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술집 시비
'음-.'
문을 넘은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마족들이 모여있으니, 마나의 농도가 높을 건 예상했다.
문제는 그 농도가 예상보다 더 높다는 것이었다.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격하게 호응했다. 숨을 쉴 때마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편안함이 엄습했다. 마치 물밖에 있던 물고기가 물로 돌아온 것처럼-.
익숙한 느낌이었다.
'마경이군.'
흑마법학회에서 7대대에 연 마경 같은 게 아니었다.
전에 아드리안나와 들어갔던 진짜 마경에 더 가까웠다.
마나 농도가 끈적이는 느낌이 들 정도로 짙었다.
'북부도 가관이군.'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마족과 전쟁을 오랜 세월 한 북부였다.
땅은 척박했고, 제국도 지원을 줄였다.
그 과정에서 북부의 쇠약은 결정된 것과 다름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마족의 도시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갈라하드는 눈을 구겼다.
아래에 마족의 도시가 있다는 건 상상치 못한 일이었다.
달그락-.
멍청한 투구가 거칠게 흔들렸다.
제법 충격을 받은 듯했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주변을 살폈다.
가득한 재 사이로, 도시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인간의 도시보다 규모가 작았지만, 마을 수준은 아니었다.
건물은 문만 있을 뿐 창문은 없었다.
마치 색을 전부 죽인 것처럼 사방이 무채색이었다
그때, 램프처럼 떠다니는 불빛이 갈라하드의 시선을 끌었다.
언뜻 보면 수도에 있는 마나 램프 같았지만, 여기는 마경이었다. 짙은 농도의 마나에서 마나 램프가 작동할 리가 없었다.
'권능이군.'
그 아래로 마족들이 돌아다녔는데, 그 옷차림이 인상적이었다.
어떤 놈은 아예 헐벗었고, 또 어떤 놈은 북부의 전사처럼 입었다. 평범한 농부처럼 입은 놈도 있었다.
공통적인 특징이 하나 있었다.
'표정이 없군.'
전부 무표정이었다.
인형으로 이루어진 도시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인간도 있군.'
마족 뒤에 애써 표정을 숨기는 이들이 있었다. 놈들은 마족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마치 주인과 산책하는 개처럼-.
'제법 많네.'
인간이 있다는 건, 마족에게 들어서 알았다.
다만, 놈들이 특무대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미지수였다.
그에 갈라하드는 오는 길에 마족의 반응을 꼼꼼하게 살폈다.
마족은 갈라하드가 데려온 특무대에 관심이 없었다.
가끔 침을 꿀꺽 삼키는 놈들이 있었지만, 딱히 이렇다 할 행동은 없었다.
그에 마나도 뿌려보고, 인사도 건네봤는데 마족은 잠잠했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나를 마족으로 생각한다.'
단순히 마족으로 생각하는 걸 넘어서 갈라하드에게 공손하게 대했다.
갈라하드를 제법 등급이 높은 마족으로 여기는 듯했다.
싸구려 알의 성장이 영향을 미친 게 분명했다.
알아낸 게 하나 더 있었다.
'마족은 서로를 의심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족은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다.
'서로에게 관심이 없는 건가.'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달그락-. 고개를 돌리니 아드리안나가 조금 가까이 있었다. 투구 사이로 언뜻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위험하다고 경고하는 듯했다.
맞는 말이었다.
마경과 다름없는 환경에서 마족들이 가득 돌아다니고 있었다.
말 그대로 마족의 도시에 들어온 상황이었다.
'이건 위험하겠군.'
혹여 정체가 들키면, 마족의 도시에 고립되는 것과 다름없었다.
다만, 위험하지 않은 곳이 더 드문 세상이었다.
여기서 돌아갈 수 없었다.
"계획은-."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길버튼이었다. 주변의 시선이 동시에 꽂혔다.
길버튼을 보는 마족들의 시선이 상당히 까칠했다.
'시끄럽게 짖는 개를 보는 것 같군.'
아무래도 여기 인권은 상당히 낮은 듯했다.
"입 닫게, 인간."
길버튼의 눈썹이 구겨졌다. 다만, 길버튼은 군말 없이 입을 닫았다.
그제야 마족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음, 이런 느낌이군.'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가장 중요한 건 데미안이었다.
'정보부터 모아야겠군.'
갈라하드는 거침없이 움직였다.
****
'맙소사-.'
톰은 속으로 신을 찾으며 방패를 굳게 잡았다.
어디를 봐도 마족이 가득했다. 사방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마족들이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단순히 쳐다보는 것도 두려운데, 마족은 그들을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마치 맛있는 음식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굶주린 맹수 사이에 던져진 느낌이었다. 상대는 마족이었으니 그보다 더 위험했다.
톰의 등에 땀이 줄줄 흘렀다.
다른 대원들의 상태도 비슷했다. 특무대는 평소보다 더 똘똘 뭉쳐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음식처럼 보는 마족들이 사방에 있었으니까-.
정작 선두의 갈라하드는 걸음에 거침이 없었다.
보면서 '이곳 지리를 잘 알고 있나?' 의문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갈라하드를 마주한 마족이 고개를 숙이며 문을 여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거기에-.
'왜 평소보다 더 신나 보이시지.'
톰은 혼잣말을 애써 삼켰다.
톰이 할 수 있는 건, 갈라하드의 등을 보고 따라가는 것밖에 없었다.
도착한 곳은 깨끗한 술집이었다.
딸랑-. 경쾌한 종소리가 그들의 입장을 알렸다.
안쪽은 검은색과 회색으로 채워진 술집이었다. 곳곳에 마족이 있었는데, 테이블에 하나씩 앉아있었다.
그때. 멀끔하게 입은 마족이 갈라하드에게 고개를 숙였다. 마족의 시선이 순간 특무대를 훑었다.
특무대를 둘러본 마족이-.
"바로 드실 겁니까?"
특무대를 가리키며 물었다.
톰은 터질 뻔한 비명을 애써 삼키며, 방패를 굳게 잡았다. 그웬이 작게 딸꾹질했다. 길버튼이 반보 나서며 칼자루를 잡았다. 아드리안나가 달그락거렸다.
그때, 갈라하드가 나섰다.
갈라하드의 깔끔한 등을 보며 톰은 안도했다.
'아니, 이쪽에는 갈라하드 대장이 있다. 괜찮다-.'
긴장을 풀기 위해 중얼거렸다.
그때, 갈라하드가 입을 열었다.
"오, 바로 추출도 해주나?"
'······?'
갈라하드의 태평한 물음에 톰은 작게 떨었다.
"예, 그 대가로 피를 조금 가져갑니다."
"얼마나 가져가지?"
"열 중 둘 정도입니다."
"많이도 가져가는군."
마족과 두런두런 대화하는 모습에 톰은 지레 겁을 먹었다.
갈라하드가 톰을 가리키면서, '자, 그동안 고생한 톰에게 박수를 치게. 마지막으로 우리의 목마름을 달래준다니-.'라고 할 것 같았다.
다만, 톰이 걱정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쉽지만, 용도가 따로 있는 것들이라서."
"아, 그러시군요. 자리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마족은 마치 귀족을 대하듯 갈라하드에게 공손했다.
그렇게 마족을 따라 술집으로 들어갔다.
술집에는 멋진 남자와 아름다운 여인들이 가득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멋진 술집이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누구도 웃지 않았다. 술집은 숨소리도 들릴 정도로 조용했고, 테이블에 놓인 유리잔에는 붉은 액체가 가득했다.
붉은 액체가 담긴 병들이 벽에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맹세컨대 끔찍한 술집이었다.
"넷이나 데리고 다니다니."
"저 여인, 싱싱해 보이네."
사방에서 괴상한 품평이 쏟아졌다.
자리는 굵직한 회색 돌을 깎아 만든 둥근 테이블과 딱딱한 의자가 있는 곳이었다. 정확히 술집의 중간에 있었다.
술집의 모든 시선이 이쪽을 향해 있었다. 정작 갈라하드는 늘 그렇듯 여유로웠다.
먼저 자리에 앉은 갈라하드가 주변을 둘러봤다. 손 인사까지 했다.
"주문은 뭐로 하시겠습니까?"
"뭐가 있지?"
"10년 산부터 30년 산까지 있습니다. 원하시면 그 아래로도 있지만, 가격이 제법 많이 나갑니다."
'10년 산? 30년 산?'
의미모를 대화였는데, 상당히 불길했다. 톰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음-."
"수컷 6년 산도 있습니다. 값이 비싸지만, 그 풍미야 유명하니까요."
마족은 고급 요리를 설명하듯 부드럽게 말했다.
길버튼이 빠드득- 이를 갈았다. 그러자 마족의 시선이 그들에게 향했다. 길버튼은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참는 듯했다.
길버튼을 본 마족이 작게 끄덕였다.
"기사를 챙겨 다니시다니-. 대단하시군요. 기사의 피도 일품이죠. 못 생겨서 값이 조금 덜 나가겠지만."
갈라하드가 손을 슬쩍 흔들었다. 길버튼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었다.
술집이 조용했다.
모두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정체가 걸릴 것 같았다.
긴장이 가득 올라왔다.
그때-.
갈라하드가 마족을 올려보며 입을 열었다.
"마족의 피는 없나?"
마족의 표정이 작게 굳었다. 이어 마족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다룹니다만."
갈라하드가 눈을 찡그렸다.
"없나?"
"예, 저희는 미식을 추구합니다."
"미식이라-."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자 마족이 한 발짝 물러섰다. 오히려 갈라하드가 앞으로 기울였다.
"마족도 바로 추출해주나?"
"원하신다면."
"좋군."
마족이 묘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주변 마족들의 끈적한 시선에 톰은 필사적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왜 하필 술집을-.'
술집은 다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이었다. 그냥 술집에서도 시비가 걸리기 일쑤인데, 마족의 술집에 들어오다니-.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컸다.
물론, 대장에게 다른 생각이 있겠지만-.
술집은 문제가 발생할 요소가 다분했다.
별것 아닌 이유로 트집을 잡아 시비가 걸릴 수도-.
"자네, 눈이 마음에 안 드는군. 벌써 몇 잔을 마신 거지?"
옆에서 들리는 대화에 톰은 작게 떨었다.
걱정대로 시비가 걸린 듯했다. 톰은 다급히 방패를 굳게 잡았다. 이내 전투를 준비할 때-.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방금 목소리는 대장 것인데?'
그에 고개를 돌린 톰은 작게 입을 벌렸다.
예상대로 시비가 있었다.
문제는-.
시비가 걸린 게 아니었다.
"한번 해보자는 건가."
갈라하드가 시비를 건 것이었다.
****
'역시 관심이 없군.'
갈라하드는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대놓고 시비를 걸어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심지어 직원 마족도 관심을 안 보였다.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철저한 무관심이었다.
'군체라고 했나.'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보통 마족은 뭉쳐 다니지 않았고, 상급부터 군체를 이루어서 생활한다는 이야기였다.
'군체가 아니면 관심을 두지 않나?'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가설이었다.
갈라하드는 술집을 둘러봤다.
술집에 있는 마족의 수는 총 열둘이었다.
이쪽에는 아드리안나가 있으니, 혹시 불상사가 발생한다면 무마할 수 있는 수였다.
톡톡, 갈라하드는 가만히 손가락을 튕겼다.
갈라하드는 앞에 있는 마족을 내려봤다. 마족은 가만히 갈라하드를 올려봤다.
'마족이 마법과 권능을 구분할 수 있을까.'
마족 행세를 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었다.
마족들이 갈라하드를 마족으로 봤지만, 문제는 갈라하드가 마법을 써도 마족으로 보는지였다.
갈라하드에게 죽은 마족들이 마지막 순간에 마족이라고 말했던 걸 생각하면, 권능과 마법을 구분 못할 가능성이 컸지만-.
'확실히 해둬야지.'
갈라하드가 괜히 시비를 건 게 아니었다.
위의 가정들을 확인해보기 위한 걸음이었다.
갈라하드는 슬쩍 아드리안나를 돌아봤다. 멍청한 투구가 달그락거렸다.
슬쩍 고갯짓했다. 톰이 길버튼과 아드리안나를 두드렸다.
"피를 나눠줄 건가?"
그때, 마족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놈의 테이블에는 마신 잔이 수두룩했다.
"누가 좋나?"
"나는 저-."
갈라하드는 슬쩍 손가락을 튕겼다. 얼음송곳이 놈의 턱에 박혔다. 반응을 할 시간조차 없었다.
놈이 꺽꺽거렸다.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다시 튕겼다. 얼음송곳이 하나 더 박혔다. 놈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갈라하드는 놈의 목덜미를 잡고 주변을 둘러봤다.
여전히 무미건조한 눈들이었다.
'마족은 개인주의군.'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추출해드립니까?"
그때,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예의 직원 마족이었다.
'완벽하군.'
가정을 확인한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겠네."
"예."
마족이 손을 휘저었다. 뭉툭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쓰러진 마족이 크게 흔들리더니, 누군가 밟은 것처럼 납작해졌다.
'권능이군.'
피가 쏟아졌다. 그에 갈라하드는 테이블에 있던 잔을 들었다. 잔에 담긴 피를 털고 공중에 휘저었다.
금세 잔이 찼다.
갈라하드는 주변 마족을 보며 입에 털었다.
그제야 마족들의 시선이 흩어졌다. 곳곳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천박한 취향이군."
"저 고약한 걸 먹다니-."
재밌는 반응이었다.
추출은 금방 끝났다. 큼지막한 유리병에 마족이었던 것이 담겼다.
"아, 킵해주게."
"죄송합니다만, 싸구려는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런가? 음, 새로운 걸 골라야겠군."
갈라하드는 검지로 앉아있는 마족들을 하나씩 가리켰다. 코-카-콜-라-.
"이번만 보관해드리겠습니다."
마족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휘저었다. 가득 찬 유리병이 진열대의 빈 곳에 올라갔다. 가장 구석 자리였다.
"아, 프록셀 가문에 대해서 좀 말해주겠나?"
갈라하드는 잔을 놓으며 입을 열었다.
방금까지 훈훈한 대화를 나누던 마족의 얼굴이 굳었다.
다른 마족들도 황급히 고개를 더욱 돌렸다.
마치-.
'고위 귀족에 대해 물어본 듯한 반응이군.'
프록셀이라는 놈들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큰 듯했다.
그때, 마족이 전과 달리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프록셀 가문과 어떤 사이십니까?"
그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리며-.
"내 아이의 본가일세."
당당하게 대답했다.
****
'이게 무슨···.'
아드리안나는 답답한 투구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사방에서 마족의 시선이 느껴졌다.
현재 아드리안나는 수십의 마족 사이에 있었다.
'어쩌다가-.'
상황을 전부 봤는데도,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역시 그 원인은-.
"마족이 정말 많군. 대공께 마족 마당인 줄 알았다고 편지를 보냈는데, 정정해야겠어. 마당이 아니라 안방이었군."
태연하게 말하는 갈라하드였다. 아드리안나는 답답한 투구를 톡톡 두드렸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아, 지금은 말해도 되네. 마법을 둘렀거든."
"위험합니다. 지금이라도-."
"도망치자고?"
"도망치세요. 제가 맡겠습니다."
아드리안나는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아드리안나가 검을 뽑지 않은 이유는 다른 이들이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진작 검을 뽑았을 것이다.
마족의 수는 상관없었다.
아드리안나는 마족을 불태우는 검이었으니까.
"미안하지만, 아직 데미안을 못 찾지 않았나. 그리고 데이트에서 여인만 두고 갈 수는 없지."
"······장난칠 상황이 아닙니다."
"장난이라니. 난 늘 진심일세. 장담하지."
갑자기 진지해진 갈라하드에 아드리안나는 작게 당황했다.
'진심-?'
사방이 마족인 상황이었다.
작은 실수에도 목숨이 위험해질 상황인데, 데이트라고-?
"······위험한 상황입니다."
"원래 데이트는 긴장을 유발해야 하는 걸세. 긴장으로 인한 심장 박동의 증진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거지."
"예?"
"그런 게 있네. 아, 저기 있군."
갈라하드가 한쪽을 가리켰다. 그 끝에 다른 것의 몇 배는 되는 건물이 있었다.
회색으로 된 저택인데, 귀족의 성을 흉내 낸 듯 그 외형이 굉장히 화려했다. 마족에게 들은 프록셀 가문의 저택이었다.
저택의 위쪽에 큼지막한 테라스가 있었다.
테라스에 귀족처럼 챙겨입은 마족들이 있었는데, 그 중간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특무대의 데미안이었다.
다만, 전에 봤을 때와 모습이 상당히 달랐다.
특무대에 있을 때는 꼬질꼬질한 소년이었는데, 지금은 고급스러운 양복을 입고 머리까지 넘긴 모습이었다.
고위 가문의 자제처럼 귀족스러웠다.
소년의 앞, 기다란 책상에는 먹음직한 요리들이 가득했다. 고기부터 시작해서 번들거리는 빵까지-. 그냥 보기에도 값이 상당할 법한 요리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소년은 마구잡이로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 주변 마족들이 꼭 시중을 드는 것 같았다.
"데미안, 출세했군."
갈라하드의 말에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들이 시중을 들었고, 요리가 가득했다. 앙상했던 소년의 얼굴에 기름기가 번들거렸다.
"하지만 물질적인 걸로는 특무대의 감동을 채울 수 없지. 데미안, 곧 구해주겠네. 조금만 기다리게."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보다 잘 지내는 것 같은데-.'
"이 도시를 무너뜨려서라도 구할 테니 걱정하지 말게!"
이어진 갈라하드의 말에 아드리안나는 묘하게 서늘해졌다.
그 목소리에 진심이 가득했기에-.
72화 푝
"최소 백은 넘습니다. 위험합니다."
갈라하드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길버튼의 얼굴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무표정이었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연초를 털었다.
술집에 있는 작은 방이었다. 마족은 잠을 자지 않았기에 따로 침대는 없었다.
마족은 잠 대신 인간의 피를 홀짝였다.
마족에게 인간은 소중한 낮잠이자, 식량이오, 또 목마름을 달래주는 물이었다. 마족은 인간의 포식자였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깊게 마시며 길버튼을 살폈다.
"후퇴해야 합니다. 지원을 요청하여 다시 진입해야 합니다."
우습게도 길버튼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전선에서 구른 기사다웠다.
길버튼의 목에 힘줄이 가득 올라와 있었다. 길버튼은 분노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후퇴를 주장했다.
"길버튼 경답지 않은 소리군."
"후퇴해야 합니다. 대장님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아니, 길버튼 경 다운 소리인가."
"장난하실 때가 아닙니다-."
"길버튼 경."
갈라하드는 다 핀 연초를 튕겼다. 마나 연초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남은 건 평평한 종이가 전부였다.
"예."
길버튼이 잔뜩 힘준 눈으로 갈라하드를 보며 대답했다.
"나는 데미안을 포기할 생각이 없네."
"하지만-."
"아직 내 말이 끝나지 않았네. 일단 들어주겠나?"
갈라하드의 말에 길버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군. 다시 말하지만, 데미안은 중요하네. 그웬이나 톰도 마찬가지지. 포기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닐세."
길버튼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길버튼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방금 내 이름이 있었나-?'
"자, 마족의 수는 정확히 백 아흔일곱일세. 그중 데미안을 데려간 프록셀 가문의 수는 총 서른한 마리고, 그와 경쟁하는 가문, 반스 가문은 스물다섯 마리지."
길버튼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어떻게 알아냈냐고 묻지 말게. 내 영업 비밀이니까."
길버튼은 갈라하드의 뒤쪽을 쳐다봤다. 거기에는 목에 구멍이 뚫린 마족이 세 구 쓰러져 있었다. 그 시체들이 삐쩍 말라 있었다. 마치 아까 직원 마족이 했던 것처럼-.
'직원 마족이 올라왔었나?'
"그런데 두 가문의 사이가 안 좋더군. 그것도 상당히-. 웃기지 않나? 마족이 패권 다툼을 한다는 게."
갈라하드가 낮게 웃었다. 길버튼은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중요한 건 마족은 군체주의라는 걸세. 자기 군체가 아닌 마족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지. 가령 군체를 이루지 못한 최하급 마족의 목은 대놓고 뽑아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네. 도시라고 표현했지만, 여기에는 법도 규칙도 없네."
갈라하드가 작게 기침했다. 레몬 향이 길버튼의 코를 간질였다. 어상큼한 향기에 침이 가득 돌았다.
"자, 계산이 훨씬 간단해졌네. 우리가 상대할 건-."
갈라하드가 기다란 검지를 빙글- 돌렸다. 길버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서른한 마리밖에 안 되지."
"'···밖에'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많은 거 아닙니까?"
"길버튼 경다운 소리군. 누가 무식하게 서른한 마리를 직접 잡나?"
"예? 그러면 어떻게 잡습니까?"
"아까 말하지 않았나. 경쟁하는 가문이 있다고."
길버튼은 눈을 찡그렸다. 경쟁하는 가문이 있다는 게 도대체 왜-.
"우리는 반스 가문에 들어갈 걸세. 충성-. 반스!"
갈라하드가 손을 이마에 댔다. 길버튼이 보기에도 지적할 부분이 없는 깍듯한 경례였다.
문제는 경례의 대상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마족 가문에 들어가겠다는 소리입니까-?' 라는 물음은 필사적으로 삼켰다.
갈라하드가 끄덕일 것 같았기에.
"아, 농담일세."
길버튼은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그래, 아무리 갈라하드라도 마족 가문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렇겠지?'
