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9

* * *

"오행에 대하여 질문할 것이 있느냐?"

"오늘은 더 없습니다."

"좋다, 이만 제의를 준비하러 가자."

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물론 오기조원에 도달하며 수명이 늘어낫을 거라는 희망을 품은 적도 있었지만.

청문세가 서고에 있는 서적들을 보며, 나는 사실상 이전과 똑같은 수명에 죽을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내 진도는 최근 상당히 많이 나가.

연기기 8성 육합만로가 아닌, 연기기 9성 오행본원에 도달해 있었다.

물론 여전히 9성 수준의 수도공법은 수련이 불가햇으나.

나는 공법의 순수한 이해에 있어서는 연기기 9성 수도자와 맞먹었다.

최근에는 연기기 10성 사상이의에 관한 내용 역시 예습하는 참이었다.

'그래도 사상이의, 아홉 갈래로 통합된 영성영맥과 영종영변을 다시 두 갈래로 통합하는 과정은 굉장히 내게 유리하다.'

그저 경맥을 통합하는 것이 주였으니, 내게 시간만 주어지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인 것이다.

"자, 해가 진다."

나는 스승님과 함께, 제의를 시작하였다.

물론 이번에도 여지없이 구름이 끼며 영성이 차단되었다.

"...이번에도 실패입니다."

"...그래."

스승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도다.

벌써 몇 번을 시도했는지 잘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자, 내일은 다시 답천사막으로 가서 시도해보자꾸나. 답천사막쪽이 그나마 구름이 늦게 몰려오는 듯 하니.."

"스승님."

"음, 뭐냐?"

나는 애써 웃으며 제의도구를 챙기는 스승님에게 입을 열었다.

"...내일은 제의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소리냐. 내일 답천사막에 천지영성이 드리운다. 내일이 아니라면 언제 또..."

"제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내일만 잠시 미뤄주시면 아니되겠습니까?"

"흠... 다음 제의 적기일은 달포 후다. 달포 후까지 청문세가로 돌아올 수 있느냐?"

나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돌아오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이십일 후.

그날이, 내가 지금까지 정확히 죽어왔던 날.

내 수명이 다하는 날이었다.

불허(不許)(3)

나는 손바닥만한 종이배의 형태로 만들어진 비행법기에 법력을 불어넣었다.

부우웅!

법력이 들어가자, 종이배 형태의 비행법기는 크기가 불어나며 색상이 생겨나고, 하나의 나무배의 형태로 모습을 바꾸었다.

"가 보자."

나는 나무배 위로 뛰어올라 법력을 불어넣으며 수결을 맺었고, 동시에 나무배에서 주술문이 떠오르며, 허공을 빠르게 박찼다.

* * *

사흘 뒤.

나는 비행법기를 사용해 벽라국과 연국의 국경에 도착했다.

'연기기 수준의 비행법기는 일반적인 배 정도의 빠르기로군...'

아무래도 비행기 정도 되는 속도를 가지려면 축기기급의 비행법기거나, 혹은 결단기 수도자의 자체적인 비둔술(飛遁術) 정도는 되어야 하는 듯 했다.

비행법기 위에서 바람을 맞으며 풍광을 즐긴 후.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기 있군."

번쩍!

내가 상대를 확인하자마자, 새하얀 강기가 번뜩이며 내게 쇄도한다.

나는 손을 휘둘러 강기를 뿜어냈다.

서로의 강기가 마치 뱀처럼 허공에서 유영하며 몇 합을 부딪혔고, 얼마 후.

내게 쏘아져온 강기가 그대로 상쇄됐다.

펄쩍!

난 허공을 박차고 뛰어내리며, 천상제를 사용하여 느릿하게 떨어져 내렸다.

"오랜만입니다."

"그래, 지난 번 봤을 때보다 조금 더 어검(馭劍)이 늘었구나."

"어검 연습은 한시도 놓은 적이 없으니까요."

이기어검이란, 단순히 칼이 허공을 움직이는 게 아니다.

검(劍)에 대한 장악력을 검신합일 이상으로 높여가고 또 높여나가.

결국엔 검에 대한 모든 것을 완전히 장악한 경지.

검의 소리와, 검의 재질에서부터 시작해 자기 자신의 무공 그 자체에서 뿜어지는 기세, 검기, 검강부터 모든 것을 완전히 의식으로 장악한 경지!

그것이, 이기어검이다.

그러므로.

이기어검을 할 수 있게 된 순간부터, 오기조원의 무인은 검뿐이 아닌 검강(劍罡) 역시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궤도를 바꾸며 조작하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내 손에서 떨어진 검을 조작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원거리에서 내 의식을 베어내어 원거리에 있는 검에 입력하는 것이기에.

오기조원의 경지에서 고저를 판단하는 것은 얼마나 자연스럽게 원거리에 있는 검을 자연스럽게 움직이느냐로 갈린다.

"하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군. 더 정진하거라."

"예, 그래야죠."

난 고개를 끄덕이며 아직 하늘에 떠 있는 비행법기를 거둬들였다.

"김 형은... 이번에 수도법술을 익히기 시작했다더니, 진짜로군요."

나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영기의 압력과, 그의 의식의 크기를 보며 물었다.

그는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뭐... 아무래도 수도법술이 실생활에서 편리한 게 많다보니... 비행법기 같은 것도 그렇고. 물론 그래봤자 연기기 2성이다. 그 이상으론 올라갈 생각도 없고, 어디까지나 무공을 보조하는 용도로 쓸 생각이고..

또 이런 잡기에 의지하는 것보다야 내 자신의 무를 갈고닦는 게 내겐 더 쓸모있을 터다."

"그렇군요..."

무공재능이야 고금제일이었으나, 아무래도 수도공법에 대한 자질은 나와 비슷했고.

그마저도 나처럼 좋은 스승도 없으며 본인 자신도 수도공법보다는 무공에 열중하느라 아직까지 연기기 2성인 듯싶었다.

'거기다 최근에 익히기 시작한 듯 하니... 연기기 2성이면 오히려 나보다는 자질이 눈꼽만큼 좋은가보군.'

김영훈은 칠십이지살진언을 익힐 때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는 둥 잡담을 하다가, 나에게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그나저나, 정말로 괜찮겠느냐? 이런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여도?"

"상관 없습니다. 저 또한 청문세가에 공을 세울 수 있어 좋고, 또 김 형의 의견에는 동의하니까요."

"...그래. 고맙다. 그 놈들은... 한 놈이라도 빨리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이득이야."

막리세가가 진씨세가에게 연국 황조를 빼앗겼지만, 막리세가는 연국에 개입해서 정식으로 양민들을 갈아넣을 권한과 연국이라는 하부세력을 빼앗겼을 뿐.

막리세가 본가가 어미어마한 타격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

물론 어쨌든 황조라는 것은 세가의 명예와 연결된 문제였기에 막리세가의 위신이 실추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여하튼 명예를 제외하면 뺏긴 것이 그리 크지 않은 막리세가는, 여전히 예전보다는 덜하나.

연국 곳곳에서 범인들에 대한 학살을 저지르며 그 더러운 연단을 하고 있다 하였다.

진씨세가는 황조를 찾은 이후부터는 막리세가의 일에 더 간섭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각 가문의 연기기 수도자들이야 서로 부딪혀서 죽는 것은, 후기지수가 아니라면 서로 별로 상관을 하지 않았으나.

가문의 주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축기기 장로들은 사로잡혀도 보상금과 함께 풀어주는 것이 원칙.

그런 이유로, 김영훈은 진씨세가가 황조를 찾은 이후로는 의(義)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진씨세가와 막리세가, 그리고 주변국의 수도가문들의 가율의 헛점을 파고들었다.

"... 알아본 바에 의하면, 연국 내에서 진가와 막리가의 축기기 수도자들은 서로 부딪혀서 사로잡히면 가문에서 배상금을 받고 풀어주지만.

타국(他國)의 영역에 침입한 수도자는 축기기라 하더라도 타국의 수도가문의 수도자에게 죽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가,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며칠 후 이곳으로 막리세가 수도자를 벽라국의 국경으로 내몰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막리세가 수도자의 힘을 다 빼 놓으면, 그때 네가 나서서 막리가 수도자의 목을 쳐버리면 된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더러운 놈을 처리할 수 있어 좋고. 너도 벽라국의 영역에 침입한 연국의 막리가 수도자를 죽이는 것이니 명분에 문제가 없지!"

"예, 분명 그렇지요."

김영훈은 신나게 계획을 설명했고, 나는 차분히 그의 계획을 들었다.

그에게 모든 계획을 들은 나는 그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다.

"김 형. 제가 이전에 월수월무록을 드렸지요."

"그렇지, 네가 준 그 절세의 무공은 나를 착실하게 등봉조극의 극한으로 데려가고 있다. 또 내가 월수월무록을 분석하며 써넣은 주석도 추가된 상황이고..."

"하면, 김 형의 성격에 월수월무록에 주석을 써붙인 비급을 지금도 가지고 있을 것 같으십니다만... 혹여 제게 그것을 읽게 해주실 수 있습니까?"

"음, 뭐. 안될건 없지."

김영훈은 이번에 저물법기를 하나 장만한 듯, 허리춤에 있는 주먹만한 주머니에서 두꺼운 서책을 하나 꺼냈다.

월수월무록은 이전에 내가 그에게 주었을 때보다 확실히 두꺼워져 있었다.

"제목은 바뀌지 않았군요."

이 정도로 내용을 추가했다면, 그의 성격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제목을 바꾸려 했을 텐데.

그러나 김영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바꿀 수 없었다... 나는 이 무학서를 여태껏 그대로 따라가며, 그저 간간히 주석을 단 게 전부다. 몇몇 내용을 추가하긴 했지만, 전부 등봉조극 너머 다음 경지로 넘어가는 것에 대한 시행착오를 기록하였을 뿐이다.

주석 몇 줄과, 시행착오 몇 줄 옮겨적었을 뿐. 나는 이 무학을 넘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감히 무슨 염치로 이 무학의 제목을 마음대로 바꾼다는 게냐."

"... 두께를 보면 시행착오 몇 줄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책의 두께는 내가 처음 주었을 때보다 서너배는 두꺼워져 있었다.

단순히 주석이나, 시행착오 몇 줄이 아니다.

김영훈이 온 정신을 다해 시행착오를 겪고, 월수월무록을 다시금 뛰어넘을 가능성을 찾으려 온 힘을 다한 것이었다.

"뭐, 두께가 두꺼워졌다 해도 내가 실패한 거야 사실이지."

"그래도 이 정도면 이전의 월수월무록과는 차별될 것 같습니다만... 조금이라도 구분을 위해 제목을 바꿔 주시지요?"

"정 그렇다면..."

그는 자조섞인 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월수월무록이 아닌, 월도월무록(越道越武錄)이라고 바꾸지."

월수월무록이나 월도월무록이나, 수도자를 뛰어넘는다는 뜻은 사실 변함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저 한 글자를. 그것도 이전과 뜻의 차이도 거의 나지 않는 제목으로 바꿀 뿐이었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본인이 더 바꾸기 싫다는데 내가 뭘 어쩌겠는가.

나는 서책을 전부 읽고 암기해 두었다.

수도자가 되며 칠십이지살진언이나, 기타 법결을 외우며 머리가 좋아진 것인지.

아니면 수도공법이라는 게 원래 익히면 의식이 커지며 머리가 좋아지는 효능이 있는 것인지.

최근 의식이 커지며 암기력이 매우 좋아진 게 느껴졌다.

이전 삶까지는 몇 번을 읽고 읽고 다시 읽어야 겨우 머릿속에 각인되었던 두꺼운 서책이, 한 번을 읽자 순식간에 전부 뇌리에 입력되는 것이 느껴졌다.

"자, 그럼 여기에서 며칠만 기다리고 있거라. 내 막리세가 수도자를 벽라국 국경으로 내몰아 올 테니..."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나는 자리에 앉아 몸 상태를 가다듬었다.

김영훈은 내게 월도월무록을 더 볼 거면 보라고 하며 내게 건내주곤 자신의 비행법기를 꺼내어 연국으로 날아가 버렸다.

"...날씨가 좋군."

스승님께 배운 천문과 천기에 대한 지식으로 미루어보아, 김영훈이 말한 시일까진 하늘이 창명할 터였다.

"그럼, 김 형이 올 동안 천천히 정리해서 써 보자..."

나는 적당히 넓직한 바위 위로 올라가, 주변에 작은 기초 진법을 펼쳐 누구도 다가오지 못하게 한 후.

저물탁에서 탁상과 한 장의 종이.

그리고 먹과 벼루, 붓을 꺼내들었다.

나는 스승님에게 남길, 내 유서(遺書)를 쓰기 시작했다.

분명 김영훈이 축기기 수도자의 힘을 다 빼 놓을 것이라지만.

그들이 축기기라는 자리를 노름으로 딴 것은 아닐 터다.

하나하나가 인외의 존재였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괴수들.

힘을 다 빼 놓더라도 내 목숨은 위험할 터.

하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이곳에, 죽으러 온 것이니까.

제자가 평생을 노력하다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그저 하늘에 거부당한채로.

그렇게 수명이 다해 죽는다.

스승으로서 얼마나 괴로울지, 얼마나 무력해질지는 상상도 되지 않았다.

지난 삶에서 내 제자들에게 어떠한 제대로 된 길도 제시해주지 못했던 내 자신이 얼마나 원망스럽고, 무력했었는가.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한 나 자신이 얼마나 혐오스러웠는가.

하지만, 제자가 멍청하게 자기 분수에 맞지 않는 상대와 싸우다가 전사(戰死)한다면,

상대가 원망스럽고, 슬플지언정.

스승님은 자기혐오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늘이 정해준 운명으로 죽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곧 죽을 목숨.

나 자신이 대적할 수 없는 무리한 상대와 싸우다가 멍청하게 그리 죽을 것이다.

그리 정했다.

스륵, 스르륵...

나는 천천히 유서를 써내려갔다.

유서라곤 했지만, 나는 내가 죽으러 간다는 것을 스승님께 들키면 안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저 벽라국 국경을 순찰하며, 스승님의 안부를 묻는 그런 형식으로 마지막 말을 전할 의도였다.

몇 번을 내 유서를 쓰고, 다시 지우기를 반복했을까.

난 마침내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 유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

"이건... 언제쯤 보내는 것이 좋으려나."

전송부(傳送符)라는 부적을 사용하면 용적과 질량, 그리고 가진 영력이 크지 않은 작은 물건 한두개쯤은 지정한 상대에게 전송하는 것이 가능했다.

전송부의 속도는 대략 비행법기와 비슷하여, 지금 스승님께 전송부를 보낸다면 사흘 후에야 도착할 터였다.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보내는 것이 가장 적당하겠군.'

지금 보낸다면 미리 편지를 받아본 스승님은 천기를 계산해내어 아예 국경 근처에서 내가 의식을 치룰 수 있는 제의를 마련할 것이다.

전투를 시작하고 며칠 후면 내 수명이 다할테니, 전투 시작 후 사흘 후에 스승님께 서신이 도달한다면, 스승의 앞에서 제자의 죽음을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나는 서한을 잘 접어, 전송부를 붙여 언제든 법력만 불어넣으면 스승님께 전달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김영훈이 약속한 일자가 되었다.

쿠릉, 쿠르릉...

저 멀리서 음기(陰氣)를 잔뜩 머금은 먹장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천기현상보다는 훨씬 그 규모가 작았고, 또한 인위적이었다.

'온다...!'

막리세가의 축기기 수도자가, 구름을 끌고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번쩍, 번쩍!

그리고 그 뒤로, 빛살이 터져나가며 누군가가 축기기 장로를 쫓아오고 있었다.

김영훈이었다.

'이제 시작이군.'

이번 삶의 마지막.

한 번 신나게 놀아볼 시간이다.

우우웅!

나는 전송부를 붙인 서신에 법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부적이 푸른 빛을 발하며, 푸른 매의 형태로 변화하였다.

푸른 매 형태의 전송부는 내 서신을 움켜잡고, 굉장히 빠른 속도로 하늘을 날아 청문세가 방향으로 날아갔다.

난 월수궁무록을 이용해 내게 닿는 인식을 베어 존재감을 지우고.

은식술로 의식을 전부 숨겼으며, 아예 지월입도결에 수록된 토둔술(土遁術)을 펼쳐 땅 밑으로 숨어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쿠릉, 쿠르릉!

쏴아아아!

먹장구름이 하늘을 덮으며 주변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땅 속에 숨어서 먹장구름의 중심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축기기 수도자는 어쩐지 익숙한 얼굴이었다.

'저 자는...'

신마전을 세웠던 당시의 회차.

그때에 50인의 축기기 수도자를 이끌고 신마전을 짓뭉개러 왔던 축기기 끝자락의 수도자!

그 노년의 축기기 장로였다.

그의 얼굴을 보자, 새록새록 옛날이 생각났다.

신마전을 세우고, 수도자들이 내린 수배령에서 도망치며 수도자들을 하나하나 참살하다가.

결국에는 축기 극초기 수도자를 이기고 기뻐하던 김영훈과 신마전.

그리고, 그 다음날 50인의 축기기 수도자들이 신마전을 둘러싸고 해충(害蟲)을 박멸하듯이 짓이겨버렸던 신마전.

저 막리세가 장로가 김영훈을 벌레 치고는 가상하다는 듯이 칭찬하며 그를 꾀어내던 순간.

그때의 절망, 회한, 약자의 비애...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때의 공포스러웠던 축기기 수도자는 없었다

"크윽, 이 빌어먹을 진씨세가 놈들!"

일그러진 얼굴로, 먹장구름의 기운을 움직이는 깃발 형태의 법기(法器)를 애타게 휘두르며.

걸레처럼 찢어진 청포를 입고, 전신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한 명의 사냥감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 이 놈들! 그만두지 못하겠느냐! 진가와 막리가의 조약에 따라, 너희는 나를 죽일 수 없다! 정당한 포로 대우를 원한다! 당장 공격을 멈춰라!"

"흥, 진을 펼쳐라!"

"예, 장로님!"

진씨세가의 연기기 수도자들 몇몇이 김영훈의 뒤쪽에서 진법 깃발을 휘두르며, 주변으로 염(炎)의 기운이 가득한 결계를 펼쳤다.

막리세가의 장로가 결계에 갇혀버렸고, 김영훈이 비릿하게 웃으며 그에게 날아갔다.

"무고한 범인들의 마을을 한줌 혈수로 만들어 가져갈 때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으면서...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지니 발악을 하는 거냐? 이 쓰레기 같은 놈... 죽어라!"

파아앗!

김영훈의 주변에서 몇 개의 강환이 번뜩이며 막리세가의 장로에게 날아간다.

"억지 부리지 마라! 그깟 벌레들 몇 좀 재료로 채집했다고, 축기기 장로인 나를 죽이려 하다니! 크게 실수하는 것이다! 나, 나를 죽이면 너라고 무사할 것 같으냐!"

콰아아아!

막리세가의 장로가 깃발을 휘두르자, 하늘의 먹장구름이 움직였다.

먹장구름은 허공에서 뭉치며 한 마리의 운룡(雲龍)을 형성하며 김영훈에게 달려들었다.

'막리황신보다도 강하다..!'

나는 축기기 수도자의 수도법술을 보며 그의 실력을 짐작했다.

얼마간 강환과 축기기 수도자의 법술이 오간다.

그리고...

촤아악!

"크윽..!"

막리세가 장로가 쏘아낸 한 줄기 음풍(陰風)에, 김영훈의 팔죽지와 허리충이 그대로 뜯겨나갔다.

동시에 김영훈이 쏘아낸 강환에 축기기 장로가 펼친 방어법술과 호신강기가 깨어지며 김영훈과 비슷하게 허리춤이 한 움큼 뜯겨나간다.

'저 상처는... 위험하다!'

축기기 수도자들이야 인간이 아니니, 저런 상처를 입어도 문제가 없겠지만.

김영훈은 연기기 2성 초기 수준의, 평범한 인간의 육신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지난 삶에서 김영훈이 막리황신에게 저 정도의 부상을 입고 기절해버린 것이 아니었는가?

그러나 그때였다.

"장로님을 지원해라!"

"서둘러라!"

결계를 펼친 진씨세가의 연기기 수도자들이, 각기 저물대에서 한 움큼의 부적을 꺼냈다.

번쩍, 번쩍!

수십, 아니 수백장은 되어보이는 치유부적이 김영훈의 상처로 날아가 덕지덕지 붙었고, 진씨세가의 몇몇 수도자들이 결계 너머에서 사용하는 치유법술이 그의 상처를 봉합한다.

'아, 그렇군. 아예 진씨세가에서 치유에 능한 연기기 수도자들을 지원병으로 데리고 온 건가.'

김영훈의 상세가 다시 완전히 나아버렸고, 그는 다시금 멀쩡해진 얼굴로 강환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이익, 이이이익! 이 빌어먹을 놈들!"

막리세가 장로는 그를 보며 얼굴이 시뻘개진 채 계속해서 법술을 쏘아내, 김영훈이 그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할 뿐이었다.

'막리황신보다 훨씬 강한 수도자다.'

완벽한 지원을 받는 김영훈과의 싸움에서 저 정도까지 버티다니.

"이 멍청한 진가 놈들! 네놈들이 들인 저 외인 놈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느냐! 저놈은 막리가와 진가의 가주들께서 직접 하신 조약을 어기려 하는 거다!

네, 네놈들이 나를 죽이면 네, 네놈들이라고 무사할 것 같으냐! 네 이놈들..."

막리세가의 장로는 피를 한 움큼 토하며 진씨세가의 연기기 수도자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연기기 수도자들은 사전에 김영훈에게 언질을 들었는지 조소를 지을 뿐이었다.

"하, 시끄럽소!"

"우리는 가율에 의해 처벌받지 않을 것이고, 되려 막리세가의 전력을 줄인 전공을 인정받아 상을 받겠지."

"미친 것들... 안 그래도 답천사막에서 일어난 대학살 때문에 가주님과 원로들께서 심기가 곤두선 이 때에 축기기 장로를 살해하는 미친 짓을 저질러! 네놈들이라고 무사할 것..."

그리고, 그때까지 숨을 죽이고 은신해있던 내가.

막리세가 장로의 빈틈을 찾아냈다.

'간다.'

의식을 집중한다.

기(氣)를 정련한다.

빈틈이 있지만, 크지는 않다.

그러므로, 저 빈틈을 더욱 더 키워야 한다!

월수궁무록, 극의(極意)

'노중로무궁!'

파아아앗!

일점으로 집중된 나의 의식이,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막리세가 장로를 향해 날아간다.

동시에, 그가 머리를 움켜잡고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아!"

"흠...!"

그 모습을 본 김영훈 역시 의식을 집중하며 그에게 노중로무궁의 일식을 사용한다!

두 사람의 고수가 펼치는 노중로무궁의 절초!

머리가 난도질당한 것 같은 느낌일 터.

'놓치지 않는다!'

단악검법

심산(深山)!

지금껏 끌어모은 기(氣)를 일거에 방출하며, 대지를 뚫고 그대로 하늘로 쇄도하였다.

삽시간에 내 신형이 막리가 장로의 품으로 파고든다.

'끝낸다!'

