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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 * *

기사단장이 말했다.

"수단에 제한은 없네. 마음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뜻을 합쳐도 좋고, 혼자만의 힘으로 헤쳐나가도 괜찮네. 지혜와 힘, 모든 걸 쥐어짜네 최선을 다하게. 그럼."

기사단장은 목례를 간단히 한 뒤,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더 질문을 해봤자 받아주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데일은 생각했다.

'중요한 발표가 있다더니, 이런 거였나.'

확실히. 도시를 뒤흔들만한 사건이긴 하다.

새로 친위대를 창설하고, 그 단장을 시험에 통과한 사람으로 뽑겠다니.

'정말 신분과 출생을 보지 않겠다는 말을 지키려는 건가?'

귀족들에게는 물론, 평민이나 용병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지다니. 천년이 넘게 신분제가 이어져 온 제국에서는 놀라운 일이긴 할 터.

하지만 완전히 평등하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먼저 정보를 줘서 우위를 주었군.'

친위대가 창설될거란 소문은 암암리에 돌았지에, 시험의 내용은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 발표했다.

시간 싸움인 시험의 특성상 조금이라도 빨리 정보를 얻는 것도 큰 배려다.

그만큼 준비하고 계획을 짤 시간을 얻을 수 있으니.

실제로 다른 사람들은 이미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평소 친분이 있던 기사들은 한데 모여 무언가를 궁리하고 있었으며, 술이 확 깬 용병들도 열띤 토론을 나누고 있었다.

몇몇 이들은 발 빠르게 연회장을 나서려 했지만, 후작이 외쳤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밖에는 이미 해가 졌소. 해가 뜰 때까지는 저택에 머물러 주시오. 원한다면 하룻밤을 지낼 방을 내어드리겠소."

해가 뜰 때까지는 후작의 저택에 남아 있어야 한다.

'이걸 노리고 일부러 발표를 늦게 한 건가?'

만약 잡아두지 않았다면, 성질 급한 이들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냅다 서북부로 달려갔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낙오자가 나오는 건 원치 않는 것 같았다.

'아니면 좀 더 협력하라는 뜻일 수도 있고.'

이미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뭉치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세력이 작은 이들도 있는 법.

세력이 작은 이들은 이 시간을 이용해 자기들끼리 동맹을 맺을지를 논의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시험에서 조금이라도 우위를 점하기 위해 치열하게 머리를 굴렸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런 분주한 분위기 속에서도 데일은 여유로웠다.

데일은 솔직히 친위대의 단장 자리 같은 건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저 해가 뜰 때까지 멍하니 서 있을 뿐.

가끔 용병들이 다가와 함께할 거냐고 묻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데일은 단호히 거절했다.

몇 번의 거절이 있은 후에는 아무도 데일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다들 욕심에 눈이 멀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데일은 그런 사람들을 구경하며 연회장의 한구석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그때. 누군가 데일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는 별생각이 없나 보군?"

고개를 돌리니 있는 건 기사단장과 그 제자였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친위대에는 들어갈 생각이 없소. 단장 자리도 관심 없고."

"그거 아쉽군."

그렇게 말한 기사단장은 데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데일이 물었다.

"뭐 할 말 있으시오?"

"지금 자네 생각을 맞춰보겠네. 왜 굳이 이런 방식으로 시험을 치르는가, 의아해하고 있겠지?"

"...맞소."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방식은 꽤 피가 많이 흐르지 않겠소?"

기사단장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상위 구역에는 새로운 바람이 필요하거든."

"...?"

"이만 가보겠네. 다음에 언제라도 찾아오게. 검이나 한번 섞어보자고."

기사단장은 그렇게 말한 뒤,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그 뒤를 제자가 졸졸 뒤따르다, 데일을 한번 흘겨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해가 뜨자 연회에 참석한 이들은 빠르게 흩어졌다.

아마도 오늘이 끝나기 전에, 도시는 이번 일에 대한 화제로 들끓을 것이다.

모두가 급한 반면. 데일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마침 그를 태우고 왔던 마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다른 분들은 급하게 달려 나가시던데, 무슨 일이 있나요?"

데일은 마차에 타며 답했다.

"다들 급한 약속이 생긴 모양이다."

"그런가요?"

데일이 마차 문을 닫자, 마부는 천천히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마부가 물었다.

"여관으로 데려다 드리면 될까요?"

잠시 고민하던 데일이 답했다.

"용병 길드로."

"3구역에 있는 길드 본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7구역에 있는 용병 길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3구역으로."

"옙.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데일은 단장 자리에는 관심은 없다. 굳이 주도해서 시험을 치를 생각도 없다.

하지만 데일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귀족들이 돈을 풀겠군.'

시험의 취지를 생각하면, 자기들이 지닌 힘과 실력만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옳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순수하게 돌아가지 않는 법.

권력을 탐하는 귀족들이 대거 참여할 것이고, 그 귀족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귀족들이 돈을 풀만한 곳은 정해져 있다.

'용병.'

여러모로 무력이 중요한 시험이다. 실력 있는 용병들의 몸값이 엄청나게 뛸 것이다.

하지만 일정 등급 이상의 용병들은 이미 귀족가 중 하나와 친분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무력은 절실한데, 막상 고용할만한 실력 있는 용병은 많지 않을 거라는 것.

이런 상황에서 데일이 지니는 가치는 특별하다.

데일은 이미 실력을 검증한데다가, 딱히 친분을 가진 귀족이 있는 것도 아니다.

냉정을 되찾은 귀족들은 지금쯤 데일이 얼마나 귀중한 전력인지를 깨닫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돈 보따리를 싸매고 달려오고 있을 터.

기다리다 보면 괜찮은 조건의 의뢰가 넘쳐날 것이다.

데일은 그중에서 가장 적절한 의뢰를 골라잡으면 될 뿐이다. 시험의 참여자로서가 아니라, 고용된 용병으로서 이득을 취하는 것이다.

'난리가 나겠군.'

이번 사건에서는 싸움의 냄새가 난다.

싸움은 데일의 성장으로 이어질 터. 굳이 이런 기회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용병 길드에 도착했다.

용병 길드에는 아직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는지, 오히려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

폭풍 전의 고요라 해야 할까.

데일은 직원에게 걸어가 가란드가 있는지 물었고, 직원은 직접 가란드에게 안내해주었다.

가란드가 데일을 반가이 맞아주었다.

"무슨 일입니까 데일 경. 오늘은 분명 훈장 수여식에 간 것 아니셨습니까?"

"수여는 모두 끝났소."

"혹시나 해서 묻는 거지만, 별문제는 없었죠?"

데일은 잠시 멈칫했다.

문제가 없었냐고 하면 그건 아니지만....

"잘 해결되었소."

"왜 뜸을 들이시는지... 일단 알겠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데일은 수여식에서 한 발표에 대해 설명했다.

친위대와 그 단장을 뽑기 위한 시험을. 가란드가 미간을 좁혔다. 생각을 정리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흐음. 또 시끄러운 일이 터졌군요."

"굳이 왜 이런 방법을 쓰는지 기사단장에게 물었더니, 새바람이 필요하다고 답변을 들었소. 무슨 의미인지 알겠소?"

잠시 고민하던 가란드가 말했다.

"상위 구역은 살기 좋은 곳입니다. 바깥에 비하면 훨씬 안전하고, 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죠. 하지만 공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상위 구역에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에 걸맞는 능력이 있어야만 하죠."

데일은 아이렉에 대해 떠올렸다.

바이만 왕국의 귀족인 아이렉은 빈민가에 터를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상위 구역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기 '쓸모'를 증명해야 한다고.

가란드가 이어서 설명했다.

"이레네가 처음 세워지고. 폐하께서 무능한 귀족은 상위 구역에 받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을 때는 엄청 혼란스러웠다는군요. 귀족들이 거세게 반발했고, 피바람이 불고 나서야 겨우 상황을 안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폐하께서는 뜻한 바를 이루셨습니다. 상위 구역에는 능력 있는 귀족들만이 남았지요. 그리고 몇십 년이 지났습니다. 지금 무엇이 문제인지, 혹시 짐작이 가시나요?"

데일은 눈을 감고 가란드의 설명을 정리한 뒤, 어렵지 않게 말했다.

"자식들이 문제가 되었군."

가란드가 눈을 크게 떴다. 습관처럼 시험해보기 위해 한 말인데, 이렇게 빨리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으음. 역시 예리하시군요. 맞습니다. 능력 있는 부모 밑에서 태어난 자식이, 능력 있으란 법은 없었지요."

작위는 기본적으로 자식 중 한 명에게만 내려진다.

작위를 얻지 못하는 다른 자식은 상위 구역에 남기 위해 공을 세우고, 자기 쓸모를 증명해야 했다.

상위 구역의 모든 기사가 명예와 업적에 집착하며, 괜히 황실 기사단에 입단하기를 갈망하는 게 아니다.

데일은 얼마 전에 훈장을 받고 눈물을 흘리던 기사를 떠올렸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나.'

귀족 자재가 공을 세울만한 곳은 한정되어 있다.

가장 공을 세우기 쉬운 곳은 바로 최전선이지만....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을 전선으로 내몰고 싶겠습니까. 또,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을 바깥으로 내치고 싶어 하겠습니까. 최근, 무능한 자식들에게 적당한 자리를 줘서, 어떻게든 상위 구역에 터를 잡게 하는 귀족이 늘고 있습니다. 무능한 자들이 자리를 차지하면, 그만큼 유능한 사람들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고요."

"부패하기 시작한 것이군."

"그렇습니다."

데일은 연회장에서 웃고 떠들며 흥청망청하던 수많은 귀족을 떠올렸다.

귀족들의 숫자는 다시 늘어나고 있고, 상위 구역은 부패하고 있다.

황제는 이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귀족의 자재들을 과감하게 내치자니, 만만찮은 저항이 있을 게 자명하다.

귀족들은 도시가 건국된 이래 수십 년간 힘을 축적해 왔다.

어쩌면 이레네 건설 초기 때 일었던 혼란보다 더욱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일부러 숨통을 트여준 것이군. 만약 친위대에 들어가면 일단 상위 구역에서 쫓겨날 일은 없을 테니."

"예. 게다가 이번 일로 귀족들의 힘도 빼놓을 수 있을 겁니다. 귀족들간의 경쟁이 가열될수록 출혈도 커질 테니까요. 물론, 너무 심한 출혈이 예상되면 황실에서 적절히 개입하겠지만요."

데일은 후작의 말을 기억했다.

'신분과 출생에 관계없이 능력에 좌우할 거라 했던가?'

말은 번드르르하지, 결국 이번 일은 귀족들 간의 경쟁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컸다.

용병들은 어디까지나 곁가지.

가란드가 말했다.

"게다가 서북부 지방의 혼란은 생각보다 심각하긴 합니다. 혼란이 발생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죠.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는 맞습니다."

"황제는 욕심이 많은 사람인 모양이오. 한꺼번에 이득을 몇 개나 보려는 것인지."

가란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기에 악마에게 맞서 제국을 지탱해오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악마와의 전쟁을 수십 년간 성공적으로 수행해온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습게 볼 인물은 아니었다.

'한번 보고 싶긴 하군.'

황제는 실제 게임에서도 얼굴 한번 마주하기 힘든 인물이었으니, 궁금증이 일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건 황제가 아니다.

가란드가 물었다.

"데일 경께서도 참여하실 겁니까?"

"어디까지나 용병으로 참여할 생각이오. 이런 일은 그냥 넘기면 아쉬울 것 같아서 말이오."

"하하. 대목을 놓치지 않는 안목. 데일 경도 용병이 다 되셨군요. 그럼 제가 몸값을 올리는 방법을 하나 조언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데일이 말했다.

"그래주면 고맙겠소."

"별거 아닙니다. 개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돈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죠. 그러니."

"그러니?"

"파티를 꾸리십쇼. 개인으로서 의뢰를 받는 것보다는 그편이 더 큰 돈을 받을 수 있을 테니."

"파티라...."

당장 떠오르는 인물들이 있었다.

데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갔다오겠소."

"서두르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귀족들의 몸이 잔뜩 달아올랐을 테니까요."

그날. 수십 대의 마차가 이레네의 성문을 나서 북서쪽으로 향했다.

일단 빨리 달리고 보자고 결정한 성급한 선발대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용병 길드는 용병을 고용하기 위해 찾아온 귀족의 시종들로 북적거렸다.

그들은 하나같이 접수처의 직원에게 화를 내며 말했다.

"데일 경! 데일 경은 어디 있소!"

"제발 부탁이니 우리에게 데일 경을 주선해주시오!"

그들은 모두 데일을 찾고 있었다.

시험

* * *

데일은 우선 여관으로 돌아가 하켄을 찾았다.

두꺼운 책을 펼쳐 그 안에 집중하고 있던 엘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 데일 경. 수여식은 어땠나요?"

"그냥 그랬다. 그보다 하켄은 어디 있지?"

"술 먹고 곯아떨어졌을 거예요."

"대낮부터 팔자도 좋군."

데일은 성큼 계단을 올랐다. 엘레나가 그런 데일의 등에다 말했다.

"아. 데일 경.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데일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혹시 급한 일인가?"

"으음. 아뇨. 급하지는 않는데요."

"그럼 나중에 얘기하지. 지금은 조금 바빠서."

"아. 예.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엘레나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궜다. 그 옆에 선 카일라가 데일을 도끼 눈을 뜨고 노려보았다.

마치 일이 바빠 딸도 내팽개치는 아빠를 보는 듯한 눈빛이다.

카일라가 툭 던졌다.

"애정이 식었네요."

"...애정은 무슨."

데일은 괜스레 민망함을 느끼며 말했다.

"일이 끝나면 그때 꼭 얘기를 들어주겠다."

그제야 엘레나도 표정을 풀었다.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빠르게 계단을 오른 데일은 하켄의 방문을 열었다.

좋게 말해도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는 방에서, 하켄은 널브러져 있었다.

"커억. 커어억."

어지간히도 깊게 잠들었는지 코를 요란하게 골다, 이따금 기침을 내뱉었다.

데일이 방문을 열었건만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놀더니 다 풀어졌군.'

데일은 하켄에게 다가가, 가볍게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물론, 데일 기준으로 가볍게였다.

쓰라린 통증에 하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 시발 어떤 새끼야!"

"나다."

데일과 하켄의 시선이 마주쳤다.

하켄은 곧장 사근사근한 표정을 지었다.

"아. 데일 경이셨군요. 허허. 말로 하시지."

"불만 있나?"

"불만이라니요! 오히려 좋습니다! 잠이 확 깨는 게, 기분이 아주 상쾌합니다. 허허허."

호들갑을 떠는 하켄에게 데일이 상황을 설명했다.

하켄은 입가에 큼직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돈 냄새가 나는데요?"

"그래. 가란드의 말로는 파티를 꾸리는 게 더 좋은 조건을 받을 수 있다던데. 함께하겠나?"

"데일 경이 가는데, 당연히 저도 가야죠! 오히려 저를 안 데려갔으면 섭섭할 뻔했습니다!"

하켄은 당연히 함께할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다음은 에스델이었다.

갑작스러운 얘기라 에스델이 곤란해할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에스델은 선선히 승낙했다.

"할게요."

"괜찮겠나?"

"안 그래도 서북부에 벌어진 혼란은 교단에서도 주시하고 있었거든요. 교단에서도 허락해줄 거예요."

방패수, 사제, 그리고 흑기사.

이 셋은 조합적으로 안정이 되어 있는 데다가, 함께 다닌 시간도 있어 손발도 잘 맞는다.

이 정도면 가란드의 말대로 몸값을 높게 받을 수 있으리라.

셋은 바로 용병 길드로 향했다.

하켄이 말했다.

"하하! 귀족 놈들. 지금쯤 잔뜩 달아올라서 난리치고 있겠죠? 평소에는 하찮은 용병이라고 무시하던 놈들이 애걸복걸하는 꼴이라니. 속이 다 시원하네요."

갑과 을의 관계는 상황에 따라 역전되기도 한다.

지금 실력 있는 용병들은 그야말로 갑이 되어, 귀족들의 열띤 구애를 받고 있을 것이다.

일행은 다소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예상하고 길드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길드 내부는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뭐지? 사람은 많은데?'

문이 열리자, 안쪽에 대기하고 있던 시선이 일제히 이곳으로 집중되었다.

그들 중 하나가 외쳤다.

"와, 왔다!"

그러고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데일에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가룸 가문에서 나왔습니다! 경을 고용하고 싶습니다! 누구보다 후한을 조건을 드리겠습니다!"

"파드룸 남작가에서 나왔소. 파드룸 남작이 어떤 분인지는 아실 거라 믿소. 우리 쪽에 합류하시오."

"제발! 제발 이렇게 부탁입니다!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회유. 협박. 애원.

귀족가에서 나온 시종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데일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길드 안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개중에는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가문 출신인 듯.

드잡이질까지 벌이는 이들도 있었다.

이 분위기에 완전히 질려버린 하켄과 에스델이 뒤로 물러났다.

다른 용병들은 휘말리지 않기 위해 서둘러 거리를 벌렸고, 길드 직원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러다 사고 나겠군.'

데일은 주위를 슬쩍 둘러본 뒤, 정신을 집중했다.

안광이 한차례 세찬 빛을 내뿜었다. 마력이 주위에 퍼졌다. 퍼져나간 마력은 시종들의 영혼을 뒤흔들었다.

"으윽."

"뭐, 뭐야."

갑작스러운 충격에 시종들은 이마를 부여잡았다.

두통과는 조금 다른, 정신 그 자체를 뒤흔드는 오싹한 감각에 피가 차갑게 식었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그제야 데일도 입을 열었다.

"다들 진정하시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일이 그렇게 말하니, 진정하기 싫어도 진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가란드가 계단을 내려왔다.

"허허. 왜 이렇게 소란스럽나 했더니...."

상황을 전해 들은 그는 모두에게 말했다.

"서로 싸우다가는 끝이 없을 겁니다. 그건 아무도 원치 않잖아요? 다들 시간이 촉박하니."

시종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다투는 일이다.

한시라도 빨리 도시를 나서 서북부로 떠나야 했다. 이렇게 드잡이질 하고 있는 시간도 몹시 아까웠다.

가란드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각자 생각해둔 조건을 종이에 적어, 저한테 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그중에서 제일 괜찮은 조건을 몇 개 골라, 데일 경께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서로 슬쩍 눈치를 살핀 시종들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시간만 죽이느니, 조금이라도 빨리 결정을 내리는 게 낫다.

데일이 가란드에게 말했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도 말해주시오. 하켄과 에스델과 함께할 예정이오."

"아, 제 조언대로 하셨군요. 좋습니다."

씨익 웃은 가란드는 시종들에게 설명했다.

전장에서도 굴러본 적 있는 베테랑 방패수와 장래가 촉망받는 유능한 사제가 함께할 거라고.

노련한 용병 출신답게 시종들의 마음이 혹할만한 부분을 잘 짚어주었다.

시종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흑기사에 용병과 사제까지.'

'포섭만 할 수 있다면....'

몸이 달아오른 시종들은 종이를 두고 고민했다.

기회는 단 한 번이니만큼, 괜찮은 조건을 불러야 했다.

문제는 다른 이들이 어떤 조건을 부를지 가늠이 안 된다는 것.

'어쩔 수 없다.'

시종들은 눈을 꾹 감고, 자기가 부를 수 있는 최대한을 써넣었다.

가란드는 그런 시종들에게서 종이를 거두었다.

그리고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평범한 은패 용병은 꿈도 꾸기 힘든 조건들이군요."

가란드는 조건들을 확인한 뒤, 빠르게 간추렸다.

단순히 돈만 본 건 아니다.

의뢰주가 신용이 있는지. 길드와 마찰이 있었는지. 평판이 어떠한지까지. 마치 자기 일처럼 상세히 따졌다.

데일은 고마움을 표했다.

"고맙소 가란드."

"아뇨. 저희가 괜히 중계 수수료를 받아먹는 게 아니니까요."

물론, 데일 정도 되니 가란드가 직접 일처리를 해주는 것이었다.

작업이 끝나자 가란드는 종이 세 장을 건네주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하나를 고르면 될 것 같군요."

추리고 추린 의뢰서는 석 장이었다.

과분할 정도의 조건. 최상의 대우. 특별히 문제없는 의뢰주.

수요와 공급이 가격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데일은 지금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귀족들이라도 무리하는군. 그렇게 자리가 탐이 났나?'

귀족들은 욕심을 부리며 무리하고 있었다.

물론, 데일이 걱정할 부분은 아니다.

게다가 이번 의뢰는 그 특수성 때문에 상당히 위험할 것이다.

'전투가 많이 있겠지.'

그렇다면 이 정도 조건이 마냥 비싸기만 한 건 아닐 것이다.

데일은 결정을 내렸다.

"이걸로 하겠소."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가란드는 데일이 누구의 의뢰를 받아들였는지 발표했다.

계약을 성사해낸 시종은 환호성을 질렀고, 나머지는 실망하거나 짜증을 부렸다.

그 모든 광경을 보고 있던 용병들은 그저 부러워했다.

"겨우 한 명한테 저렇게 매달리다니...."

"우리도 언젠가 저런 대우를 받을 수 있나?"

"꿈 깨라. 저 기사님만큼 강해지려면 10년으로도 부족해."

하지만 손만 빨고 있는 용병들에게도 곧 기회가 주어졌다.

데일을 붙잡는 데 실패한 시종들이 그들을 포섭하기 위해 달려든 것이다.

이곳에 있는 용병들은 대부분 동패 이하 등급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길드는 이내 시장통처럼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데일과 계약을 맺은 시종은 일행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후우. 제안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출발은 언제로 할 생각이지?"

"준비를 마치는 대로, 내일 해가 뜨자마자 출발할 겁니다."

"인원은?"

"저와 도련님, 가문의 사병에 여러분까지 총 열다섯이겠네요."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다섯이라.'

힘 있는 가문은 친분을 가진 고위 용병이나 실력자들이 차고 넘칠 것이다.

데일을 비싼 값 주고 고용하기 위해 직접 용병 길드로 달려온 건 이런, 강하다고 하기에도. 그렇다고 마냥 약하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가문들이었다.

데일은 투구를 긁적였다.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기에는 애매한 전력이군.'

시험에서 승리하기 위해 이 정도의 전력으로는 부족하다.

하지만 모두가 시험의 승리를 위해 달리는 건 아니었다.

'어떻게,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을 생각인가?'

병사들을 이끌고 주위를 기웃거리다가, 다른 유력한 후보에게 도움을 주고 대가를 얻어먹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가령, 친위대에서 한 자리를 받는다거나.

