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흰 도포
곧 발소리가 들리더니,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소명연이 걸어왔다. 그는 흰 도포를 입고 있었는데, 허리춤의 검은 옥 외에 별다른 장식을 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인상이 한층 더 차가워 보였다.
심씨가 매우 분노하여 찻잔을 소명연의 발치로 던지자, 찻잔이 산산조각이 났다.
“이런 불효자 같으니라고! 그렇게 입은 건, 내가 빨리 죽길 바래서냐?”
소명연은 화가 난 어머니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더니, 해명했다.
“어머니, 잊으셨습니까? 소자는 지금 처(妻)의 상중에 있습니다.”
그 말을 하자, 실내가 바로 조용해졌다.
양나라 건국 초기부터 부인이 세상을 떠나면 남편이 1년간 상을 치른다는 규율이 있었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허울만 남았을 뿐, 진정 부인을 위해 일년상을 치르는 남자는 극히 드물었다.
갑자기 시끄러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뒤이어 한 소년이 달려 들어왔다.
열너댓 살 정도의 소년은 수려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소년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한가운데 서 있는 소명연을 보더니 그대로 돌진하여 주먹을 날리고 욕을 하기 시작했다.
“나쁜 놈! 작은 형수를 죽이고, 무슨 면목으로 돌아왔어!”
방으로 뛰어 들어온 소년은 바로 소명연의 어린 동생 소석연(邵惜淵)이었다.
소명연에게 있어 소석연의 공격은 어린아이가 막 걸음마를 배운 것처럼,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까만 눈동자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소명연이 소석연의 손목을 잡았다. 이어 냉담하게 말했다.
“내가 나쁜 놈이든 아니든,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가 완력을 조금 써서 소석연을 밀어내자, 소석연은 비틀거리다가 기둥을 붙잡았다. 이에 심씨의 안색이 바로 변하며 말했다.
“명연, 감히 동생한테 손을 대?”
그녀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석연을 부축하더니 위아래를 살피며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어디 부딪치진 않았니?”
“네!”
소석연은 여전히 고집스러운 얼굴로 소명연을 노려봤다.
소명연은 더는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정안후에게 말했다.
“아버지, 소자 오늘 폐하를 알현하고, 1년간의 장기 휴가를 청하였습니다.”
“1년간 장기 휴가?”
정안후가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정안후의 적장자 소경연은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소명연을 보았다.
지금 소명연의 권세가 대단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니, 이번 기회에 황제 앞에서 잘 보인다면 분명 더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1년의 장기 휴가를 청하다니, 부인의 상을 치르기 위해서인가?’
소경연은 소명연을 보며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구나.”
정안후는 오히려 담담히 이 소식을 받아들였다.
“교씨……”
말을 이어가는 소명연의 차분했던 표정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제 아내 교씨의 관곽(棺槨)은 전쟁에서 죽은 장병들의 관곽과 함께 며칠이 지나면 경성에 들어올 것 같습니다. 소자, 내일 성을 나가 그녀를 맞이하고 싶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나면, 가봉에 가서 장인장모님을 뵙고 사죄하려고 합니다.”
“이미 사람이 죽었는데 사죄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설마 사돈 어르신들이 형님을 죽이기야 하실까.”
소석연은 소명연을 비난하기는 했으나, 그 기세는 수그러들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시근덕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작은 형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데, 그렇게 냉정하게 죽이다니, 정말 용서할 수 없어! 맞아, 흔들리면 안 돼. 절대 용서 못 해!’
소명연은 담담한 눈으로 소석연을 보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들이 원하신다면, 내 목숨도 아깝지 않다.”
그는 말을 마치더니, 정안후와 심씨에게 양해를 구했다.
“아버지, 어머니. 소자 먼저 돌아가서 쉬겠습니다.”
* * *
소명연이 방에서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던 친위 두 명이 다가왔다.
“장군.”
“소지(邵知), 언제부터 관군후부에 묵을 수 있는지, 내일 가서 물어 보거라.”
