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 초유의 사태에 카엘름 성은 들썩였다.
악마 숭배자가 주민들을 산제물로 써 악마를 부활시키려 했다.
지금껏 이런 사건은 없었다.
주민들은 가족과 이웃의 죽음에 슬퍼했다. 아무리 데일이 활약했어도, 모두를 구해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이렇게 살아 숨쉴 수 있는 것에 안도했다.
무엇보다 지하에 이야기로만 들었던 두려운 존재가 강림했다 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주민들은 연신 쑥덕거렸다.
"가니아가사? 가리오스? 아무튼 그 악마는 이제 완전히 없어진 거 맞지?"
"예. 그렇다네요.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좀 더 세속적인 이유로 들떠하는 주민도 있었다.
"잠깐. 그럼 악마를 죽였으면 여기도 성스러운 장소로 지정되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러면 대단한 영광인데 말이죠."
"순례자들도 많이 오고 교단에서 지원도 많이 온다면...!"
하지만 사리에 밝은 이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다."
"예?"
"이번에 악마를 토벌한 게 누군지 알면서 그래?"
"아...."
데일은 흑기사. 밤의 신도였다.
밤의 신도가 악마를 사냥한 장소가 빛의 교도들의 순례지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많은 소문이 돌았고, 그 소문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건 바로 데일의 이름이었다.
공주를 위해 결투에 나섰던 것으로 유명했던 데일은, 이제 악마를 토벌한 기사로 더 이름을 날렸다.
다만, 사람들은 데일의 이름 앞에 영웅이라는 칭호는 선뜻 붙이기를 꺼려했다.
데일이 다른 종교의 신자라는 이유 때문도 있겠지만....
"이전 세대의 영웅들의 활약은 너무나 뛰어났네! 숱한 악마를 죽여나가던 그들의 업적은 눈이 부실 정도였지!"
카엘름 백작이 포도주가 든 잔을 들고 거창하게 연설했다. 얼굴은 마치 앓던 이를 빼내기라도 한 듯, 몹시도 후련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선뜻 영웅이라는 칭호를 붙이지 못했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변했네!! 영웅들이 종적을 감춘 지금, 우리는 새로운 영웅이 필요하네! 그리고 나는 확신할 수 있네. 그 새로운 영웅에, 데일 경만 한 인물은 없다는 걸! 그렇지 않나?"
백작의 가신과 혈육이 '옳소! 옳은 말입니다!' 따위의 말을 내뱉으며 호응했다.
데일은 시큰둥했다.
가니아고스를 처치했다고 백작은 잔뜩 기뻐하며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대낮부터 방탕하게 마시다니.
'지금은 뒷수습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사람도 많이 죽었고, 지하 수로도 엉망이 되었을 거고,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한데, 방에만 틀어박혀 벌벌 떨던 백작은 마치 자기가 악마를 사냥하기라도 한 것마냥 잔뜩 으스댔다.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간 게, 카엘름 성에서 악마가 죽었다는 게 어지간히도 자랑스러운 눈치였다.
백작은 데일에게 다가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경. 우리 성에는 자네 같은 영웅이 필요하네. 어떤가. 원한다면 내가 가진 영토를 하사해주겠네."
영토를 준다니. 뭇 기사들이 선망하는 일이었지만, 데일은 땅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제안은 고맙지만 거절하겠소."
"그러지 말고. 다시 생각해보게. 으스대는 이레네 놈들보다는 여기가 낫지 않나? 안개가 조금 자주 껴서 그렇지, 카엘름이 살기도 좋네."
백작은 데일에게 매달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다른 이들은 그 모습을 보고, 첫사랑한테 매달리는 사춘기 같다고 평했다.
한번 죽음의 공포를 겪으니, 백작에게는 든든한 무력이 절실했다.
하지만 데일은 단호했다.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철벽을 쳤다.
결국. 시무룩해진 백작이 말했다.
"알겠네. 자네의 뜻이 정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그러면 마지막으로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겠나?"
"말해보시오."
"그... 악마를 토벌하는 데에 내 도움이 있었다고 말해주면 안 되나? 많이 말할 필요도 없네. 그냥 내 이름만 언급하면 된다네."
"알겠소."
데일이 흔쾌히 답하자 백작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하지만 이어지는 데일의 말에 인상을 확 찌푸려야 했다.
"맨입은 아닐 거라 믿소."
"으레 기사도란 재물을 탐하지 아니하며...."
"나는 그런 거 모르오."
"...."
세상에 공짜는 없다.
데일은 백작과의 긴 협상 끝에 악마를 처치하는 데에 백작의 도움이 되었다는 얘기를 하는 대신, 그에 대한 금전적인 보상을 약속받았다.
모든 귀찮은 행사들과 칭송과 호들갑을 끝내고.
데일에게 배정된 호화로운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정신적으로 몹시도 피로한 상태가 되었다.
'차라리 악마랑 싸우는 게 나을 정도군.'
나중에는 교단의 조사관이 와서 사건에 대해 조사한다고 하니, 여러모로 귀찮기만 했다.
지치지 않는 데일에게도 휴식은 필요하다. 데일은 침대에 걸터앉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과거의 기억을. 특히 즐거운 기억들을 곱씹었다.
그의 인생에서 즐거웠던 경험은 주로 조부나 보육원의 아이들과 관련되어 있었다.
데일은 그 당시의 기억을 곰곰이 되새겼다.
그러다가 일순. 그런 기억들이 너무나 선명해져 현실과 구분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데일은 이걸 꿈이라 불렀다.
* * *
무더운 여름이었다.
한여름의 땡볕 아래에서도 보육원의 아이들은 활기차게 돌아다녔다.
조부는 그런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은 서로 도와야 한다.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 거야. 돕는 데 이유는 필요 없어. 그냥 사람이면 남을 돕는 게 당연한 거야."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적인 얘기였지만, 데일은 단 한 번도 조부의 철학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조부는 자기가 말한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은 결코 남에게 강요하는 법이 없었다.
조부가 말했다.
"도움에 대한 보답을 받지도 못할 수도 있다. 때로는 감사도 못 받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런다고 실망하면 안 된다. 알겠니? 세상사 사필귀정이다. 결국, 다 뿌린 대로 다 되돌아오는 법이다. 네가 한 행동은 모두 되돌아오게 되어 있어!"
이날 조부는 유독 열정적으로 열변을 토했다.
무더운 더위가 피를 뜨겁게 달군 걸까?
어쨌거나 이런 별 볼 일 없는 기억의 한 자락도 데일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었다.
그렇게 한 것 여유를 느끼던 데일은, 돌연. 뒤쪽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그것도 사람 하나둘의 인기척이 아니었다.
"...."
데일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있어서는 안 될 존재가 그곳에 있었다.
되돌아오다
* * *
데일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있는 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심지어 모두 아는 얼굴이었다.
하시나. 하킴, 마일즈, 아바프, 검은 뱀 형제단, 마탑의 노예병, 이름도 모르는 용병, 도적, 라팽, 악마 숭배자.
모두 데일이 죽여 생기와 잔혼을 취한 이들.
그들은 넓은 평원에 멀뚱히 서서 데일을 조용히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데일은 혼란스러웠다.
어느새 주위에 있던 보육원의 아이들과 조부의 모습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내가 진짜로 꿈이라도 꾸는 건가?'
데일은 어디까지나 과거를 회상하는 것뿐이었다. 집중력을 발휘해, 기억을 되새김질하고, 곱씹는 과정.
편의상 꿈이라 불렀지만 꿈과는 거리가 있었다.
데일은 잠을 잘 수 조차 없는 몸이다.
'그럼 이건 뭐지?'
문득 떠오른 건 얼마 전에 흡수한 가니아고스의 생기와 잔혼이다.
데일은 녀석의 생기를 흡수하며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껴, 중간에 그만두었다.
악마의 생기를 취한 부작용일까?
분명 영향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데일은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데일에게 죽은 이들은 멀뚱히 그런 데일을 바라보았다.
물러서거나, 겁을 먹거나, 원망하거나 저주의 말을 내뱉지도 않는다.
그저 죽은 사람답게, 시체처럼 무감정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데일의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너도 곧 이렇게 될 것이라고.
문득 방금 들었던 조부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뿌린 대로 되돌아온다.'
작게 한숨을 내쉰 데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건 별로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개짓거리하다가 죽은 귀신들이 제 잘못도 모르고 들러붙는군.'
데일은 주먹을 휘둘러, 가장 가까이에 있던 용병의 얼굴을 후려쳤다.
용병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데일은 꿈에서 깨어났다.
* * *
다시 일어났을 때는 시간이 훌쩍 지나간 상태였다.
마치 진짜 꿈이라도 꾼 듯이 말이다.
데일은 차분히 생각했다.
'나한테 뭔가 변화가 있긴 한 모양인데.'
여태껏 이랬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데일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건, 본인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한 중요한 의식이다.
그 의식이 방해받다니.
데일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했던 분투들이, 오히려 데일이 점점 인간에게서 벗어나고 있게 만드는 게 아닌가.
'음.'
본래라면 이런 상념 같은 건 그냥 털어냈겠지만, 이건 데일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데일은 쉽사리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래서 바깥에서 온갖 개고생을 다 했는데... 잠깐. 데일 경."
"...."
"데일 경! 듣고 있어요?"
"음?"
식사 자리에서 멍하니 있는 데일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데일은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
곱슬머리를 보자마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데일이 물었다.
"하켄? 성에는 언제 들어왔지?"
악마가 죽었으니 백작이 봉쇄를 풀고, 상단도 성안에 들어온 듯하다.
데일의 질문에 하켄이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경. 아까 인사도 했잖아요! 정말."
옆에서 듣던 에스델이 핀잔을 줬다.
"하켄 얘기가 너무 재미없어서 그런 겁니다. 바깥에서 야영한 얘기를 무슨 영웅담이라도 되는 듯이 말합니까."
그러고는 데일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오늘 좀 이상하네요. 무슨 일 있었습니까?"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하티도 데일의 옆구리를 뭉툭한 코로 툭 두드렸다.
괜찮냐고 묻는 듯했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다."
"혹시 피로하신 건가요?"
"하하! 사제 양반! 데일 경이 피로라니. 무슨 이상한 얘기야!"
"그건 그렇지만...."
데일은 걱정하는 에스델을 향해 손을 휘저어주었다.
"정말 별거 아니다. 걱정하지 마라."
"데일 경이 그리 말하신다면...."
뒷말을 흐린 에스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데일 경. 오늘 별일 없으면 같이 밖에 나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별일은 없다만 왜 그러지?"
"이래저래 성에 피해가 컸잖습니까? 희생당한 분들도 많고요. 그래서 힘들어하는 주민들이 많습니다. 만약 데일 경이 얼굴을 보여주시면, 그분들께 큰 힘이 될 거예요."
에스델 다운 의견이었다.
데일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부탁이었다.
에스델은 하켄에게도 함께 가지 않겠느냐 의견을 물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밖에서 야영한 하켄은 방에 눌러앉아 술이나 마시고 싶어 했다.
"내가 언제 영주성에서 공짜 술을 먹어 보겠어! 이건 절대 포기 못 해!"
하티 역시 별로 나돌아다니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결국, 페일과 에스델, 데일 셋이 영주성을 나서게 되었다.
도시는 부산스러웠다.
그간 악마 숭배자 탓에 숨을 죽이고 살던 주민들이다. 비로소 평화를 얻었다는 대한 기쁨 때문인지, 아니면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더욱 분주하게 구는 건지.
도시에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여러모로 활기가 넘쳤다. 유령 도시 같던 카엘름에서 비로소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거리를 걷자 사람들은 에스델을 알아보았다.
"아! 에스델 님!"
"에스델 님이다!"
"어제는 고마웠어요!"
에스델이 부지런히 사람들을 돕고 다닌 모양이다.
사람들은 에스델을 몹시 반가워하거나, 감사를 표하거나, 때로는 꽃이나 과일 따위의 선물을 주었다.
페일이 옆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저도 옆에서 같이 도왔는데 말이죠."
"세상이 그런 거지."
에스델의 미모에 페일은 상대적으로 묻힌 듯하다. 에스델은 어디서도 밝게 빛나는 느낌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에스델을 보고 다가오던 사람들은 데일을 보았다.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서로 눈을 마주치며 머뭇거렸다. 아무도 선뜻 다가서지 못했다.
익숙한 반응이다.
옆에서 쩔쩔매는 에스델의 등을 데일이 밀었다.
"가라. 나는 잠시 도시를 산책하겠다."
"그... 저. 아, 아닙니다. 다녀오세요."
에스델과 함께 있어봤자 괜히 서로만 불편할 뿐이다.
데일은 에스델에게서 떨어져 홀로 거리를 걸었다.
대로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일부러 한적한 길로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데일은 불현듯. 한 가지를 깨달았다.
'길 잃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당최 여기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레네였으면 모를까, 처음 방문한 카엘름의 풍경은 낯설기만 했다.
'하티라도 데려올걸.'
그 커다란 늑대가 있었다면 크릉, 낮게 울고는 돌아가는 길을 찾아주었을 텐데.
그렇게 데일이 멍하니 서서 곤란함을 겪던 그때였다.
누군가가 데일에게 조심히 말을 걸었다.
"저어...."
고개를 돌리니 웬 중년 여성이 데일을 보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낯이 익은 여인이었다.
분명....
"그때 그 기사님 맞으시죠? 감사합니다. 아버님을 지켜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여인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분명, 데일에게 웬 노인을 지켜달라던 여인이었다.
"보답을 해드리고 싶은데 가진 게 별로 없어서...."
그 말대로 여인의 몰골은 꾀죄죄했다. 옷도 다 해졌고, 얼굴에는 삶의 피로가 녹아 있었다.
"신경 쓰지 마시오."
데일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길이야 잃었지만, 일단 걸을 생각이었다.
계속 걷다 보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별은 둥그니까.'
그런 데일에게 여인이 마음을 굳게 먹고 말했다.
"저기!"
"?"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식사를 한 끼 대접해드릴까요? 아니, 대접하게 해주세요! 기사님이 오신다면 아버님도 기뻐하실 거예요!"
의외의 제안에 데일은 잠시 고민했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까.'
데일은 여인을 따라 여인의 집으로 향했다.
가족이 대대로 살아온 듯한 낡은 2층 집이었다. 여인은 문을 열고 들어가며 멋쩍게 웃었다.
"손님 맞을 준비를 안 해놔서... 누추한 곳이라 죄송해요. 아버님! 와서 보세요! 손님이 오셨어요!"
여인은 집 안으로 들어가며 가족을 불렀다.
데일도 방 안에 걸음을 들인 뒤, 습관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흔한 실내였다. 낡은 가구나 손때가 묻어 있는 벽.
빛의 신앙을 상징하는 상징물도 꽤 많았는데, 어째선지 그 상징물 위에는 담요가 덮여 있었다. 마치 일부러 가려놓은 듯한 모습이다.
데일이 기다리고 있자니 여인과 노인이 나왔다.
노인은 데일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세상에! 기사님께서 우리 집에 진짜로 와주시다니! 저는 리델이라 합니다. 켄의 아들 리델."
"데일이오."
"정말 반갑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리델이 데일의 손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그러다 여인에게 말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아가. 어서 음식을 준비하자꾸나. 기사님께 식사라도 대접해야지!"
여인이 웃으며 답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리델은 데일의 손을 놓아주지 않고, 손수 식탁까지 안내해주었다.
조금 뒤.
여인이 음식을 내왔다. 감자를 넣어 끓인 수프에 통밀빵. 우유와 치즈.
백작이 연 연회에서 본 호화로운 음식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데일은 오히려 이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데일은 투구를 벗어 옆으로 놔둔 뒤. 숟가락을 들어 수프를 떠먹었다.
여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입에는 잘 맞으시나요?"
당연히 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음식이란 게 맛만으로 먹는 건 아닌 법이다.
데일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맛있소. 감사히 먹겠소."
"그것참 다행이네요...!"
셋은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눴다. 어느 평범한 소시민들이 할법한 그런 시시콜콜하고 특별할 것 없는 대화였다.
데일에게는 이 역시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한참을 떠들던 리델은 밤의 여신에 대해 물어오기도 했다.
"그... 밤의 신도가 되려면 이레네로 가야 합니까?"
데일이 멈칫했다.
"개종할 생각이오?"
"예. 아무래도 이번 일은 어떤 운명이 아닐까 해서...."
데일은 리델을 말릴 생각이었다. 세상이 변했다 하나, 여전히 밤의 신도들은 차별과 배척 속에 살아가고 있다.
굳이 그런 어려움을 감수하면서까지 밤의 여신을 믿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데일은 리델을 설득하기 위해 말을 고르다, 이내 그만두었다.
리델 나름대로 깊은 고민 끝에 각오를 가지고 내린 결정일 것이다. 데일이 왈가왈부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데일이 말했다.
"카엘름에는 신전이 없으니, 나중에 기회가 될 때 이레네로 오시오. 에리얼 사제장이 반갑게 맞아줄 것이오. 하지만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소. 밤의 여신께서도 나이 든 신도가 무리한 여정에서 건강을 상하는 걸 원치는 않으시니 말이오."
"아아. 조언, 감사히 새겨듣겠습니다."
말하고 나서 데일은 생각했다.
'이러고 보니 진짜 흑기사 같군.'
여신을 따르는 기사다운 일을 한 건 이번이 처음 아닐까.
어쨌거나 밤의 신도가 늘어나면 데일에게도 좋은 일이다.
데일에게 우호적인 세력이 조금이라도 커져야 유리하니 말이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데일은 떠날 준비를 했다.
리델은 좀 더 남아주길 원하는 눈치였지만 이제 슬슬 돌아갈 시간이다.
"그럼 이만 일어나보겠소."
데일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미련이 남은 눈으로 보던 리델이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 잠깐. 기다려 보시오!"
"음?"
"아버님. 왜 그러세요?"
"기다려봐!"
리델은 어디론가로 다급히 사라졌다, 품에 무언가를 들고 왔다.
연회색의 망토였다.
무슨 재질로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투박하면서도 고풍스러움이 있었다.
리델이 데일에게 망토를 내밀었다.
"역사 속 훌륭한 기사들은 모두 망토를 둘렀다고 합니다. 기사님은 이걸 쓰십시오."
데일은 망토를 보며 말했다.
"이건... 꽤 비싸 보이는데."
"우리 집안 남자들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입니다. 저는 아버지께 물려받았고, 아버지는 할아버지께 물려받은 물건이죠. 이래 봬도 무두장이 가문이라 관리는 철저히 했습니다. 질이 떨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데일은 고개를 저으며 망토를 내밀었다.
"그런 귀한 물건을 받을 수 없소."
"받아주십시오."
"아들에게 물려줘야 할 가보이지 않소."
리델은 서글픈 눈으로 말했다.
"제 아들과 손자는 모두 죽었습니다."
"...."
데일은 입을 다물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다.
이 집은 어딘가 쓸쓸한 기운이 있었으니까.
리델이 간절하게 말했다.
"제 아들과 손자를 대신해 이 망토를 둘러주시겠습니까? 두 녀석도 기사님이 입어주면 매우 기뻐할 겁니다."
"...이걸 정말 내가 받아도 괜찮겠소?"
"부디!"
그렇게 말한 리델은 까치발을 들어, 데일에게 직접 망토를 둘러주었다.
그러고는 뒤로 물러나더니, 세상 다 가진 표정으로 환하게 물었다.
"정말.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어머나."
데일은 리델과 여인의 미소를 보았다. 그들은 데일이 망토를 입어준 걸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며 무심코 생각했다.
'돕길 잘했군.'
여인의 부탁을 받고 리델을 구한 건 어쩌면 단순히 '인간 흉내'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데일은 진심으로 자기가 한 행동에 보람을 느꼈다.
차갑게 식은 심장도 조금이나마 따뜻해진 느낌이다. 어디까지나 기분 탓이지만.
간밤의 꿈으로 어지럽던 머리도 진정되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괜히 심란해했군.'
데일은 그리 생각하며 뿌듯하게 망토를 어루만졌다.
별거 아닌 망토라도 데일에게는 다른 보물 못지않은....
'음?'
데일은 망토를 어루만지다 묘한 힘이 전해져 오는 걸 느꼈다.
이 망토.
'평범한 물건이 아니다.'
뿌린 대로 되돌아온다. 왠지 조부가 뱉은 말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되돌아오다
* * *
데일은 망토를 유심히 살폈다.
집중하지 않으면 느끼기 힘들 만큼 미약하지만, 마력의 흔적이 베여 있었다.
'유물? 아니면 마도구?'
어느 쪽이든 단순히 질 좋은 망토는 아니었다. 비밀이 숨겨져 있다.
데일이 리델에게 물었다.
"이 망토. 선조께서 직접 만든 것이오?"
"예? 아, 그건 아닙니다."
리델은 고개를 저었다.
"듣기로는 집 나간 선조께서 용병일을 하다 유적에서 발견했다는 말도 있고... 그냥 술집에서 주사위 도박으로 따냈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뭐, 워낙 오래된 물건인 만큼 정확히는 모르겠군요."
"으음, 알겠소."
"왜 그러십니까?"
데일은 솔직하게 말했다.
"이 물건에는 어떤 힘이 서려 있소. 어쩌면 이 망토, 생각보다 더 값진 물건일 수도 있소."
지금이라도 리델이 망토의 가치를 깨달았으면 해서 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리델은 도리어 기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리델은 욕심 없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부디 기사님께서 잘 사용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델은 망토를 돌려받을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없는 듯했다.
데일은 다시 한번 망토를 만지작거렸다.
'힘이 서려 있다라.'
이 망토에 어떤 비밀이 잠들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비싼 돈을 들여 전문가에게 감정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볼 문제지.'