데일이 그렇게 의뢰주의 의중을 짐작하는 사이.

신나게 앞서 가던 시종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 그리고... 미리 말하지만 저희 도련님이 조금 별난 분이셔서 말이죠. 너무 놀라지 않아주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참 좋은 분이신데...."

"별나다고?"

"하, 하하. 출발은 내일이니, 다들 준비하고 약속 장소로 와주시면 됩니다."

시종은 일부러 언급을 피하며 서둘러 사라져버렸다.

조금 찜찜했지만, 이미 계약은 성립되었다. 이제와서 무를 수는 없었다.

'가란드가 선별했으니까. 큰 문제는 아니겠지.'

어쩌면 시험의 통과를 노리는 게 아닌, 적당히 간을 보다 이득만 취하려는 의뢰주가 훨씬 나을 수도 있었다.

데일은 에스델과 하켄에게 말했다.

"우리도 준비를 해야한다. 우선 에스델. 저번에도 말했지만, 제대로 된 갑옷을 입어야 한다. 함께 무기상에게로 가자."

"으음."

에스델은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 외에 또 준비할 건... 지금 서북부는 언데드 창궐과 몬스터 범람이 동시에 일어나서 큰 혼란이라고 했었지요? 그렇다면 성수를 넉넉히 챙겨 놓는 게 좋겠네요. 또, 몬스터 사냥용 도구도 챙겨 놓고...."

데일은 에스델의 말을 끊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무기를 제외하면, 되도록 짐을 줄여라. 위급할 때 최대한 빨리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예? 왜 그렇죠?"

의아해하는 에스델에게 데일은 답했다.

"언데드나 몬스터를 상대할 일보다는 사람을 상대할 일이 많을 테니까."

때마침 마차 여러 대가 일행 앞을 빠르게 지나쳤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도시 안에서의 난폭한 질주에 시민들이 다급히 몸을 피했다.

"치이고 싶지 않으면 뒤로 물러나라!"

마차를 모는 마부가 거칠게 외쳤다.

그가 모는 마차에는 귀족 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뒤 칸에는 기사 몇과 그 하인들. 그리고 고용된 용병들로 보이는 사내들이 몇 타 있었다.

그들이 데일을 봤다.

데일도 그들을 봤다.

시선이 마주친 기사가 허리에 찬 검을 툭 쳤다. 그리고는 앞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차가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

귀족들이 괜히 용병을 고용하는 게 아니다.

시험에서 이기기 위해서 어떻게든 경쟁자를 고꾸라트리려 하며, 때로는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 것. 그게 사람이다.

전투는 피할 수 없다. 싸움판이 벌어질 것이다.

데일은 마차에서 고개를 돌렸다.

"가자."

그 싸움판에 뛰어들 시간이다.

시험

* * *

시험

* * *

일행이 모인 건 이른 새벽이다.

계절이 가을에 접어들면서 부쩍 해가 짧아졌다. 도시는 아직 어슴푸레한 그림자 속에 잠겨 있었다.

데일은 하켄과 에스델. 그리고 하티와 함께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이미 의뢰주와 그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데일을 고용한 시종이 이쪽을 발견하고는 말했다.

"아!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쪼르르 다가온 시종은 옆에 있는 청년을 가리켰다.

"이분이 저희 도련님이십니다."

젊은 청년이었다. 푸른 눈은 총기로 반짝였고, 옅은 곱슬머리는 단정히 옆으로 넘겼다.

굳게 다문 입술 탓에, 어딘지 고집스러워 보이는 인상의 귀족 청년이었다.

청년이 데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 경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데일이다."

"티센 가문의 에른스트."

데일은 그 손을 마주 잡아 주었다.

손에 전해지는 악력. 그리고 청년의 허리에 찬 검을 보고 데일은 생각했다.

'그래도 제법 실력이 있군.'

어느 정도 기사로서 수련을 쌓은 듯했다.

그때. 에른스트가 말했다.

"혹시나 해서 미리 말해두겠어. 나는 굉장히 평등한 시각을 가진 사람이거든?"

"?"

"그러니 경이 포악하고 잔인한 이교도든. 혹은 천한 용병이든 나는 전혀 신경 안 써. 그러니 나를 편하게 대해주기 바라겠어."

"으음. 알겠다."

데일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일단 적당히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그러고 보니 별난 구석이 있다 했었나?'

시종이 말했던 대로, 확실히 일반 귀족 청년과는 조금 다른 인물인 듯했다. 좋은 방향으로 다른지, 나쁜 방향으로 다른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에른스트는 이어서 하켄과도 인사를 나눴다.

"잘 부탁해. 앞서 말했듯이, 나는 천한 용병이라도 편견 없이 바라보는 사람이야."

"어. 거. 감사합니다."

천한 용병이라는 말에 미묘한 표정을 짓는 하켄을 뒤로하고, 에른스트는 마지막으로 에스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는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 이럴 수가."

"...왜 그러시죠?"

에스델이 묻자, 에른스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급하게 옷매무새를 가지런히 하더니, 목소리를 일부러 내리깔며 말했다.

"마, 만나서 반갑습니다. 사제님. 성함을 들려주시겠습니까?"

갑자기 자기한테만 존댓말을 사용하자, 에스델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에스델이에요."

"맙소사. 이름마저 아름답다니."

"...예?"

"앞으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예."

에른스트는 악수를 청했지만, 에스델은 못 본 척 외면해버렸다. 왠지 손을 마주잡기 껄끄러웠다.

에른스트는 에스델이 악수를 받아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듯. 꿋꿋이 손을 들었지만, 시종이 얼른 다가왔다.

"도련님. 이제 가셔야 합니다. 더 늦어지면 여정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군."

고개를 끄덕인 에른스트가 외쳤다.

"자! 어서 출발하자!"

함께 따라온 사병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예!"

그들은 각각 다섯 명씩 3대의 마차에 나눠 탔다.

데일 일행은 두 번째 마차에 올랐는데, 에른스트와 시종과 함께 동승해야 했다.

마부는 하켄이 맡았다. 시종이 자기가 몰겠다고 했지만, 하켄은 자기가 하겠다며 완고하게 말했다.

에른스트와 같이 있는 걸 썩 내켜 하지 않는 듯했다.

두꺼운 판자로 보강되어, 화살도 거뜬히 막아낼 것 같은 마차가 덜컹거리며 나아갔다.

이레네의 성벽과 빈민가가 빠르게 멀어져 갔다.

어느 정도 도시를 벗어나고. 마차가 가도에 접어들자, 시종이 운을 뗐다.

"일단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혹시나 서로 생각하고 있는 게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한차례 말을 끊고, 주위를 둘러본 시종이 이어 말했다.

"우선, 저희의 목적은 서북부에 벌어진 혼란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최근 서북부는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겪고 있습니다. 하나는 몬스터 범람입니다."

북쪽의 겨울은 혹독하다.

북쪽 지방에서 겨울을 나야 한다는 건, 매 순간 죽음과 자연을 상대로 싸워 이겨내야 한다는 뜻이다.

그건 짐승이든, 사람이든, 몬스터든 예외가 없었다.

길고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식량을 비축하거나, 겨울잠을 준비하기 위해 미리 살을 찌워둬야 한다.

그래서 몬스터들은 가을이 되면 먹이를 찾아 산을 내려오곤 했다.

그리고 몇 년에 한 번씩. 그런 식으로 내려오는 몬스터의 숫자가 너무 많아 큰 곤란을 겪곤 한다.

"문제는 이번에는 한 가지 더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로 언데드들이 일어서기 시작한 것이죠. 자연적으로 언데드가 일어나는 건 드문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체가 일어나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범위도 너무 넓다는군요. 일어나는 언데드의 종류도 심상치 않고요. 즉."

"누군가 인위적으로 언데드를 일으키고 있다는 건가?"

시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저희가 예상하기로는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내려주신 시험의 내용은 서북부의 혼란을 잠재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데드들이 일어나는 원인을 제거하면, 저희가 승리할 수 있을 거라고 사료됩니다. 몬스터들이야, 뭐. 늘 벌어지는 일이었으니까요."

시종의 똑 부러진 설명에 에른스트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데일은 의문을 제기했다.

"괜찮겠나?"

"뭐가 말이죠?"

"수여식에서 봤을 텐데. 귀족들은 서로 동맹을 맺고, 함께 움직이고 있다."

기사가 포함된 전력이 수십 명씩 몰려다니고 있을 터.

이곳에 있는 15명은 분명 적지 않은 전력이지만, 혼자서 시험을 이겨내기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적당히 간을 보다가 이득을 보려 한다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시험에서 이길 생각인가?'

데일의 지적에 시종이 슬쩍 에른스트의 눈치를 살폈다.

에른스트는 한차례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나는 친위대의 단장 자리에는 관심 없어."

"?"

"내가 서북부로 향하는 건, 그곳 사람들이 고통을 받기 때문이지 사사로운 권력 때문이 아니야. 이건, 내가 귀족이라는 이름으로 특권을 누려온 데에 대한 당연한 의무야."

말은 즉, 순수한 호의로 용병을 고용하고 가문의 사병을 이끌고 나왔다는 소리다.

거짓말도 이렇게 얼토당토않으면 도리어 신뢰감이 생기는 법이다.

데일은 에른스트의 눈동자를 보았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당당한 눈빛.

'설마 진심인가?'

그 옆에 앉은 시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에른스트와는 뜻이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이제 보니 순진한 귀족 청년이었군.'

그리고 또 다른 순진한 사람. 에스델이 화색을 띠며 말했다.

"정말 훌륭한 생각입니다! 신께서도 에른스트 님의 행동에 기뻐하실 거예요!"

뺨이 발그레해진 에른스트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험험. 그렇게 칭찬해주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둘이 대화하는 사이, 데일이 시종에게 조용히 물었다.

"괜찮겠나? 이런 말하기는 뭐하지만, 에른스트는 다소...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데."

"당연히 안 괜찮죠. 근데 저희가 함께 따라붙지 않으면, 혼자서라도 서북부로 달려 나갈 기세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침을 꿀꺽 삼킨 시종이 말했다.

"일단 서북부에 도착하고, 직접 참상을 겪으시면 도련님의 열정도 좀 식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영웅놀이도 그만둘 테고요."

영웅 놀이라.

다소 신랄한 표현이었지만 데일도 동의했다.

'오래 살기는 힘든 타입이군.'

차라리 돈이나 이득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은 괜찮다. 적어도 그들은 현실을 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저렇게 이상을 위해 싸움에 나서는 이들은 죽을 확률이 높았다.

시종이 말했다.

"저희가 괜히 경을 비싼 돈을 드리고 고용한 게 아닙니다. 만약 저나 다른 사병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든 도련님만은 가문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알겠다. 하지만 정말 위험하다는 판단이 들면, 그때는 내 말에 따라야 한다."

"그때는 제가 어떻게든 도련님을 설득해보겠습니다. 뭣하면 기절시켜서라도요."

다행히 시종이랑은 얘기가 잘 통해, 그렇게 합의를 보았다.

어차피 당장 해야 할 일은 큰 차이가 없으니, 굳이 더 얘기해야 할 필요도 없었다.

'어쩌면 이번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날 수도 있겠는데.'

저런 종류의 사람은 쉽게 질리기 마련이다. 현실이 이상만큼 아름답지 않다는 걸 체감하면, 곧바로 줄행랑칠 것이다.

'그러면 어쩌면 의뢰를 한 번 더 받을 수도 있겠군.'

서북부의 혼란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의뢰주가 내빼면 데일은 다른 의뢰주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데일에게는 나쁠 게 없는 장사.

합의를 마친 데일은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내 들었다

영웅들에 대한 기록이었는데, 저번에 읽은 책이 영웅들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담았다면, 이건 영웅 개개인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정보를 다루었다.

데일은 우선 용병왕이라는 작자에 대한 행적부터 더듬어갈 생각이었다.

어떻게든 에스델과의 대화를 이어가려고 절절매던 에른스트가 그 모습을 보았다.

"어? 그, 글자를 읽을 줄 아나?"

에른스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데일이 물었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

"아, 아니. 이교도들. 특히 흑기사는 학문이랑은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아까 편견 같은 건 없다 하지 않았나?"

"으응? 그, 그랬지. 하하하."

에스델이 끼어들었다.

"데일 경은 다른 이교도들이랑은 다르니까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에스델은 자기가 우쭐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에른스트는 머쓱하게 머리만 긁적였다.

그런 둘의 반응을 무시하며 데일은 책을 펼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스델도 낡은 성경을 꺼낸 뒤, 에른스트에 물었다.

"에른스트 님은 독서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나요?"

"흠. 흠흠.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어딜 가든 항상 책을 가지고 다닙니다. 책은 영혼의 양식이니 말이죠!"

에른스트는 시종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

"...뭘 말이시죠."

"내가 즐겨 읽는 책 좀 건네주라고."

시종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갑자기 뭔 소리예요. 평생 책이라고는 기사도 소설밖에 읽어보지 않은 분이!"

"지금은 일단 아무 책이나 달라고!"

그런 둘의 실랑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데일은 책을 읽어내렸다.

앞으로 목적지인 서북부 지역까지는 못해도 일주일은 가야 하니, 여유를 좀 가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데일의 머지않아 방해받았다.

마차가 갑작스럽게 멈춰버렸다.

"뭐야. 왜 멈추는 겁니까."

시종의 물음에 하켄이 말했다.

"아무래도 직접 확인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

일행은 마차에서 내렸다.

에스델이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세, 세상에."

가도에는 시체가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못해도 10명은 죽었다.

마차 2대가 부서져 있었고, 온 사방에 피가 낭자했다.

데일은 바닥 한편에 널브러진 피에 젖은 깃발을 발견했다.

'이건....'

어제. 대로를 지나칠 때 마주쳤던 마차에 새겨진 문양과 같다.

에스델이 중얼거렸다.

"도, 도적 떼에 습격이라도 당한 걸까요?"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화살에 당한 시체가 적고, 대부분은 검에 치명상을 입었다.

하나하나 깔끔하고 절묘한 궤적의 검상이다. 어중이떠중이 도적이 가지기에는 너무 뛰어난 검술.

옆에 서 있던 하티는 시체 주위를 맴돌다, 어디론가로 고개를 돌리고 으르렁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데일도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다들 준비해라."

이윽고, 수풀에서 이 참상을 만들어낸 원흉들이 걸어 나왔다.

잘 무장한 기사와 사병이 스물.

그들은 딱히 숨길 생각도 없는지, 피가 묻은 검을 들고 이쪽을 향해 당당히 다가왔다.

그중 한 기사가 데일을 발견하고는 화색을 띠었다.

"어?"

참으로 공교롭게도, 훈장 수여식에서 데일에게 시비를 걸었던 기사다.

기사는 기뻐하며 외쳤다.

"아무래도 신께서는 나를 어여삐 여기시나보군! 이 건방진 반송장을 다시 만나게 해주다니!"

사납게 미소 짓는 기사에게 다른 기사들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기사는 그런 기사들을 뒤로 물렸다.

"저놈은 나 혼자서도 충분하오."

그러고는 검을 뽑으며, 데일을 향해 말했다.

"그때 내가 너를 죽이지 않은 건 기사단장 때문이었다는 걸 똑똑히 알려주마."

데일도 마검을 뽑아 들고는 중얼거렸다.

"그거 우연이군."

데일의 생각도 기사와 똑같았다.

시험

* * *

기사가 홀로 다가오며 말했다.

"오네트 가문의 가레스."

다른 기사들은 끼어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런 부분은 기사답다고 해야 할지.

'나야 좋지만.'

보이는 숫자는 이쪽이 적다. 저쪽에서 1대1로 싸워준다면, 데일에게야 나쁠 게 없었다.

데일은 검을 쥐고 마주 걸어 나갔다.

"데일."

"그래. 반송장아. 감히 나에게 건방지게 군 걸 후회하게... 윽!"

갑작스레 달려든 데일이 검을 내려베었다. 가레스는 당황했다.

생각보다 데일의 움직임이 빨랐던 탓이다.

가레스는 급하게 검을 세웠다.

캉!

검과 검이 맞붙었다. 손을 타고 오르는 짜르르한 충격에 가레스가 연거푸 뒤로 밀려났다.

'무슨 이런 괴물 같은 힘이....'

가레스는 뒤로 물러나다 거의 넘어질 뻔했다.

그런 가레스를 향해 데일이 툭 던졌다.

"그러게 하체를 좀 단련하라니까."

"이 새끼가...."

분노한 가레스의 온몸에 마력이 피어올랐다.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하는 기사들만의 기술. 가레스는 땅을 박차 데일에게 검을 휘둘렀다.

빠르고 날카로운 궤적.

하지만 그 궤적이 어쩐지 낯이 익었다.

'크리스틴이 사용하던 검술이랑 비슷하다.'

제국의 귀족들은 전부 비슷한 검술을 쓰는 걸까?

가레스의 검술은 제법 뛰어났지만, 크리스틴만 못했다.

이미 크리스틴을 상대해본 데일에게는 검로가 너무나 훤히 읽혔다.

반걸음 앞으로 내디딘 데일은 그대로 어깨를 이용해 가레스를 뒤로 밀쳤다.

깔끔한 반격. 가레스가 다시 밀려났다. 그는 어떻게든 균형을 되찾으려 했다. 그때가 빈틈이다.

데일은 왼손을 앞으로 뻗어 가레스의 투구를 짚었다.

당황한 가레스가 중얼거렸다.

"대체 뭘...."

다음 순간. 데일은 유물 장갑을 최대 출력으로 발동해, 강한 충격파를 일으켰다.

까각!

단단한 투구가 조금이나마 찌그러질 정도로 강한 충격이었다.

그 안의 내용물도 당연히 무사하지 못했다.

가레스의 코에서 끈적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눈동자는 흰자위를 드러냈다.

데일은 가레스의 투구를 옆으로 젖혀, 검을 찔러넣음으로써 확인사살까지 마쳤다.

그리고 놈의 몸에 건틀렛을 박아 넣어 생기를 흡수했다.

건장하던 가레스가 말라비틀어진 시체가 되기까지는 불과 얼마 걸리지 않았다.

"어어...!"

지켜보던 에른스트와 사병들이 당황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가레스가 죽은 데다가, 생기까지 흡수되었다.

아무리 아군이 벌인 일이라도, 꽤나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하지만 적들의 충격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수풀에서 이쪽을 지켜보던 적들은 경악했다.

"가, 가레스 님이 이렇게 무력하게 패배했다고?"

"다섯 합도 못 버텨냈잖아...."

그들은 주춤했지만, 이내 자기들 숫자가 더 많다는 데에 자신감을 얻고 이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멍하니 있던 에른스트와 사병들도 퍼뜩 정신을 차린 뒤, 앞으로 나섰다.

에른스트는 적들을 향해 외쳤다.

"멈춰라!"

에른스트의 당당한 외침에 적들이 걸음을 멈췄다.

"나는 티센 가문의 에른스트다! 보아하니 그대들 역시 서북부로 향하는 귀족들 같은데, 어찌하여 우리를 습격하는가!"

그러자 상대방 측은 어이없다는 듯이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무슨 이런 당연한 질문을 던지는지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었다.

쐐액!

적은 대답 대신 화살로 자기들의 뜻을 대변했다.

데일은 손을 뻗어 화살을 퉁겨냈다.

"어. 어엇."

"경쟁자니까 당연히 죽이려고 들겠지. 뒤로 물러나라."

"겨, 경쟁자라니. 나는 어디까지나 백성들을 위해 나선 것이지, 친위대의 단장이 되기 위해 참여한 것이 아니다."

"저놈들이 퍽이나 납득해주겠군. 검이나 뽑아라."

적들이 다시 다가오기 시작했다.

데일의 지시에 에른스트는 황급히 검을 뽑았고, 사병들도 방어 태세를 굳혔다.

데일이 에른스트에게 물었다.

"실전 경험은 있나?"

"모, 몬스터는 몇 번 사냥해본 적이 있어."

"사람이랑은?"

"...처음이다."

데일은 시종에게 말했다.

"네 주인에게 딱 붙어 있어라. 지키면서 싸우는 건 내 전문이 아니야."

"아, 알겠습니다."

다들 긴장한 와중.

데일만 홀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상대측을 향해 말했다.

"다음에는 누가 나와 결투를 벌일 생각이지? 얼마든지 상대해주겠다. 설마 비겁하게 여럿이서 달려들 생각은 아니겠지?"

데일의 도발에 기사들의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혼자 나오지 않고, 데일을 향해 신중하게 거리를 좁혀왔다.

앞서 싸운 가레스보다는 현명한 듯했다.

'기사가 셋이라.'

아군의 전력을 생각하면, 데일이 혼자서 저 셋을 상대해야 할 것이다.

'할 수 있을까?'

데일은 곰곰이 생각했다.

아마도 가레스보다는 실력이 떨어질 기사가 셋. 그 셋을 상대로 데일 혼자서....

'어렵지 않겠어.'

결론이 나왔다.

데일은 홀스터에서 도끼를 꺼냈다. 그대로 팔을 뻗어 투척.

상대도 수준이 떨어지지는 않는지, 기사는 간단히 검을 휘두르는 걸로 가볍게 도끼를 쳐냈다.

"어딜!"

하지만 도끼는 어디까지나 시선 끌기.

그 잠깐의 틈을 이용해 데일이 땅을 박찼다.

세 명의 기사도 곧장 합공을 펼치려 했다. 다음 순간.

데일이 쥐고 있던 주먹을 펼쳤다.

검은 안개가 주위를 덮었다.

사아아아!

더 풍부해진 마력으로, 데일은 아낌없이 검은 안개를 퍼트렸다.

짙은 어둠이 데일과 기사를 감쌌다.

당황한 기사가 외쳤다.

"모, 모두 눈을 감고 청각에 집중해! 보이지는 않아도, 발소리는 낼 수밖에 없어!"

나름 정확한 판단.

하지만 상관없다. 이쪽은 하나고, 저들은 셋.

어둠 속에서 서로 얽히고설키다 보면, 더는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그게 데일의 노림수다.

데일은 냅다 셋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 움직임을 읽어낸 기사들이 검을 내질렀다.

마력으로 강화된 일격은 데일의 갑옷에 상처를 냈다.

하지만 어떻게든 셋의 틈으로 비집고 들어간 데일은 이내 어지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소리가 어디로 이어지는지. 그리고 어디로 향하는지. 알아차리기 어렵게 만들었다.

난전 유도.

이윽고 데일이 행동을 멈췄을 때.

기사 들은 더는 누가 동료이고 누가 데일인지를 제대로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모두가 움직임을 멈췄다. 청각에 집중하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숨소리도 죽였다.

