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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화. 늪에서 피어나는 (7)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착용 시, 아르카나 대륙의 모든 광물과 모든 식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다.]

[설명 : 헤아릴 수 없이 방대한 지식이 담긴 마도구.]

모든 광물에 관한 지식이 말했다.

저건 바위가 아니다.

모든 식물에 관한 지식도 말했다.

저건 씨앗, 그것도 세계수의 씨앗이라고.

그래, 세계수는 숲의 정령 님프조차 알지 못하는 존재.

만약, 서적 따위에 세계수에 관한 글귀가 적혀있었더라면.

나는 그 정보를 쉽게 신뢰할 수 없었겠지.

그러나 에픽 아이템이 괜히 에픽이 아니란 말씀이시다.

'아이템 효과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거든.'

전리품은 바위 따위가 아니었다.

세계수의 씨앗이었다.

그 진실을 알게 된 나의 첫마디.

"진정으로 대륙 절멸의 위기가 도래한 모양이로군."

님프가 정중하게 되물어왔다.

"호열 님. 그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부족한 저로서는...."

모르는 게 당연하지.

나도 아이템 효과가 아니었다면 짐작조차 못 했을걸?

설령 세계수가 아르카나 대륙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 세계수가 이렇게 씨앗을 뿌릴 줄 누가 알았겠어?

"네가 부족한 게 아니다."

물론,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세계수가 씨앗을 뿌린다는 것.

세계수, 자신이 크나큰 위협을 받고 있다는 뜻.

당연하게도 그 위협은 악마를 말하는 거겠지.

'이 지식은 얼마 전까지 악마의 지식이었다.'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은 악마의 아이템.

그것도 마왕, 데카라비아에게서 획득한 아이템이었다.

데카라비아, 녀석도 지금의 나처럼 모든 광물과 식물에 관한 아이템을 가지고 있었을 테니까. 세계수에 관한 정보 또한 알고 있었을 터.

'그 정보를 활용해 세계수에 위협을 가한 건가?'

물론, 구체적인 사연까지야.

내가 알 길은 없다.

과거의 아르카나 대륙에서 벌어진 일이다.

현실의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어?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내가 할 일은 간단하다.

[월드 퀘스트 : 세계수의 씨앗]

도래한 아르카나 대륙 절멸의 위기.

거대한 위기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싹 틔워라.

─세계수의 씨앗을 발아하라. (진행 중)

●현재 발견한 세계수의 씨앗 1개 / 알 수 없음

●현재 싹 틔운 세계수의 씨앗 0개 / 알 수 없음

떠오른 퀘스트.

그것도 월드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것.

문득, 플레이어들의 호들갑이 떠올랐다.

모든 플레이어들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건 월드급 퀘스트가 분명하다.

누군지는 몰라도 월드급 퀘스트를 성공한 게 분명하다.

다들 그렇다고들 하니까.

나도 그런 줄만 알았지.

그런데 떠오른 퀘스트창을 보고 있자니 깨닫게 된다.

진짜 월드급 퀘스트는 따로 있었다고!

그 스케일부터 정말 월드급이시다.

스토리만 따져봐도 어떠한가?

대륙의 어머니라 불리는 세계수가 위기에 빠졌고, 그런 월드급의 위기에서 새로운 희망인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워야 한단다!

말했다시피 주제 파악 하나만큼은 기가 막힌 나였다.

'...뭔가 일러도 한참 이른 것 같지 않아?'

이런 월드급 퀘스트를 감당하는 나의 레벨은 고작 324레벨.

세계수도 한탄하지 않을까.

뭐 이런 뉴비가 자신의 씨앗을 싹 틔우게 됐냐면서.

그래, 일반적인 상황을 생각해 보자.

'저게 세계수의 씨앗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퀘스트가 떠올랐으니까. 세계수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바로 퀘스트의 시작 조건이겠지.'

...잠깐, 그 시작 조건부터 말이 안 되잖아?!

말했다시피.

숲의 정령 님프조차 세계수에 관해서는 무지했다.

마탑이라고 다를까.

그동안 수많은 마법 서적을 읽어온 나였거늘.

세계수란 단어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단 말이다.

그런데 플레이어가.

베일에 싸인 세계수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면?

못해도 1,000레벨은 찍어야 하지 않을까.

진심으로.

그러니까 한 줄로 요약하자면.

나는 정상적인 퀘스트 진행을 벗어났단 소리였다.

마왕 데카라비아를 쓰러트리고.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을 손에 넣은 덕분에.

그 엄청난 중간 과정을 건너뛰고.

월드급 퀘스트를 시작할 수 있던 게 분명했다...!

이거, 부담스러운 게 이상한 게 아니었잖아?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면 걱정하는 게 당연하다.

내가 이런 월드 퀘스트를 성공할 그릇이 되나, 고뇌하면서.

그러나.

내가 언제부터 정상적인 사고와 행동을 해왔던가.

거악 칠죄종 탐욕.

마왕 데카라비아.

마탑 악마 숭배자 원로 마법사들.

300레벨도 아니었다.

100, 200레벨에 불과할 때도.

그저 긍지가 이끄는 대로 행동했던 나였단 말이다.

그렇기에 알 수 있다.

설령 그 긍지에 가라앉아 익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단 사실을.

게다가.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나는 아르카나 대륙을 목격했다.

그것도 악마에게 짓밟히고 있는 아르카나 대륙을.

악마들이 세계수의 씨앗이 싹틀 때까지 보고만 있을 확률?

심지어 마왕 데카라비아가 존재했던 이상.

일말의 가능성조차 기대할 수 없겠지.

그러니까 나는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또한 그대의 긍지를 가벼이 여길 수 없겠지. 세계수여."

나의 읊조림에 님프가 동요했다.

"세계수라 하시면.... 설마, 씨앗이라는 게?"

내 말투가 오글거려서 동요한 게 아니라 다행이군.

어쨌거나.

님프도 모든 걸 알아차린 눈치였다.

"비로소 이해가 됩니다. 어째서 저 많은 이들이 바위를, 씨앗을 탐을 냈는지를요. 본능이겠지요. 세계수의 씨앗에는 감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기운이 담겨있을 테니까요."

세계수가 실존하는 것이었다니....

님프는 말꼬리를 흐렸다.

계약자, 나의 영향으로 그 고고한 자태가 흔들리지 않던 님프였거늘.

그래서 저 거대한 세계수의 씨앗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심히 우려하는 눈치였다.

'한 마디로 나와 같은 심정이라는 거지.'

그랑펠의 긍지만 하더라도 충분히 벅차건만.

세계수의 긍지까지 떠안게 되다니.

그러나 내겐 님프와 같은 망설임은 없었다.

"준비하거라. 님프."

나는 주제 파악을 잘한다.

내가 또 발버둥 치기라면 자신이 있다는 말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긍지 때문에 가라앉지 않을 자신은 있다는 말.

"씨앗을 싹 틔우기 위해선 너의 축복이 필요하다."

대단하신 세계수라고 해도 결국, 식물이었다.

식물이었기에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으로 그에 관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던 것처럼.

식물의 성장을 촉진하는 님프의 축복의 효과 또한 유효하겠지.

"제가 세계수의 씨앗에 축복을...?"

역시나 님프는 사뭇 당황한 모양.

그러나 이내 담담한 음성으로 답했다.

"저 혼자였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호열 님이 계시니 시도해 보겠습니다."

그래.

축복이 효과가 있든 없든 발버둥 쳐봐야지.

물론, 그 이전에.

"소란을 잠재울 필요가 있겠구나."

포식자의 늪지대.

그중에서도 가장 싸움이 치열한 중심부.

무지막지한 포식자들의 방해를 뚫고 세계수의 씨앗에 다가가는 것부터가 문제였지만.

'여유가 없겠는데.'

나는 냉정하게 머리를 굴렸다.

비약초도 아니고 세계수의 씨앗에 축복을 내리는 일이었다.

'그 반동이 님프는 물론, 계약자인 나한테도 찾아올 거야.'

당장 마력 탈진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거겠지.

주제 파악 하나는 기가 막히기에.

마력 탈진에 대비해 검술, 흑마법, 살 구멍을 파놓은 나였지만....

그 상대가 상대들이어야 말이지.

'[천적관계]가 발동 중이라면 모를까.'

아니라면 한 마리를 상대하기도 벅찬 게 사실이다.

"...!"

그러나 몬스터들만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이곳엔 플레이어가 있었으니까.

그중에서도 아는 얼굴들이....

아니, 그렇게 말하기엔 섭섭한 인연들이 보였다.

"모든 것엔 주고받음이 있는 법."

그래, 슬슬 다시 내가 받을 차례가 됐지?

'나, 정말 철판을. 그것도 몇 겹으로 깔았구나.'

그 아는 얼굴들, 인연들이 어디 보통 인물들이란 말인가?

기본적으로 전부 랭커이자 최상위권 길드 마스터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잘도 지껄인 것이다.

"협조가 필요하다."

도움도 아니고 협조가 필요하다고!

그러나 이제 와서 겸손을 떨기에는.

'하긴 나, 마탑 선임 마법사들도 마음대로 소집해 봤었지.'

유감스럽게도.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경험했다....

*

포식자의 늪지대 중심부에 도달.

가장 먼저 시야에 보인 건 거대한 바위.

그리고 그런 바위를 둘러싸고 전투를 벌이는 몬스터들까지.

"!"

그러나 그 어느 것보다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건 따로 있었으니.

바로 늪지대 위에 꼿꼿하게 서 있는 호열이었다.

"호열 씨, 하다 하다가 이젠 물 위를 걸으시는 거야?"

정말 호멘, 호멘하더니...?

경악하는 남태민에게 가온의 길드원들이 말했다.

"태민이 형. 자세히 봐요. 연잎 위에 타고 계시잖아요."

"아, 그러네? 그런데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잠깐만요. 저 옆에 저게 그 정령인가?!"

과연, 그 자태가 호열의 정령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척보면 척이라고.

들려온 이야기대로.

최소 상위, 최대 정령왕급 정령이 분명해 보였다.

"오히려 다행 아닌가?"

"...?"

"내가 볼 땐 언니랑 별 차이 안 나는데?"

뭐가 별 차이가 안 난다는 거야.

'...뭐, 얼굴이?'

레오니가 고개를 들자 손가락으로 키를 가늠하고 있는 미친 것들이 보였다. ...됐다, 말할 기운도 없었다. 레오니는 대답 대신 발을 밟았다.

콰직!

"아아, 언니!! 장난이잖아. 장난."

그때였다.

호열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협조가 필요하다."

"...!!!"

고위 스킬, [텔레파시].

호열의 목소리가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들려온 것이다.

레오니는 순간 흠칫했다.

'너, 너무 가깝잖아. 갑자기?!'

텔레파시라는 것을 알면서도.

호열과 이런 거리감은 낯설었다.

'...레오니. 너, 이거 망상이야.'

그러나 레오니는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협조가 필요하다고?'

어떤 협조를 원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건 호열에게 진 빚을 갚을 기회였다!

그래, 이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개인의 감정을 떠나서.

'...그렇다고 딱히 감정이 있다는 건 아닌데.'

그래, 그 뭐냐!

차 한잔 얻어먹는 걸 떠나서!

호열에게 진 빚은 길드 차원의 문제였으니까!

버서커 길드의 마스터로서도.

당연하게 호열의 협조 요청에 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레오니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주쳤다.

"어, 너도?"

"...뭐냐? 그 안 어울리는 조합은."

"글쎄요."

남태민.

히사기 카즈마.

그리고 가온과 이나즈마 길드원 전원과.

'가온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가온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호열에게 진 빚이 있었으니까.

또 남태민은 호열과 같은 국적, 친분이 있어 보였으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근데 이나즈마랑 히사기 카즈마는 또 뭔데?'

가온과 이나즈마?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조합이었다.

당사자 중 하나인 레오니가 봐도 그랬는데.

지켜보는 제삼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스튜디오.

"이게 뭔가요...?"

떠오른 화면에 눈을 끔뻑거리는 출연진들.

그 얼굴을 잘못 봤나 싶어서.

진행자는 천천히 그들의 인상착의를 읊어본다.

"보기만 해도 든든한 체구. 우리 대한민국의 남태민 플레이어가 맞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최근 들어 가온과 접점이 많은 버서커의 레오니 카셀이 맞고요. 그리고...."

아무리 눈을 씻고 다시 봐도 확실하다.

"들고 있는 창. 그리고 날카로운 인상으로 봤을 때는.... 확실하게 이나즈마의 길드 마스터, 히사기 카즈마로 보입니다!"

이나즈마의 히사기 카즈마다.

그냥 이름을 말하는데 무슨 뜸을 그렇게 들이는가?

누군가 묻는다면.

가온과 이나즈마 사이에 지긋지긋한 악연부터 꺼내야겠지.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부터 대격변 이후까지.

두 길드, 두 길드 마스터는 충돌하지 않은 날이 더 적을 정도로 서로만 보면 으르렁거렸으니까. 그러니까 떠오른 화면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불화가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습니다?"

가온, 이나즈마, 그리고 버서커.

세 길드가 한데 모여있었다.

이 순간도 전투가 끊이지 않는 포식자 구역에서.

신경전이 아니라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가, 가온과 이나즈마가 손을 잡았단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보입니다. 거기에 버서커 길드까지요!"

"마땅한 이유 없이는 힘을 합칠 길드들이 아닙니다. 각자가 아쉬울 게 없는 대형 길드지 않습니까? 더욱이 가온과 이나즈마. 두 길드 사이의 갈등을 생각하면 이건 있을 수 없는...!!"

"아, 잠시만요. 말씀드리는 순간, 이호열 플레이어가 모습을 드러낸 것 같습니다! 은발, 구두에 정장, 그리고 정령까지. 인상착의가 이호열 플레이어가 확실합니다!"

"이호열? 잠깐만요, 그렇다면 설마? 가온, 이나즈마, 버서커 길드가 손을 잡은 이유가...?"

그랬다.

이내, 설마가 사람 잡는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 91화. 늪에서 피어나는 (8)

"세계수의 씨앗을 발아하기 위함이다."

"...!!!"

무엇 하나 숨길 것이 없다는 당당함.

호열의 말에 길드 마스터들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그나마 대답할 수 있던 건.

호열과 함께하며 그 충격적인 행보에 조금은 내성이 생긴 남태민이었다.

"호열 씨. 그 진도가 너무 빨라서 그러는데.... 혹시 세계수의 씨앗이라는 게 이거, 이 거대한 바위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다. 바위가 아닌 세계수의 씨앗이다."

"세계수라니...."

호열이 거짓말을 한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것을 알고 있지만.

갑자기 세계수가 튀어나올 줄이야.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게 당연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외형만큼이나 고고한 목소리.

정령의 목소리에 남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열 씨가 그러시다면 맞겠죠. 저는 믿습니다."

남태민이 믿고 말고 자시고.

레오니의 머릿속은 혼란했다.

'...이런 걸 막, 말해줘도 되는 거야?'

대격변 이전에도 이후에도.

아르카나에 관한 정보는 곧 힘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세계수란 단어를.

본인의 입으로 꺼낼 줄이야.

따지고 보면 남인 자신들에게 사실을 그대로 말한 것이었다.

생각보다는 행동이 먼저.

그런 행동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걸 질색하는 레오니였지만....

'그래도 생판 남은 아니라는 건가?'

흠칫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히사기의 생각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두 사람보다 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숨기려고 하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었다.

아니, 자신이었으면 무조건 숨겼을 것이다.

세계수의 씨앗이라니.

듣기만 해도 엄청난 보상이 얽혀있다는 것쯤이야.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직감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호열은 당연하다는 듯 진실을 말했다.

'가온과 버서커는 몰라도. 우리에게까지.'

홋카이도에서도, 유스라 왕국에서도 느꼈거늘.

고민해 봤자 어찌 호열의 뜻을 헤아릴 수 있을까?

히사기는 그저 다짐할 뿐이었다.

"그 협조가 무엇이 됐든 이나즈나는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남태민과 레오니.

두 사람은 대답할 것도 없다는 듯.

호열의 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호열에겐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워야 하기 위해선."

하기 위해선...!

"상당한 집중력을 요하는 바."

그래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걸까?

호열의 말에 경청하면서도.

세 사람은 나름대로 아르카나의 경험을 활용해 머리를 굴려봤다.

일반적인 흐름이라면, 일단 조사부터 시작해야 하겠지.

거대한 씨앗을 살피는 데만 해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릴 터.

'싸움이 길어질 것 같은데.'

'만반의 준비를 한 보람이 있군.'

'여차하면 아예 진지를 구축하는 것도....'

그런데.

"잠시나마 소란을 잠재워 줄 수 있겠나?"

...잠시나마라니?

호열의 말에 세 사람의 얼굴이 이번에도 역시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건 저 거대한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우는 데에도 잠깐이면 충분하다는 소리였으니까.

'나는 세계수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는데...!'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는 거야?'

'과연, 호열 씨다.'

어떤 의미인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호열의 선언.

그에 대한 반응은 각기 달랐거늘.

이 순간, 세 길드 마스터의 행동은 똑같았다.

세계수의 씨앗.

전리품에 가까워진 지금.

호열과 세 길드는 공공의 적이 된 셈.

"온다!"

그래, 달려드는 포식자들과 전투를.

아니, 호열의 요청대로 협조를.

소란을 잠재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맹독뿔 코뿔소 : Lv.530]

[누더기 맹수 : Lv.550]

[뼈 무덤 지기 골렘 : Lv.600]....

몰려드는 몬스터들의 레벨을 고려했을 때.

