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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3화. 투정 (2)

AAU.

세계 각 지부, 지부장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나둘 화면에 떠오르는 그들의 얼굴.

면면을 살피던 누군가 입을 열었다.

"영국. 그리고 대한민국 지부장님은 아직이십니까?"

질문이 던져짐과 동시에.

팟─

다급하게 떠오르는 박민재의 얼굴.

박민재가 다급히 인사를 건넸다.

"후,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미스터 박은 우리가 이해해 줘야죠."

"워낙 바쁘시잖아요."

박민재, 그가 바쁜 이유야 하나뿐.

물으나마 이호열 때문이었다.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분주하게 AAU 대한민국 지부 사옥을 뛰어다니다시피 했으니까.

박민재가 가쁜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아주 그냥 요 며칠 같은 말만 녹음기처럼 내뱉고 살았습니다. 하여튼 한번 물면 놔주지를 않아요, 대한민국 언론들. 히든 클래스의 존재? 우리도 제발 좀 알고 싶다. 이렇게 억울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해봐도...!"

"오우, 지부장님. 얼굴이 너무 가까운데요."

"그래서 씻지도 못하신 거죠? 몰골이 말이 아니시네요!"

"...네? 아침에 사우나 가서 뽀송뽀송하게 씻고 왔는데요."

...그게?

다들 목젖까지 그런 말이 차올랐지만.

지금은 잠시 접어둬야만 했다.

"여튼,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크흠. 그건 그렇고 영국 쪽이 늦는군요."

"최근 불참이 잦은데요?"

"...영국 쪽엔 한동안 균열 생성도 뜸하지 않았나요?"

"글쎄요. 별수 없죠. 기다릴 상황도 아니고 시작합시다."

예정에 없던 긴급회의.

AAU의 지부장들이 모인 이유는 간단했다.

떠오르는 자료 화면.

"그래서 놈의 정체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텟퍼른 미궁 심층부.

벽면에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동공.

말문을 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동공과 크기. 피부 조직의 디테일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드래곤족 몬스터가 확실합니다. 다만,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아르카나 대륙에서 드래곤들은...."

그건 아르카나의 개발자라면 모를 수 없는 상식.

"오직 [제로 산맥] 근처에서만 머물고 있죠."

"그 설정이 바뀌었을 확률도 있지 않을까요?"

"사실 그럴 가능성도 높습니다. 현재. 그러니까 악마 등장 이후 아르카나 대륙은 우리가 알던 아르카나 대륙이 아닐 테니까요. 그런데...."

이어지는 말 또한 상식이었다.

"이건 이야기가 다르죠. 지하 깊숙한 곳에 파묻혀 있는 드래곤이라뇨!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아르카나 월드를 호령해도 모자랄 드래곤들이?"

그러니까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박민재가 입을 열었다.

"용과 비슷한 무언가라면...."

"네? 비슷한 무언가? 짐작 가시는 게 있습니까?"

"있습니다. 동양에는 말이죠. 알고 계시죠? 오카자키 씨."

...끄덕.

박민재의 물음에 AAU 도쿄 지부장, 오카자키가 반응했다.

"이무기. 용이 되길 갈망하는 존재."

"...이무기요?"

"동양의 전설에 따르면 용이 되기 위해서 영겁의 시간을 인내하는 존재입니다. 사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지하에서 발견된 거대한 파충류라면 녀석밖에 떠오르지 않았거든요."

박민재가 말을 거들었다.

"다만, 녀석이 아르카나에 존재할까. 고민했을 뿐이죠."

흐르는 침묵.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면 고려할 가치도 없는 의견이었다. 업데이트는커녕 기획조차 하지 않은 몬스터가 출현하다니.

그러나 아르카나는 더 이상 게임이 아닌 또 다른 세계였다.

"하긴 거악부터가 우리가 모르는 몬스터. 아니, 존재였죠."

게다가 이런 상황은 이미 한번 겪어보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박민재, 그리고 오카자키에 쏟아지는 질문들.

"이무기란 녀석 강합니까? 용과 비슷해요?"

심정은 알겠는데 성격 한번들 급하시군.

박민재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확실해진 게 아니니까 딱히 드릴 말씀은 없네요. 만약 이무기라고 해도 놈이 어떻게 표현됐을지도 짐작이 가지 않고요.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무기든 어쨌든, 용과 비슷한 놈이란 것.

그것만으로도 우려할 만한 상황이 확실했다.

AAU는 냉철하게 계산을 돌려봤다.

"그럼 쉽게 말해서 열화판 드래곤이라고 가정해봅시다. 이호열을 포함, 현재 텟퍼른 미궁 균열에 진입한 플레이어들이 녀석을 처치할 수 있을까요?"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이호열, 그의 활약에 모든 게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깨진 차원의 틈]이나 [마왕성] 균열과는 이야기가 달랐다.

당시 호열은 마탑을 비롯해 아르카나에서도 손꼽히는 무력 집단과 공동 작전을 펼쳤었으니까.

그 사실을 다들 알고 있기에.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설의 탐험가, 파비앙이라고 해도 결국엔 탐험가니까. 클래스의 한계로 전투에서 큰 도움을 기대하긴 힘들 거고...."

부정적인 우려가 떠오르던 순간이었다.

딸깍─

누군가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추가 업데이트 내역 올라왔어요!"

"하여튼, 레이먼! 한 번에 공지하면 어디가 덧나냐?"

"내역 좀 공유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네, 잠시만요!"

딸깍─

이내, 모든 참석자에게 공유된 업데이트 내역.

──────

신규 균열, '텟퍼른 미궁'이 추가됩니다.

신규 몬스터가 추가됩니다.

'텟퍼른 흑의 계약자' : Lv.450

신규 보스 몬스터가 추가됩니다.

'깨워선 안 될 존재'....

──────

깨워선 안 될 존재...!

그 이름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무기, 용이 되기 위해서.

영겁의 세월을 웅크린 채 인내하는 존재라고 했었나?

"아무래도 한일 지부장님들 추측이 맞는 것 같은데요?"

녀석에게 그보다 잘 어울리는 이름도 없을 테니까.

그러나 놀란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녀석, 레벨이...?!"

─────

'깨워선 안 될 존재' : Lv.900

─────

900레벨.

현재까지 등장했던 몬스터 중 최고.

마왕, 플라우로스보다도 무려 50레벨이나 높았다.

아르카나의 개발자들.

때문에 고레벨로 갈수록 1레벨의 격차가 더욱더 극심해진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보스 몬스터에 드래곤족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녀석은 마왕, 플라우로스보다도 강하다.

지부장님의 얼굴에 근심이 드리울 때였다.

"...잠시만요. 다들 보고 계세요?"

다시금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보고 있다니, 뭘 말입니까?"

"박휘강. 그러니까 미궁에 진입한 넷튜버 스트리밍이요!"

"스트리밍?"

"링크 공유 좀 해주시겠습니까? 화면 공유면 더 좋고요."

...무언가 큰일이 벌어졌구나.

긴장 속에서 떠오르는 스트리밍 화면.

떠오르는 텟퍼른 미궁의 풍경.

거기선 믿지 못할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잠깐만, 저 검은 형체...? 텟퍼른 흑의 계약자잖아요."

[텟퍼른 흑의 계약자].

업데이트 내역에 명시되어 있듯.

텟퍼른 미궁 균열에 등장하는 일반 몬스터.

아르카나의 시스템상, 보스 몬스터 '깨워선 안 될 존재'에게 종속된 몬스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녀석들이 어째서....

박민재가 작게 중얼거렸다.

"...어째서 이무기한테 달려들고 있는 거지?"

보스 몬스터의 통제를 벗어난 일반 몬스터라고?

개발자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믿지 못할 상황을 납득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경험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이호열이다.'

무슨 술수를 쓴 건지.

그의 클래스 능력 덕분인지.

혹은 퀘스트의 일부인지.

구체적인 정보는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이호열이란 것을.

"하하...."

박민재가 헛웃음을 뱉었다.

그 어떤 역경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낸다.

이 정도면 그냥 맹목적으로 믿어야 하는 수준이 아닌가?

"괜히 다들 호멘, 호열 님 거리는 게 아니었잖아. 이거?"

*

[텟퍼른 흑의 계약자에 대한 지휘권을 획득하셨습니다.]

[텟퍼른 10,890인의 흑의 계약자]

[현재 상태 : 명령 대기]

낯설지 않은 메시지였다.

내가 그래도 경험이 있거든.

나름 여신교단 성기사들을 이끌어 봤단 말씀이시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공격 명령을 내리고 싶었다.

[깨워선 안 될 존재에게 '공포'가 발생합니다.]

녀석에게서 오감을 빼앗은 『흑관』.

거기에 적합한 마력을 더한 덕분에 상태이상 중에서도 최상위 상태이상에 속하는 [공포]가 발생한 상태. 그런 상황에서 들려오는 정보가 있었으니까.

"긴급 업데이트 내역 떴다고요? 네?! 레벨이 구백?!"

뭐, 900레벨?

내가 어째 스케일이 크다 했다...!

징징거리는 수준을 넘어서 진짜 명줄이 위태로운 상황.

특히나 나는 방금까지 입방정을 떨었었으니까.

'잠투정? 그거 받아주다간 내가 영영 잠들게 생겼잖아.'

그래서 속전속결로 끝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말했다시피 [공포]는 최상위 상태이상.

──────

공포 : 대상을 육체적, 정신적으로 무너트린다.

──────

플레이어들이 악마족 몬스터를 두려워한 이유면서, 쥐뿔도 없던 내가 악마 앞에서 꼿꼿할 수 있었던 근거 중 하나일 정도였으니까.

'공포는 마왕을 절규하게 할 정도의 상태이상.'

공포가 발생한 지금이 녀석을 쓰러트릴 절호의 기회라는 것.

그러나 빌어먹을 긍지 때문에...!

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태연하게도 말했다.

"그대들은 이미 충분한 희생을 치렀거늘."

흑의 계약자, 텟퍼른의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과오를 바로 잡고자 하는 것인가?"

그랬다.

나는 [텟퍼른 흑의 계약자]들에 대한 지휘권을 얻었으면서도, 단 한 순간도 텟퍼른의 백성들을 통제하지 않았다.

가슴 속 언제 가라앉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무겁고, 복잡하신 긍지께서 그런 행동을 용납할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그러나 조급할 건 없었다.

"!!!"

즉각적으로 드러나는 공포의 효과.

동요가 그대로 드러나는 거대한 동공.

그보다 비대한 몸집으로 몸부림이라도 치는 것인가.

쿠구구구궁─!

미궁이 전보다 더욱 격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하씨, 이럴 때 공격해야 하는 거 아니야?"

"미친놈아. 저기에 어떻게 달려들어!!"

"이건 얼마를 후원하셔도 리액션 못합니다. 진심으로요."

실로 압도적인 박력.

그 앞에서 섣불리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

산전수전 다 겪었을 전설의 탐험가, 파비앙.

"후우."

그조차도 긴장감에 숨을 고르고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과오를 바로 잡고자 하는 이들에게 망설임은 없었다.

스스스─

명령 따윈 하지 않았거늘.

흑의 계약자들이 움찔거리는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흑의 계약』때문에 오직 원념만 남아있는 상태.

그 탓에 구체적인 행동은 불가능하다.

"?!"

그저 깨워선 안 될 존재, 놈을 붙들고 늘어질 뿐.

"...아군인 것까진 좋은데."

"저거 도움이 되긴 하는 거야?"

"포옹이잖아? 저래서 무슨 피해를 줄 수 있다고?"

그 모습이 누군가에겐 우습기도.

무력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내게는 아니었다.

다른 이들은 알 수 없을지라도.

나는 알고 있단 말이다.

저 행동에 담긴 의미를.

스스스─

녀석에게 밀착한 흑의 계약자들이 더욱더 짙은 어둠으로 물들어 간다.

적합한 마력을 방출해 가며 허공으로 사라진다.

사실상, 순수한 적합한 마력의 결정체.

원념만 남은 텟퍼른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산화하며 녀석에게 피해를 주는 것밖에 없을 테지.

흑마도학적 관점과 더불어.

"그런가. 그대들의 긍지를 내가 알았다."

나의 전공 분야, 긍지론적 관점까지.

그러니까 나는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펄럭─

허공에 나부끼는 백색의 겉날개.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숨 쉬듯 자연스러운 간섭과 발현.

