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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쨍그랑!

빛이 깃든 물건이 깨지자 방을 환히 밝히던 빛이 꺼져버렸다.

"…커헉."

피를 토하던 흑마법사가 조직원을 노려보며 온몸에서 어둠을 뿜어냈다.

"네놈을 길동무로 삼아주...."

짜악!

하지만 어디서 날아온 손바닥 모습을 띤 어둠이 그의 얼굴을 후렸다.

"저주 푸는 거 되게 어려우니까, 입 닥쳐."

저주에 걸린 사람은 퀘이트만으로 충분했다.

누가 저주를 푸는 게 쉽다고 했는지.

퀘이트의 저주를 조금씩 조금씩 풀어나가는 것도 어둠을 거의 소비해야 했기에 더럽게도 힘들었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저주만큼은 피하도록 해야 했다.

'좀 빨리 오길 잘했네.'

"하멜 님…!"

조직원들이 반갑게 루시온을 맞이했다.

흑마법사가 적일 때 그렇게 무섭더니, 아군일 때는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저주를 막으려면 입을 막아도 소용없습니다. 모가지를 아예 따버려야 합니다."

흄이 근처에 나뒹굴고 있는 검을 주워 흑마법사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목을 베어버렸다.

동시에 검이 부서졌지만.

흄은 빈손을 바라보며 숨을 짧게 내쉬었다.

"조만간 검을 찾으러 들릴 테니까, 인상 펴."

루시온은 흄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정말입니까?"

흄은 금세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럼."

루시온은 대답과 함께 발을 살짝 움직여 어둠으로 벽을 세웠다.

파파팟!

빛 때문에 숨어 있던 흑마법사가 더 있었는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베델이 있었다.

그녀가 반응했고, 루시온은 어둠을 사용했다.

적이 꺼낸 어둠은 제 어둠을 뚫지 못했다.

루시온이 어둠을 벌려 틈을 만들자 흄은 뾰족하게 만든 얼음을 던졌다.

쉬익!

팍!

커다란 소리와 함께 이마가 꿰뚫린 흑마법사는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아직 안 죽었어."

[맞아. 안 죽었어.]

루시온의 말에 이어 러쉘이 고개를 끄덕이자 흄이 곧바로 달려가 발을 찍어 내렸다.

하지만 적의 어둠이 흄의 발을 감쌌고, 루시온은 자신의 어둠을 빠르게 보내 흄을 잡은 적의 어둠을 베어냈다.

스걱.

그대로 배배 꼬아놨던 어둠을 추가로 적에게 날리자 드릴처럼 적의 어둠을 파고들었다.

어둠이 흔들림에 약하다는 건 자신의 왼쪽 팔이 부러지면서 얻은 사실이었다.

"…끄아아악!"

자신의 어둠이 적의 어둠이 꿰뚫자 적이 비명을 내질렀다.

'엄살은.'

루시온은 코웃음을 치며 바로 흄을 보았고, 그녀는 바로 적의 머리를 으깨버렸다.

콰직.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멜 님!"

근처에 있던 조직원들이 갑자기 우르르 달려오자 루시온은 뒷걸음질 쳤다.

좀처럼 만나기도 힘들었고, 만나도 말을 걸어보기 힘들었는데 이렇게 가까이 보게 될 줄이야.

하멜의 활약상은 거하게 열린 술자리에서 피터의 열띤 언변이 결코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직접 확인까지 했다.

빠르고 강했다.

같은 어둠이라도 하멜이 꺼낸 어둠은 이상하게도 따뜻한 느낌을 받았기에 이유 모를 친근감까지 생겨났다.

말을 걸고 싶었다.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모, 몸부터 추스르십시오."

뒤로 물러선 루시온은 그들의 묘한 기대감에 다급히 말을 꺼냈다.

"…그럼."

루시온은 돌아섰고, 복도 끝까지 따라오는 그들의 시선에 뭐라고 하는지 일부러 귀담아듣질 않았다.

[이야, 인기 좋은데?]

러쉘이 루시온을 말로써 쿡쿡 찔렀다.

걱정하는 말을 내뱉었다는 이유로 저렇게 좋아할 줄이야.

"시, 시끄럽습니다."

루시온은 간질거리는 감정을 떼버렸다.

지금은 베델의 안내를 받으며 남아 있던 흑마법사와 당장 불러낼 수 있는 유령을 불러내 처리했다.

"…혹시 오시면서 남은 놈들을 처리하셨습니까?"

퀘이트의 목소리가 오른쪽에서 들리자 흄이 순간 움찔거렸다.

루시온이 대답했다.

"맞습니다."

"제가 처리 담당이었는데...."

"아, 본의 아니게 일을 뺏어버렸네요. 죄송합니다."

"아뇨. 죄송할 게 아니라… 저야 완전 좋, 큼, 쉬엄쉬엄 오신다고 들었습니다."

"쉬엄쉬엄 왔습니다. 아시잖습니까. 흑마법사 처리가 어렵다는 사실을요."

"그래서 엄청 준비했습니다. 방금 막 빛이 깃든 물건을 발동시키려고 했는데 다행입니다. 목이 동강 날뻔했습니다."

"퀘이트 씨가요?"

누가 암살자의 목을 벤단 말인가.

"조직 내에 많거든요. 그래도 한 번 더 점검해보도록 하죠."

"제가 꼼꼼히 둘러봤으니 저택 정문 쪽에 도망치는 놈들을 처리하는 게 어떻습니까?"

"라인트가 지키고 있어서 괜찮습니다. 검에 꽂혀 불꼬챙이가 되고 싶진 않거든요."

"혹시 땡땡이치는 겁니까?"

루시온이 키득거리다 말고 갑자기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갔다.

자신이 아니라 베델이 무언가에 반응해 나타낸 움직임이었다.

[적이다.]

흄도 덩달아 고개를 돌렸지만, 그녀는 움직이질 않았다.

이미 퀘이트가 적의 심장에 검을 찔러넣고 있었다.

'분명히 내 옆에 있었는데?'

루시온은 오른쪽을 잠깐 쳐다보며 깜짝 놀랐다.

"먹고 살려면 저도 뭔가 특별한 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퀘이트가 검을 뽑아내며 말했다.

그는 곧 마스크를 내려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아, 어디까지 말씀하셨죠?"

"…크라언 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루시온의 목소리가 떨렸다.

[푸하하핫!]

러쉘이 배를 잡고 웃었다.

어디까지 흑마법사 처리가 완벽했지, 다른 놈들은 아니었는데.

"저쪽에 있습니다. 같이 가드릴까요?"

퀘이트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언제 이렇게 하멜을 놀릴 기회가 있을까 몰라 허겁지겁 입을 움직였다.

"아닙니다. …생각해보니 도움 없이도 찾아갈 수 있습니다."

루시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면에 표정이 가려져 있는 게 아쉬운지 퀘이트는 대놓고 미련을 내보였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루시온은 마무리를 짓는 말을 꺼낸 뒤에 퀘이트가 가리켰던 방향으로 향했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러쉘의 웃음소리가 거슬렸지만, 루시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얼굴이 뜨거웠다.

* * *

크라언이 있는 곳에 도착해서야 러쉘이 웃음을 멈췄다.

[…와. 바글바글한데?]

[여기까지는 오지 못했어. 흑마법사들이 제법 있었으니까.]

베델은 루시온의 눈으로 바닥에 죽어 있는 흑마법사들과 조직원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키는 유령과 그곳에서 올라오는 짙은 악취에 불쾌감을 느꼈다.

―으으.... 라타는 여기 싫어.

그림자 속에 있던 라타가 앞발로 코를 막는 시늉을 했다.

"오셨습니까?"

루시온은 크라언의 인사를 뒤로한 채 당장 검을 뽑았다.

스겅.

베델의 도움을 받아 검에 어둠을 둘러 지하로 가는 입구를 지키던 유령부터 베어냈다.

"...?"

크라언뿐만 아니라 그곳에 대기하고 있던 조직원들까지 휘둥그레진 눈으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허공에 왜 검을 휘두르는 건지.

루시온은 검을 거두며 말했다.

"뭐가 있어서 그랬습니다."

대체 뭐가.

생략된 말에 조직원들은 이유 모를 한기를 느껴야만 했다.

"저와 렌탈이 먼저 들어가서 여러 가지 확인을 거친 후에 부르겠습니다."

루시온은 때에 맞춰 베델과 함께 기세를 살짝 올렸다.

"그러니 절대로, 안으로 들어오지 마십시오."

그리고 강한 경고를 내뱉었다.

186화. 들켰다(2)

"안에 대체 뭐가 있길래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크라언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곳이 다른 곳과 달리 불쾌했지만, 그 외에는 알 수 없었다.

왜 둘이서만 들어가려고 하는 건지.

루시온은 자신에게 쏠린 시선에 고개를 살짝 돌렸다.

듣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꼭 모두가 사실을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루시온은 말을 아꼈다.

"압니다. 알기 때문에 이러는 겁니다."

안에 죽지 않는 병사가 있다.

혹은 타락한 이들이 있다.

이 말을 꺼내봤자, 저들은 이해할 수 없을 테지.

신관들이, 빛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 흑마법사를 그저 악이라 몰아세웠기에 죽음이 끝이 아니란 사실도 알지 못했으니까.

루시온은 크라언을 바라보았다.

"그럼, 부탁합니다."

이 부탁이라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섞여 있었다.

루시온은 이미 연락용 아이템을 통해 크라언에게 저택에 있는 자료란 자료는 전부 긁어모아 달라고 부탁했으니.

말을 끝낸 루시온은 지하를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며 어둠을 내보냈다.

―라타가 아무리 비밀 장소를 좋아해도 여기는 싫어.

라타는 어느새 그림자 밖으로 나와 루시온 옆에 꼭 붙어서 계단을 내려갔다.

"그건 나도 그래."

루시온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어떤 시선을 느꼈다.

죽음의 바다에서 느꼈던 끈적하고 살벌한 느낌까지는 아니더라도 털들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숨이 조금씩 막혀왔지만, 지하가 생각보다 좁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더 많이 했다.

만약 그랬다면 오지 못했을 테니까.

[조심해라, 루시온. 죽음의 바다에서 알았겠지만, 저놈들은 라타와 너를 본능적으로 노리고 있어.]

러쉘의 말에 라타가 귀를 쫑긋 세웠다.

―라타는 다, 다시 들어갈래!

라타는 루시온의 그림자로 몸을 날렸다.

―검은 손들이 막막 뻗어올 때 라타는 엄청 무서웠어! …하지만 엄청 슬프기도 했어.

라타의 동그란 눈동자가 루시온을 향했다.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지만, 루시온은 라타가 베델처럼 정화를 하길 바란다는 걸 눈치챘다.

"타락한 이들이 얼마나 있는지 보고."

자신이 가진 어둠이 그때와 달리 몇 배나 늘어났어도 한계가 있었다.

여차하면 어둠으로 보내버리는 방법뿐이었다.

"…으아아아악!"

아래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흄이 다급히 움직이려 했지만, 러쉘이 이를 막았다.

[놀랄 필요 없어. 제어를 실패한 탓이니까.]

"흑마법사들이 죽었기 때문입니까?"

루시온이 물었다.

[그래. 타락을 억누를 수 있는 것도, 없앨 수 있는 것도 같은 어둠뿐이야. 죽음의 바다에 빛을 뿌려도 왜 사라지지 않았겠어? 그건 임시조치일 뿐, 타락은 끊임없이 증식해. 너도 검은 손에 붙잡혔으니 부정이 늘어났다는 걸 눈치챘을 거잖아.]

"…예."

루시온은 다시금 씁쓸함이 몰아쳤다.

하지만 그는 감정을 던져버리고 흄을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문을 열자 쇠창살을 두고 하나같이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이들이 한 남자를 붙잡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도망치다가 붙잡힌 꼴이다.]

베델이 말했다.

'흑마법사네?'

루시온은 남자의 몸에 둘린 어둠을 보았다.

'그리고 저들은 죽지 않는 자고.'

루시온 그들이 누구인지 알았다.

달칵달칵.

철창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크게 흔들렸다.

케에에엑.

괴상한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가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남자가 두른 어둠에 제 손이 녹으면 다른 죽지 않는 자가 남자를 붙잡고 늘어지며 저 남자를 향해 엄청난 집착을 보였다.

'더럽게도 많네.'

루시온은 죽지 않는 병사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언짢았다.

"사, 살려주세요!"

남자는 루시온과 흄을 보더니 당장 소리쳤다.

[아직 괜찮네. 좀 버티겠어. 굳이 시간 낼 필요 없이 물어보면 되겠다.]

루시온은 러쉘의 말에 피식 웃으며 물었다.

마침 그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여기 최종 관리자가 누구야?"

저 흑마법사가 지하에 있다는 말은 달리 말하자면 이 저택에서도 꽤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놈이 아닌가.

게다가 제어되지 않는 죽지 않는 병사 속에서 혼자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책임자에 가까운 위치에 있다는 걸 나타냈고.

그걸 증명하듯 그의 주변에 서류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장 욕지거리를 내뱉고 싶은 표정이 되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비굴했다.

"트, 트웰로 스프리카도입니다!"

너무 예상대로라 루시온은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그저 차분하게 물었다.

자신의 목에 그 어떤 칼이 오지 않도록 다 뿌리째 뽑아야 할 테니까.

"자료는 어디에 숨겼는데?"

"저기 안쪽에 들어가시면 왼쪽 제일 끝에 벽이 있습니다. 거기에, 거기에."

남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타락이 덮쳐오는 속도가 빨라진 건지, 어둠을 내는 속도가 느려진 건지 몰라도 루시온은 꺼낸 어둠을 흔들며 그가 희망을 품게 했다.

자, 보라고.

나도 흑마법사라고.

"방이 있습니다. 방에요! 문을 여는 비, 비밀번호는 84217입니다."

'비밀 방이 있다?'

루시온에게 있어 참 탐스러운 말이라 생각했다.

굳이 저 지하에 비밀 방이 있어야 할 이유가 뭘까.

답은 간단했다.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되는 인물이 이곳에 자주 들락날락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4황자도 왔었나?"

루시온이 슬쩍 내던졌다.

"…예! 예! 왔습니다!"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무척 흡족했다.

역시 그는 책임자에 가까울 정도로 높은 직급의 인물이었다.

루시온은 어둠을 남자 쪽으로 보냈다.

그의 얼굴에 희망이 찰 무렵, 루시온은 놈이 흘렸던 서류를 싹 쓸어 흄 앞에 놓았다.

남자는 그저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며.

"다 주워."

그러든 말든 루시온은 흄에게 지시를 내렸다.

"자, 잠깐만요. 다 대답했잖습니까. 전부 다 대답했잖아요!"

"아, 한 가지 잊었네."

루시온은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반응했다.

남자의 눈에 다시금 기대감이 어렸다.

"저주는 완성됐나?"

"제가, 제가 그 장소를 다 알고 있습니다! 절 구해주신다면 전부 다! 다 알려드리겠습니다!"

저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만약 완성됐다면 장소가 아니라 고개를 끄덕였겠지.

"덕분에 편하겠네. 고마워."

저주가 완성되기 전이라 참 다행이었다.

루시온의 어둠은 남자를 덮쳤다.

조금 전처럼 어둠을 배배 꼬지 않아도 그 한 방이면 충분했다.

"어억!"

놈이 비명을 터트리자 어둠이 흐트러졌다.

바로 죽지 않는 자가 놈을 덮쳤다.

비명이 거세졌고, 루시온을 보는 그의 시선에 증오만이 가득했다.

그렇게 쳐다보면 뭐 어쩔 건가.

"흑마법사니까,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겠지?"

루시온의 가면이 노랗게 물들었다.

죽은 자에게 물을 수 있는 수단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적에게 베풀 자비는 없었다.

간절한 표정과 손발을 거세게 휘젓던 놈이 마지막으로 날카롭게 외쳤다.

"이 개새끼야…!"

놈의 얼굴까지 올라온 검은 핏줄이 눈동자에 닿자 그는 축 늘어졌다.

콰드드득.

죽지 않는 자는 그제야 놈을 물어뜯고 손가락을, 팔을 뜯어냈다.

마치 가슴에 뻥 뚫린 자신들의 구멍을 메우려는 듯이.

그제야 루시온은 철창 구멍 개수에 맞춰 어둠을 날카로운 죽창처럼 만들었다.

'저놈까지 타락하게 만들 수 없지.'

캐낼 정보가 많은 자였다.

지배하고, 다 털어놓게 해야 했다.

루시온 뒤에 수십 개의 죽창이 대기했다.

그의 손짓에 한 몸이 된 것처럼 죽창들이 철창 구멍 속으로 몸을 날렸다.

팍!

퀘에에엑!

머리든, 복부든 어딘가에 어둠이 꽂히자 죽지 않는 자들은 괴로움을 토해냈다.

'터져라.'

루시온은 어둠에게 명령했다.

동시에 그림자 속에 있던 라타의 꼬리가 바짝 올라갔다.

소리 없는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달그락.

그들의 눈을 가렸던 천이 사라졌다.

