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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이렇게 깊이 침투했을 줄이야.'

기사 벤은 왼쪽 어깨에 꽂힌 단검을 뽑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그놈들이 알면 좋아 죽으려고 하겠군.'

그렇게 여자를 좋아하더니, 결국 여자에게 칼까지 맞았다고 웃음을 터뜨리며 놀릴 게 분명했다. 한동안 성에서 얼굴도 들고 다니지 못하리라.

'그게 문제가 아니지만.'

벤은 품속에서 꺼낸 포션을 상처에 뿌렸다. 끔찍한 쓰라림이 느껴지며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잘린 팔을 대고 뿌리면 다시 붙는다는 상급 포션이었지만, 지금은 아무 효과 없었다.

오히려 검은 연기가 나며 썩은 내를 풍겼다. 상처 주변이 썩어들어갔다.

'저주인가.'

단단히 준비했군. 벤은 중얼거리며 포션 병을 버렸다. 일개 시녀가 저주 담긴 단검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철저하게 계획된 일이 분명했다.

그렇게 조심했는데, 정보가 어디서 새어 나갔을까. 어쩌면 페네르 가에 첩자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고귀한 기사라고 하더니, 몰골이 참 마음에 드는군."

앞에서 놈이 검은 후드를 걷으며 이죽거렸다.

전염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녀석의 얼굴은 곳곳이 녹아있었고 진물이 흘러나와 보는 것만으로 불쾌해졌다. 그리고 또 얼마나 앙상한지, 눈은 푹 파여 눈알의 형태가 보였고 양 볼은 치아가 보일 정도로 홀쭉했다.

벤은 녀석의 왼팔에 집중했다. 마른 녀석과 어울리지 않는 끔찍하고 거대한 무언가가 왼팔이 있어야 할 곳에 달려 있었다.

언뜻 보면 엄청나게 큰 괴물의 팔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털 대신 노란색 눈동자가 셀 수 없이 박혀 있었다.

'침식이 아직 팔 한쪽밖에 안 된 악마라···.'

벤은 이전에도 악마를 상대해 본 적 있었기에 자신이 어느 수준의 악마까지 상대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양팔이 침식된 악마까지는 상대할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위험했다.

그리고 상대는 왼팔만 침식된 상태였다.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다만, 현재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이런 극악한 상태에서 악마와 싸워본 적은 없었다.

'이래서 미인이 독이라는 건가.'

아버지가 늘 입버릇처럼 말했던 걸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잔소리라 생각했던 아버지의 말은 늘 옳았고 그를 깨닫는 건 늘 한참 늦은 뒤였다.

정신이 순간, 멀어지며 몸이 휘청였다. 벤은 곁눈질로 뒤에서 세상모르고 자는 영애를 확인했다. 얄미울 정도로 멀쩡했다.

"뭐, 밖도 대충 정리가 됐을 테니. 이제 고귀한 기사 고기 맛 좀 봐볼까."

놈이 왼팔을 쭉 펼쳤다. 그 흉측한 뭔가가 덩치를 부풀리더니, 벽을 부수며 크게 펼쳐졌다.

거기서 떨어진 부스러기들이 벤의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

"이왕이면 덜 익힌 거로 부탁하지. 그래야 잘 썰리니까."

벤은 농을 던지며 검을 고쳐잡았다. 저렇게 큰 놈을 상대할 줄 알았다면, 방패를 들고 올 것을···. 늦은 후회를 하며, 벤은 오러를 끌어 올렸다.

저주가 오러에게도 영향을 미치는지, 그 속도와 양이 형편없었다.

하지만 이거라도 어디인가. 이런 오러조차 없어서 악마 앞에 그저 한낱 식량으로 전락하는 이들이 태반인 세상이었다.

늘 그렇듯. 벤은 불평하지 않았다.

그저, 주어진 것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벤은 눈을 부릅뜨며 상대의 팔에 집중했다. 수백, 수천 개의 노란색 눈이 깜박이지 않고 벤을 응시했다.

"음, 미안. 짓이겨서 파이로 먹을 거라. 기사 파이. 어때 발음 좋지 않아?"

사내가 이죽거리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벤은 입이 절로 근질거렸다.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성격상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정말 못생겼군. 원래 못생겼었나? 아니면 악마를 받으면서 그런 몰골이 된 건가. 하긴, 사람 몰골이 원래 그럴 수가 있겠나. 애도를 표하지."

"이 주제 파악 못 하는 건방진 놈이!!"

반응이 바로 터져 나왔다. 안 그래도 흉측했던 녀석의 얼굴이 이제, 완전히 구겨지며 꼭 악마의 불알 같은 모양새가 됐다.

벤은 숨까지 참으며 녀석의 왼팔에 집중했다. 왼팔의 그 흉측한 근육이 팽창하는 것과 동시에 움직였다.

녀석의 왼팔이 주변의 모든 것을 부수며 다가왔다. 벤은 오히려 전진하며 집 중간에 배치된 기둥에 주목했다.

이윽고 녀석의 왼팔에서 풍기는 지독한 냄새까지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녀석의 왼팔이 기둥에 부딪히며 아주 잠시 멈췄다.

'기회다.'

참았던 숨을 뱉으며, 단번에 뛰었다. 억지로 끌어 올린 오러가 발에 힘을 더하자, 순식간에 주변이 늘어졌다. 벤은 단 한걸음에 녀석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녀석의 경악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크게 떠진 녀석의 눈동자 아래로 진물이 터져 흘렀다. 벤은 만약 악마에게 불알이 있다면 이처럼 생겼을 것이라 확신했다.

벤은 승리를 직감했다. 사선에서는 작은 실수 하나로 승부가 갈리는 법이었다.

손을 비트면서, 검을 찔러 넣었다. 수천, 수만··· 아니, 셀 수도 없이 반복한 동작이었다.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동작이 이어졌다. 끌어 올렸던 오러를 터뜨렸고 검에서 뜨겁지 않은 푸른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다만, 몸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했다.

상대의 경악한 얼굴에 찔러 넣기 바로 직전, 억지로 끌어올린 오러가 불평하듯 요동쳤고 그에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것은 명백한 작은 실수였고 지금은 사선 위였다.

팡!

검 끝이 흔들렸다. 상대의 얼굴 왼편을 날렸지만, 악마를 죽이기에는 부족했다. 정확히 중앙을 날렸어야 했는데···.

쾅!

끔찍한 충격과 동시에 벤의 몸이 빠른 속도로 튕겨 벽에 부딪혔다. 쿵! 벽에 거미줄처럼 금이 가며 돌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바닥에 뒹군 벤은 입에서 검붉은 피를 한 움큼 뱉어냈다. 갑옷의 가슴 부근이 흉하게 구겨진 탓에 숨쉬기가 힘들었다.

"미친! 깜짝 놀랐네! 뒤질 뻔했잖아! 고귀한 기사 새끼야! 휘유···!"

녀석이 오른팔로 과장되게 제 가슴 부근을 쓸어내렸다. 얼굴의 절반이 날아갔는데도, 녀석은 멀쩡했다.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그나마 순간적으로 오러로 오른팔을 보호하여, 부서지진 않았지만, 충격의 여파로 팔이 덜덜 떨렸다.

다시 녀석의 왼팔이 꿈틀거렸다. 노란 눈동자들이 벤을 주시했고, 끔찍한 근육이 팽창했다.

'···농사나 지으라는 아버지 말 들을걸.'

손찌검까지 하며 벤을 뜯어말렸던 소작농 아비의 모습이 흐리게 떠올랐다. 부모의 말은 틀린 게 없고, 그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말이 떠올라 쓰게 웃었다. 늦어도 단단히 늦었다.

피부에 닿을 정도로 짙은 적개심에 벤은 한숨을 쉬며, 쑤신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어릴 때 봤던 책이 문제였다.

실제 기사와 전혀 다른 아름다운 색으로만 채워진 책. 그게 벤의 인생을 바꿨다.

동부의 꽃이라고 불리는 여인을 지키기 위해, 악마와 꼬챙이 하나 들고 마주하는 것. 어찌 보면 기사의 로망과도 같은 상황이었지만, 그 결과는 아이가 보기에 좋지 않을 게 분명했다.

녀석의 얼굴이 꿀렁이더니, 구멍 난 부분에 흉측한 것이 들어찼다. 침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괜히 악마 좋은 일만 해준 듯하여, 입맛이 좋지 않았다.

몸 상태가 조금만 더 좋았으면, 오러가 조금만 더 정순했다면, 검을 잡지 않고 쟁기를 잡았다면···.

모든 가정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벤은 불평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 주어진 것에서 최선을 다할 뿐.

"잘 생겨졌군. 흉측하지만, 전보다는 확실히 나아."

벤은 역류하는 피를 삼키며 방긋 웃었다.

"···벌레 같은 것이 아직, 주둥이가 살아있구나."

어찌 됐건, 뒤에 아리따운 여인이 있었으니, 기사인 벤이 할 일은 명확했다.

벤은 어릴 때 읽었던 책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떠올리려 애쓰면서 검을 고쳐 잡았다.

'···아름다운 색이었나.'

팔은 흔들렸지만, 벤의 검은 흔들리지 않았다.

***

'젠장. 얼뜨기 기사라며.'

쿠탄은 눈을 찡그리며, 왼팔을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라고 청했다. 그에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머릿속에 울리며, 팔이 쏘아졌다.

기사 놈은 갑옷 곳곳이 깨지고 엉망이 되어, 다리를 덜덜 떨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좀처럼 쓰러지지 않았다. 휘청이면서 어떻게든 회피했다.

분명히 저주도 걸었고, 어깨에서 줄줄 흐른 피는 앞섬을 가득 적셨는데도 녀석은 쓰러지지 않았다. 바닥은 흘러내린 검은 진액과 녀석의 피로 흥건했다.

찌릿한 통증이 왼쪽 팔에서 느껴졌다. 마신 피가 거의 동났다. 이렇게 싸움이 길어질지 몰랐다. 아무리 기사라고 한들, 사람 아닌가?

'저번 그놈은 굳이 이런 짓 안 해도 잡았었는데.'

쿠탄은 음식을 먹을 때, 들어간 모든 재료를 확인할 정도로 꼼꼼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철저하게 준비했다. 다만, 기사에도 급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걸 몰랐던 게 큰 실수였다.

'이래서 작은 마을에서 기사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는데.'

쿠탄은 고개를 흔들었다. 한계에 달했지만, 그래도 기사 놈과 비교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쓰러지진 않았지만, 이제 그것도 한계인지, 검에 기대어 노려보는 게 다였다. 그 재수 없는 상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히, 나에게 못생겼다니.'

쿠탄은 이를 질끈 깨물었다. 녀석은 쿠탄의 가장 아픈 곳을 찔렀다.

쿠탄이라고 어릴 때부터 악마와 계약하여 이렇게 흉측한 몰골이 되고 싶었겠는가. 아니, 애초에 그런 사람이 존재할 리 없었다.

아이들은 모두 영웅이 되길 꿈꾸지만, 모두가 영웅이 될 수 없었다. 누군가는 악역을 맡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삶의 가장 밑부분, 시궁창에 있는 이들에게 강제됐다.

악마들의 모임에 처음 나갔을 때, 쿠탄은 다른 이의 사연을 듣고 눈물을 참느라, 애써야 했다. 다들 끝자락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영원한 영혼의 고통을 약속한 자들이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사람처럼 대접받기 위해.

괴물이 되기를 선택했을 뿐.

우습게도 모습이 흉측해질수록, 그를 대하는 이들의 태도가 조심스러워졌고, 그가 악마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대접을 받았다.

'감히 나한테 못생겼다고 해?'

어릴 때는 잘 생겼다 까지는 아니어도 남자답게 생겼다, 농사 잘하게 생겼다 정도는 들었던 쿠탄이었다.

하지만 분에 넘치는 계약을 한 죄로 그 튼튼하던 몸은 나뭇조각처럼 깡말라졌고 얼굴에서는 진물이 뚝뚝 흘렀다.

그런데 감히, 귀족으로 태어나 평탄하고 부유한 인생을 보냈을 게 분명한 건방진 기사 나부랭이가 저런 소리를 지껄이다니! 으드득. 이가 갈렸다.

왼팔에 부탁했다. 부디, 저 재수 없는 놈을 짓이겨 달라고. 짓이겨서 이게 기사 놈의 고귀한 고기인지, 그저 똥을 먹으며 자란 돼지의 고기인지 알 수 없도록 만들어 달라고.

'그리고 그걸로 파이를 만들어 먹을 것이다.'

오랜만이었다. 식욕이 생긴 것은. 말라비틀어진 입안에 침이 돌았다. 자신이 기사 파이와 돼지 파이를 구분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찌릿.

순간, 현기증이 돌았다.

마셨던 피를 다 사용한 신호였다.

이제 악마는 쿠탄의 피를 빨아먹기 시작했다.

'한 번이면 끝난다.'

쿠탄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오른손의 핏줄이 희미해질 때쯤, 왼쪽 팔이 팽창했다. 쾅! 지붕을 뚫고 올라간 팔이 빠른 속도로 내려쳤다. 팽창했던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나며, 기사 위로 검은 그림자가 그늘졌다.

나중에 녀석을 파이로 만들고 거기에 속삭일 것이다.

네 고기는 똥을 먹여 키운 돼지보다 맛없었노라고.

이윽고 왼쪽 팔이 건방진 기사 놈을 뭉개기 바로 직전.

돌연 왼쪽 팔이 방향을 틀었다.

"뭐해! 당장 파이를···. 으아아악! 뭐야!!"

혹시라도 악마가 자신의 피를 더 빨아 먹기 위해, 장난을 치는 건가 싶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때, 오른편에서 서늘함이 느껴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자신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덩치가 큰 사내였다.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온몸이 칠해진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활활 타오르는 증오. 깊이를 알 수 없는 적의. 눈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선명하게 전해지는 감정에 쿠탄은 질겁했다.

사내가 검을 찔러넣기 바로 직전, 왼팔이 사내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쾅! 굉음이 터지며 상대가 벽을 부수며 튕겨 나갔다.

'···뭐야. 좆밥이잖아.'

쿠탄을 떨게 했던 그 흉악한 기세와 다르게 사내는 단 한방에 나가떨어졌다.

왼팔에 생채기조차 나지 않았다.

그에 쿠탄은 상대가 오러를 사용할 수 없음을 눈치챘다.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한들, 오러가 없으면 악마에겐 그저 가벼운 두드림에 불과했다. 방금까지 긴장했던 자신이 우스워졌다.

'젠장! 괜히, 귀한 피만 날렸네.'

왼팔이 다시금 피를 요구했다. 짜증이 울컥 솟구쳤다. 요즘 걸을 때도 종종 휘청일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이상한 놈이 하나 껴서 괜히 귀중한 피만 날렸다.

가져가. 빨리 파이로 만들라고. 왼팔에 달린 수천 개의 눈동자가 웃는 듯, 가늘게 떴다. 그리고 동시에 전보다 심한 현기증이 쿠탄을 강타했다.

이번에는 간신히 설 수 있을 정도였다.

여기서 몇 번 더 피를 빨리면 그도 위험했다.

'대충 끝내고 저년을 넘긴 다음··· 황실 쪽에 연락을 취해야겠다.'

잠깐의 오차가 있었지만, 아직 수습할 수 있는 범위 내였다. 이제 저 건방진 기사를 짓이긴 다음 적당히 한 움큼을 파이 재료로 챙겨서···.

그때, 또다시 서늘함이 느껴졌다.

'미친!'

기사를 짓이기려던 왼팔이 다시금 방향을 틀었다.

"호른과 로만의 복수다!!"

전보다 훨씬 붉어진 사내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사내의 갑옷은 죄다 구겨졌고 왼팔은 좋지 않은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그런데도 사내는 하나 남은 오른팔로 큼지막한 검을 휘둘렀다.

자신을 노려보는 그 눈에 담긴 형용치 못할 감정에 쿠탄은 등골이 오싹했다.

그때, 사내가 다시 왼팔과 부딪쳤고.

쾅! 굉음과 함께 올 때보다 빠르게 뒤로 날아갔다.

다만, 이번에는 도중에 검을 땅에 꽂아서 멈췄다.

콰드드득! 땅이 길게 갈라졌다.

피를 한 움큼 토하면서도 사내는 여전히 깊은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뭐··· 뭐 하는 새끼야 저건.'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공포에 몸을 잘게 떨었다. 분명, 오러도 못 쓰는 좆밥이 맞는데, 기사보다 두려웠다.

"퉤."

사내가 입에서 붉은 침을 뱉어내고 천천히 일어섰다. 작은 망설임도 없었다.

"자··· 잠깐! 기다려!"

이제 더 피가 빨리면 위험했다. 쿠탄의 상대는 건방진 기사 놈이었지, 저놈이 아니었다.

녀석도 고통스러울 게 분명했다.

당장, 왼팔이 어긋나 있었고 온몸은 피범벅이었다.

거기에 입에서도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억지로 움직이는 게 분명했다.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인간이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니까.

"내 목표는 네가 아니라, 저 여자랑 저 건방진 놈을 파이 재료로 만드는 거다. 너에게는 관심 없으니, 도망쳐도 쫓지 않···."

쿠탄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도중에 사내가 다시금 뛰었기 때문에.

"호른과 로만의 복수다!!!"

사내가 입에서 피까지 토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쩌렁쩌렁한지, 골이 울릴 정도였다.

찌릿.

으득.

다시금 왼팔이 멋대로 피를 빨아갔고, 전보다 훨씬 커진 현기증은 머리에 망치를 맞은 것만 같았다. 거기에 이제는 시야까지 흐려졌다. 다리는 후들거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호른이랑 로만이 도대체 누군데!!'

쿠탄은 이를 악물고 버티며 속으로 소리쳤다.

맹세코 저 이름들을 들어본 적 없었다.

쾅!!

이번에는 전보다 더 큰소리가 났다. 몸이 꺾인 사내가 땅에 통통 튕기며 한참을 날아갔다. 사내가 튕긴 자리에는 붉은색 자국이 짙게 묻었다.

'젠장. 이러다 내가 뒤지겠네. 웬 미친놈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쿠탄은 초점이 자꾸 어긋나는 눈에 힘을 주며, 황급히 기사를 돌아봤다. 기사는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무릎 꿇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눈빛이 흉흉했지만, 움직이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한계에 봉착하자, 뜨겁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그래, 아직 수습할 수 있다. 미친개한테 물렸지만, 수습할 수 있는 수준이야. 일단, 여자를 넘긴 다음··· 그 대가로 도시 하나 정도 받아내면, 수습할 수 있어.'

그래, 기사 놈을 죽여서 뭐하겠는가. 녀석이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몰골은 자신이 보기에도 흉측했으니까.

일단, 내가 사는 게 중요했다. 여자만 챙겨서 떠나자. 아직 수습할 수 있···.

"···호···른과 로···만의 복수다."

그때, 낮게 깔린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는 온전히 붉은색으로 가득한 사내가 삐꺽거리며 일어났다.

그 모습에 쿠탄은 몸을 잘게 떨었다.

그건 공포보다는 진저리에 가까운 떨림이었다.

'그러니까 그 호른이랑 로만이란 새끼가 누구냐고!!'

쿠탄은 정말로 처음 듣는 이름이라,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억울했다.

사람 잘못 본 거 아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기운이 없는 게 참으로 원통했다.

쓰러지지 않는

'···뒤질 것 같네.'

흐려지는 정신을 억지로 부여잡았다. 역류한 피를 입 밖으로 뱉으니, 그제야 숨을 편히 쉴 수 있었다.

왼팔이 부러져서 덜렁거렸다. 힘을 줘보니, 살짝만 움직여도 극심한 고통이 엄습했지만, 움직이긴 했다.

퉤. 약해 보이지 않기 위해, 피를 침처럼 뱉었다. 양아치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전투는 기세 싸움이었다. 그 상대가 악마라 하더라도.

겨우 왼팔 하나 침식된 조무래기 악마였지만, 그래도 악마이기에 오러가 없는 나에게 힘든 상대였다. 침식이 되지 않은 부분을 공략하려고 했지만, 저 왼팔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시간이라도 벌어두면 기사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지만 무릎 꿇고 계속해서 입에서 피를 토해내는 몰골을 보니, 꽤 긴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저놈도 한계인 것 같은데.'

미라처럼 깡마른 악마 녀석의 몸이 덜덜 떨렸다. 더는 입을 열지도 않는 것을 보니, 말할 힘도 없는 듯했다.

이제 누가 먼저 쓰러지냐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쓰러지지 않는 건, 내가 자신 있는 분야 중 하나였다.

뻐근한 오른손을 빙글 돌렸다. 근육이 비명을 질렀지만, 아직 움직였다. 그리고 그거면 충분했다.

꾸륵.

기분 나쁜 효과음과 함께 녀석의 왼팔이 팽창했다. 시시각각 녀석의 얼굴이 파래지는 것을 보니, 녀석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

후···.

불이라도 난 것처럼 뜨거운 숨을 뱉어내며, 땅을 박찼다.

쾅!

트럭에 치인 것만 같은 충격에 순간, 정신이 흐려졌다. 눈을 뜨니, 어느새 날아가고 있었다. 몸의 구석구석이 서로 더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다.

날아가면서도 풀린 눈에 힘을 줘서, 악마를 노려봤다. 녀석이 휘청이며 무릎을 꿇었다. 위액이 역류한 듯 입가에서 노란 진물이 흘러나왔다. 분명히 녀석도 무리하고 있었다.

'쓰러지지만 않으면 내가 이긴다.'

퍽. 축축하고 딱딱한 땅에 거칠게 부딪히며, 등이 부서지는 듯한 끔찍한 통증이 온몸을 강타했다.

충격의 여파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몸이 움직이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투둑투둑.

쏟아지는 굵은 빗방울이 얼굴을 두드렸다.

타오르는 갈증에 입을 열어 빗물을 받았다.

입안에 가득 찬 빗물을 마시니, 조금 정신이 돌아왔다.

"혀··· 형님."

옆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삐걱대며 고개를 돌리니, 좀비들 사이에 누워있는 족제비가 보였다.

'저기 누워있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한 건가.'

심지어 녀석은 좀비의 팔을 베고 좀비의 발을 이불처럼 덮은 상태였다. 녀석은 얼굴의 윗부분만 내밀어 빼꼼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녀석이 나를 부르지 않았다면 거기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완벽한 위장이었다.

어떻게 보면 난 놈이었다. 아무리 살고 싶다고 한들, 시체 사이에 들어가서 누워있는 건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그것과는 별개로 기가 차서 헛기침이 나왔다. 뱉은 피는 금세 빗물과 섞여서 흐려졌다.

"히···힘내십쇼! 응원하고 있습니다! 제가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움직일 수가 없어서 형님을 돕지 못한다는 게 참으로 한스럽습니다. 크윽··· 마음만은 형님과 함께한다는 걸··· 놓아라! 이놈아! 나는 형님을 도와드려야 한다!"

녀석도 민망한지, 눈을 굴리며 주절주절 말을 늘여놨다. 좀비의 팔을 잡아, 제 멱살이 잡힌 듯한 연기는 사뭇 뛰어났다. 녀석은 목이 없는 좀비의 시체와 사투를 벌였다.

'다리를 다치긴 염병.'

용병을 끌고 나온 놈이 좀비 한 마리랑 투덕거리다가, 뒤로 슬그머니 빠지는 걸 본 나로서는 어이가 없었다.