마치 날개에서 깃털이 빠져나오는 것처럼.

겉날개에 저장된 속성 마법들이 하나둘씩 뿜어져 나온다.

플레이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저게 뭐야?"

"스, 스킬인가?"

"스킬이라고? 어디서부터가 스킬인 건데. 저 날개부터?"

그러나 그들의 웅성거림에 신경 쓰지 않는다.

아니, 신경 쓸 정신이 없다.

텟퍼른의 백성들이 마지막 긍지를 불사르고 있었다.

타오르는 마지막 불꽃에서 한시라도 눈을 뗄 수 없었으니까.

그래, 이것이 내가 가슴 속에 짊어진 무게라는 것이다.

겉날개에서 발현되는 백(百)의 속성 마법.

포문을 연 건 [『절대영도』]였다.

[『기이』], 그것도 세니오스의 경지를 모방해 발현해 낸 기이였으니까.

당연하게도 위력은 내가 발현할 수 있는 마법 중에서도 압도적이다.

물론, 그 마력 소모량은 아직 400레벨대에 불과한 내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다.

[효과 : 착용 시, 사용자가 발현하는 속성 마법을 저장. 저장할 수 있는 마법의 개수는 겉날개의 색에 비례하며 저장된 마법을 발현 시, 마력 소모량이 30퍼센트 감소. - 현재 저장된 속성 마법의 수 : 100개]

겉날개에 저장해 마력 소모량을 줄였다고 하더라도.

[6시간 동안 마력 재생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비약초의 효과를 더한다고 하더라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마력 소모량인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 내게 마력 탈진은 없었다.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천적관계]가 발동됐으니까.

굳이 그 이유를 파악하려고 들지 않아도, 고점에 다다른 악마 사냥꾼의 감각이 말해주고 있었다.

미궁 심층부, 균열에 진입한 플레이어 중 악마가 섞여 있다고 말이야.

'평상시 같았으면.'

악마라면 두고 볼 수 없는 그랑펠의 성질머리.

깨워선 안 될 존재보다 악마를 먼저 사냥하려고 나섰어도 이상하지 않았겠지.

그러나 말했다시피 텟퍼른의 백성들이 있었다.

"감히 열등한 족속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모든 것은 절차에 따라서.

그 우선순위가 존재하는 법.

악마 사냥은 녀석을 쓰러트린 다음이다.

...어쨌든, 나로서는 천만다행이었다.

[천적관계]가 발동된 덕분에 시작부터 [『절대영도』]를 때려 박을 수 있었거든. 그러고도 마력 탈진으로 비틀거리지 않고 저장된 속성 마법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깨워선 안 될 존재에게 '동상'이 발생합니다.]

[깨워선 안 될 존재에게 '출혈'이 발생합니다.]

[깨워선 안 될 존재에게 '마비'가 발생합니다.]....

900레벨의 보스 몬스터.

그러나 녀석은 정상이 아니다.

온갖 디버프를 달고 있는 덕분에 충분히 해볼 만하다.

아니, 나는 녀석을 쓰러트릴 수밖에 없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텟퍼른 10,890인의 흑의 계약자]

[텟퍼른 9,754인의 흑의 계약자]

[텟퍼른 7,551인의 흑의 계약자]....

최후까지 자신들을 희생하는 텟퍼른의 백성들.

하이엘과 어둠의 정령.

그리고 파비앙 일행.

"경, 저희도 참전하겠습니다. 참전이라고 해도 전투력은 별 볼 일 없겠지만.... 경께서 만반의 준비를 하라 말씀해 주신 덕분에 챙겨 온 마도구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플레이어들까지.

"다들 보고만 있을 겁니까?"

"아까는 호열 님이랑 함께 싸워보고 싶다면서요?"

"씹, 뭐라도 해야지. 계속 보고만 있는 것도 쪽팔린다고!"

깨워선 안 될 존재.

녀석을 향해 무수한 합공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고통에 조금이나마 정신이 든 것인가.

"!!!"

녀석이 더욱더 격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콰콰콰쾅!!

미궁, 암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녀석의 육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과연, 동공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건가. 날카로운 이빨, 발톱이 연달아서 모습을 드러냈다.

"미친, 저거 설마 드래곤이야?!"

"생긴 건 영락없이 그쪽인데!"

"조금만 늦었어도 저 발톱에...."

놀란 플레이어들이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나는 꼿꼿하게 멈춰선 채 물러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녀석을 쓰러트릴 수밖에 없다고.

긍지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너도.

빠져나갈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착용 시, 아르카나 대륙의 모든 광물과 모든 식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다.]

[설명 : 헤아릴 수 없이 방대한 지식이 담긴 마도구.]

지하(地下).

암벽(巖壁).

광물이 존재하는 이상.

너는 비늘 하나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을 테니까.

"침구를 차내는 행위는 잠투정으로 간주하지 않겠다."

"...?"

"격식을 지키거라."

"...!"

콰드드득─!

◈ 134화. 한 줄기 빛

무너졌던 미궁을 원상복구 하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다.

나한테는 『반전 마법』이 있었으니까.

그런 곳에 사용할 마력이 있냐고?

그냥 있는 걸 넘어서 충분하다.

[천적관계]가 발동된 상태.

게다가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이 존재하는 이상.

광물에 간섭하는 마법의 효율은 비정상적으로 향상된다.

콰드드득─!

내가 괜히 당당하게 지껄인 게 아니라는 말이다.

"!"

역재생처럼 되돌아가는 광경.

깨워선 안 될 존재가 다시금 암벽, 미궁 암벽 속에 파묻히기 시작했다. 새삼 무섭다. 그랑펠에겐 잠투정을 받아준다는 게 이런 의미였군.

'아주 그냥 이불로 꽁꽁 덮고 움직일 수 없게 만든다는 뜻이었잖아.'

내 입으로 뱉은 말에 흠칫하기도 잠깐.

분전하는 파비앙 일행이 보였다.

만반의 준비를 하라는 내 편지에 마도구를 챙겨 왔다고 했었나.

과연, 마도구의 수준이 대충 봐도 범상치 않다.

특히나 파비앙이 들고 있는 저 횃불.

'녹색 불꽃.'

외관을 떠나서 위력 또한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보였다.

횃불, 거기에 파비앙의 클래스를 생각하면 무기로 분류되는 아이템은 아닐 게 분명하거늘.

횃!

치이이이익─!

횃불이 휘둘러진 궤적.

모든 것이 순식간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단단해 보이던 녀석의 가죽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단은 공격 성공, 파비앙이 다급하게 물러나며 말했다.

"어떠냐. 그게 바로 지옥의 불이다."

[지옥의 불]이라.

이름만 들어도 뭔가 굉장히 대단해 보인다.

횃불에 관해선 추후에 파비왕과 이야기를 나눠보자. 청렴결백, 물질적인 욕심에 흥미가 가는 게 아니라 파비앙은 분명 '지옥'이라고 했으니까.

악마와 지옥.

그리고 악마 사냥꾼.

관계를 생각하면 관심을 둬야 하는 아이템이라는 것이다.

물론, 잡생각은 거기까지였다.

가슴 속 무거운 긍지에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지금 잡은 기회의 끈을 놓칠 수 없었으니까.

시야를 넓게 보자.

'프로스트 탈환 때의 경험.'

비교하기엔 하르콘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플레이어들을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라고 생각해 보자.

당장 녀석의 공격을 피하기에 급급한 플레이어들을 보조할 필요가 있겠지.

콰드드득!

솟구치는 지반.

근접 계열 클래스 플레이어들을 위한 발판이었다.

암벽 이불 속에 녀석을 가둬뒀다고 해도 접근전의 위험 부담은 상당하니까.

조금만 움직여도 진동, 지진에 휘말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계단?"

"잠깐만, 계단이라면?!"

"일단, 이거라면 자유롭게 치고 빠질 수 있겠는데?"

보는 것처럼.

밟고 뛰어오를 수 있는 발판이 있다면.

공격에도 회피에도 큰 도움이 되겠지.

슥!

스와악!

푹!

깨워선 안 될 존재.

공포를 비롯한 온갖 상태이상에 시달리고 있는 녀석이었다. 평상시라면 생채기도 나지 않았을 플레이어들의 공격에 녀석이 움찔거리고 있었다.

"방금 메시지 떴어! 치명타!"

"좋아. 먹혀든다."

"몰아붙여!"

곳곳에서 들려오는 플레이어들의 목소리가 증거.

'보조하는 데엔 마력도 신경도 크게 필요하지 않아.'

물론, 그를 가능하게 한 건 역시 백색의 겉날개 덕분이었다.

흩날리는 겉날개.

깃털처럼 나부끼며 발현되는 일백(一百) 개의 속성 마법.

저장해 둔 마법을 발현하는 형식이라, 탐색 과정을 생략할 수 있는 덕분이겠지. 거기에 속성 마법마다 적용되는 [흡혈귀 백작의 오브]의 추가 피해 효과까지.

그러나 어떤 이유보다도, 텟퍼른이 있었다.

살아 숨 쉬던 과거에도.

원념밖에 남지 않는 현재도.

아르카나 대륙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녀석을 붙들고 있는 텟퍼른의 긍지는 무엇도 대신할 수 없겠지.

그랑펠의 긍지를 떠나서 말이야.

나도 그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거든.

상대는 무려 900레벨의 보스 몬스터.

[텟퍼른 5,321인의 흑의 계약자]

[텟퍼른 4,119인의 흑의 계약자]

[텟퍼른 2,847인의 흑의 계약자]....

희생이 없다면 쓰러트릴 수 없는 적이 분명했으니까.

그 사실을 알아차린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텟퍼른 흑의 계약자.

그들을 우습게만 봤던 플레이어들도 점차 그들의 희생을, 긍지를 알아차리게 됐다.

지이이잉─

녀석의 안광에서 쏟아져 나오는 마력.

공격에 휩쓸릴 뻔한 플레이어들을 대신해 몸을 던져 가로막는 텟퍼른 흑의 계약자들.

"...뭐야?"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몬스터가 몸을 던졌어...?"

"뭔진 모르겠지만, 몸을 내던지면서 싸우고 있는 거야, 다들."

그건 전황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그를 계기로 전장에 깃든 비장감.

더 이상 불필요한 대화는 없었다.

나를 포함, 이 자리의 모두가.

녀석을 쓰러트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전투는 길어지지 않았다.

"크롸아아아아!"

마지막 유언인가.

깨워선 안 될 존재.

녀석이 흉포한 비명을 뱉었다.

그러고는 발악을 멈췄다.

시야가 점멸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 업.

[높은 처치 기여도로 전리품이 자동으로 습득됩니다.]

전리품.

[10대 불가사의 퀘스트 : 텟퍼른의 미궁]

[월드 퀘스트 : 악룡(惡龍) 사냥꾼]

퀘스트.

끊임없이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러나 수많은 메시지 중.

내 시선을 끈 건 오직 하나의 메시지였다.

그래, 모든 것엔 우선순위가 있었으니까.

[텟퍼른 1인의 흑의 계약자]

나는 마지막 텟퍼른 흑의 계약자를 바라봤다.

남은 건은 오직 원념뿐.

시야조차 온전하지 않을 텐데.

적합한 마력으로 내 존재를 알아차린 것인가.

검은 형체가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물었다.

"...우리는 과오를 씻었는가?"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그대들의 과오는 청산된 지 오래전이다."

말했다시피 여태까지 저런 괴물을 묶어둔 것만 해도 텟퍼른은 책임을 다한 거겠지.

그러니까 나는 너그럽게 말을 이었다.

"이 자리 모두가 텟퍼른의 희생과 긍지를 깨달았으니."

"...!"

"그대는 편하게 눈을 감아도 좋다."

"...그런가."

스스스─

나의 말에 최후의 텟퍼른 흑의 계약자가 허공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텟퍼른 미궁] 균열이 클리어됐다는 거겠지.

'오늘도 가라앉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안도의 한숨을 뱉고 싶다.

그러나 내색할 수 없는 피곤한 성격.

거기에다 아직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으니.

다음 절차를 수행할 시간이다.

나는 플레이어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펄럭─

흩날리던 겉날개를 접고 걸음을 옮겼다.

"거기였군."

찾았다, 주제 파악 못 하는 악마.

*

초신성, 브레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말도 안 돼."

[텟퍼른 미궁].

균열에 진입했을 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균열의 수준이 예상보다 훨씬 높았던 것이다.