눈에 깃든 붉은 빛이 가라앉자 그들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그 말에 루시온의 가슴이 떨렸다.

그들의 피부는 녹고.

뼈는 잿더미가 되었다.

모든 게 너무도 조용해 루시온 자신의 숨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열어."

루시온이 흄을 보며 입을 열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아직 자신은 배우지 않은 흑마법이지만, 망자에게 동의를 구한다면 그들을 산 자의 세계로 불러낼 수 있었다.

그때, 망자는 돌아가고 싶다면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는 자유를 쥐고 있는 상태였기에 산 자의 세계에 원해서 머물러 있는 유령과 달랐다.

유령은 원한다면 죽음을 받아들여 흑마법사의 손에 벗어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오히려 비굴하지만, 흑마법사에게 복종하면서까지 산자의 세계에 남고자 하는 자들이 아닌가.

하지만 죽지 않는 자들은 달랐다.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자들이지만, 돌아갈 자유를 뺏긴 채 제 육체 속에 묶여 명령만 듣는 가엾은존재들이었다.

'거지 같네.'

루시온은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하는 것도 불쾌했다.

러쉘도 그 감정을 알기에 혼란스러워 보이는 루시온을 위해 말했다.

[그건 어쩔 수 없어, 루시온. 네 어둠을 통해 저들을 붙잡은 타락을 없애고 다시 죽음의 세계로 보냈으니까, 어둠이 느끼는 감정을 네가 느낄 수밖에.]

러쉘은 '툭' 하고 루시온 머리에 손을 올려 가볍게 누른 뒤에 뗐다.

[어둠은 본능적으로 타락을 없애길 원하지만, 한때는 같은 어둠이었으니 혼란스러운 건 당연하잖아?]

―라타는 슬퍼. 엉엉 울 것만 같아.

루시온은 이미 글썽거리는 라타를 느꼈다.

어쩌면 어둠의 신수였기에 라타가 더 민감할지도 몰랐다.

"그럼 정화와 뭐가 다릅니까?"

루시온은 흄이 문을 열기 전에 슬쩍 물었다.

빛으로 타락을 없애는 것처럼 보일 뿐, 없앨 수 없다고 했다.

타락을 없앨 수 있는 건 어둠뿐이라고 그렇게 러쉘이 말해주지 않았던가.

[베델 봤잖아? 너처럼 강제로 죽음과 삶의 경계로 보내지 않아. 그저 타락만 걷어주는 거지.]

'타락만 가져간다는 건가?'

루시온은 곧 들려오는 소리에 반응해 앞을 바라보았다.

끼이익.

"제가 앞장서도 되겠습니까?"

흄이 물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단호했다.

"안 돼."

루시온은 이전에 타락한 흑마법사를 처음 마주했을 때, 흄이 타락에 오염된 상황을 기억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방금 죽은 흑마법사를 보니 확실히 알았다.

흄은 타락에 무척 약했다.

아니, 라비엔이라는 존재가 타락에 약한 자들인 듯했다.

"라타."

루시온은 라타를 불렀다.

―응.

"저놈을 불러내 볼래?"

루시온은 방금 죽은 흑마법사를 가리켰다.

라타의 앞발만 그림자에서 나왔다.

"…라타?"

루시온의 재촉에 라타는 그제야 얼굴을 슬쩍 내밀었다.

귀가 접혀 있었다.

―라타는 무서워서 여기서 안 나갈래. 루시온이 저쪽으로 가줘.

루시온은 떨떠름했지만, 라타가 바라는 대로 놈의 시체 앞에 갔다.

라타는 콩 하고 앞발로 놈을 건드린 후에야 다급히 얼굴을 그림자 속으로 집어넣었다.

―됐다. 라타는 했어!

라타 말대로 유령이 튀어나오자 루시온은 기다렸다는 듯 어둠을 두른 손으로 놈의 얼굴을 붙잡았다.

"내게 복종하겠느냐."

―내게 복종하겠느냐!

무섭다고 해놓고 라타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그림자 속에 배시시 웃으며 따라 했다.

루시온은 복종하겠다는 놈의 말과 함께 지배한 후에 일단 밖으로 내보냈다.

어둠을 쓰다가 실수라도 놈을 보내버리면 어쩌겠는가.

[문에 붙어 있는, 죽지 않는 자는 없어.]

러쉘이 벽 너머로 지켜본 후에 목소리를 냈다.

팍!

흄이 문 하나를 박살 냈다.

자동문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문이 닫혔으니 루시온이 편하게 갈 수 있게 부술 수밖에.

흄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구석에 저건… 뭡니까?"

마치 죽음의 바다 일부를 보는 듯 형체도 없이 꾸물거리는 무언가가 구석에서 뭔가를 먹고 있었다.

[죽음의 바다에서 봤잖아? 그거랑 똑같아. 저게 뭘까 고민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어둠 자체가 타락한 것 같아.]

러쉘은 대답하며 루시온을 보았다.

"지금 죽음의 바다와 똑같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루시온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반응했다.

[그래. 공허의 손 놈들이 저걸 만든 건지, 죽음의 바다에서 가져왔는지 몰라도 미쳤지. 그냥 미친 게 아니라 아주 단단히 미쳤지.]

"허락하겠습니다."

루시온은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러쉘에게 자신의 어둠을 쓸 수 있게 허락했다.

이편이 더 빠르고 확실했으니.

[조심해라, 루시온.]

러쉘은 한 번 더 언급했다.

"예. 조심하겠습니다."

루시온은 잔뜩 경계하는 베델의 감각을 느끼며 문 너머로 발을 내디뎠다.

꿈틀.

무언가를 씹던 타락한 어둠이 반응했다.

구해줘.

우리를 구해줘.

그들이 말을 걸어왔다.

루시온은 그대로 우뚝 섰다.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은 무미건조한 말이었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우릴 버리지 않을 거지?

기다렸어. 엄청, 엄청 기다렸어.

기다렸는데, 갑자기 눈앞에 캄캄해졌어.

그들은 꾸물거리며 루시온에게 다가왔다.

우릴 버리지 마.

구해줘. 우리도 이러고 싶지 않아.

아.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아.

걸어온 길에 그들이 무언가를 쏟아냈다.

피와 검은 물.

마치 눈물처럼 보였다.

―루시온!

그때 라타가 울먹이며 루시온을 불렀다.

―라타가 정화할래. 라타가 나쁜 거 없애줄래. 저 존재가 울고 있어. 라타는, 라타는 못 참겠어.

그렇게 무섭다던 라타가 그림자 밖으로 나왔다.

187화. 들켰다(3)

루시온은 라타의 말에 망설였다.

확실하지 않지만, 어둠 자체가 타락했다면 이걸 정화해야 하는 걸까.

죽지 않는 자나, 타락한 유령은 굳이 정화하지 않아도 어둠을 통해 죽음과 삶의 경계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저번에는 녹아내렸는데.'

죽음의 바다에서 어둠을 두른 손으로 자신을 향해 뻗어오던 검은 손을 잡았을 때 그 손은 녹아버렸다.

타락한 어둠은 사람도, 하물며 영혼도 아니었다. 그들을 어둠으로 공격하면 과연 어디로 가는 걸까.

"멀리서 할 수 있어?"

루시온이 물었다.

절대 라타를 타락한 어둠 가까이 붙이고 싶지 않았다.

―응! 라타는 이제 할 수 있어!

루시온은 라타의 대답을 들으며 러쉘을 보았다.

자신의 결정이 맞는지, 이번에는 조금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정화 자체는 위험한 행동이 아니야.]

"저도 그건 압니다."

[멀리서도 할 수 있다면 한 번은 해볼 만하고 생각해. 만약 이번에 정화가 됐을 때 정말 어둠이라면, 죽음의 바다에 있던 그 타락이 전부 어둠이라는 소리가 될 테니까.]

"…혹시 스승님께서는 누가 일부러 죽음의 바다를 만들었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루시온은 갑자기 목이 탔다.

자연에 있던 어둠이 왜 타락하겠는가.

누가 건드리지 않으면 그들이 타락할 일은 없을 텐데.

[맞아. 누가 무슨 목적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더 크고 끔찍한 짓을 저지른다고 볼 수 있겠지.]

[더 크고 끔찍한 짓이라니…?]

가만히 듣고 있던 베델이 요동하며 묻자 러쉘의 표정은 굳어졌다.

[흑마법은 어둠을 이용해서 하는 마법이야. 죽음의 바다가 사실 타락한 어둠으로 이루어진 곳이라면 저걸 이용해서 무슨 끔찍한 흑마법이 나올까 싶어서.]

"그게… 가능합니까?"

루시온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은 베델하고 빙의 중이었으니 조심해야 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확인해봐야지. 부디 아니면 좋겠지만, 만약 맞다면 그건.... 솔직히 나도 모르겠다.]

러쉘은 자신 없는 목소리를 냈다.

자신이 예를 들었던 사실도 너무나 기가 찬 데, 이게 사실이라면.

평생을 살면서 무언가를 무서워해 본 적 없지만, 지금은 달랐다.

흑마법은 강했고, 대가가 있다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수준까지 끌어낼 수 있는 마법이기도 했으니.

그 정도라면 죽은 자들까지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루시온은 흄을 바라보았다.

"…전 반대입니다."

흄이 주먹을 꽉 쥐었다.

"저걸 지금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제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도자로서의 감일지, 흄으로서의 감일지.

루시온은 더 차분해졌다.

[나는… 한 번은 부딪쳐봐야 한다고 생각해.]

베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죽음의 바다로 다시 가서 확인하는 것보다 지금 여기서 확인하는 편이 훨씬 나을 테고.]

―라타는 도와주고 싶어!

의견이 한쪽으로 몰렸다.

루시온은 조금씩,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타락한 어둠을 바라보았다.

느낌이 좋지 않았지만, 다시 죽음의 바다로 돌아가 확인할 수 없었다.

그곳이 더 위험할 테니까.

"라타."

―응!

확인할 기회가 왔을 때 해야겠지.

"해 봐."

루시온은 기어코 결론을 내렸다.

―응! 알았어!

라타의 꼬리가 흔들렸다.

그것도 잠시 라타는 앞발을 굴렸다.

라타의 주변에 바람이 일어나며 타락한 어둠들 근처에서 똑같이 바람이 솟아올랐다.

―돌아오거라.

라타의 목소리라고 믿지 않을 정도로 제법 근엄한 음성과 함께 타락한 어둠 주변에 치솟아 올랐던 바람이 검은 눈처럼 내려왔다.

툭.

타락한 어둠이 검은 눈을 맞자 사르르 모래가 된 것도 모자라 반짝거렸다.

빛이 아님에도 이토록 반짝거릴 수 있다는 사실에 시선을 빼앗겼다.

자신이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봤던 것처럼, 순례길에서 보았던 것처럼 동글동글한 형태의 어둠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모두 한 입으로 외쳤다.

도망쳐!

"...?"

딸랑딸랑!

루시온이 어둠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것도 잠시 손목에 찼던 방울이 미친 듯이 울렸다.

[뭐…? 지금 방울이....]

러쉘이 말을 멈췄다.

아니, 시간이 멈춰버렸다.

루시온은 숨을 삼켰다.

배에 치솟는 고통과 묵직한 몸, 그리고 열이 온몸을 감쌌다.

자신이 빙의를 풀지 않았음에도 자신과 겹쳐진 베델이 보였다.

지금 빙의가 풀렸다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놈이, '그놈'이었다고?'

부엉이의 흔적을 쫓다 놈을 만난 적이 있었다.

지금처럼 시간이 멈추고.

끼이익.

지금처럼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 후에 놈이 나타났다.

―…루시온?

라타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깜짝 놀랐다.

"라… 타?"

라타가 움직이고 있었다.

―다들 왜 이래? 지금 라타를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라타! 이동해!"

루시온은 다급히 재촉했다.

―어, 어디로?

"아까 언덕으로!"

―알았어!

라타도 덩달아 목소리를 키우며 그림자 이동을 사용했다.

* * *

어둠이 걷자, 루시온은 쿵쾅쿵쾅 뛰는 심장 소리에 귀가 멎을 것만 같았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겨우 숨을 토하며 하늘을 보자 날아가던 나뭇잎이 멈춰 있었다.

모두가 멈췄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생각하자. 생각하자, 루시온.'

라타가 타락한 어둠을 정화한 게 '그놈'을 부르는 행동이 아니었을까.

대체 왜?

―루시온? 라타가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이상해.

라타는 주변을 둘러보다 귀를 접었다.

루시온은 생각을 멈추고 바로 물었다.

"라타 너, 지금 어떻게 움직일 수 있어?"

그때 라타는 움직이질 않았다.

똑같이 멈춰버린 세상 속에 갇혀 있질 않았던가.

―라타가 우, 움직이면 안 되는 거였어?

그때와 지금의 자신이 다른 점은 딱 하나였다.

'검은 구슬.'

그 차이로 라타가 움직일 수 있었다.

루시온은 비틀거리다 겨우 제자리에 섰다.

지금 검은 구슬보다 문제는 '그놈'이었다.

여기에 있으면 놈이 자신을 찾지 못할까.

'트로에가 놈을 만나면 도망가라고 했는데....'

어디로 가야 한다는 건지.

루시온은 눈앞이 아득했다.

심장이 너무도 거칠 게 뛰고, 숨이 좀처럼 쉬어지지 않아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생각해야 했다.

치치직.

텔레비전이 고장 난 소리가 들려왔다.

―…뒤.

너덜너덜해진 글자가 사라지기가 무섭게 눈앞에 검은 실이 보였다.

루시온은 바로 라타를 안아 들었다.

"라타, 아무 곳이나 이동...."

섬뜩.

뒷말이 나오지 않았다.

딱딱.

멋대로 이빨이 맞부딪혔다.

"그건 안 되는데."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듣기만 해도 소름이 올라올 정도로 섬뜩한 목소리였다.

"드디어 찾았거든."

히죽 웃는 소리에 루시온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루, 루시온!

라타가 루시온을 꽉 끌어안았다.

얼굴도 보이지 않을 만큼 길고 긴,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이상한 사람이 라타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게 너무 무서웠다.

"어둠의 신수와."

놈의 손가락이 루시온에게 향했다.

"그릇."

짝짝짝.

놈은 갑자기 손뼉을 마주쳤다.

"드디어. 드디어!"

푸욱!

그때, 그의 배에서 날카로운 검은 가시들이 튀어나오며 어둠이 소리쳤다.

건들지 마!

건들지 말라고!

죽여버릴 거야!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소리치는 어둠들을 바라보았다.

"이거 어쩌나. 너희들 공격은 내게 통하지 않아. 알면서 왜 이래?"

'…저게 뭐지?'

루시온은 조금씩 걸음을 옮기다 말고 놈의 배를 타고 흐르는 무언가를 어둠이 조용히 가져가는 걸 보았다.

"나는."

순식간에 놈이 루시온의 코앞으로 왔다.

"...!"

"움직이라고 말한 적 없는데."

놈이 손을 뻗어왔다.

그의 손에 어둠이 짙게 깔려있었다.

팅!

루시온 주변에 방어 마법이 나타나 놈의 손을 한 번 튕겼다.

미엘라와 피터가 준 방어 마법이 담긴 반지였다.

"와."

머리카락 사이로 놈이 활짝 웃는 게 보였다.

"재미있네?"

루시온은 자신이 가진 온 어둠을 끌어올렸다.

저건 위험했다.

무조건 위험했다.

"저런. 어둠이 가르쳐주지 않았나 보네?"

놈은 가엽다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방어 마법을 움켜쥐어 깨버렸다.

쨍그랑!

루시온 앞에 어둠이 몰려들었다.

안 돼!

절대로 안 돼!

건들지 말라고!

놈이 키득거리며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옆으로 움직였다.

루시온 앞을 막았던 어둠도, 루시온이 펼쳤던 어둠도 죄다 사라졌다.

"...!"

루시온 앞에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이 배웠던 모든 게 놈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사실보다 루시온은 놈을 주목했다.

'놈이 노리는 건 내가 아니라 라타다.'

"내가 어둠의 왕이라는 사실을 말이야."

루시온은 놈의 말을 들으며 마지막 발버둥으로 라타를 던졌다.

푸욱!

"어억...."

놈의 손이 루시온의 복부를 관통했다.

후두둑.

흘러내리는 뜨거운 피가 차갑디차가운 놈의 손에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라타의 눈동자가 커졌다.

라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루시온이 죽어간다.

루시온이.

루시온.

라타의 눈동자에 보랏빛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커… 헉!"

루시온은 피를 쏟으면서도 놈의 손을 꽉 쥐었다.

손이,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누군가 자신의 의식을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버텼다.

버텨야 했다.

라타만은.

하다못해 라타가 도망갈 시간이라도.

"도… 망쳐."

루시온은 목소리를 내려 했지만, 입가에 고인 피 때문에 쉽게 나오지 않았다.

"저런."

놈이 혀를 찼다.

"귀찮은 신수부터 죽였어야 했는데. 뭐, 어쩔 수 없지. 그럼 죽기 전에 네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봐야 다음에 더 편하겠지?"

