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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워크샵을 가던 중 차채로 선협 세상에 떨어졌다.

그리고 각자 영근과 특이능력을 가진 이들은 전부 수도 문파에 불려가서 떵떵거리며 살지만...

나는 어떤 영근도 특이능력도 없었기에, 50년을 범인으로 살다가, 그렇게 운명에 순응하고 죽을 뿐이다.

그런 줄 알았다.

회귀하기 전까지는.

#퓨전 #무협 #선협 #회귀 #동양판타지

*국내 무협/선협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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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 - 0회차

나는 문명사회에서 온, 지구인이다.

내가 틈날 때마다 되뇌는 소리였다.

"나는, 문명사회, 쿨럭쿨럭!"

그거라도 되뇌지 않았다면, 미쳐 버렸을 테니까.

"저런, 서씨 할아버지. 어머니가 가져다 드리래요."

"그래···. 고맙다."

"아니에요. 빨리 일어나셔서 비누 좀 다시 만들어 주세요!"

옆집 주 씨네 딸은 내 옆에 삶은 감자 한 소쿠리를 놓고 총총거리며 다시 제 집으로 돌아갔다.

50년.

이 빌어먹을 세계에 떨어진 지도, 50년이 지났다.

쿨럭! 쿨럭!

나는 기침을 토하며 자리에 드러누웠다.

그래, 분명 회사 워크숍을 가던 날이었다.

김 부장과 회사원들이 함께 워크숍을 가던 중.

우리는 산사태에 휩쓸렸고, 정신을 차려 보니 기이한 세상에 와 있었다.

꼬리가 세 개인 집채만 한 여우.

머리가 두 개인 붉은 비늘의 커다란 뱀.

그리고, 검을 탄 채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괴인들이 있는 세상.

내가 가끔 보던, 선협 소설들과도 같은 세상에 떨어진 것이었다.

기이한 세상이었지만, 우리는 잘 적응했다.

아마, 대부분의 회사원들이 전부 잘 나갔을 것이다.

나만 빼고.

같은 차를 탔던 김 부장, 오 차장, 전 과장. 강 대리, 오 대리, 김 주임.

이들 중 전 과장과 강 대리, 오 차장은 이 선협 세상에 떨어진 지 사흘째에.

수선(修仙) 문파 장로들의 눈에 띄어 제자가 되었다.

오 대리는 나흘째 왠 선풍도골의 사내가 지나가다가 자신의 혈족으로 삼겠다며 데려갔고,

김 주임은 나흘째 저녁에 커다란 기관 괴뢰를 탄 노인이 김 주임의 특수 능력을 보고는 뛰어난 자질이랍시고 데려갔다.

결국 나와 김 부장은 어떤 수선 문파, 혹은 수도자들에게도 간택받지 못했으나.

김 부장은 어째선지 무공에 천부적인 자질이 있었다.

그는 수도자들의 선술은 익히지 못했지만,

6개월 동안 나와 함께 막일을 하다가, 저잣거리에서 삼류 무공을 사서 익힌 후.

어마어마한 재능으로 일류 고수가 되어 강호행을 떠나 버렸다.

10여년 후 들려오는 소리를 듣자 하니, 천하십대도객의 일 좌를 차지했으며.

20년 후에는 천하 삼절이라고, 강호에서 세 손가락에 들어가는 고수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30년 후에는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올라 무림맹을 창설하고 초대 무림맹주가 되었으며,

이후 10년 동안 강호를 안정시키고 훌쩍 사라졌다고 한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우화등선했다고도 한다.

그렇게.

선협 세상에 떨어진 일곱 중 셋은 명문 수선파의 제자로.

하나는 기인의 혈족으로.

하나는 괴인에게 자질을 인정받아.

그리고 하나는 무공의 재능을 개화하여.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보았다.

나만 빼고.

쿨럭! 쿨럭! 쿨럭!

나는 아무런 재능도, 자질도, 특수한 능력도 가지지 못했다.

'전 과장··· 천상금뢰지체(天上金雷之體)라고 했었나···. 그런 특이한 영근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했고.

강 대리 역시 귀도음화선근(鬼導陰化仙根)이라는 영근을 개화했다고 했는데···.

오 차장은 일문성체(一紊聖體)라는 육신을 가지고 있었다 했었지.'

그리고 오 대리는 나흘째에 의식을 집중하면 비와 구름을 부르는 기묘한 능력을 각성했다.

김 주임도 오 대리가 선풍도골 사내와 함께 간 후, 주변 반경 10리를 눈감고도 내다볼 수 있는 특이한 능력을 각성했었다.

나와 김 부장은 그걸 보며 기연이니, 이세계 특전이니 하며 신기해했고.

우리 둘은 덩그러니 버려진 채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벌어질까, 한참을 기대했다.

그러나, 김 부장과 나는 아무런 영근도, 특이 능력도 얻을 수 없었다.

결국 선협 세상의 상황도, 뭣도 모르는 우리 둘은 저잣거리에서 몸 쓰는 일을 하며 6개월간 푼돈을 벌며 함께했다.

그리고, 6개월째.

김 부장은 이렇게는 못 살겠다며, 모은 돈을 다 털어 저잣거리에서 파는 삼류 차력용 무공을 사서 익혔고.

세 달만에 무공을 대성해서 무림인이 되었다.

무림인이 된 후 표국에서 일하며, 점점 고급 무공을 배운 김 부장은 순식간에 강력한 무사가 되고, 강호행을 떠나 버렸다.

나를 덩그러니 버려둔 채.

나 역시, 내게도 뭔가 기연이 생길까.

숨겨진 재능을 알게 될까.

특이 능력을 각성하거나, 영근을 개화할까 등.

이 세상에서 작은 기대를 품고 살아갔다.

그러나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30년이 지났다.

내게는 아무일도 없었다.

40년이 지나고,

50년이 지났다.

쿨럭! 쿨럭!

나는 감기에 걸려서 다 죽어 가는 노인일 뿐이었다.

"나는, 지구, 지구···."

이젠 그저.

내가 지구인이라는 걸 잊지 않기 위해 허공에 대고 헛소리나 해 대는.

시끄러운 영감탱이.

"허억··· 헉···."

우리는 왜 이 세계로 왔던 걸까.

왜 우리는 전부 특이한 혈맥, 영근, 능력, 혹은 재능을 각성했던 걸까.

왜 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던 걸까.

그저 50년동안 이 세계의 말을 배우고.

글을 배우고, 막노동을 하고, 겨우겨우 정착을 해서.

잿물로 비누 만드는 장사나 하며 힘들게 살아와야만 했다.

비누 역시 중세 중국이나 다름없는 이 세계의 사람들에겐 쓸 만한 것이었지만,

어떤 도둑놈들이 비누 만드는 방법을 훔쳐보고 따라 한 이후.

내 비누는 거의 안 팔리기 시작했다.

때문에 나는 비누 외에도 약초를 캐거나, 술을 빚는 둥 온갖 잡일을 도맡아서 하면서야 이 세상을 살아 나가야만 했다.

울컥

어쩐지 나는 눈물이 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왜··· 나는···.'

단순히 내가 선택받지 못한 인간이어서인가.

아니었다.

나는 선택받지 못했을지언정.

특별한 인간이 아닐지언정.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열심히 살았다.

지난 삶이 내 눈앞을 짧게 스치고 지났다.

이 세계에서 힘겹게 말을 배운 일.

힘겹게 글을 배운 일.

힘겹게 돈을 벌어, 작은 땅을 샀던 일.

그 땅 위에 힘겹게 집을 지었던 일.

그리고 마을에 정착해서 마을 사람들과 안면을 텄던 일.

그리고 나름 지구에서의 지식을 응용해서, 비누도 만들어서 팔았던 일.

그렇게 어렵사리 작은 비누 가게도 냈던 일.

하지만 삼류 무림인 몇 놈이 내 비누 제조 방법을 훔쳐 배우고,

내 것과 똑같은 가게를 몇 개나 내 버린 후.

몇몇 단골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내 가게에 오지 않게 되었던 일.

그 이후로, 생활이 어려워져 약초를 캐고, 나무를 하러 다녔던 일.

그나마도 생활이 안정될 무렵 마을에 도적이 들어 내 돈을 전부 빼앗었던 일.

정말 온갖 잡일을 하며 구차하게 보냈던 일 등···.

'왜··· 나는··· 열심히 했는데도··· 빼앗겨야만 했던 거냐···.'

이 세계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이 세계는 나의 최선을 모조리 부정했다.

'나보고··· 어쩌란 거냐···!'

나는 억울함의 눈물을 흘리며, 침상 위에서 작게 끅끅거렸다.

오늘은 겨울이었고.

나는 감기에 걸려 있었으며.

몸은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었다.

눈이 감 겨온다.

'조금이라도··· 기회가 더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차디찬 겨울.

나는 침상에 누워, 감기가 걸린 채로, 50년 동안이나 이어 왔던 끈질긴 삶을.

그렇게 마무리했다.

그것이, 나의 첫 번째 회귀(回歸)였다.

***

"커헉! 허어억!"

나는 눈을 뜨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히 느껴진다.

눈을 감으며, 침상에 누워 어둠 속으로 빠져들던 순간이.

온 몸의 생명력이 차디차게 식으며, 그렇게 홀로 죽었던 그 순간이.

나는 죽었다.

그런데 어째서···.

"살아··· 있지?"

흠칫!

말을 하면서도 나는 순간 놀랐다.

'이··· 목소리는···!'

나는 천천히 몸을 내려다보았다.

자글자글한 주름이 진 손이 아니었다.

탱탱한 피부, 생명력으로 가득 찬 어린 손.

그리고, 이 세계의 복식과는 명확히 다른,

[지구]에서 입었던 파란 남방과 운동복 바지.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아이고, 두야···."

"이게 무슨 일이지?"

"여, 여기 어디야···."

김 부장, 오 차장, 전 과장, 강 대리, 오 대리, 김 주임···.

나는 깨달았다.

'회귀(回歸)했다!'

그리고, 동시에 알 수 있었다.

오싹!

'아무런 능력도 없이, 이 세계에 온 게 아니었다.'

나는, 회귀(回歸) 능력을 각성한 것이었다!

1회차의 첫날

"멀쩡히 워크샵 가다가 이게 무슨 일인가···."

머리가 반쯤 벗겨지신 김 부장님은 주변을 둘러보며 일어섰다.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이 시점이 어디인지를 떠올렸다.

'첫날! 이 기이한 세상에 떨어진 첫날이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우리가 이곳에 오게 된 경위도 떠올렸다.

'SUV를 타고 워크샵을··· 가다가, 산사태··· 산사태에 휘말려서··· 그리고··· 갑자기 뭔가 번쩍했던 것 같은데···.'

자그마치 50년 전의 일이라 그런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제대로 기억은 안 난다.

"이봐, 서 대리."

'회귀했으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서 대리."

'보통 회귀물을 보면, 미래 지식으로 잘 먹고 잘 살던데. 내가 아는 미래 지식은··· 주 씨네 딸이 30년 뒤에 태어난다, 그런 작은 일들밖에···.'

"서은현 대리!!!"

"핫, 전 과장님. 죄송합니다. 잠시 당황했어서."

나는 전명훈 과장의 고함에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서 대리.

하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직급이라,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오랜만에 보는 저 얼굴을 떠올렸다.

전명훈 과장.

전명훈.

내가 다니던 회사, SJD 컴퍼니의 전무 전명철의 조카.

나이는 나보다 3살 많은 32살 주제에, 낙하산으로 벌써 과장 자리를 꿰찬 녀석이었다.

'50년 전에는 상당히 싫어했던 것 같은데···.'

그래도, 50년 만에 다시 만나는 얼굴이라 생각하니 굉장히 반갑다.

어찌 되었든 50년 만에 다시 보는 고향 동포가 아닌가?

잘 지내 보자,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짜악!

전 과장이 갑자기 내게 따귀를 날렸다.

"서 대리! 이 개새끼야, 차 운전 똑바로 안 해!!"

"아···."

나는 멍하니 따귀를 맞고, 방금 전 머릿속에 떠올렸던 고향 동포 같은 생각을 싹 지워 버렸다.

잊고 있었다.

이 놈은 개새끼다.

"이 새끼, 너 때문에 이게 뭐야! 조난당했잖아! 이, 이 새끼가···!"

전명훈이 화가 나서 내게 달려들려 할 때였다.

오 차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말렸다.

"이보게, 그만하게. 그 산사태는 뭐 서 대리가 어떻게 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잖나."

내 기억으로 차차 50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래, 나는 분명··· 회사 SUV를 운전하는 역할을 맡았었다.

"차장님은 화도 안 나십니까! 서 대리 저 자식이 졸음운전 해서 이 사단이 난 거 아닙니까! 여기는 또 어디고, 우리 SUV는 또 다 어디 갔고! 우리, 저놈 때문에 조난 당한 겁니다!"

그리고, 나는 그래.

분명 졸음운전을 했다.

'그런데, 졸음 운전을 했던 이유가···.'

전명훈.

저 자식이 내게 워크숍 하루 전 자기가 미뤄 논 업무를 내게 짬을 맡겨 놓아서, 밤을 새웠어서였다.

"졸음운전을 할 거면, 남한테 운전대를 넘기든지 했어야지! 이게 무슨 개 같은 상황이야!"

그리고, 또 생각해 보니.

'원래··· 운전 담당은 전명훈 아니었나.'

그렇다. 원래 운전 담당은 전명훈이었었다. 하지만 전명훈이 뒷자리에서 여직원들에게 작업을 걸겠답시고, 나를 반강제로 운전대에 앉혀 놨었다.

"저 답답한 새끼 때문에! 우리가! 조난 당한 거라고요!"

아.

점차 50년 전의 기억이 똑똑히 살아난다.

그때는 하도 당황했고,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전명훈에게 사죄를 했었다.

나 자신도 내가 잘못한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50년 전의 이 기억을 찬찬히 되돌려보니.

'전명훈 저 새끼··· 양심이나 수치심 같은 걸 아예 느껴본 적이 없나?'

나는 분명 몇 번이나 전명훈, 혹은 여직원들에게 잠시 운전대를 잡아 달라고 부탁했었다.

하지만 전명훈 저 자식이 자기도 운전대를 안 잡을 거면서,

여직원들도 운전대를 잡지 못하게 했었다. 내가 야간 작업 때문에 졸릴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다고 대리인 내가 차장, 부장님한테 운전대를 잡아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나는 졸린 몸을 이끌고, 전명훈에 의해 쉬지도 못하고 네 시간 동안 차를 몰아야 했었다.

그리고···.

"저··· 전 과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꼴에 입은 있다고. 그래, 서 대리 때문에 우리 지금 조난 당했으니까 양심이 있으면 사과는···."

"미친 듯이 졸리긴 했습니다만. 제 기억으로 저는 커피로 수혈하면서 끝까지 차를 제대로 몰았었고. 산사태 날 때도 제가 피해 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규모가 너무 커서 피할 틈도 없이 그대로 차가 휩쓸렸던 겁니다."

분명, 나는 앞에서 흙이 떨어지길래 황급히 차를 멈춰 세우고 후진했다.

하지만 옆에 있던 산의 일면이 거의 통째로 무너지다시피 무너졌고, 내가 아무리 피해 봤자 피할 수 없었던 재해였었다.

"전 과장님 화나신 거 알겠습니다만. 지금 누구 탓할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자식이··· 지금 누구 앞에서 훈계질이야! 지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거 같은데···."

"후···."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회귀를 몰랐던 지난 삶.

나는 50년 동안 악착같이 살면서 참는 법을 배웠다.

강한 도적 떼가 나를 짓밟고 돈을 빼앗을 때 참는 법을.

흉악한 무림인이 내게 모욕을 줄 때 참는 법을.

지방 관리가 내게서 있는 것 없는 것 전부 빼앗아 세수를 징발할 때 참는 법을.

그래.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이들 앞에서, 참는 것은 진리이다.

하지만.

"야."

"뭐, 뭐? 야? 서은현 이 새끼가 지금."

감당할 수 있는 것 앞에서 괜스레 허리를 숙이는 것은,

사내대장부가 아니라는 법 역시 배웠다.

"내 잘못 아니라 했잖냐. 적당히 해라."

"차장님, 이거 놓으세요. 이 새끼가 진짜···!"

퍼억!

전명훈이 내게 달려와 얼굴을 후려쳤다.

그러나, 나는 얼굴을 맞자마자 녀석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 그대로 박치기를 박아 버렸다.

뻐어억!

"끄아악···!"

지난 삶.

무림인에게 몇 번을 맞았을까.

산에서 약초를 캐다가 산적을 만나 얼마나 맞았을까.

흉년에 도적 떼가 들었을 때 어떻게 맞았을까.

맞고, 맞고, 또 맞아 왔다.

그 무식한 폭력 속에서, 나는 지금의 전명훈과 다른 이들에겐 없는 것을 하나 체득할 수 있었다.

폭력.

퍼억!

퍽!

뻐억!

첫 박치기가 통하자마자 나는 사정없이 달려들어 전명훈을 두들겨 팼다.

"억, 잠깐, 잠깐···!"

"이, 새끼가, 내가, 아니라고, 했잖아."

사람을 때릴 때.

얼굴을 때리면 맞는 사람은 그 공포감이 어마어마하다.

주먹에 의해 가려지는 시야, 그 사이에 오는 고통.

그리고 무자비하게 때리는 상대에 대한 공포.

나는 전명훈의 시야를 가릴 겸, 녀석의 눈 주변을 주먹으로 두들겨 팼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면, 입이라도, 닫고 있던가!"

한 대 때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있었던 전명훈에 대한 앙금들이.

시원하게 풀리는 듯했다.

50년이나 지났지만, 사내에서 전명훈이 내게 주었던 악랄한 괴롭힘들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잘, 잘못, 잘못했···."

"후우···."

그 오만한 전명훈의 입에서 사과가 나올 때쯤, 나는 구타를 그만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김 부장, 오 차장, 강 대리, 오 대리, 김 주임···.

모두가 두려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김 부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해 왔다.

"서, 서 대리. 아무리 그래도 같은 사내 동료를 그 정도로···."

"네, 맞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순간 너무 욱해서 그랬습니다. 다들 놀라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그리고 어쨌든 운전자는 저였기에, 그때 조금 더 분발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사과드립니다."

나는 깔끔하게 김 부장과 다른 직원들에게 허리를 숙이고, 사과했다.

사실 어차피 이 중에서 김 부장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아무도 볼 일이 없다.

하지만, 김 부장만큼은 결국 보게 된다.

'그리고, 김 부장은 무공만 배우면 천하제일인에 도달할 사람이지.'

물론 범인들의 세상인 무림계 안에서지만.

내가 회귀를 했다 하더라도, 나는 괜스레 수도 문파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은 접었다.

'수도 문파는 무슨. 난 영근이 없다.'

영근, 혹은 영질, 영통이라고도 불리는 것.

그것이 없다면 수도공법을 익히는 것도, 수도자들의 익히는 영력을 감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이번 생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저···.

'저번 생보다, 조금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기회가, 조금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것.'

저번 생에서의 김 부장은, 무공을 익히고 나간 후.

아주 가끔 나를 찾아와서 술이나 한잔하고 가는 정도였다.

그마저도 절정고수에 오른 후에는 아예 찾아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번 생은 다르다.

'김 부장을 적극적으로 밀어주면, 나에게 콩고물이라도 조금 떨어지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그에게 잘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 다들 혼란스러운 상황인데 전 과장이 너무 밀어붙인 것도 있지. 물론 그래도 서 대리 역시 너무 과하게 반응했어. 사과하게."

"예, 부장님 말씀이 옳습니다."

나는 김 부장에게 다시 한번 허리를 숙인 후, 전 과장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전 과장님. 제가 너무 과격했습니다. 정말 사과드립니다."

"너··· 이 새···."

내가 다시 저자세로 나오자, 전명훈은 다시 기가 살았는지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내 눈빛이 서슬 퍼렇게 변하자, 결국 나와 눈을 피하고 입을 닫아 버렸다.

"그나저나 일단 숲속 같은데, 일단 걸어서 빠져나가 근처 마을이라도 찾아보는 게 어떤가?"

김 부장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하늘은 주홍빛으로 물들어, 곧 해가 질 것 같았고 바람도 쌀쌀해지고 있었다.

분명 상식선에서라면 김 부장의 말이 맞다.

하지만, 이곳에선 이제 기존의 상식은 버려야 한다.

'수도자들이 신선이 되어 영생을 얻기 위해 날아다니고. 무림인들이 부와 명예를 위해 칼부림을 하는 세상.'

그것이 이 세계다.

