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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그가 아니라면 제국으로 흑마법사가 넘어오는 걸 누가 맡겠는가.

루시온이 물었다.

"혹시 이쪽으로 흑마법사들이 지나갔나?"

[지나갔지. 쥐새끼들처럼.]

"죽였어?"

[당연히 죽였는데, 오늘은 몇 놈 놓쳤어.]

[상단과 함께 온 흑마법사를 말하는 거 맞아?]

잠깐 러쉘이 긴가민가하다 물었다.

브로슨이 결코 약한 게 아니었기에 그가 놓쳤다는 흑마법사가 헤로안이 말한 흑마법사가 맞는지부터 확인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아니. 상단은 아닌데? 진짜 쥐새끼들처럼 기어오더라고.]

착.

브로슨이 망토를 펼쳤다.

그의 옆구리에 어둠으로 긁힌 긴 자상이 보였다.

[이거 보여, 러쉘? 너 다음으로 이렇게 된 건 처음이야.]

'....'

루시온은 문뜩 치밀어오르는 사실 하나에 설마 하며 물었다.

"널 그렇게 만든 흑마법사는 어떻게 생겼지…?"

브로슨은 생각하는 것도 싫은 듯했지만, 러쉘이 지그시 바라보자 입맛을 다셨다.

[그냥, 좀 날렵하게 생겼어. 사기 잘 치게 생긴 얼굴 알잖아.]

"그 외에 다른 특징은 없었어?"

만약 자신이 생각한 사람이 맞다면 얼굴에 긴 자상이 있어야 했다.

[없는데? 왜? 잡아주게? 이거 감동....]

[왜 그러는데 루시온?]

러쉘이 브로슨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검을 잡은 브로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베델은 그 모습에 입술을 꾹 다물며 투구 덮개를 내렸다.

"있잖습니까, 스승님."

루시온은 입가를 핥았다.

얼굴에 자상이 있어야 했지만,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만약에 진짜 뉴브라가 공허의 손을 버렸다면. 놈들이 어디로 가는 게 가장, 가장 완벽할까요?"

[아마 네바스트는 아닐 거야. 공허의 손 놈들은 빛을 증오해. 네바스트와 협력하는 흑마법사도 다른 놈일 테고.]

베델이 확신하며 말하자 러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쫓겨났다고 친다면 베델 말이 맞아. 네바스트는 아니야.]

"그럼 뉴브라의 세력이 많이 뻗친 미론스트 왕국도 아니겠네요."

[다른 왕국들도 아닐 거야. 거긴 너무 힘이 없어.]

러쉘이 루시온의 말에 덧붙였다.

[뭘 자꾸 속닥거리는 거야?]

브로슨은 자신만 쏙 빼고 말하는 분위기가 불쾌해 투덜거렸지만, 라타가 다가와 머리를 비볐다.

―라타도 몰라. 그냥 듣고 있어. 이히히.

[거참. 누구 집 여우인지 몰라도 참 착하네.]

브로슨은 자신을 위로해주는 것 같은 라타를 조심히 쓰다듬었다.

―응! 라타는 착해!

루시온은 힘찬 라타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려듣다 러쉘과 거의 동시에 시선이 맞았다.

"제국뿐이겠죠…?"

[그래. 제국뿐이네.]

러쉘이 이마를 툭툭 건드렸다.

덩달아 루시온은 손톱을 물어뜯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며 애써 만지작거렸다.

"마탑… 일까요?"

[거기밖에 없지. 외부에서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곳은.]

'하지만… 놈은 공허의 손 보스가 아닙니다. 소설 속에서 명시된 외형 묘사가 다릅니다.'

루시온은 모든 게 맞아떨어졌음에도 한 가지 사실 때문에 망설였다.

[그러니까 지금 공허의 손 보스가 마탑으로 갔다는 말을 하는 건가?]

베델이 차분히 정리하며 물었다.

[정확히 말하면 쟤가 놓쳤지.]

러쉘이 브로슨을 가리켰다.

브로슨이 발끈했다.

[놓친 게 아니라, 놈은 강했어.]

[싸워서 이길 수 없었어?]

[…아니. 그건 아니지만.]

[네가 죽음의 기사가 된 지 오래된 모양이라 감이 안 오는가 본데. 으레 보통 너와 같은 상황을 놓쳤다고 말하지.]

러쉘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브로슨에게 알려주었다.

브로슨은 덤비지 못하고 분통을 터트렸다.

[에이씨…!]

'…소설 '어둠의 손아귀'에서 나오는 최종 보스가 브로슨이 이길 만큼 약하다고?'

루시온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기에 얼른 입술을 움직였다.

"진짜 이길 수 있는 상대였어?"

[그래. 그래서 용건이 대체 뭔데?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용건 없으면 가.]

덩달아 브로슨의 언성이 올라갔다.

'최종 보스가 아닌 건가?'

루시온은 조용히 생각했다.

어쨌든, 최종 보스가 완전체가 되다시피 한 시간은 2년 후였다.

만약 브로슨이 본 그 흑마법사가 진짜 최종 보스가 아니더라도 뉴브라를 향한 배신의 복수든 뭐든 마탑으로 향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혹시 모르니 누님한테 연락이라도 해봐야겠네.'

최종 보스가 정말로 제국의 마탑으로 간다면 그들이 뭘 노리겠는가.

마법사.

얌전히 있는 최악의 폭탄을 건드릴 셈이었다.

어쩌면 일정을 당겨야 할지도 몰랐다.

"브로슨. 네가 다른 흑마법사를 죽인 적은 없고?"

[너는 네가 몇 마리의 벌레를 밟았는지 일일이 세고 다니는가 보네?]

"상단 틈에 섞인 흑마법사를 보았나?"

[아니.]

"걔들은 안 돼."

[누구 마음....]

[내 마음이다.]

러쉘이 끼어들어서는 팔짱을 낀 채로 브로슨을 바라보았다.

"내 개인적 이유가 아니라, 죽음의 바다를 정화할 흑마법사가 필요해."

[웃기고 있네. 황제가 이를 허락했을....]

"했어. 증명서라도 보여줘?"

루시온은 브로슨에게 보여줄 증명서를 내밀다 말고 넌지시 물었다.

"너, 귀족이었나 보네?"

[…죽은 자에게 과거는 묻는 게 아니야.]

브로슨은 그답지 않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시온이 내민 증명서를 유심히 살피다 순간 멈칫거렸다.

[진짜로… 황제가 네 존재를 허락했네? 이런 미친!]

갑자기 브로슨이 루시온을 얼싸안을 기세로 달려들자 러쉘이 브로슨을 막아섰다.

[미쳤어?]

[아니! 기뻐서… 아니, 큼. 대단하잖아? 흑마법사로서 제국의 황제에게 인정을 받다니.]

[그걸 왜 네가 기뻐하는데?]

[누가 됐든 기뻐하면 됐지.]

―맞아! 라타도 갑자기 막 기뻐!

라타가 껑충껑충 뛰었고, 베델이 묘한 눈으로 브로슨을 바라보았다.

[혹 브로슨, 그대는....]

[좋아, 역사에 다시는 없을 일을 해냈으니 특별히 허락해주지. 어느 놈들인데? 딱 그놈들까지야. 나는 내게 주어진 사명을 루시온 너 때문에 저버릴 생각은 없으니까.]

"곧 온다고 했어."

루시온이 변경에 세워진 거대한 성 쪽을 바라보았다.

[아. 쟤들? 저기 오네.]

브로슨이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루시온도 어둠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저 흑마법사인지 아닌지는 확인해봐야지. 만약 아니라면 다시 찾아올게."

[그러든지.]

브로슨은 점점 멀어지는 루시온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아무 일이 없다는 듯 검을 닦았다.

피식.

이내 잠깐 자랑스럽게 웃다 다시 멈췄던 손을 재촉했다.

* * *

"…하멜 님."

피터가 단번에 루시온을 알아보았다.

그 말에 그들의 표정이 한순간 밝아졌다.

흑마법사를 데려오면서 왜 무섭지 않았겠는가.

하멜을 보자 드디어 안전지대에 들어선 기분을 느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잠깐 저분들하고 이야기를 나눠봐야 하니 피곤하실 텐데 먼저 아지트로 돌아가시는 게 어떠십니까?"

루시온은 말을 하면서도 제이엘이 운영하는 상단원으로 위장한 몇몇 흑마법사들에게 눈길을 떼지 않았다.

아직 적일지 아닐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베델과 러쉘은 흑마법사에게 보이지 않게 이미 모습을 감췄다.

'베델은 괜찮으려나.'

루시온은 잠깐 베델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녀는 잘 참고 있었고, 시선이 마주치자 활짝 웃어주기까지 했다.

[걱정하지 마.]

―루시온. 호옥시, 또 나쁜 흑마법사야? 라타는 나쁜 흑마법사밖에 못 봤어.

라타가 물었다.

아니야. 나쁜 사람이 아니라서 괜찮아.

그때, 어둠이 속삭이며 라타의 말에 대답했다.

동글동글한 어둠의 모습에 루시온을 바라보던 흑마법사들의 시선이 바뀌었다.

우리가 데려왔어.

루시온한테 도움이 될 거야.

맞아, 맞아!

[혹시 죽음의 바다 때문에 데려온 거야?]

러쉘이 묻자 어둠은 배시시 웃었다.

맞아. 루시온이 부숴버려서 이제 이 정도는 할 수 있어.

더 부숴줬으면 좋겠지만, 그놈이 눈치챌 거야.

"네, 네바스트의 특산품이라던데 이거 받아주십시오."

흑마법사들이 마차에서 내릴 동안 조직원 중 한 명이 제 손을 옷에 박박 닦다 루시온에게 건넸다.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을까.

루시온은 잠깐 황당했지만, 선물을 거절할 마음은 없었다.

"감사합니다. 뭔지 몰라도 잘 먹을게요."

싱긋 웃는 듯한 목소리에 조직원들은 하나둘 루시온에게 물건을 건넸다.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고, 무엇보다 고마운 그에게 언젠가 보답을 하고 싶었기에 누군가는 가족에게 줄 선물을 꺼냈고, 누군가는 꼭 먹고 싶었던 디저트도 내놓았다.

어느새 그의 얼굴을 가릴 만큼 쌓이자 보다 못해 흄이 제 주머니에 차차 담아뒀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모든 흑마법사가 내린 걸 확인한 후에 피터가 흡족해하며 미소를 지었다.

다른 조직원들도 긴 여정에도 언제 지쳤냐는 듯 눈동자를 반짝이며 루시온을 향해 인사했다.

[이야. 인기 좋은데?]

분위기를 봐서 애써 참으려 했지만, 러쉘은 결국, 입을 놀렸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못 참지.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꼭 그렇게 말해야 하는가?]

[당연하지. 이건 못 참아.]

러쉘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온은 피식 웃다 자연스럽게 흑마법사들에게 제안했다.

"자, 우리는 따로 할 이야기가 있으니 절 따라오셨으면 합니다. 사람들이 많은 곳을 들릴 수도 없고, 도로변도 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거절한다면 언제든 그들을 제압할 수 있게 미리 손바닥으로 어둠을 몰아넣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이렇게 빨리 수긍한다고?'

