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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0

80화 등산

'갑자기 무슨···.'

6대대 대장 차르티엔은 자신을 가리키는 금색 봉에 눈을 구겼다.

금색 봉을 든 놈은 갈라하드였다. 놈은 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들켰나?'

차르티엔의 눈썹이 작게 구겨졌다.

아니, 흔적은 남기지 않았다. 대공의 시선 때문에 관련된 건 최소로 줄였다.

대공이 갑자기 회의를 소집한 것부터 이상했다.

'헬오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군. 그런데 나를 왜 지목한 거지?'

차르티엔은 갈라하드를 노려봤다. 갈라하드는 여전히 뜻모를 표정이었다.

증거는 없을 것이다. 차르티엔은 표정을 굳히며 시선을 흘렸다.

대공은 상석에서 가만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 말실수를 살짝이라도 했다가는 목이 뽑히는 걸, 차르티엔은 알고 있었다.

차르티엔은 표정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헬오브는 신병 놀리기용으로 쓰는 이야기 아닌가? 거기에 뭐가 있다는 거지?"

"오, 그런 식으로 나오는군. 제법일세."

갈라하드의 모호한 대답이 차르티엔의 심기를 긁었다.

조금이라도 물러나는 순간 끝이었다. 차르티엔은 놈의 금색 봉을 잡았다. 서늘한 촉감이 손을 타고 넘어왔다.

"똑바로 말해라. 대공 전하의 인정을 받았다고 자만하나 본데. 나는 북부의 대장이다. 함부로 찔러볼 대상이 아니다."

다른 대장들 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갈라하드에게 좋은 감정을 지닌 대장은 몇 없었다. 반대로 차르티엔은 꾸준히 대장들과 교류했다.

둘 중 누구에게 무게가 쏠릴지는 명백했다.

증거가 있으면 또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놈에게 증거가 있을 리 없었다.

회의장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긴장감이 가득 차올랐다.

"그렇군, 내가 오해했나?"

갈라하드의 금색 봉이 슬쩍 물러났다.

꼬리를 마는 놈에 차르티엔은 입꼬리를 올리며 금색 봉을 굳게 잡았다. 승기를 굳힐 셈이었다.

"자세한 경위를 말해라. 헬오브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왜 나를 지목한 것이고-."

놈이 헬오브 아래에 들어갔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들어갔다면 저렇게 살아있을 수 없겠지.

그때-.

"마족의 도시가 있었다네. 지배자라 불리는 고위 마족도 있더군. 이게 놈이 아끼던 금색 봉일세. 이쁘지 않나?"

갈라하드가 금색 봉을 흔들었다. 금색 봉-. 차르티엔의 눈이 움직였다.

지배자-? 차르티엔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지배자의 지휘봉에 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배자를 죽였다고? 놈이? 마법사가? 어떻게?

수많은 의문이 떠올랐다.

'그럴 리가 없다.'

떠보는 게 분명했다. 이 정도에 넘어갈 정도로 차르티엔은 얕지 않았다.

그때, 목덜미에서 서늘함이 느껴졌다.

'무슨···?'

고개를 돌린 차르티엔은 그대로 굳었다.

대공이 차르티엔의 바로 뒤에 있었기에-.

*

갈라하드가 6대대 대장을 지목한 건 몇 가지 근거에 의한 것이었다.

가령 헬오브는 6대대와 3대대 그리고 5대대가 번갈아 가며 도는 곳인데, 최근 6대대에서 그 순찰을 자발적으로 나섰다는 것.

그런데도 별다른 보고가 없었다는 것과 헬오브 이야기를 꺼냈을 때, 순간적으로 호흡이 엉켰다는 것-. 꽤 다양한 근거가 있었지만, 다소 부족했다.

그에 가볍게 떠볼 생각이었다. 회유의 기본이었다.

이제는 의미가 없어졌지만.

촤아아악-.

거칠게 뿌려지는 피에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반투명한 방호벽이 생겼다. 방호벽이 가득 붉어졌다.

갈라하드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대공이 머리를 뽑는 건 마족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대공은 인간의 머리도 뽑았다. 그것도 아주 잘 뽑았다. 머리 뽑기 전문가였다.

머리를 잃은 몸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대장들의 시선이 대공에게 향했다. 대장들의 얼굴이 다양했지만, 그중 두려움은 없었다.

인간의 머리가 산 채로 뽑히는 게, 북부에서는 대수로운 일이 아닌 듯했다.

대공이 뽑은 머리를 갈라하드 앞에 내려놨다. 길게 내려온 혀가 달랑거렸다. 뜨거운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심장이 뛰더군. 쫓기는 사냥감처럼."

대공의 입꼬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여기 모인 이들은 대장들이었다. 고작 신병 놀리는 목적인 헬오브에 심장이 빨리 뛸 리 없었다.

제법 그럴듯한 근거였다.

'아무리 그래도 심장이 빨리 뛰었다는 이유로 머리를 뽑다니-.'

애초에 심장 소리를 듣는 것부터 어이가 없었다.

'심장도 조심해야겠군.'

갈라하드는 덩그러니 놓인 차르티엔의 머리를 보며 숨을 골랐다.

머리를 뽑는다. 대공이 할법한 처벌이었다. 차르티엔은 이제 대장들에게 훌륭한 본보기로 기억될 것이다.

다만-.

'일부러 막은 건가.'

차르티엔을 회유했다면, 더 알아냈을 수도 있었다. 그를 대공이 깔끔한 뽑기로 닫았다.

대공은 가만히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얼굴에 뚝뚝 흐르는 피에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재밌군.'

갈라하드는 금색 봉을 매만졌다.

촉감이 제법 좋아서 마음이 편해졌다.

****

'시시하게 끝났군.'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며 중얼거렸다.

차르티엔이 관공이 되고, 회의가 빠르게 진행됐다.

대공은 6대대 부대장을 대장으로 올렸다. 이어서 2대대와 아드리안나의 직속 부대, 6대대를 헬오브로 보냈다.

경과를 보고 다시 소집하겠다며 회의는 끝났다.

백에 달하는 무장한 인원이 움직이는 모습은 꽤 장관이었다.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길버튼이 못생긴 얼굴로 물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어차피 아무것도 안 나올 테니까."

"예? 그 큰 도시에서 말입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저번에도 말했지만, 마족한테 가서 물어보게나."

"······예?"

갈라하드는 대답 대신 연초를 털었다.

차르티엔을 심문하지 못한 건 아쉽지만, 앓던 이는 뺀 셈이었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빠졌다.

아무튼, 대장 중 의심스러운 놈을 처리했다.

더불어 저런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으니, 놈들도 도시를 옮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놈들에게 꽤 큰 피해일 것이다.

지배자를 못 잡은 게 아쉽지만-.

'한 번에 다 먹을 수는 없지.'

욕심을 부리면, 필연적으로 탈이 나는 법이었다.

이 정도면 제법 잘 풀렸다고 볼 수 있었다.

"아드리안나님이 길을 아셔서 다행입니다."

"멍청한 길버튼 경."

"예? 오늘 좀 까칠하십니다? 아, 그것 때문에 그러십니까?"

길버튼이 히죽 웃었다.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본래였다면 갈라하드도 저들과 함께 헬오브로 갔을 것이다.

아드리안나도 그를 주장했다. 갈라하드 대장이 발견했으니, 갈라하드 대장의 인솔이 필요하다는 합당한 주장이었다.

갈라하드의 계획도 그쪽이었다.

그런데 대공이 그를 거절했다.

그래, 거절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특무대 대장은 나와 같이 사냥을 간다.]

사냥. 참으로 묘한 단어였다. 짐승을 잡는다는 의미였지만, 대공이 고작 짐승 잡겠다고 움직일 리가 없었다.

"뭐 그냥 사냥 아닙니까. 괜찮을 겁니다."

"길버튼 경."

"예?"

"자네도 같이 가지."

"에이, 저도 그러고 싶지만, 전하께서 대장과 단둘이 가신다고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길버튼의 음흉한 웃음에 갈라하드는 얼굴을 가득 구겼다.

"대공 전하랑 돈독해질 기회 아닙니까."

"그렇지."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둘이라는 게 조금··· 아니, 상당히 마음에 걸렸지만, 좋은 기회였다.

협약이나, 차르티엔을 뽑은 이유 등···, 물어볼 게 많았다.

"전에 대공이 다른 이와 사냥을 나간 적 있나?"

"예. 제가 알기로는 두 번 있습니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군. 갈라하드는 작게 안도했다.

"누구였지?"

"아, 전임 5대대 대장이랑 전임 참모부장일 겁니다."

"······둘 다 전임이군?"

참 대단한 우연일세. 중얼거리는 순간, 길버튼이 설명을 덧붙였다.

"예, 사냥을 나갔다가 실종됐습니다."

"실종?"

"아. 별거 아닙니다. 대공 전하와 산에 오른 후로 모습이 안 보였답니다."

"참 별거 아니군."

갈라하드는 괜히 목을 매만졌다.

"예, 뭐 실종이니까요. 아, 대공 전하가 사냥을 나가시는 곳이 마물의 무덤이라서 그럴 겁니다."

"마물의 무덤?"

"예, 북부에서 가장 큰 산인데, 영역으로 돌아가지 못한 마물이 모인 곳입니다."

길버튼의 설명에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8대대가 담당 중인데, 올라가지는 않고 내려오는 마물만 처리합니다. 이상한 기운이 흐른다나-?"

"이런 아무래도 안 되겠어. 대공 전하에게 부탁해야겠군."

"뭐를 말입니까?"

"길버튼 경을 데리고 가자고."

"···예?"

그때, 익숙한 인물이 다가왔다. 테오도르였다.

"농담일세."

갈라하드는 작게 기침하며 앞으로 나섰다.

"아, 실종되시면 안 됩니다. 혹시라도 위험하시면 부르십쇼. 달려가겠습니다."

길버튼의 목소리가 상당히 진지했다. 칼자루를 굳게 쥐고 있었다. 상대가 대공이라는 걸 잊은 듯했다.

"부르면 올 수는 있나?"

"아하. 크게 부르십쇼."

"참 현명한 방법이군."

길버튼이 낄낄 웃었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연초를 껐다.

"데미안 오러나 제때 먹이게."

"예, 걱정하지 마십쇼."

슬쩍 손을 흔들고 테오도르에게 향했다.

"이쪽입니다."

마족의 도시에 들어갈 때보다 걸음이 무거웠다.

*

대공의 얼굴은 험악했다.

아니, 험악하다는 표현은 다소 부족했다. 대공의 얼굴은 과하게 험악했다.

얼굴 곳곳에 꼼꼼히 새겨진 흉터부터, 호랑이와 비슷한 눈과 굵직한 턱은 뜯어먹기에 최적화된 형태였다.

고위 마물이 굴에서 마늘을 오십일 먹으면, 아마 저런 형태가 되지 않을까.

그런 대공과 단둘이 사냥을 나가야 한다는 건, 갈라하드에게도 꽤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가지."

맹수의 으르렁거림과 비슷한 목소리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은 수행원 하나 없이 움직였다. 등에 멘 거대한 도끼가 전부였다.

'챙겨오기를 잘했군.'

갈라하드는 두꺼운 가죽 가방을 잡으며 중얼거렸다.

사냥을 나간다는 말에 톰이 바삐 챙겨준 가방이었다. 톰이 챙겨준 가방이니 필요한 건 다 있을 것이다.

'돌아가면 길버튼 경의 봉급을 줄이고 톰에게 줘야겠어.'

갈라하드는 농담을 중얼거리며 끄덕였다. 어차피 물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공이 향한 곳은 거대한 설산이었다. 하늘에 닿을 것처럼 뾰족한 설산인데, 앙상한 가지에 눈이 여기저기 쌓여 안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 주변 곳곳에 망루가 있었다. 다른 대대보다 그 밀집도가 빽빽했다.

병사들과 8대대 대장이 마중 나와 있었다. 중무장한 이들이 힘찬 경례를 올렸다. 8대대 대장이 달려와서 대공을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8대대 대장이 고개를 깊게 숙였지만, 대공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걸음을 옮겼다.

무시가 익숙한지 8대대 대장은 주변에 손짓했다. 병사들이 바쁘게 움직이면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열었다.

몇 겹으로 세워져 있던 뾰족한 나무 바리게이트가 옆으로 비켰다. 바리게이트 위에 묻은 살점과 핏자국이 시선을 끌었다.

대공은 열린 길을 거침없이 나아갔다. 갈라하드는 코트를 여미며 대공을 따랐다.

산세가 상당히 험했다. 무엇보다 길이 없었다. 새하얀 눈으로 가득하여 어디가 어딘지 구분도 되지 않았다.

대공은 말없이 계속 걸었다.

"멋진 산입니다."

대답은 없었다. 그에 갈라하드도 입을 닫고 따라가는 것에 집중했다.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하여 걸음 수와 방향을 기억했다.

그나마 금색 봉이 있어서 편했다. 역시 등산용이 분명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대공의 걸음이 처음으로 멈췄다. 대공이 등에 멘 도끼를 잡았다. 스르릉-. 서늘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도끼가 가벼이 움직였다.

저 큰 도끼를 어떻게 한 손으로 들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대공이 도끼를 위로 들었다. 던지기 전의 자세였다. 근육의 비명이 들렸다. 대공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입김이 길게 뿜어졌다.

꿀꺽-. 갈라하드는 마른침을 삼키며 손을 풀었다. 두근두근! 고통의 알이 연신 비명을 질렀다. 마치 사냥꾼을 마주한 사냥감처럼-.

그 순간, 대공의 손이 움직였다. 거대한 도끼가 순식간에 날아갔다. 공기가 찢기는 소리가 비명처럼 음산했다.

도끼가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퍼억-. 조금 떨어진 곳에서 뭉툭한 소리가 들렸다.

"잡았군."

대공이 도끼가 사라진 방향으로 향했다.

'괴물이군.'

갈라하드는 방금 봤던 도끼를 떠올렸다.

그건 폭력이었다. 압도적인 폭력-.

오러가 없이 저런 게 가능한지 의문이었다.

갈라하드는 마른침을 삼키며 대공을 따라 움직였다. 대공은 한참이나 들어갔다.

끝에 거대한 마물이 있었다. 마물의 얼굴은 파충류였다. 팔에는 털 대신에 갑각이 가득 올라와 있었고, 허리부터는 회색 털이 빼곡했다.

마물이 고통스럽다는 듯 비명을 길게 터뜨렸다. 놈의 목덜미에 도끼가 박혀 있었다.

놈이 거칠게 발버둥쳤다. 그 손길에 나무가 부서지고 땅이 뒤집어졌다. 피가 길게 뿌려졌다. 하얀 눈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대공은 느긋하게 다가갔다. 정말 사냥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마물 사냥이라니-.'

마물에게 다가간 대공이 도끼를 잡았다. 마물이 거칠게 비명을 질렀다.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지만, 대공은 눈을 감지 않았다. 이어서 주먹으로 도끼의 자루를 내리쳤다.

콰앙! 주먹에 어울리지 않는 굉음이 터졌다. 도끼가 마물의 목덜미로 사라졌다.

콰앙! 도끼 자루가 더 깊이 들어갔다.

콰앙! 우직. 묵직한 소리와 함께 마물의 고개가 툭- 꺾였다.

콰앙! 마물의 머리가 그대로 바닥을 뒹굴었다.

경사를 따라서 구른 마물의 머리가 갈라하드 앞에서 멈췄다.

마물의 얼굴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마물에게 어울리지 않는 두려움이 가득 보였다.

'음.'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두꺼운 발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대공이 갈라하드 앞에 있었다. 대공이 마물의 머리를 챙겼다.

"마물은."

대공의 손에 마물의 머리가 달랑거렸다. 깔끔히 잘린 단면에서 피가 길게 흘렀다.

마물의 입이 쩍 벌어졌다. 마물의 벌어진 입이 속삭이는 듯했다. 도망치라고- 이놈은 마물 잡는 괴물이라고-.

"머리가 제일이다."

아그작. 살벌한 소리가 귀를 괴롭혔다. 뭔가를 씹는 소리가 저리 살벌할 수 있다니-.

대공이 잇자국이 새겨진 살점을 들이밀었다.

"먹겠나?"

유치한 협박이었다. 아니, 협박이 맞나? 정말 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권하는 거였군.'

대공의 눈빛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식사하고 와서 말입니다."

"제국 놈이군."

대공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물의 머리가 성큼성큼 사라졌다.

그때, 뚝뚝 떨어지는 피에 시선이 닿았다.

"아, 피는 안 드십니까?"

대공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네놈은 피를 좋아하지."

대공이 품에서 뭔가 꺼냈다. 예의 그 잔이었다.

잔은 금방 찰랑거렸다.

갈라하드는 잔을 받아서 홀짝였다. 대공은 살을 뜯었고-.

'제법 궁합이 좋군.'

갈라하드는 속으로 농담을 중얼거렸다.

분위기가 조금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한 잔 더 주시죠."

갈라하드는 다 마신 잔을 내밀었다. 대공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눈썹으로 표현하는 건 아드리안나와 같군.'

갈라하드는 작게 안심했다.

그래, 마음에 안 들었으면, 진작 뽑았을 것이다. 굳이 여기에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는 조용하다. 마물이 쥐와 새를 전부 먹었기에."

대공이 채운 잔을 내밀며 말했다.

'듣는 귀가 없다는 거군.'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즉, 대공의 성에는 듣는 귀가 있다는 뜻이었다.

"쥐나 새는 직접 잡아도 되지 않습니까? 잘 잡으실 것 같습니다만."

"때가 아니다."

언젠가는 잡겠다는 소리였다. 갈라하드는 잔을 홀짝였다.

잠시 분위기를 살폈다. 그 거대한 마물의 머리가 반쯤 사라져있었다.

"어디에서 온 쥐입니까?"

대공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눈이 붉었다. 마물의 피였다.

"구린 것들은 모두 제국에서 온다."

대공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뾰족하고 굵직한 송곳니에서 살점이 툭- 하고 떨어졌다.

'구린 것?'

의미 없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그에 더 물으려는 순간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섯 마리 더 잡을 것이다."

한 마리에 질문 하나라는 건가.

참으로 괴상한 문답이었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움직이려는 순간-.

빼애애액. 낯익은 울음이 들렸다. 그에 고개를 드니, 하늘에 거대한 흰색 매가 있었다.

아드리안나의 매였다.

"음."

대공이 침음성을 흘렸다. 대공의 눈썹이 올라가 있었다.

대공이 아드리안나를 아끼는 건 갈라하드도 알고 있었다.

그 대공이 고작 매를 본 것 만으로 저리 반응하다니-.

'딸바보군.'

대공의 새로운 면모를 본 듯했다.

"아드리안나 대장이 보고를 올린 듯합니다. 이제 막 도착했을 것인데, 바로 보고를 올리다니-. 아드리안나 대장이 급했나 봅니다."

갈라하드는 대공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아부했다.

"음."

대공이 다시 침음성을 흘렸다. 아닌 척했지만, 그 눈썹이 살짝 더 올라갔다. 공략할 부분을 알아낸 듯했다.

"아드리안나 대장이 부끄러움이 많아서 아닌 척하지만, 제 앞에서는 대공 전하 이야기를 어찌나 많이 하던지-. 참. 이거 비밀이라 그랬는데. 아이고-. 비밀입니다."

대공의 눈썹이 조금 더 올라갔다.

'이거였군.'

아부를 이어가던 갈라하드의 입이 멈췄다.

아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오른쪽 어깨에서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기에-.

갈라하드는 처음으로 목이 무겁다고 느꼈다. 굳은 목을 필사적으로 돌렸다.

거기에 있어서 안 될 게 떡 하니 있었다.

흰 매가 주둥이로 갈라하드의 볼을 툭툭 치며 발을 내밀었다.

빨리 가져가라는 듯-.

"하하, 이놈. 사람 잘못 봤다! 저기 대공 전하에게 가야지!"

야속한 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공이 도끼를 들었다.

방긋 웃는 차르티엔이 언뜻 보였다.

81화 사냥

'걱정이라도 있으신가-.'

루시엔느는 하늘을 올려보는 아드리안나를 살폈다.

아드리안나는 늘 그렇듯 무표정이었지만, 묘한 불편함이 보였다.

"걱정거리라도 있으십니까?"

아드리안나의 시선이 루시엔느에게 향했다. 푸른 눈동자의 초점이 천천히 돌아왔다.

"마족의 도시 때문에 그렇습니까? 조사하고 있으니 결과가 금방 올라올 겁니다."

루시엔느는 뒤의 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도시의 안쪽은 무너져 있었다.

아드리안나가 틈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갈라하드 대장의 보고가 거짓이 될 뻔했다.

그 틈으로 아래를 조사하기 위해 2대대 대장이 병력을 이끌고 출발했다. 금방 결과가 나올 것이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예?"

"이미 옮겼을 거라고 했다. 헛짓거리라더군."

"······누가 그런 망발을 했습니까?"

루시엔느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공의 명령으로 백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이 움직였다. 2대대 대장과 아드리안나까지 움직였는데, 헛짓거리라니-.

대공의 명령에 그런 망발을 할 정도로 정신이 나간 이는 많지 않았다.

"갈라하드 대장이 도시를 옮겼을 것이라고. 그러니까 헛짓거리 말고 같이 사이좋게 등산이나 하자더군."

아드리안나의 말에 루시엔느는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그에 루시엔느는 눈을 찡그렸다.

"주제를 넘는군요. 감히-."

"괜찮다."

"···네?"

"헛짓거리가 맞았으니."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다시 돌렸다. 하늘을 올려봤다. 기다란 금발이 나풀거렸다.

루시엔느는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같은 여인이 봐도 적응이 안 되는 얼굴이었다.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엔느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마족이 사라질 것까지 예상했다고-?

그때, 아드리안나가 루시엔느를 응시했다.

"루시엔느, 너는 요리를 잘했지."

뜬금없는 칭찬이었다. 루시엔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종이랑 펜도 들고 다니지?"

"예, 보고를 올려야 하니까요."

"장부도 쓰느냐?"

"장부를 왜 씁니까?"

"안 쓰는구나. 그래도 전투는 곧잘 하니까. 동점이다."

"······네?"

"마물의 가죽으로 코트를 만드는 건?"

평소에도 속을 알 수 없는 아드리안나였지만, 요즘 들어 더 알기 힘들었다.

갑자기 마물 코트라니-.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지만, 루시엔느는 왠지 모르게 못 한다고 대답하기 싫었다.

"하면 하죠."

"그렇구나."

루시엔느는 문득 아까 아드리안나가 매를 날렸던 게 떠올랐다.

"보고는 올리셨습니까?"

"아, 전해줄 것이다."

****

고위 마물-. 아니, 대공이 갈라하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손에 들린 거대한 도끼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오른쪽 어깨에 앉은 매는 갈라하드의 속도 모르고 발로 갈라하드를 툭툭- 쳤다.

빨리 펼쳐 보라고 독촉했다.

'나한테 보낸 거였군.'

뚝. 도끼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대공은 그저 가만히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딸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습니까? 키워봤자-. 음."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리며 편지를 풀었다.

[안녕하세요. 1대대 대장 아드리안나입니다. 헬오브에 도착했습니다. 지반을 무너뜨려 흔적이 없습니다. 갈라하드 대장이 말한 것처럼 '헛짓거리'가 됐습니다. 갈라하드 대장의 부탁대로 마물의 무덤을 같이 갈 걸 그랬습니다. 아. 대공 전하에게 보고 부탁드립니다. 1대대 대장 아드리안나.]

