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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으로 뛰어!"

브츠즈즈즈-!

바로 뒤에서 달려들던 메뚜기 떼의 요란한 날갯짓 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섬뜩한 소리.

그 속에서 크게 외쳤다.

이쪽의 외침에 하비엘이 즉시 반응했다.

녀석에게 업힌 채로 함께 부웅.

옆으로 날았다.

배수로 속으로 엎어졌다.

그 즉시 손을 뻗었다.

하비엘의 뒤통수를 내리눌렀다.

동시에 솥뚜껑을 덮어썼다.

브츠즈즈즈-!

위에서 덮쳐오는 섬뜩한 날갯짓 소리.

그 숫자를 셀 수가 없다. 너무나 많아서 소리가 온통 뭉개져 들린다. 마치 지직거리는 회색 화면만 보여주는 티브이 채널 소리처럼.

그런데 그 소리의 볼륨이 콘서트용 대형 스피커 100개를 묶어서 최대 출력으로 켜놓은 것만 같았다.

가슴이 쾅쾅.

맥박이 미친 듯이 뛰었다.

'방울아, 지금이야!'

속으로 외쳤다.

그 순간, 방울이의 화답이 돌아왔다.

"방울!"

콰아아아아앙-!

천지를 뒤덮는 폭음.

메뚜기 떼를 덮치는 폭발.

투화학!

화산 폭발 스킬이 터졌다.

끔찍한 충격파의 엄습.

일천 도에 달하는 열파가 분출되었다.

마그마 파쇄물이 시속 400킬로미터의 속도로 폭풍처럼 몰아닥쳤다.

범위 내의 모든 것을 휩쓸었다.

복사열이 수십 미터 이내의 공간 전체를 익혀 버렸다.

그 속에서 무사할 수 있는 존재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

"더 엎드려! 더 낮게!"

로이드가 외쳤다.

밭의 배수로 안쪽으로 몸을 낮추었다.

위쪽에서 엄습해 오는 대부분의 복사열은 솥뚜껑으로 막아냈다.

나머지 열기는 아스라한 심법으로 흡수, 배출하며 흘려냈다.

그렇게 한 차례의 화산폭발 폭풍을 견뎠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지금! 때려!"

타닷!

둘이 함께 몸을 일으켰다.

로이드가 솥뚜껑을 들었다.

하비엘이 검을 치켜들었다.

데에에엥-!

검이 솥뚜껑을 때렸다.

낮고 맑은 공명음이 파괴의 현장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지면을 통해, 달구어진 공기를 통해 빠르게 번졌다.

갑작스러운 폭발에 놀라 주춤하던 나머지 메뚜기 떼의 청각을 자극했다. 유혹했다. 끌어들였다.

브즈즈즈즈즈!

주춤하던 메뚜기 떼가 다시금 게걸스레 몰려들었다.

"좋아! 한 번 더!"

데에에에엥-!

또 한 번 공기를 떨쳐 울린다.

수십만 쌍의 날개가 탐욕으로 흔들리며 날아든다.

그 순간 배수로 깊이 몸을 낮춘다.

이내 다시금 터지는 화산폭발.

"방울!"

콰아아아아앙-!

일천 도, 수천조 개의 미세한 유리조각, 시속 400킬로의 열풍.

그리고 끔찍한 복사열과 맹렬한 충격파가 발사 방향 수십 미터를 휩쓸었다.

두 번째 폭발에 일만 마리 이상의 메뚜기가 숯이 되었다.

방울이는 즉시 세 번째 포격을 준비했다.

"방울! 빠방울!"

커다란 입을 쫙 벌렸다.

준비하고 있던 뽀동이가 땅을 맹렬히 파냈다.

파내며 허공으로 퍼낸 흙이 고스란히 방울이의 입으로 들어갔다.

삼켜졌다. 소화되었다.

세 번째 폭발을 위한 장전이 끝났다.

"준비!"

데에에엥!

울리는 공명음.

사납게 모여드는 메뚜기 떼.

힘차게 외치는 발사 신호.

"지금!"

콰아아아앙-!

발사하고, 흙을 먹고, 솥을 울리고, 모이고, 또 발사하고.

그것은 완벽한 박멸을 위한 자비 없는 폭풍의 톱니바퀴였다.

거기에 하망이도 가세하며 덫을 놓았다.

"하망아, 지금!"

"하망!"

벌컥벌컥, 푸화악!

대기하고 있던 하망이가 강둑 너머의 강물에 뛰어들었다.

강물을 흡입했다. 최대한 담았다.

고개를 들었다.

분사했다.

하늘 높이.

최대한 넓게.

십만 리터 이상의 물이 단숨에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연이은 폭발에 놀라 도망치려던 메뚜기 떼를 뒤덮었다. 날개를 적셨다. 놈들이 추락했다.

그 순간, 로이드가 떨쳐 일어났다.

하비엘도 검을 뽑았다.

서쪽에서 육중한 땅 울림도 달려왔다.

"여기! 우리의 창칼도 잊지 마시오!"

투두두두...!

새하얀 마갑과 갑옷을 갖춘 500기의 기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국왕이 지원을 약속했던 직속군, 백색창기병이 마침내 도착한 것이었다.

그들이 해일처럼 달려왔다.

순백으로 빛나는 랜스를 앞세웠다.

땅에 떨어진 메뚜기 떼를 휩쓸었다.

발굽으로 짓밟고, 랜스로 꿰뚫으며, 메뚜기 떼의 후방까지 대열을 관통했다.

그 뒤로 로이드와 하비엘의 삽과 검이 번득였다.

투확!

로이드의 삼중 발파.

하비엘의 정교한 연속 발파.

파괴적 마나의 폭풍이 남은 메뚜기 떼를 휩쓸었다.

남은 메뚜기 떼 무리에 두려움의 페로몬이 전염병처럼 번졌다.

놈들이 젖은 날개를 펼쳤다.

도주를 위해 땅을 박찼다.

그런 놈들을 반기듯, 다시 한 번 방울이의 화산 폭발이 하늘을 향해 조준 사격처럼 쏘아졌다.

"방울!"

콰아아아앙-!

맹렬하게 쏘아진 화산 파쇄물의 열풍이 버섯구름 축포처럼 영지 상공을 수놓았다.

'...라는 스펙터클한 하루였지.'

긴박하고 위기감 넘쳤던 어제의 순간들.

아마도 ×스코 직원이 봤다면 감동으로 폭풍 눈물을 흘리며 기립박수를 쳤을 법한 박멸 작전이었다.

'성공해서 다행이야.'

자신이 짜냈던 작전도.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감행했던 무모한 시도도.

전부 착착 잘 맞아떨어진 덕분에 모두가 살 수 있었다.

영지도 위기에서 건져내게 되었다.

그렇게 상념을 접어두며 계속 걸었다.

노을마저 서쪽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무렵, 남작가 저택에 도착했다.

곳곳을 메뚜기에게 갉아 먹혀 엉망이 된 남작가 저택.

마치 성격 고약한 패션 디자이너가 작정하고 찢어놓은 청바지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도 안 무너진 게 다행이지요. 어제 도련님께서 조금만 늦으셨다면 분명 이 저택, 조금도 남아나질 못했을 거랍니다."

한참 저택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만 보니 정문 앞에 웬 하녀가 마중 나와 있었다.

열대여섯 살쯤 됐을까.

주근깨가 인상적인 소녀다.

주로 남작부인을 모시는 하녀인....

"에밀리?"

"네, 도련님. 부인께서 도련님이 도착하시면 식당으로 모시라고 절 보내셨어요."

"어, 그래."

저 하녀는 뭐가 저리도 좋은 걸까.

혹시 날 안내하는 이 상황이 기쁜 걸까.

앞장서서 가면서도 내내 생글거리는 모습이다.

그래서 조금 어색했다.

'이런 대우, 받고 또 받아도 익숙하지가 않아.'

대한민국에서는 어디서도 환영받은 적이 없었는데.

적어도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뒤로는 진짜로 그랬는데.

그런데 여기서는 다르다.

어딜 가든 도련님, 도련님, 이라고 불러준다.

이쪽 덕분에 자신이 살았다고, 이쪽이 영지를 구했다고, 모두가 존경과 감사의 눈길을 보내온다.

앞장서서 걸으면서도 종종 이쪽을 생글생글 돌아보는 저 소녀처럼.

"저기, 실은 도련님?"

"어?"

"저, 오늘부터 수를 놓기 시작했어요."

"수? 무슨 수?"

"십자수요."

"어, 그래."

"멋진 내용을 담을 생각이에요."

"어, 그러냐."

"네. 정말 멋진 모습요. 제가 지금까지 본 것 중에 제일 멋진 모습요."

"음, 얼마나 멋진 모습이길래."

"어제 모두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시던 도련님의 모습이요."

"...커억."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

하지만 그런 이쪽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앞서 걷는 하녀 에밀리는 제 얘기만 조곤조곤 꺼낼 뿐이었다.

"사실 어젠 정말 무서웠어요."

"음, 그랬냐."

"네. 죽는 줄 알았거든요. 여기, 계단 꼭대기에서요."

"여기서?"

"네에. 둘러싸였어요. 메뚜기 떼한테."

"기절하고 싶었겠네."

"그런데 그때 도련님이 나타나셨어요."

"...어, 배고프다. 빨리 가자."

민망해 죽겠다.

로이드는 걸음을 빠르게 했다.

에밀리를 지나쳐서 먼저 식당으로 걸어가려 했다.

한데 그때였다.

"저기, 그래서 도련님."

뒤에서 에밀리의 목소리가 소매를 잡듯 들려왔다.

그리고 이쪽이 무어라 대꾸할 틈도 없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

"절 살려주셨어요. 감사드려요. 제 동생이랑 할머니도, 모두 살려주셨어요. 생명의 은인이세요, 도련님은."

"그러냐."

"네. 부디 저녁 식사 맛있게 드세요."

"그래. 고맙다."

저렇듯 솔직하게 전해 오는 진심 앞에는 대책이 없다.

제 할 말을 마치고는 새빨개진 얼굴로 도도도 도망치는 에밀리.

그 뒷모습에 로이드는 그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 순간이었다.

딩동.

[당신은 프론테라 남작령과 라코나 자작령의 주민 모두를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는 영웅적인 용기와 결단을 보였습니다.]

[이에 두 영지의 주민들은 깊은 감명을 받아 당신에게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당신을 향한 새로운 찬사가 생성되었습니다.]

109화. 종소리의 구원자 (2)

[당신은 프론테라 남작령과 라코나 자작령의 주민 모두를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는 영웅적인 용기와 결단을 보였습니다.]

[이에 두 영지의 주민들은 깊은 감명을 받아 당신에게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당신을 향한 새로운 찬사가 생성되었습니다.]

"...."

흐음, 드디어.

불현듯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

로이드는 놀라는 대신 메시지를 찬찬히 읽어보았다.

'역시, 라고 해야 하나.'

이제 이런 순간에 메시지가 떠오르는 일에는 제법 익숙해진 그였다.

메뚜기 떼의 위협을 박멸해냈던 때부터 내심 기대하기도 했다.

'새로운 찬사가 생길 각이었으니까.'

위험을 무릅쓰고 영지를 구해냈다.

그런데 찬사 하나쯤 떡하니 생겨주지 않으면 오히려 섭하다.

사실 그래서 일부러 캡틴 프론테라니 뭐니를 외치며 자신이 모두를 구하는 거라고 대놓고 알리기도 했고.

'안 그러면 누가 구해줬는지 제대로 안 알려질 거잖아. 아무도 안 알아줄 거면 업적을 왜 세우냐.'

역시 요즘 세상은 자기 PR이 중요한 법.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연이어 떠오르는 메시지를 살폈다.

딩동.

[새로운 찬사, <종소리의 구원자>가 생성되었습니다.]

[종소리의 구원자]

[찬사 등급 : 지역 민담]

동쪽 하늘 뒤덮은 먹구름.

종말 싣고 쏟아진 날갯짓.

가축은 죽고 집은 무너졌네.

사람은 울고 검은 부러졌네.

그리하여 모두의 가슴에 죽음 드리우던 순간.

두 영지 모든 이가 절망에 몸부림치던 순간.

힘껏 울려 퍼지던 종소리 하나.

데엥. 가축을 살리고.

데엥. 사람을 일으켜.

데엥. 종말을 몰아내니.

우리는 그분을 구원자라 소리 높여 부르도다.

[찬사 효과 : 메뚜기떼 습격의 재난을 겪은 프론테라 남작령과 라코나 자작령, 두 영지의 모든 주민들이 당신을 평생의 은인으로 모십니다. 또한, 모든 곤충형 몬스터는 당신을 보는 순간 본능적인 경계심과 두려움을 느껴 크게 위축될 것입니다.]

[찬사 지역 : 프론테라 남작령, 라코나 자작령]

[찬사 유지 기간 : 110년]

[찬사의 효력은 찬사를 받는 지역과 기간 내에서 24시간 적용됩니다. 또한, 추후 당신의 행적에 따라 찬사를 받는 지역과 기간이 확장 및 연장, 축소 및 단축될 수 있습니다.]

[찬사가 매달 제공하는 CP : 3]

[현재 보유 중인 CP : 2]

'워오.'

종소리의 구원자라.

거창한 이름만큼이나 엄청난 효과였다.

'지역 최고의 존경받는 위인이 됐다는 건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옵션 효과를 요약하자면, 모든 곤충형 몬스터를 자동적으로 위축시킨다는 거로군.'

생각해보면 굉장한 일이었다.

저 옵션 설명에 몬스터의 크기 같은 것이 디테일하게 정의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곧 크기나 다른 조건에 기준이 없다는 거지. 그냥 곤충 비슷한 형태면 모두 저 옵션의 적용을 받는다는 거고. 즉, 크레모에서 싸웠던 기가티탄 같은 놈도 날 보면 겁을 먹고 몸을 사리게 될 거란 말씀이랄까.'

대한민국이었다면 ×스코가 군침을 흘리며 탐낼 인재상이었을 터.

아니, 여기서도 저 옵션은 두고두고 유용할 터였다.

'어째 곤충형 몬스터와 안 좋게 얽힌 적이 많았거든. 지금까지.'

생각해보면 정말로 그랬다.

야수개미도.

기가티탄도.

메뚜기떼도.

하나같이 가장 큰 위기를 안겨주었던 놈들이었다.

한데 만약 놈들과 갈등을 빚던 당시에 저 찬사의 옵션을 지니고 있었다면?

훨씬 수월하게 승리를 끌어낼 수 있었으리라.

목숨 걸 일도 한결 적었으리라.

'게다가 밤에 침실로 들어온 모기 잡을 때도 완전 좋을 듯.'

어찌 보면 그게 제일 꿀 옵션일지도.

로이드는 흐뭇하게 웃으며 메시지창을 접었다.

식탁 건너편을 쳐다보았다.

그곳에 저녁 식사 중인 남작 부부가 있었다.

남작도, 남작 부인도 즐거운 모습이었다.

평화로운 저녁의 한때를 만끽하며 포크를 움직이고 있었다.

하긴 그럴 법도 하다.

영지가 유례없는 재난을 맞이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들이 영웅적인 활약을 펼쳤다.

어찌 기쁘지 않을까.

어찌 흐뭇하지 않을까.

로이드는 그런 남작 부부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앞으로의 대비는 대비다.

그래서였다.

"저기, 이런 말씀 드리긴 죄송하지만 아직 끝이 아닐 겁니다."

빈 샐러드 접시에 시선을 둔 채 말을 꺼냈다.

흐뭇하게 나누던 남작 부부의 대화가 멎었다.

이내 이쪽으로 돌아오는 두 사람의 시선이 느껴진다.

걱정 담긴 남작부인의 목소리도 함께.

"저런. 혹시 샐러드 더 먹고 싶니?"

"...."

"말을 하지. 끝이 아니라니. 하긴 그걸로는 양이 안 차겠구나. 아직 왕도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쌓인 여독도 덜 풀렸을 텐데."

사박사박, 이쪽의 접시를 가져가 샐러드를 듬뿍 담아주는 남작부인.

돌아온 접시를 보니 채소보다 고기가 훨씬 많다.

"부족하면 또 말하렴. 오늘도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어, 음, 끝이 아니라는 건 이게 아니라...."

"소시지도 덜어 줄까?"

"...."

제멋대로 가슴이 뭉클.

기억이라는 건 이래서 문제다.

왜 엄마라는 분들은 다 이런 걸까.

잠깐 떠오른 엄마 생각을 억지로 접었다.

짐짓 크게 기침하며 어색한 표정을 털어냈다.

"크흠, 흠! 으음, 그게 아니라, 실은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라니?"

남작이 물어왔다.

남작부인이 샐러드용 집게를 멈추었다.

그냥 음식 얘기가 아니라는 걸 두 사람 모두 느낀 모양이다.

로이드는 남작 부부를 향해 말했다.

"기쁘고 안심되시는 와중에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서. 하지만 그런 기쁨과 안심은 나중에 따로 느껴야 할 것 같습니다. 두 분도, 저도."

"...혹시 또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예."

"앞으로 벌어질 일인 게냐?"

"예."

"자세히 말해줄 수 있겠니?"

"물론이죠."

남작의 진지해진 눈빛.

그 눈빛을 받으며 로이드는 입을 열었다.

"어제의 재난은 정말 무시무시했지요. 그래도 다행히 잘 넘겼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일 겁니다. 그 이유와 정황을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찬찬히 설명했다.

왕도에서 국왕 알리시아에게 이번 사태의 전말을 알려주었던 때처럼.

자신이 철혈의 기사를 읽어서 알고 있는 내용을.

그걸 근거로 나름 추리하여 파악한 사실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그러니 이제부터 몇 차례쯤은 앞서와 같은 침공이 더 있을 겁니다."

"몇 차례나?"

"예."

"그게...."

"대략 최소 세 번에서 최대 일곱 번쯤은 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

남작 부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훈훈하고 평화롭던 저녁 식사 시간이, 순식간에 서스펜스 납량특집 재난물 분위기가 되어 버린 것은 덤이었다.

"허어. 대체 이 일을 어찌해야.... 그럼 이대로 영지를 떠나는 것은 어떻겠느냐?"

"그건 안 됩니다."

로이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명심하셔야 합니다. 영지를 잃으면 모든 게 끝나는 겁니다."

"모든 게 끝이라고?"

"예."

사실이었다.

이 영지를 버리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이곳은 자신의 꿈과 희망, 평온한 여생과 풍족한 노후를 담아둔 꿀단지다.

한데 몬스터가 몰려온다고 해서 포기하면?

그대로 망가지도록 내버려둔다면?

그래서 이곳이 황무지가 되고, 주민들이 다 죽거나 떠나간다면?

'영지를 잃게 되겠지. 누군가는 안전하게 도망쳤다가 나중에 빈터에서 영지를 새로 세우면 되지 않겠느냐 말하겠지만, 이건 게임이 아니니까. 그건 불가능할 거야.'

영주 일가가 영지를 포기했다.

위험에 맞서지 않고 물러났다.

제 목숨만 살리고자 도망쳤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이후엔 어떤 주민도 그 영주 일가를 믿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많은 돈을 퍼부어 농경지를 정비하고 터전을 마련해줘도, 좀처럼 주민들이 모이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왕실로부터 엄청난 추궁부터 당할 것이 뻔하다.

'영지는 어디까지나 국왕이 신하에게 하사한 봉토니까.'

국왕을 대신해서 책임지고 관리하는 땅이다.

한데 그걸 버리고 도망친다는 것은?

그 땅을 관리할 자격을 스스로 포기한다는 뜻과 같았다.

영지를 영원히 상실하게 되는 셈이다.

"그러니 도망은 정말로 죽겠다 싶은 마지막 순간에 선택할 최후의 옵션으로만 남겨둬야 합니다. 일단은 무조건 여기서, 영지를 지키는 일이 우선입니다."

영지를 잃고 싶지 않다.

터전 잃은 신세가 되어 왕도로 불려 가기 싫다.

그랬다간 국왕의 심심한 위로를 받으며 관직을 받을 수밖에 없겠지.

평생 국왕이 시키는 일만 뼈 빠지게 하다가 늙어 죽겠지.

그건 절대로 사양하고 싶었다.