―어둠이 루시온은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나 봐. 라타는 루시온을 처음 보는 사람이 이렇게 예쁘게 바라보는 건 엄… 거의 처음이야!

라타가 기뻐하며 말한 것처럼 그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이 조금 이상했다.

존경.

충성.

자신을 처음 보는 사람이 하기에는 낯선 시선이 아닌가.

루시온은 뭔가 불쾌했지만, 일단 자리를 옮겼다.

216화. 세 번째 이야기(2)

* * *

"저희는 어둠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흑마법사 중 누군가 말하자 흄의 눈매가 살짝 좁혀졌다.

왠지 기분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루시온을 보고 저토록 경계를 푼 사람이 누가 있던가.

흄은 언제라도 대검을 휘두를 수 있게 꺼내서는 땅에 살짝 놓았다.

쿵.

"언제라도 벨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날 세우지 않아도 돼. 아직은."

루시온은 만족스러워하며 흄을 말리는 척 시늉했다.

자신도 저 자연스러움이 이상하던 참이었으니까.

"어둠이 뭐라고 하며 인도했습니까?"

루시온이 묻자 어둠이 바로 대답했다.

저들은 우리 말이 들리지 않을걸? 루시온도 겨우 들었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알려줄게. 이리오라고 했고, 저리 가라고 했고, 방금은 그냥 루시온을 불렀어.

이게 무슨 대답인지.

어둠이 너무도 자랑스럽게 말하기에 루시온은 할 말을 삼켰다.

"…자연에 떠도는 어둠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습니다."

흑마법사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저 말이 맞아. 빛의 축복을 받은 자들도 자연에 떠도는 빛을 웬만하면 볼 수 없으니까.]

러쉘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지금까지는 말입니다. 저희가 탈출을 강행했을 때, 어둠께서 나타나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탈출을 강행했다니.

네바스트와 흑마법사 사이에 어떤 협력도 없었다는 말이었다.

'진짜 가지가지 한다.'

루시온은 머리가 지끈거리자 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흑마법사가 자발적으로 신관들과 협력한다고? 말도 안 되지. 아마 그때는 세상이 뒤집힐 때일지도 몰라.]

코웃음을 치며 러쉘은 흑마법사들을 바라보았다.

다시 보니 부랑자나 다름없었다.

옷만 새것일 뿐, 그들의 얼굴에 도망자의 힘겨웠던 여정을 그린 것처럼 지친 기색이 가득했다.

"네바스트에서 고용된, 아니 붙잡힌 흑마법사였습니까?"

루시온의 물음에 흑마법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붙잡힌. 예, 그렇습니다."

"당신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일부입니까? 제가 본, 네바스트의 밑에서 일하던 흑마법사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불량… 품입니다. 당신이 누굴 봤는지 몰라도 그들은 저희와 다릅니다."

불량품이라는 말에 루시온은 괜스레 입 안이 썼다.

자꾸만 자신의 과거가 겹쳐 보이질 않은가.

루시온은 말을 돌렸다.

"혹시 부상자는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럼,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루시온은 바로 연락용 아이템을 사용해 피터에게 연락했다.

<예, 하멜 님.>

"미안하지만, 다시 돌아와야겠어."

<예…? 무슨 일이 터졌습니까? 그 사람들이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부상자가 있대. 밤새 세워둘 순 없잖아."

<아. 죄송합니다. 제가 더 배려해야 했는데.>

피터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자책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야. 확인을 위해 내가 먼저 가라고 했으니 내 잘못이지. 어쨌든 다시 와서 부상자부터 챙겨줘."

<알겠습니다. 근방이라 곧 도착합니다.>

피터의 대답을 듣고 나서 루시온은 그들을 바라보았다.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던 흑마법사가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상처를 입은 사람은 누구든 참지 말고 돌아오는 상단 마차에 올라타십시오."

"…저, 저희를 믿습니까?"

"믿지 않습니다. 저희, 처음 본 사이라는 거 잊으셨습니까?"

루시온이 피식 웃었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런 검사도 없이 보내도 됩니까?"

"그럼 아픈 사람을, 그것도 우리가 데려온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둡니까?"

"뭘… 뭘 원하십니까?"

마치 겁에 질린 듯한 모습에 루시온은 괜히 머쓱했다.

자신도 저랬을까 싶어서.

"뭘 줄 수는 있습니까? 저 돈 많습니다."

―맞아! 라타가 알아! 루테온 은행에 가면 루시온의 금고에 돈이 엄청 많아! 아… 라타는 또 가고 싶어. 여기도 반짝, 저기도 반짝.

라타는 마치 눈앞에 음식을 둔 것처럼 군침을 흘렸다.

보석을 끼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 그 위에서 돌아다니는 게 좋아하다니.

라타가 뭘 좀 알고 있었다.

"...."

흑마법사는 고개를 숙이고 옷자락을 붙잡았다.

아무것도 줄 수 없는 게 부끄러운 듯했다.

루시온은 그 비굴함을 재차 인지해 다시는 그 말을 꺼내지 못하게 목소리를 냈다.

"제게 뭘 줄 수 없으면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제가 눈도 높고, 입맛도 까다롭거든요."

저들이 그냥 흑마법사라면 비굴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제 조직의 일원이 될 수도 있기에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순 없었다.

저들이 곧 조직의 얼굴이지 않은가.

[에이. 마카롱 하나로 넘어가면서.]

러쉘이 빈정거리다 말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베델의 시선에 슬쩍 눈길을 돌렸다.

[…뭐어, 그렇다고. 너도 알잖아?]

[그건 조금… 걱정이긴 하지. 낯선 사람이 마카롱을 주면 따라가지는 않을 텐데, 그게, 왠지 따라갈 것만 같은… 음.]

베델이 고민하다 말을 멈췄다.

[와. 나랑 똑같은 생각을 했네. 베델 너도 나랑 똑같잖아?]

두 사람의 대화에 흄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느라 잠깐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무리 저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했다 한들 자신에게 들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루시온이 어린아이도 아니고 낯선 사람을 따라갈 리가 있겠는가.

'아. 진짜 너무들 하시네. 마카롱을 주면 따라가지는 않고 그 자리에서 받고 내쫓으면 되잖아요.'

루시온은 명확한 답을 놔두고 빙빙 돌아가는 그들이 살짝 답답했다.

"그, 그럼… 저희는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흑마법사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흄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들은 길잃은 아이처럼 행동했다.

혹시나 해 루시온이 물었다.

"혹시 네바스트 손아귀에서 자랐습니까?"

"…예."

흑마법사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왜 이렇게 어둠의 축복을 받은 자들을 억압하나 했는데, 결국, 제 말을 잘 듣는 흑마법사를 손에 넣으려고 이랬던 거야?'

루시온은 어이가 없었다.

빛이 가득한 네바스트야말로 흑마법사에게 있어 생지옥이나 다름없었겠지.

[…이젠 진짜 놀랍지도 않다. 흑마법사를 길러? 대단하다, 네바스트. 진짜 대단하다!]

러쉘이 감탄이 섞인 목소리를 냈다.

루시온은 입가를 핥고는 저들에게 답을 주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간단합니다."

흑마법사들은 다시금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왜 저들이 그런 눈빛을 짓고 있는지 이제는 알았다.

어둠에게 구해지고.

어둠의 인도를 받아 도착한 곳이 바로 자신의 앞이었다.

빛의 신이 있다고 주입받은 네바스트의 신관들처럼 저들 역시 신이 있다고 믿겠지.

그리고 그 신이 바로 자신이라 생각할지도 몰랐다.

"스스로 생각하십시오. 바로 여기에서.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 정도는 구분하실 수 있잖습니까."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

갓 우리에서 나와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겠지만, 세상은 지독하리만큼 잔인한 곳이었다.

제 한 몸도 건사하기 힘든 자신은 저들의 신이 되어줄 수 없었다.

아니, 되어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자유를 원하면 제가 지원금을 드리죠. 물론, 나중에 갚으셔야 합니다.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는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같은 흑마법사라 추가로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게 너무 좋았다.

"조직에 들어오고 싶으면 그러셔도 됩니다. 단, 배신은 안 됩니다. 배신은 죽음으로 갚으셔야 할 겁니다."

루시온은 간단하게 큰 선택지를 주었다.

"물론 둘 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어느 쪽을 선택하든, 제 조직을 건드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당신들이 여기까지 오면서 같이 마주했던 이들이 죽는다면 제가, 당신들을 죽이러 가겠습니다. 아니, 그 죽음까지도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그리고 기세를 올려 경고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 말이 다 거짓말이라면.

저 속에 네바스트의 배신자가 있다면.

자신의 조직원들이 위험할 테니.

흑마법사는 루시온의 경고에 바로 목소리를 힘을 주었다.

"비록 빛 아래에서 자랐지만, 어둠을 걸고 저희는 오늘의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맹세하겠습니다."

처음들은 맹세에 루시온은 의아했다.

[루시온 아마 너한테는 좀 낯설겠지만, 흑마법사가 어둠을 걸었다는 건 흑마법사로서 할 수 있는 최대의 맹세지.]

러쉘은 이어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어둠은 정말로 다 듣고 있으니까. 자신을 걸었는데 맹세를 저버린다면 어둠이 삐지겠지?]

아니야. 삐지는 게 아니라 미운 거야.

우리를 걸었으면 거짓말은 하지 말아야지. 그건 나쁜 행동이라고.

어둠이 투덜거리며 속삭였다.

'아직 안 갔나? 보통 이쯤 되면 알아서 사라지던데.'

루시온이 어둠을 바라보자 어둠은 좋아하며 몸을 배배 꼬았다.

왜? 무슨 할 말이 있어? 뭐든 말해봐. 뭐든 들어줄게.

"저어...."

"하멜입니다."

루시온은 자신을 밝혔다.

"저는… 45호입니다."

"...?"

루시온이 순간 움찔거렸다.

―45호는 이름이 아니라 숫자인데?

라타의 저 순진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루시온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언제 또 저택을 빠져나올 수 있을지 몰라 오늘 대화를 끝내려 했는데.

[아무리 해도 이건 아니잖은가!]

베델이 듣다못해 소리쳤다.

설령 네바스트의 손에 길러졌어도 사람으로서 살아갈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사람으로서 당연하게 받아야 할 이름조차 받지 못한 이들이었다.

처음으로 루시온 이외에 마음이 쓰이는 흑마법사였다.

"…하멜 님."

흄이 루시온을 불렀다.

그녀는 어느새 대검을 집어넣어 버렸다.

자신도 이름이 없었다.

저렇게 번호로서 불렸기에 동질감이 강하게 느껴져 뭐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그게 또 루시온에게 부담이 될까, 입술을 꾹 닫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루시온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흄과 베델의 시선이 아니라더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 대화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제, 제가 뭘 잘못했...."

"아뇨. 이름부터 짓고 그 후에 이야기합시다."

이름도 없는 사람을 두고 이게 무슨 짓인지.

루시온이 어둠을 바라보았다.

"당신들의 안목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우리 눈은 틀리지 않아. 저들은 가엾고, 가여운 아이들일 뿐이니까.

어둠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자신들을 믿어달라고 하소연했지만, 불안함이 아직 남아 있었다.

[어둠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루시온이 조직원과 저들을 저울질하기 전에 러쉘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너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데려왔으니까, 나쁜 녀석들은 아닐 거다.]

