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24

...쯔읍! 쯔즙!

"커...억...."

피가 흘렀다.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며 검붉은 흔적을 남겼다. 희생자가 두 팔을 버둥거렸다. 저항의 뜻은 담았으되, 목적을 이루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몸짓.

그걸 무시하며, 뱀파이어 블라도는 고개를 들었다.

"후우."

그는 희생자의 목덜미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자신의 송곳니가 뚫어낸 구멍 두 개가 보였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핏줄기도 보였다. 탐스러웠다. 당장에라도 다시 송곳니를 박고서 저 혈액을 모조리 빨아먹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여기서 더 혈액을 탐한다면, 이놈이 죽을 테니까. 변이증을 앓지도 못할 테니까. 그건... 주군이 허락한 바가 아니니까.

'쯧.'

참자.

블라도는 가까스로 자제력을 발휘하며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달랬다. 어차피 밤은 길고 사냥감은 많다. 더 많은 피를 탐하고 싶다면, 더 많은 사냥감을 잡으면 된다.

'이곳의 사냥감들은 경계심이 흐릿하니까. 크흣.'

사실이었다.

황도 마젠타.

거대한 제국의 중심이자, 인간 세상에서 가장 성대한 도시. 24시간 불빛이 꺼지지 않는 지상의 태양. 그런 덕일까. 이곳엔 한밤이 깊도록 행인이 많았다. 치안이 좋은 까닭인지 경계심도 별로 없었다.

'내 평생 이렇게 사냥이 쉬웠던 적이 있었던가.'

아니, 없었다.

30년 전, 주군의 손에 의해 뱀파이어로 거듭난 뒤로 이렇게 편안한 사냥은 처음이었다. 진즉 황도에 와볼 것을, 그러지 못하였음이 후회가 될 정도였다.

'그럼 다음은... 어디 보자.'

희생자를 골목 구석에 버려둔 블라도는 다음 사냥감을 물색했다. 그의 사냥감을 선정하는 기준은 하나였다.

'기왕이면 덩치가 크면 좋겠는데.'

그래야 혈액량이 많다. 죽지 않을 만큼 먹으면서도 만족스럽게 배를 불릴 수 있다. 거기에 비만으로 커진 덩치가 아닌, 골격과 체구 자체가 큰 사냥감이라면 금상첨화다. 기름기가 적어서 뒷맛이 담백하고 깔끔하니까.

그는 어둠 속 담벼락에 웅크린 채 대로를 지나는 인간들을 장 보듯이 물색했다.

'저놈? 아니. 뱃살이 많으면 맛이 느끼하니까 탈락. 그럼 저건... 너무 비리비리하고. 하면 저건... 어? 저거다.'

문득 눈에 들어온 사냥감 하나.

얼핏 봐도 체구가 컸다. 키는 최소 190센티 이상일 듯하며, 적당한 근육질에 군살도 적어 보였다. 그야말로 양과 질을 모두 만족시키는 1등급 사냥감이었다.

블라도의 눈동자에 핏빛 탐욕이 스몄다.

'오늘은 너로 정했다. 후후....'

그는 달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드문드문 밤거리를 거니는 인간들의 오감을 피해 사냥감의 뒤를 밟았다. 당연하게도 사냥감은 그의 미행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하였....

"누구길래 날 따라오지?"

"...!"

블라도는 흠칫했다.

사냥감을 따라 골목 입구에 첫발을 들이자마자 물음이 날아왔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처음부터 미행을 알고 있었다는 듯, 달그림자 사이에서 묘한 눈길로 이쪽을 쳐다보는 사냥감의 눈빛이란.

'뭐지?'

생각보다 실력이 있는 놈인가?

하지만 상관없다. 그래 봤자 열등한 인간일 뿐. 뱀파이어에 비하자면 한없이 나약하디 나약한 사냥감일 뿐. 그러니....

'네 피를 바쳐라!'

그는 사냥감의 물음에 대답 대신 비릿하게 웃었다.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를 번득이며 재빠르게 사냥감을 덮쳐갔다.

물론 거구의 사냥감은 그때까지도 반응하지 못했다. 아니,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실망스러운 혼잣말 한마디를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하였을 뿐.

"리한 군의관이... 아닌가?"

콰직!

잠시 후.

골목 안쪽에서 뱀파이어 아구창 돌아가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260화. 예절교육은 물리치료가 제맛 (1)

옛날 옛적, 드래곤이 대장내시경 받고 아야했던 시절에 골목길을 거닐던 어느 뱀파이어가 있었어요. 그 뱀파이어는 몹시 배가 고팠답니다. 그래서 골목에서 마주친 거한에게 애절한 심정을 담아서 '한 입만?'이라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글쎄, 거한이 친절하게 손을 내밀었지 뭐예요? 덕분에 뱀파이어는 아구창이 따뜻해질 수 있었답니다. 주먹이 전달하는 충격력의 일부는 국지적인 규모에서 소량의 열에너지로 변환될 수도 있다는 열역학적 사실, 우리 모두 기억해 두자구요?

...콰직!

"...!"

경쾌하게 골목을 가득 채우는 파열음. 두개골을 온통 뒤흔드는 충격. 그 속에서 뱀파이어 블라도는 경악했다.

'뭐... 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그저 사냥감을 덮쳤을 뿐이었다. 평소와 똑같았다. 접근은 완벽했고, 상대는 이쪽의 정체를 깨닫지 못한 듯했다. 거의 아무런 경계심도 내비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적어도 그렇게 보였으니까.

그러니까 인간 따위는 뱀파이어인 자신이 근거리에서 감행한 습격에 반응하지도 못할 텐데. 마땅히 그래야 하는데. 그게 정상인 건데.

그런데 왜... 지금 내 고개가 홱 돌아가고 있는 걸까. 어이없게 헤에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하얗고 뾰족한 무언가가 허공을 뱅글뱅글 가로지르며 날아가고 있는 걸까.

익숙한 색깔.

낯익은 모양.

그래, 주군께서는 내 송곳니가 유달리 길고 예쁘게 잘 빠졌노라고 칭찬을 하셨더랬지. 덕분에 나는 송곳니가 잘생긴 뱀파이어로 동료 권속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기도 했어. 내 아름다운 송곳니. 내 자부심. 그런데 그게 왜....

'저기로 날아가고 있지?'

블라도는 눈을 홉떴다.

부러져서 뱅글뱅글 날아가는 송곳니 한쪽. 분명 자신의 송곳니였다. 삽시간에 받은 충격 때문에 다리가 풀려서 영덕대게 스텝을 밟는 와중에도 그것만은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어째서? 왜?'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정신을 가다듬으려 노력했다.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다. 방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분명, 성공적으로 덮쳤다고 생각했는데.'

실패했다.

사냥감의 목덜미를 깨물기 직전이었다. 섬뜩하고도 강맹한 기세의 돌풍이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안면을 후려쳤다. 무엇이? 그래, 저 사냥감의 커다란 주먹이 내 얼굴에 쾅 하고.

'날 쳤다고? 고작 인간 주제에?'

어이가 없었다.

...터턱!

상황을 깨달은 블라도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넘어지기 직전에 균형을 회복했다. 어처구니가 가출하며 생겨난 마음속의 공백지에 분노의 감정을 가득 채웠다. 감히. 인간 따위가. 내 송곳니를.

'죽인다!'

이번만큼은 참을 수가 없다. 아무리 주군의 엄명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사냥감을 죽이지 말고 변이증에 시달릴 정도로만 살려두라는 신신당부가 있었다지만, 이건 경우가 달랐다.

'날 쳤어. 그러니 이제부터 이건 사냥이 아니다. 전투다. 죽인다! 반드시!'

사냥감이 아닌 전투 대상.

그러니 주군의 명을 따르지 않아도 되리라. 내 송곳니를 부러뜨린 치욕을 백 배, 천 배의 고통으로 갚아주리라.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신세로 만들어 제발 죽여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 주리라!

...라는 다짐은 블라도의 희망사항으로 끝나고 말았다.

콰직!

"...!"

또다시 울리는 골통.

흔들린 우정, 아니, 밤하늘의 별빛.

'어?'

블라도는 저도 모르게 다리가 완전히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이쪽으로 저벅저벅 다가오는 거한의 실루엣이 달그림자 사이로 엇비쳤다. 이쪽을 내려다보는 눈길. 그러니까, 도마 위의 생선을 바라보는 듯한 무심한 눈초리.

...오싹!

어째서 소름이 돋는 걸까.

나는 뱀파이어인데.

저쪽은 사냥감인 인간에 불과한데.

그런데 왜, 어떻게?

그는 곧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하나만 묻고 싶은데."

츠스스스스!

거한의 손에 들린 각목에서 찬란한 섬광이 피어났다. 검붉은 태양의 일부가 지상에 강림한 것만 같은 압도감. 죽음의 근원을 긁어내어 눈앞에 보여주는 듯한 초월적 섬뜩함. 보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저건... 오러소드?'

언젠가 문헌에서 본 적이 있다. 검에서 찬란한 섬광을 피워내는 이들이 있노라고. 그저 한순간의 검기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위력이라고. 그 오러소드의 빛을 밝힐 수 있는 이들을, 사람들은 '소드마스터'라 부른다고.

...꿀꺽.

그럼 설마.

내가 소드마스터를 건드렸다고?

'소드마스터가 왜... 여기서 나와?'

블라도는 억울해졌다. 그저 평소처럼 사냥을 했을 뿐인데 하필이면 상대가 소드마스터라니. 심지어 검도 아닌, 한낱 나무토막으로 오러소드를 생성하는 괴물이라니.

'이건 말도 안 되잖아!'

만약 이게 소설이라면 글쓴이의 멱살을 잡아다가 뺨이라도 후려치고 싶다. 어째서 저런 괴물이 거지 같은 행색으로 골목길을 배회하고 있던 거냐고. 이게 말이 되느냐고. 개연성은 어디 개밥그릇에 던져넣었느냐고. 진심으로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소망이었다. 당장 오러소드를 이글이글 불태우는 소드마스터가 저벅저벅 다가왔으니까. 더욱 이해 불가능한 질문을 던져왔으니까.

"리한 군의관을 본 적이 있나?"

"...예?"

저절로 공손(?)하게 나오는 반문.

심지어 블라도는 주저앉은 자세마저 다소곳해졌다. 즉, 그는 무의식중에 무릎을 꿇고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로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잘 못 들었습니다?"

자고로 최고의 예절 주입기는 물리력! 그러한 동서고금의 진리(?)를 블라도가 체감하는 사이, 거구의 소드마스터, 쟈빌론이 물었다.

"리한 군의관을 아느냐고... 물었는데...."

"리한 군의관...이요?"

"그래. 혹시 아나?"

"어, 그건...."

"모르면 어쩔 수 없지."

스윽.

쟈빌론의 각목이 치켜 들렸다. 이글거리는 오러소드가 섬뜩한 빛을 토해냈다. 그걸 본 순간 블라도는 다급해져서 저도 모르게 외쳤다.

"압니다!"

"...정말?"

"예!"

"어떻게?"

갸웃.

쟈빌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편으로 그는 기쁨을 느꼈다. 황도 마젠타에 도착한 이래로 이때껏 수많은 이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던 그였다. 리한 군의관을 아느냐고. 불행히도 긍정적인 대답을 한 번도 받지 못하였다.

하여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정말로 리한 군의관을... 알아?"

"예, 예! 정말입니다! 압니다!"

블라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모른다. 리한인지 리한나인지 처음 듣는다. 그래도 지금은 살려면 뭐라도 해야 했다. 소드마스터는 무서우니까. 당장 죽을 판이니까.

그는 재빠르게 입을 놀렸다.

"사실은 그가 제 이웃입니다!"

"이웃...이라고?"

"예, 예! 리한 군의관 말씀이시죠? 옆집에 삽니다! 제 집에 딱 붙어 있는 초록색 지붕 집이요!"

"정말로...?"

"예, 정말입니다. 진짜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좁을 줄이야. 제가 이렇듯 당신을 만난 것이 어쩌면 운명인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하늘이 제게 이런 기회를 베풀어 당신을 리한 군의관에게 안내할 수 있게 된 것인지도요?"

"그, 그런... 가?"

"아무렴요!"

됐다.

통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눈앞의 이 소드마스터, 뭔가 정신이 온전하지가 않은 것 같다. 사고체계가 망가진 사람 같달까. 혹은 머리를 다쳐서 바보가 된 것 같달까. 어쨌건 순진하게도 이쪽의 말을 넙죽 믿는 모양새다.

하지만 그건 섣부른 착각이었다.

"하지만... 넌 날 덮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예에?"

"조금... 전에."

"어, 그건...."

"내 목을 깨물...려고...."

"아닙니다!"

"...아니야?"

"예. 제가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생사람 목을 어떻게 깨물... 어휴, 소름 돋아. 그런 야만스러운 말씀은 하지도 마시죠."

"어? 그, 그래?"

"아무렴요. 제가 당신의 목을 깨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까는 왜...."

"저는 그저 당신께 가까이 다가가서 귓속말을 건네드리려고 했던 겁니다!"

"귓속말을?"

"예에. 리한 군의관을 찾고 계셨잖아요?"

"그, 그랬지."

"그런데 리한 군의관이 어디어디 산다고 크게 말하면 안 되는 거지 않겠습니까?"

"어째서...?"

"리한 군의관에게도 개인의 존엄이 있으니까요. 누군가가 들을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집 주소가 알려지고 퍼뜨려지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건 민폐지요. 저도 리한 군의관의 이웃인데, 그런 짓을 함부로 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 그, 듣고 보니... 그렇군."

"그렇지요?"

"그래...."

쟈빌론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뒤엉킨 의식과 이성 때문에 뭔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상대가 하는 말이 복잡해서 그럴듯하게 들리긴 했다.

덕분에 블라도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러니 말입니다. 저를 더 때리지만 않아 주시면... 제가 당신을 리한 군의관에게 안내해드릴 수 있을 겁니다. 어떻습니까?"

"그러면... 좋아...."

스르륵.

오러소드가 불 꺼지듯 사라졌다.

쟈빌론은 순진무구하게 웃었다. 진심으로 기뻤다. 드디어 만날 수 있다. 그리웠다. 리한 군의관을 나만의 주치의로 내 곁에 둘 수 있다. 이번에는 도망치지 못하게 확실히 잡아둬야지. 평생 내 머리를 쓰다듬게 해야지. 그래야 지옥 같은 두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

"어서... 안내해 줘...."

"아, 예. 그런데 제가 아직 다리가 말을 듣질 않아서...."

"어서...."

"그, 크읏! 힘내겠습니다! 으으읏, 윽! 돼, 됐습니다!"

"좋아... 훌륭해...."

"예, 예! 그럼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고맙군...."

"아유, 별말씀을요!"

블라도도 웃었다. 진심으로 기뻤다. 이렇게도 살아날 수 있구나. 안심이 되었다. 이제는 이 괴상한 소드마스터를 아지트로 유인할 수 있겠다. 그곳에서라면 이놈을 확실히 제압할 수 있겠지. 주군이 계시니까. 주군께 이놈의 피를 바쳐야지. 그래야 내 지위도 더욱 올라갈 테니.

'...크크큭, 넌 이제 죽은 목숨이다!'

블라도는 살벌한 속내를 숨기며 더욱 친절하고 공손하게 쟈빌론을 안내했다. 물론 자신 일당의 아지트를 향해서였다.

그는 확신했다.

아무리 소드마스터라고 해도 주군의 힘을 감당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우리 주군은 강력하시니까. 위대하시니까.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소드마스터 하나쯤은 순식간에 찜쪄먹으실 테니까.

물론 블라도는 꿈에조차 몰랐다.

이쪽의 계략에 걸려든 쟈빌론. 주군의 먹잇감으로 바쳐지기 위해 아지트로 유인당하는 소드마스터. 몰락한 앙부아즈의 반란자.

이 거구의 사내가 내전에서 패배한 이후로 얼마나 혹독한 시련의 나날을 견디었는지. 가혹한 마법 실험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어떤 지옥을 버텨내었는지. 그리하여 지금은... 일반적인 소드마스터의 상식을 가볍게 찢어 버릴 초월적 괴물이 되어 있다는 사실 또한.

261화. 예절교육은 물리치료가 제맛 (2)

'리한 군의관은... 어디에 있는 걸까.'

만나고 싶다.

사로잡고 싶다.

영원히 도망치지 못하도록 곁에 두고 싶다. 평생 주치의로 잡아두어서 내 머리만 쓰다듬게 만들고 싶다. 그래야 이 지긋지긋한 두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조금은 웃으며 살 수 있을 듯하니까. 그러니까 제발....

'리한 군의관, 내 앞에 나타나 줘.'

지금껏 얼마나 되뇌었던가. 하지만 그런 기적은 일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애타는 애원과 갈망은 단호한 침묵과 냉대로 돌아왔다. 길에서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들을 수 있는 답이라고는 무시, 혹은 '모르는데요'라는 건조한 대꾸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가슴속에 희망이 피어났다. 더는 침묵이나 부정적인 대답을 듣지 않을 수 있을 듯했다. 지금 자신을 안내하는 이가 무려 리한 군의관의 옆집에 산다고 했으니까!

'리한 군의관은... 어떤 곳에 살고 있을까.'

두근두근.

쟈빌론은 설레는 마음을 안고서 걸었다. 그동안 주위의 풍경이 조금씩 바뀌었다. 시가지의 대로에서 외곽 지대의 인적 없는 골목으로. 오가는 이라고는 쓰레기통을 뒤지는 고양이와 생쥐가 전부인 삭막한 곳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하지?"

빨리 도착하면 좋겠다.

어서 리한 군의관을 보고 싶다.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보채듯이 물었다. 안내를 하던 이가 난처한 듯이 웃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예? 아,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그런가...."

"예, 저쪽 골목 모퉁이를 돌면 되니까요."

"그럼 다 온 것이로군?"

"그렇다고 할 수 있겠죠?"

"그렇지. 그거지."

쟈빌론은 콧김을 풍 뿜어냈다.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리한 군의관을 본 지가 너무나 오래되었다. 그래서 한편으로 걱정도 들었다. 너무 오랜만이라서 리한 군의관이 자신을 못 알아보면 어쩌나 싶은 걱정이었다.

그사이 자신은 나쁜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이상한 실험을 많이 당했는데. 괴롭힘도 많이 당했는데. 그래서 리한 군의관이 이쪽을 기억 못하면 어쩌지. 그럼 나는 어떡해야 할까.

걱정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안내인이 웃으며 문을 열었다.

"이쪽입니다."

끼이익....

낡은 저택이었다. 열린 문 안쪽으로 관리가 덜 된 아담한 정원이 보였다. 정원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보였다. 숫자는 열하나. 다들 인상이 창백하고 송곳니가 유독 뾰족한 자들이었다.

"...."

이 안내인, 식구가 많구나.

나처럼 외롭거나 하진 않겠어.

'부럽다....'

그런데 어째서 다들 이쪽을 쳐다보는 눈길마저 뾰족한 걸까. 날 경계하는 걸까. 아니면 유달리 수줍음이 많은 가족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쟈빌론은 안내인을 따라 정원을 통과하여 건물 본채로 들어갔다.

건물 내부는 어두웠다. 창문마다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진 탓이었다. 햇볕을 싫어하는 건가. 피부 관리에 관심이 많은 가족이구나. 난 햇볕이 좋던데. 쬐고 있으면 따뜻하고. 기분이 좋고.

"그나저나, 리한 군의관은?"

"아, 제가 미리 연락을 넣었습니다. 곧 올 겁니다."

"그래?"

"예."

"옆집이라면서."

"그렇지요."

"그런데 왜 옆집으로 찾아가질 않고?"

"...."

쟈빌론은 문득 떠오르는 의문을 건넸다. 안내인이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허겁지겁 침묵을 옆으로 치워내듯 대답했다.

"...아, 집이 많이 어질러져 있어서, 당장 손님을 받기에는 부담스럽다고 했습니다."

"리한 군의관이?"

"예에, 예. 리한 군의관이요."

"정말?"

"아무렴요."

뱀파이어 블라도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방금은 조금 섬뜩했다.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듯한 이 인간, 까닭은 모르겠지만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듯해서 조금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무난하게 아지트로 유인해냈다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방금 받은 질문은 의외로 날카로웠다.

'끝까지 조심해야겠어.'

자신의 주군이 이놈을 처리하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 블라도는 새삼 긴장하며 열심히 변명을 입에 담았다.

"보통 아무런 연락 없이 갑자기 손님이 찾아오면 좀 부담스러워하는 게 일반적이니까요. 아마 리한 군의관도 그런 것 같았습니다. 대신 제가 리한 군의관에게 특별히 일러둔 말이 있긴 합니다."

"특별히? 무슨 말을?"

"아주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셨으니, 다른 바쁜 일이 있어도 잠시 미뤄두고 얼른 오라고 말이지요."

"그, 그래...?"

"예."

"그거 고맙군. 고마워. 진심으로."

"아, 예에. 하하하...."

다행이다.

잘 속여넘겼다.

블라도는 목덜미에 배어나는 진땀을 몰래 훔쳐냈다.

"이쪽으로 올라오시죠. 2층의 응접실에서 기다리시면 될 겁니다."

"그래, 어서 가지."

쟈빌론의 가슴이 더욱 뛰었다. 이게 곧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2층에 올라왔는데 리한 군의관이 보이지 않는 걸까. 또 어째서 2층에 있던 저 사람은 저런 눈길로 이쪽을 쳐다보는 걸까.

예를 들자면, 세수를 하다가 바퀴벌레를 발견한 것 같은 눈빛 말이다.

"이건 뭐지."

뱀파이어들의 아지트, 그들의 주군인 흑마법사 아난샤는 내심 경악했다. 처음에는 멍청한 권속 하나가 멋대로 외부인을 아지트에 데려온 줄 알았다. 그런데 다시 보니 아니었다. 아지트에 온 인간의 얼굴이 낯익은 탓이었다.

'저건... 황도에 처음 당도하였을 때 마주쳤던 미친놈 같은데?'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당시에 리, 무슨 군의관인지 뭔지를 아느냐고 물었던 거한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마나의 파동이 거한에게서 노골적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무슨 이런.'

그는 감탄했다.

보통이 아니다.

정상이 아니다.

일반적인 사람에게서는 느껴본 적이 없는 종류의 위세였다. 마치 목줄이 풀린 괴물과 맞닥뜨린 듯한 느낌이었다. 피부가 저릿해졌다. 만만한 먹잇감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

아난샤는 자신의 권속을 쳐다보았다. 잔뜩 위축되어 있는 권속을 보자마자 자초지종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감당이 안 되는 괴물을 사냥하려다가 죽기 싫으니, 아지트로 꾀어온 것이겠지. 무능한 놈 같으니라고.

하지만 지금은 권속을 추궁할 때가 아니었다.

"리한 군의관은... 언제 오지?"

거한, 쟈빌론은 연신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물었다. 기대감과 설렘 때문에 마나가 들썩거리는 걸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편으로는 초조했다. 어째서 온다는 리한 군의관은 소식이 없는 걸까. 옆집이라면 금방 올 텐데. 그런데....

"온다는 리한 군의관은 안 보이고. 혹시 날 속인 건 아니겠지?"

그의 눈빛이 불안정해졌다.

아난샤는 의자에 앉은 채 꼬고 있던 다리를 풀었다. 어느새 그의 눈빛은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결심했다. 상대의 마나가 심상치 않든 말든 상관없다. 이미 아지트에 들어왔으니, 온전하게 내보낼 수는 없게 됐으니까.

그러니 차라리....

스윽.

아난샤가 한 손을 들며 우아하게 웃었다.