목이 없는 좀비에게 붙잡혀 캑캑거리는 녀석의 연기에 기가 차서 웃었다. 작은 웃음이 터지니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통은 여전히 끔찍할 정도로 선명했지만, 몸이 다시 움직였다. 그거면 충분했다.

"혀···형님. 악마 들리신 겁니까? 그···그워어어어··· 그워어어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작게 중얼거린 족제비가 어쭙잖은 좀비 흉내를 냈다. 그 소리가 제법 비슷한 것을 보니, 좀비들 사이에 누워서 연습한 듯했다.

'저거, 대단한 놈이네.'

그에 더 크게 웃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몸이 휘청였지만, 쓰러지진 않았다. 다리의 근육이 찢어진 것처럼 비명을 질렀지만, 그래도 움직였다.

그때, 족제비 옆에 뒹구는 도끼가 보였다.

'검보다는 저게 적당하겠어.'

저런 무식하게 큰 것을 상대하는 데에는 검보다 도끼가 어울렸다.

"이··· 이건··· 저희 집안이 나무꾼 집안이라, 할아버지 때부터 가보로 내려오는···."

도낏자루를 잡으려고 하니, 족제비가 좀비 사이에서 손만 내밀어 맞잡았다. 족제비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어쩐지 꽤 좋은 쇠가 들어간 도끼 같더니만, 나무꾼 집안이었나.'

나무꾼이나 했으면 지금쯤 따뜻한 스튜를 먹고 배를 두드리며 침대에 누워있었을 텐데, 잘못된 선택으로 녀석은 좀비를 베고 있었다.

녀석에게도 사연이 있겠지만, 상황이 참 기구했다.

"쓰고 줄게."

"하···하지만···."

"쓰고 준다고."

"지···진짜 주셔야 합니다···."

간신히 정신을 잡고 있는데, 자꾸만 말을 시키니, 짜증이 울컥 솟구쳐 인상을 구겼다.

그러자 족제비 녀석이 냉큼 도끼를 내밀었다. 어차피 지금 저 악마를 못 잡으면 이 마을에 있는 모두 다 끝이었다. 악마는 고작 눈대중으로 속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립감이 좋네.'

손바닥에 퉤- 하고 침을 뱉은 다음 도끼를 고쳐 잡았다. 이 정도면 악마 대가리도 쪼갤 만했다.

"우웩!"

악마 녀석은 나오지도 않는 토를 계속 뱉어내고 있었다. 그 흉측한 왼팔에 달린 노란색 눈동자들은 녀석을 맛있는 음식을 보는 것처럼 노려봤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갈비뼈가 나간 듯, 찔리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얼마 남지 않았다.'

저런 말라깽이보다, 내가 먼저 쓰러질 리가 없었다. 의지를 다지고 뜀박질을 시작했다.

한 발자국 뗄 때마다, 아득한 통증에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참을만했다. 아직 발이 움직였다. 그거면 충분했다.

악마 녀석의 경악한 눈동자가 보였다. 녀석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한계에 달했는지 녀석의 왼팔이 팽창하지 않았다.

이내, 도끼를 휘두르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갔다. 녀석의 왼팔은 움찔거리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 악마는 숙주에게 선택을 맡긴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래야 더 깊고 끔찍한 악취를 풍기는 절망이 만들어지니까.

"두 배··· 아니, 세 배를 주겠다! 계약을 이행해라!"

녀석이 소리쳤다. 개소리로 치부하고 목을 치려는 순간, 내 어깨너머를 응시하는 녀석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에 어지러웠던 머리가 억지로 사고를 쥐어짰다. 내가 놓친 부분을 찾기 위해 피가 팽팽 돌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놓친 게 무엇인지, 떠올릴 수 있었다.

녀석의 머리를 쪼개려던 도끼를 회수하며 뒤로 크게 휘둘렀다. 자세가 무너지며 힘이 실리지 않았지만, 나를 노리는 검을 막기에는 충분했다.

"눈치가 빠르군."

겹쳐진 검 너머, 늙은 용병 존이 주름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끝내주는 스튜를 먹지 않은 건 나와 족제비 말고도 한 명이 더 있었다.

'너무 흔한 이름이더니만, 가명이었나.'

나를 노려보는 존의 눈빛이 흉흉하게 빛났다.

존의 주름진 눈이 내 곳곳을 확인했다.

속에 철을 덧대어 입으면서도, 이음새 부근을 꼼꼼히 가려, 그 존재를 숨기는 존 같은 사내는 확실히 까다로웠다.

하지만 그 까다로움은 언제 내 뒤통수에 칼을 꽂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반대로 그 뒤통수만 조심하면, 내가 질 리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음?!"

부러진 왼팔을 억지로 움직여 팔꿈치로 도끼 등을 내려쳤다. 쿵. 끔찍한 고통이 이어졌지만, 참을만했다. 그에 힘의 균형이 깨졌고 도끼가 존의 검을 밀어냈다. 존의 갑옷 가슴 부근에 도끼가 파고들었다.

나는 존이 갑옷 안에 뭔가를 덧대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단순히 도끼를 가슴에 박아 넣었다고 안심하지 않았다.

나는 이를 질끈 깨물며 다시 왼쪽 팔꿈치로 도끼 등을 내려쳤다. 캉! 도끼의 날에서 불꽃이 튀면서 존의 몸이 흔들렸다.

존은 늦었다고 생각했는지, 도끼를 막지 않고 오히려 오른손을 내 복부를 향해 내밀었다. 존의 오른손 안쪽에서 번뜩이는 꼬챙이가 튀어나왔다.

눈가에 주름이 질 때까지 칼밥을 먹은 놈다운 비장의 한 수였다. 하지만 또한 눈가에 잡힌 주름만큼 그 힘이 부족했다.

존의 꼬챙이는 내 복부를 찔렀다. 하지만 거기는 내가 책을 구겨 넣었던 곳이었다. 꼬챙이는 내 가죽 갑옷을 뚫을 수 있었지만, 그 아래에 있는 손때 묻은 책은 뚫지 못했다.

존의 눈동자가 커졌다. 눈동자에 생생한 감정들이 떠올랐다. 공포, 후회, 절망, 애원.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며, 팔꿈치를 다시 내려쳤다.

콰직.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도끼가 존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분수처럼 쏟아진 붉은 피가 내 얼굴을 적셨다. 피는 차갑지 않고 뜨거웠다. 검지 않고 붉었다. 입에 들어온 피, 철 맛이 내 정신을 한껏 고양시켰다.

존이 뒤로 무너졌고, 나는 그대로 따라붙었다.

다시 내려쳤다.

도끼의 날 반 이상이 파고들었다.

뿜어지는 붉은 피에 눈이 따가웠지만, 눈을 감지 않고 존을 마주했다.

존의 눈동자가 풀렸다.

다시 팔꿈치를 내려쳤다.

이제 도끼 등이 간신히 보일 정도였다.

"아··· 아··· 아···."

바람 빠지는 소리가 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뭐라 말하고 싶은 듯했지만, 그의 숨은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빗소리에 흩어졌다.

나는 굳이 존의 진짜 이름을 묻지 않았다.

그저 존의 얼굴을 발로 밟으며 도끼를 뽑았다.

뜨거운 피가 온몸을 적셨다. 차가운 비가 피를 씻어내려 했지만, 양이 워낙 많은지라 혈흔이 군데군데 남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순간 휘청였지만, 쓰러지진 않았다. 그거면 충분했다.

아직 해야 할 게 남았다.

"···호른, 로만."

한마디 뱉을 때마다, 가슴이 욱신거렸지만, 끝까지 완성했다. 말에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이 나를 움직이게 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 새끼들이 누구냐고···."

악마 녀석이 무릎 꿇고 멍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악마답게 참으로 뻔뻔한 녀석이었다.

한발 한발 움직이기가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움직였다. '그거면 충분해.'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질린 눈빛으로 나를 보던 녀석이 이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잠잠히 있던 녀석의 왼쪽 팔이 꿈틀거렸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앞으로 쓰러졌다.

땅에 얼굴을 부딪쳤지만, 신기하게도 아프지 않았다.

축축하게 젖은 땅이 내 몸을 잡아끌었다.

도끼를 땅에 찍으며 그를 밀어내고 녀석에게 기어갔다.

녀석은 이제 완전히 흰자가 없어진, 검은 눈동자로 하늘을 올려보고 있었다.

어떻게든 녀석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녀석의 얼굴은 완전히 추악한 그것에 잠식된 상태였다.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도끼를 들어서 내려쳤다.

쾅! 손아귀가 찢어지며, 도끼가 멀리 날아갔다.

녀석의 얼굴을 뒤덮은 노란색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눈동자가 내게 묻는 것처럼 느껴졌다. 네가 뭘 할 수 있냐고.

내가 할 줄 아는 건 많지 않았기에 고민은 짧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노란색 눈동자를 주먹으로 힘껏 내려쳤다. 단단한 쇠를 내려친 것처럼 찌릿한 통증이 오른손을 타고 넘어왔다.

그래도 아직 움직였다.

눈동자를 보며, 다시금 주먹을 내려쳤다.

끔찍한 고통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제, 오른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뭘 할 수 있지?'

아직, 허리와 목이 움직였다.

앞으로 엎어져 입을 힘껏 벌린 다음 흉측한 것을 깨물었다.

- 마음에 들었다.

멋진 중저음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며, 철처럼 단단했던 그것이 물렁물렁해졌다. 그 크기가 쪼그라들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입으로 한 움큼 물어뜯은 다음 옆으로 뱉었다. 그것의 맛은 브릭 어머니가 준 생선 빵이 맛있다고 여겨질 정도 끔찍했다.

올라오는 구역질을 삼키고 다시 물어뜯어서 뱉었다. 그를 반복하다가 뱉는 것도 귀찮아져서 삼켰다.

못생긴 녀석의 얼굴이 드러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흉측한 튀김옷 속에 숨겨져 있던 볼품없는 녀석이 드러났다.

못생긴 놈이 겁에 질린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녀석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나는 녀석을 마주 보며 방긋 웃었다.

아래에서 시큼한 냄새가 물씬 풍겼다.

녀석의 초점이 엇나간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도대체 그 새끼들이 누구냐니까! 난 모른다고 이 미친 새끼야!"

발작하는 녀석을 보며, 큰 소리로 웃었다.

'그래, 네가 알 필요는 없지.'

고개를 뒤로 힘껏 젖혔다.

욱신거렸지만, 아직 허리와 목이 움직였고, 그거면 충분했다.

"자···잠깐!"

쾅! 머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순간, 혼미해졌지만, 정신을 잃진 않았다.

다시 고개를 뒤로 힘껏 젖혔다.

쾅.

아직 움직일 수 있었다.

다시 고개를 젖혔다.

쾅.

녀석의 얼굴에서 피가 튀었다.

'아닌가, 내 피인가?'

상관 없었다.

쾅.

눈앞이 붉고 흐렸다.

더는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쾅.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쾅.

몸이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흐리고 붉은 시야 속에서, 녀석의 흐릿한 형체가 보였다. 머리가 있던 부분은 곤죽이 되어, 다양한 색이 뒤섞인 흉측한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꼭 파이 반죽 같군.'

그것도 아주 요리를 못하는 브릭의 어머니가 만든 파이 같았다.

[살아남아라.]

이제는 저주처럼 들리는 속삭임.

'나는 충분히 노력했어.'

무거운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왔다. 더는 막을 힘도 의지도 없었다.

투둑···.

빗줄기가 어깨를 두드렸다.

- 정말, 진심으로 마음에 드는군. 꽤 큰 힘이 들겠지만, 기꺼이 베풀겠네. 자네는 굉장히 맛있을 것 같으니 말이야.

좆같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단단한 몸

"어쭈, 막내가 또 쳐자고 있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잘 수도 있지. 이번 의뢰는 유독 길었으니까. 막내는 놔두고 주사위나 굴려보라고."

들어본 적 있는 대화였다. 불과 몇 년 전 일이었지만, 수십 년 전 일처럼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

'···꿈인가.'

눈을 뜨지 않았는데도, 주변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꽤 길었던 의뢰가 끝나고, 다 같이 술집에 모여서 의뢰 완수를 축하하고 있던 때였다.

도박꾼 웨인은 늘 그렇듯, 고르가이를 꼬드기고 있었고, 저번에 크게 잃었던 고르가이는 그를 거절했었다.

"네 놈이랑은 안 한다."

"어이, 고르가이. 덩치도 큰 놈이 그렇게 삐지지 말라고. 그렇게 옹졸한 마음으로 투기장에서 어떻게 살아나온 거야?"

"저거, 사기 주사위야. 컵에 들어갈 때, 저절로 굴러가는 거 봤어."

"정말인가."

"어, 정 의심되면 에이버리에게 묻던가."

"감히, 나 고르가이를 속이다니!"

도박꾼 웨인의 수법을 눈치챈 고르가이가 테이블을 엎으며 자리에서 일어났었고, 나는 떨어지는 술잔을 황급히 잡았었다.

"잠깐! 고르가이! 우리 동료잖아! 장난으로 한 거잖아! 액수도 얼마 안 되는구먼!"

"액수는 중요치 않다."

"총 1골드 32 실버입니다."

"생각해보니, 액수도 중요하군. 일어나라."

그에 놀란 도박꾼 웨인이 질겁하면서 양손을 들고 항복을 선언했지만, 고르가이가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달려들어서,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었다.

막내였던 나는 그들을 보면서, 웃음을 참느라 꽤 애를 썼지만, 목이 졸린 웨인이 오리 소리를 낼 때 참지 못하고 웃었다.

"그만, 거기까지."

고르가이가 웨인의 머리통을 뽑아버리기 직전에, 대장이 그들을 말렸었다.

'···그리고 막내인 나에게 술을 가득 따라보라고 했었지.'

"막내?"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그에 눈을 떴고.

아무것도 없는 검은 공간 속, 세상을 가득 채운 호박색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 아아, 정말 맛있군.

좆같을 정도로 멋진 중저음 목소리가 속삭였다.

***

투둑투둑.

빗방울이 어깨를 두드렸다.

주변은 빗소리만이 가득했다.

'···조용하네.'

나는 거의 다 부서진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앞에는 좀비보다 더 흉측한 놈의 시체가 있었다. 녀석의 얼굴은 형태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또 살아남았군. 이번에는 정말 끝인 줄 알았는데.'

몸의 모든 부분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양호했다.

몸이 원래도 단단하고 회복도 빨랐지만, 이번에는 거의 죽을 지경까지 갔었다. 살아남아도 최소한 몇 주는 누워있어야 했을 텐데, 생각보다 상태가 너무 좋았다.

몸이 쑤시고 고통스럽긴 했지만, 움직였고, 오히려 전보다 힘이 넘치는 기분도 들었다.

여전히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벌렸다.

빗물을 받아 꿀꺽 삼켰다. 안쪽이 가시에 찔린 것처럼 따끔거렸다.

"괜찮은가."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고개를 돌리니, 예의 그 검은 기사가 서 있었다. 기사의 그 멋진 검은색 갑옷은 죄다 부서져 있었고 한쪽 어깨는 붕대로 싸매져 있었다.

얼굴에 피곤함이 짙게 깔린 기사가 내 앞에 털썩 앉았다. 퀭하지만, 맑은 눈이 나를 뚫어지라 응시했다.

'눈싸움이라도 하자는 건가.'

오늘은 더는 싸우고 싶지 않았기에,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 미안하군. 자네의 전투가 너무 인상 깊어서 말이야. 나는 솔직히 악마 두 마리가 싸우는 줄 알았네. 그래서 마음속으로 기도했지. 만약, 저 악마 중 하나가 이겨야 한다면 그나마 안면 있는 자네가 이기기를 말이야."

"그런가. 응원이 느껴졌네. 내게 아주 큰 힘이 됐어."

"하하! 제법 괜찮은 농담을 하는군. 나도 한 농담하는데 말이야. 지금은 좀 피곤해서 안 나오지만."

녀석이 실없는 소리를 길게 늘여 놓으며, 슬쩍 손을 움찔거렸다. 그에 나는 습관적으로 녀석 오른손에 있는 반 토막 난 레이피어와 녀석의 어깨에 난 지독한 상처를 확인했다.

'저 녀석이 움찔거리면, 바로 녀석의 어깨에 손가락을 쑤셔 넣은 다음, 녀석이 레이피어를 놓치면 그를 주워 오러를 끌어 올리기 전에 목에 찔러 넣으면···. 또 내가 살아남겠군.'

나는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경우의 수를 가늠했다.

"···자네는 악마인가?"

녀석이 한껏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멍청한 질문에 순간, 허탈함과 동시에 억울함, 그리고 울분이 차올랐다. 내가 악마 잡겠다고 그 지랄을 하는 걸 봐놓고, 악마냐고? 호로 새끼.

"···내가 악마라면 이렇게 개지랄하면서 싸웠겠냐아아악-."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는데, 갑자기 입에서 검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번 흐르기 시작한 피가 좀처럼 멈추지 않아서, 발음이 꼬이며 늘어졌다.

웩- 끅.

참 없어 보이는 효과음을 내며, 피가 멎었다. 그래도 나름 악마도 잡았으니, 멋있게 무게를 잡고 싶었는데, 볼품없는 꼴을 여과 없이 보이고 말았다.

"푸흐··· 그래, 확실히 악마는 아니군. 내가 오해했네. 정말 미안하네."

녀석이 갑자기 고개를 깊이 숙이며, 진심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사과했다. 중세와 어울리지 않는 예의 있는 모습에 녀석이 기사라는 게 상기됐다.

기사는 준 귀족이다.

명백히 나보다 높은 신분이었지만, 이제 와서 말을 높이고 싶지 않았다.

'녀석도 별말 없으니, 괜찮은 거겠지.'

암묵적인 협의를 맺었다고 생각했다.

"사과를 받겠네."

"고맙군. 몸은 좀 괜찮은가?"

"내가 좀 단단해서."

"···싸우는 것을 보니, 어지간하게 단단하지 않으면 못 살아남겠더군."

녀석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단단하거든."

어떻게든 혼자 살아남을 정도로 말이야···. 뒷말을 삼키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에 잠시 나를 쳐다보던 녀석이 따라 웃었다.

"나는 벤이네. 이곳에 있는 모두를 대신하여 감사를 표하네. 자네의 전투는 내가 봤던 어떤 전투보다 고결했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거야."

"···나는 아론이다."

낯간지러운 말에 괜히, 수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누가 봐도 개싸움이었는데, 포장하는 솜씨가 꽤 대단했다.

"그래, 아론. 아론이라···, 좋은 이름이군."

"아주 좋은 이름이지."

"아, 악마는 내가 잡은 것으로 하겠네. 그게 자네에게도 좋을 테니."

벤이 죄책감과 자괴감이 뒤섞인 애매한 얼굴로 말했다.

'공을 원하는 건가? 하지만 그런 놈으로는 안 보이는데···.'

나는 녀석의 말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피곤에 절은 머리를 굴렸다.

만약, 벤이 아니라 일개 외성 경비 조장에 불과한 내가 악마를 잡았다는 게 알려지면···.

'교단 측에서 찾아오겠지. 귀찮아질 게 분명해.'

교단은 평소에 허허 웃다가도, 악마만 끼면 눈이 뒤집혀서 흉측한 무기를 번쩍 드는 놈들이었다.

기사 정도의 신분이 있다면 모를까, 일개 경비 조장인 나를 교단 놈들이 어떤 식으로 대할지 미지수였다. 눈빛에 탁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머릿속에 있는 악마를 꺼내려 내 머리를 쪼갤 수도 있었다.

그 정도로 미친 광신도 놈들이 즐비한 곳이 교단이었다. 그런 교단과는 웬만해서 얽히지 않는 게 상책이니, 벤이 처리했다고 하는 편이 내게도 좋았다.

'기사가 교단에 거짓말한 게 들키면 큰일 날 텐데 말이야.'

악마를 잡은 것은 그의 업적으로 돌아갈 테지만, 만에 하나 그 거짓이 걸렸을 때, 단순히 기사 자리를 내려놓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머릿속의 악마를 꺼내려 하겠지.

'···미개한 중세 놈들.'

미개하고 무식한 놈들이 즐비한 이곳에서도 제일 과격하고 무식한 곳은, 손에서 빛을 내뿜으며 그를 신의 증거라 뻗대는 놈들이 모인 교단이었다.

"고맙네."

내게도 좋은 제안이었다.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다른 놈들은 악마라는 이유로 쳐다도 안 봤을 테니···.'

목격자 걱정은 없었다. 이들에게 악마란 듣지도, 보지도 말아야 하는 존재였으니, 어디 숨어서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내 대답에 오히려 벤이 인상을 찡그렸다.

"···자네는 아무렇지 않은가? 자네는 악마를 잡았네. 그것도 한 마을을 지옥으로 만들고 귀족 영애까지 납치하려 했던 악마를. 이는 칭송 받아 마땅한 업적이네. 자네는 그런 대단한 업적을 내게 양보하는 것이네. ···잘하면 교단에서 축복을 내려줄지도 모르지."

벤이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얘는 뭐 어쩌라는 거지.'

먼저 제의하고 왜 아무렇지 않냐고 묻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표정이 일그러진 것을 보니, 녀석 나름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듯했다.

그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아쉬운가? 아니, 전혀.'

고개를 저었다.

결국, 목표였던 저 못생긴 놈을 패 죽였고, 나는 살아남았다. 그게 가장 중요했다.

그리고 미친놈들이 즐비한 교단과 얽히기도, 축복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

'애초에 신을 안 믿기도 하고.'

여기는 걷지 못할 정도로 중증인 이가 적절한 정성을 교단에 보이면 기도 한 번에 벌떡 일어나는, 자판기형 기적이 즐비한 세상이었다.

하지만 증거 없이도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듯, 뚜렷한 증거 앞에서도 나는 신을 믿지 않았다.

"아쉬울 게 뭐 있나. 정 찝찝하면, 보상금이라도 나눠 주던지."

그래도 기사치고 싹수가 있는 놈이니, 십 분지 삼이라도 주지 않을까. 속으로 내심 기대했다. 그것만 해도 경비 조장 월급의 몇 배는 될 것이다.

"···알겠네. 혹시나 받게 된다면 자네에게 전부 주겠네."

입술을 질끈 깨문 벤이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긍정했다.

'생각보다 더 착한 놈이네. 이거.'

어깨라도 주물러 줄까 하다가, 녀석의 어깨에 멘 붕대에 참았다. 붕대에서 진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니, 상태가 제법 심각한 듯했다.

저기를 주물렀다가는 내 손이 더러워질 게 분명했다.

"아! 그리고 아가씨가 아직 일어나지 못했는데, 혹시 깨우는 방법을 아나? 크게 소리도 질러보고 흔들어도 봤지만,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군."

벤이 고갯짓으로 누워있는 영애를 가리켰다.

영애는 유일하게 부서지지 않은 지붕 조각 아래에 누워있었다. 그 옆에는 예의 그 경갑옷 입은 여인도 있었는데, 둘은 평온한 표정으로 누워있었다. 마치, 낮잠이라도 자는 모양새였다.

'팔자 좋네. 옆에서 이 지랄이 났는데도···.'

지금 저 여자 때문에 이 사달이 났는데, 편히 자고 있다니···. 물론, 자의는 아니겠지만, 괜히 속이 꼬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깨우는 방법이라···. 아까 용병 얼굴을 후려쳐봤는데 안 일어나···."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때, 옆에서 큰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니, 뭔가 한가득 채웠는지, 주머니가 볼록 튀어나온 족제비가 손을 번쩍 들고 있었다.

'잘도 살아남았네.'

좀비와 어깨동무를 하고 누워있던 놈이니, 쉽게 죽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 훨씬 멀쩡했다.