함정 하나에 잘못 걸려도 목숨이 간당간당할 정도로.

'좋아. 좋아.'

목숨이 위험한데 오히려 좋아하는 이유?

기쁜 게 당연하지!

브레드, 아니 브레드의 육체에 빙의한 진명의 악마 '데스퀴'.

그에게 플레이어들의 부정적인 감정은 오히려 힘이 됐으니까.

데스퀴는 입술에 침을 발랐다.

'난 마왕들과 달라. 무식하지 않다는 거지.'

영악하게 머리를 굴렸다.

'언제까지나 목표는 이호열이야.'

균열에 진입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목표는 그저 이호열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잘난 마왕님들을 셋이나 짓밟아 버리다니.

악마로서 순수하게 그 강함이 궁금했으니까.

'그런데, 이거 잘만하면...?'

이런 미궁이라면.

이호열, 그도 여유롭지 않지 않을까?

혼잡한 상황을 틈타 그의 육체를 빼앗을 수 있지 않을까?

"저도 파티에 참가하겠습니다."

같잖은 인간 놈들을 연기하고 기회를 노렸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데스퀴는 자아도취에 빠져있었다.

'역시, 나는 영리해!'

타고나기를 강하게 태어났다고 설쳐대는 마왕들.

그들에게 자신의 악랄함을 보여주고 싶었다.

초신성의 육체를 차지해 이용하는 것부터.

완벽하게 인간을 연기해 목적을 달성하는 것까지.

'봐라. 미궁의 심층부가 머지않았다!'

그리고 저기엔 이호열이 있다.

마왕들은 제대로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존재.

다른 악마들은 두려워 나서지도 못하고 있는 지금.

나, 데스퀴가 이호열 앞에 당당히 섰다.

'어디냐. 이호열.'

불쾌할 정도로 위로 올라가는 데스퀴의 입꼬리.

점차 밝아지는 시야.

그가 미궁 심층부의 풍경을 목격한 순간이었다.

두근!

"...!"

...뭐지?

심장이 격하게 뛰고 있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각.

데스퀴가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다.

"뭔 눈동자가 저렇게 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저 거대한 동공에 놀란 건가?

아니, 아니었다.

저 뱀 같은 놈이 강적이면 어쨌단 말이냐?

애초에 목적은 어디까지나 이호열. 데스퀴에겐 놈과 제대로 맞서 싸울 생각 따윈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저런 걸 보고 놀랄 이유는 없는데....

두근!

두근!

심장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불쾌한 고동이었다.

그런 데스퀴의 눈에 표적이 들어왔다.

"...!"

느긋하게 찻잔을 손에 쥐고 있는 호열이.

데스퀴는 애써 헛웃음을 뱉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도.

'뭐 하는 놈인가 했더니만....'

오만하기 짝이 없는 족속이었구나.

데스퀴는 알고 있었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약한 녀석들은 약한 대로.

강한 녀석들은 강한 대로.

그 정신력엔 취약점이 생기기 마련이었으니까.

'그 오만함이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쿠구구궁─!

그리고 시작된 텟퍼른 미궁 전투.

전황은 데스퀴가 경악할 수밖에 없는 전개로 흘러갔다.

데스퀴는 다시금 중얼거렸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어떻게?"

나약한 인간, 혼자서, 이런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단 말인가?

이호열의 강함은 짐작하고 있었다.

말했다시피 마왕을, 무려 셋이나 압살한 그였으니까.

"물러서지 마!"

"형님들, 쪽팔리게 죽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전방은 물러나고 대열 교대해요!"

그랬다.

데스퀴가 두려워하는 건 변화였다.

나약했던 인간들의 감정 변화.

"...이해할 수 없어."

분명 공포에 휩싸인 인간들이었다.

그 부정적인 감정 덕분에 자신의 힘이 끓어 넘치고 있었단 말이다.

그런데 이호열, 그가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모든 게 바뀌었다.

데스퀴가 중얼거렸다.

"...최악의 상성."

데스퀴는 그제야 주제 파악을 했다.

이호열,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였다.

어째서 몇이나 되는 마왕들이 이호열의 손에 죽어 나갔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이라도 알게 돼서 다행이었다.

'녀석과는 엮이지 않는 게 최선이다.'

악마로 태어난 이상.

이호열, 그는 건드려선 안 되는 존재다.

데스퀴는 이 소식을 다른 악마들에게 전할 생각이었다.

녀석들의 목숨 따위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었지만.

그래도 쌓아둔 관계가 사라지는 건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었으니까.

"이겼다!"

클리어인가?

터져 나오는 함성과 동시에 무너져 가는 균열.

데스퀴는 다짐했다.

다시는 주제넘은 짓을 하지 않겠노라.

'...현재에 만족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미련도 아쉬움도 없다.

그런데, 어째서?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아직도 터질 듯이 뛰고 있는 거지?

"...?!"

당황한 데스퀴.

그의 시야에 빛이 보였다.

무너져 가는 균열의 빛.

그런 빛을 후광처럼 등진 채 자신을 바라보는 그림자.

펄럭─

데스퀴는 그제야 심장이 두근대던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래, 착각 때문이었어.

저 날개를 보고 내가 멋대로 착각한 거야.

지레 겁을 먹어서는....

'...아니.'

아니다.

바라보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어째서 이호열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거지?

점차 강해지는 빛 속에서 데스퀴는 호열과 눈이 마주쳤다.

"!"

더없이 냉랭한 시선과 마주했다.

'도망쳐야 한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이호열은 내 정체를 알고 있다.

내가 악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게 확실하다.

클리어된 균열.

데스퀴는 인파 사이를 다급하게 헤치고 도망쳤다.

그러나 모든 것은 헛수고에 불과했으니.

그런 데스퀴의 발밑에 마력이 일렁거렸다.

포탈.

"!"

데스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눈에 들어온 건 고풍스러운 집무실이었다.

집무실에서 꼿꼿하게 선 채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호열이었다.

들려오는 것은 오직 무미건조한 목소리.

"이곳을 밟은 악마는 네가 두 번째다."

"...아, 악마라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그 가증스러운 변명을 듣는 것도 두 번째다."

두 번째라고?

마왕, 놈들이 이곳을 찾진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설마?

'내가 처음이 아니란 말인가?'

...빙의한 악마를 알아차린 게 처음이 아니라는 뜻인가!

말뜻을 알아차렸을 땐 이미 늦었다.

사냥감과 불필요한 대화는 하지 않는다.

호열이 뱉은 말은 대화가 아닌.

그저 스스로의 다짐이었으니까.

"그러나 세 번째는 없다."

"뭐, 뭣?"

"내가 친히 열등한 너희를 처분하러 갈 것이다."

"...!!"

서걱─

*

대파장!

텟퍼른 미궁 균열은 클리어됐거늘.

박휘강을 비롯한 넷튜버 플레이어들의 실시간 중계, 생생한 영상이 남은 덕분일까?

텟퍼른 미궁에 관한 관심은 식지 않고 있었다.

누구보다 할 말이 많은 건.

호열과 함께 미궁에 진입했던 플레이어들이었다.

"처음 진입했을 땐 큰일 났다 싶었죠."

"어째서요?"

"일단, 이호열 플레이어랑 떨어져서요? 하하, 농담이고요."

각 방송사.

플레이어들과 진행되는 인터뷰.

플레이어마다 할 말은 각기 다른 모양이었지만.

그들의 소감을 요약하면 결국 하나로 일치했다.

"이호열, 아니지. 호열 님이 없었다면 끔찍합니다."

"상상도 못 했다니까요? 제가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올라탔던 그 계단을 올라타게 될 줄은...!"

"솔직하게 감동받았습니다. 저희들까지 신경 쓰고 계실 줄은 몰랐거든요."

생생한 증언과 함께 재생되는 자료 화면.

거기엔 맹활약하는 호열의 모습이 있었다.

플레이어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지켜보시는 여러분들은 와 닿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저희는 알 수 있었거든요."

"사실상 저희를 위해 호열 님께서 기다려 주신 거죠.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고나 할까?"

"다들 보셨잖아요? 티타임을 가지실 정도로 여유가 넘치셨던 거."

모든 플레이어가 미궁 심층부에 진입할 때까지.

느긋하게 차를 즐기던 호열이었다.

게다가 900레벨의 보스 몬스터, '깨워선 안 될 존재' 앞에서도 한 치의 굽힘도 없던 꼿꼿한 태도까지.

다른 이들은 몰라도 함께했던 플레이어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빚을 졌죠. 그것도 엄청나게 큰 빚을요."

다른 말은 할 수 없겠지.

호열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플레이어들은 '깨워선 안 될 존재' 처치에 기여, 처치 기여도를 인정받았고, 덕분에 경험치를 획득했고, 그와 관련된 퀘스트까지 받게 됐으니까.

[퀘스트 : 드래곤의 흔적]

그것도 보통 퀘스트가 아닌 드래곤과 관련된 퀘스트를.

그를 통해 확실해진 정보가 있었다.

깨워선 안 될 존재, 녀석이 드래곤족 몬스터였다는 것.

그러니까 텟퍼른 미궁 균열 클리어에 관한 평가는 갈리지 않았다.

마왕을 압살.

악마족 몬스터의 활동을 억제한 것도 모자라서.

직접 나서서 플레이어의 수준을 강제로 끌어올리고 있다.

이호열에 대한 평가가 다시 내려져야 한다.

그는 단순히 강하기만 한 게 아니니까.

"한없이 깊은 어둠, 그보다는...."

그런 호열에게 현재의 이명(異名)은 어울리지 않겠지.

어둠에 파묻혀 있던 텟퍼른 미궁.

그 어둠 속에서 고고한 존재감을 내뿜던 호열이 아니던가?

"한없이 깊은 어둠 속 한 줄기 빛. 그렇게 부르고 싶습니다."

.

.

.

나는 두렵다.

뭐어, 이젠 한없이 깊은 어둠 속 한 줄기 빛?

저 빌어먹을 호칭이 어디까지 길어지게 될지 말이다...!

"타인의 평가는 중요치 않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에 괴로워할 때가 아니다.

레벨, 퀘스트, 전리품.

마지막으로 정화된 마왕의 전리품까지.

"업무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네, 아무렴요. 아주 그냥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루 만에 쌓인 수석으로서의 업무까지.

확인할 게 산더미 같았으니까.

우선, 점멸하는 메시지부터 확인하자.

◈ 135화. 악룡 사냥꾼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440]

[능력치]

근력 : 71 / 민첩 : 76 / 마력 : 387 / 행운 : 6 / 심미 : 下

[보유 포인트 : 15]

15레벨 상승.

400레벨대에 진입한 뒤 극적인 레벨 업은 없었거늘.

그래도 압도적인 경험치 앞에서 장사는 없는 모양이다.

깨워선 안 될 존재의 레벨은 무려 900레벨.

텟퍼른 흑의 계약자는 물론.

플레이어들과 처치 기여도를 나누고도 이 정도의 경험치라니.

"내게 숫자놀음은 무의미하다."

...지금은 우쭐댈 때가 아니라 기뻐해야 할 때 아닌가?

어쨌거나 포인트부터 투자하자.

나는 언제나처럼 마력에 포인트를 올인하려다가 멈칫했다.

'...좀 다사다난했지?'

미신 따윈 믿지 않겠노라.

하나하나가 소중한 포인트 낭비를 하지 않겠노라.

울며 겨자 먹기처럼 행운을 외면해 오던 나였다.

그 결과가 어땠는가?

마왕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지를 않나.

미궁인 줄 알고 들어갔더니 용족 몬스터랑 마주치질 않나.

하여튼, 긍지에 가라앉을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

[행운 : 7]

그래, 딱 1포인트만.

행운의 7이잖아, 보기도 좋네.

아까워하지 말자, 호열아.

정신 건강 차원에서도 이게 훨씬 나을 거야.

합리화도 잠깐, 나는 찻잔을 들었다.

달칵─

"단순히 차를 즐기는 게 아니다. 흘러가는 시간을 함께 즐기는 것이지."

비약초로 잔뜩 도핑해 온 내가 할 말이 아니거늘.

혼잣말이기에 다행이지.

나는 퀘스트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클래스 퀘스트 : 악크샨의 절멸]

[퀘스트 : 마르셀로의 연구]

[퀘스트 : 마탑의 재건]

[월드 퀘스트 : 세계수의 씨앗]

[퀘스트 : 마왕, 플라우로스 vs 드워프]

[10대 불가사의 퀘스트]

[월드 퀘스트 : 악룡(惡龍) 사냥꾼]

많기도 하네.

