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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 *

"…흑마법사의 경로를 추적한 결과 동부로 향했습니다."

카슨이 노비오를 보며 말했다.

동부라는 말에 노비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루시온의 마지막 여행 장소가 아닌가.

다소 찝찝하긴 했으나, 동부는 넓었고, 하필 루시온이 참석할 축제 장소 근처일 확률은 무척 낮았다.

"그리고?"

노비오이 다소 날카롭게 물었다.

"놈들이 무언가를 옮겨 담고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이더냐?"

"시체입니다."

"...."

노비오는 순간 주먹을 쥐었다.

"뉴브라 놈들이 죽지 않는 병사를 만들고 있었단 말인가?"

"그런 듯합니다. 지금 정확한 장소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카슨이 서류를 내밀었다.

"그리고 루시온이 자료를 보내왔습니다."

"자료라니? 여행보고 일지 뭐 그런 것이더냐?"

노비오는 잠깐 미소를 지었다.

연락이 뜸해 섭섭하던 참이었는데.

밥은 잘 먹고 있는지, 잠은 잘 자는지, 상처를 입은 몸으로 돌아다닌다 생각하니 하루에도 수백 번씩 생각이 나고 애처롭고 당장 만나러 가고 싶을 정도였다.

"아쉽지만, 아닙니다, 아버지."

평소와 달리 카슨이 웃음을 내비치지 않자 노비오도 덩달아 웃음기를 지웠다.

"루테온 가주가 발견하고 조사한, 루시온을 노리는 귀족들의 명단입니다. 이들 모두 뉴브라와 연결된 자들이라고 합니다."

카슨이 이를 갈며 말했다.

또 루시온이었다.

또.

"…그래. 언젠가 이날이 올 줄 알았지. 변경의 세력이 이보다 더 커지길 바라지 않은 이들이 누굴 노리겠더냐?"

노비오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조용히 숨을 죽이며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가 되어갔다.

"그저 어리석은 귀족들이 붙잡은 동아줄이 겨우 뉴브라였다니."

노비오는 카슨을 바라보았다.

"전부 죽이거라."

"알겠습니다."

카슨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무렵 연락용 아이템이 울렸다.

"받거라."

노비오가 말했다.

"실례합니다."

카슨은 노비오에게 고개를 살짝 숙인 뒤 연락용 아이템을 확인했다.

헤인트였다.

"왜?"

카슨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 카슨.>

"뜸 들이지 말고 말해."

<혹시 예전에도 루시온이 쓰러진 적 있어?>

"그게 무슨 말이지?"

카슨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노비오가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당장 카슨이 쥐던 연락용 아이템을 뺏어서는 소리치다시피 물었다.

"헤인트 경. 지금 루시온이 쓰러졌단 말이더냐?"

<…가, 가, 가주님?>

"어서 말하게."

헤인트가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연락용 아이템 너머로 들려왔다.

<맞… 습니다. 루시온이 쓰러졌습니다.>

"습격인가?"

만약 또 습격이라면 노비오는 바로 황실에 달려가리라 마음을 먹었다.

남의 귀중한 아들을 잘 지키겠다고 했으면 잘 지키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경매장에서 다른 것도 아니라 무려 빛을 쐬게 했다.

다시 생각해도 이가 갈리는 일이었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헤인트가 다급히 말했다.

"그럼 뭔가?"

<…과로라고 합니다.>

"...."

노비오가 그대로 멈췄다.

"과로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카슨이 당황해하며 물었다.

루시온은 뭘 억지로 무리할 아이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도 원래 루시온이 저 정도로 몸이 약했는지 물으려고 연락을 한 건데. 네가 가주님을 바꿀 줄은 몰랐지!>

억울해하는 헤인트의 목소리 뒤로 노비오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루시온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나, 가슴이 너무도 쓰라렸다.

여행이 얼마나 고됐으면.

"헤인트 경."

<예, 가주님!>

"빛 때문에 루시온이 일시적으로 몸이 약해지던 때가 자주 있었다네. 아마 여독과 빛의 후유증이 뒤섞여서 그렇게 된 모양이야. 혹 루시온이 굶지 않게 잘 지켜봐 주게."

<알겠습니다!>

노비오가 연락용 아이템을 다시 카슨에게 넘겼다.

카슨이 연락을 끊은 뒤에 바로 노비오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동부로 가겠습니다. 흑마법사가 동부 어디에서 죽지 않는 시체를 만들고 있는지 찾아야 하지 않습니까. 이는 변경의 실수이니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핑곗거리부터 들이밀고는 카슨은 뒤이어 본심을 꺼냈다.

"그 후에 루시온의 여행이 끝날 때쯤, 동행해서 크로니아로 돌아오겠습니다."

노비오는 그제야 안도하며 카슨의 의도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갔다.

단지 보고를 듣는 것보다 카슨이 함께한다면 그야말로 안심이었다.

"그래. 그렇게 하렴."

* * *

루시온은 눈을 깜박거렸다.

그때, 라타의 발바닥이 루시온의 눈꺼풀 위로 올라왔다.

말랑거렸다.

―안 돼, 루시온. 더 자야 해. 더 자. 라타가 자장가 불러줄 테니까.

루시온은 라타가 가리지 않은 한쪽 눈을 떠서는 주변을 살폈다.

해가 창문 너머로 슬그머니 들어와 바람에 맞춰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보였다.

[이제 괜찮은가?]

베델이 루시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눈동자 봐봐. 피곤함이 싹 가셨어. 이제 괜찮겠네.]

툴툴거리는 듯한 러쉘의 목소리에 베델이 잠깐 웃었다.

[저렇게 말해도 러쉘이 제일 걱정 많이 했다는 건 알고 있지?]

"맞습니다. 가장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흄도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베델의 말에 덧붙였다.

―맞아! 라타가 자다가 잠깐 깨서 봤는데 막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라타!]

―에헴.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아프지 말아야 할 텐데.'이랬어! 라타는 똑똑하니까 다 기억했어.

러쉘이 다급히 라타를 불렀지만, 라타는 쫑알쫑알 말을 멈추질 않았다.

"…저, 기절했습니까?"

바보같이 놀란 표정으로 루시온이 입술을 떼자 러쉘은 바로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기절했냐고? 의사가 와서 과로라고 하더라. 과로.]

"제가요?"

[그럼 너 말고 누가 있어?]

루시온은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태도에 러쉘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다들 입 모아서 너한테 뭐라고 했어? 좀 쉬라고 했지? 이것 봐봐. 이 꼴이 될 때까지 몸을 혹사하니 기절하지 않고 배기겠어?]

평소에 얼마나 참아왔는지 러쉘은 잔소리를 하나둘 터트렸다.

왜 한참 성장기 때 잠을 자지 않느냐.

왜 잠을 줄이면서까지 돌아다니느냐.

네가 조직 일을 다 할 것 같으면 왜 크라언을 그 자리에 앉혔느냐.

애초에 여행 일자를 왜 이렇게 촉박하게 잡았느냐.

등등.

잔소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자 보다못해 베델이 러쉘을 말렸다.

[러쉘. 거기까지 하는 게 어떻겠나?]

[…아직 하안차암 모자란데?]

[그간 대체 어떻게 참았는가?]

[어떻게 참긴? 모든 인내심을 박박 긁어서 여기에 꾹꾹 눌러 담았지.]

러쉘은 눈썹을 가운데로 모은 채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하지만 러쉘의 표정은 환하디 환히 짓는 루시온의 미소에 금세 사르르 풀려갔다.

"더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너는 진짜… 진짜, 못됐어.]

저렇게 웃는데 어떻게 더 잔소리가 나올 수 있겠는가.

러쉘은 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배고프지 않아?]

"고픕니다."

"제가 얼른 준비해오도록 하겠습니다."

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라타도 침대에서 내려왔다.

―라타도 갈래!

부엌으로 가면 뭔가를 얻어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지 라타의 꼬리가 재빠르게 좌우로 움직였다.

"…아."

라타를 안은 흄이 잠깐 멈칫거렸다.

그가 무슨 말을 꺼내려는지 검은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흄. 루시온이 배고프겠네. 어서 가.]

하지만 러쉘이 막았다.

분명 의도적인 일에 루시온은 바로 입을 놀렸다.

"무슨 일인데? 내가 기절해 있는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어?"

흄은 러쉘의 눈치를 살폈다.

러쉘은 이마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밥 먹고 들으면 안 돼?]

"안 됩니다. 무슨 일인데?"

"첫째 도련님께서 크로니아를 떠나 동부로 출발하셨습니다."

"형님께서 왜?"

루시온은 물어본 뒤에 갑자기 한쪽 눈썹을 올리며 자신을 가리켰다.

"설마 나 때문에는 아니지?"

[그럴 것 같은데?]

러쉘이 슬쩍 말을 던졌다.

[충분하지.]

베델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이유는 아직 모릅니다."

흄은 다행히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말씀드릴 게 더 있습니다."

흄은 다시 입을 열었다.

깊게 고민했다.

이 사실을 루시온에게 말해야 할지 말지를.

"뭔데?"

루시온은 괜히 샤엘라가 보낸 편지를 떠올리며 이불을 꼭 잡았다.

"제가 또 꿈을 꿨습니다."

178화. 변화(3)

흄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꿈에서 검은 구슬이 어디 있는지 알려줬습니다."

"검은 구슬이 어디에 있다는데?"

루시온이 한껏 진지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동부입니다."

'동부 어딘지 콕 집어서 말해주면 좋을 텐데....'

루시온은 아쉬움을 느꼈다.

저번에 미론스트 왕국의 첫째 왕자인 브라키온 미론스트를 만난 게 단순히 우연이라면 다음 검은 구슬은 어떻게 찾아야 할까.

"'그대가 향하는 곳에 원하는 게 있을 거다'라고 말도 덧붙여줬습니다."

흄이 서둘러 다음 말을 이었다.

그제야 루시온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진짜 그랬다고?"

"예. 그랬습니다."

"고생했어, 흄."

루시온이 흄을 보며 눈웃음을 짓자 흄 역시 표정이 밝아졌다.

"더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야. 검은 구슬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잖아? 게다가 우리가 가는 곳에 있을 거라며? 그걸로 충분해."

루시온 입장에서 하루라도 빨리 검은 구슬을 얻어야 할 텐데, 왜 조급하지 않겠는가.

흄은 자신을 다독이는 루시온의 말에 다정함을 느꼈다.

"그럼, 저는 음식을 가지러 나가보겠습니다."

―라타도 갔다 올게. 아프지 말고 있어, 루시온.

라타가 꼬리와 앞발을 흔들며 배시시 웃었다.

흄이 몸을 돌린 후에 잠깐 떠오른 생각에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내게 정보를 알려주는 그 형상.'

"왜?"

"…아닙니다. 다녀오겠습니다."

흄이 루시온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련님을 닮은 것 같은데....'

흄은 눈동자를 좌우로 돌리다 앞으로 걸어나갔다.

* * *

다음 날.

원래는 중부에서 동부로 가야 할 날이었지만, 헤인트가 극구 말리는 바람에 중부에 더 머물 수밖에 없었다.

<…듣고 계세요?>

다급히 온 미엘라의 연락에 루시온은 얼이 빠졌다.

자신이 대체 뭘 들은 걸까.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알았어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자마드 씨와 연락 결과 그 정도는 쉽다고 말씀하셔서 다음 날 바로 샘플들을 받아봤어요.>

검을 만드는 건 어렵고, 빛을 가둘 때 마석을 보호할 물건을 만드는 건 쉽다니.

루시온은 장인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 신난 나머지 저는 또 며칠 밤을 지새워서 멈췄던 개발을 했죠. 자마드 씨가 만들어준 그 광석은 정말 장난 아니에요. 하멜 님에게도 멋진 광석을 얻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에요!>

미엘라는 말을 하다 말고 잠깐 옆으로 샜다.

광산이 가동하고 있다는 말은 크라언에게 보고로 들었기에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뭐가 어쨌든, 루시온도 덩달아 기뻤기에 어서 다음 말이 듣고 싶었다.

<아. 어쨌든, 마석 여러 개를 깨고, 샘플도 많이 깼지만, 마지막에. 정말 마지막에, 재생력만 남기는 데 성공… 했어요!>

미엘라가 말하는 도중에 갑자기 울먹였다.

<아직 완성이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는 없어도 여기까지 오는 데 정말…, 정말 오래 걸렸어요. 정말 예전부터 생각하고 만들었지만, 가문에서 쫓긴 제가 그 돈을 충당할 수 없었어요.>

알고 있었다.

심지어 미엘라는 동업자에게 사기당해 모든 걸 잃어버리기까지 했다.

저 물건을 완성하기 위해서 악의 손이라도 잡아야 할 만큼 절박했다는 걸.

비록 헤인트 손에 미엘라도, 그녀의 역작도 사라져버렸지만.

[당장 확인하러 가고 싶은 네 마음은 알지만, 안 돼, 루시온. 네가 먼저야.]

러쉘이 상체를 일으키려는 루시온의 이마를 꾹 눌렀다.

―라타도 도와줄게.

삐익!

공을 물며 라타가 후다닥 뛰어와 루시온의 팔을 꼭 잡았다.

<…있죠.>

미엘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멜 님을 만나서. 그때 하멜 님께서 절 도와주셔서. 제 모든 게 바뀔 수 있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고마워요, 하멜 님.>

미엘라는 겨우 울음을 누르는 듯했다.

<…하. 미안해요. 이러려고 말씀드린 게 아닌데, 갑자기, 갑자기 그냥 눈물이 나네요.>

하지만 미엘라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기어코 막지 못했는지 훌쩍거렸다.

"우셔도 됩니다."

루시온은 가만히 듣다 목소리를 꺼냈다.

<그, 흑, 그렇게 말씀하시면, 흐흑, 어떡… 해요?>

"잘하셨습니다. 정말 잘하셨어요."

루시온이 부드럽게 말하자 미엘라가 울음을 터트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똑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인지 베델은 머쓱한 얼굴로 슬쩍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미엘라는 코를 먹은 소리를 냈다.

<…미안해요.>

"아닙니다.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눈물이 나면 참지 말고 흘려야죠."

<그래도 민망… 하니까, 상황이 조금 더 진전되면 연락드릴게요!>

미엘라는 그대로 연락을 끊어버렸다.

루시온은 조용히 연락용 아이템을 내려놓았다.

'…미친!'

가면을 벗은 루시온의 입꼬리가 하늘 높이 치솟아 있었다.

'곧 완성이라니!'

루시온은 떨리는 마음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꾸 목숨이 간당간당할 일이 생긴 와중에 미엘라가 전해준 소식은 땅을 촉촉이 적시는 단비와도 같았다.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루시온은 그대로 상체를 일으켰다.

[루시온.]

"근처 산책은 괜찮지 않겠습니까?"

루시온은 가면을 다시 손에 쥐었다.