"그럴 리가요. 내 거처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또한, 내 먹잇감이 되실 것을 미리 축하합니다, 방대한 마나를 지닌 탐스러운 이여.

그가 되뇌는 순간.

치켜든 손에서 검붉은 마력이 방출되었다.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12갈래의 흑마법사 지파,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베일에 감싸여 있던 혈염의 권능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보아라, 이것이 바로 부항의 권능이다.'

같은 시각, 별궁.

라키엘은 흐뭇함이 쑴펑쑴펑 돋아나는 눈길을 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야물딱지게 떠오른 메시지창을 재빠르게 훑어보았다.

딩동!

[당신은 성물의 과감한 활용과 부항 요법의 응용으로 환자 : 발렌티노의 뱀파이어 변이증을 성공적으로 진료하였습니다. 그는 심각한 변이성 질환에서 벗어났으며, 적절한 안정을 취할 시 별다른 후유증 없이 완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료비 청구 (Lv.2) 스킬이 발동됩니다.]

역시나 환자를 치료하는 보람은 마지막에야 팍 하고 온다. 한국에 있던 시절에는 수납되는 진료비, 여기서는 쌓여가는 보너스 수명으로!

[환자 : 발렌티노는 당신의 치료를 통해 총 41년 9개월의 기대수명 연장 혜택을 받았습니다. 이에 당신은 41년 9개월의 1/1950에 해당하는 보너스 수명을 정산받습니다.]

[7.7 일의 보너스 수명이 계산되었습니다.]

[정산되는 수명의 최소 단위는 1일입니다.]

[정산되는 보너스 수명이 반올림 처리됩니다.]

[총 8일의 보너스 수명이 정산됩니다.]

[당신의 예상 기대수명 : 1,061일]

'...좋았어.'

가뜩이나 크라노스에서 왕창 쌓아둔 보너스 수명이었다. 거기에 추가로 뱀파이어 변이증을 치료하며 쌓는 수명이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아주 만수무강을 해줄 테다!'

이미 부귀영화 라이프가 확정된 몸이었다. 거기에 딱 하나 아쉬운 수명까지 잔치국수 면발처럼 길이길이 이어진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로또 1등과 강남 초역세권 인기 아파트 청약 당첨이 줄줄이 이어지는 겹경사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단순히 기뻐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라키엘은 흐뭇한 심정을 침착하게 갈무리하며 환자, 발렌티노의 상태부터 살폈다.

"어때, 정신이 좀 들어?"

"아... 전하?"

"이제 사람으로 돌아왔구만?"

"...."

발렌티노는 대답하지 못했다. 일순간, 그동안의 흐릿했던 기억들이 또렷하게 좌라락 정리되며 머릿속으로 훅 몰려들어 왔기 때문이었다.

약혼녀를 바래다주고 돌아오던 밤거리. 낯선 행색의 사람. 깨물리던 목덜미. 몽롱하던 동안의 기억들. 그리고 쑥과 생마늘에 시달려야 했던 나날들까지....

"...우웁?"

그동안 차곡차곡 적립(?)했던 구역질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다음 순간, 그는 황태자 앞이고 뭐고 없이 반사적으로 튀어 나갔다. 입을 틀어막고서, 식도를 힘차게 두드리는 마늘향의 역류를 느끼며 가장 가까운 화장실을 향해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본 라키엘이 빵긋 웃었다.

"허허, 팔팔하게 뛰는 걸 보니 정상이구만."

경혈 스캐닝으로 다 보였다.

발렌티노의 신체를 잠식하고 있던 뱀파이어 변이증. 그로 말미암아 흐트러져 있던 기혈의 흐름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다급하게 뛰는 뒷모습, 구토의 기미를 보이며 꿀렁거리는 위장의 움직임을 보니 확실했다.

'됐다. 이젠 할 수 있겠어.'

확신이 피어났다. 성물을 활용한 부항 요법, 효과가 확실하다. 하니 다른 변이증 환자들도 똑같이 치료하면 될 것이다.

"그렇겠지요, 대주교님?"

"허허허... 여부가 있겠습니까."

대주교도 그만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게 되네.

그리고 한편, 같은 시각.

황도 시가지 외곽의 낡은 대저택.

그곳에서는 어느 거구의 소드마스터와 혈염의 흑마법사가 고래 같은 격돌로 대폭발을 일으키며 애꿎은 일반 뱀파이어들의 등짝을 새우꽁 봉다리처럼 팡팡 터뜨리고 있었다.

262화. 예절교육은 물리치료가 제맛 (3)

뽀옵!

"...흡!"

황도 중심부의 별궁 한의원.

이곳에서는 성물 반쪽이 어느 뱀파이어 변이증 환자의 뱃가죽에 촵 달라붙어 효과 확실한 부항 자국을 야물딱지게 새기고 있었다.

"자아, 움직이지 마시고."

라키엘은 정신을 집중하며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했다.

키이이잉-!

포효하듯 역회전하는 마나써클. 이내 생성되는 강력한 흡입력. 뱃가죽을 통과해서 성물 부항컵(?) 안쪽으로 알차게 고여드는 환자의 혈액. 변이증에 오염된 피가 성물과 만나며 정화되었다.

'좋아.'

역시나 발렌티노를 치료했던 때와 똑같은 반응이다. 효과가 있다. 라키엘은 새삼스러운 확신을 느끼며 만족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약간의 피로감 또한 느꼈다.

'이거, 내가 일일이 아스라한 심법을 사용해야 하는 점이 조금 빡쎄네.'

효과는 좋은데, 대신 좀 피곤했다. 게다가 앞으로의 일정도 조금 막막했다. 당장 별궁 한의원에 격리되어 입원 중인 변이증 환자들? 백 단위가 넘어가는 터였다. 한데 그들만 전부 치료한다고 일이 끝나는 게 아닐 듯해서 더 막막했다.

'지금도 어딘가에선 실시간으로 뱀파이어에게 물리는 사람이 계속 생겨나고 있을 거니까. 이건 막아도 막아도 끝이 없는 건데.'

물론 자신에겐 손해가 없다. 밀려오는 변이증 환자? 계속 이렇게 부항으로 치료하면 된다. 그만큼 보너스 수명을 거듭 얻을 테니까. 오히려 이득이다.

'짧게만 본다면 말이지....'

라키엘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생각을 조금 더 해보면 조만간 생길 문제점을 예상할 수 있는 까닭이었다.

'이 부항 요법으로 환자를 확실하게 치료할 수는 있지만... 환자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아지면 그때부터는 감당이 안 될 거야. 부항 요법 순서를 기다리는 사이에 변이증이 지나치게 진행되면서 치료 시기를 놓치는 환자가 생길 거니까.'

웅녀 테라피로 변이증의 진행을 늦추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대기 환자의 숫자가 몇백이 아니라 수천, 수만이 되어 버리면? 그땐 감당이 안 된다. 대기표 뽑고 기다리다가 죽거나, 완전히 뱀파이어로 변이되는 환자가 줄줄이 나올 거다.

그러면 끝이다.

별궁 한의원의 명성에도 금이 갈 것이다.

'나한테 와도 치료를 받지 못하고, 별수 없이 죽었다는 소문이 왕창 퍼질 거니까. 특히나 별궁 한의원을 믿고 찾아왔다가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그런 소문을 더 널리 퍼뜨리겠지.'

아마도 그럴 것이다.

기대를 품었다가 실망한 사람들이 제일 반감을 가질 것이다. 사람의 심리가 그런 거니까. 팬이었다가 안티가 된 사람이 제일 무서운 법이니까.

'그러니 변이증 환자가 더 생겨나는 걸 막아야 해.'

치료는 질환이 생겨난 후의 대처법일 뿐.

애초부터 질환이 생겨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대책이 필요하다. 그게 이번 사태의 근본적인 해결법이다.

그러자면....

'사람들을 물고 다니는 그 모기 새ㄲ... 아니, 뱀파이어를 때려잡아야지.'

한 놈인지, 일당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건 박멸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뱀파이어의 송곳니를 챙기면 더 이득일 것이다. 드래곤의 충수염을 수술해 주며 챙긴 맹장의 독성을 중화할 수 있을 테니까. 엄청난 약재로 써먹을 수 있을 거니까.

'슬슬 뱀파이어 방역법을 생각해봐야겠어. 아, 이럴 때 그 드래곤이 도움을 주면 참 좋을 텐데.'

라키엘은 문득, 등갑룡 포르티스를 떠올렸다. 현재 포르티스는 충수염 대장내시경 수술 이후의 몸조리를 위해 입원해 있는 중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본체의 모습으로 별궁 정원 한쪽 구역을 차지한 채 쿨쿨 잠들어 있는 중이었다.

단순한 낮잠?

아니었다.

'포르티스의 말을 따르자면... 원래 드래곤의 신체는 마나의 조화가 완벽한 상태라고 했지. 그런데 자신은 수술을 받으며 맹장이 제거가 됐고, 그렇게 신체 장기의 일부가 사라진 까닭에 마나의 조화가 상당히 깨졌다고 했어.'

그 조화를 회복하기 위한 잠이라고 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는다고, 1~2개월만 있으면 눈을 뜰 거라 했던가. 대신 그 전에는 절대로 잠을 깨우면 안 된다고도 하였던가.

"...."

쯧.

필요할 때에 도움도 못 주는 드래곤 환자 따위라니.

'그쪽 도움을 받는 건 기대하지 말자.'

어쨌건, 황도에서 여름밤 모기처럼 설치고 있는 뱀파이어 방역법은 자력으로 생각하고 실천을 해야겠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전하! 큰일이 났습니다!"

벌컥!

다급한 외침과 함께 진료실 문이 거세게 열렸다. 라키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진료 중에 이렇듯 경우 없이 소란을 피우는 걸까.

하지만 그런 생각은 문을 열고 들어온 별궁 근위대장, 프란델 경의 이어진 보고에 팥빙수 녹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진료 중에 송구합니다! 황도 시가지 외곽에서 원인 불명의 대폭발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뭐?"

대폭발?

원인 불명의?

"사상자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황도 의용 소방대가 소식을 접하자마자 출동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알겠어. 응급환자가 실려 올 거란 소리지?"

"예, 전하. 아마도...."

"제법 많을 수도 있겠지."

라키엘은 혀를 찼다.

갑자기 원인 불명의 폭발이라니.

그는 진행 중이던 부항 요법을 꼼꼼하게 마무리했다. 그리고 조만간 몰려들 응급환자에 대비하기 시작하였다.

"응급실 병상을 최대한, 싹 비워둬. 간호사도 입원 병동 필수 인력만 빼고 전부 호출하고. 비번도 예외 없어. 의사도 마찬가지야. 각 과의 의사들 일반 진료는 전부 연기시키도록. 당장."

"알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별궁 한의원이 분주해졌다.

물론 라키엘도, 의사들과 간호사들도 모두 까맣게 몰랐다. 오늘 별안간 터진 원인 불명의 폭발 사고. 그로 말미암아 몰려들 환자들이 어떤 이들일지를 말이다.

'모르겠다. 정말로 모르겠어.'

...꿀꺽.

혈염의 흑마법 지파.

그 유일한 후계자 아난샤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눈앞에 있는 존재를. 어째서? 저 존재와 방금 정면으로 격돌한 여파 때문에. 그 여파가 준 정신적 충격 때문이었다.

'소드마스터가... 원래 이렇게까지 강했나?'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확신할 수 있다.

소드마스터라면 이미 개인적으로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13년 전 로사코타 지방. 소속 없이 산에서 검을 단련하던 소드마스터를 죽인 적이 있어. 그때도 쉽진 않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정말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존재는 과거에 죽인 소드마스터와 아예 차원부터가 달랐다. 13년 전에 죽은 놈은 맨손으로 오러 소드를 뽑아내지는 못했으니까.

그런데 저놈은 그게 된다.

아니, 애초부터... 그게 가능한가?

하지만 아난샤에게 더 생각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방금 그를 경악시킨 앙부아즈의 몰락한 소드마스터, 쟈빌론이 두 손을 이글거리며 앞으로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네놈... 날 속였군?"

저벅... 저거걱....

천천히 내딛는 걸음. 온통 무너진 건물의 잔해가 그 아래에 밟혔다.

이미 아난샤가 아지트로 삼던 저택은 사라졌다. 평범하게 지은 건축물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격돌의 충격파였으니까. 단 한 번의 폭발에 저택의 절반이 먼지가 되어 날아갔고, 나머지 절반은 무너졌다. 그리고 수십에 달하는 뱀파이어 권속들이 모조리 깔렸다.

"...크아악."

"사, 살려... 누가 좀...."

"꺼내... 줘어...."

"...주군!"

애타는 신음과 비명, 애걸. 타오르는 불길을 더욱 불길하게 반사하는 깨진 유리조각들. 그 사이를 쟈빌론이 천천히 가로질렀다. 기묘하게 광기가 서린 그의 눈길이 아난샤의 안면에 꽂혔다.

"너,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쟈빌론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최근과 달랐다. 어찌 보면 그 모습은, 앙부아즈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야심차던 시절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실제로 쟈빌론의 머릿속도 근래 드물게 맑아진 상태였다.

'난...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작은 혼란을 느꼈다.

자신이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은 앙부아즈의 마법 실험실이었다. 내전에서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다. 실험체로 전락했다. 끔찍한 실험실. 그곳에서 정신 마법의 실험을 위한 구속구가 머리에 씌워지던 광경이 마지막 기억이었는데.

그런데 이곳은 어디인가.

난 왜 이런 꼴인가.

저놈은 또 누구인가.

'일단 반쯤 죽여두면 뭐라도 들을 수 있겠지.'

쟈빌론의 눈빛에 서늘한 살기가 깃들었다. 덕분에 아난샤는 더욱 긴장했다.

'....'

확실히 저놈, 이상하다. 정상이 아니다. 왜 그걸 알 수 있느냐고. 간단하다. 아까 첫 격돌을 했을 때, 자신이 저놈의 정신을 흐트러뜨리는 마법을 썼으니까.

'뇌로 올라가는 동맥의 혈액 흐름을 온통 뒤흔들었는데. 그러니 뇌혈류에 이상이 생기고, 심각한 정신 착란이 와야 하는데....'

...그런데 어째서 저놈은,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진 거 같지?

'설마 내가 괴물을 건드린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상황 또한 나쁘다.

아지트가 날아가 버렸다. 너무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외부에서 충돌을 감지하지 못하도록 결계를 쳐두었는데, 그 결계마저도 단숨에 찢어져 버렸다. 덕분에 황도의 모든 사람들이 이쪽의 충돌을 감지할 수 있게 됐다.

아마 지금쯤이면 황도의 수비대가 달려오고 있겠지.

"...."

계획이 어그러졌다. 여기서 미적거리다간 포위될 것이다. 판단을 내린 아난샤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쟈빌론을 쳐다보았다.

"그쪽, 이름은?"

"나?"

"그래. 내 새로운 권속으로 삼기 전에 이름을 알고 싶은데."

이미 망쳐 버린 계획. 수많은 권속이 건물에 깔려 쓸모없어져 버렸다. 하지만 괜찮다. 만약 저놈을 지배하여 권속으로 부리게 된다면, 오늘 입은 손해를 만회하고도 남을 것이다.

아난샤는 내심 회심의 술법을 준비하며 물었다.

한데 그때였다.

쟈빌론의 서늘하게 번득이던 눈빛이 흐릿해졌다. 잔혹하게 내뱉던 말투도 잠시, 다시 예전처럼 어눌해졌다.

"리한... 군의관?"

"...."

"데려온다며. 옆집이라며."

"그건...."

"혹시 리한 군의관도 이렇게 속여서 때리고 납치한 거야? 그런 건가?"

"뭐?"

"용서 못 해!"

"...."

x발.

아난샤는 울고 싶어졌다.

뇌혈류 저주 마법의 부작용(?)으로 잠깐 제정신이 돌아왔던 쟈빌론이 다시금 정신줄을 놓고선, 건물 잔해를 박찼다.

투콱-!

쟈빌론의 양손에 살벌한 오러 소드가 생성되었다. 검? 필요 없었다. 인간의 뼈는 단련하기에 따라서 검만큼 단단해질 수 있으니까. 얼마든지 오러 소드의 토대로 사용될 수 있으니까.

...콰학!

"크읏!"

가까스로 마법진을 생성하여 오러 소드를 막아낸 아난샤. 하지만 반탄력까지 해소할 수는 없었다. 막대한 충격이 그를 수십 미터 밖으로 날려 보냈다.

쟈빌론도 즉시 땅을 박차며 그를 몰아쳤다.

"리한 군의관! 내가 구해줄게!"

"...이런 미친!"

콰앙-!

더욱 강맹한 충격이 아난샤의 마법진을 후려쳤다. 그의 몸이 더욱 멀리 날려갔다. 하지만 그가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쟈빌론의 집요한 추격과 맹공이 이어졌다.

콰콱! 투컹! 콰직!

"...!"

날려가고.

추격하고.

부딪치고.

격돌할 때마다 주위의 풍경이 바뀌었다. 황도의 외곽 시가지, 더 외곽의 빈민가, 상단의 물류창고 지대, 성벽을 지나, 밭과 양떼가 보이는 들판, 인적 드문 야산까지.

'젠장...!'

그렇게, 아난샤와 쟈빌론의 모습이 아지트에서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붕괴한 저택에는 그의 권속 뱀파이어들만이 남겨졌다. 대다수가 건물 잔해에 깔린 채 신음하는 모습으로. 아무도 돌보아 주는 이 없이 애처롭게.

하지만 그들에게도 곧 희망(?)이 찾아왔다. 의문의 폭발 사고 소식을 접하고 부리나케 달려온 시민들의 영웅, 황도 의용 소방대원들이었다.

"...이런! 많이 다쳤어! 어서 의사에게로!"

제법 어둑해진 저녁이었다. 소방대원들은 일반인에 가까웠다. 매몰된 뱀파이어 권속들도 엉망진창 흙먼지투성이인 상태였다.

따라서 건물 잔해에 깔려 신음하는 뱀파이어 권속들의 정체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소방대원들의 눈에는 그저 비극적인 사고에 휘말린 응급환자로만 보였다.

"어서 옮겨! 부목과 들것 가져오고! 환자들을 의사에게 보낼 수레도! 어서!"

"하지만 대장님? 지금 시간이... 너무 늦은 저녁이라 진료 준비가 된 의사들을 수소문하기가...."

"멍청한! 이런 때를 대비하여 황태자 전하께서 별궁 한의원에 응급실을 개설하셨다는 사실을 잊었나?"

"...아하!"

"다들 응급실로! 별궁 한의원으로 옮겨! 어서!"

"알겠습니다!"

소방대가 구조 작업에 열을 올렸다.

그렇게 졸지에, 아난샤의 권속 뱀파이어 수십 명은, 사주팔자와 오늘의 운세란에도 없던 별궁 한의원 응급실로의 로켓배송(?)을 온몸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263화. 별궁 한의원의 이빨요정 (1)

"옮겨! 어서, 빨리!"

"...."

와글와글.

시끌시끌.

청각이 온통 유린당하는 느낌. 혼란스럽고 아픈 감각. 전신 어디 한 군데도 빠짐없이 알차고 야물딱지게 뻐근한 기분. 아니, 부러진 것 같은 예감.

뱀파이어 블라도는 온몸이 아팠다. 정신이 온통 몽롱한 와중에도 통증만은 너무나 또렷했다. 그래서 억울했다.

차라리 내가 인간이었으면 이럴 땐 기절했을 텐데. 뱀파이어라서. 인간보다 튼튼해서. 그런데 그 튼튼함이 딱 애매한 정도라서 다칠 건 죄다 다친 채로 이렇게 기절도 못 하고 아픔을 느껴야 하다니.

'내가... 조금만 더 강했다면... 건물 잔해에 깔리지도 않았을 텐데.'

블라도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흐릿한 눈길을 들었다. 자신을 들것으로 옮기느라 바쁜 사람들이 보였다. 황도 의용 소방대라고 했나. 한낱 사냥감, 인간 주제에 자신을 구해주겠다며 저렇듯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모습이라니.

실소가 나왔다.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이토록 뭉클한 기분을 마지막으로 느껴본 것이 언제였을까. 저도 모르게 감동으로 눈시울이 젖는 마음을 품어본 적은 그 언제였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적어도 뱀파이어로 지내는 동안에는 없었던 것 같다. 인간의 굴레를 벗어던진 먼 과거, 주군을 만나 뱀파이어의 새 삶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감동 따위의 말랑한 감정은 버렸으니까.

한데 그런 내가 틀렸던 걸까.

'세상은... 아름다운 거였어.'

곤경에 빠진 타인을 스스럼없이 돕는 사람들. 아무런 대가 없이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이들. 이토록 이타적인 자들 덕분에 험난하고 거친 세상 한쪽에서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꽃 한 떨기가 피어나는 것이겠지.

블라도는 새삼스러운 감격 속에서 힘겹게 손을 들었다. 자신을 싣고 있는 들것. 그 손잡이를 들고 있던 소방대원의 땀에 젖은 손등을 간신히 건드렸다.

"고마...워요...."

실낱같은 목소리로나마 말했다. 진심이었다. 소방대원도 이쪽의 마음을 알아준 걸까. 온통 거친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도 이쪽을 향해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괜찮을 겁니다. 이제 곧 응급실에 도착할 테니까요. 두려워하지 마시고, 부디 완쾌되시길 바랍니다."

"그, 그래...요...."

응급실.

어떤 곳일까.

그곳에선 또 어떤 따스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날 받아주고, 구해줄까. 그래. 알고 보니 인간은 이렇듯 친절하고 따스한 종족이었어. 나는 그런 인간의 굴레를 함부로 벗어던진 채 그들을 사냥해 왔던 것이고.

"...흑, 흐흑."

내가 수십 년을 충성한 주군은 날 버렸는데... 이들은 내가 뱀파이어라는 걸 알면서도 편견 없이, 스스럼없이 날 구해주고....

"크흡!"

블라도는 저도 모르게 참회의 눈시울을 적셨다. 후회, 미안함, 또는 더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가슴을 사무치게 하였다. 한편으로는 다짐도 품었다. 이제는 인간을 사냥하지 않겠노라고. 저들을 위해 속죄하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겠다고.

그때였다.

"여기! 응급환자입니다!"

"환자의 상태는?"

...드디어 도착한 걸까.

주위가 분주해졌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게 느껴졌다. 응급실은 어떤 곳일까. 나는 이곳에서 어떤 이들의 어떤 보살핌을 받게 되는 걸까.

블라도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가 시선이 마주쳤다.

"...."

낯익은 사내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로 보이는 비쩍 마른 은발의 남자였다. 한데 은발 사내가 다가오는 순간, 주위의 공기가 싹 바뀌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소방대원들의 표정과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전하를 뵙습니다...!"

소방대원 모두가 긴장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목소리마저 떨리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그러자 황태자라 불린 은발 사내가 손을 휘휘 저었다.

"됐어. 지금이 예나 올릴 때야? 나머지 환자들은?"

"이송되어 오는 중입니다."

"잔해에 깔린 이들에 대한 구조 작업은?"

"원활합니다. 다행히 황도 수비군의 공병대가 직접 나서 주어서 무거운 잔해를 빠르게 치울 수 있었습니다."

"잘됐군. 그럼 이 환자는... 어?"

황태자가 이쪽을 돌아보다가 멈칫했다. 왼쪽으로 고개를 갸웃. 이쪽의 손목을 살며시 매만졌다. 그러더니 미간을 살포시 찡그리며 말했다.

"뱀파이어네?"

"...."

아, 네.

죄송한데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해야 하는 걸까.

