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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야, 교수님 오시면 말 잘해라."

"너 나 잘해."

밖으로 쫓겨난 에일론과 제시는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서 루카스에게 사죄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하여- 이렇게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전투의 모든 것'의 정규 강의 시간은 4시간이었으니, 이제 곧 강의가 끝날 시간이다.

"어, 이제 나온다."

4시간이 좀 넘어서 5시간 정도가 흐르자, <카일론 관>에서 엄청난 인파가 몰려나온다.

"흑, 흐윽!"

"아, 눈 부은 것 좀 봐."

"너 진짜 눈 빨갛다. 뱀파이어 같아."

그런데 그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다.

대련의 초반 진행에서 쫓겨난 제시와 에일론은 도무지 공감할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와 진짜 역대급. 내 인생에서 그라스코 입학이 가장 잘한 일로 꼽히는 날이 올 줄이야."

"이게 특강 마지막이라는 게 제일 서글프다, 진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몇 번이고 되돌리고 싶을 정도라니까."

저 정도의 반응은 루카스의 강의를 듣는다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오늘의 반응은 무언가 더 특별했다.

눈이 벌겋게 충혈된 것은 예사고, 눈물을 흘리는 이도 심심찮게 보일 정도였으니.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지?"

두 사람의 궁금증이 폭발하려 한다.

"후! 어? 제시, 에일론. 아직 여기 있었니?"

그 인파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루이나."

같은 정규 수강생 루이나 엘라임. 그녀 역시 무언가 여운을 삼켜내는 듯한 표정으로 <카일론 관>을 나서다 두 사람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저 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사람들이 다 왜...."

"아, 너희는 대련 끝나기도 전에 쫓겨나서 모르겠구나. 오늘 대련 끝나고 교수님이 해 주신 특강이 진짜 역대급이었거든."

"뭐? 얼마나."

제시의 반응이 격렬하다.

"저 반응들을 보면 모르겠어? 그냥 역대급이야, 역대급."

제시가 주변을 둘러본다.

"특강 마지막에 또 역대급을 찍으실 줄이야. 정말 우리 교수님이지만 대단... 제시?"

제시는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나한테는 이게 마지막 기회였는데... 한 글자도 놓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망연히 중얼거리던 제시는 에일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빌어먹을 마공학자."

"응, 다음 만년필 미만."

"이 새끼가 진짜-"

속상한 것은 에일론 역시 마찬가지.

루카스의 강의는 학문 구분을 떠나서 깨달음을 안겨주는 무언가 있었으므로.

에일론 역시 역대급이라는 반응이 전부인 이 특강을 놓친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심지어 이번 강의는 <카일론 관>의 자체 영상 기능도 차단된 상태라 다시 찾아볼 수도 없다.

두 사람은 강의를 놓친 것에 대해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다시금 투닥대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실습조도 정해졌는데. 수석이랑 꼴등이 한 팀, 차석이랑 976등이 한팀, 이런 식으로. 그리고 수석이랑 꼴등이... 너희 두 사람이었어."

"뭐?"

루이나의 말에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놈이랑 실습을 같이해야 한다고?'

두 사람의 생각이 통했다.

""절대 싫어!""

또각-

그 순간.

"내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건가?"

저 인파가 마치 홍해 갈라지듯 갈라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길을 따라 고아한 구두 소리가 들린다.

숨 막힐 듯한 존재감을 발산하며, 걸어온다.

"교, 교수님...."

루카스가 특유의 서늘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실습에는 참여하지 않아도 좋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루카스의 말에 두 사람이 당황했다.

"어서 서로 화해하는 모습 보여 드려!"

옆에 있던 리트가 두 사람을 향해 조용히 소리쳤다.

루카스는 그 둘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미안."

자존심 강한 제시였지만, 이 이상 루카스의 가르침을 놓치는 것은 싫었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자아를 누르며 먼저 사과했다.

에일론은 제시가 내민 손을 보았다.

"미, 미, 미...."

그러나 에일론 역시 자존심 강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존재.

미안하다는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얼른 해, 얼른 하고 치우라고.'

제시가 눈짓으로 에일론을 겁박하자, 에일론이 겨우 입을 뗐다.

"미친놈아 네가 먼저 잘못했잖아!"

§ 아카데미의 신화급 교수가 되었다 55화

55. 페두르 산맥 (5)

"...."

"...."

"쟤네는 아직도 저 모양이네."

페두르 산맥으로 출발을 앞둔 기차 안.

제시와 에일론이 서로 등지고 앉아 있다.

맞은 편에 자리를 배정받은 바론과 스키퍼 듀오가 그런 두 사람을 어이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자리에 앉았다.

화해는커녕 더욱 악화일로가 되어 버린 상황.

그렇다고 실습을 빠질 수는 없었지만, 파트너는 좌석 배치가 어쩔 수 없이 붙어 있으니 페두르 산맥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니, 페두르 산맥에 도착해서도 두 사람은 붙어 다닐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어? 교수님 오신다."

에일론의 말에 제시가 황급히 자세를 바로 했다.

하지만-

"으이구, 만년필. 또 속냐?"

속았다.

처음부터 루카스는 없었던 것이다.

"이 쫌생이 마공학자놈이...."

제시가 으르렁거리며 두 사람은 다시금 투덕거리기 시작했다.

"참, 둘이 수준이 잘 맞는 것 같은데."

"영혼의 파트너여, 영혼의 파트너."

보다 보니까 두 사람의 투닥거림이 꽤나 재밌다. 마치 마튜브 예능 채널을 직관하는 듯한 기분도 들고.

적어도 페두르 산맥까지 이동하는 동안 지루하지는 않을 거 같았다.

"어, 교수님...."

"내가 또 속을 줄 알-"

"또냐, 제시."

그 서늘한 음성에 제시의 심장은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재밌게 보던 바론과 스키퍼도 숨을 죽인 채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게 그러니까, 교수님...."

"됐다. 변명은 듣지 않도록 하지."

루카스는 치명적이리만큼 우아한 걸음걸이로 시야에서 벗어났다.

한참을 루카스가 사라진 방향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제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찍혔다.

루카스에게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찍혀 버렸다.

멍하니 바닥을 향해 있던 그의 시야에 무언가 쑤욱 들어왔다.

에일론의 얼굴이었다.

"야, 우냐?"

빌어먹게 얄미운 새끼였다.

* * *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지만....'

그러기엔 그럴 나이는 지나지 않았나.

지끈거리는 골치를 누르며 계속 걸었다.

"아, 루카스 교수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이윽고 도착한 곳은 교수들의 전용칸인 특수칸.

학생들이 앉아 있는 칸과는 다르게 좌석도 더욱 쾌적해 보였고, 훨씬 안락해 보였다.

"...됐습니다."

하지만 나는 사정 상 특수칸에 머무를 수 없다.

그들을 지나쳐 계속 걸었다.

다음 칸 역시 학생들이 자리한 칸.

그중에서도-

"아, 교수님!"

"앉아 있어라, 에밀레이."

에밀레이의 비어 있는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 그러니까, 이번 실습 잘 부탁드립니다!"

리오네 에밀레이의 순위는 489위.

정확히 한가운데의 순위이다.

끝과 끝의 수강생들끼리 짝을 지었으니, 자연스레 그녀 혼자 남게 되는 것이다. 즉- 혼자만 파트너가 없다.

사실, 이것은 어느 정도 의도한 바이기도 했다.

이번 실습이 그녀와 마주치는 거의 마지막 기회다.

"교수와 한 팀이 되어 불편할 텐데."

하여, 내가 그녀의 파트너가 되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교수님과 같은 팀으로 실습을 하게 돼서 영광이에요."

리오네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대답했다.

"...저도 잘 부탁해요, 리오네 양."

"아! 조교님도 잘 부탁합니다."

리트가 평소와는 달리 아주 냉소적인 말투로 리오네에게 말을 걸었다.

그 이후로도 리오네가 무슨 말을 하려 하면 중간에서 리트가 가로챘고, 그 둘 사이에서 나는 동떨어진 형국이 되었다.

하긴, 교수와 직접 대화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얼마 차이 안 나는 조교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훨씬 즐겁겠지.

나는 가방에서 서류 뭉치를 꺼냈다.

출발 전, 하인즈의 신작, <고대 왕국>의 원고.

아직 출간되기 전이나, 하인즈에게서 초고를 받아왔다.

<마나와 존재>와는 달리, 평소 그의 문체다운, 읽기 쉽고 이해하기 편하도록 배려가 곳곳에 녹아 있다.

'이 양반은 거기서 이런 연구를 한 거야?'

이 원고의 놀라운 점은 베르트에서 감금당했을 때, 그러니까- 한창 '아탄 탑'을 건설하고 있을 때 연구를 진행했다는 거다.

그런 최악의 상황 역시 연구의 일부분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역시 세기의 지성이라 불리는 학자답기도 했지만, 소름이 돋을 정도의 광기로 느껴지기도 했다.

심지어 이 연구의 깊이가 상당했다.

원작자인 내가 놀랄 정도로.

기본 지식이 깔려 있기도 했지만, '아탄 탑'을 건설하면서 얻은 새로운 지식이 고스란히 접목되어 있다.

거기다가 자신만의 고유한 심상까지 녹여두었다.

참으로 놀라운 노인네다. 괜히 대륙 최고의 지성이 아니다.

-저희 열차는 티그르, 아야스를 지나 페두르 산맥 초입, 디에키스 타운으로 향하는 마도 기차 MT-531입니다. 열차가 곧 출발할 예정이니,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가지고 계신 승차권을 한 번 더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탑승했는지 출발 안내방송이 흘렀다. 이제 조만간 디에키스 타운으로 출발할 것이다.

"리트, 학생들에게 승차권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알려 주고 오도록."

안내방송에서도 강조했듯, 승차권은 상당히 중요하다. 정확히는 승차권 개념이라기보다는 여권의 개념에 더욱 가깝다.

특히 이 열차의 목적지인 디에키스 타운은 아니크와의 접경지에 위치한, 아에로크의 소속도, 아니크의 소속도 아닌 중립 도시이다.

승차권이 없으면 디에키스를 둘러싼 결계를 통과할 수 없다.

그대로 열차에서 튕겨 나가게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문제는 디에키스의 근처는 페두르 산맥의 마력 폭풍이 영향을 미치는 곳.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러니 다시금 주의를 주어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리트는 리오네에게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뒷걸음질로 멀어졌다.

"다친다. 앞을 보고 걸어라."

"괜찮습니다."

리트는 리오네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그렇게 멀어졌다.

"교수님은 여기서도 일하시는 건가요?"

리트가 떠나자 말동무가 사라진 리오네가 내게 말을 걸었다.

"네겐 이 실습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나, 나는 교수다. 여기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일이지."

"아, 저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안다."

그녀와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름 사회생활을 시도해 보려 한 것 같으나, 그것이 불편함에서 오는 억지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사려 깊게 일부러 말을 짧게 줄여 주었다.

여기서 괜히 대화를 이어 나가려고 하면 피곤한 학부생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시전하는 꼰대 교수밖에 되지 않으니.

나도 그랬던 시절이 있어 충분히 그 마음 안다.

[리오네 에밀레이의 호감도가 하락합니다. -1.]

도대체 요새 애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다시금 시선을 원고에 옮겼다.

* * *

어느새 열차는 티그르와 아야스를 지났다. 그사이 내 손에 들린 원고 역시 거의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하인즈의 심상이 녹아든 이 초고대 문명에 관한 연구는 내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묘한 끌림을 준다고 해야 할까.

'실습이 끝나고 역사학과를 한번 찾아가 봐야겠군.'

관심이 생긴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내가 속한 칸은 고요하다.

내가 전세 낸 것도 아니었으나 덕분에 독서를 편안하게 할 수 있었다.

간혹 리오네가 어색한 공기를 풀어보려 시도했으나 번번이 리트에게 막히고 있다.

고마울 따름이다.

거기에 응해도 호감도는 대폭 깎일 것이고, 짧아도 호감도가 깎이니.

리오네와 호감작을 생각하고 있는 내게는 리트의 수고가 기껍다.

'음....'

그러나, 이제 그 수고를 중단해야 할 것 같다.

교수 특별석 방향에서 무언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 열차는, 잠시 후 디에키스 타운으로 진입합니다. 다시 한번 승차권을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침 명분이 생겼다.

"리트, 반대편 칸 학생들의 승차권도 확인해 보아라."

"교, 교수님, 하지만 그쪽은 저희 담당이 아닙니다."

"나는 다른 사람은 믿지 않아. 하지만 너는 믿지. 이제 곧 디에키스 타운에 진입할 테니 한 번 더 확인이 필요하다."

[리트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100]

"알겠습니다."

리트가 묘하게 생기 넘치는 표정으로 리오네를 바라봐 주곤, 반대쪽 칸을 향해 사라졌다.

"교수님, 이제 곧...."

"쉿."

지금은 리오네와 대화를 할 때가 아니다.

덜컹-

교수 특별석 칸의 문이 열리고,

"루카스 교수님, 여기 계셨네요."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밀리아 교수."

"교수 특별칸을 이용하지 않으시고."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그러는 밀리아 교수님은 이곳에 어쩐 일로."

"아직 그라스코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교수님들과 친하지 않거든요. 루카스 교수님과 친해질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고."

나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오히려 빨리 돌아가 줬으면 싶다.

"여기 앉아도 될까요?"

그녀는 내 맞은편 빈자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 자리는 주인이 있습니다."

"지금은 자리를 비웠네요."

"그렇다고 주인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그렇긴 하죠. 으차."

어차피 내 허락은 필요 없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내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나를 흥미롭다는 듯 살폈다.

"논문... 살피고 계시는가 봐요."

"그런 셈입니다."

최대한 간결하게 대답해서 그녀를 빨리 돌려보내려 했다.

"저도 마침 논문을 쓰고 있는 게 있는데. 괜찮으시면 교수님께서 감수를 맡아 주실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

그러니까 빨리 가라.

이제 곧 리트 녀석이 당도한단 말이다.

마력을 느낄 수 있는 밀리아는 당연히 리트의 마기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리트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아아, 기뻐라."

"용건이 끝나셨으면 이만 돌아가시죠."

"아니요, 제가 교수님을 찾아뵌 건 다른 용무 때문이에요."

"그럼 빨리 해결하시죠."

밀리아가 싱긋 웃더니, 그녀의 손이 움직인다.

룬 문자의 발현.

-당신, 알고 있다. 나는.

그 순간,

[새로운 알림이 도착했습니다.]

[샤를리즈 님이 100G 후원하셨습니다.]

[샤를리즈 님이 100G 후원하셨습니다.]

[샤를리즈 님이 100G 후원하셨습니다.]

[다디풀 님이 300G 후원하셨습니다.]

[n7988_mohani1526 님이 100G 후원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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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님이 5,000G 후원하셨습니다.]

[k2929 님이 100G 후원하셨습니다.]

[츠나츠나 님이 300G 후원하셨습니다.]

[매지기샤 님이 500G 후원하셨습니다.]

독자님들의 후원이 시야를 가려 버린다.

아주 순간이지만,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잠깐 띄워졌다.

'아, 잠깐. 이럴 때가 아닌데.'

아뿔싸 하는 생각과 함께 후원창 너머의 밀리아에게 조심히 시선을 옮겼다.

* * *

엘프의 피가 섞인 밀리아는 세상 모든 만물의 마력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눈앞의 존재, 루카스에게서는 당연히 느껴져야 할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이에게서 묻어난 마력의 흔적만 느껴질 뿐.

마탑 조사팀의 팀장으로 처음 그라스코에 왔을 때부터, 교수로 부임한 지금까지 루카스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었다.

선연히 묻어 있는 마기.

'이 그라스코에 마족이 있구나!'

그것도 루카스의 최측근에.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동부 전선의 영웅'이라 칭송받을 정도면, 또 최근에 들려오는 소식들과 자신이 직접 목격한 바에 따르면 루카스 정도의 실력자가 자신의 근처에 마족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실습에서 그를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교수 특별석을 이용하지 않았다.

자신만 다른 교수들에게 잡힌 형국이 되어 버린 것.

'어차피 열차가 디에키스 타운에 도착하려면 멀었다.'

다른 교수들을 상대하는 것은 디에키스에 거의 도착할 무렵에야 끝이 났다.

열차를 둘러본다고 하고, 교수 특별석을 빠져나와 루카스에게 접근했다.

'역시.'

진하게 남아 있는 마기의 잔상.

이곳까지 함께 따라올 존재는 단 하나. 루카스의 조교.

문제는 루카스가 정말 조교가 마족인 것을 알고도 숨겨주는지에 관한 것이다.

'확실하네.'

자신을 밀어내는 태도에서 알 수 있다.

루카스는 의도적으로 마족을 숨겨 주고 있다.

사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루카스가 마족과 내통하든 말든.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아니겠지.

이것은 루카스의 약점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룬 문자로 그에게 넌지시 일렀다.

-당신. 알고 있다. 나는. 조교가. 마족.

루카스의 동공이 살짝 커지더니, 순간이지만 분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는, 치명적으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천천히 그녀의 눈에 들어온 그 눈동자는 너무나도 차갑고 시렸다.

그 확실한 메시지에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아는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그가 자신을 순식간에 없애버릴 수 있는 실력자라는 것.

그 미소는 여유를 뜻했고, 저 눈동자는 그 여유를 뒷받침한다.

"밀리아 교수."

루카스의 입이 천천히 열린다.

"무, 무슨 일이시죠?"

큰일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설마.'

그래, 이렇게나 학생들이 많은데.

루카스는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에 모든 촉각을 곤두세웠다.

"승차권 떨어졌습니다."

"뭐?"

그때서야 루카스 손끝의 방향에 떨어진 자신의 승차권이 보였고-

-우리 열차, 디에키스 타운에 진입합니다!

텅-!

밀리아는 그대로 열차에서 튕겨 나갔다.

§ 아카데미의 신화급 교수가 되었다 56화

56. 페두르 산맥 (6)

"교수님, 학생들은 문제 없습... 어?"

돌아온 리트가 객실 안의 공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

"이게 무슨...."

객실의 상황을 살폈다.

경악이 어린 학생들, 어수선한 분위기, 공중에 룬 문... 어? 룬 문자?

화들짝 놀라 루카스를 바라보니,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가... 여기에 있었어?'

밀리아.

그 하프 엘프가 이곳에 있었다.

하마터면 자신의 정체가 낱낱이 까발려 질 뻔했다.

리트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면 교수님이 나를 반대 칸에 보내신 것도...?'

그제서야 루카스의 지시들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우리 열차는 잠시 후 종착지인 디에키스 타운, 디에키스 타운에 도착합니다. 두고 내리시는 물건이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곧 디에키스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교수님, 밀리아 교수님은...."

"밀리아 교수 정도의 실력자라면 무리 없이 페두르 산맥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곧 도착이니, 하차 준비를 하도록."

* * *

-당신. 알고 있다. 나는. 조교가. 가족.

디에키스에 도착하고, 열차가 완전히 정거했다.

학생들이 하나씩 내리는 와중에도 나는 한 곳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밀리아가 남기고 간 룬 문자.

이곳에서 나만 오롯이 알아볼 수 있는 이 문자들을 바라보며 의문에 잠겼다.

마지막에 밀리아가 튕겨 나가는 바람에 조금 뭉개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 형태를 변형할 정도는 아니다.

근데 문제는-

'이게 뭔 뜻이냐 이거지.'

당신, 알고 있다, 나는, 조교가, 가족?

조교를 가족같이 대한다는 건가?

"교수님, 짐 다 챙겼습니다."

"그래. 이만 내리지."

의문이 남긴 했지만, 그 아재 개그 엘프가 남긴 메시지가 중요한 건 아니다.

* * *

페두르 산맥의 가장 인접한 도시, 디에키스.

사실 도시라고 하기에도 낯부끄러울 만큼, 규모가 작다.

도시 전체가 그라스코의 면적보다 적을 정도이니.

하지만 이 도시의 가치는 면적으로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경, 페두르 산맥의 1차 방어막.

언제 터질지 모르는 몬스터 웨이브에서 대륙을 방호하는 최초의 저지선이라는 것에 있다.

관광요소도, 관광이 될 수도 없는 이 도시는 그 척박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애초에 생명이 허락되지 않은 곳에 억지로 거점을 만들어 둔 것이기에, 생명체가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환경.

하여 이 도시의 구성원조차 평범하지 않은, 그 고통이 마땅한 이들로 이루어져 있다.

즉-

대륙 최악의 죄수들이 수용된 거대한 수용소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는 소리다.

"끄윽, 큽!"

"허억, 허억,"

"숨이, 숨이 잘 안 쉬어...."

"크음!"

"허어, 허어...."

이런 환경이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기차에서 벗어나자마자 고통을 호소한다.

이른바 '마력 멀미' 현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디에키스를 둘러싼 결계가 있다고는 하나, 페두르 산맥과 최인접 지역.

마력 폭풍의 영향이 내부의 마력을 들끓게 만드는 탓이다.

곳곳에서 헛구역질을 하며 속에 있는 것을 게워냈다.

생명체라면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마력.

그것이 몸속에서 날뛰고 있으니, 오히려 마력이 웅혼할수록 더욱 괴롭다.

"크읍...."

"험! 험!"

"속이 거북하다...."

즉, 교수들 역시 격통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소리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

고통으로 가득 찬 이곳에서 유일하게 고아함을 잃지 않는 존재.

루카스가 기차에서 내려서며 서늘한 눈빛으로 고통으로 범벅된 이들을 쓸어 보았다.

"쯧."

그는 간단하게 혀를 한번 차고는 그들을 지나쳐 고고히 앞서 나갔다.

뒤이어 내린 전투 학부의 학생들 역시 고통으로 얼굴을 찡그리긴 했으나, 마법 학부의 학생들만큼은 아니었다.

마력량의 차이 때문이 아니다.

당장 루이나만 해도 마법 학부의 여느 교수 못지않은 마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데얀이나 제시 역시 탑 클래스의 마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

이 모든 것은 루카스가 직전에 펼친 특강, '전투의 모든 것'의 효과다.

특강 내내 다루었던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마력 조종'이다. 그 결과, 자신도 모르게 몸속에서 폭주하는 마력을 다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격통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으나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낼 정도는 아니다.

"이, 이 멍청한 것들! 명색이 마도사라는 것들이 마력 조종에 쩔쩔매!"

교수들의 일갈에 마법 학부생들이 서둘러 마력을 조종하였으나, 크게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아니, 저건 진짜 괴물인가?'

고통 속에서 사람들은 루카스를 보며 경악했다.

아무리 마력 조종이 능숙하다 하더라도 마력량이 많으면 고통도 커질 수밖에 없다.

