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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호초

모바일 게임 아케인 서울.

처음으로 SSR 천마를 뽑은 다음 날.

태생 N급 캐릭터 김전사가 되어 버렸다.

#현대판타지 #퓨전 #디스토피아 #빙의 #이세계 #총잡이 #칼잡이 #능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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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ㅂㅇㄹㄴㄷㅈ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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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프롤로그

[쓰알 김전사 실화냐?]

[ㅋㅋㅋ]

[뉴비 절단기가 또 한 건 했네.]

[무1이 어서 오고.]

[무1이 뭐임?]

[무과금 랭킹 1위.]

[무과금으로 랭킹 1위라고? 그게 가능함?]

[아니. 무과금 중에 랭킹 1위라고.]

나도 댓글을 하나 남겼다.

[니 여캐 쩔더라.]

이런 놈들은 다 내 밥이지.

막 랭킹전에 돌입한 놈들.

과금 때려 박아서 SSR 캐릭터로만 파티를 짜오면 뭐 해?

장비, 특성, 레벨이 받쳐주지 않으면 한계가 있다.

[이게 게임이냐? 100만 원 넘게 썼는데 무과금한테 진다고?]

[그럼 너도 1만 시간 하던가.]

[1만 시간은 또 뭔데.]

[무1이 얼마 전에 인증했잖아.]

[그 새끼 완전 겜창이지. 이딴 망겜에 1만 시간이나 쓰고 말이야.]

[미친놈 아님?]

[그러니까 종합 랭킹 9위 먹었지.]

[무1이 이기는 방법은 간단함. 돈을 열나게 쓰면 됨.]

[ㅇㅈ. 과금했는데 졌다고? 답은 더 많은 과금이다!]

[어떻게든 천마 하나만 뽑아서 갖고 있어도 무1이는 걍 쳐바름.]

으아아!

천마!

그놈의 천마!

나는 게시판을 닫고 콜로세움에 입장했다.

이번에도 여캐 파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선봉은 천마.

중진은 리바이어던.

후위는 멀린.

보조는 지브릴.

흔히 말하는 0티어 성능 조합.

내가 가진 캐릭터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이기는 조합이기도 하다.

이제 막 과금 시작한, 캐릭터 육성이 덜 된 상태라면 모르겠으나······

[철갑지존] 무1이 안녕.

하필 이놈이네.

랭킹 1위.

내가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헤비 과금 유저.

닉네임부터 아재 냄새가 폴폴 풍기고, 컨트롤도 별로지만 과금만큼은 진짜다.

[무과금다죽는다] 젭알 자비 좀. 여캐 파티 없음?

[철갑지존] 그럼 자동으로 돌릴게.

진짜 빡치네.

결과부터 말하자면 졌다.

컨트롤만큼은 자신 있는 나지만, 수천만 원대 과금 앞에선 장사 없었다.

넥타르를 죽어라 퍼먹여서 N급에서 SSR급으로 한계 돌파시킨 김전사 따위 천마에게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철갑지존] ㅈㅈ.

"이이익!"

꽝!

나는 벽에다가 머리를 박았다.

"과금 좆망겜! 으아아!"

나도 과금을 할까?

딱 100만 원만?

천마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SSR급 전사 계열 3대장, 백소린이나 칼리, 자네트만 나와도 충분하다.

"젠장, 젠장, 젠장."

하지만 포기했다.

1만 시간을 태웠다.

1만 시간을!

이쯤 되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못한다.

어차피 과금 조금 한다고 이길 것 같지도 않고.

[아케인 서울]은 전형적인 P2W(pay to win) 게임.

전략과 컨트롤이 아니라 과금으로 승부를 보려고 하는 시점에서 내 패배다.

'다음 패치를 노리자.'

아케인 서울은 주기적으로 대형 패치를 단행한다.

핵전쟁이 벌어진다거나 차원 균열로 세계가 찢어지는 식으로.

그만큼 게임 속 세상은 막장화되고, 새로운 캐릭터가 추가되면서 메타 격변이 일어난다.

'천마는 잡을 수 있어.'

사전 예고된 특성 중 내가 눈여겨보는 게 몇 개 있다.

얻으려면 또 시간을 갈아 넣어야겠지만 그 정도야 뭐, 넘쳐나는 게 시간이라고.

이걸로 숙제는 끝.

나는 침대에 누운 상태로 스마트폰을 터치했다.

"오늘은 레어 좀 나왔으면······"

숙제 보상으로 돌리는 무료 뽑기의 확률은 극악.

SSR까지 나온다고 하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웅. 웅. 웅.

언제나처럼 가볍게 진동하는 스마트폰.

"하아암."

하품을 쩌억 했다.

어차피 조금 진동하고, 빛 한 번 뿜고 말겠지.

나오는 건 노멀 등급 무더기.

기대 따위 애초에 집어 던진 지 오래다.

우우웅! 우우우우웅!

어어?

그런데 이상하다.

오늘따라 진동이 길다.

평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훨씬 더 강하고 긴 것이······

"설마?"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와 함께 스마트폰 화면이 찬란한 빛을 뿜기 시작했다.

"서얼마?"

하얀색.

아니다. 이건 하얀색이 아니다.

흰색과 황금색이 섞이고 금속광까지 더해진,

백금색이다!

"오오오!"

스트리머들 방송에서만 봤던 그 색깔!

현금을 물처럼 뿌려야 보여준다는 그 빛깔!

눈을 부릅뜨고 스마트폰 화면을 노려본다.

영롱한 백금색 사이에서 무지갯빛이 번지고, 마침내 소용돌이치면서 화면이 제 색채를 되찾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 떠오르는 카드 한 장.

흔해 빠진 여리여리 여캐가 아니라, 흑룡 장포를 바람에 나부끼며 뒷짐 지고 서 있는 근육질 남캐 하나.

[SSR 천마]

"으어어엉!"

나는 무릎을 꿇고 길게 울부짖었다.

천마, 천마라니!

전사 계열의 최고봉!

0티어 중의 0티어!

최고의 성능 픽!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구나!

김전사?

N급에서 SSR급으로 한계 돌파시킨 내 분신?

어떻게든 태생 SSR 이겨보겠다고 유명한 캐릭터마다 저격할 수 있게 특화해서 육성한 SSR 김전사 시리즈?

다 필요 없다!

천마 하나만 있으면 된다!

천마가 짱이라고!

"으아아! 으아아아!"

한참이나 바닥을 굴렀다.

쿵쿵쿵!

옆방에서 시끄럽다며 벽을 쳤지만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한참을 눈물 콧물 쏙 빼며 발광하다가 겨우 진정했다.

"하아, 하아악, 하아."

스마트폰 화면을 쓰다듬었다.

내 용병단에서 쉬고 있는, 똑같은 얼굴의 김전사들.

"그동안 수고했다."

이제는 작별해야 할 시간.

퓨어탱 김전사.

딜탱 김전사.

극딜 김전사.

특정 캐릭터 저격용 김전사 1, 2, 3.

자동 원정 뺑뺑이용 김전사······

모조리 갈아서 천마의 양분으로 써먹었다.

"잘 가라."

아깝지 않냐고?

전혀.

나는 무과금으로 랭킹 9위까지 올랐다.

그동안 갈아버린 김전사가 몇이나 될 것 같아?

태어나길 잘했어.

오늘처럼 행복한 날은 또 없을 거야.

나는 히죽거리며 웃다가 슬며시 잠이 들었다.

이때만 해도 몰랐다.

다음 날 아침.

내가 아케인 서울의 김전사가 되어 깨어날 줄은.

김전사가 되다 -1-

김전사가 되다

끼이이익!

도로 긁히는 소리.

번쩍!

급격히 커지는 불빛.

그리고 충격.

어마어마한 힘이 전신을 덮쳤다.

몸이 찢어지는 통증에 비명이 터졌다.

"으아악!"

상체를 벌떡 일으키자 맞은편 침상에 앉아 있던 중년 아저씨가 멀거니 쳐다본다.

"뭐야. 악몽이라도 꿨어?"

"어······ 여긴 어딥니까?"

"어디긴. 병원이지."

병원?

이게 무슨 소리야.

주위를 둘러보자 TV로나 보던 병실이 시야에 들어온다.

흰 벽, 흰 천장, 몰개성한 수납장.

그리고 적당히 배치된 환자 침상도.

"어?"

나도 붕대를 칭칭 감은 채 환자 침상에 누운 상태.

왜 이러나 싶어 팔을 들려다가 끄응, 신음을 내뱉었다.

움직이려고 하자마자 찌릿한 통증이 올라온 까닭이다.

"제가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맞은편 아저씨에게 묻자 아저씨가 쯧쯧 혀를 찼다.

"기억 안 나나? 자네 교통사고 났었다던데."

"교통사고요?"

"나도 자세한 건 몰라. 의사들 회진할 때 얻어들었지. 간호사라도 불러줘?"

"예. 부탁드립니다."

"어이! 보쇼! 여기 전사 씨 일어났수!"

어린 간호사 하나가 들어와선 반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김전사 님! 깨어나셨네요!"

"어······ 저 말씀이십니까?"

"네! 잠시만요. 주치의 선생님 모셔 올게요."

이상하다.

나를 왜 김전사라고 부르지?

주위를 둘러보다가 우연히 침상 뒤쪽에 시선이 갔다.

환자용 이름표가 보였다.

[M/22]

[김전사]

[뇌진탕, 흉곽 전벽의 타박상]

김전사?

이름이 왜 저래?

내 이름이 아니잖아.

의문도 잠시.

가운 입은 의사가 들어와서는 펜라이트를 들이댔다.

"동공 반사 좋으시고······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름이요? 김준수요."

"개명하신 겁니까? 접수는 김전사로 되어 있습니다만."

"김전사 님 맞아요. 경찰에서 확인해줬어요."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속으로 질문을 던질 때, 간호사가 침상 옆 미니 수납장을 가리켰다.

마침 수납장의 뻥 뚫린 공간에 낡은 지갑이 놓여 있었다.

그걸 열어 보자 세종대왕님 지폐 몇 장과 신용카드 하나, 주민등록증이 나왔다.

주민등록증을 확인하니 저절로 머리가 아찔해진다.

[김전사]

이름 석 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기 때문에.

또.

주민등록증의 사진이 너무나 낯이 익었고.

바로 스마트폰 화면으로 보던 그 김전사였다.

왼쪽 뺨의 흉터도 없고 보던 것보다 조금 더 어려 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 김전사!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전사 님이시라고요. 오늘이 몇 월 며칠인지는 아시겠습니까?"

"5월 1일이요."

"이런."

의사가 난처하다는 듯 한쪽으로 눈을 돌렸다.

벽에 걸린 전자 달력.

5월 30일이라는 글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는 아시겠습니까?"

"병원이죠."

"지금 우리나라 대통령이 누구죠?"

별걸 다 물어보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윤주열이요."

"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네요."

몇 가지 잡다한 질문을 더 하더니 의사가 머리를 흔들었다.

"단기 기억상실증 같습니다. 덤프트럭에 정면으로 치었으니 이 정도로 끝난 게 용하지요. 내출혈도 없고 골절도 없으니까요."

"덤프트럭이요?"

"네. 기억 안 나십니까?"

눈살을 찌푸렸다.

어떤 장면이 부유하듯이 떠오른다.

끼이익, 도로 긁히는 소리.

번쩍, 다가오는 불빛.

그리고 충격!

"으으윽!"

내가 머리를 싸매자 의사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일단 장기 입원하시고 정밀검사해야겠습니다. MRI도 찍어야 하고 마법 투시 검사도 필요하고 할 게 많아요."

"마법······ 뭐요?"

"정식으로 접수부터 하시죠. 보호자가 없다고 되어 있네요?"

"예. 스마트폰에 저장된 연락처에 전화했지만 모두 접수를 거부하셨습니다."

"먼저 원무과부터 들르세요."

의사는 할 일 다 했다는 듯이 빠져나갔다.

간호사가 등에 대고 꾸벅 인사하고는 김전사의 팔을 잡았다.

"일어나실 수 있으세요?"

"으윽, 네.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다행이세요. 몇 분이 같이 사고를 당하셨는데 다른 분들은 모두 즉사하셨어요."

"주, 죽었다고요?"

"네. 사고가 워낙 크게 나서요······ 김전사 님,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스테이션에 간이 원무과가 있어요."

발을 내디디니 몸이 부서지는 것 같다.

억지로 다리를 옮겼다.

간호사 스테이션은 고작 십여 미터 앞.

고작 그 조금 걸었다고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부축해준 간호사는 다른 병실로 쏙 들어가고, 스테이션에 앉아 있던 원무과 직원이 뚱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교통사고 때문에 입원했다고 들었는데요, 접수부터 하라고 해서요."

"아. 접수가 안 되어 있으신가 봐요. 성함이?"

"김준······ 김전사요."

"신분증도 같이 주시겠어요?"