그리고, 우리가 떨어진 이 숲은···.

나는 50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숲의 이름을 생각해 냈다.

'등선향(登仙鄕).'

수많은 요수와 영수, 수도자들이 비승(飛昇) 하기 가장 좋다고 하는,

천지영기가 가장 많이 모인다는 비지였다.

등선향 인근에는 그 어떤 마을도, 도시도, 국가도 없다.

그러므로, 김 부장이 하려는 일은 무의미했다.

오히려 지금 더욱 중요한 것은.

'곧 밤이 된다. 불을 피워야 해.'

나는 상념을 마치고 김 부장에게 말했다.

"부장님, 통화는 됩니까?"

"끄음··· 아무래도 신호가 먹통이군."

"제 생각에는 신호가 먹통이면 구조도 힘들고, 저희 위치를 아는 것도 힘들 것 같습니다. 곧 밤이 되는데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마을을 찾는 것보다··· 오늘 밤은 여기서 묵을 준비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지금껏 닥치고 있던 전 과장이 조용히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업니까. 서 대리. 오히려 밤이 되면 위험하니 더더욱 마을을 찾아야지···요."

"흐음, 제 생각에는 함부로 움직이는 게 더 위험할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나는 근처에 있던 나무 중 높은 나무를 가리켰다.

"저 나무 위에 올라가서 근처에 마을이나, 혹은 도로라도 있나 한 번 보고 오지요. 근처에 아무것도 없다면 제 말대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 나무를··· 올라가라고? 누가 올라갈 거···업니까. 서 대리님입니까?"

"흠, 뭐. 저 밖에 나무 탈 줄 아는 사람이 없으면 그러지요."

난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곤 근처에서 가장 높은 나무의 줄기를 잡고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이전 산에서 약초를 캐다 멧돼지를 만난 적이 있다.

그때, 죽기 살기로 근처에 있던 튼튼한 나무로 올라간 적이 있었다.

현대인들은 평소에 나무를 올라갈 일이 없지만,

회귀 이전의 삶에서 온갖 난항을 겪었던 나는 손쉽게 큰 나무 위로 올라갔다.

"뭐가 보이나! 서 대리!"

저 아래에서 김 부장이 소리쳤다.

예상대로, 근처는 끝없이 펼쳐진 수해(樹海)였다.

도로나 마을은커녕 인간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요괴나 영물이 저 나무들 사이로 득시글거리지.'

나는 나무 위에서 소리쳐 대답하는 대신, 얼마간 자세히 주변을 둘러보는 시늉을 하고 나무 아래로 다시 내려갔다.

"하하, 서 대리. 정말 나무를 잘 타는군. 족히 11미터는 되어 보이는 나무인데."

"그나저나 이 나무는 무슨 종이지? 국내에서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김 부장이 내 어깨를 두들겨 주고, 오 차장이 내가 올라갔던 나무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손을 털며 본 것들을 말해 주었다.

"주변에 도로나 마을 같은 건 없습니다."

"허어, 이상하군. 산사태에 휩쓸려서 이곳까지 왔다곤 해도, 근처에 고속도로가 있어야 정상일 텐데···."

김 부장은 이상하다는 듯이 턱을 쓰다듬었고, 전 과장은 의심하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서 대리··· 제대로 보고 온 것 맞···습니까? 혹시 일부러 아무것도 없다고 한 건 아니겠지···요?"

"제가 미쳤다고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저도 인가에서 편히 자고 싶지 숲속에서 노숙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정 못 미더우시면 전 과장님이 올라가서 보시면 됩니다."

내 말에 전명훈은 똥 씹은 듯한 얼굴로 물러섰다.

"제 생각에는 주변 탐사를 하더라도 우선 근거지를 만들어 놓고, 불이라도 피워 놓은 다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곧 밤이니까요."

"맞는 말일세. 그럼··· 아, 우리 SUV도 찾아보지. 차 타고 산사태에 휩쓸렸는데, 상식적으로 근처에 우리 차가 없을 리가 없지."

김 부장은 손바닥을 탁 치며 말했다.

하지만···.

'이 곳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니까···.'

우리가 타고 왔던 SUV는 없다.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차를 찾아서 거기서 자는 건 어떤가? 차에는 워크샵 간다고 챙겨 놓은 물품들이 꽤 많으니까···."

이번 워크숍은 사실상 소풍이나 다름없는 워크숍이었다.

때문에 캠핑용 도구나, 음식들이 SUV 안에 잔뜩 쟁여져 있었다.

하지만, 차는 없다.

'물론 내가 회귀해서 아는데, 차가 없다고 말해 봤자 안 믿겠지.'

괜히 설득하느라 기운을 빼느니, 그냥 찾아보게 두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럼 팀을 나누죠. 한 팀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묵을 만한 곳을 찾고, 한 팀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차를 찾는 겁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다시 이곳으로 모이죠."

나는 팀을 나누자는 의견을 내었다.

묵을 곳을 찾는 팀에는 나, 오 대리, 김 주임이 들어왔고.

자동차를 찾는 팀에는 김 부장, 전 과장, 오 차장, 강 대리가 들어갔다.

우리는 서로 나뉘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서 대리님. 묵을 곳이라고 했는데, 보통 그런 곳을 어떻게 찾아야 하나요?"

오 대리가 조심스레 물어 왔다.

아무래도 내가 전명훈을 두들겨 팬 것 때문에 조금 껄끄러운 것 같았다.

"산이나 숲에서 노숙은 위험합니다. 들짐승이나 산짐승이 습격할 수도 있고,

또 그렇다고 아무 곳에나 불을 놓으면 산불이 날 수도 있습니다. 제일 좋은 건 아마, 작은 동굴이겠죠. 아, 저런 곳요."

"어머, 동굴이네?"

"바로 발견했네요? 운 좋다!"

물론 50년 전에 찾아갔던 동굴로 내가 자연스레 유도했던 것이다.

'지난 삶에서는 몇 시간이나 헤매서 간신히 찾아낸 안식처였지.'

오 대리와 김 주임이 보기엔 운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지난 생에서도 안에 위험한 것도 없고, 머무르기 딱 좋았었지.'

나는 동굴을 보고는 근처에서 나뭇가지나 나뭇잎 같은 부스럼들을 긁어모았다.

"아, 서 대리님. 불 피우시려는 거예요?"

"불은 아니고, 산짐승이 밤에 덮쳐 올 수도 있고, 밤바람이 찬 것도 있으니까 입구에 바람막이를 만들려고요."

나는 큰 나뭇가지와 작은 나뭇가지들을 엮어서 순식간에 동굴 입구를 요새처럼 덮어 버렸다.

김연 주임과 오혜서 대리는 놀랐는지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와아··· 서 대리님 능력자셨네요."

"보이스카웃 같은 거 하셨나요?"

"아, 뭐··· 비슷하죠."

보이스카웃이 아닌, 50년에 걸친 올드스카웃이겠지만.

"불은 어차피 이따가 김 부장님 라이터로 붙이면 되니까. 모닥불용 장작이나 모아볼까요?"

"어머, 완전 어릴 때 수련회 와서 했던 것 같아요."

"맞아, 맞아. 그때 같다."

두 여직원은 싱글벙글 수다를 떨며 나와 함께 장작으로 쓸 만한 검불이나 나뭇가지를 모았다.

얼마 후.

해가 질 때가 되었다.

"이제 슬슬 아까 공터로 가 보죠. 네 분도 그쪽으로 모이실 테니까요."

"그래요~"

"네~"

나는 두 여직원과 함께 처음 떨어졌던 공터로 향했다.

얼마 후, 우리는 김 부장, 오 차장, 전 과장. 그리고 강 대리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SUV는 찾으셨나요?"

"···."

김 부장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오 차장과 전 과장 역시 얼굴에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강민희 대리 역시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아무 데도 없어요.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찾아봤는데, 하늘로 솟기라도 한 것처럼 사라졌더라고요. 아니, 상식적으로 차 타고 산사태에 휩쓸렸는데, 왜 우리는 빠져나와 있고. 차는 사라진 거죠?"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숲이 공포스럽기라도 한 듯.

"···어쩔 수 없죠. 일단 제가 하룻밤 지낼 만한 곳을 만들었는데 그쪽으로 가서 묵죠. 나머지 자세한 탐사는 내일 해 보는 걸로 하고요."

"···그래요."

나를 제외한 여섯은 침울한 표정으로 나를 따라 동굴로 왔다.

"어머, 이게 뭐야?"

"서 대리님이 만들어 놓으셨어요."

"허, 서은현이 능력자로구만. 자연인 생활이라도 해 봤나 본데?"

강민희 대리는 내가 만들어 놓은 바람막이 겸 동굴 문을 보며 놀랐고,

오현석 차장은 작게 찬탄성을 터트리며 나를 칭찬해 주었다.

김 부장 역시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전명훈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이었으나, 피곤했는지 아무 말 없이 들어왔다.

"부장님, 라이터 좀."

"아, 그래."

김 부장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내가 모아 놓은 검불에 불을 붙였다.

우리는 동굴 안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둥글게 둘러앉았다.

연기는 내가 만든 바람막이에 난 구멍으로 딱 맞게 새어 나갔다.

"허어··· 어떻게 된 일인지, 거 참."

"이게 상식적으로···."

"···."

모두 걱정되는지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때였다.

꼬르륵

김연 주임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니, 그게···."

"하하, 괜찮네. 다들 저녁은 못 먹었으니까···."

나는 씨익 웃으며 나뭇가지를 모을 때 따 놨던 나무열매들을 건냈다.

"다들 배고프실 텐데. 이거 드셔 보세요. 아까 딴 겁니다."

"···이거 먹어도 되는 거 맞나? 독 있는 거 아니야?"

전명훈은 긴장이 풀렸는지, 다시 말을 놓고 나를 쏘아보며 물었다.

나는 싱긋 웃으며 열매를 까서 입에 넣었다.

"어렸을 때 약초학을 배운 적이 있어서요. 뭘 먹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는 압니다."

'어렸을 때'라는 말에 어폐가 약간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예전에 배운 건 맞으니까···.

내가 스스럼 없이 나무열매를 먹자, 김 주임도 조심스레 열매를 까서 먹어 보았다.

"와, 이거 꼭 생밤 같다."

"오독오독 씹히죠? 많이 따 왔으니까 다들 드세요."

그 모습을 보며 김 부장과 오 차장 역시 헛기침을 하며 내가 따 온 열매를 먹기 시작했다. 강 대리와 오 대리 역시 신나게 열매를 까먹었다.

오직 전명훈만이 못마땅한 듯이 나무열매들을 바라보다가, 피곤하다고 하며 먼저 드러누웠을 뿐이었다.

"하하, 이거 참. 심각해야 할 상황인데 우리 서 대리 덕분에 재밌게 보내는군."

"내가 회사에서도 알아봤다니까. 얼마나 근면한가? 그, 서 대리가 운전하면서 피곤했던 것도 내가 알기로 바로 전날에 야간 근무했던 것 때문인 걸로 아는데···."

"우리 대리님 완전 부지런하시죠~"

"아, 서 대리님 덕분에 캠핑 온 거 같네요."

"그러게요."

우리는 모두 화기애애하게 그날 밤을 보냈다.

나 역시 한껏 웃으며 회사 동료들과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렇게 웃으며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는 건,

오늘 밤이 마지막일 테니까.

***

다음 날 아침.

나는 새벽 공기를 맡자마자 누구보다 일찍 눈을 떴다.

50년 전의 기억이 점차 생생히 기억난다.

'첫날, 밤새도록 숲을 헤매다 겨우 동굴을 찾아서 기절하듯이 쓰러지고 난 다음 날. 아침부터 그것이 찾아왔었지.'

50년이나 지났지만, 그때의 공포와 충격, 그리고 고통은 끔찍할 만큼 생생하다.

나는 동굴 바깥의 바람막이를 열고 나갔다.

새벽 동이 트기 전이다.

나는 근처를 돌아다니며 통증과 지혈에 좋은 약초들을 캐냈다.

등선향이라 불리는, 영기가 충만한 숲이라 그런지 약초들의 상태가 어마어마하게 좋았다.

이건 차라리 영초(靈草)라고 해야 맞으리라.

그리고, 얼마간 동굴 앞에서 기다렸을까.

이 영역의 주인이 찾아왔다.

펄쩍!

집채만 한 덩치.

꼬리는 세 개였으며, 시퍼런 안광을 타오르듯이 흘리는 그것은,

새하얀 털을 가진 여우였다.

덜, 덜덜··· 덜덜덜···.

영역의 주인이 가진 위압감, 그리고 50년 전 당했던 일들.

그것들이 떠올라 몸이 절로 공포에 떤다.

하지만, '미래를 겪어 보았다'는 건 그 자체로 엄청난 이득이었다.

"수, 수, 숲의, 주인께. 인사. 올, 올립니다."

난 절로 떨리는 턱을 짓씹으며, 천천히 여우에게 절을 올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숲의 주인을 만나면 올려야 하는 삼배이다.

이층집만 한 크기의 여우는 시퍼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독특한 향기를 지닌 인족이구나. 내 수천년을 살아왔음에도 너희 같은 향기를 지닌 인족을 본 바가 없다.]

"···."

딱, 따닥, 따다닥···.

앞으로 저 괴물 여우가 할 짓에, 절로 턱이 떨려왔다.

그때였다.

여우의 인기척에, 자고 있던 이들이 깨어났다.

김 부장, 오 차장, 강 대리, 전 과장, 김 주임, 오 대리 등이 차례로 동굴에서 나왔다.

그리고, 이어진 수순은 당연했다.

"꺄아아악!"

"괴, 괴물!"

"괴물이다!"

그 말에, 괴물 여우는 마음에 들지 않는지 커다란 두 눈을 흘겼다.

[너희 하찮은 인족은 볼 때마다 몽매한 지능과, 끔찍한 무례함을 가진 듯싶구나. 본래대로라면 전부 사지를 하나 뽑아 버렸겠지만···.]

덜, 덜덜···.

[너희 중 하나는 숲의 주인을 대하는 예를 아는 것 같기에 용서하마.]

괴물 여우의 시선이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절을 올렸던 내게 닿았다.

"저, 전부! 숲의 주인에게 예를 취하십시오! 이, 일단 빳빳하게 서 있지 말고 앉으십시오!!"

내가 소리치자, 다른 이들은 멍하니 서 있다가도 얼떨결에 나와 같이 무릎을 꿇었다.

여우의 눈이 내게 닿았다.

[예를 아는 인족이로다. 하여 함부로 벌을 내리지는 않겠으나··· 너희에게 나는 향기가 너무나도 독특하구나···.]

뚝, 뚝···.

여우의 입가에서, 끈적한 액체가 흘렀다.

침이다.

[너희 중 하나의 팔다리. 하나만 맛보게 해 다오. 하면 너희가 내 영역에 잠시 머무는 것을 허하겠다.]

흩어지는 운명(1)

"서, 서 대리. 이게 무슨···."

"저, 저···건 뭔가요?"

김 부장과 강 대리가 소곤대며 물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도, 눈 앞에서 떨어지는 여우의 침에 더욱 신경을 집중했다.

[예를 아는 인족이 있는 무리이니, 함부로 해를 끼치지는 않으나. 내 영역에서 있으려면 대가를 치러야 할 터. 너희 중 하나만 내게 사지 하나를 바치면 너희의 거주를 잠시 인정해 주마. 누가 사지를 바칠 것이냐.]

그래.

어차피, 기왕 이렇게 된 거.

"제가··· 바치겠습니다."

나는 덜덜 떨며, 왼팔을 내밀었다.

지난 삶, 아무것도 몰랐을 그때에는 모두가 여우를 보며 비명을 질렀고,

여우의 진노를 사 모두가 팔다리가 뜯어먹힌 채 죽어갔다.

그때 살 수 있었던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숲의 예(禮)를 알고, 여우의 호감을 샀다.

지난 생처럼 모두의 팔다리도.

사지 전부도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의 사지.

그중 하나만 바치면 된다.

그마저도 이틀 후 올 수도자들이 회복시켜 줄 것이다.

[예를 아는 인간이로구나. 네 예는 잘 알았으니 최대한 아프지 않게 맛봐 주마.]

여우는 커다란 입을 벌려, 내 팔을 그대로 씹었다.

"···!!!! 아아아아아악! 끄하아아악! 꺼허억! 끄아아악!"

생살이 커다란 이빨에 의해 그대로 찢긴다.

뼈가 으스러지고 혈관이 파열된다.

우득, 우드득, 우득!

툭!

촤악!

얼마간 내 팔을 씹던 여우는, 그대로 강하게 내 팔을 몸에서 뜯어내 버렸다.

"아억··· 끄하악··· 끄악···."

나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내가 미리 뜯어 놓은 진통초를 한 움큼 집었다.

그리고 그대로 뿌리째로 입에 집어넣어 삼켰다.

뿌리에 남아있는 진흙과 모래가 이빨에 우득거리며 걸렸지만,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너무 고통스럽다!

얼마나 진통초를 집어먹었을까, 어느 정도 약효가 돌기 시작하며 고통이 잦아들었다.

우득, 우드득··· 쩝쩝.

그리고, 얼마 후 내 팔을 전부 씹어삼킨 여우가 혀로 입가를 닦았다.

[독특한 향기가 나길래 맛이 다른가 싶었더니만. 일반 인족과 크게 다르진 않군. 되려 혈관에 불순물이 많이 끼어 있어 텁텁하고 뒷맛이 좋지 않구나.]

"···미욱한, 공물을, 바칩니다."

[네 그 예를 받아, 너희가 내 영역에서 칠 주야간 머무는 것을 허한다. 내 신통(神通)이 깃들었으니 그 상처로 죽지는 않을 것이니라.]

여우는 그렇게 말한 후, 펄쩍 뛰어서 숲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허, 허억··· 헉, 허억···."

나는 지혈초를 입에 넣고 씹은 다음, 그 즙을 팔이 뜯겨나간 자리에 발랐다.

얼마 후 피가 멎고, 고통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끄···으윽···."

"서, 서 대리!"

"서은현 대리님!"

김 부장과 강 대리가 황급히 와서 나를 부축해 주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인가? 방금 그건 또 뭐고?"

"···이, 일단. 들어가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두 사람의 부축을 받아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진실과 거짓을 섞어서 이들에게 진상을 말해 주었다.

"오늘 새벽, 일찍 일어나서 동굴 바깥으로 나갔다가 그 여우를 만났습니다. 여우가 말해 주더군요."

어차피 이들도 며칠 후면 다 알아낼 사실이긴 했지만.

나는 내가 미리 알고 있었던 지식을 여우가 알려 준 지식인것처럼 알려 주었다.

이곳은 원래 우리가 살던 세계가 아닌, 완전히 다른 세계이며.

선인(仙人)과 수도자들, 그리고 무림인들이 실존하는 세상이라고 했다고 한다.

"···무림이라. 이것 참 가슴이 두근거리는군그래."

"허허, 살다살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곤···."

김 부장과 오 차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어쩐지 억지로 들뜬 듯한 표정과 함께 무림에 대한 농담을 내뱉기 시작했다.

"하하, 서 대리. 무림 세상이라면 내가 또 전문이라네. 그러니까···."

그러나 완전히 감정을 숨기지는 못했는지, 김 부장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죽지 말게나. 자네가 죽으면···."

무림에 왔으니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팔이 뜯겨 나간 내 고통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려 억지로 농담을 하는 것이었다.

김 부장과 오 차장은 억지로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있었다.

그 둘이 이곳에서는 제일 어른이었으니까.

"···괜찮습니다. 안 죽습니다. 아까 여우가 그랬잖습니까, 자기 신통이 깃들어 있으니 이 상처로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실제로 지난 삶에도 예를 차리지 않아 모두가 사지가 찢겨 나갔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누구 하나 죽지 않았다.

아니, 죽을 수 없었다.

"···그런데 선인은 또 뭔가? 수도자?"

그때, 오 차장이 내가 했던 말에서 선인과 수도자라는 말에 갸웃거리자, 이번에는 전 과장이 나섰다.

"무협지가 아닌, 선협 소설이라는 게 있습니다만···."

전명훈은 김 부장과 오 차장에게 대강 선협이라는 개념을 이해시켜 주었다.

"그렇군···."

"전 과장도 신기한 걸 알고있군 그래."

"평소에도 관심이 있어 알아보곤 하니까요."

'업무 시간에 업무는 안 하고 선협 소설이나 읽었단 말이지···.'

그래서 나한테 그렇게 업무 짬처리를 맡겨 댔던 건가.

순간 울화통이 터질 뻔했지만, 나는 빠르게 흘려 버리고 말을 이었다.