"주의할 건 하나일세."
이어진 말에 길버튼은 말할 시기를 놓쳤다.
"도시의 지배자, 놈만 자극하지 않으면 되네."
"지배자란 놈이 있습니까?"
"아주 무시무시한 놈이라더군. 도시에 있는 군체의 머리는 전부 놈의 명령을 듣는다니, 놈을 자극했다가는 도시와 싸우게 될 걸세. 아쉽지만···."
'아쉽지만-?'
길버튼은 방금 자신이 들은 게 맞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문이 열리고 두꺼운 갑옷이 들어왔다.
보기만 해도 갑갑한 막내 노아드였다.
"자, 일단 움직이지. 아, 다들 조용히 해주게. 정 말하고 싶으면 손을 들게나."
그에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갈라하드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
마족의 도시는 불에 탄 냄새와 매캐한 재로 가득했다.
기침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지만, 갈라하드는 상쾌함을 느꼈다.
사방에 마족이 돌아다녔다. 신기한 건 하급 마족이라도 정신 방벽이 세워져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정신 마법을 경계하는 것처럼-.
'정신계 마족을 적으로 생각하나?'
가능성이 있었다. 다만, 지금 중요한 건 아니었기에 뒤로 넘겼다.
마족의 도시에는 어떤 규칙도 법칙도 없었다. 경비대라는 개념도 없었다.
만약 인간 도시가 그랬다면, 진작 개판이 되었을 것인데 마족 도시는 조용했다.
마족 도시를 둘러보던 갈라하드는 몇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먼저-.
"으음!"
지나가던 마족이 경기를 일으키며 뒤로 물러났다. 더러운 똥이라도 본 듯한 태도였다. 그 앞에는 아드리안나가 있었다.
'마족이 아드리안나를 격하게 피하는군. 본능인가?'
아드리안가가 가까워지면, 마족이 질색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제껏 저런 반응을 받아본 적 없었는지, 아드리안나는 심하게 당황한 눈치였다. 아드리안나의 멍청한 투구가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좀 씻지 그랬나."
멍청한 투구 사이로 보이는 푸른 눈동자에 억울함이 보였다.
달그락! 갈라하드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마족은 본능적으로 아드리안나를 꺼렸다.
그와 반대로-.
"으음, 저 암컷 팔 생각 없나? 값을 제대로 주지."
"내가 더 주겠다. 나한테 팔게."
그웬의 인기는 굉장했다. 어디를 가도 마족들이 침을 흘리며 따라붙었다. 엄청나게 맛있는 요리를 본 듯한 반응이었다.
톰이 방패를 들며 그웬 앞을 막았지만, 마족의 시선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갈라하드에게 계속해서 값을 제시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얼마 줄 생각인가?"
"······?!"
그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다급하게 입을 벙끗거렸다.
"훈련도 잘되어 있군! 내 특별히 어린 소년 다섯까지 주겠다."
"나는 일곱."
"음, 부족한데."
시세를 확인해보니 그웬은 대략 어린 소년 열에서 열둘 사이었다.
마족은 화폐 대신 인간을 사용했다. 어린 소년이 금화 같은 느낌이었고, 성인 사내가 1실버의 느낌이었다.
뻐끔뻐끔-.
그웬이 다급하게 오른손을 들었다. 톰과 길버튼도 따라서 들었다.
"그냥 알아본 걸세."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손을 휘저었다.
아드리안나를 선두에 두고 걷자, 마족의 접근이 수그러들었다.
그렇게 조금 더 걷자 목적한 곳에 도착했다.
프록셀 가문의 것과 비슷한 저택이 있었다. 다만, 그 크기가 더 작고 허름했다.
프록셀 가문과 경쟁한다는 반스 가문이었다.
'반스라-.'
프록셀 가문의 수가 많았다. 갈라하드에게 숫자는 상관없었지만, 상대가 마족이라는 게 문제였다.
마족은 마나에 민감했다. 하급만 되어도 갈라하드의 마법에 반응할 정도로 아주 민감했다.
그런 마족들이 있는 곳에 몰래 들어가 데미안을 데리고 올 수 없었다. 차라리 기사 백 명 있는 저택에 들어가는 게 갈라하드에게는 더 쉬웠다.
설령 그게 가능해도, 몰래 데려올 생각은 없었다.
이런 일은 처음에 깔끔하게 처리해야 하는 법이었다.
그렇다고 정면으로 싸우는 것도 다소 위험했다.
프록셀 가문의 권능은 나머지 마족의 힘을 한 놈에게 몰아주는 것이었다.
그런 놈들의 저택을 먼저 들어가는 건 꽤 위험한 일이었다.
그때, 길버튼이 오른손을 들었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손가락을 튕겼다.
"말해도 되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까는 후퇴하자던 길버튼이, 지금은 열기를 가득 뿜어댔다. 길버튼다웠다.
"갈등을 유발할 생각일세."
"갈등 유발······?"
"프록셀 가문을 공격하고 반스 가문의 흔적을 남길 계획이지."
사이가 안 좋은 두 가문이니, 불은 금방 커질 것이다.
"반스 가문의 습격으로 만드는 게 가능합니까?"
당연한 의문이었다. 마족은 각자의 권능으로 싸웠다. 단순히 검상을 남기는 걸로는 흔적을 남길 수 없었다.
오해를 유발하려면, 권능을 베껴야 했다.
갈라하드는 그웬을 쳐다봤다. 그웬은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우리에게는 인기녀 그웬이 있지 않나."
"······네? 저요?"
"그래, 자네."
그웬의 얼굴이 작게 떨렸다. 자신감이라고는 코빼기도 안 보였다.
전에 고통의 알이 '밥'이라는 걸 그웬에게 주자, 그웬이 권능을 흉내 낸 적 있었다. 순간에 몹쓸 정도였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갈라하드가 그웬에게 바라는 건, 그 흉내였으니까.
"나는 자네를 믿네."
"······저를요? 왜요?"
"봉급 열 배 받는 값은 해야지."
그웬의 눈이 흔들렸다.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반스 가문은 프록셀 가문보다 허름했지만,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
이런 문제는 최대한 조용하고 은밀한 게 중요했다.
밖을 돌아다니는 반스 가문 마족을 몇 놈 잡아서 그웬에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웬이 권능을 조금이라도 흉내 내면, 프록셀 가문의 마족에게 반스 쪽 권능의 흔적을 남겨서 갈등을 유발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반스 가문 놈들 생각보다 빡빡하군.'
반스 가문의 마족들이 밖에 돌아다니지 않았다.
놈들은 대문 앞을 경비만 설뿐,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반스 가문의 영역에서 건드리는 건 상당히 위험했다.
밖으로 꾀어낼 필요가 있었다.
그 방법은 역시···.
"자, 그웬. 미인계일세."
"······네에?! 저요?!"
"그래, 마족들이 침을 질질 흘리는 자네의 미모를 뽐내는 걸세."
"저는 귀엽게 생긴 건데요!"
"아니, 마족에게는 미인인 게 분명하네."
"칭··· 찬이에요?"
"그렇지, 마족에게 인기가 많다니-. 정말 부럽군. 데미안을 구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일세."
"해볼게요!"
그웬이 각오 서린 얼굴로 끄덕였다.
"자네만 믿겠네."
등을 슬쩍 밀자, 그웬이 작게 '아자!'를 외치고 마족에게 향했다. 그 걸음이 마구 떨렸다. 갓 태어난 망아지 같았다.
그에 작게 웃는데, 뒤통수가 따가웠다. 고개를 돌리니 멍청한 투구가 갈라하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달그락-.
그때, 마족의 고개가 훽- 하고 돌아갔다.
두 놈이 동시에 코를 킁킁거렸다. 놈들의 입가로 침이 길게 흘렀다. 귀족 흉내를 내는 것치고 상당히 품위 없는 모습이었다.
그웬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섰다. 마족들이 연신 움찔거렸다. 당장 그웬에게 달려들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참는 듯했다. 제법 훈련이 잘된 놈들이었다.
다만, 그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 안녕하세요?"
그웬이 울먹이며 인사하는 순간, 마족들이 한 발짝 움직였다. 마족이 처음으로 대문에서 떨어졌다.
'앉아.'
갈라하드는 심장을 꾹 눌렀다. 고통의 알이 작게 투정 부리듯 퉁퉁 뛰었다.
저번 알을 먹은 이후로 입맛이 까탈스러워졌다. 최하급 마족의 피는 오히려 퉤퉤- 할 정도였다.
작게 투덜거릴 뿐 저항은 안 했다. 바로 옆에 아드리안나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내 뜀박질이 둔탁해졌다. 갈라하드는 마나를 갈무리했다. 고통의 알도 호응하듯 천천히 움직였다.
마족은 본능적으로 갈라하드를 높은 등급의 마족으로 생각했다. 대략 알아보니 중급에서 상급 정도로 보는 듯했다.
갈라하드는 마나를 다시 고통의 알에 쑤셔 넣었다.
억지로 마나를 갈무리한 갈라하드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멍청한 투구와 칼자루를 쥔 길버튼, 방패를 내민 톰이 갈라하드를 보고 있었다.
갈라하드는 잔뜩 굳은 그들을 보며 당부했다.
"부를 때까지 나서지 말게. 이건 명령일세."
단호하게 말한 갈라하드는 그웬에게 향했다.
어느새 마족들은 그웬과 가까이 있었다. 마족들이 그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이 작게 떨렸다. 희열이었다.
"이런 이건 내 걸세."
갈라하드가 그웬에게 향하는 마족의 손을 잡았다.
마족의 시선이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풀려있던 마족의 동공이 또렷해졌다.
갈라하드는 슬쩍 마나를 흘렸다. 돌아오는 반발력을 계산하여, 마나 농도를 조정했다. 이내 적당한 수준으로 마나를 맞췄다. 그에 걸린 시간은 찰나였다.
'마나 다루는 솜씨가 더 늘었군.'
갈라하드는 자신의 재능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러다 마족과 눈을 마주치고 혀를 찼다.
"침 좀 닦아주겠나. 더럽군."
마족들의 얼굴이 구겨졌다. 마족들의 눈이 그웬에게 꽂혀 있었다. 놈들이 입맛을 다셨다.
마족은 전과 달리 가격을 묻지 않았다. 대신 더욱 음험한 눈을 했다.
아마 놈들에게 적당한 마족으로 보인 듯했다.
'성공했군.'
갈라하드는 그웬을 당기며 뒤로 돌아섰다.
미리 봐둔 골목길로 향했다. 걸음을 재촉했다. 안 그래도 음산한 분위기인 도시에서 골목길이니, 아주 훌륭한 분위기를 풍겼다.
꿀꺽.
뒤에서 들리는 침 삼키는 소리에 갈라하드는 성공했음을 직감했다.
뒤에서 서늘한 느낌이 엄습했다.
"똑똑히 보게. 실수하면 데미안이 미안데미안이 되는 걸세."
"미안 데미안···?! 네에?!"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에 갈라하드의 앞으로 압축한 방호벽이 떠올랐다.
방호벽을 뭔가가 두드렸다.
'이런-.'
제법 압축한 마나로 만든 방호벽이었다.
그런 방호벽이 순식간에 찢어졌다.
갈라하드는 찢긴 위치와 흔적을 가늠했다.
그건 아주 예리하게 벼린 마나였다.
'화살 형태군.'
어깨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고통에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처음 보는 권능이었다. 농도에 비해서 그 절삭력이 뛰어났다.
'오로지 공격을 위한 권능인가.'
갈라하드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그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져 있었다. 그웬의 얼굴이 갈라하드의 피로 붉게 칠해져 있었다.
그웬은 감정에 따라 마법을 펼쳤다. 그런 그웬의 능력을 끌어올리려면, 감정을 건드리는 게 효율적이었다.
가령 대장이 앞에서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거나-.
"괜찮아요?!"
그웬의 절절한 목소리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웬-, 뒤로 오게."
갈라하드는 그웬을 옆으로 밀었다. 갈라하드의 뒤였지만, 놈들의 권능이 똑똑히 보일 수 있는 위치였다.
"아······."
"똑똑히 보게나."
마족이 걸음을 내디뎠다.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방호벽이 다시금 찢겼다.
그웬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작게 비명이 터졌다. 하지만 갈라하드의 신경은 정면에 쏠려 있었다.
'흥미롭군. 마나 화살의 원류인가?'
갈라하드는 어깨에 뚫린 구멍을 살폈다. 상처가 깊었다.
마나 화살은 아주 기초적인 마법이었다. 위력이 화살보다 못했기에 공격용으로 분류도 되지 않는 마법이었다.
그런데 마족이 펼치니 그 위력이 달랐다.
'압축보다는 마나를 벼린 느낌이군.'
마나가 무슨 철도 아니고 압축이 아니라 벼린다니-. 새로운 개념이었다. 갈라하드의 머리가 팽팽- 돌았다.
'흥미롭군.'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가득 올라갔다.
눈에 잔뜩 힘을 줬다. 눈을 깜빡여서 이 즐거움을 놓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화살이 방호벽을 다시 두드렸다. 더 세게 압축한 방호벽이 또 간단히 찢겼다.
'연사 속도가 상당해. 진짜 마나 화살 같군.'
어깨에서 화끈한 통증이 다시 느껴졌지만, 갈라하드의 입꼬리는 오히려 올라갔다.
마나를 벼린다니-.
갈라하드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
거대한 등에 자그마한 구멍이 뚫렸다.
뜨거운 피가 그웬의 얼굴을 적셨다.
갈라하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웬은 갈라하드가 어떻게든 해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갈라하드였으니까.
그런데 그 갈라하드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웬의 앞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길버튼님은-. 톰은-.'
그웬은 주변을 둘러봤지만,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지옥처럼 두꺼운 재가 전부였다.
누구의 도움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때-.
"흐흐······."
앞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터졌다. 거대한 등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 대장 갈라하드가 신음을 흘리다니-.
그웬의 심장이 거칠게 내려앉았다.
'저걸 어떻게 하라고-.'
그웬은 어떻게든 눈에 힘을 주고 마족을 노려봤다.
눈에서 눈물이 흐를 정도로 집중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뭔가 날아와서 갈라하드에게 구멍을 새기는 게 전부였다.
마법조차 어려운 그웬이었다.
도대체 마족의 힘을 어떻게 흉내 내라고-.
[내 손을 잡거라. 무한한 힘을 주겠다.]
두근, 달콤한 목소리가 들렸다. 꼭 천사의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건 갈라하드의 등에서 나는 소리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등에 새겨진 구멍에서-.
[내 손을 잡거라. 내 너에게 힘을 주겠다. 나를 경배해라.]
전보다 더 선명한 목소리였다.
[너의 간절함이 내게 닿았다.]
조금 위험하게 느껴졌지만,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웬은 입술을 깨물며 손을 움직였다.
푝.
갈라하드의 등에 그웬의 손가락이 꽂혔다.
73화 쩝쩝
'마나 화살-.'
갈라하드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마나를 압축하는 게 아니라, 날카롭게 벼린다-.
'꼭 마법의 위계 같군.'
본래 마법은 획을 더하는 방식이었다.
1 위계의 마나 화살이 마나를 움직이는 것이라면, 2 위계의 불화살은 마나 화살에 속성이라는 획을 더하는 거였다. 가령 3 위계의 불덩어리는 불화살에 무게라는 획을 더한 거였고-.
그렇게 위계에 획이 더해지며 올라가는 방식이었다.
간단히 획이라고 표현했을 뿐, 가벼운 개념이 아니었다.
위계가 높은 마법은 그 아래 위계의 마법을 잡아먹었다.
마법에 마나 농도가 관여했지만, 일반적인 마법사가 아무리 압축해도, 위계를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탓에 마법사에게 위계는 절대적인 신분이었다. 마법사를 나누는 단계였다.
그런데 저 마족은 마나 화살을 벼렸다.
'아니, 저게 원류겠군.'
벼리는 건 획을 더하는 게 아니었다. 마나 압축처럼 부가적인 요소였다.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마법사들은 위계를 높이는 것에만 매달렸으니까-.
다만, 높은 위치에 다다른 마법사는 그 잔재주가 찰나를 가르는 걸 알았다.
갈라하드는 훌륭한 마법사였다.
'마나를 벼린다.'
방금의 느낌을 되새겼다. 그를 깨닫기 위해 일부러 어깨에 맞기까지 한 갈라하드였다.
작게 뚫린 구멍을 보며 벼린다는 개념을 떠올렸다.
압축은 마나를 누르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벼린다는 건-.
'검처럼 날카롭게 가는 것이지.'
개념을 알았는데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나를 어떻게 벼린다는 말인가. 마나는 무형의 것이었다-.
'한 번만 더.'
갈라하드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나섰다. 그러자 마족이 눈썹을 구겼다.
"좀 더 날카롭게 할 수 없나?"
"허세는-."
진지하게 부탁했지만, 마족은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얼굴을 가득 구겼다.
그래도 효과가 있었는지, 전보다 더 거칠게 손을 휘저었다. 꼭 단검을 던지는 것 같았다.
갈라하드는 눈을 끔벅이지도 않고 집중했다. 뿌려둔 마나가 시시각각 놈의 권능을 형상화했다.
이윽고- 방호벽이 가벼이 뚫렸다.
'이거였군.'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가득 올라갔다.
그때-.
'음?'
등에서 격통이 올라왔다.
그에 슬쩍 고개를 돌리니, 그웬이 당장 울 것 같은 얼굴로 앞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웬의 손가락이 갈라하드의 등에 꽂혀 있었다.
"뭐 하는······."
그웬은 대답 대신 반대손을 휘둘렀다. 마치 단검을 던지는 것처럼-.
마족의 어깨와 허벅지에 구멍이 작게 뚫렸다. 피가 왈칵 쏟아지면서, 마족이 휘청였다.
그를 본 갈라하드의 눈이 커졌다.
갈라하드가 그웬에게 원한 건, 단순한 흉내 내기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그웬이 펼친 건···.
'진짜 권능이군.'
획이 아닌 권능이었다. 놈들의 것과 똑같았다.
고통의 알을 이용하여 쓴 터라 오히려 놈들 것보다 위력이 좋았다.
"훌륭하네! 그웬! 정말 대단하군!"
"예?! 네···."
"자신감을 가져도 좋네. 저기 뚫린 구멍을 보게. 완벽한 권능일세. 내 기대보다 뛰어나군. 다만, 조준이 좀 아쉬웠네. 놈들의 권능은 화살과 같지. 날카롭고 빠르지만 그 범위가 좁지. 화살을 효과적으로 쓰려면 어떻게 해야겠나?"
"모··· 모르겠는데요."
"급소를 노려야지. 가령-. 일로 와보게. 아, 일단 손가락은 빼지 말게."
그웬은 자신도 모르게 갈라하드에게 끌려갔다. 갈라하드는 쓰러진 마족 앞에 섰다. 그리고 마족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가령 이 마족 같은 경우에는 목이나 심장 혹은 고간을 노리는 게, 효과적일세."
"······에?"
"자, 다시 해보게."
"우웁-."
그웬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그래, 뒤처리는 내가 하겠네."
갈라하드는 슬쩍 마족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족은 버둥거리고 있었지만, 그 표정에 두려움은 없었다. 여전히 그웬을 향한 열망이 가득했다.
'좀비같군.'
갈라하드는 놈 앞에 쪼그려 앉아서 손가락을 흔들었다.
"고맙네, 좋은 가르침이었네."
"···가르침?"
마족이 눈을 가득 구겼다. 그를 보며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이건 그 대가일세."
갈라하드는 잠깐 주문을 외웠다. 드는 마나가 상당하여 꼭 필요할 때만 쓰는 주문이었지만, 지금은 괜히 쓰고 싶었다.
"칼날지옥불."
이내 갈라하드의 손가락에 자그마한 불덩이가 떠올랐다. 평범한 지옥불처럼 생겼지만-.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앞으로 튕겼다.
원래는 가장 느린 마법으로 꼽히는 게 지옥불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순식간에 마족에게 날아갔다.
"다 자네의 가르침 덕분일세."
그리 말하며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는 갈라하드에-.
"나는 그런 거 가르친 적 없······."
마족은 발작하듯 소리쳤다. 물론, 불에 타버린 탓에 말은 끝내지 못했다.
"아, 다시 한번 고맙네."
갈라하드는 재가 된 놈을 향해 다시금 감사를 표했다.
그때쯤 그웬이 토악질을 멈췄다. 갈라하드는 그웬을 보며 물었다.
"펼칠 수 있겠나?"
"도움만 받으면요."
"도움?"
두근! 두근!
"그········· 구멍 하나는 놔둬 달라는데요?"
그웬의 요청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아무리 마법사라고 해도 구멍을 그대로 두기에는-.
'아니, 이미 메워져 있군.'
구멍에 검붉은 살점이 있었다. 고통의 알이었다.
이거 버릇 한 번 제대로 잡아야겠어.
갈라하드는 속마음을 숨기고 끄덕였다.
"괜찮으십니까!"
다급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길버튼과 아드리안나가 있었다. 톰은 그 뒤에서 마족의 피를 챙기는 중이었다.
괜찮냐니-.
길버튼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아주 좋네."
갈라하드는 그웬의 둥근 머리를 꾹 누르며 입꼬리를 올렸다.
달그락.
****
"마족에게 인간의 피는 식사이자 잠이고 달콤한 음료일세."
아드리안나는 설명하는 갈라하드는 가만히 쳐다봤다.
