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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의 개념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라스코에는 '정규 시험'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강의의 끝 무렵에는 항상 시험이 끼워 넣어져 있다. 따로 존재하지 않는 정규 시험 대신, 내 학생들의 수준을 평가하고 확인한다.

이것은, 내 안전을 위해서다.

내 눈앞에 보이는 이들은 모두 내 안위를 지켜 줄 인물들.

그들이 얼마나 강해졌는가는 항상 체크하고 염두에 두어야 할 것들이다.

그것이 습관이 되어 매 강의에 시험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제는 이 과정이 퍽 즐겁게 여겨지기까지 한다.

학교 다닐 때는 가장 싫었던 것이 시험인데, 정작 가르치는 처지가 되니 시험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내 가르침이 얼마나 닿았을까.

묘한 기대감이 반짝이는 것이다.

"나쁘지 않군."

이틀간 진행되었던 강의의 요체가 녹아 있으면서도 학생들의 창의성을 자극하고, 또한 실전에서 써먹을 수도 있는, 내가 보기에 퍽 훌륭한 문제가 갖춰졌다.

내가 아는 한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풀면서는 쌍욕이 나오겠지만, 풀고 나서 그 성취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그런 문제 말이다.

"리트, 거기 있나?"

-네! 교수님! 

우당탕탕!

잠시의 소란과 함께, 리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 종이는 <기초 원소 마법의 정립>의 수강생의 숫자만큼 뽑아 준비하고, 이 검식들은 각각 세 구의 전투 인형에 입력해 놓아라."

"네, 알겠습니다."

리트에게 준비까지 지시하고 나자 이제 완전하게 이번 강의는 마무리된 것이다.

내일, 이 문제를 받아든 학생들의 기뻐하는 얼굴이 눈에 선연하게 비치는 듯하다...

* * *

"와, 미쳤네."

고작 이틀이었다.

이틀의 강의는 <기초 원소 마법의 정립> 수강생들의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첫째는 마법을 보는 시각 자체를 바꿔 놓았다.

이들은 본능적으로 마법의 수식 자체를 어렵게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루카스의 강의는 이런 패러다임을 뒤집어 놓았고, 조금 더 간소하게 바라보는 시야를 길러 주었다.

그리고, 가장 큰 변화는 두 번째.

'이, 이거... 왜 이해가 되지?'

밀리아의 강의를 필기한 정리 본을 살피며 느끼는 벅찬 감정.

이 속에는 루카스의 강의 못지않은 엄청난 것이 들어 있었다.

그저 받아적기만 했을 때는 몰랐으나, 이제는 '보인다.'

밀리아가 그토록 답답해했던 이유는 물론이고, 밀리아의 강의 내용까지 속속들이 보인다.

루카스의 강의가... 중간 고리 역할을 한 것이었다!

애초에 루카스 강의 자체가 이 역할을 위해 계획되었다고 느껴질 만큼.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루카스가 의도한 바였다.

이 사실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역시나 수석, 베디치였다.

루카스 강의의 첫날은 필기구를 챙겨오지 않았다곤 하나, 그는 원래부터 필기와 정리 본을 만드는 데에 도가 텄다.

그렇기에 수재들이 모인 마법 학부의 전체 수석까지 오른 것이다.

'직관'이 '이론'이 되자, 다분히 밀리아라는 천재의 직관에 의존했던 강의 내용이 속속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루카스의 강의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내용이었다.

다만 직관적인 영역 때문에 범인(凡人)들은 그 이해에 쉽게 닿을 수 없었던 반면, 루카스의 강의를 통해 한줄기 등불이 비치고 있는 것이었다.

"미친, 진짜 미친...."

루카스와 다른 의미의 대단한 내용에 베디치는 밤을 잊고 정리 본에 몰두했다.

그렇게 아침이 밝았다.

밀리아의 강의 정리 본이 대단히 흥미롭긴 했으나, 여전히 그 난이도가 상당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오랜만에 머리를 최대치까지 써 버린 베디치는 머리가 납덩이처럼 무겁고, 피로했다.

하지만 그런 몸 상태를 깨끗하게 잊게 해 주는 마법과도 같은 단어.

'루카스 교수 특강의 마지막 날!'

놓칠 수 없다.

이날을 놓치면 자자손손 후회로 가득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베디치는 피로회복제를 원샷하고 <아덴 관> 제5 강의실로 향했다.

첫날과 너무나도 다른 분위기였다.

강의 시작 2시간 전임에도 벌써부터 로열석은 차 있었다.

듣자 하니, 이후의 강의는 자체 휴강하고 밤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 베디치도 장학금이 아니었다면 저렇게 자리를 지켰을지 모르겠다.

긍정하며 지난 루카스 교수의 강의를 되새기며 시간을 보냈다.

극심한 피로에 머리가 어질하지만, 버틸 만했다.

이윽고 2시간이 흐르고 정확한 시간에 루카스 교수가 등장했다.

그의 자태는 그야말로 피로를 싹 씻어 내리는 활력소와 같았다.

이제 베디치의 태도 어디에서도 첫날과 같은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전투의 모든 것> 대부분의 학생들 처럼, 혹은 이제 세간에 유명한 '루카스 광팬' 알란 학회장과 같은 분위기마저 풍기고 있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내 인생에 다신 이런 기회가 없어.'

그러니 하나도 놓치지 말고 새겨들어야 한다.

그는 눈은 루카스에게서 떼지 않고, 손은 그의 숨소리 하나까지 받아적을 준비를 하고 집중했다.

"오늘은 <전투의 모든 것 마법 학부 특강>의 마지막 날이다. 기존 <전투의 모든 것> 학생들은 익숙하겠지. 마지막은 그간 배운 것을 바탕으로 너희의 성취를 시험할 것이다."

...네?

준비했던 것이 아니라 당황스럽다.

<전투의 모든 것> 수강생들은 익숙하다는 듯한 반응이었으나, 마법 학부생들 사이에는 당황스러움이 퍼져 나갔다.

"본 시험은 <전투의 모든 것> 수강생들은 본 성적에 포함하겠지만, <기초 원소 마법의 정립>의 수강생들은 밀리아 교수의 판단에 일임하겠다."

"아, 그럼 저도 이 시험의 결과로 제 강의의 성적에 참고할게요."

"그렇다는군."

루카스는 밀리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입을 열었다.

"시험의 형식은 전투 학부 스타일에 맞춰 '실습형'으로 진행될 것이다."

딱-

루카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문이 열리고 그의 조교, 리트가 품에 무언가를 안고 뒤에는 전투 인형을 대동하고 등장했다.

"자아, 이거 받으세요. 여기요. 이 라인 전체로 전달 부탁드려요. 한 장씩 가지시면 됩니다. 전투 학부생은 빼고요. <기초 원소 마법의 정립> 수강생들만 한 장씩 챙기시면 됩니다."

그렇게 받아든 종이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초 마법'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전투 인형은 각기 다른 모양의 도형이 그려져 있었다.

"시험 내용은 간단하다. 마법 학부생들은 지금 받은 종이에 포함된 기초 마법을 세 가지 이상 조합해 하나의 온전한 마법을 만들어 내고, <전투의 모든 것> 학생들은 앞에 세 가지 전투 인형이 펼치는 '형'을 모두 합쳐, 자신의 무구에 맞는 '형'을 새롭게 조합해라."

시험 내용이 조금은 당황스러웠는지, 전투 학부에서도 수군거림이 일었다.

"...다들 이해를 못 한 표정이군."

루카스가 서늘한 눈으로 강의실을 살피더니, 다시금 예의 그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예시를 보여 주지."

루카스는 네 가지 도식을 그려 내었다.

종이에 있는 '스틸', '라이트', '스프레이', '미러' 였다.

잠깐 고민 후- 네 가지 도식을 또 분해하더니 새롭게 조립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눈앞에는 완전히 완성된 도식이 그려져 있었다.

처음 보는 도식이었다.

그러나 도식의 해석은 마법 학부의 기본 교양과목.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대상의 시야를 일시적으로 빼앗는 마법이다.

다만 그 범위가 굉장하고, 마력의 투입량에 따라 지속시간도 길어질 것이기에 급을 나누면 첫 강의 때 선보였던 '플레임 스톰'과 비슷한 격의 고위 마법.

'이, 이걸 기초 마법만으로 구성했다고? 그것도 비전공자가?'

마법 학부생들은 경악했다.

완전히 새로운 마법을 단순히 기초 마법의 조합만으로 해냈다.

루카스의 천재성에 경악하는 것도 지칠 무렵, 진정한 경악은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렇듯, 가볍게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어디가 가벼운 건데요.

§ 아카데미의 신화급 교수가 되었다 69화

69. 공백 (4)

"내 시험을 겪어본 이는 알겠지만, 이 시험은 완전히 종료될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니 너희도 시험을 포기하지 마라."

철컹-!

강의실 문이 잠겼다.

동시에-

"시험을 시작하지."

이틀간의 성과를 평가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어렵다.

그야말로 미칠듯한 난이도가 이들을 괴롭게 했다.

"으, 으으으!"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루카스의 압도적인 천재성을 목도한 직후라, 자신의 부족함이 두드러져 보이니 더욱 그러하다.

'새로운 마법을 창조해 내라는 거나 다름없잖아!'

그것도 암산으로.

졸작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그것도 혼자서 오늘 하루 만에 해내야만 하는 것이다.

정말 다른 교수가 이런 요구를 했다면 그것은 단순히 불쌍한 아카데미 생을 괴롭히려는 의도가 다분한 것이라 찔러 죽여도 무죄겠으나, 상대는 루카스.

루카스는 이틀에 걸쳐 이 시험의 풀이법을 알려 준 것이나 다름없다.

이 시험은 그야말로 그가 강의한 이틀간의 요체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이었으니.

문제는 받아들이는 쪽에서 미처 흡수하기 전이라는 거지만.

'천재들은 가만 보면 지들만 되는 걸 남들 다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단 말이야.'

공감 능력이라는 것이 없는 사람들 같다.

고작 이틀간의 강의로 이 정도 프로젝트를 해내라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따지고 싶지만, 루카스는 마법 도식 자체를 배운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조금 전 시범에서 선보인 미친 짓을 가능하게 했으니, 그저 투정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마법 학부생들은 얌전히 고개를 처박고 조금 전 루카스가 선보인 묘기(?)를 곱씹으며 두뇌를 풀가동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투의 모든 것> 수강생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3가지 '형'을 '각자의 무구에 맞게' 조합해야 한다.

간단해 보이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세 가지 형에서 얻을 수 있는 기본적인 조합식이 27종류였고, 수강생이 20명 남짓이기에 7개를 제외하고 겹치지 않는다 쳐도, '자신의 무구에 맞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일례로 검과 도의 '형'에도 커다란 차이가 나는 법인데, 27개 안에서 검, 도, 권, 창, 방패, 둔기 등등의 무구에 맞는 '형'을 찾아내야만 한다.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엄청나게 가혹한 시험이었다.

다른 교수였다면 답이 없는 문제를 냈다고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루카스.

답이 없는 문제로 학부생을 괴롭힐 위인은 아니었다.

...분명, 그러할 텐데.

얼핏 고개를 들었을 때, 루카스가 슬쩍 미소 짓는 것처럼 보였다.

착각이겠지.

착각일....

아닌가?

* * *

시험지를 받아든 학생들의 표정이 그야말로 기가 막히다.

깊은 고민은 기본에, 벽에 부딪힌 것처럼 절망적인 표정도 더러 짓고 있다.

...충분히 만족스럽다.

내가 학부생들을 괴롭히는 데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변태 교수라서가 아니다.

저 고뇌가, 저 절망이 저들의 단계를 몇 단계나 끌어올려 줄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LIFE TIME : 23개월]

이제 2년도 남지 않은 마족들의 대침공의 날에, 저들을 구원할 수단이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저들에게 시련을 내리는 이유.

저들의 고통이 기꺼우나 전혀 기쁘지는 않다.

저 막막함을, 저 답답함을 나 역시도 느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데뷔만을 바라보며 집필에만 매진하던 그때.

끝없는 절망만이 영원할 것 같았던 그때를 떠오르게 하는데, 나 역시 감정이 있는 사람이다.

저들의 고통을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란 말이다.

[새로운 알림이 도착했습니다.]

[k2929 님께서 100G 후원하셨습니다.]

그러니, 지금 내 얼굴에 핀 미소는 이런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나를 향해 응원하는 마음이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 * *

루카스의 강의는 헛되지 않았다.

시험이 시작된 지 약 두 시간.

가시적인 결과를 내보인 이들이 하나둘 등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루카스가 시범으로 보여 준 '대인 섬광 마법'에 비하면 정말 하잘것없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스파크'와 '클린', '커터'를 합쳐 '보푸라기 제거 마법'을 조합해 냈다든지, 구두끈이 풀리지 않는 마법이라든지 하는 소소한 마법이었다.

"훌륭하다. 하지만 여기에 '타겟'까지 섞었다면 옷감이 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발상이 훌륭했다. A."

"멋진 조합식이다. 다만, 이 부분에서 두 부분의 위치가 바뀌었더라면 더욱 효과적으로 효용을 보였을 것이다. B+를 주지."

마법 학부의 학부생들은 경악했다.

답안지를 제출했을 때, 그 결과는 며칠이 지나서야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루카스의 천재성은 그들의 예상을 몇 수나 앞서는 것이었다.

루카스는 마법 학부의 학부생들이 몇 시간이나 걸려 고민한 도식을 그저 슬쩍 보는 것만으로 더 나은 개선점을 짚어 주며 실시간으로 평가했다.

그의 지적은 정확했다.

단지 도식의 위치만 바꾸는 것으로 마법의 효율이 몇 배는 높아졌고, 간단한 도식을 추가하는 것으로 마법의 퀄리티가 격상했다.

또한, 처음에 우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점수가 후했다.