하나의 길드였다면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겠지.

길드 랭킹 4위, 보헤미안만 하더라도 고작 두 마리의 몬스터를 상대하다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니까. 그러나 하나의 길드가 아니었다.

"좋아. 질척거릴 때처럼만 하면 되겠네. 전문이잖아?"

게다가 가온과 이나즈마.

서로 자웅을 겨뤄온 만큼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두 길드였다.

길드 마스터는 물론, 길드원들끼리도.

서로의 장점과 약점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두 길드가 처음으로 합을 맞췄다?

그 합이 처음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사롭지 않았다.

지켜보던 광전사의 광기에 불이 붙을 정도로.

콱─!

날아드는 화살을 맨손으로 낚아챈 뒤.

쌔애애액─!

푸욱─!

괴력을 발휘, 되려 맨손으로 화살을 투척하는 남태민.

서걱─!

말 그대로 살을 내주고.

서걱서걱─!

뼈를 잘라버리는 레오니.

바바리안과 광전사.

남태민과 레오니가 맹렬하게 전장을 휘젓는다면.

히사기는 창으로 전투의 속도를 능숙하게 조율했다.

정말, 처음으로 호흡을 맞춰보는 게 맞단 말인가?

지켜보던 이들도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저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굉장한 호흡입니다. 십여 마리에 가까운 몬스터들을 상대로 밀리지 않고 있습니다."

"가온과 이나즈마야 샤이닝과 천하통일을 제외하면 최고라 꼽히는 길드들이 아니겠습니까? 그 명성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어요!"

"버서커도 만만치 않습니다. 길드 랭킹은 두 길드보다 뒤처지지만 광전사라 불리는 만큼. 전장에서의 기세만큼은 두 길드에 조금도 밀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포식자 구역 균열.

싸움이 끊이지 않는 만큼.

많은 볼거리가 있으리라 생각은 했건만.

-내 평생 가온이랑 이나즈마가 한 팀 먹는 걸 볼 줄이야ㅋㅋ

-만우절에 해도 욕 처먹을 농담이 현실이 됐네ㄷㄷ

-랭커들이 괜히 랭커가 아니긴 하네 ㄹㅇ

-몹이랑 렙차 꽤 나는데도 안 밀리네

정말 한시도 예측할 수 없는 전개가 쏟아졌다.

당연하게도 그 지분의 대다수는 호열에게 있었다.

연잎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심상치 않은 등장부터.

숨겼던 비수처럼 드러냈던 검술.

정령과 계약을 맺은 것도 모자라서.

가온, 이나즈마, 버서커를 연합하게 하다니.

그 사실을 알기에.

지켜보는 이들은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플레이어 커뮤니티는 물론.

-걍 정령 계약이 목적인 줄 알았는데

-아니 그게 목적이었으면 바로 균열 나갔겠지ㅋㅋ;;

-하긴 경험치나 드롭율 버프가 의미 없음 이호열한텐

VBC 스튜디오.

"이호열 플레이어에겐 더 큰 목적이 있을 겁니다."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 말씀이시군요!"

"맞습니다! 길드를 규합한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겁니다!"

아니, 전 세계가 호열에게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손에 땀을 쥐며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PD 현용석.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방송일을 하면서 느끼는 건데 말이야."

"네?"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하더라고. 자극이 큰 재미나 스릴을 줘버리면 거기에 적응을 해버리는 거야. 드라마 쪽만 봐도 알잖아? 웰메이드라고 칭송받아도 정작 막장 드라마보다 시청률 안 나오는 거."

"그거야 그렇죠?"

"그런데 그 막장의 수위에도 적응한다는 거지."

"듣고 보니까 그것도 그렇네요? 이젠 태생의 비밀은 기본에다가 불륜에 범죄에 배다른 남매에.... 여튼 엄청난 설정들을 달고 나오니까요."

"그래. 잘 알고 있네. 그러니까 나는 걱정이 된단 거야."

"걱정이요? 갑자기 방송국 걱정하시는 거예요?"

어리둥절한 조연출의 반응에 현용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호열."

지금까지 보여준 게 워낙 많으니까.

이제 호열은 웬만해선 대중들을 만족시킬 수 없겠지.

왜, 지금만 하더라도 그랬다.

'나였으면 부담스러워서 숨도 제대로 못 쉬었을 거야.'

호열의 생각을 알 순 없지만.

현용석은 머리를 굴려봤다.

'마법도 모자라 수준급의 검술. 정령의 존재를 증명한 것도 모자라서 최소 상위급 정령과 계약을 맺었다.

게다가 가온과 이나즈마, 버서커가 서로 연합하게 만들었지.'

그것만 하더라도 며칠은.

아니, 몇 주는 떠들어 댈 수 있는 활약이었다.

그러나 보다시피 인간이란 간사한 생물이라서.

또 다시 기대하고 있지 않은가?

'이호열이라면 더 대단한 걸 보여줄 거라고 말이야.'

그러나 현용석은 냉정하게 생각했다.

투데이 아르카나를 연출하며 보는 눈이 생겼단 것이다.

'이번엔 보여준 게 워낙 많다.'

그 활약들을 뛰어넘을 활약은.

제아무리 이호열이라고 한들 보여주기 힘들 것이다.

현용석은 생각했다.

'물론, 그것조차 잘 포장하는 게 연출자의 역할이지.'

하지만 착각이었다.

"...서, 선배! 저거 봐요!"

"으, 응? 왜?"

"아니, 이호열 봐요!"

다급한 조연출의 부름.

다시금 모니터로 향하는 시선.

이내, 현용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야. 저거 바위가 아니었어?"

호열에게 포장 따위가 필요할 리가.

*

더없이 든든하다.

이 [포식자의 늪지대] 균열에서.

이보다 든든한 지원군은 또 찾을 수 없겠지.

'랭커가 괜히 랭커가 아니다.'

프로스트 탈환에서 클래스 퀘스트를 시작한 남태민.

클래스 퀘스트 없이도 플레이어 랭킹 최상위권에 속하던 그였다.

클래스 퀘스트의 보상 덕분이겠지.

정말 볼 때마다 눈에 띄게 강해지는군.

'또 라이벌이 괜히 라이벌이 아니고.'

그런 남태민의 라이벌이 바로 히사기였으니까.

두말할 건 없었고.

'레오니야 뭐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랑펠의 기준에 부합하는 훌륭한 실력자였다.

한 때는 그런 레오니의 검술을 써먹어 보려고 혼자서 몸을 움직여 보기도 했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별다른 방해 없이 세계수의 씨앗에 접근할 수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크잖아, 이거.

세계수가 어디에 있는 건지는 몰라도.

그 씨앗이 여기까지 굴러 들어오게 된 경위가 궁금해지는 스케일이다. 정말.

"시작하겠다, 님프."

그러나 망설임은 없다.

거대한 크기만큼 그 후폭풍, 마력 탈진이 우려되기는 했다만....

내겐 확신이 있었다.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에 세계수에 관한 지식이 존재했으니.

세계수는 언제까지나 식물.

"그 뜻대로."

님프에겐 식물의 성장을 촉진하는 축복이 있었으니까.

나와 님프가 동시에 세계수의 씨앗에 손을 올렸다.

단단하군.

내가 느낀 건 그뿐이었지만, 님프는 아닌 모양이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집니다."

나는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나의 영향을 받은 님프가 아니던가?

역시, 한 번 결심한 일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고오오오─!

님프의 몸에서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세계수의 씨앗에 스며드는 {자연}의 힘.

과연, 예상했던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미친, 마력 빠져나가는 거 봐라.

각오는 했지만, 이 정도로 속도일 줄이야.

세계수의 씨앗이란 거대한 스펀지에.

고작 물 몇 방울 떨어트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내색은 할 수 없다.

설령 마력 탈진으로 기절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도.

눈앞이 핑핑 도는 것도.

필사적으로 억누를 수밖에 없단 말이다.

추위를 참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

과연, 경이로울 정도의 격식에 대한 집착.

건드리면 쓰러질 것 같은 탈력감이 느껴졌거늘.

나는 꼿꼿이 선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메소드 연기!

전투에 몰입한 플레이어들만큼.

나도 사투를 벌이고 있단 말이다.

물론, 그 사실은 바로 곁의 님프조차 알아차릴 수 없었으니.

님프는 나의 마력을 물 쓰듯 {자연}의 능력.

축복으로 치환하고 있었다.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

내 인생이 이렇게나 서럽다....

하지만.

"...!"

알아주는 사람, 정령은 없어도.

[세계수의 씨앗이 발아합니다.]

그래, 시스템은 내 개고생을 알고 있었다...!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님프가 말했다.

"호열 님, 지켜봐 주신 덕분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현재 싹 틔운 세계수의 씨앗 1개 / 알 수 없음

성공했다!

그 과정이 어땠느냐고 묻지 마라.

구질구질하든, 중간 과정을 한참 건너뛰었든, 어쨌든.

중요한 건 언제까지나 결과란 말이다.

"가능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번만큼은 뻔뻔한 게 아니었다.

만약, 정석대로 세계수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워야 했다면. 아르카나 대륙은 그 이전에 악마에게 멸망을 당하고도 남았을 테니까.

그래, 이번만큼은 훌륭하게 해냈다. 이호열.

자화자찬도 잠깐.

나는 메시지에서 시선을 옮겼다.

'그래서 이게 세계수인가.'

스르르─

서서히 갈라지는 씨앗.

촤아아아─

그 사이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호열 씨?"

"버, 벌써 끝났어요?"

"과연, 호열 상...!!"

가까이에 있던 이들부터 그 광경을 목격하기 시작했다.

그건 플레이어와 몬스터를 가리지 않았다.

생사가 오가는 전투조차 멈추고는.

새로운 세계수의 탄생에 집중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떡잎은 줄기가 되고 밑동이 되어간다.

뻗어 나간 뿌리가 늪지대를 단단하게 붙든다.

마치 늪지대의 습기가 자신을 위해 준비된 양분이었다는 것처럼.

수위가 낮아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세계수는 수분을 흡수해 갔다.

그리고는 나뭇가지에서 잎사귀를 틔워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새로운 세계수가 아르카나 대륙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아르카나 대륙이 세계수의 탄생을 축복합니다.]

[아르카나 대륙 전체에 생명의 기운이 일렁입니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메시지의 향연.

진짜 월드급 퀘스트였으니까.

나에게만 떠오른 메시지는 아니겠지.

"세, 세계수?!"

"설마, 저게 세계수의 씨앗이었어?"

"이호열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서...?"

그러나 나는 침묵을 지켰다.

그 이유는 월드 퀘스트를 수행 중인.

오직 나에게만 떠오른 메시지 때문이었다.

[아르카나 대륙에 당신의 업적이 울려 퍼집니다.]

[아르카나 대륙의 생명들이 당신의 존재를 이야기합니다.]

[칭호 시스템이 개방됩니다.]

[칭호, '최후의 모험가'를 습득합니다.]

...칭호 시스템이라고?

잠깐, 무슨 효과가...?

◈ 92화. 나쁘지 않은 울림이군

상태창에 새롭게 추가된 글줄.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324]

[능력치]

근력 : 53 / 민첩 : 60 / 마력 : 271 / 행운 : 6 / 심미 : 下

[보유 포인트 : 0]

정말 [칭호]라는 항목이 생성됐다.

순간, 머릿속에 스쳐 가는 아르카나에 관한 비루한 지식.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그때나 지금이나.'

칭호라는 건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나였다.

다른 게임이면 몰라도, 적어도 아르카나에서 칭호란 존재하지 않는 시스템이 확실했으니까.

나는 떠올랐던 메시지를 되새겼다.

아르카나 대륙에 나의 업적이 울려 퍼졌고.

그 업적이 대륙의 생명들 사이에서 회자됐고.

덕분에 칭호를 습득했다고 했었겠다....

'이건 스탯이 개방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칭호].

그게 원래부터 아르카나에 존재했던 시스템인지.

그게 아니라면 대격변 이후에 새롭게 업데이트된 시스템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

하지만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인지했다.

'지금만 해도 획득 조건이 말이 안 된다.'

월드급 퀘스트 정도는 수행해 줘야 칭호를 습득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또다시.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느껴진다.

...이것이 과연 옳은 보상인가?

내가 [칭호]라는 걸 받아도 되는 건가.

과정은 개뿔.

오직 결과만 보고 달린 나였다.

최선이었다고는 해도 요행은 요행.

그러나 뻔뻔하게도.

"최후의 모험가라."

항상(恒常).

그 감정을 내색할 수 없기에.

게다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한껏 꼿꼿해진 목과 척추의 각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 알아차릴 정도로.

미세하게 올라간 입꼬리.

세계수를 향하는 뿌듯한 눈초리까지.

"나쁘지 않은 울림이군."

그래, 세계수를 발아한 것도.

그 덕분에 아르카나 대륙에 존재를 알리게 된 것도.

지극히 당연하다 여기는 나, 그랑펠의 반응을 말이다.

물론, 이 철면피에는 나도 슬슬 적응하던 차.

그런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칭호]의 효과를 확인하는 거겠지.

과정이야 어쨌든.

그 결과는, 보상은 확실하게 챙겨야 하는 법 아니겠어?

[최후의 모험가 : 아르카나 대륙에서 사망하지 않습니다. 사망 시, 즉시 현실로 귀환하며 일정 시간 동안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 쿨타임 : 24시간]

그런데 뭐냐.

이 효과는?

잠깐, 사망하지 않는다는 건 '불사'라는 거 아니야?

대충 봐도 효과가 심상치 않았다.

아니, 불사를 떠나서 그 전제 조건부터도.

아르카나 대륙에서 사마아아앙?!!

아니, 근데 아르카나 대륙에서 사망하지 않아 봤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정작 아르카나 대륙으로 갈 방법조차 알지 못하는데! 그 방법을 알았으면 말이야.

마탑의 마법사들을 비롯한 아르카나인들이 현실에 머무르고 있지도 않았을 거란 말이다.

'...근데 어째 익숙하다?'

그런데, 칭호의 괴상한 효과가 왠지 낯익었다.

잠깐만, 애초에 그 명칭부터가.

최후의 '모험가'잖아.

모험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아르카나인들이 플레이어들을 칭하던 단어.

그래, 나는 플레이어.

모험가였으니까.

'만약, 내가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한다면.'

나는 최후의 모험가가 맞겠지.

그런 관점에서 보니까 효과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거 역시...!'

사망 시, 24시간 동안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할 수 없다.

'접근'이란 단어를 '접속'으로 바꾼다면.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사망 페널티와 똑같았다...!

나는 칭호의 효과를 몇 번이고 새겨 읽다가 입을 열었다.

"가설에 불과하지만, 가능성은 충분하다."

시스템 메시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런 [칭호]를 줬다는 것?

반드시 이 [칭호]를 써먹을 날이 온다는 거겠지.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현실에서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하는 것 또한.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란 말이었다.

'물론,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동안 두려움에 떨고 있거라. 열등한 족속이여."

내가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하는 날이 바로.

악마들이 공포에 떠는 날이 되겠지.

매일같이 발버둥을 치는 내가 아니던가.

그때가 되면 지금보다는 강해져 있을 테니까.

거기에 [최후의 모험가] 효과까지 생각한다면....

'죽어도 24시간 뒤에 살아나서 다시 나타난다는 거잖아.'

적어도 악마에게 나는.

그랑펠은 공포의 대상을 넘어선.

악몽이 되지 않을까?

물론, 아득히 머나먼 일처럼 느껴졌기에.

생각은 그쯤에서 정리.

나는 세계수를 올려다봤다.

어느새 늪지대의 어느 거목보다 커진 세계수.

스쳐 지나갔던 메시지처럼.

이곳은 더 이상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포식자의 늪지대가 아니었다.

[세계수의 비밀정원에 진입하셨습니다.]

"형님들. 다, 다들 보고 계시죠? 몬스터들이!!"

몬스터에게서 전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아르카나 대륙의 생명으로서.

그들 또한 세계수가 새롭게 자라났다는 의미를 본능적으로 깨닫게 된 거겠지. 아르카나 대륙이 절멸의 위기에 빠졌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세계수의 비밀정원 균열을 클리어하셨습니다.]

쿠구궁─!

이내, 흔들리는 시야.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이 뒤섞인 [『기이』]의 공간은 이제 각각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

플레이어들에겐 익숙한 현상. 하지만 님프는 당황한 눈치였다.

"풍경이 다시금...!"

물론, 걱정할 건 없다.

님프와 나는 계약 관계.

다음 균열에서 재회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때까지.'

점차 강렬해지는 빛.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나는 님프에게 말했다.

"나를 대신해 아르카나 대륙의 상황을 목도할 수 있겠나?"

아르카나 대륙의 상황.

님프와 계약을 맺기 전, 고려했던 것처럼.

아르카나 대륙에 관한 정보는 중요하다.

게다가 칭호의 효과를 통해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할 가능성까지 확인한 지금 상황에서는 더더욱.

'물론, 쉽지 않겠지.'

온전한 지역을 찾기 힘든 아르카나 대륙이다.

님프가 이곳, 포식자의 늪지대에 머무르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계약을 맺은 덕분에. 계약자인 나의 영향으로 그 외관과 성품이 바뀐 님프다.

"호열 님의 신뢰에 보답하겠습니다."

긍지가 생겼을 테니.

두려움은 없겠지.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 무거운 긍지를 감당하기에.

님프의 날개는 너무나도 허약하다는 것을...!

겉보기엔 상위 정령 혹은 정령왕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님프는 어디까지나 하위 정령이었으니까.