'보여줄 수는 없겠군.'

헛짓거리 아래에 길게 그어진 줄이 너무 선명했다.

아드리안나를 데려오기 위해서 선택한 어휘인데, 아드리안나에게 제법 재밌게 들린 듯했다.

편지에서 고개를 드니, 대공이 갈라하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갈라하드는 편지를 안쪽 주머니 깊숙이 챙겼다.

"아드리안나 대장이 대공 전하와 등산을 같이 못 가서 아쉽답니다. 다음에는 꼭 같이 가고 싶다더군요."

아드리안나의 이야기인데, 대공의 눈썹이 올라가지 않고 내려갔다.

'아드리안나가 산에 오는 걸 싫어하는군.'

아비된 입장으로서 이런 마물 가득한 산에 딸을 부르고 싶지 않은 건 당연했다.

다만, 그렇다기에 아드리안나는 전선에 배치된 상태였다.

다른 의미가 있는 게 분명했다.

'여기는 제국의 눈이 안 닿는 곳이라고 했지.'

더불어 실종된 인물까지-. 뭔가 더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드리안나 대장이 이런 험한 곳에 오게 둘 수 없죠. 제가 안 된다고 못 박았습니다."

대공의 입꼬리 한쪽이 올라갔다. 그 사이로 서늘한 송곳니가 보였다.

웃는 건지, 목덜미를 뜯어먹으려고 준비하는 건지 모호했다.

"아, 마족 도시는 무너진 상태랍니다. 안을 조사해본다고는 하는데, 뭔가 나올 가능성은 현저히 적습니다."

"확신하는군."

"예, 들켰으니 도망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마족에 대해 잘 아나?"

"꽤 압니다. 적을 알아야 이기니까요."

대공이 도끼를 돌렸다. 붉은 피가 튀었다.

"이번에는 네 차례다."

서로 번갈아 가면서 사냥하는 듯했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가락을 튕겼다.

마나 화살이 빙글- 돌았다. 마나 화살의 크기로 농도를 파악했다.

밖보다 농도가 높지만, 마경만큼은 아니었다. 마족의 영역과 마경 사이의 농도였다.

갈라하드는 마나를 움직여 슬쩍 대공을 건드렸다. 마나가 어느 정도 통할지 파악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나가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괴물이군.'

아드리안나가 마나를 불태운다면, 대공은 피부 자체가 단단한 느낌이었다. 마물 코트를 몇 겹으로 겹쳐서 입은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호기심이 든 갈라하드는 마나를 더 압축해서 찔렀다.

그때, 대공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눈치챘나?'

아주 적은 마나였다. 마법사가 아닌 이상 눈치챌 리가 없었다. 갈라하드는 슬쩍 마나를 더 넣었다.

"무슨 짓이지?"

'들켰군.'

단순히 피부가 두꺼운 게 전부가 아닌 듯했다.

"아, 마물인 줄 알았습니다."

갈라하드는 슬쩍 마나를 돌렸다.

설산은 넓었다. 칼바람이 머리를 간질였다. 갈라하드는 집중을 유지하며 탐지 마법을 길게 뿌렸다.

마나 화살을 개량한 탐지 마법이 빠르게 흩어지며 주변을 훑었다. 마물이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많군.'

길버튼의 설명처럼 곳곳에 마물이 있었다. 그중에는 무리를 지은 놈들도 있었다.

마물의 무덤이 아니라 마물의 숲이었다. 갈라하드는 마물을 꼼꼼하게 살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큰 놈을 찾았다.

'이놈이다.'

표적을 고른 갈라하드는 마나를 회수한 뒤에 다시 뿌렸다. 그 방향에 집중하여 마나를 뿌렸다. 놈의 형체를 파악했다.

거기까지 확인한 갈라하드는 마법을 골랐다. 삐쩍 마른 나무가 울창한 설산이었다. 이런 환경에 어울리는 마법은 역시-.

'얼어붙은 창.'

갈라하드의 위로 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그 순도가 얼마나 높은지 안에 거품조차 없었다.

갈라하드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마나를 날카롭게 벼렸다.

이어서 표적에 집중했다.

마물이 적당한 곳으로 움직였고-.

'지금.'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창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작은 바람이 분 게 전부였다.

멀리서 마물의 울음이 들렸다. 비명이 아닌 분노에 찬 소리였다.

"약했군. 마법쟁이다워."

"그렇습니까?"

갈라하드는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반문했다. 그에 대공이 눈을 찡그렸다.

그때, 마물의 울음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분노한 마물이 미친 듯이 달려왔다. 땅이 거칠게 흔들렸다.

갈라하드는 그 진동으로 거리를 가늠했다. 이어서 손가락을 튕겼다.

얼음 창이 떠올랐다. 서늘한 창이 잠시 기다렸다가 쏘아졌다.

······!!

마물의 울음소리가 전보다 가까웠다.

'월척이군.'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고, 손가락을 튕겼다.

얼음 창이 다시 떠올랐다. 이번에는 그 크기가 전보다 두 배는 컸다. 마나를 가득 넣은 까닭이었다.

그때, 앞의 앙상한 나무가 거칠게 부서졌다. 나무 파편과 눈이 튀었다. 그 사이로 마물이 뛰쳐나왔다.

늑대 형태의 마물이었다. 그 크기가 대공이 잡았던 것보다 더 컸다.

마물의 목덜미와 왼쪽 어깨에 얼음 창이 꽂혀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상처가 더 벌어졌다. 그 사이로 얼음 성에가 뿌려졌다.

이내 앞발이 그대로 덜렁거리며 마물이 휘청였다.

맹수였다면 이쯤에서 돌아갔겠지만, 놈은 마물이었다. 마물인 놈은 오히려 주둥이를 쩍 벌렸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주둥이에 대공이 도끼를 빙글- 돌렸다.

"제 겁니다."

갈라하드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손가락을 튕겼다.

하! 대공의 나지막한 웃음이 들렸다.

쩍 벌린 아가리를 향해 창이 날아갔다. 저항없이 들어간 창이 주둥이 안쪽에 깊이 박혔다.

마족의 피에는 농도 짙은 마나가 흘렀다. 마나는 농도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른다. 마족이 마법사의 천적인 이유였다.

그 말은 반대로도 적용된다. 가령 마물보다 높은 농도의 마나의 마법을 쓰면-.

'마물의 피가 연료가 되지.'

마물의 주둥이에 박힌 창이 들썩였다. 마물의 피에 얼음이 붉게 물들었다. 마물의 피가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뾰족해졌다.

떨어지는 피가 결정이 되어 그 크기를 부풀렸다. 마치 불에 기름을 뿌린 것처럼, 얼음 결정이 연달아 뾰족해졌다.

그렇게 크기를 부풀린 결정이 마물의 가죽을 뚫고 나왔다. 마치 안에서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화려했다.

마물은 아주 멋들어진 얼음 송이가 됐다.

'훌륭하군.'

갈라하드는 감탄하며 대공을 돌아봤다.

완벽하게 깔끔한 사냥이었다.

대공의 반응은-.

"번잡하군."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이런 예술 작품을 보고 번잡하다니-. 길버튼보다 더했다.

'무식한 북부인이니까.'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이 놀라운 마법 사냥을 어떻게 설명할지 잠시 고민했다.

"마나는 농도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릅니다. 아, 농도라는 게 무슨 뜻이냐면-."

뿌드득. 살벌한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대공이 손으로 마물의 머리를 뽑는 중이었다.

'전혀 듣지 않았군.'

애초에 북부인에게 마법을 설명하려 한 게 문제였다.

대공이 거대한 마물의 머리를 큼지막하게 한 입 씹었다. 살벌한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시원하군. 별미야."

아이스크림을 먹은 건지 헷갈리는 감상평이었다.

이번에는 대공이 질문했다.

"아드리안나를 어떻게 생각하지?"

대공의 도끼가 천천히 움직였다.

'번갈아 가면서였군.'

서로 한 마리씩 잡고 질문하고. 대충 그런 규칙인 듯했다.

'아드리안나를 어떻게 생각하냐-.'

잠시 고민했다. 마족의 왕을 찌를 검이라고 대답하는 건 좋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웃는 게 이쁜 여인입니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이 눈을 찡그렸다. 자세히 보니 웃는 것 같기도 했다.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갈라하드는 대공과의 거리를 재면서 손을 풀었다. 직업병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군."

대공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순간 눈을 찡그렸다.

심장이라니-. 갈라하드에게는 민감한 부분이었다.

다만, 대공은 추궁 대신 잔을 내밀었다. 마물의 피가 가득 찬 잔이었다.

"하하, 떨려서 말입니다."

갈라하드는 공손하게 잔을 받아서, 입에 털어 넣었다.

"시원하군요."

마물의 피는 끔찍하게 맛없는데, 얼려서 시원하게 마시니 그나마 괜찮은 듯했다.

"네 마리 남았다."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대공의 도끼가 눈에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빠르게 사라졌다.

쾅쾅! 그 사이에 있던 앙상한 나무들이 가벼이 부서졌다. 도끼의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다.

·········!

멀리서 끔찍한 비명이 터졌다.

갈라하드는 슬쩍 목을 매만졌다. 아직 붙어 있었다. 작게 안도하며 대공을 따라갔다.

바닥에 엎어진 마물이 거칠게 발버둥 쳤다. 발이 네 개 달린 놈이었다. 다리 하나하나에 뾰족한 날이 달려 있었는데, 얼마나 예리한지 바닥이 긁혔다.

대공은 아무렇지도 않게 마물에게 다가갔다. 마물이 대공에게 발을 휘둘렀다. 그를 대공이 맨손으로 잡았고-. 그대로 뽑았다.

·········!

마물이 다시금 비명을 터뜨렸다. 뽑힌 다리 사이로 피가 뿌려졌다. 그 뼈가 달랑거렸다.

대공의 마물 해체 쇼가 시작됐다. 꾸득. 살벌한 소리가 연신 터졌다.

'마물이 불쌍한 건 처음이군.'

갈라하드는 수통을 홀짝였다.

그때, 대공이 마물의 머리를 잡고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마물은 머리를 자르면 죽는다."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군요. 몰랐습니다."

아그작. 살벌한 식사 소리가 들렸다.

갈라하드는 얌전히 기다렸다. 대공이 잔에 피를 채워서 건넸다. 갈라하드는 거절하지 않고 잔을 가벼이 비웠다.

대공이 마물의 머리를 크게 씹으며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질문하라는 건가.'

갈라하드는 생각을 정리했다.

다음으로 궁금한 건 역시 협약이었다.

황제가 협약으로 실력자들을 묶고 있다는 것이 갈라하드의 예상이었다. 그것부터 물어볼 생각이었지만-.

'그건 좀 아쉽지.'

갈라하드는 협약이라는 단어에 집중했다.

협약이라는 건, 양측에서 건 조건이 있다는 것이었다. 황제도 뭔가를 약속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황제가 협약으로 대공 전하를 묶은 대가로 뭘 줍니까?"

갈라하드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대공의 폭력적인 눈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대공의 맹수처럼 뾰족한 송곳니 사이로 부서진 뼈가 떨어졌다.

어쩐지 먹는 소리가 살벌하더니, 뼈까지 먹고 있었다. 칼슘 부족할 일은 없을 듯했다.

"질문은 하나씩이다."

대공이 뼈로 이 사이를 쑤시며 말했다. 살벌한 이쑤시개였다.

'안 넘어오는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완전 길버튼은 아닌 듯했다.

다만, 대답하지 않는 것조차 대답이었다.

'협약은 맞군.'

갈라하드는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직감했다.

"아, 질문이 길었군요. 황제가 협약의 대가로 뭘 줍니까?"

대공의 눈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갈라하드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한다."

대공의 대답에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것도 안 한다-.'

단순한 말이었지만, 동시에 깊은 의미를 지닌 대답이었다.

황제는 갈라하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황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황제는 그 자리에 오른 뒤로 공식적으로 모습을 한 번도 드러낸 적 없었다. 황녀를 보좌했던 갈라하드도 본 적 없을 정도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북부 정벌을 안 한다는 건가?'

확실히 예전 기록보다 제국은 소극적이었다. 다만, 갈라하드가 정보국에서 처리한 일들은 전부 제국을 위한 거였다.

황제가 가만히 있다고 한들, 제국은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었다. 아드리안나의 남편으로 정해진 갈라하드가 그 증거였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한다니-?

'황제에 국한된 것인가? 황제가 움직이지 않는 게 그렇게 큰 의미라는 건가.'

그때-.

파삭, 경쾌한 소리와 함께 부서진 뼛조각이 바닥으로 뿌려졌다. 대공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세 마리 남았다."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규칙은 간단했다.

대공이 마물을 잡으면 갈라하드가 질문, 갈라하드가 마물을 잡으면 대공이 질문하는 거였다.

기회는 세 번밖에 남지 않았다.

규칙대로 흘러가면, 갈라하드의 질문은 한 번 남았다.

최소한 두 개는 있어야 했다-.

'아니, 세 개 전부 내 것이다.'

갈라하드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때, 대공의 도끼가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도끼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가 제법 살벌했다.

그를 보고 있으니, 그럴듯한 방법이 떠올랐다.

"그거 아십니까?"

대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시선이 쿡쿡 찔렀다.

괜히 목이 간지럽고 등이 따끔거렸다.

갈라하드는 심호흡하며 심장 박동을 유지했다.

그리고 대공을 보며-.

"제가 잡은 마물이 더 큽니다."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피로 범벅이 된 대공의 눈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갈라하드는 잠시 대공을 살폈다.

대공의 얼굴이 구겨져 있었다.

도발이 성공한 듯했다.

그다음은-.

"내기 한 번 하시죠. 딱 세 번 남았는데."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탁 튕겼다. 연초에 불이 작게 붙었다.

"이긴 사람이 전부 갖기로."

레몬 향이 가득 풍겼다.

"좋군."

대공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82화 따끔

"내기라."

대공이 갈라하드를 내려보며 말했다.

그 입꼬리가 사납게 올라가 있었다. 대공의 목소리에 흥미가 짙게 풍겼다.

"예, 장인과 사위의 사냥 내기-. 훈훈하고 좋지 않습니까?"

"장인?"

갈라하드는 괜히 간지러운 목을 매만지며 슬쩍 웃었다.

대공은 도끼를 빙글- 돌렸다. 공기가 찢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자신 있나?"

대공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심했다. 맹수의 낮은 울음소리 같았다.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리며 끄덕였다.

애초에 요원은 뭐든 잘해야 했다. 언제 어떤 식으로 임무를 수행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예, 저는 뭐든 잘합니다."

갈라하드는 굉장히 뛰어난 요원이었다. 즉, 갈라하드는 대부분 잘했다. 거기에 사냥도 포함이었다.

"북부에는 마물 사냥이라는 놀이가 있다."

'마물 사냥에 놀이라는 단어가 붙을 수 있나?'

갈라하드는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이 도끼로 머리가 잘린 마물의 시체를 깊게 눌렀다. 마물의 시체가 돌아가며 흉측한 내부가 보였다.

"마물은 다른 마물의 머리를 먹으면, 힘을 흡수한다. 가령, 이놈은 사마귀 형태의 마물을 잡아먹은 거지."

"그렇군요."

마물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에 흥미가 생겼다.

머리를 먹는다는 이야기는 묘하게 찝찝했다. 대공은 마물의 머리만 먹었다.

"이를 포식이라 부르지. 포식을 많이 할수록 마물은 더 강해진다."

대공이 그 이음새를 누르며 설명했다.

'마물 이야기를 하니 말이 많아졌군.'

"포식을 많이 한 마물일수록 높은 점수를 받는다. 네놈이 잡은 늑대 마물은 고작 여덟 개가 섞인 놈이지만, 내가 잡은 마물은 열두 개가 섞인 놈이니 내 승리지."

"그렇군요. 역시 대공 전하십니다."

대공의 눈썹이 뾰족 올라갔다.

"마물 세 마리를 차례로 잡고 비교한다. 2점을 가져가는 쪽이 승리다."

갈라하드는 슬쩍 손을 들었다. 대공이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거렸다.

"대공께서 잡았던 것 중 가장 강한 마물은 뭐였습니까?"

대공의 입꼬리가 더 올라갔다. 질문을 기다린 듯한 반응이었다.

"아흔아홉 개가 섞인 놈이었지. 풍미가 아주 뛰어났다."

방금 갈라하드가 잡은 마물이 대충 하급에서 중급 사이였다. 그런데 아흔아홉 개가 섞인 놈이라면-.

'고위 마물이겠군.'

고위 마물이 무슨 버터도 아니고 풍미가 뛰어나다니-.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사냥은 해가 다시 뜰 때까지다."

대공이 중앙에 걸린 해를 가리켰다. 그 험악한 얼굴이 묘하게 신나 보였다. 대공은 마물 사냥을 상당히 좋아하는 듯했다.

"먼저 출발해도 된다."

"아, 괜찮습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거절했다. 당장 무식하게 찾아다닐 생각은 없었다. 이어서 톰이 준 가방에서 접이식 의자를 꺼내, 볕이 잘 드는 곳에 두고 앉았다.

"여유를 부리는군."

"저는 몸보다 머리를 쓰는 쪽이라."

대공은 별말 없이 도끼를 쥐고 사라졌다.

'종이 많이 섞인 놈을 찾는다-.'

갈라하드는 멀어지는 대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규칙은 간단했다. 포식을 많이 한 마물을 잡는 쪽이 이기는 거였다.

무식한 북부인이야 직접 발로 뛰면서 사냥하겠지만, 갈라하드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주먹구구식으로 푸는 건 갈라하드의 취향이 아니었다.

'마나 농도가 높은 놈을 찾는다.'

마족이든 마물이든 등급이 높을수록 그 농도가 짙었다. 마나 농도가 짙은 놈을 찾으면, 포식을 많이 한 놈일 것이다.

마나 농도 높은 놈만 찾으면 된다는 이야기였다.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현재 쓰는 탐지 마법으로 마물의 위치는 알 수 있어도, 마나 농도까지는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새로 하나 만들어야겠군.'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며 끄덕였다.

해가 적당히 들고 주변은 조용했다. 오랜만에 여유롭게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다리를 까닥거리며 방법을 가늠했다.

'마나 화살에 농도를 더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농도를 더 하는 쪽이라면 여러 개 뿌릴 수 없으니까.'

더불어 마나 화살을 이용한 방식은 범위가 너무 작았다.

그때, 멀리서 마물의 비명이 들렸다.

'시작이군.'

마물의 비명이 이어졌다. 그 사이의 간격이 짧았다. 마구잡이로 돌아다니며 마물을 잡은 뒤에, 제일 큰 놈을 뽑을 생각인 듯했다.

'무식하긴.'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이래서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하는 법이었다.

****

대공은 숨이 끊긴 마물을 살폈다. 가슴 부근에 갑각이 있었다.

'땅강아지 마물의 갑각이군.'

곤충형이라 다리가 많았다. 그 다리를 하나씩 꼼꼼하게 확인했다. 곳곳에 미세하게 다른 부분이 있었다.

'여섯 개.'

도끼로 가슴을 갈라 속을 살폈다. 심장을 괴상한 뼈가 두르고 있었다. 그 뼈의 형태가 다양했다. 괴상한 장기도 있었다.

'열다섯 개.'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산의 마물은 보통 다섯 개에서 열세 개 사이였다. 열다섯 개면 많은 편이었다.

그보다 강한 마물은 영악하여 찾기 쉽지 않았다. 놈들은 대공의 냄새만 맡아도 숨기 일쑤였다.

'놈은-.'

갈라하드를 떠올린 대공은 눈을 찡그렸다.

호기롭게 승부를 신청한 놈은 볕이 잘 드는 곳에 의자를 피고 앉아서 연초나 뻐끔거렸다.

그건 언뜻 보기에 노는 모습이었지만, 그리 생각없는 놈은 아니었다.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놈이 어떤 꿍꿍이를 지녔건, 대공에게는 상관없었다.

대공이 마물 사냥에서 질 리 없었다.

대공은 마물의 사체를 챙겨 예의 장소로 돌아갔다.

놈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차까지 마시는군.'

놈은 찻잔을 홀짝이고 있었다. 향긋한 레몬 향과 쌉싸름한 냄새가 풍겼다.

여유를 넘어선 모습에 대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주변에 있던 마물 시체가 헤집어져 있었다. 뭔가를 시도했는지, 마물의 가죽에 괴상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오셨습니까."

놈이 태평한 목소리로 대공을 반겼다. 여기가 자기 안방이라도 되는 듯한 분위기였다.

대공은 낮게 웃었다.

"열다섯 개다."

가져온 마물을 놈 앞에 던졌다. 마물이 데굴데굴 구르며 그 내장을 쏟아냈다. 제법 끔찍한 모습인데, 놈은 눈 하나 꿈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좀 봐도 되겠습니까? 알아볼 게 있어서."

눈을 빛내며 관심을 보였다.

대공은 혀를 차며 다시 사냥을 나섰다.

이번에는 마물이 시원치 않았다. 마물이 대공을 피해 숨은 듯했다.

대공은 땅에 귀를 대고 소리에 집중했다. 마물의 심장 박동은 인간보다 컸다.

특히-.

'피 냄새가 날 때는 흥분을 주체 못 하지.'

대공은 제 팔을 긁어 피를 가득 뿌렸다.

예상대로 참지 못한 마물이 킁킁거렸고-.

'이번에는 열일곱 개군.'

대공은 마물을 해체했다. 마물을 챙긴 대공은 문득 궁금해졌다.

놈이 아직도 거기에 있을지.

"오셨습니까."

있었다.

아니, 전보다 더 본격적이었다. 보글보글 끓는 스튜에 대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요리를 좀 했는데, 드시겠습니까? 맛있을 겁니다."

놈이 그릇을 내밀었다. 그 냄새가 상당히 향긋했다. 대공은 그릇을 받아 입에 털어 넣었다.

"뜨겁습니···. 음, 아닙니다."

스튜의 맛에 대공은 놀랐다. 마물 특유의 맛을 이름 모를 소스가 잡아줬다. 풍미가 상당했다.

"맛있군."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맛있었다.

"저는 뭐든 잘하지만, 요리는 특히 더 잘합니다."

"건방진 것도 잘하는군."

대공은 기운을 흘렸다. 이 정도면 북부의 기사도 버티기 힘들 텐데, 놈은 오히려 입꼬리를 올렸다.

"스튜 값을 독특하게 지불하시는군요."

대공은 끌끌 웃으며 기세를 회수했다.

"원하는 게 있나 보군."

놈이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에게 마법 좀 써도 되겠습니까? 확인해 볼 게 좀 있습니다."

자신에게 마법을 쓰겠다는 건방진 요청에 대공은 눈을 구겼다.

"아까처럼 말이냐?"

놈이 마물을 찾는 시늉 하며, 대공을 쿡 찔렀던 게 떠올랐다. 그를 말하자 놈이 찔끔 놀랐다.

"하하, 아까보다 따끔할 겁니다."

"따끔이라."

놈이 뛰어난 마법사라도, 마법으로는 대공에게 상처 하나 줄 수 없었다.

그에 대공은 혀를 차며 끄덕였다.

그러자-.

"천벌."

대공의 눈앞이 번쩍였다.

환해진 시야에 대공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음?'