실제 루카스의 강의를 들어본 이들의 평가에 의하면 루카스의 점수 체계는 얄미울 정도로 정확하고, 소름 돋을 정도로 예리하다고 했다.

그들이 제출한 결과에 비해 점수가 후한 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험의 요체는 마법의 '창조'가 아닌, 얼마나 잘 '조합'했는가를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합의 밸런스가 훌륭하다. A."

따라서, 굳이 새로운 마법식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마법을 완벽하게 조형해 낸 것들 역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점점 합격자의 수가 많아지고 있다.

의외로 <전투의 모든 것> 수강생들의 고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합격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법 학부생들의 그것보다 평가가 심각할 정도로 박했다.

"과연 이 '형'이 창에 맞는다고 할 수 있을까? C다. 퇴실은 허락하지 않겠다. 자리로 돌아가도록."

"연결된 '형'의 호흡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뚝뚝 끊긴다. 형편없다. D-. 역시 자리로 돌아가도록."

보는 사람의 가슴이 철렁할 정도의 신랄한 평가였다.

이는 루카스 특유의 서늘한 음성과 싸늘한 무표정에 더해져 더욱 깊은 상처가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막상 그 성적을 받아든 이들의 표정은 오히려 홀가분했다.

되려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미친놈들 아니야?'

루카스의 강의를 처음 접한 학생들은 저들의 반응이 의아하기만 했다.

교수가 성적을 이유로 남으라는데 좋아하는 학생이 있다?

미친놈이 분명한 것이다.

시험은 계속되었고 시험에 통과하여 강의실 밖을 나서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물론 그 전부는 마법 학부의 학생들이었다.

아무리 못 받아도 B-.

현재까지 C가 최고점인 <전투의 모든 것> 수강생들과 달리, 시험이 끝나는 족족 강의실을 떠나는 마법 학부생들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예외도 있는 법.

마법 학부 전체 수석인 베디치가 그러했다.

밤을 새워 새로운 지식을 집어넣어서 그런 것일까.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앞서 시험을 끝마친 다른 <기초 원소 마법의 정립> 수강생들의 성적을 보아 더욱 초조함이 깊어져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만든 조합식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것으로는 루카스에게 만족을 느끼게 할 수 없다.

오히려 실망감을 안기진 않을지.

'마법 학부 전체 수석이라는 자의 조합식은 영 형편없군.' 같은 상상이 그를 괴롭혔다.

'그래, 양으로 승부하는 거야.'

극심한 피로는 베디치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이 평가에서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니라, '훌륭한 조합'이라는 척도 일 텐데.

맛있는 비빔밥을 만들라고 했더니 음식 쓰레기를 만들어 버리는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그의 조합식이 루카스 앞에 선보여졌을 때-

"형편없군."

그의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두말할 여지 없는 E다. 낙제를 주지 않은 이유는...."

그 뒤로 루카스의 말이 이어졌으나, 베디치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E다, E야. E 멍청아!

난생처음 받아보는 점수에 그의 정신은 뭉개지고 있었다.

"자리로 돌아가도록."

베디치는 터덜대며 자리로 돌아갔다.

* * *

"...더없이 훌륭하다. A+."

만점.

오늘 시험의 최초로 만점이 튀어나왔다.

그 주인공은 전반적으로 성적이 우수했던 마법 학부 쪽이 아닌, <전투의 모든 것> 쪽이었다.

루이나 엘라임.

마탑의 후계자이면서 전투학의 길을 선택한, <전투의 모든 것> 강의의 홍일점이었다.

"정확히 내가 의도한 바와 일치한다. 자네가 만든 '형'을 분석해 저들에게 선보이려 하는데,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좋다. 자네는 돌아가 보도록."

"아, 저... 교수님."

루이나는 머뭇머뭇하더니, 조심히 입을 열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도 남아도 될까요?"

"...."

루카스는 루이나의 의중을 들여다보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향상심은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 덕목이니."

"감사합니다!"

루카스의 말에 루이나는 고개를 숙이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 발걸음은 참으로 위풍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이윽고- 모든 시험이 끝이 났다.

<전투의 모든 것> 수강생은 전원이 남았다.

더러는 루이나처럼 좋은 성적을 받고도 자진해서 남은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기초 원소 마법의 정립>의 수강생은 단 한 명만이 남아 있었다.

베디치 테루카.

마법 학부의 전체 수석인 그가, 오늘은 비참한 성적표를 들고 이곳에 남아 있었다.

"이것으로 오늘 시험은 모두 끝이다."

루카스는 시계를 흘긋-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성적에 이의가 있다면 지금 제기하도록. 이 강의실을 나서는 순간부터 이의제기는 받지 않겠다."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만족할 만한 성적을 받아든 이들은 벌써 강의실을 떠난 상태였고, 루카스의 평가에 실수란 있을 수 없으니까.

"정말 없나?"

루카스는 재차 확인했다.

여전히 남은 인원은 침묵했다.

"베디치 테루카."

루카스의 입에서 베디치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정말, 없나?"

정신이 혼미한 베디치에게 루카스의 압박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 그게...."

베디치는 입을 우물대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할 말도 없나?"

루카스는 그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 같았다.

"없는 모양이군."

루카스는 실망이 잔뜩 어린 어투로 몸을 돌렸다.

"내일 여기 남은 인원을 대상으로 특별 보강을 시행하도록 하지. 주말이라는 핑계는 받지 않는다."

루카스는 그대로 몸을 돌려 강의실 밖으로 사라졌다.

나이스-!

그가 떠난 강의실에 작게 환호가 터졌다.

루카스의 보강.

이것은 생각지도 못한 특전이었다.

<전투의 모든 것> 수강생들은 바로 이것을 노린 것이었다.

낮은 점수를 받은 이들은 공통적으로 루카스의 코멘트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루카스의 평가 특성상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의 평가가 신랄하고 잔인하기는 하나, 기본적으로는 학생들의 발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을 그들이 가장 잘 안다.

분명 무언가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높은 점수를 받고서도 남은 이들 역시, 그러한 생각이었다.

한편, <기초 원소 마법의 정립> 수강생 중 유일하게 특전을 받은 베디치는, 멍하게 자신이 받은 특혜를 곱씹다가,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불길한 기운을 풍기면서, 루카스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 *

"교, 교수님!"

집무실로 향하던 도중, 누군가의 음성이 나를 불러 세웠다.

돌아보니, 익숙한 얼굴이다.

"베디치 테루카."

내 보강 대상 중, 유일한 <기초 원소 마법의 정립> 수강생이다.

그는 급하게 달려왔는지, 정돈되지 않은 거친 호흡을 뱉으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의 제기는 분명 강의실 안에서라고 했을 텐데?"

E.

내가 준 점수 중 최악이었으나, 사용된 마법들의 조화가 새로웠다. 하지만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으니 최하점을 준 것이었다. 이해의 부재일 수도 있다. 따라서 후에 제대로 설명만 덧붙일 수 있었다면 B+까지 상승할 학생이기도 했다.

그것이 안타까워 여러 번의 기회를 주었건만, 그는 스스로 발로 차 버렸다.

"이의 제기를 위해 교수님을 찾아뵌 것이 아닙니다."

"뭐?"

"저는 교수님 때문에, 성적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뭐라?"

아니, 내가 뭘 했다고 성적 수치심을...

이런 발언은 그릇된 오해를 낳을 수도 있는,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다.

서둘러 자초지종을 물어보려 했으나, 그의 말이 더 빨랐다.

"제 성적이, 너무나도 수치스럽습니다."

...이거 미친 새끼 아니야.

§ 아카데미의 신화급 교수가 되었다 70화

70. 공백 (5)

'이거 미친 새끼 아니야... 잠깐.'

처음에는 그저 단순히 웬 등신이 헛소리하나 싶었으나, 이내 눈앞에 있는 이 등신의 정체를 떠올렸다.

그라스코에서도 수재들이 모인 집합소, 마법 학부.

그곳에서 줄 곳 수석만 꿰차는 나름 천재 소리를 들어도 좋을 인재였다.

그런 인재가 이런 등신 같은 어휘를 구사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이상하고 수상쩍은 것이다.

"죄, 죄송-"

베디치는 서둘러 사과하고 내빼려 했다.

"거기 서라."

하지만 어딘가 걸리는 마음에 그를 불러세웠다. 베디치는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걸음을 멈춰 섰다.

[시력 강화]로 빠르게 그를 훑었다.

의문이... 더욱 커졌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재능의 빛은 너무나도 미미한 것이었다.

물론, 이 빛이 한 인간의 전부를 설명한다고 할 순 없지만, 그래도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시간 있나?"

"아, 저, 저 말씀입니까? 아, 예, 물론.... 그 시간이... 있습니다!"

원래라면 강의 외적으로 학생을 만난다는 것은 웬만해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도 내 학생이 아닌 심지어 다른 학부 학생을.

마음 같아서는- '그래, 아껴 쓰도록'이라고 대꾸하고 내 갈 길을 가고 싶지만, 이 녀석에게서 풍겨오는 묘한 거슬림이 내 발목을 잡았다.

아무래도 확인을 해 봐야겠다.

"따라오도록."

"예, 옛!"

내 집무실에 들어와 베디치에게 자리를 권하고, 특별히 리트에게 차를 부탁했다.

"먹어라."

"아, 옛. 감사합니다."

그는 천천히 컵을 들어 올려 입으로 가져갔고, 나는 그 모습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똑똑히 보았다.

그는, 차가 입에 닿았음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맛이 어떤가."

"괴, 굉장히 좋습니다!"

"그렇군."

나는 그의 말을 듣고 확신했다.

"베디치 테루카."

그는,

"언제부터 빌어먹을 약에 손을 댄 거지?"

마약 중독자였다.

"하핫! 야, 약이라뇨. 그게 무슨 말씀을...."

"속일 생각 마라, 베디치. 미각을 잃을 정도면, 상당히 오래 복용했다는 뜻인데."

"미, 미각을 잃다뇨. 저는 전혀-"

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마신 차를 바라보았다.

"내 조수 리트는 상당히 유능하지. 하지만 그는-"

나는 내 컵에 든 차를 화분에 모조리 부어 버렸다.

화초가 빠르게 생기를 잃고 시들었다.

"끔찍할 정도로 차를 못 탄다."

내가 리트에게 평소 차를 부탁하지 않는 이유였다.

그리고 내가 그를 마약 중독자라 단언하는 이유-

그것은 내가 <아. 천. 망>에 묘사한 부작용 중 하나가 미각 상실이었기 때문이다.

"이 끔찍한 차 맛을 느끼지 못할 정도라면... 상당히 오래되었겠군."

"...."

그의 표정은 아연했고,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 * *

'무지크....'

베디치를 추궁해 손에 넣은 작은 병 음료.

얼핏 피로회복제처럼 보이는 이것은 명백한 마약 성분이 포함된 마약이다.

다만, 그 함유량이 극히 미미하고, 그 생김새처럼 피로 회복과 집중력에 도움을 준다.

아직까지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것이 본격적으로 활개를 치는 순간-

그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 작은 약병이, 아이러니하게도 그라스코의 침공이 손쉬웠던 이유이기도 하다.

몇 년 후, 이 무지크는 그라스코에 대량으로 나돌게 되고, 학생들은 물론 교수마저도 이 약에 손을 댄다.

지금이야 피로 회복이나 집중력에 도움을 준다지만, 이 약이 본격적으로 유통되며 그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야말로 '진짜' 마약처럼 환각과 함께 강력한 중독증상을 내보이게 되는 것.

그렇게 그라스코는 허술해졌고, 그다음은 익히 아는 대로 마족들의 손에 유린당하며 멸망한다. 물론, 한 요소 중 하나일 뿐이지만, 커다란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약이 벌써 나돌고 있었다니....'

일단은 그라스코 내에서 베디치가 유일한 사용자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말, 우연한 기회에 발각한 것이 천만다행이다.

이런 종류의 일탈은 가속만 제대로 붙으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버리니까.

베디치는 그대로 밀리아에게 인계했고, 마법 학부 자체적으로 조사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번지기 전에 발견해서 다행이었다.

'문제는....'

이것이 어디서 왔는가.

그라스코 전체를 중독시키려는 계획을 세운 걸 보면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추후에... 알아봐야 할 것 같다.

* * *

"으음. 벌써 그 시기가 다가왔는가."

하인즈와 로널드는 서신을 확인하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기말고사라니. 시간 참 빠르구만, 그래."

그들의 손에 들린 서신은 기말고사를 위한 4개 아카데미의 연합 회의를 알리는 서신이었다.

당연히 그라스코의 대표자로 참석할 이는 하인즈겠으나-

"자네, 이 연합 회의에 참석할 수 있겠나?"

"...이번에도 부탁을 해야겠으이."

하지만 현재 몸 상태로는 불가능에 가깝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일세. 금방 회복하여 자네의 부담을 덜어 주지."

"그런 미안함일랑 접어 두고, 얼른 쾌차나 하시게."

"그래, 그럴까?"

하여, 그라스코에서는 하인즈 대신 로널드가 연합 회의에 대표로 참석하게 되었다.

"우리 그라스코가 기말에서 항상 죽도 못 쒔지 않는가. 기억하지?"

"그래. 자네는 학생들의 기죽은 모습을 참 안타까워했고 말이야."

"커험. 아, 아무튼! 올해는 다를걸세."

"그래? 기말고사에 진출한 이들 태반이 1학년이던데."

로널드는 하인즈의 지적에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 아이들이 모두 루카스 교수가 가르친 아이들일세. 나도 루카스 교수를 처음 이 그라스코에 들일 때만 해도 불안한 마음뿐이었는데, 중간고사 이후로 그 생각이 바뀌었네."

"중간고사가 인상적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었지. 그런데 로널드 자네가 흥분할 만큼 그렇게나 뛰어나던가?"

"말도 말게. <전투의 모든 것> 수강생들 대부분 경기가 5분을 넘지 않았다네. 그 상대가 자신보다 위에 상대이든, 아래 상대이든 상관없이 말이야!"