[…산책가는 데 가면은 왜 필요한 건데?]

러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 * *

"…하아."

보고서를 쓰고 있던 헤인트가 창문을 열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양손 위로 높이 치솟은 하멜의 가운뎃손가락을 보자 오만상을 찌푸렸다.

"왜 또?"

루시온은 그제야 씩 웃으며 따라오라고 손을 휘저었다.

[루시온 공. 그, 욕은 왜 자꾸 하는 건가?]

베델은 아직도 헤인트를 견제 중인지 궁금했다.

한 번도 아니고 벌써 두 번째였다.

헤인트가 움직이는 걸 본 뒤에 루시온이 앞으로 느긋하게 걸으며 입을 놀렸다.

"헤인트 형님은 루시온으로서 본다면 좋은 형님이지만, 하멜로서 본다면 짜증 나는 놈이지. 내가 준 게 얼마나 큰데 아직도 갈팡질팡하고 있잖아?"

[그렇지. 그건 얄미울 만하지.]

러쉘은 동조했다.

솔직히 루시온이 헤인트에게 준 정보는 돈으로 환산한다면 정말 산을 쌓을 정도의 귀중한 정보였다.

이걸 그냥 받아먹기만 한다면 쓰레기밖에 더 되겠는가.

―갈팡질팡하는 건 나쁜 거였어? 라, 라타도 딸기 쿠키부터 먹을지 초코 쿠키부터 먹을지 갈팡질팡했는데.

그림자 속에 있던 라타가 갑자기 아등바등하며 발을 굴렀다.

―라타도 나쁜 라타였어?

라타는 금방이라도 울먹이듯 눈꼬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라타가 너무 진지했기에 러쉘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그거랑 달라."

루시온이 딱 잘라 말했다.

―정말? 라타는 나쁜 라타 아니야?

"물론입니다. 라타가 얼마나 착한데요."

흄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당장 쓰다듬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딸기 쿠키부터 먹을지, 초코 쿠키부터 먹을지 얼마든지 고민해도 괜찮아."

루시온은 가만히 멈춰 그림자 속에 있는 라타를 빤히 보았다.

―응! 라타가 앞으로도 열심히 고민할게!

라타가 꼬리를 흔들자 루시온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루시온 공. 헤인트가 오고 있다.]

같이 쿡쿡 웃던 베델이 헤인트가 멀리서 오는 걸 눈치채자 루시온을 불렀다.

[혹.]

베델이 말을 던졌다.

[혹 헤인트, 아니, 제국이 공을 이용만 하고 버린다면… 어떡하겠는가.]

"내가 왜 지부를 차지하려고 했겠어?"

루시온의 가면이 노랗게 물었다.

가장 중심인 개미굴에 배신자인 4황자, 오웬 테슬라의 정보가 없을 리가 없었다.

뉴브라 왕국도 제국의 약점을 쥐고 싶을 테니까.

"날 배신하면 황실의 치부를 알려버려야지."

황자이면서 적국인 뉴브라와 흑마법사와 손을 잡은 제국의 치부.

제국이 과연 이걸 공개하고 싶을까.

루시온이 걸음을 멈췄고, 잠시 뒤 헤인트가 목소리를 냈다.

"무슨 일인데?"

"볼일이 있으니까 왔지. 왜 이렇게 표정이 나쁠까 몰라."

"가운뎃손가락은 왜 자꾸 올리는데? 기분이 더럽잖아."

"널 향한 내 인사야. 아니꼬우면 너도 해."

헤인트는 한마디도 지지 않는 루시온의 말재간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걸 대신전의 우두머리인 대신관에게 전해줘."

루시온이 헤인트에게 내민 건 편지였다.

"…편지라고?"

"그리고 황제와 만나야겠어."

"...."

헤인트는 말없이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너무 황당한 건지, 아니면 이럴 줄 알고 예상한 건지는 몰라도 헤인트는 생각보다 평온했다.

"내가 이 정도도 요구할 수 없는 건 아니잖아?"

루시온은 그러든 말든 입부터 놀렸다.

"내게 보냈던 그 편지들은 네가 보낸 건가?"

"내 말에 대답부터 하는 게 어때?"

헤인트가 물었지만, 루시온은 대답할 의지조차 없었다.

상대가 뻔뻔하니 자신은 더 뻔뻔하게 나가야 했다.

"폐하께서 널 보자고 하셨어."

'…어제 폐하가 어쩌고저쩌고하던 게 이거였어?'

루시온은 계속 헤인트에게 유령을 붙여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

황실과 무슨 말을 나눌지 모르니까.

헤인트가 제이엘을 만나고 나서 자신을 칭찬한 것도 들었지만, 기분은 썩 좋진 않았다.

자신에게 필요한 건 헤인트의 칭찬이 아니라 황실의 약속이었으니까.

"어떤 의도지?"

루시온은 경계했다.

황제와 만나길 원했지만, 갑자기 이렇게 쉽게 내어주니 너무 이상했다.

"경계하지 마. 폐하께서 좋은 의도로 널 만나고자 하셔. 해칠 생각은 조금도 없고."

헤인트는 껄끄럽지만, 될 수 있는 대로 표정을 풀었다.

"말로만 믿으라고? 너도 날 믿지 않는데?"

하지만 루시온은 계속 경계심을 내비쳤다.

"그럴 줄 알고 폐하께서 미리 증명서를 넘기셨어. 확인해봐."

'보고서 사이에 슬쩍 끼어왔나 보네.'

루시온은 황실에서 증명서까지 보냈을 줄은 모르고 있었다.

[대체 언제 보낸 거야?]

러쉘마저 의문을 드러냈다.

루시온은 마지못해 헤인트가 넘긴 증명서를 받았다.

자신의 신원을 보증하겠다는 사실과 구체적으로 해치지 않겠다는 내용까지 적혀 있는 것도 모자라 정말로 황실 문장이 찍혀 있었다.

황실 기사가 어떻게 황실 문장을 위조하겠는가.

"폐하께서는 이번 일에 무척 신경을 쓰시고 계셔."

루시온이 증명서를 살피는 동안 헤인트가 슬쩍 말을 꺼냈다.

생각 외로 하멜이 빨리 자신을 찾아와 다행이다 싶었다.

"그렇겠지. 신경 쓰지 않는 게 이상하잖아? 내가 하찮은 정보를 넘긴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루시온은 비아냥거렸다.

당연한 소리를 마치 대단하듯 말하는 게 우스웠다.

순간, 헤인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빈정거리지 말고 들어. 폐하께서 너의 공을 높이 산다는 뜻이잖아."

"하지만 나를 공개적으로 소개하지 않겠지. 나는 흑마법사니까."

"아니."

헤인트가 루시온의 말을 부정했다.

"이번 사태가 해결된다면 폐하께서는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을 마음이 있다고 하셨어."

"입으로 말하는 거야 누가 못해?"

"그렇지. 하지만 폐하께서는 절대로 함부로 말을 내뱉으시는 분이 아니셔."

'그건 나도 알고 있어.'

2년 후까지 현 황제는 테슬라 제국의 가장 찬란한 태양이라고 칭송받을 정도였으니까.

"너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없다는 건 내 기사도를 걸고 맹세할게.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내가 네 편이 되어주마."

헤인트가 사뭇 진지한 태도로 임하자 루시온은 팔뚝을 타고 올라오는 소름에 몸을 가볍게 떨었다.

"너, 왜 그래?"

"내가 아는, 아주 기특한 동생이 있는데 걔가 내뱉은 말에 당연한 사실을 하나를 깨달았거든."

'그게 나야.'

루시온은 가려운 입을 겨우 참아냈다.

헤인트가 주먹 쥔 손을 가슴팍에 올린 뒤 고개를 숙였다.

"황실 기사로서 하멜, 그대에게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멜이 아니었다면, 뉴브라 왕국이 그토록 철저하게 제국을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며.

많은 귀족이 뉴브라 왕국에 회유되었다는 사실 역시 몰랐을 테고.

적어도 적은 아니라 믿었던 네바스트의 실체를 몰랐을지도 몰랐다.

하멜은 제국에 있어 은인이었다.

그가 흑마법사가 아니라, 제국을 도운 사람이었다는 사실부터 먼저 인정했어야 했다.

'진… 심이네?'

루시온은 얼떨떨했다.

헤인트는 소설 속 주인공답게 줏대가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

"아. 네 편이 되는 데 전제 조건이 깔렸으니까, 오해하지 마라."

조금 전 그토록 정중했던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고개를 올린 헤인트는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오해는 무슨. 네 표정 보면 날 당장 한 대 칠 기세인데?"

루시온은 코웃음을 치다 편지를 다시 내밀었다.

"대신전에 네바스트의 배신자가 있어. 그게 누구인지 적힌 편지야."

"뭐… 라고? 이젠 네바스트가 대신전까지 손을 뻗었다고?"

헤인트는 깜짝 놀랐다.

"…그런데 전제 조건이 맞는다면 정말 내 편이 될 거야?"

루시온이 다시 물었다.

혹시나 하고.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지만, 그래. 내 기사도를 걸었는데 당연히 지켜야지."

"그, 그럼, 언제 시간이 될지는 내가 쪽지로 보낼게."

루시온은 그 말을 남기며 다급히 뛰었다.

감히 황제를 두고 약속을 먼저 잡겠다는 말에 어처구니없을 뻔하지만, 당황한 하멜의 태도에 헤인트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떠올랐다.

하멜은 사람이었다.

흑마법사인 하멜도 사람이었다.

조금은 특별할 뿐.

루시온을 보는 헤인트의 눈동자에 미안함이 깃들었다.

179화. 부엉이가 웃는다

* * *

<…오늘 새벽에 동부 지부를 차지했습니다.>

크라언의 보고를 루시온은 느긋하게 들었다.

알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푸른 실 하나가 잘려나갔으니까.

푸른 실은 이제 개미굴 하나, 마탑에 하나.

붉은 실은 카슨과 헤인트, 공허의 손 보스, 아샤, 트로에, 제이엘을 모함하라고 첼가를 시켰던 세피로, 베델을 배신한 전 주인 트웰로.

그리고 이전에 자신과 연결됐다가 갑자기 사라진 붉은 실 4개.

'…더럽게도 많네.'

루시온은 흄이 따라 준 차를 홀짝였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자신이 머물던 저택이 달라졌다 싶었는데 진짜 다른 저택이었다.

누가 수면제라도 탄 건지, 자신이 그동안 깨지 않고 동부로 왔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할 따름이었다.

흄은 자신이 깨어나지 않아 일정에 차질이 생길까 봐 모두가 합심해서 조심히 옮기기로 결정 났다고 알려줬지만, 또다시 생각하니 웃겼다.

"고생했어, 크라언."

루시온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제 하나 남았습니다. 가장 핵심인 개미굴이야말로 하멜 님께서 바라시던 장소가 아니십니까?>

"정보는 언제나 도움이 되니까."

<헤로안이 가장 신나 있습니다. 개미굴은 더 신경 써서....>

"아니, 거기는 정말 신경 쓸 필요 없어."

<예?>

"거긴 고작 해봤자 4명 정도 지키고 있거든."

루시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베델이 목소리를 냈다.

[거기 유령들도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

베델은 남부를 제외한 북부, 중부, 심지어 동부의 지부까지 유령들을 싹 정리했다.

자신이 나설까 봐.

루시온은 연락용 아이템을 잠깐 손으로 가린 뒤에 목소리를 냈다.

"내가 해도 되는데. 여기 동부잖아."

[아니. 공이 번거롭게 갈 필요 없다. 내가 가도 충분하니까.]

베델은 이제 루시온을 아주 잘 알았다.

자신이 처리하지 않으면 루시온이 움직일 테고, 루시온이 움직이면 일을 만들어서라도 무리하고 돌아오니 차라리 자신이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

[그럼, 그럼. 베델이 움직이는 게 낫지. 이번에는 루시온 네가 말한 것처럼 구태여 나설 이유도 없잖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러쉘이 목소리를 냈다.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크라언이 당황한 목소리로 묻자 루시온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내가 가본 곳이니까. 어쨌든, 동부에서 기다리고 있어.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죽지 않는 병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추가로 하나 더 있어."

<혹시 피터가 말하던 부엉이입니까?>

"그래. 찾아내서 모가지를 비틀어야지. 얼마나 많은 말을 토해내는지 궁금하지 않아?"

<참… 얽히고 얽혔다 싶습니다.>

크라언의 숨소리가 깊게 들려왔다.

<조직이 튼튼하게 성장하려면 제국이 필요하고, 제국과 손을 잡으려면 제국의 적이 저질렀던 일을 밝히고 파헤쳐야 한다니. 저는 개인적으로 걱정입니다.>

크라언은 잠깐 한 박자 쉬었다.

<조직도 중요하지만, 하멜 님의 몸이 하나잖습니까. 무리하지는 않으실지, 정보를 얻기 위해 너무 위험한 일까지 하시지는 않을지 걱정입니다.>

왜 저 소리가 나오지 않는가 싶었다.

―루시온이 아팠어! 라타가 보는 앞에서 기우뚱하더니 '쿵' 하고 쓰러졌어! 라타가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삐익!

라타가 갑자기 공을 문 상태로 뛰어와 열심히 하소연했다.

들릴 리가 없을 텐데.

루시온은 자연스레 크라언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중요한 말을 던졌다.

"개미굴까지 정리가 되면 너한테 줄 게 있어."

루시온은 이제 더는 크라언에게 자신이 안 사실을 숨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조직이 성장하는 만큼.

조직과 제국이 손을 잡는 만큼.

크라언 역시 과거에 한 발짝씩 내딛게 될 테니까.

크라언의 모국이었던, 케오르티아 왕국의 멸망과 무슨 사건이 있어서 그를 십여 년간 붙잡아뒀는지 몰라도 네바스트가 그와 얽혀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돈은 이제 괜찮습니다. 광산이 돌아가고, 체프란 가와 초네스트 가의 사업장 돌아가서 조직의 운영비를 충당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나중에 보자."

루시온은 말을 아꼈다.

연락용 아이템을 끊은 뒤에 가면을 벗었다.

죽음의 바다 정화 축제는, 빛으로도 정화가 되지 않는 어둠을 닮은 죽음의 바다가 정상화되길 기원하는 축제 중 하나였다.

축제는 오후 4시부터 열렸고, 행사는 오후 6시부터 시작됐다.

죽음의 바다가 까맣기에 신관들이 빛이 가장 환할 때인 저녁시각을 노렸다.

축제 기간은 3일로, 자신은 첫날 행사에 참여하기로 되어있었다.

"드디어 부엉이를 볼 수 있겠습니다."

루시온은 찻잔을 잡은 채로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검붉은 색의 보석이 박힌 브로치라고 했지?]

러쉘은 가르티오 뭰이 꺼냈던 말을 떠올리며 물었다.

"맞습니다. 붉은색이 아닌, 검붉은 색이라고 했습니다."