갈라하드는 마족에게 마족 취급을 받았다. 마족들은 갈라하드를 대접했다. 더불어 마족 도시를 잘 안다는 듯 움직였고, 방금은-.
'마족의 힘이었다.'
그것도 마법이라는 걸까. 아드리안나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갈라하드는 알수록 더 알 수 없는 사내였다.
"알아보니, 인간들이 피를 공급하고 있더군. 상인처럼 말일세."
갈라하드가 앞쪽을 가리켰다. 떨어진 곳에 다른 곳보다 유달리 큼지막한 건물이 있었다. 그 앞에 사내 몇이 떠들고 있었다,
'피 냄새-.'
아드리안나에게 익숙한 냄새가 가득 풍겼다.
"알아보니 경비가 제법 삼엄하더군. 아무래도 피가 가장 인기 직종인 듯하네. 프록셀 가문의 것은 두 개일세."
갈라하드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지금 상황이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자, 계획은 간단하네. 프록셀 가문의 피 창고를 깔끔하게 부수는 걸세. 그리고 반스 가문의 흔적을 남기는 거지. 궁금한 점 있나?"
전혀 간단하지 않았다. 길버튼이 손을 번쩍 들었다.
"어떻게 들어갑니까?"
"어떻게 들어가냐니. 참 길버튼 경 다운 생각이군."
길버튼이 입을 꾹 다물었다. 갈라하드가 대놓고 혀를 찼다.
아드리안나는 반쯤 올렸던 손을 슬쩍 내렸다.
"당연히 손님으로 들어가는 거지."
"······예?"
손님으로 들어간다니-. 갈라하드는 마족이 자신을 마족으로 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깊어졌다.
"길버튼 경과 막내는 여기서 주변 감시를 하게. 접근하는 마족이 있으면 알려주고. 그웬과 톰은 같이 가지. 아, 톰 여분의 셔츠가 있나?"
"예? 당연히 있습니다."
"역시 톰이군."
갈라하드가 아무렇지도 않게 셔츠를 벗었다.
흉터가 가득한 그 등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짐작조차 힘들었다.
그때, 갈라하드와 눈이 마주쳤다.
아드리안나는 잘못한 것도 없지만, 괜히 시선을 피했다.
"음흉하군."
달그락! 달그락!
****
"프록셀 놈들 너무한 거 아니야?"
미식가 벤타는 작게 투덜거렸다.
"안 그래도 빡빡한데, 여기서 더 늘려달라니-. 이 새끼들 돼지 아니야?"
"좆 같네. 우리를 무슨 하인으로 아나."
안 그래도 최근 북부가 빡빡해진 상황이었다. 원래 공급양도 맞추기 힘든 상황인데, 프록셀 가문은 오히려 더 많은 공급양을 요청했다.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반스 쪽에 붙는 게 낫지 않아? 최근 프록셀 쪽 시원치 않던데. 저번에 크게 실패해서 단체로 죽었잖아."
벤타는 고개를 저었다.
반스도 떠오르는 마족 가문이었지만, 프록셀 가문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여기 프록셀은 분가잖아. 마경에 본가를 둔 진짜 귀족이라고. 반스는 프록셀한테 안 돼."
여기는 쫓겨난 마족들의 소굴이었다.
진짜 마족은 마경이라 불리는 곳에 있었다. 여기는 마경에서 밀린 패배자들이 정착한 곳이었다.
그때, 누군가 다가왔다. 깔끔한 차림의 잘생긴 사내였다. 자연스레 풍기는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떠들던 이들이 황급히 자세를 잡았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프록셀 가문의 얼굴을 전부 아는 건 아니지만, 창고로 오는 놈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저 마족은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다만, 사내의 여유와 고급스러움은 꾸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심지어 옆에 이쁘장한 하녀와 짐꾼을 데리고 다녔다. 마족이 가득한 곳에서 저렇게 다니는 건, 그를 지킬 자신이 있다는 소리였다.
"열지 않고 뭐하나?"
사내가 서늘하게 말했다. 귀족 특유의 거만함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벤타는 황급히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켰다.
사내는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이내 문이 쿵- 닫혔다.
그제야 벤타는 숨을 내쉬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열어줘도 되나?"
옆에서 떨떠름한 물음이 들렸다. 그에 벤타는 대놓고 혀를 찼다.
"딱 봐도 높은 마족이잖아. 새끼야. 이걸 찍어봐야 알아?"
벤타의 타박에 동료가 눈을 구겼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러면 너는 마족이 아닌데, 마족이 우글우글한 곳에 무기도 없이 이쁘장한 하녀 하나랑 짐꾼 하나 끼고, 프록셀 가문이 담당하는 창고에 와서 뻗대는 놈이 있을 거라는 거냐? 심지어 프록셀 가문의 창고인 것도 알고?"
벤타의 타박에 동료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미친놈이 있을 리가 없지."
다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
'음-.'
건물에 들어온 갈라하드는 코를 찡그렸다.
혐오스러운 열기가 얼굴을 가득 간질였다.
뜨거운 피 냄새가 가득했다. 이런 지독한 피 냄새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펄펄 끓는 솥이 사방에 있었다. 그 위로 피가 방울져서 톡- 하고 터졌다.
솥 사이를 돌아다니는 놈들의 얼굴에 땀이 가득했다. 모르는 이가 보면 정말 열심히 일하는 일꾼들처럼 보일 듯했다.
그중 큼지막한 모자를 쓴 이가 갈라하드에게 다가왔다.
놈이 모자를 벗으며 갈라하드에게 고개를 숙였다.
"새로 오신 분이시군요."
"반갑네."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튕겼다.
놈의 미간에 자그마한 구멍이 뚫렸다. 놈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갈라하드는 이어서 손가락을 튕겼다.
준비했던 마나가 퍼졌다.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는 마법이었다.
"문으로 오는 이가 있으면 나를 부르게."
"예."
톰이 방패를 당기며 대답했다. 톰이 나설 일은 없을 것이다.
창문 없는 건물에서 갈라하드가 표적을 놓칠 리가 없었으니까.
갈라하드는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사내 하나가 제 목을 잡고 뒤로 쓰러졌다. 뒤에 있던 솥이 엎어지면서 붉은 피가 쏟아졌다. 비릿한 냄새가 짙어졌다.
핏속에서 사내가 몸부림쳤다. 길게 비명이 터졌다.
그제야 주변의 시선이 쏠렸다.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단단한 껍질-!"
마법사였는지, 놈이 주문을 외웠다. 단단한 껍질은 제법 위계가 높은 방어 마법이었다.
그를 갈라하드의 마나 화살이 두드렸다. 톡, 톡, 톡. 마법사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새끼 마족이 아니구나!"
"정답일세."
갈라하드는 다시금 손가락을 튕겼다.
"마나 화살로 단단한 껍질을 공격하다니-. 멍청한-."
마법사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목에 생긴 자그마한 구멍에서 목소리 대신 피가 쏟아졌다. 마법사가 뒤로 넘어졌다.
콰앙! 솥이 엎어지며 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다른 놈이 검을 뽑았다. 오러를 일으키는 걸 보니 미식가인 듯했다.
"감히-."
갈라하드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튕겼다.
놈이 코웃음치며 검을 휘둘렀다. 그 오러가 제법이었다. 최소한 코웃음칠 정도는 됐다.
툭, 놈의 검이 마나 화살을 그었다. 마나 화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놈이 코웃음쳤다. 확실히 오러를 다루는 기사는 까다로웠다.
오러는 어떤 마법이든 갈라버리니까.
툭, 놈의 왼발에 자그마한 구멍이 뚫렸다. 놈의 검로에서 떨어진 부분이었기에, 막을 수 없었다. 검이 두 개가 아니고서는-.
"언제-."
놈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갈라하드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연달아 튕겼다.
놈이 이를 악물며 검을 휘둘렀다. 오러가 마나 화살을 그었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뻔한 검로였다.
툭, 놈의 허벅지에 구멍이 뚫렸다. 놈의 검이 느려졌다.
툭, 놈의 심장에 구멍이 뚫렸다. 놈의 검이 앞으로 꺾였다.
"기사가 덥다고 갑옷을 벗으면 되나."
건물에는 총 열두 명이 있었다. 마법사가 넷이었고, 기사가 셋, 나머지가 잡부였다.
뜨거운 일에 다들 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덕분에 꽤 쉬웠다.
중요한 건 흔적을 남기는 거였다.
놈들의 권능에서 마나를 벼리는 법을 배웠다고 한들, 마족의 권능과 흔적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를 위해 그웬이 필요했다.
그웬은 들어온 순간부터 연신 속을 게워냈다. 그 유약한 심성이 걸림돌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그웬은 주저하지 않았다.
"잠깐만 빌릴게요!"
푝-.
그웬은 연신 토악질하면서도, 못하겠다는 유약한 말은 하지 않았다. 꿋꿋하게 권능을 뿌렸다.
'슬슬 쓸만하군.'
그때, 톰이 돌아다니며 솥을 밀어서 부쉈다.
피가 얼마나 많았는지, 바닥을 가득 적시고도 넘쳤다.
갈라하드는 문을 향해 길게 흐르는 피를 보며 마나를 움직였다.
넘친 피가 바닥을 적시고 계속 흘렀다.
이내 정문에 가까이 도달했고-.
"뭐야?! 안에 무슨 일이야!"
문이 거칠게 열렸다.
들어온 놈의 미간에 구멍이 뚫렸다.
"무슨-."
양쪽에 있던 놈들의 머리가 동시에 위로 떠올랐다.
길버튼과 아드리안나였다.
"성공일세. 아, 그웬 손가락 좀 치워주겠나?"
"네!"
뾱!
****
'음······.'
길버튼은 갈라하드와 다니며 깨달은 게 있었다.
갈라하드를 굳이 이해하려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갈라하드는 마법사였다. 괜히 이해하려다가 길버튼의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그래도 갈라하드의 결과는 늘 좋았다. 그에 길버튼은 웬만하면 의문을 품지 않고 따랐다.
그런 길버튼도 지금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마족들이 뒤엉키고 있었다.
그사이에 섞인 인간들이 길게 비명을 질렀다.
마족은 사지가 잘린다고 멈추지 않았다. 숨이 다할 때까지 손을 휘두르거나 검을 휘둘렀다.
프록셀 가문과 반스 가문의 마족이 싸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왜?
"왜 마족들끼리 싸우고 있지?"
"왜라니. 이제껏 뭐했나?"
갈라하드의 혀 차는 소리에 길버튼은 눈을 찡그렸다.
"창고 한 개 습격한 게 전부 아닙니까?"
심지어 그리 큰 창고도 아니었다. 마족 없이 인간이 지키는 그런 허름한 창고였다.
그런 곳을 찔렀다고 저렇게 싸운다니-?
"귀족에게 필요한 건 명분일세."
"명분 말입니까?"
"그렇다네. 명분은 흙보다 가치가 없지만, 때로 귀족들에게는 금보다 값지지."
"그게 무슨-. 아닙니다."
길버튼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듣는다고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음, 프록셀은 스무 마리 정도 나왔나? 예상보다 많이 안 나왔군. 이거 생각보다 데미안이 귀한 모양일세."
갈라하드가 헝클어진 머리를 넘겼다.
본래 마족의 도시는 조용하고 서늘했다. 괜히 갈라하드가 대원들에게 입 닫으라고 명령했던 게 아니었다.
그런 도시가-.
"으아아악! 죽여! 죽이라고-!"
"망할 새끼들-."
지금은 피가 튀고 비명이 들렸다. 그 다툼에 건물의 벽이 무너졌다. 오러에 피가 길게 튀었다.
도시가 가득 시끄러워졌다.
그 원인은 분명히 갈라하드였다.
그런데 정작 갈라하드는 연초를 피고 있었다.
마치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처럼-.
아주 여유로웠다.
"자, 이제 데미안을 구출하러 가볼까."
갈라하드가 다 핀 연초를 털며 말했다.
그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가 있었다.
꿀꺽-.
길버튼은 갈라하드를 아주 능력이 좋지만, 너무 뛰어나서 머리가 고장 난 사내라고 생각했다.
평가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갈라하드는 단순히 능력이 좋은 사내가 아니었다.
그는-.
재앙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휩쓰는 재앙.
"예, 대장!"
길버튼은 갈라하드와 같은 편이라는 것에 진심으로 안도했다.
****
쩝쩝-! 쩌업-! 쩝!
프록셀 분가의 부가주 헬싱턴은 천박한 소리에 눈을 찡그렸다.
데미안이 포크로 연신 고기를 집어 먹고 있었다.
포크를 하도 바짝 잡아서 손으로 먹는 것과 다름없었다.
포크를 쓰는 의미가 없는데도 데미안은 끝까지 포크를 사용했다.
애써 챙겨준 옷에는 기름과 양념이 가득 묻어 있었다. 품위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미개한 인간의 피가 반이나 섞인 까닭이었다.
역겹지만, 그렇기에 의미가 있었다.
그들은 인간이 지닌 송곳니, 오러를 탐했다.
그에 씨를 뿌렸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를 먹어서 오러를 가질 생각이었다.
프록셀 가문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유일한 결실이 앞에 있었다.
'오러를 취한다.'
헬싱턴의 입꼬리가 가득 올라왔다.
그의 가주는 억울하게 분가로 밀렸지만, 오러를 취하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가주가 놈을 먹을 것이다.
인간의 무기와 마족의 무기를 전부 다룰 수 있다니-.
'우리의 시대가 온다.'
피의 순혈로 결정되는 것이니, 가주가 데미안에게 먹힐 일은 없었다.
혹시나 그렇게 되면-.
'쓸데없는 생각이다.'
헬싱턴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살이 올라왔다 곧이다.'
헬싱턴은 데미안을 보며 끄덕였다.
그때-.
쩝쩝-. 쩝. 쩌어업!
"더 줘요."
이러다가 먼저 파산하게 생겼다-.
대업을 서둘러야 했다.
쩝쩝쩝-.
74화 꼬르륵
마족 도시는 재와 매캐한 냄새로 가득했다.
저번에 들어갔던 마경과 흡사했지만, 다른 점은 마경보다 마족의 밀도가 높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간간이 인간도 섞여 있었고-.
갈라하드는 슬쩍 뒤쪽을 살폈다.
두 가문의 전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반스 가문이 전부 뛰어나온 것에 비하여, 프록셀 가문 쪽이 다 나오지 않은 탓에 묘한 균형이 발생했다.
수적으로 반스 쪽이 유리했지만, 힘을 모으는 프록셀 가문의 권능 탓에 오히려 프록셀이 더 몰아붙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프록셀 가문의 검을 쓰는 마족 둘이 반스 나머지를 몰아내는 형태였다.
'마족에게 강함은 절대적이군.'
갈라하드는 슬쩍 연초를 입에 물었다.
전과 달리 마족들에게 열기가 느껴졌다. 뒤쪽의 전투에서 뿌려지는 피 때문에 흥분한 듯했다.
조용하던 도시가 점점 일어나고 있었다.
딸꾹-. 작은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잔뜩 긴장한 대원들이 보였다.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마족이 우글거리는 곳에 던져진 상황이었으니까.
"걱정하지 말게. 다 계획대로니까."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대로 프록셀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은 전과 달리 조용했다. 문이 열려 있었다.
'진짜 귀족 같군.'
갈라하드는 작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그냥 갑니까?"
길버튼의 다급한 목소리가 갈라하드를 붙잡았다.
"열아홉 마리가 빠졌네. 열두 마리가 남았지만, 아마 핵심 병력이겠지. 더불어 숨긴 병력이 있을 것이고-. 가령 미식가들이라든지."
"그건 추정 아닙니까."
"맞네, 추정이지. 다만, 놈들도 반스를 상대로 그렇게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닐 터, 병력을 최대한 운용했겠지. 지금 가능성이 가장 높네."
갈라하드는 어깨를 작게 돌렸다. 구멍이 뚫렸던 곳인데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법사의 몸이 튼튼한 것보다는 고통의 알 영향이 있는 듯했다.
길버튼이 제 손가락을 보며 뭐라 중얼거리다가 이내 끄덕였다.
"아무튼, 할 수 있다는 겁니까."
"그렇네, 조금 위험하지만, 뭐 세상 일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나."
갈라하드는 길버튼 뒤를 응시했다. 멍청한 투구가 작게 달그락거렸다.
"놈들의 권능은 한 놈에게 힘을 몰아주는 걸세. 다른 놈을 처리해야 더 수월하지. 자, 질문 있나?"
대원들은 조용했다. 갈라하드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막내는 내가 신호를 줄 때까지 움직이지 말게. 자, 그러면 들어가지."
갈라하드는 망설임 없이 열린 대문을 들어갔다.
정원은 황량했다. 그래도 나름 노력은 했었는지, 곳곳에 썩은 식물이 뒹굴었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저택을 올려봤다.
저택은 삼층이었다. 흔한 경비도 없었다. 마중 나오는 이도 없었다.
갈라하드는 마나를 돌리며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의 1층에 들어갔을 때도 마주하는 놈이 없었다.
갈라하드는 슬쩍 마나를 뿌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일명 마족 탐지 마법이 1층을 훑었다.
1층에는 마족이 없었다. 2층도 마찬가지였다.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처음으로 마족을 만났다.
번듯하게 입은 마족이었다. 멋들어진 콧수염과 외눈 안경은 훌륭한 귀족 흉내였다. 그 복식도 나름 나쁘지 않았다.
"초대장은 보낸 적 없는데. 무례하군."
"과감한 걸세."
갈라하드는 가벼이 말을 받았다.
'최소 중급.'
마족을 제법 만났기에, 이제 대충 견적을 낼 수 있었다. 놈은 최소 중급이었다.
"여기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네. 갈라하드라고 했나?"
놈은 갈라하드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함정인가.'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준비성이 철저한 놈들이었다. 갈라하드와 길버튼을 상정하고 함정을 준비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문제는 없었다.
'아드리안나가 있으니까.'
문제는 아드리안나가 정체를 드러냈을 때였다. 마나에 민감한 마족이 눈치를 챌 가능성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도시의 지배자라는 놈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었다.
혹시나 놈이 아드리안나의 존재를 알아챈다면-.
'변수가 생긴다.'
아드리안나는 최대한 숨겨야 했다.
"맞네, 내가 그 유명한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일세."
"나는 프록셀 가문의 헬싱턴이라고 하네. 데미안을 보러 왔겠군."
"맞네, 잘 있나?"
"아주 잘 있지. 음-."
놈이 잠시 침음성을 흘렸다. 그 태도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뭔가 고민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데미안을 보러 가겠나?"
갈라하드는 가만히 놈을 살폈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 사이즈가 살짝 큰 중절모, 외눈 안경, 허리춤의 검-. 놈의 팔과 신장을 고려하여 거리를 가늠했다.
'데미안 확인부터.'
갈라하드는 끄덕였다.
"좋지."
놈이 뒤로 돌았다. 그 뒤통수가 반들반들했다.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톡톡 튕겼다.
도착한 곳은 거대한 문 앞이었다.
"이쪽으로-."
마족은 문을 슬쩍 밀었다.
연회장처럼 길쭉한 식탁이 있었다. 그 위에 조각만 남은 고기와 빵들이 가득했다. 대충 봐도 데미안이 먹은 흔적이었다.
'많이도 먹었군.'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톡톡- 튀겼다.
그 끝에 거대한 침대가 있었다. 푹신한 침대 위에 데미안이 누워 있었다, 얼마나 먹었는지 그 배가 볼록했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데미안."
평소 한 번 잠들면 반나절은 절대 일어나지 않던 데미안이 눈을 확- 떴다. 벌떡 일어났다.
"형?"
갈라하드를 본 데미안이 눈을 끔벅였다. 지금 이게 맞는 상황인지 되새기는 듯했다.
"맞네, 나일세. 휴가를 가려면 먼저 신청해야지. 그냥 가면 되나."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데미안에게 다가갔다. 깡 말랐던 몸에 살집이 좀 붙었다. 그 얼굴에 기름기가 번들거렸다. 제법 잘 지낸 듯했다.
"그냥 눈을 뜨니 여기였어요."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등장한 인물은 깔끔하게 빼입은 노인이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따뜻함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노인이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단순히 시선이 부딪혔을 뿐인데도 털이 바짝 곤두섰다. 물에 젖은 듯한 나무 냄새가 가득 풍겼다.
'이건 좀 곤란하군.'
생각 외의 강적이었다. 데미안이 작게 떨었다. 그제야 갈라하드는 데미안이 움츠린 이유를 깨달았다.
'상급 이상이다.'
갈라하드는 슬쩍 아드리안나를 살폈다.
마경에서 아드리안나가 상급 마족을 간단히 없앴던 모습이 떠올랐다. 다만, 그 상급 마족은 정신계였다.
여기 노인이 전투에서는 더 강할 게 분명했다.
거기에 힘을 몰아주는 놈들의 권능까지 생각해보면-.
'음, 좋지 않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헬싱턴이라는 마족이 노인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노인의 시선이 갈라하드를 위아래로 살폈다. 그 눈에서 묘한 열망이 떠올랐다. 그 시선은 곧 그웬에게 꽂혔다.
"오, 맛있겠군."
노인이 추잡하게 떠들었다.
우습게도 갈라하드도 노인을 보며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노인이 손을 뻗었다. 잠깐 떤 데미안이 노인의 품에 안겼다. 겉보기에는 화목한 손주와 할아버지였다. 데미안의 눈이 잔뜩 풀어졌다.
"데미안, 돌아갈 시간일세."
"안 돼요."