다른 플레이어들은 하나 수행하기도 힘들다는 퀘스트가 무려 7개나 진행 중이다. 물론, 그중 몇 개는 이미 퀘스트 목표를 달성한 상태였고.

'완전히 끝난 퀘스트는 하나인가.'

드워프와 마왕 플라우로스의 전쟁 퀘스트.

자연스럽게 쌓아둔 공적치가 떠오른다.

보자, 어떻게 써먹을 수 있으려나?

일단, 유스라 왕국이나 프로스트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드워프들과 나의 관계도는 이미 최대치에 다다른 수준이었으니까.

'맹약으로 이어진 사이지.'

그러니까 다른 보상이 주어지지 않을까?

물론,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드워프들과 만나서 까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다.

다른 퀘스트 중에서 다시 확인할 만한 건....

역시 새로운 퀘스트겠지.

[월드 퀘스트 : 악룡(惡龍) 사냥꾼]

사악한 용의 일족을 사냥한 자여.

산맥의 전설이 그대를 부르고 있다.

─제로 산맥 최정상에 도달하라. (진행 중)

'다른 플레이어들이 받은 퀘스트는 [드래곤의 흔적].'

내게 떠오른 퀘스트는 그 이름부터 달랐다.

유달리 높은 처치 기여도를 기록한 덕분이겠지.

그리고 당시엔 긍지에 정신이 팔려서 몰랐는데....

[악룡 사냥꾼]은 무려 월드 퀘스트였다.

세계수의 씨앗 퀘스트에 맞먹는 퀘스트라는 거겠지.

퀘스트 내용을 보면 과연 그럴 법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악한 용의 일족이라.'

깨워선 안 될 존재.

역시, 나쁜 자식이었네. 그거.

내가 눈 그렇게 부릅뜰 때부터 알아봤다니깐?

"악룡에게 지나치게 친절했군."

...그게 친절했던 건가?

어쨌든, 텟퍼른이 자신들을 희생하면서까지 녀석을 미궁에 봉인해 둔 이유가 있었다. 그나저나 퀘스트 내용만 봐도 어째 전개가 짐작되는데.

'제로 산맥.'

아르카나 대륙의 마천루.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광고 영상에서도 단골 출연하던 제로 산맥이었다.

말 그대로 하늘을 뚫을 것처럼 치솟은 제로 산맥.

보는 것만으로 가슴을 웅장하게 만드는 위엄이 있었지.

게다가 산맥 최정상엔 드래곤이 산다는 전설까지!

그건 플레이어라면 모를 수 없는, 가슴이 설렐 수밖에 없는 설정이었으니까.

다만, 문제는 정작 제로 산맥 최정상에 도달한 플레이어가 없다는 거겠지.

적정 레벨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거든.

정상은커녕.

초입에서부터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제로 산맥, 이렇게 무시무시한 곳인데 말이야.

뭐, 첫 번째 퀘스트 목표가 최정상에 도달하라고?!

이걸 깨라고 만든 게 맞냐, 진짜.

다시금 깨닫게 된다.

'월드급' 퀘스트가 아니라 진짜 '월드' 퀘스트는 시작부터 차원이 다르다는 걸...! 물론, 같은 월드 퀘스트인 [세계수의 씨앗]을 꼼수로 깨버린 경험이 있긴 했지만.

요행은 언제까지나 요행일 뿐.

"산이 그곳에 있기에 오르는 것뿐이다."

쓸데없이 좋아진 기억력.

어디서 주워들은 명언을 내뱉어 본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겠지.

'균열로 떠올라야 오르든 뭐든 하는 거니까.'

허나, 틀린 말이 아니라서 더 열이 받는 때도 있는 법.

이럴 땐 내 주둥이지만 얄밉다니까?

나는 애써 찻잔을 기울이고는 아이템을 확인했다.

먼저 높은 처치 기여도로 획득한 전리품부터.

[사악한 지룡의 송곳니]

[등급 : 유니크]

[제한 : Lv.800]

[효과 : 없음]

[설명 : 용이 되지 못한 지룡의 송곳니로 만든 검. 지룡의 태생적 한계로 특별한 효과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 파괴력은 어떤 무기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다.]

...심히 난감해지는 전리품이 아닐 수 없다.

일단, 그 레벨 제한부터 보자.

800레벨.

앞으로 마왕을 몇이나 더 사냥해야 도달할 수 있는 수치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의 격차.

하지만 나도 짬밥이 있는데, 짐작하고는 있었다.

애초에 이런 상황이 하도 많았어야지. 왜, 내 레벨 대보다 훨씬 높은 악마족 몬스터를 사냥해 얻은 전리품들. 대다수가 레벨 제한이 어마어마했으니까.

문제에 이미 직면해 봤으니까.

나름대로 우물을, 살 구멍을 파놨던 나였다.

그게 바로 마법부여학이었고.

'근데, 정작 추출할 효과가 없다니!'

청렴결백.

물질에 연연하지 않는 성품.

그게 아니었다면 정말 억울해서 징징거렸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애써 차분하게 설명을 보고 있자니 이해는 된다.

'효과가 없는 대신 파괴력이 상당하다는 거겠지.'

시스템창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파괴력이 어떤 무기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니까.

정말 그런 거겠지.

그런 의미에서 약 올리는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는데.

파괴력이 이렇게 대단한데.

레벨 제한 때문에 써보지도 못해서 어쩌나.

아니꼽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나는 한 우물만 파지 않았다.

검이라고 해서 굳이 착용하고 써먹을 필요는 없잖아?

나는 [사악한 지룡의 송곳니]를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그리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무엇이든 활용하기 나름이다."

검을 휘두르는 데엔 여러 방법이 있다는 말씀.

두둥실─

나는 마력으로 지룡의 송곳니를 움직였다.

물론, 파괴력은 온전히 착용했을 때보다 훨씬 떨어지겠지.

왜, 손에 쥐지 못한 검에 검기를 불어넣을 순 없었으니까.

그러나 충분하다.

"단점이 있으면 장점도 존재한다.'

『반전 마법』이 존재하는 이상.

형태 따윈 얼마든지 변형시켜도 상관없다.

쩌저적─

나는 지룡의 송곳니를 여러 조각으로 나눴다가 다시 원상태로 반전시켰다.

무려 800레벨 제한 아이템, 파괴력 하나는 어떤 무기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했겠다....

위력을 확인해 보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거리는군.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알아야 하는 법이지."

물론, 고풍스런 마탑의 집무실에서 소란을 피울 순 없는 노릇.

위력을 확인하는 건 다음 균열로 미뤄야겠군.

나는 미련을 접고 다음 전리품을 확인했다.

데스퀴.

플레이어에게 빙의했던 진명의 악마.

녀석을 구마의식으로 처치하며 정화한 마왕의 전리품을.

[악에 물든 일각의 지휘봉].

[피로 그려진 망각의 지도].

[악의로 불타는 눈동자].

그전에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자.

어떤 마왕의 전리품을 우선적으로 정화하는 게 옳은가?

세 개의 전리품 모두 착용 제한은 없었다.

다만, 드롭한 마왕들에겐 명백한 레벨 차이가 존재했다.

'그런 관점에선 [악의로 불타는 눈동자]가 우선이겠지.'

그게 세 마왕 중 가장 서열이 높은 플라우로스의 전리품이었으니까. 그러나 나의 선택엔 그랑펠의 까다로운 심미적 관점이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으니.

"중도를 지키는 것은 중요하지."

그냥 흉측해서 손도 대기 싫었던 것뿐이거늘.

변명은 잘한다, 진짜로.

그랬다.

내가 정화한 전리품은 중도, [피로 그려진 망각의 지도]였다. 그래, 그저 순서의 차이라고 생각하자. 어차피 다른 마왕의 전리품도 정화할 거니까.

나는 진정하고 정보를 확인했다.

[만물과 통하는 지도]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누군가 몰래 감춰둔, 누군가 잃어버린, 어딘가에 숨겨진 무언가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또한 단 한 번, 무언가의 위치로 순간이동 할 수 있다.

단, 순간이동 효과 발동 시 모든 효과를 그 즉시 상실한다.]

[설명 : 사용하기에 따라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마도구.]

긴 효과를 설명이 한 줄로 요약하고 있었다.

'...진짜 무궁무진한 가능성이잖아. 이거.'

사실상 원하는 '무언가'의 위치를 알 수 있다는 거잖아?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가는 수많은 가능성.

전설이라 여겨질 만큼 희귀한 비약초의 위치도.

원하는 아이템의 위치도 특정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물론, 한계가 있긴 하다.'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으니까.

그 위치를 안다고 해도 당장 찾아 나설 순 없겠지.

물론,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다는 순간이동 능력을 사용한다면 가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

"고고하게 흐르는 시간은 모든 것을 해결하곤 하지."

일단, 위치만 알아둔 다음.

훗날, 해당 균열이 떠오를 때 행동에 돌입해도 되는 일이었으니까.

순간이동 효과까진 웬만해선 사용할 일이 없겠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니까....

어째 좀 뿌듯해진다.

무엇보다 과연 마왕의 전리품이다.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이상으로 유용할지도 몰라.'

그런 의미에서 다른 두 전리품의 효과도 기대해볼 만하다.

그러나 김칫국 마시는 것도 거기까지.

이젠 버릇이 되어버린 빠듯한 일과가 남아있다.

그래, 점멸하던 메시지도 전부 확인했으니까.

이젠 수석의 책임을 다할 시간이라는 것이다.

일단, 출탑 신청서부터 확인하자.

달칵─

내려놓는 찻잔.

나는 꼿꼿한 자세로 하나둘 양피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깃털펜을 휘갈겼다.

"여전히 쓸데없는 출탑 목적이다."

스스슥─!

"불합격이다. 벤쉬 윌리엄 선임 마법사."

*

[퀘스트 : 드래곤의 흔적]

그건 [텟퍼른 미궁] 균열을 클리어했다는 훈장이나 다름없었다.

그 내용만 봐도 당장은 수행할 수 없는 퀘스트였거늘.

플레이어들에게 아쉬움은 없었다.

"솔직히 깰 수 있을 거라 생각은 안 하는데.... 왜, 기분이라는 게 있잖아. 괜히 퀘스트창 한 번씩 바라보기만 해도 배부르고 그런 거."

"일단, 드래곤이라고 박혀있으니까. 내가 막 랭커가 된 것 같기도 하고. 그치?"

"난 그런 것보다 호열 님이랑 함께 전투했다는 거. 또 그게 영상으로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게 더 좋더라고. 진짜 영상 녹화해서 가보로 대대로 물려줘야지."

...그 영상을 가보로 남긴다고?

누군가 듣는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대화가 오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드래곤'이 등장한 현재.

플레이어를 비롯한 전 세계는 동향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플레이어 공식 랭킹 1위, 스칼의 움직임에.

445레벨, 스칼!

랭킹을 포함한 호열의 플레이어 정보는 비공개 상태.

덕분에 스칼은 단 한 번도 공식 랭킹 1위에서 내려오지 않은 상태였다.

세간이 호열의 레벨을 최소 900레벨이라 예측하고 있기에 스칼을 향한 관심은 이전보다는 줄어든 상태였지만.

"저는 지금 뉴욕에 나와 있습니다!"

말했다시피 이번만큼은 이야기가 달랐다.

센트럴 파크.

거대한 빌딩 앞에 몰려든 취재진.

세계 각국 특파원들이 카메라를 향해 열변을 토해낸다.

"그동안 신비주의를 고집하던 스칼이 모습을 드러낸 건 이례적인 일입니다."

"대격변 이후, 스칼이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처음입니다."

"하지만 플레이어를 비롯한 거대 길드들의 대응은 담담합니다. 스칼의 이런 움직임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반응입니다."

플레이어라면.

스칼을 알고 있는 플레이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그래, 스칼의 클래스는 바로 기사 계열 히든 클래스.

[용기사]였으니까.

웅성웅성─

이내, 스칼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글라스로도 감춰지지 않는 서구적인 이목구비.

그간의 신비주의가 무색하게도.

스칼은 카메라 앞에 거침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기자들이 들이대는 마이크를 낚아챘다.

툭툭─

마이크를 건들고는 입을 열었다.

