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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 *

―예. 저희는 신수를 도울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협력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갚은 것이겠죠. 저흴 도와준 신수와 조직 에일에게 말입니다.

45호는 생각 외로 호의적이었다.

그가 네바스트의 손에 길러졌다고 해도 흑마법사가 세상에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고 있을 텐데.

루시온은 혹시나 몰라 흑마법사가 세계의 공동 적이라는 걸 알려줬지만, 45호의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마 어둠께서 저희를 인도하신 이유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지금까지 저희에게 어떤 목적이라는 게 없었습니다. 네바스트에 순종하느냐, 순종하지 않느냐. 겨우 두 개밖에 없던 선택이 벌써 여러 개로 늘어나지 않았습니까?

연락용 아이템 너머로 전해오는 45호의 밝은 목소리가 아직도 머릿속에 맴돌았다.

―떠밀리듯 선택한 게 아닙니다.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가져본 목적입니다. 세상이 흑마법사를 증오한다면 그 증오를 바꿔보자고 말입니다. 저희가 조직 에일을 돕는 건 그 목적을 위한 첫 번째 선택입니다, 하멜 님. 저희의 선택을 존중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루시온은 숨을 내쉬며 어깨에 힘을 뺐다.

'참, 걱정될 만큼 티 없이 깨끗했지.'

―아, 제 이름은 이제 45호가 아니라 델로스입니다.

'델로스라는 이름도 어울렸고.'

루시온은 자리에 앉았다.

트로에와 대화를 나누려 대신전 근처에 있는 여관에 방을 잡았다.

베델이 미리 트로에를 불렀고, 지금 빛을 내며 트로에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리 커튼을 쳤기에 빛 때문에 반짝해도 안심했다.

―트로에 아저씨!

라타가 바로 새끼 호랑이가 된 트로에게 달려들어 머리를 비볐다.

―잘 지냈니, 라타?

트로에는 라타를 쓰다듬으며 러쉘과 베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라타는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잘 놀고 그래서 엄청 컸어! 라타 봐봐라.

라타가 자랑하며 제 눈에서 보랏빛 어둠을 피워내자 트로에는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너무도 깊은 그리움에 사무쳤다.

―그래. 이제. 이제야 멈췄던 시간이 흘러가는구나.

"저 보랏빛 어둠이 뭔지 아십니까?"

루시온이 물었다.

트로에는 말 대신 눈웃음만 지었다.

말할 수 없다는 건 베로니아 그놈과 관련 있는 사실일 테지.

―루시온. 아직 자야 할 시간이지 않니. 다음에는 부디 그대부터 생각해주렴.

트로에는 루시온을 보며 걱정부터 했다.

루시온은 가면을 벗었고, 트로에를 바라보았다.

"나눠야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이중생활을 하다 보니 그게 좀 힘드네요."

루시온은 숨을 골랐다.

자신이 흔들리지 않아야 했다.

"라타. 귀 막고 있어."

―라타가 들으면 안 돼?

라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네가 슬퍼할지도 몰라."

―…알았어. 라타는 슬픈 거 안 좋아해.

라타는 몸을 웅크려서는 앞발로 접힌 귀 끝을 잡으려 했지만, 한 끗 차이로 닿질 않았다.

[내가 잡고 있을게.]

보다 못해 베델이 라타의 귀를 잡아주었다.

라타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게.

"트로에."

―그래, 루시온.

"제게 어둠의 인도를 받은 흑마법사들이 찾아왔습니다. 네바스트에서 왔다고 하더라고요."

원래는 바로 본론을 꺼내야 했지만, 이상하게 이번에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네바스트에서 흑마법사를 사육하고 있었습니다."

루시온은 트로에의 표정을 살폈다.

처음과 달라지지 않았다. 마치 이런 일을 겪은 것처럼.

"그리고 네바스트에서...."

―우리를 죽였나 보구나.

"알고… 계셨습니까?"

흔들리는 건 루시온이었다.

그가 트로에의 말에 흔들리고 있었다.

―어렴풋이, 아니, 조금, 아니, 그대를 포함한 누구든 내게 알려주길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구나.

트로에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네바스트에서 신수가 셋이나 사라졌다. 누가 우리를 죽일 수 있겠니?

트로에 말대로 루시온도 그 당연한 생각을 부정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우리를 죽일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우리를 따르는 이들뿐이겠지. 답은 뻔했고, 나는 부정을 하였구나.

[저 말이 맞네. 네바스트에서 신수가 사라졌는데, 범인이 누구겠어. 나도 빤히 다 알면서 눈앞에 놓인 진실을 회피해버렸어. 빛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 그런 일까지 벌였을 리가 없다고.]

잔잔하게 러쉘의 말이 퍼졌다.

―고맙구나, 루시온.

트로에는 루시온을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내게 진실을 알려줘서 너무도 고맙구나.

아니. 이건 고마워할 일이 아니었다.

루시온이 라타에게 귀를 가리라고 한 이유는 트로에의 다른 모습을 볼까 봐, 라타가 아는 트로에가 아니게 될까 봐 미리 막기 위해서였는데.

이건 의외의 반응이었다.

빛의 신수라고 해서 왜 감정이 없겠는가.

"그들이… 밉지 않으십니까?"

―내가 그들의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지 못했기에 벌어진 일이라 슬프구나.

"슬플 수도 있습니다. 예, 그럴 수 있죠. 하지만 이번에는 그들이 잘못한 겁니다. 당신을 따르는 그놈들에게 욕을...."

트로에는 점점 언성이 높아지는 루시온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그대는 참 다정하구나.

"아뇨. 이건 다정한 게 아닙니다. 당연한 겁니다."

―누군가를 위해 화를 내는 건 무척이나 힘이 드는 일이란다.

트로에는 고개를 돌려 베델을 바라보았다.

―그대가 이전에 죽음의 바다를 바라보며 그 바다가 오지 못하게 막는 경계를 빛의 신이 했냐고 물었었지.

[예. 기억합니다.]

―빛의 신은 없단다.

트로에의 일그러진 표정과 함께.

―신은 어쩌면 있었겠지. 하지만 빛의 신은 없어, 루시온. 처음부터 빛의 신은 없었어.

검은 형체의 말이 떠올랐다.

빛의 신은 없다.

[…지, 지금 빛의 신이 없다고 하셨습니까?]

베델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지금 트로에가 빛의 축복을 받은 자라면 누구든 믿고 있는 사실을 박살 내지 않았던가.

―신께선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빛의 신은 없단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빛의 신은 바로 우리이며 우리는 신을 칭할 자격조차 없는, 조금 더 특별한 존재일 뿐이란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신수란 이름은 인간이 붙인 말일 뿐이지, 우리는 빛을 관리하는 자란다. 세상에 빛이 많지도, 적지도 않게, 그렇게 균형을 유지하는 임무를 위해 조금 더 특별해진 존재라고 말한다면 이해할 수 있겠니?

[그럼… 그 반대도 있다는 말이잖아?]

러쉘이 목소리를 내며 라타를 보았다.

그럼 그릇인 루시온은 대체 정체가 뭘까.

트로에는 러쉘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웃었다.

―어쨌든, 우리의 역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벌어진 일이니 슬플 수밖에 없구나. 누굴 원망하겠니?

"…이제 어쩌실 셈입니까?"

루시온은 차분히 물었다.

트로에는 그의 눈동자에 피어난 분노를 보았다.

자신을 걱정하고 빛의 축복을 받은 자들을 원망했기에 피어난 것이다.

하지만 저 분노는 위험했다.

어둠의 축복을 받은 자들은 자아를 가진 어둠과 닮아 가장 예민하기에 분노에 휩쓸리지 않게 트로에는 루시온을 달래며 말했다.

―신수는 사라져도 언젠가 다시 태어난단다. 오히려 우리 중 일부가 사라졌기에 빛이 줄어들어 버려 결과적으로 균형을 유지하던 추가 바로 선 셈이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루시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불합리하다고 생각해도 그게 균형이란다. 빛은 너무도 많구나. 어둠을 위해 꺼질 줄도 알아야 하는데. 빛이 오히려 어둠을 죽이고 있으니.

트로에는 아득한 과거를 보는 것처럼 그의 눈동자는 저물어가는 해를 닮아 있었다.

―미안하구나. 과거에도 지금도 말이다.

루시온은 트로에가 말하는 과거가 얼마나 까마득한지 알지 못했다.

다만, 자신이 망토를 입은 자가 되어 세상에 타락이 뒤덮인 광경을 보았다.

빛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 지금처럼 어둠의 축복을 받은 자들을 탄압하여 균형이 깨지고 벌어진 일이었다.

그때를 말하는 걸까.

"트로에."

루시온은 하나를 더 언급했다.

아마 이 부분은 트로에도 몰랐던 사실이었겠지.

―그래, 말해보렴.

"네바스트에서 흑마법사를 이용해 성물을 타락시키고 있었습니다."

트로에는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역시나 이 부분은 트로에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루시온.

"예."

―그대가 성자로서 날 위해 입을 빌려줄 수 있겠니?

"입을 빌려달라뇨?"

―과거에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빛이 어둠을 억압하고, 죽이고, 내몰고. 그 끝은 너무도 끔찍했지. 세상이 타락으로 뒤덮였다.

[잠깐만. 그게 무슨 말이야…?]

러쉘이 마른 침을 삼키며 물었다.

―타락은 자아를 가진 어둠의 혼란이야. 누군가에게 이유 없이 공격받는 어둠의 불안함으로 일어났지.

트로에의 말과 함께 또 검은 형체가 꺼냈던 말이 겹쳐졌다.

―타락은 그렇게 만들어졌어. 깨진 균형, 그러니까 빛에게 공격받고 내몰려서 일어난 어둠의 혼란. 불쌍하고 가엾은 이들이지.

'…진짜 사실이었네.'

루시온은 마음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의심을 지웠다.

[그럼, 이대로 가면 또 타락이 나타나 세상을 뒤덮는 겁니까?]

베델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아니란다. 빛의 존재들은 이제 어둠을 볼 수 없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니 그들을 공격할 수도 없지. 이제는 타락이 아니라 파멸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222화. 나눠야 할 말들(2)

"파멸이라뇨…?"

트로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파멸이라니.

―빛을 따르는 어리석은 자들이 성물의 존재마저 부정해버렸으니, 빛은 이제 저물고 사라지겠지.

"성물이 대체 뭐길래 그렇습니까?"

―그대라네.

"예…?"

루시온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도무지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대가 없으면 어둠이 사라져. 빛 역시 똑같구나. 성물이 없으면 내가 없고, 빛의 존재들까지 없지. 그대가 죽든, 성물이 타락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지금도 아슬아슬한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버린단다. 그럼, 이제 우리를 기다리는 파멸뿐이구나.

루시온은 순간 입이 간지러웠다.

여긴 베로니아의 손아귀에 있는 세계나 다름없었다.

이 파멸을 베로니아가 유도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기억하는 이전 세계, 그 후의 이야기가 당겨진 건지.

루시온은 트로에와 이어진 붉은 실이 여전히 당겨진 걸 확인하고는 일단 나아가기로 했다.

"예. 제 입을 빌려드리겠습니다."

루시온의 대답에 트로에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대신 제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말해보렴.

"터트릴 시기는 지금이 아닙니다. 조만간 네바스트에서 절 부를 겁니다."

네바스트가 일부러 뉴브라를 압박했다.

동시에 반 왕정파가 일어나 뉴브라 왕국은 현재 밖과 안에서 치고 들어오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 네바스트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정의'라는 이름으로 제국에게 성자인 자신을 보내달라고 제안할 게 뻔했다.

아주 뻔뻔하게.

"그때, 트로에의 입이 되어드리겠습니다."

―그대는 정말로 다정하구나.

트로에는 기특하다며 루시온을 쓰다듬었다.

"전 다정하지 않습니다. 결국, 또 절 위해서 트로에를 이용하지 않았습니까?"

―그걸 이용이라고 말해버린다면 '도움'이라는 단어가 없지 않을까. 그대는 다정해.

―맞아! 루시온은 너무 다정해. 역시 트로에 아저씨야!

베델이 라타의 귀를 막던 손을 떼어버렸는지 해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시온이 쳐다보자 라타는 루시온에게 달려들어서는 품에 안겼다.

참 포근했다.

―그대는 나를 위해 모두가 잠에 빠진 시간에 와주었고, 나를 위해 진실을 알려주었으며 나를 위해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니?

트로에는 원래대로 몸집을 키워서는 루시온의 이마에 제 얼굴을 가져댔다.

―하지만 그대가 다정한 사람이라 나는 조금, 아니, 많이 슬프기도 하구나.

―다정한 게 왜 슬퍼?

―남에게 다정한 건 그만큼 상처가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까. 라타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단다.

트로에의 이마에서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러쉘과 베델이 깜짝 놀랐지만, 루시온은 이마가 간지러워 실실 웃었다.

―...?

트로에는 잠깐 멈춰 서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혹, 그대에게 빛을 거부할 수 있는 어떤 힘이라도 있는가? 그대에게 준 축복을 강화하려 했는데 자꾸만 빛이 튕겨 나오고 있어.

"빛의 내성이 있습니다. 지금도 계속 기르고 있고요."

루시온은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성물이 그대에게 가는 이유가, 그대가 가장 깊은 어둠이기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이런 이유가 있었다니.

트로에가 갑자기 크게 웃었다.

―가장 깊은 어둠이되, 빛이 통하지 않는 자라. 성물이 좋아할 만했어. 내 축복이 아니더라도 그대를 상처 주지 않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제가 위험한 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랬다면 어둠이 그대를 좋아하며 따르지 않았겠지. 라타도 태어나지 않았을 테고.

'…그러고 보니. 이전 세계에서는 라타가 태어나지 않았네? 내가 그릇인 건 똑같을 텐데.'

루시온이 라타를 바라보자 라타는 눈웃음을 지으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트로에는 다시금 루시온과 이마를 맞댔다.

―그대가 내성이 있더라도 성물에게 다치지 말고, 어디든 내가 그대를 도울 수 있길 바라며.

맞댄 부분에서 빛이 천천히 새어 나왔다.

―그대가 안전하길. 그대가 건강하길. 그대가 행복하길.

트로에는 루시온에게 축복을 선사했다.

* * *

똑똑.

루시온은 헤인트의 집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안에서 들려오는 건 적막뿐이었다.

어둠을 찔끔 뿌리자 다급히 달려오는 발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막 황실로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는지 헤인트는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헤인트가 놀란 눈을 하며 루시온을 불렀다.

"하, 하멜."

"폐하를 만나러 왔어."

"…그래."

"사과를 듣는 건 덤이고."

"고맙다. …정말로."

헤인트의 목소리에 진심이 짙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헤인트가 정말로 자신을 죽일 마음이 없을 수도 있었다.

그와 연결된 붉은 실은 어디까지나 흑마법사 루시온이지 흑마법사 하멜이 아니었으니까.

루시온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비켜줘야 하지 않을....]

베델이 러쉘을 바라보다 말을 멈췄다.

러쉘의 눈동자에는 어떤 결의가 드러나 있었다.

비키자고 말해도 절대로 비키지 않을 테지.

[뭐 해, 루시온? 일단 때려야지.]

'아.'

루시온은 러쉘의 재촉에 베델을 슬쩍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야기도 제대로 듣지 못한 베델을 끌어들이는 건 아니다 싶어 루시온은 헤인트에게 걸어가 주먹을 날렸다.

어둠을 실어서.

퍽!

―홉…!

그림자 속에 있던 라타와 베델이 거의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자신에게도 잘못이 없다고 말은 못 해도 쥐어패는 건 나름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나를 믿어달라고, 말보다 행동으로 보이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지금까지 헤인트 널, 제국을 도왔어. 하지만 믿음을 강요할 수도 없고, 개인의 마음을 내가 어떻게 움직이겠어? 그래도 넌 적어도 나를 의심하지 말았어야 했어. 내가 폐하를 공격할 것 같았으면 이딴 짓도 안 해."

퉷.

헤인트는 피가 섞인 침을 내뱉었다.

그도 살짝 울컥했는지 눈빛이 흔들렸다.

"그래. 진짜 그러는 놈들이 있었겠지. 온갖 착한 척, 도와주는 척 굴면서 환심을 사고 뒤통수는 때리는 놈들이 없다고는 말할 순 없어. 하지만 내가 너한테 보여준 건 진실이었어.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진실."

"알아."

"이건 순전히 내가 열 받아서 때리는 거니까, 너도 열 받으면 치던지."

"내가 치면 가면이 날아갈 텐데?"

"…그럼 쳤다 쳐. 그때 빚은 이걸로 됐어."

루시온은 주먹을 매만졌다.

저번에는 열이 받아서 몰랐는데 헤인트의 얼굴은 돌덩이처럼 딱딱했다.

어둠을 두르지 않았으면 부러지는 쪽은 자신이지 않았을까 싶었다.

"미안해, 하멜."

헤인트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설령 네가 했더라도 내가 중간에 너한테 피해가 가지 않게 잘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을 하려고 했어. 내가 비록 낙하산이긴 해도 그럴 힘이 있거든."

"그럼 빨리 말하든가."

"네가 말을 자꾸만 잘라서 할 수 없었지."

[그건 맞지. 네가 말을 엄청 잘라 먹긴 했어.]

러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한테 빨리 말하고 싶었는데 크라언 씨한테 연락해서 구질구질하게 너한테 미안하다고 오해라고 말을 전해달라고 할 수도 없으니."

"…그건 진짜 구질구질하다."

"그러니까 요 며칠은 진짜 지옥이었어."

"됐어. 4황자 일은 내가 한 거 맞아."

루시온의 대답에 헤인트는 맞은 자리를 만지며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순간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듯하지만, 헤인트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왜 루시온을 돕는 건데?"

"왜? 흑마법사가 성자를 도우면 안 돼?"

"이번에는 말 자르지 마."

"좋아. 생각해보고."

루시온은 자리에 앉았다.

이전에는 지쳤고, 화가 나서 몰랐지만, 기사 단장 월급이 세긴 센 모양이었다.

의자에 궁둥이가 닿자마자 깜짝 놀랐다.

5점 만점에 4점.

"고마워. 루시온을 도와줘서."

헤인트도 자리에 앉아서는 루시온과 시선을 마주했다.

"다음에도 도와줘. 아니, 얼마든지 도와줘도 괜찮아. 그리고 방금 질문은 진짜 순수한 물음이었어. 삐딱하게 굴지 마."

"이상하게 곱게 들리지 않아서. 내가 흑마법사잖아? 억울한 일이 얼마나 많겠어?"

루시온은 피식 웃었다.

이전 세계에서 헤인트는 정말로 자신을 죽였다.

하지만 헤인트는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고, 그저 지금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 중 하나이자 세상을 위해서 검을 든 진짜 영웅이기도 했다.

헤인트도 피식거리다 이내 소리 내며 웃었다.

"이제 살 것 같네."

"너, 저번에 나 안 죽이겠다며. 그거 진짜야?"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건 아니야. 그런데 그 말은 진짜야. 처음에는 몰라도 지금은 너를 죽일 이유가 없고, 그럴 생각도 없어."

"왜?"

루시온은 정말 궁금했다.

"가면 속에 누가 있는지 모르고, 어쩌면 네 이름도 가짜일 수 있겠지만, 그래도 널 믿어."

