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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한 중세놈들

토독토독···

빗방울이 몸을 가볍게 두드렸다. 여름비는 더워야 오고 가을비는 추워야 온다는데, 그래서 4월에 내리는 이 비는 미지근한 듯했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 해가 티끌만큼도 안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잠시 고민했다. 이게 지금 무슨 개지랄일까.

"조장님."

나와 마찬가지로 오늘 비번이었던 베르만 녀석이 비에 젖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퀭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안 그래도 주근깨가 심해서 별명이 딸기인 녀석인데 지금은 물에 젖은 썩은 딸기 꼴이었다.

삐익!삐익!

호루라기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그 소리는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주변에 힘차게 알리는 듯했다. 내게는 '좆 됐어요! 여러분! 영주님이 화가 잔뜩 났습니다!' 이렇게 들렸다.

"이게 무슨 난리냐. 진짜 그 한스가 그런 짓을 했다고?"

나도 녀석과 마찬가지로 비에 흠뻑 젖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가벼이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자다가 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했다.

"예. 저도 방금 와서 들었는데, 목격자가 확실히 한스라고 했답니다. 거기에 애초에 다른 이랑 헷갈릴 녀석이 아니기도 하고···."

말끝을 흐리는 베르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미남 한스. 이 변방에 있는 성에서 그처럼 뛰어난 외모를 지닌 이가 또 있을 리가 없었다. 아마, 목격자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한스가 분명할 것이다.

그런데도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는 것은 내가 아는 그 '상냥하고 멋진 한스'가 그런 짓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였다. 베르만도 마찬가지인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아카데미 시험도 합격했다며? 그런 놈이 도대체 왜."

"마법사라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마법사란 놈들은 원체 이상하니까요. 좋은 밤입니다! 조장."

중얼거림에 가까운 내 말을 자른 것은 뒤에서 등장한 켈이었다. 켈은 어울리지 않게 꽃 그림이 그려진 우산을 들고 방긋 웃고 있었다. 녀석의 마지막 말과 동시에 처마에 있던 물이 한 바가지 쏟아졌다. 녀석은 그저 우산을 빙글 돌려, 물을 옆으로 흘렸다.

'로사한테서 받았겠지.'

켈 녀석이 가까이 다가오자 달달한 냄새가 물씬 풍겼다. 켈이 창부인 로사의 집에 들락날락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 작은 성에서는 비밀이랄 것도 없었다.

그다지 좋은 소문은 아니었지만, 켈의 행적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명예를 중시한다는 기사가 아닌 성에서 그저 힘 좀 쓴다는 놈들 모아둔 외성 경비대였으니까. 근무만 제대로 선다면 행실로 지적받는 일은 드물었다.

"하필 비번날 이게 무슨 일입니까. 얼마 자지도 못했는데."

"그러니까 근무 끝나면 일단 휴식부터 취하라고 대장님이 번번이 말했잖아. 여자 좀 적당히 밝히지 쯧."

"얼레? 베르만, 그런 거로 지적하면 억울하지. 그 대장님도 어제 로사의 옆집에서 봤···."

"일단, 본부로 가지."

더 놔뒀다가는 평소처럼 으르렁 댈 것이 분명했기에 말을 자르고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그래도 좀 이상합니다. 평소에 그렇게 상냥했던 한스인데···."

"마법사들은 원래 그렇다니까? 내가 예전에 봤던 한 마법사는 음식점 소스 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종업원을 돼지로 만들었다고."

주저하며 묻는 베르만을 어깨로 슬쩍 민 켈이 수십 번은 들었던 예의 마법사 이야기를 꺼냈다. 켈 녀석은 전부터 저 이야기를 수시로 꺼내며 한스를 경계했다. 본인은 마법사에 대한 경험 때문에 그렇다고 하지만, 나는 한스가 이 도시에 오며 더는 미남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녀석의 질투라 짐작했다.

물론, 나는 내가 제일의 미남이라 생각했지만, 켈 녀석은 나만 보면 기분 나쁘게 생글생글 웃었다.

"···이야기 들어보면 알겠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잡히면 녀석은 바로···."

베르만의 말이 끝나기 전 외성 경비대 본부에 도착했다. 두꺼운 벽에 조그마하게 난 창문으로 보이는 주황빛이 어둠을 조그맣게 밝혔다.

잡히면···.

빗소리에 흩어진 베르만의 마지막 말이 내 머리를 어지럽혔다. 만약 한스 녀석이 잡히면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운이 좋으면 목이 날아가고 안 좋으면 까마귀에게 심장을 쪼아 먹히고. 그것보다 더 안 좋으면···.'

재판도 열리지 않을 것이다. 모두에게 친절했던 한스는 단번에 악마의 하수인으로 둔갑할 게 분명했다.

미개한 중세 놈들···. 욕을 작게 중얼거리며 두꺼운 나무문을 밀고 들어갔다.

다들 밖으로 나갔는지, 평소에 가득했던 홀이 휑했다. 젖은 나무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를 맡으며 계단을 올라, 대장 방으로 향했다. 삐걱. 나무 계단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들어와."

문을 두드리자, 바로 얍삽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작게 심호흡하며 문을 밀었다.

'저 양반도 갑옷이 있긴 했구나.'

바들바들 떨리는 볼살과 피곤에 젖은 눈동자. 대장은 오랜만에 입은 갑옷이 불편한지 팔과 어깨의 이음새 부근을 손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생전 운동이라곤 안 해본 것 같은 저 남자가 경비대장이라는 것에 매번 감탄했다.

"너무 늦게 온 거 아닌가. 아론 조장."

"아···. 깊게 잠드는 바람에 소식을 늦게 접했습니다."

제 딴에는 눈에 힘을 준 듯했지만, 영양분이 부족한 모양인지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조차 힘든지 깊게 숨을 내쉰 대장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에 가까이 다가가자, 자리에서 일어난 대장이 말을 이었다.

"자네가 평소에 한스랑 가까이 지냈다지?"

대장의 축 처진 눈두덩이 속 능글맞은 눈동자가 나를 주시했다.

엄밀히 말하면 친하게 지낸 편이었다. 한스는 미개한 중세에 걸맞지 않게 총명하고 상냥하며 개념 있는 청년이었으니. 다만, 지금은 긍정하기에 상황이 좋지 않았다.

"···뭐 그냥 오다가다 본 정도죠."

"자네를 탓하려는 게 아니야. 우리 아론 조장이 캐서딕 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누가 모르겠나?"

대장이 내 어깨를 두드리려 했지만, 키 차이가 너무 커서 손이 닿지 않았다. 그에 나는 슬쩍 무릎을 구부렸고 대장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파르르 떨리는 볼살을 쭉 늘리고 싶다는 욕망을 애써 참았다.

"어찌 됐건 아가씨가 관련된 일이야. 내성의 기사들까지 동원됐다더군. 다들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중이야. 외성 밖으로 나간 기색은 없으니, 외성과 내성 사이의 거주 지역에 숨었겠지. 기사님들이 대단하기는 하다만, 그 구역은 우리 담당 아닌가? 이럴 때 우리 경비대가 찾으면··· 영주님이 아주 좋아하시지 않겠나?"

잠깐 어깨를 두드린 것만으로도 숨이 차는지, 후- 하며 숨을 고른 대장이 나를 올려다봤다.

"예. 그렇겠죠."

"자네가 한스랑 오가며 몇 마디라도 나눴으니··· 어디 숨었을지 짐작 가는 바가 있지 않겠나? 내가 우리 아론 조장에게 기대하는 바가 아주 커요."

말을 마치고 빙긋 웃는 대장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주먹을 꽂고 싶은 얄미운 얼굴이었지만,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그럼. 나는 우리 아론 조장 아주 신임하고 있다니까."

그에 만족스럽게 웃은 대장이 다시금 의자에 앉았다. 얼마나 무거운지, 의자에서 먼지가 확- 하고 일어났다. 시선을 책상으로 내린 대장이 손을 가볍게 저었고 그에 나는 작게 고개를 숙이며 방을 나섰다.

'저럴 거면 갑옷은 왜 입은 거야?'

아마, 혹시라도 영주가 찾아올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입었겠지. 혼자만 꿀통을 빠는 너구리 같은 놈.

작게 욕을 중얼거리며 방을 나서자, 어느새 모인 다섯 명이 보였다. 비번인 날의 소집이었기에 다들 불만이 가득한 눈을 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불평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여기는 귀족과 관련된 일에 발음만 잘못해도 성문에 목이 달리는 미개한 곳이었으니까.

'좆같은 이세계.'

이제는 습관이 된 욕을 중얼거리며 손짓을 하자, 작게 한숨을 내쉰 이들이 휘적휘적 움직였다. 그 모습이 예비군 때를 연상케 했다.

하필 비번인 날에, 거기에 또 하필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 그런 짓을 하여 이 사달을 벌이다니. 참으로 눈치 없는 놈이었다. 혹시나 놈을 만나게 된다면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겠다고 다짐했다.

계단을 내려가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 무식한 놈들은 주먹구구식으로 전 구역을 확인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마 짚더미건 이불이건 다 찔러보고 있겠지.

'성 곳곳에서 사달이 나겠군.'

당장 내일부터 일이 늘어날 게 분명했기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에 관자놀이 부근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생각했다.

'1~3구역은 아니야. 거기에 있다면 신고를 해도 한참 전에 했겠지. 4~6구역은 잭슨이 잡고 있으니··· 7구역이겠군.'

그리고 모두가 본능적으로 7구역을 꺼리니, 거기에 숨었다면 아직 발견되지 않을 만했다. 그리고 예전 순찰 때 한스 녀석을 7구역에서 마주친 적도 몇 번 있었다.

"7구역으로 간다."

"조장, 아무리 마법사가 훼까닥하기는 했지만, 그 길거리에 오물이 뿌려져 있는 곳에 있을까? 그리고 걔 3구역에 살잖아."

"그··· 기사들도 나섰다는데 어디서 숨 좀 돌리면 잡히지 않을까요?"

뭣 모르는 놈들이었다. 이렇게 위에서 나섰을 때 숨어 있다가 걸리면 평소처럼 감봉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때는 결과를 못 내도 열심히 뛰어다녀야 했다.

내가 대답하지 않고 손을 젓자 녀석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나섰다. 툴툴거리기는 해도 명령은 곧잘 듣는 녀석들이었다. 물론, 그렇게 만들기 위해 꽤 큰 노력이 들어갔지만, 결과물은 만족스러웠다.

밖으로 나오자, 고함과 뒤섞인 호루라기 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질척거리는 땅을 밀어내며 7구역으로 향했다.

손에는 횃불을 들고, 오물과 그리고 그것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인간들이 거주하는 7구역으로 천천히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

"너희 둘은 저쪽으로. 너희 둘은 이쪽. 너는 나랑 움직인다."

"예."

아까는 투덜대던 녀석들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나 지나쳤다가, 나중에 7구역에서 발견되면 좆되는 거야. 똑바로 확인해."

그럴 놈들은 아니긴 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기에 다시금 주의시키고 베르만과 중앙 거리로 향했다.

뿌욱.

발에서 기분 나쁜 감촉이 느껴졌다. 그에 설마 하는 심정으로 내려다보자, 뭉개진 갈색 덩어리가 보였다.

"아··· 시발. 왜 7구역 새끼들은 길거리에서 똥을 싸는 거야."

순찰할 때마다, 몇 번이나 길거리에서 똥 싸지 말라고 경고했는데도 절대 들어먹질 않았다. 남의 시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똥 싸라는 게 그리 큰 부탁인가?

"시···발 하하. 대장 그 발음은 언제 들어도 신기합니다. 7구역은 변소가 없지 않습니까?"

"변소가 없으면 구석에 가서 싸던가. 사람들 다니는 곳에 싸는 건 무슨 심보야. 퉤."

신발을 옆에 있는 진흙에 문댔지만, 물컹한 촉감이 아직도 선명하여 기분이 더러웠다.

"그래도 조장이 똥을 밟았으니, 오늘 운수가 좋으려나 봅니다."

베르만 녀석이 히죽 웃으며 농을 던졌다. 비에 젖어 무거운 축축함과 잠을 얼마 못 자서 자리한 피로, 그리고 다리에서 느껴지는 촉감까지.

도대체 이것 중 어디에 행운이 있다는 것인지 의문이었지만, 여기 놈들은 미신에 진심이었으므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흩어진다. 너는 이쪽 골목 확인해."

"예. 조장."

베르만 녀석을 보내고 주변을 살피며 걸었다. 7구역은 다른 구역과 다르게 밤에 저항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물론, 그게 그들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불 하나 켜져 있지 않아 어두운 거리는 악마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음산했다. 하필 또 달이 구름에 가려진 날이라, 얼마나 어두운지, 손에 든 횃불이 없었다면, 다섯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넘어졌을 게 분명했다. 나는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를 십자가처럼 매만지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때 거리 한편에 쌓인 나무 상자 옆에 쪼그려 앉은 사람이 보였다. 넝마가 된 후드를 뒤집어쓴 모양새가 퍽 수상했다.

"후드 걷어."

나는 한 손을 검 손잡이에 올려두고 명령했다.

그러자 녀석이 고개를 쳐들었다. 퀭한 눈에 반항기가 잔뜩 담긴 녀석이 뭐라 소리치려다가 내 허리의 검을 보더니, 입을 닫았다.

눈에 익은 녀석이었지만, 한스는 아니었다. 7구역 순찰 때 몇 번 문제를 일으켰던 녀석. 그에 지나치려다 뒤돌아서 녀석의 뒤통수를 한 대 갈겼다.

"악!! 왜 때립니까!"

"너 길가에 똥 싸지 마라. 쌀 거면 구석진 곳에 가서 싸."

"아니··· 내가 개도 아니고 무슨 똥을 길가에···."

녀석이 억울한지 항변했지만, 녀석의 기운 없는 목소리는 금세 빗소리에 묻혔다.

빗물이 섞인 진흙이 내 발을 붙잡았지만, 걸음을 부지런히 옮겼다.

"아론 총각!"

빗소리 속에서 뜬금없이 들린 하이톤의 목소리에 순간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비명을 질렀다가는 내일 무슨 소문이 퍼질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니, 펑퍼짐한 아줌마가 나를 올려보고 있었다.

"아, 보니카 아주머니."

"아이고~ 아론 총각이 고생이 많아. 내 마음 같아서는 따뜻한 차라도 한 잔 주고 싶지만···. 죽일 놈이 도박한다고 주전자까지 가져간 거 있지? 하! 아론 총각 그 썩을 놈 좀 잡아가면 안 되나? 저번에 그놈이 갈렙네서 은 식기구를 가져왔는데···."

적막한 7구역에 아줌마의 우렁찬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런 거로 잡아갈 수 없다니까요."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기에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유~ 그러지 말고. 나 이러다가 화나서 자다가 숨이 꼴깍 넘어간다니까. 어떻게 감옥에서 한 달 정도 살게 못 해? 그럼 정신 차릴지도 모르잖아!"

"거기서 한 달 있다가는 자기 발로 못 걸어 나와요."

"그것도 나쁘진 않겠네! 화날 때마다 머리 한 대씩 때릴 수 있고! 아무튼, 요즘 7구역도 이상해! 내가 처음 왔을 때랑 분위기가 너무 달라졌다니까. 심지어 오늘은 끔사귀 약초를 널어놨는데, 다 사라졌다니까?! 동네 뒷산만 가도 널린 것을! 그거 움직이기 귀찮아서 훔친다니··· 썩을 놈들!"

아줌마의 입에서 나온 끔사귀라는 단어가 내 주의를 끌었다. 끔사귀. 성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어, 그 값이 저렴하지만, 지혈에 효과가 좋은 약초였다. 한 바가지를 가져가도 그 값이 5 쿠퍼가 되지 않아서, 굳이 남의 것을 훔쳐서 얼굴 붉힐 물건이 아니었다.

"어디에 널어뒀는데요?"

"저어기~ 아무도 안 보이는 곳에 널어뒀는데 없어졌다니까!"

아줌마가 가리키는 곳은 낮고 헤진 건물들 사이의 작은 골목이었다. 달빛조차 들지 않아 어둠이 가득하여 악마가 나올 법한 공간.

토둑토둑-.

전보다 굵어진 빗방울이 어깨의 가죽 견갑을 두드렸다.

나는 그곳을 보며 검 손잡이를 습관처럼 매만졌다.

친절한 한스

삐익!삐익!

7구역에 들어오면서 들리지 않던 호루라기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야밤에 이게 웬 난리래? 악마라도 나타난겨?!"

"별일 아니에요. 들어가서 오늘은 웬만하면 나오지 마세요."

"하긴 이 시골 성에 뭔 악마가 오겠어. 악마도 저 멀리 있는 도시에 가겠지! 그리고 나타난다고 해도 저번처럼 아론 총각이 처리하면 되잖아!"

고개를 끄덕인 아줌마가 그 후덕한 볼살을 푸르르 떨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알았지? 한 한 달 정도만···.' 이라고 중얼거리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떨어지는 비를 맞았다. 지원을 불러야 할까. 베르만 녀석이라도 데리고 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한스 녀석을 발견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었다. 베르만은 유독 융통성이 없는 녀석이었으니.

한스 녀석의 얼굴이 성문에 걸리기 전, 녀석의 변명 정도는 듣고 싶었다.

'쯧. 사형 아니면 무죄인 무식한 놈들.'

툴툴거리며 검을 뽑았다. 기본으로 지급되는 검이라 좋은 검은 아니었지만, 벌써 이년 넘게 사용하여 손에 착 감겼다. 검을 바로 세우고 숨을 죽이며 천천히 어두운 골목으로 향했다.

군데군데 박살 난 나무 상자들이 엉망으로 뒤엉켜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급하게 지나간 듯한 모양새. 후우··· 숨을 쉬며 근육을 풀었다.

이윽고 나는 어둠 속에서 두 개의 푸른 빛을 발견했다. 여름날의 하늘처럼 푸른 눈동자가 깊게 눌러앉은 어둠 속에서 고고히 빛나고 있었다. 한스였다.

검은 천 쪼가리를 눌러 쓴 녀석은 구석에 쓰러져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꿀꺽. 긴장감에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상냥한 녀석이기는 해도 마법사였다. 마법사 혐오에 걸린 켈 녀석만큼은 아니었지만, 마법사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는 이 세계에 넓게 퍼져 있었고 내가 경험했던 마법사도 그다지 정상은 아니었다.

투둑.

빗방울이 녀석을 두드리자, 녀석이 눈에 띄게 움찔하며 몸을 움츠렸다. 그때, 나는 녀석의 왼쪽 팔 부분이 허전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검은 천 왼쪽 부근이 붉었고 그 아래에는 피와 비가 뒤섞인 웅덩이가 있었다. 붉은 웅덩이는 시시각각 옅어졌다가, 짙어지고 있었다.

다시금 한스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녀석의 푸른 눈동자가 커졌다. 녀석이 나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녀석이 입을 열려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머리가 복잡해졌다.

마법사는 속을 모른다, 마법사의 말에는 미지의 힘이 있어, 사람을 조종하거나 죽일 수 있다.

마법사는 황제가 허락한 악마다.

고민은 짧았다. 한스 녀석이 악한 놈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모름지기 이 좆같은 곳에서는 모든 걸 조심해야 했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풀어둔 다리 근육을 팽팽하게 당기며 땅을 박찼다. 바닥에 있던 물웅덩이에서 작은 물보라가 튀며 양옆의 진흙으로 지은 벽을 적셨다.

탁.

떨어지는 빗방울 사이로 보이는 푸른 눈동자를 응시했다. 푸른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다시 한 걸음. 검을 뻗으면 녀석의 목을 벨 수 있는 거리였다. 녀석의 입이 완전히 벌어졌다.

앞으로 숙이며 검을 힘차게 밀어 넣었다. 허공에 은색이 대각선으로 그어졌다. 녀석의 목에 검을 찔러 넣기 전.

"···형."

녀석의 입에서 나온 것은 주문도, 저주도 아니었다. 그저 평소와도 같은 평온한 목소리였다. 조금은 떨리는.

내 검은 녀석의 목을 살짝 찌르고 있었다. 녀석의 목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녀석이 나를 올려다보며 검은 천이 떨어졌고 녀석의 행색이 온전히 보였다. 피곤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예의 총기는 그대로였다. 왼쪽 팔은 팔목부터 깔끔하게 잘려있었고 오른쪽 손은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나는 검을 겨눈 상태에서 발로 녀석의 오른쪽 팔뚝을 즈려밟았다. 그러자 녀석이 손을 펼쳤고 그 내용물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분홍색 천 쪼가리. 그것은 명백한 여자의 속옷이었다. 그것도 피가 묻은.

'···이 새끼 진짜 여자 팬티 훔쳤네.'

복잡한 심경으로 한스 녀석을 내려다봤다.

이제 곧 아카데미의 입학이 예정된 한스는 찬란한 미래가 보장된 녀석이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만 해도 제국의 관리직은 보장됐고 더 나아가 마탑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거기에 평소 행실은 어떠한가. 만나는 모두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 별명이 친절한 한스였다.

그런 녀석이 이제 성인이 되는 영애의 속옷을 훔쳐, 성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야밤에 비를 맞으며 개짓을 하게 만들다니. 믿기 힘들지만, 증거가 눈앞에 있었다.

"···뭐냐 이건."

"모습이 이상하겠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이었어."

마왕 앞에 선 용사처럼 진지한 낯빛에 뭐라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어떻게 세상이 굴러가야, 여자 속옷을 훔치는 게 꼭 해야 하는 일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모든 경우의 수를 떠올려 봤지만, 그중에 말이 되는 게 없었다.

"그리고 훔친 게 미안해서, 남은 모든 돈을 털어서 베아트리스제 속옷 세트도 두고 왔어."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나.'

녀석은 정말 당당한 듯 정확히 내 눈을 응시했다. 베아트리스제···.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것을 이런 변방의 성에서 어떻게 구했는지도 의문이었다.

일단,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나는 녀석 옷의 가슴 부분을 잡아 그대로 뜯었다. 해진 천이 단번에 뜯어지며 근육 하나 없는 맨살이 드러났다.

악마를 받아들인 이는 심장 부근에 끔찍한 흉터가 생긴다. 그를 악마의 손자국이라 부른다. 그 때문에 가슴 부근을 확인하는 게 악마와의 연관성을 밝히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내가 애용하던 방법이기도 했고.

하지만 녀석의 가슴 부근은 깨끗했다.

'악마도 아니고···. 도대체 왜?'

오히려 악마였다면 이 상황이 이해됐겠지만, 어디에도 악마의 손자국은 없었다. 녀석은 맨정신이었고 푸른 눈동자는 그 누구보다 또렷했다.

토독토독.

녀석은 눈에 빗방울이 들어가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고 나를 올려다봤다. 그 올곧은 투명한 푸른 눈동자를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만약, 이곳이 서울이었다면 나는 녀석을 주저 없이 경찰에 넘겼을 것이다. 나름 적법한 절차를 걸쳐서 처벌을 받을 것이므로.

하지만 이곳은 악마와 마법이 실존하고 틈만 나면 사람을 꼬챙이에 매달아 불태우는 좆같은 곳이었다.

영주의 소중한 딸 속옷을 훔친 녀석은 악마의 속삭임을 뱉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한 마디도 못 하게 입을 막은 다음, 재판도 없이 성문에 목이 걸려 캐서딕 성의 새로운 마스코트가 될 게 분명했다.