그제야 루시온은 어깨에 힘을 빼며 숨을 내쉬었다.

죽음의 바다를 정화하기 위해서는 흑마법사가 필요했다.

"하멜 님. 돌아왔습니다."

때마침 피터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그가 참 반가웠다.

"다 데려가면 돼."

"예. 그 말을 기다렸습니다."

"밥도 먹이고, 시원한 잠자리도 주고."

"물론이죠. 남아도는 방이 아직 많습니다. 뭐, 만약에 부족하면 쥐쟁이들의 방을 빼죠. 아마 크라언 님도 허락해줄 겁니다."

"…저어."

45호가 말을 꺼내자 루시온은 그를 말렸다.

"선택도 나중에 하셔도 됩니다. 일단 몸부터 추스르는 게 어떻습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45호는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고 입술을 깨물며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만약 조직으로 들어온다면 절대로 안 버립니다. 이용하는 일도 없습니다. 아마, 조직원들 모두가 당신들을 따뜻하게 대해줄 겁니다. 조직 에일은 그런 곳이니까요."

루시온의 가면이 푸르게 물들었다.

"맞습니다. 조직의 목적은 바로 평화와 자유입니다."

피터가 덧붙였다.

조직이 세워진 진짜 목적이 아니기에 루시온은 괜히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조직 에일은 오로지 자신을 위해 세워진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혹시 복수를 원합니까?"

자신의 말에 45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닙니다."

45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멜 님에게만 따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좋습니다."

루시온이 고개를 끄덕였고, 피터는 나머지 흑마법사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하멜이 저들은 괜찮다고 했으니 피터는 이전보다 더 마음을 놓으며 흑마법사들을 마차로 데려갔다.

그사이 루시온은 45호와 함께 조금 멀리 떨어진 숲속을 걸었다.

"이쯤이면 멀리 온 듯하니, 제게 하실 말씀이 뭡니까?"

루시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45호는 정말 미안한 듯이,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죄가 되는 듯이 울상을 지었다.

"구해주셨으면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걸 알려야 하는데, 어떻게 알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흑마법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저희 이외에는 아마… 타락한 흑마법사가 되든 네바스트에게 복종하는 꼭두각시가 됐을 겁니다."

[저항하면 타락한 흑마법사가 되는 거고, 받아들이면 꼭두각시가 되는 거라니.]

마치 오물을 보는 듯 러쉘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어릴 때부터 세뇌를 당합니다. 그 때문에 네바스트를 탈출할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45호는 그 지옥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운지 잠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저희는 괜찮았습니다."

팅.

붉은 실이 팽팽해졌다.

트로에와 이어졌던 붉은 실이었다.

'…설마.'

루시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신수께서 저희를 지켜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217화. 세 번째 이야기(3)

45호는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지. 에이. 거기까지는 아니잖아.]

러쉘이 앞으로 나올 45호의 말을 미리 부정했다.

"그런데 신수께서 지금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원래는 같이, …같이 탈출하기로 했는데."

"잠시만요."

루시온은 45호의 말을 멈췄다.

"지금 네바스트에서 마치 신수를 공격하는 것처럼 말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예?"

45호가 당황했다.

마치 당연한 사실을 질문으로 들은 표정이었다.

덩달아 루시온도 기분이 이상해졌다.

"네바스트는 일단은 신성 국가입니다. 그들은 신수를 모시고 있잖습니까."

"누가… 누가 그럽니까? 대체 누가 네바스트에서 신수를 모시고 있다고 그럽니까?"

탁.

루시온은 저 말에 머리를 붙잡았다.

―네바스트에 존재하던 신수 다섯 중 셋이 이 땅에 사라졌다.

트로에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네바스트에서 신수란 존재는 그냥 예쁜 장식품일 뿐입니다. 벌써, 벌써 세 분이나 사라지셨습니다…!"

'이런… 씹새끼들.'

루시온은 이가 갈렸다.

―저 아이뿐만 아니라 빛의 힘을 가진 그 누구도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단다.

한탄처럼 내뱉었던 트로에의 목소리가 다시 애달프게 들렸다.

트로에의 주인인 벨로스마저 트로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데, 누가 신수의 목소리를 듣겠는가.

저들은 신수가 내지르는 마지막 비명도 듣지 못했을 텐데.

[나는, 나는 이제 뭐가 어둠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고, 빛의 축복을 받은 자들인지 모르겠다. 이건. …이건 말이 안 되는 소리야. 신수를 대체 왜?]

베델은 입술을 움직이다 말고 말문이 막혔는지 눈을 찡그린 채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만큼 막막했다.

그녀의 오렌지빛 눈동자가 햇살에 반짝였다.

―트로에 아저씨를 닮은 아저씨들이 죽은 거야? 라타는… 라타는 트로에 아저씨를 엄청 좋아하는데.

라타가 울먹거렸다.

그때, 라타는 트로에 때문에 기절해 있었기에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지금 이 소리가 얼마나 충격적으로 들릴까.

[그런 거 아니야, 라타.]

러쉘이 괜히 말을 돌렸다.

속 시원하게 욕을 퍼부으려다 라타의 목소리에 망설이고 말았다.

"…제국에 신수께서 선택하신 성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45호는 눈치를 보다 입술을 열었다.

"있습니다."

바로 코앞에.

"그분을 만나서 이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저는, 그분을 어떻게 뵙는지 모릅니다. 아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 말을 꺼내는 자체로 45호가 얼마나 순진하고 세상 경험이 없는지 알 수 있었다.

쉿.

루시온이 손가락을 입술에 올렸다.

"이 이야기는 저 이외에는 해서는 안 됩니다."

"하멜 님께서 성자께 이 사실을 알려주시는 겁니까?"

"일단 노력해보겠습니다. 하지만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금 저 이외에는 방금 꺼낸 말을 하시면 안 됩니다."

"왜 그런 겁니까? 다들 알아야 네바스트가 뭘 숨기는지 알 것 아닙니까."

"신수는 네바스트 내부와 달리 엄청 소중한 존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럴 리가...."

"무엇보다 지금 이 사실이 밝혀지면 범인이 도망갈 겁니다. 당분간 제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루시온의 제안에 45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그건 안 됩니다."

"왜… 안 되는 겁니까?"

"본인의 인생은 본인 스스로 결정하십시오."

"그럼… 제안을 따르는 건 괜찮습니까?"

"예.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루시온이 고개를 돌리자 이유는 몰라도 뿌듯해하는 흄을 볼 수 있었다.

"저는 하멜 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뜬금없는 흄의 소리에 루시온은 어리둥절했다.

* * *

"나의 사랑스러운 아들, 오웬아."

말과 달리 케틀란의 목소리는 너무도 차가웠다.

부들부들.

오웬은 몸을 떨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저토록 무서운 사람일 줄이야.

불과 얼마 전에 머리에 올려진 왕관을 꿈꾸며 평소처럼 자신의 보좌관과 담소나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서 죽어버렸다.

마치 독에 당한 듯 검은 피를 흘리고, 자신을 원망하며 자신의 목에 8개의 손톱자국을 남기고.

그리고 아버지의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오웬. 대답은 어디 갔더냐?"

"다, 다, 알려드렸잖습니까!"

오웬은 묶인 몸을 뒤틀며 소리쳤다.

"무엇을?"

케틀란이 담담하게 물었다.

늘 자신을 바라보던 애정 어린 눈빛은 메말라버린 땅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다.

"그건 사고입니다. 누군가 절 모함하려고 꾸민 짓이라고요!"

오웬은 소리치다 곧 인상을 구겼다.

"세틸 짓입니다! 분명 세틸이 절 밀어내고자 ...."

"오웬 테슬라."

케틀란이 오웬을 조용히 불렀다.

목소리에 묻어난 살기에 오웬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나는 적을 심문할 때 하루를 넘기지 않는단다. 이유를 알고 있더냐?"

오웬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간이 주어지면 꾀가 생기고, 거짓말을 입에 담고, 자신을 속이기 마련이지. 하지만 나는 널 위해 시간을 더 주었다. 네가 태어나고, 지금까지 자랄 때까지 보았던 아비란 이름의 감정 때문에 말이다."

케틀란은 진심으로 슬퍼하며 오웬을 바라보았다.

"오늘 크로니아에서 편지 한 통이 도착했더구나."

누가 뭐라 해도 사랑스러운 아들.

아니.

사랑스러운 아들이었다.

하지만 크로니아에서 온 편지란 말에 오웬의 눈동자에 깊은 탐욕과 기쁨이 꿈틀거렸다.

저건 사람이 아니었다.

오웬이라는 껍데기를 쓴 괴물이었다.

"독술사의 독이 검출됐다고 하더구나. 네가 루시온 크로니아를 위해 샀던 그 음식과 차에 말이다."

케틀란은 오웬을 바라보았다.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표정이라는 걸 너무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네가 '베르뷔르의 오후'라는 가게에서 디저트와 차를 샀다는 증거, 독술사를 고용하기 위해 용병단을 들렸던 증거, 자금을 썼다는 증거가 내 손아귀에 들어왔단다."

케틀란이 언급을 하면 할수록 오웬의 표정이 급격히 구겨졌다.

분명 저들의 입을 다 막았을 텐데.

분명히 증거를 숨겼을 텐데.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오웬."

케틀란이 다시금 오웬을 불렀다.

"세상에 밝혀지지 못한 죄들이 많고 많단다. 하지만 너는 그 죄를 숨기기에 큰 존재라는 사실을 잊었더냐?"

조용히 타이르며 케틀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오웬에게 향했다.

"네 입을 다물고."

또각.

"주변인의 입과 눈과 귀를 자르고."

또각.

"그러면 내 귀와 눈까지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더냐, 오웬!"

불벼락같이 내리치는 케틀란의 언성에 오웬은 무언가가 잘못됐음을 눈치챘다.

"네 피에 흐르는 테슬라의 긍지와 명예는 대체 어디에다 팔아넘겼더냐!"

"아, 아버지."

"네놈이! 테슬라를, 이 제국을 뉴브라, 그놈들에게 팔아넘기면 정녕 황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더냐!"

"아, 아, 아버지…!"

오웬이 말을 더듬었다.

다 알아버렸다.

케틀란이 다 알아버리고 말았다.

"테슬라의 긍지를 더럽힌 네놈은 이제 영원토록 테슬라라는 이름을 쓰지 못할뿐더러 그 죗값마저 치르게 될 거다."

"제, 제가, 아니, 소자가 잘못했습니다! 소자가 어리석어 눈이...."

"이제 네놈이 할 수 있는 건 죄를 지은 사실을 전부 다 남김없이 말하는 것뿐이다, 어리석은 죄인이여."

케틀란은 결코 끊어질 수 없는 부자의 연을 억지로 잘라냈다.

가슴이 도려내는 것처럼 아팠다.

하지만 자신은 황제였다.

정의란 검은 자신의 자식에게도 똑같이 휘둘러져야 했다.

그게 왕관을 쓴 자라면 피할 수 없는 가장 큰 슬픔이었다.

* * *

"제 선물이 잘 도착했으려나 모르겠습니다."

루시온은 검은 구슬을 손에 쥐기 전에 러쉘을 보며 물었다.

[잘 도착했겠지. 네가 어떻게 돌아다니며 오웬 그놈이 뒷공작을 한 증거를 열심히 모았는데.]