그렇게 아등바등 먹고 살아야 하는 인생은 이미 대한민국에서 지긋지긋할 만큼 겪었으니까.

그런 이쪽의 강력한 의지가 느껴진 덕분인 걸까.

남작도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뜻은 잘 알았다. 듣고 보니 네 말이 백번 옳구나."

"그렇지요."

다행이다.

잠깐 겁을 먹은 듯했던 남작이 굳게 마음을 다졌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해볼 만해진다.

한데, 이번에는 남작의 마음이 다소 지나치게(?) 굳은 듯했다.

"그러니 너는 도망가거라."

"...예?"

"이제부터 수많은 몬스터와 괴수들이 앞서 메뚜기 떼처럼 또 영지를 덮칠 거라고 네가 그러지 않았느냐. 그래서란다."

"무슨...."

"혹시 방어를 위해 측량과 설계가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까지만 하거라. 최대한 빨리."

"설마, 그것만 해두고는 공사를 맡기고 도망치라는 말씀입니까?"

"그렇단다."

남작이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굳이 너까지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있겠느냐? 그런 무모한 위험은 이번에 나서서 겪은 것만으로 이미 충분하단다. 아니, 오히려 그것만으로도 이 아비는 너에게 미안하고 부끄럽구나. 하니 이제부터 너는 안전한 곳에 있거라. 더는 무모하게 나서지 말고, 위험은 이 아비에게 맡겨두려무나."

좀처럼 들을 수 없을 남작의 엄격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그만큼 남작의 마음이 잘 느껴졌다.

설령 자신이 위험해지더라도 이쪽만은 안전하게 지켜주고 싶다는 그 진심.

"...."

다시금 가슴이 뭉클.

어째서 이럴 때면 아버지가 떠오르는 걸까.

수많은 빚을 지고도 괜찮노라고, 넌 걱정 말고 대학 공부에만 집중하라고, 당신께서 다 감당하실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애써 힘주어 엄격하게 말씀하시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사실은 제일 무섭고 힘들 거면서.'

굳이 저렇게 혼자 모든 걸 감당하려 드는 건 아버지라는 사람들의 공통점인 걸까.

로이드는 애써 크게 숨을 내쉬었다.

제멋대로 비어져 나오려는 감정을 눌러 담았다.

그리고 남작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그래선 역부족이실 겁니다."

"역부족... 이라고?"

"예."

"너는 이 아비가 영지를 지키지 못할 것이라 여기는 것이더냐."

"그건 아닙니다. 다만-"

"다만?"

"같이 지키면 훨씬 편할 겁니다. 그러니 약속하겠습니다."

"약속이라니, 무엇을."

"만일 정말로 위험해지면 제일 먼저 도망치겠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 안전한 곳으로. 어떻습니까?"

"...그 약속, 지킬 생각은 있고?"

"물론입니다."

당연한 말이다.

아무리 영지가 꿀단지라고는 하지만 목숨보다 중요하지는 않으니까.

정말로 죽을 것 같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오면 제일 먼저 도망칠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가 말했다.

"그러니 미리 도망치라는 말씀은 거두시구요. 대신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부탁이라. 무엇이더냐."

"일손을 최대한 많이 마련해 주십시오."

"방어 시설을 짓는 시간을 줄이기 위함이더냐?"

"네. 그냥 영지민들이나 공병대 외에도 추가로 더 많은 일손이 필요합니다. 특히 힘세고 체력 튼튼한 일손 말이죠. 그래서입니다."

로이드는 남작을 쳐다보았다.

싱긋 웃으며, 남작이 기겁할 말을 태연하게 꺼냈다.

"저녁 식사 후에 백색창기병 대장을 부르십시오. 그리고 알려주세요. 내일부터 백색창기병 전원을 우리 영지의 공병대에 편입시키겠다고 말입니다."

"...뭐?"

꿀꺽.

영지를 지키기 위해 어떤 일도 마다치 않겠다던 다짐도 잠시.

'물론 영지의 영주인 내가 지휘권을 이양받기는 한 상태라지만, 국왕 전하께서 파견해준 직속 부대를 어쩌겠다고?'

그러면 그 창기병 대장, 심하게 화내지 않을까.

하지만 로이드는 오히려 더욱 뻔뻔하게 말했다.

"물론 걱정되시겠지요. 그걸 어떻게 말하나 염려도 되시겠지요. 하지만 이거, 영주가 아닌 제가 요청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꼭 하셔야 하는 일이기도 하구요."

"꼭이라. 어째서이더냐?"

"오백 명이나 되는 체력 빵빵한 일꾼을 확보할 기회니까요."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이제 곧 메뚜기떼 다음의 몬스터 무리가 몰려올 겁니다. 그때를 위해 그들의 삽질이 필요해질 겁니다."

"삽질이?"

"예. 이번뿐만이 아닙니다. 이후를 바라보며 제가 그리고 있는 더욱 큰 그림을 위해 더더욱, 이번 기회에 그들이 삽질을 연마해야 합니다. 삽질에 미리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러니 반드시 설득에 성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그자가 화를 낸다면...."

"낸다면?"

프론테라 남작이 황급히 되물었다.

자신의 아들이 뭔가 묘수를 알려주지 않을까.

희망의 불빛을 간절히 바라며 로이드의 대답을 기다렸다.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뻔뻔하게 철판을 까시면 됩니다."

"...."

"하실 수 있으십니다."

"...."

"화이팅."

"...."

그런 거, 내가 할 수 있을까.

프론테라 남작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출렁였다.

110화. 삽질의 의미 (1)

밤이 깊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자리를 준비할 시각이었다.

혹은 이른 꿀잠을 만끽하며 뒹굴거릴 시간이었다.

하지만 여기 한 사람, 백색창기병 대장 발레라디 블랑크 경은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잠들지만 못하는 게 아니라 씩씩거리며 거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무슨 이런 무례하기 짝이 없는....'

철컥! 철커컥!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러자니 걸음이 절로 더욱 난폭해졌다.

무리도 아니었다.

방금 자신을 집무실로 불렀던 이곳 영지의 영주라는 프론테라 남작.

그에게서 상상도 해본 적 없는 무례한 요청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뭐? 백색창기병 전원을 공병대로 편입시키겠다고?'

자존심이 상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에 벌게질 지경이다.

'검 대신 삽이나 들고서, 흙이나 퍼담는 그런 짓을 하라고? 우리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자신이 누구인가.

자신의 지휘를 받는 백색창기병이 어떤 사내들인가.

'우리는 국왕 전하의 검이요, 창이다. 전하를 따라 전장을 호령하며 싸우다 맞는 죽음이 우리의 가장 커다란 영광이다. 한데, 그런 우리에게 삽을 잡으라고?'

당연히 반발했다.

프론테라 남작의 멱살까지 잡았다.

감히 자신에게 그런 무례한 명령을 내릴 수 있느냐고.

아무리 국왕 전하의 명을 받고 여기까지 왔다지만.

그래서 명령권이 일시적으로나마 이곳 영주인 프론테라 남작에게 주어진 상태라지만.

'그래도 이건 말도 안 돼!'

분통이 터졌다.

고래고래 고함까지 지르며 따졌다.

그랬더니 창백해진 프론테라 남작이 대꾸하던 말이 더욱 가관이었다.

'뭐? 이건 자신의 뜻이나 결정이 아니라고?'

그 대꾸에 더 따져 물었다.

이내 돌아오는 남작의 대답은 '지금 저택 연무장으로 내려가 보면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었다.

'그래, 간다. 가. 내가 더러워서 간다!'

가보면 이유를 알게 되겠지.

철컥! 철컥!

거친 걸음 옮겨 저택을 나섰다.

저택 뒤뜰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이쪽의 분통 터지는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휘영청한 환한 달빛 아래, 연무장 중앙을 차지하고서 홀로 서 있는 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여유롭게 뒷짐을 지고 있다.

달을 올려다보는 그 자세가 곧다.

"거기 누구요. 혹시 여기서 날 기다린 거요?"

블랑크 경이 물었다.

실루엣이 이쪽을 향해 돌아섰다.

무기를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한데 어쩐지 무기보다 더 위험해 보이는 태연한 미소를 짓고 있다.

"예, 맞습니다. 생각보다 더 일찍 오셨네요."

"로이드, 프론테라?"

"명성 드높은 블랑크 경께서 제 이름을 알아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영광은 무슨. 발레라디 블랑크요. 어제도 잠깐 봤었는데 이제야 제대로 통성명을 나누게 되는군."

"죄송합니다. 어제 사태를 뒷수습하느라 너무 정신이 없어서."

"바빴던 건 피차 마찬가지요."

자신도 대원들의 상태를 점검하고 기병대의 마갑, 무구를 정비하느라 바쁜 하루를 보냈다.

블랑크 경은 고개를 한쪽으로 까딱 기울이며 로이드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방금 내가 조금 이상한 소리를 들었소만."

"남작님께 말입니까?"

"아시는군."

"물론이지요. 제가 부탁드린 일이니까요."

"설마, 백색창기병을 귀하 영지의 공병대로 편입시키겠다는 결정, 그쪽의 머리에서 나온 의견인 거요?"

"그렇습니다."

"...."

어찌나 태연하게 대답하는지.

하마터면 멱살을 잡을 뻔했다.

그런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블랑크 경이 말했다.

"어째서요. 이곳으로 오면 이유를 들을 수 있을 거라 남작께서 말씀하시더이다. 그러니 빙빙 돌리지 말고 이유부터 알려주시오."

"살아보려고요."

"...뭐요?"

블랑크 경은 멈칫했다.

저 로이드 프론테라라는 작자,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죽기 싫습니다. 그렇다고 영지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이곳 주민들을 버리고 도망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러니까 뭐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할 수 있는 수단은 모조리 동원하고,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닥쳐올 몬스터들의 내습에 대비하기 위한 수단이 이거요? 백색창기병을 공병대로 편입시키는 거?"

"그렇습니다."

"하지만 실수하시는 거요."

"어째서입니까."

"공병대가 되어 삽 따위를 드는 것보다, 우리 백색창기병이 전장을 내달리며 빛낼 500자루의 랜스가 훨씬 위력적일 터이니 말이오."

"예,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이 작자가 무슨 꿍꿍이를 품은 걸까.

어째서 자신의 말에 금방 수긍해 버리는 걸까.

그런 이쪽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전장에서 랜스, 마음껏 빛내십시오. 안 말립니다. 아니, 오히려 격려와 응원을 보내드릴 겁니다. 대신 몬스터가 습격하기 전까지는 삽을 들어주십사, 하는 것이 제 부탁입니다."

"그러니까, 평시에는 귀하의 공병대와 함께 공사에 참여했다가 전장에서는 창기병으로 활약해 달라?"

"예."

너무나 깔끔한 대답이었다.

덕분에 블랑크 경은 멈칫했다.

그만 대꾸가 궁해지고 말았다.

쉽사리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가 않은 까닭이었다.

'사리로 따져 봐도 맞는 말이긴 한데.'

자신들은 백색창기병이다.

하지만 그건 전장에서의 역할일 뿐.

전장이 펼쳐지기 전까지는 함께 삽을 들어 달란다.

되짚어보니 지극히 실용적인 의견이었다.

'평상시에 삽을 든다고 해서 우리의 명예에 손상이 가는 것도 아닐 테니까.'

어차피 전쟁터에서 활약하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게다가 더 깊이 따져 보자면, 지금 로이드의 부탁은 절차상으로도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

국왕의 명을 받아 이 영지로 파견되는 순간, 백색창기병의 최종 지휘권을 프론테라 남작이 일시적으로 양도받은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분으로는 아니야.'

실용적이고 절차상의 문제가 없는 건 맞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했다.

국왕의 빛나는 기병이 흙 묻은 삽을 들어야 한다니.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크나큰 거부감이 고개를 치켜드는 것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요컨대, 이건 실리와 이성이 아닌 기분과 감정의 문제인 셈이었다.

'나조차도 이런 기분이 들진대 우리 녀석들은 어떨지.'

500인의 백색창기병.

모두가 하나같이 대단한 사내들이었다.

국왕을 위해 초개처럼 목숨 버릴 각오가 된 자들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명령을 전달받으면 더욱 크게 반발하게 될 터.

고민하던 블랑크 경은 고개를 들었다.

문득,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생겼다.

"한 가지 묻고 싶소."

"예, 물어보시죠."

"우리가 공병대로 편입된다고 칩시다. 그럼 구체적으로 정확히 무슨 일을 하게 되는 거요?"

"공병대가 하는 일을 하게 되겠지요."

"그 말씀은...."

"주로 삽질을 하게 될 겁니다. 처음에는 요령이 없으시니 일이 조금 느리겠지요. 하지만 요령만 익히시면 우리 공병들보다 훨씬 일을 잘하게 되실 거라고 믿습니다. 기대도 많이 하고 있고 말입니다."

"무슨...."

"진심입니다. 정말로."

진짜였다.

괜히 저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자 이런 일을 부탁하는 게 아니었다.

'다른 이들도 아닌 백색창기병이야.'

국왕의 직속부대다.

그만큼 전투력과 체력으로 검증된 자들이다.

요령만 익힌다면 숙련된 공병 네댓 명 몫의 일을 해낼 수 있을 터다.

게다가 삽질을 하다가도 수틀리면 현장에서 곧바로 전투 병력으로 전환할 수 있다.

조만간 자신이 그려낼 큰 그림.

몬스터들의 무한 웨이브를 한 번에 차단할 묘수.

그걸 실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저들이 삽질에 능숙해져야 한다.

"그러니 약속드리도록 하지요. 일당, 두둑하게 챙겨드리겠습니다. 우리 공병보다 다섯 배로. 이건 정말로 많이 셈해드리는 겁니다."

"지금 일당이 중요한 게 아니잖소."

"중요합니다. 그거 하나 보고 종일 뼈 빠지게 땀 흘리면서 일하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

"게다가 현장에서 삽질하는 거, 그렇게 보람 없는 일만도 아닙니다. 충분히 단련도 할 수 있습니다."

"단련이라니, 설마 체력 단련 같은 것을 말하는 거요?"

"그렇지요."

"하."

블랑크 경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눈앞의 이 로이드라는 자, 대체 제정신인 걸까.

'크레모를 구한 영웅이며 전하께서 인정하신 명공이라더니.'

게다가 체르니 경의 국왕 시해를 막아낸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어찌나 놀라고 감탄스럽던지.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만나보고 싶었다.

그런 업적을 세운 사내의 진면모를 느껴보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 그는 실망감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로이드 프론테라, 당신은 우리 백색창기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소. 우리가 겨우 공사 현장에서 체력을 담금질할 정도로 나약한 자들로 보이오?"

"흐음, 아닐까요?"

"허튼소리. 우리를 무시하시는 것이로군."

"그건 확실히 아닐 텐데요."

"우릴 무시하는 게 아니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 말씀은 즉, 공사 현장에서 우리가 체력을 단련할 수 있다는 뜻이 되는 거요?"

"물론이지요."

"대체 어떻게...."

블랑크 경이 눈썹을 찡그렸다.

고작 삽질일 뿐이다.

혹은 망치질일 따름이다.

고되어 봤자 흙이나 벽돌을 옮기는 일이 전부일 터다.

반면 자신들이 겪어온 훈련은 어떤 것이었던가.

'매일 목숨을 건 훈련을 치러 왔지. 번득이는 창칼 속에서 수없이 피와 땀을 흘리고 상처투성이가 되어가며 닦아온 실력이야. 그걸 전장에서 마음껏 떨치고, 살아남은 오늘과 더욱 용맹해질 내일을 위해 승리의 술잔을 들어 왔지. 그런데 뭐라고?'

그런 자신들이 고작 공사판에서 단련될 수 있을 거라고?

'헛소리.'

블랑크 경은 단정했다.

한결 냉랭해진 눈길로 쏘아내듯 물었다.

"어떻게 단련을 할 수 있다는 말이오? 댁이 말하는 그 공사판에서의 잘난 단련, 해 봤자 뭐가 달라진다는 거요."

"여러모로 달라질 테지요."

"구체적으로 증명할 수 있소?"

"물론입니다."

"지금 당장 가능하오?"

"원하신다면 바로 보여 드릴까요?"

"부탁하오."

"좋습니다. 단, 저와 내기 하나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내기 말이오?"

"네."

로이드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부터 제가 공사 현장에서의 단련의 결과를 삽으로 보여드릴 겁니다. 그래서 만약 제가 보여드릴 기술이 블랑크 경의 검술보다 강력하다고 판단이 되신다면, 백색창기병을 군말 없이 공병대로 편입시켜주십시오. 어떻습니까."

"허, 좋소."

블랑크 경은 두 번 생각지도 않았다.

삽으로 보여주는 단련의 결과라니.

게다가 그걸 자신의 검술에 견주겠다니.

솔직히 코웃음이 나올 뻔했다.

'저자는 내가 소드마스터를 직전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가.'

자신의 검은 오러 빼고는 다 할 수 있다.

그러니 로이드 프론테라, 저자가 삽으로 어떤 짓을 벌여도 자신의 검술보다 강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제아무리 기가티탄을 물리친 크레모의 영웅이라 해도 그렇다.

삽은 그저 도구일 뿐.

삽으로는 안 된다.

블랑크 경은 확신하며 말했다.

"그 내기, 받아들이도록 하겠소."

"좋습니다."

로이드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바닥에서 삽을 집어들었다.

'삽이라. 무기도 아닌 저런 걸로 뭘 하겠다는 건지.'

블랑크 경은 더욱 가소로운 기분을 느꼈다.

삽질이든 뭐든 할 테면 마음껏 해봐라.

구경할 만큼 구경한 후엔?

마음껏 비웃어 주리라.

지금까지 저 사내가 범한 무례와 모욕을 엄중히 따져 물으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뒤로 두 발짝 물러섰다.

옷에 흙이 튈까 봐서였다.

한데 그 직후, 블랑크 경은 뜻밖의 소리를 들어야 했다.

"두 발짝으로는 모자랍니다. 더 물러서시죠."

"...얼마나 더 물러나야 한다는 거요?"

"가능한 한 멀리."

"...."

두 발짝을 더 물러났다.

그런데 로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찜찜한 기분을 느끼며 다섯 발짝을 추가로 물러났다.

그제야 로이드가 자세를 잡았다.

"삽질이라는 건 말입니다."

꽈아아악!

삽자루를 맹렬히 움켜쥐는 두 손아귀.

손등에 힘줄을 투둑투둑 일으키며 로이드가 말했다.

"블랑크 경의 생각처럼 결코 쉽고 간단한 게 아닙니다."

키이이잉-!

세 갈래 써클이 서서히 시동을 걸었다.

움켜쥔 삽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삽질 한 번을 하려면 새벽 일찍 일어나야 합니다. 해도 뜨지 않은 시간에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안전화도 챙기고서 집을 나서야 하지요. 그리고 인력소에서 자신이 뽑히길 간절히 빌어야 합니다. 못 뽑히면? 삽질, 하고 싶어도 못 합니다."

"...."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블랑크 경은 묻고 싶었다.

그러나 로이드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물론 비가 와서 날씨가 엉망인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태풍이나 장마가 오는 여름이 그렇고, 공구리를 치기 어려운 겨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날씨가 좋아도? 인력공사 소장한테 밉보여서 뺀찌를 먹는 날도 있습니다. 혹은 '데마'라고 해서, 일이 도중에 파토 나는 운 나쁜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면 마찬가지로 삽질, 하고 싶어도 못 합니다."

"그게 무슨...."

"그런 수많은 난관과 역경을 모두 이겨내야 그날의 첫 삽질을 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단가, 그러니까 일당을 받아낼 자격을 얻게 되는 거지요. 예, 남들에겐 우습고 하찮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삽질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게 인생의 마지막 동아줄인 경우도 있습니다. 하찮은 삽질 하나로 약값, 학비, 벌 수 있으니까요. 최소한의 희망을 품어볼 수 있으니까요."

"...."

"그러니까 누군가에겐 그 삽질이라는 거, 최소한의 희망이고 인생인 겁니다. 꿈을 이어가고, 자식을 먹여 살리고, 내일을 포기하지 않게 지탱해주는 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키이이이잉-!

어느새 트리플 써클이 맹렬히 회전하고 있었다.

로이드의 한마디, 한마디가 떨어질 때마다 세 갈래 써클의 회전이 서로를 공명시켰다.