루시온 대신 흄이 대답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흄의 말이기에 신뢰성은 확실했다.

"도련님. 이제 슬슬 준비하셔야 합니다."

흄이 시계를 확인하며 말하자 루시온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격식 같은 건 누가 만들었는지. 망할 놈들."

그냥 이대로 옷 좀 제대로 된 걸 걸치고 가면 그만이지 않은가.

무슨 연회만 하면.

어딜 간다고 하면.

준비할 게 왜 이렇게 많은지.

"다들 엄청 기대하고 있습니다."

"…너도 기대하고 있는 눈치인데?"

흄의 눈동자가 너무도 초롱초롱해 루시온이 슬쩍 말을 던졌다.

―라타도 기대하고 있는데?

라타가 배시시 웃으며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었다.

―지금 루시온도 너무 좋지만, 꾸민 루시온은 별님 같아서 더 좋아!

자신이 보기에는 꾸미기 전과 후가 그렇게 큰 차이는 없어 보였는데.

'으흠....'

[시녀들도 벌써 들떠 있었어. 루시온 공을 꾸밀 거라며 번호표까지 뽑는 걸 보았다.]

베델까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놀라자 루시온이 깜짝 놀랐다.

"…농담이지?"

[농담을 듣는 거면 몰라도 말하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무릇 주인 된 자라면 그들의 바람을 이루어지는 것도 훌륭한 일이 아닌가.]

압박이 살짝 섞인 말에 루시온은 러쉘을 바라보았다.

[루시온. 나는 네가 연회 갈 때마다 입던 그 칙칙한 후드에서 탈출한 것만으로도 엄청 만족해. 여기서 뭘 더 따지겠어?]

'내 편은 하나도 없네.'

루시온은 코웃음을 치며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 * *

"...."

밖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헤인트가 루시온을 보자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이상합니까?"

그 시선에 루시온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분명 시녀들이 괜찮다며, 역작이라고 자신들끼리 손뼉을 마주치곤 했는데.

"…용기 있는 영애들이 없는 건가?"

"예?"

헤인트가 웅얼거리자 루시온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긴. 용기가 나도 못 하는 거겠지."

헤인트는 루시온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온은 크로니아의 막내아들이었다.

미쳤다는 소문을 떨쳐냈어도 루시온을 본다면 말을 걸어볼 용기가 어떻게 생기겠는가.

"용기라뇨? 제 모습이 그렇게 이상합니까?"

―아닌데. 루시온은 오늘도 별님 같아! 이히히! 라타는 너무, 너무 좋아!

라타가 루시온 주변으로 빙그르르 돌았다.

"루시온. 혹시 영애들한테 편지 받은 적 없어?"

"텔라 영애한테 온 건 있습니다."

헤인트가 갑자기 루시온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신을 안타깝게 보는 헤인트의 표정이 무척 아니꼬웠다.

"왜 그러십니까? 말 좀 해주십시오."

"그런 게 있어. 너는 아직 멀었으니까, 마차에 올라타십시오."

헤인트는 키득거리다 대문을 넘는 순간, 웃음기를 싹 지웠다.

루시온과 흄이 마차에 올라타자 헤인트도 덩달아 동행했다.

마차가 출발한 뒤에 헤인트가 입을 열었다.

"혹시 죽음의 바다를 본 적이 있어?"

"없습니다."

"일단 들었다시피 죽음의 바다는 모든 것들을 죽이는 바다야. 이게 정확히 뭔지 신전 쪽에서 계속 조사하고 있지만, 빛으로 그 바다를 정화할 수 없다는 게 공식적인 사실이야."

[빛은 원래 정화 같은 거 할 수 없어. 빛이 어둠을 정화한다고 믿는 것뿐이지, 실제로는 정화가 아니라 죽이는 행동이잖아?]

러쉘이 헤인트의 말에 반박하듯 입을 열었다.

[정화는… 보자. 라타가 할 수 있겠네? 트로에도 인정했고.]

러쉘의 시선이 라타에게 향하자 라타는 앞발도 쭉 뻗고 '에헴' 하며 소리를 냈다.

[맞아. 라타가 날 타락으로부터 원래대로 돌려줬다.]

정화를 받은 당사자인 베델이 그날 일을 언급하자 라타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응! 라타가 베델한테 묻은 나쁜 걸 없앴어!

"일단 많은 신관이 죽음의 바다에 깔린 게 어둠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어."

이어진 헤인트의 말에 루시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어둠이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그걸 모르니까, 답답한 거지. 만약 저 죽음의 바다가 제국을 덮친다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그래서 적어도 일반 바다를 삼키지 않게 주기적으로 빛을 뿌리는 일을 하는 거야."

"저는 그냥 석상처럼 서 있기만 하면 된다고 들었습니다. 위험한 건 없겠죠?"

"혹시 네가 서 있을 곳이 배 위에라는 것도 들었어?"

[…내가 이것 때문에 반대했는데.]

러쉘은 팔짱을 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죽음의 바다는 마치 결계라도 있는 것처럼 일반 바다를 침범하지 않고 일정 구역 너머로 퍼져 있었다.

비록 죽음의 바다가 지금까지 경계를 침범하는 일이 없었고 배가 죽음의 바다와 일반 바다 경계에 도달하기 전에 멈춘다고 해도 걱정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예. 들었습니다. 배가 총 3대를 움직이고 저는 정 가운데 있는 배에 탈 예정이라고 알려줬습니다."

루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좌우에 있는 배는 신관들이 옮겨 탈 거거든. 너한테 빛이 오지 않게 막는 역할을 내가 담당하기로 했고."

헤인트가 손을 만지작거렸다.

루시온이 얼마 전에 과로로 쓰러졌고, 사람이 많은 곳에 어떤 증상을 일으킬지도 몰랐다.

게다가 경매장에서 흑마법사까지 나타났으니 이번에도 그냥 넘어간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었다.

"너와 함께 배를 탈 사람은 그날 뽑기로 정해져."

"뽑기요…?"

루시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조작이 가능하다는 말과 같았다.

살짝 어두워진 루시온의 표정에 헤인트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물론, 신분은 확인은 확실히 할 거야. 내가 미리 가서 위험한 게 없는지 확인도 했어. 아, 지금도 미리 도착해 있는 황실 기사들과 크로니아의 기사들이 계속 상황을 파악하면서 알려주고 있고."

긴말을 쉬지 않고 내뱉다 헤인트는 잠깐 숨을 골랐다.

"어, 네가 특별하지만, 축제 첫째 날 행사는 과거에도 똑같았어. 신관과 일부 추첨 된 사람들이 함께 배를 타고 가서 빛도 뿌리고 그 모습을 감상하면서 다시 돌아왔거든. 지금까지 그 행사에서 문제가 발생한 적도 없었고."

"저는… 배를 한 번도 타보지 못했습니다."

"그럴 것 같더라."

헤인트가 루시온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멀미약이야."

약이라는 말에 루시온의 미간이 좁혀졌다.

"뱃멀미를 할 수 있으니까 미리 먹는 게 좋아."

헤인트의 말에 흄의 눈이 커졌다.

뱃멀미라니.

그런 건 자신이 읽었던 책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흄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리 챙겼어야 했는데."

"괜찮아. 형님께서 챙겨주셨으니까."

루시온은 말과 달리 싫은 표정으로 약을 손에 쥐었다.

우수수 닭살이 올라왔다.

"어쨌든, 루시온. 네가 이 축제에서 해야 하는 일은 배를 타고, 웃어주다가 다시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것뿐이야."

헤인트는 가볍게 손바닥을 맞잡았다.

뭔가 확정 짓는 말에 루시온은 묻질 않을 수 없었다.

"그쪽에서 그렇게 말했습니까?"

"맞아. 원래는 그것보다 더 길었는데, 내가 잘랐어."

"고맙습니다."

루시온은 모처럼 마음에 드는 헤인트의 행동에 활짝 웃었다.

* * *

"…후."

루시온은 내리기 전에 심호흡부터 했다.

뱃멀미를 대비해 약도 먹었고, 우황청심환 같은 긴장을 풀어주는 약도 추가로 먹었다.

"괜찮겠어?"

헤인트가 마차 문을 열려다 미세하게 떨고 있는 루시온의 상태에 그대로 멈췄다.

"괜찮습니다. 오랜만이라서 그럽니다."

경매장 내에는 그래도 한정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벌써 창문 너머로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게 보이자 손바닥에 땀으로 흥건했다.

[루시온 공.]

미리 주변을 살피고 온 베델이 루시온을 불렀다.

[흑마법사는 없다. 유령도 마찬가지야.]

신관들이 왔기에 흑마법사도, 유령도 없는 건 당했지만, 그 소리가 이상하게 찝찝하게 들려왔다.

루시온은 베델의 과거 고백으로 나타난 붉은 실을 바라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트웰로 스프리카도.

그자가 여기에 왔다.

그러니 어떻게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180화. 부엉이가 웃는다(2)

'트웰로가 공허의 손과 손을 잡았다면 흑마법사 놈들도 끌고 와야 할 텐데. 어떻게 날 죽인다는 거지?'

일단 한 가지는 확실했다.

트웰로는 추천에서 무조건 뽑힐 거라는 걸.

그와 연결된 붉은 실이 놈을 어떻게든 자신과 엮게 만들 테니까.

"…루시온?"

헤인트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정신을 차리고 헤인트를 보았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못 하겠으면 내가 바로 가서 말을 나눠볼게."

"아닙니다. 아마 제가 온다고 널리 알렸을 테고, 정말로 절 보러 온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요."

"네가 쓰러지면 그것도… 음, 엄청 곤란해질 텐데."

축제장이.

변경의 지배인 노비오가.

황제 폐하가.

카슨이.

'…아득하다.'

헤인트는 당장 눈을 질끈 감고 싶을 정도였다.

그가 곤란해 보이자 루시온은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럼, 쓰러질 것 같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럼, 쓰러지기 직전에 형님을 부르겠습니다."

헤인트는 재차 변명하려다 말을 멈췄다.

이상하게 기시감이 들었다.

마치 하멜하고 말을 섞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짜증이 나는 것까진 아닌데.

헤인트는 루시온을 잠깐 바라보았다.

'에이. 그럴 리가 있나. 목소리도 다르고, 머리카락 색도 달랐는데.'

체격은.

후드와 망토를 두르고 있어서 그렇지. 어쩌면 비슷할지도.

하멜 옆에 있던 여성은.

그것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목소리랑 머리카락은.

마법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헤인트는 자신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추측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간혹 직감이 들어맞을 때가 있었다.

지금 그 직감이 발동했다.

'만약에. 진짜 만약에… 루시온이 하멜이라면.'

헤인트는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걸 느꼈다.

괜히 입가가 바짝 말랐다.

묘한 기시감.

루시온에게 반응하는 빛.

하멜과 비슷한 체구.

헤인트는 한 번만 확인해보기로 했다.

'루시온이 하멜이라면 내 손에 반응해서 막아내겠지.'

하멜이 살기를 두르지 않은 자신의 검을 막아냈을 때처럼.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루시온은 먼저 눈을 깜박거렸다.

헤인트의 손이 루시온의 머리 근처에 멈춰서야 뒤늦게 놀라서는 눈이 휘둥그레 떴다.

으레 일반인이 보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 먼지가 묻어서."

헤인트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무언가를 손에 쥔듯한 흉내를 냈다.

'…진짜 큰일 날뻔했네. 어디 의심할 사람이 없어서 멍청하게 루시온을 의심해? 루시온은 일반인이라고.'

오랜만에 세차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헤인트는 억지로 입꼬리를 더 올려 보였다.

"그럼 먼저 내릴게. 마음의 준비가 되면 천천히 내려와. 아직 행사가 시작하기 전까지 시간이 있으니까."

헤인트는 루시온을 보지 않고 마차에서 내렸다.

열린 마차 문틈 사이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크게 들려왔다.

루시온은 눈을 잠깐 감았고, 마차 문이 닫히자 바로 입을 열었다.

"형님이 뭘 한 거야, 베델?"

[공을 확인하려 했다.]

베델은 곧바로 대답했다.

"내가 누구인지 말이야?"

[그래. 공이 하멜인지 확인하려고 했다.]

이어지는 베델의 대답에 루시온은 피가 마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왜?"

루시온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디가 어설펐을까.

그렇게 신경 썼는데.

[간혹 기사들 사이에 직감이라는 게 있다. 그 직감을 믿고 확인해봤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베델은 루시온을 달랬다.

순간 얼마나 무서웠겠는가.

"그런 걸까?"

이어진 루시온의 물음에 베델은 눈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날 믿어. 헤인트는 아직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베델 말이 맞아. 눈치챘다면 헤인트 성격상 그냥 두지 않았겠지.]

러쉘까지 목소리를 내자 그제야 루시온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입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벌써 지친 것 같았다.

루시온은 라타를 쓰다듬으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흄."

"예, 도련님."

"나가서 내가 좀 이상하다 싶으면 세게는 말고 정신 차릴 만큼 쳐."

"제, 제가요?"

당황스러운 지시에 흄은 말을 더듬었다.

"보이는 곳 말고, 어깨를 친다든지, 팔뚝을 쥔다든지."

"못 합니다! 도련님은 치느니, 제가 혀를 깨물고 말겠습니다!"

"이게 혀를 깨물 만한 일이야…? 아니, 이번에는 또 무슨 책을 읽고 있는 거야?"

―라타가 알아! '오, 나의 주인님.'이야! 엄청 재밌어!

"...?"

루시온의 눈이 커졌다.

[기사를 주인공으로 쓴 소설이다. 내가 추천해줬어. 기사라면 당연히 읽어야 할 글이지.]

베델이 싱긋 웃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루시온은 흄과 베델도 모자라 라타까지 앞발을 내밀어 주먹을 맞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루시온의 시선이 러쉘에게 향하자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 몰라. 안 읽어봤거든.]

"푸핫…!"

뒤늦게 루시온의 웃음이 터졌다.

행복해 보여 다행이었다.

자신이 꼼꼼히 살피지 못했지만, 잘 지내서 다행이었다.

루시온은 계속 웃으며 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열어."

"…준비는 되셨습니까?"

주먹을 맞대고 있던 흄이 깜짝 놀라며 손을 다급히 내렸다.

"아니."

"그러면...."

"그냥 부딪치는 거지. 준비하려면 하루를 줘도 모자라."

흄은 루시온의 안색을 살피고는 문손잡이를 잡았다.

흄도 떨리는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 문을 열었다.

수많은 말이 쏟아졌다.

소리가 루시온의 귀를 파고들었다.

원치 않아도 시끌벅적한 그 소리는 자신에게 퍼붓던 비웃음과 욕지거리, 그리고 마음을 갉아먹는 말들로 바뀌어 들려왔다.

그때마다 바닷속 깊은 곳에서 떠오르지 못하고 잠기고, 또 잠겨서 아등바등하는 기분에 휩싸여야 했다.

