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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구나!

나는 양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력심] 특성이다.

사실상 제 1 매립지에서 얻을 특성은 다 얻은 것.

"끝났다······"

노루가 파리한 얼굴로 말했다.

어느새 초록색 빛이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기동된 환풍기가 맹렬히 돌아가는 덕에 공기는 맑고 살랑살랑 바람마저 불어왔다.

이것으로 오늘 일은 끝.

아쉽게도 한가로이 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구어어어엉!"

열어놓은 문 너머에서 거친 괴성이 울려 퍼진 까닭.

"으아아!"

"사람 살려!"

"노루님! 후배님! 살려주십쇼!"

잔뜩 겁에 질린 비명도 함께.

노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시발!"

타앗!

순식간에 몸을 빼서 문밖으로 뛰쳐나간다.

"후우."

결국 이렇게 되나.

나도 내팽개쳤던 삽을 움켜쥐고 노루 뒤를 따라갔다.

문을 나와 통로에 들어섰을 때.

나는 보았다.

흐릿한 형광등 아래 서 있는 거구의 고슴도치 괴인과,

피를 뿌리며 허공을 날아가는 노루를.

고슴도치 -1-

고슴도치

"안 돼!"

경악과 절망에 찬 비명.

아저씨들이 멀찍이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죽거나 크게 다친 사람은 없는 모양이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시간 문제.

"키키킷. 키키키킷."

고슴도치 괴인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키가 무척 커서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인다.

전신은 두꺼운 근육질이고, 머리카락 대신 늘어진 가시가 불길한 금속성 광택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고슴도치 괴인의 팔을, 특히 주먹을 주의 깊게 살폈다.

'몇 레벨이지?'

승천할 듯 솟은 승모근과 이두, 삼두에 비해 전완근은 볼품없다.

아래팔이 전체적으로 다 그렇다.

만화에서 나올 법한, 등과 어깨만 강조되고 아래팔과 손은 아이처럼 앙증맞은, 그래서 비대칭적으로 보이는 몸.

즉, 1레벨 돌변변이.

바탕이 되는 고슴도치 머리의 몸이 썩 좋지 않았던 만큼 2레벨에 도달하지는 못한 것이다.

"후."

쨍그랑!

들고 있던 삽 따위 던져 버리고 앞으로 나섰다.

"키키킷!"

고슴도치 괴인이 퉁방울 같은 눈으로 나를 쓸어본다.

"도, 도망쳐!"

벽에 박힌 노루가 피를 토하며 말하고.

"후, 후배님! 콱 죽여버려!"

"후배님만 믿겠수다!"

"죽여버리라고!"

입만 산 아저씨들의 응원이 이어졌다.

"키아앗!"

그리고 돌진해 오는 고슴도치 괴인.

콰아아!

기세가 매섭다.

널찍한 통로가 고슴도치 괴인으로 꽉 차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오염 마력을 한계까지 흡수했지만 정화하지도 소화하지도 못했다.

나는 여전히 0레벨이다.

지금 상태에서 지금 무장으로 고슴도치 괴인과 정면 대결을 하면 필패.

하지만 아케인 서울에서 쌓은 1만 시간은 절대 헛되지 않았다.

나는 금방 해결책을 생각해냈다.

우선 몸을 긴장시킨다.

전신 근육이 뻣뻣하게 굳고, 뒷목이 뻐근해지면서 눈에 핏발이 섰다.

이마에 땀 한 방울이 맺히고 세상이 느려진다.

과집중 상태.

눈을 번뜩이면서, 주먹을 으스러져라 쥔 채로 오직 하나만을 생각한다.

'상처 회복 삭제.'

지금 당장보다는 전투 후에 쓸모 있을 특성이 사라진다.

'활기 삭제.'

마찬가지로, 장기전보다는 단기전을 위한 선택.

이어서 새로운 특성을 불러왔다.

'근력, 마력심 생성.'

심장이 강하게 뛴다.

전신이 뜨거워지는 한편 마력이 나를 향해 몰려왔다.

두근!

짜릿한 열기가 뇌리까지 치솟는다.

온몸 근육이 크게 부풀었다.

가파르고도 강렬한 기운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지만, 어떻게든 정신줄을 붙잡고 버텼다.

전신 근력을 강화하는 [근력]

모든 물리적 마법적 피해를 감소시키는 [인내]

아무 마력이나 제멋대로 처먹는 [마력 흡수]

마력 회복 속도를 높이는 [심호흡]

마력을 강화하고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마력심]

······최후의 빗장이자 방아쇠인 [오염 저항]까지.

"와라!"

고함을 터뜨리며 맞돌격한다.

고슴도치 괴인과 내가 부딪쳤다.

둘 다 힘만 믿고 던지는 우격다짐이다. 정교한 기법이나 효율적인 동작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큭!"

나가떨어진 것은 내 쪽.

허공을 날아 벽에 처박히자 저절로 신음이 터졌다.

"시, 시벌!"

"도망가자!"

"사람 살려!"

아저씨들이 바로 꽁무니를 뺐다.

내 맞은편에 쓰러져 있던 노루도 음울한 얼굴로 날 보았다.

"키키키킷!"

그리고 괴소를 터뜨리는 고슴도치 괴인.

"흥."

난 콧방귀를 뀌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교체한다.

[인내] 특성을 새롭게 얻은 [맷집] 특성으로.

내가 괜히 무모하게 달려들어서 한 대 처맞은 게 아니라고.

맷집 특성은 오로지 물리 피해만 감소시키지만 감소폭이 인내보다 배는 크고, 무엇보다도 내가 노리는 어떤 특성의 획득 조건이 되니까.

"해보자, 새꺄!"

정면으로 달려든다.

고슴도치 괴인의 아랫배에다가 주먹을 된통 박아넣는다.

"키에엑?"

정타였다.

고슴도치 괴인이 몇 발짝 물러나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깐.

"크아아아!"

거칠게 포효하며 내게 반격을 날린다.

순식간에 확대되는 주먹.

피할 수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왼쪽 팔뚝을 직각으로 세워 공격을 막았다.

파직!

"크허억!"

팔이 부러졌다.

눈앞에 별이 번쩍하면서 시퍼런 아픔이 등골을 쪼개듯이 달렸다.

예상은 했지만 너무 아프다.

반사적으로 몸이 움츠러들려고 했으나 나는 그걸 거부했다.

여기서 물러나면 결과는 오직 하나뿐이니까.

죽음!

죽고 싶지 않다면 나아가야 한다.

살고 싶다면, 이 막장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전진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악을 쓰며 주먹을 꽂아 넣었다.

"죽어!"

모든 울분을 이 주먹에 담는다.

분노를 터뜨린다.

갑작스레 떨어진 이 세계에서 느꼈던 당혹감과 좌절감, 절망감을 단숨에 폭발시킨다.

퍼억!

고슴도치 괴인의 몸이 거칠게 한 번 출렁인다.

배를 때렸으나 상체가 흔들리고 머리가 젖혀진다.

그러나 거기까지.

"크아아!"

격노한 고슴도치 괴인이 길게 주먹을 휘둘렀다.

뻔히 보이는 투로.

극도로 비효율적인 움직임.

나라고 다를 것은 없다.

노가다, 공장일, 상하차나 좀 하고, 게임이나 좀 했던 내가 무슨 용쓰는 재주가 있어서 저걸 피하겠냐고.

꽈아앙!

굉음과 함께 팔이 또 부러졌다.

정신이 순간 증발할 뻔했으나 이를 악물고 버텼다.

나도 안다.

1레벨도 못 된 주제에 1레벨 변이체와 이렇게 정면으로 치고 받는 것은 정말로 멍청한 짓이라는 사실을.

그렇기에 안다.

멍청하고 무모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이런 일이야말로 특성 획득 트리거가 된다는 사실을!

"으아아아!"

주먹을 휘두른다.

한 대 때리고 한 대 얻어맞는다.

"크아아!"

쩌렁쩌렁한 함성이 콘크리트 동굴을 울렸다.

지독히 원시적인 박투.

순수한 힘과 힘의 격돌.

내가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고 있다.

왼팔은 움직이지도 않고 아무 보호장비 없이 후려친 오른쪽 주먹도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달려든다.

그런데도 돌진한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눈앞의 고슴도치 괴인에게만 집중하며 한 번 더 주먹을 뻗는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오로지 하나.

힘!

더 강한 힘!

더 더 강한 힘뿐!

후벼 파는 통증을 감내하며 주먹을 뻗었을 때였다.

기이한 감각이 오른팔을 관통했다.

인두로 지지는 듯한 뜨거운 열감.

동시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 차디찬 냉감.

언뜻, 눈앞에 시퍼런 전광이 튄 듯했다.

심장부터, 전신으로부터, 뇌로부터 이어지는 기이한 느낌이 분수처럼 분출했다.

콰직!

고슴도치 괴인의 아랫배에 틀어박힌 내 주먹.

여태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타격감이 전해졌다.

울컥.

고슴도치 괴인이 피를 토했다.

유효타.

고슴도치 괴인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빛을 보낸다.

이것이 [돌변변이 근육] 특성의 위력.

마력심과 근력 특성을 함께 보유해야만 얻을 수 있는 특성.

"죽어!"

"크아아아!"

그렇다고 기죽지는 않는다.

고슴도치 괴인이 기세를 올리며 나와 뒤엉켰다.

또다시 주먹을 주고받는다.

나 또한 피를 토한다.

아니, 그 이상을 넘어 유효타를 몇 번 허용했다.

얼굴도 얻어맞고 배도 얻어맞아서 몸에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다리도 하나 부러졌고 눈꺼풀이 부어올라 앞이 전혀 보이지를 않는다.

"이이익!"

"크아아!"

그러나 덤빈다.

달려들고 또 달려든다.

목구멍까지 찰랑찰랑 차오르는 핏물에서, 터질 듯이 박동하는 심장에서 나는 새로운 특성의 탄생을 직감하고 있었다.

[돌연변이 육체]

근력이 돌연변이 근육으로 대체된 것처럼, 맷집이 돌연변이 육체로 대체된다.

이제 나는 밀리지 않는다.

부러졌던 왼팔도 어느새 회복되었다.

덩치만 조금 작다뿐이지 고슴도치 괴인과 대등하게 서서 일격 일격을 주고받고 있다.

"초인······"

그런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아니, 듣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내 정신은, 집중력은 철저히 고슴도치 괴인에게만 향하고 있었으니까.

"크아아!"

고슴도치 괴인이 내 가슴에 주먹을 박아넣는다.

막지 못했다.

울컥, 핏물이 고통처럼 치고 올라왔다.

꿀꺽 삼켜버리고는 고슴도치 괴인의 아랫배에 주먹을 날린다.

내가 집요하게 때리고 때렸던 바로 그 자리에.

'부족해.'

모든 스펙이 고슴도치 괴인의 하위호환이다.

공격력, 방어력, 이성을 압도하는 야성, 모두 마찬가지다.

역시 최후의 빗장을 풀어야만 한다.

마지막 방아쇠를 당겨야만 한다!

"후으읍."

길게 심호흡.

과연 될까?

내 생각대로 모든 일이 진행될까?

믿어보자.

내 1만 시간을.

아케인 서울에 박았던 시간을!

'오염 저항 삭제.'

순간 정적이 흘렀다.

세상이 정지한 것만 같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 흐르고, 전신의 혈류가 역류하기 시작했다.

둥둥둥둥.

심장이 뛴다.

완전한 엇박으로 박동한다.

심실이 심방이 되고 좌심이 우심이 되며 호흡 자체가 정지한다.

"크으윽!"

말로 형용하기 힘든 고통.

열기에 뇌가 녹아내리는 듯하고, 손끝 발끝이 못 견디게 간지러웠으며, 근육이란 근육은 섬유 단위로 해체되어 갈라지는 것만 같은 통증이 나를 엄습했다.

그리고 변화하는 몸.

몸이 부쩍부쩍 자라난다.

눈앞의 고슴도치 괴인을 압도할 지경이다.

키도 덩치도 근육도 전부.

"키킷?"

심상찮다는 것을 느낀 고슴도치 괴인이 뒤로 물러난다.

하지만 고슴도치 괴인이 상황을 파악하는 것보다 내 변이가 한 발짝 더 빨랐다.

거대한 근육질이 된 팔을 내밀어 고슴도치 괴인을 붙잡는다.

두툼한 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바닥에 메다꽂았다.

꽈아앙!

살면서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굉음이 터졌다.

천둥이 친 것 같았다.

콘크리트 구조물 전체가 진동하는 듯하다.

곳곳에 고인 물웅덩이가 사방으로 으깨졌다.

"키이잇!"

고통 어린 비명.

내리치고 내리찍고 또 내리꽂았다.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고슴도치 괴인은 비명을 지르며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나는 단 1초도 허용하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고슴도치 괴인에 대해 잘 안다.

뭐가 약점인지 강점인지 속속들이 알고 있다.

고슴도치 괴인의 특성은 단 1개.

[가시 머리카락]이 전부.

특성과 육체, 전투 방식이 따로 노는 1레벨 고슴도치 괴인 주제에, 시너지 맞춰서 특성 6개를 딱딱 갖춘 지금의 날 이길 수는 없다.

지금의 나 역시도 1레벨이니까.

전사 계열이 아니라 강화병 계열이며, 인간을 포기하고 괴인으로, 변이체로 진입했을망정 어엿한 1레벨 초인이라고.

딱, 딱, 딱, 딱.

그런 나를 보며, 노루가 위턱 아래턱을 사정없이 부딪쳤다.

"괴, 괴물······"

그래, 그렇게 보이겠지.

한 번 변이체가 되면 절대 되돌릴 수 없다는 게 상식이니까.

나도 믿는 구석은 있었다.

퍼억!

고슴도치 괴인의 죽음을 확인한 후 뒤로 물러난다.

"으아아!"

공포에 질려 바닥을 벅벅 기는 노루.

눈앞에 있는 적을 죽였으니 자기 차례라고 생각한 모양.

너한테는 관심 없다.

대신해서 내 내면에 집중한다.

지금 내 특성 목록은 이럴 것이다.

[마력 흡수][심호흡][마력심]

[돌연변이 근육][돌연변이 육체][돌연변이]

오염 저항과 돌연변이가 핵심이었다.

오염 저항을 삭제하는 것으로 방아쇠를 당겼을 때, 그래서 돌연변이가 생성되었을 때 내 몸은 루비콘 강을 건넜다.

인간의 탈을 벗고 변이체가 된 것이지.

만약에, 만약에 말이다.

돌연변이를 삭제하면 어떨까?

그래도 변이체인 채 남아 있을까?

꿀꺽.

침 한 번 삼키고 특성을 되돌린다.

돌연변이 대신 오염 저항으로.

돌연변이 근육과 육체 대신에 근력과 맷집으로.

마력 흡수와 심호흡, 마력심 대신에 상처 회복과 인내, 활기로.

우드득! 우득!

몸 곳곳에서 기묘한 소리가 들렸다.

내 몸이 줄어들고 있었다. 근육질 거한에서 원래의 호리호리한 몸으로 돌아간다. 명백히 인간의 것이 아니게 되었던 피부도 본래 색깔을 되찾았다.

시간을 되감는 듯한 괴상한 모습.

세상이 더는 붉게 보이지 않는다.

어두컴컴한 콘크리트 구조물 안, 희뿌연 빛을 뿜는 형광등, 모두 그대로다.

빙고.

내 계산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진 것.

"헉, 허어억."

인간으로 돌아온 나를, 노루가 숨을 헐떡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고슴도치 -2-

눈동자가 흔들린다.

"말도 안 돼."

그러다 시선이 내 얼굴에 못 박힌 듯 고정된다.

"초인······ 초인이셨어요?"

말투가 좀 바뀌었다?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직은."

지금이라도 돌연변이 특성을 불러오면 당장에 초인이 된다.

문제는 후유증.

전신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머리가 얼마나 어지러운지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하다.

활기 특성을 고려하더라도 며칠은 푹 쉬어야겠지.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한 느낌을 억누르며, 고슴도치 괴인 시체에 다가갔다.

가슴에 손을 얹고, 임시로 추출 특성을 장착한 다음 단숨에 뽑아낸다.

물컹해진 가슴뼈 사이, 작은 돌멩이가 내 손에 딸려 나왔다.

새끼손가락 크기 정도 될까?

유리처럼 투명하면서 수면 위의 기름때 같은 묘한 광택을 발하는 돌이었다.

마력핵.

1레벨이니만큼 어느 정도 가치는 있었다.

그렇다고 인생 역전할 정도는 아니고.

"뭐, 뭐야?"

"끝났어?"

"변이체가 죽었다!"

"뭐? 죽었다고?"

"우린 살았어!"

아저씨들이 슬금슬금 돌아왔다.

바닥에 쓰러진 시체를 보더니 하나같이 입을 쩌어억 벌린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시체를 봤다가 나를 쳐다본다.

여기에 눈치 없는 사람은 없다.

"후배님! 후배님께서 하신 겁니까?"

"허······"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런 누추한 곳에 왜 이렇게 귀한 분이······"

다들 나를 초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

하기야 1레벨 변이체를 잡을 수 있는 건 초인밖에 없다.

대구경 산탄총이나 자동소총이라도 들고 왔으면 모르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고.

나는 굳이 아니라고 설명하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더 볼 일이 없는 인간들.

초인이 아니고 어쩌고 설명하려면 내 입만 아프다.

다만 노루가 다가가 뭐라고 속삭이는 게, 내가 아직은 초인이 아니라고 한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이제 돌아가죠."

"예, 아! 예!"

"모두 갑시다!"

"저건 어떻게 하죠?"

시체를 보며 묻자 아저씨 하나가 쓰게 웃었다.

"공무원한테 말하면 알아서 처리할 겁니다. 사실, 이런 일은 가끔 있으니까요."

"그렇겠죠."

"흠, 흠. 저기 죄송한데, 가시 몇 개만 챙겨도 되겠습니까?"

"가시요? 아, 머리카락?"

"예. 저런 거 수집하는 놈들이 있어서요."

"마음대로 하세요."

아저씨들이 씩 웃고는 시체에 몰려갔다.

내팽개쳤던 삽을 주워서는 시체 머리를 거칠게 내리친다.

깡! 깡!

죽어서 마력이 흩어지고 흐물흐물 연약해진 시체.

살아 있을 때는 강철 같던 금속 가시도 뿌리 부분이 썩은 살점처럼 흐물거렸다. 따라서 삽질 몇 번으로 가시를 간단히 떼어낼 수 있었다.

노루도 슬쩍 일어서더니 시체에서 금속 가시를 몇 개 가져갔다.

내가 알기로 별 가치는 없는 물건인데 수집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

"아저씨. 이젠 편히 쉬어."

노루가 호주머니에서 힙 플라스크를 꺼내 입에 물려주었다.

탁한 갈색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다른 아저씨들도 시체 입에 싸구려 담배니, 찌그러진 사탕 따위를 집어넣었다.

"김씨, 성불하쇼."

"거기선 아프지 말라고."

"잘 가."

"옛 아버지의 축복이 있기를."

아저씨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명복을 빌었다.

그걸 보고 있으니 쓴맛이 혀를 찔렀다.

격식을 차려 조문하는 것이 아니다.

희희낙락하며 고인의 유체를 약탈하던 주제에 적당히 손을 흔드는 것이다.

하긴 나라고 저들을 비난할 자격은 없지. 내가 마력핵을 추출하는 것으로 스타트를 끊었으니까.

마지막으로 시체를 일별하고는 자리를 떴다.

걷는 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습기 찬 공기가, 축축한 분위기가 진흙 뭉치처럼 우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마침내 출입구에 도착.

문이 열리고 침침한 형광등 빛 대신 쨍한 햇볕이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공기가 얼마나 맑고 시원한지 저절로 코를 벌름거리게 된다.

"후아!"

"드디어 밖이다!"

"진짜 죽는 줄 알았네."

"길었어. 정말 길었어."

"살았다······"

"술 빨러 갈 놈?"

"김씨는 이번 달 갚을 돈이 2천이라며."

"내일 또 청소 뛴다고 하면 되지. 쌍놈들도 돈 벌겠다고 그 지랄 하는 건데 내 배를 가르려고 하겠어? 조금이라도 더 뽑아먹으려고 하겠지."

"오늘은 삼겹살 파티야?"

"미쳤어? 내가 돈이 어딨다고. 고기 국밥 정도는 사줄게."

"또 국밥이냐."

"싫으면 말고."

사무실에는 들어가지도 못했다.

밖에서 똑똑, 문을 두드리자 아침에 문을 열어줬던 공무원이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다.

"벌써 끝났어요? 어, 사람이 한 명 없네요."

"변이돼서 죽었어요."

"안쪽에서요?"

"네."

"추가 피해자는 없고요?"

"네."

"운이 좋으셨네요. 저번 팀은 다 죽었었는데."

노루가 인상을 팍 썼다.

재수 없게 왜 그딴 소리를 지껄이냐는 기색.

공무원이 귀찮다는 표정을 짓는다.

"안에 들어가 봐야겠네······ 알겠습니다. 카드키 반납하시고 귀가하세요. 나가면서 방역실 들리고요."

"예, 고생하십니다."

"고생요."

자기 일이 늘어서 귀찮다는 태도.

공무원은 대충 카드키를 받고는 사무실로 쏙 들어갔다.

방역실에 들러서 마력 정화기와 오염 검사기를 거친 후 주차장으로 이동.

주차장 한쪽에는 우리를 태우고 왔던 버스가 주차되어 있었다.

언제 왔는지 운전수가 운전석에 누워 쿨쿨 낮잠 자는 중.