기사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하, 함부로 움직이면 안 돼. 놈도 무한정으로 기술을 사용하지는 못할 거다. 버티면서 안개가 흩어질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해.'

그때. 기사는 자신에게 인기척이 다가옴을 느꼈다.

'온다!'

그는 곧장 검을 내질렀다. 날붙이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린다. 저쪽도 검을 휘두른 것이다.

기사는 적의 공격 궤적을 예측하고, 더욱 힘을 주었다.

캉!

어둠 속에서 검끼리 부딪쳤다.

기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이런!"

"알드 경! 당신이었소!?"

두 기사가 당황하는 사이. 기척을 숨기고 있던 데일의 검이 정수리를 향해 직각으로 떨어져 내렸다.

기사는 본능적으로 검을 마주 들었다.

하지만 급하게 자세를 잡은 터라, 충격을 완전히 흘려낼 수가 없었다.

기사가 땅을 굴렀다.

위기다. 기사는 체면도 상관 않고, 바닥을 여러 번 뒹굴었다.

일단 살고 봐야 한다.

하지만 그냥 두고 볼 데일이 아니다. 기사가 바닥을 구르며, 갑옷과 땅이 부딪히는 소리를 추적했다.

기어코 기사의 투구를 단단히 붙잡았다.

"이, 이거 놔라 이 괴물아!"

기사는 미친 듯이 저항했다. 데일은 단검을 꺼내, 투구가 가려주지 않는 목 부분에 찔러넣었다.

피가 튀었다.

생명력이 강한 기사는 그러고도 한참을 버둥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했어도, 목에 검이 찔리면 살아남기 어려운 법이다.

사람이기에 가지는 어쩔 수 없는 한계.

다른 두 기사는 동료에게 일어난 일을 직감한 듯. 다급히 외쳤다.

"알드 경! 괜찮소?"

"살아있소?"

데일은 기사의 목에서 단검을 뽑아냈다.

그리고 곧바로 생기를 흡수하려다,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새로 배운 기술이 있었지.'

영혼 지배.

상대의 영혼을 뒤흔들어, 조종하는 기술.

산 사람에게는 그 성공률이 낮은 기술이지만....

'죽은 사람에게도 사용이 가능하지.'

데일은 기사의 몸에 건틀릿을 찔러넣었다.

아직 시체에 남은 잔혼이 느껴졌다. 데일은 최대한 생기는 놔둔 채, 잔혼만을 흡수하려 노력했다.

익숙지 않은 작업이었다.

하지만 데일은 이내 요령을 찾았다.

데일은 빠르게 잔혼을 취했고, 그 잔혼을 향해 기술을 사용했다.

'영혼지배.'

잔혼이 저항했다. 하지만 이미 육신을 잃은 영혼의 힘은 약하다.

잔혼은 이내 데일의 명령에 따라, 기사의 몸으로 되돌아갔고, 다음 순간.

알드라는 이름의 기사가 자리에서 다시 일어났다.

"으, 으어어."

되살아난 알드의 입에서는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데일이 시체에 다시 불어넣은 건 잔혼. 말 그대로 영혼의 잔재. 찌꺼기를 뭉쳐 놓은 것에 불과하다.

온전한 상태일 수는 없다.

아주 잠시 동안만 데일에게 되살아나는 걸 허락받은 언데드.

데스나이트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수준이 떨어지는 존재.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적을 혼란에 빠트리기에는 충분하다.

데일은 명령을 내렸다.

"공격해라."

이것보다 더 어려운 명령을 내릴 수는 없었다.

검을 쥐어 든 알드는 동료였던 기사들을 향해 뛰었다.

갓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근육은 살아있었을 때와 비슷한 힘을 내주었다.

"으어."

알드가 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기사들은 누군가 다가온다는 걸 알아차리고 검을 휘둘렀다.

알드는 방어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기사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기사들은 알드의 얼굴을 보고 당황했다.

"아, 알드 경?"

"대체 왜 이러는 것이오!"

하지만 알드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기사들도 알드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분노를 터트렸다.

"감히 이런 짓을!"

"이 천벌 받을 이교도야!"

데일은 그들의 분노를 흘러넘겼다.

권력을 거머쥐기 위해 다른 경쟁자를 잔인하게 살해한 그들이 신의 천벌을 들먹여봤자 우습지도 않았다.

데일은 검을 들고 기사들에게 향했다.

온몸을 사슬갑옷으로 무장한 알드는 그때까지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기사들을 붙잡고 있었다.

데일도 알드에게 합류했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 후.

마침내 안개가 걷혔다.

바깥에서 그 나름의 싸움을 이어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적들은 경악했다.

"기, 기사님들이?"

"어떻게 이럴 수가."

"혼자서 전부 죽였단 말인가...."

기사를 처리하고 남은 사병은 열일곱 명. 여전히 이쪽에 비해서는 많은 숫자다.

하지만 데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쪽에는 새로 부하가 된 언데드 기사 3명이 더 있으니까.

* * *

싸움이 행방은 예상대로 흘러갔다.

사병들은 잘 훈련되어 있었지만, 데일과 그들의 주군이었던 기사들을 상대로는 역부족이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사병들은 항복하거나 도주를 시도했다. 하지만 데일은 단 한 명도 살려주지 않았다.

하티를 시켜서라도 끝끝내 추격해 목숨을 거두었다.

'놓치면 귀찮아진다.'

이 기사들은 나름대로 가문이 있을 것이고, 연줄이 있을 것이다.

데일이 죽였다는 소식이 전해져서 좋을 게 없었다.

애초에 살려둘 이유가 없는 놈들이기도 했고.

잠시 동안 되살아났던 기사들은 머지않아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데일의 마력이 동이 난 것이다.

'마력 소모가 생각보다 더 심한데.'

강력한 힘을 지닌 기사라 그런지, 짧은 시간 동안 지배하는 데에도 마력이 많이 들었다.

흑기사의 고질적인 문제인 마력 부족이 체감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새로 얻은 기술이 적어도 다수를 상대로 한 전투에서, 큰 효과를 발휘했다는 건 확인했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할만한 성과였다.

'어째 평범한 인간에서 한 걸음 더 멀어진 기분이긴 하지만.'

모든 전투를 마무리하고. 데일이 동료들을 향해 돌아왔다.

시종과 에른스트, 그리고 다른 사병들은 데일을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시종이 중얼거렸다.

"어. 음. 강하다는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시종은 말을 흐리고는 기사들의 시체를 흘끔 확인했다.

비싼 돈을 주고 고용한 용병이 기대 이상으로 활약한 게 기쁘다. 기쁘긴 한데....

'너무 기대 이상인데?'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신이 들었다.

적어도 목적지인 서북부까지는 무사히 도착하겠다고. 그리고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어도, 에른스트 하나 정도는 데리고 도망쳐줄 거라고.

충성심 강한 시종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이제 다시 길을 떠날 시간이다.

한 번의 전투로 주저할 시간은 없다.

앞으로 이런 전투를 몇 번이고 치러야 할 테니까.

시험

* * *

이후로도 일행은 사흘 동안 두 번의 기습을 받았다.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하티가 주위를 넓게 정찰하며 기습을 미리 알려주었고, 습격한 이들도 가레스 패거리 보다 전력이 약해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건 데일의 활약이었다.

누구보다 앞장 서서 적진에 파고들어 상대를 죽인 뒤, 그 시체를 일으켜 싸우는 데일 덕에 일행은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나오지 않았다.

설령 다친다 해도 에스델이 말끔히 치료해주었으니 일행의 피해는 조금도 없는 셈.

덕분에 사병들의 사기가 바짝 올랐다.

상대를 죽인 뒤, 그 시체를 일으키며, 다시 죽음으로 돌아간 시체에서 조금 남은 생기까지 마저 거둬들이는 데일의 모습에서는 역시 껄끄러움을 느꼈지만....

'아군이라서 다행이다.'

'같은 편일 때는 든든한데, 적으로 마주치면 끔찍하겠군.'

'실력이 대단해. 우리 도련님은 언제쯤 저 정도 실력에....'

어쨌거나 자기한테 도움이 되므로, 사병들은 점점 데일을 호의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 어스름.

한 차례 싸움을 치른 뒤, 뒤처리를 하는 와중에 하켄이 호들갑을 떨었다.

"이야. 데일 경. 저 시체 일으키는 거, 대단한데요? 어쩌면 혼자서 군대도 상대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네크로맨서처럼요."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마력이 너무 많이 든다. 연이어 전투를 치르면, 쓸 수 없는 기술이야."

한번 소진한 마력을 완전히 회복하려면 못해도 하루의 시간이 걸린다.

즉. 싸움이 길어질수록 데일은 다시 예전처럼 무기를 들고 무식하게 싸워야 했다.

옆에 함께 있던 에스델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아무리 그래도 죽은 자를 되살리는 건...."

"왜 그러나?"

"아니. 아닙니다.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습니다. 죽어서 그 속죄를 조금이나마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야죠."

교단의 신자들은 언데드를 되살리는 건 죽은 자에 대한 모독이라고 여긴다.

에스델도 이전이었으면 질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해해주려고 노력하는 게 눈에 보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에스델은 데일과 다니면서, '불경스러운' 것들에 대해 관대해지고 있었다.

변하고 있는 것이다.

'교단에서 그런 변화를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싫어하지 않을까?

사제들이 다루는 기적은 결국 빛의 여신에 대한 믿음에 근간을 두는 힘이다.

이교도에게 물들수록 에스델이 따르는 빛의 여신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를 일이다.

'그런 것치고는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지만.'

에스델이 다루는 기적은 점점 힘을 더해가고 있었다.

이제는 하급 사제를 확실히 뛰어넘은 느낌.

어쩌면 에스델이 이전에 함께 싸웠던 페일이나 탈로스를 뛰어넘는 것도, 먼 얘기가 아닐 수도 있다.

에스델을 교단에서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것도 아마 그런 순조로운 성장 때문도 있을터.

생각을 정리하던 데일에게 하티가 다가왔다. 하티가 데일을 빤히 쳐다보았다.

"잘했다. 다음에도 적이 오면 알려라."

데일은 그런 하티의 갈기를 쓸어주었다.

하티는 그게 아니라는 듯.

신경질을 부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말라비틀어진 시체를 턱짓했다.

먹어도 되냐는 의미였다.

"음."

잠시 고민했지만, 데일은 허락했다. 이미 끔찍한 꼴을 많이 보였는데, 시체를 뜯어먹는 늑대를 본다고 사람들이 더 놀랄 것 같지는 않다.

실리적인 이유도 있다.

시체를 태우려면 장작과 여러 노력이 필요하지만, 하티의 뱃속에 들어가면 그럴 걱정이 없었다.

오도독. 오도독.

전투가 끝나고 내려앉은 적막. 그 속에서 개껌 씹는듯한 소리만이 한동안 울려 퍼졌다.

휴식을 취하던 사병들은 애써 그 광경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음먹었다.

'절대 저 기사 말에 거역하지 말아야지.'

'안 그러면 늑대한테 뜯어먹힐 거야.'

어쨌거나 이 무리에 있는 모두가 데일의 말을 따르고, 데일이 실질적인 리더가 되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 * *

피로한 얼굴로 앉아 있던 시종은 슬쩍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전투를 치른 탓에 시간이 지체되고 말았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해야겠군요."

"또, 또 야영이야?"

마찬가지로 피로에 젖어 있던 에른스트가 화들짝 놀랐다.

날 때부터 귀족이었던 그에게 야영과 노숙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시종이 은근슬쩍 물었다.

"정 힘드시면, 지금이라도 돌아갈까요?"

그러자 에른스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소리! 서북부의 백성들을 구한다는 대의는 벌써 잊었어?"

"...아직도 그 얘기십니까?"

시종은 데일에게 슬쩍 시선을 주었다. 도와달라는 의미였다.

데일은 입을 열었다.

"에른스트. 실전을 겪어보니 어떻던가."

"으음?"

"사람을 몇 명 죽였을 텐데."

데일이 적의 기사들을 상대하는 동안.

에른스트와 일행은 적의 나머지 병력을 상대해야 했다.

에른스트는 짐작했던 대로 제법 괜찮은 검사였다. 실전이라고 과도하게 긴장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전장에서 실력이 뛰어나다는 건 곧. 더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에른스트에게 죽은 병사가 다섯이 넘었다.

첫 실전치고는 많은 숫자였다.

데일의 질문에 에른스트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손이 조금씩 떨렸다.

"으음. 솔직히 말해,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익숙해질 것 같지도 않았고."

"그런가?"

데일은 자신의 첫 실전을 떠올려보려 애썼다. 이 세상에 처음 떨어지고 했던 전투를.

목숨을 걸고 싸우는 위태로운 싸움이었다.

그 당시에는 살인의 거부감이나 죄책감에 대해 생각해볼 여유는 없었다.

그런 걸 생각할 정도로 만만한 적들이 아니었으니.

하지만 돌이켜보면, 다른 상황이었어도 데일은 크게 죄책감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데일은 누군가를 죽이고, 생기를 취하고, 이제는 되살리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 죄책감이나 거부감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멈춘 심장과 차가운 피를 가진 이 몸은 그런 미지근한 감정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살인의 감각에 손을 파르르 떠는 이 에른스트의 인간적인 모습은, 데일에게는 부럽게까지 느껴졌다.

혹은 질투심이 들거나.

데일은 잡스러운 감정들을 털어낸 뒤, 에른스트에게 물었다.

"마음이 안 좋으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좋다. 혹여 돌아가는 게 창피하다면 그런 걱정은 필요 없다. 이렇게 실전을 치르고, 승리해 살아 돌아가는 걸로도 큰 성과다."

게다가 기사나 귀족들에게서 챙겨 든 돈만 해도 적지 않다.

장비는 너무 무겁고 귀찮은 일이 벌어질 수 있어 챙기지 않았지만, 상위 구역의 귀족들은 주머니에 돈을 넉넉히 가지고 다녔다.

에른스트의 가문에서 이번 원정으로 사용한 돈 정도는 이미 메꿨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데일의 제안에 에른스트는 이번에도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어."

데일이 물었다.

"이제 알지 않나? 이번 시험은 단순히 백성을 돕기 위해 내려진 게 아니다. 가면 갈수록 다른 귀족들이랑 싸울 일도 많을 거다."

에른스트는 한점 흔들림 없이 답했다.

"그러니 더더욱 돌아갈 수 없어. 다른 귀족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는 데에 집중한다면, 고통받는 백성은 누가 지키겠어? 귀족으로서. 아니, 사람으로서 당연히 가야 하는 거야."

이야기를 엿듣던 시종과 사병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켄은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데일은 웃지 않았다.

데일의 무표정한 얼굴이 미소를 짓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데일은 그를 비웃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사람으로서 당연하다라.'

어떻게 보면 데일과도 비슷한 동기.

어쩌면 단순히 치기 어린 신념일 수도 있다. 금세 닳아 없어지고, 꺾여버릴 의지일 수도 있고.

하지만 데일은 이 순진한 귀족 청년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과연 에른스트가 순수한 이상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그 끝을 지켜보고 싶어졌다.

* * *

일행은 그렇게 나흘을 더 이동했고, 드디어 서북부 지역의 끝자락이라 할 수 있는 곳에 도착했다.

작은 마을이었다.

허름하고, 가난한 그런 마을.

마을 주민들은 겨울을 날 채비를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마차 3대가 다가오니 주민들의 시선이 몰렸다.

공교롭게도, 마차에서 가장 먼저 내린 건 데일이었다.

데일은 마을 사람들에게 최대한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말했다.

"물어볼 게 있소."

주민들은 데일을 보았다. 짧은 사이에 자기들끼리 시선을 교환했고, 이내....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 도망쳐! 검은 사신이 왔다!"

"모두 피해!"

마치 악마라도 본 듯. 격한 반응이다.

흑기사가 어딜 가서든 두려움을 사는 대상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신이라니.

'이건 좀 심한데?'

마침 도망치던 사내 하나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데일은 사내에게 다가갔다.

안색이 창백해진 사내가 손을 싹싹 빌었다.

"사, 사, 살려주세요. 저에게는 먹여 살려야 할 아내와 자식들이 있습니다."

"안 잡아먹으니까 진정하고 내 얘기를 들어라."

"자, 잡아먹는다니!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저는 맛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안 잡아먹는다고."

사내는 거의 기절할 기세였다.

에스델이 다가와 데일에게 핀잔을 주었다.

"왜 선량한 사람들을 겁주고 그러십니까."

"내가 겁을 준 게 아니라, 자기가 겁을 집어먹은 거다."

"비켜보세요."

데일은 어쩔 수 없이 에스델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누구를 상대하든, 시커먼 이교도 기사보다는 어여쁜 여사제가 호감을 주기 쉬운 건 당연한 일이다.

에스델이 앞으로 나서자 넘어진 사내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에스델은 사제 특유의 부드럽고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일행이 하루 마을에 묵고 싶다는 것과 데일이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는 것.

"데일 경은 이교도지만 좋은 분이에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진...짜입니까?"

선뜻 믿기지 않는 표정.

하지만 교단의 사제의 말이 지니는 권위는 크다.

사내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납득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에스델이 말하니 믿어보겠다는 눈치였다.

설득하는 데에 든 시간은 불과 5분.

에스델은 데일을 뒤돌아보며, 해냈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

세상은 불공평한 법이다.

데일은 에스델에게 말했다.

"이참에 주위 소문도 좀 물어봐라. 마을 상황이나."

그간 일행은 마을에도 들리지 않고 분주히도 달려왔다.

일행에게는 정보가 필요했다.

'이미 서북부에 많이들 도착했겠지.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거고. 어쩌면 상황이 생각보다 빠르게 해결되었을 수도 있어.'

그럴 확률은 낮지만, 이미 귀족들이 서북부의 혼란을 해결했다면, 헛물켜지 말고 얌전히 돌아가는 게 현명했다.

고개를 끄덕인 에스델은 사내에게 주위 소문에 대해 물어봤다.

사내는 별도의 보상을 요구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에스델에게 무언가를 알려줄 수 있어 기쁘다는 듯. 주위에 들려오는 소문에 대해 이것저것 말해주었다.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몬스터들. 더 많이 일어나는 언데드. 그것들을 막기 위해 모여드는 기사와 용병.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

에스델은 자기가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뭐가 나타났다고요?"

"검은 사신. 검은 사신이 나타났다고요!"

사내는 마치 그 이름을 부르면 당사자가 찾아오기라도 할 것처럼,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검은 사신이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고 있어요.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잠깐. 그 검은 사신이라는 게 대체 뭘 말하는 거죠?"

"거, 검은 사신은. 새까만 갑옷을 입고 다니는데...."

사내는 손짓발짓을 해가며 그 검은 사신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에 대해 묘사했다.

머지않아 에스델과 데일은 그 검은 사신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게 되었다.

주민들이 유독 데일을 보며 과민반응했던 이유.

'흑기사.'

또 다른 흑기사가 서북부를 배회하며 공포를 흩뿌리고 있었다.

언데드

* * *

비가 내렸다.

아마도 북부에서 올해 내리는 마지막 비일 것이다.

북부의 겨울은 일찍 찾아온다.

이 비가 눈과 얼음으로 바뀌기까지는, 불과 얼마 남지 않았다.

눈이 내리고. 대지가 얼어붙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진정한 고난의 시작이다.

사람이나 몬스터나 지금 이 시기에 필사적으로 돌아다니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그런 비를 어느 기사가 멍하니 맞고 있었다.

빗방울은 뼛속까지 시리게 할 정도로 차갑지만, 이 기사는 그러한 감각을 모른다.

무엇이 차갑고. 무엇이 뜨거운지는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다.

"...."

툭.

빗방울 하나가 투구에 떨어지더니, 이내 눈구멍으로 흘러들어왔다.

공허하던 눈동자에 푸른 안광이 피어오르며 정신이 되돌아온다.

기사는 고개를 내려 자기 몸을 둘러보았다. 멈춘 심장. 새까만 건틀릿. 새까만 갑주.

등에 메인 무식하게 큰 대검이 꽂혀 있었다.

자신이 누구였더라?

기사는 고개를 내리고 생각했다.

기억나지 않는다. 모든 게 흐릿하다.

머릿속에 짙은 안개가 끼어 있어, 제대로 된 사고를 방해한다.

이성이 흐릿해지면 본능이 주도권을 찾는 법.

기사의 코에 기분 좋은 향이 흘러들어왔다. 피냄새다.

기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주위에 펼쳐진 참상을 확인했다.

사방이 시체다.

비싼 검과 갑옷으로 무장한 시체들이 이곳저곳 널브러져 있었다. 한쪽에는 귀족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벌인 걸까.

기사는 머지않아 정답을 알아냈다.

자신.

기사는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시체에 다가가, 그 살점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마치 언데드나 몬스터처럼.

생기를 흡수하는 다른 방법이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기사는 직접 씹어먹는 게 마음에 들었다. 이편이 더 만족감이 컸다.

긴 시간 이어진 식사를 마친 뒤.

기사는 습관적으로 배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포식했건만, '배부르다'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언데드 특유의 끝없는 공허함만이 가슴속을 맴돌았다.

더 필요해.

기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더 많은 희생양을 집어삼켜, 더 강해진다. 그 본능을 충족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기사는 멈칫했다.

아니야.

단순히 먹고 사냥하기 위해 이곳까지 온 건 아니다.

분명 이유가 있었다. 이 차가운 땅에 찾아온 중요한 이유가.

"...."

기사는 머리를 쥐어 싸맸다.

어떻게든 머릿속 안개를 헤집어, 기억을 끄집어내려 했다.

그러다 불현듯. 머릿속 안개가 걷히며 세 개의 단어가 떠올랐다.

돌아간다.

기사는 그 단어를 힘주어 말했다.

"돌...아간다."

가을비만큼이나 차갑고, 무감정한 목소리였지만 일단 내뱉고 나니 한층 기분이 나아졌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 것 같았다.

그때. 기사의 허리에 메인 배낭에서 무언가가 웅웅 진동했다.

기사는 배낭을 열었다.

그 안에 든 건 자줏빛을 내는 수정구였다.

사악하고도 강력한 힘이 깃든 수정구.

이게 뭐지? 왜 나한테 있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왜인지 이 수정구를 어떻게 써야 할지는 알 것 같았다.

기사는 수정구를 손에 쥐고, 집중했다.

그러자 수정구에서 자줏빛 광휘가 주위를 덮었다.

빛은 대지로 스며들었다.

다음 순간.

기사가 뜯어먹고 남은 뼈다귀와 살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몇몇은 생전의 습관대로 검을 들었고, 또 몇몇은 무거운 갑옷을 거뜬히 버텨내며 움직였다.