다른 교수들도 추태는 보이지 않았지만, 들끓는 마력 때문에 커다란 격통을 느끼고 있는 이 상황에서 당연히 현시점 최강자 중 하나로 손꼽히는 루카스 역시 이 고통에서 예외가 아니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루카스의 표정은 늘 그렇듯 어떠한 변화도 없이 고고하다.

마치 아무런 격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이.

떠올릴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두 가지뿐이다.

의외로 마력의 양이 현격히 적은데 마력을 능숙하게 다루거나, 아니면 마력 폭풍의 영향을 압도할 만큼 폭력적인 마력량을 보유하고 있거나.

당연히 후자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둘 다 틀렸지만.

* * *

'굉장하군.'

꽤나 거리가 있음에도 느껴지는 웅장함.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와 끝없이 요동치는 마력의 폭풍이 자아내는 감탄스러운 풍광.

페두르 산맥의 위압감은 텍스트로 묘사한 것 그 이상이다.

자연 앞에서 한낱 인간은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를 실감케 하는 위용.

이곳에서 그런 것을 느끼는 것은 오로지 나뿐인 모양이지만.

다른 이들은 저 풍광을 느낄 틈이 없다.

"자, 다들 어서 모여! 거기, 구역질 그만하고 어서 이리와!"

분명히 '마력 멀미'에 대해 충분히 고지하였건만, 마법 학부는 대처가 잘 안 된 모양이다.

곳곳에 마력 멀미 환자들이 속출하고, 그런 모습을 보며 교수들의 짜증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다행히 전투 학부의 학생들은 그럭저럭 잘 대처하고 있다.

면은 선 셈이다.

마법 학부의 학생들은 비척거리며 겨우 모였다.

이 디에키스 타운 역의 플랫폼은, 몬스터 웨이브 발생 시 각국의 병력을 모두 수용해야 하기에 상당한 크기를 자랑한다.

약 2천여 명에 이르는 이 인파를 충분히 수용하고도 남을 만큼.

학부별로 정렬한 학생들 앞에 교수단이 마주 섰다.

"루카스 교수, 자네가 이번 실습의 총괄을 맡았으니 대표로 말씀해 주시게."

가장 연장자인 마법 학부의 학장, 디오르뉴가 내게 자리를 권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수많은 인파 앞에 섰다.

지금까지를 통틀어 가장 많은 시선이 내게 집중되고 있다.

그 시선에 압도될 것 같았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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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껏 용기를 얻고 입을 열었다.

* * *

마법 학부 학생들은 루카스를 가까이서 보는 것이 처음이다.

수많은 사람들 속, 독보적인 존재감을 내뿜는 존재.

그 존재에 압도당할 것 같은 기분이 그들을 잠식한다.

"드디어 페두르 산맥 실습의 시작이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이 격통 속에서 귓전을 울려대는 음성이 짜증을 유발할 법도 하건만, 루카스의 음성은 오히려 더욱 진한 집중을 끌어내고 있다.

의식에서 고통보다 그의 말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실습의 내용은 페두르 산맥 72좌 중, 하나- 바셸산의 정상까지 등반 후 하산까지다."

페두르 산맥의 72개 봉우리 중 하나, 바셸산.

디에키스에서 가장 가까운 산이기도 하며, 몬스터의 개체 수가 가장 적은 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험준함은 물론이고 높이가 무시 못 할 수준이다.

"등반 과정에서 수많은 몬스터와 조우하게 될 것이다. <카일론 관>에서의 실습과 달리 실재하는 존재들이지."

학생들의 얼굴에 긴장이 어린다.

특히 부총장의 결단 때문에 억지로 끌려온 것이나 마찬가지인 마법 학부 학생들의 얼굴은 거의 시쳇빛이 되었다.

언제 그들이 몬스터를 정면으로 상대해 보았겠는가.

전투 학부가 몸으로 막으면 마법을 쏘아대는 것이 상식인 세계인데.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희 잠재력은 저 바셸산을 정복하기에 넘칠 만큼 충분하다."

전투 학부는 확실히 타 아카데미와 비교하면 그 수준이 낮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법 학부는 다르다.

다른 아카데미와 비교해도 그 수준이 월등하며, 수련 마법사에 한해서는 세계관에서 최고의 마도 집단인 마탑과 유일하게 경쟁 구도를 가질 정도니까.

그리고 이제는 전투 학부 역시 녹록치 않은 수준이었다.

단 몇 주의 특강이었지만 루카스의 가르침은 이들의 수준을 현격히 올려두었으니까.

바셸산에 등장하는 몬스터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정도로 끌어올린 것이다.

"실습은 총 4일간 이루어진다. 이 4일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즉시 출발해도 좋고, 마지막 날 출발해도 좋다. 다만, 한 가지 유의할 점은 모든 과정은 반드시 4일 안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4일을 벗어난 시점에서 실습이 완료되지 못한 페어는 다음 실습 자격을 박탈하겠다. 이상, 질문 있나?"

루카스가 학생들을 쓸어보았다.

"질문 있습니다!"

마법 학부 쪽에서 질문이 튀어나왔다.

"교수님, 실습을 완료하지 못한 페어는 다음 실습 자격을 박탈하겠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이곳에서 아예 참가하지 않으면 다음 실습 때는 이곳에 오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물론이다."

루카스의 긍정에 마법 학부 쪽은 웅성댔다.

애초에 이 실습 자체를 억지로 끌려온 인원이 더 많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곳에서 대기하다가 4일이 경과하고 실습 자격이 박탈되면 다음 실습 때는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

마법 학부생 대다수의 생각이었다.

아니, 학부생뿐만 아니라 교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실습의 주된 목표가 무엇인가.

실전 감각이다.

애당초 실전 감각보다 연구가 더 중요한 족속들이니 당연한 생각이었다. 마법사란 후방 지원의 가치가 더욱 크기도 하고, 직접적으로 전투를 벌이는 전투 학부보다 실전 감각의 중요성은 크게 대두되지 않는다. 차라리 연구와 수련을 통해 새로운 마법을 개발하거나 기존의 마법을 강화한다거나 마력의 양을 증대하는 편이 훨씬 낫다.

당장 이번 마족 침공만 봐도 마법 학부는 후방에서 강력한 마법으로 응수하면서 버텼기에 전투 학부보다 피해가 덜했던 것이다.

"그것 말고는 아무런 페널티가 없는 건가요?"

"내 이름을 걸고 보장하지."

루카스의 확언에 마법 학부 대다수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전투 학부의 학부생들은 전혀 달랐다.

이미 그들은 루카스의 특강을 경험한 상태.

그 특강의 결과로 특강 이전보다 최소 3배는 더 강해졌다.

이번 실습도 특강과 별다를 점이 없을 것이다. 루카스가 어떤 식으로든 관여하는 이상, 얻어가는 것이 훨씬 많을 것이 분명하다.

"교수님, 한 가지 더 질문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전투 학부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그 조금 전에 말씀하시기로 이번 실습이 총 4일에 걸쳐 진행된다고 하셨는데... 이 디에키스 타운은 휴식 공간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셸 산맥에도 그런 것이 존재할 리 없고요."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디에키스 타운은 어디까지나 방파제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외지인이 이곳에 머물 이유가 없다.

혹, 몬스터 웨이브가 터져 각국의 군사들이 집결한다고 해도, 전시에 준하는 상황에서 주둔지를 구성하지, 여관을 이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연히 다른 도시에서는 당연한 숙박 시설이나 휴게시설은 눈 씻고 찾아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머물든, 바셸산으로 향하든 쉬어야 할 공간은 존재해야 했으니. 그런 의미에서 그의 질문은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할 수 있었다.

순간, '전투의 모든 것' 정규 수강생들은 묘한 기시감을 느껴야 했다.

'뭐지, 뭐였더라 이 익숙한 상황은?'

'분명 어디서 경험했는데....'

루카스의 시선이 질문한 이에게 닿았다.

그 얼굴이 지극한 의문을 품고 입을 열었다.

"누가... 쉬어도 된다고 했지?"

아.

그제서야 그들이 느껴야만 했던 기시감의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 교수님 실습에 휴식 따윈 없지, 참.'

§ 아카데미의 신화급 교수가 되었다 57화

57. 페두르 산맥 (7)

"끄응...."

밀리아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승차권이 도대체 왜 그 타이밍에...."

온몸이 쑤신다.

떨어진 승차권을 본 순간 바로 배리어를 펼치긴 했지만, 조금 늦어 모든 충격을 흡수하지 못한 탓이다.

마력 폭풍이 속을 뒤집어 놓고 있지만, 밀리아에겐 익숙한 경험이었다.

능숙하게 마력을 제어해 마력 멀미를 방지했다.

'그나저나... 나 방금 죽을 뻔했던 거지?'

조금 아프긴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조금 전, 죽을 위기에서 구해진 꼴이 됐다.

안심.....

'할 때가 아니잖아!'

지금 루카스는 자신이 협박을 하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

당장이야 실습 때문에 조치를 취하지 않겠지만, 실습이 끝나면?

설령 이대로 마탑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안전을 보장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밀리아는 결단코 루카스에게 악의를 가지고 협박할 생각은....

'있었구나.'

그저 룬 문자 해석에 도움을 좀 받고 싶었을 뿐인데.

욕심이 과했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오해를 풀어야 해!'

차라리 실습 때문에 대놓고 손을 쓰지 못할 지금이야말로 해명할 절호의 기회였다.

고개를 드니, 마력 폭풍의 영향으로 한 치 앞도 분간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이 길을 지나간 마도 기차 내부의 승객, 그라스코의 사람들이 남긴 마력의 흔적이 선명하게 보인다.

밀리아는 그 흔적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마지막 질문은 내가 해도 되겠나?"

마지막 질문은 마법 학부의 학장, 디오르뉴였다.

"전투 학부에서 제출한 실습 계획서를 보니, 루카스 교수, 자네가 한 학생과 페어를 맞춰 실습하기로 되어 있던데."

"네, 맞습니다."

"그건 너무 편애라고 생각하지 않나?"

이런 시비가 걸릴 줄 알았다.

그래서, 미리 리오네에게 양해를 구해 놓은 것이 있다.

"저와 제 파트너는 가장 먼저 출발할 겁니다."

원래 이런 시비가 걸리지 않더라도 가장 먼저 출발할 생각이었다. 가장 먼저 실습을 끝내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가장 많은 몬스터를 만날 것이고, 뒤따라오는 이들에 비하면 더 험난하겠죠."

이런 악조건의 등반 같은 경우, 항상 가장 앞선 사람이 불리하다.

그런 리스크를 안고 가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가 과하게 손을 쓰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만약 이 학생이 등반의 무리가 있다고 판단되면 그 즉시 등반을 중단하고 내려올 겁니다."

"충분한 답변이 되었군."

디오르뉴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이 실습은 지극히 공평할 것이라고."

학생들이 침묵으로 긍정을 대신했다.

* * *

"마음 단단히 먹어라."

이 결계만 벗어나면 진짜 페두르 산맥에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결계 안에서 느꼈던 마력 폭풍의 영향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는 말이다.

마력 멀미야, 마력이 없는 나는 해당 사항이 없다지만, 그것 말고도 마력 폭풍 자체가 '생명체를 배제하려는 성격을 강하게 띤다'는 설정이기 때문에 나 역시도 진정한 마력 폭풍 안에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우위에 설 수 없을 것이다.

뒤에서 지켜보는 시선들이 따갑다.

미지의 두려움과, '그때'를 떠올리게 만드는 시선들이 얽히자, 호흡이 가빠오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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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알림에 정신을 차렸다.

'그때'와는 다르다.

지금은 내게 손을 뻗어 줄 이들이 얼마든지 있으니.

"가자."

"네."

저벅-

한 발짝을 내디뎠다.

'어?'

이제 완연한 결계 밖.

분명 마력 폭풍의 영향이 온몸으로 느껴져야 한다.

하지만....

'어째서....'

평온하다.

마치 평온한 휴식을 취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설정한 거랑 좀... 다른가?'

그런 의문을 품을 때쯤,

"끅... 교, 교수님...."

등 뒤에서 고통에 가득 찬 리오네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 숨이 자, 잘 안 쉬어져... 요."

리오네는 아닌 모양이다.

하긴, 그녀는 결계 안에서도 버거워했던, 거의 유일한 전투 학부 소속이니까.

방법은 있다.

"코와 입에 마력을 덧씌워라. 이 폭풍에 네 마력이 적응할 때까지."

임시방편이긴 해도, 이 마력의 흐름 또한 적응한다면 결계 안에서처럼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 감각은 있는지, 한결 편안해진 얼굴이 되긴 했으나, 마력 폭풍이 그녀의 신체에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특히나, 자체의 특성상 신체 조건이 열악한 그녀의 피부는 더욱 쉽게 손상되고 있었다.

벌겋게 일어나더니, 이내 칼에 베인 듯이 갈라지고 있었다.

그 틈으로 페두르 산맥을 둘러싼 마력이 계속해서 침투하려 하고 있다.

"서둘러야겠군."

등반이 지체될수록 리오네에겐 큰 무리가 될 것 같았다.

일단은-

휘릭!

외투를 벗어

"걸쳐 두어라."

리오네를 감쌌다.

이것으로 한 겹 더 보호는 가능하겠지.

[리오네 에밀레이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100]

[리오네 에밀레이의 육성 시스템이 오픈합니다!]

어... 왜?

* * *

"마음 단단히 먹어라."

리오네의 앞에 루카스의 커다란 등판이 보인다.

결계 밖으로 보이는 풍광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살벌하지만, 루카스가 함께한다는 생각에 왜인지 마음이 놓인다.

루카스는 잠시 리오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준 뒤, 출발했다.

한 발짝 멀어진 루카스의 모습은 너무나 평온했다.

그저 산책을 즐기는 듯이, 오롯이 자신의 존재감만 더욱 극대화할 뿐이었다.

그 모습에 리오네는 잠깐 방심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뒤따라 들어간 마력 폭풍 속은, 루카스에 투영된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쿠오오오오!

전신을 찢어발길 듯 선연히 다가오는 마력 폭풍.

숨이 가빠온다.

"끅... 교, 교수님. 수, 숨이 잘...."

루카스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눈빛에 실망감이 어려 있겠지.

그녀는 루카스를 마주 볼 자신이 없다.

눈을 질끈 감았다.

"코와 입에 마력을 덧씌워라. 이 폭풍에 네 마력이 적응할 때까지."

이런 험난한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루카스뿐.

그녀는 루카스의 말대로 코와 입에 마력을 강하게 덧씌웠다.

호흡이 해결되니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날카로운 마력 폭풍이 실체를 가지고 그녀의 몸을 할퀴고 있는 것.

원래도 남들보다 상처가 많이 나는 체질이지만, 유독 심했다.

하지만 이것마저 루카스에게 의지할 순 없다.

"서둘러야겠군."

루카스도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다. 괜히 자신이 짐이 되는 것만 같아 괴롭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고통을 감내했다. 찢어진 살갗으로 계속 무언가 침투하려 하고 있었다.

고통스럽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순간-

펄럭!

몸을 따스하게 감싸는 무언가.

"걸쳐 두어라."

코끝을 어지러이 맴도는 루카스의 체취.

달콤하고 향기롭다.

이제 마력 폭풍이 문제가 아니다.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 * *

"야, 만년필. 버스 받으니까 좋냐?"

"처음에 누구 때문에 바로 출발 못했는지 벌써 까먹었나 보네."

"아, 그건...."

원래 둘은 루카스 페어를 바로 뒤쫓아 출발하려 했고,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하지만.

"크어억!"

"쿨럭! 크어억...!"

루카스가 보여 준 너무나 아무것 아닌듯한 모습과는 다르게,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제시가 가진 마력이 방대한 탓이다.

장기가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고통과 함께, 마력이 끝없이 뒤틀렸다. 피도 한 움큼 토해냈다.

몸이 약한 에일론은 혼절하기도 했다.

제시가 억지로 에일론을 챙겨 결계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위험한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 사람 때문에 섣불리 결계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없었다.

'아 맞다. 루카스는 괴물이었지.'라는 당연한 상식을 떠올리게 해 준 것.

자신들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가봤자 제시나 에일론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에일론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결계 안으로 들어간 페어는 10팀이 채 되지 않았다.

에일론이 정신 차리자마자 두 사람은 곧바로 결계 밖으로 나갔다.

다만, 이번에는 준비를 단단히 해서.

마력을 제어해 코와 입에 단단히 덧씌우고, 디로그로 두 사람을 배리어처럼 방호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분명 실습의 목표는 '바셸산을 등반'하는 것이기에 수단은 상관이 없다.

루카스가 4일이라는 시간을 제시한 것 역시, 이렇게 수단을 찾아내는 것의 연장선이다.

"...버틸 만하냐?"

"걱정해 주는 거냐, 지금?"

"아니, 너 때문에 내가 실습 통과 못 하고 자격 박탈되면 휠체어째로 갈아 마셔 버리려고 그랬지."

"어디 만년필이 없나... 이거 아직 정신 못 차린 거 같은데."

"닥쳐."

둘은 틱틱대면서도 놀라운 호흡으로 등반하고 있었다.

* * *

마법 학부는 팀 구성이 전투 학부와 달랐다.

성적순으로 잘라버린 것.

즉, 상위권은 상위권끼리, 하위권은 하위권끼리 맞춰나간 것이다.

조셉과 브렐린 페어는 그런 하위권 중에서도 최하위권에 속하는 페어였다.

'아, 4일간 어떻게 버티나....'

그들 역시 여느 마법 학부들처럼 루카스가 제시한 4일간, 이 디에키스 타운에 머물면서 다음 실습은 참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도 연구할 과제나 팀이 있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그들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마법 학부는 철저하게 성과주의.

연구를 통해 만들어 내는 '업적'이 그들의 학점이고 평판이었다.

마력의 양이 출중하거나 제어 능력이 뛰어나면 모를까, 그것도 아닌 그들을 끼워줄 연구팀 따위는 없었다.

"차라리, 우리도 그냥 등반이나 할까? 적어도 업적으로 인정해 줄지는 모르지."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단순한 생각이었다.

연구로 자신들의 '업적'을 쌓을 수 없다면 이런 부가활동으로라도 쌓으면 되지 않을까.

비록 연구가 아니라 얻을 수 있는 '업적'의 점수는 소소하겠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그렇게 조셉과 브렐린은 루카스의 바로 뒤에 출발했다.

사실, 간 좀 보다가 출발할 생각이었으나, 원래 루카스 뒤에 출발한 녀석들이 심각한 상태로 돌아오면서 주춤거리는 인원들이 더 많았다.

'이거 기회 아닌가?'

이곳에 도착하면서 마법 학부와 전투 학부가 보인 마력 제어의 차이 때문에 교수들이 살짝 분노에 차 있는 상태였다.

혹시나 전투 학부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주고 실습 완주가 더 빠르면 업적 점수를 좀 더 후하게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계산이었다.

그렇게 결계 밖을 나서고-

'좆될 뻔했네.'

그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하지만 자신들이 업적 점수를 쌓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기회이기에 계속 도전했다.

그렇게 도전하다 보니-

'어?'

어느 순간, 자신들도 모르게 마력의 제어가 훨씬 능숙해지는 것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휘몰아치는 페두르 산맥의 마력에 맞서면서 미미하지만 마력의 절대량도 조금씩 늘고 있었다.

무엇보다 마력이 절대적 기준치인 마도사들이기에 그 변화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실습으로 너희들이 얻는 바가 많기를 바란다.

루카스의 연설이 귀에 맴돌았다.

그의 말처럼, 정말... 얻는 것이 많을 것 같다.

조셉과 브렐린은 마력 폭풍에 몸을 내맡겼다.

* * *

"허억, 허억...."

뒤에서 느껴지는 숨소리가 거칠다.

나는 마치 가벼운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오히려 힐링까지 느낄 정도였으나, 리오네는 아닌 모양이다.

"조금만 더 버텨라."

"괘, 괜찮습니다. 버틸 만합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버겁다는 것이 느껴진다.

어차피 나도 이 등반은 빨리 끝내고, 진짜 목적인 초고대 문명의 편린을 찾아 나서야 한다.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이상하군.'

분명 바셸산이 험준한 대신 몬스터의 수가 적다고는 하더라도 지금까지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은 것은 이상하다.

혹시나 싶어 <시력 강화>를 활성화해 보았다.

뒤엉키는 마력의 흐름이 육안으로 구분되며 멀미가 일어날 것 같았으나, 조금 참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주위에 몬스터들이 존재한다. 심지어 즐비하다.

그러나 이 몬스터들은 나와 리오네의 진행 방향에서 멀어지려 하고 있었다. 마치 길을 터주려는 듯이.

무엇보다-

'....'

<시력 강화>를 계속 활성화했다간 멀미가 날 거 같으니 어서 꺼버리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원래 몬스터가 앞을 가로막으면 리오네에게 온전히 맡길 생각이었기 때문에 예상했던 시간보다 더욱 단축된 시각에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증표'인 페리꽃은 네가 챙기고, 잠시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정상에 도착한 뒤, 정상에 도착했음을 증명하는 증표, '페리꽃'을 리오네에게 맡기고 잠깐 기다리라 이른 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올라온 길 반대편으로.

얼마쯤 걸었을까, 리오네가 나를 완전히 인식할 수 없는 곳까지 이동 후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이제 그만 나오시지."

아까부터 나와 리오네를 살펴보고 있었던 어떤 존재를 불렀다.

하지만 그 존재는 대답 없이 잠잠했다.

"시치미를 떼시겠다."

만년필 상태인 레바테인을 꺼내 오러를 덧씌우고-

휘둘렀다.

쿠오오오-!

오러를 덧씌운 일격은 일직선 상의 모든 것을 가르고 거대한 길을 만들어 냈다.

그 끝에, 한 인영이 서 있다.

거리가 꽤 있지만, 내 '눈'앞에서 거리는 무용지물이다.

"너... 뭐야."

하지만 지금은 내 시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내 시선의 끝.

그곳에는 나와 너무나도 닮은 사람이 서있었으니까.

심지어...

여자다.

§ 아카데미의 신화급 교수가 되었다 58화

58. 페두르 산맥 (8)

도플갱어일까 의심했으나 아니었다.

저것은 분명한 '여성체'니까. 게다가 분명 나와 닮긴 했지만, 나보다 앳된 티가 확연하다.

'저건 도대체 뭐지?'

존재 자체가 의문투성이이다.

나와 닮은 외모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 페두르 산맥에 인간이 산다는 설정은 없으니까.

저 밑에 디에키스 타운은 '산다'기보다는 '구속'에 가깝지.

무엇보다 여기는 페두르 산맥의 중심.