소명연이 그들 중 한 사람에게 말했다.
소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즉시 대답했다.
“네.”
“소량(邵良), 역도들의 상황을 빨리 조사해서 보고하도록 하라.”
소량이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생사를 같이 한 수하들 앞에서 소명연의 표정은 훨씬 부드러워졌다.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따라올 필요 없으니, 너희들은 가서 술이나 마시도록 해라.”
그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소지와 소량은 소명연을 계속 지켜보다가 그의 그림자가 꽃나무 사이로 사라지고 나서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들 둘은 어려서부터 소명연을 모시며 자란 바였다. 전장에 여러 해 있다 보니, 그들은 이제 모두 5품 무장이 되어, 사람들에게 장군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소량이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후부인 마님은 어찌 그리 우리 장군을 미워하실까? 어렸을 때, 큰 도련님이 말썽을 피워 잘못을 저지르면, 부인은 큰 도련님이 아닌 우리 장군님의 등을 때려 퍼렇게 멍이 들게 했다니까? 약도 후부인이 아닌 우리 어머니가 장군께 발라드렸어.”
“난들 알겠어?”
소지가 고개를 가로젓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열 손가락 깨물어도 아픈 손가락은 따로 있다잖아. 그러니 부모가 편애하는 것도 이해는 가. 그래도 정안후 어르신은 장군을 가장 예뻐하시잖아?”
“하여튼 난 이해가 안 가. 우리 장군님은 모든 방면에서 가장 뛰어나신 분인데. 게다가, 장군님은 모친이 그렇게 대하는 데도 원망조차 하지 않으시니…….”
소량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하하. 후부인이 설마 눈 뜬 장님은 아니겠지?”
소지가 그를 주먹으로 치며 말했다.
“무슨 쓸데없는 소리야? 누가 듣기라도 하면 장군님만 힘들어진다고.”
“자네 말이 맞아. 그래도 다행인 건 관군후부가 수리되면 그곳으로 가면 된다는 거지. 그럼 장군도 이런 수모를 안 당해도 돼.”
그렇게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며 함께 거리로 걸어갔다.
* * *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소명연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뜰 안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니,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는 줄곧 후부 안에서도 앞쪽에 있는 이곳에 살다가, 오랜 기간 전장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어 후부에는 거의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이 정원도 혼인을 준비하면서 손질한 곳으로, 생각해보면 오늘이 두 번째 오는 것이었다.
뜰 안은 예전처럼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는데 정원을 누군가 돌보는 듯했다. 다만 주인이 없어, 조금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소명연은 담 모퉁이로 걸어가 파릇파릇한 박하를 보았다.
보드라운 박하 잎이 청량한 향기를 은은하게 내뿜고 있었다. 이 정도면, 여름이 됐을 때 모기를 쫓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또 걸음을 옮겨 금은화가 화분대에 걸쳐있는 것을 보았다.
이 무렵이면 이미 꽃이 펴서 금색과 흰색의 꽃이 한 꼭지에서 피어나 절대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금은화, 또 다른 말로는 원앙등(鴛鴦藤)이라 불렀다.
소명연은 수수한 연꽃 같은 그 여자를 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녀는 이 적막한 곳에서 이 년간 머물며, 희고 섬세한 손으로 직접 모기를 쫓는 청량한 박하와 열을 내리고 해독을 하는 원앙등을 심었다.
‘걸음을 멈추고 이 원앙등을 보았을 때, 내 아내는 외로움을 느낀 적이 있었을까?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소명연은 손가락으로 가볍게 꽃잎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오랜 세월 동안 무기를 쥐고 있던 그의 거친 손에는 단단한 굳은살이 박여있었다. 그의 거친 손길에 흰 꽃잎은 그대로 떨어지고 말았다.
소명연은 급히 손을 내리고 땅으로 떨어진 꽃잎을 보았다. 그리곤 쓴웃음이 났다.
‘나 같은 사람은 본래 부인을 얻지 말았어야 했어.’