"자네는?"

"딜런입니다!"

"아, 그렇군. 딜런, 고생 많았네. 영애님을 깨우는 방법을 안다고?"

"네! 제가 아까 용병들은 전부 깨워서 시체들과 싸우게 했습니다! 한 번에 깨울 수 있습니다!"

자신감 가득한 족제비의 대답이 못내 불안했다.

"그 방법이 뭔데?"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녀석에게 물었다.

"짠! 이걸로 허벅지 부분을 반 치 정도만 찌르면, 정신이 번쩍 들면서 일어나실 겁니다! 제가 아까 용병들에게 열 번 이상 해봤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고의 적절한 깊이로 찌를 수 있습니다."

붉은 피가 가득한 단검을 번쩍 든 족제비가 정말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미친 새끼.'

해맑게 내뱉는 개소리에 욕이 절로 나왔다.

"그러니까··· 자네, 지금 영애의 몸에 단검을 박겠다는 말인가?"

믿기지 않는 듯, 벤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벤의 오른손이 검 손잡이 쪽으로 움찔거렸다.

'그래, 그냥 찔러서 저 입 좀 닫게 해라.'

혹시나 족제비의 머리에 구멍이 뚫리게 되면, 저 악마 부산물과 같이 묻어주기로 다짐했다.

"예!"

다만, 족제비의 대답이 너무 자신감 넘치는 바람에 벤의 손이 멈췄다. 혹시, 족제비에게 뭔가 있는지 고민하는 듯했다.

"왜지?"

"악마가 관련된 일이니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잠이 더 길어졌다가, 저주가 악화될 수도 있고, 영원히 정신을 차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단검으로 찌르면 조금 아프겠지만, 그거야 포션 뿌리면 낫지 않겠습니까? 저희 같은 천민이야 이 정도는 침 바르고 끝내지만, 영애 님은 귀족이시니, 포션을 들고 다니실 게 분명합니다!"

'···왜 묘하게 그럴듯하지?'

명백한 개소리였지만, 묘하게 그럴듯한 게 신기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현명한 판단 같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녀석이 영애의 허벅지를 단검으로 쑤시게 둘 수 없었다.

화를 내야 할 벤이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영애와 족제비를 번갈아 봤다. 미간이 찌푸려진 것을 보니, 족제비의 멍청한 제안을 사뭇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했다.

"그냥 두면 일어날 거야. 만약 일어나지 않는다면 교단에 모시고 가면 되고."

혹여나 벤이 고개를 끄덕일까 봐 황급히 말했다.

"그··· 그렇군. 어떻게 영애의 몸에 칼을 대겠나. 자네 그 칼 내려놓게."

내 말에 지나치게 움찔거리는 걸 보니, 족제비의 말에 혹했던 게 분명했다.

토독.

전보다 훨씬 얇아진 빗방울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에 고개를 드니,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던 먹구름이 물러나고 있었다. 그 빈자리를 메꾸러 지평선에 걸린 태양이 슬그머니 올라오고 있었다.

아주 손톱만큼 올라왔을 뿐인데도, 어두웠던 세상이 훨씬 밝아졌다. 주변은 엉망이었다. 마을은 죄다 부서져 있었고 수십 구가 넘는 시체들이 서로 뒤섞여 있었다. 지옥을 그린 듯한 모습.

병사는 전부 당했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돌아다니는 건 용병들밖에 없었다. 그 수도 채 여섯이 되지 않았다.

용병들은 시체 사이를 돌아다니며, 시체를 뒤적거렸다.

어떤 놈은 시체의 갑옷을 벗기고 있었는데, 그게 잘 안됐는지 도끼를 꺼내 시체의 팔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팔을 잘라, 기어코 갑옷을 벗겨서 갈아입고는 히죽 웃었다.

그 웃음은 힘든 일을 마치고 두둑하게 봉급을 받은 이의 미소처럼 뿌듯함이 가득했다.

'···미개한 중세 놈들.'

쯧, 하고 혀를 차는데, 검을 네 자루나 메고 다니는 놈이 보였다.

대머리에 문신을 한 녀석이었는데, 놈은 네 자루에 만족 못 했는지, 좀비 시체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손은 두 개밖에 없는데, 참 욕심이 많은 놈이었다.

녀석의 허리춤에는 검이 너무 많았고, 때마침 내 허리춤은 허전했다.

"어이. 거기."

나는 손을 들어 녀석을 불렀다.

그에 두리번거리던 녀석이 나를 발견하고 인상을 썼지만, 내 앞에 있는 기사를 보고는 표정을 풀고 다가왔다.

녀석은 썩은 내와 혈향이 뒤섞여 끔찍한 냄새를 풍겼다.

가까이 다가온 녀석이 내 팔뚝을 훑었다. 내 팔뚝에 새겨진 흉터에 내가 동부 제일의 상남자인 것을 눈치챘는지, 녀석의 눈빛이 한결 온순해졌다.

"···예?"

"오른쪽에서 두 번째. 어, 그거."

나는 녀석의 허리에 걸린 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예? ···이거 말씀입니까?"

용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피가 잔뜩 묻은 검을 검집 채로 내밀었다.

그에 나는 그를 건네받아, 검을 뽑아서 살펴봤다. 길이가 살짝 더 길기는 했지만, 전에 쓰던 싸구려 검보다 훨씬 예리하고 상태도 좋았다. 마음에 들었다.

"그래, 싸우다가 잃어버렸는데, 찾아줘서 고맙네."

"···예? 그···거 죽은 용병 품에 있던 건데···."

녀석의 말을 무시하고, 허리춤에 검집을 꽂아 넣었다. 이제야 마음이 좀 놓였다.

얼빠진 표정을 짓던 녀석이 작게 욕을 중얼거리더니, 시체 쪽으로 돌아갔다.

- 아아, 들리는가? 이런···. 내 생각보다 많은 힘이··· 후우··· 이게 무슨··· 아아?

모기가 앵앵거리는 것 같아서, 고개를 가볍게 저으니 조용해졌다.

- 젠장, 너무 많은 힘을··· 아아···.

누군가 이미 털어갔는지, 헐벗은 존의 옆에 뒹구는 수통을 주워 입에 가져다 댔다.

'물을 너무 많이 섞었어.'

텁텁한 맛에 쯧하고 혀를 찼다.

다 마신 수통을 원통한 표정의 존 옆에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 됐건, 살아남았으니, 움직여야 했다.

악마 알레르기

잠시 시간이 지나자, 곳곳에 숨어있던 잡부들이 돌아왔다.

벤은 용병과 잡부에게 구덩이를 깊게 파도록 명령했다.

벤의 명령에 용병들은 몸에 주렁주렁 달고 있던 피 묻은 것들을 내려놓고 구덩이를 팠다.

나는 그 자리를 벗어나, 마을 뒤편으로 갔다. 그곳에는 다른 큰 나무에 둘러싸인 유독 작은 나무가 있었다.

[저와 비슷한 느낌이 들지 않아요? 언젠가는 옆의 나무들처럼 저도, 이 나무도 커지겠죠?!]

아이가 좋아하던 곳이었다.

나는 그 아래에 구덩이를 팠다. 물에 젖은 흙냄새와 퀴퀴한 냄새가 물씬 풍겼다.

손이 너무 쑤셔서 작은 구덩이인데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혹시나 비가 와서 쓸려 나오지 않을 정도로 깊게 판 뒤에, 아이의 시신을 가져와 구덩이에 넣었다. 아이의 굳은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내린 다음, 갑옷 주머니에 넣어뒀던 책을 꺼냈다. 책은 중앙이 깊게 파여 있었다.

혀를 차고 주머니에서 은화를 꺼냈다. 아이의 손에 책을 쥐여주고 그 위에 은화를 한 움큼 올렸다.

"노잣돈이다."

쓸모없는 행동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해야 내 마음이 좀 편할 것 같았다.

삐뚤어진 아이의 목을 바로 세워주고 올라와서, 흙으로 덮었다.

그를 마치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니, 큰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시체를 죄다 넣은 다음, 불을 질러놓은 뒤였다.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활활 타오르는 불과 물씬 풍기는 노릇노릇한 냄새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다음에 오면 마을 흔적도 없겠네.'

교단에서 정화를 핑계로 마을과 그 주변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 게 분명했다. 그나마 깊이 파서 묻어둔 게 다행이었다.

나를 발견한 벤이 다가왔다.

"일단, 캐서딕 성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네. 볼트 성은 하루하고 반나절 넘게 가야 하니까 말이야."

어깨의 상처 때문인지, 얼굴이 퍼런 벤이 말했다. 딱히 할 말이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니, 벤이 슬쩍 웃고 손을 저었다.

"자네도 몸 상태가 안 좋을 테니, 마차를 같이 타고 가지. 이제 자리도 넉넉하니까 말이야."

"뭐?"

뜬금없는 제안에 헛기침이 절로 나왔다.

"그 상태라면 걸어가기 힘들지 않나?"

"그렇긴 하지. 하지만···."

"아, 영애는 걱정하지 말게. 비비안 영애가 어리기는 해도, 생각이 깊네. 생명의 은인이 같이 마차에 타는 거로 화낼 인물이 아니야. 영애는 다른 귀족과 다르네."

벤은 마지막 부분의 '다른 귀족'을 강조했다. 다르면 또 얼마나 다르겠냐마는. 몸이 무거운 터라 그 제안이 끌렸다.

왔던 길을 생각하면 거의 반나절을 뛰어야 할 텐데, 지금 몸 상태로는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성에 도착할 때까지 영애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고···, 문제 생기면 쟤가 덤터기 쓰겠지.'

벤에 대해 깊게 알지는 못했지만, 문제가 생겼을 때 내뺄 놈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럼···, 뭐. 그렇게 하지."

"잘 생각했네. 이제 곧 출발할 테니. 먼저 타 있게. 나는 확인 좀 하고 오겠네."

벤이 옆에 세워진 마차를 가리키고는 용병들에게 향했다. 용병들은 놀란 말들을 달래느라 애쓰고 있었다.

말이 날뛰는 게 성질이 났는지, 용병 하나가 창대로 말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그에 말이 시원하게 뒷발차기를 했고, 정통으로 맞은 용병이 뒤로 날아가 데굴데굴 굴렀다. 용병이 빵빵할 정도로 갑옷을 겹쳐 입은 게 다행이었다.

용병이 잔뜩 성질이 나서 욕을 했지만, 꽤 아팠는지, 말한테 다가가진 않았다.

다른 용병들은 그를 손가락질하며 깔깔 웃었다.

나는 잠시 그를 보다가, 혀를 차고 마차로 향했다.

마차 문을 열고 나서, 순간 숨을 참아야만 했다.

멀리서 봐도 뛰어나게 아름다운 영애였지만, 그를 가까이서 보고 있으니, 숨이 턱 막힐 정도의 미모였다. 세상모르고 곤히 자는 영애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무방비하게 자는 영애를 보고 있자니, 괜히 손이 근질거렸다.

'아직도 처자고 있어?'

지금이라면 꿀밤 한 대 먹여도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젓고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분풀이는 후에 족제비 같은 놈한테 하는 게 손맛도 좋고 뒷마무리도 깔끔했다.

자리에 앉고 나서야 영애 옆에 그 경갑옷 여인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차 안에는 싱그러운 과일 향, 귀족 특유의 향수 냄새가 가득했다. 그 향이 얼마나 강한지, 머리가 살짝 멍할 정도였다.

나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간밤의 전투를 복기했다.

전투는 공부와 비슷했다. 목숨을 건 실전은 그동안 쌓았던 걸 보여주는 시험이었다.

예습하지 않으면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힘들었고, 시험이 끝난 뒤에는 복습해야 다음에 찾아올 시험도 통과할 수 있었다.

둘 중 하나라도 소홀히 하다가는 시험에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시험은 한번 떨어지면 끝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운이 좋았네.'

혼자 악마와 마주했다면, 이길 수 없었겠지만, 마을이 작아 악마가 흡수한 피가 적었던 것과 벤이 녀석의 힘을 한계까지 빼놓았던 게 컸다.

'만약, 다음에 악마와 마주하게 된다면···.'

- 아··· 아아!! 아아아아!!! 안 들리나!!

'시발! 깜짝 놀랐네! 뭐야?!'

뜬금없이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몸을 파르르 떨었다. 혹시 내가 정신병이라도 걸린 걸까 싶어서, 머리를 주먹으로 톡톡 쳤는데 통증이 있는 것을 보니, 아직 괜찮은 듯했다.

- 드··· 드디어! 젠장! 이게 무슨 꼴··· 아···아니, 벌써?! 자··· 아아···.

단말마를 끝으로 목소리가 다시 사라졌다.

'···많이 피곤한가.'

하긴, 그 지랄을 했으니 헛것이 들릴 만도 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지금도 정신이 몽롱했다.

그때, 마차 안으로 벤이 들어왔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벤이 내 옆에 앉더니, 마차 벽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추···출발!!"

족제비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며,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에 창문을 보니, 괴상한 자세로 말에 올라, 덜덜 떨고 있는 족제비가 보였다.

'쟤가 왜 저기에?'

족제비는 볼품없는 자세로 말 위에 앉아서, 무슨 병사라도 된 것처럼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심지어 손에는 병사의 것이었던 게 분명한 창도 쥐고 있었다.

"아, 자네의 혈육과도 같은 사이라지?"

벤의 말에 상황이 대충 이해됐다.

때마침 창문으로 족제비와 눈이 마주쳤고, 녀석은 겨우 말에 붙어 있으면서도 내게 제국식 경례를 올렸다.

'···될 놈이네.'

좀비 사이에 누워있을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만, 제국 북부에 던져놔도 살아남을 놈이었다.

그 뒤로 벤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고, 나는 그에 대답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야기는 의외로 잘 통했다.

녀석은 기사라고 뻗대지도 않았고, 재미난 이야기도 이것저것 많이 알았다.

처음에는 검에 관련된 이야기로 시작하여, 각 성에서 일어난 이런저런 일들로 이어졌다. 그렇게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으음···."

영애가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뒤척였다.

그에 나는 괜히 구석으로 붙었다. 중세에서 살아봤으면 귀족 공포증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모든 귀족은 개새끼들이었으니까. 내 흉터 중에 귀족의 것도 몇 개 있었다.

"하하, 걱정하지 말게. 비비안 아가씨는 다른 귀족들과 다르다니까. 자네에게 감사를 표하면 표했지, 뭐라 할 사람이···."

내 긴장을 눈치챈 벨이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나를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그때, 영애가 눈을 번쩍 떴다.

바다를 담은 듯 깊은 푸른 눈동자가 정면에 있는, 나를 응시했고. 그 아름다운 눈이 큼지막하게 커졌다.

"꺄아아아악!!"

그리고 영애의 붉은 입술에서 아주 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끼이이엑! 악마입니까?! 말씀해주십쇼!"

마치, 화답하듯 마차 밖에서 족제비의 비명이 이어졌다.

***

"죄송해요. 잠에서 깨자마자 낯선 이가 있어서 그만···."

벤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영애가 미안함 가득 담긴 얼굴로 사과했다.

벤은 영애에게 사실을 조금 바꿔서, 악마를 잡는데 내가 큰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내가 인간 방패 역할을 했고, 그 덕분에 자신이 악마를 해치울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내가 얼굴에 흉터가 많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 얼굴 보고 비명을 지르는 건···.'

괜히 찝찝하여 볼을 긁적였다. 나름 얼굴에 자신 있는데, 얼굴을 보고 비명을 질러 버리니, 기분이 좋진 않았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빗물에 대충 씻기는 했지만, 아직 얼굴 곳곳에 혈흔이 남아 있었다. 흉터 가득한 얼굴에 피까지 덕지덕지 묻어 있으니, 영애의 심정을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아··· 아니에요! 아론은 정말··· 음··· 믿음직하신걸요."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던 영애가 박수를 짝하고 치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냥 잘 생겼다고 하면 되지.'

그에 따라 웃었더니, 영애의 입꼬리가 굳었다.

영애는 금세 웃는 얼굴로 돌아왔지만, 나는 이미 영애의 얼굴이 굳은 걸 본 뒤였다.

"그럼 마을 분들은···."

"죽은 병사, 용병들과 같이 불태웠습니다."

영애의 물음에 벤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에 영애가 오른손을 머리에 가져대고 고개를 숙였다. 태양교의 기도 방식이었다.

영애는 그 후로 한참을 기도했고, 마차에는 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으···으음···."

경갑옷 입은 여인이 신음했다.

"아, 카일라. 괜찮아요?"

"아···가씨?"

"네. 저에요."

영애가 경갑옷 입은 여인의 어깨를 잡았다. 경갑옷 입은 여인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더니,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고.

"끄윽! 아···악마!! 악마다!! 아가씨 뒤로 물러나십쇼!"

대뜸, 허리춤의 검을 뽑으며 나를 겨눴다.

익숙한 전개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얼굴에 피가 묻어서 그래.'

나는 속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나는 객관적으로 잘 생겼다. 확신할 수 있었다. 얼굴에 묻은 피를 제대로 닦지 않아서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게 분명했다.

"카일라! 그만 하세요! 이분은 무섭고 흉악하게 생겼지만, 악마가 아닙니다!"

"하···하지만··· 저게 어찌···."

"알아요! 꿈에서 볼까 무섭다는 걸! 하지만 사람을 외관으로 판단하면 안 되는 법입니다! 검 내려놓으세요!"

영애가 눈에 힘을 주며 소리쳤다.

'너무하네. 이 새끼들.'

나를 먹이려는 게 분명한 대화에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나 정도면 꽤 생긴 것 아닌가?'

얼굴에 흉터가 좀 많기는 했지만, 이것은 자랑스러운 상남자의 증거였다. 어딜 가도 대접받을 수 있는 훈장과도 비슷했다.

"···악마라고?!! 아아악마!! 아···악마!"

그때, 족제비가 갑자기 기괴한 비명을 지르면서 고삐를 거세게 잡았다. 말이 고개를 돌려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족제비가 순식간에 멀리 도망갔고, 족제비가 소리친 악마라는 단어에 주변은 난리가 났다.

눈을 손으로 가린 용병들이, 신을 부르짖었고, 짐꾼들은 수레 아래로 숨었다.

아무래도 악마 PTSD가 짙게 남은 듯했다.

그리고 그를 진정시키는 데에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그··· 죄송합니다."

얼굴이 새빨개진 경갑옷 여인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그 옆 영애의 얼굴도 별반 다를 것 없이 붉은색이었다.

"아닙니다. 사람을 악마로 오해 좀 할 수 있죠."

경갑옷 입은 여인은 그렇다고 쳐도, 영애가 사과하니, 제법 난감했다.

지금까지 얽혔던 귀족이 두 자릿수였지만, 귀족에게 사과를 받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신에게 선택받은 고귀한 핏줄이라는 귀족 놈들은 잘못해도, 고개를 숙이는 법이 없었다.

물론, 애초에 그 잘못을 지적하는 이도 없었지만.

"정말 괜찮습니다."

본디, 본인에 대한 믿음이 굳건한 자라면 타인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 법이었다.

'확실해. 나는 미남이야.'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을 때, 때마침 나를 보던 영애와 눈이 마주쳤다.

딸꾹!

영애가 어깨를 작게 떨며, 딸꾹질했다.

***

별다른 문제 없이 캐서딕 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외성부터 난리가 났다. 그도 그럴 게 풀푸츠 가의 문양이 그려진 마차가 피범벅이 되어 돌아왔으니, 난리 날 수밖에 없었다.

마차는 외성 경비대의 호위를 받으며 내성으로 들어갔고, 나는 끌려다니면서 이런저런 보고를 올려야 했다.

치안관 윌리암부터 시작하여, 경비단장과 외성 경비대장까지 하나하나 찾아가서 했던 말을 반복했다. 나중에는 입만 열면, 말이 주르륵 나올 지경이었다.

또 하필 우리 조가 주간인 날이라, 이 무식한 외성 경비대장이 나를 성문 쪽으로 보내려 했다.

그때, 내성 경비대원이 찾아왔고, 내게 4일 휴가가 내려졌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이 노동법 없는 중세에서 4일 휴가란, 정말 어마어마한 포상이었다.

캐서딕 외성 경비대에 전설로 남을 정도로 큰 포상이었다.

그에 나는 같이 근무 나갈 준비를 하던, 베르만을 약 올리고 재빨리 여관으로 향했다. 딱딱했던 침대가 푹신하게 느껴졌다.

나는 기절하듯 그대로 잠들었다.

그때부터 2일이 지났고, 나는···.

"미친, 시발?"

켈에게 빌린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거울 안에 펼쳐진 모습이 너무 믿기지 않아서, 눈을 몇 번이나 비비고, 꿈인가 싶어서 내 대가리도 스스로 후려쳐봤지만, 애석하게도 그대로였다.

'이게 뭐야.'

내 심장 부근의 피부가 나무처럼 이질적으로 쩍 갈라져 있었는데, 그 색이 불길한 검은색이었다. 그리고 중앙에 그 크기가 너무 작아서, 보석처럼 보이는 노란색 눈이 있었다.

이 흉측한 것은 위치상 악마의 손자국이 분명했다.

도착한 뒤 첫날은 잠만 잤고, 이틀째에 이걸 발견했다. 그리고 삼 일째 되는 지금까지 나는 믿을 수 없는 사실에 거울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 허억··· 허억··· 이··· 이제 좀 들리나?

아주 작은 목소리가 내게 속삭였다.

'···좆 됐네.'

악마의 손자국과 어디선가 들리는 환청.

결국, 몸속에 악마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 뱉는 게 귀찮다고 처먹은 게 문제인가.'

어떻게 악마를 들이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악마를 받은 자는 가슴에 악마의 손자국이 있으니, 악마의 손자국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말을 나누지 말고 바로 목을 쳐서, 불태워야 한다는 게 전부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 왼쪽 가슴에 사형 선고 판결문을 문신한 것과 다름없었다. 심지어 교단에 가져가면 큰 보상을 받을 테니, 이 흉측한 사형 선고 판결문은 복권 1등 용지의 기능도 겸하고 있었다.

'이거 안 떼지나?'

손톱으로 악마의 손자국을 긁었는데,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 손톱이 부서질 것처럼 흔들렸다. 그에 검을 뽑아서 긁었는데도 오히려 검의 이가 나갔다.

내려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불리고 와서 다시 시도 해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아우··· 시원하다.

녀석의 반응에 열만 오를 뿐이었다.

'뭔데 너.'

- 뭐겠나.

아까부터 놈은 묘하게 긁는 말투였다.

'악마겠지.'

- 무지한 자들은 그렇게도 부르지.

'악마가 아니란 건가?'

- 음··· 우리가 아직 그런 이야기를 할 사이는 아닌 것 같군.

몇 마디 주고받았을 뿐인데, 어딘가 심통난 듯한 녀석의 말투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노란색 눈동자를 보면, 그 말라깽이 녀석의 왼팔에 있던 놈이 맞는 것 같은데···. 교단 새끼들도 악마를 먹지 말라고 경고라도 하던가. 예방할 생각은 하지 않고, 쳐죽일 생각만 하는 무식한 새끼들. 원래 이런 문제는 추후 처리보다 예방이 중요한 법이거늘.'

침착하려 애썼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이곳에 넘어오고 나서, 모든 경우의 죽음을 생각했었지만, 거기에는 몸에 악마를 받아 화형당하는 건 없었다.

'진짜 미치겠네.'

- 그렇게 기쁜가.

'지랄.'

녀석의 말에 절로 욕이 나왔다.