노루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퍼떡 놀라며 깨어난다.

"어? 노루 님? 빨리 끝나셨네요? 몇 시간 뒤에나 나오실 줄 알았는데요."

"그렇게 됐어."

"고생하셨습니다. 어디······ 하나, 둘, 셋······ 어? 한 분이 안 보이네요? 고슴도치 아재는요?"

"알잖아."

"아······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제길."

운전수가 자기 목덜미를 주물렀다.

그러더니 조수석 글로브 박스에서 녹색 소주병을 꺼내 나발을 분다.

미친. 음주 운전을 하겠다고?

하지만 누구도 참견하지 않는다.

"박씨! 박씨만 먹지 말고 우리도 좀 줘!"

"아, 나 먹을 것도 없어!"

"그러지 말고. 우리도 죽을 것 같다고."

"경찰에 꼰지른다?"

"빌어먹을 인간들. 한 모금씩만 마셔."

아저씨들이 소주 나발을 불었다.

당연히 한 병으로는 모자랐다. 운전수가 투덜거리며 소주 두 병을 꺼내 더 돌렸다.

"캬아!"

"으아, 살겠다."

"역시 박씨밖에 없어!"

"아저씨도 좋은 거 먹네? 소주에 뭘 처넣은 거야."

"돈 벌어서 뭐해. 좋은 술 처먹겠지. 이제 출발할 거니까 잘 잡고 있어. 신삥은 안 먹게?"

내가 머리를 흔들어 거절하자 운전수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본다.

뭐라고 말하기도 전, 아저씨들이 먼저 난리를 쳤다.

"어허! 신삥이라니!"

"후배님이라 불러, 후배님! 예비 초인님이신데, 어디서 말버릇이 그따위야?"

"우리 후배님 아니었으면 우리 다 뒈졌다고!"

"후배님? 당신들 왜 그래? 어, 잠깐만. 예비 초인이라고? 진짜야?"

"그러엄!"

"우리가 다 봤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이젠 말을 섞기도 싫다.

버스 구석에 앉아 눈을 꾹 감았다.

운전수가 새삼스럽게 나를 보는 것이 느껴진다.

부르릉.

디젤 엔진이 경운기 소리와 함께 시동이 걸렸다.

털털거리며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버스.

평일 오후라 강변북로는 한가했다. 막히는 일 없이 쭉쭉 달릴 수 있었다.

덕분에 30분 만에 인력사무소에 도착.

다른 사람들이 양보해줘서 첫 번째로 소장과 면담할 수 있었다.

소장이 번쩍이는 눈으로 나를 주시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요."

"예. 한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원일이한테 들었습니다. 김민수 씨······ 술을 좋아하셔서 그렇지 아주 성실하고 쾌활한 분이었는데 안타깝게 됐습니다."

소장이 애도하듯이 고개를 숙인다.

찌푸려진 얼굴, 일그러진 미간.

그러나 그 표정이 악어의 눈물처럼 보인 것은 내 착각이었을까?

역시나 고개를 들었을 때, 애도하는 빛은 물컵에 던진 소금 한 꼬집처럼 싸악 사라진 다음이었다.

"이제 일 이야기를 하죠."

냉철하기만 한 사업가의 얼굴.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요."

"뭐, 그럽시다."

나라고 다를 건 없다.

"관리국에서 연락은 받았습니다. 구역 5개를 정화하셨다고요."

"정확합니다."

"아시다시피 전리품은 모두 습득자 몫이고, 구역 1개 정화당 정화비 천만 원이 지급됩니다. 총 5천만 원에서 제 수수료 20%가 빠지고, 나머지 4천만 원에서 여덟 분이 나누니까 5백만 원을 드려야 합니다만······ 오늘처럼 특수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는 그럴 수가 없죠."

소장이 한쪽에 손짓을 했다.

철컥.

보란 듯이 전시된 금고가 열리고 신사임당 두 뭉치가 춤추듯 허공을 겅중겅중 뛰어왔다.

뭐야? 염동력이야? 아니면 마법?

신사임당 두 뭉치······ 아마도 천만 원이 내 앞에 안착한다.

"받으십쇼."

소장이 손을 들어 지폐 뭉치를 가리켰다.

"김전사 님 몫입니다."

천만 원.

내가 원래 세계에서조차 한 번도 손에 쥐어보지 못했던 거금.

떨리는 손으로 지폐 뭉치를 집어 들었다.

소장이 묘하게 웃더니 또 한 번 손을 휘젓는다.

"초인, 예비 초인이라고는 들었습니다만 어쨌든 김전사 님을 다른 청소부들과 똑같이 대우할 수는 없지요. 김전사 님께는 수수료를 10%, 아니 5%만 받겠습니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고요."

열려 있던 금고 문이 한 번 파르르 떤다.

그와 함께 날아오르는 지폐 뭉치.

세종대왕님 한 다발.

아니, 두 다발.

이거면 분명히 2백만 원이다.

"조금 많은데요?"

지폐 뭉치를 받고 엉겁결에 입을 열자 소장이 씨이익 웃는다.

"그냥 조금 더 넣었습니다. 천원 단위, 백원 단위까지 따져서 가르면 정 없지 않습니까?"

"전 괜찮습니다만······"

"어허. 그냥 넣어두십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는 의미에서 드리는 뇌물입니다. 저랑 계속 거래하시면 절대 금전적으로 섭섭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소장이 수더분하게 웃어 보였다.

어제 면담했을 때와 비슷한, 그때보다 더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미소.

그래서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형만 믿어라!]

[내가 다 알아서 해준다니까?]

그렇게 호언장담하던 인간들이 했던 짓이 떠올라서.

하기야 냉정히 생각해 보면 소장이라고 다를 게 없다.

당장 말투부터 달라지지 않았나.

존대와 하대를 묘하게 섞어 쓰던 말투에서 철저한 존대로.

왜 그러겠어?

당연히 이용해 먹으려고 그러는 거지!

나는 차가워진 눈빛을 감추고 빙그레 웃었다.

"좋습니다. 이렇게 신경 써주시는데 소장님과 계속 거래해야지요. 믿고 있겠습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김전사 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천군만마를 얻은 듯이 든든합니다. 아직 식전이시죠? 제가 좋은 곳을 압니다. 같이 식사하면서 건설적인 이야기를 하면 어떨까요?"

밥 먹이고 술 먹이면서 할 얘기는 뻔하다.

전속 계약서라도 쓰자고 하겠지.

나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아, 그럼 언제쯤······"

"글쎄요? 조만간 찾아오겠습니다."

"음! 알겠습니다. 나중에 제가 연락 한 번 드리겠습니다."

"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계약서를 다시 쓰긴 해야지.

맨정신에.

내가 초인이 된 다음에.

만약에 그때 수를 쓴다?

그럼 끝이다. 죽은 고슴도치 머리 몫을 나한테 챙겨주고 자기 수수료까지 줄인 것은 고맙지만 비즈니스는 어디까지나 비즈니스.

돈 좀 더 줬다고 해서 노예 계약서를 쓸 생각은 없다고.

소장과 악수하고 인력사무소를 빠져나왔다.

흥얼흥얼.

생전 처음으로 천이백이라는 거금을 손에 쥐어서일까?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그걸 자각하고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뭐 별수 없지.'

사람이 죽었다.

흉측하게 변이해서는 끔찍한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되레 그 잿밥에만, 전리품에만, 정화비나 수수료에만 관심이 있었다.

나 역시 그렇잖은가.

솔직히 말하면 내게도 소장을, 아저씨들을 욕할 권리는 없었다.

어쩌면 세파에 찌들어 닳고 닳은 나야말로 이 막장 세계에 어울리는 인간일지도 모른다.

'······흥.'

상관없다.

이름도 제대로 몰랐던 아저씨보다야 내 목숨이 훨씬 소중하다.

살아남는다.

그 한마디 명제를 가슴에 품으며, 얼굴을 새하얗게 굳혔다.

"후배님······"

대기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날 보고는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수많은 시선이 내가 든 가방에 꽂힌다.

마력핵 백여 개와 현금다발로 불룩해진 가방.

나는 그들의 눈에서 아주 익숙한 감정을 읽어냈다.

탐욕, 그리고 질투였다.

고시원 탈출 -1-

고시원 탈출

"으으, 죽겠네."

낡아빠진 침대에 몸을 던졌다.

침대가 삐걱거리며 비명을 지른다.

나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전신에 알이 배어 움직일 때마다 근육이 절규를 토하고, 세상이 출렁이면서 나를 넘어뜨리려고 했다.

'특성 전환도 만능은 아니야.'

특성을 바꾸면 몸도 바뀐다는 것은 굉장한 장점.

문제는 후유증이 남는다는 사실.

단순히 근력이나 활기를 삭제할 때야 괜찮았지만, 돌연변이 삭제의 후폭풍이 뒤늦게 몰려오고 있었다.

'고레벨에서 돌연변이를 삭제하면 죽을지도 몰라.'

하긴 변이체에서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엄청나지.

앞으로도 어쩌면 한두 번은 내 목숨을 구해줄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슬며시 눈을 감았다.

늪에 잠기는 느낌이 엄습해 오고, 이내 칠흑 같은 어둠이 내게 손을 뻗었다.

"크으움······"

정말로 죽은 듯이 잤다.

괴로운 것은 그 와중에도 정신이 얕게 깨어 있었다는 점이다.

"X년이 X같X 구니X XX아 죽XX린다!"

"왜 XX테 난X야! 의사 XXX도 소개XX주X 해줄 X XX줬는X!"

"XX이 그래도!"

그래서인지 소음이 다 들렸다.

고시원의 일상.

누군가 싸우는 소리.

귀에 익은 목소리였지만 반쯤 잠든 내 정신은 누구 목소리인지 인지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려니 하고 끼무룩 멀어졌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할 뿐.

몇 시간이 더 지났을까?

섬뜩하고도 날카로운 비명이 칼날처럼 내 고막을 찢었다.

"아아아아악!"

강제로 고막을 열어젖히고 대뇌에 꽂히는, 그래서 선잠을 자는 중이든 숙면 중이든 일어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는 비명.

나는 퍼뜩 상체를 일으켰다.

새벽이었다.

창문 하나 없는 고시원 방. 머리맡에 놔둔 스마트폰이 오전 5시를 출력하고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새벽부터 왜 이래! 잠 좀 자자, 잠 좀!"

이상함을 느낀 이웃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고 한마디씩 했다.

하지만 곧 입을 다물게 된다.

"흐아아아아아······"

바람 새는 듯한, 절망과 공포로 버무려진 신음이 길고도 낮은 음색으로 울려 퍼진 탓이다.

단순한 비명도 신음도 아니다.

듣자마자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불길하고 섬뜩한, 뭔가 명백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게 하는 쇳소리.

나는 본능적으로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다들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어떤 아줌마는 부엌칼을 들고나오고, 어떤 아저씨는 야구 방망이를 가지고 나오기도 했다.

"어디야?"

"관리실! 관리실이었어!"

"관리실이라고?"

"뭐야, 아줌씨가 칼이라도 맞았나?"

관리실은 출입구 바로 옆에 있다.

드나드는 사람은 반드시 얼굴을 확인할 수밖에 없는 곳.

우리가 관리실 앞을 막아서기 무섭게,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풀린 눈.

게게이 흘리는 침.

반쯤 틀어져서 장착된 강철 턱.

얼기설기 심어놓은 톱니바퀴 이빨.

미친 과학자에게 생체 실험이라도 당한 듯한 몰골.

손에 든 칼, 피가 묻어 있다!

"제, 젠장."

"빌어먹을."

열린 문 사이로 주인 아줌마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피 웅덩이가 잔뜩 번져가는 중이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 출혈량은 이미 치명적이다. 신전의 사제가 와서 신성력을 쓰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지.

"흐흐흐!"

강철 턱, 이씨 아저씨가 푸들거리며 웃었다.

자기 손에 든 칼을 보더니 장난치듯 흔들었다.

"비, 삐껴! 따 삐껴!"

고시원 주민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 새끼 약 빨았네."

"술 안 처먹었을 때도 발광하던 인간이 약까지 빨았어?"

"비켜주자고. 우리가 경찰도 아니고 저거 잡아서 뭐하게?"

괜히 설치다 칼 맞으면 나만 손해지.

그런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나는 주먹을 살며시 쥔 채 강철 턱을 빤히 쳐다보았다.

'잡을까?'

잡을 수는 있다.

아무리 약을 빨고 칼을 들었어도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

내가 비록 1레벨은 못 됐다고 하지만 근력과 밝은 눈 특성을 이용, 가구 같은 걸 몇 개 던지고 돌진하면 못 잡을 것도 없다.

하지만 그래야 할 이유가 없지 않나.

나는 관리실 속 엎어진 아줌마를 한 번 힐끗 보았다.

자업자득.

월세 좀 연체했다고, 돈 좀 될 것 같다고 무면허 돌팔이한테 턱과 치아를 팔아넘기게 했으니 그 업보가 몰려온 것.

적당히 독촉이나 하고 법원에 강제 집행이나 신청하지 그랬어?

칼침 맞은 건 불쌍하지만 정말로 불쌍한 것은 강철 턱이다.

어쩌면 강철 턱이야말로 내 미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을 틀어서 길을 비켜주었다.

강철 턱이 지나갈 수 있게.

그런데 강철 턱의 행동은 내 예상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조용히 지나가는 대신 고함을 지르며 달려든 것이다.

"쭈꺼!"

이 새끼가?

거리는 고작 몇 미터.

아차 하면 덮쳐질 상황.

우연처럼, 먼지가 잔뜩 내려앉은 소화기가 내 눈에 들어왔다.

우지끈.

소화기는 벽 한쪽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우격다짐으로 잡아떼는 내 힘을 이겨내진 못했다.

부웅!

그대로 휘두른다.

소화기가 거칠게 강철 턱에 꽂혔다.

퍼억!

찰진 타격음.

왼쪽 관자놀이에 제대로 맞았다.

안 그래도 맛이 가 있던 두 눈이 스르륵 풀린다.

땡그랑!

칼이 떨어져 소리를 내고, 휘청이던 강철 턱이 무너져 내렸다.

단 일격.

그것으로 충분했다.

약에 취한 알콜 중독자를 처리하는 것쯤은.

"히야."

"허어, 대단하네."

"이씨도 젊었을 때는 한 가락 했다고 들었는데······"

"역시 전사 씨야! 이름값 하네!"

"주, 죽은 건 아니지?"

"안 죽었습니다."

경동맥에 손을 대보니 힘차게 뛰고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쫄렸다고.

아무리 나라도 사람을 때려죽이는 건 그렇잖아.

고슴도치 머리야 이미 괴물로 변했었으니 상관없지만, 강철 턱은 그게 아니니까.

"경찰 불러야 하는 거 아니에요?"

20대 초반 아가씨가 부들부들 떨면서 묻는다.

그러자 머리가 훤히 벗겨진 아저씨가 코웃음을 쳤다.

"경찰? 부르면 오기나 한대? 그치들은 신고해도 안 와! 저어기 근린공원 위로는 애초에 손 놨다고!"

"그, 그치만 사람이 죽었는데요."

"하루에 대한민국에서 죽어 나가는 인간이 몇인데? 신고하고 싶으면 해. 대신에 알지? 경찰들이 존나 귀찮게 한다는 거. 애꿎은 신고자가 가해자로 둔갑해서 빵 들어갈 때도 있어."

"설마요."

"진짜라니까? 내가 직접 본 거야. 짭새들이 얼마나 실적에 눈이 멀었는지 몰라? 그리고 신고해도 좋은데 좀 있다가 해."

"왜요?"

아저씨는 대답하는 대신 관리실 안으로 들어갔다.

축 뻗어버린 아줌마를 보곤 혀만 몇 번 찬 뒤 주머니에서 철사 한 가닥을 꺼냈다.

다른 아저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보쇼, 양씨. 사람이 죽었는데 그러고 싶소?"

"시발. 시체가 밥 먹여주나. 그럼 댁은 방에 들어가서 처자던가. 엔빵할 건데 받아가지 말고."

"아니. 안 받겠다는 건 아니고······"

대머리 아저씨가 구석에 놓인 금고에 철사를 가져갔다.

자물쇠에 철사를 넣고 솜씨 좋게 몇 번 돌리자 철컥, 쇳소리가 나면서 금고가 열린다.

꿀꺽.

누군가 군침을 삼켰다.

곧 금고문이 열리고 내부가 드러났다.

안쪽에 보이는 지폐 뭉치 몇 개.

금고를 딴 대머리 아저씨가 한쪽에 가래침을 뱉었다.

"에이, 퉤! 뭐여. 악착같이 돈 받아가더니 6백이 전부야?"

"6백? 6백이라고?"

"시벌. 그냥 내가 다 가질걸."

대머리 아저씨가 모인 사람들을 훑어본다.

워낙 시끄러운 탓에 고시원에 사는 사람은 다 모였다.

작은 고시원이지만 워낙 닭장처럼 벽을 친 탓에 적어도 20명 이상.

머릿수대로 나누면 인당 30도 안 돌아간다.

나는 먼저 손을 흔들었다.

"전 됐습니다."

"어허. 전사 씨가 가장 많이 받아가야지."

"그냥 월세 낸 셈 치겠습니다."

사람이 죽은 것만도 심장이 벌렁거릴 일이다.

그런데 시체 옆에서 태연하게 금고를 따고, 금고 안의 돈을 나누자고 모의하고 있다니.

더 무서운 것은 이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이 사람들의 사고방식이었다.

심지어 경찰에 신고해야 하지 않냐고 했던 아가씨도 기대감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방을 빼야겠어.'

아니, 이 동네를 아예 떠야겠다.

서울 중심가, 하다못해 중산층들 모여 사는 동네로 가면 낫지 않을까?

며칠 전 특성을 수집했던 근린공원 근처라도.

"전 가보겠습니다. 전 그냥 없었던 걸로 해주세요."

"흐, 그러지. 뒤처리는 확실하게 해주겠네. 우리도 철권파 무서운 건 똑같거든."

"철권파요?"

"어. 요즘 이 근방을 먹은 갱단 말이야. 거기 보스가 집요한 성격이라 괜히 얽히면 골치 아파지거든. 여기 아줌마도 거기다 상납하고 있었을 거야."

듣고 있던 아가씨가 걱정스럽다는 듯 묻는다.

"그럼 이거 나눠 가지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그게 무서우면 안 받으면 돼."

"그, 그건 아니고요."

"우린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아침에 깨보니까 죽어 있었다고 하면 돼. 나머지는 철권파에서 알아서 다 하겠지. 이 건물이 누구한테 갈지는 모르지만 철권파도 상납금만 따박따박 받으면 그만이거든. 그리고 이씨는······"

대머리 아저씨가 금고를 잠그고는 쓰러진 강철 턱을 내려다보았다.

근처의 주민들이 서로 은밀한 눈빛을 나눈다.

"우리가 적당히 알아서 처리하지."

"그, 그러세요."

아가씨는 겁먹은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자기 몫으로 배당된 신사임당 몇 장을 낚아채듯이 받아들고는 계단으로 뛰어간다.

대머리 아저씨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아침부터는 저 아가씨도 안 보이겠고만."

"어디 가서 말 옮기고 다니진 않겠지?"

"그럴 리가. 또 그래봤자 뭔 소용이야. 저 아가씨도 공범인데."

"하긴."

"전사 씨도 아침부터는 우리랑 모르는 사이인 겁니다. 아셨죠?"

"알겠습니다."

나도 방으로 돌아왔다.

짐은 없다. 있어 봐야 낡아빠진 옷 몇 벌에 자질구레한 것들이 전부.

대신 가방이 있었다.

현금 천이백만 원과 0레벨 마력핵 백여 개, 1레벨 마력핵 1개가 들어 있는.

묵직한 가방을 들자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어젠 진짜 무겁게 잤지.'

너무 피곤해서 되레 푹 자지 못했다.

정신이 반쯤 깨어 있었지만, 제대로 외부 상황을 인지할 수가 없었고.

만약 누군가 문을 따고 들어왔다면?

조용히 내 심장에다가 칼이라도 꽂았다면?

찍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새삼스레 방금 봤던 대머리 아저씨의 자물쇠 따는 장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마도 좀도둑 출신인 모양.

이 고시원에, 또 이 고시원 골목에 자물쇠 딸 줄 아는 게 대머리 아저씨뿐일 리가 없다.

그리고 이 인간들은 현금 천만 원쯤 먹을 수 있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고도 남을 작자들이다.

'위험해.'

단지 내 정신건강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빨리 여길 떠야 한다.

나는 가방을 들고는 빠르게 복도를 가로질렀다.

아직도 관리실과 관리실 바깥 복도에는 고시원 주민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끈으로 목을 졸라서······"

"그러지 말고 박 선생님한테 그냥······"

"의체는 시체보다는 살아 있는······"

"······아줌마 딸이······"

"······동생이······"

"······철권파 김철권······"

아무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 한 명은 있었다.

내 가방을 한 번 보고는 몸을 빼서 안쪽으로 걸어간다.

급히 챙기느라 남아 있을 짐을 가져가려는 모양.

이쯤 되면 헛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어휴."

특성을 수집했던 근린공원까지 내려와 벤치에 앉았다.

날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마귀할멈 손톱처럼 세상을 할퀴는 듯하다.

'움직여야지.'

넋 놓고 있어 봐야 죽도 밥도 안 된다.

다짐했잖아.

살아남겠다고.

그러려면 오늘 일은 대충 넘기고 내일을 향해 전진해야 한다.

돈도 있고 능력도 있다.