비루한 나의 마력 탓에 전투력의 상승을 기대하기도 힘들겠지.

그러나.

'내가 마력은 쥐뿔도 없어도.'

물려받은 '유산'이 조금 있거든.

바로 악크샨의 유산, [퀴른베르크 기계탑] 말이다.

그래, 이 순간에도.

기계탑은 악크샨의 결전병기로서의 긍지를 다하고 있을 터.

그 [퀴른베르크 기계탑]이야말로 님프에겐 안전하면서도, 대륙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물론, 그에 얽힌 사연을.

말로 설명하기엔 시간이 촉박하다.

나는 님프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그리고 짧게 덧붙였다.

"나의 안배와 함께하도록."

마지막까지 나답게.

뻔뻔하게.

*

...번뜩!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플레이어들이 눈을 떴다.

시야에 들어온 건 스칸디나비아의 침엽수림.

"와, 진짜 이렇게 끝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마지막에 뭐였지, 그거? 몬스터들이 무릎을 꿇지 않았어?"

"세계수라니. 너무 많은 메시지가 빠르게 떠올라서 뭐가 뭔지...!"

"잠깐, 그래서 이호열은?"

[포식자의 늪지대].

아니, 이제는 [세계수의 비밀정원]이라고 불러야 하나?

어쨌든, 이번 균열에서도.

말도 안 되는 행보를 보여준 호열이었다.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호열을 찾는 건 당연한 일.

"진짜 뭐라도 건지면 대박이다. 알지?"

"알고 있어요. 저도."

"빨리. 입 제대로 풀어놔. 어차피 여기로 올 수밖에 없으니까."

"으으, 어떻게 여긴 아직도 춥냐?"

포탈 주변.

수많은 취재진도 마찬가지였다.

그 취재 대상이 천하의 호열이라고 해도, 이건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건이 아니었다.

그래, 호열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민감한 질문은 건너뛴다고 하더라도.

"딱, 검술에 관한 것만 물어볼까요?"

"그래, 그거라도 건지는 게 어디야."

"그쵸? 이 정도는 대답해 주겠죠. 이호열도?"

"글쎄. 그러길 바라야지. 뭐."

충분히 화제가 될만한 떡밥이 워낙 많았어야지.

물론, 무엇보다 중요한 건 호열의 기분이었다.

부르르.

입술을 떨던 앵커가 혹시나 하며 말을 이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이호열도 사람인데. 이번 균열에서 얻은 성과가 얼마나 많은데. 기분도 좋겠다, 이런 사소한 질문에 대답 정도는 해주겠죠? 짧게라도?"

그저 정령 계약에서 호열의 활약이 끝났다면.

질문할 엄두도 내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마지막에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우고, 성공적으로 뿌리까지 내리게 했던 호열이 아니던가?

대격변 이전, 이후를 떠나서 이 정도의 업적을 세운 플레이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궁금한 건 따로 있지만...."

당당하고 거침없던 호열의 행동들.

그건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과연, 호열은 어디까지 알고 균열에 진입했던 걸까.

이번 활약으로 어떤 보상을 획득하게 됐을까.

'그런 예민한 질문은 분위기를 봐서 이어 나가보자.'

앵커가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이내, 호열과 마주했다.

그러나 그 다짐이 무색하게도.

"...!"

앵커를 비롯.

누구도 호열에게 말을 걸 순 없었다.

또각─

호열이 포탈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도.

이유야 간단했다.

'또 뭐가 문젠데!'

그 사전에 만족이란 단어는 없다는 듯.

더없이 굳은 무표정.

호열이 풍기는 분위기가 너무나도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멍하니 호열이 사라진 포탈을 바라보던 도중.

누군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설마, 이런 업적으로도 만족할 수 없다는 건가?"

그랬다.

그렇다고 볼 수밖에 볼 수 없는 반응이었다.

자연스럽게 의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대체 호열은 얼마나 먼 곳까지 내다보고 있단 말인가?

.

.

.

원망스러울 정도로 하찮은 마력.

누구 하나 말을 걸거나, 붙잡지 않아서 다행이다. 정말.

내겐 상냥하게 대답할 기운 따윈 없었으니까.

누군가 붙잡는다면 그대로 꼬꾸라질 자신만 있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선 감탄만 나오는구나.

'이런 꼬라지로 기어코 계단을 올라가는구나.'

또각─

나는 곧장 나의 연구실로 향했다.

마력 탈진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마력 보충이 필요했다.

마력 보충의 방법 또한 심히 효율이 떨어지는 방식을 고집할 수밖에 없다. 그래, 역시나 빌어먹을 격식 때문이란 말이다...!

마력을 보충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

당연하게도 비약초로 만든 마력 재생 포션을 섭취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간단한가?

음료수를 마시는 것과 다름없단 말이다.

그러나 그랑펠의 고귀하신 격식과 품위께서.

포션으로 병나발을 부는 행위를 용납할 리 없었으니.

나는 결국 연구실에 도착하자마자 찻잔을 준비했다.

달칵─

비효율적인 마도구, [간이 램프]로 물을 끓이고.

비효율적으로 비약초 티백이 우러날 때까지 기다린 뒤.

비효율적으로 차를 음미하며 마력을 회복했다.

"마침표를 찍는 것만큼이나 쉼표를 찍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

네네, 어련하시겠습니까.

'내가 진짜 앓느니 죽지.'

그래도 쉼표, 휴식이 필요하다는 말엔 격하게 공감한다.

[포식자의 늪지대]에 진입한 순간부터.

나는 단 한 번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으니까.

느긋하게 티타임을 즐기고 있자니.

문득, 아쉬움이 떠오르는군.

정령왕 드라이어드의 축복이 말이다.

'결국, 경험치랑 드롭율 버프는 맛도 못 봤네.'

수지타산을 따지자면야.

월드 퀘스트가 훨씬 이득이겠지만.

나는 언제까지나 레벨이 아쉬운 입장이었으니까.

그러나 내게는 한 방이 있었다.

왜,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가동한 순간.

떠올랐던 메시지를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거든.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경험치가 축적됩니다.]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명성이 축적됩니다.]

[축적된 경험치와 명성에 대한 습득 권한을 획득합니다.]

칭호, 최후의 모험가.

그를 통해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지금.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경험치와 명성은 내겐 쌓아둔 적금이나 다름없다는 거지.

'물론, 만기일이 언제인지는 나도 모르는데.'

어쨌거나 찾기만 하면 인생 역전.

아니, 레벨 역전이 가능하단 말이다.

'그때가 되면 말이야.'

마탑의 뿌리도 제대로 뽑을 수 있겠지.

레벨 제한 때문에 활용하지 못했던 마탑의 마도구들도 왕창 대여하고. 마력 소모 때문에 발현할 엄두도 못 내는 마법도 난사해 보고!

내가 일확천금의 꿈에 부푼 순간이었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나는 반사적으로 양피지를 확인했다.

선명하게 떠올라 있는 글씨.

과연, 약속된 만남이 있었군.

'마침 잘됐다.'

그렇지 않아도 희소식이 있었으니까.

나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들어오게나. 마르셀로."

*

저벅─

계단을 내려가는 마르셀로의 걸음은 가벼웠다.

야위여 가는 몸 때문이 아니라 조금이나마 가벼워진 마음 때문이었다.

안건이 통과됐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문득, 계단에 멈춰선 마르셀로가 마탑의 전경을 한 차례 둘러봤다.

'탑주님. 모순의 굴레를 끊고 비로소 마탑이 움직입니다.'

비록 그 첫걸음은 미약할지라도.

모든 건 첫걸음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마르셀로는 어깨를 으쓱였다.

'경에게도 처음으로 희소식을 들려줄 수 있겠습니다.'

과연, 호열 경께서는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그래도 약간은 놀라지 않으실까.

그러나.

마르셀로의 야심 찬 생각은 이내 무너지고 말았다.

달칵─

호열이 내어준 차를 들이켬과 동시에.

"?!"

커흡.

뜨거운 찻물을 간신히 삼킨 마르셀로가 되물었다.

"세, 세계수라니. 게다가 아르카나 대륙에 관한 정보도 알 수 있게 되셨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로서는 이해가...!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마탑의 수석 마법사조차 따라가기 벅찬 진도였다.

◈ 93화. 모든 것은 절차에 따라서 (1)

"대륙 절멸의 위기...."

마르셀로는 침음을 흘렸다.

세계수, 전설처럼 여겨왔던 존재.

그것이 실존한다는 것만 해도 놀랄 소식이었는데.

경께서 그 세계수를 발견하는 것도 모자라서.

그 씨앗까지 싹 틔우고 돌아오셨을 줄이야.

게다가 그 과정에서 정령과 계약을 맺다니.

"경의 행보를 따라가기엔 저조차도 벅차군요."

그러나 엄살은 오래가지 않았다.

마르셀로는 냉철하게 사태를 파악했다.

"그러나 훌륭한 판단이셨습니다. 전설 속 세계수는 아르카나 월드를 조율하는 존재. 그 존재의 공백이 길어질수록. 악마들의 세력은 더더욱 강성해지고, 그에 저항하는 이들은 갈수록 힘을 잃었을 테니까요."

호열이 새로운 세계수를 싹 틔운 것.

아르카나 대륙에 희망의 씨앗을 피워낸 셈이었다.

'마법의 연구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스스로가 이런 엄청난 일을 해냈다는 것을.

호열 경께서는 알고 계시는 것인가?

정말, 아르카나 대륙 모든 이들에게 '업적'으로 칭송받을 만한 성과를 경께서는 해낸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너무나도 태연했다.

그걸 뛰어넘어서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마르셀로는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으신 건가?'

자신이 세운 업적에 만족하기보다도.

오히려 한가로운 티타임에 만족한 듯한 호열의 모습.

마르셀로는 각오했다.

'설령 수다스럽다는 인상이 박히게 되더라도.'

호열 경께서는.

본인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 건지.

제대로 알고 계실 필요가 있다.

"그저 말뿐이 아니라 대륙엔 새로운 기류가...."

결심한 마르셀로가 운을 뗀 순간이었다.

달칵─

호열이 찻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그대의 말이 옳네, 마르셀로."

그저 담담하게.

"내가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움으로써. 아르카나 대륙에는 생명의 기운이 일렁이게 되겠지."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생명의 기운은 절멸의 위기에 저항하는 이들에게 큰 힘이 될걸세. 말뿐이 아니라 생명력과 마력 재생에 영향을 끼치리란 소리지."

그 어조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새로운 세계수를 목격한 이들 또한 직감적으로 대륙 절멸의 위기를 감지하게 될 터. 세계수를, 대륙을 지키기 위해. 더욱 비장한 각오로 악마에 맞서리라 기대할 수 있겠지."

동요도, 들뜸도 없다는 말이었다.

'나보다도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

엄청난 업적을 세웠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담담하게 자신의 업적을 읊조릴 수 있다니.

그것은 마치 당연하게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듯한 태도.

"역시 경의 생각은 따라갈 수 없습니다."

마르셀로는 다시금 호열의 그릇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

.

.

[새로운 세계수가 아르카나 대륙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아르카나 대륙이 세계수의 탄생을 축복합니다.]

[아르카나 대륙 전체에 생명의 기운이 일렁입니다.]

[아르카나 대륙 전체에 생명력 재생 버프가 적용됩니다.]

[아르카나 대륙 전체에 마력 재생 버프가 적용됩니다.]....

그저 출력됐던 메시지를 읽었을 뿐이었다.

메시지가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말할 수 있던 거지.

...그러나 마르셀로는 알지 못한다.

이게 얼마나 방대한 중간 과정을 건너뛰고 성공한 건지 말이야. 정상적인 길을 외면하고, 꼼수에 꼼수를 부려 지름길로 도달한 꼴이거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뻔뻔할 수 있다니.

나의 철면피 두께에 경악하고 싶은 심정이다, 진심으로.

물론, 일희일비하지 않는 항상의 자세.

그래도 꺼드럭거리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그러나 그랑펠은 내색하지 않을지라도.

'잠깐만, 마르셀로가 방금 뭐라고 한 거지...?'

나는 흠칫할 수밖에 없는 말이 이어졌다.

그건 귀를 의심하게 할 정도의 이야기.

"출탑에 수뇌부 과반의 승인이 필요치 않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그런가, 하고 듣고 넘겼다.

왜, 현재 마탑의 수뇌부는 온전하지 않았으니까.

탑주는 정상적인 행동이 불가능.

다섯의 원로 마법사 중 셋이 악마 숭배자로 판별된 상황.

수뇌부라고 해봤자 원로 마법사 둘밖에 남지 않았는데.

과반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래, 그런 의미인 줄만 알았는데....

"출탑. 그 전권이 저희에게 주어졌습니다."

...뭐라고? 그런 뜻이었어?!

깨닫는 순간.

눈앞에 퀘스트창이 떠올랐다.

─수석의 무게 (반복)▲

●토파즈 홀에서 검증을 진행하라. (성공)

●정기 학회를 성공적으로 진행하라. (성공)

●마법사들의 출탑을 감독하라. (진행 중)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출탑(出塔)이라니.

그 말이 뜻하는 바가 더없이 분명했으니까.

"그렇습니다. 경께서 모순의 굴레를 끊어내 주신 덕분에. 비로소 마탑이, 저희가 외부 행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탑에 묶여있던 마법사들이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이날이 오는구나.

이번에도 내색은 못 하지만, 심히 감격스러웠다.

'내 꿈이 이뤄지는 건가?'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졌다.

나는 [포식자의 늪지대]에서 지원군의 필요성을 실감했다.

미리미리 주고받지 않았더라면.

덕분에 도움을 받지 못했더라면.

나,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울 수 없었겠지.

그런 의미에서 마탑의 마법사들?

아군으로 그들보다 든든한 존재가 또 없었다.

더욱이 월드 퀘스트를 수행하게 된 나였다.

앞으로는 갈수록 더한 퀘스트 목표가 기다리고 있을 터.

그런데, 마탑이 아군이 되어준다면.

지름길로 가는 수준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창조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아예 고속도로를 뚫어버리는 거지!'

그런데, 잠깐만.

어째 점멸하는 퀘스트 목표가 뭔가 심상치 않았다.

출탑을 승인하는 것도 아니고....

감독하라고?

"출탑의 목적은 다양할 겁니다. 다만, 공통적으로 균열을 향하게 되겠지요. 허나, 경께서도 뱅그릿 선임 때의 경험으로 알고 계시듯. 균열엔 악마의 마수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랬다.

[깨진 차원의 틈].

균열에서 '???'.

그 이름 모를 악마는 뱅그릿을 노렸다.

물론, 그건 악마 숭배자였던 원로 마법사들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지만.

'꼭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악마 사냥꾼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악마들이 갈수록 교묘하게 현실에 침범하리란 걸.

악마란 강할수록 비열해지는 족속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마르셀로는 경계하고 있는 눈치였다.

"저는 저희의 힘이 온전하게 쓰이길 바랍니다."

마탑의 수석 마법사.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마르셀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

'나도 제발 그러길 바란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뱅그릿이 악마에게 빙의 당했다고 생각해 보자.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진짜...!

악마를 앞에 두고 도망칠 수도 없는 내가 아니던가? 울며 겨자 먹기로 뱅그릿에게 덤볐다가, 지금쯤 무거운 긍지에 가라앉아 황천에 익사하고도 남았겠지.

그러니까.

"과연, 그 말대로 감독의 필요성이 있겠군."

나의 노후를 위해서라도.

나는 마탑 마법사들의 출탑을.

정확히는 그들과 균열에 동행하며 그들을 감독할 필요가 있단 말이었다. 그러나 감독이라는 것은 언제까지나 나, 그랑펠의 기준.

"그 절차는 간단할 것이네."

물론, 언제나 그 절차가 우선이었다.

마르셀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막힘없이 입을 열었다.

"출탑을 희망하는 마법사는 출탑의 목적을 상세히 적시하여 내게 전달한다. 그 목적에 당위성이 있는가에 관한 판단은 오로지 나의 몫. 당연하게도 나의 판단에 출탑 희망자의 직위는 고려되지 않는다."

남에게 휘둘려 귀찮은 일을 감수한다?

그랑펠의 무거운 긍지가 남에게 잘도 휘둘리겠다.

그런 내가, 그랑펠이 출탑을 감독하게 된 이상.

'맞추는 건 내가 아니라 마법사들이 되어야 한단 말이다.'

나는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또한 모든 출탑 일정은 내가 결정하며 진행한다."

또 하나 배운다.

사회에서 약속이란 건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걸.

지금도 봐라.

괜히 전권을 넘겨준 덕분에.

"제가 선임 마법사들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이런 불공정한 절차가 곧장 통과됐잖아?

그러나 내가 신경 쓸 것은 아니다.

나는 줄곧 선언하지 않았던가.

'꼬우면 처음부터 시키지 말든가.'

수석의 무게를 짊어진 만큼.

나는 누려 할 것을 전부 누려야 한다.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게다가.

'당장 신경 써야 할 곳은 따로 있으니까.'

그래, 마탑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지금.

가장 큰 위협 요소를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마탑의 사정에 대해서도.

악마에 대해서도.

심지어는 전과까지 존재하는 그 위협 요소를.

[퀘스트 : 마탑의 재건]

마법사의 탑에 존재하던 모순의 실체.

진리 추구라는 마탑의 목적조차 불순해진 지금.

마탑을 그 기반부터 바로 세워라.

─탑주와 조우하라. (진행 중)

─도주한 악마 숭배자를 처분하라. (진행 중)

─진정한 진리를 찾아라. (진행 중)

출탑의 감독 또한 정기 학회와 마찬가지로.