헤인트는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내가 지금까지 널 봤으니까. 네 말대로 네가 얼마나 진실로서 나와 폐하를, 그리고 제국을 대했는지 아니까."

"…거짓말이지?"

"아니. 진짜야. 난 널 믿어."

헤인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하마터면 그 눈빛에 홀려 가면을 벗어버릴 뻔했다.

"…폐, 폐하를 만나러 가자고. 지금 만날 수 있지?"

당황해하는 루시온의 태도에 헤인트가 키득거렸다.

이어 러쉘도 루시온을 쿡쿡 찌르며 실실거렸다.

루시온이 시선을 돌리자 흐뭇해하는 베델과 눈이 맞았다.

'…이런.'

이 상황이 너무도 낯설어 루시온은 온몸이 가려웠다.

* * *

몇 번의 사람을 거치긴 했지만, 헤인트는 미리 연락망을 통해 황제에게 하멜이 간다는 소식을 전했다.

평소 말을 통해 출근하는지, 헤인트의 요란한 행보에도 그를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루시온은 황궁에 도착하기 전에 뛰어내렸고, 그때 케틀란과 만났던 그 장소로 향했다.

문 앞에 몇 명의 기사들이 있었는데 자신을 보자마자 자리를 비켜주었다.

"폐하."

루시온은 이전보다 더 편안한 마음으로 케틀란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황제 아저씨!

라타는 그림자 끝에 매달려 케틀란을 향해 꼬리를 흔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대를 부르고 싶었네. 그대를 칭찬해주고 싶었거든."

케틀란은 루시온을 향해 웃어주며 자리를 권했다.

'...?'

루시온은 앉자마자 살짝 놀랐다.

저번 의자와 똑같이 생겼지만, 달랐다.

저번에는 분명 5점 만점에 3점짜리였는데, 이번에는 만점에 가까웠다.

자신이 이곳에 올 줄 알고 바꾼 걸까.

뭐가 됐든 루시온은 흡족했다.

"그대가 준 정보 덕에 뉴브라에 있는 반 왕정파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네."

"아, 헤인트에게 들었습니다."

"그대가 어떻게 들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전쟁을 원하지 않네. 될 수 있다면 말일세. 땅은 이미 넓고, 제국이라는 이름은 굳이 전쟁을 통해야만 유지가 되는 게 아니니."

"저도 전쟁은 원치 않습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제국은 얻을 이득보다 실이 훨씬 더 많은 법이지요."

[원래 많이 가진 놈이 많이 잃는 법이지.]

러쉘이 동의하며 말했다.

"그대도 나와 생각이 같다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네.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제국을 위해서라면 전쟁을 벌일 각오는 되어있다네. 그 점은 부디 그대가 이해해주길 바라네."

케틀란은 미안해하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이해합니다, 폐하."

"고맙네."

그제야 케틀란은 다시 미소를 지어서는 차를 홀짝였다.

"혹여 그대가 뉴브라의 반 왕정파가 걱정되어 짐을 찾아온 거라면 걱정하지 말게. 그들도 뉴브라가 저지른 만행을 모두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으니 말일세."

케틀란은 자신이 반 왕정파의 약점을 쥐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케틀란의 표정은 마냥 밝지 않았다.

"폐하께서 지금 제일 골치가 아픈 부분은 네바스트가 맞습니까?"

"그렇다네."

케틀란의 눈동자에 묘한 기대감이 어렸다.

"네바스트가 뉴브라를 자극했기에 때맞춰 반 왕정파가 그 사실을 꼬집어 일어났지만, 반 왕정파에서는 그 이상을 원하지 않네."

이는 당연했다.

현 뉴브라 왕을 비판하며 일어섰던 이들이었기에 모든 책임이 온전히 현 뉴브라 왕에게 화살이 꽂혀야지, 뉴브라라는 왕국 자체에 꽂혀버리면 곤란했으니.

"예. 반 왕정파는 왕권을 유지하되, 현 정권만 무너트리는 게 목표일 테니까요."

"빨리 현재 뉴브라의 왕이 무너져야 할 텐데. 생각 외로 잘 버티고 있어 골치가 조금 아프다네."

케틀란은 미간을 꾹 눌렀다.

적의 손을 빌려 이득을 얻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기에 그로서는 얼른 현 뉴브라 왕이 반 왕정파들의 손에 끌려 내려와야 했다.

"폐하. 제가 마침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지금 좋은 소식이라 하였나?"

케틀란은 무척 반겼다.

"헤인트를 통해 미리 들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어서 폐하께 전해야 하기에 제가 직접 왔습니다."

여유로운 목소리와 달리 루시온의 심장은 거세게 뛰었다.

이제부터 무척 중요했다.

제국의 힘은 거대했으며 그 힘만으로 자신이 원하는 걸 쟁취할 수 있었다.

제국, 뉴브라, 네바스트 이 주요 세력과 떨어져 나간 공허의 손.

자, 이제 이들을 끌고 멋지게 지휘를 할 차례였다.

223화. 나눠야 할 말들(3)

"그대가 나를 찾아온다는 말에 솔직히 큰일이 났나 싶어 걱정이었네. 하나, 좋은 소식이라니 내 마음이 놓여 아주 기쁘다네."

케틀란은 말과 달리 미소를 짓지 않았다.

꼭 큰 충격에 대비하기 전 모습 같았다.

"일단 그전에 마음의 준비부터 하셔야 합니다."

"…좋은 소식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네바스트를 압박할 좋은 기회이지, 내용 자체는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베델은 루시온의 말을 들으며 두 손을 꼭 쥐었다.

네바스트, 뉴브라, 공허의 손.

이렇게 난리가 난 일을 대체 어떻게 이어나가려는지.

보기만 해도 살이 떨리는 심정인데 그 당사자인 루시온은 오죽하겠는가.

[힘내, 루시온 공.]

베델은 루시온을 응원하며 그의 집중이 흐트러지지 않게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루시온은 가장 먼저 죽음의 바다부터 꺼냈다.

"일단 죽음의 바다부터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허락해주시겠습니까?"

"그래. 죽음의 바다를 정화할 수 있는 자는 오직 흑마법사뿐이라는 그대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네."

"그래서 죽음의 바다를 정화하기 위해 흑마법사들을 데려올까 합니다. 언제가 괜찮으십니까?"

루시온은 가벼운 약속을 잡듯 너무도 자연스럽게 행동해 케틀란도 일순간 자신의 일정을 떠올렸다.

"자, 잠깐만 기다려보게. 흑마법사들이 그렇게 쉽게 볼 수 있는 자들이었나?"

"아닙니다. 운이 좋아 그들과 닿게 되었습니다."

루시온은 어둠이 인도했고, 어쩌고저쩌고하면서 긴 설명을 붙일까 하다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흄을 떠올리며 간단하게 '운이 좋았다'라고 설명했다.

'어차피 지금 대신전은 황제의 것이니 그들을 통제하는 거야 쉽지.'

대신전 폭파 사건으로 대신전은 네바스트의 손을 거부하고 황실에 고개를 숙였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짐이...."

케틀란은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다시금 떠올려도 너무도 기가 찼다.

죽음의 바다 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나 지났는가.

하멜의 일 처리 속도에 감동이 밀려왔다.

다른 대신들도 저렇게만 해주면 정말 예뻐해 줄 수 있는데.

케틀란의 목소리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짐이 그 일은 빨리 대신관과 연락해 죽음의 바다 정화 작업이라는 핑계로 동부 바다를 통제하고 입이 무거운 신관과 함께 작업할 수 있게 도와주겠네."

"감사합니다, 폐하."

루시온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밝았다.

케틀란이 황제라 일 처리가 얼마나 빠를지 벌써 기대가 됐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입이 꼭, 꼭 무거운 자들로 붙여주셨으면 합니다. 흑마법사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여전히 곱지 않습니다."

"그 점은 걱정하지 말게, 짐은 황제이니."

케틀란의 목소리에 자부심이 가득 묻어났다.

일단 하나를 처리했다.

루시온은 당장 실실 웃고 싶었지만, 감정을 억누르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 흑마법사가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않은가."

케틀란은 흥미를 드러내며 입꼬리를 올렸다.

"네바스트입니다."

"네바스트에서 탈출한 흑마법사란 말인가? 그렇다면 네바스트에서 많은 것들을...."

"아닙니다, 폐하. 네바스트에서 자란 흑마법사입니다."

"...."

케틀란의 얼굴에 피어났던 미소가 순식간에 시들어버린 꽃처럼 저버리고 말았다.

"지금.... 지금 뭐라고 하였는가."

"저한테 온 흑마법사들은 네바스트에서 길러졌고, 탈출한 흑마법사입니다."

"그, 그러니까 네바스트에서 왜 흑마법사를 길렀단 말인가?"

탈출이라는 말에 케틀란은 더욱 얼굴을 구기고 말았다.

당장 개소리라며 소리치고 싶은 욕구를 꾹 눌러 참는 듯했다.

"아시잖습니까."

루시온이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게 말이 되지 않는단 말일세!"

콰앙!

케틀란은 기어코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지만, 그는 한순간 표정을 다잡았다.

"…미안하네. 잠깐 흥분하고 말았어."

과연 황제답게 감정을 아주 쉽게 다스렸다.

누가 보면 조금 전에 화를 낸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케틀란은 평온했다.

"네바스트는 신성 국가라네. 신수가 있고, 빛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 지배층인 곳. 그곳이 네바스트인데, 흑마법사라니. 그들이 그런 일을 할 리가 있겠는가."

"폐하, 실제로 벌어진 일입니다."

케틀란은 루시온의 대답에 숨을 삼켰다.

"내가… 도무지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다네. 그들이 가장 먼저 흑마법사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흑마법사가 세계의 적이 되게끔...."

케틀란은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그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아무리 부정해봤자 사실이 턱밑까지 올라왔다.

"…이걸 위해서였나? 흑마법사의 숫자가 줄어들면 그들과 상극인 빛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 그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되니. 이걸 노렸던가."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 사실도 사실이지만, 지금 네바스트가 흑마법사를 이용해 신수를 죽이고 있습니다."

"...?"

케틀란은 기어코 눈을 크게 뜨며 입마저 벌렸다.

"탈출한 흑마법사에게서 들었습니다. 네바스트에게 신수란 그저 예쁜 그림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루시온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다음 말을 이어갔다.

"신수를 타락시키기 위해서는 여러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중 하나가 흑마법사입니다. 폐하께서는 뉴브라 왕국이 누구와 손을 잡았는지 아실 겁니까."

"공… 허의 손이라 불리는 단체가 아닌가."

케틀란은 아직도 넋을 잃을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데 지금 뉴브라가 반 왕정파와 네바스트의 압박에 제 왕위를 위해 공허의 손을 버렸다지요?"

"그대는… 지금, 네바스트가 공허의 손을 포섭하기 위해 이런 짓을 벌였다는 말인가?"

"네바스트 입장에서 관리해야 할 흑마법사가 늘어봤자 거기서 거기일 겁니다."

케틀란은 미간을 찌푸렸다.

"확실히 그대의 말이 진짜 사실이라면 오히려 흑마법사를 얻어야 이득인 셈이지. 관리할 자신이 있다면 말일세."

"아마 지금쯤 미론스트 왕국에서 보낸 편지가 폐하께 도착했을 겁니다."

"그래. 미론스트에 뉴브라 왕국과 손을 잡았던 이들을 처리해주는 데 도움을 주기로 했네. 그대 덕에 미론스트가 뉴브라에 넘어가기 전에 바로 잡게 해주어 고맙다네."

겨우 이성의 끈을 붙잡았지만, 케틀란은 여전히 표정이 굳어 있었다.

"제가 거기에서 뭘 봤는지 아십니까?"

"…하."

케틀란은 숨부터 내쉬었다.

"이제는 정말로 그대가 내뱉는 말이 너무도 무섭다네."

케틀란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자 진심이 묻어나 보였다.

하지만 루시온은 계속 케틀란은 압박했다.

자신의 계획을 위해서.

"네바스트는 미론스트 왕국의 백성들을 흑마법에 필요한 대가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개새끼들…!"

케틀란은 분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을 대가로 바친다면 네바스트가 뭘 노리는지 이제는 뻔하지 않은가.

"네바스트가 노리는 건 전쟁으로 벌어질 제물이었단 말인가! 이런 미친 새끼들!"

[진짜… 네바스트가 저걸 노리는 것이었나?]

베델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반응했다.

네바스트가 무얼 노리는지는 말을 나눈 적이 없으니까.

[씁쓸하지만, 전쟁이 벌어지면 흑마법사에게 있어 공짜로 대가를 얻는 셈인데, 이걸 그냥 두겠어? 아마 변경에 세워진 성벽에 있던 유령들을 루시온이 그대로 내버려 뒀다면 이미 그 벽은 무너졌을 거야.]

러쉘은 베델의 시선을 살짝 흘렸다.

같은 흑마법사로서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폐하. 고정하십시오. 어디까지 가능성입니다."

루시온은 케틀란을 말렸다.

어디까지나 확률 높은 가능성이었지만.

"이게, 이 일이 쉽게… 감정을 가라앉히기가 너무 힘들다네."

"폐하께서는 적이 언제 제 모습을 드러낸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든 걸… 이뤘다고 생각하기 전이겠지. 눈앞에 황금이 있는데 이를 보고 평온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렇습니다. 현재 뉴브라의 반 왕정파는 현 왕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왕권을 잡기를 원합니다. 네바스트는 뉴브라의 내전을 통해 쉽게 제물을 모으고 싶어 할 수도 있습니다."

루시온은 공손하게 케틀란을 가리켰다.

"제국은 무얼 원합니까, 폐하?"

"나는 언제나 평화를 원했네."

"하면 제가 그 평화를 위해 힘을 빌려드리겠습니다. 지금 팽팽해진 뉴브라 왕과 반 왕정파의 사이에서 승리의 깃발을 가져올 수 있는 건 딱 하나입니다."

러쉘이 눈을 찌푸렸다.

루시온이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눈치챘다.

어쩌면 정말로 루시온만이 가능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건 좀 위험하지 않아 루시온…?]

"그게 무엇인가?"

케틀란은 입가를 핥았다.

하멜이라면 정말로 자신에게 해결법을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전에 한 가지만 약속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는 폐하께 드리는 제 간곡한 부탁입니다."

"뭐든 편하게 말하게."

"저를… 의심하지 마시고, 경계하지 마시고, 적으로 삼지 말아 주십시오."

자신도 러쉘이 말한 것처럼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힘은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사람들의 두려움을 자극할 테니까.

이는 케틀란이라고 해도 똑같겠지.

"대체 무엇을 하려고 이렇게 부탁을 하는 건지 몰라도 내가 그대를 해치는 일도 없을 것이며 의심하는 일도 없을 거라네. 아니, 애초에 그대를 의심했다면 이렇게 코앞에서 그대를 마주하지 않았겠지."

케틀란은 겁을 먹은 듯 보이는 루시온을 달랬다.

"제가."

루시온은 입을 열다 말고 망설였다.

이 말을 내뱉으면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원하는 걸 이루려면 이렇게 해야 했다.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고, 일렁거릴 때, 라타가 목소리를 냈다.

―라타가 봤을 때, 황제 아저씨는 엄청 착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루시온.

해맑은 라타의 말에 참 우습게도 가슴을 압박해 오던 두려움이 빠르게 사라지는 걸 느꼈다.

"제가… 흑마법으로 뉴브라 왕의 자백이 담긴 자필 문서를 받아오겠습니다."

"그대가…?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은가."

겁에 질리거나, 차갑게 바라보는 등 여러 예상을 깨고 케틀란은 오히려 자신을 걱정했다.

그게 참 고마웠다.

"희생 없이, 현 뉴브라 왕을 끌어내릴 수 있을뿐더러, 자백을 받았기에 그 죗값을 피하러 거래를 제시할 겁니다."

"하지만 그대가 위험하네. 나는 그대를 잃고 싶지 않네."

"그 거래에 응하셔야 놈을 꼭두각시로 앉힐 수 있을 겁니다. 그래야 네바스트의 눈을 속이고 진실을 알 수 있으면서 동시에 반 왕정파에 족쇄를 달 수 있을 겁니다."

흘러가는 상황 자체가 현 뉴브라의 왕이든, 반 왕정파든 모두를 압박하고 있었다.

게다가 희생 없이 왕위를 차지할 수 있다고 하는데 반 왕정파가 그 거래를 마다할 리가 있겠는가.

이미 전쟁을 끝내자고 제국과 합의를 봤을 테니까.

"그 후에 현 뉴브라 왕의 처리는 폐하께 맡기겠습니다."

루시온은 이미 수만 번이고 떠올린 적이 있었던 뉴브라의 왕, '노르비온 뉴브라', 그놈의 최후를 실천할 수 있게 되어 기뻤다.

왕으로서 존엄성을 잃고, 자신에게 구차하게 매달리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죽어가는 최후는 놈에게 가장 어울리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놈의 최후는 그대에게 주겠네."

케틀란은 루시온의 말 속에 숨은 분노를 엿보았기에 기꺼이 노르비온의 최후를 넘겼다.

"이는 황제로서 분명히 약속하겠네."

"감사… 합니다, 폐하."

"하멜. 그대가 무얼 바라는지 말해주겠나?"

케틀란은 부드럽게 목소리를 냈다.

"저는 뉴브라의 왕이 바뀌고, 네바스트의 그 끔찍한 진실이 드러나 빛의 축복을 받은 자들 역시 저희와 마찬가지로 그저 한 인간이라는 걸 알리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뉴브라가 바뀌고, 네바스트가 무너진다면.

이전 세계의 결말이 바뀌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도 바뀌지 않을까.

"…하."

케틀란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챙길 줄은 모르는지.

계획이 성공만 한다면 뉴브라의 왕이 바뀌는 건 당연할 테고, 네바스트가 가졌던 그 특권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 그 모든 건 당연한 흐름이었다.

"그대는 혹 북부, 동부, 서부, 남부, 중부 중 어디가 좋은가?"

"예?"

느닷없는 질문에 루시온은 당황했다.

"좋아하는 곳이 어디인가?"

케틀란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뭘 주려고 하시나?'

어쩌면 자신을 가엾게 여겨 살 곳을 마련해준다는 게 아닐까.

자신의 집은 크로니아였고, 자신이 좋아하는 곳은 그런 크로니아가 있는 서부였다.

하지만 이미 서부 대부분 크로니아가 장악했으니 만약 죽음의 바다가 원래대로 돌아온다면 그곳이 참 예쁘지 않을까 싶었다.

"동부… 입니다."

"그대는 높은 곳을 좋아하는가?"

"예. 그, 좋아하긴 합니다."

"잘 알겠네. 기대하고 있게. 아, 그대가 바라던 부분에서 더 첨가를 해보도록 하지."

뭘 첨가한다는 건지 몰라도 훈훈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와 달리 지금 당장 허락받아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었다.

"폐하."

"말해보게."

"죄송하지만, 하나 더 남았습니다."

"...?"

"버림받은 공허의 손이 지금 마탑으로 향했습니다."

"…이런 미친!"

쾅!

케틀란은 테이블을 다시금 두드렸다.

224화. 마탑으로

"그놈들이 마탑 개방을 노린다는 건가?"

케틀란의 눈 사이가 좁혀졌다.

"맞습니다."

"지금 당장 군사를...."