"여하튼, 그 숲의 주인이 이 숲에서 잠시 머물고 싶다면 제물을 내놓으라고 하여 제 팔을 내 주었습니다. 그 댓가로 이제 일주일 동안은 숲에 있어도 안전할 겁니다."

"이, 일주일? 일주일이 지나면··· 어떻게 되는 건가?"

"···또 다른 제물을 바쳐야겠지요."

그 말에, 모든 이들의 눈길이 내 어깻죽지를 향했다.

전부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그나저나, 진통초 좀 가져다 주십시오. 너무 아프군요."

"아, 알겠네. 이건가?"

"감사합니다."

나는 미리 캐놓은 진통초를 또 한뿌리 씹어 삼켰다.

"한 숨만 자겠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인지, 긴장이 풀리자 자연스레 잠이 왔다.

고통을 진통초로 억누른 후, 나는 달콤한 잠에 빠졌다.

***

사람의 감각 중 가장 오래 가는 것은 청각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정신을 차리자 들리는 것은 다른 이들의 목소리였다.

"아니, 제물이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주일이 지나면, 또 저런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겁니까?"

"일주일 안에 최대한 이곳을 벗어나는 걸 생각해 봅세."

"서 대리님 불쌍해서 어떻게 해···."

"서 대리님이 처음으로 그···걸 마주쳐서 뜯어먹히신 거나 다름없잖아."

"그렇다기보단, 처음으로 희생하신 거죠."

나는 비몽사몽한 와중, 계속해서 이어지는 대화를 들었다.

"그런데, 만약 일주일이 지나도 숲을 못 벗어나면 어떻게 합니까?"

전명훈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또 누가 팔을 뜯길 거죠?"

굴 안쪽에 침묵이 맴돌았다.

'어차피 사흘 후에··· 선인들이 나타나서 당신들을 납치해 갈 거니까 상관은 없을 거다만···.'

회귀에 대해서 털어놓을 게 아닌 이상 굳이 얘기할 필요는 없다.

그때였다.

상당히 신경이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서 대리 잘 자고 있죠?"

"네에··· 완전 기절하셨어요."

"서 대리, 혹시 일어났으면 잠시 할 말이 있는데 일어나 봐요."

나는 계속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전명훈은 내가 자는 걸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입구로들 와 보시죠."

"예? 그냥 여기서 얘기하면···."

"아, 와 보라고요."

전명훈은 결국 동굴 바깥 입구로 다른 이들을 끌고 나갔다.

얼마 후, 입구 쪽에서 침음성이 흘렀다.

동시에 전명훈을 질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 과장님!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실 수가 있으세요?"

"서 대리님은 자기 팔을 희생해서 저렇게 되셨는데···."

"으음. 전 과장. 그건 나도 좋게 볼 수가 없겠군."

"으으음···."

동굴 바깥에서, 전명훈이 목청을 높였다.

"아니, 그럼 다들 일주일 후에는 누가 자기 팔, 다리를 괴물 여우한테 뜯길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오 차장님, 차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저는 이게 합리적이라고 봅니다만."

"···모르겠군. 그리고, 서 대리는 유능하네. 약초도 많이 알고, 먹을 것도 알고···."

"그럼 일주일 동안 최대한 서은현한테 최대한 배운 다음에···."

동굴 바깥이라 제대로 들을 수는 없었으나,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기왕 내가 장애인이 됐으니, 내 팔다리를 잘라서 일주일마다 여우한테 바치자는 건가.'

어차피 일어날 일은 없지만, 기분이 좀 더럽다.

굉장히, 굉장히 많이.

'죽일까.'

한 팔만 있어도, 내가 지난 생에서 50년 동안 배워온 '폭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외팔로도 전명훈 같은, 아직 현대에서 제대로 벗어나지도 못한 문명인은 손쉽게 죽일 수 있다.

'···아니. 아니다.'

이틀 후 우리를 발견할 수도자들은 '우리'를 발견한 게 아니다.

'재능있는 존재'를 발견해서 왔다고 했었다.

'오현석 차장, 강민희 대리, 그리고 전명훈 과장. 이 셋의 자질에 놀라서 왔다고 했지.'

셋 중 하나라도 없으면 그들이 올지 안 올지 알 수 없었다.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줄까? 아예 장애인으로 만들어 버려?'

어차피 선인들은 사지가 토막 나 있던 지난 생에도 우리를 찾아왔다.

녀석의 사지 정도는 부러뜨려 놔도 찾아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나는 이내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다들 아마 공포 때문에 머리와 감정이 마비된 거겠지. 다들 원래는 좋은 사람들이다. 그냥 상황이 너무 급작스럽고 말도 안 될 뿐이다.

그리고 나중에 김 부장에게 의지하려면, 지금 너무 잔혹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좋지 않겠지···.'

오히려 보호받거나, 동정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는 게 좋다.

또한 김 부장 역시 저 모의에 동참한다면, 훗날 죄책감 때문에라도 나를 더 챙겨 줄 터.

'오히려 좋지. 어차피 사흘째 되는 날 모든 게 해결될 테니.'

앞으로 이틀 후면 전명훈, 오현석, 강민희는 평생을 안 볼 것이다.

사흘 후에는 오혜서와 김연 역시 떨어지고, 나와 김영훈 부장은 괴인의 도움을 받아 등선향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

나는 얌전히 계속 바닥에 누워서 자는 척을 했다.

얼마 후, 무언가 더러운 합의를 본 것인지 어두운 표정의 인원들이 굴 안으로 들어왔다.

"이보게, 서 대리. 괜찮나? 일어나 보게."

전명훈이 자는 시늉을 하던 나를 굳이 흔들어 깨웠다.

"하하, 서 대리. 그동안 미안했네. 자네가 그 정도로 희생정신이 투철한 사람인 줄은 몰랐네."

"···."

"앞으로, 잘 부탁함세."

전명훈은 전에 다시 없던 미소로 나를 쳐다보며 내 등을 쓸어 주었다.

나는 주변 인물들의 눈치를 보았다. 모두 하나같이 어둡다.

'이 쓰레기 같은 놈이, 어떻게 세 치 혀로 설득시켰나 보군.'

순간 짜증이 뻗쳐, 나를 껴안은 녀석의 목을 졸라 죽여 버릴까를 고민해 보기도 했다.

'참자. 후, 참는 거다.'

"···네. 어려운 상황에 다 같이 살아 나가야죠."

"하하, 그래. 그래서 말인데. 혹시 자네가 어제 따온 열매.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나?"

"···."

이 새끼, 이래서 괜히 자고 있는 사람 깨운 거구나.

"···가르쳐 드릴 수 있습니다. 사실, 원래부터 전 과장님한테는 특별히 가르쳐 드리려고 했습니다."

"핫, 정말 고맙네! 고마워!"

"숲에서 살아남는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다 가르쳐 드릴 테니까요."

난 녀석을 향해 씨익 웃어 주었다.

그래, 이깟 지식이야 실컷 알려 주마.

어차피 수도선파에 들어간 이후에는 평생 쓸 일 없는 지식이겠지만.

***

"전명훈 씨. 그 열매 아니라고 몇 번을 알려드렸습니까. 제 말에 집중 안 하시죠?"

"아니, 분명···."

"꼭지가 갈라진 건 다른 열매라고요. 이 열매는 먹으면 뒈져요. 아시겠어요?"

"···."

전명훈에게 약초와 식용 열매를 가르쳐 주며, 나는 이제 더 이상 녀석을 과장이라고 불러 주진 않았다.

녀석은 내게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입가를 씰룩이며 약초들을 배우고 있었다.

'새삼 저거 배워 봤자 저급 약초들이라 수도선파의 제자가 되면 쓸모도 없을 텐데.'

그 사실을 깨닫게 되면 얼마나 분통이 터지려나.

"아니, 전명훈 씨. 제 말 못 알아들어요? 제가 지금 설명을 몇 번이나 했는데. 그거 집중력에 문제 있는 거예요."

"···알겠···네."

전명훈의 얼굴은 산딸기처럼 시뻘개져 있었다.

입사 초기, 전명훈은 내가 녀석을 갈구던 것과 똑같은 형태로 갈굼 당하고 있었다.

아마 일주일 동안 최대한 지식을 빼먹을 생각으로 꾹 참고 있는 거겠지.

미안하지만 우리는 이틀 후에 평생 볼 일이 없을 거란다.

"자 봐요. 이건 초록잎어귀라는 건데. 씹으면 독특한 향을 내뿜어요. 이빨 닦는 데도 쓸 수 있고, 벌레 쫓는 효능도 있어요."

"초록잎어귀, 초록잎어귀···."

"흠, 그런데 한국에서는 한 번도 못 들어본 것들인데···."

오현석 차장은 조금 어리둥절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조금 전문적인 풀들이고, 국내 종이 아니라 잘 모르실 겁니다."

물론 당연히 지구에는 없다.

나도 이 세계에서 배운 약초 지식으로 써먹는 거니까.

하지만 오현석 차장 역시 전문가는 아니었기에 대강 믿는 듯했다.

"그렇구만. 계속 알려 주게."

"자, 이건 푸른아기손맥이라고 부르는데. 청혈초라고도 합니다. 아, 전명훈 씨. 제 말 지금 안 듣죠?"

"···미안, 하군."

나는 전명훈에게 눈에 보일 정도로 꼽을 주며 계속해서 약초 수업을 계속해 갔다.

그날 하루는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리는 동굴 앞에서 우리를 노려보는, 머리가 두 개인 커다란 붉은 뱀을 마주해야 했다.

"히, 히이익···."

"흐으으···."

다른 이들은 공포에 떨며 동굴 안쪽에서 나뭇가지 같은 걸 들었고,

나는 조심스레 뱀에게 말을 걸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그리고, 뱀이 말했다.

[영역의 주인이 독특한 향기를 품은 인족을 맛보셨다 하셨다.]

여우만큼은 아니었지만, 내겐 뱀 역시 상당히 두려운 존재였다.

물론, 여우에 비하면 정말 트라우마가 없는 수준이긴 했지만.

[물론 너희는 영역의 주인께 제물을 바치고 칠 주야간의 거주를 허락받았으니. 그 기간 동안은 건드리지 아니하겠다. 하지만···.]

뱀이 두 개의 머리로 입맛을 다셨다.

[너희의 피 맛을 조금만이라도 보게 해 준다면, 칠 주야가 지나도 딱히 너희를 건드리진 않으마.]

내 팔을 그대로 뜯어먹은 여우와 달리, 뱀은 상당히 온건한 편이었다.

심지어 지난 생에는 여우에게 거주권을 인정받지 못한 상태였기에,

머리 둘의 이 뱀은 그냥 와서 오 차장의 몸에 이를 박아넣고 피를 빨고 가 버렸었다.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우리 허락을 받고 피를 조금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상관없겠지.'

우리의 몸은 현대인답게 온갖 콜레스테롤과 지방이 잔뜩 끼어 있었다.

그 덕인지, 지난 삶에서도 뱀은 오 차장의 피를 맛 본 후 맛이 없다고 그대로 가 버렸었다.

"얼만큼의 피를 원하시는지요?"

[한 줌. 한 줌의 피만 다오. 그리하면 물러가 주마.]

나는 씨익 웃으며 전명훈을 바라보았다.

"전명훈 씨. 이분께 피 좀 드리시죠."

"뭐, 뭐?"

"저처럼 팔을 희생하라는 것도 아니고, 피 한 줌 정도만 달라 하시는 것 같은데요. 그 정도는 지혈도 금방 됩니다."

"이, 이···."

"아, 전명훈 씨. 혹시 약초 지식 필요 없으십니까?"

"···알았다."

전명훈은 시뻘개진 얼굴로, 근처에 만들어 놓은 날카로운 돌칼로 본인의 손을 그었다.

뚝, 뚝···.

뱀은 화색을 띈 채 전명훈의 피를 받아먹었고.

얼마 후.

[피에 불순물이 많군. 심지어 독까지 들어있어. 끔찍한 맛이군···. 내가 먹어 본 그 어떤 인족의 피보다 맛이 없다.]

뱀은 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뒤로 물러났다.

콜레스테롤과 니코틴에 쩔은 21세기 직장인의 피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피를 맛보게 해 줬으니, 물러가겠다.]

뱀이 물러간 후, 나는 전명훈의 상처에 지혈초를 발라 주었다.

전명훈은 상당히 짜증이 나고, 뱀에게 핥아질 때 느꼈던 기분이 더러운지.

굉장히 불쾌한 얼굴이었다.

"서은현 씨. 내가 은현 씨한테 입사 초기에 많이 괴롭힌 건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방금 같은 건 좀 너무하지 않나!"

"그럼 뭐 어떻게 합니까. 여성 분들한테 하기도 그렇고. 부장님 차장님 등 나이 있으신 분들 피 뽑기도 조금 그런데."

"피 한 줌 정도는 자네가···."

"···전 어제 팔이 잘려서, 피가 조금 모자란 상태입니다. 피 한 줌도 제겐 큰일이에요."

"크윽···."

전명훈은 입술을 짓씹으며 숨을 들이쉬었다.

'웃긴 놈 같으니. 자기는 나를 일주일 후에 여우한테 팔아치워 버릴 계획이면서.'

내가 저를 희생 제물 삼으니 괜스레 분노하는 것이다.

어차피 이 녀석은 나를 어찌하지 못한다.

'뭐, 내일부터는 다시 볼일 없을 테니···.'

나는 그 전에 최대한 굴려먹으며 뽕을 뽑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전명훈을 한참 굴리기 시작했다.

***

그렇게, 우리가 이 숲에 떨어진 지 사흘이 되었다.

후웅, 후웅···.

오늘은 새벽부터 바람이 거셌다.

찌릿, 찌릿···.

동시에, 공기가 요동치는 느낌이었다.

나는 히죽 웃으며, 아침 일찍부터 전명훈을 깨웠다.

"전명훈 씨, 아침에 약초 좀 뜯으러 가 봅시다."

"아침부터···."

"아, 빨리요."

"···."

나는 전명훈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약초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얼마 후.

"오, 심 봤다!"

"이, 이거 좋은 약초인가?"

"예, 뭐 그렇죠."

"확실히, 삼을 닮긴 했어···."

전명훈은 눈앞의 산삼을 닮은 풀을 보며 침을 꼴딱 삼켰다.

눈앞의 삼은 황주삼이라는 삼의 종류로.

사실 그렇게 희귀하거나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삼의 크기.

천지영기를 가득 머금은 등선향이라서 그런지, 본래 새끼손가락만 하던 황주삼은 내 팔뚝처럼 굵어져 있었다.

"괴, 굉장히 굵은데. 이거, 그 산삼 맞나?"

"예, 뭐. 맞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조금 더 찾아보죠."

"그, 그러지."

전명훈도 산삼을 찾는다고 생각하며 더욱더 열심히 나를 따라다녔다.

그 결과, 황주삼은 두, 세 군데에서 몇 뿌리를 더 뽑아낼 수 있었다.

"하하하, 어, 엄청나군. 산삼을 이렇게 많이 캐도 되는 건가?"

"···."

전명훈은 희열을 느끼는 듯했지만, 나는 속으로 피식 웃고 있었다.

'어차피 앞으로 너는 그런 거 먹을 일 없다.'

심지어 전명훈은 자기 손으로 캔 저 황주삼들도 못 먹을 거다.

수도자들에게 있어서 황주삼은, 범인용 저급 약초였으니까.

'물론 무림인들에게는 내공 증진용으로 쓰이기에··· 나중에 김 부장님이나 드려야겠군.'

"자, 삼은 나중에 드셔 보시고. 일단 여기 넣으시죠."

난 내 옷을 찢어 만든 주머니를 건넸다. 전명훈은 조심스레 삼들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자, 그럼 돌아가죠."

이제 슬슬 올 때가 되었다.

나는 동굴로 돌아가, 전명훈에게 불을 피우게 시키고는 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 하늘을 바라볼 때였다.

콰광! 콰과광!

순간 번쩍하더니, 하늘에서 뭔가가 부딪혔다.

검은빛과 황금빛, 그리고 새하얀 빛이 부딪힌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

"커헉! 끄아악!"

갑자기 전명훈이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아악, 아아악!"

강민희 대리 역시 자리에 주저앉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비명은 귀곡성이 되어 주변을 울렸다.

또한 오현석 차장 역시 심장을 쥐어뜯으며 주저앉았다.

'때가 됐다.'

그리고, 얼마 후.

파아앗!

우리가 있는 동굴 위로, 세 개의 빛 덩어리가 날아왔다.

[허어, 놀랍군. 귀찮은 놈들과 부딪히다 이런 원석들을 발견할 줄이야.]

[누가 할 소리. 꺼져라, 벽호. 이 녀석들은 모두 내 것이다.]

[양심이 없는 소리를 하는군. 허곽.]

빛 덩이 속에서는 각각 황금빛 장포의 장년인,

남성인지 여성인지 헷갈리는 흑색 마의인.

그리고 청색 갑옷을 입은 거한이 걸어 나왔다.

"다, 당신들은··· 누구···입니까···?"

김 부장이 두려운 듯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질문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김 부장을 흘긋 쳐다본 후 무시해 버렸다.

[영근이 없군.]

[범인이야.]

[내 법보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녀석이군.]

그들의 시선이 우리 일곱을 차례로 흝었다.

[영근이 있는 건 저 셋인가.]

[그나저나 놀라운데. 어떻게 수련도 안 한 범인들이 등선향에 있는 건지···.]

[크크, 그 여우 녀석한테 뜯긴 녀석도 있는 것 같은데. 뜯긴 자국을 보아하니 스스로 바쳤군. 범인이지만 기개가 있구나.]

쿠웅!

청색 갑옷을 입은 거한이 발을 구르자, 희미한 청록색 빛이 물결치며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동시에, 내 몸이 그 빛에 닿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하늘색 빛이 돌며 내 팔이 다시 자라난 것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나는 황송하다는 듯이 거한에게 엎드려 절을 올렸다. 거한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수도자도 아니고, 고작해야 범인의 정혈 정도는 회복하기가 굉장히 쉬우니 너무 그럴 건 없다. 그나저나···.]

까딱

청색 갑옷의 거한이 허공을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그와 함께 내 몸은 뒤로 밀려났고,

전명훈, 오 차장, 강 대리의 몸이 앞으로 끌려왔다.

[이 셋이 영근을 가졌으니, 셋 중에 알아볼까?]

황금빛 장포를 입은 장년인이 앞으로 나와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 위로 황금빛 검이 떠올랐다.

우우웅!

파지직!

동시에 황금빛 번개가 하늘을 울렸고, 전명훈이 다시금 바닥으로 쓰러지며 피를 토했다.

[역시··· 놀랍군! 천상금뢰지체(天上金雷之體)야···!]

[비켜, 내 차례다.]

여인인지 사내인지 알 수 없는 흑색 마의인이 황금 장포의 장년인을 밀치며, 풍에서 흑색의 비파를 꺼내 들었다.

퉁―

비파 현을 퉁기자, 강민희 대리가 머리를 움켜쥐며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그녀의 비명은 다시금 귀곡성처럼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흑색 마의인의 얼굴에 희색이 어렸다.

[귀도음화선근(鬼導陰化仙根)···! 그게 실제로 있는 거였다니! 아아아···.]

[흐흐, 나도 내가 느꼈던 게 거짓이 아니리라 믿는다.]

청색 갑옷의 거한이 흑색 마의인을 지나쳐, 오현석 차장에게 다가갔다.

"뭐, 뭡니까."

오 차장은 두려운 듯했으나, 청갑 거한은 의외로 가장 멀쩡하게 오 차장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어 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일문성체(一紊聖體)! 이, 이게 존재할 수 있는 육신이었나! 마, 말도 안 되는···.]

얼마 후, 충격에 빠진 듯한 셋은 잠시 가슴을 진정시키는 듯하더니, 우리 쪽의 셋에게 물어보았다.

[자네들, 수선(修仙)에 뜻을 둬 볼 생각이 없는가?]

황금빛 장포의 장년인이 전명훈에게 온화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자네들은 한 명 한 명이 이 세상을 뒤집어엎을 재(才)를 가지고 있어. 그 재능을 썩힌다는 건 있을 수가 없네.]

흑색의 마의인이 강민희 대리를 끈적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영생불사! 천지를 뒤집어엎을 힘! 막대한 부와 명예! 모든 걸 가지고 싶지 않나? 내 장담하지. 나를 따라오면 자네들은 100년 안에 모든 걸 얻게 될 걸세.]

청갑의 거한이 오현석 차장에게 대놓고 다가가 그의 몸을 주무르며 말했다.