라타가 루시온의 그림자에 들어갔고, 루시온은 마차에서 내렸다.

첨벙.

들리지 않을, 소리들의 바다가 자신을 휩쓸어왔다.

파도가 몰아치고, 자신에게 쏟아지면 마치 가슴이 날카로운 가시에 찔린 것만 같았다.

후.

루시온은 숨을 내쉬었다.

'이건 그런 소리가 아니라, 함성이야.'

주문을 걸듯 계속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젠 벗어날 때도 됐지 않은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질척함에 붙잡히지 않게, 루시온은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고 그저 앞을 바라보았다.

―저것 봐! 사람들이 루시온을 보며 웃고 있어!

해맑은 라타의 소리와 함께 자신을 감쌌던 파도가 점점 걷어졌다.

라타의 목소리에 왜 이렇게 안심이 되는 건지.

웅얼거리던 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물거품에 가려졌던 사람들의 표정도 차차 보였다.

웃고 있었다.

자신이 성자가 됐던 그 날처럼 사람들은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쿡쿡.

뒤따라오던 흄의 소심한 손길이 등 뒤에 느껴졌다.

루시온은 다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성자님! 성자님!"

"우와! 진짜 성자야! 엄마! 성자님이 반짝반짝해!"

"부디, 이 테슬라 제국에 빛이 되어주십시오! 성자님!"

"허.... 저게 사람이야? 미쳤다, 미쳤어."

다양한 소리가 루시온의 귀를 파고들었다.

서로 섞이지 않고 들려오는 다양한 소리에도 루시온은 아직은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떨리는 손이 티가 나지 않게 서로 꼭 붙잡으며.

입꼬리를 올리는 걸 잊지 않고 앞을 보았다.

꽃이 뿌려졌다.

자신의 양쪽 옆에서 누군가 뿌린 꽃잎이었다.

'…누님은 오셨으려나.'

늦봄을 알리는 것처럼 색색의 꽃잎을 보자 샤엘라가 떠올랐다.

루시온은 궁금했지만, 차마 눈동자를 돌리지 못했다.

지금으로서 앞만 보면서 걷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행동이었다.

* * *

"고생했어."

헤인트가 접이식 의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루시온은 흄이 건넨 물을 마신 뒤에 겨우 자리에 앉았다.

아직도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루시온 네가 먼저 탄 후에 신관들이 나머지 배를 탈 거야."

헤인트의 말을 들으며 루시온은 부두에 정박한 배를 바라보았다.

"지금 추첨에 들어갔네. 잠깐만."

헤인트가 잠깐 자리를 비웠다.

―…어! 트로에 아저씨다!

라타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눈동자를 굴렸다.

'벨로스까지 왔네?'

자신하고 눈이 맞자 벨로스가 고개를 숙였다.

'이러면 좀 곤란한데. 정치적 중립성을 위해 선택한 축제를 아니꼬운 시선을 바라보는 놈들이 나타나겠네.'

헤인트가 자신의 편지를 제대로 건넸다면 지금쯤 대신전 내부가 발칵 뒤집혔을 상황이 아닌가.

트로에를 부를 수 있는 벨로스가 무엇 때문에 대신전 밖으로 나온 건지.

'내부가 더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한 건가?'

―반갑구나.

트로에의 목소리가 멀리서나마 들렸다.

라타처럼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는지 트로에는 보이질 않았다.

―루시온 그대가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벨로스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바로 저 바다를 위해 왔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렴.

'독심… 술이라도 익힌 거야?'

자신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본 트로에의 말에 루시온은 하마터면 소리를 낼뻔했다.

[뭐야. 진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네 걱정을 하라니까, 이 와중에도 정치적이니 뭐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

러쉘이 이어 기겁했다.

조금 전 인사 한번 했다고 아직도 떨림이 멋질 않았는가.

제 몸이 보이지 않는 루시온의 둔함에 손뼉이라도 마주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트로에 아저씨! 라타가 궁금한 게 있어!

―말해보렴.

―저어기, 저 너머에 까만 바다가 있대. 저게 뭔지 알아? 라타는 설명을 들었는데도 모르겠어.

―저건 타락이란다. 신관들이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아주 짙은 타락이지.

[네가 나서야 할 만큼?]

러쉘이 물었다.

―그래. 바다 경계가 조금 불안하구나.

[저 경계를 신수께서 하셨습니까?]

베델은 축제장 주변을 살피며 죽음의 바다를 보고 왔다.

위에서 내려다본 죽음의 바다는 이름 그대로 죽음을 떠올릴 만큼 너무도 어두워 자신도 들어간다면 빠져나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

푸른 바다와 까만 바다가 서로 만나지 않고 있는 모습은 다른 의미로 놀라웠다.

빛의 신이 어루만져 까만 바다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는 세간의 이야기가 왜 퍼졌는지 알 정도였다.

―내가 아니란다. 나는 그저 타락이 경계를 더 공격하기 전에 막으러 왔을 뿐이구나.

[그럼 진짜 빛의 신이 하신 겁니까?]

베델은 호기심이 어린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대는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모르겠습니다. 아마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제 꼴이 이 모양이 됐을까요?]

트로에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베델은 입술을 모으며 한쪽 눈썹을 올렸다.

[뭐가 됐든, 조금은 안심이네.]

러쉘은 그제야 굳어졌던 얼굴을 풀었다.

[신관들이 없다면 내가 루시온 공과 빙의를....]

베델이 말을 멈췄고, 순간 루시온이 움찔거렸다.

딱!

[베델!]

러쉘이 손가락을 튕기며 갑작스럽게 치솟아 오르는 베델의 살기를 억눌렀다.

타타탁!

루시온과 열 발자국 정도 떨어져 있던 기사들이 이유 모를 살기에 반응해 루시온을 감쌌고, 담소를 나누던 신관들이 어둠에 반응해 경계했다.

"…괜찮습니까?"

헤인트가 재빨리 다가왔다.

되도록 빛을 억누르려고 했지만, 방금 그 반응은 분명 어둠이었다.

[…미안하다. 미안해, 루시온 공.]

베델은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랐다.

눈동자를 돌리는 와중에 눈이 맞고 말았다.

트웰로 스프리카도.

그놈과 눈이 맞는 순간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참았어야 했는데.

"괜찮… 습니다."

루시온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트웰로가 마치 보란 듯이 자신의 근처를 지나갔다.

잠깐 시선이 마주했다.

싱긋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그때, 검붉은 보석이 박힌 브로치를 보았다.

축제 날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거무튀튀한 붉은빛이 도는 보석.

누군가 약속한 신호가 아니면 저런 브로치를 할 수 있을까.

[저거, 저 보석 말이야. 가르티오가 말한 보석 아니야?]

베델의 살기를 계속 억누르던 러쉘마저 깜짝 놀라며 입을 올렸다.

[러쉘. 부엉이가, 부엉이가 어떤 특징을 가졌다고 했던가?]

베델이 다급히 러쉘을 재촉했다.

[손등에 상처, 새끼손톱이 까맣다고 했어. …혹시 봤어?]

러쉘의 대답에 베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설마, 설마....]

베델이 말을 잇지 못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놈이.'

루시온은 입을 다물며 핏줄을 타고 흐르는 불쾌감에 쥐고 있던 컵까지 부르르 떨었다.

베델의 증언, 붉은 실도 모자라 검붉은 보석까지.

'놈이 부엉이다!'

181화. 부엉이가 웃는다(3)

트웰로 스프리카도.

헤로안이 알려준 정보에 따르면 놈은 동부의 귀족이라 불릴 만큼 큰 세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놈의 가문은 대대로 황실을 모셨고, 제국을 노렸던 다른 나라들과 전쟁을 했을 무렵 제국을 위해 전쟁에 참여한 공을 인정받아 백작에서 '후작'이라는 작위를 수여 받았다고 할 정도로 뼈대가 있던 집안이었다.

'…그런데 놈이 부엉이라고?'

루시온은 좀처럼 믿기 힘들었다.

다른 귀족들처럼 가세가 기울었든지, 돈이 필요한 놈이라면 몰라도 세력도 제법 있는 놈이 뭐하러 뉴브라 왕국과 손을 잡을까.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을 텐데?'

득과 실을 따지지 못할 정도로 분별력이 없는 걸까.

[루시온 공. 내가....]

[거기까지 해, 베델.]

러쉘이 베델을 말렸다. 이 이상 자학은 좋지 않았다.

가뜩이나 어둠의 존재이기에 부정적 감정에 휩쓸릴 수 있었다.

죽음의 기사든, 유령이든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끝은 타락으로 마무리될 테니까.

베델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

―우, 울지마, 베델! 루시온은 이런 거로 화낸 적 없어! 라타가 그릇을 막 깨도 흄은 혼냈는데, 루시온은 한 번도 안 냈어. 엄, '떽'은 했는데, 막 무섭지 않았어!

베델이 라타의 다급한 말에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우는 거 아니야, 라타. 내가 어떻게 울겠어?]

"…루시온 공?"

헤인트가 루시온을 불렀다.

그의 시선을 따라갔지만, 추첨을 보러온 사람들뿐이었다.

'뭘 보고 있는 거지?'

헤인트가 의문을 느끼다 말고 문득 예전에 카슨이 술김에 털어놓았던 말을 떠올렸다.

―…루시온 말이야. 가끔 허공을 바라본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는데 너무 겁에 질려 있어. 왜 그럴까, 대체 왜 그럴까 생각해도 모르겠다. 갑자기 귀를 틀어막고 오지 말라고 미친 듯이 소리치는데, 그게 뉴브라 놈들 때문에 생긴 병이라고 생각하니까, 미치겠다. 내가, …내가 놓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미친놈이지. 내가 개새끼지…!

혹시 카슨이 말하던 그 병이 도진 건 아닐까 싶어 헤인트가 루시온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괜찮아? 뭔가 몸이 이상한 거면 말해줘. 내가 해결할 수 있으니까."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하지만 제가 선택했으니, 미안한 표정을 짓지 않으셔도 됩니다."

분명 헤인트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루시온의 눈동자는 베델을 향해 있었다.

괜찮다. 내가 선택한 일이니 자책하지 마라.

루시온은 그렇게 베델에게 말했다.

[…그래. 그럴게.]

베델의 목소리가 살짝 잠겼다.

자신이 처음부터 말했다면 루시온이 이렇게 둘러서 알지 않아도 됐을 텐데.

미안한 마음이 깊었다.

"헤인트 경. 추첨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루시온은 주변 시선을 의식하며 입을 열었다.

"추첨 후에 신분 확인 때문에 시간이 조금 걸릴 겁니다. 결과가 나오는 사이에 지금 배를 점검하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루시온은 손에 쥐고 있던 컵을 흄에게 넘겼다.

기사들이 벽이 되어 주어도 사람들의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자신은 이제 추첨 결과 때까지 얌전히 앉아 숨만 내쉬는 석상이 될 차례였다.

―라타는 구경하고 싶은데.

라타의 시선이 축제 쪽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축제 속에 스며있는 맛있는 냄새가 라타의 코를 간질이는 모양이었다.

잠시 뒤, 황실 기사가 걸어와 헤인트에게 종이를 건넸다.

"추첨 결과가 나왔습니다."

헤인트는 추첨에 뽑힌 자를 확인한 후에 루시온에게 건넸다.

종이에 적힌 글씨를 읽자마자 루시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떻게 놈이 추첨이 될 수 있는가.]

베델이 조용히 분노했다.

'붉은 실 때문이야.'

루시온은 꺼낼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트웰로가 추첨이 될 거라 예상했어도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떤 방법으로 나를 죽이려고 할까?'

루시온은 기다리는 동안 고민했지만, 도무지 방법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이미 허락된 기사들 이외에는 당연히 무기를 들고 갈 수 없었다.

황실 기사단 내에 배신자는 헤인트가 처리했다.

'흑마법사도 없고.'

루시온의 시선이 신관들을 향했다.

'남은 건 신관들인가. 하지만 나와 다른 배를 탈 테고, 설령 빛으로 공격한다고 한들, 헤인트 형님이 있으니 소용없는 짓이라는 건 분명한데.'

"혹시 수상쩍은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이 사람을 주목해주십시오. 이전에 카슨 형님께서 하신 말씀이 걸립니다."

루시온은 헤인트의 물음에 손가락으로 트웰로의 이름을 가리켰다.

"알겠습니다. 주목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배에 있는 한 누구도 제 근처에 접근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트웰로가 뭘 할지 모르겠지만, 접근하지 못한다면 일단 자신을 죽일 방법의 절반은 사용하지 못하는 셈이었다.

"뭘 걱정하시는지 알겠습니다. 그런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헤인트는 루시온이 수영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 *

루시온이 배에 올랐다.

몸이 흔들리는 느낌에 루시온은 움찔거렸다.

―우오오오오! 물은 되게 예쁜데 이상한 냄새가 나! 엄, 생선 냄새야!

라타는 그림자 끝에 매달려 꼬리를 흔들며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루시온.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수영할 줄 알아?]

러쉘의 물음에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곤란한데. 배에서 트웰로가 할 짓이라면 뻔하잖아.]

[…그렇지. 하지만 기사들이 지키고 있는데 어떻게 루시온 공을 물에 빠트릴 수 있겠는가.]

[굳이 직접적인 방법을 사용할 필요는 없지. 보니까 마법사들도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었어.]

[마법사들이 있었다고?]

베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돌아갔다.

유령이 되면서 가장 불편한 건 바로 감각이었다.

살기에는 '찌릿'하고 감각이 들지만, 그 외의 것들은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사라지지 않은 기억에 의존해 그 감각을 떠올려보는 게 고작일 텐데.

[러쉘 그대는 어떻게 그렇게 빛도, 마나도 잘 느낄 수 있는가?]

[나라고 또렷하게 느껴지는 건 아닌데, 이 정도는 느껴지잖아.]

[아니.]

베델은 그 말을 부정했다.

[나는 느껴지질 않아.]

베델 자신은 유령보다 더 위에 있는 존재인 죽음의 기사였다.

상식적으로 자신이 더 많은 감각을 느껴야 했다.

러쉘은 알면 알수록 너무 이상한 유령이었다.

'뭐야?'

의문을 느낀 건 루시온도 마찬가지였다.

옆에서 헤인트가 뭐라 떠들어대는데 귀에 하나도 닿지 않았다.

지금 베델과 러쉘이 나누는 말이 더 흥미로웠다.

[베델.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러쉘은 의기양양한 목소리와 함께 입꼬리를 올렸다.

[난 천재거든.]

베델이 그 모습에 눈을 크게 뜨며 주먹까지 꽉 쥐었다.

처음으로 러쉘이 재수 없어 보였다.

[어쨌든, 루시온. 경계해서 나쁠 건 없어. 마법사라면 배가 얼마나 육지와 멀어졌든 사정거리 안일 테니까.]

러쉘은 웃는 낯짝으로 입을 놀렸다.