- 다른 놈들은 나를 못 받아서 안달인데, 너의 반응은 이상하군. 보물을 앞에 두고도 불평이라니, 이게 그 멍청이라는 건가.

'그럼 그 좋다는 놈들에게 가겠나? 몇 놈 뽑아서 보여주지. 7구역에 가면 좋다는 놈들이 줄을 설 거야.'

- 미안하지만, 너를 회복 시키느라, 모았던 모든 힘을 다 써서 말이야. 이렇게 말을 건네는 것도 힘들 지경이야. 힘을 되찾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지.

'시간? 어느 정도?'

- 오래는 안 걸리지. 한 백 년 정도.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가슴 부근을 주먹으로 내려쳤다가, 손이 찌릿하여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좀 더 빨리 나갈 수 없나? 내가 악마 알레르기가 있어서 말이야. 지금도 몸이 막 간지럽고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서 죽겠군.'

- 아···알레르기? 뭔지 모르겠지만, 싫다면 방법이 있지. 자네가 좀 도와주면 되네.

'방법이 있으면 그것부터 말해야지. 뭔데?'

- 인간 천명 분의 피를 내게 먹여주면 되네. 쉽고 간단하지.

'···미친 새끼인가?'

무슨 스튜 사달라는 이야기처럼 가볍게 말하는 녀석의 모습에 절로 짜증이 솟구쳤다.

- 수많은 이름으로 불렸지만, 그런 이름은 없었네.

'그거 말고 딴 건?'

- 없네.

단호한 대답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좆 됐네.'

- 왜 그렇게 싫어하지?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묻는 목소리에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심장 부근에 악마를 달고 있는 게 왜 싫냐니?'

그 이유가 백 가지도 넘어서, 어디부터 말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교단, 기사, 제국군, 사냥꾼···. 만약, 악마인 것을 들키게 된다면 앞으로 내 열혈한 사생팬이 될 게 분명한 놈들이었다. 그중 어느 것도 만만하지 않았다.

- 나는 네게 힘을 줄 수 있다.

'지랄··· 힘은 무슨. 그런 끔찍한 힘 필요 없다.'

말라깽이가 왼팔만 잠식했는데도 기사를 죽이기 직전까지 갔던 걸 보면 강력한 힘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 힘의 모습이 워낙 유별난지라, 사용하는 순간 인생이 끝날 게 분명했다.

- 아, 그게 문제였군. 그건 놈의 그릇 때문에 그런 형태로밖에 발현이 안 된 것이고, 자네가 원한다면 다른 방식으로도 줄 수 있네.

'힘이고 뭐고, 필요 없다. 그냥 나가라니까. 나는 악마가 싫어. 나는 악마는 죄다 머리가 뽑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악마 혐오자야.'

다시 옆에 놓았던 검을 잡았다. 이걸 어떻게든 긁어서 떨어뜨려야···,

검으로 박박 긁고 끝부분으로 찔러도 봤지만, 검의 날만 뭉개질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 그러고 보니, 쇠를 든 자들은 이런 걸 좋아하지.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녀석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검에서 푸른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그 이글거리는 푸른 불꽃은 환한 푸른 빛으로 방을 가득 채웠다.

그 불꽃은 오직 악을 멸하고 정의를 관철한다는 인류의 검, 기사의 고결한 증거인 오러였다.

'악마가 오러를···?'

뜬금없이 나온 오러에 머릿속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졌다. 그동안 내가 알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증거에 사고가 좀처럼 따라가지 못했다.

- 히이익··· 히이익··· 자··· 잘··· 보았느냐! 내 힘의 증···거. 히이익···.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푸른 불꽃이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시간이 어찌나 짧았는지, 2초도 되지 않을 듯했다.

- 히이익··· 후우우··· 히이익··· 끄으윽···.

거친 숨소리가 섞인, 앓는 소리가 잠시 이어지더니, 이내 목소리가 사라졌다.

"···조루?"

그저 쇠붙이로 돌아온 검을 내려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오러와 악마

'···악마가 오러를?'

전혀 상상도 못 한 상황에 순간, 머리가 굳었다.

오러, 그것은 노력으로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이곳에서 오러는 단순히 깨달음을 얻어서 도달하는 경지가 아니었다. 오직, 제국의 손을 거친 이들만이 오러를 다룰 수 있었다.

매해 제국에서는 재능이 있는 청년들을 뽑아서 수도에 있는 특수한 기관에서 교육했다.

출신도, 국적도, 인종도 상관없이 오직 실력만을 보기 때문에, 매해 제국의 수도로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몰렸다.

정확히 모르지만, 거기서 선별되어 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이들 중에서도 소수만이 오러를 다룰 수 있다고 들었다.

아직도 그 기관에서 어떤 교육을 받는지, 오러의 원리가 무엇인지, 대외적으로 밝혀진 게 없었고, 오러는 여전히 제국의 전유물이었다.

출신도, 국적도 보지 않고 뽑기 때문에 제국이 아니라,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간 이들이 제법 되는데, 여전히 제국이 오러 기사 생산법을 독점하고 있다는 게 이상했다.

'···그런데 악마가 오러를 뽑아낸다니?'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느 가정을 하더라도, 지금까지 알던 게 송두리째 바뀌었다.

밝혀지지 않는 오러 기사 제조 과정, 뜬금없이 오러를 일으키는 악마. 둘 사이의 간극이 묘하게 가까우면서도 멀었다.

그것은 긁어봤자 부스럼밖에 나오지 않겠지만, 긁지 않을 수 없는 비밀이었다.

'마법사는 혼자 깨달음을 얻어서 입문하는 경우가 제법 있다. 여자 팬티 도둑 한스도 그랬고. 그에 반해 기사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왜 기사는 평범한 판타지 소설처럼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는가. 어째서 제국의 손을 거치지 않은 이들 중에는 오러를 뽑아내는 이가 없는가.

'···혹시.'

쿵쿵!

그때, 문을 두드리는 거친 소리에 상념이 깨졌다.

화들짝 놀라, 옆에 둔 검부터 챙기고,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그 위에 두꺼운 가죽조끼까지 걸쳤다. 어찌 됐건, 들키는 순간 변명도 못 하고 끝이었으니까. 매무새를 가다듬고, 거울에 비쳐도 아무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뒤,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내성 경비대의 사생아 제곱, 제이스가 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녀석은 여길 찾아온 것이 불만인지 얼굴을 있는 힘껏 구기고 있었다.

'이 새끼가 여길 왜?'

가슴에 악마를 박아둔 상태라 그런지, 모든 게 의심스러웠다.

나는 제이스의 허리춤에 걸린 검을 곁눈질로 살피며, 습관적으로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슬쩍 곁눈질로 같이 온 이가 있는지 확인했다. 사람 하나 겨우 지나다닐만한 복도에는 제이스밖에 없었다.

"벤 경이 부르신다."

"왜?"

"평민이 건방지게 이유를 묻는군."

내 물음에 제이스 녀석이 한쪽 입꼬리를 삐쭉 올리며 이죽거렸다.

그 반항적인 태도에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여기라면 보는 눈도 없었으니, 몇 대 패서 녀석에게 예의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도···.

'아니, 지금은 사려야 해.'

고개를 작게 저었다. 일단, 악마를 처리할 때까지는 최대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게 좋았다.

"알았다. 가자, 사생아 제곱."

악마를 받았지만, 그에 굴하지 않는 성품을 보여줄 필요성이 있었다.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 빌어먹을 평민이!"

내가 붙여준 별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얼굴을 잔뜩 구긴 제이스가 대뜸 주먹을 날렸다. 그에 나는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렀고, 내 주먹이 먼저 녀석의 코에 닿으며 제이스의 주먹이 힘을 잃었다.

정통으로 코를 얻어맞은 제이스가 코를 부여잡으면서 쓰러졌다.

'무식한 놈.'

별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하면 될 것을 일단, 주먹부터 날리고 보는 무식한 중세 의사소통 방식에 혀를 찼다.

"아, 미안."

"···빌어먹을 평민놈."

코피가 터졌는지, 손이 붉게 물든 제이스가 나를 노려봤지만, 딱히 무섭지 않았다. 사생아 제곱인데도, 귀족의 끈을 놓지 못하는 제이스는 뒤에서 칼을 꽂진 않았으니까.

"그래서 어디로?"

제이스에게 손을 내밀며 물었다.

코를 휑하고 풀어 터진 피를 바닥에 닦은 제이스가 손을 본채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돌아섰다.

그에 머쓱해진 손을 바지춤에 슥슥- 닦고 제이스의 뒤를 따랐다.

"아론! 마침, 가져다주려고 했는데! 어? 어디 가요?"

아래로 내려가자, 고기가 듬뿍 들어간 빵을 든 해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나는 악마의 손자국을 본 뒤로,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기에 요 며칠간 해나가 직접 방까지 음식을 가져다줬다.

그러면서 해나는 자신이 먹을 것까지 가지고 와서 같이 먹었다. 내가 왜 여기서 먹냐고 물으니, 해나는 '혼자 먹으면 악마가 든대요!'라는 쓸데없는 소리를 늘여 놓았다.

해나는 아무 생각 없이 뱉은 말이었겠지만, 괜히 혼자 깜짝 놀라는 바람에 한참을 딸꾹질로 고생했다.

"얘 따라가는데."

"아! 아론의 동료분이시구나! 안녕하세요! 저는 아론의 음··· 해나에요!"

이상한 부분에서 말을 흐린 해나가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음."

인사를 받은 제이스가 턱을 위로 치켜들며 고개만 까딱 숙였다.

제이스는 원래도 턱이 긴 놈인데, 그런 놈이 턱을 치켜드니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여기요! 아론, 잘 좀 먹고 다녀요. 요즘 좀 핼쑥해진 거 같아요."

해나가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맥주잔과 빵을 건넸다.

"···핼쑥?"

제이스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에 내가 마주 보며 장난스럽게 어깨를 움츠리자, 제이스가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오늘 들어오실 거죠?"

해나가 내 가족 조끼의 줄을 매듭지어주며 물었다. 매듭을 묶은 해나가 내 가슴 부근을 두드렸을 때, 나는 긴장하여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당연하지, 여기 하루 방값이 얼만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대답했다.

"완전 저렴한 편이거든요?! 그리고 아론한테는 더 적게 받잖아요! 그거 원가도 안 나와요! 원가도!"

해나가 입을 삐쭉 내밀며 톡 쏘아붙이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해나는 최근에 '원가'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는지, 뭐만 하면 '원가'를 입에 담았다. 어제는 예의 그 손동작을 하며, 40 쿠퍼면 원가도 안 나온다고 하는 걸 보니, '원가'의 제대로 된 뜻을 모르는 것 같았다.

"음···."

"뭐냐, 그 표정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해나가 들어간 주방과 나를 번갈아 보는 제이스의 눈빛이 왠지 기분이 나빴다.

"저런 처자가 네 놈과··· 흠··· 희한하군."

"희한하긴 뭘. 네 출생이 더 희한하지."

"···?"

내 말을 이해 못 했는지, 제이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나는 그런 제이스를 보며 해나가 준 빵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생선 빵의 효과인가.'

전에는 맛없던 고기 빵이 이제는 제법 맛있게 느껴졌다. 퍽퍽한 빵에 밴 고기 기름도 풍미가 대단했다. 일단 비린내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요리가 분명했다.

"이··· 이··· 이···!"

빵을 두 입째 먹었을 때, 제이스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제이스는 잔뜩 힘을 준 눈으로 나를 노려보다가, 뒤로 돌아 빠르게 걸어 나갔다.

"야, 삐졌냐."

"···."

뒤로 보이는 목이 새빨간 것을 보니, 삐진 게 분명했다.

'그것 좀 놀렸다고 삐지기는.'

제이스는 1구역으로 향했다. 사실 1구역이라고 해봤자, 그저 다른 구역보다 건물이 좀 더 높고, 사람들의 옷이 깨끗할 뿐이었다. 중세 특유의 거리 똥냄새는 여전했다.

'수도나 도시 정도나 가야, 냄새가 좀 덜하지.'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빵을 다시 한 입 먹었다.

"조심하세요!"

그때, 위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고개를 드니, 귀엽게 생긴 여인이 둥근 물건을 들고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여인의 얼굴에 담긴 싱그러운 미소보다 그 둥근 물건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시발.'

여인이 뭐 하려고 하는지, 눈치챈 나는 화들짝 놀라 옆으로 비켜섰다. 제이스는 벌써 멀찍이 떨어져 있었고, 길을 가던 이들도 분분히 흩어져 건물에 붙었다.

그리고 잠시 뒤, 2층에 있는 여인이 창문 밖으로 요강에 있는 내용물을 쏟아냈다. 푸드득-,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오물 냄새가 물씬 풍겼다.

'···좆같은 중세.'

황급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다만, 냄새는 피할 수 없었다.

"아, 엠마."

"제이스! 좋은 아침이야!"

길거리에 오물을 뿌린 여인과 제이스가 밝게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에 욕이 절로 나왔다.

이게 1~3 구역과 다른 구역의 차이점이었다. 1~3 구역 놈들은 길거리에서 싸지 않고, 집에서 요강에 싼 다음 그걸 길거리에다 버렸다.

그런 놈들이 길거리에서 똥 싸는 걸 미개하다고 손가락질하는 게 나는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버릴 거면 변소에 버리던가.'

특별히 따로 물길을 내어, 공용 변소까지 만들어줬는데도, 이들은 여전히 창문 밖으로 뿌렸다. 거리에 똥냄새가 진동해도 별 상관없는 눈치였다.

"엠마, 이따 같이 저녁 먹겠어? 저기 푸른 달팽이에 예약해뒀는데."

"좋지! 그럼 이따가 볼까?"

'방금 똥 뿌린 여자한테 데이트 신청이라니···.'

헤벌쭉한 제이스의 얼굴을 보다가, 한입 남은 빵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대충 씹은 다음 맥주로 넘겼다.

'···미개한 중세 놈들.'

도저히 적응되지 않는 똥냄새에 이제는 입버릇이 된 말을 중얼거렸다.

이제 곧 사생아 세제곱의 아비가 될 제이스는 1 구역에 있는 회당 앞에서 멈췄다.

회당 주변에는 작게 울타리가 쳐져 있었는데, 그 크기가 거의 집 두 채는 짓고도 남을 정도로 넓었다. 회당의 높이는 옆의 건물의 배는 될 정도로 높았고 하얀색 석재건물은 보는 이로 하여금 교단의 위세를 느끼게 했다.

제이스는 회당 앞에서 주먹을 이마에 대며, 작게 고개를 숙였다.

'···회당으로 불렀다고?'

도둑이 제발 지리는 심정으로 나는 괜히 고개 숙인 제이스의 목을 노려보며, 검 손잡이를 매만졌다.

제이스 놈이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 쪼잔하게 몇 대 쥐어팼다고, 앙심을 품은 놈이 여기로 유인한 건 아닐까. 생각이 이어지며, 검 손잡이를 잡은 손에 식은땀이 났다.

의뢰 때문에, 같이 행동했던 사제의 말이 떠올랐다.

[악마는 간교하고 교활하며 늘 거짓을 속삭이기에, 그 실체를 밝혀내기가 녹록지 않습니다. 파악하기 위해서는 불태우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아! 물론, 가슴 부근을 확인하는 방법도 있지요.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불에 태워야 합니다. 악마의 저열하고 달콤한 속삭임에 넘어갈 수 있으니까요.]

당시 제법 이름이 알려져 있던 사제가 했던 말이었다. 그러니 이런 변방에 있는 인물 중에서 겉모습만으로 악마를 알아볼 리가 없었다.

'악마를 판별하는 방법은 불태우거나, 손자국을 확인하는 수밖에 없어.'

악마와 혈투를 벌일 때, 가죽 갑옷이 찢어지긴 했지만, 심장 부근은 멀쩡했다. 그 때문에 나도 목욕하고 나서야, 악마의 손자국을 확인했으니, 이를 본 사람은 확실히 없었다.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과열된 망상을 잠재웠다.

'여기서 도망가면 오히려 그게 더 수상해.'

호흡을 가다듬어,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생각을 정리하고 고개를 드니, 제이스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먹구름이 낀 하늘처럼 탁한 푸른 눈을 마주 보며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

"아, 요즘에 힘든 일이 많아서. 상담 좀 했네."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으니, 주춤거릴 필요 없었다.

나는 오히려 녀석을 앞질렀다.

반들반들한 문의 손잡이를 잡고 밀었다. 혹시, 예전 영화에서 봤던 결계처럼 스파크가 튈까 걱정했지만, 아무 문제 없이 들어설 수 있었다.

'···악마 관점에서 걱정해야 하는 날이 올 줄이야.'

회당의 내부는 변방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화려했다. 색이 들어간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은 아름답게 쪼개져 흰색의 회당을 색칠했으며, 바닥에는 균일한 크기의 대리석이 깔려 있었다.

"어서 오시지요."

머리의 윗부분을 동그랗게 민 수도사가 나를 반겼다. 수도사는 내가 돈을 내러 왔다고 생각한 듯, 밝게 웃으며 허리춤의 짙은 갈색 주머니를 꺼냈다.

'원래 덕담부터 하지 않나?'

수금이라도 하는 모양새에 어이가 없었다.

"벤 경이 부르신다고 해서 왔습니다."

나는 수도사를 보며, 손바닥이 앞으로 보이도록 오른손을 말아서, 이마에 댔다.

"아, 사제님이 말씀하셨던 분이시군요."

그에 잠시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던 수도사가 이내, 표정을 고치고는 마주 주먹을 이마에 댔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수도사가 발소리도 내지 않으며 걸었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그를 따라 움직였다.

'문이 하나밖에 없다. 뒷문은?'

수도사 뒤를 따라가며, 도주로를 확인했다. 회당 안쪽은 길게 복도가 이어져 있었고, 그 옆으로 나무문이 하나씩 배치된 형태였다. 나는 슬쩍 손가락에 침을 발라, 바람이 부는지 확인했다.

'안쪽에 뒷문이 있군.'

수도사가 옆으로 돌기 전, 바람이 불었기에 나는 안쪽에 뒷문이 있고, 열려 있을 거라 확신했다.

수도사는 유난히 큰 나무문 앞에서 멈췄다. 수도사가 손등으로 문을 정중하게 두드렸다.

"예. 들어오시지요."

안에서 인자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수도사가 옆으로 비켜섰다.

후···.

작게 심호흡하고, 허리 잡는 척하며 왼손을 검 손잡이에 위치한 다음, 문을 천천히 밀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최악을 상상했다. 문을 밀고 슬쩍 뒤로 비켜섰다. 예상했던 습격은 없었다.

방은 단정하면서도 꽤 화려했다.

중앙에는 등 부분이 긴 나무 의지가 여섯 개 놓여 있었고 길쭉한 테이블 위에는 흰 천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다양한 빵과 금색 잔이 놓여 있었다.

벤과 배불뚝이 사내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 왔군."

나를 발견한 벤이 활짝 웃었다. 벤은 전과 달리, 은색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전에 입었던 검은색 갑옷보다 질이 낮아 보였다. 힘을 주어, 검을 찔러 넣으면 뚫릴 것 같은 재질. 나쁘지 않았다.

벤의 맞은편에는 배불뚝이 사내가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목에 두른 금색 케이프에는 사제의 증거인 검은색 줄 두 개가 그려져 있었다. 굳이 내가 손을 쓰지 않아도, 성인병에 숨도 못 쉴 것 같은 양반이었다.

배불뚝이 사내 뒤에, 두꺼운 갑옷을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웬만한 남성만큼 큰 키. 아무 표정 없는 차가운 얼굴, 검은색 단발, 여인은 등 뒤에 자신의 몸만 한 대검을 매고 있었다.

'대검이라···.'

대검을 사용하는 이는 대부분 까다로웠다. 그 길이가 긴 것도 그렇지만, 저런 무식한 걸 휘두를 정도면 근력 자체가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선 것이기에 칼을 맞댈 수가 없었다.

습관적으로 여인의 팔길이와 대검 길이의 합을 가늠하고 있을 때, 나는 여인의 갑옷 중앙에 그려진 문양을 보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여인의 갑옷은 백색으로 빛나는 두꺼운 갑옷이었는데, 그 정중앙에 해가 그려진 망치 문양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 문양이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이단 심문관.'

여인은 이교도의 악몽, 악마 추적자, 혹은 대리 심판자라고 불리는 이단 심문관이었다.

그제야 여인의 허리춤에 걸린 흉측한 메이스와 검은색 성서가 눈에 들어왔다.

여인과 눈이 마주쳤고, 나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여인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쿵쿵.

두꺼운 갑옷에서 발생하는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면서 내 심장을 누군가가 쥐어짜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들켰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이단 심문관은···.'

여인의 검은 눈동자는 아무 감정이 담겨있지 않아,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나는 다가오는 여인을 보며 검 손잡이를 매만졌다. 그러자 한결 마음이 차분해졌다.

여인이 좀 더 가까이 오면 내가 유리한 거리였다. 대검을 뽑기 전에 검을 찔러 넣을 수 있는 거리.

투구를 쓰지 않아 노출된 여인의 목을 확인했다. 그에 다양한 경우의 수가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하지만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하든, 그 끝이 좋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나는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여인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여인의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이 보였다.

이불에 오줌을 눈 아이 같은 표정. 그에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훌륭한 도망자의 얼굴로 변했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여인이 대뜸 오른손을 올렸다.

'교단 쪽이 아무리 회복력이 뛰어나다고 한들, 목을 베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목을 베고 여인으로 문을 막은 다음···.'

검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만약, 여인이 대검의 손잡이를 잡거나, 메이스를 꺼내는 시늉만 하더라도 바로 목을 베어 버릴 수 있게 준비했다.

툭.

여인이 내 이마에 주먹을 가져다 댔다.

여인의 가벼운 행동에 복잡하고 붉은색으로 가득했던 생각들이 사라졌다.

"오오··· 이단 심문관의 축복이라니."

사제의 중얼거림에 나는 그제야 여인이 무엇을 하려는 건지 깨달았다.

통성명도 하지 않고, 대뜸 축복을 내리는 게 이해되진 않았지만, 일단 눈을 감았다.

'···진짜 악마가 됐나.'

단순히 이단 심문관이 다가왔다는 이유만으로, 죽이는 방법을 다섯 가지나 떠올렸다는 사실에 입맛이 썼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최선을 다해 살아남기로 약속했으니까. 이미 내게 채워진 목줄이 많았다.

'근데··· 축복받아도 되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몸에 악마가 있는 이상, 축복을 받으면 끔찍한 고통이 찾아오지 않을까. 하지만 이단 심문관의 손을 쳐낼 수는 없었다.

혹시나, 다가올 고통에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이를 질끈 다물었다. 팔이 잘리는 정도만 아니면 웃으며 참을 수 있을 것이다.

- 감히, 개 따위가. 어디에 손을 대느냐.

그때, 갑자기 잔뜩 화가 난듯한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여인의 손에 환한 빛이 감돌았고.

- ···흐으.

마사지를 받은 아저씨처럼 흐물거리는 목소리를 끝으로 조용해졌다.

'···이 새끼 진짜 악마 맞아?'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아무 감정도 떠오르지 않은 여인의 깊고 검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내 손은 여전히 검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금태양 경비조장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던 여인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표정이 없어서, 여인은 잘 만들어진 인형처럼 느껴졌다. 수틀리면 대뜸 상대의 머리를 깨는, 저주의 인형.

"하하. 조안나 자매님이 워낙 조용한 성격이라. 앉으시죠."