그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순간, 세 갈래 써클이 충돌했다.

그가 삽을 하늘로 뻗었다.

투화하학-!

"...!"

화산처럼 용솟음치는 삼중 발파의 기세가 70미터 높이까지 치솟았다.

밤하늘 일부를 맹렬히 불태웠다.

바람과 함께 사그라들었다.

그런데 그 바람이 열풍이었다.

너무나 강력한 발파의 기세에 달궈진 바람이 불어왔다. 블랑크 경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로이드의 시선이 이쪽으로 돌아왔다.

그가 나직하게 내뱉었다.

"진짜 삽질이라는 거, 이런 겁니다."

"...."

블랑크 경은 아무런 대답도 못했다.

대신 무의식중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다음 날부터, 백색창기병 전원의 손에는 삽이 다소곳이 들려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엿새 후.

로이드가 예견한 두 번째 몬스터 무리가 남작령 외곽에 모습을 드러냈다.

111화. 삽질의 의미 (2)

투두두두두....

동쪽에서부터 땅울림이 전해져 온다.

드높게 솟은 동부 산맥의 줄기를 넘어.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 무수한 계곡을 따라.

능선 아래 험준한 둔덕과 이름 모를 바위를 거쳐.

산맥 기슭의 사냥터와 광산, 벌목지와 도로, 텃밭을 따라 낯설고도 묵직한 땅울림이 지면을 타고 전해져 온다.

마침내 말발굽을 지나, 등자와 안장을 통해, 허리와 가슴마저 두드려 온다.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으음."

백색창기병 대장, 블랑크 경은 부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동부 산맥을 향했다.

프론테라 영지 동쪽에 놓인 드높은 산맥.

그곳에서부터 낯설고도 묵직한 땅울림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정말로 마스토돈인가."

문득, 블랑크 경은 어제저녁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을 찾아온 프론테라 남작의 장남, 로이드가 이런 말을 했던가.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 마스토돈이 우리 영지를 덮쳐올 겁니다.'

해서 자신은 물었더랬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고.

그랬더니 로이드는 그저 뜻 모를 미소만 지으며, '뻔하지요'라는 대답만 들려주었다.

'뻔하다니. 그런 걸 어떻게 뻔하게 척척 예상한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알기로 로이드라는 자는 동부 산맥으로 따로 정찰을 보내지도 않았다.

그저 지난 며칠 동안 이곳에서 공사를 감독했을 뿐이다.

한데 마치 날개 달린 눈이 따로 있는 것처럼 굴다니.

솔직히 그의 예측을 선뜻 믿기가 어려웠다.

오늘 이른 아침까지도 그랬다.

식사를 하고 세수를 하면서는 피식 웃기까지 했다.

마음속으론 '거 봐, 아무 일도 안 일어나잖아'라는 생각도 품었다.

한데 지금 보니?

그랬던 자신의 의심이 틀렸다.

정오 무렵이 되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쪽 산맥 멀리에서부터 낮고 육중한 땅울림이 느껴지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묵직한 생물체 무리가 한꺼번에 이동하며 내는 특유의 땅울림.

앞을 가로막는 나무며 바위를 모조리 깨부수며 내는 포효성.

황야에서 살아가는 초식성 대형 몬스터, 마스토돈 무리가 분명했다.

'땅울림이 다가오는 기세로 보아서 곧 모습을 드러내겠군.'

코뿔소와 코끼리를 섞은 듯한 4미터의 덩치.

그런 수백 마리의 무리가 들이닥칠 것이다.

'그것이 마스토돈 무리의 이동 방식이니까.'

꽈드득!

블랑크 경은 랜스를 움켜쥐었다.

내심 앞으로의 전투 양상을 예상했다.

'마스토돈 무리는 동쪽에서부터 곧바로 서진하며 남작령으로 돌진해 오겠지.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전력으로 수행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대응법은 힘 대 힘의 정면 돌격일 터.'

자신이 백색창기병의 선두에 서리라.

달려오는 마스토돈 무리를 향해 정면으로 돌격하리라.

놈들의 상아와 뿔을 피해 앞다리 관절에 랜스를 꽂아넣으리라.

'그렇게 선두의 마스토돈을 저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까. 쓰러져 진로를 막는 선두의 놈 때문에 무리 전체의 대열이 정체되고 어지러워지겠지. 그러면 놈들의 돌진도 자연히 중단될 터.'

그때부터는 제자리에 멈춘 마스토돈 무리를 둘러싸고 빙글빙글 돌며 기동한다.

기마 사격과 투창으로 놈들을 유린한다.

마치 양파껍질을 벗기듯.

바깥에서부터 차근차근 숨통을 조여 간다.

그렇게 무리 전체를 몰살시키면 되는 것이다.

'충분히 가능해. 프론테라 영지의 보병들이 제대로 지원을 하고, 대열을 지켜주면 할 수 있다.'

블랑크 경은 머릿속에 떠오른 전투 양상을 토대로 결과도 예측해보았다.

'마스토돈 무리는 전멸. 우리 백색창기병은... 최소 이십에서 최대 삼십 기를 잃겠군.'

500의 총인원 중에 20에서 30의 사상자 발생.

꽤나 큰 피해일 터였다.

하지만 블랑크 경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상관없다. 최선을 다한 결과가 그것이라면 만족한다. 그것이 우리의 영광이니까.'

국왕의 명을 받아 나선 전장이다.

몬스터 무리의 습격으로부터 나라의 땅을 지켜내는 일이다.

그런 전장에서 맞이하는 죽음은 결코 두렵지 않았다.

"전원 돌격 준비. 이곳에서 대기하다가 신호가 떨어지면 일제 돌격을 실시한다."

"예!"

영지 중심가에 자리 잡은 500인의 백색창기병대가 우렁차게 화답했다.

일제히 새하얀 랜스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한데 그때였다.

남작가 저택 쪽에서 전령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리고 뜻밖의 명령을 전달해 왔다.

"헉, 후우, 허억. 남작님의 명령입니다. 백색창기병대 전원은 현재 위치를 이탈하여 남쪽 마레즈 개간지 경계에서 랜스와 삽을 함께 갖추고 대기하십시오."

"뭐?"

블랑크 경의 턱수염이 꿈틀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남쪽에서 대기하라니. 그러면 돌격은?"

"정면 돌격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저기, 동쪽 능선 위의 새하얀 바위가 보이십니까?"

"보인다만."

"저곳에 로이드 님이 계십니다."

"로이드 프론테라? 그자가 왜 저기에...."

"저곳에서 작전을 지휘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블랑크 경께서는 남쪽의 지정된 위치를 사수하며 대기하다가, 저 바위에 청색 깃발이 세워지면 북쪽으로 '천천히' 전진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천천히? 저 마스토돈 무리를 상대로? 전력 질주나 돌격이 아니라?"

"예. 그렇습니다. 전진하며 최대한 흙먼지를 많이 피우고, 삽으로 랜스를 요란하게 두드리라는 말씀도 주셨고 말입니다."

"아니, 대체...."

블랑크 경의 표정이 굳었다.

말이 안 되는 명령이었다.

마스토돈 무리를 정면에서 막아서 돌격을 저지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천천히 전진하라니. 돌격의 함성 대신 먼지와 소음이나 만들어내라니.

"자네, 명령을 제대로 받은 것이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확실합니다. 아, 그리고 로이드 도련님께서 블랑크 경께 꼭 전하라 제게 당부하신 전언이 있습니다."

"꼭 전하라니. 무슨 전언이기에."

"엿새 동안의 삽질이 드디어 빛을 볼 때가 되었습니다,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

블랑크 경의 입이 다물렸다.

문득, 지난 엿새 동안 치렀던 삽질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알겠네. 명을 따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럼."

전령이 예를 표하며 물러났다.

블랑크 경은 그 길로 백색창기병을 이끌었다.

명령에 따라 남쪽으로 향하는 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연 지금 이 작전이 효과가 있을까.'

문득 떠오르는 기억.

7일 전의 밤이었던가.

로이드가 치켜들던 삽.

삽에서 쏟아져 나오던 맹렬한 기세.

그렇게, 하늘을 향해 쏘아져 수십 미터나 치솟던 마나의 폭풍.

그런 광경은 처음 보았다.

몇 번 본 적이 있던 소드마스터의 오러보다 더욱 위력적으로 느껴졌다.

그 내기에서 진 뒤부터였다.

로이드의 요청에 따라 기꺼이 삽을 들었다.

부하들에게도 삽을 들게 하였다.

그렇게 로이드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우리는... 엿새 동안 삽질만 했지.'

진짜로 삽질만 했다.

까라는 대로 까고.

파라는 대로 파고.

흙을 옮겼다. 쌓았다. 다졌다.

처음엔 그게 어떤 시공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사흘이 지나고서야 건설물의 윤곽이 드러났다.

'그건, 지면에 설치하는 초대형 부조 조각이었어.'

가로 150미터.

세로 100미터.

서쪽이 높은 15도 경사의 반듯한 토대가 만들어졌던가.

그 뒤로도 계속 삽질을 반복했다.

흙 토대 위에 화산재를 옮겼다. 덮었다. 다졌다.

그다음엔 로이드가 지시하는 부분을 긁어내거나, 더 두껍게 만들었다.

때로는 물을 부어가며 굳혔다.

그러다 보니 서서히 하나의 거대한 형상이 만들어졌다.

바로 황야에서 살아가는 육식성 초대형 몬스터, '메가라니아'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찾아갔지. 따졌어.'

이래선 안 된다고.

이게 무슨 방어 준비냐고.

대놓고 의문을 표했더랬다.

그랬더니 로이드의 반응은 어땠던가.

'그거, 같은 양의 흙을 쌓아서 올리는 토벽보다 훨씬 방어 효과가 좋을 겁니다. 이번만은 확실히 말입니다... 라고 했었지, 아마.'

당연히 믿음이 가질 않았다.

고작 저런 바닥에 새긴 부조 형상으로 마스토돈 무리를 막아낸다니.

'게다가 이렇게 돌격마저 못하게 한다니. 대체 어쩔 생각인 거지?'

남쪽으로 이동하는 내내 블랑크 경은 번민에 휩싸였다.

기병의 돌격 타이밍은 아무 때에나 나오는 게 아니다.

특히 상대가 인간이 아닌 몬스터인 경우 더욱 그렇다.

한데 그런 귀한 돌격 기회를, 로이드는 무슨 생각인지 그냥 허투루 날리려 하고 있었다.

'설마 미신 같은 걸 믿고서 이러는 건 아니겠지.'

입술을 잘근거리는 블랑크 경.

그의 걱정 담긴 눈길이 로이드가 있을 새하얀 바위를 향했다.

'과연 이런 방법이 효과가 있을까.'

"효과? 당연히 있지."

로이드가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물론 앞으로의 상황도 자신이 예상한 그대로 흘러갈 것이다.

두 번째로 남작령을 급습해 올 몬스터가 마스토돈이 될 것임을 똑 부러지게 예측했던 것처럼.

"이걸 모두 확신하셨던 겁니까?"

"어."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비엘이 물었다.

"어떻게 확신하신 것인지."

"간단해. 똑똑하니까."

"...."

"농담이고. 자료를 좀 뒤적여봤어."

"자료를 말입니까?"

"어. 이거."

툭툭.

로이드가 낡은 책자 하나를 들어서 먼지를 털어 보였다.

하비엘은 그 책자의 가죽 표지에서 '동부 황야 몬스터 도감'이라는 제목을 찾아볼 수 있었다.

"저택 서재에 있더라. 이걸 보니까 동부 황야 몬스터의 목록과 습성이 다 정리되어 있더라고. 그래서 분석하고, 참고했지."

"그 결론이 오늘의 작전이고 말입니까."

"어."

로이드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거짓말이다.

책을 참고한 것은 맞되, 자신이 참고한 책은 이 동부 황야 몬스터 도감만이 아니다.

'사실은 아주 유용한 다른 책이 또 있지. 소설 철혈의 기사라고. 허허.'

자신이 내보인 몬스터 도감.

사실 저 도감의 내용만으로는 작전을 짤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걸 참고했다고 거짓말을 한 이유가 있었다.

'똑똑해 보이는 명확한 근거와 이유가 필요하니까.'

당연한 일이다.

근거 없는 천재.

그냥 똑똑한 척척박사.

그런 식으로 보이는 건 곤란하다.

자료도 없는데 이곳의 모든 걸 아는 모습을 보인다면?

정찰을 하지도 않았는데 제갈공명 코스프레를 하며 미래를 다 맞춰댄다면?

처음엔 칭송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는 달라질 것이다.

'의심받겠지. 여기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니까.'

그러니 지금처럼 '작전의 근거로 삼는, 이곳 사람들이 이해할 최소한의 자료'를 제시하는 게 중요하다고 로이드는 생각했다.

'되도록 의심은 안 받고 사는 게 편하니까.'

의심 없는 영지.

신뢰 넘치는 일상.

그 정신을 모토로 오늘도 힘차게 혓바닥을 놀리는 로이드였다.

"내가 말했을 거야. 이거, 몬스터 도미노 현상 때문에 일어난 사태라고. 그럼 로커스 메뚜기 다음으로 이곳을 습격해 올 몬스터는? 뻔하지. 집단 서식을 하고, 기동성이 좋으며, 먹이사슬 하위에 있는 놈. 거기에 동부 산맥을 넘어올 정도로 튼튼한 놈."

"마스토돈이로군요."

"바로 그거야."

딱 여기까지가 자신이 '동부 황야 몬스터 도감'을 참고한 내용이다.

그다음의 준비와 작전은?

'당연히 철혈의 기사를 참고했지.'

자신은 천재가 아니다.

물론 제갈공명도 절대로 아니다.

그저 이곳 사람들보다 약간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어쨌건, 철혈의 기사에 짤막하게 언급됐던 오크족의 사냥 풍습이 많은 도움이 됐어.'

소설에 나오던 내용이 살짝 떠올랐다.

오크족은 마스토돈을 사냥할 때 메가라니아의 모습이 새겨진 거대한 석판을 사용한다. 그러면 머리가 나쁘고 경계심이 강한 마스토돈은 석판의 메가라니아를 진짜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면서 '일단은' 반대편으로 달아나고 본다.

일단 경계부터 하고 판단은 뒤에 하는 것이다.

오크들은 바로 그 습성을 활용했다.

그렇게 마스토돈이 '일단' 달아나는 방향에 함정을 설치하는 것으로 말이다.

"그러니까 함정은 이제부터야. 잘 봐."

로이드가 턱짓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 순간, 땅울림이 더욱 커졌다. 가까워졌다.

일대 수백 그루의 나무가 흔들렸다. 쓰러졌다.

마침내 마스토돈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쿼오오오오!"

콰자작! 투두두두두-!

4미터의 덩치.

코뿔소의 뿔과 코끼리의 상아, 들소의 머리를 지닌 초식형 몬스터, 마스토돈.

그 수백의 무리가 동부 산맥 기슭을 따라 달려 내려왔다.

인간의 사냥터와 벌목장을 지나, 텃밭을 짓밟았다.

특히, 선두에서 달려오던 무리의 대장 마스토돈은 흥분한 콧김을 뿜으며 생각했다.

산맥을 넘어왔더니 모처럼 평평한 곳이 나와서 좋다고.

게다가 황야와 달리 푸릇한 풀밭이 곳곳에 보여서 더욱 좋다고.

그러니 한동안 이곳에서 마음껏 날뛰며 풀을 뜯어 먹으면 다음 번식기 걱정은 없겠노라고.

대장 마스토돈이 충혈된 시선으로 남작령을 노려보았다.

마침내 목격하고 말았다.

"...쿼오옥?"

인간의 영지 한가운데.

그곳에 천적의 모습이 보였다.

바로 자신들을 주식으로 삼는 끔찍한 마수, 메가라니아의 모습이었다.

악어처럼 길쭉한 아가리.

그 속에 비죽비죽 솟아나온 이빨.

뿔도 들어가지 않는 갑옷 같은 비늘.

먹잇감의 뱃가죽을 찢는 데에 특화된 발톱까지.

심지어 저기에 서 있는 메가라니아의 크기는 자신이 아는 천적의 모습보다 최소한 3배는 컸다.

게다가 놈이 이쪽을 향해 웅크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메가라니아 특유의 치명적인 사냥 자세였다!

"쿼오오, 쿼옥!"

대장 마스토돈은 당황하고 말았다.

어째서 메가라니아가 이곳 인간의 터전에 있는 건지.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바닥에 흙과 화산재로 부조처럼 새겨진 메가라니아의 형상이 너무나 실감 났다. 마치 당장에라도 여기로 덮쳐 와서 자신의 허리를 한입에 끊어놓을 것처럼 보였다.

무서웠다.

혹시나 저게 가짜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만일의 경우를 떠올리니 두려워졌다.

죽기 싫었다.

결국, 무리의 대장 마스토돈은 습성대로 안전함부터 추구하는 결정을 내렸다.

"쿼오옥! 오옥!"

콰과가가가각!

메가라니아가 보이는 서쪽으로의 돌진을 멈추었다.

뒤에서 따라오던 무리 전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마스토돈 무리가 갈 곳을 잃고 혼란에 휩싸였다.

그때였다.

"지금! 청기 들어!"

로이드가 외쳤다.

하비엘이 대형 깃대를 들었다.

새하얀 바위 위로 펄럭이는 청색 깃발.

그 모습이 남쪽 마레즈 개간지 초입에서 대기 중이던 블랑크 경에게도 똑똑히 보였다.

"...."

설마 작전이 먹힐 줄이야.

'겨우 저런 바닥에 새긴 형상 때문에 진짜로 마스토돈이 돌진을 멈출 줄은....'

정말로 몰랐다.

직접 시공에 참여하며 삽질을 했음에도 그랬다.

'혹시 동쪽을 향해 비스듬히 지면을 기울여서 만든 덕분인 건가.'

어쩌면 15도 경사로 쌓은 토대.

그리고 산맥에서 내려오며 아래쪽을 보는 마스토돈의 시야 각도.

그 두 가지 각도가 어우러져서 부조 속 메가라니아의 모습이 마스토돈에게 더욱 실감 나게 느껴진 것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에만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블랑크 경은 아까 받았던 명령을 떠올리며 외쳤다.

"속보로 전진! 삽과 랜스를 들어라!"

다각! 다각!

그의 명을 받은 500인의 백색창기병이 움직였다.

트롯(Trot) 속도로 다각다각 적당하게 전진했다.

미리 명령받은 대로 흙먼지를 잔뜩 피워냈다.

양손에 나누어 쥔 랜스와 삽을 부딪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카앙! 캉! 카앙!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북쪽으로 서서히 움직였다.

그러자 마스토돈 무리가 또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쿼오오옥!"

대장 마스토돈이 길게 울부짖었다.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위협이 먹히는 건가?'

정말로 그랬다.

블랑크 경은 모르고 있었지만, 만약 그가 처음 원했던 대로 재빠른 돌격을 감행했다면 마스토돈 무리는 지금과 반대의 반응을 보였을 터였다. 지나친 위협에 방어본능을 느껴 사납게 마주 공격해 왔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서서히 이동하며 흙먼지와 소음으로 마스토돈을 적당히 압박했다.

그게 제대로 먹혔다.

저 멀리 보이는 천적 메가라니아의 모습이 주는 공포감.

거기에 남쪽에서부터 차근차근 다가오는 흙먼지와 소음.

그게 초식 몬스터 마스토돈의 도주를 유도한 것이었다.

'잠깐. 그런데 놈들이 도망치는 방향에는... 남북으로 크게 파이며 이어진 통로가 만들어져 있어. 설마.'

블랑크 경은 비로소 깨달았다.

지금 마스토돈이 몸을 돌려 달아나는 곳.

그곳은 지난 엿새 동안 자신과 대원들이 미친 듯이 삽질을 했던 곳이었다.

물론 자신들은 뭔가를 의도하고 삽질을 하진 않았다.

그저 로이드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

까라면 까고.

파라면 파고.

그렇게 메가라니아 부조의 토대를 만들기 위해 흙을 퍼냈을 뿐이었다.

한데 그 결과는?

그곳에 운하, 혹은 해자처럼 넓고 기다란 구덩이 형태의 통로가 생겨났다.