디에키스 타운과는 결이 다르다.

전신의 신경을 곤두세운 채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식을 집중했다.

사박-

그녀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사박 사박-

가벼운 몸놀림으로, 점점 빠르게.

이제 그녀의 신형은 지척에 다가왔다.

머리로는 어떠한 조치든 취해야 한다고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커다란 충격에 빠진 것처럼.

어느새 그녀는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젠 반응을 하기에도 늦었다.

그녀의 몸이 크게 움직인다.

그리고-

포옥!

'응?'

그녀는- 내 품에 안겨들었다.

"흐끅!"

거기다 난데없이 울기까지.

"흐아아앙!"

곤란하다.

* * *

밀리아는 곧장 실습의 중간 지점이라 할 수 있는 바셸산의 정상으로 향했다.

디에키스에 들르지 않은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쪽팔리잖아....'

그 칸에 있던 학생 대부분은 마법 학부의 학생들이었다.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들.

그들 앞에서 열차 밖으로 튕겨져 나가는 추태를 보였으니.

'곧바로 루카스에게 간다.'

정상으로 향하는 마력 중, 가장 미약한 마력.

그곳에 루카스가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저 마력이 루카스라는 뜻이 아니다.

저게 루카스와 함께 있는 존재의 흔적이라는 뜻이다.

밀리아는 그 마력의 방향을 향해서 나아갔다.

페두르 산맥이 가까워질수록 마력 폭풍의 영향력은 지대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엘프의 핏줄을 타고났기에 자유롭지는 않아도, 운신할 수는 있다.

마력 폭풍 속 마력의 흐름을 읽어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최대한, 학생들이 없는 쪽으로.

자연히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가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험준한 지형에 몬스터들이 엉긴다.

화르륵-!

퍼어엉!

하지만 그녀는 100년도 넘게 살아온 하프 엘프 마도사.

그 수준은 이미 인간의 기준에서 아득한 것이다.

손쉽게 몬스터들을 처리하며 바셸산을 정복해 나갔다.

얼마쯤 올랐을까.

쿠오오오-!

거대한 마력 폭풍이 느껴진다.

발걸음을 재촉해 서둘러 그 근처까지 다가갔다.

'말도 안 돼....'

바셸산의 절경에, 루카스라는 인간이 만들어 낸 거대한 통로가 생겼다.

그 끝과 끝에....

'사람?'

한쪽은 루카스, 한쪽은 사람... 이었다.

이 페두르 산맥에, 그라스코 관계자가 아닌 사람이 있다.

멀어서 보이지 않지만, 이내, 그것은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저 멀리에 있던 형체는 사뿐사뿐 다가와, 그 얼굴을 드러내었고-

'루카스 교수?'

그 얼굴은 루카스 교수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아, 아니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일단 둘의 충돌을 막아야 한다.

하지만 밀리아가 손을 쓰기 전에 이미 두 사람은 가까워졌고, 이내-

'엥?'

저 멀리서 다가온 이는 루카스에게 안겨 버렸다.

"흐끅! 흐아아앙!"

그리고는 운다.

'나도 안겨서 울고... 아니, 저것들 도대체 뭐야?'

밀리아는 눈앞의 상황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 * *

가슴께가 축축하게 젖어 찝찝하다.

이걸 언제까지 받아 주어야 하나.

여자가 안겨 우는 것은 처음이라 어떡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흐끕, 흐끅!"

어느 정도 진정된 모양인지 떨림이 멎고, 파묻었던 고개를 쳐들었다.

상당한 미모다.

하긴, 작중에서 미형으로만 따지자면, 카린보다 루카스의 외모가 더 상위에 있으니, 루카스와 닮은 여성이 엄청난 미모를 자랑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보고 싶었어."

그러고는 다시금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얼굴을 파묻는다.

상당히... 이상했다.

심장이 아린다.

이것은 마치, 5주 훈련을 끝마치고 자대 배치 전 맞이한 면회에서 어머니의 눈물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

나도 모르게, 안겨 있는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괜찮다."

"흐어어어엉!"

그녀는 더욱 격렬하게 울어 버렸다.

그러면서 작은 주먹으로 내 가슴을 툭- 툭 쳐대는데,

'아프다.'

눈물이 핑 돌만큼 아프다.

무슨 가볍게 치는 주먹에 뼈가 나갈 것 같은 통증이란 말인가.

"그만."

"흐끕!"

때리는 걸 그만하라는 소리였는데, 그녀는 울음까지 그쳐냈다.

"왜 이제야 온 거야. 금방 오겠다며...."

이 대화의 흐름을 쫓아가기 위해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일단, 내 예상으로 이 여인은 나의- 가족.

그러나 내 설정상, 루카스는 자신들의 종족에서부터 쫓겨나 대륙을 유랑하는 것이었고, 당연하게도 그 뒤에 어떤 식으로든 루카스의 가족이나 종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이, 이렇게 지금 나를 곤란하게 하고 있다.

'대답을 잘못하면... 큰일이다.'

꼭 쥔 그녀의 손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그녀를 보며 그리운 감정이 느껴지긴 하다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녀를 모른다.

하지만 이쪽은 굉장히 반가워하는 듯하니, 내가 여기서 모른다고 하면-

'어떻게 나를 모를 수가 있어? 죽여 버릴 거야.' 라던가, '모르면 알 때까지 처맞으셔야지. 그럼 기억이 나겠지.' 같은 폭행 엔딩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말을 조심해야 했다.

"오빠는 여전히 과묵하네. 그때도 그랬지, 혼자 다 떠안고...."

"할 일이 많았다."

조심히 말을 골라, 내가 얻어 내야 할 정보를 얻자.

"그런데, 네가 여기는 웬일이냐."

"그야 인간들이 바셸산에 오르고 있으니까 내가... 아, 나 파수꾼 됐어!"

새로운 키워드를 얻었다.

"파수꾼?"

"흥, 오빠가 알던 어린 루시아가 아니야. 이제 나도 당당한 사만족의 성인이라구."

루시아.

그녀의 이름인 듯하고- 무엇보다

'사만족.'

이것이 루카스와 루시아의 종족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장하다."

뻐기는 듯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녀는 헤실 웃었다.

그 모습이 퍽 귀엽다.

"그런데...."

슈캉!

척어디선가 활이 튀어나오고, 어딘가를 노린다.

나의 시선은 화살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고-

슈화아아악!

퍽!

화살이 발사되는 소리라곤 믿을 수 없는 굉음과 함께 거대한 일격이 바셸산에 커다란 흔적을 남기고 쏘아졌다.

"저 잡종은 뭔데 아까부터 우릴 몰래 지켜보고 있는 거지?"

...취소다.

하나도 안 귀엽다.

조금 전까지의 귀여운 여동생 루시아는 어디 가고 살벌한 파수꾼 루시아가 저쪽에 주저앉은 한 인영을 노리고 있었다.

팔에 불룩 솟아난 힘줄들이 또 하나의 설정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아, 루카스 원래 활의 종족 출신이지.'

어쩐지 툭툭 치는 손길이 더럽게 아프더라니.

같은 종족인 루시아 역시, 활잡이답게 엄청난 힘캐라서 그런 거다.

루시아가 쏜 화살이 찢어발긴 풍경을 보아라. 팔에 돋아난 근육과 힘줄을 보아라.

절로 주눅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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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독자님들께서 여동생에게 기죽지 말라고 이렇게 후원을.

차마 말릴 엄두는 나지 않았지만-

"루, 루카스 교, 교수님. 저, 저 아시잖아요."

저 떨리는 목소리가 너무나도 익숙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밀리아 교수, 여기까지는 무슨 일입니까."

"그, 그게... 교수님과의 오해를 풀고 싶어서 이렇게 왔는데...."

뜬금없이 등장한 밀리아가 입을 열자, 루시아가 내 팔을 강하게 휘어잡으며 물었다.

"저거 뭐야? 오빠 나가서 반려라도 만든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오히려....

'썰렁한 농담이나 치는 상대하기 껄끄러운 부장님...에 가깝지.'

그런데 나와 밀리아 사이에 풀어야 할 오해가 있던가?

"무슨 오해를 말씀하시는 건지."

"그러니까 열차 안에서...."

아, 그 당신, 알고 있다 어쩌구?

그 무슨 소린지도 감이 안 잡히던, 그거?

"그 썰렁한 농담을 말하는 건가?"

밀리아의 성격상, 또 룬 문자로 썰렁한 농담이나 보여 주려고 했겠지. 그거 상당히 짜증 나는데 말이다.

"네, 맞아요, 그 썰렁한 농담. 하하하."

자신의 잘못을 알긴 아는 모양인지, 그걸 사과하러 여기까지 오네. 그냥 디에키스에서 기다리고 있었어도 됐을 텐데.

"잊겠습니다."

그깟 게 뭐 대수라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 이거 사과가 너무 깍듯하지 않나?

여기서 진한 냄새가 느껴진다.

거부할 수 없는 호구의 냄새가.

"단-"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밀리아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나를 올려다본다.

루시아 역시, 더욱 바짝 달라붙으며 밀리아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내가 밀리아를 살려 준 것도 포함해야지?

* * *

슈화아아악!

퍽!

정확히 밀리아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든 화살.

루카스가 그 특유의 기세로 자신을 넘어뜨리지 않았다면 머리가... 날아갔을 것이다.

"$#%@$#?"

이 엄청난 화살을 날린 루카스와 닮은 여성은 다시금 활에 화살을 재고 이쪽을 노리고 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저 화살이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녀는 남은 힘을 짜내어 소리쳤다.

"루, 루카스 교, 교수님, 저, 저 아시잖아요!"

루카스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그는 그 앞의 여성에게 무언가 말했고, 다행히 설득(?)이 잘 통했는지, 활은 거두어졌다.

"흐아아...."

루카스와 만난 이후로는 어째, 매번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것 같았다.

'차라리 마탑으로 튈걸....'

이건 그야말로 첩첩산중이 아닌가.

밀리아는 루카스도 두려웠지만, 그 옆의 여인이 더욱 두려웠다.

루카스는 말이라도 통하지, 저 괴물은....

"밀리아 교수, 여기까지는 무슨 일입니까."

"그, 그게...."

옆에서 강렬한 시선으로 노려보는 여인 때문에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평생 '강자'의 입장에서 살아오던 밀리아였다.

하지만 눈앞의 두 괴물 앞에서는 한없이 비루한 '약자'의 모습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나마 루카스가 있기에 빠르게 안정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교수님과의 오해를 풀고 싶어서 이렇게 왔는데...."

밀리아의 시선은 조심스럽게 루카스의 옆에 있는 여인에게로 향했다.

그 시선을 받은 여인은 더욱 경계를 끌어올리며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루카스에게 들러붙었다.

'정작 들러붙고 싶은 건 나라고.'

이곳에서 의지할 곳이라고는 루카스뿐.

루카스에게 들러붙어야 하는 건, 무식하게 강한 그쪽이 아니라, 내 쪽이란 말입니다- 라고 속으로 울부짖었으나, 입 밖으로 꺼낼 용기는 없었다.

"무슨 오해를 말씀하시는 건지."

"그러니까 열차 안에서...."

루카스는 잠깐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 썰렁한 농담을 말하는 건가?"

루카스는 자신의 협박을 썰렁한 농담쯤으로 치부하려 한다.

즉, 없던 일로 해 주겠다는, 자애로운 결정인 것이다.

"네, 맞아요, 그 썰렁한 농담. 하하하."

"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밀리아는 활짝 웃었다.

이제 마음의 짐을 좀 덜었다.

루카스 교수와 원활하게 오해도 풀어낸 것 같으니, 그만 떠야겠다.

무엇보다 루카스 교수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저것이 너무 무섭다.

"단-"

단호한 루카스의 음성이 밀리아의 귓가에 울렸다.

그 목소리에 서린 위엄에 일어나려던 자세 그대로 멈췄다.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리니, 서늘한 그의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조금의 감정도 없이 차가운 그 얼굴이 입을 움직였다.

"밀리아 교수, 저한테 빚을 두 개나 지셨군요."

저것은 단순히 '상하 관계'에서 오는 시선이 아니다.

주인.

루카스의 전신에서 풍겨져 나오는 기세는, 확실한 '주종관계'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러한 기세였다.

여기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

"네에...."

그에게 복종하는 것뿐이었다.

* * *

[밀리아의 '복종'을 받아 내셨습니다.]

[주종관계 형성에 따라, 펫 시스템이 오픈합니다!]

§ 아카데미의 신화급 교수가 되었다 59화

59. 페두르 산맥 (9)

눈앞에 떠오른 '펫'이라는 시스템.

그간 봐왔던 '육성'과는 전혀 다른 시스템이었다.

한순간, 우효~~엘프노예 겟또다제~~같은, 다분히 금태양같은 대사가 아른했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전혀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

[펫]

육성 과정을 거치지 않은 대상에게서 완전한 '복종'을 받아 내면, 펫으로 등록할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은 '생명체'라는 조건만 충족되면 어떠한 대상이든 가능하며, 사용자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합니다.

단, 주기적인 산책, 놀이 등으로 교감 수치를 유지해야 합니다.

대상에 따라 먹이, 산책, 놀이 등은 다를 수 있습니다.

===

그야말로, 진짜 반려생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오우야한 그런 펫이라기보다, 차라리 뽀삐 쪽에 더 가깝다는 소리다.

100년 넘게 산 엘프를 뽀삐 취급하는 게 더 웃기긴 하다만, 그래도 내게 손해될 것은 없으니.

'난 '그쪽'이 더 좋긴 하지만.'

전체 이용가에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나저나... 이 '놀이'라는 건 뭐지?'

교감 유지에 필수적이라고 묘사된 '놀이'.

산책의 경우 비교적 명확하다고 할 수 있으나, 놀이의 경우는 무엇인지 감도 안 잡힌다.

설마 진짜 강아지들처럼 '가져와' 놀이를 말하는 건 아닐 테고.

레바테인을 던져 실험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아 내고, 살벌한 표정으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루시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 잡종은 뭐냐니까?"

뭐라 설명해야 하지?

반려동물?

지극히 오해를 살 것 같고.

아는 사람?

애초에 사람이 아니지.

"...직장 동료다."

결국, 설명할 단어는 직장 동료. 이것밖에 없다.

여전히 루시아는 수긍한 표정이 아니다.

"저어, 교수님.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이번에는 밀리아가 지랄이다.

"물어보시죠."

"옆에 계신 분은... 누구?"

아, 둘이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지.

나와 밀리아가 나누는 대화는 루시아가 알아들을 수 없고, 루시아와 내가 나누는 대화는 밀리아가 나눌 수 없다.

그러니 서로 누군지 궁금해지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여동생입니다."

"가족이 있었어요?!"

지금 패드립을 시전하는 건가?

하긴, 나도 루시아를 만나기 전까지 내 종족 이름도 몰랐으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아니, 근데 어떻게 사람이 페두르 산맥에...."

그건 나도 궁금하다.

조금 전 루시아에게 물어보았을 때,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자신이 파수꾼이기에 바셸산에 있다고 했다.

그게 어째서 당연한 거지?

"루시아, 일족은 어디에 있나."

"...!"

루시아가 나를 돌아보며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다.

"이제, 완전히 돌아온 거야?"

내 설정상, 루카스는 일족에서 '쫓겨난' 것이다.

돌아가고 말고 할 것이 아니다.

하지만, 루카스의 일족에 대해서는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안내해라, 루시아."

* * *

바셸산을 벗어나, 페두르 산맥의 한 가운데로 향한다.

마력 폭풍의 영향이 더욱 거세어져, 시공간이 왜곡될 정도다.

한걸음 걸음마다 주변의 풍경이 급속도로 바뀌는 독특한 경험을 선사한다.

"여기서부터는 잘 따라와야 하는 거 알지? 오랜만이라 발을 헛디딜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 그대로 이(異)차원에 갇히고 싶지 않으면."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페두르 산맥이 무서운 이유가 나온다.

사실, 페두르 산맥에 접근을 제한해 되도록이면 언급조차 되지 않도록 집어넣은 설정. 마력 폭풍의 중앙으로 향할수록, 시공간의 왜곡은 끊임없이 위협적으로 변해, 그 속에 갇혀버린다는 설정이다.

"교수님, 저희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제 고향... 입니다."

하지만 기억에는 없는.

내 목소리에서 어디가 무거운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밀리아는 그 이후 입을 꾹 다물고 따라왔다.

얼마를 걸었을까.

어느 순간 시야를 제한하던 마력 폭풍이 사그라지고 있었다.

마력 폭풍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눈' 속으로 들어왔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루시아라는 안내자가 없었다면 구경도 못 했을 마력 폭풍의 '눈'.

"우와...."

밀리아의 반응처럼, 감탄이 절로 나오는 풍경이다.

페두르 산맥의 풍경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녹음과 함께, 평화롭기까지 한 분위기.

마음이... 편안해진다.

"오랜만이지? 우리의 땅, 노브로즈(Novloz)에 돌아온 걸 환영해."

루시아가 하얗게 웃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따라 웃을 수 없다.

레바테인을 검의 모양으로 바꾸고, 즉시 루시아를 잡아당겼다.

파바박!

조금 전까지만 해도 루시아가 있던 자리에 화살들이 꽂혔다.

적의가 담긴 것이 아니라, 모양을 보아 루시아의 움직임을 막을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모습을 드러내라."

그들의 위치는 이미 <시력 강화> 활성화로 지켜보고 있다.

전방 1Km 부근에 한 무리.

낮게 읊조리자, 일련의 무리가 갑자기 솟아났다.

어머 씨발 깜짝이야.

얘들은 못 봤는데?

아마 이동 마법 같은 것을 쓴 모양이다.

"무엇을 달고 온 게냐, 파수꾼 루시아."

가장 선두에 있던 중년이 날카로운 적의를 숨기지 않고 물었다.

루시아는 즉시 자세를 낮추고 입을 열었다.

"자, 장로님... 오빠예요. 노브로즈로 다시 돌아왔어요."

"아니, 저것은 네 오라비가 아니다."

슈콱!

처억!

장로라 불린 남자는 어디서 돋아났는지 모를 활을 들고, 빈 시위를 잡아당겼다.

위이잉-!

화살이 있어야 할 자리에 맹렬한 기운을 담은 오러가 모여든다. 그것은 이내 화살의 형태를 띠고, 나를 노린다.

"그저, 일족을 배신한 배신자일 뿐-!"

'위험하다.'

본능적인 위기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눈앞의 상대는 지금까지 내가 상대한 이 중 가장 강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몸이 굳은 듯, 움직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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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님들의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나 역시 몸을 움직였다.

포인트를 대폭 밀어 넣어, 레바테인에 오러를 덧씌우고-

쿠와아아아-

지근거리에서 날아오는 오러의 화살을-

스겅-!

베어 냈다.

전신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어간다.

"아니... 어째서?"

장로라 불린 남자의 표정에 경악이 어렸다.

"일족의 배신자가 어째서 그 기운을 사용할 수 있는 게냐-!"

장로가 무지막지한 기운을 발하며 일갈했다.

그저 일갈일 뿐이었으나 엄청난 기세가 전신을 짓눌렀다.

이번에도 막대한 포인트를 사용해 전신에 거대한 오러를 피워 응수했다.

장로의 표정에 경악이 어린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무슨 염치로 노브로즈에 다시 발을 들인 것이냐! 썩 돌아가거라!"

나는- 그러니까 '루카스'는 모종의 이유로 이 사만족에서 쫓겨났다.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루카스의 종족 배경의 전부다.

"쫓아낸 자가 돌아오니 두려운가."

"뭐, 뭐라? 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사만족의 신성한 의무를 저버리고 일족을 등진 네가 감히...."

하지만 이상하다.

정작 저 장로의 반응은 쫓겨난 자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극심한 배신감을 느끼는 것 같지 않은가.

"장로님, 오빠 많이 반성하고 있대요. 이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예요. 장로님... 아니, 삼촌도 오빠 많이 그리워하셨잖아요."

"뭐라?"

저건 내가 보이고 싶은 반응이다.

그러니까 저 장로라는 아저씨가 내 삼촌이라고?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는데... 외가 쪽인가?

페두르 산맥에 와서 출생의 비밀을 여럿 알아간다.

충격을 받은 표정은 감추고, 둘의 대화를 계속해서 들었다.

"오빠가 일부러 저희를 떠난 게 아니라는 거, 삼촌이 가장 잘 아시잖아요."

"루카스는 우리를 배신하고, 우리 사만의 신성한 의무를 등지고 인간의 편을 들었다."

"이유가 있었잖아요!"

"그 이유가 무엇이든!"

장로가 씹어 뱉듯, 겨우 내질렀다.

"루카스는 그 순간부터 사만을 버린 것이다."

"삼촌...."

그는 단호하게 잘라내고 등을 돌려 발을 뗐다.

"...하나."

한 발짝 걷다 멈추고 입을 열었다.

"루시아의 손님을 무조건 내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따라와라."

"삼촌-!"

"장로님이라고 부르래도."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삼촌!"

장로가 안겨드는 루시아를 받아 내며 내게 말했다.

"나는 허락을 했어도 다른 장로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다. 그들의 설득은...."

그는 아직 내 전신에 남은 오러를 훑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그 잡종은 뭐냐?"

장로 역시 루시아와 같은 질문을 했다.

"그러게, 걔는 뭔데 아직까지 따라와?"

루시아 역시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고 물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동료?

아니, 그 정도는 아니다.

그럼... 웬수?

아니, 웬수라고 하기에는 좀.

고심 끝에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밀리아는 나의-

"반려동물입니다."

"그렇군."

"아아."

뭔데 왜 수긍하는데.

* * *

그들을 따라 노브로즈 안으로 입성했다.

살벌한 기운을 풍기는 사람들만 만났어서, 막연하게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안쪽의 구성원은 의외로 평범했다.

일반 도시의 풍경, 그것과 크게 다름없다.

다만, 평지가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과 건축의 양식이 독특하다는 점, 그리고 길거리에 보이는 사람들이 상당한 미인이라는 사실 정도.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움직일 때마다, 그들의 시선이 우리를 쫓는다는 것 정도가 있겠다.

이런 폐쇄적인 곳에서 나라는 존재는 이방인이기에 어쩔 수 없지만, 그 범위가 너무 넓다.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위치한 사람들이 모두 이쪽을 보고 있었고, 육안으로는 확인되지 않는, 지평선 근처에 있는 사람들도 이쪽을 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고 있으니까.

'부담스러워. 그래도 신기해. 재밌는 것 같기도?'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며 이곳의 곳곳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네? 여기서요?"

어어, 나 혼자 여기서 뭐 하라고.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나도 따라가고 싶다.