곁눈질로 여인을 살핀 배불뚝이 사제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빈 의자를 가리켰다.

'이게 그냥 조용한 수준인가?'

나는 고개를 작게 저으며, 사제가 가리킨 곳에 앉았다.

"벤 경이 얼마나 칭찬을 하던지, 직접 뵙고 싶어서 요청했습니다. 허허. 실제로 보니, 정말 장대하시군요."

사제의 말에 벤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뼈다귀를 물어온 강아지와 비슷했다.

"감사합니다. 저는 아론입니다. 블리안 사제님."

캐서딕 성에 있는 사제는 블리안밖에 없었다.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켈에게 들은 특징과 일치했다. 걷지 못할 정도로 배불뚝이에 볼에 박힌 주근깨, 그리고 주먹코.

'묘사 참 잘했네.'

켈이 로사 집 주변에서 본 적 있다고 신나서 알려준 적 있었다. 켈은 다음날 옆집 창부가 흠뻑 젖은 성서를 버렸다는 것도 알려줬다.

"오, 저를 알고 계십니까?"

블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예. 캐서딕 성에 사는 이 중에서 블리안 사제님의 덕망을 듣지 못한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유명하긴 했다. 블리안은 종종 값을 내지 않고 축복으로 대신하기 때문에 원망이 자자했다. 물론, 앞에서는 말을 못 하니까, 우리에게 자그마한 목소리로 푸념하는 정도였다.

블리안은 전형적인 세속에 찌든 사제였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블리안을 질책하지 않았다. 사제라는 신분이 기사와 귀족 사이의 애매한 위치에 있기도 했고, 저 정도면 변방의 사제치고는 양호한 편이기도 했으니까.

블리안은 전형적인 세속에 '적당히' 찌든 사제였다.

"허허··· 저는 한참 미흡합니다. 아론처럼 듬직한 분이 외성 경비 조장을 맡고 계셔서 캐서딕 성이 지금까지 별문제가 없었나 봅니다. 하하."

블리안의 기름기 넘치는 볼이 푸들거리며 떨렸다. 내 칭찬이 제법 마음에 든 듯했다. 캐서딕 성이라고 발생하는 문제가 없진 않았다. 다만, 블리안은 사제라, 그런 문제를 겪지 않았을 뿐.

"블리안 사제님 같은 분이 캐서딕 성에 있으니, 악마들이 얼씬 못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블리안 사제님이 새벽마다 기도를 드린다는 이야기는 캐서딕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 다 알고 있습니다."

나는 다시금 입에 발린 말을 내뱉었다.

아무 생각 없이 가볍게 나온, 무게 없는 칭찬이었지만, 이 배불뚝이 사제 블리안은 평소에 칭찬을 받아본 경험이 별로 없는지, 얼굴이 단번에 풀렸다.

"쑥스럽습니다. 허허··· 이거 아론 같은 분을 이렇게 늦게 만나다니!"

블리안은 여인의 눈치를 보며, 히죽 웃었다.

원칙적으로는 귀족의 대가리도 깔 수 있는 게, 이단 심문관이었다. 사제라고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블리안이 다른 사제보다 청렴하고, 적당히 세속적이라고 해도, 이단 심문관은 상대 평가가 아니라 절대 평가를 할 테니, 블리안의 머리가 깨질 이유는 충분히 넘쳤다.

"저도 덕망이 높으신 블리안 사제 같은 분이랑 알게 돼서, 정말 영광입니다. 말씀 편하게 하시지요."

"허허··· 금칠을 제대로 해주는구먼."

블리안의 입술이 살짝 들리며, 사이로 늘어지는 침에 인상을 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블리안은 정말 기분이 좋은지, 몸을 뒤로 눕히며 몸을 잘게 떨었고, 그에 테이블이 흔들렸다.

'확실해, 못 알아본다.'

나는 그런 블리안과 이단 심문관을 곁눈질하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조금이라도 내게서 악마의 낌새가 느껴졌으면, 사제가 저렇게 웃을 리도, 이단 심문관이 가만히 있을 리도 없었다. 악마와 말을 섞는 것조차 죄로 분류하니까.

"그런데 무슨 일로?"

슬쩍 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아, 악마를 잡는 신성한 일에 도움을 줬는데,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가. 심지어 신실한 아론인데 말이야!"

"하하, 보답을 바라고 한 행동은 아닌데 말입니다."

"알지! 알지! 하지만 그래도 선행에는 보상이 뒤따라야 하는 법일세. 그래야 사람들도 선을 행하는 것이지! 이는 세상의 이치를 바로 세우기 위함이니, 부담스럽더라도 거절하지 말게!"

칭찬 두 번 만에, 블리안은 제 살이라도 떼줄 것처럼 살가워졌다.

'평소에 얼마나 칭찬을 받지 못했으면···.'

안쓰러운 마음이 생길 뻔했지만, 늘어진 블리안의 볼살에 금세 사라졌다. 생각해보니, 칭찬을 들을 구석이 없는 사내였다.

블리안이 품을 뒤지더니, 작은 상자와 은색 주머니를 꺼냈다. 그 둘이 왠지 따뜻할 거 같아, 기분 나쁘기는 했지만, 원래 중요한 것은 그 내용물이었다.

은색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기분 좋은 소리가 들리며, 내 얼굴도 단번에 풀렸다.

"자! 받게! 이는 적합한··· 아니, 오히려 부족한 보상이니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받게!"

나는 슬쩍 손바닥을 펼치면서, 고개를 돌렸고, 블리안이 내 손바닥 위에 상자와 주머니를 올렸다. 나는 '이러시지 않아도···.'라고 중얼거리며 잽싸게 그를 챙겼다.

은색 주머니는 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로 무거웠고, 그 작은 상자에 각인된 금색 선에 어깨가 절로 올라갔다.

'뚱뚱하고 못생겼지만, 마음만은 착하구나.'

나는 환히 웃으며 블리안의 손을 맞잡았다. 그 말랑말랑한 손을 몇 번 흔드니, 블리안의 얼굴이 푸르죽죽해졌다.

"그···그만 마음은 충분히 알았네!"

벤이 내 어깨를 잡고 나서야, 내가 블리안의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확실해. 손자국만 보이지 않으면 모른다.'

좀 더 확실히 하자는 생각에, 사제의 손까지 잡았지만, 눈치채지 못했다.

그 뒤로 블리안은 한참이나, 신이나, 축복 같은 것에 대해 말했고, 나는 악마 들린 이 중에서 가장 신실한 모습으로 그를 경청했다.

***

"흥흥···."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불운의 사고로 심장에 괴상한 게 박히기는 했지만, 이단 심문관도, 사제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사제는 나를 칭찬하며 선물까지 줬다. 마지막에는 자주 찾아오라고 부탁까지 할 정도로 친해졌다.

이단 심문관이 축복을 내린 이후로 그 목소리가 사라졌다. 손자국은 그대로라서 나는 녀석이 기절 비슷한 것을 했다고 짐작했다.

어차피 당장 떼어낼 방법이 없으니, 단순하게 생각했다. 남들 앞에서 가슴만 까지 않으면 된다고. 유교 국가에서 25년 넘게 살았었기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블리안, 그 빛돼지가 준 주머니가 너무 두둑하여 내 모든 걱정과 복잡한 머리를 밀어버렸다.

은색 주머니 안에는 금화가 3개나 들어있었다. 그 영롱한 노란빛에 없던 신앙심이 저절로 생겨 잠깐 기도도 했다.

어차피 악마가 아니어도, 언제 대가리가 깨져도 이상할 게 없는 세상이었다. 거기에 페널티 하나가 더해진 것뿐이었다. 가슴을 보이면 불구덩이로 직행하는 단순하면서도 살벌한 페널티.

'그렇다고 페널티만 가지는 건 억울하지.'

어차피 당장 떼어낼 수 없다면 이용할 생각하는 게 맞았다.

아주 짧았지만, 분명히 검에 오러가 서렸었다. 지속 시간이 심하게 짧아도, 오러는 찰나의 순간에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비장의 한 수였다. 늙은 용병 존의 손에 숨겨져 있던 꼬챙이처럼.

다만, 그 꼬챙이가 악마의 것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애초에 악마가 맞나?'

일단, 놈과 이야기를 좀 더 나눠야 할 듯했다.

"조장, 기분 좋아 보입니다?"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상념이 깨졌다.

고개를 돌리니, 로사의 것이 분명한 장미색 스카프를 목에 두른 켈이 삐딱하게 서 있었다.

"아, 좋지. 좋아."

나는 그에 슬쩍 웃으며, 목을 내밀었다. 내 목에는 순금으로 된, 멋들어진 태양 문양의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금으로 된 태양 목걸이, 줄여서 금태양 목걸이는 블리안이 준 작은 상자에 있었는데, 블리안의 말로는 행운을 가져다주는 금목걸이라고 했다.

물론, 나는 미개한 중세인처럼 미신을 믿진 않지만, 금은 미신이 아닌 확실한 믿음의 증거였다.

"뭐··· 뭡니까 그 촌스러운 건."

"촌스럽다니."

영롱한 금빛을 뿌리는 이 금태양 목걸이가 촌스럽다니, 물건 보는 눈이 처참했다.

"여기 푹 파인 이빨 자국은 뭡니까?"

"아, 그런 게 있어."

손을 가볍게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며, 허리를 틀었다.

"그··· 갑옷도 샀습니까?"

"마차꾼이 들어왔던데, 거기서 샀지."

"조장이 무슨 돈이··· 아니, 그리고 왜 하필 그렇게 제각각인 색을··· 통일이라도 하지···."

켈이 말을 더듬으며, 내 위아래를 여기저기 훑었다. 정확히 내가 새로 구매한 곳에 꽂히는 시선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캐서딕 성에 들어온 마차꾼을 죄다 모아두고, 그중 철저하게 기능만을 고려해 모은 컬렉션이었다. 모두 손으로 두드리면 뭉툭한 소리가 날 정도로 순도가 높았고, 그 두께도 최소 손가락 한 마디 수준이었다.

철이 함유된 만큼 그 가격이 말도 안 됐지만, 경비대는 특별히 할인을 받았기에 마련할 수 있었다.

"그··· 아니··· 아닙니다. 조장이 좋으면 뭐···."

켈이 말을 더듬으면서 마른세수를 했다.

오늘 아침 출근할 때, 제이스를 마주쳤는데 놈도 화들짝 놀라 도망쳤다. 이곳에서는 몸에 두른 철이 신분이었으니, 나는 몇 단계를 뛰어오른 것과 같았다.

"그···그럼 그렇게 입고 순찰 도실 겁니까?"

"당연하지."

무슨 멍청한 질문인가. 당연히 입고 다니려고 샀지. 나는 어깨를 쫙 펴서, 어깨 견갑을 살폈다. 보는 이에게 절로 마음의 평화를 주는 초록색.

흉갑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망을 느끼게 하는 붉은색. 무릎 보호대는 흙에 뒹구는 일이 많으니, 티 나지 않도록 갈색으로 구매했다.

몸을 누르는 갑옷의 무게에 자꾸만 턱에 힘이 들어갔다. 당장 기사 옆에 서 있어도 꿀리지 않을 듯했다. 아니, 오히려 압도할 것이다. 자그마치 금화가 두 개나 들어간 컬렉션이니.

"맙소사··· 그··· 갑시다. 조장."

그에 고개를 끄덕이고 순찰을 나섰다. 내 위용을 알아본 것일까, 숙덕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깨를 펴고, 철의 위세를 당당히 보였다.

"아, 조장. 조장 없을 때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문제? 무슨."

이 조막만 한 성에 문제가 있으면, 또 뭐가 있겠나 싶은 생각에 가볍게 되물었다.

"그··· 베르만이 용병들이랑 또 시비가 붙었는데···."

"베르만?"

베르만이 용병들을 싫어하는 건 유명했다. 그 때문에 전에도 일이 몇 번 있었다. 물론, 결국에 가벼운 스포츠로 판명 났긴 했다.

"요즘 성내에 용병들이 좀 많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아득히 먼일처럼 느껴졌다.

"근데 요즘도 용병이 많아?"

"예. 오히려 더 많아졌습니다."

살짝 골치 아프긴 했다. 용병 놈들은 늘 사고를 치고 다녔기에 그 수가 늘어날수록, 목줄 풀린 강아지가 늘어나는 것과 같았으니까. 그리고 그 똥을 치우고 강아지들의 목줄을 다시 묶는 게 우리 일이었다.

"아무튼, 시비가 붙었는데···. 음··· 놈들이 도끼를 꺼냈습니다."

"뭐?!"

순간, 어이가 없어서 목소리가 커졌다. 아무리 막 나가는 용병들이라고 해도, 성안에서는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게 있었다.

그리고 그것 중에서 쇠붙이를 뽑지 않는 건 최상단에 있었다.

"그래서 베르만은."

"그놈들도 그냥 위협하려고 꺼낸 거라, 그냥 긁힌 정도라서··· 일단은 집에 있습니다."

"아, 그래. 그놈들은? 통?"

"예, 통에 있긴 한데···. 아, 조장 이미 우리가 잘 타일러 뒀습니다. 그냥 알아두시라고···. 아! 조장!"

"먼저 순찰 돌고 있어라. 금방 갔다 올 테니까."

뒤에서 들리는 켈의 목소리에 손을 흔들어주고, 나는 곧장 통으로 향했다.

통은 외성 경비대 지하에 있는 방을 부르는 은어였다. 주민들이 사고 치면 그냥 통에 넣어두고, 생각나면 꺼내줬는데 한번 들어 갔다 오면 효과가 꽤 좋았다.

도박쟁이 하나가 통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주사위만 보면 비명을 질렀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있었다.

지하로 들어가는 문 앞에는 6조의 꼬맹이, 마른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마른은 젖살도 안 빠진, 외성 경비대의 막내였다.

"꼬맹이."

"으음··· 히이이익! 아론 조장! 놀랐잖습니까!"

나름 막내라고 배려해서, 부드럽게 어깨를 두드렸는데, 녀석은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더니, 소리를 빽! 하고 질렀다.

'6조 조장이 누구였더라.'

어느 놈이 막내 관리를 안 하는지 떠올리며, 녀석이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뭐하러 오셨습니까? 아, 그 베르만 형 때문에 오신 겁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른이 신나서 허리춤에 걸린 열쇠를 건넸다.

"그중에 눈에 흉터 난 놈 있는데, 걔가 저한테 난쟁이라고 했습니다. 아주, 고약한 놈이 틀림없습니다."

마른이 내 뒤를 졸래졸래 따라오며, 미주알고주알 말했다. 어떤 놈이 제일 냄새나는지, 또 코에 여드름이 크게 난 놈은 코를 심하게 골기 때문에 코를 좀 고쳐야 한다고 떠들었다.

두꺼운 나무문 앞에서, 잠시 몸을 풀었다. 뒤에 걸린 횃불만이, 어둠 가득한 지하를 밝히고 있었다.

마른은 긴장했는지, 창을 꼬나쥐고 거친 숨을 쉬었다.

"여기 있다가, 내가 들어오라고 할 때 들어와."

"···예옙!"

나무문의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고 돌렸다. 얼마나 뻑뻑한지, 거의 부수는 느낌으로 돌리고 나서야, 잠김이 풀렸다.

횃불조차 없어서, 어둠으로 가득한 공간에 사내 몇 놈이 쭈그려 앉아 있었다. 내가 문을 열며, 빛이 들어오자 기다린 것처럼 사내들이 벌떡 일어났다.

'나무 족쇄도 다 부숴놨네.'

본래, 팔과 다리에 나무 족쇄 하나씩 묶어두는데,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놈들은 그를 다 푼 상태였다.

'총 다섯 놈.'

나는 차분히 달려드는 사내들의 수를 셌다.

"덮쳐라! 적은 하나다! 하나만 재끼면 돼!"

"개 같은 경비대!! 먼저 시비 걸고는, 그것 좀 긁혔다고 우리를 여기에 가둬?!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감히, 겁도 없이 혼자 들어오다니!"

부순 나무 족쇄를 갈아서 만들었는지, 놈들은 각자 나무 꼬챙이 하나씩 들고 내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그중 한 놈의 목소리가 유난히 낯익었다. 제일 뒤에서 소리를 빽빽 지르며, 선동하는 놈.

"덮쳐! 어어··· 엇? 형님?"

족제비였다.

'이 새끼는 왜 여기 있어?'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통에 잡혀 왔단 말인가. 어이가 없었다.

"이 파렴치한 죄수 놈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지 못할망정! 감히 신성한 경비대에 창을 겨누다니! 벼락 맞아 죽을 놈들!!"

나를 발견한 족제비가 펄쩍 뛰더니, 나무 꼬챙이의 방향을 틀어서, 제 앞에 있던 놈의 다리를 냅다 후렸다.

"아악! 뭐야! 이 새끼 왜 이래!!"

"이 새끼라니! 이 벼락 맞을 죄수 놈아! 얌전히 정의의 매를 맞아라!"

족제비가 쓰러진 놈을 연신 나무 꼬챙이로 두들겨 팼다.

나머지 세 명은 그를 눈치채지 못하고, 내게 달려들고 있었다.

'족쇄 좀 바꾸자고 해야겠네.'

제일 앞에서 달려든 사내가 꼬챙이로 내 가슴을 찔렀지만, 단단함의 극치인 내 흉갑을 뚫을 수 없었다. 나는 손을 쭉 뻗어 사내의 목덜미를 잡고 그대로 땅에 내리꽂았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사내가 혀를 길게 빼물었다.

'하여튼, 갱생도 안 되는 놈들.'

쯧, 혀를 차며 그 뒤에 있던 놈의 가슴을 발로 찼다. 쾅! 소리가 나며 녀석이 뒤로 쭉 날아갔고, 마지막 한 명만 남았다.

"으아악! 죽어 이 새끼야!!"

맨몸으로 찔려도 안 죽을 것 같은 나무 꼬챙이를 손으로 잡았다. 녀석이 안간힘을 쓰는 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나는 그대로 나무 꼬챙이를 들어 올렸고, 녀석이 공중에 떴다.

녀석이 당황한 듯, 나를 멍한 표정으로 봤고, 나는 그대로 나무 꼬챙이를 아래로 휘둘렀다. 녀석이 균형을 잃고 쓰러지면서, 나무 꼬챙이가 내 손에 들어왔다.

"나쁘지 않네."

적당한 그립감과 무게에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 정도면 이 무식한 놈들을 갱생하는데 충분했다.

"다들 모여서 엎드려."

꼭 이 악마 놈들을 갱생시키겠다고 다짐하며, 활짝 웃었다.

***

"저···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형님!"

족제비가 자기 엉덩이를 부여잡고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놈들은 갱생의 증거를 줄줄 흘리며 엎어져 있었다. 마른은 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하! 이제 누가 난쟁이지?!'라고 외치면서 주먹으로 머리를 내려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놈들은 '다시는 경비대에게 깝죽거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복명복창했다.

역시 원초적인 폭력은 가장 효과적인 교육 수단이었고, 그 교육을 길게 받은 녀석들은 제대로 갱생된 듯했다.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진짜요··· 형님!"

족제비는 다른 기절한 놈들의 바지에 손을 집어넣더니, 은화를 꺼내 내 앞에 잔뜩 가져왔다. 심지어, 제 옷에 박박 문질러 광까지 냈다. 그 양이 제법 됐기에 이놈이 정말 억울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베르만을 공격했던 놈들은 나머지 넷이었기에, 족제비는 몇 대 때리지 않았다. 그리고 때릴 때마다 족제비는 죽는시늉하며, 바닥을 뒹굴뒹굴 굴렀기에 시끄러워서 더 때리고 싶지도 않았다.

"정말입니다. 형님. 제가 형님이랑 다니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거 아닙니까? 그래서 이제 칼도 놓고! 정당하게 흘린 땀으로 먹고살고자···."

"그래서?"

"마지막! 저엉말 마지막으로! 그 주사위 놀이를 했는데···."

정당하게 흘린 땀으로 먹고살려고 마지막으로 주사위 놀이를 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건지,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했는데."

"그 개새끼가 사기를 치는 거 아닙니까!"

"···사기라고?"

"예. 제 눈은 진짜 정확합니다! 분명히 컵 안에 넣고 주사위를 굴렸는데, 주사위 구르는 소리가 한 번 더 나는 거 아니겠습니까?!"

족제비가 열분을 토해냈다. 처음에는 그저 패배자의 핑계라 생각했는데, 가만히 듣다 보니 주사위 6이 다섯 번 연속으로 나왔다는 건 좀 많이 이상했다.

"6이 다섯 번 나오는 게 말이 됩니까?! 그 년이 펑퍼짐한 튜닉을 입고 있었는데, 손목이 이상해서 손목 좀 보자고 했더니! 꺄아아악! 비명을 지르면서 경비대를 부르는 거 아닙니까! 갑자기 옆에 있던 사내들이 나를 붙잡고! 나··· 진짜 억울해서 못 살겠소! 형님! 내가 그 시체 놈들과 싸우면서! 형님과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사선을 넘으면서! 얻은 값진 은화들이! 아이고- 형님!! 저 정말 눈이 뒤집힙니다! 눈이!!"

좀비 사이에 누워 있던 놈이 말만 들으면, 열 마리는 해치운 것 같았다.

'값진 은화들을 주사위 놀이에 걸어?'

침도 안 바르고 입바른 소리를 늘여 놓는 녀석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이놈이 돈을 잃었건, 말건 상관없었지만, 그게 사기도박에 당한 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곳에서는 술집에 앉기만 하면, 주사위 놀이할 거냐고 물을 정도로 주사위 도박이 오락화되어 있었다. 만약 전문 도박 사기꾼이 성에 들어온 거라면, 여러 가구가 파탄 날 가능성이 있었다.

'음··· 확인해봐야겠네.'

주사위 생각을 하니,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쩔 수 없는 순찰의 일환이다.'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디서 털렸는데?"

"아픈 인어 술집이오! 형님! 역시 형님밖에 없다니까! 크흑··· 내 은화로 형님 좋은 검 하나 마련해주려고 했었는데···."

5구역에 있는 술집이었다. 꽤 규모가 크고, 주사위 전용 테이블도 구비 해놔서, 일이 끝난 사내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장소를 확인했기에 일어났다.

"역시··· 형님밖에···."

"나무 족쇄 더 두꺼운 거로 채워두고, 다음부터는 꼭 두 명 이상씩 무장하고 들어가라고 해."

"예, 알겠습니다. 가만히 있어!"

"형님!! 형님!"

"가만히 있으라고!! 에잇!"

무언가 깨지는 것처럼 둔탁한 소리를 뒤로하고 통을 나섰다.

'주사위 놀이라···. 승부사로 돌아갈 시간인가.'

나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까닥거렸다.

***

마른은 낑낑거리는 놈을 묶고 나서, 손을 탁탁 털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악명 높은 아론 조장은 사람 패는 것만큼은 언제봐도 대단했다. 마치, 사람을 패기 위해서 태어난 백정 같았다. 아론에 대한 떠도는 소문 중에 '투기장' 출신이라는 것에 마른의 마음이 기울었다.

'···근데 아론 조장, 도박 금지되지 않았나?'

마른은 예전에 있던 일이 떠올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이··· 설마 또 그러겠어.'

고개를 가볍게 저어, 생각을 털었다.

그때, 묶어놓은 놈 중 눈에 흉터가 난 놈과 눈을 마주쳤고, 마른은 짐짓 아론의 그 무서운 표정을 흉내 내며, 나무 꼬챙이를 고쳐 잡았다.

"자, 이제 누가 난쟁이지?!"