"…루시온 공? 듣고 있습니까?"

"아… 죄송합니다, 헤인트 경."

조금 더 커진 헤인트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그제야 헤인트를 보았다.

"오늘 파도가 잔잔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배가 조금 흔들릴 수도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헤인트는 동시에 무언가를 건넸다.

"바람 마법이 깃든 조끼입니다. 혹시 모르니 미리 입고 있는 게 좋을 듯합니다."

'구명조끼네.'

루시온은 얼른 조끼를 받았다.

"답답하시겠지만,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헤인트는 루시온이 주변을 의식하지 않게 일부러 앞에 섰다.

루시온 역시 자신을 빙그르르 감싸듯 촘촘히 서 있는 기사들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물에 빠지는 것보다 이 상황이 더 나으니까.'

기사들 때문인지 추첨에 뽑힌 사람 중 일부가 배에 올라탔음에도 감히 루시온 근처로 오지 못했다.

"물러서십시오."

기사 중 누군가 목소리를 냈다.

"잠깐이면 됩니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 인사하는 것도 안 됩니까?"

트웰로의 목소리에 베델은 귀를 막고자 했다.

살의가 미친 듯이 치솟아 올랐다.

[베델. 안 되겠다. 잠깐 물러서 있어.]

보다 못해 러쉘이 베델에게 제안했다.

눈앞에 원수가 있는데 이를 참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 되겠는가.

베델은 투구 덮개를 내리며 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염치없는 말이지만, 루시온 공을 부탁… 할게.]

조금 전처럼 루시온에게 폐를 끼치느니 차라리 자신이 이 자리를 떠나는 게 나았다.

베델은 루시온에게 고개를 숙인 뒤 트웰로를 쳐다보지도 않고 날아갔다.

루시온의 표정이 굳어지자 헤인트가 그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갈게."

헤인트가 기사들 사이를 비집고 트웰로에게 향하자 루시온은 잠깐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배 난간을 꼭 잡고 앞으로 물살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감상했다.

라타는 소리도 지르지 않고 물끄러미 그림자 끝에 매달려 바다의 모습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흄은 혹여나 루시온이 빠지진 않을까 옆에 딱 붙어서는 바짝 긴장했다.

"흄."

루시온이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바다를 가리켰다.

자신은 바다를 본 적이 있지만, 흄은 아닐 테니까.

"봐봐. 엄청 예뻐."

루시온의 목소리에 이끌려 흄은 고개를 돌렸다.

배가 나아가면서 일으키는 물보라와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모습은 보석으로 가득 찬 크로니아의 금고를 보는 듯했다.

넓었다.

아득했다.

흄의 입이 자동으로 벌어졌다.

"예쁘지?"

"…예. 바다라는 게 이런 곳일 줄은 몰랐습니다."

흄은 루시온의 물음에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건 밤하늘의 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흄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 * *

배가 죽음의 바다를 앞두고 멈췄다.

바다의 풍경에 푹 빠져 있던 라타와 흄은 죽음의 바다가 나오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바다가 아니라, 진득한 늪 같은데?'

루시온도 불쾌하긴 마찬가지였다.

―루시온. 라타는 저기가 너무 싫어! 저긴 너무 이상해! 어둠도 안 보여!

라타가 털까지 바짝 세워서는 경계했다.

'어둠도 안 보인다고…?'

루시온은 라타의 말에 이상함을 느꼈다.

"가까이 가면 안 되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흄이 루시온을 바라보며 걱정했다.

세상에 온갖 더럽고, 추잡한 것들만 섞어서 저곳에 던져둔 것 같았다.

[저긴 진짜, 끔찍하다. 닿기만 해도 타락할 것만 같네.]

러쉘답지 않게 루시온 뒤로 물러서 있었다.

"…진짜 장난 아니네."

헤인트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예. 왜 다들 죽음의 바다를 걱정하는지 알겠습니다. 저긴, 이상한 곳입니다."

"이만큼 떨어졌으면 만약 바다에 빠졌어도 죽음의 바다로 넘어가는 일은 없을 거야. 거리 차이가 엄청나니까."

헤인트의 말을 듣다 말고 루시온은 이상한 감각에 뒤를 바라보았다.

히죽.

기사들 사이로 트로웰이 웃는 모습이 보였다.

싸아아.

순간, 루시온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꼭 무슨 일을 벌인 것 같지 않은가.

신관도 있고, 기사들도 있고, 배도 검사했고, 추첨된 자들의 신분도 확인했다면 불안하지 않아야 할 텐데.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저놈 뭐야…?]

러쉘이 눈살을 찌푸렸다.

러쉘도 트웰로의 미소를 보았다.

일을 저지르기 전에 자신만만하며 꺼내는 미소와 닮아 있었다.

뿌우우우.

뿔피리가 울렸다.

식을 시작하는 소리였다.

"이제 식이 시작됩니다. 자리를 옮겨주십시오."

헤인트가 루시온이 배 가운데로 가도록 요청했다.

루시온의 눈동자에 흔들림이 멋질 않았다.

"아프시겠지만, 되도록 빛을 막아보겠습니다."

헤인트는 루시온과 거리를 벌렸다.

신관들과 추첨한 이들 중 일부를 태운 배가 루시온이 탄 배에서 더 멀어졌다.

노랫소리가 들렸다.

신관들이 합창해서 내뱉는 소리에 라타는 귀를 쫑긋 세웠다.

―루시온. 빛을 조심하거라.

트로에가 루시온을 걱정하며 말했다.

하지만 루시온은 그 말이 귀에 닿질 않았다.

불안했다.

트로웰의 미소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신관들의 노랫소리가 점점 고조되며 왼쪽에서 빛이 하늘로 치솟았다.

헤인트가 동시에 빛을 사용해 막았지만, 루시온은 파도와 함께 배가 흔들리며 몸이 휘청거렸다.

흄이 다급히 루시온을 붙잡았다.

―우오오오! 반짝거린다!

라타는 하늘을 빤히 바라보았다.

해가 내려앉은 바다에 뿌려지는 빛은 수많은 반딧불이가 모여 있는 것처럼 은은하게 퍼졌다.

파아아아.

오른쪽에서도 빛이 치솟아 오르자 어둠이 걷어져 가는 느낌마저 받게 했다.

―우오오… 오?

양쪽에서 하늘을 향해 올려진 두 빛이 죽음의 바다에 닿기 전에 허공에서 사라졌다.

쿠웅!

배들이 전부 갑자기 크게 흔들렸다.

[밑이야!]

러쉘이 소리쳤다.

모두가 혼란스러운 그때, 루시온이 있는 중앙의 배에 갑자기 치솟는 물줄기와 함께 배가 관통됐다.

[이, 지독한 놈들…!]

러쉘은 이를 악물었다.

적들이 오늘을 위해 바닷속에서 숨을 죽인 채로 루시온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흑마법을 쓸 수 없기에 러쉘은 주먹을 꽉 쥐는 게 전부였다.

"루시온!"

헤인트가 검으로 물 마법을 베어내며 루시온에게 달려갔다.

"도련님!"

흄이 루시온을 붙잡았다.

쿠와아아앙!

하지만 한 번 더 물줄기가 배를 관통했다.

눈앞에서 흄이 사라졌다.

루시온의 눈이 휘둥그레질 무렵, 축축한 물줄기가 루시온의 배를 휘감았다.

182화. 샤엘라

쉬이익!

기껏 잘 낫고 있던 상처가 압박된 것도 모자라 루시온은 물줄기가 잡아당기는 힘에 순식간에 뒤로 끌려갔다.

'빌어먹을…!'

루시온은 이를 악물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함께 다리가 공중에 뜨고 시야가 배에서 바다로 빠르게 옮겨지며 발끝에 자신이 타고 온 배가 살짝 가릴 만큼 멀어지고 있었다.

흑마법을 사용하면 무조건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양쪽에 신관들이 있었다.

정 가운데는 헤인트가.

뒤에는 죽음의 바다가.

딱 죽기 좋은 각도가 아닌가.

'빌어먹을 붉은 실!'

얼른 죽으라고 아주 밥상까지 다 차려버렸다.

―루, 루시온! 루시오온!

[미치겠네!]

지금 답답한 건 루시온뿐만 아니었다.

라타도, 러쉘도 발만 동동 굴릴 뿐이었다.

저 물줄기가 당장이라도 루시온을 죽음의 바다로 던져버릴 것만 같지 않은가.

―루시온. 놀라지 말고 가만히 있으렴.

빛이 번쩍하더니 트로에가 모습을 드러냈다.

트로에는 허공을 빠르게 날아 루시온에게 다가가 발톱으로 물줄기를 잘라버렸다.

[좋아, 트리에!]

러쉘이 기뻐하며 당장 손뼉을 쳤다.

트로에가 떨어지는 루시온을 등으로 받았다.

"스승님. 흄은 괜찮습니까?"

루시온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눈앞에서 흄이 사라졌다.

[흄은 절벽에서 떨어져도 괜찮을 테니까 네 걱정부터 해!]

―상태는 어때, 루시온? 피 냄새가 나는데.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으시네요. 상처가 좀 터진 모양입니다."

루시온은 인상을 구기며 배를 움켜쥐었다.

옷이 점점 붉게 물들었다.

―많이 아파? 괜찮아?

라타가 그림자 속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걱정하지 말렴, 라타. 루시온은 내가 무사히....

오싹!

루시온은 그대로 굳어졌다.

이 오싹함을 느낀 건 자신만이 아닌지 트로에가 털을 바짝 세웠다.

루시온이 오싹함을 느낀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죽음의 바다에서 손처럼 된 형상들이 뻗어 나왔다.

'미친! 저건 또 뭐야?'

―꽉 잡으렴, 루시온!

트로에가 육지를 향해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이리 와.

이리 와. 이리 와.

이리 와. 이리 와. 이리 와.

섬뜩한 음성이 루시온의 귀를 찔렀다.

―타락이 그대를 원하고 있어.

트로에의 당연한 말에 루시온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대체 왜요?"

―그대 속에 있는 라타를 느낀 탓일지도 몰라. 라타가 가진 정화의 힘을 바라고 있겠지.

이리 와. 이리 와! 이리 와…!

뒤쪽에서 들려오는 섬뜩한 음성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빌어먹을! 흑마법을 쓰면 내쫓아버릴 수 있는데!]

러쉘은 안타까움에 언성만 높였다.

하지만 지금 사용하면 트로에를 공격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도련님!"

밑 쪽에서 흄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온은 아래를 내려보았다.

신관들이 내뿜는 빛에 바다는 환했기에 흄이 너무도 잘 보였다.

헤엄쳐서 여기까지 오는 게 가능하냐는 질문은 흄에게 있어 우스운 소리였다.

흄이기에 가능했다.

"떨어지겠습니다."

루시온은 말과 함께 트로에를 놓았다.

―루, 루시온…?

트로에가 타락과 싸우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 때문이었다.

빛을 사용하면 자신이 다치니까.

걸리적거리는 역할은 딱 질색이었다.

―우어어어어!

라타가 소리쳤다.

루시온은 밀려오는 바람에 감겨오는 눈을 뜨며 바다에 있는 흄을 보았다.

흄을 믿었다.

자신이 바다에 빠지기 전에 차가운 바람이 자신을 휘감았다.

[잘했다, 흄! 루시온 너는, 너는… 간 좀 떨어지게 하지 마!]

러쉘은 그 잠깐 사이에 간이 몇 번이고 떨어졌다.

아무리 루시온에게 뒤가 없다는 걸 알지만, 냉큼 떨어질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흄이 울먹거리며 소리쳤다.

"아직 아니야. 그리고 내려놔, 흄."

"피 냄새가 납니다. 바닷물은 상처에 좋지 않습니다."

"네가 얼음의 힘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

루시온이 단호하게 말했다.

파아아앗!

트로에게게 퍼져나가는 빛에 루시온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가뜩이나 루시온이 피를 흘리고 빛까지 맞는 와중에 지금 바닷속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흄은 절대로 할 수 없었다.

"아니! 그대로 잡고 있어! 떨어트리기만 해. 당장 죽여버린다!"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에 흄은 자신도 모르게 위로 손을 뻗어 루시온을 양손에 든 상태를 유지했다.

갑자기 꽃향기가 퍼져나갔다.

무언가 자라는 듯한 소리가 이어 들렸다.

'나뭇가지…?'

흄의 입이 벌어졌다.

갑자기 나무가 바닷속에서 뻗어 나왔다.

"누, 누님!"

루시온은 그녀의 후드가 걷어지기도 전에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이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샤엘라뿐이었으니까.

[누님? 샤엘라라고?]

러쉘은 갑작스러운 샤엘라의 등장에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고 보니 루시온과 닮아 있었다.

러쉘은 눈동자를 돌렸다.

육지 쪽에서 부리나케 달려왔는지 아주 굵고 커다란 나무와 바닷속에서 치솟아 오른 나무들이 그녀의 흔적을 따라 자라 있었다.

가지가 조심스레 루시온을 휘감았다.

"…하. 진짜 간 떨어질 뻔했네."

샤엘라가 다른 나뭇가지에 서 있는 채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짙은 보라색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널 건드리는 놈이 어떤 새끼인데? 내가 당장 쳐 죽여줄게."

"누, 누님. 지금은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루시온은 당황했다.

혹시나 오면서 기사들을 쥐어패고 온 게 아닌가 싶어서.

샤엘라는 순간 움찔거리더니 손바닥을 루시온 쪽으로 뻗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실처럼 긴 빛이 뿜어져 나왔다.

순식간에 바닷속에서 나무 장벽이 솟아올랐다.

타타타타!

콰아앙!

커다란 소리와 함께 퍼진 바람에 샤엘라는 오른쪽 손가락을 움직여 루시온을 나뭇잎에 감싸 보호했다.

"…뭐?"

샤엘라의 눈동자가 순간 휘둥그레졌다.

나무가 순식간에 죽어버렸다.

아니, 녹아버렸다.

"저 미친 손은 뭐야?"

죽어버린 나무들 그 틈으로 검은 손바닥들이 뻗어 나왔다.

샤엘라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지만, 검은 손에 닿자마자 피어나는 꽃도, 싱그러운 나무도 죄다 죽어버리고 말았다.

점점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건 애초에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너. 루시온을 둘러매. 도망칠 거니까."

샤엘라는 흄의 발밑에 발판을 만들어주었다.

"흄입니다. 제 집사죠."

"미안. 네가 흄이구나. 안토니가 그렇게 자랑하던 흄!"

루시온의 말에 샤엘라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도망친다! 따라와, 집사!"

"예! 따라가겠습니다."

흄은 루시온을 업고서는 힘껏 대답했다.

샤엘라는 자신이 왔던 곳에 나무를 키워 발판을 만들었다.

방해야.

너도 방해라고!

루시온을 향해 뻗어오던 검은 손이 발작하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리 와. 이리 와. 응?