뭐가 힘들다고 죽상이야?

전세금 사기당하고 고시원 들어가던 때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카드빚은 좀 있지만 광질만 반복해도 금방 갚는다.

"가자."

고시원에서 탈출했으니 집부터, 방부터 구해야지.

미리 봐두었던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향해 돌격했다.

고시원 탈출 -2-

서울시 관악구.

한 공인중개사 사무소.

나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공인중개사와 마주 보고 있었다.

"보안이 가장 중요하시다고요."

"예. 좀 험한 일을 겪었더니 안전제일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고객님도 아시겠지만 보안 좋은 집은 그만큼 세가 셉니다. 매매로 들어가지는 않으실 거 아니에요?"

"그렇죠. 월세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흠, 흠, 월세. 월세라."

공인중개사가 스캔하듯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낡아빠진 옷. 마찬가지로 낡아빠진 가방.

그나마 불룩한 가방에 시선이 머무른 것도 잠깐.

공인중개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예산은 얼마나 됩니까? 제가 최대한 맞춰보지요."

"보증금 천에 월세 백까지는 가능합니다."

"천에 백, 천에 백이라······ 아휴, 이거 힘들겠는데요?"

"그, 그래요?"

천에 백이면 그래도 적당한 오피스텔 하나는 구할 수 있지 않아?

아무리 서울 집값이 미쳤어도 그렇지.

······아니, 아니다.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곤 눈살을 찌푸렸다.

이 세계의 부동산은 원래 세계와 비교하여 2배에서 3배 가까이 비싸다는 점.

오늘 짐 싸서 나온 1평짜리 고시원만 해도 보증금 50에 월세 40이었다.

말이 되냐?

내가 원래 세계에서 살던 2평짜리 고시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이게 다 인구 과밀 때문이다.

이 세상 대한민국 인구가 무려 1억을 넘어가니까.

아니나 다를까.

공인중개사가 폭탄 같은 말을 내뱉었다.

"천에 백이면 일단 오피스텔에는 못 들어가요."

"예? 방이 좀 작아도 괜찮습니다. 그냥 잠만 잘 수 있어도······"

"이 근처가 집값이 싼 건 아시죠? 그래도 마찬가지예요. 5평짜리 원룸형 오피스텔 들어가려고 하면 보증금 3천 넘게 주던가 월세 백오십 주는 게 기본이에요. 천에 백으로는 안 됩니다."

머리가 띵해졌다.

원래 세계에서 천에 백이면 1.5룸 오피스텔이나 좀 싸게 가면 투룸까지도 가능했는데?

첫날 느꼈던 문화 충격이 내 뒤통수를 마구잡이로 후려치는 느낌.

"그럼 어디가 가능합니까? 보안 좋은 곳으로요."

"크흠, 보안은 오피스텔이나 아파트가 좋은데······ 월세를 더 내실 수는 없는 겁니까?"

"그게······"

가능하긴 하다.

나한테는 현금 천이백이 있고, 아직 합성하지 않은 마력핵이 그득그득 남아 있으니까.

하지만 이건 내가 새롭게 얻을 특성을 위한 종잣돈이다.

여기서 집 구한다고 발목 잡혀서는 안 된다고!

내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공인중개사가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뭐······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관리형 원룸으로 들어가시죠."

원룸이면 원룸이지 관리형 원룸은 또 뭐야.

공인중개사가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이듯 말했다.

"관리형 원룸이 어떤 면에서는 오피스텔이나 아파트보다 낫습니다. 오피스텔이랑 아파트에는 무장 경비원이 있잖습니까? 그것 때문에 비싸고, 관리비도 많이 들지요."

"그야 그렇죠."

"관리형 원룸은 소유주가 아예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다 관리해줍니다. 무장 경비원도 당연히 있고, 혹시 범죄라도 일어나면 반드시 보복해주지요. 그래서 도둑이나 강도가 들어오질 못해요. 한 번 털면 손목이 잘릴 판인데 무서워서라도 못 오죠, 암."

듣고 있으니 뭐가 좀 이상하다?

보복을 해?

손목을 잘라?

덩달아 내 목소리도 낮아졌다.

"소유주가 누군데 그렇습니까?"

"여럿이 있는데······ 흠, 이 근처에서 찾아보자면 단검파나 철권파가 있겠지요. 싼 건 단검파고, 철권파는 더 비싼 대신 관리가 확실합니다. 둘이 경쟁 중인데 단검파가 조금씩 밀리고 있어서요."

단검파, 철권파!

뭐야. 갱단이 관리하는 원룸으로 들어가라는 말이었어?

내가 대놓고 한숨을 쉬자 공인중개사가 허겁지겁 말을 주워 삼켰다.

"고객님. 천에 백으로 보안 챙길 곳은 관리형 원룸밖에 없어요! 그냥 원룸? 고시원? 그런 데 살다가 밤에 칼침 맞기 십상입니다. 돈만 뺏기면 다행이게요? 관리형 원룸은 좀 으슥한 곳에 있는 거 말고는 단점이 없어요. 깨끗하지, 널찍하지, 안전하지. 조직원들한테만 잘 보이면 거리에서도 안전해진다니까요?"

"후우,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 예. 1년 365일 호텔에서 사실 거 아니면 관리형 원룸 들어가시는 게 낫습니다. 아니면 월세를 한 2백 정도로 올리시던가요."

인사하고 일어서서 밖으로 나왔다.

공인중개사가 철저히 자본주의적인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배웅해준다.

그걸 보니 저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원래 세계에서 내 전셋집 사기에 일조했던 그, 사람 좋아 보이던 공인중개사가 떠올라서.

'진짜 이놈이나 저놈이나.'

관리형 원룸?

거기가 그렇게 좋으면 너나 들어가서 살아라!

갱단이랑 얽히는 곳이 안전할 리가 없지.

갱단도 돈 벌어야 하니까 자기 고객한테는 각별히 대한다고?

헛소리. 차라리 노숙하고 말지, 갱단네 집에서는 하루도 잘 생각이 없다.

"어쩌지?"

다른 부동산을 가 봐?

길거리에 쭈그려 앉아 부동산 어플을 실행해 보았다.

아침에 검색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아는 시세보다 2배에서 3배 정도 비싼 매물들이 주르륵 나왔다.

무슨 놈의 집값이 이러냐.

이딴 세상에서 도대체 어떻게 사는 거야?

"집값은 비싸고 월급은 짜고······ 어휴."

이러니까 고시원으로, 다세대 주택으로, 원룸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것 같다.

그나마 생필품 물가가 싸고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 가격이 싸서 폭동이 안 일어나는 거겠지.

어쨌든 먹고 살 수는 있고 즐길 거리가 있으니까.

'호텔로 가자.'

장고 끝에 결론을 내렸다.

집을 구할 수 없다면 호텔이 가장 나은 방법.

호텔 아니냐, 호텔.

무장 경비원은 당연히 상주하고 특급호텔쯤 되면 초인을 고용하기도 한다.

'특급호텔은 좀 그렇지.'

이유, 비싸니까.

원래 세계의 특급호텔과는 비교가 안 된다. 호텔 예약 어플을 받아 살펴보니 1박에 무슨 수백만 원을 호가했다.

스위트룸도 아니고 일반 디럭스 룸이.

'비즈니스 호텔은······'

역시 원래 세계보다 비싸다.

호텔마다 차이가 있지만 30만 원에서 40만 원 사이.

그래도 이 정도면 사정거리 안이다.

광질만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하루에 수백씩 간단히 땡겨올 수 있으니.

마음을 정하고 가장 가까운 비즈니스 호텔로 향했다.

회전문으로 다가가자 덩치 큰 경비원 둘이 앞을 막아섰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블루스테이 호텔입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말투는 친절하고 입은 웃고 있다.

하지만 눈만큼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내가 메고 있는 큰 가방을 힐끔거리는 중이다.

둘 중 한 명은 아예 자기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상태.

수틀리면 총을 꺼내려는 눈치다.

"아, 숙박하려고요."

"혹시 예약하셨습니까?"

"아뇨. 예약은 안 했어요."

"평일이니 만실은 아닐 겁니다.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리셉션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호텔 안으로 들어가자 여기저기서 찌르는 듯한 시선이 느껴진다.

내가 그렇게 수상해 보여?

하긴, 다 낡은 옷에 가방은 터질 듯이 불러 있으면 누구라도 의심하겠지.

그래서 더 안심이 된다.

최소한 호텔 안에서 강도당할 일은 없을 테니까.

"디럭스룸 열 박이요."

"네, 결제하실 신용카드랑 신분 확인을 위해 신분증 부탁드리겠습니다."

"현금 결제도 되지요?"

"예, 고객님."

체크인은 금방 끝났다.

내가 가방을 열면서 현금다발이 살짝 노출되었지만, 그걸 본 경비원들은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살짝 미소 지으며 좋은 하루 되라며 물러났다.

내 사정을 대충은 간파한 모양.

체크인까지 마친 후, 호텔 직원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열쇠를 내밀었다.

"1909호입니다, 고객님. 편안한 투숙되시길 바랍니다."

"열쇠가 두 개네요?"

"예. 저희 블루스테이 호텔은 보안을 위해 두 종류의 잠금장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편히 드나들고 싶으시다면 디지털 카드키만, 확실한 보안을 원하신다면 아날로그 열쇠까지 사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게 맞지.

초인과 초능력, 온갖 범죄 조직이 판치는 세상이다.

카드키 따위 가볍게 딸 수 있는 능력자가 즐비하니 이 정도 보안은 필요했다.

더 강하게 하려면 마법 잠금에 생체 인증까지 들어가야 하지만 비즈니스 호텔에서 거기까지 바라기는 힘들다.

1박에 수백씩 하는 특급호텔이라면 모를까.

"고맙습니다. 수고하세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19층으로 직행한다.

도착 후, 현금 9백만 원을 우선 객실 내 금고에다 집어넣자 비로소 맥이 탁 풀린다.

"휴!"

이제 안전해졌다는 느낌이다.

긴장을 풀고 호텔 방을 살폈다.

원래 세계 호텔과 비교해서 특별히 다를 건 없다.

사실 호텔은 한 번도 못 가봤지만 인터넷으로 많이 봤다고.

파앙!

"캬!"

침대에 몸을 던지자 푹신한 감각이 양털 구름처럼 나를 반긴다.

이게 침대지! 이게 침대야!

원래 세계 고시원의 침대도, 이 막장 세계 고시원의 침대도 이 침대에 비교하면 건초더미에 불과하다.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한참 침대 위를 뒹굴다가 눈을 감았다.

'좀 쉬자.'

억지로 일어나 활동하긴 했으나 돌연변이의 후유증이 지금도 남아 있다.

눈을 감는 즉시 졸음이 쏟아졌다.

정말로 죽은 듯이 잠을 잤다.

무려 사흘 동안.

푹 잔 건 아니었다. 몸은 분명히 널브러져서 자고 있는데 정신은, 뇌는 반쯤 깨어 있어서 더 힘들었다.

거의 비몽사몽 간에, 고시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아닌 채로 시간을 보냈다.

"으그그극!"

그래서 사흘 뒤에 일어났을 때도 몸이 썩 좋질 않았다.

한참을 침대 위에 멍하니 누워 있다가 룸서비스를 뻑적지근하게 시켜서 먹은 다음에야 정신이 돌아왔다.

"진짜 힘드네."

역시 남용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정말로 위급할 때가 아니면 돌연변이 관련 특성은 꺼내지 않도록 하자.

"후!"

쫘아악!

내 뺨을 갈기며 정신을 차렸다.

"일해야지, 일."

방심하면 안 된다.

숙박비로 쓴 돈만 무려 300만 원이다.

그나마 장기 투숙이라고 30만 원을 할인해줘서 그렇지, 정가는 1박에 33만 원이라고 했다.

월세 2백 주고 오피스텔 잡을 걸 그랬을까?

하지만 입주하고 어쩌고 하면서 시간을 까먹느니 얼마 동안은 호텔 신세를 지는 것도 괜찮다.

'우선······'

나는 가방을 거꾸로 쥐고 침대 위에 탈탈 털었다.

마력핵들이 우스스 떨어진다.

대부분이 가치 없는 0레벨 마력핵.

일일이 숫자를 세어 보니 정확히 131개다.

"후읍."

가볍게 심호흡.

호흡 한 번으로 특성을 교체한다.

적당히 근력 특성을 빼고 합성 특성으로.

그러자 세상이 한 번 붉게 변했다가 마력핵 사이에 적색 선이 찌릿찌릿 그어졌다.

둘씩 잡아 찰흙 뭉치듯 마주쳤다.

타다다닥!

작은 전깃불이 튀면서 마력 파장이 번졌다.

몸에서 힘이 쏙 빠지고 심장에 어릿한 통증이 새겨진다.

아, 이거 마력을 쓰는구나.

'인내, 맷집, 상처 회복 삭제. 마력 흡수, 마력심, 심호흡 추가.'

즉석에서 특성 전환.

기존의 활기 특성까지 더해 마력이 급속도로 회복된다.

도심 지역이라 마력 농도가 낮지만 없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슈우우웅.

달궈진 마력광이 잦아들며 합성 결과가 나타났다.

새끼손가락 1마디 크기의 마력핵.

아직은 0레벨이다.

게임에서도 대성공이 떠야 한 번에 1레벨 마력핵이 됐으니 당연한 일.

한 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

마력핵은 많고 시간도 많다.

인내심을 가지고 마력 합성을 이어나갔다.

마력이 꽤 많이 소모됐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오히려 좋아.'

급격한 마력 소모는 필연적으로 어떤 특성 생성 조건이 된다.

역시나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나는 몸이 근질거리면서 마력이 차오르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마력 회복] 특성.

지금 상태에선 크게 필요 없는 오염 저항을 삭제하고 마력 회복을 장착했다.

더욱 빠르게 마력핵을 합성해 나간다.

0레벨과 0레벨끼리.

그렇게 얻은 1레벨과 1레벨끼리.

고슴도치 머리에게서 얻은 1레벨 마력핵도.

130개가 넘던 마력핵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후아!"

꼬박 하루가 걸렸다.

지금 내 손에 들린 마력핵 1개를 얻는 데까지.

새끼손가락 크기가 아니다.

거의 손가락 3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거기다 함유한 마나가 어찌나 농밀한지 가만히 들고만 있어도 무지갯빛 연한 마력광이 거품처럼 뿜어져 나온다.

"2레벨 마력핵······"

3레벨이 아닌 건 아쉽다.

초인도 3레벨부터 진짜 초인 대접을 받는 만큼 3레벨부터 마력핵의 가치도 팍 뛴다.

그래도 상관없지.

2레벨 마력핵만 되도 수백은 거뜬히 받거든.

쓰레기 취급받는 0레벨 마력핵 모아 모아서 수백이면 명백히 남는 장사다.

'이걸 팔아? 말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균적으로 10개에서 20개 정도 모아서 합성하면 상급 마력핵을 얻을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2레벨 마력핵 20개보단 3레벨 마력핵 1개가 몇 배는 비싸다.

그렇게 생각하면 존버가 답이지만 내 육감은 그게 아니라고 속삭였다.

'적당히 하자. 적당히.'

꼬리가 길면 밟힌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3레벨 마력핵을 판 뉴비가 0레벨 청소 업무만 줄창 하고 있다?

누구라도 그 뉴비가 합성 능력 소유자라는 사실을 눈치챌 것이다.

그 후에는 끌려가서 통조림 당하겠지.

감금당한 채 죽어라 마력핵만 합성하게 된다고.

적당히 2레벨에서 멈추자. 3레벨은 나중에 나 자신을 지킬 힘이 생기면 만들고.

"후후후."

그래도 기분 좋은 건 부정할 수가 없다.

실없이 한 번 웃고는 마력핵과 가방을 챙겨서 호텔을 나왔다.

마력핵도 처분하고 돈 번 김에 특식도 먹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어?"

우연처럼, 호텔 너머 골목에 서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6월 초.

흐리긴 하나 습기 때문에 묘하게 불쾌한 날씨.

그런데도 롱코트를 입고 옷깃을 세우고 있다.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 까만 마스크까지 차서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모자 밑 언뜻 드러난 눈매가 익숙한 것은 내 착각이었을까?

남자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묵묵히 몇 초 보고는 나한테는 관심이 없다는 듯 호텔 쪽으로 눈길을 옮긴다.

그 수상한 분위기에 호텔 경비원들도 다들 긴장한 모습이다.

"수고하십니다."

일부러 말을 걸자 경비원들이 고개를 숙인다.

"고객님도 조심하십시오.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설마 나는 아니겠지?

아무렴. 나 같은 피라미를 누가 신경이라도 쓴다고.

하지만······

나는 가방을 한 번 만져보고, 경비원들의 불룩한 바지 주머니를 한 번 보고는 마음을 굳혔다.

무기를 사야겠다고.

특히 총기류를.

고시원 탈출 -3-

크고 아름다운 무기까진 필요 없다.

대충 0레벨, 혹은 1레벨 정도까지 쓸 무기면 충분하다.

방어구도 챙기면 더 좋고.

'결국은 돈이네.'

뭘 하든 돈이 필요하다.

금고에 넣어둔 돈을 쓸 게 아니면 마력핵을 처분하기는 해야 한다.

마침 미리 봐둔 거래소 근처에 총포사가 있었다.

지도를 보며 걸어가니 눈에 익은 거리였다.

인력사무소가 있는 곳.

비슷한 업종이라 그럴까?

최선수 인력사무소 말고도 다른 인력사무소들이 빼곡하게 위치했다.

덩달아 거래소, 총포사, 마법 상점 등 여러 가게가 입점했다.

거래소는 그중에서도 오염체와 마물, 마수의 부산물을 거래하는 데 특화된 상점.

끼이익.

적당한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머리가 허옇게 센 아저씨가 친근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서 오세요! 찾으시는 것 있습니까?"

"아. 뭘 하나 팔려고 왔는데요."

"흠······"

판다, 그 한 마디에 주인의 눈빛이 살짝 바뀌었다.

다른 이들처럼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탐탁잖은 눈빛이 된 것.

"미리 말씀드리지만 0레벨 마력핵은 매입 안 합니다. 그거 사봤자 쓸 데가 없어서요. 차라리 오염체가 씹다 뱉은 구형 스마트폰이나 휴대용 배터리가 훨씬 낫습니다."

"그건 저도 압니다."

그래서 0레벨은 쓰레기 취급이고, 1레벨도 제대로 된 값은 못 받는다.

나는 중언부언 뭐라고 설명하는 대신 가방을 열었다.

옅은 무지갯빛 마력광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검은 비닐봉지로 꽁꽁 싸맸는데도 투과해버리는 빛.

"호오!"

상점 주인이 나직이 감탄을 토했다.

"이 정도면······ 설마 2레벨입니까?"

"예. 확인해 보시죠."

비닐봉지를 잡아 주인에게 건넸다.

주인이 조심스럽게 받은 다음, 라텍스 장갑을 끼고 비닐봉지를 파헤쳐 마력핵을 꺼낸다.

우우웅!

꺼내자마자 자기 존재감을 알리며 우짖는 마력핵.

주인의 눈동자가 핑글핑글 돌아갔다.

"허, 허허허. 정말로 2레벨 마력핵이네요. 잠깐만요, 마력 측정해 보겠습니다."

주인의 옆에 디지털 저울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위에 마력핵을 올리자 디지털 저울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빛과 공명하여 마력핵이 공중으로 살짝 떠오르고, 푸른 광선이 마력핵을 샅샅이 조사했다.

파팟! 파파팟!

마력핵이 강렬한 파장을 뿜어냈다.

파장에 반응하여 디지털 저울, 아니 마력 저울 옆의 온도계가 쭉쭉 치솟는다.

처음에는 흐리디흐린 파란색이더니 눈금 끝까지 두 번 주파한 후 짙은 파란색으로 변화했다.

마법 저울 액정에 2.07 Lv이라는 글자가 뜨는 것을 끝으로 모든 과정이 끝나고 마력핵이 저울 위에 내려앉았다.

주인이 마력핵을 챙겨 작은 유리 상자에 넣고는 한숨을 쉬었다.

"2.07 레벨. 훌륭하네요. 모자라지도 않고 과하지도 않은, 딱 이상적인 2레벨 마력핵입니다."

"그렇지요?"

"이걸 팔러 오신 겁니까?"

"예. 시세가 얼마나 됩니까?"

순간 주인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데굴데굴, 쥐새끼처럼.

나는 주인을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마력핵 시세 정도는 나도 안다. 아케인 서울에서 주구장창 팔아댔거든. 집값이나 보험료 이런 건 게임에 안 나와서 모르지만 마력핵이나 무기, 방어구 같은 거로 날 속이지는 못한다.

"음······"

내가 여간내기가 아니라고 느낀 걸까?

아니면 간을 보고 싶은 걸까?

주인이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이 마력핵 말입니다, 혹시 어떤 경로로 입수한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제가 합법적으로 장사하는 인간이라 장물은 접수하면 안 돼서 말이지요."

예상했던 질문 중 하나다.

미리 준비해온 대답을 던졌다.

"제 고용주께서 파시는 겁니다."

"고용주요?"

"예. 설마, 제가 직접 사냥했다고 생각하진 않으시겠죠?"

"그야 그렇지요. 2레벨 마력핵이니······ 다른 부산물을 가져오신 것 같지도 않고요."

"맞습니다."

"흠. 혹시 물건은 이게 다입니까? 더 많이 가져오시거나, 지속적으로 거래하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물건은 주기적으로 더 들어옵니다. 장담은 못 하지만 1주일에 한두 개는 가능하겠지요. 앞으로 더 늘거고요."