자신을 가리키는 놈의 손가락과 몸 주변으로 튀는 스파크-.

대공은 놈이 자신에게 번개를 떨어뜨렸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심지어 놈의 행동에 작은 망설임도 없었다.

아무리 허락했어도, 대공인 자신에게 냅다 마법을 뿌리다니-.

'미친놈이군.'

대공은 작게 웃으며 손을 털었다.

스파크가 가득 튀었다.

그때, 놈이 슬쩍 스튜를 내밀었다.

"한 그릇 더 드시겠습니까?"

대공이 지그시 쳐다보자-.

"하하, 농담입니다."

놈이 손가락을 슬쩍 옆으로 치웠다.

****

'이 방법은 나쁘지 않은데.'

갈라하드는 수식을 점검하며 끄덕였다.

마나는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흘렀다. 강한 마물의 주변 마나 농도가 높을 게 분명했다.

문제는 자연적인 마나의 흐름은 그렇게 빠르지 않기에 그 흐름을 추적하는 게 어렵다는 점이었다.

상대가 움직이는 마물이라면 더더욱 추적이 어려웠다. 더불어 주변 마물만 해도 그 수가 상당했다.

그 하나하나를 살필 시간은 없었다.

그렇기에 새로운 마법이 필요했다.

'아주 넓은 마법. 가능하면 설산을 덮을 정도로-.'

그를 위해서는 농도가 짙은 마나가 상당히 많이 필요했다.

갈라하드라도 그 정도의 마나는 없었다.

다만, 널린 게 마물 시체였다.

그리고 갈라하드에게는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에 대한 지식이 있었고-.

'재밌겠군.'

갈라하드는 돌아다니며 마물의 시체를 모았다. 다 모으고 보니 작은 산처럼 보일 정도로 거대했다.

이어서 금색 봉으로 그 주변에 마법진을 그렸다.

'잘 그려지는군.'

금색 봉으로 그리니 마법진이 제법 잘 그려졌다.

기본은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이었다. 마물 조련사의 마족 피를 다루는 부분을 가져다 썼다.

다만, 갈라하드가 원하는 방식으로 쓰기 위해서는 식을 새로 짜야 했다.

언뜻 단순한 이야기였지만, 그건 마법진을 새로 그리는 것보다 오히려 어려웠다. 심지어 그 대상이 마족의 피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다만, 마족의 피를 직접 마시는 갈라하드였다.

마족의 피에 대한 이해도는 어떤 마법사보다 뛰어나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이런 대형 마법은 오랜만에 쓰는군.'

갈라하드는 거대한 마법진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본래 마법사들은 위계가 높아질수록 화려하고 거대한 마법을 선호했다.

화려한 대형 마법이 마탑에 취업할 때 효과적이기 때문이었다. 어디에서 자랑하기도 좋았고.

애초에 마법사는 마탑에서 마도구만 두드려도 명예와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굳이 현장에서 적은 돈을 받으며 구르는 길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갈라하드는 현장직 요원이었다. 요원에게는 조용하고 흔적이 남지 않는 마법이 최고였다.

그렇기에 갈라하드는 대형 마법을 선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혐오하는 쪽에 가까웠다. 쓸데없는 허세와 낭비라고 생각했다.

다만, 지금은 대형 마법이 필요했다.

이런 설산을 직접 뒤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마나의 기본적인 원리를 사용할 생각이었다.

마나는 농도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른다-.

다만, 단순히 마물이 숨 쉬는 걸로 특정하기에는 다소 어려웠다.

알아보기 쉽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마법진을 다 그린 갈라하드는 시체 산으로 향했다. 그 아래에 피가 가득 고여 있었다. 갈라하드는 그 웅덩이에 금색 봉을 꽂았다.

그리고 선을 천천히 그렸다. 그려둔 마법진에 마물의 피가 흐르도록-.

'좋군.'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며 마법진의 중심에 섰다.

마물의 피가 마법진을 천천히 칠했다. 이윽고 마법진이 가득 채워졌다.

오른쪽 팔목에 새겨진 마법진이 영롱하게 금빛을 뿌려댔다. 갈라하드는 계산을 마무리하며, 주문을 천천히 외웠다.

이윽고 마법진이 거칠게 흔들렸다. 갈라하드는 금색 봉을 마법진의 중앙에 꽂으며 주문을 마무리했다.

"새벽녘의 안개."

마법진이 붉은 빛을 뿌렸다.

마법진을 채웠던 피가 열을 가한 것처럼 보글보글 끓었다. 한참 끓던 피가 이내 수증기가 되었다.

붉은 안개가 서서히 퍼졌고-.

이내 주변이 자욱해졌다.

"훌륭하군."

갈라하드는 헝클어진 머리를 넘기며 시원하게 웃었다.

****

'스물하나.'

대공은 앞에 놓인 마물의 사체를 보며 도끼를 털었다.

스물한 개의 마물은 흔치 않았다. 최근 잡은 것 중에 가장 높다고 볼 수 있었다.

'이겼군.'

대공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스물한 개를 넘어선 마물은 대공도 찾기 힘들었다.

'음?'

묘한 느낌에 대공의 시선이 돌아갔다.

어딘지 꺼림직한 느낌이 들었다. 대공은 자신의 감을 믿었다. 그에 마물을 포기하고 뒤로 돌았다.

그때, 멀리서 다가오는 붉은 안개가 보였다. 그건 단순한 안개가 아니었다. 음산함이 가득 담긴 붉은 안개였다.

안개는 하얀 설산을 잡아먹듯이 퍼졌다.

대공은 눈을 가늘게 뜨며 도끼를 크게 휘둘렀다.

거센 바람이 안개를 가득 밀쳤다. 무형의 바람이 붉은 안개를 거칠게 찢었다. 붉은 안개가 뒤로 크게 밀렸다.

다만, 그건 잠깐이었다. 붉은 안개는 다시 퍼졌다.

'최상급 마족이다.'

대공은 오히려 안개를 향해 전진했다. 붉은 안개가 대공을 삼켰다.

피부가 따끔거렸다. 언뜻 보기에는 그저 붉은 안개였지만, 그 안에 심상치 않은 힘이 느껴졌다.

'고위 마족인가.'

대공은 길게 호흡했다. 달콤한 피 냄새가 숨을 가득 채웠다.

대공의 입꼬리가 더 올라갔다.

짙은 허기가 정신을 흔들었다.

문득 갈라하드를 떠올렸다. 어쩌면 상대가 노리는 게 갈라하드일 수도 있었다.

사방이 붉은 안개에 시야가 가려졌지만, 대공은 망설이지 않고 걸었다.

가까이 갈수록 따끔함이 심해졌다. 감각이 뚜렷해졌다.

'놈을 노렸군.'

그때-.

정면에서 날카로운 감각이 느껴졌다. 대공은 도끼를 휘둘렀다.

붉은 안개가 거칠게 갈라졌다.

날아온 건 날카로운 창이었다. 얼음으로 된-.

대공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저 얼음 창은 갈라하드가 쓰던 마법이었기에-.

그때, 붉은 안개가 갈라지며 상황이 보였다.

거대한 붉은 그림이 있었다. 피로 그린 게 분명한 그 거대한 그림에서 붉은 안개가 연신 뿌려지는 중이었다.

이 상황을 만든 고위 마족이 저기에 있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그 고위 마족이-.

"아, 마물인 줄 알았습니다."

갈라하드라는 점이었다.

"이번에는 진짜 실수입니다."

"이번에는-?"

대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에 갈라하드가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대공 주변의 붉은 안개가 물러났다.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의 원리를 이용한 마법입니다. 아, 조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적의 칼을 뺏어서 쓴다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갈라하드가 길게 설명했다.

산을 피로 만든 안개로 뒤덮다니-. 고위 마족이나 할 법한 짓이었다.

물론, 놈의 말대로 마법일 수도 있었다.

다만-.

"네놈, 심장이 두 개군?"

심장은 속일 수 없었다.

대공은 도끼를 비스듬히 돌렸다.

놈은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그때, 갈라하드가 손을 들었다.

"질문은 내기에서 이기시고 하시죠."

단단히 미친놈이었다.

83화 예물

'성공했군.'

갈라하드는 펼쳐진 안개에 입꼬리를 가득 올렸다.

붉은 안개는 마물의 피로 된 고농도 마나의 형상화였다. 안개로 마나의 농도를 시각화할 수 있었다.

즉 강한 마물을 한결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거기에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놈-."

창이 가벼이 부서졌다. 대공의 시퍼런 눈이 조금 구겨져 있었다.

대공의 존재가 너무 강한 까닭에 안개가 쏠렸다. 대공은 자석이었다. 대공 주변은 안개가 아니라 피 웅덩이였다.

갈라하드도 억울했다.

"아니, 대공 전하께서 너무 강하시니까 자꾸 쏠리지 않습니까. 이건 명백히 방해입니다."

"방해?"

대공이 어이없다는 듯 작게 혀를 찼다.

"사냥 끝나셨습니까? 그러면 숨 좀 참으십쇼. 방해됩니다."

"···뭐라?"

갈라하드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이런···. 눈치를 채다니.'

대공이 고통의 알을 눈치챘다.

'자네는 소리도 못 숨기나? 싸구려군.'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자그맣게 두근거렸다. 잔뜩 의기소침한 박동이었다.

'그래, 하급 알에 내가 뭘 기대하겠나.'

고통의 알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마법에 집중한 까닭에 갈라하드도 조금 풀어졌었다.

무엇보다-.

'진짜 심장 박동을 들어?'

아무리 귀가 좋아도 어떻게 심장 소리를 듣겠는가. 단순한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런데 대공은 진짜 심장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고통의 알을 눈치챘다.

'지면 안 된다.'

대공이 두 번째 심장에 관해 물을 것이다. 반드시 이겨야 했다.

만약 고통의 알에 관해 묻는다면, 상당히 번거로워질 것이다.

내기에 건 조건이 꽤 강렬했으니까.

질문을 건 내기가 조금 거칠어졌지만, 딱히 상관없었다.

갈라하드는 지는 내기 따위는 하지 않았기에.

'열다섯, 열일곱, 스물이었나.'

하급에서 중급 사이, 중급, 중급에서 상급 사이의 마물이었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며 손을 휘저었다.

붉은 안개가 널리 퍼졌다. 넓어진 감각이 갈라하드를 콕콕 찔렀다.

갈라하드는 눈을 감고 그에 집중했다. 이윽고 넓은 영역의 정보가 머리를 가득 쑤셨다.

'음, 이거부터 해볼까.'

갈라하드는 그중 적당한 쪽을 골랐다.

도착한 곳에는 큼지막한 마물이 있었다.

갈라하드는 놈 주변에 멍울진 피의 농도를 살폈다. 마물이 뛸 때마다 찰박 소리가 날 정도로 진했다.

'중상급이군.'

그때, 마물의 주둥이가 길게 벌어졌다. 거대한 송곳니를 타고 독이 뚝뚝 흘렀다.

풍기는 기세가 살벌했다. 다만, 중상급 놈이었다. 여기는 마경도 아니었고, 갈라하드에게 위협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갈라하드는 다른 고민을 하고 있었다.

'저걸 어떻게 들고 가지?'

잡은 마물을 거기까지 가져가는 게 문제였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잡는 것만으로도 빠듯한데, 그걸 나르기까지 해야 한다니, 아무리 갈라하드여도 그건 무리였다.

'아, 그게 있었군.'

잠시 고민하던 갈라하드는 작게 끄덕였다.

머리가 무식하면 몸이 고생하는 법이었다. 갈라하드는 유능한 마법사니, 몸이 편할 수밖에 없었다.

****

'마법? 웃기는군.'

대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주변이 온통 핏방울이었다. 그 하얗던 산이 붉게 칠해졌다. 이걸 마법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고위 마족이나 할 법한 짓이었다.

더불어-.

'심장이 두 개였다.'

대공은 가슴을 매만졌다. 그 왼쪽 가슴에 굵직한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갚지 못한 두 개 중 하나였다.

대공의 입에서 뜨거운 숨이 뱉어졌다. 그 숨에 담긴 건 짙은 분노와 희열이었다.

이제 곧 풀어질 의문이었다.

갈라하드가 마물 사냥에서 대공을 이길 가능성은 없었다.

주변에 있는 마물은 대공이 전부 사냥했다. 그보다 더 강한 마물을 잡으려면, 위쪽으로 올라가야 했다.

위쪽의 마물은 영리하여 대공을 피해 숨었다. 대공이 산에 들어왔으니 꼼꼼하게 숨었을 것이다.

설사 찾아도 그걸 잡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더불어 마물을 사냥해도 그걸 여기까지 들고 오는 것도 일이었다.

만약 잡아도 설산은 높고 험했다. 거대한 마물을 삐쩍 마른 마법쟁이가 여기까지 끌고 올 수도 없었다.

'달이 기울었군.'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대공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달이 모습을 감췄다,

대공을 타고 멍울지던 붉은 안개는 이제 웅덩이가 되었다.

'안 오는군.'

대공은 눈을 가늘게 떴다. 내기는 해가 뜰 때까지였다.

이제 곧 동이 틀 것이다. 그런데 놈은 단 한 마리의 마물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세 마리를 동시에 끌고 올 생각인가-.'

마물은 그 무게가 상당했다. 마물 세 마리를 동시에 옮기는 건, 대공에게도 다소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쿵.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달콤한 마물 냄새가 가득 풍겼다.

마물의 발소리였다. 이상한 점은 그 발소리가 여러 개였다.

여기는 마물이 갇힌 산이었다. 여기서 마물은 서로 잡아먹지, 뭉치지 않았다.

'실한 놈이다. 최소 서른개-.'

대공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붉은 안개가 서서히 물러났다. 산을 덮은 붉은 안개가 전보다 옅었다.

안개 너머로 마물이 보였다.

아니, 마물들이었다.

하나는 뱀과 같은 형상의 마물이었다. 머리가 세 개였는데, 하나는 뱀이었고, 하나는 사자, 다른 하나는 늑대였다.

최소 서른 개였다.

옆에 있는 마물도 제법 굵직한 놈이었다. 거대한 늑대 형태의 마물인데, 그 갈퀴가 뱀이었다.

눈이 있어야 할 곳에 매의 머리가 자리했고, 주둥이 사이에는 뱀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대공이 잡은 것보다 굵직한 놈들이었다.

저 정도의 마물은 대공의 냄새만 맡아도 도망쳤다. 그런데 먼저 다가오다니-.

'신기하군.'

그때, 마물 사이에 마물이 하나 더 있었다.

언뜻 보기에 윤기가 넘치는 말이었다. 일반 말의 네 배 정도 되는 크기였는데, 뱀처럼 생긴 눈이 다섯 개 달려 있었다. 심지어 발에서는 불이 흩날렸다.

양옆의 마물에 비하자면 작았지만, 명백한 마물이었다.

'탐나는군.'

대공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저 마물이라면 자신을 태울 수 있지 않을까. 다만, 마물은 길들일 수 없었다.

대공이 아쉬움을 달래며 도끼를 고쳐잡을 때-.

"저 안 늦었습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말 위에 놈이 앉아 있었다.

놈은 전과 달리 꼴이 엉망이었다. 깔끔하게 넘겼던 머리는 잔뜩 풀어져 있었고,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다만, 얼굴에는 후련한 미소가 담겨 있었다.

"자, 다들 인사하게."

놈이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흔들었다.

양옆의 거대한 마물이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손짓으로 마물을 움직이다니-.

대공은 오래된 전설을 떠올렸다.

인류 최악의 배신자.

'마물 조련사-.'

도끼를 쥔 대공의 손에 힘줄이 올라왔다.

*

'이건 위험하군-.'

대공의 도끼가 갈라하드를 향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선명한 죽음을 느꼈다.

그건 확정된 죽음이었다.

'힘을 숨기고 있었군.'

대공이 드러낸 기세는 갈라하드의 예상을 넘어선 경지였다.

'좋지 않은데.'

갈라하드는 슬쩍 손가락을 풀었다. 고통의 알이 연신 뛰었다. 마나가 계속해서 돌았다.

대공이 만약 기사였다면, 갈라하드도 승부를 점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대공은 마물의 머리를 먹어 배를 불린 자였다. 기사보다는 마물에 가까웠다.

그것도 아주 고위 마물-.

갈라하드는 마물과 상성이 좋지 않았다.

"마물 조련사의 제자였나."

대공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형 집행자가 단두대를 떨어뜨리기 전에 묻는 것처럼 아주 건조했다.

'마물 조련사에 민감하군.'

그럴만했다. 마물 조련사는 북부에 가장 큰 피해를 입힌 인물이었으니까.

갈라하드가 상급 마물을 양옆에 끼고 나타났으니, 충분히 오해할 만했다.

다만, 사실과 달랐다.

"아, 오해입니다. 제자가 아닙니다."

갈라하드는 손바닥을 보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우연히 얻은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을 개량해서 응용한 겁니다. 마물 조련사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보고 올렸습니다만."

"우연이라-. 마물 조련사가 남긴 흔적만 보고 상급 마물을 다스렸다?"

대공이 한쪽 입꼬리만 올렸다.

명백한 불신이었다.

"예, 제가 뛰어난 마법사라서. 아시지 않습니까?"

갈라하드는 슬쩍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양옆의 마물이 동시에 엎어졌다.

갈라하드가 얻은 건, 마물 조련사 마법진의 열화판이었다. 갈라하드가 아무리 뛰어나도 열화판 마법진으로는 상급 마물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를 이용하여 옮기는 용도로 쓴 것이었다.

대공의 기세가 갈라하드를 가득 눌렀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숨이 턱- 막혔다.

혹시나 오해로 상황이 안 좋아질 경우를 계산했다.

"그래-."

대공이 나지막한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두 개인 것도 우연인가?"

어깨를 누르는 압박이 거세졌다. 버티기 힘들 정도였다. 금색 봉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괴물이군.'

갈라하드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대공의 오해는 그럴싸했다.

다만-.

"질문은 제가 하는 거 아닙니까?"

내기는 갈라하드의 승리였다.

무거운 정적이 자리했다. 갈라하드는 언제든 마법을 쓸 수 있도록 팽배한 긴장을 유지했다.

여러 오해가 쌓인 상황이었다. 본래 귀족은 앞과 뒤가 다른 놈들이었다.

내기에서 패배했다고 그냥 물러나는 귀족은 흔치 않았다. 끝까지 떼를 쓰는 게 보통이었다.

심지어 상대는 대공이었다. 이쪽은 제국 놈이었고.

인정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좋지 않군.'

갈라하드는 손을 천천히 풀었다. 연초를 자연스럽게 입에 물었다. 마나를 계속 눌렀다.

그때-.

"그래."

대공이 도끼를 뒤에 맸다. 어깨를 누르던 기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가 졌군."

대공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긴장한 게 무색할 정도로 깔끔한 인정이었다.

대공은 호걸이었다.

*

'깔끔한 인정이군.'

질문은 세 개였다.

갈라하드는 대공의 험악한 얼굴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협약은 황제가 실력자를 묶는 거였다. 그 대가로 황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고위 마족은 황제의 죽음을 바랐다. 황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

둘 사이의 연관을 찾는 게 중요했다.

그를 위해서는 먼저 황제를 알아야 했다.

"황제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갈라하드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대공의 눈이 갈라하드의 뒤쪽을 살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잠시 노려봤다.

'제국의 귀가 있다는 게 단순히 세작이 아닌 건가.'

그 특이한 반응에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륙적으로 마족의 왕이란 개념 자체를 부정한 걸 확인했다. 황제도 비슷한 짓을 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황제에 관한 건 질문 두 개짜리다."

'두 개짜리 질문?'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질문이 세 개인데, 두 개짜리 질문이라니-.

다만, 두 개라는 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예, 좋습니다. 두 개 쓰겠습니다."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대공이 잠시 뜸을 들였다.

황제가 고위 마족일 가능성도 있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까. 너무 클리셰적이지만-.

그때, 대공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멍청한 놈이다."

"···예?"

"황제는 멍청한 놈이다."

대공이 또박또박 말했다. 그게 문제가 아니었는데-.

"아니-. 멍청하다니-. 그게 뭡니까?"

"질문인가?"

"대답에 성의가 너무 없지 않습니까. 질문 두 개짜린데."

"두 개짜리 대답이다."

대공의 대답은 단호했다.

멍청하다-. 황제에게 상당히 적합하지 않은 수식어였다.

'대공이 굳이 꼼수를 부릴 인물은 아니다.'

멍청하다는 게 대공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대답일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멍청하다는 대답은 너무 성의 없지 않습니까?"

"다음 질문."

"이런 멍청한-. 아니, 하신 말씀을 되새긴 겁니다."

대공의 가늘어진 눈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었다.

'멍청한 황제-.'

수확이 없는 건 아니었다. 황제에 관한 이야기는 함부로 발설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냈다. 황제가 마족의 왕과 비슷한 짓을 했을 가능성이 떠올랐다.

이건 꽤 큰 수확이었다.

"다음 질문."

대공이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에 관한 건 두 개짜리 질문이었다. 그 외의 것에는 딱히 쓸 게 없었다.

"나중에 써도 됩니까?"

"음."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움이 약간 남아도 수확이 제법 있었다.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을 활용하는 법도 알아냈고, 협약의 정체도 파악했다.

그때, 갈라하드는 대공의 시선이 어딘가에 꽂힌 걸 깨달았다.

대공은 무뚝뚝한 사내였다. 마물의 목을 뽑아 그 머리를 씹어먹을 때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대공인데, 지금은 표정이 묘했다. 눈썹이 작게 흔들렸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에 의하면, 저건 무언가에 흥미가 있다는 신호였다.

대공의 시선이 향한 곳은-.

'말?'

갈라하드가 타고 온 마물이었다. 말의 형태인 하급 마물이었다.

대공의 시선은 정확히 그 마물에 꽂혀 있었다.

갈라하드는 슬쩍 마물을 옆으로 움직였다. 대공의 고개가 돌아갔다.

'말이라고 여기는 건가?'

이곳에서 잘 빠진 말은 슈퍼카였다.

이 흉측한 마물을 말이라고 보기는 좀 어려웠지만, 애초에 대공도 고위 마물과 흡사한 외모였다.

'잘 어울리는군.'

갈라하드는 작게 끄덕였다.

세 마리를 채울 용으로 잡은 마물이었다.

하급이기에 다른 상급과 달리 다스릴 수 있었지만, 그래도 마물이었다. 데리고 다니기에는 위험했다.

거기에 그를 유지하기 위해서 마물의 피를 계속 먹여야 했다. 그 아까운 마물의 피를 먹여야 한다니-. 연비가 상당히 좋지 않았다.

말이 더 말을 잘 듣는데, 굳이 이놈을 데리고 다닐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산에서 내려가면 버릴 마물이었다.

그런데 대공이 관심을 보였다.

음-.

"대공 전하, 제가 예물을 안 드리지 않았습니까?"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가득 올렸다.

대공의 눈썹이 작게 움직였다.

"예물? 나는 네놈의 결혼을 허락한 적 없다."

갈라하드는 톰이 준 가방을 뒤졌다.

고급스러운 고삐가 들어 있었다.

그에 고삐를 물리고 대공에게 내밀자, 대공이 눈썹을 씰룩거렸다.

"자, 이놈은 보시다시피 발에 불이 나옵니다. 이를 수도에서는 열선 옵션이라고 부르는데-."

대공의 눈썹이 점점 올라갔다.