검은 손이 루시온을 어르고 달랬지만, 그 행동은 날카로웠다.

당장 샤엘라를 죽일 듯이 뻗어왔다.

'들킬까? 흑마법을 쓰면 진짜로 들킬까?'

루시온은 크게 갈등했다.

트로에는 다른 검은 손들에게 붙들리다시피 했고, 갑자기 튀어나오는 마법사들의 존재와 함께 배 위에 있던 기사들마저 발이 묶여버렸다.

[들켜. 무조건 들킨다고. 널 가려줄 수 있는 게 없어.]

러쉘은 루시온의 망설임을 읽었다.

밤은 신관들이 내는 빛으로 이미 제 모습을 잃어버렸다.

가면으로서 얼굴을 가릴 수 있는 순간도 아니었다.

왜 모르겠는가.

라타의 그림자 이동만 써도 피할 수 있는데.

콰르르르!

갑자기 번개처럼 빛이 하늘에서 날아와 루시온을 향해 뻗어오던 검은 손들을 내리찍었다.

"…커헉!"

루시온은 코앞에서 일어난 빛의 힘에 상체가 무너져내렸다.

뚝뚝.

입에서 피를 쏟으며 흄의 어깨를 적셨다.

'미친.... 저 손이 아니라 빛 때문에 죽겠다.'

"이런 망할…!"

샤엘라가 고개를 돌리자 배 끝에서 누군가 거친 숨을 내쉬며 서 있었다.

"야! 이 미친놈아!"

샤엘라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헤인트였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알아도 루시온이 받은 피해가 너무도 컸다.

샤엘라는 당장 물었다.

"루시온. 괜찮아? 아니면 죽을 것 같아?"

"…후자입니다."

루시온이 개미만 한 소리를 냈다.

샤엘라는 루시온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오싹.

루시온의 전신에 소름이 돋아났다.

[왔다!]

러쉘의 말과 함께 루시온이 눈동자를 돌리자 샤엘라의 목 뒤에 어느새 검은 손이 하나 더 온 상태였다.

타락.

저것도 일단 어둠이기에 너무도 조용했다.

방금 빛에 죽어버린 손들을 보았기 때문인지 마치 똑같이 죽지 않기 위해 기회를 엿본 것처럼 조용히 다가왔다.

'저건 안 돼. 누님이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루시온은 이를 악물고 흄의 등을 발판 삼아 몸을 던져 검은 손을 붙잡았다.

어둠을 손바닥에 희미하게 둘러서.

―라타가....

[안 돼, 라타!]

러쉘은 재빨리 라타를 말렸다.

루시온이 노린 건 정화가 아니었다.

지금 기사들이 싸우면서도 죄다 루시온을 바라보고 있는 여기서 라타가 어둠을 크게 키우면 곤란했다.

풍덩!

루시온이 두른 어둠에 검은 손이 녹자 루시온은 그대로 바다에 빠졌다.

'…으으!'

구명조끼 덕분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터진 상처에 바닷물이 들어오자 아파서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픔은 익숙했기에 참을 수 있었다.

파파파팟!

흄이 마치 물귀신처럼 거센 파도를 헤치며 자신에게로 다가왔다.

흄이 손을 뻗었고, 루시온도 손을 뻗었다.

잡았다.

하지만 귓가를 간질이는 목소리와 함께 배에서 격렬한 통증이 밀려왔다.

검은 손이 루시온의 배를 휘감아 바닷속으로 더 깊이 당겼다.

타락이 닿자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보글보글.

루시온의 입에서 거품이 일어났다.

루시온이 어둠을 꺼낼 때쯤, 러쉘이 소리쳤다.

[이런 미친 새끼들!]

어차피 바닷속이었다.

여기까지는 누구도 보지 못할 테지.

기회가 왔다.

[그 더러운 손으로 내 제자를 만지지 말라고!]

―라타도 이번에는 도울 거야!

그림자 속에 있던 라타의 꼬리가 바짝 섰다.

참았던 분노를 터트리듯 러쉘이 힘을 쓰는 순간 바다가 일그러졌다.

압축된 어둠이 터져나가자 루시온을 붙잡고 있던 검은 손과 바닷속에서 뻗어오던 검은 손들까지 죄다 녹아버렸다.

하지만 바다 위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조용했다.

지금 움직이는 건 타락이자 어둠이었고, 신관들이 따로 반응할 무언가도 없었다.

[흄! 빨리 데려가!]

러쉘의 재촉에 흄이 더 빨리 헤엄쳐서는 루시온을 데려갔다.

빌어먹을.

죽일 거야!

죽여버릴 거야…!

검은 손들이 발악하며 외쳤지만, 러쉘은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덤벼보든지.]

러쉘은 알고 있었다.

타락에게도 자아가 있고, 저들은 어둠을 두려워한다는 걸.

그런데 뭐 어쩌라는 건가.

덤벼오면 죽일 뿐.

바로 이 바닷속에서.

* * *

"...!"

그의 몸이 움찔거렸다.

"거기구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속과 문밖의 시간은 다르게 흘렀다.

어둠의 신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자신에게 걸린 제약 때문에 추적이 어려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신수가 힘을 썼다.

바로 그곳에서.

자신의 힘이 가장 가득한 곳에서.

"바다다!"

자신이 제약 없이 쉽게 갈 수 있는 유일한 그곳.

"아, 세상에서는 여길 '죽음의 바다'라고 부르지?"

그가 히죽 웃으며 어둠을 바라보았다.

"너희도 거긴 어쩔 수 없었겠지."

그가 부드럽게 목소리를 냈다.

"혹여나 나를 그곳에 부를까, 그릇을 지키고자, 신수를 지키고자 멀리 떨어졌겠지."

푸흡.

그는 어둠을 비웃었다.

"그런데 너희가 생각한 것만큼 그렇게 희망찬 상황이 아니네?"

그를 둘러싼 어둠들이 불안한 기세를 띄자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거긴 내 영역이니까."

빠드득.

그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자, 이제 두 모가지를 비틀어야지. 너희가 보는 앞에서."

어둠이 우스스 일어났다.

그들의 분노가 공간을 일그러트릴 정도로 거대했지만, 그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가 손을 휘둘렀다.

어둠이 내는 분노는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화내지 마. 화를 내봤자 뭐해? 너희가 나를 절대로 이길 수 없을 텐데."

그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 * *

흠칫.

루시온은 놀라며 눈을 떴다.

"으...."

머리가 지끈거리고, 온몸이 아팠다.

열감에 휩싸였는지 몸이 뜨겁다는 게 느껴졌다.

바다에서 건져진 뒤 검은 손들이 물러가고, 배 위에 옮겨 탄 후에 기억이 없었다.

―루시온!

오른손에 라타가 꼬물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제 안 아파? 이제 아픈 거 다 날아갔어?

[괜찮은가…? 내가 없는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내가 있어야 했다. 벗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베델이 루시온의 손을 꼭 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있었어야 했다.

적어도 빙의를 했다면 달랐을 텐데.

루시온은 베델을 보며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베델이 있었으면 나았을 테지만, 어쨌든 죽지 않았으니 됐다.

그걸로 됐다.

"쉬쉬. 루시온 진정해."

샤엘라가 루시온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다 끝났어. 이제 널 노리는 것들은 없어."

"…누님."

"그래, 루시온."

"몸은 괜찮으십니까?"

따악!

샤엘라가 루시온의 이마를 세게 때렸다.

"아으… 저 부상자입니다!"

루시온은 억울해하며 소리쳤다.

―홉! 맞아! 루시온 지금 아프다고!

라타가 샤엘라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푸핫!]

러쉘이 웃음을 터트렸다.

속이 다 시원했다.

[러쉘. 루시온은 부상자다.]

베델은 당황했다.

조금 전까지 걱정하던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러쉘의 웃음이 경박했다.

"너 내가 그 버릇 버리라고 누누이 말했지? 너랑 나랑 누가 더 부상자야?"

샤엘라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183화. 샤엘라(2)

"…접니다."

루시온이 본능적으로 움츠러들며 대답했다.

"그런데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해? 내가 너를 걱정해야 해. 알겠어? 네가 날 걱정하는 게 아니라."

루시온이 눈을 동그랗게 뜬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샤엘라는 그제야 표정을 풀고 으르렁거리는 라타의 코를 살짝 건드렸다.

"그래. 엄청 걱정 많이 했어. 오래간만에 봤는데 피의 축제를 연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볼 줄은 몰랐네."

샤엘라의 눈동자가 점점 차갑게 식었다.

"그래서… 누군데?"

"예?"

"네 배에 구멍을 뚫는 놈이 누군데?"

'형님이요.'

루시온은 하마터면 말을 내뱉을 뻔했지만, 다급히 삼켰다.

"모릅니다."

"몰라? 네 배때기에 구멍을 냈는데 몰라?"

"모릅니다."

"그래. 네가 모른다고 하니까 진짜 모르는 거겠지."

샤엘라는 아쉽지만, 바로 물러섰다.

"헤인트는 어떻게 해줄까?"

"헤인트 형님은 왜...."

"너한테 빛을 쐬게 했으니 그 이유는 충분하잖아. 모가지를 따줘?"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네가 말만 했으면 딸 수 있었는데. 아쉽네."

샤엘라는 입맛을 다셨다.

진심이었다.

그녀는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루시온은 마른침을 삼켰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알았으니까, 꺼져!"

샤엘라의 언성이 올라갔다.

"누구… 입니까?"

[황실 기사야. 제8 기사단이 아니라.]

러쉘이 알려줬다.

'황실 기사가 왜…?'

루시온은 문득 불안함을 느꼈다.

자신이 기절한 사이에 샤엘라가 무슨 짓이라도 저지른 걸까.

"너랑 축제 구경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고 싶었지만, 네가 이렇게 다쳤으니 안 되겠어. 네가 간다고 해도 내가 말릴 거야. 무조건."

"누님."

"왜?"

"혹시… 누굴 죽였습니까?"

"당연히 죽였지."

"황실 기사는 아니겠죠?"

"걔들은 쥐어팼지."

그 말에 루시온은 샤엘라를 걱정스레 보았다.

"그래서 지금 황실 기사들이 온 겁니까?"

"아니야. 다른 일 때문이야. 그리고 쥐어팬 건 당연했어. 열 받잖아. 널 지키지도 못했는데 그 꼴로 기사라고? 네 집사 흄이 더 기사다웠지. 잘 골랐어. 엄청 마음에 들어."

"예. 흄은 제 집사입니다."

루시온이 미소를 그렸다.

덩달아 샤엘라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아. 흄은 괜찮습니까?"

루시온은 주변을 살피다 흄이 없다는 걸 알고 그의 상태를 물었다.

"튼튼하던데? 어쨌든, 내가 죽인 건 바닷속에 숨어 있던 마법사들이었어. 아, 다 죽인 건 아니야. 몇 놈은 헤인트한테 줬고. 몇 놈은 내가 슬쩍 빼돌렸어."

"빼… 돌렸다고요?"

"당연하지. 어느 놈인지 알아야 내가 박살을 낼 거 아니야?"

샤엘라가 꼰 다리를 까닥였다.

"듣자 하니 얼마 전에 자칭 마법사 집단이라고 하던 루미노스가 박살이 났다며? 그런데 마법사가 날뛰었으니 이제 표적이 마탑으로 향하겠지. 마침 나도 마탑 관리자 한 놈의 멱살을 쥐고 나왔고. 귀족 놈들의 입꼬리가 올라간 게 눈에 훤하네."

"괜찮...."

따악!

매서운 샤엘라의 손길에 루시온은 이마가 또 얼얼했다.

라타가 다급히 루시온의 얼굴 근처로 달려갔다.

―안 돼! 루시온 때리지 마!

"루시온. 이 누님이 누구인지 몰라?"

샤엘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크로니아에 영향이 없도록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아버지는… 음, 잔소리는 듣겠네."

그녀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다른 손으로 라타를 건드렸다.

왕.

샤엘라의 손가락을 깨물던 라타는 순간 놀라며 눈치를 살폈다.

―홉! 어떡해! 라타가 물어버렸어! 아프면 어떡해.

"아버지께서 연락이 없으셨습니까?"

루시온이 묻자 샤엘라는 당황해하는 검은 여우를 보며 피식 웃었다.

"왜 없으셨겠어? 우리 귀여운 막내가 다 죽어갔는데. 헤인트와 연락하는 걸 슬쩍 들었는데 화가 나셨더라. 엄청. 아마 폐하께 연락해서 막 소리를 지르셨을 거야. 변경을… 비우기가 어려우실 테니 얼마나 애가 타실까."

노비오가 루시온을 아낀다는 사실을 크로니아에서 모르는 이가 있겠는가.

그간 노비오가 티를 내지 않으려 꾹 참았을 뿐이었다.

"아버지와 연락하고 싶습니다."

루시온이 손을 내밀자 샤엘라는 그의 손바닥 위로 연락용 아이템을 내려놓았다.

"자. 난 잠깐 나가 있을게."

"연락용… 아이템이 있으셨습니까? 왜 지금까지 연락하지 않으셨습니까?"

"편지가 더 멋지잖아."

샤엘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녀를 보는 루시온의 눈에는 황당함이 가득했다.

루시온은 문이 닫히고 나서야 베델과 러쉘을 보았다.

[방금 샤엘라가 말한 대로야. 마법사들의 목이 뎅강 잘렸고, 살아남은 마법사 일부를 심문하고 있고 축제는, 음, 일단 수습은 했어.]

러쉘이 입술을 움직였다.

―밤이 두 번 찾아왔어! 라타는 엉엉 울려고 했는데 흄이 그러면 안 된다고 해서 꾹 참았어!

"착하네, 라타."

루시온이 라타를 쓰다듬었다.

―응! 라타는 착해!

라타는 배시시 웃으며 루시온의 손길에 꼬리를 살랑거렸다.

"놈은 어디로 갔습니까?"

[축제가 열리는 장소 근처 여관에 가둬놨어. 계획은 실패했고, 추첨한 이들 모두 용의선상에 있으니 빠져나가려고 해도 소용없지.]

"좋습니다."

루시온은 입꼬리를 올렸다.

트웰로가 붙잡혔다.

이대로 쉽게 빠져나가지 못할 테니, 목을 비틀기에는 제격이었다.

하지만 우선 처리해야 할 일이었다.

죽지 않는 병사.

그들을 생산하는 곳부터 먼저 박살 내야 트웰로를 제대로 붙잡을 수 있었다.

목을 비트는 건 자신의 역할이지만, 그놈을 붙잡고 줄줄이 달린 뿌리까지 뽑아내는 건 제국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자신은 트웰로에게 정보를 들으면 그뿐이니까.

[좋다니? 루시온…? 너 부상자야.]

러쉘이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배에 감긴 붕대의 느낌이 들지 않는 건지, 아니면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열이 오른 게 느껴지지 않는 건지.