번쩍!

미리 뽑아두었던 검에 찬란한 검강이 맺혔다.

내 검강이 그의 품에서 막리세가 장로를 향해 휘둘러졌다.

평소라면 축기기 수도자의 정순지력으로 은연중에 호신강기를 뿜고 있었겠으나.

김영훈을 상대하며 법력이 잔뜩 닳아있는 막리가 장로의 호신강기는, 연기기 수도자의 방어법술만 못한다!

콰앙!

내 검강이 그의 얇아진 호신강기를 파고들며, 그의 목을 베어간다.

'자른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파아아앗!

그의 품에서 푸른 빛이 터져나왔다.

'구명법기!'

불허(不許)(4)

그 찰나. 구명법기가 작동하며 막리가의 장로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더욱 더 위쪽으로 솟구쳤으며.

내 검강은 그의 목이 아닌 가슴을 스칠 수밖에 없었다.

촤아악!

물론 그만으로도 그의 늑골을 자르고, 간을 절반으로 만들며, 폐 하나를 완전히 잘라버릴 수 있었으나.

막리가의 장로는 전신에서 피를 흘리며, 살아있었다.

"커헉! 꺼헉... 끄르륵.."

입에서 피거품을 마구 뿜으면서도, 흘러내리는 내장 조각을 법력으로 간신히 잡아두면서도.

그는 살아있었다.

"끄륵, 끅... 그, 복장... 청문세가...! 이 빌어먹을... 청문세가와 손을 잡았구나, 진가 놈들...!"

폐 한쪽이 완전히 으스러졌을텐데도, 그는 법력으로 망가진 장기들의 역할을 강제로 대체하며, 숨을 붙잡고 있었다.

가공할 생명력.

그러나, 저대로 두면 법력을 완전히 소진해서 죽어버릴 터.

"끄륵... 끄윽.. 청문가의 식솔이여, 나를 살려주시오. 보, 본가 차원에서 엄청난 보상을 드리겠소.

답천사막에서 일어난 대학살에, 현재 수많은 수도가문의 다수의 결단기 수도자들의 심기가 날카로워져있소...!

이백년 후 있을 대전쟁에 모두가 대비해야 하오..! 이런 상황에선 축기기 수도자 하나라도 중하외다..!"

"..."

난 말없이 검을 잡고 검강을 불어넣었다.

그 모습을 본 막리가 축기기 수도자가 이를 갈았다.

"이... 멍청한! 뭐가 중한지도 모르고...! 벽라국 국경을 넘은 것은 본가 차원에서 제대로 배상할 것이오!

그, 그러니 제발..."

부웅!

"이이익!"

그는 내가 날려보낸 검강을 회피하며, 이를 악물었다.

내가 대화가 통할 대상이 아닌 듯 싶자, 막리가의 장로는 수결을 맺으며, 가슴팍에서 빛을 뿜었던 구명법기에 힘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진원...! 생명력을 들이붓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신형이 일순간 파랗게 변하더니 어마어마한 속도로 결계의 어귀에 도달해 있었다.

'저건, 결단기 수도자의 비둔술!'

저 구명법기는 아무래도 결단기 수도자들이 허공을 날 때 사용하는 비둔술을 아래 단계 수도자가 흉내내게 해주는 듯 했다.

"빌어쳐먹을..! 이 내가, 내가 이대로 죽어줄 것 같으냐! 어림없는 소리다!!"

콰아앙!

막리가 장로가 온 힘을 다하여 법술을 쏘아내자, 결계가 유릿장처럼 박살나며, 그가 나갈 틈이 생겨났다.

그 반동에 수도진을 만들었던 진가 연기기 수도자들이 모두 한 움큼씩 피를 토한다.

"도망 못 간다!"

"하, 잡을 테면 잡아봐라!"

막리가 장로가 가슴팍의 구명법기를 움켜잡으며, 다시 한번 비둔술을 사용했다.

그의 신형이 눈 깜짝할 사이에 10장 바깥으로 이동해 있었다.

"잡아라!"

"예!"

나는 빠르게 허공을 박차며 강기를 쏘아댔다.

"흐, 빌어먹을 놈들...! 절대, 절대 네놈들의 계교에 쉬이 죽지 않을 것이다!"

번쩍!

그가 다시 한번 비둔술 구명법기를 사용했고, 푸른 둔광과 함께 그의 신형이 또 다시 저 멀리 이동해 있었다.

'저 방향은...!'

나와 김영훈, 그리고 진씨세가의 다른 연기기 수도자들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저 자는 지금, 연국 국경에 있는 막리세가의 연락소가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막아! 저 자가 연락소로 향해 가문의 축기기 수도자들에게 지원받게 하면 안 된다!"

"알고 있습니다!"

나와 김영훈이 미친듯이 막리세가의 장로를 쫓아갔고, 그렇게 국경 지역에서의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부웅!

나는 검을 휘둘러 검강을 쏘아내며, 빠르게 수결을 맺어 지수성(地囚星)에 대응하는 지수진언을 외워 법술을 사용했다.

"지수(地囚)!"

쿠구구!

법력이 쏘아지며 대지에서 기둥들이 뻗어나와 막리세가 장로를 가두기 위해 쏟아져 간다.

그러나 막리세가 장로가 법결을 맺자, 음풍(陰風)이 불어오며 그대로 대지의 창살을 갈갈이 찢어발긴다.

내가 뻗어난 대지의 창살이 음풍에 밀려 다시금 내게로 떨어진다.

파앗!

내 시야가 공간을 살피며, 내게 쏟아지는 돌무더기를 바라보았다.

틈이 보인다.

타닷!

나는 빠르게 산군월악비를 펼쳐 돌의 잔해들을 밟고 잔해의 폭풍에서 벗어나 하늘로 뛰어올랐다.

동시에 월악의 초식과 함께, 강하게 검을 휘둘러 검강을 쏘아내었다.

반원형의 백색 강기가 축기기 장로를 향해 쏘아졌다.

"하압!"

그가 수결을 맺자, 음기가 먹장구름의 형태로 뭉치며 그를 감싸안았고, 내 강기가 튕겨나간다.

동시에, 그를 감쌌던 먹장구름이 다시금 운룡의 형태로 변하며 내게 쏘아진다.

그러나 나는 그대로 그를 향해 쇄도해갔다.

막지 않는다.

파아앗!

등 뒤로 가공할 의념의 파동이 울리며, 파공성이 들려온다.

콰아아앙!

주먹만한 빛의 환(丸)이 나를 지나쳐 운룡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 운룡을 터트려버리고 막리가 장로에게 쇄도하였다.

"죽을 수 없다!"

번쩍!

그가 다시금 진원을 불어넣으며 구명법기를 발동하였고, 그는 비둔술과 함께 사라졌다.

동시에 그가 있던 자리에서 강환이 폭발한다.

빛의 폭풍!

수많은 광류(光流)의 도흔(刀痕)이 눈 앞의 공간을 메우는 듯 했다.

그 폭발이 잦아들 무렵, 나는 빛의 폭발을 뚫고 나가, 그 너머에서 도망치는 막리가 장로를 향해 크게 일참을 뻗어내었다!

단악검법

기산심천!

검강이 강화되며 크게 늘어난다.

그 범위가 넓어지며, 나의 검강이 그를 향해 쭈욱 뻗어나간다.

피융-

콰아앙!

길게 늘어난 나의 검강이 막리세가 장로를 후려치며 저 아래로 내려꽂는다.

나는 눈쌀을 찌푸리며 수결을 맺어 흙의 감옥을 형성했다.

'검강에 닿는 느낌이 둔탁했다.'

베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호신강기를 끌어올려 베이는 것이 아닌 맞는 것으로 그친 것이었다.

"지수(地囚)!"

쿠구구!

대지의 창살이 자라나며 막리세가의 장로를 가둔다.

그러나 흙의 감옥 속에서 기합 소리가 울려퍼지고, 그 한 번의 기세에 내 법술은 통채로 박살나서 터져버렸다.

'역시, 축기기 수도자는 체급 자체가 다르군.'

검강이고 법술이고, 제대로 된 유효타를 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의 발목을 잡아두는 데엔 성공했으니까.

어느새 다시 김영훈이 도착하여 강환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홉 개의 강환들이 막리세가 장로를 향해 쏟아져내린다.

번쩍, 번쩍, 번쩍!

빛의 폭풍이 수없이 밀어닥친다.

그와 동시에, 빛의 폭풍 사이로 푸른 빛살이 번뜩였다.

"죽을 수 없다, 이리 죽을 수 없어..!"

막리세가의 장로는 진원을 퍼부어가며 구명법기를 사용하였고, 그는 비둔술을 사용하며 김영훈의 강환세례를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도망쳤다.

그러나 미처 피하지 못한 공격도 있었는지, 그의 배는 완전히 갈라졌고, 한쪽 팔은 소멸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한쪽 팔을 정순지력으로 억지로 생성해내서 법결을 맺으며 도망치고 있었다.

'무슨 바퀴벌레도 아니고...'

나는 그 생명력에 혀를 내두르며 막리세가 장로를 쫓아갔다.

저게 무슨 인간이란 말인가?

'축기기 수도자는 머리, 심장, 단전 중 하나가 완전히 파괴되지 않는 한 결코 쉬이 죽지 않는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군.'

축기기 수도자는 체내에 생성한 정순지력과 연기기 때에 완성한 영맥이 상부상조하며, 장기 몇 개가 없어져도 정순지력이 얼마간 해당 장기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고 하였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인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사실이 그랬다.

물론 과다출혈이나 내장이 저렇게 파괴당한 상태에서 법력이 다 떨어지면 죽은 목숨이겠지만.

법력이 허락하는 한 저 상태더라도 안 죽는 것이었다.

나와 김영훈은 빠르게 막리세가의 축기기 장로를 쫓았다.

내가 그를 방해하며 발목을 잡으면 김영훈이 따라와 치명상을 입힐 공격을 퍼부어대고.

막리가의 장로는 그때마다 구명법기를 마구잡이로 써 가며 비둔술을 사용해 공격을 빠져나왔다.

끊임없이 그런 양상이 반복되었고, 막리세가의 장로는 반 시체가 된 상태에서도 저물대에서 약 같은 것을 꺼내 마구잡이로 삼키며 어찌어찌 버티는 듯 했다.

'한번에 끝내기가 쉽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저 자가 월수궁무록의 인식을 베어내어 은밀히 접근하는 방식에.

상당히 효율적으로 대처한다는 점이었다.

기본적으로 막리황신보다 지닌 법기가 많고 강력한 수도자인 것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이번 생에는 김영훈이 특히 막리세가와 많이 대적하였기에, 그의 특기들이 많이 상대들에게 알려진 탓 같았다.

'거기다가... 지닌 단약이 상당히 많은 자다.'

지금도 무슨 튀밥을 쥐어서 먹듯이 단약들을 저물대에서 한 움큼씩 쥐어서 입에 쳐넣고 있지 않은가.

'시간을 끌면 곤란하다...'

벌써 날이 슬슬 저물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며 어검(馭劍)을 허공으로 날리며 막리세가 장로의 뒤를 쫓았다.

검끝이, 축기기 수도자를 추격한다.

본래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 행동.

축기기 수도자에겐 검강을 쏘든 몇 번이고 검을 내리치든, 그들이 가진 호신강기의 빈틈을 정확히 파고들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하지만, 막리세가의 장로는 사색이 된 얼굴로 내 어검을 피했다.

다 죽어가는 그에겐 내 어검조차도 엄청난 위협이 되는 것이다.

스팟!

내 어검이 막리세가의 장로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역시, 난전(亂戰)에서는 정밀하게 어검을 조종하기가 쉽지 않다.'

제대로 된 발판이 있어야 한다.

나는 허공에서 내려가, 땅을 짚었다.

"천속(天速)!"

나는 천속성(天速星)에 대응하는 천강법결을 외며 법술을 사용했다.

쿠그극!

대지가 뭉치며 내 발 아래에 둥그런 원판을 형성했다.

내가 수결을 바꿔맺자, 원판이 대지를 미끄러지듯이 흘러나갔다.

쿠구구구구!

지반(地盤)이 내 탈것이 된다.

수많은 나무와 바위가 내 뒤로 스쳐지나간다.

저 위쪽으로 이제는 속도마저 느려진 막리가 장로가 보인다.

지상에선 내가, 천공에선 김영훈이 그를 위아래로 포위하고 각자 강환과 검강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원판 위에서 기수식을 잡고 검을 그러쥐었다.

'끝을 내주마..!'

이번엔 발밑이 튼튼하다.

안 놓친다!

우우우웅!

납검(納劍)을 한 상태에서, 기를 끌어모았다.

쿠구구구구!

빠득, 빠드드득...!

검집이 힘을 버티지 못하고 덜걱거리며 쪼개져 간다.

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나쁘지 않군.'

삶의 끝은 얼마나 처절한가.

죽음의 순간은 얼마나 힘겨웠는가.

하나, 이번 생의 죽음은.

상당히 의미있게 끝날 것 같았다.

해가 떨어졌다.

다음 날 동이 트기 전.

내 수명이 다할 것이다.

'자, 간다.'

단악검법

11초, 단애(斷崖)!

콰자작!

발검하지 않는다.

검집에 들어있는 상태로, 검집 자체를 베어버리고, 그대로 하늘을 향해 검강을 올려베었다.

가공할 속도로 내 검강이 하늘로 쏘아졌고, 하늘에선 아홉 개의 빛무리가 떨어진다.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막리세가의 장로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결인을 맺었다.

"...흐, 그래. 너희가 이겼다."

빛살이 천지간을 메웠다.

빛의 폭풍 속에서, 나는 막리세가의 장로의 전신이 난도질되며, 결국 모든 호신강기가 흩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커헉..!"

하늘을 날던 수도자가, 땅으로 떨어졌다.

철퍽!

가까스로 숨이 붙어있었다.

그에게 남은 법력은 이젠 연기기 1, 2성 정도였고.

그마저도 흩어질 듯 미약하였다.

그의 생명력은 꺼질 듯 흔들리고 있었고, 이젠 심장 소리도 작아지고 있었다.

"네가 숨을 끊거라."

"알겠습니다."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죽어가는 막리세가의 장로를 바라보았다.

비참하게 벌레처럼 몸을 꿈틀거리는, 하늘을 날던 수도자.

나는 지난 삶을 떠올렸다.

먹장구름을 불러와 비를 부르고.

시커매진 하늘을 등진 채 오연하게 우리를 내려다보았던 그 자.

그때의 축기기 수도자는, 이젠 이런 꼴이 되어있었다.

"...죽기 전이 되니, 당신들 축기기 수도자도 그토록 무시했던 범인들과 다를 바가 없구려."

나는 담담하게 검을 들어올렸다.

그 때였다.

"...내가, 범인들과 다를 게 없다고..?"

막리세가의 장로가, 잔뜩 충혈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웃기지 마라... 나는 막리운련! 대막리세가의 장로이며... 위대한 수도일족이다...!"

파아아앗!

"...!"

"범인들 따위와, 비교하지 말아라...!"

그의 몸이 부풀어 오른다.

푸른 빛과 동시에 시체 썩는 냄새가 그에게서 강력하게 뿜어나온다.

그의 체내에서 일어나는 영력흐름에, 나는 그가 무얼 하려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자폭(自爆)...!'

타앗!

내가 황급히 몸을 피했고, 시퍼런 폭광이 주변을 뒤덮는다.

'뭐지, 이건...?'

그러나 나는 폭광을 보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폭발의 빛은 거대했지만, 파괴범위가 너무 협소하고 힘이 약했다.

'이건, 폭발이라기보단 차라리... 섬광탄(閃光彈)..?'

흠칫!

나는 그의 의도를 바로 알 수 있었다.

"김 형! 도망쳐야 합니다! 이 근처에..."

쿠구구구!

시체 썩는 냄새가 풍겨오며, 저 멀리서 시독(屍毒)이 잔뜩 섞인 녹수(綠水)가 강물처럼 이곳으로 들이닥친다.

키르르륵, 크르르륵..

크웨에엑!

크에에에엑!

나는 황급히 허공을 박차고 녹류를 피했으나, 녹류 안쪽에서 강시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오며 허공으로 뛰어올라 손톱을 휘둘렀다.

'제길, 이건...'

촤아아아!

녹류가 회오리치며 용솟음친다.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청포를 입은 중년의 수도자가 한 자루의 섭선을 들고 걸어나왔다.

그 거대한 의식의 크기.

이 영력의 압박!

'축기기 수도자가... 한명 더...!'

거기에 이 영기의 압박.

평범한 축기 수도자가 아니다.

축기 후기!

막리황신 급의 강자였다!

"갑자기 구조섬광이 터지길래 누군가 했더니, 운련 노야가 보낸 구조신호였군..."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던 청포 수도자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녹수들이 흐르며 막리운련이 남기고 간 옷가지와 저물대를 그에게 가져갔다.

"...훌륭한 연단사셨거늘. 그의 손에서 탄생한 품질 좋은 단약만 해도 수만개가 넘었건만..."

그가 이를 갈며 우리를 노려보았다.

"청문세가의 수도자, 그리고 진씨세가의 결전병기... 네놈들이 똑똑하게 진가와 막리가의 조약을 파고들어 운련 노야를 죽인 게로군..."

그는 대충 상황이 파악이 되는지, 나와 김영훈을 번갈아보며 영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이 놈들... 편히 죽을 생각은 마라...!"

그러나 김영훈은 피식 웃으며 강환을 다시 뿜어냈다.

"뭘 근거로 그리 자신감이 넘치시는지 모르겠군... 축기기 네 번째 단계에 이른 막리운련 그 자도 몰아간 내가, 세 번째 단계에 불과한 당신에게 겁먹을 것 같소?"

"하하하, 운련 노야를 상대하느라 썩 지친 건 이미 알고 있다. 진가 연기기 떨거지들이 보조해봤자겠지. 그나마도 그 떨거지들 법력도 거의 떨어진 것 같은데... 네놈은 충분하지."

"흐... 나 혼자라면 그랬겠지만. 나와 함께하는 청문세가의 동생은 연기기 14성 이상 축기기 미만의 전력을 가지고 있소. 그가 합세한다면..."

"합세?"

그가 픽 웃으며 되물었다.

"아, 뭔가 착각하는 것 같군. 내가 언제 혼자 왔다고 했지?"

쿠우우우!

어두운 밤하늘.

시커먼 먹장구름이 또 다시 몰려오고 있었다.

방금 죽은 막리운련과 비슷한 수도공법을 익혔는지, 주변에서 일어나는 천기현상은 그와 똑 닮아있었다.

먹장구름의 크기는 막리운련의 반의 반 정도로 작았으나, 나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하늘이 음기(陰氣)로 뒤덮이는 듯 하다.

"본 가문의 후기지수 중 하나와 근처에서 마침 같이 재료 채집을 하던 중이라 같이 왔다네."

"막리군 숙부! 너무 빨리 가십니다."

도착한 것은 청포를 입은 젊은 사내였다.

오연하게 생긴 그는 영기를 갈무리하며 자연스레 그 기세를 드러내었다.

축기기 중기!

'그것도, 중기 후반... 후기로 곧 있으면 넘어갈 정도...'

막리세가의 직계!

후기지수라고 불릴만한 인물이 등장한 것이었다.

"네가 너무 느린 게 아니더냐 준아야. 뭐, 여하튼 잘 와주었다. 네가 진씨세가 떨거지들과 저 청문세가 놈을 맡거라. 나는 진가의 외당장로인 무림인 놈을 죽일테니."

"예, 그나저나 누가 섬광신호를 보낸 것입니까?"

"...운련 노야가 돌아가셨다."

그 말에, 사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운련 노야가요...? 그, 그 무슨... 노야 같은 대연단사가...?"

"진가와 청문가가 손을 잡고 벌인 일 같구나. 놈들이 막리가와 진가 사이에 맺어진 조약의 틈을 파고들었어.

저 청문가 놈의 손을 빌려, 벽라국 국경을 넘은 것을 명분으로 운련 노야를 참살한 것 같다."

"...이, 쓰레기 같은 놈들이..."

막리가의 사내가 흉신악살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네놈들이 누굴 죽인 건 줄 아느냐... 막리세가에서 결단기 원로분들 아래로 가장 존경받는, 위대한 연단사를 죽인 거다...

많은 자제들이 그분의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잃고, 네놈들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귀한 단약들을 제련할 기회가... 그대로 날아간 거란 말이다...!"

나는 개소리를 하는 청년을 바라보며 무표정하게 기수식을 잡았다.

"잘 됐군. 내 손에 저 쓰레기가 죽어서, 앞으로 수백 수천의 생명이 보전되겠구나."

어차피 오늘이 곧 내가 죽을 날.

이 자리를 무덤으로 정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다만, 마음이 쓰이는 것은...

"...김 형! 최대한 도망치십시오!"

김영훈이 이 자리에서 의를 펼치지 못한 채 죽는 것.

이제 곧 죽을 나는 괜찮았지만, 그는 조금 더 살았으면 하였다.

"할 수 있는 한 시간을 끌겠습니다."

산외산부진의 초식을 끌어올리며, 나는 둘 중 약해보이는 축기 중기의 청년에게 달려들었다.

"하, 가소롭다 못해 짜증이 나는군."'

쿠우우우우!

음풍이 불어닥친다.

음풍의 너머로 음기의 환(環)이 내게 날아온다.

단악검법을 펼치며 축기기 수준의 법술을 베어넘기고, 때때로 나도 수결을 맺으며 법술로 대항한다.

'모든 것을 짜낸다!'

수많은 법술을 베어넘기고, 흘려넘기고, 되치고, 그 틈새를 파고든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일말의 틈을 발견하여 틈새를 향해 쏘아져 들어갔다.

'벤다!'

내 일검이, 축기기 중기의 청년을 향해 쇄도했다.

단악검법, 22초, 단악!

스물 한개의 모든 초식이 한번에 펼쳐지며 내 검을 통해 터져나갔다.

'통해라!'

단악(斷岳)!

산조차 베어버리겠다는 기개의 이름을 가진 최후의 초식이, 축기 중기의 사내를 향해 쇄도한다.

그리고.

카앙!

내 검은, 부러져 버렸다.

단순히 검이 부러진 것을 넘어, 검에 씌워진 검강마저, 그대로 산산이 부스러진다.

방어법술을 펼쳤는가?

아니었다.

공격법술로 되쳤는가?

아니었다.

법기를 사용했는가?

아니었다.

축기 중기의 청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정순지력을 이용한 호신강기를 내뿜으며, 나를 우습다는 듯 바라보고만 있을 뿐.

그것만으로도, 오기조원의 무인이 펼치는 검강의 세례는 이도 들어가지 않는다.

'...이게, 축기기 수도자인가...'

축기기 진입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애송이라면 월수궁무록과 기타 무공을 사용해서 어찌어찌 목숨을 걸고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축기기에 진입해 제대로 경험을 쌓고, 축기 중기에 오른 이는, 오기조원으로선 결코 쉬이 상대가 불가능하다.

김영훈에게 강환세례를 한참 두들겨맞아 죽기 직전이었던 막리운련과는 달랐다.

그보다 경지는 낮을지언정, 법력과 체력은 팔팔한 축기기 중기!