"오호······ 그렇습니까."

상점 주인이 비로소 작게 웃는다.

주기적으로 거래한다.

최소한 단발성 장물은 아니라는 소리니까.

2레벨 마력핵이라면 초인급 마수 사냥꾼에게 나왔을 확률이 높은데 굳이 여기까지 마력핵 1개만 팔겠다고 보낸 것은 이상하긴 하다.

하지만 세상만사 요지경이고 사람마다 저만의 사정이 있는 법.

여전히 수상쩍게 생각하면서도 그럭저럭 납득하는 눈치였다.

"마력핵 시세를 보여드리죠."

주인이 탁자 한쪽을 탁 건드렸다.

위이잉.

탁자 한쪽에서 투명 모니터가 분리되어 내 눈앞에 딱 멈추었다.

허공에 인터넷 브라우저를 띄운 듯한 장면.

[0레벨 마력핵 : 103원]

[1레벨 마력핵 : 155,339원]

[2레벨 마력핵 : 5,176,983원]

[3레벨 마력핵······]

1레벨 마력핵 하나면 시내버스 1대를 1년 정도 굴릴 수 있다.

2레벨 마력핵은 전차와 자주포에 적용되고, 가끔 프리미엄 슈퍼카에 쓰이기도 한다.

비행차에는 못 써도 지상에서는 충분하다고.

상점 주인이 숫자 키패드를 두드렸다.

"시세에 제 수수료 10%······ 아니, 8%만 받겠습니다. 92% 곱하면 476만 2천 8백 2십 4원입니다. 고객님 꽃길만 걸으시라고 477만원 드리지요."

"하하, 감사합니다."

"어떻게, 계좌이체로 드릴까요? 아니면 현금으로 드릴까요?"

주인이 다 안다는 눈을 하고 물어본다.

나도 장단을 맞춰주느라 자못 음흉하게 웃었다.

"현금이 좋지요."

"후후. 좋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주인이 뒷걸음질 쳐서 물러나더니 한쪽 벽을 쑥 잡아당겼다.

잠금장치가 해제되고 금고가 노출된다.

그 와중에도 시선은 나를 보고 있고, 금고 아래쪽 수납공간에서는 총 손잡이가 튀어나와 있었다.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질문을 던졌다.

"험한 일을 좀 겪으셨나 보죠?"

"이 근방은 그렇죠, 뭐. 그래도 신림동은 사정이 나은 편입니다. 금천구로 가면 아주 말도 못 해요. 거기 갱단놈들이 아예 손 놓고 마약만 줄창 팔고 있어서요."

금고가 열리고 자동으로 지폐를 새서 뱉어냈다.

오로지 세종대왕 님으로만.

주인이 자기 손으로 일일이 지폐를 샌 후, 백만 원씩 엮어 종이봉투에 넣어서 내게 주었다.

"확인해 보세요. 정확히 477만 원입니다."

"예. 좋은 거래였습니다."

"제게도 좋은 거래였습니다. 나중에 또 오시면 수수료를 더 깎아드리지요."

"하하. 알겠습니다.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다음으로 총포사에 직행.

아침부터 날이 흐리더니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를 맞아가며 총포사에 들어가자 뻐끔뻐끔 담배를 태우던 덩치 큰 중년 여자가 나를 보고 눈을 끔뻑였다.

"못 보던 얼굴인데."

"왜요? 처음 오면 총 못 삽니까?"

"철권파 놈이 아닌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철권파? 아, 전 그쪽이랑은 관계없습니다."

"흐흐. 소개받아서 온 건 아닌가 봐?"

"예. 그냥 찾아왔습니다."

"흐, 알고 보니 선량한 시민 분이셨고만? 한 번 쭉 들러봐. 없는 물건도 웃돈만 얹어주면 뭐든 구해줄 수 있으니까 말해보고."

여자가 내 얼굴에다가 담배 연기를 훅- 내뿜었다.

아니, 이 여자가?

화를 내려다 말고 얼굴을 굳혔다.

연기를 흡입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혀끝이 아려왔기 때문이다.

이거, 마약이다!

그것도 흡입 한 번으로 훅 갈 수도 있는 강한 마약!

여자가 날 보더니 씨익 웃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합법적인 물건 찾을 거면 굳이 나한테 살 필요도 없어. 저 앞에 형제 총포사만 가도 돼. 그게 아니면 나한테 사고. 좀 쎈 것도 취급하니까."

나는 말 없이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벽면마다 총, 검, 쇠뇌, 방탄복, 위장복, 삼단봉, 전기 충격기, 스프레이 등 다양한 물건이 걸려 있었다.

아케인 서울의 대한민국은 총기 허용 국가.

단, 한계가 있었다.

일반인은 권총이나 단발성 산탄총, 공기총만 소유할 수 있다.

그나마 자유롭게 들고 다닐 수는 없고, 외부에 노출되지 않게 가방이나 상자에 넣어 다녀야 한다.

따라서 이 총포사의 벽에 걸린 제품도 권총이 대부분이었다.

"소총은 없습니까?"

"당연히 있지!"

여자가 자기 뒤쪽 벽을 건드렸다.

벽이 통째로 회전하며 새로운 총들이 나타났다.

원래 세계의 M16, K2, AK37, G36, P90과 비슷한 여러 소총.

여자가 자랑스럽게 소총들을 쓰다듬었다.

"총의 제왕은 역시 소총이지. 이거 하나면 2레벨 초인도 거뜬히 저세상에 보내거든."

"3레벨은요?"

"3레벨? 3레벨은 진짜 초인이잖아. 3레벨 초인이랑은 싸울 생각도 하지 마. 혹시 싸우게 되면 무릎 꿇고 비는 게 생존확률이 높으니까. 아니면······"

여자가 씩 웃고는 바닥 한 군데를 탁 쳤다.

그러자 바닥에 숨겨져 있던 수납함이 치솟고, 저절로 열리면서 내용물을 노출시킨다.

수류탄, 섬광탄, 최루탄, 봉인탄.

그 개수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이 정도면 아주 전쟁도 할 수 있겠어.

"이거 몇 개 들고 가야지. 방심하고 있을 때 봉인탄 파바박! 섬광탄 파바박! 수류탄 파바박! 해버리면 제까짓 게 뭐 어쩌겠어? 나도 초인 몇 놈을 이걸로 잡은 적이 있다고."

"초인씩이나 됐으면서 수류탄에 잡힌다고요?"

"심리전이지, 심리전. 인생은 게임이 아니거든. 초인이건 뭐건 대가리에 총알 한 방이면 이거야, 이거."

여자가 자기 엄지로 목을 연신 그었다.

그 표정이 뉴비 만나 신난 고인물 같아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문제는 내게 있었다.

나는 벽면의 자동소총과 수납함의 수류탄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저걸 내가 제대로 쓸 수가 있을까?'

나도 군대 정도는 갔다 왔다.

대한민국 육군 병장 출신이라는 말씀.

하지만 자대 있을 때 사격을 썩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냥 남들 하는 정도 했지.

김전사라고 다를 것은 없다. 김전사는 엄연히 전사 계열 초인이고, 사격 종류 특성은 4대 초인 계열 중 강화병 계열에 속한다.

투자하는 건 좋은데 장기적으로는 손해라는 뜻.

"어휴."

짧게 한숨을 쉬자 여자가 눈썹을 삐죽 들어 올렸다.

"왜, 돈이 없어? 그럼 기관단총도 괜찮아. 코트 안에 숨기고 다니다가 위험할 때 쏴 갈기기 좋거든."

여자가 권한 것은 원래 세계의 우지를 똑 닮은 기관단총.

잠깐 마음이 쏠렸으나 머리를 흔들었다.

실전성이 없잖아.

저런 작은 기관단총은 코앞에서 기습할 때나 좋지 총격전을 벌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 어쩌자고?"

투덜거리는 여자를 앞에 두고 차분히 생각했다.

과연 내게 필요한 물건이 뭐냐?

다른 것보다 대인용 장비가 필요하다.

마물보다, 오염체보다 사람이 백배 천배는 무서운 세상이니까.

"저걸로 주세요."

"으응? 이거?"

"예. 그게 가장 마음에 드네요."

"잘 생각했어! 한국 사람은 신토불이지! 국산이 최고라니까? 러시아제, 미제, 독일제 다 필요 없어! 탁월한 선택이야!"

여자의 입이 함지박처럼 벌어진다.

내가 고른 것은 원래 세계의 K2를 꼭 닮은 소총.

다른 총은 쏴보지도 못했으니 이게 가장 낫겠지.

"얼마죠?"

"국산이라 싸! 삼백만 줘."

"예? 삼백이요?"

무슨 소총 하나에 삼백이나 해?

여자가 코웃음을 친다.

"싫으면 적당히 산탄총이나 공기총 사 가. 그건 싸. 백만 원이면 된다구. 권총은 오십만 원이면 되고."

"그렇게 차이가 나나요?"

"위험수당이야, 위험수당. 무슨 말인지 알지? 꼬우면 초인증 들고 오던가. 초인한테 파는 건 합법이거든."

불법이라 더 비싸다는 소리다.

그래도 사람 상대로는 소총만 한 게 없지.

몇 번 망설이다가 눈물을 머금고 시퍼런 지폐 뭉치를 건넸다.

여자가 지폐에 입을 쪽 맞추고는 금고에 던져 넣는다.

"총알은 필요 없어?"

"하아, 서비스 안 됩니까?"

"장난하는 거지?"

"하아아."

정말로 탈탈 털렸다.

마력핵 팔아 번 477만 원을 몽땅 날렸다고.

그야 총알만 산 게 아니라 섬광탄도 두 개 사고, 합법인 권총 한 자루에 탄창 여럿, 방탄복과 초대형 삼단봉까지 샀으니까.

총포상 여자가 싱글벙글 웃었다.

"어디 사냥이라도 가?"

"비슷합니다."

"흐흐흐. 고마워. 개털 손님인 줄 알았는데 알짜 손님이었네. 이건 서비스. 싸구려긴 한데 그 가방보다는 나을 거야."

여자가 길쭉한 골프백을 서비스라며 건넸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들고 다니던 가방에는 소총이 안 들어갔다. 더구나 골프백 안쪽에 개별 공간이 더 있어서, 열자마자 소총이 보이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겠다.

"흐흐, 또 와."

여자가 살가운 태도로 날 배웅해주었다.

호주머니를 완벽히 털려서일까?

휘청, 다리가 꼬인다.

어느새 땅거미가 내리는 중.

붉은 노을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잘한 거겠지?'

대충 권총 한 자루, 방검복 한 벌 사고 퉁칠 걸 그랬나?

사실 총격전을 할 일이 얼마나 있겠어.

아무리 총기 허가 국가라고 해도 칼침이나 놓지, 누가 총부터 들겠냐고.

그런 생각을 하며 걸어갈 때였다.

"안녕하세요?"

누군가 내 앞을 막아섰다.

한 명이 아니었다.

최소한 네 명.

하나같이 두꺼운 코트에, 오토바이 헬멧을 눌러쓴 차림새.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단 한 명, 가장 앞에 서 있는 사람만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다리가 괴상하게 휘어있지 않은가.

사람이 아니라 어떤 초식동물의 다리.

어제 하루 종일 봤던 그 다리.

또, 아케인 서울 게임에서도 심심찮게 봤던 그 다리.

"······노루?"

흐흣.

노루가 대답 없이 작게 웃더니 오른손을 코트 안쪽으로 슬그머니 집어넣었다.

순간, 내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총격전 -1-

총격전

뭐지?

알 수 없다.

어쩌면 내가 과민반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평범하게 명함이나 초대장 같은 걸 주는 것일 수도 있잖아.

하지만 최근에 겪은 일이, 이 이상한 세계에 떨어지고 경험한 모든 일이 내게 경고음을 발하고 있었다.

"이익!"

몸을 돌린다.

이를 악물고 땅을 박찬다.

오른손에 든 골프백이 거추장스러웠지만 힘껏 끌어안고 달린다.

이 골프백이야말로 내 목숨줄이니까.

"어어?"

"튀, 튄다!"

"잡아!"

"새꺄! 거기 서!"

모두 익숙한 목소리다.

여기에 하나 더.

탕!

총소리가 울리고 귀에 시큰한 느낌이 번졌다.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롱코트에 손을 집어넣기에 혹시 했는데 진짜였다.

총이다, 총!

"멈춰!"

"안 서면 죽여 버린다!"

저 새끼들이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내가 정화비를 모두 독식한 것도 아니고, 내 덕에 쉽게 수백씩 벌어갔잖아.

변이체를 처치해서 목숨도 구해줬고.

답은 하나.

나는 인력사무소를 나오면서 봤던 그들을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개 같은 놈들."

욕심 때문이겠지.

내가 번 돈을 차지하려는 거든, 아니면 다른 것에 욕심이 생겼든 간에.

'어? 설마?'

내가 합성 특성을 가진 걸 눈치챘나?

설마.

그것까진 모르겠지.

여태 제대로 노출한 적도 없단 말이야.

안타깝지만 오래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내가 달리는 방향에서도 롱코트 남자 여럿이 불쑥 나타난 것.

"손들어!"

"안 멈추면 쏜다!"

악어 대가리처럼 치켜드는 오른손.

저마다 낡은 권총 한 자루를 쥐고 있었다.

어느덧 어둠이 내린 가운데, 불안하게 껌뻑이는 가로등 빛에 권총 총구가 반질거린다.

사금파리 같은 예리한 빛.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땅바닥을 굴렀다.

탕탕!

거의 동시에 발사되는 권총.

화염이 어둠을 찢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맞았다!

총에, 권총에!

총격 사실을 자각하기 무섭게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비틀거리다가 쓰러지자, 남자들이 왁 하고 함성을 터뜨렸다.

"푸하하!"

"김씨! 맞추면 어떻게 해?"

"아, 실수야, 실수."

"저 새끼 죽으면 김씨도 죽을 줄 알아!"

"실수라니까!"

가슴을 한 번 만져본다.

"으윽!"

손이 살짝 닿자 못 견디게 아팠다.

망치로 강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 통증.

하지만 어디 구멍이 나지는 않은 모양이다.

최소한 출혈은 없고, 영화에서 몇 번 본 것처럼 쌕쌕 이상한 숨소리도 나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과거의 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잘했어.'

방탄복을 사길 잘했다.

만약 방탄복을 사지 않고, 샀어도 손에 들고 나왔으면 이 자리에서 끝장났을 것이다.

"으윽, 으으윽."

나는 몸을 웅크리고 눈물 콧물을 짜냈다.

한편으로는 눈을 가자미처럼 떠서 주변 지형을 살핀다.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

눈에 익었다.

최선수 인력사무소 근처이면서 내가 살던 고시원으로 향하는 길이다.

탁! 탁탁!

아까 전부터 창문이 모조리 닫히고 있다.

남의 일에 엮이고 싶지 않은 모양.

누가 경찰에 신고라도 해줄 법하지만 이곳은 순찰 범위 바깥.

무법지대이며, 갱단의 영역 안.

남자들이 다가오고 있다.

노루가, 또 나와 함께 일했던 아저씨들이 슬금슬금 걸어온다.

"나,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아파죽겠다는 듯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호소한다.

방심한 걸까?

남자들이 권총을 슬며시 내린다.

얼굴마다 비웃음이, 탐욕이, 비뚤어진 우월감이 새겨져 있었다.

"흐흐흐. 우린 이제 팔자 폈다."

"그냥 변이체 돼서 죽었으면 이런 꼴은 안 당하지."

"저 새끼가 병신이라 그래. 나 같으면 그 자리에서 목격자 다 죽여버렸다."

"우리만 노난 거지."

거기까지 듣고 나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아차렸다.

돌연변이 특성.

여기 있는 아저씨들이야 멀리 도망가서 날 제대로 못 봤지만 노루 하나만큼은 확실히 목격했다.

내가 변이체가 되어 고슴도치 머리를 쓰러뜨리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광경을.

변이체가 인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은 이 세계의 상식.

아마 어디 마법사에게 나를 실험체로 팔아넘기려는 모양.

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개 같네. 은혜를 원수로 갚아?'

욕을 하면서도 필사의 연기를 펼친다.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고 끄응 끙 신음을 흘린다.

일부러 혀를 깨물어서 입 밖으로 피를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운이 좋았다.

남자들은 완전히 내 연기에 속아 넘어갔다.

희희낙락 다가와 날 잡으려 할 때, 포위망이 헐거워지면서 사람 하나 충분히 지나갈 정도로 구멍이 났다.

"으아아!"

바로 몸을 일으켰다.

기회는 오직 한 번뿐!

이번 기회를 놓치면 실험체 엔딩이다.

도망쳐야 한다고!

전력을 다해 몸을 던졌다.

민첩 종류 특성은 없지만 근력을 쥐어짜고 조금 모인 마력도 몽땅 들이부었다.

쾅!

격한 소리와 함께 깨진 보도블록이 들썩였다.

내 몸이 포탄처럼 앞을 향해 쏘아진다.

"어어?"

갑작스러운 사태에 남자들이 놀라고, 그중 하나를 잡아다 뒤로 힘껏 던졌다.

"으아악!"

"뭐야!"

"컥!"

남자들이 스트라이크 터진 볼링핀처럼 나뒹군다.

노루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저 새끼 잡아!"

"시발!"

"그냥 죽여버려!"

"안 돼! 죽이면 끝이야!"

"시발, 그럼 다리를 아작 내 버려!"

그나마 약간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골프백을 껴안고 달리고 또 달린다.

마력을 아낌없이 쓴 탓에 거리를 벌리는 데 성공했다.

이대로 도망치면 남자들을 따돌리는 것도 가능하겠지. 내게는 마력이 있고 마력을 회복할 특성도 몇 개나 있으니까.

'그건 정답이 아니야.'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 가운데서도 내 머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골목에 주차된 자동차의 유리창을 통해 마주친 눈이 싸늘하고도 날카롭기만 하다.

'끝을 봐야 해.'

도망치면 일이 끝나나?

천만에!

절대로 그렇지 않다. 노루와 저 패거리는 반드시 나를 쫓을 것이다. 어떻게든 나를 납치하려고 하고, 그게 안 되면 죽여버리려고 할 것이다.

납치 시도가 실패한 이상 나는, 나라는 초인은 노루 패거리의 가장 큰 위협이 될 테니.

'끝을 봐야 해.'

다시금 다짐해 본다.

그러자 입 안쪽이 놀랍도록 꺼끌꺼끌해졌다.

모래를 한 줌 삼키기라도 한 듯이.

끝을 본다······

즉, 죽인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살면서 주먹다짐, 멱살잡이는 몇 번 해봤지만 작정하고 사람을 패거나 상처를 입힌 적은 없다.

하물며 살인?

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덜렁거리는 골프백이 나를 자꾸 때린다.

골프백 속 자동소총이 나를 마구 후려갈기고 있었다.

방법이 없다.

이 엿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나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단지 실력과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부터.

어느새 내가 살던 고시원이 가까워졌다.

고시원 건물과 건물 사이, 좁다란 골목 안으로 들어간다.

철벅!

물웅덩이를 밟았는지 물소리가 났다.

솨아아아.

보슬보슬 내리던 비가 어느샌가 짙어져 세상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코끝으로 파고드는 썩은 내를 무시하며 골목길로 파고든다.

뒤에서 왁자하게 소리가 들렸다.

"저기! 저 안으로 들어갔어!"

"잡아!"

"조심해! 놈은 초인이야! 급소를 노려!"

"뭐 보이면 그냥 쏴갈겨!"

"개새끼! 죽여 버린다!"

십몇 분 쫓아왔다고 바짝 약이 오른 모양.

나는 숨을 가다듬으며 골프백을 열었다.

지이익.

경쾌한 지퍼 소리.

무기를 꺼낸다.

초대형 삼단봉, 권총, 섬광탄, 마지막으로 소총까지.

떨리는 손으로 소총 권총에 탄창을 결합한 다음, 나머지 물건은 적당히 주머니와 허리춤에 쑤셔 넣었다.

골프백을 한쪽에다 던져둔 뒤 커다란 제설함 뒤에 숨었다.

귀를 연다.

소리에 모든 신경을 집중한다.

앞만 보다가는 뒤쪽으로 돌아오는 놈한테 잡힐 수가 있었다.

아무리 방탄복을 입었어도 뒤에서 총질 당하면 끝장.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거칠게 박동한다.

얼마나 크게 뛰는지 귀가 다 멀 지경이다.

머리에 피가 쏠려 뇌가 뜨겁고 또 뜨거웠다.

세상이 하얗게 변하는 것만 같다.

그렇게 긴장감 속에 다리를 부들거릴 무렵, 드디어 기다리던 소리가 들렸다.

철벅!

물웅덩이 밟는 소리.

지금이다.

번개처럼 몸을 일으킨다.

숙련된 자세로 서서 쏴 자세를 취한다.

내가 숨을 아주 짧게 들이마신 뒤 호흡을 정지하는 것과 동시에 남자들이 나를 발견했다.

"어?"

"저, 저기!"

"쏴!"

이미 늦었다.

타타타타탕!

귀에 익은 그 총소리.

조정간을 연발에 놓고 쏴 갈긴다.

둔중한 충격이 어깨에 전해지지만 총구는 흔들리지 않는다.

육군 병장 출신, 자세는 충분히 숙련되어 있고 근력 특성의 보조를 받는 육체는 중기관총 반동을 잡고도 남을 수준이다.

총알이 비처럼 쏟아졌다.