러쉘의 표정이 금세 일그러졌다.

"압니다."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상자이고 뭐고 몸이 움직일 수 있을 때 움직여야 했다.

지금은 자신이 놈들을 사냥해야 할 차례였다.

진통제 먹고, 베델과 빙의한다면 움직이는데 제약이 덜할 테지.

"라타. 32, 33, 34번한테 연락해서 흑마법사가 시체를 들고 어디로 모였는지 물어봐 줘."

라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루시온이 말하는 대로 따르고 싶지만, 마음이 좋지 않았다.

―루시온. 라타는 루시온이 가만히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해.

"라타. 내 몸이 어떤지 알아. 오늘, 아니 내일까지는 움직이면 안 되겠지."

루시온은 자신을 빤히 보는 라타의 눈동자가 오늘따라 구슬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내일은 무슨 일주일은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하겠구만.]

러쉘이 쏘아댔다.

[됐고. 이제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잠이나 자. 트웰로는 당분간 나올 수 없을 테니까.]

[아니.]

베델이 목소리를 냈다.

[놈이라면 분명 여기까지 생각했을 거다. 벌써 이틀이라는 시간이 흘렀지. 이제 슬슬 빠져나갈 준비가 되어 있을 거야.]

[너답지 않게 왜 이래?]

러쉘은 이어진 베델의 말에 얼굴을 다시금 구겼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내가 이 중에서 가장 놈을 알고 있으니까. 나도 루시온 공을 말리고 싶다. 정말 소리까지 지르면서 말리고 싶지만, 놈을 놓친다면 공이 더 위험해진다고 판단했다.]

루시온이 이 꼴이 되게 한 놈은 다름 아닌 트웰로였다.

베델은 큰 결심을 한 얼굴로 루시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겠다. 공을 지키겠다고 한 그 맹세에 부끄럽지 않게 견디고, 버틸게. 그러니 나를 믿어줘.]

"아니. 넌 도망치지 않았어, 베델. 그건 도망이 아니야. 나를 위해준 행동이었지."

루시온이 손을 들어 베델의 손을 잡았다.

베델은 루시온의 따뜻한 온기에 먹먹하다는 기분이 무엇인지 새삼 느꼈다.

―그럼 라타도 유령한테 물어볼게.

라타의 목소리에 힘이 살짝 빠져 있었다.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티가 났다.

그게 우스워 루시온은 피식거렸다.

[…하. 미치겠네.]

러쉘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머리카락을 세게 쥐었다.

[조직원들 죄다 불러. 불러서 넌 입만 떠들어.]

"그러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마 다들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루시온은 우선 노비오와 연락하기 위해 연락용 아이템을 들다 손등에 그려진 시곗바늘이 움직인 걸 보았다.

부정이 늘어났다.

타락과 맞닿았기 때문일까.

뭐가 됐든 쓰라렸다.

그렇게 부정을 피했지만, 결국 늘어났다.

"…아버지."

루시온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루, 루시온!>

노비오의 놀란 소리가 들려왔다.

내내 연락용 아이템만 붙잡고 있었는지 너무 빨리 받는다 싶었다.

<루시온. 다친 곳은 괜찮더냐? 어디 달리 아픈 곳은 없고? 언제 깨어났더냐? 밥은 먹었고? 아니, 아니. 지금 이럴 게 아니라....>

"아버지. 전 괜찮습니다."

루시온은 놀란 노비오를 달랬다.

<많이… 아프더냐.>

하지만 노비오는 또 걱정을 깊게 담아 물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루시온은 대답한 뒤에 괜히 샤엘라가 때린 이마가 다시금 쑤셔와 말을 바꿨다.

"…음. 조금, 아주 조금 아픕니다."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구나.>

노비오는 그제야 목소리가 밝아졌다.

<약은 먹었고?>

"먹었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아픕니다."

<당장 만나러 가고 싶구나.>

노비오의 애타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루시온 네가… 너무도 보고 싶구나.>

특별한 말도 아님에도 루시온은 괜히 가슴이 일렁거렸다.

"…저도요."

그 몇 마디가 뭐라고.

괜스레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도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

하지만 내뱉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을 간질이면서도 포근한 느낌이 가슴을 가득 채웠으니.

* * *

똑똑.

루시온은 주린 배를 수프로 채워 넣으며 오랜만에 샤엘라와 식사를 함께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루시온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탑에서 보자고. 보자… 한 2주 뒤에 개방돼. 하지만 너는 내 동생이니까, 그 전에 들어올 수 있어."

샤엘라는 카드처럼 생긴 물건을 주머니에 꺼내 보이며 씨익 웃었다.

"그게 가능합니까?"

루시온은 카드를 받으며 물었다.

"그렇게 할 거야. 아직 사람이 많은 곳은 무섭잖아?"

"...."

샤엘라의 말에 루시온은 갑자기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렇게 직접 말을 꺼내는 건 아마 러쉘과 샤엘라뿐일지도 몰랐다.

"괜찮지 않은데 억지로 괜찮다고 말할 필요 없어. 네가 괜찮지 않은 건 빤히 다 보이거든."

샤엘라는 루시온에게 물이 든 컵을 건넸다.

"티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티가 잘 나지 않긴 해. 널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그 반대는 티가 잘 난다는 말이겠지, 루시온?]

러쉘은 콕 집어 말했다.

"루시온. 죽음의 바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널 노리는 놈들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마. 분노하고, 터트려."

샤엘라의 말에는 죽음의 바다 사건과 자신의 과거가 뒤섞인 듯했다.

하지만 루시온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저 물었다.

"제가 복수를 하길 원하십니까?"

"아니. 다 네 잘못이라고 생각해서 떠안지 말라고. 네가 속으로 곪는 것보다 터트리는 게 훨씬 나으니까."

샤엘라의 손끝이 루시온의 가슴을 가리켰다.

죽음의 바다 사건에서 왜 사망자가 없겠는가.

"…혹시 아직도 꿈을 꿔?"

샤엘라는 물을 마시는 루시온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안 꿉니다."

"약은… 먹고 있어?"

"끊었습니다."

"왜? 그렇게 막 끊어도 돼?"

"제멋대로 끊은 거 아닙니다. 아시잖습니까. 다른 건 넘어가셔도 아버지께서 이것만큼은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잖습니까."

"지금 가슴이 막 뛰거나, 손끝이 떨리거나, 숨이 잘 쉬어지지 않거나...."

"누님."

루시온은 아직도 과거의 루시온을 떼어내지 못하는 샤엘라에게 알려주었다.

"전 괜찮습니다."

이제 괜찮다는 걸.

샤엘라는 루시온을 빤히 보았다.

"그래. 이겨냈니?"

"거의 이겼습니다."

"잘했어. 잘했어, 루시온."

샤엘라의 목소리에 기쁨이 가득했다.

그녀는 포크를 들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솔직히 네 소식을 들었을 때 놀랐어. 알다시피 마탑에 들어가면 주변 소식을 듣기 힘들잖아? 네 이야기가 마탑에도 들리면 루시온 네가 정말로 그랬는지 반쯤 의심하고 있었는데. 사실이었어. 정말 사실이었어!"

"누님."

루시온도 숟가락을 잠깐 내려놓았다.

"그래. 말해봐."

"이제 집에 돌아오셔도 됩니다."

루시온은 샤엘라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그녀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바로 자신 때문이었으니.

184화. 샤엘라(3)

"눈치… 챘어?"

샤엘라는 그대로 표정이 굳어졌다.

"당연히 눈치채지 않겠습니까. 누님께서 집에 돌아오지 않으신 게 벌써 몇 년인데요."

샤엘라가 원한다면 마탑에 있든지 간에 크로니아로 돌아올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십여 년 전, 자신이 납치당했을 그때, 그녀는 크로니아의 저택에 있었다.

"내가."

샤엘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떻게 거길 가?"

자책이 섞인 목소리에 루시온은 숨을 짧게 내쉬며 말했다.

"왜 못 오십니까? 크로니아는 누님의 집입니다."

"내가 그때 같이 갔으면."

샤엘라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마법을 연구하는 게 뭐라고. 병신같이, 어차피 실패할 마법이었는데. 그 마법이 뭐라고."

"제가 괜찮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루시온은 목소리에 힘을 줬다.

"나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어. 그렇게 예뻤던 네가… 가죽만 덮은 핏덩어리처럼 되어버렸는데. 바짝 마른 나뭇잎처럼 당장 바스러질 것만 같았는데...."

샤엘라의 고개가 천천히 떨구어졌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집으로 가? 내가 무슨 낯짝으로?"

자신이 루시온의 상황을 알아버렸을 때는 이미 다 끝난 뒤였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 죄책감이 온몸을 덮어버렸을 때, 병신처럼 서 있는 자신만 보일 뿐이었다.

"...!"

루시온은 샤엘라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에 깜짝 놀랐다.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 없던 그녀였다.

"네가 태어났을 때 널 지키겠다고 어머니하고 약속했어. 루시온. 내 마법은.... 내 마법은 널 지키려고 배운 거였는데."

몰랐던 사실에 루시온은 몸이 굳었다.

'날 지키려고 배웠던 거였어?'

"…나 진짜 병신같네."

샤엘라는 코를 훌쩍였다.

그녀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루시온이 몸을 억지로 움직여 그녀를 붙잡았다.

"루시온! 너 미쳤어! 지금 그 몸으로 뭘 움직이겠다는...."

"집으로 돌아오셔도 됩니다. 누님께서 이러는 게 더 불편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가려고 했어. 가려고 했으니까, 배에 힘주지 마."

"정말입니까?"

"그래.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한 적 있어?"

"있죠. 제 마카롱 드시고 안 드셨다고 거짓말하셨잖습니까."

"사줄게! 네가 원하는 만큼 사준다고!"

"예. 좋습니다."

루시온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순간 휘청거려 샤엘라가 붙잡아 올려주었다.

"마카롱 좋아하는 건 어릴 때랑 달라진 게 없네."

"누님께서 처음으로 주셨잖습니까."

"아.... 네가 이빨 몇 개 빠져서 쿠키를 못 먹는다고 엉엉 울길래 하나 줬는데 그때를 기억해?"

"기억합니다. 기억하니 지금도 먹고 있잖습니까."

―홉! 루시온 이빨이 없었어?

옆에서 고기를 맛있게 먹고 있던 라타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러쉘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아냈다.

―'아' 해봐, 루시온. 라타가 볼래.

라타가 다급히 침대에 오르려고 하자 샤엘라가 라타의 뒷덜미를 잡았다.

"떽! 밥 먹을 때 올라오면 못 써."

루시온의 떽과 샤엘라의 떽은 달랐다.

가볍게 꺼낸 말이었음에도 샤엘라의 말은 너무 무서웠다.

―루, 루시오온!

라타가 다리를 아등바등하며 루시온을 간절히 바라보았다.

"제 여우는 똑똑하니까 이만 놓아주는 게 어떠십니까?"

"밥 먹을 때 침대에 올라오는 모습을 보면 똑똑하다는 말이 나오진 않은데?"

―아니야! 라타는 똑똑해! 이것 봐. 라타 이제 밥 먹으러 갈 거야.

발이 땅에 닿자 라타는 샤엘라를 보며 한쪽 발로 땅을 툭툭 두드렸다.

"오! 방금 한 말은 취소. 진짜 똑똑한데?"

제 밥그릇으로 알아서 찾아가는 검은 여우의 모습에 샤엘라는 방긋 웃었다.

―맞지? 라타는 똑똑해!

멈췄던 라타의 꼬리가 흔들렸다.

샤엘라는 고개를 돌려 루시온을 보았다.

"루시온. 이제 갈게."

"벌써 가십니까?"

"일이 꼬여서 그렇게 됐어. 붙잡은 마법사 놈들의 입을 어떻게든 열 테니까, 마탑에서 보자."

샤엘라는 손을 흔들었다.

"몸조심하세요."

"내가 할 말이야, 루시온. 아버지께 안부 전해 드리고. …아, 오라버니한테도."

샤엘라는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

참 그녀답다 싶었다.

밖에서 들어오지도 못하고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흄과 헤인트가 그제야 안으로 들어왔다.

"…누님에게 맞으셨습니까?"

헤인트의 입가 주변이 찢어져 있자 루시온은 자신도 모르게 물어보았다.

"맞았지. 너한테 빛을 쐬게 했는데 샤엘라가 날 가만뒀겠어?"

헤인트는 미안한 얼굴로 대답했다.

"사정이 어쨌든 미안해, 루시온."

그는 곧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아니지. 덕분에 죽을 뻔했다고 말해야지.]

러쉘은 그때를 떠올리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아무리 다급했어도 그렇지.

루시온이 빛의 내성이 없었다면 농담 아니라 죽기 직전까지 갔을지도 몰랐다.

지금 루시온이 열이 나는 이유도 거의 빛 때문이었다.

헤인트는 이미 아는 사실을 다시 보고처럼 루시온에게 꺼냈다.

추첨된 사람들 전부와 트웰로가 붙잡혔고, 자신들을 습격했던 마법사들은 죽고, 일부는 심문하고 있는 사실을.

"루시온."

헤인트는 여전히 미안한 표정으로 루시온을 불렀지만, 그에게서는 어떤 원망도 찾아볼 수 없었다.

착한 녀석 같으니라고.

헤인트는 더 마음이 옥죄어오는 기분을 느꼈다.

"예, 형님. 말씀하세요."

"신수께서 네가 깨어나길 기다리셨어. 혹시 잠깐 만날 수 있겠어?"

"괜찮습니다. 들어오시라고 전해주세요."

"알았어. 잠깐만."

헤인트는 트로에를 부르기 위해서 다시 밖으로 나갔다.

흄이 내미는 약을 오만상 쓰며 먹고 난 후 트로에를 기다렸다.

잠시 후, 빛과 함께 트로에가 모습을 드러냈다.

―트로에 아저씨이!

라타가 반가움에 소리쳤다.

트로에는 루시온을 보자마자 안타까움에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습니까?"

바로 들려오는 루시온의 걱정에 트로에는 또 말문이 막혔다.

지금 누가 다쳤고, 괜찮은지는 명확하지 않은가.

―그대를 보니 내 마음이 아프구나.

트로에는 겨우 말을 꺼냈다.

"저는 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트로에는 아니잖습니까."

신수는 일정 피해가 쌓이면 사라진다고 했다.

영원히.

―나는 또다시 태어날 수 있단다.

"그건 트로에가 아니잖습니까."

―그렇지. 트로에는 아니겠지. 하지만 기억을 이어받을 수 있으니 나는....

"기억을 이어받는다고 해서 트로에가 되는 겁니까?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다치지 마십시오."

―그대는 참 다정하구나.

오랜만에 듣는 말에 트로에는 루시온에게 다가가 앞발로 그를 쓰다듬었다.

―그렇지? 루시온은 다정해! 라타가 알아!

라타도 얼른 앞발을 내밀어 루시온의 팔을 쓰다듬었다.