"그것참 대단하군."

"내 이번에야말로 '카데인 아카데미' 그놈들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볼 수 있겠어. 흐하하하!"

"원, 사람 체통 없이 웃어대긴."

"거기 총장이 항상 우리 아이들보고 비웃고 다녔더랬지. 이제 그 얄미운 면상도 오늘로 끝이다, 이 말일세!"

"그래, 그래. 알겠네, 알겠어!"

로널드가 저렇게 신나는 듯한 모습이 얼마 만인지, 하인즈는 친우의 기뻐하는 모습에 그저 뿌듯했다.

'그나저나 그 루카스 교수가 직접 가르친 아이들의 재능은 어떠할지... 참으로 궁금하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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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특별 근무를 해야 하는 내 처지가 안쓰러운지, 독자님들의 응원이 이어졌다.

이 정도면 주말 출근할만하지. 만족스럽게 강의실 문을 열었다.

전투 학부 학생들의 모습이 가장 먼저 보였다.

현재 조사 중인 베디치를 빼면 전원이 내 학생들이니 당연한 일인가.

"오늘은 어제 예고했던 대로, 어제 너희가 제출한 답안지를 토대로 보강을 진행할 것이다."

오늘은 아무래도 크게 보여 줘야 할 것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레바테인을 만년필 형태가 아닌, 검의 형태로 들고 왔다.

"가장 먼저 너희가 보인 공통적 실수에 대해 짚어보도록 하지."

내 검이 움직인다.

C-를 받은 토레스의 답안지가 그대로 시연되고 있었다.

"우와...."

우와는 무슨. 이거 불합격이라니까.

"지금 보여 준 '형'에서 부족한 점은 무엇이지? 루이나, 대답해 봐라."

어제 시험에서 유일하게 A+을 받은 루이나.

다른 학생들과 달리, 그녀의 답안지에서만 도드라진 특징이 있었다.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고 끊어집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지?"

"그것은 세 가지 '형'이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대답이 퍽 만족스럽다.

"맞는 말이다. 이 '형'을 제출한 토레스와 루이나는 놀랍도록 같은 순서로 '형'을 완성했지. 그러나 두 사람의 점수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지? 토레스, 대답해 봐라."

이번에는 이 '형'의 당사자인 토레스를 지목했다.

"그, 그게 연결되는 이음새 부분에서 커, 커다란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답이다."

하루 동안 꽤 많은 고민을 했음인지, 만족스러운 대답이 튀어나왔다.

나는 루이나의 '형'을 추가로 시연했다.

앞선 토레스의 그것과는 다르게, 확실히 자연스러움이 베여 있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완전한 답이라곤 할 수 없어. 루이나에게 A+를 준 것은, 내 학생 중 그녀가 가장 훌륭했기 때문이다.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 평가였다면 A-가 적당했겠지. 나는 '세 가지 형'을 예시로 주었으나, 루이나의 것에는 그 외의 것이 첨부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분명히 명시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내 잘못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나는 내 실수를 인정한 뒤, 내가 의도한 정확한 예시를 시연했다.

"자, 보아라. 너희는 단순히 '형' 자체를 합치려고만 했다. 하지만, 말했듯 모든 '형'은 선으로 나누어진다-"

나는 예시로 던져주었던 세 가지의 형을 선으로 나누었다.

"이번 시험의 결과물 역시 그것과 다르지 않다. 결국 '선'의 집합체가 되어야 할 것이었어."

내 손에서 세 가지 '형'에서 파생된 선이 새로이 조합되어간다.

이것은 학생들의 답안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으나, 한 편으로는 예시로 주었던 세 가지의 '형'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이기도 했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진의- '융합'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시선이 따가우리만큼 강렬하다.

좋다.

이런 열의가 바탕이 되어 이들은 더욱 발전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발전이야말로 내가 진실로 바라는 것이다.

'더욱 성장해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 * *

전투학의 성지, 학회-

기말고사를 위한 아카데미 연합 회의는 바로 이곳에서 진행되었다.

"제726회 5대 아카데미의 연합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안건은 얼마 뒤 치러질 기말고사에 관한 건입니다."

안건이 발의되고, 4대 아카데미를 대표하는 이들은 그 시선을 한 곳에 집중했다.

"이번에 개최지는 그라스코의 순서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라스코.

이번 기말고사를 개최하게 될 장소이다.

4개 아카데미 중 규모가 가장 크기에 유치 자체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허허, 걱정입니다. 중간고사 때 꽤나 큰일이 있었지 않습니까?"

중간고사 때 발생한 일이 그 발목을 잡고 있었다.

사실 발목을 잡았다기보다는 일방적인 시비에 가까운 것이다.

에르멜 왕국의 카데인 아카데미.

그들은 제시 애슬론을 빼앗긴 분풀이로 그라스코에 대해 좋지 않은 이미지를 심는 중이었다.

"그것은 불가항력이었습니다."

"기말고사 때도 그 불가항력이 닥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분명히 마탑의 과실이라고 발표까지 난 사건에 대해 이렇게까지 꼬투리를 잡는 것은 다른 의도가 있다고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라스코의 대표, 로널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구구절절 다 맞는 이야기니까.

"기말고사가 아무리 4대 아카데미의 화합을 위한 축제라고는 해도, 거기에 참여하는 이들은 명백히 각 아카데미의 보배고, 미래입니다. 그런 불안한 곳에 믿고 맡길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로널드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것은 걱정하지 마시게나."

그 순간, 그들의 갈등 사이에 어느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알란... 학회장님."

"그렇지 않아도 중간고사 때 이야기는 들었네. 그런 일이 또다시 반복되지 말란 법은 없지. 하여- 우리 학회에서 기사들을 파견 보낼 생각이네. 그러니 그대들은 안심하고 우리 전투학의 미래들이 우애를 다지는 축제를 즐기시게."

학회에서 기사들의 파견.

이것은 확실히 충분한 안전장치였다.

'로널드 교수, 걱정하지 마시게. 루카스 교수가 특별히 부탁했으니.'

그때, 로널드의 귓가로 속삭이듯 들려오는 알란의 목소리.

그제서야 로널드는 알란이 자신을 감싸 주는 배경에 루카스가 있음을 깨달았다.

"학회에서 힘써 주신다면, 안전은 확실히 보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라스코의 시설 또한 기말고사를 치르기에 부족함이 없으니, 이 정도면 된 거 아닐까요?"

남은 두 아카데미 역시 알란의 참전 이후 그라스코의 편으로 돌아섰다.

카데인 측은 한 발짝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라스코를 깎아내리는 것을 멈춘 것은 아니었다.

"허허. 학회에서 지원을 해 주신다니, 참으로 든든합니다. 그럼 개최지는 확실히 정해지긴 했으나... 그라스코 측에서는 상당히 뼈아프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뼈가 아프다니?"

말 속에 뼈가 들어 있다는 것을 캐치한 로널드가 되물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까. 매 기말고사에서 그라스코 측의 성적이... 크흠. 여기까지만 합시다!"

아주 교묘한 조리돌림이었다.

하지만 로널드 역시 가만히 당할 사람은 아니었다.

"아,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 기말고사 진출자 명단에 '제시 애슬론' 군이 이름을 올렸거든요. 제시 군의 재능이야 카데인 측이 더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카데인의 역린- 제시의 이름이 나오자 그의 표정이 똥 씹은 듯 구겨졌다. 로널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저희 그라스코 역시 만만치 않을 겁니다.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이번 기말고사는 분명한 이변이 있을 겁니다. 예를 들면 최다 우승 아카데미인 카데인이 조기 탈락한다거나... 아, 물론 어디까지나 예시입니다. 허허허!"

§ 아카데미의 신화급 교수가 되었다 71화

71화. 기말고사 (1)

"준비는 잘되어 가고 있나? 어디 불편하거나 필요한 것은 없고?"

"없습니다."

'니가 제일 불편한데요'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치솟았지만, 참았다.

로널드는 연합 회의에 다녀온 이후 내 강의마다 쫓아다니고 있다.

처음에는 저 뒷자리 구석에서 지켜보는 정도였다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제는 완전히 코앞에서 지켜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번 기말고사를 위해 따로 특강 같은 건 준비한 것이 없나? 기말고사 진출자들을 상대로 뭐 더 해 준다던가······."

"없습니다."

로널드가 이렇게 질척대는 이유는 짐작이 간다.

<아. 천. 망>에서 그라스코는 단 한 번도 기말고사에서 유의미한 성적을 내본 적이 없다.

제시라는 걸출한 재능이 있긴 했으나, 원래 세계관에서 제시는 기말고사에 출전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제시는 에르멜 왕국의 사람이니 그라스코의 명예를 위할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다르다.

그라스코 전투 학부 역사상 최고의 전력.

그동안 알게 모르게 무시를 당해온 그라스코가 다른 아카데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절호의 기회였으니.

가짜 하인즈 시절에도 대외 업무는 로널드가 모조리 맡아 했고, 그라스코가 곧 로널드인 삶에서 그라스코의 모욕은 로널드의 모욕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몇 년을 버텨오다가, 드디어 올해.

로널드에게는 광명이 비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이해는 가지만······.

"필요 없습니다."

하등의 필요가 없다.

왜냐?

자신이 없거든.

기말고사를 망칠 자신이.

* * *

"무슨 일이 있어도 그라스코에는 절대 지면 안 돼"

카데인의 총장, 퍼레이라는 전투학 교수들을 모아두고 신신당부를 했다.

"문제는 그라스코에 제시가 있다는 것이겠죠."

"으음······."

입에 까끌하게 남는 이름, 제시 애슬론.

두말할 여지없는 최고의 재능으로써 카데인의 대표 기수가 되어야 했던 이인데-

"아직 1학년이지 않나!"

"10살도 되지 않았을 때 고등부를 이겨 먹은 놈입니다······."

"그, 그건······."

퍼레이라는 마른세수를 했다.

확실히, 제시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은 엄청나다.

"제시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 교수가 반론했다.

그는 그라스코의 중간고사를 참관했던 이다.

단순히 제시 애슬론의 성장세를 보러 갔던 것이지만, 그는 전혀 다른 곳에서 놀라움을 느꼈다.

바로, 루카스가 가르친 다른 제자들의 실력.

"다른 학생들의 재능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제시만 경계하다가는 큰 코······."

"그래서. 지금 우리 카데인의 학생들이 진다는 건가?"

"그, 그건 아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라스코 놈들은 짓밟아. 어떤 방법이든 상관없으니!"

퍼레이라의 호통을 듣고 있던 교수 중 한 명이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어떤 방법이든 상관없으시겠습니까?"

"······."

묘한 그의 기백에 퍼레이라가 잠깐 침묵했으나, 이내 학회에서 자신을 도발하던 로널드의 모습을 떠올리며 결심을 굳혔다.

"그래. 상관없다!"

"그렇다면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방법이라는 것이 뭐지?"

"학생들의 잠재력을 일시적으로 증폭시켜주는 약이 있다고 합니다."

"약?"

퍼레이라는 약이라는 말에 거부반응을 보였다.

"그라스코를 짓밟기 위해 어떤 방법이든 사용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 그건 그렇지만······."

"약물 검사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기말고사 때만 쓴다면······ 아무도 카데인을 의심하지 못할 겁니다."

"으음······."

퍼레이라는 고민에 빠졌다.

"총장님, 그래도 약은 좀······."

"그렇다면 교수께서는 그라스코를 압도적으로 짓뭉갤 방법이 있으시다는 거겠죠?"

"험, 험······."

그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가 중간고사 때 목도한 학생들의 실력만큼은 '진짜'였으니.

게다가 에일론이라 하는 그 괴짜의 전투 방식은 그야말로······.

"그럼 이렇게 하시지요. 간단한 테스트를 해 보는 겁니다."

"간단한 테스트라 하면?"

퍼레이라가 흥미를 보였다.

"약물을 투여한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을 대련시키는 겁니다. 일반 학생들로 테스트를 거쳐 그 효과를 확인하는 거지요."

"으음······ 하지만 그건 좀······."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저 확인만 하는 수준이에요. 일반 학생들을 상대로 뛰어난 효과가 입증된다면, 기말고사 진출자들에게는 얼마나 큰 효과가 있겠습니까? 거시적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크흠······."

퍼레이라가 계속 망설이자, 최후의 수단을 꺼내 들었다.

"그라스코의 로널드 부총장과 총장님께서는 동창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놈과의 악연은 꽤나 질기지."

"만약, 아주 만약에 말입니다. 우리 카데인이 진다면, 그 질긴 악연을 가진 로널드 부총장이 총장님을 얼마나 괄시할지······ 생각만 해도 괴롭군요."

"으음!"

그 한 마디가 트리거가 되었다.

"총장님, 이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해서 될 일이 아니라······."

"됐네. 총장인 내 의무는 카데인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실력을 증명하게 만드는 것이야. 그래, 한번 해 보지. 카데인이 그라스코 따위에 절대 질 리 없다는 것을, 4대 아카데미 중 최강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자 이 말이야."

"그렇다면, 준비하겠습니다."

그는 묘한 웃음을 남겼다.

* * *

"약물 반응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네. 마탑에서 전문 검사 기구까지 빌려와서 검사했는데도 전혀 발견되지 않았어요."

"그런가."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무지크'가 그렇게 은밀히, 또 빠르게 퍼질 수 없었을 테니.

다만, 자세하게 서술하지 않은 부분이라 어쩌면, 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약은 어디서 구했는지 알아보셨습니까?"

"클럽에서 우연히 얻었다고 해요. 그게 또 거짓은 아니고······."

일단은 그라스코 내부의 일은 아닌 것 같다.

그건 그나마 다행이다.

그렇지 않아도 외부의 요인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또다시 내부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골치가 아프다 못해 터질 것 같기 때문이다.

"고생하셨습니다."

[밀리아를 교감을 나누셨습니다.]

[밀리아와 유대감이 상승합니다.]

