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배를 타다
교소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손을 보았다. 소녀의 손은 봄의 새싹처럼 갸날프고 부드러워 아름다웠지만,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인 예전 자신의 손과는 달랐다.
교소는 여소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볼 수 없었다. 두 손을 내려다보는 교소의 얼굴에 망연자실한 빛이 어렸다.
‘어떻게 해야 여소의 신분으로 내 집에 머무를 수 있을까?’
교소는 몸을 돌려 앉고선 찻잔을 든 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 같았다.
그때, 갑자기 세 사람이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지찬, 주언. 너희 언제까지 바둑을 둘 셈이야? 밥 안 먹을 거야?”
교소가 고개를 들어보니, 배의 주방장이 이미 식사를 내와서 그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주언은 검은 돌을 쥐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끝내기 싫은 게 아니라, 지찬이 벌써 일각(*一刻: 15분) 동안 생각만 하면서 시간을 끌고 있다니까.”
양후승이 바둑판을 슬쩍 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찬, 자넨 이미 졌어. 빨리 패배를 인정하게. 다른 사람들 시간만 낭비하게 하지 말고.”
지찬은 가늘고 긴 손가락 사이에 빛나는 흰 돌을 끼우고서,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패배를 인정하란 거야? 난 바둑을 둬서 져본 적이 없어!”
양후승이 피식 웃더니, 교소의 앞에서 서슴없이 사실을 폭로했다.
“자넨 당연히 진 적이 없지. 자네가 한 수를 둘 시간이면 다른 사람은 한판을 둔단 말이야. 결국엔 상대방이 못 견디고 자네랑 바둑을 안 두는 거지.”
지찬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자네가 뭘 안다고 그래? 난 심사숙고하는 거라고!”
양후승은 화가 나서 고개를 돌리며 생각했다.
‘심사숙고는 무슨……! 이건 얼굴에 철판 깔고 생떼 부리는 거랑 같잖아!’
주방장의 오늘 요리는 가마솥에 찐 생선 요리로 그 향이 사람의 애간장을 녹게 했다. 결국, 주언은 더는 참지 못하고 손을 들며 말했다.
“내가 진 걸로 할 테니, 밥이나 먹지.”
지찬이 그를 막으며 말했다.
“그럼 안 되지. 우린 늘 실력으로 승부를 냈잖아.”
주언과 양후승은 동시에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내 양후승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자네를 흠모하는 그 경성에 있는 여인들에게 자네가 진짜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고 싶군!”
“콜록콜록!”
지찬은 기침을 하다가 교소를 슬쩍 보았다.
소녀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확실히 좋지 못했다. 양후승은 자신이 실언한 것을 깨닫고, 멋쩍은 듯 웃었다.
“바둑을 둘 때 옆 사람은 끼어들지 말라고 했거늘……! 주언, 우리 계속 두세. 흰 돌은 분명히 살아날 길이 있을 거야. 난 잠시 그 수가 생각나지 않는 것뿐이야.”
“보아하니, 일찍 밥 먹긴 글렀군.”
양후승이 교소에게 말했다.
교소는 배가 고파서 배를 움켜쥐었다. 여소의 몸은 연약해서, 식사가 잠시 늦어졌을 뿐인데도 위가 서서히 아파오기 시작했다.
북쪽의 연성 성벽 위에서 교소는 날카로운 화살이 심장을 관통하는 고통을 느꼈었다. 그래서 이제는 가능하다면 조금의 고통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다시 시작된 인생에서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잘해주고 싶었다.
“바둑이 끝나면, 밥을 먹을 수 있는 건가요?”
“당연하……!”
양후승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교소가 바둑통에서 흰 돌을 집더니 바둑판에 놓았다. 그가 재빨리 막으려 했으나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큰일이 나겠구나.’
평소 지찬은 성격이 좋았으나, 몇 가지 금기시하는 것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그가 바둑을 둘 때 옆 사람이 방해하는 것이었다.
지찬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소, 바둑알은 가지고 노는 게 아니다.”
계속 바둑판을 보고 있던 주언이 목소리가 변해서 말했다.
“지찬, 자네…….”
지찬은 주언의 말은 듣지도 않은 채, 곁눈질로 교소를 보다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여소. 내 바둑을 망쳤으니, 어떻게 보상할 것이냐?”
“지찬!”
지찬은 주언이 자꾸 자신을 부르자 말했다.