데미안의 단호한 대답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데미안답지 않은 똑 부러진 대답이었다. 데미안은 배고프다거나 졸린다고 말했지, 저렇게 똑똑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계산을 다시 해야 했다.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톡톡 튕겼다.
"대답이 됐나?"
노인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가 있었다.
'우리를 그냥 돌려보내고 싶어 하는군.'
정확히 말하자면 다툼을 피하는 눈치였다. 노인은 갈라하드를 경계하고 있었다. 특무대를 경계하는 듯했다.
아무래도 저번에 특무대에게 실패한 게 큰 듯했다.
'데미안을 보여준 건 포기를 종용하기 위함인가?'
실제로 데미안의 상태가 좋았고, 데미안이 '싫다고' 말하는 모습까지 보여줬으니까.
더불어 노인의 힘까지 은연중에 드러냈다.
포기를 종용하기 위한 게 분명했다.
괜히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반스 가문과의 전쟁 영향도 있겠지만-.
'뭔가 더 있는 눈치군. 그것도 제법 굉장한 게 말이야. 굵직한 마족이 연기를 할 정도로-.'
갈라하드는 빠르게 상황을 되짚었다.
'일단 데미안이 멀쩡한 건 확인했으니.'
멀쩡한 정도도 아니었다. 데미안은 제법 잘 지내고 있었다.
'굳이 어려운 길로 갈 필요 없지.'
톡톡,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며 끄덕였다.
"그렇군."
갈라하드는 수통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웅은 필요 없네."
계산을 마친 갈라하드는 망설임 없이 뒤돌았다.
*
그웬은 다급하게 갈라하드에게 따라붙었다.
갈라하드는 별말 없이 성큼성큼 걸었다. 그 다리가 워낙에 길쭉한 탓에 그웬은 거의 뛰듯이 걸어야 했다.
'데미안-.'
마족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는 데미안의 모습은 상당히 편해 보였다.
마족이 저주받은 존재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런 데미안을 보니 그웬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데미안은 정말 잘 먹고 잘살고 있었다. 그 얼굴에 기름기가 번들거렸고, 배도 볼록 나왔다. 더불어 소가주 소리까지 들었다.
그런 데미안을 보니, 그웬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데미안에게 저곳이 집인 걸까.
"이대로 그냥 갑니까?"
길버튼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냥 간다니. 길버튼 경다운 소리군."
그웬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잘 지내는 것 같은데요!"
갈라하드의 시선이 그웬을 향했다. 그 눈은 여전히 무심했다.
"마족 품에서 말인가? 웃기는 소리군. 늑대 사이에 뒹구는 포동포동한 아기 돼지를 보고도 가만히 둘 건가?"
갈라하드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뭔가를 찾는 것처럼 위아래를 살폈다.
그웬은 물러설 수 없었다. 아이에게 부모가 얼마나 소중한지 가장 잘 알았기에-.
"데미안이 싫다고 했잖아요."
"일단, 데미안은 싫다고 하지 않았네. 안 된다고 했지. 둘의 차이는 아주 극명하지."
갈라하드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단단한 확신이 가득했다. 그웬은 작게 안도했다.
"더불어 특무대에 들어온 이상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는 절대 나갈 수 없네. 한 번 특무대는 영원한 특무대니까. 아, 자네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일세."
달그락.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막내 노아드가 투구를 흔들고 있었다. 그웬의 시선에 그 투구가 뚝- 하고 멈췄다. 어딘지 맹한 막내였다.
"음, 내 계산이 틀렸네. 놈들이 가주라고 부르는 그 노인-. 상당히 강적일세. 데미안이 저렇게 똑똑해질 정도니까. 방법을 바꿔야겠어. 먼저 가지치기부터 하지."
"가지치기 말입니까?"
"이렇게 말일세."
갈라하드의 손가락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러자 벽이 길게 그어졌다. 그 사이에 눈을 동그랗게 뜬 마족이 있었다.
"일단, 하나일세. 길버튼 경."
"건방진···!"
마족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길버튼의 검이 목을 갈랐다. 피가 길게 뿌려졌다. 길버튼의 검에는 작은 망설임도 없었다.
"잘했네, 길버튼 경. 이런, 배웅은 필요 없다고 했을텐데."
"어리석은 인간은 늘 문제를 일으키지."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길을 안내해줬던 마족이었다. 마족이 검을 뽑아 갈라하드를 겨눴다.
검을 모르는 그웬이 보기에도 화려하고 멋들어진 검이었다.
마족의 뒤로 번듯하게 차려입은 이들이 나왔다. 복도가 가득 찰 정도로 수가 많았다. 피부로 느껴지는 따끔함에 그웬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얌전히 제물이 되어 주겠나."
마족이 갈라하드를 보며 정중하게 물었다.
"제물이요?!"
마족의 시선에 그웬은 황급히 갈라하드의 뒤로 숨었다.
"설명해주겠나?"
연초의 불이 갈라하드의 얼굴을 작게 밝혔다. 무표정이었다. 그 손가락이 탁탁 튕겼다. 입이 뭔가를 작게 중얼거렸다.
"흠, 멍청한 인간이 들어봤자 이해 못 할 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좋은 날이니 해주겠다."
"고맙군. 역시 프록셀일세."
사내가 손을 들었다. 검을 든 이들이 그대로 멈췄다. 미묘한 대치였다.
"놈은 프록셀이 만든······."
그때,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작은 소리가 전부였다.
마족을 향해 자그마한 불이 날아갔다.
그에 마족이 다급히 검을 휘둘렀다.
마족의 검이 불을 찔렀다.
콰아아아앙!
불이 거칠게 터졌다. 커진 불이 길게 뿜어지며 마족과 그 뒤에 있던 이들까지 한 번에 삼켰다.
후끈한 열기가 복도를 가득 휩쓸었다.
"끄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뒤늦게 터졌다.
고기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
불길이 사라진 자리에 마족은 없었다.
그저 새까만 재가 전부였다.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자네는 말이 너무 많아."
갈라하드가 연초를 털면서 중얼거렸다.
'물어본 거 아니었나-?'
경악 어린 시선이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그에 갈라하드가 눈을 찡그렸다.
"일 안 하나?"
그 타박에-.
"기사- 길버튼-!"
길버튼의 검이 푸르게 타올랐다.
****
"아래가 시끄럽구나."
노인은 아래를 가벼이 훑어보며 혀를 찼다.
하여튼 요즘 것들은 교양이 없다니까.
'놈은 조금 다른 줄 알았건만.'
역시 인간인가. 노인은 눈썹을 찡그렸다.
'냄새가 강했지.'
노인은 갈라하드라는 놈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노인조차 헷갈릴 정도로 냄새가 짙은 놈이었다.
확실히 저번에 보낸 이들이 당할만했다.
다만, 그래 봤자였다.
'우리는 프록셀이다.'
프록셀은 영역에서 절대 지지 않는다.
분가된 탓에 임시로 만든 영역이지만, 그래도 프록셀이었다.
질 리가 없었다.
원래는 마주한 순간 데미안 앞에서 처리할 생각이었다. 데미안에게 마지막 남은 인간의 끈을 끊기 위함이었다.
다만, 갈라하드라는 놈이 상당히 까다로웠다. 더불어 놈 뒤에 있던 그 멍청한 투구를 쓴 놈-. 놈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놈을 돌려보냈다.
안 그래도 멍청한 반스 가문 때문에 시끄러워진 상황이었다. 여기서 일을 더 키웠다가는 지배자의 시선을 끌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게 엎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돌려보낸 것인데-.
'멍청한 인간이 주제도 모르고 문제를 일으키는군.'
노인은 눈을 찡그렸다.
그때-.
묘한 허전함이 느껴졌다.
그에 노인은 다급하게 권능을 펼쳤다.
이건-.
'헬싱턴이 사라졌다?'
노인의 눈이 구겨졌다.
노인의 예상보다 더 빨랐다-.
노인은 고개를 돌렸다.
"준비는 멀었느냐!"
"끝났습니다."
옆에서 들린 보고에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겨운 냄새와 달콤한 냄새가 정확히 반 섞인 아이, 데미안이 노인을 올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탐탁지 않은 기운이 섞여 있었다.
"일어나거라."
데미안이 멍하니 일어났다. 더러운 인간의 피가 반이 섞여 다소 까다롭지만, 결국 데미안도 프록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노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콰아앙!
다시금 굉음이 터졌다. 노인의 눈이 가득 구겨졌다. 초조함이 올라왔다.
자신이 초조함을 느꼈다니-.
노인의 미간이 깊어졌다.
"일단, 계승부터 한다."
노인은 데미안의 목덜미를 잡았다.
"계승을 끝내면 저 건방진 인간 놈도, 지배자라 꺼드럭거리는 놈도, 감히 나를 쫓아낸 본가 놈들도 다 프록셀에 굽힐 것이다."
노인의 읊조림에 보고를 올린 마족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꼬르륵-.
그때, 데미안의 배에서 큼지막한 소리가 났다.
'그렇게 먹였는데, 또?'
노인은 눈을 가득 찡그렸다.
완벽한 계승을 위해서는 미련을 지워야만 했다.
다만-.
콰아아아앙!
허전함이 다시금 엄습했다.
그사이에 수가 하나 더 줄었다.
'또?!'
완벽하지 않았지만-.
'고작 굶주림이다. 이 정도는 괜찮다.'
이런 반푼이보다 노인의 피가 더 진하니까.
콰아아아앙!
노인의 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꼬르륵! 꼬르륵!
75화 사춘기
'계승이라.'
갈라하드는 손에 묻은 피를 털었다.
마족에게 알아낸 건 단편적인 정보였다.
노인이 데미안에게 계승이라는 걸 하겠다는 이야기가 전부였다. 그 이상을 물으면 머리가 터졌다.
'상당히 불온한 단어군.'
그리 낯선 단어는 아니었다.
'놈이 하던 짓 같군. 스한이었나.'
스한은 상당히 평이 좋았던 요원이었다. 푸근한 인상에 고아들을 키운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놈을 조사했다. 이곳에서 고아를 보살필 때는 대부분 의도가 불순했기에.
의외로 놈의 집은 깨끗했다. 어디에서도 고아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갈라하드는 꼼꼼하게 놈의 집을 살폈고, 이내 지하에서 거대한 마법진을 찾아냈다. 붉은 마법진인데, 그 위에 작은 시체들이 있었다. 바짝 말린 시체들이었다.
놈은 정보보다 강했다. 물론, 갈라하드의 상대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사건의 내용은 상당히 평이했다.
놈은 고아를 모아서 따로 마법을 가르쳤다. 많은 걸 가르친 건 아니었다. 그저 필요한 문자를 읽고 마나를 움직일 정도만 가르쳤다.
그리고-.
'마나를 흡수했지.'
놈은 아이들의 마나를 흡수했다. 놈이 기록보다 강했던 이유였다. 놈은 계승이라고 표현했다.
웃긴 이야기였다. 위에서 아래로 주는 것이 아닌데, 계승이라니-.
갈라하드는 놈을 은퇴시켰다.
사유는 불법 마법 강습이었다. 고아 납치 살해보다 그쪽이 더 형벌이 높았다.
'마법의 원류가 마족이라-.'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톡톡- 거리면서 기억을 뒤졌다.
흥미로운 마법진이었기에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마법진은 상당히 조잡했다. 지금 보니 마족의 것을 흉내낸 탓인 듯했다.
'만약 마족이라면-.'
갈라하드는 기억 속 마법진을 다시 조합했다.
'피를 흡수할 생각이군.'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프록셀의 권능을 이용하는 듯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절반은 프록셀, 절반은 창부였다.
계승이 온전할 리 없었다.
그렇다면-.
"우웩-."
"그웬님, 괜찮으십니까? 이것 좀 마셔보십쇼. 속에 좋습니다."
달그락.
시끌벅적한 소음이 갈라하드의 상념을 깼다.
"대장, 이놈들 계속 나옵니다."
길버튼이 손을 털며 물었다. 그 뒤로 목이 잘린 마족의 사체가 뒹굴었다.
"이상하군."
"예?"
"죽여도 마족의 힘이 눈에 띄게 줄지 않아. 계산대로라면 비례하여 힘이 줄어야 할 텐데-."
"대장님이 틀린 거 아닙니까?"
"미안하지만, 내가 틀릴 일은 없네."
갈라하드의 단단한 말에 길버튼은 마른침을 삼켰다. 어찌 저리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 신기했다.
"마족을 죽여도 그 힘이 줄어들지 않아. 오히려 농도가 오르는 것 같군. 어째서?"
주변을 살피던 갈라하드는 문득 벽에 묻은 얼룩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언뜻 보기에 그냥 재였지만, 얼룩이 상당히 짙었다.
마치 누가 일부러 바른 것처럼-.
"아, 그거였군."
"뭐가 말입니까?"
"이 저택도 프록셀일세. 제법 머리를 썼군."
"저택이 프록셀?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길버튼 경, 자네는 배움을 부끄러워하지 않는군. 참 좋은 자세일세."
길버튼은 잠시 갈라하드의 말을 되새겼다. 칭찬인가?
"벽을 보게. 곳곳에 얼룩이 있지. 단순한 얼룩처럼 보이지만-. 맛을 봐보게."
길버튼은 가죽 장갑을 벗고 벽을 손가락으로 긁었다. 먼지 같은 자그마한 얼룩이 손가락에 묻었다.
"퉤-! 젠장! 좆 같은 맛이 나지 않습니까!"
"정답일세. 이건 마족의 시체로 만든 벽이네. 프록셀 가문의 마족이겠지."
"자기 선조 시체로 만든 거라는 겁니까? 미친 마족 놈들-."
"똑똑하지 않나? 여기서는 마족을 죽여도 저택에 흡수되는 것 같네. 영역에 관한 권능인가. 이런 건 처음 보는군."
"······예?"
갈라하드는 헝클어진 머리를 넘겼다.
저택도 프록셀이었다.
'순순히 보내주더니. 자신이 있었던 거군.'
마족을 불로 태워도 저택에 흡수되는 듯했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남았다.
'왜 노인이 직접 안 나서지?'
아무리 저택이 흡수해도, 그 효율이 완벽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노인이 나서지 않았다.
'힘을 쓰는 걸 꺼리는가?'
갈라하드가 두려운 걸까? 그런 눈치는 아니었다.
프록셀은 도시에서 큰 조직이었다. 그런 조직의 수장인 노인이 나서기 꺼리는 이유는-.
'지배자란 놈 때문인가.'
도시를 다스린다는 마족, 지배자란 놈에 대한 소문은 다양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건 하나였다.
지배자의 관심을 끈 대상은 마족과 인간 상관없이 사라진다고-.
소문이야 부풀려지기 마련이었지만,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갈라하드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드리안나는 최대한 힘을 죽이고 있었다. 갈라하드의 요청 때문이었다.
행여 아드리안나가 나섰다가, 지배자의 시선을 끌게 될 수도 있었기에-.
'노인도 두려워할 놈이라.'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었다.
지배자에 대한 위험도를 더 올렸다.
노인이 경계하여 제 살을 내어줄 정도라면, 지배자의 개입은 피하는 게 맞았다.
당장 여기 프록셀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피로도가 상당했다. 최대한 조심해야만 했다.
'아드리안나는 아껴야겠군.'
그에 갈라하드는 다시 계산했다.
단서는 두 개였다.
첫 번째는 노인의 목적이 데미안에게 계승이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단서는 저택도 프록셀이라는 것이었다.
갈라하드는 두 단서를 조합했다. 이윽고 하나의 방법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데미안을 믿어야겠군."
말을 하니 입안이 텁텁했다. 애석하게도 갈라하드는 남을 믿고 맡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계승의 개념은 비슷할 것이다.'
갈라하드는 그웬을 쳐다봤다. 그웬은 아직도 속을 게워내고 있었다.
"예? 꼬맹이를 믿는다고요?"
"그렇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지. 좀 도와줘야겠는데-."
"어떻게 도와줍니까?"
"마족을 잡아주는 거지. 문제는 마족을 잡아도 힘이 저택으로 넘어가네. 이를 끊으려면-. 시간이 제법 걸리겠군."
"왜 그렇게 합니까?"
"방금 설명하지 않았나. 길버튼 경."
"아니, 그게 아니라-."
길버튼이 텁텁하게 반문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자네가 배움에 당당한 이라는 건 알지만, 때로는 부끄러움도 필요한 걸세."
갈라하드의 지적에 길버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택이 문제라면-."
끝까지 말하는 길버튼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다만, 이어진 길버튼의 말에 작게 감탄했다.
"그냥 저택을 부수면 되지 않습니까?"
길버튼다운 무식한 소리였다.
'저택을 부수자.'
참으로 무식한 방식이었지만-.
'확실히 효과적이군.'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길버튼 경, 자네는 고장 난 시계일세."
"예? 저는 기사입니다만."
"그걸 내가 몰랐군. 자, 그러면 저택을 부수지."
"이럴 줄 알았으면, 망치를 들고 올 걸 그랬습니다."
툴툴거리는 길버튼에 갈라하드는 짙게 웃었다.
"아, 망치 여기 있습니다!"
톰이 큼지막한 망치를 꺼냈다.
쏠린 시선에 변명하듯 톰이 어색하게 웃었다.
"망치를 쓰는 놈이 있었습니다. 필요할 것 같아서 챙긴 겁니다."
"농담이다. 검으로도 충분해."
길버튼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에 톰이 망치를 흔들었다.
"그러면 다 부숩니다?"
오러를 가득 일으킨 길버튼이 물었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아래가 시끄러운데?"
"침입자가 있다는군."
"반스 놈들인가?"
"아니, 인간이라던데."
"지랄하지 마."
"나도 들은 거라고."
퉁명스러운 반응에 미식가 베른은 눈을 찡그렸다.
진짜 인간들이 쳐들어왔다는 건가? 어떻게 들어온 거지?
설사 들어왔다고 한들-.
"프록셀 저택에 제 발로 들어온다고? 미친놈들인가."
베른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프록셀 가문은 특이한 놈들이었다. 프록셀은 괴상한 힘을 사용했다. 마족은 전부 괴상한 힘을 썼지만, 프록셀 가문은 더 독특했다.
특히 저택에서는 힘이 더 강해졌다. 상급 마족이 프록셀 저택에 들어왔다가 그대로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유명했다.
그런데 제 발로 저택에 들어오다니-.
"미친놈들이군."
"그러게. 그래도 한가락 하나 봐? 여태까지 시끄러운 걸 보니까."
라크란이 길게 하품하며 말했다. 그녀의 말처럼 아래에서 굉음이 계속 터졌다.
꽤 잘 버티는군. 베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굉음이 멈췄다. 오랜만에 침묵이 찾아왔다.
"끝났나 보군. 얼마나 지났지?"
베른은 다급하게 모래시계를 확인했다.
"내가 이겼네?"
베른이 마나 시계를 흔들었다. 색이 노란색이었다. 두 번 흔들렸다는 신호였다.
"시덥잖은 놈들이었네."
"하하, 이상한 곳에 화풀이하지 말라고."
얼굴을 가득 구기는 라크란에 베른은 흐흐- 웃었다.
"내기는 내기잖아?"
"쯧, 분명 잘 싸우는 놈들이라고 했는데."
라크란이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견갑을 풀었다. 그에 드러난 하얀 피부에 베른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한 입만이야."
"알았다고."
베른은 허리춤의 포크와 나이프를 꺼냈다. 라크란이 제 목을 내밀었다. 미식가들의 흔한 내기였다.
그때-.
벽이 작게 진동했다. 베른과 라크란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라크란이 칼자루를 잡았다. 베른도 다급하게 검을 뽑았다.
벽이 거칠게 부서졌다. 부서진 파편이 가득 튀며 시야를 가렸다.
그 사이로-.
"기사- 길버튼-!"
못생긴 기사가 뛰어나왔다. 기사의 검에 서린 오러가 창연하게 빛났다.
베른은 검을 내밀었다. 라크란이 익숙하게 베른을 보조했다.
그 순간-.
어깨에서 서늘한 통증이 느껴졌다.
'언제?'
베른의 어깨에 아주 날카로운 얼음이 박혀 있었다.
얼마나 날카로운지 베른의 갑옷이 뚫려 있었다.
굵기가 가늘어서 위협적이지 않았다. 다만, 그 꽂힌 위치가 문제였다. 정확히 근육의 이음새인 절묘한 부분이었다.
베른의 검이 순간 느려졌다. 찰나에 가까운 순간이었지만, 사선에서 찰나는 승패를 가릴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비겁한-!"
못생긴 기사의 검이 틈을 정확히 노렸다.
베른의 머리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시야가 붕 올라갔다. 빙글 돌았다-. 멍청한 투구를 쓴 기사와 검을 섞는 라크란이 보였다.
상대는 오러가 없는데도 라크란의 검이 밀렸다. 라크란의 드러낸 목덜미에서 피가 길게 뿜어졌다. 예의 날카로운 얼음이었다.
또다시 절묘한 위치였다. 순간 라크란의 움직임이 멈췄고-.
라크란의 머리가 공중에 떠올랐다. 멍청한 투구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마치 예의를 차리듯.
자유로워진 시야가 계속 돌았다.
못생긴 기사 너머에 한 사내가 보였다. 연초를 입에 물고 무표정하게 손을 튕기는 사내-.
베른과 눈이 마주친 사내가 손을 흔들었다.
'마족···?'
올라갔던 시야가 내려갔다. 이어서 돌아갔다. 그에 뒤쪽이 보였다.
못생긴 기사가 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창연한 오러가 벽을 통째로 갈랐다. 참으로 무식한 오러였다.