수석으로서의 긍지가 걸려있는 업무.

당연하게도.

내가 감독하는 출탑에서는.

단 하나의 돌발 행동도 용납될 수 없다.

'처분해야지. 위협 요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무간의 죄수들을 심문할 시간이군."

마르셀로가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바로 가시는 겁니까?"

"그렇다."

"...경께서는 정말 아무렇지 않으신 겁니까?"

무간(無間).

천부적인 마력을 지니고 태어난 마탑의 마법사들.

그들에게 무간에서 느껴지는 무력감은 상당한 정신적 충격으로 다가오는 모양.

마르셀로는 물론, 능구렁이 같던 원로 마법사들도 무간에서만큼은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말하지 않았던가?

『그랑펠이 차기 가주로서 가장 먼저 몸에 익힌 건 사사로운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이었다.

클라우디 가문의 가주의 자리는 조금의 동요도 용납되지 않는 그런 자리였다.』

끔찍한 무간이야말로 나의 안방.

그러나 낯뜨거운 과거는 죽어도 말할 수 없으니.

나는 나답게 덧붙일 뿐이었다.

"무력감 또한 감각의 일부."

"...!"

"그조차도 익숙해질 필요가 있는 법이네. 마르셀로."

방금까지 시달리던.

마력 탈진의 경험담을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

보이는 것은 오직 어둠.

"...자네 거기 있는가?"

허공에 물어도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젠장!"

이젠 청각마저 고장이 난 것인가?

아니면 정말 대답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건가.

마탑의 원로 마법사.

아니, 악마 숭배자.

아니, 이젠 그것도 아니었다.

무간 속에서 신음하는 건 그저 무력한 인간에 불과했다.

'대체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난 것이냐.'

머리가 혼탁하다.

기억이 흐릿하다.

이대로는 무간에서 풀려나도 문제였다.

이래서야 마법 하나 제대로 발현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런 고민조차 희망이 있을 때나 할 수 있는 것.

'이렇게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어째서 나는 이 빌어먹을 장소에 갇혀있는 거지?

설마, 모든 계획이 백지장이 돼버린 것인가?

고개를 저어서 생각을 떨쳐내 보려 해도 쉽지 않았다.

'...그래, 계획은 이미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무간에 갇혀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충분히 구해낼 수 있으면서도. 우리를 외면하고 있는 것 아닌가?'

역시, 우리는 쓰다 버리는 패에 불과했단 말인가?

"젠장...!"

더욱더 큰 의심과 불신이 사고를 지배했다.

그러던 중이었다.

"!"

끼익─

무간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다가온 것은.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이곳에서 내보내 준다면 얼마든지 애원할 수 있었다.

"누구인가? 나를, 우리를 꺼내주려고 온 것인가?!"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 어둠 속에서 들려온 것은.

또각─

어째서인가.

혼란한 기억 속에서도 강렬하게 남아있는 구두 소리뿐.

이내, 악마 숭배자에게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보였다.

"너, 너는...?"

흐릿한 기억 탓에 가뜩이나 낯선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은발의 머리카락.

더없이 오만한 얼굴.

그 외관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마르셀로, 그 녀석이 공동 수석 자리에 앉힌 모험가였다.

그가 다시 무간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

간단했다.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계획은, 진정한 진리에 도달하는 건.

아직도 멀었단 말인가?

다시금 느껴지는 절망감.

그러나 진정한 절망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사내가 의자에 착석.

그러고는 말 한마디 없이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흐릿한 시야 탓.

정확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저건 책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에 들고 있는 건....

'...잔?'

맞았다.

정확히는 찻잔이었다.

부유 정원이 아니다.

이곳은 무간(無間).

시간의 흐름도.

육체의 감각도.

모든 것이 항상에 수렴하는 공간.

발을 들이는 순간,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끔찍한 공간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런 무간에서 책을 펼친 것도 모자라 차를 음미할 수 있다고...?

'저러고도 정신이 온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 의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내, 깨닫고 말았으니까.

스륵─

책장을 넘기는 소리.

달칵─

찻잔이 움직이는 소리.

"!!"

그 행동들이 시계의 초침 소리가 됐다.

망가졌던 시간 감각을 일깨워 줬단 소리였다.

그건 감각 일부가 돌아왔다고.

기뻐할 일이 아니었다.

사내가 책을 펼친 지도.

족히 며칠은 지난 것 같았거늘.

'이제야 책장 한 페이지가 넘어갔을 뿐이라고...?'

마찬가지로.

영겁의 시간이 흐른 것 같았거늘.

찻잔에서 피오르는 김은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 무언가 수작을 부린 게 분명하다.

분명, 마법으로 눈속임을....

그렇게 생각하다가 깨달았다.

이곳은 마력이 존재할 수 없는 무간이란 사실을.

'그렇다면 내가 버텨온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겨우 몇 주.

아니, 고작 며칠에 불과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이곳에서 썩어야 한다는 거지?'

지금까지 느낀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절망이 느껴졌다.

달랑 책 한 권과 찻잔 하나 때문에.

.

.

.

자고로 자투리 시간조차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왜, 학창 시절에도 말이야.'

공부 잘하는 애들은 쉬는 시간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었지.

게다가 나는 아쉬운 입장.

살 구멍을, 우물을 많이 파둬야 한단 말이다.

'심문도 효율적으로 해야 한다는 거지.'

고작 악마 숭배자 따위를 심문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순 없다.

그것이 바로 무간에 마법 서적과 찻잔을 챙겨서 입장한 이유.

물론, 그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해 줄 의무 따윈 내게 없다.

『마법부여학 심화 이론』.

스륵─

가져온 서적은 마법부여학 심화 과정.

수석의 권리를 내세워 무료로 누릴 수 있는 마탑의 서비스엔 마법부여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마탑의 공짜 서비스를 놔두고 내 손으로 마법부여를 시도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마법부여도 누가 손을 대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물, 아이템의 효과가 달라졌으니까.

마력이 부족한 내 똥손으론 뭘 제대로 하지도 못하겠지.

그러나 남의 손을 빌린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주문하기 위해선 지식이 필요하니까.'

게다가 이건 한번 습득하면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는 지식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내가 독서에 집중하던 차였다.

문득, 신음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하겠다. 도주한 원로 마법사, 그 녀석이 지금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알고 있는 선에서 모든 걸 말하겠단 말이다...!!"

...갑자기 뭔데.

심문은 시작도 안 했는데?

어쨌거나 수고를 덜었군.

그러나.

모든 일엔 그 절차가 존재하는 법.

나는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기다려라."

"...?"

독서 중엔 정숙.

기본적인 에티켓을 지키란 말이다.

◈ 94화. 모든 것은 절차에 따라서 (2)

가넷 홀.

마탑의 마도구를 관리하는 가넷 홀엔 마법부여학파가 관리하는 별실이 존재한다.

그 별실에서 이뤄지는 작업은 당연하게도 마도구의 마법부여 작업.

그 노력에 비해 결과가 따라주지 않는 마법부여학이다.

무언가 조금만 어긋나도 귀중한 마도구가 손상되니까.

가넷 홀 별실에서는 한숨이 끊이질 않는다.

그런데.

"으으. 어째서 제게 이런 시련을...!!"

그런 별실에서도 흔치 않은 절규가 흘러나왔다.

마법부여학 선임 마법사, 키코 아르민.

그녀가 내뱉은 원망 가득한 절규가.

철퍼덕─

마법부여대 위에 대자로 뻗은 키코.

그녀를 바라보며 시선을 교환하는 숙련 마법사들.

'괜찮으신 거 맞아?'

키코는 좀처럼 일어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숙련 마법사 중 하나가 총대를 멜 수밖에 없었다.

"키코 선임 마법사님. 역시, 저희가 책임을 지는 게...."

"그럴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저에게 말을 하지 말았어야죠."

"아앗, 죄송합니다. 저희 생각이 짧았...."

"하지만 침묵하고 넘어갔다가 일이 틀어졌다면? 그때도 난 절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예요. 왜 나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느냐며 캐물었겠죠."

"그, 그것도 죄송합...."

"그대가 뭐가 죄송하다는 거죠? 누가 봐도 내가 변덕을 부리는 건데?"

키코는 대(大)자로 엎드린 채.

체인 라이트닝처럼 저릿한 말을 쏘아붙였다.

숙련 마법사들이 다시금 시선을 교환한다.

아뿔싸.

발현되고 말았다!

키코 선임 마법사의 피해망상이!

그녀의 피해망상은 자존감 결여에서 비롯된 질병.

마탑의 다른 학파들이 부지런히 벌어온다면.

마법부여학은 벌어놓은 재산을 거덜 내는 학파였으니.

"당신들은 지금이라도 진로를 바꾸는 게 좋을 거예요. 뭐가 좋다고 마법부여학에 매달리는 거죠? 빌어먹을, 학문! 내가 그대들처럼 나이라도 젊었다면...!"

평소엔 꺼내지 않는 나이까지 들먹이시는 걸 보면.

이번 피해망상은 쉽게 가시지 않겠군.

숙련 마법사들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만도 하시지.'

하지만 그 심정이 이해가 됐다.

이 상황을 초래한 원흉은 명백했으니까.

히스테릭한 말을 내뱉던 키코가 결국 그 이름을 꺼냈다.

"대체, 이호열 수석께서는 뭐가 부족하셔서 굳이 마법부여학을 건드리시는 걸까요? 아무리 봐도 이건 눈치를 주는 게 분명해요! 적자만 내는 식충이들은 당장 마탑에서 꺼져라! 말 대신 이런 식으로 눈치를 주시는 거죠. 안 그래요?"

명백한 원흉, 이호열 수석!

그랬다.

가넷 홀 별실에 비상이 걸린 이유는 바로 호열의 주문서 때문이었다.

"내가 식사 자리에서 눈치를 줄 때부터 알아봤는데...."

빼꼼─

원망스럽게 중얼거리던 키코가 드디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요청 다시 한번만 읽어주겠어요?"

푸석푸석한 진보랏빛 머리카락.

그보다 더 진하게 깔린 눈가의 눈그늘.

얼굴을 그렇게 쓰실 거면 차라리 절 주시지....

"저기, 듣고 있나요?"

도리도리─

재촉에 숙련 마법사가 잡생각을 떨치고 대꾸했다.

"아, 네! 이호열 수석께서 보내주신 주문서에 따르면.... 첫째, 제출한 마도구에 깃든 효과를 추출하여, 마찬가지로 제출한 의복에 부여하는 것. 둘째, 재료에서 추출한 효과를 증폭하여 마도구에 부여하는 것...."

키코는 양피지를 읽어나가는 숙련 마법사를 바라봤다.

조잘대는 입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키코는 속으로 곱씹었다.

'...몇 번을 들어도 이해가 안 되네?'

역시나 모든 일의 원흉인 호열을!

애증의 마법부여학.

습득해야 하는 지식은 터무니없이 방대하지만, 정작 그 지식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 감수해야 할 손해가 너무나도 크다.

말했다시피 효율이 떨어지는 마법 분야란 말이다.

연구할 가치가 떨어진다는 말이다.

천하의 마르셀로 수석조차 마법부여학에 관한 지식은 기초 수준에 불과했으니까.

그런데.

'뭘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알고 있는 거야?'

굴러들어 온 수석이 보내온 주문서는 지나치게 상세했다.

마법부여학의 한계를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그 한계치에 근접하는 결과를 요구하는.

한마디로 너무나도 깐깐한 주문서란 말이었다!

'마법부여학, 그것도 심화 과정에 대한 지식이 있지 않고서야.'

이런 주문을 요청할 순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까 정기 학회 때에도 그랬다.

'마법부여학 연구에 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었지.'

덕분에 애를 먹던 숙련 마법사가 바로 앞에 있었다.

한참이나 재잘거리던 숙련 마법사가 말을 끝마쳤다.

키코가 턱을 까딱거렸다.

"아직 뒷내용이 남은 것 같은데. 무슨 내용인가요?"

"아, 추신이라고 덧붙이신 말이 있습니다."

"추신?"

"도움이 된다면 활용하라고 적혀있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저희 숙련 마법사의 지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식이어서."

절대 윗사람으로 두고 싶지 않은 성격의 소유자.

그러나 성격과 능력은 별개였다.

키코는 호열이 보여줬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인상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당연하게도 선임 마법사 뱅그릿 톰 사건이었다.

'정말, 보통이 아니었지.'

뱅그릿 톰.

원로 마법사.

그리고 악마 숭배자로 이어졌던.

상상하지도 못했던 마탑의 모순.

그걸 해결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호열이었으니까.

'도움이 된다면 활용해라?'

그러니까 호기심이 들었다.

대체 뭘 적어놨길래.

숙련 마법사들조차 이해하기 어렵다고 혀를 내두르는 걸까?

"읽어봐야겠군요."

슥─

키코가 드디어 마법부여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손짓했다.

숙련 마법사가 쪼르르 키코에게 양피지를 건넸다.

"대단하시네요. 진심으로."

우리 굴러들어 온 수석께선.

무엇 하나 대충 하는 법이 없으시네.

추신이라고 하기엔 그 분량이 상당했다.

오죽했으면 상세했던 주문서보다도 내용이 길잖아?

괜히 읽어보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이내, 키코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잠시만. 이건?'

첫 문단을 읽는 순간.

깨닫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당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해요."

이건 마법부여학에 관련된 지식이 아니었으니까.

"엄밀히 따지자면 다른 학파의 지식이니까요."

그것도 뭐라 단정 지을 수 없을 정도로.

갖가지 학파의 지식이 섞여 적혀있었으니까.

그러나 마법부여학의 선임으로서 짐작할 수 있었다.

"괜히 이런 까다로운 요청을 해오신 게 아니었잖아?"

호열이 덧붙인 추신으로.

마법부여학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읽는 순간, 그 사실을 깨달을 정도로.

어려운 해결책도 아니었다.

그저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던 것뿐.

'어떻게 이런 관점으로?'

답은 마법부여학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키코가 발상을 전환하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선임 마법사라면 누구라도 가지고 있는 생각.

"마법부여학이 최고다...."

그래, 자신의 마법이 최고라 여기는 고집 때문이었다.

그러자 깨닫게 됐다.

호열이 어떻게 이런 생각을 내놓을 수 있었는지도.

키코가 헛웃음을 뱉었다.

"오히려 굴러들어 온 돌이라 가능하셨다?"

왜,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 법이니까.

이내, 키코가 길게 늘어진 로브를 걷어 올렸다.

"그래. 좋아요. 저도 벗길 때가 됐네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낀 이끼를 벗길 때가 됐다.

그런 뜻에서 한 말이었건만.

추신조차 해석하지 못하는 숙련 마법사들이 그녀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갑자기 뭘 벗기신다는 거야?'

숙련 마법사들이 서로 묘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으셨으면 헛소리까지 하시는 걸까.'

'불쌍한 우리 키코 선임님.'

'...진심으로 지금이라도 진로를 바꿔야 하나?'

*

마탑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가?

바로 진리 추구.

물론, 지금 마탑은 진리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이긴 하다만.

'어쨌거나 최종 목표는 다 똑같다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굳이 학파끼리 사이가 나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왜, 마법에 관해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그랑펠 덕분에 알게 됐거든.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지."

여러 우물을 파서 그런가?

뜻밖에 쉽게 해답이 보였다.

정기 학회에서도 그랬고.

이번에 마법부여 주문서도 마찬가지.

'공부한 게 억울해서라도 제대로 적었지.'

마탑의 뿌리를 뽑겠노라.

다짐했던 것처럼.

나는 아주 상세한 요구를 덧붙여 마법부여 주문서를 뽑았다.

디테일 하나가 추가될 때마다.

단위수가 바뀌는 게 마탑의 마법부여 서비스란 걸 고려하면.

평범한 플레이어라면 엄두도 못 낼 견적이라는 말이다.

'적당히 해먹어야지. 뭐든.'

물론, 너무 날로 먹어도 배탈이 나는 법.

그래서 추신으로 덧붙였다.

『마법부여학 심화 이론』.

무간에서 독서하며 깨달은 지식을 말이다.

당연히 마법부여가 성공할 확률도 높아질 테니까.

나로서는 손해 볼 게 없는 일이란 거지.

귀찮더라도 뭐든 첫 단추를 잘 끼워놓아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다음에도 제대로 써먹을 수 있거든.

"허나,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절차다."

여기서 절차란 기한 엄수.

그야 언제 사건이 터질지 알 수 없었으니까.

급하게 아이템이 필요하게 될 수도 있단 말이다.

그랬다.

아이템의 마법부여를 의뢰한 것도.

"나쁘지 않군."

[숭고한 약속의 목걸이]

[등급 : 레어]

[제한 : Lv.300]

[효과 : 피격 시, 낮은 확률로 스킬 '중급 보호' 발동.]

[설명 : 전장에 나서는 연인을 위한 목걸이다. 상대방이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에 마력이 깃들어 뛰어난 효과를 가지게 됐다.]

인벤토리에 묵혀뒀던 아이템을 착용한 것도.

전부 만반의 준비를 위해서였다.

위협 요소를 제거해야 하니까.

─도주한 악마 숭배자를 처분하라. (진행 중)

●상위 마왕의 부활을 저지하라. (진행 중)

그저 책장을 넘기고, 티타임을 즐겼을 뿐이거늘.

악마 숭배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계획을 털어놨다.

나는 태연하게 읊조렸다.

"상위든, 하위든, 마왕이든. 하찮다는 것에 변함은 없다."

긍지에 휘둘려 말은 그렇게 했다만.

이게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쯤이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악마 사냥꾼의 지식이 말해주고 있었거든.