“자네들 둘이 이 애를 위해 좋은 말을 하려는 것 알고 있네. 허나 내가 보기에 이 녀석은 똘똘해서 마차를 빌려 혼자 경성까지 가는 것도 문제없을 듯해.”
‘흥, 감히 바둑 두는 것을 방해하다니. 도움을 받았는데도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은혜를 갚겠다는 말도 없고……. 가장 중요한 건, 날 아저씨라고 불렀잖아!’
지찬은 이 소녀가 정말이지 너무도 얄미웠다.
“지찬, 내가 하려는 말은…… 흰 돌이 이겼네.”
믿기 어렵다는 듯이 말을 하면서 주언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검은 돌은 분명 이기고 있었고, 승리가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여소가 멋대로 돌을 놓자, 놀랍게도 전세가 뒤바뀌어 검은 돌이 막다른 상황으로 몰리고, 다시 판을 뒤집을 기회조차 없어진 것이다.
지찬은 어리둥절해져서 급히 바둑판을 보았다. 양후승도 와서 함께 보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교소를 보았다.
“너 어떻게 한 것이냐?”
지찬이 놀라서 물었다. 교소가 입술을 오므리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무렇게나 한 거예요. 운이 좋았나 보죠.”
“난 진짜 사실을 알고 싶은 거야.”
지찬이 손가락을 구부려 바둑판을 탁탁 쳤다.
‘아무렇게나 둬도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고심하는 것보다 낫다는 말인가?’
더욱이 주언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경성의 젊은이 중 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니 이 계집애의 말은 설득력이 없었다.
“음, 그럼 아마 제 수준이 조금 더 높나 봐요.”
지찬과 주언은 서로 마주 보다가, 갑자기 손을 뻗어 바둑판을 어지럽히더니 동시에 말을 했다.
“자, 우리 바둑 한판 두자.”
“저 배고파요.”
교소는 유달리 밥 챙겨 먹는 것만은 성실했다.
* * *
식사 후.
주언은 바둑판을 오랫동안 응시하다가 바둑알을 바둑통에 하나 떨어뜨리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 기술이 부족하군. 내가 졌다.”
그는 지찬이 앉도록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양은 점점 서쪽으로 기울고, 가봉의 부둣가가 어렴풋이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지찬은 여전히 바둑알을 쥔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맞은편의 소녀는 바둑판을 보며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지찬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다니. 정신력만 놓고 보자면 정말 대단한 아이야.”
주언은 양후승에게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부족함을 탄식했다. 양후승은 주언을 이기고 지찬의 느린 바둑 두기도 견디는 소녀를 보며 탄복했다. 이내 양후승은 진지한 눈으로 교소를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멈칫하더니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보기에 저 애 자는 것 같은데?”
“너 나랑 바둑을 두면서 잠든 거야?”
지찬이 냉랭하게 물었다.
교소는 흠칫 놀라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바둑알을 놓으며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못 보신 거예요.”
소녀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웠다. 그녀는 잠깐 졸았을 뿐이었다.
“내가 보니까 너 방금 눈 감고 있던데?”
지찬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으나, 그 말투는 사람을 긴장하게 했다.
“못 믿겠으면 보세요. 제가 잘못 놓은 적이 있나요?”
교소는 옥처럼 희고 보드라운 손가락으로 조용히 추목(楸木)으로 된 바둑판을 가리켰다.
할아버지와 은거하던 시절, 시간은 유달리 천천히 흘렀다. 바둑은 시간을 보내기 좋은 수단이었다. 할아버지와 겨룰 정도의 실력을 지닌 교소는 눈앞의 지찬과는 사실 눈 감고 겨루어도 실수할 일이 없었다. 교소는 이런 생각이 들자, 자신이 상대를 좀 얕잡아보는 것 같다 싶었다.
지찬의 눈은 무의식적으로 소녀의 손가락이 머무는 곳을 쫓았다. 교소가 바둑알을 놓은 후, 그는 또 자신의 피해가 막심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조금 전 자신의 판단에 대해 회의했다.
‘그런데 이 계집애가 방금 잠든 건 아니겠지?’
“그만들 하고, 빨리 짐이나 정리하게. 곧 도착이야.”