"안 됩니다, 폐하."

"안 된다니…? 방금 그대가 공허의 손, 그놈들이 마탑을 노린다고 하지 않았는가."

"흑마법사에게는 보이지 않는 눈이라는 게 있습니다."

루시온은 '유령'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았다.

사람은 제 눈으로 목격해야 진실임을 아는 존재였다.

모두가 크라언처럼 자신을 이해해줄 수 없다는 사실은 일찌감치 버렸다.

"그 눈이 폐하의 기사들을 감시하고, 신관들의 존재를 눈치채 제가, 아니, 폐하께서 해결할 수 없는 범위까지 치달을 겁니다."

"은밀하게 움직여도 소용이 없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 눈앞에서는 무엇도 소용이 없습니다."

케틀란은 대답을 듣고는 눈을 크게 떴다.

하멜이 이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눈치챘다.

자신조차 있는지 몰랐으며, 누구도 알지 못한 단체가 있었다.

"조직 에일은 동맹을 맺은 제국을 위해 움직일 겁니다."

루시온이 목소리에 힘을 준 만큼 케틀란의 눈빛이 흔들렸다.

적들이 모르는 단체, 에일.

그들이 제국을 위해 움직이겠노라 말했다.

어디에서 이런 영웅이 튀어나왔는지.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며칠 뒤에 성자가 마탑을 방문하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루시온이 고민한 것도 무색하게 케틀란이 먼저 말을 꺼내주었다.

"마탑 개방 이전에 방문한다고 하였으니, 그때가 제격이 아닐까 싶네. 공허의 손도 여기까지는 몰랐겠지."

하멜 말대로 적에게 보이지 않는 눈이 있다고 한다면 제8 기사단의 기사들을 다른 이들로 바꿔도 문제가 생긴다는 뜻이었다.

지금 거의 다 잡았지만, 제국 내에도 뉴브라와 내통하고 있던 귀족들이 있었다.

그들이 제8 기사단의 인적사항을 이미 다 퍼트려놓았겠지.

골치가 아팠다.

하필 적이 붙잡은 곳이 마탑이라니.

그곳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도 같은 곳이었다.

"마탑도 마탑이지만, 성자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루시온은 다 알면서 모르는 척 물어봤다.

"그 부분이 무척 걱정이긴 하네. 허락… 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케틀란은 자신이 보았던 그 어떤 순간보다 심각한 표정을 했다.

[그러게. 노비오가 허락을 해줄까 싶은데.]

러쉘이 귓불을 만지작거렸고, 베델은 숨을 짧게 내쉬었다.

[허락을 받는 게 정말, 정말로 어렵지 않을까 싶어.]

"그 부분은 폐하께 맡기겠습니다. 제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러쉘과 베델의 우려처럼 루시온 역시 노비오와 카슨을 어떻게 설득할지 고민이 깊긴 했다.

"내…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겠네. 이 부분은 확답을 줄 수 없어 미안하네. 정 안 되겠으면 성자를 설득해보도록 하지."

"저도 성자의 보호를 위해 애쓰도록 하겠습니다."

―성자는 루시온인데? 루시온이 루시온을 보호해?

라타가 난생처음 듣는 말을 들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직을 미리 동부로 움직이도록 할 테니, 폐하께서는 부디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도록, 후에 문제 거리를 쉽게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걱정하지 말게. 그대의 조직에 어떤 문제도 생기지 않게 내 도장이 찍힌 패를 내어주도록 할 테니. 아, 그걸로 조직의 새 장비든 뭐든 맞춰도 된다네."

케틀란은 신나게 말을 하다 말고 루시온을 빤히 보았다.

시선이 묘했다.

마치 돈을 쓸 줄 모르는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처럼,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는 듯했다.

"듣자 하니, 크라언이라고 그대의 조직에 그대를 대신해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자가 있다고 들었네."

"예. 있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줄 패를 그자에게 넘겨줄 셈인가?"

"물론입니다. 저는 대외적으로 나설 수 없는 처지가 아닙니까."

"그거참 잘됐네!"

이유 모를 기쁨과 함께 케틀란은 조금 전 눈빛 속에 깃들었던 불안함을 싹 지워버렸다.

[푸하핫!]

러쉘이 배를 잡고 웃었다.

[나 같아도 너 말고 크라언한테 맡기는 게 편하지.]

이어진 러쉘의 말에 루시온은 배신감을 살짝 느끼며 베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를 거라고.

[어, 음, 돈을 관리하는 부분은 당연히 루시온 공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공은 저렇게 돈이 손에 쥐어져도 공에게 아무것도 쓰지 않을 것 같거든. 봐, 지금도 돈이 있음에도 공에게 아무것도 쓰지 않잖아.]

―…엄. 아니야. 루시온은 돈을 많이 써. 흄이랑 라타한테 맛있는 걸 사 먹으라고 맨날 돈을 주는데?

그림자 속에 있던 라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기에 루시온이 없을 텐데?]

러쉘이 라타의 말을 꼬집자 라타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홉! 진짜야!

라타는 곧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깜짝 놀랐다.

―라타랑 흄이 닭꼬치를 먹을 때, 엄청, 엄청 많이 먹었는데 루시온 손에 두 개밖에 없었어!

라타의 눈동자가 점점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호옵! 흄이 입을 옷을 사러 갔을 때도 루시온은 옷을 하나도 안 샀어!

라타의 꼬리마저 바짝 서서는 놀란 그 표정 그대로 루시온을 올려다보았다.

―호오옵…! 라타가 좋아하는 공을 사러 갔을 때도 루시온은 공을 하나도 안 샀어!

[거봐. 베델 말이 맞지?]

러쉘이 웃음을 참으며 묻자 라타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응응! 루시온은 루시온한테 돈을 안 써! 라타가 몰랐어. 라타가 몰랐다니....

충격받은 라타의 표정과 함께 잠깐 다리를 휘청거렸다.

'내가 사치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돈을 쓸데가 없어서 안 썼을 뿐인데.'

루시온은 억울했다.

노비오가 알아서 옷을 새 걸로 맞춰줘, 먹고 싶은 게 있으면 흄과 안토니가 귀신같이 알아서 사 오고, 그 외에는 카슨이 자신이 원하는 걸 죄다 구해 오니 돈을 쓰려고 해도 쓸 이유가 없었다.

돈 쓰는 취미도 없고.

'…그런데 폐하는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지?'

러쉘, 베델, 라타야 자신을 많이 봤다 치지만, 케틀란은 몇 번 봤다고 저러는지.

루시온이 케틀란을 빤히 보자 그는 헛기침을 내뱉었다.

"하멜."

"예, 폐하."

"내 그대에게 줄 패에는 한계가 없을 테니 그대가 쓰고 싶은 대로 쓰게나."

"제가 막 쓰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부디 그래 줬으면 하네."

케틀란이 호쾌하게 웃었다.

솔직히 하멜에게 무얼 챙겨줘야 기뻐할지 아직 감이 잡히질 않았다.

일단 여러 가지를 챙겨줄 셈인데 좋아할지 말지 몰라 걱정이기도 했다.

"저… 진짜 막 씁니다?"

루시온이 눈치를 보듯 살짝 힘 빠진 목소리를 냈다.

케틀란은 가볍게 웃었다.

저것 보게.

만약 자신의 앞에 앉은 자가 하멜이 아니라 다른 이였다면 탐욕스러운 기세를 숨기지 못했겠지만, 하멜은 벌써 부담감을 느끼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저러니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국이 그간 쌓아 올린 부를 무시하지 말아 주게나."

제국은 돈이 많았다.

이는 황제인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제발 좀 써라.]

러쉘까지 합류해 루시온에게 말하자 그는 묘한 압박에 기분이 이상했다.

속이 간질거리지 않는가.

"나중에 다른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

루시온은 마지막으로 케틀란에게 경고하듯 내뱉었다.

하지만 케틀란은 자신을 향해 또 웃음을 터트렸다.

도무지 왜 웃는지 알 수 없었지만, 루시온은 일단 기뻤다.

'폐하의 돈을 사용하면 조직의 돈을 아낄 수 있겠지?'

마침 지부도 새로 짓고 있는 와중이니 돈이 들어갈 때가 많았다.

'이참에 죄다 최고급으로 싹 바꾸....'

루시온은 생각을 하다 말고 케틀란을 힐끔 바라보았다.

"추적은 걱정하지 말게. 내 그대를 믿고 자금의 출처를 추적하지 않겠다고 이 자리에서 맹세하겠네. 원한다면 증명서까지 써줄 수도 있다네."

케틀란은 차를 홀짝였다.

어차피 추적을 해봤자, 참 재미없는 내용만 나올 게 뻔했다.

또 누군가를 위해 쓰고 있겠지.

어쩌면 지금도 누군가를 생각하며 어떻게 써야 할지 계획하고 기뻐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왠지 그대 주변에 그대를 걱정하는 이들이 많을 것 같네."

[오…! 역시 황제야.]

러쉘은 케틀란의 안목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루시온이 깜짝 놀라며 자신의 가면을 만지작거렸다.

분명 표정이 안 보일 텐데.

"나도 일 중독에 빠진 사람이라, 내 그대 같은 사람을 아주 잘 알고 있지. 제 몸을 돌처럼 여길 걸세."

[맞습니다, 폐하. 보고 있으면 너무 조마조마합니다.]

그간 꾹 눌렀던 감정을 터트리듯 베델은 깊게 공감했다.

조금만,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자기 자신을 아끼길 바랐다.

"아닙니다. 저는 절 무척 아낍니다."

그 대답에 케틀란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저건 진심이었다.

하멜이 자신에게 알려준 사건만 해도 며칠 안에 나올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그만큼 지금까지 제 몸을 굴리고, 또 굴리면서 얻어온 결과겠지.

케틀란은 하고 싶은 말을 꾹 누르며 루시온에게 제안했다.

"가끔이라도 쉬어주게. 그대뿐만 아니라, 그대 주변인들을 위해서라도 말일세."

[캬. 말도 너무 잘한다.]

케틀란을 바라보는 러쉘의 눈동자가 오늘따라 너무도 반짝였다.

루시온은 러쉘을 힐끔 바라보다 목소리를 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노력이 아니라 그대에게 줄 패를 크라언 그자에게 주고, 그대는 마탑에 가기 전까지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자 좀 쉬게."

만약 하멜이 대신 중 한 명이었다면 알아 온 사실로 벌써 포상과 더불어 진급은 물론 휴가를 1년 치 이상 받아갔을 수도 있었을 텐데.

"참 안타깝네."

"무엇이 말입니까?"

"그대에게 황명을 들먹이지 못하는 점이 말일세. 그랬다면 강제로라도 쉬게 했을 텐데."

"진심이십니까?"

"진심이네. 내 그대의 앞에서는 뭐든 진심이니 농담으로 흘리지 말게나."

"...?"

놀란 루시온의 반응에 케틀란이 키득거리다 차를 홀짝였다.

* * *

우물우물.

루시온은 그네 의자를 타며 한 손에는 마카롱을, 다른 손에는 연락용 아이템을 손에 쥐었다.

케틀란에게 모든 사실을 알린 뒤에 집으로 돌아와 한숨 푹 자고 나서 러쉘과 베델에게 약속한 대로 모든 걸 내려놓고 휴식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트로에에게 네바스트가 신수를 죽이고 성물을 타락시킨다는 말을 했다.

헤인트와 화해도 했고.

케틀란의 마음을 얻으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다 이뤘다.

이제 중요한 일은 딱 하나가 남았다.

<…아버지?>

조심스러운 샤엘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온은 순간 피식 웃고 말았다.

<어…? 루시온 너야?>

"예. 접니다, 누님."

<하. 진짜 깜짝 놀랐잖아!>

"아버지한테 평소에 지은 죄가 큰가 봅니다?"

루시온이 낄낄 웃었다.

―아.

라타가 입을 벌리자 루시온은 마카롱을 넣어 주었다.

<많지. …엄청 많지. 하나밖에 없는 딸이 집에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는데 얼마나 속상하시겠어.>

샤엘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개인적으로 편지가 더 좋지만, 네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으니 이것도 나쁘지 않네.>

"자주 연락하겠습니다."

<됐어. 가끔 만나야 반가운 것도 있잖아? 그래서 마탑에 언제 올 건데?>

"5일 뒤에 마탑으로 가겠습니다."

<엄청 빠른데?>

"아무래도 중부에서 하루 쉬어가야 할 것 같아서 하루 더 잡았습니다."

트웰로의 목이 걸리는 걸 봐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폐하께서 나를 부를 것 같단 말이지.'

하멜이 아닌, 성자 루시온으로서.

<그러니까 너무 빠르다고. 솔직히 서부에서 중부로 오는 게 얼마나 피곤한데. 더 천천히 와. 보자, 이틀은 쉬다 와도 되겠네.>

"포탈이 있습니다."

<포탈이 있는 거야 알지. 또 열이 날라.>

"그 정도는 이제 버팁니다."

<루시온 너, 상처도 다 안 낫고, 여독으로 며칠 앓았다고 이미 다 들었어.>

"누구한테 말입니까?"

<아버지하고 오라버니하고, 안토니. 내가 마탑에 있어도 집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있어. 그러니까....>

"누님."

<알았어. 그렇게 하기 싫다는 거지? 뭐, 좋아. 그런데 앓기만 해. 이마에 혹이 생길 줄 알아라.>

"진짜로… 때리실 겁니까?"

루시온은 흠칫 놀라자 샤엘라가 크게 웃었다.

<아니. 내가 널 어떻게 때려. 때리는 시늉은 하겠지.>

"저번에 때리셨잖습니까."

<그건 사랑의 딱밤이었고. 내가 때린 건 헤인트지. …하. 이번에 정말로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어. 너 주려고 선물도 준비했는데.>

'…설마 아니겠지.'

선물이라는 말에 루시온은 괜히 자동으로 물건 하나가 떠올랐다.

"아니겠죠?"

루시온을 향해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던 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러쉘이 설마 하며 한쪽 눈썹을 올렸다.

[흄하고 러쉘도 성물을 떠올렸는가?]

베델은 놀란 눈을 하며 쿡쿡 웃었다.

―우오오오! 성물이다!

라타 혼자 벌써 성물이라고 확정 지어버렸다.

225화. 마탑으로(2)

"…선물이라뇨?"

루시온이 입가를 핥으며 물었다.

<그냥 이것저것. 너 보면 주려고 막 모아둔 게 있거든? 장식품도 있고, 네가 하면 예쁠 것 같아서 머리끈도 샀고, 옷에 다는 장식품에 신발하고, 아, 보니까 귀걸이도 하고 다니던데. 그래서 귀걸이도 샀지.>

샤엘라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무얼 샀는지 한참 늘어놓다가 이내 실실 웃었다.

생각만 해도 좋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한숨을 깊게 내쉬며 실망감이 가득 묻힌 목소리를 냈다.

<아쉽지만, 정말 아쉽지만 어쩌겠어. 그래도 네가 오니까, 좋다. 솔직히 엄청 설레.>

"누님. 있잖습니까."

<왜? 더 필요한 게 있어? 아. 신기한 마법 아이템도 모아뒀어. 여기가 다른 곳도 아니라 마탑이잖아? 찢으면 불꽃이 내뿜어지는 종이도 있고, 저번에 보니까 라타가 공도 좋아하던데 공이 구를 때마다 빤짝거리는 효과가 나는 것도 있어.>

―호옵! 라타가 좋아하는 공이 구르는데 반짝거리기까지 한다고! 라, 라타는 당장 가고 싶어! 라타가 좋아하는 반짝반짝!

라타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루시온의 허벅지에 올라가 귀를 쫑긋 세웠다.

앞발을 파닥이며 꼬리가 당장 날아갈 듯 흔들렸다.

"혹시 빛이 깃든 물건을 지니고 계십니까?"

<마탑에 빛이 깃든 물건이 있을까 봐 그래?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 네가 올 때 다 치워 놓도록 힘 좀 써볼 테니까.>

"빛이 깃든 물건이 마탑에도 있습니까?"

루시온은 기뻐하며 물었다.

제일 우려하던 점이 아닌가.

<그거야 자기 마음이니까,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지.>

"누님은 있습니까?"

<없는데. …흠. 루시온.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모르겠지만, 왜 아까부터 빛 타령을 하고 있어? 빛이 걱정되는 건 아닌 것 같고.>

"누님. 저도 귀가 없는 게 아닙니다. 뉴브라 왕국이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네바스트가 뉴브라를 압박하고 있고요."

<아. 그 개새끼들과 손을 잡았던 흑마법사가 만약 버려진다면 마탑으로 올 거라 생각해서 빛이 깃든 물건을 이야기한 거였어?>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제 걱정이 너무 앞섰나 봅니다."

<아니야, 루시온.>

샤엘라는 툭 하고 던져진 루시온의 걱정에 깊게 고민하는지 '흐음' 하며 침음을 흘렸다.

'계속 고민해주십시오, 누님.'

루시온은 샤엘라의 머리 회전이 얼마나 빠른지 알기에 마카롱을 먹으며 잠깐 기다렸다.

<확실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네. 마법사라는 족속은 생각보다 더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거든. 그중에서도 모르던 정보를 아는 걸 가장 기뻐하지. 지금 가장 잘 알려진 존재 중에 정보가 없는 자들이 바로 흑마법사야. 만약 이걸 거래로 잡았다면 무조건 허락했을 거야. 그리고 흑마법사 입장에서는 마탑이 얼마나 좋은 곳이겠어? 골치 아픈 시한폭탄들이 모였는데.>

샤엘라는 숨 한 번 쉬지 않고 긴말을 이어갔다.

"혹시 누님도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아니야, 루시온. 마음이야 그러고 싶지만, 아버지를 실망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고, 너에게 자랑스러운 누나가 되고 싶거든.>

"감사합니다, 누님."

<아무것도 안 했으니까, 너무 띄워주지 마. 어쨌든, 혹시 모르니까 한번 루시온 네가 말한 대로 빛이 깃든 물건을 켜둘게. 그리고 나도 개인적으로 호기심이 들어서 말이야.>

호기심이라는 단어에 루시온은 미간을 찌푸렸다.

"…만약 진짜라면 너무 깊이 파고들지 말아 주십시오."

<네 걱정부터 해, 루시온.>

"저는 괜찮습니다."

<일단 5일 뒤에 만나는 걸로 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하.>

샤엘라는 잠깐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얽히니 상황이 복잡해졌죠?"

자신이 마탑에 간다는 사실은 이미 황제와 고위 귀족들, 그리고 마탑의 관리자에게 알려진 상태일 테지.

<그런 생각하지 마, 루시온. 내가 널 지켜.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테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와. 그럼.>

샤엘라는 힘있는 목소리를 낸 후에 연락을 끊었다.

루시온은 연락용 아이템을 지그시 바라보다 땅을 박차며 그네 의자를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누님은 이전 세계에 어떻게 된 걸까.'

마탑은 소설 형식을 빌린, 이전 세계를 보는 힘에서도 거의 언급이 되지 않았다.

왜 그런 걸까.

바닥을 짚으며 땅을 박찼던 루시온의 다리가 멈췄다.

[왜 그래?]

러쉘이 갑자기 굳어진 루시온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마탑이 조용했던 게 아니라.

"누님이."

조용할 수밖에 없었다면.

헤인트가 공허의 손 보스를 물리쳤더라도 이전 세계의 승자는 뉴브라와 네바스트였다.