눈치 빠른 간호사가 환자복에 지갑을 넣어놓았다.

지갑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주자 원무과 직원이 키보드를 후려갈겼다.

"사흘 전에 입원하셨네요? 응급실 비용, 입원 비용, CT랑 X-ray 촬영 비용, 주사랑 약, 식대까지 다해서 22,370,569원입니다."

"네? 뭐라고요?"

지금 뭐라고 했어?

2천 2백만 원?

장난해?

사흘 입원했는데 2천 2백이 말이 되냐!

여기가 미국도 아니고!

"본인 부담금이 2천 2백이에요?"

"보험 없다고 나오는데요. 보험 없으면 전액 본인 부담이죠."

"보험이 왜 없어요?"

"없는데요? 전산에 안 떠요."

"국민건강보험은요?"

"국민건강보험? 그게 뭐예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옆에서 일하던 간호사들도 나를 이상한 사람 보듯이 쳐다본다.

원무과 직원이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했다.

"군단 보험이나 마탑 보험, 교단 보험 같은 거 없으세요? 신화생명이나 금오생명도 괜찮고요."

"없어요······"

없는 게 아니라 애초에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다.

군단? 마탑? 교단?

그게 다 뭐냔 말이야.

'아!'

순간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케인 서울 설정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서울을,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네 갈래의 세력.

군단, 재벌, 마탑, 교단.

방금 원무과 직원이 말한 보험의 이름이 이들과 일치한다.

신화니 금오니 하는 것도 아케인 서울의 5대 재벌 중 하나였으니까.

원무과 직원이 나를 빤히 보다가 말했다.

"보험 없으신 것 같은데 결제는 어떻게 하실래요?"

"······카드 됩니까?"

"당연히 되죠. 할부 몇 개월로 해드릴까요?"

"무이자는 몇 개월까지 되죠?"

"네? 무이자요? 세상에 무이자 할부가 어디 있어요?"

또다시 숨이 턱 막혔다.

무이자 할부가 없다고?

어떤 가능성이 스멀스멀 등골을 타고 올라온다.

애써 현실을 외면하면서 신용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12개월 할부로 해주세요."

"12개월이면 49% 적용되서 33,332,147원이고 매달 2,777,678원씩 내셔야 해요."

"이자가 그렇게 비싸요?"

"49%가 뭐가 비싸요? 저희는 병원이라 적게 받는 거예요. TV나 냉장고 안 사보셨어요? 기업에선 70%도 받아요."

법정이자 한도 같은 거 없냐?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원래 알고 있던 세상이 저 멀리 도망쳐 버린 것 같다.

어떻게든 결제를 마치자 원무과 직원이 신용카드를 들고 흔들었다.

"지금 추가 입원 오더랑 검사 오더 떴는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더 입원하실 거면 선납하셔야 해요."

"어, 얼마나요?"

"MRI랑 정신 분석, 마법 투시 검사까지 떴으니까 검사비만 3천만 원 조금 넘네요. 한 달 입원까지 하면 대충 1억 7천 넘을 것 같은데 10% DC해서 1억 6천으로 맞춰드릴게요."

한 달 입원에 1억 6천.

정신 나갈 것 같은 소리다.

"됐습니다······"

"그럼 퇴원하세요."

"퇴원요? 지금요?"

"하루 더 입원하시게요? 입원비가······"

"아, 퇴원할게요! 퇴원한다고요!"

온몸이 아프다.

상황 파악도 안 된다.

진저리를 치면서도 한 가지를 확인했다.

"제가 교통사고 피해자인데 보상 같은 건 안 나옵니까? 그, 가해자 측에서요."

"그 사람도 죽어서요."

"예에?"

"보험이라도 있으면 다행인데 요즘 누가 트럭 몰면서 보험에 가입해요? 무보험이고 가해자는 죽었고, 가해자 가족들도 다 상속 포기해서 방법이 없어요."

"나라에서 나오는 것도 없고요?"

"없죠."

매몰찬 한 마디.

상식이 실시간으로 거부된다.

국민건강보험도 없고 트럭 운전수는 무보험이었고 병원비 지원도 안 된다?

더 할 말이 없었다.

짐을 챙겨서 병원을 나왔다.

다행히 갈 곳은 있었다.

주민등록증에 기록된 주소, 신림동의 한 고시원.

끼기긱!

고시원 문을 열자 들리는 쇠 찢어지는 소리.

원래 세계의 고시원보다 더 낡고 더 볼품없었다.

공용 주방은 비좁았고 퀴퀴한 지린내가 코를 자극했다.

그래도 집이라고 1평짜리 방에 들어오자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좁다."

원래 살던 고시원은 2평짜리였다.

2평에서 1평.

그 작은 차이가 마음을 더 옥죄게 만든다.

벽에 슨 곰팡이도 그렇고 다 썩은 미니 책상도 그렇고.

아무리 싸구려 고시원이라곤 하지만 너무한 거 아냐?

최소한 도배는 해주고 가구 정도는 갈아줘야지!

쾅쾅쾅!

항의라도 할까 생각할 때 누군가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학생! 전사 학생! 안에 있어?"

"아, 네. 있습니다. 잠시만요."

문을 열자 불독 닮은 아줌마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학생! 이번 달 월세는 언제 주려고? 벌써 두 달이 밀렸어! 석 달 밀리면 강제 집행 들어가는 건 알지?"

"아······ 보증금 안 남아 있어요?"

"진작 다 까먹었지! 하여간 언제 줄 거야? 일 안 해? 그리고 옷은 왜 그래? 얼굴에 붕대는 뭐고?"

"제가 교통사고를 당해서요."

"교통사고?"

사납게 몰아붙이던 아줌마가 움찔하며 놀랐다.

"사고가 꽤 크게 났나 봐?"

"예. 죽은 사람도 있대요."

"저런······ 보상금은?"

"못 받았어요. 가해자가 무보험이라서."

"큰일 났네. 그럼 여태 병원에 있다가 온 거야?"

"네. 다행히 다친 곳은 없대요."

"다행이네, 다행."

사고가 난 걸 알아서일까?

아줌마의 태도가 확연히 부드러워졌다.

"어디 탈 난 곳은 없고? 다 건강하대?"

"네. 다행이죠 뭐."

"그래. 젊은 사람은 몸이 재산인데 어디 아프면 안 되지. 입원까지 했으면 병원비가 꽤 많이 나왔겠어. 전사 학생은 보험 있나? 보험 없으면 병원비 그거, 정말 부담스럽거든."

첫인상과 다르게 공감 능력이 좀 있는 사람인가 보다.

역시 사람 얼굴 보고 판단하면 안 돼.

"제가 보험이 어딨겠어요. 한 달은 더 입원해야 한다는 거 그냥 나왔어요."

"아니. 그럼 어떻게 해? 의사 선생님이 입원하라고 하면 입원해야지, 돈 없다고 그냥 나와?"

"어쩌겠어요. 돈 나올 구석도 없는데."

"그렇단 말이지······"

아줌마가 눈을 이리저리 굴린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이.

"내가 아는 병원을 소개해줄까?"

"소개요?"

"그래! 정식으로 면허증 걸고 진료하는 의사는 아닌데 실력 하나는 최고야. 우리 같은 신림동 토박이들은 다 그 선생님한테 간다니까? 저번에 207호에 이씨 아저씨 간경화도 내가 소개해서 치료했잖아!"

"치료비는 받으실 거 아니에요."

"그렇지. 치료비가 문제지. 그래도 평범한 병원보다는 훨씬 싸! 거의 삼 분의 일? 그 정도밖에 안 한다니까?"

삼 분의 일이라고 해도 많다. 오늘 결제한 금액이 3천 3백이니까 삼 분의 일이면 천만 원 이상.

아줌마가 뱀처럼 입맛을 다셨다.

"가장 좋은 점이 뭔지 알아?"

"뭔데요?"

"그 선생님은 치료비를 꼭 돈으로만 받지는 않아."

"그럼 뭘로 받아요?"

"글쎄? 여러 가지 있지. 가장 좋은 건, 응······ 역시 의체 재료겠지."

"의체 재료요?"

재료?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재료로 쓸 게 있나?

계좌를 확인한 건 아니지만 빈털터리일 게 뻔한데?

아줌마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정말 모르겠어?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거야? 사람 장기 말이야. 사람 장기!"

"예에? 장기라뇨? 농담이시죠?"

"전사 학생이 가진 건 그 젊은 몸뚱이밖에 없잖아. 월세도 밀리고 병원비도 빚으로 달아놓고 이대로 살 거야? 그러다 진짜 골로 가, 골로! 사람이 빚 무서운 줄을 알아야지! 차라리 각막 하나 떼서, 아니 눈알 하나 떼서 주고 몸도 치료하고 빚도 다 갚아버리는 게 낫지. 월세도 한 1년 선납해 버리고 말이야! 요새 인공 눈이 얼마나 좋게 나오는 줄은 알아? 마법 안구 아니라 광학 안구도 사는 데 아무 지장 없어! 어떤 사람은 일부러 자기 눈 떼서는 인공 눈을 넣는다더라!"

"맙소사."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정말로 맙소사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그렇지 각막을, 눈을 떼서 팔라고 해?

이거 혹시 소개해준다는 의사도 무면허 돌팔이 아니야?

소름이 쫘아악 돋았다.

"나가세요!"

"어어, 어딜 손대?"

"다음 달에 월세 다 드릴 테니까 나가시라고요!"

"정말이지? 월세 준다고 했다? 지금 녹음하고 있어!"

"드린다니까요! 가세요!"

"월세 안 내놓기만 해봐. 진짜 강제 집행할 거야. 학생도 법원 집행자들 손 매서운 건 알지? 강제노역 끌려가기 싫으면 눈알이 아니라 신장이라도 팔아서 돈 마련해 놔!"

"가시라니까요!"

쾅!

겨우 문을 닫았다.

문밖에서 따발따발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요즘 것들은 예의를 모른다느니, 지 생각해서 좋은 제안을 했는데 무시한다느니 하는 어처구니없는 말.

한참을 그러다 쿵쿵대며 멀어진다.

몸에서 힘이 빠져서 벽에 기대고 겨우 주저앉았다.

"시발."

진짜 시발이다.

설정으로만, 그래픽으로만 알았던 이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더 막장이었다.

[신은 죽었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황금을 숭배하고 마도과학을 신앙하며,]

[인류는 스스로 노예가 되었다.]

아케인 서울을 처음 실행하면 나오는 나레이션.

대충 듣고 스킵한 그 나레이션을, 이토록 절절히 체험할 줄이야.

의체를 삽입하라고?

그게 그렇게 좋으면 자기나 하던가!

"후우."

자, 이제는 인정하자.

자그마한 거울 하나 없는 살풍경한 방구석.

스마트폰의 카메라를 전면 카메라로 전환한다.

미니 책상에 적당히 기대놓고서 거울처럼 얼굴을 비춘다.

붕대로 칭칭 감싸서 눈과 코, 입만 덩그러니 보이는 얼굴.

"후우우."

붕대를 푼다.

한 번, 두 번, 세 번······

허연 붕대가 켜켜이 풀리고 창백하게 젖은 얼굴이 드러난다.

평범한 외모.

다만 눈에 띄는 상처가 하나 있다.

왼쪽 뺨.

길게 패인, 아직 피딱지도 아물지 않아 흉측한 상처.

눈에 익었다.

조금 어리긴 했지만 스마트폰에서 매일 보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태생 N급이자 기본 캐릭터, 튜토리얼 처음부터 플레이어와 함께하는 김전사였다.

"하하하, 하하하하."

나오느니 웃음뿐.

현실이 칼이 되어 심장을 찌르는 느낌이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고.

기분 좋게 천마 뽑고 잠들었는데 게임 속 튜토리얼 캐릭터가 되어 있을 줄이야.

"빌어먹을."

현실을 자각하자 드는 것은 맹렬한 위기감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막장인 아케인 서울.

그런데 내가 아는 대로라면 조만간 고대신 부활이니 핵전쟁, 차원 균열 같은 에피소드가 실행된다.

가만히 넋 놓고 있으면 죽는다.

돈이 없어도 죽고 힘이 없어도 죽고 운이 없어도 죽는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냥 죽어줄 수는 없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

나는 핏발 선 눈으로 스마트폰 화면 속 내 얼굴을 노려보았다.

"김전사."

그리고 아케인 서울에 태운 1만 시간.

믿을 건 그것뿐이었다.

김전사가 되다 -2-

자, 흥분을 가라앉히자.

내가 어떻게 이 세계에 온 건지, 뭐 때문에 김전사가 됐는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답이 없는 문제잖아.

신이나 악마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농간을 부렸든, 외계인이 날 납치해서 어디 이상한 기계에다 넣고 실험을 하고 있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생존이 중요하다.

살아남아야 한다고.

잘못하면 몇 달 안에 죽거나 장기를 적출당할 판이다.