게다가 꼭 망토의 힘을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다. 리델이 선물해 준 망토는 이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그렇기에 데일은 고개를 숙여,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잘 사용하겠소."
"아... 고, 고개를 드세요."
쩔쩔매는 여인과 리델에게 감사를 표한 데일은 말했다.
"이제 그만 가봐야겠소."
"네. 기사님의 앞날에 좋은 일만 있길 기도하겠습니다."
"그대들도 조심히 지내시오."
부드럽게 덕담을 나눠 한 데일은 집을 나섰다.
그런 데일에게 리델과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하지만 조금 후.
데일은 리델의 집으로 돌아왔다.
어리둥절해하는 리델에게 눈을 슬쩍 피하며 말했다.
"이미 작별 인사까지 해 놓고 이런 말하기에는 그렇지만... 영주성까지 길 안내 좀 해주겠소?"
"?"
데일과 리델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 영주성까지 함께 걸어가야 했다.
* * *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다.
카엘름에서 인력과 물자를 보충한 상단은 4군단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그리고 레베카와 데일과의 계약은 그렇게 끝이 났다.
레베카는 데일을 여러 번 붙잡으려 했지만, 데일은 완고히 거절했다.
결국, 레베카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상단이 출발하는 당일.
레베카는 어딘가 수심에 잠긴 얼굴로 상단 일행을 둘러보고 있었다.
호위 병력은 이전보다 줄었다.
이제부터는 4군단의 영향력 아래 있는 지역이라 도적이나 몬스터도 적다는 게 레베카의 설명이었다.
그런 레베카에게 데일이 질문을 던졌다.
"위험하지 않겠소?"
"뭐가 말이죠?"
"탈영병들을 봐서 알지 않소. 전선의 상황이 생각보다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그런 곳엘 굳이 왜 직접 가려는지 모르겠군."
레베카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선에 직접 들러 분위기를 살피고, 장군들의 동향을 살피는 것도 상인 길드장의 역할이에요. 폐하께서 직접 명하신 일이죠."
"다른 사람을 시킬 수는 없소?"
"그러면 경쟁자들이 제 자리를 치고 들어오겠죠?"
잠시 고민하던 데일이 되물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그 자리를 지킬 이유가 있소? 이미 돈은 충분히 벌지 않았소."
"이름을 댈 부모도 없는 고아 출신으로 일어나 평의원까지 된 여자. 그게 저예요."
그렇게 말한 레베카는 더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듯이 말이다.
데일도 더 말하지 않았다.
레베카와 함께 멀어져가는 상단을 보았다.
문득, 레베카가 일전에 했던 말이 떠오른다.
외곽 구역의 상인 길드장은 유독 자주 바뀐다고. 목이 날아가는 일이 많다고.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단어가 있다.
'판 위의 장기말.'
외곽구역의 평의원이라는 자들도 결국은 장기말에 불과한 것일까.
그리고 그 장기 말을 움직이는 건 상위구역에 있는 황제와 고위 귀족들일 것이다.
'악마. 전선의 장군들. 영웅들. 그리고 황제.'
데일은 머릿속에서 퍼즐을 맞춰보려 했다. 하지만 아직 퍼즐의 빠진 조각이 너무 많다.
데일은 상념을 털어내고, 고개를 돌렸다.
마침 하켄이 마차를 몰고 오고 있었다. 무려 카엘름 백작이 직접 내준 마차였다.
데일은 마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툭 말했다.
"뭐지 이건? 이런 걸 타라는 건가?"
"...저도 창피하니까 말하지 마세요."
백작이 내준 마차는 참으로 화려했다. 화려해도 너무 화려했다.
마치 귀족 영애나 탈법한 그런 마차였는데, 밝은 색상의 마차를 새하얀 백마 두 마리 끌고 있으니, 더욱 요란스러워 보였다.
하켄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일단 엄청 비싼 물건은 맞습니다. 마차 자체도 엄청나게 튼튼하고요. 화살이 날아와도 거뜬히 막아낼걸요?"
"확실히 튼튼해 보이긴 하는군."
"그리고 다행히 저희한테는 사제 양반이 있지 않습니까.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귀족 영애가 탄 마차겠거니, 하지 않겠습니까?"
부끄러운지 빨개진 얼굴을 파묻고 있던 에스델이 휙 고개를 들며 말했다.
"하켄. 이상한 얘기하지 마세요."
어쨌건. 하자도 없는 마차를 외양 때문에 마다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셋은 마차를 타고 성 밖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이른 시각이다.
갓 해가 뜬 카엘름은 처음 보았던 것처럼 옅은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을씨년스러움은 이제 없었다.
하루를 시작하는 시민들이 거리로 하나둘 걸어 나왔다.
시민들은 마차에 탄 에스델을 보고 미소를 짓다, 데일을 보고 굳었다.
하지만 이내 데일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데일은 보는 이들이 전부 그랬다.
"반응이 이전과는 다르군."
"이제 다들 마음의 여유도 찾으니, 누가 자기들을 도와줬는지 깨달은 거죠."
"네가 억지로 시킨 건 아니겠지?"
"...대체 저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데일은 카엘름의 주민들에게 슬쩍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리고는 카엘름 성이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뒤를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 * *
두 마리 백마가 이끄는 마차는 빠르게 달렸다.
마차는 고가품이라 그런지 거친 길 위를 마구 달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 탓에 하켄의 질주 본능이 자극받은 모양이다.
하켄은 마차의 속도를 마음껏 올렸다.
"하하하! 바람이 기분 좋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데일 경?"
이제 여름도 막바지에 접어들고, 가을이 슬그머니 다가오고 있었다.
하켄은 아직 여름의 습기가 남아 있는 바람을 한껏 만끽했다. 곱슬머리가 세찬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렸다.
반면, 이런 과격한 질주에 에스델은 죽을 맛이었다.
"제, 제발 하켄. 적당히 하세... 우읍."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접어든 산길은 몹시 울퉁불퉁했다.
그런 곳을 빠르게 달렸으니, 아무리 고가품의 마차라도 이리저리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안색이 파리해진 에스델은 연신 헛구역질했다.
하지만 하켄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하하하! 사제 양반! 그냥 속 시원하게 게워내! 언제 또 이런 속도감을 즐겨보겠어?"
"우읍. 데, 데일 경."
에스델이 데일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데일은 하켄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억!"
"속도 줄여."
"옙."
하켄은 두말하지 않고 속도를 늦췄다. 에스델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신이시여.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하하. 그거 영광이구만. 내 방패를 뚫으려면 어지간한 무기로는 안 될걸?"
농담을 던지는 하켄에게 에스델이 살벌한 눈빛을 던졌다. 하켄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에스델이 중얼거렸다.
"이번 기회에 공격 기적을 배워야겠어요."
데일은 그걸 배워 어디다 쓸지는 묻지 않았다.
대신, 하켄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바람을 쐬면서 되도록 먼 곳을 바라봐라. 그러면 멀미가 덜할 거다."
"...감사합니다."
마차의 문을 열고 나온 에스델은 하켄의 옆자리에 앉았다. 자리를 비켜준 데일은 마차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다시 마차가 움직였다. 하켄은 슬쩍 눈치를 보며 천천히 말을 몰았고, 에스델은 눈을 감고 시름시름 앓았다.
마차를 혼자서 쓰게 된 데일은 이번에 새로 구매한 무기들을 일렬로 늘어놓았다.
단검 여럿에 손도끼, 팔뚝만 한 도끼에, 혹시나를 대비한 한 손 검. 그리고 팔뚝만 한 철퇴까지.
가니아고스의 싸움에서 무기가 없어 위험했었기에, 일부러 다양하게 준비했다.
데일은 무기를 사고 덤으로 받은 숫돌과 기름, 그리고 새 헝겊을 꺼냈다.
데일은 헝겊을 들어 무기를 하나하나 닦았다. 이미 충분히 깔끔했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데일에게 처음 싸우는 법을 가르쳐준 이들은, 자기 몸은 매일 안 씻어도 무기는 매일 닦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작자들이었다.
그들의 습관은 데일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데일은 천천히 무기를 닦았다. 쇠 비린내가 기분 좋게 풍겨왔다. 문득 이렇게 무기를 새로 장만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써보고 싶은데.'
새로 옷을 사면 입어 보고 싶은 것처럼 무기를 구하면 써먹어 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그렇다고 아무 대상에게나 시험해볼 수 없는 게 곤란한 점.
그런 데일의 아쉬움과 별개로, 마차는 산길을 쉼 없이 이동했다.
해가 지기 전에 이 산을 넘어야만 했다. 자칫하다가는 산 한가운데에서 야영을 해야 할 수도 있다.
다행히 앞서서 하켄이 워낙 빠르게 달린 덕분에 여유가 좀 있었다.
이대로라면 여유롭게 산을 통과할 수 있을 터.
그 같은 계산에 하켄이 늘어지게 하품하며 다소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였다.
"엇."
하켄은 반사적으로 방패를 앞으로 내밀었다.
다음 순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방패에 날아와 박혔다.
본능적으로 화살을 방어해낸 하켄은 서둘러 고삐를 잡아당겼다.
깜짝 놀란 두 마리 백마가 앞발을 들며 히힝 거렸다.
옆에서 같이 달리던 하티도 으르렁거렸다.
앞쪽에 한 무리의 무장한 사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게 뭐야."
하켄은 눈매를 좁혔고, 옆에서 시름시름 앓던 에스델의 얼굴은 갑작스러운 정지에 더더욱 창백해졌다.
* * *
날 때부터 도적이었던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각자 사정과 처지에 따라 다양한 이유로 도적의 길을 걷게 된다.
농한기에 굶주림에 지쳐 농기구를 들고 도적질을 하다 계절이 지나면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는 농부도 있는가 하면.
수준 떨어지는 용병이 먹고살기 위해 직종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그보다 흔한 경우는 바로 도시에서 중죄를 저지르고 도망간 범죄자들이 노상강도가 되어버리는 일이다.
이번에 데일 일행을 맞이한 도적들도 그러했다.
이들은 기본 사람 한 두 명은 죽이고, 도시에서 도망쳐 나온 범죄자들이었다.
도적들이 하켄에게 화살을 겨누며 말했다.
"자자. 여기는 우리 영역이다. 그러니 통행세를 내줘야겠어."
하켄이 인상을 찌푸렸다.
"뭔 개 같은 소리야. 언제부터 이 산에 주인이 생겼다고."
"빈 땅에 우리가 와서 깃발을 꽂았으니 이제 우리 땅인 거지. 그리고 곱슬머리. 혀를 잘라버리기 전에 닥쳐."
"...."
하켄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도적들은 그 모습을 보고, 자신들의 위협이 먹힌 거라 생각했다.
도적들이 히죽거리며 상의했다.
"형님. 어떤가요. 이번엔 제법 짭짤하게 벌겠는데요."
"그냥 짭짤한 수준이 아니다. 아무래도 우리, 횡재한 것 같다."
"예?"
형님이라 불린 사내가 마차를 가리켰다.
"봐봐라. 척 봐도 높으신 분들이 쓸법한 마차 아니냐."
"확실히. 엄청 화려한 게 신분 높은 여자들이 탈법한 마차긴 하네요. 말도 새하얀 게 뭔가 고급스러워 보이고."
"그리고 마부석에 앉은 둘을 봐라. 저 곱슬머리는 그냥 얼간이처럼 보이지만 그 옆에 있는 여자는...."
그때까지도 시름시름 앓는 에스델을 본 도적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사제네요! 그것도, 엄청나게 이뻐요!"
"그래. 한눈에 봐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지. 근데 생각해봐라. 보통 마부석에는 누가 앉지?"
"어... 멀미가 심한 사람이요?"
정답에 근접한 추론이지만, 형님은 부하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생각을 좀 해라 이 새끼야. 신분이 낮은 사람이 마부석에 앉고, 그 윗사람이 마차에 타잖아."
"아! 그렇다면...."
"그래. 저런 여사제를 부하로 부릴만한 사람은 귀족밖에 없지 않겠어? 그것도 꽤 고위 귀족."
형님이 목소리를 한층 낮추며 말했다.
"내 생각에는 저곳에 공주가 타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고위 귀족의 영애나."
"고, 공주!"
공주라는 단어에 도적들이 웅성거렸다. 형님의 입가에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이대로 공주를 사로잡기만 하면 그때부터 우리 인생은 활짝 핀 거다. 가족에게 협박을 해서 돈을 뜯어내든, 암시장에 팔아버리든 떼돈 버는 거야."
"형님!"
"그래. 그러니 조심히 사로잡아라. 혹여나 손 데거나 다치게 하면 문제가... 아니다. 내가 직접 하마."
형님은 부하들에게 활을 계속 겨루고 있으라 한 뒤, 조심히 마차로 다가섰다.
하켄이 물었다.
"뭐야 넌 또. 뭐하려고 그러는데."
"너희가 숨긴 공주는 우리가 데려가마. 아, 물론 신사적으로 대우할 테니 걱정은 하지 말고. 흐흐."
"뭐?"
하켄은 이게 뭔 개소리냐는 듯. 머리만 벅벅 긁었다. 하티와 에스델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형님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런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형님은 꿋꿋이 걸어가, 마차의 문 앞에 섰다.
그는 만면에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문을 힘껏 잡아당겼다.
"자! 순순히 나오세요 공주님!"
문이 열렸다.
형님은 안에 있는 데일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형님은 생각했다.
'공주가 왜 이렇게 크고 새카맣지?'
되돌아오다
* * *
너무 놀란 도적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데일은 도적을 붙잡아 들어올렸다.
"어어."
흔히 이야기 속 왕자가 공주를 안아 들듯. 허리와 다리를 양손으로 들어 올리는 듯한 자세다.
사소한 차이가 있다면 안긴 게 아리따운 공주가 아닌 수염이 숭숭 난 중년 사내라는 점이라는 것.
그리고 안고 있는 이는 왕자라기에는 너무 살벌하다는 점이었다.
"...."
"...."
도적과 데일의 눈이 마주쳤다. 가까이서 쳐다보니 시선이 부담스럽다.
도적이 겁에 질려 소곤댔다.
"살려주세요."
데일은 답했다.
"싫어."
우드득.
데일은 그대로 힘을 줘, 도적을 구겨버렸다. 그러고는 그때까지도 활을 겨누는 도적들을 향해 던져버렸다.
팡!
"억!"
날아온 도적에게 부딪힌 동료 두엇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데일은 곧장 무기를 뽑았다. 하켄과 하티가 도우려고 일어나자, 데일이 말했다.
"가만히 있어라."
"예?"
"내가 알아서 하겠다."
마침 새 무기들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데일은 곧장 앞으로 달려 나가며 손도끼를 던졌다.
공중에서 팽그르르 회전하며 날아간 도끼가 도적 하나의 미간에 틀어박혔다.
도적들은 반사적으로 활시위에서 손을 놓았다.
투퉁퉁. 화살이 데일의 투구를 두드렸다. 나름 활 솜씨가 좋았다.
하지만 데일은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날을 시퍼렇게 세워놓은 단검을 곧장 투척했다.
"어억!"
도적은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그 흔한 누비 갑옷도 입지 않은 대가였다.
마침내 도적과 데일의 거리가 줄어들었다.
도적들은 당황했다. 도망쳐야 할지 맞서 싸워야 할지 우왕좌왕했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보다, 동료를 잃었다는 분노가 더 큰 모양이다.
"감히 형님을!"
"죽여!"
커다란 벌목용 도끼가 정수리를 노려왔다. 데일은 간단히 고개를 비틀어, 도끼를 단단한 견갑으로 막아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내뻗어 철퇴로 앞의 도적의 머리통을 부순 뒤. 곧바로 몸을 돌려 마주 공격하던 도적의 명치를 힘껏 걷어찼다.
두 도적이 흰자위를 까뒤집으며 바닥에 쓰러지는 건 동시였다.
이제 남은 도적의 수는 8명 남짓.
데일의 무위를 본 다른 도적들이 망연자실한 얼굴을 했다. 활을 든 녀석은 화살을 시위에 걸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데일이 물었다.
"더 안 하나? 너희들 구역이라 하지 않았나. 자기 땅을 지키려면 더 열심히 싸워야지."
데일 나름대로 농담을 던져본 거였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도적들은 죽은 동료들의 시체를 흘끗 쳐다봤다. 실력 차이가 크다는 게 명확해졌다.
'이길 수 없어.'
그제야 분노로 흐려졌던 이성이 되돌아왔다. 그리고 슬그머니 두려움이 고개를 들었다.
두려움에 민감한 데일은 곧장 낌새를 눈치챘다.
"미리 말하지만, 도망칠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튀, 튀어!"
데일의 말을 끊고, 도적들이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도적들은 나름 자신이 있었다. 이곳은 자신들의 영역인데다가 나무가 우거진 숲이다.
경험 많은 사냥꾼도 잘 모르는 숲에는 섣불리 들어가지 않는 법이다.
사방으로 달아나면 충분히 달아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데일은 양손에 단검을 들고 연달아 던졌다. 도적 둘이 풀썩 자리에 쓰러졌다. 하지만 나머지 녀석들은 기어코 달아났다.
"귀찮게 구는군."
하켄이 다가와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다 잡아 죽여야지."
저런 놈들은 가만 놔두면 또 무리를 만들어 무고한 사람들을 습격할 것이다.
하켄이 물었다.
"어떻게 쫓을 생각이십니까? 숲길에서는 자칫 길을 잃기 쉬운데요."
"사냥을 할 때는 개를 풀어놓는 법이다."
"개? 아...!"
하켄과 데일이 하티를 쳐다보았다.
하티가 불만스럽게 크릉 울었다. 자기는 개가 아니라 늑대라고 말하는 듯했다.
데일이 물었다.
"쫓을 수 있겠나?"
하티는 우아하게 걸어 데일을 지나쳤다. 그리고는 따라오라는 듯이 고개를 휙 돌렸다.
데일은 그 뒤를 따랐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이 산중에서 보내야 할 듯싶었다.
* * *
하티가 도적들을 냄새로 추적해 전부 죽이기까지는 반나절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시간이 단축된 이유는 사방으로 도망갔던 도적들이 한곳으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산 중턱에 마련된 은신처.
자신들의 집으로 되돌아오는 도적을 모두 잡아 죽인 데일은, 놈들의 은신처를 둘러보았다.
'그럴듯하게 지어놨네.'
조잡하게 지은 집 몇 채가 서 있었고, 심지어 닭 같은 가축도 몇 마리 키우고 있었다.
작은 마을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모습이었다.
물론, 도적들이 평범하게 가축을 길렀을 리는 없다. 키우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얼굴이 꾀죄죄한 꼬마가 닭을 돌보고 있었는데, 데일이 하티와 함께 다가오자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눈에 물방울을 맺으며, 히끅거렸다.
"흑. 자, 잘못했어요."
"...뭐가."
"앞으로는 잘할게요. 게으름도 안 피우고, 엄마 말 잘 듣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아무래도 아이의 부모는 착하게 굴지 않으면 악마가 찾아와 아이를 잡아먹을 거라 겁을 준 모양이다.
아이가 보기에 커다란 늑대를 대동하고 나타난 흑기사는 악마와 큰 차이점이 없었다.
자기는 악마가 아니라고 설득하려던 데일은 이내 그만두었다. 말해봤자 알아듣지도 않을 것 같았다.
대신, 데일은 물었다.
"너희 엄마는 어딨지? 너 혼자는 아닐 거 아니냐."
그러자 주저앉아 있던 아이가 데일의 다리를 붙잡았다.
"아, 안 돼요! 저, 저는 괜찮으니 엄마는 살려주세요."
"...."
속으로 한숨을 삼킨 데일이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몇 채 안 되는 집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이 있었다.
데일은 아이를 다리에 매단 채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문을 열자 도망치지 못하게 다리가 묶인 여인들이 보였다. 도적들에게 지독한 대우를 받았는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여인들은 데일을 발견하고는 겁에 질려 구석 자리로 뒷걸음질 쳤다.
'여기서 말을 걸어봤자 역효과겠군.'
번거롭지만, 에스델을 데려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데일은 에스델과 하켄을 은신처로 데려왔다.
에스델은 지독한 광경에 말을 잃었다.
데일이 부탁했다.
"에스델. 네가 저 여인들을 치유해주고, 상황을 설명해줬으면 좋겠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에스델이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여인들에게 다가갔다. 여인들은 같은 여성이며 사제이기도 한 에스델이 다가오자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사이. 하켄이 데일에게 물었다.
"다른 집도 둘러보셨습니까?"
"아니."
"그럼 얼른 둘러보죠. 어쩌면 돈을 꽤 많이 모아놨을 수도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데일은 집들을 하나하나 수색했다. 은화 몇 개와 조잡한 무기 따위를 주울 수 있었다.
하지만 생각만큼 큰 소득은 없었다.
하켄은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이 정도밖에 없을 리가 없는데...."
그때. 옆에서 서성이던 하티가 바닥에 놓인 나무 판자를 앞발로 툭툭 두드렸다.
그 의중을 알아챈 데일은 철퇴를 들어 그대로 바닥을 내리쳤다.
쾅!
바닥이 무너지며 그 아래에 있던 자그마한 구멍이 드러났다.
구멍 속에는 나무 상자가 하나 있었다.
하켄이 화색을 띠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도적놈들이 의리 따위가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뒤로 빼돌려 놓는 게 당연하죠. 빨리 열어보죠!"
"호들갑 떨지 마라."
데일은 상자의 뚜껑을 잡아당겼다.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렸다.
안에 있던 내용물이 드러나자 하켄이 감탄을 흘렸다.
"오. 오오!"
상자에 든 건 은화 더미였다. 반짝이는 금화도 몇 개 섞여 있었고, 보석 목걸이나 반지도 두어 개 들어 있었다.
'알뜰하게도 모았군.'
하켄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이, 이거면 몇 년은 놀고먹어도 되겠는데요?"