뱀파이어 블라도는 어쩐지 조마조마한 심정이 되었다. 그리고 주위 소방대원들을 슬쩍 둘러보았다. 이들은 날 변호해 줄 거야.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편견 없이 날 구조해서 여기까지 데려와 줬....

"...으어억?"

"배, 뱀파이어?"

"물러나!"

소방대원 모두가 샤샤샥 빛의 속도로 멀어졌다. 이쪽을 보는 눈빛에도 두려움이 배어났다. 특히나, 어느 소방대원은 자신의 손등을 연신 살피기도 했다. 마치 물린 곳이 없나를 확인하는 듯한 모습. 아까 자신을 향해 힘내라고 말해 주었던 그 소방대원이었다.

비로소 블라도는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

아, 이 인간들.

편견이 없는 게 아니었구나.

그냥 눈썰미가 없는 거였구나.

어두운 저녁이라서. 건물이 무너진 혼란스러운 환경이라서. 이쪽의 대략적인 겉모습이 인간과 거의 똑같아서. 그래서 뱀파이어인 줄을 모르고 그저 다친 사람이라 여겨서 구조를 해온 것이었구나.

'그럼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병원에서 치료는커녕 이대로 산 채로 화형을 당하는 건 아닐까.

'그건... 싫어!'

블라도는 다급한 심정이 되었다. 이대로 비참하게 죽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면 도망쳐야 한다. 탈출해야 한다. 힘을 짜내야 한다. 전신 골절이 심하지만,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서....

"가만히. 섣불리 움직이거나 무리하게 힘을 주면 부러진 곳들이 더 어긋날 거야."

터억.

별안간 뻗어온 황태자의 손이 가슴을 지그시 눌러왔다. 의외로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억지로 억누르거나 위협하는 느낌이 전혀 들지가 않았다.

이쪽을 내려다보는 황태자의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의식은 있는 것 같고."

"...."

"의용 소방대원 전원은 잘 듣도록. 나, 마젠타노의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가 당부하노니, 그대들은 오늘 밤 발생한 붕괴 사고의 희생자들에게 어떠한 형태의 편견도 갖지 말기를 바란다."

황태자가 소방대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엄격하고도 진지한 목소리였다.

"다친 이가 뱀파이어이든, 사람이든 상관없다. 예기치 않은 사고에 휘말려 다친 이들을 치료하는 데에 있어 종족이 무슨 상관인가. 그러니 모두 데려오도록. 물론 이송 과정에서 물리지 않도록 조심은 하고. 혹여나 물리면 당장 와서 치료를 받도록 하고. 알았나?"

"...예, 예 전하!"

"명을 받듭니다!"

소방대원들이 즉시 고개를 숙였다. 실은 잠깐 동요하고 있던 소방대원들이었다. 자신들이 허겁지겁 이송한 환자가 사람이 아닌 뱀파이어였다니. 그 사실에 크게 놀라고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낀 까닭이었다.

하지만 때맞추어 날아든 황태자의 당부가 그들의 생각을 두들겨 일깨웠다. 반성하게 하였다. 그래. 상대가 뱀파이어이든 뭐든 다쳤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 않나. 그리고 우리는 화재와 재난을 수습하며, 다친 이를 구조하고 이송하는 의용 소방대가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미처 하지 못했던 생각을 전하께서 하실 줄이야....'

'역시 황태자 전하...!'

'우린 아직 멀었어.'

'반성하고 또 반성하자.'

꾸욱, 소방대원들은 새삼스러운 반성과 깨달음 속에서 구조 활동의 의지를 다시금 활활 불태우며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본 뱀파이어, 블라도의 감동도 섭씨 100℃로 보글보글 타올랐다.

'....'

나, 이제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아니야? 뱀파이어인 걸 알게 됐으면서도... 치료를 해주는 거야? 환자로 받아주는 거야?

"...흐흑!"

"자아, 울지 마시고. 얼른 이리로. 일단 응급처치부터 합시다. 어이쿠, 많이 부러지셨네."

"그, 그게...."

"건물에 깔린 거죠? 쯧쯧. 많이 아프셨겠네."

"그흑...."

"그럼 통증부터 해결합시다. 편안히 힘 빼시고. 눈 감으시고오."

황태자가 숨을 골랐다.

이제부터 뭘 해주려는 걸까.

이윽고 다가오는 손길. 부러진 자리들을 손바닥으로 살살 쓸어주듯 매만지는 감각. 그리고 이어지는 노랫가락.

"내 손은 약손~ 내 손은 약손~ 에헤이야↘↗"

"...."

아, 이거 소문으로 들어본 적이 있는데. 황태자가 이상한 노래를 부르며 환자를 만져주면, 아픈 곳이 씻은 듯이 사라진다던데.

블라도는 최근에 들었던 어느 소문을 문득 떠올렸다. 그리고 그 소문을 들었던 당시에 자신이 보였던 반응도 떠올렸다. 그래. 그때 나는 비웃었더랬지. 그따위 능력이 어디 있느냐고. 말도 안 된다고. 차라리 개똥을 달여서 마시면 병이 낫는다는 말을 믿겠다고.

그런데 소문이 진짜였다.

자신이 틀렸다.

아픈 곳이... 진짜로 사라져 갔다!

"...."

이게 무슨....

블라도는 경이로움을 느끼며 눈을 홉떴다.

"어때요? 아직도 아프거나 불편한 곳은?"

"...."

없습니다. 당신 덕분에요.

진심을 담아서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이것은 놀라움? 아니, 그것을 한참 넘어선 경외감이며 존경심이었다.

그를 보는 황태자, 라키엘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따사롭게 맺혔다.

'허허허.'

이 복덩이 같으니라고.

사실은 라키엘도 내심 많이 놀란 터였다. 붕괴 사고가 났다는 소식에 급히 진료 준비를 서둘렀다. 응급실로 달려왔다. 그런데 정작 실려 온 환자가... 뱀파이어였다.

경혈 스캐닝으로 살펴보는 순간 기이함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람이 아니다. 비슷한 '그 무언가'이다. 하여 곧바로 진맥을 실시했다. 오장육부의 상담 기능을 활용했다. 그들의 보고 덕분에 답을 얻어냈다.

뱀파이어였다.

그걸 깨달은 순간,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환호성을 내지를 뻔했다. 두 마리 토끼를 한 큐에 잡았다는 예감이 들은 까닭이었다.

최근 뱀파이어 변이증을 퍼뜨리던 뱀파이어가 실려 왔으니 방역이 자동으로 달성될 것이라는 예감. 거기에 그토록 원했던, 드래곤 맹장의 독성을 중화할 재료인 뱀파이어 송곳니를 얻게 되었다는 확신까지.

'게다가 어쩌면... 이런 뱀파이어들이 더 실려 올지도 몰라.'

건물이 붕괴했다고 했다. 수많은 이들이 깔렸노라고 했다. 그런데 과연 그들 중에 뱀파이어가 추가로 없을까? 아니, 어쩌면 그들 모두가 뱀파이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일부러 소방대원들의 의욕을 고취시켰다. 혹시나 현장에서 환자가 뱀파이어인 걸 깨달아 버리면 곤란해지니까. 구조가 중단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으니까. 그러면 안 되니까.

'당연히 안 되지. 뱀파이어라면... 한 놈도 남김없이 다 잡아와야지!'

그래야 방역이 완성된다.

송곳니도 왕창 얻는다.

게다가 뱀파이어의 송곳니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뽑혀도 계속해서 또 자라난다고 했어. 왜냐. 송곳니야말로 뱀파이어의 생존에 가장 필수적인 신체기관이니까!'

즉, 그 결론은....

뱀파이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송곳니가 무한 리필이라는 뜻!

무조건 치료하고 살려야 한다.

강제로라도 소생시켜야 한다.

그래야 내 이득이 커진다.

"...그러니 이제 본격적인 치료를 해봅시다."

라키엘이 한결 따사롭게 웃으며 블라도를 치료실로 인도했다. 그때 블라도는 미리 알았어야 했다. 라키엘이 허리춤 뒤로 숨기고 있는 오른손. 그 손에 발치용 뺀찌가 야물딱지게 들려 있음을.

264화. 별궁 한의원의 이빨요정 (2)

세상사 살다 보면 뽀록이 터지는 날이 있다. 심지어 그게 연타로 터지며 두 마리 토끼를 잡게 되는 날도 있다.

생각 없이 편의점에 갔더니 포카몬 빵이 방금 들어온 날이 있다. 쾌재를 부르며 사서 집에 돌아오다가 만 원짜리 지폐를 줍기도 한다.

혹은, 생각지도 못했던 계약 성사를 기뻐하며 친구한테 술을 쏘는 도중에 우연히 옆 테이블과 합석을 하게 되고, 그렇게 만난 사람과 연인으로 맺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우리 인류는 그런 경우를 겹경사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히죽.

라키엘은 급경사로 치솟아 귀에 걸리려는 입꼬리를 애써 단속했다. 대신 고개를 들었다. 마침 또 한 팀의 소방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 들것이 실려 있음은 물론이었다.

"전하! 응급환자입니다!"

소방대가 들것을 내려놓았다. 전신이 만신창이가 된 환자의 모습이 보였다. 인간이었다면 진즉 정신을 잃었을 부상. 그럼에도 기절하지 않고 있다는 건....

"역시나. 뱀파이어인가?"

"...!"

흠칫!

들것에 실려 오는 내내 주위의 눈치를 살피던 환자, 아니, 뱀파이어가 어깨를 희미하게 떨었다. 하지만 이제 라키엘도, 소방대원 중의 그 누구도 환자의 종족적 진실(?)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최소한 뱀파이어가 보는 앞에서는 그러기 위해 노력했다.

'당연하지! 그래야 뱀파이어가 방심하고 얌전하게 실려 올 거니까!'

라키엘은 므흣한 미소를 감추었다.

반면, 소방대원들은....

'과연! 상대가 뱀파이어라도 기꺼이 상처를 보듬어 주시려는 전하의 넓은 마음가짐과 자비심이란...!'

다들 라키엘의 속내도 모르고서 지레짐작으로 감동했다. 더욱 불타오르는 휴머니즘을 2심방 2심실 가득 장착하고서 붕괴현장으로 달려갔다.

"치료실로 옮기도록."

라키엘이 눈짓했다. 간호사들이 움직였다. 뱀파이어를 실은 들것이 응급실을 지나 안쪽의 치료실로 옮겨졌다. 그동안 뱀파이어 환자(?)의 긴장감이 서서히 풀렸다.

뱀파이어는 생각했다.

'나... 정말로 치료받는 거야? 진짜로?'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사실 건물 잔해에 깔렸던 때에는 죽는 줄로만 알았다. 이대로 잔해에 압사당하거나, 잔해 사이로 스미는 태양빛에 몸이 불타거나, 그도 아니라면 오랜 시간 피를 마시지 못해서 굶어 죽는 등의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리라 여겼다.

절망했다.

암담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인간 소방대의 구조를 받았다. 이렇게 병원으로 실려 오기까지 했다. 물론 자신을 받아준 이가 황태자라는 사실에는 조금 겁이 나긴 했다.

'주군께서는... 황태자를 적대하고자 황도에 뱀파이어 변이증을 퍼뜨렸는데.'

그런데 황태자는 오히려 이쪽을 보듬어주고 있다. 놀라웠다. 세상에 이런 일이 가능한가 싶을 정도였다.

한편으로는 자신보다 먼저 구조되어 실려 갔던 동료들이 부러워지기도 했다. 고생을 덜 했을 테니까. 더 일찍 치료를 받으며 고통에서 해방되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자아, 송곳니부터 뽑자고."

뱀파이어의 중추신경이 감동에 절어서 완전히 쫄깃해지기 직전이었다. 황태자의 태연한 말이 귓구멍을 쏙 파고들었다. 덕분에 뱀파이어는 멈칫. 혹은 흠칫. 자신이 방금 뭘 잘못 들었나 싶어서 면봉 플리즈를 중얼거릴 뻔했다.

그리고 그때.

꽈악!

별안간, 밧줄이 몸에 감겼다. 그리고 어찌 반응할 틈도 없이 전신이 병상에 단단히 고정되어 버렸다.

"...!"

어? 이게 무슨?

뭐라고 외칠 여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웨어울프 간호사들이 손을 뻗어와서 입에 뭔가를 집어넣었기 때문이었다.

"웁! 으웁? 웁!"

입이 강제로 꽉 벌어졌다. 다물 수가 없게 됐다. 당혹감에 젖어 무어라 외치려는데, 황태자의 태연한 말이 떨어져 내려왔다.

"특수 강철 개구기야. 입 벌린 상태를 유지해 주는 기구."

"읍! 웁웁?"

"아픈 거 아니니까 겁내지 말고. 무리하게 입 닫으려고 힘 주지도 말고."

"으읍! 읍!"

"아, 거 참. 안 된다니깐. 이거 드워프 장인들이 만들어준 물건이라, 함부로 씹으려다간 어금니 나간다?"

"...읍읍?"

"그렇지. 이제 좀 말이 통하네."

"으흡...."

"울 필요까진 없고. 괜찮아요. 안 아파요. 자아, 아~ 해봅시다."

"아아...."

"아이고 착하다."

"...."

상큼하게 웃으면서 뺀찌, 아니, 강철 집게를 들이미는 황태자. 지상에 악마가 존재한다면 바로 눈앞의 이 인간이 아닐까. 뱀파이어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눈물 젖은 동공을 휙휙 돌렸다.

비로소 치료실(?)의 광경이 제대로 보였다. 다른 뱀파이어들이 자신과 비슷한 몰골로 병상에 묶여 있었다. 다들 넋이 나간 얼굴로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한데 그렇게 벌린 입 안에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보이지가 않았다.

그건 바로....

"이야, 이거 왕건이다, 왕건이."

꽈득!

송곳니를 꽉 움켜쥐는 황태자의 쇠집게! 동시에 깨달음이 전두엽을 땅 하고 후려쳐 왔다! 황태자는 지금! 내 소중한 송곳니를!

"아, 앙애!"

"응, 돼."

뽀작?

당신은 혹시 뱀파이어 송곳니가 뿌리째로 뽑히는 맑고 고운 소리를 감상하신 적이 있나요?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적어도 이 치료실의 모든 이들은 자신 있게 '그렇습니다'라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방금 송곳니를 뽑힌 뱀파이어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응!"

"뭘 그렇게 엄살이야. 이 송곳니로 죄 없는 사람들을 마음껏 물고 다녔을 거면서."

"...어, 으흥."

"우냐?"

"흐흥...."

"쯧쯧. 댁한테 물린 사람들은 더 울었을 거야. 팔자에도 없던 뱀파이어 변이증에 걸려서 고생을 했고, 더 이전에 물려서 날 만나지 못했던 이들은 죽었거나 뱀파이어가 됐겠지. 그건 안 미안한가?"

"...."

"그런 짓을 저지른 요 나쁜 송곳니는 벌을 받아야겠지요?"

"어, 어으! 앙애!"

"응, 된다니까. 때찌."

뽀작!

"...겨응!"

윗송곳니 두 쪽을 모두 잃은 뱀파이어가 자지러지며 눈물 콧물을 흘렸다. 하지만 라키엘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뱀파이어는 이 정도로는 안 죽는다. 게다가 함부로 사람을 물어대고 고통에 빠뜨렸던 놈이라 딱히 불쌍하지도 않았다.

'이거 딱 모기 잡는 거랑 비슷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은 그냥 죽일까 싶은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것까지는 하지 않았다. 동정심 때문에? 천만에. 절대로 아니었다.

'살려두면 계속 송곳니가 자랄 거니까!'

문득, 드래곤 포르티스가 알려준 정보가 떠올랐다. 송곳니는 뱀파이어에게 가장 중요한 생존 기관이라고 했다. 그래서 사람과 달리, 뱀파이어는 불행한 사고나 부상으로 송곳니가 뽑혀도 계속해서 다시 자라난다고 했던가.

그러니까 살려두는 게 이득이다.

자라면 뽑고.

또 자라면 또 뽑고.

이것이 바로 생체 무한 리필!

'게다가 황도에 계속해서 퍼지던 뱀파이어 변이증을 이걸로 막아낼 수 있게 됐어.'

라키엘은 치료실을 둘러보았다.

이미 송곳니를 뽑힌 수많은 뱀파이어들이 보였다. 그 숫자가 이미 10명이 넘었다. 모두가 붕괴된 건물에서 발굴, 아니, 구조된 놈들이었다.

"...."

이렇게나 많은 뱀파이어가 황도에서 조직적으로 설치고 있었다니. 비로소 뱀파이어 변이증이 갑작스럽게 대규모로 확산됐던 사태가 이해가 됐다.

한편으로는 의문도 생겨났다.

'이런 놈들이 한꺼번에 건물 붕괴에 휩쓸렸다니. 대체 뭘까.'

분명 뭔가가 있다. 우연이 아니다. 이들이 활동을 한 것도. 이들이 모여 있던 저택에 의문의 거대한 폭발과 붕괴가 일어난 것도. 이유와 목적이 있을 거다.

'뭐, 그건 황제와 황실의 정보기관이 알아서 추적하겠지.'

그러니 나는 지금 당장의 일부터 하자.

생각을 정리한 라키엘은 뱀파이어의 상태부터 살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주요 부상은 각종 타박상과 염좌, 골절. 대략 앞서 실려 온 놈들과 비슷한 수준의 부상이었다.

"아니스? 접골과 응급처치 부탁해."

"크릉!"

믿음직한(?) 간호사들에게 뒤를 맡겼다. 그 후로도 추가로 실려 오는 뱀파이어들의 송곳니를 알차게 수확했다. 덕분에 하루가 지나는 사이, 뱀파이어의 송곳니를 무려 43개나 모을 수 있게 되었다.

"...후아."

이게 웬 떡인가. 뱀파이어 변이증 방역과 송곳니 득템(?)까지 당첨되는 겹경사, 뽀록 연타의 하루라니. 쓰지도 않던 일기를 쓰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렇듯 콩다닥콩닥 설레는 마음을 다잡으며 곧바로 다음 일을 서둘렀다.

앞서 등갑룡, 드래곤 포르티스의 충수염을 수술해 주며 얻었던 드래곤 맹장의 독성을 제거하는 작업이었다.

'당연히 서둘러야지. 시간이 많지가 않아.'

자고로 약초든 뱀파이어 송곳니든 뭐든, 뽑은 직후가 가장 신선한(?) 법! 게다가 드래곤 맹장도 오래 방치하기가 어려웠다. 지금이야 저온 식품창고에 보관을 해두고 있지만, 결국에는 상하고 썩을 테니까.

하여 라키엘은 곧바로 드래곤 맹장의 독성을 제거하는 작업, 법제를 서둘렀다.

그 첫 단계는 뱀파이어 송곳니 가공이었다.

"자, 갈아보자고."

"...."

커다란 절구를 받은 가르딘 경과 데미안이 라키엘을 슬금슬금 쳐다보았다. 라키엘이 뻔뻔하게 반문했다.

"뭐. 왜. 뭐."

"...."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하세요들."

"으음, 전하? 불만이라기보다는 말입니다. 그게... 요즘 들어서 조금, 혼란스러워서 말입니다."

"혼란?"

"예, 전하."

"어떤 혼란?"

"어, 음, 그게-"

잠시 주저하던 가르딘 경이 입을 열었다.

"제 본분이 뭐였는지, 요즘은 종종 그걸 잊어버리는 때가 있는 듯해서 저도 모르게 흠칫하곤 합니다. 전하의 건강을 보살피는 주치의로서의 제 본분 말입니다."

"아하."

라키엘은 상큼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가루약 조제용 절구를 끌어안고서 뱀파이어 송곳니를 뿌셔뿌셔 갈갈갈하는 이런 일을 왜 하고 있어야 하나, 뭐 그런 업무적 회의감이 든다는 거지?"

"예에? 아, 그, 제 말씀은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라키엘은 콧김을 풍 뿜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뱀파이어 송곳니는 드래곤 맹장을 법제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재료고, 그걸 곱게 갈아서 가루로 만드는 일 또한 그만큼 아주 중요하고, 그만큼 중요한 일이니 내가 제일 믿을 수 있는 경에게 맡기는 거 아니겠어?"

"예?"

"경을 제일 많이 믿는다고."

"...."

"물론 추가 수당은 없다."

"...."

살포시 솟구칠 뻔했던 가르딘 경의 감동이 빛의 속도로 짜게 식었다. 그렇게 세 남자는 저녁 내내 열심히 뱀파이어 송곳니를 찧고, 빻고, 갈았다.

그리고 다음 날.

라키엘은 날이 밝자마자 뱀파이어 송곳니 가루를 분석했다.

"저기, 뽀복아?"

"뽀?"

"너 배고프진 않아?"

"뽀보?"

"별로? 으음, 그러면 안 되는데. 건강에 안 좋은데."

"뽀오?"

"정말이야. 너 혹시 그거 알아? 아침을 든든하게 먹을수록 신진대사가 활발해진대."

"뽀?"

"그러니까 이거 조금만 먹어 보자아?"

"...뽀보오?"

"아이고 맛있다. 아이고 잘한다 우리 뽀복이."

"뽀!"

꼬드김에 넘어간 불사조 개복치, 뽀복이가 입을 빵긋 벌렸다. 라키엘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준비하고 있던 뱀파이어 송곳니 가루 약간을 재빠르게 티스푼으로 퍼서 뽀복이의 입에 탁, 털어 넣었다.

"뽀보! 뽀!"

뽀복이가 가루를 야물딱지게 녹이며 삼켰다. 그리고 역시나 꼴까닥 죽었다.

"...뽀보!"

항상(?) 있던 일이었다.

라키엘은 뽀복이의 성분 분석 결과를 기다렸다.

그런데 잠시 후.

딩동!

[당신은 뱀파이어의 송곳니를 원료로 하는 새로운 약재, <뱀각산>을 발견하였습니다!]

뜻밖의 야물딱진 메시지가 눈앞을 알차게 채웠다.

265화. 별궁 한의원의 이빨요정 (3)

딩동!

[불사복치 뽀복이가 스킬 <으앙 쥬금 ㅠㅠ (Lv. 1)>을 시전합니다.]

털푸덕!

뱀파이어 송곳니 가루를 흡입(?)한 뽀복이가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느러미의 불꽃이 꺼지고, 눈이 하얗게 뒤집어지고, 혓바닥까지 봬앩 내밀었다.

평범(?)한 약재 성분 분석 과정이었다. 이미 익숙해진 라키엘은 차분히 기다렸다. 역시나 잠시 후, 뽀복이나 눈을 반짝 떴다.

"...뽀?"

딩동!

[불사복치 뽀복이가 스킬 <부활! (Lv. 1)>을 시전합니다.]

[불사복치 뽀복이의 거대화 1스택이 적립되었습니다.]

힘찬 메시지와 함께 녀석이 벌떡 일어섰다. 일어나기가 무섭게 한숨부터 푸욱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듯, 지느러미를 뚝 떼 내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불사복치 뽀복이가 스킬 <일기 쓰기 (Lv.1)>를 시전합니다.]

여기까지도 평소와 같았다.

그런데... 녀석이 쓰는 일기의 내용이 심상치가 않았다?

[오늘의 일기]

[오늘도 주인이 이상한 걸 먹였다. 아침을 든든히 먹어야 신진대사가 활발해진다나. 딱 약팔이스러운 멘트로 날 꼬드길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니깐. 괜히 낚여가지고 퍽퍽한 가루나 삼키고. 맛은 또 어찌나 짠지. 게다가 이거 무슨 물질인지는 모르겠는데 먹자마자 혈관이 터질 거 같아. 갑자기 온몸에 피가 확 많아지면서 혈관이 빵빵해졌다니깐? 아주 미치겠다, 내가.]