[나는 금신천뢰문(金神天雷門)의 태상문주, 금벽호라 하네. 자네들 셋 다 우리 금신천뢰문에 입문하는 게 어떤가?]

[흥, 욕심도 많기는! 우리 흑색귀골곡(黑色鬼骨谷)에 입곡하면 없는 속성 공법이 없다네. 본인은 곡(谷)의 원로원 원주 백골귀마라고 합세. 자네들 모두 본 곡에 입곡하면 최대의 성장을 이뤄낼 수 있을 테지.]

[뭐, 난 저 둘은 굳이 필요 없다. 자네만 오게, 일문성체. 창천개벽문(蒼天開闢門)의 개파 사조, 이 창호자가 직전 제자로 받아들여 잘 가르쳐 주지. 원한다면 창천개벽문을 물려줄 의향도 있다네. 아, 나머지 둘도 원하면 오게나. 방향성은 다르지만 막대한 재(才)를 가졌으니, 오면 어쨌든 직전 제자로 받아 주지.]

세 수도자는 말로는 셋에게 선택권을 주고 있는 듯했으나.

실상은 반강제로 협박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청갑을 입은 창호자란 거한은 아예 오현석 차장의 어깨를 으스러져라 잡고 있었고.

백골귀마란 중성적 마의인은 강민희 대리와 눈을 마주치고 뭔가를 하고 있었다.

강민희 대리는 점차 눈빛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금벽호란 이는 뭔가 보이지 않는 압박감으로 전명훈을 압박하며, 자신을 선택하지 않으면 죽일 것 같은 기색을 쏘아내고 있었다.

얼마 후, 전명훈, 오현석 차장, 강민희 대리는 반강제로 세 수도선파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하하, 본문에 온 것을 환영한다!]

[본곡의 원로원이 너를 잘 보듬어 줄 것이다.]

[제자야, 가자.]

세 수도자는 세 사람을 데리고 날아오르려는 기색이었다.

그때쯤 정신없이 상황을 보던 김 부장이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달려나갔다.

"자, 잠깐! 이보시오! 우, 우리를 혹시 이 숲에서 빼내 주실 수 있으시오? 우, 우리는 이곳에 있다가는 전부 죽을 겁니다!"

[흠, 범인이라서 그런가, 걱정이 많군. 그 여우 놈 때문에 걱정인가? 걱정하지 말라.]

청갑 거한, 창호자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오면서 등선향의 모든 요괴와 마물을 전부 때려잡았다! 이제 그 여우 놈도 잡으러 갈 테고, 향후 10년간 등선향은 안전할 게다!]

"아, 아니··· 이, 이보시게! 전 과장! 오 차장! 강 대리! 뭐라고 말 좀 해 보게! 우리는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도 모르네!"

그러나 정작 전명훈은 금벽호가 금색 호리병을 꺼내서 포O몬처럼 안에 집어넣은 상태였고.

강민희 대리는 백골귀마에게 홀렸는지 완전히 맛이 간 얼굴이었으며.

창호자는 오현석 차장이 무어라 말을 해도 껄껄거릴 뿐, 별로 신경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50년 전에도 그랬지.'

저 셋은 안하무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우리가 아무리 목이 터져라 외쳐 대도, 우리가 벌레인 마냥 신경 쓰지 않고 갈 길을 갔었다.

나는 목 아프게 세 수도자를 부르는 것보다는, 다시 회복된 팔을 만져 보았다.

'그래도, 팔을 다시 만들어 준 게 어디인가.'

나는 한숨을 쉬며, 일단 창호자에게 속으로 감사 인사를 올렸다.

김 부장은 멀어져 가는 세 개의 빛무리를 보며 목청이 터져라 외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허억··· 헉···젠장할···."

결국, 김 부장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우리더러··· 어떻게 하라고··· 이 숲에서···."

이제 남은 사람은 넷.

나, 김 부장, 오혜서 대리, 김연 주임.

'아마 내일이면 오 대리랑 김 주임도 납치(?)당할 테니까···.'

이제 김 부장과 함께할 시간이 머지않았다.

***

김 부장은 잠시 침통해 있었으나, 내 팔이 회복된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축하해 주었다.

"정말 다행이네, 다행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거기에 그 창호자란 사람이, 여우도 잡아 준다고 했으니. 살려고만 한다면 충분히 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후우··· 그렇군···."

"서 대리님 팔이 뜯겼을 때는 정말 정신 나가는 줄 알았어요···. 아, 사실 지금도 동료가 셋이나 사라져서 조금, 아니 많이, 정말 많이 당황스럽긴 한데···."

"대리님, 정말 다행이에요."

우리는 동료를 잃고, 목숨을 보장받은 이 기이한 상황에.

울지도 웃지도 못하며 자리에 앉아만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하늘에 유성이 지나가듯, 새하얀 빛이 또다시 하늘을 가로질렀다.

"어, 어엇···."

그것만이 아니었다.

새하얀 빛 이후로, 수 개. 수십 개의 빛이 마치 유성우처럼 하늘을 건너 날아갔다.

모두 금벽호, 백골귀마, 창호자가 날아간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저 방향에 뭐라도 있는 건가···."

김 부장은 당황한 듯이 그 방향을 쳐다보았고, 나는 오늘 먹을 나무열매를 모아, 모닥불을 피워 열매들을 굽기 시작했다.

이제 내일이면, 오 대리와 김 주임과도 작별이다.

***

쏴아아아아―

다음 날이 되었다.

이날은 특이하게도 비가 내렸다.

하늘 곳곳에 먹구름이 끼고, 천둥이 친다.

"···이래서야 열매 구하러 가기도 그렇겠네요. 어떻게 할까요?"

김 주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오 대리님도 상태가 안 좋으신데."

말 그대로였다.

오혜서 대리는 열이 잔뜩 나서 드러누워 있었으며, 멍한 눈으로 하늘을 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죠."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쩌면, 오늘도 어제 같은 기적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걸 기적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 물론 서 대리님 팔이 다시 돌아온 건 정말··· 정말 기적 같은 일이긴 한데···."

나는 피식 웃으며 김 주임에게 말했다.

"혹시 압니까. 누가 나타나서 오 대리님 병도 전부 낫게 해 주실는지요."

나는 김 주임, 그리고 김 부장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점심때가 되었다.

콰르릉!

뇌성이 울렸고.

쿨럭! 쿨럭!

오 대리의 기침과 열은 점차 심해졌다. 그녀의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서, 서 대리님. 이럴 때 필요한 약초라도 있나요? 어, 어떻게 해야···."

"일단 해열초를 조금 먹여 보죠."

그때였다.

저벅, 저벅···.

누군가가 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청포를 입고 있는, 잘생긴 중년인이었다.

꽁지머리를 한 중년인의 머리에는 작은 사슴뿔 같은 것이 한 쌍 나 있었다.

[등선향에 범인들이라. 진룡들 경쟁에 개미 허리가 터져 나가는 형국이로군.]

"다, 당신은 누구요!"

김 부장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새로운 인물을 경계했다. 청포 중년인은 씨익 웃으며 여유롭게 자신을 소개했다.

[해룡왕(海龍王), 서휼(瑞鷸). 갑자기 천기에 없던 호풍환우가 일어나기에 그 비틀림의 근원을 좇아왔네만. 그 처자가 호풍환우의 술법을 부리고 있군.]

자신을 서휼이라 소개한 중년인이 오 대리를 가리켰다.

[아니, 술법이라기엔 조금 그런데··· 그래. 호풍환우의 권능을 휘두르고 있어. 인간의 육신으로 저런 막대한 기사를 벌이니 몸이 무리를 받는 게야.]

"호, 호풍환우?"

[그렇네. 호풍환우. 정말 기이하군. 인족. 그것도 범인··· 영근조차 없는 인족 여성이 어찌 이런 광대한 힘을 휘두르는 것인지···. 심지어 의식적으로 휘두르는 것도 아니군. 정말 기이해.]

기이하다라···.

나는 서휼에게 되려 내가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저희야말로 사실 더욱 더 기이합니다. 어제, 세 분의 엄청난 수도자분들께서 각자에게 딱 맞는 제자를 우리 일행 중에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마침 당신께서 오 대리를 봐 주시러 오셨습니다.

왜 당신들처럼 대단한 분들께서 저희에게 딱딱 맞춰서 와 주시는 겁니까?"

내 물음에, 서휼은 멀뚱히 있는 듯싶더니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러니까.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뛰어난 자질을 가진 이가 자네들 동료 중에 있었고. 그 자질에 딱 맞춘 스승들이 자네 동료를 딱 맞춰서 데려갔는데. 오늘은 내가 저 처자에게 또 딱 맞춰서 나타난 게 기이하단 건가?]

서휼은 재미있다는 듯이 내게 물어왔다.

[이보게 범인 친구. 이곳이 어디인지 아는가?]

"대략 듣기로, 등선향이라는 지명인 것 같습니다만···."

[등선향. 등선향이라고도 하고, 비승도(飛昇途)라고 하여, 상계(上界)로 비승할 수 있는 통로로 향하는 길목일세. 그리고 몇달 후 비승도 너머, 승천문(昇天門)이라고도 불리는 공간 균열이 입을 여는 시기일세.

천 년에 한 번 있는 시기로, 이 시기에는 주변 공간이 불안정해지고, 비승도 근처로 수많은 수사와 영물들이 싸그리 몰려든다네. 상계로 승천하기 위해서지. 이 계면(界面)에 존재하는 고위 수사란 수사는 싸그리 몰려들었을 테니.

확률상 자네들한테 딱 맞춘 스승들이 나타나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야. 저 처자 역시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동급 수사들이나 영물들이 발견했을 확률이 크지.]

"그렇습니까···."

나는 우리를 이렇게 빠르게 뿔뿔이 흩어 놓는 것에, 우리를 이 세계로 날려 보낸 어떤 존재의 의도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런 것이라기보단, 그냥 확률의 문제였던 듯싶었다.

"음, 그런데 내 동료들을 그 수사란 이들이 데리고 갔는데···."

김 부장은 내가 서휼과 말을 트는 것을 보자 긴장이 풀렸는지, 그 역시 서휼에게 궁금한 것을 질문했다.

"각기 자기 문파에 가입시키겠다거나, 문파를 물려주겠다고 하던데, 그 상계···란 곳으로 비승을 하면, 어찌 자기 문파에 가입을 시킨단 겁니까?"

[흠, 범인이라 수도자에 대해서는 잘 이해가 안 될 수도 있겠군. 수도자들의 선술 중에는 커다란 물건을 축소시켜서 보관하는 기술도 있지.]

이어진 서휼의 말에,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아마 그들 모두 자기 문파를 본인의 저물법기에 보관하고 있을 걸세. 문파 자체를 승천문이 열린 이때에 상계로 함께 비승시키려는 야망인게지. 아, 사실 나도 우리 해룡족(海龍族)의 성(城) 하나를 떼어서 이 저물법기에 넣어놨다네. 성안에는 천팔백여 명의 우리 해룡족원들이 잠들어 있고.]

그 가공할 말에, 나와 김 부장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스윽···.

그때, 서휼은 오 대리에게 다가가 그녀의 이마를 쓸어 주었다.

붉게 달아오른 채 가쁘게 숨 쉬던 오 대리의 상태가 빠르게 안정되었다.

[···기이하군, 기이해. 하지만, 해룡족원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마어마한 존재가 될 수 있을지도···.]

스윽···.

말을 하며 서휼은 오 대리를 안아 들었다. 김 부장은 당황해서 그를 말리려 했으나, 보이지 않는 반탄력에 튕겨 나가 버렸다.

"어이쿠!"

[이 처자는 본왕(本王)의 피를 주어 혈족으로 받아들이지. 아마 그게 서로에게 좋을 거야. 그리고 등선향에 무시무시한 수사들이 많이 지나갈 터이니 노파심에 하는 말이네만···.]

파앗!

서휼의 동공이 세로로 쭉 찢어졌다.

"컥! 커헉··· 어억!"

"끄···으윽···!"

나와 김 부장, 서휼에게 질문을 한 우리 둘은 숨쉬기조차 힘든 압박감에 주저앉아 버렸다.

[함부로 고위급 수사에게 질문을 하지 말게. 본왕은 성격이 좋아 대답해 주었으나, 성격이 더러운 일부 수사들은 자네들이 질문한 것만으로도 벌레처럼 그대들을 터트려 죽일 수도 있으니까···.]

말을 마친 서휼은 동굴 바깥으로 나갔다.

번쩍!

우르릉!

빛과 함께 뇌성벽력이 울렸고, 얼마 후 우리는 저 하늘을 날아가는 한 마리의 청룡(靑龍)을 볼 수 있었다.

쏴아아아―

여전히 비는 그치지 않았다.

김 주임은 허탈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전부 납치당했네요. 이젠 저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갑자기 산사태에, 갑자기 다른 세계라 하고, 신선들이니, 용이니 하는 것들이 직장 동료들을 납치해가고··· 하, 하하···."

그녀는 울 듯한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김영훈 부장 역시 우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사람 사는 곳을 찾아봐야 할 것 같은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고. 신선이니 용이니 하는 것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 늘어놓고는··· 제길."

"···."

나는 얌전히 둘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때, 갑자기 김연 주임이 내 팔을 붙잡았다.

"대리님, 은현 대리님은 갑자기 안 사라지실 거죠?"

"···."

"대, 대리님도 갑자기 납치당하시면 안 돼요. 대리님까지 납치당하시면, 이 숲에서 살 자신이 없어요···."

나는 씁쓸하게 웃어 주었다.

오늘 저녁.

마지막으로, 김연 주임이 괴인에게 납치당할 것이다.

흩어지는 운명(2)

투둑, 투두둑···.

끝없이 내리던 폭우는 오 대리가 사라지자 점차 잦아들었다.

얼마 후, 다시 하늘이 개이기 시작했다.

"···일단 앞으로 어떻게 되든, 먹을 걸 좀 구해 오겠습니다."

나는 침울해져 있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일어섰다.

"잠깐, 은현 대리님. 같이 가요."

"그, 그래. 혹시 떨어진 사이에 이상한 놈들이 납치할 수 있지 않은가?"

"···뭐, 그러죠. 그리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제자니 혈족이니 하며 데려갔으니, 납치라기보다는···."

"그게 납치지. 뭔가? 그 괴상한 놈들이 어디 각자 제대로 수락은 받고 데려간 건가?"

김 부장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하긴, 사실 납치가 맞기야 하다.

우리는 서로에게 붙어서 나와 함께 약초를 캐고, 열매를 땄다.

"여기 이 풀 좀 씹어 보시죠. 몸에서 열이 날 겁니다."

나는 비가 온 후, 찬 공기 속에서 추워하던 김 주임과 김 부장에게 발열초를 건네주었다.

"고, 고맙네. 서 대리."

"정말, 대리님 없었으면 저흰 아마 첫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굶주리기만 했겠죠···?"

"자네같이 유능한 사람을 왜 회사에서는 몰라봤을까···."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할 줄 아는 게 이런 것 뿐이라서 그런 겁니다. 산 속에서 며칠 살아남는 거야 잘 하겠지만, 그 외에는 아무런 능력도 재능도 없습니다."

"겸손 떨 것 없네. 자네 덕분에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니까. 자네는, 우리 목숨의 은인이나 다름없어."

"맞아요, 대리님."

둘은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격려해 주었다.

둘의 진심어린 말에,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이런 것밖에 없습니다.'

나는 지금, 미래의 지식으로 김 부장의 호의를 사기 위해 장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유능한 사람도, 선한 사람도, 누군가의 은인이 될 수도 없는 인간이다.

그저, 당신들의 호의를 사기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

그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였다.

"이것도 조금 드셔 보시죠. 머리가 맑아질 겁니다."

"이 풀은 혈액 순환에 도움이 되고···."

"이 열매는 미용에 효과가 있다고 하고···."

나는 숲을 돌아다니며, 김 부장과 김 주임에게 수많은 영초와 영과를 먹였다.

'황주삼도 몇 뿌리 더 캤고. 지난 삶에서 귀히 취급되던 영초들도 많이 캤어. 그리고···.'

두 사람도 배불리 먹였다.

"고맙네, 서 대리. 배가 든든해지니 우울감도 조금 가시는군."

"대리님. 대리님은 정말··· 어디 가시면 안 돼요."

"···물론이죠. 저는 안 납치당합니다."

숲을 돌아다니며 약초와 열매들을 캐 와 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슬슬 때가 되겠어.'

나는 상의를 벗어, 김 부장의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세, 세상에. 서 대리! 뭐 하는 짓인가!"

"대, 대리님!"

비가 올 때는 동굴 안에 있었고, 비가 그친 후에 돌아다니며 입었던 옷이라 잘 말라 있어, 아주 잘 탔다.

나는 내 옷을 태운 불에 막 따온 열매들을 집어넣었다.

"···비가 와서 장작들을 못 구합니다. 곧 밤이 될 텐데, 불이 필요해요."

"하, 하지만··· 자네 옷이···."

"전 괜찮습니다. 발열초도 많이 따 왔잖습니까."

김 주임의 송별 선물이다.

나는 당황하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잠시 후 나뭇가지로 불 속에서 열매들을 꺼냈다.

"김 주임, 한번 드셔 보세요. 부장님도 잡숴 보시고요."

"···고맙네, 서 대리."

"정말, 감사해요."

노을이 졌다.

우리는 굴속에서 노을을 바라보며, 구운 열매를 까먹었다.

아마 이것이 김 주임과의 마지막 식사이리라.

열매를 먹으며, 우리는 오 차장, 전 과장, 강 대리, 오 대리 등과 헤어진 우울감을 감추기 위해 수다를 떨었다.

가끔은 깔깔거리며,

가끔은 피식거리며.

가끔은 부장님의 농담에 재미없어하며.

그렇게, 한참을 웃고 떠들었다.

붉게 노을 진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며, 해가 지평선 아래로 거의 내려갔을 때 즈음.

저 멀리.

수많은 수도자들, 그리고 해룡왕이 향했던, 승천문이 있다는 그 방향으로.

김 주임이 휙 고개를 돌렸다.

"김 주임, 무슨 일이야?"

김 부장이 김연 주임에게 물었다. 나는 입술을 파르르 떠는 그녀를 보며, 시간이 되었음을 짐작했다.

"어, 어어···."

그녀가 능력을 각성했다.

"이, 이상···해요. 갑자기, 주변의 모든 게 전부 느껴져요. 몇 킬로미터 바깥까지 감각이··· 으, 으아···."

김연 주임은 갑작스레 주변 수 킬로미터 안을 감지하는 감각을 손에 넣자 머리가 아픈지,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렸다.

"으··· 끄으으···."

"서, 서 대리! 이거 어떻게 해야하나? 두통에 좋은 약초 같은 게···."

"두통에 좋은 건 여기 있긴 합니다만."

아마 쓸 일은 없을 거다.

50년 전.

지난 삶에서도, 분명 이 즈음에 왔으니.

"아, 아아···!"

그녀가 승천문이 있는 방향을 보며 낮게 비명을 질렀다.

"오, 온다! 와요! 뭐가, 오고 있어요!"

수도자들이 향했던 승천문의 방향에서, 작은 점 같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 후, 점은 급속도로 커지더니 삽시간에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파아아앗!

미쳐 눈으로 쫓기 힘든 속도로 우리가 있는 동굴 상공에 도착한 그것은, 거대한 흉수(凶獸) 형태의 꼭두각시였다.

마치 해태를 닮은, 그러나 그보다 훨씬 사악해 보이는 형태의 괴뢰(傀儡) 위쪽에는 한 곱사등이 노인이 지팡이를 쥐고 앉아있었다.

[이게 뭐야. 범인(凡人)들이 아닌가? 어찌 영근도 없는 범인들이 비승도 외곽까지 도달한 거지? 아, 그런가. 승천문이 열릴 시기에는 인근 공간이 불안정해지니 범인들이 공간 폭풍에 휩쓸렸을 가능성이 높겠군! 키히히, 역시 나는 천재야. 이런 난제의 답을 순식간에 알아내다니!]

스스로를 자화자찬하던 곱사등이 노인은 얼마간 낄낄거리더니, 우리를 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범인들아. 방금 전에 어마어마한 식(識)을 늘어뜨렸던 이가 누구냐? 강대한 식(識)에, 상계(上界)의 선사가 강림한 줄 알고 화들짝 놀랐거늘···. 아, 저 녀석인가?]

펄쩍!

노인이 괴뢰의 위에서 펄쩍 뛰어내려, 두통을 호소하는 김 주임에게 다가왔다.

"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김 주임은, 저희의 동료입니다."

김 부장은 용기를 내서 노인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노인이 턱 끝을 까딱거리자 김 부장은 힘없이 옆으로 날아가 버렸다.