"폐하께서는… 다르시겠죠?"

[루시온. 이런 말을 하는 게 탐탁지 않겠지만, 헤인트하고 다시 말을 나눠봐. 물론 그놈이 잘못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다른 황실 기사들도 있는데 네가 헤인트를 선택했잖아?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루시온은 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나마 말이 통하니, 저 붉은 실을 자르고 싶어서 선택했다.

솔직히 자신이라고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

'그래. 황실 기사로서 본분을 다하려다, 그딴 식으로 말해?'

루시온은 인상을 왈칵 구겼다.

"떠올리니까 열 받네요. 한 대 더 칠 걸 그랬습니다."

[다음에 만나면 확실히 쳐. 베델하고 빙의해서.]

"예. 제대로 치겠습니다."

그제야 루시온은 실실 웃으며 라타를 쓰다듬고, 제 머리맡에 있는 검은 구슬을 보았다.

"좋은 꿈 꾸고 올게요."

[그래.]

러쉘은 또 무슨 기억을 찾을지 두려웠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루시온은 검은 구슬을 손에 쥐었다.

검은 구슬이 제 몸을 향해 녹아내리며 스르르 잠에 빠졌다.

* * *

'엄청 빨리 왔네?'

검은 형체가 루시온을 반겼다.

그는 이제 어떤 모습을 띠었는데 이상하게 낯익었다.

'검은 구슬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루시온이 대답했다.

'그럼 오늘도 다음 이야기를 해봐야지. 기다렸을 거 아니야?'

딱.

검은 형체가 손가락을 튕기자 소파가 나타났다.

'편안하게 앉아, 루시온.'

'점점 힘이 생겨나는 것 같다?'

루시온은 그를 경계하며 말했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 하지만 경계하지 마. 나는 무조건 네 편이니까.'

검은 형체가 실실 웃는 목소리를 냈어도 그 경계심이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루시온은 우선 검은 형체가 만들어낸 소파에 앉았다.

'너는 대체 누구지?'

'그래. 그게 궁금하겠지.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밝힐 수 없어.'

'왜?'

'전에 말했지? 여기에 오래 있으면 나한테 먹힐 거라고. 그래서 그래.'

'내 편이라며?'

'맞아. 네 편이야.'

'이건 말이 맞지 않잖아.'

'루시온. 초조해하는 건 이해해. 하지만 어차피 네가 원하지 않아도 내가 누구인지는 금방 밝혀질 거야. 내 모습 안 보여?'

검은 형체가 양팔을 펼쳐 보였다.

점점 어떤 모습을 되찾고 있다는 건 굳이 그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검은 형체가 자신을 찬찬히 살폈다.

'그 뒤로 베로니아는 만난 적 없어서 다행이네. 상태는… 뭐어, 여전히 그저 그렇네.'

'부서진 세계의 일부분이라는 건 무슨 말이었어?'

'그건 안타깝지만 나도 다 듣지 못했어.'

'듣지 못했다니? 누가 너한테 그 말을 했다는 거야?'

'맞아. 내가 아는 건 말이야, 세계가 지금 뭔가로 덮여 있고, 그걸 만든 게 바로 베로니아라는 사실뿐이야.'

'베로니아… 그놈이? 그놈이 어떻게 그렇게 힘을 가지고 있는 거지? 사람이 맞긴 해?'

'베로니아가 누구인지 오늘 이야기를 들으면 감이 올 거야. 들을래?'

'해 봐.'

루시온의 허락에 검은 형체는 가볍게 웃었다.

'저번 이야기는 기억하지?'

'기억해. 빛의 축복을 받은 놈들 때문에 균형이 깨져서 타락이 세상을 덮쳤다며.'

'맞아. 기억력이 좋은데?'

검은 형체는 넌지시 말을 던졌다.

하지만 루시온의 표정에 변화가 없자 검은 형체는 헛기침하다 입을 열었다.

'타락은 어둠의 종을 좀먹었고, 어둠의 종은 괴물이 되었다.'

'...?'

루시온은 순간 움찔거렸다.

라비엔이 타락하면 괴물이 된다니.

'빛은 괴물을 죽였고, 어둠의 종까지 죽였다.'

검은 형체는 루시온의 반응을 보면서도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어둠의 종은 살기 위해 숭배하던 어둠을 찾아가 빌었다.'

루시온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망토를 입은 자.

누군지 몰라도 자신이 그자가 되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애처롭게 빌지 않았던가.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그놈이 베로니아였어?'

'맞아. 베로니아야. 꿈을 통해서 봤잖아?'

'그놈이 나오는 꿈을 내가 왜 꾸는 건데?'

'그릇이니까. 지금 부서진 그릇이 낫고 있잖아? 회복 과정에서 막 뭐가 떠오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어쨌든 그 외에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게 있어?'

루시온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릇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보다 더 기분이 더러웠다.

그딴 놈의 꿈을 꾸다니.

'라비엔이 정말로 괴물이 된다는 말이야? 아니면....'

'맞아. 애초에 타락에 약하고, 타락에 침식되면 말 그대로 몬스터가 되어버려.'

몬스터.

흄이 자신을 소개했을 때 처음 내뱉었던 말이었다.

그래서 몬스터였다.

세간에 알려진 몬스터는 정말로 타락에 침식된 라비엔이었다.

'그러니까, 조심해. 흄을 절대 타락 곁에 두게 하지 마.'

검은 형체는 흄을 걱정했다.

'…흄 말이야.'

루시온은 말이 나온 김에 자신의 의문을 터트렸다.

아샤는 자신을 마지막 라비엔이라고 소개했다.

그때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저 또 다른 라비엔인 흄을 반기기에 자신도 기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지막이라는 건 큰 의미가 있었다.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존재란 뜻이었기에 흄은 라비엔의 손에서 탄생한 존재가 아니란 뜻이었다.

그걸 증명하듯 흄은 자신이 흑마법사 손에 만들어졌다고 했다.

작은 방에 가둬져 아주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고 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는 흑마법은 없었다.

'흄을… 도대체 누가 만든 거야?'

218화. 넘실거리다

'그건 내가 아니라 흄한테 물어봐야겠지?'

검은 형체가 대답했다.

'정확히 말해서 흄은 나도 잘 몰라. 아마 본인 말고는 아무도 모를걸?'

'아무도라는 건… 어둠을 말하는 거야?'

'그리고 러쉘.'

검은 형체가 러쉘을 언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승님을 왜?

'자, 이제 다음에 만날 시간이야. 얼른 오길 바랄게.'

검은 형체는 손을 흔들었다.

* * *

쏴아아.

비가 내렸다.

이하람일 때인가.

퍼억!

무언가 머리를 강타하고, 열려 있던 크로스백에 물건들이 우르르 떨어졌다.

손에 쥐고 있던 우산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고, 주변이 빙글빙글 돌며 또 피가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비에 몸이 젖어가자 부르르 떨렸다.

"…루시온? 루시온…!"

아닌데.

지금은 이하람인데.

"이, 이 바보야! 그걸 왜 피하지 못해서 얻어맞냐고! 피했어야지! 내가 검도 가르쳐줬잖아!"

속상한 목소리가 무척 낯에 익었다.

아.

스승님이다.

진짜로 스승님이네.

근데 언제 가르쳐주셨죠?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봐."

러쉘은 다급히 걸음을 옮겨 떨어진 우산을 쥐어서는 루시온을 씌워주었다.

머리에 떨어지는 비는 멈췄지만, 루시온의 부들부들 떨리는 몸이 멋질 않았다.

"이게 뭐야."

뭐가요.

"말이라도 섞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게요.

"이렇게 죽었던 거야? 이렇게… 쓸쓸하게 죽어버렸던 거야?"

그런가 봅니다.

"이 멍청아.... 너는 진짜 어떻게 된 게 변하질 않아. 멍청한 게 왜 달라지질 않아."

기분 나쁠 법한 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당장 키득거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 봐봐. 루시온."

러쉘은 쪼그려 앉았고, 비를 맞으며 자신에게 손을 뻗었다.

"나는 러쉘이야. 러쉘 폴."

러쉘은 새삼스레 자신을 소개했다.

이미 알고 있는데.

"지금까지 쭉 네 스승이었던 사람."

그것도 알고 있는데.

"네가 몇 번, 몇십 번이고 살렸던 사람."

지금 뭐라고 하는 건지.

루시온은 말을 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 너를 살릴 사람."

러쉘이 환하게 웃었다.

이전에는 흐릿하기만 했는데 이제야 그의 얼굴에 새겨진 이상한 무늬를 알았다.

저건 저주였다.

온몸에 저주가 덮여버린 것이었다.

스승님.

스승님 대체.

대체 뭘 하신 겁니까?

* * *

루시온은 천천히 눈을 떴다.

이건 단지 꿈이 아니었다.

과거에 러쉘과 만났다.

만나서 그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루시온은 라타가 깨지 않게 조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러쉘이야. 러쉘 폴. 지금까지 쭉 네 스승이었던 사람. 네가 몇 번, 몇십 번이고 살렸던 사람.

'몇 번, 몇십 번이나 살렸다고? 내가? 스승님을?'

루시온은 러쉘이 빈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 너를 살릴 사람.

러쉘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늘 보고 있지만, 갑자기 러쉘이 보고 싶었다.

"막내 도련님…?"

복도를 걷다 마주친 시종이 깜짝 놀랐다.

이내 반갑게 웃으며 물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흄을 부를까요?"

"아니. 괜찮네. 혹시 흄을 만나면 곧 방으로 돌아간다고 말해주게."

"알겠습니다. 옷이 얇습니다. 조금 더 두껍게 입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금 여름이지 않은가."

"열이 있으신 듯합니다. 얼굴이 붉습니다."

"괜찮네."

루시온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발을 움직였다.

아까부터 저택 내부가 덥고, 시선이 살짝 흔들린다고 생각했는데, 열 때문이었나.

루시온은 숨을 고르며 복도를 거닐고, 계단을 올랐다.

보이는 시종마다 자신의 안부를 묻고, 또 반겼다.

'지금 몰골이 나쁜가 보네.'

루시온은 대충 생각하며 러쉘이 좋아하는 저택의 옥상으로 향했다.

지금쯤 베델은 저택 근처에 있는 폭포를 보러 갔겠지.

그녀 역시 이 장소를 좋아하지만, 폭포를 더 좋아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그 장면이 너무 좋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곳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단 산이었고, 벌레가 너무 많았으니까.

요새는 특히 모기가 귓가에 앵앵거리는 게 질색이었다.

하지만 가을쯤에 그 폭포로 가기로 베델하고 약속했다.

잠결이라 그런지 별생각이 다 떠올라 루시온은 피식 웃었다.

[…루시온?]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던 러쉘이 아직 세수도 하지 않은 듯 보이는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물은 먹었고? 세수는?]

"라트초도 아직 안 먹었습니다."

라트초를 먹지 않았다는 말에 러쉘은 노심초사하며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혹시 악몽이라도 꿨어? 그럼 날 부르지 그랬어. 당장 달려갔을 텐데.]

"제가 라트초를 먹지 않은 게 그렇게 큰일입니까?"

루시온이 낄낄 웃었다.

[넌 하늘이 두 쪽 나도 라트초를 먹고 있을 애야.]