뉴브라의 꼭두각시가 되어도 황제가 되고 싶었던 4황자, 오웬.

그 오웬이 여전히 꼭두각시가 되게 해야 했던 뉴브라가 과연 무엇을 잡았을까.

'…마탑이다.'

크로니아가 무너졌을 때도 샤엘라는 등장하지 않았다.

"누님이… 걱정됩니다."

루시온은 노비오에게 빌린 연락용 아이템을 꽉 쥐며 파르르 떨었다.

* * *

루시온이 제 방에 가기 위해 옥상에서 계단을 내려오다 흄이 갑자기 멈췄다.

"왜 그래, 흄?"

"가주님께서 계십니다."

흄의 손짓을 따라 방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노비오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폐하께서 공의 부친께 마탑 이야기를 한 모양이야.]

베델은 노비오의 얼굴이 깃든 불안감을 보았다.

'폐하께서 정말 일 처리가 빠르시네.'

루시온은 숨을 짧게 내쉬었다.

케틀란의 일 처리를 내심 기대를 했지만, 지금 이렇게 갑자기 올 줄은 몰랐다.

가뜩이나 샤엘라 때문에 마음이 뒤숭숭했는데.

"아버지."

하지만 루시온은 속에 깃든 감정을 잠깐 잊어버리며 노비오를 반갑게 불렀다.

"루, 루시온."

루시온을 보자마자 노비오가 깜짝 놀라며 주춤거렸다.

"왜 이렇게 놀라십니까?"

"...."

노비오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바쁘실 텐데, 저를 부르시지 그랬습니까."

"루시온."

"예. 말씀하세요."

"잠깐… 걷겠더냐."

* * *

러쉘과 베델이 자리를 비켜주었고, 흄이 라타를 안아 들어 못 가도록 말렸다.

루시온은 산책을 못 가 금세 그렁그렁한 눈물을 흘리려는 라타를 쓰다듬어주고는 노비오를 따라갔다.

노비오는 정원에 시중도 물리고, 누구도 가까이 오지 말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평소와 달리 노비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굳어진 표정은 영혼이라도 빠져나간 듯 보여 루시온은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그의 복잡한 심경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아버지."

보다 못해 루시온이 먼저 말을 꺼냈다.

"넌 내 보물이다."

노비오는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

"나하고 레니아가 만든 마지막 소중한 보물."

노비오는 어머니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루시온은 어머니가 왜 돌아가셨는지를 알지 못했다.

자신이 아는 건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아버지께서 몇 년이나 슬퍼했고, 그 슬픔이 너무도 커 누구도 그 이름을 올리지 못하게 했다는 사실뿐이었다.

기일에는 노비오 혼자 어머니를 묻었던 곳으로 갔기에 그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루시온은 묻지 않았다.

이유는 몰라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물어보려고 할 때마다 답답함과 함께 가슴 속에서 죄책감이 꿈틀거렸기 때문이었다.

"…폐하께 연락이 왔더구나. 뉴브라 왕국에 내쫓긴, 너를 공격했던 흑마법사 단체 공허의 손이 마탑에 있다고."

역시 이 이야기였다.

노비오는 걸음을 멈췄다.

그의 뒷모습은 여전히 컸다.

"폐하께서, 아니, 케틀란 그놈이 내게 이렇게 말하더구나. 네가, 루시온 네가 마탑으로 가는 걸 말리지 말아 달라고!"

빠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놈이, 그놈이 내게 어떻게 그럴 수 있더냐. 그래서 내가 화를 냈다. 내가 어떻게 말리지 않을 수가 있겠냐고."

"아버지. 저는...."

"제발, 말하지 말거라 루시온. 제발."

노비오의 고개가 숙어졌다.

"…내가 너무도 사랑한 레니아도 너처럼 일반인이었다. 너처럼 그 여린 몸으로 크로니아로서 살아갔다. 그래서 더 사랑스러웠고, 그 당당함에 보고만 있어도 미소가 멈추질 않았지."

노비오의 목소리가 차차 젖어갔다.

"하지만 크로니아라는 그 이름 때문에, 그 무거운 이름이 레니아를 죽였다."

'어… 머니께서 크로니아를 노리는 이들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루시온은 갑자기 양팔에 무언가 닿는 촉감이 느껴져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이상하게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무언가 알 듯 말 듯 사실에 가슴이 조여왔다.

"그 무거운 이름 때문에 너도 잃을 뻔하지 않았더냐. 나는 한 번이면 족하니, 제발 크로니아라는 이름이 너를 삼키지 말았으면 한단다."

"아버지."

"…루시온!"

노비오는 루시온을 소리치듯 부르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가가 이미 붉어져 있었다.

"루시온. 너까지 크로니아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니, 자유롭게 살거라. 제발."

애절하다 못해 처절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이토록 약한 노비오의 모습은 처음이라 루시온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루시온은 노비오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저는 얽매인 적이 없습니다."

"...."

"얽매인 게 아니라 저도 크로니아가 되고 싶었습니다."

"왜. 왜… 그 힘든 길을 가려고 하더냐."

노비오의 목소리가 살짝 찢어졌다.

자신도 크로니아로 태어났지만, 그 이름이 너무도 버거울 때가 많았다.

적은 불가피하게 많고, 이곳을 노리는 자들이 언제 자신의 목숨을 노릴지 몰랐다.

하지만 버텨야 했다.

자신은 제국의 방패이자 창이었으니.

이곳이 무너지면 수백만의 백성들이 죽어갈 테니까.

"아버지의 아들이니까요."

루시온은 힘을 빼고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굳이 힘을 주어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노비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버지 아들로서 아버지께서 일궈놓으신 것들이 너무도 자랑스러워서 제가 먹칠하지 않으려고요."

누군가 노비오가 무얼 했냐고 자신에게 묻는다면 루시온은 그가 수백만의 백성들의 목숨을 지켰노라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이는 단지 책임감이 아니었다.

긍지와 자부심까지 더해 지긋지긋한 적들의 피를 검에 바르고, 지독한 피비린내를 몸에 배면서도 제국을 위해, 크로니아에 사는 모두를 위해 노비오는 하루도 멈추질 않았다.

"저는 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

노비오가 숨을 들이켰다.

"그래서 저도 크로니아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름뿐만 아니라 진짜 크로니아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 듯 숨을 내쉬었다.

루시온이 꺼내는 저 말에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루시온 크로니아.

분명 크로니아라는 이름을 받았지만, 루시온은 선천적으로 크로니아가 될 수 없었다.

강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곳에서 루시온은 언제나 보호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보호가 약해졌을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났던가.

루시온이 뉴브라로 끌려가 작은 벌레가 사람 손에 으스러진 것처럼 핏덩이가 되어 돌아왔다.

그래서 크로니아가 될 수 없었다.

"저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약점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노비오는 담담하게 꺼내는 루시온의 진심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사랑스러운 아들이 자신의 유일한 약점이 되는 그 자체가 얼마나 증오스럽던가.

그 약점이 또 제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아버지. 제가 크로니아로서, 성자로서 활약할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루시온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지금 제일 괴로운 건 노비오일 테니까.

"제가 아버지의 약점이 되지 않게 허락해주셨으면 합니다."

마탑에 적이 있는 걸 알아도 자신이 가야지만 이번 계획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엄청난 공을 받을 기회이기도 했다.

그래서 루시온은 자신이 가겠다고 노비오에게 말했다.

"루시온. 나는… 아직도 무섭단다."

노비오는 천천히 루시온에게 다가갔다.

그 거리가 짧았지만, 노비오의 걸음이 무거웠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핏덩이가 된 네 모습이 떠오른단다. 네가 또 그렇게 될까 봐 너무, 너무 무섭고 두렵구나."

다가오는 노비오를 바라보는 루시온의 눈동자가 잔잔한 물결이 쳤다.

"네가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이렇게 걸어 다니고, 그 방에서 나와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다정하고 따스한 그 목소리에 루시온은 목이 콱 막힌 듯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깨물며 노비오를 바라보았다.

"내 욕심으로는 너를 마탑으로 가지 못하게 하고 싶단다. 안전하게 이곳에서 지냈으면 한단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겠지."

노비오는 루시온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네가 부러진 날개를 스스로 고치고, 드디어 하늘로 날아가겠다고 날갯짓을 한다는데 이걸 어찌 막겠더냐."

"…아버지."

"가거라."

노비오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눈동자에 넘칠 듯 요동치는 눈물은 기어코 흐르지 않았다.

"가서 무사히 돌아만 와주면 된단다. 다치지 말거라. 제발, 살아서 오거라."

루시온은 말없이 노비오의 품을 파고들었다.

루시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또 끄덕이자 노비오가 등을 토닥여주었다.

의사 누구도 루시온이 살 수 없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루시온은 자신의 생명을 붙잡았다.

의사 누구도 루시온이 움직일 수 없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루시온은 움직였다.

의사 누구도 루시온이 걸어 다닐 수 없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루시온은 지금 이렇게 서 있지 않은가.

모두가 절망했을 때, 루시온은 몇 번의 기적을 보여줬는가.

어찌 자랑스럽지 않을까.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까.

"나도, 루시온 네가 너무도 자랑스럽단다."

노비오는 루시온을 꼭 끌어안았다.

226화. 마탑으로(3)

* * *

하루 뒤.

루시온은 누운 채로 입가를 핥으며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크라언한테 현재 상황을 알렸고, 아마 지금쯤 동부로 향하고 있을 테고.'

손가락을 접었다.

'델로스한테도 조만간 황제에게 연락이 오면 동부로 떠날지도 모르니 그때까지 푹 쉬고 있으라고 했고.'

델로스는 같이 떠나지 않았다.

그들이 같이 떠난다면 여러모로 편하겠지만, 상대는 마법사들이었다.

입을 막기 어려웠고, 전체적으로 시기가 좋지 않았다.

지금 흑마법사 때문에 뉴브라가 그 꼴이 난 게 아닌가.

그런 와중에 흑마법사를 우르르 데리고 온다면 기껏 다 죽인 뉴브라에게 구원의 밧줄을 내려주는 셈이겠지.

자신도 조용히 칼질이나 하고 있어야 할지도 몰랐다.

루시온은 손가락을 또 접었다.

'헤로안은 네바스트를 계속 조사하고 있고, 조직이 쓸 빛이 깃든 물건은 이틀 뒤에 도착할 것 같고, 무기는… 보자, 삼일 뒤에 도착한다고 했지?'

이 기회에 새로 바꾼 무기와 갑옷 등을 떠올리며 실실 웃다 또 손가락을 접었다.

'미론스트 왕국은 제국의 지원을 받아 한참 뉴브라와 손을 잡았던 놈들을 죄다 숙청 중일 테고, 그 숙청이 끝나면 아직도 흑마법을 위해 제물로 바쳐지는 사람들이 있는지 살핀다고 말해줬으니....'

루시온은 네 번째 손가락을 접고 나서 미간을 찌푸렸다.

라타가 자신의 상체를 장애물 삼아 넘나들며 꺄르르 웃었다.

'…이제 남은 구슬은 3개.'

하나는 브로슨이 가지고 있었으니 남은 건 2개였다.

―라타 봐봐. 엄청 잘 뛰지?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흄이 동부에 하나가 있다고 했지? 처음에는 죽음의 바다 그 근처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그렇다는 이야기는.'

마탑이었다.

'마탑이 분명해.'

루시온은 입꼬리를 올렸다.

[루시온. 너 이제 보니까 쉬는 거 모르지?]

러쉘이 벽에서 튀어나와 루시온을 빤히 보았다.

기껏 자리를 비켜줬더니.

"아뇨. 지금 쉬고 있잖습니까."

[침대에 있으면 다 쉬는 거야?]

"예. 침대란 본디 휴식의 장소잖습니까."

[쉬는 걸 몰라?]

루시온은 재차 꺼내는 러쉘의 물음에 눈을 크게 뜨며 침대를 가리켰다.

[다 내려놓고, 아무 생각하지 말고 네가 평소에 하고 싶었던 걸 즐기란 말이지. 그게 휴식이지.]

"…하고 싶었던 거요?"

루시온이 멈칫거렸다.

자기 전까지 만지작거렸던 스마트폰이 갑자기 그리워졌지만, 이곳에는 바란다고 해서 바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뭘 좋아했더라.'

루시온은 눈을 깜박거렸다.

[…혹시 하고 싶은 게 없어?]

러쉘의 눈도 덩달아 커졌다.

그러고 보면 루시온이 사건과 얽힌 걸 제외하면 무얼 원한다고 말한 적이 있던가.

마카롱을 좋아하고.

하늘을 보는 걸 좋아하고.

간간이 책도 읽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잖아?'

[루시온 너....]

"산책하러 가라고 하셔도 싫습니다. 덥습니다."

개인적으로 자마드한테 놀러 가고 싶었다.

그의 망치질은 이상하게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뜨거운 용암 앞에 앉아 있을 자신이 없었다.

가면을 쓰고 싶지도 않았고.

'…자마드 씨라면 내가 가면을 벗어도 괜찮지 않을까.'

루시온은 눈을 깜박거렸다.

왠지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줄 것만 같았다. 자신이 흑마법사라는 걸 알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니.

―라타는 산책가고 싶은데.

라타는 뛰려다 말고 입을 삐쭉 내밀었다.

"어디 가고 싶은데, 라타?"

―루시온이 가고 싶은 곳! 라타는 루시온이 가는 곳은 다 좋아!

"그럼, 책 좀 들고 아버지한테 갈까?"

―응응! 흄이 책을 읽어주는 것도 좋은데, 루시온이 읽어줘도 좋아! 노비오가 맛있는 것도 엄청 많이 주고!

라타는 신이 나서는 우다다 뛰다 공을 물었다.

삐익!

[흄한테 말해줘?]

"아뇨. 제가 가서 고르려고요. 아, 저녁때는 흄이 좋아하는 야시장에 갈 겁니다. 요새 못 갔잖습니까."

―호오옵! 라타도 좋아! 라타도 시장 좋아해!

라타는 공을 문 채로 루시온에게 달려들었다.

루시온이 라타를 매만지다 통통한 뱃살을 살짝 찔렀다.

'다들 라타를 너무 예뻐해도 문제네.'

쿡쿡.

* * *

"아버지."

카슨이 문을 열고 들어오다 말고 다급히 손가락을 입술에 올리는 노비오의 모습에 카슨이 멈칫거렸다.

새액. 색.

깊은 숨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루시온이 잠에 빠져 있었다.

그의 머리맡에 가득 쌓은 책이, 배에는 앞발을 접고 고개를 젖힌 채 같이 잠에 빠진 라타가, 손에는 책이 있었는데 제목이 참 이상했다.

마카롱을 먹는 데 이유가 어디 있어요?

'이걸 왜 읽고 있는 거지?'

카슨은 바로 옆에 놓인 색색의 마카롱과 간식거리를 보며 웃음을 참았다.

루시온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책이지 않은가.

"무슨 일로 왔더냐."

노비오가 루시온을 쓰다듬으며 소곤소곤 묻자 카슨도 목소리를 낮췄다.

"언제부터 온 겁니까?"

"아까부터. 참 넉살도 좋다 싶다."

노비오는 루시온의 얼굴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치웠다.

어제 자신이 그렇게 추한 모습을 보였음에도 루시온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냐는 듯 책도 들고 오고, 간식거리도 야무지게 챙긴 채 소파에 몸을 뉘었다.

라타한테 책도 읽어주고, 누워서 공놀이도 하고.

그 모습에 서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가끔 이런 날도 있어야지.

"제가 방으로 데려가겠습니다."

카슨이 루시온을 덮은 담요를 건드리자 노비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내가 데려갈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래서 내게 보고할 게 무엇이더냐?"

"정찰대가 돌아왔습니다."

현재 네바스트와 뉴브라가 팽팽한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약소국이긴 하나, 다른 나라들도 살펴야 할 때가 맞았다.

"살아왔더냐?"

"예."

"계속해 보거라."

"이상 증상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이상 증상이라니?"

"나무와 건물이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걸 보았다고 합니다."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고?"

노비오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음을 알자 입술을 꾹 다물었다.

"예. 하지만 더 이상한 건 '보지 마'라고 바닥에 글씨가 나타난 후에 사라졌다고 합니다."

"...."

카슨은 굳어진 노비오의 표정에 바로 다음 말을 이었다.

"약을 한 증상도 없고, 의사의 검진 결과 놀란 것뿐 정신적 착란 증상도 없다고 합니다."

"마법인가?"

"아닙니다. 마법이 아니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현상인지."

노비오는 턱을 매만졌다.

자신도 처음 듣는 현상이었다.

"다시 정찰대를 꾸리겠습니다."

카슨이 목소리를 냈지만, 노비오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만큼 중요한 문제라 생각했다.

"얼마 전에 죽음의 바다가 움직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상 현상이 발생했지. 카슨 너는 이 일들이 따로 일어났다고 생각하더냐?"

"아버지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일의 전조는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다고 말입니다."

"일단 잠깐 기다리거라. 만약 이 일이 누군가의 손에 벌어졌다면 이번 일로 경계하고 있을 테니."

"입단속은 철저히 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잘했구나, 카슨."

"…아버지."

카슨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루시온을 향했다.

"안다, 카슨. 네 심정이 지금 얼마나 무너져내리는지."

"제가… 자리를 비워도 되겠습니까?"

지금 뉴브라 왕국의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반 왕정파로 인해 날이 섰는지, 변경의 성벽을 건드리던 병사들의 숫자와 비교도 안 될 만큼 크게 움직이고 있었다.

변경에 모든 걸 바치기로 맹세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 자리를 비운다는 건 그 맹세를 저버리는 일이 아닌가.

"샤엘라에게 안부를 전해주거라."

노비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일그러진 카슨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잠깐 바깥바람 좀 쐬고 오고. 네가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변경이 무너지는 게 아니니. 게다가 내가 있지 않더냐. 걱정하지 말거라."

"감사… 합니다, 아버지."

카슨은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카슨."

별거 아닌 말에 감정을 내비치는 카슨을 보며 노비오는 그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예, 아버지."

"너도 이제 내려놓거라."

"하지만...."

"네 잘못이 아니란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네 잘못이 아니야."

"…도망쳤습니다. 루시온을 볼 때마다, 미칠 것만 같아서 도망쳤습니다."

카슨은 옷자락을 쥐어 구겼다. 주름은 그의 일그러진 얼굴을 닮아 있었다.

"잠은… 잘 잤니. 밥은 먹었니. 오늘은, 오늘은 기분이 어떻냐고 그 간단한 말도 못 했습니다."

노비오는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카슨의 죄책감은 깊었다.

"루시온은 괜찮다고, 다 잊으라고 말했지만, 제가 어찌 잊어버리겠습니까?"

"…미안하구나. 내가 섣불렀다. 내가 잘못했다."

"아버지. 저는 루시온에게 있어 영원히 도망자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카슨은 일그러진 얼굴로 쓰디쓴 미소를 입에 담았다.

* * *

5일 뒤.

"잊어버린 건 없더냐?"

루시온이 마차에 오르기 전에 노비오가 물었다.

―라타는 먼저 올라가 있을게.

라타는 흄 앞에서 기다렸다가 그가 마차 문을 열자 쪼르르 올라갔다.

"저는 제 몸만 챙기면 됩니다. 아시잖습니까."