'한데 그 구덩이... 남쪽과 북쪽 끝이 마레즈 개간지 옆을 흐르던 강과 거의 맞닿아 있었는데.... 그렇다는 것은 설마?'

불현듯 머릿속에 번쩍 떠오르는 예감.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퍼즐 조각들.

하나씩 맞춰지고.

차례로 설계되더니.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는 함정의 실체.

그 깨달음에 블랑크 경은 오싹한 소름을 느꼈다.

고개를 돌렸다.

동쪽 산맥 기슭의 새하얀 바위를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그의 예감에 대답이라도 해주듯 커다란 백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동시에 남쪽에서부터 마스토돈 무리를 향해 무지막지한 크기의 물풍선, 아니, 환상종이 맹렬하게 굴러 왔다.

"하망!"

수공(水攻)의 시작이었다.

112화. 호수의 지배자 (1)

물줄기가 쏟아진다.

맑고 힘 있게 떨어져 수통을 채운다.

쪼르륵.

"여기, 이것 좀 드십시오."

"...."

백색창기병 대장 블랑크 경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돌아보니 부관이 휴대용 수통을 내밀고 있다.

"물입니다. 먼지를 하도 마셨더니 목이 칼칼하실 듯해서."

"어, 고맙네."

수통을 받았다. 기울였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물줄기.

문득 떠오른다.

아까 보았던 광경. 마스토돈 무리. 곧게 뻗은 통로. 쏟아지던 물줄기. 굴러 오며 물을 뱉어내던 하망이. 쓸려가던, 아니, 하망이의 모습과 기세에 겁에 질려 스스로 물길을 따라 헤엄쳐 도망치던 수백의 짐승들.

"...."

차가운 물이 빈속을 싸하게 울렸다.

그만큼 수공의 효과는 대단했다.

그토록 많던 마스토돈 무리를 일거에 쓸어버렸으니까. 통로 반대편 끝, 북쪽 강물 속으로 짐승들을 밀어 넣어 버렸으니까.

'오늘 내가 본 것은... 뭐였지.'

실화인지. 혹은 한바탕 고약한 꿈인지. 그도 아니면 거대한 사기극의 일부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이 하나 있었다.

로이드 프론테라, 그의 계획이 정확히 적중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남작령에 거의 아무런 피해 없이 수백의 마스토돈 무리를 막아냈다는 것이었다.

"아, 물론 아무런 피해가 없는 건 아닙니다."

"...."

어느새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목소리.

부관이 아니다.

시선을 돌리니 보이는 얼굴.

로이드 프론테라가 특유의 뜻 모를 쓴웃음을 싱긋 내걸고 있었다.

저 무시무시한 작자는 대체 어느 틈에 온 걸까.

블랑크 경은 조금은 멍한 기분으로 물었다.

"피해가 있었소?"

"네. 있죠."

으쓱이는 로이드의 어깻짓.

이내 돌아오는 자조 섞인 대답.

"산기슭에 있던 텃밭들이 망가졌습니다. 양파와 대파, 감자, 옥수수를 심어뒀던 곳인데 말이죠. 안타깝네요. 특히 거기 산기슭에서 키우는 옥수수가 진짜 맛있는데."

"...."

"아, 그리고 수공으로 마스토돈들을 쓸어버리느라 포장도로도 일부 유실됐습니다. 하, 저거 힘들게 만든 건데. 뭐 어쩌겠습니까. 다시 복구해야죠."

"...."

수백의 마스토돈을 막아냈는데 그 정도 피해면 표창장이라도 받아야 할 판국이다.

그런데도 죽겠다고 엄살이나 부려대는 이 작자.

대체 뭘까.

블랑크 경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설마 오늘 이 수공, 그걸 위한 수로, 아니, 마스토돈이 자발적으로 뛰어들어 헤엄치며 도망갈 구덩이 통로. 모두 마스토돈의 형상을 만들 때부터 계획했던 거요?"

"물론이죠."

빼지도 않고 척척 대답한다.

쓸데없는 겸양도, 겸손 따위도 없다.

"엿새 동안 땅 파내느라 힘드셨죠? 그거 다 계획한 겁니다. 부조 형상을 만들 바로 옆자리를 파면 되는데 왜 하필이면 먼 곳의 흙을 파내서 옮겨야 하는 건지 불만도 많으셨지요? 그것도 다 계획한 겁니다. 한 곳에서 그냥 흙을 퍼내면 되는 건데 어째서 수로를 파듯이 정해진 경로를 기다랗게 파야 했던 건지 짜증도 나셨지요? 물론 그것도 다 계획한 겁니다."

"그럼 그 수로의 경로를 전부...."

"예. 전부 미리 측량하고 설계했지요. 우리 남작령을 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시계 방향으로 크게 감싸며 지나가는 프로나 강, 그걸 이용하려고 말입니다."

"...."

"강줄기가 서쪽으로 꺾어지는 지점에서 출발해서 다이렉트로 북쪽까지. 그렇게 시계 방향으로 돌아서 흘러오는 하류와 만나도록. 뭐, 덕분에 앞으로 두고두고 써먹을 수로 하나 건졌지요. 저거 조금만 다듬고 정비하면 미니 운하 정도쯤의 역할은 충분히 해줄 테니까."

꿩 먹고 알 먹기.

사탕 한 봉지 사고 주차권 챙기기.

마스토돈 습격 막아내고 운하 획득하기.

이 모두는 머리가 나쁘면서도 조심성이 많은 마스토돈 특유의 습성 덕분에 성립이 가능했던 작전이었다.

"뭐 어쨌건, 북쪽으로 쓸려간 마스토돈들은 거기서 알아서 잘 살겠지요. 쓸려 내려가긴 했어도 그 정도로 쉽게 죽을 놈들은 아니고, 마침 북쪽은 영지가 없는 무인지대고, 그렇다고 여기로 녀석들이 돌아올 일은 없을 거고."

"돌아올 일이 없다니, 어떻게...."

"천적인 메가라니아의 모습을 봤으니까 말입니다."

"아."

"녀석들, 그런 거 하나는 기억 잘할 겁니다. 그러니 천적이 있다고 인식된 이쪽으로 굳이 올 일은 없겠지요. 피하면 모를까."

"설마 그것까지 다 계산에 두신 거요?"

"예. 당연한 거 아닙니까?"

"...."

블랑크 경은 대답을 잃었다.

아니, 안 당연하다.

그저 싸우고, 물리치면 된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렇게 목숨을 초개처럼 내버리며 왕국의 영토를 지켜내면 된다고만 여겼는데.

'그런데 싸우지도 않고 이겼어. 거의 아무런 피해도 없이.'

아니, 심지어 앞으로 두고두고 써먹을 운하까지 겸사겸사 만들었다.

눈앞의 이 로이드라는 자, 이런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계산을 한 걸까. 그 계산을 현실로 만들어내기 위해 얼마나 머리를 굴렸을까.

단순한 무인인 자신으로선 감도 잡히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목울대가 출렁였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진짜 싸움이란 건 이런 건지도 모르겠구나.'

무조건 돌격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용맹을 앞세우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때로는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것.

철저하게 실리적인 이득을 취하는 것.

그것이 병력을 지휘하는 자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승리가 아닐까.

'그러면 부하들을 잃지 않아도 될 테니까.'

자신이 치렀던 수많은 전투가 떠올랐다.

백색창기병 대원으로서 12회.

창기병 대장이 되고서는 오늘까지 합쳐서 5회.

그렇게 무려 17회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면서 동료나 부하를 한 사람도 잃지 않은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언제나 당연한 듯 치러야 했던, 전우의 사체 수습 절차가 빠진 전장 정리.

그 낯설고도 신선한 경험이 가슴을 두드렸다.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그래. 언제나 용맹과 명예로 죽음을 포장했지. 전장에서 용맹하게 싸우다 죽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라고만 여겼어. 하지만 여기에 더 큰 용맹과 명예가 있었구나. 싸우고도 죽지 않는 것. 가족과 연인, 동료의 품으로 무사히 돌아오는 것. 그래서 다음의 더 큰 싸움을 치러낼 수 있게 되는 것 말이다.'

그렇게 계속 살아남아 더욱 강해진다.

강해져서 더욱 큰 싸움을 이겨낸다.

그렇게 오래도록 나라를 수호한다.

한편으로는 가족과의 행복도 지켜간다.

'그것이야말로 더욱 명예를 빛낼 길이었구나.'

그동안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살릴 수 있었을 부하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후회와 충격, 깨달음과 감탄을 동시에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달라진 눈으로 로이드를 쳐다보았다.

"고맙소."

"예?"

의아한 눈길을 보내오는 로이드.

그를 향해 존경심을 담아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잘 부탁하오."

곁에서 지켜보며 배우리라.

더욱 깨닫고, 익히리라.

그렇게, 이 존경스러운 사내를 마음의 스승으로 삼으리라.

"어, 네. 뭐, 저도 잘."

로이드는 뻘쭘함을 애써 삼키며 마주 손을 내밀었다.

굳게 나누는 악수.

그 속에 오가는 진심.

블랑크 경은 왈칵 고이려 하는 눈물을 참았다.

로이드는 오그라들려는 손가락을 힘껏 유지했다.

그렇게, 두 번째 몬스터 습격을 막아낸 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남작령의 정리 작업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짓밟힌 텃밭을 복구하고, 수공에 휩쓸려 유실된 포장도로를 보수했다.

그 와중에 소소한 소득도 있었다.

두려움에 스스로 물길로 뛰어들어 수공에 휩쓸린 마스토돈 무리.

그 와중에 어미와 떨어져 낙오된 새끼 마스토돈 다섯 마리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래서, 경이 얘들을 키워보겠다고?"

"그렇습니다, 로이드 님."

굳은 결의를 담아 보고하는 바이에른 경.

그런 바이에른 경의 목소리에 화답하듯, 그의 뒤에 있던 새끼 마스토돈 다섯 마리가 힘차게 울음을 터뜨렸다.

"뿌이이이잉-!"

"보십시오, 로이드 님. 다행히 다친 곳도 없이 건강하고 튼튼한 놈들입니다."

"어, 그건 알겠는데. 위험하진 않을까?"

"안 위험할 겁니다."

"그걸 경이 어떻게 알아?"

"귀여우니까요."

"...."

"물론 저 말고 이 아가들 말입니다."

바이에른 경이 마스토돈 새끼들을 가리켰다.

한데 바이에른 경, 어쩐지 평소의 근엄한 모습과 달리 볼이 살짝 붉어져 있다.

"제가 일전에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야생에서 자란 성체 마스토돈은 지극히 사나워서 인간이 접근하기도 어렵지만, 새끼 때부터 길들인 녀석은 놀랍도록 달라진다고 하더군요."

"어, 길들이는 게 가능해지는 건가?"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참에 길들여 보려고?"

"예, 그렇습니다."

"흐음, 그래도 엄청 힘들지 않을까."

"안 힘들 겁니다."

"그걸 경이 어떻게 알아?"

"귀여우니까요."

"...."

"물론 저 말고 이 아가들 말입니다. 크흠, 흠."

이미 바이에른 경은 커다란 젖병을 들고 있었다. 아니, 저건 이미 젖병이라기보단 미니 드럼통에 젖병 꼭지만 달아둔 수준의 크기였다.

"뿌애애애앵!"

"뿌이이이잉!"

송아지만 한 새끼 마스토돈 다섯 마리가 저마다 젖병을 먼저 물려고 난리다.

그럴 때마다 바이에른 경은 흐뭇한지 연신 크흥흥 콧소리를 내며 녀석들에게 차례로 젖병을 물리는 게 아닌가.

"...."

거, 바이에른 경.

평소에 근엄하던 모습이라 그렇게 안 봤는데.

'은근 자발적 집사 기질이 있었구만.'

다 큰 남자가 귀여운 아기 동물을 향해 우쭈쭈를 연발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니 약간 속이 느글거렸다.

하지만 뭐, 나쁜 일은 아니리라.

"쓰읍. 그래서, 허락해 달라고?"

"예, 부탁드립니다."

"흐음, 어떡할까."

초조하게 이쪽을 바라보며 결정을 기다리는 바이에른 경.

그를 보며 잠시 고민에 잠겼다.

마스토돈은 덩치가 4미터에 달하는 초식성 괴물이다.

당연히 덩치만큼 엄청난 힘을 지녔다.

그걸 성공적으로 길들인다면?

영지의 커다란 전력이 될 것이리라.

평소엔 유용한 노동력도 되어 주리라.

'밭을 갈게 할 수도 있고. 무거운 짐이나 초대형 마차를 끌게 할 수도 있고. 몇 마리를 엮으면 청정 무공해 기관차 역할을 시킬 수도 있겠지. 뭐, 물론 똥은 소똥과는 비교도 안 되게 엄청난 규모로 싸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활용성이 무궁무진할 것 같다.

"그래. 기왕 하는 거, 잘 키워 봐."

"정말이십니까?"

"그럼 거짓말일까 봐?"

"아니,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자, 푸딩아, 푸당아? 풍덩이랑 풍딩이, 푸동이도. 다들 정렬해서 인사드려라. 이제부터 너희가 모실 로이드 님이시다."

"뿌이이이잉!"

"뿌애애애앵!"

'...커헐, 벌써 이름까지 지어뒀던 건가.'

참 본격적이다, 본격적이야.

만약 허락해 주지 않았다면 단단히 삐쳤을 뻔했네, 우리 바이에른 경.

로이드는 결국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 뒤로도 그는 여러 일을 처리했다.

예전, 자신과 함께 동부 산맥을 넘었던 공병대원들을 뽑았다.

그들을 동부 산맥 너머로 다시 보냈다.

정찰을 겸하여 오크 부족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동안은 확인해 보고 싶었어도 그럴 여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이쪽이라도 일단 살고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조금이라도 눈을 돌리는 게 사치인 상황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나마 숨 돌릴 틈이 생겼다.

그래서였다.

로이드는 그동안 해보고 싶었지만 여유가 없어서 미뤄 두었던 또 다른 일을 시도했다.

"설명 잘 들었지? 이제부터 거기 가만히 앉아 있으면 돼."

"여기 말입니까?"

"어."

"그럼 설명하신 것처럼 로이드 님이 제 마나를 대량으로 흡수하게 되시는 겁니까?"

"어. 그럴 거야."

왕도 마젠타노에서 급속 충전 옵션을 발동했던 때처럼.

국왕 알리시아의 마나를 대량으로 흡수했던 것처럼.

잘만 하면 마나하트를 또 성장시킬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한밤중에 하비엘을 연무장으로 불러냈다.

"하지만 로이드 님."

"어. 왜."

"저는 이제 소드마스터입니다."

"어. 그래서?"

"이제 로이드 님의 자장가, 없어도 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하. 소드마스터 증후군에서 벗어나셨다?"

"예. 지나치게 예민해졌던 감각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이젠 아쉬울 거 없으니 내가 하라는 대로 막 끌려가고 이용당하기 싫어지셨다?"

"예."

"과연 그럴까?"

"예?"

"그럼 오늘 밤에 스스로 잠들어 보시든가."

로이드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날 밤, 하비엘은 밤새 뒤척였다.

잠들지 못했다.

뼛속 깊이 깨달았다.

습관이라는 것이 참으로 무서운 것임을.

어느새 자신이 로이드의 자장가 없이는 잠들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음을.

"그러니까 얌전히 앉아 있자?"

"...예."

다음날 밤, 하비엘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다스리며 연무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윽고 로이드가 허공으로 전력을 실은 삼중발파를 쏘아냈다.

의도된 탈진 상태에 빠져들었다.

급속 충전 옵션을 발동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했다.

국왕 알리시아 때처럼 마나를 대량으로 흡수할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하비엘도 아스라한 심법의 보유자였기 때문이었다.

딩동.

[상대의 마나 써클이 이쪽의 써클 회전에 공명하며 마나 흡수의 흐름을 교란하고 있습니다.]

눈앞에 떠오르는 저 메시지와 함께, 하비엘에게서의 마나 흡수가 취소되었다.

덕분에 로이드는 애꿎은 연무장 모래와 공기로부터만 마나를 빨아들여야 했다.

탈진했던 몸의 원기만 간신히 되찾았음은 물론이었다.

"...쳇. 도움도 안 되는 녀석 같으니."

아쉬웠다.

대신 블랑크 경을 소드마스터로 키워서 마나 배터리로 삼아볼까 싶은 생각도 잠깐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까지는 없는 상황이었다.

메뚜기 떼도.

마스토돈 무리도.

이제부터 연이어질 몬스터 도미노 현상의 시작일 뿐이다.

"하지만 그걸 일일이 다 막아내다간 버티지 못할 겁니다. 의미 없는 소모전이라는 게 늘상 그런 법이니까 말입니다."

다음 날 저녁, 로이드는 남작가 집무실에 모두를 불러들였다.

남작 부부와 하비엘, 바이에른 경, 블랑크 경을 한자리에 모았다.

그들 앞에 섰다.

그동안 품고 있던 큰 그림을 펼쳐 보였다.

그것은 몬스터 도미노로 인해 연달아 일어날 몬스터 무리의 습격을 한 큐에 방지하고, 영구적인 평화를 확보해낼 묘안이었다.

"동부 산맥 중턱의 카푸아 호수, 그 일대의 지배자인 킹 스토마를 강제로 깨워서 우릴 위해 일하게 만들면 됩니다. 물론 그걸 위한 세부적인 계획도 이미 세워 뒀고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참 쉽죠?"

그의 말에 집무실의 모두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어쩐지 아득해지는 기분 속에서 생각했다.

저 녀석에게 안 쉬운 건 대체 뭘까, 라고.

113화. 호수의 지배자 (2)

"동부 산맥 중턱의 카푸아 호수? 그곳의 지배자인 킹 스토마를 깨우겠다고?"

고요하던 침묵을 제일 먼저 깬 이는 프론테라 남작이었다.

그의 황망한 물음이 모두의 고막을 콕, 찔렀다.

그제야 집무실의 모두가 움찔, 정신을 차렸다.

남작 부인은 저도 모르게 손수건을 꼭 쥐었다.

하비엘은 푸른 눈동자를 서늘하게 번득였다.

바이에른 경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블랑크 경은 기대감에 가슴 뜀을 느꼈다.

그런 모두의 귓가로 프론테라 남작의 물음이 이어졌다.

"카푸아 호수라면 지난번에 라코나 자작 때문에 상수도 취수장을 만든 곳이 아니더냐?"

"예, 맞습니다."

"한데 거기 잠든 킹 스토마라면, 엄청난 마수가 아니더냐."

"예, 그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수를 깨우겠다니, 따로 염두에 둔 목적이 있는 것이더냐?"

"예, 조금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조금 전에 말했다니?"

"우릴 위해 일하게 만들어볼까 합니다."

"킹 스토마를? 깨워서 일을 시킨다고?"

"예."

"...."

그게 가능한 일인가.

아니, 그 전에 그 마수에게 대체 무슨 일을 시키려고?

남작도, 나머지 모두도 멍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도저히 로이드의 계획이 짐작이 가질 않았다.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뭐, 일을 시킨다고는 하지만 딱히 거창한 건 아닐 겁니다. 매일 두 번씩, 아침저녁으로 녀석이 포효를 하도록 만들 생각입니다."

"포효를?"

"예. 일종의 영역 표시 행위랄까요."

"킹 스토마의 포효라. 그걸 하게 되면 뭔가가 달라지는 것이더냐?"

"예. 아주 많이 달라집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몬스터 도미노 현상으로부터 영지가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게 될 겁니다."

"어째서?"

"황무지에서 서쪽으로 달려오던 모든 몬스터가 동부 산맥을 넘어올 엄두도 못 내게 될 테니까요."

"설마, 킹 스토마의 포효 때문에?"

"그렇습니다."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품속에서 낡은 책자를 하나 꺼냈다.

"이건 서고에서 찾은 옛 기록입니다."

사박, 사박.

로이드의 손이 세심하게 책장을 펼쳤다.

낡은 종이가 묵은 곰팡내를 풍기며 내용을 드러냈다.

"여길 보십시오. 약 삼백오십 년 전, 그러니까 우리 가문이 이곳 봉토를 하사받기 전에 이 지방을 관리하던 영주가 남긴 기록이 있습니다."

로이드가 페이지의 한 곳을 짚었다.