알림에 나타난 것처럼, 밀리아는 아주 기쁜 듯한 표정이다.

꼬리가 있었으면 살랑대며 흔들고 있지 않았을까.

마치 골든리트리버를 떠올리게 하는 밀리아를 보면, 처음에 봤던 그 하프 엘프가 맞나······ 싶은 의문이 들긴 하지만, 지금이 상대하는 것은 더욱 편한 건 사실이었다.

만약 맹견 종류의 강아지를 떠올리게 했다면······.

어후.

"교수님, 이제 그만 가셔야죠? 곧 강의 시간인데."

곁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리트가 웃으며 밀리아를 독촉했다.

리트는 밀리아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지, 밀리아가 내 방에 들어온 이후 단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감시하고 있다.

나까지 무섭게 말이야.

"어······ 오늘은 자체 휴강할게요!"

"그러시면 안 되죠 교수님은 교수님이잖아요."

"그치만······."

"자, 얼른요."

리트가 밀리아를 떠밀듯이 내보냈다.

그제서야 만족한 듯한 표정의 리트.

'그나저나 검출되지 않는 약이라······.'

이거 뭔가 찜찜함이 남는다.

"리트."

"네, 교수님."

"네가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제가 해야 할 일이면······."

"리트가 아닌, '리리트'에게 부탁할 일이다."

내 입에서 자신의 진명(眞名)이 흘러나오자, 리트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학생들의 '꿈'을 뒤져 봐야겠다."

"꿈이라고 하시면······."

이래 봬도 리트는 반은 몽마다.

하지만 아직 중급 정도의 수준인 데다, 하프라서 온전한 몽마의 힘은 사용할 수 없지만- 어떤 키워드에 대해서는 접근할 수 있다.

"학생들 중, 베디치 말고 '약'에 관련된 이들이 있는지 알아봐라. 그 정돈 할 수 있겠지?"

"네!"

그녀는 자신이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진심으로 기쁜지 밝게 웃었다.

* * *

챙- 챙- 채앵-!

떨그렁!

"······져, 졌습니다."

카데인의 지하 연무장.

이곳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대련의 결과는 한쪽의 일방적인 압승이었다.

"놀랍군."

이 둘이 처음부터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거나 하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이긴 쪽이 진 학생에 비해 약간 밀리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요인만으로 이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 약의 효과가 정말 대단하군. 게다가 약물 반응도 전혀 나타나지 않고."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기말고사 때까지 약은 얼마나 확보할 수 있지?"

"충분히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럼, 그 이상으로 확보해 두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퍼레이라는 눈앞의 결과가 흡족했다.

당장 재능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은 학생도 이렇듯 훌륭하게 진화시킨 이 약을 기말고사에 출전할 정도로 뛰어난 학생들이 복용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는가.

'로널드, 네가 감히 내 앞에서 거들먹거려? 그 잘난 믿음이 산산조각 나고서도 그렇게 건방을 떨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 크흐흐!'

퍼레이라는 로널드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는 상상을 하며 연무장을 벗어났다.

"자아, 그럼."

퍼레이라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교수는 두 학생들에게 다가갔다.

"분하냐? 그렇다면 너도 이 약을 먹어볼 테냐?"

"에르멜의 기사는 그런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강해지지 않아요."

"그 신념이 참으로 눈부시군."

교수는 흡족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뱉는 신념치곤, 상당했어."

스걱-

동시에 그 학생의 가슴에 커다란 검이 처박혔다.

"너, 왜······."

"······."

하지만 그 의문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베디치인가 배치기인가 그놈은 너무 신중했어. 1달 치 약을 1년에 나눠 복용할 줄이야······ 이러면 목표를 바꿔야 하잖아."

공허한 읊조림이 지하 연무장을 채워 나갔다.

* * *

"······."

다음 강의 날

학생들의 안색이 아주 가관이었다.

밤새 무언가에 시달린 듯, 퀭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얘네 상태가 왜 이래? 멀쩡한 놈이 하나도······.'

순간, 내 시선 끝에 리트가 걸렸다.

그녀는 이 학생들과 대비되도록 쌩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광이 나는 것도 같았다.

-학생들의 '꿈'을 뒤져 봐야겠다.

동시에 내가 어제 리트에게 했던 부탁이 떠올랐다.

'이거······'

이들의 상태가 이토록 멜랑꼴리한 것은 모두 나 때문이었다.

몽마가 꿈에 다녀간다는 것.

그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몽마란 꿈에서 상대방의 정기를 흡수하는 마족.

리트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꿈에 방문한 그 자체로 학생들의 정기는 쪽쪽 빨려 버린 것이다.

물론, 그 꿈의 내용은 아주 자극적인 것들이었을 것이다.

상급 몽마는 그 꿈의 내용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지만, 리트 정도의 수준으로는 한 카테고리밖에 설정할 수 없으니까.

정기가 빨려 손가락 하나도 들 힘이 없는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소식이지만-

"지금까지 배운 것들을 바탕으로 실습을 해 보는 시간을 가지겠다."

오늘은 로널드에게 특별히 내 학생들의 수준을 보여 주기로 한 날이다.

손가락을 튕기자, 리트가 전투 인형들을 안으로 들렸고, 학생들의 곤란한 시선이 내게로 쏟아진다.

나도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 뜨끔-하고 찔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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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시선 따위는 가볍게 무시될 독자님들의 후원창이 내 시야를 따뜻하게 감싼다.

미소가 차오르려는 찰나, 저들에게는 내 모습이 악덕 교수처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후원창 너머로 보이는 학생들의 안색이 아연하다.

나도 한 사람의 인간이고, 고의는 아니라지만 나 때문에 저렇게 정기가 쪽빨린 제자들이 안쓰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전투 인형 따위에 지는 일은 없도록."

나도 로널드에게 뱉은 말이 있으니, 물릴 수는 없단다.

무엇보다-

ㄴ기말고사 질수없죠? 이겨야죠? 그럼..굴려야죠!

독자님들이 너네 구르는 걸 좋아하셔.

§ 아카데미의 신화급 교수가 되었다 72화

72. 기말고사 (2)

"...나쁘지 않군."

실습이 끝난 자리.

모두가 널브러지긴 했으나, 결과는 명백했다.

<전투의 모든 것> 학생들의 승리.

솔직히 말해, 나쁘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훌륭하다.

이번 실습을 위해 설정한 전투 인형의 수준은 대략 E급 정도.

E급이면 아카데미의 고학년에서 졸업반 정도 되는 수준이다.

그 정도 수준의 전투 인형을 컨디션이 최저인 상태에서 싸워 이겨냈다.

물론 그 과정이 수월하지는 않았다.

처절했고, 추접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진짜 전투란 아름답지 않으니까.

"10분간 쉬었다 하지. 몸을 추스르도록."

체력의 한계에 헐떡대고 있는 학생들을 뒤로하고 강의실 밖으로 나왔다.

"리트, 회복 포션을 나눠줘라."

"알겠습니다!"

회복 포션이 흡수당한 정기를 채워 줄 순 없겠지만, 전투 인형과의 실습에서 소모된 체력은 어느 정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다.

* * *

'개같이 굴렀다.'

학생들의 지금 심정을 대변할 문장으로 이보다 더 완벽한 것이 있을까.

간밤에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꿈으로 인해 잠을 설쳤다.

잠을 설친 것뿐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전투 학부 소속인 만큼, 평소 단련된 체력은 하루쯤 밤을 꼴딱 센다고 해도 크게 지장 없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마치 페두르 산맥에서 밤을 꼴딱 새운 것처럼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수준이었다.

다른 강의였으면 자체 휴강을 했겠지만, 루카스 교수의 수업이다.

억지로 움직여 겨우 강의실에 도착했더니 이건 또 뭔가.

실습이라니.

그야말로 처절하게 굴렀다.

무기를 지팡이 삼아 억지로 일어나고, 전투 인형에 몸을 기대듯이 던진 후 무기를 박아 넣었다.

어떻게 실습이 끝났는지도 모른다.

시야에 천장만이 보이고 머리가 어질어질한 이때, 루카스의 음성이 들렸다.

"10분간 쉬었다 하지. 몸을 추스르도록."

루카스의 어조는 역시나 고저가 없었다.

이런 모습을 보여 실망한 걸까, 아니면- 조금의 기대도 하지 않은 걸까.

루카스가 나가고서야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학생들 역시 자신과 같은 몰골을 하고서 널브러져 있다.

도대체 이 그라스코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그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더니, 한 실루엣이 강의실 곳곳을 누비며 무언가를 나누어주었다.

"교수님께서 준비한 회복 포션이니까, 얼른 마시고 회복하도록 해요."

루카스 교수의 하나뿐인 조교, 리트였다.

그가 나눠주는 포션을 받아들려는 순간-

"감사... 으읏?"

전신이 움찔대며 이상 반응을 일으켰다.

"으엇!"

"으헛!"

이상야릇한 소리가 강의실을 뒤덮었다.

"이거 마셔야 남은 강의도 마칠 수 있는데? 얼른 먹어요!"

다 나누어주었음에도 그 누구도 포션을 마시지 못하자 리트는 곤란한 듯 포션 병을 따서 직접 먹여 주었다.

"으흣!"

그야말로 아찔한 현장이었다.

그의 손이 닿는 족족 탄성과 함께 몸이 움찔댔다.

어제 그 꿈이 다시 떠오른다.

괴롭고 야릇한 시간이 흘렀다.

모든 학생들이 리트에 의해 포션을 섭취 당하자(?) 10분이 흘렀다.

강의실로 돌아온 루카스는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쯧."

짧게 혀를 찼을 뿐이지만, 그 안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 * *

10분간 환기를 추가로 진행하자, 강의실 안 후덥지근한 공기가 가셨다.

퀴퀴한 냄새도 사라진 것 같다.

이로써 강의를 이어나갈 여건은 마련되었다.

실습이 끝나고 곧바로 무슨 강의인가 싶겠지만, 직전에 실습에서 보여 준 모습들이 본능에 가까운 발버둥이었기에 지금처럼 적기는 없다.

본디 내 강의는 이들의 '본능적' 영역을 이론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데에 그 가치가 존재한다.

"조금 전 너희가 이 전투 인형을 상대로 보였던 움직임을 기억하나?"

침묵이 내려앉았다.

당연한 일이다.

정기가 빨려 정신이 오락가락한 가운데 발버둥에 가깝게 움직였던 것들이다. 발악이라 표현해도 좋을 움직임을 기억하는 데 쓰일 기력은 없었을 테니.

하지만 이 시간은 그 움직임을 기억해 내기 위해 할애할 것이다.

"너희가 본능적으로 구사한 그 움직임들이야말로 '선'과 '형', 그리고 '융합'이라는 내 강의들의 주제를 설명하기에 걸맞은 것들이었다."

그들이 어떻게든 버텨 내기 위해서 처절하게 움직였던 것들은 본능적으로 지금까지 내 강의의 핵심요소들을 그대로 녹여 내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저 상태로 E급에 해당하는 전투 인형들을 상대해,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이것을 조금 더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

"지금부터 너희들은, 조금 전 보여 주었던 움직임을 재현할 것이다."

본능에 의존하지 않고, 의식에 때려 박아 언제든 펼칠 수 있게 체화시킬 것이다.

그 순간, 저들의 수준은 한 단계 더 성장하리라.

"어려울 것 없다. 너희가 조금 전 했던 행동을 바탕으로 '형'을 정제화하면 된다."

학생들의 표정에 의문이 가득하다.

어떻게 본능적인 움직임을 재현하느냐- 하는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해답은 존재한다.

"에일론,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가능합니다."

딱-

손가락을 튕기자, 전투 인형들이 몸을 일으켰다.

학생들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으나-

이번에는 대련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전투 인형은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비척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에는 힘없이 움직이다가, 처절하고 처연한 움직임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눈앞에서 움직이는 전투 인형의 움직임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은 모양이다.

"너희들의 움직임은 이 전투 인형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바탕으로 저번 강의에 배운 '융화'를 접목해, 너희만의 '형'을 만들어라."

* * *

'다시, 다시, 다시.'

루카스의 과제는 '다시'의 연속이었다.

본능적인 움직임을 완벽하게 재현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 관절의 움직임이 맞나... 싶은 움직임이 이어지고, 사람 몸이 이렇게 꺾일 수 있나... 싶은 동작이 이어졌다.

완전히 따라 하는 데만 해도 강의 시간을 넘겨 버렸다.

"이번 과제는 다음 강의까지 보류하도록 하지."

결국, 이번 과제는 다음 강의까지 미뤄졌다.

본래 루카스 강의에서 주어지는 과제는 얼마가 걸리더라도 강의 시간 안에 해결해야 하나,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기말고사를 앞두고 준비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아에로크 왕실로 출장을 가야 했고, 복귀해서는 교수 회의도 참석해야 했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스케줄의 루카스였다.

루카스는 학생들을 남겨 두고 강의실을 벗어났고, 리트가 대신 학생들 앞에 나섰다.

"자, 여기 대여 신청서 작성하시고, 각자 배정받은 전투 인형을 가지고 복귀하도록 하세요. 전투 인형의 심각한 훼손이 있거나 유실 시에는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명심하시구요."

그렇게, <전투의 모든 것> 수강생들은 전투 인형과 함께 기숙사에 복귀했다.

이제 그라스코 내에서 루카스 교수의 강의는 그 관심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당연히 교보재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전투의 모든 것> 수강생들은 모든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수밖에 없었으나-

"저게 뭐 하는 거야?"

"춤... 인가?"

"제령 의식 아닌가?"

그들의 행동은 의문을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마치 단체로 약에 취한 것 같은 기이한 행동들.

정작 <전투의 모든 것> 수강생들은 진지했고, 루카스의 강의를 조금이라도 들어본 이들이라면 그 행동들이 절대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어떻게든 그 속에 숨겨진 진의를 파악하고자 했으나,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 * *

그라스코에서 약에 관련된 이는 베디치밖에 없음을 확인했다.