...뭐?

피가 많아졌다고?

혈관이 빵빵해져?

'그게... 가능해?'

상식을 파괴하는 내용에 라키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이었다.

딩동!

[당신은 뱀파이어의 송곳니를 원료로 하는 새로운 약재, <뱀각산>을 발견하였습니다!]

"...."

이거 설마.

어쩌면 진짜로.

두근거리는 예감을 느끼며, 눈앞에 떠오르는 내용을 빠르게 읽어내렸다.

[약재명 : 뱀각산]

[성상 : 흰색의 분말]

[주요 성분 : 뱀파이어의 정수]

[효능과 효과 : 환자의 혈액 성분을 복제하여 혈류량을 대폭 증가시킴으로써, 심각한 빈혈 및 과다출혈의 응급 치료에 매우 유효함]

[사용상의 주의사항 : 다음 환자에게는 투여하지 말 것 - 혈류량, 혈압이 정상인 환자]

[부작용 : 본 약재는 빠른 시간에 복용자의 혈류량을 대폭 증가시키므로, 그 영향에 따라 심혈관계의 심각한 손상 및 뇌출혈을 초래할 수 있음. 복용 후 어지러움, 안면 홍조 등의 증상이 나타날 경우에는 즉각 투여를 중단하고 헌혈 요법으로 일정량의 혈류를 체외로 방출하여야 함]

[저장 방법 : 1~15℃의 건조하고 서늘하며 그늘진 환경에서 보관.]

[사용 기간 : 가루로 조제한 뒤로부터 30년]

[발견자 :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이게 무슨....'

라키엘은 눈을 부릅떴다.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복용하자마자 환자의 혈액 성분을 복사한다고? 그러니까... 피를 뻥튀기시켜 준다고? 미친 거 아냐?'

하도 상식을 초월하는 내용이라 거듭 읽어보았지만, 역시나 사실이었다.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다. 앞으로 자신의 한의원에서 출혈과다로 죽을 사람은 없겠구나, 라고.

'진짜 미쳤는데?'

물론 부작용이 커 보이긴 했다. 멀쩡한 사람에게 먹이면 오히려 사람 잡기 딱 좋아 보였다. 체내의 혈액이 갑자기 많아지면 그만큼 혈압도 팍 오를 거고, 전신의 실핏줄이 다 터질 테니까. 뇌혈관을 포함해서 주요 장기의 혈관에 엄청난 타격이 가해질 테니까.

"...."

땡 잡았다.

난 그저 드래곤 맹장의 독성을 중화, 법제할 재료를 확보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법제 준비를 열심히 했을 뿐인데. 법제를 시작하기 전에 성분을 확인한 것뿐인데. 그런데 법제 재료에 이런 뜻밖의 효능이 있을 줄이야.

'포르티스의 말에 따르자면, 뱀파이어 송곳니는 최고의 독성 해독 효능이 있다고 했지. 그래서 딱 그 정도까지의 이득을 기대했던 건데....'

이건 기대 이상의 대박, 초대박이었다.

'조상님들, 감사합니다.'

라키엘은 경건해지는 심정으로 입꼬리를 귀에 걸었다. 그의 내부에서는 오장육부도 덩달아 신이 났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놀라운 발견에 함께 기뻐합니다.]

[심장 : 네? 피가 복사가 된다고요?]

[허파 : 허어... 파하핳...ㅋ]

[대장 : 형님들? 허파 형님이 뻥치지 말라는데 말입니다?]

[간장 : 솔직히 나도 안 믿김.]

[위장 : 그래도 저거 사실이면 ㄹㅇ 개사기 아님? 출혈 심해서 숨 깔딱깔딱 넘어가는 부상자도 저 가루 먹이면 피 채우고 개 같이 부활이자나ㅋㅋㅋ]

[콩팥 : 우리 몸뚱이네 한의원, 우리 몸뚱이를 닮아가나? 점점 약점이 없어지네.]

[비장 : 엥? 뭔 소리임? 우리 몸뚱이 약점투성이 아님?]

[콩팥 : ㄴㄴ 약점 없음.]

[비장 : 왜?]

[콩팥 : 약점이라는 건 다른 곳에 비해서 특별하게 더 약한 곳을 가리키는 말이잖아?]

[비장 : 그렇지.]

[콩팥 : 그런데 우리 몸뚱이는 온몸이 다 폐급이잖아?]

[비장 : 그렇지.]

[콩팥 : 그럼 어디를 봐도 다 똑같이 약한 거니까, 특별하게 더 약한 곳은 사실상 없는 셈이잖아?]

[비장 : 그렇네.]

[콩팥 : 그럼 약점이 없는 거 아님?]

[비장 : 아하.]

[오장육부가 당신의 새로운 약재 발견을 축하하며 500 HP를 후원합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18,900]

"...."

아하는 개뿔!

라키엘은 때아닌 내면의 디스(?)에 개탄했다. 하지만 눈물을 훔치며 무너지는 대신 드래곤 맹장 법제에 집중했다.

'이건 시간 싸움이니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드래곤 내장이라고 해서 용가리 통뼈처럼 천년만년 유지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엄밀히 말하면 고깃덩이니까, 엄연히 유통기한(?)도 존재할 것이다.

한데 따지고 보면 드래곤 포르티스의 맹장 수술을 해준 지가 시일이 제법 지났다. 지금까지야 별궁의 식품용 저온 창고에 애지중지 보관했다고는 하지만, 더 늦으면 자칫 상해서 못 쓸 우려가 있었다.

'그러면 피눈물 나는 법이거든.'

세상에 드래곤 맹장을 얻어볼 기회가 얼마나 있겠는가. 아마도 로또 1등에 당첨되는 것보다 훨씬 희박한 확률이겠지.

그걸 잃을 수는 없다는 집념! 불의는 참아도 손해는 못 참는다는 확고한 신념! 불타는 의지로 무장하고서 그는 거대한 드래곤 맹장을 별궁 안뜰로 꺼냈다.

"누우우? 누우!"

쿠웅, 철퍽!

5미터 길이의 거대한 산삼 모양 맹장이 우루스의 괴력에 이끌려 안뜰에 놓였다. 라키엘은 맹장의 상태부터 점검했다. 다행히 아직 신선했다.

"좋아. 그럼 다들, 각자 역할은 잘 숙지했겠지?"

"꼬슴!"

"뽀보!"

"코몽!"

"누우!"

"꾸꺄!"

라키엘의 물음에 환상종 3총사인 꼬슴이와 뽀복이, 코몽이가 힘차게 대답했다. 우루스와 아피로스 여왕벌 애벌레, 꾸꾸도 마찬가지였다. 이내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 임무를 수행한 환상종은 코끼리 환상종, 코몽이였다.

"코모몽! 코몽!"

거대화한 코몽이가 코로 분수를 뿜었다. 미리 준비한 맑은 물이 시원하게 뿌려지며 드래곤 맹장을 씻어냈다.

물론 라키엘이라고 구경만 하지는 않았다. 그는 직접 솔을 들고서 맹장 겉면을 박박 문질러 닦았다.

"후! 후욱!"

워낙 커다란 맹장이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금만 닦았는데도 금방 체력이 쭉쭉 빠져나갔다. 가히 시내버스 한 대를 칫솔로 혼자서 세차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다른 이에게 일을 떠넘기지도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건 무조건 내가 직접 해야 해.'

법제를 하는 과정이 그렇다. 장차 자신의 한의원에서 환자들에게 쓸 약재다. 게다가 다른 이들은 만져본 적조차 없는 생소한 약재다. 한데 그걸 남의 손에 맡겨야 할까. 아니. 절대로.

'오직 나만 경혈 스캐닝을 사용할 수 있으니까. 그걸로 맹장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살펴볼 수 있으니까.'

드래곤의 맹장이라서 그런 걸까.

본체(?)에서 떼어낸 지 시일이 제법 지났음에도, 맹장에는 여전히 마나의 기운이 활발했다. 덕분에 경혈 스캐닝으로 그 흐름과 상태를 관측할 수 있었다.

"훅! 후욱!"

맹장을 다 씻어내는 데에만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었다.

"꼬슴아?"

"꼬슴!"

꼬득, 퍼엉!

라키엘의 신호를 받은 꼬슴이가 빨간 해바라기씨를 씹고 거대해졌다. 온몸의 가시를 빡 세우고서 맹장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꼬스슴! 꼬슴!"

푸푸푸푸푹!

맹장에 미세한 구멍이 수천 개씩 생겨났다. 그 후에 우루스가 나섰다.

"누우!"

파팍!

구멍이 송송 뚫린 맹장에 굵은 소금을 팍팍 뿌렸다. 그렇게 소금에 절이는 것까지가 법제의 1단계 과정이었다.

"자아, 하루만 휴식!"

"꼬!"

"뽀!"

"코!"

"누!"

"꾸!"

법제의 피곤에 절은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동안 드래곤 맹장도 소금에 푹 절었다. 염분 때문에 조직에서 수분이 빠져나오며 숨이 죽었다.

그 후에는?

"양념 치대기!"

모두가 오순도순 모여서 뱀파이어 송곳니 가루, 뱀각산을 꺼냈다. 숨이 죽은 드래곤 맹장 전체에 뱀각산을 꼼꼼하게 발랐다. 주물렀다. 해독 성분 양념(?)이 충분히, 깊은 곳까지 배어들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이것은 가히 김장을 담그는 듯한 광경! 덕분에 라키엘의 입에는 침이 잔뜩 고였다.

'아. 수육 땡긴다.'

자고로 김장하는 날에는 겉절이에 김 모락모락 피어나는 수육 한 덩이를 알차게 싸서 새우젓갈 찍고 우물우물 씹어준 후에 막걸리로 입가심을 싸악!

그것이 전통이고, 진리이며, 인류의 DNA에 새겨진 법도이자 보편타당한 미풍양속이 아니겠는가.

"...하아."

불현듯 고향의 입맛을 그리워하는 라키엘의 한숨 사이로, 역사적인 드래곤 맹장 법제의 첫 시도가 성공적인 결실을 맺었다.

그럼 다음 차례는?

당연히....

"담가."

퐁당!

거대한 산삼 모양의 드래곤 맹장이 통짜로 술에 담가졌다. 그 언젠가 숙성을 마치고 알차게 쓰일 날을 위하여. 앞서 담가진 선배(?)인 베스파로스 담금주, 기간토피스 담금주와 나란히 라키엘의 약술 콜렉션이 되었다.

그렇게 드래곤 맹장의 법제와 약술 담그기를 마친 후에야 라키엘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후아."

하지만 한숨은 잠깐 몰아쉬는 것이기에 한숨일 뿐. 그는 잠시 미뤄두었던 다음 일에 곧바로 착수했다.

"그럼 이제... 정말로 시작하시려는 겁니까?"

"어."

데미안의 물음에 라키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황도에 사상 초유의 규모로 뱀파이어 변이증이 번졌던 상황이잖아? 그런 상황에서 스무 명이 넘는 뱀파이어가 무더기로 잡혔어. 그럼 변이증 확산의 범인이 누굴까?"

"그야 당연히...."

"그래. 놈들이겠지. 혹은, 놈들을 움직이는 더 큰 배후가 있을지도 모르고. 문헌에 따르면 뱀파이어는 단독 행동을 선호한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스물이 넘는 놈들이 합숙하듯이 한 저택에 머물고 있다가 집단으로 사고를 당하고 매몰됐다? 이건 무조건 뭔가가 있는 거거든."

그러하다.

하니 당연히....

"이제부턴 놈들과 알찬 상담 시간을 가져야겠지. 그러니 법과 질서를 수호하는 물의 전사 아쿠아와 불의 전사 플레임이여, 준비됐나?"

빵긋 웃으며 돌아보는 라키엘.

그의 물음을 받은 일명, '아쿠아'와 '플레임'. 가르딘 경과 데미안이 각자 물고문용 고농축 마늘즙 물통과 불고문용 햇빛 돋보기를 들고서 착잡하게 웃었다.

266화. 흉수 족집게 (1)

고문은 무섭다.

비인간적이며 윤리에도 어긋난다.

그렇기에 때로는 정말정말 무섭다. 특히, 고문을 하는 자가 선을 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줄 때가 그러하다.

바로 지금처럼.

"자아. 목마르지? 많이 마셔. 아쿠아?"

"예, 전하."

"이분 목이 칼칼하시댄다."

라키엘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그의 말에 '아쿠아'라고 불린 가르딘 경이 조용히 물통을 들었다. 그리고 물통 마개를 살포시 열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저 물병을 열었을 뿐인데, 라키엘의 맞은편에 앉은 뱀파이어가 자지러지는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읍? 으읍? 읍!"

물통의 뚜껑이 열리자마자 뱀파이어는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물통에서 불길한 냄새가 난다. 익숙한데 절대로 맡고 싶지는 않은 위험한 냄새다. 이 매캐한 자극. 후각과 영혼을 싸잡아 160km/h 포심 패스트볼로 지옥배송을 시작할 것 같은 이 감각!

'마늘이다, 마늘이야!'

확실했다.

저 물통, 마늘즙이 들어 있는 거다. 콧구멍이 아니라 발가락 모공으로 맡아도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짙은 냄새가 위기감을 새록새록 불러왔다.

"읍읍! 으읍! 읍!"

도망치고 싶었다.

소리치고 싶었다.

꽁꽁 묶인 채 온몸을 버둥거렸다.

그런 이쪽의 모습을 본 황태자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물을 마시려면 재갈부터 풀어줬어야 했는데."

"읍! 으읍! 읍!"

"내가 배려가 부족했지? 미안해요?"

"...푸흐악!"

"어휴. 이제 숨 쉬기 편해졌죠? 물 마시기도 편해질 거야."

"흐흡?"

"자아, 입 벌리시고."

"읍!"

"벌리라고."

"...긔엡."

"아이고 착하다. 잘 마신다. 원샷."

"...거거걲꺽ㄱ걱!"

강제로 벌려진 뱀파이어의 입속으로 마늘즙이 퐁실퐁실 흘러들어갔다. 양이 딱히 많지는 않았다. 너무 많이 마시면 배탈이 날 테니까. 딱 그러지 않을 정도로만.

"어때? 좀 시원해?"

"커거걱... 콜록콜록!"

"아이쿠. 사레가 들리셨나? 좀 천천히 드시지."

"나, 나한테 왜... 커컥...!"

"왜긴. 편의를 봐주는 건데. 자, 다음 코스 갑시다. 플레임?"

뱀파이어에게 강제로 마늘즙 시식(?) 체험을 선사해준 라키엘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 '플레임'이라고 불린 데미안이 있었다.

"자아. 촉촉한 수분으로 몸을 적셨으니, 이제는 건강한 육체를 위해 선탠을 합시다아."

데미안에게 신호를 보냈다. 데미안이 창가로 걸어가서 커튼을 걷었다. 촤악, 따스하고도 강렬한 햇살의 선샤인이 실내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덕분에 뱀파이어는 인상을 와락 찌푸려야 했다.

"...그읏!"

"아, 미안해요. 눈뽕이 좀 갑작스러웠나?"

"그으읏, 크읏!"

"따뜻하죠? 행복하죠? 알고 보면 적당한 일광욕이 우리 몸에 참 좋은 거거든요. 비타민D 합성도 팍팍 되고. 덕분에 골다공증 예방도 되고. 면역력도 올라가고. 거기에 세로토닌 호르몬 분비도 활성화가 돼서 불면증과 우울증 퇴치에도 도움이 되고."

"후, 후욱."

"으음 그런데 역시, 이 정도 햇볕으로는 약빨이 없나 보네요? 생각보다 반응이 열렬하지가 않네?"

라키엘의 웃음이 은근해졌다.

뱀파이어는 원한 서린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자신의 송곳니를 뽑아간 잔인한 인간 놈. 게다가 이런 고문까지 서슴없이 자행하는 놈.

'하지만... 이번엔 틀렸어. 내가 이런 평범한 햇볕 정도에 고통스러워할 줄 알고?'

속으로 비웃었다. 사실이었다. 아무리 뱀파이어라고 해도 건강한 상태라면 평범한 햇볕에 불이 붙거나 생명에 지장이 생기지는 않는다. 다만 그저 따갑고, 능력이 대폭 저하되어 불편해질 뿐.

이 정도의 햇볕에 위협을 받으려면?

아주 쇠약해진 상태이거나, 갓 태어난 약한 개체만이 위험할 뿐이다.

'그러니 네놈이 내게서 뭘 얻으려는 건지는 몰라도, 이런 하찮은 수법은 통하지 않아!'

...라고 뱀파이어가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스윽.

라키엘이 데미안에게서 뭔가를 받았다. 아담한 손잡이. 그 위엔 동그란 테두리. 테두리 안쪽에는 도톰한 유리가 끼워진....

'돋보기?'

저게 왜 지금 나와?

뱀파이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라키엘의 입꼬리가 귀에 살포시 걸렸다.

"자아, 집중치료 들어갑니다아."

치이익.

"...!"

"어이쿠. 여기 왕점이 있으시네."

치이이익!

"...!"

이제 뱀파이어는 본격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만끽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라키엘도 돋보기로 한 점만 잔혹하게 지져대진 않았다. 오히려 화상을 입지 않도록 돋보기를 빠르게 움직여댔다. 그것만으로도 효과(?)가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오오오오옥!"

"이야. 그렇게 좋아요?"

"갸아아야얄!"

차라리 죽여, 이 미친놈아!

뱀파이어는 말도 나오지 않는 고통 속에서 비명만 질러댔다. 그런데 더 무서운 건, 황태자가 여전히 아무런 질문이나 목적을 밝히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즉, 정작 고문을 당하면서도 왜 이걸 당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차라리 질문이라도 받으면 대답이든 거부든 뭐든 하겠는데. 지금은 달랐다. 그저 어린애 손에 던져진 개미 꼴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더욱 끔찍하게 불안했다. 언제까지 이 짓을 당해야 하나 싶어서 막막하기도 했다.

물론 라키엘은 목적이 있었다. 그저 고통만 가하려는 가학적인 목적? 당연히 아니었다.

'바뀐다. 녀석의 두뇌로 가는 기혈의 흐름이 바뀌고 있어. 역시....'

마늘과 햇볕이 효과가 있구나.

라키엘은 고통에 부들거리는 뱀파이어의 신체를 관찰했다. 경혈 스캐닝 옵션은 진즉부터 켜둔 상태였다.

덕분에 낱낱이 볼 수 있었다.

뱀파이어의 두뇌 한곳에 배배 꼬여서 뭉쳐 있던 기혈의 흐름이 자극에 의해 조금씩 풀어지는 모습이 확연히 보였다. 동시에 뱀파이어의 눈동자에 서린 핏빛이 서서히 지워져 갔다.

'저 뭉쳐진 기혈의 덩어리, 그리고 붉은색 눈동자. 전부 세뇌의 영향일 거라고 했지.'

문득, 며칠 전에 대주교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원래 뱀파이어는 독자적인 행동을 선호하지만, 간혹 수십의 단위로 뭉쳐서 움직일 때가 있다고도 했던가.

그러면서 당부했던 말이....

'그렇듯 뭉쳐서 활동을 하는 경우에는 대개, 그들을 지휘하는 강력한 상위의 존재가 있기 마련입니다. 또한 그런 경우, 지휘를 받는 하위의 뱀파이어들은 세뇌와 정신지배 상태에 놓이곤 하지요.'

...라고 했다.

딱 이번 케이스와 일치했다.

당연히 이놈들도 상위의 존재에게 세뇌와 정신지배를 받는 상태이리라 여겼다. 하여 송곳니를 뽑을 때부터 경혈 스캐닝으로 기혈을 관찰했다. 과연, 두뇌 속에 배배 꼬이고 뭉친 기혈의 덩어리가 보였다.

'역시나. 마늘과 햇볕에 풀어지는 걸 보니까 세뇌 때문에 생긴 덩어리가 맞네.'

직접 보니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 사실상 이건 고문이 아닌 치료다. 말하자면 세뇌 치료.

'일단 세뇌부터 풀어야 제대로 된 정보를 들을 수 있을 테니까.'

이를테면, 놈들을 조종하던 상위 존재의 정체 같은 것들을 말이다.

라키엘은 더욱 상냥하게 웃었다.

그리고 꼬슴이표 가시를 집어들었다.

"자아, 다음 코스로는 마늘즙을 이용한 약침 시술을 받으며 우리 모두 더욱 건강해져 봅시다아."

"...."

제발 그만해 미친놈아.

뱀파이어는 울고 싶어졌다.

고문을 빙자한 세뇌 치료의 효과는 확실했다.

라키엘은 며칠간 뱀파이어들을 꾸준히 괴롭... 히진 않고 치료했다. 덕분에 나날이 세뇌의 뭉친 기혈이 풀어져 갔다. 뱀파이어들의 태도도 한결 고분고분해졌다.

"저기, 뭐든지 말할 테니 이젠 제발 그만!"

"다 말할게요! 전부 말씀드릴게요!"

"저 사실은 모태솔로입니다!"

"실은 저 구두 벗으면 180센티가 안 됩니다!"

"뱀파이어라서 피부 하얗고 창백하단 거 거짓말이었습니다! 그거 전부 썬크림 바른 거였습니다!"

세뇌가 풀려가며 갖가지 자백이 이어졌다. 그대로 놔두면 속옷 사이즈는 물론이고 어린 시절 첫사랑 썰까지 죄다 풀어놓을 기세였다.

그런데도 의외로 뱀파이어들은 자신들을 조종하던 상위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말하지를 못했다.

"...예에? 저를 조종하던 분이요?"

"어, 그게...."

"이름이 잘... 생각이...."

"어윽, 갑자기 머리가!"

너를 조종하던 배후가 누구냐, 라는 질문을 받기만 하면 눈빛이 흐리멍덩해졌다. 마치 넋이 빠진 듯한 표정이 되었다. 일부러 꾸민 것? 아니었다. 경혈 스캐닝으로 관측되는 기혈의 흐름을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

'금제가 걸려 있구나.'

라키엘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났다. 다른 대답을 할 때는 멀쩡하던 놈들이, 배후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두뇌 기혈 흐름이 딱 느려지는 게 보였다. 아마도 일반적인 세뇌를 뛰어넘는 더욱 강력한 금제가 걸려 있는 듯했다.

하지만 라키엘은 상관하지 않았다. 이만하면 됐다. 저 반응만으로도 파악할 것은 전부 파악하고, 추론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기에 이렇듯, 폐하께 알현을 요청하였사옵니다."

결론을 얻은 라키엘은 부리나케 황제를 찾아갔다. 그리고 예를 표하자마자 자신이 추론한 사실을 황제에게 고자질(?)했다.

"하면, 근래 황도에 확산되던 뱀파이어 변이증의 근본적인 배후를 네가 알아냈다는 뜻이더냐?"

"그렇사옵니다, 폐하."

라키엘이 고개를 숙이며 답하였다.

"아마 폐하께서도 최근 황도 시민들을 괴롭히던 변이증의 존재와, 제가 행하였던 그 치료의 과정을 알고 계셨으리라 보옵니다."

"그랬지. 네가 다수의 뱀파이어를 잡아들여 괴롭히고 있음 또한."

"그것도 알고 계셨사옵니까?"

"물론."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험하듯 물었다.

"하면 묻자꾸나. 네가 추론한 변이증의 배후는 보다 상위의 뱀파이어인 것이더냐?"

"아니옵니다, 폐하."

"...뭐?"

황제가 멈칫했다.

라키엘의 말이 이어졌다.

"제가 추론한 변이증의 배후는 단순한 상위의 뱀파이어가 아닌, 흑마법을 사용하는 인간 마법사이옵니다."