양후승이 웃음을 참으며 두 사람의 대화를 중단시켰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육지에 닿자, 지찬은 정말 양후승의 말처럼, 성에 가지 않고도 아주 능숙하게 성 밖의 마구간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건강한 세 필의 말을 골랐다. 그는 말의 등을 치며 교소에게 말했다.
“우리 세 사람은 너와 함께 말을 탈 수 없으니, 이따가 내가 널 데리고 성으로 들어갈 때까지 객잔에 머무르도록 해라.”
“저 말 탈 줄 알아요.”
교소가 말했다.
지찬은 멍한 얼굴로 자신의 겨드랑이에도 닿지 않는 소녀의 키를 가늠해 보았다. 그러더니 입가를 올리고, 또 한 필의 말을 골라왔다.
“말을 탈 줄 안다니, 너도 데리고 가마.”
“고마워요.”
교소는 안도의 숨을 내쉬더니, 크게 웃으면서 대추색 말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양후승이 알 수 없다는 듯 작은 소리로 주언에게 물었다.
“……왜 갑자기 지찬의 태도가 바뀐 거야?”
주언은 교소의 키를 보더니, 인정머리 없게 말했다.
“아마도 쟤가 말을 타지 못할 것 같으니까, 웃음거리 만들려고 그러는 거겠지.”
“그런 거면 지찬은 또 실망하겠는데? 저 녀석 보통이 아니야. 저 나이에 벌써 바둑으로 자네를 이기고…… 어쩌면 기마술도 나보다 뛰어날걸?”
갑자기 앞을 보는 주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양후승도 덩달아 앞을 봤을 때, 대추색의 큰 말이 소녀를 옆으로 내던지더니 득의양양하게 도망가고 있었다.
소녀는 콧속으로 흙이 들어가 심하게 기침을 해댔다.
“과연 기마술이 뛰어나군.”
주언이 크게 웃었다.
도망간 말을 보며, 교소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자신은 분명히 말을 탈 줄 알았었다.
“넌 객잔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지찬은 미소를 지으며, 얼굴에서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 사람은 날 떨어뜨리고 싶겠지?’
교소는 고개를 숙이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이들이 원망스럽지 않았다. 그들 세 사람은 우연히 알게 된 사이인데, 생면부지의 사람이 자신을 구해줬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교소도 은혜를 원수로 갚는 수밖에 없었다.
“저도 오라버니들과 같이 갈래요. 지찬 오라버니, 저도 태워주……”
“안 돼! 남녀유별이거늘!”
지찬은 단호히 거절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계집애는 어째서 낯짝이 이렇게 두꺼운 거야?’
“전 상관없어요.”
지찬이 교소의 우김에 눈을 희번덕거리며, 차갑게 말했다.
“네가 상관없는 건 나도 알아. 그런데 내가 상관이 있어!”
교소는 그의 말이 매정하다고 탓할 수도 없었다. 만일 그의 성격이 더 부드러웠다면, 과거 경성에서 집 밖에 나가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지찬이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을 하는데도, 교소는 오히려 가볍게 웃었다. 과거에 지찬은 자신의 할아버지 앞에서 이렇게 낯 두껍게 매달렸었다. 그리고 오늘에는 지찬이 아닌 자신이 그에게 매달리고 있으니, 이는 인과윤회(*因果輪回: 세상 만물은 돌고 돈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왜 웃는 게냐?”
지찬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찬이 봤을 때 이 계집애는 좀 영악한 데가 있어서, 도통 평범한 열두 세 살짜리 소녀로 볼 수가 없었다.
“제가 웃는 건, 오라버니들이 절 데려가지 않으시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요.”
지찬은 맞은편에서 웃는 듯 마는 듯한 소녀의 눈을 돌연 매섭게 바라보다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자애들은 교묘한 술수를 쓰는 걸 좋아한다니까. 이러면 내가 데리고 갈 줄 알았느냐? 하하, 널 데리고 가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가려는 곳이 어딘지 맞히면 데리고 가마.”
“지찬, 이제 여소를 그만 놀리게.”
양후승이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 말했다. 주언도 맞장구를 쳤다.
“그래, 아니면 내가 저 애를 데리고 타겠네.”
지찬은 못마땅한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주언은 태녕후(泰寧侯)의 적장자로, 신분이 높은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재능도 출중하여 젊은 나이에 벌써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다. 그는 겉보기엔 성품이 온화했지만, 실은 교만한 구석이 있었다. 그런 그가 소녀를 태우고 가겠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