"아아, 용기사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예상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동안 어떻게 신비주의를 고수하며 살아온 것인가?

고개가 갸웃거려질 정도로 대담한 언행.

그런 스칼의 목적은 더없이 분명해 보였다.

"떨거지들한테 용건은 없다. 이호열, 나는 그쪽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

"...?"

"대단하신 악룡 사냥꾼 씨."

"...!!!"

.

.

.

한없이 깊은 어둠도 모자라서.

한없이 깊은 어둠 속 한 줄기 빛.

끝인 줄 알았더니 그걸로도 모자라서 이젠 악룡 사냥꾼?

스칼의 폭탄선언 덕분에 낯뜨거운 이명(異名) 하나가 추가된 순간이었거늘. 당사자인 호열은 마탑 집무실 책상에서 처음 자세,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호열의 눈이 살피는 것은 출탑 신청서였다.

치유학파 선임 마법사, 벨리에 유시아의 출탑 신청서.

시선이 그 출탑 목적을 훑었다.

──────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 시무아르드.

시무아르드 마도 가문에 전승되는 시한부의 저주.

그 해주(解呪)에 관한 연구.

──────

여느 때와 같았다.

일희일비하지 않았으며 고민 또한 길지 않았다.

호열이 자신의 집무실을 나섰다.

또각─

◈ 136화. 살고 싶은가

시무아르드.

마도 명가답게 그 이름은 아르카나 대륙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혈족, 일원 하나하나가 압도적인 마력의 소유자.

다른 마도 가문엔 한 명조차 배출하기 힘들 정도의 재능을 지닌 천재가 한 대 걸러 한 대마다 등장한다.

그러나 시무아르드 가문을 부러워하는 이들은 없으리라.

명성만큼이나 유명한 시한부의 저주.

시무아르드의 핏줄은 압도적인 마법적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 대신 중년에 이르지 못하고 사망했으니까.

예외는 없었다. 시무아르드 가문이 마도 명가로 명성을 날리게 된 이후부터는.

"후우."

마르셀로는 집무실을 둘러봤다.

갖가지 연구 자료들로 가득하던 집무실.

그 정리도 얼추 끝나간다.

"덕분입니다."

이호열 수석, 그가 아니었더라면.

지금도 자신의 책상엔 정기 학회 사전 검증 관련 자료며, 기이에 관한 가설이며, 심지어는 출탑 신청서까지 나뒹굴고 있었겠지.

"이 세계엔 그런 말이 있더군요."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다는 말.

...어째 이런 곳에 사용할 말은 아니었지만, 마르셀로가 그 사실까진 알 수 없었다.

다만, 마르셀로는 지키고 싶었을 뿐이었다. 마지막까지 수석으로서의 격식을.

몸 상태는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다.

미약해진 심장박동.

둔감해진 마력의 흐름.

앙상해져 가는 몸뚱이.

'깨진 차원의 틈 균열에서부터 느껴졌다.'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육체에 반동이 느껴졌다.

벨리에 선임,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가뜩이나 좋지 않은 몸에 무리했다는 거겠지.

-"미안합니다. 늘 신경 쓰게 만드는군요. 벨리에 선임."

그로도 모자라서 마탑에 복귀한 뒤에도 쉴 새 없이 업무에 집중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가뜩이나 짧은 명을 재촉한 김이 없지 않아 있긴 했다.

마르셀로가 피식 웃음을 뱉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시무아르드 가문의 일원.

마르셀로에게 죽음이란, 무엇보다 가까운 것이었다.

유년 시절부터 죽음엔 익숙했으니까.

기억 속에 존재하는 건 아버지의 임종이었다.

아직 어렸던 자신을 제외하고 가문의 누구도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죽음이 마치 당연하다는 것처럼. 심지어는 아버지, 본인께서도.

-"훗날 모든 것을 깨닫게 될 날이 올 거란다. 마르셀로."

과연, 당신의 말씀은 옳았다.

시무아르드 시한부의 저주는 남녀, 출가 여부를 구분 짓지 않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왔으니까.

한 해가 지나고, 수많은 이들의 죽음과 마주하며 마르셀로 또한 아버지의 유언을 이해하게 됐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다만, 시무아르드의 핏줄에게만 조금 야박할 뿐.

그러나 마르셀로는 억울하지 않았다.

"모든 것엔 주고받음이 있다...."

경의 말씀대로.

수명과 재능을 맞바꾼 거겠지.

시무아르드의 피가 흐르는 자신은 엄청난 마법적 재능을 가지게 됐으니까.

게다가 아버지를 비롯한 다른 선조들과 다르게 그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마탑에 입성했다.

-"마르셀로, 그대에겐 권리가 있습니다."

그건 후손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대모, 율라 시무아르드의 허락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마르셀로는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나 때문에 누군가는 고생하고 있겠지만.'

좋으나 싫으나 마탑에 입성한 이상.

서약에 따라 다른 마법사들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가문의 일엔 관여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시무아르드 가문이 누군가의 걱정을 살 가문이던가?

'그러니 내가 신경 쓸 건 그쪽이 아니라....'

이쪽, 마탑이겠지.

마르셀로는 정리된 집무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집무실의 풍경만큼이나 마탑도 많은 게 바뀌었다.

원로의 탈을 뒤집어쓴 채 마탑을 기만하던 악마 숭배자들을 축출했다.

원로 마법사는 다섯에서 하나가 됐다.

그러나 빈자리는 느껴지지 않았다.

마탑의 모든 구성원이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으니까.

모든 계급 마법사가 참가하는 원탁회의가 그 증거겠지.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마탑은 공공의 적, 악마를 인지했다.

마법사 성격이 더러운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마르셀로였지만.

공공의 적이 생긴 지금, 그 자존심 센 마법사들이 서로서로 협력하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고 으르렁거리던 선임 마법사들이 잠잠해진 걸 보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이 또한 덕분입니다."

역시, 모든 것이 이호열 수석 덕분이었다.

그러니까 마르셀로에게 걱정은 없었다.

그라면 자신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대신할 수 있겠지.

그래, 받아들이고 있었으니까.

시한부, 시무아르드의 혈족임을 자각한 순간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죽음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겠지.

"...걱정은 없지만, 미련이 남습니다."

경지에 다다르지 못한 마법도.

완성하지 못한 이론마법학도.

기이에 관한 연구도.

그리고 어느 무엇보다도....

"당신께서 깨어나신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습니다."

탑주님을 다신 뵐 수 없다는 것.

그것이 마르셀로의 미련이었다.

그러나 마르셀로는 알고 있었다.

저항한다고 달라질 건 없다. 이미 끝이 정해진 이가 품는 미련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그러니까 깊게 생각하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드륵─

서랍을 열자 호열이 건넸던 녹차 티백이 보였다.

마르셀로가 티백을 바라보고 쓰게 웃던 순간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셔도 됩니다."

벨리에 선임인가?

그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마르셀로는 애써 낯빛을 바꿨다.

그런데 열린 문에서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나타났다.

"...!"

사전에 약속되지 않는 만남은 가지지 않는다.

그 좌우명 탓에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

이호열 수석이었다.

"이 수석님? 어떤 일로 제 집무실을 찾으셨습니까?"

"마르셀로 수석."

"듣고 있습니다."

"아니, 마르셀로 시무아르드."

"...!"

이 수석께는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말씀드린 적이 없었다.

모험가인 호열이 시무아르드 가문의 내력을 알고 있을 리 없겠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었다. 다른 이들의 우려를 사는 건 지금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다만, 지금이라도 알게 되셨다면....

꾸벅─

마르셀로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숨기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들려오는 대답이 낯설었다.

"마르셀로 시무아르드. 그대에게 묻겠다."

따지고 보면 그건 대답이 아닌 질문이었다.

누구보다 죽음에 가까운.

시무아르드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났지만.

"살고 싶은가?"

"...!"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던 질문.

.

.

.

모든 건 빌어먹게 피곤한 긍지 때문이었다.

나는 점멸하는 퀘스트창을 바라봤다.

[퀘스트 : 마르셀로의 연구]

마법사의 탑,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

그가 한 차원 진보한 마법에 도달하기 위해.

당신과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마르셀로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성공)

─능력을 증명한다. (성공)

─수석의 무게 (반복) ▼

─기이에 대한 접근 (진행 중) ▼

정확하게는 [마르셀로의 연구] 퀘스트 맨 마지막.

새롭게 떠오른 퀘스트 목표를.

─마르셀로의 유지를 잇는다. (진행 중)

치유학 선임 마법사, 벨리에 유시아.

그녀의 출탑 신청서를 집어들자 퀘스트 목표가 갱신됐다.

덕분에 상황파악은 빨랐다.

시무아르드 가문이 어떤 가문인지는 알 수 없어도.

시한부라는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쯤은 말이지.

그러자 머릿속에 남아있던 의문이 해결됐다.

내가 많은 걸 짊어지진 않았어도, 마르셀로가 짊어지고 있던 수석의 무게를 나눠 든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런데 수고가 무색하게도 마르셀로는 볼 때마다 야위어 갔다.

단순하게 체질을 탓할 수 없을 정도로.

'근데, 그것만으로 알아차리는 게 더 이상한 일이지.'

그 사실을 알고 나니까....

나 왠지 굉장히 못된 놈이 된 것 같다...!

[깨진 차원의 틈]도 모자라서 [마왕성] 균열까지. 시한부를 선고받은 마르셀로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던 내가 아니던가? 게다가 지금 뱉은 말까지도.

"살고 싶은가?"

이게 다짜고짜 할 말이냐고, 진짜.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슴 속의 무거운 긍지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시무아르드 가문 시한부의 저주.

벨리에의 출탑 목적을 보는 순간.

점멸했던 또 하나의 퀘스트.

[퀘스트 : 시무아르드 가문의 의뢰]

마도 가문 시무아르드.

그들은 자신들에게 내려진 시한부의 저주.

그 저주의 근원을 파헤치길 원한다.

─시무아르드 저택을 방문하라. (성공)

─시무아르드 백작 부인과 마주하라. (진행 중)

시무아르드 가문의 의뢰.

퀘스트 목표에 떠있는 '성공'.

그건 내가 수행했던 퀘스트가 아니었다.

말했다시피 난 시무아르드 가문이 뭔지도 모른단 말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악크샨의 의뢰 구조를.

'의뢰를 수행하던 악마 사냥꾼이 전사한 거야.'

악크샨이 존재하던 과거.

의뢰를 수행하던 악마 사냥꾼이 사망하면 다른 악마 사냥꾼이 그 의뢰를 이어서 수행했다.

근데 다들 알다시피 악크샨은 절멸했고, 생존한 악마 사냥꾼은 오직 나 혼자뿐.

'덕분에 자연스럽게 잊혔던 의뢰가....'

내가 시무아르드 가문에 얽힌 비밀을 알게 되면서 떠오르게 된 거겠지. 그래, 이호열의 관점으로 보자면 이건 고민할 게 없는 일이었다.

─마르셀로의 유지를 잇는다. (진행 중)

뭐, 마르셀로의 유지를 이어?

누가?

내가?!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

그럴 능력도 그럴 마음도 내게는 없다!

내가 원하는 건 진짜 수석의 자리가 아니라 공동 연구자의 자격으로 누리는 수석의 권한뿐.

절반만 떠맡은 수석의 업무를 처리하는 데만 하더라도 죽겠단 말이다. 마르셀로 다음엔 내가 과로사로 돌아가시게 생겼단 말이다...!

그다음도 문제였다.

악마를 주적으로 여기게 된 마탑이다. 그런 중대한 상황에서 마르셀로의 공백이 생긴다? 이건 뭐 해보기도 전부터 미래가 뻔히 보이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봐도.

─시무아르드 백작 부인과 마주하라. (진행 중)

[시무아르드 가문의 의뢰].

나에게 떠넘겨진 악크샨의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이 어떻게 봐도 옳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게 '악크샨'의 퀘스트인 이상.

'시무아르드 가문의 저주는 악마와 관련된 확률이 높겠지.'

그래, 고민할 건 없었다.

그러나 말했다시피 빌어먹을 긍지가 문제였다.

긍지가 마르셀로의 입으로 대답을 듣길 원했다.

자신의 긍지만큼이나 타인의 긍지도 중요한 법.

마르셀로, 그의 긍지가 바라는 자신의 최후가 시한부의 저주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나는 잠자코 마르셀로의 유지를 이을 수밖에 없겠지.