'아, 그렇군.'

나는, 이 자에게 절대 이빨조차 박을 수 없다.

지난 삶에서 막리황신을 상대했던 것조차, 그의 실력이 축기기 네 번째 단계에서 연기기 13성 정도로 떨어졌기에 가능한 일.

그 이상은 결코 닿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게 끝인게냐? 이 벌레 놈."

콰아아앙!

막리가의 청년의 손에 가공할 음기(陰氣)가 몰려들더니, 하나의 용조(龍爪)를 형성해냈다.

그 용조가, 나를 그대로 후려쳤다.

나는 파공성을 내며 그대로 저 아래쪽의 숲으로 쳐박혔다.

"크헉...!"

순간 힘을 흘리며 방어법술을 펼치지 않았다면 일격에 절명할 뻔했다.

말 그대로, 체급이 다르다.

"컥...커헉..."

나는 피를 뿜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쿨럭, 쿨럭..

피가 섞인 기침과 함께, 내장 조각이 섞여 나왔다.

내장이 파열된 것 같았다.

"커..커헉...커..카...카하...카하학.."

난 피를 뿜으면서 시커먼 먹장구름에 가려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녹수를 다루는 수도자는 어느새 김영훈과 대치하며 그를 밀어붙이는 중이었다.

'...부끄럽기 짝이 없군.'

도망치긴 뭘 도망치란 말인가.

뭘 시간을 끈다는 말인가.

이렇게 바로 당해버려서 기식이 엄엄해졌건만.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부끄럽기만 한 인생.

이룬 것도 없으며, 나 자신이 하늘에게 거절당했다는 것만을 확인한 삶이었다.

오기조원의 너머는 커녕, 그 중반에는 간신히 왔을까 싶었고.

연기기 7성 이후는 이론만 빠삭히 공부했을 뿐, 정작 하늘이 허해주지 않아 도달하지 못했다.

마지막에는 조금 명예롭게 죽는가 했으나, 그조차 이리 비참하게 벌레취급 당하며 죽을 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인생이었다.

"쯧, 쓰레기같군. 청문세가에 있다는 오기조원의 무인이 네놈인가 본데... 어딜 철쪼가리나 들고 설치는 무림인 주제에 감히 수도자와 대적을 한 것이냐.

수도자의 선술을 조금 익힌 것조차 연기기 7성... 허섭스레기같고, 쓸모가 없구나..."

막리가의 후기지수가 혀를 차며 결인을 맺었다.

"네놈이 본가의 장로를 감히 국경을 침입했단 명분으로 죽였으니... 나도 네놈을 똑같은 명분으로 죽여주마..."

내 몸이 그의 법술에 들어올려지며, 벽라국과 연국의 국경 사이를 슬쩍 넘어가 버렸다.

"벌레같은 네놈의 운명으로 감히 본가의 대연단사를 죽인 것을 후회하며, 그렇게 죽어라."

그가 결인을 맺었다.

나는 자조적인 미소가 맺히는 것을 느꼈다.

'벌레같은 운명이라...'

맞는 말이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하늘이 나를 거부한다는 데,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한다는 말인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결코 닿을 수 없다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한다는 말인가.

나는 눈을 감으며, 내게 찾아올 죽음을 기다렸다.

이룬 것 없는 인생.

질기고 질긴 인생의 끝이, 그렇게 찾아왔다.

그것이 나의 일곱 번째 회귀인 줄 알았다.

콰아앙!

폭음이 울리며, 나를 동여매던 막리가 후기지수의 법력이 흩어져 버렸다.

나는 눈을 뜨고, 나를 풀어준 인물을 바라보았다.

너무도 익숙한 등이다.

"...스승님...?"

내 스승, 청문령(淸汶令)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어, 어찌 여기까지..."

나는 당황하여 그에게 물었으나, 스승님은 나를 돌아보지 않고 짧게 답하였다.

"서신을 보내지 않았더냐."

"예...? 그건... 사흘은 있어야 도착할 텐데..."

"흥! 사흘은 무슨. 평소에도 느려터진 네놈인데, 스승에게 보낼 서한까지 늦어서야 되겠느냐. 네놈이 출발하기 전 내가 훨씬 품질이 좋은 전송부를 네놈 저물탁에 넣어뒀다."

스승님은 한숨을 쉬며 한 손을 흔들었다.

그의 손에는, 잔뜩 구겨진 내 서한이 들려있었다.

"내가, 모를 것 같았느냐? 이 놈... 네놈 서체만 봐도 무슨 감정인지 알 수 있었다."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며 글을 썼다 생각했건만.

스승의 눈은 속일 수 없던 모양이었다.

"...제자야. 너는 왜 그리 끝까지 답답하느냐? 이 내가 그렇게 너와 함께 제의를 치루며 천문을 읽고 또 읽었건만. 너에 관한 천기를 몇백번이고 읽었는데, 네 수명이 다할 날이 다가왔다는 걸 모를 줄 알았느냐?"

"..."

"네놈도 제 수명의 끝이 다가온다는 걸 아는 것 같았길래 한번 보내줬다만... 이게 뭐냐. 넌 지금 명예롭게 죽고 싶어 온 거냐? 네가 감히 배은망덕하게 내게 아무 말도 없이 싸우다 죽으려 했던 게냐?"

스승님은 노한 기색으로 내게 소리쳤다.

그러나, 나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스승님의 의념은 짙은 검푸른 빛이었다.

슬픔(哀)의 의념.

하늘에 드리운 먹장구름처럼, 당신의 의념도 그리 물들어 있었다.

"...미안하구나."

그리고, 나는 내가 스승님으로부터 가장 듣고싶어하지 않았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못나,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어..."

"...아닙니다."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스승이 보는 앞에서 작별을 해도 되지 않겠느냐."

스승님은 여전히 나를 돌아보지 않고 말하는 중이었다.

어째선지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스승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으니까.

"...예. 그러겠습니다."

그때였다.

막리세가의 후기지수, 막리준이 피식 웃으며 스승님에게 소리쳤다.

"하, 당신 제자는 연국의 국경으로 함부로 넘어와서 내가 직접 참해야 하오. 썩 비키시지.."

"...뭔가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군. 각 국의 국경을 허락없이 넘지 못하는 것은, 연기기 수도자가 아니라 각 가문의 주요전력인 축기기 수도자다. 그러므로, 내 제자는 네게 심판받을 이유가 없다."

"흐, 그것 참 재밌군. 그렇다면 벽라국 축기기 수도자인 당신 역시 지금 연국 땅을 밟고 있으니, 당신은 심판대상에 들어간다는 건데?"

"...연국 땅?"

쿠구구구-

스승님의 주변으로, 녹빛의 영기가 넘실거리기 시작하였다.

"어린 녀석이 착각하는 것 같군. 수도가문들 사이에서의 영역은, 범인들의 척관법으로 명확히 정해진 게 아니다. 연국 땅이니 벽라국 땅이니 그런 범인들의 국경이 아닌. 각 대지에 흐르는 용맥(龍脈)을 기반으로 하여.

어떤 수도가문들에게 적합한 영기가 흐르는 대지를 각 가문의 영역으로 표시한 것이다. 그리고 그 영역 아래에서 범인들의 국가가 성립된 것이지. 범인들의 국경이 수도가문의 영역이 아니란 것이다..."

쿠구구구!

스승님의 진도(陣圖)가 주변으로 펼쳐졌다.

동시에, 주변의 기질(氣質)이 바뀌었다.

쿠구구구!

'이건...'

용맥(龍脈)의 기운이 바뀐다!

원래 이 대지에 존재하던 영기가, 벽라국에서 자주 접했던 기질의 영기에 밀려 몰려나기 시작했다!

"즉슨, 용맥이 곧 수도가문의 영역증명이기에. 이제 이 땅은 내가 용맥을 유지하는 동안은 우리 영역이라는 소리이지. 이젠 반대로 네놈이 청문, 벽씨, 공묘. 삼가(三家)의 땅을 침범했구나.

썩 꺼져라! 나와 내 제자의 마지막을 방해한다면 용서치 않을 것이다!"

"이익, 이이익...!"

막리준이 수결을 맺으며 스승님이 진도를 펼쳐 불러모은 용맥을 몰아내려는 듯 했으나.

법술을 다루는 기교와 경험의 차이인지, 법술을 시도하는 번번이 전부 파훼되었다.

"내 제자에게 손대는 것을... 불허(不許)한다!"

거목(巨木)

"억지 부리기는! 무어라 해도 당신이 진가와 막리가의 땅인 연국에 침입한 것은 변하지 않는다! 내 친히 네놈을 심판해주마!"

"심판..? 천둥벌거숭이가 감히... 누가 누구를 심판한다는 것이야. 말하지 않았느냐. 용맥이 이곳에 드리운 이상 이곳은 삼가의 땅이다.

용맥과 진법, 기초법결에 한해서는 벽라국, 연국, 성제국을 전부 합쳐도 나, 청문령만한 이가 없거늘. 네놈이 뭘 안다고 나불대는게냐."

"하! 억지는... 그래. 청문령. 그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긴 하지."

막리준이 이죽이며 말을 이었다.

"축기기 수사 중. 3대 위인이 있는데, 연단의 막리운련. 법기의 공묘천색. 진도와 기초법술에 청문령이라지? 한때 당신이 뭣 하는 위인인가 싶어 알아본 적이 있다.

감히 웬 놈들이기에 본가의 운련 노야와 비견되는지. 공묘천색은 천박한 자이나, 실력만은 확실하다던데.

당신은 몇백년을 수련해놓고 아직도 축기 초기더군. 그조차 기(箕)가 아닌 미(尾)의 단계? 얼마나 아둔하고 멍청하고 게으르면 축기 초기조차 극성에 달하지 못했단 건가?"

녀석이 낄낄 웃으며 살기를 드러냈다.

"그 스승에 딱 그 제자로군. 청문세가 본가에는 왠 밥만 축내는 식충이가 도움도 안 되는 기초법술, 선각후통이니 뭐니나 연구하며 눌러앉았다고 하던데. 그런 식충이에게 가르침을 청한 저 놈도 멍청하고, 아둔하고, 게으르며. 또한 쓰레기 같은 놈일 것이 분명하구나.

이곳이 이제 삼가의 땅이라고? 그럼 당신을 죽이면 다시 용맥이 물러가며 본가의 땅이 되겠군."

쿠구구구구!

그의 머리 위로 먹장구름이 움틀거렸다.

음기가 그에게서 충천하며, 사방을 물들였다.

나는 그 먹장구름을 바라보았다.

먹구름.

하늘을 막는 장막.

하늘이, 나를 거부하였다는 의지.

"...스승님."

"말하거라."

"제자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부끄럽고 또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스승님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나 일단은 내 말을 들어보겠다는 듯, 잠시 침묵하였다.

"하지만... 스승님. 제자는 스승님의 실력을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축기기 수도자와 부딪혀보며, 더더욱 확실히 알았나이다."

비틀, 비틀...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스승님에게 다가갔다.

"스승님은 비록 축기 초기이시지만, 저 자는 충분히 이기실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 말은... 스승님이 해온 것은, 의미가 없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까?

스승님께서 노력해온 세월의 가치가, 의미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스승님. 제자는 이 수명이 거의 닳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감히 스승께 청하겠습니다."

털썩..

나는 그의 뒤로 무릎을 꿇으며, 청하였다.

"제자에게 주었던 가르침이... 당신이 평생을 고련해온 모든 것이,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부디 저 무뢰배 놈이, 스승님께 막말을 한 것을... 후회하게 해 주십시오. 당신은 저런 말을 들어서는 아니되지 않습니까."

"...그래."

스승님이, 드디어 등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를 한번 안아준 후 내 손을 잡았다.

자글자글하고, 굳은살이 잔뜩 배긴.

평생의 고련(苦練)이 담긴 늙은 살갗이 느껴졌다.

"진즉 그럴 예정이었다. 제자야."

쿠우우!

하늘에서 운룡이 우리에게 떨어져 왔다.

"신파는 죽어서 실컷 하거라!"

번쩍!

퍼엉!

그리고, 스승님이 손을 들어올리자, 운룡이 그대로 터져나갔다.

스승님은 등을 다시 돌리고, 막리준을 노려보며 말하였다.

"우선, 네놈의 헛소리엔 정정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구나."

쿠구구구!

스승님의 주변으로 다시금 녹빛의 영기가 뿜어져 나왔다.

목(木) 속성의 영력이었다.

"우선, 첫째. 나는 네가 말한대로 아둔하고, 멍청하고, 게으른 식충이가 맞다. 하지만... 내 제자는 아둔한 녀석이 아니다. 아둔한 녀석들은 자신들이 타고난 자질을 가지고도 노력을 게을리하는 멍청한 놈들이지."

수목(樹木)의 영력(靈力)이 움직이며 스승님의 주변으로 진도(陣圖)를 그렸다.

"둘째, 내 제자는 멍청하지 않다. 자질이 조금 좋지 않을 뿐, 멍청한 이가 어찌 무공을 익혀 영통을 뚫겠느냐."

대지가 녹빛으로 꽉 차올랐다.

그리고, 대지 곳곳에서 빛무리가 터지기 시작했다.

"셋째, 내 제자는 게으르지 않다. 목이 쉴 정도로 진언을 연습하고, 손에서 피가 날 정도로 수결을 연습했다. 그 와중에도 자기 특기인 어검을 끊임없이 연습했다. 이 녀석은 절대 게으르지 않다."

녹빛의 영력들이 곳곳에서 뭉치며, 대지에 영력으로 이뤄진 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반경 10장이 스승님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가며, 대지 곳곳에서 무수한 영기의 싹이 돋아간다.

하늘의 어둠이 대지에서 피어나는 빛에 밀려가는 듯 했다.

"넷째, 내 제자는 쓰레기가 아니다. 좋은 자질을 타고난 본가의 똥오줌 못 가리는 자제들보다도 훨씬 노력하고 노력하며 스승인 나를 공경하였다. 이런 녀석이 쓰레기라면 이 세상 누가 쓰레기가 아니란 말이냐."

"하, 누가 식충이 아니랄까봐 같은 식충이인 제자를 열심히 변호하는구나."

"다섯째..."

파아아아-

스승님의 주변으로 영기로 이뤄진 녹빛의 나무들이 생장하였다.

영력으로 이뤄진 수림(樹林)이 새로 생겨나고 있었다.

"너는 나를 식충이라고 무시하는 것 같지만... 본 청문세가는 오직 좆대가리를 놀려 얻는 혈통으로만 서열을 정하지 않는다.

청문가는 투도(鬪道)를 숭앙하는 가문이며. 몇 년에 한번씩 열리는 투선회(鬪仙會)로 하여금 가원들의 서열들을 정한다. 서열이 낮은 이는 가문 바깥 영지로 밀려나가고, 서열이 높은 이는 본가에서 머무를 권한이 주어진다. 그리고... 나는 근 150년간 본가에서 머무르며 법술 연구를 이어갔다."

"...그게 어쨌단 거냐. 네놈은 그래봤자 축기기 제 1수(宿). 축기 초기 단계에 불과하다. 나는 축기기 제 2수(宿)! 축기 중기이다. 거기에 막리군 숙부께서 저 진가 외당장로 놈을 제압하신다면 축기 제 3수(宿)의 경지에 오른 수도자 역시 합세할 터. 넌 절대 이길 수 없다!"

"여섯째."

번쩍!

대지를 채운 영기의 수림이, 급작스럽게 거대화하기 시작하였다.

쿠구구구구!

"내가 평생을 다해 온 선각후통(先覺後通)은. 내가 제자에게 가르친 가르침은... 결코 틀리지 아니하였다!"

수많은 수목이 합쳐져, 하늘에 닿을 듯한 거대한 거목(巨木)이 되었다.

"제자야, 나는 부족한 스승이었다. 그렇기에 네게 뭔가를 해 준 것도, 해 줄 수도 없었다. 그저... 내가 네게 가르친 것이, 네가 배워온 그 모든 것이..."

쿠오오오!

운룡이 뭉치며 거목을 향해 포효한다.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결코 의미가 없지 않았음을... 단지 그것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구나.

제자야... 너는, 그리고 나는.

우리는, 결코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거목(巨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그걸 증명해주마."

콰과과과!

거목의 가지가 뻗어나간다.

갑작스레 하늘로 뻗쳐간 나뭇가지에서 또 가시 잔가지들이 뻗어나오며, 운룡을 가둬버렸다.

'지수(地囚) 진언의 원리..? 아니, 저건...'

나는 문득, 거목을 자세히 바라보며 경악하였다.

거목은 단순한 영기의 덩어리가 아니었다.

수백, 수천, 아니... 수천만은 물론이고 수억에 달하는 무수한 진언(眞言)과 주문(呪文)들이 거목을 이루고 있었다.

가히 헤아릴 수 없는 주술문자들이 거목을 이루었다.

그리고, 동시에 거목으로부터 법술(法術)들이 쏘아지기 시작했다.

콰과과광!

빛의 폭류(瀑流)가 휘몰아친다.

거목에서부터 발사되는 수천 수만개의 법술들이 하늘에 구멍을 내기 시작했다.

먹장구름이 찢어지며 사이사이로 별빛을 드리우는 밤하늘이 비춘다.

"크윽, 이 무슨..."

"선각후통이니, 선통후각이니 하며 많은 이들이 떠들어대지. 마치 그 둘이 동등한 것마냥 말이다... 선통후각. 말은 멋져 보이지만 그저 타고난 자질에 기대어 편히 경지를 높인다는 걸 고급스레 표현하는 게 아니더냐!"

막리준이 황급히 법술과 신통을 사용하였다.

음기가 응집되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목이 빛을 발한다.

스승님은 거목의 위에서 눈에 차마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빠르게 수결을 맺으며 외쳤다.

"손에 피고름이 맺힐 정도로 진언과 법결, 수인을 맺으며 간신히 도달하는 것. 그것이 선각후통이다. 그저 지성없이 높은 경지에 기댄 본능만으로 법술을 사용하는 네놈들과,

모든 법술을 꿰고 간신히 그를 바탕으로 경지에 오르는, 모든 선각후통의 수도자들이, 감히 동일선상일 듯 싶으냐!!!"

거목의 법술과, 먹장구름의 신통이 몇 번이고 부딪힌다.

그럴때마다 공기가 진동하고, 영기의 파동이 천지간을 휩쓸었다.

"선각후통으로 경지에 오른 나는, 동 경지라면 압도(壓倒)할 자신이 있다!"

거목이 한 번 먹장구름과 부딪힐때마다.

점차 거목의 생김새가 변하기 시작했다.

거목은 점차 사람의 형태로 변하고 있었다.

거대한 목인(木人)이 팔을 휘두른다.

하늘에서 음기로 뭉쳐진 운룡(雲龍)이 아래로 쇄도한다.

쩌어엉!

광풍이 휘몰아치며, 구름이 둥글게 파문을 그렸다.

막리준이 만들어낸 운룡이 찢어지며, 목인이 더욱 더 또렷한 형상으로 변화하였다.

목인(木人)은, 스승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깊고 깊은 뿌리를 대지에 박고, 하늘에 닿을 듯한 모습을 취한 거인(巨人).

그것이, 스승님이었다.

스승님은 거목(巨木)이었다.

두근, 두근...

아아, 아름답다.

동시에, 나는 심장이 기묘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내가 죽을 날.

죽을 시가 다가온다.

'살 수 없는가.'

아직 스승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눈에 채 다 담지도 못했다.

그런데 어찌 벌써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

억울하다.

'하늘이시여, 내게 준 것은 없으면서도, 어찌 이리 야속하게 시간을 지켜 내 명을 앗아가려 하십니까...'

두근, 두근..!

그리고, 나는 갑작스레 내 심장이 이상현상을 보이는 것을 알아챘다.

'심장마비...!'

몸은 오기조원에 이르러 환골탈태를 하였기에 아직 생명력이 팔팔했고.

내장이 조금 으스러지긴 했지만 아직은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늘이 어찌 나를 죽일 것인지 궁금했으나.

내 이번 사인은 급사(急死)인 듯 했다.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나는 시야가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조금이라도 더 스승님의 분전을 눈에 담기 위해 노력했다.

'스승님. 이 못난 제자는...'

문득, 나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승께서는 저리 나를 위해 열심히 분전하는데.

나는 뭐란 말인가.

단순한 천명(天命).

그것 때문에 스승님이 내게 주는 마지막 선물을, 전부 받지도 못하고 가야한다는 말인가!

정말로, 인간은 천명을 거스를 수 없단 말인가!

'아니, 아니야!'

그럼 수도자는 뭐란 말인가!

막리세가 놈들이 만드는 단약은 뭐란 말인가!

'쓰레기 같은 단약으로도 수명을 늘리는 것이 가능할진데... 나는! 정녕 이 수명에 그대로 굴복해야한단 말인가!!!'

그럴 순 없다.

죽을 때 죽더라도.

오늘 이 장면만은.

스승님이 마지막까지 분전하는 이 모습만은!

이 두 눈에 새기고 가겠다!

파아아앗!

내 손에 강기(罡氣)가 서렸다.

축기기 수도자들은 정순지력이라고 부르는 힘.

나는, 그대로 강기를 머금은 손을 내 가슴으로 가져가, 우악스레 심장으로 강기를 밀어넣었다.

"끄으으으으읍!"

고통스럽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하나, 강기가 주는 자극에, 심장은 그대로 다시 뛰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

'하늘이여! 어쩔 텐가! 내 심장은 다시 뛴다!'

나는, 지금 죽지 않을 것이다!

쿠구구구!

갑자기 내 뒤편에 있던 나무가 부러지더니, 내 쪽을 향해 쓰러졌다.

"끄읍..!"

나는 고통을 호소하는 심장을 무시하고, 몸을 굴려 가까스로 나무를 피했다.

콰악!

"...!"

손을 땅에 집자, 갑작스레 땅굴에서 뱀이 나타나 내 손끝을 물었다.

뱀의 무늬로 보아 강력한 독사였다.

'죽을 인간은, 반드시 제 명에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

어림없다.

이대로... 죽을쏘냐!

치이이익!

나는 내공을 조종해 혈류에 침입한 독기를 전부 몰아내어 손끝으로 뿜어내었다.

두근, 두근, 두근!

그리고, 몇 가지 방법으로도 내가 죽지 않자.

하늘은 다시 내 심장을 멈추었다.

하지만 나는 강기를 흘려넣어, 끊임없이 심장을 자극했다.

'심장이... 말을 안 듣는다..!'

심장은 이제, 강기의 자극이 없으면 아예 뛰려고 하지를 않았다.

내가 한순간이라도 고통스러운 강기의 자극을 멈추면 바로 멈춰버릴 터였다.

하지만!

'지금이다!'

두근!

심장이 뛴다.

이 날, 이 시, 이 때.

지금 이 순간!

나는 죽었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살아있다!'

강기로 심장을 자극하며 억지로!

비록 내공이 전부 소진되면 그대로 죽겠지만...

난 아직도, 아직도 이대로 살아있었다.

'하늘이여... 난 살았다. 비록 얼마 후 죽겠지만... 이 순간만은 눈에 담고 죽겠다!'

나는 심장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계속 견디면서도, 계속 스승님의 분전을 눈에 담았다.