'돈이 없어.'

나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군단 은행]

[잔액 136,711원]

추가로 지갑에 세종대왕님 네 분.

전 재산 17만 원!

이거 가지고 어떻게 사냐?

당장 다음 달 돌아올 카드값에 월세는?

[전화를 받지 않아 소리샘으로 연결되오니······]

"쯧. 너도 불쌍한 인생이구나."

스마트폰에 저장된 연락처에 전화를 해봐도 받질 않는다.

반장님, 부반장님, 최씨 아저씨 등등.

병원에서 전화 건 줄 알고 무시하는 거겠지.

어차피 모르는 사람들.

김전사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어떤 인간관계를 가졌는지 알 길은 없었다.

게임 설정은 그렇게 세세하지 않았고 스마트폰에도 아무 정보가 없었으니까.

벽에 기대고 앉아서 눈을 감았다.

'돈부터 벌자.'

아케인 서울은 흔히 말하는 과금 좆망겜이다.

거기서 무과금으로 살아남는 법?

역시나 돈이 필요했다.

현금 대신 인게임 화폐. 원(₩), 다이아, 넥타르 같은 거.

특히 앵벌이 김전사가 쏠쏠했지.

파티 네 명 모두 앵벌이 김전사로 채워서 광질 돌리면 어설픈 과금 유저 따윈 개처바를 돈이 나왔다.

'지리산 마굴은 안 열렸겠지?'

잘 모르겠다.

지리산 마굴은 에피소드 7 이후에 열리지만, 여긴 게임이 아니라 또 다른 현실 혹은 이세계니까.

게임에선 순차적으로 패치된 마굴과 금역, 미궁이 이미 다 존재할 수도 있다.

"상태창."

실망스럽게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스태이터스. 스탯. 능력치. 캐릭터창. 캐릭터. 김전사. C. 에이, 젠장."

날로 먹기는 실패.

거 이세계에 보냈으면 뭐 치트 능력이나 상태창 같은 건 줘야 하는 거 아뇨?

설마, 내가 아는 지식까지 다 쓸모없진 않겠지?

억지로 마음을 다잡으며 내 앵벌이 김전사를 떠올린다.

최근이 아닌 몇 년 전에, 게임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됐을 때 쓰던 김전사를.

'효율이 영 안 나오겠는데······'

일단 가장 기본적인 곳부터 가보자.

어차피 지리산 마굴이나 백두산 마굴은 고레벨이 된 다음에나 입장할 수 있다.

지금처럼 쥐뿔도 없을 때는 매립지 마굴이 최고지.

단, 그 전에 먼저 확인해야 하는 것 하나.

나는 책상에 굴러다니던 볼펜을 집었다.

눈을 꽉 감고는 그대로 손등 위에 내리찍는다.

"켁!"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팠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여전히 눈을 질끈 감은 채 손등을 찍고 또 찍었다.

두근!

그러다 문득, 심장이 크게 한 번 박동했다.

온몸이 뜨거워진다.

용암이 혈류를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느낌이다.

눈을 뜨자 왼쪽 손등에 난 상처가 천천히 재생되는 것이 보였다.

"오케이."

노림수가 먹혔다.

만약 이게 게임이었다면 이런 메시지가 떴을 것이다.

[김전사(0 Lv)가 [상처 회복] 특성을 획득했습니다.]

재생도 불사도 아닌, 3티어따리 공용 특성이지만 이게 어디야.

마음이 확 놓였다.

"후우우."

하나만 더 해보자.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한다.

게임에서는 터치 몇 번으로 끝낼 행동이지만, 상태창 없는 현실에선 이런 걸 해야 하지 않을까?

'없앤다. 없앤다. 없앤다.'

속으로 몇 번이나 생각했다.

상처 회복 특성을 삭제한다고.

안 통할지도 모르니까 상처 회복 능력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염원했다.

그다음 또 손등을 내리찍었다.

"아으!"

차라리 다른 특성으로 실험할 걸 그랬을까?

하지만 상처 회복만큼 즉각적으로 얻기 쉬우면서 반응을 보기 좋은 특성도 드물다.

비명을 지르며 손등을 보니, 다행히도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처음 만든 상처는 다 회복된 채로.

이번에도 성공.

"휴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공적으로 특성이 삭제된 것.

아깝지 않냐고?

실은 이거야말로 태생 N급 튜토리얼 캐릭터, 김전사의 가장 큰 특징이자 강점이다.

백지 신체.

기본으로 주어지는 캐릭터인만큼 시작 특성이 없다.

다른 김 시리즈, 김철권이나 김마법, 김사제는 각각 특성을 하나씩 가지고 시작하는 데도.

대신 특성 획득과 변경, 삭제가 그 어떤 캐릭터보다 자유롭고 쉽다.

다른 캐릭터는 특성을 변경하거나 삭제하려면 다이아가 필요하지만 김전사는 요구 코스트 제로.

특성 획득도 조건 대폭 완화.

내가 R급과 SR급 캐릭터를 몇 번 뽑았으면서도 굳이 김전사를 주력으로 키운 이유 중 하나였다.

"다행이다."

특성 획득 조건은 게임과 똑같이 작동하는 것 같다.

그럼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지.

대충 옷을 입고 고시원을 뛰쳐나갔다.

음습한 뒷골목이 펼쳐진다.

고장 나서 깜빡거리는 가로등.

다 깨진 보도블록.

곳곳에 고인 물웅덩이.

잔뜩 쌓인 쓰레기 더미.

그 위에서 앵앵대는 파리.

어딘가에서 풍겨오는 썩은 내.

목각인형처럼 삐걱삐걱 걸어오는 주정뱅이.

주정뱅이가 덜그럭대며 웃는데······ 강철 턱과 톱니바퀴 치아가 훅 드러나며 거친 마찰음을 흘렸다.

악몽에서나 나올 법한 기괴한 모습.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헉?"

"흐흐흐."

취객이 흘흘 웃고는 나를 지나쳤다.

'이씨 아저씨.'

불현 듯 그런 이름이 떠올랐다.

이씨 아저씨······

바로 몇 시간 전에 들은 게 있지.

[저번에 207호에 이씨 아저씨 간경화도 내가 소개해서 치료했잖아!]

간경화 치료하는 대신 턱과 입, 치아를 치료비로 냈나 보다.

저절로 몸이 떨렸다.

이따위로 야만적인 세계라니!

조금만 지체하면, 멍하니 있으면 나도 저런 꼴이 될 것이다.

몸서리를 치며 달리고 또 달렸다.

뒷골목에서 조금 넓은 골목으로, 대로로, 인근 공원으로.

고작 몇백 미터 차이인데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다.

가로등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고 산책 나온 시민들이 부지런히 공원을 도는 중이었다.

"왈왈!"

"헤헤헤!"

원래 세계와 별다를 게 없는 장면.

개는 뛰어놀고 아이들은 뭐가 좋은지 웃음을 터뜨린다.

아직은 초저녁.

나는 전력 질주하면서 공원을 돌기 시작했다.

"헉, 헉, 헉."

원래 김전사가 체력이 약했나?

금세 턱까지 숨이 차올랐다.

무시하고 달린다. 호흡 조절, 체력 따위 다 무시한다. 그냥 달리고 달린다. 가슴이 터질 것 같고 세상이 노랗게 변하지만,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워지지만 그래도 달린다.

쉬면 안 된다. 달리고 달리다 쓰러져 땅에 얼굴을 처박아야 한다. 응급실에 실려 가면 더 좋다.

그것이 내가 얻으려는 특성의 획득 조건이니까!

"뭐야?"

"앞 좀 보고 다니쇼."

앞이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몇 번 부딪히자 사람들이 짜증을 냈다.

척 보기에도 정상이 아닌 나.

걱정하거나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이상한 사람인가 싶어서 슬슬 피해 갈 뿐.

"컥!"

결국 쓰러졌다.

흙바닥에 대차게 얼굴을 박았다.

코가 깨지면서 코피가 줄줄 흘렀다.

"어······"

"엄마. 저 아저씨 이상해."

"집에 가자."

사람들이 내게서 멀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넘어졌던 내가 일어났는데, 코가 깨져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실실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나를 누가 정상으로 보겠어?

다 상관없었다. 특성 획득을 확인했기 때문에.

[활기]

문자 따윈 뜨지 않는다.

대신 고갈된 체력이 샘솟고 있었다.

무겁던 몸은 가벼워지고 노랗게 변했던 세상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내가 모든 초기 앵벌이 김전사에게 부여했던 특성, 활기.

별것 아닌 공용 특성이지만 앵벌이에서만은 다르다.

광질 정도의 간단한 작업이라면 무휴식 24시간 활동도 가능하게 하니까.

'그리고······'

공원에 있는 운동기구를 확인한다.

다행히 내가 찾는 운동기구가 있었다.

체스트 풀.

마침 비어 있어서 의자에 앉은 후 중량을 최대로 높이고 당기기 시작했다.

"어윽."

제대로 되지를 않는다.

하여간에 전사 계열 캐릭터 주제에 묘하게 부실한 몸이야.

"으, 한 번만······"

최대 중량을 한 번만 땡기면 된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거의 어거지로, 전신을 써서 매달리다시피 해서 겨우 당겨냈다.

양쪽 철봉이 가까스로 내려온 직후였다.

팔에 시원한 느낌이 돌면서 근육이 두꺼워지더니, 돌연 철봉이 가벼워졌다.

성공!

[근력] 특성 획득이다.

이제 공원에서 할 건 하나만 남았다.

땀을 닦아내고 공원을 설렁설렁 돌아다녔다.

매의 눈으로 땅바닥을 훑어본다. 가끔 풀숲을 뒤지거나 발로 흙을 탁탁 파헤치기도 했다.

'분명히 있을 텐데······'

아케인 서울의 모든 공원에는 반드시 그것이 존재한다.

아무 캐릭터나 가서 산책시키면 랜덤하게 집어 오는 그것.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찾아냈다.

5백 원짜리 동전!

눈이 확 트이면서 공원 여기저기 푸른 광원이 맺혔다.

'이제 됐네.'

[보물찾기] 특성.

앵벌이, 특히 광질에는 필수 중의 필수.

보물찾기 특성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마굴을 가도, 아무리 레벨 높은 오염체를 잡아도 효율이 안 나온다.

안타깝게도 모든 준비가 끝난 건 아니다.

가장 하기 싫은 일이 남아 있었다.

진짜 해야 하나?

그래도 볼펜으로 손등 찍기보단 낫겠지.

그렇게 자위하며 고시원 앞 뒷골목으로 돌아왔다.

적당한 쓰레기 더미를 찾아 앞에 선다.

"냐오오옹!"

쓰레기를 뒤지던 애꾸눈 고양이가 타다닷 도망쳤다.

그 뒤를 멀거니 보다가 문득 코를 쥐었다.

지독하게 비리고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오, 진짜."

쓰레기 더미에 손을 가져간다.

눈을 감고는 쓰레기 더미를 뒤졌다.

뭔가 찐득하고 불쾌한 것이 손에 닿자, 그걸 그대로 움켜쥐어서는 얼굴에 확 문질렀다.

'으아아!'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나도 별로 평탄한 인생을 살진 않았지만 이런 적은 없었다고.

공장일을 하면 했지, 노가다를 뛰면 뛰었지, 이런 더러운 건 손대본 적도 없어!

'빌어먹을!'

이번 특성 역시 필수 특성이다.

단순히 돈을 더 벌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고 생존과 직결된 문제.

견뎌야 한다.

견뎌야 하느니라.

견뎌야 한다고 으아아으으아아시바아아아알!

"우웨에······ 어?"

효과는 있었다.

몇 번을 더 문지르자 어느덧 냄새가 싹 가셨다.

아니, 완전히 못 느끼는 건 아니고 역겹고 토할 것 같고 격하게 자살 마려운 상태에서 수산시장에서 생선 비린내 맡는 정도로 적어진 수준이라고 할까?

이것만 해도 천국에 온 것 같다.

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쓰레기를 몽땅 던져 버렸다.

"으, 찝찝해."

입고 있던 옷으로 얼굴을 박박 긁은 다음 그것마저 버렸다.

4번째로 얻은 특성은 [오염 저항].

광질할 때 없으면 마력 오염 때문에 하루 일하고 며칠은 쉬어줘야 한다.

죽거나 신체 변형으로 신전 신세를 져야 할 수도 있고.

"후우우."

힘든 건 끝났다.

남은 건 [추출]과 [합성]

둘 다 얻기 쉬웠다.

얼굴에 철판 깔고 근처 편의점에서 이쑤시개 통을 사서 나왔다.

"노숙자 새끼 냄새 쩌네."

뒤에 대고 날아오는 욕은 무시하도록 하자.

다 영광의 상처다, 이 말이야.

고시원에 돌아와 샤워한 다음 이쑤시개 통을 열었다.

책상 위에 이쑤시개를 차곡차곡 쌓는다.