'당사자의 의견? 중요하지. 이해할 수 있어.'

그런데 같은 말을 해도 '살고 싶은가?'가 뭐냐고!

혹시라도 마르셀로가 불쾌하진 않았을까?

침묵하는 그를 바라보는데....

어째 마르셀로의 입꼬리는 오히려 올라가 있었다.

"알고 계십니까, 경?"

"무엇을 말인가?"

"그런 질문을 듣는 건 태어나서 처음입니다."

마르셀로가 입이 일그러졌다.

소리 반, 웃음 반 섞인 말을 이었다.

"시무아르드. 제 가문의 저주는 대륙에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제 재능을 시기하는 자는 있었어도, 또 그런 저를 가엾이 바라보는 이는 있었어도...."

뭐, 멀리서 찾을 것도 없었다.

선임 마법사 중에서도 그런 이들이 섞여 있었으니까.

마르셀로가 결국, 참던 웃음을 뱉었다.

"하하, 죄송합니다. 정말 그 질문은 새로워서요."

...웃음이 나올 정도로 골때리는 질문이라는 거구나.

어째 이야기가 잘 풀리지 않을 것 같다.

그러게 모든 게 다 이놈의 입방정 때문에...!

"그래서 찰나의 시간, 고민을 해봤습니다."

...잠깐만.

마르셀로의 말에 나는 주둥이를 두들기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마르셀로의 시선이 말끔하게 정리된 그의 집무실을 훑었다.

"후회는 없습니다. 저는 제 그릇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가문의 내력이 아니었다면.... 저는 절대 지금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겁니다. 수명과 재능을 맞바꿨기에. 이런 자리에서 이런 풍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마르셀로가 쓰게 웃었다.

"...그러니 미련조차 남지 않아야 하는 것이 옳은데."

꾸욱─

"경의 질문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마르셀로가 주먹을 쥐었다.

"...살고 싶다고."

당연하게도 나는 알지 못한다.

마르셀로에게 어떤 미련이 남았는지.

그가 시무아르드의 피를 이은 자로서.

어떤 자세로 시한부 인생을 살아왔는지도.

그러나 충분하다.

"알아들었네, 마르셀로."

"...?"

"그대는 벨리에 선임의 말에 따라 안정을 취하고 있도록."

그랬다.

내가 듣고 싶었던 건 기구한 사연 같은 게 아니다.

살고 싶다는 말, 그 한마디였지.

그와 동시에 퀘스트창이 점멸했다.

─마르셀로의 유지를 잇는다. (보류)

'진행 중'에서 '보류'로 바뀐 퀘스트 상태.

기왕 바뀔 거면 실패로 바뀌지 그랬냐.

이딴 퀘스트를 진행할 생각은 죽어도 없거든.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인 마르셀로를 바라봤다.

정확하게는 그의 주먹을.

입에 달고 살다시피 해서일까.

'이젠 슬쩍 봐도 뭔지 알겠네.'

마르셀로가 주먹에 쥔 건 녹차 티백이었다.

터지는 바람에 바닥으로 떨어진 마른 찻잎.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혹시나 필요하다면 집무실로 찾아오게나."

"...!"

"차를 즐길 때만큼은 시간조차 느릿하게 흐르는 법이니까."

.

.

.

[퀘스트 : 시무아르드 가문의 의뢰]

마도 가문 시무아르드.

그들은 자신들에게 내려진 시한부의 저주.

그 저주의 근원을 파헤치길 원한다.

─시무아르드 저택을 방문하라. (성공)

─시무아르드 백작 부인과 마주하라. (진행 중)

당연하게도 시무아르드 가문은 아르카나 대륙에 있다.

이건 마왕성이나 텟퍼른 미궁처럼 대사건이 아니었으니까.

정기 업데이트로 떠오를 확률은 전무하겠지.

자연스럽게 질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무아르드 가문을 찾아가야 하는가?

현시점에서 현실에서 아르카나 대륙으로 이동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깨진 차원의 틈] 균열, 그 기이의 공간에서 봤던 광경을.

[???]

이름을 알 수 없던 거대한 악마.

녀석은 분명 균열을 무너트리고 모습을 드러냈었다. 그러고는 내가 발현한 [『기이』]에 줄행랑을, 다시금 아르카나 대륙으로 다시 도망을 쳤었지.

그 광경을 보고 깨달았다.

균열은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이 절반씩 섞인 기이의 공간.

현실이 균열과 통해있듯.

분명 아르카나 대륙도 균열과 통해있을 것이라고.

그렇다고 균열에서 아르카나 대륙으로 가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선택해 볼 만한 선택지는 하나 존재하지.

바로 마왕의 전리품.

[만물과 통하는 지도]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누군가 몰래 감춰둔, 누군가 잃어버린, 어딘가에 숨겨진 무언가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또한 단 한 번, 무언가의 위치로 순간이동 할 수 있다.

단, 순간이동 효과 발동 시 모든 효과를 그 즉시 상실한다.]

[설명 : 사용하기에 따라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마도구.]

그랬다.

이게 내가 당당하게 지껄일 수 있었던 이유였다.

누군가는 묻겠지.

아르카나 대륙은 이미 악마들의 소굴이 아니냐고.

설령 아르카나 대륙을 밟게 되더라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냐고. 아니, 애초에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방법은 알고 있냐고.

"나는 가능하다."

언제나처럼 당당한 대답과 함께.

상태창을 띄워 주겠노라.

[칭호 : 최후의 모험가]

◈ 137화. 나를 믿어라 (1)

[최후의 모험가 : 아르카나 대륙에서 사망하지 않습니다. 사망 시, 즉시 현실로 귀환하며 일정 시간 동안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 쿨타임 : 24시간]

[세계수의 씨앗] 퀘스트 성공.

보상으로 개방됐던 칭호 시스템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월드 퀘스트의 보상이지만, 효과를 처음 확인했을 땐 계륵도 이런 계륵이 있나 싶었는데.... 어떻게 그 효과를 써먹을 날이 오긴 오는구나.

'물론, [만물과 통하는 지도]가 유효할 때의 이야기지만.'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확신은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에픽 등급 아이템, 마왕의 전리품이니까.

무엇보다 [깨진 차원의 틈]에서 목격했던 광경이 근거였다.

[???]

이름 모를 악마도 맨손으로 균열에 진입했었는데.

마왕의 전리품을 제물로 바치는데.

그 정도는 가능해야 수지타산이 맞겠지.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래.

간만에 말 한번 잘했다, 호열아.

시간은 제한되어 있었다.

'마르셀로가 한계에 다다른 상태.'

아르나카 대륙 땅을 밟는다라....

내 생각보다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긴 하다만.

절대 미룰 수 없는 일이라는 거겠지.

그러니까 내게 필요한 건 짧은 시간, 만반의 준비였다.

이른바 초심으로 돌아가 발버둥을 쳐야 한다는 거지.

그런 내가 준비할 건 간단했다.

"그대의 출탑 신청서는 보류다."

우선, 절차에 따라서 수석의 업무를 마무리하는 것.

하여튼 이놈의 격식과 절차...!

이럴 시간이 있나, 싶었지만.

내가 하지 않으면 마르셀로가 떠맡게 될 게 뻔한 일이다.

숱한 사회 경험에서 깨닫지 않았던가?

남이 떠넘긴 일을 처리할 때보다 스트레스 받는 게 또 없거든.

되려 마르셀로의 수명을 깎아먹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거지.

"유감이군. 벨리에 유시아 선임."

벨리에의 출탑 신청서를 제쳐둔 이유?

간단하다.

아르카나 대륙엔 나 혼자 갈 수밖에 없었으니까.

'생지옥이 따로 없겠지.'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가동되고, 새로운 세계수의 씨앗이 부화하고, 마왕 압살로 악마들의 활동이 뜸해졌다 하더라도. 아르카나 대륙은 이미 악마 소굴이나 다름없었다.

'마탑의 선임이라고 해도 위험한 장소다.'

마탑이 통째로 옮겨가는 거라면 또 모를까.

"열등한 족속의 영역이라. 당장이라도 짓밟아 주고 싶구나."

항상.

평소처럼 지껄이는 나의 주둥이.

[최후의 모험가] 칭호의 효과가 없었다면 정말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무모한 행동이었겠지.

설령 선임 마법사들의 능력이 내 상상 이상이라서 벨리에에게 악마 따윈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들.

'돌아올 방법이 없어.'

아이템에 명시된 효과.

거기엔 여러 명이 순간이동할 수 있다는 말도.

또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방법도 적혀 있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순간이동 효과가 발동되는 순간, [만물과 통하는 지도]는 모든 효과를 상실한다.

이번만큼은 빽을 아니, 보험을 들고 싶어도 불가능하단 뜻이다.

어쨌든, 만반의 준비를 시작하자.

'일단, 청렴결백이고 뭐고....'

닥치는 대로 본전을 뽑아야 한다!

그랑펠은 몰라도, 아직 무소유 정신을 깨닫지 못한 나는 [만물과 통하는 지도]를 최대한 써먹지 못하면 억울해 돌아가실 것 같았으니까.

'물론, 어디까지나 최우선 목적은.'

[퀘스트 : 시무아르드 가문의 의뢰].

퀘스트에 성공하는 것.

그를 통해 마르셀로의 시한부 저주를 해주하는 것이다.

가능한 일인가.

우려는 되지 않았다.

나는 이 성격을, 그랑펠의 심오하고도 복잡한 긍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였으나 악마에게 그 가문이 몰락.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이하 그랑펠은 그 악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악마 사냥꾼의 길을 걷게 됐다.]

마탑의 희생은 세니오스, 그 하나로 충분하다.

그랑펠의 긍지가 고조되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은 언제나와 같았다.

"두뇌 회전에 앞서 간단한 몸풀기는 도움이 되는 법이지."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

●35KM 달리기 (성공)

●팔굽혀펴기 2,500회 (진행 중)

●턱걸이 1,500회 (성공)

●버피 테스트 700회 (성공)

자, 발버둥 시작이다.

*

부유 정원.

흑색과 녹색.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건 녹색 머리칼, 벨리에였다.

"제 출탑 신청은 보류 처리되었더군요."

잘근─

벨리에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스스로도 출탑 목적이 적합하지 못하다는 것쯤은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호열 수석이라면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해 주실 줄 알았다.

"...해주 방법 따위 모르니까요. 구체적인 목적을 제시할 수 있을 리가 있나요."

시무아르드가(家) 시한부의 저주.

해주가 목적이었지만.

저주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자책할 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시무아르드가라고 시도해 보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벗어날 수 없던 시한부의 저주였으니까.

"그대의 책임이 아닙니다. 벨리에 선임."

흑마도학의 창시자, 마티스.

일부 지역에선 마법이 아닌 저주라고도 불렸던 게 정립 이전의 흑마법이었다.

덕분에 마티스 또한 시무아르드가 시한부의 저주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걸 넘어서 마탑에 입성하기 전, 시무아르드의 혈육과 대면한 적도 있었다.

"그건 마법도 흑마법도 아니었습니다."

적합한 마력에 감응하는 마도구.

마티스는 반지를 매만졌다.

그때 반지의 색은 변하지 않았었다.

그 저주가 흑마법이 아니란 증거였다.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겠죠."

"벨리에 선임의 치유 마법이라면...."

"제 치유 마법이요?"

절레절레─

벨리에는 고개를 저었다.

"그저 숨이 붙어있게 하는 것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 시한부의 저주를 해결하지 않는 이상. 그건 강령술과 다를 바 없을 거예요."

마티스는 찻잔을 바라봤다.

차는 식어버린 지 오래.

잔잔한 찻잔의 수면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

그 순간.

문득, 들려오는 코웃음 치는 소리.

마티스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벨리에가 웃고 있었다.

더없이 쓴 표정으로.

"바보 같아요, 그는. 사실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죠. 마르셀로는 유년 시절부터 한결같았으니까. 곁에서 지켜보면 짜증 날 정도로 미련했어요. 그는."

"마르셀로 수석께서 무서울 정도로 미련하시다니...?"

"마티스 선임께서는 시무아르드가의 연례행사가 무엇인지 알고 계시나요?"

"글쎄요. 연례행사라고 하면...."

매년 벌어지는 일일 터.

마도 가문에서 매년 벌어지는 일이라면....

고민하던 마티스에게 벨리에가 말을 덧붙였다.

"추도식."

"...!"

"시무아르드 가문에선 해마다 혈육들이 사망하니까요."