루시온은 키득거리며 안토니를 이어 카슨을 보았다.

카슨이 따라오는데 챙길 일이 어디 있겠는가.

"안토니가 꼼꼼히 살펴주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카슨의 칭찬에 안토니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저는 그저 막내 도련님이 걱정될 뿐입니다."

"안토니. 카슨이 따라가는데, 왜 그렇게 걱정이 많은가?"

노비오는 신뢰가 묻어난 눈빛으로 카슨을 바라보았다.

"이 늙은이가 나이가 드니 주책이 많아져서 그럽니다, 가주님. 부디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안토니가 가볍게 웃었다.

"그대 마음을 내가 왜 모르는가."

노비오는 걱정이 눈동자에서 얼굴로 줄줄 흐르다시피 한 안토니를 보며 크게 웃었다.

자신이 루시온에게 채워주지 못한 부분을 안토니가 채워주었기에 이따금 루시온을 손주 보듯 바라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버지 제가...."

"거기까지. 말하지 않아도 된다, 카슨. 널 믿으니."

"예, 아버지."

카슨은 기사로서 노비오에게 경례를 했다.

두 사람을 바라보다 루시온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다녀오렴, 루시온."

노비오는 루시온을 향해 활짝 웃었지만, 무언가 부족하다는 듯 주변 눈치를 슬쩍 살폈다.

안토니가 고개를 돌리고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 루시온이 먼저 노비오에게 다가가자 그는 재빠르게 양팔을 활짝 벌렸다.

"형님이 따라가니 이제 안심하셨죠?"

"카슨이 따라가지 않아도 안심하고 있었을 거란다."

루시온은 배시시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진짜로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렴."

노비오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루시온은 마차에 올랐다.

[그런데 루시온.]

문이 닫혀서야 러쉘이 입을 열었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살짝 잡혀 있었다.

[카슨이 같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네가 힘들지 않겠어?]

"그래서 계속 생각하고 있습니다. 형님께서 따라오시는 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잖습니까."

[가장 좋은 건 루시온 공이 마탑을 구경한 뒤에 습격을 강행하는 일인데. 그렇게 된다면 공이 하멜로서 자연스럽게 전투에 참여할 수 있겠지.]

루시온은 베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그래. 그게 가장 좋은데, 글쎄."

"제가 최대한 보필하겠습니다."

흄은 루시온의 눈동자에 깃든 초조함을 보았기에 그를 달랬다.

"그래, 흄."

"그런데 도련님."

"왜?"

흄은 창문으로 밖을 한 번 살피고는 자신의 검지와 중지를 꼭 잡았다.

"…말씀드려도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분들이라면 도련님을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다못해 노비오와 카슨, 샤엘라까지 루시온을 무조건 이해해줄 거라고 보았다.

그만큼 루시온을 아끼지 않는가.

베델은 다급히 숨을 들이켰다.

루시온과 빙의를 했기에 그가 루시온으로서, 하멜로서 얼마나 갈등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당장 흄을 말리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며 바라보았다.

"그럴까? …음. 그럴지도 모르겠지."

루시온은 잠깐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흄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어딘가 모르게 공허해 보였다.

"그런데 흄. 나는 두려워."

담담하게 꺼내는 루시온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흄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알았다.

자신이 느꼈던 점을 루시온이 왜 모를까.

알고 있음에도 하지 못했다는 걸 더 빨리 알았어야 했는데.

"몇 번이나 부딪쳐봤는데… 내 목소리가 닿지 않았거든. 만약 이번에 또 닿지 않으면 예전처럼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 그래서 그래."

루시온은 살짝 망설이고, 입가를 핥고, 손을 만지작거렸다.

예전에는 가족들을 애증 했다면 지금은 달랐다.

그들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버렸으니까, 만약 또 자신 때문에 흩어져버리면 이번에는 정말로 버틸 수 없을지도 몰랐다.

"죄… 송합니다, 도련님.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아니야. 이건 애정과 별개의 문제고, 네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일 테니 궁금한 건 당연해."

루시온은 피식 웃고 말았다.

조금 전 자신이 말한 것도 있지만, 흄에게 말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헤인트과 카슨을 이은 붉은 실.

그 붉은 실을 끊지 못한 이상, 자신은 흑마법사로서 이전 세계처럼 어떤 형태로든 죽을 수 있었다.

"…어렵습니다."

흄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맞아. 어려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감정이란 참 어렵지."

루시온은 창문 너머에 보이는 노비오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새삼 노비오가 실에 얽매이지 않아 다행이다 싶었다.

카슨이 올라탔고, 마차가 출발했다.

마탑을 향해.

227화. 다시 들려오는 환호성

* * *

"…중부에 도착하면 헤인트와 합류하게 될 거다."

카슨은 한 손에 책을 잡은 상태로 떨떠름하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싱긋 웃었다.

"지금 뉴브라 놈들과 손을 잡았던 귀족들이 줄줄이 잡혀 있기에 이번 여행길은 안전할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형님이 계신 데 제가 무슨 걱정을 하겠습니까?"

루시온은 라타를 간질이며 대답했다.

살짝 기름칠이 된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카슨은 피식거렸다.

"원래라면 오늘 합류해야 했지만, 너도 알다시피 적들의 시선을 조금이나마 뺏고자 동부 사건으로 황실과 사이가 틀어졌다고 알려지길 폐하께서 원하셨다."

"예.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여 중부에 하루 머물고 나서 제8 기사단이 합류하게 되겠지."

'조직원들은 준비가 된 상태지만.'

루시온은 멈춘 자신의 손을 툭툭 건드리는 라타의 손길에 다시 라타를 간질였다.

꺄르르.

라타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헤인트는 아마 지금쯤 중부에 있는 우리 별장에 도착해 있을 거다. 폐하를 모시고."

루시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캬. 내 제자지만, 보면 볼수록 연기력이 참 대단해.]

러쉘은 루시온의 얼굴을 쿡쿡 찔렀다.

"마탑 습격 계획 때문에 오신 거니, 너무 놀라지 말거라."

굳어진 루시온의 표정에 카슨은 부드럽게 목소리를 냈다.

루시온은 러쉘을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화를 살짝 삼으며 물었다.

"…하지만 폐하께서 괜히 저 때문에 곤란해지시는 게 아닙니까?"

"그런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예.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한 사람이 더 올 것 같구나."

'크라언이네.'

루시온은 속과 달리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누구입니까?"

"이번 작전에 우리를 도와줄 조직 에일의 음, 크라언이라는 사람이 도와줄 거다."

아마도 헤인트에게 들었다면 조직 에일의 우두머리가 크라언이 아니라 하멜이라는 사실을 알 테지만, 카슨은 '흑마법사인 하멜'을 언급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그 조직이 어떤 곳입니까?"

루시온이 묻자 카슨의 눈 사이가 좁아졌다.

"…수상하지만, 나쁘지 않은 곳이다."

"수상한데 나쁘지 않다뇨?"

마치 억지로 칭찬하는 듯한 느낌을 벗기가 어려웠다.

카슨답지 않았다.

'뭐지?'

라타를 간질이던 루시온의 손이 다시 멈췄다.

분명 이전에 하멜을 재수 없는 자식이라고 언급했는데.

"그러니까, 그곳에 가면을 쓰고 있는 자가 있는데, 그자가 수상해서 한 말일 뿐, 조직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혹시 형님께서 이전에 '재수 없는 자식'이라고 언급한 사람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때는 그랬지만, 정말로 그런 자가 아니니 내가 한 말은 잊어버리거라."

비록 카슨이 말을 바꿨지만,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베델이 카슨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슨이 말을 바꾼 거? 에이, 말 정도는 바꿀 수 있지. 루시온이 퍼준 게 얼마나 되는데. 그리고 헤인트한테 크로니아를 도와준 게 하멜이라고 들었을 텐데 당연히 저래야지.]

'…아.'

루시온은 그제야 카슨이 왜 저렇게 태도를 바꿨는지를 알았다.

러쉘이 말한 것처럼 크로니아를 도와줬던 사람이 하멜이라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하긴. 형님께서는 은혜와 복수가 확실하신 분이지.'

[그 사실을 들었으면 말을 바꿀 만하지.]

베델마저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온. 이제 배의 상처는… 괜찮더냐?"

"많이 좋아졌습니다."

카슨은 루시온의 대답을 듣고 나서 흄을 바라보았다.

루시온이 눈을 크게 떴다.

'...?'

"예. 정말로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아마 며칠 뒤에 실밥을 뽑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흄이 웃자 카슨은 안심했지만, 루시온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왜 괜찮다는 내 말은 아무도 안 믿지?'

[어쩔 수 없지. 믿겨야 믿을 테니까.]

러쉘은 이유를 묻듯 루시온과 시선이 마주했지만, 굳이 대답하지만 않았다.

이미 수없이 많이 말하고 또 말했는데 듣지 않은 건 루시온이었다.

* * *

"…긴장하지 말고."

카슨이 문을 잡다 말고 루시온을 보았다.

루시온은 눈을 깜박거릴 뿐이었다.

[긴장한 건 카슨인 것 같은데?]

러쉘 말처럼 루시온도 그렇게 보였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제가 왜 긴장을 합니까?"

루시온은 혹여나 케틀란이 자신을 알아보면 어쩌나 싶어 앞이 캄캄할 지경이었다.

'잘해야 한다.'

보기보다 강심장을 가진 루시온의 모습에 카슨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지. 그게 당연한 일이지만, 당연하지 못한 자들이 너무 많기에 너에게 물어본 거란다."

루시온은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라타를 안은 흄을 바라보았다.

흄은 자신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그렇게 어깨에 힘을 주지 않아도 될 텐데.

오면서 습격은 당연히 없었다. 카슨이 말한 대로 자신을 습격할 놈들은 이미 잡혔거나,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까.

"이야기가 길어질 수도 있으니까, 라타랑 맛있는 거 먹고 있어."

―라타는 기다릴 수 있어!

라타는 눈에 힘을 주고 흄은 차분히 입술을 열었다.

"이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아, 저번에 가면서 아이스크림 가게를 봤잖아? 기억해, 흄?"

―홉! 라타도 기억해!

"기억합니다. '노르비아의 오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거기. 텔라 영애가 알려줬는데 여름만 장사하는 곳이고, 거기서 파는 아이스크림이 그렇게 맛있다고 하더라고."

모름지기 여름이니 아이스크림 정도는 먹어줘야지.

배가 꿰뚫려서, 열 때문에, 혹은 감기에 걸릴까 봐 등 다양한 이유로 아이스크림에 입도 대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괜찮았다.

"지금 바로 사러 가겠습니다."

단순한 심부름임에도 흄은 정말로 기뻐했다.

"그래. 오면서 맛있는 것도 사 먹고 그래."

루시온이 주머니를 뒤지자, 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돈은 충분합니다. 도련님께서 얼마 전에도 주셨잖습니까."

"그냥 받아. 먹는데 돈이 모자라면 안 되잖아."

흄하고 라타가 얼마나 먹는가.

루시온이 돈이 든 주머니를 흄에게 건네서는 억지로 쥐었다.

'…걱정되네.'

크로니아에서는 흄과 라타만 보내도 상관없었는데, 이곳은 중부라 그런지 슬쩍 걱정됐다.

저번에 중부에 머물렀을 때도 심부름을 보냈더니 '도를 믿으십니까' 같은 놈에게 붙잡혀 자신도 모르고 있던 부모님 이야기를 들었다며 기뻐하며 말하지 않았던가.

"흄."

흄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해맑은지.

"예, 도련님."

"누구 따라가면 안 돼."

"알고 있습니다."

―라타도 알아.

"누가 널 불러도 아는 사람이 아니면 무시하고."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응! 라타도 알고 있어!

둘 다 힘차게 대답은 잘했지만, 이상하게 미덥지 못했다.

[내가 따라갈 테니, 공은 걱정하지 마.]

베델이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웃다가 목소리를 냈다.

[네가 따라가면 무조건 안심이지.]

흄과 라타가 미덥지 못한 건 러쉘도 마찬가지였는지, 잠깐 어깨를 떨구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정 그렇게 걱정되면 기사를 붙여주마."

카슨이 보기에는 루시온이나 흄이나 똑같이 걱정스러운 아이였다.

"아닙니다. 흄은 잘할 수 있습니다. 저는 흄을 믿으니까요."

심부름 하나에 꺼낼 말은 아니었지만, 카슨은 피식 웃으며 손잡이를 돌렸다.

적막감이 방 안에 가득했다.

마치 하던 말을 멈춘 것처럼.

루시온은 정면에 앉아 있는 헤인트를 바라보다, 케틀란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케틀란의 시선에 미안함이 가득했다.

문이 닫히고, 카슨과 루시온은 케틀란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유일한 태양을 뵙습니다."

"됐네. 다들 아는 얼굴인데 격식을 차려서 뭘 하겠는가."

미행을 온 탓에 케틀란의 복장은 가벼웠지만, 대기업의 사장님 같은 느낌을 가리지는 못했다.

"일단 앉게나."

케틀란이 자리를 권했고, 루시온은 앉으면서 헤인트에게 인사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형님?"

헤인트는 케틀란을 한 번 살피다 자신의 눈가를 가리켰다.

"이거 보여? 잠도 못 자서 그늘이 진 거?"

"내 헤인트 경에게는 매번 미안하다네."

케틀란은 진심을 담아 미안함을 드러냈다.

제국에 기사단이 없는 건 아니나, 조금씩이나마 귀족들의 손을 탔던 기사단들과 달리 제8 기사단은 최근에 만들어진 기사단이기에 자꾸만 여러 가지를 시키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황실 호위에 루시온과 하멜 담당까지 섞여 있지 않았는가.

"저는 저하께서 저를 알아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입니다."

듣고 싶었던 말인지 헤인트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카슨이 얼굴을 구겼다. '꼴값을 떤다.'라는 말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루시온은 입을 가리고 키득거렸다.

"카슨 공."

케틀란은 카슨을 조용히 불렀다.

그가 다가가 앉은 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었다.

"예, 폐하."

"혹… 화가 많이 났던가?"

"예. 아버지께서는 엄청, 엄청 많이 화가 나셨습니다."

"다음번에 만날 때, 뺨이라도 맞아줘야 하겠네. 그러면 조금 풀리겠는가?"

"두 뺨을 내어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하...."

케틀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생각도 그러하네. 기꺼이 두 뺨을 내어주지."

[…뭐야?]

러쉘은 자신이 이상한가 싶어 루시온과 헤인트를 보았지만, 두 사람 모두 제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아무리 케틀란이 황제답지 않게 친절해도 일단 황제가 아닌가.

[이상한 거 맞지? 아무리 노비오하고 케틀란이 친우 사이라고 해도 케틀란은 일단 황제잖아. 얼굴을 때려도 되는 거야?]

'절대 안 되죠. 반역죄로 잡혀갈지도 모릅니다.'

루시온은 너무도 섬뜩한 말에 마른 침을 삼켰다.

"아. 내가 어릴 적부터 폐하와 아버지께서 이러셨으니 그렇게 놀라지 말거라."

카슨이 놀란 루시온을 향해 부드럽게 목소리를 냈다.

당장 헤인트가 미간을 찌푸리긴 했지만, 케틀란 앞이라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루시온 공."

케틀란이 조심스럽게 루시온을 불렀다.

"예, 폐하."

"공이 성자가 된 날 이후로 처음인데 얼굴이… 그다지 좋지 않아 보이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루시온은 간결하게 대답했다.

"긴장하지 말게. 그대를 잡아먹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니 말일세."

케틀란이 농담을 던졌지만, 루시온은 싱긋 웃고 말았다.

케틀란은 머쓱한 듯 턱을 매만지다 루시온에게 물었다.

"혹 그대의 부친인 노비오 공에게 마탑 이야기를 들었는가?"

"예. 이미 들었습니다. 제가 가겠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렸습니다."

"…미안하네."

"아닙니다.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때마침 제가 제국에 도움이 되어 기쁠 따름입니다."

루시온의 대답에 카슨은 시선을 살짝 흘렸고, 헤인트는 묘한 표정이 되었으며 케틀란은 한쪽 눈썹을 올렸다.

[표정이 다들 왜 이래? 뭔가 이상한데.]

루시온의 대답은 완벽했지만, 분위기가 가라앉자 러쉘은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이번 일이 무섭지 않은가?"

케틀란은 여전히 한쪽 눈썹을 올린 채로 물었다.

"왜 무섭지 않겠습니까?"

루시온은 미소를 지었다.

"몇 번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몇 번을 생각해도 답은 하나였습니다. 이 작전에서 제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며 누구도 절 대신할 수 없다는 걸 말입니다."

케틀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분명 목소리가 다르거늘, 이상하게 저 화법이 낯이 익었다.

"전 어차피 이번 작전에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마탑에 들어가 구경하는 게 전부입니다. 제가 거기서 더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

이어지는 루시온의 목소리에 카슨이 숨을 들이켰다.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 케틀란과 대화하고 있었다.

"하여 무섭지만, 괜찮습니다."

"지금 마탑은 평화롭지만, 그대가 안으로 들어가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른다네."

케틀란이 진중하게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제가 가야 하는 건 변하지 않습니다, 폐하. 저는 그저 폐하와 카슨 형님, 그리고 헤인트 형님을 포함한 기사분들을 믿을 뿐이지요."

'정말 닮았어.'

케틀란은 이상하게 하멜이 떠올랐다.

아니.

하멜이 루시온을 닮은 걸까.

똑똑.

케틀란은 때마침 들려오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숨을 잠깐 돌리며 다음에 올 손님을 맞이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조직 에일의...."

크라언은 안으로 들어와서는 후드를 살짝 내리다 루시온과 시선이 맞았다.

순간, 크라언의 눈동자가 반짝거렸지만, 자연스럽게 다음 말을 이어갔다.

"조직 에일의 대장 대행을 맡은 조직원 크라언 젤이라고 합니다."

크라언은 그 어떤 모습보다 가장 활기찼다. 조직원으로서 소개하는 게 그렇게도 기쁠까.

'어쨌든, 이제 다 모였네.'

루시온은 미소를 슬쩍 흘렸다.

228화. 다시 들려오는 환호성(2)

"...?"

케틀란은 크라언의 모습에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

크라언을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가 너무도 낯익었다.

"갑자기 미안하지만, 혹… 우리 만난 적이 있던가?"

"아마 그럴 겁니다, 폐하."

크라언은 흔들리지 않고 대답했다.

이미 케오르티아 왕국의 왕자는 없는 사람이니.

하지만 벌써 10년 넘게 지났음에도 아직도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케틀란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미안하네. 내 분명 그대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대를 기억하지 못했네."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하지만 저는 오늘 조직 에일의 대장 대행으로 왔으니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맙네, 크라언. 아, 어서 앉게나."

케틀란은 크라언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런데 크라언이 와도 되는 거야? 헤인트도 그렇고 카슨도 몇 번 봤잖아?]

러쉘이 걱정하자마자 크라언이 다시금 목소리를 냈다.

"현재 체프란 저택의 집사로서 일하고 있습니다."

크라언은 정말 놀란 카슨과 놀란 척하는 루시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 이럴 때는 뻔뻔하게 좋긴 하지.]

그제야 러쉘이 피식 웃었다.