나는 달려가서 김 부장을 온몸으로 받아 냈고, 내 등이 쓸리긴 했으나 김 부장은 안전하게 받아낼 수 있었다.

"서, 서 대리, 고맙네. 허, 헉! 괜찮은가! 등이!"

"괜···찮습니다."

우리가 그러는 사이, 곱사등이 노인이 김 주임에게 다가가 말했다.

[기이하구나, 기이해. 범인의 식(識)은 자기 뇌 내에서밖에 머무르지 아니하거늘. 이 아이의 식은 마치 실처럼 늘어져서 천지사방에 뻗쳐 있다. 그 기세가 하도 거대하여 내가 상계의 선사인 줄 착각했을 정도니···.]

곱사등이 노인은 김 주임의 턱을 잡고 들어 올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아이야, 내가 너를 거두어 주마. 영근이 없다지만, 내 능력이면 영근 정도는 충분히 각성시켜줄 수 있지. 이런 기묘한 식이 수도자의 신식으로 진화한다면,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궁금해지는군···.]

김 주임의 눈이 파르르 떨리며, 우리를 향했다.

"부, 부장님··· 대리님···!"

[흠···? 이 내가 거두겠다고 했거늘, 아직도 속세의 인연 따위에 집착하겠다는 게냐?]

"으, 흐으···."

그녀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며칠 만에 사내 동료들이 납치당한 후, 또 누군가가 흩어질 것을 걱정한 그녀였다. 또다시 우리와 흩어진다고 생각하니 두려운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곱사등이 노인이 얼굴을 흉신악살처럼 일그러뜨리며 우리를 가리켰다.

"커, 커억!"

"어어어억!"

나와 김 부장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숨도 쉬기 힘든 압박감이 우리를 조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네 속세의 인연을 친히 끊어주마. 자···.]

"아, 안 돼요! 제, 제발··· 시키는 건 전부 할게요. 제발 저분들을 살려 주세요!"

김 주임은 눈물을 흘리며 노인의 발치에 매달렸다.

그 모습을 본 곱사등이 노인은 미간을 꿈틀거리며 우리에게서 손을 거두었다.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던 압박감이 그제야 사그라들었다.

[좋다, 그리 말한다면 굳이··· 하지만, 넌 내 것이 되었으니 이제 속세의 인연은 전부 잊어야 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기왕 이리 된 것, 여기에 놔 두면 네 미련이나 남을 테니, 저 둘은 근처 범인들의 국가로 돌려보내겠다. 공간 균열을 통해 무작위로 보내는 것이니 나도 어디로 보내질지는 모른다. 앞으로 저 둘과 만날 일은 없을 게다! 속세의 미련한 그 인연을 잊어라!]

"자, 잠깐만요···!"

파앗!

쩌어억!

나와 김 부장의 뒤쪽에서 시커먼 균열이 입을 벌렸다.

김 부장은 그 모습에 놀라 다른 쪽으로 달아나려 했고, 나 역시 황급히 동굴 입구에 내놓았던 영초와 약초 꾸러미를 챙겨서 품에 안았다.

[어딜!]

그리고, 곱사등이 노인이 손짓을 하자 우리는 다시금 균열로 향해 빨려가기 시작했다.

"은현 씨! 영훈 부장님!!! 안 돼!"

저 균열 너머, 우리에게 간절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손을 뻗는 김연 주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정신을 잃었다.

***

깜빡.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는···."

나는 50년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퀴퀴한 냄새.

저 멀리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들···.

"···어?"

나는 눈을 비비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억과 다르다.

지난 삶에서 떨어졌던 곳과 다른 곳이었다.

나는 왠 골목의 사이 같은 곳에 떨어져 있었고, 저 골목 너머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게 보였다.

"왜, 왜 지난번과 달라진 거지?"

그러다가, 곱사등이 노인이 '무작위로 공간 균열을 잇는다'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랜덤이었나.'

그래서 티끌만 한 차이로도 나비 효과 때문에 확률이 달라져 지난 삶과 다른 곳으로 전송된 것이리라.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뒤쪽에는 김 부장과, 내가 품고 온 약초들이 길에 널브러져 있었다.

'···일단 바깥으로 잠시 나가 보자.'

나는 약초들을 정리해서 길목 구석에 밀어 두고, 근처에 있는 거적떼기로 가려 두었다.

그런 후 골목 바깥으로 나가 보았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내 귀를 강타했다.

"연국(鸢國) 최고의 비단이올시다!"

"오늘 들어온 물품은 성제국(盛製國)에서 들어온 경전들이오!"

"우리 약방으로 말할 것 같으면···."

번화가다.

그리고, 다행히도 익숙한 '말'들이었다.

'순간 식겁했군. 완전히 다른 나라에 떨어져서 언어도 전부 새로 배워야 하나 했는데···.'

다행히도 내가 지난 삶에서 살아온 연국(鸢國)에 떨어진 듯 했다.

"이보시오, 내가 헷갈려서 그런다만. 여기 지명이 뭐였소? 내 촌에서 막 올라와서 이곳의 이름이 조금 헷갈린다만···."

나는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이곳의 이름을 물었다.

지난 삶에서 나와 김 부장이 떨어진 곳은 연국 연산성(鍊山城).

연국의 변방에 위치한 작은 성이었었다.

내 질문에, 행인은 왠 미친놈을 보겠다는 듯 내 손을 쳐내며 말했다.

"정신 나간 놈 같으니. 수도 한 가운데에서 여기가 어디냐니, 에잉, 재수 옴 붙었네. 대낮부터 미친놈을 만나고···."

"수도···."

나는 이 곳의 이름을 알아내고 미소를 지었다.

"서경성(西京城)!"

이번 생(生)에서는 연국 수도에 오게 된 것이다.

부장님은 무공천재(1)

나는 내가 있는 위치를 확인한 후, 아직도 기절해 있는 김 부장에게 다가가 흔들어 깨웠다.

"부장님, 김 부장님!"

"으, 으음···."

김 부장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 대리. 여긴 또 어딘가···?"

"···여기는."

나는 부장에게 대강 설명을 해 주었다.

그 곱사등이 노인이 우리를 공간 균열로 떠민 후, 눈을 떠 보니 이런 곳이었다.

아무래도 중세 중국 같은, 무림인들이 실재하는 세상 같다고 말해 주었다.

"···이젠 하도 많은 일이 일어나서, 뭐가 뭔지도 모르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차라리 이 모든 게 그냥 꿈이라고 해 주었으면 좋겠어···."

김 부장의 얼굴은 한 10년은 더 늙은 듯 했다.

"···다행이라 해야 하는지, 아닌지 모르겠군. 아무 능력도 자질도 없어서 그 괴물 같은 존재들한테 잡혀가지 않은 게 좋은 건지, 아니면 그냥 버려진 건지···."

"···."

그에 대해서는 나 역시 모르는 문제였다.

지난 삶에서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 약초꾼이었을 뿐이니까.

이번 삶에서 자못 여유롭게 다른 이들과 사흘 동안 생존했다고는 해도,

그건 전부 회귀라는 능력 덕분일 뿐.

나라는 인간 자체는 크게 대단하지 않은 것이다.

"일단, 계속 이 골목에 있을 순 없으니 한번 나가 보지요."

"···음, 알겠네."

나와 김 부장은 서경성의 번화가로 나갔다.

온갖 종류의 인간들이 돌아다니는 서경성의 번화가는 현대의 번화가 못지않게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으음, 뭐라 그러는지 모르겠군. 전부 중국말 같은데, 게다가 왜 사람들이 우리를 흘긋거리는 겐가?"

"아마도, 입고 있는 옷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는 원래 입고 있던 상의를 김 주임의 송별회 식사 때 태워서 땔감으로 써 버려, 지금 상의에는 속에 있던 런닝밖에 없었다.

그리고 김 부장은 아예 이곳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등산복을 입고 있었기에 눈에 띄는 것 같았다.

"···큰일났군. 그나저나 서 대리, 중국말은 혹시 할 줄 아는가···?"

"예, 다행이도 중국어 연수를 받은 적이 있어서요. 들어보니 중국 남부 사투리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의사소통은 가능할 듯싶습니다."

"오오··· 그것 참 천운이군···!"

물론 거짓말이었다.

이 세상의 언어는, 문자가 한자처럼 갑골문에서 시작되어, 한자와 생긴 게 비슷하다는 걸 제외하면 중국어와 완전히 다른 말이었다.

번체든 간체든 중국 어느 지역 사투리든, 이 곳에서는 안 통한다.

'지난 삶에서는 기초적인 의사소통을 배우려고, 두 달동안 구걸을 하며, 근처 거지들에게 매달려서 말을 배웠었는데···.'

지금은 그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계속 이 옷이면 눈에 띌 것 같으니 옷을 새로 사지요."

"어, 어떻게 옷을 사나? 우리 돈이 여기서 통할 것 같지는 않은데···."

나는 씨익 웃으며 답해 주었다.

"돈은 안 통하겠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이면 약은 필요하겠죠."

나는 근처에 있던 약방으로 들어가, 지혈초나 발열초, 해열초 등 잡다한 약초들을 약방에 팔았다.

내가 캔 약초 중 가장 저급하고, 등선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약초들이었다.

물론 등선향에서 영기를 잔뜩 먹으며 오래도록 사람 손을 타지 않은 약초들이어서 기존 약초들보다 크기가 서너 배는 큰 약초였고, 나는 약방에서 상당한 돈을 받고 나왔다.

"하하, 서 대리. 역시 서 대리 능력이 여기서도 통하는군. 마, 많이 받은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나는 약방 주인이 준 돈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많이도 후려치는군.'

행색이 수상하다는 이유였다.

약초가 크고 양이 많아서 이 정도라도 받은 거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제대로 돈도 못 받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정도만 해도 옷 정도는 새로 살 수 있겠지만.

나는 직후 근처에서 가장 허름해 보이는 포목점에 들어가, 낡은 옷을 두 벌 새로 샀다.

우리는 평범해 보이는 옷이는 옷으로 갈아입고, 바깥으로 나왔다.

'물가가 어마어마하군.'

연산성보다 서너 배는 물가가 비싼 듯 싶었다.

덕분에 가지고 있던 돈을 모조리 써야만 했다.

"그, 그럼 이제 어떻게 하나? 서 대리."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부장님. 아무래도 약초를 몇 번 더 팔아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아까 찾아갔던 약방이 아닌 다른 약방을 찾아가, 약초를 다시금 팔았다.

아까와 같이 행색이 수상하다는 이유로 값을 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상당히 값을 후려쳐서 가격을 쳐 주었다.

나는 다시 한번 포목점으로 가 이번에는 조금 더 좋은 옷을 사서, 또 다른 약방으로 가 약초를 팔았다.

이번에는 내 옷을 본 약방의 주인이 값을 후려치지 않고 제대로 된 가격에 약초를 사 주었다.

나는 다시 한번 포목점으로 가서, 이번에는 비단옷을 사 입고 서경성의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상당히 커 보이는 약방으로 들어가 황주삼을 한 뿌리 팔았다.

"아, 아이고 대인. 이런 귀한 걸 저희 약방에 팔아주시다니···."

약방의 주인은 비단옷을 입은 내게 굽신거리며, 두 손으로 황주삼을 받아들었다.

"내가 보기에, 적어도 팔백 년은 묵은 황주삼일세. 아무리 적어도 마제은 열 덩이는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아무렴요! 사실 이 정도라면 마제는 열다섯 덩이는 됩니다!"

"그래, 그렇겠지. 얼른 가져다주게나."

나는 약방 주인의 인사를 받으며, 마굽 형태의 은을 열다섯 덩이를 받아 나왔다.

"허, 허허. 엄청나군. 서 대리. 이제 끝난 건가?"

"예, 뭐."

아직도 황주삼은 몇 뿌리 더 있다.

게다가 방금 판 것은 제일 작은 삼이었다.

나는 부장님에게 비단옷을 사 준 후, 관청에서 가서 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호패를 얻었다.

그리고 서경성 외곽에 조그마한 집과 땅을 사고 나니, 마제은은 한 덩이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오늘부터 여기에서 지내지요. 일단 기초적인 주거지는 확보했고, 부장님께 글자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정말 고맙네, 서 대리. 아니, 아니지."

그는 조금 멋쩍은 듯 말했다.

"이제 회사 사람도 아니니, 서 대리라고 하는 건 맞지 않겠지? 뭐라고 부르는 게 좋으려나···."

"···그냥 이름으로 불러 주십시오."

"고맙네, 서은현이."

나는 호칭을 정하고는, 그와 앞으로의 일을 논의했다.

"이만한 돈을 바로 구할 수 있던 건, 제가 그 숲에서 캐온 약초들을 팔아서입니다. 약초가 전부 떨어지면 의식주에 문제가 생길 텐데, 생계수단을 알아봐야 합니다."

"어떻게 생계를 이어 가야 하려나··· 그래, 약초를 팔아서 은을 사고, 장사를 해 볼까?"

확실히.

기초 자금이 두둑한 지금이라면, 나름 중견 기업의 부장이었던 김영훈의 능력으로 입에 풀칠할 수 있을 정도로는 장사를 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런 걸로는 안 돼.'

기왕 회귀를 한 것.

할 거면 조금 더 높은 곳을 노려 봐야 하지 않겠는가.

'김영훈 부장은, 무공의 천재(天才)다.'

저잣거리에서 파는 삼류 차력용 무공을 몇 개월 만에 대성해서 강력한 무인이 되고,

차차 고급 무공을 배워서 결국 연국 무림계의 천하제일인에 오를 정도로.

그런 그에게, 처음부터 고급 무공을 가르치면 어떻게 될까?

'천하제일도(天下第一刀)의 탄생을 30년은 앞당길 수 있어···!'

그리고 나는 그 옆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최대한 받아먹을 거다.

"부장님, 이 곳은 무림(武林)과 무공(武功)이 실존합니다."

"음···!"

"그런데, 그런 곳에서 순진하게 장사만을 하다가, 무림 문파 간의 경쟁에 언제 휩쓸릴지도 모르지요. 하니, 최소한의 호신(護身)을 위한 무공쯤은 배우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군···."

그는 어쩐지 상기된 얼굴로 내게 물어 왔다.

"하, 하지만 무공이란 건 외인에겐 문외불출(門外不出)일 텐데 어찌 우리가 쉽게 배울 수 있겠나?"

무공을 배운다는 말을 듣자, 김 부장은 무협지에서 쓰일 법한 단어를 쓰며 눈을 빛냈다.

"아까 약초 한 뿌리에 은을 열다섯 덩이나 받았잖습니까.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건 없지 않겠습니까?"

"허험···!"

"물론, 그 전에, 문자부터 익히셔야겠습니다만."

"흐음···."

이후, 삼 개월간 나는 약초를 하나 더 팔아서 그걸로 의식주를 해결하며, 김 부장에게 말과 문자를 가르쳤다.

그 역시 생뚱맞은 세계에 떨어지고, 사원들과 헤어진 우울감을 학습으로 해소하려는지, 정말 온 힘을 다해 문자와 언어를 익혔다.

동시에 나는 삼 개월간 틈틈이 지난 삶에서 익혔던 삼류 무공인 천지심법의 호흡을 부장에게 건강용 호흡이라며 가르쳤다.

그리고, 삼 개월 후.

"최근 들어 아랫배가 간질간질하단 말이지. 그리고 집에 앉아만 있는데도 힘이 불쑥불쑥 나고 말이야···."

'놀랍군.'

나는 김 부장의 엄청난 성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천지심법은 말 그대로 기초 중의 기초 내공심법으로, 내공을 '쌓는 것'이 아닌, 단전의 기틀을 잡아 내공을 '느끼는 것'에 주안이 잡힌 심법이었다.

일반인은 천지심법으로 체내의 기(氣)를 느끼는 데에 팔 개월이 걸리는 것을, 김 부장은 삼 개월 만에 해낸 것이었다.

'천지심법을, 대성(大成)해 버렸군.'

동시에 나는 약간 자괴감이 이는 것을 느꼈다.

나는 천지심법으로 기를 느끼게 될 때까지, 약 십삼 개월이 걸렸다.

일반인보다도 한참 둔재인 것이다.

삼류 무공에서야 고작 네 배의 차이이지만, 상승 무공으로 향할수록 나와 그의 재능 차이는 현격히 드러날 것이다.

"···그럼 문자와 언어도 어느 정도 되는 것 같으니, 이제 입문할 문파를 찾아보죠."

"그러지. 하하, 이제 무공을 배우는 건가···!"

삼 개월 동안 김 부장에게 글자와 말을 가르치며, 나는 연국 서경성 무림 문파에 대한 조사를 해 보았다.

"중요한 문파는 일곱 문파가 있습니다. 참마종(斬魔宗), 계엄사(系俺寺), 월조방(越鳥房), 칠현문(七玄門), 아랑단(牙狼團), 암야회(暗夜會), 투룡보(鬪龍堡) 등이 서경성의 칠 대 문파로 꼽히더군요."

나는 각 문파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참마종, 계엄사, 월조방, 칠현문 등은 정파로 분류되며,

아랑단, 암야회, 투룡보는 서경성에서 유명한 사파였다.

네 개의 정도 문파와 세 개의 사파 문파를 가리켜, 서경성에서는 사성삼마(四星三魔)라고 부른다 했다.

참마종은 검법과 도법을 주로 익히는 검파였으며, 계엄사는 불가 계통의 종교 문파, 월조방은 하오문 같은 정보 조직이었고, 칠현문은 역사가 깊어 이것저것 많은 무공을 섭렵하고 있었다.

아랑단은 실전 위주의 강맹한 투술을, 암야회는 서경성에서의 불법적인 일을 유통하는 과정에서 발전한 은신술과 신법 등을, 투룡보는 맨손 유술을 주로 익히는 문파였다.

"부장님은 어떤 문파가 가장 마음에 드십니까?"

어차피 김 부장의 재능이라면 어떤 문파를 가더라도 성공할 터다.

김 부장은 한치의 고민도 없이 문파를 정했다.

"참마종! 참마종으로 하지. 무릇 협객이라면 검법(劍法), 사내라면 도법(刀法)이 제격이 아닌가!"

'지난 삶에서도 첫 무공으로 도(刀)를 집더니, 이번에도 마찬가지군.'

좋은 선택이다.

천하제일도를 이뤘던 지난 삶에서의 재림이니.

나는 김 부장과 함께 참마종으로 향했다.

참마종의 본파는 서경성 동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커다란 장원 안에 자리를 잡은 참마종의 안쪽에서는 커다란 기합소리가 수백씩 들려오고 있었고, 입구에는 도(刀)와 검(劍)을 패용한 무사 두 명이 양쪽에서 문을 지키고 있었다.

"정지, 본문에는 어떤 일로 찾아오셨소?"

입구를 지키는 호위 무사들은 우리가 입은 비단옷을 보며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이 분은 저희··· 큰형님이신데. 참마종의 명성을 듣고 참마종의 무(武)를 배워 보고자 찾아오셨습니다."

"흠···."

문지기의 눈이 김 부장을 향했다.

머리는 반쯤 벗겨졌고, 배가 통통하게 튀어나와 있는 장년인.

"···음, 미안하지만 그 나이에 이르렀으면 무공을 익히기가 쉽지 않을 것이오."

"하하, 그래도 한번 윗분과 대화를 해 보도록 하지요. 단순한 호신용 무공이라도 좋으니까요."

난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호신용이라고 말이야 했지만, 몇 개월만 지나면 오히려 저 쪽에서 김 부장에게 상 승무공을 배워 달라며 사정을 하게 될 것이다.

문지기들은 서로를 잠시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고는 문을 열어 주었다.

나와 김 부장은 얼마 후 참요당(斬妖堂) 당주(堂主) 허백이라는 자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래, 호신용 무공을 배우고 싶으시다고···."

"예, 기왕이면 호신용 무공이라도 최대한 좋은 물건으로···."

나는 허백에게 준비해 온 비단함을 건넸다.

황주삼을 전부 팔아치워 얻은 은괴(銀塊) 스무 개 중 열다섯 개를 넣어 두었다.

허백은 비단함을 열어 은괴를 확인한 후,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험, 험··· 참요당 외문 제자로 넣어 주겠소. 그리고, 원한다면 내문 무공도 두엇 정도는 전수해드리지. 하지만, 엄연히 취급은 외문 제자로 할 것이오. 기부 입문을 했다고 해도 특혜는 없소. 또한··· 외문 제자는 둘 중 한 사람만 받겠소."

"으음···."

"흠···."