거목은 점차 스승님을 완전하게 닮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번쩍!

거목의 모습이 완벽하게 스승님의 형상으로 화하였다.

"내 진도(陣圖)가 완결되었다."

그리고, 스승님의 형상으로 변한 거목이, 수결을 맺기 시작했다.

파아아앗!

거대한 목인은, 그 크기에 맞지 않게 어마어마한 속도로 수결을 맺는다.

스승님이 평소에 수결을 맺는 속도와 비슷하다.

그리고, 목인의 주변으로, 어마어마하게 거대해진 법술들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무, 무슨... 그게 끝이 아니었다고...!"

쿠구구구!

다시금 수천개의 법술들이.

이번에는 거대해진 상태로 막리준에게 날아든다.

그가 필살기마냥 펼쳐대는 운룡의 술법들 하나가, 거대한 목인이 사용하는 기초법술에 고작 맞먹을 뿐.

절대 뛰어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휘광이 번뜩이며, 스승님의 술법으로 불려나온 거대한 목인의 주변으로, 그 크기에 비례하는 진도(陣圖)가 깔리기 시작했다.

인근의 산(山) 전체가 그 진도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간다.

"이, 이게 뭐야... 이 법술 범위는, 결단기가 아닌가...!"

"활(活)!"

스승님이 결인을 맺자, 목인도 결인을 맺었다.

동시에, 그 주변으로 아까와 같이 영기의 싹이 돋아나더니, 거목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다시 거목들이 합쳐지며, 그대로 하늘로 치솟았다.

거목(巨木)이 구름을 뚫는다.

푸확!

"배(排)!"

동시에, 까마뜩한 높이의 거목에서 거대한 항력(抗力)이 느껴지는 듯 하더니, 원형으로 막리준의 먹장구름을 찢어발겼다.

먹장구름에 가려져있던 아름다운 별하늘이 모습을 드러낸다.

"결(結)!"

동시에, 거목의 가지 끝에서 새순이 돋고, 꽃이 피며, 열매를 맺었다.

열매는 마치 별과 같이 빛나고 있었다.

대지에서 자라난 작은 새순들이, 어느새 저 하늘의 별과도 같은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다.

"거(去)!"

그리고, 열매가 떨어진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저 열매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한 법술들의 응집체라는 것을!

"아, 아아아..."

막리준은 아연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떨어져내리는 열매들의 세례를 보며 알수 없는 침음성을 흘리고 있었다.

콰과과광!!

빛의 폭풍이 몰아쳤다.

거대한 원구 형태의 폭발이 일어났고, 그게 끝이었다.

그 폭발의 안쪽에는, 막리준은 물론이고 그의 저물대나 옷가지조차 흔적도 없이 소멸해 있었다.

"거(去)!"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남은 열매들이, 둥실둥실 떠오르더니, 저 멀리서 분전을 벌이고 있는 막리세가의 축기 후기 수도자.

막리군에게 날아간다.

"무, 무슨...!"

콰아아앙!

막리군이 손짓을 하자, 거대한 녹류의 파도가 일며 열매를 막아내는 듯 했으나.

그 틈을 타 그에게 날아든 김영훈이 강환을 뿜어냈다.

"아, 안..."

그리고, 찰나.

김영훈이 쏘아보낸 한 자락의 강환에, 막리군은 그대로 심장을 관통당해버리고 지상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남아있는 열매들 몇몇이 그가 떨어진 곳을 향해 더 떨어졌다.

콰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그 주변을 휩쓴다.

두근, 두근...

그리고, 하늘을 뚫을 듯이 높이 치솟아 있었던 스승님의 술법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동시에, 나는 내 내공이 거의 다 닳았다는 것을 인지하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스승께, 마지막 인사는 올려야 하지 않겠는가!

내공이고 법력이고 전부 끌어올려 강기로 변환시키며, 심장을 억지로 뛰게 만든다.

기혈이 꼬이고 단전이 만신창이가 되어갔으나, 나는 피를 토하면서도 스승님을 맞이하였다.

다시 땅으로 내려온 스승님의 안색은 파리하였다.

"...조금 무리하긴 했지만. 네게 보여줄 것은 다 보여주었다."

난 그의 안색을 보며 물었다.

"진원을... 소모하셨군요."

"흥! 저런 놈 정도는 장기전으로 가면 피를 말려 죽일 자신이 있었다. 목인의 술법을 완성하고 그 상태에서 두 번째 변형을 시도하는 게 아닌 기초법술 폭격을 해 줬다면 충분히 안정적으로 이겼다. 다만 네놈이 못 버틸 것 같았기에 일부러 빨리 끝내느라 그런 것 뿐이다."

"하하... 감사합니다, 스승님."

"..."

두근, 두근...

"...제자야, 너는 내 자랑이었다. 가문의 자제들이 내게 가르침을 청하긴 했으나. 그 중 한 놈도 내 독설과 잔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다.

하지만... 너는 끝까지 악착같이 남아 내 선각후통의 가르침을 전수받았다..."

스승님은 내게 걸어와, 내 어깨를 잡고, 한 손으로 내 이마를 짚었다.

"이것밖에 해 주지 못하구나.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네가 배우지 못한 법결을 네게 주는 것 뿐이다..."

우우웅!

뇌리로, 지식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서로의 의식에 간섭해서 바로 지식을 흘려넣는 법술이었다.

내 뇌리로, 스승님이 방금 사용한 신통술과, 그가 익힌 축기기 공법의 내용이 흘러들어왔다.

"곧 죽을 제자에게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이게 내 마음이구나. 짐이 아니라면 받아다오."

"...스승의.. 은혜가."

나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찌, 제게 짐이겠습니까."

저 멀리.

밤이 지나고 동이 트고 있었다.

결국 나는 질긴 집념으로, 심장을 강제로 움직이며.

내 수명보다 무려 하루나 더 살았다!

무려 하루나!

하지만 이젠 그것도 끝인듯.

내 내공과 법력이 모두 닳은 상태였다.

이제 끝이다.

새벽의 햇살이 산 너머로 비춰온다.

두근....

이젠 정말 끝.

'...하지만, 제자로서, 이리 끝낼 수는 없다.'

스승에게 받기만 하고 감사 인사조차 올리지 못한다면.

어찌 참된 제자라 할 수 있으리오!

콰앙!

내공은 전부 다 닳아 없어졌지만.

난 주먹으로 억세게 가슴을 후려쳤다.

가슴에 주먹 자국이 패였다.

내 주먹질에, 다시 멈추려 하는 심장이 다시 강제로 뛴다.

콰앙, 콰앙, 콰앙!

'어차피 죽을 것, 조금 더 아프게 죽자.'

스승님은 내가 무얼 하려는 지 알았는지, 입술을 파르르 떨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나는 가부좌를 튼 스승님께, 절을 올렸다.

한번, 두번, 세번...

다시 심장이 멈췄으나, 나는 다시금 가슴이 패일 정도로 가슴을 두들겨 강제로 심장을 움직였다.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뚝, 뚝...

왜 먹구름이 사라졌는데도 주변이 검푸른 빛인가.

왜 아직도 비가 내리는 것인가.

'아, 먹구름이 아니군.'

스승의 슬픔이며, 스승의 눈물이었다.

일곱 번, 여덟 번, 아홉 번...

구배지례를 올렸다.

구배지례는 본디 스승에게 올리는 아홉 번의 절이 아닌.

아홉 가지의 절하는 방식을 뜻한다.

무협지에서 시작되어 왜곡된 이 사제의 예.

그러나, 비록 왜곡된 예법일지언정.

내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아홉 번조차 부족했다.

예법에 근본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이 마음을 표하기에 족하면 그것으로 되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열 번의 절을 올린 나는, 쉰소리로 스승께 인사를 올렸다.

"지금까지, 더할 나위 없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안녕히 계십시오."

"...오냐. 잘 가거라."

물이 떨어진다.

스승님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줄 알았더니, 내 눈에서도 떨어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쉬어라, 사랑하는 제자야."

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 * *

새벽빛이 하늘을 물들인 와중.

제자의 절을 받은 스승은, 눈물을 흘리며, 이젠 차게 식어가는 제자에게 말하였다.

"너는 내 마음의 거목(巨木)이었다."

처음에는 분명 귀찮게 구는 작은 싹이었으나.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나고.

싹은 자라나, 나무가 되고.

자라나고 자라나.

이젠 무시할 수 없는 거목이 되었다.

그 거목은 청문령의 마음을 떠받치는 기둥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거목은 없었다.

"편히 쉬어라."

평생을 노력해온 제자.

청문령은 제자가 사후에나마 편하기를 빌어주며, 절을 한 채로 죽은 제자의 시신을 제대로 눕혔다.

청문령은 저물대에서 한 씨앗을 꺼내 제자의 가슴 위에 얹었다.

그가 목 속성의 법력을 불어넣자, 씨앗이 반응을 하기 시작했다.

파아아앗!

쿠구구구!

씨앗이 싹을 틔우며, 빠르게 자라난다.

이윽고 씨앗에서 나온 뿌리가 제자의 몸을 뒤덮으며, 거목(巨木)이 되어 자라났다.

어느새 인근 숲에서 그 어떤 나무들과도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나무가 거대하게 자라나자, 그제야 청문령은 손을 떼었다.

나무는 모과나무.

청문령은 제자와 똑 닮은 그 나무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너를 잊지 않으마."

휘이이잉!

직후, 서은현의 영혼이 승천하기라도 하는 듯, 모과나무의 밑동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와 하늘로 올라갔다.

청문령은 모과나뭇가지 사이로 비추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것이, 서은현의 일곱번째 회귀(回歸)였다.

7회차의 첫날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아직도 가슴이 아렸다.

지난 삶 죽기 전에 심장을 쥐어짠 탓인지.

그도 아니면 심장을 거세게 때린 환통(幻痛)인지.

그조차 아니면, 이젠 나와 인연을 쌓았던 그 스승님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아릿함인지.

'제자는, 스승님을 마음 속에 새길 것입니다.'

시간선이 갈라져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되었지만.

이 마음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짧게 맹세를 한 후.

나는 법결을 맺었다.

체내엔 법력이 한 줌도 없었으나, 선각후통으로 완벽히 체화한 법결들은, 체내에 흐르는 미약한 기(氣) 만으로도 얼마간 발동이 가능했다.

파아앗!

법결이 발동하자, 막 일어나려던 주변의 다른 동료들은 손댈것도 없이 다시 전부 잠들어버렸다.

나는 법결을 사용하고 나니,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느낌... 상단전이 이상하다..?'

뭔가, 상단전 안쪽으로 거대한 뭔가가 꽉 들어찬 느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게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연기기 7성 수준에 달했던 내 의식이군..!'

사실 오기조원 무림인들의 의식의 크기가 연기기 3, 4성쯤 된다는 걸 생각해보면.

그 상태에서 또 수도공법을 익혀 연기기 7성까지 올라선 내 의식의 크기는 연기기 10성 정도의 크기였다.

그 크기의 의식이 상단전에 꽉꽉 압축된 상태인데, 상단전이 멀쩡한 것이 이상한 것이었다.

'일단 몸이 오기조원에 이르러 환골탈태를 하기 전으로 돌아와서 상단전이 버티기 힘든가보군.'

나는 우선 이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근처에서 황주삼을 캐내어 먹고, 바로 환골탈태에 들어갔다.

다시금 천지영기의 오행이 내 몸으로 흘러들어왔고, 난 다시금 오영질을 얻고 수도자의 자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환골탈태를 하여 의식을 버틸 수 있는 조화력을 가진 육신을 손에 넣은 후에야.

나는 머리가 아픈 현상이 멈춘 것을 알아냈다.

동시에 상단전에 압축되어 있던 의식이 오기조원에 이른 후에야 제대로 풀려서 그 형체를 드러내었다.

지난 삶의 의식과 그 크기가 같았다.

나는 그를 보며 미약한 감회를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전승되는 것이 또 하나 생겼군...'

동시에, 나는 회귀의 법칙 중 하나를 파악할 수 있었다.

회귀하는 것은 내 영혼과 의식뿐이며.

의식이 성장한 다음 회귀한다면, 그 의식의 크기는 유지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우선 동료들을 동굴로 데려가 수면술로 계속 잠을 재워 놓았다.

그런 후, 나는 이번 삶에 대해 고민하였다.

"하늘이, 나를 허락하지 않는다...라."

어찌해야 하는가.

수도자가 되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승천문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삶 청문세가에서도 청문세가 내 서고를 이용하여 승천문에 대해 알아본 적이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과 크게 다를 바는 없는 정보였지만...

여하튼 승천문은 천 년에 한 번씩 열리는 공간균열이며.

한번 열리면 육개월에 걸쳐 점차 작아지며 다시 닫힌다고 하였다.

그리고, 승천문 내부의 공간 압력을 버티려면 최소 천인경 수도자급의 방어력은 갖춰야 하며.

한 번 승천문이 닫히면 다시 그 승천문을 구경하기 위해선 1000년을 기다려야 한다.

천 년.

그 긴 시간을 기다리기 위해선, 최소한 원영기 수도자급의 수명과 힘이 필요했다.

그랬기에 수도자가 되기로 한 것.

'무공은 아무리 익힌다 한들 육신을 전성기의 상태로 만들어줄지언정, 수명이 늘어나진 않는다.'

내가 직접 지난 삶에 확인했던 사실.

그러나, 나는 수도자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하는가?

어떤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말인가?

스승님이 내 뇌리에 축기기 공법과 연기기 후반에 대한 지식을 넣어주셨다 할지라도.

정작 연기기 7성을 절대 넘을 수 없건만.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한번, 매달려 보아야겠군."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며칠 후 찾아올 천인기의 노괴들.

금신천뢰문, 흑색귀골곡, 창천개벽문.

그리고 해룡왕과 꼽추 노인.

그들에게, 매달려보자.

발을 핥아서라도 방법을 물어보자.

난 이를 악물고, 잠든 동료들 옆에서 수도공법의 기초.

단수(丹修)의 단계를 다시 밟기 시작했다.

다섯 영질을 균일화시키고, 단전에 안착시킨다.

그런 후 음양이기로 조화를 맞추어 혼원지력으로 닦아낸다.

지난 삶에 이미 이룬 경지인 탓일까.

나는 이틀 밤을 새워 바로 단수공법을 완공하고 법화단전을 완성했다.

이젠 언제든지 연기기 1성에 진입할 준비를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날이 찾아왔다.

또 다시 금신천뢰문의 태상문주, 흑색귀골곡의 원로원주, 창천개벽문의 개파조사.

세 명의 천인경 수도자가 우리에게 내려왔다.

[영근을 가진 건 이렇게 넷인가?]

금신천뢰문 태상문주, 금벽호가 우리를 끌어당겼다.

그러자 천지영기가 자연스레 감응하며 나, 오현석 차장, 전명훈 과장, 강민희 대리를 앞으로 끌고갔다.

그리고 또 다시 이전 삶과 비슷한 반응들이 터져나왔다.

[천상금뢰지체...! 전설상의 체질이라니!]

[귀, 귀도음화선근..!]

[일문성체! 하하하,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는구나!]

그리고, 셋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남은 내게 향하였다.

[흠? 단수기 완공의 단계로군. 보아하니 본래 수도자였던 것 같은데... 호오? 이것 봐라. 의식의 크기는 연기기 10성 급인데?]

금벽호가 내 의식의 크기를 보며 탄성을 터트렸다.

그러자, 나머지 인원들의 시선들에 다시금 탐욕이 어렸다.

[어디, 자질을 검사해볼까.]

동시에, 천지영기가 내 몸으로 강제로 스며들며 몸 곳곳을 헤집었다.

뿌드득, 우드득...!

"크윽..끄으으읍!"

나는 이를 악물고 그의 악랄한 자질검사를 거쳤고, 얼마 후.

내 영질이 오영질인 것이 판명났다.

다섯 영기가 광채를 내뿜자, 세 수도자는 단번에 실망한 기색이 되어버렸다.

[쯧, 단수기인 녀석 의식의 크기가 예사롭지 않기에 기대했건만...]

[이 녀석은 별볼일이 없나보군.]

[흠, 그래도 아무런 영맥도 할성화되지 않은 걸 보면 막 수도공법을 익히기 시작한 것 같은데... 그 정도 의식의 크기면 썩 나쁘지 않은 자질이로군.]

창호자만이 그나마 내 의식의 크기에 대해서 조금 호감을 보이는 태도였다.

이대로라면 또 다시 창호자만이 내게 추천권을 넘겨주고 전부 가버릴 상황.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며 크게 외쳤다.

"천인경의 대선배들께 인사드립니다! 저는 무공으로 오기조원에 올라 영통을 강제로 뚫었으며, 수도자가 되고자 간절히 바라왔습니다! 하오니 부디 이 천것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저를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파아앗!

나는 허공에 강기를 덧씌우며 휘둘러보여 내 가치를 증명했다.

"축기기 수도자들이 쓰는 정순지력 역시 다룰 수 있습니다. 제 전력(戰力)은 연기기 14성 이상, 축기기 미만입니다. 저를 데려가시면 바로 연기기 14성 급의 전력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부디 대선배들께서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흠...]

[오기조원이라... 분명 그런 게 있긴 했었지...]

금신천뢰문의 금벽호와 흑색귀골곡의 백골귀마는 어쩐지 시큰둥한 표정이었고.

창천개벽문의 창호자는 굉장히 흥미가 동한 얼굴이었다.

"오, 벽라국어를 할 줄 아는구나. 벽라국 사람이냐?"

그는 의식을 통해 말을 전하는 심언(心言)이 아닌 육성으로 벽라국어를 쓰며 물어왔고, 나 역시 그에 맞춰 대답하였다.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벽라국에 내 방계 가문이 있는데..."

그러나, 그는 내게 일정 이상의 흥미는 없었고, 이번에도 그저 추천권으로 끝낼 생각인 듯 했다.

나는 이를 악물며 물었다.

"어째서 제게 기회를 주지 않으십니까! 저를 데려가시면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흠... 아마 승천문이 열릴 시기가 아닐 때, 네가 창천개벽문을 찾아왔으면. 아니, 본문뿐이 아닌 저 금신천뢰문이나 흑색귀골곡으로 갔어도, 너는 충분히 내당제자로 들어갈만한 자질이다. 하지만, 승천문이 열리는 지금은 다르지.

이미 우리는 문파 내의 최중요 인원 전체를 압축해서 비승할 예정이고, 한 명씩 추가될 때마다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부담은 곱절이 된다. 이 녀석들의 자질, 천상금뢰지체니 귀도음화선근이니, 일문성체니 하는 것들이 워낙에 전설적이다 못해 신화적인 자질이기에 그 부담을 각오하고 데려가려는 것이다."

그런가.

내가 지닌 자질 정도로는 날 데려갈 수 없단 것인가.

나는 이를 악물고, 세 명의 천인기 수도자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면,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감히, 조금 상대해줬더니 우리가 한가한 것처럼 보이더냐!]

쿠릉!

금벽호가 노갈성을 지르자, 천지영기가 그에 호응하며 한 줄기 벼락이 하늘에서 떨어져내렸다.

콰아앙!

"크으으윽...!"

나는 벼락에 직격당하며 비명을 내뱉었다.

전신이 타들어가는 것 같다.

'주, 죽는...'

"거 참. 성질머리 한번 더럽군."

부웅-

그러나 창호자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목 속성의 영기가 치유의 힘을 품고 나를 뒤덮었다.

내 체내에 있는 뇌기가 밀려나며 전신이 바로 회복되었다.

"커, 커헉...! 허억...!"

[흥, 고향 사람이라고 챙겨주는 거냐.]

"네놈들이 너무 성질머리가 더러운 게 아니냐. 후배가 궁금한 게 있을 수도 있지. 말 한 번 했다고 벼락을 떨구기는."

창호자는 혀를 차며 말했다.

나는 창호자를 믿고, 일단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질문을 물어보기로 하였다.

"선배들께 여쭙습니다. 선배들께서 저를 데려가실 생각이 없으시다면, 혹여 하늘에게 수선(修仙)의 길을 불허(不許) 받은 이가 어찌하면 그를 극복할 수 있는지 여쭙고자 합니다.

연기기 7성에 이르러 칠성제(七星祭)를 지내고자 하는데, 제를 지낼때마다 하늘에서 먹구름이 일어나 천지영성을 막는 현상이 일어난다면 어찌해야 하나이까!"

내 질문에, 백골귀마가 일단 불쾌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가리켰다.

푸콱!

그와 동시에 내 양팔이 그대로 터져나갔다.

[창호자가 네 재롱을 봐준다 해서 지나치게 방만하구나. 진짜 네게 우리에게 말을 걸 권한이 있다고 믿은 것이야?]

"쯧쯧, 모르면 모른다 할 것이지. 미친 놈 같으니라고."

창호자는 혀를 끌끌 차며 다시 내 양팔을 회복시켜 주었다.

백골귀마는 강민희 대리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기며, 더 상대하기 귀찮다는 듯 허공으로 떠올랐다.

[흠, 천거(天拒) 현상이라. 본문의 문헌에서 봤던 기억이 나는군.]

금벽호는 그나마 내 질문이 흥미로운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말했다.

[타인이 도와주면 칠성제의 의식이 깨어지니, 내 알기로 제의를 치루는 본인이 천거 현상에 생기는 이상현상을 밀어내면 될 것이다.]

"하하하, 이 친구 얼굴이 썩어들어가는 게 보이는군. 하기사 아무 도움도 안 되는 해답이긴 하지 않나? 칠성제를 치루는 수도자는 연기기 수도자인데, 연기기 수도자들이 무슨 힘이 있답시고 천거 현상을 본인 힘으로 막나? 세살배기 어린애도 할법한 답안이군!"

[...쯧, 어쩌라는 거냐. 짜증나는 놈이군! 난 이만 가겠다!]

쿠릉!

콰아앙!

금벽호는 애꿎은 화를 내게 다시 벼락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풀고는 허공으로 떠올랐다.

"크아아악!"

이번에도 역시 나는 육신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끼다가, 창호자의 치유법술에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청문세가 시조, 창천개벽문 개파조사 창호자께 감사드립니다."

"별 것 아니다. 쯧쯧... 천인기쯤 되면 다들 오래 살아서 그런지 성격이 모두 한 부분쯤은 맛이 가 있으니 그러려니 하거라. 그럼 네게는 일단 청문세가의 추천권을 줄 테니 그곳으로 가 보거라. 너 정도의 의식크기면 승천문이 열리기 전에는 어디서든 환영받았을 텐데, 아쉽군."

그러나, 나는 그의 앞에 읍을 하며 말했다.

"말씀은 감사하오나, 저는 승천문이 열리는 이 시기에 등선향을 지나실 많은 분들께 계속 청을 올릴 작정입니다."

"흠? 청을 해도 다들 우리처럼 자기내 문파 최중요 인원과 후기지수를 바리바리 싸 들고 가는터라 너를 챙길 여유는 없을텐데?"

"하지만... 자문파가 없이, 그저 홀로 가시는 분도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알기로 등이 굽고, 괴뢰를 부리시는 한 분께선 문파가 없는 것으로..."

내 말에, 창호자가 얼굴을 팍 찌푸렸다.