"흑마법사?"

"그러하옵니다, 폐하. 또한 그 흑마법사는, 의도적으로 변이증을 확산시켜 황도에 크나큰 혼란을 불러오고, 자신은 이 사태와 관련이 없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서 모습을 드러내어 공적을 세울 계획이었을 것이옵니다."

"...말하자면 병 주고 약을 주듯이, 자신이 퍼뜨린 변이증을 치료하고 생색을 내며 사회적 공헌을 세울 작정이었다는 말인가?"

"바로 그러하옵니다, 폐하."

"추측일지언정 참으로 뻔뻔한 의도로다. 하면, 그 결과로 흑마법사가 얻을 이득은?"

"제법 많았을 것이옵니다. 하여 이제부터 그것을 정리하여 말씀드리겠사옵니다."

그때부터였다.

라키엘은 자신의 추측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만약 이번 일을 꾸민 흑마법사 아난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저도 모르게 팔뚝에 돋아난 소름을 털어냈을 만큼 정확한 내용들이었다.

그걸 들으며 황제 또한 문득 생각했다.

황태자가 말하는 저것과 비슷한 결론을 얻어내기 위하여... 황실의 정보부는 어젯밤까지 수십 명이 달라붙어서 고생하며 정보를 취합하고 회의를 거듭해야 하였는데, 라고.

267화. 흉수 족집게 (2)

나의 아들아.

너는 과연, 내가 알던 그 아이가 맞는 것이더냐.

"...."

황제, 아스테리온은 복잡해진 눈길을 보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 라키엘이 있었다. 황태자. 자신의 후계자. 장차 제국의 모든 것을 두 어깨에 짊어질 아들.

그런데 문득 낯설었다.

어째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주 가끔씩, 아니, 어쩌면 생각보다 종종, 정체불명의 이질적인 느낌이 들고는 했다. 눈앞의 아이가 어쩌면, 자신이 아는 존재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기이한 감각, 혹은 예감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심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마치 지금처럼.

'내가 또 무슨 생각을.'

황제는 자신을 사로잡으려 했던 기이한 생각을 얼른 털어내었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눈길로 자신의 아들, 라키엘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면, 네 추론에 따르자면 이번 뱀파이어 변이증 확산의 배후가 인간 흑마법사일 것이고, 그자의 목적이 사회적 공헌을 세우는 것이었을 터다, 이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폐하."

"추측일지언정 참으로 뻔뻔한 의도로다. 하면, 그를 통해 흑마법사가 얻을 이득이 있는가?"

"당연히 있사옵니다, 폐하."

"말해 보라."

황제는 새삼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감탄을 애써 숨겼다. 감탄의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황태자가 말하는 추론이, 최근에 자신이 따로 받았던 보고의 내용과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황실의 정보부는... 저 추측을 하기 위해 수십 명이 달라붙어서 정보를 취합하고, 회의를 거듭하여야 했는데....'

그런데 눈앞의 아들은?

혼자서 저걸 추론하여 말하고 있다.

대체 어떻게?

알 수 없었다.

다만 저 추론 이후가 궁금해졌다. 과연 자신의 아들은 황실의 정보부와 똑같은 결론을 내릴 것인가. 황제는 궁금해하며, 한편으로는 기대하며 라키엘의 대답을 기다렸다.

"감히 말씀을 드리옵자면, 흑마법사는 이번 일을 통하여 사회의 양지로 나오는 것을 원하는 듯하옵니다."

"사회의 양지?"

"그렇사옵니다, 폐하."

"조금 더 자세히."

...정말로 비슷하다. 정보부가 내린 결론과 비슷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황제는 굳은 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물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보다 자세히 아뢰옵자면, 현재 모든 종류의 흑마법은 제국 황실의 법으로 금지가 되어 있사옵니다."

"그렇지."

"하여 흑마법은 어떤 경우에든 사용은 물론이고, 전수하는 것조차 금지가 되어 있는 실정이옵니다."

"물론이다. 그런데?"

"아마도 흑마법사는 그러한 황실의 법을 바꾸고 싶어 하는 것 같사옵니다."

"...설마, 사회적 공훈을 세우고 인정을 받음으로써?"

"예, 폐하."

라키엘은 자신의 추론을 이어갔다.

"누구에게나 박수를 받을 공훈을 세우고, 사회적 인정을 받고, 그를 통해 흑마법이 금지될 만큼 해롭지 않다는 인식을 만인에게 주어 활동의 자유를 얻으려는 것이 그의 목적일 것이옵니다."

딱 그거였다.

생각해 보니 간단했다.

실제로 마젠타노 황가는 흑마법을 금지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금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박해를 하고 있었다. 대대로 흑마법과 악연이 제법 많았다나. 어쨌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흑마법사의 입장을 헤아려보자면... 크게 두 가지 정도를 가장 많이 바라겠지. 자신의 활동을 제약하는 제국 황실을 뒤엎거나, 혹은 제국 황실에게 인정받아서 활동의 자유를 얻거나.'

예를 들자면?

앞서 크라노스에서 토벌된 좀비술사, 카르투가 전자의 케이스일 터였다. 실제로 그는 제국 황실의 전복을 꿈꾸며 좀비 군단을 양성했으니까.

반면, 이번에 출몰하여 뱀파이어를 조종하는 흑마법사는?

'그놈이 황실의 전복을 꿈꾸었다면 다른 방법을 사용했겠지. 애매하게 황도의 시민들을 건드리는 게 아니라, 황가의 핵심인사나 황족들에게 수를 썼을 거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애꿎은 시민들에게만 뱀파이어 변이증을 퍼뜨렸다. 덕분에 조금만 생각을 해보니 그 의도가 빤히 보였다.

"아마도 그는 뱀파이어 변이증을 간단하게 치료할 능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옵니다."

"하면, 수하들을 시켜 퍼뜨린 변이증을, 자신과 관계가 없는 척하며 치료함으로써 사회적 공훈을 세우려 한 것이다?"

"바로 그러하옵니다, 폐하."

"...."

황제는 침묵했다.

똑같다.

바로 오늘 아침, 황실의 정보부로부터 받은 보고의 내용을 황태자가 거의 똑같이 말하고 있다.

'너는 대체....'

황제는 애써 감탄을 삼켰다. 그리고 마지막 시험을 내리는 심정으로 말했다.

"좋구나. 너의 의견은 잘 들었도다. 한데 그럼에도 여전히, 짐은 한 가지 의문이 가시지 않음을 느낀다."

"어떤 의문이시옵니까?"

"너는 이번 일의 흉수가 인간 흑마법사일 것이라 추측하였는데, 짐은 그 점이 참으로 이해가 아니 된다. 통상적으로 뱀파이어를 부리는 존재라면, 더 상위의 뱀파이어가 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터인데 말이다."

"옳은 말씀이시옵니다."

"한데 네가 인간 흑마법사를 따로 지목한 근거가 있느냐?"

"물론이옵니다, 폐하."

"고하라."

황제가 명하였다.

라키엘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것을 추측한 근거는 간단하였사옵니다. 제가 포획한 뱀파이어들의 증언을 들었기 때문이옵니다."

"증언이라."

"그들에게 정신적인 금제가 걸려 있기에 직접적인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사옵니다. 하오나, 변칙적인 질문을 통하여 다수의 간접적인 증언을 얻게 되었사옵니다."

"간접적인 증언?"

"그렇사옵니다, 폐하."

"예를 들자면?"

황제가 물었다.

라키엘의 미소가 짙어졌다.

"뱀파이어들을 지휘하던 흉수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마늘 바게트라 하였사옵니다."

"...뭐?"

"그는 흰색을 좋아하옵니다. 약간의 고소공포증이 있사옵니다. 목젖이 예민한 편이라 양치질을 하다가 가끔씩 헛구역질을 살짝 하옵니다. 암기력이 뛰어나 마법 술식을 빠르게 익히는 편이며, 좋아하는 이성 취향은 책을 많이 읽는 여자라고 하였사옵니다. 특히 환상 문학에 관심이 많은 이성이요."

"...."

"마차 운전 성향은 의외로 매우 얌전한 할배운전 스타일이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성실한 타입이라 하였사옵니다. 스트레스가 쌓인 날에는 자면서 살짝 이를 가는 습관이 있고, 일광욕과 차가운 커피로 아침을 시작하는 것을 즐긴다고도 하였사옵니다. 한겨울에도 이건 똑같다고 하니 아마도 얼죽아... 아니아니, 어쨌건 또한, 때때로 장이 민감해져서 고단백 음식을 다량으로 섭취하는 걸 부담스러워한다고도 하였사옵니다."

"그게 무슨...."

"전부 뱀파이어들의 증언을 통해 간접적으로 얻은 정보이옵니다."

"...."

"더 고하여 드려도 될지...."

"또 있느냐?"

"몸 가꾸기에 관심이 많아서 근력 운동을 즐긴다고 하였사옵니다. 최근에는 3대 400킬로그램을 달성하였고, 이제 곧 안다아머를 당당하게 입을 수 있을 것 같다며 매우 기뻐했다고도...."

"...."

"더 고하여 드릴까요?"

"아, 아니, 되었다."

황제는 저도 모르게 손사래를 쳤다.

라키엘의 말이 이어졌다.

"이렇듯, 방금 고하여드린 바와 같은 정보들을 취합한 결과, 그가 뱀파이어일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사옵니다."

...그러하였다.

애초에 심각한 변태가 아닌 이상, 마늘 바게트를 즐기는 뱀파이어는 없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뱀파이어도, 일광욕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뱀파이어도 없다.

게다가 뱀파이어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초월한 근력을 지니고 있다. 3대 운동 400킬로그램? 그들에겐 껌이다. 한데 고작(?) 그걸 달성하며 매우 기뻐했다니, 아무리 봐도 뱀파이어의 행동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흉수의 정체는 뱀파이어가 아닐 것이며, 뱀파이어와 관련된 혈액 계통의 흑마법을 익힌 존재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사옵니다."

"인간이면서 뱀파이어를 부리는 자라...."

"그렇기에 사회적 지위와 인정에 더욱 집착하는 것이겠지요."

"하면, 대책은?"

"이미 모두 마련되어 시행되는 중이옵니다."

라키엘은 방긋 웃었다.

"그가 부리던 뱀파이어가 모두 사로잡혔으니 앞으로 변이증을 퍼뜨릴 수 없을 것이고, 이미 퍼진 변이증은 제가 치료하는 중이기 때문이옵니다."

이제 놈에겐 방법이 없을 것이다. 짜잔, 하고 나타나서 변이증을 치료하며 생색을 낼 기회 따위는 1그램도 주지 않을 거니까.

'어딜 감히! 원래 같은 업종끼리는 상권 겹치게는 안 들어오는 게 예의거든?'

라키엘은 문득, 한국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느 날, 같은 빌딩 다른 층에 들어왔던 어떤 한의원이 생각났다. 그 한의원의 입점을 알게 된 날 건물주에게 따졌던 순간도 떠올랐다. 덕분에 돌려받아야 했던 암담했던 대답도, 모두.

"...."

암울한 기억은 가급적 자주 떠올리진 말자.

라키엘은 당시에 느꼈던 기분을 접으며 새삼 다짐했다. 일부러 병을 퍼뜨리고 생색내는 치료를 하는 상도덕 없는 짓으로 남의 영업을 방해하는 놈 따위는 가뿐히 밟아 버리겠노라고. 그 어떠한 빈틈조차 내어주지 않겠노라고.

"하니 이후의 대응은 제게 맡겨주시면 어떨까 하옵니다."

"...."

황제는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최고의 인재들이 모인 황실의 정보부. 그들이 머리를 맞댄 것과 완벽하게 똑같은 수준의 결론을 혼자서 꺼낸 자신의 아들을. 그 놀랍고 경이로운 모습을.

'너는 대체....'

누구인 것이더냐.

과연 짐이 알던, 그 무력하고 무능했던 라키엘이 정녕 맞느냐. 만약 아니라면, 짐이 모르는 미지의 존재라면, 그것이 진실이라면, 짐은 너를 어찌 대하여야 하겠느냐.

처음엔 기뻤다.

그저 마냥 기뻤더랬다.

한데 요즘은 점점 자신도 모를, 인정하기 싫은 이질적인 기분이 치밀곤 했다. 이상했다. 부정하고 싶었다.

그런데도 의심과 의혹이 독버섯처럼 마음 한쪽을 자꾸만 좀먹어 온다. 거부하려 하여도 어쩔 수가 없이. 어버이 된 사람의 본능 같은 감각으로.

하지만 황제는 애써 그런 기색을 숨겼다. 오히려 그는 스스로를 책망하였다.

'...쯧, 아스테리온. 이 어리석은 놈아. 너는 아직도 계속하여 아들을 가혹한 시험에 놓이게 던져두고 싶은 것이더냐.'

이런 의심은 옳지 않다.

이제는 아들을 믿자.

그것이 그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이 아들에게 퍼부었던 냉대에 대한 유일한 속죄의 길이 될 것이니.

그러니 부디.

"황태자는 뜻하는 바대로 하라."

황제의 윤허가 떨어졌다.

그리고 같은 시각.

며칠에 걸친 혈투의 끄트머리에서 가까스로 쟈빌론을 제압한 흑마법사, 아난샤는 만신창이가 된 채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헉! 허억."

그는 주저앉아서 가까스로 웃었다. 그리고 맞은편으로 눈길을 들었다. 그곳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숙인 거한, 쟈빌론이 있었다.

'방금은... 정말로 위험했다.'

거의 죽임을 당할 뻔했다.

마지막 순간, 도박을 거는 심정으로 걸었던 정신지배가 실패했다면? 아마도 자신의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성공했다.

괴물 같은 거한의 정신을 성공적으로 지배했다. 비결은 간단했다. 놈이 수없이 찾으며 외치던 리한 군의관이라는 존재를 이용했다. 놈으로 하여금 자신을 '리한 군의관'으로 인식하게 최면을 걸었다.

"후후... 후후후...."

최면이 제대로 걸렸다.

확신이 들었다.

"나, 리한 군의관이 명하노니, 고개를 들라."

아난샤는 짐짓 목소리를 꾸며서 명령했다. 그 명령에 쟈빌론의 커다란 어깨가 꿈틀, 희미하게 반응했다.

좋다. 자고로 최면은 첫 반응과 교감이 중요하다. 첫 교감을 어떻게 나누는가에 따라서 최면을 시전한 자와 걸려든 자의 관계가 고정되기 때문이었다.

'내게 복종해. 어서!'

아난샤는 짐짓 엄격한 눈빛으로 쟈빌론을 쏘아보았다. 그러기를 잠시. 떨구어져 있던 쟈빌론의 고개가 서서히 들렸다. 흐리멍덩하던 눈빛이 이쪽을 향하며 초점이 잡혀갔다.

이내 흘러나오는 중얼거림.

"리한... 군의관...?"

성공이다.

이쪽을 리한 군의관으로 인식했다.

자신감을 얻은 아난샤는 더욱 힘찬 어조로 명령했다. 자신을 주인으로 인식하도록. 그 관계가 고정되도록.

"그래. 내가 리한 군의관이야. 그러니 너는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리한 군의관...."

"좋아. 어서 말해."

"너는 나의 것이다."

"...?"

"너는... 나의 것이다, 리한 군의관!"

"...에?"

철렁.

쟈빌론의 눈동자 가득 이글이글 떠오르는 무한 집착의 엑기스를 감지하며, 아난샤의 가슴이 철러덩 내려앉았다.

268화. 부항자국 아티스트 (1)

"너는 나의 것이다, 리한 군의관."

"...."

"행여나 미리 말해두는데, 지난번처럼 날 떠나려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도 말도록."

"...."

"그런데 리한 군의관? 오늘은 내 머리를 안 쓰다듬을 생각인가?"

"...."

또다.

아니.

계속 이런다.

미치겠다, 진심으로.

"...."

혈염의 흑마법사, 아난샤는 2심방 2심실 가득 쑴펌쑴펑 피어나는 난감함과 암담함을 만끽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성공적(?)으로 정신지배를 당하게 된 거구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쟈빌론이 있었다. 매우 단호하고도 한편으로는 은근슬쩍 반가운 기색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눈빛이 있었다.

"뭐 하는 거지, 리한 군의관? 내가 부르는데 어째서 미적거리는 반응인 것이지?"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너는 나의 것이다, 리한 군의관."

"...."

x발.

하마터면 나올 뻔한 욕설을 참으며, 아난샤는 어쩌다가 자신이 이런 사태를 맞이하게 됐는지를 떠올렸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정말로 그랬다.

멍청한 권속 하나가 아지트로 데려와 버린 이 거구의 소드마스터. 처음에는 자신도 그저 잡아먹을 생각을 했다. 소드마스터에게서 뽑아내는 피로 자신의 수명과 마력을 더욱 상승시키리라 기대했다.

한데 오판이었다.

막상 충돌하고 보니, 거구의 소드마스터는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첫 충돌에 아지트를 숨겨두던 결계가 찢어졌다. 충격파가 외부로 모조리 번졌다. 아니, 충격파만 찢겼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아지트로 삼던 저택마저 붕괴했다. 대다수의 권속이 그 재난에 휩쓸렸다. 일부는 충격파에 정통으로 맞아 전신이 가루가 되었다. 살아남은 것들은 대부분 건물 잔해에 깔렸다.

하지만 그들을 구할 수 없었다. 거구의 소드마스터, 이놈이 미친 듯이 날뛰며 계속 덤벼들었기 때문이었다.

리한 군의관이 어디 있느냐고.

혹시 나 모르게 잡아둔 거냐고.

리한 군의관을 순순히 풀어주라고.

"...."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도망만 칠 수도 없었다. 추격을 뿌리치는 것이 불가능했다. 선택 가능한 해답은 맞서 싸우는 것밖에 없었다.

살기 위해 싸웠다. 무려 나흘 밤낮을 꼬박 싸웠다. 그 와중에 황실의 추격을 받지 않기 위해 마나의 흔적까지 감추며 싸우느라 두 배로 힘들었다.

그 끝에 도착한 인적 없는 협곡. 여기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막다른 길이었다. 자신과 거구의 소드마스터. 둘 중의 하나가 죽어야 끝날 듯한 상황이었다.

물론 죽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죽일 자신도 없었다. 하여 도박을 거는 심정으로 정신 지배 마법을 시전했다.

거구의 소드마스터가 내내 외치던 리한 군의관. 그 존재를 이용했다. 자신을 리한 군의관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목이 베이기 직전에 가까스로 성공했다.

그런데 이걸 과연... 성공이라고 불러야 할까?

"리한 군의관? 나 머리가 아프다."

"...."

"이리 오라. 와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다오."

"...."

"어서?"

"...."

리한 군의관. 당신은 대체 뭐 하던 인간입니까?

아난샤는 우주의 근원만큼이나 열렬하게 궁금한 의문이 생겨 버렸다. 인생에 단 하나의 기회가 있다면, 리한 군의관이라는 사람을 한 번쯤 만나보고 싶어졌다.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은 인간이길래 이런 미친놈과 엮였던 걸까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소한(?) 의문보다는 상황의 해결이 우선이었다.

'젠장!'

아난샤는 욕지기를 삼키며 어색한 손을 내밀었다.

"이, 이렇게 하면 됩니까?"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니.

강아지 x낀가.

뭔가 한심한 기분이 치밀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정신지배 마법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니까. 아무리 정신을 지배하더라도, 자신을 리한 군의관으로 인식하게 했더라도, 원래의 리한 군의관과 지나치게 다른 태도를 보인다면 정신지배가 풀릴 수도 있다.

그런 사태를 방지하려면?

어느 정도는 요구를 맞추어 주어야 하리라.

"...."

젠장, 내가 어쩌다가.

아난샤는 까닭 모를 비애감을 느끼며 쟈빌론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물론 그 어색한 손길로 쟈빌론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지만.

"...쓰읍. 정성이 부족하다, 리한 군의관."

"네?"

"전에는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마다 구수한 노래도 불렀는데."

"노래...를요?"

"그래. 노래. 내 손은 약손~ 내 손은 약손~"

"내... 내 손은... 약손...."

"그렇지. 그렇게. 에헤이야~"

"에헤...이야...."

"더 구수하게."

"아, 네...."

"그런데 리한 군의관?"

"네?"

"잠시 못 본 사이에 실력이 퇴보한 것 같은데. 어째서 그대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데도 계속해서 머리가 아픈 것이지?"

"네에?"

"정성이 부족한 것 같다. 더 열심히 하도록."

"...."

"아 참, 리한 군의관? 사실 내가 전부터 궁금한 점이 있었는데."

"네? 어떤...?"

"예전엔 왜 날 떠나려 했지?"

"예?"

"날 떠나려 했잖나. 날 속이고. 감히 앙부아즈를 지배할 예정이었던 나를 버리고서. 훌쩍, 말이야."

"앙부아즈요?"

"그래. 앙부아즈. 이 쟈빌론 님이 지배하며 더욱 찬란하고 위대한 천 년의 반석에 올라설 예정이었던 왕국."

"...."

"말해봐, 리한 군의관. 왜 날 떠나려 했지?"

"...."

"설마 내가 미웠나?"

"아, 그건...."

아난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거구의 소드마스터. 떡지고 헝클어진 머리칼과 땟국물이 가시지 않은 얼굴. 덕분에 지금까지 알아보지 못하였던 정체.

'이놈, 설마.'

문득 떠올랐다.

작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앙부아즈 내전. 그 내전에서 패배한 반란군. 수장 쟈빌론. 거구의 소드마스터라고 했다. 왕국군에게 포로가 되어 마법 실험실로 끌려갔다고 했던가. 그런데....

'이자가? 탈출한 건가 설마?'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체구. 엄청난 위력의 소드마스터. 거기에 스스로 '쟈빌론'이라고 이름을 밝히기까지.

게다가 이렇듯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보자니, 언젠가 앙부아즈 왕가가 방방곡곡에 내걸었던 격문의 내용이 떠올랐다. 반란군에 맞서 왕국을 지켜낼 자원입대자를 모집하는 내용의 격문이었다. 그곳에 사악하게 묘사된 반란자 쟈빌론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

그때 그림으로 봤던 얼굴.

거기서 사악한 묘사만 좀 걷어내면... 흡사하다. 아니, 거의 똑같다. 눈앞의 이 거구의 미친놈과.

"저는 떠나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을 위해서였지요, 쟈빌론 각하."

감(?)을 잡은 아난샤는 즉각 태도를 바꾸었다. 시험을 하듯 은근한 대답을 했다.

그랬더니....

"그, 그래?"

거구의 소드마스터, 쟈빌론이 즉각 반색을 했다.

"그 말이 정말인가? 나를 위해서 그런 행동을 했다는 말이?"

"네. 그렇습니다. 저는 정말로, 진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날 떠나는 척하려 했던 것이라고?"

"네, 쟈빌론 님."

"그런데 왜 날 패대기쳤지?"

"...네?"

"나보다 엄청나게 커졌잖나. 그래서는 날 붙잡고... 쥐포 털듯이 이쪽 땅바닥, 저쪽 땅바닥에 번갈아서 패대기를 치고.... 그것도 전부 날 위한 것이었다고?"

"아, 그게...."

아난샤의 이마에 진땀이 좍 돋아났다.

그는 서둘러 대답했다.

"두통을 사라지게 할 새로운 방법을 시도한 거였습니다!"

"어, 그, 그랬나?"

"네!"

"아, 그랬...군.... 미안하네, 리한 군의관. 그것도 모르고 난 그대를 미워할 뻔하였는데."

"...."

휴우.

다행이다.

아난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또한, 한편으로는 확신하게 되었다.