그 무식한 판결에 베아트리스 제 속옷 세트를 두고 온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녀석의 허전한 왼쪽 팔과 오른손에 쥐어진 속옷, 그리고 푸른 눈동자를 차례로 둘러봤다.

속옷을 훔친 죄로 팔이 하나 날아갔으면 충분한 처벌인가?

잘 모르겠다. 내가 판단을 내릴 입장도 아니었지만, 이대로 녀석을 넘기고 근무할 때, 성문에 걸린 녀석의 목을 반나절 보고 있을 생각을 하니, 토악질이 올라왔다.

동전 한 개의 값어치도 가지지 못한 죄의식에 몇 달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게 분명했다.

이곳에 와서 생긴 습관. 고민은 짧고 행동은 빠르게. 나는 쓰러진 녀석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팔이 잘린 덕분인지, 녀석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주머니에서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사뒀던 최하급 포션을 꺼내 녀석의 잘린 면에 부었다.

'내 피 같은 90 실버···.'

어쩌면 지금 내 눈가로 흐르는 게 빗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품이 올라오며 피가 멎었다. 뭐라 말하려는 녀석의 입을 막고 걸음을 옮겼다.

'이쯤일 텐데.'

7구역에는 우리 조가 가끔 이용하는 개구멍이 있었다. 본래는 켈 녀석이 유부녀와의 밀회를 위해 누군가에게 구매한 곳이었는데, 술자리에서 거나하게 취한 켈 녀석이 자랑한 후로 다들 몰래 사용하고 있었다.

지붕이 무너진 집을 지나서, 높게 쌓인 썩은 장작을 발로 차니, 사람 하나 간신히 지나 갈만한 개구멍이 있었다. 나는 녀석을 그 앞에 던졌다.

"···형."

아까부터 왜 자꾸 부르는지, 복잡한 머리가 더욱 엉클어졌다. 개구멍은 구정물이 고여있었다. 여자 팬티 도둑에게 딱 어울리는 탈출로였다.

도대체 무슨 사연으로 속옷을 훔쳤는지 모르겠지만,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기에 그저 손을 저었다.

"고마워."

남은 손 하나로 품에 소중히 속옷을 챙기며 흙탕물 속을 힘겹게 지나가는 꼴이 퍽 우스워 끌끌 웃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만 잔뜩 일어나는 세상이었다.

'아, 맞다.'

구정물에 몸이 잠긴 한스 녀석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러자 한스가 의문 섞인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적당한 힘을 주어 녀석의 뺨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녀석이 비명을 질렀지만, 구정물에 잠겨 공기 방울만 뱉을 뿐이었다. 잠시 뒤 녀석은 벽 너머로 사라졌다.

어떻게 보면 여성 속옷 훔친 변태를 도와준 상황이지만, 돌이라도 찬 듯 무거웠던 가슴이 풀렸다.

토독토독. 탁탁.

빗소리 사이로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빗소리만이 들렸다.

"진짜 내가 별 지랄을 다 한다."

옆에 돌아다니는 돌 중 큼지막한 것을 골라서, 개구멍 위쪽을 연신 내려쳤다. 까끌까끌한 돌덩이의 표면에 장갑이 찢겼지만,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내려치자, 개구멍 위쪽의 돌들이 떨어져서 빈자리를 메꿨다.

나는 옆에 있는 땅을 손으로 파서 물에 젖은 흙으로 그를 좀 더 단단히 했다. 작업을 마치고 나니, 몸에서 김이 나고 있었다. 조금 티 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애초에 조잡한 성벽이라 어울렸다.

삐익!삐익!

호루라기 소리가 더욱 가까워졌고 어둠만이 가득했던 7구역이 수많은 횃불로 밝아졌다.

'시발.'

나는 먹구름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비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늘은 여전히 검었지만, 우습게도 축축하고 찝찝하여 짜증 났던 빗줄기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

"이야, 한스 녀석 보기보다 대단했나 봅니다? 기사님까지 움직였는데, 못 잡은 걸 보니."

짜증이 가득한 얼굴의 켈이 비아냥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법사니까, 마법을 사용해서 도망간 거 아닐까? 그렇지 않습니까? 조장?"

동글동글한 얼굴의 브릭이 물었다.

"멍청한 브릭. 마법으로 다 되면 팔도 안 잘렸겠지. 저 성문에 팔이 왜 걸려 있겠어."

그 옆의 뱀눈 풀이 이죽거렸다.

"그···그건 그러네?"

"아아··· 어제 잠을 2시간 잤어···. 난 죽을지도 몰라."

"잠 좀 안 잤다고 안 죽는다 쿼터."

"네가 뭘 알아. 난 죽을지도 몰라. 난 밥보다 잠이 중요하다고."

"다들 시끄럽다."

"베르만, 또 뭐 있는 척하네. 너도 우리랑 같은 일개 경비대원일 뿐이라고."

비는 도통 그칠 생각이 없었다. 그에 삼일 밤낮을 빗속에서 수색을 이어나간 경비대원들은 조금만 건드려도 터질 정도로 까칠했다. 뭐, 평소랑 크게 다르진 않았지만.

"다들 고생 많았다. 그래도 성안에 없다는 사실이 확실해졌으니, 수색은 끝이다."

영주는 정말 머리끝까지 화가 났는지, 기사와 내성 경비대를 추격을 위해, 성 밖으로 보냈다.

그들은 전부 말을 타고 있었기에, 당장 내일 성문에 걸린 한스 녀석의 잘생긴 얼굴과 마주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충분히 노력했다. 녀석의 마법 중에 달리기를 빠르게 하는 게 있기를.

켈과 브릭 그리고 쿼터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중 쿼터는 눈을 감은 모양새가 당장 여기서 잘 생각인 듯했다.

"···근데 조장. '수색은' 끝이라니? 말이 좀 이상한데?"

먼저 눈치를 챈 것은 뱀눈 풀이었다. 풀의 말에 조원의 눈이 동시에 내게 모였다.

"순찰이랑 보초 서야지. 오늘 우리 조가 주간이잖아."

나도 이런 소식을 전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떡하겠는가, 고용법이 없는 무식한 시대에 살고 있음을 원망해야지.

"아아아악!!"

눈을 감고 있던 쿼터가 칼에 찔린 것처럼 길게 비명을 내질렀다.

어쩌면 쿼터에게는 칼에 찔린 것보다 잠을 못 잔 상태에서 일하는 것이 더욱 고통스러울 수도 있었다.

똑똑똑.

"들어와."

"아론. 대장님이 찾으시는데?"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사각 턱의 제이든이었다.

'아, 잊고 있었군.'

자르지 못해, 덥수룩하게 난 수염을 신경질적으로 벅벅 긁었다.

슬프게도 이 긴 하루는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

"들어오도록."

평소와 다르게 굳은 대장의 목소리가 건너편에서 들렸다. 상급자와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잠시 내 복장을 점검하고 문을 열었다. 전처럼 어울리지 않는 갑옷을 입은 대장이 서 있었고 원래 대장이 앉아 있던 자리에는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사내가 앉아 있었다. 굵직한 선과 형형한 눈빛, 호랑이를 연상케 하는 사내였다.

'치안관 윌리엄.'

상대의 정체에 절로 자세를 곧추세웠다. 이 성에서 영주 다음으로 조심해야 할 사내였다. 그 옆의 대장이 가까이 오라고 눈짓을 보냈다.

"아론이라고 했나. 반갑네. 치안관 윌리엄이라고 하네."

윌리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덩치가 얼마나 컸는지, 천장에 닿을 정도였다. 이 몸도 키가 커서, 올려다볼 일이 전혀 없었는데, 윌리엄을 보기 위해서는 목을 끝까지 젖혀야 했다.

윌리엄이 굳은살 잔뜩 박인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잠시의 고민도 하지 않고 장갑을 벗은 다음 그를 맞잡았다. 손만 잡았는데도 상대의 단단함이 전해졌다.

"자네가 죄인 한스와 친했다지?"

윌리엄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내려다봤다.

'이 너구리 새끼가?!'

황급히 곁눈질로 대장을 봤는데, 대장은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조금 안면만 있는 사이입니다."

"그렇군. 자네 조는 수색 때 7구역으로 바로 향했다고 하던데, 왜 그랬나?"

윌리엄의 호박빛의 눈동자가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마치, 내 속내를 꿰뚫어 보려는 것처럼.

[네 이름은 아론이다. 아론.]

다만, 그 눈빛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여, 기분이 좋지 않았다.

뒷골목의 주인

'알고 있는 건가? 아니면 그냥 짐작?'

우리가 가장 먼저 7구역 순찰을 시작했으니, 아는 것이 있을 리 없었다.

거기에 만약 내가 한스를 풀어주는 걸 봤다면 무식한 중세 놈들이 이렇게 신사적으로 심문할 리가 없었다.

'바로 영주성 지하에 처박혔겠지.'

고민은 짧았다.

"그날 비번이라 소집에 늦어서, 아직 수색하지 않은 곳부터 시작했습니다. 그게 7구역이었고요."

"흐음··· 그렇지. 그래도 수색 중 비어있던 구역이 있었다는 게 어이가 없군. 기강이 해이해졌어."

윌리엄이 쯧- 하고 혀를 차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책상의 서랍들을 열며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에 옆에 있던 대장이 펄쩍 뛰었지만, 차마 막지는 못하고 입만 뻥긋거렸다.

"그래서 7구역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나? 그 구역이 유일하게 내성 경비대에서 가지 않은 곳이라, 자네 입으로 직접 듣고 싶네. 아, 여기 있군, 오, 케넬트 가의 물건이군. 어디서 구했나?"

윌리엄이 책상에서 꺼낸 것은 고급스러운 네모난 상자였는데, 그 안에는 시가가 있었다. 그쪽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시가.

얼굴이 풀린 윌리엄은 그중 하나를 꺼내 입에 물더니, 끝을 자르고 불을 붙였다.

"하하··· 그게··· 친척이 선물로··· 하하···."

대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형편없이 구겨졌다. 평소에 술 한번 사지 않았던 인색한 대장이었기에, 나는 웃음을 참느라 애써야 했다.

"예.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그런가? 쯧. 골치 아프게 됐군. 후- 이거 향이 굉장히 좋구만. 자네도 한 대 피울 텐가?"

윌리엄이 시가 한 개를 꺼내서 내게 내밀었다. 윌리엄의 뒤에 있던 대장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지금이라도 담배를 배워야 하나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여기 놈들은 담배가 몸에 좋다고 생각하여, 남녀노소 불문하고 신나게 피웠지만, 나는 담배가 폐를 검은색으로 칠하는 물감이란 걸 알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그래? 알겠네. 왜 하필 혼사가 오가는 이런 중요한 순간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쯧."

시가를 하나 더 꺼내 입에 문 윌리엄이 눈을 감고 손을 저었다. 축객령이었다. 그에 나는 고개를 깊게 숙이고 방을 나섰다.

'무사히 도망갔나 보네.'

외모뿐만 아니라 기세도 호랑이 같은 사내였다. 취조실에서 형사와 대면하면 이런 느낌일까.

혹여나 한스가 잡혀도 걱정하지 않았다. 이 무식한 놈들은 악마에게 현혹될 게 두려워 한스에게 어떤 것도 묻지 않고 목을 칠 게 분명했으니까.

'그나저나 당분간 삶이 고달프겠구먼.'

기강이 해이해졌다고 중얼거리는 윌리엄의 모습을 떠올리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예전 군시절 경험을 빗대어 봤을 때,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당장 오늘이 문제지만.'

보통 긴급 상황 때문에 며칠 동안 밤새며 일했으면 어느 정도 휴식을 보장해주겠지만, 이 고용법 없는 무식한 곳에서 그런 융통성을 보여줄 리 없었다. 두 시간도 채 자지 못했지만, 바로 일해야 했다.

그나마 체력이 좋은 게 다행이었다. 오늘 업무가 끝나면 목욕을 꼭 하겠다 다짐하며 외성 경비대 본부를 나서려는 순간.

번쩍한 은색 갑옷을 차려입은 여자와 마주했다. 질끈 묶은 주황색 머리, 경직된 표정이었지만, 그런데도 가려지지 않는 아름다운 외모.

나는 습관적으로 여자의 팔 길이와 허리춤에 걸린 검을 훑어봤다. 무게가 제법 나가 보이는 검. 다만, 그 길이가 길지 않았다. 만약 싸우게 된다면···.

'오러를 꺼내기 전이라면 칠할, 오러를 꺼낸다면··· 어렵겠군. 염병할 오러.'

그러다 여인과 눈이 마주쳤고 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이 시대에서 몸에 철을 두른 것은 신분이었다.

이 성에서 귀족을 제외하고 저 정도의 무장을 보유할 수 있는 인물은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내성 경비대장과 기사 정도. 그중 여인은 기사 아델라밖에 없었다.

터벅터벅.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옆으로 무거운 발소리가 지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

'못 잡았군.'

영주의 명령이 아니라면, 기사가 외성 경비대까지 행차할 리가 없었다. 여기사의 얼굴도 미묘하게 구겨져 있었다. 그 구겨진 표정에 담긴 감정은 짜증이 분명했다.

생각보다 한스 녀석의 재주가 뛰어난 듯했다.

'아니면 정말 이동 관련 마법이라도 있는 건가.'

뭐, 이제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

"아니, 대장 정말 너무한 거 아닙니까? 저 어제 잠 한숨도 못 잤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로 근무라니···."

눈 밑이 퀭한 켈 녀석이 투덜댔다.

"그래도 세 시간 정도 잘 시간은 있었잖아. 네 놈이 퇴근하자마자, 그 여자 집에 간 게 문제지. 그러고 싶냐?"

"아니, 요 며칠 성안이 뒤숭숭해서 로사가 무섭다잖습니까. 신사가 레이디의 청을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신사는 옘병··· 발정 난 개새끼겠지. 아직 분위기 안 풀렸으니까, 입조심 해."

뭐라 대답하려던 켈이 내가 인상을 쓰자, 쩝 소리를 내며 입을 닫았다.

켈이 유난히 발정 나긴 했지만, 다른 녀석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중세의 변방에 있는 성에서는 즐길 거리가 별로 없었기에 출산율은 걱정 없었다.

물론, 넷을 낳으면 둘은 죽었지만. 이놈들은 평균 열을 낳으니, 출산율이 다섯은 보장됐다.

그래서 성의 어디를 가도 바글바글하여 시끄럽고 번잡스러웠다.

"그나저나 조장. 옆집 루나가 편지까지 보냈는데, 답장 안 하셨다면서요? 조장에게 다른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허우대도 멀쩡한 사람이 허구한 날 검만 휘두르고···."

"닥쳐."

루나는 로사와 마찬가지로 유명한 창부였다. 물론, 내가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몇몇 남자들이 그 집을 드나드는 것을 본 적 있었다.

순찰 때 루나에게 질척거리는 남성을 떼어주고 난 뒤부터 대놓고 추파를 보내왔다.

루나는 아름다웠지만, 그렇다고 내가 중세의 창부와 뒹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성병 걸리면 좆이 바로 좆 되는데, 내가 미쳤다고···.'

여기로 넘어오기 전, 성교육 시간에 봤던 충격적인 사진들로 인해, 성병의 무서움을 알고 있는 내가 길바닥에 똥이나 싸는 놈들이 즐비한 미개한 세상에서 창부와 뒹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이고오··· 내 사과··· 아이고오···."

"손 떼! 이놈들아! 호로 새끼들! 떨어져! 떨어지라고!"

"떨어졌잖아! 제국법에 따르면 떨어진 것은 누구의 것도 아니게 되네!"

"쩝. 한스 놈이 사람 여럿 잡았네."

켈의 중얼거림에 고개를 끄덕였다. 거리는 난장판이었다.

허리 높이도 안 되는 가판대 아래에 숨어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인지, 가판대는 죄다 뒤집혀 있었고 그 위에 있던 과일이나 채소가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땅에 떨어진 것들을 주우려는 이들이 들러붙었고 가판대 주인은 그를 막기 위해 꼬챙이를 꺼내 휘두르고 있었다.

"다들 떨어져!"

배에 힘을 주고 큰소리로 외치니, 썩은 고기에 붙은 구더기처럼 몰려 있던 사람들이 눈치 보며 떨어졌다. 역시 이놈들을 대할 땐, 목소리 크고 쇠를 차고 있는 게 직방이었다.

"손에 든 것도 내려놓고."

"내려놔! 이 새끼들아! 안 들려?! 앙?!"

켈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검을 빼 들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집었던 것을 놓고 슬금슬금 물러났다. 켈은 그걸로도 부족하다 여겼는지, 몇몇 놈을 따라가 주먹을 직접 먹였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없었지만, 요즘에 쌓인 피로를 나름의 방식으로 푸는 듯하여 굳이 막지 않았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가판대의 주인이 감사를 표하며 허겁지겁 떨어진 물건들을 주워 도로 올려놨다. 나는 그중 상태 좋은 사과를 몇 개 집었다.

"···?"

"아침 사과가 몸에 좋거든."

사과를 줍던 염소수염 사내가 나를 올려다봤지만, 이내 고개를 돌리고 다시 분주히 줍기 시작했다.

"고맙습니다. 조장. 마침 출출했는데."

켈이 주머니에서 꽃무늬가 그려진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 사과를 벅벅 닦았다. 나는 녀석이 다 닦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 것과 바꿨다. 켈은 분통을 터뜨리며 다시 사과를 닦았다.

'맛있네.'

한국이었다면 충주 사과가 분명했을 맛을 음미하며, 가판대가 정리될 때까지 기다렸다.

사과를 두 개 정도 먹었을 때, 빵모자를 쓴 꼬마가 다가왔다.

"···카넬리아 꽃은 지지 않는다."

내 옆에 온 꼬마는 의미 모를 말을 속삭이고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지랄한다. 진짜.'

나는 꼬마가 쓴 빵모자가 의미하는 것을 알았기에, 머리가 지끈거려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언제 또 저런 개 같은 암호를 만든 것인지.

"잠깐 좀 다녀온다. 이쪽 순찰하고 있어."

"넵. 다녀오십쇼. 오- 이건 진짜 달다. 로사가 아주 좋아하겠어. 어이! 좀 담아줘 봐."

대답하는 켈은 어느새 오렌지를 까먹고 있었다. 켈의 호통에 염소수염 사내는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오렌지 몇 개를 종이봉투에 담았다.

멀리 있는 골목까지 간 꼬마는 고개만 내밀고 나를 기다렸다. 내가 가까이 가면 다시금 뛰었고 나는 그를 따라갔다.

'돌고 있군.'

뻔히 위치를 알고 있는데, 왜 굳이 빙빙 돌아가는지··· 인내심이 바닥나서 꼬마의 머리에 주먹을 박아 넣기 직전 목적지에 도착했다.

삐뚤빼뚤한 글자로 '젝슨'이라고 적혀 있는 허름한 술집이었다.

술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청년들이 보였다. 앳된 얼굴이 남아 있는 그들은 다들 검은색 빵모자를 쓰고 한껏 무게를 잡고 있었다. 다만, 애송이 티는 전혀 가려지지 않았다.

그들이 나를 보고 고개를 깊게 숙였고 나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두목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중 하나가 다가와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 딴에는 예의를 차린 듯했지만, 그 억양이 너무 강했다.

'두목은 옘병.'

뻔뻔한 녀석의 말에 욕설이 입 끝까지 올라왔다.

그가 안내한 곳은 2층의 가장 안쪽 방이었다. 그곳에는 어디서 주운 듯한 허름한 책상이 있었고 그 건너에 덩치가 큰 사내가 앉아 있었다.

"오랜만이군."

빡빡 깎은 머리에 굵은 목과 몸통, 하관을 반 이상 가린 덥수룩한 수염과 그에 어울리지 않는 순진한 눈망울. 자칭, 캐서딕 성의 그림자 스카였다. 물론, 다른 이들은 곰탱이 스카라고 부르지만.

"내가 근무 시간에 부르지 말라고 했지?"

"아니, 잠깐!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 그 한스 놈 때문에 우리 쪽에 피해가 막심했다고!"

"피해가 막심하긴 개뿔··· 밀주 몇 개 뺏기고 벌금문 게 다겠지."

내 예상이 맞았는지, 스카 녀석이 눈을 뒤룩 굴리며 내 시선을 피했다. 술도 못 마시는 놈이 테이블 위에 갈색 액체가 담긴 유리잔을 매만졌다.

나는 그를 뺏어, 입에 털어 넣었다. 싸구려 밀주가 넘어가며 식도가 타는 듯했다. 진짜 맛없지만, 덕분에 피곤이 조금은 씻겼다.

"너 그리고 요즘 집에 안 들어간다며?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나는 냅다 녀석의 멱살을 잡아 틀었다. 단번에 녀석이 끌려 나왔다. 녀석이 숨 막힌다는 듯 내 손을 툭툭 치며 고개를 맹렬히 저었다.

"컥! 아··· 아니, 그건 요즘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방인들 몇 명이 들어와서 감시하느라··· 근데 그건 어디서 들었··· 또 캐시지! 이 망할 여편네! 바깥사람이 대업을 이루는데,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쓸데없는 소리를 늘여 놓는 녀석의 머리를 주먹으로 가볍게 두들기고 풀어줬다. 스카가 볼멘 얼굴로 중얼거리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변방의 성이라 얼마나 먹을 게 없으면 저런 놈이 뒷골목을 잡고 있는지···. 물론, 저놈이 뒷골목을 접수한 건 녀석 아비의 입김이 컸지만, 녀석이 마을 광장에서 제 몸만 한 돌을 들어 올려 괴력을 자랑한 것도 컸다.

"이방인은 무슨···. 여행객이겠지. 너 저번에도 여행객 의심스럽다고 난리 쳤다가, 일주일 갇혀 있던 거 기억 안 나?"

"이번에는 그때와 달리 진짜 이상한데···."

나는 녀석을 말을 자르며 손바닥을 내밀었고 녀석은 투덜거리며 서랍에서 허름한 주머니를 꺼내 내게 건넸다.

주머니를 열어 확인하니, 은화 몇 개가 들어 있었다. 뒷골목의 주인과 거래하는 것치고는 정말 푼돈이었지만, 경비대 월급이 쥐꼬리였기에 이조차 감지덕지했다.

"그때 약속 기억하지? 아론은 양지에서, 나는 음지에서 캐서딕 성을 장악하자는 말."

돌연 표정을 굳힌 스카 녀석이 어울리지 않게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뻔뻔한 모습에 더는 참기 힘들었다.

"장악하긴 개뿔. 너 오늘 목공소 나가는 날 아니냐?"

"아! 젠장! 벌써 날이 그렇게 됐나? 영감이 또 잔소리 하겠구만!"

잔뜩 무게를 잡고 있던 녀석이 깜짝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나서 허겁지겁 한편에 쌓여있는 옷을 챙겨서 뛰쳐나갔다.

"가서 목공소나 장악해라! 예순 넘은 노인에게 맞지 말고!"

헐레벌떡 뛰어나가는 녀석의 뒤에 대고 낄낄거리며 소리쳤다.

테이블 위에 거의 마시지 않은 술병을 집으려는데, 스카가 적어둔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 놈들이 성에 들어온 지 삼 일째인데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의심스럽다. 다른 이는 속여도 그림자의 왕 나 스카는 속일 수 없지.

'글을 쓸 줄 알면, 영주 성에서 일하지.'

