤다.
제의 (1)
62화
"흠."
레이가 실험동에서 터져 나오는 화염을 차분하게 살폈다.
마탑이란 곳이 본디 이런저런 실험이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곳이라 저런 폭발 사고쯤은 꽤나 빈번하게 발생했다.
의외로 사상자가 나오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마법사들이 다들 '자기 안전'은 열심히 챙겼고 유학생들은 대개 실력 좋은 호위를 대동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화르르륵!
열기가 번져 나왔다.
화염에 휩쓸렸던 마법사 하나가 덤덤하게 불이 붙은 로브를 털어냈다.
이 쯤에서 사건이 수습되나 싶었는데, 뒤늦게 짐승의 울음소리가 실험동 안에서 흘러나왔다.
"크르르르..."
불길에 온몸이 휩싸인 마물이 태양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외관이 꽤나 익숙했던 터라, 레이는 실소를 터뜨렸다.
"와일드호그?"
멧돼지를 닮은 몬스터.
비슷한 체격의 마물들 중 맷집이 좋은 편이라 마법사들의 실험 재료로 선호된다는 이야기는 몇 번 들었었다.
'저건... 룬 문자인가?'
자세히 살피니 와일드호그의 가죽에 새겨진 수십 개의 문자가 빛을 내뿜으며 공명하고 있었다.
사방으로 번져가는 불길의 원인이 저 와일드호그임을, 레이는 어렵지 않게 파악했다.
"크르륵!!"
와일드호그가 주둥이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뚝뚝 떨어지는 침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증발되어 흩어진다.
와일드호그는 자기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버티기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쿠웅!
반 쯤 눈이 돌아간 와일드호그가 가장 가까이 있던 인간, 로필렌을 향해 땅을 박찼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인원이 꽤 됐지만, 다들 먼저 나서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딱 봐도 실험체로 보이는 와일드호그다.
어디가 어떻게 강화되었는지 파악이 힘들었다.
제압한다해도, 경우에 따라 실험체를 망가뜨렸다는 시비에 걸릴 수 있었다.
역시나 가만히 서 있는 레이를 향해 플로리아가 입을 열었다.
"저분이 로필렌 교수님이야."
"그래요?"
레이가 뒤집힌 로브 사이로 드러난 로필렌의 얼굴을 확인했다.
오벨리스크의 일이 기억을 스쳐 갔다.
'그때 그 마법사군.'
묘한 우연이었다.
레이는 팔에서 힘을 뺐다.
마탑의 교수쯤 되면 와일드호그를 제압하진 못하더라도 자기 몸 지킬 수단은 충분히 지니고 있을 터였다.
그때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레이의 귓가를 때렸다.
"가거라, 피닉스여! 몸통박치기!"
바람이 휘몰아쳤다.
하늘에서부터 강하한 독수리 형태의 정령이 와일드호그를 향해 곡선을 그렸다.
거대한 덩치를 가진 괴수들이 엄청난 속도로 충돌했다.
콰앙!!
[크르륵!!!]
지면을 구른 와일드호그가 곧장 몸을 일으킨다.
와일드호그가 분노함과 함께 가죽 위에 새겨진 룬 문자가 점멸하며 주변의 온도가 가파르게 솟구쳤다.
깊숙이 파인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열기를 못 이기고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안광을 피워내는 와일드호그를 향해, 어느새 펜리르를 타고 나타난 알레시아가 일갈했다.
"마물이 발악을 하는구나!"
알레시아는 목에 힘을 잔뜩 준 채 와일드호그를 내려봤다.
레이가 중얼거렸다.
"저런 씹..."
플로리아가 옆에 있어서 욕을 하다 말았다.
레이가 지켜보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알레시아는 고조되는 감정을 느끼며 입꼬리를 올렸다.
'드디어 내가 활약할 자리가 만들어졌구나!'