건물 외벽과 도보 블록이 깨지며 돌가루가 빗물처럼 튀고, 서 있던 남자들이 몸을 꺾으며 춤을 추었다.

생각보다 피가 많이 튀지는 않는다.

곳곳에서 치솟은 물보라가 시야를 가리고, 깨진 돌가루가 날려 세상이 뿌예질 뿐.

"으아아!"

"커허억!"

"끄윽!"

멍하니 있을 수는 없다.

남자들은 비명을 지르고 신음을 토하면서도 손을 허우적거렸다.

손마다 권총이 들려 있다.

탁!

몸을 날린다.

상반신은 살짝 숙이고, 소총은 껴안듯이 대각선으로 들고, 무릎도 굽힌 채 우측을 향해 튀어나간다.

찹찹, 물 튀는 소리에 이어 탕탕, 총소리가 고막을 꿰뚫었다.

빗나간 총알이 제설함을 두들겼다.

남자들도 필사적이었다.

사냥꾼에서 사냥감으로 전락해 버린 그들.

아프다고 쓰러져 있다간 반드시 사냥당하고 말 테니까.

"흐읍."

고시원 건물 외벽에 몸을 붙인 후 참았던 숨을 들이쉰다.

그러나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는 않는다.

주머니에 대충 쑤셔 박았던 섬광탄 하나를 꺼낸 다음 안전핀을 제거했다.

딸깍.

섬광탄 투척!

남자들이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다.

오른쪽이 건물 외벽으로 막혀 있어 왼손으로 굴리듯이 던졌는데, 몇 년 만에 해보는 것인데도 제대로 된 동작이 나왔다.

데구르르.

쩌어엉!

기묘한 소음과 함께 빛이 터진다.

눈이 타들어 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광량.

그나마 나는 눈을 감고, 양손으로 귀를 막은 상태였으나 남자들은 무방비 상태에서 섬광탄을 얻어맞았다.

당연히 비명이 터진다.

"끄아악!"

"내 눈! 내 눈!"

"사람 살려!"

비명을 들은 순간 움직인다.

아니, 섬광탄이 터졌음을 인지하자마자 몸을 날리고 있었다.

조종간을 3점사에 둔다.

철컥 쇳소리와 함께 탄창을 교체한다.

땅!

빈 탄창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뒷골목 모퉁이를 돌아가 총을 겨눈다.

"으아아! 으어어어!"

"살려줘! 내가 잘못했어!"

"노루, 노루가 다 시켰어! 노루가 시켰다고!"

남자들이 본능적으로 울부짖는다.

눈물 콧물을 쏙 빼는, 어디 한 군데 피를 흘리며 더러운 바닥을 나뒹구는 추한 몰골들.

잠깐 손이 떨렸다.

바닥에 엎어져 있던 고시원 주인 아줌마가 생각난다.

고시원 주민들에게 결박당하던 강철 턱이 떠오른다.

변이되어 비참하게 죽은 고슴도치 머리도 뇌리를 스친다.

그래서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살고 싶으면 죽여야 한다!

이 한 번 꽉 깨물고, 소총을 받친 왼손에 힘을 한 번 준 다음 당겼다.

방아쇠를.

단숨에!

타타탕!

첫 번째 3점사.

가장 가까이 있던 아저씨의 몸이 팽그르르 돌아간다.

팔이 젖혀지고 살짝 가려져 있던 손이 노출되었다.

최후까지 쥐고 있던 권총이 빗물 사이로 털썩 떨어졌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 파르라니 떨리는 긴장감, 빗물 젖은 몸으로 느끼는 불쾌함, 원초적인 폭력에서 오는 가학심이 잔뜩 버무려져서 내 정신을 날아가게 만든다.

타타탕!

총을 쏜다.

타타탕!

또 총을 쏜다.

타타탕!

귀신 들린 듯이, 혹은 뭔가에 홀린 듯이 총을 쏘고 또 쏜다.

저 세계의 대한민국에서 평생 구축했던 도덕 관념이나 상식 따위 다 지워버렸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다.

다른 누군가가 나를 조종해서 남자들을 죽이는 느낌.

"허억, 허억."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호흡도 견착도 파지도 다 어긋난 채 탄창을 비우는 나.

철컥! 철컥!

총알이 다했는지 쇳소리만 연거푸 난다.

살아있는 사람은 없다.

모두 축축하니 빗물 고인 콘크리트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채 핏물을 퍼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진 않았다.

나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숫자가 안 맞는다.

내가 그 사실을 깨닫고 빠르게 주위를 돌아보던 순간.

등 뒤에서 울분에 찬 고함이 터졌다.

"야 이 개새끼야아!"

몸을 돌렸지만 늦었다.

커다란 물체가 나를 향해 벼락치듯 날아온다.

엉겁결에 소총을 들어서 막았다.

빠각!

어처구니없게도 소총 중간이 똑 부러졌다.

"커헉!"

내 몸이 가랑잎처럼 붕 나가떨어진다.

트럭에라도 치인 듯한 충격.

바닥을 몇 번이나 구른 다음에야 겨우 멈춰서 앞을 볼 수 있었다.

"개새끼, 개새끼, 개새끼······"

음침한 뒷골목.

제멋대로 쌓인 쓰레기 더미 위.

깜빡이는 가로등.

쏟아지는 비를 배경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서 있었다.

이상하게 꺾인 다리.

껑충하니 큰 키에 비정상적으로 가느다란 몸.

얼굴 윤곽을 따라 덥수룩하게 난 털과 수염.

머리에 살짝 솟은, 그래서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뿔이 두 개.

노루였다.

"젠장."

어제 보았던 그 노루가 아니다.

조금 전 내 앞을 가로막았던 그 노루도 아니다.

완전히 각성한.

그리하여 1레벨이 된 초인 노루.

놈이 격노해서는 내 앞에 장승처럼 서 있었다.

총격전 -2-

"죽여버린다!"

노루가 포효한다.

빠직.

얼마나 손에 힘을 줬는지 쥐고 있던 권총이 뭉개져 버릴 지경.

상관없다.

노루는, 완전히 각성하여 1레벨로 거듭난 초인은 자동소총을 든 소총수만큼 위협적이었으니까.

"으윽."

부러진 소총은 놔두고 허리춤에 꽂아둔 삼단봉을 꺼낸다.

권총은 의미가 없다.

급소를 단번에 맞추면 모르겠으나 노루가 가만히 맞아줄 리가 없으니까.

촤자작!

삼단봉을 휘두르자 저절로 펼쳐진다.

길이 150센티미터에 두께도 야구방망이와 비슷한 초대형 삼단봉.

노루가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죽인다······"

으르렁대는 울음이 한 마리 짐승 같았다.

"죽여버릴 거라고!"

탓!

노루가 몸을 날린다.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물보라가 치솟는 것과 동시에 빗물이 폭발하듯이 사방으로 번지고, 노루의 신형이 확대되면서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흐읍!"

이를 악물고 삼단봉을 휘두른다.

특성은 [근력][활기][맷집][마력 회복][마력심][밝은 눈].

꽈앙!

삼단봉과 발끝이 마주친다.

굉음이 터졌다.

대포에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어마어마한 충격이 나를 후려쳤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이를 악물며 겨우 눈을 부릅떴을 때, 나는 또다시 허공을 날고 있었다.

"끅!"

물이 흥건한 골목길 위에 거의 몇 미터나 미끄러졌다.

팔이 덜덜 떨린다.

시야가 흐릿했다. 여기에 빗물이 자꾸 눈을 가렸다. 연속으로 깜빡인 다음에야 세상이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나 가만히 엎어져 있을 수는 없었다.

탓!

땅을 박차는 소리가 엄습해 온 까닭이다.

"이이익!"

삼단봉을 껴안은 채 바닥을 뒹굴었다.

내가 조금 전만 해도 엎어져 있던 곳.

거길 압도적인 폭격이 후려갈겼다.

콰악!

관리를 못 받아 부실하기 그지없는, 그래서 금이 쫙쫙 가 있던 보도블록이 단번에 깨져나갔다.

"흐으윽!"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키자 땅을 내리찍은 노루가 고개를 돌린다.

나를 향해서.

두 눈 가득 노여움과 증오가 올올이 불타고 있었다.

가슴이 탁 막힌다.

억울함과 분노가 내 가슴을 치고 올라온다.

아니, 어디서 피해자 코스프레야?

너희가 먼저 시작했잖아!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아주 그 자체.

"죽여버릴 거야!"

노루가 자세를 잡는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노루를 주시했다.

'돌연변이를 쓸까?'

너무 위험하다.

육체에 가해지는 부담을 말하는 게 아니다.

당장 죽을 판에 후유증 따위를 고민할 필요가 없지 않나.

문제는 여기가 아무리 공권력 바깥 영역이라도 서울 한복판이라는 점.

철권파라고 했지.

이 근처를 주름잡는 갱단이 있다.

총질 정도야 상납금 조금 내고 끝낼 수 있지만 변이체가 나타나면 그게 안 된다.

바로 갱단들이 달려 나오겠지.

자기 구역에서 변이체가 출몰했다는 것은 그만큼 큰 문제니까.

"쳇."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괜찮다. 방법은 있다.

각성하면 된다.

여기 이 자리에서 온전히 마력을 쌓고 마력 회로를 각인하여 1레벨 초인으로 거듭나면 된다.

"크아아아!"

노루가 괴성을 지른다.

완전히 끝장을 보겠다는 듯이 몸을 던진다.

파아앙!

물보라가 튀었다.

보도블록이 박살나며 돌가루가 흩날린다.

세상을 다 품을 듯이 뿌려진 물과 먼지 세례.

노루가 안 보인다.

잠깐 사이 내 시야를 벗어난 것.

"흥."

하지만 내 두뇌까지 속일 수는 없다.

R급 초인 노루의 시작 특성은 두 가지.

[입체 기동]과 [발길질]

이런 뒷골목에서 노루의 특성을 생각하면 어떻게 움직이고 있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후으으읍."

힘을 집중한다.

심장에서 찰랑이는 마력을 몽땅 양손에 눌러담는다.

그리고 삼단봉을 힘껏 휘두른다.

위를 향해서.

머리 위쪽으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꽈아앙!

천둥소리가 났다.

노루의 발끝이 내 삼단봉에 막혀 있었다.

"끄윽!"

팔이 망가질 것 같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삼단봉이 낚싯대처럼 거칠게 휘어져 있었다.

그나마 부러지지 않은 것이 다행.

삼단봉은 어떻게든 견뎌냈고, 나 또한 어떻게든 견뎌냈다.

노루가 내 삼단봉을 밟고 몸을 띄우더니 바로 뒤에 있던 건물 외벽을 걷어찬다.

화려하게 몸을 돌리는 노루.

그 주변 물방울이 조각나는 장면이 슬로우모션처럼 내 망막에 박혔다.

"아, 진짜!"

공중 연속 공격이다!

눈을 크게 뜨고 노루를 살핀다.

콰직!

어디를 어떻게 건드린 것인지 전기가 나가고 일대 정전이 찾아왔다.

사방이 어둠에 잠기고 빗물에 가려 앞을 제대로 보기도 힘든 골목길.

몸을 뒤집은 노루가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빠악!

삼단봉으로 공격을 쳐낸다.

노루는 삼단봉의 탄력까지 이용해 다시 뒤로 날아갔다. 그리고 벽을 차고, 다시 맞은편의 벽을 차고 내 뒤쪽으로 쇄도했다.

어떻게든 몸을 돌려 공격을 막아냈다.

그때마다 삼단봉이 부러질 듯 휘어지고 내 몸에 충격이 누적되었지만 괜찮다.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

"이 새끼가!"

노루의 눈에 조바심이 깃들었다.

분노와 증오 대신 계산적 보신주의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렇잖은가.

애초에 노루와 죽은 아저씨들 사이 유대감이 크지도 않았다.

결국은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한 법.

거기에 내가 변이체 고슴도치 머리를 처리하던 과정을, 노루는 똑똑히 목격했었다.

순간의 흥분이 식으면 머리를 굴리게 되기 마련.

그러면 안 된다.

여기서 끝을 봐야 한다.

나는 조금 전부터 손바닥에 감도는 열기를 확인한 후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왜, 겁먹었냐?"

"개소리!"

"너 같은 건 이걸로 충분해."

삼단봉을 왼손으로 움켜쥔 채 오른손을 내린다.

불룩한 호주머니.

거기 들어 있는 권총을 향해서.

노루가 눈을 크게 뜬다.

사실 권총은 노루에게 별 위협이 안 된다.

내가 무슨 훈련 받은 특수요원도 아니고, 눈에 잘 보이지도 않게 움직이는 노루를 권총 가지고 어떻게 맞추겠어.

하지만 노루도 그걸 알까?

이제 막 초인이 된 노루가 자신의 능력에 대해 제대로 알고, 뭐가 위협적이고 위협적이지 않은지 알고 있을까?

지금 당장은 초인보다는 평범한 사람의 생각에 가깝겠지.

역시나 노루는, 자기 능력을 제대로 살려 입체 기동하는 대신 정면으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이익!"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

눈을 깜빡였을 때는 이미 내 앞에 와 있다.

저릿한 열기가, 맹렬한 바람이, 빗물 머금은 폭풍이 나를 덮친다.

지금부터 움직여도 늦다!

꽈악.

아무래도 좋은 일.

나 또한 진작에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권총을 향해 페이크를 넣었던 오른손도 삼단봉 손잡이를 움켜쥐어서는 힘껏 휘둘렀으니까!

화아악.

손이 불타는 듯하다.

이미 내 특성은 전환되었다.

[근력][활기][맷집]

[마력심][마력 회복].

이 다섯 항목까지는 똑같다. 다만 [밝은 눈] 대신 새롭게 얻은 특성을 넣는다.

[강타]

힘껏 힘껏 노루의 공격을 받아치며 얻은 특성.

공용 특성이 아니다.

처음으로 얻은 계열 특성이다.

비록 전사 계열 특성 중 가장 기본적이고 위력도 3티어에 지나지 않는, 기초 중의 기초 특성이지만 엄연히 공격 특성.

마력이 폭발한다.

삼단봉이 순간적으로 퍼렇게 물든다.

여기에 근력이 뒷받침되고, 전사 계열 특성인 탓에 활기와 맷집 보너스가 적용된다.

노루의 얼굴에 당혹감이 새겨지는 것과 동시에, 삼단봉과 발끝이 제대로 격돌했다.

꽈르릉!

섬광과 함께 폭음이 그어졌다.

충격파가 터지며 우릴 향해 그어지던 빗물마저 사방으로 날려보낸다.

"아악!"

짧은 비명.

내가 낸 소리가 아니었다.

거기서 확신했다.

역시 노루는 자기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발길질] 특성을 제대로 발휘했다면 강타 한 번 맞았다고 소리를 지르진 않을 테니까.

"끄으윽!"

아직 멀었다.

마력 소모로 허해진 가슴을 무시하고, 근육통을 호소하는 전신을 이끌고 한 발짝 크게 내딛는다.

아니, 두 발짝 세 발짝, 더 나아가 전력으로 질주한다.

철벅 철벅 물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널브러진 노루가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다.

"으아아!"

허우적거리며 도망치는 노루.

오른쪽 발목이 볼품없이 꺾여 있었다.

조금 전 강타를 얻어맞고 부러졌나 보다.

쌔액! 쌔애액!

삼단봉을 휘둘렀다.

마력이 모자라 강타를 쓰지는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위협적이었다. 노루는 겁에 질린 얼굴로 겨우겨우 공격을 피했다.

그래서 고마웠다.

속으로 차분히 숫자를 세어본다.

'내리치기 한 번.'

휘이익!

삼단봉이 허공을 갈랐다.

'올려치기 한 번.'

쌔애액!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는 삼단봉을, 노루가 공포에 물든 눈으로 쳐다보았다.

'옆으로 휘두르기 한 번.'

슈웅!

이번에는 크게 빗나갔다.

노루가 몸을 굴려 멀찍이 도망쳤다.

얼굴에 결연한 빛이 감돈다.

도망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이를 악물고 부러진 다리 대신 왼쪽 다리에 체중을 싣는다.

'마지막.'

피할 수 없다.

막을 수도 없다.

특성 획득까지 최후의 동작 하나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이번이 승부수.

눈이 마주친다.

빗금 내리긋는 빗물 사이로 두 눈동자가 형형하게 불타오른다.

노루도, 나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함성을 터뜨렸다.

"으아아아!"

서로를 향해 달려든다.

노루가 통증도 무시하고 부러진 발을 기병창처럼 내밀고, 나 또한 팔을 쭉 뻗었다.

'찌르기 한 번.'

꽝!

터지는 폭음.

소리만이 아니라 뼈와 강철이 부서진다.

맞닿은 삼단봉을 통해 뼈가 부서지고 으깨지는 느낌이 생생히 전달되었다.

여태 버텨준 삼단봉이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연결 부위가 가장 먼저 으스러지면서 삼단봉 전체가 수십 조각이 나 흩어졌다.

내 팔 역시 그러했다.

충격을 고스란히 받은 오른팔이 똑 부러지면서 날카로운 고통이 대뇌에 쑤셔박혔다.

"으아악!"

"끄윽!"

숨이 넘어가는 비명, 신음.

나는 눈을 부릅뜨고 노루를 주시했다.

노루 역시 눈물을 흘리면서도 나를 마주 본다.

아프다고 울며 신음할 시간이 없었다.

여기서 주저앉는 자는 죽는다.

처참하게 살해당한다!

날카로운 직감이, 위기감이 나도 노루도 질끈 입술을 깨물며 일어나게 만들었다.

확실히 나는 운이 좋았다.

또한 사기적인 능력의 보유자였다.

조금 전 찌르기 후, 마지막 동작을 완결한 직후 선명하게 어떤 감각을 느꼈으니까.

팔 근육에 올올이 새겨지는 열기.

마치 근섬유 하나하나를 떼어다가 거기 마법 회로를 새기는 듯한 이 선명한 고양감.

발동시킨다.

[맷집]을 제물로 바치고 빈자리에 새롭게 얻은 특성을 투여한다.

[연격]

이게 다가 아니다.

있는 마력 없는 마력을 모조리 끌어올린다.

마력심 특성이 과부화되며 삐걱거리듯 심장이 아파 오고 가슴이 죄어오지만 무시한다.

모든 여력을, 힘을 이번 공격에 쏟아붓는다.

여기서 끝장을 볼 거니까!

[강타]

두 공격 특성의 조합.

팔이, 주먹이 불타는 것 같다.

뻑적지근하게 마력이 흘러들면서 근육과 뼈를 자극한다.

특히 부러진 오른팔을 칼로 저미는 듯해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느낌이다.

그러나 무시한다.

모든 것을 감내하고서, 품어내고서 팔을 뻗는다.

강타와 함께 쏟아지는 연격!

소나기 같은 연속 공격이, 주먹질이, 쇠도 콘크리트도 부러뜨릴 기세를 품고서 펼쳐졌다.

"커헉!"

노루는 확실히 늦었다.

첫 공격을 턱에 얻어맞은 순간 이미 나자빠져서 피거품을 빼물었다.

퍽퍽! 퍼퍼퍼퍽!

마구 두들긴다.

얼굴을, 가슴을, 배를, 오직 치명적인 부위만.

노루는 금세 만신창이가 되었다.

얼굴은 다 뭉개졌고 가슴은 움푹 함몰되었다. 입에서는 피거품을 연신 흘리고 두 눈은 초점을 잃은 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까뒤집었다.

"헉, 허억, 헉, 헉."

나라고 정상은 아니다.

오른팔이 부러진 것을 넘어 아예 고장이 난 것 같다. 주먹도 안 쥐어지고 팔꿈치 관절과 손목 관절이 기괴하게 꺾여 있었다.

여기에 축축하니 젖어 천근만근 무거운 몸뚱어리까지.

그 모든 괴로움을 참으며 노루 앞에 섰다.

노루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주먹을 메다꽂는 대신 그나마 온전한 왼손으로 권총을 들었다.

철컥.

총알 장전되는 소리.

노루가 정신을 차린다.

자기 이마에 겨눠진 권총을 보더니 눈동자가 몇 배로 커졌다.

"사, 살려······"

굳이 듣지 않았다.

탕!

단발의 총성이 꽂혔다.

퍽, 고개를 떨어뜨리는 노루.

늘어지는 그림자를 뒤로 하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솨아아아.

비가 미친 듯이 내리고 있었다.

얼마나 쏟아지는지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몸이 불덩이처럼 뜨겁다.

잊고 있던 고통이 개미 떼처럼 나를 물어뜯는다.

이 와중에 찰랑찰랑 차오르는 마력.

선명하게 느껴진다.

내 몸에 새로운 기관이 탄생하는 게.

심장에서 혈관을 따라 질주하고, 또 척수에서 신경계를 따라 주행하면서.

거미줄 형태로 각인된 마력 회로.

치이익, 치익.

마력과 빗물이 반응한다.

빗물이 증발하여 수증기로 변한다.

희뿌연 수증기가 내 주위에 포개진다.

앙다문 조개껍데기 내려앉듯이.

들끓는 열기.

용처럼 맴도는 수증기 구름 안에서.

나는 그렇게 초인이 되었다.

1레벨 초인 -1-

1레벨 초인

1레벨!

별 것 아니라면 별 것 아니다.

성인 남성이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자동소총으로 무장하면 그게 바로 1레벨이니까.

그렇다고 아예 의미가 없진 않았다.

이 세상에서 초인이란 곧 신분이다.

초인 인증서만 들고 가도 은행에서 저리에 대출을 해주며, 무장 용병 대신 초인과 계약하려는 업체는 쌔고 쌨다.