-"마왕이라고 전부 같은 마왕이 아니다. 그 서열에 따라 하급 악마와 마왕. 그 이상의 격차가 나기도 하니까. 따라서 상위 마왕은 거악과 다를 것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말하자면 간단했다.

꼼수를 부려서 지름길로 가려는 건 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악마.

그리고 악마 숭배자.

녀석들도 똑같았다.

-"...우리의 계획은 상위 마왕을 보다 빠르게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그래, 뱅그릿 톰은 그 제물 중 하나에 불과했지. 빌어먹게도 실패하고 말았지만."

처음 그 소릴 들었을 땐 진짜 아찔했지.

마왕, 데카라비아를 쓰러트리긴 했었지만.

데카라비아의 서열은 72 마왕 중 고작 69위에 불과했으니까.

그 데카라비아와 상위 마왕 사이엔.

하급 악마와 마왕.

그 이상의 격차가 있단 뜻이었다...!

거악, 칠죄종 탐욕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녀석은 데카라비아도 알고 있던 [구마의식]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거악이라 부를 상대가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쓰러트린 내가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그런 나사 빠진 녀석들조차.

구질구질하게 쓰러트리는 게 최선이었던 나였단 말이다.

만약 악마 숭배자들의 계획대로.

지금 시점에서 상위 마왕이 부활했다면....

'상상하기도 싫다. 정말.'

그런 의미에선 다시금 자화자찬할 수밖에 없다.

'나대는 것도 타이밍 좋게 잘 나댔구나.'

장하다, 이호열.

원로 마법사들 앞이라고 주눅이 들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덕분에 이렇게 반격할 기회가 생긴 셈이었으니까.

그러나.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게 불쾌하군."

마탑에서 도주한 한 명의 악마 숭배자.

그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이상.

악마 숭배자들의 상위 마왕 부활 계획은 아직 유효하다.

무간에 갇힌 숭배자들이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던 것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믿고 지금까지 인내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무리야...! 나는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다고. 정신이 버티지 못한단 말이다!"

물론, 사실대로 말했다고 해서 풀어줄 순 없는 노릇.

무엇보다 이들은 마탑의 대역죄인이 아니던가?

대역죄인이라면 대역죄인답게.

마탑의 절차에 따라 그 처벌을 감당하는 것이 옳다.

'물론, 나머지 하나도 마찬가지고.'

하나 남은 악마 숭배자.

그 행방에 대해선 악마 숭배자들도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빡세네.'

인간에게 빙의한 악마도 [천적관계]가 아니면 알아차릴 수 없었으니까. 악마 숭배자, 그것도 모자라 원로 마법사 자리까지 차지했던 작자를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겠지.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섣불리 행동하는 그날이 처분의 날이 될 것이다."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움직이는 순간이 바로.

내가.

아니, 정확히는 마탑이.

대역죄인을 처단하기 위해 움직이는 날이 될 테니까.

그래.

마르셀로는 물론, 스무 명의 선임 마법사들까지.

다시 한번.

호가호위를 넘어선 위세를 부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선 오히려 기다려지는데?'

그러나 이 시커먼 속내는 혼자라고 해도.

드러낼 수 없는 것.

나는 냉랭하게 읊조릴 뿐이었다.

"최후까지 최선을 다해 발버둥 쳐보거라."

왜, 처절하게 발버둥 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거든.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금방 다리에 쥐가 날지도 모를걸?

*

호텔 최상층.

널브러진 옷가지들.

그곳에 자욱한 연기.

요동치는 부정한 기운.

"과연, 악마의 소굴이라 불려 마땅하군."

포마드로 넘긴 백발.

적절하게 손질한 수염.

갖춰 입은 현대식 복장까지.

원로 마법사.

이제는 악마 숭배자에 불과한 카림제바가 말을 이었다.

"이 세계도 아르카나 대륙과 다를 바 없군. 그래."

그는 완벽하게 사회에 적응한 모습이었다.

그의 몸에서 일렁이는 방대한 마력만 빼면 말이다.

"다를 바 없기는. 오히려 더 좆 같지요."

침대 위.

술에 취한 여인들 사이에서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악마 숭배자 앞에서 숨길 게 뭐가 있을까.

드러내는 빙의의 증거.

그가 새까만 동공으로 호텔을 둘러봤다.

"나도 악마지만, 어떻게 보면 악마보다 더 악랄하거든요? 마왕을 위해서라든가. 강해지기 악행을 저지른다든가. 그따위 명분도 없어요. 단순하게 자기 쾌락을 위해서 같은 인간을 구렁텅이로 걷어차 버린다니까?"

"말조심하게."

"알겠습니다. 어떻게 된 게 악마인 나보다도 끔찍하게 마왕님을 챙기시는 건...!"

고오오오─

살기 등등한 카림제바의 기세.

악마는 다급하게 양손을 들어 올리고는 말을 주워담았다.

"에이. 농담. 농담도 못 하나?"

"자네에겐 우리의 계획이 농담처럼 들렸나 보군."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제 말은...!"

"됐네. 긴 이야기는 필요 없겠지."

마탑에서 도주.

사회 속에 숨어든 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 흐름이 심상치 않았다.

'『텔레파시』가 오지 않는다.'

마탑에 남아있는 원로 마법사.

악마 숭배자들에게서 소식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마탑에 접근할 수 없기에.

그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원로 마법사였다.

어느 누가 그들의 말과 행동에 의심을 제기할 수 있단 말인가?

설령 의심을 제기한다고 한들.

그들이 자신에게 텔레파시조차 보내지 못할 정도로.

위기에 빠지진 않았을 터.

'...설마.'

배신한 건가?

과거 마탑을 배신했던 것처럼.

이번엔 악마를 배신한 것인가.

'아니다. 그들은 진정한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기다릴수록 불신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카림제바는 접촉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악마에게.

카림제바가 말했다.

"내겐 마탑의 소식이 필요하다. 이 세계에서 그대의 지위라면 어렵지 않게 그에 관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겠지. 그를 위해서 차지한 육신일 테니까."

그의 말에 악마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요. 그렇게 잘 알고 계시면서 말이야."

"...?"

"유일하게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 나한테. 그렇게 막 대하시면 쓰나? 그쪽이 대단하신 양반이라는 건 알겠는데. 우리 사이엔 이해관계가 있잖아, 안 그래?"

...빌어먹을, 악마 새끼가.

간섭까지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마력만으로도.

이따위 악마쯤은 터트려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탑에 관한 소식을 알 수 없게 된다. 그럼 계획도....'

카림제바는 필사적으로 살기를 억눌렀다.

그리고 대답했다.

"자네의 말이 옳군. 내가 경솔했네."

과거, 화룡(火龍)이라 불렸던 카림제바가.

악마 따위에게 굽히는 꼴이라니.

고작 첫걸음을 내디뎠을 뿐이거늘.

벌써부터 다리를 삐끗한 기분이 들었다.

◈ 95화. 착각은 거기까지다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결국, 인간에 불과하지.'

진명(眞名)의 악마, 아캄파탐은 미소를 삼켰다.

카림제바, 녀석이 얼마나 대단한 인간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화룡(火龍)이라 그랬던가.

뭐, 아르카나 대륙에서의 명성은 잠시 제쳐놓더라도.

그의 육체에서 일렁이는 마력은 정말 심상치 않았으니까.

'섣불리 입을 놀렸다간 타서 뒈지겠는데.'

그러나 이곳은 아르카나 대륙이 아니었다.

아르카나 대륙과는 전혀 다른 세계.

이쪽 세계에 관해선 카림제바보다는 잘 알고 있기에.

"자네의 말이 옳군. 내가 경솔했네."

그나마 고개를 굽히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요. 나도 말이 과했습니다. 서로 돕고 살아야죠."

물론, 저런 괴물과 기 싸움을 할 필요는 없겠지.

아캄파탐은 사과를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소파에 마주 앉았다.

'일단 계산을 좀 해볼까.'

후우─

연초에 불을 붙이고 머리를 굴려봤다.

재벌가의 후계자.

신분을 떼어놓고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육체를 차지했지만.

그래도 이해득실 하나를 따지는 머리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왜, 지금도 보다시피 말이야.

자기 쾌락을 남의 인생보다 우선시하고 있잖아?

'오히려 나보다도 악랄한 구석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

그런 머리가 말해주고 있었다.

'이거 나로서는 전혀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 아닌데.'

상위 마왕?

부활에 성공한다고 한들.

자신에게 득이 될 건 하나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손해를 보면 보겠지.

'모든 악의 기운이 잘나신 마왕님을 향하게 될 테니까.'

보잘것없는 난 지금 생활에도 만족하는데 말이지.

치지지직─!

한마디로 똥 밟고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이란 거다.

담뱃불을 끄는 손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마탑의 소식이 필요하시다. 뭐, 어렵지 않죠. 이 세상도 나름 편리하거든요. 마법까지 갈 필요도 없고, 손가락만 몇 번 까딱하면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거든요."

슥─

스마트폰을 꺼내 들자.

카림제바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촌놈 같기는.

아캄파탐은 피식 웃고는 능청을 부렸다.

"그런데 누구보다 잘 아시다시피 마탑이 워낙 보수적인 집단이지 않습니까? 떠도는 정보라고 해도 죄다 추측밖에 없다는 거죠. 전부 다 부정확한 뇌피셜. 아, 뇌피셜 뜻은 아시죠?"

농담 한마디에 곧장 달라지는 기색.

드드드─

일렁이는 마력에 주변 가구들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 노친네는 자각이 없나?'

자신이 어떤 마력을 뿜어대고 있는지 말이야.

이거, 밀당 잘못하다가 뒈지겠네.

아캄파탐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가 누굽니까? 다 방법이 있다, 이 말입니다."

"방법이라. 말해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이제 한배를 탄 입장인데."

그리고 스륵─

연락처를 넘겼다.

"그쪽한테 마왕도 아닌 우리처럼 평범한 악마가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나름대로 머리란 걸 쓰고 있거든요. 저처럼 인간의 탈을 쓰고, 이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거죠."

알고 있다.

카림제바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말을 이어 나갔다.

"당연하게도 그 숫자는? 우리 카림제바 님께서 생각하시는 거 그 이상이다. 그 능력도? 아르카나 대륙에서는 몰라도, 이 세계에서는 충분히 써먹을 수 있을 정도로 괜찮다."

"본론을 말하게."

"본론이야 간단하죠. 현재 마탑엔 아르카나 대륙 출신만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카림제바는 곧장 말뜻을 알아차렸다.

"...모험가, 이호열을 말하는 거군."

"정답! 우리 악마 쪽에서도 그 이호열과 연이 닿은 악마가 하나 있거든요."

"...!"

이호열과 연이 닿은 악마가 있다...?

카림제바는 악마, 고유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이호열이 수석, 마르셀로가 인정한 재목이라고 한들.

악마의 힘이라면 그의 능력과 무관하게.

'다른 원로들과 뱅그릿이 그랬던 것처럼.'

그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

'확실하게 마탑에 관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겠군.'

아니, 그걸 넘어서 이호열을 이용한다면?

그 이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아캄파탐이 미소를 드러내고는 말을 이었다.

"표정을 보니까 대충 짐작하신 눈치시네요. 그래도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아르카나 대륙 관점에서 봐도. 그리고 이 세계의 관점으로 봐도. 이호열, 그 자식은 보통이 아니니까."

드르륵─

재벌가의 인맥.

끊임없이 내려가던 스크롤이 드디어 멈췄다.

"그런데도 결국 해낸 녀석이 하나 있단 말이죠."

"가능하단 소리로군."

"뭐, 마왕님을 위한 일이라는데 당연히 협조하지 않겠습니까?"

아캄파탐은 일부러 말끝을 꼬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역시나 조금도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빌어먹게도 손을 뗄 수도 없고.'

물론,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다.

'잿더미가 될 일 있나.'

한마디로 뒈지기 싫으면 할 수밖에 없다는 말.

게다가 악마이기에.

다른 악마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잘 알고 있었다.

'이거, 답장이나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심지어 용건이 마왕 부활에 관련된 것까지 말한다면.

협조는커녕 차단을 당해도 싸겠지.

그러나.

아까부터 득실을 따지던 머리가 방법을 내놓았다.

'...결국, 제물이 필요하단 거잖아?'

악마 숭배자들.

놈들의 구체적인 계획까진 알 수 없지만.

마왕, 그것도 상위 마왕을 부활시키는 데엔 엄청난 수의 제물이 필요하다.

아캄파탐의 머리가 비열하게 회전했다.

그렇다면, 그 제물을....

'내가 가로챌 수 있다면?'

나도 상위 마왕에 버금가는 힘을 거머쥘 수 있다...!

'이걸 빌미로 이 녀석을 끌어들일 수도 있겠지.'

마왕을 부활시키는 목적이 아니다.

마왕 부활에 필요한 제물을 가로챌 목적이다.

그렇게 말한다면 이호열에 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을 터.

'물론, 뒤통수에 뒤통수를 쳐야 하겠지만.'

이제 와서 발을 빼고도 살아남는 것보단 쉬운 일이겠지.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것이다.

그쯤에서 계산은 끝났다.

"그런데, 저도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이젠 그 계산서를 교묘하게 속여 내밀기만 하면 될 뿐.

"같은 배를 탄 입장으로서. 제게도 그 계획이라는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주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입니다?"

굳이 심기를 살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요동치는 마력이 불편한 기색을 대신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아캄파탐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전 단지 실패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 위대하신 카림제바 님이야 한 번의 실패 따윈 문제가 되지 않으시겠지만. 저처럼 나약한 악마는 처한 처지가 다르니까요."

침묵하던 카림제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물론, 아캄파탐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계획을 알게 됐다고 한들.

가로채는 데에도 준비는 필요한 법이니까.

"또한 제가 계획을 진행하는 동안에는, 부디 조용히 계셔주셨으면 합니다."

"...?"

"주제넘은 요청이란 걸 알고 있지만. 지금만 하더라도 카림제바 님의 마력이 워낙 눈에 띄지 않습니까? 은밀하게 계획을 진행하는 건 전문가인 저희 같은 악마에게 맡겨두시죠."

이렇게 지껄일 수 있는 이유?

간단했다.

카림제바는 아직 이 사회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으니까.

'지금만큼은 화룡이 아니라 이제 막 우물을 벗어난 개구리에 불과하단 거지.'

스윽─

과연, 카림제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호열에 관한 소식을 기다리지."

그 말인즉슨,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것.

아캄파탐은 검은 동공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좋은 소식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텔레포트.

이내, 호텔 객실에서 모습을 감춘 카림제바.

아캄파탐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비열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병신이 제대로 낚였군."

곧장 메시지를 전송했다.

대어가 걸린 만큼.

빠르게 낚아채야 했으니까.

*

신화 그룹 소속.

신화 길드.

길드 마스터, 백이설은 브리핑을 경청했다.

"신화 길드의 국내 브랜드 선호도는 지난달보다 4.8퍼센트 포인트 상승함으로써. 길드 창립 이후, 최초로 두 달 연속 상승세를 기록...."

한번 추락한 신뢰는 되돌리기 어려운 법이다.

그동안의 행적으로 제대로 미운털이 박힌 신화 길드가 그랬다.

하지만 그래프로 보다시피 신화 길드의 이미지가 반등하고 있었다.

"그 이유로는 달라진 오너의 태도...."

모든 건 유스라 왕국.

그래, 호열 덕분이었다.

자료 화면을 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처음엔 정말....'

울며 겨자를 먹는 심정이었지.

호열이 제시했던 조건은 정말이지.

신화 길드 입장에선 흙을 파서 장사하라는 소리와 다름없었으니까.

물론, 호열에겐 크게 빚을 졌으니까.

백이설은 과감하게 계약을 체결했다.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신화 길드. 그리고 신화 그룹 차원에서도 과감한 투자한 투자였지만, 오히려 그 과감한 투자가 대중의 반향을 이끌어 냈다고 보입니다."

이호열 효과가 이렇게 클 줄이야.

투자를 결정할 때는 기대조차 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신화 길드가 돈으로도, 뇌물로도, 인맥으로도.

살 수 없던 신뢰를 되찾아 가고 있었으니까.

모든 브리핑이 끝나자 백이설이 입을 열었다.

"이젠 어디 가서 신화 묻었단 소리 안 들을 수 있겠죠?"

"어유, 그래야죠."

"솔직히 아직 부족하긴 한데. 제가 더 노력하겠습니다."

오가는 너스레.

작게 터져 나오는 웃음.

경직되지 않은 회의실 분위기.

달라진 신화 길드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달칵─

백이설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 놓인 오늘 자 신문.

그 첫 면엔 역시나 호열의 얼굴이 인쇄되어 있었다.

-세계수의 등장... 이호열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

-AAU측, "우리도 당혹스럽다. 이호열과 대화 원해...."

-가온, 이나즈마, 버서커... 최강의 길드 연합 탄생하나?

자연스럽게 신문으로 향하는 손.

"흠."

백이설은 신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니, 정확히는 호열의 기사 사진을 바라봤다.

회의 때보다도 진지한 표정으로.

"어떻게 된 게 굴욕 사진 하나가 없지?"

포털사이트에 '백이설'만 입력해도 완성되는 자동 검색어.

[백이설 굴욕]

"완벽하셔라."

문전박대를 박하던 자신의 모습은 영원히 인터넷에 떠돌게 됐는데 말이다.

물론, 그보다 수치스러운 흑역사는 따로 있었다.

연예계, 정치계 가리지 않고 흩날리던 염문설.

더 나아가서는 팜므파탈이다, 뭐다.