데일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요즘은 돈주머니가 점점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버는 수익은 많은데, 소비는 그에 따라가지 못하니 점점 돈이 늘어났다.
'은행이라도 가야 하나?'
돈을 많이 모아두어서 나쁠 건 없다. 특히, 이제 상위 구역으로 올라가면 돈을 쓸 만한 일들이 생길 것이다.
데일은 이 뜻밖의 횡재를 감사히 여기기로 했다.
그때. 하켄이 은근하게 물어왔다.
"데일 경. 저는 욕심 없습니다."
"?"
"딱 1할만 나눠 주십시오. 그 이상은 안 바랍니다."
"네가 한 게 뭐가 있는데."
하켄은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이번 도적을 처리하는 데 하켄이 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리 데일과 하켄이 친한 사이라 해도 계산은 철저히 해야 하는 법이다.
반박할 수 없는 말에 하켄이 시무룩해하며 말했다.
"그렇게 많이 벌어서 어디다 쓰시려구요."
"글쎄. 쓰려면 얼마든지 쓸 수 있지만... 지금 이 돈을 당장 쓸만한 곳이 하나 떠오르긴 하는군."
"예? 뭔데요 그게?"
데일은 답해주지 않았다. 하켄은 그런 데일을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 * *
일행은 도적들에게 사로잡혀 있던 여인들과 아이를 마차에 태우고 이동했다.
긴 시간 학대받아 온 여인들은 체력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무리한 이동은 할 수 없었다.
다행히 백작이 내준 마차는 안락한 편이었고, 두 마리 백마도 힘이 넘쳤다.
며칠간의 여정 끝에 마침내 이레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데일은 도적들에게 사로잡힌 여인들의 처우에 대해서 에스델과 상의했다.
"저분들은 아마 서쪽의 한적한 수도원으로 가시게 될 거예요. 아무래도 지금 당장은 체력도 떨어지고, 마음도 힘들어하시니까요."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갈 곳 잃은 여인들을 교단에서 맡아준다면 안심이다.
데일은 도적들의 은신처에서 찾아낸 나무 상자를 열어, 은화의 절반 정도를 자루에 담았다. 그리고 에스델에게 내밀었다.
에스델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이건...?"
"저 사람들을 맡기는 것에 대한 대가다. 일단 내가 데려온 거니, 나도 일정 부분 책임져야 맞는 거겠지."
에스델이 손사래를 쳤다.
"아뇨아뇨. 이건 교단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에요. 돈을 받을 수는 없어요."
"저 여인들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받아라."
"예?"
"돈을 내고 수도원에 간다면 손님이 되지만, 돈을 내지 않으면 귀찮은 짐일 뿐이다. 그러니 받아라."
에스델은 부인하려 했다. 교단의 모두는 신실하고 선량한 사람들이라 설령 돈이 내지 않아도 여인들을 반가이 맞아줄 거라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제 에스델도 세상이 그리 아름답게만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특히 교단의 형제자매들에 대한 믿음 역시 많이 깨졌다.
이번 이단 심문관들과의 만남은 에스델에게 여러모로 충격을 주었다.
에스델은 데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데일의 조언은 항상 현실적이었다.
에스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일 경께는 배우기만 하는군요."
"뭣하면 그냥 헌금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흑기사가 교단에 헌금을 낸다니. 밤의 여신께서 노하시지 않으십니까?"
"그러지 않...."
다고는 확실히 말할 수 없었다.
진짜 헌금을 냈다가는 배신행위라고 삐지지 않을까?
어쨌거나 데일은 돈 자루를 에스델의 손에 쥐여주었다.
별로 아깝지는 않았다.
여인들은 도적들이 모아 놓은 돈에 대해 지분을 요구할 정당한 권리가 있었다.
계산은 확실히 하는 것.
그게 데일의 방식이고, 어둠을 따르는 신도들의 방식이기도 했다.
일행은 성문을 넘어 이레네로 들어섰다. 에스델이 여인들을 이끌며 말했다.
"저는 우선 교단에 들러보겠습니다. 보고할 것도 많고, 일단 이분들 일을 봐 드려야 하니까요."
"그래 고생했다."
"예. 일을 마치면 카일라의 여관에 한 번 들르겠습니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델이 걸음을 옮기자, 여인들도 데일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그 뒤를 따랐다.
코흘리개 아이도 엄마의 손을 붙잡고 따라 걸었다.
그러면서 자꾸만 뒤를 보고 데일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아이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처음 보는 대도시에 신난 건지. 아니면 엄마랑 같이 밖을 걸어다니는 게 마냥 즐거운지.
적어도 눈물 콧물을 질질 쏟는 모습보다는 훨씬 보기 좋았다.
아이가 앞으로도 저렇게 웃을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아이의 앞에 놓인 삶은 그리 녹록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든 도적들의 은신처보다는 나을 것이다.
아이와 엄마는 둘이서 잘 헤쳐나갈 것이다.
'엄마라....'
그러고 보니 데일에게도 자기를 아들이라 부르는 존재가 있었다.
한동안 신전에 가지 못했다.
그간 잔혼을 많이도 쌓아놨으니, 이제 그걸 바칠 시간이다.
데일은 밤의 신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되돌아오다
* * *
데일은 신전의 입구에 섰다.
언제나처럼 허름한 신전이었다.
데일은 하티를 신전 입구에 세워두고,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빛 한 점 없이 새까만 신전에는 평소와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한구석에 서서 허공에 검을 휘두르는 스켈레톤.
마치 신전의 구조물처럼 항상 같은 자리에 서서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안대 낀 사제장.
서늘하게 가라앉은 공기.
그런 고요한 분위기는 데일의 쇠장화가 땅을 밟는 소리에 깨져버렸다.
에리얼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그녀는 데일을 보고 입가에 미소를 띠며 반가이 맞아주었다.
"데일 경. 오셨군요. 얘기는 들었습니다. 부활한 가니아고스를 처치했다고요."
"부활한 지 얼마 안 돼 악마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녀석이었다."
"그래도 악마는 악마입니다. 데일 경께서 저희 교의 위상을 드높여주신 거죠. 여신님께서도 크게 기뻐하고 계십니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니아고스를 직접 상대해본 데일은 녀석의 힘이 다른 악마들에 비할 바가 못 된다는 걸 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악마를 쓰러트렸다는 사실 그 자체다.
에리얼은 즐겁게 얘기했다.
"데일 경이 가니아고스를 쓰러트렸다는 소식을 들은 건 마침 평의원들끼리 회의를 하고 있었을 때였죠. 소식을 접한 교단의 주교가 흙 씹은 얼굴을 하는 게 어찌나 통쾌하던지!"
에리얼은 이번 일로 밤의 교도가 되고 싶다 하는 사람들이 늘었다느니, 덕분에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다느니 따위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했다.
데일은 대충 흘려들으며 대화를 끊을 타이밍을 가늠했다. 그렇게 슬쩍 주위를 둘러보던 그에게 눈에 들어오는 광경이 있었다.
언제나처럼 검을 휘두르는 스켈레톤. 눈에 피어오른 안광마저 흐릿한 저 나약한 스켈레톤이 왠지 눈길을 끌었다.
정확히는 그, 혹은 그녀의 동작이 눈에 걸렸다.
"백오십일만 삼천칠십일. 백오십일만 삼천칠십이."
정수리까지 검을 들어 올렸다가, 사선으로 내려 벤다. 그 상태에서 검을 앞으로 찌르고, 다시 팔을 들어 허공을 올려 벤다. 그 다음에는 다시 내려 베기.
그 과정을 스켈레톤은 무한히 반복하고 있었다.
기본적인 동작이다. 단순한 동작이고.
하지만 평범하지는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데일은 스켈레톤에게서 일전에 맞붙었던 크리스틴이 생각났다.
평생을 수련에 매진했던 검사의 검에서 풍기는 치명적인 냄새가 저 스켈레톤에게서 우러나왔다.
아니, 어쩌면 더 높은 경지일 수도 있는....
"데일 경? 듣고 계신가요?"
"아."
데일 경은 투구를 긁적였다. 한 순간 입을 삐죽인 에리얼이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 얘기가 재미없었던 모양이군요."
"...저 스켈레톤에게 시선이 빼앗겼다."
"마스터 루드비히 말이시군요?"
루드비히. 골격을 보고 짐작은 했지만 일단 인간 시절이었을 적에는 남성이었던 모양이다.
데일이 물었다.
"저 스켈레톤은 누가 일으킨 것인가? 아니면 자연스레 일어난 것인가."
언데드는 두 가지로 나뉜다.
흑마법이나 주술 따위로 시체를 일으키는 경우와 자연적인 현상으로 우연히 일어나는 경우.
전자는 시체를 되살린 주문 사용자에게 지배되며 절대 거역하지 못하는 반면, 후자는 자신의 본능대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에리얼이 답했다.
"굳이 따지자면 전자겠네요. 마스터 루드비히는 스스로의 의지로 죽음을 거부했으니까요."
"언데드가 되길 원했다는 것인가? 근데 왜 하필 스켈레톤으로?"
스켈레톤은 언데드 중에서도 가장 아래 단계에 자리해 있었다.
근육 없는 뼈다귀는 큰 힘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에리얼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리치나 데스나이트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니까 그랬겠죠? 저도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어요."
"흠."
데일은 스켈레톤을 유심히 살폈다. 생전에는 뛰어난 검사였을 것이다. 데일은 눈을 날카롭게 치뜨고 검을 쥔 검사의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하급 언데드가 된 지금, 스켈레톤에게서는 더는 지성이나 이지를 엿볼 수 없었다.
'미련. 아니면 집착인가.'
사람이 언데드가 되는 이유야 그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스켈레톤에게서 신경을 끈 데일이 물었다.
"기도를 드리고 싶은데."
"아. 지금은 전부 비어있으니 아무 방이나 들어가시면 돼요."
고개를 끄덕인 데일이 복도를 걸었다. 기도실 앞에 마검을 내려놓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좁은 기도실에 놓인 제단과 은촛대. 데일이 무릎을 꿇고, 투구를 벗자, 불도 붙지 않은 양초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는 하얀 발과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되어 아래로 흘러내렸다.
"왔습니다."
"어서 오거라 내 자랑스러운 아들!"
언제나 여신은 데일을 맞아주었지만, 오늘은 그 느낌이 더하다.
무려 아들 앞에 '자랑스러운' 수식어가 붙었다.
"잘했다! 아주 잘해주었구나! 그 사악한 뱀은 절대로 되돌아와서는 안 될 끔찍한 존재였다. 그냥 내버려두었다면 반드시 이 대륙을 파괴할 놈이었지. 네가 잘 막아주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마침 막 부활했을 때 마주쳤으니까요. 부활한 뒤 조금 시간이 지난 상태였다면 이기지 못했을 겁니다."
그 말 그대로였다.
가니아고스가 좀 더 힘을 되찾은 상태였다면, 데일은 이길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싸워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도망쳤을 것이다.
에스델을 비롯한 사제들이 돕지 않았다면 이길 수 없었을 것이고, 애초에 곱사등이가 데일을 보지 않았다면 의식을 늦췄을 수도 있다.
여러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승리.
하지만 여신은 말했다.
"우연이 겹치면 그건 운명이란다. 그리고 데일 너는 그 운명을 거머쥐었다. 그러니 스스로의 업적에 더 자랑스러워 하려무나."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지금껏 모은 영혼을 바치고 싶습니다."
그간 모아 놓은 잔혼이 많다. 이제 이것들을 힘으로 바꿀 시간이다.
여신이 감탄하며 말했다.
[정말 많이도 모아왔구나.]
"이 정도면 등급을 올릴 수 있겠습니까?"
[올릴 수 있다마다. 곧바로 올려주도록 하마.]
여신은 데일에게서 잔혼을 거두어갔다.
여신의 부드러운 손이 데일의 이마에 닿았다.
파앗!
새로운 힘이 데일의 손끝에서부터 천천히 퍼져 들어왔다.
데일의 눈에 서린 안광이 두어 차례 불온한 빛을 내뿜으며 기도실 안을 환히 밝혔다.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데일이 입은 갑옷이 마치 액체처럼 뚝뚝 흘러내리더니,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그러다 다시 데일의 몸에 달라붙어 다시 갑옷의 형상을 취했다.
하지만 이전과는 조금 다르다.
겉면은 좀 더 단단해지고, 어깨의 견갑은 더 날카로워졌으며, 종아리 부분에는 알 수 없는 문자가 세로로 새겨졌다.
데일은 고개 돌려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확인했다.
'등급이 올랐군.'
어둠 속에서도 존재감을 잃지 않던 데일의 그림자가 더욱 짙어졌다.
주위에 풍기던 쌀쌀한 기운은 한층 강해졌으며, 어둠 속에서 명멸하는 안광도 더 강한 빛깔을 냈다.
이 모든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데일은 한 단계 높은 격으로 올라섰다.
이러한 변화에 밤의 여신은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축하한다! 아들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성장하다니, 이 여신은 기쁘기 그지없구나! 아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다. 당장 에리얼에게 얘기해 축제를 벌이라 신탁을 내려야겠구나. 이런 때를 위해 모아 놓은 재물이 아니더냐!]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주책을 부리려는 여신을 말린 데일은 생각했다.
'4등급에 올라섰다.'
4등급. 직업의 허리에 해당하는 등급이며 본격적으로 흑기사로서 개성을 발휘하는 단계였다.
지금까지 주로 활용했던 강한 신체는 사실 흑기사만의 특징은 아니었으니.
데일이 물었다.
"제가 새로 배울 수 있는 기술이 있습니까?"
물론 있을 것이다. 데일은 확인하듯이 질문했다.
여신이 긍정했다.
[그렇단다. 총 세 가지의 기술이 있단다. 이 중에서 하나를 고르려무나.]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 선택지가 세 개가 떠올랐다.
"어둠 강타"
무기에 어둠의 힘을 담아 적에게 강한 충격을 줍니다.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 상대는 어둠이 전해주는 스산함에 경직되고 말 것입니다.
"그림자 방패"
그림자를 둘러 공격을 막아냅니다. 기술이 강화되면 그림자가 스스로 자아를 가지며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스스로 공격을 막아낼 것입니다.
"영혼 지배"
강력한 영혼의 힘으로 대상의 영혼을 지배해 공포에 빠트립니다. 정신력이 낮은 이들은 완전히 이성을 잃고 당신의 명령에 따를 것입니다. 죽은 이의 영혼을 강제로 시체에 고정해, 짧은 시간 동안 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어둠 강타. 그림자 방패. 영혼 지배.
셋 모두 흑기사의 공용 기술로 준수한 성능을 자랑한다.
가능만 하다면 셋 모두를 고르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선택을 내려야 했다.
데일은 신중히 고심했다.
'어둠 강타. 확실히 괜찮은 기술이지.'
무기에 어둠의 힘을 담아 더 큰 파괴력을 내는 어둠 강타는 굉장히 단순하면서도 파괴적인 기술이다.
다양한 상황에서도 활용 가능하고, 배워서 나쁠 일은 절대 없을 기술.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 선택지라 해야 할까.
하지만 지금의 데일에게는 조금 아쉬운 감이 있었다.
'파괴력은 지금도 충분한 것 같은데.'
데일의 괴력이라면 웬만한 적들에게는 충분히 타격을 줄 수 있다. 구태여 파괴력을 늘리는 건 낭비처럼 보였다.
게다가 데일이 사용하는 마검도 문제였다.
주문을 베어내는 힘이 있는 마검으로는 어둠 강타를 사용할 수 없다.
마검이 아닌 다른 부무장으로는 사용할 수 있다지만....
'굳이?'
데일은 어둠 강타를 우선 선택지에서 제외했다.
그 다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건 '그림자 방패'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그림자를 둘러 공격을 막아내는 기술.
자기 자신은 물론, 동료를 지켜주는 데에도 뛰어난 효과를 보이지만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방어에 투자하기에는 너무 아깝다.'
데일에게 수비적인 능력은 우선 순위가 높지 않았다.
그림자 방패는 다른 기술들을 포기할 만큼의 효과는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기술은 하나다.
'영혼 지배.'
적의 영혼을 사로잡아 지배하는 기술.
물론, 반드시 지배가 성공하는 건 아니다.
데일보다 정신력이 낮을수록 데일에게 지배당할 확률이 높아지는데, 성공률이 그리 높지만은 않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지배는 실패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의 영혼을 뒤흔드는 건 그 자체로 유효하다.
특히 마법사를 상대할 때 그랬다.
상대가 주문을 욀 때 영혼 지배로 머리를 뒤흔들면 그대로 주문이 취소되고, 마법사가 내상을 입게 만들 수 있다.
'무엇보다 죽인 상대를 되살려 싸우게 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다.'
갓 죽은 상대를 짧은 시간이지만 일으켜, 지배한다.
본래 시체가 가지고 있던 능력 역시 일부나마 사용할 수 있으므로, 흑마법사가 부리는 언데드 소환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게다가 훗날, 기술이 강화된다면, 다수가 얽히는 전장에서 말도 안 되는 위력을 선보일 수 있으니....
광역 공격이 부족한 데일에게는 여러모로 요긴하게 사용해볼 만한 기술이다.
데일은 결정을 내렸다.
"영혼 지배를 배우겠습니다."
[확실하느냐?]
"예."
한 줄기 그림자가 데일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영혼 지배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그 추상적인 감각이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다.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느냐?]
"예. 덕분에."
[장하다. 새로 얻은 기술이 아들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마지막으로 능력치에 투자하는 일만 남았다.
데일은 언제나 그렇듯 '근력 상승'에 가장 많이 투자했고, 그다음으로 '영혼 강화'에 투자했다.
'영혼 지배는 마력도 많이 잡아먹는 데다가, 내 정신력 수치에도 영향을 받는다.'
영혼을 강화하면 마력과 정신력을 동시에 올려준다.
영혼 지배를 제대로 사용하려면, 꼭 필요한 투자라 할 수 있다.
그 뒤, 남은 걸 '갑옷 강화'에 투자한 데일은 본인의 능력치를 살폈다.
[데일]
등급: 4
직업: 흑기사
근력: 72
내구: 45
마력: 32
체력: ―
정신력: 22
[보유 기술 목록]
생기 흡수
검은 안개
영혼 지배
[특성]
반인 반언데드
부정한 감각
밤의 여신의 축복
[칭호]
악마 살해자
등급은 이제 어느덧 4에 이르렀고, 등급에 걸맞지 않게 높은 근력과 내구 능력치가 눈에 들어온다.
'마력도 많이 올랐어.'
이번에 가니아고스의 피를 마신 것과 영혼을 강화한 게 성과를 보였다.
이전에 비해 데일은 수 배나 더 많은 마력을 다룰 수 있다.
만족스러운 성장.
이 수치야말로 데일이 적어도 틀린 방향으로 가지 않고 있다는 걸 증명해주었다.
여신도 기쁘게 말했다.
[장하다. 정말 장하다 내 아들. 계속 정진하거라. 그리하면 네가 바라는 소망에. 그리고 네가 알고 싶어 하는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란다.]
데일은 정중히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모든 볼일을 마쳤으므로,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왜 벌써 가느냐. 더 얘기하다 가지 않고.]
"...일이 바빠서 그렇습니다. 다음에 왔을 때는 더 길게 있다 가겠습니다."
밤의 여신은 마지못해 수긍했다. 데일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여신은 언제나처럼 데일의 등에 대고 아련하게 말했다.
[자주 찾아오거라 아들아. 꼭 일이 있어야만 찾아오는 게 여신은 섭섭하구나.]
그리고 조금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식으로 자주 안 찾아오면 에리얼에게 신탁을 내려 아들을 강제로 잡아오게 만들 거란다.]
데일은 못 들은 척하며 서둘러 기도실을 나섰다.
그러면서 새로 얻은 능력에 대해 생각했다.
'당장 어느 정도 다룰 수 있는지 궁금하긴 한데. 문제는 시험해볼 대상이 없다.'
다짜고짜 다른 사람들에게 기술이 먹히는지 시험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디 괜찮은 상대가 있다면 좋을 텐데....'
그때. 데일의 눈에 들어온 건 검을 휘두르는 스켈레톤이다.
"백오십일만 사천팔십삼."
데일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영혼 지배는 꼭 사람한테 써야만 하는 게 아니었지. 흑마법사들이 부리는 언데드를 뺏어 쓰는 것도 가능했어. 그렇다면....'
데일은 스켈레톤을 응시했다.
투구 속 안광이 번뜩이고, 몸에서 뻗어나온 마력이 파문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
그 마력이 스켈레톤을 덮쳤다. 두개골 속 뻥 뚫린 눈두덩이의 안광이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긴가민가하던 데일이 말했다.
"이리로 와라."
그러자 스켈레톤이 고개를 휙 돌리더니, 이쪽을 향해 검을 늘어트린 채 척척 걸어왔다.
그러고는 검을 쥐고 데일의 눈앞에 고개를 숙였다.
"오."
첫 번째에 바로 성공이라니. 솔직히, 데일 조차 당황스러울 정도로 깔끔하게 성공해버렸다.
그냥 연습이나 해보자는 생각으로 별생각 없이 시도했는데....
'이게 되네?'
다음 순간. 그 광경을 발견한 에리얼이 기겁하며 외쳤다.
"데일 경!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데일은 에리얼에게 같은 신도의 영혼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고 한참이나 설교를 들어야 했다.
영웅들
* * *
영혼 지배는 정신력이 약하고 의지가 흐릿한 대상일수록 더 큰 효과를 보인다.
가령 멍청한 짐승이라거나 하급 언데드가 그렇다.
데일의 영혼 지배가 스켈레톤에 정확히 먹혀든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정말. 뭐 하시는 겁니까 데일 경...."
잔소리를 늘어놓은 에리얼은 한숨을 푹 쉬었다.