[뭣! 괴군(怪君), 그 미치광이한테 청을 올린다고!]

그는 무언가 당황을 한 것인지, 육성이 아니라 영언으로 외쳤다.

그의 영언에, 허공에 떠올라 비둔술을 쓸 채비를 하던 금벽호와 백골귀마가 다시 이곳을 내려다 보았다.

[괴군? 그 정신나간 노인네 별호가 왜 나오지?]

[그 소름끼치는 미치광이 얘기는 또 왜 꺼내는 건가?]

'어...?'

어째 반응이 좋지 않았다.

심지어 하늘로 올라갔던 두 천인기 수도자들이 다시 이쪽으로 내려올 정도였다.

금벽호의 얼굴은 어쩐지 시뻘개져 있었다.

[네놈, 설마 괴군 그 미치광이 새.. 아니, 그 미친 작자에게 우리와 똑같은 청을 올리려는 건 아니겠지!?]

"...맞습니다만."

[뭐! 네가 어떻게 그 미치광이를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 아니, 하도 유명한 인간이니 모르기 힘들겠지 그래. 하지만 내가 진심으로 충고하건데, 그 정신이상자한테는 접근도 하지 말아라!]

"예...?"

나는 의아하게 되물었다.

지난 삶에서 만났을 때는 내가 오기조원의 무인이라는 것을 알자 꽤 호감가게 대해줬던 것이 생각이 났다.

심지어 의식공법인 은식술까지 선물받지 않았던가?

그러나, 백골귀마 역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내게 충고를 하였다.

[괴군은 알고 있으면서 그가 뭐하는 작자인지는 들어보지 못한 것이야? 그 작자는 가끔은 멀쩡해 보여도, 수시로 광증(狂症)이 도지고 발작을 하는 미치광이야. 그 어떤 마도(魔道) 종문이나 세가의 수도자들보다도 그 자가 더 소름끼치고 무시무시하다.

혹여 그에 대한 멀쩡한 기록 같은 걸 읽고 그런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 미치광이가 멀쩡한 시기는 애초에 별로 많지 않고, 대부분 미쳐있으니 상대를 하지 말아라!]

창호자 역시 내게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말하였다.

"너는 심지어 오기조원의 무림인이라 하지 않았더냐? 그 자가 무림인에게 보이는 기묘한 집착은 유명하지. 젊은 시절 연인이었던 무림인이 오기조원이었더랬나? 자기 연인이 죽은 후부터, 그 미친 작자는 무림인들을 잡아들여 산채로 개조해 꼭두각시로 만들기로 유명했다!

충고컨데, 절대 그 작자에게 다가가지도 말아라! 너는 괴군에게 잡혀서 생체괴뢰로 개조(改造) 당할 수도 있어!"

"..."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여하튼, 삶을 함부로 버리고 싶지 않다면, 그와 말도 섞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그가 나타났을 때 바로 숨어서 들키지 않게 빌어야 할 것이다! 내 말을 명심하거라!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은 말고 청문세가의 추천권을 줄 테니 그쪽으로 가는 게 좋을 것이다."

나는 멍하니 창호자에게 추천권을 받았고, 창호자는 몇 번이나 더 꼽추 노인, 괴군이라는 자와 마주해서는 아니된다고 경고를 한 후 떠나가 버렸다.

'...도대체 뭐지, 그 자는?'

난 나름 멀쩡해 보였던 꼽추 노인을 떠올리며, 심히 마음 속으로 갈등이 이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 이전에...'

나는 내가 벽라국어로 수도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광경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바라보던 김연 주임을 바라보며 고민하였다.

'김 주임을...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은데...'

저 자들의 말대로라면 김연 주임이 괴군이라는 노인에게 잡혀가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어찌 막아도 김 주임은 그 거대한 의식을 각성할 것이고, 괴군이 잡으러 올 터...'

천인기 수도자의 힘은, 의식을 제대로 가지고 수도법술에 대한 이해가 생긴 지금에서야 이해가 가능했다.

생각만으로 천지영기가 자연스레 감응한다.

그런 괴물들을 어찌 상대한다는 말인가.

비유가 아니라, 그들은 실제로 연국을 일격에 나라째로 가루로 만들어버릴 수 있으리라.

* * *

걱정과 불안이 교차하는 가운데.

다시금 오혜서 대리가 호풍환우의 힘을 각성했다.

그리고 해룡왕 서휼이 그 힘의 발원지를 느끼고, 그녀를 데리러 왔다.

나는 그녀를 데리러 온 서휼에게 무릎을 꿇고 질문을 하였다.

"해룡왕께 미천한 범인이 질문을 올리고자 합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질문을 받아주소서..."

[흠, 마음대로 하게나.]

"혹여, 해룡왕께선 괴군이라는 수도자 분을 아십니까?"

그러자, 지금까지 한 번도 근엄함과 점잖은 표정을 잃지 않았던 해룡왕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 찢어죽일 미치광.. 흠흠. 그 정신이상자는 뭣 때문에 물어본 건가?]

"..."

이로써 확실해졌다.

꼽추 노인.

괴군이라는 자는, 모든 이들이 꺼리는 확실한 미친 놈인 것이다.

'그 점잖던 해룡왕이 이런 반응이라니...'

"...괴군이라는 분이 어떤 짓을 하셨길래 그리 다들 좋아하시지 않는지 알고싶습니다."

[그 자식에 대한 존칭은 집어치우게. 그 정신이상자는 매우 변태적인 교미욕구를 가지고 있어, 자기 괴뢰에다가 박는 자이지. 천인경쯤 되면 1000년 이상 살아왔기에 다들 한 부분쯤 정신에 이상이 있지만...

괴군은 한 부분만 빼고 모든 정신이 이상이 있는 자일세. 절대 상대하거나, 말을 섞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네! 그 자가 자기와 말을 섞은 이를 놓아주는 경우는 매우 기분이 좋거나, 굉장히 운이 좋은 경우이고.

보통 그 미치광이는 자기와 한번 이상 말을 섞은 자는 잡아다가 생체괴뢰로 개조해 버리기로 유명하지.]

"..."

나는 그에, 할 말을 잃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지금까지 나는 굉장히 운이 좋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운이 아니라 그 자가 김연 주임을 제자로 맞아서 매우 기분이 좋았던 건가..?'

하기사, 생각해보면 다른 이들은 성정이 흉포하다고 해도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고 갔지만.

괴군이라는 노인은 김연 주임에게 속세와 연을 끊느니 뭐니 하며, 늘 나와 김영훈을 죽이려 했었다.

'늘 김 주임이 말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매번 죽었겠지.'

곰곰히 생각해보니, 확실히 그는 미치광이였다.

그리고, 그런 미치광이에게 김 주임이 납치당하게 두는 것은... 너무 잔인한 처사였다.

털썩!

나는 해룡왕께 무릎을 꿇고 간청하였다.

"해룡왕께 부탁드리나이다... 부디, 여기 김연이라는 여인 역시 해룡왕의 제자, 혹은 혈족으로 받아주소서..!"

[...뭐라? 본왕이 왜 그래야 하지?]

괴군의 얘기로 잠시 흥분하는 듯 하던 서휼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오며 내게 되물었다.

나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우리는 이계인이며, 각자 이 세계로 오며 특이한 능력을 손에 넣었으며.

김연 주임은 천인경을 뛰어넘는 크기의 의식을 얼마 지나지 않아 각성할 예정이고.

그 자질을 괴군이 탐내어 그녀를 제자로 잡아갈 것 같다고.

[흐음... 사정을 듣게되니 딱하군. 괴군의 눈에 들다니...]

하지만 아무래도 해룡왕은 우리가 갑작스레 이계로 떨어졌다는 얘기보다는, 괴군이 김 주임에게 눈독을 들인다는 말이 더 딱한 듯 했다.

[그런데, 자네는 그런 걸 어찌 아는 거지?]

"...이것이 제가 얻게 된 능력입니다."

[흠, 예언 같은 것인가? 혹여, 자네도 데려가 달라는 말은 사절하겠네. 경지에 이른 이들은 운명에 대한 감이 생겨, 앞날에 대해 대략적으로 아니까. 예언 능력만큼 쓸모없는 것이 없거든.]

"...전 상관이 없나이다. 부디 해룡왕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그녀를 데려가주십시오."

[흠...]

서휼은 잠시 고민을 하는 듯 싶더니 말했다.

[본왕으로서도 한 명을 더 데려가는 것은 큰 부담이네. 사실 이 처자를 데려가는 것도 엄청난 부담이지만, 그녀의 능력이 본 종족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데려가려는 것이고...

거기에 한명을 더 데려가라니...]

"..."

[하지만, 괴군에게 어떤 꼴을 당할지가 너무 걱정되고, 또 자네가 말한대로라면 그녀의 의식은 썩 쓸모가 있겠지...]

그는 얼마간 고민하는 듯 하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생각해보니, 자네가 말한 게 거짓일 가능성도 있지 않나? 저 처자가 아무런 능력도 각성하지 못한다면, 나로서는 아무런 매력이 없는데...]

"...하면, 해룡왕께서 제가 거짓을 말했다고 판단되시면 저를 씹어 잡수셔도 됩나다, 제 예지... 능력에 의하면, 그녀가 능력을 각성하는 것은 오늘 하루 안쪽이니, 그때까지만 확인하면 될 것입니다."

[흠...]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 싶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 자네의 말이 거짓일 경우, 난 그녀를 그냥 승천문 근처에 버리고 갈 예정이네. 어차피 자네가 말한 능력이 거짓이면 괴군이 눈독도 들이지 않을테니 상관이 없겠지. 하지만... 괴군의 능력은 너무 강대하여, 만약 그녀가 그 능력을 각성할 때 알아차린다면, 나도 어쩌면 당해내기 힘들 순 있겠지만...]

"...!"

[그래도 자네가 말한대로의 능력이라면 도움이 썩 될테니, 최대한 지켜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해룡왕이시여!"

말을 마친 해룡왕은 김연 주임에게 다가가 그녀의 팔목 역시 붙잡았다.

김연 주임은 무슨 일인지 몰라 깜짝 놀라며 발버둥쳤다.

[흠, 반항이 심하군. 잠시 자고 있으시게나.]

투웅-

해룡왕에게서 나긋한 의식파동이 뿜어졌고, 의식파동을 맞은 김연과 김영훈, 오혜서는 전부 정신을 잃고 잠에 들었다.

[...어쩌다보니 말을 많이 나누게 되었군. 인연이 이리 되었으니, 자네를 데려가진 못해도, 등선향 바깥으로 내보내줄수는 있네. 어떤가?]

우웅-

해룡왕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동굴 안쪽으로 공간균열이 벌어지며 시커먼 입을 벌렸다.

'...하긴, 김 주임이 해룡왕에게 간다면 괴군 노인이 굳이 이쪽으로 올 일도 없으니...'

난 잠시 생각을 하다가, 일단 잠들어있는 김영훈에게 다가갔다.

그런 후, 법결을 맺었다.

내 의식과 그의 상단전이 연결되었다.

난 그의; 이마를 짚고, 지난 삶, 스승님이 내게 지식을 넘겨주었던 법술을 사용하였다.

김영훈의 뇌리로 연국어와 벽라국어, 그리고 성제국어 약간의 지식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단맥도법과 단악검법, 기타 등등의 무공.

월수궁무록과 조수월무록, 월수월무록, 월도월무록 등의, 지난 삶의 김영훈이 쌓아올렸던 구결들을 불어넣었다.

'...이번 삶의 김 형은, 괜히 저와 연관되어 위기에 처하시지 마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김영훈의 뇌리에 막리세가의 잔혹무도한 짓과.

황제 막리정을 죽이면 막리세가의 무도한 짓이 조금 줄어든다는 정보를 불어넣어 주었다.

김영훈이 황제 막리정을 죽이면, 진씨세가에서는 괜히 암살부대를 운용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제자들 또한 자연스럽게 진씨세가의 밑에서 일을 하는 일반인으로 돌아갈 터였다.

나는 김영훈에게 일단의 지식을 불어넣어준 후, 그를 들어 공간 균열에 집어넣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김 형."

이번 삶에서는 볼 일이 없을 것이다.

[호, 자네는 가지 않겠는가?]

"...예."

나는 등선향의 공기를 들이마시었다.

등선향 바깥.

연국이나 벽라국보다, 몇 배는 더 농밀한 천지영기가, 이곳에 즐비했다.

어차피 바깥으로 나가도, 연기기 7성을 뚫지 못하는 건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번 삶은 등선향 안쪽에서, 이 농밀한 영기 속에서 수련을 하며.

끊임없이 하늘에게 제의를 치룰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스승님이 내게 불어넣어준, 연기기 후반의 깨달음들, 축기기 공법을... 무의미하게 만들쏘냐?'

하늘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하늘이 지겨워 미쳐버릴 때까지.

이번 생을 다 바쳐서라도, 하늘에게 허락을 구해낼 것이다.

등선향은 영기가 훨씬 짙으니, 어쩌면 조금은 다른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소인은 등선향에서 머물고 싶습니다."

[흠... 등선향의 영기 속에서 수행을 하겠다는 건가? 나쁘지는 않군. 하지만 이곳은 최소 원영기 수도자가 아니면 들어오기도 힘든 곳이고. 천인경 수도자들이 재료로 쓴답시고, 등선향의 축기, 결단 이상의 생령은 모조리 잡아갔으니... 자네는 이곳에서 수련한다면 몇십년동안 엄청난 고독 속에서 머물게 될 텐데?]

"...그 정도는 각오했습니다."

[뭐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행운을 빈다네.]

서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공간균열을 다시 닫아버리고, 김연과 오혜서를 안고 동굴 바깥으로 나섰다.

번쩍!

푸른 빛이 눈 앞을 뒤덮었고, 잠시 후 저 하늘로 한 마리의 청룡이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동굴 바깥으로 나와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번 삶은, 등선향에서 끊임없이 하늘에 허락을 구할 것이다.

50 평생을 끊임없이 제의에 바친다면, 하늘도 감히 나를 허락하지 않고는 못 배기리라...!

'스승님, 이 제자...'

반드시 당신이 준 지식을 헛되지 않게 할 것입니다!

난 이번 삶에서의 맹세를 다지며,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이여(1)

난 우선 등선향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결단기 수준의 여우가 머무는 처소로 가 보았으나, 그곳엔 핏줄기와 흰색의 털만이 남아있을 뿐.

여우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천인기 수도자들이 축기, 결단급의 존재들을 다 잡아갔다는 해룡왕의 말이 허언이 아닌 듯 했다.

'일단 여우의 동굴이 훨씬 더 영력이 농밀하긴 하군.'

나는 여우의 동굴 주변으로 가, 그곳의 영기를 조금 빨아들였다.

그러나 굳이 여우의 동굴이 아니더라도, 등선향은 곳곳의 영력만 해도 연국이나 벽라국의 네, 다섯배 농도의 영력이 비재했기에, 어디서 수련을 하든 상관은 없을 듯 했다.

'그럼 일단...'

나는 다시 원래 있었던 동굴로 돌아가, 적당히 먹을 것을 쟁여놓은 후.

지월입도결을 상기하며 공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 * *

한달동안 공법을 운용하며, 나는 칠십이지살의 첫 번째 관문인 지괴성(地魁星)에 대응하는 영맥을 활성화시킬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영력이 농밀한 등선향에서 전심전력을 다해 운용하니 빠르게 활성화가 된 것 같았다.

거기에 지난 삶 선각후통의 수련법을 따르며 진언과 결인의 이해도를 한참 높인 것 역시 좋게 작용한 듯 했다.

'그래도 가장 걱정되던 고비를 빨리 넘어서 다행이군.'

지괴성의 영맥은 지난 삶에서 영석을 마구잡이로 흡수하여, 선통후각의 방식으로 활성화시킨 영맥이었다.

아무리 추후에 지괴진언에 대한 이해도를 키우고 수결을 연습했다 하더라도 조금은 걱정이 되었는데, 그나마 다행인 듯 싶었다.

'일단 영맥을 활성화시켜 연기기 1성에 도달했으니...'

조금 힘들긴 해도 이걸로 기본적인 법술은 쓸 수 있을 터.

'이제 슬슬, 승천문으로 가 볼까...'

나는 마음을 굳히고, 금벽호, 백골귀마, 창호자, 서휼 등이 날아간 방향을 쳐다보았다.

물론 승천문으로 들어가는 건 천인경 이상은 되어야 노려볼법 하겠지만.

그래도 외곽을 살펴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정말로 어쩌면, 승천문 외곽에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고...'

지금까지야 괴군이 나와 김영훈을 바로바로 공간균열에 던져넣은 탓에 한 번 등선향을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를 못했으나.

지금은 달랐다.

'좋아, 한번 가 보자.'

나는 마음을 먹은 후 바로 승천문이 있다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놀렸다.

파앙, 파앙, 파앙!

나는 천지영기와 공기의 결을 밟아가며 허공답보로 날아가며, 등선향 곳곳의 풍광을 눈에 담았다.

축기급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온갖 기이한 생물들이 살고 있었고.

처음 보는 약초나 괴초, 혹은 아주 진기한 영초들도 볼 수 있었다.

물론 진기한 영초같은 경우엔 천인기 수도자들이 떼어간 탓인지 중요한 부분이 없는 곳이 대다수였지만.

그리고, 몇날며칠을 허공을 밟아가며 뛰었을까.

쿠릉, 쿠르릉...

약 십주야째.

나는 저 멀리서 기이한 형태로 몰아치는 뇌운(雷雲)을 볼 수 있었다.

소용돌이 형태로, 별다른 기류가 없었음에도 허공에서 응집되어 휘몰아친다.

그리고 그 뇌운의 정중앙.

그 바로 아래쪽의 대지.

그곳에, 새하얀 빛이 빛무리를 뿌리고 있었다.

"저게... 승천문(昇天門)."

어쩌면, 나와 동료들을 이 세상으로 데려왔을 원흉.

난 가만히 승천문을 노려보았다.

더 자세히 들어가서 보고 싶었지만...

쿠릉, 쿠르릉...

뇌운에선 실시간으로 벼락이 치고 있었다.

'엄청난 벼락이군...'

뇌운의 아래쪽으론 엄청난 속도로 벼락이 비처럼 쏟아지는 중이었고, 심지어 뇌운의 사이사이.

시커먼 공간균열들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승천문의 주변으론 공간 곳곳이 일그러져 있었으며, 시꺼먼 공간균열들이 입을 벌리고 근처로 오는 이를 잡아먹을 듯이 움틀거린다.

'최소 결단기...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은 되어야 저곳에 접근이라도 할 수 있겠어.'

난 혀를 내두르며 가까이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구경만 해야 하였다.

그리고, 승천문과 뇌운을 구경할 때였다.

"응...?"

뇌운 아래쪽.

승천문의 위쪽.

그 허공에, 뭔가가 떠 있었다.

'뭐지? 저건...?'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내공을 집중해서 안력을 높여도 흐릿하게만 보일뿐, 무엇인지 잘 가늠이 안 되었다.

그 희미한 무언가는 끊임없이 뇌운에서 내리치는 벼락을 흡수하며 둥실둥실 떠 있었고, 겉으로 보기에 굉장히 수상해 보이는 무언가였다.

'제길, 저게 뭔지 굉장히 궁금한데...'

난 잠시 고민하다가 승천문 근처, 안전해 보이는 장소를 물색한 후, 그곳에서 다시금 공법을 수련했다.

법력을 더 쌓아서 십리안의 술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저것을 더욱 명확히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 * *

두 달이 지났다.

시간이 지난 탓인지, 승천문의 크기는 이전보다 절반만큼 줄어들었고.

나는 그사이 약 12개의 영맥을 더 활성화시켰다.

'등선향의 영력이 충분한 것도 있지만, 역시 선각후통으로 이미 뚫었던 영맥들인지라 훨씬 속도가 빠르다...'

선각후통은 지닌바 자질이 아닌, 후천적인 노력과 이해도를 통해서 영력을 받아들이는 방식이었기에.

진언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수록 수련속도가 빨라지는 장점이 있었다.

그리고, 스승님께 직접 진언들을 사사받은 나는 기초진언에 대한 이해도만큼은 누구도 쫓아올 수 없으리만치 높았다.

난 영맥들을 흐르는 법력을 운용해보며, 십리안(十里眼)의 법술을 운용했다.

십리 이내의 물체가 마치 눈 앞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승천문 위쪽에 있는 물체를 통해 십리안의 법술을 사용하였다.

'저것은...'

그것은 비석(碑石)이었다.

비석은 끊임없이 뇌운에서 떨어지는 천뢰들을 흡수하며 그 동력(動力)을 바탕으로 허공에 떠 있는 듯 했고.

무언가 글자가 적혀있었다.

-...후대들을 위해 남겨놓고, 마음을 내려놓고 비승하라. 이를 지키지 아니하는 자, 재앙을 겪게 될 것이다.

"....?"

자세히 보니, 비석은 윗부분이 훼손되어 있었고.

윗부분의 글자는 몰랐으나, 남은 부분의 글자만을 볼 때 승천문을 통과하려는 후대를 위해, 어떤 수도자가 남겨놓은 경고문인듯 했다.

'뭘 남겨놓으란 거지? 영석이나 기진이보, 영약 같은 걸 말하는 건가?'

또 한 가지.

비석의 글자는 연국, 벽라국, 성제국 등지에서 교양을 위해서나 배우는 고어(古語)로 쓰여져 있었다.

나 역시 교양을 위해 배운 적이 있었기에 간신히 읽을 수 있었지만, 최소한 저 비석이 몇천년 전의 고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흠, 그냥 선대의 수도자가 후대를 위해 남겨놓은 경고문이었나."

난 뭔가 허탈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굉장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평범한 경고문이었던 것이다.

그조차도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걸 보아서, 특별한 경고문이 아닌 승천문에 들어가기 전 마음의 준비를 좀 하라는 의미인 듯 했다.

'저건 신경쓸 필요 없겠군...'

나는 조금 실망스러운 마음을 감추며, 일단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이곳에서 수련하는 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저 멀리서 휘몰아치는 뇌운과 공간균열들 덕에 정신이 사나워 집중하기엔 어려운 환경이었다.

또 다시 십주야가 걸려, 나는 나와 동료들이 처음 자리잡았던 동굴로 돌아왔다.

'일단, 최대한 빨리 지난 삶의 경지를 회복해보지.'

선각후통의 수련법을 익혀왔으니, 공법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영기의 밀도가 높은 등선향이라면 빠르게 경지를 회복할 수 있을 터였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수련을 시작했다.

* * *

약 10여년이 흘렀다.

칠십이지살 영맥을 뚫고.

삼십육천강 영성을 응집하고.

십이지율의 영종을 영맥에 적응시키고.

십천간도의 영변을 부여한다.

구궁귀일의 이치에 백팔 영맥영성과 육십 영종영맥을 아홉 가지로 귀일하며.

팔괘의 괘상에 대응하는 모든 영맥을 완결시킨다.

쿠구구구!

전신의 주요영맥이 전부 활성화되고 통합된 것이 느껴졌다.

나는 지월입도와 함께 수련한 지주원법의 공법을 사용하며, 수결을 맺었다.

"지원(地院)!"

쿠구구구!