마른은 아론처럼 웃었다.

사기도박 패거리

켈은 4구역에 있는 술집 앞,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술집이라고 해봤자, 식당이랑 다를 바 없었다.

근면과 성실을 미덕으로, 나태를 죄악으로 삼는 태양교 특성상, 해가 나와 있을 때는 대부분 일을 했기 때문에, 술집 앞에는 켈밖에 없었다.

"···진짜 이렇게 입고 다니네."

켈이 손에 든 맥주잔을 홀짝거리며, 질린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뭐라고?"

"잘 어울린다고 했슴다. 그래서 패고 왔습니까?"

"교육이지."

"조장, 손등에 묻은 피나 닦으십쇼."

손등에 묻은 피를 켈의 어깨에 대충 비벼 닦았다.

"아잇! 진짜!"

켈이 발작하듯, 손을 쳐냈지만 이미 닦은 뒤였다. 그에 켈은 작게 한숨 쉬며 맥주를 벌컥 들이마셨다.

"너는 근무 시간에 술을···. 쯧."

"어! 아론! 오랜만이에요! 한 잔 드릴까요?"

"응, 사과주로."

갈색 머리가 매력적인 샤롯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품속에 넣어둔 수통을 꺼내, 샤롯에게 건넸다.

미개하고 무식한 중세 놈들에게 술까지 들어가면, 열에 아홉은 상남자를 빙자한 난봉꾼으로 변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술집은 그런 놈들이 손님이었기에, 대부분 경비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 조장도 마실 거면서 왜 뭐라 합니까."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 켈을 무시하며 그 옆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았다. 몸이 앞뒤로 흔들리는 게 퍽 재밌었다.

"나는 조장이고 임마. 조장은 마셔도 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딨습니까. 억지도 적당히 부려야지."

"있다니까. 꼬우면 조장하던지."

"어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아, 맞다. 너 사기 도박꾼에 대해서 들은 거 있냐."

"사기 도박꾼? 그거 조장 아닙니까?"

"···그건 사기가 아니었다고."

켈이 정말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에 작게 한숨을 쉬며 손을 저었다. 그저 단순히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몇 번이나 설명했지만, 누구도 믿지 않았다.

"아무튼, 요즘 뭐 주사위 놀이에 관련해서 들어온 거 없어?"

"음···,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조가 이번 주는 주간 아닙니까. 보통 그런 경우는 야간에 발생해서 잘 모르지 말입니다."

"아론! 여기 있어요."

"아, 고마워 샤롯."

얼마나 가득 채웠는지, 살짝만 흔들려도 넘치는 수통을 재빨리 입에 가져다 댔다. 미지근했지만, 그래도 물씬 풍기는 사과 향과 텁텁한 맛이 제법 괜찮았다. 물을 거의 섞지 않았는지, 단번에 열기가 확 올라왔다.

'···좀만 시원하게 마시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캐서딕 성의 가장 아쉬운 점은 변방의 성이다 보니, 시원한 맥주나 음료가 없다는 점이었다. 맥주는 뜨뜻하거나, 미지근했기에 오줌 같았다.

수도나 도시에 가면, 책을 포기한 떨거지 마법사들이 술을 차갑게 해서 파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게 가장 그리웠다. 밍밍한 맥주의 스무 배 되는 가격이라도,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저, 들은 적 있어요."

샤롯이 벽에 등을 기대더니, 무슨 비밀스러운 지령을 받은 것처럼, 괜히 눈을 내리깔며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급 애들은 성격이 다 비슷한가.'

해나 와는 다른 느낌이었지만, 그 발랄함의 결이 비슷했다.

"아! 해나는 잘 지내요? 요즘 손님이 너무 많아져서, 통 못 봤네."

"해나?"

"네! 해나가 말 안 해줬어요? 해나가 아론 이야기 많이 했는데."

"딱히."

"아무튼! 사기 도박꾼 이야기 들은 적 있어요."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온 샤롯이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고, 쉿쉿···거렸다.

나는 그를 보며, 여급 애들은 공통으로 어딘가 이상한 점이 있다고 확신했다.

"최근, 레이슨이랑, 이모트가 당했대요! 둘 다 저희 술집에서 술 진탕 먹고, 소리를 꽥꽥 질러서 알고 있어요. 아, 그때 브릭 씨가 도와줬었는데···, 혹시 브릭 씨 만나는 여자 있어요?"

뜬금없이 다른 길로 샌 샤롯이 왼손을 동그랗게 말고, 오른손 검지로 그를 통과시키면서 물었다.

'···얘네는 저런 걸 어디서 배우는 거야?'

어디 숨겨진 여급 커뮤니티라도 있는 게 아닐까 의심됐다. 몇 달 전에 도시 물 먹은 몇 놈이 성에 들어오면서, 길드 같은 거로 주민들에게 헛바람을 넣고 있다던데, 한번 뒤져봐야 할 듯했다.

"브릭? 그 녀석은 너무 순순해서 재미없는데. 괜찮겠어? 샤롯 아가씨?"

"아후··· 뭐야···. 켈! 나이가 몇인데 그런 말투를 써요! 징그러워!"

"뭐···뭐어? 내 말투가 어때서! 이거 사교계에서 유행하는 말투라고!"

켈이 눈썹을 찡긋거리며, 느끼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자, 샤롯이 질겁했다. 그에 켈이 세상 무너진 표정을 지었지만, 샤롯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어? 아론. 갑옷 바꿨네요? 알록달록해서 이뻐요. 꼭 렉시벨 같아!"

켈의 눈이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이렇게 완벽하고 실용적인 색 배합을 보고, 촌스럽다니.

"그렇지? 역시 샤롯이야. 근데 렉시벨이라니?"

"그런 게 있어요! 이쁜 거예요."

아마, 아주 멋지다는 걸, 다른 왕국어로 이야기한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아무튼, 그래서··· 목공소에서 일하는 레이슨이랑 이모트가 알고 있다고?"

"응응! 알려줬으니까, 저도 알려줘요! 브릭에 대해서!"

샤롯의 물음에 잠시 고민했다.

바른 생활의 대명사인 브릭은 이상적인 경비대원이었다. 좆같은 생선 빵이 문제였지만, 그것만 견딜 수 있다면 결혼 상대로도 나쁘지 않았다. 샤롯도 뒷말이 없는 여인이었고. 나름 잘 어울렸다.

"없을걸. 걔 워낙 숙맥이라."

"숙맥이에요?! 아하하! 잘 어울려!"

"그런 딱딱한 녀석이 뭐가 좋다고··· 자고로 남자라면 양털처럼 부드럽게, 때로는 강철처럼 단단하게···."

"그러면 그거 써야겠다!"

샤롯이 박수를 치며, 켈의 말을 잘랐다.

"그거?"

"저쪽 언니한테 배운 거 있어요! 남자들이 무조건 넘어오게 만드는 기술!"

"그게 뭔데?"

"비비기!"

샤롯이 뜬금없이 등을 피며, 가슴을 쭉 내밀었다. 나는 그 괴상한 동작을 보면서, 브릭의 반응을 상상했다.

"통하겠네."

"진짜요? 와아!"

브릭 녀석은 당황해서 몸이 굳어 어버버 거릴 게 분명했지만, 후일담을 듣는 게 재밌을 것 같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샤롯이 방긋 웃으며 박수를 쳤다.

사과주를 한 모금 더 마신 다음에, 수통 입구에 마개를 끼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흔들의자가 잘 가라는 듯, 앞뒤로 움직였다.

"브릭한테 말 좀 잘해줘요!"

샤롯이 손을 붕붕 흔들었다.

"···조장."

"왜."

켈이 뜬금없이 진지한 얼굴로 날 불렀다.

"로사가 저것보다 배는 큽니다."

"그래. 좋겠다."

물론, 굳이 귀담아듣지 않았다.

목공소는 성문 밖에 있었기 때문에, 성문으로 향했다. 오늘 검문은 쿼터와 뱀눈 풀이었다.

"···조장님,"

성문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던 쿼터가 고개를 작게 숙이고 다시 눈을 감았다. 잠을 어떻게 서서 자는지 매번 볼 때마다 신기했다.

그 옆에는 뱀이 사람을 잡아먹어서 그 형상을 얻은 것처럼 생긴 풀이 마차꾼 하나를 잡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아니, 드렸잖소."

"쓰읍. 요즘 물가가 올랐다니까. 그리고 50 쿠퍼를 누구 코에 붙이나?"

"조금만 봐주소. 가뜩이나 마차꾼들이 몰려서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데···."

"에헤이! 이 사람이! 신께서 가라사대, 거짓 하지 말지어다! 모르나?! 내가 저번에 자네 나갈 때 마차가 텅텅 비었던 걸 알고 있는데!"

상대도 만만치 않은 듯했지만, 뱀눈 풀을 이길리가 없었다. 풀은 얼마나 독한지, 근무 아닐 때도 새벽부터 일어나서 나가는 마차를 확인하는 놈이었다.

풀은 본인 나름의 기준을 세워서, 마차꾼들에게 적절한 양의 팁을 받아냈다. 세금 징수원에 어울리는 인재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까막눈이었다.

녀석은 누런 종이에 자기만 알아볼 수 있는, 이상한 그림으로 메모를 해서 마차꾼들에게 받을 돈을 계산했다.

"그···그건 어찌···."

깜짝 놀랐는지, 마차꾼이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팔짱을 끼는 것이, 제대로 걸린 듯했다.

'대단한 놈이라니까.'

그때, 풀이 내게 슬쩍 손짓했다. 그게 무슨 신호인지는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누가 거짓을 고했다고?! 신께서 거짓 하지 말라고 했거늘!! 독실한 태양교 신자로서 손이 떨리는구먼!!"

나는 짐짓 동물처럼 등을 부풀리고, 얼굴을 있는 힘껏 구겼다. 상남자의 흔적이 즐비한 얼굴을 구기면서 나서니, 마차꾼의 얼굴이 대번에 푸르죽죽해졌다.

"아···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지···진정 좀 해보시오!!"

"안 그래도, 이단 심문관님이 성에 계시는데 말이야! 내가 이단 심문관님이랑! 축복도 받고! 인사도 하고! 그런 각별한 사이인데, 이거 오늘 내 믿음을 또다시 증명해야겠군!"

"아이고, 조장님 참으십쇼! 저번에도 그렇게 끌고 갔다가··· 크흠···."

뱀눈 풀이 뒷말을 흐리면서, 성문을 슬쩍 쳐다봤다. 높다란 성문 위쪽에는 줄로 묶으면 정확히 얼굴이 닿을 높이에 언뜻 붉은색 자국이 있었다. 그를 발견한 마차꾼의 얼굴이 공포에 질렸다.

"에헤이!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다~ 이 말입니다! 거짓은 아닙니다. 진짜입니다! 아이고··· 팔 좀···."

마차꾼이 두둑한 주머니를 덜덜 떨리는 손으로 풀에게 슬쩍 건넸다. 풀은 그 자리에서 주머니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은화 한 개를 꺼내고 나머지를 다시 돌려줬다. 규칙은 칼같이 지키는 신기한 놈이었다.

"나도 꼭 그런 말은 아니었지. 아무튼, 가죽을 많이 가져왔군. 내 듣기로 4구역 쪽에서 이번에 무슨 가방을 만든다고 가죽이 많이 필요하다 했으니, 거기로 가면 좋을걸세."

풀이 마차꾼의 어깨를 두드리며, 활짝 웃었고, 그에 찜찜한 표정이던 마차꾼이 어색하게 웃었다.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나도 따라 웃자, 마차꾼이 질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풀이 손을 젓자, 고개를 꾸벅 숙인 마차꾼이 말을 몰고 성으로 들어갔다.

"여기 조장 몫입니다."

"어. 별일 없고?"

풀이 건넨 50쿠퍼를 주머니에 넣으며 물었다.

"요즘 마차꾼들이 날로 영악해져서 난리입니다. 오가는 마차들이 많아서 못 볼 거라 생각하는지···. 쯧, 그거 잡느라고 요즘에 잠을 거의 못 잡니다."

풀의 한탄에 나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차꾼이 검문을 받으며, 경비대에 소량의 팁을 제공하는 것은 친분을 교류하는 신성한 행위인데, 사람들이 몰려들다 보니, 그 아득히 오래된 전통을 지키지 않는 얍삽한 놈들이 늘어난 듯했다.

"영애 생일도 한참 남았는데, 왜 이렇게 사람이 몰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고도 자주 일어나고··· 외성 경비대 조를 최소한 두 개는 늘려야 합니다."

"증원해줄 리가 있나."

"그렇긴 하죠. 그 덕분에 사고를 쳐도 별 간섭이 없기도 합니다만···. 오, 조장 갑옷 샀습니까?"

풀이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내 위아래를 살폈다. 그에 나는 손을 허리에 올리고, 가슴을 당당히 폈다.

"오, 전부 제대로 된 물건 아닙니까? 이거, 칼로 찔러도 칼이 부러지겠는데···, 원래 이러면 무게가 문제지만, 조장이라면 상관없으니까···. 키야- 부럽습니다. 조장."

역시, 진짜는 진짜를 알아본다는 말처럼 무식한 다른 놈들과 다르게, 눈치 빠르고 냉철한 풀은 내 갑옷의 진가를 단번에 알아챘다.

풀의 목소리에는 부러움이 잔뜩 담겨 뚝뚝 흐를 정도였기에, 절로 내 입꼬리가 올라가고 턱이 들렸다.

그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풀이 건네준 50 쿠퍼를 다시 풀에게 줬다. 그에 풀도 환히 웃었고, 나도 웃었다. 켈은 못 볼 걸 봤다는 듯,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아무튼, 우리는 목공소 좀 다녀온다."

"예. 고생하십쇼."

풀이 손을 가볍게 젓고, 기다리고 있던 마차꾼을 불렀다. 쿼터는 여전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목공소는 성에서 조금 떨어진 곳, 울창한 숲 앞에 있었다. 나무로 지어진 지붕만 있는 곳 아래에 통나무들이 잔뜩 쌓여 있었고, 웃통 벗은 사내들이 열심히 뭔가를 두드리거나, 나르고 있었다.

'···쯧, 땀 냄새.'

"어?! 아론! 무슨 일 있어요? 스카는 여기 없는데, 오늘 출근 안 했어요."

웃옷을 입지 않아서, 근육이 없는 몸을 드러났지만, 빵모자는 쓴 변태 같은 놈이 말을 걸었다.

"아, 걔 보러온 게 아니라, 근데 그 새끼 또 출근 안 했어? 이 새끼, 정신 못 차렸네. 아무튼, 레이슨이랑 이모트 좀 불러와."

스카 놈은 또 뒷골목 후진 건물에서 분위기 잡으면서 뺀질거리고 있을 게 분명했기에, 노동의 필요성을 다시 각인시켜야 할 듯했다.

"레이슨이랑 이모트요? 알았어요. 그··· 스카한테는 제가 말했다는 거, 비밀로 해주겠어요?"

"니가 누군데."

"저요? ···아하! 금방 불러올게요!"

고개를 끄덕인 변태 빵모자 놈이 목공소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스카··· 걔 맞습니까? 잭슨 아들."

"어, 잭슨이 그렇게 말린다는데, 아직도 대장 놀이하더라고."

"흐음··· 뭐, 문제 될 거 있습니까. 잭슨의 아들인데."

"그래서 문제지."

"아하."

잠시 뒤, 안색이 창백한 사내 둘이 나왔다. 하나는 말랐고, 하나는 뚱뚱했다. 마르고 수염이 듬성듬성 난 사내가 레이슨이었고, 뚱뚱하지만 근육이 잡혀있는 놈이 이모트였다.

'이 새끼들 상태가 왜 이래?'

둘은 어디서 집단 린치라도 당했는지, 곳곳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

"아··· 아론!!"

"저희 좀 살려주십쇼!"

나를 발견한 두 놈이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내 다리를 잡고 매달렸다. 내 신상 무릎 보호대에 녀석들의 땀이 묻을까 봐 그를 걷어찼지만, 녀석들은 다시 기어와 악착같이 매달렸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어떻게 된 건지나 말해봐."

"흐···흐읍··· 진짜로 억울합니다!"

여전히 '억울합니다.'만, 반복했기에 주먹을 사이좋게 한 대씩 먹여주니, 울음을 뚝 그쳤다.

"아픈 인어 술집에서 가볍게 주사위 놀이를 하는데, 웬 여자 꼬맹이가 와서 같이 하자고 했다고?"

"예예. 이 정도 되는 여자 꼬맹이입니다!"

"그래서 걔랑 같이 주사위 놀이를 했는데, 너희가 계속 땄고?"

"맞습니다! 녀석은 주사위가 뭔지도 모르는지, 어리숙하게 컵을 돌리면서 계속 1만 뽑았습니다. 분명 그랬던 년이! 이제 가야 한다고 마지막으로 크게 한번 하자는 거 아닙니까?"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녀석들의 눈에 이글거리는 분노가 담겼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몸까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 새끼들 공사 당했네.'

교본으로 불려도 될 정도로 흔한 수법이지만, 이런 변방에서 평생 나무만 자르고 다듬던 놈들이 그를 어찌 알겠는가.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어떻게 흘러갔을지, 대충 감이 왔다.

"그런데!! 갑자기 이 년이 6을 뽑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돈을 다 잃은 다음에, 옆에 있던 놈들한테 돈을 빌렸고?"

"예! 안타깝다고 갑자기 빌려준다고 해서···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돈 빌려주는 애들까지 끼고 다닐 정도면 생각보다 규모가 큰데?'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났다. 아주 달콤하고 향긋한 은화의 냄새가, 코가 마비될 정도로 진득하게 풍겼다.

"그때부터 걔는 계속 6만 뽑았고?"

"예···예!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6만 네 번 뽑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제야 이상함을 느끼고 일어났지만, 갑자기 그 옆에 있던 놈들이 잡아서··· 크흑···."

뚱뚱한 놈, 이모트가 눈을 가득 채운 멍을 보여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사기도박 패거리라···.'

돈을 빌려주는 역할을 맡은 놈과 유사시를 대비한 덩치들, 그리고 주사위를 굴리는 꼬맹이까지.

'바람잡이도 있겠지.'

최소 네 명이었다. 아마, 그것보다 좀 더 많을 게 분명했다.

사람이 넘치고, 돈이 셀 수 없는 단위로 흐르는 도시에서야 몰려다니는 놈들이 제법 있었지만, 이런 변방으로 흘러들어오기에는 수가 제법 많았다.

애초에 이런 작은 성에서는 소문이 금방 돌기 때문에, 얼마 해 먹지도 못하기도 했고.

'몇 대 쥐어박으면 되겠지.'

깔끔한 계획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론님 꼭 좀 부탁드립니다! 집에도 찾아와서 돈 될 만한 건 죄다 가져갔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어떻게 모은 돈인데···! 이 나쁜 놈들!!"

둘이 내 뾰족구두를 팔뚝으로 비벼 닦으며, 헤헤 웃었다.

"응? 뭐를?"

"···예?"

내 물음에 둘의 얼굴이 벙쪘다.

"아, 사기당했다고 했지. 걱정하지 마. 잡아서 꼭 벌을 줄 테니까."

손을 휘휘 저어서, 내 발에 붙은 두 놈을 떨어뜨렸다. 두 놈이 서로를 보며, 갸웃거렸지만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맞습니다! 역시 캐서딕 성의 망··· 아니, 아론 님밖에 없습니다!"

쾅! 소리가 날 정도로 머리를 세게 찧는 녀석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돌아섰다.

"근데 조장. 대장이 도박 금지하지 않았습니까?"

"이건 순찰이잖아. 업무야. 공과 사를 구별하라고."

"···둘 다 공 아닙니까?"

"사기도박이 얼마나 위험한데."

"그렇···기는 합니다만, 조장이 가는 게 더 위험···. 일단, 제가 먼저 가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애들 몇 끌고 가서···."

"왜? 맛있는 거 혼자 처먹으려고?"

"···예?"

켈이 눈을 동그랗게 떴고, 나는 게슴츠레 떴다.

"···아닙니다. 뭐, 나쁜 놈들이니까."

"아주 나쁜 놈들이지."

"조장, 입꼬리 올라갔습니다."

"아, 사과주를 너무 많이 마셨나."

"아무튼, 너무 크게 벌리지 마십쇼. 저번에도 도박장 사건 때 한참 시끄럽지 않았었습니까. 물론, 그 덕분에 그놈들을 성에서 쫓아내긴 했지만··· 듣고 있습니까? 이 사람, 안 듣고 있네."

로사랑 매일 붙어 있어서 그런가, 뭔 놈의 잔소리가 저리 긴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에휴··· 조장 잘못 만난 내 잘못이지."

뒤에서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렸다.

"됐고, 빨리 와라. 순찰 마저 돌아야지."

"···알겠습니다. 로사한테 또 혼나겠네."

켈은 구시렁거리면서도 바로 옆에 붙어서 따라왔다.

주사위 놀이

순찰은 평소처럼 별일 없이 끝났다.

그저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면서, 아주머니들 대화 상대도 해주고, 일하러 가지 않은 녀석들을 몇 대 쥐어패고, 아이들한테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고 나니 퇴근할 시간이었다.

그에 외성 경비대 본부로 돌아가, 대장한테 보고를 올렸고, 대장의 그 살집 넘치는 팔뚝이 얼마나 근육 덩어리인지 이야기를 듣고 나왔다.

"근데 왜 따라오냐."

"조장만 보내면 또 무슨 난리를 칠 줄 알고 보냅니까. 같이 갑시다. 되도록 크게 벌이지 말고, 일찍 끝냅시다."

켈은 내내 툴툴거리더니, 언짢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따라왔다. 돈 냄새를 맡은 게 분명했다.

"쯧. 구 대 일."

"···그게 뭔 소리입니까?"

"알았어, 팔 대 이."

"아니, 설명을 좀 해주고···."

"욕심 그만 부려."

"뭐라는 겁니까. 상관없으니 그냥 좀 빨리 끝냅시다."

그냥 여색에 빠진 발정 난 놈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흥정하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5구역으로 향했다. 해가 저물 시간이라 그런지, 다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픈 인어' 술집은 5구역의 중앙에 있었다. 가장 목이 좋은 장소였는데, 소문에 의하면 술집 사장 조셉의 조상이 캐서딕 성을 지을 때, 망치질을 유독 잘해서 좋은 자리를 받았다고 들었다.

'아픈 인어' 술집은 다른 곳보다 한층 더 높은 3층으로 지어져 있어서, 5구역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보였다.

"데릭이 안 보입니다?"

켈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픈 인어'처럼 인기가 많은 술집은 주정뱅이들의 술주정을 막고자, 자체적으로 사람을 고용하는데, 아픈 인어의 가드는 데릭이었다. 덩치가 크고 인상이 사나운 놈이었지만, 겉모습과 다르게 사람 때려본 적 없을 정도로 순했다.

다만, 그 겉모습이 살벌했기에, 여행객이나 이방인들에게는 효과적이라서 고용됐다고 들었다. 그저 데릭이 서 있거나, 어슬렁거리면 취한 놈들도 행동거지를 조심하는 듯했다.

매일 '아픈 인어' 술집 앞에 있던 놈인데, 오늘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픈 인어' 술집 앞에서 잠시 멈췄다. 굳이, 켈까지 데리고 들어갈 필요 없었다. 데리고 가봤자, 잔소리만 할 것이 분명했다.

"들어가 보면 알겠지. 너는 앞쪽에서 나오는 애들 잡아라."

"조장, 혼자 들어갈 생각입니까?"