****

"올라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수하의 물음에 8대대 대장 베니존스는 입술을 씹었다.

마물의 무덤은 그 끝이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은 설산이었다.

이변은 새벽에 일어났다.

처음에는 작은 점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붉은 안개가 점점 퍼지더니, 이윽고 산의 아랫부분을 가득 덮었다.

설산이 피를 흘리는 것 같았다.

대장으로 8대대를 꽤 오래 담당했던 베니존스도 처음 보는 이상 현상이었다.

고위 마족이 분명했다.

문제는 마물의 무덤은 대공이 금지한 구역이라는 점이었다. 대공의 허락이 없으면 누구도 오를 수 없었다.

그에 오르지도 못하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짙은 피 안개라니-.

'단순한 고위 마족이 아니다. 아주 독한 놈이다.'

칼자루를 쥔 손에 땀이 가득 찼다.

그때,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렸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평온한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말을 계속 유지하려면 주기적으로 피를 먹이셔야 합니다. 원래 고급스러운 말일수록 유지비-. 아니, 유지 피가 많이 듭니다."

북부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 그 재수 없는 제국 놈의 것이 분명했다.

"그렇군, 예물이라."

이어서 대공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와 달리 그 목소리가 살짝 높았다. 웃음기가 섞인 것 같기도 했다.

베니존스도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때, 앞의 붉은 안개가 걷어졌다.

네 개의 발이 불에 타오르고 눈이 다섯 개인 마물이었다. 그건 꼭 지옥에서 올라온 말 같았다.

그 말 위에 대공이 있었다. 대공은 평소와 달리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재밌는 사냥이었습니다."

갈라하드가 대공을 보며 웃었다. 그에 대공은 고개만 까닥거렸다.

그 둘의 모습이 묘하게 친밀해 보였다.

믿기지 않았다.

그때, 대공이 갈라하드를 보며 말했다.

"약혼식에 네 가족도 불렀다."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굳었다.

*

"왕국 연합의 반기가 점점 커지는 중이오. 왕자의 진상을 밝혀달라는 요청이 또 올라왔소."

"서역의 바다가 시끄럽소. 해적이 들끓는 중이오."

"마법부에서 마도 기사의 시제품을 내놓았소. 제법 전망이 좋더군."

"마법 열차의 선로 작업도 거의 끝나는 중이오."

"마족 발생 빈도가 높아졌소.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오. 기사단을 두 개 더 증설해야 하오."

황실 회의장은 시끄러웠다. 성과를 발표하려고 열을 올리고, 지원을 따내기 위해서 핏대를 세웠다.

다만, 회의는 아무 소득 없이 끝났다.

머리가 없는 까닭이었다.

앰버르탄 백작은 코트를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앞을 얄밉게 생긴 귀족이 막아섰다.

줄곧 앰버르탄을 견제하는 바라한 백작이었다.

"갈라하드가 대공의 인정을 받았다던데. 계획과 너무 틀어진 것 아니오?"

바라한 백작의 이죽거림에 엠버르탄 백작은 눈을 찡그렸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무슨 상관이냐니. 갈라하드는 그대의 아들 아니오? 셋째 아들."

"그래서?"

"앰버르탄 백작가에서 은밀하게 도움을 준 것 아니냐는 의문이 돈다오."

바라한 백작의 말에 앰버르탄은 소리 내어 웃었다.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검술 명가인 앰버르탄에서 감히 더러운 마법을 익힌 놈이다. 앰버르탄에 묻은 더러운 오점인 놈을 돕는다-? 하, 개도 웃겠군. 손을 더럽히기 싫어서 놈을 제때 치우지 못한 게 내 가장 큰 실수다."

앰버르탄의 신랄한 말에 바라한 백작이 양손을 들며 슬쩍 물러났다.

주변의 뾰족한 시선이 꽂혔다. 마법에 대한 혐오를 드러낸 까닭이었다.

'더러운 마법쟁이들.'

앰버르탄 백작은 욕을 중얼거렸다.

자리를 벗어나는 앰버르탄 백작의 앞을 누군가 막았다.

피처럼 붉은 머리에 놀라울 정도로 미인-.

황녀였다.

황녀가 앰버르탄을 보며 활짝 웃었다.

"앰버르탄 백작?"

만개한 꽃처럼.

84화 똥

'숲-.'

갈라하드는 주변 가득한 녹색에 눈을 찡그렸다.

사방이 초록이 무성한 나무로 빽빽했다. 뾰족한 잎과 퍼진 잎, 다양한 잎들이 하늘거리는 바람에 흩날렸다.

무릎까지 올라올 정도로 무성한 풀이 발을 간질였다. 새의 발랄한 지저귐이 귀를 간질였다. 풀을 바로 앞에서 뜯은 것처럼 짙은 냄새가 코를 가득 채웠다.

아주 자연스러웠다. 마치 이곳에서 태어난 것처럼-.

갈라하드는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연초를 찾았다.

없었다.

'현실이 아니군.'

중독은 습관이고, 습관은 무의식의 영역이었다. 무의식의 영역은 방벽으로 쓰기 좋았다.

가령 지금처럼-.

꿈은 아니었다. 요원인 갈라하드는 꿈을 꾸지 않았다.

'숲, 그분, 마족, 고위 마족-.'

인지와 동시에 정신이 서서히 일어났다. 학습된 의심이 완벽한 정황을 하나씩 뜯었다.

갈라하드는 인식을 늘렸다. 요원에게 정신 간섭에 대한 방비는 기본이었다. 정신 간섭은 이상을 눈치챈 순간부터 깨기 쉬운 마법이었다.

분명 그랬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풀리지 않는다.'

여전히 새는 지저귀고 있었고, 풀은 바람에 흔들렸으며, 잎이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대공과 사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마경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장악력이라니-.

그때, 수풀이 열렸다. 나무들이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비켜섰다. 네발 마족이 천천히 나왔다.

네발 마족의 걸음마다 풀이 꽃으로 변했다. 꽃잎이 퍼지며 발자국을 기록했다.

네발 마족이 갈라하드의 앞에 섰다. 그 모습이 전보다 선명했다.

[황제를 죽여라.]

그 목소리가 갈라하드를 가득 울렸다. 갈라하드는 상황을 파악했다.

'아, 계약이군.'

저번에 마족을 부르기 위해 했던 말이 계약으로 작용한 듯했다. 계약이라면 이야기가 상당히 복잡해졌다.

[황제를 죽여라.]

갈라하드의 입에서 초록이 피어올랐다. 풀이 자라났다. 고통이 전보다 선명했다. 실제로 끔찍한 고통이 엄습했다.

'계약의 영향이군.'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리며 감탄했다. 왼쪽 눈에서 붉은 꽃이 피어올랐다. 벌이 날아와서 꽃에 앉았다.

몸 안에서 나무가 자라나는 느낌이었다. 안에서부터 차곡차곡 터지는 듯한 고통은 꽤 새로웠다.

"참을성이 부족하군. 독촉하지 말게."

네발 마족이 입꼬리를 올렸다.

[황제를 죽여라.]

"나도 그럴 생각일세. 하지만 황제가 옆집 제임스도 아니고 그냥 죽일 수 없지 않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지. 전문 용어로는 착수금이라고 하네. 얼마나 줄 수 있지?"

[황제를 죽여라.]

"막무가내군. 이런 식으로 나오면 일만 늦어지는 걸세. 풀이 날 뜯어 먹는 건 상관없지만, 입은 가만히 둬주겠나? 협상 중이지 않나."

[황제를 죽여라.]

"말이 안 통하는군."

[황제를 죽여라.]

"헛수고일 걸세."

갈라하드는 풀로 흩어졌다.

새로운 고통이 엄습했다. 다만,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다. 고통을 더 잘 느끼라고 그러는 듯했다.

갈라하드는 흩어지는 풀을 진지하게 응시했다.

'이것도 정신 간섭인가?'

흥미롭군.

아득한 경지의 정신 간섭이었다. 이 정도면 정신 간섭의 궁극이라고 볼 수 있었다.

풀로 흩어진 갈라하드의 몸을 벌레가 아그작 아그작 뜯었다.

그 너머로 옅은 미소를 짓는 네발 마족이 보였다.

'그러니까 앞으로 잠들 때마다 매일 개인 과외를 해주겠다는 건가?'

네발 마족의 미소가 굳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

'조금만 더-.'

갈라하드는 거친 숨을 내쉬면서 눈을 떴다.

푸석한 나무 벽이 눈에 보였다. 마차였다. 헝클어진 머리를 넘기며 연초를 찾았다. 연초가 있었다. 연초를 입에 물고 황급히 불을 붙였다.

레몬 향이 깊게 퍼졌다.

'계약이라-.'

순순히 돕는다 싶더니만, 계약을 이행하기 위함인 듯했다.

'황제를 죽여라.'

갈라하드는 문장을 작게 중얼거렸다.

황제가 실력자들을 묶고 있다는 게 확실히 된 상황이었다. 그로 인한 공백이 상당했다. 대륙 곳곳에 마족이 영향력을 펼치는 가장 큰 원인이었다.

대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마물의 머리를 뜯어 배를 채우는 대공이었다.

그런 대공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면, 북부가 마족으로 점철되지 않았을 것이다.

비단 대공의 문제가 아니었다. 잠적한 실력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마족이 들끓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황제의 부재가 너무 길었다.'

원래도 황실은 화기애애한 곳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소리 없는 전쟁터였다. 주인인 황제가 자리를 오래 비운 탓이었다.

우습게도 황제의 암살을 의뢰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황녀의 배신 때문에 무산이 됐지만, 갈라하드도 그를 상정한 적 있었다.

황제의 죽음을 원하는 이는 꽤 많았다. 그중 한 번은 우습게도 황실이 맡긴 임무였다.

황실의 보안 강화용 암살 의뢰였다.

황실은 마법보다 기사를 믿었다. 온 대륙의 천재가 모인 곳이 황실 기사였다. 그런 황실 기사를 꽉꽉 채운 황실을 뚫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시에는 갈라하드도 마지막 문을 앞에 두고 실패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황실 기사 단장이 경악하여 묻던 얼굴은 제법 볼만 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사람을 쓰는 이상 구멍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강조했다.

황실은 황급히 마법적인 보안을 추가했다. 그를 위해 다양한 고위 마법사들을 초빙했다.

갈라하드가 황혼의 마탑주를 만난 것도 거기에서였다.

아무튼, 마법적인 방비가 추가된 황실은 갈라하드에게는 오히려 더 쉬웠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황제를 죽이면 제국 공적, 그것도 1위에 오를 게 분명했다. 반드시 피해야 했다.

네발 마족이 독촉했지만, 급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봤자, 잠 좀 설치는 게 전부였으니까.

둥둥!

묵직한 북소리에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공의 성에 병사들이 가득 도열해 있었다.

안에 있던 병사가 전부 나온 듯했다. 거대한 성벽에 병사들이 빽빽하게 선 모습은 꽤 중압감 있었다.

다만, 그 전부를 합쳐도 대공 하나만 못했다.

대공은 발에 불이 가득 올라오고 눈이 다섯 개 달린 말을 타고 있었다.

그런 끔찍한 마물에 험악한 인상의 대공이 윗통을 까고 거대한 마물을 타고 있으니, 어울린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지옥에서 가장 용맹한 전사가 올라온 느낌이었다.

용맹한 북부의 병사들이 질겁한 표정을 지었다.

대공을 따라 대공의 성에 들어갔다. 마차에서 내리니 병사들이 귀신 보는 듯한 얼굴로 갈라하드를 살폈다. 사냥에서 살아 돌아온 게 꽤 인상적인 일인 듯했다.

대공은 저 멀리 먼저 가고 있었다. 인사조차 하지 않는 게 참으로 대공다웠다. 그편이 갈라하드에게도 깔끔하고 좋았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하나 더 물었다.

일단, 특무대부터 챙길 생각이었다.

그때, 익숙한 인물이 다가왔다. 테오도르라는 사내였다.

"대공 전하께서 식사하신다고 올라오시랍니다."

"음, 내키지 않네만."

"하하, 명령이라고 하셨습니다."

테오도르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예물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나 보군.'

저 험악한 대공과 단둘이 밥을 먹어야 한다니. 거절하고 싶었지만 명령이었다.

"하하, 대공 전하께서 갈라하드 대장을 특별히 아끼시는 것 같습니다."

"체하겠군."

크게 웃은 테오도르는 황급히 입을 막았다.

*

······!

마물의 울음이 방을 흔들었다. 중급 마물도 안된 놈이기에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문제는-.

'기어코 방까지 데려왔군.'

갈라하드는 대공의 옆에 있는 마물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마물은 그 덩치가 상당했다. 들어오는 입구가 마물에 비해 작았다.

그런 상황에서 대부분은 마물을 밖에 두기 마련이었다. 다만, 대공은 문제를 정면 돌파했다. 아니, 부쉈다.

대공은 걸리는 부분을 전부 도끼로 밀어버렸다. 그렇게 확장 공사를 하여 마물을 기어코 방까지 가져왔다.

마물이 내뿜는 불에 방이 따뜻한 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왜 불렀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대공은 고기만 뜯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고기를 슬쩍 구우며 식사했다.

갈라하드의 식사가 끝날 때쯤, 대공은 다섯 번째 고기를 뜯고 있었다.

마물을 그렇게 먹었는데, 또 뭔가를 먹는 게 신기했다.

갈라하드는 그를 잠시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제 가문은 안 올 겁니다."

대공의 눈이 갈라하드를 향했다.

"사이가 안 좋나 보군."

대공의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이미 이쪽의 사정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예, 제가 내놓은 자식이라서."

"아카데미 최연소 졸업자도 내놓나 보군."

"검술 가문이라서 말입니다."

알고 있던 사실인 듯 대공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감히 내 딸의 약혼식에 안 올 것이다?"

"예."

"좋군."

의외의 대답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농담이 아니라는 듯 대공의 눈썹이 살짝 올라가 있었다.

대공은 갈라하드의 가족이 오지 않는 걸 오히려 반겼다. 그 이유는 뻔했다.

'내 가문은 오히려 방해라는 건가.'

제국에 대한 반감이 큰 북부였다. 갈라하드만 챙길 생각이 분명했다. 그러니 갈라하드의 가문이 나타나지 않는 것에 반색하는 거겠지.

아예 결혼시킬 마음이 없던 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진짜 데릴사위군.'

갈라하드는 괜히 목을 매만졌다.

그때,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예의 멍청한 갑옷이 아닌 멋들어진 흰색 갑주를 입은 아드리안나가 들어왔다.

"1대대 대장 아드리안나 복귀했습니다."

아드리안나가 대공을 보며 꾸벅 숙였다. 그에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의 흔적은 발견했습니다만, 전부 무너뜨려 놓은 탓에 흐릿합니다. 2대대 대장이 추격 중이지만, 전망이 좋지 않습니다."

아드리안나의 보고에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먹지."

"알겠습니다."

갈라하드는 벌떡 일어나서 옆의 의자를 빼줬다. 갈라하드의 반대편에 앉으려던 아드리안나가 멈칫거렸다.

대공의 시선이 갈라하드에게 꽂혔다. 갈라하드는 그를 애써 무시하며, 의자를 가리켰다.

"여기 앉게."

"···안 빼주셔도 됩니다만."

"기본적인 매너일세."

아드리안나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갈라하드의 옆에 앉았다. 그에 갈라하드는 만족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등받이에 등을 기대니 아드리안나의 놀라울 정도로 오똑한 코에 대공이 슬쩍 가려졌다. 그제야 소화가 좀 되는 기분이 들었다.

"사냥은 어떠셨습니까?"

"아주 재밌었네. 대공 전하와 사냥 내기도 했지."

"아, 내기하셨습니까?"

아드리안나의 시선이 잠시 대공에게 향했다. 묘한 분위기였다. 대공은 옆의 마물을 보고 있었다.

"내기는 어떻게 됐습니까?"

"간발의 차이로 내가 이겼네. 대공 전하의 배려 덕분이지."

"배려한 적 없다."

"맞네. 나는 마물 사냥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더군."

대공의 눈썹이 작게 구겨졌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대단하십니다. 틈만 나면 마물 사냥만 하시는 대공 전하를 이기시다니."

"크흠."

대공이 나지막한 기침을 했다.

"대공 전하의 실력이야 말할 것도 없지. 다만, 상대가 나였을 뿐일세."

대공의 눈썹이 휙- 올라갔다. 갈라하드는 슬쩍 아드리안나의 뒤로 숨었다.

아드리안나에게서 피 냄새가 옅게 섞인 탄 냄새가 풍겼다. 전선의 냄새였다.

"그러면 저 마물은 뭡니까?"

아드리안나가 대공의 말 마물을 가리키며 물었다.

"내 말이다."

"일단, 저건 말이 아니라 마물입니다, 마물은 길들일 수 없습니다. 전에도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셨습니까."

대공에게도 바른말을 퍼붓는 아드리안나에 갈라하드는 작게 감탄했다.

'전에도 몇 번 시도했었군.'

대공은 그 덩치가 마물과 비견될 정도로 컸다. 저 거대한 덩치를 견딜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마물을 길들이려고 노력했다니-. 대공스러웠다.

"또 전시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드리안나의 말에 갈라하드는 작게 탄식했다. 벽에 걸린 수많은 마물의 머리가 그 노력의 흔적이었다니-. 그 종류도 다양했다. 뱀부터 사자, 더불어 새의 형상도 있었다.

'저래서 그리 기뻐한 거군.'

의도치 않게 최고의 예물을 선물한 듯했다.

"마물이 아니라 북부의 정세를-."

"내가 해드렸네."

바른말을 퍼붓는 아드리안나에 갈라하드는 슬쩍 끼어들었다.

"···예? 해드리다니요?"

"마물 조련사의 마법진을 응용하여 길들인 것일세.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네. 유지하기 위해서 마물의 피가 상당히 필요하지만, 대공 전하가 어련히 잘하시지 않겠는가."

이번에는 대공의 눈썹이 올라가고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내려갔다. 이거 균형 잡는 게 좀 까다롭군.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휙- 내려갔다. 도끼눈이었다.

"마물 조련사라고 그러셨습니까? 마물 조련사는 제마전쟁때 마족의 편에서 큰 피해를 입힌 오대 악인 중 일인입니다. 악인의 기술을 쓰셨다는 겁니까?"

아드리안나의 정직한 지적이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자, 못된 대장장이가 있다고 생각해보게. 아주 놀라운 검을 만들어서 그걸로 마을 사람들을 핍박하는 못된 대장장이. 쓰레기 같은 놈이지."

"명검이 있어도 검술 실력이 형편없다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것도 맞는 말이지. 하지만 이 검은 아주 뛰어나서 휘두르면 불이 상대를 태워버리는 검이었다네."

"마검이군요. 이해했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끄덕였다. 그에 갈라하드는 이게 비유라는 걸 설명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 마검이지. 아무튼, 마검으로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못살게 군 거지. 어느 날 소년이 몰래 마검을 훔쳐서 마검으로 대장장이를 쫓아낸 거야. 그러면 소년은 악인인가?"

"아닙니다."

"그렇지. 그런 걸세."

아드리안나가 잠시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그에 갈라하드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 아주 못된 대장장이가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다만, 마검은 피를 탐합니다. 그걸 쥐고 있으면 대장장이가 될 겁니다."

"소년이 아주 똑똑한 놈이라네. 대장장이만 없으면 마검을 놓을 걸세."

아드리안나가 가만히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그 푸른 눈이 너무도 투명하여 가슴을 쿡쿡 찔렀다. 그에 갈라하드는 슬쩍 얼굴을 기울였다. 아드리안나가 당황하여 얼굴을 피했다.

그때, 대공과 눈이 마주쳤다.

"도둑놈이었군."

대공이 입꼬리를 사납게 올렸다.

갈라하드는 작게 헛기침하며 주의를 환기했다.

아드리안나는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갈라하드를 보며 입을 열었다.

"마검은 조심해야 합니다. 이건 믿음과 별개인 문제입니다."

진지한 대답에 갈라하드는 가만히 끄덕였다. 목이 조금 무거웠다.

이어서 아드리안나가 식사를 시작했다.

대공은 제법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드리안나가 있으면 대공은 좀 부드러워졌다. 고위 마물에서 최상급 마물 정도로 변했다.

분위기가 꽤 좋다고 볼 수 있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원했던 바를 떠올렸다.

'마족 도시에 대한 공.'

아드리안나가 마족 도시를 확인하고 돌아왔으니 이제 보상을 내려줄 것이다.

다만, 대공의 인정 같은 게 또 내려올 가능성을 지워야 했다. 대공의 인정은 더는 필요 없었다.

갈라하드가 원하는 건 따로 있었다.

그건 대공만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다만, 반발이 심할 게 분명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족 도시에 관한 공을 내려주실 거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

"안에 지배자라는 고위 마족이 있고 이백이 넘는 마족이 있던 도시를 무너뜨린 건 상당히 큰 공이지 않습니까?"

갈라하드는 슬쩍 아드리안나의 갑옷을 찔렀다. 열심히 먹던 아드리안나가 작게 놀라더니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를 더 방치했었다가는 큰 위험이 될 게 분명했습니다. 큰 공입니다."

아드리안나가 의견을 더했다. 그에 대공이 눈썹을 조금 구겼다.

"원하는 걸 말해라."

대공이 투박하게 물었다.

갈라하드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마석장 사업의 합법화입니다."

정적은 잠시였다.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대공의 거친 기세가 갈라하드를 눌렀다. 옆에 있던 마물이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아드리안나의 얼굴에 당황이 떠올랐다.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마족의 똥을 말하는 건가?"

대공의 목소리가 무심했다. 꼭 목을 조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목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마족의 똥이 아니라. 마석입니다만."

"쓸만하다고 봐줬더니 주체를 못 하는군."

대공의 반응이 격렬했다. 아무래도 마석의 인식이 생각보다 더 안 좋은 듯했다.

대공은 갈라하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만약 시선으로 갈라하드를 죽일 수 있었다면, 한 세 번쯤 죽었을 것이다.

'그와중에 쓸만하다니. 인정은 받은 건가.'

갈라하드는 슬쩍 아드리안나를 살폈다. 지원군인 아드리안나도 도끼눈이었다.

"마석은 저주받은 물건입니다. 마족과 마물, 제국에서 온 무법자들이 노리는 것입니다. 그에 희생된 북부의 전사가 셀 수없이 많습니다. 마석 합법화는 다소 복잡한 이야기입니다."

아드리안나가 빠르게 설명했다.

그들의 반발이야 이해할 수 있었다. 마법을 배척하는 북부 입장에서 마석은 그저 빛나는 돌일 뿐이니까. 심지어 탐내는 놈들이 계속 꼬이는 골칫덩이였다.

다만-.

"먼저 마석은 마족의 똥이 아닙니다. 수도에서는 금보다 비싼 게 마석입니다. 그 가치를 모르는 무식한 이들이야 돌이라고 우기는 것일뿐."

대공의 눈썹이 휘어졌다. 갈라하드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설령 마족의 똥이라고 해도-."

곧은 자세의 갈라하드에 아드리안나는 묘하게 다급해졌다.

갈라하드의 성격을 이제 아주 조금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대공 앞인데-.

아드리안나는 갈라하드의 눈이 슬쩍 웃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뭔가 저지르기 전의 모습이었다.

그에 말리려 했지만, 갈라하드의 입이 더 빨랐다.