주변에서 흙벽이 솟구치며, 한 채의 흙집이 지어졌다.

나는 흙집에서 나와, 몇 가지의 신통과 법술을 전부 사용해본 후, 숨을 들이쉬었다.

회귀 10년차.

지난 삶에서는 50여년에 걸쳐 도달했던 연기기 7성에, 10여년만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남은 것은.

'칠성제의(七星祭儀)!'

하늘의 스물 여덟 별자리중 일곱 별자리를 선택하여, 천지영성을 내려달라는 제의를 치뤄야 한다.

제의를 치루는 법과 절차는 전부 알고 있었다.

제단을 만드는 법도 알고 있었다.

제의에 필요한 시운을 계산하는 법도, 천문을 관측하는 법도 알고 있다.

남은 것은, 그저 하늘이 허락해주는 것 뿐!

이번 생에는.

반드시!

'반드시, 이 경지를 넘어서고 말리라...!'

* * *

나는 연기기 7성에 도달한 후, 별자리를 관측하고, 시운을 계산하여 근시일내에 제의를 지낼 날짜를 선택하였다.

'이 날 이 시에 제를 지내면 되겠군.'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천문을 읽고, 영력을 감응해본 바.

근 십주야간은 날씨가 맑을 예정이었다.

제를 지내는 것은 이틀 후.

과연, 하늘은 나를 허락하지 않을 것인가.

나는 지주원법과 지월입도결을 이용하여 흙과 돌을 끌어모아 제단을 만들고, 근처에서 영초와 영과를 뽑아와 제단을 치장하였다.

그리고, 제의 날짜가 다가왔다.

해가 진다.

그리고, 별들이 몰려온다.

아름다운 별하늘.

그러나, 나는 저 아름다운 하늘이 가진 잔혹함을 잘 알고 있었기에 신중함을 잃지 않으며 제의를 열었다.

제(祭)가 시작된다.

"하늘의 도움을 바라 수선(修仙)을 걷고자 하는 인도(人道) 서은현이,

갈건야복(葛巾野服)으로 성제단(星祭壇) 올라 지세(地勢)를 살핀 후에 칠성(七星)을 기리고자 동남풍 빌 제!

천지간(天地間) 이십팔수(二十八宿)와 육정육갑(六丁六甲)을 베풀어 각각 방위를 벌릴 제!

동방갑을(東方甲乙) 청제지신(靑帝之神)은 각항저방심미기(角亢氐房心尾箕)를 응하여 청존(靑尊)의 형상을 벌리어 꽂고!

남방병정(南方丙丁) 적제지신(赤帝之神)은 정귀유성장익진(井鬼柳星張翼軫)을 응하여 양존(陽尊)의 형상을 벌리어 꽂고!

서방경신(西方庚辛) 백제지신(白帝之神)은 규루위묘필자참(奎婁胃昴畢觜參)을 응하여 백존(白尊)의 형상을 벌리어 꽂고!

북방임계(北方壬癸) 흑제지신(黑帝之神)은 두우여허위실벽(斗牛女虛危室壁)을 응하여 음존(陰尊)의 형상을 벌리어 꽂고!!

중앙무기(中央戊己) 황령지신(黃靈之神)은 오방차제(五方次第)로 황신기(黃神旗) 꽂고

서은현이 전조산발(剪爪散髮)한 연후 이리 비나이다!"

오른손에는 축문을 써 놓은 나무껍질을 들고,

왼손에는 돌을 깎아 만든 향로를 들고,

하늘의 성좌(星座)를 향하여 제문을 읊는다.

이십팔수의 별자리 중, 내게 맞을 별자리를 선택하여 일곱 별에게 아뢴다.

"인도(人道) 서은현이 수선의 길을 걷고자 할 제!

각항저방심미기(角亢氐房心尾箕) 청존칠수(靑尊七宿)께 아뢰오니, 부디 이를 갸륵히 여기어..."

동방갑을(東方甲乙)의 운(運)을 관장하는 칠수(七宿).

각수성(角宿星), 항수성(亢宿星), 저수성(氐宿星), 방수성(房宿星), 심수성(心宿星), 미수성(尾宿星), 기수성(箕宿星) 일곱 별에 기도를 하며, 나는 제무(祭舞)를 추었다.

미리 별자리를 그려놓은 석검(石劍)을 어검술로 불러와 손에 쥐고 일곱 별자리를 상징하는 검무를 취며 제단의 영기를 끌어올렸다.

"이 소성(小星)에게 기회를 허락하소사! 이리 비나이다!

하늘이여, 천지영성(天地靈性)을 내게 허락하사!

하늘이여, 내게 힘을 내리소사..."

그리고, 한참 제무를 추던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양팔을 뻗었다.

"하늘이여..."

하늘에는, 먹장구름이 끼어 있었다.

분명 영력을 관측해본 바.

티없이 맑을 것이라 예측했거늘.

"...하늘이여."

별빛의 힘이 끊겼다.

하늘과 계속해서 소통하여야 하건만.

하늘의 영력이 끊기니, 자연스레 제단의 기운도 가라앉았다.

제(祭)가 그렇게 끝이 나버린 것이었다.

"...하, 하하하하..."

그래, 예상했다.

하늘이 내게 쉬이 힘을 주리라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지난 삶에서도 그랬고.

어쩌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나.

하나 나는...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 포기할 수 없다.

내 삶을 위해서.

더욱 더 높은 곳을 향하기 위해서.

그리고... 나의 스승의 노고를 무의미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하늘이시여."

아무리 고고하게 날 막아선들.

나는 반드시, 반드시 어떻게 해서든!

"그곳에 도달할 것이외다...!"

쿠웅!

나는 발을 굴러 제단을 함몰시켜 버리곤 나직히 하늘을 노려보았다. 그날의 먹장구름은.

회귀 이후 처음 치룬 그날의 제의는, 유난히 어두웠다.

* * *

제의의 시운은 대략 보름에 한번씩은 돌아왔다.

나는 달포마다 꾸준히 제구(祭具)를 더욱 더 정교하게 만들어 끊임없이 하늘에 제를 지내었다.

"인도(人道) 서은현이 수선의 길을 걷고자 할 제!

각항저방심미기(角亢氐房心尾箕) 청존칠수(靑尊七宿)께 아뢰오니, 부디 이를 갸륵히 여기어..."

"...서은현이 수선의 길을 걷고자 할 제.

두루여허위실벽(斗牛女虛危室壁) 음존칠수(陰尊七宿)께 아뢰오니, 부디 이를 갸륵히..."

"...수선의 길을 걷고자 할 제.

규루위묘필자참(奎婁胃昴畢觜參) 백존칠수(白尊七宿)께 아뢰오니, 부디 이를..."

"...걷고자 할 제.

정귀유성장익진(井鬼柳星張翼軫) 양존칠수(陽尊七宿)께 아뢰오니..."

스물 여덟 별의 네 가지 별자리를 돌아가며, 매 시운마다 다른 별자리에게 간절히 청해보았다.

동방갑을의 별자리시여, 부디 나를 받아주소서.

서방경신의 별자리시여, 부디 나를 허락하소서.

남방병정의 별자리시여, 부디 나를 바라보소서.

북방임계의 별자리시여, 부디 나를 일으키소서.

별들이시여.

이 인간이 아룁니다.

제발.

제발...

보름에 한 번씩 돌아가며 제사를 지내고, 또 지냈다.

1년에 스물네번.

간혹 특별한 시운이 추가로 깃들때 추가로 제사를 지내어, 열두번이 추가되어 1년에 서른 여섯 번의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매번 실패한다.

실패하고 실패하였다.

하늘은 나를 밀어내고 또 밀어낸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났다.

그리고, 세월은 다시 흘러 10년이 흘렀다.

* * *

10년.

그 동안 500여번의 시도가 있었다.

1년에 정식으로 허락되는 24번의 시운과, 몇몇 특별한 시와 일에 추가되는 시운이 합쳐져, 572번의 제의를 치룰 수 있었다.

그리고, 전부 실패하였다.

그때마다 하늘은 나를 가로막았다.

"...하늘이여."

나는 이번 제의가 또 다시 허물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나직히 하늘을 불렀다.

"힘을... 내려주소서."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힌 채.

아무런 답이 없었다.

"..."

이제 573번의 실패라 해야겠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서, 하늘을 부르짖고 또 부르짖기를 10여년.

내 수염은 덥수룩해졌고, 입고 있던 옷은 완전히 헤져 거적떼기가 되었다.

최근에는 풀들을 엮어 그것으로 옷을 해 입으며 지내고 있었다.

사람이 없기에 옷도 필요는 없었지만, 제의를 지낼 때 최소한의 예를 갖추기 위함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지만.

이 세계의 하늘은 그런 말을 모르는 게 아닌가 싶다.

인간이 10년을 내리 바쳤을진데, 정녕 이리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이 맞는가?

"...모르겠군."

최근 들어서는, 이 모든 게 부질없어 보이기도 했다.

부웅, 붕, 붕!

나는 돌을 깎아 만든, 제사용 석검(石劍)이 내 어검술(馭劍術)에 의해 허공에서 검무를 추는 것을 보았다.

'...외롭군.'

고독함.

이전에는 몰랐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는 늘 인간들이 부대끼는 곳에서 시간을 보냈었으니.

손에서 피가 날 정도로 수련을 했던 그 때에도, 최소한 스승님과 김영훈과의 교류는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 진정으로 혼자가 된 것이었다.

혼자서 외로이 검무를 펼치는 어검을 보며, 나는 문득 또 다른 석검을 쥐고, 검에 검강을 불어넣었다.

"...한번 오랜만에 놀아볼까."

나는 허공에 떠 있는 검을 김영훈이라 생각하고, 그 검에게 달려들었다.

어검은 단맥도법을, 나는 단악검법을 펼치며 혼자서 그렇게 하루 종일 칼춤을 추었다.

* * *

한 일주일 정도, 완전히 정신을 놓고 어검과 칼춤을 추었다.

실컷 몸을 움직이니, 조금은 머릿속에 깃든 짜증이 풀리는 듯 했다.

거기에 어검술 역시 더욱 더 자연스러워져, 이전보다 한층 진보한 느낌이었다.

단맥도, 산바람의 초식을 머금은 어검이 내게 빠르게 쏘아진다.

난 다른 검을 손에 쥐고 유곡의 초식으로 어검을 흘려내 버린 후 가공의 상대에게 괴암과 기석의 초식으로 반격하였다.

이제 어검을 다루는 실력은 늘어나고 늘어나서, 마치 허공에 검이 떠 있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김영훈이 검을 잡고 내게 휘두르는 듯 했다.

"...김 형. 내 실력은 어떻소?"

부웅, 붕!

어검이 내게 짓쳐들어오며, 용릉의 초식으로 내 발밑을 노린다.

나는 입산의 기수식을 취한 뒤 공곡전성의 초식으로 하단세에서 용릉을 받아 되쳐버렸다.

하지만 어검은 딱히 쥐고 있는 주체가 없었기에 큰 피해를 받지는 않았다.

"그렇구려. 아직도 형편없는건가. 하지만 많이 좋아지지 않았소?"

어검을 쥔 김영훈은 한숨을 쉬며, 뭐라뭐라 내 자세를 지적하고, 한바탕 설교를 늘어놓고는 했다.

"고맙소. 말상대를 해 주어서."

난 김영훈과 대화를 나눈 후, 내 검세를 살펴보고, 그가 말한 부분을 고친 후 검을 휘둘러보았다.

확실히 조금 더 좋아진 것 같았다.

"음, 그렇군. 의념을 그렇게 운용하는 게 더 도움이 되려나..."

김영훈은 혀를 차며 또 다시 내 내공운용과 의념운용을 지적하곤 했고.

나는 그때마다 착착 운용을 고쳐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고맙소, 김 형."

김영훈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대련 중에 잡담은 무(武)를 겨루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며, 다시금 검을 잡고 내게 덤벼들었다.

"하하하, 신명나게 놀아봅시다!"

나는 껄껄 웃으며 김영훈과 부딪혔다.

* * *

며칠이 지났을까.

나는 그날도 무의식적으로 천문을 계산하고, 제단을 미리 만들어둔 후 제구들을 확인하고.

김영훈과 만나 무를 지도받았다.

"아니 김 형. 도대체 내 자세에 어디가 문제가 있단 거요!"

김영훈은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내 앞에서 몇 번 무공시연을 선보였다.

난 한참동안 그의 무공시연을 본 후.

그래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모르겠으니, 그냥 한번 부딪혀 봅시다."

김영훈은 씨익 웃으며 검을 잡고 내게 달려들었다.

나 역시 검무를 추며 그와 부딪혔다.

'그런데, 김 형이 원래 검을 썼던가?'

그의 주무기는 도였을텐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김영훈과 더욱 더 재미나게 놀 수 있게, 법술로 바위를 제련하여 석도(石刀)를 한 자루 만들어 내었다.

김영훈은 도를 들어보고는 마음에 든다는 듯 바라본 후.

내게 바로 산새의 초식으로 파고들어와 도를 휘둘렀다.

"그래, 역시 김 형은 도를 써야 상대할 맛이 나는구려!"

그와 검무를 추고, 또 추며.

시운을 계산하여 시일이 맞을때는 하늘에 대고 제의를 지낸다.

그리고 여실히 또 실패하였고.

나는 제의를 실패한 제단은 김영훈과 함께 때려부순 후, 그와 무공을 겨루기를 수백번을 반복하였다.

그렇게, 몇날 며칠이 흘렀을 터였다.

* * *

어느 날, 나는 김영훈과 자리를 옮겨가며 무를 겨루던 중.

원래 머물던 동굴에서 한참을 멀어지게 되었다.

승천문 방향은 아니었고, 승천문에서 반대쪽 방향.

그러니까, 금벽호, 백골귀마, 창호자, 서휼 등이 온 곳이었다.

"그러고보니 김 형. 저쪽으로 계속 가면, 우리가 아는 벽라국이나 연국 같은 곳이 나오는건가? 등선향에서 우리가 아는 지형으로는 당최 어떻게 이어져있는지를 모르니..."

김영훈은 내게 도를 휘두르며, 그럼 한번 이대로 쭉 가보자고 하였다.

"하하, 좋소. 계속 가며 한번 신명나게 부딪혀 봅시다!"

다시금 그의 도가 내 검과 부딪히며.

나는 그와 분전을 벌이며 천인기 수도자들이 왔던 방향으로 나아갔다.

약 두 달 후.

나와 김영훈은 마침내, 등선향의 '끝'에 도달할 수 있었다.

쿠우우우-

"..."

이건...

나는 그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김영훈도 마찬가지였는지, 놀란 눈으로 멍하니 도를 늘어뜨린 채 등선향의 끝을 바라볼 뿐이었다.

"...지난 삶에서 청문세가의 서고를 들락거렸어도, 왜 등선향으로 가는 직접적인 길목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는지... 그 이유를 알겠군."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멍하니 등선향의 끝으로 걸어갔다.

등선향은, 하늘에 떠 있었다.

거대한 땅덩어리가 영기를 머금고, 그렇게 하늘 위로 떠 있는 것이었다.

저 아래로 까마뜩하게 지상이 보인다.

동시에, 나는 등선향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답천(踏天) 사막..."

저 아래로 보이는 것은, 분명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막!

그리고 내가 아는 한에서, 그런 사막은 답천사막뿐이었다.

"왜 하필 사막 이름이 답천인가 하였는데.."

답천사막의 이름이 답천사막인 이유는, 연국과 벽라국의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는 이유였다.

누구는 답천사막은 하늘과 이어져있다는 설화가 내려와 답천사막이라 불린다 했고.

누구는 답천사막에 이어진 끝없는 모래를 밟고 사막을 횡단하다 죽어 하늘로 올라간 이들이 많아 답천사막이라 불린다 하였다.

누구는 답천이란 말이 먼 동방 사막 너머 국가들의 언어를 음차한 것이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야 그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등선향, 그리고 승천문...'

수도자들이 하늘로 비승할 수 있는 입구가 있는 곳.

그곳이기에, 수많은 수도자들이 답천(踏天)이라 이름붙인 듯 하였다.

"...놀랍구려. 김 형."

나는 김영훈을 보며, 내 감정을 말하려 했고, 문득 그를 바라보며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김영훈의 육신이, 흐릿해졌다.

'아니, 아니다.'

"...하, 하하하..."

나는 검을 들고, 흐릿해진 김영훈에게 달려들었다.

나와 흐릿해진 인영이 맞부딪혔다.

얼마간 합을 주고받던 중.

나는 인영의 빈틈을 파고들어, 인영을 도신째로 반으로 갈라 죽여버리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인영은 그렇게 반으로 갈라져서 죽었다.

"..."

툭!

인영이 들고 있던...

아니.

내가 지금껏 혼자 조종해오던 어도(馭刀)가 허공에서 툭 떨어졌다.

"...그래, 김영훈은, 23년전에 내가 홀로 보냈지."

이제야 생각이 났다.

나는 지금껏, 약 2년 반째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등선향이 하늘에 떠 있는 천공도(天空島)라는.

충격적이고도 장엄한 그 광경을 보며.

잠시 머리가 맑아지자 깨달았던 것이다.

"하하... 하하하하..."

나는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반쯤 미친상태로 계산한 결과, 오늘 밤이면 다시 제의의 시운이 돌아오는 날이다.

그러나, 나는 제단을 세우지도, 제구들을 만들거나 가져오지도 않았다.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또 울었다.

별들이 떠올랐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하늘이여...!"

나는, 제의를 행하지 않고, 별들을 향해 그렇게 부르짖었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이 자리에 머물러야 한단 말입니까...!"

제발, 나를 이 다음으로 보내주소서.

제발 내가 더 미치지 않게 하소서...!

하늘이여...

하늘이여(2)

밤이 지나고, 동이 텄다.

그리고, 나는 기이한 것을 보게 되었다.

우웅-

내가 반으로 갈라버렸던, 상상 속의 김영훈에게 만들어주었던 석도.

두쪽난 석도가, 허공으로 둥실둥실 떠오른다.

'어...?'

그리고, 희미한 인영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반으로 쪼개버렸던 그 인영.

그 인영은 반으로 갈라진채, 각자 오른쪽과 왼쪽이 도신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반으로 갈라진 인영들의 반대편에서 새로운 몸이 자라났다.

꿈틀, 꿈틀-

새 몸이 완전히 자라나, 두명이 된 인영의 실체가 다시금 뚜렷해졌다.

이번에도 역시 김영훈이었다.

두 명이 된 김영훈이 각기 도를 잡고 나를 겨누었다.

두 명의 김영훈은 투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묻고 있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고, 한판 겨루자고.

"흐, 흐흐흐..."

입에서 침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눈이 충혈된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낄낄 웃으며 석검을 잡고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흐하하하하...!"

나는 두 명의 김영훈에게 달려들었다.

미쳤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래, 일단 놀고 생각하자.

* * *

두 명의 김영훈을 베어버린 것은 또 다시 육개월이 지나서였다.

나는 등선향 곳곳을 돌아다니며, 두 명의 김영훈과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단악검법을 극성으로 끌어올려 두 명의 김영훈을 동시에 베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반쪽이 나버린 두 명의 김영훈의 사체가 눈앞에 있다.

둘은 반으로 쪼개졌음에도 싱긋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은 자못 기괴하기까지 하였다.

"...내가 베었는데, 원망스럽진 않습니까?"

반으로 쪼개진 상태에서, 두 명의 김영훈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내 무공이 상승한 것 같아 기쁘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반으로 갈라진 두 명의 김영훈의 몸에서, 또 다시 새로운 신체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꿈틀, 꿈틀...

이제, 둘이었던 김영훈은 네 명이 되었다.

네 명의 김영훈이 무기를 잡고 나를 포위하였다.

더더욱 쉽지 않은 싸움이 될 터였다.

"좋소, 해 봅시다..!"

* * *

다시금 몇 달이 지났다.

시운이 돌아오면 하늘을 향해 제사를 지내고, 매번 제사가 실패하면 이제는 여섯명으로 증식한 김영훈들과 함께 제단을 때려부쉈다.

"왜! 왜! 왜!"

나는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지르며, 김영훈들과 함께 제단을 때려부쉈다.

"왜 나를 허락하지 않으십니까... 하늘이여...!"

왜 나를 아직도, 아직도...!

이 정도 지성이 모자라면, 도대체 내게서 뭘 원하는 것이냔 말이다!

콰앙!

여섯 번째 김영훈이 도를 놀려 제단의 마지막 조각을 때려부쉈다.

나는 김 형에게 고맙다고 한 후 한숨을 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김 형."

나는 김영훈들에게 말을 걸었다.

"알고 있습니다. 난 지금 정신이 나가버린 게지요. 하지만, 나는 한편으론 정신이 나갔으면서도, 한편으론 이성적이기도 합니다."

반복되는 실패와,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고독감.

그리고 반복되는 회귀에 대한 우울증들이 지금의 환영들을 만든 것일 터.

나는 그러한 내 심정들을 돌아보며, 눈 앞의 김영훈들에 대한 어떠한 가설을 세웠다.

"...당신들은, 내가 기억하는. 지난 삶들의 김영훈들이지요?"

그 말에, 여섯 명의 김영훈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가 없던 최초의 삶의 김영훈을 제외하고.

그리고 이번 회차의 김영훈을 제외하면, 총 여섯 번의 회귀동안 만났던 6명의 김영훈.

내가 기억하는, 그리고 내가 그리워하는 그 때의 김영훈들.

눈 앞의 환영들은, 분명 그들이었다.

"...제 망상에 억지로 불려나오셨구려. 고인(故人)들을 함부로 불러내어 죄송하다는 말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씨익 웃으며 어차피 내 망상인데 무슨 상관이냐고 하였다.

나는 큭큭 웃으며 검을 잡았다.

"...나랑 놀아주셔서, 늘상 감사할 뿐이외다."

깜빡

눈을 감았다 뜨자, 그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여섯 개의 석도가 허공에 둥둥 떠있는 모습이 보였다.

눈을 다시 깜빡이자, 그들은 다시 여섯 명의 김영훈으로 변하였다.

* * *

7년이 지났다.

"하늘이여... 힘을 내려주소서."

하늘이여, 나를 허락하소서...

쿠우우우-

나는 이번에도 나를 가로막은 먹장구름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아직도...'

아직도다.

아직도 나는, 하늘에게 허락받지 못한 것이다.

일류에서 절정으로 넘어가던 시절과도 또 달랐다.

그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거대한 벽이 나를 막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분명 그 벽 너머가 존재한다는 것이 느껴졌었고, 나는 그 벽을 허물기 위하여 일생을 망설임 없이 바쳤었다.

하나, 지금은 거대한 벽이 아니었다.

막막한 우주공간에 맨몸 하나만 덜렁 던져진 느낌.

벽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다.

다음 경지가 보이지조차 않는다.

하늘이 언제 나를 허락해줄지, 아무런 기약이 없으며 그저 내가 저 드높고 냉혹한 하늘의 자비를 기대하며 매달려야 하는 상황.

다음 경지로 갈 수 있는가...?

'...해 봐야지.'

뿌드득...

강기를 실은 손가락으로 제단을 움켜쥐었다.

지주원법의 법술로 만든 석제단에 내 손가락 자국이 그대로 패인다.