필립스 백작령에 있을 때는 지미 보육원의 고아들에게 치여 자존감이 꽤나 떨어졌던 알레시아다.
허나 황실 마탑에 유학을 온 뒤로 교수들이 하나같이 관심을 표하며 얼굴에 금칠을 해주니, 그야 마음이 들뜰 수밖에 없었다.
알레시아는 여기저기 실력을 뽐내며 칭찬을 듣고 싶었다.
허나 레이의 요구에 따라 한동안 조용히 지내며 속앓이를 했는데, 지금 떡하니 무대가 차려진 것이다.
사람도 구하고 명성도 높일 기회다. 그야말로 일거양득이었다.
"펜리르! 피닉스를 돕거라!"
펜리르가 와일드호그를 향해 마주 돌진했다.
레이가 한숨을 쉬며 플로리아를 바라봤다.
"아가씨, 도움을 좀 주실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
"그러면..."
레이의 설명을 들은 플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은 아니니 걱정 마렴."
"감사합니다."
콰앙!!
펜리르와 와일드호그가 충돌했다.
주르륵 미끄러진 펜리르를 와일드호그가 재차 들이박았다.
와일드호그 주변의 공기가 가열되며 상승 기류가 발생한 탓에 실체화된 펜리르의 육체가 자꾸만 흩어졌다.
상성이 안 좋았다.
펜리르와 피닉스가 합공한다면 곧바로 와일드호그를 밀어붙일 수 있겠지만, 와일드호그는 보기보다 눈치가 좋았다.
"크르르륵!!!"
펜리르를 밀어낸 와일드호그가 정령을 부리는 알레시아를 향해 돌진한다.
알레시아가 몸을 움찔 떨었다.
별로 좋지 못한 추억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허나 당황은 길지 않았다.
알레시아가 마법을 쏘아내기 위해 자세를 잡았고, 피닉스와 펜리르도 다시 와일드호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꽤 흥미진진한 대결을 볼 수 있었겠지만.
당연히도 젠킨슨은 그 꼴을 두고 보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촤악!!
검기가 서린 칼이 와일드호그의 옆구리를 긁고 지나간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비틀거리는 와일드호그를 젠킨슨이 어깨로 들이받았다.
쿠웅!!
와일드호그의 돌진을 저지한 젠킨슨이 지면을 나뒹굴었다.
제 아무리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기사라 해도 질량 차이가 몇 배였다.
와일드호그의 기세가 더욱 사나워졌다.
공간을 메운 열기 탓에 갑옷이 상하고 머리카락 끝이 타들어 갔지만, 젠킨슨은 개의치 않고 검을 겨누었다.
얼굴을 구긴 채 젠킨슨 곁에 도착한 레이가 어깨 위로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레이의 신호를 받은 플로리아가 정령을 활용해 거친 바람을 만들어냈다.
쐐애애애액!!
사방에 들러붙었던 화염이 회오리를 타고 하늘로 솟구친다.
잠시 잠깐, 레이와 젠킨슨, 그리고 와일드호그의 모습이 화염에 가려졌다.
레이가 젠킨슨에게 손을 내밀었다.
"검 좀 빌려줘요."
"오냐."
젠킨슨이 순수히 검을 던져주었다.
검을 받아든 레이가 두 다리로 지면을 찍어 눌렀다.
"빨리 끝내겠습니다?"
"그래, 단칼에 죽여라."
"소문 좀 날 텐데요. 젠킨슨 경이 대단한 기사라고."
"맹약이 끝나간다. 백작님도 가문의 저력을 조금씩 드러낼 것이라 하셨다. 걱정 말고 마무리 지어."
"알겠습니다."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일으킨 와일드호그가 재차 돌진해온다.
츠즈즉!
레이가 손에 쥔 검에 찬란한 검기가 맺혔다.
검날을 타고 흘러내린 검기가 검 끝에 둥글게 압축된다.
레이의 검이 앞으로 뻗어 나갔다.