그 말에 루시온은 배를 잡고 웃다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천천히 웃음을 지워나갔다.

"스승님."

[그래.]

"저, 스승님이 보고 싶어서 제 발로 왔습니다."

[잠이… 덜 깼어?]

"생각해보니 매번 스승님만 저한테 오셨잖습니까. 가끔은 제가 먼저 스승님한테 가도 되지 않겠습니까?"

[루시온. 그 검은 형체가 너보고 뭐라고 지껄였길래 그래?]

루시온의 반응에 러쉘은 눈살을 찌푸렸다.

"많은 것을 알려줬습니다. 그중 꺼내서는 안 되는 말도 있고요."

루시온은 자신의 눈높이에 맞춰 천천히 내려왔다.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몸에 칭칭 감긴 실이 너무 많았다.

[네가 말했던 것처럼 너도 억지로 말할 필요 없어, 루시온.]

러쉘이 루시온을 달랬다.

"제가… 스승님을 속이고 있는 것 같아서, 스승님이 저에게 실망할까 봐. 그게 무섭습니다."

[나는 단 한 번도 너한테 실망한 적 없어. 그런 생각을 할 필요도 없고. 정말로 악몽을 꿨나 보네.]

러쉘의 목소리가 조금 전 덮고 나온 이불처럼 포근했다.

이러면 다 말해버리고 싶지 않은가.

다 꺼내서 알리고 싶지 않은가.

"제가 이 말을 하면. 그 말을 꺼내면 스승님께서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래서 두렵습니다."

러쉘은 일그러진 루시온의 표정을 보며 머리를 꾹 눌렀다.

[루시온.]

"예."

[나는 이미 죽었어.]

"...."

[네가 보는 건 한낱 유령이야. 이제는 알고 있잖아? 여기서 내가 물러날 곳은 없어.]

"…압니다. 알고 있어도 붙잡고 싶습니다. 제가 죽기 전까지 그러면… 안 됩니까?"

자신은 흑마법사니까.

설령 죽음을 보아도 그 마지막만큼은 붙잡을 수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못 한다면 애초에 왜 유령들을 볼 수 있게 해뒀단 말인가.

[루시온.]

러쉘의 목소리가 조금 전과 달리 떨렸다.

"스승님."

하지만 루시온이 먼저 목소리를 냈다.

"제가 꿈을 꿨습니다."

조심스럽게 시작했다.

"그 꿈에서 스승님이 나왔습니다."

마치 오다가 본 걸 말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스승님께서...."

치치직.

텔레비전이 고장 났을 때 들려오던 불쾌한 소리.

―이게 마지막이야.

눈앞에 그 글씨가 떠올랐다.

이번에는 세상이 멈추질 않았다.

대신 원하지 않았던 게 나타나고 말았다.

'…제발.'

루시온은 온몸에 피가 마르는 기분을 느꼈다.

베로니아, 그놈에게 보았던 검은 실이 바닥에서 뚫고 나와 러쉘을 옭아맸고, 자신마저 엮었다.

'제발, 이러지 마.'

바닥이 꺼지는 기분에 루시온은 당장 무너져내릴 것만 같았다.

기어코 실이 러쉘을 엮었다.

마치 이게 순리라는 듯이.

어디 한 번 정해진 죽음을 피해 보라는 듯이.

검은 실.

보기만 해도 역겹고, 끔찍한 실에 루시온은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루시온?]

러쉘은 루시온의 이상 증세에 그를 붙잡았다.

[너, 너 왜 그래? 검은 구슬 때문이야?]

"…아닙니다. 그냥 어지러워서 그렇습니다."

루시온은 목구멍을 간질거리는 감정을 꾹 누르며 입꼬리를 올렸다.

[방으로 가자. 내가 바로 흄을 불러올게.]

"아닙니다. 잠깐 앉으면 괜찮습니다."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네 의자에 앉았다.

순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루시온은 내색하지 않았다.

실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검은 실은 달랐다.

베로니아와 러쉘, 그리고 자신.

마치 이 세 명을 위해 만들어진 무대라고 알려주듯 '마지막'이라고 글자가 나타나지 않았던가.

루시온은 그네 의자에 달린 줄을 꽉 쥐었다.

꿈에서 러쉘이 말한 사실이 진짜였다.

사람을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살리는 건 불가능했다.

'…세계가 반복되고 있다.'

루시온은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들어버렸다.

하.

루시온은 숨을 깊고 깊게 내쉬었다.

러쉘이 이전에는 자신이 먼저 죽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신을 살리겠다고 했다.

이건 애초에 소설 속 세계가 아니었고, 자신이 소설이라 생각했던 '어둠의 손아귀'는 몇 번째인지 몰라도 이전 세계의 것이었다.

―맞아. 내가 아는 건 말이야, 세계가 지금 뭔가로 덮여 있고, 그걸 만든 게 바로 베로니아라는 사실뿐이야.

검은 형체가 말했던 뭔가로 덮인 것.

그게 뭔지 몰라도 세상은 어둠의 손아귀, 소설 이름 그대로 베로니아의 손아귀에 있었다.

책의 형식을 빌려 자신에게 이 힘을 준 건 스승님이었을까.

"스승님."

[역시 몸이 이상하지? 흄을 불러올게.]

러쉘은 또 자신을 걱정했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스승님."

루시온은 반짝거릴 만큼 활짝 웃었다.

러쉘은 과거에도, 지금도 언제나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자신의 스승님이 되어주셨다.

그게 너무도 고마웠다.

얼마나 힘겨웠을까.

러쉘이 기억을 잃은 건 자신 때문이었다.

자신을 살리고자 기꺼이 떠안은 대가였다.

[…알… 았어?]

러쉘은 조용히 흐르는 루시온의 눈물을 보며 말을 더듬었다.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네가....]

"죽었죠."

루시온은 일부러 짧게 말했다.

러쉘의 얼굴이 바로 일그러졌다.

[미안해. …미안해, 루시온.]

떨리는 목소리에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히 발을 차 그네 의자를 흔들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건 사과하지 말아 주십시오. 제발요."

루시온은 숨을 들이켜며 흘러내린 눈물을 닦았다.

"…다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는 걸 들었습니다."

[누가…? 어둠이?]

루시온은 러쉘의 물음에 입술을 꾹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나?]

러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그랬다고? 나는 너한테....]

러쉘은 말을 멈췄다.

이번에 맞춰진 기억의 조각은 몇 번째 루시온인지 몰라도 그와 보냈던 기억들이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도려질 만큼 아프고 시렸다.

자신이 떠올린 기억 중 누군가에게 아주 중요한 듯 무언가를 말한 기억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비가 내리던 그 날. 낯선 세계에서 내가 보았던 그 남자가… 그 남자가 너였어?]

"예. 맞습니다."

루시온은 다시금 눈물을 흘렸다.

"바로… 접니다."

러쉘은 자신이 그 남자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몰랐다.

그렇기에 너무도 안타까웠다.

"스승님."

루시온은 입꼬리를 올렸다.

얼마나 힘겨운지 바들바들 떨리기까지 했다.

[그래, 루시온.]

"전, 다시는 죽지 않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않을 겁니다."

언제나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루시온의 눈빛은 너무도 곧았다.

저 곧음이 부러지지 않을까 조마조마할 정도로.

또 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절 대신하지 말아 주십시오."

자신을 대신해 죽지 말아달라.

그 잔혹한 부탁을 루시온이 꺼냈다.

러쉘은 그토록 곧은 눈이 어떻게 흐려지고, 생기를 잃으며 숨이 꺼져버렸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만 보여줬으면.

제발 멈춰달라고 빌고 싶을 정도로 루시온은 자신을 위해, 때로는 갑작스럽게 그렇게 죽어버렸다.

'아....'

러쉘은 알았다.

루시온이 알고 있는 건 이전 세계의 자신이라는 걸.

루시온을 대신해 빛을 맞고 사라진 자신이라는 걸.

[루시온. 나는 이미 죽었어. 나는 이미 죽었다고.]

"그러니까 부탁드리는 겁니다…!"

루시온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러쉘의 옷자락을 잡았다.

러쉘이 죽은 걸 왜 모르겠나.

하지만 자신은 설령 그가 유령이라도 해도 흑마법사니까, 그를 보고 말을 나눌 수 있었다.

만약 사라지면.

사라진다면 영원히 끝이지 않은가.

"그냥, 제 어리광이라고 생각하고 받아주십시오. 제발요!"

루시온의 고개가 미끄러지듯 숙어졌다.

"제 행복 속에… 스승님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반드시 말입니다."

루시온은 떼를 부리듯 목소리를 냈다.

온몸을 떨다시피 하며 말을 꺼내는 루시온이 러쉘은 이토록 안쓰러울 수가 없었다.

산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너무도 커서 그들에게 정을 붙이지 못하고 죽은 자신에게 정을 붙이고 말았다.

이렇게 깊도록.

[이게, 루시온 네가 바라는 행복이었어?]

평범한 행복.

루시온이 내내 입에 담았던 소망이자 바람이었다.

"…맞습니다. 제가 바라는 행복입니다."

루시온의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저 때문에 흩어졌던 가족이 모이고, 제가 믿을 수 있는 사람과 평범한 듯, 조금 특별한 듯 그렇게 사는 것 말입니다."

러쉘의 옷자락을 잡은 루시온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아시잖습니까."

루시온은 울음을 토하며 간절히 목소리를 냈다.

"제가 이렇게… 이렇게, 그토록 바라던 소망으로 향할 수 있게 도와준 건 스승님이잖습니까. 저를… 사람으로서 살아가게 해준 건 스승님인데, 왜 제 행복 속에 스승님이 빠져야 합니까?"

러쉘이 자신을 구렁텅이에서 꺼내줬기에 그 방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저는 그런 거 싫습니다. 저는… 그렇게 못 합니다."

[…루시온.]

러쉘이 피식 웃었다.

루시온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범벅이 된 모습은 영락없는 아이와 같았다.

[네 어리광은 이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너무 크네.]

러쉘은 루시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몇 번을 반복해도 루시온은 똑같았다.

저토록 보는 사람이 애가 타게 해 차마 할 수 없는 걸 자꾸 부탁하지 않던가.

[네가 죽어가면서 나보고 행복하게 살라고 했는데. 하나밖에 없는 제자를 지키지도 못한 못난 놈이 어떻게 그렇게 살겠어?]

가벼운 말과 달리 목소리에는 짙은 죄책감이 묻어났다.

[나는 절대 그렇게 못 해.]

"스승님…!"

[살아라, 루시온.]

러쉘이 이빨이 드러날 정도로 활짝 웃었다.

[나는 죽었으니 산다는 건 이상하잖아? 그러니까 넌 살아라. 나는 뭐, 이대로 있어 보도록 할게. 그럼 됐지?]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스르르 손을 놓고 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살아라'라는 말이 왜 이렇게 기쁜지.

"…예."

루시온의 어깨가 들썩거리며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졌다.

"예. 그걸로. 그걸로 됐습니다."

219화. 넘실거리다(2)

* * *

라트초를 먹고, 빛을 쐬고, 덤으로 피도 토하며 산뜻하게 아침을 시작했다.

[이래서 스승이 제자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나왔나 봐.]

러쉘이 옆으로 누워서는 루시온에게 빈정거렸다.