기사는 되살아난 시체들에게 무심하게 고개를 돌린 뒤, 중얼거렸다.

"돌아간다."

기사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뒤로 구울, 스켈레톤, 좀비 등등. 갖가지 언데드들이 자기만의 속도로 기사를 따라나섰다.

개중에는 기사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낙오되는 언데드도 있었다.

기사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낙오된 언데드들이 주위에 영향을 주어, 또 다들 언데드를 일으킬 거라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기사는 희미해진 감정과 몸을 지배하는 본능에 따라 전진했다.

검은 사신이라는 별명의 흑기사는 그렇게 다른 사냥감을 찾아 나섰다.

* * *

데일과 일행이 들른 마을은 숲 근처에 있다 해서 '숲 밑 마을'이라는 이름을 지닌 곳이었다.

50명이 정도 주민이 살아가고 있었는데, 허름한 집이나 조잡한 목책을 보면 썩 여유 있는 마을은 아니었다.

에스델이 주민들을 적극적으로 안심시켜준 뒤에서야, 도망갔던 주민들은 마을로 되돌아왔다.

에른스트는 촌장에게 부탁했다.

"우리 일행이 하루 묵고 갈 숙소를 내줬으면 좋겠는데. 아, 기왕이면 식사와 술도."

"으음."

"당연히 사례는 넉넉히 할 생각이다. 나는 다른 귀족과 달리, 공짜로 얻어먹을 생각은 없어."

귀족의 피가 지금보다 더 고귀했을 시절.

평민들이 마을에 들른 귀족을 대접하기 위해 주머니를 털고 가축을 잡아야 했던 건 당연한 의무에 가까웠다.

성난 귀족의 병사들에게 칼을 맞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악마의 침공 이후 그런 일은 크게 줄었다.

이제는 귀족이라는 이름값이 예전만 못하기도 하거니와, 가난한 농가에도 칼 한 자루씩은 구비해놓는 시대다.

하루 무전취식을 하기 위해 감수해야 할 위험성이 너무 커졌다.

에른스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촌장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뭘 당연한 걸 가지고 생색내는 거지? 당연히 식사를 했으면 돈을 내야지.'

하지만 그걸 입 밖에 낼 수는 없다.

병사를 이끌고 온 귀족.

심지어 공포스러운 흑기사를 데리고 온 귀족에게는 예의를 갖추어야 했다.

촌장이 허리를 굽신거렸다.

"그, 그건 아닙니다. 다만. 저희 마을은 보다시피 작은 마을이라, 여관도 없고, 숙소라 할 것 없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대접하지 못할까 해서, 걱정했을 뿐입니다."

"그, 그렇군. 마을에 여관이 없을 수도 있군."

"예에... 그. 일단 괜찮으시면, 도련님께는 저희집을 내어드리겠습니다."

"으음. 촌장의 집이라."

으레 촌장의 집은 마을에서 가장 크고 괜찮은 저택이기 마련이다.

촌장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셈.

다른 사병들은 각각 나뉘어 다른 주민의 집에서 묵어야 할 것이다.

에른스트가 주저하는 사이. 시종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기왕이면 돼지도 한 마리 잡아주고요. 아. 일단 이것부터 받으세요."

시종은 돈이 든 주머니를 재빨리 촌장의 손에 건네주었다.

상당히 묵직한 주머니였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촌장의 손에 은화 한 닢까지 추가로 쥐여주었다.

"이건 개인적인 감사의 의미를 주는 것입니다."

"허. 허허. 뭘 이런 걸 다."

주머니의 돈은 마을 주민들과 나누어야 하지만, 이건 촌장 개인에게 주는 돈.

반짝이는 은화를 확인한 촌장의 눈이 반짝였다.

언제 어디서나 뇌물은 먹히는 법이다.

시종이 말했다.

"병사들이 쉬고 씻을 수 있게 우선 따뜻한 물이랑 음식부터 준비해주시죠. 괜찮겠죠 도련님?"

"으응. 그렇게 해라."

의례적으로 묻는 시종의 말에 에른스트가 동의하자, 촌장이 손을 비비며 답했다.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궁금한 게 있다면, 제 아내에게 물어보십쇼."

그렇게 말을 남긴 촌장이 사라지고, 촌장의 늙은 아내가 자리를 대신했다.

갑자기 혼자 남게 된 촌장의 늙은 아내는 외지인들이 영 불편한지.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런 아내에게 에른스트가 부드럽게 물었다.

"촌장의 말대로, 이 근방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겠어?"

"버, 벌어지는 일이라 하면?"

"몬스터의 동향. 언데드가 일어난 지역. 귀족들. 알고 있는 건 사소한 소문까지 전부 알려줬으면 좋겠는데."

"으음. 알겠습니다."

주저하던 여인은 하나둘 알고 있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언데드가 점점 더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과 몬스터들이 생각보다 더 기승이라는 것.

그리고 그런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귀족들이 병사들을 이끌고 모여들고 있다는 것까지.

여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이지 큰일이었지요. 몬스터에 이어 언데드까지 일어나다니. 마을이 몇 개나 사라졌는지 몰라요. 영주님은 몬스터를 막아내는 데에만도 급급했고요. 그런데 귀족분들께서 저희들을 위해 한달음에 달려와주시니, 이보다 더 기쁠 수가 없더라고요."

사실 귀족들의 의도는 그리 순수하지만은 않지만, 결과적으로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에른스트가 물었다.

"혹, 귀족들끼리 다툼을 벌인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어?"

"으음.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귀족들끼리 싸움을 벌여도,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싸우지는 않을 거다.

그들도 기왕이면 자기가 경쟁자를 죽였다는 걸 숨기고 싶을 테니.

데일이 끼어들었다.

"시체가 발견되거나 하지는 않았나?"

"아, 으. 그게."

데일의 질문을 받은 여인이 굳어버렸다.

에스델이 말했다.

"데일 경."

이제는 받아들이기로 한 데일이 말했다.

"나 대신 네가 물어봐라."

"귀족들의 시체가 발견되는 일은 없었나요?"

똑같은 질문을 에스델이 하자, 다시 마음을 진정한 여인이 말했다.

"그, 그러고 보니 귀족분들의 주검이 가끔 발견되기는 하는데... 그건 검은 사신의 짓이었습니다!"

검은 사신.

아까 겁에 질렸던 사내도 그 이름을 꺼냈었다. 이 주위를 배회하는 흑기사가 있다고.

데일이 말했다.

"그 얘기를 더 자세히 해달라고 물어봐라."

"그 얘기를 더 자세히 해주시죠."

여인은 더듬더듬 설명했다.

그 흑기사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건, 용뼈 산맥의 바로 아래에 자리한 사냥꾼 마을이다.

당시에는 몬스터가 자주 내려와 사냥꾼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는데, 산에서 웬 시커먼 기사가 내려오는 걸 발견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엘프인 줄 알았답니다. 용뼈 산맥에서 하이 엘프가 내려오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아니었다.

내려온 건 엘프보다 더욱 위험한 존재였다.

상대가 엘프가 아니란 걸 확인한 사냥꾼들은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며 화살을 겨누었다.

그런 경계심은 비단 상대가 이교도 기사여서만은 아니다.

"피 냄새. 온몸에서 피냄새가 진동했다고 하더라고요. 짐승을 해체하는 데에 이골이 난 사냥꾼들도, 그런 지독한 피 냄새는 처음이었데요."

"그 뒤로 어떻게 됐나요?"

여인은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전부 죽었답니다."

사냥꾼들은 전부 죽었다.

흑기사는 너무나 강했다. 사냥꾼들은 흑기사를 상대로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가장 처음에 도망친 어린 사냥꾼만이 목숨을 건졌다.

살아남은 사냥꾼은 도시에 가서 이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도시에서도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고 한다.

산맥에서 내려온 몬스터를 신경 쓰기도 바빴던 데다가, 겁쟁이 사냥꾼이 도망친 걸 변명하고자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았다.

그게 피해를 키웠다.

그 흑기사가 제대로 주목을 받고, 검은 사신이라는 별명을 얻은 건, 3개의 마을이 더 초토화되고 난 후였다.

이야기를 들은 데일은 곰곰이 생각했다.

'흑기사라.'

흑기사.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난 후. 데일은 자기를 제외한 흑기사를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

심지어 밤의 신전에서도 흑기사는 보기 힘들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대부분의 흑기사는 전선에 있다.

언데드의 본능에 반쯤 잡아 먹혀 살육만을 반복하는 그들이 적성을 발휘할 수 있는 장소는 오직 전선뿐이었다.

'그런 흑기사가 이곳에 나타났다라.'

전선에나 있어야 할 흑기사가 이 서북부에. 그것도 하필 몬스터가 기승을 부리는 시기에 맞춰 나타났다.

그리고 언데드들이 일어나고 있다.

우연이라고 여기기에는 공교롭다.

'어쩌면 이번 혼란의 원인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수도 있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내줄 집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이냐! 감히 누구인 줄 알고!"

"아이고 죄송합니다! 하, 하지만."

어리둥절해 하던 일행은 촌장의 집을 나섰다.

그리고 보았다.

마을로 들어오는 네 대의 마차를.

마차에는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화려한 깃발이 걸려 있었다.

'이런.'

목적지가 같으면 결국 경로도 비슷하기 마련이다.

또 다른 귀족이 용병과 병사를 이끌고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곳은 작은 마을이다.

이미 15명이 찾아온 것만 해도 버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다.

즉.

어느 한쪽은 오늘, 지붕 아래서 편안한 밤을 보내는 걸 포기해야 한다.

언데드

* * *

갑작스러운 소란에 데일 일행과 마을 주민들이 모두 밖으로 나왔다.

촌장이 귀족의 시종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연신 고개를 꾸벅이고 있었다.

"묵을 곳이 없다고?"

"정말 죄송합니다! 이미 손님이 와 계신 터라 빈집이 없습니다...."

시종은 곤란한 기색으로 슬쩍 뒤를 살폈다.

그러자 마차 문이 열리고, 웬 귀족이 한 명 내렸다.

평생 운동과는 담쌓고 지낸 듯.

살이 토실토실하게 오르고, 얼굴에 기름기가 반들거리는 귀족이었다.

실제로 귀족의 손에는 노릇하게 구워진 양다리를 손에 들고 있었다.

마차에서 고기 향이 주위로 훅 풍겨왔다.

'마차 안에서 고기를 구우면서 온 건가. 여러 의미로 대단하군.'

귀족은 기름진 몸과는 어울리지 않게, 차가운 얼굴로 촌장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말했다.

"지금 우리가 잘 곳이 없다고 했나?"

귀족 특유의 고압적인 눈빛에 촌장이 움츠러들었다. 더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 마을은...."

짝! 짝!

귀족은 늙은 촌장의 볼을 연달아 후려갈겼다.

뚱뚱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재빠른 손놀림이었는데, 누군가의 따귀를 때리는 게 매우 익숙한 듯 보였다.

느닷없는 폭력에 촌장이 바닥에 엎어졌다. 입술이 터져 피가 흘러내렸다.

지켜보던 주민들도 크게 당황했다.

"아이고...."

귀족이 늙은 촌장의 멱살을 쥐고 싸늘하게 말했다.

"빈집이 없으면, 너희가 노숙을 해서라도 집을 비우면 될 일 아닌가?"

"죄, 죄송합니다."

"미안할 짓을 했으면 대가를 벌을 받아야지. 어디, 나를 귀찮게 했으니까... 10대 정도로 봐줄까?"

귀족은 그리 말하고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대로 촌장의 따귀를 연거푸 후려치려 했다.

그때.

누군가가 귀족의 팔을 붙잡았다.

"그만하지."

"!"

감히 누가 자기 손목을 붙잡는단 말인가.

분노한 귀족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새까만 갑옷의 기사가 어느새 자신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흑기사가 풍겨내는 싸늘한 한기와 불길한 기운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오싹했다.

마차에서 내리던 병사들도 이 갑작스러운 당황에 검을 뽑으려 했다.

"이, 이놈!"

데일은 차갑게 말했다.

"뽑을 건가?"

그리고 귀족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토실토실한 팔을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아, 아악!"

검을 뽑으려던 병사들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췄다. 그대로 무기를 뽑았다가는, 그들의 주인에게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그때까지도 팔이 붙잡혀 있던 귀족이 말했다.

"아, 알겠으니 이거 놓아라."

"그보다 먼저 사과를 해야지."

"뭐, 뭐?"

데일은 턱짓으로 촌장을 가리켰다. 귀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황한 촌장이 손을 내저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 정도로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보, 본인이 괜찮다잖아. 네가 뭔데... 아악!"

데일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안 괜찮다."

귀족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참아보려 했다. 척 봐도 오만해 보이는 귀족이 아랫사람에게 사과한다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데일은 만약 귀족이 손목을 부러질 때까지 사과를 하지 않는다면, 그 나름대로 인정할 생각이었다.

그 정도면 단순한 우월의식이 아닌, 신념의 영역이었으니까.

데일은 신념 있는 사람을 존중하는 편이었다.

아쉽게도 귀족에게는 그런 강인한 정신이 없었다.

"아, 알았다. 미안해. 미안하다고. 그러니 어서 이거 놔라!"

그제야 데일은 귀족의 손을 놓아주었다.

빨갛게 부은 손목을 만지작거린 귀족은 급하게 뒤로 물러나 병사들 사이에 섞였다.

시종이 급하게 손목을 봐주려 했지만, 귀족은 도리어 시종의 뺨을 때린 뒤 성을 냈다.

"내가 잡혀 있을 때 뭐했어? 나를 지켰어야지."

"죄, 죄송합니다...."

"쯧. 쓸모없는 것들."

그 모습을 보던 하켄이 중얼거렸다.

"이야. 요즘 보기 드문 귀족다운 귀족인데요?"

데일도 동의했다.

꽤나 고위 귀족의 자재인 걸까?

데일은 에른스트에게 물었다.

"아는 사람인가?"

에른스트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이를 으득 악물고는 말했다.

"칼리 자작가의 차남, 이고르다."

"칼리 자작가?"

"모르나? 대대로 제국에서 행정 관리를 지내는 가문이다."

에른스트는 당연한 상식인 것처럼 말했지만, 그런 걸 데일이 알 리가 없다.

"행정관 가문이 친위대 단장을 하겠다고 이 먼 곳까지 왔다고?"

"능력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놈이야. 돼지처럼 처먹고 노는 것밖에 모르는 쓰레기지. 이제 상위 구역 밖으로 쫓겨날 일밖에 없으니,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이번 시험에 참가한 거 아니겠어?"

에른스트가 신랄하게 말하는 중.

자기 부하들에게 화풀이를 마친 이고르가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데일 옆에 서 있는 에른스트를 발견했다.

"이거 누구야. 누가 건방지게 내 숙소를 차지했나 했더니, 머저리. 너였냐?"

이죽거리는 이고르에게 에른스트가 맞받아쳤다.

"돼지. 긴말하지 않겠어."

돼지라는 말에 이고르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아무래도 이 둘. 사이가 심히 좋지 않은 듯하다.

에른스트가 이어 말했다.

"우리는 이미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하룻밤 묵고 가기로 합의를 보았어. 그리고 이 작은 마을에는 너희들을 더 받아줄 여력이 없어. 그러니 얌전히 물러나."

"글쎄. 난 조금 생각이 다른데?"

이고르가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당장 꺼져. 험한 꼴 당하고 싶지 않으면."

둘이 사이가 좋았다면.

어쩌면 문제를 좋게 해결할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촌장 집은 꽤 넓은 편이니, 함께 하루를 보내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둘의 사이는 너무나 나빴다.

설상가상.

무언가가 하켄의 이마 위로 툭 떨어졌다.

"앗 차가... 비?"

가을비.

이런 날씨에 비를 맞으며 밖에서 야영한다는 건, 과장이 아니라 목숨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즉. 여기서는 더더욱 물러날 수가 없다는 거다.

주위 분위기는 차가운 비만큼이나 싸늘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에른스트와 이고르는 표정을 굳혔다.

양측의 사병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주위에 선 주민들은 불안하게 눈동자만 굴렸다. 싸움이 벌어진다면, 애꿎은 그들에게 불똥이 튈 확률이 높았다.

이대로라면 언제까지고 서로를 노려볼 것 같은 분위기였다. 데일이 에스델에게 조그맣게 말했다.

"네가 중재해라."

"...예? 저 말씀인가요?"

"어찌어찌 잘 합의해서 같이 집을 쓴다면, 비를 피하는 건 가능하다. 조금 좁겠지만."

양측 다 싸움을 원하지는 않을 거다.

에른스트는 단장 자리에 관심이 없고, 이고르 역시 이쪽 전력이 만만치 않음을 잘 안다.

싸워봤자 서로 손해다.

문제는 서로의 자존심이다.

이렇게 대립 해 놓고, 손을 먼저 내미는 건 자존심이 몹시 상하는 일이다.

하지만 에스델이 중재한다면 다르다.

교단의 사제라면 귀족들도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해, 해볼게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 에스델이 앞에 나섰다.

그리고 에른스트에게 말했다.

"에른스트 님."

"에스델 님...."

정적 속에서 에스델의 맑은 목소리가 선명히 울렸다.

"서로 양보하면 어떻겠습니까. 조금 좁더라도, 서로 어깨를 맞대고 부대끼면 비는 피할 수 있을 겁니다. 신께서도 언제나 이웃에 대한 배려를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이 그 조언을 실천해야 할 때가 아닐까요?"

에른스트는 끙. 하고 신음을 삼켰고, 사병들은 서로 눈치만 살폈다.

말이야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이고르가 툭 내뱉었다.

"밤중에 습격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나?"

"서로 믿고 배려한다면...."

"그 잘난 배려가 칼을 막아주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보다 제대로 된 사제가 맞긴 한 건가? 사제라면 어떻게 저런 이교도랑 함께 다니는 거지? 사제복을 훔쳐 입고 사칭하는 거 아니야?"

에스델이 사제라는 건 그 분위기만으로도 확실하지만, 이고르는 일부러 그렇게 이죽거렸다.

이교도와 다닌다는 점 또한 에스델에게는 불리한 점이기도 했다.

신실한 사제답지 못한 일이었으니.

'저 돼지 말이 틀린 건 아니야.'

서로를 믿지 못하는 이상, 같은 마을에서 묵는 건 어려운 일이다.

밤중에 칼을 빼 들지 누가 알겠는가. 결국, 타협의 여지는 처음부터 없었던 셈이다.

에른스트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그래서. 기어코 칼을 뽑자는 거야?"

"필요하다면."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자존심과 체면은 사람을 어리석게 만든다.

스릉!

양측은 서로 누가 먼저랄 세도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숫자는 상대가 이쪽에 비해 두 배 정도 많다.

저 숫자야말로 이고르의 자신감의 이유다.

하지만 아군 역시 겁먹지 않았다.

반드시 이길 거라고 굳게 믿었다.

아군의 자신감의 이유는 데일이다.

'...데일 경이라면.'

'더 강한 기사들도 이겼어. 저런 돼지한테 질 리는 없지.'

병사들이 보기에, 데일을 상대하려면 못해도 황실 기사단의 기사는 데려와야 했다.

하지만 시험에 참여한 건 황실 기사단에 들지 못한 애매한 실력의 귀족이나 기사들뿐.

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가 긴장 속에 대치하고.

주민들은 화를 피하기 위해 뒤로 물러나던 중.

가장 바깥쪽에 서 있던 주민이 코를 벌름거렸다.

"응? 이게 무슨 냄새지?"

"뭐가."

"뭔가 썩은 내 안 나?"

"좀 씻으라니까...."

"그런 게 아니라 뭔가 이상한데?"

그와 동시에 데일의 옆에 있던 하티도 낮게 울부짖었다.

데일도 이변을 알아차렸다.

'무언가 오고 있다.'

확실한 건 사람은 아니다.

여전히 서로를 향해 대치하는 사병들을 무시하고, 데일은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양측의 사병들은 그런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당황했다.

시종이 물었다.

"데, 데일 경. 갑자기 어디 가시는 겁니까."

"일단 싸우는 건 나중으로 미뤄야 될 것 같다."

"예?"

데일은 조잡한 목책을 나서, 저 멀리 있는 숲으로 시선을 향했다.

함께 따라온 하티 역시 잔뜩 흥분해 발톱으로 바닥을 긁어댔다.

어둠에 잠긴 숲. 곧게 선 나무줄기 사이로 푸른 빛을 내뿜는 안광 수십 쌍이 이쪽을 향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언데드.

대부분은 좀비나 스켈레톤 따위의 하급 언데드다.

하지만 저 중에 단 하나. 유독 거대하고. 압도적인 기세를 흩뿌리는 녀석이 있었다.

녀석이 이쪽으로 느릿하게 걸을 때마다 쿵, 쿵, 땅이 울렸다.

풀썩!

거대한 덩치의 괴물이 움직이자, 나무 한 그루가 옆으로 기우뚱 쓰러졌다.

넘어진 나무 너머로 녀석의 모습이 드러났다.

거인과 비슷한 신체 구조지만 유독 뚱뚱하고 짧은 다리. 옆으로 퍼진 몸. 단단한 근육.

무시무시한 모습의 외눈박이.

'오우거군.'

오우거. 거인과 친척 관계라 볼 수 있는 몬스터.

하지만 눈앞의 상대는 평범한 오우거가 아니었다.

"쉬익. 쉬이익"

오우거는 무어라 외쳐댔지만, 반쯤 잘려 덜렁거리는 목에서는 바람 빠지는 소리만이 들렸다.

저건 살아있는 오우거나 아니다.

언데드 오우거.

데일을 따라 뒤늦게 튀어나온 사병과 주민들은 사색이 되었다.

그들은 살면서 저런 끔찍한 괴물을 마주한 적은 없었다.

"여, 여기 서북부 끝자락 아니었어? 왜 저런 괴물이 여기에 있는 거야."

"뭔가 냄새를 맡고 온 거 아니야?"

"냄새?"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이고르에게 향했다.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얼굴. 마차에서 풍겨오던 진한 고기 냄새.

그런 류의 냄새는 바람을 타고 멀리 퍼져나가, 예상치 못한 불청객을 불러들이곤 한다.

이고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뭘 쳐다봐."

"...."

데일은 마검을 뽑으며 사병들에게 말했다.

"다들 싸움은 미루고 무기나 들어라."

다들 당황한 얼굴로 데일의 지시를 따랐다.

데일이 이어 말했다.

"다행히 오늘 밤 잠자리 걱정은 없겠군."

싸우다 보면 해가 뜰 것이다.