영혼 지배에서 풀린 스켈레톤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듯, 멍하니 서 있었다.
에리얼이 물었다.
"마스터 루드비히. 괜찮으십니까? 정신이 좀 들어요?"
자기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스켈레톤이 반응했다.
스켈레톤은 언데드 특유의 타들어가는 안광으로 에리얼과 데일을 말없이 응시하다가, 이내 자기가 항상 서 있던 자리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허공을 향해 칼질을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아무래도 이전까지 세어 놓은 숫자를 잊어먹었는지 처음부터 다시 세기 시작했다.
데일은 투구를 긁적였다.
하다못해 화라도 낼 줄 알았건만.
저 스켈레톤은 감정조차 결여된 것 같았다.
마치 허공에 검을 휘두르기 위해 만들어진 기계와 같은 느낌이었다.
에리얼은 오른손을 허리에 짚으며 말했다.
"어쨌든. 데일 경이 더 강해진 걸 보니 저도 기쁘네요. 앞으로도 열심히 해주세요. 데일 경은 이제 누가 뭐라 해도 우리 교의 얼굴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데일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크게 마음에 담아두지는 않았다.
데일은 지금껏 해오던 대로 행동할 뿐이다. 사람들이 데일을 어떻게 생각하든 데일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게 신전을 나선 데일을 입구 앞에 앉아 있던 하티가 반겨주었다.
데일은 하늘에 쨍하게 떠 있는 햇빛을 보며 고민했다.
'이제 어디로 가지.'
당장 할 일이야 많았다.
레베카의 상회로 가서 의뢰 성공 보수도 받아야 했고, 용병 길드에 가서 보고도 해야 한다.
카일라의 여관에 가서 얼굴을 한번 비출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왠지 데일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할 일이 많군.'
이레네에 오랜만에 돌아오는지라 처리해야 할 게 많았다.
고민하던 데일은 하티에게 말했다.
"길드로 가자."
아직 해가 저 높이 떠 있다.
여관에 돌아가기에는 하루가 너무 많이 남았다.
귀찮지만, 데일은 우선 가란드를 만나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용병 길드는 언제나처럼 북적였다.
의뢰를 찾거나 함께할 동료를 구하던 용병들은 데일의 등장에 일순 동작을 멈췄다.
무려 악마를 사냥한 기사의 등장에 모두 입을 다물고, 기꺼이 데일을 위해 길을 터주었다.
그 한가운데를 걸어나간 데일은 접수대로 다가갔다.
이제는 데일에 대한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는 접수처의 직원이 친절하게 응대해주었다.
"오셨군요 데일 경."
"가란드를 보고 싶다."
"안 그래도 지부장님께서 애타게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바로 안내해드릴게요."
"나 혼자서 갈 수 있다."
"하하. 그럴 수는 없죠."
접수처에서 걸어 나온 직원이 데일을 직접 가란드의 집무실까지 안내했다.
이제껏 이런 적은 없었다. 보통 알아서 올라가라는 태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귀빈이라도 맞이하는 듯한 태도다.
익숙지 않은 대접에 영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필요 없다고 버티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데일은 직원을 따라 가란드의 집무실까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직원이 가란드의 방문을 두드렸다.
"지부장님. 데일 경을 모셔왔습니다."
"들어오도록."
가란드는 집무실에서 한가하게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저번 빈민가 수색 때 서류의 산에 파묻혀 있던 것과는 반대로 여유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가란드는 데일을 보며 반가운 표정을 짓더니 직원에게 말했다.
"안내 고마웠어. 이제 돌아가서 일 봐."
"예."
직원이 정중히 고개를 숙인 뒤, 문을 닫고 나섰다.
가란드가 손을 내밀며 권했다.
"아무래도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은데. 앉으시죠."
데일은 가란드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데일이 엉덩이를 대자 의자가 삐걱거리며 힘겨워했다.
가란드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더 강해지셨군요. 그쵸? 분위기도 좀 변했고요."
"그렇소."
"하긴. 당연한 거겠죠. 무려 악마를 쓰러트렸으니."
그런 가란드의 반응에 데일은 이미 몇 번이고 한 얘기를 뱉으려 했다.
"가니아고스는 갓 부활해서...."
"원래 힘의 일부밖에 내지 못했죠. 압니다. 하지만 반쪽짜리 악마라도, 그걸 토벌했다는 사실은 데일 경에게 정말로 값진 재산이 될 겁니다. 경험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적인 지위에서도 말이고요."
"지위?"
데일이 묻자, 가란드가 데일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실 이번 일은 저 윗구역의 귀족들과 황제 폐하께서도 주목하고 계십니다. 왜 안 그러겠습니까? 몇 년 만에 악마가 쓰러졌는데 말이죠. 설령 그게 갓 부활한 악마라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악마를 사냥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시민들은 물론, 전선의 군인들에게도 큰 힘이 되어준다.
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전쟁에서 언젠가 승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다.
여러모로 불안정한 제국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 황제 입장에서는 무척 기꺼운 일일 것이다.
가란드가 작게 말했다.
"이건 뒤에서 들리는 얘기지만, 아마 데일 경께 훈장이 수여될 것 같습니다."
"훈장?"
훈장. 큰 공을 세운 이들에게 황제가 내려주는 상훈.
훈장은 그 자체로 커다란 명예인 동시에 실질적인 이득도 가져다주었다.
가령....
"훈장을 수여 받으면 준남작 작위가 자연스레 따라옵니다."
준남작 작위.
최하위 작위라 해도 귀족은 귀족이다.
악마의 등장 이후 세상은 변했다. 귀족이라는 이름의 가치는 이전만 못하다. 능력이 없는 자는 죽어 없어져 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평민보다는 귀족이 살아가는 데에 더 유리했다.
누릴 수 있는 권리도 더 많았고.
데일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가란드가 말할 정도면 제법 신빙성 있는 얘기겠지만, 훈장에 대해서는 나중에 확실해지면 생각하고 싶었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바로 용병 등급이다.
"이번 의뢰도 마쳤으니, 이제 동패 등급이 되는 건가?"
"아. 그럼 우선 보고부터 해주시죠."
데일은 상행에 참여해 도적들과 싸운 일을 시작해, 가니아고스를 처치한 일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상세히 설명했다.
워낙 중요한 일인 만큼 가란드도 중간중간 질문을 던지거나, 사실을 재확인하며 꼼꼼히 보고서를 작성해나갔다.
그렇게 모든 작업을 끝마치자, 가란드는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후우. 악마를 살해한 경력을 가진 동패 용병은 용병왕 이후로 처음이군요."
"승급이 확정된 건가?"
"오히려 그 이상으로 승급해 드리고 싶지만... 절차가 절차인지라. 죄송합니다."
꾸벅 사과를 한 가란드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데일에게 건네주었다.
구리로 만든 얇은 판에는 데일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뒷면에는 길드를 상징하는 문양이 찍혀 있었다.
"용병패입니다. 찾으실까 봐 미리 만들어두었습니다."
용병패를 만지작거리는 데일에게 가란드가 설명했다.
"이제 동패를 달성하셨으니, 여러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의뢰를 찾는 데에도 우선권이 주어지고, 길드와 연계된 가게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물건을 구매할 수 있고, 또...."
"상위구역에 출입할 자격이 생기겠지."
"예. 맞습니다. 이제 데일 경은 도시에 필요한 인재로 인정되어, 상위구역으로의 출입이 허가됩니다."
그렇다면 외곽 구역과 빈민가에 있는 사람들은 도시에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까?
가란드는 증서 몇 장을 내밀었다.
이 사람은 상위구역에 출입할 권한이 있으며, 용병 길드에서 그 신분을 보장한다는 증서였다.
상위구역에 가려면 이 증서를 매번 보여주어야만 했다.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해주십시오. 다시 발급해드릴 수는 있지만, 절차가 복잡해 오래 걸릴 겁니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인 뒤, 증서를 조심스레 챙겼다.
당장 이 증서를 가지고 내일에라도 상위구역에 가볼 생각이었다.
"이만 일어나겠소."
해야 할 일을 마친 데일은 집무실을 나서려 했다. 그러다 자리에 우뚝 멈췄다.
방금 가란드가 언급한 용병왕이라는 이름에서, 질문해야 할 게 있었음을 떠올렸다.
'악마를 죽인 영웅들.'
이번에 가니아고스와 대적하면서, 데일은 온전한 상태의 가니아고스를 처치했다는 영웅들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그간 간간이 들었던 용병왕이라는 작자가 그 영웅 중 하나라는 것도 들었다.
이제 데일은 이전보다 성장했으며, 이 도시에서도 착실히 자리를 잡았다.
여유가 생긴 지금 이 궁금증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가란드는 아마도 이런 류의 일들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을 법한 사람이다.
영웅들에 대해 세간에 떠도는 소문은 허황되거나 영 신빙성이 없었으니.
데일이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게 있소."
"음? 말씀하시죠."
가란드가 의아해하며 말했다.
데일은 자기가 가진 의문에 대해 질문을 던지려 했다.
"용병왕과 그 영웅이라는 놈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때.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 뒤에, 직원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직원은 가란드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고, 가란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굉장히 미안하다는 얼굴로 데일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데일 경. 급한 일이 생겨가지고, 다음에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아, 시급한 일이면 지금 일을 조금 미뤄서...."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소. 급한 건 아니오. 다음에 물어보겠소."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데일은 직원의 배웅을 받으며 길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일을 마치니 해가 지고, 어스름한 그림자가 도시를 덮어나가고 있었다.
"...."
데일이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자 하티가 뭉툭한 코로 허리를 툭 찔렀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니다. 여관으로 돌아가자."
데일과 하티는 카일라의 여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어째선지 식탁에 음식이 가득 쌓여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엘레나나 카일라, 그리고 어느새 돌아온 하켄도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데일을 발견한 카일라와 엘레나가 화색을 띠었다.
"데일 경!"
"경!"
오랜만에 데일이 돌아오니, 어지간히 반가웠는지 표정에 전부 드러났다.
하지만 그보다 반가워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내 친우여! 어서 오게나!"
남들은 음식 나를 때 혼자서 무기를 닦던 프라우가 나는 듯이 달려오며 양팔을 활짝 벌렸다.
데일은 그런 프라우를 슬쩍 피한 뒤, 안쪽으로 들어섰다.
"이게 다 뭐지?"
카일라가 말했다.
"뭐긴요. 데일 경이 오랜만에 왔으니, 제가 솜씨 좀 부려봤죠."
데일이 카일라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당연히 공짜는 아니겠지?"
"물론이죠! 음식값은 하켄이 다 내기로 했어요!"
"응? 나는 처음 듣는 얘긴데?"
준비가 끝나자, 모두들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하켄은 그간의 여정이 얼마나 위험하고 굉장했는지에 대해 과장을 팍팍 섞어가며 떠벌거렸다.
프라우는 그런 하켄의 말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집중해 들었다.
시간이 지나자 소식을 들은 발튼이 찾아왔고, 일을 마친 에스델도 합류했다.
여관 안은 곧 시끌벅적하게 되었다.
데일은 카일라가 만든 맥주를 입에 대며 생각했다.
영웅이니 용병왕이니 하는 것들은 이후에 생각해보자고.
지금은 이 순간을 만끽할 뿐이다.
* * *
상위 구역 중에서도 3구역에는 마탑과 도서관, 용병 길드 등의 시설이 있고. 2구역은 귀족들의 저택과 극장 따위가 있었다.
그리고 2구역과 3구역이 둥그렇게 둘러싼 중앙에는 1구역. 즉 황궁이 있었다.
데일은 우선 3구역부터 천천히 둘러볼 생각이었다.
게임에서도 여러 번 다녀봤지만, 분명 달라진 게 많을 것이다.
3구역으로 통하는 성문은 7구역에 나 있었다. 그 성문을 지키는 건 무려 판금 갑옷을 차려 입은 기사였다.
"다음. 신분 확인하겠소."
기사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데일이 앞에 서자, 그 눈에 이채가 서렸다.
하지만 기사는 다른 쓸데없는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며, 오직 절차대로만 행동했다.
"증서를 내미시오."
데일은 가란드가 발급해준 증서를 내밀었다.
기사는 증서를 받아들여 옆에 있는 하급 귀족에게 넘겨주었고, 하급 귀족은 증서가 위조되었는지 아닌지를 꼼꼼히 살폈다.
하급 귀족이 기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위조가 아니라는 수신호였다.
기사가 증서를 다시 돌려주면서 물었다.
"3구역에는 처음이시오?"
"그렇소."
"그렇다면 몇 가지 규칙을 설명하겠소."
기사는 투구의 면갑을 올리며 말했다.
"우선, 2, 3 구역에서는 얼굴을 가려서는 안 되오. 그 투구는 벗어야 할 것이오."
얼굴을 가리고 헛짓거리하는 걸 방지하겠다는 것이다.
귀하신 몸이 많은 상위구역답게, 깐깐한 규칙이었다.
"그리고 허리에 찬 무기도 안 뽑는 게 좋을 것이오. 아니, 아예 들고 다니지 않는 게 제일이겠지. 한 번이라도 문제를 일으켰다가는 단순히 추방으로 안 끝날 것이오."
"알겠소."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순한 태도에 기사도 조금 어조를 부드럽게 하며 말했다.
"해가 지면 허가되지 않은 사람은 야외를 돌아다닐 수 없소. 그러니 해가 지기 전에 볼일 보고 다시 외곽구역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이오. 아시겠소?"
통금이 있다는 얘기인가?
데일이 알던 때랑은 조금 다르다.
그때도 엄격한 질서로 돌아가던 곳이었지만, 그때보다 규칙이 훨씬 빡빡해졌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어쨌거나 마음에 들든 안 들든, 규칙은 따를 수밖에 없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기사는 데일에게 길을 비켜주었다.
"들어가시오. 제국의 중심에 온 걸 환영하오."
데일은 해자 위에 놓인 다리에 발걸음을 옮겼다. 유난히 깊고 넓게 팬 해자에는 물이 가득 고여 있었는데, 그 탓인지 마치 자그만 강이 상위구역이 외부 구역을 가르는 모양새가 되었다.
데일은 기묘할 정도로 깊은 해자를 내려다보다, 이번에는 고개를 위로 들었다.
이레네의 외벽보다도 더 높은 성벽 위에는 궁수와 마법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요새가 따로 없군.'
백만대군을 이끌고 와도 이런 성을 함락시키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데일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과할 정도로 두꺼운 성벽을 지나친 데일이 가장 먼저 본 건, 웬 동상이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정교한 조각상. 데일은 현 황제나 건국왕의 조각상 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정갈한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름 없는 영웅들에게 영광있으라.]
[용병왕, 대마법사, 성녀, 그리고 얼굴 없는 기사.]
데일은 그 조각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인지 이 조각상은 그의 시선을 강렬하게 잡아끌었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찬찬히 뜯어볼수록, 이 조각상의 인물들이 자기 기억 속에 있는 어떤 인물들과 너무나 닮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얘들은...."
그게 누구였는지. 한참의 고민 끝에 데일은 마침내 기억을 떠올렸다.
'전부 내가 키우던 캐릭터잖아.'
단순한 착각일까?
확실히, 자그마한 모니터 너머로 보아왔던지라 완벽히 기억 속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몇몇 특징들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단순한 착각이라기에는 너무 절묘했다.
당황스러운 기분에 데일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머지않아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래. 내가 키우던 캐릭터가 있을 수도 있지.'
거기까지는 이해했다.
이미 이 세상에 떨어진 순간부터, 데일은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게 되었다.
자기가 키우던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이며, 영웅이 되었다 해도 이상할 건 없다.
오히려 그렇다면 몇 가지 의문이 해소되기도 한다.
누군가가 악마들을 토벌했다는 말에 데일은 의아함을 느꼈었다. 온전한 상태의 악마란 참으로 강력한 존재니까.
하지만 그 의문은 이제야 납득이 되었다. 이 조각상의 주인들이 함께 힘을 합쳤다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떻게 4명이 함께 있는 거지?'
이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은 싱글 플레이어 게임이었다.
영웅들
* * *
싱글 플레이어 게임.
즉, 주인공이 캐릭터를 조종하며 세계관을 탐험하는 그런 류의 게임이다.
다른 사람을 만날 일도 없고, 다른 캐릭터를 키우려면 게임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그런 류의 게임.
처음 데일이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데일은 여러 가설을 세웠었다.
내가 게임 속에 들어온 걸까?
아니면 게임과 배경만 같은 세계에 다시 태어난 걸까.
혹은, 나는 원래 이 세계의 주민인데 어느 날 갑자기 미쳐버려서 지구에 대한 거짓된 기억을 얻은 걸까.
가장 받아들이기 쉽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 건 첫 번째 가설이었다.
'내가 게임 속에 들어왔구나.'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데일은 게임 속의 배경과 가끔 마주치는 게임 속 인물들을 보며 반쯤 확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가설이 지금 흔들리고 있다.
데일이 키웠던 캐릭터들이 한자리에 모여있다. 이곳이 게임이 맞다면,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건 대체.'
데일은 조각상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턱이 각진 용병. 키가 크고 머리카락이 치렁치렁한 여사제. 단발머리에 음울한 눈을 한 마법사. 십자 모양으로 눈구멍이 뚫린 투구를 깊게 눌러쓴 기사.
모두 데일이 기억하는 그대로다.
착각이 아니었다.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영웅이니 용병이니 하는 것들은 그렇게까지 중요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알아보는 걸 뒤로 미뤘다. 그 밖에도 중요한 일이 너무 많았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이 네 명이 지닌 비밀이야말로 데일이 이 세계에 떨어진 이유와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실마리가 될 것 같다고.
데일은 강한 확신을 가졌다.
문득 밤의 여신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계속 정진하다 보면 내가 원하는 것과 알고 싶은 것에 다가갈 수 있을 거라 했던가.'
그 말 그대로였다.
데일은 고생 끝에 상위구역에 입성할 수 있었고, 그곳에 발을 들이자마자 이렇게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어쩌면 이 세상에 처음 오고 얻은 실마리.
이걸 놓쳐서는 안 된다.
'정보를 알아봐야 해.'
한가하게 상위구역을 둘러볼 때가 아니다. 지금은 이 실마리를 따라 움직일 때다.
하지만 어디서 정보를 알 수 있을까?
'최대한 신빙성이 높은 정보를 얻고 싶은데....'
그렇게 데일이 고민하고 있던 그때. 문득, 주위에 인기척이 느껴지는 걸 깨달았다.
너무 집중해 미처 알아채지도 못한 것이다.
데일은 반사적으로 검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했다.
'음?'
젊은 여인이 두 명 서 있었다.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서로 얼굴이 닮은 걸 보니 자매인 듯했다.
'귀족인가?'
귀족이 이렇게 대로를 돌아다니다니. 상위구역에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두 자매는 어째선지 데일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데일이 물었다.
"무언가 볼 일이라도 있으시오?"
데일이 말을 걸자 두 여인은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더니, 언니 쪽이 뺨을 붉히며 말했다.
"아, 아니에요. 그냥 처음 보는 기사님이 조각상을 보고 계시기에...."
여인은 데일의 얼굴을 홀린 듯이 바라보다, 그제야 그 갑옷이 흔히 볼 수 없는 색깔이라는 걸 알아챘다.
여인이 중얼거렸다.
"아. 흑기사...."
그러더니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데일 경이십니까?"
"...나를 아시오?"
데일이 묻자 두 여인은 서로를 보며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이내 흥분한 목소리로 서로 속닥거렸다.
데일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그러시오."
"아뇨. 그. 책에서 나와있는 것보다 잘생기셔서...."
"책?"
"패, 팬입니다! 여기에 글귀 하나만 적어줄 수 있으신가요?"
그러더니 품에서 두꺼운 책을 꺼내서 데일에게 내밀었다.
비싼 가죽으로 된 표지에 무려 금박으로 제목을 새겨 놓은 책이었다.
데일은 제목을 읽어내렸다.
'명예로운 흑기사의 모험과 결투, 그리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
데일은 종이를 넘겨 빠르게 내용을 훑어보았다.
주인공은 각지를 모험하며 약자를 돕는 명예로운 흑기사다.
어느 날 그는 오래된 왕국의 공주가 사악한 마법사와 비열한 기사의 농간에 넘어가 곤욕을 치를 거라는 소문을 들었다.
참지 못한 주인공은 기사에게 결투를 벌여 승리하고, 그 부하와 사악한 마법사들까지 단칼에 베어버린 뒤, 공주를 무사히 구출해낸다.
그 뒤, 공주와 주인공은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때쯤에 데일은 책을 툭 덮었다.
여인들이 즐겨 읽는 그런 로맨스 소설이면서 남자들이 즐겨 읽는 기사도 문학과도 비슷한 구석이 있는 책이었다.
문제는 이 이야기가 낯이 익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주인공의 이름이 데일이다.
'아니. 이거 내 얘기잖아.'
누가 보더라도 데일의 이야기를 가져다가 썼다. 허락도 없이 말이다.
심지어 책 뒤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이야기에는 조금의 허구가 섞여 있지만, 대부분은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말해둡니다.]
데일이 보기에 이 소설의 9할은 거짓이었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실화에 기반한 사건에 대해 더 관심을 기울이니, 그걸 노린 상업적 전략인 걸까?
덕분에 데일은 꽤나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다.
두 여인은 눈을 초롱초롱 뜨며 말했다.
"간악하고 끔찍하며 여인을 희롱하기 좋아하고 몸에서 지독한 냄새가 나는 크리스틴 경과의 결투에 대해 얘기해줄 수 있으신가요?"
"음. 크리스틴이 여자를 희롱하는 건 모르겠지만 냄새는 안 났던 것 같소."
"무고한 아녀자를 마법을 연구를 위한 실험체로 삼아버리는 마법사들에 대해서도 얘기해주세요!"