생각하니 괘씸했다.

스승은 제자보다 먼저 가고 되지만, 제자가 스승보다 먼저 가는 놈이 어디 있던가.

루시온은 아주 괘씸한 제자였다.

"제가 언제 스승님을 이겼습니까?"

러쉘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루시온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조금 전에. 울면서 내 고집을 꺾었잖아.]

―러, 러쉘이 루시온을 울렸어? 러쉘이…! 루시온한테 1등인 러쉘이!

라타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마치 처음으로 배신을 당한 것처럼 라타는 그대로 러쉘을 원망하며 바라보았다.

[내가 울린 거 아니야. 그리고 그 뒷말은 마음에 드네.]

러쉘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암. 스승이라면 모름지기 그래야지.

-응! 루시온한테 1등인 러쉘이 그럴 리가 없지. 라타가 오해해서 미안해.

그제야 라타가 눈을 깜박거리다 배시시 웃었다.

"안 울었어. 운 적 없다니까, 라타."

루시온이 미간 사이에 주름을 잡았다.

"그리고 이제 1등은 너야, 라타."

―홉! 라, 라타가! 라타가 1등이야?

라타는 발바닥에 스프링이라도 달린 것처럼 힘차게 뛰며 좋아 죽었다.

―얏호! 라타가 1등이야! 라타가 1등!

반대로 러쉘이 자신을 째려보듯 쳐다봤지만, 가끔 이런 날도 있어야지. 1등이 영원할 순 없잖은가.

"눈가가 붉습니다."

흄은 루시온의 옷가지를 정리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냥 좀 나쁜 꿈을 꿨을 뿐이야."

루시온은 시선을 흘리다 문득 자신의 옷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흄. 이거 외출복이 아닌데?"

"압니다. 실내복입니다."

"이걸 왜 줘?"

"...."

흄의 눈이 커졌다.

루시온의 열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당장 의사를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나 멀쩡해."

"옷이 땀으로 흠뻑 젖었습니다."

주르륵.

눈치도 없이 코피가 흘러내렸다.

―…홉! 루시온! 어떡해! 어떡해!

언제 뛰었냐는 듯 라타가 다급히 루시온의 주변을 빙그르르 돌아다녔다.

진짜 걱정하다 나중에는 도는 게 재미있는지 이내 꺄르르 웃기 시작했다.

"도련님. 보셨습니까? 몸은 정직합니다."

흄이 손바닥으로 침대를 가리켰다.

"순례길을 다녀오신 후에 검은 구슬을 두 개나 흡수하셨습니다. 저번에 하나만으로도 몸에 이상증세가 나타났는데 무려 두 개를 드셨으니 멀쩡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루시온은 순례길로 가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만, 왜인지 몰라도 아버지하고 형님 두 분 다 저택에 꼼짝하지 않아 곤란하던 참이었다.

누구 한 명이라도 변경에 있는 성벽으로 나가야 경계가 덜할 텐데.

"게다가 아침에 아픈 몸으로 돌아다니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흄의 잔소리는 끝나질 않았다.

"그때는 아프지 않았어."

"제가 들은 바로는 그때도 편찮아 보이신다는 말이 많았습니다."

"다들 눈이 안 좋은...."

서걱.

붉은 실이 갑자기 잘렸다.

'누구지?'

루시온은 말을 멈추고 잘린 실을 보았다.

체이톤이었다.

'아. 다 불었나 보네.'

루시온은 피식 웃었다.

이제 곧 트웰로랑 나란히 목이 잘리려나.

"…도련님?"

흄이 갑자기 입꼬리를 올렸다 내리는 모습에 실례한다며 말하고는 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조금 전보다 높아졌네요. 해열제랑...."

지잉.

그때, 눈치도 없이 연락용 아이템이 울렸다.

흄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크라언인 게 뻔한데. 줘봐."

루시온이 손을 내밀었다.

45호를 비롯한 흑마법사 일로 연락이 왔을지도 몰랐다.

"그럼, 일단 누워 계십시오. 식사는 여기로 가져오겠습니다."

"아니야. 가서 먹을 거야. 아버지하고 형님이랑 같이 먹고 싶어."

마탑에 가려면 또 아버지와 담판을 지어야 할지도 몰랐다.

아마 이번에는 쉽게 허락하지 않을 테지.

하지만 자신에게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다.

"…그럼 제가 불러오겠습니다."

흄이 머뭇거리다 눈에 힘을 주었다.

"아버지를?"

"예. 가주님께서 원하는 게 있으면 언제든 편하게 말씀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그게 아닌데.]

흄이 잘한다며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던 러쉘이 눈을 크게 떴다.

[흄. 그건 그 말이 아니야.]

"가주님께서 거짓말을 하셨다는 말씀입니까?"

흄은 충격을 받은 얼굴이 되었다.

[아니, 아니. 거짓말이라기보다는 그러니까, 입에 발린 말이라는 거지.]

"거짓말이 아니라면 한번 부딪쳐보겠습니다. 아, 천천히 갔다 올 테니 도련님께서는 편하게 연락하십시오."

흄이 연락용 아이템을 루시온에게 넘긴 후에 말과 달리 자신이 침대에 누울 때까지 바라보았다.

'뭐지? 왜 저렇게 바라보는 건데?'

루시온이 침대에 눕자 그제야 흄은 환하게 웃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흄이 왜 이렇게 무서워졌죠?"

문이 닫힌 후에야 루시온이 입을 열었다.

[그래. 네가 막 구르는 건 생각이 안 나지?]

"제가요?"

러쉘은 루시온의 대답에 코웃음을 쳤다.

저럴 줄 알았다. 참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멜 님.>

루시온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연락용 아이템을 사용하자 바로 크라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크라언. 흑마법사들은 잘 있고?"

<예. 적응하는 건 시간이 필요할 듯합니다. 현재 부상자들을 치료했고, 지금 그, 음, 이름 짓기에 한창 들떠 있습니다.>

"라인트가 신났겠네."

<맞습니다. 이름 짓는 걸 가장 열정적으로 돕고 있습니다.>

"덤으로 흑마법사의 정보도 얻고 말이야."

<예. 그렇습니다.>

크라언이 잠깐 웃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입니까? 이렇게 많은 흑마법사는 처음 봅니다.>

흑마법사는 고작 20명도 되지 않았다.

그걸 많다고 표현하는 게 참 우스웠지만, 루시온은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크라언은 알고 있어야 했다.

<…시, 신수가 죽었다고 그랬습니까?>

"그래."

<신수가....>

크라언은 충격에서 쉽게 헤어나오질 못했다.

말을 잇지 못했고, 저 멀리서 어렴풋이 욕지거리를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걸어오는 소리에 이어 크라언은 혹시 몰라 사과했다.

"아니야. 어쨌든, 오늘 용건은 이제 다야?"

<아, 아닙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뭔데?"

<헤인트 님이...>

"알았어. 연락을 달라는 거지? 내가 간다고 전해."

루시온은 도중에 말을 잘랐다.

어차피 트로에에게 이 소식을 알려줘야 했기에 중부에 들를 예정이었다.

검은 구슬을 흡수했으니 그림자 이동의 거리가 이전보다 더 길어졌고.

'그런데 순례길까지는 갈 수 있으려나.'

<괜찮으십니까?>

크라언은 조심스레 물었다.

"나보다 트로, 아니 신수가 걱정이지.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을 당한 건데."

―라타도 트로에 아저씨가 걱정이야.

라타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루시온은 라타의 입을 툭툭 건드리며 이어 말했다.

"조만간 찾아갈게. 흑마법사들에게 해야 할 말도 있거든."

<알겠습니다. 늘 몸조심하시고, 세끼 꼬박꼬박 챙겨 드시는 거 잊지 마시고, 밤에는 돌아다니지 마시고 꼭 주무....>

루시온은 듣다못해 연락용 아이템이 끊었다.

저번에 황제, 케틀란을 만났을 때 죽음의 바다 이야기와 함께 정화를 할 수 있는 자는 오직 흑마법사뿐이라고 알려준 적이 있었다.

'이제는 저들을 데리고 죽음의 바다를 정화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나눠야겠네.'

루시온은 숨을 골랐다.

샤엘라하고도 아직 연락하지 못했다.

어떻게 위험을 전해야 할까.

느닷없이 조심하라고 말할 수도 없고.

'누님도 눈치가 빠르신데.'

루시온은 잠깐 눈을 감았다.

만약 마탑에 공허의 손이 기어들어 갔다면 샤엘라도 위험했다.

흑마법사의 현혹과 매혹을 마법사들이 피할 수 있을까.

"스승님."

[왜?]

루시온은 라타를 쓰다듬으며 생각하고 생각했다.

―라타는 이제 공 가지고 놀 거야.

라타는 루시온의 손아귀를 파고들며 비비적거리다 침대 밑으로 내려갔다.

삐익!

"마탑 안에 빛이 있을까요?"

[아마 없지 않을까? 마법사들이 빛이 깃든 물건을 건다고? 되게 이상한데?]

러쉘이 곰곰이 생각하다 말을 던졌다.

[샤엘라 때문이야?]

"맞습니다."

[현혹과 매혹 때문이라면 일단 마법사들이나 기사같이 마나를 갈고 닦은 이들은 정신력이 엄청 높아. 쉽게 걸리진 않지.]

"하지만 결국, 걸리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렇게 따지면 안 걸릴 사람이 누가 있겠어?]

"만약에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서 한다면 어떻습니까?"

[무조건 뚫려. 이건 어쩔 수 없지. 아무리 마법사가 정신력이 높아도 혼자가 아니라 다수라면 쉽게 뚫릴 테고, 설령 혼자라도 어떤 대가가 있다면 더 빨리....]

러쉘은 말을 멈췄다.

루시온이 자신에게 이를 물어보는 이유는 단순히 저 사실이 궁금한 게 아니었다.

[루시온 너 지금 공허의 손이 처음부터 마탑에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 같은데? 맞아?]

"맞습니다. 정확히는 공허의 손과 손을 잡은 마법사가 있었겠죠."

마탑은 외부인이 들어가기가 무척 까다로웠다.

하지만 내부인이 밖으로 나오는 건 외부인보다 상대적으로 간단한 편이었다.

"혹시 기억하십니까? 제가 지부를 처음 얻은 날, 그때 피터에게 걸린 추적을 역추적했잖습니까."

피터가 멋대로 가출을 강행해 공허의 손에게 추격용 흑마법을 걸려온 적이 있었다.

[기억하지. 그때 어영부영 넘어갔잖아?]

"마탑이었습니다."

루시온은 목에 힘을 주었다.

"피터에게 추격용 흑마법을 건 놈은 공허의 손이었고, 그 역추적이 마탑으로 향했다는 건 제 가설에 가능성이 있는 거 아닙니까?"

[이건 가능성이 아니라 그냥 확정인데?]

러쉘이 눈에 힘을 주며 턱을 매만졌다.

[네가 부숴버렸던 마법사 단체 루미노스 말이야. 그놈에게 공허의 손이 어떻게 접근했나 싶었는데 중개인이 마탑 소속 마법사라면 아주 자연스럽네.]

"…그렇다는 건 역시 지금쯤 마탑에 당도했겠네요."

[그놈들이 노리는 게 뭐겠어?]