이미 녀석에게 몇 번이나 말했지만, 녀석은 그림자의 주인을 운운하며 굳이 거친 목공소로 출근했다. 양지는 나한테 맡긴다는 개소리를 하며.

잔에 밀주를 따라 다시 한 모금 마시니, 불이라도 삼킨 기분이었다. 은은하게 퀴퀴한 향이 풍기는 게 최하급 밀주가 분명했다.

다 마신 잔을 내려두고 녀석에게 받은 주머니를 가죽 갑옷 안쪽에 밀어 넣었다.

그러다 이방인의 행적이 적힌 종이가 보였고 잠시 고민하다가 챙겼다. 헛짓이 분명했지만, 그러라고 받는 봉급이었으니 확인해야 했다.

'쯧.'

확인하고 별일 아니면 스카 녀석의 머리를 몇 대 쥐어박으면 됐으니,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동부 제일의 상남자

켈이 있던 곳으로 돌아오니, 염소수염 사내는 손에 꼬챙이를 들고 켈을 노려보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조장 너무 늦은 거 아닙니까? 끅."

나를 발견한 켈이 길게 트림했다. 녀석 아래로 과일 껍질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염소수염은 그런 켈을 노려보며 꼬챙이를 쥐고 저주라도 퍼붓는지,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늦기는 무슨."

"조장님, 이것 보십쇼. 로사가 유독 오렌지를 좋아해서 챙겼지 말입니다."

양심이란 게 전혀 없는 모양인지, 녀석은 종이봉투를 들어 올리며 시원하게 웃었다. 하긴 길거리에 똥을 누는 게 문화인 이곳에서 무슨 양심을 논하겠냐마는.

"말이 나와서 그런데···, 로사한테 이것만 주고 오면 안 됩니까?"

"안돼."

"조···조장은 갔다 오지 않았습니까?!"

"꼬우면 네가 조장하든지."

내 단호한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켈이 입을 벙긋거리다가, 이내 입을 닫았다.

"어이."

"개새··· 예?"

욕을 할 거면 좀 안 들리는 데서 하던가, 켈을 노려보던 염소수염이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이 중 가장 싼 과일로 가득 담아봐."

"이런 악마도 울고 갈···."

더 놔뒀다가는 큰소리로 욕을 할 것 같아, 아까 스카에게 받은 주머니에서 50 쿠퍼 짜리 동전 하나를 꺼내 건넸다. 그에 꼬챙이를 잡고 중얼거리던 염소수염이 반색하더니, 냉큼 생글생글 웃었다.

'···하여간 장사치들.'

신난 염소수염이 큼지막한 종이봉투에 과일을 이것저것 담았다. 상태 안 좋은 것들만 골라 담는 게 보였지만, 내가 먹을 게 아니었기에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돌을 던져줘도 잘 먹는 녀석들이었으니까.

"그것보다 조장. 로사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내성 경비대원 몇 명의 목이 날아갔다던데?"

"내성 경비대원?"

"어, 로사 손님 중에 내성 경비대원이 있는데, 그 사람한테 들은 이야기래. 이거 기회 아니야?"

"너는 네 여자가 다른 남자랑 뒹구는데 아무렇지도 않냐?"

"응? 창부가 손님 많이 받으면 좋은 거지. 그게 왜? 로사가 손님 셋 이상 받은 날에는 고기가 들어간 파이도 만들어준다니까."

정말 모르겠다는 듯 의문이 가득 담긴 켈의 표정에 오히려 내 말문이 막혔다. 그런가? 여자친구가 창부면 손님을 많이 받는 게 좋은 건가?

잠시 고민했지만,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보통 이럴 때는 그냥 넘어가는 게 내 정신 건강에 좋았다.

"그래."

"이거 잘하면 내성 경비대로 올라갈 수 있는 거 아니야?"

켈 녀석이 눈을 반짝였지만, 나는 회의적이었다. 그저 덩치 크고 힘 좀 쓰면 지원할 수 있는 외성 경비대와 다르게, 내성 경비대는 영주가 머무는 내성을 경호하기에 조건이 깐깐했다.

물론, 그만큼 대우가 좋았다. 월급도 외성 경비대의 몇 배에 달하고 따로 3구역에 머물 집도 제공된다고 들었다. 그리고 내성 경비대에 들어가게 되면 콧대 높은 1~3 구역 아가씨들에게 이런저런 편지도 많이 받는다고 들었다.

'그래봤자, 일주일에 한 번 씻는 애들과 사흘에 한 번 씻는 정도의 차이지만.'

그래도 1~3구역은 길거리에 똥을 싸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조금 나은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고 내성 경비대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여기 있습니다! 경비대원님의 노고에 항상 감사드립니다!!"

염소수염이 가득 담긴 종이봉투를 내밀며 빙긋 웃었다. 종이봉투가 터질 것처럼 팽팽한 것을 보니, 상태 안 좋은 것들은 죄다 골라 담은 게 분명했다.

"맛없으면···."

"에이 조장, 설마 미치지 않고서야 그러겠습니까. 조장은 좀만 수틀려도 손부터 나가는 무식한 놈으로 유명한데 말입니다."

"예에···?!"

장난삼아 꺼낸 농담에 켈 녀석이 한마디 거들자, 염소수염의 얼굴이 순식간에 푸르죽죽해졌다. 그 모습이 퍽 우스워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자 염소수염이 재빨리 종이봉투를 가져가더니, 그 안에 있는 걸 바닥에 쏟아붓고 헐레벌떡 다시 담기 시작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굳이 말리지도 않았다.

***

난장판이 된 거리를 정리하느라 꽤 힘을 쓰기는 했지만, 순찰은 별다른 일 없이 끝났다.

본부에 올려놓은 과일 잔뜩 담긴 종이봉투는 보고를 올리고 나오자, 비어있었다. 참으로 먹성 좋은 놈들이었다.

업무를 끝내고 바로 숙소로 향했다. 내가 머무는 곳은 5구역 구석진 곳에 있는 여관이었다.

"아! 아론! 오셨네요! 목욕부터죠?!"

여관을 들어서자, 바닥을 빗자루로 쓸고 있던 여급 해나가 방긋 웃으며 물었다. 점심과 저녁 사이의 애매한 시간이었기에 식사하는 이는 몇 없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해나는 안쪽으로 향했다. 물을 데우는데, 꽤 시간이 걸리므로 나는 내 방으로 향했다.

침대 하나가 있을 뿐인 단출한 방이었지만, 들어서자 마음이 편했다. 요 며칠 비에 흠뻑 젖어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가죽 갑옷을 벗고 가벼운 평상복을 챙겨 아래로 내려갔다. 물론, 검은 챙기고.

"아! 딱 맞춰 오셨네요. 물은 데워놨어요."

이마에 땀이 맺힌 해나가 소매를 걷어 올리며 말했다.

"고맙다."

"근데 이건 안 필요해요? 이거?"

돌연 해나가 오른손을 말아쥐더니, 위아래로 흔들며 해맑게 웃었다. 때 묻지 않은 해맑은 미소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천박한 동작이었다. 저건 또 어디서 배웠는지, 보는 순간 골치가 아팠다.

"필요 없다. 나도 손 있어."

"에잉··· 아론! 나 잘한다니까요? 본인 손으로 하는 거랑 완전히 느낌이 다를걸요?! 단돈 1실버! 아론이니까 특별히 저렴하게 해주는 거예요."

처음에는 나를 대하기 어려워해서, 매번 말을 더듬던 애가 언제 이렇게 능글맞아졌는지···. 나는 고개를 젓고 해나를 지나쳐 욕실로 향했다.

"70쿠퍼! 진짜 더는 안 돼요! 본전도 안 나온다니까요!"

욕실 문을 닫았다. 그러자 밖에서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렸다.

조악하고 커다란 나무통에 김이 모락모락 나오는 뜨거운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에 땀에 전 옷을 벗어 옆에 두고, 천천히 몸을 담갔다.

뜨뜻한 물에 피로가 단번에 녹아내리는 듯했다. 나는 머리를 푹 담갔다가 뺐다.

'안 잡히다니, 재주가 용하네.'

녀석을 풀어주기는 했지만, 얼마 못 가서 잡히리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포션을 발라줬다 하더라도 팔 하나를 통째로 잘린 녀석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도마뱀도 아니고 그런 녀석이 어떻게 말 탄 기사를 따돌린단 말인가?

'조력자가 있었나.'

자연스레 이어진 추론에 고개를 저었다. 여자 팬티 훔치는 것에 조력자는 무슨···.

그래도 녀석이 잡히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생각은 스카가 말했던 이방인으로 이어졌다. 녀석은 뒷골목의 주인이 되겠다는 건지, 아니면 자경단을 하고 싶은 것인지, 왜 자꾸 성의 안위를 신경 쓰는지 모르겠다.

'상관없지만.'

옆에 있는 천으로 대충 몸을 문질렀다. 흉터가 가득한 몸은 내가 보기에도 미관상 좋지 않았지만, 이 시대에서는 흉터가 훈장이고 남자의 자격이었다. 이 정도면 이 성에서···, 아니 제국 동부에서 제일가는 상남자가 분명했다.

간단히 목욕을 마치고 몸을 대충 닦은 다음 가져온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입고 온 옷은 옆에 대충 던져뒀다. 해나가 빨래해서 가져다줄 것이다.

"아론! 고기 많이 넣은 빵 맞죠?"

밖으로 나가 홀의 빈자리에 앉자마자, 해나가 빵이 올려진 접시를 내려놨다.

"어, 고마워."

"스튜는 왜 안 먹어요? 다른 사람들은 스튜를 제일 많이 찾는데."

해나가 맞은 편에 앉으며 질문했다.

해나가 말한 스튜는 정중앙에 있는 커다란 솥에 담긴 무한의 스튜였다. 숙소를 방문하는 이들이 가지고 온 재료를 넣는데, 이 미개한 놈들은 그것을 계속 반복하며 씻거나, 새로 만들지도 않고 끓이기만 했다.

처음 아무것도 모르고 그 스튜를 먹었는데, 웬 털보 놈이 싱글벙글 웃으며 주머니에서 꺼낸 곰팡이 가득한 육포를 스튜에 털어 넣는 것을 보고 그날 먹은 모든 것을 게워냈다.

여관의 가장 저렴한 음식이었기에 많은 사람이 찾았지만, 나는 굶으면 굶었지 절대 스튜를 먹지 않았다.

"일 없다."

"아론은 참 신기하다니까."

고기가 듬뿍 담겨 기름이 줄줄 흐르는 빵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얼마나 뻑뻑한지 그냥 먹으면 잘 뜯기지도 않는 빵이 기름을 머금어 그나마 씹을 만해졌다. 거기에 고기의 비린내까지 더해져 환상의 맛을 자아냈다. 토하고 싶었지만, 이 정도 음식이면 양반이었다.

톡톡.

해나가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근데 한스가··· 진짜 그랬어요?"

나와 눈을 마주치자, 한껏 목소리를 깐 해나가 질문했다. 위험한 호기심이었다.

"관심 두지 마라."

"하지만···."

"쓰읍."

인상을 쓰니, 해나가 입을 삐쭉이며 고개를 돌렸다. 즐길 거리가 없으니, 뭐라도 씹을 거리가 필요한 듯했지만, 영주와 관련된 이번 일은 그다지 좋은 주제가 아니었다.

"아! 페네르 남작님이 방문한다는 이야기 들었어요?"

잠시 풀 죽어 있던 해나가 대뜸, 입을 열었다.

'페네르 남작이? 이번 사건 때문인가.'

이번 사건의 주인공인 아가씨와 혼담이 오갔던 곳이 페네르 남작 가였다. 이곳 캐서딕 성의 영주인 풀푸츠 남작과 같은 계급이었지만, 성의 크기가 1.5배는 더 큰 곳이었기에 같은 위치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페네르 남작이 다스리는 볼트 성은 캐서딕 성과 가장 가까운 성이지만, 걸어서 이틀 정도 걸릴 정도로 꽤 거리가 있었다. 물론, 고귀한 귀족은 마차를 타고 다닐 테지만, 그래도 페네르 남작이 직접 방문하다니, 생각보다 속옷 도둑 사건이 커지는 듯했다.

'뭐, 나 같은 말단이야 별일이야 있겠냐마는.'

다만, 여급인 해나가 외성 경비대 조장인 나보다 그 사실을 먼저 알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오늘 말 관리하는 쟝 아저씨가 볼트 성으로 간다고 말해줬거든요."

내 시선을 느꼈는지, 해나가 혀를 삐쭉 내밀었다.

"네가 외성 경비 조장해도 되겠다."

"어머, 정말요? 하긴 제 팔 힘이 얼마나 좋은데···. 참 좋은데···."

내 농담에 금세 능글맞게 웃으며 팔을 위아래로 흔드는 해나의 모습에 시선을 돌렸다.

***

[이름이 없다고? 그럼 아론이라 하지.]

[뒤돌아보지 말고 도망쳐.]

[명령이다.]

잠에서 깨자마자, 머리맡의 검부터 확인했다. 검을 쥐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나무 컵에 담긴 고약한 냄새가 나는 물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 밖을 보니, 아직 해가 뜨기도 전인 어두운 새벽이었다.

잠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해서, 몸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숙소 뒤에 마련된 공터로 향했다. 여관의 첫 주인이 마구간을 지으려고 땅을 크게 빌렸는데, 도중 도박에서 지는 바람에 공사비가 모자라 공터가 된 곳이었다. 이는 내가 이 허름한 여관을 숙소로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공터의 중앙에 서서 몸을 풀었다. 아직 해도 뜨기 전이었지만, 주변에서 분주한 소리가 났다. 모름지기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해가 지면 자는 단순한 곳이었다.

나는 몸을 천천히 그리고 꼼꼼히 풀었다.

몸을 풀고 나서, 공터를 가볍게 달렸다.

그러다 점점 속도를 높였고 이내, 숨이 찰 때까지 그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조금만 뛰어도 죽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몇 바퀴를 도는지, 세지도 않았다. 그저 더는 움직이지 못할 것 같으면 그때 멈췄다.

달리기를 멈추고 숨을 골랐다.

이내 호흡이 가라앉자, 검을 뽑아 양손으로 잡았다. 착 달라붙는 손잡이의 촉감이 만족스러웠다.

갑자기 이 몸이 된 것은 6년 전이었다. 참으로 긴 시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대학생이 살인자가 되었다가, 비겁한 도망자가 되어, 변방의 경비 조장이 되기에 충분한 시간.

온갖 얼룩으로 가득한 6년이란 세월은 그전의 기억들을 희미하게 만들어,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검을 횡으로 긋는다.

초식이나, 검술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간결한 횡 베기.

필요 없는 부분을 계속 잘라내고 다듬어, 이제는 온전히 본연의 목적만을 담은 단순한 횡 베기였다.

누군가와 검을 마주하면 좀 더 빠르게 휘두르는 놈이 이겼다.

평소에 얼마나 검을 휘둘렀는지, 몸의 단련을 소홀히 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검을 꽂아 넣을 때, 망설이지 않을 정도로 손에 피를 묻혔는지가 더해져서, 승자를 찰나에 결정했다.

다시 횡 베기.

공기가 찢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휘두르면 팔목 나간다.]

문득 떠오른 잡념에 검을 더욱 세게 움켜잡고 자세를 고쳤다.

그렇게 횡 베기를 계속 반복하다가 다음에는 수직 베기.

마지막 찌르기까지 하고 나자, 온몸이 뜨거워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고 근육은 비명을 질렀다. 잡념은 고통에 잡아 먹혀, 더는 소리를 내지 못했다.

짝짝짝.

박수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짙은 검은색의 갑옷을 입은 사내가 서 있었다.

"정말 깔끔한 검술이었습니다."

철로 온몸을 두른 사내가 환히 웃으며 박수를 쳤다.

사내의 가슴에는 페네르 가의 문양이 박혀 있었다.

기적의 은화

검은색인데도 역설적으로 빛나는 갑옷. 허리춤에 걸린 검은 손잡이가 수려하게 장식된 레이피어였다.

[뾰족한 검을 든 놈을 상대할 땐, 다리를 봐야 해.]

나는 자연스레 사내의 발을 확인했다. 발조차 철이 덧대어 있는 것을 보니, 페네르 가가 돈이 많다는 게 사실인 듯했다.

다음으로 상대의 눈빛을 확인했다. 깊고 또렷한 눈동자, 호의적인 눈빛 뒤로 자신감이 엿보였다. 사내의 눈동자도 나의 여기저기를 훑어보고 있었다.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손에 피가 흥건한, 제대로 된 기사였다.

'어렵겠네.'

습관적으로 상대와의 승부를 가늠했지만, 승률을 점치기 힘들었다. 이런 경우에는 실제로 붙어봐야 알 수 있지만, 좋게 끝날 것 같진 않았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상대는 준 귀족인 기사였다. 굳이, 목에 힘을 줄 필요가 없었다.

'왜 페네르 가의 기사가 여기 있는 거지?'

해나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지만, 페네르 가의 기사가 입성했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너무 예의 차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대의 검이 너무 깔끔하여, 나도 모르게 박수친 것이니."

"벤 경, 여기서 뭐해요! 호위기사가 나를 두고 가면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

"비비안 아가씨 말이 맞습니다!"

그때 사내 옆으로 여인 두 명이 나타났다. 그중 갈색 후드를 두른 풍성한 금발 머리 여인에게 순간 시선이 빼앗겼다. 땟국물이 없는 하얀 피부, 생기 넘치는 표정, 그림으로 그린 듯한 이목구비. 여인은 주변 모든 것을 끌어들이는 듯했다.

캐서딕 성에 머무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비비안? 영주 딸이 왜 여기에?'

상대의 정체를 파악함과 동시에 나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물기 젖은 진흙이 찝찝했지만, 참을 만했다.

"하암··· 그러니까 저는 이런 이른 아침에 돌아다니기 힘들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아버지가 일어나기 전인, 지금밖에 안 되는걸요! 그리고 약속했잖아요! 심지어 삼십 분이나 늦잠 잤으면서! 응? 이분은?"

"지나가다 봤는데, 검술이 뛰어나서 구경 중이었습니다. 근데 아가씨네 성 아닙니까?"

사내가 웃으며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저희 성이라고 제가 다 알지는 못합니다! 물론, 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오가는 대화를 들어보니, 저 사내가 아가씨의 호위기사인 듯했다.

'왜 페네르 가의 기사가 호위를?'

기사는 매우 귀한 존재였다. 오러를 다룰 수 있는 기사는 인간이지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존재. 악마에 대적할 수 있는 인류의 검이라 불리며 그 값을 매기기가 힘들었다. 오죽하면 기사는 같은 기사밖에 적이 없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다.

'물론, 오러를 꺼내기 전에 목을 베면 죽지만.'

그런 귀한 기사는 캐서딕 성에 두 명, 페네르 가에 네 명 있었다. 그중 한 명을 호위로 붙여주다니···. 페네르 가에서 이 영애에게 엄청난 투자를 했다고 볼 수 있었다.

"외성 경비대 4조 조장 아론입니다."

"아, 아론 님이시군요! 동이 트기도 전부터 훈련하시다니···. 그대의 노력 덕분에 캐서딕 성이 무사할 수 있는 겁니다. 풀푸츠 가를 대신하여 감사를 표합니다."

방금까지 입을 삐쭉이고 있던 비비안이 돌연 표정을 굳히더니 고개를 깊게 숙였다.

귀족이 할 것이라 상상도 못 한 그녀의 행동에 나는 잠시 멍하게 있다가, 냉큼 반대쪽 무릎도 꿇었다. 이제 얼추 무게 중심이 맞았다.

"아하하! 아가씨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부담되지 않겠습니까. 짓궂은 장난이군요!"

"그···그게 아니라··· 저는 진심으로 감사해서···! 아아! 일어나셔도 됩니다! 바닥도 다 진흙인데···!"

"아가씨! 옷이 더러워지잖아요. 벤 경! 장난 그만 해요!"

이윽고 사내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고 비비안은 얼굴을 붉히며 입을 삐쭉 내밀었다. 경갑을 입은 여인이 사내를 노려보더니, 비비안의 옷에 묻은 흙을 털었다.

"더 늦으면 영주님이 일어날 시간이니, 빨리 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앗! 맞다! 아직 해슨 아저씨 빵집도 못 들렸는데!"

잠깐 시끄럽던 분위기가 지나가고 비비안이 먼저 돌아섰다. 견갑을 입은 여인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며 그 옆에 붙었다.

"···분명, 기사라 생각했는데."

사내의 미묘한 감정이 담긴 중얼거림을 끝으로 주변이 조용해졌다.

나는 그들의 말소리가 멀어지고도 한참 지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이 서서히 밝아지는 것을 보니, 근무 나갈 시간이었다.

***

"하아··· 졸리지 말입니다."

눈을 게슴츠레 뜬 쿼터가 턱을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굳이 그를 지적하지 않았다. 지적한다고 고쳐지는 것도 아니었고 최근 너무 바빴던 것도 사실이니, 잠에 민감한 쿼터에게는 생지옥이었을 것이다.

"다음."

가볍게 손짓하자, 말 두 개가 끄는 수레가 서서히 다가왔다. 마차 주위로는 무장한 사내 두 명이 짜증 섞인 얼굴로 서 있었다.

"아이고~ 고생이 많으십니다. 아론 님."

마부석에 앉은 낯익은 사내가 모자를 벗고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마차꾼 존이었다. 성 사이를 돌아다니며 물품을 공급하는 사내였는데, 이번에는 저번보다 주기가 짧았다.

"방문한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나?"

"캐서딕 성에 사람들이 몰린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무리해서 목적지를 바꿨죠. 두둑하게 챙겨왔습니다."

"···음 최근 방문객이 많기는 했지. 물건들 좀 보여주게."

"넵 헤헤."

마부석에서 뛰어내린 존이 촐싹거리는 걸음으로 뒤로 가서 수레를 덮은 천을 거뒀다. 대부분 우유나 밀가루 같은 식료품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니, 존이 천을 다시 덮었다.

나는 슬쩍 턱으로 쿼터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쿼터가 작게 한숨을 쉬며 앞으로 나섰다.

"하암··· 조장. 혹시 모르니까 수레 아래도 뜯어봐야 하지 않습니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수레 아래로 밀반입하는 경우도 있다던데 말입니다."

쿼터는 하기 싫은 표정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실감 나게 연기했다. 뻔한 억지였다.

성에 반입하는 물품을 확인해도 수레의 밑창까지 뜯어보진 않았다. 만약, 확인한다는 핑계로 성에 들어오는 수레나 마차의 밑창을 죄다 뜯어 엉망으로 만든다면 변방에 있는 이 성에 오려는 이가 몇이나 있겠는가.

물론, 장사치들은 그에 맞는 해결법을 찾아내겠지만.

"흐음··· 그런가. 하긴, 최근 성이 흉흉하기도 하고 말이야. 존은 그럴 인물이 아닌 걸 잘 알고 있지만···."

"아이고!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당연히 확인해야지요! 하지만, 성을 위해서 밤낮없이 일하는 우리 경비대분들에게 그런 귀찮음까지 더해드리기엔 제 마음이 너무 무거워서 말입니다."

역시 여러 성을 뺀질나게 돌아다니는 마차꾼답게 바로 눈치채고, 내 주머니 쪽에 뭔가를 조심스레 넣었다. 번쩍이는 은화였다.