김 부장은 생각보다 짠 대우에 인상을 찌푸리고 일어나려 했으나, 나는 그의 어깨를 슬며시 누르며 막고는, 허백에게 포권을 올렸다.

"당주께 감사 인사 올립니다. 그 정도라도 충분하지요. 외문 제자로는 저희 큰형님···이 들어가실 겁니다."

"험, 그럼 잠시 후 외문 제자들이 있는 외인당으로 오시오."

허백은 거드름을 피우며 나와 김 부장을 두고 가 버렸다.

김 부장은 당황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으, 은현이. 나만 무공을 익히게 되면 무슨 의미인가? 이 정도로 비쌀 줄 알았으면 그냥 다른 문파로 갔어도 되는데···."

"아닙니다. 부장님이 무공을 익히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지요."

"아니, 젊은 자네가 훨씬 무공을 익히기엔 적합할 텐데···."

"···전 예전부터 운동은 잘 못 해서 말입니다. 저는 남은 은괴들로 사업을 하며 부장님을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이게 제 일이고, 또 제 역할인 겁니다. 부장님은 부장님의 역할을 해 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얼마간 미안한 표정을 짓던 김 부장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 또한 최선을 다해 무공을 익혀서 자네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겠네. ···늙은 몸에 제대로 초식이나 익힐 수 있으면 다행이겠지만."

"자신을 믿으십시오."

"고맙네···."

그렇게, 김영훈 부장은 참마종의 외문 제자가 되어, 외문 무공 몇 개와, 기부 입문의 특혜로 내문 무공 셋을 익힐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칠 개월이 지났다.

참마종이 발칵 뒤집혔다.

부장님은 무공천재(2)

어떠한 무공을 대성(大成)한다는 것은, 그 무공이 지닌 진의(眞意)를 깨달아 완전히 체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무인의 기량에 따라 무공의 진의를 실전에 적용할 수 있으면 한 명의 당당한 무사(武士)로 인정받는다.

저잣거리의 삼류 무공이더라도, 삼류 무공의 의(意)를 깨달아 체득하고, 그것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이류 무인이 될 수 있다.

물론 상승 무공으로 향할수록, 무공의 한 초식에 담긴 의(意)만 하여도 삼류 무공 두엇에 해당하는 깨달음이 필요하기에, 상승 무공은 초식을 익히는 것만으로도 이류, 일류에 도달하고는 한다.

참마종은 그런 류의 상승 무공들이 모여있는, 명실상부한 서경성의 대문파(大門派)였다.

그리고,

그런 참마종의 무공을, 칠 개월 만에 대성(大成)해 버린 자가 나온 것이었다.

슈칵, 슈칵!

김영훈 부장의 도(刀)가 허공을 갈랐다.

참마종의 절룡도법(絶龍刀法).

하늘을 나는 용마저 베어 가른다는 도법으로, 참마종의 내문 제자들이 배우는 내 제자용 기본 무공이었다.

물론, 내문 제자용 기본 무공이라는 뜻은, 일반적인 저잣거리 삼류 무공과는 궤를 달리하는 이류의 무공이라는 의미였다.

이류(二流)라는 이름 때문에 착각할 수도 있었으나,

이류 무공이라는 건 절대로 약하지 않았다.

대문파의 내문 제자들이 익히는 기본 무공인 만큼, 그 흉맹함은 상당한 강함을 자랑했다.

그리고, 그런 이류 무공의 진의를 깨달아 완전히 체화했다는 의미는,

"···일류에 도달했군."

일류 무사(一流武士)에 턱걸이로나마 도달했다는 의미였다.

나는 눈앞에서 도법을 펼치는 김영훈 부장을 보며 경악하고 있었다.

일류.

그 이름이 주는 힘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어느 업계를 가더라도, [일류]라는 이들은 모두 한 업계의 거장들을 의미한다.

당장 무림 안에서도 일류 무사는 한 대문파의 장로급, 혹은 당주급의 직책을 맡는다.

중소 문파에서는 장문인 직책을 맡기도 한다.

'무공을 익힌 지 반년 만에 일류라니.'

수많은 무인들이 고련하며, 깨달음을 얻어 겨우겨우 도달하는 것이 일류의 경지이다.

그런데, 김영훈 부장은 그러한 상식을 정면에서 부정하듯이, 당당히 반년 만에 일류에 접어든 것이었다.

'참마종이 뒤집어졌다고 했나.'

듣기로, 칠 개월 만에 외문 제자가 장로급 실력을 가지게 된 것에 대해 참마종이 난리가 나고, 김영훈 부장을 다른 문파의 간자로 의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한다.

결국 그 일 때문에 김영훈 부장은 또 다른 간자 후보인 나와 함께 자택에 구금되어 버렸다.

'난 무공도 모르는데 왜 간자로 모는 건지···.'

물론 이해야 간다.

50대의 배불뚝이가 무공을 배우겠답시고 찾아와서 무공을 가르쳐 줬더니,

자기 문파의 무공을 익혀서 반년 만에 일류 고수가 되었단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만큼, 의심할 만도 하다.

"그나저나 부장님. 걱정도 안 되십니까?"

"하하, 뭘 말인가?"

"간자로 몰리셨는데, 왜 이런 무협에서 보면 단전을 폐하고 경맥을 끊는 일도 있다 하지 않습니까."

"분명 그렇지."

부웅!

그는 마지막으로 검을 휘두른 후, 땀을 닦았다.

"하지만 왠지, 다음 [벽]이 보이는 것 같아서 말이네. 그 벽을 넘으면 다음 경지에 도달할 것 같거든."

"···."

괴물이다.

일류 무사가 된지 얼마나 됐다고, 다음 경지를 느껴?

'일류 다음은 절정 고수.'

절정 고수부터는 대문파의 장문인, 혹은 원로급 전력이다.

연국에서는 절대고수라고도 불리우는 경지이며, 절정 고수만 되어도 연국에서 1000명 안에 들어가는 무시무시한 경지이다.

사실 무림계 안에서, 절정 이후의 경지는 얘기조차 되고 있지 않으니 사실상 절정 무사가 무공을 익혀 도달할 수 있는 끝자락인 셈이었다.

'고위 무공을 좀 익혔다고, 칠 개월 만에 절정 고수···.'

내 예상은 틀렸다.

이 기세라면, 천하제일도의 재림을 30년이 아닌, 50년은 앞당길 수 있다.

'아니, 50년은 너무 갔고, 40년 정도로 해 두지.'

그만큼 김 부장의 성장세는 정신 나간 수준이었다.

"하하, 일류 무사 정도라면 간자 취급 받겠지만, 절정의 벽을 넘으면 수상쩍더라도 받아 줄 수밖에 없겠지. 거기다, 서은현이가 캐온 삼도 한 뿌리 남아 있고 말이야?"

그는 다시금 도법을 연습하며 말을 이었다.

확실히 나는 등선향에서 캐 온 황주삼 역시 한 뿌리를 남겨 놓았다.

김 부장이 어느 정도 성장하면, 그의 내공을 증가시켜 주기 위해 준비해 놓은 황주삼이었으나···.

'얼마 후에는 주게 되겠군.'

그렇게 되면 김 부장의 내공도 역시 절정 고수에 걸맞는 내공이 될 터다.

"···그나저나 부장님, 어째 방금 전이랑 도법의 형(形)이 아예 달라진 것 같은데···."

"하하, 참요당주 허백의 검법이네. 참마검법(斬魔劍法)이었나? 한 번 펼친 걸 보고 익혀 뒀지. 그걸 도법으로 풀어 펼쳐보는 중이라네."

"···."

'천무(天武)의 재(才)로군.'

정말 가공할 정도다.

하긴, 생각해 보면 원래부터 김 부장은 이상할 정도로 등산을 하면서도 체력이 안 닳았고, 족구를 해도 기이할 정도로 발놀림이 빨랐다.

회사에서 몸 쓰는 뭔가를 하면 수상할 정도로 항상 1등을 달성하곤 했었다.

'원래부터 있던 재능인건가···? 그렇다면, 어쩌면 우리의 자질과 능력은 이 세계로 오며 각성한 게 아닌, 원래 세계에 있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능력인건가? 그렇다면, 내 회귀 능력도?'

억측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머릿속에서 떠오른 상념을 지워 버렸다.

그리고, 칠 주야가 지났다.

파앗!

김 부장이, 절정 고수가 되었다.

"[벽]을 넘었네."

"···허."

나는 김 부장에게 900년 묵은 마지막 황주삼을 건네주며,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생각외로, 말도 안되는 재능을 지니셨군요."

"나도 내가 놀랍다네. 나한테 무공에 이런 재능이 있었을 줄은··· 어릴 때부터 무협을 좋아했던게 어쩌면 이런 이유였을지도."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김 부장은 내가 건낸 황주삼을 받아 씹어먹고는,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쿠우우···.

얼마 후, 김 부장의 머리 위로 세 개의 꽃의 형태로 기(氣)가 뭉치더니, 그의 코와 입 속으로 흩어져 들어갔다.

'저게 삼화취정···.'

스아아···.

김 부장의 눈에서 서기가 어렸다.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참마종 장문인도 딱히 안 무섭군."

"···그래 보이십니다."

"그나저나, 이 자택 연금은 언제 풀리는 건지 원."

그는 우리 집 앞에서, 우리를 감시하는 장로 한 명에게 다가갔다.

"이보시오, 언제쯤 가택 연금이 풀리는 거요?"

"네 간자 혐의가 풀릴 때까지다."

"흠··· 일단 알겠소."

그렇게 사흘이 더 지났다.

참마종에서 사람들이 왔다.

"간자(間者) 영훈과 그 일당은 들으라! 참마종의 무공을 빼 가려는 타 문파의 간자 영훈의 단전을 폐(廢)하고 사지의 경맥을 끊어서 오라는 장문인의 명이시다!"

"허···."

참마종에서 온 장로 셋이 김 부장을 둘러싸고, 이류 무인인 호법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정말 간자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소이까. 나는 그저···."

"시끄럽다! 저 놈을 묶어라!"

"후우···."

제대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저, 김영훈 부장이 빠른 속도로 발도(發刀)를 했다는 것 외엔.

슈칵!

"크으··· 아아아악!"

장로 한 명의 손목이 조금 잘려 나갔다.

이제 저 장로는 저 손은 평생 쓸 수 없을 거다.

김 부장은 우울한 얼굴로 검을 잡았다.

칠 개월 전과는 달리, 살이 쪽 빠져 근육으로 가득찬 그의 몸이, 그가 수천수만 번 연습했던 도형(刀形)의 자세를 자연스레 잡는다.

"내 첫 사문(師門)이었거늘···."

"이··· 무슨···!"

그 모습을 보고 놀란 다른 두 장로가 그에게 달려들었으나,

다시금 김 부장의 도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휘둘러지며 장로들의 손목을 옅게 베었다.

"어, 어어···."

퍼억!

내게 다가오던 호법 역시 당황하던 새, 김 부장이 빠르게 다가와 손목치기를 날리자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으, 으아아아아!"

"젠장! 상승 고수다! 도망쳐!"

"장문인께 알려라!"

그러나 장로들과 같이 왔던 참마종의 제자들 몇몇이 기겁하며 도망쳐 버렸고, 김 부장은 굳은 얼굴로 내게 말했다.

"은현, 나는 투룡보(鬪龍堡)에 갈 생각이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투룡보는 사파이지만 크게 악행을 일삼는 문파가 아니고, 그저 호승심이 강한 문파인 만큼,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좋군. 그럼 자네는 일단 투룡보 앞에 가 있게나. 참마종의 장로들과··· 장문인을 따돌리고 오겠네."

나와 그는 집 밖으로 나가, 반대 방향으로 헤어졌다.

나는 서둘러 투룡보가 있는 서경성 남부로 향했고,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투룡보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서은현이, 왜 이렇게 늦나."

"하하, 부장님이 빠르신 겁니다."

그러나 김영훈 부장은 어느새 나보다 빨리 투룡보에 도착해 있었다.

난 그의 도신에 묻어있는 핏자국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폭력성에 기겁을 하던 김 부장은, 이젠 칼에 피를 묻히고 다니게 되었다.

비록 이 세계에서 살아 나가기 위해서라지만, 이 세계는 우리를 바꾸어 놓는다.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무림이 아닌, 지구에 있는 일상으로.

문득, 나는 한 번의 삶을 더 허용한 이 회귀라는 능력이 참 하잘것 없다고 느껴졌다.

'기왕 회귀할 거면··· 아예 지구에 있던 그때로 보내 주지 그랬나···.'

어쩔 수 없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어찌되었든 살아야 하지 않겠나.

나는 칼에 피를 묻힌 김 부장을 보며, 싱긋 입꼬리를 올려 웃어 주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부장님."

***

10년이 흘렀다.

참마종에게 배신당하고 나온 김 부장은 투룡보에 투신해서, 투룡보의 공봉(供奉)으로 봉해졌다.

투룡보의 공봉이 된 그는 더욱 더 상승의 무공들을 수집해, 어느새 절정 고수에서도 상위에 달하는 강자가 되었다.

이제 그는 십 년 만에 천하삼대도객의 좌를 차지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는 언제나 실력의 4할 이상을 감춰 두고 실력을 보였으며,

그가 실력을 제대로 드러낸다면, 그는 천하제일도, 연국제일인(鸢國第一人)이 될 거라고, 나는 한 푼도 의심치 않았다.

이제 나는 그와 나이차를 무시하고 호형호제하고 지내기로 했으며.

그는 내게 딱 맞는 무공을 아예 만들어 내서 내게 가르쳐 주었다.

"단악검법(斷岳劍法)이라는 검법이네. 거악(巨岳)마저 베어 버릴 기개를 가지고 있다는 뜻에서 이름 붙였지. 아마 대성한다면 자네도 능히 절정 고수가 될 수 있을걸세."

단악검법과 더불어, 검법과 함께 창제된 용맥기공(龍脈氣功).

단순한 삼류, 이류 무공과는 궤를 달리하는 일류 무공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런데 은현. 자네 정말··· 둔재로군."

내 끔찍한 무재(武才)였다.

천하제일인인 그가 직접 나에게 맞는 무공을 창제해서 상세하게 알 려주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1년째 삼류에 간신히 턱걸이를 하는 정도였다.

"···어쩔 수 없잖습니까. 각자 재능이 있는 분야가 다른 거지요."

지난 10년간, 김영훈이 무공을 수련하고, 나는 의술(醫術)을 공부했다.

전에 익혀 놓은 약초학에 더불어 혈자리, 시침법, 진료법 등을 공부했다.

덕분에 정식으로 의당을 차리고 의원 행세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상승해 있었다.

익혀놓은 약초학이 도움이 됐던 건지, 의술 분야는 무공보다는 훨씬 빠르게 진도를 나갈 수 있었다.

"그나저나 자네, 혼인은 안 할 건가?"

"···뭐, 기회가 오든지 해야 하지요."

우리가 몸 담고 있는 투룡보는, 그 특유의 험난한 분위기 때문에 혼인을 하기가 꺼려졌다.

선을 보아도 내가 투룡보의 의당에서 일한다는 말에 얼굴이 하얘져 도망친 소저들도 있을 정도였다.

"하하하, 이거 서 아우의 결혼을 위해 투룡보를 슬슬 나가 봐야겠구만."

"아니, 정말 저 때문에 나가는 겁니까?"

"농담일세. 그보다는, 투룡보가 너무 좁은 것 같아서 말이지."

확실히, 십 년 안에 천하삼대도객의 칭호를 얻고, 실질적인 천하제일인의 실력을 가진 그의 말이라면 그럴 만했다.

"투룡보를 떠나, 새로운 단체를 꾸리려 하는데, 어떤가?"

"새로운 단체 말입니까?"

"그래, 무림맹(武林盟)! 연국 강호의 수많은 문파를 규합하고, 혼란스러운 정사지간의 문제를 중재할 단체지. 어떤가? 나랑 같이 갈 건가?"

"···당연한 말을 하십니다. 동향 사람끼리."

"그래, 동향 사람끼리··· 헤어지지 말아야지."

그렇게, 나와 김영훈은 이 세계에 온지 십 년째, 무림맹을 창설하기 위해 투룡보를 나섰다.

김영훈은 투룡보를 떠나 이 년 동안 연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각 주(州)의 대문파들을 찾아다니며 도장 깨기를 시도했고,

삼 년째.

결국 모든 문파의 간판을 떼는 데에 성공했다.

그는 진정으로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의 별호를 얻었고, 그는 천하제일인의 명성으로 무림의 문파들을 규합할 무림맹을 창설했다.

초대 무림맹주는 당연히 그였고, 나는 무림맹주인 김영훈의 측근이자 책사(策士)로 그를 보좌했다.

무림맹을 창설하고 7년이 지났다.

우리가 이 세계에 떨어진지 햇수로는 20년째.

나는 삼류 무사에 간신히 턱걸이하던 실력에서,

이제 무난히 삼류 무사 정도는 될 실력이 되었다.

물론 책사의 자리에서 영약을 많이 먹어치워 내공만은 일류였지만, 실력 자체는 아직도 삼류에 불과했다.

하지만, 김영훈은 역시 달랐다.

쿠우우우―

어두운 밀실.

나는 김영훈의 호법을 서며, 그가 운기조식을 마무리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때였다.

우우웅!

서광이 비추며, 그의 머리 위로 다섯 개의 원(圓) 형태의 기(氣)가 뭉쳤다.

얼마 후 다섯 개의 원형의 기들을 그의 코와 입으로 빨려들어갔다.

오기조원(五氣朝元)의 경지!

뚝, 우둑, 우두득···.

얼마 후, 그의 몸 곳곳이 크게 비틀리기 시작하며, 뼈와 살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저건···."

우드득, 우드드득!

그의 육체가 이상적인 형태로 변화한다.

환골탈태(換骨奪胎)!

파아아앗!

잠시 서광이 이는 듯싶더니, 내 눈앞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주름과 흰머리는 전부 사라졌고, 벗겨진 머리는 풍성하게 자라 있었다.

생명력이 넘치는 그 육신의 주인은, 내가 알던 사람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형···님···?"

"하, 하하··· 하하하하!"

김영훈은 환골탈태를 함으로써, 반로환동(返老還童)에 성공한 듯했다.

이제 그는 오히려 나보다 훨씬 젊은 얼굴이었다.

"정말 최고군! 이보게, 아우! 정말 생명력이 팔팔 넘치는 것 같군!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하하, 저보다 형님이 먼저 혼인하시겠습니다."

그랬다.

나는 무림맹의 책사로 임명된 후, 미친 듯이 바빴기에 결혼은커녕 연애조차 할 수 없었다.

"예끼, 이 사람아. 내가 혼인은 무슨 혼인을···."

하지만 그 역시 결혼에 대해서는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내가 결혼해 봐서 아는데, 처음 3년만 좋지 이후로는 정말, 아니네. 말을 말지."

김영훈은 지구에서 과장을 달고 결혼을 한 유부남이었다.

아내분께 맺힌 게 많았는지, 그는 천하제일인이 된 이후에도 절대로 결혼은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나저나, 형님이 환골탈태한 걸 알면 세간이 놀라겠습니다."

"하하, 확실히 그렇겠지. 그나저나 이제 슬슬 무림맹도 다음 맹주에게 넘겨주어야 하는데···."

"형님 눈에 차는 사람이 없나 보죠."

"무림맹주는 자고로 무공이 어느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어찌 된 놈이 한 놈도 무(武)를 이해하는 놈이 없어!"

"형님이 비정상적으로 천재인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멍청이가 아니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환골탈태 이후, 1년 후.

형님은 무림맹주의 직위를 후대에게 넘기고 은퇴했다.

나 역시 형님과 함께 은퇴하고 싶어했지만 2대 맹주가 무림맹 운영에 난항을 겪었기에, 결국 반강제로 무림맹 책사에 앉아 있어야 했다.

그렇게, 다시 10년이 지났다.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진 지 30년이 지났다.

내 나이도 어느새 예순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공 실력은, 내공만은 많았으나 실질적인 실력은 삼류 끝자락에 간신히 도달한 정도였다.

무림맹은 2대 맹주를 거쳐, 3대 맹주의 시기에 이르렀고, 나는 은퇴하기 위해 미친 듯이 후계자를 양성해 2대 책사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가까스로 은퇴할 수 있었다.

영훈 형님은 초대 무림맹주의 자리에서 은퇴하고, 강호를 떠돌아다닌다면서 연국 곳곳을 여행하고는 했고, 몇 달씩 얼굴을 보지 못 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 때문인지, 형님은 결국 내 은퇴식 때에도 오지 않았다.

내가 영훈 형님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던 것은 책사 은퇴 이후, 1년이 지난 시점.