'이자, 앙부아즈의 반란자 쟈빌론이다. 확실해. 그런데 리한 군의관이라는 존재는....'

...마젠타노의 황태자인가?

혹시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문득, 예전에 접했던 풍문이 떠올랐다.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거대한 모습으로 전장에 나타나 반란자 쟈빌론을 쓰러뜨렸다고 했던가.

당시엔 헛소리인 줄 알았다.

그런데 듣고보니, 방금 쟈빌론이 떠들어댄 이야기와 어느 정도는 내용이 비슷한 듯했다.

"...."

에이. 그래도 아니겠지.

황태자가 타국의, 그것도 반란군의 일개 군의관이었을 리가. 게다가 마젠타노의 황태자는 병약한 존재라는 것이 정설인데 무슨.

'헛소문이지, 그건. 병약한 약골 황태자가 이런 괴물 소드마스터를 패대기를 쳤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 황태자는 리한 군의관이 아니다. 게다가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니다.

'내가 소드마스터를 부리게 된 거야.'

권속들을 모두 잃었다.

계획이 어그러졌다.

그러나 대신에 소드마스터를 손에 넣었다. 이로써 손해를 훨씬 만회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에 품던 계획 또한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좋구나, 좋아.'

아난샤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쟈빌론을 쳐다보았다. 그의 두 눈동자에 위험한 야심이 꿈틀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쟈빌론이 반응했다.

"그런데 뭐 하나, 리한 군의관? 어째서 내 머리 쓰다듬기를 마음대로 중단하는 거지?"

"...아, 네?"

"쓰다듬으라고. 어서."

"아, 내 손은... 약손...."

"그렇지. 잘하는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너는 내 것이다, 리한 군의관."

"...."

젠장.

아난샤는 생존을 위한 머리 쓰다듬기를 시전하며, 한편으로는 새로운 위험한 계획을 꾸리기 시작하였다.

"자아, 위험하지 않으니까 힘 빼시고."

"네에...."

"시작합니다, 흐읍!"

뽀옥!

한편, 이곳은 아난샤와 쟈빌론이 있는 협곡에서 한참 떨어진 황도의 별궁 한의원. 오늘도 라키엘은 진료실에서 성물을 이용한 부항 치료에 매진하는 중이었다.

"흐으읍!"

키이이이잉-!

아스라한 심법이 발동되었다. 전격적인 마나의 흡수! 환자의 혈액 일부가 흡수력에 이끌려 왔다. 그리고 미리 침으로 찔러둔 부위를 통해 피부 밖으로 흘러나왔다. 피부를 뒤덮고 있는 반구형 성물 안에 고였다.

그리고 정화되었다.

치이이익!

꼬슬꼬슬 간고등어 굽는 듯한 소리가 진료실을 가득 채웠다. 동시에 뱀파이어 변이증에 감염되어 있던 환자의 혈액이 깨끗해졌고, 환자의 몸속으로 돌아갔다.

'좋아!'

라키엘은 씨익 웃었다.

역시나 잘된다.

사실 당연하다.

지난 며칠 내내 수없이 반복했던 치료니까. 덕분에 성물과 아스라한 심법을 조합한 부항 치료가 완전히 손에 익을 정도로 익숙해졌으니까.

'그러고 보니... 이번 환자가 딱 100명째인가.'

대략 그런 듯했다.

덕분에 지금까지 얻은 보너스 수명도 엄청났다.

[당신의 예상 기대수명 : 1,311일]

"...."

엄마, 나 해낸 거 같아요.

이대로면 무병장수 만수르 라이프, 진짜로 가능할지도.

솔직히 말해서 당장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 변이증 사태를 터뜨린 뱀파이어들의 볼따구에 격한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뭐, 만약에 웅녀 테라피와 성물 부항 치료법을 개발하지 못했다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더 고통받았을 테니까.'

사실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다.

그러니 함부로 기뻐하지 말자. 이번 일로 죽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내가 그런 일을 해냈다는 사실 자체에 가장 크게 기뻐하자.

라키엘은 가벼워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눈앞의 환자를 치료하는 데에 더욱 집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00번째 환자의 변이증이 완치되는 순간.

딩동!

[당신이 쌓은 부항 치료의 특수한 실전 경험이 스킬로 변환됩니다.]

[새로운 스킬이 개방되었습니다!]

[스킬명 : 부항 Lv.1]

[부항 기구로 환자의 피부에 음압을 발생시켜 이로운 치료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부항 치료 효과 +10%]

[스킬 옵션 ① : <부항자국 아티스트>를 활용하면 환자에게 각종 추가 버프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269화. 부항자국 아트스트 (2)

[새로운 스킬이 개방되었습니다!]

[스킬명 : 부항 Lv.1]

[부항 기구로 환자의 피부에 음압을 발생시켜 이로운 치료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부항 치료 효과 +10%]

[스킬 옵션 : ① <부항자국 아티스트>를 활용하면 환자에게 각종 추가 버프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

역시나 예상했던 결과다.

부항으로 많은 사람을 치료하면 이런 결과가 나올 줄 알았다. 이를테면, 부항에 관련된 스킬이 개방될 거라는 간단하고도 명료한 결과 말이다.

그런데 이건 예상 못 했다.

'부항자국 아티스트?'

라키엘은 눈을 가늘게 뜨며 메시지창을 노려보았다.

[당신은 성물을 공격적으로 활용하는 과감한 치료법으로 100명의 환자를 뱀파이어 변이증으로부터 구해냈습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당신이 지니고 있던 기존의 부항 치료요법에 대한 지식이 큰 영향을 받았으며, 숙련된 지식만큼 깊어져 있던 고정관념의 일부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당신이 지니고 있던 부항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지며, 새로운 옵션 활용의 길이 열렸습니다.]

[스킬 옵션 : <부항자국 아티스트>를 통해 당신은 환자의 부항 자국에 다양한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이 일정 조건을 충족시킬 때, 부항자국에 새겨진 그림이 환자에게 각종 이로운 효과를 부여할 것입니다.]

"...."

고정관념이라.

어쩌면 내가 한의대에서부터 배우며 익힌 지식이 일종의 벽처럼 내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걸까. 그렇게 나는 기존의 지식이라는 고정관념의 틀에 붙잡혀 있었던 걸까.

'사실 부항이야 유사 이래로 엄청 대중적인 처치법이었으니까.'

그러했다.

부항의 역사는 깊었다.

또한, 거의 모든 민족이 애용했다.

보통은 동양, 한국이나 중국, 일본 등지에만 부항요법이 발달되었을 거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그건 틀린 고정관념이다. 역사 이래로 부항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랑받은 치료요법이었다.

'사실 부항의 원리는 엄청나게 간단하거든. 문어 빨판 같은 음압을 발생시켜서 피부를 자극하고, 그걸로 국부 모세혈관의 충혈이나 파열을 의도적으로 일으켜. 그러면 신체가 손상된 부위를 회복하기 위해서 반응하지.'

일명, '자가용혈(自家溶血)' 현상이 일어난다. 조직에 대사 산물이 만들어진다. 신체의 자가회복 사이클이 앞당겨진다. 자연히 면역력이 증진된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러한 일련의 자극이 신체의 혈관수용기를 통해 중추신경에 전달된다.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균형을 적절하게 조절한다. 아울러 신체 조직의 대사와 탐식작용을 끌어올려 준다.

즉, 게임으로 치자면?

캐릭터의 생명력 리젠률을 끌어올리는 버프인 셈이다.

'방법은 간단하고 시간은 많이 걸리지 않는데 효과는 괜찮아. 많이 아프지도 않아서 진입장벽도 낮지. 그만큼 가성비가 좋은 치료법이야. 덕분에 역사상의 수많은 민족이 부항을 애용한 증거가 곳곳에 남아 있고.'

대표적으로는 그리스의 의사들이 있겠다. 이미 그때부터 그리스 성님들이 부항을 받으며 그 시원함에 크어어 뻑... 아니, 제우스 만세를 외쳐댔다.

그 유구한 전통이 중세를 거쳐 유럽 곳곳에 변형되고 발전하며 이어졌다. 영국의 커핑테라피(Cupping therapy), 프랑스의 출산을 돕는 방투즈(Ventouse), 독일의 슈뢰프코프(Schröpfkopf) 등이 좋은 예시일 것이다.

'게다가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 성님들도 소뿔을 사용해서 부항을 즐겼다고도 하니까 뭐.'

이쯤이면 거의 모든 민족이 다 즐긴, 고장 난 전자제품은 때리면 낫는(?)다는 풍습과 버금갈 지구 휴먼 전통의 민간요법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일 것이다.

자신이 부항 요법의 고정관념에 휩싸여 있던 것은.

'쉽고, 간단하고, 역사가 깊고, 그래서 오히려 쉽게 생각한 거였어, 내가. 다 안다고 지레짐작하며 자만했던 거지.'

그런데 지금 보니까?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깊은 경지가 있었다.

뱀파이어 변이증을 치료하기 위해서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며 발버둥을 치다가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고정관념의 벽을 깨고 깊은 경지를 엿본 것이리라. 그 결과, 이러한 뜻밖의 옵션을 얻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딩동!

상큼한 알림음과 함께 후속 메시지가 또르륵 떠올랐다.

[스킬 옵션 : 부항자국 아티스트는 당신이 이룩한 성과에 따라 활용 가능한 범위가 확장되는 성장형 옵션입니다. 당신은 부항 치료를 통해 뚜렷한 의료적 업적을 세울 때마다, 새로운 부항자국 도안과 버프를 획득할 것입니다.]

[현재 보유한 도안 개수 : 1개]

[도안의 상세한 목록과 내용을 열람하시려면 <여기>를 선택해 주세요.]

"...."

꾸욱, 눈빛으로 <여기>를 눌렀다. 그러자 획득한 부항자국 도안의 내용이 펼쳐졌다.

딩동!

[보유 중인 도안의 개수 : 1개]

[도안 ① : 흡혈귀 퇴치의 도안]

[환자의 몸에 새겨넣을 시, 뱀파이어 변이증의 치료에 이로운 효과를 불러옵니다.]

"...뭐?"

저도 모르게 육성으로 의문사가 덩실 튀어나왔다. 덕분에 방금 완치된 환자가 흠칫, 놀랐다. 하지만 라키엘은 개의치 않고 도안의 설명을 거듭 읽었다.

'이거 미쳤는데?'

보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오장육부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걸까.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이 획득한 새로운 스킬의 옵션 내용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심장 : 뭐? 부항자국에 그림을 그려? 각종 버프를 획득한다고? 그럼 여자 사람 그리면 환자한테 여자친구 생김?]

[허파 : 퍼허허...ㅋ]

[대장 : 그럼 우리 몸뚱이가 셀프로 부항 받고 그림 그리면요?]

[간장 : 응 그래도 안 생김.]

[위장 : 바랄 걸 바라야지ㅋㅋㅋ]

[콩팥 : 아 양심 좀ㅋㅋㅋㅋㅋㅋㅋ]

[비장 : 야야 살살 패라. 우리 몸뚱이 울면 혈당 떨어진다.]

[오장육부가 당신의 새로운 스킬과 옵션 획득을 축하하며 5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19,400]

"...."

아니 난 딱히 여자친구에 목매는 사람도 아닌데. 그런데 왜 갑자기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며 눈물 한 떨기를 배송하려는 걸까.

'오장육부 이것들, 줄빠따 치고 싶네.'

언젠가는 저놈들을 의인화시켜서라도 반드시 해내고 만다, 내가.

라키엘은 눈꼬리에 맺히려는 눈물을 훌쩍 털어내며 부항 스킬과 옵션의 내용을 정리해보았다. 간단했다. 뱀파이어 변이증의 치료를 돕는단다. 그럼 혹시, 지금 활용하고 있는 대주교의 성물을 쓰지 않아도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을까.

'직접 해보면 알겠지.'

라키엘은 방금 완치된 환자를 내보냈다. 그리고 다음 환자를 불렀다.

"으으...."

변이증과 웅녀 테라피에 동시 폭격(?)을 당하여 초췌해진 환자가 들어왔다. 50대 초반의 여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성물을 뚝 잘라서 만든 부항컵을 사용해야 할 차례. 그러나 라키엘은 이번에 다른 부항컵을 들었다. 유리 몸체와, 위쪽의 말캉한 가죽으로 만들어진 일반 부항컵이었다.

뿌븟!

부항컵 위쪽의 가죽 부위를 손으로 강하게 눌렀다. 그 상태에서 환자의 등에 부항컵을 붙였다. 손을 놓았다. 오므라들었던 가죽 부위가 펼쳐지며, 부항컵 안쪽에 음압이 발생했다. 즉, 문어 빨판처럼 환자의 등판에....

...뿁!

하고 야물딱지게 달라붙었다.

'이번엔 피를 빼지 않는 건식 부항으로.'

성물을 이용할 때는 성물 부항컵 안쪽에 피를 고이게 하여야 했다. 그래야 성물과 접촉되는 환자의 혈액이 정화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이해한 부항 스킬의 옵션 내용대로라면, 굳이 피를 빼지 않고도 뱀파이어 변이증의 치료가 가능해질 테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여러 개로 해보자.'

뿁, 뿁! 뾰뵵! 뿁!

총 5개의 부항컵을 등판 이곳저곳에 추가로 붙였다. 그리고 기다렸다. 부항컵이 환자의 등에 빨갛고 동그란 자국을 확실하게 새길 때까지. 뜸을 들이는 심정으로. 라면 면발이 딱 적당하게 익어 주기를 기다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그렇게 10분이 흘렀다.

'좋아.'

라키엘은 손을 뻗어 부항컵 위쪽의 마개를 열었다. 그러자....

푸슈웁!

공기가 부항컵 안쪽으로 들어가며 음압이 풀렸다. 부항컵이 환자의 등에서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왔음은 물론이었다.

그 자리에 남겨진 새빨간 부항자국.

그걸 보는 순간, 자동으로 스킬 옵션이 발동되었다.

딩동!

[당신은 방금 시술된 부항자국을 감지하였습니다.]

[부항 스킬 옵션 ① : 부항자국 아티스트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부항자국 아티스트를 발동하려면 붓, 펜 등의 필기구를 들고서 환자에게 접근해 주세요.]

"...."

시키는 대로 했다.

마침 근처에 작은 사이즈의 붓이 있었다. 붓을 들어 잉크로 적셨다. 그랬더니 스킬 옵션이 본격적으로 발동되었다.

딩동!

[부항 스킬 옵션 ① : 부항자국 아티스트가 발동됩니다.]

[보유한 도안의 개수가 1개이므로, 도안 선택의 과정이 생략됩니다.]

[보유 중인 <흡혈귀 퇴치의 도안>을 사용합니다.]

스윽!

붓을 든 팔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어떻게 말리고 자시고 할 사이도 없었다. 일필휘지의 기세로 환자의 등판 부항자국에 도안을 새기기 시작하였다.

슥슥! 스슥! 슥!

마치 컴퓨터로 레이저 각인을 하는 듯한 거침없는 손길!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자그마한 그림이 동그란 부항자국에 싹싹 새겨졌다. 그러한 도안의 실물은 송곳니가 뽑혀서 엉엉 우는 뱀파이어의 얼굴이었다.

한데 그림의 실력이 가관이었다. 정교해서? 아니, 절대로. 이건 그냥....

'차라리 내 손재주로 직접 그리는 게 낫겠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삐뚤빼뚤했다. 유치원생이 고사리손으로 그린 그림을 보는 듯했다.

한데 이쪽의 항의(?)를 들은 걸까.

메시지의 얄미운 대답이 즉각적으로 돌아왔다.

딩동!

[출력되는 도안의 예술성은 스킬 보유자의 실제 그림 실력을 기반으로 합니다. 불만 금지.]

"...."

네, 얌전히 닥치겠습니다.

팩트로 후드려맞은 라키엘은 입을 찰싹 다물었다. 그 사이, 스킬 옵션의 인도를 받는 그의 손이 계속해서 움직였다. 덕분에 짧은 시간 안에 5개의 부항자국에 똑같은 도안 5개를 새길 수 있게 되었다.

한데 그런 이쪽의 모습이 심히 괴상했던 걸까.

"저기... 전하?"

스킬 발동을 마치고 보니, 수간호사 아니스가 당혹감에 젖은 눈길을 보내오고 있었다. 갑자기 뭔 돌아이짓을 하시느냐는 뜻을 나름의 예절로 포장한 눈길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럴 법도 했다. 잘 쓰던 성물 부항컵을 던져놓고 일반 부항컵을 쓰는 것도 의아한데, 그 부항자국에 다짜고짜 유치원생 수준의 그림을 빼곡하게 그리는 황태자라니.

하지만 라키엘은 아니스의 의문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눈앞에 떠오를 추가 메시지에 집중하였다.

'자, 스킬 옵션을 썼으니까 결과를 보여줘.'

아까 읽은 내용에 따르면 도안이 환자에게 각종 버프를 걸어준다고 했다. 특히, 이번에 얻은 <뱀파이어 퇴치의 도안>은 뱀파이어 변이증의 치료에 이로운 효과를 불러온다고 했는데....

딩동!

'떴다!'

과연 도안의 효과가 눈앞에 숑숑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효과의 내용이....

'미쳤는데, 이건?'

라키엘은 마른침 한 덩이가 덩실덩실 환호와 기쁨의 탭댄스를 밟으며 식도를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꿀꺽.

270화. 부항자국 아티스트 (3)

꿀꺼덕, 꿀꺽!

"크흐흐...!"

내가 모시는 황태자 전하는 참 괴상... 아니, 특이한 분이시다. 왜냐고? 가끔씩 저렇게 혼자서 허공을 쳐다보며 뜻 모를 웃음을 흐뭇하게 터뜨리시곤 하거든.

"...."

별궁 한의원의 수간호사, 웨어울프 아니스는 콧등을 찡그렸다. 그리고 난감한 눈길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황태자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연신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멍한 눈길? 아니, 절대로. 오히려 초롱초롱했다. 마치 선물 보따리를 듬뿍 받는 사람 같은 눈빛이었다. 혹은, 반가운 소식이 잔뜩 적힌 편지를 읽는 사람의 눈빛 같기도 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

진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인데. 그런데 뭐가 저렇게 좋다는 걸까. 게다가 조금 전까지 황태자는 환자의 부항자국에 괴발개발 괴상한 그림을 그려넣기까지 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익숙하지 않은 왼손으로 그린 것만 같은, 그런 그림을.

'전하께서는... 그림을 엄청 못 그리시는구나.'

솔직히 이렇게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은 처음 봤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자신이 발가락으로, 아니, 귓구멍에 붓을 꽂고 그려도 더 잘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림 실력은 둘째치고....

'전하께서는 왜 이러시는 거지?'

아니스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사실 황태자가 아무 이유 없이 이런 괴팍한 짓거리를 하는 것은 아니리라 생각하는 그녀였다. 당연했다. 지금까지 황태자가 벌여댄 온갖 기이한 행동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으니까. 예외가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이번에도 그러하리라.

"크흐흣, 크킄!"

"...."

이번은 아닌가.

결국, 아니스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전하? 환자를 밖으로 안내할까요?"

환자는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보통 성물을 이용한 부항치료를 받으면 그 자리에서 완치가 되며 제정신을 차리곤 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이 또한 당연했다. 성물을 쓰지 않았으니까. 그냥 일반 부항컵으로 부항을 하고, 그 자국에 낙서를 새겼을 뿐이니까.

그런데....

"아니, 잠깐 기다려 봐."

의외로 황태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더니 환자의 기색을 면밀히 살폈다. 요모조모, 환자의 얼굴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살피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뜻밖의 말을 했다.

"아니스? 이 환자 별궁 연무장으로 안내해드려."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아니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무장이라니요?"

혹시 황태자는 환자를 연무장에서 훈련이라도 시키겠다는 걸까. 에이 설마 아니겠지.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이라는 생각은 틀렸다.

"연무장에 데리고 가서 20바퀴만 같이 걸어."

"네에?"

"20바퀴 걸을 수 있게 부축 좀 해드리라고."

"...."

어째서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꺼낼 수가 없었다. 황태자의 이어지는 말이 먼저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마침 오늘 날씨가 화창하니까?"

"...."

"20바퀴쯤 걸으면서 햇볕 낭낭하게 쬐어주고, 동시에 혈액순환 한껏 돌려주면 환자분이 정신을 차릴 거야. 그러면 회복실로 옮겨줘."

"회복실이라시면...."

"응. 웅녀 테라피 졸업이야. 완치니까."

"...."

이해가 안 된다.

무슨 뜻인 건지 짐작도, 추측도 안 된다. 너무나 엉뚱해서. 뜬금이 없어서. 인류와 웨어울프 모두의 보편타당한 상식을 동원해도 해석이 안 되어서.

하지만 아니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어서."

"아, 알겠습니다, 전하."

까라면 까야 하는 것이 이 세상 모든 을, 피고용자의 숙명!

아니스는 당혹감을 억누르며 아주머니 환자를 데리고 연무장으로 나갔다. 그리고 부축을 해주며 함께 천천히 걸었다. 물론 그동안에도 환자는 여전히 몽롱한, 전형적인 뱀파이어 변이증의 인사불성 상태를 보였다.

"끄흐으으... 그르...."

만취한 듯한, 혹은 좀비와 같은 의미 불명의 신음. 환자의 표정과 몸짓과 행동 어느 구석에서도 회복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같이 걸으면 완치일 거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적어도, 다섯 바퀴를 걸을 무렵까지는 그랬다.

"어으... 아유...."

...어?

함께 걷던 아주머니 환자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전과는 조금 달랐다. 아까까지는 그저 지성 없는 좀비 같은 소리였는데, 지금은 사람 같은(?) 느낌이 살짝 났다.

'....'

착각인가.

아니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속해서 환자를 부축했다. 여섯 바퀴... 여덟 바퀴... 열 바퀴... 꾸준히 연무장을 함께 걷는 동안 상황이 점점 달라졌다.

"후우, 어유. 으즈르르오오...."

"네?"

깜짝이야.

열한 바퀴를 걸었을 무렵이었다. 뜬금없이 환자가 말을 했다. 지극히 어눌한, 그래서 얼른 알아듣기 어려운 발음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말'을 했다.

"...."

이거 실화인가.

아니스는 문득, 최근 자신들이 돌보았던 뱀파이어 변이증 환자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중에서 제대로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증상 초기에는 그나마 대화가 가능했지만, 병세가 진행되면 아예 말을 못 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이 아주머니 환자도 마찬가지였다. 변이증이 중증의 단계까지 진행되며 지성을 거의 잃어가던 상태였다. 그런데 고작, 연무장을 열 바퀴 남짓 걷는 사이에 상태가 호전되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니?

'이게 가능한가?'

처음 보는 상황에 잠깐 당혹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숙련된 수간호사답게 금방 침착함부터 되찾았다. 그리고 환자에게 나긋하게 물었다.

"조금 힘드세요? 천천히 걸을까요?"

"으으... 네에."

"...."

진짜다.

말을 하고 대화를 나누게 됐다.

고작 연무장을 걸었을 뿐인데!

'설마.'

황태자의 호언장담이 맞는 걸까. 어째서? 어떻게? 그냥 일반 부항 치료를 했을 뿐인데? 특이한 점이라고 해보았자 부항자국에 괴상한 그림을 그렸을 뿐인데? 진짜로 그것 때문에? 혹시 남들 모르게 마법이라도 쓴 거 아냐?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덕분에 이제는 결과가 더 궁금해졌다. 그녀는 아주머니 환자를 부축하고서 더 성심껏, 천천히, 배려를 하며 걸었다.

열세 바퀴... 열다섯 바퀴....

아주머니 환자의 발음이 또렷해졌다.