남을 해치고 자신도 해쳤으니 말이다. 부인의 죽음은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다.
소명연은 화분대에 기대어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석양이 지면서 찬란했던 저녁노을은 빛을 잃고, 아무 소리 없이 인간세상과 작별인사를 했다.
사방이 조용해지고, 유충의 낮은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바람이 불자, 박하의 청량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 왔다.
소명연은 손으로 어깨에 떨어진 꽃잎을 털어내고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이 시간이면 서부의 아가씨들은 수업이 끝나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해서 그녀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청송당의 노부인 등씨에게 문안을 드리는 것이었다. 청송당은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오늘은 서예 수업이었지?”
노부인 등씨가 웃는 얼굴로 질문을 던지며 손녀들을 바라보았다.
세 명의 아가씨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처녀는 큰아가씨 여희로 이제 막 16살이 되었다. 계란형 얼굴에 버들잎 모양의 고운 눈썹, 단정하고 고운 자태를 지닌 노부인이 가장 아끼는 손녀였다.
다른 두 명의 아가씨는 둘째 마님인 유씨의 딸로, 노란 옷을 입은 넷째 아가씨 여언(黎嫣)은 여소와 같은 나이였고, 분홍 옷을 입은 여섯째 아가씨 여선(黎嬋)은 겨우 열 살 남짓의 나이였다.
노부인 등씨의 질문에, 가장 나이 어린 여선이 대답했다.
“네, 새로 바뀐 서예 선생은 아주 엄격하세요. 오늘 전 손바닥도 맞았다니깐요.”
그녀는 희고 보드라운 손을 노부인 등씨에게 내보였다. 손바닥에는 정말 빨간 상처가 나 있었다.
노부인 등씨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네가 아직 노력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새로 오신 서예 선생은 향군이 친히 모셔온 분이니, 잘 배우도록 해라. 올해 석가탄신일에는 꼭 위신이 설 수 있도록 말이야.”
현 황제는 도교를 믿고 있었지만, 태후는 불교를 믿고 있어서, 도성 안에서는 사원이나 절 모두 번성하고 있었다.
매년 석가탄신일이 되면, 각 가정의 부녀자들은 연등값과 필사한 불경을 들고 대복사(大福寺)로 가서 관불회(*灌佛會: 석가모니의 탄생을 기념하는 법회) 등의 행사에 참여했다.
대부분의 불경은 부녀자들이 직접 필사하였는데, 언제부터 이런 풍습이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는 각 가문의 아가씨들이 서예 솜씨를 뽐내는 기회가 되곤 했다.
대복사가 있는 산봉우리에는 소영암(疏影庵)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오욕칠정을 버리고 속세를 초월한 대장공주(大長公主)가 살고 있었다. 항렬로 보자면, 그녀는 현 황제의 고모뻘이었다. 매년 석가탄신일이면 대복사의 승려는 서예 솜씨가 뛰어난 불경을 추려 소영암으로 보냈다.
필사한 불경이 대복사 승려의 눈에 들어 대장공주에게 전해지면, 그건 가문의 위신이 서는 일이 되는 것이었다.
“석가탄신일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이제 와서 노력해봤자 늦었다고요.”
여선이 입을 삐죽거렸다.
넷째 아가씨 여언이 여선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그러길래 평소에 열심히 하랬지!”
여선이 히죽 웃으며 옆으로 숨었다.
“여하튼, 난 있으나마나잖아. 큰언니랑 둘째 언니도 있는데 뭐.”
여선이 말하는 ‘큰언니’는 여희(黎姬)였고, ‘둘째 언니’는 동부의 아가씨 여교(黎嬌)였다.
동부(東府)에는 두 명의 아가씨가 있었는데, 둘째 아가씨 여교는 본처 소생으로 향군이라 불리는 강씨가 가장 아끼는 손녀였다.
서부의 아가씨들은 동부가 개설한 여학에 가서 이 아가씨를 모시고 공부를 하는 셈이었다. 다섯째 아가씨 여주(黎姝)는 서출이라 더 말할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