"으음."
"아! 공주와는 지금도 뜨거운 사랑을 나누시고 계신가요?"
"엘레나는 키가 내 허리에밖에 안 오는 어린애요."
데일은 소설의 내용이 대부분 허구임을 한참이나 설명해야 했다.
두 여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별로 받아들이지 않는 눈치였다.
결국, 데일은 그들이 지닌 소설책의 앞장에 '카타리나와 마리카. 항상 행복하시오.' 라고 적고 나서야 질문 세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참고로 카타리나와 마리카는 자매의 이름이었다.
간신히 벗어난 데일은 다시 조각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자매가 말했다.
"참 잘 깎은 조각상이죠? 저희도 영웅들을 멀리서나마 본 적이 있었는데, 정말이지. 외모가 이 조각상이랑 똑같았답니다."
고민하던 데일이 물었다.
"영웅들에 대한 관심이 생겨서 그러는데, 혹시 이들에 대한 얘기를 들을만한 곳이 있겠소?"
자매는 서로 속닥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는 저희도 해드릴 수 있답니다. 아! 그러면 저희 저택으로 오시겠어요? 차를 대접해드리면서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데일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소. 되도록 객관적인 정보를 얻고 싶은 거라...."
"으음. 객관적인 정보 말이죠."
두 자매는 머리를 맞대고 고심에 빠졌다가, 이내 손뼉을 짝! 하고 치며 말했다.
"아. 그러면 도서관으로 가보시는 게 어떠세요?"
"도서관?"
"예! 도서관에는 중요한 일들을 기록해놓는 기록관님이 있다고 들었어요. 기록관님이라면 최대한 정확하게 기록해두지 않았을까요?"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고, 그런 인종은 역사에 주관을 섞을지언정 없는 사실을 지어내지는 않는다.
데일이 원하는 정보를 줄 수 있을 것이다.
두 자매와의 진 빠지는 대화는 나름의 소득이 있었다.
데일은 감사를 표한 뒤, 고개를 돌렸다.
데일의 등에 대고 자매가 말했다.
"또 봐요 데일 경!"
"다음에는 함께 차를 마실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하고는 손수건을 꺼내 흔들어댔다.
그 천진난만한 모습에 데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데일은 기억을 더듬어 도서관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3구역의 정경을 구경했다.
우선 가장 눈에 크게 들어오는 건 깔끔한 거리다. 잘 관리하는지, 도로에는 먼지도 잘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표정도 밝았다.
옷도 비싸고, 삶에 여유가 있어 보였다.
데일은 행인들의 수다를 엿들었다.
"연주회에서 들었던 새 음악 말이죠. 확실히 선율이 좋던 게 제 취향이었어요."
"카리 남작가의 무도회에서 그 망나니가 또 소란을 일으켰다는군. 참 골치 아프겠어."
"아가씨도 그 책 읽었나요? 흑기사가 공주를 위해 결투에 나서는 내용인데...."
대화 역시 바깥에서는 쉬이 듣기 힘든 여유로운 주제들뿐이다.
평화롭다.
마치 바깥에 악마의 군세가 침공해 오는 상황이나, 각지의 국가와 도시가 무너져 피난민이 몰리는 상황은 자기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듯한 태도다.
빈민가와 외곽구역에서 늘 상 느껴지는 치열함도 없다.
마치 다른 국가. 다른 세상 같다.
성벽을 하나 넘는 것만으로도 펼쳐지는 별천지.
데일은 영 익숙지 않은 분위기를 느끼며 3 구역을 천천히 걸었다.
빈민가나 외곽구역처럼 골목이 우거지지 않아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보이는 건물들은 모두 커다랗고 웅장하다.
황궁을 감싸는 마지막 성벽은 다른 그 어떤 성벽보다도 튼튼해보였고, 높이 솟은 회색 탑은 구름을 찌르는 듯했다.
저 회색 탑이 바로 마탑이었다.
기억대로 마탑을 지나쳐 더 걷다 보니, 널따란 광장의 끝자락에 위치한 5층 건물이 보였다.
'저기가 도서관이군.'
다행히 기억 속 위치와 차이는 없었다. 데일은 도서관을 향해 다가갔다.
도서관에는 학자나 마법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데일처럼 갑옷과 무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데일이 들어서자 젊은 사서가 당황해하며 말했다.
"어, 저. 여기는 도서관인데요?"
"알고 있다."
사서가 데일을 묘한 눈빛으로 보더니 다시 말했다.
"도서관은 책을 읽는 곳이에요."
"...왜 당연한 걸 설명하는 거지?"
하지만 사서는 여전히 데일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기사가 도서관에 찾아오는 일은 적었다.
가끔 교단의 성기사들이 금지된 서적을 감시한다고 찾아오는 정도?
흑기사가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 사서에게 데일은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기록관님을 찾아오셨다는 거네요."
"내가 만날 수 있겠나?"
"되긴 됩니다. 되는데...."
사서가 말을 흐리자 데일이 물었다.
"무슨 문제 있나?"
"문제라 해야 할까. 으음. 이건 제가 설명하기보다는 직접 설명하는 게 낫겠네요. 따라오세요."
사서는 데일을 이끌고 계단을 올랐다. 둘이 향한 곳은 먼지가 풀풀 나는 고서들과 용도를 알 수 없는 잡동사니가 산처럼 쌓여 있는 곳이었다.
그런 고서의 산 위에서 커다란 고깔 모자를 쓴 난쟁이가 지루한 표정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사서가 말했다.
"저분이 기록관님이에요. 성격이 괴팍하시니까 조심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아, 제가 괴팍했다는 말을 한 건 비밀이에요?"
데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서가 사라졌다.
데일은 고서의 산을 지나쳐 기록관에게 다가갔다.
기록관은 데일을 흘끔 보더니,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지식의 보고에 검을 들고 오다니. 하여간 요즘 것들이란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
데일이 기록관에게 말했다.
"당신이 제국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모두 기록한다고 들었소. 묻고 싶은 게 있어 이렇게 찾아왔소."
기록관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툭 내뱉었다.
"299명."
"?"
"그런 식으로 나를 찾아온 얼간이가 299명이다. 하지만 그거 알아? 나는 멍청이들한테 내 귀한 지식을 내줄 생각이 추호도 없어!"
기록관은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눈에서는 광기 비스무리한 감정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에 데일은 생각했다.
'괴팍하긴하군.'
척 봐도 상대하기 쉽지 않은 노인네였다.
기록관이 외쳤다.
"감히 나에게서 감히 정보를 빼내가려면 나를 싸워서 이겨야 할 거다! 하지만 앞서 왔던 299명의 머저리는 실패했지. 자! 네가 300명째가 될 테냐?"
"알겠소."
"음?"
"싸워서 이기면 된다는 것 아니오."
"그래. 나랑 지혜로 승부를 겨뤄...."
스릉.
데일이 마검을 뽑았다. 기록관은 마검이 풍기는 흉흉한 분위기에 굳어버렸다.
그런 기록관에게 데일이 말했다.
"싸움은 내 전문이오. 바로 끝내겠소."
"자, 자, 자, 잠깐! 싸우자는 건 그런 게 아니라...!"
데일은 기록관의 말을 끊어내듯. 바닥을 박차며 검을 들어올렸다.
기록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의 무패 신화가 깨지려 하고 있었다.
영웅들
* * *
데일이 살벌하게 달려들자 기록관이 서둘러 양손을 쫙 펼쳤다. 입안으로는 주문 구결을 외웠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고서들이 두둥실 떠올랐다. 강한 마력이 느껴졌다.
'마법사?'
평범한 노인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수준이 높은 마법사였다.
데일은 팔을 휘둘러 고서를 쳐냈다.
그와 동시에 벽장에 걸려 있던 책들이 와르르 튀어나오더니, 데일의 머리를 향해 비처럼 쏟아졌다.
퉁! 투퉁!
무거운 책이 데일을 두들겼다. 그러고는 어떻게든 데일에게 달라붙으려 했다. 마치 책 자체에 의지가 있는 것 같이 행동했다.
하지만 데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정도로는 데일에게 타격을 줄 수 없다.
데일은 고개를 돌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웬 양탄자가 뱀처럼 기어오더니 데일을 휘감으려 했다.
데일은 마검을 내질러 양탄자를 꿰뚫은 뒤, 양탄자의 한자락을 밟아 그대로 반으로 찢어버렸다.
양탄자는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몸부림치다,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기록관이 외쳤다.
"안 돼! 내 양탄자"
한데. 왜인지 목소리가 위쪽에서 들려왔다.
데일은 고개를 위로 들었다.
저 위쪽 벽장 꼭대기에 기록관이 서 있었다.
"야 이 무식한 것아!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기록관이 팔을 붕붕 휘두르며 역정을 냈다.
데일이 그런 기록관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쪽이 싸우자 했지 않소."
"누가 무기 휘두르면서 싸우재? 어? 사람이 어, 머리도 좀 쓰고, 지혜도 좀 겨루고 그래야지!"
"...."
데일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냥 무기로 싸우면 안 되오? 그 편이 더 속 편한데."
"시끄러! 내 말대로 안 할 거면 썩 꺼져!"
한숨을 속으로 삼킨 데일이 말했다.
"일단 알았으니까 거기서 내려오시오."
기록관을 아래를 슬쩍 본 뒤,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못 내려가."
"또 왜 그러시오."
"방금 마력을 다 써버렸어."
"겨우 그거로?"
"겨우라니!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거라고! 그리고 실전 마법은 내 전공이 아니야!"
데일은 양손을 벌리며 말했다.
"뛰어내리시오. 받아주겠소."
"정말 받아주려는 거 맞아? 일부러 나를 떨어트려서 죽일 속셈 아니야?"
"싫으면 계속 그렇게 있으시던가."
그건 달갑지 않은지 기록관은 헛기침을 한차례 한 뒤, 침을 꿀꺽 삼키고 아래를 향해 뛰어내렸다.
풀썩.
데일은 요령 좋게 기록관의 겨드랑이를 붙잡아주었다.
삐쩍 마른 기록관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내려줘."
기록관이 머쓱하게 말하자, 데일은 기록관을 바닥에 내려 주었다.
새삼 기록관을 보니 그 키가 매우 작았다. 드워프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시선을 눈치챘는지 기록관이 말했다.
"혹시라도 오해 할까봐 말하는 거지만 나는 노움과 인간의 혼혈이다. 나 정도면 꽤 큰 편이라고."
데일은 일전에 만났던 노움인 레온의 키를 생각했다. 딱히 기록관이 레온보다 큰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굳이 그런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대신 다른 걸 물었다.
"마법사였소?"
"내가 마법사가 아니라면 이런 병신 같은 모자를 쓰겠어?"
기록관은 자기가 뒤집어쓴 큼지막한 고깔모자를 가리켰다.
데일도 수긍했다.
"확실히 그렇군."
"거기서는 빈말로라도 모자가 멋있다고 했어야지!"
뭐 어쩌라는 것일까.
"하여간. 이래서 요즘 것들은 말이야."
데일은 이 나이 많은 마법사를 상대하는 게 슬슬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새기 전에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뭘 어떻게 겨루자는 거요."
"아. 그래. 그런 얘기를 하고 있었지."
기록관은 흰수염을 쓰다듬으며 거드름을 피웠다.
"기록이란 건 억만금의 가치가 있다. 다들 간과하고 있지만 종이와 글자야말로 우리 사회를 발전시킨 장본인이라고. 그런 귀한 걸 아무에게나 넘겨줄 수 없지."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혀가 길다.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면 안 되겠소?"
"쯧. 인내심도 없어가지고는. 요는 이거다. 나는 나보다 멍청한 놈들에게 내 소중한 지식들을 넘겨줄 생각이 없어. 특히 허리에 칼 찬 놈들에게는 더더욱!"
기록관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데일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거요."
"나는 널 농락한 수백 가지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재미도 없고, 정당한 승부가 되지 않겠지. 너와 겨룰 건 이거다!"
기록관이 손가락을 튕기자, 고서더미 한편이 스르륵 밀려나며, 그 아래 잠들어 있던 나무판이 저절로 굴러왔다.
나무판 위에는 흰색과 검은색 돌로 만들어진 말들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데일에게도 익숙한 게임.
체스다.
기록관이 으스대며 말했다.
"이건 전쟁을 본떠 만든 놀이다. 너희 칼 찬 놈들이 좋아하는 전략과 전술 역시 들어가 있지. 어때. 이 정도면 공평하지 않겠어?"
기록관은 규칙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데일이 알고 있는 것과는 별 차이가 없었다.
데일이 물었다.
"이걸로 이기면 되는 것이오?"
"그래. 이기기만 한다면, 뭐든 해주마."
기록관은 장난에 성공한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물론 네가 이길리는 없겠지만!'
기록관은 그간 자신을 찾아온 299명을 체스로 꺾어낸 무패의 승부사다.
심지어 불리했던 판은 단 하나도 없었다.
'결국, 이건 상대의 수와 심리를 읽어내면 이기는 싸움이다.'
수에서는 생각이 드러난다.
그리고 적의 생각과 심리를 읽기만 하면 승리는 놀랍도록 쉽게 거머쥘 수 있는 법이다.
'내가 읽어내지 못하는 수 따위는 없다. 날고 기는 마법사들도 나를 이기지는 못했어. 적어도 인간은 나를 이길 수 없어!'
기록관은 나이 많은 마법사들 특유의 끝 모를 자신감을 내비치며 거만하게 말했다.
"자! 어디 한번 덤벼봐라!"
* * *
입구를 지키고 있던 도서관 사서는 책을 분류하던 중, 문득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웬 흑기사가 왔었지.'
사서는 고개를 옆으로 들었다.
저 책상 앞에 여인들이 모여 두꺼운 책을 읽으며 꺄르륵 대고 있었다.
최근 상위구역의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설이었다.
'저 소설의 주인공도 흑기사였던가.'
아쉽지만 사서는 소설책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그보다는 자신의 상관인 기록관에 대해 생각했다.
'괜찮으려나. 무기도 찼던데.'
그 괴팍한 노인네를 상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자기도 열 받았던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덜컥 무기를 뽑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뭐, 별일은 없겠지만.'
기록관이 뛰어난 마법사라는 걸 아는 사서는 이내 마음을 놓았다.
지금쯤 기록관은 갖은 구실로 체스로 승부를 걸어, 흑기사를 박살내고 있을 것이다.
체스로 상대를 꺾어 상대를 멍청하다고 비웃는 건 기록관의 고약한 취미 중 하나다.
기록의 중요성이니 뭐니 하는 건 전부 구실에 불과하다.
사서도 처음 이곳에 취직했을 때 원치 않는 체스를 두느라 얼마나 곤욕을 치렀던가.
'한번 가서 볼까.'
그 큰 덩치의 흑기사가 얌전히 체스를 두는 건 잘 연상이 가지 않았다.
사서는 쟁반에 차와 과자를 담아 계단을 올랐다.
'조용하네?'
사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지금쯤이면 체스로 상대를 박살내고 비웃음을 흘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사서는 빼꼼 고개를 내밀며 안을 살폈다.
둘이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체스를 두고 있었다. 한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데일은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반명, 기록관의 이마에는 땀이 가득 맺혀 있었다.
사선은 체스판의 상황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눈을 부릅떴다.
"!"
박살이 나고 있는 건 데일이 아닌 기록관이었다.
체스판에는 데일의 하얀색 말이 지배하고 있었고, 검은 말은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사실상 승부가 난 상황.
그 사실을 기록관도 알지만 차마 인정하지 못하고 애꿎은 말만 만지작거렸다.
사서는 감탄하며 데일을 쳐다보았다.
'기록관님을 이기시다니. 똑똑하기로는 도시에 적수가 없으신 분인데....'
기사들은 무식하고 우악스럽다는 편견이 지금 산산이 깨져나갔다.
사서는 체스판의 상황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그렇게 몇 번의 수가 오고 간 뒤. 승부가 났다. 데일이 말했다.
"승부가 난 것 같소만."
기록관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삼세판."
"?"
"그래! 애초에 두 번 이기는 쪽이 승리하는 거였다!"
"...."
데일과 사서가 둘 다 한심한 시선으로 기록관을 바라보았다.
기록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지만, 뜻을 굽히지는 않았다.
고집스럽게 판 위의 말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하는 짓이 어째 마법사나 거인이나 똑같구나.'
데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백색 말을 가지런히 배열했다.
기록관은 데일을 우습게 봤지만 사실 데일은 꽤나 수준급의 체스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할 게 그것밖에 없었지.'
데일은 조부와 함께 보육원의 아이들과 자주 놀아주곤 했다.
하지만 보육원의 아이들이 즐길만한 놀이는 많지 않았다.
낮에는 축구를 하고, 해가 지면 체스나 오목을 두었다.
매일 하다 보면 당연히 잘해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날이 갈수록 아이들의 수준은 훌쩍 올랐다.
하지만 아이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어느 날. 어느 똘똘한 아이가 컴퓨터의 체스 기보를 외워왔다.
당시 체스는 이미 컴퓨터에 정복당한 상태였다.
그런 컴퓨터의 기보를 외운다는 건 곧 보육원에서 적수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날부로 아이들은 너도나도 기보를 외우기 시작했다. 이기기 위해. 데일 역시 마찬가지다.
재미를 느끼고 우호를 다지는 체스가 아닌, 오로지 이기기 위한 냉철하고 기계적인 체스를 두어야 했다.
보육원에 체스 열풍이 끝나기 전까지 말이다.
'그때 고생깨나 했지.'
당시에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새로운 문물에 익숙지 않은 조부는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짓이냐며 혀를 끌끌 차곤 했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그것도 다 아련한 추억이었다.
'애들은 잘 지내려나.'
그리고 그때 했던 노력이 시간을 지나 이런 곳에서 빛을 발했다.
데일은 큰 고민 없이 말을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기록관의 눈이 마구 흔들렸다.
기록관은 침을 꿀꺽 삼켰다.
'대체. 도대체 이 수에는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여태 만나온 어떤 상대도 이런 수를 둔 적은 없었다. 기록관은 도저히 데일의 의중을 읽어낼 수 없었다.
그 얼굴을 통해 심리를 읽어내려 했지만 그것 자체도 쉽지 않았다.
데일의 무표정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다.
인간을 상대로는 절대 지지 않을 거라 확신했던 기록관이다.
솔직히, 방금 전판은 방심해서 실수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록관은 느꼈다.
'수에서 아무런 생각도 읽어낼 수 없어. 마치 바위랑 두는 기분이다.'
거대한 벽을 마주하는 기분.
수를 거듭할수록 기록관의 손은 느려졌고, 판 위의 상황은 시시각각 안 좋아졌다.
그리고 결과는 어김없이 참패.
기록관은 멍하니 체스판을 내려다보았다. 데일이 말했다.
"내가 이긴 것 같소."
"...."
"이제 약속을 지킬 때요. 설마 이제 와서 말을 바꿀 생각은 아니리라 믿소."
"크으으윽."
분한 듯. 이를 악문 기록관이 손을 옆으로 뻗었다.
그러자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책 중 몇 권이 그의 손으로 날아왔다. 기록관은 그 책을 내밀었다.
"영웅들에 대한 일 중, 사실이 확인된 사건만을 기록해둔 책이다. 내가 직접 기록한 것이니, 거짓은 없을 거다."
데일은 책을 받아들였다. 생각보다 분량이 컸다. 정말로 상세하게 기록해둔 모양이다.
목적을 달성한 데일이 곧장 떠나려 했다. 그런 데일의 망토 끝자락을 노인이 붙잡았다.
"왜 그러시오."
기록관은 머쓱하게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한 판 더 둬. 네놈의 수를 이제 이해할 것 같다. 더 두면 내가 이길 것 같단 말이다!"
그런 기록관을 물끄러미 쳐다본 데일이 물었다.
"맨입으로?"
기록관의 얼굴이 마구 일그러졌다.
영웅들
* * *
[영웅들이 처음 두각을 드러낸, 적어도 믿을만한 기록이 있는 사건은 아스트라스 공방전이다.]
[당시 2군단이 지키고 있던 아스트라스 성은 '분열의 칼라일'의 끝 모를 군대에 함락당할 위기였다. 아스트라스 성이 함락당하면 중부 지방이 전란에 휩싸일 것은 자명했다.]
[그때 등장한 게 네 명의 영웅이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그들은 함께 힘을 합쳐 악마의 군세를 뚫고, 악마 칼라일을 완전히 소멸시켰다.]
[그 당시를 지켜본 병사들은 입을 모아 증언한다. 영웅들은 하나같이 인간을 초월한 강함을 지녔다고. 그런 넷이 뭉쳤으니 중급 서열의 악마가 쓰러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 뒤, 영웅들은 흩어졌다. '대마법사'는 마탑의 마스터 중 하나가 되었으며, '성녀'는 교단에서 주교를 위협할 위치가 되었고, '용병왕'은 용병 길드의 전설이 되었다.]
[홀로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돕던 '얼굴 없는 기사'를 제외하면,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단체 세 곳에서 주도권을 거머쥔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탑. 용병 길드. 그리고 교단. 그 세 곳에서 지지를 받는다면 못 할 게 없겠군.'
이 네 명이 하나의 뜻을 공유하는 동지라면, 이 네 명은 황제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강력한 세력이나 다름없다.
'아니. 애초에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계획적으로 행동한 건가?'
탁!
기록관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체스 말을 움직였다.
그러자 데일은 별 고민 없이 무심하게 체스 말을 움직였다.
기록관이 움찔했다.
데일은 다시 책을 읽어 내려갔다.
[갑작스럽게 세력을 떨치면, 기존 기득권의 경계를 사기 마련이다. 그 당시에 귀족들 중심으로 영웅들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그 귀족들 뒤에 누가 있는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데일은 미간을 좁혔다. 말을 할 거면 끝까지 하던가, 아니면 아예 언급을 말던가.