서경성에 장원을 사서 그 안에서 유유자적하며 의술 서적을 읽고 있을 때였다.

저벅, 저벅···.

"뭐냐, 왠 놈이야··· 으음! 혀, 형님!"

"···."

"왠 거지꼴입니까. 그나저나 제 퇴임식 때에도 안 오고, 어딜 가셨던 겁니까. 강호 유람이 그리··· 형님?"

오랜만에 본 그는, 거지꼴을 한 채 창백한 얼굴로,

세상을 뒤덮을 것 같던 그 모든 자신감을 잃은 상태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형님!"

철퍽!

그는 내 장원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은현아. 나는 내가, 정말로 축복받은 무의 자질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맞잖습니까. 형님이 천재가 아니면 뭡니까?"

"···맞다. 난 분명 무공의 천재다. 아마 이 연국에서, 아니, 범인(凡人) 중에서 내 무재(武才)를 따라올 놈 따위는 단 한 놈도 없을 거다."

"범인이요? 형님이 어떻게 범인입니까? 형님은 천하제일인이시고···."

"수도자(修道者)란 것들과 손속을 겨뤄 봤다. 너도 기억하지 않느냐. 30년 전. 우리 동료들을 납치해 갔던, 하늘을 날아다니던 그 괴물들."

"···."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랬다.

수도자들.

무림맹주의 책사로 활동하며, 나는 그들을 몇 번 만나 보기도 했다.

그들은 연국의 정재계, 심지어 연국 황실 곳곳에서 암약하며, 연국 자체를 주물럭거리는 이들이었다.

무림을 조율하는 무림맹이 창설된 후, 그들은 무림맹 역시 그들의 손에 넣고 싶어 했다.

영훈 형님은 못마땅해했으나, 그들에게 거역한다는 것은 연국이라는 나라 자체와 싸운다는 것임을 알고 있었던 나는 그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수도자들의 간접적인 지원을 받으며, 무림맹의 세력을 전폭적으로 키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무림인이 수도자를 해할 수 없게 조치할 것을 명했고, 그 명에 의해 무림맹에 속한 이들은 수도자란 이들과 손속을 겨뤄 볼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형님은 무림맹주의 직위를 내려놓고, 수도자들을 찾아다녔다고 했다.

"수도자란 놈들은 정말 찾기 어렵더구나. 심지어 한 번 찾아서 손속을 겨뤄 보려고 해도, 환술이나 비행술 같은 짜증 나는 기술로 도망치고는 해서, 겨룰 기회가 없었지만,

이번에 기어코 놈들과 겨루는 데에 성공했지."

"그래서, 이겼습니까?"

"···이겼다."

"무림맹주 시절에 그러셨으면, 제가 뒷목을 잡았을 겁니다."

영훈 형님은 끌끌 웃으며, 씁쓸한 얼굴로 혀를 찼다.

"축기기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수도자와 싸워, 목숨을 걸어서야 그의 손끝에 상처를 낼 수 있었어···. 그 수도자가 자신의 몸에 스치기만 해도 내가 이겼다고 쳐 준다 했으니··· 일단은 이긴 거긴 하지."

"···축기기의 경지에 이르른 그 자는, 수도자들의 천하십대고수, 그런 자입니까?"

"···아니다."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말하기를, 자신이 이른 축기의 경지는, 수도계에서 밑바닥에서 두 번째의 경지라고 하더군. 무림인으로 치면, 이류 무사인 거지."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지난 삶에서도, 이번 삶에서도.

분명 수도자들이 무서운 이들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무림인들의 위에, 수도자들이라는 무지막지한 존재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30년 동안 그의 무공을 옆에서 봐왔기에, 알고 있었다.

그의 무공은 진정 하늘에 닿아 있다!

단순한 수식어가 아닌, 그는 정말로 허공답보를 사용해 하늘에서 무공을 펼치는 것이 가능했다.

만년한철 역시 두부처럼 베어 가르는 것이 가능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그런 무공천재가!

수도계에서 밑바닥에 두 번째에 있는 자에게 목숨을 걸고서 손끝에 상처를 내는 것으로 끝나다니!

'선협 세계라고 알고 있긴 했지만.'

내가 선협이라는 장르를 아는 것은,

그냥 그런 장르가 있다는 사실만을 알 뿐이었다.

그리고 수도자라는 게 있기에 나는 대충 이 세계를 선협 같은 세계라고 했을 뿐,

그들의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는 크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회사의 동료들을 납치해 갔던 괴물들 역시 수도자라기보다는, 어떤 신(神)적인 존재쯤으로 대충 생각하고 있던 게 지금까지의 내 인식이었다.

"···인간이, 형님을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로 강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연국의 곳곳에서 암약하던, 우리가 봐 왔던 그 수도자들은, 수도계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던 이들이라고 하더군. 수도계에서 제일 밑바닥이라, 오히려 속세의 일을 처리하며 속세 곳곳에서 암약하는 것이라고 말이야."

"···."

그는 침음성을 흘리며 말했다.

"나는 앞으로도 수도자들을 더욱 더 상대할 거다. 그리고, 그들을 상대할 수 있는 무공을 만들어낼 것이다. 반드시···! 나는, 이 연국, 아니, 이 천하에서 다시없을 천무(天武)의 재(才)를 지녔으니까!"

그렇게, 형님은 형형한 안광을 불태우며 어딘가로 가 버렸다.

나는 그의 말에 충격을 받아 한동안 바깥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날부터 수도자라는 존재들에 대해 전력으로 조사를 이어 나갔다.

내 인맥을 이용해 무림맹에서 암약하는 수도자들, 정, 재계, 황실 곳곳에서 암약하는 수도자들과 만나며, 그들에게 수도계에 대한 것을 듣고, 알아냈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교류하며 수도계의 범위가 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도자(修道者).

그들은 칼과 내공을 갈고닦아 일신의 무위를 내세우는 것이 끝인 무림인들과 달리.

수련을 통해 신선(神仙)이 되는 것이 목적인 존재들이라 하였다.

그런 그들은 가장 밑바닥의 수도자들조차 무림의 절정 고수와 맞먹으며, 무림 곳곳에서 암약하고, 수도자의 경지가 올라갈수록,

호풍환우를 부리며, 천재지변을 장악하고, 점차 신적 존재에 가까워진다는 듯했다.

나는 그런 무시무시한 존재들에 대해 들은 이후, 너무나도 두려워 그 두려움을 잊기 위해 놓고 있었던 무공수련을 이어나갔다.

30년 전 처음 보았던 괴물들이,

그 용과 신선 같은 존재들이,

신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수련을 해서 도달할 수 있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고.

더욱 믿기지 않는 건, 그런 그들조차 상위세계로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 치며,

그 상위 세계에는 훨씬 더 무시무시한 존재들이 즐비한다는 사실이, 허무맹랑한 거짓말 같았다.

그러나,

나 자신부터가 그런 허무맹랑한 거짓말의 목격자였기에, 단순한 농담이라고 부정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나는 동료들이 적당히 수도자가 되었다는 것만 알았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내 동료들은 정말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을 터였다.

"하하···."

수도자들에 대해 알면 알수록, 나와 영훈 형님은 얼마나 하잘것없는 힘을 얻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제아무리 인간이 팔다리를 움직이는 무공을 익히면 뭘 하나.

수도자는 산을 집어던지고 지형을 바꾸는 괴물들이다.

제아무리 내가 회귀를 하면 뭘 하나.

절대 수도자들에게는 도달할 수 없다.

애초에 수도자가 되려면 영근(靈根)이란 것이 꼭 필요했고, 그것이 없는 이는 [절대로] 수도자가 되지 못한다고 한다.

'회귀의 능력이, 이번 생이 끝인지 아닌지는 나도 모른다.'

그저 한 번 더 얻은 삶이라 생각하고, 늘 최선을 다해 살아왔을 뿐.

만약 다음 삶이 또 있다면 어쩔 것인가.

사실 회귀의 능력이 한 번으로 끝나는지, 몇 번의 기회가 더 있는지는 나도 몰랐다.

하지만, 몇 번을 더 회귀한다고 한들.

'절대로, 우리는 수도자라는 존재들에게 대항할 수 없어···.'

수도자들과 만나 그들의 세계에 대해 듣고,

고서(古書)를 뒤져 수도자들의 기록을 찾아볼 때마다, 나는 더없는 무력감을 느껴야 했다.

그 무력감과 압박 속에서, 나는 무공을 수련하고, 또 수련했다.

늙은 몸으로 칼을 한 번 휘두르면, 그래도 잡념이 조금은 사라졌기에.

그렇게 10년이 다시 흘렀다.

"후우···."

나는 단악검법(斷岳劍法)을 펼치며, 숨을 조절했다.

이제, 나는 이류 무사에 턱걸이를 할 정도의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즈음.

나는 또다시 달라진 형님을 만날 수 있었다.

"혀, 형님···?"

오랜만에 만난 그는 봉두난발의 괴인(怪人)과 같은 행색이었다.

머리카락은 길게 뻗쳐 있었고, 수염은 길쭉하게 자라 있었다.

"···오랜만이다, 은현아."

"예, 지난 몇 년간 거의 못 봤지요. 서신으로만 연락을 주고받았고··· 제가 보내드린 수도계에 대한 정보는 도움이 조금 되었습니까?"

"그래. 나름 도움이 됐다."

"수도자들을 이길 무공은··· 혹여···."

"구상해 두던 무공은 완성했다."

"허어···!"

나는 탄성을 내뱉었다.

무공의 천재인 그가 그런 말을 내뱉을 정도라면, 그의 무공으로도 수도자를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정녕 형님의 무공이 하늘을 뛰어넘으셨겠구려···."

"아니."

그러나, 그의 얼굴은 이상하리만치 침울한 기색이었다.

"내 무(武)는, 딱 여기까지인 것 같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늘은 네게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형님?"

그의 얼굴에 가득하던 자부심과 희망은 전부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오늘부로 수도문파(修道門派)에 제자로 들어가게 될 거다. 아마 막내부터 시작하겠지. 큭큭···."

"아니, 그게 무슨···."

"···10년 동안 수도자들에 대한 정보로, 그들을 찾아다니며 겨루고, 그들을 상대하기 위한 무공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결단기 수사라는 존재를 만났다."

형님의 말이 이어졌다.

"그와 싸우고, 내 모든 깨달음을 펼친 덕에, 결단기 수사의 왼손을 잘라 내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결단기 수사가 부적을 하나 붙이니 손이 다시 자라나고, 나는 그 직후 그의 손에 철저하게 놀아났다."

"···."

"그자가 말하기를. 내 의지를 높게 봐 주어 자신의 수도문파에 넣어 주겠다고 하더군. 그자와의 대결에서 패배하고, 나는 알게 되었다. 여기가, 무공으로 닿을 수 있는 [끝]이라는 걸."

"···."

"무공을 익혀서는, 더 이상 위로 갈 수 없다. 백 년을 익히든, 천 년을 익히든 똑같을 뿐이야···. 그래서, 나는 이제 수도자가 되어 새로운 길을 걸을 작정이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할 말이 너무 많았지만, 해 줄 말이 없었다.

잠시 후, 내 입에서 튀어나온 건 꽤 멍청한 말이었다.

"수도자가 되려면, 영근이라는 게 없다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결단기의 수도자가 말하기를."

그리고, 멍청한 물음에, 충격적인 대답이 들려왔다.

"무림인이 도달하는 오기조원(五氣朝元)의 경지는, 수도자가 가지고 태어나는 오행영근(五行靈根)에 상응한다고 하더구나. 정확히는, 범인이 무공으로 오기조원에 도달하면, 그것으로 영근이 각성(覺醒)한다는 것이야."

"허···."

"수도자들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자질이, 범인은 무공을 익히고 평생을 궁구해야 겨우 각성할 수 있는 자격이라는 거지."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보며 읊조렸다.

"나는··· 무공의 천재였지만, 무공의 천재였을 뿐이야."

얼마간 하늘을 쳐다보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만 가겠네. 더 위의 경지를 추구하기 위해."

말을 마친 영훈 형님은, 신법을 펼쳐 사라져 버렸다.

그가 있던 자리에는 한 권의 서책이 남겨져 있었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가 남긴 서책을 집어 들었다.

책의 제목은 월수궁무록(越修窮武錄)이었다.

수도자를 넘기 위해(越修) 무를 궁구한(窮武) 기록(錄).

그가 지난 십 년간 수도자들을 찾아다니며 만들었다는 무공이었다.

나는 한 장 한 장, 영훈 형님이 남긴 깨달음을 읽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류에 턱걸이를 했을 뿐인 내가 보기에, 뜬구름 잡는 소리밖에 없는 무공 구결이었다.

하지만 나는 책을 가득 채운, 영훈 형님의 떨리는 글씨체를 보며, 그가 이 무공을 남기며 느꼈을 심경을 느꼈다.

동시에, 이런 무공을 만들어 낸 그가 결국 무를 포기하고 수도자가 되기로 한 심경 역시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책의 말머리에는 그가 내게 남기는 당부가 적혀 있었다.

―아우 서은현은 이 무공을 부디 후대에 남겨, 후대가 수도자라는 자연재해의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최소한의 동아줄로 만들어 다오.

나는 그가 남긴 깨달음들을 또 읽고, 읽으며 머릿속에 박아 두었다.

어차피 몇 번을 읽어도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그의 유지를 느끼기 위해서였다.

"···형님. 이 아우를 남겨 두고, 어디를 가신단 말이오."

처음에는 그저 부장님일 뿐이었다.

그러나, 40년의 세월 동안.

그는 내 진정한 형님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날부터 더욱 더 수련을 열심히 이어 갔다.

조금이라도 그가 남긴 구결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싶은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노쇠할 대로 노쇠한 내 몸은 점차 약해져만 갈 뿐이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나는 이류에 턱걸이가 아닌, 제대로 된 이류 무사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점을 기점으로, 내 몸은 급격히 쇠약해져 갔다.

어쩔 수 없는 노화였다.

***

쿨럭! 쿨럭!

나는 화려한 침상에서 기침을 했다.

'얄궂군.'

이 세계에 온 지, 50년이 되어간다.

나는 지난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침상에 누워, 비슷하게 감기로 죽어 가고 있었다.

바뀐 것은 그저 침상과 집의 종류뿐.

'내 천명(天命)이란 것은, 바꿀 수 없는 건가 보군.'

정확히 같은 날, 같은 일에 죽을 것이다.

죽음이 가까워지니, 느낄 수 있었다.

이는 운명(運命)이었다.

인간은 아무리 거스르려 해도 운명이란 걸 벗어날 수 없다.

그저 순응할 수밖에 없다.

미친 듯이 발버둥 치면 삶(生)을 조금 더 낫게.

조금 더 좋게 지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타고난 운(運)과 명(命)을 바꿀 수는 없다.

사람(人)으로 몸을 받아, 운과 명 사이(間)에서 발버둥 치는 것이, 우리의 삶이자 일(事)이라면.

그 안에서만 뭔가를 얻어 가는 것이 인간지사(人間之事)이다.

그 바깥의 것은 얻을 수 없다.

'···과연, 그랬을까.'

나는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지난 삶에서의 후회를 느끼기 싫어.

새로 주어진 시간에서는 미친 듯이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정말 나는 내 운명 너머로 갈 수 없었을까.

무언가··· 발버둥 쳐서, 운명 너머를 엿볼 수라도 없었을까.

간혹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조금 더, 조금만 더 발버둥 쳤다면, 조금 더 나아갈 수 있었···을지도···.'

영훈 형님과 평생을 보내며, 무림맹의 초대 책사 자리까지 올라가 보았다.

인간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부와 명예는 모두 거머쥐었고,

이제 남은 것은 임종일 뿐.

'아쉬웠나?'

이 삶은 아쉽지 않았다.

오히려 차고 넘쳤다.

단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더욱 더 커다란 곳으로 도약하려고 하는 이가, 더욱더 커다란 벽을 마주했을 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한 것이··· 아쉽···군···.'

나는 한 번의 회귀를 거친 것 외엔, 지극히 평범하다.

무공 면에서는 오히려 둔재이다.

평범한 내가, 하늘의 축복을 받은 재능의 옆에서, 그가 하늘을 넘어서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

그래.

하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지 못한 것이.

내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차지만 춥지만은 않은 겨울.

나는 침상에 누워, 50년이나 지새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온 질긴 삶을.

그렇게 마무리했다.

그것이, 나의 두 번째 회귀(回歸)였다.

2회차의 첫날

깜빡.

숨이, 쉬어진다.

생명력이 흘러 나가던 몸이 아니다.

몸 전체에 생명력이 흘러넘친다.

"···이건."

익숙한 숲속.

나는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또다시 회귀(回歸)했다.

"···회귀는, 역시 한 번이 끝이 아니었던 건가."

지금껏, 회귀는 내게 주어진 또 한 번의 기적 같은 기회라 여기며 늘 충실하게 살아왔다.

회귀 능력을 얻게 되기는 했지만, 어떤 원리인지도 몰랐고, 횟수가 몇 번인 줄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두 번의 회귀를 겪었다.

'회귀는, 한 번이 끝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번 역시 끝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무한회귀··· 인가.'

내가 상념에 빠진 사이, 전명훈 과장이 익숙하게 화를 내며 내게 달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서 대리, 이 새끼가!"

슈욱!

휘익!

나는 내게 달려들어 내 뺨을 때리려는 전명훈의 손을 손쉽게 피했다.

"이, 이게. 피해?"

슉! 슈욱!

전명훈은 악에 받쳐 내게 달려들었으나, 나는 계속해서 상념을 이어 가며 그의 손길을 손쉽게 피해 냈다.

'왜··· 회귀했지?'

나는 멍한 얼굴로 눈앞에서 내게 달려드는 전명훈을 바라보았다.

지난 생.

나는, 정말로 열심히 살았다.

정말로 충실하게.

그렇게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평안하게 죽었다.

약간의 아쉬움은 있었을지라도, 그 이상의 것은 바란 적이 없다.

'왜··· 회귀한 거지···?'

생명력 넘치는 육신.

새로 얻게 된 기회.

분명 좋은 것이다. 하지만···.

'내가 50년에 걸쳐 이룬, 그 [모든 것]들은?'

이젠, 어디에도 없다.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회귀를 함으로 인해, 내가 50년 동안 쌓아 올린 그 모든 것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것이다.

"이, 이 서 대리, 개자식아! 너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인데, 무슨 염치로 자꾸 피해!"

전명훈이 적반하장의 태도로 내게 빽빽 소리치며 달려들어 왔다.

난 보법을 밟으며 그의 주먹을 쉽게 피하며 계속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왠지 익숙하다. 뭘까. 이 익숙한 기분은···.'

아, 그런가.

"···그렇군. 나는··· 무의식적으로 오늘 같은 날을 두려워했을지도 모르겠군."

"서은현, 이 새끼가! 피하지만 말고 붙어 보라고!"

회귀.

나는 분명 그 능력을 통해서 기적과도 같은 또 한 번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기회를 통해 얻은 모든 것은, 다시 한번의 회귀를 통해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너무나 기적 같은 삶이었기에, 역설적으로 회귀를 통해서 그 시간대를 날려 버리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리라.

익숙한 기분.

그것은, 내가 가진 두려움이 완전히 눈앞에 실체화되었기에 생긴 것이었다.

'설령, 굳이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졌더라도, 그 시간대가 사라졌어야 옳은 것인가.'

나는 내 인생에 부끄럼 없이 살아갔다.

하지만, 내가 부끄럼 없이 살았던 그 모든 것은 회귀를 통해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그렇군. 나는 어쩌면··· 지난 삶에서도 무의식중에 내 능력을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아니, 분명 나는 이 능력이 두렵다.'

이 회귀 능력이 단발성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으며, 내 두려움은 더더욱 커졌다.

아니, 확실해졌다고 해야 하나.

'이 능력은, 내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능력이다.'

이번의 회귀가 끝이라면, 나는 편히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끝이 아니라면?

내 회귀가 영원히 반복된다면?

'내 모든 삶은 부정당하고, 내가 알던 이들은 영원히 시간의 굴레에 갇혀 빠져나올 수 없다.'

그래.

나는 내 아쉬움. 아니, 두려움의 실체를 명확히 찾아냈다.

그것은 내 회귀라는 능력 그 자체에서 기인하는 공포.

그렇다면, 회귀라는 능력을 극복하려면 어찌해야 할까.

'회귀 능력을, 없애야 한다.'

이 능력은 있어서는 안 되는 힘이다.

나는 이번 생의, 아니, 이 생을 비롯해 앞으로의 무수한 생을 걸쳐 이룰 목표를 정했다.