갈라진 벽 사이에 잘 차려입은 마족이 있었다. 마족이 입을 쩍- 벌렸다.
"여섯을 잡았으니, 이제 여섯 남았군."
"여덟 아닙니까?"
"음, 길버튼 경 검이나 휘두르게."
괴상한 대화가 베른의 마지막이었다.
****
콰아아아앙!
'이게 무슨-.'
노인은 아래를 보며 얼굴을 가득 구겼다. 그 얼굴에 전과 달리 여유가 없었다.
콰아아아앙!
계속 들리는 굉음 때문이었다.
놈들의 포기를 종용했지만, 혹시나 놈들이 저항하는 것도 예상은 했다.
애초에 인간이었으니까.
다만, 이곳은 프록셀의 저택이었다.
놈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질 리가 없었다.
그런데-.
'놈들이 저택도 부수고 있다.'
놈들이 저택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 큰 저택을 아래부터 부수다니-. 노인은 어이가 없었다.
다만, 효과적이었다.
'이걸 눈치챘다고?'
설령 눈치챘어도 저택 자체를 부술 생각을 하다니-.
'지배자가 두렵지 않나?'
무식한 인간놈들-. 노인의 얼굴에 혐오가 떠올랐다.
무식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힘이 줄어들고 있었다.
노인은 숨을 내쉬며 다급함을 눌렀다.
저택은 상관없었다.
다시 본가로 돌아갈 테니까.
감히 자신을 쫓아낸 놈의 목을 비틀고, 본가를 탈환할 것이다.
이제 저택은 상관없었다.
노인은 아래를 내려봤다.
허리까지 피가 가득 차 있었다. 그 아래에 데미안이 있었다. 데미안은 늘 그렇듯 멍하니 입을 벌리고 위를 보고 있었다.
꼬르르륵!
'그렇게 먹였는데, 벌써 배가 고프단 말인가?'
노인은 어이가 없었다. 성에 있던 식량을 모조리 동내고 더 공수한 것까지 먹은 데미안이었다.
그런데 또 배고프다니-.
'인간 부분을 완벽하게 지우지 못했다.'
계획과 상당히 틀어졌다.
다만-.
콰아아아아앙!
상황이 좋지 않았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노인의 힘이 빠르게 소모되고 있었다.
애초에 데미안은 반푼이였다.
마지막 남은 것도 고작해야 배고픔이었다.
노인이 가진 대업에 비하면 하등하고 미약했다.
"시작한다."
노인은 데미안의 위에 대고 손목을 그었다. 흉터에서 피가 거칠게 뿌려졌다.
데미안이 뻐끔거리며 받아마셨다. 이내 데미안의 입가에 넘쳤다. 늘 풀어져 있던 데미안의 눈이 강렬해졌다.
노인은 권능을 펼쳤다. 저택에 있는 프록셀들의 의식이 이어졌다.
'···수가 왜 이렇게 적어?'
예상보다 더 적은 힘에 노인은 순간 당황했다.
수가 적은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저택 안에서 죽으면, 저택에 흡수되어 가주인 노인에게 오니까-.
그 힘이 상당히 적었다는 게 문제였다. 놈들이 저택을 부순 게 영향을 미친 게 분명했다.
조급함이 다시금 올라왔다.
"우리는 프록셀이다."
노인은 멍한 데미안을 보며 말했다.
수십의 목소리가 겹친 것처럼 위압적인 목소리였다.
노인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그건 프록셀이라면 거역할 수 없었다.
데미안의 눈이 반쯤 풀렸다.
"우리는 프록셀이다."
노인이 재차 선언했다. 데미안의 고개가 크게 흔들렸다.
데미안의 손을 타고 잿빛 오러가 일어났다.
그를 본 노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분명 잿빛이었다. 또한 오러였고-.
'설마 진짜였다는 말인가.'
회색의 오러-.
그건 백 개의 눈이 뽑혔다는 고위 마족이 남긴 전설이었다.
'어쩐지 본가에서 특히 신경을 쓰더니-.'
예상치 못한 수확이었다. 동시에 불안함이 엄습했다.
노인보다 피가 더 짙다면?
'그럴 리가 없다.'
노인보다 더 순혈이려면, 놈이 움직여야 했다. 놈이 인간과 몸을 뒤섞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더불어 그렇다고 한들, 놈은 반푼이였다.
노인은 손을 내밀어, 데미안의 이마를 잡았다.
그리고 선언했다.
"우리는 프록셀이다."
데미안의 입이 천천히 움직였다.
뻐끔거리는 입가를 타고 피가 흘렀다.
그렇게 피를 토해낸 데미안이-.
"저는 데미안인데요."
대꾸했다.
순간 노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원래 지금쯤 의식을 잃었어야 했다.
뭔가 잘못되었다.
그때, 데미안의 입이 다시 움직였다.
"배고파요."
꼬르륵!
****
"이게 어떻게 안 무너지는 겁니까?"
"공학적인 설계인가 보군."
길버튼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저택의 1층과 2층을 전부 부쉈는데, 저택은 무너지지 않았다. 3층의 방만 남았는데, 그를 토대만 남은 계단이 지탱하는 우스꽝스러운 형태였다.
'마나가 들어가지 않는군.'
갈라하드의 마나가 방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궁금하면 들어와서 보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문고리를 잡았다.
"그웬, 내게 붙게."
"네? 네!"
그웬이 바로 갈라하드의 뒤에 붙었다. 푝, 자연스럽게 손가락이 등에 꽂혔다.
문을 열자 익숙한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피 냄새였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피 냄새-.
안쪽은 온통 붉었다. 늘어 붙은 붉은 흔적이 사방에 가득했다. 바짝 말린 해골이 여기저기 뿌려져 있었다.
거기에 노인은 없었다.
데미안만 혼자 있었다.
갈라하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데미안을 살폈다.
데미안은 뒷짐을 지고 있었다.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데미안의 시선이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눈이 마주친 갈라하드는 오싹함을 느꼈다. 내가 두려움을 느낀다니-. 황급히 마나를 돌렸다.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격하게 뛰었다. 고통의 알이 짙은 식욕을 드러냈다. 이때까지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한 충동이 엄습했다.
그때, 데미안의 입이 열렸다.
"미개한 놈들이 기어코 일을 벌이는군."
노쇠함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데미안에게 어려운 단어들이 제법 있었다.
'아쉽게 됐군.'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충분히 흔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노인의 저력이 생각보다 강한 듯했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방책도 세워뒀다.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
그때-.
"데미안! 그게 무슨 못된 말이니!"
그웬이 뾰족하게 잔소리했다.
이런 상황에서 잔소리라니-.
데미안의 몸이 작게 흔들렸다. 눈동자가 순간 명료해졌다. 찰나였지만, 갈라하드는 놓치지 않았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데미안, 어머니가 뭐 하신다고 했지?"
그리 묻자-.
"창부요."
데미안의 입이 움직였다.
"이 미개한 놈이-."
이어진 데미안의 목소리는 노쇠했다.
상황 파악을 마친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다음 임무는 데미안의 사춘기를 고쳐주는 걸세."
갈라하드는 대원을 돌아보며 연초를 입에 물었다.
"사춘기요?"
"그래, 아이라면 응당 사춘기가 오지. 사춘기는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자, 성장의 기회일세."
길버튼이 손을 번쩍 들었다.
"말하게, 길버튼 경."
"사춘기를 어떻게 고칩니까?"
"그건-."
갈라하드는 슬쩍 데미안을 응시했다.
데미안이 검으로 갈라하드를 겨눴다. 그 자세가 상당했다.
무엇보다 그 검에 잿빛 오러가 가득 일렁였다.
"성장통을 주는 걸세."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76화 홍삼 캔디
'회색 오러-.'
길버튼은 검을 고쳐잡으며 눈을 구겼다.
그 앞에는 데미안이 검을 겨누고 있었다. 전에 쓰던 투박한 검이 아닌 고급스러운 검이었다.
그 위에 덧씌우듯 덮어진 오러의 색이 시선을 잡아 끌었다.
오러의 색은 다양했다. 가령 아드리안나의 오러는 흰색이었고, 길버튼의 것은 푸른색이었다. 심지어 황녀는 분홍색이었다.
위처럼 오러의 색은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다만, 거기에는 공통적인 특징이 하나 있었다.
밝다는 것이었다.
신념은 어두울 수 없기에-.
그런데 데미안의 오러는 잿빛이었다.
그건 아무리 좋게 봐줘도 밝지 않았다. 비 오는 날의 잔뜩 낀 먹구름처럼 우중충했다.
7대대에서 마족의 힘을 받았던 놈들이 잿빛의 오러를 일으킨 적 있었지만, 그건 오러에 마족의 힘이 섞인 것뿐이었다.
오러라 부르기에는 다소 부족한 불순물이었다.
다만, 지금 데미안의 손에 있는 건 분명한 오러였다.
오러는 신념이었다. 진흙탕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은 자들의 위안이었다.
그런 오러가 어둡다는 건-.
"험한 인생이었나 보구나. 꼬맹아."
길버튼은 쓰게 웃었다.
"길버튼 경, 나와 그웬은 도와줄 수 없네. 위험하면 막내에게 도움을 요청하게나."
뒤에서 갈라하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슬쩍 시선을 돌리니, 뭔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갈라하드와 그웬이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저 얼빵한 막내한테 도움을 요청하라니-.
"그래 봤자 꼬맹이입니다. 혼자 충분합니다."
길버튼은 검을 고쳐 잡으며 대답했다.
"음, 외형은 그렇겠지만, 속에는 아까 그 쭈글쭈글한 노인이 들어가 있네. 늙었는데도 욕심은 그득하여 소년의 몸을 탐하는 아주 추잡한 노인이지."
"······뭐라?"
데미안의 입에서 터진 노쇠한 경호성에 길버튼은 끌끌 웃었다. 긁는 솜씨만큼은 일품이었다.
"꽉 붙잡고 있게. 내가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꽉 붙잡다니-."
길버튼은 자세를 낮췄다. 검 끝으로 데미안을 가리켰다.
"버릇을 고쳐 두겠습니다."
길버튼의 목소리는 단단했다. 푸른 오러가 불길처럼 타올랐다.
"그래, 혹시 어려우면 막내에게 도움을 요청하게나."
"필요 없습니다. 저 기사 길버튼입니다. 고작 데미안에게 지겠습니까?"
"그런가?"
"미개한 인간 놈들. 쯧-."
데미안이 혀를 차면서 검을 흔들었다. 잿빛 오러가 바닥을 길게 갈랐다.
어느새 데미안이 그 앞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게 무슨···.'
길버튼은 다급하게 검을 당겼다. 잿빛 오러와 푸른 오러가 뒤섞였다. 극명하게 다른 두 오러가 서로 탐하듯 거칠게 뜯었다.
푸른 오러가 찢기듯 성큼 뜯겨나갔다. 길버튼의 눈이 가늘어졌다. 검이 다시금 교차했다. 푸른 오러가 다시금 뜯겼다.
'이건-.'
길버튼은 입술을 씹으며 다시금 오러를 일으켰다. 푸른 오러가 가득 일어나며 잿빛 오러를 밀어냈다.
다만, 밀어낸 것도 잠시였다.
푸른 오러가 한 움큼 사라졌다.
길버튼은 검을 크게 휘둘렀다.
콰앙! 묵직한 소리가 터지며, 데미안이 뒤로 길게 밀렸다. 평소의 데미안과 달리 안정된 자세였다.
검술 실력이 상당했다. 실전의 검술이 아닌 교과적인 검술이었다. 평소 데미안의 검과 정반대였다.
다만, 문제는 놈의 검술이 아니었다.
잿빛의 오러가-.
길버튼의 오러를 먹었다.
"맛있구나."
데미안이 혀로 입술을 핥았다. 검에 일렁이는 잿빛 오러가 전보다 컸다.
'오러가··· 먹혔어?'
길버튼은 제 검을 내려봤다. 푸른 오러가 전보다 살짝 작았다. 마치 누가 뜯어먹은 것처럼-.
오러를 뜯어먹는 오러라니-.
이건 꼭-.
'기사를 먹는 괴물 같군.'
검을 잡은 길버튼의 손바닥에 땀이 찼다. 등이 서늘해졌다.
"네놈 생긴 것과 다르게 오러는 맛있군."
놈이 진득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놈의 잿빛 오러가 크게 일렁였다.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오러를 먹어서 제 크기를 키운다니. 상상도 못 한 일에 길버튼의 미간이 가득 구겨졌다.
당장 한 수를 섞었는데도 길버튼이 밀린 상황이었다. 심지어 놈의 오러는 더 커졌다.
'기사와 검을 섞을수록, 점점 더 강해지는 건가.'
단 한 수를 나눴지만, 길버튼은 본능적으로 상대를 파악했다.
왜 갑자기 데미안이 저렇게 된 건지, 저 괴상한 오러는 뭔지, 상황이 상당히 복잡했다.
이해하기에는 머리가 아팠다.
다만, 대장이 방법을 찾는다고 했다.
더불어 길버튼은 기사였다.
그렇기에-.
"기사 길버튼."
검이나 고쳐 잡았다.
*
'재밌군.'
갈라하드는 길버튼과 검을 교차하는 데미안을 보며 중얼거렸다.
길버튼은 훌륭한 기사였다.
멍청한 만큼 우직했고, 우직하기에 신념이 다른 이보다 단단했다.
오러는 누구보다 단단한 게 길버튼이었다.
데미안의 오러는 그런 길버튼의 오러를 뜯어 먹고 있었다.
'오러를 잡아먹는 오러라-.'
다시금 두 오러가 교차했다.
푸른 오러가 작아졌다. 정확히 한 움큼 정도였지만, 갈라하드는 그 크기가 전보다 조금 더 작아졌음을 알아챘다.
그와 반대로 잿빛 오러는 더 커졌다. 정확히 먹은 만큼-.
오러를 잡아먹고 그만큼 성장하는 오러라니-.
'기사의 천적이군.'
마족의 가장 큰 적은 기사였다.
그런 기사의 천적이라면-.
'치워야 하나.'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대로 두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만약 데미안이 마족에게 넘어간다면, 끔찍한 재앙으로 성장할 것이다.
톡톡,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내키지 않았지만, 내키지 않다고 필요한 일을 하지 않을 정도로 갈라하드는 멍청하지 않았다.
판단을 내릴 때는 감정을 배제해야만 했다. 그래야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냉정하게 위험도와 가능성을 비교했다.
다만-.
[말했잖아요. 저랑 있으면 위험하다고.]
갈라하드의 눈이 구겨졌다.
[너는 정이 너무 많아.]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데미안을 포기할 수 없었다. 위험도가 높다는 건, 가치가 크다는 법이었으니까.
위험을 두려워하여, 미리 포기할 정도로 갈라하드는 담이 작지 않았다.
"프록셀의 권능을 쓰는 걸세. 고통의 알을 통하여 사용하니, 내 힘을 전해줄 수 있겠지."
"······네?! 데미안에게 힘을 준다고요?!"
그웬의 반문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 못 하겠으면요?"
"미안 데미안일세."
그웬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그웬은 평소와 달리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질끈 씹었다. 화난 얼굴이었다.
"할게요."
"그래, 부탁 좀 하겠네."
갈라하드는 슬쩍 자세를 숙였다. 고통의 알에 집중했다.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격하게 움직였다. 굳이 무리하지 말고 깔끔하게 먹어서 해치우자는 듯했다. 흥분을 부추겼다. 정신을 강렬하게 흔들었다.
'기어코 주제를 넘는군.'
낮은 읊조림에 고통의 알이 뚝- 하고 멈췄다.
놈의 시선이 느껴졌다.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심장에서 무게감이 느껴졌다. 터뜨리겠다고 협박하는 듯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작게 웃었다.
'지랄하지 말게.'
오른손을 흔들었다. 마법진이 밝게 빛났다. 고통의 알이 꿀렁거렸다. 갈라하드는 오른쪽 손목을 심장에 가져다 댔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고통의 알이 격하게 흔들렸다. 그를 무시하고 더욱 마나를 돌렸다.
고통의 알에서 생명력이 토해졌다. 그에 고통의 알이 다급하게 심장을 잡았지만-.
'계약이 어긋날 텐데?'
고통의 알이 뚝- 멈췄다.
계약 조건은 '코르튼이 원한다면' 아드리안나를 죽이는 거였다.
코르튼은 흑마법학회의 학회장을 꿈꿨고, 그를 위해서 열심히 광물을 캐고 있었다.
지금 아드리안나가 죽어봤자 다른 이의 공으로 돌아갈 게 분명했다. 공에 대한 욕심은 누구보다 뛰어난 코르튼이었다.
코르튼은 학회장에 오르고 나서 원할 게 분명했다.
갈라하드는 정확한 계산을 내렸고, 그 계산을 신뢰했다.
즉-.
여기서 고통의 알이 갈라하드의 심장을 터뜨리는 건 명백한 계약 위반이었다.
'쓸모가 늘었지만, 자네의 뿌리는 엄연히 계약용일세. 계약에 어긋나는 짓을 할 수 있겠나?'
두근. 고통의 알이 작게 떨었다.
'어울려주는 것도 여유가 있을 때일세. 지금은 놀아줄 시간이 없으니, 닥치고 말이나 듣게. 뜯어버리기 전에-.'
갈라하드의 손가락이 정확히 심장 왼쪽을 겨눴다.
고통의 알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미친놈은 진짜로 제 가슴에 구멍을 뚫을 수도 있음을-.
고통의 알이 조용해졌다.
'그러니까 알아서 잘하면 좋지 않나.'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두근···.
"농담···이었다는데요?"
"나는 재미없는 농담을 싫어한다고 전해주게. 지금 중요한 건 프록셀의 권능일세. 할 수 있나?"
"네, 알 거 같아요."
"오, 잘했네. 그웬."
"하지만 위험해요. 이건······."
그웬이 입술을 벙끗거렸다. 그 눈에 다양한 감정이 감돌았다. 착한 아이였다.
"그웬."
"진짜 위험해요. 연결되는 느낌이라-."
"위험한 건 내 전문일세."
갈라하드는 셔츠의 소매를 풀며 말했다.
"자, 바로 하지."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웬의 얼굴이 한결 진지해졌다.
이어서 그웬이 손가락을 깊게 찔렀다.
뿍.
갈라하드의 시야가 점멸했다.
*
쏴아아아아-.
거친 빗소리가 귀를 두드렸다. 젖은 나무 냄새와 흙냄새가 뒤섞인 큼큼한 냄새가 가득 풍겼다. 주변은 허름한 집이었다.
갈라하드는 슬쩍 고개를 숙였다. 천장이 너무 낮아서 하마터면 머리가 닿을 뻔했다.
안에서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사내와 여인의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집을 가득 흔들었다.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리며 둘러봤다.
꼬르르르륵!
구석진 곳에 뭔가 웅크리고 있었다. 삐쩍 마른 탓에 순간 시체처럼 보였다.
갈라하드는 습관적으로 연초를 찾았지만, 연초는 없었다. 혀를 차며 소년의 옆에 같이 앉았다.
고개를 들자, 허접한 천장이 보였다. 얼마나 대충 지었는지 그 사이로 물방울이 연신 떨어졌다.
똑- 똑-. 소년은 그 물방울을 보고 있었다. 갈라하드도 가만히 구경했다.
물방울이 점점 커지다가 뚝 떨어졌다.
그때, 교성이 끝났다. 방문이 열렸다. 텁텁한 열기가 가득 풍겼다.
볼이 상기된 대머리 사내가 허리춤을 추스르며 나왔다. 소년을 발견한 사내가 혀를 차더니 뭔가를 던졌다. 마치 개에게 주듯-.
그건 반쯤 곰팡이가 핀 빵이었다. 소년은 허겁지겁 빵을 집어서 입에 넣었다.
대머리 사내가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서 곱슬인 사내가 들어왔다. 수염을 제법 멋들어지게 기른 사내였다.
수염 사내는 소년은 본 척도 하지 않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인기가 많으시군."
"최근 가격을 깎았거든요. 다른 창부가 나타나는 바람에 손님이 줄어서요."
"그런가? 사업 수완이 뛰어나시군."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이 켁켁- 거렸다. 소년은 허겁지겁 물이 떨어지는 곳으로 향했다. 이내 입을 쩍 벌리고 물을 받아먹었다.
콰앙! 어디선가 들리는 굉음에 집이 크게 흔들렸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축축한 천장이 정수리에 닿았다. 소년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일어나게. 나가야겠군."
"왜요?"
소년의 물음에 진심이 가득했다. 여기를 벗어날 이유를 모르는 듯했다.
갈라하드라고 딱히 좋은 성장기를 보내지 않았기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더불어 감정적인 말로 호소할 성격도 아니었다.
갈라하드는 다시 주머니를 뒤졌다. 드디어 찾았군. 손에 들린 건 은은하게 레몬 향이 나는 연초였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었다. 탁탁, 천장에서 흐른 비에 젖어 불이 잘 붙지 않았다. 조금 뒤에 겨우 불을 붙일 수 있었다.
연초를 깊게 빨며 소년을 내려봤다.
소년은 전보다 더 웅크리고 있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혀를 찼다.
"명령일세."
소년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상큼한 향에 침이 도는지 꿀꺽 침을 삼켰다.
"아, 자네 의지는 상관없네."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이거 폼이 안 사는군. 갈라하드는 투덜거리며 주먹을 휘둘렀다. 물에 젖은 천장에 주먹이 꽂혔다. 그 파편이 튀며 구멍이 넓어졌다.