'그래도, 해 봐야지.'

아무리 하늘이 나를 무시한다 하더라도.

내가 그저 발버둥하는 벌레에 불과할지라도.

버틸 수 있는 곳까지는...

버텨봐야 하는 것이다.

그래, 오늘이 아니라면 다음 날에, 다음 날이 아니라면 다다음 날에.

나를 받아줄때까지.

계속, 계속 시도할 것이다...!

"하늘이여... 기다리고 계시오...!"

콰앙!

나는 발을 굴렀다.

제단이 우그러진다.

옆에서 각자 제무를 추며 나를 보조하던 여섯 명의 김영훈들이 나와 함께 제단을 마구 두들겨 부쉈다.

"반드시 도달할 것이오..!"

* * *

촤악!

나는 어느순간.

김영훈 여섯명을 베어넘길 수 있었다.

하늘은 나를 허락하지 않는데.

철쪼가리 휘두르는 법이나 늘어가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조차도 사실 내 망상이나 다름없다.

눈 앞의 김영훈들이 진짜 김영훈인가?

아니었다.

진짜 김영훈이었다면 강환 하나만 쏘아서 나를 그대로 터트려 버렸을 터.

내가 싸우는 것은 내 상상력이 받쳐주는 김영훈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젠 내가 그리워했던 회차의 김영훈들도 전부 베어넘겼다.

이젠 나는 누구와 싸워야 한단 말인가?

누구와 겨루며 이 괴로움을 토로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때였다.

꿈틀, 꿈틀...

내가 베어넘긴 김영훈 여섯의 환영들.

그 사체들이 꿈틀거린다.

그리고 그의 사체조각들에서, 뭔가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막리황실 어좌 암중호위대 대주.

그리고 그 부대원들이었다.

"..허?"

암중호위대가 김영훈의 사체에서 자라났고, 김영훈 여섯이 꿈틀거리며 다시금 자라났다.

이젠 김영훈 여섯과 더불어, 어좌 암중호위대까지 생겨났다.

"...하하, 나쁘지 않군."

고수들의 합공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나는 침이 입가를 흐르는 것을 느끼며 소리쳤다.

"덤벼라! 전부 덤벼! 오냐 그래, 무기는 내가 만들어주마!"

나는 법결을 맺어, 암중호위대 대원들과 김영훈들에게 돌로 된 무기를 만들어준 후, 강기를 불어넣어 던져주었다.

그들은 내 무기를 받고, 전부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전투를 벌일 때마다 머릿속에서 짜르르한 쾌락이 일며, 제의 실패에 대한 괴로움과 절망을 날리는 것을 느꼈다.

"흐하하하하!"

즐겁다!

너무 즐겁다!

나는 즐겁다!!!

내 의념은 어째선지 검푸른 빛이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외쳤다.

"좋구나!!!"

* * *

2년이 흘렀다.

회귀햇수로는 32년.

칠성제의를 시작한 후로는 22년.

나는 그날도 입가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암중호위대 여럿과 내가 만나온 몇몇 절정지경의 고수들의 합공, 그리고 김영훈 무리의 합공을 받아냈다. 우리는 허공답보로 등선향의 산 하나를 넘어가며 전투하는 중이었다.

"음...?"

문득, 암중호위대주의 극을 받아내던 중, 나는 문득 저 아래에 뭔가, 이질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저, 저건...!"

난 눈이 휘둥그레지는 걸 느끼며, 잠시 나와 놀아주던 인원들에게 손짓을 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것은, 하나의 석조건물이었다.

문명의 흔적!

나는 황급히 석조건물로 달려갔다.

"이곳은..."

석조건물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기껏해야 등선향 곳곳에 피는 영초나 독초, 그리고 연기기 저계 수준 정도 되는 요수들 몇몇이 모여살며 내게 이를 들어낼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녀석들은 내 뒤로 줄줄이 따라오는 암중호위대와 대문파의 절정고수들, 그리고 김영훈 무리를 보고 놀랐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망쳤다.

'음, 그런데 이상하군. 이들은 내가 정신이 나갔기 때문에 내 눈에만 보이는 것일텐데... 왜 저 녀석들이 도망치는거지?'

잠시 생각해보던 나는, 생각해보니 수많은 무구가 허공에 둥실둥실 떠서 따라오는데 그것도 굉장히 무시무시한 광경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뭐 좋다... 어쨌든 이 건물은 도대체...'

건물은 수천년 전에나 쓰이던 양식의 건물인 듯 했고.

안쪽에는 딱히 뭔가 있지는 않았다.

'일단 사람이 사는 용도로 만들어진 건 아니군.'

그렇다기엔 공간이 너무 협소하다.

이건 건물이라기보단 차라리...

'사당 같은 느낌이군.'

나는 위패, 혹은 그 비슷한 것을 올려놓는 단을 보고는 그 생각에 확신을 굳혔다.

제단 위쪽에는 예전에 뭔가가 올라가 있었는지, 네모난 모양으로 커다란 홈이 파여져 있었다.

'위패나 혹은 어떤 비석 같은 것을 올려놓은...'

잠깐, 비석?

나는 건물에서 나와 황급히 건물을 바라보았다.

황급히 건물에 들어와 살피느라 인지하지 못했지만, 이 건물은 단순히 오래되서 방치된 느낌이 아니었다.

주변에는 석조 건물의 잔해로 보이는 돌들이 흩어져 있었고, 석조 건물의 밑부분은 뜯겨나가 있었다.

그리고 석조건물의 주변 지형.

이건 마치.

'굉장히 강한 힘을 지닌 자가, 이 석조 건물을 원래 있던 자리에서 뽑아, 이곳으로 집어던진 듯한 모양새가 아닌가...?'

석조건물의 주변 지형은 한쪽으로 깊게 패여있었다.

마치 집어 던져져서 대지에 자국이 남은 듯한 상흔.

나는 자국의 방향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승천문이 있는 방향이었다.

'석조건물 안쪽에 있던 단에 패인 홈. 그 홈의 크기는... 마치 승천문 위에 떠 있던 비석과 똑같은 크기가 아닌가...?'

어쩌면 이 석조건물은 본디 승천문이 있던 곳에 세워진 건물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천인기의 수도자 중 하나가 어떤 일로 이 건물을 뽑아 이곳으로 집어던진 듯 했다.

'뭔가 비밀이 숨겨져 있는건가..?'

나는 석조건물 근처를 뒤지던 중, 반가운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갑골문이 적힌 돌 파편이었다.

너무 오래전의 고어인지라 제대로 식별할 수는 없었지만.

내가 아는 것에 의하면, 아마 뢰(雷)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뢰라는 글자가 적힌 돌 파편 주변을 한참 찾아보았으나, 딱히 보이는 것은 없었다.

'이건 좀 궁금해지는군. 이 등선향에 뭔가 숨겨진 비밀 같은 게 있는것인가.'

천둥을 뜻하는 이 갑골문은 무슨 의미인가.

승천문 주변에 있던 그 뇌운과 관계가 있을까?

"흠... 궁금해지는군."

이런저런 가설을 세우며 머리가 맑아지자, 내 주변에 있던 수많은 인영은 투명해졌고.

수많은 석제 무구들만이 허공에 둥실둥실 떠 있는 꼴이 되었다.

"일단 이 비슷한 게 더 있는지 찾아볼까..?"

난 이런 석조건물과 비슷한 것이 더 있는지 찾아보자는 심정으로 등선향 곳곳을 돌아다녔다.

등선향의 크기는 그 자체로 연국의 성 예닐곱개를 합친 것만큼 거대했다.

대략 남한만한 크기라고 생각되었다.

난 이 가공할 크기의 등선향 곳곳을 돌아다니며 살폈다.

등선향 중심에는 승천문이 있었고, 이 등선향은 승천문을 중심으로 원형의 대지가 허공에 떠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등선향 곳곳을 살폈음에도 나는 더 이상 저 비슷한 석조건물은 찾을 수 없었다.

'흠, 뭘 알아보려 해도 단서 자체가 더 없으니 알아보기도 힘들군...'

난 한숨을 내쉬며 오랜만에 승천문 근처로 갔다.

시기가 지나서인지 승천문은 닫혀있었으나, 그 주변에 산재한 공간균열들과 뇌운은 여전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전에는 신경쓰지 못한 부분을 볼 수 있었다.

승천문 근처에 있는, 석조건물의 흔적.

석조건물과 같은 석재로 보이는 돌들이 저 인근에 잔뜩 깔려있었다.

아무래도 석조건물의 밑동인 듯싶었다.

"흠..."

나는 얼마간 석조건물의 밑동 부분인 듯한 석재들을 살펴보고, 다시 석조건물이 있는 곳으로 갔다.

석조건물이 날아간 방향은 승천문을 기준으로 북쪽.

나는 문득 석조건물의 크기와, 승천문 근처에 있던 석조건물의 밑동으로 보이는 부분의 크기가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아냈다.

'밑동 부분이, 거의 열 배는 더 크다.'

그 말인 즉슨, 석조 건물은 본래 훨씬 더 거대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왜 이곳에는 이 석조건물밖에 남지 않았는가.

석재 잔해들이 풍화되어 부스러진 것인가 생각해 보았지만, 이 주변엔 딱히 그런 잔해들이 더 이상 많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더 큰 석조건물이 있었고, 이 건물을 날려버린 수도자가. 건물을 뜯어내어 던져버릴 때 석조건물의 이 부분만이 이곳으로 떨어졌고, 나머지 부분은...'

더욱 더 북쪽.

등선향의 바깥으로 떨어졌다는 말이 되었다.

나는 등선향의 북쪽 끝을 향해 달려가, 그 아래의 답천사막을 내려다보았다.

"...쯧, 전부 모래군."

하지만 어쩌면 저 모래 속에 파묻혔을 수도 있었다.

석재는 몇 번 만져본 바, 상당히 단단했고 쉬이 흠이 가지 않는 재료였으니.

나중에라도 저 근방의 모래 아래쪽을 파 보든지 해야 할 것 같았다.

아니면 토둔술을 익혔으니, 땅 밑을 파고들어가 보는 것도 방법일 터고.

'어쨌든 추후에 한번 조사해보지.'

나는 일단 그렇게 결론을 지은 후,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갑작스레 생긴 의문과 호기심에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난 이제 다시 제의를 지내야 했다.

"...언제까지."

그러나 문득.

전부 때려치고 싶은 마음이 밀려들었다.

"언제까지... 나는... 이러고 있어야 하는가."

어쩌면 나는 굉장히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건 아닐까.

사실 하늘은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날 허락할 생각이 없는데.

괜히 진땀을 빼는 건 아닐까.

나는 괜히 아직도 등선향에 남아 멍청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나는...

"...스승님."

나는, 이를 악물었다.

콰앙!

발을 구르자, 흙이 치솟아오르며 제단을 만들어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셨지요... 제자는, 있는 힘을 다할 것입니다."

아직은.

아직은 포기할 수 없다.

포기하더라도, 이번 삶을 전부 바쳐 도전한 후에야 포기하겠다.

포기하기에는, 수많은 삶 속에서 내 등을 밀어준 이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수많은 인영이 나를 감쌌다.

그들은 무기를 들고 있는 이도, 무기를 들지 않은 이도 있었다.

김영훈도 있었고, 무림맹주 시절의 부하도, 신마전 시절의 부하도, 암중호위대도...

그리고 내 제자들과,

스승님도 있었다.

나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

나는 미친 것이 아니라, 그저 너무나도 그리운 마음에 저들을 불러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내 기억 속에 있던 수많은 이들이, 내 의지에 따라 잠시 눈앞에 투영되었을 뿐이었다.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모두를 보며.

김영훈을 보며.

제자들을 보며.

스승님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당신들의 도움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제구를 모으고, 제단을 치장하며, 그날 밤의 제의 준비를 하였다.

* * *

하늘이여.

하늘이여.

힘을 내려주소서.

나를 허락하소서.

나는 먹장구름을 머금은 하늘을 바라보며 부르짖었다.

그러나 하늘은 묵묵부답.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침묵하고 나를 내려볼 뿐이었다.

이번에도 실패였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하늘이여... 내게 힘을 내려주소서..."

"하늘이여... 나를 허락하소서..."

간절히 청하며,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제의를 치루고 기도한다.

하늘은 나를 보지 않았지만, 나 역시 이제는 하늘을 보지 않았다.

대신 나는 제의를 치룰때마다 내 주변에 자리한 수많은 인영들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나를 밀어준.

내가 밀어준, 나를 지탱해준 수많은 인연들.

이제는 만나지 못하게 되었을지언정, 내 가슴 속에 함께하는 이들.

"하늘이여..."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제의가 끝나면 분노에 차 제단을 때려부수는 짓은 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금 석재들을 모아와 제단을 더욱 높고, 견고하게 쌓는 일에 집중하였다.

내 제단은 점차 높아졌다.

언젠간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아질 터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둘러싼 인영들은 더더욱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탑이 높아질수록, 더더욱 견고해질수록.

나와 무를 겨루던 여섯 명의 김영훈, 암중호위대, 몇 몇의 절정고수들.

그리고 내 제자들.

500여명이 넘는 무수한 제자들과, 암중호위대, 김영훈, 여러 대문파의 장로, 호법들.

진씨세가에서 같이 싸웠던 결사대들.

그들이 전부 무기를 들고 나와 대련을 해 주었다.

처음에는 버겁기도 했지만, 몇 년이 지나자 나는 어느새 그들 전체를 상대로 동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내 실력이 늘면 늘수록, 내 대련에 참여하는 인영들은 점차 많아졌다.

무기를 들고 싸우는 무림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내가 잡아들였던 사소한 산적, 수적, 사파 무림인.

혹은 내가 대련을 했던 일류고수들까지 점차 범위가 넓어지자, 그 수는 이젠 거의 이천명에 달하였다.

회귀 35년차.

칠성제의를 시작한지는 25년차.

몇천번이고 제의에 실패했는가.

'기억도 안 나는군.'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이 꺾이지 않을 것을 예감했다.

난 혼자가 아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함께하는데, 어찌 혼자란 말인가...!'

"하늘이여, 보십시오."

인간은 홀로서는 하늘에 도달할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본디 홀로 완성되지 않는다.

수많은 인연과 관계 속에서.

'우리'라는 그 안쪽에서, 비로소 인간은 태어나고, 살아간다.

"하늘이여, 당신은 나를 쳐다보지 않겠지요."

나는 비단 나 하나만으로 구성되지 아니하였다.

그렇기에, 하늘은 '우리'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젠 거의 4층 전각만큼 높아진 거대한 제단으로 올라갔다.

제단 아래로는 수천 개의 병장기들이 허공에 떠서 도열하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자, 병장기들은 모두 수많은 인영들이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인영들 외에도, 병장기를 잡고 있지 않은 수천 명의 인영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나를 보며, 정신이 나가 가상의 인물들을 만들어 노는 광인이라고 칭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나는 광인이 맞았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나는 과연 미친 것인가?

모든 인간은 인간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나고, 죽는다.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람을 찾게 되어있다.

사람이 사람을 갈구하는 게.

사람이 삶을 갈구하는 게.

사람이 그를 위하여 더 높은 곳을 갈구하는 게 광기인가?

"하늘이여, 나는 이제 포기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인영들을 바라보며 읇조렸다.

나도 알고 있다.

저들은 내 고독함과 갈망, 그리움이 만들어낸 허상.

하지만, 내가 회귀와 운명의 굴레를 모두 끊어낼수만 있다면.

저 허상을 모두 찾아다니며, 그렇게 나의 삶을 다시 찾을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러기 위하여.

나는 저 위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제단을 올라가며, 나는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하늘이여, 보십시오! 나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내게 힘을 내리십시오!

그러니, 나를 허락하십시오!

제(祭)가 시작되었다.

하늘이여(3)

나는 과연 미친 것일까.

저 아래에서 나를 바라보며 기대를 거는 수많은 눈빛들이, 너무나도 생생히 느껴진다.

하늘의 먹장구름은 여전히 걷히지 않았지만, 나는 제의가 끝나고도 고통스럽거나 실망스럽지 않았다.

스승님이 제단 위로 올라와 내 어깨를 두들겨 주셨다.

다음 번에 다시 해 보자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나를 믿어준 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미소를 지어보였다.

광인(狂人)의 망상일지언정, 제단 아래에서 나를 바라봐주는 수많은 눈빛은, 마치 하늘의 별들 같았다.

하늘의 별은 나를 만나지 않았으나.

나는 스스로의 힘으로 지상의 별들을 돌아보는 데에 성공하였다.

"다시 한 번 시도하겠습니다."

스승님은 내 옆에서 다시금 천문과 시운을 같이 계산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시운을 계산하여 제의를 치뤘다.

하늘이 몇 번이고 막아섰지만, 나 역시 몇 번이고 도전하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김영훈들이 도를 들고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나에게 하늘을 열어주겠다는 듯!

그러나, 여전히 구름이 있는 하늘은 높았다.

어느 정도 하늘을 날아가고 나면 결국 어도(馭刀)에 실린 기(氣)가 소진되어 다시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렇다고 내가 제의 도중 직접 하늘로 올라갈 수는 없었다.

제사자가 제단을 떠나면 바로 제의가 중단될 테니까.

간혹 열이 뻗쳐 수많은 인영들에게 부탁하여 수천 명어치의 어검(馭劍)이 하늘로 향하게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역시 이번에도 하늘에 도달하기 전에 기(氣)가 소진되어 무구들은 떨어져내려 버렸다.

몇 번을 더 시도해본 후, 나는 몇천명어치의 강기를 모조리 한 무구에 담아 날려보내기도 하였다.

그렇게 하면 하늘에 도달할 수는 있었지만, 막상 구름이 있는 곳까지 도달해도 기운이 잔뜩 소진되어 평범한 검강 하나 정도밖의 위력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정도의 위력으로는 거대한 먹구름을 약간 흔드는 것 외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흔들린 부위조차 먹장구름이 더욱 더 몰려들어 짙어졌고, 또 다시 실패가 이어졌다.

'실패, 실패, 실패...'

그러나, 나는 미소를 지었다.

끊임없는 실패의 반복.

하지만, 그 실패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한 걸음씩 올라가고 있었다.

내 제단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고, 인영들은 날이 갈수록 실체화되는 이들이 많아졌다.

하늘이여.

나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늘이여, 내게 힘을 내려주십시오."

나를 허락하십시오.

이젠 9장 크기의 높이가 되어버린 제단 위에서 먹장구름을 올려다보며 하늘을 노려보았다.

* * *

36년차.

나는 점차 어검을 더더욱 멀리 보내는 요령이 늘어갔다.

그 덕인지, 검강을 잔뜩 담아 하늘을 향해 보내면, 그 흔들림이 이전보다 눈꼽만큼 커진 듯 했다.

여전히 저 까마뜩한 구름을 걷어내기에는 부족했지만.

나는 미소를 지었다.

한 걸음, 한 걸음씩 이렇게.

나는 점차 하늘에 가까워질 것이다.

* * *

37년차.

나는 문득 내 용맥기공에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챘다.

나는 오천명의 인영을 실체화하는 데에 성공했고, 그들에게 전부 강기를 불어넣던 중.

일반적인 무림의 내공심법으로는 원래 이런 어마어마한 내공을 다룬다는 게 말이 안된다는 것을 상기하였다.

'뭐지? 어째서...?'

나는 한동안 용맥기공을 참오했고, 그러던 중 단전의 중앙, 그곳에 희미한 압력과 흡입력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 흡입력과 압력에 의해 내공이 더욱 더 압축되며, 내공의 총량이 늘어나는 것이었다.

문득 나는 이 현상이 월수월무록에서 설명하는 현상과 미약하게 비슷하다는 걸 눈치챘다.

그랬다.

나는 이제, 오기조원의 끝자락에 진입하고 있는 것이었다.

'두 번의 삶을 바쳐서야 겨우 여긴가...'

김영훈은 아마 지금쯤 월도월무록으로 진즉 등봉조극의 극한에 도달했을 터다.

어쩌면, 등봉조극 너머에 대한 실마리를 찾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난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다.

'왜일까...'

어째선지 김영훈이 더 이상 그리 높아보이지 않았다.

저 하늘 역시 마찬가지로 그리 높아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문득, 내가 쌓아올린 제단을 바라보았다.

제단은 이제 15장 크기였다.

약 45미터.

어마어마한 크기.

난 천천히 제단을 올라가며, 오늘의 제의를 펼쳤다.

쿠우우우우!

이번에도 먹장구름이 몰려온다.

하나, 나는 잔뜩 압축된 내공을 하늘로 향해 쏘아올렸다.

이번에는 하늘이 조금 더 많이 흔들리는 듯 했다.

물론 여전히 하늘은 틈새조차 보여주지 않았지만.

나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늘이여... 보이시오?"

이 미천한 벌레가.

점차 하늘을 흔들기 시작했소.

정녕 나를 허락치 않으리오?

하늘이여.

보시오, 언젠가 당신은 나를 허락하셔야 할 것이오.

나는 하늘의 흔들림을 지켜보며 좋아하는 스승님께 미소를 지어주었다.

* * *

세월이 다시 흘렀다.

나는 어검에 대해 참오하였다.

그리고 점차 맑아져가는 이성으로, 내 주변에 모여든 인영들을 관찰하였다.

'어찌해야 강기를 더더욱 멀리까지 보낼 수 있는가.'

인영들의 실체화랍시고 좋아했던 적도 있었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인영들이 실체화된 게 아닌, 끊임없는 연습으로 내 어검 실력이 늘어나 다룰 수 있는 어검의 수가 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수가 늘었을지언정, 요령이 늘었을지언정.

어검을 보낼 수 있는 한계는 존재했다.

최근에 단전 중심으로 압력이 생겨나며 내공이 늘어 조금 더 한계가 늘어나긴 했으나.

거기서 거기일 뿐이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일정 거리를 벗어나면 기운의 통제가 힘들어지고 내공의 소모도가 많아진다는 점이었다.

난 주변의 인영들에게 물어보았다.

"어찌해야 당신들을 내게서 멀리 떨어지게 할 수 있습니까?"

나는 김영훈에게 물었다.

"김 형, 당신은 알고 있겠지요. 어떻게 해야 어검을 더욱 더 멀리 보낼 수 있습니까? 당신이 강환을 멀리까지 보내는 그 원리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김영훈은 싱긋 웃을 뿐 대답은 없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이 김영훈은 내 상상일뿐이기에, 내가 모르는 대답은 할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홀로 끊임없이 고민했다.

어찌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하늘까지 내 힘을 보낼 수 있을까.

난 시운을 계산하며, 동시에 어찌하면 어검을 더욱 멀리까지 보낼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세월은 흘렀고, 요령은 늘었으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인영들은 점차 많이 실체화되었고, 더욱 더 또렷하게 실체화되었다.

* * *

문득, 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 내 마음에 있던 인영들이 실체화된 것일까.

'내가 그리워해서겠지.'

그렇다면, 지금 실체화된 이 인영들은 가짜인가?

'내 망상이다.'

모든 것이 나의 망상이라면, 이 인영들은 헛된 것인가?

'헛되지는 않다. 망상과 광기에 힘입어 오기조원의 극한에 달하였다.'