켈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한 번도 나를 저런 눈빛으로 본 적 없는 놈이라 생소했다.

"왜? 걱정돼?"

"조장 혼자 들어가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까 당연히 걱정되지 않겠습니까. 자제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인데."

역시 나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내가 안에서 저지를 일을 걱정하는 거였다. 발정 난 중세 놈이 나를 폄하하는 것에 어이가 없었다.

"저지르기는 무슨··· 그냥 사기꾼 놈들 몇 대 쥐어박는 게 다지. 하여튼, 앞에서 나오는 애들은 모두 잡아서 꿇려놔."

"예. 조장 믿겠습니다. 그냥 쥐어패기만 하는 겁니다?"

"알았다니까."

"진짜입니다! 오늘 야간 2조 놈들이지 말입니다! 걔네는 다른 조처럼 말이 통하는 놈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렇게 투덜댈 거면 굳이 왜 따라 왔는지.'

계속되는 잔소리에 손을 젓고는, 술집 문을 잡았다.

돈을 많이 벌었는지, 다른 곳보다 손잡이가 배는 컸고 세 배는 번들거렸다.

문을 밀고 들어갔다. 향을 뿌렸는지, 달콤한 냄새가 가득 풍겼다.

홀에는 둥근 나무 식탁이 스무 개 놓여 있었다. 벽에는 원통하게 죽은 것이 분명한 사슴 대가리가 걸려 있었고, 그 아래에는 꾀죄죄한 망치가 박혀 있었다. 아무래도, 조상이 망치질을 잘했다는 게 사실인 듯했다.

'일곱 명 정도인가.'

급격하게 조용해진 술집 내부를 천천히 둘러봤다. 퇴근하고 바로 와서 그런지, 아니면 작은 성에 소문이 돌았는지, 손님으로 보이는 이는 없었다.

무장한 놈들이 아닌 척하면서 곳곳에 퍼져 있었다.

한 테이블에는 얇은 가죽 갑옷을 입은 사내와 천을 두른 얍삽하게 생긴 놈이 앉아 있었고, 벽에 등을 기대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덩치 큰 사내 둘, 내가 들어온 문 바로 옆에 눈빛이 서늘한 놈 하나.

'그리고 여자애 앞에 하나.'

홀 중앙에 놓인, 다른 테이블보다 배는 큰 둥근 식탁에 후줄근한 튜닉을 입은 여자아이와 사슬 갑옷을 입은 사내가 앉아 있었다,

'사기꾼 놈이 사슬 갑옷이라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사내 허리춤에 걸린 검을 눈여겨봤다. 길이가 짧고 폭이 큰 것이, 언뜻 보면 중국 집에서 쓰는 칼 같기도 했다.

다들 눈빛이 살벌하고, 쇠붙이 하나씩 들고 있었지만, 여자아이 건너편에 앉은 사내를 제외하고는 조무래기들이었다.

아닌 척하면서도, 내게 모이는 시선이 느껴졌다. 꾸며진 어수선함 속에 짙은 경계가 나를 쿡쿡 찔렀다. 그에 나는 오히려 웃으며, 손을 번쩍 들었다.

"여어, 조셉! 맥주 한 잔 부탁하지."

홀의 반대편, 주방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익숙한 사내가 푸르죽죽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절망과 고민이었다.

"아···아론 너는 분명 금지를···."

아픈 인어의 주인 조셉은 그 특유의 염소수염을 손가락으로 벅벅 긁으며 나와 여자아이 앞의 사내를 번갈아 봤다. 그 표정을 보아하니, 고민하는 듯했다.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피해가 적을까.

조셉의 눈동자가 사내 쪽을 향한 게 못내 가슴 아팠다. 경비대 조장이 아니라, 어디서 굴러온 지 모를 양아치를 선택하다니.

물론, 조셉의 선택과는 상관없이 이미 벌어질 일이었다. 나는 그대로 여자아이가 앉은 테이블로 향했다.

거침없는 움직임에 주변 놈들이 티 나게 움찔했다. 그들 딴에는 잘 속인다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묘하게 어설펐다.

'무장 수준을 보면, 그래도 꽤 굴러먹던 놈들인가.'

원래는 그저, 사기도박 패밀리라 생각했지만, 그것보다는 어디 집단에 속한 놈들 같았다. 뒷골목 녀석들 특유의 당장 칼을 뽑을 것 같은 악다구니와 제 덩치를 부풀리려 껄렁이는 불량함이 느껴졌다.

"앉아도 되나?"

나는 여자아이 앞의, 볼에 길게 흉터가 있는 사내를 보며 물었다. 사내의 눈이 나를 빠르게 훑었다. 기본은 된 놈이었다.

'이 완벽한 갑옷에 감탄하는 중인가.'

나는 오히려 어깨를 피며, 내 멋진 갑옷의 위용을 뽐냈다.

"···풋."

그때, 여자아이가 웃었고,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의자를 뒤로 끌며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사내의 중심은 앞으로 쏠려 있었다. 조금만 어긋나면 칼을 뽑을 거란 무언의 협박처럼 느껴졌지만,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주사위 놀이라.'

주사위 놀이는 사내들의 게임 중 제일이었다. 규칙은 단순했다. 주사위 하나를 테이블 위에 두고, 각자 컵으로 그를 돌린다. 그리고 둘 중 수가 더 높은 쪽이 이긴다. 동점이라면, 그대로 다시 굴린다.

나는 단 한 번도 주사위 게임에서 져본 적이 없었다.

의자에 몸을 기대자, 낡은 의자가 넘치는 무게에 작게 비명을 질렀다.

"흥."

앞에서 여자아이가 작게 콧방귀를 꼈다. 그제야 나는 여자아이의 용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머리는 흔하지 않은 보라색,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 잔뜩 기름지고 엉클어져 있었다. 그래도 끼니는 제때 먹는지, 얼굴에 윤기가 흘렀지만, 그 눈빛이 아이와 어울리지 않았다.

죽어있는 눈동자. 어디 영지 전쟁에 참여한 용병에게서 나올 법한 눈동자인데, 아직 청소년 기도 안 지난 것 같은 아이가 그 눈인 걸 보니, 짧지만 굵은 인생을 살아온 듯했다.

아이는 곁눈질로 주변을 살피면서, 손을 까닥거렸다.

'꼭 버림받은 길고양이 같네.'

아이는 내가 옛날에 길 가다가 불쌍해서 주워와서 키웠던 고양이와 퍽 닮았다. 눈빛도, 차림새도, 상황도 비슷했다.

그에 피식 웃으며, 곁눈질로 아이의 손바닥을 살폈다. 아이의 손바닥은 매끈했다. 도박꾼 특유의 굳은살이 없었다.

'···타짜는 아니고.'

도대체 6을 어떻게 네 번 연속 뽑는지 궁금했다. 그에 아이를 살피다가,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눈에 보일 정도로 크게 흠칫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그러면서도 손에 들고 있는 컵과 주사위는 놓치지 않았다.

아이는 초조한 듯, 옆으로 비킨 사내를 힐끗거렸는데, 그 모습이 비를 맞고 있던 길고양이와 퍽 닮았다.

그에 나는 아이의 경계를 풀어주기 위해, 최대한 활짝 웃었다.

'모름지기 경계를 푸는 데에는 미소만큼 좋은 게 없으니까.'

아이가 눈을 크게 떴고, 나는 더욱 활짝 웃었다.

***

칸나는 지금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한 놈이잖아!'

어디서 누가 버린 것을 하나씩 주워 입었는지, 알록달록한 색으로 꾸며진 갑옷. 다른 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덩치.

사내가 처음 술집에 들어올 때, 칸나는 오크가 들어오는 줄 알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사내가 칸나 앞에 앉았다. 그에 칸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필, 이럴 때!'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계획을 실행할 수 있었는데 사내가 들어오면서 엉클어졌다.

'지금 아니면, 또 저놈들한테 끌려다녀야 하는데.'

칸나는 곁눈질로 자신이 앉은 테이블을 미묘하게 에워싼 놈들을 확인했다.

눈치가 없는 건지, 술을 거하게 마셔 정신이 없는 건지, 누가 봐도 살벌한 술집으로 태평하게 들어온 사내 때문에 모든 게 엉망이 됐다.

사내는 칸나를 빤히 보면서, 주머니를 열어 은화 한 개를 테이블에 올렸다. 짤랑. 사내의 주머니가 열릴 때, 꽤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옆에 있던 칼잡이 샥이 헤벌쭉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진행하라는 신호였다.

'멍청한 놈들! 두목이 숨어 지내라고 했는데도, 그새를 못 참고, 이런 쥐똥만 한 성에서 사고를 치다니!'

욕이 입 끝까지 차올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그녀가 마법사라고 한들, 사용할 줄 아는 마법은 전부 쓸데없었기에, 결국 힘없는 소녀일 뿐이었다.

'진정하자, 칸나. 할 수 있어. 저놈들이라고 한들, 잡히면 끝이야.'

칸나는 심호흡하며,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때, 앞에 앉은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얼굴에 흉터가 저리 많은 사람은 처음 봤다. 마치, 맹수가 긁은 것처럼 얼굴 곳곳에 굵은 흉터가 가득했다. 본판은 잘 생겼을 듯했지만, 그 위에 덧칠된 흉터가 그를 가리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깊은 눈.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본 적 있는 눈빛이었다. 이제 다시 못 볼 눈이었지만.

'···그는 죽었어.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칸나는 사내의 눈을 피하지 않으면서, 연습 삼아 컵을 살짝 돌렸다. 컵 안에 담긴 주사위가 컵을 타고 도는 게 손끝을 통해 느껴졌다.

갑자기 사내가 입꼬리만 올렸다. 그에 사내의 입이 쩍 벌어졌고, 입 옆에 있던 기다란 자상이 흉측하게 구겨졌다. 그러면서도 눈은 웃지 않고 있었기에, 꿈에서 볼까 두려운 흉측한 모습이 됐다.

'뭐···뭐야!'

칸나는 비명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컵을 돌리는 손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덜덜 떨렸다. 순간, 마나가 흐트러졌다.

'뭔가 알고 있는 거야?'

사내의 괴랄한··· 아니, 흉측한 표정에 칸나는 온몸에 소름이 쫙 올라왔다. 등골이 삐쭉 섰고, 손에 땀이 흘렀다.

그때 칼잡이 샥이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어서 진행하라는 신호였다.

사내의 갑옷이 얼마나 멍청이처럼 알록달록한지, 상관없이 놈들은 사내 갑옷의 질과 주머니의 두둑함만을 보고 있었다.

그에 칸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주사위 놀이할래요?"

오글거릴 정도로 앳된 목소리. 칸나는 자신이 내고도 괜히 창피하여 고개를 숙였다. 나쁘지 않았다.

멍청한 놈들은 이 앳된 모습에 속아, 제 목이 드러난 지도 모르고 위선적인 따뜻한 가면을 쓸 것이므로. 금세 벗겨질 가면을.

"그럼, 좋지."

사내의 입에서 맹수가 으르렁대는 것만 같은 굵은 목소리가 나왔다.

칸나는 찔끔 놀랐으면서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컵을 만졌다.

"저···부터 할게요."

일부러 어수룩한 척 컵을 대충 잡았다. 그리고 컵 안쪽으로 주사위를 굴렸다.

'후우···.'

칸나는 마나를 움직였다. 이물감 가득한 감각이 그녀를 간지럽혔다. 개미가 기어 다니는 듯한 그 불쾌한 감각을 애써 억누르며, 마나를 조절했다.

그녀가 돌리는 주사위는 그 전부터 계속해서 그녀의 마나에 노출 시켜뒀었기 때문에, 금세 감응했다. 그때, 컵을 멈췄고 그녀는 컵을 열지 않았음에도 주사위가 2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천재구나! 천재야! 따스한 목소리가 떠올라, 칸나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고작 주사위로 평민 주머니나 터는 게, 어떻게 천재 마법사란 말인가.

'···책을 포기한, 떨거지 마법사.'

그녀 같은 이들을 부르는 멸칭이었다. 배움을 포기하고, 겨우 배운 하급 마법으로 삶을 연명하는, 그런 쓰레기들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멸칭.

칸나는 포기하지 않았지만, 결국, 이런 쓰레기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칸나는 사람들이 마지막 문장만 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중심 부분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이 읽는 마지막 문장에서 칸나는 '책을 포기한, 떨거지 마법사'였고, 그녀가 그렇게 된 중간 과정은 그들의 관심 밖이었다.

칸나가 컵을 들자, 주사위는 2를 가리키고 있었다.

"운이 없군."

사내는 여전히 흉악한 표정을 유지한 채로 중얼거렸다. 사내가 컵을 들었고 사내의 주사위는 4를 가리키고 있었다.

"운이 좋군."

작게 중얼거린 사내가 히죽 웃으며, 칸나 앞에 있던 은화를 가져가서 다시 그대로 제 앞에 놓았다.

'···멍청한 놈!'

자신이 이미 수렁에 빠진 지도 모르고, 좋아하는 꼴이라니! 칸나는 비웃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어수룩한 표정을 유지하면서 은화 2개를 꺼냈다.

테이블에 은화 4개가 올라갔고.

다시, 주사위를 굴렸다.

이번에 칸나는 1이었고, 사내는 2였다.

사내는 다시 '운이 좋군.'이라고 중얼거리며 은화를 가져가서 그대로 제 앞에 쌓았다.

'속도가 너무 빠른데.'

사내가 버는 그대로 바로 다시 걸었기에 베팅 금액이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이쪽이 원하는 바였지만, 그 속도가 평소보다 빨랐다.

곁눈질로 칼잡이 샥을 봤다. 칼잡이 샥은 사내의 두둑한 주머니를 보면서 방긋 웃고 있었다. 그러면서 제 허리춤에 걸린 칼을 매만졌다.

'후우···.'

어차피 결과는 정해진 연극이었다. 칸나는 다시금 표정을 관리하며 은화 4개를 꺼냈다.

이번에 칸나의 주사위는 1을 가리켰고, 사내의 주사위는 2를 가리켰다.

사내는 은화를 가져갔고, 제 앞에 8개를 쌓았다.

칸나는 은화 8개를 꺼내서 올렸다.

다시 주사위를 굴렸고, 칸나는 2, 사내는 3이었다.

사내가 은화 8개를 가져가서, 총 16개를 제 앞에 쌓았다.

그때, 샥이 주먹을 빙글 돌렸다. 이제 슬슬 운을 띄우라는 신호였다.

"아··· 시간이···! 이제 가봐야 하는데···."

칸나는 급한 척 연기했다. 몇 번이나 했는지, 처음에는 어려웠던 게 이제는 능숙하게 나왔다. 자신의 재능은 마법이 아니라, 연기 쪽이 아니었을까. 칸나는 속으로 고민했다.

"그래? 즐거웠다."

그때, 사내가 만족스럽다는 듯 주머니를 열어 테이블 위에 있던 은화를 넣었다.

그제야 칸나는 아까부터 느껴지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사내는 꽤 많은 은화를 땄음에도 그저 작은 감탄사만 내뱉을 뿐, 다른 놈들처럼 눈을 붉히며 흥분하지 않았다.

그저, 간단한 게임을 하는 것처럼 작게 좋아할 뿐이었다.

사내가 저렇게 나오자, 급해진 것은 칸나였다. 칸나는 황급히 샥을 쳐다봤고, 샥이 눈을 부라리며 제 허리춤의 칼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어떻게든 진행하라는 신호였다. 저 사내를 벗겨 먹지 않으면 네 가죽을 벗기겠다는 신호. 칸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마··· 마지막으로 한번 할까요? 한판 정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굳이? 바쁘다며?"

"하··· 한판 정도···."

보통 이런 때라면, 상대는 자신을 벗겨 먹지 못해서 안달인데, 이놈은 욕심이 없는지, 만족한 것처럼 제 배를 두드리고 있었다.

"으음··· 어떻게 할까···."

사내 뒤로, 칼잡이 샥이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칼 손잡이를 톡톡 두드렸다. 사내가 더 버티면 당장 칼을 휘두를 기세였다.

두목이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멍청한 놈은 죄다 까먹은 듯했다. 칼잡이 샥이 살인이라도 저질렀다가는, 모든 게 엉망을 넘어서 최악으로 치달을 게 분명했다.

"한 판정도 할 수 있다니까요!"

급해진 상황에 칸나는 자신도 모르게 다급하게 소리쳤다. 낭패였다. 상대에게 더 이상하게 보일 게 분명했다.

'아니야. 오히려 이 반응이 더 자연스럽지! 잃은 은화가 몇 개인데!'

칸나는 그 기세를 몰아, 눈 끝을 뾰족 세우고 상대를 노려봤다. 따고 도망치는 놈을 노려보는 눈빛을 했다.

"그럼, 내 질문에 답하면 한 판 더 해줄게."

사내가 예의 그 흉악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에 칸나는 두려워 몸을 잘게 떨었다.

'질···문?'

예상을 벗어난 사내의 말에 잠시 머리가 굳었지만, 칼잡이 샥의 반쯤 뽑힌 칼에 정신이 돌아왔다. 그래, 질문이든 뭐든 무슨 상관이랴.

"좋···아요! 뭐든 물어보세요."

"아, 차갑게 하는 마법을 할 줄 아나? 맥주를 시원하게 만드는 것처럼."

사내의 질문에 칸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식간에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가, 터졌다. 어떻게 자신이 마법사라는 것을 알아챘지?

칸나는 사내의 질문에 너무 당황하여, 얼굴에 쓴 가면이 벗겨진 지도 눈치채지 못했다.

마녀와 마법사는 종이 한 장 차이였다. 둘 사이에는 아주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그를 '긍지'라 불렀다.

그리고 주사위에 마법을 걸어, 다른 이를 등쳐먹는 것은 명백히 긍지를 버린 행위였기에, 지금 칸나는 마녀였다. 괴상한 나무 막대기에 몸이 묶여,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불 타죽는 그런 마녀.

칸나가 당황하고 있을 때, 칼잡이 샥을 비롯한 놈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들 모두 쇠붙이를 반 치 이상 뽑아 든 상태였다. 긴장감이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크게 부풀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대답 안 하는 건가?"

눈치가 없는 건지, 저 알록달록한 갑옷을 믿는 건지, 사내는 태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주머니를 뒤져서 뭔가를 꺼냈다. 영롱한 금빛, 금화였다.

꿀꺽. 누군가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금화를 보자, 신기하게도 칸나의 정신이 돌아왔다.

'그래, 어차피 죽을 놈이야. 어울려준다고 생각하자.'

금화를 꺼내고, 칸나가 마녀라는 것을 눈치챈 이상. 놈이 살아갈 가능성은 없었다. 금화는 성을 옮기는 번거로움 감수할 정도의 가치가 있었으니까.

"네. 원한다면 살얼음도 띄울 수 있죠."

칸나는 본연의 말투로 대답했다. 더는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 좋군."

뭐가 좋다는 걸까. 칸나가 사내의 대답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사내도 칸나를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 눈빛이 꼭···.

탐나는, 꼭 가지고 싶은 물건을 보는 듯한 흉흉한 눈빛.

그 안에 담긴 적나라한 욕망에 칸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근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녀의 수중에는 금화 한 개 만큼의 돈이 없다는 것. 이런 산골짜기 조그만 성을 턴다고 얼마나 벌었겠나. 이제 남은 것은 은화 46개가 전부였다.

"아, 그냥 있는 거, 다 걸어. 그게 재밌으니까."

머뭇거리는 칸나를 봤는지, 사내가 먼저 제안했다.

'···멍청한 놈.'

아마, 지금까지 이겼다고 또 자신이 이길 거라 생각한 모양이겠지. 그제야 칸나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고마워요. 이것뿐이라."

"뭘, 이 정도로."

사내가 따분한 듯 하품까지 했다. 그 반응에 칸나는 속으로 콧방귀를 꼈다. 뭐라도 있는가 싶었더니, 그저 멍청하고 오만한 흉악하게 생긴 놈이었을 뿐이었다.

칸나는 긴장을 풀려고 노력했지만,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금화 때문에 자꾸 집중이 분산됐다.

떨리는 손으로 컵을 잡았다. 심호흡하며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이제 뽑을 수는 6. 상대가 뭘 뽑든 상관없었다. 앞으로 계속 6만 뽑을 것이니.

툭. 칸나는 컵을 들었고, 거기에는 6이 위로 향한 주사위가 있었다.

'하, 멍청한 놈.'

방금까지 오만하던 놈의 얼굴이 얼마나 멋지고 맛있게 구겨졌을까 기대하며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생각보다 더 멍청했는지, 사내의 입꼬리는 여전히 올라가 있었다.

"내 차례인가."

사내가 컵을 돌렸고, 술집에는 누군가의 침 삼키는 소리, 그리고 주사위가 컵을 타고 도는 달그락 소리만이 들렸다. 드륵. 잠시 뒤, 컵이 멈췄고, 사내가 예의 그 흉측한 표정을 지으며 컵을 들었다.

"···육?! 이게 무슨!"

지켜보는 놈 중 덩치가 큰 만큼 제일 멍청한 놈이 소리를 질렀다. 사내의 주사위는 6을 가리키고 있었다.

"운이 좋군."

사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다시 주사위 위에 컵을 올렸다.

"이번에는 나부터."

예의 그 흉악한 표정을 지은 사내가 컵을 다시 돌렸다.

'한 품의 재주는 있었다는 건가?'

칼잡이 샥이 이제는 존재감을 숨길 생각이 없는지, 대놓고 사내의 옆에 서서 내려다봤다. 이제 샥의 칼은 끝만 검집에 살짝 걸려 있었다.

드륵. 이내 멈추는 소리가 들렸고, 사내는 가벼운 손길로 컵을 들었다.

"운이 좋군."

주사위는 또 6을 가리키고 있었다.

겁이 없는지, 사내는 옆에서 내려다보는 샥을 응시하며, 이죽거리듯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칸나는 사내가 컵을 굴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사내의 손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이상한 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정말, 사내의 말처럼 운이 좋았던 건가?

칸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컵을 들었다. 운이든 뭐든 상관없었다. 긍지 없는 마법을 부리는 자신은 계속해서 6을 뽑을 것이다. 운이든, 손재주든 상대는 언젠가 바닥을 보일 것이다.

칸나가 컵을 돌렸고 6이 나왔다.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나부터."

칸나는 긴장한 걸 들키지 않도록, 당당하게 외치며 컵을 잡았다.

그때, 옆에 있던 놈들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 철의 스산함이 느껴질 정도였기에, 오히려 칸나가 압박받았다.

칼잡이 샥이 톡톡, 칼을 두드렸다. 그 살벌한 소리가 자꾸만 칸나의 집중력을 건드렸다.

'멍청한 놈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방해하다니! 칸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집중하자. 고작 주사위 놀이야. 마법 축에도 못 든다고.'

칸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컵을 돌렸다. 드르륵. 주사위가 컵을 타고 흐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시 마나를 움직이기 위해 집중했다.

그때, 사내가 돌연 입을 열었다.

"책은 왜 포기했지?"

사내가 툭 던진 말이었지만, 그건 칸나의 역린을 제대로 관통하여 그녀의 가장 깊은 흉터를 헤집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미, 주변의 압박에 집중력이 흐트러진 상태에서 그것은 결정적이었다.

"포기는 누가 포기를 해!! 네가 뭘 안다고···."

패착이었다. 순간적으로 집중력이 무너지면서, 손이 삐끗했고, 주사위가 컵을 떠나서 테이블 위를 통통 튕겼다.

"···이 미친년이."