쏴아아아아! 빗소리가 더 격해졌다. 미지근한 비가 가득 쏟아졌다.
"안 돼요!"
소년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미안하지만, 늦었다네."
주먹을 다시 휘둘렀다. 천장의 구멍이 넓어졌다.
갈라하드는 부서진 천장을 잡고 뜯었다. 허름했던 천장이 그대로 무너졌다.
거친 빗줄기가 갈라하드를 연신 두들겼다.
"시원하지 않나?"
갈라하드의 물음에 소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자세히 보니 미소였다.
사방에 번듯하게 입은 이들이 가득 있었다.
그들은 뭔가를 찾는 듯 여기저기 살피는 중이었다.
"아. 여기일세."
갈라하드가 손을 흔들었다.
갈라하드를 발견한 놈들이 살벌하게 뛰어왔다.
"이런 들켰군."
"형이 무너뜨렸잖아요."
소년의 얼굴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그게 내 전문일세."
갈라하드는 주머니를 뒤졌다. 여기쯤 있을 텐데-.
아, 여기 있었군.
갈라하드가 꺼낸 건 사탕이었다.
아주 붉은-.
"먹으면 힘이 날 걸세."
사탕을 던지자 소년이 넙죽 받아먹었다.
"으-."
소년의 얼굴이 순식간에 죽상이 되었다.
"몸에 좋은 건 쓴 법일세."
갈라하드는 낄낄 웃었다.
뒤에서 발소리가 무수하게 들렸다.
그에 갈라하드는 양손을 뻗고-.
"자, 내가 위기에 빠졌네. 구해주게. 데미안."
뻔뻔하게 말했다.
"네, 형."
데미안은 키득키득 웃었다.
*
'형편없다.'
길버튼은 눈을 가늘게 뜨며 검을 튕겼다.
놈의 검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좋게 말하자면 정석적인 검술이었다. 태가 남다른 걸 보면 고급 검술이 분명했다. 귀족들이 배우는 그런 검술이었다.
다만, 심하게 정석적이었다. 그런 탓에 뻔히 보였다.
전선에서 검을 깎은 길버튼의 상대가 아니었다.
문제는 놈의 오러였다.
길버튼의 오러를 뜯어먹으며 점점 성장하더니 지금은 거의 대검이었다.
그에 반해 길버튼의 검에 서린 오러는 반 토막 난 상태였다.
그나마 검술로 버티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점점 버거워지고 있었다.
"멀었습니까!"
길버튼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검이 무거웠다. 손바닥이 찢어져 피가 가득 튀었다.
"대··· 대장님 자는데요!"
그웬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지금 상황에서 잔다니··· 그게 무슨-.'
어이가 없었지만, 갈라하드가 방법을 찾아본다고 했으니,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길버튼의 역할은 그때까지 버티는 거였다.
문제는-.
"이제 슬슬 질리는군."
놈과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거였다.
이제는 검을 한 번 받는 것으로도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였다.
길버튼은 눈을 가늘게 뜨며 놈을 쳐다봤다. 놈의 오러는 이제 검을 넘어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에 반해 길버튼의 오러는 이제 그 형태를 유지하는 것도 힘들었다.
[어려우면 막내에게 도움을 요청하게나.]
길버튼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막내 노아드가 검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진작 와서 돕던가. 정말 답답한 놈이군.'
길버튼은 괜스레 투덜거렸다.
다만, 얼빵한 막내였다. 막내가 돕는다고 달라질 수준이 아니었다.
"도망쳐라. 여기는 내가 맡겠다."
길버튼은 막내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애초에 길버튼도 잡을 수 없는 상대였다. 저 얼빵한 막내가 더해진다고 달라질 리가 없었다.
달그락.
막내가 뭔가를 말하고 싶은 듯 투구를 흔들었다.
그때, 놈이 길버튼을 겨눴다. 잿빛 오러가 주둥이를 쩍- 벌리듯 넘실거렸다.
길버튼도 마주 검을 세웠다.
거대한 잿빛 오러가 길버튼에게 향했다. 크기가 커진 탓에 파도처럼 보였다.
길버튼은 작게 혀를 차며 검을 고쳐 잡았다. 찢어진 손아귀에서 화끈한 통증이 올라왔다.
길버튼의 오러는 이제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그때, 길버튼의 앞으로 두꺼운 갑옷이 자리했다.
막내였다. 그 등이 묘하게 익숙했다.
정말 묘하게-.
"도망가라니까! 이 멍청한···."
길버튼이 불같이 화를 냈다.
그때, 막내가 검을 뽑았다. 그 검에 서린 빛이-.
순백이었다.
오러는 신념이었다.
순백일 정도로 순수한 정의를 지닌 이는 한 명밖에 없었다.
'······막내가 아드리안나님?'
길버튼은 처음으로 검을 떨어뜨렸다.
****
"그러니까 도시를 유지하는 게-."
여우 가면은 고개를 들었다. 그 앞에 있는 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마족 주제에 왕관까지 쓴 미친놈-. 놈의 고개가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망할 녀석.'
여우 가면은 작게 욕을 중얼거렸다.
어떤 놈이 지배자의 관심을 끈 게 분명했다.
그에 권능을 쓴 여우 가면은 마나 농도가 급격하게 낮아진 걸 느꼈다.
그런 무식한 일을 행할 인물은 하나밖에 없었다.
'아드리안나? 그년이 왜 여기에?'
그렇다면 지배자가 갑자기 일어난 게 이해됐다.
아드리안나가 지배자의 관심을 끈 게 분명했다.
'아직은 아닌데.'
여우 가면은 입술을 씹었다.
당장 여기서 아드리안나와 지배자가 부딪히면, 추가 뒤틀릴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될 바에야 차라리-.
'지배자를 처리해야 하나. 아, 그건 너무 귀찮아 지는데.'
여우 가면은 작게 끙- 소리를 냈다.
다만, 지배자와 아드리안나의 접촉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그에 여우 가면은 손을 풀었다.
그때-.
"벨하르데니아, 드디어 왔구나."
지배자가 짙게 웃었다.
'벨하르데니아? 그건 최초의 마법사님의 존함인데?'
최초의 마법사님이 여기 왔을 리가 없었다. 그쪽은 움직일 수 없었으니까.
'그러면 누굴 보고 저러는 거지?'
여우 가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튼, 아드리안나는 아닌 듯했다.
여우 가면은 작게 안도했다.
잔업은 질색이었다.
77화 오답
쏴아아아아.
거친 빗방울이 몸을 연신 두들겼다.
갈라하드는 젖은 앞머리를 뒤로 가득 넘겼다.
굵은 빗줄기 사이로 열심히 뛰어다니는 데미안이 보였다. 데미안은 목줄 풀린 맹수였다.
상대는 잘 차려입은 마족들이었다. 프록셀의 권능이었다.
투박하고 원시적인 계승이었다. 갈라하드는 계승을 피해 숨어있던 데미안을 강제로 끌어냈다. 숨어있는 건 해답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대신 갈라하드는 가져온 마나와 생명력을 데미안에게 넣어줬다.
그웬이 프록셀의 권능을 쓴 덕분이었다.
'계승이라.'
데미안의 기다란 발톱이 한 놈의 목을 벴다. 놈의 머리가 두둥실 떠 올랐다.
다른 놈이 망치로 데미안을 후려쳤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데미안이 떠올랐다.
머리가 반들반들한 놈이 데미안을 걷어찼다.
퉁퉁, 데미안이 데굴데굴 굴러왔다. 갈라하드는 데미안을 발로 잡았다.
데미안이 켁- 하고 숨을 터뜨렸다.
데미안이 동그란 눈으로 갈라하드를 올려봤다.
"너무 많아요."
"자네는 할 수 있네."
"너무 많은데요."
데미안이 뒤를 가리켰다. 확실히 데미안이 제법 뛰어다녔는데도 그 수가 많았다.
"재생하는 것 같군."
데미안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머리가 찰랑거리며 물을 튀겼다.
"그러면 재생 못 하게 막게."
"어떻게요?"
갈라하드는 대답 대신 주머니를 뒤졌다. 여기에 있을 텐데-. 중얼거리자 뭔가 잡혔다.
갈라하드가 꺼낸 건 포크와 나이프였다.
"먹어버리면 되지 않나."
데미안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배고프지 않나?"
꼬르르륵!
데미안의 배가 대답을 대신했다.
"마음껏 먹게."
데미안이 포크와 나이프를 잡고 방긋 웃었다.
고기를 받았을 때보다 환한 미소였다.
그때-.
콰아아앙! 굉음이 들렸다. 이어서 길버튼의 비명이 들렸다.
길버튼이 비명을 지르다니-.
상황이 상당히 안 좋은 듯했다.
"나는 자네를 믿네."
갈라하드는 연초를 구겼다.
*
콰아앙!
아드리안나는 검을 타고 넘어온 묵직한 충격에 눈을 찡그렸다.
'오러가 뜯겼다.'
아드리안나의 오러는 아드리안나의 성질을 담고 있었다.
마나를 불태우는 성질을 담고 있었기에, 마족을 재로 만들었다. 그 상대가 인간이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힘이 통하지 않는 건 오러가 유일했다.
아드리안나의 성질은 오러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아드리안나는 최연소 소드 마스터였다.
그녀를 검으로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은 적었다.
문제는 소년의 오러였다. 그 잿빛 오러는 아드리안나의 오러도 뜯어 먹었다. 마치 굶주린 것처럼-.
지금은 아드리안나에게 위협적인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이후에 소년의 오러가 다른 오러를 먹고 계속 성장한다면-.
'위험하다.'
아드리안나는 소년의 얼굴을 살폈다. 아직 앳됨을 벗지 못한 소년이었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가득 내려갔다.
검을 굳게 잡았다. 순백의 오러가 어둠을 밀어냈다.
아드리안나는 갈라하드의 충고를 떠올렸다. 최대한 기를 죽이라고 했으니, 필요한 만큼의 힘으로 처리할 생각이었다.
"미안하다."
아드리안나는 진심으로 사죄했다. 그녀의 능력이 부족한 까닭이었으니까.
그때-.
"멈추게, 아드리안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정중하면서 어딘지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는 분명 갈라하드의 것이었다.
"이 아이는 위험합니다."
아드리안나는 입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그 와중에도 소년의 오러는 아드리안나의 것을 뜯어 먹고 있었다.
위험했다. 그 어떤 마족보다도 더-.
"명령일세."
"대장은 서로 명령할 수 없습니다. 저는 대공 전하의 명령만 듣습니다."
"자네는 지금 특무대 막내 노아드일세."
그때, 소년의 검이 일변했다. 전에는 정석적인 검술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야수처럼 거칠었다. 태가 전혀 없었다.
아드리안나는 눈을 찡그리며 검을 받았다. 오러가 다시 한 움큼 뜯겼다. 소년의 검이 살아있는 것처럼 반응했다.
소년은 지금도 성장하는 중이었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그건 위장 신분일 뿐입니다."
아드리안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에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날 믿게."
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드리안나는 눈썹을 구기며 한 발짝 물러났다. 소년의 검이 굶주린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검이 연달아 부딪쳤다. 아드리안나의 오러가 뒤로 밀렸다.
점점 커지는 소년의 오러와 날카로움이 섞이는 소년의 검술, 계속해서 경고가 울렸다.
이제 진짜로 위험했다.
만약 여기서 아드리안나가 진다면, 저 소년은 북부의 재앙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안 믿었네.]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씹었다.
갈라하드는 능력있는 자였다. 그런 갈라하드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방법이 있을 게 분명했다.
"알겠습니다."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는 못 버팁니다."
"아, 걱정하지 말게. 내가 도울 테니까."
'돕다니?'
소년과 아드리안나의 경합은 찰나를 겨루는 첨예한 승부였다.
그걸 마법사인 갈라하드가 어떻게 돕는다는 건가-.
그때, 아드리안나의 옆으로 뭔가 스쳤다.
끝이 뭉툭한 얼음이었다. 얼음이 소년의 몸을 두들겼다.
정확한 순간에 절묘한 위치였다.
소년의 흐름이 잠깐 끊겼다. 아주 찰나였지만, 아드리안나에게는 지독히 긴 시간이었다. 아드리안나는 틈으로 검을 찔렀다.
소년의 걸음이 처음으로 뒤로 밀렸다.
"이놈들이-!"
소년이 격하게 호통치며 검을 움직였다. 거대한 오러가 아드리안나를 노렸다.
아드리안나는 그에 맞춰서 오러를 키웠다.
그때, 뭉툭한 소리가 다시 들렸다. 얼음 조각이 소년의 발을 두들겼다. 소년이 크게 휘청였다.
또다시 적절한 순간의 정확한 위치였다. 마치 정말 옆에서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효과적이다.'
아드리안나는 거대한 오러를 피해 검을 찔렀다. 소년이 한 발짝 더 물러났다.
다시 얼음 몽둥이-. 소년이 그를 막기 위해 검을 움직였고, 아드리안나의 정면에 빈틈이 정확하게 열렸다.
아드리안나의 검이 이어지는 방향과 정확히 일치했다.
'대단해.'
아드리안나의 검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황녀와 결투 전에 연습했지만, 이처럼 자세하게 기억하다니-. 엄청난 기억력이었다.
더불어 상대를 그쪽으로 유도했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보조하고 있었다. 정확히 맥을 짚으면서-.
마치 갈라하드가 옆에 검을 들고 서 있는 듯했다.
진짜로 합을 맞추는 느낌이었다.
'할 수 있어.'
아드리안나는 오러가 부딪히지 않게 조심하면서, 결투를 이어갔다.
"이이···! 인간 놈들!"
소년의 목소리가 점점 뒤섞였다.
아드리안나의 오러와 부딪히지 않자, 소년의 오러가 점점 사그라들었다.
이렇게라면 제압할 수 있을 듯했다.
그때, 소년의 고개가 홱- 하고 돌아갔다. 소년이 갈라하드를 노려봤다.
"이런."
소년이 검을 크게 휘둘렀다. 그에 아드리안나는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전과 달리 소년이 땅을 박찼다. 콰앙! 소년이 디딘 땅이 거칠게 튀었다. 소년의 신형이 길게 늘어졌다.
"네놈부터 죽이겠다."
소년은 아드리안나가 아닌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소년의 검에 서린 형형한 오러가 갈라하드를 노렸다.
그에 다급히 움직이던 아드리안나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갈라하드가 아드리안나를 향해 손바닥을 들고 있었다. 마치 기다리라는 것처럼.
갈라하드에게 계획이 있어 보였기에, 아드리안나는 일단 멈췄다.
천장에 닿을 정도로 커진 잿빛 오러가 갈라하드를 향해 떨어졌다.
그에 갈라하드는-.
양손을 좌우로 뻗었다.
'······?'
아드리안나의 사고가 순간 정지했다. 뒤늦게 땅을 박찼다.
하지만 거리가 있었다. 소년의 오러는 이미 갈라하드의 바로 앞에 있었다.
잿빛 오러는 맹수가 주둥이를 쩍 벌린 것처럼 거칠게 일렁이며 갈라하드를 노렸다.
늦었다.
그때, 누군가 뛰어들었다.
톰이었다. 톰은 방패를 들고 갈라하드의 앞을 막았다. 허름한 방패였다.
저 거대한 오러를 방패로 막을 생각하다니-.
그때, 소년의 검이 뚝- 하고 멈췄다.
톰의 방패가 반쯤 잘렸고, 갈라하드의 이마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였다.
앞머리가 나풀거릴 정도로 가까웠는데-.
"끝났군."
갈라하드는 아무렇지 않게 연초를 입에 물었다.
탁, 갈라하드의 손가락에서 자그마한 불이 올라왔다.
소년의 얼굴이 가득 일그러졌다. 소년의 눈가에 주름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발작하듯 팔이 달달 떨렸다.
"이··· 이놈이! 미개한 놈이 어디를 무는 거냐!"
소년이 검을 놓고 몸을 털었다. 마치 벌레 터는 것처럼 손으로 몸 여기저기를 털었다.
몸을 이리저리 뒤틀던 소년이 바닥을 뒹굴었다. 노쇠한 비명이 계속해서 터졌다. 소년의 드러난 목덜미에 잇자국이 크게 새겨졌다.
"포크를 쓰라니까."
갈라하드가 혀를 차며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소년이 격렬하게 바닥을 굴렀다. 그 어두운 금색이었던 소년의 머리가 노인의 것처럼 새하얘졌다.
주름이 가득 생겼다가 사라졌다. 노쇠한 비명이 길게 터졌다.
이내 발버둥이 뚝-하고 멈췄다.
소년이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꺼억."
시원하게 트림했다.
소년의 머리는 여전히 새하얬지만, 그 기도가 달랐다.
"배불러요."
"이런 데미안이 배부르다는 소리도 할 줄 아는군."
"데미안!"
"길버튼님이 기절하셨습니다! 입에서 거품까지 나옵니다!"
"뺨이라도 때리게."
대충 손을 휘저은 갈라하드가 아드리안나에게 다가왔다.
그 얼굴이 늘 그렇듯 여유로웠다.
"우리 궁합이 아주 잘 맞더군. 천생연분인 게 분명해."
갈라하드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궁합이 잘 맞은 게 아니었다. 갈라하드가 아드리안나에게 맞췄을 뿐이었다.
그를 저리 뻔뻔하게 말하다니-.
"감사합니다."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자네가 왜 감사하나?"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웬에게 파묻힌 데미안이 보였다.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릇된 판단을 막아주셨습니다."
구할 방법이 있었는데, 소년을 죽일 뻔했다. 끔찍한 실수를 갈라하드가 막아줬다.
"오, 그건 자네의 잘못이 아닐세. 자네에게는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나야 뛰어난 마법사니까 새로운 방법을 찾아낸 것이고. 나만큼 유능하지 못한 게 잘못은 아니지."
갈라하드가 입꼬리를 올렸다. 새콤한 레몬 향이 퍼졌다.
아드리안나는 갈라하드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몇 번 되새긴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멍청하다는 겁니까?"
갈라하드가 연기를 연달아 내뱉었다. 갈라하드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이 떠올랐다.
"···그게 아닐세, 내가 뛰어나다는 것일 뿐. 가령 마법을 모르는 이에게 왜 나뭇가지를 꺾어서 불을 피우냐고 뭐라 하는 게 말이 되나."
"그러니까 마법도 모르는 멍청이라는 거군요."
"아니라니까-."
아드리안나는 작게 기침했다.
"···자네, 농담도 할 줄 아는군."
"예, 1대대의 가장 재밌는 사람으로 계속 뽑혔습니다."
"이런···. 1대대가 문제였군."
아드리안나는 연초를 피는 갈라하드를 가만히 응시했다.
왜 마족이 갈라하드를 마족이라고 생각한 건지, 마족에 대해 어찌 그렇게 잘 아는지 등등. 의문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그에 아드리안나는 입을 열었다.
"레몬을 좋아하십니까?"
"아니, 싫어한다네. 무척."
"그러면 왜 레몬 향 연초를 피십니까."
"습관일세. 아주 고약한 습관이지."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공기가 무거워졌다.
"이런 들켰군."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돌렸다.
"음, 벨하르데니아의 느낌이 났는데?"
꼬마 아이가 있었다.
삐딱하게 왕관을 쓰고 망토까지 두른 꼬맹이였다.
언뜻 보기에 우스운 생김새였지만, 전혀 우습지 않았다.
그 풍기는 기세만으로 손이 저릴 정도였으니까.
최소 최상급 마족이었다.
혹은-.
'고위 마족.'
아드리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순백의 오러가 강렬하게 타올랐다. 전과 달리 아드리안나를 넘어서 천장을 뚫을 정도로 강렬했다.
가득 피어오르는 순백이 주변의 어둠을 가득 찢었다. 마치 아침이 온 듯 환해졌다.
관심을 끈 이들을 데리고 간다는 도시의 지배자가 분명했다.
아드리안나를 노리는 게 분명했다.
"저를 노릴 겁니다. 제가 맡을 테니, 그 틈에 후퇴를-."
아드리안나는 지배자를 검으로 겨누며 말했다.
그때, 지배자가 움직였다.
지배자는-.
아드리안나를 가벼이 지나쳤다.
*
'좋지 않군.'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제일 경계하던 지배자의 관심을 끌어버렸다.
데미안의 잿빛 오러가 가장 큰 변수였다. 오러를 먹는 탓에 길버튼이 쓸모 없어졌다. 거기에 노인도 생각보다 질겼다.
변수들이 겹치면서 계획이 엉클어졌다.
그래도 결과는 예상보다 좋았다.
데미안의 오러를 확인했고, 노인을 데미안에게 훌륭히 먹였다.
문제는 지배자의 이목을 끌었고, 지배자가 직접 나타났다는 점이었다.
지배자는 머리에 왕관을 쓰고 손에 금색 몽둥이까지 든 꼬맹이였다.
다소 우스운 모양새였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
지배자가 등장한 순간부터 마나가 움직이지 않았기에-.
"조아려라."
지배자가 짤막하게 명령했다.
어깨가 무거워졌다. 무릎이 저절로 꺾였다. 육체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어느새 갈라하드는 반쯤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정신 간섭?'
갈라하드는 마나를 머리로 돌리려했다. 마나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굳은 것처럼-.
'이게 고위 마족인가. 흥미롭군.'
전에 겪은 것과 비슷했지만, 그 느낌이 묘하게 달랐다.
'아드리안나는?'