하지만 벌써 사라지고 없다.

이미 그들은 시야에서 멀어졌고, 혼자 남은 나는 시무룩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서운하기도 하고.

기다리면... 오겠지?

* * *

나는 지금껏 루카스의 동족이 루카스를 쫓아낸 줄 알았다.

그러나 노브로즈에 본격적으로 입성하고는 그 생각이 조금은 달라졌다.

이들의 눈빛이 너무나도 호의적인 것.

그냥 사람들이 순박하고 착한 건 아닌 것 같다.

거리 곳곳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낮부터 술에 취해 우리를 안내하는 장로에게 시비를 거는 사람도 있었고, 아이들의 놀이 역시 피가 튀기는 것은 기본이요, 어른들은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심지어 욕설이 난무하기도 한다.

뭐랄까, 상당히 전투민족이라고 느껴진다.

그 살벌한 풍경들을 지나, 마침내 장로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곳이 바로 장로들이 모여 있는 곳- 원로원이다."

노브로즈에서도 가장 크고 웅장한 건물이다.

그곳의 입구에서 멈춰선 장로는 몇 가지 유의점을 알려 주었다.

"첫째, 너무 긴장하지 마라. 둘째, 너무 풀어지지 마라. 셋째 방심하지 마라."

뭐 어쩌라는 건지 참.

"아, 그리고 이 앞에서부터는-"

장로의 시선이 내 뒤를 쫄래쫄래 따라오던 밀리아에게 향했다.

"반려동물 출입금지다."

엄밀히 말하면 반려동물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긴 하지만, 노펫존이라니.

존중해 줘야지.

밀리아에게 몸을 돌려 그녀에게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네? 여기서요?"

살짝 불안한 듯 보이는 밀리아였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밀리아가 '기다려'를 익혔습니다.]

...진짜 펫이네 이거.

§ 아카데미의 신화급 교수가 되었다 60화

60. 페두르 산맥 (10)

"교수님이 오시려면 멀었나...."

리오네는 루카스가 사라진 방향으로 목을 주욱 뺐다.

루카스가 시킨 일을 막 완료한 참이다.

페리꽃을 소중히 품에 안아 들고, 자신의 몸을 덮고 있는 루카스의 외투를 여몄다.

루카스의 향기가 후욱하고 피어올랐다.

시간을 보니 이제 겨우 5분이 지났을 뿐인데. 엄청 오랜 시간이 흐른 것만 같다.

그때였다.

과아아앙-!

루카스가 사라진 방향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

금방 잦아들긴 했으나, 신경 쓰이는 소리.

리오네는 자리에서 일어나 루카스가 사라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초목들이 거세게 흔들린다.

'무슨 일이지?'

덜컥, 걱정이 든다.

가봐야 할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오만가지 생각과 함께 걱정이 떠오른다.

고오오옹!

몇 분이 지나자 한 번 더 소리가 들렸다.

이전에 났던 소리 때문에 그쪽을 의식하고 있었기에 더욱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심장이 두방망이질했다.

루카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진 않을까?

망설이던 리오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루카스가 준 외투를 한 번 더 단단히 여몄다.

그리고는 다시 앉았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안다.

설령, 무슨 일이 생겼다 한들, 자신이 도움이 될 리가 없다.

게다가 루카스는 분명히 말했다.

-잠시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그녀는 무엇보다 루카스를 믿는다.

* * *

장로를 따라 들어간 원로전은 거대한 '눈'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건물 구조도 그렇고, 벽면에 새겨진 문양들도 모두 눈을 나타내고 있다.

다른 건 모르겠고, 내가 어째서 시력이 좋은지는 알 것 같다.

이 사만족, 눈에 광기마저 느껴지는 집착이 엿보인다. 이 정도 광기면 시력 좋은 것쯤은 당연하다 생각이 들 정도.

장로를 따라 조금 들어가자 이윽고 중앙에 도착했다. 눈앞에 5개의 자리가 드높게 솟아 있었다.

4자리는 이미 주인이 앉아 있고, 한 자리만 남은 상태.

당연하게도 나를 이곳까지 안내해 준 장로의 것이다.

그는 나를 장로들 앞에 세운 뒤, 비어 있는 자리로 이동했다.

그가 착석하자, 가장 중앙에 앉아 있던 이가 입을 열었다.

"루카스... 일족의 배신자여. 무슨 염치로 노브로즈에 다시 발을 들였는가."

그의 음성에 따라 주변 마력이 출렁인다.

"4 장로여, 어째서 루카스의 출입을 허가한 거지?"

"대장로님, 그건 제가...."

루시아가 중간에 끼어들자, 대장로라 불린 이가 그 시선을 루시아에게 옮겼다.

"파수꾼 루시아. 아직 그대가 발언할 때가 아니다. 4장로는 내 물음에 답하라."

"루카스가 일족의 배신자라고는 하나, 그의 신분이 격하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그렇군. 일리가 있도다."

이번에는 대장로가 4장로의 말을 끊었다. 마치 뒷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듯한 태도였다.

'내 신분에 뭐가 있나?'

의문도 잠시.

"그렇다면 파수꾼 루시아. 그대가 루카스를 이곳까지 인도한 것으로 안다. 그 이유가 무엇이지?"

"제 오빠니까요."

너무도 당당한 무논리에 걱정이 되기도 하였으나, 원로단 쪽에서는 오히려 자애로운 웃음이 터졌다.

마치 명절에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재롱을 부리는 아기라도 본 듯한 그런 자애로움이다.

"파수꾼 루시아. 개인적인 감정도 존중받아야 하겠으나, 그대는 어엿한 파수꾼. 그보다 일족이 앞서야 한다."

대장로는 루시아를 부드럽게 타일렀다.

"오빠도 일족을 그리워했어요. 오빠가 먼저 이곳으로 안내하라고 부탁했는걸요."

"그러냐."

이번에는 내 쪽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것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진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대장로- 아니, 대장로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원로단 모두 엄청난 강자다.

"자, 그럼 루카스, 그대에게 묻겠다."

조금 전까지 온화하던 표정은 어디 가고, 엄숙하고 근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대가 이 노브로즈에 돌아온 저의는 무엇인가."

대장로는 그 기운을 더욱 거세게 끌어올리며 물었다.

"일족의 품으로 되돌아오기 위함인가."

"...나는 그라스코의 전투학 교수, 루카스 폰 크라우스."

장로들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갔다.

내 전신을 옥죄는 대장로의 기운에 맞서기 위해 포인트를 왕창 때려 넣어 오러를 활성화하고 입을 열었다.

"사만의 루카스가 아닌, 그라스코의 교수 자격으로 이곳에 방문한 것이다."

대장로는 4 장로와 마찬가지로 내 오러를 보자마자 경악했다. 그리고는 시선을 4 장로에게 향해 모종의 시선을 주고받더니 지극한 의문을 담고서 입을 열었다.

"어째서 네가... 일족을 떠난 네가 일족의 잊혀진 힘인 파마의 기운을 다루는 것인가!"

골드 상점에서 팔던데?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해 봤자 미친놈 취급받을 뿐이다.

대장로는 더욱 기세를 끌어올려 나를 강하게 압박했다.

'으음....'

당신 같은 괴물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이거 유지하는데 재화가 필요하단 말이다. 적당히 해라, 적당히!

그를 찍어누를 생각으로 포인트를 더욱 밀어 넣었다.

빠르게 닳는 포인트가 너무나도 아깝다. 더욱이 유료화 이후 적어지는 포인트를 생각하면....

다행히도 힘겨루기는 길지 않았다.

대장로 쪽에서 기운이 수그러들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나 역시 포인트를 낭비할 이유가 없으니 빠르게 오러를 거뒀다.

줄어든 포인트를 보고 있자니, 속이 쓰리다.

[새로운 알림이 도착했습니다.]

[n7988_mohani1526 님께서 100G 후원하셨습니다.]

[k2929 님께서 100G 후원하셨습니다.]

[아틸란 님께서 5,000G 후원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x비스콘!

순식간에 속이 편안해지며 자애심마저 차오른다.

"그렇군. 파마의 기운을 되찾았다면, 루카스 그대가 이 노브로즈에 온 것이 설명이 되지. 자네가 이 노브로즈에 왔다는 것은, '그것'을 취하기 위함이겠지?"

'그것?'

대장로의 물음에 일단은 침묵했다.

"아주 오래전, 이제는 신화로 기록된 그 시절의 유물."

대장로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초고대 문명의 편린.

이 페두르 산맥에서 실습을 벌이는 또 하나의 목적.

고개를 끄덕여 긍정해 주었다.

"그래, 일족의 옛 힘을 되찾은 자네라면, 자격이 있지."

대장로가 신호하자, 원로원 모든 장로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운을 끌어올렸다.

'응?'

그들의 전신에 이상한 문신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의문도 잠시.

그들 몸에 떠오른 문신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그대로 자신들이 앉아 있던 자리로 옮겨갔다. 문신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장로들의 자리를 기점으로 원로원 곳곳으로 퍼져 나가, 이내 한가운데 눈 모양에 모였다.

'이 장면...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정확히 같은 장면은 아니었으나, 비슷한 걸 본 거 같다.

구구궁-!

그것도 잠시.

이내 무거운 소리와 함께 눈 모양의 바닥 장식이 열리기 시작하더니, 제단 같은 것이 솟아올랐다.

"이것이 우리 원로원의 존재 이유- 잊혀진 제단이다."

"...이곳에 내가 찾는 것이 있다는 말인가."

딱 봐도 던전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들어서는 입구가 눈에 보이진 않지만, 보나 마나 뭐 내가 열 수는 있겠지.

"그렇네. 여기에 자네가 가진 파마의 기운을 불어넣으면 진정한 입구가 열릴...."

"그럼, 나는 이만 돌아가야겠군."

"응? 방금 뭐라고...."

"돌아가겠다고."

어차피 이번 실습에서는 '위치'만 파악해 둘 생각이었다.

이렇게 위치를 알았으니, 이번 실습에서 할 일은 끝이었다.

"다음에 찾으러 오지. 루시아, 돌아가겠다."

"응? 오빠 지금 가게?"

"말했지 않나. 그라스코의 전투학 교수로 이곳에 온 것이라고. 내 학생들이 기다린다."

지금은 실습 중이다.

게다가 리오네가 정상에서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시공간의 왜곡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한 시간이 지났을 테니, 빨리 가봐야 한다.

괜히 그녀가 움직였다가 무슨 사건에라도 휘말리면.

내가 소설을 읽을 때도 가장 극혐하던 발암캐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럴 순 없다.

제발 리오네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기를 바라며 돌아가려 했다.

"아, 아니...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잊혀진 제단'의 입구를 열어주었는데, 가겠다고?"

"내가 언제 열어달라고 했던가?"

자기 혼자 일족의 잃어버린 힘이 어쩌구, 자격이 어쩌구 하며 스스로 열었다.

나는 그 과정에서 단 한마디도 보태지 않았다.

늙은이가 혼자 신나서 열어놓고 나에게 책임 전가를 하려 한다.

"대신 다음에 다시 찾아오도록 하지."

"어, 어... 그, 그래. 다, 다음에 오게."

대장로가 멋쩍은 듯 기운을 거두었다. 다른 장로들도 슬그머니 기운을 거두자,

구구궁-!

'잊혀진 제단'이 상당히 서글픈 소리를 내며 자취를 감추었다.

* * *

'길이... 달라졌다.'

돌아가는 길은 노브로즈에 진입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마력 폭풍에 의해 시공간이 왜곡되어 어긋난 것이다.

하지만 방향은 맞다.

길잡이인 루시아가 없었다면, 왔던 길 그대로 돌아갔을 것이고 이 시공간의 감옥 안에 갇혔을지도 모르겠다.

<시력 강화>를 활성화해 '진짜' 길을 읽어 내는 법에 대해 대충이나마 감을 잡아가며 걸었다.

다음에 올 때 참고 해야겠다.

"다 왔어."

루시아의 시무룩한 목소리가 도착을 알렸다.

루시아와 만나고 밀리아와 마주한 그곳이었다.

나와 루시아가 만들어 놓은 흔적이 황망하게 남아 있다.

'5분밖에... 지나지 않았군.'

시간을 확인하니, 이곳을 떠났을 때에서 5분이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시공간 왜곡의 영향이다.

마치 어릴 적 읽었던 전래동화 속 신선 세계에라도 다녀온 기분이다.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마치 다른 차원에 다녀온 느낌이랄까?"

내 감상은 밀리아가 대신 말해 주었다.

"저건 뭐라는 거야?"

루시아는 여전히 밀리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통하지 않는 언어를 들으며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오빠, 반려동물이라며. 파양하면 안 돼?"

"루시아."

그녀의 말이 많아지는 것은 비단 밀리아 때문만은 아니다.

이제 찾아올 헤어짐이 아쉬운 것이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고 입을 뗐다.

"그만 가보마."

아니나 다를까.

루시아의 얼굴이 서운함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다음에... 또 올 거야?"

루시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혈육과의 이별이 많이 속상한 모양이다.

그런 루시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약속하지. 내 일이 끝나면 너를 보러 노브로즈에 들르마. 너는 이곳에서 네 일을 하거라."

"...오빠가 노브로즈를 떠났을 때도 그런 비슷한 말을 했어. 언젠가 돌아오겠다고."

"그래서 이렇게 돌아왔지."

"...."

루시아는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고 싶어 하는 듯했으나, 말꼬투리 잡는 게 일인 내게 그런 수는 통하지 않는다.

"꼭 와."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자주 오마."

루시아의 눈동자에 얼핏 이슬이 맺힌다.

"알겠어. 오빠 믿고 이곳에서 기다릴게."

루시아는 나름 어른스럽게 이별을 맞이했다.

"아-"

완전한 이별을 고하려는 찰나, 머릿속에 어떤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마수의 진행 방향을 컨트롤 하는 거 같던데."

"응. 파수꾼이라면 그 정돈 쉽지."

루시아가 내 등반 때 손을 써, 마수들이 그토록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이었다.

"부탁 하나 하마."

"뭔데?"

루시아의 눈이 반짝 빛이 난다.

"내가 내려가고 나서도 많은 이가 바셸산을 오를 것이다."

"아... 그 사람들도 편하게 올라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라고?"

웃음이 났다.

"아니."

고개를 젓고 웃으며 말했다.

"그 반대다."

이제, 느슨해진 실습에 긴장감을 불어넣을 때다.

§ 아카데미의 신화급 교수가 되었다 61화

61. 페두르 산맥 (11)

소리가 들리고 약 5분 정도가 흘렀을까.

"교수님!"

루카스가 사라진 방향에서 드디어 거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저 잠깐 못 본 것뿐인데 왜 이렇게 반가운지.

리오네는 루카스의 등장에 가슴이 콩닥거리는 것을 느꼈다.

"오래 기다리게 했군."

"아, 아니에요. 얼마 안 기다렸어요."

리오네는 붉어진 얼굴을 들킬까 일부러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

그런 그녀의 귓전에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또 보는구나."

"어, 밀리아 교수님?"

루카스의 압도적인 존재감 때문에 밀리아가 함께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아까 열차에서 튕겨 나간 그녀가 여기엔 왜...?

'아, 밀리아 교수님 마중 가신 거였구나!'

그러면 10분 정도 자리를 비운 것이 이해가 간다.

마력 폭풍 속에서 바셸 산에 들어선 그녀를 마중하기 위해 루카스가 나선 것이었다.

어쩜 배려심 또한 그렇게나 깊으신지!

루카스 정도라면 이 마력의 폭풍 속에서도 밀리아의 기척을 읽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 혼잡한 마력의 흐름 속에서 밀리아 교수님의 기척을 읽었고, 그녀가 헤매고 있는 것을 눈치챈 루카스가 직접 밀리아를 데리러 간 것이다.

리오네의 추론을 증명이라도 하듯, 밀리아는 루카스와 대조될 정도로 흐트러져 있었다. 마력 폭풍 속에서 상당한 고생을 한 모양이다.

사실 루카스가 어이없을 정도로 멀쩡한 것이지만.

"...다른 이들은 아직인가?"

"네. 아직까지는 저희만 도착한 거 같아요."

"잘됐군."

"네? 방금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페리꽃은 챙겼나?"

"네! 여기 있습니다."

리오네가 자랑스레 페리꽃을 내보였다.

확인을 마친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제 내려가는 일만 남았군."

하지만 루카스의 행동은 정반대였다.

오히려 정상에 눌러앉겠다는 듯이 바위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았다.

"자, 여기서 문제."

그가 풍겨내는 엄숙한 분위기에 리오네는 마른침을 삼켰다.

"내려가는 길은 어디인가."

생각 없이 받아들인다면 어이없는 질문처럼 보일 수 있다.

내려가는 길이 어디긴, 올라온 길 그대로 내려가면 되지.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생각. 이 속에 숨겨진 진의를 살펴야 한다.

이 바셸산은 마력 폭풍이 휘몰아치는 마경.

단순히 마력 폭풍의 문제가 아니다.

그 영향으로 시공간의 뒤틀림이 발생하고 있는 것.

바셸산은 그 정도가 약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루카스의 의도는 그 영향을 피해 안전하게 내려갈 수 있는 길을 리오네 스스로 찾아 답하라는 뜻이었다.

애초에 올라올 때도 형평성에 의문이 제기되었으나, 루카스가 단언한 대로 지극히 공평해야 했기에, 내려가는 길은 리오네가 확실히 답해야만 했다.

그녀는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일단 올라온 길 그대로 내려가는 것은 기각.

이미 시공간이 살짝 어긋나 틀어져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야 하지?'

올라오는 것은 그저 정상을 향해 오르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정상에서부터 디에키스에 무사히 복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고뇌가 뒤따르는 것이었다.

"나를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참이지?"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더욱 조급해진 리오네는 머리를 쥐어짜 냈다.

그 순간, 한 가지 떠오른 사실.

'교수님이 돌아오신 방향....'

리오네는 조금 전, 루카스가 돌아온 곳을 가리켰다.

시공간의 왜곡이 적었기에 루카스가 무사히 갔다 온 것 아니겠는가!

"여기에요!"

긴장하며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정답이다."

기쁘다.

무엇보다 루카스의 인정을 받은 것 같아 너무나도 기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미 등반을 시작하기 전에 루카스가 바셸산에 오르는 것보다 하산이 더욱 힘들 것이라고 주의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가 진짜라는 생각에 조심히 발을 내디뎠다.

두렵지만, 등 뒤에 루카스가 있다.

그것만으로 마음이 든든해지는 리오네였다.

하지만-

"꺄악!"

"으헉!"

"엄마아아...."

실전은 더욱 참혹했다.

미끄러지거나 발을 헛디디는 등, 올라올 때에 비해 산세가 더욱 험악하게 느껴졌고, 체력은 두 배 이상 소모되었다.

그 와중에 올라올 때는 보이지 않던 마수들까지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올라오기 전 루카스 본인이 했던 선언처럼, 마수를 잡는 과정에서 루카스의 도움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1대 다수의 상황이 벌어질 때만 한 놈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묶어두었다가 한 놈의 처리가 끝나면 다음 놈을 풀어 주는 식이었다.

올라올 때와 다르게 중반부터는 완전히 퍼져 버렸다.

그것은 따라오는 밀리아 교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막대한 마나를 가지고 있다 보니, 컨트롤 해야 하는 마력의 수준 역시 엄청났고, 거기에 더해 하산의 피로까지 감내하고 있으니, 리오네 자신보다 훨씬 힘든 상황일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의문인 것은-

'루카스 교수님은 어째서 저렇게 멀쩡하실 수 있는 거지?'

루카스 그는 놀라우리만큼 흐트러짐이 없었다.

분명 등산에는 적합하지 않은 복장이었으나 미끄러지거나 발을 헛디디는 일이 없었고, 드러난 제복은 구김 하나 허락하지 않고 말끔한 자태를 지키고 있었다.

루카스 주변으로 혼자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호흡은 또 어떤가. 지친 기색이 역력한 리오네나 밀리아와는 달리 조금의 힘든 기색도 없다. 오히려 지루한 기색이었다.

'나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고 계셔....'

리오네는 다시 한번 이를 악물었다.

다리가 후들거리지만, 다시 한번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했다...."

루카스의 특강 중, 꼴찌를 도맡아 했으며, 실습 전 평가에서는 가장 어중간했던 성적의 리오네 에밀레이.

그녀는 2천여 명의 실습대상자 중 가장 처음으로 바셸산 등반을 완료한 학생이 되었다.

* * *

"야, 힘드냐?"

"닥쳐, 휠체어 놔 버리기 전에."

가파른 경사 구간.

제시는 에일론의 휠체어를 있는 힘껏 밀며 겨우겨우 등반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몇 번을 두고 갈까 고민했다.

그러나 이 실습은 2인 1조가 기본이었고, 에일론의 디로그가 막아 내는 마력 폭풍은 분명히 등반에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래도 마수들이 없어서 그나마 낫지 않냐?"

"입 다물어, 좀."

확실히 에일론 말처럼 앞서 올라간 루카스가 마수들을 다 정리한 것인지, 마수들의 방해가 없어 그나마 나은 편.

.

.

크르르...

"...이었는데."

선명하게 귓가에 울리는 낮은 하울링.

이것은 분명,

"마수다."

콰악!

제시는 에일론의 휠체어를 단단히 눌러 바닥에 고정해 두었다.

"잠깐 기다리고 있어라."

스릉-!

그리고는 검을 뽑아 응전을 시작했다.

"한 두 놈쯤이야, 제시 너한테는 별거 아니잖아?"

아무리 마력 폭풍이 움직임의 제한을 만들어 낸다고는 해도, 제시의 실력이면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돌파해낼 수 있다.

그랬는데.

크르르...

크릉!

크워어어..

"어, 마수들이 번식기인가? 왜 점점 늘어나지?"

"에일론, 넌 그 입 좀 봉인해야 돼."

어째 에일론이 입을 떼면 뗄수록 상황이 악화되어 가는 것 같다.

"여물고 지켜나 봐. 금방 끝낼 거니까."

제시는 빼든 검을 그대로 휘두르며 눈앞의 마수들을 정리해 나갔다.

숫자가 많을 뿐이지 상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히려-

'어?'

점점 움직임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력의 폭풍 속에서 들끓는 마력이 어디로 향할지, 자기가 알아서 움직이는 기분.

이 가혹한 상황에서 제시는 한 단계 벽을 넘으려 하고 있...

"제시-! 내가 도와줄게!"

콰앙!

"...너 뭐하냐?"

"혼자 힘들잖아. 내가 도와줄게."

철커덕!

위잉!

지이이잉-!

드로그의 위력은 확실히 놀라웠다.