"예산 없지 않습니까? 돈 없으면 똥이라도 주워서 팔아야지. 주울 똥이라도 있는 게 어디입니까?"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거칠게 흔들렸다.

85화 북부를 다시 위대하게

'살벌하군.'

갈라하드는 괜히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앞에서 지그시 노려보는 대공 때문이었다.

대공은 그저 가만히 응시하는 듯했지만, 그 시선이 상당히 무거웠다.

아무래도 마석에 관한 반감이 예상보다 큰 듯했다.

평생을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마족과 전쟁한 북부였다. 마족에 대한 반감이 강한 건 당연했다. 그들의 말처럼 마석과 마족은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더불어 마석을 팔려면 마족 못지않게 반감 있는 제국과 거래해야 했다.

그들에게 꽤 어려운 선택지가 분명했다.

다만, 필요한 선택지였다.

'아드리안나가 있으니, 목을 뽑지는 않겠지.'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곁눈질하면서 끄덕였다.

"마석은 그냥 똥이 아닙니다. 비싸게 팔리는 똥입니다."

갈라하드는 대공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말했다. 대공의 눈썹이 더욱 낮아졌다. 그 푹 꺼진 눈이 형형했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대공과 갈라하드 사이에 끼어들었다.

"마석을 정식으로 운용하면, 그를 노리는 외부 세력이 유입될 겁니다."

"맞는 말일세. 다만, 이미 충분히 유입되지 않았나? 마족 도시도 있던데."

"갈라하드 대장."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굳었다. 갈라하드는 슬쩍 대공을 쳐다봤다.

대공은 가만히 갈라하드를 응시 중이었다. 그 깊은 눈은 무슨 생각인지 안 보였다.

"어차피 이대로 가면, 북부는 끝입니다."

아드리안나의 건틀릿이 다급히 갈라하드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대공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맹수의 것이 분명한 굵직한 송곳니가 드러났다.

"자신 있나."

"예."

"그래,"

생각보다 쉬운 승낙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호걸이었다.

"감사합니다."

"대신-."

대공의 승모근이 크게 꿀렁였다. 뿌드득, 근육의 살벌한 소리가 갈라하드의 귀를 간질였다.

"책임도 네가 진다."

대공이 찐득한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대공의 시선이 마물 머리 컬렉션 사이에 큼지막한 빈 곳을 가리켰다.

문제가 생기면 저기에 걸겠다는 살벌한 협박이었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물론입니다."

책임이야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가늠한 일이었다.

다만, 요원은 굴을 두 개 이상 파는 법이었다.

지금처럼-.

"책임은 저희가 지겠습니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슬쩍 당기며 선언했다.

"······?"

아드리안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대공의 눈썹이 구겨졌다.

*

"왜 제가 같이 책임을 집니까?"

아드리안나는 평정을 애써 유지하며 물었다. 갈라하드는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결혼할 사이 아닌가. 책임은 나누면 반이 되는 걸세."

"···그럴 생각 없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지금은 그렇겠지."

뭐라 말해도 도대체 들어 먹지 않았다. 아드리안나는 답답함에 눈썹을 구겼다.

'단호하게 말해야 해.'

그에 다시 말하려는 순간-.

"북부의 자금 상황 위태롭지 않나?"

갈라하드가 먼저 물었다. 아드리안나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상당히 좋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제국의 지원이 끊긴 까닭입니다."

전쟁에는 돈이 많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제국에서 지원해주던 돈도 끊긴 상황이었다. 북부는 척박한 땅이었다.

"마석이 해결할 걸세."

갈라하드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견고했다. 확신이 가득하여 믿을 수밖에 없는 그런 목소리였다.

"대공 전하도 허락하시지 않으셨나."

"······그게 허락입니까?"

대공은 문제가 발생하면 갈라하드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선언했다. 그건 허락보다 협박에 가까웠다.

대부분 다 그렇게 생각할 것인데, 갈라하드에게는 다르게 들린 듯했다.

"허락일세. 끄덕이는 것 못 봤나?"

갈라하드가 시원하게 웃었다. 그에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어찌 사람이 저렇게 자신감이 넘칠 수 있는지 신기했다.

"자네, 수도 가본 적 있나?"

갈라하드의 뜬금없는 물음에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수도에는 하수도라는 게 설치되어 있네. 마석을 이용한 하수도 덕분에 오물이 지하를 통해서 밖으로 나가지. 거리에는 향긋한 향이 가득하고 마나 램프 덕분에 밤에도 낮처럼 밝다네-."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자그마한 불빛이 천천히 떠올라 빙글- 돌았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그를 쫓았다.

"마도구로 농업이 발달하면서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게 아닌 미식이 관심사가 됐지. 달콤한 케이크부터 향긋한 사탕까지."

갈라하드의 자세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아드리안나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녀의 세상은 전선이었기에, 붉거나 잿빛이었다. 그런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북부는 어떻나?"

갈라하드가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 그 모습이 정말 귀족 같았기에 아드리안나는 한 발짝 물러섰다.

"춥고, 굶주렸지. 아닌가?"

"······맞습니다."

사실이었다. 아드리안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똥이라도 태워 몸을 덥히고 먹어서 주린 배를 채워야지."

갈라하드의 목소리에는 작은 틈도 없었다. 무슨 뜻인지는 이해했다. 그의 말이 옳다는 것도 알았다.

다만-.

"······똥이라는 표현은 그만해주시겠습니까."

"아, 자네들이 그렇게 부르길래."

"식사 자리에서 똥 이야기를 하는 건 실례입니다."

"아, 그렇군. 명심하지."

뻔뻔한 대답에 아드리안나는 고개 돌려 작게 기침했다.

"아, 참모진이 모인 곳이 어디지?"

"좀 더 안쪽입니다. 그런데 참모진은 왜 찾으십니까?"

"허락 받았으니, 마석장 사업을 논의해야지."

방금 허락 아닌 허락을 받고 나온 상황이었다. 그런데 바로 참모진을 찾아가겠다니, 따라가기 힘든 진행력이었다.

"참모진은 까다로운 이들입니다."

"당연히 까다로울 걸세. 들어보니까 재무부터 시작해서 인사, 잡일을 전부 맡았던데, 신경이 날카로울 수밖에 없겠지. 어디인가?"

"이쪽입니다."

아드리안나는 참모진이 있는 곳을 안내했다.

참모진이 모인 방은 분주했다. 참모들이 움직이며 뭔가를 열심히 논의 중이었다.

참모진은 부서의 이동과 재무 등등 전반적인 것을 계획하는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참모진은 늘 차갑고 까칠했다.

그들은 대공이 아니라면,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실제로 아드리안나에게도 쌀쌀맞게 대했다.

그런 참모진이 열띤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갈라하드가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섰다.

"반갑네, 나는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라고 하네."

목소리 높여 당당하게 소개하는 갈라하드에 아드리안나는 당황했다. 참모진이 얼마나 까칠한지 모르기에 그러는 듯했다.

그에 아드리안나가 나서려는데, 참모진의 반응이 아드리안나의 예상과 달랐다.

참모들의 얼굴에 화색이 떠올랐다. 저 까칠한 이들이 웃는 것에 아드리안나는 작게 놀랐다.

"아, 갈라하드 대장. 여기는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님일세."

제일 먼저 다가온 테오도르가 방긋 웃었다.

아드리안나도 처음 보는 반응이었다. 그를 따라 참모들이 일어나서 갈라하드 주변으로 모였다.

북부에서는 싸우기에 덩치가 작고 힘이 약한 이들이 글을 배웠다. 그렇기에 참모진은 죄다 조그맸다. 그에 반해 갈라하드는 길쭉한 터라, 그 대비가 상당했다.

참모 사이에 갈라하드가 우뚝- 선 모양새였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이거 훤칠하시군요. 아드리안나님과 아주 잘 어울립니다."

"7대대의 마경을 훌륭하게 처리해주셨다고···."

"마족 도시도 있지! 그게 그냥 있었으면, 얼마나 골치 아팠겠나!"

참모진이 시끄럽게 갈라하드를 반겼다. 뚜렷한 호의에 아드리안나는 당황했다.

그때, 갈라하드가 금색 봉을 슬쩍 들었다. 그 화려한 금색 봉이 시선을 끌었다. 시끄럽던 참모들이 조용해졌다.

갈라하드가 조용해진 참모진을 둘러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대들의 노고야 진작에 들었네. 이런 불모지인 북부를 운영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나. 심지어 북부인들은 덩치도 커서 많이 먹지?"

갈라하드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참모진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갈라하드가 그들 하나하나 어깨를 두드려줬다.

"혹자는 무기를 들고 나가 싸우는 이들만 영웅인 줄 알지만, 전쟁을 이어 나가는 건 돈 아닌가. 그들이 먹는 것, 입는 것, 칼까지-. 뭐 하나 안 들어가는 구석이 없지. 그를 묵묵히 보좌하는 그대들이 진정한 전사이자 영웅일세."

갈라하드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자, 참모진 사이에서 거친 동의가 쏟아졌다.

"맞소! 이놈들 돈이 어디서 굴러오는 줄 안다고! 우리가 예산을 줄이고 싶어서 줄이는 줄 아나!"

"애초에 참모라고 묶어서 복잡한 일은 전부 맡겼다니까!"

참모들의 불평이 쏟아졌다. 아드리안나가 알던 냉철한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갈라하드는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의 노고야 내가 잘 알지. 북부가 이렇게 유지될 수 있던 건 전적으로 그대들 덕분일세."

"드디어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났어···!"

참모진이 크게 동요했다. 그들의 설움이 꽤 쌓인 듯했다.

아드리안나도 괜히 찔끔했다. 아드리안나도 몇 번 지원에 관하여 요청한 적 있었다.

"자, 영웅들을 위해 내가 좋은 소식 하나 가져왔네."

"좋은 소식 말입니까?"

참모들의 얼굴에 화색이 깃들었다. 갈라하드가 금색 봉으로 바닥을 찍었다. 쿵, 작은 소리에 참모진들이 작게 놀랐다.

"마석장 사업일세."

"······마석장 사업!"

참모들이 비명을 질렀다.

"자··· 잠깐만. 마석장이라고 하셨습니까?"

"마족의···. 음, 그 마석이 맞네."

"대공 전하께서 허락하셨습니까? 마족과 관련된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켜시는데···."

"이번에 마족 도시를 무너뜨린 공으로 내가 제안했지. 사소한 논의가 더 있겠지만, 일단은 받아들이셨네."

"오- 맙소사! 정말입니까?!"

"정말일세."

참모진이 소리 내어 '우-와-'했다. 이내 표정을 굳힌 참모가 손을 들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얼마든지."

갈라하드의 허락에 참모진이 다시 모였다. 빙 둘러선 참모가 머리를 맞대고 조용히 떠들었다.

기사인 아드리안나에게는 똑똑히 들렸다.

"마석이라면, 대장 몇몇이 몰래 팔던 것 아니오? 제법 짭짤하다던데."

"짭짤한 수준이 아니더군. 5대대 같은 경우에는 그걸로 부대 시설을 고쳤다니까."

"그때, 5대대의 그 추정 값어치가······."

"대공 전하께서 정말 그 마석장 사업을 허락하셨다는 건가? 이건-."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참모들이 고개를 위아래로 까닥거렸다.

"대박이군!"

참모진이 한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 열기가 가득했다.

다 들리는 짧은 회의를 마친 참모진이 다시 갈라하드의 앞에 모였다.

"마석장 사업에 관해서 잘 모르는데, 그 가치에 대해 정확히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일세. 자, 간단하게 가장 즐비한 하급 마석부터······."

갈라하드의 말이 거침없이 이어졌다. 갈라하드는 마석의 가치에 관해 북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예시까지 들며 설명했다.

참모진의 고개가 연신 위아래로 움직였다.

처음 들어보는 큰 금액에 아드리안나의 눈이 커졌다. 저 정도로 큰 금액일 줄은 아드리안나도 예상하지 못 했다.

"오오··· 그 빛나는 돌이 그렇게 비싸다는 것이오?"

"수도에서는 못 구해서 안달일세. 북부의 마석은 그 가치를 더 높게 쳐주지."

오오-. 감탄이 다시금 터졌다. 그러다 참모 하나가 의문을 제기했다.

"마탑과 어떻게 거래합니까? 제국의 대북 정책 때문에 마탑은 거래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제국의 눈치를 볼 테니까요."

"아, 그건 걱정하지 말게. 내가 일 잘하는 마법사들을 잘 아니까. 더 잡아 올 생각도 있네."

'······잡아 온다?'

묘한 단어에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오··· 역시 갈라하드 대장입니다!"

참모진이 다시금 격하게 호응했다. 그에 갈라하드가 그들의 손을 하나씩 맞잡아주며 끄덕였다. 그 모습이 상당히 묘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계획을 짜보지. 먼저 대장들이 가진 뒷구멍을 확실하게 캐내는 것부터 시작하는 걸세. 최근 대장 중에 받은 예산보다 더 윤택한 생활하는 이들이 있나? 아, 5대대랑 7대대는 빼고."

참모진들이 앞다퉈서 보고를 올렸다.

'이게 무슨···.'

순식간에 참모진을 휘어잡은 갈라하드에 아드리안나는 작게 당황했다.

"혼자 뒷돈 먹으면 탈이 난다는 당연한 세상의 이치를 알려주는 걸세. 자, 따라 하게."

갈라하드가 갑자기 금색 봉을 높이 들었다. 그 금색 봉에는 묘하게 시선을 끄는 힘이 있었다.

"북부를 다시 위대하게!"

갈라하드의 외침에 참모진의 눈이 커졌다. 힘이 넘치는 문구였다.

참모진이 입을 벙끗거렸다. 그러다가 이내 목청을 높였다.

""북부를 다시 위대하게!""

'······북부 출신 아니잖아요?'

화기애애한 모습에 아드리안나는 의문을 삼켰다.

****

"후후···. 드디어 도달했다."

퍼스트는 안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힘에 광소를 터뜨렸다.

마경이라 불리는 이 공간은 퍼스트에게 최적의 환경이었다. 퍼스트는 도착한 순간부터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훈련을 이어갔다.

그 동기는 역시 갈라하드였다. 오랜만에 마주한 갈라하드는 또다시 강해져 있었다. 역시 퍼스트의 대적자다운 면모였다.

조금 줄였나 싶었더니 다시 벌어진 격차는 누군가에게는 절망이지만, 퍼스트에게는 연료이자 동기였다.

그에 퍼스트는 아예 마경을 나서지 않았다. 마경 안에서 먹고 자고 싸고 모든 걸 해결했다.

그 피나는 노력은 이내 결실을 이루었다.

"후후-."

음흉한 웃음을 흘리는 퍼스트에 펌킨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아니, 시발 옷은 또 왜 다 벗으셨습니까."

"온몸으로 마주하기 위함이다. 후후-."

나체에 검만 달랑 든 퍼스트였다. 그 모습이 상당히 좆 같았다. 다만, 퍼스트의 검에 서린 오러와 그 위로 타오르는 불이 전보다 배는 커졌다.

"이것을 마나-오러라고 부르겠다."

"너무 성의 없는 이름인데. 아니, 좀 입으십쇼, 다 쳐다보지 않습니까."

"자신 있다. 갈라하드만 아니라면."

"자신 있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아오, 진짜 시발."

"펌킨, 너는 자신이 없나 보군."

"지랄 마십쇼."

펌킨이 거칠게 말했지만, 퍼스트는 듣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갈라하드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퍼스트는 줄곧 머리가 뚫린 상태였다. 말해봤자 이쪽 손해였다.

더불어-.

'크기가 작아졌어.'

펌킨은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마경의 크기가 전보다 작았다. 그 원인은 하나밖에 없었다.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를 위하여!"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

퍼스트의 말처럼 홀딱 벗고 구르는 저들 때문이었다.

7대대의 중대장부터 시작된 훈련이 병사에게까지 퍼지며, 모두 구르고 있었다. 그에 흡수된 건지, 마경의 크기가 전보다 작아졌다. 마경을 맨몸으로 흡수해서 지우고 있었다.

펌킨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를 뒤졌다.

"명령서 왔습니다."

"흠. 명령서?"

퍼스트가 명령서를 받아 읽었다.

내용은 대충 예상이 됐다. 맡은 임무를 조속히 진행해라-. 뭐 그런 것일 게 분명했다.

펌킨은 이후 퍼스트의 반응도 당연히 예상했다.

"귀찮게 하는군."

퍼스트가 주저 없이 명령서를 찢었다. 그에 펌킨은 한숨을 쉬며 흩어진 종이를 챙겼다.

위에서 내려온 명령도 머리에 구멍이 뚫린 퍼스트를 말릴 수는 없었다.

"누구도 내게 명령을 내릴 수 없다. 내가 인정하는 건 갈라하드 뿐이지."

퍼스트가 검을 챙기며 말했다. 그 얼굴에 단호함이 가득했다.

"징계 두 번 더 받으면 은퇴당할 겁니다."

펌킨은 웃음을 지우고 진지하게 말했다. 요원에게 은퇴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죽음-.

"이런, 아직 두 번이나 남았군."

시원하게 웃는 퍼스트에 펌킨은 얼굴을 가득 구겼다.

"그리고 갈라하드가 아니라면 누가 나를 은퇴시킬 수 있지?"

퍼스트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다만-.

"시발, 저도 같이 은퇴당하는 거 까먹었습니까?"

"걱정하지 말게. 자네는 내가 책임질 테니."

펌킨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언뜻 멋있는 대사였지만-.

"제발, 옷 좀 입으십쇼."

펌킨은 눈을 구기며 퍼스트의 갑주를 내밀었다.

그때, 옆에서 병사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적나라한 나체에 펌킨은 작게 욕을 중얼거렸다.

"찾으시는 분이 계십니다."

"날 찾는다?"

그에 고개를 돌리자, 까마귀 가면을 쓴 이가 있었다. 흑마법학회 쪽 인물이었다

"그······. 갈라하드 대장이 마법사 잡기 내기를 신청하셨습니다."

까마귀 가면을 쓴 이가 잔뜩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 말하면서도 이게 맞는지 의문인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속이 뻔히 보이는 내기 신청이었으니까.

'우리를 무슨 하수인으로 아는 건가.'

다만-.

"그 내기-. 받아들이겠다."

퍼스트의 격한 대답에 펌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수인은 돈이라도 받지-.

펌킨은 혀를 차며 마물 코트를 내밀었다.

86화 데이트

"마법사를 구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아드리안나가 특유의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갈라하드는 작게 끄덕였다.

"맞는 말일세. 제국의 대북 제재 때문에, 정규 마탑은 못 오겠지."

"그러면 어떻게 구하실 생각입니까?"

"자네, 마탑에 속한 마법사가 전체의 몇 정도인지 아나?"

"모릅니다."

"당당해서 좋군. 마탑에 속한 마법사는 열 중 하나도 안 되네."

"아카데미 밖의 마법 강습은 금지되었다고 압니다."

"오, 자네가 그런 것도 아나?"

"저 길버튼 경 아닙니다."

아드리안나의 진지한 대답에 갈라하드는 작게 웃었다.

"맞네, 금지했지. 다만, 금지한다고 안 할 놈들인가?"

아드리안나가 잠시 눈썹을 찡그렸다.

"마탑 소속이 아닌 마법사들을 부르실 생각이십니까?"

"부를 필요가 없네."

"예?"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작게 흔들렸다. 그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북부에 이미 많으니까."

"···북부에 많습니까?"

"최근 문제가 계속 발생하지 않았나? 대부분 욕심만 넘치는 마법사가 저지른 짓일 걸세."

"아-."

아드리안나가 작게 탄식했다.

"하긴 이상했습니다. 마물이나 마족은 원래 자주 나왔지만, 마법사나 부랑자는 적었는데 최근 들어 너무 많이 늘었습니다. 원인이 뭔지 아십니까?"

아드리안나의 진지한 물음에 갈라하드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크흠, 마석에 관한 소문이 돌아서 그런 것 아니겠나?"

"그렇다기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습니다. 누가 밀어 넣은 것처럼-."

"이런 밀긴 누가 밀었다는 건가. 다 사연이 있었겠지. 아무튼, 중요한 건 일꾼들은 북부 곳곳에 있다는 걸세."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드리안나가 이내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러면 놈들을 어떻게 찾습니까?"

갈라하드는 연초를 작게 털었다. 레몬 향이 풍겼다. 아드리안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찾을 필요가 있나. 모으면 되지."

"모은다고요?"

"음, 여기 정도면 적당하겠군. 이거 무슨 건물인가?"

갈라하드가 뒤쪽을 보며 물었다. 그러자 뒤에서 거리를 두고 따라오던 참모진이 달려왔다.

"창고와 보급소입니다!"

테오도르가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옮겨도 되겠군."

"물론입니다."

"그러면 여기부터 저기까지 밀어버리지."

"예! 여기부터 저기까지 밀어!"

참모진이 시끌벅적해졌다. 그에 당황한 아드리안나는 갈라하드에게 물었다.

"저기를 왜 미는 겁니까?"

"아, 마탑을 세울 걸세."

그렇구나. 마탑을 세우는구나. 중얼거리던 아드리안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러다가 이상함의 정체를 깨달았다.

"······지금 마탑을 세우신다고 하셨습니까?!"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드물게 높아졌다. 그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세울 생각일세."

"······마탑을 말입니까?"

"대공의 허락도 받았는데, 문제 될 게 있나?"

당당한 갈라하드의 반문에 아드리안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대공 전하가 언제 마탑을 허락하셨습니까?"

"마석장 사업을 허락하셨지. 마탑은 마석장 사업의 가지일세."

갈라하드가 시원하게 웃었다. 정말 아무 문제 없다는 듯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었다.

'마탑이 짓는다고 지을 수 있는 건가?'

아드리안나는 잠시 중얼거리다가 이내 끄덕였다. 갈라하드가 아무 계획도 없이 말한 건 아닐 것이다.

"마탑을 짓고 내 이름을 걸면 마법사들은 알아서 모일 걸세. 내가 워낙 유명한 천재인 터라. 음, 마탑을 지으려면 마법서를 몇 개 써야겠군. 그리고 수확해온 마석당 마법서를 나눠주면 될 거 같고-."

갈라하드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아드리안나가 묘한 눈으로 갈라하드를 보고 있었다.

"내가 잘생긴 건 알지만, 그렇게 뚫어져라 보면 닳네만."

"본다고 닳지 않습니다."

"잘생긴 건 인정하는군."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쭉- 올라갔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작게 저었다.

"마법을 정말 좋아하시나 봅니다."

"당연한 걸 묻는군. 나는 마법사일세,"

그리 말하는 갈라하드가 묘하게 빛나는 듯하여 아드리안나는 한 발짝 떨어졌다.

"마탑의 이름은 뭐로 하실 겁니까?"

"이름? 음-."

갈라하드는 턱을 매만졌다. 마석장 사업을 위해서 짓는 마탑이지만, 앞으로 전략적 요충지가 될 가능성이 컸다.

"정오일세."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왜 정오입니까?"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물었다.

"제일 밝고 따뜻한 때니까."

"아, 그렇군요, 좋은 이름 같습니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탑은 어떻게 짓습니까?"

"첨탑과 똑같네. 대충 겉모습만 그럴듯하면 되니까."

"그렇군요. 오래 안 걸릴 겁니다."

"오래 안 걸린다? 제법 높이 지어야 하네만."