지금은 가린 손 틈 사이로 봐도 아찔한 복장들까지.

"...물론, 그 꼴을 떠올리면 평생 감사드려야겠지만."

그래, 굴욕 사진을 박제시켰든 어쨌든.

백이설에게 호열은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호열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아직도 저런 꼴로...!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진심."

오소소.

백이설은 닭살이 돋아난 팔뚝을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또 한 번 호열의 사진을 바라봤다.

"...."

은발의 머리카락.

고고한 시선.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

그 표정이 한결같아서일까?

위아래, 어느 각도에서도 흠잡을 곳이 없다.

그러나 백이설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사진이 실물은 못 따라가네."

단정한 블라우스와 스커트.

신문을 응시하는 심각한 표정까지.

누가 봐도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는 CEO처럼 보이는 백이설.

"사진으론 그 기품과 격식을 표현할 수 없지."

괜히 호멘호멘 말하는 게 아니라니까?

그녀 또한 호열교의 신자였다니.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백이설은 단지 중요한 일과를 수행 중인 것처럼 보였으니까.

눈치가 있다면 누구도 방해할 수 없다는 말이다.

지이잉─

그러나 눈치가 없게도.

백이설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확인하니 메시지였다.

발신인을 확인한 백이설은 흠칫했다.

"장현도...?"

장선 그룹 후계자, 장현도.

자신과 같은 재계의 인물이기에.

이름 정도는 알고 있는 게 당연하지만.

"글쎄요."

그와는 사적인 연락을 주고받을 사이가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간단하다.

기억이 흐릿한 시기.

악마, 서큐버스에게 빙의된 시점에 쌓은 인연이라는 거겠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

그 뒷수습 때문에 꽤나 고생했었지.

서큐버스가 사라지면서 음몽의 상태이상 효과도.

각자의 기억도 사라졌지만.

피해자들에겐 증거가 남아있었다.

자신의 연락처를 비롯해 나눴던 메시지가 남아있었다는 뜻.

"또 무슨 소리를 할지 벌써부터...."

꿈에서 당신을 봤다.

아무래도 우린 인연인 것 같다.

혹시 우리가 그렇고 그런 관계였냐.

하필이면 빙의가 돼도 서큐버스였을까?

백이설이 탄식하며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내, 그런 백이설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서큐버스. 구미가 당길 제안을 하지. 마왕과 관련된 일이다.

"...서큐버스?"

장현도가 자신을 서큐버스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장현도는 서큐버스의 피해자가 아니다.

장현도는 악마 혹은 과거 자신과 같은 악마 빙의자다.

그것도 모자라서 마왕과 관련된 일이라니...?

백이설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악마, 마왕.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장현도에게 모종의 계획이 있다는 것.

그 계획이 마왕과 관련됐고,

다른 악마를 끌어들여야 할 정도로 큰 계획이라는 것까지.

그러나 장현도, 악마에겐 한 가지 부족했다.

눈치가.

백이설은 망설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호열에게 곧장 전화를....

"...아."

걸려다가 우선, 문자를 남겼다.

그래,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예절을 지켜야 하니까.

*

장선 그룹 후계자, 장현도.

그리고 마왕.

두 단어만으로도 확신할 수 있었다.

'찾았다.'

악마 숭배자, 그리고 악마.

너희도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구나?

재벌의 힘을 빌릴 생각을 하다니.

적어도 대한민국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군.

그러나 아무리 빠르게 이쪽 세계에 적응한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이 나라에서 태어난 나보다 잘 알 수 있을까?'

아르카나 대륙이면 몰라도.

현실에선 나도 먹어온 짬밥이 있는데 말이야.

"당장 좌표로 통하는 포탈을 열겠습니다."

마르셀로가 비장하게 말했다.

그 심정은 알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악마가 장현도의 몸을 차지한 이유는 간단했으니까.

'믿고 있는 거지.'

멀리 갈 것도 없었다.

백이설, 그리고 마에다였던가.

일본의 정치인에게 빙의했던 악마도 똑같았으니까.

'사회라는 울타리가 자신을 지켜줄 거라고.'

플레이어가 됐든, 아르카나인이 됐든.

자신은 장현도의 탈을 뒤집어쓴 상황.

장현도의 권력을 휘두르는 자신을 건드리는 것?

누구에게나 부담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써먹는 것이다.

"내부 사정을 외부에 떠벌릴 필요는 없겠지."

게다가 이건 마탑 내부 사정이었다.

그것도 마탑의 모순과 관련된 내부 사정.

세상에 알려져서 좋을 건 조금도 없겠지.

'예전 같았으면 골치 좀 썩었겠는데.'

악마가 갈수록 영악해진다고 징징댔을지도 몰라.

그러나.

'지금의 나한테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거든.'

그랬다.

그저 울타리가 존재하지 않는 장소에.

장현도를 데려다 놓으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고오오오─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뱅그릿 톰을 추적하던 마르셀로처럼 일대를 탐색했다.

물론, 내 하찮은 마력으로는 마르셀로처럼 지구 전체를 탐색하는 것은 역부족. 그러나 그 범위를 서울로 한정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장현도는 서울에 있는 게 확실하니까.'

간섭과 발현 또한 크게 특별할 것 없다.

데려다 놓는다고 생각하면 거창하지만.

오고 가는 통로.

그저 포탈을 발현한다고 생각하면 되거든.

쉽게 말하자면 장현도에 발밑에 포탈을 발현한다는 것이다.

자, 이렇게.

"으, 으아아악! 씨발. 깜짝이야. 뭐, 뭐야?!"

나는 바닥을 나뒹구는 장현도를 바라봤다.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그래, 이곳은 마탑.

그중에서도 토파즈 홀.

정기 학회에 앞서 독립된 면담이 이뤄지는.

마탑에서도 지극히 폐쇄적인 장소.

보는 눈도.

CCTV도.

재벌가란 울타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심문에 이보다 적합한 장소도 없다는 말이다.

"심문을 시작하지, 마르셀로."

"시, 심문이라니! 갑자기 뭔 개소리를?!"

"직접 묻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마르셀로의 물음에 나는 긍지 넘치는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사냥감과 말을 섞지 않는다네."

◈ 96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1)

큰 키.

앙상한 허우대.

피골이 상접한 얼굴.

그런 마르셀로가 주도하는 심문은 예상과 다르게 박력이 넘쳤다.

떠넘긴 게 조금도 후회되지 않을 정도로.

무엇보다 마탑과 관련된 일이라 그런가.

자비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지금 카림제바의 행방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모른다고 말했잖아? 그 오만한 노친네가 나한테 자기 은신처를 알려줄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거야?"

"그 말이 진심인지 확인하겠습니다."

"으, 으으으윽!!"

파지지직─!

보는 사람까지 저릿해지는 마법.

마르셀로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장현도.

아니, 악마를 고문했다.

다시금 깨닫는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되는 존재라는 걸.

'어떤 면에선 피도 눈물도 없다는 게 이해가 된다.'

물론, 이 심문 과정을.

태연하게 지켜보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

나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그랑펠이 악마에게 동정심을 느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뭐, 뭐라고 말 좀...!!"

날 그런 눈으로 바라봐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심문 끝에 얻어낸 정보를 정리해 본다.

'진명(眞名)의 악마, 아캄파탐.'

그 아캄파탐이 바로 장현도에게 빙의한 악마였다.

진명의 악마라고 하니까 거창해 보이지만, 크게 다를 건 없겠지. 악마 중 네임드 몬스터로 분류되는 이들이 바로 진명의 악마였으니까.

'같은 레벨 대의 악마보다 강하다.'

네임드 몬스터라.

[포식자의 늪지대] 균열에서 지겹게 구경했었지.

평범한 몬스터도 네임드란 이름이 붙으면 그 패턴이 지랄 맞아지는데.

악마는 그보다 더하면 더한 게 당연하다.

"들어서 아시지 않습니까? 애초에 저는 카림제바, 그 노친네에게 협력할 생각 자체가 없었습니다! 뒤통수 칠 생각은 했었어도. 저도 상위 마왕이 부활하는 건 원치 않는단 말입니다!"

아캄파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그 주둥이가 지랄 맞군.'

마탑이 원하는 건 자신 같은 잔챙이가 아니다.

악마 숭배자, 카림제바다.

마르셀로의 질문에서 그 사실을 깨닫고는.

교묘하게 논점을 틀어대고 있었다.

"맹세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건 전부 말했습니다."

카림제바도 이 화술에 넘어간 거겠지.

그것도 모자라서 뒤통수까지 맞을 뻔했고 말이야.

뭐, 덕분에 카림제바의 계획은 전부 파악하게 됐다.

"동시다발적인 균열 생성이라...."

그랬다.

카림제바가 준비하는 건 상위 마왕의 소환 의식.

프로스트, 데카라비아가 그랬던 것처럼.

상위 마왕의 부활에도 그 제물이 필요할 테니까.

카림제바를 비롯한 악마 숭배자들은 균열을 열고.

균열을 통해 제물을 충당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뱅그릿 선임이 제물이 될 뻔했단 소리겠군요."

감히 마탑의 선임 마법사를....

다시금 살기를 띠는 마르셀로의 눈매.

마르셀로가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했다.

"카림제바를 제외한 두 명의 악마 숭배자가 무간에 갇힌 지금. 그도 계획했던 것처럼 많은 균열을 통제할 수 있는 여력은 없을 겁니다."

거기에 대해선 나도 동감하는바.

하지만 계획보단 적은 균열이라고 해도.

나는 그 균열들의 적정 레벨을 짐작할 수 있었다.

[깨진 차원의 틈]

[적정 레벨 : Lv.900]

물론, 선임 마법사 뱅그릿을 위한 함정이었으니까.

그 적정 레벨이 유달리 높았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카림제바라는 적정 레벨보다 더 큰 변수가 있었다.

'막말로 균열에 카림제바가 대기하고 있다고 쳐봐.'

플레이어들이 진입하는 순간?

그냥 곧바로 상위 마왕의 제물행이 되겠지.

문제는 카림제바가 그렇게 행동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아캄파탐에게 모든 계획을 털어놓은 게 그 증거.

카림제바는 궁지에 몰린 상태였으니까.

"저는 그저 협박에 이기지 못해서...! 당신, 이호열 씨의 정보를 넘겨주겠다고 한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마탑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빌어먹게도. 어째서 서큐버스가...?"

아캄파탐의 말대로.

백이설에게 연락을 받지 못했더라면 꽤 먼 길을 돌아갈 뻔했군. 그러나 그런 백이설을 [구마의식]을 통해 사람으로 만든 것 또한 나였다.

그런 의미에서.

'잘했다, 이호열.'

과거의 나를 또 한 번 칭찬할 수밖에.

이젠 두꺼워질 대로 두꺼워진 철면피.

이런 건 이제 자화자찬 축에도 낄 수 없는 일이다.

그걸 증명하듯 나는 태연하게 감회에 젖었다.

'예전 같았으면 끔찍했겠지. 진짜.'

무지막지한 적정 레벨을 자랑하는 균열이 세계 곳곳에 동시에 나타나고, 그런 균열에 카림제바라는 괴물이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 심지어 그런 균열을 클리어하지 못한다면 상위 마왕이 소환될 수도 있단다.

...와씨. 겁나게 암울하잖아?

그것도 모자라서 내 레벨은 고작 324레벨.

혼자서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는 건지.

엄두도 못 낼 정도의 스케일이란 거겠지.

그러나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래, 적어도 내겐 권한이 있었으니까.

"이 시간부로 선임 마법사들의 균열 접근을 허가하겠네. 마르셀로."

그래, 마법사들의 출탑에 관한 전권이...!

카림제바는 마탑의 대역죄인.

그 대역죄인을 확보하기 위한 일이니까.

절차는 물론, 긍지에도 어긋나는 출탑 허가가 아니다.

그래,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당당하게.

마탑의 위세를 부릴 수 있다는 말이다.

'마탑 퀘스트는 기본.'

카림제바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균열 또한 클리어하게 될 터.

'그를 통해 획득할 경험치, 전리품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겠지.'

물론, 나의 사심이 겉으로 드러나는 법은 없었다.

마르셀로가 대답했다.

"준비를 서두르겠습니다. 곧 카림제바도 알게 될 테니까요."

흠칫─

나는 움찔거리는 장현도를 바라봤다.

알게 된다고?

무엇을?

전부 사실대로 말했잖아?

장현도. 아니, 아캄파탐은 그렇게 되묻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런 아캄파탐을 차갑게 바라봤다.

'입만 잘 털면 뭐 하냐.'

정작 눈치가 없는데.

.

.

.

빠득─

아캄파탐은 고개를 숙인 채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카림제바를 팔아넘긴 덕분에.

자신에 대한 경계심은 줄어든 상황.

아캄파탐은 일단 안심했다.

'적어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겠어.'

그런 안도가 들었지만, 치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미친 마탑 마법사 놈들.'

카림제바도 그렇고, 이 뼈다귀 같은 놈도 그렇고.

하나같이 무식하다.

이런 마력을 휘두르면서 감정의 동요조차 없다니.

자신들이 뿜어대는 마력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뭐야?'

이호열.

저 녀석에게선 카림제바나 뼈다귀 같은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캄파탐은 마법사란 족속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의 마력을 과시했으면 과시했지.

결코 숨기지 않는 게 마법사란 말이다.

그런데....

마력을 숨기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만한 마력이 없다는 것인가?

어느 쪽이 됐든, 둘 다 말이 되지 않았다.

'그야 아까부터 꼬박꼬박.'

이 뼈다귀가 이호열에게 존댓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모자라서 그 태도가 아주 공손하다.

부정적인 감정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라는 말이었다.

'됐어.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더 생각해 봤자 머리만 복잡해졌기에.

아캄파탐은 생각을 접었다.

그 대신 자신 있는 쪽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나저나, 아캄파탐 님을 앞에 두고 못 하는 말이 없군.'

이호열과 뼈다귀, 마르셀로.

둘이 나누는 대화 덕분에 상황은 대충 파악했다.

'마탑, 무간이라는 공간에 갇힌 거다.'

카림제바.

그가 찾던 동료 악마 숭배자들이 말이야.

그건 아캄파탐으로서도 의외였다.

카림제바의 동료라면 분명.

그에 필적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을 터.

'그런 괴물들이 제압을 당했단 건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곳이냐, 마탑은.

그런 마탑에 끌려왔다 생각하니.

또다시 소름이 돋았지만....

어쨌든, 귀중한 정보를 획득했다.

'이걸로 돌아가도 괜찮다.'

카림제바의 모든 계획을 발설한 마당에.

그와 만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녀석이 아니니까.

카림제바가 찾아왔을 때.

뭐라도 해줄 말이 있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오늘 일은 비밀로 해야겠지만.'

카림제바를 속여넘기는 것?

자신 있었다.

녀석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이미 한 차례 속여넘긴 인간에 불과하다.

두 번째는 오히려 더 쉽겠지.

'그러기 위해선 당장은 닥치고 있어야 한다.'

아캄파탐은 숨을 죽였다.

그래, 이곳에서 살아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던 중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를 서두르겠습니다. 곧 카림제바도 알게 될 테니까요."

"?"

녀석이 알게 된다고?

뭘 알게 된다는 거지?

나는 이 일에 대해서 닥치고 있을 건데?

"!"

아캄파탐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가 눈을 마주쳤다.

호열과.

그리고 떠올렸다.

그건 흘러 지나가듯 들렸던 음성.

-"나는 사냥감과 말을 섞지 않는다네."

그랬다.

그건 먹잇감을 바라보는 천적의 시선이었다.

아캄파탐의 동공이 새까맣게 변했다.

"너, 너는?"

덜덜덜─

화룡, 카림제바의 앞에서도 멀쩡했던 혀가 말을 듣지 않았다.

카림제바조차 속여넘겼던 간사한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머리조차 사고하기를 멈췄다.

그래, 이건 저항할 수 없는 떨림.

공포였다.

그런 아캄파탐에게 호열이 말했다.

"내게는 보인다."

"...?"

"그 어리석은 착각이."

착각.

무슨 뜻인지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살아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게 착각이었다...?'

그러나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사냥감과 말을 '섞지' 않는다.

방금은 대화가 아닌 일방적인 선언이었다는 듯.

호열의 행동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으니까.

아캄파탐은 경악했다.

'이, 이렇게 끝난다고? 나, 아캄파탐이?'

서걱─

물론, 그 경악조차 내뱉을 수 없었지만.

*

"그가 내부 사정을 알아서 좋을 건 없겠죠."

마르셀로는 장현도의 기억을 지워버렸다.

그 기억을 어디까지 지운 건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만.

되도록 옛날 기억까지 지워버렸으면 좋겠는데.

기왕이면 삐뚤어지기 전까지 말이야.

'장현도는 다른 의미로 유명하니까.'

마약, 음주운전, 갑질.

아캄파탐에게 빙의당하기 전에도 장현도는 온갖 구설수로 신문에 오르내리던 인물이었다.

그 망나니가 제 버릇 남 못 주고 다시 설치기라도 해봐라.

'카림제바가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겠냐고.'

아캄파탐의 기억은 지워졌으니까.

서로 말이 통할 리가 없을 터.

장현도가 화풀이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거지.

물론, 그건 장현도가 개과천선을 하느냐.

그의 기억이 어디까지 남아있느냐에 달린 일이다.

'그나저나.'

[천적관계].

그리고 [구마의식]을 발동하면서 체감하게 됐다.

'이런 걸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런데.'

아무래도 나는 [포식자의 늪지대]를 클리어하면서 상당히 성장한 모양이었다.