그의 '겁쟁이' 성격 덕분이었다.

1년이 넘도록 복용하고 있으면서도 과하지 않게 조절해가며 먹고 있었고, 중독이 아닌 활용을 하는 녀석이었다.

다른 의미로 대단한 녀석이다.

무지크의 중독성을 의지만으로 이겨 냈다는 소리니까.

'졸업 후에 물려 줄 생각을 했다는 게 문제지만.'

어째서 그라스코에 무지크가 퍼지게 됐는지는 바로 감이 왔다.

이 녀석은 관리를 잘했지만, 베디치가 졸업 후 일이 꼬인 것이다.

누군지는 몰라도 그놈은 베디치에 비해 약을 남용했고, '부작용' 역시 빠르게 드러났을 것이다.

그렇게 그라스코에는 무지크가 퍼지게 됐을 테고, '부작용' 때문에 그라스코는 더욱 빠르고 심각하게 무너져내린 것이다.

무지크가 마약(魔藥)이라 불리는 이유,

그것은 바로 이 부작용에 있다.

무지크의 부작용-

그것은 인간의 마인화에 있다.

인간의 재능을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마인화로 인해 상대적으로 능력치가 증폭되는 것이다.

종국에는 이지를 잃고 '약사'에 의해 조종받는다.

마약(麻藥)이 아닌, 마약(魔藥)이라 불리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적정량보다 미만이라고는 하나, 1년 넘게 복용한 베디치 역시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밀리아의 주도로 감금해 두고는 있다.

문제는 이것이 언제 또 흘러들어올지 모른다는 것.

조사가 필요하다.

물론 나 혼자 할 수는 없는 일-

"그래, 독대를 청했다고."

"예, 폐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아에로크의 알현실.

그곳에는 시종 복장의 로메로가 권좌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대가 직접 독대를 요청할 사안이면 평범하지는 않겠지. 말하라."

"아에로크 정보국의 협조를 요청하고 싶습니다."

"정보국의 협력? 하인즈가 또 납치라도 된 것인가."

로메로는 가벼운 농담으로 서두를 열었다.

하지만, 이것은 뼈있는 농담이다.

아에로크의 정보국을 무슨 뒷골목 정보 집단쯤으로 아느냐는, 일종의 경고.

"아에로크의 안위에 관한 문제입니다."

"...들어보지."

"약이 시중에 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약'이라 뭉뚱그렸으나, 로메로는 단박에 그 정체를 파악했다.

"그 약의 정체는 알고 있나?"

"'무지크'입니다."

"무지크? 확실한가?"

로메로는 이미 무지크에 대해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마족들과의 전선이 가장 인접한 국가의 수장인데, 무지크를 모를 수 없지.

"그렇습니다."

"무지크라니... 큰일이군. 알겠네. 지금부터 정보국을 가동해 무지크의 흔적을 찾도록 하지. 찾는 즉시 자네에게 관련 정보를 넘겨주겠네."

"감사합니다."

로메로와의 독대를 마무리하고 쉴 틈 없이 다시 그라스코로 향했다.

이제 기말고사가 일주일 정도 남은 상황.

준비할 것이 많다.

숙소가 아닌, 집무실로 향해, 교수회의를 대비해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다.

무지크 건은 베디치 하나의 일탈로 밝혀졌으니, 주요 안건으로 상정되지는 않을 테고, 안전장치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전투 학부의 기말고사가 가장 주된 논제가 되겠지.

"교수님!"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는지, <전투의 모든 것> 수강생 일부가 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찾아왔다.

"무슨 일이지?"

"중간 점검을 받고 싶습니다."

"...."

본래라면 들어주지 않았어야 옳다.

하지만 여기까지 찾아온 열의는 칭찬할 만하다.

게다가 최근 무지크의 등장으로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원인도 있다.

그래서-

"그래, 봐주마."

학생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동작의 카피는 끝낸 상태.

이제 그것을 온전한 '형'으로 고치는 과정에 있었다.

이 부분이 생각보다 어려웠는지, 상당히 헤매고 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답답하다 못해, 울화가 솟구칠 지경이다.

무지크라는 실체화된 위험이 가까워지고 있고, 알림창으로 보이는 라이프 타임이 점점 줄어들기에 조바심이 나는 이유도 있다.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다.

그 짜증이 발출하려는 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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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짜증은 사그라들었고,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제가 제대로 한 게 맞나요?"

"아니, 다시 해 오거라."

평화는 평화고, 엉망인 건 엉망인 거다.

§ 아카데미의 신화급 교수가 되었다 73화

73. 기말고사 (3)

학생들의 열의는 대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곧 기말고사를 앞두고 있었고, 자신들은 그라스코를 대표해 선발된 38인 중 하나가 아닌가.

게다가 기말고사는 중간고사와 스케일 자체가 다르다.

각국의 내로라 하는 기사단에서 참관하는, 그야말로 그들에겐 미래가 달려 있는 것이었다.

루카스가 낸 과제를 나름대로 열심히 수행했다.

하루가 채 되지 않는 시간에 결국 전투 인형의 움직임을 카피했고, 루카스의 가르침을 녹여 내 나름 '형'을 빚어내기도 했다.

제로에서 시작한 것치고는 괜찮은 결과가 나온 것 같았다.

루카스의 확인을 받으려면 아직 이틀이나 더 남은 상황.

기다릴 수 없어 교수동으로 찾아갔다.

"교수님!"

문이 열리고, 늘 그렇듯 기품이 덕지덕지 묻어난 루카스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무슨 일이지?"

"중간 점검을 받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루카스의 고아한 일면 때문에 상당히 냉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리다.

그는- 학생들의 요청을, 그것도 학생들의 성장에 관련된 요청은 거절하지 않는다.

"그래, 봐주마."

지금 역시 그러하다.

그렇다고 그들이 이 기회를 거저 얻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비록 약식이긴 하지만, 자신이 준비한 최선을 선보였다.

'형'의 시연을 마치고, 루카스의 평가만을 기다리고 있는 이때.

숨이 멎을 듯한 침묵이 감싼다.

루카스를 바라보지만, 그의 표정으로는 결과를 짐작할 수 없다.

얼핏, 분노가 서린 것도 같다.

잔뜩 긴장하며 그의 입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마침내, 그의 입이 열리려는 찰나-

'웃으셨다?'

아주 잠깐, 정말 찰나의 순간이지만, 단련된 그들의 시각에 루카스의 미소가 잡혔다.

"제가 제대로 한 게 맞나요?"

"아니, 다시 해 오거라."

콰앙-

커다란 소리를 내며 굳게 닫혀 버린 문이, 커다란 벽을 느끼게 했다.

* * *

어... 일부러 세게 닫으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바람 때문이다, 바람.

아무튼, 학생들의 중간 점검까지 마치자 피곤이 몰려온다.

하지만 숙소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

숙소에서 잠을 잤던 게 얼마나 오랜 일인지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집무실 소파에서 대충 잠을 청하는 날이 더 많다.

숙소의 매트리스가 편안하다고는 하나, 그것도 익숙해지다 보니 결국 잠을 설치게 되었다.

차라리 이곳에서 쪽잠을 자는 것이 훨씬 낫더라는 진리를 깨달은 후, 강의 준비가 길어지거나 업무가 많으면 차라리 이곳에서 잠을 청하곤 했다.

사실 잠을 청한다기보다 그저 눈만 잠깐 감았다 뜨는 수준이었다.

육체적인 피로야, 일일 훈련 보상으로 날아가 버리니, 아무래도 좋다.

학생들을 돌려보내고, 다시금 책상 앞에 앉았다.

지금 내 눈앞에는 학생들이 보였던 본능적인 움직임을 내 나름대로 '형'으로 바꾼 것들이 학생별로 정리되어 있다.

단, 그림으로 알기 쉽게 표현한 것이 아닌, 문장으로 그 움직임을 독해하는- 일종의 구결(口訣)이다.

그 수준은 말할 것도 없이 조금 전 보았던 그것에 비해 압도적.

내 나름의 답지로 준비해 두고 있다.

완성본이 아니지만 이대로 주어도 저들에게 커다란 힌트는 될 테지.

아직 밤이 깊지 않았으니,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기초는 완성해 둘 참이다.

구결 하나씩을 들고, 심상에 잠겨 그 움직임을 옮겨 적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졌다.

내가 이렇게 집중력이 좋았나 싶을 정도로 집중한 모양이다.

어느새 완성된 기초 단계의 형이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대신 뻑뻑한 눈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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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알 님께서 500G 후원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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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뭇한 마음으로 알림을 확인하고, 구결들을 내려놓았다.

나도 사람인지라, 피곤이 느껴진다.

소파로 이동해 자리를 잡았다.

다만 드러눕지는 않고 최대한 편하게 앉았다.

누워서 자면 편할 텐데, 오히려 눕는 게 더 불편하다니. 이상한 몸뚱이지만, 내가 적응해야 할 문제다.

'잠깐 눈만 붙이자.'

어차피 5시쯤에는 깨기 싫어도 깰 테니.

그저 잠깐 눈을 감았다.

* * *

"교수님, 퇴근 안 하셨어ㅇ...."

루카스의 연구실 문을 조심히 열고 들어온 리트는, 소파에 조각처럼 앉아 잠든 루카스를 발견했다.

그가 이렇게 잠든 모습을 몇 번 본 적 있지만, 볼 때마다 그저 놀랍다.

종족을 초월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그저 앉아서 눈을 감고 있을 뿐인데.

"이럴 때가 아니지."

잠시 멍하게 루카스를 감상하던 리트는 얇은 담요를 챙겨 루카스에게 덮어 주었다.

그리고는 자신도 루카스 옆에 얌전히 앉아 잠든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감은 눈의 긴 속눈썹이, 그의 고른 호흡이 그녀의 마음을 간질였다.

문득, 그녀는 지금 루카스가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헛!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하지만 점점 유혹은 깊어졌다.

얼마 전 루카스의 명령으로 리트는 처음으로 몽마족 다운 일을 했다.

난생처음 다른 이의 꿈속으로 들어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종하며 정기를 빨아들였다.

처음으로 맛본 정기는 그야말로... 달콤했다.

그렇게 맛본 정기도 그렇게 달콤한데, 직접 정기를 빨아들이는 것은 얼마나 황홀할까.

하지만 꿈의 내용을 조종해 정기를 빨아들이는 것과 직접 꿈에 현신해 정기를 흡수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통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리트는 만약, 아주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 상대는 당연히 루카스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무, 물론 교수님의 허락을 받아야 하겠지만....'

얼마 전 맛본 정기의 맛이 입안을 감돌고, 루카스의 숨이 달큼하게 코끝을 간질인다.

자신도 모르게 품은 음심은, 몽마족의 본능을 콕콕 건드렸다.

'그냥 같이 눈만 감고 있을... 까.'

루카스는 그야말로 누가 업어 가도 모르는 상태로 잠들었다.

곁에서 같이 눈 감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리트는 루카스 옆에 앉아 눈을 감았다.

심장의 고동과 숨소리가 느껴지고, 마음이 느슨해진다.

그녀의 몸이 점점 루카스 쪽으로 향했다.

폭-

안정적으로 루카스의 어깨에 기댄 리트는 그야말로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루카스의 몸에서 나는 좋은 향기가 그녀의 이성을 자꾸 끊어 버리려 하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ㄴ돼, 돼....'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루카스의 꿈속으로 들어가 버린 그녀였다.

야릇한 무언가를 기대하며.

화르르륵!

-어멋!

그러나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루카스의 꿈속은 그녀의 생각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었다.

사방이 온통 시뻘겋다.

피 냄새가 가득하고,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다.

지옥도나 다름없는 풍광.

그러나 그녀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루카스의 꿈과 연결되며 생생히 느껴지는 이 감정.

그것은 그야말로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동시에 어마어마한 무력감이 그녀를 뒤덮었다.

도대체 이 감정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지, 자신이 이러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곧- 루카스의 감정이 이렇다는 것이다.

리트는 이 꿈을 조종해 이 감정에서 벗어나려 했다.

-교수님이 이전에 꾸셨던 꿈...!

지금은 솟구쳐 오르는 감정 때문에 제대로 꿈을 조종할 순 없으니, 이전에 꾼 꿈으로라도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화르르륵-!

꺄아아악!

쿠구구궁!

콰광!

몇 번을 돌려도, 루카스의 꿈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끓어오르는 감정만 격해질 뿐이었다.

-그렇다면 교수님은 이런 꿈을 매일 꾸고 계셨단 말이야?

꿈이란 단순한 것이 아니다.

몽마가 꿈에서 정기를 흡수하는 것처럼, 꿈 자체에도 기운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꿈만 매일같이 꾼다면, 멘탈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리트는 서글픈 감정이 몰려왔다.

꿈에 동화되어 그런 것이 아니다.

루카스를 향한 진심 어린 동정이 그녀를 덮쳐들었다.

-교수님, 제가 곧 편하게 해 드릴게요. 더 이상 이런 꿈을 꾸시지 않도록-!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라도 행복한 꿈으로 바꾸려 했다.

물론, 그 속에 자신의 모습도 투영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라?

이상한 일이었다.

이 꿈과 완벽하게 동화한 상태였으나, 꿈의 내용이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이 꿈에서 풍겨오는 감정 때문이라 치더라도 아주 조금의, 그저 약간의 변화도 허용되지 않고 있었다.

-이게 왜....

그때였다.

-멈추어라, 더러운 몽마년아.

그녀의 눈앞에, 루카스와 소름 돋을 정도로 똑같은 형상의 사내가 나타났다.

그의 행색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평소 루카스를 떠올렸을 때,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옷가지는 다 해져 남루했고, 머리는 흐트러졌으며 곳곳에 상처투성이였다.

무엇보다 전신에 피 칠갑을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괴기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모습.

-리트... 이 반푼이 몽마가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것을 제외하면 루카스와 똑 닮은 모습이었으나, 리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자는 루카스가 아니다.