쩌엉!!!!
레이의 코앞까지 돌격해온 와일드호그의 안면이 삽시간에 함몰됐다.
충격파가 일며 와일드호그의 몸뚱이가 훅 떠오른다.
와일드호그의 가죽이 파도처럼 출렁이길 한 번.
굉음과 함께 와일드호그가 뒤쪽으로 튕겨 나갔다.
콰가가가가강!!
불길을 뚫고 나간 와일드호그는 지면을 수십 번 찍으며 나뒹군 끝에야 자기가 뛰쳐나왔던 실험동 안으로 굴러떨어졌다.
그 진귀한 광경에 상황을 지켜보던 이들도 탄성을 한 번씩 흘렸다.
플로리아가 만들어낸 화염 회오리가 가라앉는다.
레이는 금이 쩍쩍 간 검을 젠킨슨에게 반환했다.
"실력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마스터."
"그 아가리 좀 어떻게 하렴, 종자야."
젠킨슨은 떫은 얼굴로 검을 받아들었다.
한편, 뒤에서 대기하다 플로리아를 호위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던 리옹은 지면에 길게 이어진 와일드호그의 혈흔을 보며 짧게 감탄했다.
"아벤시오와 멘데스의 합공을 이겨냈다고 하더니, 가히 뛰어난 기사로군요. 검기로 저만한 파괴력을 만들어 낼 수 있다니..."
"글쎄. 저게 과연 젠킨슨의 경의 작품이려나."
부채를 펼친 채 쿡쿡 웃은 플로리아가 식어가는 열기를 느끼며 앞으로 걸었다.
레이가 뒷목을 잡은 채 알레시아를 올려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정수리를 쾅쾅 내려치고 싶은데, 보는 눈이 많아 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이를 갈아낸 레이가 알레시아에게 속삭였다.
"제가... 나대지 말랬죠...?"
"크흠."
젠킨슨이 헛기침을 했다.
레이가 감정을 추스르며 문장을 고쳤다.
"아가씨, 위험한 행동은 자제해 주시길 바랍니다."
"으음, 알겠느니라..."
알레시아가 풀이 죽어 고개를 끄덕였다.
실험에 의해 강화된 와일드호그의 저력은 알레시아의 예상을 상회했다.
괜히 펜리르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주변을 둘러본 알레시아가 실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교수님이 사라졌구나. 감사 인사는 받을 줄 알았거늘."
"남 함부로 돕는 거 아니에요. 잘못하면 없는 죄도 뒤집어쓴다니까요."
"네가 그리 말하니 굉장히 설득력이 떨어지는구나아..."
알레시아가 시무룩한 얼굴로 틱틱댔다.
그때 플로리아가 책을 한가득 품에 안고 레이에게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자, 네가 놓고 갔던 책이야."
"아, 감사해요. 하마터면 책이 상할 뻔했네요."
"나는 그만 가볼게. 지금은 스케줄이 있어서. 남은 이야기가 있다면 이따 오후에 하자."
"그럼 점심 식사 마치시고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둘을 알레시아가 번갈아 쳐다봤다.
뭐지? 언제 둘이 이렇게 친해졌지?
그러고 보니 근래 들어 부쩍 레이가 플로리아의 이름을 입에 담는 횟수가 늘어났다.
뒤늦게 위기감을 느낀 알레시아가 다급히 물었다.
"프, 플로리아! 설마 나의 기사를 탐내는 건 아니겠지?"
"흐음."
눈을 가늘게 좁힌 플로리아가 레이를 마주 봤다.
자기 어깨보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한 레이의 정수리를 손으로 두들겨본 플로리아가 싱그럽게 웃었다.
"잡아먹기엔... 아직 좀 이르지?"
"으그극..."
레이가 고통스러워하는 사이 알레시아가 플로리아를 붙잡아 끌며 화를 냈다.