칼잡이 샥이 욕을 내뱉었고, 주변에 있던 놈들이 죄다 쇠붙이를 뽑았다. 챙! 쇠붙이 특유의 서늘하고 날카로운 소리와 주사위가 통통거리는 소리가 합쳐졌다.

주변의 스산한 쇠들이 그들을 가리킬 때, 테이블 위를 구르던 주사위가 멈췄다.

주사위에 뜬 수는 5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운이 좋았다.

'···나쁘지 않아. 충분한 숫자야.'

칸나는 자신에게 속삭이는 듯 중얼거렸다. 주변에 있던 이들의 생각도 비슷한 듯,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칼을 살짝 물렸다.

'그래, 5라면 높은 수야. 이길만해.'

칸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상대를 노려봤다.

"운이 없군."

모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데도 상대는 아무렇지 않게 중얼거리며 컵을 잡았다.

'운이 없다니. 5라면 충분히 높은 수···.'

도르륵. 주사위가 컵을 타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모두가 숨 쉬는 것도 잊고 사내의 손에 집중했다.

칼잡이 샥이 뭉툭한 칼을 뽑아 사내의 손을 가리켰다. 조금이라도 손장난하는 기색이 있으면, 바로 자른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이내 사내의 손이 멈췄다.

천천히 컵이 들렸고.

"운이 좋군."

6이 뜬 주사위를 보며 사내가 예의 그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칸나는 사내의 그 흉악하고 무도한 표정이 미소라는 걸 깨달았다.

"조셉, 맥주는 아직 멀었나?"

자신을 겨눈 서늘한 쇠붙이들 사이에서, 사내는 웃고 있었다.

운이 좋군

사내는 자신을 겨누는 쇠붙이들 속에서 태연한 표정으로 있었다.

그런 사내의 모습에 칸나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정신이 나간 걸까. 아니면 자신감의 발로일까. 알록달록한 갑옷을 입은 것을 보니, 전자 쪽에 무게가 실렸다.

만약, 여기 있는 놈들이 어중이떠중이라면 저 거대한 덩치와 몸에 두른 철, 그리고 사내의 여유에 지레 겁먹고 물러날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애석하게도 이들은 그렇게 가벼이 분류될 놈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도시 카르잔을 나눠 먹는 세 조직 중 하나, '고독한 늑대' 소속이었다. 카르잔에서는 이들을 마주하면, 사람들이 먼저 주머니를 꺼내고 납작 엎드릴 정도로 악명이 자자했다.

'멍청하기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런 사내의 모습에 칸나는 속에서 열불이 끓어올랐다. 어쩌면 사내의 깊은 눈이 그와 닮아서일까.

그때, 칼잡이 샥이 눈을 굴렸다. 그에 옆에 있던 놈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에 놈을 끝내자는 신호였다.

평생을 도시의 부산물을 주워 먹으며 살아온 이들에게 정정당당한 싸움이란 모욕과도 같았다. 뒤통수가 보이면 칼을 꽂는 게, 이들의 긍지였고, 다 같이 한 명의 배에 칼을 쑤시는 게 이들이 의형제를 맺는 방식이었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고,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홀을 가득 채웠다.

"잠깐!"

그에 칸나는 자신도 모르게 발작하듯 소리쳤다.

"잠깐은 무슨···, 이 미친년이! 쑤셔!!"

샥이 소리치면서 칼을 높이 들었고, 그의 외침과 동시에 다른 놈들도 칼붙이를 휘둘렀다. 사내 주변으로 제각각의 쇠붙이들이 빛을 반사하며, 날카로움을 뽐냈다.

여섯 명이 동시에 칼붙이를 휘둘렀는데, 그 소리가 하나로 합쳐져 들렸다.

그때 주변을 가득 채운 칼붙이 사이로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눈 감아라."

사내가 거대한 테이블을 뒤집으며 일어났다. 테이블이 뒤집히며, 주사위와 컵, 은화가 공중에 떠올랐고, 앞쪽에 있던 칼잡이 샥이 뒷걸음질 쳤다.

사내는 다른 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기 때문에, 휘둘러진 쇠붙이들은 사내의 붉은색 흉갑에 박혔다.

캉! 쇠끼리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와 동시에, 몇몇 놈들이 신음을 흘렸다. 사내의 갑옷이 어찌나 두꺼운지, 오히려 내려친 이들의 손아귀가 찢어졌다.

그때 칸나는 사내가 낮은 웃음을 흘리는 걸 봤다. 얼굴에 새겨진 흉터들이 구겨지며, 사내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흡족함이었다.

"이 새끼가!!"

그때, 덩치가 제일 큰 학살자 구안이 도끼를 크게 휘둘렀다. 살과 근육 그사이인 구안의 팔뚝이 크게 출렁이며 공기를 찢는 소리를 냈다.

구안의 괴력은 고독한 늑대에서도 유명했다. 그는 맨손으로 사람의 팔을 뽑았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힘을 자랑했다. 그에 칸나는 사내의 최후를 직감했다.

카앙! 전보다 훨씬 큰 소리가 났지만, 도끼는 사내의 흉갑을 긁었을 뿐, 피를 내지는 못했다.

"무···무슨 이런 무식한 철 덩어리를 입고···."

구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사내의 붉은색 흉갑을 질린 눈빛으로 봤다. 구안의 말이 맞았다. 구안의 도끼가 찍힌 곳에 굵은 흠집이 났는데, 거의 손가락 한마디가 들어갔음에도, 사내의 살이 보이지 않았다.

"그야 당연히, 금화··· 잠깐."

구안의 중얼거림에 만족스럽게 웃으며 제 흉갑을 쓰다듬던 사내가 돌연 표정을 굳혔다. 사내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크게 흠집 난 부분을 어루만졌다.

"···읍?!"

그때, 사내가 돌연 손을 내밀어 구안의 목덜미를 잡았다. 구안은 덩치만큼 목도 두꺼웠는데, 사내의 손이 얼마나 큰지 구안의 목을 한 번에 감쌌다.

거대한 구안의 몸이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구안의 안색이 실시간으로 푸르죽죽해졌고, 구안의 눈동자의 흰 부분이 커졌다. 그 더러운 수염이 가득한 입술에서 침이 줄줄 흘렀다.

"뭐해!! 이 새끼들아! 찔러!!"

칼잡이 샥이 엎어지는 테이블을 피하며 칼을 휘둘렀다. 칼잡이라는 별명답게 그 소리부터가 달랐다. 뭉툭한 샥의 칼이 사내의 등을 향했다.

그때, 사내가 빙글 돌았고, 덩치 큰 구안이 마치 인형처럼 딸려왔다. 그러자 샥이 구안의 등에 칼을 휘두르는 꼴이 됐다.

"비켜!!"

"끄으윽···."

샥은 소리 지르면서도 칼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구안의 등에서 피가 길게 뿜어졌고, 비스듬히 있던 칸나는 그 피를 뒤집어썼다. 뜨거운 피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사내는 그대로 구안을 샥 쪽으로 떠밀었다. 샥이 욕을 내뱉으며 그를 피하려 했지만, 구안의 덩치가 워낙 큰지라 샥과 구안이 겹치며 바닥을 뒹굴었다.

사내가 일어나며 엎은 테이블이 그제야 바닥에 엎어졌다. 이 모든 일이 찰나의 순간에 이뤄졌음을 느끼고, 칸나는 몸을 잘게 떨었다.

'···일부러 테이블을.'

그제야 칸나는 사내가 테이블을 뒤집은 이유를 깨달았다. 사내는 자신의 사각지대를 막기 위해, 커다란 테이블을 뒤집었다.

철저한 계산의 산물이었다. 사내는 언제부터 이를 계산하고 있었던 거지? 칸나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그때, 사내가 말라깽이 하나를 바닥에 메다꽂았다.

자신은 칼을 피할 정도로 속도가 빨라서, 무거운 갑옷을 입을 필요가 없다고 호언장담하던 말라깽이였다.

하지만 사내의 손을 피할 정도로 빠르진 않았는지, 목덜미를 잡혀 바닥을 향해 수직으로 꽂히고 있었다.

다른 덩치가 그런 사내를 향해 칼을 휘둘렀지만, 사내의 초록색 견갑에 막혔다. 캉! 덩치가 낮게 욕을 지껄이며 칼을 놓쳤다.

콰앙! 사람을 꽂았다고 보기 힘든 살벌한 굉음에 순간, 모두 동작을 멈췄다.

혀를 길게 내민 것으로 봐서는, 이미 기절한 게 분명했지만, 사내한테는 충분하지 않은 듯했다.

사내는 말라깽이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콰직. 절로 인상이 찡그려지는 효과음과 함께 하얀 이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흩어졌다. 사내의 손이 붉은색으로 칠해졌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며, 사내의 붉은색 흉갑이 더욱 짙어졌다.

"미···미친 새끼!"

그 살벌한 모습을 지켜보는 놈들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지만, 이내 분노의 감정으로 변했다.

길거리에서 살아온 놈들이라, 두려움이 얼마나 나약한지 잘 알고 있었다. 억지로 몸집을 부풀리는 금수와 같았지만, 그들이 가장 잘하는 것이기도 했다.

"젠장. 돼지 새끼."

쓰러진 구안이 꿀렁이더니 옆으로 넘어갔고, 피범벅이 된 칼잡이 샥이 기어 나왔다. 칼잡이 샥은 혀를 날름거리며, 칼을 역수로 잡았다.

쾅! 싸움에서 나오기 힘든 굉음이 다시 터졌고 말라깽이가 사지를 부들부들 떨었다, 칼잡이 샥은 자세를 낮게 깔며 사내를 향해 접근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칸나는 원초적인 폭력 앞에 몸이 덜덜 떨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알록달록하여 우스꽝스러웠던 사내는 모두 짙은 붉은색으로 칠해져,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와도 같은 형상이었다.

그 잠깐 사이에 사내 하나가 기괴한 방향으로 비틀려 바닥을 뒹굴었다. 사내는 앞으로 엎어졌는데도, 발뒤꿈치가 땅에 닿았다.

칸나는 사내가 이기는 것도 무서웠고, 놈들이 이기는 것도 두려웠다.

저 흉측한 사내가 자신을 살려둘 것 같지 않았고, 샥이 이겨도 두목의 말을 어기고 살인을 저지른 샥에게 조직에서 척살자를 보낼 게 분명했다.

둘 중 누가 이기더라도 자신은 끝이었다. 칸나는 순간 억울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결국, 마지막 순간에도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내가 다른 놈 하나를 더 땅에 꽂으려고 할 때, 뱀처럼 땅을 기어 다가간 칼잡이 샥의 다리가 팽창했다.

샥이 매번 입버릇처럼 자랑하는 뱀 검법이었다. 이 기술로 기사를 죽인 적도 있다고, 상대가 누구든 뒤만 잡으면 반드시 죽일 수 있다며 자신감에 가득 차서 떠든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술만 마시면 자제력이 약해지는 샥은 멍청하게도 필사의 기술을 자작의 아들놈에게 펼쳤고, 그 때문에 이런 변방으로 쫓겨 도망친 것이었다.

샤악- 서늘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던 샥이 펄쩍 뛰었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샥이 이를 드러낸 독사처럼 보였다.

샥의 칼이 사내의 목덜미를 노렸다. 다른 놈 하나는 무기를 던지고 사내의 허리를 잡고 있었다. 놈은 샥을 믿는 듯했다. 비열한 칼잡이 샥은 기회를 봤을 때 놓치는 법이 없었으니까.

그때 사내는 얇은 가죽 입은 놈의 얼굴에 주먹을 박아 넣고 있었다. 하얀 이가 우수수 땅에 떨어졌지만, 사내는 멈추지 않았다.

사내의 목에 가까워지는 샥의 칼에 칸나는 사내의 끝을 직감했다. 사내는 두려울 정도로 강했지만, 결국 혼자였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늘 다수가 이겼다.

칸나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콰앙! 끅.

뭔가 부서지는 듯한 굉음과 얕은 숨소리가 섞여 귀를 간지럽혔다.

이상했다. 샥의 칼은 그 뱀이라는 별명처럼 소리를 내지 않기로 유명한데, 굉음이라니···.

그에 칸나는 무거운 눈꺼풀에 힘을 주어 눈을 떴고, 눈 앞에 펼쳐진 모습에 너무 놀라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입에서는 그저 '아···아···'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나왔다.

바닥에 구겨진 샥을 밟고 한 손에는 축 늘어진 놈의 멱살을 잡은 사내가 칸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온몸은 붉었고, 얼굴에 있는 기다란 자상을 타고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사내가 숨을 쉴 때마다, 맹수가 그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낮게 깔렸다.

사내와 눈이 마주쳤고, 사내가 예의 그 흉악한 표정을 지었다.

피를 뒤집어쓴 사내가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그때, 칸나는 사내가 허리춤의 검을 뽑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애가 똥오줌도 못 가리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의 밑으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에 혀를 찼다.

아이가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기에, 눈을 감으라고 했건만, 아이답게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와중에 한 놈이 문으로 도망쳤지만, 굳이 잡지 않았다. 켈이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놈이었다.

끄으윽···. 바로 아래 깔린 사슬 갑옷 입은 놈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꽤 값이 나가 보였기에, 사슬 갑옷을 벗기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놈이 살짝 반항했지만,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니, 입을 헤- 벌렸다.

그 상태에서 사슬 갑옷 머리 부분을 잡아당기니, 자연스럽게 벗겨졌다.

'안에 아무것도 안 입었네. 이 더러운 새끼.'

질이 좋은 사슬 갑옷이었지만, 여드름이 가득한 녀석의 피부에 닿았다고 생각하니, 입을 엄두가 안 났다. 거기에 내가 입기에는 크기가 작았다.

'팔던지, 애들 주든지 해야겠네.'

쩝. 입맛을 다셨다. 역시 돈 지랄이 최고였다. 잔챙이들은 두꺼운 철갑옷을 뚫을 힘이나 오러가 없었고, 나는 그 사이에서 강철의 남자였다.

"끄으윽··· 우···우리 두목이 널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놈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면서도 도끼눈을 뜨며 나를 노려봤다. 목소리에서 얼마나 악의가 흘러넘치는지, 아까 칼을 휘두를 때도 느꼈지만, 보통 놈은 아니었다.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가, 펄쩍 뛸 때는 벌레처럼 보여서 순간 놀랐다.

물론, 결국 벌레처럼 발길질 한 방에 찍-하고 엎어졌지만.

"두목?"

"그··· 그래! 우리 두목이 너의 배를 갈라, 그 창자를 생으로 뜯어 먹을 것이다!!"

내 대답에 기운을 얻은 것일까, 녀석이 의기양양해져서 목소리를 더 키웠다. 그러면서 가슴팍에 그려진 문신을 슬쩍 가리켰다.

그를 보다가 나는 녀석의 젖꼭지에 자란 굵직한 털을 보고 말았다.

'아이··· 시발.'

습관적으로 손이 나갔고, 방금까지 의기양양하던 녀석이 게거품을 물며 기절했다. 멱살을 놓고 손을 털었다.

'문신까지 새기는 놈들이, 굳이 이런 변방까지 왔다.'

생각해보니, 놈들이 어수룩하긴 했어도 칼을 휘두를 때 망설임이 없었다. 그 말인즉슨, 그 실력과 별개로 손에 피를 충분히 묻혔다는 뜻이었다.

그런 놈들이 이런 먹을 것 없는 변방에 온 이유는 뻔했다.

'수배 중이겠지.'

손가락을 톡톡 튕기며, 생각을 정리했다.

몸을 움직였기에, 목이 탔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바닥에 구르고 있는 은화도, 놈들도 아니었다.

"거기 냉장··· 아니, 이름이 뭐지?"

"네···네?!"

전과 달리 잔뜩 겁먹은 눈빛의 아이가 올려다봤다. 아이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러게 눈 감으라니까.'

혀를 차며, 쓰러진 놈들을 대충 옆에다 모아놓고, 테이블 위에 있던 천으로 그들을 가렸다. 그리고 아까 엎은 테이블을 다시 제대로 세웠다.

"앉아봐."

나는 아이가 최대한 안심할 수 있도록, 활짝 미소 지으며 테이블을 두드렸다. 내 진심이 전해졌을까, 아이는 바들바들 떨면서도 잽싸게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조셉!!"

"···여기있다."

얼굴이 퍼렇게 질린 조셉이 큼지막한 나무 맥주잔을 가져다줬다. 나는 그를 잠시 보다가, 아이 쪽으로 밀었다.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를 받았다.

"차갑게 할 수 있다고 했지?"

"아··· 네네! 할 수 있습니다!"

혹여나 아이가 압박을 느낄까 봐, 다시금 활짝 웃었고 내 친절한 미소에 용기를 얻었는지, 아이가 양손으로 맥주잔을 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삐걱. 그때 문이 열리고 켈이 도망친 놈의 멱살을 잡아, 질질 끌며 들어왔다.

"조장, 적당히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적당하잖아. 이 정도면."

내 대답에 켈이 미간을 좁히며, 주변을 한 바퀴 살폈다. 그에 나도 켈의 시선을 따라 주변을 둘러봤다.

부서진 테이블과 곳곳에 뿌려진 피와 하얀 이, 천으로 포장된 양아치들. 적당했다.

"예, 참 적당히 하셨습니다."

묘하게 빈정대면서도 켈은 덮어둔 천을 들어서, 기절한 놈들을 살폈다.

"이거··· 카르잔 쪽 애들인 것 같습니다?"

켈이 중얼거리면서 쓰러진 애들을 뒤적거렸다. 켈의 손에는 녀석들의 품에서 나온 주머니가 한 움큼 쌓였다.

"현상금도 받을 수 있을걸. 일단, 영주님 쪽에 넘기는 게 깔끔할 것 같긴 한데."

"예. 제 생각도 비슷합니다. 이런 놈들 굳이 끌고 다녀봤자, 귀찮기만 하지···. 그리고 카르잔 쪽 수배자라면 영주님도 좋아할 게 분명합니다."

흐음··· 켈이 작게 침음성을 내며, 녀석들의 무장을 해체했다. 그 손놀림이 얼마나 빠른지, 손이 한번 지나간 자리에 장비가 뚝뚝 떨어졌다. 녀석들의 몸에 있던 칼붙이나 장비들이 옆에 차곡차곡 쌓였다.

"···히끅."

그때, 아이가 작게 울음을 참으며, 맥주잔을 내밀었다.

맥주잔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심장이 마구 뛰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떨림인지···. 나도 모르게 떨리는 손을 내밀어 맥주잔을 잡았다.

'차가워! 맥주잔이··· 차갑다니!'

침을 꿀꺽 삼키며, 잔을 천천히 입에 가져갔다. 이윽고 시원한 맥주가 식도를 타고 흘러내렸고, 머릿속에 짜릿함이 번개처럼 번쩍였다. 온몸으로 피가 흐르는 듯한 느낌. 살아있다는 게 자각됐다.

'···이게 맥주지.'

큼지막한 맥주잔을 단번에 비우고, 내 머리 위에 대고 거꾸로 흔들었다. 그 시원함이 혈관 하나하나에 퍼지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잡아야 한다.'

비록 똥오줌도 못 가리는 아이였지만, 어차피 길거리에 똥 싸는 놈들이 즐비한 세상이었다. 옷에 오줌을 갈기는 건 오히려 신사적일 수도 있었다.

일단, 잡아야 했다. 이 냉장고만 있다면 언제든 시원한 맥주를 마실 수 있으니. 이 냉장고를··· 아니, 아이를 반드시 잡아야 했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했다. 얼마를 줄 수 있을지, 어떤 조건을 제시해야 할지. 머리가 팽팽 돌았다.

"크흠··· 일단, 내가 제안할 거래 조건은···."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그때, 아이가 돌연 내 말을 자르고 소리를 빽! 질렀다.

그 절박한 외침에 켈이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러면서도 묻지 않고 제 할 일을 하는 게, 오히려 더 거슬렸다.

"크흠···."

주변이 아이에게 좋은 모습은 아니었기에, 아이가 충분히 오해할 만하다 생각했다. 그에 나는 다시금 최대한으로 상냥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숙식을 제공해주고, 네 안전도 보장해주겠다. 조율해서, 일정량의 은화도 쥐여주지. 너는 그저 내가 원할 때, 저렇게 맥주를 시원하게만 만들어주면 돼."

나는 '책을 포기한 떠돌이 꼬마 마법사'가 원할만한 조건을 꺼냈다.

아이는 우산이 필요할 것이다. 이곳은 아이가 홀로 버티기에 지독한 비가 자주 내리는 곳이었으니.

"···예? 네네! 네!"

아이가 여전히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맹렬히 끄덕였다.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한 건가?'

보통 이럴 때는 확실하게 해 두는 것이 좋았기에 다시 입을 열려던 때.

쾅!

갑자기 문이 부서질 것처럼 세게 열렸다.

"감히!! 이 캐서딕 성의 그림자, 스카의 허락도 받지 않고 사기를 쳐?!!"

""사기를 쳐?!""

등장한 것은 빵모자를 쓴 곰탱이 스카와 떨거지들이었다. 떨거지들을 얼마나 많이 데리고 왔는지, 순식간에 술집이 가득 찼다.

그들은 잔뜩 굳은 얼굴로, 손에는 무기가 아닌 목공소에서 가져온 게 분명한 공구를 들고 있었다.

그중에는 상의를 입지 않고 빵모자만 쓴 변태 놈도 있었다.

"응? 아론? 아론이 여기 왜?"

호기롭게 외친 스카가 나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큼지막하고 어울리지 않게 반짝이는 눈망울에 울컥 짜증이 솟구쳤다. 나는 손가락을 까닥거렸고, 스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왔다.

나는 가까이 다가온 녀석의 귀를 잡아, 냅다 비틀었다. 그에 스카가 큼지막한 손으로 내 손을 두드렸다.

"켁! 자···잠깐! 오해가 있다! 오해가!"

"오해는 무슨 염병. 너 요즘 또 목공소 안 나간다며?"

"누··· 누구냐! 이번에는 캐시한테도 출근한다고 했거늘! 밀고자를 심어둔 것이냐! 아론!"

"밀고자는 지랄. 그리고 여기는 또 왜 왔어? 목공소 망치는 왜 훔쳤고."

"훔치다니! 대의를 위해, 잠시 빌린 것이다! 아악! 아파!"

스카가 내 손을 치면서, 곁눈질로 뒤에 있는 떨거지들을 가리켰다. 자기도 나름 부하들 앞이라 체면을 세워달라는 모양새였다. 그 모습에 허탈하여 손을 놓았다.

"마침 잘 왔다. 저쪽에 있는 애들 끌어다가 내성 쪽에 던져줘라. 내 이름으로 달아두고."

"응? 엇! 벌써 처리했나? 한발 늦었군."

금세 예의 그 보는 사람 화나게 하는 표정으로 돌아온 스카가 줄줄 묶인 놈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에 참지 못하고 한 대 쥐어박았고, 스카가 애써 아프지 않은 척 입을 꾹 다물었지만, 눈가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크흠··· 일어나라! 이놈들아!"

힘 하나는 뛰어난 스카가 녀석들을 묶은 줄을 쭉 끌어당겼고, 그에 놈들이 주르륵 끌려왔다. 그 모습에 옆의 빵모자들이 박수치며 감탄을 내뱉자, 잔뜩 신이 난 스카가 줄을 확 끌어당겼고, 놈들이 의자나 테이블에 부딪히면서 순식간에 난장판이 됐다.

"아··· 안 돼··· 아론은 금지라고···."

염소수염 조셉이 낮게 울먹이는 소리를 냈다.

그에 스카가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허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