놈은 절망에 가득 찬 어둠들의 감정에 화답하듯 키득거리며 손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손이 꼼짝도 하질 않았다.

그릇이 가졌던 어둠은 분명 방금 다 없앴을 텐데?

탁.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에 놈이 반응했다.

루시온이 꺼낸 두 개의 성물과 온전하지 않은 성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놈이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어둠의 왕이든 뭐든 빛에 약하는 건 마찬가지네.'

루시온이 히죽 웃었다.

"…뒈… 져라."

놈이 가진 어둠에 반응해 성물이 빛이 뿜어냈다.

빛의 내성이 있는 자신과 아마도 빛의 내성이 없는 놈 중에 누가 버틸지.

하지만 빛을 쐤음에도 루시온은 이상하게 아프질 않았다.

오히려 포근한 느낌과 함께 서서히 뒤로 쓰러졌다.

'죽는 건가…?'

아니었다.

아.

트로에의 축복이다.

루시온은 그 포근함에서 트로에를 느꼈다.

"아아악! 네놈! 네놈!"

빛 때문에 눈이 타들어 갔는지 놈이 얼굴을 가리며 소리쳤다.

미안해.

미안해. 아무것도 못 해서 미안해.

죽으면 안 돼. 버텨줘.

어둠들이 루시온을 감쌌다.

배에서 꾸역꾸역 나오는 피를 누군가 막고 있는 기분도 들었다.

고통이 이상하게 잦아들었다.

스르르.

어둠 중 하나가 무언가를 떨어트렸다.

'저건....'

조금 전, 어둠이 그놈을 공격했을 때 나왔던 무언가가 아닌가.

톡.

휘이이이.

루시온은 말라버렸던 제 몸의 어둠이 빠르게 차오르는 걸 느꼈다.

마치 검은 구슬을 흡수했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화르르륵!

무언가 타오르는 소리와 함께 제 몸 주변에 저번에 보였던 보랏빛 어둠이 아른거렸다.

따뜻했다.

하지만 자신의 의식이 흐려지는 건 막지 못했다.

―루시온.

라타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라타는 루시온을 지키는 자야.

그 목소리에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라타 안 돼. 분노에 휩쓸리면 안 돼.'

루시온은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라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맞추듯 제 몸을 둘러싼 보랏빛 어둠이 크게 몸을 불려 나갔다.

용서할 수 없어.

보랏빛 어둠이 속삭였다.

―라타도 그래. 하지만 분노하지 않을 거야. 루시온이 원하질 않으니.

라타가 대답했다.

―루시온. 버텨줘. …제발.

유달리 라타가 크게 보였고, 라타의 눈동자 보랏빛 어둠이 어려 있었다.

하늘에 갑자기 보랏빛 어둠이 깔렸고, 날카로운 칼로 모습을 바꿔나갔다.

"…으억!"

놈이 있는 곳에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보랏빛 어둠이 휘몰아쳤다.

놈에게 통하는지 그가 비명을 질렀다.

―루시온.

라타가 루시온을 불렀다.

―라타를 따라 말해줘. 아니, 말해야만 해.

라타이되, 라타가 아닌 느낌에도 루시온은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는 게 고작이었다.

―문 너머로 돌아가거라.

'…문 너머로 돌아가거라.'

루시온은 어둠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끼이익.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빌어먹을! 이게 무슨, 이게 무슨!"

놈이 몸에 꽂힌 무수히 많은 보랏빛 검과 빛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어둠들이 뭉쳐 놈을 문 속으로 밀어 넣어버렸다.

미안해.

죽지 말아줘.

제발, 죽지 마.

어둠은 차마 루시온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며 엉엉 울었다.

보드라운 털 감촉이 느껴졌다.

―죽지 마, 루시온!

라타라기에는 너무 컸지만, 그 크기가 점점 줄어드는 듯했다.

―루시온! 죽으면 안 돼! 라타가, 어헝. 라타가...!

'…안 죽어. 절대로 안 죽어.'

루시온은 의식을 잡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어떻게 발버둥 쳤는데.

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하지만 기어코 감기는 눈을 막지 못했다.

188화. 쉿. 비밀이야

* * *

[…방울이 울렸다고?]

러쉘이 깜짝 놀라며 말을 마쳤지만, 그는 곧 놀란 눈으로 베델을 보았다.

[뭐야, 베델? …빙의가 왜 풀렸어?]

그 말에 베델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빙의를 풀 때, 문밖을 나서는 듯한 그 느낌이 전해져야 했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도련님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흄이 두 사람이 느끼던 의문에 파문을 던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러쉘의 표정에 덜컥 두려움이 드러났다.

'이거 왜 이래?'

루시온의 심장 소리가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루시온이 사라졌고, 라타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심장 소리가 죽어가다니.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기다려 봐. 내가....]

러쉘은 당장 움직였다.

그가 벽을 뚫고 갈 무렵, 뒤쪽에서 루시온이 느껴졌다.

―러쉐에엘!

라타가 눈물을 쏟아내며 울부짖었다.

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덜덜.

흄이 몸이 무너져 내렸고, 온몸을 떨었다.

루시온의 배에 팔뚝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피가 자꾸만 새어 나왔다.

저러면 안 되는데.

저렇게 피가 많이 나오면 안 되는데.

―루시온이이! 루시온이 죽어가아!

라타가 루시온에게 얼굴을 비비며 소리쳤다.

[....]

스르르.

러쉘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심장이 찢어진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오늘에서야 알아버렸다.

유령이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가.

하지만 숨이 막혀서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러쉐엘! 루시온 좀 구해줘어어!

[…흄. 진정하고. 피부터 막아. 뭐든 사용해서 막으라고! 어서…!]

귀를 찌르는 라타의 울부짖음에 러쉘 자신도 모르게 언성이 올라갔다.

"그러겠습니다. 그러겠습니다…!"

흄은 그제야 덜덜 떨며 제 주머니에서 천이란 천은 죄다 꺼냈다.

[베델.]

[말해. 얼른! 얼른 말해, 러쉘!]

베델이 소리쳤다.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지금 벌어진 일은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왜 루시온이 저렇게 되어버린 걸까.

[내가.]

러쉘은 겨우 말을 토해냈다.

[내가 길을 열 테니까, 루시온이랑 빙의해서 시간을 벌어줘, 제발.]

러쉘의 표정이 기어코 무너져내렸다.

울음을 힘겹게 참아내며 루시온이 허락했던 어둠을 사용해 베델이 빙의할 수 있게 문을 열어주었다.

"피가… 멈추질 않습니다!"

흄은 입술을 떨며 목소리를 냈다.

가진 지혈제를 뿌려도, 천으로 상처를 압박해도 피가 멈추질 않았다.

상처가 잘 아물지 않은 루시온의 체질이 이토록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베델이 루시온과 빙의하자 끊어질 듯한 루시온의 숨소리가 그나마 정상으로 돌아왔고, 줄줄 흐르던 피도 천천히 멎어 들어갔다.

엉엉 울던 라타가 루시온의 숨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루시온, 흑, 이제 괜찮은 거야?

[…얼마나 남았는데?]

러쉘이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

베델이 침묵했다.

정말로 그렇게 되어버릴까, 차마 그 시각을 입을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흐느꼈다.

루시온이 죽어가는 게 느껴져 너무도 공포스러웠다.

[러쉘. …러쉘. 루시온 공을 살릴… 방법이 없겠나? 이대로 보낼 수 없다. 이대로… 이대로, 루시온 공을 보낼 수 없어.]

슬픔을 어떻게 수치로 나타낼 수 있겠는가.

하지만 베델은 러쉘이 얼마나 절망에 빠졌는지를 느꼈지만, 결국 그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흄. 루시온을 업어.]

러쉘은 마치 인형처럼 목소리를 냈다.

흄은 당장 루시온을 업었다.

그제야 자신이 무얼 해야 할지 알았다.

루시온이 흔들리지 않게 위로 뛰어갔다.

[그래. 미엘라. 미엘라가 만든 그 목걸이가 …마지막.]

러쉘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베델이 아무리 억지로 루시온을 대신해 숨을 내쉰다고 해도 심장 소리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빛을 정통을 맞았을 때도.

칼에 찔렸을 때도 이렇게 아프지 않았다.

그런데 이 고통은 너무나도 아팠다.

[…마지막 희망이야.]

러쉘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겨우 삼켰다.

자신까지 무너지면 내리면 정말로 끝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온 힘을 다해 버티고 참았다.

"크라언 님!"

흄이 목이 터지라 외쳤다.

세상에.

위에서 그가 루시온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처럼 크라언이 반가울 수가 없었다.

크라언이 그 소리에 다급히 아래로 내려왔다.

"무슨 일...."

크라언의 다리가 한순간 풀렸다.

렌탈에게 업혀 축 늘어진 사람은 다름 아닌 하멜이었다.

너무도 짙은 피 냄새와 렌탈 앞으로 뻗어 나온 하멜의 손은 피로 범벅되어 있었다.

"미, 미엘라 씨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알려 주십시오! 미엘라 씨가 어디 있는지 제발 알려주세요! 제발요!"

흄이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도, 동부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위치가 어디냐면."

크라언은 눈을 크게 뜬 채로 말을 더듬었다.

금세 눈가가 붉어지고 무언가에 막힌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 두려움이 제 목을 틀어막아 버렸다.

[기다려. 내가 추적할 테니까.]

러쉘은 루시온의 어둠을 사용해 크라언의 머리에 어둠을 넣었다.

―라타는, 흑, 준비됐어. 라타는 준비됐으니까, 어서 알려줘어.

라타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흄을 따라가면서 계단에 뿌려진 루시온의피는 라타 자신이 보아도 원망스러울 정도로 너무 많았다.

눈을 질끈 감았던 러쉘이 눈을 뜨며 말했다.

[저기다! 어딘지 알았어?]

―응응. 알아.

흄이 라타의 말에 크라언의 팔을 덥석 쥐었다.

* * *

콰앙!

"까, 깜짝이야!"

미엘라가 갑자기 열린 문소리에 기겁했다.

"누구예요? 헤로안 씨에요?"

하지만 그녀는 곧 익숙한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왜요? 또 망가트렸어요? 내가 그래서 좀 예쁘게 다뤄달라고...."

"…미엘라 씨."

헤로안이 아니었다.

렌탈의 목소리에 미엘라는 끼고 있던 안경을 벗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분이 이상했다.

렌탈이 왜 이 시각에 여길 찾아온 건지.

'분명 저택을 습격한다고 들었는데.'

일이 벌써 끝난 걸까 싶어 미엘라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숨소리가 바로 거칠어졌다.

"…왜, 왜 이러는 거예요? 왜...."

탁.

크라언이 뒤쫓아와 문을 닫았고, 흄이 미엘라를 재촉했다.

"어서 그 아이템을 사용해주세요! 어서요!"

"잠깐만요. …아니지, 아니야."

크라언의 부축을 받고 미엘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엘라는 부르르 떨리는 손을 꼭 쥐었다.

진정해야 했다.

지금 저 목걸이의 사용법을 아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제가, 제가 다른 방에서 준비하고 있을게요. 이, 이쪽에 눕혀주세요."

미엘라는 당장 뛰어가 자신의 침대가 있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목걸이를 챙겨 빛이 깃든 물건이 쌓인 창고로 뛰어갔다.

흄은 루시온을 조심스레 침대에 눕혔다.

크라언이 목 너머로 흘러내리는 피를 보며 기어코 말을 내뱉었다.

"가면을 벗겨야 합니다. 숨을 압박할 겁니다."

하멜과 무얼 두고 계약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정체를 알려고도 하지 말고 알았다고 해도 모르는 척 있어라.

하지만 저대로 두면 위험했다.

흄이 그 말에 망설였다.

[벗겨.]

러쉘이 힘겹게 말을 토해냈다.

지금은 루시온이 먼저였다.

[맞다. 벗겨야 한다.]

베델까지 동의했다.

"비밀을… 지키실 수 있으십니까?"

흄이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자신도 알고 있었지만, 루시온이 지금까지 정체를 숨기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으로 행동했던가.

그 노력을 알기에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지킬 수 있습니다. 만약 제가 변심한다면 그때는 절 죽이셔도 됩니다."

크라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만약 하멜이 누구냐고 자신에게 묻는다면, 자신은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다.

새로운 삶을 주신,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신이라고.

"믿겠습니다."

흄은 그제야 루시온의 가면을 벗겼다.

검붉던 머리카락이 서서히 푸른빛과 회색빛이 뒤섞인 머리카락으로 바뀌었다.

마냥 숨 가쁘던 루시온의 호흡이 차차 가라앉았다.

크라언의 눈과 입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서, 서, 성자?"

그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지만, 저 얼굴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예. 하멜 님께서는 루시온 크로니아 님이십니다."

흄은 어차피 숨길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직접 언급했다.

'어떻게....'

크라언은 그제야 왜 루시온이 하멜이라는 가명을 썼는지 알아차렸다.

크로니아의 막내아들이 흑마법사라니.

흑마법사가 성자라니.

이 맞물릴 수 없는 사실에 혼란을 느끼는 것도 잠시 루시온 근처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검은 여우가 눈에 들어왔다.

루시온이 키운다던 새끼 여우가 있다는 사실을 암암리에 들었는데.

"비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아니, 저는 아무것도 보질 못했습니다."

크라언은 사정이 무엇이든 간에 하멜이 루시온이라는 사실을 가슴 속에 묻었다.

그래야만 했다.

루시온이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얼마나 고됐을까.

어렸던 게 아니라, 루시온은 어렸다.

크라언은 루시온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생겼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가 아니었다.

"버티십시오. 버텨야 합니다."

루시온이 살아야 했다.

반드시 살아야 했다.

"커헉...."

루시온이 또 피를 쏟자 베델은 초조해졌다.

지금 가면이고 뭐고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미엘라는. 미엘라는 아직 멀었나?]

콰앙!

미엘라가 문을 거칠게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흄이 불안한 시선으로 크라언을 보았다.

크라언에 이어 미엘라까지 알려야 할까.

[이건 어쩔 수 없어, 흄.]

러쉘이 바짝 마른 입가를 핥으며 말했다.

가면을 벗긴 건 루시온을 위해서였다.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크라언이 목소리를 냈다.

비밀을 아는 사람이 적어야 하겠지만, 미엘라는 반드시 비밀을 지킬 사람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다시 가면을 씌운다면 가뜩이나 빨라진 숨소리를 재촉할지도 몰랐고.

"제가… 세상에...."

다급히 뛰어오던 미엘라가 하마터면 목걸이를 떨어트릴 뻔했다.

성자인 루시온 크로니아가 아닌가.

그의 옆에 하멜이 쓰던 가면이 놓여 있었다.

미엘라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로 겨우 말을 꺼냈다.

"무, 문을 닫아주세요."

"제가 가겠습니다."

크라언이 당장 움직였다.

미엘라는 입을 꾹 다물고 흄을 보았다.

"아직 사람한테 실험해 본 적은 없어요."

"괜찮습니다."

"아플지도 모르니 몸이 움직이지 않게 잡아주세요."

이 아이템은 아직 완전하지 않았다.

빛을 거르고 그 속에 든 재생력만 남기는 게 목적이지만, 어쩌면 채 거르지 못한 빛이 담겨 있을 수도 있었다.

더불어 재생력으로만 이루어진 힘이 사람에게 어떻게 작용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미엘라는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 방법뿐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기에 시도했다.

"붕대를 찢어주세요."

부욱!

흄은 다급히 배를 감쌌던 천을 찢어냈다.

미엘라가 헛구역을 했다.

저런 상처를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이런 미친."

크라언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처였다.

미엘라는 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며 상처 위에서 벌벌 떨리는 손으로 마법 아이템을 사용했다.

소금이 뿌려지듯 동그랗고 굵은 알갱이가 상처 위로 떨어졌다.

저게 빛을 거르고 남은 재생력의 모습이었다.

꿀꺽.

라타가 훌쩍이며 조용히 바라보았다.

눈처럼 쌓여가던 재생력이 갑자기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가지를 뻗어가듯 서로를 향해 길게 내민 하얀 작대기가 거미줄처럼 이어졌다.

뽀글뽀글.

거품이 일어났다.

휘청.

순간 루시온의 허리가 위를 향해 들리자 흄이 다급히 루시온을 붙잡았다.

발작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루시온의 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미엘라의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그녀는 아이템 사용을 멈추질 않았다.

지금 멈추면 소용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숨을 내쉬고, 천천히.

조심스레, 천천히.

미엘라는 균일한 재생력을 낼 수 있도록 집중했다.

[버텨, 루시온!]

러쉘은 두 손을 꼭 쥐었다.

채 걸러지지 않는 빛 때문이었다.

하지만 심장 소리에 점점 힘이 생기는 게 느껴져 더 간절히 빌었다.

[…제발 버텨줘, 루시온.]

베델도 빌고, 빌었다.

루시온의 몸이 살아나는 게 가장 생생히 느껴졌기에 빌 수밖에 없었다.

"버텨주십시오, 도련님."

흄은 있지도 않은 신을 찾는 사람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해했다.

너무도 간절했기에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자신의 이 바람을 들어줬으면 했다.