"안 된다! 탐내지 말거라! 나는 플로리아를 친구라고 믿었거늘 어찌 배신하느냐!"
"농담이야, 농담."
알레시아는 정령의 힘까지 빌려 억지로 플로리아를 레이에게서 멀리 떨어뜨렸다.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은 레이가 책을 가득 들고 몸을 돌렸다.
얼마 뒤, 황실 마탑은 알레시아와 젠킨슨에게 책임자의 사과와 함께 기사 하나를 중무장시킬 수 있는 금액을 보상으로 건넸다.
깔끔한 일 처리였다.
*
우연인가, 아니면 겁박인가.
와일드호그 탈출 사건이 발생한 지 사흘 후.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붉게 물든 로필렌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제어하지 못한 실험체가 탈출하는 건 분명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이다.
허나 로필렌은 이번 일을 우연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 와일드호그는 내가 실험동을 지날 때를 기다렸다는 듯 뛰쳐나왔다고!'
한 달 안에 징계위원회에서 탈출한 와일드호그의 실험을 주도했던 교수의 징계 수위를 결정할 터다.
'경징계로 끝나겠지.'
누군가 뒤를 봐주었기에 벌인 짓일 테니까.
만약 중징계를 받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뒤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겉으로는 철저하게 우연을 가장하겠다는 의도일 테니까.
로필렌은 이번 사고가 자신을 노린 테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빨리 꺼지란 소리인가? 황실 마탑에서?'
목숨을 노린 테러는 아니다.
로필렌의 목숨을 빼앗기에 이성 잃은 와일드호그로는 부족했다.
마탑에서 계속 버티고 있다간 더 큰 위협을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협박에 가까웠다.
'젠장, 젠장!'
로필렌은 복도를 걸어가며 손톱을 깨물었다.
이미 손가락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안전한 개인 연구실에 박혀 있고 싶었지만, 침묵이 내려앉은 공간에 홀로 있다 보면 참을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하곤 했다.
로필렌은 자각했다. 자신은 미쳐가고 있었다.
달칵!
사람 많은 다른 연구실은 전전하다 쫓겨나길 반복해, 12시간 만에 다시 개인 연구실로 돌아왔다.
로필렌이 개인 연구실의 문을 열었다.
침입자를 쫓아내기 위해 오벨리스크의 공간 왜곡장을 모방해 구현해 놓은 장소였다.
이곳은 안전했다.
그리 생각하고 개인 연구실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한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아, 안녕하세요 교수님."
레이가 머쓱하게 웃었다.
*
황실 마탑 유학생들은 교수와 면담 약속을 잡을 수 있다.
레이는 플로리아가 잡아준 면담 시간에 맞춰 로필렌의 연구실을 찾아갔다.
허나 약속 시각이 지나도록 로필렌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연구실 안으로 슬쩍 고개를 들이밀었다.
"...열려 있네?"
마법사는 병적으로 보안에 집착한다.
만약 정말 중요한 연구가 여기서 진행되고 있었다면 분명 침입이 불가능했거나, 침입한 후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레이는 연구실을 둘러보며 사방에 늘어져 있는 종이와 그 위에 휘갈겨져 있는 수식을 살폈다.
'내용을 모르겠네.'
이 세계는 마탑이나 학파마다 같은 뜻을 가진 기호도 다르게 쓰고는 했다.
고개를 설래설래 저은 레이가 권능을 사용했다.
암호처럼 보였던 기호들이 자연스레 해독된다.
"흠..."
로필렌이 무엇을 연구했는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종이에 쓰여있는 기호들은 마법학이 아닌 순수 수학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레이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어... 다 아는 내용이네?"
더 나아가 로필렌이 어떤 개념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며, 잉크가 마른 지 얼마 안 된 것을 보아 아직 연구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들어오면 안 되는 곳에 들어온 것 같은데.'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연구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아, 안녕하세요 교수님."
레이가 머쓱하게 웃었다.
제의 (2)
6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