순백의 오러가 더욱 커졌다. 마치 기름이라도 넣은 것처럼 활활 타올랐다. 아드리안나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아드리안나는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지배자의 권능에 밀리는 게 아니었다.
아드리안나는 마를 불태우는 성질을 지녔다. 그 성질은 상대에 따라 강해졌다.
고위 마족에 맞춰서 강해진 성질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듯했다.
그 뒤로 도시의 전경이 보였다.
마족들과 인간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그들은 정말 왕을 마주한 것처럼 무릎을 꿇고 납작 엎드려 있었다.
'단단히 포위됐군.'
지배자의 개입은 예상했던 수 중 하나였다.
아드리안나와 갈라하드가 힘을 합치면, 고위 마족도 처리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었다.
아드리안나가 저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질 리가 없었다.
다만-.
'하나 더 있다.'
갈라하드는 지배자의 뒤쪽을 응시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지배자의 등장과 아드리안나의 오러에 주변 마나가 가득 휘몰아치는데, 그곳만 고요했다.
마치 일부러 숨기는 것처럼-.
최소 지배자 급이라는 이야기였다.
그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때-.
"흐음, 너구나."
어느새 지배자가 갈라하드 앞에 있었다.
지배자의 눈이 갈라하드를 살폈다.
놈은 아드리안나가 아닌 갈라하드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제야 상황이 설명됐다.
아드리안나가 최대한 조심했는데도, 왜 지배자가 나타난 건지 깨달았다.
지배자는 갈라하드에 이끌려 나타난 거였다.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놈의 관심을 끌었다는 말인가.
'고통의 알?'
고통의 알은 아예 가만히 있었다. 마치 자신은 여기 없다는 것처럼-.
죽은 척이나 하는 싸구려 알이 지배자의 관심을 끌었을 리가 없었다.
그때, 지배자가 입을 열었다.
"벨하르데니아와 무슨 사이냐?"
벨하르데니아-.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벨하르데니아는 최초의 마법사였다. 인류 최초의 배신자였고-.
지배자는 갈라하드가 최초의 마법사와 관계가 있다고 의심했다.
그 이유는-.
'이 마법진 때문에?'
갈라하드는 제 손목을 내려봤다. 최초의 마법사가 남긴 마법진이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가장 큰 가능성이었지만, 이건 고작 마법진이었다.
지배자가 고작 그 정도로 움직였다고 보기 다소 어려웠다.
그때, 지배자 머리 위의 왕관이 시선을 끌었다.
원래 큼지막한 보석이 박혀 있었는지, 왕관의 중간이 뻥- 뚫려 있었다.
'마족의 왕?'
갈라하드는 마른침을 삼켰다. 피가 가득 돌았다. 머리가 뜨거워졌다.
지배자는 털이 쭈뼛 설 정도로 강자였지만-.
'마족의 왕은 아니다.'
평생 마족의 왕을 쫓은 갈라하드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놈은 마족의 왕이 아니었다.
다만, 위기인 건 변함 없었다.
지배자의 녹슨 금 몽둥이가 갈라하드를 가리켰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벨하르데니아와 무슨 사이냐?"
고작 두 번 물었으면서 마지막 질문이라니-. 인내심이 상당히 부족한 듯했다.
놈의 눈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그를 마주하고 있으니 꼭 뇌신경이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갈라하드는 그 대답에 따라서 머리통이 날아갈 수도 있음을 직감했다.
단서를 조합했다. 놈은 마족이었다. 최초의 마법사가 나타났다고 생각하여 직접 움직일 정도였다.
긍정적인 관계일까. 부정적인 관계일까.
마족이니 긍정적인 관계일 가능성이 컸다.
다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지배자 뒤에 숨은 놈이었다.
놈은 지배자의 쪽인가. 그러면 왜 숨어있지? 굳이 놈이 숨은 걸 택했다는 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변수가 많았다.
가능성 높은 쪽을 선택할 뿐이었다.
"스승님이십니다."
지배자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그래? 드디어 찾았구나."
갈라하드의 심장이 순간 멈췄다.
"빌어먹을 배신자 놈."
이런, 오답이었군.
이분의 일인데, 오답이라니-.
'운이 없군.'
고통의 알이 다급하게 심장을 눌렀다.
숨이 가까스로 트였다.
이미 잘못된 선택지를 고른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황제를 죽이겠다."
판을 엎어야 했다.
[좋다.]
향긋한 풀내음이 코를 간질였다.
78화 탈출
'이런-.'
회색 일변도에 자그마한 풀 한 포기가 피어올랐다. 그 작은 풀이 자라나더니 수풀이 되었다. 수풀이 무성해지더니 나무로 변했다.
그 나무에서 이파리들이 무수히 떨어졌다.
이파리들이 다시 풀 한 포기로 되었고, 다시 수풀에 이어서 나무가 되었다.
이내 숲이 자리했다.
'화려하군.'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
여우 피하자고 범의 굴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다만, 자신을 '그분'이라 칭하는 마족은 갈라하드에게 원하는 게 뚜렷했다.
황제의 죽음-.
목적이 뚜렷하면 예측할 수 있었다.
목적이 상당히 위험했지만, 아예 모르는 것보다 나았다.
'놈은?'
갈라하드는 지배자를 확인했다.
여유롭던 지배자의 얼굴이 구겨져 있었다. 그 얼굴에 드리운 감정은-.
'두려워하고 있군.'
고위 마족이 두려워하다니-.
무성한 수풀이 갈라지며, 놈이 나타났다.
사슴처럼 발이 네 개였다. 전부 길쭉하고 하얀 여인의 것이었다.
얼굴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성스러운 얼굴의 미인이었다.
마족보다 천사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리는 그런 외형이었다.
네발 마족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 끝에 헐떡이는 아드리안나가 있었다. 순백의 오러는 타오르는 수준을 넘어서 폭발하듯 일렁이고 있었다. 네발 마족이 등장한 까닭인 듯했다.
아드리안나가 감당할 수준을 이미 넘어선 듯했다. 성질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아드리안나가 연료인 것처럼 더 거칠게 타올랐다.
'권능 좀 줄이지.'
네발 마족의 시선이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갈라하드의 시야가 점멸했다.
어느새 갈라하드는 천 길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그걸로도 부족한지 지나가던 독수리들이 달라붙어서 쪼아 먹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말하지 않았나. 이런 건 소용없다고."
작게 혀를 찼다.
시야가 뒤틀렸다. 다시 숲에 있었다.
[너는 미쳤다.]
적나라한 평가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그때, 지배자가 봉을 빙글- 돌렸다. 그 얼굴에 옅은 조소가 떠올랐다.
"구렁텅이에 있어야 할 것이 감히 내 영토에 나타나?"
지배자가 네발 마족을 보며 이죽거렸다. 그 목소리가 옅게 떨렸다.
'구렁텅이?'
새로운 단어에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갈라하드가 잡았던 마족은 대부분 정신 간섭에 대한 방비가 되어 있었다.
마족은 마법사의 천적이자 상성이었다. 마족에게 마법을 걸 수 있는 마법사는 흔치 않았다. 그러니 방비 대상이 마법사일 리가 없었다.
'구렁텅이라는 건, 유배 같은 건가?'
갈라하드는 새로 얻은 단서를 기억했다.
'쉽지 않군.'
고위 마족이 둘이나 있기 때문일까. 숨조차 마음대로 쉴 수가 없었다.
세상이 눈치를 보는 것처럼 사방이 조용했다.
그때, 네발 마족의 시선이 지배자로 향했다. 지배자가 몸을 작게 떨었다.
지배자가 금색 봉을 내밀며 표정을 굳혔다.
"여기 있는 건 어차피 허상일 터. 네가 뭘 할 수 있지?"
지배자가 이죽거리며 금색 봉을 크게 휘둘렀다.
수풀이 갈라지고 나무가 부서졌다. 회색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좀먹듯 퍼진 회색이 숲을 천천히 부쉈다.
이내 숲의 반이 사라졌다.
[맞다. 나는 여기에 없다.]
따스운 날의 낮잠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정신을 간질였다. 네발 마족의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면 썩 꺼지거라. 왕관도 없는 것아."
지배자가 금색 봉을 다시 휘저었다. 금색 봉을 아주 아끼는 듯했다.
회색이 좀 더 퍼지며 숲을 더욱 밀어냈다.
'밀리는 건가?'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리며 네발 마족을 올려봤다.
그때, 네발 마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머리칼에서 초록 잎이 퍼졌다.
[그런데-.]
상큼한 풀 내음이 다시 풍겼다.
[너는 여기에 있느냐?]
"뭐라-."
지배자가 말끝을 흐렸다.
지배자의 눈이 가득 풀렸다. 놈의 고개가 꺾였다. 숨이 더욱 거칠어졌다. 그 어깨가 살짝 떨렸다.
'꽤 험하긴 하지.'
안에서 수십 번은 죽었을 것이다. 갈라하드는 작게 공감했다.
네발 마족의 다리가 우아하게 움직였다. 네 개의 다리가 균형을 맞추듯 하나씩 나아갔다.
[다시 묻겠다.]
네발 마족이 가까이 다가가자 지배자의 떨림이 심해졌다.
지배자의 무릎이 꺾였다. 눈이 붉어졌다. 그 입가로 터진 피가 길게 흘렀다.
[너는 여기에 있느냐.]
네발 마족이 지배자를 가만히 내려봤다.
경배하듯 무릎을 꿇기 직전, 지배자가 멈췄다.
입을 질겅거린 지배자가 퉤- 하고 뭔가 뱉었다.
그건 붉은 살덩어리였다. 제 입술을 씹어 뱉은 것이었다.
지배자의 눈이 다시 돌아왔다.
놈이 입을 천천히 벌렸다. 한 움큼 베어진 입술 사이로 피가 거칠게 흘렀다.
'아깝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이곳은 내 영토다."
지배자가 금색 봉에 기대며 일어났다. 기세가 전보다 강렬했다.
그에 네발 마족이 한 발짝 물러났다.
[이 아이는 내 종이다.]
네발 마족이 갈라하드를 보며 말했다. 종이라니-. 말이 섭섭하군.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구렁텅이에 빠진 놈이 탐내는 물건이라니. 내 컬렉션에 꼭 넣어야겠군."
지배자가 금 몽둥이를 매만지며 말했다.
그 목소리에 욕망이 진득했다.
'인기가 많은 것도 탈이군.'
두 마족의 시선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지배자의 기세가 점점 거칠어졌다. 갈라하드를 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다.
네발 마족이 나타난 게 놈을 더 자극한 듯했다.
네발 마족이 갈라하드를 보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황제를 죽여라.]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배자가 금색 봉을 휘둘렀다. 숲이 다시 흩어졌다. 회색이 푸르름을 뜯었다. 마족들이 한 걸음 내디뎠다.
위기감이 가득 올라왔다.
네발 마족이 놈을 보며-.
[너는 어디에 있느냐.]
입을 움직였다.
더 이상 숲은 없었다. 그저 지배자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놈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지배자는 눈도 끔벅이지 않고 그대로 굳었다.
네발 마족도 조용해졌다.
그에 갈라하드는 상황을 파악했다.
'묶어두는 게 전부군.'
지배자는 등장 만으로 아드리안나가 폭주하고, 갈라하드의 털이 쭈뼛 서게 만든 고위 마족이었다.
그런 고위 마족을 정신 간섭으로 묶다니-.
'대단하군.'
다만, 문제가 아직 남아 있었다.
"다른 놈들은 어떻게 안 되나?"
도시의 마족들과 인간들이 슬슬 움직이고 있었다. 적의 가득한 시선들이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네발 마족은 대답하지 않았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먼저 아드리안나를 살폈다. 멍청한 투구가 옆에 뒹굴고 있었다.
아드리안나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순백의 오러가 이제 연료를 부은 것처럼 거칠게 타올랐다. 아드리안나의 얼굴에 푸른 핏줄이 가득했다.
지배자에 이어서 네발 마족까지 등장하니 힘을 조절하지 못하는 듯했다.
해결책은 단순했다.
힘을 아예 죽이면 되는 문제였다.
아드리안나도 그를 알 것인데,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제 몸이 불타는데도 저리 버티는 이유는 뻔했다.
'이쪽을 지키겠다는 책임감이겠지.'
참으로 미련한 여인이었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아드리안나 앞에 섰다.
"오러를 넣게."
실핏줄 터져 붉어진 눈동자가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그 눈에 무식한 고집이 가득했다.
"그거 한 번 휘두르고 죽을 생각인가? 자네가 아직 감당할 수 없는 힘일세."
아드리안나의 눈동자가 끔벅였다.
'말로 하면 안 통하겠군.'
설득할 시간이 없었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성큼 나아갔다.
"······!"
아드리안나의 눈동자가 커졌다.
갈라하드는 멈추지 않고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순백의 오러가 갈라하드의 얼굴 바로 앞에서 일렁였다.
닿는 순간 녹을 것이다. 아드리안나의 검에 베인 마족처럼 먼지가 될 게 분명했다.
다만,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가 그러지 않을 걸 확신했다.
그에 한 발짝 더 내디뎠다.
아드리안나가 작은 숨을 터뜨렸다. 입술을 씹었는지 입가로 피가 흘렀다. 오러가 조금 작아졌다.
갈라하드는 다시금 발을 내디뎠다.
그 앞으로 순백의 오러가 스쳤다. 앞머리가 먼지로 흩날렸다.
오러가 성큼 사라졌다. 아드리안나의 얼굴에 땀이 가득했다.
"자네는 피부가 정말 좋군."
"미쳤습니까?!"
아드리안나가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어째서 이런 무모한 짓을 하십니까-!"
"자네를 믿었네. 자네도 나를 믿지 않았나."
아드리안나가 입을 벙끗거렸다. 너무 화가 나는데, 아는 욕이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갈라하드는 뒹구는 투구를 챙겨서 아드리안나에게 내밀었다.
"시간이 없네. 나머지 대원들을 부탁하지."
갈라하드는 바로 지배자에게 향했다.
지배자는 여전히 봉을 내밀던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지배자의 외형은 다소 우스웠다. 어린아이가 제 머리보다 큰 왕관을 쓰고 금색 봉을 든 모습이었다.
다만, 제압 당했는데도 풍기는 기세가 강렬했다. 피부가 따가울 정도였다.
지배자가 눈동자만 움직여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갈라하드는 잠시 손가락을 튕기며, 놈을 죽이는 걸 시도할지 고민했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바로 깰 것이다.
계산을 끝낸 갈라하드는 품에서 빈 수통을 꺼냈다. 수통의 입구를 깨끗하게 닦았다.
지배자의 시선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뭐하는지 궁금한 듯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웃으며-.
"음, 입술에 힘 좀 줘보겠나?"
수통을 놈의 턱 아래에 댔다. 혹시라도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지배자의 찢어진 입술에서 떨어진 피가 수통에 담겼다. 지배자의 동공이 작게 흔들렸다.
수통에 피가 조금씩 차올랐다.
그렇게 피를 담는데, 뒤가 시끄러워졌다. 마족과 인간들이 선명한 적의를 드러내며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계단이 비좁아 몇 명이 떨어지는데도 놈들은 거칠게 달렸다.
"아쉽군."
수통을 챙기던 갈라하드에게 놈의 금색 봉이 보였다.
놈이 굉장히 아끼는 물건인지 손때가 가득했다. 지배자는 금색 봉의 끝을 잡고 있었다.
'당기면 빠지겠는데?'
갈라하드는 잠시 보다가 슬쩍 당겼다. 금색 봉이 쏙- 하고 빠졌다.
지배자의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 동공이 커졌다가 작아졌다.
빠드득- 이 가는 살벌한 소리가 들렸다.
"반-."
지배자의 입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대충 협박일 것이다.
"미안하지만, 나를 노리는 놈들이 좀 많아서 말일세. 대기 줄이 좀 길다네."
갈라하드는 금색 봉과 수통을 흔들어주고, 미련 없이 뒤돌았다.
아드리안나가 깨웠는지 그웬 빼고 다들 일어나 있었다.
"막내? 내가 정신을 잃어? 분명 검을 들고··· 어라? 뭔가 끔찍한 걸···. 뭐였지?"
길버튼이 제 머리를 매만지며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잘 잤다."
데미안이 기지개를 켜며 좋아했다. 톰은 기절한 그웬을 챙겼다.
"자, 이제 가지."
갈라하드는 수통을 흔들었다. 양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저 한 번 홀짝일 정도였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콰아앙! 묵직한 소리와 함께 벽이 허물어졌다.
가득 뭉친 마족과 인간이 달려왔다. 실로 끔찍한 모습이었다.
선두의 마족이 주둥이를 쩍 벌렸다. 그 주둥이에 날카로운 얼음송곳을 날렸다. 마족이 피를 토하며 뒤로 넘어갔다. 그 자리에 마족 셋이 밀고 들어왔다.
끔찍한 마족 해일이었다.
"아, 잡히면 술래일세."
갈라하드는 여유롭게 말했다.
****
"후우-."
아드리안나는 뜨거운 숨을 뱉어내면서 검을 당겼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마족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터뜨렸다.
먼지가 번졌다. 이내 마족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기다렸다는 듯 다른 마족이 그 자리를 채웠다.
마를 태우는 성질이 어느 때보다 거칠게 타올랐다. 그를 누르는 것조차 힘들었다.
마주했던 고위 마족 때문이었다.
지배자라는 고위 마족도 문제였지만-.
'그 마족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뒤에 등장한 마족, 그건 단순한 고위 마족이 아니었다.
마주한 순간 아드리안나는 성질을 다스릴 수 없었다.
마나를 불태우는 성질이 아드리안나까지 태우면서 더욱 기세를 올렸다.
갈라하드가 아니었다면, 성질은 아드리안나를 잡아먹었을 것이다.
조절하지 못한 오러가 순간 가득 일어났다. 팔이 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웠다. 아드리안나는 다급히 검을 그었다.
따라오던 마족의 무리에 순백의 선이 길게 그어졌다.
열에 가까운 마족과 인간이 먼지로 사라졌다.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아드리안나는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성질을 눌렀다. 오러가 가까스로 꺼졌다.
"이쪽일세."
그때,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선두의 갈라하드였다.
길버튼이 왼쪽, 데미안이라는 꼬맹이가 오른쪽, 아드리안나가 뒤를 맡았다.
갈라하드가 선두였다. 마법사가 선두에 서다니, 말도 안 되는 대형이었다.
다만, 다른 이들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았다.
데미안에게 뜯어먹힌 길버튼은 아직 오러를 완벽히 회복하지 못했고, 아드리안나는 오러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갈라하드가 선두에 서고 있었다.
아무리 갈라하드라지만, 마법사가 선두에 서다니. 납득할 수 없었지만, 갈라하드가 명령이라며 못 박았다.
그때-.
"캬하아아악!"
위쪽에서 마족들이 떨어졌다. 마족보다는 마물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위로 튕겼다. 스파크가 튀었다. 순식간에 핀 화려한 번개 꽃이 그들에게 향했다.
마족의 몸이 거칠게 떨렸다. 눈이 순간 풀렸다.
퍼억-. 땅에 그대로 떨어진 마족들이 잠시 멈칫거렸다. 찰나였지만, 아드리안나에게 아주 긴 시간이었다.
마족의 목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짙은 재가 피처럼 뿌려졌다.
그 사이 갈라하드는 앞을 막은 마족의 어깨에 얼음송곳을 박아넣었다.
마족이 주춤거렸고-. 이번에는 길버튼이 마족의 목을 날렸다.
놀라울 정도로 효율적이었다.
'······이게 마법사?'
선두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사방에서 마족과 인간이 쏟아졌다. 조금이라도 느려지는 순간 뒤의 놈들에게 잡힐 게 분명했다,
더는 대화가 없었다. 그저 거친 숨소리와 마족의 비명, 환호가 전부였다.
무채색 일변도에 사방의 적-. 도시 전체에 쫓기는 기분이었다.
어디가 길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들은 그저 갈라하드의 등을 보며 뛰었다.
그렇게 얼마나 뛰었을까-.
"후미가 안쪽으로 들어오게. 데미안과 길버튼이 좀 더 크게 메꾸고."
앞에서 투박한 명령이 내려왔다.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좀 진정됐나?"
갈라하드가 아드리안나를 보며 물었다.
"예, 괜찮습니다."
"한 번 크게 휘두를 힘을 모으게."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저 멀리 큼지막한 대문이 보였다. 도시로 들어왔던 문이었다.
그 주변에 마물과 마족이 다수 있었다.
들어왔을 때 봤던 목이 여러 개 달린 거대한 마물부터, 깔끔한 복장의 마족까지 다양했다.
공통점은 전부 이쪽을 보며 적의를 드러낸다는 점이었다.
"길버튼 경과 데미안이 뒤를 막게."
갈라하드가 예상했다는 듯 명령을 내렸다.
"기사- 길버튼!"
"그냥 데미안."
위치가 다시 바뀌었다. 아드리안나는 검을 굳게 잡으며 나섰다.
"저건 자네가 처리해야 하네."
"예, 괜찮습니다."
아드리안나는 끄덕이며 검을 고쳐잡았다.
뛰는 동안 조금 추슬렀다. 여전히 성질이 격렬하게 타오르고 있었지만, 한 번 정도는 어떻게 할 수 있었다.
아니, 해야만 했다.
아드리안나는 검을 고쳐 잡았다.
그때, 옆에서 갈라하드가 속삭였다.
"벤다고 생각하지 말게."
아드리안나는 묻지 않고 집중했다.
"태워버린다고 상상하게."
베는 게 아니라 태워버리라니-.