"그렇지? 신용 좋기로 소문난 마차꾼 존이니까 말이야! 내 믿도록 하지! 본래 믿음, 소망, 살인 중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지 않나."

"헤헤. 그 기대 저버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나도 웃고, 존도 웃고, 쿼터도 슬쩍 웃었다. 은화 하나로 이렇게 사이가 돈독해질 수 있다니. 과연 신의 뼈로 불리는 은화였다.

"이 친구들은 뭔가?"

"아, 비잔트 성에서 구한 용병들입니다. 최근 흉흉한 소문이 제법 도는지라, 조금 무리해서 구했습니다. 용병 길드에 등록도 된 열심히 사는 친구들입니다."

"흉흉한 소문?"

"그··· 비잔트 성 주변에서 마차 도난 사건이 몇 번 일어났습니다. 저처럼 소속 없는 평민 마차가 사라진 거라, 샤를롯 가도 딱히 별다른 조사를 안 해서 이렇게 사비로 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악마의 소행이라는 소문도 있는지라···."

존은 주변의 눈치를 보며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긴,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는 세상이었다. 고작 평민 마차 몇 개 없어진 거로는 귀족이 관심 두지 않는다.

"그렇군. 어이! 친구들! 인상 좀 피게. 안 그래도 산적처럼 험한 얼굴인데, 그렇게 인상까지 쓰고 다니면 사람들이 놀라지 않겠나? 웃어보게나."

내가 이죽거리며 말하자, 사내 둘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 나를 노려봤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웃었다. 들여보내도 크게 문제가 없는 목줄이 채워진 용병이었다.

"그래, 요즘 우리 성도 뒤숭숭하니, 행동 조심하고. 잘 보니까 웃는 상이네, 방긋방긋 웃고! 통과!"

손을 저으며 옆으로 비키자, 꾸벅 고개를 숙인 존이 마부석으로 올라 마차를 천천히 앞으로 몰았다. 그 옆의 용병들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따라갔다.

그 뒤로도 성문에서 지루한 업무를 계속했다. 며칠간 비가 지독하게 와서인지, 습한 공기에 가죽 갑옷 안이 땀으로 가득 찼다.

한스를 놓아준 게 현명했다. 이 날씨에 고약한 시체 냄새까지 맡으면서 반나절을 서 있었으면 금세 정신을 잃었을 게 분명했다.

슬프게도 존 다음으로 검문한 사람 중에는 친절한 방문객이 없었다. 대부분 팔이 앙상한 소작농이었으며, 나머지는 그 소작농들에게 밥을 주고 오는 여인네들이었다.

'주간 3조 놈들은 꽤 챙겼다던데, 요즘 들어 도통 운이 없군.'

외성 경비대에서 성문 경비를 설 때, 마차꾼에게 쌈짓돈을 받는 것은 경비대 사이에서 불문율이자, 나름의 생존법이었다.

그것은 웨이터에게 팁을 주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신사적이며 신성한 행위였고 쥐꼬리만 한 경비대 월급으로 살아남는 비결이었다.

떠도는 소문으로는 다른 성에서 어떤 미친놈이 귀족 문양을 못 알아보고 귀족 마차 상대로 요구하다가, 눈이 뽑혔다고 들었다.

그 후로 경비대 한쪽에는 귀족 가문들의 문양이 삐뚤빼뚤하게 그려져 있었다. 내가 페네르 가의 문양을 알아본 것도 그 여파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쿼터가 옆에 기대어 본격적으로 코를 골기 시작했을 때, 큼지막한 마차가 다가왔다. 나는 서둘러 쿼터의 옆구리를 찔러 깨웠다. 쿼터가 벌떡 일어나며, 입가에 묻은 침을 대충 닦았다.

개인이 운용하기에는 크기가 꽤 큰 마차라, 여기저기를 확인했는데, 마차의 오른편 대롱이 달린 곳에 은화를 든 고블린이 그려져 있었다. 모자크 상단의 표식이었다.

마부석에는 빵집이라도 차릴 것처럼 푸짐하게 생긴, 사내가 앉아 있었다. 다만, 내가 알던 모자크 상단의 사람이 아니었다.

"안녕하십니까."

천천히 마차를 세운 사내가 멋진 중절모를 벗으며 살가운 미소를 지었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길게 늘어진 볼살, 그리고 반쯤 벗겨진 머리와 공손한 태도까지. 절로 안정을 주는 포근한 인상과 점잖은 태도였지만, 사내를 보고 있으니 모래를 씹은 것처럼 입맛이 꺼슬꺼슬하여 기분이 탐탁지 않았다.

"아, 도르누아. 금방 또 오셨군요."

아까부터 졸고만 있던 쿼터가 웬일인지, 눈을 반 이상 뜬 상태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신기한 일이었다. 아름다운 여인이 지나가도 눈을 뜨지 않는 녀석이 스스로 인사를 건네다니.

"예. 저번에 챙겨오지 못했다던 것들을 가져오느라, 그 먼 길을 다시 갔다 왔습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정신이 깜빡깜빡합니다. 허허. 그런데 이 잘생긴 분은 누구십니까?"

외모와 어울리는 따뜻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대답한 사내가 나를 보며 물었다.

'좋은 놈이었네.'

최근 잠을 얼마 못 자, 피곤해서 내가 오해한 듯했다. 본래 눈이란 마음의 창이라는데, 저런 훌륭한 마음의 창을 지닌 이가 못된 놈일 리가 없지 않은가.

"아, 우리 조장 아론 님입니다. 조장, 이쪽은 모자크 상단 캐서딕 지부로 발령 난 도르누아라고 합니다. 며칠 전 검문 근무할 때 알게 됐습니다."

"조장님이시군요! 아이고- 고생이 많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근무하시는 분들 덕분에 저희 같은 장사치들이 편히 다니는 거 아니겠습니까."

다시금 서글서글하게 웃은 사내가 슬쩍 악수를 청했다. 나는 굳이 사내의 손을 잡고 싶지 않았지만, 사내의 손바닥에 어렴풋이 보이는 주머니에 냉큼 맞잡았다.

'좋은 놈이었네.'

건네받은 주머니는 사내의 볼살만큼 두둑했다. 단번에 내 얼굴이 헤벌쭉하게 풀렸다.

"아하하! 도르누아 아우였구만! 일을 얼마나 열심히 하면 아주 그냥··· 어깨가 다 뭉쳤어!"

나는 히죽 웃으며 사내의 어깨춤을 주물렀다. 내 급변한 태도가 당황스러웠는지, 사내가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몸이 워낙 뚱뚱한지라 단번에 잡혔다. 사내의 살은 귀족이 먹는다던 고급 돼지가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부드러웠다.

"하하···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가만히 있게! 내 어찌 피곤한 우리 도르누아 아우를 보고 그냥 지나치겠는가!"

'문신?'

사내의 어깨를 주무를 때,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사내의 옷이 살짝 뒤로 밀리며 사내의 목덜미와 어깨 사이에 그려진 문신이 보였다. 거미 같기도 하고 뱀 같기도 한 미묘한 문신이었다.

용병 중에는 온몸을 그림으로 떡칠한 놈이 있을 정도로 흔한 게 문신이었지만, 사내의 문신은 시선을 잡아끄는 뭔가가 있었다. 마치, 어두운 동굴을 보는 듯한···.

"아이고! 제가 어떻게 감히 형님에게 안마를 받겠습니까!"

그때 사내가 능숙하게 내 손을 잡아 내리며, 울상을 지었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주머니 하나를 더 건네는 게, 꿈에 그린 듯한 참 아우였다.

나는 녀석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며 나와 비슷한 점이 있는지, 꼼꼼히 살폈다. 이 몸의 부모는 모르지만, 저런 훌륭한 인품을 보니, 열을 낳아 살아남은 다섯 중 하나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배다른 형제일 수도.

'입술 색이 좀 비슷한가?'

조금 애매하네.

"내가 그동안 찾았던 아우가 여기 있었구나!"

마음 같아선 안아주고 싶었지만, 아무리 아우라고 한들 나로서는 악수가 최대였다. 나는 아우의 포동포동한 손을 잡고 몇 번이나 흔들었다.

아우의 눈 옆에 주름이 깊어질 때쯤, 쿼터가 나를 말렸다. 아우는 이렇게 진한 환영은 처음인지, 상당히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혹시, 그때 주신 거 있습니까?"

"···아, 그거 말씀입니까. 여기 어디쯤 있을 텐데."

쿼터의 물음에 정신을 차린 아우가 예의 그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품속을 뒤졌다. 마차 끌고 다니며 정장을 입은 꼴이 웃겼지만, 아우의 취향을 존중하기 위하여 표정을 관리했다.

잠시 뒤, 아우가 꺼낸 것은 안에 사탕 같은 것이 담긴 투명하고 작은 유리병이었다.

"오, 다행입니다. 이걸 먹고 자니, 꿈도 꾸지 않고 얼마나 푹 잤는지, 눈 감자마자 다음날이었습니다. 얼마입니까?"

"하하, 저희 사이에 무슨 값을 치룹니까. 그리고 거의 값이 나가지 않는 것이라, 부담 없이 받으셔도 됩니다."

사내가 값을 치르려는 쿼터를 한사코 만류했다. 얼마나 절실하게 막았는지, 혹시 사내가 돈을 받으면 죽는 저주에 걸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결국, 쿼터는 값을 치르지 않고 유리병을 챙겼다. 그때 나는 쿼터가 환히 웃는 모습을 처음 봤다.

입술 색이 닮은 것을 보니, 내 아우가 분명했지만, 그래도 시늉은 내야 했기에 마차 문을 열었다. 그러자 물씬 풍기는 악취에 코를 막아야 했다.

큼지막한 마차 안에는 혀를 빼물고 죽은 염소시체가 가득 담겨 있었다. 심지어 가죽도 벗기지 않았고 피도 빼지 않았는지, 마차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다.

"읍, 냄새···. 아우야, 이거 이렇게 끌고 다니면 고기도 상하고 마차도 다 상한다. 따로 수레로 끌고 다니든지 해야지."

"아, 그게··· 알던 도축업자가 최근에 죽은 줄 알았던 말한테 차여 못 일어나는 바람에··· 그렇다고 고기를 상하게 둘 수도 없으니, 일단 급한 대로 싣고 왔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우가 이내,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시체 말한테 차여서 죽은 도축업자라니···, 술자리에서 말해도 욕먹을 만한 이야기였다.

"아무튼, 들어가서 최대한 빨리 이것부터 해결해. 이러다 고급스러운 아우 몸에 고약한 냄새 밴다. 여자들이 얼마나 냄새에 민감한데, 그 뚱뚱한 몸에서 고약한 냄새까지 나면··· 끔찍하군."

"뚱뚱···? 그··· 알겠습니다."

표정이 미묘해진 아우가 고개를 꾸벅거리더니, 다시 마차를 몰아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얼굴이 짜증으로 가득한 다른 조 애들이 교대하러 왔다. 그에 갑자기 기분 좋아져서 그들에게 덕담을 몇 마디 건넸다.

"아오! 그냥 좀 가십쇼! 어떻게 된 양반이 그냥 가는 법이 없습니까!"

놈이 시뻘게져 침을 튀기는 모습에 만족하고 돌아섰다.

"그럼 좆뺑이쳐라."

역시, 교대하는 순간이 가장 즐거웠다.

배불뚝이 콥스

본부에 도착해 대장에게 얼굴도장을 찍고 나오니, 쿼터는 보이지 않았다. 침대로 달려간 게 분명했다. 의리 없는 새끼.

"조장 퇴근하십니까."

가죽 갑옷을 벗고 평상복 차림이 된 베르만이 넌지시 인사를 건넸다.

"어. 오늘 순찰 때 별일 없었냐."

"저희 쪽은 3, 4구역 순찰이라 평소랑 비슷했는데, 5, 6구역 순찰했던 브릭 쪽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최근에 이방인이 많아지다 보니 이런저런 잡음이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아, 그래? 무슨 문제."

나는 대답하며 이음새를 눌러 가죽 갑옷을 풀었다. 찌든 냄새 가득한 갑옷을 벗으니, 다시 태어난 것처럼 상쾌했다. 역시 사람은 뭔가를 더 걸칠수록 자유에서 멀어지는 게 분명했다.

"가게 쪽에서 용병들끼리 시비가 붙었다고 들었습니다. 좀 도와드립니까?"

"어, 거기 좀 잡아봐. 안 빠지네."

"알겠습니다."

베르만이 내 가죽 장화의 반대쪽을 잡고 힘을 줘서 당겼다. 그렇게 한참을 낑낑대니, 잠시 뒤 뽁!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장화가 벗겨졌다. 발이 자유를 되찾았다.

"아오. 이거 크기 안 맞는다니까, 몇 번을 말해야 새것으로 주는 거야. 짠돌이 새끼."

이내 반대쪽 장화까지 벗어서 한편에 던졌다. 그리고 베르만의 발을 슬쩍 봤는데, 깜짝 놀란 베르만이 옆으로 움직여 발을 가렸다.

"야, 안 뺏어. 안 뺏는다고."

"저번에 켈 모자 가져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깃털 달린 거."

"그때는 그 새끼가 자꾸 여자 자랑하니까 짜증 나서 그런거고."

"조장님도 여자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정착한 지도 2년 넘으셨고, 루나가 관심을 표했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됐다. 됐어. 아무튼,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술까지 마셨는지, 용병 놈들이 브릭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싸웠다지 말입니다. 결국, 2, 3조 지원받아서 싹 다 통에 넣었습니다."

"아, 진짜? 간이 부어도 단단히 부은 놈들이네."

"칼밥 먹는 용병 놈들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베르만이 쯧하며 혀를 차고 용병 욕을 했다. 그에 괜스레 뭔가 찔려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르만의 말이 맞았다. 자신의 목이 걸린 주사위를 매일 던져야 하는 용병을 배운 놈들이 할 리 없었다. 칼밥은 먹고 싶어서 먹는 게 아니었다. 먹을 게 그것밖에 없어서 선택지가 없었을 뿐이지.

"왜 갑자기 사람이 몰리는지 모르겠지만, 마음 같아서는 그 새끼들 죄다 7구역에 몰아넣고 싶습니다."

전부터 베르만은 유독 용병을 경멸했다. 다른 때는 중세답지 않게 나름 신사적인 놈이 용병만 끼면 눈이 훼까닥 돌아갔다.

그것에 대해서 켈이 '베르만은 거기가 큰 용병에게 연인을 뺏긴 적 있다'라고 주장했는데, 사실로 밝혀지진 않았다.

벗은 것들은 한쪽으로 대충 쑤셔 넣었다. 경비대에는 사물함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저 매일 놓는 자리가 자기 자리가 되는 것이다. 내 자리는 통풍이 잘되고 눈에도 잘 보이는 자리였다.

'최근에 사람들이 몰리네.'

변방에 있는 성이라, 방문객이라고 해봤자 물건 나르는 마차꾼이나 상단밖에 없었는데, 최근에는 방문객의 수가 급증했다.

받는 은자가 늘어나 좋았지만, 사람이 몰리면 반드시 문제가 발생하는 법이었다. 지금까지 늘 그랬고. 조만간 다시 바빠질 것 같았다.

'하긴 작년 영애 생일 때도 몰리긴 했었지.'

그 미모가 제법 유명한지라, 그 당시에는 거의 잠도 못 자고 굴러다닐 정도로 바빴었다. 귀족 문양을 새긴 마차가 하루에도 두세 개씩 들어서는 바람에 농땡이도 피지 못했다.

"···조장님도 조심하십쇼."

"뭐?"

"5구역에 특히 용병 놈들이 많이 몰렸다고 하니까, 조심 하십쇼. 또 일단, 두들겨 패서 저번 같은 일이 안 일어나게 말입니다. 그냥 다른 조 애들 불러서 쪽수로 누르면 용병 놈들도 접어주지 않습니까."

뭔 이야기 하나 싶었더니, 실없는 소리였다. 그에 대충 손을 흔들었다.

다른 조를 불러 해결하다니. 참 웃긴 이야기였다.

경비대의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인가. 빵이나 과일을 저렴한 가격에 먹을 수 있는 것? 검문하면서 자잘한 돈을 벌며 친목 도모를 할 수 있는 것?

아니, 그런 것들은 자잘한 부산물, 혹은 복지 정도에 불과했다.

모름지기 경비대의 가장 큰 장점은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놈이 아니라면 일단 때려눕혀도 된다는 거였다.

이 무식한 중세 놈들은 뭔가 하나씩 큰 잘못을 꾸준히 저지르므로 일단, 쥐어패면 뭐라도 나왔다. 그리고 경비대는 그런 놈들을 적당한 선까지 쥐어패도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 또 우리까지 묶여서 감봉되지 않도록 조심해 달라는 말입니다!"

감봉된 만큼···, 아니 오히려 더 두둑하게 챙겨줬는데 뭐 저리 불만인지. 베르만의 외침에 손을 가볍게 저었다.

다만, 베르만의 말대로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가장 맛있는 부분을 왜 남과 나눠 먹는단 말인가. 혼자서 먹어야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

"아이고···."

배불뚝이 콥스는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으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예전에는 온종일 일해도 집에 가서 마누라를 만질 정도의 체력이었는데, 이제는 반나절만 일해도 몸이 축축 처졌고 집에 들어갔다가 괜히 마누라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오한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아야 했다.

일도 전보다 줄고 사람도 고용하며 퇴근 시간이 빨라졌지만, 그렇다고 집에 갈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콥스는 집에서 온전한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

그런 콥스의 유일한 낙은 퇴근하고 '웃는 토끼' 여관에서 따뜻한 차 한잔 마시는 거였다.

콥스가 '웃는 토끼' 여관을 좋아하는 이유는 몇 가지 있었다. 일단, 여관 자체가 조용하다는 것.

캐서딕 성에서는 어디를 가도 늘 시끄러웠다. 1구역의 찻집은 조용하다지만, 그의 형편에 1구역에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은.

"아! 콥스 아저씨! 따뜻한 차 맞죠?!"

여급인 해나가 친절하고 따뜻하다는 것과 값이 매우 저렴하다는 것이었다.

'우리 마누라도 젊었을 적 저랬는데···. 지금은 무슨 오크라도 잡아먹었나.'

쩝. 입맛을 다시며 앞에 놓인 찻잔을 매만졌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해나가 청소하는 소리만이 들려,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콥스는 쌉싸름한 차를 마시며, 이곳에 처음 왔을 때를 떠올렸다.

첫 방문 때 여관과 어울리지 않는 조용한 분위기에 놀랐었다.

다른 여관은 늘 사내들끼리 모여 시끌벅적하게 잔을 부딪치다가 주먹 싸움을 하는 게 보통이었는데, 여기는 아주 조용했다.

여급이 미인인데, 이렇게 조용할 수가 있나? 보통 껄떡대는 사내로 붐벼야 정상이었다.

혹시 여기서 비밀스러운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의문은 당시 매일 반복되는 일과에 지쳐있던 콥스에게 신선한 자극이었다. 콥스는 그날부터 비밀을 캐내기 위해, 여관을 방문했다.

그렇게 콥스가 웃는 토끼 여관에서 파는 차의 쌉싸름한 맛에 눈을 뜨기 시작할 때쯤, 왜 여관이 조용한지 깨닫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망나니 아론이 머무는 곳이었을 줄이야.'

용병 몇 명이 해나에게 치근덕거렸고 그날 웃는 토끼 여관은 다른 여관보다 배는 시끄러웠다.

저 멀리 도시에서는 귀족들이 용병들을 서로 죽이게 만들어 그를 구경한다고 들었는데, 콥스는 그날 왜 고귀하다는 귀족들이 그런 야만스러운 짓을 시키는지 깨달았다.

원초적인 폭력을 보고 있으니, 안에서 무언가가 해소되는 느낌. 그동안 여기저기 치이며 받았던 설움이 녹아내리는 듯한···.

삐걱.

낡은 나무문이 세월을 작게 토로하며 열렸다.

'악마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콥스는 문이 열리고 들어온 거구의 사내를 보고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태는 잘생겼지만, 얼굴 곳곳에 새겨진 흉터 때문에 그 인상이 좋지 못했다. 거기에 천 옷을 입었음에도 드러나는 단단한 몸은 같은 수컷으로서 절로 시선을 내리게 만드는 기세를 물씬 풍겼다.

"아! 아론! 오늘도 고생했어요! 목욕 먼저 할거죠?"

"어."

아론이 2층으로 올라가는 걸 보고 나서야, 콥스는 편히 숨을 쉴 수 있었다.

'기사보다 더 무섭단 말이야.'

직업 특성상 기사를 자주 보는 콥스였지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기사보다 저 아론이 더 무섭다고.

삐꺽!

"아이씨! 뭔 문이 이렇게 뻑뻑해! 아까 거기 여관 가자니까, 왜 이런 구석진 곳까지 온 거야."

"원래 이렇게 후진 곳에 있는 식당이 제일 맛있다니까."

나무문이 전보다 길게 소리를 내며 열렸고, 험상궂은 사내 셋이 들어왔다. 등에 도끼를 메고 곳곳에 단검이 묶여 있는 걸 보니, 최근 들어 많아졌다던 용병이 분명했다. 그들은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주변을 부라렸다.

'오늘이었나!'

그들을 훔쳐보며 콥스는 가슴이 콩닥거렸다. 용병이 많아졌다는 소문에 기대하긴 했지만, 자신이 방문했을 때와 맞을 줄이야!

"어서 오세요! 식사하실 건가요?"

"잠자리도 되나? 하하! 농담이야. 일단, 식사부터."

"오! 존! 네 말이 맞았다! 제대로구먼!"

"아하하··· 이쪽으로 앉으시겠어요?"

녀석들의 무례한 말에 해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중앙에 있는 테이블로 안내했다.

'오늘이군!'

자리에 앉으면서도 해나에게 연신 저질스러운 농담을 던지는 모습에 콥스는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해나가 손목을 잡는 손길을 애써 웃으며 밀어내고 주방 쪽으로 사라지자,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번 의뢰가 귀족에게 받은 것이라, 보수가 엄청 나다느니, 이번 건을 완수하면 농기구를 구매해 제대로 된 인생을 살겠다느니, 같은 이야기를 시끄럽게 떠들었다.

그렇게 한참 그들이 한창 시끌벅적할 때, 아론이 내려왔다. 가벼운 옷이었지만, 늘 그렇듯 허리춤에는 검을 맨 상태였다.

아론이 내려오자, 시끄럽던 용병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용병들은 아론을 노려보며 옆에 풀어 놓았던 도낏자루를 잡았다.

아론은 그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 그에 오히려 경계한 그들이 우스워졌다.

"아! 아론! 물 데워놨어요!"

"고맙다."

"이거는? 70 쿠퍼? 아론이라 해주는 거라니까요!"

다른 이를 대할 때와 다르게 보조개까지 보이며 함박웃음을 지은 해나가 늘 그렇듯 천박한 손짓을 하며, 눈썹을 삐쭉 올렸다.

아론은 질린 표정을 지으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에 해나는 혀를 빼꼼 내밀더니, 다시 주방으로 사라졌다.

"뭔 놈의 새끼가 눈빛이···."

"풋. 쫄았냐?"

"쫄기는! 그리고 너는 도끼까지 꺼낼 기세던데."

"저 쪼다 새끼가 노려본 거 봤지. 확 마! 대갈통을 부수려고 만졌다!"

방금의 침묵이 민망했는지, 사내 셋은 오히려 전보다 더 크게 목소리를 내며 거친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들은 괜히 옆 테이블의 사람에게 시비를 걸며, 분풀이했다.