"맞습니다. 도련님께서는 다정하신 분이십니다."

흄까지 목소리를 내자 루시온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다정은 무슨....'

자신이 다정하면 세상에 다정은 다 죽었을 테지.

그저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이었다.

"절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뭡니까?"

루시온은 본론을 꺼냈다.

지금 푹 자야 밤에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그때는 경황이 없어 말을 못 했지만, 죽음의 바다에서 뻗어오던 검은 손 말이다.

트로에가 앞발을 내렸다.

―그 속에 '그놈'의 향기가 뒤섞여 있더구나.

모두가 정적에 잠겼다.

철퇴로 머리를 내려치는 듯한 충격에 루시온은 입술만 움직일 뿐 목소리를 쉽게 내지 않았다.

[…미친.]

러쉘이 제일 먼저 입술을 열었다.

[죽음의 바다가 일반적인 곳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놈의 힘이 작용하던 곳이었어?]

"…방울이 울리지 않았습니다."

루시온은 그제야 목소리를 냈다.

방울이 울리지 않았다.

자신으로서는 누군지도 모를 '그놈'이 코앞까지 왔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 지금은 아니지. 하지만 어쩌면 그대의 위치를 들켰을 수도 있으니 힘들겠지만, 서둘러 떠나는 게 좋을 듯하구나. 이 말을 전해주러 기다렸단다.

트로에의 말이 끝나자마자 루시온은 차분히 숨을 골랐다.

벌써 다음을 준비하려는 그의 모습에 트로에는 측은함을 숨길 수 없었다.

―내 축복을 더 불어넣어 주고 싶지만, 지금 그대가 내 축복을 견딜 수 없을 만큼 약해져서 곤란하겠구나.

'…제기랄.'

루시온은 볼 안쪽을 세게 씹었다.

오늘 밤 자신이 움직일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하지만 언제 올지도 모를 '그놈'을 피하는 것보다 당장 자신의 목숨을 또 채가려 준비하는 트로웰을 대비하는 게 먼저였다.

―루시온. 뭐가 됐든 그대가 먼저이니 무사 하렴.

"벌써… 떠나십니까?"

루시온은 트로에의 말에 의문을 느끼며 물었다.

축제는 오늘로 마지막이지만 죽음의 바다 일로 더 머물러야 하는 게 맞았다.

―소비한 빛을 채우려면 벨로스나 다른 신관들의 빛으로는 턱없이 모자라겠더구나. 나도 이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지만, 어서 놈을 대비해야 하니 대신전으로 갈 수밖에 없단다.

빛과 어둠, 그리고 마나 중 가장 빠른 회복력은 단연 어둠이었고, 그 반대가 빛이었다.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겠네. 그럼 기다리지 말고 우리한테라도 슬쩍 이야기하고 가지 그랬어?]

러쉘의 목소리가 살짝 삐딱했다.

이유가 어쨌든, 트로에가 사실을 말했다면 이틀간 그냥 놀지 않았을 텐데.

[러쉘 그대는 모르겠지만, 신수께서는 그냥 가만히 있지 않으셨어. 죽음의 바다 경계에 빛을 뿌리셨거든.]

루시온에게 얽매여 있는 러쉘과 달리 베델은 죽음의 바다까지 보고 왔다.

그곳에서 바다로 뿌려지는, 찬란한 빛을 바라보며 신수의 힘을 느꼈다.

[…아. 미안.]

러쉘은 금세 민망한 표정으로 트로에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유가 무엇이든 이런 상황에서 자리를 비우는 게 마음에 걸리는 건 사실이구나.

트로에는 루시온에게 얼굴을 비볐다.

라타의 털 못지않게 보드랍고 따뜻했다.

―루시온 그대에게 행복만이 깃들길.

트로에는 루시온에게 다시 축복의 말을 남기며 사라졌다.

루시온의 시선이 러쉘에게 향했다.

[…시간이 없으니 움직이겠다고?]

"맞습니다."

루시온은 씩 웃었다.

"오늘 밤 움직이겠습니다."

[다시 생각해 봐.]

"다시 생각해도 오늘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생각하라니까.]

"예. 오늘입니다."

러쉘은 물러섬이 없는 루시온의 말에 제 이마를 '탁'하고 친 후에 소리쳤다.

[…이. 이 고집불통아!]

* * *

'배에 붕대도 튼튼하게 맸고, 약도 먹었고.'

루시온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베델하고도 빙의를 했다.

확실히 무겁던 몸이 가벼워져 빙의의 효과를 다시금 느끼고 있었다.

[…루시온 공.]

베델이 꾹 참다 참다 못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왜?"

[어떻게, 어떻게 이런 몸으로 움직일 생각을 했는가?]

[…허. 루시온이 움직여야 한다고 동의할 때는 언제고?]

옆에서 러쉘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동의했지만, 방금 후회했고, 후회하고 있어.]

베델의 말처럼 그녀의 목소리에 깊은 후회가 묻어 있었다.

"이미 늦었어."

루시온은 키득거리며 조직원들을 느긋하게 기다렸다.

언덕 밑에 숨어 있다시피 한 작은 오두막이 유령을 이용하고, 베델이 확인해서 찾아낸, 죽지 않는 병사를 만들어내는 적의 아지트로 향하는 입구였다.

저 입구는 언덕 근처에 있는 한 저택과 이어졌고, 그 저택의 주인은 다름 아닌 '테펠로우 셀가' 후작이었다.

테펠로우 셀가는 경매장에서 자신과 팔찌를 경쟁했고, 트웰로의 수족인 놈이었다.

"…도련님."

흄이 언덕 아래를 내려보며 입을 열었다.

"왜?"

"기습 때 절대로 안에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기습은 간단했다.

두 조로 나뉘어 한 조가 저 입구로 침투해 내부를 치면 다른 조는 기다렸다 빠져나오는 이들을 처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베델의 말을 따르자면 저택 내부에 일반인은 거의 없고, 대부분 흑마법사라고 했다.

덕분에 습격이 한결 수월해졌다.

흑마법사가 빛을 맞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효과는 확실했다.

자신이 장담할 수 있었다.

"빛을 사용할 건데 내가 거기에 왜 들어가? 여기 있을 거라니까."

루시온이 발로 땅을 굴리자 흄의 눈이 커졌다.

"크게 움직이지 마십시오."

"발만 굴렸어."

"그것도 하지 마십시오."

―오오오! 맞아! 루시온은 발도 굴리지 마! 라타는 루시온이 여기 풀밭에서 가만히 누워 있으면 좋겠어.

열심히 풀밭을 뛰어다니던 라타가 쪼르르 달려와 흄의 말을 거들었다.

허.

루시온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럼 여기에 왜 왔겠는가.

"오늘은 여기 가만히 계시다가 마지막에 들어오셔서 입만 움직이십시오."

"너 오늘따라 왜 그래?"

루시온은 당장 가면을 벗어 흄에게 자신이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알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제가 물렀다는 걸 알았습니다."

흄이 눈에 힘을 주었다.

"물렀다니…?"

"도련님께서는 뭐가 위험한지 모르는 분이십니다."

"…뭐?"

"주인의 위험에 대응해야 하는 건 집사로서 해야 할 일입니다. 저는 비로소 깨닫고 그 행동을 하는 것뿐입니다."

너무도 단호한 흄의 태도에 루시온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마치 모범생이었던 흄이 난데없이 가출 선언을 하는 것 같지 않은가.

185화. 들켰다

짝짝짝.

러쉘이 손뼉을 마주쳤다.

[그렇지. 바로 그거지, 흄. 집사로서 주인의 생명을 지키는 건 무조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이잖아?]

"맞습니다. 도련님께서는 제 몸을 돌처럼 여기십니다. 저는 그게 화가 납니다."

흄은 기어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누가? 내가?"

루시온은 놀라며 자신을 가리켰다.

"예. 도련님이요."

"나만큼 내 몸을 아끼는 사람이 어디 있어?"

루시온은 당연한 소리를 꺼내야 한다는 사실이 퍽 우스웠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농담이지?]

러쉘이 넌지시 말을 던지자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담입니다."

[놀랍겠지만, 루시온 공은 지금 진짜, 진짜 진지한 상태다.]

베델이 하다못해 답답해하며 말을 꺼냈다.

그 말에 러쉘은 눈을 휘둥그레 떴고, 흄은 깊은 고민에 빠진 듯 고개를 살짝 숙이며 꼭 잡은 두 손을 입가에 가져댔다.

어디부터 잘못된 건지.

"...?"

러쉘과 흄의 반응에 루시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시온. 아낀다는 단어를 모르면 라타가 가르쳐줄게! 라타는 똑똑해서 알고 있어! 있지. 아낀다는 건 말이야. 품 안에 매일매일 안고 있을 정도로....

'뭐 하는 거지?'

루시온은 라타의 설교를 듣다 말고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자신이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가.

푸핫.

하지만 즐거우니 됐다.

루시온은 웃음을 터트리다 베델의 말에 단번에 웃음을 멈췄다.

[크라언이 오고 있다.]

언덕을 오르는 소리가 들리고 크라언은 루시온을 찾았다.

"여기야."

루시온이 손을 흔들자 크라언은 다급히 달려갔다.

"지시하신 대로 두 조로 나뉘어 대기하고 있습니다. 빛이 깃든 물건은 때마침 미엘라를 위해 한가득 준비된 상태라 바로 보급할 수 있었습니다."

크라언은 보고부터 꺼냈다.

그 후에 진짜 본론에 들어갔다.

"이틀째 연락이 없으셨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예."

대답은 흄이 했다.

"아니."

루시온이 이에 질세라 고개를 가로저었다.

둘의 말이 엇갈리자 크라언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지금 하멜 님께서는 상처를 입은 상태입니다."

흄은 정확하게 루시온의 상태를 알렸다.

크라언은 깜짝 놀라며 당장 목소리를 냈다.

"어, 어딜 다치셨습니까? 많이 다치셨습니까?"

"이번 임무에 원활한 행동을 하지 못할 만큼의 부상입니다. 부디 크라언 님께서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흄이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하게 말하자 러쉘의 박수가 이어졌다.

'…허어.'

멋대로 입을 놀리는 흄의 행동에 루시온은 다시금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루시온은 언성을 살짝 높였다.

"제 역할을 다했을 뿐입니다. 이게 제가 판단했고, 내린 결론입니다. 저는 하멜 님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흄의 의지에 루시온은 잠깐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흄이 생각하고 판단했다.

그 행동은 자신을 위해서였고, 사실 나쁜 판단도 아니었다.

다른 조직원들은 몰라도 크라언만큼은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어야 했다.

'이번에는 내가 물러서야지.'

루시온의 결정에 베델은 무척 기뻐했다.

'좋은 결정이다, 루시온 공.'

이게 그렇게 기뻐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루시온은 떨떠름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렌탈 말이 맞아. 크게 날뛸 수 없는 부상이야. 하지만 날뛰지만 않으면 되고, 오늘 내가 움직일 일도 별로 없을 테니까 상관없을 거야."

"그래서… 연락이 없으셨습니까?"

크라언이 눈썹 양쪽의 꼬리가 아래로 향했다.

"그래. 조금 있다가 들어갈 테니까, 상황이 정리되면 말해줘."

"그렇다면 하멜 님께서 오지 않으셔도...."

"아니. 정보를 찾으려면 내가 필요할 거야. 꼭 살아 있는 자만이 입은 아니니까."

저 밑에 시체들이 많았다.

유령들도 많이 생길 테고.

무엇보다 죽지 않는 병사가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하는 건드리지 마. 지상까지 정리해. 그 후에 합류할게."

저 저택에 있는 흑마법사들은 만만찮은 놈들이었는지 베델은 자세히 안을 탐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타락한 유령이든, 이미 만들어진 죽지 않는 병사가 타락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러쉘도 그 말에 동의했고.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크라언이 의문을 드러내며 물었다.

"내가 대답해도 모를걸? 어쨌든, 다들 빛이 깃든 물건들 더 꼼꼼히 챙기라고 해. 몸에 둘러도 좋고, 허리춤에 채워도 좋고."

"알겠습니다. 조금 더 살피겠습니다."

"크라언."

"예."

"…미안하다."

저택 습격 후에는 정신이 없을 테니 루시온은 지금 이렇게라도 사과하고 싶었다.

자신이 크라언과 관련된 정보를 숨긴 건 사실이었으니까.

"예?"

하지만 이유 모를 사과에 크라언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어쨌든, 습격 후에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연락 줘."

"알겠습니다. 습격 신호를 기다리겠습니다."

크라언은 여전히 어안이벙벙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크라언이 물러가고 나서야 루시온은 러쉘을 바라보았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아니. 네가 침대에 딱 붙어야 있어야 만족이 되겠는데.]

"그럼 너는?"

"전 일단 만족합니다."

흄은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그려나갔다.

"베델 너는?"

[…나는 침묵하겠다. 지금도 공의 발언에 동의한 사실을 후회하고 있으니까.]

루시온은 그제야 자리에 앉다 라타가 바라는 대로 풀밭에 누웠다.

―이히히.

라타의 밝은 웃음이 머리맡에서 들려왔다.

잠시 후, 크라언에게 준비가 됐다는 연락을 받았고, 루시온은 잠깐 베델과 빙의를 풀어 그녀에게 유령들을 없애주길 부탁했다.

풀밭에 누워 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와 빙의를 풀자마자 몸이 무거워지면서 열이 순식간에 확 올라왔다.

[됐어. 루시온. 크라언한테 알려.]

러쉘이 저택 쪽을 바라보다 굳게 닫혔던 입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루시온이 바로 지시를 내렸다.

"움직여, 크라언."

<예.>

크라언은 짧게 대답하고 연락을 끊었다.

[…지하까지는 손을 대지 못했다.]

돌아온 베델이 아쉬움을 토로했다.

"괜찮아. 지하에 타락한 놈들이 있을 것 같다며."

[그것도 한몫했지만, 흑마법사들이 날 알아보는 눈치라 더 가까이 가질 못했어.]

[유령이 사라졌을 테니 네가 보이지 않아도 뭔가가 나타났다는 걸 알아볼 수밖에 없지.]

러쉘은 당연하다며 베델의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눈치채봤자, 빛으로 공격하는 데 뭘 어쩌겠어?]

키득거리며 러쉘은 다시 입을 놀렸다.

"그래도 슬슬 준비해야겠습니다."

루시온은 언덕 너머에서 반짝거리는 빛들을 보며 베델과 다시 빙의했다.

빛으로 무장했다 한들, 흑마법사가 쉽게 당해주지 않을 테니까.

"천천히 가십시오."

흄이 당장이라도 루시온을 붙잡을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루시온은 코웃음을 쳤다.

"언제 가든, 가는 건 내 마음이야."

한 번 봐줬으면 됐지, 두 번은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주인 된 자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이었다.

이것까지 양보할 순 없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