'내 회귀 능력을 없앤다. 혹은, 회귀 능력이 영원히 발동되지 않게 한다.'

그것이 내가 추구할 장구한 목표이다.

"···그러려면 일단."

이 회귀 능력이 어디서 기인했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지구에 있을 때는, 누구도 특이한 체질이나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우리 일곱 모두 이 세상에 오고 난 후 그런 것이 생긴 것일 확률이 높아.'

예전에는 이러한 능력이 지구에서도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말이 되지 않는다.

비와 바람을 부르고, 수 킬로미터를 감지하는 초능력이 원래부터 있었다면 오 대리와 김 주임은 우리 회사 같은 곳에 입사를 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회귀 능력을 없앨 가장 큰 가능성은···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항구적인 목표 안에서, 조금 더 목표를 구체화시켰다.

"우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아 보자."

그렇다고 할 때.

집으로 돌아가려면 어찌해야 할까.

'우선··· 지금의 능력으론 안 된다.'

일개 범인(凡人)에 불과한 내 능력으로는 어떤 것도 시도할 수가 없다.

"힘을 길러야 해."

이류 무사 수준으로는 안 된다.

'수도자! 수도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

수도자가 되어, 긴 수명과 힘을 얻고.

'상계로 통하는 승천문! 그곳을 조사해 보아야 한다!'

승천문이 열릴 시기에는 이 등선향이라는 곳의 공간이 불안해진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떨어진 것도 그것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승천문을 통해서 다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수도 있다.

'수도자가 되어, 승천문에 간다.'

그렇게, 나는 내 목표를 더욱더 구체화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수도자가 되려면 영근이 필요하다고 하지. 영근이란 게 없으면 일반인은 절대로 수도자가 될 수 없다고. 하지만, 나는 영근의 단초를 잡은 적 있다!'

지난 삶.

영훈 형님이 말해 주었다.

일반인이 무공을 익혀 도달할 수 있는 오기조원의 경지는, 수도자가 가지고 태어나는 오행영근에 상응한다고.

오기조원에 도달하면, 일반인도 영근을 각성할 수 있다고!

"···그래. 장기적인 목표는 수도자가 되어 승천문에 가, 고향으로 돌아갈 방도를 찾고, 고향으로 돌아가 내 회귀 능력을 없애버리는 것."

"허억··· 헉··· 뭐, 뭐 이렇게 빨라··· 이 개자식이···"

"그리고 그보다 짧은 목표는··· 수도자가 되기 위한 영근을 얻기 위해. 무공을 익혀 오기조원의 경지까지 도달해야한다··· 인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굉장히 빡센 조건이다.

안 그래도 무공에 재능이 없는 내가, 오기조원을 이루기 위해서 얼마나 걸릴지도 모른다.

'웃기게도, 회귀 능력을 없애기 위해 회귀 능력에 의지해야 하는 건가.'

그래도 절망적인 기분이 들지는 않는 것이, 내 회귀 능력이 있는 이상.

내게 기회는 무한하다.

'얼마나 걸리더라도··· 반드시 오기조원에 이를 것이다.'

나는 굳게 다짐하며, 내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성을 정했다.

그리고,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난 나는 숨을 헐떡이며 내 앞에 주저앉은 전명훈을 바라보았다.

"···전 과장님, 진정하시죠. 뭐 이런 상황에 열 내 봤자 어쩌겠습니까."

"이··· 자식이. 지가 뭘 잘못했는지도···."

"분명 전 과장님이 전날에 저한테 본인 업무 전부 짬 때리셔서 워크샵 전날 저는 밤을 샜습니다. 그리고 분명 운전은 과장님이 하시기로 되어 있었잖습니까. 심지어 제가 졸린 거 아셨으면서 제가 다른 분들한테 운전 좀 부탁하려 해도 괜히 저 막으셨고요. 그리고 산사태 날 때 전 분명히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습니다. 단지 산의 옆면이 전부 무너져 버려서 제가 뭘 어찌할 새도 없었던 거죠. 이상한 논리로 저한테 책임 전가하지 마시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나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나는 할 말을 전부 폭포수처럼 쏟아붓고는, 전명훈 과장을 지나쳐 영훈 형님에게 다가갔다.

"형··· 아니, 김영훈 부장님. 실례지만 라이터 좀 빌려도 되겠습니까?"

"음, 알겠네."

"감사합니다. 일단 곧 밤이 될 것 같아서 저는 오늘 밤 묵을 만한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자동차를 찾아보든지, 아니면 이 숲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아보시든지, 알아서들 해 보십쇼. 이따가 해 지면, 저쪽으로 오시면 제가 불 피워 놓고 있을 테니 불빛 보고 찾아오시면 됩니다."

"어··· 아니."

나는 할 말을 속사포처럼 뱉어낸 후 지난번 묵었던 동굴을 찾아갔다.

그런 후 주변에서 나뭇가지를 모아 바람막이 겸 문을 만들고, 검불을 모아 모닥불을 피울 준비를 마쳤다.

그런 후 주변에서 나무열매와 약초를 모아 모닥불을 피우고 그곳에 구웠다.

지익, 지이익···.

나는 속옷을 찢어 약초를 채집할 주머니를 만들고, 근거지 주변으로 약초들을 채집하러 다녔다.

지혈초와 진통초, 마비초 등 내일 당장 내 팔을 씹으러 올 여우를 대비하기 위한 풀들을 모아놓고, 다듬어 분류를 해 놓았다.

"음, 열매들이 다 익었군."

그런 후, 나는 모닥불 밑에서 구워진 나무열매들을 꺼내 식힌 후 열매 껍질들을 까서 하나씩 입에 넣었다.

"먹을 만하군."

나는 적당히 배를 채운 후, 근처에서 적당한 길이의 나뭇가지를 잡아들고, 기수식을 잡았다

단악검법(斷岳劍法).

지난 생.

회귀 1회차.

그 당시의 영훈 형님이 넘치는 재능으로 만든, 내 몸에 완전히 맞는 무공.

부웅, 붕붕!

나는 검을 잡고 휘두르며 단악검법의 1초식부터 12초식을 연계해 펼쳐 보았다.

"흠, 조금 감이 떨어졌군."

지난 생, 죽기 직전에는 검을 잡고 들 힘도 없어 제대로 검초를 연습하지 못했다.

그 때문인지, 내 검초는 이류에 간신히 턱걸이를 하던 시절로 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한 달쯤 마음을 잡고 수련을 하면 다시 감을 찾을 수 있을 거 같고···."

내공 역시, 등선향에 널려 있는 영약들을 먹어놓으면 부족할 일은 없다.

이번 생에는,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까.

나는 이번 생애에는 무림맹 같은 웃긴 사업에는 동참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너무 내 개인 시간을 잡아먹는다.

지난 삶에서 일에 미친 듯이 치여 여자를 만나기는커녕 기루에도 못 갈 정도로.

'이번 생에는 무공에 집중하자.'

수도자가 되려면 일단 오기조원에 도달해서 영근을 각성해야 한다.

하지만 내 일천한 무공 재능으로, 그 경지까지 도달하려면 멀고도 멀다.

'최대한 경지를 높이는 게, 일단 이번 생의 목표다.'

나는 단악검법을 펼친 후, 천지심법을 호흡하며, 아무 기반도 없는 이 육체의 단전을 활성화시키기 시작했다.

천지심법을 운용하니 몸이 맑아지고, 절로 머리가 깨끗해지는 기분이 든다.

'···잠깐. 그러고 보니.'

나는 문득, 지난 생 영훈 형님이 완성했던 무공을 떠올렸다.

월수궁무록(越修窮武錄)

범인의 몸으로 수도자를 이기기 위한 무공.

'영훈 형님은 지난 생애를 바쳐 이 무공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그건 영훈 형님이 절정 고수가 된 이후 만들어 낸 무공이었어.'

만약, 처음부터 그에게 이 무공을 익히게 하면 어떻게 될까.

지난 삶, 영훈 형님에게 고급 무공을 익히게 해서 천하제일인의 탄생을 40년은 앞당겼다.

그렇다면, 그 천하제일인이 평생을 궁구해서 만든 무공을 처음부터 그에게 익히게 하면···.

나는 영훈 형님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비록 수도자가 되기 위한 영근을 얻기 위해 무공을 익히는 걸 목표로 삼긴 했지만···.'

어쩌면 그는, 내게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해 줄지도 모른다.

저벅, 저벅···.

동굴 바깥에서, 내가 피워 놓은 불을 보고 찾아왔는지 다른 이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허허, 서 대리. 능력도 좋군. 이런 걸 언제 만들어 놨나?"

영훈 형님.

김영훈 부장이 가장 먼저 동굴에 들어왔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라이터를 돌려주며, 은근슬쩍 물어보았다.

"부장님, 제가 알고 있는 건강 체조법이랑 호흡법이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긴장이 되어서 그럽니다만, 혹시 같이 연습 좀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늘이 내린 재능(1)

"이 상황에 그런 건 할 생각 없네."

"아, 예···."

그러나 영훈 형님은 그런 것보다는 지금 상황이 더 신경 쓰이는지, 딱히 내 호흡법과 건강 체조법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시간이야 많으니···.'

다음 날.

나는 여우를 마주하고, 그에게 한쪽 팔을 뜯겼다.

여전히 아픈 건 비슷했으나, 이번에는 내 정신력의 상승과 더불어 지난 생에 쌓았던 의술 지식으로 혈을 눌러 고통과 출혈을 멈추고, 약초를 씹어 그 자리에 발랐다.

우리는 여우에게 이 땅에서의 거주권을 허락받았다.

전명훈이 지난번 삶과 마찬가지로 수작을 부리며, 내게서 배울 것을 전부 배운 후 나를 여우에게 바치자고 했다.

그리고 나는 지난 번 삶과 마찬가지로 전명훈을 부려먹고, 다음 날에는 붉은 뱀에게 피를 뽑아 주게 하는 등 그를 열심히 괴롭혀 댔다.

그리고 사흘째.

지난번 삶과 똑같은 이들이 와서 전명훈 과장, 강민희 대리, 오현석 차장을 납치해서 가 버렸다.

그리고 나흘째.

[이 처자는 내가 데리고 가지.]

해룡왕 서휼이 도착해 오혜서 대리를 안아들고 일어섰다.

"해룡왕께 불초 범인이 한 가지를 여쭙사옵니다."

[흠, 무엇인가?]

서휼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해룡왕께서, 저희 오혜서 대리를 데려가신다는 것 같은데··· 저희 오 대리는 영근이 없는 범인(凡人)입니다만, 범인은 아무리 살아 봤자 100년을 채 살지 못합니다. 하온데 그녀를 어찌 쓰시려 데려가시옵니까?"

[하하, 상당히 수도자의 생태에 대해 잘 아는 범인이군. 하지만 걱정할 것 없네. 그녀는 본왕의 피를 주어 해룡족으로 받아들일 것이니. 해룡족의 피를 받아들이면 그녀는 적합한 영질(靈質)을 각성할 게야. 그렇다면 그녀 역시 수선의 길을 걸을 수 있다네.]

"···!"

영질!

영근의 다른 표현이었다.

한 마디로, 해룡왕의 피를 받으면 한번에 수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혹여··· 저희에게도 기회를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녀는 저희와 같은 동향 사람이옵니다. 어쩌면 저희에게도 독특한 능력이 있을수도 있으니···."

[하하, 자네 말일세.]

번뜩!

내 제안에, 서휼의 눈이 파충류의 것처럼 쭉 찢어진다.

[승천문이 열릴 기간에는 등선향에 고위 수사들이 많이 지나갈 터이기에··· 노파심에 한 마디 하겠네만.]

쿠구구구구!

"커억! 어억!"

나는 심장을 붙잡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 같은 고위 수사에게는 함부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않는 게 좋다네. 우리는 수백 수천년을 살아가며, 감히 자네가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알지 못한 것을 알고, 얻지 못한 지혜를 얻는다네. 나는 성격이 좋아서 넘어간다만, 성격이 괴팍한 이들은 자네들이 그들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하다 하여 벌레처럼 찍어 죽이는 경우도 있지.]

"허억, 허어억···!"

[본왕은 이 처자의 능력이 본 해룡족에 어마어마한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데려가는 것이고, 자네들은 영근도 없고, 특이 능력도 없으며, 설령 특이 능력이 있더라도 이 처자만큼 도움이 되지 않기에 데려가지는 않을걸세. 안 그래도 승천문을 넘을 때 동행자가 많아질수록 비승의 난이도가 높아지는데, 자네들까지 데려가는 건 내게 상당한 부담이니 그리 알게나.]

말을 마친 그는 동굴 바깥쪽으로 걸어갔다.

콰르릉!

동시에 천둥 소리와 번갯불이 비치며, 그의 모습이 입구에서 사라졌다.

어느새 하늘 위로는 한 마리의 청룡이 비구름을 뚫고 유유히 날아가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영훈 형님과 김 주임은 허탈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날 저녁, 나는 특별히 좋은 버섯을 캐 와, 불에 구워 김 주임과의 마지막 만찬을 즐겼다.

그리고, 그녀가 능력을 각성한 후, 괴뢰를 탄 괴인이 우리를 찾아왔다.

지난 삶과 마찬가지로, 괴인은 김 주임을 데려가기로 했다.

나는 그 괴인에게 엎드려 절하며 물었다.

"존경하는 수도자이시여. 저희의 동료인 김 주임은 영근이 없는 범인일진대, 어찌하여 수도자님의 제자가 될 수 있겠나이까!"

내 말에, 곱사등이 노인은 피식 웃으며 답해 주었다.

[세간에는 분명 귀하기는 하지만, 범인(凡人)에게 영통(靈通)을 뚫어 주는 영약, 혹은 그러한 기물이 존재한다. 일개 일반인도 그런 기회를 손에 넣으면 수선(修仙)의 기회가 열리는 게지.]

"···!"

엄청난 정보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수도자가 되는 길이, 또 하나 있었다!'

[뭐어··· 또한 너희 범인들이 익히는 무공 역시 극한으로 다듬으면 오행영근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 길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정작 그 방식으로 영질을 각성시켜 봤자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으니 난 영약을 구해서 제자에게 먹일 것이다. 자아, 알겠느냐? 나를 따라오면 수도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내게 말을 하던 중 자연스럽게 김 주임에게 시선을 돌리며 그녀를 유혹했다. 그러나 수도자가 뭔지, 영근이나 영통이 뭔지 알 턱이 없는 그녀는 멀뚱멀뚱하게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얼마간의 실랑이를 걸친 후, 곱사등이 노인은 우리를 가리켰다.

우우웅!

우리 뒤쪽에 있는 허공에 시커먼 균열이 일어나더니, 나와 영훈 형님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나는 약초들을 챙기고, 영훈 형님은 도망치려다가 괴인의 힘에 잡혀서 결국 그 너머로 던져지고 말았다.

나는 공간 균열 너머, 김 주임이 우리에게 손을 뻗는 것을 마지막으로,

저번 삶과 마찬가지로 정신을 잃었다.

***

정신을 차리자, 어두운 동굴 속이었다.

"이곳은···."

이번에도다.

괴인이 무작위로 우리를 전송시킨 덕분에, 아주 사소한 나비 효과로 전혀 다른 곳에 떨어져 버린 것이다.

나는 천천히 동굴 안쪽에서 빛이 보이는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숲이군."

그랬다.

이번에 떨어진 곳은 나무가 빽빽한 숲이었다.

그러나 등선향과 같은, 그 특유의 기묘한 느낌은 없었기에, 확실히 그 바깥으로 나온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후우···."

나는 자리에 앉아 지난 사흘 동안 운용했던 천지심법을 운용했다.

천지심법은 단전을 활성화시키고, 기를 느끼고 조종하게 해 주는 기초 중의 기초 심법.

많은 무림인은 무공을 익히기 전 꼭 천지심법을 익히고는 했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모른다.'

아마 연국이 아닌 완전히 다른 곳일 수도 있고, 사람이 사는 곳까지 가려면 몇 날 며칠이 걸릴지도 모른다.

"으적, 으적 으적···."

나는 등선향에서 캐 두었던 팔백 년 묵은 황주삼을 꺼내서 씹어 삼켰다.

우우웅···.

강력한 기운이 단전에서 휘몰아친다.

지난 삶에서는 황주삼을 캤어도, 알고 있는 내공심법이 천지심법밖에 없어 황주삼을 내가 먹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무림맹 책사로 몇십 년을 구르며, 쓸만한 내공심법은 많이도 알고 있지.'

나는 지난 삶의 영훈 형님이 내게 맞춰서 만들어 준,

단악검법과 쌍을 맞춘 내공심법.

용맥기공(龍脈氣功)을 운용했다.

쿠우우우―

웅혼한 기운이 내 내공으로 녹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강력한 기운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탓에, 기운을 제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장장 40년을 똑같은 내공심법으로 운용했다.

내공심법의 운용이 어려울 리가 없다.

체내의 경락과 혈도들을 따라, 40여 년간 운용해 왔던 용맥기공의 길을 다시 만들어 낸다.

쿠웅!

쿠웅!

쿠웅!

막힌 혈도들을 뚫어 가며, 기운이 내 몸을 일주천했다.

비록 천지심법으로 이틀간 어느 정도 몸을 깨끗하게 했다곤 해도, 역시 지금의 몸 자체는 인스턴트와 니코틴에 찌든 몸인 탓인지 쉽게 혈도를 뚫기가 쉽지 않았다.

"후우···."

나는 적당히 소주천을 마친 후, 근처에서 적당한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근처의 날카로운 돌로 나무를 박박 갈기 시작했다.

내공을 불어넣은 돌로 나뭇가지를 갈자, 나뭇가지는 삽시간에 톱밥을 떨어 내며 적당한 크기의 목검으로 변했다.

"이 정도면 쓸 만하겠군."

부웅, 부웅!

나는 목검을 들고 단악검법의 검세를 펼쳐 보았다.

이류에 간신히 턱걸이를 한 정도의 검형이 내 손에서 뿜어져 나왔다.

지난 생에선 순수한 실력은 이류 평균이었지만,

아무래도 죽기 전에는 검을 오랫동안 잡지 않은 탓인지 검 끝이 많이 무뎌진 느낌이었다.

'물론···.'

부웅!

콰드득!

목검에 내공을 불어넣어 바로 앞에 있는 아름드리나무를 향해 단악검법을 펼치자, 목검이 그대로 아름드리나무를 파고들어 밑동의 절반을 잘라내 버렸다.

'이 정도로도 며칠간 산에서 살아남기는 가능하겠지.'

요괴와 영물이 드글드글하던 등선향이 아니라면, 이류 수준에 이른 내 검 실력만으로도 생존은 가능했다.

그때였다.

"서, 서 대리··· 방금 그거··· 뭔가? 뭐가 어찌된···."

영훈 형님, 아니.

아직은 김영훈 부장인 그가, 내게 당황한 표정으로 물어 왔다.

"어, 어떻게 목검으로 나무를··· 그 괴력은 또 뭔가?"

"아··· 이거 말입니다."

나는 잠시 고민을 한 후, 적당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기연(奇緣)입니다."

"기, 기연?"

"예, 저 동굴 안에 있던··· 왠 서책을 집자, 서책이 불타면서 서책의 내용과 그 기운이 제게 스며들어왔습니다. 어떤··· 한 무인이 수도자라는 존재의 힘을 빌려, 자신의 무공을 후학에게 전하기 위해 만든 기이한 물건인 듯싶습니다. 저는 그 덕분에 단번에 그 무공의 계승자가 된 셈이고요."

"허, 허억···!"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그는 나흘에 걸쳐 하도 말도 안 되는 일들만을 겪은 탓인지 그 역시 납득하는 모습이었다.

'이세계에 떨어지고, 집채만 한 여우한테 자기 부하 사원의 팔이 뜯겨 나가고, 하늘을 나는 괴인들이 나타나 부하 직원들을 납치해 가고, 시커먼 공간 균열에 떨어지기까지 한 이 상황에 못 믿을 게 뭐가 있겠느냐만···.'

나는 속으로 실소를 지으며, 김영훈 부장에게 상황을 이해시켜 주었다.

우리는 현재 곱사등이 노인에 의해 전혀 다른 곳으로 떨어졌다.

근처에는 민가가 없으니, 민가를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이동해야 한다.

이 세상에는 무공이 있는 것 같으니, 알려 주겠다 등···.

김영훈 부장은 마지막으로 한 말인, '무공을 알려 주겠다'에 꽂힌 것인지 그렇게 절망적인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나는 그에게 천지심법과, 이 세계의 기초 어휘.

그리고 기본 혈자리들을 알려 주며, 그와 함께 숲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