바로 옆 테이블에 있던 겁쟁이 구륵은 화들짝 놀라 잔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 최대한 멀리 떨어진 자리로 옮겼다.

콥스는 구륵도 자신과 같은 기대를 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근데 아까 그 손짓 봤냐?"

눈 끝이 삐쭉 솟아, 고블린과 닮은 사내가 히죽 웃었다.

'오늘이군!'

콥스는 구륵과 눈을 마주치고 히죽 웃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구륵이 사내들의 눈치를 보며 슬쩍 목을 손가락으로 그었다.

잠시 뒤 해나가 음식이 담긴 접시와 맥주잔을 들고 나왔을 때, 사내들은 일어나서 홀을 부술 기세로 춤추고 있었다.

눈은 웃지 않고 입꼬리만 올린 해나가 테이블에 접시와 잔을 내려놓고 돌아설 때, 고블린과 닮은 사내가 해나의 손목을 잡았다.

해나가 예의 그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이번에는 쉽지 않은 듯 고운 이마를 찌푸렸다.

"아까 보니까 좋은 걸 해주는 것 같던데 말이야. 나도 오늘 땀을 좀 많이 흘렸는데, 목욕물 좀 받아주지?"

"그··· 일단 아론 씨가 다 씻으면 물 받아줄게요. 욕조가 하나뿐이라."

"아까 그놈에게 말했던 70 쿠퍼인가? 그것도 받고 싶은데. 근데 좀 비싸네. 저쪽은 50 쿠퍼면 이것저것 다 할 수 있다던데. 특별한 무언가가 있나 보지?"

"그건 그냥 장난친 거예요. 지금 한창 바쁜 시간이라, 이것 좀 놔주시겠어요?"

"내가 똑똑히 들었는데, 지금 무식한 용병 새끼라고 차별하는 거야?!"

사내 중 제일 덩치 큰 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내 둘이 따라 일어나서 해나 주변을 둘러쌌다.

콥스는 용병들이 저번과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을 보며 작게 감탄했다. 혹시 저게 용병들 사이에서 유명한 구애 방식인가? 만약 그렇다면 용병들은 대를 잇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 용병님들이 거칠고 멋진 남자인 건 알지만, 제가 정말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지는 않거든요. 제가 오해할만한 농담을 해서 정말 죄송한데···, 계속 이러시면 저도 그렇고 손님분들도 정말 곤란하고 귀찮은 상황이 되니까, 여기까지만 하시겠어요?"

해나는 사내들에게 둘러싸였는데도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안쓰러운 눈빛으로 사내들을 둘러보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하! 귀찮은 상황? 경비대라도 믿는 건가? 진짜 순진한 아가씨구만."

덩치 큰 사내가 해나의 볼을 손등으로 쓸어내리며 음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작 달에 30 실버도 못 받는 경비대가 이런 허름하고 구석진 여관까지 돌봐줄 것 같나? 그리고 우리가 이런 변방에 있는 경비대에 쫄 것 같아?"

"···암요. 암요. 그렇겠지요."

사내의 말에 해나가 포기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충 대답했다. 그에 사내가 인상을 찡그리며 해나의 머리 체를 잡는 순간.

끼이익.

어쩐지 불길한 문 열리는 소리와 무거운 발소리가 들렸다.

그에 방금까지 해나를 희롱하던 사내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홀에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윽고 그가 나왔다.

통로에 가득 찰 정도로 큰 덩치.

윗옷을 입지 않아, 훤히 드러난 상체에는 검을 찔러 넣어도 들어갈 것 같지 않은 단단한 근육들이 자리해 있었다. 그리고 그 근육 위에는 끔찍한 흉터들이 빈틈없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끔찍하여, 영겁의 세월 동안 서로 뜯어먹는 형벌을 받은 악마를 떠올리게 했다.

물기를 닦지 않아 머리에서 뚝뚝 떨어진 물방울이 가슴을 길게 가로지른 흉터를 타고 흘렀다. 순간, 물방울이 붉게 보였다.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흉흉하게 빛나는 눈동자는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손이 덜덜 떨리게 만드는 기세가 담겨 있었다.

저 멀리 제국의 서쪽 끝 울창한 숲속에 사는 사람을 뜯어먹는 야만인.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하고 또 얼마나 잔혹한지, 제국조차 포기하게 만든 야만인.

'아론은 야만인의 왕이 분명하다!'

콥스는 확신했다.

콥스는 자꾸만 새어 나오는 비명을 참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아론이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음에도 손이 덜덜 떨렸다.

"10일 정도인가."

모두의 시선을 받는 아론이 태평하게 중얼거렸다.

"···뭐멋?!"

용병 중 덩치 큰 사내가 소리쳤지만, 그 목소리가 달달 떨리고 끝이 갈라졌다.

"5일! 저번보다 수도 적잖아요! 그리고 당신 경비대잖아! 애초에 아론이 해야 할 일이잖아!!"

대답은 사내들에게 붙잡힌 해나에게서 나왔다. 해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앙칼지게 대답하며 입을 삐쭉 내밀었다.

"퇴근했어. 9일."

"6일! 더는 안 돼요! 요즘 장사도 잘 안된단 말이에요!"

"8일."

"6일! 거기에 이거 서비스!"

"그냥 6일로 하지. 그건 필요 없고."

사내들에게 잡힌 와중에도 손을 위아래로 흔드는 해나의 모습에 아론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잡것들이 지금 우리를 무시하는겨?! 감히 강철 도끼 삼인방을?!"

기에 눌려 있던 용병들이 그제야, 둘의 대화를 이해했는지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들은 부끄러움을 애써 분노로 표출하며 소리쳤다.

"감히 강철 도끼 삼인방을 무시하다니! 촌놈이라고 봐줄 것 같아?!"

"건방진 년, 너는 이따 보자."

"꺄악!!"

용병들에게 밀쳐진 해나가 벽에 부딪히며 비명을 질렀다.

그를 옆에서 보고 있던 콥스는 그 순간에, 다리 한쪽이 부실한 테이블을 용병들 쪽으로 슬쩍 밀어 넣는 해나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무식한 중세 놈들."

캐서딕 성의 망나니, 아론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콥스는 몸을 최대한 벽 쪽에 밀착하면서 지금부터 일어날 일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에 힘을 줬다.

내일부터 웃는 토끼 여관은 또 한동안 조용할 것을, 콥스는 확신했다.

가벼운 스포츠

'무식한 중세 놈들.'

볼을 파르르 떨며- 분노를 격하게 표출하는 세 명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분명, 경비대라고 해나가 말했는데도 녀석들은 멈출 기색이 없었다. 뭐 기껏해야 벌금형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래도 이성이 남긴 했는지, 도끼를 뽑진 않고 그저 욕설을 퍼부으며 다가왔다. 그에 나도 검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제일 앞에 선 녀석은 대머리의 울퉁불퉁한 사내였다. 굵은 팔뚝을 보니, 힘을 꽤 쓸 것 같았지만, 나보다 팔이 짧았다.

"겁대가리 없는 새끼. 이 창부의 자식아!!"

사내가 대뜸 부모 욕을 하며, 힘껏 주먹을 뻗었다.

처음 부모 욕을 들었을 때는 심히 당황스러웠지만, 저건 용병들 사이에서 '개새끼' 수준의 범용성을 지닌 욕이었다.

'어쩌면 진짜 창부의 자식일 수도.'

이 몸의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르고 있으니, 녀석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도 꽤 싸워본 녀석인지, 주먹을 내지르는 자세가 나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맞을 정도의 빠르기는 아니었지만. 녀석의 팔을 팔뚝으로 내리찍었다. 뿌드득- 끔찍한 소리가 나며 녀석의 팔뚝이 기괴한 방향으로 틀어졌다.

녀석의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지며, 비명을 지르기 위해 입을 크게 벌렸다. 나는 녀석의 뒤통수를 잡았다.

"으아···."

녀석의 비명이 시작되기 전에, 테이블에 녀석의 얼굴을 박아 넣었다.

우당탕.

테이블이 부서지며, 붉게 물든 나무 파편과 누렇고 썩은 이가 튀었다.

쓰러진 녀석 바로 뒤에 있던 놈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당황했는지, 분노와 당황이 섞인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눈은 크게 뜨고 있었지만, 입은 욕을 하는 듯 잔뜩 쭈그려진 우스꽝스러운 표정이었다.

이미, 기세가 넘어온 싸움이었다.

나는 그대로 한 발자국 다가가며 발을 휘둘렀다.

"끄아아아악!"

내 발이 녀석의 허벅지를 찼고, 녀석의 다리가 보기 좋지 않은 방향으로 휘어졌다. 녀석이 길게 비명을 지르며 덜렁거리는 제 다리를 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그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주변에 떨어진 나무 조각으로 녀석의 머리를 한 대 내려치니 금세 조용해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녀석은 눈매 끝이 올라가 족제비처럼 생긴 놈이었다. 족제비 녀석은 입을 벌리고 쓰러진 두 놈과 나를 번갈아 봤다. 샤워 중에 갑자기 벽이 무너져 사람들에게 노출되면 지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아니···."

녀석이 도낏자루에 얹어진 손을 움찔거렸다. 무기를 꺼내야 하는지 고민하는 듯했다.

성 내에서 가벼운 주먹 다툼은 평민들의 친목 도모. 혹은 스포츠로 용인했지만, 쇠붙이를 뽑는 것은 다른 의미였다.

"뽑을 거야?"

나는 적당한 크기의 나뭇조각을 고르며 말했다. 그에 녀석이 눈을 뒤룩 굴리며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울상인 것을 보니, 나름의 결단을 내린 듯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이 꽉 깨물고."

"아··· 그··· 방금 저 여인에게 했던 말은 제가 용병이니까··· 일종의 관습이랄까··· 그냥 용병이 여자를 보면 하는 의례적인··· 진심으로 한 게 아니라··· 정말입니다."

오줌을 지렸는지, 시큼한 냄새가 물씬 풍겼다. 아까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녀석이 순한 양 같은 눈으로 나를 보며 말을 더듬었다.

그 모습이 딱히 우습지는 않았다. 자신보다 강자 앞에서 순한 양이 되는 것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당연하니까. 그런 당연한 이치를 이겨낸 용감하고 고결한 자들은 이미 다 무덤에 들어가 있었다.

그 묘비에는 자랑스럽게 적혀 있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 용감했노라고. 그게 위안이 될지 모르겠지만.

단념했는지,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문 녀석의 머리를 향해 나뭇조각을 휘둘렀다. 빡! 경쾌한 소리가 나며 녀석이 쓰러졌다. 바닥에는 주인이 둘 중 하나인 누렇고 썩은 이들이 잔뜩 뿌려져 있었다.

'무식한 중세 놈들.'

쯧. 나는 혀를 차며 쓰러진 놈들을 한쪽 구석으로 모았다. 녀석들은 잘 먹고 다녔는지, 제법 무거웠다.

"3일도 안 되는 애들이구만···."

바닥에 뿌려진 이를 줍는 해나가 칭얼거렸지만, 이미 거래는 끝난 뒤였다.

***

"···죄숑함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족제비를 닮은 놈이었다. 눈을 뜨고 나를 마주한 녀석이 비명을 지르려다가, 급하게 손바닥으로 제 입을 막았다. 눈치가 제법 빠른 모양이었다.

나는 고갯짓으로 옆을 가리켰다. 족제비 녀석은 기절한 녀석들의 뺨을 짝! 소리가 날 정도로 후려쳤다.

그에 일어난 녀석이 족제비에게 욕을 하다가, 나를 발견하고 비명을 지르려는 것을 족제비가 냉큼 막았다.

"죄숑함다."

"···죄숑함니다."

나란히 앉아서 나를 올려다보며 말하는데, 이가 빠져서인지 발음이 우스웠다. 팔이나 다리가 기괴하게 꺾여 있어 고통스러운지, 얼굴을 찡그리다가도 나와 눈을 마주치면 억지로 웃었다.

"아까 뭐라 그랬지?"

"···에?"

족제비가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까 월급이 30 실버라며."

"그···그거는··· 아까 미뗬츨 때, 막 배튼 헛소리임다! 죄숑함니다!"

"왜 30 실버야."

"에?"

"왜 30 실버라고 생각했냐고."

"그··· 그건···."

"어?"

"비··· 비쟌투 성의 아는 경비대원이 술자리에서 그렇게 말해서···."

"난 20 실버인데."

"에?"

"나는 달에 20 실버 받는다고."

내 대답에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녀석의 표정이 '그래서 어쩌라고?' 묻는 듯했다. 생각보다 눈치가 더딘 놈이었다. 독심술이라도 할 것처럼 생겼는데 말이야.

"내가 이렇게 퇴근하고도 고생하는데 말이야. 심지어 비잔트 성 놈들은 우리보다 근무 시간이 적다고 하더군?"

"에에···. 그렇슴니까? 마··· 말도 안 됩니다! 이렇게 고생하시는데! 이 창부의 자식들! 악마보다 나쁜 놈들!"

"그렇지? 말이 안 되지?"

"···에."

잠시 눈을 뒤룩 굴리던 족제비 녀석이 내가 넌지시 손바닥을 내밀자, 상황을 이해했는지 다시금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문 쪽을 훔쳐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응시했다. 아래에서 분주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다친 곳을 건드렸는지, 신음이 나오고 욕설이 오갔지만, 나는 계속 천장만 봤다.

"고···고생하는 경비대 님을 위한 조촐한 성의입니다."

다시 고개를 돌리니, 족제비가 은화 몇 개랑 동전 몇 개를 공손히 내밀고 있었다. 솔직한 녀석인지, 녀석의 말처럼 정말 조촐했다.

"음. 눈이 침침해서 잘 안 보이는데, 이게 10 실버인가?"

"그··· 그게 아직 의뢰를 완수하지 못해서, 이게 저희가 들고 있는 전부입니다!"

족제비가 절절한 목소리로 외쳤지만, 나는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제 부모도 못 믿는 용병 놈들이 들고 다니는 게 저것뿐 일 리 없었다.

"속옷 안에도 없나?"

"그···그걸 어떻게! 흡!"

족제비가 경악하여 소리쳤다가, 제 실수를 깨닫고 입을 재빨리 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다시 천장을 올려다봤다.

"개새끼···."

씹어 뱉듯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욕설 뒤로 전보다 더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크흑."

울음을 애써 참는 소리에 고개를 내리니, 이번에는 족제비 손바닥에 은화 열 개가 올려져 있었다. 그중 몇 개는 누런 색이라 만지기 꺼려졌다.

"성의가 좀 더럽네."

까드득. 이 가는 소리를 낸 족제비가 제 바지춤에 은화를 비벼 닦았다. 다시 내밀었고 이번에는 다 반들반들 빛났다.

"그래. 앞으로 사고 치지 말고. 그래도 못 참고 사고 칠 거면 내 눈에 보이는 곳에서 쳐라."

내 교육 덕분에 무식한 중세 용병 놈에서 벗어난 녀석이 기특하여 족제비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그에 족제비가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렸지만, 나랑 상관없는 일이었다.

"가보도록."

가볍게 손을 젓자, 녀석들이 서로 부축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쩔뚝거리며 여관을 나섰다.

팔이 꺾인 놈과 다리가 꺾인 놈이 서로 부축하는 모습을 보니, 서로의 부족함이 겹쳐져 더욱 우애가 돈독해진 듯했다.

혹시 두고 보자 같은 말을 할까 기대했지만, 녀석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사라졌다.

나는 손에 들어온 은화를 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스트레스도 풀고 은화까지 벌다니, 오늘은 정말 운수가 좋았다.

그때, 해나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뭔가를 내놓으라는 손짓이었다.

"의자 세 개, 테이블 한 개, 고급 요리들, 맥주 석 잔, 그리고 청소비!"

해나는 엉망이 된 홀의 곳곳을 가리키면서 눈에 힘을 주고 나를 올려다봤다.

개소리였다. 의자들은 이미 부러져 구석에 있던 것이었고 테이블은 저번에 술 마시고 신난 브릭이 올라가 춤추다가 다리 하나를 부순 것이었으니.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지만, 나는 은화 두 개를 해나에게 건네줬다. 이 돈을 벌게 된 것에는 해나의 덕도 있었으니, 이 정도는 받을 만했다.

"다들 맥주 한 잔씩 하지."

내가 은화 두 개나 줄 것이라 생각 못 했는지, 벙찐 해나의 모습에 웃으며 말했다.

"우와아아아악!!!"

구석에 있던 배가 나온 중년 남성이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지르는 것을 시작으로 홀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쟤도 올 때마다 있단 말이야.'

뚱뚱한 사내가 보기 싫은 춤을 추는 모습에 혀를 찼다.

"···아론은 이제 50 쿠퍼에요."

어쩐지 붉어진 해나가 방긋 웃으며 소리치고는 주방으로 달려갔다.

은화 2개를 받아서 상당히 기분이 좋은 듯했다.

***

"아우··· 머리야."

"조장, 어제 술 마셨습니까?"

동글한 얼굴의 브릭이 앳된 음성으로 물었다.

"어, 그러니까 오늘 검문은 네가 해라."

구석에 둔 가죽 갑옷을 꺼내 입으며 대답했다.

"푸하하. 조장, 저랑 근무할 때는 원래 제가 다 하지 않았습니까."

브릭이 옆으로 다가와 생글생글 웃으며 가죽 이음새를 단단히 고정해줬다.

"그걸 분업이라고 한다."

"아, 그렇습니까. 역시 조장은 똑똑하십니다."

"비꼬냐?"

"에이, 설마 그러겠습니까. 아, 어머니가 이거 조장 드리라고 챙겨줬습니다."

브릭이 절인 생선이 담긴 빵을 건넸다. 절인 생선을 넣은 빵이라니···. 저번에 먹었다가, 온종일 입에 비린 맛이 남았었다. 냄새만 맡았을 뿐인데도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그··· 이러지 않으셔도 된다니까. 별것도 아닌 일로··· 네가 만류 좀 하지··· 이 개새끼야."

"에이, 그게 어떻게 별것도 아닙니까. 저희 어머니는 그때부터 기도할 때 꼭 조장 이름도 말합니다."

절실하게 거절하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줬다는 음식을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나는 억지로 웃으며 빵을 챙겼다. 개새끼.

"나중에 집에 한번 들리시라고···."

"아로오온!!!"

2층에서 들리는 돼지 멱따는 소리가 브릭의 말을 잘랐다. 대장의 목소리였다.

"···조장, 또 사고 쳤습니까?"

브릭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그에 혹시나 내가 잘못한 게 있는지 고민했지만, 아무리 깊게 생각해도 짚이는 게 없었다. 최근 너무 바빴던 터라, 사고 칠 시간도 없었다.

"아니? 사고 친 거 없는데."

"아로오오오온!!!"

"저러다 대장 숨넘어가겠습니다. 갔다 오십쇼. 먼저 가 있겠습니다."

브릭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대장실로 향했다. 얼마나 절실하게 부르는지, 내가 대장실을 문을 열 때쯤 그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로오오오오온!!!"

"예. 아론입니다."

대장실에 들어가자, 살이 뒤룩뒤룩 찐 대장의 볼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대장이 허··· 하며 숨을 들이켰다. 길게 이야기할 숨을 모으는 듯했다.

"내가 요즘 성 뒤숭숭하다고 행동 조심하라 그랬지. 그런데 그 새를 못 참고 사고를 쳐?! 애들을 말려도 모자랄 마당에 조장이란 놈이! 내가 너 때문에 얼굴을 들 수가 없다! 들 수가!! 또 내성 놈들이 얼마나 지랄지랄···."

대장은 버럭버럭 화를 내면서도 내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입에 담지 않아서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분명 저번에는 아주 신임한다고 하지 않았나.'

이번에는 눈에 실핏줄이 죄다 터진 것을 보니, 그 신임이란 것이 전부 날아간 듯했다. 대장의 풍채와 다르게 대장의 신임은 참으로 가벼웠다,

나는 그저 멍하니 서서 돈도 꽤 만졌는데, 오늘 저녁은 3구역에 가서 먹을까 고민했다. 가격이 비싸긴 했지만, 3구역 정도라면 꽤 먹을 만했으니까.

"···그러니까 네 잘못은 네가 책임져! 알았어?!"

"예. ···예?"

조금 더 욕심을 내서 2구역에서 식사를 할까, 고민할 때 돌연 대장이 물었다. 그에 습관적으로 대답했다가, 황급히 되물었다.

"네가 내성에서 직접 고용한 용병들을 병신으로 만들었으니까! 그놈들 대신 볼트 성에 갔다 오라고!"

대장이 책상을 쾅! 하고 내려쳤다. 그러고는 손이 아팠는지, 끄응··· 소리를 내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제야 나는 대장이 질책하는 내 잘못이 뭔지 깨달았다.

어제 행패 부리는 무식한 중세 용병들에게 친절하게 예의에 대해 알려주고 소정의 금품을 받은 것.

'그게··· 잘못?'

충격적인 사실에 까슬까슬한 수염을 긁었다.

왜 거리에 똥 싸는 놈들은 그냥 놔두고 선행을 베푼 나를 손가락질하는지. 이 무식하고 줏대 없는 중세 놈들은 정확한 선이 없어서 늘 사람을 헷갈리게 했다.

"하필 때려눕혀도 내성 쪽에서 고용한 용병을 때려눕혀! 저번에도 그렇고! 너 새끼는 왜 수틀리면 일단 패고 보냐고! 말로 할 생각은 없어?! 그리고 팰 거면 적당히 패야지! 애들을 병신으로 만들어?!"

대장이 마치, 짐승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굳이 입 아프게 뭘 말로 합니까. 때리면 바로 착해지는데. 그리고 내성에서 고용한 것치고 용병 놈들의 질이 참··· 그거 그대로 보냈으면 무조건 문제 생겼습니다. 오히려 칭찬해주지 못할망정······."

"나가!! 책임지고 해결하고 와!"

더 오래 있으면 대장의 얼굴이 터질 것 같아서,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왔다.

"무식한 새끼!!"

뭔가를 집어던졌는지, 닫힌 문에 부딪히며 쾅! 하고 큰 소리가 났다.

'무식하고 줏대 없는 중세 놈들.'

유리 깨지는 소리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 입안의 바다

'내성이라···.'

쩝. 입맛을 다시며 외성 경비대 본부를 나섰다. 억울해도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내성으로 향하는 정문은 3구역 끝쪽에 있었다. 깨끗하고 반듯한 돌이 놓여 있어 깔끔한 도로에 감탄하며 내성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 깔끔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똥냄새가 슬슬 풍겼다. 길가에 똥을 싸는 건 어쩔 수 없는 이들의 본능인가.

'높게도 지었다.'

내성이 외성보다 반 배 이상 높았다. 거기에 성벽 위쪽에 졸고 있는 놈이 보였다.

'돈은 많이 받겠지만, 재미는 없겠네.'

자고로 경비대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한다면, 사람과의 즐거운 소통인데, 저 높은 곳에 앉아 있으면 세상에서 소외된 등대가 될 게 분명했다.

내성 문 앞에는 네 명의 사내가 있었다. 두 사내는 창을 든 채로 잔뜩 긴장하여 정자세로 서 있었고 나머지 둘은 그보다 조금 뒤에서 짝다리를 짚고 있었다.