"기록에 따르자면 당시에 킹 스토마가 처음 산맥에 유입되었습니다. 어디서 왔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쨌건 녀석은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고 합니다. 수많은 나무를 꺾고, 물어서 산맥 중턱에 쌓았다는군요."

"산맥 중턱에? 어째서?"

남작의 물음에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천연 댐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산맥 중턱에 대량의 물이 고이고 모였습니다. 이쯤이면 대강 짐작하시겠지요? 카푸아 호수가 생겨난 기원을 말입니다."

"...아."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당연히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으로만 여겼던 산중 호수인 카푸아 호수.

그게 킹 스토마에 의해 생겨난 것이었다니.

모두의 귀가 로이드의 입으로 쏠렸다.

"뭐, 처음 들으시는 게 당연합니다. 저도 이번에 이 기록을 통해서 처음 알았거든요. 어쨌건 그렇게 만들어진 댐 위로 흙이 쌓이고, 나무가 자랐다고 합니다. 풍경도 감쪽같이 자연적인 산중호수처럼 변했지요. 지금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킹 스토마는 만족스럽게 수면기로 들어갔습니다. 자신이 만든 호수 중심의 거처에서 말이죠."

"그럼 그 카푸아 호수가,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단 말이더냐? 킹 스토마의 손에 의해서?"

"예. 하지만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그 뒤쪽입니다."

팔랑팔랑.

로이드의 손이 페이지를 넘겼다.

"기록에 의하면 킹 스토마가 수면기로 들어선 이후부터 이쪽 지방의 삶이 험난해졌다고 하네요."

"어찌하여?"

"간단합니다. 간혹 몬스터가 동쪽에서부터 산맥을 건너왔거든요. 난동을 부리고, 사람을 잡아먹고, 뭐 그런. 산기슭에 자리한 우리 영지가 지금도 일 년에 한두 차례씩 겪고 있는 일들처럼 말입니다."

"아...."

남작의 눈빛에 이채가 떠올랐다.

로이드의 말을 들어보니 자연히 이해가 되었다.

실제로 지금도 프론테라 영지는 가끔씩 몬스터에 의한 피해를 입곤 했다. 대부분이 동부 산맥에서 내려오는 몬스터 때문에 일어나는 피해였다.

이번 몬스터 도미노 현상이 아니라도 항상 그랬다.

한데 산맥에서 이쪽 영지로 내려오는 길목인 카푸아 호수에서 강력한 마수가 영역 활동을 한다면?

답은 명확했다.

"그럼 킹 스토마가 몬스터를 막아주는 역할을 해줄 거란 말이더냐?"

"맞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킹 스토마를 깨우겠다는 것이고?"

"예. 하루에 두 번만 영역표시를 위해 포효성을 질러주면, 동쪽에서 오던 모든 몬스터가 겁에 질려 발길을 돌릴 테니까 말입니다. 일종의 생물학적 장벽 역할이랄까요."

"생물학적 장벽이라."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도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다.

방금 들은 로이드의 발상, 상상 이상의 스케일이긴 한데 설득력이 있다고.

한 번쯤은 시도해 볼 만하다고.

"하지만 위험하진 않겠느냐?"

"위험이라 하심은?"

"킹 스토마가 오히려 우리 영지를 습격할 가능성 말이다."

남작의 목소리에 희미한 걱정이 배어났다.

"그 무시무시한 마수가 행여나 우리 영지로 내려온다면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터인데. 혹시 그런 사태를 방지할 대책은 마련을 하였더냐?"

"물론입니다."

"어떤 것이더냐."

"그냥 가만히 있는 거요."

"가만히?"

"예."

"어떻게?"

"그냥 가만히요."

"...."

남작이 침묵했다.

로이드가 희미하게 웃었다.

"정말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과거에도 킹 스토마는 자신의 서식지를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철저하게 영역 생물의 습성을 보였다고 하는군요. 아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만약에...."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압니다. 무얼 걱정하시는 지도요. 하지만 우리에겐 아스라한 경이 있습니다."

"뭐?"

"이미 알고 계신 것처럼, 그는 소드마스터입니다."

"...."

모두의 시선이 하비엘에게 쏠렸다.

덕분에 쑥스러움을 느낀 걸까.

하비엘이 큼큼, 작게 헛기침을 했다.

로이드의 입가에 짓궂은 쓴웃음이 맺혔다.

"만약 킹 스토마가 영지로 내려와 난동을 부린다면 답은 간단합니다. 우리에겐 소드마스터인 아스라한 경이 있습니다. 거기에 용맹한 백색창기병도 가세한 상태지요. 킹 스토마가 아무리 강력한 마수라 한들 큰 무리 없이 사냥할 수 있습니다."

사실이었다.

문헌 기록이나 여러 학자들의 연구 일지를 통해 킹 스토마를 조사한 바 있었다.

그 결과 내린 결론은, 지금 남작령이 보유한 전력으로 충분히 사냥할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예상되는 킹 스토마의 힘은 크레모에서 상대했던 기가티탄과 거의 비슷할 걸로 예상이 됩니다. 그러니 사냥만을 목표로 한다면 아스라한 경 혼자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 죽일 수도 있을 겁니다. 오히려 수십만 마리 메뚜기 떼나 수백 마리 마스토돈보다 쉬울 테지요. 그놈 하나만 상대하면 될 테니까요."

"하지만 사냥하지는 않고, 우리를 위해 일하게 만들 거라는 말이더냐?"

"예. 우리 입장에선 이게 최선의 수단일 듯합니다."

"흐음, 그렇겠구나."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의 말을 듣고 보니 그림이 그려졌다.

킹 스토마를 정리해보자니....

1. 영지에 위협이 될 때 제거하기가 크게 어렵지는 않음.

2. 대신 그보다 더 처리하기 까다로운 다수의 몬스터 습격을 효과적으로 사전에 차단해줄 수 있음.

...이라 할 수 있었다.

이쪽에서 제어하기는 어렵지 않고.

더 큰 위협은 효율적으로 막아주는 존재.

그게 지금 남작령의 입장에서 만들어줄 수 있을 킹 스토마의 포지션이리라.

"한마디로 엄청나게 덩치 큰 경비견인 셈이로구나. 우리 집 앞마당에 목줄이 매여서 다른 몬스터를 겁주고 막아 주는."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작부인이 한마디 거들었다.

듣고 보니 확실히 그랬다.

좋은 요약이었다.

덕분에 이제는 모두가 로이드의 그림을 이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의문이 다 풀린 건 아니었다.

"으음, 대강은 알겠구나. 그런데 말이다."

남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킹 스토마를 어떻게 깨우고 뜻대로 조종할 생각이더냐?"

"조종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하면?"

"운동을 좀 시켜야죠."

로이드의 손이 낡은 책자를 향했다.

팔랑팔랑, 다시금 페이지를 넘겼다.

마침내 펼쳐진 마지막 페이지.

"여길 보시죠."

모두의 눈길이 로이드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그곳에는 킹 스토마의 습성을 한마디로 정의한 문장이 있었다.

[비버와 무척 흡사함.]

"...비버?"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중에서 블랑크 경만이 예외였다.

"강에 살며 댐을 만드는 커다란 쥐를 닮은 동물, 맞습니까?"

"딩동댕. 맞습니다. 나머지 분들은 비버를 잘 모르시는 듯하네요."

로이드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대강 블랑크 경의 말대로입니다. 강이나 호수에 살며 나뭇가지를 모아서 댐을 만드는 것이 비버의 습성입니다. 댐에 굉장한 집착을 보이지요. 심지어 대를 이어가며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입니다. 댐이 부서지면 만사를 제치고 달려나와 다시 댐을 만들려고 애를 쓰곤 합니다."

"그렇다면, 킹 스토마도 마찬가지라는 뜻이더냐?"

"예."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그는 대한민국의 티브이 동물농× 프로그램에서 봤던 비버의 모습을 떠올렸다.

'동물×장 202화였나. 동물원에서 사육되는 비버가 나왔었지.'

그 비버도 온종일 댐을 만드는 게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그렇게도 열심히 만들었더랬다.

한데 기껏 댐을 완성하면?

사육사가 댐을 파괴했다!

무자비하게 박살 냈다!

'완전 사악하게 괴롭히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아니었지.'

당시 방송에서 인터뷰하던 사육사의 말이 떠올랐다.

이렇게 해야 비버가 부지런히 계속 움직이며 야생의 습성을 잃지 않는다고. 댐을 완성한 채로 놔두면, 그래서 증축을 할 일마저 없어지면 그때부터 비버는 거기에 안주한다고. 뒹굴거리고 살이 찌며 잔병치레가 많아진다고.

그래서 틈틈이 댐을 부숴 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일거리를 제공해 줘야 비버가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건강해진다나.

'여러 학자들의 분석 결과, 킹 스토마도 그런 비버와 습성이 흡사하다고 했지. 그렇다면 저 방법, 아마도 통할 거야.'

로이드는 그런 비버의 습성을 모두에게 간략히 설명해주었다.

동물×장 이야기만 쏙 빼고 적당히 윤색했다.

그리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때쯤.

확신을 담아서 말했다.

"그러니 우리도 저 방법을 쓰면 됩니다."

"저 방법을?"

"예. 킹 스토마가 잠든 사이에 카푸아 호수의 둘레 일부를 살짝 허물어뜨리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걸 느낀 킹 스토마가 댐을 보수하기 위해 깨어날 것이고?"

"바로 그겁니다."

"으음, 그럼 댐이 다 보수되면?"

"그럼 다시 슬쩍 접근해서 또 댐을 부수면 됩니다."

"...."

그거, 너무 사악한 거 아닌가.

모두는 수면기에 있을 킹 스토마를 향한 갑작스러운 연민을 느꼈다.

하지만 로이드는 그런 모두의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거 신경 쓸 여력이 없으니까.'

당장 영지가 몬스터 도미노에 쓸려갈까 말까 하는 판국이다.

그러니 덩치 큰 마수 하나 1년쯤 괴롭혀서 영지의 평화와 안녕을 확보할 수 있다면, 백 번이라도 서슴없이 그 짓을 하리라 그는 다짐했다.

"게다가 킹 스토마만 무조건 불쌍하다 여길 필요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위험이 아예 없는 건 아닐 테니까요."

"으음, 확실히 덩치 큰 마수이긴 하니까."

"예. 게다가 철거 범위를 잘못 계산해서 댐을 무너뜨리면 대홍수가 일어날 겁니다."

"홍수가?"

"예."

로이드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원래 댐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아주 약간, 일부가 허물어지는 것만으로도 전체가 붕괴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킹 스토마가 호수 안에서 격렬하게 날뛰는 일이 생겨도 곤란해집니다. 그러면 호수에 국지적인 해일이 일어나면서 호숫물이 댐 위를 넘어와 버리는 사태가 생깁니다. 그러면 역시나 홍수가 일어나는 거고요."

"...."

모두의 말이 없어졌다.

그런 식의 재난은 미처 생각해본 적 없었기 때문이었다.

'뭐, 당연하지. 대형 댐을 접해본 적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방금 자신이 예시로 든 두 가지 타입의 재난은 언제나 발생 가능한 위협이기도 했다.

'첫 번째 케이스로는 1985년에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스타마(Stava) 댐 붕괴 사고가 있지. 댐 외벽에 생긴 약간의 손상 때문에 댐이 무너졌고, 25만 리터의 물이 시속 90km의 속도로 마을을 덮쳤어.'

게다가 두 번째 케이스인 호수 쓰나미는 더했다.

'1963년, 이탈리아의 바이온트(Vajont) 댐 붕괴 사고. 그건 더 끔찍했지. 댐 양쪽으로 점토층을 포함한 석회암층이 있었어. 한데 댐 덕분에 물이 차오르면서 이 지층에 물이 닿았지. 시간이 갈수록 지반이 약해졌고, 결국엔 산사태가 나면서 2억 3천8백만 제곱미터의 흙더미가 댐의 물로 쏟아졌어. 한꺼번에. 히로시마 원자폭탄 2배의 충격량을 선사하면서.'

그 결과는 실로 끔찍했다.

댐 호수에 쏟아진 대량의 흙더미.

그 여파로 높이 250미터라는, 충격과 공포의 메가 쓰나미가 댐 호수에 일어났다.

당연히 그 파도가 댐을 넘었다.

하류의 모든 마을을 휩쓸었다.

추정 사망자의 숫자만 최소 2,500에서 최대 5,000명에 달하는, 초대형 재난이었다.

"하지만 뭐, 그런 재난이 안 일어나도록 신경 써야겠지요. 그건 제게 맡겨 두시면 됩니다. 측량과 설계는 이럴 때 써먹기 딱 좋은 분야니까요."

킹 스토마를 깨우고 움직이게 하기 위한 의도적인 댐 붕괴.

하지만 댐 전체의 구조에 타격이 가지 않도록 철저한 계산을 할 생각이었다.

움직이게 될 킹 스토마의 동선을 유도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그래서입니다. 어쨌건 킹 스토마는 위험한 마수니까, 이번 작전에는 오로지 저와 아스라한 경, 그리고 백색창기병만 참여하게 될 겁니다."

"저희가 말입니까?"

블랑크 경이 물어왔다.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예. 일반 공병대가 수행하기엔 너무 위험한 작전이니까요. 행여나 킹 스토마가 이쪽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사납게 반응하더라도, 백색창기병이라면 전투적으로 대응하는 게 충분히 가능하실 테고."

일반인에 불과한 공병대는 그게 불가능하다.

행여나 킹 스토마가 날뛰게 된다면?

대량의 사상자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삽질을 하다가도 수틀리면 곧바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강인한 자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일찌감치 백색창기병을 공병대로 편입시키고, 메가라니아 부조 형상 만들기에 참가시켰던 겁니다. 어째서? 삽질에 익숙해질 시간을 드리려고."

"...."

로이드의 태연한 목소리가 집무실에 울렸다.

모두의 입이 다물렸다.

그리고 모두는 깨달았다.

설마 저런 것까지 계산하면서 지금까지의 일을 벌여 왔던 것인 줄은 몰랐다.

이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호수에 잠든 고대의 마수를 일깨워 부려 먹기 위한 로이드의 사악하고 간교한 설계가 시작되었다.

114화. 호수의 지배자 (3)

찰방.

불쑥 다가온 가을 탓일까.

로이드는 호숫물에 담근 손을 움츠렸다.

수온이 생각보다 훨씬 차다.

이른 아침의 공기도 마찬가지다.

'까딱하면 감기 걸리기 딱 좋겠네.'

세수를 마친 그는 호수를 둘러보았다.

동부 산맥 중앙에 떡하니 자리한 카푸아 호수.

전형적인 산중 호수였다.

그런데 넓었다.

무식할 정도로 넓었다.

구불구불하고 길쭉한 특유의 형태 때문인지, 전체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거의 소양호 정도 규모쯤 되려나.'

대한민국의 강원도 춘천과 양구, 인제에 걸쳐 있는 소양호.

면적은 약 1,608ha.

수면 직선거리는 60킬로미터.

굴곡 수면 거리는 120킬로미터.

저수량은 무려 29억 톤에 달하는 무지막지한 호수였다.

'여기도 딱 그 정도쯤 되겠네.'

대한민국의 소양호와 이곳 동부산맥의 카푸아 호수.

둘 사이엔 은근히 공통점이 제법 있었다.

일단 둘 모두 자연 호수가 아니었다.

소양호가 인간이 만든 것이라면, 카푸아 호수는 마수 킹 스토마가 만든 것이었다.

덕분에 호수의 물 대부분을 특정 지점이 막아놓고 있다는 점도 비슷했다.

'소양호의 물막이 지점이 소양강댐이라면, 여기선 저쪽이지.'

로이드의 시선이 서쪽을 향했다.

이미 그의 눈동자는 희미한 마나의 물결로 빛나고 있었다.

딩동.

[측량 스킬을 사용합니다.]

[스캔을 시작합니다.]

츠츠츠츠츠!

그는 날카로운 눈길로 호수의 서쪽 일대를 살폈다.

측량 스킬을 통해 그곳의 지형과 특성을 면밀히 파악했다.

'이건 대놓고 진짜로 댐이랑 거의 똑같은데. 굳이 비교를 하자면, 댐 중에서도 사력댐이랑 비슷한 느낌?'

사력댐은 일반적인 콘크리트 중력댐과 달랐다.

콘크리트 중력댐이 콘크리트를 퍼부어 만드는 것이라면, 사력댐은 바위와 자갈, 모래 등의 풍부한 재료를 혼합해서 만든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한데 킹 스토마가 이곳에 지어놓은 댐이 딱 그랬다.

'엄청난 규모의 바위와 자갈, 거기에 나무를 그루 채로 때려 붓고 얽어 놨구만.'

측량 스킬의 옵션인 '지하 스캐닝'의 힘을 빌렸다.

덕분에 표면 아래쪽 5미터까지나마 구성 물질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얼핏 보이는 댐의 내부.

그것만으로도 철옹성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아예 아름드리나무를 뿌리째로 뽑아서 쌓아놨어.'

그렇게 쌓은 나무의 규모만 족히 수천, 수만 그루는 되어 보였다.

그 뼈대 사이로 엄청난 양의 자갈과 바위, 흙을 채워 넣었다.

그 후에 흐른 시간과 함께 표면에 자연스레 흙이 쌓였다.

흙 위로 새로이 자라나는 풀과 나무가 뿌리를 내렸다. 얽혔다. 더욱 단단해졌다.

이쯤이면 이건 일반적인 댐 수준이 아니다.

그냥 지형지물, 그 자체다.

'이건 어지간한 다이너마이트로도 택도 없겠는데.'

보면 볼수록 혀가 내둘러지는 구조.

하지만 로이드는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은 댐 전체를 부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자칫 댐이 무너지게 되면 수십억 리터의 물이 산 아래로 쏟아지며 대규모의 홍수가 일어난다.

그러니 지금은 댐의 '극히 일부'만 무너뜨려야 한다.

'댐 전체의 구조에 타격이 없도록 말이지.'

그러려면 당연히 정밀한 계산은 필수.

철벅! 철벅!

측량으로 댐 주위의 데이터를 따낸 로이드는 호숫물로 세수를 했다.

차가운 물로 정신을 가다듬고는 설계 스킬을 발동했다.

측량 데이터를 기반으로 정밀한 실험을 하기 위해서였다.

딩동.

[설계 스킬 옵션 ③ : 시뮬레이션 모드를 실행합니다]

[현재 설계 공간에 불러온 지형 데이터를 시뮬레이션 대상으로 지정합니다.]

츠팟!

로이드의 눈앞 허공에 가상의 설계 공간이 생성되었다.

설계 공간에 방금 따낸 측량 데이터가 적용되었다.

츠츠츠츠츠!

갖가지 수치와 물리적 특성.

지형의 고저와 화학적 조성.

그 모든 요소가 적용되며 설계 공간에 점이 찍혔다. 선이 그려졌다. 면이 덧씌워졌다.

그렇게 폴리곤으로 구성된 카푸아 호수 서쪽 지형이 가상공간에 만들어졌다.

실제와 거의 차이가 없는 모습이었다.

'시작해 볼까.'

손을 움직였다.

아르페지오(Arpeggio)로 기타 현을 뜯는 연주자처럼. 때로는 스타카토(Staccato)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혹은 글리산도(Glissando)로 바이올린 현 위를 미끄러지듯.

그의 두 손이 가상의 설계 공간을 자유자재로 매만졌다.

점을 당겼다.

선을 늘렸다.

면을 돌렸다.

둔덕을 파내고.

바위를 떼어내고.

구멍을 파기도 했다.

때로는 쌓거나 무너뜨렸다.

허물고, 다지고, 뚫고, 퍼냈다.

그런 갖가지 시도와 실험을 반복했다.

호수의 서쪽을 틀어막은 댐의 거의 모든 지점에서 다양한 테스트를 거듭했다.

그동안 그는 완전한 집중 상태에 빠졌다.

덕분에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도 의식하지 못하게 되었다.

"...."

하비엘은 묵묵히 로이드를 바라보았다.

또 저러는 로이드 님의 모습이다.

무아지경에 빠져 있다.

한데 명상이나 생각에 빠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있다.

허공을 바쁘게 훑고, 쳐다보고 있다.

손도 마찬가지다.

조금도 쉬질 않는다.