막상 해보니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정교한 물체를 만들어야 하는데 숨만 조금 크게 쉬어도 무너지기 일쑤, 손만 살짝 떨어도 와르르 망가지기 십상이었으니.

"쓰레기보단 낫다. 쓰레기보다는 낫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접고 몇 시간 넘게 매달렸다.

한참을 악전고투한 끝에 겨우 완성.

어설픈 이쑤시개 집이 완성되자마자 눈이 시큰거리면서 이쑤시개끼리 연결된 가상의 선이 보였다.

"됐다."

이어서 이쑤시개 집의 이쑤시개를 하나씩 둘씩 빼낸다.

젠가 하듯이. 무너지지 않도록.

여기서 특성을 얻기 전에 집이 무너지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다. 어찌나 집중했는지 눈알이 빠질 것만 같았다.

하나, 둘.

다시 하나, 둘.

몇 번을 반복했을까?

이쑤시개 집이 무너지기 직전, 세상이 한 번 빨간색으로 변했다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보이는 광경.

이쑤시개 집 군데군데 붉은 반사광이 어려 있었다.

"끝!"

진짜 끝이다. 다 끝났다고.

체력 회복을 돕는 [활기]

힘과 물리 공격을 강화하는 [근력]

희귀 전리품을 탐지하는 [보물찾기]

오염 마력에 저항하는 [오염 저항]

소재를 즉석에서 획득하는 [추출]

소재를 상위 등급으로 조합하는 [합성]

초반 앵벌이용 김전사 완성이다!

'몇 개 더 추가하면 완벽한데.'

아쉽지만 불가능하다.

한 캐릭터가 가질 수 있는 특성은 여섯 개로 제한되니까.

'여섯 개······ 맞겠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설마? 혹시?

에이 아니겠지 그게 되면 개사기지 하면서도 볼펜을 들었다.

"후으읍."

심호흡 크게 한 번 하고 볼펜을 내리찍자 눈앞에 불똥이 튄다.

"커흑!"

저절로 나오는 신음.

괜히 했다!

내가 미쳤지!

아주 정신이 나갔었어!

내가 이 짓을 또 하면 개아드님이다!

"아 진짜."

그 난리를 친 게 무색하게 상처는 그대로였다.

진짜 개삽질을 했네. 개삽질을 했어.

짧게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상처 회복 있으면 좋겠다······'

별로 좋은 특성은 아니지만 최소한 아픈 게 금방 없어지지 않겠나.

너무 진심으로 찍어버려서인지 손등이 심하게 아렸다.

원래 세계였다면 응급실 찾아갔을 정도로.

설마 뼈 부러진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어?"

당황해서 홉뜬 내 눈에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내 왼쪽 손등.

볼펜을 찍어버려 상처 난 살갗이 꾸물꾸물 재생되는 것 아닌가.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김전사가 되다 -3-

머릿속에서 벼락이 쳤다.

대박이다!

생각해 봐라.

특성을 무한으로 가질 수 있다면?

허접한 공용 특성이라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은 여섯 개 가지고 빌빌거릴 때 백 개, 천 개씩 가지고 있으면 먼치킨 예약이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어디······"

고시원 방의 불을 껐다.

스마트폰 손전등을 켜고 눈에 확 들이대자 안구가 따끔거리며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아울러 어둡던 방 안이 살짝 밝아진 느낌이 든다.

[밝은 눈] 특성.

"됐다!"

주먹을 불끈 쥐었으나 환호하기에는 일렀다.

밝아진 눈을 통해, 주먹에 울룩불룩 돋아 있던 힘줄이 사그라드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당황스러움에 주먹과 팔을 내려다본다.

근력 특성 때문에 근육질로 변했던 팔이 원래처럼 앙상한 모습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게 무슨······ 아!"

잠깐만.

그러고 보니 아까 전부터 몸이 묘하게 무겁다.

군대에서 천리행군을 뛴 다음 날처럼.

활기 특성이 있다면 이런 느낌을 받을 수가 없는데.

"그럼 그렇지."

무한 특성이 말이 되냐?

알고 보니 새로운 특성을 얻은 만큼 기존 특성이 삭제되는 모양.

'아니지.'

그래도 엄청난 거다.

나는 분명히 볼펜을 사용하지 않고도 상처 회복 특성을 가져왔으니까.

조건 없는 특성 획득······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한다.

'염동력, 염동력, 염동력.'

혹시나 해서 한 거였는데 여지없이 실패,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기서 나는 새로운 능력에 대한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새로 특성을 얻는 건 아케인 서울과 똑같아.'

단, 그 이후가 다르다.

이미 획득했다가 버린 특성을 다시 가져오는 것.

이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나는 상처 회복과 밝은 눈 특성을 삭제하고 활기와 근력 특성을 복구했다.

아주 쉬웠다. 마음만 먹자 자연스럽게 특성이 교체된다. 눈이 어두워지고 상처 회복이 멈추는 대신 상쾌한 느낌이 치솟고 팔이 두꺼워졌다.

"하하하."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특성 스위치?

특성 전환?

무한 특성에 비교하자면 별거 아닐지 모른다.

그래도 이 능력은, 특성 전환은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품고 있었다.

1만 시간 동안 내가 키웠던 김전사 시리즈를 마음껏 활용할 수 있다는 얘기니까.

특성 전환에 시간이 많이 걸리냐면 그렇지도 않다.

집중해서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면 된다.

익숙해지면 1초는커녕 0.1초도 안 걸리겠지.

전투 중에 퓨어탱 김전사로 전환해서 방어하고, 극딜 김전사로 전환해서 공격하는 것도 가능하다!

"후우."

대박, 초대박.

아쉬운 점이 있다면 느긋하게 특성 수집할 시간이 없다는 것.

돈이 문제고 돈이 원수다.

특성을 모으더라도 돈을 벌면서 해야 한다.

'뭐, 좋아.'

계획을 바짝 당길 수 있게 됐다.

원래는 나 죽었소, 하고 한동안 광질만 뛸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끝날지도 모른다.

'일단 좀 자자.'

특성 모으고 어쩌고 하는 사이 밤이 깊었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았지만 억지로 눈을 감고 시간을 보냈다.

새벽 3시가 넘도록 뒤척이길 한참.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고 눈을 떴을 때는 벌써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게임에서는 간단했다. 아무 0레벨 마굴을 선택해서 들어가면 됐다.

여기서는?

'설정상으로는 정부가 마굴을 관리하고 있다고 했지.'

0레벨 마굴은 대부분 도시 근처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인이 마음대로 들어가기도 어렵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내가 아는 0레벨 마굴을 검색해 보니 마굴은 허가받은 사람만 출입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허가 없이 들어가면 과태료 부과 대상이라고.

'청소부로 시작해야지.'

청소부도 쉽진 않았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마굴 청소부가 되는 방법은 세 가지.

지자체 공개 채용, 청소부 협회 등록, 인력사무소.

공채는 어렵다. 말이 청소부지 공무원이 되는 길이고 복지와 수당이 빵빵해서 경쟁률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청소부 협회도 마찬가지. 근대화 이후 설립된 청소부 협회의 역사는 유구하고, 그만큼 강력한 이익 집단이 되어 인맥 없이 협회에 소속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도 인력사무소냐."

노가다를 뛰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친숙해지는 게 인력사무소다.

원래 세계에서 겪은 일을 생각하면 이가 갈리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인력사무소 말고는 방법이 없다.

마침 근처에 작은 인력사무소 하나가 있었다.

바로 가서 문을 열자 인력사무소 안에 빼곡히 앉아 있던 사람들이 홱 돌아본다.

삶에 찌든 얼굴들.

지치고 내려앉은 어깨.

헝클어진 머리칼.

퀴퀴하게 풍기는 냄새.

남자, 여자, 고등학생이나 될 법한 어린애, 환갑은 진작 넘겼을 노인 모두 다를 게 없었다.

어디 한 군데가 일그러진 채로, 생물학적으로 변형되었거나 마도공학 의체를 삽입한 채 날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신참인가."

"어려 보이는데."

"우리 노루 초인님이랑 비슷하고만, 뭘."

"흥."

코웃음을 치는, 20대 초반의 왜소한 청년.

다리가 괴상하게 휘어 있었다.

입에는 짧은 전자담배를 물었는데, 기묘한 형광색 광채가 명멸하며 청록색 연기를 뿜어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누군지 안다.

[R 노루]

선천적으로 타고난 노루 다리가 특징적인 초인이다.

노루 다리 덕에 민첩이 굉장히 높게 측정되었고 어릴 때부터 마약을 했다는 설정 때문에 도핑 한계가 꽤 높았다.

여기 있는 걸 보면 아직 초인으로 각성하지는 못한 모양.

내 시선을 느꼈는지 노루가 눈을 부라렸다.

"뭘 봐?"

초면에 반말을 박아?

하긴 마약쟁이가 인성이 좋아야 얼마나 좋겠어.

어차피 R급. 나도 몇 번 써먹지도 않고 갈던 초인이다.

머릿속에서 지우고 접수대를 향해 다가갔다.

예쁘장하게 생긴 접수원 아가씨가 방긋 웃는다.

"안녕하세요! 최선수 인력사무소입니다! 어떻게 오셨어요?"

"여기 오면 일자리 소개해준다고 해서요."

"아! 혹시 소개받고 오셨나요?"

"그냥 인터넷으로 검색했습니다."

아, 하고 접수원이 살짝 미소 지었다.

대충 무슨 사정인지 짐작이 간다는 듯이.

이어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먼저 서류부터 작성해주시겠어요?"

"그러죠."

접수대에 볼펜 몇 개가 부착되어 있었다.

원래 세계에서 보듯이 스프링으로 부착된 게 아니라, 가늘지만 충분히 질긴 쇠사슬로 고정된 채로.

누가 훔쳐 가기라도 하나?

실소를 흘리며 서류를 작성한다.

[직업 알선 요청서]

[성명 김전사]

[연락처 xxx-yyyy-zzzz]

[주소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aa로bb길cc dd고시원 207호]

[희망 업종]

[농업□ 임업□ 어업□ 건설업□ 물류업□ 경호업□ ······ 청소업□ 정화업□]

서류를 쓰던 내 눈이 마지막 부분에 멈췄다.

청소업과 정화업.

이중 청소업이 아니라 정화업에 √ 표시를 했다.

서류를 돌려주자 접수원이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화업이 뭔지는 알고 오셨죠?"

"알죠. 마굴 청소 아닙니까."

"쯔쯔, 저런."

"또 멀쩡한 사람 하나 죽어 나가겠네."

뒤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접수원이 방실방실 웃으며 추가 서류를 내밀었다.

"정화가 쉽지 않다는 건 아시죠? 위험하다는 것도요."

"당연하죠."

"이거 서류 읽어보시고 사인해주세요. 나중에 딴소리하시면 안 돼요!"

[마력 정화 참여 신청서]

[신체 오염 동의서]

[신체 책임 각서]

[제반 사항 청취 확인서]

자질구레한 말이 많았지만 핵심은 이거였다.

모든 책임은 본인에게 있으며 오염 마력으로 인해 마력병이 발병해도, 신체가 변형되어도, 만에 하나 오염체로 변이되더라도 최선수 인력사무소에게는 일체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이밖에 수수료 20%, 점심 및 간식 제공 없음, 4대 보험 가입 필수라는 항목이 보였다.

'와, 이건 또 신박하네.'

4대 보험.

원래 세계의 4대 보험과는 백만 광년쯤 거리가 있다.

모두 사보험이며, 인력사무소와 연계된 듣보잡 보험회사에 보험 가입이 필수였다.

그만큼 떼고 일당을 지급한다는 소리.

어쨌든 보험 들어주니까 좋은 거 아니냐고?

퍽이나.

보나 마나 어떻게든 안 주려고 수를 쓰겠지.

할 수 없다.

내 처지에서는 이것마저도 감수해야 한다.

다른 어느 인력사무소를 가더라도 비슷한 조건 아니겠나.

서류 작성을 끝내고 내밀자 접수원이 냅다 받아 챙겼다.

"다 되셨네요! 이제 소장님 면담하실게요. 소장님! 신규 있어요! 신규 정화업이요!"

"들어오라고 해."

소장실은 접수대 뒤, 길고 좁은 복도를 지나 있었다.

상당히 넓다.

대기실보다 오히려 클 지경.

한쪽에는 거창한 원목 책상이 놓였고 그 앞에 있는 소파는 척 봐도 푹신해 보였다.

책상에는 머리가 다 벗겨진 아저씨가 담배를 문 채 앉아 있다.

[최선수 소장]

소장이 눈만 굴려 나를 쳐다보았다.

평범한 눈이 아니다.

눈동자에서 기묘한 광채가 기름때처럼 번들거렸다.

"흠."

소장이 자기 뺨을 한 번 긁었다.

이제 안 건데 뺨 한쪽이 강철로 되어 있었다.