보통 체프란 저택의 집사로서 일하고 있다고 해서 체프란이 에일의 아지트라고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다시금 소개하겠습니다. 카슨 크로니아라고 합니다."

카슨은 크라언을 보며 짧게 소개했다. 하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상태였다.

"루시온 크로니아라고 합니다. 이렇게…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루시온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자신과 다르게 얼굴에 철판을 깔지 못하는 크라언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저렇게 연기를 잘할 줄이야.

곧 그는 주변 눈치를 살피다 다급히 입을 열었다.

"말을 나누게 되어 가, 감격입니다."

크라언이 가장 자연스러울 말을 꺼내자 케틀란은 루시온을 바라보며 흡족해했다.

"그렇다네. 정말 놀랍지 않은가?"

여러 의미로 루시온은 놀라웠다.

그가 왜 지금까지 연회에서 후드를 쓰고 다녔는지 알만했다.

"그렇습니다. 이미 만난 적 있지만,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크라언의 목소리에 진심이 묻어났다.

언제 기회가 됐든 이렇게 공식적으로 루시온과 만나고 싶었다.

곧 그는 루시온을 보자마자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많이 드셔야겠습니다."

분명 쉬었다고 들었는데, 자신이 기대하던 건강함이 보이진 않았다.

"…많이 먹고 있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루시온은 여기서까지 크라언의 걱정을 들을 줄 몰랐기에 하마터면 얼굴을 찌푸릴 뻔했다.

"크라언 씨. 목소리만 듣고 이렇게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갑습니다, 헤인트 트리아라고 합니다."

헤인트가 크라언에게 손을 내밀었다.

"경매장에서 만났는데, 그분이 크라언 씨였다니."

"저도 이렇게 만날 줄 몰랐습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크라언은 당황하지 않고 능숙하게 빠져나왔다.

'아주 자연스럽네.'

루시온은 흡족했다.

"자, 이렇게들 모였으니 서로 바쁜 사람들끼리 빠르게 말을 나누어보겠네."

케틀란은 모두가 모이자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갔다.

"마탑의 전반적인 안내는 제 동생 샤엘라 크로니아가 맡을 겁니다."

카슨이 먼저 말을 꺼냈다.

"누님도 아십니까…?"

루시온은 난리가 나지 않았냐고 묻고 싶었지만, 애써 말을 삼켰다.

"샤엘라가 당연히 알아야 하지 않겠더냐. 루시온. 네가 생각한 그런 일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거라."

샤엘라는 이미 예상했던 것처럼 사실을 받아들였고, 루시온을 마탑에 오지 못하게 말려달라고 부탁했지만, 루시온이 원한 선택이라는 말에 더는 말을 하지 못했다.

카슨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샤엘라가 내부에서 놈들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빛이 깃든 물건이 있는 자들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빛이 깃든 물건이 있는 자들을 제외하면 자연스레 흑마법사에게 이미 당했거나 당할 수 있는 마법사의 명단을 확보할 수 있었다.

"마탑 내부와 명단은 황실이 가지고 있으니 샤엘라 공에게 그 이상 무리하지 말고 부디 몸조심하라고 전해주게."

케틀란은 카슨을 보며 말했다.

마탑을 만들면서 마법사들을 관리하고자 모았던 명단이 이런 식으로 빛을 발할 줄이야.

"예.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카슨의 대답을 이어 크라언이 목소리를 냈다.

"전투 담당인 조직원들은 동부에 마탑 근처에 모여 있습니다. 흑마법사가 사용하는 보이지 않는 눈에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흩어진 상태입니다."

케틀란의 고갯짓을 보고 크라언은 다시 입을 열었다.

"빛이 깃든 물건도 충분히 준비되었고, 마탑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만 안다면 언제든 습격할 수 있습니다."

조직 에일의 선두는 라인트 용병단이 서기로 했다.

"제8 기사단들도 모두 준비가 된 상태입니다. 제가 단장으로서 마땅히 지휘해야 하지만, 현재 습격조의 유일한 빛의 힘을 지닌 자로서 루시온 옆에 서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헤인트는 허락을 구했다.

이 작전에서 신관이 따라갈 수 없었다.

신관에게 흐르는 특유의 빛 때문에 마탑에 있던 흑마법사가 예민하게 반응할 테니까.

"허락하겠네, 헤인트 경. 습격도 중요하지만, 성자의 호위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지."

뭐니 뭐니 해도 흑마법사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존재는 빛의 축복을 받은 자였기에 케틀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제가 지휘를 잡겠습니다."

카슨이 입을 열었다.

자신이 루시온 곁에 있고 싶지만, 헤인트와 자신 둘 중 한 명은 지휘를 잡아야 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헤인트가 루시온 옆에 있는 게 맞았다.

"폐하. 죄송하지만, 혹시 어디까지 죽여도 되는 겁니까?"

크라언은 후방에 설 퀘이트를 포함한 암살자들을 생각하며 물었다.

"그건 걱정하지 말게. 선두에 서는 건 제8 기사단일 테니. 테슬라 제국의 기사임을 알면서도 공격하는 자는 다 죽여도 된다네. 혹여 이번 일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면 전부 다 내가 책임질 테니, 그대들은 그 어떤 고민도 하지 말았으면 하네."

케틀란은 이어 루시온을 보았다.

"이번 습격의 승리 조건은 두 가지라네. 하나는, 공허의 손에게 붙잡힌 마탑을 해방할 것. 그리고 다음은 성자인 그대가 안전하게 돌아올 것이라네."

루시온은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늘 보호받으면서 살아왔기에 갑갑함이 숨통을 살짝 쥐고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케틀란은 루시온의 눈동자에 깃든 분함을 엿보았다.

"루시온 공은 알고 있나?"

"무얼 말씀하시는 겁니까?"

"공의 존재만으로도 사람들은 희망을 품고, 자부심을 가진다는 걸."

"전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폐하."

"그래. 특별함이 무조건 좋은 점만 가져오는 게 아니라는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네."

제국의 황제.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의 지배자.

이보다 특별한 존재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대의 특별함은 달라."

"…다르다뇨?"

루시온은 처음 들어보는 말에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그대는 희망을 주는 존재가 아닌가. 빛의 축복을 받은 자도 아니며, 하물며 빛에게 거부를 받은 자이니."

"그게 왜 희망을 주는 겁니까?"

루시온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그의 표정에 케틀란은 가볍게 웃었다.

크라언과 카슨은 입이 가려워 죽었고, 헤인트는 놀라며 루시온을 보았다.

"특별한 사람만이 특별해질 수 있다는, 절대로 바뀌지 않을 고정관념을 그대가 깨어버리지 않았던가."

케틀란이 차분히 대답했다.

"하지만 저는 크로니아입니다. 이미 태생적 신분으로 특별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대는 태생적으로 변경백의 막내로서 태어났으니 왜 특별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백성들에게 그 신분은 특별하지 않네."

"예…?"

"이미 당연한 계급이지 않은가. 백성들이 그대를 본다면 그저 귀족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할 게 뻔하다네."

케틀란에 이어 러쉘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아. 그런 건가.'

루시온은 특별함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았다.

황제가 있고, 귀족이 있고.

그 특별함은 당연하기에 더는 특별하지 않았고, 그냥 별개의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대는 태어나면서부터 성자가 아니었으며 신관도 아닌, 빛 알레르기를 가진 그대가 신수의 축복을 받지 않았던가."

이전에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특별함.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신분도 아니었고, 이미 정해진 노선에도 벗어난 특별함.

"그 자체로 백성들은 이미 희망을 손에 쥐었다네. 자신도 언젠가 특별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런 희망은 위험하지 않습니까?"

루시온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지금 이곳은 신분제 사회였다.

"나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생각은 없네. 그대들이 어떻게 들을지 모르겠지만, 이 제국을 이끄는 존재는 내가 아니라 바로 백성들이라네."

케틀란은 루시온을 이어 다른 사람들도 천천히 바라보았다.

"비록 지금 바로 그대의 특별함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진 않네. 하지만 나는 그대가 몰고 올 이 특별함으로 좋은 변화가 일어나길 바라고 있다네."

신분을 떠나 인재들이 제 실력에 맞는 자리를 찾아갈 수 있는 제국.

케틀란은 그런 제국을 바랐다.

"그러니 그대는 내가 바라는 제국을 위해서라도 살아야 하네."

'희망을 주는… 특별함이라.'

루시온은 손가락을 매만졌다.

지금까지 특별함은 자신에게 고통만 주었다.

하지만 케틀란이 말한 특별함은 다른 방향의 특별함이 아닌가.

[누려도 되니까. 누려, 루시온. 트로에가 널 왜 선택했는지 알잖아?]

러쉘이 루시온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트로에하고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데 네가 아니면 누가 성자를 하겠어?]

'처음에는 반대했잖습니까.'

[뭐어, 처음에는 반대했냐고 물어보면 그건 할 말이 없긴 한데, 어쨌든 지금은 너밖에 없어, 루시온. 그러니 당당하게 어깨를 펴.]

케틀란은 다시 루시온을 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어떤 망설임을 보였다.

감히 자신이 누려도 되는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신수께서 널 선택한 이유가 분명 있을 거다, 루시온."

카슨은 더는 참지 못했다.

세상에 이유 없는 선택은 없었다.

"맞습니다! 루시온 공께서는 그 누구보다 성자에 어울리십니다!"

크라언이 동조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비록 루시온은 흑마법사지만, 그가 자신에게 보여준 그 모습은 성자 그 자체였다.

어둠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저무는 태양처럼 진한 빛을 드러내면서도 별처럼 잔잔했다.

그때 느낀, 그 고요함은 다정했으며 또 따뜻해 꼭 빛을 따라야만 성자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고, 생각했다.

"하여 그대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는 살아서 돌아오라는 거라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 주게."

"힘이… 닿는 데까지 노력하겠습니다."

루시온은 이유 모를 간지러움을 느끼며 케틀란에게 대답했다.

"소신이 지키겠습니다. 이전의 잘못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헤인트는 굳건한 태도를 드러내며 케틀란을 보았다.

동부에서 일어난 일로 수많은 경위서를 썼지만, 그보다 비참함이 넘실거렸다.

기사단장으로서 호위해야 하는 루시온을 구하지 못했다.

"짐은 그대들이 잘해주리라 믿네."

미소를 띠며 케틀란은 미리 가져온 지도를 인원수대로 넘겼다.

"마탑의 현재 구조라네. 지금 여기에서 머릿속에 집어넣게."

저 구조는 결코 다른 사람들 손에 들어가면 안 되지만, 케틀란은 저들 모두를 믿기에 기밀을 넘겼다.

루시온도 여러 장으로 된 지도를 빤히 보았다.

'…지도를 볼 줄 모르는데.'

난감하던 차, 러쉘의 목소리가 들렸다.

[흄이 왔어야 했는데.]

'저도 막 그 생각을 하던 참이었습니다.'

루시온은 러쉘을 힐끔 바라보았다.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러쉘은 자신을 가리켰다.

[하지만 비운의 천재 내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루시온은 러쉘이 잘 볼 수 있게 슬쩍 오른쪽으로 내밀고는 얌전히 기다렸다.

'…비운의 천재 흑마법사라.'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러쉘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 비운이라는 말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스승님께서 제 자랑을 한다고 꺼내신 말씀인 줄 알았는데.'

루시온은 너무도 미안했다.

반복되는 세계 속에서 러쉘은 자신을 살리고자 큰 대가를 짊어지고 흑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러쉘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비운이었을까.

아니면 몇 번이나 자신을 살리지 못했기에 그런 말을 입에 담으신 걸까.

'스승님께서도… 살아계셨으면 좋겠다.'

루시온은 바라면 안 될 소망을 한 번 품어보았다.

[루시온. 너도 일단 외우기라도 해야지. 딴 생각하지 말고 지도 봐봐.]

러쉘은 멍하니 생각에 빠진 루시온을 툭툭 건드리며 지도를 가리켰다.

"모르면 내가 알려줄게."

헤인트가 루시온답지 않게 어벙한 모습에 키득거리며 말했다.

아마 지도는 처음 보겠지.

"루시온은 내가 알려줄 테니, 신경 끄고 네 거나 잘해."

카슨이 코웃음을 쳤다.

저 모습을 한두 번 봐온 게 아니었지만, 헤인트는 순수한 호의마저 삐딱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에 제 이마를 쳤다.

"…와. 동생 없는 사람은 진짜 서러워서 살겠어?"

"헤인트 경."

"예, 폐하."

헤인트는 웃음기가 가득한 케틀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카슨 공이 별종이라네. 으레 동생은 없는 것보다 조금 났다 싶거나, 아예 없는 게 좋다고 생각하니 환상을 가지지 말게."

"…그, 그런 겁니까?"

"하지만 루시온 같은 동생이 있다면야 저렇게 되는 것도 이상하진 않지."

케틀란은 노비오에게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루시온의 칭찬을 들었기에 카슨이 저러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분위기가 또 이상해지자 루시온은 탈출구로 크라언을 바라보았다.

대화에 참여하고 싶어 눈을 반짝이는 모습에 루시온은 당장 자리를 박차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애써 시선을 돌린 채 지도를 보았다.

'외워. 외우는 게 남는 거야.'

[이야, 좋겠네, 루시온?]

옆에서 러쉘의 깐족거리는 웃음소리에 루시온은 더 눈에 힘을 줬다.

229화. 다시 들려오는 환호성(3)

다들 지도를 어느 정도 외운 후에 전투 시 기사단과 조직원들의 배치, 입구가 여러 개인 마탑으로 후발대인 조직원들이 빠르고 효과적으로 들어올 방법.

마탑 입구를 지킬 인원수와 동부에 주둔 된 주변 병사들과 빠르게 협력하도록 조직원들을 근처에 배치해두기 등 여러 방향에서 의견을 나누고 결정지었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었고, 이야기는 마무리로 접어들었다.

"지도는 제가 책임지고 태워버리겠습니다."

카슨이 입을 열었다.

"고맙네. 내 그대만 믿겠네."

케틀란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덩달아 모두가 궁둥이를 떼었다.

"루시온 공."

밖으로 나가기 전에 케틀란이 루시온을 불렀다.

"예, 폐하."

"…이번 일이 힘겨울 거라네."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짐은 그대의 편이니, 무슨 일이 생겨도 걱정하지 말게."

"...!"

루시온은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케틀란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마치 하멜일 때 자신을 바라보던 눈길로 쳐다보지 않는가.

"아, 내일 기대하게."

케틀란은 씨익 웃다 쓰고 온 망토를 다시 뒤집어썼다.

'내일이라면 마탑 습격, 아니 드디어 트웰로 스프리카도의 처형일이구나.'

루시온은 케틀란이 처형을 그럴싸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베델이 들었으면 기뻐했을 텐데.

[루시온…!]

러쉘이 루시온을 보다 말고 기겁하며 소리쳤다.

"…루, 루시온 공?"

덩달아 루시온을 보고 있던 케틀란이 당황하며 그를 불렀다.

이어 나머지 사람들도 자신의 이름을 불렀지만, 크라언의 목소리가 제일 컸다.

크라언은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입을 가렸다.

"아. 조금 피곤했나 봅니다."

루시온은 코피를 쓱 닦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지었다.

[이것 봐봐. 순례길을 가지 않아도 괜찮다며? 이게 괜찮은 거야?]

러쉘이 소리쳤고, 카슨이 당장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루시온에게 건넸다.

"아직 상처가 덜 나은 거야?"

헤인트가 걱정스레 묻자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코가 약한지 가끔 이렇습니다. 내일 작전 일인데 심려 끼쳐 죄송합니다, 폐하."

"아니네. 그대의 건강이 우려될 뿐이지."

겨우 코피를 흘렸을 뿐이지만, 케틀란의 목소리에 묻은 걱정은 생각보다 깊어 루시온은 이상함을 느꼈다.

"…미안하다."

카슨의 고개가 살짝 숙어지자 그의 옅은 남색 머리카락이 어깨 안으로 살며시 들어왔다.

그 모습에 헤인트가 눈동자를 굴리다 목을 매만졌다.

"형님이 왜 사과하십니까? 안전하게 중부로 왔잖습니까. 내일 작전은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그래."

카슨은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그의 눈동자에 슬쩍 엿보이는 미안함은 아직도 여전했다.

"내가 그대들을 만나 너무 시간을 뺏은 건 아닌지 모르겠네. 이만 가겠네. 루시온 공, 오늘은 푹 쉬게나."

"내일 보자. 루시온 넌 푹 쉬고."

케틀란은 말을 남기고 헤인트와 함께 방을 나섰다.

카슨과 루시온, 그리고 크라언이 케틀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크라언은 루시온을 힐끔 쳐다보다 그가 푹 쉴 수 있게 자리를 비켜주고자 했다.

하지만 카슨이 그를 붙잡았다.

"시간 괜찮으시면 저녁을 먹고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저녁을 말입니까?"

크라언은 루시온을 다시 곁눈질로 살폈다. 빨리 가라는 눈짓에 크라언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 * *

"…정말 괜찮으신 거 맞습니까?"

크라언이 물었다.

벌써 몇 번이나.

루시온은 흄이 얼음의 힘으로 녹지 않게 지켜낸 아이스크림을 입에 가득 넣고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입 안에 아이스크림을 다 녹인 후에 흄이 목소리를 냈다.

"내일이 작전 일인데 걱정입니다."

"제 말이 그렇습니다. 분명 쉬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맹세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도련님께서는 이번에 확실히 쉬셨습니다."

흄은 크라언의 물음에 바로 대답했다.

'…잘들 논다.'

루시온은 밥그릇에 고개도 들지 않는 라타를 바라보다 다시 아이스크림을 퍼서는 입에 넣었다.

"그런데 걱정입니다."

"또 뭐가?"

걱정을 입에 달고 사는 크라언의 말에 루시온은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혹여나 정체가 들킬 수 있잖습니까. 제가 최대한 도울 예정이나, 작전상 계속 붙어 있을 수는 없잖습니까."

[나도 저게 걱정이야.]

베델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불확실한 요소가 너무 많았다.

루시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숟가락을 살짝 물며 숨을 세게 내쉬었다.

'만약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 * *

러쉘은 혹시 몰라 마탑 주변으로 정찰을 간 베델을 기다리며 저택 주변을 떠돌아다니다 루시온의 방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루시온과 시선이 딱 맞았다.

루시온이 황급히 눈을 감았지만, 러쉘이 딱밤을 때리며 말했다.

[왜 아직도 안 자는데? 이제 부엉이라도 될 셈이야?]

루시온은 이마를 문지르며 러쉘을 바라보았다.

문득 자신이 이하람일 때, 얼굴에 저주의 흔적을 가진 그가 떠올랐다.

그때와 얼굴이 변하지 않았다.

유령은 죽었을 그 당시의 나이로 나타난다고 했는데.

많이 봐도 30대 중반이었다.

이하람일 때 자신을 본 뒤에 스승님은 돌아가신 걸까.

[루시온?]

"…그냥 내일 이것저것 걱정이 됩니다."

[뭐. 걱정이 되겠지. 그런데 아무리 걱정해도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일단 자둬. 그게 남는 거야.]

"스승님."

[왜?]

루시온은 러쉘을 바라보니 하고 싶은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제가 어떻게 죽었습니까?

스승님은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그렇게 물을 순 없잖은가.

"괜찮습니까…?"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괜찮아, 루시온?]

러쉘은 기회를 틈타 물었다.