"어유, 어지러. 후우...."

"...."

열일곱 바퀴째.

환자가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간호사 아가씨? 우리, 계속 이렇게 걸어야 해요?"

"네. 걸어야 합니다."

"나 너무 덥고 힘든데. 조금만 쉬었다가 하면 안 될까?"

"안 됩니다."

"어째서요?"

"황태자 전하의 명령이십니다."

"...어? 그랬어요?"

"네."

"아유, 그럼 걸어야지. 얼마나 더 걸으면 돼요?"

"세 바퀴 남았습니다."

그러면 완치가 될 거라 했으니까요.

...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눈으로 봐도 달라지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는 까닭이었다.

그렇게 마저 세 바퀴를 걸어서 연무장 20바퀴를 채우는 순간이었다.

"...헛?"

땀을 흘리며 열심히 걷던 아주머니 환자가 느닷없이 우뚝, 걸음을 멈추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잠시 후, 이쪽을 돌아보며 망연자실하게 말했다.

"나, 기억이 났어...."

"...."

"골목에서 웬 여자가 다가와서는... 내 목을...."

"다 떠오르신 건가요?"

"응, 그런 거 같아요."

고개를 끄덕이는 아주머니 환자.

그 모습을 보며 아니스는 내심 감탄했다. 뱀파이어에게 물리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 그것이 뱀파이어 변이증의 가장 확실한 완치의 증표이기 때문이었다.

즉, 이 아주머니 환자는....

"축하드립니다. 뱀파이어에게 물렸지만, 다행히 완치가 되신 거 같네요."

"내, 내가요?"

"네. 그럼 이제 회복실로 모시겠습니다."

...황태자 전하의 당부대로 말이죠.

아니스는 뒷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슬쩍 들었다. 그리고 연무장으로부터 저 멀리에 보이는 한의원 병동의 어느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그곳 창가에 황태자가 서 있었다. 아마도 내내 이쪽을 보고 있던 거겠지.

"...."

황태자 전하.

당신은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요?

그녀는 묻고 싶은 말들을 잔뜩 삼키며 환자를 안내하였다. 물론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라키엘은 아니스가 품은 의문의 답을 알고 있었다.

'후우, 이거 효과 확실하네.'

혹시나 했다.

실화인가 싶었다.

그래서 바로 확인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

라키엘의 눈길이 향하는 허공.

그곳에 메시지창이 떠올라 있었다.

[부항 스킬 옵션 ① : 부항자국 아티스트가 발동되었습니다.]

[보유 중인 <흡혈귀 퇴치의 도안>을 사용하였습니다.]

[사용된 도안의 숫자 : 5개]

[도안의 숫자가 많을수록 효과가 중첩됩니다.]

[도안의 효과가 뱀파이어 변이증 치료 행위에 +500% 효과 버프를 부여합니다.]

[치료 버프 지속 시간 : 3시간]

[버프 시간이 종료되기 전에 적극적인 치료 시행을 권장합니다. 마늘 섭취, 일광욕 추천. 치료를 시행하며 적절한 혈액순환이 병행될 시에, 뱀파이어 변이증이 완치될 확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아까 도안을 다 그린 직후에 떠오른 내용이었다. 이제 그 결과까지 확인을 하고 보니 이건 정말이지....

'미쳤네. 게임 터졌네.'

라키엘은 확신했다. 이걸로 뱀파이어 변이증 치료는 끝났다고. 이제 더는 성물을 사용할 필요가 없겠다고.

그 순간, 그의 확신에 쐐기를 박는 추가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당신은 부항스킬 옵션의 적극적인 활용을 통하여 환자 : 엠마의 뱀파이어 변이증을 성공적으로 진료하였습니다. 그녀는 중증 변이성 질환에서 벗어났으며, 적절한 안정을 취할 시 별다른 후유증 없이 완치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녀는 변이증이 더 진행될 시에 죽음이 아닌, 뱀파이어의 운명을 받을 예정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진료비 청구 스킬이 발동되지 않습니다.]

[보너스 수명을 받지 못한 대신, 소정의 HP가 보상으로 지급됩니다.]

[오장육부가 당신의 노고를 치하하며 3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19,700]

'후우. 좋아.'

라키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뭐, 보너스 수명을 못 받은 건 살짝 아쉽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아직 남은 변이증 환자가 많으니까. 그들에게 퍼받을 보너스 수명만 계산해도 엄청난 양이 될 테니까.

'게다가 이제는 부항 치료에 성물을 쓸 필요가 없어졌으니, 진료 속도가 몇 배는 빨라질 거야.'

성물을 쓸 때에는 직접 아스라한 심법을 사용해야 했다. 그 때문에 한 번에 한 명의 환자만 진료할 수 있었다. 심지어 매번 심법을 쓰느라 제법 피로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제약이 풀리게 됐다.

'환자 열 명쯤 나란히 눕혀서 부항 붙여뒀다가 한꺼번에 도안만 그려주면 되니까!'

실제로 한의원에서 침이나 부항을 맞아본 사람은 알 것이다. 한의사는 한 번에 한 명만 진료하지 않는다. 이 침상, 저 침상을 분주하게 오가며 침을 꽂고, 부항을 붙여주고는 한다. 덕분에 한의원 치료실 곳곳에서 타이머 알람 소리가 수시로 울리는 것이기도 하고.

'이번에도 그렇게 하면 돼.'

그는 시험 삼아 몇 명의 환자를 더 불러왔다. 일반 부항컵으로 부항자국을 새기고, 자국에 뱀파이어 퇴치의 도안을 그려주고, 연무장을 걷게 했다.

결과는 전원 완치.

'됐다.'

마지막 확인까지 마친 라키엘은 다음날 대주교를 불러들였다.

"대주교님? 이렇게 갑작스러운 초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전하. 저야 언제나 전하의 부름에 감사할 따름이지요. 허허허."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또한 감사합니다, 대주교님. 실은, 오늘은 제가 대주교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듯 무례를 무릅쓰고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예? 긴히 주실 말씀이라니 무슨...?"

"일전에 반으로 뚝 잘랐던 성물 말입니다."

"예, 전하."

"이제 그걸 대주교님과 교단의 품으로 돌려보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예에?"

대주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벌써 모든 환자를 치료하신 겁니까?"

"아뇨. 그건 아닙니다. 아직 환자는 제법 남았습니다. 다만, 이제는 성물의 도움 없이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됐습니다. 그러니 당초에 드렸던 약속대로 성물을 돌려드리는 것이 도리겠지요. 물론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해드리는 것도 잊지 않겠습니다."

라키엘이 솔직한 생각을 밝혔다.

사실 성물을 반으로 잘라서 쓰는 것은 이쪽 입장에서도 찜찜했다. 교단과 관계가 나빠져서 좋을 것은 없으니까. 혹은 신이라는 존재에게 미운털이 박힐 수도 있으니까. 그런 일은 가급적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에 얻게 된 부항 스킬의 존재가 더욱 반가웠다. 한편으로는, 이렇듯 성물의 빠른 반납 의사를 밝히면 대주교도 매우 기뻐하리라 여겼다.

그런데....

"아, 그건...."

뜻밖에도 대주교가 난감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리고 더욱 뜻밖의 말을 건네어 왔다.

"외람되지만, 전하? 혹시 괜찮으시다면... 성물을 더 계속 사용해 주실 수는 없으실는지요?"

"예?"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대주교의 뜻밖의 말이 이어졌다.

"실은 교단에서 말입니다. 전하의 이번 성물 사용을 매우 크게 반기는 분위기라서...."

"제 성물 사용을 말입니까?"

"예, 전하. 덕분에 교단의 명성이 드높아졌다는 평가입니다."

"허허?"

"아, 그리고 이건 사실 며칠 뒤에 교단에서 공식적으로 공표할 내용이기는 한데, 으음, 귀를 좀 빌려도 되겠습니까?"

"귀를요?"

"예. 전하께서 당사자이시니 미리 귀띔을 해드릴까 해서 말입니다."

"...."

교단에서 며칠 뒤에 공표할 사안? 그런데 내가 당사자라고?

대체 뭘까.

라키엘은 궁금함을 느끼며 대주교에게 다가갔다. 주위를 슬쩍 살핀 대주교가 귓속말을 소곤소곤 건네어 왔다.

"실은... 성물을 활용한 전하의 뱀파이어 변이증 치료 성과를 일종의 기적을 행한 성스러운 업적으로 간주하게 되어서 말입니다.... 교단에서 전하를 공식적 성인(聖人:Saint)으로 추대할 예정입니다."

"...네?"

라키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신성한 존재라 불리는 성인? 나 같은 놈이? 진짜?

'이거... 실화?'

271화. 잘못된 만남 (1)

이 세상에는 성스러운 존재가 많다.

부처님, 예수님, 알라신, 공자 맹자 등등의 존경스러운 분들은 구태여 말을 하는 게 입이 아플 지경이다. 그 외에도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분들, 응급현장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아무런 보상이 없어도 희생을 자처하는 분들도 계신다.

그뿐일까.

소리 없이, 티 내지 않는 봉사를 이어가는 분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비록 큰 금액이 아닐지라도 사회를 위해 기부를 하는 분들께도 칭찬의 박수.

그런데 내가....

'성인으로 추대된다고? 진짜? 리얼?'

라키엘은 미간을 살포시 찡그렸다.

말도 안 된다. 자신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저 통장에 들어오는 월급의 생존(?)기간보다 짧은 수명을 늘려보려고 아등바등거렸을 뿐이니까.

'다른 사람을 치료해서? 뱀파이어 변이증을 성공적으로 잡아낼 방법을 찾아내서?'

물론 그건 좀 대단하긴 하다. 스스로 생각해도 그렇다. 하지만....

"대주교님?"

"예에, 전하."

"저는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전하."

"...."

"하지만 전하께서도 성인 추대의 의미를 어느 정도는 알아차린 눈치이신데 말입니다."

"예, 뭐. 물론."

그렇다.

황당하지만, 그럼에도 알겠다.

이쪽을 성인으로 추대하는 일이 교단에게도 큰 이득이 되리란 사실쯤은 말이다.

"제가 알기로 교단에서 누군가를 성인으로 추대하는 경우는 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성스러운 기적을 행하거나, 그에 준하는 역사적인 업적을 통하여 신의 뜻을 온 세상에 드높인 공로가 인정되는 자. 맞지요?"

"예. 맞습니다, 전하."

"그리고 두 번째는... 우리 마젠타노 제국의 황제."

그러했다.

역대 모든 황제는 신성교단의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언제? 대관식을 거행할 때마다. 예외 없이 무조건 자동으로였다.

"물론 그건 일종의 명예직이라고 볼 수 있다지요. 제가 듣기로는 그랬습니다. 황제가 정말로 성스러워서 성인으로 추대되는 게 아니라, 성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만큼 어질고 자비로운 정치를 펼쳐달라는 교단의 당부의 의미가 담긴 추대라고 말입니다."

"정확하십니다, 전하."

"그럼 제가 성인으로 추대되는 건... 두 번째 케이스는 아니겠군요. 저는 아직 황제로 대관식을 치르지 못했으니까."

"그렇습니다, 전하."

대주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는 그저 명예직의 의미가 아닌, 역사적인 업적을 인정받은 진짜 성인으로 추대될 예정이십니다."

"...."

뱀파이어 변이증의 치료법을 발견한 게 그렇게 대단한 거였나.

"명예롭게 받아들이셔도 되십니다. 말 그대로 진정한 의미에서 치러지는 성인 추대는 백 년에 한두 번이 있을까 말까 하는 일이니까 말입니다."

그건 안다.

세기에 겨우 한두 번.

어떨 때는 없기도 하다.

'후우. 장난 없네.'

라키엘은 심호흡을 하며 들뜬 심장을 가라앉혔다. 너무 생각지도 못했던 소식이라 십이지장 융털돌기 동맥이 온몸에 고혈압 비트를 넣어댈 지경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싫지는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딩동!

[당신의 오장육부가 성인 추대를 통한 사회적 명예 상승을 기뻐하며 춤판을 벌입니다.]

[심장 : 유후! 이제부터 내가 성인의 심장이다!]

[허파 : 흐픕! 허프픕!ㅋㅋ]

[대장 : 그럼 제가 방출하는 끙까는 뭐지 말입니까?]

[간장 : 끙까가 그냥 끙까지 뭐겠냐ㅋㅋㅋㅋㅋ]

[위장 : 성인이 누는 끙까는 사이다 향이라도 나길 바랐음? 양심 좀ㅋㅋㅋ]

[콩팥 : 그래도 이런 말도 있잖아. 일단 끙까를 싸라. 유명해질 것이다.]

[비장 : 성인으로 추대되는 자리에서?]

[간장 : 유명해지긴 하겠네.]

[심장 : 아하.]

[허파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당신의 오장육부가 거대한 사회적 명성 획득을 축하하며 600 HP를 후원합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20,300]

"...."

응, 솔직히 좋다.

게다가 교단이 갑자기 이런 파격적인 성인 추대를 결정한 이유도 대강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이번 일이 교단에게 큰 이득이 되겠다는 계산이 선 거겠지.'

그러하다.

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신성교단? 그런 곳이 순수한 선의로만 운영될 거라는 기대는 어리석다.

누구나 다 그렇지만, 교단 또한 당연히 자신들에게 이득이 될 일만 골라서 한다. 이번 결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자신들의 성물을 사용해서 뱀파이어 변이증을 치료했으니까. 그 업적을 높이 사서 날 성인으로 추대한다는 건? 즉, 자신들의 성물을 함께 올려치겠다는 뜻인 거지.'

덕분에 교단의 명성도 함께 올라갈 것이다. 아울러 제국 황실과의 관계도 한층 돈독해지고, 교세 또한 확장될 것이다. 서로 윈윈이 되는 셈이다.

"으음, 그럼... 제가 이 성물을 당장 반납하지 않고 계속 치료에 사용해 주길 바라는 것도 같은 맥락인 거겠지요?"

"외람되오나 그렇습니다, 전하."

대주교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역시 굳이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벌써 눈치를 채셨군요."

"예, 뭐. 이쯤은."

...이래서 눈치 빠른 놈은 싫다니까, 라는 상투적인 대사를 읊으며 대주교가 품속에 숨겨온 권총을 꺼내는 일은 물론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대주교는 더욱 사람 좋게 웃었다.

"전하께서도 이번 성인 추대가 순수한 의도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다분히 정치적인 이해타산이 들어간 결정이겠지요. 하지만 그걸 눈치를 채셨음에도 이렇게 흔쾌히 기뻐해 주시니...."

"감사하다고요?"

"예, 전하."

"오히려 제가 감사할 일이지요. 저한테도 이득이 될 테니까."

"하하, 그런 겁니까?"

"물론이죠."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그런 그의 머릿속 뇌주름에서는 '신성교단이 인증하고 추대한 성스러운 성인에게 진료를 받을 기회! 놓치지 마세요!'라는 한의원 홍보문구가 어푸어푸 접영을 하는 중이었다.

'이걸로 홍보만 잘 하면 별궁 한의원을 더 키울 수 있어!'

더 많은 환자.

더 많은 보너스 수명.

그걸 위해 의료대학에서 더 많은 의사를 납ㅊ, 아니, 고용해야지.

"그럼, 성인 추대 공식 발표는 언제쯤 나오게 되는 겁니까?"

"아마 며칠 걸리지 않을 겁니다, 전하."

대주교의 대답은 정말로 현실이 되었다.

불과 사흘 뒤였다.

진료실에서 뱀파이어 변이증 환자의 부항자국에 그림을 그려대고 있던 라키엘은 황제의 갑작스러운 부름을 받았다.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가 이 땅의 합당한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를 감히 뵙사옵니다."

"인사는 되었다. 혹여 소식을 들었느냐."

"송구하옵니다. 어떤 소식을 이르시는지 잘 모르겠사옵니다, 폐하."

"그렇게 말하는 네 표정을 보니 이미 아는 것 같다만."

"그리 말씀하시는 폐하의 기색으로 보아 나쁜 소식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은 드옵니다."

"뻔뻔하구나."

"송구하옵니다, 폐하."

라키엘은 시치미를 뚝 떼었다.

황제가 냉랭한 눈빛을 떠올렸다.

"대주교에게 미리 귀띔을 받은 것이겠지?"

"그 역시 송구하옵니다, 폐하."

"그래. 송구하여야지. 마땅히 무거운 죄악감을 느끼며 네 죄를 용서해 달라 빌고 자비를 구하며 바닥에 머리를 찧어야지."

"...예?"

"오늘 오전에 신성교단으로부터 전언을 받았노라. 그들이 너를 성인으로 추대하겠노라 결정하였다지?"

"그, 그렇사옵니다, 폐하."

"한데, 그런 좋은 소식을 먼저 듣고서도 그걸 짐에게 알리지를 않아?"

"...."

"그런 경사를 먼저 접하고서도, 그걸 짐에게 전하지를 않고 혼자서만 즐겨?"

"...."

"네 죄를 네가 알렷다?"

"그, 저기...."

"고하라. 감히 고할 낯짝과 입이 있다면."

"이 모든 기쁜 소식과 경사가 모두 폐하의 덕분이옵니다."

"하. 이제 와서 감히 입에 발린 알량한 소리를."

"...."

저 양반, 삐쳤네. 삐쳤어.

라키엘은 숙인 고개 아래로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어, 으음,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겠사옵니다, 폐하."

"이런 일? 어떤 일?"

"그게, 먼저 좋은 소식을 접하면 반드시 폐하께 바람처럼 달려와 가장 먼저 고하여드리겠사옵니다, 폐하."

"그런 바람 필요 없도다."

"그럼에도 폐하의 잠긴 문을 두드려 밖에서라도 열심히 고하여 드리겠나이다, 폐하."

"그런 문 따위는 이미 부서졌도다."

"...어오."

"방금 무어라 하였느냐?"

"아, 아니옵니다. 잠깐 재채기가 나올 뻔하여 가까스로 참은 것이었사옵니다, 폐하."

"짐이 듣기엔 전혀 아닌 것 같았다만."

"...."

"어쨌건 네게 당부하노니, 부디 교만해지지 말지어다."

"명심하겠사옵니다, 폐하."

다행(?)히 이쪽의 아첨이 통한 걸까. 황제의 서운해하던 기색이 조금은 풀어진 듯했다. 라키엘은 안심하며 재차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의 안심은 방심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또한 네게 당부하노니, 부디 스스로를 대단하다 여기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그 또한 명심하겠사옵니다, 폐하."

"이건 그저 단순한 당부가 아니니라."

"예?"

"너는 실제로 대단한 구석이 없지 않느냐?"

"...."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쁜 소식을 아비에게 전하지도 않고서 남의 입을 통하여 듣게 하는 놈이 무슨 대단한 구석이 있겠느냐."

"...."

차라리 절 귀양이라도 보내시죠, 그냥.

라키엘은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분명히 볼 수 있었고, 느낄 수도 있었다. 황제는 너무나 기뻐하고 있었다. 만일 보는 눈들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었을 만큼. 아니, 어쩌면 혼자 있을 때 진즉 추었을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겉으로는 저래도 정이 많은 사람이니까. 단지 그 표현법이 매우매우 하자가 있을 정도로 서투른 타입일 뿐.

"어쨌건, 짐이 너에게 알리노니, 앞으로는 성인의 명성에 걸맞도록 몸가짐을 더욱 신중히 하라."

"알겠사옵니다, 폐하."

그렇게 갈굼 같은 축하와 칭찬, 당부로 배가 터지도록 얻어맞고서야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황실과 교단의 협력 하에 성인 추대식, 즉, 시성식 준비가 빛의 속도로 착착 진행되었다.

그동안 라키엘은 매일 바쁜 일상을 보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진료시간 내내 뱀파이어 변이증 환자들을 치료했다.

대부분은 새로 얻은 부항 스킬, '부항자국 아티스트' 옵션을 활용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교단의 성물을 사용하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 이쪽의 사업적 스폰서(?)가 된 교단의 홍보를 위한 서비스였다.

그 사이, 시간이 쭉쭉 지났다. 하루, 이틀, 나흘, 열흘, 그리고 보름에 이어 한 달.

마침내 시성식이 거행될 아침, 행사가 준비 중인 황도의 프론테라 대광장에 거구의 어떤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인가. 리한 군의관을 뜻을 받들어 거사를 치를 곳이."

과거의 몰락한 반란자, 쟈빌론이 인파 속에서 위험한 눈빛을 번득이며 시성식 단상을 올려다보았다.

272화. 잘못된 만남 (2)

"카이엔 경? 이곳이 오늘 자네가 위치할 자리일세."

시성식이 거행될 프론테라 대광장.

그곳을 둘러보던 데미안 카이엔은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문득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별궁의 보안 책임자이자, 별궁 근위대의 지휘관 프란델 경이었다. 그런데 프란델 경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자네, 괜찮은가?"

"...."

혹시 프란델 경은 나를 걱정해주는 걸까.

어째서?

내가 아파 보이나?

사실 어젯밤 무렵부터 열이 제법 나고 있기는 한데. 그게 벌써 티가 나는 걸까.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나 보다.

"미안하군. 자네를 이런 취급을 하게 되어서."

프런델 경이 진심으로 미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알고 있네. 자네의 경지가 내 상상 이상으로 높다는 걸. 실력으로만 따지자면 오늘 거행될 시성식 행사 내내 전하의 가장 가까운 곳을 자네가 지키는 게 합당하다는 것도. 하지만 높은 분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듯해서 말이야."

"제 출신 때문인가 보군요."

"으음, 대강은."

프란델 경이 혀를 찼다.

사실이었다.

오늘의 시성식은 매우 중요한 행사였다. 당연했다. 신성교단에서도 백 년에 한두 명 추대할까 말까 하는 존재가 성인이니까. 그런데 황태자가 그 성인이 되게 생겼으니까. 오늘, 이 시성식 행사를 통해서 말이다.

"그렇게 큰 행사이니만큼, 황실의 궁내부와 신성교단이 협의를 거쳐서 모든 사안을 결정했네. 이곳 프론테라 대광장으로 장소를 정한 것도, 전하와 주요 인사들을 호위할 경비 계획을 세우는 것도 모두 말일세."

"압니다. 그처럼 높고 존귀한 분들이 저를 어떻게 여길지도 말입니다."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프란델 경의 결정이 아님을 잘 아니까요."

"하지만 말이야. 아, 이건 좀 아닌데, 진짜로. 자네 같은 실력 있는 호위가 오늘 같은 날에 전하의 곁에 머무르지 못하고 광장 외곽 모퉁이에나 서 있어야 한다니. 쯧."

프란델 경은 진심으로 혀를 찼다.

자신이 상부로부터 받은 보안 계획서. 그 서류에는 오늘 시성식장에 배치될 보안 인력의 모든 위치가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데미안의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그 자리가 황태자의 곁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냥 곁이 아닌 정도가 아니야. 여긴 아예 대광장의 가장자리니까. 이래서야 원, 전하의 얼굴이나 제대로 보일까.'

대광장 둘레의 가장자리. 하급 근위병사와 동일한 취급이었다. 이유야 간단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데미안의 신분 때문일 것이다. 작위나 가문은커녕 혈통도, 출신도 알 수 없는 지하 검투장 검투사였으니까.

"만약에 말일세. 오늘의 이 배치에 불만이 있다면... 으음, 내가 상부에 다시 이야기를 좀 해보겠네. 전하의 바로 곁은 아닐지라도 조금은 가까운 곳에 배치될 수 있도록 말이야. 어떻겠는가?"

그래야 한다.

이런 인재를 광장 둘레에 병풍처럼 세우는 것은 정말로 국가적 손실이다. 오늘 가장 중요한 것은 황태자의 보호니까. 프란델 경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과거 한때 데미안을 몰래 시기했던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다.