"이런."

간과하고 말았다.

시한부의 저주는 예외가 없는 혈족 단위의 저주.

해마다 저주의 희생자가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겠지.

마티스가 의아함에 물었다.

"그런데 그것과 미련함이 무슨 연관이 있는 겁니까?"

"저는 그가 슬퍼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

"어린 시절부터 그와 관련된 기억만큼은 하나도 빠짐없이 선명하게 남아있는데 말이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가깝게 지내던 이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마르셀로는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으니까요."

벨리에는 과묵하던 마르셀로가 싫었다.

언젠가 다가올 자신의 차례를 얌전히 기다리는 착한 아이 같아서.

벨리에가 다시금 코웃음을 쳤다.

"보세요. 지금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런 몸으로 무슨 회의를 하겠다는 건지."

크리스탈 홀.

마르셀로는 원탁회의를 진행 중이었다.

그러는 둘은 어째서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쇠약해진 마르셀로의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우려가 되는군.'

마티스는 입안이 말라왔다.

결국, 어떠한 방법도 없단 말인가?

그가 텁텁한 마음에 찻잔에 손을 뻗으려던 순간이었다.

"...?"

또르르─

잔잔한 찻잔 속에 파문이 일었다.

찻잔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점차 커지는 진동.

진동의 근원이 가까워졌다.

"벨리에 님!"

치유학파 숙련 마법사, 클레.

우다다─

다급하게 달려오던 클레가 흠칫했다.

마티스 선임과 대화를 나누고 계셨을 줄이야.

"대화 중에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사과할 것 없네."

"이야기는 끝난 참이었어요. 괜찮답니다, 클레. 무슨 용건이죠?"

"아, 그게!"

치유학파 내부에 급한 사정이라도 생긴 걸까.

남의 사정을 귀담아듣는 건 좋지 않지.

마티스가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아무래도 크리스탈 홀, 원탁회의에 관해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원탁회의?

원탁회의는 현재도 한창 진행 중일 터.

벨리에가 궁금한 마음에 물었다.

"계속 이야기하세요, 클레."

흐읍.

가쁜 숨을 고르고.

이내, 클레가 말을 이었다.

"...뭐라고요?"

그런데 그게 상상도 못 한 말이었다.

"...이호열 수석께서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신다고요?"

벨리에와 마티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마주 봤다.

어떻게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한다는 것일까.

그 방법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유는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설마, 이 수석께서 보류 판정을 내리신 이유가...."

마르셀로와 관련되어 있는 걸까?

짐작만 할 때가 아니었다.

세 사람이 다급히 크리스탈 홀로 향했다.

.

.

.

원탁회의.

나는 크리스탈 홀, 마법사들 앞에서 선언했다.

"나는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할 생각이네."

아주 당당하게 말이지.

마탑을 지켜야 하는 수석의 자리다.

그런데 개인사정으로 자리를 비우게 됐으니.

마탑, 모든 일원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이 적절한 절차.

그랬다.

모든 건 격식과 절차를 중시하는 그랑펠의 긍지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다만, 이 말을 굳이 원탁회의에서 할 필요가 있었을까?

'연차 쓴다고 사원들 앞에서 자랑하는 꼴이잖아. 이거.'

양피지로 주고받아도 충분했거늘.

게다가 난 아직 [만물과 통하는 지도]의 효과가 유효한지도 확인하지 못했단 말이다. 이러다가 아르카나 대륙으로 순간이동할 수 없게 된다면?

'정말, 그때의 뒷수습은 상상하기도 싫군.'

그러나 속내가 드러나는 법은 없었다.

"자리를 비우는 시간은 길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출탑 신청을 비롯한 나와 관련된 요청들은 며칠 동안 자제해 주면 좋겠군. 그대들의 양해를 바란다."

...양해를 바란다니.

그랑펠, 너 이런 말도 할 줄 알았구나?

철들었네, 이거.

새삼스럽게 감탄하기도 잠깐.

나는 흐르는 침묵 속에서 깨달았다.

'...잠깐, 나의 위치를 잊고 있었다.'

문득, 떠오르는 과거.

부장이 사원들에게 양해를 바란다고 말할 땐 분명 지랄맞은 이유가 뒤따랐었지. 그러나 빌어먹을 계급 사회. 까라면 깔 수밖에 없었던 그 경험.

이건 말로만 양해를 구하고 있었지, 사실상 일방적인 선언에 불과했다.

그래, 내가 웬일이냐 싶었다. 긍지 빼면 시체, 꼰대 같은 성격에 양해란 단어를 뱉을 수 있을 리가....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 수석님."

정적을 깬 건 마르셀로였다.

그래도 계급장이 같다는 건가.

마르셀로는 의문이 남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자리를 비우신 기간 동안 업무는 제가 대신...."

아니, 그래선 내가 아르카나 대륙을 찾는 이유가 없어진다.

"거절하지."

"...네? 거절하신다니."

"다시 한번 말하겠다. 나의 공석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말이야.

입이 삐뚤어져도 이렇게까지 삐뚤어질 수 있을까, 싶다.

그냥 복귀해서 처리하겠다는 말을.

이렇게 거창하고 까칠하게 뱉어내다니.

그래도 덕분에 내 의사는 확실하게 전달된 모양이었다.

"알아들었습니다."

마르셀로의 대답에 다시금 흐르는 정적─

그러나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새로운 원탁회의가 시작되고 악마의 존재를, 아르카나 대륙의 현황에 대해 알게 됐던 마탑이었으니까.

웅성웅성─

애써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들려오는 소리들.

"...어떻게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신다는 거야?"

"뭔가 새로운 방법을 발견하신 건가?"

"근데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너무 위험하잖아!"

세계수조차 위협을 느껴 새로이 씨앗을 뿌릴 정도.

절멸의 위기를 맞이한 아르카나 대륙.

나는 그런 생지옥에 진입하겠다고 말한 것이었으니까.

우려를 보내오는 것이 당연하다.

"아무리 이호열 수석님이라고 하셔도...."

소란 속에서 누군가 손을 들어 올렸다.

익숙한 얼굴이군.

순수마력학 선임 뱅그릿 톰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격식을 갖췄군.

역시 뭐든 한번 배울 때 엄하게 배우는 게 효과적이다.

나도 모르게 흡족해서 고개를 끄덕이자 뱅그릿이 말했다.

"수석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누구보다 수석님이 잘 알고 계시겠지만 아르카나 대륙은 현재...."

뱅그릿의 질문에 내게 시선이 집중됐다.

끼익─

심지어는 뒤늦게 크리스탈 홀에 입장한 마티스와 벨리에의 시선까지도. 정말 혼자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한다는 건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건가.

각자 생각들 하는 거겠지.

"말했듯 나는 단신으로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한다."

그러나 그런 나를 불쌍하게 쳐다볼 필요는 또 없다.

그랑펠 말로는 '안배'라고나 할까.

내가 이래 봬도 말이야.

'아르카나 대륙에 든든한 지원군들이 조금 있거든.'

하이엘. 그리고 어둠의 정령.

아르카나의 상공에 날고 있을 드워프들의 비행정.

마지막으로.

악크샨의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까지.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경험치가 축적됩니다.]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명성이 축적됩니다.]

[축적된 경험치와 명성에 대한 습득 권한을 획득합니다.]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축적됐을 경험치와 명성도 잊고 있지 않았단 말이다.

그러니까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할 땐 고독해도, 진입해서는 혼자가 아니었단 뜻이었다.

그러나 이놈의 말버릇.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할 정도로 친절하지 않았으니.

"그러나 그대들이 걱정할 건 없다."

나는 단호하게 덧붙이는 게 전부였다.

"나를 믿어라."

◈ 138화. 나를 믿어라 (2)

오간 안건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원탁회의의 여파는 첫 회차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수석, 선임 마법사가 차례로 크리스탈 홀을 빠져나간 뒤.

남겨진 이들이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대체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숙련 마법사, 지브릴.

화려한 머리 모양에서도 알 수 있듯 지브릴은 매사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이호열 수석의 저건, 자신감을 넘어선 '무언가'였다.

"혼자서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신다?"

위험성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왜, 균열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르카나 대륙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서.

모험가들의 세계 또한 집어삼키기 위해 마수를 뻗쳐오는 악마들이었으니까.

절레절레─

"솔직히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우쭐대기 좋아하는 숙련 마법사, 린느의 어깨가 들썩였다.

"수석님이 대단하신 거야 마탑의 모두가 알고 있지만, 이건 정도를 넘지 않았나 싶은데요? 아르카나 대륙이라니, 균열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위험하잖습니까?"

"린느가 재수 없는 소릴 잘하긴 해도. 반박할 수 없네."

"그렇죠! 제 말이 맞.... 네? 재수 없는 소리라뇨?!"

티격태격.

말싸움 사이에서 지브릴은 턱을 매만졌다.

'위험하다는 걸 모르고 계실 리도 없을 텐데 말이지.'

오히려 자신들보다 아르카나 대륙 상황을 잘 알고 있을 이호열 수석이었다.

그리고 어중간한 실력을 가진 자신들과 다르게, 자신의 능력과 한계 또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을 터.

"!"

그렇다면 역시?

지브릴의 눈이 반짝였다.

"크나큰 위험을 감수할 만큼의 이유가 있다면?"

촌뜨기 귀족은 이래서 안 된다느니.

교양은 어디에 팔아먹은 거냐느니.

유치한 말싸움에 한창이던 린느가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지브릴 양의 말을 놓칠 순 없었다.

"네?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지브릴 양?"

"됐어요. 싸우던 거 계속 하세요. 린느."

"예? 지브릴 양,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이건 싸우는 게 아니라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결투와도 같은...!"

린느의 변명 따위.

흥미를 포착한 지브릴의 귀에 들릴 리 없었으니.

지브릴은 어느샌가 크리스탈 홀 입구.

인파에 치이고 있던 클레를 발견했다.

불쑥.

"깜짝이야! 지브릴?"

지브릴은 클레에게 팔짱을 끼며 은근하게 물었다.

"클레 양. 어떻게 대화에 소득은 좀 있으셨나요?"

이호열 수석의 선언에 뒤늦게 크리스탈 홀을 찾아온 벨리에와 마티스 선임 마법사.

당연하게도 무언가 짐작이 가는 게 있어서 찾아온 게 아니겠는가?

그러나 지브릴과 다르게 클레는 거기까지 머리를 굴리지 않았다.

"소득이요? 진짜, 전 아무것도 몰라요!"

지브릴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그것도 자신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클레가 억울한 목소리로 흐느꼈다.

"아아, 간지러워요! 진짜, 진짜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

.

.

'모르겠어. 갑자기 어째서?'

벨리에는 걸음을 서둘렀다.

무엇이 그리도 급한 것인가.

원탁회의가 끝나자마자 자리를 떠난 이호열 수석.

그를 따라잡기 위해서였다.

격식과 예절.

평상시 약속되지 않는 만남은 절대 가지지 않으신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지금 벨리에에겐 절차를 따질 정신이 없었다.

'분명, 이유가 있으신 거야.'

그 이유가 내가 생각하는 이유가 맞을까?

...맞다면.

벨리에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적어도 나는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수석의 능력을 떠나서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었다.

벨리에는 알고 있었다.

카림제바, 반신이라 불리는 원로 마법사들조차 꼬리를 내린 상위 마왕의 존재를.

상위 마왕의 부활엔 압도적인 제물이 필요하다 했지만, 아르카나 대륙은 이미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아니던가? 제물이야 차고도 넘쳤겠지.

상위 마왕.

혹은 그에 준할 만한 존재가 아르카나 대륙에 나타났을 확률은 충분했다. 아니, 그랬을 테니까 대륙이 악마들의 손아귀에 떨어졌겠지.

'...내가 도움될 거라 생각하진 않아.'

그런 강적이라면 벨리에, 자신이 합류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러나 이건 마음의 문제였다.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이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것.

똑똑.

벨리에가 수석 집무실 문을 두들겼다.

"벨리에 유시아입니다."

비장한 눈빛.

이내, 원탁회의에서 적잖은 소란을 일으키고서는.

시치미라도 떼는 것처럼 평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도 좋다. 벨리에 선임 마법사."

철컥─

벨리에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눈에 들어온 건 여느 때와 다름없는 풍경. 절제된 집무실. 과할 정도로 꼿꼿한 자세로 책상에 앉아있는 호열이었다.