과연 자신이 몇십 번이나 죽었다는 사실을 맨정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지금도 죽지 않으려고 그렇게나 애를 쓰는데.

그날 이후로 서로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기에 러쉘은 괜스레 입이 바짝 마른 느낌이었다.

"저야 죽었다는 자각이 없으니 버틸 만합니다. 하지만 스승님은 아니잖습니까."

루시온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걱정했다.

[네가 또 죽지 않으면 돼. 나는 그걸로 됐어.]

러쉘은 억지로 루시온의 눈을 쓸며 감겼다.

이상하게 지금 저 눈동자를 마주할 수 없었다.

루시온에게 미안해서.

너무 미안해서.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되찾은 기억도 거의 단편적인 기억이라 네가 왜 죽었는지 몰라서 너한테 도움도 되지 못하는데.]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저는...."

[알았어. 어서 자. 피곤해서 쓰러지면 안 되니까.]

러쉘은 장난스레 말하며 키득 웃었다.

하지만 루시온은 억지로 밝게 웃으려는 러쉘의 노력이 엿보여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예. 이만 잘게요."

루시온은 라타가 깨지 않게 이불을 조심스레 끌어 올렸다.

[그래.]

* * *

마차가 수도에 있는 중앙 광장에 근처에서 멈췄다.

마차에 박힌 크로니아의 여우 문양을 보고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크로니아가 왔다는 건 성자, 루시온 크로니아도 왔다는 뜻이 아니겠나.

사람들의 눈빛에 기대감이 물결을 쳤다.

―아! 라타는 여기가 어딘지 알아. 루시온이 성자가 돼서 다 같이 축하해주던 장소야!

라타는 그림자 끝에 매달려 꼬리를 흔들다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높게 묶은 머리카락이 러쉘과 비슷했지만, 러쉘과 다른 반짝거림에 라타는 배시시 웃었다.

―루시온. 이번에도 다들 루시온을 좋아할 거야. 라타는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후.]

"…하."

서로 다른 이유였지만, 베델과 루시온이 거의 비슷하게 숨을 내쉬었다.

카슨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폐하의 명이 아니셨다면 너를 이곳에 데리고 오지 않았을 거다."

가뜩이나 원래도 사람들이 많은 중앙 광장이었다.

"괜찮습니다. 약 몇 개를 주워 먹어서 살 만합니다."

[거짓말쟁이야. 괜찮지 않으면 괜찮지 않다고 말해도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닌데.]

러쉘은 당장 루시온의 이마에 딱밤을 때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정말입니다.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보십시오. 조금만 떨리잖습니까."

루시온은 보란 듯이 파르르 떨리는 자신의 손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이전에는 수전증이 심한 것처럼 떨렸다 싶으면 지금은 추워서 벌벌 떨리는 수준에 그쳤다.

얼마나 좋아졌는가.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네.]

베델은 죄책감이 금세 드러난 카슨의 표정에 루시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왜?'

루시온은 베델에게 이유를 묻고자 했지만, 카슨의 굳어진 표정이 대신 대답했다.

'아직 자랑할 만한 수준이 아닌가 보네.'

루시온은 괜히 머쓱해졌다. 내심 칭찬을 기대했는데.

"…그래. 예전보다 나아졌구나."

카슨은 애써 미소를 내보이다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숨이 콱 막히는 기분에 시선이라도 돌려야 살 것 같았다.

루시온이 납치된, 그날은 벌써 십여 년 전 일이었다.

그렇게나 좋아하던 사람을 무서워하고, 사람들이 뭉쳐 있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고.

아직도 사람들이 무서우면서 괜찮다고 자랑하듯 꺼내는 저 말들이 비수가 되어 돌아와 자신의 가슴에 꽂혀버렸다.

"형님."

"그래, 루시온."

"저를 잘 보십시오."

루시온이 문을 잡자 카슨과 베델이 흠칫 놀랐다.

"저는 이제 도망치는 거 관뒀습니다. 그러니까 형님도 이제 슬슬 그만두시는 게 어떻습니까?"

카슨을 향해 보란 듯이 웃고는 루시온은 자신의 손으로 문을 열었다.

"우와아아아아!"

함성이 들려왔다.

루시온은 자신의 눈을 찌르듯 다가오는 햇살에 눈을 감았고, 쿵쾅쿵쾅 뛰는 심장 소리에 숨이 턱까지 막혀왔다.

깊게 잠수했다 숨을 내쉼과 동시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마치 바다에 빠진 것 같이 무겁던 몸도, 보글보글하던 거품 소리도 모두 빠르게 가라앉았다.

수많은 사람이 보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저마다의 미소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차 밑에서 흄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아래로 내려왔다.

"괜찮으십니까?"

흄이 작게 속삭였다.

[힘겨우면 저번처럼 앞만 바라봐. 아니다, 나하고 베델이 앞으로 갈 테니까, 우리만 봐.]

[그래, 루시온 공. 우리가 앞에서 공을 바라보고 있을게.]

러쉘의 의견에 베델은 눈웃음을 지으며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저렇게 나오니 어떻게 괜찮지 않을까.

할 수만 있다면 두 사람의 손을 잡고 걷고 싶을 정도였다.

"괜찮아. 조금은 말이야."

루시온은 대답했다.

시녀들이 오늘도 새벽부터 분주히 자신을 꾸며주었다.

자신이야 가만히 있으면 되지만, 그녀들은 얼마나 고될까.

그럼에도 환한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오늘도 무척 중요한 날이에요. 주인공이 도련님이 아니시더라도 도련님만 보이도록 할 거예요!

―맞아요. 우리 도련님이 최고니까요. 아, 이건 첫째 도련님하고, 아가씨한테 비밀이에요. 만약 아시면 섭섭해할지도 몰라요.

―도련님. 밖에는 더울 테니 머리를 높게 묶어도 될까요? …절대로 사심이 담긴 게 아니에요. 이번에 예쁜 머리 장식들이 들어왔거든요. 도련님께서 안 된다고 하시면 어쩔 수 없지만요. …제발요. 꾸미게 해주세요.

루시온은 이제는 알았다.

그녀들의 다정한 손길이 절대로 거짓이 아니라는 걸.

바람을 따라 루시온의 머리를 장식한, 시녀들이 고르고 골랐던 연붉은 리본이 흩날렸다.

'나를 열심히 꾸며줬는데, 미간을 찌푸리면 되겠어?'

루시온은 자신을 꾸며준 시녀들이 자랑스러울 수 있도록.

자신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러쉘과 베델을 위해서 루시온은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루시온이 제일 반짝반짝해! 라타가 너무, 너무 좋아하는 반짝반짝이야!

라타는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루시온을 빤히 바라보다 기뻐 빙그르르 돌았다.

양쪽에서 울리는 환호성에 귀가 먹먹하고, 손바닥에 땀이, 심장이 크게 울리고, 가슴이 살짝 조여왔지만, 루시온은 숨을 내쉬고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카슨에게 내뱉은 것처럼 더는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

그 모습을 바라본 카슨의 눈동자가 조금씩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아버지. 저는 루시온에게 있어 영원히 도망자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망자.

노비오에게 자신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루시온은 도망치지 말라고 했다.

카슨이 마차에서 내렸다.

"갈까요, 형님?"

루시온이 마치 여유가 있듯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직도 저렇게 떨면서.

"오늘… 기분은 어떻더냐?"

카슨은 루시온에게 진작 꺼냈어야 할, 그 말을 꺼내 보았다.

너무도 간단한 말이 아닌가.

이렇게도 쉽고 간단한 말이었는데, 루시온이 그토록 괴로워했을 때, 왜 말해주지 못했을까.

"나쁘지 않습니다. 형님은 어떠십니까?"

"너무도… 너무도 좋구나."

카슨은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후련했다.

"가자꾸나."

카슨이 먼저 앞으로 걸었다.

루시온과 카슨이 걸을 때마다 점점 환호성이 커졌다.

"우와아아아아아…!"

그들은 계단을 올라 자신들의 자리에 앉았다.

멈출 줄 몰랐던 함성이 한 존재로 꺼져버렸다.

제국의 태양이자 유일한 지배자인 케틀란 테슬라.

그가 중앙 광장을 가로지르며 등장했다.

그의 주변에 8개의 기사단 대장이 호위했고, 케틀란은 아무런 말도, 미소도 짓지 않았다.

공기가 달라졌다.

너무도 무거웠다.

모두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자연스레 튀어나오는 경외심에 누구 하나 눈동자도 굴리지 않았다.

기사단장의 묵직한 갑옷 소리에 케틀란의 발소리가 묻혔지만, 마치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케틀란은 광장에 마련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오늘 이 자리는 제국을 배신한 죄인을 처단하기 위한 자리이다."

모두를 쳐다본 뒤에 케틀란은 질질 끌지 않고 외쳤다.

"죄인, 트웰로 스프리카도를 데려오거라!"

230화. 구경 중인데 이럴래?

베델이 두 손을 꼭 맞잡고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드디어 이 날이었다.

잠들지 못하는 날이 그토록 괴로울 수가 없었다.

트웰로의 처형일이 다가오면 모든 걸 내려놓고 후련해질 줄 알았지만, 오히려 초조했다.

'진정하자, 진정해.'

베델은 멋대로 떨려오는 듯한 느낌에 숨을 다시 내쉬었다.

혹여 뉴브라 왕국과 공허의 손이 제 잘못을 숨기고자 놈을 탈출시키면 어쩌나.

기사들을 뚫고, 신관들을 뚫고, 빛이 깃든 물건도 뚫고, 그래서 오늘 난리가 나면 어쩌나.

설령 저 단두대 앞에서 선다고 한들, 어떤 변명을 늘어놓을까.

어떤 소리를 지껄이며 그 뻔뻔한 입을 놀려댈지.

베델은 모든 게 두려웠다.

[트웰로의 죽음은 네 거야, 베델. 그러니 진정해.]

러쉘은 트웰로를 데리러 가는 병사들을 보며 베델을 달랬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리가 비어버린 기분이야.]

베델은 곱슬기가 섞인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뭐든 말해. 아니, 말하지 않아도 돼. 말을 섞을수록 어쩌면 네가 비참해질 수도 있어. 그냥 단칼에 베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래. 그대의 말이 맞아, 러쉘. 트웰로 저놈이 어떤 말을 꺼낼지 빤히 아는데. 말을 섞으려 하다니.]

베델은 알고 있었다.

어차피 트웰로 입에서 '미안하다' 같은, 사람이 꺼낼 수 있는 말이 나올 수 없다는 걸.

그걸 기대해서도 안 된다는 걸.

루시온은 베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이 너무 많았다.

[고마워, 루시온 공. 하지만 무리하지 마. 공이 지금 이 자리에 어떤 용기를 내어 앉았다는 걸 아니까.]

베델은 그런 루시온의 손을 꼭 잡아주며 싱긋 웃었다.

지금도 얼마나 무서울까.

수많은 사람에게, 수많은 유령에게 거부당했음에도 이곳에 앉아 있는 게 참 대견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라타도 베델 손을 꼭 잡아주고 싶어. 루시온도 울려고 하면 라타가 이렇게 잡아주는데.

[착하네, 라타.]

베델은 루시온의 그림자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베델, 울어?

[아니 안 울어. 오늘은 기쁜 날이니까.]

베델이 실실 웃었다.

[베델.]

애써 슬픔을 참는 웃음에 러쉘이 베델을 조용히 불렀다.

[응.]

[놈은 너한테 사과 따위 하지 않을 거야.]

[알아. 내가 더 잘 알고 있어.]

[그러니까 흔들리지도 말고, 무너지지도 마.]

[그럴게. 이제 내 검이 지켜야 할 사람은 루시온이니까.]

자신의 마지막 주인.

루시온을 위해서라도 과거는 오늘로써 말끔하게 떨쳐내야 했다.

그 뒷맛이 씁쓸하든 아니든 간에.

"저기 놈이 온다."

카슨이 날을 세우며 옆을 바라보았다.

루시온도 덩달아 고개를 돌리자 두 다리가 부러졌는지 질질 끌려오는 놈을 볼 수 있었다.

케틀란이 걸었던 길이 아니라 골목길 어귀에서 나오는 모습에 베델은 배를 잡고 웃었다.

[저 새끼, 저 꼴 좀 봐!]

넝마와 다름없는 옷가지에 머리카락도 우수수 빠진 채로 놈이 그렇게나 애써서 관리하던 수염도 다 밀려버린 채, 두 다리는 부러졌고, 두 팔도 빠졌는지 덜렁거렸다.

그 꼴이 너무도 우스워 베델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트웰로라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동부의 지배자라 불렸던 그 트웰로가 맞는지.

분명 보고 있음에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트웰로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보거라. 제국을 배신하고 뉴브라 왕국의 그 더러운 돈을 먹어치우며 성장한 배신자를!"

케틀란은 트웰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사람들은 동부의 지배자였던 트웰로가 무슨 일로 잡혀 죽는다는지 알지 못했다.

트웰로가 누구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혹은 고위 귀족이 죽는다는 사실에 신이 나서 그저 구경하러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케틀란의 말에 사람들의 태도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더러운 새끼! 어디 붙을 때가 없어 뉴브라새끼들에게 붙어?"

"네놈이 그러고도 사람이냐! 뉴브라 새끼들이 제국을 노린다는 건 3살짜리 아이도 알겠다!"

"당장 저놈을 죽여주십시오, 폐하!"

"맞습니다. 저놈을 당장 죽여야 합니다! 더러운 배신자 새끼!"

그간 이래저래 제국을 향한 뉴브라의 도발에 신경이 곤두서 있던 사람들은 분노를 터트렸다.

분노는 형체를 이루듯 사람들에게서 사람들로 옮겨졌다.

베델의 눈동자에는 마치 불꽃이 붙은 것처럼 보였다.

더 타오르길 바랐다.

더 타올라 트웰로를 삼켰으면.

"죽여! 저 새끼 죽이라고!"

사람들이 트웰로를 때려죽이려 움직이자 이때를 위해 줄지어 서 있던 병사들은 사람들을 막기 위해 방패를 들었다.

"짐은 그대들의 분노를 안다."

모두의 목소리를 뚫고 케틀란의 중후한 음성이 들렸다.

"하여 짐은 지금 배신자를 이 자리에 세웠노라."

제국을 배신하면 설령 그 대상이 동부의 지배자이자 고위 귀족이라 할지라도 누구에게나 똑같이 처단하겠다는 뜻을 짧게 알렸다.

"트웰로를 포함한 총 432명의 배신자를 내 모두 이 자리에 세울 것이다."

졸개들은 뺐다.

뺐음에도 저렇게나 많았다.

저 중에 백 명에 가까운 자들이 귀족이었고, 트웰로처럼 이름이 난 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저 쥐새끼들이 자신의 눈을 피해 제국을 갉아먹고, 제 아들이었던 오웬을 황세자로 책봉해 제국을 통째로 뉴브라에게 넘기려 했다.

케틀란은 잠깐이나마 꺼졌던 백성들의 눈에 증오가 피어나는 걸 보았다.

그중 자신을 향한 원망도 엿보였다.

하지만 케틀란은 묵묵히 말을 이었다.

"트웰로는 432명의 배신자의 우두머리였으며 수많은 이들을 '공허의 손'이라 불리는 흑마법사 단체에 짐의 백성들을 제물로써 바쳤도다."

베델은 그 말에 주먹을 꽉 쥐었다.

"이름도 모를 짐의 가여운 백성들이 배신자 트웰로 때문에 차가운 바닥에서 무참히 죽어갔도다! 짐은 이 참담함에… 이가 갈리고, 주먹이 떨리노라."

베델은 기어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번에는 루시온이 베델의 손을 살포시 잡아주었다.

지금 대부분 케틀란에게 시선을 뺏겼으니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고마워.]

베델은 살짝 울먹이며 대답했다.

참 우습게도 케틀란의 힘찬 저 목소리가 정말로 위로가 되었다.

아무도 몰랐던, 죽었는지조차 모를 자신들을 지금 알아주었다.

흑마법의 실험체로 비참히 죽어간 자신들을.

"귀족으로서 응당 백성들을 지켜야 할 의무를 저버리고 돈과 권력에 미처 짐의 백성들을 무참히 죽여버렸기에 짐과 그대들의 분노는 정당하다!"

케틀란은 지금 사람들이 느끼는 분노에 정당성을 주었다.

더 분노하라고.

더 소리쳐 저놈에게 죽어간 백성들의 넋을 기려달라고.

"트웰로 스프리카도는 이 땅에 제국이란 이름이 사라질 때까지 배신자로서, 백성을 팔아넘긴 추악한 자로서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며 제국을 배신한 이들 모두 똑같이 지워지질 않을 이름을 안고 손가락질받으며, 죽어도 사라지지 않을 추악함을 뒤집어쓸 것이니라!"

케틀란은 자신이 구해주지 못한, 이름 모를 백성들을 위해 온 마음으로 안타까움을 표하고, 분노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돌리며 트웰로를 보았다.

동부의 지배자라 불리던 저놈은 지금 떨고 있었다.

폭풍처럼 몰려오는 사람들의 원망에 오줌을 지리고, 시퍼런 단두대의 날에 구역질을 내뱉었다.

한층 낮은 목소리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얼마 전에 이곳에서 죽었던 로베리오, 그 이름을 기억하는가?"

트웰로의 밑에서 뉴브라와 붙어먹으며 흑마법사와 결탁해 사업장 밑에 저주를 만들기 위한 비밀 장소를 지을 돈을 제공한 자였다.

'당연히 기억하지. 사업장이 있던 땅은 이제 내 거고, 건물이 올라가고 있는데.'

루시온은 베델을 바라보았다.

사업장은 그녀를 만났던 장소가 아닌가.

"로베리오, 그 더러운 놈은 트웰로의 앞잡이였다. 로베리오, 그놈을 붙잡은 건 다름 아닌 우리의 자랑스러운 성자 루시온 크로니아이니라…!"

케틀란은 트웰로를 누가 붙잡았는지 소개하지 않았다.

저 빈 자리는 소문과 소문을 통해 자연스럽게 채워지도록 내버려 뒀다.

"...?"

루시온은 귀족들을 포함해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자 숨을 멈췄다.

[숨을 내쉬어, 루시온 공.]

베델이 루시온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응응! 루시온을 보는 나쁜 시선은 없어! 라타를 믿어!

라타가 앞발로 루시온의 신발 밑창을 쿡쿡 건드렸다.

"진정하거라."

카슨이 옆에서 루시온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괜… 괜찮습니다."

루시온은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케틀란의 손짓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혼자만 조명을 받는 기분에 루시온은 답답함부터 밀려왔다.

케틀란이 뭐라고 말하는데 귓가에서 웅웅 울려 무슨 말인지 닿지 않았다.

[정신 차리고, 우리만 봐, 루시온.]

러쉘이 루시온 앞에 섰다.

[그래. 우리만 보자.]

머릿속에 울리는 러쉘과 베델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숨을 내쉬었다.

짝짝짝!

박수가 들려왔다.

"성자! 성자!"

"루시온 크로니아! 오오오! 루시온 크로니아…!"

조금 전 그렇게 붉게 물들었던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했다.

―이히히! 봐봐. 라타 말이 맞지? 라타가 말한 것처럼 사람들이 루시온을 좋아하지?