앞으로 뻗은 두 손을 분주하게 놀린다.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뭔가를 로이드 님만 혼자 보시는 걸까.'

아무래도 그렇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욱 이상했다.

'내게도 보이지 않는 걸 보시는 로이드 님이라.'

하비엘의 단정한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물론 전에도 로이드의 저런 모습을 여러 번 보았던 터다.

그래도 그땐 자신이 소드마스터가 아니기에, 감각이 완성되지 않았기에 미처 못 보고 못 느끼는 것이 있겠거니 생각을 하였더랬다.

한데 지금 보니?

아니었다.

'소드마스터에 오르면서 감각이 완벽하게 완성됐어. 그런데도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아.'

이제 자신의 감각은 인간의 수준을 완전히 벗어났다.

마음만 먹는다면 주위의 거의 모든 미세한 소리를 감지해낼 수 있다. 티끌과 그 속에 깃든 기운마저 보고, 느낄 수 있다.

그런데도 아직 로이드에게는 보이는 '뭔가'를 보거나 감지할 수가 없다니.

심지어 로이드와 나란히 있음에도 그렇다니.

'대체 뭘까.'

로이드에겐 보이는데 자신에겐 보이지 않는 것.

그게 무얼까를 생각해보았지만 짚이는 것조차 없었다.

마법도 아닐 듯했다.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특별한 능력인 건가. 그도 아니라면 그저 높은 집중력을 유지하면서 습관적으로 배어나는 기행인 건가.'

쭈우욱.

시험 삼아 로이드의 양쪽 볼을 슬쩍 잡아당겨 보았다.

로이드의 정면에 서서 두 팔을 흔들어도 보았다.

그런데도 로이드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여전히 집중한 얼굴과 눈빛으로 허공만 허위허위 매만지고 있을 뿐.

'알면 알수록 더욱 알기 어려운 사람.'

로이드 프론테라.

자신이 모시는 도련님.

이 사람의 정체는 대체 뭘까.

전에는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정신 차린 망나니 도련님 정도로만 여겼는데.

'그런데 점점 더 모르겠어.'

여전히 설계에만 집중한 로이드.

그런 로이드를 바라보는 하비엘.

은발 기사는 자꾸만 떠오르는 의문을 애써 푸른 눈동자 속으로 숨겼다.

눈치 없는 낙엽만 자꾸만 떨어져 툭, 투욱, 어깨를 두드렸다.

사흘이 지났다.

설계가 끝났다.

마침내 댐 철거 계획이 완성되었다.

"다들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우리는 오늘, 이곳에서 카푸아 호수를 지탱하는 댐의 일부를 아주 살짝만 철거할 겁니다."

로이드는 500인의 백색창기병을 향해 연설했다.

"그러기에 앞서 우리는 작업의 목적을 명확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댐 전체를 무너뜨려선 안 됩니다. 정확히 지정된 장소만, 지정된 만큼만 파내고 허물어뜨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여러분은 지난 시간 동안 공병대에 편입되어 함께 공사를 치르고, 삽질을 익힌 것입니다."

그의 연설이 이어졌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그냥 이렇게 삽질을 하는 거면 영지의 공병대가 함께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틀렸습니다. 그랬다간 공병대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을 겁니다. 이제부터 오늘의 철거 때문에 깨어날 킹 스토마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맹한 백색창기병, 여러분들과 다르게 말입니다."

로이드의 눈동자가, 손이 백색창기병 대원들의 대열을 가리켰다.

그들 하나하나를 짚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공병대와 격이 다릅니다. 오늘 이곳에서 삽질을 하는 도중에 킹 스토마가 깨어나 덤벼들면? 들고 있던 삽을 고쳐 쥐고 곧바로 전투에 돌입할 수 있는 강인한 전사이자 사내들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제 말에 틀린 곳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대놓고 백색창기병 대원들의 자부심을 복복 긁어주는 로이드의 감언이설 행복 멘트.

기병대원들의 행복지수가 스멀스멀 상승했다.

"예, 그렇지요. 여러분이니까 가능한 일입니다. 어설픈 기사들? 내로라하는 전사들? 어림도 없습니다. 대체 어떤 이들이 이런 위험한 곳까지 와서 삽질을 하고, 거대한 마수를 함부로 깨우며, 그런 위협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삽을 휘두를 생각을 하겠습니까? 이거 다 백색창기병이니까 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우오오!"

"여러분은 뭐다!"

"최강의 백색창기병!"

"백색창기병은 뭐다!"

"용맹! 명예! 전진!"

"그러니까 오늘 우린 뭘 한다!"

"삽질! 용맹하고 명예롭게! 전진!"

마침내 백색창기병의 자부심이 하늘마저 찔렀다.

로이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삼키며 삽을 들어 철거 예정지를 가리켰다.

"갑시다. 1조부터 투입!"

"투입!"

그렇게 철거 작업이 시작되었다.

치솟는 자부심에 두려움마저 접어둔 백색창기병.

그들의 빵빵한 체력과 용기를 바탕으로 한 힘찬 삽질이 연이어졌다.

물론 로이드는 그들을 마냥 독려하지만은 않았다.

직접 삽을 들고서 현장에서 함께 움직였다.

자신이 수없이 시뮬레이션으로 실험하여 뽑아낸 철거 계획.

그 계획을 그야말로 철저하게 따랐다.

정확히 계산된 인원만을 투입했다.

설계 그대로의 면적만을 파냈다.

쌓을 곳엔 확실히 쌓았다.

그렇게 일부를 철거하더라도 호수의 물이 범람하지 않도록, 댐 구조 전체가 무너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마무리로 하비엘을 불렀다.

"자, 아까 내가 설명한 대로. 댐 사면에 그려놓은 붉은 표시 보이지?"

"저길 부수면 되는 겁니까?"

"어. 발파로. 신속하고 깔끔하게. 각도도 정확하게. 부순 뒤에는 붕괴가 시작될 테니까 즉시 도망쳐 나오는 것도 잊지 말고."

"만약 제가 도망치는 게 늦으면 붕괴에 휩쓸리는 겁니까?"

"어. 당연하지."

"그러면 로이드 님은 절 구해주실 겁니까?"

"내가 왜?"

"...."

"대신 산재 처리는 해줄게."

"그게 무슨...."

"매년 추도식도 꼬박꼬박 챙겨줄게."

"...저 아직 안 죽었습니다만."

"말이 그렇단 거지. 뭐해. 얼른 투입."

"후우. 투입."

하비엘이 절레절레 넌더리를 내며 철거 예정지로 투입되었다.

반나절 내내 용맹하게 삽질을 거듭한 백색창기병.

그들이 모두 빠져나온 텅텅 빈 현장에서 숨을 골랐다.

그리고 검을 뽑았다.

"흐읍."

스파팟!

섬광이 번득였다.

번득임이 붉은 표식을 파고들었다.

순간 땅이 미세하게 들썩였다.

그땐 이미 하비엘의 검이 검집으로 되돌아간 후였다.

투확!

총 6회의 발파가 연달아 터졌다.

계산하고 의도된 방향과 강도로 정확히.

댐 상부를 일정하게 꿰뚫고 헤집었다.

그리고 폭발했다.

콰아앙-! 쿠르르!

폭발과 붕괴.

의도되고 제어된 파괴.

그렇게 300년 전, 킹 스토마가 쌓아올렸던 토대의 일부가 처음으로 무너졌다.

쿠르르르르!

수백 톤의 토사가 허물어지고 흘러내렸다.

그 막강한 진동이 댐 구조 전체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댐은 무너지지 않았다.

댐에 갇힌 호수도 마찬가지였다.

'됐다. 성공이야.'

로이드가 주먹을 꾹 쥐었다.

그리고 호수 중앙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 자그마한 섬이 있었다.

물론 그 실체는 섬이 아니다.

마치 비버가 저수지 중심에 나뭇가지를 쌓아 만든 거처처럼, 킹 스토마가 호수 중앙에 마련한 초대형 둥지였다.

'놈은?'

둥지를 보는 로이드의 눈동자에 초조함이 배어났다.

오늘의 시공은 철거가 목적이 아니다.

철거를 통해 킹 스토마를 깨우는 것.

그렇게 잠에서 깨어난 킹 스토마가 활동기에 접어들도록 유도하는 것.

그것이 오늘 백색창기병을 동원하며 삽질을 시킨 궁극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만 퍼질러 자고 일어나라, 이 잠탱아.'

300년 넘게 잤으면 충분하잖아.

이젠 일 좀 하자.

부서진 댐도 보수하고.

아침저녁으로 영역 표시도 해 주고.

그렇게 동쪽에서 도미노처럼 몰려들 몬스터들을 좀 막아내란 말이다.

로이드는 염원하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킹 스토마의 둥지를 쳐다보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쿠작!

호수 수면 위로 섬처럼 봉긋하게 솟은 둥지.

그 꼭대기에 자라난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살짝 들썩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쿠자작!

앞서보다 더 크게 들썩였다.

아니, 흔들리고, 춤을 추었다.

쿠즈각! 콰드득!

뒤흔들리다 못해 버드나무가 넘어졌다.

나무를 지탱하던 둥지 상부도 마찬가지였다.

콰가각! 콰각!

둥지 전체가 흔들렸다.

마치 안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잠에서 깨어나듯.

잠이 덜 깬 채로 비틀비틀 움직이듯.

불만 가득한 투덜거림을 내뱉듯.

거칠게 포효했다.

"비벙-!"

세상을 뒤흔들 기세로 웅장하게.

그러나 어쩐지 환상종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킹 스토마의 포효성이 호수 전체에 우레처럼 울려 퍼졌다.

115화. 환상종 길들이기 (1)

"비벙-!"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상을 뒤집을 기세로 호숫가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래서 백색창기병대와 함께 풀숲에 몸을 숨기고 있던 로이드는 의아함을 느꼈다.

'어?'

저거, 뭐지.

울음소리가 왜 저렇지?

어쩐지 이거, 낯설지가 않은데?

'완전 환상종 소린데, 저거?'

그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다시 한 번, 호수 중앙의 둥지 아래에서 포효성이 울렸다.

"비버벙! 비벙!"

콰아아아-!

아까보다 한층 커진 소리.

그 웅장한 포효성 때문에 호수에 파문이 생겨났다.

곁에 함께 매복하고 있던 백색창기병 대원들이 저도 모르게 삽자루를 꽉 움켜쥐며 긴장하게 되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로이드는?

달랐다.

전혀 긴장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큰 의문과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방금 울려 퍼진 킹 스토마의 포효성.

그 속에 깃든 뜻을 '명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깐. 방금 쟤, '누가 내 댐 부순 거야!'라고 외친 거지?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지?"

"뽀동!"

확인차 품속을 쳐다보며 물었다.

안주머니에서 꼬물거리던 뽀동이가 고개를 힘차게 뽀잇 끄덕였다.

"뽀도동, 뽀동. 뽀동동!"

"맞지?"

"뽀동!"

"어. 내가 듣기에도 그랬어."

확실하다.

방금 킹 스토마,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마치 실시간 자동번역기를 내 머릿속에 켜 놓은 것처럼 그렇게 들렸어. 완전 또렷하게. 그런데 이거, 엄청 익숙한 느낌이야.'

당연한 일이다.

항상 겪는 일이니까.

뽀동이와 방울이, 하망이와 얘기를 나눌 때 항상 그래 왔으니까.

'그러니까 이거, 환상종이랑 이야기할 때만 겪는 감각인 건데.'

사실 자신도 그 원리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처음부터 그랬다.

예전, 뽀동이를 소환했던 순간부터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뽀동이가 하는 말을 자신만은 모두 명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마치 머릿속에 실시간 자동번역기가 켜진 것처럼.

혹은 자신이 환상종 언어 1급 자격증을 지닌 것처럼.

그냥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도 그런 거지?'

분명 킹 스토마는 마수일 텐데.

어째서 저 녀석의 포효성이 환상종의 것처럼 들려오고 그 뜻이 느껴지는 걸까.

의문은 길지 않았다.

이윽고 더 큰 포효가 들려왔다.

"비버벙! 비버버버버벙!"

투콰하아악!

포효와 함께 터진 굉음.

둥지 한쪽이 들썩였다.

물보라가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그 속에서 거대한 덩치가 몸을 일으켰다.

전체적으로 둥글고 통통한 실루엣이 우뚝 섰다.

쏴아아아!

범선의 노를 닮아 납작하며 넓고 평평한 20미터 길이의 꼬리가 물을 튀겼다.

강인하며 짧고 굵은 뒷다리가 기둥처럼 섰다.

힘이 바짝 들어간 둥글고 살집 많은 궁둥이.

그 위로 빵빵한 몸통과 짧은 앞다리가.

마지막으로는 크고 동그란 머리가 보였다.

그렇듯 물에 젖은 어두운 갈색 털을 온몸에 두르고서.

한껏 벌린 입 사이로 네모 반듯한 앞니를 드러내며.

100미터의 덩치를 일으키며 다시금 포효했다.

"비벙-!"

콰아아-!

거대한 포효가 수십 번 메아리치며 호수와 산맥 일대를 뒤흔들었다.

비로소 로이드는 깨달을 수 있었다.

'저거, 비버 같은 습성이 아니라 그냥 비버 그 자체잖아?'

그러했다.

지금 잠에서 깨어 둥지에서 나온 마수.

마침내 100미터의 덩치를 드러낸 킹 스토마.

녀석은 습성뿐만 아니라 외모까지도 비버 그 자체였다.

그냥 아예 100미터 덩치의 비버를 갖다놓은 것 같았다.

포효를 마친 뒤 보이는 행동 또한 그랬다.

푸확!

킹 스토마가 일으켰던 몸을 다시 앞으로 기울였다.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수면 아래로 들어갔다.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아까 하비엘이 발파를 쓴 지점.

그렇게 댐 일부가 무너진 곳을 향해서였다.

'좋아, 예상대로야.'

자신이 지은 댐에 무한한 집착을 보이는 비버.

그와 같은 습성이라기에 고안했던 이번 계획.

그 계획이 제대로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녀석이 댐을 고치러 가는 듯했다.

'잘한다. 그대로만 쭉 가라. 어서 망가진 댐을 고치는 거야.'

로이드는 내심 킹 스토마를 응원(?)했다.

녀석이 이대로 철거된 댐 지점으로 쭉쭉 헤엄치길 바랐다.

한데 상황은 그의 바람대로만 흘러가질 않았다.

헤엄을 잘 치던 킹 스토마가 돌연 제자리에 멈췄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냄새를 맡듯 킁킁거렸다.

의심 가득한 포효성을 내질렀다.

"비버벙? 비벙?"

물론 로이드는 이번에도 그 포효성의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건 바로....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난다? 라고?'

킁킁킁!

킹 스토마의 동글동글한 코가 연신 공기를 빨아들였다.

공기에서 느껴지는, 희미하지만 이질적인 체취.

흙과 나무, 호수로 가득한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냄새.

비릿한 쇳덩어리 냄새가 한쪽에서부터 흘러들어와 후각을 자극해 왔다.

'비벙! 비버벙!'

킹 스토마는 연신 킁킁거리며 생각했다.

확실하다.

이 정도로 진한 쇳덩이 냄새라면 인간이다.

오직 그 나약하면서도 탐욕스러운 종족만이 이만큼 짙고 비릿한 쇠 냄새를 흘리고 다닌다.

그렇다는 뜻은....

"비버벙! 비버버벙!"

킹 스토마의 시선이 댐을 향했다.

조금 전에 자신의 잠을 깨운 진동이 느껴진 곳.

그렇게 붕괴된 댐의 일부분을 눈에 담았다.

"비벙!"

이젠 알겠다.

저거, 그냥 무너진 게 아니다.

낡아서라거나 우연히 붕괴된 게 절대로 아니다.

인간의 짓이다.

쇠 냄새를 흘리는 놈들.

그놈들이 무슨 이유에선가 무너뜨린 것이다.

자신의 소중한 댐을!

"비버버벙!"

킹 스토마의 크고 까만 눈망울이 분노로 물들었다.

활활 타오르는 듯한 시선으로 호수 일대를 이 잡듯 살폈다.

덕분에 로이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켜야 했다.

'저 녀석, 지금 우릴 찾고 있어.'

분노에 차서 외치는 킹 스토마의 울음소리.

그걸 듣고 있자니 환상종과 대화할 때처럼 뜻이 자동으로 이해되었다.

'쇠 냄새가 난다고. 인간이 있는 것 같다고. 댐을 망가뜨리고 자신을 깨운 것도 인간들의 짓인 것 같다고.... 후아, 저 추리력 실화냐.'

듣고 있자니 장난이 아니었다.

한낱 짐승이나 마수의 지능이나 사고 수준이 아니었다.

자신이 데리고 다니는 뽀동이나 방울이, 하망이와 동등해 보였다.

즉, 인간과 대등한 지능과 추리 능력을 지닌 것이었다.

'이거, 앞으로의 계획을 다시 점검해 봐야겠는데.'

로이드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생각을 정리했다.

'원래는 앞으로도 계속 댐을 손상시키려고 했지. 댐을 손상시켜서 킹 스토마가 잠에서 깨어나도록 만들고, 댐을 보수하게 만들고. 킹 스토마가 댐을 다 고친 후에 잠들면? 또 앞서와 같은 과정을 반복하려고 했어. 몬스터 도미노 현상이 끝날 때까지. 딱 1년 정도만.'

자신이 티브이로 봤던 동물×장 프로그램 속 비버처럼.

혹은 그리스 신화에서 영원히 돌을 굴려야 하는 시시포스처럼.

그렇게 반복되는 노동을 안겨줌으로써 킹 스토마가 반강제로 활동하도록 유도하려 했다.

한데 지금 보니?

그 작전, 그대로 진행하다간 이쪽이 제대로 큰코다칠 판이다.

'예상보다 훨씬 지능이 좋아.'

그냥 마수일 줄 알았다.

기가티탄처럼 짐승 수준일 줄 알았다.

설마 환상종과 같은 특징을 보이는 놈일 거라는 예상까진 못했다.

'그러니 예정대로 작전을 반복하긴 힘들게 됐어.'

지금이야 어떻게 통한다지만, 지금 보여주는 킹 스토마의 추리 능력으로 보아선 두세 번만 더 반복했다간 곧바로 덜미가 잡힐 것 같았다.

그래서였다.

'맞춤 대응이 필요해.'

로이드의 머리가 핑핑 돌아가기 시작했다.

원래 세웠던 계획.

오늘 확인한 킹 스토마의 특성, 지능.

그 모든 퍼즐을 분해했다.

바닥에 늘어놓았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새로운 모양을 맞추어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정답을 찾았다.

"하비엘."

계산을 마친 로이드가 시선을 돌렸다.

하비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네가 악역이 좀 되어 줘야겠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하비엘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물어 왔다.

로이드가 한쪽 입술을 말아 올렸다.

"말 그대로야. 네가 좀 악당이 되어줘야겠어. 저 킹 스토마에게."

"킹 스토마에게 말입니까? 그 말씀이라면 즉-"

하비엘의 눈이 번득였다.

"죽이면 되는 겁니까."

"아니, 절대. 네버."

로이드가 고개를 팍팍 저었다.

"죽이면 안 되지, 이 사람아. 생각을 해봐. 쟤를 죽이면, 어? 그럼 앞으로 도미노 현상으로 계속 몰려올 몬스터는 누가 겁주고 막아 주냐, 어?"

"그럼...."

"쟤가 지금 원망할 대상을 찾고 있거든?"

"예? 원망할 대상이라뇨?"

"좀 더 설명하자면, 오늘 댐을 부순 범인의 자취를 찾고 있어."

"그래서 지금 댐으로 곧장 접근하지 않고 멈추어선 채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겁니까?"

"어. 킁킁거리는 거 보이지?"

"예."

"저거 지금 쇠 냄새가 나는 곳을 찾고 있는 거야."

"인간이 범인이라고 단정한 것이로군요."

"맞아. 바로 그거."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그러니까 용맹하고 시크하며 쿨한 아스라한 경이여. 오늘, 이 자리에서 그대가 인류를 대표하여 주지 않겠는가?"

"어째서 제가 그래야 하는 겁니까."

"잘생겼으니까."

"...."

하비엘이 입을 다물었고, 로이드가 사악하게 웃었다.