마광포 한줄기로 이 일대의 마수를 초토화시켜 버렸으니까.

그런데 타이밍이 욕이 나올 것만 같다.

조금만 더 했다면 무언가 잡혔을 것 같은데.

"괜찮아, 제시?"

에일론은 그런 제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본 제시는 확신했다.

'이새끼, 알고 있구나.'

에일론이 백 퍼센트 알고 했다는 것을.

"자, 다시 가자!"

"그래. 어휴. 다시 가자."

이래서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있나 보다.

해맑게 웃으며 휠체어에 다시 탑승한 에일론을 보며 제시는 그저 한숨만 폭 내쉬고는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고서 다시 가파른 절벽을 오르... 오르....

"야, 잠깐."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내가 왜 이걸 밀고 있는 거지?

"너... 트랜스 폼 할 수 있잖아."

흠칫!

에일론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너 이새끼, 지금까지 일부러 나 부려먹은 거지."

"헤헤."

에일론은 특유의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웃는 낯에는 침을 못 뱉는다.

"퉤!"

그거, 오늘부로 개소리다.

* * *

순탄하게 진행되던 등반 실습은 마수들의 등장으로 그 난이도를 더했다.

그냥 등반만 하거나 마수만 등장했다면 모를까, 두 가지가 한꺼번에 몰아닥치니 버거웠다.

"크윽...."

가뜩이나 마력 폭풍을 뚫고 등반하는 중이라 체력 저하가 뒤따르는 중이었는데 마수까지 상대해야 하니, 체력의 소모가 극심해지고 체력의 소모가 극심해지다 보니 마력 폭풍의 영향을 온전히 받아 내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된 것.

그래도 루카스의 가르침이 헛되지는 않았기에 학생들은 '방'과 '공'을 사용해 마수는 훌륭히 상대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수였다.

마수들의 수준이 충분히 감내할 만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정상에 가까운 곳보다 오히려 중턱 즈음이 더욱 들끓은 것.

늦게 출발한 이들이 더욱 곤란한 이유였다.

게다가 이런 상황은 학생들로 하여금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차라리 마수면 마수, 등반이면 등반, 이런 식으로 한쪽을 확고하게 결정하고 움직였다면 오히려 상황은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은 상대하면서도 등반을 선택했고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었다.

결국, 판단의 미숙은 균열을 만들어 내었다.

"크윽!"

"제크란!"

정신력이 무너지며, 마력의 컨트롤이 깨어졌다.

'방'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학생이 마수의 일격을 크게 허용했다.

흩뿌려진 피는 더욱 많은 마수를 꼬여 내었다.

마치 벌떼처럼 마수들이 속속 모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절망감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플랭, 빨리 너라도 도망쳐서 다른 사람들한테 도움을 구해."

한 명이 겨우 입을 떼 말했다.

"제크란, 그럼 너는!"

"일단 하나라도 무사해야 할 거 아니야!"

제크란의 판단이 그나마 정확했다.

그는 현재 상처를 입어 빠르게 움직일 수 없는 상태.

이 상황에서는 다른 한쪽이 서둘러 구조 요청을 하는 것이 둘 모두를 살릴 유일한 방법이니까.

"어서!"

"크흑!"

제크란의 독촉에 주저앉았던 플랭은 주섬주섬 일어나 도움을 구하려 뛰쳐나가려 했다.

그 순간.

스겅-

"쿠워?"

서걱!

"크워어어어!"

주변의 마수들이 조각나기 시작했다.

학살.

누군가 마수들을 가볍게 유린하며 학살하고 있었다.

"움직일 필요 없다."

뚜벅-

흩뿌려지는 마수들의 피륙 사이로

뚜벅-

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다.

뚜벅-

너무나도 우아한 걸음걸이로,

뚜벅-

너무나도 아름다운 자태로.

이 정도의 압도적 존재감을 낼 수 있는 이-

그들이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루, 루카스 교수님!"

이윽고 그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났다.

그가 등진 태양이 마치 후광처럼 루카스를 비추었다.

신성하다.

신화 속 한 장면 같은 루카스의 자태는 신성함마저 느끼게 할 정도였다.

그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무심히 향했다.

"제크란, 플랭."

루카스의 입에서 두 사람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안도감과 함께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루카스에 대한 신앙심이 샘솟으려 한다.

"교수님...."

이제 안심해도 좋다.

루카스의 음성이 그렇게 두 사람을 위로하는 듯했다.

"탈락이다."

위로가 아니었네.

§ 아카데미의 신화급 교수가 되었다 62화

62. 페두르 산맥 (12)

조셉과 브렐린은 산 중턱 즈음 당도했다.

그저 걷는 것만으로 온몸에 진이 빠지고, 마력 폭풍 때문에 속은 메스꺼웠으나, 점점 익숙해지고 버티는 법을 알게 되면서 이 실습의 진가를 깨달았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디에키스에 막 도착한 자신들과 지금의 자신들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만큼의 격차가 생겼다.

이 마력 폭풍의 흐름 속에서 마력 제어를 더욱 세심하게 컨트롤 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마력의 양이 증가함은 물론이고, 더욱 정순해졌다.

저기 밑에서 멍청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 누구보다 훨씬 치고 나가고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끝내면 안 돼!'

둘에게 든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전투 학부의 무식쟁이들이 루카스 교수의 강의를 극찬하고 다닐 때만 해도, 그들이 가진 지식의 질을 안타까워했을 뿐이었다.

고작 무기 휘두르고 막고 하는 것에 무슨 지식이 끼어들 여지가 있다고.

하지만 이 실습에 참여하면서 그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루카스의 강의에는 이 실습보다 직접적인 지식의 전수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쯤 되니 둘은 그 미지의 지식에 몸이 달아오르는 지경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들... 그동안 루카스 교수 강의 빡세다 뭐다 투덜거린 게 전부 비틱질이었어!'

기숙사에서 밀리아와 루카스의 강의에 대한 한탄을 나누었던 것이, 사실 일방적인 자랑질에 불과했던 거다.

밀리아 교수의 강의는 질적으로만 따지면 더할 나위 없이 그라스코 최상위 강의이겠으나, 문제는 받아들이지를 못한다는 거다.

하지만 루카스 교수는 어떠한가.

앞서 나가는 녀석들 보면 알 수 있듯이, 루카스의 특강은 전투 학부 전체를 바꿔 놓은 것이었다.

부러움과 함께 절실함이 밀려왔다.

마법 학부와 전투 학부는 겹치는 과목이 없다.

당연하게도 루카스와의 접점은 이 실습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되는 것이다.

놓칠 수 없다.

그들은 이 실습에서 버티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하지만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마수들의 위협이 본격적으로 들이닥치면서 상황은 난항을 빚었다.

"크윽!"

최전방에서 싸움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이들이 코앞의 마수들을 어떻게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생존이 목마른 상태.

앞선 전투 학부의 뒤꽁무니를 바짝 따라붙으며, 간간이 지원도 하며 겨우겨우 버텼다.

하지만 이 실습은 전투 학부에게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

탈락자가 계속 발생하고, 상황이 괜찮은 이들은 등반 속도를 높이면서 조셉과 브렐린 페어를 멀찍이 떨어뜨려 놓았다.

결국, 이 두 마법사는 혼자 생존해나가야 했다.

마력 폭풍을 뚫으며 마수들을 상대하기란 녹록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해내야만 할 이유가 있었다.

'언제까지 밑바닥에서 살 수 없어!'

그라스코는 신분의 차별이 없는, 거의 유일한 아카데미다. 그렇다고 해서 차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성적.

그라스코의 모든 잣대는 성적으로 좌우된다.

재학 중의 생활, 연구의 참여, 관련 자료를 열람할 권리... 더 나아가서는 졸업 후의 미래까지.

특히, 마법 학부는 그 차별이 극심하다.

타 아카데미도 아니고, 그 마탑과 수위를 다투는 학과다 보니, 당연하다.

이 둘은 그 마법 학부에서도 밑바닥을 장식하고 있다.

성적 우수자들에 비해 참여할 수 있는 연구는 적고, 그렇게 되면 졸업 후의 인생이 꼬이게 된다.

이 실습이야말로 그들이 인생을 역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이다.

"가자. 우린 살아남아야 해."

"그래. 언제까지 바닥에 처박혀 있을 수는 없어!"

정상까지 그야말로 코앞이다.

두 사람은 힘을 냈고,

쿠워어엉-!

마수, 리자드 킹과 조우하게 되었다.

'하, 진짜....'

그들은 새삼, 인생은 실전이라는 격언이 떠오른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질 놈은 아무리 힘을 내도 리자드 킹 같은 마수를 마주하게 된다.

"으으!"

리자드 킹의 날카로운 눈빛이 그들을 훑자, 전신에 소름이 돋는다.

"정신 차려!"

"그, 그래."

두 사람 모두 리자드 킹 같은 마수를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하기는 처음이라 몸이 굳었으나, 이 실습의 티켓을 놓치고 싶지 않은 그들은 뭐라도 시도했다.

"모든 것을 끌어안는 대지여! 심연보다 깊게 가라앉아 내 적을 절망으로 붙들어라!"

거창한 주문이었지만-

"스왐피!"

정작 결과물은 리자드 킹의 앞에 조그마한 뻘 하나를 만들어 내는 것에 그쳤다.

"타오르는 억겁의 불꽃이여, 분노하여 내 적을 태워라!"

이 주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플레어!"

리자드 킹의 콧김으로 꺼트려 버릴 법한 불꽃 몇 개가 위협적으로 타오르는 것이 다였다.

그들의 수준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나마 고위 마법인 것이다.

이 정도 수준조차도 영창이라고 하는, 주문 형식으로 된 수식의 계산식을 이용해야 한다.

당연하게도 그들의 마법은 리자드 킹에게 큰 피해를 주지 못했고-

"도망가-!"

"으아아악!"

결과는 처참했다.

하지만 그들은 도망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풀려 버린 다리가 꼬여 엎어져 버렸고, 바닥을 뒹굴었다.

흙이 입으로 들어가 찝찝하고 텁텁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다시 서둘러 일어나야만 했다.

리자드 킹이 육중한 몸을 이끌고 서서히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찰나-

뚜벅.

"크워?"

리자드 킹의 움직임을 멈출 만큼, 압도적인 존재감.

"루카스 교수님...."

루카스 교수의 등장이었다.

순간, 조셉과 브렐린은 안도하였다.

이제 루카스가 저 리자드 킹을 처리하고 우리 앞길을 터줄 것이다...

'응?'

하지만 멈춰선 루카스는 그저 고고하게 이 광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크... 워?"

리자드 킹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슬쩍 팔을 들어 조셉과 브렐린을 향해 휘두르는 척하곤, 루카스의 눈치를 살폈다.

마치 상위 포식자에게 자신의 행위를 허락이라도 받는 듯한 모습이었다.

여전히 루카스의 반응이 없자, 리자드 킹이 본격적으로 다시 움직였다.

"교, 교수님 사, 살려...."

"내가 움직이면, 너희는 탈락이다. 그래도 좋은가?"

텁-

루카스의 말에, 두 사람은 서로의 입을 틀어막았다.

'탈락은 안 돼!'

"포기하고 싶다면 언제든 말해라."

"크윽-!"

그나마 다행이라면, 리자드 킹의 커다란 몸집만큼 둔해서 그들이 도망칠 여유가 충분하다는 정도.

둘은 서둘러 일어나 리자드 킹과 거리를 벌렸다.

그 와중에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마법을 펼쳤다.

"쿨럭...."

물론, 페두르 산맥의 마력 폭풍은 그들의 영창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마력의 컨트롤이 어수선해지면 두 사람의 내부를 진탕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가혹한 상황이다.

이제 두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고위급 마법은 바닥났다.

포기를 떠올린 그 순간, 루카스의 입이 열렸다.

"답은 가까이에 있다."

마치 너희는 할 수 있다는 듯한, 서늘한 목소리 뒤에 감춰진 자애로운 격려.

마법 학부에서도 바닥을 담당하는 두 사람답게, 그들을 따라다니는 것은 격려가 아닌 폄하와 비하였다.

그라스코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두 사람은 자신의 잠재력을 믿어주는 이를 만났다.

아이러니하게도 마법 학부와 연관이 없는 루카스였지만,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 존재가 보내는 격려에 두 사람은 엄청난 자신감을 얻었다.

"덤벼라, 도마뱀 새...."

"크워어엉!"

뻐억-!

"조세에엡!"

물론, 자신감을 얻었다고 해서 상황이 극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크윽... 그래도 빗맞아서 다행...이...야."

"정통으로 맞은 거 같은데."

루카스가 한마디 거들었지만, 이 엄청난 격통을 들킨다면 실습에서 탈락할 수도 있기에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할 수 있습니다!"

"아자, 아자!"

두 사람은 기합을 넣고 일단 다시 거리를 벌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마법으론 놈에게 통하지 않아.'

'근데 루카스 교수님은 우리 둘이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고 하셨잖아?'

'그렇지.'

'루카스 교수님 정도 되는 실력자가 허튼소리를 할 리도 없고.'

'방법이 있다는 소린데....'

두 사람은 빠르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루카스가 분명 '답은 가까이에 있다'라고 확언했다.

그러니, 분명 방법이 존재할 것이다.

'뭐지? 뭘까? 우리가 아는 최고의 수를 써도 통하지 않는데.'

두 사람의 머리가 급속도로 회전한다.

마법 학부생의 뛰어난 두뇌는 이내,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게 했다.

-쟤들은 도대체 뭘 배우는 거냐?

-그러게, 왜 계속 내려 베기만 죽어라 하고 있지?

비교적 오래된 기억이다.

루카스의 '전투의 모든 것' 정규 수강생들이 보였던 이상행동.

그리고 최근-

마찬가지로 기본 검술을 단련하던 전투 학부의 학생들.

그 기억들은 두 사람에게 한 가지 키워드를 던져 주었다.

'기본'

짐작하건대, 루카스의 강의에서 이 기본이 중요한 포인트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들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그동안 하찮게만 여겼던 '기본'에 이 위기를 벗어날 방법이 있지는 않을까?

두 사람은 빠르게 시선을 교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두 사람 모두 몸속의 마나를 분출해 한 곳에 응집했다.

마나 응집.

마법 학부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마력의 컨트롤 방법이다.

마나- 전투 학부에서는 마력이라 불리는 이것을 찰흙 놀이하듯 가지고 놀면서 기본적인 이해를 쌓는다.

하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기본이라, '마법'이라고 불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저 전투 학부의 '내려 베기'와도 같은 개념, 오히려 그보다 더 떨어지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이 유일하게 '능숙하다'라고 평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이 마나 응집이었다.

아무런 영창도, 어떠한 원소의 첨가도 없는 순수한 마나.

그것이 두 사람의 손끝에서 자그마한 마나의 응집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마나로 응집할 수 있는 최선의 크기다.

이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마나 응집은 그저 어린 마법사들의 마나 친화력을 위한 놀이거늘.

이것으로 저 리자드 킹에 어떻게 대항한다는 말인가.

두 사람이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그냥 들이받는다!'

아무리 기본이라고 해도, 이 응집된 마나 역시, 마력을 품고 있다. 여기서 수식이 더해져 원소가 합쳐지면 그것이 바로 마법이 되는 것이다.

단순한 마나 덩어리일지 모르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두 사람의 마나가 섬전처럼 리자드 킹을 향해 날아갔다.

작디작은 마력을 품었으나, 이것은 모든 마법의 기본.

그리고 이 두 마법사의 마력 컨트롤이 오롯이 녹아 있는 '진정한' 마법이라 할 수 있다.

푸욱-!

복잡한 영창을 사용한 마법으로도 흠집 하나 낼 수 없던 리자드 킹이, 이 단순한 마력 구슬에 신형이 무너져 내려간다.

"제법이군."

거기다 루카스의 인정까지.

최고다.

최고의 날이다!

"흐, 흐흐하!"

"우리가, 우리가 해냈어!"

더할 수 없는 벅참이 그들의 전신을 짜릿하게 훑었다.

"끝났어! 우리가 끝냈습니다. 교수님!"

루카스는 두 사람의 기쁨에 찬 포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끝났다고 했지?"

크워어어어-!

루카스의 의문에 대답하듯, 엄청난 굉음이 두 사람의 귓전을 때렸다.

수많은 리자드가 거대한 물결이 되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얼핏 광기마저 내비치는 것 같았다.

꿀꺽-

그 위용에 절로 마른침이 삼켜진다.

천천히 시선을 루카스에게로 옮겼으나, 루카스는 여전히 특유의 서늘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단언했다.

"조금 전에도 말했듯, 답은 가까이에 있다."

아니요, 돌아가신 저희 할아버지가 더 가까이에 계신 것 같은데요.

* * *

현재까지 눈앞에 두 어린 마도사는 유일하게 바셸산을 등반하는 마법 학부 소속이다.

내 특강이 이 마수들을 상대하는 것에 맞춰져 있었던 만큼, 이 두 학생은 상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내가 마수를 처리해 주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답은 가까이에 있다."

충분한 힌트를 던져 주었다.

하지만 저들은 기묘한 짓을 했다.

마법사들이 마나와 친해지기 위해 어린 시절에 하는 놀이, 마나 응집. 그걸로 리자드 킹을 처리해 버린 것이다.

물론 저 둘의 온전한 실력이라고 할 수는 없고, 마력 폭풍과 저 마나가 만나면서 마력이 증폭된 덕분도 있다.

하지만...

'굳이?'

아쉽게도 정답은 아니다.

그래도 일단 내 예상 밖으로 훌륭히 해 주었으니, 인정은 한다.

"제법이군."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왕을 잃은 리자드들이 분노의 러쉬를 감행한 것이다.

이 둘은 리자드들이 뿜어내는 위용에 어찌할 줄 몰라한다.

그 모습이 참으로 답답하다.

나는 분명히 힌트를 주었다.

답은 가까이에 있다고.

몇 발짝만 내디디면 정상.

거기는 마수들이 접근하지 못한다.

그냥 닥치고 올라가면 되는데 왜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걸까.

"으아아아아악-!"

"도망쳐-!!"

그들은 있는 힘껏 달아난다.

하필이면 반대 방향이다.

"그... 이제 답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

내 애처로운 목소리가 닿지 않는 모양이다. 점점 더 멀어져간다.

[새로운 알림이 도착하였습니다.]

[k2929 님께서 100G 후원하셨습니다.]

독자님의 후원에 시선을 뺏긴 동안, 두 학생은 더욱 멀리 가버렸다.

저런.

§ 아카데미의 신화급 교수가 되었다 63화

63. 페두르 산맥 (13)

조셉과 브렐린은 다행히 가까스로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헉, 허억, 헉."

"진짜 죽을 뻔했어······."

마수들이 더 이상 쫓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력의 제어는 본능적으로 하고 있으니, 실로 장족의 발전이라 할 만하다.

"하아······."

어느 정도 호흡이 안정되자 다시금 일어났다. 그리고는 왔던 길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일렁이는 풍경 뒤로 리자드들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다.

다시 봐도 아찔하다.

한편, 그 사이 루카스는 몇 팀을 더 정상까지 이끌어 놓았다.

정상에 도착한 이들은 처음에는 안전지대에 도착했음에 안도했고, 호흡이 추슬러진 이후에는 이 마경에서 홀로 고고히 존재하는 루카스에 대한 경외를 느꼈다.

이 수많은 인원의 안전 통제를 혼자서 하고 있다.

밀리아가 있긴 했지만, 루카스의 활동과 비교하면 없는 수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 루카스에게 물었다.

"교수님은······ 정말 하나도 안 힘드세요?"

순간, 루카스의 표정에 의문이 담겼다.

겨우 이 정도가 힘든가? 라는 듯한 반응이었다.

······학생들은 저 괴물과 우리를 동일 선상에 놓아선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

* * *

바셸산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이유-

간단하다.

사람들의 의식 속에 리오네의 실습 과정은 공평하지 못하다는 인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리오네에게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았으나, 사람들에게는 그저 나라는 존재가 플러스 요소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리오네는 마수들과 조우를 하산 과정에서밖에 하지 않았으니.

실제로도 어느 정도 형평성이 무너진 것이다.

나는 시작할 때 공정을 이야기했다.

적어도 내가 한 말에 책임은 지고 싶었다.

바셸산이라는 마경을 수차례나 제집처럼 돌아다닌다는 것은 엄청나게 힘겨운 일이겠으나, 그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이야기.

나는 이미 이 산을 오르기 전부터 골드 상점의 도움을 받았다.

===

[특수효과 : 임홍길]

아무리 험준한 지역도 평온하게 거닐 수 있는 특수효과.

===

마력 폭풍의 영향은 받지 않으니, 움직이는 것만 어떻게 하면 된다는 생각에 5만 골드라는 거금을 투입해서 산 것이다.

물론 체력 보정 효과는 없기에 힘들긴 하다.

그나마 일일 훈련을 꾸준히 해서 그런지, 어느 정도 버틸 만하다.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거다.

얼마나 힘들면 학생들의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교······ 은······ 도······ 세요?"

다시 한번 말해달라고 하기에도 미안하니, 그냥 입이나 꾹 다물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

[새로운 알림이 도착했습니다.]

[BlueJay 님께서 100G 후원하셨습니다.]

[BlueJay 님께서 100G 후원하셨습니다.]

[BlueJay 님께서 100G 후원하셨습니다.]

[BlueJay 님께서 100G 후원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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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Jay 님께서 100G 후원하셨습니다.]

[BlueJay 님께서 100G 후원하셨습니다.]

총 13번.

끝없이 이어지는 알림창.

이전에도 이런 유형의 후원은 존재했다.

그러나 이 순간,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 후원을 보내주시는 독자님들은 매 편마다 100원씩을 보내주시는 걸까? 아니면 그냥 100원씩 연달아 보내 주시는 걸까.

13번인 이유는 뭘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아차, 표정 관리.'

순간, 제정신이 퍼뜩 들어 다시금 표정 관리를 하고 알림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학생들이 경악 섞인 표정으로 질렸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뭐지.

* * *

현재 디에키스에 남아있는 인원은 마법 학부 소속을 빼면 데얀과 바론 빌헬름 페어가 유일했다.

아직 실습 2일 차니까 여유가 있다지만, 바론은 솔직한 심정으로 조바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저 결계를 넘어가는 순간 고통에 몸부림치며 뒷걸음질하던 이들도 다시 몸을 추스르고 떠난 지 오래.

게다가 하나둘 실습 완료자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아무리 실습을 끝낸 순서가 성적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도 데얀과 바론, 두 사람 모두 '전투의 모든 것' 강의의 정규 수강생이다 보니, 쉽사리 안심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정규 수강생이 특강생인 리오네에게 선두를 빼앗긴 것도 어딘가 좀 걸리고.