물론, [포식자의 늪지대]에 악마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간만에 발동된 [천적관계]의 효과가 극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있겠지만.

그걸 생각해도 이렇게 수월하게 사냥할 수 있을 줄이야.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진명의 악마, 아캄파탐.

녀석을 처치하면서 레벨은 9레벨이 상승했다.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333]

[능력치]

근력 : 60 / 민첩 : 65 / 마력 : 271 / 행운 : 6 / 심미 : 下

[보유 포인트 : 9]

습득한 경험치량으로 추측했을 때.

아캄파탐은 최소 560레벨은 되겠지.

그런 녀석을 처치하는 데엔.

거창한 마법도 필요하지도 않았다.

──────

은 마스터리 (81%)

──────

그냥 스킬 숙련도도 올릴 겸.

대충 형태를 바꾼 은으로 공격한 게 전부였으니까.

그런데 예상치도 못한 치명타가 터졌다.

[진명의 악마 아캄파탐에게 '치명타'가 발생합니다.]

그저 운이 좋았나.

아니면 이것도 행운에 포인트를 투자한 덕분인가.

무심하게 생각하고 넘길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천적관계]. 발동 반경만 늘어난 게 아니라는 건가.'

레벨이 높아질수록.

더욱더 광활해져 가는 [천적관계]의 발동 반경처럼.

나와 악마의 [천적관계]도 더욱 확고해졌다는 거겠지.

'악마와의 전투에서 더더욱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건가.'

나는 뻔뻔하게 말했다.

"그러나 만족할 수 없다."

욕심이 과한 게 아니라 아직 한참 부족하거든.

오래 거슬러 갈 것도 없었다.

[포식자의 늪지대]에서만 하더라도.

나는 얼마나 구질구질한 사투를 벌였던가?

검술도 모자라서 말이야.

부족한 마력 때문에 연잎을 타고 다니질 않나.

순수한 정령한테 계급 사회의 쓴맛을 알려주질 않나....

'그러니까 자만할 수 없다.'

언제나 자신감 넘치는 그랑펠은 몰라도.

나는 끝까지 이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주제 파악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스스스─

양피지에 떠오르는 글자.

──────

요청하신 마도구의 마법부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습니다.

──────

달칵─

내려놓는 찻잔.

[비약초, '별꽃뿌리'의 효과로 지능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카림제바를 처분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말이야.

그건 마탑의 선임 마법사들 또한 마찬가지겠지.

그러니까 다시 한번 다짐한다.

주제 파악하겠노라.

마탑이란 든든한 지원군을 제대로 활용하겠노라.

내겐 고래 싸움에 휘말려 비명횡사하고 싶은 마음 따윈 없었으니까.

.

.

.

그래, 그렇게 다짐했건만.

이런 과잉 대접을 원한 건 또 아니었는데.

'...든든함을 넘어서 부담스럽단 말이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내색은 할 수 없다.

나는 마주 앉은 중년 남성을 바라봤다.

그가 인자한 미소를 띠며 내게 말했다.

"이런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군. 내 소개를 하겠네."

사내치고는 작은 체구.

그러나 그의 몸에서 일렁이는 초월적인 마력이 그가 누구인지를.

다시금 내게 상기시키게 한다.

그러나 굽힘은 없다.

'빌어먹을 긍지가.'

이래서 회사를 때려치운 건데, 내가!

속에서 메아리치는 원망이 무색하게도.

나는 건방지게도 입을 열었다.

"아니, 소개는 생략하지."

"오?"

"원로 마법사, 세니오스. 나를 찾아온 용건을 말하게."

노블레스 오블리쥬.

마탑이 현재 상태에 이르기까지.

그저 방관만 해온 두 명의 원로 마법사를.

그랑펠의 긍지가 곱게 여길 리 없었으니까.

존댓말은 고사하고 고운 말이 나올 수가 없다는 거겠지.

나는 그저 지그시 눈을 감고 싶은 심정이었다.

'따지자면 상사한테.... 짤려도 할 말이 없다. 정말.'

마탑에도 퇴직금 제도가 있을까.

있다면 뭘 챙겨주려나.

대여한 마도구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러나 각오했던 것과 다른 대답이 들려왔다.

"용건이라 간단하지. 허가를 받기 위함이네."

...잠깐, 허가라니?

원로 마법사 양반이 나한테 받을 허가가 뭐가 있단 말인가.

나는 생각하다가 떠올리고 말았다.

나에게 주어진 출탑의 전권을.

세니오스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원로 마법사, 세니오스가 정식으로 출탑의 허가를 요청하네."

더없이 진심이라는 듯.

절차에 따라서.

그 목적까지 덧붙였다.

"목적은 마탑의 대역죄인, 카림제바를 내 손으로 처단하기 위함일세."

...아니, 그쪽은 지원군 지원 자격을 훌쩍 넘기셨는데요?

육성으로 헉 소리가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지만.

내색은 할 수 없는 법.

달칵─

나는 태연하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보다 구체적인 사유가 필요하겠군."

◈ 97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2)

둥실─

요동치는 마력.

장현도의 몸뚱이가 깃털처럼 허공에 떠오른다.

"컥컥."

짙은 마력 농도에 산소조차 희박해진 공간.

장현도가 헐떡댔지만 카림제바는 미동도 없었다.

그저 장현도의 몸을 탐색할 뿐.

'마력흔은 느껴지지 않는다.'

마르셀로의 철저한 일 처리.

단서가 될만한 마력흔은 조금도 남겨두지 않는 것이 기본.

제아무리 카림제바라고 해도 남지 않은 마력흔을 추적할 재주는 없었다.

빠직─

카림제바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감히 나를 기만한 건가, 아캄파탐."

아캄파탐이 도망쳤다.

카림제바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우당탕!

"하찮은 인간 새끼."

허공에서 떨어지는 장현도.

"으으으억...."

기절한 장현도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감히 자신에게 반말을 지껄이는 걸로 봐선.

무엇 하나 제대로 기억하는 게 없다는 거겠지.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어째서.

갑자기 아캄파탐은 모습을 감췄을까?

카림제바는 용암처럼 들끓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결국, 짚이는 바는 하나밖에 없었다.

'악마는 악마에 불과하다는 건가?'

악마란 모든 것을 기만하는 존재.

설령 그게 자신들의 왕.

마왕이라고 할지라도 그 본성을 버릴 수 없다는 거겠지.

고작 진명의 악마 따위에게 신경을 쓰고 싶진 않았지만.

아캄파탐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구체적인 계획을 들먹이던 것도 이 때문이었나?'

그것도 모자라.

일 처리에 관해서는.

자신더러 손을 떼고 있으라고 요청했던 아캄파탐이었다.

카림제바는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악마를 믿다니, 미련했군."

그리고 지금에서야 알게 됐다.

장현도의 몸에 아캄파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엄연한 실책이다."

악마를 신뢰한 것이 나의 실수였다.

카림제바는 인정했다.

그러나 자책은 길지 않았다.

'헛되이 보낸 시간 동안 확실히 깨달았다.'

자신에게 더는 동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캄파탐이 사라진 지금.

마탑의 정보를 입수할 방법은 없었거늘.

"나는 심히 유감스럽네."

텔레파시는 여전히 감감무소식.

그 덕분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의 자의가 됐든, 타의가 됐든.

두 명의 원로 마법사.

그들과는 앞으로 함께 할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을.

스윽─

카림제바는 손으로 한 차례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로써 성공은 가능성은 크게 낮아졌겠군."

어지간하면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말이지.

번뜩─

그러나 카림제바의 눈동자는 여전히 선명히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작열하는 불꽃처럼.

그래, 그건 영락없는 마법사의 눈빛.

"허나, 쉽게 풀렸다면 그건 그거대로 이상한 일이겠지."

진리를 갈망하는 마법사의 눈빛이었다.

"진정한 진리를 묵도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진정한 진리'로 향하는 길.

설령, 그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고 해도.

아캄파탐이 모든 계획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 행동이 자신의 최후로 앞당기는 일이라고 해도.

"좋아. 이보다 화려한 장례식도 없겠군."

마법사, 카림제바에게 물러날 생각 따윈 없었다.

진정한 진리를 위해서라면.

"이까짓 육체 따윈 몇 번이든 불태울 수 있으니."

그게 마법사란, 글러 먹은 족속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카림제바는 경고했다.

"한번 붙은 불이란 쉽게 걷잡을 수 없는 법이라네."

마탑?

악마?

모험가?

누가 됐든 상관없었다.

진정한 진리로 향하는 길.

방해되는 건 모조리 불살라 버리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

화룡, 카림제바.

그 거창한 수식어에 맞게 그는 대단한 마법사였다.

뭐, 마법 서적을 들춰볼 필요도 없겠지.

화염마법학 선임 마법사, 벤쉬 윌리엄.

그의 호들갑만 봐도 알 수 있었거든.

"솔직한 심정 같아서는, 저는 빠지고 싶습니다."

크리스탈 홀.

나와 마르셀로.

선임 마법사 전원이 모인 공간에서.

벤쉬는 다짜고짜 선언했다.

"카림제바 님. 아니지, 이젠 마탑의 대역죄인이니까. 카림제바, 그 자식이 괜히 화룡이라 불린 게 아니란 말입니다! 화염마법학에서 그가 남긴 업적은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한 수준. 그 강함은 저 벤쉬 윌리엄조차 절대 따라갈 수 없는...!"

그거야 나도 알고 있다.

여러 우물을 파기 위해서 온갖 마법 서적을 탐독했던 나였다.

당연하게도 화염마법학에 관한 지식 또한 어느 정도 쌓게 됐으니까.

'카림제바라는 이름이 많이 나오긴 했었지.'

거짓말 안 하고.

단락에 한 번씩은 그의 이름이 튀어나올 정도였거든.

자신도 답답한 모양인지, 벤쉬는 가슴팍을 치며 말했다.

퍽퍽.

"물론, 저만 빠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죠. 하지만 화염마법의 특성을 고려해 주십사, 하고 이런 자리에서 말씀을 드린 겁니다."

화염마법의 특성.

역시나 독서는 나의 힘.

그 또한 듣지 않아도 알고 있다.

'위계질서가 확실한 마법이지.'

화염은 더 큰 화염에 삼켜지는 법.

화염마법도 마찬가지였다.

카림제바와 벤쉬의 화염마법이 맞부딪혔다고 가정해 볼까?

'보나 마나 더 큰 화염이 돼서 우리 쪽을 덮치겠지.'

원로 마법사와 선임 마법사의 협공 마법이라.

상상만으로도 벌써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군.

그런 의미에서 벤쉬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대의 편성에 그 점을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사각사각─

마르셀로는 깃털펜을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편성이란 말처럼 그는 선임 마법사들을 어떻게 묶어야 하는가.

고심하는 눈치였다.

각 분야 최고의 마법사들이라고 한들.

그 분야마다 강점과 약점은 반드시 존재하니까.

'플레이어처럼 생각하면.'

균열 진입에 앞서.

클래스에 따라 파티를 구성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

물론, 그렇게 중요한 편성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마탑의 목적은 대역죄인 카림제바를 저지하는 거지, 균열 공략이 아니었으니까.

'카림제바의 위치가 확정되는 순간.'

모든 선임 마법사들이 그곳으로 집결하게 될 테니까.

균열간의 거리?

포탈 정도 되는 마법쯤이야.

물 쓰듯 마력을 써버리는 선임 마법사들에겐 걱정거리도 되지 못하겠지.

'물론, 내 비루한 마력으로는 좀 부담스럽긴 한데....'

어쨌든, 비약초로 최대한 보완을 해보자.

다짐하던 찰나에 마르셀로가 말을 이었다.

"역시, 그 위험변수에 대응할 수 있는 건 마티스 딘 카를 선임밖에 없겠군요."

흑마도학파 선임 마법사, 마티스 딘 카를.

과거, 마티스는 마르셀로와 수석의 자리를 두고 겨루던 마법사였다.

마티스가 마르셀로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티스 선임께서 저와 함께요?"

물론, 벤쉬는 부담스러운 기색이 역력해 보였지만.

"아니, 사실 그렇게까지 심각한 건 아니거든요? 굳이 마티스 수석께 폐를 끼칠 정도는 또 아니지 않나.... 게다가 마티스 수석께서도 저 때문에 조금은 부담스러우시지 않겠습니까?"

선임 마법사들 사이에서 마티스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왜, 능력 증명 퀘스트에서도 말이야.'

마티스가 찬성표를 던지자마자 나머지 선임 마법사들도 그를 따라 찬성표를 던졌을 정도였으니까.

벤쉬는 그런 마티스와 단둘이 행동하는 게 불편하다는 거겠지.

물론, 내가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불펴여어언?!'

팔자도 좋구나, 벤쉬 윌리엄.

대역죄인 처분이라는 마탑의 긍지가 걸린 막중한 임무다.

불편 같은 사소한 감정 따위가 우선시될 수 없단 말이다.

나는 곧장 입을 열었다.

마티스를 바라봤다.

"이 결정이 부담스러운가, 마티스?"

"아닙니다."

"그렇다는군. 벤쉬 윌리엄 선임."

나는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

...나 같은 상사를 상대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하나는 확실했다.

'우리 부장님보다도 피곤한 스타일이겠지.'

그나마 아부라도 통하던 부장님과 다르게.

나한테는 아부도, 심지어 뇌물도 먹히지 않았으니까.

벤쉬의 반응은 더 이상 설명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물어보실 필요까지는...!!"

편성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기어들어가는 말을 끝으로 벤쉬는 입을 다물었다.

물론, 벤쉬에 뒤지지 않게 심상치 않은 표정을 짓는 선임 마법사들도 보였다.

아마도 마티스에 대한 나의 호칭 때문이겠지. 오해할 법도 하다.

'그 대단한 마티스 딘 카를을.'

나는 자연스럽게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으니까.

물론, 거기에도 복잡한 사연이 있단 말이다.

"종잡을 수가 없군요. 정말."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래, 그 사연이 미치도록 궁금하겠지만.

내게는 물론이요.

마티스에게도 물어볼 엄두는 내지 못하겠지.

'나도 절대 말해줄 생각은 없거든.'

그야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면 마티스와의 첫 만남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단 말이다.

당연하게도 나의 흑마법 적성에 대해서도 언급하게 될 터.

흑마법의 원천.

적합한 마력의 근원이 되는 나의 과거.

흑역사를 나는 죽어도 말할 수 없었으니까.

스스슥─

작은 소란 중에도.

마르셀로는 펜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편성이 끝난 모양이었다.

"저는 균열 내부 상황을 지켜보고 지원이 필요한 쪽으로 움직일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남은 건 이호열 수석의 결정뿐입니다."

자연스럽게.

나를 향하는 시선 속에서.

나는 솔직하게 생각했다.

'...마음 같아서는 말이지.'

균열, 하나하나를 전부 순회하고 싶었다.

선임 마법사들이 떨어트릴 콩고물을 모조리 주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그럴만한 여유는 없겠지. 어떤 균열에 어떤 악마가, 또 카림제바가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결심한 대로 선언했다.

"나는 세니오스와 동행하지."

일동 정적─

그런 나의 말에 마치 얼음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

크리스탈 홀이 침묵에 빠졌다.

그러던 중 누군가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세니오스라면? 설마?"

그래, 아마 그 설마가 맞을 것이다.

내가 언급한 세니오스는 마탑의 원로 마법사, 세니오스였으니까.

다를 바 없이 할 말을 잃었던 마르셀로가 정신을 차리곤 물어왔다.

"경, 혹시 세니오스 님이라고 하시면...?"

"그렇다. 원로 마법사, 세니오스다."

"동행이라는 건 세니오스 님께서도 출탑. 그러니까 균열로 향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마탑의 수뇌부.

원로 마법사들과 그나마 교류가 잦았던 만큼.

마르셀로는 그 결정을 이해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지.

이렇게 나설 수 있었으면 말이야.

미리미리 잘 좀 했으면 안 됐느냐고.

-"그대는 알 수 없겠지만. 마법사라는 족속은 이기적이고 오만한 족속이라네. 그건 나이를 먹어도, 이러한 경지에 올라도 변하지 않는 천성이라는 것이지."

그러나 세니오스의 반응은 의외였다.

그냥 시원하게 자신이 글러 먹은 탓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거기에도 구체적인 사연이 이어졌지만.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남의 개인사를 말하는 건.'

격식에 어긋나는 것.

그러니까 나는 사실만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태연하게 말을 잇는 게 전부였다.

"세니오스 또한 내게 출탑의 허가를 요청한바. 그 출탑의 목적은 자신의 손으로 대역죄인, 카림제바를 처분하는 것. 나는 세니오스의 직위를 고려하지 않고 그 목적을 판단하여 그의 출탑을 허가했네."

나의 말에 크리스탈 홀에 한차례 소란이 일었다.

"세니오스 님께서 이호열 수석께 허락을 받았다고?"

"출탑의 전권을 이호열 수석께서 쥐고 있긴 하지만...."

"아무리 직위를 따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건...."

이렇게까지 절차를 중시할 줄이야.

다들 경악하고 있는 거겠지.

물론, 나 또한 해고당해도 할 말 없는.

나의 싹수에 혀를 내두르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이런 선임 마법사들의 웅성거림 정도야.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놀랍지만, 희소식이군요."

과연, 마르셀로는 빠르게 판단을 끝낸 모양.

그러고는 내게 말을 이었다.

"허나, 경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건 또 아닐걸?

'세니오스 그 양반, 생긴 거랑 다르거든.'

하지만 내 생각이 어쨌든.