"예, 마물이나 마족의 습격이 잦은 터라, 성벽은 잘 짓습니다. 놀라실 겁니다."

아드리안나의 장담에 갈라하드는 작게 웃었다.

다른 건 몰라도 몸 하나만큼은 대륙 제일인 북부의 병사들이었다. 오면서 봤던 성벽들도 까마득하게 높았고-. 빠르게 짓는다는 건 사실일 것이다.

다만, 결국 무식하게 짓겠다는 거 아닌가. 마법을 쓰는 게 더 효율적일 게-.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거기! 밀어!"

그때, 참모진이 갈라하드가 지정한 곳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에 병사들이 달라붙었는데, 그 기세가 꽤 흉흉했다. 심지어 어떤 놈은 오러까지 일으켰다.

건물을 부수는데, 오러를 쓰다니-.

'상당히 무식하군.'

대신 확실히 빨랐다. 큼지막했던 건물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북부는 여러모로 대단하군."

"예."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에 갈라하드는 작게 웃었다.

'마석장이라.'

대공의 성은 큼지막하고 황량했다. 전쟁의 냄새가 가득 풍겼다. 당연한 일이었다. 사시사철 눈이 내리는 척박한 땅에서 어찌 풍족하겠는가.

다만, 마석은 이야기가 달랐다. 마석은 가치가 점점 더 높아지는 중이었다.

마석에 관한 가설은 몇 가지 있었다. 마족의 시체가 뭉쳐진 것이 마석이라는 게 대중적인 주장이었다.

그 이론이 사실인지, 마족과 전선이 맞닿은 북부에는 마석장이 많았다. 더불어 마석의 질도 좋았다. 마나 농도가 높기 때문일 것이다.

즉 북부는-.

'산유국이라는 거지.'

다른 곳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압도적인 산유국. 그 가치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아드리안나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듯 마석에 대한 반감이 상당했다.

'인식 개선은 어차피 이뤄질 것이고.'

굳이 노력할 필요 없었다. 대장들이 뒷구멍으로 마석장을 판 것처럼, 마석이 돈이 된다는 걸 깨달으면 좋아할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꽤 많은 난관이 남았다. 제국의 대북 제재에 유통은 쉽지 않을 것이고, 날파리들도 잔뜩 꼬일 것이다.

만약 그를 이겨내고 무사히 마석장 사업을 안착시킨다면-.

'대륙의 판도가 바뀌겠군.'

마족과의 전선에서 벼려진 북부의 전투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북부에서 가장 부족한 게 자금이었다.

만약 마석장 사업으로 자금 문제를 해결한다면, 아예 판도가 바뀔 것이다.

'차라리 공국 선언을 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군.'

갈라하드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드리안나는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묘하게 뿌듯해 보였다.

산유국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마족의 왕을 찌를 검-.

"약혼식 꽃은 장미가 좋겠지?"

"예? 장미보다는 백합이-. 아니, 약혼식 할 생각 없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백합이라. 꼭 기억하겠네."

"···아닙니다!"

잔뜩 흔들리는 아드리안나의 눈썹에 갈라하드는 작게 웃었다.

연초의 연기가 끊기듯 뿌려졌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드리안나가 단호하게 말하려는 순간-.

"아, 달콤한 거 먹으러 가겠나?"

갈라하드가 가벼이 손을 내밀었다.

마경에서 탈출할 때, 지나치듯 한 대화였다. 그걸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아드리안나는 작게 놀랐다.

"···이곳에는 달콤한 음식을 파는 곳이 없습니다."

"한 곳 있네. 파는 건 아니지만, 있을 걸세."

갈라하드의 대답에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는 북부의 성이었다. 아드리안나가 태어난 곳인데, 갈라하드가 더 잘 안다는 듯 말했다.

다만, '달콤한'이 아드리안나를 콕콕 찔렀다.

'이건 정보 수집이다-.'

"자네, 눈썹이 올라갔네."

"······예?"

"아닐세, 가지."

****

정보국 안가의 핸섬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안가에 거주하는 요원은 할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동태를 파악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면 보고를 올리는 게 전부였다. 일반인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정보국에 들어온 엘리트 기사가 하기에는 다소 무의미한 일이었다.

안가로 배치된 건, 한마디로 요원 생활이 끝났다는 이야기였다.

다만, 최근 상황이 변했다.

마기사라는 별명을 지닌 상위 요원, 퍼스트가 이쪽 안가로 내려왔다.

그런 강자를 북부로 보낸 이유는 분명했다.

'본부에서 북부에 관심이 늘고 있다.'

갈라하드 때문일 것이다. 갈라하드가 오면서부터 북부의 정세가 바뀌었다.

문제는-.

'왜 나 혼자지?'

분명 보충이 있었는데-.

퍼스트는 정보만 얻고 바로 사라졌다. 퍼스트가 가져다준 물품이 제법 많았지만, 결국 핸섬 혼자 남았다.

다만, 이 고요도 나쁘지 않았다.

그때-.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핸섬은 칼자루를 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견하기 힘든 곳에 배치한 안가였다. 지나가는 이가 방문한 건 아닐 것이다.

핸섬은 문에 슬쩍 기대며 칼자루를 돌렸다. 문이 열리면 공격할 수 있도록 준비를 끝낸 핸섬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오!"

핸섬의 입에서 완벽한 북부 말투가 튀어나왔다.

답이 없었다.

'···장난인가?'

핸섬은 눈을 구겼다.

문이 달그락거렸다. 다섯 겹으로 보안이 된 마법 문이었다. 열릴 리가 없었다.

그때-.

"자네, 이것 좀 잡아보게."

어딘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유로우면서도 정중한 목소리-. 갈라하드였다.

핸섬은 꿀꺽 침을 삼켰다. 저번에 갈라하드가 문을 뚫었지만, 지금은 보안이 그때보다 강화된 상태였다.

열릴 리가 없었다.

'······안가를 어떻게 찾은 거지?'

"남의 집 문을 함부로 열면 안 됩니다."

"남의 집이 아닐세."

"예? 아, 알겠습니다."

묘하게 차분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달그락. 손잡이가 옆으로 바로 돌아갔다. 작은 저항도 없었고, 알람이 울리지도 않았다.

"안 잠겨 있습니다."

"잠겨 있었네. 자네가 지웠을 뿐이지."

문이 가벼이 열렸다. 길쭉하고 멀끔한 제국의 귀족, 갈라하드가 앞에 있었다.

갈라하드의 시선이 칼자루 위에 올려진 핸섬의 손을 향했다.

"뽑을 건가? 추천하지 않네만."

갈라하드의 물음에 핸섬은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찾으셨습니까?"

"이곳만 문이 튼튼하더군."

"예?"

"그런 게 있네. 잠깐 좀 들어가도 되겠나?"

정중한 요청이었지만-.

'보통 문을 열기 전에 묻지 않나?'

그때, 갈라하드의 뒤의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여인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외모였다. 북부의 최연소 소드 마스터 아드리안나였다. 핸섬이 정보국 요원이라고 한들, 소드 마스터의 상대는 아니었다.

그걸 떠나서 갈라하드에게는 은혜를 받은 입장이었다. 핸섬은 슬쩍 옆으로 비켰다.

"고맙네. 들어오게."

"예. 이색적이군요."

둘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들어왔다. 꼭 갈라하드의 집으로 보였다.

"수도의 방식일세. 자, 앉게나."

갈라하드가 익숙하게 의자를 빼줬다. 그에 아드리안나가 멈칫거렸다.

"안 빼주셔도 됩니다."

"알았네."

갈라하드가 의자에 쏙 앉았다. 아드리안나가 잠시 멈칫거리더니 기침했다. 아드리안나가 반대쪽으로 가서 앉았다.

"핸섬, 달콤한 것 좀 있나?"

"예, 있습니다만."

"좀 내와 주겠나? 부탁 좀 하겠네."

당연하다는 듯한 요청에 핸섬은 자기도 모르게 끄덕였다.

보급으로 초콜릿이나 사탕 같은 게 오긴 했다. 입에 안 맞아서 그냥 쌓아둔 상태였다.

'······이게 맞나?'

접시에 초콜릿과 사탕을 담던 핸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갈라하드가 보고를 올렸다면, 은퇴했을 핸섬이었다. 그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만-.

"와-. 정말 맛있습니다."

"자네는 단 걸 먹으면 토끼 눈이 되는군."

"······그런 적 없습니다."

"도끼눈이 됐군."

'아니, 왜 여기서 데이트를······.'

북부의 추위에 이제 좀 적응이 됐나 싶었는데-.

핸섬은 묘하게 시림을 느꼈다.

****

"후후-. 갈라하드, 내가 왔다.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음흉하게 웃지 마십쇼. 다 쳐다봅니다."

펌킨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익숙하게 특무대 증명서를 내밀었다. 그를 본 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특무대 대장이 마탑이라는 괴상한 걸 짓는다던데-."

"마···탑? 마탑?"

퍼스트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 눈동자가 뒤룩- 굴렀다. 시발. 펌킨은 나지막하게 욕을 중얼거리며 황급히 앞으로 나섰다.

"저희도 복귀 중이라 잘 모릅니다."

"아, 그렇군."

병사가 옆으로 비켰다. 펌킨은 퍼스트의 팔뚝을 잡고 질질 끌었다. 퍼스트의 눈이 이리저리 굴렀다.

"소문일 겁니다. 아무리 갈라하드라고 해도 마탑을 어떻게 짓습니까. 제국에서 허락할 리가 없습니다."

펌킨은 다급하게 말했다.

"아무리 갈라하드가 뛰어난··· 퍼스트님과 겨룰 실력자라고 해도 마탑은 영역이 다르지 않습니까? 허락을 이미 받아뒀을 리도 없고. 소문일 겁니다."

"그렇지. 아무리 갈라하드라도 마탑은 아니지. 하지만! 놈이 마탑을 세운다면-!"

퍼스트의 눈이 빙글- 돌았다. 열을 뿜어내는 퍼스트에 펌킨은 질색했다.

"나는 마검탑을 세울 것이다."

퍼스트가 진지하게 선언했다. 그 눈이 한껏 가라앉아 있었다. 진심이 분명했다.

'마검탑은 무슨-.'

펌킨은 작게 욕을 중얼거렸다.

"자네는 마검부탑주일세."

"예, 뭐 영광입니다."

허락 없이 마탑을 세우면, 최소가 반란죄였다. 펌킨은 대충 흘렸다.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으니까.

그때, 앞쪽이 소란스러웠다. 그에 시선을 돌린 펌킨은 눈을 찡그렸다.

성의 구조야 진작에 외웠다. 큼지막한 건물이 있던 곳이 깨끗하게 밀려 있었다.

문제는 거기에 돌을 동그랗게 쌓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직 밑부분이지만, 그 형태는 분명-.

'마탑이잖아.'

시발. 펌킨은 욕을 중얼거렸다.

갈라하드의 능력이야 펌킨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마탑은 궤가 다른 이야기였다. 포부가 크다는 것으로도 부족했다.

'부마탑주-!'

펌킨은 다급히 퍼스트를 확인했다.

다행히 퍼스트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때, 퍼스트의 고개가 돌아가려 했다. 펌킨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휘둘렀다.

퍽.

펌킨의 주먹이 정확히 퍼스트의 볼에 꽂혔다. 펌킨도 기사였다. 그 주먹에 상당한 힘이 실렸는데, 그를 정통으로 맞은 퍼스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 지금 내 볼에 뽀뽀한 건가?"

"···내기! 내기가 있습니다."

"아! 내기!"

퍼스트의 신경이 바로 돌아갔다. 그에 펌킨은 작게 안도했다.

이어서 정보국의 안가에 도착했다.

"마법 보안은 언뜻 완벽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명백한 허점이 존재하지. 가령 마나를 이렇게-."

퍼스트가 주절주절 떠들었다. 갈라하드가 정보국 안가의 문을 땄다는 이야기 때문인 게 분명했다.

퍼스트의 강함은 인정했지만, 마법 보안문은 다른 영역이었다. 퍼스트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열쇠 마도구 받았잖아.'

그때-.

덜컥. 퍼스트의 손에 문손잡이가 덜렁 들렸다. 퍼스트가 잠시 멈칫거렸다. 진짜 열릴 줄은 예상 못 한 듯했다.

이내 퍼스트가 호탕하게 웃었다.

"자, 이론의 힘일세."

"미친, 그걸 왜 부십니까."

"아니, 부순 게 아니다. 파훼일세."

"그 값이 얼만데-. 또 봉급 까이잖아! 이 무식한!"

"크흠."

퍼스트가 슬쩍 손잡이를 다시 넣었다. 다만, 이미 고장 난 손잡이였다. 힘을 잃은 손잡이가 바닥을 뒹굴었다.

펌킨의 눈치를 슬쩍 본 퍼스트가 호기롭게 웃었다.

"이거 싸구려군."

"진짜 좀-."

퍼스트가 도망치듯 안으로 들어갔다. 그에 펌킨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따라 들어갔다.

퍼스트가 그대로 멈췄다. 갑자기 멈춘 퍼스트에 펌킨은 눈을 구겼다.

"왜 그럽니까?"

펌킨은 퍼스트의 옆으로 고개를 넣어 안을 살폈다.

안에는 갈라하드가 긴 다리를 꼬고 있었다.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여유로웠다.

그 건너편에 여자 기사가 정자세로 앉아 있었는데, 뭔가를 잔뜩 먹었는지 볼이 약간 빵빵했다.

영락없는 데이트였다.

'왜 정보국 안가에서 데이트를······?'

그 여자 기사의 외모가 놀라웠다.

'와- 사람 맞나?'

그 완벽한 외모에 펌킨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경외심까지 들 정도의 외모였다.

그때, 퍼스트의 고개가 홱- 하고 돌아갔다. 퍼스트가 진지한 눈으로 펌킨을 위아래로 살폈다. 그리고 다시 여자 기사로 고개를 돌렸다. 음- 작게 침음성을 흘린 퍼스트가 다시 펌킨을 살폈다.

퍼스트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명백한 패배감이었다.

원래라면 기분이 나쁘겠지만, 상대가 저 여자 기사인 터라 그런 생각도 안 들었다.

저 여인은 아름다움이라는 단어의 정의였으니까.

다만, 퍼스트의 입이 달싹거렸다.

지랄을 시작하려는 징조였다.

저 입은 닫고 싶었다.

"펌킨."

"닥치십쇼."

"나는 펌킨 자네가 더-. 크흑!"

"제발 닥쳐."

퍼스트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꼭 힘든 일이라는 것처럼 헐떡거렸다.

깊게 숨을 내쉰 퍼스트가 갈라하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갈라하드, 이건 승부가 아니다! 사람마다 매력이 다른 걸세!"

퍼스트가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멋진 말을 바락바락 소리쳤다.

문제는-.

'아무도 그런 말 안 했잖아-. 제발.'

당사자인 펌킨이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여자 기사가 놀란 얼굴로 이쪽을 쳐다봤다. 갈라하드와 다른 요원의 시선이 쏠렸다.

'그만 해-'.

펌킨은 간절히 빌었지만, 퍼스트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펌킨도! 펌킨의 매력이 있다! 예를 들면-!"

제발-.

"펌킨의 승모근이 그쪽보다 두껍다! 하하!"

닥쳐-.

펌킨은 화끈한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87화 요원 갈라하드

"······죄송합니다."

펌킨이 고개를 정중하게 깊이 숙였다. 그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었다.

그 이유는-.

"승모근만이 아니지! 삼각근도 펌킨이 더 크다!"

"제발, 닥쳐주십쇼. 아니, 혀 깨무십쇼."

옆에서 기세등등하게 외치는 퍼스트 때문이었다. 펌킨은 어금니를 꽉 다물고 말했다.

둘이 왁자지껄 떠들었다.

아드리안나가 살짝 경계하는 태도로 고갯짓했다. 그 손은 이미 칼자루에 있었다. 볼록한 볼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단 걸 정말 좋아하는군.'

평소 무표정을 유지하는 아드리안나가 드물게 목소리를 높일 정도였다.

이내 아드리안나가 꿀꺽- 삼켰다. 그 표정이 잠시 풀어졌다가 금세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아시는 분들입니까?""직장 동료들일세. 이쪽은 퍼스트, 저기는 펌킨. 자, 여기는 내 예비 부인 아드리안나일세."

"······예비 부인 아닙니다. 1대대 대장 아드리안나입니다."

"오, 그대가 북부의 영웅, 얼어붙은 꽃, 최연소 소드 마스터 아드리안나로군."

퍼스트가 호기롭게 손을 내밀었다. 그에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살짝 내려갔다.

"미안하지만, 아드리안나는 나만 건드릴 수 있네."

갈라하드는 퍼스트의 손을 잡으며 상황을 설명했다.

"건드리면-?"

퍼스트가 눈썹을 까닥거렸다. 특유의 승부욕이 분명했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아드리안나의 손을 잡고도 버틴 건 갈라하드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마법사가 아드리안나를 건드렸다가는 백치가 될 수도 있었다.

퍼스트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굳이 일을 만들 필요 없었기에 말릴 생각이었다.

다만, 퍼스트는 세게 말하지 않으면 안 듣는 놈이었다.

강하게 말할 필요가 있었다.

"건드리면···."

갈라하드는 잠시 말을 골랐다.

이내 적당한 단어를 선택했다.

"죽을 걸세."

갈라하드는 진지하게 충고했다. 퍼스트의 눈이 커졌다. 펌킨이 탄성을 터뜨렸다.

"와아-. 갈라하드님이 그렇게 말하는 건 처음 봅니다."

펌킨이 소리 내어 감탄했다. 그 눈이 묘하게 반짝였다.

"크흠, 농담이다. 그건 공정한 경쟁이 아니니까. 그럴 생각 없었네."

퍼스트가 겸연쩍은 얼굴로 살짝 물러났다.

"······."

아드리안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누가 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모습이었다.

그제야 갈라하드는 어감이 조금 이상했음을 깨달았다.

"그래, 그대가 그 아드리안나군."

금세 기운을 되찾은 퍼스트가 다시 앞으로 나섰다.

"예, 1대대 대장 아드리안나입니다."

아드리안나는 손을 내미는 대신 짧게 목례했다.

그러자 퍼스트가 눈에 힘을 주며 아드리안나를 노려봤다.

"일단, 다들 앉지."

갈라하드가 먼저 자리에 앉자, 퍼스트가 맞은편에 바로 앉았고, 펌킨이 한숨을 내쉬며 퍼스트 옆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아드리안나가 빈자리인 갈라하드의 옆에 앉았다.

갈라하드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마탑을 아무리 빨리 지어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마탑은 중장기적인 계획이었다. 당장 지금 마법사를 잡아 올 필요가 있었다. 그를 위해서 퍼스트를 부른 것이다. 대신 5대대 대장을 마경 훈련을 핑계로, 마경 훈련소 쪽으로 옮겼다.

그때-.

쿵. 퍼스트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테이블이 거칠게 흔들렸다. 죄송합니다. 펌킨이 대신 사과했다.

퍼스트의 눈은 아드리안나에게 꽂혀 있었다.

"그 갈라하드가 결혼하는 상대가 누군가 했더니만-."

그리 말하는 퍼스트의 목소리가 상당히 찐득했다.

이내 아드리안나를 살핀 퍼스트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인정할 수밖에 없군! 승모근이 조금 아쉽지만! 그래, 갈라하드를 가지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아니, 네가 뭔데 인정을 하니마니 하십니까. 죄송합니다."

"······?"

아드리안나의 얼굴에 당황이 떠올랐다. 그 시선이 잠시 방황했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에 퍼스트가 예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마법사 잡기 내기라고. 무슨 꿍꿍이지?"

퍼스트가 상체를 슬쩍 기울이며 물었다.

퍼스트의 눈은 번지르르한 광기가 넘실거렸다. 마법과 기사의 길을 동시에 걸은 후유증이었다.

마법과 검을 동시에 잡으려면, 똑똑하면서 멍청해야 했다.

기사의 멍청함과 마법사의 똑똑함은 반대가 아니었다. 다만, 서로 영향을 미치는 건 분명했다. 퍼스트가 저렇게 된 건 그에 대한 부작용이었다.

"꿍꿍이라니. 사업 하나 하려는 걸세."

"사업? 마석장이겠군."

"정답일세."

"대공의 허락은 받은 건가?"

"비슷하네."

"제국이 가만히 안 있을 텐데?"

"두렵나?"

갈라하드의 물음에 퍼스트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그럴 리가. 그러면 못 돌아갈 텐데?"

퍼스트가 슬쩍 아드리안나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마석장을 운용하면, 본격적으로 정보국과 대립하게 될 것이다. 감찰실 놈들을 보내겠지.

'오랜만에 그리운 얼굴들을 만나겠군.'

더불어 북부로 요원을 더 많이 파견할 게 분명했다. 상당히 번거로워지겠지.

다만-.

갈라하드는 슬쩍 연초를 입에 물었다. 퍼스트의 눈이 굳었다. 퍼스트의 손이 허리춤으로 내려갔다. 퍼스트가 슬쩍 펌킨을 뒤로 밀었다.

연초에 불이 붙었다, 레몬 향이 작게 퍼졌다. 퍼스트가 호흡을 늦췄다.

"지금과 다를 게 있나?"

어차피 버려진 입장이었다.

퍼스트의 얼굴이 험하게 구겨졌다. 이어서 느끼한 미소가 떠올랐다.

"없겠군."

갈라하드는 슬쩍 손을 풀었다.

퍼스트는 유능한 요원이었다. 적으로 돌리면 상당히 귀찮아질 게 분명했다. 엇나갈 거라면, 지금 처리하는 게 맞았다.

요원 생활을 꽤 오래 한 갈라하드는 순간의 주저함과 감정에 의한 판단이 맹독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끊는 건 빠를수록 좋았다.

정적은 짧았다. 퍼스트가 예의 미소를 지었다.

"의외군. 직장에 애착이 있는 줄 알았네만. 자네처럼 열심히 오래 일한 요원은 없었으니까."

"그때는 그게 가장 유력한 방법이었으니까."

"지금은 달라졌나?"

그에 갈라하드는 시선을 돌렸다. 아드리안나가 무심히 시선을 받았다.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는 자세였다.

"달라졌네."

아드리안나의 볼이 살짝 움직였다.

퍼스트가 눈을 찡그렸다.

"여전히 그 마족의 왕 이야기인가?"

"맞네."

퍼스트가 입을 달싹거렸다. 그 눈에 불퉁한 기색이 깃들었다.

"경쟁자로서 그대를 존중하네. 다만, 마족의 왕에 관한 이야기는 자네가 틀렸어. 마족의 왕은 존재하지 않네. 그 당연한 이치를 왜 모르는 거지?"

퍼스트가 격하게 반발했다. 원래라면 갈라하드는 반박했을 것이다.

다만, 이제는 그게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어차피 설명해도 통하지 않을 것이기에, 반박할 가치가 없었다.

그에 갈라하드가 끄덕이려고 할 때-.

"마족의 왕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없다고 단정 지을 근거는 부족합니다."

도끼눈을 뜬 아드리안나가 반박했다.

'이런.'

갈라하드는 묘한 울렁임을 느꼈다.

"없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마족의 왕이 존재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것과 다릅니다. 북부의 최전선에서 평생을 보낸 제 의견은-."

갈라하드는 슬쩍 아드리안나를 두드렸다.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었다. 설명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됐네. 자, 그래서 할 건가?"