"흐으."

나는 아픈 가운데서도 흐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많은 것을 잃었지만 많은 것을 얻었다.

차분히 부상도 치료하고 얻은 것을 확인하려 할 때였다.

찰박, 찰박.

물웅덩이 밟는 소리가 들리고 한 무리의 남자들이 나타났다.

하나같이 몸에 딱 붙는 검은 양복을 입고, 한 덩치 하는 남자들.

우산 따위 들지 않고 비를 온몸으로 맞고 있다.

얼굴에는 선글라스를 썼다.

나 조폭이요, 하고 소리치는 듯한 차림새.

선두에 선 남자가 나를 보며 히죽 웃었다.

"거, 화려하게 저지르셨습니다?"

나는 묵묵히 남자를 쳐다보았다.

깍두기 같은 얼굴, 올백으로 빗어넘긴 머리칼, 만두귀.

무엇보다도 오른쪽 아래팔이 의수였다.

강철 의수.

왼쪽과 비교하여 확연히 두툼하고 강해 보이는.

누군지 안다.

김철권.

김 시리즈 중 하나이자 아케인 서울 튜토리얼에서 두 번째로 합류하게 되는 강화병 계열 초인.

왼쪽 허리춤에는 우지를 닮은 기관단총이 보란 듯이 걸려 있었다.

강화병 계열 초인의 특징이다.

노루는 자기 실력을 갈고닦기도 전에 내게 당했지만, 정상적이었다면 입체 기동과 함께 총을 난사하고, 허점을 발견했을 때만 발길질을 날리는 것이 일반적인 노루의 전술이었다.

"그냥 죽어줄 수는 없어서요."

"흐흠, 그렇습니까?"

여기가 철권파 구역이라더니, 총격전 신고를 받고 나왔나 보다.

김철권의 눈이 가늘어진다.

중요한 결단을 내릴 때 보여주던 표정.

여기서 철권파와 부딪칠 수는 없다.

모두 총을 가지고 있을 거고, 지금 내 무장으로 이기기란 불가능에 가까우니.

그래서 조금 허세를 부리기로 했다.

특성을 교체한다.

강타와 연격을 빼고 다른 특성을 집어넣었다.

[근력][인내][활기]

[마력심][마력 회복][상처 회복].

이 상태에서 왼손으로 오른쪽 팔뚝을 잡는다.

부러지다 못해 으깨져서 괴상하게 꺾여 있는 팔뚝.

"후우."

먼저 심호흡 한 번.

다음 순간, 이를 악물고 팔을 확 뺐다가 살짝 틀었다.

으아아아아아!

눈앞에 불똥이 튀고 세상이 새하얗게 변했다.

비명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근력 보정인지 인내와 활기 보정인지 몰라도 팔꿈치가 제대로 이어진 것이다.

"헙!"

"으흡!"

"어후, 시발."

내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지기만 했으나 지켜보던 철권파는 그게 아니었다.

오줌이라도 마려운 듯 엉거주춤 사타구니를 오므리고, 반사적으로 자기 팔에 손을 가져간다.

김철권 역시 비슷했다.

한쪽 눈썹을 치켜들며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린 것.

여기서 멈출 수는 없지.

팔꿈치에 이어 손목 관절도 제대로 맞춘다.

그러자 오른팔 전체에서 시원한 느낌이 들면서 뻐근한 아픔이 올라왔다.

[재생] 특성 획득.

근력 특성을 지우고 재생 특성을 장착했다.

상처 회복 특성과 함께 운영하면, 며칠 내로 부상을 모두 치료할 수 있겠지.

"허허허, 저도 한 깡 합니다만 그쪽 분도 한 깡 하십니다그려.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름을 묻는다······

당장 이 자리에서 어쩌지는 않을 속셈이다.

"김전사라고 합니다."

"음? 이름이 김전사시라고요?"

"예. 조사하시면 아실 겁니다."

"하하, 신기하네요. 하긴 김마법 씨도 있고 김사제 씨도 있는데 김전사 씨가 없겠습니까."

김마법과 김사제.

김철권이 그 둘과 인연이 있었나?

"그건 그렇고······"

김철권이 주위를 한 번 둘러본다.

비가 자욱하게 내리는 뒷골목.

그 안에 널브러진 시체 한 구, 두 구, 세 구······ 일곱 구.

특히 나와 김철권 사이에 쓰러진 노루의 시체는 지극히 처참하다.

몸은 괴상하게 변형되었고 얼굴은 완전히 망가졌으니까.

톡, 톡, 톡.

김철권이 시체를 몇 번 건드리더니 새하얗게 미소를 지었다.

"김전사 씨. 저한테 빚진 겁니다."

썩 달갑지 않은 말이다.

언젠가 한 번은 내가 김철권에게 힘을 빌려주어야 한다는 뜻이니까.

어쩔 수 없다.

상황이 그렇고, 이 난장판을 나 혼자서는 어떻게 처리할 수가 없지 않겠나.

'완전히 나쁜 일만은 아니야.'

나도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내게 필요한 수많은 특성.

그중에는 도시의 어둠에서만 획득할 수 있는 것도 많다.

김철권은 대놓고 쳐들어오면 쳐들어오지 음흉하게 배신하는 인간은 아니니 선을 대놓는 것도 좋겠지.

"좋습니다. 기억해두지요. 제 힘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연락 주세요.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요?"

"예. 불법인 건 상관없는데 제 양심에 거슬리는 짓은 못합니다."

"하하하."

김철권이 소리 내어 웃는다.

그러더니 뻔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알겠습니다. 김전사 씨가 싫다는 일은 저도 권하지 않겠습니다."

"그러시다면야."

눈으로 살짝 인사를 보낸다.

김철권도 고개를 까딱여 답례했다.

그렇게 헤어지고, 내 물건만 챙긴 후 골목을 벗어났다.

쏴아아아!

비가 더 많이 온다.

거의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리붓는 폭우.

빗물이 핏물을 씻어줘 기꺼우면서도 찝찝한 느낌이 같이 들었다.

"후우."

낯익은 근린공원을 지나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여기서부터는 경찰이 순찰하는 영역이다.

노루 패거리가 다짜고짜 총질을 한 걸 보면 별로 의미는 없는 것 같지만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한참을 더 걸어서 호텔에 도착했다.

경비원들이 날 보더니 깜짝 놀라서는 뛰어온다.

"고객님! 괜찮으십니까?"

"아니,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밖에 계셨습니까?"

"일이 길어져서요."

"이러지 말고 얼른 들어가시죠."

경비원들이 검은 우산을 씌워준다.

원래 서비스가 이렇게 좋나? 특급 호텔도 아닌데?

의아하게 생각하던 중, 호텔 정문 유리에 비친 날 보고 답을 찾았다.

여전히 마력이 들끓는 몸.

덕택에 빗물이 내 몸을 적시는 대로 증발하는 중이다.

자연히 희뿌연 수증기가 자욱이 일어났다.

수분 증발은 초인의 명백한 증거.

이것만으로는 몇 레벨인지 알 수 없으나 1레벨 초인이라 해도 평범한 사람과는 격이 다르다.

현대판 신분제라고 해야 할까?

조금은 쓰게 웃으면서, 경비원이 잡아준 문을 통과하여 호텔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로비에 서 있던 직원과 리셉션에 있던 직원이 더욱 친절해진 것은, 마냥 착각만은 아니지 싶다.

나는 경비원들에게 감사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고객님. 편안한 투숙 되십시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객실에 들어간 직후,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다.

비로소 긴장이 풀리며 억눌렀던 피로와 고통이 해일처럼 범람하기 시작했다.

"으으으, 진짜."

온몸이 아주 펄펄 끓는다.

체온을 재면 40도가 가뿐히 넘을 것이다.

여기에 부러지고 으깨진 오른팔이 심각하게 아팠다.

재생과 상처 회복으로 치료 중이긴 하지만 뼈가 몇 조각이 났다고.

그게 급속도로 회복되면 과연 어떤 느낌일 것 같아?

"젠장! 젠장!"

불사 같은 상위 특성이 있으면 아무렇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불사 특성을 얻는 방법은 어렵고도 힘들기 그지없다.

지금은 재생과 상처 회복으로 때워야 하는 신세.

부들부들 떨면서 침대를 향해 기어갔다.

거기까지였다.

한계에 달한 내 의식이 똑 끊겼고, 눈을 떴을 때는 비가 그치고 해가 떠서 환한 햇빛이 내 눈을 파고들고 있었다.

"벌써 아침이야?"

나는 엎어져 있다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윽!"

습관적으로 오른팔을 썼다가 신음을 삼켜야 했다.

그래도 어젯밤보다는 견딜 만하다.

열도 내렸는지 정신이 맑았다.

나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시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살았다······"

정말이지 어제는 죽는 줄 알았다.

잠깐이라도 삐끗했으면 죽는 건 노루가 아니라 내가 됐겠지.

대신 얻은 게 많았다.

강타와 연격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정신없이 총격전을 치르고, 도망가는 중에도 나는 분명히 어떤 감각을 느꼈었다.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권총을 꺼낸다.

오른손을 쓸 수 없으니 왼손으로 대충 책상 어귀를 조준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어도 별 변화가 없어서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느낌이 왔었는데······"

설마 소총만 적용되나?

슬슬 권총을 집어넣으려고 할 무렵.

가늘게 떨리던 권총이 안정되면서 시야가 확대되고, 가늠자가 커져서는 시야를 꽉 채웠다.

내가 조준한 책상 어귀가 화악 다가오는 것은 덤.

[사격] 특성이다!

사격 계통 중 상위 특성은 강화병 계열 특성으로 분류되지만, 기초 특성은 어느 계열 초인이든 가질 수 있었다.

수는 얼마 안 되지만 전사 계열 특성도 몇 존재하고.

효율적이지 않으니까 대개는 획득 조건이 맞아도 그냥 넘어갔지만 내게는 상관없는 이야기.

필요할 때만 특성 전환하면 되니까.

"또······"

달린다.

작은 방 안에서 전력 질주하며 끝에서 끝을 왕복한다.

그러면서 [질주] 특성을 떠올리자 몸이 가벼워지면서 한껏 빨라졌다.

'투척은?'

베개를 던져 보았다.

위로 힘껏, 아래로 잠수함 투구하듯이 한 번, 정면으로도 던져 보고.

아쉽게도 투척 특성은 생성되지 않았다.

섬광탄 투척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

다른 특성들도 실험해 보았지만 마찬가지.

어제 일로 내가 얻은 특성은 [강타][연격][재생][사격][질주] 이렇게 다섯 가지인 셈이다.

"아니지."

갑자기 든 기억.

노루 패거리에게 도망치던 중, 나는 방탄복에 총알을 맞고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척 연기했었다.

이건 내가 알기로 분명 어떤 특성의 획득 조건이다.

[죽은 척]

나는 거울을 앞에 두고 그대로 자빠졌다.

얼굴에서 핏기가 빠르게 빠져나간다.

입술은 퍼렇게 질리고, 심장까지 느리게 뛰게 된다.

'좋은데?'

게임에서도 괜찮은 특성이었다.

공용 특성 주제에 오염체나 변이체는 반드시 속이고, 콜로세움에서도 잠깐 대상 고정에서 벗어나는 데 유용하게 쓰였지.

여섯 개밖에 안 되는 특성 칸을 여기 쓰기 아까워서 많이 쓰진 않았지만.

한 번 싸우고 특성 여섯 개 획득.

여기에 각성 완료까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장비다.

나는 골프백을 뒤져 안에 있던 무기를 모조리 꺼냈다.

둘로 쪼개진 소총 한 자루.

삼단봉 조각.

권총과 섬광탄 하나씩.

그 외 탄창들.

방탄복은 여전히 입고 있었다. 아직은 쓸 만하고,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항상 입고 다닐 생각이다.

"하루짜리였네."

소총과 삼단봉이 그렇다.

가서 환불해달라고 해?

하지만 무기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상대가 안 좋았던 거지.

1레벨 초인이 전력으로 날린 발차기를 막아줄 정도면 소총도 삼단봉도 자기 역할을 다한 거다.

특히 삼단봉이 대박이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그렇게 많이 견뎌주리라곤 생각도 못 했지.

"총포상에 들르긴 해야겠다."

다만 그 전에 처리할 일이 있다.

이번 사태에서 느꼈지만 합법적으로 구할 수 있는 권총과 단발 산탄총으로는 날 지키기엔 역부족이다.

소총이, 기관총과 저격총이, 수류탄이 필요하다.

이걸 불법으로 구하려면 너무 비싸지.

합법으로 구할 방법, 정확히 말하면 총기 허가증이 절실했다.

나는 골프백은 놔두고 권총 한 자루와 탄창 하나만 챙겼다.

밖에서 안 보이도록 호주머니에 깊숙이 찔러넣고서, 적당히 돈을 들고 호텔을 나섰다.

택시를 잡아타고 간 곳은 송파구 신천동.

초인탑이 있는 곳이었다.

1레벨 초인 -2-

석촌 호수.

원래 세계에서는 롯데월드와 롯데월드타워가 있었지.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초인탑을 올려다보았다.

세 쌍둥이 탑.

초인 협회, 초인 인증소, 초인 연합, 서부군 연락소, 신화 그룹 지점, 태양 마탑 사무실, 옛 아버지 교단 성소 같은 초인 관련 시설이 총집합한 곳.

탑 하나하나가 원래 세계의 롯데월드타워보다 크다.

주변 마천루들 역시 그렇다.

대충 봐도 20개가 넘는 마천루가 서울시 송파구의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고 있었다.

도로도 널찍하다. 무려 왕복 40차로. 깨진 보도블록 하나 없고 도로에도 구멍 하나 패이지 않았으며, 잘 정돈된 가로수들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노루 패거리와 싸웠던 뒷골목과는 차원이 다른 풍경.

쌔액! 쌔애액!

하늘을 날아 초인탑으로 바로 진입하는 비행차들을 지켜보다가, 나도 발걸음을 옮겨 초인탑으로 향했다.

한 덩치 하는 경비원이 눈에 낀 선글라스를 조작한다.

그러더니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비켜섰다.

"초인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예비 초인님."

"감사합니다."

마력 감지 선글라스.

눈에 한 번 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광활한 공간이 나타난다.

신기하게도 기둥 하나 없이 펼쳐진 축구장 크기는 될 공간.

체육관 같은 구조도 아니고 수백 미터 마천루의 1층이 이런 광장이라니,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아."

한 가지 특이한 점이라면 마력이었다.

곳곳에 마력이 회로처럼, 혹은 입체 마법진처럼 배치되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이 세상의 건물은 철근 콘크리트가 아니라 마력이 무게를 지탱하는 모양.

신기한 눈으로 둘러보며 걷자 모델처럼 늘씬한 직원이 다가왔다.

어쩐지 낯익은 얼굴인데······

"안녕하십니까?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초인 인증 받으러 오셨습니까?"

"예. 어디로 가면 될까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초인 인증은 처음이실까요?"

"처음입니다."

"조금 험하게 수련하셨나 봐요."

직원도 얄쌍한 안경을 끼고 있었다.

저 안경에도 마력 감지 마법이 걸린 것 같다.

내게 마력은 감지되는데 신원 조회가 안 되니 자꾸 다가오는 거겠지.

그건 그렇고 수련이라?

저 말을 하는 걸 보면 내 계열까지 읽혔을 가능성이 높다.

강화병 계열이나 마법사 계열, 사제 계열이라면 다른 식으로 말했겠지.

중심에 도착했다.

직경 10미터가 넘는 청록색 원형 바닥.

그 위에 커다란 입체 마법진이 제멋대로 부유하고 있었다.

끝도 보이지 않는 천장에선 맑고 투명한 빛이 은하수처럼 떨어지는 중이다.

거기 시선을 주자, 직원이 정중히 팔을 들어 가리켰다.

"마력 회로 측정 장치입니다. 저기 안에 들어가시면 컴퓨터가 마력 회로 레벨과 중첩도를 종합적으로 측정해서 알려줍니다."

"그게 정확한가요?"

"9레벨 대마법사이신 멀린 경께서 직접 설계하신 마법진입니다. 틀릴 리가 없죠."

어, 그래.

멀린. 마법계의 천마.

그 사람이 만들었으면 할 말이 없지.

저벅저벅.

측정 장치를 향해 걸어간다.

드넓은 1층을 오가던 사람들이 잠깐 움직이는 것을 멈추고 내 쪽을 쳐다보았다.

"초인 인증하나?"

"오랜만에 보네."

"저기 좀 봐! 마력치는 1.0을 훨씬 넘는데 등록이 안 돼 있어!"

"오,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예비 초인이었어?"

"우리 용병단에 자리 비었는데 영입할까?"

"겨우 1레벨짜리를? 막 인증받고 초인뽕 취한 애송이보단 특수부대 출신 군인이 훨씬 낫지. 진짜는 3레벨부터라고."

호기심과 기대에 찬 눈빛이, 혹은 무시하고 괄시하는 시선이 범벅이 되어 내게 꽂혔다.

막 측정 장치에, 빛의 기둥에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웅! 우우웅!

탑 전체가 진동하고 천장에서 빛이 떨어졌다.

비 내리듯이, 수직의 선을 수도 없이 그리며, 마치 레이저 폭격이라도 가하는 듯한 광경.

형형색색의 광선이 그리는 빛의 세례.

내가 눈만 끔뻑거릴 때 뒤에 서 있던 직원이 놀라 소리쳤다.

"성녀님께서 오셨어요!"

성녀?

그게 누구지?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반드시 있을 법한 별명이지만, 아케인 서울의 사제 계열 SSR 캐릭터 중에는 성녀가 없었으니까.

기이잉.

내 의문을 무시하고 천장이 열렸다.

전부는 아니지만 벽면 일부가, 도개교처럼 쩍 내려가서는 하늘을 노출시킨다.

청량하게 쏟아지는 파란빛 사이 한 비행선이 떠 있었다.

비행선?

아니다. 저건 비공선이라고 해야 옳겠다. 날개도 풍선도 없이 바다에나 떠다닐법한 배에 마도과학 엔진과 부유 마법진을 단, 사치와 자기과시의 총체.

고오오오.

비공선은 척 보기에도 강대한 마력을 휘감고 있었다.

마력이 전혀 없는 일반인조차 느낄 정도.

은은한 바람이 유선형 몸체를 회오리치듯 쓰다듬으며 돌고, 금속 표면에선 파란 별빛이 타닥타닥 불꽃을 피운다.

비공선은 그대로 탑에 진입하여 천천히 하강했다.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1층 광장에 광풍이 몰아치고, 마력에 빛이 산란되면서 파랑 빨강 초록 빛무리가 나팔꽃처럼 피어났다.

"탑에 비공선을 타고 들어와도 되는 겁니까?"

반쯤 기가 질려 묻자 정신 팔고 있던 직원이 겨우 대답했다.

"그럼요! 성녀님이시잖아요!"

"성녀님이요?"

"네! 성녀님!"

누구더라?

분명히 그런 별명이 있긴 했는데.

얼핏 기억이 날락 말락 했다.

나는 눈살을 살짝 찌푸린 채 비공선을 올려다보았다.

구우우웅.

1층 광장 바로 위에 정지하는 비공선.

함수가 상어 머리 꺾이듯 위로 열린다.

착, 착, 착.

접혀 있던 바닥이 펼쳐지며 거대한 경사로가 만들어진다.

비행선과 1층 광장을 잇는 경사로.

전체가 까맣다. 그냥 검은색이 아니라 심연 너머 무저갱 아래, 모든 빛을 흡수하는 듯한 꺼먼색이다.

그 흑색 경사로에는 음험한 황금색으로 신성 문자를 새겨놓았다.

라틴어와 갑골 문자를 적당히 섞어놓은 듯한 신성 문자.

그걸 보니 슬슬 감이 온다.

'어, 이거?'

막 무의식 깊은 곳에서 기억 한 움큼을 꺼내려는 찰나.

철컥.

쇳소리가 들렸다.

철컥, 철컥, 철컥.

그것도 연속으로.

자연스럽게 내 눈동자가 확장된다.

들은 적이 있다.

이 효과음.

정확히 말하면 발소리라고 해야 할까?

'정말로?'

보스 몬스터가 이 자리에는 왜 나타난 거야!

내가 속으로 비명을 삼킬 무렵, 그녀가 열린 입구를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가 자지러지듯 소리를 질렀다.

"성녀님!"

강렬한 마력광 아래 호리호리한 그림자가 서 있다.

통짜 묵색 흉갑.

두툼한 강철 치마.

등에 짊어진 거대 전투 망치.

오른팔에 장착한 초대구경 산탄총.

얼굴을 덮은 적색 반투명 고글.

머리를 장식한 흑금관.

성녀가 쇳소리를 내며 경사로를 따라 내려온다.

그 뒤를 따라 흑금 갑옷을 입은 성기사들이 총과 망치를 흔들며 시위하듯 행진했다.

틀림없다.

나는 마침내 기억의 조각을 건져 올리는 데 성공했다.

고대신의 성녀.

흔히 옛 아버지 교단이라 부르는 사이비 종교.

이 세상 기준으로는 멀쩡한 종교다.

신멸 전쟁에서 죽긴 했으나, [옛 아버지]는 한때 지상을 거닐며 인류를 지배했던 강력한 신 중 하나였으니까.

'그리고 보스 몬스터지.'

아케인 서울은 에피소드 단위로 스토리가 진행된다.

그중 에피소드 1, 2, 3.

서울 테러, 좀비 사태, 고대신 부활.

이 모든 사건에 옛 아버지 교단이, 고대신의 성녀가 관여하고 있다.