책을 쥐고 기록관에게 내밀었다.
"귀족들 뒤에 누가 있다는 거요."
기록관은 미간을 좁혔다.
"당연히 황제지 누구겠어. 생각해야 하니까 말 걸지 마."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라면 일부러 모호하게 언급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러나 귀족들의 견제는 처음부터 성공할 수 없었다. 불온한 움직임을 읽은 영웅들은 가장 강렬한 방식으로 자기 영향력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한 자리에 모여 악마를 사냥하기 시작한 것이다.]
[덴데. 가니아고스. 오로도이아를 비롯한 하위 서열과 중위 서열 악마를 열이나 죽였다. 전쟁 이후 파죽지세로 밀고 오던 악마들이 처음으로 기세를 잃었다. 전선이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고작 네 명이 만들었다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업적이었으며, 책상에서 펜대나 굴리는 귀족들은 절대 이뤄내지 못할 쾌거였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선이 소강상태에 빠졌다 해서 의아해했는데, 설마 악마를 열이나 죽였을 줄이야.
[영웅들의 활약은 그들이 이 제국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걸 증명했다. 시민들은 무한한 지지와 사랑을 보냈다. 제국의 역사 동안 이렇게 사랑 받아온 영웅들이 있었던가? 간혹 불손한 호사가들은 말한다. 이때가 1000년을 이어온 황조가 가장 위태로웠던 시기였다고.]
성문을 통과하자마자 보이는 조각상이 황제가 아닌 영웅들이었으니, 그 위상이 어떤지는 어렵사리 예상할 수 있다.
그들의 위업은 어떤 말로도 흠집 낼 수 없을 만큼 찬란히 빛났다.
하지만 데일은 이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왠지 알 것 같았다.
으레 권력자들이란 자기 자리를 넘볼만한 경쟁자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법이다.
[수면 아래에서 여러 일들이 벌어졌다.]
기록관은 그렇게 적어두었다.
상세히 적어놓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너무나 무성의하고 건성인 문구다.
하지만 데일은 안다. 이게 기록관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데일은 다음을 읽었다.
[영웅들은 그 뒤, 2군단으로 향했다. 2군단에는 상위 서열 악마인 '겁화의 콜고라스'가 진격해오고 있었다. 영웅들은 콜고라스를 막아냈다. 이후. 영웅들은 세간에서 완전히 잠적해버렸다.]
데일은 종이를 넘겼다.
다음 장은 비어 있었다.
어째 뒤로 갈수록 내용이 듬성듬성하고, 생략이 많이 되었다.
적지 못할 내용이 대부분이었던 건가?
그래서 데일은 직접 물었다.
"이 이후로 영웅들은 어떻게 되었소."
"시끄럽다고! 지금 생각하고 있잖...."
"한 수 물러주겠소."
"큼."
코를 쓱 훔친 기록관이 물었다.
"뭐가 궁금하다고?"
"콜고라스와의 싸움 이후 잠적했다고 나와있는데, 평범하게 생각하면 그냥 악마와의 싸움에서 죽은 것 아니오?"
기록관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분명 악마를 패퇴시키고 병영으로 살아서 돌아왔다는 목격 증언이 있으니."
데일은 생각을 정리했다.
갑자기 나타난 영웅들은 큰 활약을 보였다. 그들은 전황을 완전히 뒤바꿔버렸다.
하지만 그 덕분에 경계를 샀다. 아마도 황제와의 마찰이 있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악마와 싸우고, 왜인지 종적을 감춰버렸다.
이어지는 듯하면서도 무언가 아귀가 맞지 않는. 그런 사건의 연속.
데일은 생각했다.
'찾아야 해.'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영웅들이야말로 데일과 관련된 비밀을 풀 수 있는 실마리다.
찾아야 한다. 어디에 숨어 있든.
막연히 강해지는 것만 추구하고 있던 데일에게 목표가 생겼다.
데일은 체스말을 앞으로 움직여 승리를 확정했다.
기록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
"물어볼 게 있소."
"...한 판만 더 두면 안 될까? 이번에는 진짜 이길 것 같은데."
"대답만 잘해준다면."
"큼. 묻고 싶은 게 뭔데."
데일이 입을 열었다.
"그쪽이 생각하기에 잠적한 영웅들이 어디 있을 거라고 보시오."
"음. 호사가들이 술 안주거리로 삼을만한 주제군."
판에서 체스 말을 싹 쓸어낸 기록관이 말했다.
"글쎄. 추측이야 많지. 전선의 장군들과 붙어먹어 반란을 준비하고 있다느니, 제국 내에 숨어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느니, 악마 쪽에 넘어갔다는 터무니없는 얘기도 있고."
"그쪽은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시오."
"그쪽이 아니라 안드레이다 이 건방진 것아. 파벨의 아들이자 마탑의 일곱 마스터 중 4석인 안드레이."
데일이 멈칫했다.
"...마탑의 마법사였소? 그것도 마스터?"
"그래 이놈아. 이제 좀 달라 보이냐?"
데일은 오래된 책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나는 도서관을 둘러보았다. 좋게 말해도 깨끗한 환경은 아니었다.
데일은 기록관이라는 직책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중요하다면 중요한 일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탑의 마스터가 할 만한 일은 아닌데.'
그런 의중을 눈치챘는지 안드레이가 재빨리 말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마탑에서 쫓겨난 거 아니야. 내가 그 머저리들이랑 같이 있기 싫어서 나온 거라고."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소."
하지만 안드레이는 계속 설명하려 했다.
"하여간에. 비전투 계열 마법이라고 무시나 하고. 원래 전쟁 전에 마법의 꽃은 비전투 계열 마법이었다고. 사람 죽이는 기술이나 연구하는 게 뭐 그리 자랑스럽다고. 맨날 키 작고 늙었다고 뒤에서 욕하기나 하고. 내가 못 들은 줄 알았나보지...?"
투덜거리는 안드레이의 말이 잦아들 낌새를 보이자, 데일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괜찮겠소?"
"뭐가."
"마탑에서는 나를 별로 안 좋아할 텐데."
엘레나를 끌고가 그 재능을 취하겠다는 계획은 데일에 의해 수포로 돌아갔다.
심지어 그에 대한 이야기가 소설로 나와 상위 구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소설 속에서 마법사들은 어지간히도 끔찍한 작자들로 묘사되어 있었다.
당사자들은 얼마나 치가 떨릴까.
"나한테 이렇게 도움을 주는 걸 다른 마법사들이 별로 안 좋아하지 않겠소."
하지만 안드레이는 심드렁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가 보군. 넌 마탑이 한 몸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나?"
"아니었소?"
"옛날에나 그랬지. 지금 마탑은 하나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야. 다들 여유가 생기니까 파벌을 만들어서 허구헌 날 정치 싸움이나 일삼고 있거든. 오히려 다른 파벌을 엿먹였다고 네게 고마워해야 할걸?"
데일이 기억하는 마탑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악마를 막아내자는 대의를 향해 함께 달려가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변한 모양이다.
'영웅들이 악마를 사냥한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군.'
데일은 다시 주제를 되돌렸다.
"그래서.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소. 그들이 어디로 사라졌을 거라 생각하시오."
안드레이는 심드렁한 얼굴로 귀를 후볐다.
"글쎄. 솔직히 말해 별 관심 없어. 워낙 비밀도 많고 여러모로 감추는 게 많은 놈들이잖아. 심지어 이름도 안 밝혀서 용병왕이니 대마법사니 하는 거창한 별명으로 불리고."
안드레이는 이어서 말했다.
"그래도 어느 쪽이냐 골라야 한다면... 그래. 전선에서 장군들이랑 붙어먹었다는 게 제일 그럴듯하군. 요즘 분위기가 영 미묘하잖아?"
데일도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전선의 군인들이 돌아와 일어나는 사건들을 비롯해 이리저리 활개 치는 탈영병들까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는 건 명확했다.
"이레네의 시민들에게도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데, 전선의 군인들에게 영웅들이 어떤 의미겠어. 거의 신이나 다름없지 않겠어? 나 같으면 그런 군인들 사이에 섞여 있을 것 같군."
확실히, 그 편이 가장 그럴듯하긴 했다.
'그러면 내가 전선으로 직접 찾아가봐야 하나?'
전선으로 가면 분명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전선이 지닌 위험성이다.
언제든지 악마가 나타날 수 있는 것도 문제지만, 전선의 장군들이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기에 더 위험하다.
'결국은 힘이 문제인가.'
데일이 여기서 더 강해진다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
하지만 마음을 급하게 먹어서는 안 된다. 데일은 지금도 충분히 빠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데일이 다시 생각에 잠겨들 낌새를 보이자, 안드레이가 서둘러 체스말을 올렸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자! 어서 시작하자!"
"원한다면 내가 흑을 잡겠소."
"아니! 지금 이대로 한다! 도전자가 백을 잡는 법이니!"
완패한 안드레이가 도전자가 아닌가?
데일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그냥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노인들은 대체적으로 고집이 세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데일은 순순히 체스를 시작한 뒤, 머지않아 안드레이를 박살내버렸다.
안드레이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대체. 대체 왜 이렇게 잘하는 거야.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슬슬 시간이 늦은 것 같으니 이만 가보겠소."
데일은 안드레이가 건네준 두꺼운 책을 들고 일어섰다. 영웅들 개개인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적힌 책이었다.
데일이 일어서자 안드레이가 쩔쩔맸다.
"잠깐! 잠깐만! 내일도 올 거지? 한 판만 더 두자고. 응?"
데일은 애원하는 안드레이에게 말했다.
"맨입으로?"
"젠장! 또 그 소리야? 칼 찬 놈이 그래도 되는 거야? 어? 기사도 그런 거 몰라?"
"거래는 언제나 공정해야 하는 법이오."
"...내일 와서 나를 또 이기면 무슨 부탁이든 들어주겠다. 어때. 마탑의 마스터에게 빚을 지워둘 기회는 흔치 않다고?"
"좀 미안한 마음이 드는군."
"뭐가."
"너무 나한테 유리한 게 아닌가 해서 그렇소."
데일의 능청에 안드레이가 씩씩거렸다.
"건방진 놈! 두고 봐라! 내일은 내가 반드시 이길 테니!"
어깨를 으쓱여준 데일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피곤한 인상의 사서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데일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밖을 나오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거리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대신, 삼엄히 무장한 병사와 기사들이 요란하게 종을 흔들며 외쳐댔다.
땡땡땡!
"해가 지고 있습니다! 시민들께서는 즉시 거주지로 돌아가시고, 외부자들은 성 밖으로 나가주십시오!"
그런 닦달에 몇 없던 행인들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낮이랑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평화롭고 여유로운 느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딘가 날이 서 있는 듯한 분위기가 주위에 흘렀다.
데일에게도 병사 하나가 다가왔다.
"거기! 안 나가고 뭐 합니까! 당장 구속해도... 엇."
신경질을 내며 달려오던 병사는 데일이 내려다보자 주춤했다. 그 위압감에 순간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데일이 말했다.
"지금 나가보겠소."
"...어, 어서 나가시지요."
갑자기 공손해진 병사에게 고개를 끄덕인 데일은 거리를 지나쳐 성문으로 향했다.
그렇게 3구역을 나서기 전, 성문 앞에 있는 조각상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용병. 사제. 마법사. 그리고 기사.
낮에 보았을 때는 위풍당당하고 힘이 느껴지는 조각상이었다.
하지만 해가 지자, 성벽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절묘하게 이들의 머리를 덮었다.
어둠에 파묻힌 네 명의 영웅.
이 모습이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 같이 느껴지는 건, 너무 비약일까.
데일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조각상을 향해 더 다가갔다.
그리고 그런 데일의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밝은 낮에는 오히려 신경 쓰지 않았던 미세한 흠집. 자세히 보니 그 흠집은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페어 놓은 느낌이 들었다.
데일은 얼굴을 가까이에 해 그 미세한 흠집을 살폈다.
그건 글자였다.
조각상 아래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머지않았어요.]
수여식
* * *
머지않았어요.
데일은 그 짧은 문장은 뚫어져라 쳐다봤다.
대체 누가 이런 글귀를 써 놓은 걸까.
혹시 만취한 취객이 술기운에 장난을 친 걸까?
어쩌면 장난기 많은 소년이 벌인 짓일지도 모른다.
또, 머지않았다는 건 무슨 뜻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쓰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하지만 데일은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머지않았다라.'
왠지 데일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지면, 너무 과한 생각인가?
땡땡땡!
거리를 순찰하는 병사들이 울리는 종소리가 더욱 요란해졌다.
조각상에서 눈을 뗀 데일은 성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침에 성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서 인가.
여유로운 표정을 지은 기사가 데일에게 물었다.
"3구역은 어땠소."
데일은 흘끔 도시를 보더니 말했다.
"바깥이랑은 완전히 다른 세상 같았소."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그곳은 별세계였다.
기사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정확한 감상이오."
고개를 끄덕인 데일은 그대로 떠나려 했다. 그런 데일을 기사가 붙잡았다.
"잠깐."
"왜 그러시오."
기사는 품을 뒤진 다음에 두꺼운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익숙한 표지다.
요즘 상위구역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 데일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험. 험험."
민망하게 헛기침한 기사가 말했다.
"내 딸아이가 참으로 좋아하는 책이오."
"...그렇군."
"그대 이름을 적어주면 내 딸이 아주 기뻐할 것 같은데. 부탁해도 되겠소?"
데일은 말없이 펜과 책을 받아들였다. 기사가 다급히 말했다.
"브레이든에게. 늘 행복하시오. 라고 적어 주시오."
"...딸 이름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험험."
데일은 순순히 부탁받은 대로 해준 뒤, 걸음을 옮겼다.
카일라의 여관 앞에는 하티가 앞 다리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데일이 오자 하티가 고개를 들었다. 녀석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크릉, 하고 낮게 울었다.
상위구역에 데려가지 않아 섭섭한 눈치였다.
데일은 하티의 갈기를 한차례 쓸어주었다.
"거기에 널 데려갔으면 기사들이 기겁을 했을 거다."
하티는 알았다는 듯, 꼬리를 휙 휘둘렀다. 그런 하티를 두어 번 더 쓸어준 데일은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한산한 실내. 카일라가 맞아주었다.
"오셨어요? 식사하시겠어요?"
데일은 고개를 젓고, 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닫고 침대에 등을 기댔다. 조잡하게 만든 침대가 삐걱거렸다.
생각에 잠겼다.
생각의 주제는 영웅들. 즉, 데일이 직접 키웠던 캐릭터들이다.
최고의 효율로 육성해 하나하나가 엄청난 성능을 뿜어내던 괴물들. 이보다 더 강하게 키울 수는 없다고 데일은 확신했었다.
'그 당시에는 어지간히도 빠져 있었지.'
과거를 회상하다 보니, 어느 순간 기억이 선명해진다.
정신을 차렸을 때.
데일은 어느 좁은 방 안에 있었다.
익숙하고 어둡고 비좁은 방.
그곳에서 눈이 퀭한 폐인 같은 사내가 컴퓨터를 앞에 두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데일은 낯익은 얼굴의 사내를 보았다. 그건 데일이었다.
원래 데일의 모습.
사내는 그저 모니터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데일도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게임의 시작 화면에 그간 키워오던 캐릭터 넷이 당당히 서 있었다.
사내가 마우스를 딸칵 클릭했다.
그러자 경고문이 떠올랐다.
[정말로 캐릭터를 삭제하시겠습니까?]
사내는 한참을 갈등했다.
마우스를 몇 번이나 왔다갔다 했다.
데일은 그런 사내의. 자신의 행동을 조용히 응시했다.
그 결말을 알지만 끝까지 지켜봤다.
긴 시간이 흐른 후.
사내는 끝끝내 캐릭터를 삭제하지 못했다.
* * *
도서관의 사서는 나름대로 자기 삶에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도서관의 사서라는 직업 자체가 한번 취업에 성공하면 정년까지 잘릴 걱정이 없으면서, 일이 너무 힘들지도 않은 편이었다.
기껏 마법사가 되었으면서 그 능력을 썩히는 기분도 들었지만, 사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야망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냥 편하게 책이나 읽으며 사는 게 좋은 거지.'
사서는 자기 일에 대해 대체적으로 만족하는 편이었지만, 딱 하나 힘들어하는 게 있었다.
바로 고약한 성격의 노움 혼혈.
기록관 안드레이다.
사서는 안드레이라는 개인에 대해서는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안드레이는 생활용 마도구 제작과 룬 문자, 기타 비 전투용 마법에 통달한 사내였다.
그 능력을 인정받아 마탑에서는 젊은 나이에 마스터라는 직함을 받았으니. 실력은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다만, 안드레이는 비운의 천재였다.
악마와의 전쟁으로 모든 게 송두리째 변해버렸다.
모든 마법은 얼마나 효과적으로. 얼마나 많이. 얼마나 빠르게 사람을 죽일 수 있냐로 평가받게 되었다.
그간 이어져 오던 마법사 윤리는 모두 사라졌다. 그 잔혹성 때문에 금지되었던 고대의 주문들을 부활시켰다.
살상력이 없는 마법은 쓸모없다는 소리를 들었고, 연구에 대한 투자는 툭 끊겼다.
비전투 마법사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전공을 바꿔야만 했다.
하지만 안드레이는 그러지 못했다.
마법사 특유의 자존심과 신념 탓도 있었지만, 안드레이에게는 전투 마법에 끔찍할 정도로 재능이 없었다.
공격용 마법은커녕, 마도구조차 살상력 있는 물건을 만들지 못했다.
안드레이는 곧,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게 되었다.
마스터라는 감투를 썼지만 발언권은 없다시피 했고, 그 어떤 젊은 마법사도 그의 제자가 되고 싶지 않아 했다.
안드레이가 마탑을 뛰쳐나와 도서관에 틀어박혀 역사책을 붙들게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나이 든 이들이 그렇겠지만, 특히 안드레이에게 과거란 너무나 소중하고 되찾고 싶은 것이었으니까.
사서는 그런 안드레이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를 상대하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오래도록 인정받지 못한 마법사의 성격은 고약했다. 안드레이에게 익숙해질 때까지 사서가 얼마나 고생했던가.
안드레이는 다가오는 사람을 모두 쳐냈다. 마치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와도 같았다.
'평생 친우 같은 건 없겠지.'
사서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깨졌다.
사서는 다과가 올려진 쟁반을 들고 안쪽을 슬쩍 살폈다.
데일과 안드레이가 체스를 두고 있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안드레이가 박살나고 있었다.
"하, 한 수만 물러줘."
"그 말만 몇 번째요."
"마지막이니까. 응?"
"알겠소. 특별히 봐드리겠소."
"...기왕 무르는 거 한 수만 더 물러주면 안 될까?"
사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고약한 안드레이님과 저렇게 친근하게 지내다니.'
웬만한 사람은 치를 떨고 도망갔을 텐데, 데일은 그러지 않았다.
안드레이를 능숙하게 다루는 건 물론, 제법 친근하게 대화까지 나누고 있었다.
노인을 상대하는 데에 익숙한 것 같았다.
사서는 그런 데일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의외로 사교성이 좋은 건가.'
지금껏 안드레이와 저렇게 친해진 사람은 드물었다.
사서는 데일을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궁금하기도 했다.
'비결이 뭐지?'
사서는 쟁반을 들고 일부러 발걸음 소리를 냈다.
안드레이가 휙 고개를 돌리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뭐야."
"두 분 드시라고 다과를 좀 가져왔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얘는 어차피 음식 안 먹어도 된다니까?"
안드레이가 데일을 향해 삿대질했다. 데일은 그러거나 말거나 사서에게 고맙다고 한 뒤, 찻잔을 받아들고 홀짝였다.
그 모습에 안드레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차를 홀짝이는 흑기사라니. 그것만으로도 역사책에 실리기 충분할 거다. 어차피 마실 필요도 없고, 맛도 못 느끼면서 왜 마시는 거야. 쓸모없는 행동이잖아."
"사람이 음식을 먹고, 차를 마시는 게 뭐 이상한 행동이겠소. 그리고 쓸모없어 보이는 것에도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소?"
"뭐? 거참 이상한 놈이구만."
안드레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내심 데일의 말에 감명을 받은 듯했다.
특히, '쓸모없어 보이는 것에도 의미가 있다'가 마음에 남았다.
안드레이는 쓸모없는 마법을 연구하는 마법사였으니까.
기분 좋아하는 안드레이를 보며 사서는 왜 안드레이가 데일을 좋아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보기보다 좋은 사람일 수도....'
그때. 데일이 말했다.
"자. 이제 내가 이겼으니, 약속을 지키시오."
"크윽."
"총 다섯 번 이겼으니, 다섯 개의 부탁을 들어주셔야 하오."
"봐, 봐주면 안 될까?"
데일은 정색하며 말했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오."
데일이 뿜어내는 흉흉한 기세에 안드레이가 고개를 수그렸다.
사서도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냥 착각인가?'
안드레이가 불안하게 물었다.
"그래서. 부탁할 게 뭔데. 말해두지만, 너무 무리한 부탁은 못 들어줘."
"그런 것 아니오."
데일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안드레이는 마도구에 일가견이 있는 것 아니오? 일전에 봤던, 스스로 의지를 갖고 움직이는 양탄자는 굉장히 훌륭한 물건이었던 것 같은데."
"흠. 흠흠. 내 마도구가 훌륭하긴 하지."
기분이 좋아졌는지, 안드레이는 수염을 잡아당겼다.
말을 꺼낸 데일이 그 양탄자를 찢어버렸다는 건 까맣게 잊은 듯하다.
데일은 그런 안드레이에게 걸치고 있던 망토를 내밀었다.
"이걸 좀 봐주시오."
"이건?"