괴상하게도 격자무늬를 새겨넣은 형태.

"신규라고?"

"네! 정화업 지망이세요!"

"정화업 좋지. 거기 앉으시게. 어디 보자, 김전사 씨시라고?"

"예. 김전사입니다."

소장이 고개를 숙여 서류를 본다.

"근처 사시는고만?"

"그래서 여기 왔지요."

"잘 생각했어. 가까운 곳이 좋지, 암. 뭘 하든 직접 얼굴 보고 하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단 말이야. 척 봐도 몸도 좋고 눈빛도 맑은 것이 마력 정화를 잘하게 생기셨어. 그래, 다니는 신전은 있고?"

"없습니다."

"저런, 저런. 그러면 안 되지. 마력 오염은 놔두면 안 돼. 주기적으로 신전에 헌금하고 정화 받아야 한다고. 내가 아는 신전이라도 소개해 드릴까?"

반말과 존대를 교묘히 섞는 말투다.

나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따로 알아보지요."

"뭐, 그렇게 하고······ 정화 경험은 있으신가?"

"아뇨. 처음입니다."

"처음, 처음이라 이거지. 따로 속해 있는 팀도 없고?"

"예."

"그럼 내가 적당한 팀에 넣어드리지. 운이 좋았어. 마침 결원 있는 자리가 있거든. 거기 팀장은 경력도 10년이 넘고 실력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야."

"잘됐네요."

"그렇지? 그런데 문제가 있어."

"문제라뇨?"

"거기 팀장이 사람을 좀 가려. 경력이 최소한 3년은 되어야 팀원으로 받거든."

무슨 소리인지 알겠다.

자기한테, 또 그 팀장이라는 사람한테 뒷돈을 달라는 거지. 아니면 수수료율을 조정하거나.

정말이지 말이 안 나온다.

벼룩의 간을 빼먹지, 수수료 20%로도 모자라 보험료랍시고 가져가고 뒷돈까지 챙기겠다고?

나는 얼굴을 굳혔다.

"제가 드릴 게 없어서요."

"흠! 바로 줄 필요는 없어. 어차피 자네도 배우는 처지 아니신가? 수업료 낸다고 생각하고 팀장한테 적당히 얹어주면 그만이야. 그렇게 한 2년, 아니지 1년만 배워도 한몫하게 될 테니 다른 팀에 가도 좋고 수업료를 조정해도 좋지 않겠어?"

아하.

그러니까 1년 동안 열정페이 하라고?

나는 얼굴을 더욱 딱딱하게 굳혔다.

"죄송하지만 제가 정말로 돈이 급합니다. 좀 경력 없으신 분이어도 괜찮습니다."

"아니,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마다한다고? 정신줄 놓으셨어? 마굴 청소가 얼마나 위험한데, 실력 있는 팀장 밑에서 배울 생각을 안 하고 돈부터 따지고 그래? 돈이 목숨보다 중요한 줄 아시나? 그러다 자네 죽어!"

"꼭 좀 부탁드립니다."

"으흠."

소장이 탐탁잖다는 시선을 보낸다.

그 와중에도 눈동자 깊은 곳에는 교활한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렇게 급하신가?"

"예."

"그럼 뭐······ 이렇게 하지. 정규 팀이 정화업의 전부는 아니야. 임시 팀이라고 들어는 봤나?"

"처음 듣습니다."

"다른 게 아니고 일이 있으면 그때그때 머릿수만 맞춰서 투입되는 팀이지.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팀장 몫이 빠지니 배당률은 괜찮을 거야. 어때? 생각 있으신가?"

소장과 눈이 마주친다.

짐짓 사람 좋은 얼굴을 한 소장.

얼굴만 보면 동네 인심 좋은 아저씨 같다.

하지만 나는 소장의 눈을 보고 원래 세계에서 지긋지긋하게 봤던 속내를 읽어낼 수 있었다.

[호구 새끼.]

이용해 먹겠다는 거지.

내가 임시 팀에 들어가도 정규 팀에 들어가는 것만큼, 혹은 그보다 더 많이 뽑아먹을 수 있다는 거고.

고작 0레벨 마굴에서 그게 가능할까?

······충분히 가능하다.

소장이 날 어디에 던질지 알겠다.

나는 씨익 웃었다.

"기꺼이 참여하지요."

마굴 청소 -1-

마굴 청소

"아저씨가 우리팀 신입이라고?"

노루가 위아래로 나를 훑어본다.

딱 봐도 탐탁잖은 얼굴.

나 마음에 안 드냐? 나도 너 마음에 안 든다.

"변이되지 마. 변이되면 죽여버릴 거니까."

그 말을 남기고 노루가 눈을 감았다.

나도 대충 버스 앞쪽 빈자리에 앉았다.

뒤쪽에 앉은 아저씨들이 수군거린다.

"저 새끼 바로 변이되진 않겠지?"

"초짜여도 뭐, 몇 번은 버티겠지. 일정 끝난 다음에는 알 바 아니고."

"하긴 억제제만 맞으면 되니까."

"우린 돈만 벌면 되고."

"젠장. 고작 몇백 벌겠다고 이게 뭔 짓거리야."

"우리 같은 처지에 이렇게 많이 버는 일자리가 흔해? 꼬우면 초인 되던가."

"후······ 노루 님이 부럽네."

아저씨들의 시선이 노루를 스쳐간다.

처지는 비슷하다. 몸 한 군데가 기괴하게 변형되었거나 괴상하게 생긴 의체를 삽입한 상태.

머리카락 대신 고슴도치 가시가 빼곡하게 난 아저씨. 다리 대신 강철 촉수 여덟 개를 문어처럼 단 아저씨. 몸이 반쯤 좀비화된 아저씨.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다.

아저씨 하나가 부럽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저번에 노루 님이 마력 반사 사진 찍었는데 마력 회로가 희미하게 비쳤다고 하더라고."

"허, 정말로?"

"그렇다니까."

"아예 찍힌 건 아니고?"

"아니지. 그랬으면 진작 초인탑 가서 1레벨 인증 받으셨겠지."

"부럽고만. 부러워."

"1레벨은 아니어도 0.9레벨은 된다는 소리잖아."

"세상 불공평하다니까. 누구는 이 똥통에서 몇 달을 굴러도 몸만 축나는데 누구는 차근차근 강해지고 말이야."

"세상 불공평한 거 이제 알았어? 애도 아니고, 억울하면 공부 죽어라 해서 마법 대학에 들어갔어야지."

"머리가 안 되는 걸 어쩌라고."

마력 회로가 정착되고 특성을 개방하면 그게 바로 1레벨.

나는 새삼스런 눈으로 노루를 쳐다보았다.

'세긴 세네.'

아케인 서울 설정상, 1레벨 초인은 소총수와 비슷한 종합 전투력을 가진다고 되어 있다. 2레벨 초인은 중무장한 특수부대원급이고.

겉으로 보기에는 왜소해 보이는 저 녀석이 소총수보다 살짝 약하다는 뜻.

별거 아니라고?

천만에!

맨몸 전투력이 자동소총과 비슷할 정도라는 얘긴데, 그 정도면 이미 훌륭한 인간 흉기다.

그리고 초인이라고 맨몸으로 다니겠어?

온갖 마도과학 장비에 총기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지.

'마력 좀 빨아먹고 특성 개화하면 초인 되겠네.'

괜히 태생 R급이 아니라는 거지.

잠시 후 운전수가 버스 안으로 들어왔다. 앞자리에 앉은 날 보고는 눈살을 한 번 찌푸리더니, 비닐팩 하나를 던지듯이 건넸다.

"신입이쇼? 억제제니까 일정 끝날 때마다 맞으쇼. 안 맞으면 당신 죽어."

하여간 밑바닥 인생들은 하나같이 말이 짧다니까.

나는 대꾸도 하지 않고 비닐팩을 받았다.

비닐팩에는 1cc 주사기 2개와 2cc 약 앰플 1개가 들어 있었다.

억제제.

어제 인력사무소 소장에게 설명을 들었던 물건이다.

'사흘 일정이라고 했지.'

연속 사흘 정화.

평범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탈이 생긴다.

그래서 하루 일정이 끝나면 억제제를 맞아서 마력 오염을 억눌러놓고 마지막 날에 알아서 처리하는 것이다.

신전에 달려가서 정화 받든, 성수를 사다 마시든, 아니면 다른 식으로 해결하든.

'난 필요 없지.'

오염 저항과 활기 조합 때문이다.

위험할 것 같으면 관련 특성을 몇 개 더 얻어서 장착하고 있으면 된다.

특성 전환은 개사기니까.

비닐팩을 대충 가방에다가 쑤셔 넣었다.

가방이 생수와 김밥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어떻게든 들어가긴 들어갔다.

이윽고 운전수가 운전석에 앉았다.

부르릉!

버스가 진동을 토해냈다.

경운기 소리 같은 엔진음.

쌩쌩 달리던, 마도과학 엔진을 단 차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디젤 엔진이네 이거.

운전석 뒤에 앉아 있던 노루가 투덜거렸다.

"버스는 도대체 언제 바꿔? 이 구닥다리를 몇 년이나 굴리는 거야."

"아시잖습니까. 우리 소장님 100원짜리 하나에도 벌벌 떠는 거."

"빨리 초인 되서 계약 갱신하든지 해야지 원."

"아유, 초인만 되시면 다 달라지지요. 소장님께서 아파트도 한 채 해주시고 수행 비서도 붙여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말 진짜지?"

"그럼요. 어서 초인만 되십쇼."

나나 다른 아저씨들을 대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

운전수는 헤헤거리며 노루의 비위를 맞추기 바빴다.

노루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덜컹덜컹.

트럭이 한참을 달린 끝에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 앞에 도착했다.

[수도권 제 1 매립지]

앙상한 철골탑에 달린 간판이 삐걱삐걱 흔들렸다.

역시 이곳이구나.

내가 처음부터 염두에 뒀던 곳.

게임 초창기, 지리산 마굴도 백두산 마굴도 없을 때 앵벌이 김전사 파티로 자동사냥을 보내던 곳이기도 하다.

"흐아아."

"내가 또 여길 왔네."

"돈이 원수지, 원수야."

운전수가 스마트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그러고 나서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콘크리트 구조물의 쪽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밖으로 나왔다.

"흐아암."

공무원증을 패용하고 있는 남자.

이쪽을 대충 한 번 훑어보더니 노루에게 카드키 한 장을 내민다.

"선수 소장님 팀 맞죠? 오늘도 수고하십니다."

카드키에 작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노루가 그걸 보더니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이번엔 다섯 군데나 돼요?"

"많으면 좋은 거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만······"

"오늘도 잘 부탁합니다.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공무원은 그 길로 몸을 뺐다.

열정이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모습.

노루가 얼굴을 찌푸린 채 포스트잇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우선 날 보더니 에휴, 한숨을 내쉬고 다른 아저씨들을 훑을 때는 아예 심각한 표정이 된다.

마지막으로 고슴도치 머리를 봤을 때는 일그러지다 못해 휴지처럼 구겨버렸다.

"김씨 아저씨."

"예, 노루 님."

"아저씨는 빠져."

"예? 빠지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무 위험해. 솔직히 말해 봐. 이번에 정화도 제대로 안 받았지? 오염된 게 너무 심해. 잘못하면 훅 가. 마력병 수준이 아니라 아예 변이된다고."

모두 얼굴을 심각하게 굳혔다.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으나 고슴도치 머리는 낄낄 웃어넘겼다.

"흐흐, 노루 님. 제 사정 몰라서 그러십니까?"

"알기야 알지. 그런데 그게 목숨보다 중요해?"

"노루 님. 전 말입니다, 변이되는 것보다 토요일에 만날 추심꾼들이 더 무섭습니다. 돈 못 내면 아시죠? 두개골 적출당하는 거."

고슴도치 머리가 자기 머리를 들이밀었다.

특이하게 변형된 머리카락.

아마 두개골과도 융합이 되었겠지.

그래서 추심꾼들이 고슴도치 머리를 탐내는 것이고.

노루가 팔짱을 끼고 고슴도치 머리를 주시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들어가야겠다?"

"예. 5백이면 이자랑 원금 좀 내고도 한 잔 걸칠 수 있는 돈입니다. 두개골 적출되고 바가지 뒤집어쓰면 그게 사람 사는 겁니까? 곧 죽어도 고 해야죠."

"정말로 죽을지도 몰라."

"이 바닥에 들어왔을 때부터 각오한 일입니다."

고슴도치 머리가 대범한 척 웃어 보였다.

하지만 대충 늘어놓은 손끝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다른 아저씨들이 욕설을 늘어놓았다.

"시펄."

"엿 같은 세상."

"그냥 콱 망해 버렸으면 소원이 없겠다."

"후······ 마음대로 해. 죽어도 아저씨가 죽지 내가 죽나. 혹시 지금이라도 돌아갈 사람 있어?"