"주위를 좀 둘러봐라. 여기 이 자리에서 너보다 잘생긴 사람 있냐?"

"없습니다."

"오, 대답하는데 1초도 생각 안 하는 거 봐."

"명확한 사실이니까요."

"맞아. 그러니까 네가 대표로 나서야지."

"그게 무슨...."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네가 킹 스토마의 눈에 잘 띄는 곳에 나타나 주면 좋겠다. 그리고 시선을 끌어줘. 오늘 댐을 부순 악당이 너인 것처럼 굴면서."

"뭔가 노리는 것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맞아. 노리는 게 있어. 게다가 너, 실제로도 댐을 부순 거 맞잖아?"

"하지만 그건 여기 있는 모두가 함께...."

"막타는 네가 쳤잖아?"

"...."

이 더럽고 치사한 도련님 같으니.

하비엘은 잠시 아니꼬운 가자미눈으로 로이드를 째려보았다.

그러나 곧 상황을 수긍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하지요. 대신 저도 로이드 님께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부탁?"

"예."

"거절할게."

"...."

"뭐. 왜. 뭐. 이런 상황에서 분위기 잡으면서 부탁 멘트 날리면 내가 그걸 뻔하게 넙죽 받아줄 줄 알았냐."

"후우, 아닙니다."

"역시 아니지? 잘 봤네. 그럼 어서 출동. 호수에 파도 안 일어나게 물 얕은 가장자리에서만 싸우는 거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럼."

뭘 시도하시려는 건지는 몰라도 부디, 위험을 무릅쓰지는 말아 주십시오.

...그렇게 부탁하려고 했는데.

하비엘이 한숨과 함께 몸을 낮추었다.

풀숲 아래로 걸었다.

한참을 은밀히 이동했다.

일행에게서 삼백 미터 이상 거리를 벌렸다.

눈에 잘 띄는 호숫가 바위 위로 올라섰다.

스르릉!

검을 뽑아 치켜들었다.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했다.

두 개의 써클을 맹렬히 충돌시켰다.

투화학-!

치켜든 검에서 강력한 발파가 쏘아졌다.

폭음과 함께 호수 상공을 가로질렀다.

그때까지도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던 킹 스토마의 고개가 이쪽으로 홱 돌아왔다.

하비엘의 모습을 단박에 포착했다.

"비벙-!"

네놈이로구나!

킹 스토마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깨어나기 직전, 단잠을 만끽하던 가운데 얼핏 들었던 폭음.

소중한 댐을 부수던 바로 그 굉음.

그것과 똑같은 소리였다.

확실했다.

그러니까, 저기 호수 건너편에서 검을 들고 서 있는 은색 머리칼의 인간이 자신의 소중한 댐을 부순 범인이었다!

"비버벙! 비벙!"

분노의 포효를 내질렀다.

차가운 수면 아래로 잠수했다.

거대한 몸으로 물살을 가르며 호수를 건넜다.

추와아아악!

워낙 큰 덩치 탓에 그 움직임은 둔중해 보였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노를 닮은 평평하고 넓은 꼬리.

그 꼬리가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엄청난 양의 물을 휘저었다.

10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몸을 쑥쑥 앞으로 밀어냈다.

덕분에 킹 스토마는 불과 몇 번의 꼬리짓만으로 하비엘이 있는 호숫가를 덮칠 수 있었다.

"비벙!"

촤아아!

수면을 부수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즉시 짧고 굵은 앞다리로 하비엘을 내리찍었다.

콰아앙-!

육중한 체중이 실린 일격에 바위가 쪼개졌다. 아니, 통째로 부스러졌다.

킹 스토마가 씩씩거리며 부서진 바위를 살폈다.

하지만 녀석은 그 어디서도 가증스러운 적의 시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때였다.

"이쪽이다."

별안간, 2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강렬한 충격파가 일직선으로 뻗어왔다.

투확-!

내쏘아진 발파가 킹 스토마의 머리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덕분에 킹 스토마는 움찔 놀라고 말았다.

"비벙!"

아 깜짝이야.

놀람은 곧 더 큰 분노로 변했다.

"비버벙! 비벙!"

그때부터였다.

킹 스토마는 더욱 사나운 기세로 날뛰었다.

댐을 부순 가증스러운 범인(?)을 죽이기 위해 야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때마다 하비엘은 날파리처럼 얄밉게 공격을 피해냈다. 덤으로 발파를 일부러 빗나가게 쏘아대기까지 했다.

덕분에 킹 스토마의 시선이 더욱 집요하게 하비엘만을 뒤쫓게 되었다.

하비엘이 번번이 공격을 피해낼수록.

그렇게 자신을 놀리듯 계속 도망 다닐수록.

모든 감각과 신경을 하비엘에게만 집중시켰다.

"비벙! 비버버벙!"

그렇듯 시간이 갈수록 더욱 흉포하게 날뛰는 킹 스토마.

덕분에 녀석은 꿈에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좋아, 됐어.'

어느새 로이드가 킹 스토마의 뒤로 살금살금 접근하고 있었다.

한데 그런 로이드의 손에는 킹 스토마를 굴복시키기 위해 꺼내 든 비장의 무기가 야무지게 들려 있었다.

환상종을 자그마하게 만들어주는 묘약.

파란 해바라기씨였다.

116화. 환상종 길들이기 (2)

'좋아, 됐어.'

살금살금.

신속하게.

로이드는 한 발짝씩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그런 그의 손에는 파란 해바라기씨가 야물딱지게 들려 있었다.

목표는 저 앞에서 날뛰고 있는 킹 스토마였다.

'저 녀석에게 파란 해바라기씨를 먹이는 거, 한 번쯤은 해볼 만한 시도야.'

아무리 봐도 저 킹 스토마는 환상종이 확실했다.

녀석의 말을 자신이 다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 증거였다.

그래서 추측해보았다.

어쩌면 저 킹 스토마, 다른 환상종들과 반대 체질인 것은 아닐까.

평소엔 자그마한 뽀동이와 방울이가 빨간 해바라기씨를 먹으면 일정 시간 동안 커지는 것과 반대로, 저 녀석은 평소엔 거대하다가 파란 해바라기씨를 먹으면 일정 시간 동안 작아지는 것은 아닐까 하고.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아님 말고.

만약 자신의 추측이 틀린 거라면?

그때 가서 다른 수단을 선택하면 된다.

'어차피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많아. 퇴각하거나, 제압하거나, 정말로 아무 방법이 없으면 죽이거나. 그렇다고 저 녀석한테 따로 주인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

사실 조금은 놀라웠다.

자신이 소환하지 않은 환상종이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랬다.

그래도 뭐, 상관없었다.

저 녀석이 환상종이라는 것.

그래서 길들일 가능성이 보인다는 것.

지금은 오직 그것만이 중요하니까.

'조금만 더.'

하비엘을 잡으려고 날뛰고 있는 킹 스토마.

녀석과 거리를 더욱 좁혔다.

호숫물에 허리까지 잠긴 채로 은밀하게 접근했다.

한데 그때였다.

"비벙?"

킹 스토마의 동글동글 거대한 머리가 이쪽으로 홱 돌아왔다!

"...!"

로이드는 황급히 몸을 숙였다. 아예 호숫물 속으로 머리까지 잠기도록 주저앉았다. 출렁이는 수면. 그 위로 이쪽을 두리번거리며 쳐다보는 킹 스토마의 모습이 일렁이며 비쳤다.

설마 걸린 걸까.

그런 생각이 들 때쯤.

투확!

반대편에서 쏘아낸 발파가 날아왔다.

킹 스토마의 머리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덕분에 킹 스토마의 시선이 다시 저쪽으로 돌아갔다.

"비버벙! 비벙!"

쾅, 콰쾅, 요란한 굉음과 함께 다시 날뛰는 킹 스토마.

그 뒷모습을 보며 로이드는 물속에서 안도의 한숨을 보글보글 내쉬었다.

'저 녀석 저거, 보기보다 감각이 엄청 예민한데?'

방금은 진짜로 위험했다.

조금만 반응이 느렸다면?

그래서 재빨리 물속으로 몸을 숨기지 못했다면?

발각되어서 놈의 공격을 받았을 터다.

'아예 잠수해서 접근하자.'

그때부터였다.

로이드는 수면 아래로 살금살금 기면서 킹 스토마에게 접근했다. 호흡은 가끔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미는 것으로 해결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간절히 기원했다.

'하비엘! 제발 어그로 제대로 끌어라, 좀!'

물론 로이드는 텔레파시 능력자가 아니었다.

따라서 그의 간절한 염원은 하비엘에게 모기 손톱만큼도 닿지 않았다.

그 순간, 하비엘은 이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로이드 님, 역시 이번에도 직접 위험을 무릅쓰시는 건가.'

그런 시도만은 안 하시길 바랐는데.

한데 그러한 자신의 바람이 소용없는 것 같았다.

'항상 저런 모습이셨으니까.'

돌이켜보면 정말로 저랬다.

영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노이만 경과 결투를 감행하던 때도. 야수 개미굴로 직접 들어가던 때도. 흑마법사에게 잡혀간 공병대원들을 구하러 가던 때도.

'매번 말과 행동이 달라.'

입으로는 위험한 거 질색이라면서.

자기가 그런 걸 왜 하냐면서.

뻔뻔하게 굴곤 했다.

그런데 행동은?

'가장 위험한 순간이 오면 제일 앞에 나서곤 하시지.'

바로 지금처럼.

누군가에게 미루지 않고.

몸소 모든 위험을 감수하며.

말과 다른 행동으로 증명하는 자.

그게 바로 자신이 모시는 주군의 아들, 로이드 프론테라의 모습이었다.

'그러니 오늘의 제 역할은 이것인 것 같군요.'

로이드에게 모든 위험을 덮어씌우지 않으리라.

그에게 닥칠 어떠한 위협이라도 자신이 나서서 대신 덮어쓰리라.

하비엘은 그렇게 다짐했다.

더욱 힘차게 발파를 내쏘았다.

킹 스토마의 신경을 계속해서 자극했다.

하지만 그걸로는 모자랐다.

아까도 그랬다.

또 언제 아까처럼 킹 스토마가 고개를 홱 돌려 로이드를 찾아낼지 모른다.

그렇기에 하비엘은 떠올렸다.

킹 스토마의 주의를 더욱 극적으로 끌어낼 방법을.

"비벙!"

콰아아앙-!

내리쳐 오는 거대한 앞발.

그걸 재빠르게 피해냈다.

순시간에 유유히 거리를 벌렸다.

"흐읍."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오러를 사용하기 위해서?

더욱 강력한 발파를 내쏘기 위해서?

모두 아니었다.

그의 들이마신 호흡은 이내 우렁찬 외침으로 내쏘아졌다.

"비벙-!"

마나를 잔뜩 실은 하비엘의 외침이 터졌다.

킹 스토마의 포효와 거의 비슷한 크기로 호숫가를 쩌렁쩌렁 흔들었다.

그 외침의 효과 때문이었을까.

달려들던 킹 스토마의 동작이 딱 멎었다.

그런 킹 스토마의 얼굴에는 당황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방금 하비엘이 이쪽을 향해 외친 '비벙!'이라는 한마디.

그게 킹 스토마의 언어로는 '엄마!'라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비벙?"

저기, 난 네 엄마 아닌데?

게다가 난 엄연한 수컷인데?

심지어 수백 년 동안 솔로였는데?

멈칫한 킹 스토마가 그렇게 되물었다.

그러자 하비엘이 이쪽으로 검 끝을 겨누었다.

더욱 맹렬한 마나를 담아서 우렁차게 외쳤다.

"비벙! 비버벙! 비벙!"

물론 하비엘은 킹 스토마의 언어를 전혀 몰랐다.

당연히 자신이 무슨 말을 외치는지도 모르고 그냥 외쳤다.

한데 그 외침은 킹 스토마에겐, '오늘 저녁엔 비가 온다는데! 왜! 돈까스에 소스가 없는 걸까!'로 들렸다.

킹 스토마는 혼란에 빠졌다.

"비버벙?"

너 뭐 잘못 먹었어?

아님 어디 갑자기 아파?

킹 스토마는 당황스러웠다.

자신의 댐을 부순 나쁜 인간.

그런데 저놈이 갑자기 이상한 헛소리를 날려 오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움을 넘어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당연했다.

어떤 무례한 사람이 자신의 집 현관문을 뻥뻥 걷어찼다.

그래서 화가 나서 문을 열고 나갔다.

그 사람에게 격렬하게 따졌다.

그런데 말을 섞고 보니?

그 사람이 괴상한 헛소리만 늘어놓는 정신병자라는 걸 깨달았다.

그때부턴 세상 어떤 이라도 당황스럽고 불안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

지금, 킹 스토마가 느끼는 기분이 딱 그랬다.

"비벙? 비버벙?"

차라리 아까처럼 멀쩡한 정신으로 싸워주면 안 돼?

킹 스토마는 나름의 진심을 담아서 물었다.

그러자 하비엘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비벙! 비버버벙! 비버벙! 비벙! (사슬 묶고 훌라춤은 슬퍼! 코피는 맛있어! 난 귀여우니까!)"

"...비, 비벙?"

"비버버벙! 비벙! 비버벙! (그래서 임금님이 말했죠! 나는 ㄱr끔 눈물을 흘린ㄷr! 사랑해 장조림!)"

"비벙, 비버벙?"

킹 스토마는 더욱 당황했다.

한층 깊은 고민에 빠졌다.

'비벙, 비버벙.'

저 인간, 확실히 정상이 아니다.

그런데 이대로 계속 싸워야 하는 걸까.

아니면 일단 좀 달래서 정신부터 차리게 해주고 다시 싸워야 하나.

그렇듯 고민에 빠져들수록 킹 스토마의 시선과 감각이 모두 하비엘을 향해서만 쏠렸다.

'잘 됐다. 이 방법이 통하고 있어.'

하비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우렁차게 아무말 대잔치를 이어가며 시선을 힐끗 던졌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

그곳에 로이드가 있었다.

로이드는 어느새 살금살금 킹 스토마의 꼬리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좋아, 굿. 이대로만 해라!'

로이드는 눈빛으로 하비엘을 응원했다.

더욱 은밀하고 힘차게 킹 스토마의 꼬리를 타고 올라갔다. 마치 한 마리 빈대가 된 기분을 만끽하며 수십 미터 길이의 등 위를 기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킹 스토마의 머리 위에 도착했다.

"비벙?"

그제야 수상한 낌새를 깨달은 킹 스토마가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바로 지금!'

타앗!

로이드가 킹 스토마의 정수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아래쪽을 보았다.

킹 스토마가 이쪽으로 고개를 치켜드는 게 보였다.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비벙?"

멍하니 벌어지는 킹 스토마의 입.

그쪽을 조준하며 오른손을 세차게 뿌렸다.

쐐액!

파란 해바라기씨가 로이드의 손을 떠났다.

투심 패스트볼의 궤적을 그렸다.

직선으로 곧장 뻗어 갔다.

잠깐 멍하니 멈추어 선 목표.

킹 스토마의 입속으로 쏙 들어갔다.

꼴깍.

"비버벙?"

킹 스토마는 저도 모르게 파란 해바라기씨를 삼키고 말았다.

그리고....

퍼펑!

작아졌다.

10센티미터 크기로.

참방!

"...비벙?

몸이 작아지며 순식간에 호숫물 속으로.

참방 빠져들며 킹 스토마는 당황했다.

혼란을 넘어서 혼돈을 느껴 버렸다.

'비, 비벙? 비버벙?'

자신은 그저 뭔가 자그마한 걸 얼결에 삼켰을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세상이 엄청나게 거대해졌다!

삽시간에 자신을 집어삼킨 호숫물 아래의 광경이 그랬다.

눈앞에서 살랑이는 수초가 자신보다 크게 보이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유유히 헤엄치며 지나가는 송사리도.

그 서슬에 놀라며 뒷다리를 차는 개구리도.

모두 자신과 비슷한 덩치로 보였다.

게다가....

"잡았다!"

"...!"

촤악!

수면을 깨부수며 물속으로 확 다가오는 손아귀.

어찌할 틈도 없이 자신을 움켜쥐었다.

붙들고는 들어 올렸다.

"비, 비벙!"

격렬히 버둥거렸다.

손짓 한 번에 나무 열 그루를 쓰러뜨리던 감각을 담아.

궁둥짝만으로 간단하게 바위를 짓뭉개던 기억처럼.

엄청난 힘을 담아 격하게 트위스트를 추었다.

그런데 아무 효과가 없었다.

손아귀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손아귀 너머로 보이는 세상이... 너무나 광활하고 거대했다!

"어이, 이제 포기했냐?"

"...!"

자신을 쥐고 있는 커다란 손아귀.

그 손아귀 뒤로 이어진 팔뚝은 산맥처럼 웅장하게 느껴졌다.

그 너머로 하늘을 가득 뒤덮을 듯한 인간의 얼굴이 보였다.

물 뚝뚝 흐르는 어두운 머리칼.

이쪽을 쳐다보는 보름달만 한 눈동자.

막막했다.

아득했다.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생물체를 처음으로 보는 충격.

그 속에서 킹 스토마는 깨닫고야 말았다.

저 인간이 커진 게 아니다.

자신이... 작아진 거다.

"비, 비벙! 비버벙!"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킹 스토마가 황급히 외쳤다.

그러자 자신을 움켜쥔 인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슨 짓을 한 거긴. 널 작게 만들었지."

"...!"

또 한 번의 충격이 킹 스토마를 감쌌다.

자신이 작아진 거라는 사실을 확인해서?

아니었다.

'비벙? 비버벙?'

설마 방금, 자신이, 저 인간의 말뜻을 다 알아들은 건가?

아니, 세상에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킹 스토마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언젠가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까마득한 과거, 이 세상에 처음 떨어졌을 때부터를 더듬어보아도 그랬다.

'비버, 비버벙, 비벙.'

아무도 자신을 부르지 않았다.

아무도 자신을 낳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신은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져 생겨난 것처럼.

그래서 살아왔다.

그저 살아남고, 자라나고, 살았다.

물론 그동안 단 한 번도 동족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아니, 이 세상에 자신의 동족이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누군가 다른 존재와 말이 통할 거라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한데 지금, 눈앞에 그런 존재가 있었다.

"어이, 너. 내 말 알아들을 수 있지? 그렇지?"

"...."

꿀꺽.

킹 스토마는 믿기지 않는 눈길로 로이드를 쳐다보았다.

로이드의 입가에 썩소가 싱긋 떠올랐다.

"맞네. 알아듣는 거."

"비, 비벙, 비버벙."

"그래. 나도 네 말 알아들을 수 있어. 그러니까 우리, 차분하게 대화 좀 할까?"

"비벙?"

"어휴. 힘들다. 일단 좀 앉을게."

"...."

"뭐부터 말할까. 안심하라는 말부터 해줄까? 나, 너 안 해칠 거니까."

"비버벙?"

"정말이야. 안 해칠게. 약속해."

"...비벙."

"인간의 말은 안 믿는다고?"

"비버벙. 비벙!"

"당장 놓아주지 않으면 날 짓밟아 버리겠다고?"

"비벙!"

"으음, 하지만 그러면 곤란한데. 난 지금 너보다 한참 커졌지만 널 짓밟거나 하지 않고 있잖아? 우리, 다툼은 좀 그만두면 좋지 않을까 하는데."

"비벙! 비버버벙!"

"인간 따위의 말을 순순히 따르긴 싫다고? 어째서?"

"비버벙!"

"네가 이 호수의 지배자니까?"

"비벙!"

"...흐음."

로이드는 곤란함을 느꼈다.

'이 녀석, 생각보다 사납네.'

지금도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힘껏 발버둥치는 킹 스토마.

녀석의 고집이 생각보다 훨씬 질겼다.

게다가 인간에게 친근함을 전혀 지니지 않은 것 같았다.

그저 말만 통한다 뿐이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뽀동이나 방울이, 하망이랑 완전 다른데.'

아마 자신이 소환한 녀석이 아니라서가 아닐까.

그럼 길들이려면 좀 따끔하게 대해야 하는 걸까.

고민하던 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으음, 그랬다가 녀석이 마음을 닫아 버리면 일이 더 어려워지는데.'

기껏 위험을 감수하며 파란 해바라기씨를 먹인 판국이다.