가죽 갑옷인 나와 달리, 그들의 갑옷은 철이 덧씌워져 있었는데, 그 색이 균일하지 않은 걸 보니, 질 나쁜 철을 대충 덧씌운 듯했다.

내성 앞은 한산했다.

앞에 두 놈은 모르는 얼굴이지만, 뒤에 있는 이들은 낯이 익었다. 그에 손을 흔들며 다가가는데.

"정지!!!"

앞에 두 놈 중 오른쪽 놈이 소리를 빽! 지르며 창을 겨눴다. 얼마나 기합이 들어갔는지, 하마터면 목에 창이 찔릴 뻔했다.

그에 왼쪽 놈이 깜짝 놀라, 펄쩍 뛰었고 뒤에 있던 갈색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 레이암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신분과 용무를 밝혀··· 악!!"

"막내! 소리 지르지 말랬지. 내가 몇 번을 말해! 하··· 이 꼴통 새끼."

"하··· 하지만 분명 이렇게 하라고···."

뒤통수를 맞은 사내가 억울한 듯 중얼거리다가, 다른 사내에게 목덜미를 잡혀 뒤로 끌려갔다.

"레이암, 오랜만이에요."

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며 인사했다. 조금만 더 깊게 들어왔으면 나도 모르게 검을 뽑을 뻔했다.

"오, 그래 아론. 아직 말일까지 남지 않았나?"

"우리 대장이 여기로 가라던데요."

머쓱한 기분이 들어, 수염을 긁으며 대답했다. 꼭 학창 시절 교무실에 불려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뭐? 아, 그럼 네가 그 용병들을 병신으로 만든··· 하하하! 하긴 네 놈 말고 그런 무식한 짓을 할 망나니가 또 있겠어! 하하하하! 제이스! 여기로 와보게! 아론이 노바를 화나게 한 외성 경비대원이라는군!"

무식한 중세 사람에게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언짢았지만, 그 상대가 내가 이 성에 정착할 수 있게 도와줬던 레이암이기에 참았다. 앞으로 두 번 정도는 더 참을 수 있을 듯했다.

"···크흠."

제이스가 애써 못 들은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예전 일로 아직도 삐져 있는 게 분명했다.

"진짜 그놈들이 개차반이었다니까요."

"하하! 당연히 그랬겠지! 자네가 이유를 만들어 패기는 해도, 이유 없이 패는 놈은 아니지 않나! 아, 용병 쪽은 노바가 관리하니, 노바에게 가면 될 걸세."

"예? 노바요? 노바가 용병까지 관리해요?!"

레이암의 입에서 나온 '노바'라는 이름에 찔끔 놀랐다.

노바는 원래 시녀 장의 딸이었는데, 글을 읽고 쓸 수 있어서, 영주 아래에서 일하는 여인이었다.

그 능력이 제법 출중하여 영주가 직접 처리하지 않아도 되는 자잘한 업무들을 맡기는 바람에 노바는 늘 눈에 실핏줄이 터져 있었고 신경질적이며 까칠했다.

그에 웬만하면 마주치고 싶지 않은 여인인데···.

"그··· 제이스 내성 경비만 설려니까 막 답답하고 그러지 않나? 넓은 세상을 돌아다니며 인간이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느껴보며 자유를 만끽하고 싶지 않나? 예를 들면 볼트 성에 간다든지."

"···개소리하지 마라. 평민."

제이스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제이스는 귀족의 사생아가 또 바깥으로 돌아서 낳은, 간단히 말하자면 사생아 제곱인 놈인데, 그래도 자신은 평민이 아니라 귀족이라 믿는 놈이었다.

놈은 원래 귀족만 아니면, 죄다 천민이라고 불렀는데, 내 교육 덕분에 그 명칭이 평민으로 바뀌었다. 물론, 어조는 똑같아서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걱정하지 말게! 노바가 아무리 무섭다고 한들, 자네를 잡아먹겠나."

"찔러 죽이겠지."

이죽거리는 제이스의 머리에 주먹을 꽂고 싶었지만, 심호흡하여 참았다. 무턱대고 주먹질하기에는 장소가 좋지 않았다.

"하··· 알겠습니다. 갑니다."

"갔다 오면 같이 술이나 한잔하지! 내가 좋은 술을 구했거든."

뒤에서 들리는 레이암의 말에 손을 흔들어줬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레이암의 술 약속이 아주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

똑똑똑.

최대한 힘을 빼서, 정중함을 담아 노크를 했다. 박자가 얼마나 정확한지, 정중함이 흘러넘쳤다.

"들어오세요."

간단한 말인데도 짜증이 듬뿍 담긴 목소리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여자에게 호감을 사는 법? 칭찬이지. 그렇다고 무작정 칭찬을 하면 또 반감을 살 수가 있어. 여자들은 말이야, 굉장히 눈치가 빠르거든. 사실에 근간을 두되 몇 배는 부풀린···, 이를테면 고급스러운 쿠키 같은 칭찬을 해야 한다는 거지. 가령 저 마녀 같은 부대장에게는··· 이크!]

나는 머릿속으로 여자에게 건네면 좋은 반응이 나올만한 칭찬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다만,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사실에 기반한 칭찬···.

작게 중얼거렸다.

"들어오시라고요."

다시금 들리는 짜증 섞인 목소리에 애써 굳은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었다.

누런 종이가 가득 쌓인 책상 너머로 노바가 보였다. 윤기가 넘치는 짙은 주황색의 생머리를 질끈 묶었는데, 한 올도 빠져나오지 않은 것이 그 심성을 짐작게 했다.

신경질이 잔뜩 담긴 눈빛이 나를 노려봤다. 그러면서도 털이 거의 다 빠진 깃털 펜은 분주히 움직였다.

나를 응시하던 눈이 점점 가늘어지더니, 깃털 펜이 멈췄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또 너였어?"

짜증 섞인 목소리에 나는 재빨리 노바의 곳곳을 확인했다.

'사실에 기반을 둔 칭찬. 다만, 부풀려서 고급스러운 쿠키처럼. 사실에 기반을···.'

어떻게든 칭찬할 구색을 찾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윽고 나는 노바의 뚜렷한 특징을 잡아낼 수 있었다.

"아, 노바. 머리가 정말 주황색인 것이 꼭 잘 익은 오렌지 같군. 당장 땅에 심으면 장정 열은 배불리 먹이고도 남을···."

"···뭐?!"

노바의 얼굴이 단번에 풀렸다. 비록 얼굴에 담긴 감정이 기쁨이나 감동보다는 당황과 황당에 가까워 보였지만,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던 노기가 사라진 것을 보니 그럭저럭 소기의 목표는 달성했다고 볼 수 있었다.

"너랑 말하면 머리가 지끈거리니까, 그냥 듣기만 해. 네가 때려눕힌 그 용병은 우리 측에서 볼트 성에 보내는 마차의 호위이자 짐꾼으로 고용한 용병이야."

작게 한숨을 쉰 노바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말했다.

"지금 이렇게 말하면 책임 회피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 용병들은 볼트 성에 보내기에는 질이 참 안 좋았어. 그대로 보냈으면 분명 사고가 발생했을 거야. 어떻게 보면 내가 공을 세웠다고 볼 수도···."

"닥치고 듣기만 하라고. 잘잘못을 따지려고 부른 게 아니니까. 애초에 네가 그런다고 들어 먹을 교양 있는 놈도 아니고."

"교양?! 허··· 이 여자가. 나 고등 교육까지 받고 지식의 상아탑이라 불리는 대학···."

"닥쳐! 아무튼, 네가 때려눕힌 용병 두 놈 대신해서 그 자리를 채우고 와. 완수하면 용병 둘의 의뢰금은 줄게."

입이 근질거렸지만, 한 마디라도 더 꺼냈다가는 당장 저 깃털 펜이 날아올 것 같아, 애써 참았다.

내가 떳떳해도 어쩌겠는가, 남들이 다 잘못했다고 하면 수긍해야 하는 게 사회생활인 것을. 정의를 관철하기에는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알았어. 언제 출발인데."

"오늘."

"···?"

노바는 용건이 끝났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다시 누런 종이를 보며 깃털 펜을 바삐 움직였다.

'무식하고 계획성 없는 중세 연놈들.'

그에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벙끗거리다가, 더 말해봤자 짜증 섞인 목소리를 들을 뿐이란 걸 깨닫고 포기했다.

'바람 좀 쐰다 생각하지 뭐.'

시기가 이르기는 했지만, 볼트 성에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거기에 용병 둘의 의뢰금도 준다고 하니, 나름 쏠쏠할 듯싶었다.

***

"···헤헤."

"야, 족제비."

"저는 족제비가 아니라··· 딜런···."

"야, 족제비."

"···예!"

"강철 도끼 삼인방이라며, 무슨 강철이 장난삼아 휘두른 주먹질이랑 발길질에 부서지냐."

"그···그러게나 말입니다! 나약한 놈들!"

족제비가 부족한 앞니를 드러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 새끼들 어딨어. 반대 방향으로 때리면 괜찮아질 거 아니야."

"예?! 아, 그놈들은 계약 위반으로 영주성에···."

족제비가 뒷말을 흐렸지만, 더는 둘을 보지 못할 거라는 걸 깨달았다. 귀족과의 계약이란 게 원래 그런 법이었다. 도중 무슨 일이 있든, 천재지변을 당했든 상관없었다. 완수하지 못하면 끝이었다. 그저 핑계 있는 무덤이 생길 뿐이었다.

'무식한 중세 놈들.'

나는 혀를 차며, 주변을 둘러봤다. 마차는 출발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마차 주변으로는 15명 정도 되는 제법 많은 용병이 서 있었다.

'도대체 뭐길래?'

애초에 굳이 용병을 따로 고용했다는 점도 이상했지만, 인원이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병사들과 잡부까지 합하니, 거의 서른 명 정도 되는 듯했다.

정신이 나가지 않은 이상 귀족의 문양이 박힌 마차를 건들 놈은 없었다. 거기에 볼트 성과 캐서딕 사이는 주기마다 청소도 하여 마물도 나오지 않았으니, 위협될 요소가 거의 없었다.

그동안은 그저 병사 몇 놈과 마차꾼 그리고 잡부 정도 정도만 다녔는데, 이번에는 그 병력이 몇 배였다.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야, 족제비."

"예?! 요···욕한 거 절대 아닙니다!"

족제비가 깜짝 놀라며 변명했다. 그에 슬쩍 눈을 가늘게 뜨자, 벌벌 떠는 꼴이 우스웠다.

"저 마차에 뭐가 있는지 아냐?"

"그··· 그야···."

딱히 녀석이 알 것 같지 않았기에 가볍게 물었는데, 족제비가 묘하게 뜸을 들였다. 혹시 이 쓸모없는 놈이 알고 있나?

"이렇게 경비가 삼엄한 걸 보니, 중요한 게 들지 않았을까요? 아악!!"

나는 참지 못하고 족제비의 뒤통수를 갈겼다.

'아니지.'

혹시 모르니 반대 방향으로도 한 대 더 쳤다.

억울함 가득한 족제비가 입을 씰룩거렸지만, 이내 삼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출발!!"

앞쪽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마차 양옆에서 말을 타고 있는 병사 둘이 캐서딕 가의 문양이 새겨진 깃발을 높게 들었다.

이윽고 마차에 묶인 말들이 움직이며 천천히 전진했다. 그 뒤를 잡부와 짐이 실린 수레가 뒤따랐고 제일 뒤가 용병들이었다. 나는 용병들 중에서도 뒤에 있었다.

내성 문을 지나, 3구역으로 들어섰고 이내 5구역을 지났다. 거리의 사람들이 마차를 보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중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좆뺑이 치십쇼!"

교대할 때 내가 놀렸던 놈이 싱글벙글 웃으며 소리쳤다.

'이래서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건가.'

괜히 배알이 꼴려 속이 아팠다.

***

병사들은 자신들이 말을 타고 있다는 이유로 꽤 빠른 속도를 유지했다. 그에 용병들은 거의 뛰는 듯한 속도를 유지해야 했다.

족제비 놈의 숨이 꼴깍꼴깍할 때쯤, 마차가 멈췄다. 해가 중간을 넘어 살짝 기울어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여기 놈들은 식사 때는 귀신같이 알았다. 뭔가를 하다가도 갑자기 멈추면 식사 때가 됐다는 거였다.

병사들은 말의 상태를 확인했고 잡부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불을 지피고 그 위에 거대한 솥을 올렸다.

용병들은 그런 잡부를 돕거나, 몇 명은 병사에게 끌려가 주변을 순찰했다. 나와 족제비는 수레 옆에 보이지 않게 쭈그려 앉아서, 숨을 돌렸다.

이윽고 맛있는 냄새가 물씬 풍겼고 잡부 중 하나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때 나는 시녀처럼 보이는 여인 둘이 고급스러워 보이는 접시에 스튜를 담아 마차로 향하는 걸 확인했다.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었나? 만약 사람이라면, 이 정도 인원을 동원할 이유가···.'

비밀 특유의 꾸름한 냄새가 나는 듯하여, 코밑을 손가락으로 긁었다.

"형님, 저희도 밥 먹어야 하지 않습니까?"

거대한 솥 주변에 몰린 용병들의 모습에 늦게 가면 음식이 없을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너나 먹어라."

내 대답에 족제비가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배식하는 곳으로 뛰어갔다.

"하···, 브릭 개새끼."

주머니에서 브릭이 준 빵을 꺼내니, 물씬 풍기는 비린내에 욕이 절로 나왔다. 브릭의 어머니는 바다 건너에 있는 브링턴 왕국 출신이었는데, 그 때문에 생선을 주로 요리했다. 아마 브링턴 왕국 녀석들은 미각이 없는 게 분명했다. 고장 났거나.

절인 생선이 푸짐하게 들어간 빵의 몰골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당장, 지옥에서 악마들이 먹는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저번에 한 번 경험했기에, 나는 이 맛을 알고 있었다. 아는 맛이 위험하다는 말처럼 나는 이 빵이 두려웠다.

심호흡하고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생선이 살아있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진득한 비린내가 입안을 순식간에 채웠고 그 뒤를 짠맛이 살짝 찔렀다. 말 그대로 바다가 내 입안에 펼쳐졌다.

'···진짜 브릭 개 시발 새끼.'

눈물이 핑 돌았다. 몸이 강력하게 이 끔찍한 것을 거절했지만,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그를 꿀꺽 삼켰다. 한입 먹었을 뿐인데도 배가 불렀다.

"형님, 이것 보셨습니까? 와··· 내 스무 살 생애에 이렇게 고기가 많이 들어간 스튜는 처음 봤습니다. 냄새도 얼마나 향기로운지··· 으악! 이게 무슨 냄새입니까?!"

싱글벙글한 얼굴로 돌아온 족제비가 코를 킁킁거리더니 대뜸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면서 내 눈치를 보더니, 세 걸음쯤 뒤에 주저앉아서 스튜를 먹기 시작했다.

얼마나 맛나게 처먹는지, 당장 이 하나를 더 뽑아 앞니의 균형을 맞춰주고 싶을 정도였다.

"내 살면서 이런 맛있는 스튜는 처음 먹어보는군. 캐서딕 성의 사정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소문이었나 봐."

"다른 곳들은 그냥 빵 하나 던져주는 게 전부 아닌가? 나는 나중에 캐서딕 성이 전쟁이라도 열게 되면 꼭 참전할 것이네."

'···좆같은 중세.'

주변 용병들이 내뱉는 감탄을 들으며, 나는 다시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다시금 입안에 바다가 펼쳐지며, 눈물이 찔끔 나왔다. 브링턴 왕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붉은색 주머니

어떻게든 입에 쑤셔 넣고 삼켰지만, 마지막 한 입은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지독한 맛에 고문당한 내 혓바닥을 소독하기 위해, 나무로 된 수통에 담아온 밀주를 반 이상 마셨다.

"와, 이 스튜 진짜 맛있습니다. 더 먹고 싶은데···. 쩝."

족제비가 빈 나무 그릇을 혓바닥으로 핥았다. 스튜가 정말 맛있긴 했는지, 목소리에서 아쉬움이 뚝뚝 흘렀다.

나는 차마, 녀석의 아쉬움을 지나칠 수가 없었다.

"이거 먹어라."

"···예?"

내가 내민 끔찍한 빵을 보며, 족제비가 눈을 끔벅거렸다. 인상을 쓰자, 머뭇거리며 빵을 받아갔다.

"이거 먹는 겁니까?"

의심이 듬뿍 담긴 족제비의 눈빛을 보니, 조금이나마 안심됐다. 그냥 브릭네 어머니가 요리를 못···, 아니, 기괴하게 하는 것일 뿐이지, 중세라고 입맛이 이 정도로 타락한 건 아니구나.

잠시 빵을 들고 고민하던 족제비가 내 눈치를 봤다. 내가 주먹을 쥐고 흔들자, 녀석이 눈을 질끈 감고 빵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그대로 멈췄다.

잠시 뒤 족제비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황급히 달려가 먹은 것을 게워냈다. 그 모습에 내 미각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고작 그거 하나 먹었다고 엄살은.'

무릎까지 꿇고 구토하는 족제비를 보며, 혀를 찼다. 참 근성 없는 놈이었다.

"크흠··· 안녕하신가."

옆에서 눈가에 주름이 있는 사내가 말을 걸었다. 꽤 나이가 있어 보이는 사내였는데, 덩치가 작고 말라서 허리춤에 걸린 검과 허벅지에 달린 단검을 보고 나서야 용병인 것을 눈치챘다.

사내는 긁힌 자국이 많은 해진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두께가 두꺼운 것을 보니, 안에 뭔가를 덧대 입은 듯했다. 그다지 강해 보이진 않았지만, 용병으로 저 나이까지 살아있는 것을 보니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모름지기 용병 대부분은 얼굴에 주름이 지기 전에 목에 긴 주름이 생기는 법이었으니까.

덩치 크고 힘센 놈들보다 이런 놈이 더 까다로웠다. 이런 유형을 상대할 때는 뒷통수를 조심해야 했다. 뒤에서 찌를 때, 의무적으로 질러야 하는 '죽어라!'를 외치지 않을 테니.

"나는 존이라고 하네."

사내가 붉은색 주머니를 내밀었다.

[1 쿠퍼를 넣어. 그러면 너의 불행이 이곳에 담길 거다.]

문득, 떠오른 기억에 작게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붉은 주머니였다.

용병들의 전통이었다.

이렇게 처음 만난 용병들끼리 모여 일하게 될 때면, 가장 나이 많은 용병이 피에 담갔던 주머니를 들고 돌아다녔다.

그러면 다른 용병들은 1 쿠퍼를 꺼내, 동전에 대고 자신이 생각하는 제일 끔찍한 저주를 퍼부은 다음, 주머니에 넣는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동전을 땅에 묻는데, 만약 도중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동전에 걸었던 저주가 남은 이들에게 향한다. 라는 지극히 비과학적이고 미개한 전통이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일이 끝나기 전에 뒤통수를 치면 그놈은 평생 저주를 받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칼밥 먹는 놈이 처음 보는 놈들이랑 함께하려니, 뒤통수가 얼마나 근질근질하겠는가. 거기에서 발생한 용병들의 전통이었다.

아무 법적 효력이 없는, 미개함의 극치인 약속이었지만, 의외로 효과는 뛰어났다. 그도 그럴 게 여기는 미신이라면 껌뻑 죽는 중세였고 칼밥을 먹는 용병들은 특히 그런 것에 민감했으니.

나는 잠시 주머니를 보다가, 동전 한 개를 꺼냈다.

"아! 형님! 이게 뭐냐면 용병들의 역사 깊은 전통으로써··· 응? 알고 계시네?"

족제비가 입 주변을 팔로 쓱쓱 문지르며 말했다.

"···이 세계로 갈 것이다."

나는 동전에 대고 작게 중얼거린 다음, 주머니에 넣었다.

"고맙네. 자네도 넣게나."

"음, 금방 꺼내겠네."

족제비가 바지에 손을 쓱 넣더니, 뭔가를 찾는 듯 인상을 썼다. 그리고 다시 나온 손에는 다른 것보다 유난히 짙은 동화가 들려있었다.

'하여튼, 용병 새끼들은···.'

구린 냄새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왜 멀쩡한 주머니를 놔두고 속옷 속에 넣어 다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감히 내 뒤통수를 친다면! 그 좆같은 빵을 배 터질 때까지 먹게 될 것이다!"

족제비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동전에 끔찍한 말을 퍼붓고 주머니에 넣었다.

"그럼 됐구먼. 얼마 되지 않는 기간이지만, 앞으로 잘 부탁하네."

사내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누군가 쓰러지면 잠시 쉬고 다시 전진하는 것의 반복이었다.

평소에 운동을 게을리하는지, 족제비는 이미 눈이 풀려 있었다. 몇 번 휘청였지만, 그래도 쓰러지진 않았다. 물론, 쉴 때는 바닥에 그대로 엎어졌지만, 나름의 근성이 있는 듯했다.

이번에는 한 명이 쓰러지자, 기회다 싶었는지, 네 명이 따라서 쓰러졌고 그에 제일 앞에 있던 병사 놈이 조금 더 긴 휴식을 명했다.

"한 모금 하겠나?"

존이라 자신을 소개했던 사내가 내게 수통을 내밀었다. 향긋한 향이 풍기는 포도주였다.

존은 쉴 때마다, 내게 와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눴다. 존뿐만이 아니라, 다른 용병들도 삼삼오오 모여서 친분을 나누고 있었다.

다들 이 일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걸 느꼈는지, 용병들은 친목 도모에 필사적이었다. 다른 용병들과 친해져서 위험한 순간에 대신 몸을 던져주길 원하는 듯했다.

물론, 그런 고귀한 용병은 정말 드물기에, 살아남은 놈이 술집에서 죽은 놈의 이름을 부르며 술을 마실 정도의 친분으로 남겠지만.

나는 거절하지 않고 수통을 받아서 마셨다. 물이 섞인 듯 포도주보다는 포도즙에 가까운 맛이었다.

"물을 좀 섞기는 했지만, 그래도 꽤 비싼 값을 치른 술이라네."

"맛있네요. 잘 마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존이 수통을 건네받아서 입에 물었다.

여기 물은 맛이 너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포도주나 사과주에 물을 타서 들고 다니며 목을 축였다. 그래서인지 대부분 볼이 붉었다.

'그래서 더 미개한 건가.'

알딸딸한 상태가 기본값이라, 눈만 마주치면 싸우고 길거리에 똥 싸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도 영주님께 고용된 건가?"

"예, 뭐 그렇죠."

존의 물음에 굳이 자세히 설명하고 싶지 않아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모인 숫자와 의뢰금을 보고 영지 전쟁이라도 벌이는 줄 알았네. 그런데 단순 마차 호위라니··· 찜찜하군. 내 경험상 이런 경우에 항상 탈이 나는데 말이야."

존이 수통을 품에 챙기며 중얼거렸다.

"이상하긴 하죠."

나는 대답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 껴 있었다. 4월이면 봄이 분명한데, 하늘은 좀처럼 맑아지지 않았다.

"···예감이 좋지 않아."

존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뜬금없이 클리셰 덩어리를 뱉는 존의 모습에 주먹이 근질거렸지만, 차마 나보다 나이 많은 존을 때릴 수 없으니, 옆에 엎어져서 졸고 있던 족제비의 머리를 후려쳤다.

"아악!···."

"다시 출발한다! 조금 더 가면 마을이 있으니, 그곳에서 쉰다!"