에피소드 3, 고대신 부활의 최종 보스가 바로 저 성녀.

처음 공개되었을 때 난이도가 엄청났던 것이 기억난다.

정말 힘들게 잡았지. 나도 수십 번이나 실패한 끝에 현질할까 고민했을 정도였으니까.

나중에야 스펙이 올라가면서 스펙 체크용 보스 몬스터로 전락하지만.

'니가 왜 여기서 나와?'

그야 게임 시작 몇 년 전이니까.

게다가 에피소드 2까지만 해도 옛 아버지 교단은 멀쩡한 종교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신전에 가서 헌금하고 축복받거나 정화하는 것도 가능.

캐릭터 중에 N급이긴 해도 옛 아버지 교단 사제와 성기사도 존재했고.

그래서 에피소드 3 공개 때 반향이 꽤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철컥, 철컥.

성녀가 전투력 측정 장치를 향해 직진한다.

직원이 탄성을 터뜨렸다.

"레벨 갱신하시나 봐요!"

레벨 갱신?

성녀는 시작부터 8레벨 아니었나?

아, 지금은 아닐 수도 있겠구나.

성녀가 전투력 측정 장치 앞에 선다.

벌써 마법진이 반응하기 시작한다. 마력 입자가 유형화되어 흩날리고 마법진이 진동하면서 그 진동이 밀물처럼 탑 전체로 번져 나갔다.

번쩍! 팟! 휘리릭!

어느새 소식이 전해진 것일까.

열려 있는 천장을 통해 비행차 수백 대가 날아들었다.

고레벨 초인들이 비행차 위에 서서는 성녀를 지켜본다.

순간이동 마법으로 도착하는 마법사들.

공간이 일렁이며 차례차례 강림하는 신들의 눈.

집중된 눈길 아래 성녀가 입을 열었다.

"시작하겠습니다."

허스키한, 중성에 가까운 목소리.

문득 소름이 끼쳤다.

보스전을 할 때마다 고막을 찢어버릴 듯이 울려 퍼지던 광기 진득한 웃음소리가 생각나서.

쿠웅.

성녀가 발을 내디뎠다.

육중한 무게에 마법진이 비명을 지른다.

빛의 기둥이 불꽃처럼 타오르고 어마어마한 마력의 소용돌이가 회오리쳐 나를 강타했다.

"으윽!"

저절로 신음이 나온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느낌.

욕지기가 올라오는 걸 겨우 꿀꺽 삼켰다.

옆의 직원은 이미 눈을 까뒤집은 채 기절한 다음이었다.

1층 광장의 다른 사람들 역시 비슷했다.

일반인은 예외 없이 기절. 그나마 초인들만 버티고 있으나 1레벨 2레벨 저렙 초인들은 졸도하기 직전까지 갔다.

나도 반사적으로 특성을 바꾸지 않았으면 저렇게 됐겠지.

[맷집][인내][활기]

[재생][상처 회복][마력 회복]

방어와 회복 계통 특성을 총동원해서 겨우 버텼다고.

한참이나 빛이 번뜩였다.

거의 정신줄을 놓기 직전이 되어서야 마력 폭풍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대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글자 한 뭉치.

웅혼하고 찬란하게 불타는 글자들이 허공에, 세상에 낙인을 꽉꽉 눌러 찍고 있었다.

[성녀]

[여자]

[27세]

[사제 계열]

[8레벨]

[6중 회로]

성녀는 자기 이름마저 옛 아버지에게 바친 사제 계열 초인.

8레벨, 8레벨이라.

아케인 서울의 설정상으로는 항공모함 전단에 비견되는 무력.

흔히 초월경이라고 부르는 무위.

성좌라고 칭하는 9레벨보다는 아래지만 걸어 다니는 국가급 전투력이 따로 없다.

'이 시점에서 8레벨이 된 거구나.'

여기에 옛 아버지 교단까지 합치면 악몽이 따로 없다.

성녀가 보스 몬스터임을, 빌런임을 아는 것이 나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짝짝짝짝!

박수 세례가 폭포수처럼 떨어졌다.

기절했던 사람들도 깨어나 열렬하게 손을 마주치고 있었다.

"감축드립니다, 성녀님!"

"드디어 8레벨이 되시다니!"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어쩌면 21세기 다섯 번째 성좌가 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옛 아버지의 영광이 재현될 날도 멀지 않으셨습니다!"

"오오, 성녀님!"

이 세계에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9레벨은 단 네 명.

천마, 리바이어던, 멀린, 지브릴이 전부.

초월경 8레벨은 수십 명이나 되지만 어쨌든 100명은 안 넘는다.

초인에게 모든 것이 집중되는 세상에서 100위 안에 들었다고 하면 엄청난 거지.

"고맙습니다."

성녀가 짧게 답한 후 몸을 돌렸다.

처억!

성기사들이 서로를 마주 보고 2열로 도열한다.

쿵! 쿵! 쿵!

전투 망치로 바닥을 거세게 내리찍는다.

음험하게 퍼지는 마력 파장 속에서, 저마다 총을 높이 들어 성녀에게 경의를 표한다.

"옛 아버지의 첫째 딸에게 영세영광 있으라!"

"옛 아버지의 첫째 딸에게 영세영광 있으라!"

성녀가 당당하게 걸어 비행선으로 돌아간다.

X자로 교차한 총구 아래를 지날 때마다 마력인지 신성력인지 모를 힘이 무겁게 폭발했다.

기이이잉.

한쪽 벽면만 열렸던 탑 천장은 아예 전체가 열렸다.

꽃봉오리 개화하는 듯한 장면.

거기에 마력 예포를 쏘아 하늘이 마력 무늬로 물들어간다.

단지 초인탑 위 하늘만이 아니라 서울 전체가.

"햐."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8레벨 될 만하네.

전 서울적으로 불꽃 축제를 열어주고 말이야.

9레벨이라도 되면 아주 전국적으로 축제가 열리겠어.

나도 언젠가는 8레벨, 9레벨이 되겠지?

사실 9레벨로도 힘들지 모른다.

천마도, 리바이어던도, 멀린도, 지브릴도, 후반부 에피소드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니까.

설정으로만 존재하는 10레벨에 도달하여 승천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갈 길이 머네.'

시작이 반이고 천릿길도 한걸음부터인 법.

오늘은 1레벨을 인증받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특성을 교체했다.

[근력][맷집][강타]

그저 무난하게.

특성 칸도 세 개를 비워두었다.

적당히 강한 전사 계열 초인으로 인증되도록.

바로 그 순간이었다.

철컥철컥 잘 걷던 성녀가 별안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한 곳을 바라본다.

"성녀님?"

"왜 그러십니까?"

성기사들이 의아해하고, 옆의 직원도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성녀는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몸까지 돌렸다.

그리고 걸어오기 시작했다.

나를 향해, 직선으로.

1레벨 초인 -3-

"서, 성녀님?"

직원이 침을 꼴깍 삼킨다.

숨길 수 없는 동경의 빛이 두 눈 가득 뿜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성녀는 직원을 보지 않는다.

오직 나만을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내 앞에 우뚝 서자, 비로소 상황을 파악한 사람들 사이로 술렁임이 번져갔다.

"무슨 일이지?"

"저게 누구야?"

"그냥 평범한 1레벨 초인 같은데······"

"성녀님께서 뭘 보신 거지?"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성녀.

흑금색 신성력 어린 두 눈이, 마치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듯 내 눈에 꽂히고 있었다.

실제로는 내가, 김전사가 키가 조금 큼에도 불구하고.

"특이한 분이시네요."

한참 뒤에야 성녀가 입을 열었다.

고글을 통해 보이는 눈동자가 이상하게 아련하다.

가슴이 촉촉해져서 당황하다가 금세 정신을 차리게 된다.

성녀의 입가에 떠오른 호선 때문에.

그 치명적인 웃음.

초식동물을 앞에 둔 포식자가 지을 법한 사납고도 잔인한 미소에 온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다.

"저, 저 말씀이십니까?"

"네. 초인님이요. 굉장히 특이한 힘을 갖고 계시네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설마, 봤나?

내가 특성 전환하는걸?

"초인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런······

난 낭패스러운 감정을 느꼈다.

아케인 서울에서 성녀가 이름을 묻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으니까.

'어쩌지?'

그냥 넘어가기란 불가능하다.

성녀가 단순히 강력한 초인이라서, 거대 종교 집단의 수장이라서가 아니다.

내 입이 내 의지와 무관하게 제멋대로 움직였다.

"김전사입니다."

"네, 김전사 님."

성녀가 내 손을 붙잡았다.

강렬한 욕구가 치솟는다.

당장 무릎을 꿇고 성녀 앞에 엎드려, 내 모든 죄와 존재를 고백하고 싶다는 욕구가.

고글 위로 또렷하게 눈동자가 떠오른다.

신이 강림한 듯 신성력 가득한 흑금색 동공.

성녀가 또박또박 힘을 주어 말했다.

"옛 아버지께서는, 흑금 옥좌의 주인께서는 언제나 그대 같은 희귀한 힘의 소유자를 욕심내십니다. 바라건대 그분께 귀의하셔서 이 지옥 같은 세상, 이 지옥 같은 지구에서 평안과 평화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콰아아아.

머리 위로부터 강대한 힘의 폭포가 떨어진다.

신성력.

옛 아버지 교단 특유의 음험하면서도 강철 같은 기운이 내 몸을 관통하여 쏟아지고 있었다.

옆의 직원이 놀랍고도 부럽다는 얼굴로 날 보았다.

"세례라니, 그것도 성녀님께 직접! 좋으시겠어요!"

직원만이 아니다.

1층 광장에 있던 사람들, 성녀를 호위하던 성기사들, 성녀 소식을 듣고 구경하러 온 초인들 모두 날 주시하고 있었다.

'비, 빌어먹을.'

환장할 노릇이었다.

여기서 이 힘을 받아들이면 나는 즉시 [세례] 특성과 [신성력] 특성을 획득한다.

교단에 정식으로 가입한 다음 사제 수업을 받으면 사제 계열 초인이 되고, 전투 수업을 받으면 전사 계열에 포함되는 성기사로 인정받겠지.

이 시점에서는 괜찮은 선택이다. 성녀에게 직접 세례받았다는 프리미엄까지 더해서 탄탄대로를 걸을 테니.

문제는 고대신 부활 이후.

옛 아버지 교단은 본격적으로 마각을 드러내고 대한민국과 전쟁을 시작한다.

초반에는 서울의 절반을 점령하고 대한민국 국군을 괴멸시키기까지 하지만 결국에는 패배하고 말지.

군단, 재벌, 마탑, 교단.

아케인 서울을 지배하는 주요 세력들이 비로소 참전하거든.

'상장 폐지될 주식을 풀매수하는 멍청이도 있냐?'

유감스럽게도 난 아니다.

다만 여기서 세례를 거부하면 신열에 걸린다는 게 치명적.

신열.

아케인 서울에서도 대단히 강력한 디버프.

신열에 걸리는 순간 정상적으로 일상 생활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고집을 꺾고 신전에 찾아가 세례받기 전까지 24시간 내내 고문당하는 거니까.

'그래도 세례받을 수는 없어.'

신열을 해결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엘릭서로는 불가능하지만 넥타르나 암브로시아 같은 한계 돌파 보물이 있으면 된다.

그리고 내가 아직 1레벨밖에 안 돼서 쓸 수 있는 방법도 있지.

마음을 굳혔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무릎 꿇고 싶어 하는 육체를 통제하여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거부합니다."

덜컹!

힘이 흔들렸다.

공기가 확 바뀌었다.

아예 시간이 정지해버린 것 같다.

도도하게 나를 관통하던 힘의 폭포 역시 마찬가지다.

더는 강물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대신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물이 얼어붙은 듯 그렇게, 내 몸에서 박제된 채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제가 잘못 들은 거지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성녀.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감히!"

"저 불경한 자가!"

성기사들은 화를 냈다.

"멍청하긴."

"지 복을 지가 찬 거지."

"내기할까? 1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세례 해달라고 울부짖고 있을걸."

"애송이라 아무것도 모르는군."

초인들은 비웃었다.

"아니, 왜?"

"세례받으면 좋은 거 아닌가?"

"불신자인가 보지."

"아무리 불신자여도 그렇지. 세례잖아, 세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세례받을 수만 있으면 그 교단에 뼈를 묻어야지, 암."

일반인들은 의아해했다.

아무도 모른다. 모를 수밖에 없다.

이 시점에서 옛 아버지 교단이 대한민국 전체와 전쟁을 벌일 거라고, 그래서 패망하고 완전히 사라질 거라고 누가 예상이라도 했겠어?

나는 다시금 의지를 모아 말했다.

"거부합니다."

화악, 성녀가 찬 고글에서 불이 일어났다.

이제 고글 위 눈동자에 맺힌 감정은 불신과 당혹스러움이 아니었다.

분노였다.

노여움이었다.

거절당한 신의 감정이 성녀를 통해 여과되지 않고 콸콸 쏟아진다.

"으윽!"

정신이 아찔해진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저절로 주저앉는다.

쓰러진 나를 보면서 성녀가 냉랭한 목소리로 묻는다.

"진심이십니까?"

"예, 진심입니다."

"아쉽네요."

성녀가 몸을 숙이고 나를 내려다보며 머리를 저었다.

"어째서 고통의 바다에, 이 지옥에 괴로움을 더하시려는 겁니까? 옛 아버지의 옥좌에 스스로를 바치는 순간 그 모든 괴로움에서 해방되거늘."

헛소리.

살아있을 때도, 죽은 지금도, 부활을 시도하는 미래에도 인신 공양받던 신이 퍽이나 그러겠다.

성녀가 숙이고 있던 몸을 폈다.

담담해진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감돌고 있었다.

"좋습니다. 인간이 신을 섬기는 것도, 신을 거부하는 것도 모두 자유. 저희 교단은 베스트팔렌 신멸 조약을 준수합니다. 자유의지에 따라 옛 아버지를 거부하신다면, 저희도 그 자유의지를 존중해야겠지요. 하지만······"

성녀가 허리를 굽혔다.

내 귀에 체리 같은 입술을 갖다 대고는 조용히 속삭인다.

"옛 아버지께서는 이미 그대를 점지하셨다는 점을, 신성의 티끌이 그대에게 깃들었다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작은 티끌조차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대의 선택도 자유의지도 아무 의미가 없지요."

화악!

"크윽!"

불길이 치솟는다.

내 심장에서, 허파에서, 목구멍을 타고, 입술을 넘어 전신으로 불꽃이 번진다.

까맣고 까만 불이다.

인체를 직접 손상하지는 않되 신경계를 극단적으로 자극하여, 인간이 가장 고통스럽게 느낀다는 작열통을 1년 365일 하루 24시간 내내 가한다.

철컥, 철컥.

"건승하시길. 위대한 영혼이여."

이건 성녀의 티배깅이었을까?

마지막 숨결을 불어넣고는 성녀가 몸을 일으켰다.

철컥, 철컥.

쇳소리와 함께 성녀가 멀어진다.

성기사들이 줄지어 따라갔다.

몇 명은 침을 뱉고, 몇 명은 욕을 하고, 몇 명은 날 비웃었다.

"퉷!"

"하찮은 구더기 주제에 감히 세례를 거부하다니."

"저놈 들어오면 성전사 보내서 굴립시다."

"그 영광스러운 자리를 내주겠다고?"

"신앙도 시련이 있어야 강해지는 법 아닙니까. 어쨌든 성녀님께서 직접 점지하신 놈이니 우리가 아량을 보여줘야지요."

"듣고 보니 옳은 말일세."

"놈. 죽었다고 복창해라."

나는 그걸 모두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참 괴상한 감각이다.

육체가 불타며 고통스러운데, 당장이라도 미칠 것만 같은데, 되레 정신이 또렷해지며 주위를 선명하게 지각하고 인지하게 되는 것은.

"쯧쯧."

"그러게 얌전히 세례를 받았어야지."

"나는 받고 싶어도 못 받았고만······"

"저거 어쩌지? 그냥 저대로 놔둬?"

"놔둬. 괜히 손댔다가 부정 탈라. 살고 싶으면 지가 알아서 옛 아버지 신전 찾아가겠지."

주변엔 아무도 없다.

딱 한 명.

전혀 생각하지 못한 한 사람을 빼면.

"초인님······ 어떻게 해······"

나랑은 전혀 면식이 없었던, 오늘 처음 본 초인탑 직원만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나는 태아처럼 몸을 말고 신음을 삼켰다.

그러면서 속으로 되뇌였다.

'정신 차리자.'

이대로 있으면 죽도 밥도 안 된다.

눈을 최대한 치켜뜨고 열린 천장을,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하여 성녀가 탄 비공선이 탑을 떠나고, 꽃처럼 만개했던 천장이 닫힌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행동에 나섰다.

특성 전환.

[인내][맷집][활기]

[상처 회복][재생]

여기에 하나 더.

[죽은 척]

심장 뛰는 속도가 극도로 느려지고 몸이 차갑게 식었다.

핏기가 싹 빠지는 바람에 검은 불꽃 아래, 내 손이 퍼렇게 질려버릴 지경이다.

다른 사람은 모를 것이다.

내가 검은 불꽃에 휩싸여 있는 탓에, 오로지 검은 불꽃만이 보이기 때문에.

"으으으."

효과가 있었다.

외형상 검은 불꽃의 변화는 없었지만 그로 인한 통증이 크게 경감되었다.

죽은 척은 무조건 대상 고정을 해제시키는 특성이자 기술.

신열은 대상의 격에 따라 약해지고 강해지는 디버프라서 1레벨 초인인 나는 죽은 척만으로 효과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인내와 맷집으로 피해를 감소시키고 활기, 상처 회복, 재생으로 조금씩이라도 회복하고 있다.

'조금만, 조금만 버티자.'

그래도 고통스럽다.

인두 수백 개로 몸을 동시에 지지는 것 같다.

"끄으으윽."

견디지 못하고 신음을 흘리자 누군가 내 머리에 물을 부어주었다.

"힘내세요."

아까 날 안내하던 직원이었다.

성수도 치유 물약도 아닌 그냥 생수.

비싼 건 아니지만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다른 사람들은 재수 없다고, 부정 탄다고 얼씬도 안 하고 있는데 혼자 날 도와주고 있으니까.

차디찬 생수가 머리를 적시고 몸통으로 흐른다.

직접적으로 검은 불꽃이 사그라들지는 않는다.

되레 차갑고 축축한 감촉과 뜨겁고 격렬한 통증이 대비되어 고통을 더욱 선명하게 자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떠오르는 어떤 힘 하나.

내 몸에 무형의 일렁임이 번지며 검은 불꽃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신성 저항] 특성을!

"고, 고맙습니다."

"괜찮으세요? 신전에 모셔다드릴까요?"

"아닙니다."

순수하게 걱정과 염려에 찬 눈빛.

이 막장 세계에서는 처음 만나보는 순수한 영혼이었다.

"끄으응!"

신음과 함께 숨을 들이킨다.

새로 얻은 신성 저항까지 더하니 그래도 견딜 만했지만 이대로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

죽은 척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

다른 특성이 필요했다.

[인내][신성 저항][마력심]

[마력 회복][심호흡][마력 흡수]

처음 바꿨던 그 버티기 특성이 아니다.

되레 검은 불꽃을 부채질하는 특성이었다.

신열은, 성화는 상대가 강할수록 강해지고 특히 마력량에 민감하게 반응하니까.

화악!

"어떻게 해!"

검은 불꽃이 혀 날름거리듯 거세게 번지고 생수 붓던 직원은 완전히 울상이 된다.

종종종 뛰어가더니 생수를 몇 리터씩 사와 내게 들이부었으나 불꽃은 잦아들기는커녕 더욱 거칠게 타올랐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혀를 끌끌 찼다.

"거 하나도 소용없는 걸 왜 자꾸 해."

"돈만 아깝다."

"소린 씨는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내버려 둬. 지가 사서 고생하는 걸 왜 도와주려고 해?"

"저놈 지금이라도 옛 아버지한테 기도하면 바로 멈춰. 그사이에 신전 찾아가면 돼."

"뭔 능력을 가졌는지는 몰라도 신께서 단단히 찍으셨어."

사실은 달랐다.

직원이 부어주는 물줄기가 내게는 감로수와도 같았다.

고통과 감각의 대비 때문이다.

그 청량하면서 맑은 기운이 내게 한 가지 영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끙끙 앓으면서도 정신을 집중한다.

원래는 고통을 더 강하게 느끼라는 의미에서 강화되고 냉정해지는 정신.

덕택에 할 수 있었다.

마력을 최대한 끌어모아 차가운 감각에, 내 머리를 적시는 생수에 집중한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불과 물의 대비.

상상한다.

물이 번진다고.

파도가 용암을 밀어낸다고.

신성력과 마력의 대비.

불과 물의 대치.

여기에 강제로 끌어 올려진 내 집중력.

이 모든 것들이 하나되어 강력한 특성을 탄생시킨다.

[마력 방어막]

방어 전사, 퓨어 탱커 지망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1티어 공용 특성.

내 심장으로부터 무형의 힘이 발산된다.

완벽한 구체.

완전히 투명한 파동.

마력 방어막이 물결처럼 달려가 검은 불꽃과 부딪혔다.

기름 부은 듯 잠깐 화악 타오른 검은 불꽃.

거기까지였다. 잠깐 반항하던 검은 불꽃이 마력 방어막에 떠밀려 스러진다.

아니, 추방된다.

내 몸 밖으로. 내 신경계를 불태우지도 고문하지도 못하는 위치로.