역시나 이호열 수석과 대면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러나 벨리에는 각오했다.

다른 것도 아닌 마르셀로와 관련된 일이기에.

"약속드리지 않고 수석님을 찾은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그 사과를 받아들이겠네."

"또한 결례를 범하기 위해 찾아온 것에 대해서도 미리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이호열 수석, 수석께 드리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고개를 들어 올리는 호열.

벨리에는 호열과 마주했다.

일희일비.

감정 하나조차 내비치지 않는 얼굴.

그 얼굴과 직면하고 있자니 의문은 더욱 커졌다.

'정말 내 출탑 신청서 때문에....'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시는 것일까?

아무것도 몰랐을 땐 어림도 없는 소리라고 여겼겠지.

그러나 벨리에는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었다.

-"세니오스 원로 마법사...."

누구보다 진지하게 세니오스를 애도하던 호열을.

찰나지만 그 내면을 언뜻이나마 목격했으니까.

벨리에는 용건을 끝마칠 수 있었다.

"저는 수석께서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시려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자신의 출탑 신청서를 보류 처리한 호열이었다.

누구보다 질문의 의도를 잘 알고 있겠지.

벨리에의 예상은 적중했다.

달칵─

"...?"

곧장 뒤따라 들어왔다고 생각했거늘.

찰나의 틈에 언제 손에 찻잔을 쥔 것일까.

찻잔을 내려놓은 호열이 대답했다.

대답은 더없이 명쾌했다.

"시무아르드 가문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

단지 산이 그곳에 있기에 산에 오른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

.

.

다른 사람은 몰라도 벨리에에겐 이유를 말해줄 필요가 있다.

벨리에의 출탑 신청서가 아니었다면 마르셀로가 시한부의 저주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도.

그와 관련된 퀘스트도 수행할 수 없었을 테니까.

"시무아르드 가문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나 삐뚤어진 입이 문제다, 정말.

멀쩡해도 삐뚤어지게 말하는 주둥이가 결국 일을 냈군.

다시금 다짐한다.

이 세상에 편식해서 읽을 책은 없다고 해도.

'...명언집만큼은 절대 들춰보지 말자.'

어쨌든, 찾아와 준 덕분에 수고를 덜었다.

벨리에에겐 여러모로 물을 게 있으니까.

마르셀로의 현재 상태는 물론, [시무아르드 가문의 의뢰] 퀘스트에 관해서도 정보가 필요했으니까. 그런데 어째 벨리에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하하."

작게 내뱉는 웃음.

설마, 나의 얄팍한 명언 인용을 알아차린 건가?

제 발에 저리기도 잠깐.

"...죄송하게도 또 한 가지 사과드려야겠습니다."

"?"

"멋대로 미리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무어라 추궁할 새도 없었다.

벨리에가 비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호열 수석님. 저도 아르카나 대륙에 함께 진입하겠습니다."

마르셀로와 벨리에.

두 사람의 관계에 관해선 알고 있지도, 알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벨리에가 마르셀로를 진심으로 우려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출탑 신청서를 제출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그래. 같이 가서 나쁠 건 없어.'

나도, 벨리에도 마음에 남는 거 없고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말했다시피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말이다.

그렇다고 벨리에에게 아이템의 효과와 칭호에 관해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

"유감이지만 요청은 거절하겠네."

"이호열 수석님, 저는...!"

"그대의 심정은 짐작할 수 있네, 벨리에 선임."

그러니까 또 한 번 나답게 지껄일 수밖에.

"그럼에도 나를 신뢰하게."

물론, 꼭 동행하는 게 아니더라도 벨리에의 도움은 필요하다.

"그리고 나 또한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게 있네."

"...답변하겠습니다."

"내겐 시무아르드가의 정보가 필요하네. 정확한 위치를 비롯해 대략적인 가문의 구성원까지. 보다 구체적으로는 시무아르드 백작 부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군."

"...!"

내가 묻자 벨리에는 그제야 낙담해서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알고 있던 시무아르드가, 시한부의 저주에 관한 정보를 늘어놓았다.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야 벨리에는 자각한 모양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가까웠던 사이라고는 하나, 저도 착각하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당사자에게 묻는 게 가장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에 관해선 나보다 긍지가 먼저 반응했었다.

마르셀로 시무아르드.

그의 가문에 관한 정보를.

제삼자를 통해 얻어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평상시엔 결코 긍지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

그러나 악마가 관련된 이상.

이조차도 악마의 계략일 수 있었다.

악마는 그런 족속이었으니까.

'시한부의 저주가 악마와 관련된 게 사실이라면.'

마르셀로가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어떻게 될까? 그땐 악마를 향한 마르셀로의 고요한 분노가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될 수도 있을 터.

'그런 건 나도 말릴 자신이 없거든.'

막말로 마르셀로가 마도구를 들고 악마를 전멸시키겠다고 나선다면 말릴 수 있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게다가 그런 부정적인 감정은 결국 악마의 힘이 된다.

그런 복잡한 이유를 나는 한마디로 함축해서 말했다.

"아니."

"...?"

"그에게 격한 감정변화는 좋지 않다."

순간, 벨리에의 동공이 움찔거렸다.

마티스도 그렇고.

역시 선임 마법사쯤 되면 말이 잘 통한다.

아, 벤쉬 윌리엄 한 명만 빼고.

그의 출탑 신청서는 스팸 메시지보다 귀찮으니까.

흐르는 정적─

벨리에가 짧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이유도, 그렇게 생각하신 뜻도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이 이번에는 나를 향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짐을 혼자 짊어지시는 건...!"

"우려할 것 없다."

아니, 걱정할 게 없다니까 그러네?

나한테는 [최후의 모험가] 칭호 효과가 있단 말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나 나답게 말할 수밖에 없었으니.

"본래 살아가는 건 고독 속에서 헤엄치는 것이다."

...부디 흑역사를 그럴싸하게 포장하지 마라, 그랑펠.

그 흑역사 속에서 헤엄쳐 살아가는 내가 가엾지도 않은 거냐?

.

.

.

나는 악룡 사냥꾼, 이호열과 대화를 원한다.

간만에 모습을 드러낸 스칼의 폭탄선언.

당연하게도 세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비공식 랭킹 1위, 이호열.

공식 랭킹 1위, 스칼의 만남이 성사되는 것인가?

누구보다 촉각을 곤두세운 건 랭커들이었다.

"뭔가 얽힌 게 있는 거 같지 않아?"

"악룡 사냥꾼. 애초에 스칼, 그 자식은 그게 악룡이란 걸 어떻게 안 걸까? 미궁에 파묻혀 있어서 도마뱀인지, 드래곤인지조차 알 수 없었잖아?"

"스칼의 클래스를 생각하면. 역시 용기사 [클래스 퀘스트]와 관련됐을 확률이 높겠지."

샤이닝.

록스, 카밀라, 드미트리는 간만에 건설적인 대화를 나눴다.

이호열과 스칼의 회동. 그것이 가지는 무게를 알고 있었으니까.

드미트리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스칼의 클래스 퀘스트라니. 듣던 중 소름 돋는 소리네."

히든 클래스, 용기사.

게다가 신비주의를 고집하던 스칼 덕분에 클래스의 능력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용기사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어디 보자. 옛날 생각나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카밀라는 활시위로 스칼을 겨눈 적이 있었다.

딱히 원한이 있던 건 아니고.

퀘스트에 얽혀서 어쩔 수 없던 상황이었지.

당시 스칼이 타고 있던 건 용도 아닌 평범한 준마였다.

"근데 한 발도 안 맞았다니까? 나 열 받아서 죽는 줄 리얼."

쏟아지는 무수한 화살, 마법을 회피하고 전장을 호령하던 스칼.

그 광경을 지켜보던 샤이닝은 결론을 내렸었다.

스칼, 그가 진짜 드래곤을 부리는 [용기사]로 거듭난다면 아르카나에 그와 대적할 수 있는 플레이어. 아니, 길드는 없을 것이라고.

드미트리가 억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귀하디귀한 히든 클래스시니까! 엄청난 잠재력? 이해할 수 있어. 게다가 말이 용기사지. 제로 산맥 꼭대기에 있을 드래곤을 어떻게 타고 다닐 수 있겠냐고. 솔직하게 뒤에서 비웃은 적도 있었어. 근데...!"

이호열.

스칼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온 순간.

드미트리는 얼어붙고 말았다.

"이호열이라면 또 모르는 거잖아! 스칼이나 우리가 드래곤을 사냥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번에 이호열이 텟퍼른 미궁에서 보여준 활약을 보라고! 뭐랬지? 한없이 깊은 어둠 속 한 줄기 빛?!"

웬만하면 드미트리에게 딴죽을 걸었을 카밀라.

그러나 카밀라도 이번만큼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웃으며 넘어갈 일이 아니었으니까.

"만약에 말이야. 호열 씨가 스칼하고 협력한다면?"

"야, 진짜 그런 끔찍한 소리...!"

"그래서 스칼이 반쪽짜리 용기사에서 탈출하게 된다면?"

"와씨. 듣기만 해도 피곤해."

"드미트리 넌 됐고. 록스, 넌 어떻게 생각해?"

침묵하던 록스가 입을 열었다.

"용기사. 포텐은 [대마법사]에 버금가겠지."

"...!"

"록스, 그거 뒤끝?"

대마법사.

그건 제시의 클래스였다.

이젠 샤이닝이란 둥지를 떠난 제시 하인네스 말이다.

"뒤끝이 아니라 냉정한 주제 파악이랄까."

제시가 남아있었다면 딱히 걱정하지 않았겠지.

그러나 이젠 입장이 바뀌었다.

록스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우리도 상황을 주시하는 수밖에 없어."

세간이 집중하는 것 그 이상으로.

.

.

.

그러나 랭커라고 입장이 전부 같은 건 아니었다.

남태민.

레오니.

히사기.

거대 연합의 세 길드 마스터들.

그 셋은 스칼의 선언을 듣자마자 생각했다.

일단, 레오니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저, 미친놈 보소?!"

이호열이 제일 싫어하는 거?

예의 없는 거.

그런데 매스컴 앞에서 호열의 이름을 언급하다니.

스칼, 저거 아무래도 은둔생활을 하다 보니까 감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악룡 사냥꾼? 호열과 만나고 싶다고? 뭘 원해서 그러는지는 모르겠다만.

"저 자식. 저거 이번 생에는 글렀다."

나는 말이야.

차 한 잔 얻어먹기 위해서 개고생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보다 더한 협조를 요청하는 사람의 태도가 그게 맞나?

"쯧쯧."

혀를 차는 레오니.

그 옆에서 히사기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니 씨 말이 맞습니다. 잘못 생각했군요, 스칼은."

히사기를 비롯한 이나즈마의 길드원들.

그들에겐 경험이 있었다.

유스라 왕국에서 호열에게 문전박대를 당할 뻔했던 경험이.

그러니까 예절 교육의 선배로서 할 말이 있었다.

"자고로 대화를 나누기 이전에 공손히 머리부터 숙이는 것이 절차인데 말입니다."

"...말은 잘하네."

내 평생, 히사기의 말에 긍정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남태민의 생각도 두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무슨 용건이 있어서 호열 씨를 찾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그쪽, 큰 실수를 한 것 같은데?"

.

.

.

그랬다.

세 사람의 예측은 정확했다.

이내, 마탑 포탈에 모습을 드러낸 호열.

호열에게 몰려드는 무수한 인파.

꼴깍─

당장이라도 카메라를, 마이크를 들이대고 싶어 안달이 난 듯한 취재진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호열의 앞이었다.

마른침을 삼키고, 격식에 따라 차례를 지켜가며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네는 기자들.

"플레이어 스칼 씨의 선언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스칼 씨가 악룡 사냥꾼이란 호칭으로...."

"혹시 깨워선 안 될 존재가 드래곤이란 사실을...."

호열은 잠자코 질문을 들었다.

그러나 이상의 친절은 없었다.

수많은 질문 끝.

호열이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는 방해로 간주하겠다."

"...!!!"

.

.

.

그렇지 않아도 신경 쓸 게 많단 말이다.

그런데, 뭐?

악룡 사냥꾼? 그걸 동네방네 소문을 냈어?!

아무래도 우리 인연은 시작도 전에 끝인 것 같다, 스칼.

나는 여느 때보다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비켜주지 않겠나? 내게 낭비할 시간은 없으니."

◈ 139화. 아르카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