라타는 당장 루시온에게 달려들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루시온이 카슨을 이어 저 멀리서 자신을 보는 흄을 바라본 후에 놀란 눈으로 케틀란을 보자 그는 카슨과 흄처럼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자, 보라고.

네가 일궈낸 결과라고.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 루시온은 기분이 이상했다.

로베리오도 트웰로도 자신이 붙잡은 게 맞지만, 트웰로는 자신이 붙잡았다는 소리도 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루시온은 이 환호가 나쁘지 않았다.

"루시온 공. 그대를 위한 환호일세."

케틀란이 콕 집어 루시온에게 말했다.

자신이 성자가 되었을 때, 사람들이 이토록 크게 환영해주었다.

지금은 달랐다.

그 환호 소리는 더 컸으며 자랑스러움과 고마움까지 귓가에 닿았다.

이전 세계에서는 모두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루시온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사람들을 보았다.

비명이 아니라 환호 소리였다.

저 사람들 손에 무기 대신 크나큰 손뼉 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은 사람들의 적도 아니었다.

'…지금은 달라.'

루시온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 *

트웰로는 그 어떤 변명도 하지 못했고, 루시온은 단두대에 목이 잘리는 광경을 눈에 담았다.

그 모습에 베델은 눈물을 흘렸다.

그건 틀림없이 기쁨의 눈물이었다.

서걱.

동시에 붉은 실이 잘리고, 다시 어딘가를 향해 이어졌다.

뉴브라의 왕이 있는 쪽이 아닌 동쪽.

동쪽에 마탑이 있었다.

트웰로가 손을 잡은 놈은 뉴브라 왕국의 왕이 아니라 공허의 손 보스였다.

'정말로 마탑에… 그놈이 있다.'

루시온은 주먹을 꽉 쥐었다.

마탑 습격 작전 시간까지 약 4시간 정도 남았고, 포탈을 타고 가면 약 2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루시온은 마차를 타고 다시 별장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포탈을 타러 가려면 별장 근처를 들려야 하기에 카슨은 루시온이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덕분에 루시온은 트웰로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나는 다음에 만나도 되니까, 공이 먼저 쉬었으면 해.]

하멜로서 출발하고자 옷을 갈아입는 루시온을 보며 베델이 그를 말렸다.

흄은 말은 못 하고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러쉘의 은은한 시선에도 루시온은 입을 열었다.

"어쩌면 공허의 손이 먼저 왔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지금 가야 해."

[루시온 공!]

"초조하잖아, 베델."

[....]

"아버지가 거의 다 죽여버렸지만, 내 몸에 흉터를 새긴 놈들이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못 참아."

목을 당장 비틀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겠지.

베델이라고 왜 그렇지 않겠는가.

아니.

자신보다 더하겠지.

베델은 죽었고, 자신은 살아 있으니.

"베델."

루시온은 가면을 쓰기 전에 베델을 바라보았다.

"나는 너하고 스승님한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 흄하고 라타처럼 맛있는 것도, 좋은 옷하고 베델 네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검도 사줄 수 없어."

루시온은 러쉘하고 베델이 너무도 고마웠다.

하지만 유령인 그들에게 무엇 하나 해줄 수 없는 처지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베델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런 말 하지 마. 공은 이미 나한테 충분히 줬다고. 내 마지막 소망을 이루게 해줬잖아. 내가 다시 소망을 꿈꿀 수 있게 해줬어.]

"그럼 늦었지만, 내 기사가 된 축하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받아줘."

[루시온 공!]

"이 정도는 움직여도 괜찮아. 검은 구슬 덕분에 어둠이 많이 늘어났어. 너도 알잖아?"

루시온은 베델을 바라보며 속삭이듯 부드럽게 목소리를 냈다.

―…엄. 루시온 말이 맞아. 루시온의 어둠이 엄청 늘어났어!

라타까지 말을 하자 베델은 금세 마음이 약해졌다.

마탑 습격 작전을 위해서라도 어둠을 아끼는 게 나을 텐데.

하지만 루시온을 어떻게 이길까.

자신을 바라보며 짓는 저 미소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베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베델."

루시온이 실실 웃다 가면을 썼다.

[웃음이 잘도 나온다.]

빈정거리는 러쉘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웃음을 멈추질 않았다.

"그럼 바로 출발하자, 라타."

―응응! 라타는 아까, 아까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어!

라타가 해맑게 웃었다.

231화. 구경 중인데 이럴래?(2)

* * *

"빛쟁아. 여기야."

루시온이 자신을 찾으러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헤인트를 향해 말했다.

중앙 광장 인근에서 헤인트와 만나기로 했고, 루시온은 더 일찍 출발했다.

"…왜 또?"

헤인트가 인상을 구겼지만, 가운뎃손가락이 올라가지 않아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디야? 서로 바쁘니 빨리 가자고."

루시온은 그림자 이동을 사용하기 전에 안절부절못하던 흄이 떠올라 마음이 다급해졌다.

루시온의 재촉에 헤인트는 일단 발을 움직였다.

잠깐 말없이 걷다 헤인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에 너도 거기에 참가해?"

"맞아. 크라언한테 못 들었어? 물어봤으면 말했을 텐데."

"말을 나눌 시간이 없었어. 알다시피 허를 찌르는 작전이라 일정이 좀 촉박하잖아?"

"폐하께서 현명하셨어. 트웰로 그놈을 처형하는 날이 바로 습격 날이 될 줄은 누가 알았겠어?"

[확실히 작전 자체는 좋지. 다 좋은데, 하필 네가 엮어서 그렇지.]

러쉘의 눈 사이가 좁혀졌다.

"…너 괜찮은 거야?"

"뭐가?"

루시온은 오히려 베델을 바라보았다.

트웰로의 죽음을 본 후라서 그런지 그녀는 평온했다.

"어, 그러니까, 거기에도 흑마법사가 있잖아? 같은 흑마법사끼리 뭐가 통하고 그런 거 없어?"

"…음. 웬만하면 같은 흑마법사끼리도 못 느낄걸?"

루시온은 답을 바라며 러쉘이 있는 방향으로 바라보았다.

[맞아. 여기 러쉘하고 라타, 그리고 내가 없으면 알기 어렵지.]

러쉘이 씩 웃었다.

"그러면 다행이고."

헤인트는 어느 가정집 앞에서 멈췄다.

"여기, 아니, 저쪽에서 기다릴게."

헤인트는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서다 더 멀리 뒷걸음질하면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뭐야. 내가 어둠이라도 쓸까 봐?"

"아니. 내 귀가 좋아서. 엿듣고 싶진 않거든. 봐봐. 여기에서도 들리잖아?"

루시온은 혹시나 해 소리를 죽여 목소리를 내어봤다.

"…빛쟁아. 네가 나를 의심했던 상황을 아직도...."

"거기까지. 내가 잘못했다고 했잖아?"

헤인트가 당장 걸어와 루시온에게 다급히 말했다.

―홉! 라타만큼 잘 들어!

라타의 눈이 반짝거렸다.

'진짜 잘 듣네.'

루시온도 살짝 놀랐다.

―라타도 있지. 라타가 자다가 노비오하고 카슨이 나누던 말을 들었는데! 엄, 저번에 케오… 어엄.

[케오르티아.]

―맞아! 러쉘은 역시 똑똑해, 이히히! 케오르티아에서 봤던 것처럼 나무랑 벽이랑 막 나타났다가 사라진다고 했어!

[뭐라고?]

"…뭐?"

러쉘을 이어 루시온은 너무 놀라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냈다.

곧 깜짝 놀라 헤인트를 바라보았다.

헤인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흉터가 있는 자신의 뺨을 긁적였다.

"보기보다, 아니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니 됐고. 어쨌든 되게 쪼잔하네. 나는 다 잊은 줄 알았지."

"다 잊었어. 그럼 들어갈 테니까, 기다려."

"누굴 개로 아네."

"기다려줘."

"…허 참."

헤인트는 루시온의 빠른 입놀림에 허탈하게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루시온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라타에게 조금 전 이야기를 묻고 싶었지만, 베델을 의식해 꾹 참았다.

[금방 끝나니까 물어봐도 돼. 그렇게 꾹 참지 말고.]

베델의 허락이 떨어지자 루시온은 라타가 있는 그림자를 보며 물었다.

"방금 무슨 말이야, 라타?"

라타가 그림자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라타가 잠결이라서 제대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무랑 건물이 나타났다가 바닥에 무슨 글씨가 적혀졌대. 오지 마? 보지 마? 엄… 라타는 더는 모르겠어.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라타의 고개가 왼쪽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우리야. 우리.

어둠이 목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홉!

라타가 뒤로 껑충 뛰며 꼬리를 바짝 세웠다.

가까이 가면 루시온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죽을까 봐 그랬어.

너무 다급해서 바닥에 '보지 마'라고 써놨는데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

"아닙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루시온이 가면을 벗고 어둠을 향해 미소를 짓자 어둠은 수줍은 듯이 실소를 꺼냈다.

히히.

"케오르티아에서 봤던 그 현상이 퍼져 있는 겁니까?"

맞아! 그런데 그 장소를 애써 찾지 마.

"분명 그걸 부서트리면 놈이 약해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있으면 찾아서 부서트려야 하지 않을까.

거기에 그놈이 있을 수 있으니까.

어둠은 조금 무겁게 말을 던지고는 주변을 살피는 듯하다 '안녕'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나타나는 게 순 자기들 마음이잖아.]

러쉘은 어둠이 더 이야기해주길 바랐다.

루시온이 케오르티아에서 보랏빛 어둠으로 부서트린 게 대체 무엇인지.

"그놈 때문에 마음대로 나타날 순 없겠죠. 그래도 한 가지는 알았잖습니까."

[그래. 놈이 그곳에 있다는 건, 부서지지 않게 무슨 작업을 한다는 거겠지. 할 일 없이 구경을 갈 리가 없잖아?]

루시온은 러쉘의 대답에 동의하며 멈췄던 발걸음을 재촉했다.

굳이 베델과 러쉘이 알려 주지 않아도 트웰로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쪽에 구슬픈 냄새가 흘러나왔다.

'검은 구슬 때문인가?'

루시온은 긴가민가하며 문을 열었다.

그곳에 검은 천으로 둘둘 말린 시체가 한 구 있었다.

"라타."

―응!

라타가 그림자에서 나와 시체를 툭툭 건드리자 유령이 된 트웰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루시온은 베델을 바라보았다.

"자리를 비켜줄 테니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아니.]

베델은 검 손잡이를 쥐었다.

[금방 끝나니까, 거기 있어도 괜찮아.]

트웰로의 목이 떨어질 때, 베델은 비로소 모든 게 끝났음을 알아차렸다.

멋대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따금 가슴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증오와 입가에 남은 자신의 마지막 피 맛이 다시 생생하게 맴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주 빠르게 그 감각들은 사라졌다.

자신을 비롯해 지하에서 죽어가던 이들을 이제는 모두가 알아주었다.

영원히 알지 못할 것 같던 자신의 억울한 이 죽음을 사람들이 분노해주었다.

스겅.

베델은 검을 뽑았다.

[나는 이제 괜찮다.]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이는 진심이었다.

루시온이 자신이 위로하고자 모두가 있는 앞에서 거리낌 없이 제 손을 잡아주었을 때 알아버렸다.

트웰로가 자신의 세상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 착각하고 있다는 걸.

진짜 소중한 존재는 바로 자신의 뒤에 있지 않은가.

트웰로와 눈이 맞았다.

―나는 네놈을 지키기 위해 내 심장과 목숨을 걸고 맹세했다! 그런데 네놈이, 네놈이 나를 배신했어? 나를? …오냐! 내 언젠가 너를 죽이러 가마! 네 심장에 내 칼을 박고, 저주하고, 또 저주하며 네놈을 향해 마음껏 비웃어주지!

자신이 실험체가 되기 전에 트웰로에게 소리쳤던 그 목소리가 기억났다.

[너, 너는....]

[나는.]

베델은 트웰로의 말을 잘랐다.

어떤 망설임도 없이, 늘 자신이 수도 없이 그렸던 검의 궤적을 따라 검을 놈의 심장에 쑤셔 넣었다.

[…으, 으아악!]

[베델 레비스티다!]

그녀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제 트웰로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간 느껴온 분노조차 아까울 만큼 허상 같은 존재.

[루시온 크로니아의 기사 베델 레비스티…!]

베델은 고통에 울부짖는 트웰로를 힘차게 외치고 루시온을 보았다.

베델의 눈동자는 그 어떤 순간보다 생기가 넘쳐흘렀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과 별개로 놈은 기억되어야 했다.

이렇게 쉽게 사라지게 둘 수는 없지.

루시온은 손에 어둠을 두르고 베델이 원하는 대로 트웰로 얼굴을 잡고 손에 힘을 주었다.

"꺼져버려, 빌어먹을 새끼!"

화르륵.

어둠이 단 한마디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감정을 이해했는지 보랏빛 어둠이 트웰로의 몸을 빠르게 태워버렸다.

재가 되었다.

그리고 사라져버렸다.

베델은 그 광경을 두 눈에 담으며 개구쟁이처럼, 장난스럽게 웃었다.

주근깨가 살짝 난 그녀의 두 뺨이 마치 붉어진 것만 같았다.

이제야 자신은 과거에서 해방되었다.

이제야 마음껏 웃을 수 있었다.

[…후련하다.]

베델은 깊게 숨을 돌렸다.

이제야 자신의 스승님을 보러 갈 용기가 났다.

―베델. 이제 기뻐?

라타가 베델에게 다가가 얼굴을 비볐다.

[응. 이제 정말로, 정말 기뻐.]

―그럼 베델 이제 안 울어? 라타는 루시온도, 베델도 우는 거 싫은데.

얼굴을 비비다 말고 라타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 안 울어.]

베델은 자신을 바라보는 작은 여우와 시선을 맞추려 자리에 앉았다.

라타는 루시온과 닮은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다 품을 파고들었다.

―이히히. 라타도 기뻐!

애교쟁이 같으니라고.

베델은 안도하다 자신과 눈이 맞아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러쉘의 모습에 쿡쿡 웃다 루시온을 불렀다.

[루시온 공.]

"그래, 베델."

루시온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나?]

"얼마든지."

베델은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집어넣고,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따뜻하게 쳐다보는 루시온의 눈빛에서 이제는 잃어버렸을 온기를 느꼈다.

[나하고 같이 스승님을 보러 가주겠나?]

"물론이지. 언제가 좋을까? 말만 해. 당장 갈 테니까."

[지금은 아니야.]

베델이 키득거렸다.

정말 지금 가자고 하면 루시온은 자신을 위해 가주겠지.

그만큼 루시온은 상냥하니까.

[루시온 공.]

"그래."

[공을 만난 건, 내게 있어 정말 크나큰 축복이야.]

베델은 금세 당황하는 루시온을 보며 다시 키득거렸다.

이렇게 알려주지 않으면 모르겠지.

루시온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인지.

할 수만 있다면 베델은 오늘도, 내일도, 계속 그 사랑스러움을 말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전에 부끄러워 도망칠지도 몰랐다.

카슨하고 샤엘라가 이런 심정으로 루시온을 바라보는 걸까.

* * *

―…빨리, 빨리!

라타가 루시온 주변을 어지럽게 뛰며 그를 재촉했다.

"그렇게 안 뛰어도 돼. 흄이 떡하니 앞에 지키고 있는데. 혹시 형님이 오시면 흄이 빠르게 문을 세 번 두드...."

똑똑똑!

루시온은 다급히 이어지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순간 기겁했다.

[진짜 카슨이 왔네…?]

러쉘은 밖으로 고개를 내밀다 말고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봐봐! 라타 말이 맞았어! 빨리! 빨리!

루시온 주변을 돌아다니는 라타의 속도가 갑자기 빨라졌다.

동시에 옷가지를 벗는 루시온의 손도 바빠졌다.

진땀이 흐르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양말을 벗다 중심을 살짝 잃고는 침대 기둥에 머리를 살짝 박을 뻔했지만, 어둠이 쿠션 역할을 해주었다.

―아이쿠!

쿵!

소리는 우습게도 라타에게 들렸다.

빙글빙글 돌다가 침대에 아주 살짝 부딪혀버렸다.

루시온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지만, 지금 그럴 때가 아니었다.

베델은 웃음을 참으며 라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어둠, 나빠! 라타도 안 아프게 해주지! 라타는 어둠도 좋아하는데…!

라타는 울먹이며 소리쳤다.

[다 침대 밑에 쑤셔 넣어. 흄이 거짓말을 못 해서 고장 났으니까.]

러쉘은 루시온을 재촉하다 말고 라타를 보며 대놓고 웃음을 터트렸다.

때마침 대충이나마 옷을 갈아입은 루시온은 하멜로서 입었던 옷가지를 싹 다 침대 밑에 숨겨서는 침대에 누웠다.

딸깍.

문이 열리고 카슨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안에서 소리가 나서 갑작스레 들어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면 미안하구나."

'…하. 옷을 쉽게 벗을 수 있게 만들어서 다행이지.'

루시온은 기지개를 켜는 척하며 땀을 닦고는 카슨을 반겼다.

"라타가 놀다가 침대에 부딪혔습니다."

"…음, 옆면이 딱딱하지 않게 침대를 새로 사마."

카슨은 침대에 이어 울먹이는 라타를 바라보았다.

카슨 뒤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흄이 보였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몰라도 흄은 싸우는 것보다 더 힘겨워 보였다.

"혹, 악몽을 꿨더냐?"

카슨은 루시온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보았다.

"더워서 그랬습니다."

"그래. 너는 옛날부터 더위를 많이 탔으니."

카슨은 대답하며 주변으로 눈동자를 움직였다.

마치 탐색을 하는 듯한 시선에 루시온이 다급히 물었다.

"지금 나가봐야 합니까?"

"그래. 더 쉬게 해주고 싶지만, 작전 시간이 조금 더 당겨졌더구나."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아니. 문제라기보다는 방금 헤인트가 폐하께서 공허의 손 놈들이 마탑 너머로 도망칠 걸 우려해 중부에서 동부로 이어지는 포탈을 점검이라는 핑계로 오늘 하루 정도 멈출 예정이라고 하더구나."

"…포탈을 멈추면 손실이 엄청날 텐데요?"

루시온은 케틀란의 결단력에 당장 손뼉을 마주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루의 손실보다 공허의 손이 도망쳐 발생할 손실이 더 크다고 판단하셨단다."

[그건 맞지. 황제가 언급한 놈들만 400명이라면 그놈들을 위해 일했던 자들이 수천 명 이상이라는 거겠지? 저 사태가 또 반복될 수 있으니 장기적으로 보면 포탈을 끄는 게 이득이지.]

러쉘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럼 포탈 때문에 일찍 출발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래. 네가 쉬더라도 동부로 가서 쉬어야겠다."

루시온은 당장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렇게 결정이 났다는데 뭘 더 망설이겠는가.

"그럼 바로 출발하죠."

―출발한다! 야후후!

밖으로 나간다는 말에 라타는 언제 울먹였냐는 듯 카슨과 루시온을 두고 빙글빙글 돌았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거라. 아직… 서툰가 보구나."

카슨은 쿡쿡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루시온이 아래를 내려다보다 단추가 엇갈린 옷이 보였다.

"…왜 아무도 말을 안 해주셨습니까?"

232화. 구경 중인데 이럴래?(3)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