"우연히 얻게 된 물건인데, 미약한 힘이 느껴지는 것 같소. 어떤 물건인지 감별해줄 수 있겠소?"
"흐음."
안드레이는 망토를 눈 가까이에 가져다 대, 유심히 살폈다.
"확실히. 예사 물건은 아니군. 꽤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들었는데, 일부러 힘을 숨겨놓은 모양이야. 물건의 원주인은 이걸 어디서 났다고 했지?"
"원주인도 모른다고 했소. 그저 가보로 물려받았다는 것밖에는."
"흐음. 그렇단 말이지. 이거, 쉽지 않겠어."
"어렵다면 어쩔 수 없지. 알겠소...."
데일이 망토를 돌려받으려 하자, 안드레이가 망토를 휙 뒤로 뺐다.
그리고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안드레이다. 마스터 안드레이. 나한테 불가능은 없어."
"부탁해도 되겠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안드레이는 손에 녹색 빛을 뿜는 조그마한 구체를 들고 망토를 상세히 살폈다.
그러고는 눈을 크게 떴다.
"어?"
"왜 그러시오."
"이 문양. 보이나?"
안드레이가 망토의 중간을 녹색 빛으로 비추자, 검과 책을 양발에 짓밟고 있는 푸른 사자의 문양이 나타났다.
이 문양이 의미하는 건....
"바이만 왕국."
"그래. 마법깨나 좋아하던 놈들이지. 놈들이 만든 마도구라면, 과연. 범상치 않은 물건일 거야."
마법과 검으로 유명한 바이만 왕국이다.
그들이 만들어낸 유물이나 마도구는 평범한 물건이 아닐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이 망토의 제작자가 마도구의 효과를 숨기길 원했다면, 그걸 파헤치는 건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안드레이는 어느 순간부터 입을 다물고 오로지 망토를 조사하는 데에만 시간을 쏟았다.
사서가 데일에게 말했다.
"기록관님은 한번 집중하시면 몇 시간이고 저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으세요. 심지어 누가 뺨을 때려도 신경 쓰지 않으신다니까요?"
"혹시 직접 때려보셨소?"
"...그럴 리가요."
왜인지 대답에 뜸을 들인 사서가 쟁반을 들고 사라지려던 그때.
아래쪽에서 소란이 들렸다.
"으음?"
당황한 사서가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호기심이 일은 데일도 그 뒤를 따랐다.
도서관에는 판금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들이 쭉 도열해 있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사서가 중얼거렸다.
"화, 황실 기사단?"
황실 기사단. 제국에서 가장 강한 무력 집단 중 하나.
데일은 그들을 유심히 살폈다.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군.'
지금의 데일이 저 기사들과 1대1로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선뜻 확신할 수 없었다.
저들은 강하다.
데일의 시선을 느낀 걸까.
황실 기사단원들이 일제히 시선을 데일에게 향했다.
그중. 지위가 높아 보이는 이가 천천히 다가왔다.
눈빛이 잘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로운 사내였다.
기사는 데일의 앞에 다가와 물었다.
"가니아고스를 쓰러트린 흑기사 데일. 맞나?"
"그래."
데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황실 기사단원이 품에서 종이를 하나 꺼내 건네주었다.
"이건?"
데일이 묻자 기사는 엄숙하게 말했다.
"황제 폐하의 칙서다. 데일, 너에게는 훈장이 수여될 예정이다. 무한한 영광으로 알고, 훈장 수여식에 반드시 참석하도록."
일방적인 통보.
데일은 칙서를 흘끗 살피며 생각했다.
'훈장 수여식이라.'
왠지 또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수여식
* * *
훈장 수여.
구태여 거절할 이유도 없지만, 애초에 데일에게 선택권이 있는 것도 아니다. 황제가 오라면 가야 했다.
데일이 찾아오는 게 용건이었는지, 황실 기사단원들은 빠르게 돌아갔다.
마치 한 몸처럼 걸음걸이를 맞추는 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기사단원들이 빠져나가자 도서관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사서도 멍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긁적였다.
"휴. 또 기록관님 잡으러 온 줄 알았네요."
"...잡혀간 적이 있었나?"
"역사책에 폐하에 대한 다소 과격한 표현을 써서 문제가 됐던 적이 있었죠."
데일은 어딘가 듬성듬성했던 기록을 떠올렸다.
그 깐깐해 보이는 노인이 유독 칼 찬 놈들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던 것도.
'이미 한번 호되게 당했었군.'
한시름 놓은 사서가 말했다.
"음. 축하드려요. 훈장 그거 아무나 받는 게 아닌데. 부럽네요."
데일은 사서의 시큰둥한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그런 것치고는 별로 부러워하는 표정은 아닌 것 같은데."
"뭐. 예. 그 훈장 수여식이라는 게 귀족들 전부 모이는 사교회 같은 자리인데, 그런 데 평민이 가봤자 좋은 소리 못 듣거든요. 심지어 훈장까지 받았다? 어후. 엄청 못살게 굴걸요? 아, 훈장을 받으면 이제 준남작이니 경께서도 귀족이려나요?"
사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귀족에 대해 썩 좋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데일은 황제의 칙서를 슬쩍 확인한 뒤, 사서에게 말했다.
"이만 가봐야겠다. 안드레이 님께는 나중에 망토를 찾으러 오겠다고 전해드려라."
"어차피 한동안 집중하느라 말도 못 붙일 거예요."
데일은 도서관을 나선 뒤, 빠르게 걸음을 옮겨 7구역으로 돌아왔다.
'훈장 수여식이라.'
가란드가 귀띔해주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빠르게 일이 진행될 줄은 몰랐다.
데일은 용병 길드로 향해 가란드를 찾았다. 집무실 문을 열자 가란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데일 경을 찾고 있었습니다. 소식은 들으셨나요?"
데일은 황제의 칙서를 보여주었다.
"수여식이 바로 다음 주군요."
"따로 내가 준비해야 할 건 없소? 의복이라거나?"
"괜찮을 겁니다. 수여식이 귀족들 간의 사교회 느낌이 강하긴 하지만, 기사들은 갑옷을 입고 가는 게 관례니까요."
"예법이나 그런 건? 황제를 상대로 지켜야 할 예절이 있지 않소."
가란드는 웃음을 터트렸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훈장을 수여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워낙 공적인 자리에 모습을 잘 안 드러내는 분이시니까요. 그리고 데일 경은 예법에 대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왜 그렇소?"
"아무도 그런 걸 기대하지 않을 테니까요."
가란드는 데일의 몸을 가리켰다.
새까맣고 위압적인 갑옷.
두려움과 멸시의 대상인 이교도 기사에게 그 누가 깍듯한 예법을 바라겠는가.
"그냥. 상식선에서 행동을 하시면 됩니다."
"상식. 상식이라. 알겠소."
데일이 중얼거리자, 가란드는 뒤늦게 불안함을 느낀 모양이다.
그가 황급히 말했다.
"문제만 안 일으키시면 됩니다. 귀족들과의 자리에서 문제가 벌어지면 여러모로 골치가 아프니까요. 또, 데일 경은 일단 용병 길드 소속이라 문제가 발생하면 저한테도 책임이...."
그에 대해 데일은 짧게 답했다.
"걱정 마시오. 그쪽에서 건들지 않으면 나도 가만 있을 테니."
"...그쪽에서 건들면요?"
"그건 그때 가서 봐야 하지 않겠소."
가란드가 말했다.
"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웬만하면 참아주세요. 귀족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귀찮게 굴 수 있으니까요."
"명심하겠소."
데일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답했지만, 가란드는 왠지 데일을 불안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 * *
수여식 당일이 되었다.
마차를 보내준다는 말에 데일은 여관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데일은 평온했다. 훈장 같은 건 솔직히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이었다.
도리어 흥분한 건 다른 사람들이었다.
카일라가 안절부절못했고, 하켄은 부러움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맥주만 홀짝였다.
엘레나는 긴장하며 말했다.
"청사자 기사단장의 단장이라는 위치를 망각하지 마시고, 늘 당당하고 기품있게 행동해주세요."
"그런 자리를 받아들인 기억은 없다."
프라우도 존경 어린 눈으로 데일을 보며 말했다.
"그런 명예로운 자리에 설 수 있다니. 같은 전사로서 부럽네. 정말 부러워! 경. 사실 부탁할 게 있네. 어려운 부탁이지만...."
"어렵다는 걸 알면 부탁하지를 마라."
"나도 함께 데려가 줄 수 있겠나? 응? 얌전히 있겠네! 아, 이렇게 하면 어떤가! 큰 가방을 준비해서 내가 그 안에 들어가는 거네. 그 뒤에...."
프라우가 늘어놓는 쓸데없는 계획을 무시하며, 데일은 문밖에 의식을 기울였다.
마침. 밖에서 누군가 당황하는 소리와 말들이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왔군."
"예?"
데일은 문으로 가 밖을 살폈다.
고급스러운 마차를 이끄는 마부가 커다란 하티의 모습에 당황하고 있었다.
"웬 괴물이 도시에...."
"위에서 보내서 온 것이오?"
데일이 묻자, 마부는 흠칫 놀랐다. 거대한 늑대만큼이나 데일의 모습도 만만치 않게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미리 얘기를 듣고 각오했던지라 빠르게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마부는 귀족을 섬기는 사람답게 예의 바르게 말했다.
"데일 경이십니까?"
"그렇소."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데일은 마차에 올라 문을 닫았다.
마부는 놀란 말들을 진정시킨 뒤, 이내 마차를 몰았다.
고급스러운 마차가 대로를 걷자, 지나다니던 행인들은 모두 길을 비켜주었다.
마부는 이런 대우가 익숙한 듯.
너무 느리지도, 너무 빠르지도 않게 마차를 몰았다.
목적지는 귀족들이 모여 사는 2구역이다.
황제의 오른팔 격인 후작이 훈장을 수여할 예정이었다.
데일은 2구역의 정경을 눈에 담았다.
귀족들이 모여 사는 곳답게 확실히 깔끔하고 비싸보이는 저택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하지만 저택의 크기는 크지 않다.
카엘름 성에서 보았던 백작의 저택의 반의반도 안 되는 규모다.
'당연한가.'
2구역의 크기는 한정되어 있다.
살 수 있는 사람의 숫자도 정해져 있다.
저택은 자연스레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크고 웅장한 대저택이 있었다.
바로 오늘의 목적지인 후작가였다.
마부가 후작가의 정문 앞에 말을 멈추며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셔야 합니다. 저택의 하인들이 안내해드릴 겁니다."
"고맙소."
마부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치 이 일을 하면서 처음으로 고맙다는 말을 들어본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마부는 괜스레 헛기침하며 말했다.
"제 일을 했을 뿐인데 고맙긴요. 괜찮다면 돌아가는 길에도 제가 모셔드리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데일은 저택의 정문으로 다가갔다.
이미 저택 앞에는 수많은 귀족들과 그들이 타고 온 마차들로 몹시도 북적이고 있었다.
'이게 다 귀족이라니.'
아무리 전쟁 통에 숫자가 많이 줄었다 해도, 이렇게 모아놓으니 여전히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족들은 서로 얼굴을 아는지. 즐거운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 속내까지 즐거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 데일이 있으니, 확실히 눈에 띄었다.
귀족들이 눈을 흘겼다.
"저게 그?"
"쯧. 이교도가 훈장을 수여 받다니. 세상은 변하는 법이라지만, 이번엔 조금 심하군."
"악마라 부르기도 민망한 녀석을 운 좋게 잡아놓고 으스대려는 건가? 황제 폐하께서는 너무 자비로우셔서 문제야."
"요즘에는 웬 괴상한 소설을 냈다지? 얼굴만 번드르르해서는."
대부분은 데일을 적대하는 분위기다.
소설의 애독자로 보이는 몇몇 젊은 여인들이나 귀부인들은 이쪽으로 흠모의 감정을 보냈지만, 주위 분위기 탓에 다가오지 못했다.
'이렇게 노골적인 건 오랜만이군.'
적나라하게 쏟아지는 적의에 데일의 몸이 반응했다. 자꾸만 손이 검의 손잡이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데일은 인내심이 있는 사내다. 이 정도에 칼을 뽑았다면 진즉 도시에서 칼부림을 벌였을 것이다.
데일은 쑥덕대는 귀족들을 무시하며 검은 옷을 입은 하인에게 다가갔다.
"수여식에 참여하러 왔다."
"아. 저택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데일은 하인을 따라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의 넓은 홀에는 바깥에서 본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귀족과 기사, 마법사, 그리고 상인들까지. 상위구역에서 힘 좀 쓰는 사람은 모두 모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교의 장이라 했던가. 왜 사서가 심드렁했는지 알 것 같군.'
저들이랑 얘기를 나누고, 인맥을 다져놓으면 분명 훗날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데일은 그러지 않았다.
귀족들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시도해봤자 성공할 것 같지도 않다.
게다가 저택 안으로 들어오니 데일에게 향하는 적의는 더 강해졌다.
특히, 검을 찬 기사나 귀족들은 데일에게 질투 가득한 눈빛을 보내왔다.
이유를 생각하는 건 어렵지 않다.
상위구역의 기사. 혹은 기사 지망생들은 명성과 실적을 쌓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당장 크리스틴도 데일과의 결투에 목을 매지 않았던가.
그런 와중에 웬 이교도 기사가 크리스틴을 결투로 꺾어 명성을 날리는 데다가, 악마를 토벌해 훈장까지 받는단다.
질투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질투하는 기사만 있는 건 아니다. 개중에는 이 기회를 영리하게 잡으려는 이들도 있었다.
사슬 갑옷을 입은 기사가문의 자제 중 하나가 데일의 근처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우연을 가장한 척. 데일의 앞에 다리를 밀어 넣었다.
이러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놈을 넘어트리면 가만히 안 있겠지. 그때 검을 뽑아 이 반송장 놈을 꺾는다면... 명예는 내 차지다.'
일부러 시비를 걸어 싸움을 건 뒤, 쓰러트린다.
그렇다면 데일이 쌓아온 모든 명성은 기사에게 돌아갈 터.
높은 신분의 자제가 하기에는 지나치게 유치하고 비열한 계략이지만, 신분이 높다고 인격적으로 더 낫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사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다리를 거는 걸 넘어, 아예 발을 뻗어 데일의 정강이를 차버리려 했다.
데일은 그 움직임을 읽었다.
무릎을 오므린 뒤, 절묘하게 힘을 주었다.
깡!
기사의 쇠장화가 데일의 무릎과 부딪혔다. 강한 힘에 균형을 잃은 건 도리어 기사 쪽이었다.
"윽!"
예상치 못한 반격에 기사는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갑옷이 대리석 바닥과 부딪히는 요란한 소리에 저택 안에 한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곳으로 쏠렸다.
데일은 엉덩방아를 찧은 기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체 단련을 더 열심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쉽게 넘어져서 어디 검이나 제대로 휘두르겠나?"
데일의 덤덤한 목소리가 정적 속에서 울려 퍼졌다.
데일은 나름의 농담과 조롱의 의미로 내뱉은 말이었다. 평소에 데일의 농담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만큼은 의도가 정확히 전해졌다.
기사의 얼굴이 수치와 분노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그것도 귀족들 앞에서 체면을 구겼으니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기사는 자리를 박차며 주먹을 내뻗었다.
"반송장 주제에 감히!"
데일은 그 주먹의 궤적을 읽고, 손바닥을 앞으로 펼쳤다. 그리고 주먹을 정확히 붙잡아 버렸다.
기사가 다른 주먹을 내질렀지만 이번에도 텁! 하고 붙잡아 버렸다.
졸지에 어른한테 제압당한 어린애 같은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이를 악문 기사는 안간힘을 써서 주먹을 빼내려 했지만, 도무지 빼낼 수가 없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성장을 통해 더더욱 강해진 데일의 힘은 기사가 당해낼 수가 없었다.
결국, 기사는 마력을 끌어올려 신체를 강화하고 나서야 데일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정확히는 데일이 놔준 것뿐이었지만.
"...."
데일이 기사를 여유롭게 가지고 노는 모습에 분위기가 더욱 싸늘해졌다.
기사가 느끼는 모멸감은 더욱 커졌다.
눈을 시퍼렇게 물들이고, 온몸에 마력을 끌어오른 기사는 기어코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댔다.
"후회하게 해주마."
데일은 기사가 검을 뽑기까지 기다렸다.
웬만하면 참아주겠다는 가란드와의 약속 때문에 참고 있었다. 하지만 검을 뽑는 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행위다.
그 순간부터는 데일 역시 거리낄 게 없었다.
그렇게 기사가 검을 뽑고, 곧장 휘두르려던 그 순간.
어디선가 뻗어온 손이 기사의 손을 붙잡았다.
"거기까지만 하게. 죽을 걸세."
"넌 또 뭔데...."
분노한 기사는 뻗어온 손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뜨겁게 달아오른 피가 얼음처럼 싸늘하게 식었다. 그의 표정에서는 핏기가 가셔 하얗게 질려버렸다.
마치 사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다.
아니. 어쩌면 눈앞의 존재가 사신보다 더 두려운 대상일 수도 있다.
기사가 자기 앞에 선 노인을 보며 외쳤다.
"기, 기사단장!"
그곳에 서 있는 건 황실 기사단장이었다. 그는 오싹할 정도로 딱딱 끊어지는 발음으로 말했다.
"그 검. 뽑으면 죽을 걸세."
수여식
* * *
황실 기사단의 기사단장.
아마도 대륙에서 가장 강한 검사이자, 황제를 지키는 검.
모든 기사들의 우상.
검성.
거물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지켜보던 귀족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 누구도 숨소리 하나. 자그마한 소음조차 만들어내지 못하고 집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사단장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칼날 같은 기세는 사람을 절로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기사단장은 다시 한번 힘을 주어 말했다.
"그 검. 뽑으면 죽을 걸세."
손을 붙잡힌 기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 짜내며 말했다.
"거, 검을 뽑으면 저를 죽이실 거라니. 지금 저 이교도의 편을 드시는 겁니까?"
"뭐?"
잠시 벙찐 얼굴을 하던 기사단장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이 친구, 뭔가 착각하고 있군. 내가 자네를 왜 죽이겠나?"
"그, 그렇다면...."
기사단장은 데일을 가리켰다.
"검을 뽑으면 저 친구가 자네를 죽일 거란 말일세. 자네는 단 열 합도 받아내지 못할 거야. 영광스러운 훈장 수여식 날에 그런 하찮은 싸움으로 피를 흘려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아니면."
기사단장은 한 번 호흡을 삼킨 뒤 말했다.
"설마 자네가 이길 거라 생각했나? 부디 아니라고 말해주게. 나름 기사란 것들의 수준이 이렇게까지 형편없다면, 제국의 미래는 참으로 암울할 테니."
"...."
기사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손만 부르르 떨었다.
기사단장이 말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게나. 적당히 사과하고 끝내게. 앞서 말했듯이, 좋은 날에 피를 흘리는 건 별로지 않나. 자네도 내 얼굴을 봐서 한 번만 봐주게나."
기사단장은 데일에게 말했다.
갑작스러운 개입에 흥이 식어 심드렁하던 데일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우리가 서로 얼굴을 보고 봐주고 그런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애초에 오늘 처음 만난 사이 아니오?"
"...!"
"!"
듣던 기사와 귀족들이 경악했다.
저 기사단장에게 저렇게 건방지게 대꾸하다니.
두려움이라는 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저렇게 행동할 수는 없을 진데!
그때. 인파 속에서 검을 든 기사가 튀어나와 외쳤다.
"스승님께 무슨 망발이냐 이 무례한 놈아!"
"스승?"
쩌렁쩌렁 외친 건 젊은 여기사였다. 단장을 스승으로 칭하는 걸로 보아, 그의 제자인듯했다.
제자는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기세였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기사단장은 껄껄 웃었다.
"하하하! 그래. 기사라면 그 정도 배포는 있어야지."
"스, 스승님?"
기사단장은 데일에게 말했다.
"미안하네. 아무래도 너무 내 생각만 했군. 자네는 나를 처음 보는 거겠지만, 사실 난 자네를 본 적이 있네. 그... 누구더라?"
기사단장이 제자에게 시선을 주자, 제자가 답했다.
"크리스틴 경입니다."
"그래. 그 크리스틴이라는 놈과 결투를 벌이는 걸 봤지. 솔직히 만족했네. 기술은 부족했지만, 확실히 싸우는 법을 알더군. 오랜만에 피가 끓었어."
기사단장의 말에 주위가 더욱 웅성거렸다.
특히, 기사나 기사 지망생들의 경악했다.
그들은 기사단장이 같은 기사단원들한테도 얼마나 엄격한지. 그리고 또 칭찬에 인색한지를 알았다.
기사단원 중 하나가 단장에게 처음으로 '수고했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는 얘기는, 상위구역에서 너무 유명했다.
'그런 기사단장의 눈에 들다니.'
기사들은 더욱 질투심을 불태우며 데일을 쳐다보았다.
정작. 데일은 심드렁했지만.
"하고 싶은 말이 뭐요."
"오늘은 이만하게. 분란을 일으키면 자네한테도 좋을 게 없네. 저래 보여도 나름 이름 있는 가문 출신이니 말일세. 자네는 뭣 하나. 어서 사과하지 않고?"
기사단장이 데일에게 시비를 건 기사에게 말했다.
기사는 굴욕적인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미, 미안하다."
누가 봐도 억지로 하는 듯한 사과.
하지만 데일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역시 귀찮은 일은 사양이었다.
기사단장이라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고집부릴 이유는 없었다.
"알겠소."
"따라줘서 고맙네. 나중에 기사단으로 찾아오게. 검이나 한번 섞어보고 싶으니. 자네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네."
그렇게 말을 남긴 기사단장이 멀어져 갔다.