노루의 시선이 언뜻 나를 스쳤다.

이러고도 집에 안 간다고?

그런 물음이 눈동자 표면에서 반질거렸다.

깨끗하게 무시.

급한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월세를 체납하면, 카드값이 밀리면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주인 아줌마 말대로 강제노역이나 조금 하면 다행이겠지만 그걸로 끝날 리 없지.

"들어가자고."

쪽문을 통과한다.

어두컴컴한 공간이 팀을 맞이했다.

뚝, 뚝.

완전히 콘크리트로 덮어서 만든, 초거대 벙커 같은 공간.

내부가 굉장히 습했다. 천장에서 물방울이 연거푸 떨어졌다.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있었다. 청소를 제대로 안 했는지 곰팡이가 잔뜩 슬어 있다. 구석에는 버섯까지 자라서 인공 구조물이 아니라 거대 동굴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더구나 공간 전체에서 풍기는 썩은 냄새에 코가 떨어져 나갈 지경이었다.

어디 쓰레기장에라도 들어온 것처럼.

"J-13 구역······"

익숙하다는 듯 노루가 길을 인도한다.

좁은 통로를 한참이나 걷고 직각 모퉁이를 몇 번이나 돌아간 다음에야 도착했다.

[J-13]

녹이 잔뜩 슨 동판.

그 아래에서 붉은 전기등이 위태롭게 깜빡였다.

"아우, 먼지."

후욱!

노루가 불어낸 입김에 전자 제어판에서 먼지가 폴폴 휘날렸다.

입김을 신호로 아저씨들이 챙겨온 가방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낸다.

방독면이니 스카프니 하는 것들.

고슴도치 머리가 방독면을 쓰다 말고 나를 힐끗 보았다.

"자네는 뭐 안 챙겨왔나?"

"예."

"음, 내가 뭐라도 줄까?"

"됐습니다."

"허, 참. 그러다 사람 훅 가."

"아티팩트도 아닌데 무슨 소용입니까?"

"그야 그렇지만 사람 마음이······ 에휴, 아니야. 내 앞가림도 못 하는 주제에 무슨."

오염 마력이 독가스도 아니고, 저런 허접한 방독면이나 스카프로 막기란 불가능하다.

노루도 다른 아저씨들도 내 말을 들었지만 살짝 고개를 틀어 외면했다. 그러곤 효과가 1도 없을 방독면 위에 스카프를 치렁치렁 둘렀다.

위이잉.

노루가 카드키를 대자 문이 작동했다.

끼기기긱!

거친 소리와 함께 문이 좌우로 벌어진다.

직후 안쪽에서 풍겨오는 비릿한 냄새.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커먼 연기.

아저씨들이 질색하며 뒷걸음질 쳤다.

"미친!"

"개꼴았잖아!"

"엄청 심해!"

오염 마력이다.

근대화 이후 도시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대두된 문제.

초거대 도시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부정적인 사념, 음차원 마력, 오염 물질이 합쳐져 생기며 방치하면 훗날 더 큰 문제가 된다.

자연히 현대의 도시 계획은 오염 마력 제어에 집중했고, 원래 세계에서 골프장으로 전용되었을 제 1 매립지는 오염 마력 유도 시설로 활용하는 중이다.

"피똥 좀 싸겠네. 모두 준비해."

다들 미리 준비해온 삽을 꺼낸다.

나도 마찬가지.

여기에도 내 피 같은 돈이 들어갔다.

가방, 김밥, 생수, 삽 따위를 사느라 안 그래도 가볍던 통장 잔고가 심각하게 가벼워졌지.

"간다."

끼기기기긱.

노루가 두 번째 철문 제어판에 카드키를 댔다.

거대한 강철 문이 쇳소리를 내며 열린다.

퐈학!

기다렸다는 듯 분출되는 오염 마력.

얼마나 농도가 짙은지 안개처럼 시야를 가릴 지경이다.

겨우 자기 손, 눈앞의 사람만 분간할 지경.

그 와중에도 꾸물꾸물 밖으로 기어 나오는 괴물들이 보였다.

원유와 타르, 썩은 진흙을 대충 뭉쳐서 만든 것 같은 시커먼 덩어리 괴물들.

오염 슬라임.

전투력은 동네 길고양이 수준의 0레벨 오염체지만, 놈이 무서운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저씨들이 소란을 피웠다.

"숨 참어, 숨!"

"흐으읍!"

"빨리 해! 빨리 좀 하라고!"

"으랏차차!"

선두에 선 아저씨들이 삽을 거세게 내려찍는다.

출렁, 오염 슬라임이 거칠게 흔들린다.

실질적인 피해는 없다. 대신 땅 파듯이 오염 슬라임의 몸을 떠내 크게 앞으로 뿌렸다.

"없어!"

"계속해!"

"마력핵 빼! 빨리!"

오염 슬라임을 죽이는 방법은 하나.

몸 어딘가에 있을 마력핵을 부수거나 빼내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절대 쉽지 않다.

오염 슬라임의 몸이 워낙에 꺼먼 데다 마력핵은 새끼손가락 손톱보다 더 작기 때문에.

그래서 삽이었다.

삽으로 최대한 몸을 떠내 사방으로 흩뿌리면, 그 안에 마력핵이 들어가는 순간 연결이 해제되어 오염 슬라임이 죽는다.

푸욱! 후욱!

오염 마력이 분출되어 청소부들을 괴롭혔다.

아저씨들의 이마에서 검은 땀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고슴도치 머리의 가시가 더욱 뾰족해지고 금속성 광택이 흐르기 시작한 건 내 착각이었을까?

"으아아아!"

노루가 광분하며 삽질을 해대고 있었다.

아저씨들보다는 훨씬 빠르다.

거의 두 배 이상.

그러나 그뿐이었다. 전사 계열도 아니고 강화병 계열인 노루. 그나마 각성도 제대로 못 하여 1레벨도 안 된 노루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비켜."

이러다 하루 다 가겠네

보다 못해 앞으로 나서자 노루가 눈을 부라린다.

"어디서 신삥 새끼가?"

"닥쳐 봐. 군대도 안 갔다 왔냐? 삽질을 누가 그렇게 하래?"

육군 병장 출신에 노가다 좀 뛰어본 내가 보기엔 애들 장난 같은 삽질이었다.

삽을 콱 쥐고 힘껏 찔렀다.

"꾸르륵!"

기괴한 소리에 엿 같은 감촉.

다 무시하고 발로 다시 콱, 삽을 넣는다.

거의 머리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들어간 삽.

비로소 떠내어 앞쪽으로 뿌린다.

"어어?"

"우와!"

제식하듯 정확하고 절도 있는 내 동작.

노루나 다른 아저씨들이 퍼내던 것의 5배 가까운 분량이 뿌려지자 주위에서 탄성이 터졌다.

그 탄성은 금방 경악으로 바뀌었다.

푸시시시.

오염 슬라임이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무너져내린 까닭이다.

"뭐, 뭐야?"

"말도 안 돼!"

"한 방에 슬라임을 죽였어!"

당연하다.

희귀한 전리품을 찾아내는 [보물찾기] 특성.

그 덕에 나는 오염 슬라임 내부에서 빛나는 파란 광채를 볼 수 있었으니까.

바로 오염 슬라임의 마력핵.

드물게 중고 전자제품이나 소모성 아이템이 걸릴 때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가끔.

"세상에······"

"저게 말이 돼?"

"초심자의 행운이지, 뭐."

"하긴."

"노루 같은 베테랑도 못 하는데 신삥이 운이 좋았고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틀렸다.

나는 얼마든지 슬라임을 학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것은 헛삽질이었다.

파란 광점이 뻔히 눈에 보이는데도 적당히 피해서 슬라임 몸을 떠낸 것.

'다 보여줄 필요는 없지.'

그래도 빨랐다.

나 혼자서 다섯 명 몫을 하고 있었다.

퍽! 퍼억!

물처럼 뿌려지는 슬라임 잔해.

덕분에 금방 J-13 구역에 있던 오염 슬라임들이 정리되었다.

고작 30분.

평소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였다.

마굴 청소 -2-

아저씨들이 입을 쩍 벌렸다.

"내가 꿈을 꾸고 있나?"

"미쳤어, 미쳤어."

"나 원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고슴도치 머리가 손을 떨었다.

"혹시, 초인?"

홱, 머리가 돌아간다.

아저씨들이 숫제 눈에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만큼 강력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단어.

초인.

뻣뻣하게 굳어 있던 노루가 마른 침을 삼킨다.

"아저씨, 진짜 초인이야?"

"아니."

"초인이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할 수가 있어?"

"말했잖아."

나는 어깨만 한 번 으쓱였다.

"군대 갔다 왔다고."

"아······"

"혹시, 군단 출신?"

"서부군? 아니면 동부군?"

"군단 출신이면 그럴 만하지."

이 세상은 많은 점에서 원래 세계와 비슷하지만, 다른 점도 여럿 있다.

그중 하나가 군대.

원래 세계 대한민국과 다르게 모병제였던 것.

모자란 병력 자원은 두 개의 군단이 대체한다.

막강한 민간군사기업이자 전사 계열 초인들의 이익 추구 단체이며, 국소적인 자치권마저 부여받은 국가 내 권력 집단이.

"일이나 하지."

퍽퍽!

나는 돌아다니며 뭉개진 슬라임 파편에서 마력핵을 수거했다.

마력핵이 깃든 파편은 꾸물거리며 재생 중이라서 수거하는 일 자체는 쉬웠다.

아저씨들도 몸을 일으켜서 나를 도왔다.

"이거 마력핵은 전부 이 형씨 줘야겠는데?"

"그럽시다."

"이 형씨 아니었으면 피똥 꽤 쌌을 거니까."

"비싼 것도 아니고, 뭐."

옛날에는 0레벨 마력핵도 귀중한 자원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아니다.

0레벨 마력핵으로 돌릴 수 있는 기계는 TV나 냉장고 등 가전 제품이 전부고, 거기에 비싼 마도과학 장치를 쓰느니 전기세 좀 내는 게 훨씬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아저씨들이 0레벨 마력핵을 모아 내게 건네주었다.

유일하게 노루만 마력핵을 주는 걸 거부했다.

"이건 내 거야."

노루가 잡은 슬라임은 겨우 2마리.

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숫자지만 그거라도 챙길 작정인가 보다.

0레벨 마력핵을 가방에 거칠게 쑤셔 넣는 걸 보며, 마력핵을 모아 건네던 아저씨들도 한 걸음 물러났다.

"흠."

"마음대로 하십쇼."

딱 보기에도 노루의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

등 돌린 뒷모습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어리기는.'

대장 대접을 못 받아서 기분이 상했다, 이거지?

어차피 며칠 보면 작별할 인연이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내가 받은 것은 0레벨 마력핵 21개.

남들에게는 쓰레기지만 내게는 보물덩어리.

감사를 담아 정중히 목을 숙였다.

"고맙습니다."

"고맙기는. 우리가 더 고맙지."

"덕분에 쉽게 했어······ 아니, 했습니다."

"맞아, 맞아. 우리 후배님 덕에 쉽게 했지. 안 그랬으면 땀 실컷 흘리고 마력도 엄청나게 마셨을 거야."

말투도 호칭도 바뀌었다.

속으로 한 번 픽 웃고는 콘크리트 벽에 기대어 앉았다.

"얼른 끝내고 가죠. 오늘 하나는 더 돌아야 하잖습니까."

"흐아아, 죽겄네."

"벌써 폐가 녹는 것 같어."

"젠장. 그놈의 도박만 아니었어도."

아저씨들이 꿍얼거리면서 적당히 벽에 둘러앉았다.

노루는 혼자 멀찍이 떨어져서 아예 드러누워 있었다.

아무 보호 장구도 차지 않은 나를 한 번 보고는 자기도 스카프와 방독면을 벗더니 크게 심호흡하기 시작했다.

꼴에 경쟁심을 느끼는 모양.

무시하고 눈을 감았다. 단전 호흡도 명상도 해본 적 없지만, 의식을 배꼽 아래에 집중한다고 생각하며 최대한 길게 숨을 들이켰다.

스으읍, 하아.

습-습- 후으읍-

길고 낮은 숨소리가 귓가를 맴돌고, 그에 따라 오염 마력이 내 허파를 간지럽힌다.

아니, 찌른다.

허파가 통째로 이질적인 마력에 침습 당하고, 심장 박동이 제멋대로 뒤틀리는 이 더러운 기분.

"후우우."

의식적으로 가슴을 부풀렸다.

마력을 최대한 받아들인다 생각하며 숨을 들이쉬자, 어느 순간 뱃속까지 뜨거워지면서 전신이 간지러워졌다.

[마력 흡수] 특성 획득.

눈을 뜨자 검은 연기 덩어리가 내게 몰려오는 것이 보인다. J-13 구역 전체가 눈에 띄게 밝아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오염 마력이 일정 부분 정화된 것이지만.