갈라하드의 물음에 퍼스트의 표정이 돌아왔다. 예의 느끼한 얼굴이었다.

"마법사 잡기 내기라. 재밌겠군. 막내 때 생각도 나고. 그렇지 않나?"

퍼스트가 빙글 웃으며 물었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아카데미 밖에서 마법을 배운 마법사를 불법 마법사라 칭하는데, 요원 막내 때는 불법 마법사를 잡으러 다니는 게 주된 업무였다.

실전을 겪게 하면서 현장에 적응시키기 위함이었다.

다만-.

"자네, 나보다 늦게 들어오지 않았나? 그리고 나는 막내 생활을 별로 안 했네."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갈라하드는 막내 때도 두각을 드러냈다. 곧바로 막내 임무에서 제외됐다. 퍼스트와 겹친 적이 없었다.

퍼스트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나도 삼 개월 만에 막내에서 제외됐네만."

엘리트들만 모인 정보국에서 막내 적응기는 보통 1년 정도였다. 삼 개월이라면 유능하다는 건 분명했다.

다만-.

"미안하지만, 나는 첫 임무에서 제외됐네."

퍼스트의 눈동자가 빙그르르- 돌아갔다. 펌킨이 대놓고 배를 잡으며 웃었다.

그에 퍼스트가 반발하듯 입을 열었다.

"그건 베아트···."

퍼스트는 입술을 벙끗거렸다. 갈라하드의 손가락이 퍼스트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난이 심하군."

갈라하드의 지적에 퍼스트는 천천히 끄덕였다.

그에 갈라하드는 여유롭게 웃었다.

"자, 그러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마법사를 잡는 방식에 대해서 논의하지-."

"크흠. 좋네. 오랜만에 몸 좀 풀겠군."

'쫄았네- 쫄았어.'

펌킨은 키득키득 웃었다.

*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인정할 수 없다."

"죄송합니다. 제발, 닥치십쇼."

펌킨이 열을 올리는 퍼스트를 질질- 밀면서 사라졌다.

마석장 사업이 의심되는 대장의 목록을 퍼스트에게 줬다.

대공이 6대대 대장의 머리를 뽑은지 얼마 안 됐다. 대장들은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릴 가능성이 컸다.

놈들의 뒷주머니를 잡아 오기 좋은 시기였다.

"···왜 마족의 왕에 저렇게 반응하는 겁니까?"

아드리안나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군가 마족의 왕에 관한 개념 자체를 지운 듯하네. 그 때문에 마족의 왕에 관해 물으면 저렇게 반발이 올라오는 것이고-."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며 대답했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외부의 힘이 작용한 게 아니라면 저런 반응이 나올 리가 없지 않나?"

"아-."

"자네도-. 마를 불태우는 성질 탓에 자네한테 통하지 않았다는 거니까. 명백한 증거지."

아드리안나가 작게 탄식했다. 그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제야 마족의 왕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갈라하드 대장은 어째서 알고 있습니까?"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유는 명백했다.

'내가 소설에 들어온 외부인이기에-.'

다만, 그를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말하지 않았나. 나는 똑똑하고 유능하다고."

"아, 그렇군요."

"마족의 왕은 존재하네. 그리고 언젠가 대륙을 피로 물들이고 지옥으로 만들 걸세."

아드리안나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그 흔들림 없는 푸른 눈이 한층 더 깊어졌다.

"누구도 믿지 않네. 마탑주도, 황실 기사도, 고위 귀족도-. 오히려 욕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그대와 나밖에 없을 걸세."

갈라하드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웃음기나 여유가 없었다. 그에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살짝 구겨졌다.

"정말 마족의 왕이 있고, 대륙 전체에 개념을 지워버릴 정도라면-. 저희 둘이 어떻게 막습니까?"

아드리안나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단단했다. 그 푸른 눈도 곧았다.

그 물음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대가 나를 믿고-."

갈라하드는 포크를 움직였다. 그 앞에 있는 초콜릿을 포크로 쿡 찔렀다. 아드리안나의 시선이 따라 움직였다.

"나는 그대를 믿는 걸세."

초콜릿을 깊게 찌른 포크를 내밀었다. 아드리안나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아드리안나가 조심스럽게 포크를 받았다. 아드리안나의 볼이 천천히 움직였다.

정적이 잠시 이어졌다.

갈라하드는 진지한 얼굴로 초콜릿을 먹는 아드리안나를 보며 그녀의 반응을 예상했다.

대륙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마족의 왕을 대비해야 한다는 건, 바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심지어 다른 이들은 다 부정하고 있었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버거워할 수도, 두려워할 수도 있었다. 아니, 그런 반응이 당연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어떻게 달랠지 고민했다.

한참 뒤에 열린 아드리안나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갈라하드의 예상에 없었다.

아드리안나는 낙담하지도, 부정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곧은 푸른 눈으로 갈라하드를 보며-.

"혼자 힘드셨겠습니다."

진심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걱정했다.

'음.'

처음 들어보는 말에 갈라하드는 잠시 멍하니 그 눈을 쳐다봤다.

묘하게 위험한 느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간이 늦었군.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지. 핸섬, 달콤한 것 좀 포장해주겠나?"

묘하게 다급해 보이는 갈라하드에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가 무슨 카페도 아니고-.'

핸섬은 투덜거리면서 남은 초콜릿과 사탕을 챙겼다.

"아, 잘 먹었습니다."

아드리안나가 꾸벅 인사를 하고 황급히 갈라하드를 따라나섰다.

안가에 덩그러니 남겨진 핸섬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적적하네.'

아무래도 요원 보충 요청을 해야 할 듯했다.

****

'볼만하겠네.'

정보국의 자밋은 눈을 찡그리며 주변을 살폈다.

오늘은 정보국의 정기 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회의장에 인원이 속속 도착했다.

대부분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얘는 어디 갔어?'

갈라하드의 이름을 받은 요원, 제임스가 보이지 않았다. 막내인 놈이 늦게 도착하다니-.

그때, 부국장이 들어왔다. 부국장은 자연스레 자밋 옆에 앉았다.

"오셨어요."

부국장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얼굴에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때, 문이 거칠게 열렸다. 익숙한 얼굴, 제임스 요원이었다.

제임스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들어왔다. 그 얼굴이 들어올 때와 좀 달라졌다.

정직하게 잘생긴 미남이었는데, 지금은 신경질적인 모습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조금의 노련함이 자리했다.

[이제 요원 명이 갈라하드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자밋은 얼마 전 제임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실제로 제임스의 실적이 상당히 좋았다.

가장 유망한 요원으로 꼽힐 정도였다.

자밋을 본 제임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자밋은 가벼이 손만 흔들어줬다.

그때, 문이 거칠게 열렸다. 화가 잔뜩 난 국장이 들어왔다. 모든 요원이 일어나서 경례를 올렸다.

국장의 거친 등장에 제임스는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하게 됐다.

제임스가 국장에게 인사하려는 순간-.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국장이 목청을 높였다. 제임스는 사색이 됐다.

'위에서 한 소리 들었나 보네.'

푸들거리는 국장에 자밋의 입꼬리가 가득 올라갔다.

"이 실적이 말이 되나?! 봉급은 꽁으로 받아? 제국민의 피땀 어린 돈을 받았으면 제대로 일을 하라고! 일을!"

국장이 짜증을 쏟아내면서 앞에 놓인 종이를 내던졌다. 가득 쌓인 보고서가 멋지게 휘날렸다. 국장의 유일한 장기였다. 보고서 뿌리기-.

"작전과장! 입이 있으면 네가 말해봐. 실적이 왜 이렇게 처박혔는지!"

국장의 지적에 작전과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전과장의 눈썹이 구겨져 있었다.

성질 있는 작전과장이었다. 안 그래도 요즘 짜증이 올라와 있었는데, 저리 누르면-.

'들이박겠네.'

자밋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금 실적이 낮은 게 아닙니다. 전의 실적이 지나치게 높았을 뿐이죠."

"뭐라-?"

"보고서에 적었는데, 실적이 눈에 보이게 떨어진 이유는 갈라하드 요원의 부재가 큽니다."

적나라한 작전과장의 말에 자밋은 작게 감탄했다. 다른 과장들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장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고작 요원 하나 빠졌다고 실적이 이렇게 박힌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잔뜩 흥분한 것치고 국장의 지적은 타당했다. 다만, 상대는 작전과장이었다.

"단순히 하나의 부재가 아닙니다. 애초에 갈라하드 요원은 현장 요원 중에서 압도적인 업무 실적을 가진 요원입니다. 은밀함을 요구하는 요원의 임무에서 갈라하드 요원의 가치는 팀 단위보다 더 뛰어나다고 보고를 올렸습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수치로 증명한 결과입니다. 보고서의 서른다섯 번째 장을 봐주시면 됩니다."

자밋은 앞에 놓인 보고서를 넘겼다. 거기에는 정말로 갈라하드의 능력에 대한 상세한 계산이 적혀 있었다.

'일개 분대의 무력이라. 제대로 모르네.'

자밋은 작게 혀를 찼다.

"갈라하드는 초과 근무는 기본이고, 그 흔한 휴가 한 번 가지 않았습니다. 입사한 후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여든아홉 번째 장을 보시면 됩니다."

거기에 갈라하드의 업무 일지가 적혀 있었다. 갈라하드는 입사한 후로 단 한 번도 쉬지 않았다.

"그런 갈라하드가 사라졌으니 실적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이에 대한 계산은 백한 번째 장에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보고를 끝낸 작전과장이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국장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요원 하나 없다고 실적이 이렇게 박혔다는 건가?! 너희 전부가 갈라하드 하나만도 못한 놈들이라고?!"

국장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자존심을 자극하려는 듯했지만-.

끄덕.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갈라하드였으니까.

국장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입가로 거품이 작게 흘렀다.

그때, 부국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나마 지금 실적이 나온 것도 갈라하드 요원이 있던 기간과 겹쳐서지. 아마 다음 분기는 더 형편없을 것이야."

부국장이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갈라하드를 다시 불러와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다른 과장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에는 겁에 질린 이들도 제법 있었다. 갈라하드에게 신세를 진 놈들이었다.

그에 국장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어찌나 붉은지 곧 터질 것 같았다.

"절대 안 된다. 그 이야기는 두 번 다시 꺼내지마."

국장의 얼굴에 떠오른 건 공포였다.

정보국의 국장이 겁에 질리는 상대라니-. 도대체 누구지?

"아무튼 안 된다! 어떻게든 실적 올려! 또 이딴 쓰레기 같은 실적이 나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국장이 단호하게 말하고 돌아섰다.

그에 국장과 엉거주춤 있던 제임스가 눈이 마주쳤다.

"넌 뭐야?"

국장의 서늘한 물음에-.

"요원 제임스입니다!!"

제임스는 목청 높여 소리쳤다,

88화 쪼끄마한

갈라하드는 숙소에 늦게 도착했다. 숙소는 조용했다. 그웬과 데미안은 자러 올라갔는지 없었고, 톰은 뒷정리하는 중이었다.

갈라하드는 허름한 의자에 앉아 연초를 뻐끔거렸다.

의자가 삐꺽-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주변은 위층에 있는 그웬의 코고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건너에 앉은 길버튼이 잔에 술을 따랐다. 길버튼은 갈라하드에게 잔을 권하지 않았다. 혼자 잔을 비우고 다시 채웠다.

[세상은 마족의 왕에게 멸망한다.]

갈라하드는 허름한 가죽 수첩을 매만졌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길버튼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들었다.

길버튼이 못생긴 사막여우 같은 얼굴로 갈라하드를 보고 있었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며 입을 열었다.

"길버튼 경, 세상이 멸망한다는 걸 알고 있다면 어떻게 할 건가?"

"세상이 왜 멸망합니까?"

"가정일세."

길버튼의 눈이 가늘어졌다. 깊게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냥 검이나 잡을 것 같습니다만."

"길버튼 경다운 대답이군."

"그러면 대장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막아야지."

"막을 수 있습니까?"

"난 뛰어나고 유능한 마법사니까."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에 길버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특무대의 임무가 대륙의 멸망을 막는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네, 우리는 대륙의 멸망을 막을 걸세."

"여섯 명인 부대에서 맡을 만한 임무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걸 소수 정예라고 한다네."

"지나치게 소수 정예 아닙니까?"

작게 투덜거린 길버튼은 다시 잔을 채웠다. 그 모습이 퍽 즐거워 보였다.

길버튼의 취미는 두 개였다. 검과 술-. 참으로 기사다운 취미였다.

잠시 뒤에 정리하러 갔던 톰이 돌아왔다. 톰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요리를 들고 있었다. 또 요리를 한 듯했다.

"역시 톰이군."

"별거 아닙니다. 그냥 고기랑 채소를 볶은 겁니다."

길버튼이 히죽 웃으며 음식을 냉큼 한 움큼 집었다.

"데미안도 포크를 쓰는데. 쯧."

"북부에서는 원래 이렇게 먹습니다."

갈라하드의 지적에 길버튼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길버튼이 쩝쩝거리면서 먹었다.

"안 드십니까?"

"식사하고 왔네. 괜찮네."

"예."

고개를 끄덕인 톰은 슬쩍 악기를 꺼냈다. 기타와 비슷하게 생긴 악기였는데, 그 소리가 꽤 들을 만했다. 저번보다 실력이 더 늘어 있었다.

"톰, 세상이 멸망한다면, 자네는 뭘 할 것 같나."

연주가 뚝- 하고 멈췄다. 톰이 진지하게 고민했다. 길버튼의 쩝쩝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특무대가 다 같이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음식을 요리할 것 같습니다."

톰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바꿔도 됩니까? 톰의 요리를 먹으면서 검을 휘두르겠습니다."

길버튼의 괴상한 대답에 자그마한 웃음이 터졌다.

"냄새-."

그때, 위에서 데미안이 흐느적거리면서 내려왔다. 잠에서 덜 깬 듯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그웬이 그 뒤를 따라 내려왔다.

톰은 자연스럽게 데미안에게 접시를 밀어줬다. 그웬이 데미안의 옆에 앉아서 잔에 물을 채웠다. 둥그런 탁자가 순식간에 가득 찼다.

"내 오러를 그렇게 먹었는데도 배가 고프냐?"

졸지에 요리를 뺏긴 길버튼이 데미안을 보며 혀를 찼다.

"얼마 못 먹었어요. 오러가 쪼끄매서."

"쪼끄맣다니!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애한테 왜 성질을 내나."

"아니! 쪼끄맣다고 하지 않습니까! 안 쪼끄맣다! 이놈아!"

"쪼끄맣던데."

"이 꼬맹이가!"

"왜 애한테 소리를 질러요!"

분위기가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졌다.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연초를 털었다.

"아, 세상이 멸망하면 뭐할 건지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뭐 하실 겁니까?"

톰이 주제를 돌렸다. 길버튼이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면서 '안 쪼끄맣다!'라고 소리쳤다.

"밥 먹을래요."

"저는 아이들이랑 다 같이 놀러 나갈래요! 근데 왜 갑자기 멸망이에요? 세상 멸망해요?!"

그웬의 목소리가 금세 울먹거렸다. 염소 같은 목소리였다.

"대장님이 물어보셔서-."

톰의 말에 특무대의 시선이 갈라하드에게 꽂혔다.

제법 고생한 터라, 이제 허접한 티를 좀 벗은 특무대였다. 온기가 깃든 시선들에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었다.

잠시 고민하던 갈라하드는 입을 열었다.

"마족의 왕이 세상을 멸망시킬 걸세."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방금까지 옅은 미소가 있던 얼굴이 가득 일그러졌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마족의 왕 같은 건 없습니다."

모두가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농담일세."

그제야 다시 웃음이 터졌다.

따스한 열기가 다시 퍼졌다.

방금의 대화가 없었다는 듯-.

[혼자 힘드셨겠습니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깊게 빨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

"후우-."

아드리안나는 검을 천천히 내리며 숨을 깊게 내쉬었다. 두꺼운 갑옷을 넘어 김이 가득 올라왔다.

슬슬 해가 뜨고 있었다. 아드리안나는 항상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서 단련했다. 검을 잡은 순간부터 매일 행하는 습관이었다.

'그 감각-.'

아드리안나의 손이 달싹였다. 마족의 도시에서 벗어날 때, 휘두른 검이 아드리안나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수십의 마족을 단번에 재로 만들었던 것-. 그건 검술이 아니었다.

아드리안나가 지닌 성질의 발현이었다.

아드리안나는 마나를 불태우는 성질을 축복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저주였다. 손에 닿는 모든 이를 불태우고 끔찍한 고통을 선사하는 아주 지독한 저주-.

그녀의 어머니까지 태운···.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가득 씹었다.

[태워버린다고 상상하게.]

갈라하드의 말을 따라 휘두른 검은 그녀의 성질을 가득 담았다.

그녀의 본질은 저주였다.

인정하자 우습게도 묘하게 홀가분했다.

그때, 손이 가득 흔들렸다. 아드리안나는 검을 내려봤다.

기름을 가득 부은 것처럼 오러가 가득 일어나 있었다. 규격이 없었다. 그저 세상을 집어먹을 것처럼 거칠게 타올랐다.

'성질이 주체가 안 돼-.'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씹으며 검을 흔들어 오러를 흐트러뜨렸다.

힘이 주체가 안 됐다.

"최근 전선이 심상치 않습니다. 복귀하셔야 합니다."

아드리안나의 보좌관인 루나비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은 최전선이었다. 재가 가득 뒤덮이고 피 냄새가 물씬 풍기는 전선이 그녀에게 어울리는 곳이었다.

"알겠다. 바로 출발하겠다."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한쪽이 시끄러워졌다.

"내가 내 약혼자를 만나는데, 무슨 문제 있나?"

"누가 아드리안나님의 약혼자라고-. 개소리를!"

"자네, 이름이 뭔가?"

"벨하른이다!"

"그래, 벨하른. 대공 전하에게 전해주겠네. 1대대의 벨하른 경이 개소리라고 했다고."

"내가 언제-."

익숙한 목소리에 아드리안나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작은 소란 뒤에 직속 부대 기사들이 갈라졌다. 아드리안나에 대한 충성심이 지극한 이들이 물러나다니-.

"진작 비키면 서로 좋지 않나."

갈라하드가 옷깃을 털며 들어왔다. 뒤의 기사가 황당한 얼굴로 입을 벙끗거렸다.

아드리안나를 발견한 갈라하드가 손을 흔들었다. 그에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좋은 아침일세. 자네는 땀이 범벅이 되어도 이쁘군."

갈라하드는 늘 그렇듯 뻔뻔하게 말했다. 아드리안나는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갈라하드에게서 묘하게 피곤이 엿보였다.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잠을 좀 설쳤네."

갈라하드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그 웃음이 연했다.

"침대에 눕기 전에 적당한 운동을 하시면, 숙면에 도움이 되실 겁니다."

"그런가. 명심하겠네."

"너무 격한 운동은 오히려 방해되실 겁니다."

아드리안나의 진지한 조언에 갈라하드가 시원하게 웃었다. 운동을 가르쳐주려던 아드리안나는 슬쩍 멈췄다.

"복귀할 생각인가?"

"예, 전선을 너무 오래 비웠습니다."

"그렇군."

갈라하드는 예상했다는 듯 가벼이 끄덕였다.

"내기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드리안나는 슬쩍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퍼스트라는 인물과 한 내기 이야기였다.

아드리안나가 보기에 퍼스트와 펌킨이라는 이들은 상당한 실력자였다. 직접 검을 섞지 못하여 정확한 판단은 할 수 없지만,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갈라하드는 그런 둘에게 참모진에게 얻은 정보까지 건넸다. 아드리안나는 갈라하드를 도와줄 수 없었다.

"음-. 아, 그거 말인가. 괜찮을 걸세."

"얻은 정보도 다 전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야 놈들이 하나라도 더 많이 잡아 오지 않겠나."

"하지만 내기는-."

"나를 걱정해주는 건가?"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갈라하드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꼭 주먹을 한 대 맞은 얼굴이었다.

"자네 실력이 좀 늘었군."

"무슨 실력 말입니까?"

"아닐세."

갈라하드가 슬쩍 연초를 입에 물었다. 갈라하드는 말문이 막히면 연초를 찾았다. 아드리안나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나는 지는 내기는 하지 않네."

갈라하드가 예의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에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들에게 정보를 전부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들이 유리합니다."

"자네, 마경이 마법사에게 얼마나 매력적인 곳인 줄 아나?"

그리 묻는 갈라하드의 모습이 묘하게 위험해 보였다.

"······예?"

"이번에 대공 전하의 압박이 꽤 심했네. 대장들은 골칫덩이인 놈들을 처리하고 싶겠지. 그런 시기에 갑자기 마경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면-?"

갈라하드가 연초를 털며 설명했다.

아드리안나는 방금 들은 내용을 천천히 되새겼다.

그러니까-.

"마경 훈련소로 마법사를 유인하시겠다는 겁니까?"

아드리안나의 물음에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정답이라는 듯-.

"위기는 이겨내면 기회인 법이지."

갈라하드의 말은 상당히 그럴듯했다. 위기는 이겨내면 기회인 법이었다.

다만-.

"···스스로 만든 위기 아닙니까?"

"기회는 기다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걸세."

갈라하드의 말은 늘 그렇듯 막힘없었다.

아드리안나는 그 내용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니까 위기는 이겨내면 기회니까, 스스로 위기를 만들어서 기회로 만들겠다는 건가-?

그때, 갈라하드가 손을 내밀었다.

"자, 손 좀 주게."

당당한 요구에 아드리안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아!"

성질이 주체가 안 되는 걸 뒤늦게 떠올린 아드리안나가 손을 빼려 했지만, 이미 잡힌 뒤였다.

"끄으으윽······!"

적응되지 않는 따뜻함에 아드리안나는 그대로 굳었다.

갈라하드의 반응이 평소보다 격렬했다. 몸을 가득 떨었고, 입에서는 누르지 못한 신음이 연신 터졌다.

아드리안나의 성질이 강해진 까닭이었다. 그에 손을 빼려 했지만, 갈라하드가 깍지까지 꼈다.

갈라하드의 피부에 핏줄이 가득 올라왔다. 실핏줄이 터져 눈이 붉어졌고,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아드리안나는 황급히 손을 뺐다.

갈라하드가 순간 휘청였다. 가득 비틀거렸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금색 봉에 기대어 버텼다.

갈라하드의 몰골이 형편없었다. 실핏줄이 가득 터진 눈은 피처럼 붉었고, 몸을 경기라도 일으킨 것처럼 계속 떨었다.

그저 손을 잠깐 잡았을 뿐인데, 지옥에라도 다녀온 모습이었다.

그에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씹었다.

'역시······.'

그때, 갈라하드의 마른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무슨 욕이 나올지 두려웠다. 저주받은 마녀라고 욕할까, 파멸을 품은 마족이라고 할까-.

아드리안나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자네는 정말 끝내주는군. 늘 새롭고 짜릿해."

갈라하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드리안나의 예상과 아득히 멀었다.

그가 가득 웃었다.

"······가보겠습니다."

아드리안나는 뒤늦게 도망쳤다.