때마침, 말에 탄 병사가 크게 소리쳤다. 그에 족제비가 툴툴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이에 있는 마을이면···.'

어딘지 알고 있었다. 캐서딕에 오기 전 들렸었고, 그 이후로 종종 들렀던 곳이니까. 인구가 80도 안 되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이 미개한 곳은 아이가 걷기 시작하면 곧바로 일에 투입하기 때문에, 햇볕에 그을려 피부가 붉은 아이였다. 아이는 손때가 너무 묻어, 해진 책을 들고 있었다.

[기사님, 저는 책 읽는 게 제일 좋아요.]

기사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도 녀석은 도무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이는 나를 따라다니며 묻지 않은 것들을 조잘거렸다.

내게 아이는 껄끄러운 상대였다.

내 말 한마디가 그 도화지에 색을 남길 테니, 실수로 보기 싫은 얼룩이 그려질까, 대하기 어려웠다. 그 얼룩이란 것이 얼마나 짙게 남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이제 좀 컸으려나.'

마지막으로 봤던 게 반년 전이었으니, 만약 살아남았다면 지금쯤 꽤 자랐으리라.

'이번에는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는데···.'

아이도 이제 머리가 제법 굵었을 테니, 은화를 줘도 괜찮을 듯했다.

조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입꼬리가 올라갔다.

***

도착한 마을은 매우 조용했다.

아니, 조용한 수준을 넘어서 마을은 죽어 있었다.

"아무도 없구먼. 단체로 도망친 건가?"

"아, 저 위쪽에 있는 블란트 성도 높은 세금 때문에 흉년이 든 해에 소작농들이 대거 도망갔다고 들었습니다."

존과 족제비의 대화에 수염을 긁었다. 둘은 서로 수통에 담긴 술을 나눠 마시며 제법 친해져 있었다.

물론, 캐서딕 성도 세금을 많이 긁어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른 성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거기에 흉년이라는 이야기도 들은 적 없었다.

제일 앞에 있던 병사가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에 마을 초입 부분에 마차가 천천히 멈췄다. 용병들은 각자 무기를 쥐면서 주변을 살폈다.

"아··· 악마가 한 짓 아니야? 여기 마을 촌장을 내가 아는데, 이렇게 도망갈 사람이 아니라니까!"

"쉿! 조용히 하게! 악마는 입에 담으면 나타나는 거 모르나?!"

'···악마라.'

잡부들의 입에서 나온 '악마'라는 단어에 머리를 긁적였다. 이놈들은 바람이 불어, 천장의 그릇이 떨어져도 악마라며 발작하는 무식한 놈들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느낌이 좋지 않았다.

병사 중 뾰족한 투구를 쓴 놈이 뒤쪽으로 다가왔다. 다른 병사는 마차 문을 열고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나는 마차를 향해 거의 납작 엎드린 병사의 모습에 주목했다.

'영주 부인이나, 영애 정도인가.'

귀족이 아닌 이상 저런 반응이 나올 리가 없었으니, 안에 있는 인물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영주였다면, 이보다 더 큰 병력이 운용됐을 것이니, 영주는 아니었다.

그리고 영주 부인이 굳이 바깥으로 나돌 리가 없으니, 영애일 확률이 높았다. 목적지가 볼트 성이라는 것도 그렇고.

"흩어져서 마을에 이상한 점이 있는지 살피도록."

뾰족 투구 병사가 말에 앉아 내려다보며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둘씩 흩어져서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존이 앞으로 나서서 대답했고 병사는 고삐를 돌려 돌아갔다.

"다들 짝지어서 마을을 살피도록 합시다. 작은 마을이니, 둘러보는데 그리 큰 시간이 들지 않을 테니. 빨리 끝내고 저녁 먹읍시다. 아까 그 맛있는 스튜가 더 있지 않겠습니까?"

살살 달래는 존의 말에 용병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들의 얼굴에 찜찜한 기색이 가득했지만, 딱히 반항하지는 않았다.

용병들을 다루는 솜씨가 꽤 능숙했다.

"혀··· 형님. 정말 악마가 있을까요?"

어느새 도끼를 빼든 족제비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이제는 완전히 어두워진 하늘을 보며 대답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기세였다.

만약, 내가 악마였다면 산책하기 좋은 날이라고 기뻐할 그런 날이었다.

'저쪽이었나.'

기억을 되짚으며, 마을의 구석진 곳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

"같이 갑시다! 형님!"

화들짝 놀란 족제비가 따라붙었다.

마을의 집들은 다들 비슷했다. 지붕은 짚, 그리고 뼈대는 목조로 된 초가집과 비슷한 형태였다. 그 크기나 높이가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마을 자체가 작았기 때문에 구석진 곳이라고 해도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에요!]

아무리 소작농들이 모인 마을이라 한들, 그래도 그들 나름의 차이가 있었다. 그 차이 중 하나가 집의 크기였고 그 아이가 머물던 집은 유독 작았다.

- 크리스, 벨라 그리고 호른!

입구 옆, 허리 위치에 새겨진 삐뚤빼뚤한 글씨를 매만졌다.

"형님, 여기 너무 으스스하지 않습니까?"

족제비의 칭얼거림을 무시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조악한 테이블과 의자, 곳곳에 곰팡이가 핀 식기들. 그리고 한편에 모아둔 짚더미들. 만약 도둑이 들어도 욕을 하며 나갈 게 분명한 가난함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래도 테이블이 생기긴 했네.'

손재주가 형편없는 사람이 만들었는지, 살짝만 건드려도 부서질 것 같은 조악한 테이블이었지만, 저번에 왔을 때는 없던 거였다.

"예전 우리 집이 떠오를 정도로 거지 같은 집구석인데요."

족제비는 능숙하게 여기저기를 뒤지며, 불평을 쏟아냈다. 녀석은 짚더미 속에 뭔가 있을 거라 기대하는지, 짚더미를 뒤졌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꼬질꼬질한 책을 들었다. 책 옆에는 큼지막한 잉크 통과 해진 깃털 펜이 있었다.

[와아! 정말 선물이에요?!]

물을 탄 듯 묽은 잉크는 바닥을 보였고 깃털 펜은 깃털이 죄다 빠진 상태였다.

삐익!

그때 멀리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쓰읍··· 아무래도 꽝인 것 같습니다."

몸 곳곳에 짚 부스러기가 붙은 족제비가 툴툴거렸다.

책을 갑옷 안쪽에 챙기고 집을 나섰다.

중심부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악마라니··· 우··· 우린 다 죽을 거야···."

"···끔찍하군."

"어쩐지 의뢰금이 많다 했더니, 제기랄."

잡부들은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한곳에 모여 오들오들 떨고 있었고, 용병들은 각자 무기를 꼬나쥔 채 욕을 내뱉고 있었다.

그들 어깨너머로 보이는 내부의 끔찍한 모습에 눈이 찌푸려졌다. 붉은색으로 가득한 내부, 벽에 매달린 네 명의 사내. 그리고 사내의 배에서 길게 늘어진 창자가 불길한 형태를 그리고 있었다.

공포 영화의 도입부로 훌륭한 모습이었다. 문제는 등장인물 중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거지만.

"비켜라! 비켜!"

"우··· 우웨엑!!"

"야이··· 새끼야! 절로 꺼져있어!"

뾰족한 투구를 쓴 병사가 다가왔다. 문 옆에 있던 병사가 연신 구토를 했는데, 뾰족한 투구를 쓴 병사가 소리치며 놈을 옆으로 밀었다. 그에 병사가 자신이 뱉은 구토에 엎어졌다.

"···신이시여."

뾰족 투구가 오른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무슨 일인가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본 목소리였다.

요정이 노래하는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

'영애가 맞았군.'

전과 달리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비비안은 주변에 깊게 깔린 어둠을 밀어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래도 쟤는 이틀에 한 번은 씻지 않을까.'

그 옆에는 그때 봤던 기사가 있었다. 이번에는 눈만 겨우 보이는 투구도 쓰고 있었다.

"···맙소사."

안을 확인한 영애가 휘청였고 옆에 있던 예의 경갑옷 입은 여인이 영애를 붙잡았다.

"어떻게 합니까?"

뾰족 투구가 기사를 보며 물었다. 그에 모두가 입을 닫고 기사에게 집중했다.

'아마, 이 마을에서 밤을 보내겠지.'

저런 끔찍한 게 있는 마을에서 머무는 게 찝찝해도 어두운 밤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밖으로 나가는 것보단 나았다.

'이쪽을 노린 게 아닐 수도 있고.'

그저 악마가 지나간 자리에 때맞춰 온 것일 수도 있었다.

데려온 병력도 꽤 많고 기사도 있었다. 악마에게 대적하는 인류의 검. 습격당하는 게 아니라면, 어지간한 악마는 물리칠 수 있으리라.

"비가 오겠군."

하늘을 올려다본 기사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하룻밤을 보낸다."

기사가 반발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서늘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지금 상황에서 제일 나은 선택이었다.

투둑.

작은 물방울이 어깨를 두들겼다.

[제가 생각해봤는데, 아저씨는 기사가 맞아요!]

비에 젖지 않도록 책을 더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오늘 밤은 유난히 길 것 같았다.

걸어 다니는 시체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땅이 질척이며 발을 잡아당겼다. 걸음이 무거워졌다.

"젠장! 이 의뢰를 받는 게 아니었어. 어쩐지 돈을 많이 주더니만··· 악마가 관련됐을 줄이야. 맙소사··· 태양신이시여."

족제비가 어울리지 않게 태양신을 찾으며, 계속해서 욕을 중얼거렸다. 기도하는 건지, 신에게 저주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그다지 도움 될 것 같지 않았다.

"···자네는 묘하게 침착하군."

존이 수통을 건네며 말했다. 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술은 찰나의 순간에 손을 느려지게 한다. 지금은 목마른 게 더 나았다.

'그런가.'

존의 말대로 다른 용병들처럼 동요하진 않았다.

어찌 됐건, 우리 측에는 기사가 있었다. 상대가 악마라도 인류의 검이 있는 이상 승산이 없진 않았다.

그리고 슬프게도 승산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나는 늘 살아남았다.

악마의 힘은 바쳐진 제물에 비례하여 천차만별이었다. 그저 성인 남성보다도 못한 벌레 같은 악마부터 도시를 잡아 삼키고 왕국을 무너뜨리는 악마까지. 실로 다양했다.

하지만, 이곳은 고작해야 80명인 마을이었다.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짓을 한 놈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고."

"그렇긴 하지. 공포에 빠지는 것보단 차라리 태평한 게 좋지. 악마는 사람의 공포를 잡아먹는다고 하지 않나?"

존의 물음에 쓰게 웃었다. 악마에 대한 떠도는 소문 중 하나였다. 하지만 악마는 공포를 먹지 않는다.

[아···론.]

악마는 절망을 먹는다.

아주 지독하고 고약한 냄새가 날 정도로 숙성된 절망을 좋아한다.

"근데 자네들은 스튜 안 먹나? 다른 용병들은 맛있다고 난리던데."

존이 바글바글 모여있는 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으··· 그런 끔찍한 꼴을 보고 어떻게 밥을 먹습니까. 저는 아까 먹은 것도 올라올 지경입니다."

족제비가 인상을 구기며 토하는 흉내를 냈다.

나도 딱히 저녁 생각은 없었다.

아까 먹은 좆같은 생선 빵의 비린내가 여전히 존재하여, 식욕이 생기지 않았다.

"오래 살려면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둬야 하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게 우리 인생 아닌가."

존이 중얼거리면서 품에서 뻑뻑해 보이는 빵을 꺼내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그러는 존은 왜 저 맛있는 스튜 안 먹고 그런 뻑뻑한 빵을 먹습니까?"

"나는 원래 남이 준 음식은 안 먹는다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말이야."

마치, 맹수처럼 빵을 크게 물어뜯은 존이 빵을 질겅질겅 씹었다. 그러다가 밖으로 손을 내밀어 빗물을 받은 다음 입에 가져다 댔다.

"으으··· 여기서 밤을 보내야 한다니, 불안해서 잠을 잘 수 있을지···."

족제비가 계속해서 앓는 소리를 냈다.

영애와 기사는 마을에서 가장 큰 집으로 들어갔다. 촌장이 지냈던 곳인 듯, 다른 집들과 다르게 벽돌로 지어진 큼지막한 곳이었다.

그 앞에서 시녀 복장을 한 여인이 큼지막한 솥에 끓인 스튜를 나눠주고 있었다. 솥 주변에는 사람이 바글바글 몰려 있었다.

방금의 그 끔찍한 모습도 이들의 입맛을 떨어뜨리기엔 부족한 듯했다. 하긴, 광장에서 사형이 집행되면 빵 같은 걸 들고 와서 씹어 먹으며 구경하는 게 중세 놈들이었다.

"그런데 그 아가씨 정말 이쁘지 않습니까? 와, 저는 살면서 그렇게 이쁜 여자 처음 봤습니다. 악! 왜 때립니까! 악! 진짜···."

정신이 나갔는지, 대뜸 귀족을 입에 담는 족제비를 재빨리 쥐어박았다. 투덜대길래 한 대 더 쥐어박으니 금세 조용해졌다. 역시 열 마디 말보다 주먹 하나가 더 효과적이었다.

"원래 귀족 관련해서는 입에 담지도 않는 게 좋네."

"···저도 알고 있지만, 거리가 있지 않습니까. 거기다 빗소리도 크고."

"아무튼, 속으로만 생각하게. 아니, 속으로도 생각하지 말게."

존이 단호하게 말하자, 족제비가 꿍얼거리며 입을 닫았다.

다시금 빗소리가 주변을 가득 채웠고.

나는 검을 검집에서 꺼내, 상태를 확인했다.

내게는 검면의 서늘한 감촉이 진정제보다 효과적이었다.

***

'이거 미친 새끼들 아니야.'

족제비···. 아니, 딜런은 옆에서 꾸벅꾸벅 조는 용병 놈들을 보며, 속으로 욕을 삼켰다.

당장, 악마가 나올 수도 있는 상황에서 졸고 있다니! 간이 부어도 단단히 부은 게 분명했다. 심지어 세 명이 함께 경계를 서는데, 딜런을 제외한 나머지 두 놈이 모두 졸고 있었다.

'저런 빠진 놈들은 된통 당해 봐야 해.'

뒤통수에 주먹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용병의 덩치가 자신보다 컸다. 한 대 쥐어박으면 말로 돌려받을 게 분명했다.

최근 주제 파악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깨달은 딜런이었기에 손쉽게 참을 수 있었다.

그에 딜런은 귀족이 묵는 건물 앞에 서 있는 병사에게 시선을 옮겼다. 빗줄기가 굵었기에, 넘어가려면 온몸이 흠뻑 젖을 게 분명했다.

딜런은 이놈들을 좆되게 만드는 것과 몸이 비에 홀딱 젖는 것, 둘을 저울질했다.

드르렁. 쿠우.

옆에서 들리는 큼지막한 코 고는 소리에 딜런은 결심했다. 온몸이 죄다 젖더라도 얘네를 좆되게 하는 게 더 가치 있을 게 분명했다.

딜런은 건너편 집을 향해, 빠르게 뛰었다. 비에 젖으며 몸이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너네는 이제 좆됐다.'

저 나태한 놈들이 받을 형벌을 생각하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병사 둘이 창을 들고 서 있었다. 어떻게 말해야 병사들이 더욱 크게 분노할까. 딜런은 진지하게 고민하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저 병사님들··· 지금 경계를 서고 있는데, 3인 1조 아닙니까? 그래서 혹시나, 엄한 일이 벌어질까 봐,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살피는데, 옆에서 갑자기 코 고는 소리가 들리는 것 아닙니까?!"

드르렁.

"맞아요! 그것보다는 조금 작았지만, 비슷··· 응?"

딜런은 뭔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슬쩍 고개를 옆으로 눕혀 투구 밑의 병사 얼굴을 살폈다.

볼에 흉한 여드름이 가득한 병사는 벽에 기대어 창을 잡고 서 있었지만, 눈은 감겨 있었다. 심지어 입에서는 침도 줄줄 흘렀다.

'이런 미친? 병사들까지··· 뒤지지 못해 환장을 했구만!'

순간 속에서 열불이 확 올라왔다. 지금 누구는 악마 때문에 눈 감는 시간도 아까워서 평소에 눈을 두 번 뜨는 것을 줄여, 한 번만 뜨면서 경계를 서는데, 나머지 놈들은 병사건 용병이건 죄다 자고 있···.

'다들 자고 있다고? 병사가 귀족을 경호하는데?'

그제야 딜런은 이상함을 눈치챘다. 목숨이 여러 개가 아닌 이상 귀족을 지키며 잠을 잘 리가 없었다. 거기에 언제 악마가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자는 게 말이 안 됐다.

까드득.

그때, 어떤 소리가 빗소리 사이로 들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딜런은 그 작은 소리에 담겨 있는 적의에 소름이 돋았다.

무게추를 단 것처럼 무거운 목을 천천히 돌렸다.

빗소리에 듣지 못했던 걸까.

수십에 달하는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양손은 앞으로 쭉 뻗고 다가오는 그것은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생기가 전혀 없어,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함을 담고 있었다.

'···악마다!!!'

딜런은 비명 지르려는 자기 입을 주먹으로 쳐서 막았다. 입에서 피가 났지만,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필사적으로 눈을 굴리며 도망갈 공간을 찾았지만, 수십에 달하는 그것은 그물처럼 촘촘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꼼짝없이 그물망 속의 물고기 신세가 된 딜런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딜런은 무의식적으로 그 악마 같은 개새끼를 떠올렸다.

말 대신 손이 먼저 나가는 무식한 개새끼.

하지만, 지금 여기서 가장 강한 개새끼이기도 했다.

"혀어어어어엉님!!"

딜런은 냉큼 용병들이 묵는 곳으로 뛰었다.

***

이런 상황에서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나는 문에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서, 검을 품에 안고 아까 챙겼던 책을 꺼냈다.

책의 내용은 어느 기사에 대한 것이었다.

고귀한 기사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악마에 대항하여 싸웠으며 결국, 영웅이 되어 사람들에게 칭송받는다.

뻔한 영웅 전기였다. 주인공 이름도 어디서 들어본 것을 보니, 어느 높은 가문에서 선전용으로 뿌린 듯했다.

책의 빈 곳에는 삐뚤빼뚤한 글씨가 가득 적혀 있었다. 허접한 소설이었지만, 아이는 이야기에 푹 빠져서 기사를 동경한 듯했다.

기사가 고난을 겪는 부분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힘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다 중간에.

[오늘 아저씨를 만났다. 존스 패거리가 나를 괴롭히고 있었는데, 아저씨가 주먹을 휘둘러 녀석들을 물리쳤다! 존스는 얼마나 크게 울었는지, 내가 다 민망할 정도였다. 허세쟁이 존스!]

'너무 세게 때리긴 했었지.'

쓰게 웃으며 다음 장으로 넘겼다.

[어제는 아저씨가 마을의 골칫덩어리였던 한스 형을 쥐어패는 걸 봤다. 한스 형은 마을에서 제일 강했는데, 아저씨에게 손 한번 못 대고 엄청나게 맞았다. 아저씨는 내가 본 사람 중에서 가장 강했다. 아저씨는 기사가 아닐까? 엄마에게 물어봤더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짚이나 더 가져와서 바닥에 깔라고 혼났다.]

[글을 읽고 쓰는 게 너무 재밌어.]

[내가 얼마나 글을 좋아하는지 알려줬더니, 아저씨가 사서라는 일을 알려줬다. 저 멀리 도시라는 곳을 가면 온 세상이 책으로 가득한 공간이 있다고 했다! 맙소사!]

그다음 부분은 누군가가 뜯어낸 듯 찢겨 있었다. 그 뒤로는 마지막 한 장이 남아있었다.

[아버지에게 사서라는 걸 하고 싶다고 말했다가, 한참을 맞았다. 화가 잔뜩 난 아버지가 책을 뜯어서 버렸다.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었는데···.]

[술에 취해서 돌아온 아버지가 나를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목줄이 채워져 있고 그것을 벗어날 수 없다고. 미안하다고 한참이나 울었다. 너무 어려운 말이라, 뭔 소리인지 몰랐지만, 나도 따라 울었다.]

···목줄이라.

맞는 말이었다.

마을의 소작농뿐만 아니라, 나도, 용병도, 귀족도 모두 보이지 않는 목줄을 차고 있었다.

그워···.

작게 들린 소리에 습관적으로 검을 뽑아, 찔러 넣었다. 기분 나쁜 촉감이 검 손잡이를 타고 느껴졌다.

검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손에 닿았다. 피는 뜨겁지 않고 차가웠다.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운 피. 상대는 인간이 아니었다.

검을 당기자, 상대가 가까이 끌려왔다. 놈은 치명상인데도 적의를 드러내며 입을 쩍 벌렸다. 문틈으로 들어온 서늘한 달빛에 상대의 얼굴이 보였다. 회색 눈동자, 곳곳의 살점이 떨어져 나간 푸르죽죽한 얼굴에는 불길한 사기가 물씬 풍겼다.

'걸어 다니는 시체.'

좀비였다. 녀석에게 박힌 검을 뽑아, 목을 쳤다. 차가운 검은 피가 내 몸을 적셨다.

중간에 뼈 때문에 저항감이 느껴져, 손잡이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뿌득.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목이 잘렸다.

떨어진 좀비의 머리통을 발로 걷어찼다. 데굴데굴 굴러간 머리가 누워서 자는 용병에게 부딪혔지만, 용병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에 검면으로 옆에 있는 용병의 얼굴을 후려쳤다. 큰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때렸는데도 용병은 일어나지 않았다.

배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걸 보니, 살아있었다. 그런데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니, 단순히 깊은 잠이 아닌 듯했다.

"혀어어어어엉니이이임!!"

잔뜩 울상인 족제비가 집으로 들어왔다.

"바···밖에 이상한 것들이··· 병사들도 죄다 자고 있고··· 끼에에에엑!!!"

말을 더듬거리던 족제비가 제 발밑의 머리 없는 시체를 보더니,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병사들까지··· 약인가? 언제?'

빠르게 되짚었다. 족제비와 내가 무사하다···. 저녁에 먹었던 스튜에 뭔가를 탄 게 분명했다. 단순히 병사들이 피곤해 보여, 푹 자라고 약을 넣은 것은 아닐 테니, 내부에 적이 있는 게 분명했다.

'이러면 꼭 그 좆같은 생선 빵이 날 구한 거 같잖아.'

묘하게 기분이 더러웠다. 검을 휘둘러, 묻은 피를 털어낸 다음 밖으로 나갔다.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었고, 수많은 좀비가 몰려들고 있었다. B급 좀비 영화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독이 아니라, 수면제를 탄 것을 보니, 살아있는 게 필요한가 보군.'

생각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살아있는 상태로 필요한 게 누구일까. 굳이 병사나 용병을 노리기 위해 이런 거창한 짓을 할 리가 없었으니, 둘 중 하나였다. 검은색 기사와 영애.

'영애인가.'

아무리, 혼사가 오가는 사이라고 해도 그 귀한 기사를 붙여줬다는 것부터 이상했다.

거기에 고작 아름답다는 이유로 제국 내에서 이런 미친 짓을 벌이지는 않을 테니, 영애에게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기사는?'

검은색 기사 놈이 그 맛있다고 소문난 스튜를 먹었는지가 관건이었다. 만약, 놈이 악마를 상대할 수 있다면 좀비 정도야 문제 되지 않았다.