그게 아니라도 사람이 꽤 죽을 테니, 묵을 집이 부족할 일은 없다.

데일 나름대로 긍정적인 부분을 말해본 것이지만, 대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언데드

* * *

언데드의 가장 큰 특성은 산자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심이다.

그들은 산자를 보면 어떻게든 먹어 치워 자신의 공허함을 채우려 든다.

언데드는 또한 집요하다.

한 번 발견한 사냥감은 끝까지 쫓아가려 하는 습성이 있다.

고기 냄새에 이끌려 온 언데드 무리는 이 작은 마을의 주민들을 보았다.

멀쩡히 살아 숨 쉬며 움직이는 모습을 발견했다.

이제 이 망자들은, 저 주민들이 자기와 같은 처지가 될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급 언데드가 100에 달하고. 중급 언데드는 기껏해야 5기 정도인가?'

스켈레톤이나 좀비 따위의 언데드는 하급에 분류된다.

구울 정도의 중급 언데드는 기껏해야 5기 정도.

언데드 하나하나는 그리 강하지 않기에, 여기에 있는 전력이라면 능히 막아낼 수 있다.

'문제는 오우거인가.'

저 거대한 괴물은 살아 있었을 적에도 산의 폭군이라 불리며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던 존재다.

언데드로 되살아난 된 지금은 조금이나마 약해졌을까?

'글쎄.'

데일이 보기에는 아니었다.

언데드 오우거라고 일반 오우거보다 상대하기 쉬울 것 같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비슷해 보였다.

"저, 저런 걸 어떻게 상대해."

"우리는 마법사도 없잖아. 싸워봤자 개죽음이야."

"지금이라도 도망치면, 언데드는 걸음이 느리니까...."

누가 명령한 것도 아닌데, 사병들이 하나둘 뒤로 물러났다.

도망치는 쪽으로 가닥을 잡으려 했다.

그러자 마을 촌장이 다급히 말했다.

"아, 안 됩니다! 언데드들이 마을을 지나치면, 마을이 쑥대밭이 될 겁니다!"

가장 먼저 뒤로 내빼던 이고르가 코웃음을 쳤다.

"흥. 쑥대밭이 되더라도, 일단 목숨이라도 건지고 보는 게 낫잖아?"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가 마을을 버리고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겨울을 대비해 모아놓은 식량을 다 잃으면, 저희는 다 굶어 죽을 겁니다!"

북부의 겨울은 춥고 험난하다.

설령 당장은 목숨을 건져도, 터전을 잃은 마을 사람들의 운명은 쉬이 예상이 갔다.

하지만 이고르는 심드렁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

그 뻔뻔한 모습에 촌장이 이를 악물었다.

"따, 따지고 보면 귀족님께서 고기 냄새를 풍기고 온 것 때문에 언데드가 몰려온 거 아닙니까!"

"하찮은 게... 감히 지금 내 탓을 하는 거냐?"

이고르는 도리어 성을 내며, 옆에 있던 시종의 검을 뽑아 들었다.

사색이 된 촌장이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상황이 급하지 않았으면, 내가 직접 네 목을 베었을 테니까."

쯧. 하고 혀를 찬 이고르는 부하들을 이끌고 마을 안으로 걸음을 향했다.

언데드가 오기 전에 마차를 빼고 도망칠 심산이었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에스델이 중얼거렸다.

"저렇게 후안무치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니. 언젠가 신께서 천벌을 내리실 겁니다."

데일은 고개를 돌려 에른스트를 보았다.

데일은 딱히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싸움을 피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일단 명목상이긴 해도, 의뢰주는 에른스트다.

에른스트의 의견을 존중해야 했다.

"...."

에른스트 역시 저 멀리서 다가오는 언데드 오우거를 보며 공포에 질려 있었다.

시간이 촉박하다. 하지만 데일은 에른스트가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에른스트가 이제 정신을 차릴까? 자기가 얼마나 순진한 생각으로 이곳에 왔는지 알아차리고, 현실을 깨닫게 될까?

다음 순간.

에른스트는 마을 안으로 들어간 이고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뻔뻔한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다음으로는 에스델을 쳐다봤고, 마지막으로 데일을 보았다.

에른스트는 의지를 다지고 입을 열었다.

"데일 경. 나는 저들을 막고 싶어."

"도련님!"

옆에서 시종이 다급히 외쳤지만, 에른스트는 꿋꿋이 이어 말했다.

"폐하께서 내려주신 이번 시험은 혼란을 잠재우고 백성들을 도우라는 거였어. 여기서 물러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알겠다."

데일이 조금의 주저도 없이 승낙하자, 에른스트가 눈을 크게 떴다.

"...!"

"왜 그러지?"

"아니. 난 당연히 말릴 줄 알고...."

"말려주길 원했나?"

에른스트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절대 아니야. 그냥... 이길 수 있나 싶어서."

데일은 언데드 떼를 슬쩍 쳐다보았다.

분명 언데드 오우거는 위협적이긴 하다. 하지만 데일은 이것보다 더 어렵고 위험한 싸움도 숱하게 겪어보았다.

겨우 이 정도에 뒤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해보겠다."

승리할 거라 확언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데일의 이 말만으로도 에른스트는 용기를 얻었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다들. 내 고집 때문에...."

에른스트의 사병들은 슬쩍 눈치만 봤다. 여전히 별로 내켜하지는 않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시종이 그들을 향해 눈을 부라리자, 사병들이 하나둘 말했다.

"괘, 괜찮습니다 도련님."

"오히려 이런 명예로운 싸움에 함께할 수 있어, 큰 영광입니다."

에스델도 에른스트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귀족의 귀감이라 할 수 있는 훌륭한 행동입니다. 신께서도 에른스트 님의 선택에 크게 기뻐하실 거예요."

"...고맙습니다."

에른스트는 부끄러운지 뺨을 붉혔다.

하지만 무언가 희망찬 분위기와 달리, 상황이 나아진 건 아무것도 없다.

데일은 지시를 내렸다.

"다들 무장 단단히 해라. 그리고 주민들 중에서도 싸울 수 있는 자는 모두 싸워야 한다."

촌장과 주민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도 북부 사람입니다. 코흘리개들도 싸울 줄은 압니다."

"무리하지 말고, 목책을 사수하는 식으로 싸워야 한다. 언데드들의 시선을 최대한 끌어야 해. 그리고."

데일은 고개를 돌려 이고르 일행을 쳐다보았다.

이고르 일행은 마차를 이끌고 마을을 나서기 위해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데일은 걸어가 입구를 막아섰다.

"멈춰라."

당황한 마부가 안쪽의 이고르를 향해 물었다.

"주, 주인님. 흑기사가 마차를 막아서고 있습니다."

안쪽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안 비키면 그냥 치어버려."

"예?"

"치어버리라고."

"아, 알겠습니다."

마부는 명령대로 말 엉덩이에 채찍을 휘둘렀다. 마차로 데일을 들이받고 갈 작정이었다.

예상한 반응이다.

데일은 마검을 들고 마차를 향해 도리어 걸음을 옮겼다.

그다음. 마검을 절묘하게 휘둘렀다.

"으, 으악!"

마부는 자기를 베려는 줄 알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베인 건 말과 마차를 연결하는 줄이었다.

갑작스러운 해방감에 놀란 말 두 마리는 저 멀리 달아나버렸다.

"어, 어어."

관성 탓에 그대로 미끄러져 오는 마차를 향해 데일은 그대로 양손을 뻗었다. 하체를 고정하고. 힘을 주었다.

끼이이익.

마차를 부여잡은 데일이 일직선으로 쭉 밀려났다.

하지만 데일은 마차를 놓치지 않았고, 열 걸음 정도 밀려나서 끝끝내 마차를 세우고 말았다.

멍한 얼굴로 앉아 있는 마부와 데일의 눈이 마주쳤다.

"내가 멈추라고 했을 텐데."

"죄, 죄송합니다."

마부는 자기도 모르게 사과하고 말았다.

힘만으로 달려오는 마차를 멈춰버리다니.

머릿속이 하얘져 무어라 말해야 할지 떠오르지도 않았다.

갑작스레 마차가 멈추자 이고르가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인상을 와락 구겼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데일이 답했다.

"너 때문에 모여든 언데드다. 너도 책임을 져라."

"뭐? 나 때문에 모여들었다는 증거 있어? 감히 언데드 주제에 어디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히익!"

팍!

이고르의 바로 옆에 손도끼가 틀어박혔다. 조금만 틀어졌어도, 이고르의 미간에 박혔을 궤적이다.

데일은 이고르의 얼굴을 양손으로 부여잡은 뒤, 낮게 말했다.

"저 도끼가 머리에 틀어박히는 게 싫으면 싸워라."

"으. 으으."

"그리고 한 번 더 나를 언데드라 부르면 각오해야 할 거다."

"...."

"왜 대답이 없지?"

"아, 알았다."

이고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의 부하들은 검을 뽑고 달려들어야 할지 말지를 고민했다.

여기서 사람들끼리 싸워봤자 자멸하는 미래밖에 없는 데다가, 도저히 데일을 상대로 검을 휘두를 용기도 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언데드 무리가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마을의 반대편 입구는 그리 크지 않아 마차가 드나들 수 없다.

즉. 마차를 타고 도망치는 건 이미 글렀다.

마차를 버리고 도망치는 수도 있지만, 썩 현명한 선택은 아닐 것이다.

지금은 이래저래 언데드를 상대로 함께 싸울 수밖에 없었다.

모두 데일의 의도대로였다.

"으윽! 모두 싸울 준비해라!"

이고르는 발작하듯이 외친 뒤, 사병들 사이에 섞여들었다.

데일의 거침없는 일 처리에 감탄하던 에른스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겠어? 나중에 저 돼지가 귀찮게 굴 수도 있어."

"지금 당장 급한데, 훗날을 생각할 여유가 어딨나."

"으음. 그건 그렇지. 만약 나중에 문제가 생긴다면, 내 가문의 이름을 걸고 경을 도와줄게."

데일은 대충 고개를 끄덕여준 뒤.

앞에서 다가오는 언데드 무리에 시선을 주었다.

훗날을 기약하는 것도 우선 저 시체들을 처리하고 생각할 문제다.

'마법사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화염 마법으로 일단 한차례 훑고 나면, 허접한 언데드는 맥을 못 추었을 터.

이럴 때마다 마법사의 부재가 아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싸워야 한다.

데일이 말했다.

"모두 옆 사람과 합을 맞춰라. 언데드 하나하나는 별거 아니다. 여럿한테 둘러싸이지 않으면 된다."

데일의 지시에 사병들과 주민들이 함께 어깨를 맞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으르렁댔지만, 또 필요에 따라 다시 뭉칠 수 있는 게 사람의 특성인 법이니.

이윽고.

비척비척 걸어오던 언데드 무리가 이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망자가 뱉어내는 기괴한 비명 밤하늘에 울렸다.

인간과 언데드가 맞부딪혔다.

"막아!"

"물리면 안 돼!"

"카악!"

백에 달하는 언데드의 기세는 우습게 볼 게 아니었다.

잘 무장한 사병들은 어찌어찌 버텨냈지만, 갑옷 하나 입지 않은 주민들에게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쪽에는 언데드의 천적이라 부를 수 있는 사제가 있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무리들에게 벌을 내려주소서."

화아악!

하얀 섬광이 바닥에서 솟아오르며, 언데드의 몸을 강타했다. 빛에 닿은 언데드는 그대로 가루가 되어 바스러졌다.

'신벌 기적인가. 공격용 기적을 배우겠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적어도 언데드를 상대로, 사제는 마법사 못지않은 위력을 선보였다.

데일은 혹여나 에스델의 기적에 닿지 않게 조심하며, 언데드들을 차근차근 베어나갔다.

마력은 언데드 오우거를 상대할 때 사용하기 위해, 아껴둘 심산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언데드 오우거는 여전히 숲에서 가만히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주섬주섬

작업하고 있었다.

'뭘 하려는 거지?'

의아하다.

하지만 당장에는 이쪽에도 나쁠 게 없다.

오우거나 다른 언데드 무리와 싸우는 것보다는, 따로 각개격파하는 게 더 유리하니 말이다.

데일은 더더욱 맹렬하게 검을 휘두르며, 언데드를 베어나갔다.

꽤나 긴 싸움이 될 것 같았다.

* * *

싸움의 열기가 오르고.

사람들과 언데드 무리는 서로 뒤엉켜 치열하게 싸워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뒤편에서 슬쩍 구경하던 이고르는 그의 시종에게 말했다.

"지금이다. 이 틈에 도망치자!"

시종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예? 무,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단장자리 따내려 온 거지, 이딴 곳에서 오우거나 상대하러 온 줄 알아? 그리고 저거랑 싸우다가는 전부 죽어."

"그, 그래도, 아직 저쪽에 저희 병사들이 섞여 있기도 하고...."

"잔말 말고 빨리 마차 몰아!"

이고르의 호통에 시종은 허겁지겁 그나마 멀쩡한 마차로 돌아가, 마차를 몰아 왔다.

얼른 마차에 탄 이고르가 말했다.

"이대로 출발해! 어서!"

"...알겠습니다."

시종은 다시 한번 채찍을 휘둘렀다. 놀란 말들이 한차례 앞발을 들어올린 뒤, 빠르게 앞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어어?"

마차가 향하는 경로에 있던 사람들이 다급히 물러섰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 이고르의 부하들은 그 충격이 더했다.

"도망친다고?"

"우리를 버리고?"

설마 이렇게까지 막 나갈 줄이야.

데일은 저 괘씸한 놈을 추격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하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여태껏 숲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작업하던 언데드 오우거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놈의 손에는 적당한 크기의 나무줄기가 들려 있었다.

두꺼운 나무줄기였지만, 거대한 덩치의 오우거가 들자, 마치 얇은 창처럼 보였다.

오우거는 줄기의 가운데를 잡고 덜렁거리는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주위를 훑었다.

마치 목표물을 찾는 듯이.

언데드와 사람들이 뒤섞인 전장에서, 단연 눈에 띄는 건 혼자서 움직이는 마차였다.

"쉬익."

목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 뿜은 언데드 오우거는 나무줄기를 양손을 붙잡았다. 마차를 향해 겨냥했고. 일말의 주저도 없이 힘껏 집어 던졌다.

나무줄기는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사람들의 고개도 나무 줄기를 따라 우에서 좌로 이동했다.

그리도 다음 순간.

쾅!

나무 줄기가 마차에 정확히 직격했다. 너무나 깔끔한 투척이다.

사람들은 예상외의 전개에 벙찐 얼굴로 그쪽을 보았다.

"...."

"저거 맞고 살긴 힘들겠죠?"

"그렇겠지."

곱슬머리를 긁적인 하켄이 툭 내뱉었다.

"어. 사제 양반 말대로 신께서 저 귀족 나으리에게 천벌을 내리긴 했네. 음. 오우거의 모습을 빌려서 말이야."

에스델이 정색하며 말했다.

"하켄. 신성모독입니다."

언데드

* * *

투척은 원시적이면서도 효과적인 기술이다.

몇몇 거인들은 멀리서 나무나 바위를 투척해 사람들을 공격하기도 하는데, 저 언데드 오우거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법 훌륭한 솜씨로 움직이는 마차를 적중시켰다.

뭉개진 마차로 다른 언데드들이 먹이를 찾아 달려들었다.

'살아생전의 습관대로 행동하는 건가?'

숲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준비하던 건, 투척할 나무를 준비하던 모양이었다.

'좋지 않아.'

빠른 속도로 쏘아지는 묵직한 나무줄기에 얻어맞았다가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갑옷을 입었든, 방패를 들었든 마찬가지다.

무식한 질량에 그대로 으스러질 것이다.

심지어 이렇게 밀집 진형을 이루고 싸울 때에는, 투척을 피하기조차 쉽지 않다.

서로 밀치고 얽히다 나뭇더미에 깔려 버릴 것이다.

'그렇다고 산개하라고 하면....'

그때는 개떼처럼 달려드는 언데드들이 문제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녀석들은, 머리 위에 나무가 날아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으리라.

데일의 불안은 정확히 적중했다.

언데드 오우거가 다음 나무줄기를 들었다. 앞선 것보다 더 무겁고 길어보이는 녀석이었다.

오우거는 나무줄기를 들어올려 이쪽을 겨냥했다.

그러고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힘껏 던졌다.

사람들이 사색이 되었다.

"어어."

"이, 이쪽으로 날아오는데?"

공교롭게도.

하켄과 에스델. 그리고 다른 사병들이 있는 곳이었다.

'에스델을 노리는 건가?'

언데드와 빛의 신앙은 상극이다.

지능이 떨어지는 언데드라도 누가 가장 까다로운지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에스델은 급하게 방어벽을 펼치려 했다.

하지만 빠르게 날아오는 나무줄기를 도저히 방어해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당황한 하켄이 이를 악물며 방패를 들어 올리고, 다른 사병들이 도망치려던 그때.

데일이 땅을 힘껏 박찼다.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나무줄기를 향해 어깨를 부딪쳤다.

꽝!

굉음과 함께 데일이 튕겨나갔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소리쳤다.

"데, 데일 경!"

그대로 땅에 처박힌 데일은 몸 상태를 점검했다.

왼쪽 어깨가 흉하게 찌그러졌다.

덕분에 왼팔 움직임이 조금 불편했다.

'무식하게 세군.'

아무리 데일이 단단해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이럴 때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데일은 주위를 살폈다.

나무줄기를 완전히 튕겨내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조금이라도 방향을 트는 데에는 성공했다.

오우거가 던진 나무줄기 아래에는 애꿎은 좀비 몇이 깔려 버둥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가하게 주위를 둘러볼 상황은 아니었다.

꽈릉!

오우거가 곧바로 던진 다음 나무줄기가 마을의 목책에 부딪혔다.

조잡한 목책의 한구석이 형편없이 박살나 버렸다.

목책을 사수하며 언데드들을 막아서던 마을 사람들에게 언데드 무리가 달려들었다.

'더 던지게 놔둬서는 안 돼.'

데일은 마검을 뽑아든 뒤, 앞을 향해 달리며 말했다.

"내가 오우거를 상대하겠다. 최대한 버티고 있어라! 지휘는 하켄 네가 맡아라!"

"아, 알겠습니다!"

하켄이 방패를 앞으로 내밀며 답했다.

경험 많은 하켄이라면 적어도 틀린 지휘를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데일은 눈에 띄었다.

뒤쪽에 있던 언데드들은 그런 데일을 발견하고, 곧장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데일이 가까이 다가오자 언데드들은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으어?"

"크르르?"

눈앞의 이 흑기사가 자신들과 같은 언데드 동료인지 헷갈리는 눈치.

그게 데일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데일은 포효를 내지르며 검을 쥐고 몸을 빙글빙글 회전시켰다.

카엘름의 지하수로에서 시도했던 기술을 한 번 더 선보였다.

칼날의 폭풍이 언데드 무리를 덮쳤다. 날카로운 마검에 언데드의 몸이 부드럽게 갈려나갔다. 팔다리가 하늘을 날았다.

그제야 상대가 적이라는 걸 인지한 언데드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회전하는 마검에 말 그대로 갈려 나가기만 할 뿐이었다.

가로막는 언데드들을 적당히 정리한 뒤. 데일은 곧장 땅을 박찼다.

마음 같아서는 깔끔히 정리해버리고 싶다.

하지만 지금도 언데드 오우거가 다음 투척을 준비하고 있었다.

데일은 언데드 무리를 무시하고 오우거에게로 달렸다.

오우거도 그런 데일을 봤다. 데일이 위협적인 적이라는 것도 인지했다.

나무줄기가 데일에게 향했다.

목표물을 데일로 바꾼 것이다.

'다행이다.'

후웅!

오우거가 나무줄기를 던졌다. 어찌나 세게 던졌는지, 데일을 향해 일직선의 궤적을 그리며 날아왔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살벌했다.

데일은 서둘러 땅을 굴렀다. 나무줄기가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가, 땅에 처박혔다.

"쉬이익!"

언데드 오우거는 빗나가는 게 짜증 났는지, 반쯤 잘린 목으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고는 다른 나무줄기를 집어 들었다. 곧바로 던지려 했다. 하지만 이미 데일이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오우거는 나무를 던지는 대신 무기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대로 나무를 들어 데일을 향해 내리쳤다.

쿵!

딛고 선 지면이 흔들릴 정도로 묵직한 일격이었다.

데일조차 위협을 느낄 정도의 힘이 실려 있다.

강하다. 하지만 느리다.

기민한 움직임으로 옆으로 물러선 데일은 오우거가 내려친 팔을 들어올리기 전에, 재빨리 마검을 휘둘렀다.

파악!

마검이 오우거의 가죽을 뚫고 파고들었다. 하지만 뼈까지 끊어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오우거의 강골은 상상 이상으로 단단하다.

'이런.'

마검이 녀석의 팔에 단단히 틀어박혔다. 데일은 더 고집부리지 않고, 미련 없이 검에서 손을 놓았다.

쿠웅!

아예 몸째로 엎어진 오우거의 거체가 지면을 강타했다.

살벌한 육탄 공격.

하지만 데일에게는 오히려 기회다.

곧장 몸을 던진 데일은 녀석의 어깨를 지그시 밟았다.

팔을 뻗어 오우거의 못생긴 머리를 부여잡았다.

"!"

언데드 오우거는 데일을 떼어내기 위해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떨쳐낼 수 없었다.

데일은 오우거의 머리를 잡은 손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도리어 힘을 주었다. 반쯤 잘려나간 목이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질긴데.'

저항이 만만치 않다. 오우거는 어떻게든 저항하려고 온몸을 구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데일이라도 저 거구에 깔리면 무사치 못한다.

하지만 데일이 누구인가.

사람과 괴물을 가리지 않고, 목을 수십 차례 꺾어본 전문가다.

데일은 요령 좋게 오우거의 머리를 돌렸다. 각도가 커질수록 오우거의 저항도 거세졌다.

나중 가서는 오우거가 반쯤 발광해 양 주먹을 자기 몸에 휘둘렀는데, 데일이 재빠르게 피한 터라 자기 몸만 계속 후려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다 결국. 데일이 마지막 힘을 주었고.

뜨득! 살과 뼈가 뜯겨나가는 소리와 함께, 마침내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었다.

'됐다.'

목이 뜯겨나간 언데드 오우거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 지는 않았다.

"음?"

"?"

데일과 손에 들린 오우거의 머리가 동시에 어리둥절해했다.

머리가 뜯겨나갔는데, 몸통이 여전히 멀쩡히 움직였다.