―루시온. 다친 거 다 나으면 라타가, 라타가 좋아하는 공도 주고, 간식도 죄다 줄게! 머리카락으로 장난도 안 칠 거고, 그릇도 안 깰게! 그러니까, 눈 떠줘!

라타는 코를 먹은 소리로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목걸이에서 떨어지는 재생력을 먹고 거품이 더욱 커져 상처 부위 전부를 휘감았다.

뽀글뽀글.

거품 소리가 차차 잦아 들어갔다.

그리고 한순간에 거품이 사라졌다.

189화. 쉿. 비밀이야(2)

불완전한 마법 아이템이기에 상처 부위가 완전히 아물지 않았다.

아직도 의사의 도움이 필요한 정도였다.

하지만 러쉘이 눈물을 흘렸다.

루시온의 심장 소리가 너무도 힘차게 뛰었기에 이제 살았다며 안도하는 것 같아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세상에.]

베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냈다.

이 빙의를 풀어도 될 정도였다.

라타가 베델의 말에 눈을 떴다.

조용히 러쉘의 표정을 살폈다.

미엘라가 재생력을 계속 부었지만, 더는 반응하지 않고 미끄러지며 침대 위를 굴렀다.

"안 돼, 안 돼. 아직 멈추지 마. 더, 더 반응하라고…!"

"이제 됐습니다, 미엘라 씨."

크라언이 미엘라의 손을 거뒀다.

미엘라는 당장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았어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잖아요? 이러면 안 되잖아요. 이러면. 이러면 실패...."

"아닙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러니까, 안정기에 접어들었네요."

"…정말요?"

미엘라의 눈동자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예. 미엘라 씨가 하멜 님을 살리셨습니다."

크라언은 목걸이를 가리켰다.

"으흑...."

미엘라가 그제야 울음을 터트리며 목걸이를 쥔 상태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다행이었다.

하멜이 죽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자신의 밝은 해님이 사라지지 않아서 이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크라언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났다.

"나머지는 의사를 불러 치료하면 됩니다. 제가 불러오겠습니다."

크라언은 미소를 내보였다.

루시온의 커다란 상처 옆에 무언가에 찔린 상처는 흉터 없이 말끔하게 사라진 상태였다.

저게 렌탈이 말했던 부상이었겠지.

안타까웠다.

너무도 안타까워서 마음이 쓰라렸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미엘라 님, 크라언 님."

흄이 울먹이며 말했다.

마냥 차갑던 루시온의 손에 온기가 돌아왔다.

살았다.

루시온이 살았다.

흄이 흘린 눈물이 루시온의 손등에 떨었다.

―…흑. 루시오온.

라타가 그제야 다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따뜻해진 루시온의 온기를 느끼며 루시온에게 머리를 비볐다.

* * *

뚝뚝.

피가 떨어지며 바닥을 적셨다.

그놈, 자신을 어둠의 왕이라 주장하는 그놈에게 꿰뚫린 가슴이 아니라 머리에서 흐르는 듯했다.

어디에서 맞았더라.

누구한테 맞았더라.

생각이 나질 않았다.

쏴아아.

비가 내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스마트폰, 신용카드.

그리고 신분증.

가방이 엎어진 모양이었다.

이하람.

신분증에 그런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

자신이 이하람일 때였다.

누군가 걸어왔는지 발이 보였다.

비가 멈췄는지 뭔지 몰라도 더는 온몸을 적시는 비의 촉감이 느껴지질 않았다.

누군가 분명 뭐라고 하는데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머리를 맞은 탓일까.

"…그래서 네가 그릇이 되어야 해."

그릇?

고개가 멋대로 올라갔다.

"만나서 반가웠다. 나중에 봐. 내가 널 찾아갈 테니까."

살짝 끝이 올라가 사나워 보이는 눈꼬리. 잎사귀를 닮은 초록 눈동자, 높게 묶어 올린 포니테일을 한 짙은 회색 머리카락.

그의 얇은 입술이 구슬픈 미소를 지었다.

어?

얼굴에 그려진 이상한 문신은 모르겠지만, 루시온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러쉘 폴.

자신이 제일 존경하는 스승님이었으니까.

* * *

"…헉!"

루시온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진정해, 루시온.]

"괜찮습니다, 도련님. 여긴 중부에 있는 도련님의 방입니다."

흄이 다급히 루시온의 몸을 잡아 흔들리지 않게 했다.

루시온의 눈동자가 러쉘을 향했다.

'그건 분명 스승님이었어.'

자신이 이하람일 적에 왜 스승님이 그 자리에 있었던 걸까.

'개꿈인가?'

루시온은 식은땀을 흘리며 잠깐 생각했다.

여긴 어둠의 손아귀라는 이름을 가진 소설 속 세계에 가깝지 않은가.

아니, 러쉘이 어떻게 자신이 이하람일 적 그곳으로 올 수 있겠는가.

'개꿈이네.'

루시온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도련님. 진정이 좀 되셨습니까?"

흄이 탁자 옆 조명을 켰다.

빛이 들어오자 그제야 루시온은 주변이 아직 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시온은 자신의 배를 더듬거렸다.

[겨우 낫고 있는데, 만지지 마.]

러쉘이 루시온의 손을 쳤다.

"…상처는 어디로 갔습니까? 이거 혹시 꿈입니까?"

[꼬집어줘?]

루시온은 자신의 겨드랑이와 허리 틈에 꼬물딱거리는 느낌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라타였다.

고로롱, 거리며 잠에 취한 채 배를 내보이고 있었다.

루시온은 깊은 안도감과 함께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느낌에 눈을 감았다.

'…하. 무사했어.'

죽지 않았다.

그놈.

자신을 어둠의 왕이라 부르는 그놈에게서 무사히 도망친 건가.

"어, 어디 아프십니까? 진통제를 드릴까요?"

흄이 호들갑을 떨며 물었다.

그제야 슬그머니 밀려오는 현실이 루시온을 덮쳤다.

그만한 상처로 자신이 사는 방법은 딱 하나였다.

미엘라의 역작.

"…혹시 미엘라가 만들고 있던 그 아이템을 나한테 사용했어?"

루시온이 물었다.

"맞습니다. 미엘라 님께서 만든 그 아이템이 도련님을 살렸습니다."

흄은 그때를 떠올리며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

"하...."

루시온이 깊게 숨을 토했다.

정말로 목숨 하나가 늘어났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베델은?"

[저택 주변에 경계를 서고 있어.]

러쉘이 대답했다.

"무… 슨 일이 생겼습니까?"

[너 말고 없어. 베델이 답답해서 그러는 거니까, 지금은 내버려 둬.]

기사로서 주인을 지키지 못했다는 무력감이 밀려왔을 수도 있었다.

그 감정은 누구도 달랠 수 없었다.

"스승님.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라타한테 들었습니까?"

루시온은 흄이 건넨 물을 마신 후에 입을 열었다.

[듣긴 했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더라.]

"…그놈이 나타났습니다."

루시온은 라타를 바라보았다.

그놈은 자신을 어둠의 왕이라고 불렀다.

그 말이 트로에도, 어둠도 꺼내지 못한 놈의 이름일까.

[너랑 라타만 빼고 다 멈춰 있었다며? 라타는 네가 놈의 손에 배가 관통되는 걸 보고 그 뒤에 의식이 없었다고 했어.]

'그건 라타의 의지가 아니었나?'

루시온은 핵심을 잘 말한 라타의 말솜씨도 놀라웠지만, 자신이 기절하기 전에 만났던 라타가 또 본인 의지로 움직인 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의문이 들었다.

러쉘이 입을 열었다.

[루시온. 일단 네가 알아야 할 게 있어.]

"혹시 형님께서 오셨습니까?"

[맞아. 어제 와서 난리를 부리고 오늘 동부로 떠났어.]

"조직이 발칵 뒤집혔습니까?"

[그것도 맞아. 맞는데, 소수야.]

"소수라뇨?"

[너, 들켰어.]

"예?"

[들켰다니까.]

루시온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눈동자를 돌리자 흄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다시금 루시온의 입가에 어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제가… 하멜인 걸 들켰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

루시온이 맹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흄과 눈치를 살피던 러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진짜네요. 진짜 들켰네요."

루시온이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들켜버렸다.

"미엘라나, 크라언입니까? 아니면 둘 다입니까?"

루시온은 당장 생각나는 사람들을 꺼냈다.

"…둘 다입니다."

목소리를 죽인 흄이 슬쩍 고개를 들며 말했다.

"됐어. 고개 들어, 흄. 들킨 걸 어쩌겠어. 이제 따로 찾아서 말 좀 나눠봐야지."

루시온은 허탈했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고, 시기가 조금 당겨졌을 뿐이었다.

"화가… 나셨습니까?"

흄의 물음에 루시온은 피식 웃었다.

"안 나. 이런 일이 올 거라 예상했으니까. 카슨 형님이나 헤인트 형님에게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네."

조직원들은 자신의 힘으로 해결 가능한 선이었지만, 그 두 사람은 아니었다.

들키면 문제가 너무도 복잡해지겠지.

"참, 형님께서 동부엔 왜 가셨습니까?"

루시온은 카슨이 동부로 갔다는 사실이 무척 신경 쓰였다.

[죽지 않는 병사를 만든다는 사실을 알았나 봐.]

자신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정보를 찾아서 여기까지 왔지만, 크로니아는 아니었다.

진짜 미친 정보력이었다.

"흄, 자료는 아직 얻지 못했지?"

"예. 자리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이 꼴이었으니 흄이 자리를 떠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라타도 자신과 연결된 만큼 멀리 떨어질 수도 없었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어?"

"이틀 됐습니다."

이틀이라는 사실에 루시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헤인트가 계속 트웰로를 잡고 있었고, 어제 카슨까지 확실하게 압력을 넣어서 놈을 풀어주진 못할 거니까 신경 쓰지 마.]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루시온은 안도했다.

그는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몇 시지, 흄?"

"새벽 3시입니다. 더 주무셔도 됩니다."

"연락용 아이템 좀 줘봐."

[새벽 3시라니까? 새벽 3시 몰라?]

러쉘의 언성이 단번에 높아졌다.

"힘이 없을 뿐이지, 이제 괜찮습니다."

[루시온…!]

"쉿. 라타 깹니다."

라타가 꼬물거리자 루시온은 라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루시온. 네가 어땠는지 모르니까… 그 말이 잘도 나오지?]

러쉘이 울컥하며 말하자 루시온은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누워.]

하지만 러쉘이 루시온의 이마를 누르며 억지로 눕혔다.

"…스승님.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제 배가 그놈한테 꿰뚫렸습니다. 죽을 뻔했습니다. 아니, 트로에의 축복과 성물이 없었으면 진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흐려지는 의식을 잡으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 짜내서 쓴 수였다.

덕분에 놈에게도 빛이 통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 …이 미친놈아!]

러쉘이 단번에 언성을 높이다 라타를 힐끔 쳐다보았다.

[성물을 썼다고? 성물을? 빛이 깃든 물건도 아니고? 어쩐지 상태가 더 안 좋다더니! 넌, 루시온 넌 진짜 미친놈이야!]

러쉘은 욕지거리를 퍼붓고 싶은 얼굴로 애써 말의 수위를 낮췄다.

제 발로 무덤을 판 셈이라 루시온은 당황했지만, 서둘러 말을 던졌다.

"그놈을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뭐, 뭐라고? 대체 언제?]

러쉘이 기겁하며 묻다 말고 무언가를 생각한 것처럼 움찔거렸다.

[…설마, 네가 성자가 된 기념으로 열린 축제 날, 루미노스가 부쉈던 그 저택에서 본 거야?]

그날, 뭔가가 이상했다.

분명 루시온을 습격한 것도 없음에도 난데없이 피를 토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친숙한 느낌까지 들었다.

"맞습니다. 그날입니다."

[왜 말을 안 했어?]

"놈이 그놈인지 몰랐습니다."

[놈이 그놈이 아니라도 상관없었어. 왜 말을 하지 않았어?]

"믿지… 않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루시온의 눈꼬리가 아래를 향했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네가 돌멩이를 가리켜 모래라도 해도 나는 믿겠다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담 갖지 마, 루시온. 솔직히 말해서 나는 듣고, 믿어주는 게 고작이니까. 육신도 없는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러쉘은 자신을 낮추며 루시온의 마음을 짓누르는 부담을 지우려 했다.

비록 만남은 짧았지만, 루시온을 알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루시온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지금 모든 걸 러쉘에게 다 말해버리고 싶었다.

자신이 소설 속에 나온 중간 보스였고, 어떻게 죽는지, 왜 죽는지 알기에 그 운명을 피하고자 이러고 있는 거라고.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러쉘이라면 자신을 반드시 믿겠지만, 실이, 망할 운명이 러쉘뿐만 아니라 흄, 그리고 베델까지 덮치면 어떡하나 싶었다.

소설 속에 자신의 존재로 이미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던가.

그게 설령 지금 현실에 있는 자신이 아닐지라도 똑같이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스승님, 흄."

루시온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절 아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멈출 수 없습니다."

[멈추라는 게 아니야. 조금만, 조금만 쉬고 난 후에 움직이라는 거야.]

"제… 목에 검이 겨눠져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순간, 루시온은 목이 콱 틀어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 그놈이 무서운 건 알겠어. 이해해. 정말로. 나도 무서우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먼저 쓰러질 순 없잖아.]

러쉘이 자신의 말을 오해했다.

자신이 두려운 게 그놈, 어둠의 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그 검은 저한테만 겨눠진 게 아닙니다. 제가 움직여야 합니다."

[너만 움직이지 않아도 돼. 방법을 찾자. 다 같이 머리를 맞대서 생각하자고.]

"그래도 제가 움직여야 하는 건 절대로 변하질 않습니다. 그러니까, 스승님. 제가 지쳐서 일어날 힘이 없어진다면 그때, 일으켜주세요. 지금은 그냥 달리게 내버려 두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원해서 달리는 게 아니니까요.

루시온은 말을 삼켰다.

"도련님. 전 도련님의 인도자입니다."

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샤 님이 알려주셨습니다. 인도자란, 길을 이끄는 사람이라는 걸요. 가장 위대하면서도 숭고한 자 옆에서 그분의 방패가 되어드리는 자라는걸요."

흄의 눈동자에 강한 힘이 어린 듯 반짝였다.

'내가 가장… 위대하면서도 숭고한 자라고?'

루시온은 순간 소름이 돋아나는 걸 느꼈다.

자신이 들어본 말 중에 가장 개소리로 들렸다.

자신은 그런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라비엔 중에서도 라비엔의 힘을 이어받을 수 있는 제 힘은 오직 도련님을 위해 생겨났습니다."

의지가 가득한 흄의 말에 루시온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도련님께서 거둬주셨지만, 이 목숨과 이 삶은 절 위해 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절 위한 길입니다. 제가 절 위해 도련님을 따라가는 것뿐이니 말리지 말아주십시오."

"…어디서 못된 고집을 배워왔어?"

루시온이 피식 웃었다.

"도련님한테서 배웠습니다."

흄의 목소리와 눈빛과 그리고 미소에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190화. 쉿. 비밀이야(3)

"뭐?"

[맞네. 너한테 배운 거.]

러쉘이 황당해하는 루시온을 보며 키득거렸다.

루시온의 미간이 좁혀졌다.

"…어서 연락용 아이템을 넘겨, 흄."

고집은 자신도 인정하는 바라 루시온은 손을 뻗고 재촉했다.

[포기한 거 아니었어?]

"잘 봐, 흄. 고집은 이런 거야. 한번 하고자 하면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지."

루시온이 러쉘의 웃음을 이어받으며 키득거리다 말고 배를 움켜쥐었다.

"…으."

[아프지. 그게 안 아프면 사람이게.]

"진통제를 드리겠습니다."

흄이 다급히 목소리를 냈다.

"아냐. 됐어. 참을 만해."

루시온은 흄이 망설이다 넘긴 연락용 아이템을 쥐었다.

기왕 들켰으니 굳이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참 편했다.

"크라언."

루시온이 연락했다.

<…하, 하멜 님?>

새삼 낯선 목소리에 크라언이 놀라며 물었다.

"뭘 놀래? 구면도 아니고. 날 루시온이라고 부를래? 아니면 하멜이라고 부를래?"

<제가 모시는 분은 하멜 님이십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게 주장하는 크라언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떠볼 생각을 지워버렸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몸은… 괜찮으십니까? 혹시 방금 깨어나셔서 제게 연락하신 건 아니시죠?>

크라언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자신을 대했기에 그게 우스웠다.

"맞아."

<하, 하멜 님! 무조건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마법 아이템의 효과를 빌었다고 해도 몸에 부담이 가신 사실이 지워지지 않는 건....>

"고마워, 크라언."

<…아닙니다. 제가 한 건 없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못 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해."

<예? …예?>

크라언이 황당해했지만, 루시온은 계속 목소리를 꺼냈다.

자신이 루시온이라는 걸 알았어도 크라언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도 딱히 의식해서 달라질 필요는 없었다.