-당신 뭐야? 당신이 어째서 교수님의 꿈에...? 루카스 교수님은 어디에 계시지?

-빌어먹을 마족년에게 해 줄 대답 따위는 없다. 이곳에 제 발로 들어온 이상- 너는, 죽어야겠다.

꿈에서 몽마를 상대한다니, 보통은 코웃음을 칠 일이다.

하지만, 이 남자의 말은 진짜였다.

거부할 수 없는 압력이 리트를 향해 짓쳐 든다.

-끄윽, 꺽... 교, 교수님. 사, 살려....

하프 몽마족 리트는 꿈에서 소멸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멈춰라, 루카스."

너무나도 서늘한, 하지만 너무나도 따뜻한 음성이 공간을 울렸다.

동시에 리트를 압박하고 있던 기운이 물러났다.

-교수님....

리트가 알던, 그 루카스의 등장이었다.

* * *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어차피 깨면 기억조차 남지 않겠지만, 이 괴로움은 강렬하게 남을 것이다.

이것은 나의 업보.

내가 고스란히 떠안아야 할 나의 원죄.

나는 오늘도 이 감옥에 갇혀 내가 받아야 할 형벌을 감내하고 있다.

-끄윽, 꺽... 교, 교수님. 사, 살려....

그 순간.

어떤 목소리가 내 귓전에 울렸다.

그것은 지금껏 이 꿈에서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

그러나 한없이 익숙한 목소리.

"리트?"

리트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괴롭게 울리며 나를 괴롭혔다.

"어디냐, 어디냐 리트."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리트, 대답해라!"

당장이라도 소리의 근원을 찾아 움직이고 싶었으나, 움직일 수 없다.

나는 사슬에 묶여 사지를 결박당한 상태이니.

하지만 포기할 수 없다.

분명, 리트가 내게 살려 달라 간청하고 있다.

이것은, 이 꿈이 내게 내리는 형벌이 아닌-

'진짜.'

"끄아아아아!"

사슬을 끊어 내려 안간힘을 썼다.

그 순간-

[이강밍 님께서 100G 후원하셨습니다.]

[이강밍 님께서 100G 후원하셨습니다.]

[이강밍 님께서 100G 후원하셨습니다.]

[이강밍 님께서 100G 후원하셨습니다.]

[이강밍 님께서 100G 후원하셨습니다.]

[이강밍 님께서 300G 후원하셨습니다.]

[이강밍 님께서 300G 후원하셨습니다.]

[이강밍 님께서 300G 후원하셨습니다.]

[이강밍 님께서 500G 후원하셨습니다.]

[이강밍 님께서 500G 후원하셨습니다.]

[이강밍 님께서 500G 후원하셨습니다.]

[이강밍 님께서 1,000G 후원하셨습니다.]

[이강밍 님께서 1,000G 후원하셨습니다.]

[이강밍 님께서 3,000G 후원하셨습니다.]

[이강밍 님께서 5,000G 후원하셨습니다.]

[특수한 조건이 성립되었습니다. 12,900G를 소모해, '루카스의 원죄'를 일시 해제합니다.]

챙그랑-!

공간이 깨어지며 그 너머의 루카스와 리트가 보였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애처로웠다.

"멈춰라, 루카스."

-교수님....

그녀는 동시에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무너져 내렸고, 나는 그녀를 받아들었다.

그녀는 내 품에서 의식을 잃었다.

"네 원망은 내가 오롯이 받아 낼 것이다. 다른 이는 끌어들이지 마라."

-지금 분노하는가? 네가 무슨 낯짝으로!

루카스의 처절한 음성이 쩌렁하게 울렸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나도 양보할 수 없다.

"네가 하지 못한 것, 나 때문에 지키지 못한 것은 내가 대신해서 반드시 지키겠다. 그 빌어먹을 미래, 내가 책임지고 바꿀 것이다. 그러니, 너는 더이상 선을...."

조용한 분노가 타올랐다.

내 분노에 반응하듯이 오러가 넘실댔다. 포인트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이 끝없는 공간을 집어삼킬 듯이 오러가 폭주했다.

"...넘지 마라."

루카스는 그런 내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더니, 이내 저 균열 너머의 공간을 바라보았다.

그의 음성에는 슬픔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우습구나, 우스워. 무엇보다 우스운 것은 너와 달리 저 풍경을 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일 테지.

어느 순간, 내게 묶여있던 사슬이 루카스에게로 옮겨갔다.

-약속은 꼭 지켜라. 그리고, 절대 잊지 마라. 저 기억을, 저 감정을.

루카스는 깨어진 공간 너머로 걸어 들어갔고, 동시에 빛이 터져 나오며, 공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뜨니-

"교수님!"

내 연구실이었다.

§ 아카데미의 신화급 교수가 되었다 74화

74. 기말고사 (4)

"루카스 교수님 괜찮으세요? 정신이 좀 드세요?"

눈앞에서 밀리아 교수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대고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지?"

"후우, 괜찮으시구나."

밀리아는 안심했다는 듯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있으면 교수 회의인데 웬일로 <카일론 관>에 안 계시길래 와봤더니... 교수님이 숨도 안 쉬고 계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뭐?"

그녀의 말에 놀라 몸을 일으키자, 가슴께에 있던 무게감이 후욱- 사라졌다.

"그 친구도 여기서 잠들었나 본데...."

어쩌다 보니, 내 무릎을 베개 삼은 그것-

바로 리트였다.

내 꿈속에서 '진짜' 루카스에 의해 죽어가던 리트.

서둘러 맥박과 상태를 확인했다.

우려와 달리, 숨은 쉰다.

지금은 그저 기절한 상태로 보인다.

"후우...."

깊은 한숨이 튀어나왔다.

모든 것이... 기억이 난다.

이곳에 넘어온 이후로 처음이다. 꿈이 이렇게나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그곳에서 불타는 그라스코와, 죽어가는 내 제자들의 초상을 보았다.

모조리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속의 모두를 구하고 싶었으나,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리트의 안위뿐이었다.

여전히 무력감이 전신을 짓누른다.

리트의 머리를 조심히 들어 소파에 완전 누인 뒤, 담요를 덮어두었다.

내가 하는 것을 지켜보던 밀리아가 입을 열었다.

"교수님의 조교... 몽마족 맞죠?"

다소 걱정스러운 투였다.

당연한 일이다.

몽마족이 옆에서 잠에 들어 있다는 것이 좋은 의미는 아니니까.

하지만-

"걱정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리트가 어째서 내 꿈에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행동에 악의가 없다는 것은 확실히 안다.

밀리아가 걱정하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몽마족에게 꿈을 허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줄 아시잖아요. 혹시 모르니, 지금이라도 저 마족을-"

부스럭.

무언가의 기척에 시선을 돌리니, 리트가 천천히 눈을 뜨고 있었다.

"교, 교수님...."

그녀의 입에서 메마른 음성이 흘러나왔다.

"죄송, 죄송해요. 제, 제가 교수님 꿈에 함부로 들어가서...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교수님을 곤란하게 한 건가요? 흑, 저는 정말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깨어난 리트는 굉장히 횡설수설했다.

내 꿈에 접근을 시도했고, 그 이후의 기억은 없어 보인다.

그저 지금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이 상황 때문에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고 짐작하는 듯했다.

"리트."

"네에, 교수님...."

"몽마인 너에게 정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안다. 한 번의 실수는 잘못을 묻지 않겠다. 하지만 두 번은 없다."

"네...."

오히려 리트 덕분에 한 가지 제약에서 풀려난 셈이다.

끝도 없이 되풀이되던 감옥에서 탈출하게 되었으니. 그렇기에 그녀의 잘못을 덮으려 한다.

"밀리아 교수도 이번 일은 여기에다 묻어두셨으면 좋겠는데."

"...알겠어요."

어딘가 토라진 듯한 표정이지만, 그래도 일단 대답은 했으니.

"우린 교수회의에 다녀올 테니, 리트 너는 조금 더 쉬어라. 밀리아 교수, 가시죠."

"네, 교수님."

리트는 연구실에 남겨 두고, 밀리아와 함께 교수회의로 향했다.

* * *

"어떠십니까?"

"...완벽하군."

일반 학생으로도 엄청난 효용을 발휘했던 '약'은 기말고사에 진출할 정도의 수준을 가진 학생들을 상대로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그것은 사방에 널브러진 이들의 상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은 카데인이 자랑하는 전투 학부의 조교와 조교수들.

그 수준이 만만치 않은 이들이었으나, '약'을 투여한 학생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단 몇 합 만에 저렇게 처참한 상태로 널브러지게 된 것.

그야말로 어른과 아이의 싸움과 같았다.

이 강함을 등급으로 나타내자면, 최소 D급.

보통 조교수들이 F급 남짓임을 감안할 때, 아카데미의 재학생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수준이다.

이 정도라면 4대 아카데미가 아닌, 군소 아카데미의 정교수와 맞먹는 수준이 아닐지.

퍼레이라의 얼굴에 만족이 가득했다.

"이것으로 이번 기말고사 역시, 우리 카테인의 것이 되겠군."

"당연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퍼레이라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주위에 음울한 무언가가 일렁였다.

그 모습을 본 교수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톱니바퀴는 구르기 시작했으니....'

* * *

교수회의는 주로 '안전'에 관한 것이 논의되었다.

중간고사 때 크게 데인 기억도 있고, 이번 기말고사에는 아에로크의 국왕은 물론이고, 에르멜의 국왕까지 참석을 천명했기 때문이다.

다른 국가의 수장들은 아직 공식 입장을 내어놓진 않았으나, 참석 쪽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이제 그라스코의 '안전' 문제는 외교와 관련 있는 사항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각국의 수장들이 그냥 맨몸으로 올 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안전을 소홀히 해선 안 됐다.

"밀리아 교수는 결계 관리를 더욱 철저하게 해 두시고, 조교수들과 연구생(대학원생)들을 동원해서 경계를 강화해야겠습니다. 다들, 이해하셨습니까?"

"부총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밀리아 교수, 말씀하세요."

밀리아는 나와 있을 때는 상반된, 마치 마탑 조사단의 팀장이던 그 시절의 모습이었다.

"결계는 제가 온전히 책임지겠습니다. 단- 루카스 교수님의 도움을 좀 받고 싶은데요."

"루카스 교수 말입니까?"

"네. 제가 믿고 도움을 요청할 분이... 루카스 교수님뿐이네요."

마법 학부의 교수들은 상당히 언짢은 티를 내면서도, 결계와 연관된 지식이 룬 문자에 관련된 것이기에 입을 닫았다.

실제로 그 분야에 한해서는 자신들이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그라스코에서는 밀리아를 제외하면 룬 문자에 관한 지식이 있는 것이 나뿐이다.

밀리아의 요청은 타당한 것이다.

하지만-

"루카스 교수는 기말고사의 준비에 집중을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로널드는 물러서지 않았다.

다른 것이 아니고, 그라스코의 명예가 걸려 있는 것이다.

내가 온전히 기말고사에만 집중하길 바랐다.

그러나 밀리아도 물러서지 않았다.

"외교적 문제를 낳을 수도 있는 사안입니다. 그리고, 기말고사는 결국 학생들이 치르는 것- 루카스 교수가 온전히 기말고사에 몰두하는 것이야말로 인력 낭비라고 생각합니다만?"

냉철하게 받아쳤다.

분명 나와 있을 때 보였던 골든리트리버와는 다른, 뭐랄까....

'보더콜리?'

그래도 강아지의 이미지는 벗어나지 못한 것 같지만.

"으음...."

그녀의 논리에 로널드가 무너지고 있었다.

밀리아가 의기양양해져서 내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결계 쪽으로 지원하러 갈 생각이 없다.

혹시나 결계 보수 작업을 해야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물론 대부분 밀리아가 하겠지만, 만에 하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 경우, 획당 만 골드다.

아무리 독자님들 덕분에 골드가 많아졌다고는 해도 흥청망청 쓸 생각은 없다.

[새로운 알림이 도착했습니다.]

[홍서크 님께서 300G 후원하셨습니다.]

[네쥬0605 님께서 100G 후원하셨습니다.]

[호령자 님께서 300G 후원하셨습니다.]

[호령자 님께서 100G 후원하셨습니다.]

[k2929 님께서 100G 후원하셨습니다.]

이렇게 후원 알림이 매번 내 시야를 행복하게 장식한다고 하더라도-

"저는 기말고사 준비에 집중하겠습니다."

독박은 너 혼자 써라, 밀리아.

* * *

"아, 교수님! 너무 하신 거 아니에요?"

"밀리아 교수, 혼자의 역량으로 결계를 지키는 것은 충분할 텐데요. 다른 의도가 있다는 것쯤은 훤히 보입니다."

교수 회의가 끝나고 밀리아는 내게 서운함을 토로했다.

밀리아는 어떡해서든 나와 함께 있을 시간을 만들어, 단둘이서....

룬 문자를 해독하려 했을 것이다.

다른 교수들이나 밀리아의 위압감에 짓눌리지, 내게는 훤히 보이는 수였다.

밀리아 혼자 그라스코의 결계를 맡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대목부터가 이미 무언가를 노리고 있다는 뜻이다.

"교수님, 나빠요."

살짝 토라진 듯 입술을 삐죽이는 그 모습이- 마치, 주인에게 투정 부리는 강아지 같았다.

"압니다. 저도. 제가 나쁜 놈이라는 거."

하지만 지금 밀리아에게 할애할 시간은 없었다.

기말고사는 말할 것도 없고, '잊혀진 역사'나 '무지크' 역시 내가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특히 무지크 같은 경우에는 내게, 그리고 이 그라스코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가능성이 너무나 크다.

한가로이 룬 문자나 읽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 기말고사 끝나면 시간 좀 내주실 수 있나요?"

"...."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고 있자니, 죄책감이 콕콕 찔러온다.

기말고사가 끝나도 내 일이 줄어들 거라는 장담을 하지 못한다.