이해할 수 없었다.
그에 아드리안나는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예."
그저 믿었다.
*
'될까?'
갈라하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아드리안나를 살폈다.
갈라하드가 알아낸 아드리안나의 성질을 설명해준 거였다.
갈라하드도 명확하지 않기에, 할 수 있는 설명이 별로 없었다.
반신반의였다.
아드리안나가 반만 처리해줘도 나머지는 어떻게든 밀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아드리안나의 오러가 가득 타올랐다.
또다시 오러에 먹힌 듯하여,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아드리안나가 검을 휘둘렀다.
굵직한 흰색 불이 그를 따라서 퍼졌다.
아드리안나의 검은 정직하고 고고했다.
그에 반해 지금 아드리안나가 펼친 검은 질서가 없었다.
그건 검술보다는 불에 가까웠다.
모든 걸 태우기 전에 멈추지 않는 아주 거센 불-.
순백의 불이 대문 주변의 마족과 마물을 삼켰다.
그 불은 하나를 삼킬 때마다, 크기가 오히려 더 커졌다.
마족은 땔감이었다. 그것도 바짝 말린 훌륭한 땔감-.
불은 마족을 전부 먹어 치우고 나서야 사라졌다.
서른이 넘는 마족이 있던 자리에는 먼지만 가득했다.
'말도 안 되는군.'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의 성질에 대해서 깨달은 것을 설명해줬다고 한들, 바로 저렇게 응용해버리다니-.
'이걸 해내네.'
역시 마족의 왕을 태울 검이었다.
"자네한테 반할 것 같군."
아드리안나가 거친 숨을 터뜨렸다. 멍청한 투구가 달그락거렸다. 그 아래로 헝클어진 금발이 보였다.
늘 굳건했던 자세가 휘청였다.
한계에 달한 듯했다.
아드리안나는 검에 기댔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부축했다.
"괜찮나?"
달그락. 말할 힘조차 없는지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길버튼이 뒤에서 검을 휘둘렀다. 등에 그웬을 멘 톰은 방패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마족을 밀어냈다. 데미안의 잿빛 오러가 마족을 베어냈다.
이윽고 그들은 대문에 도착했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를 밀어 넣었다. 그 뒤로 데미안과 그웬을 업은 톰이 들어갔다.
대문을 마지막으로 통과한 길버튼이 문을 힘껏 밀었다.
힘이 없는지 발이 헛돌았다.
"기사가 이렇게 힘을 못 써서야."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길버튼 옆에 붙었다.
"저도 돕겠습니다."
톰이 뒤이어 붙었다.
데미안은 검을 들고 대문 사이로 들어오는 마족들을 베었다.
붉은 피가 가득 튀었다.
난리가 잠시 이어졌다.
이윽고-.
쿵!!
대문이 굳게 닫혔다.
"아슬아슬하게 성공이군."
갈라하드는 이마를 닦으며 웃었다.
"그건 뭡니까?"
길버튼의 질문에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돌렸다.
갈라하드의 손에 익숙한 물건이 들려 있었다.
금으로 된 길쭉한 봉이었다.
'저걸 어디서 봤더라-.'
눈을 찡그리던 아드리안나는 그 정체를 깨달았다.
지배자가 들고 있던 봉이었다.
저걸 왜 가져 왔다는 말인가.
아니, 도대체 언제-.
"아, 수집품일세."
갈라하드가 금색 봉을 휘두르며 시원하게 웃었다.
그에 아드리안나는 세 번 연속 기침했다.
79화 금색 봉
"탈출했군."
갈라하드는 거친 숨을 애써 누르며 말했다.
수분이 섞인 상쾌한 새벽 공기가 코를 간질였다.
밖으로 나오니 해가 어스름히 떠오르고 있었다. 어두울 때는 음산한 폐허였던 것이 지금은 꽤 멋들어지게 보였다.
아니, 마족이 우글거리는 곳에 있다가 나오면 뭐든 안 이뻐 보이겠나.
"괜찮으십니까."
아드리안나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드리안나의 다리가 풀린 탓에 갈라하드가 부축 중이었다.
"자네 생각보다 무겁군."
"······예?"
"좀 더 가지."
갈라하드는 퍼지려는 대원들을 재촉했다. 지배자가 언제 올라올지 알 수 없었다. 최대한 멀어져야 했다.
갈라하드는 마차에 도착하고 나서야 숨을 돌렸다.
길버튼이 고삐를 잡고 나머지는 마차에 탔다.
"이랴!"
길버튼이 길게 소리쳤다. 마차가 거칠게 흔들리며 출발했다. 갈라하드는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마차는 열기로 가득했다. 톰이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새벽 공기가 마차를 덮었다.
갈라하드는 도시에서 봤던 것들을 되새겼다.
마나를 날카롭게 단련하는 것부터, 지배자의 묘한 권능과 네발 마족의 정체까지-.
얻은 게 제법 많았다. 데미안의 성질을 깨달았고, 마나를 날카롭게 벼리는 법도 알아냈다.
무엇보다-.
'고위 마족의 피라.'
수통을 흔들자,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근! 두근! 조용히 있던 고통의 알이 연신 뛰었다. 당장 먹여 달라는 듯 헐떡거렸다.
당장 마셔도 놀라운 효과를 보겠지만, 필요한 순간에 마시는 게 더 효율적이었다. 가령 고위 마족이랑 싸워야 할 때라든지-.
두근! 두근!
'닥치게.'
······두근, 고통의 알이 잠잠해졌다. 버릇이 조금 잡힌 듯했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몸을 살폈다.
'엉망이군.'
가리지 않고 마법을 써댔더니, 속이 아주 엉망이었다. 상대가 마족인 터라, 어쩔 수 없었다.
갈라하드는 수통을 허리에 차고, 안쪽에서 다른 수통을 꺼냈다.
최하급 마족의 피가 담긴 수통이었다. 그를 홀짝이자, 고통의 알이 작게 떨었다.
꼬르륵!
"배고파요."
데미안의 투덜거림에 톰이 육포를 꺼내서 건넸다. 데미안은 씹지도 않고 삼켰다.
'육체의 배고픔이 아니었군.'
갈라하드는 육포 뜯는 데미안을 보며 중얼거렸다.
데미안의 주식은 고기나 빵이 아니었다.
기사의 오러였다.
'기사의 오러를 먹다니-. 흥미롭군.'
데미안은 심지어 아드리안나의 오러도 먹었다. 그 출신에서 비롯된 힘일 것이다. 위험성을 고려해도 키울 가치가 넘쳤다.
'길버튼 경한테 주기적으로 오러를 먹이라고 해야겠군.'
무식하기에 오러만큼은 출중한 길버튼이었다.
콕콕. 옆에서 찌르는 손길에 고개를 돌리니 멍청한 투구가 있었다. 아드리안나였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멍청한 투구 사이로 보이는 푸른 눈동자가 진지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가 어떤 말을 할지 가늠했다.
아드리안나가 의심을 가질 만한 상황이었다. 갈라하드를 따라서 마족이 나왔고, 두 마족이 갈라하드를 탐냈으며, 황제를 죽인다는 말까지 했으니까.
'이건 상당히 좋지 않군.'
마족을 잡기 위해 평생을 전선에 있는 아드리안나였다. 마족에 관한 그녀의 반감은 설명할 것도 없었다.
그에 적당한 변명을 떠올리고 있을 때, 아드리안나가 투구를 달그락거렸다.
"갑옷이 무거운 겁니다."
"······음?"
아드리안나의 진지한 목소리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그러자 아드리안나가 제 갑옷을 가리켰다.
"이 갑옷. 싸구려 철이라 무게가 많이 나갑니다. 더불어 안쪽에 마물 가죽을 덧대어 입어서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고로 갈라하드 대장이 무겁다고 느낀 건, 이 갑옷 탓입니다."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상당히 진지했다.
갈라하드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아드리안나는 '갑옷이 왜 무겁나'에 대한 설명을 그쳤다.
아드리안나가 안쪽의 종이를 꺼냈다. 거기에는 미리 적어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위험에 빠졌습니다.' 같은 것들이었다. 대공에게 보고를 올리기 위한 까닭인 듯했다.
"종이와 펜은 톰한테 있을 걸세."
"병사가 왜 종이와 펜을 들고 다닙니까?"
아드리안나의 의문은 합당했다. 글을 아는 이가 열 명 중 하나도 안 되는 세상이었다. 병사가 종이와 펜을 들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
갈라하드도 비슷한 생각이었지만, 왠지 톰이라면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아, 장부랑 특무대 일기를 기록하기 위해서 따로 구해뒀습니다. 가죽을 말린 싸구려 양피지인데 괜찮으십니까?"
"···일기는 왜 적습니까?"
"취미입니다."
톰의 단단한 대답에 아드리안나의 투구가 잠시 흔들렸다.
"특무대는 참 특이한 부대군요."
"자네는 꼭 아닌 것처럼 말하는군."
"저는 위장 신분입니다. 이제 그것도 아니지만."
아드리안나가 투구를 벗으며 말했다. 톰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꼭 보면 안 되는 것이라도 마주한 모습이었다.
멍청한 투구가 벗겨지고 아드리안나의 얼굴이 나왔다. 순간 환해지는 착각이 들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입맛을 다셨다.
'아쉽군. 제법 재밌었는데.'
평소 아드리안나를 극도로 모시던 길버튼이었다. 자기가 갈궜던 막내가 아드리안나라는 걸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아드리안나는 톰이 건넨 양피지에 글을 적었다. 문을 열고 손을 뻗자 흰색 매가 나타났다. 흰색 매가 나풀거리며 날아갔다.
그때-.
"막내야! 내가 고삐 잡아야겠냐!"
길버튼의 호통이 들렸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작게 흔들렸다.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당황이 보였다.
'눈치를 못 챘다고?'
길버튼이 정신을 잃었지만, 나오는 길에 아드리안나는 검을 숨기지 않았다.
'정반대 위치긴 했군.'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눈치 못 채다니-.
'아, 현실 부정이군.'
너무 큰 충격에 오히려 외면하는 쪽을 선택한 듯했다. 일종의 자기 방어기제처럼.
아무튼-.
"막내야!!"
"자네를 부르는군."
갈라하드는 당황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아드리안나에게 투구를 씌워줬다. 멍청한 투구 너머로 시선이 느껴졌다.
"이 방법이 꽤 유용하다는 건 자네도 알지 않나."
달그락.
작게 숨을 내쉰 아드리안나가 마차 문을 열고 나갔다.
갈라하드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마족 도시부터 시작하여, 구렁텅이, 네발 마족, 지배자, 최초의 마법사가 배신자-. 등등 다양한 것들이 떠올랐다.
"꼭 불러야 나와? 나 부대장 길버튼이다. 내가 이 짬에 고삐를 잡아야 해?"
갈라하드는 작게 웃었다.
****
'여기서 갈라하드가 나오다니-.'
여우 가면은 갈라하드를 알고 있었다.
북부에서 한창 뜨거운 사내기에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여우 가면에게는 정보국에 있을 때가 더 익숙했다.
'실제로 볼 줄은 몰랐군.'
갈라하드에 관한 이야기는 꽤 많았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마법 전문가라는 이야기였다.
마법사가 아닌 마법 전문가라니-. 우스운 칭호였지만, 그 실상은 전혀 우습지 않았다.
마법 전문가에는 '마법사를 전문적으로 아주 잘 죽이는'과 '마법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잘 아는'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었다.
다만, 여우 가면의 시선을 끈 건 놈의 내부에 있는 존재였다.
'알을 품고 있군.'
심지어 알을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투박한 방식이었지만, 놈은 분명 알을 썼다.
그게 여우 가면의 흥미를 자극했다.
지배자가 놈에게 관심을 보이자, 여우 가면이 잔업을 감수할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놈의 뒤에서 다른 고위 마족이 등장했다.
그건-.
'잊힌 존재였다.'
여우 가면이 나설 필요도 없이 놈은 아드리안나를 데리고 탈출했다.
일이 잘 풀렸다고 볼 수 있었다.
문제는-.
"이 개 같은 놈이! 감히 내 지휘봉을!"
갈라하드가 지배자의 지휘봉을 가져갔다는 점이었다.
지배자가 연신 분통을 터뜨렸다. 지배자의 수하인 인간들의 머리가 대신 터졌다.
그렇다고 지배자의 분이 풀릴 리가 없었다.
지배자의 물건에 대한 집착은 어마어마했다.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뭐든 컬렉션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게 지배자였다.
이 도시도 지배자의 괴상한 집착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그런 지배자가 특히 아끼는 게, 왕관과 지휘봉이었다.
그 지휘봉을 가져간 거였다.
가만히 뒀다가는 쫓아갈 기세였기에, 여우 가면은 앞으로 나섰다.
"거기까지 하시죠."
"감히 짐에게 명령하는 거냐?"
"나가실 겁니까? 저 밖으로?"
여우 가면은 대문을 가리켰다. 지배자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마경이 아니라면, 마족의 힘은 형편없이 떨어졌다. 높은 마족들이 마경 깊숙한 곳에서 안 나오는 이유였다.
"감히 내 것을 가져갔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나? 북부를 밀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대공도요?"
지배자의 눈이 구겨졌다. 잠시 머뭇거리던 지배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 생각은 뻔했다.
"계획을 당기겠다."
기어코 선을 넘는군-. 여우 가면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치울까?'
여우 가면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일은 벌어졌다. 그걸 수습하는 것도 바빴다.
"지휘봉은 제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도시를 움직일 채비나 하시죠. 대공이 움직일 수도 있으니까."
"놈도 데려와라."
지배자의 목소리에 감정이 뚝뚝 흘렀다.
"산 채로."
이어서 지배자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다.
"예, 뭐. 알겠습니다."
지배자의 집착은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놈이 가져간 그 지휘봉은 상당히 값진 물건이니까.
다만, 그 가치를 고위 마족이 아닌 놈이 알아봤을 리가 없었다.
'도대체 왜 가져간 거지?'
여우 가면은 눈을 찡그렸다.
****
'등산할 때 쓰기 좋겠군.'
갈라하드는 금색 봉을 이리저리 매만졌다.
일단 들고 온 봉이었다. 그에 살폈는데 좀처럼 용도를 알 수 없었다. 마나를 넣어도 반응이 없었다.
유일한 단서는 그 표면에 새겨진 글자였다. 갈라하드도 처음 보는 글자였기에, 지금은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그래도 손맛은 좋군.'
쥘 때마다 손에 착 감겼다. 그 생김새도 고풍스러운 게 마음에 들었다.
길이도 적절한 터라, 지팡이 용도로 쓰거나 검 대신 호신용품으로 사용하기에도 좋을 듯했다.
이번에 아드리안나를 부축할 때도 그 값어치를 톡톡히 했다.
대공의 성은 전과 달리 시끌벅적했다. 곳곳에 마차들이 있었는데, 그 마차에 다양한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대장들이 전부 모였군.'
대공이 소집한 듯했다.
북부의 대장들은 맡은 구역 내에서는 굉장한 권력을 휘둘렀다. 거기에 병력까지 있으니, 자연스레 목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뻣뻣한 대장들이 이렇게 빨리 모인 걸 보면, 대공이 무섭긴 한 듯했다.
"그런데 막내는 어디 갔습니까?"
길버튼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길버튼을 쳐다봤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길버튼 경, 자네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군."
"예?"
"아닐세."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마족 도시라니-. 이런 빌어먹을 마족 놈들. 이번 기회에 전부 쓸어버려야 합니다."
길버튼이 특유의 투박한 욕을 하며 따라왔다.
"이미 사라졌을 걸세."
"예?"
"들켰는데, 놈들이 거기에 있겠는가. 이사라도 가겠지."
"도시가 어떻게 이사를 갑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나. 마족들한테 묻게."
"······예?"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안쪽으로 향했다. 병사들의 따가운 시선이 동시에 꽂혔다.
'대공이 움직일까-.'
대공은 성에서 웬만하면 나오지 않았다. 저번에 나온 것도 아드리안나 때문이었다.
지금은 아드리안나가 위험에 빠진 상황이 아니었으니, 대공은 나서지 않을 것이다.
갈라하드가 본 대공의 성미와 어울리지 않는 행보였다.
'협약이라 그랬나.'
갈라하드는 황녀와 대공의 대화에서 들었던 단어를 떠올렸다.
대공에게 모종의 제약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대공에게 제약을 걸 수 있는 인물이 몇이나 있겠는가. 황제일 게 분명했다.
'대공은 협약에 묶여서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다.'
협약으로 묶인 게 대공만일까?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었다.
대륙에는 실력자가 꽤 많았다. 그중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인물은 현저히 적었다.
만약 그 원인이 협약이라면-.
'제법 그럴듯하군.'
갈라하드의 사고가 이어졌다.
네발 마족은 황제의 죽음을 원했다. 그 이유는 '황제가 아무것도 안 해서'였다.
만약 실력자들이 묶인 게 황제의 협약 때문이고, 그래서 황제의 죽음을 원하는 거라면-?
'상당히 그럴듯하군.'
갈라하드의 눈이 깊어졌다.
****
'갑자기 소집이라니-.'
5대대 대장 마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대공이 대장들을 소집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아드리안나가 등장했다. 꼭 태양을 녹인 듯한 금발이 찰랑이며 어두웠던 방이 환해졌다.
아드리안나는 안쪽으로 향했다. 옆의 좌석이 비어있는 곳이었다.
"특무대 대장은 아직인가?"
"주인공이니까. 일부러 늦는 건가 보군."
삐딱한 대화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원래 대장들은 갈라하드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저러다가 금방 죽겠지-.' 라는 게 정론이었다.
다만, 갈라하드는 죽지 않았다. 죽기는커녕 공을 계속해서 세웠고 기어코 대공의 인정까지 받았다.
갈라하드는 이제 더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아드리안나는 북부의 영웅이자, 자랑이었다. 황태자와 아드리안나의 일화로 인해 제국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놈은 제국이 내민 아드리안나의 짝이었다. 제국 출신에다가 귀족이었으며 심지어 마법사였다.
북부에서 싫어하는 걸 응축한 게 갈라하드였다.
반감은 당연했다.
딱히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 상대가 갈라하드였으니까. 7대대 대장도 비슷한 생각인 듯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 의외의 인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아드리안나였다.
아드리안나는 본래 다른 대장의 일에 끼어들지 않았다. 각 대장은 오로지 대공 전하의 명령만 듣는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그런 아드리안나가 두둔하고 나서니,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오히려 역효과였다.
그때,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갈라하드였다. 갈라하드는 평소처럼 멀끔한 모습이었다. 달라진 건 손에 들린 금색 봉이었다.
대장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쏠렸다. 마크도 느낄 정도로 날카로운 기세가 갈라하드를 압박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오, 딱 맞춰 도착했군. 반갑네,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일세."
웃으며 인사했다.
'딱 맞춰 도착이라니-.'
곳곳에서 혀 차는 소리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갈라하드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아드리안나 옆에 앉았다.
'어찌 사람 속을 저리 긁을 수 있지?'
마크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갈라하드는 눈치가 빠른 사내였다. 이 분위기를 모를 리가 없었다.
갈라하드는 수그리기는커녕 오히려 더 대장들의 심기를 긁었다.
'다른 의미로도 대단하군.'
그때, 문이 거칠게 열렸다.
거친 기세가 방을 가득 채웠다.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압박감이었다.
북부의 패자, 대공이었다.
대공의 등장에 대장들이 다급히 일어났다. 그 살벌한 존재감에 마크는 마른침을 삼켰다.
대공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상석으로 향했다.
대공이 상석에 앉자 대장들이 분주하게 자리에 앉았다.
대장들은 숨소리를 내는 것조차 조심하며 대공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 대공이 갈라하드에게 손짓했다.
'대공의 인정이라-.'
갈라하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서서 대장들을 둘러봤다.
"친애하는 북부 대장 여러분들. 그대들의 노고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춥고 척박한 땅을 마족에게서 지키느라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갈라하드가 부드럽게 말을 시작했다.
뜬금없는 말에 대장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대공은 관심 없다는 듯 뒤로 기대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마크조차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저도 북부에 오니까 얼마나 춥던지. 마물 코트가 아니었으면 진작에 얼어 죽었을 겁니다. 하하. 이 정도의 추위에서 마족과 싸우시다니! 저는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갈라하드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대장들을 치켜세우는 내용에 분위기가 살짝 풀어졌다.
'무슨 생각이지?'
마크는 눈을 가늘게 떴다.
갈라하드의 유려한 말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갈라하드는 이어서 '새벽의 설산'과 '해가 떨어질 때 눈 덮인 호수'를 칭찬했다.
"제국의 눈은 내려도 쥐꼬리만큼 내리는 게 전부인데, 북부의 눈은 어찌나 펑펑 오던지! 포부의 크기만큼 오나 봅니다! 하하!"
제국 놈이 제국을 욕하면서 북부를 칭찬하는데, 싫어할 리가 없었다.
대장 몇이 따라서 웃었다.
대장들은 어느새 갈라하드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갈라하드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헬오브라는 곳을 가봤는데, 꽤 멋진 곳이더군요."
헬오브-? 뜬금없는 단어에 마크는 눈을 찡그렸다.
그때, 갈라하드가 손을 빙글 돌렸다.
유려하게 움직인 금색 봉이 누군가를 가리켰다.
마치 검처럼-.
"헬오브는 아주 멋진 곳일세. 자네는 아는 것 같군. 그렇지 않나? 6대대 대장 차르티엔?"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가득 올라갔다.
80화 등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