꽤나 강력한 언데드라 목이 떨어져도 몸이 알아서 움직이는 것이다.

언데드가 된 지 얼마 안 된 오우거는 그 사실을 여태 모르고 있었다.

'이러면 뭐라 불러야 하는 거지? 듀라한 오우거?'

자기도 놀랐는지, 입을 벌려 뻐끔뻐끔대던 오우거가 이내 상황을 깨닫고 자기 몸통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목 없는 시체가 쿵쿵 움직이며 데일을 향해 달려들었다.

데일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머리가 몸통을 조종할 수 있다는 건, 결국. 어떤 식으로든 머리와 몸통이 연결되어 있다는 건가.'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데일은 오우거의 머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시선을 맞췄다.

데일의 안광이 한차례 번뜩였다. 뿜어져 나온 빛이 오우거의 눈으로 빨려 들어갔다.

영혼 지배.

강인한 언데드다. 지배하는 게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미 몸에서 떨어져 나온 머리라 그럴까?

'성공했다.'

눈이 썩어 없어진 오우거의 눈두덩에 데일과 똑같은 빛의 안광이 생겨났다.

오우거의 몸통도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좋아. 지배가 제대로 된 것 같은데. 그럼...."

데일은 고개를 돌려, 다른 일행을 살폈다.

일행은 언데드 무리를 상대로 여전히 분투를 이어가고 있었다.

"도와주러 가야겠군."

오우거의 몸통이 아군을 향해 쿵쿵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데일은 오우거의 머리를 붙잡고 그 뒤를 차분히 따라갔다.

그때까지도 분투하던 아군은 데일의 승리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리하지 마세요! 데일 경이 올 때까지 버티면 돼요!"

"오우거만 없으면 이 정도쯤은!"

데일이 어떻게 언데드 오우거만 처리하면 이길 수 있다!

그 마음을 가지고 사기를 드높여 싸우고 있었다.

그때.

사람들은 보고야 말았다.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언데드 오우거를.

"맙소사."

"언데드 오우거가 여기로 다가온다는 건...."

"데일 경!"

"지, 진정해."

자기도 모르게 달려 나가려는 에스델을 하켄이 말렸다.

그러고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비장하게 외쳤다.

"데일 경이... 쯧. 이렇게 된 거. 내가 시간을 벌게. 그 시간 동안 모두 도망쳐!"

비장하게 말하는 하켄에게 에스델이 말을 흐렸다.

"하켄...."

"어서! 나, 방패수 하켄! 동료를 지키다 죽을 수 있으면...."

"하켄."

"어허. 빨리 물러나래도!"

"그게 아니라 앞을 보세요."

어느새 접근한 오우거가 다른 언데드들을 짓뭉개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뒤 편에 오우거의 머리를 들고 서 있는 데일을 발견했다.

'간단하군.'

거대한 오우거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건 짧은 시간뿐이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은 언데드 무리를 초토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저거. 지금 기사님이 조종하고 있는 건가?"

"그런... 것 같은데?"

"그게 말이 돼?"

"글쎄...?"

마을을 사수하던 사병과 주민들, 에른스트, 에스델.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어이없는 심정으로 이 광경을 구경했다.

이로부터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훗날.

북부에는 식인 늑대와 거대한 오우거를 조종하는 흑기사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퍼져나가게 되었다.

* * *

새벽 깊은 시각이 되어서야 전투는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데일은 주위를 돌며 아직 어기적거리는 언데드 무리를 정리했다.

그러다 낯이 익은 녀석을 발견했다.

"으어어."

뚱뚱하고 피부에 기름기가 도는 언데드.

이고르가 좀비가 되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데일은 주위를 슬쩍 살폈다.

이고르가 이끌고 온 병사들이 지친 얼굴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언데드가 되어버린 주인을 뭐라고 생각할까.

'그냥 깔끔히 죽은 거로 하자.'

데일은 주먹으로 이고르의 머리를 여러 번 내리쳤다.

이고르는 저항조차 못 하고 고깃덩이가 되어, 땅과 하나가 되었다.

정리를 마친 데일은 마지막 남은 마력까지 긁어모아, 주위에 검은 안개를 흩뿌렸다.

썩어버린 시체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생기가 몸 안에 차올랐다.

그 양이 많지는 않았다.

'좀 아쉬운데.'

역시 언데드보다는 살아있는 것들을 사냥하는 게 얻는 게 많았다.

데일은 다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해 돌아왔다.

사람들은 데일이 오자 슬쩍 뒤로 몇 걸음씩 물러났다. 이전보다 더 두려워하는 모습.

하켄과 에스델만이 데일을 반가이 맞았다.

"정말이지. 걱정하게 만들지 마세요. 데일 경이 패배한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요."

"호들갑 떨지 마라."

"호들갑이라뇨. 심지어 사제 양반은 당황해서 곧바로 뛰어들려 했다고요?"

"그, 그런 적 없습니다."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는 에스델에게 데일이 물었다.

"피해 상황은?"

퍼뜩 고개를 든 에스델이 화색을 띄었다.

"놀랍게도, 전사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부상자들이 있지만, 제가 응급치료를 마치고 지금은 안정을 취하고 있습니다. 운이 좋았어요!"

이 정도 대규모의 싸움에서 전사자가 없다니.

믿기 힘들 정도의 성과다.

기적 같은 승리.

'이고르랑 놈의 시종이 죽긴 했지만.'

그건 도망치다 죽은 것이니, '전사자'는 아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승리를 기뻐하기에는 사람들이 너무 지쳤다.

일단은 휴식을 취해야 했다.

촌장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방을 내어드릴 테니, 그 안에서 주무시죠. 다만, 앞서 말한 대로 여유가 없어 조금 좁게 지내셔야 하는데...."

"그냥 부대껴 자죠 뭐. 피곤해 죽겠는데, 누가 밤에 일어나서 뒤통수 찌르고 그러겠어요."

이미 이고르는 죽어 없어졌다.

그를 따르는 사병들은 에른스트 측과 별로 대립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운 사이가 아니던가.

사병들 사이에는 기묘한 동료 의식이 감돌고 있었다.

그제야 안심한 촌장도 표정을 풀며 말했다.

"자. 따라오시죠. 푹 쉬세요. 내일 아침에는 성대한 식사를 준비할 테니 기대하시고요."

지친 사람들은 시체처럼 어기적 걸으며 부서진 목책을 지나쳐 마을로 걸어 들어갔다.

몸에서는 썩은 내가 풀풀 났다. 멀리서 보면 언데드라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도 그걸 신경 쓰지는 않았다.

뒤따라가던 데일은 뒤를 돌아보았다.

생기를 전부 흡수당해 말라 비틀어진 오우거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언데드 오우거라.'

이만한 오우거를 언데드로 일으켰다는 건 상대의 수준이 아주 높다는 걸 의미한다.

아니면 상당히 강력한 유물을 다루거나.

하지만 데일의 신경을 끄는 건 다른 부분이었다.

처음부터 반쯤 베여 덜렁거렸던 오우거 목.

그 오우거의 목에 난 검상을 생각했다. 대검으로 만들어낸 듯한 투박한 검상이었다.

'살아있는 오우거를 대검으로 베었다는 건가.'

요즘 소문이 돈다는 흑기사의 짓일까?

그렇다면 만만치 않은 적수가 될 터였다.

'검은 사신이라.'

만약 놈이 다른 이들에게 토벌당하지 않는다면, 머지않은 시간 내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흑기사

* * *

언데드 무리를 맞서서 사람들은 용맹히도 싸웠다.

사병이든 마을 주민이든, 남자든 여자든. 노인이든 애든. 어떻게든 언데드를 막기 위해 한 손을 거들어야 했다.

그리고 위협이 사라진 지금.

사람들은 모두 피곤에 절어 곯아떨어졌다.

마을은 잠에 빠졌다. 적막이 주위에 내려앉았다.

이따금 코 고는 소리나 숲에서 올빼미 우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다.

잠을 이루지 못한 건 데일뿐이다.

사람들에게 집을 양보해준 데일은 집 바깥의 벽에 기대, 멍하니 달을 쳐다보았다.

옆에서는 웅크려 잠든 하티가 고롱고롱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데일은 그런 하티의 갈기를 한차례 쓸어준 뒤, 눈을 감았다.

이 기나긴 밤을 보내려면 역시 과거를 곱씹는 것밖에 없다.

데일은 이전의 기억들을 되새겼다. 소중했던 그 순간들을.

어느새 기억들은 현실처럼 생생해졌고, 데일은 꿈을 꾸었다.

기억 속 조부는 보육원의 마당 한편에 마련된 평상에 앉아, 아이들을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쌀쌀한 겨울에 이르렀는데도 씩씩하게 공을 차고 있었다.

보온병에서 따뜻한 차를 따라 홀짝이던 조부가 말했다.

"언젠가 네가 먼 곳으로 떠나야 할 날이 올 수도 있다."

아마 데일의 진로에 대해 얘기하다 나온 말이었을 거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부가 이어 말했다.

"하지만 늘 잊지 말거라. 네게는 돌아올 집이 있다는걸."

"돌아올 집이요?"

"이곳 말이다."

조부는 선하게 웃었다. 깊게 패인 주름에서는 인자함이 묻어나왔다.

데일은 물었다.

이곳은 보육원이고, 조부와 데일이 둘이서 사는 집은 따로 있지 않냐고.

조부는 말했다.

"이놈아. 가족들이 있는 곳이 집이지. 안 그러냐?"

데일은 아이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족이라. 확실히 이제는 아이들이 데일에게도 가족 같은 존재가 되긴 했다.

조부를 쫓아 맺어진 인연이라 하나, 이제는 정이 너무 들어버린 것이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를 가게 되든, 이곳. 그러니까,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겠다 약속했다.

'돌아가야 한다.'

그로부터 얼마 후.

조부는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 * *

부산스러운 소리에 데일은 눈을 떴다.

어느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겨울의 해는 늦게 떠오르는 법이니, 제법 시간이 지났음을 알 수 있었다.

마을의 마당에 사람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데일이 일어서자 하켄이 인사를 해왔다.

"아. 일어나셨어요?"

"그래."

"근데, 방금 혹시 자고 있던 건가요? 저는 흑기사는 잠을 잘 수 없다고 들었는데...."

"잔 거 아니다. 그냥, 꿈을 좀 꿨을 뿐이다."

잠은 안 자고 꿈을 꾸다니? 하켄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훌렁 털어버렸다.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굳이 캐묻지 않는 게 하켄의 장점이었다.

"뭘 하고 있었나?"

"아. 일단 여자들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고요, 저희는 뒤처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고소한 냄새가 난다.

간밤의 전투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돼지 몇 마리를 잡아 통째로 굽고 있었다.

마을의 바깥에서는 조각나고 말라비틀어진 언데드 시체를 한데 모아, 에스델이 신성력을 흩뿌리고 있었다.

혹여나 저 시체가 주위에 나쁜 영향을 끼쳐 또 다른 언데드가 일어서는 것을 방지하는 작업이다.

다른 주민들은 부서진 목책을 수리하고 있었다.

오우거가 요란하게 박살을 내버려서 절반 정도는 새로 지어야 할 판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있었다.

"오우거 놈이 나무를 막 던져댔잖아요? 그래서 재료가 부족하지는 않다네요."

하켄의 말대로. 오우거가 던진 나무를 장정 여럿이 낑낑대고 들어올리려 했다.

"그 괴물놈은 쉽게쉽게 들어서 우습게 봤는데...."

"아이고 허리야. 이거 생각보다 더 무거운데?"

나무를 드는 주민들이 앓는 소리를 하던 순간.

갑자기 손에 전해지는 무게가 가벼워졌다.

주민들은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고, 나무를 든 데일을 발견했다.

"어. 음."

"아."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

분명, 이 근방에 퍼지는 검은 사신에 대한 소문 때문에 주민들은 과할 정도로 흑기사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이제는 데일이 그들이 알던 흑기사와는 다르다는 걸 안다.

지난밤의 전투에서 데일이 없었다면, 그들 역시 죽어서 언데드 무리에 합류했을 것이다.

그렇게 난감한 침묵이 계속되던 그때. 데일이 툭 뱉었다.

"은근슬쩍 팔 내리지 마라."

"아, 죄, 죄송합니다."

주민들은 서둘러 손을 들어 나무를 함께 잡았다.

여럿이 드니 아무리 무거운 나무줄기라도 거뜬히 들어낼 수 있었다.

절반 이상은 데일 덕분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데일과 주민들은 주위에 널브러진 나무를 모아 땅에 단단히 박았다.

그리고 끈을 이용해 다른 나무들을 요령 좋게 묶어놓았다.

목책을 이전과 상태로 복구하는데에는 불과 얼마 걸리지 않았다.

조잡할지언정 튼튼한 나무 성벽.

겨우내 굶주린 짐승이 마을을 어슬렁거려도, 굳건히 방어해줄 것이다.

다시 세워진 목책을 보며 촌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주름진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한참을 그러고 서 있던 촌장은 데일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언데드 무리가 왔을때만 해도, 다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터전이 제 대에서 끊기는 줄 알았습니다."

"별거 아니오. 내 의뢰주는 에른스트이니, 그에게나 감사하시오."

용병의 활약은 곧 의뢰주의 성과.

데일은 용병으로서의 미덕을 보였지만, 데일이 단순한 용병이 아니라는 건 촌장도 알았다.

그는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주머니를 하나 내밀었다.

"꼭 받아 주십시오. 저희 성의입니다."

전날. 시종이 촌장에게 건넸던 돈의 대부분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액수가 그리 크지도 않았고, 이걸 데일이 받으면 또 그림이 이상해진다.

데일은 거절했다.

"됐소. 겨울이 길 테니, 주민들과 함께 나눠 쓰시오."

"허어...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크게 감동한 촌장이 물었다.

"그러면 존함이라도 알려주시죠. 누가 마을을 지켜냈는지, 저희 후손들에게도 알리겠습니다."

데일은 그러지 말라고 거절하려다 말았다.

'어차피 금방 잊겠지.'

원한은 쉬이 잊히지 않지만, 고마움은 금방 휘발되기 마련이다.

후손들에게 말해준다는 것도 그냥 고마우니까 하는 말이리라.

그때, 요리가 모두 준비되었다.

사람들은 공터에 모여 잘 구워진 돼지고기를 나눠 먹기 시작했다.

마을을 구해주었기에, 주민들은 에른스트와 사병들에게 친절히 대했다. 음식과 술을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주민들은 마을에서 도망치지 않은 것에 대해 에른스트를 칭송했다.

그리고 저 혼자 도망치려던 오만하고 뚱뚱한 이고르를 욕해댔다.

에른스트는 한껏 기쁜 얼굴로 그 칭송을 즐겼다.

"역시 나는 틀리지 않았어! 사람들을 지켜냄으로써 얻는 기쁨은, 그 어떤 것에도 비할 수가 없구나!"

그런 에른스트에게 눈치를 보던 사병들이 다가갔다.

에른스트의 사병이 아닌, 이고르의 사병이다.

"저. 에른스트 님."

"음?"

이고르의 사병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저희를 받아주십시오!"

"뭐라고?"

대표로 보이는 사병이 바닥에 머리를 쿵! 찧으며 말했다.

"에른스트 님의 약자를 아끼는 그 마음! 그리고 언데드를 앞두고도 도망치지 않는 용기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희가 지금껏 섬겼던 이고르 같은 작자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훌륭한 분을 이제야 만나게 되다니... 에른스트 님과 꼭 함께하고 싶습니다! 부디 거둬주십시오!"

"주십시오!"

무릎 꿇은 사병들은 마치 연습이라도 한 듯,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데일과 하켄은 그 모습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저들의 생각이야 알 만하다.

'다급하군.'

저들은 주인인 이고르와 시종을 잃고 말았다. 심지어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가문의 사병이자, 호위 임무를 맡은 자로서는 최악의 실책.

이고르의 가문으로 돌아가봤자 남은 건 엄중한 처벌뿐이다.

'재수 없으면 목이 잘려도 안 이상한데.'

그럴 바에야 새 주인을 찾는 게 나았다.

이고르와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에른스트라면 그 주인으로서 적당했다.

아니. 그밖에 선택지는 없었다.

'감명을 받았다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뻔뻔한 거 아닌가?'

지켜보던 사람들도 다들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들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한 사람이 딱 하나 있었으니, 그는 바로 에른스트였다.

"내 용기에 감명을 받았다니... 큼큼. 좋아. 어쩔 수 없지. 넓은 마음으로 받아주겠어. 앞으로 더 열심히 하도록!"

기분이 좋은지, 에른스트는 입꼬리를 연신 씰룩였다.

그러고는 못 이기는 척 그들의 합류를 받아주었다.

"감사합니다!"

이제는 에른스트의 아랫사람이 된 사병들은 냉큼 엎드렸다.

그 모습에 에스델이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의인에게는 사람들이 몰려든다는 말이 있죠. 정말 보기 좋은 광경이네요. 그렇죠?"

"사제 양반... 아니. 됐다."

무어라 설명해주려던 하켄은 그만두었다.

꼭 모두가 진실을 알아야 하는 건 아닌 법이니.

이렇게 이고르의 사병 25명이 아군에 합류하게 되었다.

부서진 마차를 제외하면, 마차는 3대가 더 추가되었다.

'총 40명에 마차만 6대 규모인가?'

순식간에 몸집이 몇 배는 늘어났다.

이 정도 전력이면 그래도 어디 가서 무시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데일이 에른스트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떡할 생각이지?"

에른스트는 한 점 고민 없이 답했다.

"어쩌긴. 계속 북쪽으로 가야지."

"오우거를 봤을 텐데. 생각보다 강한 언데드가 일어서고 있다."

지금은 몬스터들이 산에서 내려와 활보하는 시기다.

그만큼 몬스터의 사체도 많을 것이고, 오우거 못지않은 강력한 언데드도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더 심각할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에른스트는 단호히 말했다.

"그래.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지.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물러서면 안 되는 거야."

데일은 에른스트의 눈을 보았다. 희망과 의지로 가득 찬 눈빛을.

에른스트의 이상은 아직 꺾이지 않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번에 실패해야 했을지도.'

만약 언데드 오우거라는 불행을 맞닥 뜨려 부하를 잃고, 생명의 위기를 느꼈다면.

그랬다면 에른스트는 자기가 얼마나 순진했는지를 깨닫고, 돌아가기로 마음먹지 않았을까?

데일이 없었다면, 적어도 오늘의 기적 같은 승리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대단한 승리가 에른스트의 의지에 불을 붙이고, 도리어 그를 더욱 위험한 장소로 내몰고 있었다.

'....'

고민하던 데일은 상념을 털어냈다.

이제 와서 말리는 것도 우습다.

게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왠지 이놈. 운이 따라주는 것 같기도.'

데일이 의뢰에 참여한 것도 에른스트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었고, 이번에 이고르의 사병들이 합류한 것도 운이 좋았다 볼 수 있다.

묘하게 운이 따르는 놈이다.

그리고 운 좋은 놈은 오래 살기 마련.

데일은 이 순진한 청년이 어디까지 나아갈지, 계속 지켜보고 싶어졌다.

* * *

이레네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용뼈 산맥이 나온다.

용뼈 산맥의 산악지대와 고원지대는 하이 엘프의 터전이다.

몬스터가 득시글거리며 위대한 자연과 매 순간 투쟁해야 하는 험지.

전사들의 땅.

강인한 엘프들이 아니라면 살아가기 힘든 곳이었다.

그런 용뼈 산맥의 동쪽으로는 1군단이 있다.

천혜의 요새를 등지고 선 1군단은 그 규모는 다른 3개의 군단에 비해 가장 작지만, 여태껏 악마에게 단 한 번도 함락당한 적이 없는 곳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1군단에는 강인하고 경험 많은 전사들이 가득하다고. 그래서 적은 숫자로 굳건히 수비해내는 거라고.

다른 누군가는 말한다. 악마와 괴물들이 굳이 추운 북부를 공격하지 않는 것뿐이라고.

"그 흑기사 놈은 정황상 1군단에서 용뼈 산맥을 넘어, 이곳 서북부까지 왔을 것이오. 그리고 지금도 계속 서쪽으로 움직이고 있소."

서북부의 평원에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북부로 달려온 성미 급한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적당히 몬스터를 사냥하고, 언데드를 토벌한 뒤, 그 공적을 가지고 도시로 돌아가면 친위대의 한 자리를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분주히 움직이며 몬스터와 언데드를 사냥했다.

그러다가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이번 일이 심상치 않다는 걸.

신중하거나 겁이 많은 귀족들은 뒤로 내뺐다.

하지만 몇몇 영민한 이들은 싸움을 멈추고, 다른 귀족들과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이곳 '일곱 가문 동맹' 역시 마찬가지다.

일곱 개의 가문이 모인 이 동맹은 이번 일의 원흉이 '검은 사신'이라는 별명의 흑기사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놈의 이동 경로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소. 술 취한 부랑아처럼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긴 해도, 결국에는 서북부 쪽으로 계속 이동하더군. 그리고 내 예상대로라면...."

"반드시 이 평원을 지나가야 한다는 것이군. 맞소?"

지도를 들고 열심히 설명하던 귀족은 갑작스럽게 끼어든 젊은 기사 탓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헛기침을 불쾌함을 표현한 뒤, 말했다.

"큼. 맞소. 이곳을 지키고 있으면 그놈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오."

다른 귀족이 물었다.

"그러면 도시에 가 지원을 요청하는 게 낫지 않겠나? 듣기로는 꽤 강력한 놈이라는데."

귀족은 코웃음 쳤다.

"그렇게 되면 공적을 나눠야 하지 않소. 만약 뒤늦게 와 숟가락이나 올린 놈들이 친위대의 단장 자리를 요구한다면, 나는 화나서 잠을 이룰 수 없을 것이오."

"그건 그렇군."

"그리고 이곳에는 무려 일곱 가문이 모였소. 용감한 기사와 병사가 백을 거뜬히 넘어가오. 설마 겨우 언데드 따위에 겁을 먹은 것이오?"

"그, 그럴 리가! 나를 모욕하지 마시오!"

상대가 발끈하자, 귀족은 그를 달래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이지, 모욕할 생각은 없었소. 다들 생각해보시오. 이번 일만 잘 해결한다면, 여기 있는 일곱 가문에서 친위대의 주요 자리를 다 꿰찰 수 있소. 단장이든 부단장이든 뭐든 다 우리 것이란 말이오! 그러면 우리는 이레네의 새로운 강자가 될 것이오!"

사방에서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귀족들의 눈에 탐욕이 어렸다.

하지만 이들이 이 급조된 동맹에 동료 의식을 느끼는 건 절대 아니었다.