"그 저택에서 얻었던 정보는 이미 정리하고 있든, 정리했을 테고. 그럼 저택을 습격하기 전에 나하고 만났던 그 언덕에서 팔찌랑 단검이랑, 브로치 좀 주워올 수 있겠어?"

성물을 회수하지 못했다.

하지만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했다.

<소중한 물건입니까?>

"맞아. 성물이야."

<아. 성물이… 서, 성물이라뇨? 빛의 신께서 직접 만드셨다던 그 성물을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죠? 제발 그렇다고 말씀해주십시오!>

"어쨌든, 회수해 줘. 오늘 밤 찾아갈 테니까."

<안 됩니다! 문이란 문은 죄다 잠가 버릴 겁니다! 쉬셔야 합니다! 무조건 안정을 취하셔야 할 상처입니다!>

문은 딱히 자신에게 있어 방해물은 아니었다.

루시온이 피식 웃음을 날렸다.

"다시 잠근 문을 열려면 피곤할 텐데. 그게 좋다면 마음대로 해. 그럼, 이만."

<하멜 님…!>

"…아. 만약 자료 분류가 다 끝났다면 미안하지만, 트웰로 스프리카도 위주로 모아줬으면 해. 그리고 개미굴은 이제 박살 내버려. 뉴브라 왕국에서 보낸 감사원도 다녀갔을 테니까."

<거기서 뭘 모으면 되겠습니까?>

크라언은 불만이 섞인 목소리를 내며 물었다.

"4황자, 오웬 테슬라. 그리고 미엘라한테는 내가 따로 연락할 테니까, 그냥 깨어났다고 말해줘."

루시온은 할 말만 끝내고 연락을 끊어버렸다.

"저 다시 잘 겁니다. 눈이 감기네요."

루시온은 목까지 이불을 당기다 크게 하품했다.

눈이 구불구불 감겼다.

[여기까지 버틴 것만 해도 잘했네.]

러쉘이 빈정거렸다.

"흄."

"예, 도련님."

"혹시 내가 깊게 잠들어도 깨워. 동부에 그 저택으로 가서 비밀 장소를 털어야 하고, 하멜로서 헤인트 형님하고 만나서 대신전에서 발견한 네바스트 첩자인, 그...."

"세피로입니다."

"그래. 그놈이 뭘 실토했는지 나도 들어야지. 그리고 모은 증거를 넘겨서...."

그러고 보니 검은 구슬은 어디에 있는 걸까.

루시온은 마지막 생각을 끝으로 넘실거리는 꿈의 세계에 발을 내디뎠다.

* * *

"…죽음의 바다 사건도 있고, 잠깐 중부에 머물러야겠어."

헤인트가 후식으로 마카롱과 푸딩을 건드리는 루시온을 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형님도 기다려야 하잖습니까."

"그렇긴 하지. 카슨이 같이 크로니아로 돌아가자고 말했으니… 아, 루시온."

"예?"

루시온은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잠만 잤더니 먹어도 먹어도 배가 허전한 기분에 그 많던 후식도 잘 들어갔다.

정작 그 배는 욱신거려왔지만, 알게 뭐람.

구멍을 메꿔야 하니 더 잘 먹어야지.

베델이 자신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자 루시온은 시선을 돌리려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라타도 아.

루시온의 무릎에 얌전히 앉아 있던 라타가 입을 벌렸다.

"루시온. 혹시 나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지 않아?"

"범인은 잡혔습니까?"

루시온은 마카롱을 하나 집어 라타에게 슬쩍 주었다.

―이히히. 라타는 이제 행복해.

"…아직."

"그럼 없습니다. 어차피 잡힐 텐데 뭐 하러 형님을 닦달하겠습니까?"

루시온은 얼른 다른 마카롱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그건 사고였습니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사고요."

착한 녀석 같으니라고.

헤인트는 다시금 생각했다.

예측할 수 없는 사고를 막으라고 자신이 있었다.

세틸 저하가 화를 냈고, 노비오에게 깨졌고, 카슨한테 멱살도 잡혔다.

써야 할 경위서도 얼마나 많은지.

그런데 가장 자신을 원망할 루시온이 아무 말도 하질 않아 오히려 마음이 더 좋지 않았다.

"여기저기에서 한 소리 들은 표정입니다."

우울해 보이는 헤인트의 표정에 루시온은 마카롱을 먹으며 말을 꺼냈다.

"엄청 깨졌지."

헤인트는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지금까지 죽음의 바다가 경계를 넘은 적이 없었는데, 그 검은 손은 뭐고, 왜 널 노렸는지 물어도 내가 설명할 길이 없네."

"신전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지금 내부에서도 엄청 시끄러워서 조사까지 늦어지고 있어."

헤인트는 턱을 괬다.

"왜요?"

"으음… 이건 기밀이라서 누출하면 안 돼. 미안해."

"아닙니다. 그런 거라면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멜로 들으면 되니까 상관없었다.

루시온은 그저 대신전 내부의 조사가 잘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흡족할 뿐이었다.

"루시온. 트웰로가 신경 쓰인다고 했지?"

"예.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나도 내 직감이 놈이 범인이라고 하는데 증거가 없어."

'없으면 오늘 가져다줘야지. 얼른 처넣어버리게.'

루시온은 자몽 에이드를 홀짝였다.

"루시온."

헤인트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말씀하십시오."

"저번 변경에서 나타난 흑마법사 일로 네바스트에서 정식으로 뉴브라 왕국에 항의를 보냈다고 해. 아마 어제였을 거야."

'지랄하고 있네.'

루시온은 하마터면 코웃음을 칠 뻔했다.

[진짜 뻔뻔하다. 하긴. 뻔뻔하니까 뒤에서 사람도 납치하고 그러는 거겠지.]

루시온이 치지 못한 코웃음을 러쉘이 대신했다.

"신성 국가에서 항의하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전 오히려 늦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그 진실을 밝힌다는 이유로 우리 제국에도 슬슬 말을 걸고 있는데… 음, 아마 너를 끌어들이려는 것 같아."

"지금 삼파전을 하자는 겁니까?"

루시온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네바스트가 갑자기 뉴브라 왕국에 항의했다는 사실이 퍽 우스웠는데 역시 꿍꿍이가 있었다.

네바스트와 뉴브라가 혹여나 손을 잡으면 어떡하냐는 잡음을 위해 테슬라에서도 간섭하라고 강요하며 흑마법사 일에 당연히 성자도 나서야 한다는 핑계를 대겠지.

'이제 그 두 놈이 손을 잡은 건가? 아니면 단순히 이해관계가 맞물린 걸까?'

루시온은 딱 하나가 걸렸다.

성자인 자신이 죽길 바라는 건지, 아니면 귀족인 자신이 죽길 바라는 건지.

루시온은 그 불확실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건 진짜 이상한 말이긴 한데, 내가 보기에 네바스트까지 널 노리고 있어."

"형님."

"그래. 걱정하지 마. 절대로 네가 네바스트로 향할 일을 만들지 않을 테니까."

"아닙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무슨 소리야?]

헤인트와 러쉘이 동시에 말했다.

아, 깜짝이야.

루시온은 라타를 쓰다듬으며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옛말에 호랑이를 잡으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하고, 짐승을 잡으려면 짐승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니 여지는 남겨주십시오."

"루시온.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어?"

"카슨 형님께는 비밀입니다."

루시온은 인상을 구긴 헤인트를 보며 배를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루시온. 잠깐 기다려봐."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네바스트가 절 노리고 있다면서요?"

"…아직 추측이야."

루시온은 헤인트가 참 거짓말을 못 한다 싶었다.

하지만 모르는 척 넘어갔다.

"뉴브라는 언제나 제 목을 가져가길 원했죠. 둘이 손을 잡았을 가능성은요? 적이 언제 진짜 모습을 보이신다고 생각합니까?"

마냥 온순해 보이던 루시온의 모습이 오늘따라 달라 보였다.

보호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마치 대등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헤인트는 놀란 눈으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궁지에 몰렸을 때? 아닙니다. 의혹이 제기될 때? 그것도 아닙니다. 바로 먹잇감을 손에 넣었을 때입니다. 제가 바로 그들의 먹잇감입니다."

루시온이 미소를 지었다.

제법 살벌한 미소였다.

"하지만 죽는 건 제가 아닙니다. 그러니 형님. 여지를 남겨주셨으면 합니다. 그 정도는 해주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루시온은 자신이 너무 본색을 드러냈나 싶어 다시 말을 꺼냈다.

"계속 보호받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저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거니 큰 오해가 없었으면 합니다."

루시온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방으로 돌아갔다.

'…열이 단단히 받은 모양이야.'

헤인트는 루시온이 떠난 자리를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싹 비운 그릇을 보며 피식 웃었다.

'하긴, 그럴 만하지.'

헤인트는 테이블을 툭툭 건드리며 의문이 가득 찬 표정이 되어갔다.

'이틀 전에 루시온 주변에 풍기던 피 냄새가 마치 방금 상처를 입은 것처럼 정말 짙었는데. 혹시 어딜 갔다 온 건 아니겠지?'

헤인트의 눈동자가 또르르 구르다 자신의 뺨을 때렸다.

짜악.

'정신 차려. 아직도 미련이 남는 거라면 정신 차리라고. 루시온이 그 몸으로 가긴 어딜 갔겠어?'

헤인트는 빨개진 볼을 감싸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 * *

"비밀번호가 뭐라고 했지, 흄?"

루시온은 꼭 스마트폰 액정 같은 번호 마법의 촉감에 오랜만에 그립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84217입니다."

흄이 대답하자 루시온은 빠르게 번호를 입력했다.

카슨이 여기에 오기 전에 서둘러 자료를 찾고 튀어야 했다.

동부 어디라는 소리는 들었겠지만, 구체적인 장소를 찾는 건 아무리 크로니아라도 무척 어려울 테지.

띠링.

비밀번호가 맞다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도련님."

흄이 목소리를 냈다.

"왜?"

"이곳에 계셔도 괜찮으십니까?"

"내가 보기에 네가 나가야 할 것 같은데? 안색이 나빠."

"전 괜찮습니다. 그냥…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나쁠 뿐입니다."

"베델 너도 별로 상태가 좋지 않고."

베델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답답하고 괴로웠다.

루시온 자신에게 있어 테펠로우 셀가 저택 지하는 그저 찾아야 할 물건이 있는 장소일 뿐이었다.

그놈이 나온 건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타락을 건드렸기 때문이라 딱히 별생각도 없었다.

그냥 상처가 욱신거려왔다.

―언제 나가, 루시온? 라타는… 여기가 싫은데.

라타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자료 얻고, 여길 정리한 뒤에 나가야 해. 이틀 동안 연락이 두절됐으니 뉴브라에서도 사람을 보냈을 테니까."

루시온은 문을 열었다.

5평 남짓한 공간에 테이블과 소파, 그리고 책장이 전부인 공간이 드러났다.

안쪽에 어디론가 통하는 문이 하나 더 존재했다.

"다 챙기고 있어 봐, 흄."

루시온은 자신이 열었던 문을 닫고는 반대편 문을 돌렸다.

[내가 보고 올 테니까, 너도 챙겨 루시온.]

러쉘은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저도 얼른 챙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카슨이 동부로 왔다.

그 사실에 흄은 뭔가에 쫓기는 느낌을 떼어놓을 수 없었다.

"아마 형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루시온은 카슨과 이어진 붉은 실을 의식하며 말했다.

기회가 왔는데 저 붉은 실이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번처럼 제 배를 내어주지 않을 테니까요."

루시온은 자신 있게 말했다.

저번에는 확인할 수단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붉은 실이 있으니 실이 좁혀지자마자 튈 생각이었다.

또 검에 찔리는 건 질색이었다.

191화. 망국의 왕자, 크라언

[그래. 유령들이 주변을 감시하고 있으니 한결 낫겠지. 하지만 상대는 카슨이야. 대화가 안 통한다고.]

러쉘이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헤인트 때야 인질도 있었고, 어느 정도 대화할 수 있는 수단이 있었다 치지만, 카슨은 설령 그 수단이 있다고 한들 들을 사람이 아니란 생각부터 들었다.

게다가 변경 너머에서 이미 한 차례 접점이 있지 않았던가.

분명 기억하고 덤비겠지.

"제 형님이지만, 너무도 단호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루시온은 자료를 담으며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서둘러.]

러쉘은 안쪽에 있는 문으로 들어갔다.

대충 5분쯤 지났을까, 러쉘이 돌아와 밖은 그냥 산으로 이어지는 통로일 뿐이라고 알려줬고, 흄이 입을 열었다.

"다 담았습니다."

"벌써…?"

루시온이 자신 앞에 있던 자료를 집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고작 귀퉁이에 쌓인 몇 개의 자료를 담았던 자신과 나머지 자료들을 담은 흄의 속도가 단번에 비교가 됐다.

자신이 이렇게 손이 느렸던가.

"이제 움직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맞아! 어서 움직이자, 루시온!

라타가 흄의 제안을 덥석 받으며 루시온을 재촉했다.

"크라언 님을 만나서 성물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흄이 오늘따라 다급했다.

루시온도 되도록 이곳에서 카슨을 마주하긴 싫었기에 지하를 벗어났다.

―하. 라타는 이제 행복해.

그제야 라타가 그림자 밖으로 나와 신나게 저택을 돌아다녔다.

루시온은 저택 곳곳을 돌아다니며 떠도는 유령들을 죽음과 삶의 경계로 보내버렸다.

그중에서 조직원이었던 자들도 있었다.

루시온은 혼란스러운 그들의 시선을 외면하지 않았다.

조직을 위해 목숨을 바친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자신이 줄 수 있는 보답일 테니까.

[…하멜 님. 혹시 제가 보이십니까?]

유령이 된 조직원 중 누군가 루시온과 시선이 맞자 물었다.

"예, 보입니다."

그 대답에 유령이 된 조직원들이 루시온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럼 제가 죽… 었습니까?]

누군가는 부정하고.

[역시 죽었군요.]

누군가는 이를 받아들였다.

[왜, 왜 빛의 신께서 저희를 배웅해주시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누군가는 자신이 배웠던, 죽음의 끝을 언급했다.

"신이 없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이게 죽음입니다. 신은 오질 않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고요."

루시온이 손을 뻗었다.

"혹시 길을 잃으셨다면 제가 가야 할 곳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조직을 위해 일해주셨던 여러분께 제가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인사입니다."

마지막 인사.

그 말에 제각각 다른 표정을 지었던 그들이 조금씩 미소를 지었다.

[역시 하멜 님은 상냥하신 분이셨습니다. 왜 그간 홀로 다니시는지 이제야 이해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들이 루시온의 손을 잡기 시작했다.

[이 풍경은… 정말로 고독하네요. 저를 보내주세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들 남길 말씀이 있으십니까?"

루시온의 물음에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다 마치 약속한 것처럼 루시온을 안아주었다.

"...?"

루시온은 정말 깜짝 놀랐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알던 유령들과 달리 다정했으니까.

그저 스승님과 베델 말고도 자신을 좋아해 주는 유령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 손바닥이 괜히 간질거렸다.

[죽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지만, 잠깐이나마 조직과 함께해서 행복했습니다.]

[더 오래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그게 너무 아쉽네요.]

[제 마지막을 함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멜 님.]

루시온은 그들의 말을 모두 들은 뒤에 손아귀에서 어둠을 꺼냈다.

아쉬웠다.

마음 한편이 쿡쿡 찔린 느낌이 들었다.

조직원들은 하나둘, 어둠에 뒤덮여 반짝이며 사라졌다.

반짝거림이 오늘따라 아련하게 보였다.

루시온은 가면을 벗어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명복을 빌었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시길."

* * *

"…하."

루시온은 숨을 골랐다.

자신이 어둠의 왕에게 가진 어둠을 전부 뺏겨 빈털터리가 된 상태에서 배에 구멍도 뚫려 골골댈 때, 어둠이 무언가를 주었다.

그 힘이 마치 검은 구슬 같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자신의 어둠이 늘어났고, 이에 따라 라타가 사용할 수 있는 그림자 이동의 거리도 늘어난 상태였다.

그래도 여러 번 사용해야 중부로 돌아올 수 있기에 가뜩이나 몸도 좋지 않아 힘든 건 어쩔 수 없었다.

"지쳐 보이십니다."

흄이 부지런히 루시온을 향해 시원한 바람을 불어넣었지만, 이미 그는 땀범벅이었다.

"아까 통풍도 되지 않은 저택에 있어서 그래. 그래도 밤이라 좀 났네. …아."

루시온이 중부에서 크라언을 만나기로 한 장소를 앞두고 무언가 생각이 났다.

[왜 그러는가? 혹시 그 저택에 빼먹은 게 있는 건가?]

베델이 물었다.

"아니. 다 했어. 거기엔 이제 더는 볼일이 없어."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틀 전에 그 저택에서 죽지 않는 자에게 죽었던 흑마법사를 지배했고, 오늘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그리고 베델의 검에 최후를 맞이하도록 했다.

그녀가 원한 일이었다.

"검은 구슬이 뭐로 만들어졌는지 말하는 걸 잊었습니다."

루시온은 러쉘을 보았다.