기사단장의 제자는 데일을 한차례 찌릿 노려보더니,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데일에게 시비를 걸었던 기사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는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데일에게 무참히 패배했을 거라고는 절대 인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미 기사단장이 중재한 마당에 한 번 더 시비를 건다? 그러면 그건 기사단장의 체면을 무시한 게 되어버린다.
기사는 그런 간 큰 짓을 감행할 자신이 없었다.
"운 좋은 줄 알아라."
기사는 그렇게 내뱉고는 얼른 사라졌다.
데일은 그런 기사를 붙잡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저런 머저리들은 언젠가 다시 마주치게 되어 있었다.
굳이 지금 처리할 필요는 없다.
사건이 일단락되었지만, 한번 싸늘해진 분위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조용히 눈치만 살핀 채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마침내 훈장 수여식이 시작되었다.
"후작 각하께서 납십니다! 모두 뒤로 물러나십시오!"
하인의 외침과 함께 귀족들이 양옆으로 물러났다. 그 다음으로는 후작가의 기사들이 들어와 일렬로 도열했고, 마지막으로 중년의 후작이 당당하게 걸어왔다.
후작은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로 길고 화려한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일부러 우아한 동작을 천천히 걸었는데, 자기한테 쏠리는 시선을 즐기는 듯했다.
미리 준비한 단상에 올라선 후작은 한 것 거드름을 피우며 주위에 시선을 주었다.
그러고는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
"오늘은 참으로 뜻깊은 날이오. 황제 폐하께서 공을 세운 젊은 용사들에게 훈장을 수여하시기로 하셨으니 말이오. 그 명예로운 임무를 폐하께서 내게 일임하시니, 이 또한 나에게는 커다란 영광이오."
후작의 말에 몇몇 귀족이 의미 깊은 날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인 후작이 옆에 있는 하급 귀족에게 시선을 주었다.
하급 귀족은 훈장 수여자의 명단이 적힌 긴 종이를 양손으로 힘껏 펼쳤다.
그리고는 외쳤다.
"베르하르트 가문의 오토는 앞으로 오시오!"
"예!"
기사가 재빨리 튀어나와, 후작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급 귀족이 외쳤다.
"오토 그대는 남서부에서 단신으로 트롤을 사냥하고, 백성들을 지켰으며, 마을의 평화를 지켜낸 공로를 인정해, 붉은 방패 훈장을 수여하는 바이오!"
귀족의 긴 설명이 끝나자, 후작이 기사에게 훈장을 건네주었다.
"축하하네. 앞으로 더 정진하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기사는 눈물까지 주륵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이다.
'너무 요란 떠는 것 아닌가?'
훈장을 받는 게 나쁜 일은 아니지만, 저렇게 호들갑을 떨 정도일까?
단순히 명예 때문이라고 하기에 기사는 너무 기뻐했다.
그런 데일의 의문을 뒤로하고.
훈장 수여식은 계속 이어졌다.
하급 관리는 계속 수여자의 이름과 그 공로를 읊었고, 후작도 일일이 훈장을 건네주었다.
훈장 수여자의 숫자가 상당히 많았다. 기사들뿐만 아니라 용병도 꽤 많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수여식이 끝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조용히 듣던 귀족들도 지루했는지, 슬슬 잡담을 나눴다.
"이번에는 유독 훈장을 많이 수여하는군. 영웅들이 사라진 이후로는 한동안 뜸하지 않았는가."
"그게, 내가 듣기로는 폐하께서 새로 친위대를 하나 만드신다는군. 황실 기사단만으로는 한계가 있지 않은가?"
"새로운 친위대?"
"그래. 신분에 상관없이 실력만 있으면 받아준다는데."
"무슨 터무니 없는 소리를."
"터무니없기는. 이번 훈장 수여식에는 유독 용병이나 평민이 많지 않은가. 심지어...."
수군대던 귀족들은 흘긋 데일을 살폈다.
그러고는 자기들끼리 대화를 이어갔다.
"저런 자에게 훈장을 수여할 정도면, 폐하께서 정말로 신분과 출신에 구애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명한 것 아니겠나."
"으음. 그건 확실히 그렇군."
단순히 공을 치하하기 위한 훈장 수여는 아닌 모양이다.
데일은 빼어난 청각으로 정보를 모으며 생각했다.
'친위대라.'
황제는 영웅들의 등장에 한 차례 황권의 위협을 받았다.
영웅들이 도시를 떠나 전선으로 향하게 된 데에는 크든 작든 황제가 관여하고 있을 터.
그런 황제가 친위대를 모으려 한다.
'왜지?'
이미 많은 병사를 거느린 황제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부릴 수 있는 충실한 군사들을 더욱더 원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건가.'
황제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걸까?
당장은 판단할 만한 정보가 부족했다.
그렇게 긴 시간 끝에 마침내 데일의 차례가 왔다.
하급 귀족이 외쳤다.
"밤의 여신을 섬기는 기사이자 동패 용병 데일! 데일 경은 앞으로 오시오!"
데일이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귀족은 그런 데일을 보고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외쳤다.
"데일 그대는 아르구르의 추종자 하시나를 쓰러트렸으며, 용병으로서 의뢰를 받고 도시에 행해지는 갖가지 위협을 성공적으로 처리해내 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지켜내었소. 또한, 카엘름에서 되살아난 가니아고스가 힘을 되찾기 전에 토벌한 공로를 인정해, 황금검 훈장을 수여하는 바이오."
후작은 귀족에게서 황금으로 만들어진 검 모양 훈장을 데일에게 내밀었다.
"그대가 데일 경인가?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이번 일은 정말 수고해주었어. 만약 카엘름이 함락당했다면, 제국에는 큰 화가 되었을 걸세."
데일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이 이어 말했다.
"받게. 황금 검 훈장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훈장이 아니네. 그만큼 폐하께서도 자네의 활약을 눈여겨봤다는 거겠지."
"감사히 받겠소."
데일은 손을 내밀어 훈장을 가져오려 했다. 그때. 후작은 데일의 손을 확 잡아챘다.
후작의 손에는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후작은 데일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데일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네는 제국과 폐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데일은 미간을 좁혔다.
갑작스러운 질문.
황제가 친위대를 만들 계획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시험인가?'
그렇다면 데일은 좋은 점수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딱히 황제의 친위대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데일은 퉁명스레 말했다.
"별생각 없소."
당황한 후작이 말했다.
"...그래도 뭔가 느끼는 바가 있지 않나."
"글쎄."
데일은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았다. 갑자기 둘이 소곤거리자, 귀족들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후작은 뭐라도 대답을 듣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을 기세였다. 데일은 다시 입을 열었다.
"위태로워 보이는 것 같소."
"제국이 말인가? 어느 부분이?"
"여러모로."
"흐음."
데일의 대답에 후작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보인다면, 우리가 부덕해, 폐하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의견 고맙네. 그리고 다시 한번 축하하네. 그 훈장을 가슴에 착용하고 다니면 사람들이 자네를 우러러볼걸세."
데일은 아닐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가슴에 번쩍번쩍한 훈장을 달아도, 사람들의 눈에 데일은 그저 이교도일 테니까.
'일이 끝났으니까 곧바로 돌아가야지.'
이런 피곤한 공간은 어서 뜨고 싶다.
하지만 그런 데일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후작이 말했다.
"이 이후에는 연회가 준비되어 있네. 자네가 본 것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연회가 될 테니, 부디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난...."
데일은 단칼에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후작이 곧바로 이어 말했다.
"그리고 연회 때 꽤 중요한 발표를 할 예정이라네. 듣는 게 좋을 걸세. 그러니 먼저 돌아가지 말고, 느긋이 연회를 즐기게."
"그냥 지금 말해주면 안되는 것이오?"
"하하. 경은 보기보다 농담을 잘 하는군."
"아니. 농담이 아니라...."
후작은 한차례 웃음을 터트린 뒤, 손을 휘이 저었다.
잔말 말고 기다리라는 뜻이었다.
데일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아무래도 일찍 돌아가기는 그른 것 같다.
수여식
* * *
화려한 연회가 될 거라는 후작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현악기를 든 수십 명의 악단이 연주를 시작하고, 쟁반에 음식을 가지고 들어온 하인들이 끝없이 줄지어 들어섰다.
쟁반에는 향신료와 재료를 아끼지 않은, 어디서도 보기 힘든 신기한 요리가 들어 있었다.
연회장의 한구석에는 포도주가 솟아자는 폭포가 있었다.
귀족들은 잔을 들고 요령 좋게 포도주를 떠 마셨다.
'하켄이 보면 환장하겠군.'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 맞는 사람끼리 뭉쳐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귀족은 귀족끼리. 기사는 기사끼리. 그리고 마법사는 마법사끼리.
그런 와중에 붕 뜨는 이들이 있었으니, 이번에 훈장을 수여 받은 용병들이었다.
이들은 용병 업계에서는 존경받으며 대접받는 베테랑들이다.
하지만 그런 베테랑도 귀족들 사이에서는 영 기를 펴지 못했다.
게다가 귀족들이 일부러 텃세를 주기도 했다.
"큼. 큼큼. 정말이지, 예법도 모르는 자가 말이지."
"이래서 천한 것들은...."
멀뚱대던 용병들이 음식이나 술에 손을 댈라치면, 귀족들은 그런 식으로 대놓고 무안을 주었다.
일종의 견제이기도 하다.
귀족들 입장에서는 훈장을 수여 받은 용병이 언제든지 치고 올라올 수 있는 잠재적 경쟁자로 보였으니.
평소에는 거칠 것 없는 용병들도 신분이라는 벽 앞에서는 주눅들 수밖에 없었다.
용병들은 구석 쭈그려 서서 눈치만 보았다.
그때. 데일이 음식으로 다가갔다.
평소처럼 먹는 시늉이라도 하려는 것이다.
귀족들이 이번에도 수군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교도가 참여하는 건 연회의 격을 떨어트리는 게 아닌가."
"눈치라는 게 있었다면 알아서 자리를 떴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다 들으라는 듯. 한층 더 노골적인 비아냥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데일은 용병들과 다르다.
신분제가 없는 사회에서 온 데일에게 귀족이라고 딱히 위축되거나 그런 일은 없다.
데일은 수군거리는 귀족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대놓고 물었다.
"불만 있나?"
당황하는 귀족들에게 데일이 이어 말했다.
"불만 있으면 직접 말해라. 아니면 검을 뽑던가."
귀족들은 노련하다.
이렇게 대놓고 다가오는 경우쯤은 이미 대비하고, 멋들어지게 면박을 줄 방법쯤은 알고 있었다.
문제는 데일이 풍기는 기세다.
"무슨...."
데일과 바로 앞에서 눈을 마주친 귀족들은 입을 열지 못했다.
기사단장과는 다른 의미로 위험한 기세가 풍겼다.
데일의 주위만 유독 어두운 기분이 든다. 주위가 싸늘해진 느낌에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당황한 귀족들은 궁색하게 변명했다.
"험험. 뭔가 오해하고 있나 보군."
"왜 우리가 자네에게 불만이 있겠나."
"아니라면 다행이군."
귀족들을 내려다본 데일은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접시에 음식을 담았다.
'아무 맛도 안 나는군.'
특별한 재료와 향신료로 만들어낸 진미이련만. 역시나 느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눈치를 보던 귀족들은 데일에게서 황급히 멀어졌다.
지켜보던 다른 귀족도 마찬가지.
데일 주위에 원형으로 빈 공간이 생겨났다.
데일은 멍하니 서 있는 용병들에게 말했다.
"안 먹나?"
그제야 용병들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멋쩍게 웃으며 다가왔다.
"감사합니다. 은패 용병인 토드입니다.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은패 용병인...."
용병들은 각자 자기소개를 했다.
모두 은패 등급 이상인, 뛰어난 용병들이었다.
술이 들어가고, 마음이 풀리자 용병들은 하나둘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주로 용병 일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높은 등급의 용병인 만큼 가지고 있는 정보의 질이 매우 뛰어났다.
"최근 북쪽 지방에서 언데드들이 많이 늘어나서, 성수를 미리 챙겨다니는 게 좋습니다."
"안 그래도 그쪽 지방에서 몬스터들이 유독 많이 늘어나서 곤란인 상황인데...."
"그렇군."
데일은 그들이 전해주는 정보를 하나하나 기억해두었다.
당장 어디에 쓸지는 몰라도, 분명 언젠가는 도움이 될 것이다.
게다가 귀족들보다는 이 용병들과 친해지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질 거다.'
데일은 확신했다.
지금은 전선이 소강상태라 위태로운 평화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미 평화가 깨어질 조짐은 여기저기서 보이고 있다.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개개인의 능력이 더욱 중요해지는 법.
하찮은 신분으로 이곳까지 올라온 용병들은 훗날 두각을 드러낼 것이다.
'친해져서 나쁠 게 없다.'
게다가 친분을 쌓는 게 어렵지도 않았다.
용병들은 강자를 존경하는 편이고, 그래서인지 데일에게 호의적이었다.
"나중에 불러주십쇼! 데일 경과는 꼭 한번 같이 일해보고 싶으니!"
"저도요! 같이 싸울 수 있으면 영광일 겁니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귀족들의 텃세에 쭈뼛쭈뼛하던 용병들은 이제 완전히 기를 되찾았다.
주위는 신경을 안 쓰고 자기들끼리 열띤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주로 음담패설이나 여자에 관한 주제.
등급이 높든 낮든, 용병은 용병이었다.
성욕이 없는 반언데드인 데일에게는 별로 공감하기 힘든 주제였다.
적당히 뒤로 빠진 데일은 고개를 돌렸다.
'답답하군.'
데일은 멍하니 서서 한시라도 빨리 이 연회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 * *
흥겨운 연회의 한구석에서 기사단장과 그의 제자가 조용히 서 있었다.
일전에는 그렇게 칼날 같은 기세를 흩뿌려대던 기사단장이지만, 지금은 마치 무정물처럼 어떤 기세도 품지 않았다.
바로 앞에 지나다니는 귀족들이 그런 기사단장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기사단장의 제자는 흥청망청 술을 마시며 연회를 즐기는 귀족들과 기사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한심하네요. 귀족이라는 작자들이 바깥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이렇게 풀어져서는.... 쓸모없는 놈들이 너무 많아요. 수를 콱 줄여버려야 하는데."
과격한 말에 기사단장은 껄껄 웃었다.
"하하. 이런 사람들도 있어야 제국이 돌아가는 법이다."
제자는 입을 삐죽였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이런 연회에 쏟아부을 돈으로 무기를 사고, 병사들을 모으면 전쟁에서는 더욱 유리해질 수 있잖아요."
"그럴 수도 있지."
기사단장은 표정을 달리하며 말했다.
"하지만 쓸모없어 보이는 것에도 저마다의 의미는 있는 법이다. 저렇게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 교류하는 것도 분명 큰 도움이 될 거다. 너도 맨날 검만 휘두르지 말고, 저 사이에 섞여 다른 기사들과도 친분을 다지는 게 어떻겠느냐. 모두가 너랑 친해지고 싶어 안달일 텐데."
제자는 콧숨을 흥 내뿜었다.
"친해지고 싶은 건 제가 스승님. 아니, 단장님 제자라서 그런 거잖아요. 그런 사람들이랑 친해져봤자 뭐하겠어요."
"그럼 저 녀석은 어떻냐. 적어도 내 제자라고 특별히 여길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기사단장이 가리킨 건 연회 한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는 데일이다.
용병들 사이에 껴 있는 데일은 멀리서도 유달리 눈에 띄었다.
제자는 인상을 콱 찌푸렸다.
"더 싫은데요. 일단 이교도잖아요."
"그 점은 나도 마음에 안 드는구나."
"그리고 그런 식으로 낭비할 시간은 없어요. 그 시간에 검을 휘둘러야죠. 그래야 제가 단장님을 뛰어넘어, 하루라도 빨리 단장님이 은퇴할 거 아니에요."
기사단장은 다시 한번 껄껄 웃었다. 당돌한 발언이지만, 별로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기사단장은 실력과 재능이 있는 전사에게 한해서는 몹시 관대한 편이었다.
기사단장은 웃음을 멈추고,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더더욱 혼자서 검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
"예?"
"혼자서 수련하는 검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좋은 아군과, 훌륭한 적수가 없다면 네 검은 언제까지고 제자리를 맴돌 것이다. 나 역시 뛰어난 동료가 있어 이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단다."
"단장님께서도요?"
제자가 놀라며 물었다.
기사단장은 좀처럼 자기 과거 이야기를 하는 법이 없는 사내였다.
기사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검에 대한 순수한 재능만은 나를 뛰어넘는 놈이었지. 검술에 대한 집착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고."
제자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말했다.
"단장님보다 재능이 뛰어났다고요? 그게 말이 돼요?"
"그래. 정말이지, 괴물 같은 재능이었다. 도시의 검술 길드에서는 존경을 담아 마스터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렇게 대단한 분이 있었다고요? 근데 저는 그런 얘기는 한 번도 못 들어봤는데...."
기사단장은 서글프게 웃으며 말했다.
"녀석은 남과 비교할 수 없는 재능을 가졌지만, 신께서는 공평하신 법이다. 녀석의 몸은 너무 약했어. 지병이 있었지. 마력을 다루는 능력 역시 뒤떨어졌고. 몸이 재능을 따라오지 못하는 거야."
"그런...."
"하지만 놈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매일 같은 자리에 서서 검을 휘둘러댔지. 마치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을 부정하려는 것처럼, 반쯤 미친 사람처럼 검을 휘둘렀다. 그러다... 어느 날 사라져버렸다."
제자는 눈을 땡그랗게 떴다.
"사라졌다고요? 어디로요?"
"나도 모른다. 지병이 악화되어 목숨을 잃었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말을 흐린 기사단장이 말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 역시 친우가 있었기에 이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사실, 내 검술 실력만 보면 아직 그 녀석에게 미치지도 못했어."
놀라운 이야기에 제자는 선뜻 믿을 수 없었다. 기사단장보다 더 뛰어났던 천재가 있었다니.
하지만 그녀는 안다.
기사단장이 허투루 이야기를 지어낼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제자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그분의 성함이 어떻게 되나요?"
잠시 주저하던 기사단장은 이내 힘을 주어 말했다.
"루드비히. 검술 길드의 검사들과 그를 아는 기사들은 모두 존경의 의미를 담아, 마스터 루드비히라고 불렀다."
* * *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연회가 점점 달아오르던 그 시각. 드디어 후작이 연회장의 중앙에 섰다.
그 옆에는 기사단장이 함께였다.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드디어 발표할 생각이군!'
그렇지 않고서야 기사단장까지 함께 서 있지는 않을 거다.
좌중을 둘러보던 후작은 부드럽게 손짓했다. 그러자 악기를 연주하던 악단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모두의 시선이 후작에게 쏠렸다.
후작은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법을 아는 사내였다.
마침내 원하는 분위기가 되자, 후작이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영광스러운 날에, 한 가지 중요한 발표를 하겠소."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다.
후작이 이어 말했다.
"최근. 정세가 매우 혼란스럽다는 건 다들 알 것이오. 불미스러운 일이 끊이지 않고, 도시에는 배신자가 숨어들고 있소."
귀족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 아니면 후작이 말하니 일부러 과장스럽게 반응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폐하께서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인재를 원하고 계시오. 능력 있고, 제국에 충성하는 뛰어난 인재를!"
후작의 얘기가 길어질 것 같자, 옆에 있던 기사단장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눈치 빠른 후작은 능숙하게 말을 이었다.
"다음 부분은 우리의 기사단장께서 설명해줄 것이오."
"고맙소 후작."
흠흠. 헛기침을 한 차례 한 기사단장이 말했다.
"이미 알 사람은 알고 있겠지만, 폐하께서는 새로 친위대를 창설할 계획이라네. 새로 생길 친위대는 신분도, 출신도 상관없이 오로지 능력과 폐하께 대한 충성심만을 보고 뽑을 예정이지."
기사단장의 말에 좌중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특히 귀족들과 기사들의 반응이 썩 좋지 않았다.
출신과 상관없이 뽑겠다는 말은 큰 불만을 샀다.
하지만 겨우 이런 것에 꿈쩍할 기사단장이 아니다.
그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말했다.
"최근 서북부 지방이 몬스터와 언데드들로 혼란스럽다는 건 알 거라고 믿네. 생각보다 피해가 커지고 있어, 폐하께서도 골치를 앓고 계시는 문제지."
친위대에 대해 얘기하다, 갑자기 서북부를 언급하니 귀족들은 어리둥절해했다.
기사단장이 이어 말했다.
"시험을 내리겠네. 여기 있는 누구라도 좋아. 한시라도 빨리 서북부로 가 혼란의 원인을 제거하게. 그러면."
한번 말을 끊은 기사단장이 주위를 둘러보며 한차례 뜸을 들였다.
잠시간의 침묵.
기사단장은 주위를 느릿하게 둘러보며 힘을 주어 말했다.
"친위대에 입단할 자격을 주겠네. 그리고 가장 큰 활약을 보인 이에게는 친위대의 부단장 직위가 내려질 것이네. 참고로 지금 친위대의 단장은 나지만, 얼추 자리가 잡히면 곧바로 단장 자리를 넘겨줄 생각이네. 나는 황실 기사단 하나만으로도 바쁘거든."
단장이라는 말에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아무리 출신과 성분을 안 본다 해도, 그 단장 자리까지 이렇게 덜컥 넘겨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귀족들. 특히 기사들의 눈에 탐욕이 일었다.
'황제를 수호하는 친위대의 단장 자리라니.'
그것만큼 부귀영화가 보장된 자리가 또 있을까?
물론, 새로 생기는 친위대가 황실 기사단만큼의 위상을 누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이 갑작스러운 선언에 사람들은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한 귀족이 기사단장에게 물었다.
"시험은 언제부터 시작입니까?"
기사단장은 고민 없이 말했다.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