"우웨엑!"

노루가 뛰쳐나가더니 구성지게 구토했다.

"어어, 노루 님. 괜찮으세요?"

"정신 차리십쇼!"

"숨 참아요, 숨!"

"뭔 짓을 한 거야?"

"방독면은 왜 벗으셨대? 노루 님, 그러다 훅 갑니다!"

나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오염 저항으로 마력 오염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활기로 소모된 체력을 보충하는 나랑 같냐?

게다가 나는, 김전사는 전사 계열 초인.

아직 각성은 못 했다고 해도 4대 계열 초인 중 가장 오염 한계가 높았다.

노루는 강화병 계열이니 차이가 날 수밖에.

"후우, 후아아."

더욱 깊이 심호흡하여 오염 마력 흡수에 박차를 가했다.

사실 오염 구역 정화에 있어서 오염 슬라임 제거는 전채에 불과했다.

진짜 업무는 바로 오염 마력 흡수였다.

쉽게 말하자면 인간 필터라고 보면 되겠다.

오염 마력으로 가득 찬 오염 시설에 던져넣어 오염 마력을 한계까지 흡수하는 직업.

그것이 마굴 청소부.

막장 세계에서도 막장 중의 막장 직업이었다.

"우어억!"

"쿨럭!"

"케헥! 케헤엑!"

아저씨들이 하나둘 밖으로 뛰쳐나갔다.

통로 밖으로 멀찍이 떨어져서는 구토를 하고, 설사를 지리고, 식은땀을 흘리고, 아주 야단이었다.

저러니 냄새가 안 나겠나.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썩은 냄새가 난다 싶더니, 다 저거 때문이었나 보다.

밖에서 한바탕 쏟아낸 고슴도치 머리가 들어와서는 퀭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허억, 허억. 후배님은 괜찮으십니까?"

"전 괜찮습니다."

"허······ 진짜 예비 초인님이 여기 계셨네."

고슴도치 머리가 무심코 노루와 나를 힐끔 쳐다본다.

노루가 욱해서는 소리 질렀다.

"새꺄, 뭘 봐?"

"아닙니다, 노루 님."

찔끔 놀라서는 벽에 달라붙는 고슴도치 머리.

나는 고슴도치 머리의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분명히 착각이 아니다.

처음 봤을 때보다 고슴도치 가시가 두 배 이상 길어졌고 금속성 광택이 흐린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번들거리고 있었다.

몇 시간 후.

모든 오염 마력 정화가 완료되고 초록색 불빛이 켜졌다.

아저씨들이 환한 얼굴로 박수를 쳤다.

"세상에!"

"벌써 끝났다고?"

"원래는 두 시간은 더해야 하는데!"

"후배님이 오래 버텨준 덕분이지."

"고맙습니다! 후배님!"

"내 머리 좀 봐. 아직 안 뾰족하지?"

"어. 조금은 버티겠어."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후배님만 있으면 오늘 일은 쉽게 끝나겠어!"

아저씨들이 허리를 굽실거렸다.

어울리지 않게 상찬의 말이 쏟아진다.

하지만 나는 주먹을 한 번 쥐어보곤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삐걱삐걱.

주먹이 잘 안 쥐어진다.

J-13 구역의 오염 마력이 내 생각보다 더 짙고 음울했기 때문이다.

오염 저항까지 갖춘 김전사의 몸뚱어리에, 이미 심각할 정도의 오염 마력이 들이차 있었다.

'억제제를 맞을까?'

원래 계획은 억제제 안 맞고 버티는 거였는데 마력 흡수 특성 때문에 오염 마력이 계획보다 훨씬 많이 들어왔다.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몸을 일으켰다.

"다음 구역으로 가죠."

"예, 후배님."

마굴 청소는 순조로웠다.

다음 구역에서도 오염 슬라임 제거에 걸린 시간은 30분.

그 후 몇 시간 정도 내부에서 숨을 쉬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우!"

"으으으!"

"우웨에엑!"

아저씨들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이젠 구토나 설사, 식은땀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눈코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살짝 드러난 피부에는 온통 부스럼이 돋고, 장착한 의체는 빠져 버리고, 변형된 신체는 더욱 기괴하게 변하고······

노루 역시 마찬가지였다.

원래도 괴상하게 휘어 있던 다리.

이젠 두 배는 넘게 부풀어서 말처럼 변한 채 근육을 꿈틀거린다.

"흐어어, 흐어."

다행인 것은 여기서 더 변형되기 전에 끝났다는 점.

띵!

경쾌한 소리가 나면서 초록색 빛이 반짝였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졌다.

"살았다······"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죽으면 차라리 다행이게?"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빨리 버스로 돌아가자고."

"가자고, 얼른."

터벅터벅 걸어서 콘크리트 구조물을 빠져나왔다.

그렇다고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주차장과 주차장 한쪽에 마련된 화장실, 샤워 시설뿐.

왜 밖으로 나가면 안 되냐고 묻자 고슴도치 머리가 얼굴에 돋은 각질을 뜯으며 대답했다.

"방역 때문에 마력 정화기랑 오염 검사기를 한 번씩 돌려야 하니까 그렇죠."

"그게 왜요?"

"여기 공무원들 일하기 싫어하는 거 어디 하루 이틀입니까. 그리고 세 번 돌릴 거 한 번 돌리고, 문서에는 세 번 돌렸다고 써놓으면 뒷구멍으로 챙기는 것도 좀 있죠."

"아······"

게으름과 욕심의 환상적인 콜라보다, 이 말이지.

샤워실에서 적당히 물로 몸을 씻어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샴푸 하나 비누 하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여기서도 예산을 아껴?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거울 속 내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가관이네."

얼굴에 물고기 비늘 같은 각질이 빼곡하게 났다.

머리카락도 변형되어 끄트머리가 Y자로 갈라져 있었다.

여기에 눈동자에는 물 위에 뜬 기름때 같은 얼룩이 감도는 중.

하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인간 고슴도치처럼 변한 고슴도치 머리나 다리가 두 배로 커진 노루에게 비교하면.

샤워실에서 나와서 버스로 돌아왔다.

시동이 꺼져 있었다.

해가 진 다음이라 안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노루가 스마트폰 플래시를 켜고 들어와서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아, 그 아저씨 진짜. 또 차 키 가져갔네."

"항상 그랬잖습니까. 겨울에도 그랬고요."

"그때 그 푸닥거리를 했어도 이 짓거리를 하니까 그렇지."

"소장 새끼가 시키는데 어쩌겠습니까. 저 인간도 돈 벌어야죠."

"이제 6월인데, 에어컨도 없이 어떻게 자라고."

투덜대면서도 자기 자리에 앉는다.

의자를 최대한 젖혀서 눕고는 비닐팩을 꺼냈다.

1cc 인슐린 주사기에 억제제 주입.

주사 바늘을 자기 팔에다 꽂고 대충 밀어 넣었다.

"흐으으으."

앓는 소리를 내는 노루.

놀랍게도 비대해졌던 다리가 순식간에 제 모습을 되찾았다.

알게 모르게 털이 수북하게 났던 얼굴 역시 마찬가지다.

고작 십여 초 만에, 키가 껑충했던 괴인이 왜소한 청년의 모습으로 변화한다.

"흐윽!"

"허어어."

다른 아저씨들도 마찬가지였다.

흡사 기적의 물약처럼 보일 정도로 급격한 변화.

그러나 나는 억제제를 투여하는 대신 김밥과 생수를 꺼냈다.

'저런 게 부작용이 없을 리 없지.'

싸구려니까.

딱 봐도 수전노 느낌이 폴폴 나던 최선수 소장.

그 작자가 양질의 억제제를 줬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분명히 최하급일 거고, 어쩌면 마약 종류일지도 모른다.

이 세계에선 양질의 약품보단 마약이 훨씬 싸게 먹히니까.

"크, 좋다."

역시나 노루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푸우우."

전자담배를 꼬나물고는 길게 청록색 마력 연기를 뿜어낸다.

거기에 주섬주섬 주사기 몇 개 더 추가.

바늘을 몇 개나 더 팔뚝에 꽂고서야 만족한 얼굴이 되어 널브러졌다.

"흐······ 천국이다."

완전히 풀린 표정.

게게이 흘리는 침.

징그럽기만 한 장면이다.

내가 슬쩍 고개를 틀어 그 광경을 외면할 때, 옆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손이 있었다.

"후배님, 하나 하실랍니까?"

가시 같은 솜털이 오돌토돌 돋아 있는 손.

고슴도치 머리였다.

시가 같이 생긴 담배를, 보기만 해도 묘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는 물건을 쥐고는 내게 내밀고 있었다.

보자마자 마약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니, 이 인간은 빚도 많다면서 마약을 해?

나는 뚱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됐습니다."

"이거 진짜 좋은 물건입니다. 부작용도 적고 효과도 아주 직빵이에요. 한 대 피우면 바로 천국 간다니까요?"

"정말 괜찮습니다."

"뭐······ 알겠습니다."

고슴도치 머리가 미련 없이 담배를 물었다.

불을 붙이자 마력이 타오르며 금세 형광색 불꽃으로 변하고, 어지럽게 춤추는 꽃잎 사이에서 달짝지근한 냄새가 피어오른다.

순식간에 너구리 소굴이 되어버린 버스 안.

아저씨들이, 아니 약쟁이들이 해롱대며 내는 소리에 귀가 다 썩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버스 밖으로 나가는 대신, 진저리를 치면서도 마력 연기에 찌든 김밥을 씹었다.

'죽겠네. 진짜.'

몸은 냄새 때문에 괴롭고 마음은 신음에 문드러지고.

신체와 정신 양면으로 가해지는 공격.

새로운 특성의 개화 조건이 충족되는 순간이었다.

마굴 청소 -3-

[인내] 특성 획득.

게임에서는 모든 피해 감소라는 간단한 능력이 붙어 있었다.

이 세계에서도 비슷한가 보다.

역겹고 구역질 나던 마약 냄새와 신음이 확 약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그만큼 약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겠지.

"좀 살겠네."

김밥을 마저 입속에 욱여넣었다.

참치와 마요네즈를 듬뿍 넣은, 밥은 얇고 야채가 여러 종류 들어 있어 맛이 괜찮았다.

이게 고작 1500원.

원래 세계 기준 참치김밥 실한 거 하나 사려면 4000원 정도 하는 걸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가격이다.

'물가가 이상해.'

부동산 가격은 2배에서 3배가 비싼 반면 생활 물가는 절반 이하.

사실 그럴 수밖에 없지.

최저 임금이 없는 세상이잖아.

시급이 보통 4천 원 선에서 형성되어 있고 5천 원만 줘도 후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발전한 마도과학 때문에 식량과 생필품 생산량이 하늘을 뚫지 않았으면 세상이 뒤집히고도 남았지.

대신 인구 폭발로 대한민국의 인구는 1억을 돌파한 지 오래.

이 코딱지만 한 남한 땅에서 1억 명이 살고 있으니 사회 문제가 폭발하는 중이다.

괜히 마약이 이렇게 범람하는 게 아니라고.

'잠이나 자자.'

모르겠다.

이 괴상한 세계의 대한민국이 어디로 굴러가든 알 바 아니다.

내 목숨이나 잘 챙겨야지.

가방에서 싸구려 침낭을 꺼내 머리까지 팍 덮었다.

여전히 아저씨들의 신음이 귀에 거슬리지만 어떻게든 잠을 청했다.

다음날.

다들 어기적어기적 기듯이 콘크리트 구조물로 향했다.

"죽겠다······"

"박씨. 좀 떨어져서 걸어. 몸에서 썩은 내 나."

"좀비 처음 봐?"

"속은 괜찮은 거지?"

"어. 말짱해."

"변이될 것 같으면 미리 말해. 박씨는 피부가 다 썩어서 변이됐는지 안 됐는지 구분이 안 돼."

"알았다니깐."

대부분 어제 출발할 때와 비슷한 모습이다.

딱 한 명만 빼고.

"어우······"

고슴도치 머리가 걷다 말고 비틀거렸다.

경계 어린 눈빛이 쏟아진다.

"김씨. 괜찮아?"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된다. 김씨 혼자 죽을 거 줄초상 나는 수가 있어."

"그렇다고 변이되면 더 안 되지."

"변이되더라도 마력 먹다가 변이되라고. 변이될 것 같으면 미리 말하는 거 잊지 말고."

"흐흐. 괜찮아. 저번 주에 기억 안 나? 저번 주에도 딱 이 정도였어."

"그때도 위험하긴 했는데······"

억제제가 고슴도치 머리를 완벽히 되돌리지 못했다.

어젯밤만 해도 그랬지 않나.

손등에 난 솜털이 작은 가시처럼 변해 있었지.

지금도 머리카락이 확실히 길고 금속성 광택이 흐른다. 그나마 끝이 뾰족하지 않기는 했으나 그것도 내가 보기에는 시간문제였다.