아마 그가 이 말을 제일 반길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검은 구슬이 뭐로 만들어졌다고?]

아니나 다를까, 러쉘은 맛좋은 음식을 눈앞에 둔 것처럼 입가를 핥으며 재촉했다.

"그놈의 피라고 해야 할지, 체액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둠이 그놈을 공격했고 거기서 검은 구슬의 힘과 똑같은 무언가가 튀어나왔습니다."

[혹시 어둠이 한 공격이 통했어?]

"아뇨.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건 피도, 체액도 아닌, 아마도 놈이 가진 '어둠'일 거다.]

루시온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네 어둠으로 널 공격할 순 없어. 마나든, 빛도 다 똑같아. 하지만 어둠이 한 공격은 통하지 않았고 뭔가가 튀어나왔다며?]

"예."

[그러니까 자연에 떠도는 어둠과는 다른 그놈이 가진 '어둠'일 수밖에 없지.]

열심히 설명하던 러쉘은 기어코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그 어둠을 어떻게 네가 흡수할 수 있냐는 거야.]

"잊으셨습니까? 제 존재가...."

[아니. 그릇도 모양에 따라 용도에 따라 담을 수 있는 힘의 크기와 모양이 다른 것처럼 이것도 마찬가지야. 한 그릇엔 하나의 힘밖에 담질 못해.]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럼, 제가 원래는 담을 수 없는 힘을 담을 수 있단 말입니까?"

[여기서 가정은 두 개야. 네가 가진 그릇은 뭐든 담을 수 있는 그릇이거나, 애초에 그 힘의 주인이 너였다거나.]

"전자겠네요. 후자는 말이 안 되잖습니까."

루시온이 피식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네 어둠은 이미 있으니까.]

루시온은 속이 후련함을 느끼고는 약속 장소로 걸어갔다.

"오셨습니까?"

크라언이 루시온과 흄을 반겼다.

"혼자 온 거 아니지?"

루시온이 묻자 크라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라인트도 따라왔습니다. 물론 다른 곳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미엘라도 오고 싶어했지만...."

"오늘 들었어. 그 아이템을 반드시 완성시킬 거라고 의지를 태우던데?"

오늘 루시온은 미엘라와 연락을 했다.

그저 '미엘라 씨.'라는 말을 꺼냈을 뿐인데 그녀는 울었다.

너무도 서럽게 울기에 자신이 미안해질 정도였다.

그리고 한참 후에 그녀는 말을 꺼냈다.

―오늘은 쪽팔, 아니, 조금 창피하지만 괜찮아요. 있죠. 방금 이 아이템의 이름을 정했어요. 얘는 '햇님이'에요. 유치하지만, 저는 마음에 들어요. 하멜 님께서는 제게 햇님과도 같거든요. 우중충한 먹구름도, 비도 죄다 없애줬어요. 그러니까, 이 햇님이가… 부디, 부디 하멜 님을 지켜줬으면 해요.

햇님이.

다시 생각해도 웃긴 이름이었지만, 그 아이템을 만든 건 미엘라였다.

그녀가 좋다면야 무슨 상관이겠나.

루시온이 자리에 앉으며 가면을 벗었다.

기왕 들켰으니 뭐 하러 답답하게 가면을 쓰고 있겠는가.

크라언이 순간 움찔거렸다.

"왜 놀라? 내 얼굴에 뭐 묻었어?"

"…그, 믿기질 않아서 그럽니다."

"내가 성자인 거? 아니면 성자가 흑마법사인 거?"

루시온이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짓자 크라언이 한결 편안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간 가면에 가려져 보지 못했던 얼굴이었기에 저렇게도 웃을 수 있구나 하며 생각했다.

루시온은 어렸고, 또 어른스러웠다.

그 차이가 안쓰럽기도 했다.

"그나저나 방이 시원하네."

루시온은 잠깐 눈을 감았다.

머리는 가면 덕분에 시원했지만, 다른 곳은 아니었다.

"예. 일부러 이곳으로 골랐습니다. 그것보다 벌써 이렇게 돌아다니시면 안 되잖습니까."

"잔소리는 됐어."

"아뇨. 더 하셔도 됩니다. 도련님께서는 그 말이 필요합니다."

흄이 미소를 지으며 루시온의 말을 바로 반박했다.

[그렇지. 잘한다! 흄 네가 최고다!]

러쉘은 당장이라도 흄을 얼싸안을 정도로 그를 높이 띄웠다.

테이블에 앞발을 올려 기지개를 하던 라타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라타는 크라언도, 흄도 다 잘한다고 생각해! 최고다!

이히히.

빠르게 흔들리는 라타의 꼬리와 함께 행복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베델은 그 모습에 웃음을 흘렸다.

같이 동참하고 싶지만, 루시온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차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아무래도 제가 하멜 님을 정확하게 본 것 같습니다."

루시온 옆에 서 있는 렌탈의 정체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크라언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중생활을 하시느라 몸이 그렇게 축나셨다는 걸 이제라도 알아서 저는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엘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루시온의 한쪽 눈썹이 올라가자 크라언은 새삼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떤 형태로든 하멜 님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게 너무 기쁜 겁니다."

"그러니까 왜?"

"하멜 님."

크라언은 안타까움이 섞인 목소리로 루시온을 불렀다.

어제 개미굴을 차지했다.

조직원들이 그곳에 쌓인 정보를 쓸어왔고, 그중 루시온 크로니아라고 적힌 정보에 손을 대고 말았다.

정보가 새로 바뀐 다른 곳과 달리 루시온 크로니아의 정보는 예전 것만 존재했다.

크라언은 루시온이 받는 걸 어색해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았다.

루시온의 주변에는 온통 적들뿐이었다.

그의 정보를 캐내려는 자들, 그를 납치해 뉴브라 왕국에 팔아버리려고 했던 이들, 그를 죽이려는 이들.

크라언은 밀려오는 참담함에 더는 읽을 수 없었다.

자신이 루시온과 같은 나이 때, 왕자로서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자신이 나라를 잃고, 개같이 구르기도 전에 루시온은 이미 가시밭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왜?"

"뭘… 좋아하십니까?"

"마카롱."

루시온은 소파에 기대서는 대답했다.

순간 크라언의 눈동자에 깃든 안쓰러움을 보았기에 루시온은 코웃음을 쳤다.

크라언이 개미굴에서 자신의 정보를 읽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크라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그는 자신을 배신하지 않았고 비밀을 지키려 했기에 상관없었다.

어제 드디어 지부를 모두 손에 넣었다.

6개의 지부를 포함해 개미굴까지.

당연히 붉은 실이 나타났고, 그 방향은 서부를 향했다.

서부에는 뉴브라 왕국이 있었다.

"개미굴에 적힌 '사과'는 내가 조작한 거야. 난 사과 싫어해."

"제가 더 신경 쓰겠습니다."

"성물부터 줘."

루시온은 손을 내밀었다.

"이거 정말 성물이 맞습니까?"

크라언의 의심에 루시온은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진짜인지 아닌지 보여줘?"

"아, 아닙니다!"

크라언은 고개를 저었고, 곧 물었다.

"왜… 이걸 모으시는 겁니까?"

"신수가 필요하다고 해서."

"진짜 신수께서 하멜 님을 선택하셨습니까?"

루시온은 의심이 많은 크라언을 위해 당장 앞머리를 올려 이마를 가리켰다.

"여기 보이지? 이게 신수의 축복을 받은 증표야."

크라언은 제 눈으로 보았지만, 금세 혼란이 밀어닥쳤다.

"흑마법사가 성자가 될 수도 있습니까?"

"어제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라고 했지? 시간이 지났으니까, 안 가르쳐 줄 거야."

"…쪼잔하십니다."

크라언이 성물들을 건네며 말했다.

"허."

루시온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비밀 하나를 알았다고 아주 막 나가신다.

"정리한 자료도 줘. 복사본 맞지?"

"맞습니다. 혹시 화나셨습니까?"

크라언이 슬쩍 눈치를 살폈다.

"아니. 내가 화를 내는 일은 잘 없어. 너도 알잖아?"

―맞아, 맞아! 루시온은 엄청 상냥해!

[뭐, 지금은 그렇지. 이전에는 아주 불꽃이었지만.]

러쉘이 슬쩍 말을 껴들었다.

루시온의 시선이 맞자마자 러쉘은 보란 듯이 웃어주었다.

"크라언."

"예. 말씀하십시오."

크라언은 괜히 긴장했다.

"오늘 이렇게 보자고 한 건 너한테 줘야 할 게 있기 때문이야."

루시온은 자신이 숨기고 있던, 이틀 전에 줘야 했던 크라언이 누군가에 의해 10년 동안 노예로서 살아왔던 사실이 담긴 편지를 내밀었다.

192화. 망국의 왕자, 크라언(2)

"이게 뭡니까?"

크라언이 편지를 보더니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루시온이 자신에게 편지를 썼을 리는 없을 테고.

"네가 10년간 노예로서 살게끔 누군가 뒤에서 힘을 넣었다는 내용이 적힌 편지."

루시온이 말을 하면 할수록 크라언의 얼굴에 분노가 뒤섞여갔다.

"어… 디서 찾으셨습니까?"

크라언은 목이 메는지 더듬거리며 물었다.

"사람들이 납치됐던 그 낡은 저택을 기억해?"

루시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크라언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 눈빛 속에는 살기까지 섞여 있었다.

흄은 움찔거렸고, 라타는 조용히 테이블에서 내려와 루시온 옆에 꼭 붙었다.

"왜. …왜 숨기셨습니까?"

원망이 포함된 목소리에 루시온은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이걸 너한테 줘도 될지 말지 망설였어."

"설령 그게 가짜든 아니든 그걸 판단하는 건 접니다…!"

"알아."

"그럼 절… 주셨어야죠."

"나는 조직과 널 저울 위에 올렸고, 네가 흔들리지 않길 원해서 숨겼어. 내 멋대로 판단했고, 널 속였어. 그 점, 진심으로 미안해."

루시온은 어떤 변명도 없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크라언에게 허리를 숙였다.

크라언은 그 모습에 순간,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자신에게 주고 말고는 루시온의 마음이 아닌가.

그걸 왜 자신이 판단하고루시온에게 왜 애꿎은 화풀이를 했는지.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하멜 님. 부디, 숙인 고개를 들어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크라언까지 일어나 루시온의 어깨를 쥐었다.

새삼 말랐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자 크라언은 자신이 더 부끄러웠다.

어른은 자신일 텐데.

과연 루시온에게 자신이 망국의 왕자라는 사실을 다 털어놓았다면 그가 저 편지를 숨겼을까.

아니었다.

루시온이라면 분명 줬을 테지.

"저 역시 하멜 님 앞에서 떳떳하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말씀드리지 못한 제 탓입니다."

그제야 루시온은 고개를 들었다.

"고마워, 크라언."

그 말에 크라언은 고개가 절로 숙어졌다.

마치 투정을 부린 것 같아 너무도 창피하기까지 했다.

"…어서 앉으십시오. 몸에 무리가 갈까 걱정스럽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아."

루시온의 말에 흄은 할 말이 많은 얼굴이 됐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끼어들 순 없었다.

"저 편지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누구인지 말씀을 드리지 못했기에 하멜 님께서 이 편지를 숨겼을 테지요. 분명 믿을 수 없는 내용이 적혀 있을 겁니다."

―아니야. 루시온은 이미 크라언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 루시온도 라타처럼 똑똑하다고!

라타가 다시 테이블에 매달려 크라언을 보았다.

'기분이 좀 찝찝하네…?'

루시온은 라타를 쓰다듬으려다 멈칫거렸다. 칭찬인데 칭찬이 아닌 것 같았다.

[크라언이 오해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크라언이 루시온 공에게 화를 내다니.]

베델이 놀란 기색을 띠며 말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나도 엄청 놀랐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크라언이? 흄이 갑자기 손수건을 내리치면서 '저 이제 집사 때려치웠습니다'라고 말하는 거랑 같잖아.]

러쉘은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흄은 놀란 눈으로 러쉘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절대로 집사를 때려치우지 않을 거라고 눈으로 말하는 듯했다.

"저는."

크라언이 말을 꺼내다 말고 숨을 내쉬었다.

"저는 이제는 사라진, 케오르티아 왕국의 왕자였습니다."

"...?"

루시온은 최대한 놀라는 척 연기했다.

크라언이 멋대로 오해했으니 그 박자에 맞출 셈이었다.

"믿으실 수 없다는 말이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증명할 길도 없습니다. 제가 그나마 손에 쥐었던 흔적도 전부 그 노예상인한테 뺏겼고, 케오르티아는 사라졌으니까요."

크라언은 한마디, 한마디를 꾹꾹 눌러 담았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그의 손이 꽉 쥐어지다 못해 부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케오르티아는 제국이 변경 너머라 부르는 바위지대와 뉴브라 왕국, 그 사이쯤에 숲과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나라였습니다. 아마 지금은 그런 나라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모두가 잊었을 겁니다."

루시온도 케오르티아를 알지 못했다.

후에 찾아보긴 했지만, 정보가 없었다.

작은 나라라고 해도 저렇게 빨리 잊힐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크라언의 눈동자에 애틋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저는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조국이 왜 사라졌고, 저를, 아니 제 가신들을 죽이고, 어딘가에 팔아넘겼던 그 노예상인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애써 무덤덤해지려던 크라언의 얼굴이 기어코 일그러졌다.

"나도 소문으로는 들었어. 갑자기 나라가 사라졌다고. 누군가는 흑마법사가 벌인 일이라고 했는데 뭐가 진실인 거야?"

루시온은 섣부른 위로는 하지 않았다.

나라를 잃은 마음을 자신이 알 리가 없었으니.

"제가 오히려 하멜 님께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정말로 꾹 참고, 참아낸 물음이니 오해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말해봐."

"흑마법이라는 게 나라를 한 번에 통째로 지워버릴 만큼, 강한 마법입니까?"

"진짜… 나라가 통째로 사라진 거라고?"

"…예. 제가 제국과 외교를 위해 잠깐 자리를 비우고 왕국으로 돌아오던 길에 보았습니다. 사라졌습니다. 그냥 나라가 통째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절망감이 가득한 크라언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절대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알고 싶을 정도였다.

[가능한가?]

베델이 러쉘을 재촉했다.

[이론적으로 대가가 있다면 가능해. 하지만… 그 정도의 대가를 만드는 불가능해. 이건 존재 자체를 없앤 거잖아? 그걸 가능하게 하려면 제국, 나아가 전 나라들의 사람을 다 바쳐야 할걸?]

"불가능해."

루시온은 딱 잘라 말했다.

그만한 대가를 대체 누가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아주 잠깐 어둠의 왕인 그놈을 떠올렸지만, 지금 제국을 포함해 다른 나라들도 아직 건재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타락한 어둠이라고 밝혀진 죽음의 바다도 그대로 있지 않은가.

몇 번을 생각할 필요 없이 그건 불가능했다.

"그렇… 습니까?"

크라언은 마치 마지막 희망을 놓친 사람처럼 대답했다.

"그럼 사라졌다는 게 무슨 말인지 조금 더 자세히 말해봐."

"더 말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케오르티아가 사라지고 조사를 제대로 하지도 못한 채 갑자기 습격을 받아 노예로 끌려갔으니까요."

"얼마 만에 습격을 받았는데?"

"한 3~4일 정도였을 겁니다."

"일단 읽어봐."

루시온은 편지를 손가락 끝으로 툭툭 건들었다.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제 감시는 됐다. 10만 델을 받고 풀어줘. 10년이라는 시간은 길지. 그간 지켜본 결과 저놈은 제 왕국을 다시 세울 능력도, 진실을 밝힐 능력도 없는, 그야말로 무능하기 짝이 없는 놈이지.

크라언의 말과 편지에 적힌 내용을 따르자면 크라언을 노예로 만든 건 계획적으로 벌인 일에 가까우며 케오르티아가 사라질 걸 알고 있었다는 게 되는 셈이었다.

'…진짜?'

루시온은 자신이 생각해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러쉘이 턱을 매만졌다.

[3~4일 후에 습격을 받았다는 말은 애초에 누군가 케오르티아 왕국을 감시하고, 눈여겨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깔려야 한다. 하지만 케오르티아 왕국은 과거에도 그럴 만한 왕국은 아니었다.]

베델은 기사의 관점에서 말을 꺼냈다.

케오르티아는 습격할 가치도 없을 만한 왕국이라고.

루시온은 편지를 읽는 크라언을 기다리며 두 사람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루시온 공을 습격한 그놈이 벌인 일이 아닐까 싶다.]

베델은 이어 루시온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범인을 언급했다.

[내가 만나봤어야 뭐라고 답을 해줄 텐데. 보질 못했으니 추측도 어렵네.]

눈살을 찌푸리던 러쉘이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마치 어땠냐고 묻는 것 같았다.

루시온은 그놈의 힘을 보았다.

하지만 그놈에게 시간을 멈출 힘이 있는 건지, 놈이 문 너머로 나왔기에 시간이 멈췄는지는 아직 몰랐다.