"마법사와 일반인, 그리고 혼란이겠지요."

루시온이 얼굴을 구겼다.

조만간 마탑이 개방하게 된다.

그 날짜를 아는 건 황제를 포함한 몇몇 고위 귀족과 내부인뿐.

공허의 손과 손을 잡은 마법사가 있다면 날짜를 아는 건 아주 손쉬울 테지.

[공허의 손이 원하는 건 힘으로써 흑마법사의 권리를 되찾는 건데. 마탑 개방은 놈들에게 있어 아주 환상적인 먹잇감이지.]

러쉘 말이 맞았다.

마법사를 흑마법으로 사로잡고, 마탑을 구경하러 온 일반인을 공격한다면 설령 제국을 등지더라고 모두가 알게 되겠지.

흑마법사가 가진 힘이 단지 소문이 아니라 사실임을.

'내가 막아야 해.'

반복되는 세계라는 건 과정이 조금씩 다르지만, 그 결과는 똑같은 세계를 말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자신이 붉은 실을 자르려고 저항하는 행위 자체가 베로니아를 막는 길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결과를 완전히 바꿔놓을 테니까.

"아무래도 조직 에일을 세상에 알릴 시간이 온 모양입니다."

공허의 손이 마탑을 지배할 거라는 걸 알았으면 어서 행동해야 했다.

하지만 마탑 주변에 유령들이 깔릴 테고, 따라 황제가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 건 지금으로서 자신의 조직뿐이었다.

[미리 선수 치게?]

"예. 놈들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움직여야겠습니다. 그간 놈들이 해온 짓을 생각하면 역시 뒤통수를 후려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름다운 결말이란 모름지기 자신이 행복해야 하는 법이었다.

루시온은 벌써 입꼬리가 간질거렸다.

최종 보스는 브로슨도 겨룰 수 있을 만큼 약했다.

그럼 해볼 만하지 않은가.

[그래서… 네가 이렇게 필사적이었네.]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러쉘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삐익!

라타의 공 소리를 들으며 루시로은 몇 번을 생각했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그럼, 황제한테 다 지원해달라고 해야지. 이 정도는 해주겠지?'

루시온은 곧 입꼬리를 올리며 행복감에 젖어갔다.

물론 지금도 좋지만, 조직원들이 더 좋은 무기와 좋은 옷으로 바꿀 수 있다니.

[그래. 황제한테 뜯을 거면 확실히 뜯어야지.]

슬그머니 들려오는 러쉘의 말에 루시온은 깜짝 놀랐다.

"…혹시 독심술 익히셨습니까?"

[네가 너무 티가 나는 거야.]

"스승님의 눈치가 빠르신 겁니다."

[어. 벌써 일어났는가, 루시온 공?]

베델이 벽 너머로 고개를 내밀다 루시온을 향해 활짝 웃었다.

―베델! 좋은 아침이야!

라타가 공을 문 채로 베델을 향해 꼬리를 흔들었다.

[라타도 잘 잤어?]

베델은 라타를 쓰다듬으며 루시온을 살폈다.

[루시온 공이 제 발로 침대에 누울 리가 없고. 흄이 이랬는가? 얼굴이 붉은 걸 보니 열이 이제 들끓기 시작한 모양이야.]

"…안 그래도 흄한테 한 소리 들었어. 봐봐. 얌전히 있잖아."

루시온이 투덜거리자 베델은 쿡쿡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흄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은 또 움직였을 게 아닌가. 아마도 트로에를 만나러 중부로 갔겠지.]

"헤인트 형님도 만나러 갈 거야."

[화해하러 가는 건가?]

베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화해는 무슨."

루시온은 이불을 눈 밑까지 끌어당겼다.

"형님이 먼저 나한테 잘못했다고 신호를 보냈으니까, 동생으로서 못 이기는 척 넘어가야지."

220화. 넘실거리다(3)

솔직히 하룻밤 자고 나니 거의 다 풀려버렸다.

순간 헤인트에게 실망해 멋대로 소리친 자신도 잘못하지 않았던가.

분명 뭔가 이유가 있었겠지.

―잘했어, 루시온. 너무 착해!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라타의 칭찬에 러쉘과 베델이 웃음을 터트렸다.

의도는 알겠지만, 루시온은 기분이 묘했다.

―싸우면 화해해야 한다고 했고, 엄, 화해를 받아주는 건 아주아주 힘든 일이래. 그래서 루시온이 엄청 착하다고 생각해!

라타는 앞발을 들어 루시온을 쓰다듬었다.

똑똑.

[노비오가 왔나 보네.]

러쉘이 문을 바라보다 베델에게 손짓했다.

[우리는 자리를 비켜주자고.]

[그대가 웬일인가?]

[가끔 이런 날도 있어야지. 그렇지 않아?]

러쉘이 씩 웃으며 먼저 방을 빠져나왔다.

루시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노비오가 잠깐 놀란 눈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땀을 삐질 흘리며 한껏 상기된 루시온의 얼굴을 보자마자 당장 이마에 손을 올렸다.

뜨거웠다.

"열감기더냐?"

"걱정하지 마세요. 가끔 이렇게 열이 날 때가 있잖습니까. 흄이 아버지를 부른다고 했을 때도 놀랐지만, 진짜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루시온은 노비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지 눈웃음을 지었다.

문이 스르르 열리고 카슨이 피식 웃었다.

"막내가 어리광을 부리니 와야 하지 않겠더냐."

"어, 어리광이라뇨?"

"흄이 나하고 아버지하고 밥을 같이 먹고 싶다고 전하던데. 아니었더냐."

카슨이 살짝 실망하며 묻자 루시온은 차마 아니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맞습니다. 같이 먹고 싶습니다."

루시온은 손바닥이 간지러워 주먹을 쥐었다.

"샤엘라도 왔으면 참 좋았겠구나. 아무리 화가 났어도 황실 기사를 때려 당분간은 마탑 밖으로 나가질 못하니. 이것 참 아쉽구나."

"아버지께서는 무척 좋아하셨잖습니까."

카슨이 입꼬리를 올리자 노비오는 헛기침을 내뱉었다.

"시기가 좋지 않다는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폐하께서 원하셨기에 황실과 변경의 사이가 틀어진 것처럼 보여야 하기에 샤엘라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 게 아니더냐. 오늘 폐하께 연락이라도 해서 목소리 좀 내야겠구나."

노비오는 껄껄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여기서 같이 먹자꾸나."

테이블이 있으니 뭐든 올려놓으면 식탁이 아니겠는가.

테이블에 간소하게 음식이 차려지고 세 사람과 한 마리는 즐겁게 식사를 이어갔다.

간간이 카슨이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듯했지만.

이쯤이면 되겠지.

루시온은 배도 살짝 불렀겠다, 용건을 꺼냈다.

"마탑이 개방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루시온의 목소리에 노비오와 카슨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서는 그를 바라보았다.

'…왜 이러시지?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신데.'

부디 그다음 말은 하지 않길 바라는 표정이었지만, 루시온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마탑에 가기로 했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

노비오는 입술을 굳게 다물며 앓는 소리를 냈다.

루시온이 밖으로 나갔기에 누가 적인지 알게 된 건 무척 큰 성과였지만, 나가기만 하면 다치고 돌아오니 미치고 팔짝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직 상처가 낫지 않았으니 조금 미루는 게 어떻겠더냐?"

카슨이 그답지 않게 너무도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꼭 하고 싶은 말을 참는 것처럼.

"그건 안 됩니다. 저는 개방 전날에 가야 합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주렴."

노비오가 살짝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누님과 만나기로 했거든요."

루시온은 자신의 든든한 지원군을 입에 올렸다.

"샤엘라… 와 만나기로 했다고?"

카슨이 입을 벌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샤엘라라고 하는데 이걸 어떤 식으로 입에 올릴 수 있을까.

"예. 누님과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루시온은 설레는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노비오는 샤엘라라는 말에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언제 만나기로 했더냐?"

"누님께서는 개방 전에 언제든지 오셔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슬슬 약속을 잡아야죠."

"연락용 아이템이 필요하겠구나."

"맞습니다. 동부에서 누님을 만났을 때 연락용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걸 봤습니다."

"샤엘라가 잘 쓰진 않지. 편지가 뭐가 멋있다는 건지. 마법을 못 담는 게 그렇게도 싫은 건지."

노비오는 이때다 싶어 속상함을 드러냈다.

지금 그의 옆에 물잔이 아니라 술잔을 놓아야 할 것 같았다.

'누님이 보내시는 편지가 멋있긴 하지.'

루시온은 가볍게 웃었다.

"어쨌든, 루시온. 섭섭하구나."

"예?"

노비오의 불만에 루시온은 포크를 내려놓았다.

"카슨이나 샤엘라는 어릴 때부터 저랬다 치지만, …너마저 그럴 줄 몰랐다."

카슨과 샤엘라 둘 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이지만, 어릴 때부터 너무 똑 부러지고 어른스럽게 행동하니 아이의 그 예쁨이 없었다.

누가 막내가 가장 애교도 많고, 어쩌고저쩌고할 때마다 그 입을 틀어버리고 싶었다.

첫째나 둘째나 너무 예쁜데 그쪽으로는 영 담을 쌓았으니까.

하지만 루시온은 달랐다.

자신에게 어설픈 발음으로 '아빠' 하며 한달음에 달려와 안길 때마다 케틀란이 입을 열며 자랑하던 그 마음이 어떤 건지 알아버렸다.

목석같던 카슨과 샤엘라의 마음도 스르르 녹아내리게 하지 않았던가.

"아버지와 보내는 시간이 행복해서 그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루시온은 진심을 털어놓았다.

집에서 뒹굴다 보니 마탑을 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것도 사실이었고, 케오르티아와 미론스트로 갔던 날만 제외하면 노비오의 집무실로 놀러 가서 노비오와 말도 나누고 낮잠도 잤지 않았던가.

오죽하면 안토니가 자신의 방으로 찾아와 '오늘은 가주님의 집무실에 가지 않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크흠."

노비오는 언제 섭섭했냐는 듯이 씰룩 올라간 입꼬리가 좀처럼 내려오질 못했다.

카슨과 마주 앉았기에 그가 얼마나 힘겹게 웃음을 참고 있는지 보였다.

"그래서 누님께 가도 됩니까, 아버지?"

"루시온."

"예, 아버지."

"네가 어딜 갈 때마다 다치고 돌아오니 내 마음이 너무도 좋지 않구나."

노비오가 물로 입을 적혔다.

"…조심하겠습니다."

당연히 그 말을 꺼낼 거라 알고 있었지만, 루시온은 막상 닥치니 할 말이 없었다.

러쉘이 옆에 없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탑 일은 조금 더 고민해보마. 말이 나온 김에 너에게 알려줄 불미스러운 일이 있구나."

"불미스러운 일이라뇨?"

루시온은 노비오가 드디어 '오웬'의 일을 꺼내려는 걸 알았지만,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노비오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가 망설이고, 망설이자 보다 못해 카슨이 '오웬' 이야기를 꺼냈다.

"…4황자, 오웬 테슬라가 너를 독살하려고 했다."

이미 알고 있고, 오웬과 이어졌던 붉은 실까지 잘라냈지만, 루시온은 다른 사람의 입으로 그 사실을 들으니 새삼 자신의 존재가 이렇구나 싶었다.