하지만 파란 해바라기씨의 효과는 24시간이 다일 터.

24시간이 지나면 녀석은 다시 100미터 사이즈로 거대해지리라.

그러니 그 전에 설득을 하건 길들이기를 하건 결과를 보아야 할 듯했다.

'말이 통하는 김에 설득을 해서 녀석이 자발적으로 이곳을 지키게 하는 쪽이 가장 좋은 결과일 텐데. 으음, 어떡하면 좋지?'

머릿속으로 핑핑.

생각을 굴렸다.

뇌 주름을 열심히 접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닿았다.

'혹시.'

나 말고 다른 환상종을 보면 녀석의 경계심이 좀 풀어지지 않을까.

반짝 떠오르는 그 가능성에 로이드는 자신의 외투 안주머니를 살짝 열었다.

"어이, 뽀동아? 방울아? 하망아?"

"푸풍! 뽀동!"

"어푸푸, 방울!"

"하마마망!"

욕조처럼 물이 가득 찬 안주머니 속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로이드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여기 새 친구가 있는데, 다들 나와서 좀 만나볼래?"

"뽀! 방! 하!"

대답과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뽀동이가 하망이를 등에 태우고 안주머니에서 나왔다.

뽀르르 어깨 위로 기어 올라왔다.

손아귀에 잡힌 킹 스토마를 쳐다보았다.

"뽀동?"

"하망?"

"비버벙! 비벙! 아르르!"

킹 스토마가 뽀동이와 하망이를 보며 날카로운 앞니를 드러냈다.

한데 다음 순간이었다.

"방울?"

방울이가 로이드의 어깨 위로 뒤늦게 올라왔다.

물에 젖은 리본을 정리하느라.

방울에 들어간 물을 털어내느라.

한발 늦게 어깨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촉촉하게 젖은 얼굴을 새초롬하게 반짝였다.

그리고 로이드가 말한 '새 친구'를 향해 둥글고 까만 눈망울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빠방울?"

그 소리가 킹 스토마의 주의를 끌었다.

"비버벙?"

사납게 으르렁대던 모습 그대로.

킹 스토마의 시선이 움직였다.

로이드의 어깨 위쪽.

고개를 빼꼼 내민 방울이를 향했다.

방울이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킹 스토마의 사납게 일그러져 있던 얼굴이 저도 모르게 멍해졌다.

"...비... 벙?"

그날, 킹 스토마는 마법 같은 핑크빛 첫사랑에 빠져들게 되었다.

117화. 도미노를 뒤집는 방법 (1)

"그래서, 날 주인이라고 부르겠다고?"

"비벙!"

"흐음, 뭔가 태세전환이 너무 전격적인데?"

"비버벙, 비벙."

"원래부터 이러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거라고? 진짜? 이름도 비벙이라고 불러달라고?"

"비벙!"

"흐음."

킹 스토마, 아니, 비벙이가 통통한 고개를 뽀잇 끄덕였다.

로이드는 제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불신 담긴 눈빛이 비벙이를 향했다.

"너어, 아무래도 뭔가 수상해."

"비벙?"

"태도가 너무 확 바뀌었잖아. 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 있는 모든 상대랑 다 싸우려는 듯이 마구잡이로 으르렁거렸다?"

"비버벙?"

"맞잖아. 나 솔직히 너 붙잡고 있는 손 깨물리는 건 아닐까 걱정까지 됐다니깐?"

"비벙?"

"모르는 척하긴. 그게 불과 1분쯤 전이거든?"

"비, 비벙."

"기억 안 난다고?"

"비벙."

"이쪽의 진심을 보고 싶었던 거라고?"

"비, 비버벙."

"흐으음."

손바닥 위에 얌전히 앉아 있는 킹 스토마, 아니, 비벙이.

그런 녀석을 보는 로이드의 눈빛이 샐쭉해졌다.

'아무래도 뭔가 있단 말이지.'

그는 조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비벙이는 진심으로 사나웠다.

파란 해바라기씨로 작게 만드는 것까진 좋았는데, 도무지 협상이나 설득이 불가능했다. 아니, 대화를 이어가는 것 자체가 어려울 정도였다.

인간에게 너무나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완전 야생동물 그 자체였지.'

말이 통하는 것도 소용이 없었다.

그냥 이쪽에게 마음 자체를 열지 않았다.

어떤 설득이나 회유도 먹히지 않았다.

난감했다.

그래서였다.

시종일관 사납게만 구는 비벙이에게 뽀동이와 방울이, 하망이를 보여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반짝 들었다.

자신과 비슷한 환상종들을 보면 조금 태도가 바뀔까 싶었던 기대감에서 떠올린 생각이었다.

한데 웬걸.

이쪽의 환상종을 꺼내서 보여주자마자.

비벙이의 태도가 맹렬하게 180도 바뀌었다.

가히 빛의 속도로 선보인 태세전환 수준이었다.

'분명 이거 뭔가 있는데.'

그렇게도 사납게 굴던 녀석이다.

한데 아무 이유도 없이 저럴 리가 없다.

'이유를 파악하면 좀 더 쉽게 부려 먹을 수 있을지도 몰라.'

로이드의 눈이 더 가늘어졌다.

손바닥 위에 놓인 비벙이를 면밀히 살폈다.

녀석의 포동포동한 몸짓, 표정, 눈빛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스캔하고 분석했다.

그러자 언뜻 보였다.

'녀석이 서 있는 각도. 어쩐지 방울이 쪽에서 볼 때 비스듬한 45도. 설마 뱃살이 제일 날씬해 보이는 각도인 건가? 게다가 이 녀석, 은근히 힐끔힐끔 방울이 쪽으로만 곁눈질을 하고 있잖아?'

슬슬 결론이 나왔다.

'그럼 이놈 이거, 혹시?'

씨이익.

로이드의 한쪽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어이, 너."

"비벙?"

"관심 있는 애가 생겼구나?"

"비, 비벙?"

"근데 난 그게 누군지 알 것 같은데."

"비, 비버벙?"

비벙이의 표정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로이드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아아, 그녀의 머리는 동글동글 몸매는 오동통, 꼬리엔 딸랑딸랑 방...."

"비버벙! 비벙! 비버버벙!"

"절대 아니라고? 그런 거 모른다고? 진짜?"

"비벙!"

비벙이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드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확인 완료.'

이 녀석, 아무래도 방울이에게 제대로 꽂힌 거 같다.

'그럼 방울이는 어떨까?'

방울이의 반응을 살짝 살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비벙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데 그 눈빛에선 호기심 이상의 감정은 엿보이지 않았다.

'아아, 서글픈 짝사랑이여.'

솔로 부대 입대를 환영한다.

로이드는 만면에 화사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뭐, 알겠어. 네가 그렇다니까 그런 거겠지?"

"비벙!"

"그래. 좋아. 어쨌건, 그럼 이제 날 주인으로 모시겠다고?"

"비버벙."

"좋은 결정이야.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비벙?"

"너, 누가 소환한 거야?"

진짜로 궁금했다.

녀석을 소환한 사람이 누군지.

그런데 왜 이런 곳에서 주인 없이 혼자 살고 있었던 건지.

'나 외에도 환상종을 소환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뜻일지도 모르니까.'

그건 중요한 문제였다.

환상종을 소환할 수 있다는 건 곧?

어쩌면 RP 시스템의 혜택을 누리는 자일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로이드는 비벙이를 소환한 사람이 누군지, 어떤 존재인지 무척 궁금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내 돌아온 비벙이의 대답에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은.

"비버벙, 비벙! 비벙비벙."

"뭐? 소환한 사람 같은 건 없었다고?"

"비벙!"

고개를 끄덕이는 비벙이.

녀석이 계속 말했다.

"비벙, 비버벙, 비벙!"

"흐음, 그럼 정리해보자. 어느 날 그냥 이 세상에 불려 오듯 탄생했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 뒤로도 너와 비슷한 환상종은 한 번도 만나보질 못했다는 거지?"

"비벙!"

"...500년 이상이나?"

"비벙!"

"흐음."

아무래도 비벙이처럼 자연 발생하는 환상종은 극히 희귀한 케이스인 듯하다.

로이드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한데 그때였다.

비벙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비버벙? 비벙?"

"뭐? 저 친구는 괜찮은 거냐고?"

"비벙!"

어느새 비벙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데 그렇게 비벙이가 가리키는 곳에 있는 사람은....

"쟤 이름은 하비엘 아스라한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쟤가 왜?"

"비벙, 비버버벙. 비벙!"

"뭐? 갑자기 헛소리를 늘어놨다고?"

"비버벙! 비벙!"

"아무말 대잔치가 장난이 아니었다고? 조금 머리가 회까닥 한 것 같다고? 그래서 걱정된다고?"

"비벙!"

"아, 괜찮아. 쟤 원래 가끔 그래."

"비버벙?"

"사실은 어릴 땐 동네에서 천재 소리 좀 듣던 애거든. 근데 일곱 살 때 감나무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그만...."

"로이드 님, 다 들립니다."

"...."

"유언비어를 통한 흑색선전과 비방에도 일가견이 있으실 줄은 몰랐군요."

"흠흠, 봤지? 평소엔 이렇게 멀쩡한데 가끔씩만 그러는 거야. 네가 좀 이해해라."

"비벙!"

해맑게 고개를 끄덕이는 비벙이.

미간을 살포시 찌푸리는 하비엘.

그 모습을 보며 로이드는 싱긋 웃었다.

'어쨌건, 목표를 이뤘네.'

카푸아 호수의 지배자인 킹 스토마를 깨우는 것.

그렇게 강제로 활동기로 접어든 킹 스토마의 영역 표시를 통해 몬스터 도미노를 막아내는 것.

그 목표를 이렇듯 이루게 되었다.

아니, 그냥 활동기로 만든 정도가 아니었다.

아예 주종관계를 맺고서 부릴 수 있게 되었다.

'일종의 초과달성인 거지.'

물론 주종관계를 맺었다고 해서 끝은 아닐 터다.

게다가 한때 킹 스토마로 불렸던 이 비벙이 녀석은 덩치가 너무 큰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뽀동이 등의 다른 환상종과 완전 정반대 특성을 지녔으니까.'

뽀동이나 방울이는 평소엔 작았다.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기 딱 좋았다.

그러다가 필요할 때만 빨간 해바라기씨로 크기를 키우면 되었다.

한데 비벙이는?

반대였다.

평소의 덩치가 무려 100미터나 됐다.

휴대를 위한 순간에만 파란 해바라기씨로 크기를 줄일 수 있다.

그렇게 소형화시킬 수 있는 시간도 한 번에 최대 24시간이 한계일 터였다.

'즉, 데리고 다니며 써먹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거지.'

그렇다면 그냥 원래 계획대로 카푸아 호수에 풀어놓고 방목해서 키우며(?) 몬스터 도미노 현상을 막아줄 방파제로만 활용해야 하는 걸까. 그러다가 아주 가끔씩 써먹을 곳이 생기면 데리고 다녀야 할까.

로이드는 잠깐 고민에 잠겼다.

한데 그때였다.

"로이드 님?"

곁의 하비엘이 이쪽을 불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하비엘이 호숫가 건너편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기, 아무래도 우리 영지의 정찰대인 것 같습니다."

"뭐? 정찰대?"

"지난번 동부산맥 건너편으로 보내신 정찰대 말입니다."

"아, 걔들?"

하비엘이 가리키는 호수 건너편을 보았다.

영지의 공병대 복장을 갖춘 일군의 무리가 보였다.

거리가 멀었지만 대강은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지난번, 마스토돈 무리의 습격을 막아낸 직후에 동부산맥 건너편 오크족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보냈던 정찰대였다.

"가보자."

아무래도 그들이 정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인 듯했다.

로이드는 모두를 이끌고 호수 댐을 통해 건너편으로 갔다.

정찰대도 이쪽을 향해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로이드 님?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 다들 무사하고?"

"예. 다행히 한 명의 낙오자도 없습니다."

정찰대를 이끄는 자는 일전에 오크 부락의 석빙고 공사에 참여하다가 허리를 삐끗했던 바로 그 병사였다.

"다행이네. 오크 부락은? 어땠어?"

"으음, 그게 말입니다...."

병사의 표정이 다소 어두워졌다.

"격렬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싸워? 혹시 몰려오는 몬스터들과?"

"예."

"허얼."

로이드는 기함했다.

오크족이 용맹한 전사라는 건 익히 아는 바였다.

그래도 설마하니 피난도 안 가고 그 자리에서 싸우고 있었을 줄이야.

'피해가 장난이 아니겠는데.'

지금 일어난 몬스터 도미노 현상은 진짜로 장난이 아니다. 한 무리의 몬스터를 막아내고 격퇴한다 해서 끝인 것도 아니다.

그 뒤로 계속해서 다양한 종류의 몬스터가 파도처럼 연달아 몰려온다.

한두 번 막아내는 걸로는 택도 없다.

그렇게 끝없는 파도에 깎여나가듯 전력이 줄어든다. 지쳐간다. 마침내 무너지고 만다.

그게 이번 사태의 진짜 무서운 점이었다.

'그래서 나도 비벙이를 이용한 생태적 장벽을 마련하려고 했던 거고.'

한데 그런 무시무시한 사태에도 물러나지 않고 꿋꿋이 힘으로 맞서고 있다니.

오크족의 용맹함과 무모함에 혀가 내둘러졌다.

한편으론 그들을 구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든든한 동맹이니까.'

도의적인 판단이 아니었다.

지극히 실리적인 판단이었다.

친구가 되면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는 듬직한 존재들.

그런 오크 부족을 이렇게 쉽게 잃기는 싫었다.

'그럼 어떡해야 할까.'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크 부족을 지원할 효과적인 방법.

그러면서 이쪽의 피해를 최소화할 방법.

동시에 이쪽이 얻을 이득을 극대화할 방법까지.

현재의 상황.

지닌 전력과 자원.

타이밍과 기회.

득실과 수단.

과정과 결과.

모든 요소를 맞추었다.

건설하듯 쌓고, 끼우고, 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비벙아?"

"비벙?"

"너, 혹시 다시 커지면 우리 모두를 태워줄 수 있어?"

"비버벙?"

"이대로 동쪽으로 가볼까 싶거든. 산맥 동쪽 기슭의 황야까지. 혹시 가능해?"

"비벙? 비버벙?"

비벙이의 표정에 곤란함이 떠올랐다.

거의 평생을 이 호숫가 근처에서만 살아온 비벙이였다.

한데 호숫가를 떠나서 산맥 건너편 황야까지 가자니.

아무리 주인으로 삼게 된 로이드의 부탁이라지만 영 내키지가 않았다.

한데 그때였다.

"만약 내 부탁, 들어주면 누구누구가 아아주 기뻐하게 될 거야."

로이드의 은근달콤한 목소리가 고막을 콕콕 두드려 왔다.

게다가 로이드는 말끄트머리에 눈짓으로 방울이를 살짝 가리키기까지 했다.

"...비벙?"

비벙이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진짜로?

내가 산맥 동쪽 기슭까지 모두를 데려다 주면?

방울이가 기뻐할 거라고?

로이드의 목소리가 더욱 은근해졌다.

"자아, 생각해봐. 아주 즐거워하게 될 그 애의 모습을 말이다. 게다가 그 애는 날 아주 충실하게 섬기고 있거든? 그런데 네가 내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같은 주인을 성실히 보좌한다는 동질감과 안정감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비, 비벙?"

"널 보는 시선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이야."

"...."

"어때?"

너무나 달콤한 독사과 같은 물음.

결국, 비벙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힘껏 끄덕이고 말았다.

"비, 비벙! 비버벙!"

"당연히 할 수 있어? 와아, 멋져라. 아마 걔도 그렇게 생각할 거 같네."

"비벙!"

그녀를 위하여!

비벙이는 호떡 같은 앞발을 힘껏 치켜들었다.

그 와중에도 방울이의 기색을 슬쩍 곁눈질로 살피며, 로이드가 내미는 빨간 해바라기씨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로이드 일행이 100미터쯤 물러난 것까지 확인한 뒤에 그걸 씹어 삼켰다.

오도독, 꼴깍.

변화는 금방 찾아왔다.

퍼어엉!

다시 눈앞의 세상이 작아졌다.

아니, 원래 크기로 돌아왔다.

"비벙! 비버벙!"

순식간에 100미터 사이즈로 돌아온 비벙이가 우렁차게 포효했다. 지면으로 몸을 낮추었다. 로이드를 향해 어서 올라타라고 손짓했다.

탑승(?)은 일사불란하게 실행되었다.

로이드와 하비엘, 20인의 정찰대, 500인의 백색창기병까지.

워낙 등판이 통실하고 넓다 보니 그 모든 인원을 다 태우고도 공간이 남을 정도였다.

"자, 출발. 동쪽으로!"

"비벙!"

꽉 잡아!

힘차게 외치며 땅을 박찼다.

그렇게 정든 카푸아 호수를 떠났다.

동쪽으로 거침없이 진군했다.

한걸음에 계곡을 건넜다.

몇 달음에 봉우리를 올랐다.

헥헥대며 달리다 보니 산맥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불과 여섯 시간 만에 동부 산맥을 넘었다.

"좋아. 계속 동쪽으로!"

"비벙!"

로이드가 비벙이의 머리 위에 올라타고서 인간 내비게이션이 되어 주었다.

이윽고 눈에 익은 지형이 보였다.

언젠가 흑마법사의 소굴을 찾아가던 길.

그리고 하비엘이 처음 발파를 사용했던 화강암 채석장.

그 너머에 보이는 황량하고도 싯누런 황야의 광경.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흙먼지까지.

'저거, 강철모래 부락이 있는 곳이잖아.'

흙먼지를 살피는 로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분명했다.

기억 속 부락이 위치한 곳에서 흙먼지가 계속 피어나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니 여러 외침과 포효가 뒤섞여 들려오고 있기도 했다.

로이드가 재빨리 말했다.

"비벙아, 이제부터 잘 들어!"

"비벙!"

"일단 저 앞에서 우릴 내려줘. 그리고 우리가 다 내린 다음엔 저기, 흙먼지가 피어나고 있는 쪽으로 달려가."

"비버벙?"

"그래, 곧장 달려가는 거야. 그러면 흙먼지 속에 오크와 몬스터들이 보일 거야."

"비벙? 비버벙?"

"아니아니, 오크는 적이 아니야. 오크는 냅둬. 대신 몬스터들을 후려갈겨."

"비벙?"

"최대한 위엄 넘치고 흉포하게. 여기까지 달려온 몬스터들이 엄마야 놀라서 동쪽으로 다시 도망치면서 소문까지 내버릴 만큼 임팩트 넘치면서 어마무시하게. 할 수 있겠어? 만약 멋지게 해낸다면-"

로이드의 목소리가 또 은근하게 변했다.

"'그 애'가 무척 기뻐할 거 같은데?"

"비벙!"

역시 '그 애'는 마법의 단어였다.

비벙이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모두를 땅에 내려주고 난 뒤, 비벙이가 강철모래 부락을 향해 달려갔다.

방울이가 자신의 멋진 모습을 지켜보리라 생각하며.

그런 자신의 모습에 반할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며.

일생 최대의 의욕을 활활 불태웠다.

"비버버벙! 비벙!"

오크들은 다 비켜!

포효하며 흙먼지 속으로 돌진했다.

그 서슬에 놀란 오크 전사들을 지나쳤다.

자욱한 흙먼지 속 적의 모습을 포착했다.

"크르륵?"

이쪽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눈을 휘둥그레 뜨는 50미터 사이즈의 마수.

악어처럼 길쭉한 아가리.

그 속에 비죽비죽 솟아나온 이빨.

뿔도 들어가지 않는 갑옷 같은 비늘.

먹잇감의 뱃가죽을 찢는 데에 특화된 발톱까지.

바로 황야에서 가장 사납다고 알려진 포식자 마수, 메가라니아였다.

하지만 메가라니아건 뭐건, 비벙이에겐 아무 상관도 없었다.

지금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놈들은 그저 첫사랑의 순정에 바치는 한낱 제물일 뿐!

"비버벙!"

투콰아아앙-!

박력 넘치는 포효와 함께.

비벙이의 체중이 잔뜩 실린 3,000톤 첫사랑 펀치가 메가라니아의 안면에 작렬했다.

118화. 도미노를 뒤집는 방법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