마르셀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봐도 마르셀로는 나를 과대평가하는 게 확실하군.

그러나 굳이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랑펠에게 겸손이란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과소평가에는 증명을. 과대평가는 기어코 현실로 만들어 내고야 말았으니까.』

나 또한.

이렇게 생겨먹은 인간이라는 말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설명을 대신할 순 없었다.

경악이 천천히 가시려던 순간.

누군가 근본적인 의문을 떠올리고 말았으니까.

"그래요. 절차니까 이해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이호열 수석께선 분명 원로 마법사, 세니오스 님을.... 그냥 세니오스라고 부르시지 않으셨나요?"

긍지가 세니오스를 인정할 수 없다.

그 복잡한 사연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마티스와 마찬가지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단 말이다.

결국, 이번에도 애꿎은 사실을 들먹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뻔뻔하게 지껄였다.

"내가 감독하는 출탑에서 직위는 고려되지 않는다."

다시금 깨닫는다.

기왕 미칠 거면.

누구도 건드릴 수 없게.

제대로 미치는 게 낫다고.

"불만이 있다면 절차에 따라 이의를 제기하도록."

또각─

.

.

.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에 새 글이 올라왔다.

-수요일.

오늘은 목요일이 아니었다.

예정된 신규 업데이트가 아닌 긴급 업데이트란 뜻.

그 말이 뜻하는 바를.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망설임은 없었다.

정렬하는 브로치의 각도.

가다듬는 옷매무새.

차분하게 내려놓는 찻잔까지.

나는 깃털펜으로 양피지에 휘갈겼다.

──────

이 시간부로 대역죄인, 카림제바의 처분을 시작하겠다.

──────

원로, 세니오스. 수석, 마르셀로. 선임 마법사 전원.

──────

집결.

──────

◈ 98화. 극비사항 (1)

AAU 북아메리카 지부.

빌딩의 불빛은 밤에도 꺼지지 않았다.

균열이란 예정됐지만, 예방할 수 없는 위협.

언제나 발 빠르게 대응해야만 했으니까.

"끄으으─!"

통제실에 기지개 켜는 소리가 울렸다.

피로가 쏟아졌지만, 이번 주는 운이 좋았다.

"그래도 수요일은 나쁘지 않지. 안 그래?"

"몰라. 나 바쁘다."

"뭔데, 좋은 날에 뭘 그렇게 두드리고 있는 거야?"

내일은 목요일.

신규 업데이트가 떠오르는 날.

사명감이 투철한 AAU 직원이라고 해도 목요일 근무를 반길 순 없으리라.

사태 파악이다, 높으신 분들한테 브리핑이다, 뭐다. 목요일엔 정말이지, 숨 돌릴 틈도 없었으니까.

"부지런도 하셔라. 벌써 리포트 쓰는 거야?"

"누구처럼 아까운 시간을 버릴 생각은 없어서."

"뭐든, 쉬엄쉬엄 해야지. 네가 너무 열정적인 거라고."

그래서 뭘 쓰고 있는 거지?

슬쩍─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봤더니 바로 알 것 같았다.

"세계수? 그 떡밥을 파고 있는 거야?"

포식자의 늪지대.

그 균열에서 피어났다는 세계수.

그건 AAU에서도 가장 뜨거운 연구 대상 중 하나였다.

물론, 노력에도 알아낸 정보는 없었지만.

"노력하는 건 좋은데 말이야. 그걸 두드린다고 뭐가 달라질까? 왜, 세계수에 관한 건 진짜 레이먼 션이나 알고 있을 정보잖아."

"나도 알거든. 그냥 정리하는 거야."

타다다닥─

말하는 와중에도.

카트리나의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뭐,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고."

나중에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

그 말에 그 내용을 힐끗거리던 남자가 말했다.

"근데, 그거 그냥 이호열 찬양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문장마다 이호열이란 이름이 빠지지 않잖아?

그래도 뭐라 할 말은 없었다.

실제로 세계수의 씨앗을 발견한 것도.

그 씨앗을 싹 틔운 것도.

모두 호열이 해낸 일이었으니까.

"혹시 나중에 써먹는다는 게.... 이호열 위인전이나 그런 거 써서 팔아먹는다는 뜻?"

"뭔 소리야. 넷튜브에 동영상을 올리면 올렸지. 요새 그런 걸 누가 본다고."

"...동영상 올릴 생각은 했구나, 벌써."

절레절레─

여기에도 호열교 신자가 있었구만.

혀를 내두르는 사내에게 카트리나는 대꾸했다.

"그리고 일종의 직업병이라는 거지."

직업병?

그 소리에 사내는 깨달았다.

"아아! 코스모 재직 때 퀘스트 담당 부서였다고 그랬지?"

"오케이."

"그럼 인정이지. 아니, 이럴 게 아니라 방해 그만해야겠네."

퀘스트 담당 부서.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

아르카나의 크고 작은 퀘스트 라인을 구성하던 부서였다.

사내는 입을 다물고는 생각했다.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이었다면.

지금쯤 아르카나 대륙에선 엄청난 업적을 세운 플레이어.

이호열의 이름이 울려 퍼지고 있겠지.

"새로운 영웅 탄생. 사건 하나만으로도 연계될 수 있는 퀘스트가 무궁무진한데. 이건 세계수까지 엮여있으니까. 설마, 나중에 써먹을 수 있다는 게 그런 뜻이었어?"

결국, 모든 퀘스트엔 스토리가 존재했으니까.

호열의 스토리를 정리하며 떠오른 영감을 정리하는 거겠지.

그리고 직업병을 발휘해서....

"역시, 다음에 떠오를 퀘스트를 예상해 보는 거 맞지?"

타다다닥─

카트리나는 자판을 두드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예상이 맞아떨어질 가능성은 1프로 미만이지만."

티끌만큼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해봐야겠지.

매 순간, 목숨을 걸고 균열에 진입하는 플레이어들과 달리.

AAU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으니까.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고.'

아르카나 대륙은 또 하나의 현실이자 세계.

게임이던 시절과 똑같을 순 없겠지만. 이호열이 해낸 일의 수준을 고려한다면, 그 업적은 대륙 전체를 뒤흔들 정도가 확실했다.

'게다가 아르카나 대륙의 시간은 현실보다 빠르니까. 지금쯤이면 이호열의 업적이 대륙 전체에 퍼지고도 남았을 거야.'

과연, 이호열의 행동이 아르카나 대륙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그래, 쉴 새 없이 자판을 두드리는 이유는 그 가능성을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후우. 당분 땡기네."

물론, 머리가 깨질 정도로 쉽지 않았다.

현재 아르카나 대륙은 쑥대밭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는 달라도 완전히 다를 테니까.

그런 변수를 전부 고려하고 대륙의 흐름을 예상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란 거지.

그래도 하나만큼은 장담할 수 있었다.

'세계수와 관련된 그 '종족'만큼은 어떻게든 움직이겠지.'

엘프.

물론,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만.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의 등장만으로 세상은 뒤집어질 수밖에 없으리란 것을.

"어라?"

"?"

"아씨. 또 뭔데. 진짜...!!"

하지만 그 이전에.

세상은 뒤집어지고 말았다.

삐삐삐─

통제실, 아니 AAU 지부 전체에 울리는 경고음.

사내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니, 수요일 긴급 업데이트는 진짜 선 넘었지!!"

울분을 토해내면서도 대응은 신속했다.

업데이트 내역을 확인하고.

곧바로....

곧바로....

곧바로 다음 행동으로 넘어가야 했거늘.

"미친."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이 동시에 멈춰버리고 말았다.

"이거 그때 그 균열이잖아."

그때 그 균열.

그랬다.

[깨진 차원의 틈].

지금처럼 긴급 업데이트와 함께 생성됐던 그 균열.

떠오른 긴급 업데이트 내역에는.

그때처럼 [깨진 차원의 틈]이라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 업데이트 내역의 길이가 심상치 않았다.

──────

신규 균열, '깨진 차원의 틈 : ה'이 추가됩니다.

신규 균열, '깨진 차원의 틈 : מ'이 추가됩니다.

신규 균열, '깨진 차원의 틈 : ל'이 추가됩니다.

신규 균열, '깨진 차원의 틈 : ש'이 추가됩니다....

──────

자판을 두드리던 손도.

재잘거리던 입도 멈춰버렸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 적정 레벨은 적혀있지 않았지만, 짐작할 수 있는 게 당연하다.

[깨진 차원의 틈] 균열은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그 적정 레벨을 예측해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적정 레벨 : Lv.900]

경험을 통한 지식이 있었지만.

당혹감을 떨쳐낼 순 없었다.

설령, 적정 레벨이 900레벨 수준은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생성된 균열의 개수가 너무나도 많았으니까.

그것도 모자라 균열의 적정 레벨이 상향될 수 있다는 사실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으니까.

사내가 중얼거렸다.

"...이건 우리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지부....

아니, AAU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전 세계의 합의가 필요할 정도의 대재앙이었다.

소식은 빠르게 전해졌다.

일찌감치 극단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럼 그냥 균열이 붕괴하게 놔두자는 겁니까?"

"방법이 있습니까? 이건 미사일로 쓸어버리는 편이 나을 정도의 재앙이란 말입니다. 세계를 위해서 작은 희생은 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 균열의 위치도 특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런 말씀은 삼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니요. 위치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설령 나의 조국, 수도의 한복판에 균열이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내 결정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어쩔 수 없다는 것.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평소 같았더라면.

언급도 되지 않았을 초강수가 진지하게 논의됐다.

그래,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건 플레이어들이 나설 수 있는 수준이 아니잖아?"

아르카나의 홈페이지에 떠오른 긴급 업데이트.

플레이어는 물론, 일반인들도 그 내역을 입수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어떤 커뮤니티를 둘러봐도 분위기는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아니, [포식자의 늪지대]에서 랭커들 못 봤음??

-적정 레벨 500짜리 균열에서도 피똥을 쌌는데 다들

-진짜 선 넘었다 이번 업데이트는....

-심지어 이번 균열은 하나도 아니잖아ㅠㅠㅠㅠㅠ

그러나 누구보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는 건 플레이어들이었다.

천하통일.

길드 마스터, 류오쥔춘은 일찌감치 이번 균열에 관한 관심을 끈 상태였다.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니다."

양민들의 사정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미련하게 목숨을 버릴 생각은 없었으니까.

붕괴된 균열에 미사일을 폭격하든 핵폭탄을 투여하든.

자신들이 신경 쓸 일이 아니란 것이다.

"진짜 악랄하네."

"이것도 레이먼 션 짓이야?"

"갑자기 뜬 긴급 업데이트니까. 예정된 일이 아니란 거겠지."

유스라 왕국.

그리고 프로스트.

그곳에 머물던 플레이어들도 업데이트 내역을 접했다.

제아무리 레벨과 명성에 목이 말랐다고 하더라도.

이번 균열에 진입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러나 말했다시피.

경험을 통해 다들 알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균열을.

클리어했던 한 명의 플레이어를.

"결국, 이번에도 이호열밖에 없는 건가?"

그래.

적정 레벨 900~1,000레벨.

[깨진 차원의 틈]을 클리어했던 이호열.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움직일 수밖에 없는 플레이어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이 마주친 장소는 당연하게도 마탑이었다.

"...너희 뭐냐. 또."

"너도, 너도. 진짜 말 걸지 마. 오해받기 싫으니까."

"불쾌한 소리를 잘도 하시는군요."

레오니.

남태민.

그리고 히사기.

세 사람은 탐탁지 못한 눈빛으로 서로를 노려봤다.

[포식자의 늪지대], 그곳에서부터 시작된 불편한 연합.

그 바람에 얼마나 많은 질문, 인터뷰, 매스컴에 시달렸던가?

"내가 진짜 호열 씨만 아니었어도. 어?"

남태민은 그 생각을 하면 아직도 치가 떨리는 심정이었다.

특히 히사기와는 차라리 예전처럼 만나면 으르렁대던 시절이 나았을 정도였다.

그땐 서로를 헐뜯으면서 스트레스라도 발산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을 연합하게 한 건 호열이었다.

호열이 어떤 생각으로 자신들을 연합하게 만든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런 호열의 결정을 곧바로 부정해버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연합에 관해선 노코멘트.

요즘 세상에 침묵은 긍정과 다름없었으니.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레오니가 삐딱한 시선으로 두 사내를 올려다봤다.

"너희 사태의 심각성을 알긴 알아?"

"아니까 왔지. 도와야 할 거 아니야."

"받은 게 있으면 갚아야 하는 법이니까요."

힐끗─

레오니는 두 사람의 뒤를 흘겨봤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길드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뭐, 심각성을 알고 있긴 하구나.

'진짜 자살행위나 다름없으니까.'

무모한 결정.

이런 고집에 길드원들을 끌어들일 생각 따윈 없었다.

그래, 그래야 했는데 말이야.

고집을 부리는 건 자신들만이 아니었다.

"찾았다. 나 같은 바보들!"

능글맞은 목소리.

샤이닝의 간부이자 최상위 랭커, 카밀라였다.

난데없이 등장한 그녀의 뒤로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너희 미쳤어?"

가온, 이나즈마, 버서커의 길드원들이었다.

길드원 전원은 아니었지만, 얼핏 봐도 수십.

적지 않은 플레이어들이 길드 마스터를 따라나선 것이었다.

"남태민. 내가 너 여기 있을 줄 알았지."

"언니, 언니만 고집 있는 줄 알아?"

"누가 뱀 아니랄까 봐. 쥐도 새도 모르게. 겨우 찾았네."

카밀라는 몸서리를 쳤다.

"죽음도 갈라놓지 못하는 끈끈함이란 건가? 좋을 때네."

물론, 그 감동의 재회를 부러워할 건 없었다.

'내 입장도 다를 건 없으니까.'

카밀라는 그날.

제시의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깨진 차원의 틈] 균열이 재등장한 지금.

"척하면 척이거든."

제시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 말도 안 되는 균열에 자신들이 합류해 봤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멋대로 하는 건 알아줘야지~"

공주님이 괜히 공주님이겠어?

손이 많이 가시니까 공주님이겠지.

주위를 둘러보니 제시는 보이지 않았다.

"...벌써 가진 않았겠지? 나름대로 엄청 서둘렀는데, 나."

카밀라가 서둘러 마탑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목격했다.

우두커니 멈춰선 제시 하인네스를.

"제시?"

작은 숨결조차 감지할 수 있는 카밀라의 감각.

제시의 호흡이 평소와 명백히 달랐다.

"제시.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카밀라가 제시를 뒤에서 감싸 안았다.

그런 그녀를 뒤따라 진입한 이들도 그 광경을 목격했다.

정확히는 달라진 마탑 로비의 풍경을.

"...포탈이 없어졌어?"

흔적조차 없었다.

언제나 마탑의 로비를 지키고 있던 포탈이 보이지 않았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이곳, 마탑에 모인 플레이어들에게....

"생성된 균열이 몇 갠 데. 포탈 없이 어떻게 거길 전부...?"

단시간 내에 균열로 향할 방법은 전무하다는 것.

이내, 카밀라는 제시가 굳어버린 이유를 알아차렸다.

카밀라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포탈이 사라진 이유?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사정이 있겠지.

그러나 포탈을 사라지게 할 정도의 권한을 가진 사람은 짐작할 수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선임 마법사도 이런 건 무리겠지. 그래, 적어도 수석 정도는 돼야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 거야.

"...이거, 따끔하게 한마디 해줘야겠네."

그제야 모두가 알아차렸다.

호열이 포탈의 가동을 중지한 것이라고.

"...어째서?"

자신들과 다르게.

호열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이런 행동에도 뜻이 있겠지.

그래, 자신들을 포함한 플레이어들에겐.

이번 균열이 벅찬 균열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래도....

이건 너무 가혹했다.

"빌어먹을.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건가?"

자신들에게도.

"균열이 몇 갠 데. 그걸 혼자서 뭘 어떻게 하시겠다고...!"

호열, 본인에게도.

언제나 당당했기에.

또 한결같았기에.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다.

호열은 어떤 심정으로 포탈의 가동을 중지했을까.

그것도 모자라 홀로 균열로 향하는 심정은.

그리고 자신들은 어째서.

지금에서야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호열이 이런 짐을 짊어진 건 지금이 처음도 아니었는데.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엄습했다.

침묵 가운데.

빠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혼자서, 혼자서 모든 걸...!"

*

내부 사정에 외부인을 끌어들일 순 없는 법.

'더 나아가서 이런 단체 행동엔 말이야.'

마탑의 선임 마법사들이 총출동하는 상황이다.

구체적인 정황을 말하지 않는다고 한들.

눈치가 있다면 마탑에 뭔가 사건이 터졌구나, 알 수 있겠지.

'문책 같은 건 피하고 싶다고.'

나는 되도록 조용하게 넘어가고 싶단 말이다.

일이 생기면 책임지고 물러나는 건 낙하산이란 걸.

사회에서 흔히 봐서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최대한 신속하게.

최대한 은밀하게.

내부 사정을 수습하는 게 최선이라는 말이다.

생성된 균열은 총 11개.

그 균열의 위치를 특정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처음엔 몰랐다고 하더라도.'

[깨진 차원의 틈].

그 불완전한 균열의 특성은 경험을 통해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이 사태를 계획한 카림제바의 마력흔을 추적하면 되는 일이란 거지.

당연하게도 나한테 그럴 마력은 없다.

하지만 든든한 마탑의 마법사들이 있지.

과연, 마르셀로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탐색, 간섭, 발현.

이내, 마르셀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좌표를 포착했습니다."

◈ 99화. 극비사항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