****

[대장들에게 전합니다. 마경 훈련소가 완성 됐습니다. 마경은 마족의 영역 그 깊숙이 있는 공간을 말하는데, 마나 농도가 얼마나 높은지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를 이용하여 마경 적응 훈련을 할 계획입니다. 혹여 마법사들에게 넘어갈 수 있으니, 엄중한 보안 유지가 필요합니다. 혹시 마경에 마법사가 들어가게 될 경우, 마나에 관한 감응력이 높아지고 높은 농도의 마나를 담을 수 있고, 또 지팡이의 효율이······.]

5대대 대장 마크는 본부에서 내려온 명령서에 눈을 찡그렸다.

언뜻 보기에 마경 훈련소에 관한 내용이었지만-.

'이건 마경 훈련소를 홍보하는 것 아닌가?'

그 아래에 참모 테오도르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이거 자네가 쓴 건가?"

5대대 대장 마크는 명령서를 내리며 물었다. 그 앞에 갈라하드가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그 손에 들린 금색 봉이 이리저리 까닥거렸다.

"아닐세, 나는 불러주기만 했을 뿐. 테오도르가 썼네. 글씨가 제법이지 않나?"

"······지금 그게 문제인가? 대장들이 대공 전하의 눈치를 보느라, 제 아래의 마법사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일 텐데 이렇게 보내면-. 오···. 이걸 노렸군."

마크는 작게 탄식했다. 갈라하드는 마크가 아닌 이 중에 가장 명석한 이였다. 이 편지가 가져올 파장을 몰랐을 리가 없었다.

대공이 대장들 앞에서 6대대 대장의 머리를 직접 뽑았다. 아무리 대장들이라고 한들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뒤로 마석장을 꾸렸던 대장들은 그를 처리하는데, 곤란을 겪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저런 명령을 내리면, 처리 곤란한 마법사들을 마경 훈련소에 보낼 게 분명했다.

"······어디부터 의도한 거지?"

"의도했다니. 과장이 심하군. 그저 좋은 쪽으로 흐름을 유도했다- 정도일세."

갈라하드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설마 그 회의에서 6대대 대장을 지목한 게···. 아니, 마경 훈련소를 놔둔 것부터?'

도대체 어디부터 계획했다는 말인가-. 북부를 마음대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크는 작게 기침했다.

"···감당할 수 있나?"

"감당할 필요가 있나?"

금색 봉으로 마크를 가리키며 반문하는 갈라하드에 마크는 눈을 찡그렸다.

"흑마법학회 때와 같네. 나는 그들에게 꽤 괜찮은 조건을 제안할 걸세. 어차피 갈 곳 없는 놈들 아닌가?"

"······그들이 안 받아들이면? 마경 훈련소가 놈들에게 넘어가면 위험할 거다."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시원한 미소였다.

"회유는 내 전문일세."

그 목소리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마크는 그런 갈라하드를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갈라하드도 갈라하드였지만, 애초에 7대대의 전력이 상당했다.

더불어-.

'흑마법학회도 사실상 갈라하드의 전력이니까.'

계산을 마친 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갈라하드가 시원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금색 봉은 어디서 얻었나? 좋아 보이는군."

마크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선물 받았네."

*

'명령서 전부 보냈고, 퍼스트 치웠고-.'

갈라하드는 금색 봉을 매만지며 정리했다.

애초에 마법사들을 찾으러 돌아다닐 생각 없었다. 북부는 너무 넓고 황량했다. 하나하나 잡으러 다니는 건 낭비였다.

그에 갈라하드는 마경을 이용했다. 마법사에게 마경은 거절할 수 없는 선택지였다.

더불어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물론, 그렇다고 북부에 숨어있는 마법사들이 전부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직접 찾으러 다니는 것보다 효율이 좋을 건 명백했다.

먼저 일꾼을 최대한 확보한 후에-.

'마석장 사업의 합법화를 공표해야지.'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북부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갈라하드의 영향력을 넓히는 것도 필요했으니까.

'일꾼을 확보하면, 영향력이 늘 수밖에 없지.'

다만, 그를 위해서 준비할 게 많았다.

"대공의 인정을 받은 자!"

지나가던 병사들이 악에 받친 경례를 올렸다. 그에 갈라하드는 손을 흔들어줬다. 마물 코트를 둘러도 한기가 스며드는 북부였다. 도대체 왜 벗고 다니는지-.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바쁘게 걷던 갈라하드는 우뚝 멈췄다.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그건 남들이라면 그냥 지나쳤을 정도로 아주 작은 위화감이었지만, 갈라하드는 자신의 감을 믿었다.

감각은 무의식이 보내는 경고였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만큼 멍청한 게 없었다.

갈라하드는 금색 봉으로 바닥을 두드리며 마나를 뿌렸다.

마나에 걸리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 아무것도 없었다.

'재밌군.'

이상할 노릇이었다.

아무것도 없다면 왜-.

저기서 마나가 사라질까.

"나오게."

갈라하드는 허공을 금색 봉으로 가리켰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서늘한 칼바람이 대답하듯 머리를 간질였다.

"귀찮게 하는군."

갈라하드는 허공을 가리키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때, 허공이 일렁였다.

허공에서 느닷없이 생겨난 건-.

"당신, 진짜 최초의 마법사 제자예요?"

여우 가면이었다.

'저 마법은 분명 멸망한 마탑의-.'

두근! 두근! 두근!

그때, 고통의 알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에 담긴 감정은 평소의 흥분이 아닌-.

두려움이었다.

89화 여우 가면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연신 격하게 뛰었다. 그럴 때마다 강렬한 두려움이 갈라하드를 흔들었다.

원인은 저 여우 가면 때문이었다.

고통의 알은 여우 가면을 쓴 놈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갈라하드는 그런 고통의 알과 반대로 짙은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방금 여우 가면이 사용한 마법 때문이었다.

여우 가면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나타났다.

그건 분명-.

'공간 마법이다.'

최초의 마법사가 세웠지만, 이제는 사라진 네 개의 마탑을 '멸망한 4대 마탑'이라고 칭했다.

마법사 사이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였다.

갈라하드는 그게 단순한 전설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때, 여우 가면의 몸이 뚝- 하고 멈췄다. 여우 가면이 고개를 구십 도로 꺾었다.

"설마 알아본 거예요?"

여우 가면 주변이 작게 일렁였다. 틀림없었다. 공간 마법이었다.

"설마 지금 알아본 거예요?"

여우 가면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함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다만, 갈라하드가 피할 수 없는 함정이었다.

멸망한 4대 마탑의 마법이었다. 저걸 어떻게 안 볼 수 있다는 말인가.

"허무의 마탑이 아직도 있을 줄 몰랐군."

"진짜 알아봤네요! 와아- 이걸 알아보는 인간이 있을 줄이야!"

"그렇게 대놓고 쓰는데 못 알아볼 수가 있나?"

"보통은 못 알아보죠."

그때, 여우 가면이 앞으로 움직였다.

"알을 가지고 있고."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여우 가면은 갈라하드의 왼쪽에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연신 떨었다. 당장 도망치자고 소리쳤다. 갈라하드는 가벼이 무시했다.

"잊힌 존재의 가호를 받으면서-."

여우 가면의 목소리가 오른쪽에서 들렸다. 그에 고개를 돌리니, 여우 가면이 오른쪽에 거꾸로 서 있었다.

'이게 공간 마법.'

갈라하드는 짙은 흥미를 느꼈다. 입에 침이 가득 돌았다.

"거기에 이 마법도 알아보고?"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갈라하드의 뒤통수를 콕 찔렀다.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여우 가면이 어느새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솔직히 말해봐요. 진짜 최초의 마법사 제자예요?"

여우 가면이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렸다. 꼭 아이가 장난치는 모양새였다.

가벼운 태도였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위험했다.

'최초의 마법사를 알고 있군. 최초의 마법사가 아직 살아있나? 내가 최초의 마법사 제자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어.'

갈라하드의 머리가 빠르게 굴렀다.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그쪽 정보국 요원이잖아요?"

이어진 여우 가면의 말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갈라하드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대답 좀 해주실래요? 누구세요?"

여우 가면이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어느새 놈은 갈라하드 바로 앞에 있었다.

여우 가면의 눈동자가 있어야 할 부분에는 짙은 어둠이 전부였다.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는 듯 혹은 보면 안 될 게 있다는 것처럼-.

공허한 어둠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일세."

허리에 힘을 주며 자세를 곧게 했다.

여우 가면이 뚝- 멈췄다.

"아하, 그렇군요."

여우 가면이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그때, 왼쪽 귓불에서 뜨거운 통증이 느껴졌다.

'왼쪽 귓불이 사라졌다.'

목을 타고 느껴지는 시원함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이게 공간 마법이군.'

갈라하드는 통증에 집중하며 방금의 상황을 되짚었다.

마나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듯 갈라하드의 귓불이 사라졌다.

마법은 크게 세 단계로 구성되었다.

응집, 계산, 방출.

마나를 모으는 게 응집, 술식과 수식을 수행하는 게 계산, 마지막으로 마법을 뿌리는 게 방출이었다.

방출에는 트리거의 용도인 특정 동작이 필요했다.

가령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기는 것처럼-.

그건 과정을 압축한다고 생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여우 가면은 어떤 동작도 없었다.

사소한 동작이라도 갈라하드가 놓쳤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시선이군.'

가면으로 가려진 저 시선 속에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말이 되나? 눈이 트리거 역할을 한다고?'

그때, 여우 가면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자, 다시 물어볼게요. 최초의 마법사 제자예요?"

여우 가면의 목소리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글쎄."

갈라하드는 오히려 입꼬리를 비틀며 도발했다.

"이런."

여우 가면의 고개가 미세하게 돌아갔다. 아주 미세한 차이였지만, 갈라하드에게는 명확히 보였다.

가면의 방향을 토대로 그 시선을 살폈다. 오른쪽 발이었다. 확인과 동시에 발을 움직였다. 방금까지 발이 있던 곳이 깊게 파였다. 마치 지워진 것처럼 깔끔했다.

정말 시선이 방출 동작이라니-. 갈라하드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와-. 이걸 알아챘어요?"

여우 가면도 소리 내어 감탄했다. 다만, 그 목소리에 담긴 건 작은 흥미가 전부였다.

'공간 자체가 사라졌다.'

갈라하드는 그 달콤한 문장을 중얼거렸다.

공간을 지웠다-. 그건 마법으로 무언가를 불태워나 얼리는 것과 아예 다른 이야기였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 수 있지?'

갈라하드가 가진 개념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당연했다.

그건 멸망한 마탑과 함께 소실된 획이었으니까.

'드디어 찾았군.'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

'···도대체 뭐 하는 놈이지?'

여우 가면은 갈라하드를 보며 눈을 찡그렸다.

경고 삼아 귓불을 지웠다. 그 귀를 타고 피가 뚝뚝 흐르는데, 갈라하드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

"이거 기분이 좀 나쁜데요."

여우 가면은 투덜거리며 다시 놈을 응시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경고할 생각이었다. 어깨는 두 개였으니까 하나 정도는 없어도 될 것이다.

그때-.

갈라하드가 먼저 손가락을 튕겼다.

여우 가면은 혀를 찼다. 갈라하드의 마법이 빠른 건 알고 있었다. 아마 마법사 중에는 최고일 것이다.

다만, 아무리 빨라봤자 놈은 개정된 마법사였다.

'차이를 확실하게 알려주고 이야기해야겠네.'

여우 가면은 느긋하게 갈라하드를 기다려줬다. 그러다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갈라하드는 여우 가면을 공격하지 않았다.

갈라하드가 펼친 마법은-.

'서늘한 안개?'

서늘한 안개는 기본적인 마법 중 하나였다. 한기가 서린 안개로 범위 안의 적들을 둔화시키는 용도였다.

공격보다 보조 성질이 강한 마법이었다.

"와아- 당신 진짜 대단하네요."

여우 가면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서늘한 안개는 여우 가면에게 꽤 까다로운 마법이었기에.

"정답인가?"

안개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여우 가면은 순순히 끄덕였다.

"그쪽이 할 수 있는 것 중에서는요?"

여우 가면에게 안개는 정공법이었다. 상당히 까다로웠다.

다만-.

고작 그 정도였다.

여우 가면은 정면의 공간을 깊게 지웠다. 허공에 작은 공허가 자리했다. 그 깊은 공허가 주변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였다.

주변 가득했던 안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서늘한 안개는 상당히 똑똑한 방법이었다. 온도가 낮았기에 치우기 쉽지 않았으니까.

그 격차가 지나치게 컸을 뿐이었다.

이런 압도적인 격차 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까.

'절망하겠지? 달콤하겠어.'

여우 가면은 들뜸을 숨기지 못했다.

다만, 갈라하드의 반응은 여우 가면의 예상과 달랐다.

놈은-.

"오, 그런 방식으로 치우다니. 흥미롭군."

정말 재밌어서 못 견디겠다는 듯 가득 웃고 있었다.

그에 여우 가면은 눈을 찡그렸다.

'최초의 마법사 제자는 아니겠군.'

최초의 마법사는 머리가 녹은 놈들을 싫어했다. 그런데 저놈은 여우 가면이 만났던 누구보다 머리가 녹은 놈이었다.

아니, 마법에 머리가 녹다 못해 전 놈이었다. 그런 놈을 최초의 마법사가 받아줬을 리가 없었다.

그게 더 문제였다.

최초의 마법사 제자가 아닌 놈이 여우 가면의 정체를 알아냈다는 거니까.

'너무 큰 변수인데.'

놈은 변수였다. 그것도 아주 또렷한 변수-. 모든 단서가 놈을 치워야 한다고 소리쳤다.

처리할 방법은 간단했다. 지배자에게 놈을 가져다주면 되는 문제였다. 애초에 여우 가면도 그럴 생각으로 놈을 추적했다.

다만-.

'재밌어.'

갈라하드는 여우 가면의 흥미를 자극해버렸다.

그것도 아주 강하게-.

마법에 뇌가 절다 못해 녹은 듯한 것도, 여우 가면의 권능을 알아본 것도, 알을 지팡이처럼 쓰는 것도 흥미로웠다.

그중 제일은-.

'알을 품은 마법사가 그 아드리안나의 약혼자라니.'

그 사실이 여우 가면의 흥미를 아주 제대로 자극했다.

본래였다면, 갈라하드를 적당히 다진 뒤에 지배자에게 주고 상황을 덮었을 것이다.

그게 가장 빠르고 간단한 해결책이었으니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이쪽이 더 재밌잖아.'

끄응-. 여우 가면은 나지막한 침음성을 흘렸다.

재미가 있지만, 그렇다고 지배자를 처리하는 수고를 감수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때, 놈이 입에 연초를 물었다. 레몬 향이 깊게 퍼졌다. 이 향은···. 여우 가면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지배자가 나를 찾나."

갈라하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우 가면은 작게 놀랐다.

저 물음은 지배자와 있을 때도 여우 가면의 존재를 알아챘다는 뜻이었으니까.

이쪽으로 재미가 좀 더 기울었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재밌으면 확실히 마음을 정할 텐데-.

"지금은 좀 바쁘다네."

갈라하드는 오히려 여유를 부렸다.

여우 가면은 작게 코웃음 쳤다.

"미안하지만, 그쪽 의사랑은 상관없어요. 뭐, 아카데미 최연소 졸업자인 그쪽의 자신감은 이해하지만, 그래봤자 마법사잖아요?"

"꼭 너는 아닌 것처럼 말하는군."

"저도 한때는 마법사였지요. 다만-."

그때,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주제를 모르군.'

여우 가면은 작게 혀를 차며 눈에 힘을 줬다.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뾰족한 얼음이 그대로 사라졌다.

확실히 놀라운 빠르기였다. 마법사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확실히 대단한 속도네요. 그러니까 잘 나가는 요원이었겠지. 근데 아무리 빠르다고 한들, 제 눈보다 빠르겠어요?"

친절히 설명해줬지만, 대답은 얼음송곳이었다.

여우 가면은 눈을 찡그렸다. 연속으로 날아오던 얼음송곳이 한 번에 지워졌다.

"제법 고집이 있네요."

"강단일세."

그 대답이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때, 여우 가면의 허리 주변이 작게 흔들렸다.

그에 시선을 내리니, 큼지막한 얼음송곳이 박혀 있었다.

'언제?'

여우 가면은 눈을 찡그렸다.

여우 가면의 눈이 가려진 건 놈이 안개를 깔았을 때밖에 없었다. 그러면 그 짧은 순간에 마법을 하나 더 준비해뒀다는 말인가?

무엇보다-.

'안개를 깔 때부터 여기까지 생각했다고?'

여우 가면은 작게 감탄했다. 확실히 자신을 가질만한 실력이었다.

상대가 안 좋았을 뿐.

여우 가면은 가벼이 몸을 털었다. 꽂혔던 얼음송곳이 흩어졌다.

"봤죠? 어차피 안 돼요. 얌전히 기다려요. 처분을 생각 중이니까."

"오, 공간 마법을 방어용으로 쓴 건가?"

회심의 일격이 흠집조차 못 낸 상황이었다. 응당 절망하는 게 마땅한데, 놈의 입꼬리는 더 올라가 있었다.

'그냥 지금 처리할까.'

여우 가면은 진심으로 고민했다.

그때, 갈라하드가 입을 천천히 열었다.

그에 여우 가면은 눈을 찡그렸다. 살려달라거나 뭐 그런 말을 할 게 분명했다. 아무리 뇌가 녹아도 삶은 인간의 본능이었으니까.

'그러면 재미없는데-.'

여우 가면의 걱정과 달리 갈라하드는 빌지 않았다.

아니, 빌기는커녕-.

"허무의 마탑 마법에 대해서 알려주겠나?"

여우 가면에게 당당히 요청했다.

'허-.'

여우 가면은 작게 감탄했다. 살려달라고 해도 모자를 마당에 공간 마법을 알려달라니-. 한계를 넘어서 미친놈이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흥미가 식었다.

강단이 큰 건 재밌지만, 주제도 모르고 그저 뻗대기만 하는 놈은 재미없었기에.

"가치도 모르는 멍청한 놈이었군."

"언제 그냥 달라고 했나?"

뜬금없는 말에 여우 가면은 눈을 찡그렸다.

놈이 얼마를 제시하든 소용없었다. 여우 가면의 권능은 그 가치를 메길 수 없는 것이기에.

그때, 놈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교환하자는 걸세."

"하!"

너무 어이가 없어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교환이라니-! 놈이 가진 모든 걸 털어도 여우 가면에게는 한 줌이었다.

"재미로 어울려 줬더니만-."

"아직 내 말 안 끝났네."

놈이 대뜸 여우 가면의 말을 잘랐다. 격차를 보여줬는데도 저런 태도라니-.

여우 가면이 눈에 힘을 주려고 할 때, 놈에게서 짙은 마나가 느껴졌다. 놈의 팔목에 새겨진 마법진에서 영롱한 빛이 뿜어졌다.

'최초의 마법진과 알을 연동하여 이용한다고? 그렇다면 마법진을 건드렸다는 건가?'

그 영리한 흐름에 여우 가면은 감탄했다. 확실히 놀라웠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놈은 마법사인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영리했다.

'어쩌다 머리가 녹아서는-. 아니, 머리가 녹아서 저기까지 갈 수 있는 건가?'

그때-.

"지옥불."

놈의 앞에 불덩어리가 떠올랐다.

자그마한 불덩이였다. 크기가 작아서 언뜻 보면 낮은 위계의 마법처럼 보이는 그런 불덩이였다.

여우 가면은 웬만해서 당황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놈이 펼친 지옥불은-.

"네놈! 어떻게 업화의 마탑 마법을!!"

멸망한 마탑의 마법이었기에-.

"이제 거래할 마음이 생기나?"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깊게 올라갔다.

****

"펌킨, 멸망한 4대 마탑에 대해서 아나?"

펌킨은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퍼스트에 눈을 찡그렸다.

"원래 마법은 4대 속성으로 나뉘어졌었다네. 불, 물, 흙, 공기였지."

"관심 없습니다."

"최초의 마법사가 그를 각각 마탑으로 세웠는데, 어느 순간 전부 자취를 감쳤다네. 그를 멸망한 4대 마탑이라고 부르지."

"관심 없다고 했습니다."

퍼스트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마족에게서 파생된 게 마법 아닌가? 초창기의 마법은 부작용이 상당했다더군. 최초의 마법사가 4개의 마탑으로 나눈 이유일세. 속성이 섞이는 순간 인간이 감당할 수 없다나-."

펌킨은 한 귀로 흘리며 정면을 살폈다. 음습한 후드를 입은 놈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인간에 맞춰 발전된 지금의 마법과 달리, 원시 마법은 그 위력이 차원이 달랐다더군."

"시끄럽습니다."

"지옥의 불이라는 업화의 마탑 마법만 얻을 수 있다면, 갈라하드를 마법으로 이길 수 있다는 거지."

퍼스트의 목소리에 흥분이 가득했다.

결국, 또 갈라하드를 내기에서 이기는 상상이었다.

퍼스트는 저런 쓸데없는 말을 꽤 많이 떠들었다.

"더럽습니다. 숨 좀 참으십쇼."

펌킨이 투덜거렸지만, 퍼스트는 들은 척도 안 했다.

"물론, 이번 내기는 내가 이기겠지만."

퍼스트의 손에 두꺼운 양피지가 들려 있었다.

갈라하드가 준 정보와 정보국에서 얻은 정보를 종합하여 정리한 양피지였다.

퍼스트는 갈라하드만 연관되면 뇌에 구멍 뚫린 놈이 되었지만, 동시에 평소보다 능률이 몇 배나 올라갔다.

퍼스트가 갈라하드의 바로 뒤를 바짝 쫓을 수 있던 이유였다.

덕분에 이런 깔끔한 지도가 나올 수 있었다. 이건 펌킨이 보기에도 놀라웠다.

퍼스트가 작성한 게 의심될 정도로 깔끔한 지도였다.

'이거라면 진짜 이길지도-.'

실제로 이미 마법사를 몇 잡은 뒤였다. 그에 반해 갈라하드는 그들보다 늦게 출발했다. 심지어 아드리안나는 전선으로 향했다.

"이번은 다를 것이다."

퍼스트의 목소리가 상당히 단단했다. 아주 의미심장한 대사였지만, 퍼스트가 매번 하던 말이었다.

그에 따라 일어나던 펌킨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이내 뭐가 이상한지 깨달았다.

예상한 것보다 마법사의 수가 적었다.

"저기, 수가 적지 않습니까?"

"오차 범위다."

"하지만 계속 적었지 말입니다. 야이!"

퍼스트는 이미 달려 나가고 있었다.

'에이, 아니겠지.'

퍼스트와 펌킨은 잠도 안 자고 움직였다.

아무리 갈라하드라도 이번에는 안 될 것이다.

펌킨은 고개를 저으며 검을 뽑았다.

'아, 승모근-.'

펌킨은 욕을 중얼거리며 어깨의 힘을 풀었다.

****

"또 왔다고?"

까마귀 가면을 쓴 팔호는 눈을 가득 구겼다.

그 앞에 흑마법사가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었다.

"예, 이번에는 이급 수배자의 제자들이랍니다."

"그게 무슨-."

까마귀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저 멀리 우중충한 후드를 눌러 쓴 놈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잔뜩 기세가 올랐는지, 당당한 걸음걸이였다.

그 당당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우중충한 후드를 쓴 이들이 모여있었기에-.

'······이게 맞아?'

마법사들이-.

아니, 광부들이 알아서 모이고 있었다.

'곡괭이 여분 있나?'

때아닌 호황에 팔호는 바빴다.

90화 개인 교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