마치 강아지를 집에 외로이 두고 출근하는 기분이다.

"노력해 보죠."

내가 밀리아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 정도뿐이었다.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밀리아 정도 되는 네임드의 호감도를 유지하는 것 또한 중요하니까.

다만, 지금은 기말고사와 무지크에 더욱 초점을 맞출 때라 이 정도가 마지노선이다.

연구실로 돌아와 리트에게 약물 관련 뉴스는 모조리 찾아오라고 지시하고, 나는 무지크의 설정들을 정리했다.

세계관 유일의 중독성이 존재하는 약물이라는 것.

용법에 따라 그 효용이 천차만별이라는 것.

또한, 그 부작용에 관해서도.

그리고, 이 무지크가 가져온 일들까지.

동시에 기말고사 준비 또한 허투루 할 순 없었다.

기초 수준으로 완성했던 구결들을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전투의 모든 것> 수강생들뿐만이 아니다.

나머지 18인의 것까지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이들은 내 수업을 듣지 않기에 그저 지난 중간고사와 특강, 페두르 산맥 실습에서 보았던 움직임을 토대로 구성한 것들이다.

학생들은 학생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의 일을 했고-

기말고사까지 시간이 성큼 흘렀다.

* * *

기말고사는 그야말로 대축제였다.

화려함의 수준이 중간고사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어 다채로웠다.

4개국의 수장들이 모두 이 기말고사의 참관을 위해 방문했고, 각국의 귀족들이 자리를 빛냈다.

거대한 그라스코의 부지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축제를 즐기기 위한 인원들과 각국의 요인을 지키기 위해 결집한 경호 인력들.

학회에서 파견 나온 수준급의 학회 소속 기사들.

이 순간, 그라스코는 천혜의 요새,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이 그라스코의 자랑스러운 38인의 학생들을 소개합니다!

축제의 막이 열리고, 이 기말고사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전투 학부의 연합 대전이 시작되려 한다.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주최 측인 그라스코의 학생들.

네 개의 아카데미 중, 가장 규모가 큰 아카데미답게 38명의 인원이 참가한 그라스코.

그 명성에 비해 기말고사의 성적은 지금까지 형편없었으나- 이번 기말고사는 다르다.

루카스라는 존재만으로 새로운 기대감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다음으로! 전통의 강호! 카데인 아카데미의 용맹한 학생들을 소개합니다!

쿵-

쿵-

쿠웅!

수십의 인원이 날카로운 기도를 풍기며, 절도 있게 들어서고 있다.

그 광경은 좌중을 압도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역시, 전통의 강호라 불리는 카데인다웠다.

-다음은, 베르하탄 아카데미의 30명의 전사들이 등장합니다!

아니크 왕국의 베르하탄 아카데미.

그들 역시 심상치 않은 기도를 뿜어내며, 여유롭게 등장했다.

"으음... 다들 심상치 않구만. 준비를 많이 한 듯 허이. 하지만, 우리 그라스코 학생들도 밀리진 않겠지?"

로널드가 긴장된 음성으로 루카스에게 속삭였다.

루카스는 고저 없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라스코에서 우승을 노려볼 수도 있겠나?"

루카스는 로널드의 물음에 잠깐 입을 다물더니,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아카데미에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글쎄요."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신흥 강자! 세이란 아카데미의 학생들을 박수로 맞이해 주십시오!

* * *

원래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루카스'가 아니었다.

내가 이 몸에 빙의되어 주인공을 가로챈 것뿐,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다.

아카데미의 천재 망나니.

제논 프레이어.

내 시선 끝에 걸린 세이란 아카데미의 행렬 속, 참으로 무기력한 자세로, 아무런 감흥도 없어 보인다는 태도로.

일견- 싸가지 없어 보이는 자태로 걸어 들어오는 저, 평범하디 평범한 인간.

하지만 <시력 강화>로 그 실체를 본다면-

등장만으로 낮과 밤을 바꿀 만큼 어마어마한 '빛'의 소유자.

두말할 것없이 이 기말고사의 유일한 우승 후보.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의 등장이었다.

§ 아카데미의 신화급 교수가 되었다 75화

75. 기말고사 (5)

제논 프레이어.

내가 창조해 낸 소설 속의 주인공.

100화에 가까운 이야기 동안 저 녀석을 조형하며 웃고, 화내고, 힘들어하고, 좌절했다.

내 필력으로는 도저히 저 녀석을 매력 있게 만들 수 없었으니까.

스쳐 지나가듯 나온 개그캐만도 못한 존재감을 보이며, 내 소설의 멸망을 이끌었던 주축 중 하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외모, 눈부시게 밝은 금발, 조각한 듯 완벽한 비율의 신체조건까지.

내가 바라던 이상향을 거기에 넣어 두었으니까.

재능은 또 어떠한가.

이 <시력 강화>로 보이듯, 거대한 그라스코 부지 전체를 오롯이 그의 '빛'으로만 채울 정도이니 말 다 한 셈이다.

현시점으로 보자면, 세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제논 프레이어를 조금이라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그 천재성을 모를 수 없다.

하지만 그에겐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게으른 천재.

지독하게 게으르다는 점이었다.

재능이 있으나 노력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으니 재능이 제대로 개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 미친 천재는 그 수준만으로도 이 기말고사에서 가볍게 우승을 거머쥘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게 문제랄까.

'신은 공평하지 않다'라는 예를 전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저 제논 프레이어라는 놈이다.

그가 본 실력을 발휘한다면 우승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에일론이 마광포를 쏘아대도, 제시나 토레스가 내가 준 '구결'을 완전히 익혔다고 해도, 데얀이 듀란달을 사용한다고 해도, 제논 프레이어에겐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 기말고사에서 제 실력을 드러내고 우승을 하는가 하는 부분은 다른 문제였다.

원작에서는 제논 프레이어가 기말고사에서 단 한 차례도 우승한 적이 없었다.

게으름 이전에 흥미 문제였다.

저기 걸어오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듯, 그는 이 '기말고사'에 대한 흥미가 단 1g도 존재하지 않는다.

압도적인 재능 탓에 오히려 세상살이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고 해야 하나.

물론, 그에게도 취미라는 것은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 * *

"아... 오늘 '이. 소. 메(이세계 출신 소꿉친구를 메이드로 부리고 있습니다!)' 신간 나오는 날인데!"

"크게 이야기하지마, 쪽팔리니까. 그리고 어차피 전체 제목 말할 거면서 줄여 말하는 심보는 도대체 뭐야?"

"뭐? '이소메'가 부끄러워? 카즈키(메인 히로인)의 아름다움을 무시하는 거냐고!"

"그딴 건 모르겠고, '괄호 열고, 괄호 닫고' 이따위로 말하는 네 놈 친구라는 게 가장 부끄럽다."

둘의 싸움을 보고 있던, 세이란 학생들의 리더, 무쿠탄은 나지막이 경고했다.

"여긴 보는 눈이 많다. '세이란'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유의해."

"뭐가 이렇게 귀찮은 게 많아. 난 그저 '이소메'에 나온 학교랑 이름이 같아서 진학을 선택했을 뿐인데, 맨날 어디 갔다 와라, 뭐해라, 뭐해라. 이래서야 카즈키를 외롭게 둘 수밖에 없잖아."

"제논, 그 '카즈키'의 안위가 내 손에 달려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되지."

"헙! 무쿠탄, 그걸로 협박하기 있어?"

"무쿠탄, 그딴 베게 진작 찢어 버리라니까?"

"카즈키를 질투하는 거야, 지금?"

"지랄도 병이야, 이 씹덕아."

"흥, 사랑을 모르면서."

"적어도 그게 사랑이 아닌 건 잘 알지."

무쿠탄은 둘의 다툼이 조금도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나마 주변의 열기로 인한 환호와 소음 덕에 둘의 대화 내용이 새나가지 않는다는 점이 위안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신흥 강자! 세이란 아카데미의 학생들을 박수로 맞이해 주십시오!

"자, 우리가 들어갈 차례다."

무쿠탄은 학생들을 돌아보며 다시 한번 주지했다.

"세이란의 학생회장으로서, 세이란의 명예를 실추하는 행동은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 특히- 제논 너. 내가 지켜보고 있다. 카즈키를 지키고 싶으면, 절대 튀는 행동은 하지 마라. 알겠나?"

"알겠다고."

세이란 학생들의 앞을 막은 문이 열리고, 더욱 커다란 함성이 이들을 뒤엎었다.

4대 아카데미에 속하긴 하지만, 변방 아카데미에 불과한 세이란 출신 학생들에게는 압도적인 경험이었다.

무쿠탄은 그들의 가장 앞에서, 그러나 의식은 뒤에 골칫거리들에게 집중하며 걸었다.

후욱-

한 발짝 걷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뒤에 있는 제논 프레이어만큼은 아니더라도, 무쿠탄 역시 학생회장이 될 만큼의 실력자.

그 공기 속에 섞인 '강자'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이가 있었으니.

'저자가, 루카스인가.'

현시대, 가장 유명한 기사를, 아니 가장 유명한 '인물'을 꼽으라면 반드시 거론되는 이 중에 하나.

'동부 전선의 영웅' 루카스.

과연, 그는 소문다운- 아니, 소문 이상의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이 드넓은 곳에서 오롯이 홀로 존재하는 듯, 고고한 기세를 뿜으며, 그야말로 절대자의 위엄을 풍겨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시선이 이쪽에 고정되어 있다.

무쿠탄은 더욱 긴장을 끌어올리며, 행동거지에 실수라도 하나 있을까 심혈을 기울였다.

'잠깐.'

근데 이상했다.

물론 이곳에 들어오기 전, 주의를 시켰다고는 하지만, 뒤에서 쫓아오는 제논이 너무 조용했다.

순간, 섬찟한 기분에 뒤를 돌아보자-

"제논!"

그가 멈추어 서서, 루카스를 마주 보고 있었다.

서둘러 그에게 다가가 목덜미를 잡아채곤 끌고 가듯, 배정된 자리로 향했다.

주변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상관없다.

제논의 눈빛에 '진심'이 담겨 있었으니까.

'진심'이라 뭉뚱그려 표현했지만, 이 '진심'은 이 제논이 상대방을 가늠하고자 할 때 자신의 기운을 담아내 특정 상대방에게 보내는, 일종의 도전장이었다.

그것을 받아 내는 것 자체만으로도 막대한 기운을 소모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신입생이던 제논의 '진심'을 받아 냈을 때, 무쿠탄은 이틀간 요양을 해야만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제논의 '진심'이 분명 닿았을 텐데.

루카스는 어떠한 표정의 변화 없이, 오히려-

'웃고 있다?'

희미했지만, 분명히 루카스의 입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무쿠탄, 너도 봤지? 루카스, 저자가 웃고 있는 거. 보통 사람이 아니야. 내 '진심'을 그냥 흘려 버렸어."

"...흘려 버렸단 말이냐."

무쿠탄은 제논의 말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 * *

제논 프레이어는 마치 내게 흑역사와 같은 존재다.

성격이나 취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저 제논이야말로, <아. 천. 망>의 실패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으니까.

들어서는 제논을 보며 그때의 생각에 잠시 숙연해지려는 찰나-

[새로운 알림이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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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님들의 반가운 알림 덕분에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아무튼, 모든 기말고사 진출자들이 전투학 경기가 열릴 메인 스테이지에 당도했다.

그 수준의 차이는 보이지만, 확실히 기말고사에 진출한 이들답게,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기세를 뿌리고 있었다.

벌써부터 수많은 기사단의 스카우터들이 불을 켜고 옥석을 골라내기 위해 눈을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사이 나는 하인즈를 부축해, 단상으로 이끌었다.

삑- 삐익-

약간의 잡음이 어수선하던 분위기에 집중을 만들어 낸다.

단상에 서 있는 초로의 노인, 하인즈가 허허롭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거, 젊은이들의 축제에 이 늙은이가 눈치없이 주목을 끌어 버렸군요. 죄송합니다."

이곳의 어떤 이가 감히 그를 그냥 늙은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오랜만에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하인즈는, '대륙의 현자'라 칭송받는 이유를 증명하듯 유려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이 기말고사라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참석해 주신 귀빈 여러분들, 모두 반갑습니다. 저는 이 기말고사가 개최되는 그라스코의 총장을 맡은 하인즈라고 합니다."

하인즈가 고개를 숙여 보이자, 박수로 화답이 돌아왔다.

"가장 먼저, 자신들의 실력을 증명해 내고 이 기말고사에 진출한 128인의 학생들에게 커다란 찬사를 보냅니다."

하인즈의 손짓에 따라 128인의 학생들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졌고, 우레와 같은 박수가 이어졌다.

"우리의 이웃, 카데인, 페두르 산맥의 정기를 이어받은 베르하탄, 멀리서 여기까지 찾아와준 세이란. 마지막으로- 이 늙은이의 자랑, 그라스코. 네 아카데미의 엄선된 128명의 학생들이 소속한 아카데미의 명예를 위해 결투에 임하게 됩니다. 아카데미의 명예, 물론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축제를 단순히 투쟁의 장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서로의 성취를 확인하며 교류를 다져 화합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말이 길었습니다만- 지금부터, 기말고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동시에 마법으로 만들어진 축하 탄이 화려하게 터지며, 그라스코의 하늘을 수놓았다.

하인즈는 손뼉을 치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자리까지 모시겠습니다."

"고맙소, 루카스 교수."

하인즈는 내 부축을 받아 자신의 자리로 찾아 들어갔다.

"하인즈 총장, 참으로 심금을 울리는 축사였습니다."

에르멜의 군주, 라오니스 3세가 하인즈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하인즈 총장의 말대로 저 아이들의 화합을 넘어, 국가 간의 화합으로 발전되었으면 좋겠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과거의 아픔을 딛고, 함께 발전해 나간다면 더욱 좋겠지요."

이 VIP 구역은 이미 단순한 좌석이 아닌, 그 자체로 정상회담의 장소나 다름없었다.