얼굴에 어제는 없던 작은 가시가 오돌토돌 나 있었거든.

"아저씨는 여기서 중단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보다 못해 한마디를 하자 공기가 확 차가워졌다.

노루가 불퉁한 얼굴로 말했다.

"아저씨. 8명이서 먹을 거, 7명이서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하는 소리야?"

"그건 아는데······"

"낙장불입이야. 어제 김씨 아저씨가 박박 우겨서 들어온 이상 끝을 봐야 해. 다섯 개 다 정화 못 하면 문도 안 열어줘. 나나 아저씨는 어떻게 버틸 것 같은데 여기서 김씨 아저씨가 빠지면 여기 아저씨 중에 두세 명은 콱 죽어버릴걸?"

나머지 아저씨들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고슴도치 머리도 마른침을 한 번 삼킨 다음 말했다.

"전 괜찮습니다. 이대로 가죠."

"정말 괜찮으세요?"

"예.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전 죽는 것보다 추심꾼들이 더 무섭습니다. 여기서 포기하면 어제 번 것도 못 받아요. 추심꾼들한테 머리통 털리느니 끝까지 갈랍니다."

주먹을 꾹 쥐고 말하는 고슴도치 머리.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다.

그 얼굴이 며칠 전 밤길에 보았던, 턱이 강철 의체로 대체된 고시원 이씨 아저씨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

가슴이 살살 아려와서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게 된다.

그래.

난 할 만큼 했다.

이 이상은 오지랖이고, 고슴도치 머리의 선택이자 자기 복이다.

자기가 굳이 지옥으로 들어가겠다는데 뭘 어쩌겠어.

"간다."

노루가 무뚝뚝하게 말하고는 콘크리트 구조물 안으로 걸어갔다.

첫 번째로 따라붙는 것은 고슴도치 머리.

짐짓 쾌활하게 웃고 떠들고는 있으나 흔들리는 눈동자와 떨리는 두 손을 감출 수는 없었다.

"끝나고 소주 한 잔 빨까?"

"좋지!"

"이씨가 사는 거야?"

"내가 돈이 어딨어서? 엔빵이지, 엔빵!"

"나도 낀다!"

"김씨는 정화나 제대로 받아."

"이번에도 정화 안 받으면 다음에는 100프로야, 100프로!"

청소는 어제와 비슷하게 돌아갔다.

나와 노루가 앞장서서 슬라임들을 파헤치고, 슬라임 사냥이 끝나면 아저씨들이 마력핵을 모아 오고, 벽에 기대 앉아서 오염 마력을 흡수하고.

"후우우, 후읍."

"으으으······"

"허어억, 헉."

"우웨엑!"

"으, 미치겠다. 미치겠어!"

"학교 다닐 때 공부 좀 열심히 할걸!"

그렇게 둘째 날 두 번째로 들어간 오염 구역.

나는 오염 마력을 흡수하다 말고 숨이 확 트이는 것을 느꼈다.

폐부 깊은 곳까지 청량해지는 이 기분.

그 상쾌한 감촉은 곧 오염 마력에 의해 더럽혀졌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심호흡] 특성 획득.

이것으로 오염 마력 흡수가 훨씬 빨라진다.

평소에도 나쁠 건 없는 이야기였다. 심호흡 특성은 마력 회복 속도를 증가시키니까.

저절로 마음이 푸근해졌다.

'잘하면 마력 관련 특성 하나 더 얻겠네.'

내가 지금까지 얻은 특성들은 모두 공용 특성이며, 공용 특성 중에서도 3티어따리이자 기본 특성들이었다.

대신 어떤 1티어 특성의 획득 조건을 만족시켰다.

바로 마력심.

마력심은 공용 특성 중 흔치 않은 1티어 특성이면서, 모든 마력 사용과 회복 효율을 크게 높여주는 특성이다. 마법사 계열에 가장 효율적이긴 하지만 전사 계열에도 만만찮게 좋았다.

"끄르륵!"

내가 속으로 히죽거리며 웃을 때였다.

통로 쪽에서 뭉개고 있던 고슴도치 머리가 왈칵 피거품을 토했다.

"어어? 김씨?"

"괜찮아?"

"제길! 삽 꺼내!"

"총 가져온 사람 없어?"

노루가 비정한 눈빛을 토한다.

자기 가방을 꺼내 권총을 꺼내는 노루.

철컥.

장전하는 쇳소리가 무겁게 났다.

그걸 들은 고슴도치 머리가 급히 두 손을 든다.

"으읍! 으으읍!"

쏘지 말라고 하는 것 같은데 말이 나오질 않는다.

혀까지 변형된 것.

더는 돌이키기 힘든 상황.

노루가 권총을 들어 고슴도치 머리를 조준하려고 할 때였다.

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초록색 빛이 폭발했다.

무게추처럼 무겁던 긴장감이 포르륵 터지면서 소멸한다.

"후아!"

누군가 참았던 한숨을 뱉어냈다.

"김씨 진짜 죽을 뻔했네."

"1분만 늦었어도 죽었지."

"오늘부로 새로 태어난 줄 알아."

"우읍, 우으읍."

고슴도치 머리가 주저앉아서는 뜻 모를 소리를 뱉어냈다.

아저씨들이 급히 고슴도치 머리를 부축했다.

"얼른 나가지."

"여기 오래 있으면 안 돼."

"빨리 나가서 억제제부터 맞아."

오염 마력을 몸으로 흡수했다고는 하나 잔여 마력 정도는 남아 있다. 그래서 굳이 밖으로 나가서 억제제를 맞는 것이다.

다들 절뚝거리며 겨우 밖으로 나왔다.

어제는 샤워한 후 억제제를 맞았지만 오늘은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나오자마자 허벅지나 팔뚝에 주사기를 꽂기 바빴다.

"흐······ 지챠 주그 뻐 해따······"

억제제는 어제와 같은 기적의 성능을 보여주지 못했다.

고슴도치 머리가 특히 그랬다.

다른 사람들은 그나마 비슷하게라도 돌아갔는데, 고슴도치 머리는 뾰족한 머리를 번쩍이며 옹알이하듯 혼잣말을 읊조리고 있었다.

"김씨. 버틸 수 있겠어?"

"하나······ 나마짜나."

"맞아. 하나 남았지."

"내일은 두 개가 아니야. 딱 하나라고."

"어떻게든 버텨. 버텨서 돈만 벌면 돼. 신전에 가서 헌금하고 정화 받으면 산단 말이야. 알았지?"

"어······ 버티께."

제 1 매립지에서 맞는 두 번째 밤.

어제와 비슷하게 아저씨들은 마약에 절어 드러누웠다.

고슴도치 머리는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듯 마약을 몸에 들이붓고 있었다.

담배 마약과 주사 마약은 기본. 거기에 초록색 소주병을 아예 병나발을 불었다. 처음에는 소주인 줄 알았는데 지켜보니 마약이었다.

한 모금 한 모금 마실 때마다 고슴도치 머리가 맛이 가는 게 실시간으로 보였거든.

"꺼흑. 취한다."

마약이 치료제, 아니 억제제 역할을 겸하는 걸까?

옹알이 소리가 많이 개선되었다. 뾰족하던 가시 끝도 조금은 무뎌진 것 같다.

그래 봐야 마약이고 그래 봐야 임시방편이다.

나는 유리창에 비친, 묘하게 번들거리는 고슴도치 머리의 얼굴을 힐끔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드디어 마지막 날.

다섯 번째 구역 마력 흡수를 시작하고 채 1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고슴도치 머리가 발작하기 시작했다.

"꺼허억!"

입으로 흘리는 것은 피거품.

아니, 괴상하게 변형되어서 모래알 크기의 까만 가시를 잔뜩 품은 까만 점액질.

변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젠장! 김씨! 정신 차려!"

"이제 다 끝났어! 여기가 마지막이라고!"

"조금만 버텨!"

"성수 없어? 성수?"

아저씨들이 거칠게 고슴도치 머리의 짐을 뒤졌으나 나오는 것은 없었다.

딱 하나.

바닥을 드러낸 초록색 소주병 하나를 빼면.

"젠장!"

"제길!"

"누구 성수 있는 사람?"

"최하급 성수라도 좋아! 누구 가진 사람 없어?"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비웃음을 날렸다.

목소리 크게 성수를 외치는 아저씨들에게서 진실의 편린을 엿보았기 때문에.

내기할까?

여기 있는 아저씨 중에 최소한 절반 이상은 성수를 가지고 있을 거다.

아까워서 안 내놓는 거지.

그렇잖은가?

운이 좋아 오늘은 살아남더라도 오래 살지는 못할 인간, 혹은 약쟁이.

가족도 아닌데 그 정도 인간을 위해 비싼 성수를 쓸 사람은 최소한 이 자리에는 없다.

무의식적으로 자기 다리를 쓰다듬으며 몸을 빼는 노루 역시 그렇다.

그게 인지상정이지.

나도 똑같은 처지라고 하면 성수를 내놓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 한 병의 성수가 내 목숨줄이 될 수도 있으니까.

'너희도 쓰레기. 나도 쓰레기.'

자화상을 인정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대신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해줄게.

운이 좋으면 살겠지. 운이 나쁘면 죽겠지만.

"데리고 나가세요."

"응?"

"후배님?"

아저씨들이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나를 본다.

나는 가만히 턱짓을 한 번 했다.

"제가 최대한 커버하겠습니다. 아직 견딜 만해요. 데리고 나가서 기다리세요. 제가 버텨보고, 안 되겠으면 부를 테니 그때 교대하고요."

나 혼자 오염 마력을 흡수하겠다는 뜻.

문을 닫지는 않을 테니 오염 마력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긴 하지만 크게 이탈하지는 않는다.

아저씨들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진심이십니까?"

"괜찮으시겠어요?"

"그러다 후배님이 잘못되면······"

"괜찮습니다. 힘들면 말씀드린다니까요."

"꼭입니다, 꼭!"

"말씀만 하시면 바로 들어오겠습니다!"

말을 취소할까 봐 무섭다는 듯 우르르 몰려나가는 아저씨들.

아저씨들에게 들려 나가는 고슴도치 머리가 몸부림을 치고 있다.

금속성으로 변한 가시가 쭉쭉 길어지는 중.

확률은 반반.

버티면 살 것이고 못 버티면 변이하여 오염체가 되겠지.

노루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저씨."

"왜?"

"뭐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글쎄."

나는 가볍게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어차피 처음 본 사이.

죽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면 그만이다.

그런데 막상 현실이 되어 눈앞에서 저 사람이 죽는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그래서 이러는 거다.

오염 마력을 몇 배는 더 퍼먹는 정도, 나한테는 별일 아니니까.

이렇게 무리를 해도 절대 변이되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걸 아니까.

"후으으읍."

눈을 감고 공기를 최대한으로 들이마신다.

심호흡과 마력 흡수의 효과로 대량의 오염 마력이 유입되었다.

현재 내가 선택한 특성은 이렇다.

[심호흡][마력 흡수][오염 저항]

[인내][활기][상처 회복]

확실히 견디기 쉬웠다.

나 혼자서도 구역 하나를 통째로 정화하고도 남을 지경.

단, 그렇게 구역 하나를 끝내고 나면 집에 가서 정양을 해야 하겠지만.

"으으으윽!"

옆에서 노루도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나에게 경쟁심을 느끼는 모양.

아서라.

뱁새가 황새 쫓아오는 거 아니야. 그러다 다리 찢어져.

"끄아아악!"

정말로 그랬다.

내 느낌상 오염 마력을 절반 정도 흡수했을 무렵 노루가 길게 비명을 질렀다.

다리가 뒤틀리고 있었다.

이미 두 배는 두꺼워진 상태에서 뱀처럼 길어지며 관절이 하나 더 생기려고 한 것.

여기가 한계지점.

노루가 숨을 헐떡이더니 가방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뽕!

입으로 마개를 물어뜯고는 유리병에 담긴 액체를 자기 다리에다가 뿌린다.

물처럼 투명한데 기이하게도 별빛 같은 빛을 품은 액체.

치이이익!

뿌연 수증기가 일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길어지고 뒤틀리던 다리가 크게 출렁이더니 원래 상태로 돌아간 것.

그것도 마지막 구역에 들어오기 전의 상태가 아니라, 처음 사무소에서 봤던 때의 상태로.

"허억, 허억, 허어억."

노루가 숨을 몰아쉰다.

유리병을 한쪽에다 던져버리더니 내 시선을 피해 눈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침묵.

노루는 입을 꾹 다물었고 나는 모르는 척 호흡에 집중했다.

그러기를 한참.

별안간 심장이 욱신거리더니 칼에 맞은 듯 아팠다가 통증이 사르륵 녹아 사라졌다. 직후 심장이 쿵쾅쿵쾅 뛰면서 전신으로 뜨거운 기운이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