'만약 대가가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가능할 것 같네. 하지만 굳이 왜? 왜 케오르티아 왕국을 사라지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지?'

루시온은 이해가 가질 않는 행동에 의문을 느끼고 있을 때쯤 갑자기 앞에서 느껴지는 살벌함에 깜짝 놀랐다.

―아니야. 가만히 있어, 떽!

라타가 꿈틀거리던 루시온의 어둠을 눌렀다.

"하멜 님."

크라언이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루시온을 불렀다.

하지만 크라언의 목소리에 섞인 숨소리가 거칠었다.

그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당연했다.

크라언이 날린 건 단지 세월만이 아니었으니.

그의 분노는 당연했다.

"이 편지. …이 편지 말입니다. 사람들을 납치했다던 그 저택에서 발견했다고 말씀하셨죠?"

"맞아."

"누구입니까. 하멜 님을 그곳으로 이끌게 한 놈이 대체 누구인지 말씀해주십시오!"

"체이톤."

"…체이톤이요?"

크라언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루시온을 보았다.

"체이톤의 뒤에 네바스트가 있었어."

"네, 네바스트요? 그 신성 국가 네바스트 말입니까?"

"그래. 네 적은 네바스트야, 크라언."

루시온의 미소가 길어졌다.

"그리고 그 네바스트는 나를 노리고 있지."

같은 적을 두었다.

루시온은 그렇게 말하며 크라언에게 제안했다.

"서부로 돌아가면 케오르티아로 안내해 줘."

"케… 오르티아로요? 제가 말입니까?"

덜컥 두려움이 가득한 크라언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밝혀야지. 그렇지 않아?"

마치 당연하다는 듯 전해오는 루시온의 말에 크라언의 고개가 조용히 무너져 내리고 두 손바닥이 얼굴을 파묻었다.

"…으흑."

크라언은 기어코 울음을 터트렸다.

"오늘 좋은 소식을 듣고 연락할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루시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면을 쓰고 크라언의 어깨를 움켜쥐고는 돌아섰다.

크라언은 그저 흐느꼈다.

십여 년을 기다렸다.

조국에 돌아갈 그 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빈손으로 갈 수 없었다.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자신의 가족들과 백성들.

그들을 잃어버린 주제에 어떻게 빈손으로 다시 고향에 갈 수 있겠는가.

혹시 사라질 때, 아팠을까.

고통스러웠을까.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쁨과 고마움, 그리고 미안함으로 범벅이 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크라언은 그저 눈물을 쏟아냈다.

* * *

"…하. 다 됐다."

헤인트는 이제는 신물이 올라올 것 같은 경위서를 바라보다 시계를 살폈다.

밤 11시.

오늘 드디어 연이은 밤샘 작업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쁨이 몰아닥쳤다.

루시온은 저녁을 먹자마자 곯아떨어졌고, 주변에 이상도 없고, 카슨도 아직 오지 않았고.

손가락을 접으며 확인한 끝에 헤인트는 불을 껐다.

딸깍.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침대에 몸을 눕자마자 헤인트는 바로 일어났다.

"…이 미친놈이."

자신에게 은은한 어둠을 내보내는 존재는 오직 하멜뿐이었다.

분명 대신전에 숨어든, 네바스트와 손을 잡은 세피로가 어떤 자백을 했는지 결과를 들으러 왔을 테지.

헤인트는 투덜거리면서 하멜에게 줄 자료들을 챙겼다.

지금은 밤이라 만날 때마다 하멜이 올리는 가운뎃손가락을 보지 않아서 참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하멜에게 향했다.

"...."

헤인트는 하멜이 자신을 보자마자 반갑게 올리는 가운뎃손가락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루시온 공?]

베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루시온과 빙의를 했기에 이제는 견제도 뭣도 아니라 그냥 루시온의 짜증이 느껴졌다.

헤인트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빌어먹을 저 손가락은 오늘 안 볼 줄 알았는데."

"오는 말이 고아야 가는 말고 곱지. 나보고 미친놈이라며? 그럼, 미친놈처럼 해줘야지."

루시온은 빈정거렸다.

오늘은 저번 만남을 생각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헤인트를 불렀는데 다짜고짜 저렇게 불릴 줄은 몰랐다.

"…그래. 내가 실수했어."

헤인트는 루시온을 건들지 않으려 한발 물러섰다.

그제야 루시온도 손가락을 내렸다.

"오늘은 혼자네? 같이 있던 사람은?"

헤인트가 흄의 흔적을 찾았다.

흄은 혹시 몰라 일단 저택으로 보낸 상태였다.

자신은 몰라도 집사가 사라지면 흔적이 많이 남는 법이었으니.

"왜? 싸우게? 너랑 나랑 싸우면 어떻게 되는 줄은 알고 있지?"

"좀. 곱게 들으면 안 돼? 그냥 물은 거잖아."

헤인트는 살짝 짜증이 났다.

그냥 순수한 질문에도 왜 저렇게 사납게 반응하는지.

루시온이 손을 뻗었다.

"대신전에서 뭘 알아냈는지 이제 줘. 시간은 충분했잖아."

"충분하다고…? 너 내가 누구인지 몰라?"

조금 전까지 경위서를 쓰고 있었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랐지만, 헤인트는 꾹 참아냈다.

"모를 리가 있나. 제8 기사단의 대장이신 헤인트 트리아 님이시잖아."

루시온이 다시금 빈정거렸다.

헤인트가 바쁜 걸 왜 모를까. 하지만 자신은 몰라야 했다.

조금 미안한 기분도 들었다.

"그럼, 찾아낸 곳까지만이라도 줘."

"그러려고 했어."

헤인트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이젠 그러려니 하며 화를 참고 자료를 넘겼다.

"이제 뭘 알아냈는지, 간단하게 말해줘. 되도록 3줄 내외로 요약해서."

루시온은 자료를 손에 쥔 채로 물었다.

193화. 망국의 왕자, 크라언(3)

"…허."

헤인트가 어이없다는 듯이 반응했다.

그렇지 않아도 짧게 말해주려고 했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루시온이 피식 웃었다.

베델은 루시온이 이제 즐긴다는 걸 알아챘다.

"서로 바쁜 거 왜 몰라? 나도 널 위해 자료를 하나 가져왔거든."

"어디에서 뭐가 터졌는지 몰라도 벌써 머리가 아프네."

헤인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멜이 가지고 오는 정보들은 하나같이 정보의 질이 달랐다.

솔직히 조금 무섭기도 했다.

"성자가 갔던 축제에서 난리가 났잖아? 공식 발표로 배에 문제가 생겼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 네가 뭘 얻고 싶은지도 알고 있고."

루시온이 손바닥을 펼치며 가볍게 흔들었다.

"내가 뭘 가지고 왔게?"

"너, 내부자였어?"

헤인트의 눈이 커졌다.

그 사건은 배를 탔던 사람들 전원, 황실의 힘을 빌려 입을 다물게 했다.

분명 새어 나갈 입이 없었을 텐데.

"맞다고 한들, 아니라고 부정한들 믿을 거야? 아니잖아. 그냥 내 귀가 밝아서 그래."

"그 말을 지금 믿으...."

"빨리 말해봐."

루시온은 헤인트의 말을 자르고 그를 재촉했다.

아직 카슨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듣지 못했고, 붉은 실이 서서히 짧아지는 듯 보여 조금 초조했다.

"세피로, 그놈이 체이톤이라는 놈한테서 지령을 받았다고 했어. 지금 체이톤이 미론스트 왕국에 가 있다고는 하는데, 대체 체이톤이 누구인지 몰라서 막혀버린 상황이야."

'…와.'

루시온은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이어진다고?'

새어 나올 것 같은 헛웃음을 꾹 삼키며 밀려오는 의문에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왜 노예상인이 필요한 거지?'

네바스트와 납치, 그리고 노예상인.

셋이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거기서 하나를 끼워 넣으면 너무도 완벽한 조합으로 바뀔 수 있었다.

흑마법사.

그 생각에 베델의 혼란스러운 감정이 느껴져 루시온은 아차 했다.

[체이톤이 크라언을 노예로 만든 노예상인이었는데, 그 뒤에는 진짜로 네바스트가 있었고, 네바스트가 크라언의 조국이었던 케오르티아를 없앴다고?]

자신이 꺼낸 말이지만, 러쉘도 어처구니없이 반응했다.

[애초에 노예상인이 왜 필요한 건데?]

러쉘은 루시온이 느끼던 의문을 곱씹었다.

[뉴브라 왕국이었다면 이런 의문을 갖지도 않을 텐데. 네바스트가 뭐 하러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거지? 이해가 가질 않네.]

[루시온 공이 생각한 대로 네바스트에도 흑마법사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이미 노예상인과 납치, 이 두 개의 연관성이 나왔을 때부터 베델은 의심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자신은 저주의 실험체가 되어 죽은 경험이 있기에 직감이 발동했다.

[…그게 정말이라면 진짜 내가 들어본 소리 중에 가장 미친 말인데?]

러쉘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하멜 너, 체이톤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

헤인트는 루시온의 침묵을 느꼈고, 바로 물어보았다.

"알고 있어."

루시온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말해줄 생각은 없었다.

헤인트가, 나아가 제국이 우선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그럼 말해줘. 체이톤이 대체 누구인데?"

"트웰로 스프리카도."

루시온은 헤인트의 재촉에도 흔들리지 않고 제국이 움직여야 할 방향을 알려주었다.

"놈의 정보가 필요할 테지?"

"너… 진짜 대체 정체가 뭐야?"

헤인트는 어차피 하멜에게서 듣지 못할 말이라는 걸 알지만, 도무지 묻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다 알고 있는 걸까.

내부자일까.

아니면 하멜이 루시온이라면?

'…그래도 불가능해.'

헤인트 자신은 루시온의 동선을 알고 있었다.

루시온의 동선은 너무도 좁았다.

아니, 애초에 기사들이 깔린 저 호위망을 뚫고 나갈 수가 없었다.

설령 나가서 일을 본다고 해도 시간이 모자랄 테지.

아니, 정말 모든 걸 다 가능하다고 생각해도 조력자도 없이, 루시온의 몸으로는 몇 번을 생각해도 불가능했다.

'내가 하멜이라고 의심하는 눈치인데?'

루시온은 마치 아는 사람을 보는 듯한 헤인트의 눈동자에 그의 의심을 눈치챘다.

'완벽히는 아니더라도 의심할 거리를 조금도 주지 않았는데. 이거 직감이 좋아도 너무 좋잖아?'

루시온은 생각하다 말고 문득 느낌이 싸했다.

어느새 카슨과 이어진 붉은 실이 짧아져 있었다.

[카슨이다!]

러쉘이 '카'를 말할 때, 이미 베델은 루시온의 손으로 검을 뽑아 뒤를 향했다.

깡!

검과 검이 부딪치는 거친 소리가 나기도 전에 헤인트가 빛의 힘으로 단번에 치고 들어오며 카슨의 검을 흘렸다.

루시온은 울렁거리는 속을 억지로 참아내며 헤인트를 바라보았다.

'진짜… 약속을 지켰잖아?'

지금 헤인트는 호위 대상인 루시온 크로니아가 아니라 흑마법사인 하멜을 위해 검을 들었다.

[…하.]

베델이 숨을 고르는 소리를 냈다.

자신이 막을 수 있었지만, 루시온의 몸이 문제였다.

[…큰일 날 뻔했네.]

러쉘 역시 안도했다.

오늘따라 헤인트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카슨이 헤인트를 노려보며 말했다.

"비켜, 헤인트."

―아, 안 돼! 라타 말 들어, 카슨. 지금 루시온은 가면을 쓴 루시온이야.

라타는 들릴 리 없다는 걸 알지만 열심히 카슨에게 해명했다.

"너 뭐 하는 짓이야…?"

헤인트 역시 빛을 거두며 카슨을 노려보았다.

왜 기습을 하는지 몰라도 이건 잘못됐다.

하마터면 하멜의 목이 날아갈 뻔하지 않았던가.

"비키라고 했다, 헤인트."

파지직.

카슨의 검에 오러가 어렸다.

이 미친놈.

헤인트는 하멜을 의식해 차마 빛을 끌어 올리지 못하고 목소리에 힘만 주었다.

"못 비켜."

"너, 저놈이 누구인지 알고 그래?"

"흑마법사."

"아니. 변경에서 뉴브라 놈들과 함께 있었던 그 흑마법사다!"

"틀렸어."

루시온이 입을 열었다.

한 번쯤 카슨에게 반말을 해보고 싶었는데 마침 그 소원을 이룰 수 있어 기뻤다.

"내가 뉴브라를 이용했어."

"뭐…?"

놀란 소리는 헤인트에게 들렸다.

"뉴브라 놈들이 흑마법사, 아니 공허의 손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알았거든. 하지만 아무도 모르더라고."

"비켜, 헤인트. 저 자식이 입을 놀리는 걸 계속 봐야 하겠나?"

카슨은 조금도 믿지 않았다.

정말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흔들림도 없었지만, 루시온은 헤인트를 믿고 입을 놀렸다.

깡!

다시 헤인트와 검을 맞대는 카슨을 보니 다음에 이런 기회가 없다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루시온은 얼른 입을 놀렸다.

"검 내려놓지? 무려 테슬라 제국의 황제가 내 존재를 인정했거든."

"맞아."

헤인트가 냉큼 루시온의 말을 주워 담았다.

"...!"

그제야 카슨의 검이 흔들렸고, 헤인트는 기회를 노려 그의 검을 쳐 날려버렸다.

헤인트의 검 끝이 카슨에게 겨눠졌다.

"폐하의 명이시다. 제국을 수호하고, 변경을 지키는 네가 폐하의 명을 거부하지 않겠지?"

"…폐하께서? 정신 차려, 헤인트. 저 흑마법사의 꾐에 넘어가지 말라고."

"너야말로 정신 차려! 내가 빛의 축복을 받은 자라는 걸 잊었어? 여기서 내 빛을 보여줘야 믿을래?"

"봐봐. 늘 이렇다니까."

루시온은 목소리를 꺼냈다.

"내가 크로니아에 찾아가서 뉴브라 왕국이 공허의 손과 손을 잡고 있으니 조사하거나 경계하라라고 말하면 과연 들어줬을까?"

억울함이 담긴 목소리에 헤인트는 흔들렸다. 으레 당연한 반응이지만, 참 구슬프게 들렸다.

루시온은 코웃음을 쳤다.

"아니. 절대로 아니지. 카슨 크로니아. 날 경멸하고 증오하는 네 눈동자만 봐도 답이 나왔잖아? 내 목은 크로니아 어딘가에 걸려 있을 거야."

"좋다. 그렇게 억울하다면 말해 보거라. 넌 거기에 뭐 하러 왔지?"

카슨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루시온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아니. 그 전에 내가 물어볼게. 그 당시 내 흑마법으로 누군가 죽었나? 내 흑마법은 어딜 향해 있었지?"

루시온이 사실을 꼬집자 카슨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아무도 죽지 않았어. 내 흑마법은 하늘을 향해 있었지. 자, 이제 이유를 물어볼 차례가 아니야? 내가 왜 흑마법을 사용했는지를 말이야."

루시온은 카슨이 구미가 당길 만한 먹잇감을 던져두었다.

당장 물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먹잇감이기에 흔들릴 수밖에 없을 테지.

자신의 흑마법으로 아무도 죽지 않았고, 뉴브라와 공허의 손이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라니.

그리고 카슨이 조금 전에 묻지 않았던가.

왜 자신이 변경 너머에 있었는지를.

"카슨. 뒤로 물러나."

헤인트는 그제야 카슨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했다.

"정말 폐하의 뜻인가?"

카슨이 물었다.

"황제가 직접 찍은 인장이 발린 증명서라도 보여줘?"

하지만 헤인트 대신 루시온이 빈정거리며 말했다.

"거기서 잠깐만 기다려줘. 잠깐이면 돼. 이 친구가 좀 예민할 일이 있어서 그래."

변경 너머에서 루시온이 다쳤다.

헤인트는 그 일 때문에 카슨이 예민하게 구는 걸 알기에 하멜에게 양해를 구한 뒤에 카슨을 데리고 잠깐 거리를 벌렸다.

[이건 참을 수 없지.]

러쉘이 당장 쫓아갔다.

"…카슨. 다 이해하는데, 너무 급했어."

헤인트가 한숨을 내쉰 뒤에 조곤조곤 말을 꺼냈다.

"난 흑마법사를 베려고 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 흑마법사가 바로 내가 너한테 말했던 조력자라고."

"…하. 제국이 이만큼 수치스러웠던 적이 없다. 고작 저 흑마법사에게 매달리다니."

"고작이 아니야. 하멜이 모든 걸 이어줬다고."

"잠깐만."

굳어진 카슨의 표정이 잠깐이나마 풀렸다.

"그 이름… 저놈의 이름이야?"

"어. 맞아."

"…거지 같네."

짜증이 확 일어났다.

왜 하필 그 이름인가.

하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쓰던 루시온의 옛 이름이었다.

"어쨌든, 하멜을 죽이는 건 절대 안 돼."

헤인트는 아예 못을 박았다.