'아무래도 말해야겠어.'

그동안은 데얀이 은연중에 내뿜던 위압감에 쉽게 말하지 못했으나, 이제는 말해야겠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저기······."

"이제 출발하자."

"이제 슬슬······ 어?"

하지만 마침맞게 데얀의 입에서도 출발하자는 소리가 나왔다.

"어, 어······ 그래."

"초반에 주의할 점은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야 뭐, 지겹도록 보아온 풍경이니 알 수 있다.

이 경계선 너머는 여기와 차원이 다른 공간.

이곳에서도 마력의 안정을 위해 정신을 곤두세워야 했지만, 저 너머는 그보다 더욱 난장판인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들어가자마자 마력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고, 정상으로 곧바로 튀어 올라 갈 거다. 마수들이 많을 거다. 네 방패술을 믿겠다."

데얀은 지금은 평범한 학생의 신분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그 정체는 왕실 근위 기사 중에서도 왕의 그림자 역할을 했던 존재다.

당연하게도 전술과 지략, 그리고 실력은 학생들의 그것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그런 데얀이 가장 마지막을 자처한 이유는, 이 실습을 위해서였다.

이 페두르 산맥은 데얀이 왕의 그림자로 살아갈 때, 한 번 와 본 적 있다.

그때 역시 상당한 고생을 하긴 했으나 결국에는 적응을 했다.

지금도 그렇다.

루카스만큼은 아니겠으나, 본인 또한 충분히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그것은 이 실습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루카스라는 괴물은 몰라도, 자신처럼 평범한 학생 역시 그럭저럭 버티는 모습을 보이면 경각심 없이 결계를 벗어난 학생들이 커다란 내상을 입어 4일간 끙끙댈 것이 뻔하다.

이 실습의 목적은 당연히 학생들의 실력 상승을 위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실력 상승이고 뭐고 루카스의 허무함만 상승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데얀은 가장 뒤로 자신의 순서를 미뤘다.

하지만 돌파는 누구보다 빠를 것이다.

자신 있었다.

"가자."

데얀과 바론이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 * *

이 실습은 4일간 이루어진다.

그 말은- 정상에서 얼마를 휴식하든, 정해진 기한 안에만 도착하면 된다는 소리다.

올라오는 과정에서 지쳤던 이들은 대부분 정상에서 휴식을 선택했다.

"쉬었다가 가는 게 낫지 않나?"

"······선배님들, 교수님의 마지막 말을 떠올려 보십시오."

'전투의 모든 것' 정규 수강생들이 무언가 찝찝하게 여운을 남기고 돌아섰다.

특강생들은 그들이 전혀 이해 가지 않았고, 오히려 미련하다고 생각했다. 실습은 아직 이틀이나 남은 상황.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움직이는 것이 최상의 선택지라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결단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밤이 되자, 이 정상의 날씨가 기괴하게 변한 것이었다.

푹푹 찌는 날씨였다가, 극심한 추위가 몰아쳤고,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 쉬려고 하면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핑핑 돌았으며, 어디선가 하수구 썩는 냄새가 올라왔다.

바로, 페두르 산맥 봉우리들의 꼭대기에서만 자생하는 페리 꽃이 풍겨내는 악취였다.

해가 있을 때는 더없이 싱그러운 향기를 뿜어내지만, 해가 사라지면 참기 힘든 악취를 뿜어내는 것이었다.

-선배님들, 교수님의 마지막 말을 떠올려 보십시오.

순간, 그들은 루카스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누가······ 쉬어도 된다고 했지?

그렇다.

루카스는 휴식의 가능성 자체를 배제한 사람이었다.

그런 루카스를 잘 알고 여러 차례 겪었던 '전투의 모든 것' 정규 수강생들은 휴식 없이 바로 하산하는 강행군을 선택한 것이고.

루카스의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하다.

휴식은 없다.

즉, 이 어둠을 뚫고 내려가야 한다는 말이다.

내려가는 중턱에서 쉬면 되지 않겠냐고?

어림없는 소리.

저 마수들이 득실대는 곳에서 어떻게 편안한 휴식을 취할 것이며 잠깐 눈감으면 진한 숙취가 밀려드는 이곳에서 어떻게 눈을 붙일 것인가.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야 하는데······.'

최악의 상황에서 차악을 선택해야만 한다.

"젠장······."

학생들은 몸을 일으키고 걸음을 옮겼다.

야간 산악 행군의 시작이었다.

* * *

밤의 바셸산은 더욱 위험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시야, 그 속에서 더욱 흉포하게 날뛰는 몬스터들.

산의 모든 것들이 학생들을 위협한다.

청각과 시각이 제한된 상황에서 학생들은 그저 침묵하고 정신을 집중했다. 더불어 마력의 제어까지 동반되어야 하니, 그들의 기감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키야아앗-!

멀리서 마수들의 소리가 들릴 때마다 움찔한다.

그럴수록 발걸음을 더욱 재촉해 움직였다.

하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탓에 발을 헛디디거나 부딪히는 일이 잦았다.

'야, 우리 발광 마법 놔두고 뭐 하냐?'

마법 학부의 두 사람, 조셉과 브렐린은 너무 지친 나머지 기초 중에서도 기초인 발광 마법조차 잊고 있었다.

그것이 있으면 적어도 시야는 확보할 수 있을 터.

'라이트!'

원래라면 다른 마법들처럼 길고 긴 영창이 필요했겠으나, 저번 깨달음으로 인해 그들의 수준은 한 단계 상승했다.

시동언만으로 마법을 구현해 낼 수 있었지만-

"쿠워어어어!"

이 상황에서 발광 마법은 시야를 확보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위치까지 노출 시킬 수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튀어!"

다시금 길고 긴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발광 마법을 끄고, 감각만으로 빠르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일견, 볼품없어 보이는 이 과정은 이들의 감각을 극한으로 발달시켰다.

발달된 감각은 마력의 흐름을 명확하게 느끼게 했으며- 덕분에 이들은 한 단계 더욱 성장하게 되었다.

애초에 밑바닥에서 시작하였으니 그 성장 속도 역시 가파른 것이었다.

"끼야야야아아악!"

비록 지금은 마수에 쫓기는 신세지만.

* * *

3일 차 정오.

사실상 실습이 마무리되는 분위기였다.

전투 학부는 전원이 정상을 한 번 찍었고, 마법 학부는 조셉과 브렐린 페어를 제외하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으니.

저들이 마법을 덕지덕지 바르고 오른다 해도 이틀은 걸릴 일정이니 결국 탈락은 확정이다.

'역시, 마법 학부는 움직이지 않는가.'

나 역시 마법 학부의 특성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본격적인 침공에 앞서 그 수준은 높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합동 실습을 진행한 것인데, 역시나 마법 학부는 연구를 택했다.

휴식이 없긴 해도, 어차피 이 마법사라는 족속은 연구에 매진하면 밤새우는 것은 기본이라, 디에키스의 4일도 대수롭지 않게 버틴 것이다.

'저 두 놈이 특이한 거긴 하지만.'

내 시선은 조셉과 브렐린이라는 마법사들에게 향해 있다.

힌트를 주었으나 오히려 멀어지던 이들.

그들이 결국 야간 산행까지 마치고 실습을 훌륭히 통과해냈다.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대로 '마법적' 성장을 이루어 내었다.

사실, 이번 실습은 전투 학부보다는 마법 학부의 이들에게 더욱 커다란 의미를 지녔을 것이었다.

전투 학부는 마력의 세심한 컨트롤이 크게 중요하지 않지만, 마법사들은 그 세심함의 정도에 따라 수준이 천차만별로 나뉘기 때문에.

또한, 이 실습의 '증표'인 페리꽃에도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그 향기를 맡는 동안 마력의 소모는 두 배로 커지며 마력 폭풍의 영향에 더욱 적나라하게 노출된다.

하지만 그만큼 이 실습의 수련 효과는 곱절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실습에 보다 많은 마법 학부 학생이 참여해 주었으면 했다.

내가 전투 학부의 교수이기에 그들에게 강압적이고 싶진 않았고, 대신 서두의 실습 안내에서 충분히 얻어 가는 것이 많을 거라고 언질을 줬지만-

'뭐, 마법사들이니 어쩔 수 없나.'

대신, 완료한 조셉과 브렐린에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너, 너희 뭐야······."

"마나가······ 발전했다고?"

"야, 이거 마나 정순한 것 좀 봐!"

"뭔데, 그 컨트롤은 어떻게 한 건데?"

그들이 성취한 성장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제서야 이 실습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굉장한 기회였는지 깨달은 모양이다.

이제 출발하는 이들도 보였으나, 저들은 정상에 도달하기도 전에 실습이 끝이나 있을 것이다.

즉- 탈락이라는 소리다.

* * *

아니나 다를까.

뒤이어 도전한 마법 학부는 전원 시간 초과로 탈락했다.

그래도 오르는 과정에 약간의 성취가 있어 보인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랄까.

전투 학부는 십여 팀을 제외하고 전원 통과했으니.

"모두들 4일간 고생이 많았다."

실습의 끝을 맺는 역할 역시 내가 맡았다.

마법 학부 교수들은 굳이 입을 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실습으로 얻을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독자적으로 이런 실습을 운영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이 실습은 국가적 조약으로 인해, 제한적으로 할애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그 모든 기회는 오롯이 내가 주도하게 되었다.

빈번하게 사람들을 받아들이면 결계가 약해지고 디에키스는 '댐'으로써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어지게 된다.

즉, 앞으로 마법 학부의 대부분은 이곳에 올 수 없다는 소리다. 그리고 이번 실습에서 과제를 수행하지 못한 이들은 다음 실습에 참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저들은 더 이상 페두르 산맥의 실습 기회가 없어졌다는 소리다.

"루카스 교수, 탈락자들에게도 다시 한번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겠나?"

마법 학부의 교수들이 넌지시 물어보았다.

학생들 역시 아련한 기대감을 품고 내 쪽을 바라보았다.

자비심이 생길 뻔하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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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님들의 일침이 뒤따랐다.

이것은 자비심이 아니라 동정이고, 내 매력을 내가 내다 버리는 일이다.

순간, 조금이나마 느낄 뻔한 동정심이 싹 사라졌다.

위엄이란 뱉은 말에서 어긋나지 않기에 생겨나는 것이다.

내가 쉽사리 뱉은 말을 철회하면 교수로서, 루카스로서 가지는 위엄이 약해진다.

"기회를 주세요, 교수님."

"반전을 보여 주십시오!"

마법 학부 쪽에서 간절한 외침이 터진다.

하지만 내 마음은 변함이 없다.

"자자, 너희들. 그만."

내 의사를 알아챈 밀리아가 나섰다.

"루카스 교수님은 이미 시작 때 분명히 말씀을 하셨다고 들었어. 반전? 반전이라... 그래. 찬스를 거꾸로 하면 뭔지 아나?"

밀리아의 말에 마법 학부의 얼굴에 의문이 깃든다.

"스찬이다."

그들이 눈에 띄게 당황한다.

당연하다.

나도 모르겠으니.

이윽고 밀리아의 입이 열린다.

"아무 뜻도 없어. 포기하라는 말이지."

"밀리아 교수."

밀리아는 마치 '물어와!'를 완수한 강아지처럼 은근한 기대를 품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만 좀 하세요."

정말이지 끔찍한 유머감각이다.

§ 아카데미의 신화급 교수가 되었다 64화

64. 페두르 산맥 (14)

마족과 한창 전쟁이 한창인 이때, 세계정세는 약간의 묘하게 흐르고 있었다.

마족이라는 거대한 적 때문에 겉으로는 상호 협력하고 무기한 휴전에 들어가 있는 상태이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로 아에로크와 에르멜이 그러하다.

원래 전쟁 중이었던 두 국가는, 마족이 아니었더라면 지금도 한쪽이 멸망할 때까지 전쟁 중이었을 만큼 앙숙이다.

전쟁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만 뿌리 깊은 악연만 있을 뿐.

심지어 양국의 대표적 아카데미인 그라스코와 카데인은 휴전 선언 후에도 양 국가의 학생들을 뽑지 않을 정도였다.

그라스코에 하인즈가 취임하며 교류가 시작되긴 했으나 일부러라도 서로의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않았다.

그러나 항상 예외란 존재하는 법.

다만, 그 예외가 에르멜 입장에서는 국보라는 것이 문제였다.

제시 애슬론.

그가 그라스코에 입학하면서 모든 것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루카스에게 배우겠다며 그라스코로 향한 제시.

불행인지 다행인지, 루카스가 담당하는 강의 선발에서 탈락했을 때는 곧 카데인에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

애슬론 가문의 자존심이 있지.

몇 달 뒤에는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으나, 여전히 제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애슬론 가문은 어떨지 몰라도 에르멜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제시 애슬론은 에르멜의 국보나 다름없는 존재다.

더이상 그라스코 같은 곳에서 썩게 할 수 없었다.

그 결심은 '중간고사'를 보고 확고해졌다.

선연히 빛나는 재능을 만천하에 떨친 제시.

그를 반드시 찾아와야만 했다.

그러려면 제시가 그라스코에 붙어 있는 이유를 제거하는 편이 옳았다.

루카스 폰 크라우스.

모든 원흉의 시작.

그를 제거해야 한다.

물론, 현시점에서 최강자를 꼽을 때 한 손에 들어가는 그를 쉽사리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막대한 피해를 주는 것은 가능하다.

한때 제시를 가르쳤던 스승, 페르시온이 그 역할을 맡을 것이다.

* * *

열흘 같은 4일간의 실습이 모두 끝났다.

돌아가는 기차에 오르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전투 학부의 대부분은 실습에 의한 피로감으로, 그리고 마법 학부 대부분은 엄청난 기회를 놓친 아쉬움으로.

"교수님... 저 어떡해요?"

리트가 루카스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실습 기간에는 밀리아와 접촉할 일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일부러 루카스와도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지금은 그럴 수조차 없다.

꼼짝없이 밀리아와 마주해야만 한다.

"걱정하지 마라. 잘 설명해 두었으니."

사실, 밀리아가 내 '펫'이 되었기에 사라진 걱정이었지만 리트에게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

...라는 생각은 얼마 뒤 사라졌다.

밀리아는 노골적으로 내 근처에서 내 관심을 끌려는 듯 행동하고 있었다. 마치 강아지가 주인 곁에서 관심을 갈구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거기에 왜인지 리오네와 리트까지 합세해, 내 눈앞에는 상당한 개판이 펼쳐져 있었다.

정신이 어질하여 피로감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른 것이다.

"그만, 그만-"

잠깐 얼어붙은 분위기도 잠시뿐이었다.

내가 자리를 뜨는 것이 맞다.

"교수님, 어디 가세요?"

"화장실 가세요? 저도 같이-"

"화장실에 그쪽이 왜 같이 따라가시려고 하는 거예요?"

"그쪽이라니? 잊었니? 나 교수야."

"교수님이시면 남자 화장실 들어갈 수 있어요? 그러면 차라리 조교인 제가 따라가는 게-"

"다 따라오지 마라."

['기다려'를 사용하셨습니다.]

[TIP : '명령'을 성공한 펫에게 보상을 주면 유대감이 더욱 깊어집니다.]

이딴 팁 필요 없어.

최대한 그들과 떨어진 칸으로 이동했다.

그라스코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일반석으로 이루어진 칸이었다.

"교수님, 혹시 불편하신 것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닙니다. 그저- 이곳에 잠시 앉아 있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디에키스에서 출발한 지라, 이 칸은 현재 통째로 비어 있다.

"물론입니다. 원하시는 자리를 선택하시면, 그 자리를 비워 두겠습니다."

특권이란 이렇듯 편한 것이다.

나는 느긋한 걸음으로 자리를 물색했다.

적당히 볕이 잘 들고, 적당히 안락해 보이는 자리.

"여기가 좋겠군요."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그라스코의 사람들은 이곳으로 오지 못하게 막아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편안한 여행 되십시오."

괜히 따라붙으면 시끄러워지니 말이다.

승무원은 친절히 그렇게 해 주겠다 했고, 나는 좌석에 몸을 파묻었다.

교수 특별석보다, 심지어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좌석보다 딱딱했지만, 이 적막이 마음에 들었다.

* * *

-지금 그라스코, 그라스코 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선에서 한 걸음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아야스 역.

승객들 틈바구니에 한 남자가 조용히 섞여 있었다.

이윽고 그는 승객에 섞여 진입한 열차에 올랐다.

디에키스 타운에서 출발한 이 열차는 이미 상당한 승객을 태우고 있었다.

대부분, 아니 전원이 그라스코의 인원들.

'제대로 탄 모양이군.'

그가 기다리던 그 열차다.

그는 1번 칸에서부터 차례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승객 한 명씩 천천히 살피며.

어느 순간, 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익숙한 얼굴이다.

'제시.'

약간은 짜증 난 듯한 얼굴로 옆자리 아이와 쉴 새 없이 투닥대는, 여느 아카데미 학생 같은 모습의 제시.

어려서부터 제시를 가르쳤던 페르시온은 알 수 있었다.

제시는 지금, 행복하다.

더없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에르멜에 있었을 때는 무채색이었던 그의 감정이, 이렇듯 선명한 색깔을 띠고 있지 않은가.

'친구라는 감정도 몰랐던 놈이....'

유일한 친구라고 부를 만했던- 시종, 토레스에게 했던 짓을 자신 또한 잘 알고 있다.

어렸을 때는 굉장히 정이 많던 아이였다.

웬 부랑자 같은 아이를 구해다 자신의 식구로 삼았을 만큼.

하지만 커가면서 그의 성격은 조금씩 달라졌다.

오직 더 높은 곳을 보며 달렸고, 정 많던 성격은 히스테릭하게 변했으며 이기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했다.

그것은 전부- 에르멜 때문이다.

에르멜이 제시의 인간성을 죽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온 역시 제시처럼 그런 과정들을 겪었기에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제시는 인간으로서는 실격이나- 에르멜의 '살인 기계'로는 더없이 완벽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제시는 다시금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또래 아이들처럼 친구들과 우정을 쌓고 기뻐하며 공감할 줄 아는.

'제시를 에르멜로 데려가는 게, 정말 맞는 선택일까?'

순간- 그의 생각이 흐트러졌으나, 본인은 에르멜의 군인.

까라면 까야 한다.

첫 번째 칸을 지나 두 번째 칸.

두 번째 칸에서 세 번째, 네 번째-

총 스무 칸을 지나고서 루카스가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교수 전용 특별 칸까지 도착했다.

특별 칸의 손잡이를 잡은 순간- 승무원이 나타나 제지했다.

"손님, 이 앞은 허가된 분들만 지나가실 수 있습니다. 혹시 승차권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아, 이쪽에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라, 여길 넘어서 저쪽으로 가려고요. 제가 처음 진입부터 잘못 들어섰지 뭡니까."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승차권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페르시온은 승차권을 승무원에게 넘겼다.

"정반대로 타셨군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친절하시군요. 감사합니다."

페르시온은 소매 속에 숨겨두었던 단도를 언제든지 운용할 수 있게 슬쩍 빼두고 승무원의 뒤에 바짝 달라붙었다.

"아카데미에서 오신 분들인 것 같은데."

"네, 그렇습니다. 이 기차의 승객 대부분은 그라스코에서 오신 분들이죠."

"그렇군요. 그라스코라면, 그 루카스 교수가 재직 중인 곳 맞죠?"

"그렇습니다."

승무원은 친절했다.

당연하게도 이 모든 질문은 빈틈을 위해서다.

언제든 루카스를 발견하면 이 승무원을 베고 그에게 달려들기 위함이다.

'없다.'

이 특별 칸에 있으리라 예상했지만, 루카스는 이곳에 없었다.

'분명히 이 기차에 탑승했다는 첩보는 있었는데.'

이상한 일이었으나,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점은 지나오면서 본 승객들이 하나같이 지쳐 있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그에게 호재였다.

디에키스 타운에서 무슨 일을 벌였는지는 모르나, 페두르 산맥의 인접 지대에서 잠시라도 있었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피로를 유발했을 것이다.

그것은 루카스 역시 다르지 않을 터.

임무에 성공할 가능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교수님, 마법 학부 교수님이 어째서 저희 전투 학부 쪽에서 자꾸 시간을 보내고 계신 걸까요?"

"마, 맞아요!"

"흐응? 주위를 둘러보렴. 여긴 마법 학부 애들이 더 많은데."

"그, 그건...!"

"그리고 루카스 교수가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어."

"교수님이 그런 말씀은 안 하셨는데...."

"우리 둘만 통하는 언어가 있단다."

"두 분이 통하는 언어라니...."

상당히 시끄러운 칸도 지났다.

루카스의 이름이 들리긴 했지만, 정작 본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20칸을 더 거슬러 올라갔다.

'이곳은... 일반 칸.'

그라스코의 사람들로 빼곡했던 지난 칸과는 다르게, 여기서부터는 일반 승객의 영역이었다.

페르시온의 좌석 역시 이곳에 있었다.

"D-43은 저곳입니다. 그리고 손님, 운이 참 좋으세요."

"네?"

승무원의 알 수 없는 말과 동시에-

후욱-

느껴졌다.

너무나도 선명한 존재감.

압도적으로 시선을 빼앗는 무언가.

"루카스 교수님이 손님 바로 맞은편 좌석에 앉아계시거든요."

이 무슨 운명의 안배란 말인가.

페르시온은 떨리는 마음으로 루카스의 앞에 앉았다.

괜히 먼 길을 돌아왔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조심히 자리에 앉아 맞은편의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실로- 엄청난 미모다.

같은 남자임에도 순수한 감탄을 일으키는.

신문으로 본 사진보다, 소문으로 전해 들은 것보다 훨씬 대단하다.

옆자리의 승객 역시 그런 루카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다.

루카스는 이런 일이 익숙한 듯, 시선에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일을 하고 있다.

그 자태가, 참으로 우아하다.

그렇게, 열차의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 * *

이 자리로 옮긴 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

어느새 내 맞은편에는 승객들이 타고 있었다.

승무원들이 나름 배려해 내 옆자리는 비워 주었으나, 맞은편은 그러지 못한 모양이다.

이해한다.

그래도 그들은 나를 힐끔 바라볼 뿐, 방해하는 것은 아니어서, 저 극성맞은 이들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것보다 훨씬 쾌적한 여행이었다.

-우리 열차는 잠시 후 티그르, 티그르에 도착합니다. 내리실 승객께서는 미리 하차 준비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느새 티그르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이 여정도 거의 끝에 다다르는 것이다.

이제 일반 승객들은 거의 내릴 테니, 다시금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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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매번 후원창에 이름을 남기셨던 독자님.