이곳에서 주고받는 이야기를 가볍게 다룰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저 모든 것이 국가 간의 대소사를 결정하게 될 언사이기 때문이다.

가벼운 사담으로 보일지라도 그 속에는 철저하게 계산된 외교 정치가 깔려 있는 것이다.

'아찔하군.'

이래서 정치를 총성 없는 전쟁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그 속에 깔린 의도가 내게는 너무 적나라하게 보이다 보니, 정신이 아찔하다.

"역시 기말고사답게, 저기 학생들의 기세가 남다릅니다. 그나저나 그라스코는 1학년들이 대다수라고 들었는데. 그들의 성취가 남다른가 봅니다?"

"허허, 그들이 모두 루카스 교수의 제자라지 않소. 루카스 교수가 부임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을 텐데, 맡은 제자들을 바로 기말고사에 진출시키다니. 과연, '동부 전선의 영웅'이라는 위명이 허튼소리가 아니었나 봅니다."

군주들과 총장들의 시선이 내게 쏠린다.

나는 그저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이번에 그라스코의 약진을 기대해 봐도 되겠는가?"

로메로의 '탈'을 쓴 그림자가 입을 열었다.

물론 그를 조종하는 것은 저 뒤에 시종 복장을 한 진짜 로메로겠지.

그 역시 이번 기말고사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실망하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아직 완벽히 가공되지 않은 원석들이지만, 그들의 재능은 1학년이라는 잣대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 대단하니까.

"자신이 있어 보이는군. 어떻습니까, 퍼레이라 총장. 그라스코가 카데인의 우승을 저지할 수 있겠습니까?"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알겠지만...."

퍼레이라 총장은 진득한 미소를 그렸다.

"굵고 얇은 것은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크하하하! 퍼레이라 총장. 그대의 자신감이 짐을 기쁘게도, 또 낯 뜨겁게도 하는구려."

"저는 단지 원론적인 의견을 드렸을 뿐입니다. 우리 카데인에서는 1학년을 기말고사에 내보낼 만큼, 고학년들의 수준이 낮지 않거든요."

"그 말은 상당히 불쾌합니다, 퍼레이라 총장?"

"로널드 부총장께서 제 말을 곡해하셨나 봅니다."

"곡해? 지금 곡...."

로널드가 흥분할 조짐이 보이자, 하인즈가 슬쩍 끼어들었다.

"아, 첫 번째 경기가 시작되려나 봅니다. 저희 그라스코의 학생과... 베르하탄 학생 간의 대결이군요."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리니, 데얀이 경기장에 올라오고 있었다.

'진짜' 로메로의 눈빛이 반짝였다.

나 역시, 퍼레이라의 언행이 썩 좋지만은 않던 차였다.

[귓속말 서비스를 시작합니다.]

[대상 : 데얀.]

-압도해라.

데얀이 움찔하며 주변을 돌아보다, 내게 시선이 닿았다.

나는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데얀은 검을 바로 잡았다.

'여기 있는 모두를 놀라게 해야 할 거다. 그렇지 않으면....'

1,000G의 값어치만큼 굴려지게 될 테니.

참고로 절대 가볍지 않을 것이다.

데얀의 몸이 경련하듯 움찔했다.

§ 아카데미의 신화급 교수가 되었다 76화

76. 기말고사 (6)

수많은 시선이 이 경기에 몰려 있다.

'루카스의 제자'라는 타이틀, 그리고 무엇보다 '첫 경기'라는 상징성이 컸다.

그것 말고는 없다.

원래부터 그 이름값이 대단했던 제시나 루이나, 그리고 충격적 퍼포먼스로 사람들의 뇌리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 에일론에 비하면, 데얀의 기댓값이란 정말 눈곱만큼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대부분은 제시 혹은 루이나, 에일론 또는 카데인의 우승 후보들이 경기할 순서를 기다렸다.

첫 경기.

그것 말고는 하등의 의미가 없는, 그저 지나가는 한 과정일 뿐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기말고사니까, 재미는 있겠지' 정도의 기대감만 품은 채.

그렇게 경기가 시작되었고-

스-걱!

하나,

둘,

셋.

쿠웅-!

-미... 믿을 수 없습니다! 경기가 시작된 지 단 사, 3초! 승자와 패자가 명백히 갈립니다! 베르하탄의 4학년, 라릭 학생을 꺾고, 그라스코의 1학년! 루카스 키즈! 데얀 학생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쥡니다!

'압도하라'는 루카스의 지시.

데얀은 그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다.

상대방을 넘어, 이 경기장 자체의 분위기를 압도했다.

데얀이 가진 재능의 정수(精髓)라 할 수 있는 속도의 극한.

그것을 오롯이 내보였을 뿐이다.

하지만,

"...."

승자와 패자가 나누어진 자리에 있어야 할 열광은 없다.

시리도록 차가운 침묵.

이해의 부재에서 비롯된, 무반응.

되려, 의문이 태어난다.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이, 이게 무슨... 어떻게 아카데미 학부생이 이런...."

사람들의 시선이 데얀에게 향했다가 루카스에게로 향했다.

수많은 시선을 받아 낸 그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의 시선이 퍼레이라를 향해 옮겨갔다.

"실망하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허허! 맞아, 우리 루카스 교수가 분명 그렇게 말을 했지. 자, 이제 카데인에서 굵은 것을 보여 줄 차례인가? 허허허!"

로널드가 얄밉게 덧붙였고,

뿌드득-!

퍼레이라가 앉은 의자 손잡이가, 그의 악력으로 인해 엉망으로 구겨졌다.

* * *

기말고사란 단순히 친선교류전이 아니다.

참가한 학생들의 미래를 결정지을 수도 있는 중요한 자리다.

그런 자리에서 첫 경기에 데얀이 남긴 인상이 강렬하다 보니, 자연히 부담감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어진 두 번째 경기.

역시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토레스의 경기였다.

다만, 이번에는 상대방도 방심하지 않았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도 루카스의 제자 아닌가.

첫 경기에서 무취의 데얀 덕분에 <전투의 모든 것> 수강생들은 모든 참가자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된 상태다.

토레스는 이번 경기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눈앞의 상대는 '그' 카데인의 3학년.

에르멜 출신인 토레스는 카데인의 위상을 잘 알기에 조금은 위축되었다.

"에르멜 출신이라고 들었다."

"...."

"말도 섞지 않겠다는 건가? 오만하구나."

마, 말을 더듬어서 그, 그런 건데.

토레스는 변명하고 싶었으나, 상대방의 공격이 더욱 빨랐다.

그는 엉겁결에 들고 있던 대검을 크게 휘둘렀다.

후웅-!

콰아아앙!

-자, 장외!

"역시, 루카스 키즈!"

"이번에도 한 방이잖아?"

"카데인도 별거 아닌 거 아니야?"

데얀의 경기가 충격을 줬다면, 토레스의 경기는 열광이 뒤덮었다.

더없이 직관적이었고, 확실한 '힘'의 차이였기 때문이다.

다소 당황스러움이 남긴 했지만-

"크하하! 굵긴 정말 굵군요! 장외로 날아가는 궤적 보셨습니까? 아주 굵었어요!"

로널드는 배꼽을 잡고 웃었고, 퍼레이라는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하인즈 역시 그라스코 학생들의 대약진에 기분은 좋았으나, 대놓고 드러내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저희 카데인에서 가장 기대할 바가 없던 아이...입니다. 큰 실수를 할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큰 실수? 굵은 실수겠지!"

로널드가 얄밉게 비꼬았고, 루카스는 그 둘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 * *

첫째 날에 준비된 32개의 경기가 모두 끝났다. 카데인의 학생들은 총 아홉 경기를 치렀고, 토레스에게 진 한 경기와 카데인의 학생끼리 맞붙은 경우를 제외하면 모조리 승리를 거머쥐었다.

아직 반밖에 진행하지 않았으나 이미 64명 중에서 8명을 확보한 것이다. 훌륭한 성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단 한 경기가 카데인의 명성에 단단히 먹칠을 했다. 퍼레이라는 노기를 잔뜩 띤 채, 직접 카데인의 학생들이 머무르는 숙소에 등장했다.

그리곤 다짜고짜 패배한 학생의 뺨을 갈겼다.

짜악!

"도대체 어떻게 된 게!"

그의 발은 무자비하게 학생의 복부를 강타했고, 그대로 바닥을 뒹굴었다.

"아오!"

그의 웅혼한 기운이 담긴 고함이 쩌렁하게 울렸다.

뻐억-

"크억!"

"아까처럼 나가떨어져 봐. 어디, 아까, 처럼, 찌그러져, 보라고."

한 음절씩 끊어가며 그의 발길질이 살벌하게 쏟아진다.

한참을 폭발하고 나서야 겨우 진정된 듯,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하필 그라스코 나부랭이한테 져? 내가 그렇게 그라스코 애송이들에게만은 이겨야 한다고 신신당부했거늘! 뭐, 한 방? 자, 변명해 봐. 변명해 보라고!"

하지만 학생의 상태는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총장님. 노여움을 푸시지요."

"노여움을 풀어? 내가 지금 노여움을 풀게 생겼나? 저 위에서 내가 창피를 당한 게 얼마인지 아나? 로널드 그 빌어먹을 새끼가 내 면전에 대고 얼마나 개쪽을 줬는지 알기나 해?"

그의 눈앞에서 얄밉게 비꼬아대던 로널드가 떠오르니 더욱 열이 뻗치는 것 같다.

그의 눈에 얼핏, 광기가 어리는 것도 같았다.

다시금 폭력의 열망이 끓어오른다.

퍼레이라가 울분을 터트리는 와중에도 '교수'는 침착했다.

"자, 일단 총장님께서 좋아하시는 이 차를 드시면서 안정하십시오. 너무 심한 분노는 몸에 좋지 않습니다."

"후우...."

퍼레이라는 '차'라는 말에 가까스로 마음을 다스리고 자리에 앉았다.

익숙한 향이 그의 코끝을 파고들었다.

뜨거운 김이 폴폴 나는 상태이건만, 퍼레이라는 꿀떡꿀떡 마셨다.

"이제 진정이 좀 되셨습니까?"

"그런 것... 같군."

진정됐다는 그의 상태는 어딘가 이상했다.

눈에 초점이 흐리고, 멍했다.

조금 전까지 분노에 차올라 발길질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

"대계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래... 자네만... 믿네...."

퍼레이라의 의식이 암전했다.

"크흐흐, 멍청한 새끼. 이게 뭐야. 내 병사를 엉망으로 만들어놨잖아. 자아, 아이야. 이 약을 먹으렴. 고통이 눈 녹듯 사라질 거다."

교수는 알약 한 줌을 학생의 입에 뭉텅이로 집어넣었다.

겨우 의식만 유지하던 학생은 약이 입에 들어가자, 격렬하게 몸을 뒤틀어대기 시작했다.

한참을 활어회처럼 펄떡이던 그는 이내 잠잠해졌다가 눈을 번쩍 떴다.

뜬 눈에는 안광이라 불릴 만한 것이 없다.

오로지 검은자위만 가득했다.

"일어나라. 대계를 위해."

* * *

기말고사의 둘째 날.

첫날에 그라스코 학생들이 보여 준 임팩트가 너무나 강렬했기에, 둘째 날은 시작부터 참가자들 사이에 감도는 기운들이 격렬하다 못해 살벌했다.

"퍼레이라 총장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시는데. 밤새 잠을 설치셨나 봅니다? 하긴, 이해가 가지만."

로널드는 퍼레이라를 보자마자 이죽댔으나, 퍼레이라는 딱히 반응이 없었다.

첫날과 달리 로널드의 도발에 대꾸 없이 그저 묵묵히 경기장에 시선을 둘 뿐이었다.

"이제 할 말도 없어졌나 보군."

로널드는 승자의 웃음을 지으며 의자에 몸을 깊게 파묻었다. 하지만 얼굴은 만족스러운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평소에 내가 알던 그 로널드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어떻습니까."

로널드의 표정은 상당히 복잡했다.

"자네의 의견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네. 하지만... 저자는 내가 아는 퍼레이라와 많이 달라. 어제는 너무 다혈질이었고, 오늘은 지나치게 침착하네. 퍼레이라 놈은 다혈질이긴 해도 선을 지킬 줄 알고, 선을 지키면서도 한없이 재수가 없어. 저건... 퍼레이라가 아니야."

"...알겠습니다."

[새로운 알림이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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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서크 님께서 100G 후원하셨습니다.]

[은다래 님께서 500G 후원하셨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 알림창처럼, 앞이 깜깜해졌다.

나는 퍼레이라를 의심하고 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본능 단위의 불쾌감은 내게 어떠한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마족.

처음에는 마족이 퍼레이라의 탈을 쓰고 있다고 생각을 했으나, 그것은 아니다.

밀리아에 의해, 마족들의 침입을 거부하는 결계가 덧씌워졌기 때문이다.

마족에게 영혼을 팔았는가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것도 아니다.

내 원작에서 퍼레이라는 자존심이 강하고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긴 했으나, 마족에게 영혼을 팔 정도로 썩어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가능성.

'무지크.'

바로 약물에 의한 마인화.

마인화가 진행될 정도로 무지크를 복용했다면 부작용의 증세를 동반하게 된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퍼레이라를 가장 잘 아는 로널드와 짜고 판을 벌였다.

덕분에 의심은, 어느 정도 확신이 되었다.

'그렇다면....'

한 아카데미의 총장이 약물에 중독되어 버렸다.

개인의 일탈이라고 치부하기엔, 내가 설정한 퍼레이라는 꼬장꼬장할 정도로 강직한 존재다. 아마 누군가의 계략에 빠진 것이겠지.

그렇다면 그 배후는 과연 퍼레이라 총장 하나로 만족을 했을까?

아니, 그럴 리 없다.

"저는 제 제자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명분을 남겨두고 빠르게 경기장 가까이 자리를 옮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