"저놈이 뉴브라와 한 편일 수 있잖아? 네 말에 따르자면 타이밍이 너무 좋아. 마치 노리고 나타난 것처럼."

"절대 아니야. 내가 장담할 수 있어."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데?"

"흑마법사도 사람이야. 하멜도 제국인이라고."

"...."

헤인트가 그랬던 것처럼 카슨도 살짝 얼빠진 표정이 되어 어깨에 들어간 힘을 서서히 빼냈다.

크로니아는 변경을 지키는 가문이었다.

모든 건 제국, 나아가 제국인을 위한 일이었고.

흑마법사도 제국인.

그 사실에 마음이 흔들렸다.

"하멜은 위험을 감수하고 내게 와서 나를 설득했어. 뉴브라 왕국이 제국을 노린다는 사실과 더불어 네바스트의 진짜 모습까지 알게 했다고."

헤인트는 자신이 하멜을 위해 목에 힘을 주는 게 우습긴 했지만, 이젠 상관없었다.

자신이 말을 하면 할수록 하멜을 신뢰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래. 카슨. 네 말대로 하멜이 나타난 타이밍이 너무 좋아. 하지만 하멜이 나타난 게 아니라, 나처럼 공허의 손을 뒤쫓고 있었고 우연히 만났어."

"우연히 만났다고?"

카슨은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놈은 흑마법사였다. 사람을 홀릴 힘을 가진 놈이었다.

"사실이야. 몇 번을 말해도 진짜야."

헤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헤인트."

카슨은 냉정하게 생각했다.

헤인트가 알려준 정보는 상상 이상이었고, 자신이 알아냈던 정보도 뒤섞여 있었으니까.

사심을 넣지 않고 하멜을 죽여야 하느냐, 죽이지 말아야 하느냐를 둔다면 당연히 후자였다.

재수 없지만, 놈은 제국에 도움이 되고 있었다.

"나는 놈을 죽이지 않겠다."

"하."

그제야 헤인트가 숨을 돌렸다.

여기까지 자신이 카슨을 설득했다는 사실이 새삼 뿌듯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 대화에 끼어들어야겠다."

"왜?"

"의심스러우니까."

당당한 카슨의 말에 헤인트는 뭐라 말할 기운도 없었다.

카슨은 원래 저런 놈이었다.

루시온과 샤엘라 앞에서만 온순해지는 망할 놈.

"아, 주워와야지."

카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뭘?"

"네가 날린 내 검. 그게 좀 비싸거든."

"그건...."

"먼저 그놈하고 대화하고 있을 테니까, 날 말리고 싶으면 빨리 찾든지."

카슨은 하멜에게 걸어갔다.

[온다.]

베델이 루시온에게 말했다.

러쉘에게 요약 정리된 내용을 듣고 있던 루시온은 카슨이 온다는 사실에 바짝 긴장했다.

카슨은 루시온은 앞으로 걸어와 입을 열었다.

"설명해 봐. 자리를 깔아줄 테니 날 설득해보란 말이다."

카슨의 살벌한 눈빛에 라타는 이미 등을 내보인 지 오래였다.

루시온도 조금 움찔거렸지만, 자신은 지금 하멜이었다.

아무리 자신을 막아줄 헤인트가 없어도 당당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내 정보는 비싼데? 크로니아에서 뭘 해줄 수 있는데?"

"내가 지금 널 살려주고 있다는 사실이 보이지 않는가?"

카슨은 자신 있게 말하며 땅을 가리켰다.

"지금 네 목숨은 내 인내심 덕에 지켜지고 있다는 걸 명심해."

쿵쾅쿵쾅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루시온이 입을 놀렸다.

"글쎄. 내가 귀가 먹어서 그런가? 이상하게 약속처럼 들리지 않아서."

194화. 황제, 케틀란 테슬라

―루시온. 지금 심장이 엄청 빨리 뛰고 있어! 라타 귀에도 들려.

라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루시온을 보았다.

솔직히 라타 말대로 조금 무서운 건 사실이었다.

카슨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가장 가까이서 봤으니.

하지만 루시온은 침을 삼키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썼다.

약해 보이면 카슨한테 물릴 뿐이었다.

[루시온 공. 카슨을 이 이상 자극하지 않는 게 좋을 듯해.]

지켜보던 베델도 루시온을 말렸다.

애초에 카슨은 견제하기에 헤인트와 성질이 다른 사람이었다.

카슨이 피식 웃었다.

"나는 거래를 좋아하지 않아."

'알고 있습니다.'

루시온은 속으로 대답했다.

"누가 날 떠보는 것도 싫어하지."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루시온은 바짝 긴장했다.

"딱, 여기까지다."

카슨이 경고를 보냈다.

분명 그의 손에 검이 없음에도 왜 이렇게 살벌한지 몰랐다.

[루시온. 나도 여기까지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기어코 러쉘까지 입을 열었다.

카슨을 이 이상 자극해봤자 루시온에게 도움이 되질 않는다는 건 뻔했다.

애초에 카슨은 적이라 인식한 놈들과 대화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내 목숨은 언제까지 살려줄 셈이지?"

하지만 루시온은 그냥 물러서질 않았다.

"네가 헤인트와 제국을 배신하거나, 내가 의심스럽다고 판단할 때까지."

"제법 넉넉하게 줬네."

"그럼. 내 인내심은 제법 깊으니까."

카슨이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루시온은 입가를 핥으며 말을 꺼냈다.

그래도 용케 목이 붙어 있지 않은가. 많은 발전이었다.

"너는 죽지 않는 병사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뉴브라나 크로니아 병사들의 시체를 태웠을 거야."

"맞다. 그게 정석 방법이니까."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부족하다?"

"죽음은 끝이 아니야. 크로니아와 뉴브라가 변경에서 벌이는 그 전투로 얼마나 많은 사망자가 생겼겠어? 그 죽음으로 흑마법사는 대가를 공짜로 얻었어."

카슨의 미간 사이에 주름이 잡혔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을 잡은 표정이었다.

"변경이 그렇게 자랑하던 벽을 부술 만큼의 대가를, 크로니아에서 제공한 셈이지."

"뭐라고?"

카슨은 마치 이마를 맞은 듯 반응했다.

루시온의 가면이 노랗게 물었다.

"그걸 내가 없앴고, 넌 그런 나를 찔렀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그곳에는...."

"그곳에는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없었겠지. 크로니아의 기사와 뉴브라 왕국의 병사밖에는."

루시온은 눈을 가리켰다.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고 그곳에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야."

눈을 가리키던 손가락이 머리로 향했다.

"생각해 봐. 뉴브라 왕국에서 함몰시킬 수도 없는 커다랗고 단단한 성벽을 향해 왜 그렇게 기를 쓰고 달려들었는지를."

뉴브라 왕국.

공허의 손.

변경에 있는 성벽.

그리고 변수를 터트린 자신.

아무리 카슨이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사실이니까.'

루시온은 가면 속이 아니라 가면 밖에서 카슨을 '형님'이라 부르며 이 사실을 나누고 싶었다.

자신이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알려서 이제는 단지 보호받을 대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그런 날이 꼭 올 거다, 루시온 공.'

베델이 부드러운 말로 자신을 위로했다.

"그러니까 너는 지금 크로니아가 스스로 목을 죄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카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흔들렸네.]

러쉘은 그의 감정 변화를 보며 말했다.

"그래. 변경을 지키고자 저지른 일들이 목을 죄어온 셈이지."

"그 말을 지금...."

"몰랐을 테니까."

"뭐?"

"흑마법사를 몰랐기에 지금 이 사태가 벌어진 셈이지. 그럼, 이 무지를 누가 만들었겠어?"

루시온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질문에 대답했다.

"바로 신관들이야."

"핍박받았다고 주장하고 싶은가?"

"사실이잖아. 물론, 개쓰레기 같은 흑마법사를 변호할 마음은 없어. 하지만 정보를 알았다면 크로니아에서 뭔가 다른 수를 썼겠지."

루시온은 손을 비볐다.

"이제 다 들었으면 비켜. 헤인트하고 나눌 말이 있으니까."

강하게 나가고 싶지만, 차마 카슨에게 '꺼져'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아니. 나도 여기에 참가하기로 했다."

"내 얼굴만 봐도 속이 뒤집힐 것 같은 표정인데?"

"흥미가 생겼다. 그 같잖은 가면 속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저 가면 속에 네 동생이 있다고, 카슨. 그러니 살살 좀 해.]

루시온은 라타같은 러쉘의 모습에 피식 웃을 뻔했다.

"…싸운 거 아니지?"

헤인트가 달려와서는 두 사람의 기류를 감지했다.

"싸워? 죽였으면 죽였지, 그런 유치한 장난은 치지 않아."

카슨은 헤인트가 건네는 검을 받아 집어넣었다.

헤인트는 혹시나 카슨이 검을 뽑진 않을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안 죽인다고 했으니 눈 돌려."

기분 나쁘다는 듯 카슨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 손짓에 헤인트도 기분이 나빠졌지만, 지금 저 성질머리를 건드리고 싶진 않았다.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그저 카슨을 의식하며 카슨과 루시온 사이를 끼어들었다.

"트웰로 스프리카도의 정보를 내가 가지고 있다고 했어."

"지금 트웰로 스프리카도라고 했나?"

카슨이 반응했다.

"그래. 흥미가 돌 만한 이야기지?"

"인정하지."

카슨은 깔끔하게 대답했다.

루시온이 다친 그 몸으로 바다에 빠졌다.

지금 여름이기에 망정이지 겨울이었다면 얼어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만약 마법사들을 시켜 루시온을 그렇게 만든 놈이 트웰로라면 제발 죽여달라는 말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오게 만들 셈이었다.

"아, 그 전에 묻지."

카슨은 동부에 죽지 않는 병사를 만드는 장소를 찾았다.

저택은 테펠로우 셀가 소유였고, 놈은 비록 후작이나 같은 후작인 트웰로 스프리카도의 가신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저택은 이미 털려있었다.

싹 쓸어가 뭔가를 주울 수도 없었다.

마침 트웰로 스프리카도가 나왔으니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뻔하지 않은가.

"너인가? 테펠로우 셀가가 소유한 그 저택을 턴 놈이."

[와. 진짜 거기까지 갔어? 일찍 오길 잘했네. 하마터면 진짜, 진짜 큰일 날 뻔했잖아.]

러쉘은 다시금 안도했다.

"맞아."

루시온은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뻔한 거짓말은 신뢰를 깎아 먹을 뿐.

루시온은 헤인트와 쌓은 신뢰를 흐트러트리고 싶지 않았다.

"…너도 바쁘다고 한 말이 사실이었네."

헤인트가 동질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받아. 그 눈빛은 치우고."

루시온은 카슨이 아니라 헤인트에게 일단 정리된 자료부터 넘겼다.

갑자기 손끝이 떨렸다.

자신이 아니라 베델이 느끼는 기쁨에 손이 멋대로 반응했다.

루시온의 떨림을 본 헤인트는 의문을 느꼈지만, 굳이 묻진 않았다.

"트웰로 스프리카도. 놈이 뉴브라 왕국과 손을 잡은 귀족들의 중심이자, 일명 '부엉이'라고 불리는 놈이야."

루시온은 요약해주었다.

"죽지 않는 병사를 만드는 실험과 더불어 제국 전역에 퍼질 저주를 만드는 실험까지 강행하고 있어."

"저주라고…?"

헤인트가 말을 더듬었다.

흑마법사를 상대하기 까다로운 이유가 바로 저 저주 때문이 아닌가.

저주는 빛의 힘으로도 풀 수 없었다.

"저주를 만드는 실험장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하지만 찾아보지. 대신 한 가지 약속만 해줘."

루시온이 보다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그놈의 최후는 내 거야."

"이유가 뭐지?"

트웰로의 목을 노리고 있던 카슨이 물었다.

"저주의 실험체가 되어 죽었던 이들 중에 내 기사가 있으니까. 이 정도는 양보해줘도 되잖아?"

[루시온 공…?]

베델은 기쁨도 잠깐, 곧 당황했다.

[나, 나는 놈이 죽을 수만 있다면 뭐든 좋다. 하지만 공은 아니야. 공에게 그놈의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아.]

베델이 꺼낸 말에 러쉘의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베델이 얼마나 트웰로를 증오하는지 알기에 그는 입술을 뗄 수 없었다.

'아니, 베델. 넌 내 기사야. 내가 쥔 손으로 놈의 목에 검을 박아넣어.'

루시온은 고민하는 헤인트를 바라보며 베델에게 똑똑히 알려줬다.

빙의해서 트웰로를 죽이라고.

[공이 날 생각해주는 건 무척 기뻐. 기쁘지만, 내 복수에 공이 희생하는 건 원치 않아.]

베델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행복감에 젖어 기쁨으로 물들어갔다.

[공이 바라던 행복을 나 역시 그리고 있으니까.]

죽음은 어둠의 하위 개념이었다.

남을 죽이는 행위는 어둠을 향한 모독과 같기에 사람을 죽일수록 흑마법사는 타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루시온이 자신을 위해 검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왜 기쁘지 않겠는가.

소중하고, 다정한 자신의 주인인데.

[그러니 공이 타락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해. 기억하지? 내 소망은 루시온 공이야.]

'…그래.'

루시온은 베델이 바라는 대로 들어주고 싶었다.

"…미안하지만, 다른 부탁이라면 몰라도 그건 안 돼."

헤인트가 고민을 끝내고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다.

가면 때문에 하멜의 표정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헤인트는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말한 것처럼 놈이 변절자 중 가장 중심에 있는 놈이라면 더더욱 안 돼. 놈은 제국이 휘두르는 검으로 죽어야 해."

'베델.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네 의견을 말해줘. 저 말에 동의해?'

루시온은 베델이 원치 않는다면 바로 혀를 놀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동의해. 나는 놈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변절자로서. 많은 이들의 미래를 앗아간 괴물로서 죽으면 좋겠어. 그래야 두고두고 개새끼로서 기록될 테니까.]

"좋아. 그럼 놈을 죽이고 난 후에 잠깐 혼자 놈을 봐도 괜찮겠지?"

루시온은 방향을 틀었다.

산 자였던 트웰로가 베델이 바라는 대로 변절자이자 괴물로서 죽는다면, 유령이 된 트웰로는 반드시 베델 손에서 끝내야 했다.

헤인트가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정도는 괜찮아."

"원래는 오늘 황제를 만나려고 했지만, 내 손에 다른 게 들어와서 말이야."

루시온은 4황자, 오웬 테슬라가 변절자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넘겼다.

이건 경고이자, 황제가 자신을 만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헤인트. 이 편지를 황제에게 전해. 오직, 황제만 봐야 해. 그렇지 않으면 누구 목이 잘릴지 몰라."

이제 카슨도 돌아왔으니 중부를 떠나기 전에 황제를 봐야 했다.

루시온은 그때, 조직을 소개할 생각이었다.

이제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조직의 몸집이 커졌으니 제국에 빨대를 꽂아 튼튼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아, 물론 그 검을 휘두르는 건 내가 아니라 황제일 테니까."

루시온은 뒤돌다 미처 하지 못한 경고를 꺼냈다.

"그럼."

루시온은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 모습에 카슨은 코웃음을 쳤다.

분명 제 앞에서 사라진 주제에.

하지만 카슨은 일부러 헤인트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편이 더 재미있을 테니.

"카슨."

"왜?"

"진짜 하멜을 변경 너머에서 봤어?"

"보기만 했겠어? 찔렀지. 놓쳤지만."

"어쨌든, 봤지? 쟤가 죽으면 제국은 엄청난 손해를 입는다고."

"아니까, 그만 말해."

"그나저나 왜 이쪽으로 와? 정문은 여기가 아니잖아? 기사들은 또 어디로 가고?"

"쉬라고 미리 저택에 보내고, 루시온 주려고 마카롱을 사 오던 참이었다. 그 가게에서 이쪽이 지름길이었고."

그 말에 헤인트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지금 시각에 여관도 아니고 장사하고 있는 가게가 있다고?"

"돈이 해결해줬거든."

"너도 참 한결같다."

"샤엘라한테 얻어맞았다며?"

"그, 그걸 어떻게… 제기랄. 크로니아의 기사들이 그렇게 입이 가벼울 줄은 몰랐네!"

"넌 좀 더 처맞았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샤엘라가 루시온을 봐서 기분이 좋았나 보다."

헤인트가 흠칫 놀랐고, 카슨은 헤인트를 비웃으며 저택으로 걸어갔다.

"야, 카슨."

헤인트가 카슨을 뒤따라오며 그를 불렀다. 하지만 그는 어떤 반응도 보이질 않았다.

"내가 루시온한테 말했어. 네바스트가 루시온을 노리고 있다고."

그제야 카슨이 뒤를 돌아선 굳어진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루시온도 알고 있어야 하잖아. 네가 왜 숨기려는지 알고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잖아."

"...."

카슨은 입을 다물고 헤인트에게 가운뎃손가락을 올려준 뒤에 다시 저택으로 걸었다.

"재수 없는 자식."

헤인트가 오만상을 쓰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195화. 황제, 케틀란 테슬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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