혹시나 싶은 마음에 다시금 들여다보았지만 없다.

기분이 가라앉는다.

서글픈 마음이 들어 눈을 감았다.

* * *

페르시온은 이 풍경에 완연히 녹아들었다.

적당한 타이밍을 노려 저 루카스에게 일격을 가하면 된다.

하지만-

망설여진다.

제시의 평범한 모습이 뇌리에 너무 깊게 남은 탓인가.

단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놓치기를 반복이었다.

어쩌면 나는 이 행위를 함으로써 제시를 감정 없는 인형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마치 나처럼.

그는 고뇌하고 있었다.

그러나 더이상 미룰 수만은 없다.

티그르에 도착하기 전 끝을 봐야 한다.

이다음부터는 오롯이 그라스코의 사람들만 남아 있을 수 있으므로.

-우리 열차는 잠시 후 티그르, 티그르에 도착합니다. 내리실 승객께서는 미리 하차 준비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차 안내가 들리고 승객들이 하차 준비를 하며 주변이 어수선해진다.

기회다.

페르시온은 소매 속 단검을 바투 쥐었다.

그 순간-

"잠깐."

너무나도 서늘한 목소리.

소름이 돋을 정도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보니, 착- 가라앉은 루카스의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력의 구현 없이, 단지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엄청난 압박감을 안겨 주었다.

들켰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니, 규정하는 것조차 어리석다.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였다.

루카스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사, 살려 주겠다는 뜻인가?'

들은 적이 있다.

루카스는 그 행동이 냉철하고 차가우나, 실상은 누구보다 제자를 아끼는 교수라고.

학생들이 가득한 이 기차 안에서 소란을 벌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순간, 자신의 처지가 겹쳐지며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다.

자신도 이런 교수가 있었다면 이런 식으로 생활하진 않았을 텐데.

한 편으로 제시에게 이런 교수가 있다는 것이 진심으로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루카스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서둘러 그의 앞에서 사라졌다.

* * *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사람이 일어나더니 깊이 고개를 숙인다.

뭐지, 팬인가.

§ 아카데미의 신화급 교수가 되었다 65화

65. 페두르 산맥 (15)

-우리 열차는 종점인 그라스코 아카데미에 도착합니다. 두고 내리는 물건이 없도록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안내음이 들림과 동시에 하인즈의 초고를 완독할 수 있었다.

원고를 잘 갈무리 해 서류 가방에 집어넣고, 하차 준비를 했다.

내 짐이라고는 이 서류 가방이 전부이니, 굳이 원래 자리에 들를 필요는 없겠지.

학생들이 모두 빠져나온 듯하니, 나 역시도 짐을 챙겨 열차에서 내렸다.

이제 여기서는 따로 인솔 없이 흩어질 것이다.

밀린 업무를 떠올리며 걸음을 옮기려는데-

"교, 교수님."

당황한 기색의 승무원이 내 발걸음을 잡아챘다.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불러 세운 이를 돌아보았다.

내게 자리를 배려해 준 그 승무원이다.

"무슨 일입니까."

"그 저쪽 칸에 계신 교수님께서 움직이질 않으셔서...."

어느 교수인지 진상을 부려도 개진상을 부리고 있는 모양이다.

도대체 어떤 인물이 그라스코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지.

나는 다시금 그의 뒤를 따라 열차 안으로 들어섰다.

...어째, 자리가 익숙하다.

나는 막연히 특별 칸에서 와인을 많이 마시고 늘어진 교수를 생각하였으나, 현실은 그것과 전혀 달랐다.

"...밀리아 교수."

"루카스 교수님!"

밀리아는 한껏 밝은 톤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내 이름이 이토록 쪽팔린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곤란해하고 있습니다. 어서 나오세요."

"네!"

...뭐지.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렸다기에 조금 더 완강한 반응을 생각했으나, 그녀는 순순히 일어나 내 뒤에 붙었다.

'설마.'

그제서야 내가 자리를 비웠을 무렵 떠오른 알림이 떠올랐다.

[새로운 알림이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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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eWa 님께서 500G 후원하셨습니다.]

[DueWa 님께서 500G 후원하셨습니다.]

아니, 이거 말고.

['기다려' 상태를 해제하셨습니다.]

그래, 이거.

그러고 보니, 원로원에서 나올 때도 똑같은 알림이 떴었다.

그러니까-

내가 기다리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뭐라든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 즉, 밀리아의 진상짓은 내가 원인이었다는 거다.

지끈거리는 골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밀리아가 칭찬을 바라는 듯한 얼굴로 서 있다.

"자알 했습니다."

다분히 비꼬는 의미였으나-

['기다려'를 훌륭히 해낸 '밀리아'에게 보상으로 칭찬하셨습니다.]

[유대감이 상승합니다.]

이 빌어먹을 시스템은 무슨 세상을 꽃밭으로 보는 건가.

* * *

대충 자리를 파하고, 내가 곧바로 향한 곳은 하인즈의 집무실이었다.

아직 온몸에 포션 바늘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긴 했으나, 확실히 안색이 좋아진 것이 보인다.

"오셨소, 루카스 교수. 그래, 페두르 산맥까지 간 보람은 있었소?"

"그런 것 같습니다."

"그것참 다행이구려. 자, 앉으시오. 금방 차를 내어드리리다."

"괜찮습니다."

"아닐세, 이렇게 움직여 줘야 회복이 빠르다더군,"

환자에 노인을 부려먹는 것 같아 양심이 콕콕 찔리지만, 저렇게 완강하게 하겠다는데 어쩌겠나.

그리고 하인즈가 내어 준 차는 그 향과 맛이 일품이었으므로 두 번은 거절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뜨거운 김이 솔솔 나는 잔이 내 앞에 놓여졌다.

그 향이, 실로 아찔하다.

"편히 드시게."

하인즈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차를 권했다.

그 사이, 나는 가방에서 하인즈의 원고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읽어 보았습니까?"

"예."

"그래, 루카스 교수가 보기에 어땠소, 읽을 만하더이까."

"훌륭했습니다."

빈말이 아니다.

하인즈의 원래 문체가 읽기 쉬운 데다가 문장에 흡입력이 있어, 전공 서적 수준의 원고가 소설처럼 술술 읽혔다.

"다만 한 가지. 제게 이 원고를 주실 때 분명 탈고까지 끝냈다고 하셨습니다."

"그랬지."

"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 원고는 반쪽짜리라고 느껴졌습니다."

이 원고는 분명 훌륭한 원고다.

이대로 발표가 된다면, 분명 역사 학계의 스테디셀러가 될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내게는 '보인다.'

이 원고는 구멍이 숭숭 뚫린, 미완의 원고다.

아니, 완성은 했으나 하인즈가 임의로 도려내었다는 표현이 옳다.

"저는 '원본'을 보고 싶습니다, 총장님."

하지만, 그 도려낸 부분이야말로 핵심이다.

내가 알고 싶은 지식이 그곳에 담겨 있을 거라는 확신을 지울 수가 없다.

"...루카스 교수. 당신은 정말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를 가졌구려."

그의 감탄은 '원본'이 따로 존재한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안타깝지만, 그대가 본 그 원고가 원본이오."

"애초에... 만들지 않으셨군요."

"정답이오."

원본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완성된 지식'은 존재하나, 그것을 대중에게 공개할 수단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지. 그러나 모든 지식을 감당할 수 있는 건 아니라오."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은 어딘가 씁쓸하고 외로워 보였다.

"감당할 수 없는 지식은 자아를 붕괴시키고, 이지를 잃게 하여 파괴를 낳는 법이지. 유렌, 그자처럼."

나는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공감을 표시할 뿐이었다.

"하지만, 루카스 교수- 그대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드는군."

하인즈는 자애롭게 웃었다.

그 웃음은 평화로웠고, 어딘가 홀가분해 보이기까지 하다.

"강의는 오랜만이라 실수할 수도 있다오. 이해해 주기 바라오."

대륙 최고의 석학, 하인즈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 * *

태초에 위대한 존재가 이 중간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대신해 중간계 살필 존재를 만들었으니- 이는 곧 드래곤이였다.

드래곤은 신의 언어인 룬 문자를 통해 신의 권능을 사용하여 중간계를 보살폈다.

드래곤을 창조한 이후, 그는 또 다른 종족을 창조했다. 과하게 아름다운 종족을 창조한 뒤 마나의 권능을 나누어 주며 엘프라 이름 지었다. 또한, 자신의 권능을 실체화하여 정령을 만들었고, 그들로 하여금 중간계의 자연을 관장하게 하였다.

그 뒤로 수많은 종족이 생겨났고, 그들은 모두 창조주의 권능 하나씩을 나누어 받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들을 그러모아 형태를 창조하곤 인간이라 이름 붙였다.

마지막 창조물인 인간에게는 나누어 줄 권능이 없었다.

그래서 대신 번식 본능을 선물로 주었고, 덕분에 인간은 중간계에서 가장 융숭하게 번영할 수 있었다.

가장 많은 개체가 태어나고, 위대한 존재를 가장 기쁘게 하는 존재로 탈바꿈한 것이었다.

하지만 인간이 받은 본능은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 것이었다.

긍정적인 감정, 부정적인 감정이 혼재했고, 혼돈이 태어났다.

혼돈은 인간들 사이에 빠르게 퍼졌다.

이는 욕심과 거짓을 인간들에게 가르쳤다.

그리고 인간은, 거짓으로 위대한 존재를 속여, 원하는 것을 받아 낸다.

'모든 존재의 재능'을 조금씩 자신의 몸에 담아 버린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인간은 세 부류로 나뉘게 되었다.

룬 문자를 사용하여,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부류, '대리자' 다른 모든 권능을 조합하여 무력으로 다른 종족을 탄압하는 부류, '반하는 자' 그리고 그저 지켜보는 부류, '방관자'

세 부류는 저마다 각기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부류는 신의 대리인을 넘어 '신' 그 자체를 자처했고, 이는 결국 분열을 낳고 말았다.

'대리자' 일부는 또 나뉘어 '반하는 자'와 함께 중간계의 '신'이 되고자 했고, 전쟁을 일으켰다.

단순한 인간끼리의 전쟁을 넘어서 중간계의 패권을 위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 인간들의 룬 문자 사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초고대 문명의 흔적이라 불리는 것들.

그 무시한 파괴력을 앞세워 중간계는 더욱 황폐하게, 더욱 깊은 전쟁의 화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수많은 종족이 죽어 나갔고, 사라졌다.

반하는 자' 진영은 다른 종족들까지 설득해 자신들의 세력을 불려 나갔다.

이제 더 이상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 순간, 위대한 존재는 '방관자'를 통해 직접 나서기 시작했다.

그들은 룬 문자도, 마나도, 다른 피조물의 재능도 모두 거절한 이들이었다.

대신 그들은 단 하나- 중간계를 전쟁의 화마에 밀어 넣은 이들에게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할 힘을 얻었다.

그들의 참전으로 균형추는 맞춰졌고, 전쟁은 양 진영에 엄청난 타격을 입히며 점점 절정으로 치달았다.

* * *

"결과를 보면 알겠지만, 전쟁은 '반하는 자'들의 패배로 끝이 났지. 그렇게 '반하는 자'들은 척박한 환경으로 쫓겨나게 되었네. 여기까지가 바로 '잊혀진 역사'."

이 '잊혀진 역사'는 내가 창조해 낸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초고대 문명이 존재했었다.' 정도만 언급한 것이다. 그것도 빠른 완결을 위해서.

-개연성이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뭐지?'

순간, 머릿속에 누군가의 음성이 들렸다.

낯설지만 익숙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만 같은 음성이었다.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열쇠 어쩌구를 외쳐대는 음성과 똑같았다.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 내었다.

하인즈의 강의는 계속되었다.

"자아, 여기서 문제를 내겠소. '대리자'들이 누군지 알겠소?"

그의 물음에 바로 어떤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베르트...."

신성 제국 베르트.

말 그대로 광신도 집단인 베르트였던 것이다.

"정답이오. 그렇다면 '반하는 자'는?"

순간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지듯, 착착 맞춰지는 것이 있었다.

"마족."

"역시, 정답이오. 이것이 바로 이 원고를 완성하여 발표하지 못하는 이유라오. 이런 지식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버거우니까. 마족과 인간이, 사실 그 뿌리가 같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은... 실로 잔인한 진실이지."

"...한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마족에 대항할 힘은 '방관자들'에 주어졌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위대한 존재는 어째서 신성 제국에 '반하는 자들'을 상대할 힘을 주지 않은 걸까요."

"그 전쟁을 비록 '반하는 자'들이 일으켰다고 하나, 그 전쟁을 키운 것은 '대리자'들이기 때문이오. 이 중간계를 멸망 가까이 몰아붙인 그 초고대 문명 자체가 '대리자'와 '반하는 자'의 합작이었으니."

그렇다.

위대한 존재의 시선에서 보자면 둘 다 자신의 사랑을 배반한 것이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거절한 '방관자'에게 중책을 맡긴 것이다.

"그리고 위대한 존재는 '대리자'와 '반하는 자' 모두에게 벌을 내렸소. '대리자'에게는 자신이 존재하는 증거- 신성력을 줌으로써, 자신이 존재함을 기억하게 했고, '반하는 자'에게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지워 사랑을 앗아갔다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서 자신의 언어를 빼앗아 영원히 봉인했지. 지금도 룬 문자는 존재하지만, 그 시절의 그것과 비교하기에는 터무니없다오. 진정한 룬 문자는 그야말로 '신의 힘'이거든."

하인즈는 찻잔 속 남은 차를 완전히 들이켜고 말을 이었다.

"자,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더 남게 될 텐데. 그렇다면 '방관자'들은 누구인가. 대리자와 반하는 자와 달리, 방관자는 임무를 끝내고 철저하게 그 이름에 걸맞은 방관자로 돌아갔소. 그 종족의 이름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하인즈가 묘사한 일련의 묘사가, 내 머릿속 어떤 존재들과 정확히 들어맞기 때문에.

"...사만족."

하인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치 들어선 안 될 이름을 들은 것처럼.

"자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내가 그 사만족의 후예랍디다.

하지만 굳이 밝히지는 않았다.

§ 아카데미의 신화급 교수가 되었다 66화

66. 공백 (1)

머릿속이 복잡하다.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로 하인즈의 방에서 나섰다.

내가 모르는 내 세계관의 설정들이 어지러이 머릿속을 떠다닌다.

어떻게 내 연구실까지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알림이 도착했습니다.]

[k2929 님께서 100G 후원하셨습니다.]

독자님의 후원 덕에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내 자리였다.

"교수님, 어디 편찮으세요?"

리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내색은 할 수 없다.

'노브로즈에 들러,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었군.'

이 혼란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정확한 지식이 필요하다.

하인즈의 지식은 어디까지나 제삼자인- 그러니까, 네 번째 부류, '인간'의 것이었다.

'대리자'나 '반하는 자', 그리고 '방관자'에 속하지 않은, 대다수의 인간들.

그러니, '대리자'나 '반하는 자', '방관자'의 지식도 살펴보아야 비로소 명확한 사실이 보일 것이다.

이 세 가지 지식 중에서 그나마 내가 접근 가능한 지식이라 하면, 당연히 '방관자'의 지식일 것이다.

'대리자'인 신성제국도 가능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들겠지만, 신성제국에 이와 관련된 지식이 온전하게 남아 있을지도 의문이고, 설령 남아 있다고 해도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그 흔적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지식을 내게 공개할 리 만무하다.

그러니 이 세 종류의 지식 중, 내가 접근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것이 바로 '방관자', 사만족의 지식이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진 않겠지만.

'어차피 빠른 시일 내에 찾아갈 예정이었으니....'

그 원로원에 숨겨진 초고대 문명의 유산을 챙기기 위해서라도 언젠간 들러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곤란하다.

당연하게도, 학기 중이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찾으러 가고 싶다만, 이 육신 자체에 깊숙이 박힌 '책임감'이라는 녀석은 그 마음을 순식간에 제압한다.

기말을 앞둔 상태라 그 책임감이라는 녀석이 더욱 강하게 작용하는 듯싶다.

좀 더 깊이 있는 내용으로 강의를 채우고 싶다.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다만, 그것을 위해서는....

"교수님, 부총장실에서 연락 왔어요. 연결할까요?"

로널드가 왜.

하지만, 마침 잘되었다.

그에게 재가받아야 할 일이 있으니.

"연결해라."

리트가 수정구를 조작하자, 로널드의 음성이 들렸다.

-흠, 흠. 루카스 교수. 실습은 잘 다녀왔는가?

"그렇습니다."

-총장께 인사드렸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그 옆방이 바로 내 집무실인데 들르지 않은 것은 굳이 지적하지 않겠네.

이미 하고 계신데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그런 질책을 위해 연락하신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아, 그렇지. 내가 자네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이렇게 전화를 했다네.

부탁이라.

"말씀하시죠."

-그... 밀리아 교수 있지 않은가.

밀리아의 이름이 나오자, 리트의 몸이 굳었다.

-밀리아 교수의 강의가 너무 어렵다고 원성이 자자해서 말일세.

아, 그건 나도 들은 적이 있다.

마법 학부생들 사이에서 커다란 불만이 튀어나오고 있다고 한다.

가뜩이나 밀리아 교수가 맡은 과목은 학점이 상당해서 마법 학부생들에겐 필수 강의로 꼽히는데, 당최 이해를 할 수 없으니 답답하다는 식이었다.

-그와 반대로 자네의 강의는 참 평판이 좋단 말이야. 이번 특강의 강의 평가도 엄청났고 말일세.

"부총장님, 돌려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그래, 그래. 자네는 직설적인 걸 좋아했지.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 혹시 자네가 밀리아 교수의 강의를 참관해 주겠나? 이렇게 부탁함세.

...잘됐다.

내가 로널드에게 재가를 받으려던 것 역시, 마법 학부의 강의 중 아무 강의나 하나 참관하겠다는 것이었으니.

"알겠습니다."

당연히, 수락했다.

* * *

마법 학부의 <아만 관>, 그중에서도 밀리아의 강의가 펼쳐질 제3 강의실.

나는 강의가 시작하기 전, 이곳에 도착해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내 나름의 배려였다.

마도사들은 예측 불가한 변수를 끔찍이도 싫어했다.

심하면 공포를 느끼기도 했다.

괜한 말이 아니다.

칸트라는 이름의 대마도사는 자신의 주변을 예측 가능한 변수로만 가득 채웠다. 심지어 제자들의 복장까지 통일시켰는데, 하루는 한 제자가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나자 실신 직전까지 가 버렸다.

물론, 이 예시의 칸트라는 놈이 유별난 것이긴 하지만, 마도사라는 족속은 공통적으로 변수를 꺼린다.

당연하지.

그들이 사용하는 마법은 조금의 변수로도 완전히 다른 결과물을 보이니까.

그런 그들을 배려해 일부러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으나-

"루카스 교수님이 여긴 왜...."

"으어... 정신 나갈 거 같아...."

강의실에 들어선 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내 존재를 눈치채곤 저렇듯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저들로서는 저런 반응을 보일 만큼, 이곳에서 나라는 존재는, 아니, 전투 학부의 사람이 여기에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변수다.

당연하다.

두 학부의 연관성은 전혀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존재하지 않으니.

전투 학부의 건물인 <아덴 관>과 마법 학부의 건물인 <아만 관>의 거리만큼이나 이 두 학부 사이의 거리감은 멀다.

"거기-"

대충 눈에 보이는 학생들 몇을 불렀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학생들에게 내가 이곳에 있다고 알려줘라."

들어오는 학생마다 놀라는 것을 보는 것도 상당한 짜증을 유발하니 미리 연락해서 조금이라도 줄여 보고자 했다.

이 방법은 나름의 효과가 있었다.

이윽고, 정각이 되었고 조금 더 지나자 밀리아가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 루카스 교수님?"

...밀리아에게 미리 말해 둔다는 걸 깜박했네.

그나마 밀리아는 변화에 상당히 유한 편이라 다행이다. 얼마나 변화에 유한 편인가 하면, 아까 예시로 들었던 칸트라는 대마도사. 그를 실신시킨 제자가 바로 밀리아였으니.

나는 손을 뻗어 어서 강의나 시작하라는 제스쳐를 보냈다.

그러자 밀리아가 총총 다가왔고-

척!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밀리아가 '손'을 배웠습니다.]

아, 그런 거 아니라고.

* * *

밀리아의 강의가 시작되고, 몇 가지의 이유로 놀랐다.

첫째로, 밀리아는 학생들을 가르치려는 의지는 있었다는 점이었다.

솔직히 말해, 마탑의 파견직 교수들은 '교수'라기보다는 '결계사'의 느낌이 더욱 강했고, 특히나 밀리아의 경우, 전임자인 율레이드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직접 온 것이라 교수라는 직함에 책임감이 없을 줄 알았는데, 강의만 놓고 보자면 그렇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학생들과 나누려 하고 있었다.

문제는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는 정도일까.

여기서 두 번째로 놀랐다.

수준의 차이가, 그야말로 극심하다.

밀리아와 학생들의 차이는 단순히 교수와 학생들의 차이를 넘어섰다.

아예 다른 차원이라 보는 것이 옳겠다.

이것은 마치 개미들을 모아놓고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학생들이 개미 정도의 수준이라는 것이 아니라, 밀리아가 인간의 이해를 아득히 넘는 천재라는 소리다.

이러니, 학생들이 강의가 어렵다는 원성이 자자한 것이다.

수강 신청은 했고, 이수 시 학점이 크니까 그냥 자리만 채운다는 스탠스가 한눈에 보일 정도다.

'이래서야 곤란하겠군.'

밀리아의 강의에는 커다란 문제가 있다.

수준의 차이라기보다는 마치-

'미싱링크.'

그래. 이 표현이 가장 적절할 듯하다.

'잊혀진 역사'처럼 커다란 공백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한쪽의 내용만 알고 있는 이들이 이해를 버거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법은 간단하다.

그 공백을 채우는 것.

여기서 세 번째로 놀랐다.

그 공백이, 내가 다음에 선보일 강의의 주제와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 * *

"그러니까... 그 공백의 지식을, 자네가 채울 수 있다는 소린가?"

"그렇습니다."

로널드는 루카스 교수의 보고를 들으며 솔직히 반신반의했다.

밀리아 교수의 강의는, 뭐랄까 상당한 골칫거리였다.

분명 마법에는 문외한인 자신이 보기에도 엄청난 수준의 강의라는 것은 느껴질 만큼 대단한 것이나, 문제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에 있었다.

자신이 그럴진대, 학생들은 오죽할까.

처음에는 마법 학부의 교수들과 논의해 보았다.