그리하여 떠오르는 검은 불꽃 무리.

흡사 검은 도깨비불.

어쩌면 검은 화룡처럼 보일 신성력을 휘감은 채.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1레벨 초인 -4-

"······세상에."

툭.

직원이 생수통을 떨어뜨렸다.

물이 바닥을 콸콸 적시지만 치울 생각도 못하는 모습이다.

그만큼 충격적인 장면.

나는 가만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력 흡수, 심호흡, 마력 회복, 마력심으로 생성되는 모든 마력이 마력 방어막에 흡수되는 중이다.

마력과 신성력의 절묘한 균형.

이질적인 힘이 충돌하면서 퍼지는 여파에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지만 더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후우우."

길게 숨을 들이마시자 직원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괜찮으세요?"

"예, 괜찮습니다."

"세상에, 세상에······"

감탄사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연발하는 직원.

나는 잠깐 휘청거렸다가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여기저기서 놀람에 찬 탄성이 터졌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설마, 신열을 극복했다고?"

"불가능해!"

"아니지. 그냥 방어막으로 밀어낸 거지. 성화가 그대로 남아 있는 거 안 보여?"

"쯧쯧. 고생길을 자처하네. 24시간 내내 방어막을 유지하지는 못할 거 아냐."

"그래도 대단해. 원래는 방어막 못 썼던 것 같은데."

"하기야······"

"어, 잠깐만. 신열 때문에 마력 방어막을 각성했다고? 이 자리에서?"

하나둘 눈빛이 바뀐다.

어떤 양복쟁이는 손거울을 꺼내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넥타이를 새롭게 맸다.

저 멀찍이 보이는 초인은 스마트폰으로 어딘가 전화를 걸었다.

나는 그들을 한 번 둘러본 후 정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마력 회로 측정 장치.

성녀가 새치기 하다시피 해서 먼저 들어갔던 빛의 기둥.

비틀거리면서도 빛의 기둥을 향해 걸어갔다.

한 발짝 시작하니 쉬웠다. 남아 있던 고통의 잔재마저 싹 날아가 사라지고 휘청거리던 몸은 온전히 내 의지대로 움직였다.

마침내 접촉.

파파팟!

마법진과 내 마력이 반응하면서 불똥이 튀었다.

성녀가 인증받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는 탑 전체가 진동하고 마력 예포를 뻥뻥 쐈다면, 지금은 내 주변에서 불꽃이 몇 번 튀는 게 고작.

불꽃이 조각조각 나면서 글자로 변화한다. 글자가 허공에 조각되어 작은 글자판을 만들고 있었다.

내가 중심에 도착하는 것과 동시에 글자판도 완성되었다.

[김전사]

[남자]

[22세]

[전사 계열]

[1레벨]

[6중 회로]

이런, 낭패다.

내가 원래 인증받으려 했던 건 적당히 강한 1레벨 전사였다.

그런데 6중 회로?

성녀와 같다.

아마 이 회로 숫자가 특성 개수를 의미하는 모양.

너무 강하고 너무 눈에 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말도 있잖아. 초인 인증만 받아서 광질하고, 광질로 돈 벌어서 특성 수집하는 게 내 계획이었는데······

'어쩔 수 없어.'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성녀가 날 알아보고 세례 했을 때부터 다 망했다고.

어쩌겠어.

빗나간 건 빗나간 대로, 틀린 건 틀린 대로 보정하고 맞춰가면서 새롭게 해나가야지.

"와, 초인님!"

날 안내해줬던 직원이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축하드립니다! 6중 회로 스타트는 저 입사하고 진짜 처음 봐요! 보통은 3레벨은 되어야 6중 회로가 된다고 하던데 진짜진짜 대단하세요. 왜 세례 거부하시나 했더니 유서 깊은 무문 출신이셨나 봐요. 혹시, 서부군이나 동부군에 이미 자리 잡아놓으신 거 아니에요?"

"하하, 글쎄요."

"6중 회로라니······ 나중에 유명해지실 분이니까 미리 사인 받아놔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초인님. 초인 인증서와 초인증을 발급해 드려야 하는데 라운지에서 잠깐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그러죠."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직원이 작은 태블릿 PC를 꺼내 꾹꾹 조작했다.

고오오오.

탑을 떠받치던 마력 흐름 일부가 쪼개져 내게 다가온다.

허공에서 푸른 입자가 모여들면서 반원형 경사로를 만들었다.

탑 2층 어디론가 이어지는 마력의 길.

직원이 탑 2층을 선망에 찬 눈으로 한 번 본 후 내게 공손히 인사했다.

"초인님. 마력로를 타고 2층에 가시면 2층 직원이 대기하고 있을 거예요. 2층 직원의 안내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지 말고 계속 담당해 주세요."

"네? 제가요?"

"안 됩니까? 규정에 어긋나는 건 아니죠?"

직원이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먼저 말을 못 하고 있었다뿐이지 내가 이 말을 꺼내기만 기다렸다는 듯이.

어딘가와 무전을 나눈 다음, 마력로 앞에 서서 팔을 부드럽게 뻗는다.

"초인님께서 원하시면 가능하지요. 올라가시겠습니까?"

"가죠."

파랗게 반짝이는 빛의 길에 몸을 올린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푹신하면서 질긴, 나일론 실을 짜서 만든 듯한 질감이 나를 맞이했다.

그 상태 그대로 마력로가 부드럽게 나를 운반한다.

에스컬레이터를 마법으로 구현하면 이럴까?

2층이라고는 하지만 절대 낮지 않은 높이.

수십 미터를 단숨에 치솟아 도착한다.

속도는 빨랐으나 탑승감은 부드러웠고 흔들림 하나 없었다.

2층 난간에 도착하기 직전, 직원이 목소리를 낮춰 내게 속삭였다.

"저도 2층에는 처음 올라와 봐요."

"입사한지 얼마나 되셨는데요?"

"2년이요······ 아, 초인님. 이제 말 편하게 해주세요. 저 초인님께 존대 들으면 안 돼요."

"괜찮습니다. 제가 불편해요."

"제발요. 대리님이나 주임님이 보시면 저 큰일 나요."

울상을 짓는 직원.

차마 나 편한 대로 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 아케인 서울의 직장 문화는 원래 세계와는 비교도 안 되게 수직적이고 권위적이거든.

흔히 알려진 간호사 사회의 태움 문화도 몇 수, 아니 수십 수 접어줘야 할 지경.

"알겠습니다. 아니, 알겠어."

"감사합니다!"

하얀 치아가 드러나도록 환히 웃는 직원.

처음 봤을 때 느꼈지만 낯이 익다.

'아케인 서울 캐릭터로 나왔었나?'

그런 것 치고는 초인이 아닌 게 이상하긴 하다.

얘기를 나누는 사이 2층 난간에 도착했다.

난간 바로 앞에 금속성 통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통로 앞에 회색 정장 입은 직원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나를 보고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초인님! 인증을 축하드립니다!"

합창하듯이 지르는 인사.

생전 처음 받아보는 대접이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어, 반가워."

어색하게 묵례를 하자 가장 앞에 서 있던 여자가 힐끔, 내 뒤를 따라오던 직원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던졌다.

"초인님. 불편해 보이시는데 담당 직원을 교체해 드릴까요?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초인님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원하시면 2층 책임자인 제가 직접 보필해드리겠습니다."

"대, 대리님······"

직원이 애처로운 목소리로 여자를, 대리를 부른다.

뭐냐, 고객 빼가기야?

원래 세계에서 몇 번인가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둘이 뭐라고 말을 나누기 전, 나는 강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필요 없어."

내가 듣기에도 단호한 목소리.

대리가 찔끔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네, 초인님. 그럼 그대로 유지해드리겠습니다. 혹시 필요하시면 언제든 호출해주시기 바랍니다."

고분고분한 태도, 예의 바르게 굽힌 허리.

하지만 나는 대리의 눈가 언저리에서 이질적인 색채를 읽어낼 수 있었다.

먹이를 노리는 승냥이의 눈빛.

그 시선이 내 주위에서 감도는 검은 불꽃을 스치는 것을, 똑똑히 간파한 것이다.

'하여간에.'

자기 커리어에 도움이 될 것 같으니 말단을 제치고 직접 받으려고 한 것.

내가 미쳤냐?

위험할 때 도와준 착한 직원 놔두고 저런 하이에나 같은 인간한테 실적 던져주게.

"초인님, 드시고 싶은 음료 있으세요?"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부탁해."

"잠시만 기다리세요."

직원은 빠르게 일을 처리했다.

라운지 중앙에 있는 바에서 커피를 내리고, 비치된 다양한 디저트까지 예쁘게 담아 가져온다.

다른 직원들이, 심지어 2층 관리자라는 대리까지 내 주변에서 얼쩡거렸지만 워낙 손이 빨라서 내게 말을 붙이기도 전에 커피 준비가 끝났다.

"커피 잘 내리네."

"감사합니다, 초인님. 잠시만 기다리시면 초인 인증서와 초인증을 가져오겠습니다."

언제 준비를 한 걸까?

이번에는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마력로를 타고 올라오면서 원격으로 서류 작업을 마친 모양.

라운지 구석에 잠깐 들어가더니 완성된 초인 인증서와 초인증을 가져와 내 앞에 내려놓았다.

대리와 다른 직원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들끼리 입만 벙긋거리며 서로를 비난했는데, 마력을 완전히 각성하면서 예민해진 감각 때문에 모르는 척하느라 입이 간지러울 지경이었다.

내 앞에 앉은 직원도 눈치챈 모양.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으면서 겨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초인님. 공식적으로 초인 인증을 받으신 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초인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초인에게는 다섯 가지 특권과 수많은 혜택이 부여됩니다. 그중 1레벨이신 초인님께 적용되는 건 두 가지 특권입니다."

"감세 특권과 무장 특권이죠?"

"네, 맞습니다. 비록 크진 않지만 소득세와 재산세, 부동산세, 증여세, 상속세 등 모든 직접세에서 일정 비율로 혜택을 보실 수 있습니다. 나중에 레벨이 오르면 더 많은 혜택을 보시게 되고요."

1레벨 감세는 별 것 아니다.

무서운 점은 계속해서 비율이 높아진다는 점.

7레벨쯤 되면 거의 명목세에 가깝게 변한다.

8레벨?

완전 면세지. 심지어 개인만 아니라 그 개인이 속한 단체에까지 적용이 된다.

"또, 초인이 되신 이상 총기와 무기 소지에 제한이 없어지십니다. 단, 치안 관계상 무기 노출만큼은 자제해주시길 권유 드립니다. 3레벨부터는 자유화됩니다만 2레벨까지는 서울시 조례 위반으로 과태료가 나옵니다."

이게 핵심이다.

소총이든 로켓 발사기든 마음대로 들고 다녀도 된다는 뜻.

과태료를 내야 하니 적당히 가방에 넣어 다니는 게 낫지만.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3레벨이 되시면 제재 특권이, 5레벨이 되시면 면책과 불체포 특권이 새로 부여됩니다."

제재 특권.

사적 제재의 다른 말이다.

3레벨 초인부터는 사회 통념과 대한민국 법률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범죄자들을 단죄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면책 특권과 불체포 특권.

많이 들어봤지?

원래 세계 대한민국에서는 국회의원에게나 허락되는 특권이다.

다시 말해 이 세상 5레벨 초인은 원래 세계 국회의원과 맞먹는 특권층이라는 뜻.

'대놓고 귀족이야.'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는 법. 5레벨 초인은 전투기 1대와 맞먹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 평범한 소총수 따위 아무리 많이 모여도 상대가 안 된다.

어쩌겠어.

귀족 대접해드려야지.

"또, 초인증을 사용하시면 대중교통 무료, KTX 일반석 무료 이용, 비행기 이코노미 클래스 좌석 보장 및 금액 지원, 톨게이트비 전액 무료, 전국 초인 시설 무료 이용, 병원비 급여 항목 무료, 그리고······"

초인으로서 받는 여러 혜택.

레벨마다 조금씩 차등이 있었다. 1레벨인 지금은 KTX 일반석 무료라면 3레벨부터는 특실 좌석 보장과 무료 이용이 붙고, 5레벨에는 비행기 비즈니스 클래스 좌석 보장과 무료 이용이 붙는 식이다.

나는 초인 인증서와 초인증을 받아 챙겼다.

그러자 주위 직원들이 슬쩍 자리를 떴다.

몰래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리고 허공에 긁적긁적 글씨를 쓰고 야단이다.

'아, 젠장.'

왜 저러는지 알겠다.

좋은 먹잇감이잖아.

기자들에게도, 헤드헌터에게도, 심심한 초인들에게도.

이대로 자리를 뜨면 1층 광장에서 몇 시간 붙잡혀 있을 게 뻔하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내 마음을 읽었는지 직원이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어떻게?"

"다 방법이 있죠."

"좋아. 부탁할게."

직원이 날 향해 살짝 윙크를 했다.

그러더니 내 옆으로 굳이 옮겨온 다음, 내 팔짱을 끼고 일으켰다.

"대리님! 김미현 대리님!"

"응? 어, 왜?"

"저 오늘 조퇴할게요!"

발랄하게 외치는 직원.

대리가 반사적으로 안 된다고 하려다 말고 몸을 굳혔다.

지진 난 듯 흔들리는 동공이 엉거주춤 일어선 나와, 내게 몸을 포개듯이 기댄 직원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어······ 응, 그래. 알았어. 내일 늦게 출근해도 되니까 잘 모셔드리고 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선이 쏟아진다.

질투와 시기에 찬 눈빛.

그리고 뒷담화.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순 내숭이었네."

"무서운 년이야."

"저년 저거 저럴 줄 알았지."

잠깐만.

이거 뭐야.

분위기가 이상한데?

내가 반응하기도 전, 직원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대리님! 비품실 좀 들를게요!"

"마음대로 해."

대리는 아예 다 놔버린 듯한 표정이다.

허탈한 얼굴을 뒤로 하고 직원이 이끄는 대로 라운지 구석 조그마한 방에 들어갔다.

그때까지 내게 달라붙어 있던 직원이 빠르게 방을 뒤졌다.

"초인님, 이거 입으세요."

직원이 내게 내민 것은 직원용 정장과 치렁치렁한 망토 하나.

나는 망토에 눈길을 주었다.

스마트폰 화면으로 많이 보던 물건이었다.

은신의 망토.

투명 망토처럼 완벽하게 은신이 되지는 않지만 존재감을 확 죽이는 물건이다. 마물의 감지 범위에 들어가도 어지간해서는 들키지 않을 정도로.

지금 저걸 쓴다면?

내 몸 주위에 맴도는 검은 불꽃이 확 줄어들겠지. 감지 종류 특성이 없다면 내게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옷을 갈아입고 망토를 썼다.

망토가 녹아들 듯 내게 달라붙으면서 검은 불꽃 역시 자취를 감췄다.

물론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내 방어막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저 외부에서 관측되지 않게 되었을 뿐.

그대로 비품실을 빠져나갔다.

비품실에 숨겨진 직원 통로를 따라, 벽면을 따라, 밖에 대기하고 있을 하이에나들을 피해서.

길고 긴 지하 통로까지 지나자 나온 곳은 지하철 2호선 초인탑 역이었다.

원래 세계로 치면 잠실역.

"고마워."

망토와 옷을 돌려주었다.

그러나 검은 불꽃이 튀는 일은 없었다.

새롭게 얻은 특성 때문이다.

[은신]

비밀 통로를 활용하고, 은신의 망토를 사용하면서 획득 조건을 만족한 것.

직원이 묘한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초인님은 다른 분들이랑 다르시네요."

"뭐가?"

"그냥요. 뭐라고 할까······ 꼭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초인이신데 이렇게 친절하신 분은 처음 봐요."

설마 감사 인사를 했다고 그래?

초인탑에서 근무하면서 갑질 꽤 당한 모양.

대답하는 대신 한 번 웃어 주었다.

직원도 까르르 웃고는 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멋대가리 하나 없는 사각 명함.

명함을 받아든 직후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백소린]

이 세 글자 때문에.

백소린, 백소린이라니!

전사 계열 3대장 캐릭터 중 하나.

천마보다는 못해도 다른 SSR 캐릭터는 가볍게 압살하는 존재.

"초인님! 그럼 다음에 봬요!"

백소린이 발랄하게 말하고는 팔랑팔랑 걸어간다.

얇은 안경에 길게 기른 머리칼, 밝은 표정.

저것 때문에 알아보질 못했던 것이다.

게임 속 백소린은 항상 비틀린 미소를 지은 채 흉흉한 눈빛을 빛내곤 했으니까.

"백소린······"

게임에서는 단 한 번도 쥐어보지 못했던 카드.

하지만 이 세상에서라면?

침이 꼴까닥 목구멍을 넘어갔다.

서우진 -1-

서우진

띠링!

경쾌한 소리와 함께 녹색 불빛이 번쩍였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허파를 자극하던 눅눅한 공기 대신 맑은 바람이 내 기관지를 간지럽혔다.

'효율이 영 아니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저번에 팀을 짜서 왔을 때는 한 구역에 4시간이 안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게임에서도 앵벌이 김전사 4명을 파티 짜서 보내면 게임 시간 기준 1시간이면 떡을 쳤고.

그런데 이번엔 무려 10시간이 걸렸다.

나는 주변에서 타오르는 검은 불꽃을 노려보았다.

'이것 때문이야.'

특성을 죄다 마력 방어막에 맞춰놔서 그렇다.

[신성 저항][마력 방어막][마력심]

[마력 회복][심호흡][마력 흡수]

현재 내 특성.

여기서 신성 저항과 마력 회복, 마력 방어막은 빠졌어야 맞다.

대신에 오염 저항과 인내, 활기를 넣었다면 오염 마력 흡수 속도가 두 배는 빨라졌겠지.

5시간과 10시간의 차이는 크다.

출퇴근이 가능하냐, 아예 여기서 자고 갈 거면 두 탕 뛰냐 네 탕 뛰냐를 갈라 버리니까.

'여기서 자고 싶진 않은데.'

한편으로는 과거의 김전사에게 미안해졌다.

나는 원정대를 조직하고는 김전사를 쉬지도 못하게 24시간 내내 자동 원정을 돌렸으니까.

막상 이 세상에 떨어지니 도저히 이 안에서는 못 자겠다.

화장실이 없어서 청소부들이 아무 데나 똥오줌을 갈기던 곳이다. 오염 마력과 매립된 쓰레기까지 더해져 오묘한 냄새를 풍긴다. 습기와 곰팡이, 유독성 버섯까지 합쳐져 최악의 환경을 자랑하는데 여기서 잘 수 있으면 거의 인간이 아니지.

통로보다 막 정화된 이 안쪽 구역이 나을 지경.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벽에 기대어 앉았다.

눈을 감고 시간을 보낸다.

그래도 광질이 돈 벌기에는 좋았다.

하루에 1구역만 청소해도 정화비 1천만 원이 입금된다. 인력사무소를 통해서 들어온 게 아니니 수수료도 안 떼인다. 여기에 합성 재료로 쓸 0레벨 마력핵은 덤이고.

'초인이 되길 잘했어.'

초인증을 내미니 프리패스였다.

공무원들이 반색하며 문을 열어주었다.

1레벨 초인이 일반인 10명 팀보다 낫다는 게 이 세상의 상식이었으니까.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일이라 초인이 안 하려고 해서 그렇지.

'특성을 조금 바꿔보자.'

신성 저항과 마력 회복을 빼고 오염 저항과 활기를 넣었다.

그러자 당장 검은 불꽃이 솟구치며 내 피부를 불살랐다.

마력 농도가 높은 구역이고, 오염 마력도 오염 저항 덕에 어느 정도 쓸 수는 있다고 하나 신성 저항과 마력 회복만큼은 아니었던 것이다.

"으윽, 젠장."

처음 세례받았을 때처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고통스럽다.

신음을 흘리면서도 차분히 계산해 본다.

이 정도면······ 마력 정화까지 8시간 정도 걸리겠지.

이걸론 안 된다.

머리를 한 번 흔들고는 특성을 원위치했다.

나도 산전수전 다 겪었지만 작열통을 생으로 견딜 정도로 의지의 사나이는 아니다.

8시간 동안 고문당하느니 마법진 텐트 사 와서 한 잠 때리는 게 낫다.

'너무 비효율적이야.'

돈을 많이 버는 건 좋다.

하루 두 탕 뛰면 적어도 2천만 원 보장에 마력핵과 기타 잡템으로 플러스 알파가 붙는다.

한 달 풀로 출근하면 6억이고, 주 5일 출근해서 4.3주로 계산하면 4억 3천.

그렇게 몇 달만 뛰면 종잣돈을 마련할 수 있긴 한데······

돈도 벌면서 특성도 벌고, 아티팩트나 희귀 약물도 얻을 수 있는 방법 어디 없나?

기왕이면 넥타르를 받으면 좋은데.

신열 디버프를 없애 버리게.

"에라."

나는 잡념을 쫓아내며 벌떡 일어났다.

이럴 거면 운동이나 하자.

운동해서 얻을 수 있는 특성이 몇 개가 남아 있잖아.

도약이니 강건이니 하는 것들.

스스로 운동을 시작했다.

괜히 크게 뛰어보고, 있는 힘껏 달려서 콘크리트 벽면에 몸을 던졌다가 반대편으로 돌아가서 달린다.

쉽게 생성되지는 않는다.

내 몸이 이미 지나치게 강해져서 적당한 운동으로는 지치지 않기 때문이다.

근린공원에서 운동하던 때를 생각하면 상전벽해에 가까운 변화.

띠리리리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