'싸울 때 적당히 뒤통수쳐서....'

'중요한 공만 가로채면 된다. 어떻게든 단장 자리는 내가 가져야 해.'

'일곱 가문에서 다 꿰찬다고? 내가 왜? 내가 다 먹을 수 있는데.'

각자 시커먼 속내를 숨기며, 귀족들은 장밋빛 미래를 꿈꾸던 그때.

밖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왔습니다! 놈이 왔습니다!"

퍼뜩 고개를 든 귀족들은 화색을 띠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흑기사를 사냥해 친위대의 단장 자리를 따낼 수 있는 기회를.

귀족들은 행여나 다른 귀족들이 앞서 돌격할까 싶어, 앞다투어 막사를 나섰다.

보고한 병사의 말대로 저 평원 너머에서 검은 갑주의 기사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제법 먼 거리였지만, 등에 멘 무식하게 커다란 대검이 선명히 보였다.

흑기사의 뒤쪽으로는 많은 수의 언데드 무리가 뒤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그런 잔챙이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흑기사와 언데드 무리 사이에 거리가 있는 데다, 이곳에는 마탑의 마법사가 있었으니까.

귀족이 지금까지 입 다물고 있던 평범한 인상의 마법사에게 말했다.

"한스 공. 부탁하오. 우리들이 흑기사를 상대할 동안, 그대가 잔챙이들을 쓸어버리시오."

"아. 음. 넵. 알겠습니다."

다시 고개를 돌린 귀족이 크게 외쳤다.

"자! 때가 왔소! 영광스러운 선봉은 나와 내 병사들이 맡겠소!"

귀족은 냉큼 말에 올라타 앞서나갔다.

"아앗! 얘기가 다르지 않소!"

그걸 시작으로 다른 귀족과 기사.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병사들은 흑기사를 향해 돌진했다.

다음 날.

일곱 가문 동맹이 전멸했다는 소식이 도시에 전해졌다.

흑기사

* * *

여섯 대의 마차는 북쪽으로 더 이동했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대부분의 경쟁자가 북쪽으로 올라간 것일까?

아니면 덩치가 커지니까 더는 건드리지 않는 것일까.

데일 일행은 습격받는 일 없이 순조롭게 이동했다.

그리고 닷새 뒤. 목적했던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엘드리엄.

서북부에서는 가장 규모 있는 도시로, 용뼈 산맥에서 나오는 몬스터 부산물과 광석. 희귀 약초 따위를 팔아 성세를 이룬 도시다.

엘드리엄은 용뼈 산맥에서 몬스터가 내려오는 걸 감시하는 목적도 겸하는데, 그래서인지 유독 높고 단단한 성벽을 가졌다.

일행은 성문 쪽으로 다가갔다.

두터운 모피 옷을 껴입은 경비병이 나는 듯한 발걸음으로 마차에 다가왔다.

"멈춰라."

딱딱한 말투에 시종이 인상을 찌푸렸다.

"뻔히 가문의 문양을 봤으면 그에 걸맞는 예의를 갖춰야... 엇."

말을 이으려던 시종은 경비병과 눈이 마주쳤다.

날카롭게 빛나는 회색 눈동자.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되지 않는 아름다운 외모. 뾰족한 귀.

"고, 고산 엘프?"

고산 엘프. 다른 말로는 하이엘프가 당당히 경비병으로 일하고 있었다.

엘프라는 말을 들은 데일은 반사적으로 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냐."

엘프와 데일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데일은 모르는 얼굴이었다.

엘프가 물었다.

"왜 그러지?"

"아무것도 아니다."

데일은 자리에 도로 주저앉았다.

다시 정신 차린 시종은 급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일행은 이레네에서 왔으며, 서북부의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왔다고 전했다.

앞서 말한 무례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았다.

그야 당연했다. 하이 엘프에게 그런 걸 바라는 건 미련한 짓이니까.

"그렇군. 너희들도 황제의 시험인지 뭔지를 치르러 온 귀족들인가."

"그래. 들여보내 주겠나?"

엘프가 턱짓했다. 들어가라는 뜻이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너희도 목숨을 조심해라. 이미 많이 죽었다. 시체를 치우는 건 귀찮다."

"뭐?"

"그리고 거기 너. 이름이 뭐지?"

엘프는 데일에게 시선을 주었다.

데일은 퉁명스레 대꾸했다.

"네가 알 필요는 없다."

하지만 엘프 경비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너는 강한 전사다. 나중에 찾아가겠다. 결투할 준비를 해라."

그러고는 이견은 받지 않겠다는 듯.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시선을 돌렸다.

손에 들고 있는 창끝이 북부의 햇빛을 받아 서늘한 예기를 뿜어냈다.

데일은 그런 엘프를 깔끔히 무시해버렸다.

하켄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하하. 엘드리엄은 예전부터 하이엘프랑 왕래가 잦았다고 하더니, 설마 경비병으로 엘프를 세워뒀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그럼 도시 안에는 귀쟁이가 더 있다는 말인가?"

"음. 그렇겠죠?"

데일은 벌써 이 도시가 싫어졌다.

하지만 에른스트와 시종이 심각하게 여긴 부분은 다른 곳이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했죠? 엘프가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을 겁니다."

"앞서 왔던 귀족들이 많이 죽었다는 건가?"

경비병이 말할 정도면 꽤나 많은 숫자가 죽은 모양이다.

일행은 귀족들끼리 서로 싸우다 피해가 커진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일단 정보부터 모아야겠군. 그전에 일단 숙소를 잡고."

데일의 제안에 다들 동의했다.

마을을 떠난 이후로는 다시 노숙과 야영을 반복하는 나날들이었다.

노숙이라는 건 안 그래도 체력을 갉아먹는 짓인데, 초겨울에 들어선 북부는 춥기까지 하다.

뼛속까지 침투하는 냉기에 다들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특히 노숙에 익숙하지 않은 에른스트는 반쯤 기절한 상태였다.

그나마 멀쩡한 시종이 말했다.

"숙소를 잡죠. 도련님과 다른 분들은 쉬고 계세요. 제가 정보를 좀 모아오겠습니다."

숙소를 잡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도시에 찾아온 귀족들이 많아서인지, 엘드리엄은 때아닌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시험을 치르고 오겠다는 인간들이 대체 왜 다 도시에 틀어박혀 있는 거야."

에른스트는 그렇게 불평해댔다.

결국, 도시에서 조금 외진 곳에 가고 나서야 겨우겨우 방을 구할 수 있었다.

"피곤해서 죽을 것 같아. 좀 쉬고 싶어."

힘없이 흐느적거리는 에른스트에게 시종이 말했다.

"편히 쉬고 계세요. 저는 우선 용병 길드로 가보겠습니다. 정보를 모으는 데에는 거기만 한 데가 없으니까요."

"나도 가겠다."

"예? 굳이 안 그러셔도 됩니다."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데일은 무한한 체력을 지니고 있다. 피곤하다는 감각도 없다.

굳이 숙소에서 시간을 죽일 필요는 없다.

시종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음.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혼자 돌아다니는 게 겁이 나던 참입니다. 북부 사람들은 성질이 거치니까요."

에스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그럼 교단에 한번 들러보겠습니다. 언데드를 퇴치하기 위해 지원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자 죽은 듯 흐느적거리던 에른스트가 눈을 번쩍 뜨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예? 갑자기요?"

"연약한 여인을 혼자서 돌아다니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근데 방금 피곤해서 죽을 것 같다고...."

에른스트는 억지로 팔에 힘을 주며 말했다.

"하하. 쉬고 싶다니요. 저는 지금도 쌩쌩합니다."

"으음...."

에스델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에른스트와 둘이서 함께하는 게 썩 내키지 않는 듯했다.

에스델이 데일에게 도움의 시선을 보냈다. 데일은 하켄의 등을 앞으로 툭 밀쳤다.

"하켄이 에스델과 함께할 거다."

"예? 제가요? 저도 쉬고 싶은...."

하켄은 데일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는 고개를 붕붕 끄덕였다.

"당연히 가야죠. 음! 신앙심 깊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저 아닙니까?"

"아."

명백히 거절당한 에른스트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내렸다.

그 틈을 타 일행이 재빨리 숙소를 나섰다.

피곤해 죽겠는데, 교단에 따라가게 된 하켄이 툴툴거렸다.

"사제 양반도 그냥 저 도련님이랑 같이 가면 되지. 좀 어벙해 보이는 구석은 있어도, 사람은 착해보이는데."

에스델이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예전부터 저에게 과한 호의를 보이는 남성분들 탓에 곤란했던 적이 많아서... 일부러 거리를 두게 되더군요."

"쳇. 배부른 소리하네. 난 여자들이 달라붙어 오면 가리지 않고 다 받아줄 건데."

"그러니까 하켄이 안 되는 겁니다."

"...방금 뭔가 엄청 심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에스델은 모른 척, 데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늦지 않게 다시 숙소로 모이는 것으로 하죠."

"해가 지기 전까지는 돌아가겠다."

에스델과 하켄이 멀어졌다.

데일은 뒤늦게 나온 시종에게 말했다.

"길을 안내해라."

"아. 따라오세요. 안 그래도 여관 주인에게 용병 길드 위치를 물어본 참이었습니다."

시종은 씩씩하게 앞장섰다.

여정 내내 에른스트의 수발을 들랴, 잡일을 하랴 바쁜 시종이다.

다른 그 누구보다 피곤하고 지쳤을 것이다.

하지만 시종은 그런 내색은 일절 하지 않았다.

데일은 새삼 이 시종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유능한데.'

여정의 처음부터 한 생각이었다.

다른 시종들과의 경쟁에서 기어코 데일을 쟁취해낸 것도 그렇고, 에른스트를 보좌하는 것도 그렇고.

상당히 유능한 사람이었다.

데일이 물었다.

"힘들지 않나?"

"예? 뭐가요?"

"에른스트를 섬기는 거 말이다."

"으흠. 뭐.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가끔 쥐어박고 싶어질 때도 있고요."

시종은 놀랄 만큼 솔직하게 말했다.

웃지도 않는 게, 농담이 아니라 순수한 진심 같았다.

하지만 시종은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저는 도련님이 좋습니다. 도련님이 바라시는 그런 꿈들. 멋있잖아요? 설령 순진한 꿈이라 해도, 그런 멋진 꿈을 옆에서 함께할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 아니겠습니까?"

"흠."

"왜 그러십니까?"

데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냥. 에른스트가 운이 좋다는 생각이 새삼 떠올랐다."

"하하. 도련님이 여러모로 운 좋게 태어난 건 맞죠. 별 어려움 없이 자랐으니, 여전히 순수함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시종 같은 사람이 옆에서 함께한다는 건 큰 축복일 것이다.

에른스트에게는 복이 있었다. 사람이 알아서 모여드는 복이.

그렇게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걷다 보니 금방 길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용병 길드 엘드리엄 지부.

엘드리엄은 용뼈 산맥에서 내려오는 몬스터 때문에 용병 수요가 많은 도시다.

이레네 지부만큼은 아니어도, 엘드리엄 지부는 꽤나 성세를 자랑했다.

시종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부에는 험상궂은 인상들의 용병이 서성이고 있었다.

과연 북부 사내들답게 눈썹이 부리부리하고, 수염이 덥수룩한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시종이 들어서자 일제히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대놓고 무시하는 눈빛으로 자기들끼리 소곤거렸다.

"뭐야 저 비쩍 마른 놈은."

"꼴에 검사라고 검을 차고 있는데."

강자를 동경하는 게 용병의 습성이라지만, 북부에서는 좀 더 심하다.

약해 보이면 무시 받는다.

뒤이어 데일이 들어오자, 길드 내부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용병들이 당황해 중얼거렸다.

"흑기사."

"검은 사신? 아니. 아니지. 상식적으로 검은 사신이 도시 안에 있을 리가."

"그렇다면...."

한 용병이 깨달았다는, 크게 외쳤다.

"데일! 악마를 죽였다는 흑기사 데일이다!"

놀라울 거 없는 일이지만 데일의 명성은 이곳 북부에까지 전해졌다.

다시 말하지만. 북부의 용병들은 강자를 동경한다.

그들은 시종을 휙 밀친 뒤 앞다투어 다가왔다.

"만나서 영광이오!"

"이 먼 북쪽까지는 무슨 일이신가요."

"같이 용뼈 산맥에 몬스터 사냥이라도 가시겠습니까? 산맥 지리에 저만큼 밝은 건, 엘프들 정도밖에 없을 겁니다."

이 느닷없는 환영에 데일은 한숨을 삼켰다.

'사람들이 적당히라는 게 없군.'

겁에 질려 도망가거나, 부담스러운 호의를 가지며 다가오거나.

흑기사가 되고 나서 받는 취급이란 건 늘 이런 식으로 극단적이다.

그래도 전자보다 후자가 낫다면 나았지만.

"다들 비켜라. 급한 일이 있다."

다소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데일의 말에도 용병들은 군말 없이 물러났다.

이들에게 힘 있는 자의 말은 법과도 같았다.

데일은 용병들에게 치여 황망히 앉아 있던 시종을 번쩍 일으켜 세웠다.

시종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 인기가 많으시군요."

"그러게 말이다. 가자."

데일 덕분에 훤히 뚫린 길을 따라 둘은 접수대로 향했다.

접수대에 데일은 용병패를 내밀며 말했다.

"정보를 좀 얻고 싶다."

"동패 용병 데일인가? 확인했다."

젊은 여인들이 접수대를 맡는 이레네와 달리, 이곳의 접수대에는 근육이 우락부락한 중년 남성이 앉아 있었다.

서류 작업과는 영 관련이 없어 보이는 외형.

직원은 데일을 흥미 깊은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무엇을 알고 싶은 거지?"

"최근 귀족들이 이 도시에 많이 왔지 않나?"

"많이 왔지."

"경비를 서는 귀쟁이가 말하길, 귀족들이 많이 죽었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를 좀 듣고 싶다."

"아. 일곱 가문 동맹인지 하는 놈들이 검은 사신에게 몰살당한 일을 말하는 거군."

"검은 사신?"

데일이 되묻자 직원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요즘 여러모로 골머리를 썩게 하는 놈이지."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다."

"얘기해주는 거야 어려울 건 없지만... 아무래도 싸움에 참가한 사람한테 직접 듣는 게 좋지 않겠어?"

직원은 길드의 출입구를 가리켰다.

로브를 뒤집어쓴 인물이 깨금발로 서서, 살금살금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직원이 눈짓하자 용병들이 출입구를 막아섰다.

"흑기사와 전투에 참여했던 마법사다. 혼자서만 살아 돌아온 게 수상해 조사하고 있었지."

"마법사?"

용병들이 도망치려는 마법사를 번쩍 들어 이쪽으로 다가왔다.

대롱대롱 매달린 마법사가 머리를 덮은 로브를 슬쩍 들며 멋쩍게 말했다.

"아, 안녕하세요?"

근데 이 마법사.

어째 낯이 익다.

흑기사

* * *

데일은 마법사의 이름을 말했다.

"한스?"

한스. 빈민가 수색 당시 데일과 한차례 투닥거렸던 애송이 마법사다.

특징 없이 개성 없이 생긴 게 특징이라면 특징인 이 애송이를 여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

데일을 본 한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데일에게 패하고 당했던 일을 떠올린 것이다.

한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음. 안녕하십니까 경? 정말 오랜만입니다. 제가 한 번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일이 바빠 그러지 못했던 걸 용서해주시고, 그럼에도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참으로 반갑...."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라."

"옙."

한스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우락부락한 길드 직원이 물었다.

"아는 사이인가?"

"어느 정도는."

"그래?"

직원은 용병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한스를 붙잡고 있던 용병들이 일제히 손을 놓았다.

한스는 꿱! 하는 비명을 뱉으며 바닥에 떨어졌다.

"이놈이 귀족들이랑 함께 검은 사신을 상대로 싸운 마법사다. 혼자서 살아남았다는군."

"그런가?"

"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물어봐라."

고개를 끄덕인 데일이 한스에게 물었다.

"여기에서 뭐 하는 거냐."

한스가 머쓱하게 답했다.

"언데드 토벌에 동참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귀족들이랑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거 무슨, 친위대 시험인가? 그런 거라고 들었는데요."

다수의 언데드를 상대하는 데에는 마법사가 제격이다.

귀족들도 그 사실을 알고, 마탑에 지원을 요청한 듯하다.

"마법사는 너 하나인가?"

"그런 셈이죠? 다른 마법사분들은 굳이 이런 춥고 위험한 곳까지 오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요."

"너는 왜 왔는데."

"...저도 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한스는 강압에 의해 보내진 모양이다.

울적한 표정을 짓던 한스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 너무 하지 않습니까? 마탑 내에서 저희 학파 세력이 약하다고 일을 전부 떠넘기고, 그 학파에서도 제가 평민 출신이고 뒷배 없다고 모조리 저한테 떠넘기고! 심지어 별다른 지원도 안 해주고!"

마탑은 이번 친위대 시험 건에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황제가 마탑보다 친위대를 더 중히 여길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탑은 적당히 생색이나 내려고 평민에, 실력도 어중간하고, 힘도 없는 한스를 보냈다.

누가 봐도 버림 말인 것이다.

한스가 계속 징징거릴 기색을 보이자, 데일이 말을 끊었다.

"됐고. 그 검은 사신이라는 흑기사에 대해서나 말해라."

"아, 알겠습니다."

자세를 바로 한 한스가 설명을 시작했다.

"저는 일곱 가문이 모여 동맹을 맺은, 일곱 가문 동맹이라는 곳과 함께했습니다. 무려 기사가 12명에, 사병이 150명. 기타 시종이나 하인을 포함하면 200명이 넘어가는 규모였죠. 거기에 저까지 있으니 하찮은 언데드 상대로는 전혀 무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슬쩍 데일의 눈치를 살핀 한스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하찮은 언데드라는 건 말 그대로의 의미지, 딱히 데일 경을 폄하하거나 모욕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음을...."

"한 번만 더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각오해라."

"옙."

어쨌거나 200이 넘는 규모에 마법사가 끼어 있었으니, 스켈레톤이나 좀비 따위는 전혀 두려울 게 없었다.

일곱 가문 동맹은 이 주위를 돌아다니며 한동안 언데드를 토벌하고, 돌아다니는 몬스터를 사냥했다.

"솔직히. 저는 마법 몇 번 쓰지도 않았습니다. 별로 나설 일도 없었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이번 일은 날로 먹겠구나, 하고 좋아하고 있었죠. 근데 이 욕심 많은 작자들이 갑자기 흑기사를 토벌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뭐라더라? 이번 일에는 흑기사와 분명 연관이 있으니, 놈을 잡으면 단장 자리는 따 놓은 거라 했던가?"

편하게 지내면서 대충 돕는 시늉이나 하려던 한스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어,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습니다. 북부는 넓으니까요. 근데 이 욕심 많은 작자들이 기어코 흑기사의 경로를 예상하고, 놈이 올 곳에 미리 대기한 겁니다."

"그리고 만났군."

"그렇습니다! 우연인지 운인지 모르겠지만, 진짜 마주쳐버린 겁니다."

이후.

귀족과 기사들은 서로 공을 차지하기 위해 앞다투어 달려들었다.

하지만 한스는 함께 달려가기보다는, 자리에 서서 냉정하게 지켜보았다고 한다.

"저 멀리 흑기사 놈의 뒤로 상당히 많은 수의 언데드가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수백? 최소 1000은 넘는 군세였죠. 심지어 제법 덩치 큰 몬스터가 언데드가 되어 함께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놈들한테 겨우 200명이 달려들었으니, 몰살당할 만하군. 언데드한테 둘러싸인 건가?"

"예? 아닙니다."

한스가 단호히 부인했다.

"흑기사와 다른 언데드들 사이 거리가 상당히 멀었습니다. 놈의 발걸음이 워낙 빨랐거든요. 탁 트인 평원이라서 저 멀리 언데드 무리가 보였을 뿐입니다. 애초에 가까이 있었다면 귀족들이 달려들지도 않았겠죠. 군세가 오기 전에 잡아낼 수 있다 생각하고 돌진한 겁니다."

"그러면?"

한스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그놈 혼자서 죽였습니다. 200명 전부요! 다른 언데드가 도착할 시간도 없었어요."

데일이 물었다.

"기사만 열둘이라고 했지 않나? 한 명을 상대로 그렇게 쉽게 밀렸을 것 같지는 않은데."

"예. 실력 있는 기사분들이 간간이 녀석의 갑옷을 부수거나, 팔째로 찌그러트린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주위 병사를 붙잡아 목에 이빨을 박아넣고는... 피를 빨더군요. 그러더니 놀랄 만큼 빠르게 회복했습니다."

귀족들의 방심이 불러일으킨 참사다.

으레 언데드란 소수 정예로 상대하는 게 정석이다.

어중이떠중이들은 괜스레 시체가 되어 적들의 도움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는 흑기사도 마찬가지다.

흑기사는 생기만 흡수할 수 있다면 무한히 싸울 수 있다. 괜히 전장에서 흑기사를 기용하는 게 아니다.

'흑기사가 귀족들의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강했던 거야.'

기사 열둘을 홀로 상대했다는 건, 아무리 유리한 이점을 가지고 싸웠다 해도 무시할 만한 업적이 아니다.

데일은 언데드 오우거의 목에 난 깊은 검상을 떠올렸다.

'만만한 놈이 아니다.'

데일은 한스에게 말했다.

"놈이 어떻게 싸웠는지 자세히 설명해라."

필요한 건 정보다.

흑기사는 5등급에 들어서면 한 가지 계열을 선택해서, 전문화를 시작한다.

냉기. 영혼. 그리고 어둠.

이 셋 중 무엇을 택하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차이를 보인다.

'언데드를 놈이 일으킨 거라면, 놈은 영혼 계열을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영혼 계열을 선택하면, 영혼을 다루는 모든 기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성장한다.

언데드를 일으키거나 언데드와 몬스터를 조종하는 건 영혼 계열을 택한 흑기사의 특성이다.

고민하던 한스가 답했다.

"그러고 보니 기사들과 그 흑기사의 검이 부딪힐 때마다 칼이 얼어붙었던 것 같습니다. 유독 그 주위에 가면 병사들이 굳어버렸던 것도 같고요. 아. 때때로 눈 폭풍이 부자연스럽게 불었습니다. 멀리서 봐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얼어붙었다고?"

눈 폭풍. 얼어붙는 검.

모두 냉기 계열을 택한 흑기사가 사용하는 기술이다.

'두 가지 계열을 동시에 고를 수는 없어.'

그게 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데일은 한층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건 아니겠지?"