"형님!! 도망칩시다! 저희 둘이 힘을 합치면 한쪽을 뚫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족제비가 도끼 잡은 손을 덜덜 떨면서 소리쳤다. 녀석은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은지, 몸을 움찔거리면서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도망이라.'

달콤하면서도 아릿한 맛을 주는 단어에 쓰게 웃었다.

[도망쳐.]

[돌아보지 말고.]

[살아남아라.]

[명령이다.]

이미, 반대편인 제국 동부의 변방이었다. 여기서 또 어디로 도망친단 말인가.

영애를 버리고 가면 캐서딕 성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바로 잡혀서 캐서딕 성의 새로운 마스코트가 되겠지.

'결국, 남은 건 바다 건너의 브링턴 왕국인데···. 차라리 죽고 말지.'

아직도 입에 남은 비린내에 쓰게 웃었다. 거기는 죽어도 가기 싫었다.

"들어가라. 생긴 것만 좆같지, 약한 놈들이니까 졸지 말고 도끼 제대로 휘두르고."

뒤에서 족제비가 뭐라고 소리친 것 같았는데,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개소리겠지.

앞으로 나서자, 굵은 빗줄기가 나를 반겼다. 이도 저도 아닌 4월의 애매한 비는 미지근했다.

제국 동부는 날씨가 참 지랄 맞은 곳이었다. 해를 본 날보다, 비가 내리는 날이 더 많은 그런 좆같은 곳.

그워어어-.

바로 앞 좀비가 바람 공기 빠지는 듯한 맥빠진 소리를 내며 나를 반겼다.

"그워어어어!"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일 검에 좀비의 목이 갈라졌다. 차가운 피가 튀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곧이어 미지근한 비가 그를 씻겨줬다.

목을 잃은 몸이 아쉬운 듯 손을 뻗으며 앞으로 쓰러졌다. 그를 어깨로 밀치며, 전진했다. 좀비가 땅에 엎어지며, 작은 물보라가 일었다.

[응? 왜 매일 웃냐고? 내가 살던 마을에서는 웃으면 행운이 들어온다는 이야기가 있거든. 그러니까 막내야 너도 좀 웃어라. 뭐냐, 그 표정이.]

지금, 행운이 필요했기에.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기사가 그 끝내주는 스튜를 먹었을지, 안 먹었을지 모르겠지만, 좀비들의 주의를 끌 필요가 있었다.

"빠빠! 빠빠빠! 빠빠빠빠!!"

이제는 흐리게 기억나는 군대 기상나팔 소리를 목청이 터지도록 크게 외쳤다.

[너 그거 하지 말랬지! 기분 나쁘다고 그거! 뭔지 모르겠지만!]

우르르릉- 콰앙!!

번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검붉은 하늘을 반으로 잘랐다.

그에 주변이 순간적으로 밝아졌고.

동작을 멈춘 수십의 좀비가 나를 응시하는 게 보였다. 좀비의 주둥이에서 줄줄 흘러나온 침이 길게 늘어져, 땅에 떨어졌다.

"좆 같이도 많군."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중얼거리며 검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이 정도 수라면, 승산이 전혀 없진 않았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나는 승산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늘 살아남았다.

싸구려 검

'···저게 진짜 사람이여?'

딜런은 도망치는 것도 잊고 멍하니 구경했다.

처음에는 그냥 죽고 싶어 환장한 미친놈인 줄 알았다. 도망가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큰소리로 주의를 끄는 모습에 딜런은 기절할 뻔했다.

저놈이 강한 건 직접 맞아봐서 알고 있었지만, 상대는 수십의 저주받은 시체들이었다. 다른 놈들은 죄다 퍼질러 자고 있었기에 그 수십을 둘이서 상대해야 하는 상황. 도망가는 게 당연했다.

아니, 딜런은 처음 저 저주받은 시체를 마주한 순간에 도망갈 길이 있었다면 혼자서 도망갔을 것이다. 다만, 도망갈 길이 없었을 뿐.

그런데 저 미친놈은 검을 뽑고 오히려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에 딜런은 저 미친놈이 주의를 끌 때, 도망가려 했다.

맞기 싫어서 형님이라 불렀지, 놈에게 좋은 감정은 없었다. 놈은 틈만 나면 주먹을 날리는 놈이었으니까. 감정이 있다면 오히려 증오에 가까운 악감정이었다.

그때, 미친놈이 좀비 한 마리를 해치웠다.

숨 한번 쉬는 짧은 시간에, 시체 하나를 반으로 가른 놈이 오히려 좀비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어어···?"

딜런은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렸다. 아무리 미친놈이라고 해도, 저 한복판에 뛰어들 생각을 하다니, 공포에 정신이 나간 게 분명···.

콰직.

그때, 푸르죽죽한 머리 두 개가 하늘로 동시에 떠올랐다. 동시에 놈과 좀비들이 뒤엉켰다.

놈은 검을 계속 휘둘렀다. 그러다 시체가 들러붙으면 손으로 떼어내서, 하나씩 차근차근 부숴나갔다.

주먹으로 머리를 깨부수기도 하고 어느 때는 박치기도 했다. 미친놈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그 싸움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처절했다.

그런 무식한 미친놈 앞에 시체들이 쓰러져갔다. 검은 피를 흠뻑 뒤집어쓴 놈의 몸에서 허연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딜런은 그 모습을 보며, 수십의 시체보다 저 괴물이 더 두려워졌다.

그러다, 쓰러진 시체가 열을 넘어섰을 때, 딜런은 고민했다.

'···저 개새끼가 이긴다면?'

딜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저울추를 가늠했다.

만약, 저놈이 이긴다면 폴포츠 가에서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아니, 당장 저 십새끼부터 나를 용서하지 않겠지. 등에 소름이 쫙 돋았다.

아까 기사 같은 놈도 있었던 걸 보면 이길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 정도로 놈의 무력은 뛰어났다.

'이길 수 있나?'

거기에 못 받은 의뢰금이 생각나며, 균형을 이루던 저울추가 비스듬하게 기울었다. 최근 저놈에게 억울하게 돈을 뜯긴 뒤로 거지나 다름없었다.

'···젠장.'

시체들 사이에서 계속 전진하는 놈의 커다란 등판을 보며 딜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술집에서 하던 주사위 놀이가 떠올랐다. 늘 잃기만 했던 딜런이었다.

너는 정작 던져야 할 순간에는 쫄아서 못 던진다. 그래서 매일 잃기만 하는 거다. 옆에 있던 놈이 이죽거렸던 게 떠올랐다.

어찌 됐건 지금은 또다시 주사위를 던질 때였다. 이번에는 돈이 아니라, 목숨이 판돈이었기에 무조건 이겨야 했다.

결심을 내린 딜런은 냉큼 용병들이 모여있던 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밖의 상황이 이런데도 이 게으른 녀석들은 여전히 퍼질러 자고 있었다!

참으로 의리 없는 개새끼들이 분명했다. 딜런은 그중 가장 가까운 개새끼부터 깨울 생각으로 다가갔다.

'이 새끼 얼굴이 왜 이래?'

딜런은 퉁퉁 부은 녀석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었다.

"일어나! 이 시방새야!"

딜런은 있는 힘껏 녀석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퍽! 녀석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코를 골고 있었다.

"이 시방새가?!"

얼마나 깊게 쳐 자는 건지, 이 강철 주먹을 맞고도 안 일어난다니! 더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딜런은 냉큼 단검을 꺼냈다.

'손은 싸워야 하니까 안되고. 여기가 적당하겠네. 도망도 못 치게.'

그리고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녀석의 허벅지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너무 깊게 찔렀나?

"···으음. 으···으아아아악!! 뭐야! 이 새끼야!!"

잠시 신음을 흘리던 녀석이 두 눈을 부릅뜨며 벌떡 일어났다. 움직이는 걸 보니, 적당하게 찌른 듯했다. 딜런은 냉큼 옆으로 움직였다.

'늦게 나가면 그 새끼가 나 죽일지도 몰라.'

시체의 머리를 큼지막한 손으로 박살 내는 끔찍한 모습을 떠올리며 딜런은 다시 단검을 번쩍 들었다.

"일어나! 이 시방새야!!"

딜런은 빌어먹을 게으름뱅이의 잠을 깨우는데, 단검이 참 효과적이라는 걸 깨달았다.

***

콰-직.

깡마른 중년 여성 좀비의 목이 ㄱ자로 꺾였다. 그에 좀비가 중심을 잃으며 옆으로 무너졌다. 이제는 검이 뼈를 가르지도 못했다.

'날이 상했나.'

쯧. 싸구려 검. 혀를 차며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목을 짓이겨 뜯었다. 꽈드득.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검은 피가 다시금 뿌려졌다.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에 앞으로 숙였다.

후···.

거친 숨을 토해내며, 검을 뒤로 크게 휘둘렀다.

콰직.

둔탁한 충격이 손잡이를 타고 넘어왔다.

'얕았다.'

좀비의 갈비뼈에 검이 걸려 더는 나아가지 못했다.

'···검까지 버리고 온 건 오버였나.'

놓고 온 줄 알았던 미련이 고개를 불쑥 들었다. 그에 쓰게 웃으며 검을 회수했다.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퍽.

어깨 부근에 느껴지는 충격에 몸이 휘청였다. 좀비 하나가 가죽 견갑을 물고 있었다. 녀석은 미각이 없는지, 가죽 견갑이 살점이라도 되는 것처럼 열심히 씹고 있었다. 방해하기 미안할 정도였다.

검을 바꿔 들며, 오른손으로 좀비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파드득. 기괴한 소리가 나며 좀비가 번쩍 들렸다. 이가 유난히 단단한 녀석이었는지, 내 가죽 견갑이 뜯겨 나갔다.

"그래. 너 처먹어라."

그대로 땅에다 꽂았다. 쾅! 힘이 부족했는지, 피가 튀었지만, 녀석이 꿈틀거렸다. 그에 주먹을 쥐어 머리를 힘껏 내려쳤다.

뿌직.

기분 나쁜 소리가 나며 눈알이 뽑혀 땅바닥을 굴렀다. 데굴데굴 구르던 눈알이 돌에 막혀 멈췄다. 주먹만큼 큰 눈동자를 마주 보다가, 발로 짓이겨 밟았다. 끈적한 촉감이 발을 붙잡았다.

후···.

몸이 뜨거웠다. 전투의 고양감이 나약한 공포를 억지로 누르고 고통을 잠재웠다. 시야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

주변의 소리가 웅웅거렸다. 거친 빗소리와 섞인 좀비 울음소리. 집중하여 가장 가까운 울음소리를 찾아냈다.

콰직.

날이 죄다 나가서 이제는 검보다 쇠몽둥이에 가까운 싸구려 검을 찔러 넣었다. 콰득. 좀비의 목젖을 부수며 전진했다. 뒤에 있던 좀비들이 뒤엉켰다.

'기사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검을 한 바퀴 휘둘러, 주변에 공간을 억지로 만들었다.

쾅!!

영애가 있던 집에서 파란 불빛이 뿜어져 나왔다. 다행히 기사가 그 끝내주는 스튜를 먹지 않은 듯했다.

'비건 기사였나.'

일부러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콰아아앙!

전보다 더 큰 번개가 치며, 다시금 주변을 밝혔다. 시선을 끌고 오히려 파고든 탓에 사방이 좀비였다. 그 수는 여전히 많았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적었다.

'···지치는군.'

이런 진흙탕 싸움은 오랜만이라 그런 걸까. 아직 절반밖에 치우지 못한 것 같은데, 검이 무거웠다. 검이 싸구려라 더 피로했다.

"에라 모르겠다!!! 돌격!! 가라고 이 시방새들아!!"

그때, 악에 받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도끼를 붕붕 돌리며 뛰어오는 족제비가 보였다. 목소리는 용맹했지만, 녀석은 당장이라도 눈물을 왈칵 쏟을 것처럼 울상이었다. 그 모습이 우스워 순간, 고통도 잊고 웃었다.

녀석 뒤에는 허벅지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용병들이 같이 달리고 있었다.

'저 새끼들 다리는 왜 저래. 그것보다 어떻게 깨웠지?'

쥐어패도 일어나지 않던데.

"혀어어어님!! 형님의 아우! 저 딜런이 도우러 왔습니다!! 저 게으른 녀석들을 깨우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물럿거라!! 형님에게서 떨어지거라!!"

요란하게 소리 지르며 도끼를 휘두르는 족제비의 모습에 기가 차서 웃었다. 아까 손톱을 깨물며 지켜보던 것을 알고 있는데, 참으로 뻔뻔했다.

'···뭐, 늦게라도 오면 됐지.'

도망이란 게 얼마나 달콤한지 알고 있기에, 족제비를 비난할 수 없었다. 녀석은 그래도 나보다는 나은 선택을 했으니.

쾅!쾅!

영애가 있는 집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용병들과 좀비가 부딪치며 내게 집중됐던 좀비가 흩어졌다. 전투가 전보다 수월해졌다. 용병들은 쩔뚝이면서도 좀비와 곧잘 싸웠다.

으레 칼밥을 먹는 게 이런 거였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 망설이면 목가에 큰 주름이 잡힌다. 다들 그를 알고 있기에 허벅지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쇠붙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 기사 쪽이 어떻게 될지 몰라.'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베기 보다는, 짓이겨 부순다는 느낌으로. 차가운 피가 튀고, 미지근한 빗방울이 그를 씻겨주고 다시 피를 뒤집어쓰고···. 몸이 담금질 되는 기분이었다.

좀비의 수가 점점 줄었다. 용병들도 쓰러졌다.

검은 피와 붉은 피가 뒤섞이고, 썩은 살점과 생생한 살점이 섞였다.

검을 깊게 찔러 넣었다. 두 마리가 동시에 꼬챙이 신세가 되며 뒤로 엎어졌다. 그에 검을 뽑으려 했지만, 검 손잡이만 뽑혔다.

'시발, 싸구려 검.'

욕을 중얼거리며, 검 손잡이를 옆으로 던질 때.

유난히 작은 좀비가 앞에 서 있었다.

[기사!]

기사라고 부를 거면, 님까지 붙여야지.

[그러면 사이가 멀어 보이잖아요! 아저씨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인데!]

아저씨든, 기사든 하나만 정해.

[그럼··· 기사 아저씨!]

"그워어어···."

사춘기를 지나지 못해, 그르렁거리는 소리조차 앳된 꼬마가 나를 향해 주둥이를 쩍 벌리고 있었다.

'···키가 좀 컸군.'

입맛이 텁텁하여 쓰게 웃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그녀, 우드라를 떠올리게 했다.

***

그날은 내가 처음으로 실전에 나선 날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처음 만난 날이기도 했다.

"제···제발···."

콧물에 눈물까지 질질 흘리며 애원하는 사내의 모습에 손이 덜덜 떨렸다. 사내는 벌어진 복부에서 흐르는 내장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억지로 틀어막고 있었다. 끔찍한 모습에 토악질이 올라왔다.

내가 죽이지 않아도 죽지 않을까? 나약한 마음이 고개를 불쑥 들었다.

그때였다. 내장을 잡고 있던 사내가 돌연 오른손을 움직인 것은.

사내의 오른손이 번쩍였다. 머리는 검을 휘두르라고 소리쳤지만, 공포심에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반 치 크기의 칼붙이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머, 막내야. 지금 눈 감은 거야? 뒤질래?"

예상했던 고통은 없었다.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사자처럼 풀어헤친 붉은 머리. 피를 머금은 듯 붉은 입술과 어딘가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 미인상이었지만, 특유의 위험한 분위기에 절로 피하게 되는 미친년.

부대장 우드라였다. 우드라는 손에 묻은 붉은 피를 혓바닥으로 핥으며 미소지었다.

"그래그래. 첫 전투니까 그럴 수 있어. 보니까 칼도 제법 잘 휘두르고. 그런데 다음에도 또 이러고 있으면···. 거기를 뽑아서 입에다 꿰매 버릴 거야."

겁주려 하는 소리일 수도 있었지만, 우드라의 입에서 나오니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저 미친년은 진짜로 내 것을 뜯어서 입에 달고도 남았다.

"아···, 대장이 막내한테는 상냥하게 대하라고 했는데···. 으음, 그럼 특별히 하트 모양으로 꿰매줄게."

짝하고 박수치며 방긋 웃는 우드라의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드라의 바느질 솜씨가 최악이라는 건, 유명했다.

구겨진 우드라의 미간에 황급히 웃었고, 그제야 우드라가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지었다.

***

우드라가 가래 끊는 소리를 내며, 악착같이 기어왔다. 허리 아래는 뜯어 먹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내장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내장이 꿈틀거리며 그 안의 것들을 쏟아냈다.

이건 놈이 보내는 조롱이었다. 놈은 이런 하급 좀비를 쓰지 않았고 고작 내가 이런 거에 죽지 않을 거란 것도 알고 있었으니.

그저 패배자, 도망자에게 보내는 녀석의 질 나쁜 농담이었다. 애초에 내가 도망친 것도 녀석이 봐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디부터 잘못됐을까. 어째서 놈이 우리가 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이윽고 내 발치까지 다가온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매일 다듬던 그 고운 손톱은 군데군데 빠져 있었다.

쿨럭. 내 입에서 피가 한 움큼 쏟아졌다.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눈에 힘을 줬다. 이번에는 시야가 흐려졌다.

나는 정신을 억지로 붙잡고 내 발을 뜯어먹으려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내 팔을 잡고 펄쩍 뛰었다.

매번 침대로 뛰어들어, 잔소리하게 했던 그녀의 습관과 비슷하여 순간, 아주 작은 희망이 고개를 들었지만, 그것은 공중에 길게 늘어진 그녀의 내장을 본 순간 사라졌다.

[안아줘. 악몽을 꿨단 말이야. 무서워. 안아줘. 안으라고. 안으라니까?]

'···악몽이었으면 좋겠군.'

비가 오는지, 눈앞이 흐렸다.

입에서 침을 흘리며 내 목덜미를 물려고 하는 그녀를 꽉 안았다. 늘 따뜻했던 그녀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녀가 내 목덜미를 물어뜯고, 여기저기를 할퀴었지만, 눈을 질끈 감고 더 꽉 안았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철철 흘렀지만,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움직임이 멎을 때까지, 꽉 안았다.

그녀가 외롭지 않도록.

생각보다 겁쟁이였던 그녀가 더는 악몽을 꾸지 않도록.

간절히 빌었다.

[얼굴 조심해. 잘생긴 게 막내의 유일한 장점이니까.]

얼굴에 박힌 손톱을 빼서, 그녀와 같이 묻었다.

***

나는 그날 우드라를 안았던 것처럼 아이를 안았다.

왜 자꾸 기사라고 부르냐.

[그야, 아저씨는 늘 나를 구해주니까요!]

품 안에서 아이가 발버둥 쳤다.

힘을 주어, 목을 부러뜨렸다.

아이의 움직임이 멈췄다.

팔뚝에 손톱이 박혀 있었다.

보이지 않는 목줄.

아이의 말이 맞았다.

모두 보이지 않는 목줄을 차고 있었다.

내게는 수십 개의 목줄이 있었고.

거기에 자그마한 목줄이 더해졌다.

움직임을 멈춘 아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일어났다.

넷을 낳으면 둘은 죽는다.

그저 동전을 던져, 뒷면이 나온 것과 비슷했다.

'좆같은 이세계.'

도무지 좋아할 수가 없는 곳이었다.

[살아남은 새끼가 나머지 몫까지 오래오래 살기로 하자. 그런 의미에서 다들 돈을 어디에 숨겨뒀는지 공유를 할까? 아니, 내가 훔치려는 게 아니라···. 뭐 도둑?! 도오오두욱?!]

아직, 그 좆같은 샌드위치가 입안에 남았는지, 입맛이 텁텁했다.

'그래. 오래오래··· 나머지 몫까지.'

눈을 감고 기도했다.

아이가 다음에는 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를.

빗줄기가 굵었지만, 빌어먹게도 너무 조용했다.

호른과 로만

콰아앙!

굉음과 함께 터지는 푸른 불꽃을 보며, 팔뚝에 박힌 손톱을 뺐다. 아주 자그마한 손톱이 박혀 있던 자리에는 이미 커다란 흉터가 있었기에 티도 나지 않았다.

'호른.'

마을에서 유독 작았던 집의 한쪽 귀퉁이에, 삐뚤빼뚤 적혀 있던 아이 이름을 중얼거리며 손톱을 땅에 털었다.

머릿속이 그녀와 아이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어지러웠다. 무거운 추가 달린 것처럼 마음이 계속 가라앉았다. 그대로 쓰러져서 엉엉 울고 싶었다.

이런 나약함은 쓸모 없었다.

'···악마.'

억지로 의식이 흐르는 방향을 틀었다.

응어리져 토해내지 못하는 감정에 분노를 연료마냥 퍼부은 다음 거칠게 풀무질을 했다. 딱지 진 기억들을 박박 긁어, 터져 나온 감정을 부어서 그 열기를 더욱 키웠다.

어떻게든 이 지친 몸이 움직이도록 달구었다.

"끄으윽···."

숨넘어가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반 이상 뜯어 먹힌 용병이 하늘을 올려보고 있었다. 용병은 여기저기 뼈가 보일 정도로 뜯겨 있었고 거기에는 사람의 잇자국이 남아 있었다.

살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지만, 이제 그마저도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나름 비싼 갑옷인 듯, 가죽 갑옷이 멋들어지게 기름졌지만. 그게 좀비에게도 맛있게 보였는지, 죄다 뜯어먹힌 상태였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사내의 훤히 보이는 목덜미 뼈에 닿을 때마다 사내가 움찔거렸다.

숨 쉬고 있는 것조차 기적에 가까운 상태였지만, 사내의 눈에는 삶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다.

저런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사내는 살고 싶어 했다.

"이름이 뭔가."

"끄륽··· 로호오··· 만···."

"그래 로만."

사내의 목덜미 뼈에서 피가 들끓는 것처럼 방울졌다가, 터져서 흘렀다.

그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사내의 손에 들린 검을 잡았다. 꽤 잘 사는 집안 출신이었는지, 아니면 재주가 좋았는지, 사내의 검은 제법 쓸만해 보였다.

사내는 겁에 질린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다가, 이내 힘을 풀었다. 열망만이 가득했던 눈에 회한이 깃들었다.

이게 설사 전설로만 내려오는 검이든, 아니면 값비싼 보검이든, 이제 사내가 갈 곳에는 필요 없었다. 들고 갈 수도 없었고.

"부디, 뒤에 아무것도 없기를."

또다시 이 지옥에 끌려오지 않기를···. 뒷말을 삼켰다.

사내의 절망과 열망, 그리고 회한이 가득한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며 사내의 목을 베었다. 굴러간 사내의 머리가 좀비들과 뒤섞였다.

그러자 좀비와 사내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좀비든 사내든 다들 원통한 얼굴이었기에.

결국, 둘 다 생기가 없었기에, 둘은 똑같았다.

콰아아앙!!

다시 푸른 불꽃이 터졌고.

[검투사로 천 승을 달성한 비법?]

[단순하다. 분노.]

[분노해라. 그럼 분노는 네 몸을 숨이 멈추는 순간까지 움직이도록 채찍질할 것이다.]

'···호른과 로만.'

반복하여 중얼거리며, 검을 고쳐 잡았다.

미지근했던 빗물이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분노가 충분히 달구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