어째서 망상이 현실에 영향을 주는가?

"...망상이 현실에 영향을 준 게 아니다."

나는 자문자답을 하며 말했다.

"이 인영들은 모두, 나와 함께했던 인연들. 내 소중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내 인연이 영향을 준 것이다."

나의 인연은 이미 다른 시간선으로 넘어갔을진데, 그렇다면 없는 것과 다르지 않은가?

"...다르다. 인연이 사라졌을지언정... 모두가 남긴 것을 내가 기억한다. 모두... 이 안에 이어져 있다."

왜 네 안에 이어져 있는가?

"그것은..."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나와 문답을 나누던 자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들이, 나 자신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전에 생각했었던 것이다.

인간은 홀로서 이뤄지지 않는다.

인간은 우리라는 틀 안에서 생겨나며, 자라나고, 그렇게 그 안에서 죽는다.

고로, '나'는 단지 나만으로 이뤄져있지 않다.

그렇다.

내가 지금까지 봐왔던 수많은 환영은, 사실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파사사사!

수많은 인영이, 눈 앞의 존재에게로 흡수되었다.

눈 앞의 존재는 눈에 보일듯 뚜렷해졌다.

그것은 나였다.

나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눠져있다 생각한 것이 전부 나를 이루는 부분이었다면, 너의 무(武) 역시 그러하지 않겠는가?"

"...옳다."

나는 지금껏 광증과 망상에 빠져 수많은 과거의 인물들을 추억하였으나,

그들은 전부 사실 나를 이루는 일면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를 이루는 부분들이 움직여 어검을 다루었다면.

완성된 나 자신으로서 어검을 다룰수는 없는가?

"깨달음을 얻었는가?"

"그렇다."

"정신분열이 아니고?"

"하하, 그건 아닌 것 같군."

"그렇다면, 해 보자."

나는 눈 앞에 자리한 '나'를 보며, 미소를 짓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손에서 강기가 뿜어진다.

눈 앞의 또 다른 나가 양손을 뻗었다.

내 손에서 뿜어진 강기가, 그의 손 안에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는 눈 앞에 자리한 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수많은 얼굴이 눈 앞의 나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중에는 내가 죽인 자도 있었고, 내가 미워한 자도, 내가 그리워한 자도, 내가 애틋하게 여겼던 자도 있었다.

적들도 있었고, 부하들도 있었고, 동료들도 있었으며, 제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스승님도 있었다.

나는 문득 나를 바라보던 수많은 눈빛이 마치 별빛과도 같이 느껴졌던 밤을 떠올렸다.

그 무수한 별빛이, 내 안에 있었다.

내 안의 별빛들이 손 안으로 몰려들었다.

수많은 강기가 휘몰아치며 일점으로 귀일한다.

내 손 안에서, 어떤 것보다 아름다운 별이 탄생하였다.

나는 그 별을 내 앞의 또 다른 나에게 건냈다.

드디어 나는 이 안에 '생명이 있다'고 했던 김영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검으로 행동을 입력하고 입력하는 것을 넘어서서.

마침내 '자기 자신'을 불어넣는 것.

그것이...

"등봉조극(登峰造極)!"

모든 봉우리의 끝에 올라, 마침내 하늘을 바라보는 단계(登峰造極)!

지난 삶과 이번 삶.

두 번의 삶을 통째로 바쳐서야 이루어냈다.

회귀햇수 40년차!

약 100년에 걸쳐 드디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다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해가 지고 별들이 떠오른다.

나는 내가 쌓은 제단을 바라보았다.

제단의 크기는 60장에 달했다.

몇십년에 걸쳐 쌓은 제단이다.

이제는, 하늘에 닿을 때도 되지 않았는가?

나는 손 안에 별을 쥐고, 제단을 천천히 올랐다.

완전한 밤이 되었다.

제(祭)를 다시 시작하였다.

"하늘의 도움을 바라 수선(修仙)을 걷고자 하는 인도(人道) 서은현이,

갈건야복(葛巾野服)으로 성제단(星祭壇) 올라 지세(地勢)를 살핀 후에 칠성(七星)을 기리고자 동남풍 빌 제!

천지간(天地間) 이십팔수(二十八宿)와 육정육갑(六丁六甲)을 베풀어 각각 방위를 벌릴 제!

동방갑을(東方甲乙) 청제지신(靑帝之神)은 각항저방심미기(角亢氐房心尾箕)를 응하여 청존(靑尊)의 형상을 벌리어 꽂고!

남방병정(南方丙丁) 적제지신(赤帝之神)은 정귀유성장익진(井鬼柳星張翼軫)을 응하여 양존(陽尊)의 형상을 벌리어 꽂고!

서방경신(西方庚辛) 백제지신(白帝之神)은 규루위묘필자참(奎婁胃昴畢觜參)을 응하여 백존(白尊)의 형상을 벌리어 꽂고!

북방임계(北方壬癸) 흑제지신(黑帝之神)은 두우여허위실벽(斗牛女虛危室壁)을 응하여 음존(陰尊)의 형상을 벌리어 꽂고!!

중앙무기(中央戊己) 황령지신(黃靈之神)은 오방차제(五方次第)로 황신기(黃神旗) 꽂고

서은현이 전조산발(剪爪散髮)한 연후 이리 비나이다!"

오른손에는 축문을 써 놓은 나무껍질을 들고,

왼손에는 돌을 깎아 만든 향로를 들고,

하늘의 성좌(星座)를 향하여 제문을 읊는다.

이십팔수의 별자리 중, 내게 맞을 별자리를 선택하여 일곱 별에게 아뢴다.

"인도(人道) 서은현이 수선의 길을 걷고자 할 제!

각항저방심미기(角亢氐房心尾箕) 청존칠수(靑尊七宿)께 아뢰오니, 부디 이를 갸륵히 여기어..."

나는 일곱 별을 노려보며, 제무(祭舞)를 춘다.

그리고, 내가 손에 쥔 작은 별을 옆에서 지켜보던 나에게 건냈다.

나 자신이 미소지으며, 별을 받았다.

그리고 별을 받아든 내가 별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제단의 영기를 끌어올렸다.

"이 소성(小星)에게 기회를 허락하소사! 이리 비나이다!

하늘이여, 천지영성(天地靈性)을 내게 허락하사!

하늘이여, 내게 힘을 내리소사..."

쿠릉, 쿠르릉...

그리고, 역시나 하늘이 먹장구름으로 뒤덮였다.

나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나 자신을 불어넣은, 인간이 만들어낸 별빛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별빛의 기(氣)는 그렇게 크게 소모되지 않았다.

그 안에, 이미 또 다른 나 자신을 집어넣었으니까.

나 자신이, 기운을 완벽히 제어하며 소모도를 0에 수렴하게 하고 있다.

별은 천천히 하늘로 올라갔고, 마침내 구름에 닿았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하늘이여,

"하늘이여..."

몇 번이고 부르짖고 또 부르짖었던.

"하늘이여!!!!!"

그 거대한 어둠을 향해서.

"내게! 힘을 내놓아라!!!"

그렇게, 일갈하였다.

그리고 빛이 터져나갔다.

별빛이 폭발하며 하늘에 구멍을 뚫는다.

구름이 원형으로 찢어지며, 저 하늘의 별빛이 그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지성이면 감천?

하늘은 감동하지 않는다.

그저 그대로 존재할 뿐.

그렇다면, 벌레처럼 아득바득 기어서, 내가 도달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내가 만들어낸 강환(罡丸)이 터져나가며, 빛의 광류(光流)가 불어닥친다.

그리고 그 안에 불어넣었던 나 자신.

내 안에 있던 수많은 인연들이 하늘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지난 삶의 김영훈들, 제자들, 스승님...

그들이 하늘에서 나를 향해 웃어주었다.

하늘을 향해 이 두 팔을 뻗은 채, 내게 떨어지는 천지영성(天地靈性)을 받아들인다.

몇 번을 연습하고 상상해왔던 이 순간이다.

결코 놓치지 않는다.

경맥을 움직여 천지영성을 흡수하며, 두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여!"

내가, 이겼다.

나는 그렇게 칠성제의(七星祭儀)를 완료하고, 연기기 7성을 넘어 연기기 8성에 도달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천뢰(天雷)(1)

쿠릉, 쿠르릉...

그냥 시커멓던 하늘의 먹장구름에서 푸른 빛이 번뜩이며, 우뢰소리를 토했다.

어쩐지 하늘에도 의념이 있다면 그 색은 새빨갈 것이라 생각했다.

마치, 어거지로 구름을 찢고 힘을 얻어낸 내게 노(怒)하는 것 같지 아니한가?

"내리칠테면 내리쳐 봐라."

나는 강기를 짜내어 다시금 손 위로 떠올렸다.

수십, 수백, 수천개의 검강(劍罡)이 내 손 위로 모이며, 검강압환(劍罡壓丸)을 만들어내었다.

파아앗!

손 위로 다시금 하나의 별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하늘은 다행히도 내게 천뢰를 내리치진 않았다.

그저 쿠릉거리더니, 한번 지켜보겠다는 듯이 구름을 흩을 뿐.

'지금이면 벼락을 막을 수 있으려나...'

잠시 생각해 보며 피식 웃었으나, 역시 검환으로 벼락은 좀 무리인 것 같았다.

빛의 속도로 내리치는 그 힘을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검환에 담긴 힘은 충분하지만 속도가 부족해서 막는 게 불가능했다.

'뭐, 어쨌든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고...'

나는 눈 앞에 형성한 검환을 쳐다보았다.

월수월무록에서, 그동안 이해가 가지 않았던 부분들이 많이 이해가 간다.

'김 형의 시행착오들...'

그가 앞서 경지를 개척한 덕에, 나는 시행착오로 경지를 더듬어야 하는 일 같은 경우는 피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검환은 그냥 던져서 폭발시키거나 하는 폭탄이 아니라는 것 등의 사실.

우우웅-

나는 제단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은 채 검환을 띄웠다.

검환은 굉장히 위력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저 무식한 기(氣)의 덩어리.

그 말은 즉슨.

"후우웁..."

이렇게, 체내로 들이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그래봤자 원래 내뿜었던 내 내공을 다시 흡입하는 것이라 내공 증진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단전에 생겨났던 압력과 흡입력. 어째서 그런 흡입력이 생겼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는구나.'

오기조원을 넘어, 등봉조극에 접근하고 있었다는 신호였으리라.

강환은 내 체내로 들어와, 단전으로 안착한다.

의념을 입력하고 입력하다 못해 나 자신을 집어넣었다.

나 스스로를 작은 구슬 안에 응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단전은 마음의 밭이라고 하던가?

나 스스로를 마음의 밭에 응축시켰을진데, 그 밭에 변화가 없는 것이 이상하였다.

단전에 안착한 강환은, 마치 처음부터 그래야 했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흡입력과 압력의 중심부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환(丸)의 형태로 완전히 뿌리를 내렸다. 동시에 나는 압력과 흡입력이 수십배 이상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건...!'

지금껏 내 단전에는 수도공법의 법력과, 무림내공의 내력이 혼탁하게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강환이 흡입력을 발하자, 혼탁하게 뒤섞인 내공이 전부 강환 안쪽으로 빨려들어갔다.

동시에 법력과 함께 전신 경맥을 흐르던 내공 역시, 법력과 완전히 분리가 되어 단전 중심의 환 안쪽으로 끌려들어간다.

'아아...'

느껴진다.

이 환 안쪽으로, 내 의식이 허락하는 한 내공이 무지막지하게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사실이!

지금껏 존재하던, 단전의 내공한계가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느낌이었다.

단전에 자리잡은 환 안쪽으로는, 공력을 불어넣으면 넣는대로 압축되어서 끝없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아니, 단전에 자리잡은 강환은 더 이상 강환이라 부르기도 뭣하군.'

단전의 성질과 뒤섞여, 무언가 다른 것이 되었다.

그래... 이건 차라리 강환이라기보단, 내단(內丹)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으리라.

내단이 형성됨과 동시에, 나는 뭔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 그랬구나.'

이전, 영맥을 흐르는 용맥기공의 내공에 대해 꺼림칙함을 느낀 적이 있었다.

어째서 꺼림칙함이 느껴졌는지 그때는 이유를 몰랐었다.

하지만 이제서야 알 수 있었다.

우우웅!

지월입도결을 운용하자,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천지영기가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훨씬 영력의 운용이 편해졌다.

마치, 지금껏 미세먼지 속에 쳐박혀 살다가 맑은 공기를 가진 시골로 와서 마음껏 숨을 쉬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내공이 경맥에 혼탁하게 법력과 끼어 있어서 수도공법을 수련하는데에 일정 부분 방해를 받았던 거로군.'

지난 삶.

김영훈이 나보다 눈꼽만큼 더 수도공법에 대한 자질이 좋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좋은 스승도 오래 투자한 시간도 없이, 내가 했던 것보다 빠르게 연기기 2성에 올랐으니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나보다 눈꼽만큼 자질이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나처럼 혼탁한 기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단에 내공을 잘 저장해놓아 혼탁하게 공력이 섞이지 않게 했던 것일 뿐이리라.

후우웁!

천지영기를 들이마쉬며, 나는 운공을 해 보았다.

이전보다 더욱 빨라졌다.

동시에 나는 은식술을 활용하였다.

의식을 압축시켜 수련 속도를 조금 더 높이는 기술!

그러자, 이전에 은식술을 쓸 때와는 효율이 차원이 다를 정도로 높아진 것이 느껴졌다.

'이 정도라면... 오영근이 아니라 사영근쯤의 효율이 아닌가...?'

어마어마한 수련 효율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물론 오영근이나 사영근이나, 둘 다 쓰레기같은 잡영근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았지만.

그래도 오영근이었던 내게 이 정도의 수련 효율은 굉장히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수행 속도를 확인한 후, 우선 내단의 다른 효과들을 확인해 보았다.

파아앗!

내단에서 내공이 뿜어져 나온다.

동시에 내단은 그 자체로 하나의 축(軸)이 되어주며 하나의 중심을 형성하였다.

이전처럼 맨 허공에다가 강기를 겹쳐서 강환을 형성하는 것이 아닌, 내단 안에서 바로 강환을 만들어서 뿜는 것이 가능해졌다!

내 장심(掌深)에서 강환이 빛을 흩뿌리며 빠져나왔다.

이전의 김영훈이 보여주었던 기술.

나 역시 그가 남겨준 월수월무록이 아니었다면 아마 강환을 만들고도, 강환을 내단으로 변화시키기까지 한참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으리라.

'그나마 내단은 시행착오만 해결하는 즉시 바로 만들 수 있어 다행이로군.'

나는 다시 주먹을 쥐어서 강환을 흡수했다.

그런 후 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굴렀다.

파앙!

순식간에 5장의 거리가 좁아진다.

내단이 중심을 잡아주며, 이전보다 내공효율이 압도적으로 좋아졌다.

내공으로 신체를 강화하는 정도가 극한으로 증폭되었다.

순간반응속도, 근력, 체력 등이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이 강해졌다.

"하압!"

나는 내단에서 내력을 뽑아쓰며 주먹을 내질렀다.

쿠과광!

이전까지는 검기를 미약하게 씌울 정도였던 내력이, 내단에서 발출되자 엄청난 위력을 보이며 1장 크기의 바위를 그대로 박살낸다.

'내공에 낭비가 1푼 1리도 없다. 내공에 대한 통제가 10할 완벽해졌어.'

앞으로는 동일한 초식을 써도 훨씬 강력한 위력이 나오리라.

나는 내단을 관조하며 몇 번 더 초식을 써보며 내단에 익숙해졌다.

동시에, 결단기 수도자들이 형성한다는 금단(金丹)과 내가 형성한 내단(內丹)의 차이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결단기 수도자들이 형성하는 금단도 이 내단과 같은 효과이려나?'

잠시 생각해보던 나는, 형태만 비슷할 뿐 전혀 다른 것이리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애초에 무림의 무공은 수도선법의 열화판. 비슷하게 생겼다 해서 절대 같지 않다. ... 결단기 수도자가 금단을 형성하면, 그 위력은 산을 부수고 바다를 가를 정도다.'

막리황신 같은 축기기 수도자야 회오리로 전각 한두개를 부수는 정도였지만.

만약 결단기 수도자가 같은 법술을 썼다면, 회오리로 황궁 전체를 들어올려 갈아버렸을 터였다.

아마 결단기 수도자라면 눈을 감고 하나부터 열 까지 셀 동안 황도 전체를 갈아엎을 수 있을 터다.

그러나 내 내단으로는 그저 무공효율이 좋아지고, 강환을 사용하는데에 있어 그 속도가 빨라진 정도였다.

나는 몇 번 더 내단의 효용을 체감해 본 후.

연기기 칠성제의를 치루고 난 효과를 알아보았다.

하늘을 바라보자, 천기(天氣)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지영성을 받아들이자 하늘을 읽어내어서 하늘의 뜻을 알 것 같았다.

물론 연기기 수도자 주제에 많은 뜻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하늘을 보면 내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명확하게 아는 정도.

그리고, 다음 날의 날씨 정도는 하늘을 보고 감으로 맞출 정도의 영감(靈感)이 생겨나 있었다.

'내 수명이야 늘 같은 날 같은 시에 죽어서 충분히 잘 알고 있어서 쓸모 없고... 날씨 역시 스승님이 알려주신 진법을 이용하면 계산이 가능하다만.'

경지가 올라갈수록 천기를 읽는 능력이 강해지고, 추후에는 길흉화복과 운명에 대한 것 역시 어렴풋이 엿볼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연기기 8성의 육합만로(六合滿路)와 9성의 오행진의(五行眞意)의 경우, 빠르게 타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삶에서 칠성제의 부분에서 막힌 이후론 그 너머의 경지를 계속 예습하여 뜻을 거의 다 이해하였다.

"후우..."

자리를 잡고, 지월입도결 8성 부분을 운기하자, 천지영력이 이전과는 비할 바 없이 빠른 속도로 밀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전까지 내 법력 운용을 방해했던 내력들이 내단에 들어가 전부 없어지고.

은식술 또한 발휘되니, 사영근자 수준으로 수행 속도가 빨라졌다.

1년이 지났다.

거기에 등선향의 농밀한 영기까지 더해지니, 나는 1년여만에 시행착오를 거쳐 연기기 9성에 진입할 수 있었다.

육합만로는 천지사방, 육방위에 존재하는 의식을 천지영력으로 자극하여 의식의 크기를 키우고 전신영맥을 영기로 꽉 채우는 경지였다.

경지를 완전히 이해한 채 꾸준히 수련을 하자 빠른 속도로 도달할 수 있던 것이었다.

이제 연기기 9성은 오행진의.

이 오행진의의 단계부터 기초공법의 속성이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기초법술로 하여금 고만고만한 흙을 조종하는 단계였다면, 9성부터는 제대로 된 신통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압!"

쿠구구구!

결인을 맺으며 지월입도결에 수록된 신통을 발휘하자, 눈 앞으로 거대한 흙벽이 세워졌다.

약 2장 높이의 흙벽은 법력으로 뭉쳐져 있어 단단하기도 했고, 흙벽에서 흙탄을 쏘아낼 수 있어 공방일체를 하는 것이 가능했다.

또한 흙벽을 쓰러뜨려 흙 위에서도 미끄러지듯이 타고다닐 수 있었고, 흙집을 짓거나 토둔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둥.

이전보다 토 속성으로 할 수 있는 신통과 법술들이 훨씬 많아졌다.

거기에 오행진의에 단계에서부터는 공법의 속성에 맞는 법술과 신통에 한해서는 진언과 수결을 맺는 과정이 크게 생략되었다.

타닷!

빠르게 기초수결을 맺자, 이전에 진언과 수결을 전부 맺어서야 완성됐던 토 속성의 법술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때즈음.

나는 슬슬 등선향을 나가기로 결심하였다.

'육합만로라면 몰라도, 오행진의부터는 이렇게 농밀한 영기는 필요 없지.'

그냥 내 속성에 대한 영력만 충만하면 되었다.

그리고, 그럴 바에는 천공도인 등선향보다 그냥 저 아래 대지에서 토 속성 영력을 확충하는 것이 더 나았다.

난 내가 41여년간 머물렀던 처소를 바라보았다.

처소의 옆에는 60장 크기의 제단이 세워져 있었고, 나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나는 잠시 그곳을 본 후, 뒤를 돌아 등선향의 외곽으로 향하였다.

저 아래, 답천사막.

나는 기본적인 음식과 식수 등을 챙긴 후, 그대로 아래로 뛰어내렸다.

휘이이이!

바람결이 나를 몰아친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대지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파아아앗!

나는 뭔가를 '통과하는' 느낌을 받았고, 기이한 기분이 들어 허공을 쳐다보자, 허공에 떠 있던 등선향의 모습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뭔가 결계같은 게 감싸고 있는건가...'

하기야 답천사막은 범인들도 자주 건너는 곳이었고.

저런 엄청난 크기의 천공도가 떠 있다면 회자되지 않을 리 없었다.

나는 신기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며, 장심에서 강환을 하나 뽑아내서 허공으로 쏘아냈다.

파아아앗!

번쩍!

그러나 강환은 어느 순간 허공에 가로막히더니, 그대로 부스러져 버렸다.

'안에서는 바깥으로 나가기 쉬워도, 바깥에서는 안으로 쉬이 들어올 수 없는 구조로군.'

어차피 등선향에서의 볼 일은 다 보았으니 큰 상관은 없었다.

점차 사막의 대지가 가까워졌다.

나는 바람의 결을 읽으며 그대로 허공을 박찼다.

파앙! 파앙!

내단의 덕택인지, 허공답보 역시 훨씬 내공을 적게 사용했음에도 더욱 더 큰 효용을 보이고 있었다.

빠르게 속도가 줄어들며, 모래사장이 가까워졌을 때, 나는 거의 계단을 밟고 내려가듯이 대지에 착지할 수 있었다.

툭!

촤아아-

주변으로 모래가 비산한다.

나는 법결을 맺어 토 속성의 법력으로 내게 날아드는 모래를 전부 떨쳐냈다.

'보자, 그럼 일단 어디로 가볼까.'

수상한 석조건물이 날아간 것으로 추정되는 북쪽 방향으로 가 볼까.

아니면 벽라국이 있는 서쪽 방향으로 가 볼까.

천뢰(天雷)(2)

결정은 길지 않았다.

'북쪽으로 가 봐야겠군.'

사람이 매우 그립기는 했지만, 북쪽에 있을 석조건물이 더욱 궁금했다.

나는 우선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밤이 되고 별들이 떠오르자, 별자리를 읽어 현재 위치를 파악하고 벽라국의 위치를 대강 파악한 후.

법결을 맺어 모래로 흙원판을 만든 후 그것을 타고 사막을 헤쳐나갔다.

촤아아아-

나는 북쪽을 향해 가면서도, 끊임없이 지하를 향해 지청술(地聽術)을 펼쳤다.

석조건물이 있다면, 모래사막에 파묻혔으리란 생각에서였다.

'석재긴 했지만, 처음 보는 광석이었다. 상당히 단단하고 견고했어. 설령 몇천년 전의 건물이더라도 아직까지 풍화되진 않았을 터.'

그렇다면 충분히 찾을 수 있을 터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