옆에서 엿듣고 있던 직원도 맞장구쳤다.

"안 그래도 의심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렇게 강력한 적이라면, 왜 이런 비실비실한 놈이 혼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겠나."

한스가 다급히 말했다.

"지, 진짜입니다! 제가 왜 거짓말을 치겠습니다! 저는 느낌이 쎄해서 곧바로 말을 타고 도망쳐서 살았을 뿐입니다!"

이곳이 이레네였다면, 감히 마탑의 마법사에게 말대답이냐며 고압적으로 나왔을 한스다.

하지만 이곳은 북부.

북부의 사내들에게 마탑이란 사기꾼들 집합소쯤으로 여겨지고, 눈앞의 데일은 마탑의 권위를 가장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중 하나다.

잔뜩 주눅이 든 한스는 필사적으로 빌었다.

"믿어주십시오! 아! 그러고 보니 그 흑기사의 허리춤에 자줏빛으로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분명 그게 언데드를 일으키는 원흉일 겁니다!"

"급하다고 막 지어내지 마라."

"진짜입니다! 믿어주십쇼...."

옆에 있던 직원이 물었다.

"물어볼 건 다 끝났나?"

데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직원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

"그럼 다시 데려가겠다. 깊은 대화를 나누다보면, 언젠가는 진실을 뱉게 되겠지."

험상궂은 직원이 다가오자 사색이 된 한스는 데일에게 달라붙었다.

그리고 애원했다.

"데일 경. 저 좀 도와주십시오."

"내가 왜."

"도, 도와만 주시면 뭐든 돕겠습니다."

"뭐든?"

한스가 고개를 붕붕 끄덕였다.

데일은 한스가 사용하던 마법들을 상기했다. 한스는 대단찮은 마법사지만, 그런 수준의 마법도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데일이 직원에게 말했다.

"이놈을 내가 데려가도 되겠나?"

"음. 영 수상쩍은 놈인데."

"걱정 마라. 흑기사를 사냥하는 데에 쓸 거니."

"...예?"

한스가 바짝 굳어버렸다.

그 괴물에게서 어떻게 도망쳤는데, 다시 그놈에게 간다니.

차라리 우락부락한 직원에게 붙잡혀 조사나 받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한스는 은근슬쩍 직원에게로 걸어가려 했다.

데일이 그런 한스의 어깨를 잡았다.

"어디 가지?"

한스가 움찔했다.

데일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흑기사의 체격에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차마 데일 앞에서 대놓고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

검은 사신이라는 흑기사는 저 멀리 있지만, 데일은 바로 이곳에 있다.

"가, 가다니요? 하하. 뭔가 착각하신 모양이네요."

"설마 모를 리는 없지만,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너는 지금 이레네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예?"

한스는 요청을 받고 마탑에서 파견한 마법사다.

근데, 그 마법사는 전투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자기 혼자 도망쳐버렸다.

차라리 한스가 귀족들과 같이 죽었다면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혼자 살아 돌아온 건 분명 문제가 되는 것이다.

마탑의 위신에 누가 되는 행동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스 혼자 이레네로 털레털레 돌아가면?

"마탑에서도 가만 안 있겠지. 마침 평민 출신에 뒷배도 없으니 본보기로 처벌하기도 좋고."

"...."

차라리 이곳에 남아 조금이라도 만회하는 게 한스에게 남은 유일한 활로였다.

데일이 물었다.

"그래서. 여전히 돌아가고 싶나?"

한스는 표정을 달리하며 말했다.

"무슨 소립니까. 제 동료들을 살해한 흑기사를 두고 어찌 저 혼자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복수해야지요."

"알아먹었으면 됐다."

그렇게 정보를 모은 데일과 시종, 그리고 한스는 숙소로 돌아왔다.

기진맥진한 상태의 에른스트에게 시종은 상세히 보고했다.

에른스트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런! 그 흑기사가 이 근방을 어지럽힌다는 말이야! 다른 귀족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데?"

"그게, 일곱 가문 동맹이 몰살당한 후로는 절반 정도가 이레네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도시에 눌러앉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고요."

흑기사 하나뿐이라면 어찌어찌 일을 도모해볼 수도 있지만, 문제는 녀석을 따르는 언데드 군세다.

그 숫자가 천을 넘어가니 이는 이제 단순한 시험이 아닌, 전쟁의 영역에 들어섰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의 규모가 더는 저희가 어떻게 하기 힘들 정도로 커졌는데요."

시종은 '이제 그만하고 돌아가자는' 뜻을 은근히 돌려 말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시도다.

에른스트의 표정이 굳었다.

그 역시 이게 혼자서 뭘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건 알아차렸다.

그렇다고 선뜻 돌아가자는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패배의 쓴맛을 한 번이라도 맛보았다면 다른 선택이 내려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에른스트는 이곳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좌절을 맛보지 못했다.

계속된 성공이 에른스트에게 미련을 불어넣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그냥 싸울 수는 없어.'

그 정도의 계산은 있었다.

지금 에른스트가 거느린 인원으로 흑기사를 상대로 싸워봤자, 언데드의 파도에 휩쓸릴 뿐이다.

그렇다고 그냥 포기하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보고 싶어.'

한참을 고민하던 에른스트가 입을 열었다.

"분명 우리처럼 흑기사와 싸우고 싶지만 힘이 부족해 고민하는 자들도 있을 거야."

"그렇긴 하겠죠."

"그들을 끌어모으자! 사람 가리지 않고, 흑기사를 상대로 싸우고 싶다는 전사는 모두 받아들이겠다고 용병 길드에 공문을 넣자고! 사람을 늘리는 거야!"

시종이 난색을 표했다.

"도련님. 그러면 돈이 들 겁니다. 하지만 당장 지불할 수 있는 금화는 많지 않습니다."

에른스트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가문의 이름을 대고 공언하면 되잖아! 이레네로 돌아가 돈을 지불하면 되는 문제야!"

"음. 저희 가문이 돈이 부족한 편은 아닙니다만, 자칫 너무 많은 인원이 몰리면 어떡하죠?"

그럴 리 없다는 듯. 에른스트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하기는 그렇지만, 우리 가문이나 내가 특별히 유명한 것도 아닌데 나한테 그렇게 많이 몰릴 것 같지는 않아. 흑기사와 맞서겠다는 다른 귀족이 있다면, 그쪽으로 몰리겠지."

결국, 이번 일의 주역은 다른 이름 있는 가문이나 귀족이 맡을 것이다. 에른스트가 원하는 건, 그저 조금이라도 사람을 모아 언데드로부터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다.

욕심 많은 귀족들이 신경쓰지 않는 주민들을 지켜내는 것이다.

시종도 에른스트의 예상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렇긴 하죠. 아무래도 저희 가문은 별로 유명하지는 않으니까요. 근데 만약 다른 귀족 가문에서 한 군데도 흑기사랑 맞서겠다는 곳이 없다면요?"

"그거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에른스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비록 다들 권력을 탐내 이곳에 온 자들이지만, 그래도 가슴 속에 최소한의 양심은 있을 거야. 게다가 여기서 귀족들이 전부 꽁무니를 뺐다가는 그것보다 우스운 꼴이 어딨겠어? 온 제국에서 두고두고 조롱당할 텐데. 염치와 체면이라는 게 있다면 그러지는 않을 거야."

에른스트는 믿었다.

비록 몇몇 무능하고 한심한 귀족이 있을지언정, 양심적이고 뛰어난 귀족도 얼마든지 있을 거다.

그들과 힘을 합치면 이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도 분명 타개할 수 있을 것이다.

에른스트는 그렇게 믿었다.

"그렇죠? 하긴, 싸우겠다는 귀족이나 기사가 단 하나도 없을 리는 없죠."

"그래.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둘은 다시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서로 죽이 잘 맞는 시종과 주인이었다.

흑기사

* * *

다음 날. 용병 길드를 통해 에른스트가 사람을 모은다는 소식이 퍼졌다.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건 이번 시험에 참여했다가 의뢰주와 주인을 잃은 용병과 사병들이다.

이번 시험은 특히 귀족들 간의 전투가 빈번했는데, 이는 단순히 시험의 경쟁자여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귀족들은 수십 년간 좁디좁은 상위 구역에서 부대껴 살았다.

모여 살다 보면 얼굴 붉힐 일도 생기고, 원한 관계도 만들어진다.

문제는 그런 원한이 있어도 상위 구역이라는 좁은 사회에서 계속 마주쳐야 하는 것이다.

원한이 깊어지기에는 최적의 조건.

귀족들은 이번 기회를 그 원한을 푸는 데 사용했다.

경쟁자를 제거하며, 그간 마음에 안 들던 타가문의 자제들에게 화풀이하는 것이다.

꽤나 많은 귀족이 죽어 나갔고, 그런 식으로 주인을 잃은 용병과 사병이 붕 뜨게 되었다.

용병들은 새 고용주를 찾아 북부에서 서성였고 사병들은 어찌할지 몰라 어슬렁거렸다.

이레네로 돌아가봤자 처벌만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에른스트가 사람을 고용한다는 말이 귀에 들려왔다.

"티센 남작가의 에른스트? 들어봤어?"

"아니. 처음 듣는데."

"그래도 가문의 이름을 걸고 전부 받아준다는 거 보면 진심인가 본데?"

"그러면 한번 지원해볼까?"

그런 식으로 사람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사건이 하나 더 일어났다.

"영주께서 검은 사신에게 현상금을 걸었다!"

"금화 300개! 300개를 거셨다!"

엘드리엄의 영주는 계산적이면서도 눈치 빠른 인물이었다.

처음 몬스터의 범람과 언데드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혼란이 커졌을 때.

그녀는 이게 홀로 막아낼 만한 사건이 아니라 여겼다.

막으려면 어떻게든 막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게 했을 때는 그녀가 짊어져야 할 출혈이 너무 컸다.

그래서 영주는 본인이 대대로 황실과 친한 가문이라는 내세워, 황실에 도움을 요청했다.

즉. 황실 기사단을 보내달라는 뜻이었다.

황실 기사단의 기사 다섯만 와도 어지간한 문제는 해결할 수 있으니 말이다.

황제는 기사단 대신 상위 구역의 귀족들을 보냈다.

친위대의 단장 자리를 미끼로 내걸었고, 실제로 귀족들은 가문의 병사와 용병을 대동해 이곳 엘드리엄으로 모여들었다.

엘드리엄의 영주는 기뻐했다.

귀족들이 군세가 적지도 않았거니와, 그들이 뿌린 돈으로 도시가 기쁨의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 돈 중 많은 부분이 세금으로서 영주의 주머니로 들어오게 될 터였다.

황제가 참 일을 잘해주었다고. 크게 만족했다.

그러면서 영주는 욕심을 냈다.

어차피 귀족들이 언데드를 물리쳐 줄 테니 자신의 병사를 지원해준다거나 하는 도움을 일체 삼간 것이다.

귀족들이 알아서 해결할 텐데 굳이 자기 병사를 왜 사용하겠는가?

손 안 대고 코를 푼다는 격언은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하지만 그녀가 예상치 못한 점이 몇 가지 있었다.

하나는 귀족들 사이가 생각보다 더 나빴다는 것.

귀족들은 언데드나 몬스터를 사냥하기보다, 서로를 죽이는 데에 열중했다.

설령 같이 언데드를 상대로 싸운다고 해도 협력 같은 건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는 와중에 검은 사신이라는 흑기사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영주 역시 그 흑기사가 이번 일과 깊은 관계가 있다 여겼다. 귀족들에게 흑기사의 토벌을 부탁했다.

그녀의 말에 혹한 몇몇 귀족들이 흑기사를 사냥하기 잡기 나섰다.

일곱 가문 동맹처럼 함께 손을 잡는 이들도 있었고, 일정 규모 이상의 가문은 혼자서 사냥하려 했다.

공을 남들과 나누고 싶지 않은 것이다.

문제는 흑기사가 생각보다 더 강했다는 것이다.

황실 기사단에 들어갈 실력은 안 되지만, 그래도 나름 저력을 지닌 기사들이 몰살당했다.

흑기사와 맞선 자는 그 누구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심지어 그렇게 죽은 이들은 언데드가 되어 흑기사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언데드에게 박살나는 전형적인 수순을 밟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영주다.

지금도 이미 충분히 피해가 크다.

당장 저 괴물을 막아내야 했다.

그녀는 일단 도시에 남아있는 귀족들에게 사람을 보냈다. 협력을 구하려 했다.

돌아온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뭐라고?! 전부 도망쳤다고!"

"그, 그렇습니다. 티센 가문의 에른스트라는 분 외에는 전부 도망쳤습니다."

"무슨! 위험할 것 같다고 전부 꽁무니를 내빼다니. 세간의 비웃음이 두렵지 않단 말인가!"

유능한 귀족은 이미 상위 구역에서 자리를 잡았고, 애매한 자들만 참가한 시험이다.

어찌 보면 예정된 결과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 내막까지는 모르는 영주는 치를 떨었다.

하지만 이미 떠나간 자들을 다시 붙잡아 올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영주는 결단을 내렸다.

"검은 사신에게 현상금을 걸어라."

"얼마를 걸면 되겠습니까."

"금화 300개."

"!"

금화 300개. 일반 시민은 꿈도 꾸기 힘들 정도의 거금이다. 영주는 이 현상금을 미끼로 다른 지역에 있는 용병들까지 불러 모을 생각이었다.

돈 되는 소문은 빨리 퍼지기 마련이니, 머지않아 용병들이 몰려들 것이다.

물론. 아무리 영주라고 해도 이 정도의 돈은 큰 부담이다. 하지만 영주는 그만큼 절박했다.

금화 300개짜리 현상금에 대한 소문은 도시의 모든 용병들은 물론 주민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금화 300개면 평생 놀고먹고도 남는 돈이야."

"근데 우리끼리는 힘들지 않아? 아무리 돈이 탐나도 개죽음밖에 안 될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웬 처음 들어보는 귀족이 흑기사 토벌대를 모집하고 있다는데. 거기 껴서 기회만 잘 보면, 금화 몇 개는 받아먹을 수 있지 않을까?"

"오."

언제나 사람들을 움직이는 건 욕망이다.

권력. 돈. 성공.

귀족이나 평민이나 그 점에 차이는 없다.

사람들이 에른스트의 아래로 모이기 시작했다.

* * *

데일은 이른 아침부터 한스와 함께 도시를 돌아다녔다.

흑기사와의 싸움이 확실시된 만큼, 그에 따른 준비를 할 생각이다.

'성수. 그리고 사제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빛의 신성이 담긴 성수는 언데드에게 치명적이며, 밤의 힘을 다루는 흑기사에게는 더더욱 치명적이다.

데일도 몇 번 맞아봐서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 둘은 에스델이 구해오겠다고 했고.'

에스델이 교단에 도움을 요청하러 갔으니, 그에 대한 결과를 기대해봐도 좋을 것이다.

'기름이 있으면 더욱 좋고.'

불.

언데드에게는 언제나 효과적인 공격 무기다.

특히. 상대는 냉기 계열을 택한 흑기사다. 못해도 5등급에 달한 실력자.

한스의 말이 맞다면 냉기에는 상성이라 할 수 있는 불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주는 게 좋을 것이다.

그냥 기름을 사용해도 되지만, 그러면 불이 금방 꺼질 수도 있다.

데일은 좀 더 제대로 준비할 생각이다.

"아. 저기 보이네요."

앞서나가던 한스가 앞을 가리켰다. 굴뚝이 높이 솟은 가게였는데, 굴뚝에서 위험한 색깔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엘드리엄의 유일한 연금술 공방입니다. 주로 포션을 만든다는데, 다른 것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데일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공방 안은 매우 세련된 인테리어를 하고 있었고,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젊은 점원이 활기차게 인사했다.

"어서오세요!"

수상쩍은 시약병들과 약품에 절여진 몬스터가 전시되어 있지 않을까 예상하던 데일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점원은 데일을 보며 잠깐 흠칫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사무적인 미소를 지어내며 데일을 응대했다.

교육을 잘 받은 점원이었다.

"무엇을 찾으시나요?"

"검은 불을 사고 싶다."

"검은 불 말인가요?"

검은 불.

끈적한 검은색 시약으로 한번 불이 붙으면 연료가 다 할 때까지 꺼지는 법이 없다.

흑기사가 다루는 냉기를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을 터.

점원이 물었다.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

"얼마나 있지?"

"어. 창고를 찾아보면 30병 정도는 있지 않을까요? 잘 안 팔리는 제품이니까요."

데일이 말했다.

"전부 다 줘라."

"...예?"

"30병 다 달라고."

"저, 전부요?"

점원과 한스 모두 당황했다.

"전쟁이라도 나가시나요?"

"데일 경. 돈 많아요? 이거 엄청 비싼데요?"

데일은 대답 대신 묵직한 주머니를 내밀었다.

점원은 슬쩍 주머니를 열었고, 그 안에 반짝이는 은화들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

개중에는 금화도 몇 개 섞여 있었다.

"바로 창고에서 꺼내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어차피 돈 쓸 일도 없는 데일이다. 그간 해온 일 때문에 돈이 부족할 일은 없다.

만만치 않은 상대이니만큼, 확실히 준비할 생각이다.

데일이 조금의 흥정도 없이 선뜻 거금을 내놓자 한스의 눈빛이 달라졌다.

"...데일 경. 사실 제가 요즘 새로 마법 연구를 하는 데 돈이 좀 필요하거든요?"

"근데."

"무려 번개를 독수리의 형상으로 날려보내는 마법인데, 데일 경께서 자금을 조금 지원해주신다면, 절대 후회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싫어."

"...."

그 사이 점원이 궤짝을 들고 왔다. 궤짝 안에는 검은 액체가 든 유리병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데일은 점원에게서 궤짝을 받아들고는 공방을 나섰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점원은 통 큰 고객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공방을 나선 둘은 그 뒤로도 도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조금이라도 준비를 철저히 하기 위해 구할 수 있는 모두 구하려 했다.

한스는 그런 데일에게 혀를 내둘렀다.

'단순무식하게 생겨서는 꼼꼼하기는 마탑 노인네들 못지않네.'

그때.

데일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속으로 툴툴거리던 한스는 데일의 갑옷과 얼굴을 부딪혔다.

"악. 갑자기 왜 멈추는 거예요."

"저거."

데일이 한쪽을 가리켰다.

두 개의 대로가 십자로 교차하는, 엘드리엄의 중심지였다. 그 중앙에 익숙한 석상이 하나 서 있었다.

투구를 깊이 눌러쓴 기사가 룬 문자가 새겨진 검을 들고 있는 조각상.

한스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얼굴 없는 기사의 석상이네요. 저게 왜요?"

얼굴 없는 기사. 데일이 찾아다니는 영웅들 중 하나.

데일이 물었다.

"왜 혼자지?"

영웅들의 위명을 생각하면 이곳저곳에 석상이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

한데. 왜 네 명이 함께 있는 게 아니라, 기사 혼자 있단 말인가.

한스는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야 영웅들 중에서 북부에서 활동한 건 저 기사 혼자니까요?"

"북부에서 활동했다고? 뭣 때문에?"

"저야 모르죠. 용뼈 산맥에 몬스터가 많으니, 그거라도 사냥하고 다닌 거 아니겠어요?"

"흠."

4명의 영웅 중, 얼굴 없는 기사는 다른 영웅들과 달리 그 활동이나 행적이 모호할 때가 많았다.

워낙 이곳저곳을 방랑하며 떠돌아다닌 것이다.

'북부에 왔었다라.'

또 하나의 정보를 얻어냈다.

이렇게 대륙을 돌아다니며 영웅들의 흔적을 찾을 때마다 꽤나 묘한 기분을 느꼈다.

흩어진 퍼즐 조각을 하나씩 찾아내는 기분이라 해야 할까.

데일은 조각상의 주위를 살폈다.

혹시나 상위구역에서 봤던 것처럼 어떤 문장이 새겨져 있을까 싶어 꼼꼼히 확인했다. 하지만 조각상은 잘 관리된 듯, 몹시 깔끔했다.

문장은커녕 낙서 하나도 없었다.

한스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뭐 찾으시는 거라도 있어요?"

"아무것도 아니다."

조각상에서 시선을 뗀 데일은 무심하게 걸음을 옮겼다.

한스도 얼른 발걸음을 맞췄다.

그는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어느 샌가부터 거리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근데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사람이 너무 많잖아요."

"도시에 사람이 많은 게 뭐 이상한가?"

"북부 사람들은 밖에 잘 안 돌아다닌다고요. 그리고 기분 탓인지 다들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그 말대로였다.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은 모두 데일과 같은 방향을 향해 걷고 있었다.

처음에는 기분 탓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한참을 걷고도 사람들은 흩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걸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한스가 옆 사람에게 물었다.

"이보세요. 다들 왜 같은 방향으로 가는 거랍니까? 뭐 축제라도 하나요?"

"응?"

질문을 받은 사내는 등에 양날 도끼를 맨 드워프였다.

"모르고 같이 가는 거였소? 다들 흑기사 토벌대에 참여하려는 게 아니오."

"흑기사 토벌대... 이 인원 전체가 말입니까?"

"그렇소."

지금 거리에 보이는 것만 해도 수백 명이다.

이들이 전부 토벌대에 참여한다면, 대체 어느 정도의 규모란 말인가.

한스가 감탄하며 말했다.

"이 인원을 모두 고용하려는 거 보면 꽤 권세 높은 귀족인가 본데요. 이번에 참여한 가문 중에서 이만한 여력이 있는 가문은... 톨 백작가? 아니면 바텐 백작가려나? 이렇게 된 거, 우리도 이쪽에 붙으면 안 될까요? 저희 끽해야 50명도 안 되는데, 홀로 싸우는 것보다는 이 토벌대에 합류하는 게 더 승산 있지 않겠어요?"

데일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확실히 이만한 숫자를 지휘하는 귀족이 있다면, 그들과 합류하는 게 더 승산이 높은 싸움이 될 터이다.

어차피 데일이나 에른스트나 단장 자리에는 관심 없지 않은가?

혼란을 흩뿌리는 흑기사를 저지할 수 있다면 그만일 터.

"누가 토벌대를 모으는지 일단 확인하고, 숙소로 돌아가자."

"예. 좋네요. 마침 방향도 비슷한 것 같으니까요."

둘은 그렇게 한참을 더 걸었고. 마침내 함께 걷던 이들이 모두 걸음을 멈췄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오. 여기가 그 귀족이 있는 곳 같은데...."

한스가 말을 잃었다.

그는 자기 눈을 비빈 뒤, 다시 말했다.

"왠지 여기 우리 숙소인 것 같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