그러나 그들 중 아무도 밀리아의 강의를 이해한 교수는 없었다.

분명, 제대로 전달만 되면 상당한 재산이 될 것은 분명한데.

이러한 고민을 하인즈에게 털어놓았다.

하인즈는 밀리아의 강의를 영상으로 지켜보았고, 그저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것은 이해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네."

하인즈 역시, 루카스처럼 '공백의 지식'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다만, 이것은 직관의 영역이라 자신이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니라 했다.

그러면서 루카스에게 부탁해 보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루카스 교수는 전투학 교수이지 않은가."

"모든 것은 극에 달하면 통하는 법이지. 나는 천성이 학자라, 스승이 될 수 없기에 방법이 없지만, 루카스, 그자는 천성이 스승이라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 그렇게 된다면 자네의 바람처럼 학생들에게 대단한 도움이 될 걸세."

로널드는 하인즈의 말에 따라 루카스에게 부탁했고, 루카스는 이렇듯- 방법을 제시했다.

"그래서... 그 '공백의 지식'을 위한 특강을 하겠다는 것이고?"

"정확히는 제 강의에 밀리아 교수 강좌의 수강생들을 초대하겠다는 뜻입니다."

루카스는 예의 그 서늘한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 표정이 깊은 신뢰감을 안겨 주고 있으니.

"알겠네. 자네가 생각한 대로 한번 해 보게."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다.

로널드는 루카스의 의견을 수용했다.

* * *

[특강 공지]

대상 : 밀리아 교수님의 <기초 원소 마법의 정립> 수강생.

장소 : <아덴 관> 제5 강의실.

일시 : XXXX년 XX월 XX일

본 특강은 전투 학부, <전투의 모든 것> 강좌의 추가 편성입니다.

따라서, 출석 여부는 <기초 원소 마법의 정립>의 성적과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전투의 모든 것> 과목의 조교 리트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 * *

"마법 학부랑 같이 수업을 듣는다고? 이게 뭔 일이래?"

"교수님이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기초 원소 마법의 정립>과 <전투의 모든 것>의 융합 강의는 <기초 원소 마법의 정립> 수강생들에게도, <전투의 모든 것> 수강생들에게도 엄청난 화제였다.

전투학과 마법학이란, 완전히 다른 카테고리의 강의가 한 공간에서, 두 부류의 학생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과연, 어떤 식으로 진행이 될까, 같은- 그 전에, 두 집단이 동시에 이해할 수 있을까 같은 본질적 의문이 뒤따랐다.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전투의 모든 것>의 수강생들이나, 특강으로 루카스의 강의를 경험했던 이들은 루카스의 새로운 강의 방식에 호기심을 나타내긴 했으나, 그 저변에는 신뢰가 깔려 있는 반면, 마법 학부 쪽에서는 그 자체가 '변수'로 다가와 깊은 우려를 나타낸 것.

물론 그것까지 고려해 이번 특강은 <기초 원소 마법의 정립>의 성적과 별개라고 명시해 두었으니, 선택은 본인 몫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밀리아 교수의 강의만도 골치가 아플 지경인데, 그와 쌍벽처럼 여겨지는 루카스 교수의 강의는 얼마나 엄청난 난이도를 자랑할 것인가. 게다가 전투학 강의인 만큼, 이론보다 몸을 움직이는 일이 더 많을 것인데. 같은 걱정이 기본으로 깔려 있었다.

그래서인지, 원래 수강생들의 절반도 되지 않은 인원이 <아덴 관>에 찾아왔다.

사실, 이것 또한 상당한 인원이라 볼 수 있었다.

변수를 끔찍하게 여기는 마도사들이 스스로 변수에 뛰어든 것이니.

그렇다고 특강에 출석한 학생들이 큰 기대를 걸고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변수에 대한 끔찍함보다 호기심이 앞선 것뿐이었다.

벌컥-

과연, 소문대로 강의 시간이 되자마자 1초의 오차도 없이 루카스가 강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실습 때도 느꼈지만, 실로 압도적인 존재감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으나, 자연스레 그에게 집중하게 만드는 초능력 같은 것이 느껴진다.

"이번 강의는 <전투의 모든 것>의 정규 강의이자, <기초 원소 마법의 정립>의 특강을 겸한다. 그럼 본 강의를 시작하지."

자질구레한 부연 없이 강의가 시작되었다.

처음에 큰 기대가 없던 마도 학부 학생들의 태도는, 단 5분 만에 바뀌게 되었다.

§ 아카데미의 신화급 교수가 되었다 67화

67. 공백 (2)

'어디, 얼마나 대단한지- 내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도록 하지!'

마법 학부의 총괄 수석, 4학년 베디치는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루카스 교수가 현재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과 기사로써 끼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한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마법을 우습게 보고 있는 건가?'

그가 마법학 강의를 진행한다는 것은(정확히는 전투학의 강의에 마법 학부가 초대된 것이나-) 마법을 우습게 보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전투 학계에서 천재로 떠받들어지니, 마법까지 가볍게 보는- 아주 오만한 상태인 것이다.

'내가 그 실습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부총장의 특별 지시 때문에 따라가긴 했지만, 페두르 산맥에서의 실습은 그다지 유쾌한 기억이 아니었다.

속은 메스꺼웠고, 쉽게 지쳤으며, 연구로 시간을 보냈어도 그 내용이 머릿속에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 멍청한 실습에 억지로 끌려가는 바람에 오히려 퇴보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게다가, 정작 그 멍청한 실습을 이행한 놈들은 무언가를 얻어서 끝냈으니.

묘한 패배감만 남은 그런 실습이었다.

베디치가 이번 특강에 출석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루카스의 흠을 잡기 위해.

그의 오만한 콧대를 납작하게 해 주기 위해 출석한 것이었다.

베디치는 루카스가 반드시 보일 수밖에 없을 허점을 찾아 눈을 번들거렸다.

베디치가 그런 시선으로 보든 말든, 루카스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들어 허공에 주욱 그었다.

만년필이 지나간 궤도에 따라 허공에 선이 떠오른다.

"와아...."

의식을 벗어난 감탄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루카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시전한 것이었으나, 저 간단해 보이는 행위는 엄청난 마력량은 물론이고 마력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발출, 조형, 실체화, 고정 등등-

저 공중에 그어진 한 줄의 선에 범인(凡人)은 감히 짐작도 하지 못할 경지가 녹아 있는 것이었다.

'큼, 큼! 그 루카스 교수인데. 이, 이 정도는 당연히 하는 거겠지. 혹하지 말자.'

베디치는 아주 잠깐, 혹할 뻔했으나 이내 정신을 다잡고 루카스가 하는 말에 의식을 집중했다.

"내 강의에서 이 '선'의 중요성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자, 여기서 마법적인 시선을 더해 보겠다."

그의 만년필이 그려내는 선은 많아졌고, 그 선들은 복잡한 모양으로 엮여나갔다.

이것은-

'플레임!'

마법 학부생들은 루카스가 그려낸 것이 무엇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수준의 플레임 도식. 이쯤 되면 단순한 도식이라기보다, 예술품에 가까운, 그러한 것이었다.

"전투 학부의 학생들은 모르겠으나, 마법 학부생들은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겠지. 이것은 '불'을 뜻하는 마법적 도식이다."

루카스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이어서 '아쿠아'를, 그리고 '윈드'를 연이어 그려나갔다.

이 두 가지 역시 경악할 만한 수준의 것이었다.

'루카스가 언제 마법학을 익혔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전투학에서 일가를 이룬 이가 저 정도 수준의 플레임과 아쿠아, 윈드의 도식을 그려낸다고?

말도 안 된다.

전투학과 마법학의 그것은 양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검사라는 족속이 있긴 하지만, 그들도 저 도식을 저 수준으로 완벽하게 구사하지는 못할 것이며, 전투학 적 깊이 역시 루카스의 수준에 비하면 발톱의 떼만도 못할- 전투 학부의 학부생 수준보다 못한 수준일 것이다.

그만큼 양립이 어렵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루카스가 보이는 수준은 무엇인가.

저자는, 드래곤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억겁의 시간이 아니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와아- 아까 가르쳐 드린 건데... 저보다 도식이 완벽하시네요?"

베디치가 잠깐 품었던 의혹은 밀리아의 발언으로 인해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저게, 조금 전 익힌 거라고?'

그야말로 벽을 느꼈다.

흠을 잡으려 했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그, 그게 마법학을 가르칠 수 있다는 오만함의 근거는 될 수 없어.'

이쯤 되면 완벽한 자기합리화의 수준이었으나, 이렇게라도 해야 울컥 치미는 열등감을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마법사의 연구 본능이 계속 움틀 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으나- 다행히(?)도 저것은 기초 중에서도 기초에 속하는 내용이다.

아무리 완벽하다고 한들, '특별한 지식'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역시 베디치의 섣부른 오류였다.

"이 도식들은 마법적으로 나타낸 '형(形)'이다. 이 '형'의 결과물은 마법 학부생들이 가장 잘 알겠지. 그렇다면 묻겠다."

루카스는 다시 한번 허공에 만년필을 죽죽 그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그가 그렸던 도식은 아주 기초적인 것들이었다면, 지금 것은 조금 더 복잡한 형태의 도식이었다.

하지만, 그 완성본은 경악할만한 것이었다.

"이 '형'은 고위 마법 중 하나인 '플레임 스톰'의 도식이다."

'어, 어째서.'

플레임 스톰은 루카스의 말대로 고위 마법이다.

단순히 마법학을 익혔다고 해서 구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저 안에 들어간 계산식이 얼마나 복잡한데...!

그러나 루카스는 그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하품을 터트리듯이 가볍게 완성해 냈다.

"마법 학부생들은 이 도식이 뜻하는 바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겠지. 하지만, 너희는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어."

루카스의 만년필이 다시 한번 움직인다.

'어, 어어?'

이번에는 정확히 세 번에 나누어져서 움직였는데, 각각 갈기갈기 분해된 '플레임'과 '아쿠아', 그리고 '윈드'였다.

"일견 복잡해 보이는 '플레임 스톰'의 도식은 마법학에서 가장 기초로 여겨지는 '플레임'과 '아쿠아', '윈드'의 조합식에 불과하지 않아. 복잡하다고 생각한 계산식 역시 '다중 역학'만 고려해서 그렇지, 이런 식으로-"

루카스가 그려낸 조각난 도식이 너울너울 움직였다.

그 운용법은 지금까지의 마법학 상식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아, 아아...."

마법 학부 학생들의 입에서 탄성과 함께 경악이 터진다.

'전투의 모든 것' 수강생들은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그저 마법 학부생들을 바라볼 뿐이다.

그래, 저거다.

원래 전투학이 마법학을 만나면 저런 표정이 나와야 정상이다.

하지만 어째서 루카스는 자신에게 감탄과 탄성을 일으키는가.

'필기, 이건 필기 해야 해!'

베디치의 마음이 급해졌다.

이 강의는,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만한, 그런 가치가 있는 것이다.

기록으로 남겨 두고두고 곱씹어 봐야 할,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는 보물인 것이다!

'...씨발.'

하지만 베디치는 이내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그가 이 특강에 참석한 이유는 루카스의 흠을 잡아내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필기구를 지참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크게 치켜떴다.

모조리 외울 생각이다.

루카스의 손짓, 발짓, 심지어 머리칼 한 올의 움직임도 모조리 외워 버릴 것이다....

* * *

'아깝다.'

이 허공에 떠다니는 '선'들이 얼마나 커다란 가치를 가지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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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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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할인 특가!)

교육의 목적으로 사용 시 '한 획'의 인정 범위가 '끊어지지 않고 그려내는 획'으로 인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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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필기]라 불리는 이것은, 자그마치 한 획 당 10G씩이나 하는, 어마어마한 몸값을 자랑하는 녀석이었다. 물론 룬 문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건 실제로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거고, 이건 단순히 시인성을 높여줄 뿐인 것이었다.

다만, 교육 할인이라는 고마운 정책 덕분에 '교육' 목적의 사용 시, 한 획의 기준이 '한 번에 그려 내는 획'으로 책정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단어를 원래로 따지자면, 10획, 즉 100G라는 거금이 들어가야 하지만, 한붓그리기로 단번에 그려 버리면 10G만 소모된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엄청난 비용인 것은 맞으나- 부담은 없다.

내가 이 강의에 [공중 필기]로 소모한 골드는 약 1,000G 남짓.

가능하면 한붓그리기로 끝내려고 별의별 쇼를 했기에 가능한 비용이었다.

'아깝다.'

눈물 나게 아깝다.

내 학생들만 상대할 때는 굳이 [공중 필기]를 사용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마법 학부와 함께하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 강의 내용을 온전히 목격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확연히 보이는 [공중 필기]가 필수적이다.

마법 학부 특강에 왜 이렇게 열심이냐고?

정확히 말하자면 이 투자는 내 학생들을 위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마법 학부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하느라 그렇게 보일 뿐이다.

이번 강의의 진짜 핵심은 '형'의 연결이다.

그러기 위해, '형'의 연결을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마법 학부의 예시가 필수적이었다.

마침, 이 '형'의 연결은 <기초 원소 마법의 정립> 강의에서 밀리아와 학부생들 사이의 '공백의 지식'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다.

기초 마법인 '플레임'과 '아쿠아', '윈드'의 형을 연결하면 '플레임 스톰'이라는 고위 마법이 된다.

기존 상식으로는 저 세 가지의 마법과 '플레임 스톰'은 전혀 별개의 것이라 여겨졌으나- 실상은 전혀 다르다.

깊이 들어가면 머리만 아프니,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직관의 영역을 눈앞에서 분해하여 이론의 영역으로 설명해 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도식에 관한 지식도 필요하지만, 나는 마법 도식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설정한 것은 텍스트로 이루어진 마법의 설정이지, 그림으로 이루어진 도식이 아니니까.

하지만 내게는 사기 스킬, 교학상장이 있다.

교학상장으로 루이나의 '플레임'을 복사해 하나의 형을 보여 주었고, 그 순간 마법 학부생들에게도 표식이 새겨지며 '아쿠아'와 '윈드'를 복사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마법을 복사하는 일은 없었지만, 지금은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형태를 보여 주기 위한 개념이다. 일종의 누끼를 따는 것이라 이해하면 편하다.

게다가 무엇보다 완벽한 도식을 그려낼 수 있었던 이유-

내가 매일 하는 것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동작'이다.

도식 완벽하게 따라 그리는 것쯤은 누워서 소설 보기보다 쉽다.

그러나 그 쉬운 행위에 1,000G나 소모되다니.

참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이게 다 독자님들이 나를 위해 준비해 주신 정성 아니던가.

마치 할머니께서 '우리 손주 맛난 거 사묵으라'며 부모님 몰래 찔러 넣어준 용돈을 어머니께 들켜 삥 뜯긴 것만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새로운 알림이 도착했습니다.]

[츠나츠나 님께서 100G 후원하셨습니다.]

[츠나츠나 님께서 300G 후원하셨습니다.]

[츠나츠나 님께서 500G 후원하셨습니다.]

[츠나츠나 님께서 1,000G 후원하셨습니다.]

[루디포 님께서 300G 후원하셨습니다.]

[k2929 님께서 100G 후원하셨습니다.]

[마음의단비 님께서 500G 후원하셨습니다.]

[홍서크 님께서 500G 후원하셨습니다.]

[홍서크 님께서 500G 후원하셨습니다.]

[홍서크 님께서 300G 후원하셨습니다.]

[홍서크 님께서 300G 후원하셨습니다.]

[홍서크 님께서 100G 후원하셨습니다.]

이 정도로 뻥튀기되어 돌아오는 정도면, 오히려 좋아... 랄까?

§ 아카데미의 신화급 교수가 되었다 68화

68. 공백 (3)

"굳이 다중 역학을 사용할 필요 없이, 간단한 계산으로 '플레임 스톰'을 완성할 수 있다."

<기초 원소 마법의 정립> 수강생들은 그야말로 충격의 도가니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루카스가 지금 설파하고 있는 저것-

저것은 새로운 개념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패러다임이 뒤바뀌는 것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직관'의 영역을 '이론'의 영역으로 끌어온 것.

그것은 그전까지, 이 이후에도 그 누구도 하지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전투학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이렇게-"

루카스는 어느새 손에 있던 만년필을 거두고 어디서 놨는지 모를 검을 들고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와아....'

베디치와 마법 학부생들은 이번에도 감탄을 터트렸다.

그의 움직임은 마법 학부생들도 익히 아는, 페리어드 소드의 그것이었으나,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아는 페리어드 소드가 아니었다.

전혀 다른 수준.

마치 예술적인 연극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전투의 모든 것> 수강생들도 다르지 않았다.

'교수님 시연은 매번 보는데, 매번 볼 때마다 놀랍네, 정말.'

'역시 교수님이셔....'

'대단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제시를 만년필로....'

"에일론. 너 또 만년필 어쩌구 생각했지."

"찔리냐, 그렇다면 정답이다."

루카스의 시연은 매번 보는 것이지만, 매번 볼 때마다 감탄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지금 보여 준 세 가지의 검식은 각각 마법 학부의 '플레임', '아쿠아', '윈드'와 비견되는 페리어드 소드의 기초 세 가지 검식이다. 흔히들 페리어드 소드는 저급의 검법이라 평가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루카스는 앞서 보여 준 세 가지의 검식을 새롭게 재배치했다.

그러자-

"...!"

조금 전, '플레임 스톰'이 나왔을 때 마법 학부에서 터졌던 경악성이, 이제는 <전투의 모든 것> 수강생들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엉알 잉이 앙아웅어여...(정말 입이 안 다물어져...)"

두 부류에 모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루이나는, 하도 입을 벌려 턱이 빠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 * *

'미친, 진짜 말도 안 돼....'

검술 학부 교수의 강의에서, 그것이 루카스가 되었든 어쨌든 간에 학문적으로 이렇게 감탄할 수 있을지, 베디치는 전혀 알지 못했다.

루카스의 강의는 그야말로 경이로움의 연속이었다.

마법학적 지식은 이제 놀라는 것도 지칠 수준이었고, 더욱 놀라운 것은 마법학과 전투학 두 가지 상반된 지식이 놀라울 정도로 융합하여, 전례 없는 강의가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초반에는 분명 그 경계가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그 경계가 무너져내렸다.

분명 전투학 강의를 듣고 있는 것 같지만, 마법학과 연관되어 있었고, 마법학인가 싶지만, 전투 학부생이 깨달음을 얻어 가는, 기이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한 마디로 축약하자면, 놀라운 경험이었다.

지금 베디치가 1초라도 놓칠세라, 눈이 벌게져 가며 모든 순간을 담아내고 있는 이유였다.

루카스 강의는 그야말로 상식을 무너뜨리는 것에 연속이다.

기존에 통상적으로 받아들였던 상식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되고, 무엇보다 자신을 초라하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기분 나쁜 의미의 초라함이 아니었다.

마치 우주 안에서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작은가- 따위의 초라함이었다.

깊은 화두를 던져 주는 강의였다.

어느 순간부터 베디치의 눈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도 눈을 감지 않아 흐르기도 했지만, 흐릿한 깨달음에서 오는 감동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으로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루카스의 입에서 이 말이 튀어나왔을 때, 베디치는 저도 모르게 '아, 안 돼!'를 외칠 뻔하였다.

실제로 몇몇 마도 학부생들은 그 소리를 입 밖에 내기도 했다.

<전투의 모든 것> 수강생들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는 이 모든 추태를 보기 전에 강의실을 나섰고, 그가 사라진 강의실은 너무나도 공허하게 느껴졌다.

더러는 도대체 얼마나 지났다고 강의를 끊어 버리는 거냐며 투덜대기도 했다.

하지만-

'벌써 세 시간이 지났다고?'

그의 강의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각에 끝이 났다.

루카스의 강의가 온전한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는 것을 깨닫자, 익숙한 한탄이 흘러나왔다.

"아아, 조금만 더 하면 뭔가 잡힐 거 같은데!"

"시간 뭐 이렇게 빠른데!"

"와, 나 보통은 과거의 나한테 욕밖에 한 적 없는데 방금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만나면 내 모든 걸 줄 수 있을 듯."

"3일짜리 특강 맞지? 내일도 들을 수 있는 거지?"

"내일 강의 듣기 전까지 아무 강의도 듣고 싶지 않다... 그냥 쓰레기처럼 느껴질 거 같아."

"시간의 신 이 새끼 일 존나 못하네. 방금 그 강의 시간을 길게 빼고, 나머지 시간은 제발 삭제 좀...."

<전투의 모든 것> 수강생들이 겪어본 적 있는 풍경이다.

"특강이 끝날 때쯤엔 엄청나게 괴로워하겠네."

"이게 끝이 아닌데. 풉."

저들은 기한이 있고 우리는 기한이 없다. 같은 우월감을 느끼며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마법 학부 학생들은 한참이나 강의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강의가 남긴 여운을 계속해서 붙잡고 있었다.

* * *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의 개념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라스코에는 '정규 시험'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강의의 끝 무렵에는 항상 시험이 끼워 넣어져 있다. 따로 존재하지 않는 정규 시험 대신, 내 학생들의 수준을 평가하고 확인한다.

이것은, 내 안전을 위해서다.

내 눈앞에 보이는 이들은 모두 내 안위를 지켜 줄 인물들.

그들이 얼마나 강해졌는가는 항상 체크하고 염두에 두어야 할 것들이다.

그것이 습관이 되어 매 강의에 시험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제는 이 과정이 퍽 즐겁게 여겨지기까지 한다.

학교 다닐 때는 가장 싫었던 것이 시험인데, 정작 가르치는 처지가 되니 시험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내 가르침이 얼마나 닿았을까.

묘한 기대감이 반짝이는 것이다.

"나쁘지 않군."

이틀간 진행되었던 강의의 요체가 녹아 있으면서도 학생들의 창의성을 자극하고, 또한 실전에서 써먹을 수도 있는, 내가 보기에 퍽 훌륭한 문제가 갖춰졌다.

내가 아는 한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풀면서는 쌍욕이 나오겠지만, 풀고 나서 그 성취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그런 문제 말이다.

"리트, 거기 있나?"

-네! 교수님! 

우당탕탕!

잠시의 소란과 함께, 리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 종이는 <기초 원소 마법의 정립>의 수강생의 숫자만큼 뽑아 준비하고, 이 검식들은 각각 세 구의 전투 인형에 입력해 놓아라."

"네, 알겠습니다."

리트에게 준비까지 지시하고 나자 이제 완전하게 이번 강의는 마무리된 것이다.

내일, 이 문제를 받아든 학생들의 기뻐하는 얼굴이 눈에 선연하게 비치는 듯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