만약 몰랐어도 지금처럼 담담했을 거라 생각했다.

목숨을 위협받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이어야지.

'독만큼은 당한 적이 없어서… 아니, 있었던가?'

"4황자의 뒤에는 뉴브라 왕국이 있었다. 그래서 널 독살하려고 했지. 하마터면 또...."

카슨은 도중에 울컥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루시온은 오히려 미안함과 속상함으로 물들어가는 카슨과 노비오의 표정이 더 보기 힘들었다.

"전 보시다시피 괜찮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폐하께서… 너의 의견을 물어보았단다. 너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겠다고 하시는구나."

노비오가 목소리를 냈다.

'…황제가 진짜 못 할 직업이네.'

독살 사건이 미수로 그쳤음에도 루시온은 대답하는 내내 떨리는 노비오의 손을 보았다.

노비오도 저런데 제 자식을 죽여야 하는 케틀란은 오죽할까.

하지만 안타까운 건 케틀란이지 오웬이 아니었다.

"뉴브라 왕국이 자신의 죄가 아니라 부정할 겁니다."

"그렇겠지. 그놈들은 비열하기 짝이 없으니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다."

카슨은 주먹 쥔 손을 테이블에 올리다 루시온을 보며 슬쩍 내렸다.

"그때, 4황자를 사용하십시오."

루시온이 재차 목소리를 냈다.

제국에서 뉴브라와 내통한 자를 들이미는데 그자가 귀족도 아니고 황자라면 어떻겠는가.

물론, 누군가는 황제가 미쳤다며, 냉혹하다며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마 대다수는 느낄 테지.

제국을 생각하는 황제가 얼마나 대단한지.

제국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그 차이가 승리를 거머쥐게 하는 열쇠였다.

"4황자를 통해 진실을 알리고 4황자는 제국의 명예와 제국인들의 명예, 그리고 어지럽혀진 정의를 위해 죽어야 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오웬이 평생토록 감옥에 처박혀 썩어갔으면 했지만, 그의 목숨은 더 값진 곳에 쓰여야 했다.

정의.

뜬구름 잡는 소리지만, 모두에게는 저 단어가 필요했다.

노비오는 아주 잠깐 말을 잇지 못하고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훌쩍 커버린 건지.

그 사실이 기특하면서도 내심 섭섭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네 생각은 내 충분히 전할 테니 걱정하지 말렴."

"감사합니다. 폐하께 꼭 감사하다고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꼭 전해주마."

노비오는 다정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 * *

"물은 여기 있구나."

카슨이 슬쩍 눈을 뜬 루시온에게 물을 건넸다.

아침을 먹고 난 이후로 열이 펄펄 끓어 루시온은 기절하듯이 잠에 빠졌다.

의사는 여독과 상처 때문이라고 하면서 어쩌면 정신적 충격 때문일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비록 독살 사건이 미수에 그쳤지만, 아버지와 그렇게 상의를 했고, 마음의 준비까지 해도 당장 나타난 루시온의 증상에 가슴이 쓰라리고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형님이세요?"

루시온이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그래. 흄은 방금 부엌으로 갔단다. 널 억지로 깨워서라도 수프를 먹이겠다고 하더구나."

[거봐라. 흄이 옳았지? 검은 구슬을 두 개나 흡수했으니 앓지 않는 게 이상한 거지.]

[몸은 괜찮은가, 루시온 공? 만약 오늘 공이 움직였으면 흄이 아니라 내가 잔소리를 하려고 했다.]

카슨의 목소리를 이어 러쉘과 베델의 걱정이 듬뿍 발린 잔소리가 들려오자 루시온은 실실 웃었다.

가끔 눈을 떴을 때, 방에 아무도 없으면 심장이 철렁 내려앉곤 했다.

만약 러쉘과 베델이 없더라도 옆에서 새근새근 잘도 자는 라타의 숨소리에 안심했기에 지금이 정말 좋았다.

루시온은 고개를 돌렸다.

"라타라면 부엌 간다는 소리에 좋아서 흄을 쫓아가더구나. 먹는 게 뭐가 그렇게 좋은지."

[라타가 자신이 없어도 울지 말라고 전해 달라고 했어.]

베델은 키득거리며 라타가 남기고 간 말을 알려주었다.

'라타답네.'

루시온도 웃으려다 카슨을 의식하며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루시온."

카슨이 손에 쥔 책이 살짝 구겨진 것처럼 보였다.

그는 왜인지 몰라도 초조한 듯 긴장까지 하고 있었다.

"…미안하구나, 루시온."

"무얼 사과하시는 겁니까?"

루시온은 상체를 일으켜 물을 마시려다 말고 그를 바라보았다.

과거 일을 말하는 거라면 그렇게나 괜찮다고 말했는데, 깔끔하게 해결됐다고 생각한 건 자신뿐이었을까.

"그냥. 그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카슨이 내보이는 반응은 그게 아니었다.

카슨은 지금 납치 사건과 다른 어떤 문제를 두고 있었다.

그게 뭘까.

루시온은 궁금했지만, 더 파고들지 않았다.

알게 모르게 지나왔던 시간이 카슨에게 있어 죄책감으로 남았을 수도 있었으니.

그저 숨 한 번 고르고 농담을 던졌다.

"혹시 제 마카롱을 드신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더냐. 나는 단 걸 좋아하지 않는단다."

카슨이 곧 가볍게 실소를 내뱉었다.

"저는 형님이 왜 저에게 사과하는지 모르겠지만, 혹 제가 안 받아주면 어쩌시려고 이럽니까?"

"...."

카슨은 멈칫거렸다.

씁쓸한 표정이 잔잔하게 얼굴로 퍼져나갔다.

"그렇다면 무척 괴로울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저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형님. 제 시중을 다 들어주시고, 먹고 싶은 거 다 사주시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다 들어주시고, 아, 1분. 아니 3분간만이라도 반말하게 해주십시오."

"마카롱은 덤이더냐?"

"그건 기본입니다."

"반말은 네가 원한다면야 지금이라도 해도 괜찮다."

"에이. 제가 막상 하면 충격받으실 텐데요?"

"…음,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잠깐 생각을 한 건지 몰라고 카슨은 벌써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만약 제게 잘못한 일이 있다면 방금 알려드린 대로 하시면 됩니다."

루시온은 깔끔하게 정리하고는 이빨을 내보이며 웃었다.

"고맙구나, 루시온."

카슨은 미소를 지었다.

"아뇨. 제가 더 고맙습니다."

카슨이 자신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소설, 어둠의 손아귀는 몇 번째인지 몰라도 이미 실제로 벌어졌던 세계였다.

카슨은 이름을 버리고, 존재도 버린 채 자신처럼 가면을 쓰고 '하멜'이라는 이름으로서 살아갔다.

형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자신을 공허의 손 중간 보스가 아니라 루시온으로서 죽이기 위해서.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자신은 그저 소설이라는 형태로 봤을 뿐인데도 그렇게 슬픈데.

"어서 더 자거라. 어지러울 테니."

괜히 카슨을 봤다가 울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고개를 돌렸지만, 그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 따뜻하게 들렸다.

[그래. 자. 얼른 자야 다른 생각도 하지 않겠지.]

러쉘까지 재촉하자 루시온은 못 이기는 척 물을 먹고 다시 누웠다.

가슴이 깊이 가득 차오르는 포근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카슨의 손에 자신의 피를 묻히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어야 했다.

절대로.

221화. 나눠야 할 말들

* * *

루시온은 스르르 눈을 떴다.

열은 저녁 늦게 떨어졌고, 몸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검은 형체가 알려준 것처럼 부서진 그릇이 붙고 있던 덕분인지도 몰랐다.

루시온은 시선을 옮겼다.

라타는 곤히 잤고, 아침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야행성도 아니고. 다시 자. 눈 감으라고.]

러쉘의 목소리에 이어 손이 다가오자 루시온은 움찔거렸다.

"…아직 계셨습니까?"

[혹 공의 상태가 나빠지면 흄을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베델은 천천히 루시온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손끝에 느껴지는 열감이 없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열 안 나, 베델."

[아직 미열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나저나 지금 다들 자?"

넌지시 묻는 루시온의 말에 러쉘은 바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루시온.]

"지금 가야 할 곳이 세 군데입니다."

루시온이 손가락을 세 개 펼쳤다.

"순례길, 트로에, 겸사겸사 헤인트 형님이요."

그중 하나를 접었다.

"그런데 순례길은 지금 가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농담도 아니고, 억지로 참는 것도 아니라 정말로 괜찮아졌습니다."

불필요한 동선은 일단 제외해야 했다.

[지금은 그렇겠지.]

"흄한테 확인받고 싶을 정도입니다."

루시온은 자신감 있게 말하며 접었던 손가락을 다시 펼쳤다.

"흑마법사들을 만나야 합니다."

또 손가락을 펼쳤다.

"황제를 만나야 하고요."

[흑마법사들은 연락용 아이템을 사용해서 물어보면 되지 않겠는가. 헤인트를 만나는 김에 황제까지 같이 보면 되겠고. 그리고....]

베델은 습관적으로 고민을 해결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러쉘이 얼굴을 구기며 베델을 지그시 바라보았고 루시온이 신난다는 얼굴로 바로 손가락을 튕겼다.

"내 생각도 그래, 베델. 대신 트로에를 만날 때 대신전으로 들어가지 않을게."

루시온도 한발 물러섰다.

이 모든 걸 오늘 안에 할 수 있었다. 대신 자신만 조금 더 힘들 뿐이지.

이어 루시온은 러쉘을 바라보았다.

"그 후에 마탑에 가기 전까지 쉬겠습니다. 지금 상황이 급하잖습니까."

루시온은 창문을 가리켰다.

"게다가 은밀히 행동하기에 시간도 딱 좋습니다."

베델이 투구 덮개를 만지작거렸다.

애초에 루시온에게 틈을 주면 안 되는데, 자신이 주고 말았다.

베델은 한숨을 내쉬다 루시온과 시선이 맞았다.

저 눈만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약해졌다.

[라타가 아직… 잠에 빠져 있지 않은가.]

베델이 겨우 핑곗거리를 찾아 목소리를 냈다.

―라타 눈 떴어!

갑자기 라타가 벌떡 일어나며 꼬리를 흔들었다.

곧 크게 하품도 하고 기지개도 크게 폈다.

[평소에 깨워도 일어나지 않더니. 이래서 낮잠을 많이 재우면 안 돼.]

러쉘이 묘한 배신감에 한쪽 눈썹을 올렸다.

―라타는 이제 안 졸려. 라타는 어디든 슝을 사용할 준비가 됐어.

라타는 눈에 힘을 가득 주었다. 그렇다고 눈동자에 아직 어린 잠이 완전히 빠진 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루시온?

"트로에하고."

―우오오오! 트로에 아저씨!

"헤인트 형님하고."

―응응! 화해해야지! 루시온은 착해!

"황제를 만나러."

―라타도 황제 아저씨 좋아!

라타는 벌써 기대감에 눈을 반짝거렸다. 사람을 만나는 건 너무 좋았다.

다정한 손길을 받으면 루시온에게 안긴 것처럼 가슴이 포근해졌다.

"일단 연락부터 하고."

루시온은 연락용 아이템을 꺼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