"...."

생각해보면, 당시의 자신도 지금의 높은 분들과 똑같이 데미안을 얕잡아 보았더랬다.

처음 황태자가 데미안과 검투사들을 별궁으로 들였을 때는 얼마나 기함을 하였던지. 심지어 출신조차 불분명한 이들로 황태자만의 특수 호위대, 특근대가 꾸려졌을 때는 얼마나 경악하였던지.

믿을 수가 없노라 여겼다. 한편으로는 시기했다. 특히 데미안이 가장 눈엣가시처럼 느껴졌다. 황태자의 가장 근접 호위는 자신의 자리여야 한다고. 별궁 근위대의 지휘관인 자신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 자리를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놈에게 빼앗기니 억울했다. 가뜩이나 소드 익스퍼트 상급자의 고질병인 소드마스터 증후군 때문에 예민한데, 스트레스까지 쌓이니 잠도 거의 자질 못하였다.

하지만 크라노스에서였던가.

붕괴된 협곡에서 황태자를 상처 하나 없이 보호하여 부축하고 나오던 데미안의 모습을 보며... 시기심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현실을 절감한 까닭이었다.

'이 친구가 나보다 백 배, 천 배는 나아.'

전투 후의 조사 과정에서 직접 문제의 계곡을 답사했던 프란델 경이었다. 당시에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끔찍한 폭발과 열기로 절벽이 녹아내린 흔적들. 거기에 거대한 짐승이 통째로 베어문 듯이 소멸된 비탈과 암석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형태, 그 이상의 붕괴와 파괴의 현장이었다.

그걸 보니 소름이 돋았다.

만약 이러한 붕괴가 일어나는 장소에, 자신이 데미안을 대신하여 황태자의 곁에 있었다면, 그랬다면... 자신은 데미안만큼 황태자를 잘 지켜낼 수 있었을까. 상처 하나 없이. 무사하게.

"...."

아니.

절대로.

세상에는 노력을 해도 닿지 못하는 곳이 있다. 제아무리 애를 써도 도달하지 못하는 지점이 있다. 프란델 경은 크라노스의 붕괴한 협곡에서 그걸 느껴 버렸다. 그러고 나니 오히려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데미안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어떤가. 자네가 원한다면 내가 상부에 한 번쯤은 말을 해볼 수 있을 듯한데."

그는 순수한 마음으로 데미안이 더 좋은 대우를 받기를 바랐다. 그걸 위해서라면 추후의 문책을 감수하고서라도 목소리를 내어야겠다는 생각 또한 품었다.

물론 데미안도 그런 프란델 경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으음, 정말인가?"

"예. 저 때문에 빚을 지워드리는 것은 싫으니까요. 대신-"

"대신?"

"프란델 경께서 오늘 전하의 가장 가까운 곳을 지켜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그래서일세. 그건 나보다 자네가...."

"경께서 잘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

"진심입니다."

"...알겠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결국, 프란델 경은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생각해보니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호들갑을 떨은 건가 싶었다. 무려 제국 황실과 신성교단이 함께 추진하는 시성식이었다. 그런데 설마 이런 장엄한 장소에서 난동을 부릴 이가 있을까.

'하긴. 나 말고도 황실의 소드마스터 두 분도 모두 폐하와 단상 근처에 머무를 것이라 했지. 거기에 교단의 최고위급 성기사도 한 사람이 나올 거라고도 했고.'

행사장 하나에 소드마스터 둘과 최고위 성기사 하나. 이 정도면 이미 대륙 최고 수준의 호위다. 아마 인간의 세상에선 가장 안전한 장소가 아닐까.

"그럼 오늘도 수고해 주게나. 행사가 무사히 끝나면 저녁에 따로 보도록 하지."

"어째서입니까?"

"자네와 특근대 모두 말일세. 내가 술이라도 한 잔 살까 해서."

"다들 말술이라 한 잔 가지고는 한참 부족할 텐데 말입니다."

"그럼 더 사면 되고."

"위로주인가요."

"뭐, 그런 셈인가."

프란델 경이 쓴웃음을 머금으며 다른 근위대원들에게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보던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나직한 숨을 내뱉었다.

"후우...."

지금 내뱉는 숨마저 뜨겁다는 걸 다행히 들키지 않았다.

실은 어젯밤부터였다. 갑자기 오한이 나며 온몸에서 열이 끓기 시작했다. 단순한 독감일까. 알 수 없었다. 다만 걱정이 되는 부분은 있었다.

'...마계왕.'

문득, 전에 황태자가 신신당부했던 말이 생각났다. 자신의 내면에 도사린 마계왕. 놈이 육신을 빼앗으려 불치병을 일으킬 것이라고. 그렇게 해서라도 이쪽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고, 그걸 통해 강제로 각성을 발동시키리라고.

그러니,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바로 말하라고... 당부했는데.

"...."

그런데 오늘은 다들 너무 바빠 보인다.

역사상 처음으로 황태자가 시성될 날이니까. 다들 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다. 심지어 황태자마저 그렇다. 황태자는 새벽부터 황궁으로 불려갔다. 그곳에서 황제와 함께 시성식 준비를 하고 있겠지. 덕분에 오늘은 아예 얼굴조차 보질 못하였다.

'뭐, 그래도.'

반나절 정도만 참으면 되겠지. 그저 감기인 거겠지, 이 정도면. 그러니까 잠깐만 참자. 시성식이 다 끝나면 황태자에게 진료를 받자.

데미안은 목덜미에 돋아나는 오한과 식은땀을 애써 무시하며 배정받은 자리에 섰다. 그리고 오늘 자신이 맡은 광장 외곽 감시의 임무에 충실하자고 스스로를 향해 다짐했다.

"후우."

오늘 잘하자.

실수하지 말자.

라키엘은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정면에 걸린 거울. 그 속에 비친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을 마주보았다.

"흐음."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전보다 제법 건강해진 모습이구나.

아직 마른 체형인 건 여전했다. 하지만 전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혈색도 좋아졌다. 예전이 당장 육수를 뽑아도 될 병약 멸치 같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그럭저럭 사람처럼 봐줄 정도는 된 듯했다.

'이 정도면 딱 건강한 슬림 체형이지, 뭐. 안 그런가.'

그는 몸을 휘휘 돌리며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러다가 문득, 거울 속의 자신과 시선이 마주쳤다.

"...."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제국의 병약한 황태자. 원래대로였다면 진즉 병으로 죽어야 했을 무력한 청년. 진짜 네 영혼은 어떻게 된 걸까. 그리고 이한. 서울에 남겨져 있을 내 진짜 몸은 어떻게 되어 있는 걸까.

그때 난 양화대교에서 죽은 것인가.

아니면....

'모르겠다.'

아무리 짐작해도 알아낼 수가 없는 답이었다. 라키엘은 잠깐 떠오른 복잡한 상념을 훌훌 털어내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의 마주한 일에 집중하였다.

'실수하지 말자. 시성식장에서 버벅거리지 말고 시키는 대로만 하자. 그리고... 이번 일로 별궁 한의원 로비에 내걸 새 광고 내용이나 떠올려 봐야지.'

무려 신성교단 오피셜(?) 성인으로 시성되게 생겼다. 당연히 한의원 광고로 써먹어야 한다. 아예 사골육수에 단물까지 다 빠지도록 써먹어야지. 별궁 한의원을 더 키워야지. 그러면 보너스 수명도 더 쉽게 많이 얻어낼 수 있을 거니까.

'그래야 데미안 녀석도 더 잘 보살필 여유가 생길 거고.'

그러고 보면 크라노스에서 돌아온 지도 벌써 제법 되었다. 마계왕도 그동안 계속 잠잠했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까.

'아니. 절대로.'

여전히 기회를 노리며 도사리고 있을 테지. 언제든 데미안에게 불치병을 일으킬 수 있다. 하니 내가 여유를 갖고 있어야 한다. 보너스 수명을 많이 지니고 있어야 한다.

마계왕 각성을 저지하기 위한 데미안의 치료에 전념하는 동안 보너스 수명이 수급되지 않아도, 내 수명이 깎여도 버텨낼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예를 들자면 전격적인 퇴사를 감행해서 반 년쯤 월급이 들어오지 않아도 버틸 수 있을 만큼 통장을 빵빵하게 채워두듯이 말이야.'

그래서였다.

라키엘은 내내 별궁 한의원의 새 홍보문구를 궁리했다. 그동안 주위의 시종과 시녀들이 내내 분주했다. 이쪽의 옷을 갈아입히고, 머리칼과 손톱을 나노 단위로 다듬을 기세로 손질해 주었다.

그리고 마차에 올랐다. 황궁을 출발했다. 다각다각, 행사를 앞두고 뛰는 심장과 같은 리듬으로 울리는 발굽 소리의 끝자락에서 광장에 도착했다. 이미 자리를 가득 채운 인파. 붉은 카펫. 드높은 단상.

단상 위까지 어떻게 걸어 올랐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두근두근, 쿵쿵 뛰는 심장박동 속에서 어어 하다 보니 안내를 따라 단상 위에 올라서 있었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

이쪽을 향해 예를 표하는 새하얀 법복의 교황. 건너편으로는 황제도 보였다. 수많은 황족과 고위 귀족, 성직자들의 도열한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모두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황제는 아예 감격해서 울 기세였다. 겉으로는 여전히 근엄한 표정이지만, 눈꼬리가 연신 파르르 떨리는 걸로 보아 확실했다.

그만큼 이쪽의 가슴도 떨렸다.

살면서 이런 행사의 주인공이 되어 만인의 환호와 축하를 받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예를 들자면, 심지어는 한때 대립했던 앙부아즈의 반란자 쟈빌론마저 행사장 귀빈석 가장 앞줄에 자리를 잡고서 우아하게 박수를 보내 주는 이런 날이 올 줄은 말이ㄷ....

'어?'

찬물이 확.

라키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눈알을 이태리 타월로 벅벅 닦아내는 심정으로 방금 스치듯 보았던 쪽을 다시금 확인했다.

덕분에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귀빈석 제일 앞줄. 그중에서도 중앙. 그곳에 너무나 익숙한, 그런데 여기선 절대로 마주할 일이 없을 거라 여겼던 얼굴이 있었다.

앙부아즈의 냉혹한 반란자.

거구의 소드마스터.

끝내 몰락하여 마법 실험실로 끌려갔던 사내.

'...쟈빌론?'

그가 너무나 말쑥하고도 깔끔한 정복 차림으로, 더없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 우아한 격식을 선보이며, 자리에 완벽하게 스며들어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환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댁이 왜... 여기서 나와?'

번쩍, 정신이 들었다.

273화. 잘못된 만남 (3)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앙부아즈의 반란자.

몰락한 거구의 야심가.

쟈빌론은 고개를 들며 문득 생각했다.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성인으로 추성되는 시성식장. 자신은 어찌하여 이런 장소의 귀빈으로서 제일 앞열에 앉아 있게 된 걸까.

답은 어렵지 않았다.

'리한 군의관... 당신 때문이지.'

얼마 전 황도 인근의 어느 이름 없는 협곡에서였던가. 마침내 리한 군의관과 해후했다. 더없이 기뻤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리한 군의관을 드디어 만났으니까. 자신만의 주치의로 곁에 둘 수 있게 되었으니까. 다시 두통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하여 곧바로 치료부터 명했다. 리한 군의관도 선뜻 응해 주었다. 오랜만에 받던 머리 쓰다듬. 내 손은 약손 구성진 노랫가락.

그런데 이상했다.

두통이 사라지지가 않았다. 분명 리한 군의관의 쓰다듬을 받으면 두통이 없어져야 하는 법인데, 도통 그렇지가 못했다. 어째서 그런 걸까.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가. 혹은, 그 사이에 리한 군의관의 실력이 녹슬어 버린 걸까.

의아함과 의구심을 담아 엄격하게 물었다. 왜 이런 거냐고. 어째서 치료 효과가 없어진 거냐고.

그랬더니 리한 군의관이 진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하였던가.

- 이게 전부... 마젠타노의 황태자 때문입니다!

...라고 말이다.

처음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한데 리한 군의관이 거의 울 것 같은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나쁜 짓을 저질렀단다. 그 나쁜 짓으로 자신의 치료 능력을 없애 버렸단다. 그러니 황태자를 잡아와야 한단다.

어째서?

- 그래야 제 능력이 돌아올 테니까 말입니다.

...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리한 군의관이 간절한 부탁을 했다. 마젠타노의 황태자를 납치해 달라고. 그러면 자신의 능력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마침 조만간 황태자가 성인으로 시성되는 행사가 열릴 테니, 그곳에서 황태자를 납치하면 될 것이라고.

그래서 자신은?

부탁을 듣자마자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도 아닌, 리한 군의관의 부탁이었다. 게다가 황태자를 납치해야 리한 군의관이 능력을 되찾을 수 있다니, 더더욱 반드시 들어 주어야 할 부탁이 아니겠는가.

하여 이곳에 왔다.

황태자를 납치하기 위하여.

"후우...."

쟈빌론은 다시금 치미는 끔찍한 두통을 정신력으로 버텨내며, 황태자를 성공적으로 납치하기 위한 타이밍을 재기 시작하였다.

'저놈은 어떻게... 저럴 수 있던 걸까.'

혈염의 흑마법사.

인간이면서 뱀파이어 권속을 만들고, 부리는 자.

아난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먼 곳으로 눈길을 던졌다. 시성식 행사가 열리는 대광장 외곽에 겨우 자리를 잡은 자신과 달리, 뻔뻔하게도 성공적으로 귀빈석 제일 앞줄까지 간 쟈빌론의 뒤통수를 향해서.

새삼스러운 감탄이 다시 나왔다.

'저놈, 저렇듯 태연하게 저기까지 침투에 성공할 줄이야.'

얼마 전에 간신히 성공한 정신지배, 그 마법으로 부리게 된 쟈빌론이었다. 황도 인근의 어느 이름 없는 협곡에서였던가. 거의 죽기 직전까지 내몰린 상태에서 가까스로 놈의 정신을 장악했다. 자신을 리한 군의관으로 속인 덕분이었다.

그 후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놈이 자신에게 가장 바라는 일이 두통의 치료라는 것쯤은 눈치로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그 심리를 이용했다. 황태자를 납치해 달라고 부추겼다. 성공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쟈빌론이 이 정도의 능력을 보이리라곤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다.

"...."

그저 시성식장 언저리에서 서성거릴 줄 알았는데. 그 압도적인 무력으로 시성식장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돌파를 감행할 줄 알았는데. 자신의 아지트에 쳐들어왔던 때처럼. 다짜고짜 달려들던 때처럼 말이다.

그런데 쟈빌론이 실제로 행한 일은 전혀 달랐다.

압도적인 무력?

그것만 내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발톱을 숨기는 쪽을 택했다.

시성식장에서 황태자를 납치해 달라는 부탁을 수락하자마자, 쟈빌론은 대뜸 돈부터 달라고 했다. 무슨 돈? 설마 강탈? 이유를 들어보니 전혀 아니었다.

- 리한 군의관? 납치를 실행할 장소가 시성식장이라 하지 않았소? 그러니 무력으로 뚫는 것은 불가능하오. 제국 황실이 보유한 다수의 소드마스터와 성기사가 빈틈없이 배치될 거요. 그러니 조금이라도 성공 확률을 높이려면, 가장 가까운 곳에서 기습적으로 황태자를 덮쳐야 할 것이오.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어지는 말들은 더욱 가관이었다.

- 그걸 위하여 위장을 해야 하오. 하니 돈을 주시오. 되도록 많은 돈을. 가장 비싼 옷을 살 수 있는 돈을 말이오.

...하여 주었다.

그리고 관찰했다.

자신에게서 나름 거금의 용돈(?)을 받아간 쟈빌론이 그 돈으로 비싼 옷을 사서 무슨 짓을 할 것인가. 그쯤 되니 궁금해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쟈빌론은 폭풍 쇼핑(?)을 시작했다.

공중목욕탕에서 깨끗이 씻고, 이발소에서 헤어를 정돈하고, 그 상태에서 황도 명품가 거리로 직행했다. 가장 비싼 옷들? 단순히 비싼 옷만 선택하지 않았다.

- 흠, 이 디자이너의 이름은... 생각이 나는군. 이런 스타일은 나와 맞지 않았으니 넘어가고, 다음 숍으로.

...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신중하게 명품숍을 골랐다. 은근히 날카로운 안목과 센스를 매번 드러내면서 말이다.

그걸 보며 비로소 떠올릴 수 있었다.

'저놈, 분명 앙부아즈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방계 왕족이라고 했지.'

그러했다.

알고 보면 쟈빌론도 방계일지언정 태생부터 왕족 출신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부유하게 자라나 수많은 명품과 고가품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누리고 접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몸에 본능 수준으로 각인된 극도의 예법과 매너 또한 마찬가지였다. 들어가기조차 부담스러운 명품숍에서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매번 자신에게 딱 맞는 스타일의 옷과 물품을 선택했다.

그렇듯 완벽한 준비를 갖춘 상태에서 시성식장에 왔다. 귀빈석으로 안내를 받는 것도 생각보다 손쉽게 해냈다. 누가 봐도 완벽한 차림과 격식이 배어나는 몸짓. 위장신분으로 지방 귀족가의 이름을 대었더니 조금의 의심도 받지 않았다.

덕분에 침투 성공.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가까이, 아예 귀빈석 가장 앞줄에 태연하게 앉아 있게 된 쟈빌론의 저 뒤통수란.

"...."

덕분에 아난샤는 작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설마 진짜로 황태자를 납치하는 데에 성공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닐 거야.'

성공해서는 안 된다.

자신은 그것까지 바라지는 않는다.

'넌 그저 시성식장에서 난동을 부려 주기만 하면 돼. 황태자를 붙잡고 인질극? 그 정도까지는 괜찮아. 하지만 황태자를 사로잡은 상태에서 이곳을 벗어나 버리면... 오히려 곤란해지지. 그럼 내가 나설 기회가 없어지니까.'

쟈빌론을 향한 아난샤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저 앙부아즈의 반란자는 이곳에서 죽어야 한다. 누구의 손에? 자신의 손에. 황태자를 위협하고, 시성식장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모두를 곤란하게 만든 상황에서... 극적으로 나설 자신의 손에 죽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에게 사회적 공로가 생기니까. 그 공로를 통해 황제에게 인정을 받고, 자신의 흑마법 지파를 사회적으로 공인된 법적 테두리 안에 넣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면 진짜 거사가 시작되는 거지.'

다른 흑마법 지파들을 차례로 끌어들일 것이다. 제국의 내부에서부터 사회를 좀먹어 들어갈 것이다. 안쪽에서부터 거인을 무너뜨리는 셈이다.

'그러니 이제 슬슬 움직여. 뜸 들이지 말고.'

차갑게 식은 아난샤의 눈길이 쟈빌론의 뒷모습을 향해 꽂혔다.

그 순간.

쟈빌론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스륵.

귀빈석 제일 앞줄에 앉아 있던 쟈빌론. 미동조차 않고서 기회를 노리던 포식자. 그의 첫 움직임은 지극히 미미하고 사소하였다.

꼿꼿하게 앉은 자세를 슬쩍 고치듯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허리를 슬쩍 꿈틀거렸다. 상체를 살짝 앞으로 숙이고, 오른 무릎을 굽혀 다리를 조금 당겼다. 오른 뒤꿈치를 지면에서 띄우며 엄지에 체중을 실었다.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30미터 남짓.

귀빈석 앞줄에서 황태자가 서 있는 단상까지 한 번에 도약하기에 완벽한 준비였다.

투확-!

땅을 박찼다.

동시에 품에 쥐고 있던 작은 스크롤을 찢었다. 리한 군의관이 황태자를 납치할 결정적인 순간에 쓰라고 준 마법 스크롤이었다.

부훅!

스크롤을 찢자마자, 그 속에 담긴 1회성 마법이 온몸을 감쌌다. 순간 그의 움직임 속도가 2배로 빨라졌다. 도약과 돌진, 착지까지 모든 동작에 예외가 없었다.

...스팟!

30미터 가량의 멀지 않은 거리. 일반적인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뛰어넘은 실력. 거기에 흑마법사가 작정하고 준비한 2배속 마법까지.

그 세 가지 요소가 폭발적인 시너지를 발휘하였다. 일반적인 모든 경우의 수를 감안하여 짜둔 제국 황실의 보안 계획도, 촘촘하게 배치된 근위대의 방비도, 모두가 순식간에 돌파되었다.

그것은 단상 주위에 배치되었던 2인의 소드마스터 또한 마찬가지였다.

"...!"

황태자와 가장 가까운 귀빈석.

30미터의 거리.

그 정도라면 어떤 형태의 저격이라도 능히 막아낼 수 있을 2인의 소드마스터였다. 그래서 애초부터 귀빈석과 단상을 거리를 30미터로 잡아두기도 하였던 터였다.

그러나 쟈빌론의 돌격은 그들이 생각하고 대비했던 어떤 형태의 저격보다도 빨랐다. 쟈빌론은 이미 단상에 도착했다. 착지하자마자 손부터 뻗었다. 그곳에 눈을 부릅뜬 황태자, 라키엘이 있었다.

터억!

쟈빌론의 커다란 손아귀가 서슴없이 라키엘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가히 독수리가 사냥감을 낚아채거나, 방탄조끼단 콘서트 티켓이 0.1초 만에 팔려나가는 것과 능히 견줄 만한 속도였다.

제국 황실의 소드마스터 2인은 그 후에야 가까스로 반응을 하였다.

"...흐읍!"

2인 중에서 먼저 반응한 이는, 황실의 근위대장 로베르토 경이었다. 그는 위험을 감지하자마자 검을 뽑았다. 롱소드 검신은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화염 같은 격렬한 오러를 토해냈다.

그러나 그런 로베르토 경의 대응 또한, 한발 늦은 것이었다.

...스핏!

황태자를 낚아챈 쟈빌론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단순해 보이지만,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반 발짝 초월한 자만이 보일 수 있는 대응속도와 체중 이동이었다. 덕분에 쟈빌론의 한쪽 어깨를 노렸던 로베르토 경의 일격이 간발의 차이로 허공만 베고 말았다.

시성식장의 모두가 눈을 부릅뜬 것은, 그때쯤에 겨우 일어난 일이었다.

"...습격이다!"

누군가가 뒤늦게 외쳤다.

경악에 담긴 눈길을 던졌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감각을 느꼈다. 그러나 이미 황태자는 정체 모를 흉수의 손에 붙잡혀 버린 상황이었다. 뒤늦은 오싹함과 위기감이 시성식장에 자리한 모든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딱 한 사람.

쟈빌론의 손에 붙잡힌 황태자 라키엘만 제외하고서.

스륵....

모두가 경악하고 놀라는 순간, 오직 유일하게 당황하지 않은 라키엘이 손을 움직였다. 사실 그는 이미 이런 상황에 대비(?)하던 터였다.

어떻게?

납치되기 직전, 쟈빌론과 눈이 마주쳤던 덕분이었다. 그의 정체를 누구보다도 일찍 깨달은 덕분이었다.

그래서였다.

주위를 향해 소리쳐 위험을 알릴 틈조차 없이 쟈빌론이 달려들었지만, 대응할 수조차 없이 목덜미를 붙잡히고 말았지만, 그 짧은 순간 사이에 라키엘은 제법 많은 것을 준비할 수 있었다.

예전, 앙부아즈에서 쟈빌론과 대적했던 기억. 그때를 떠올렸다. 쟈빌론이 사용하는 오러소드의 근원이던 고통. 그걸 없애 버리기 위하여 비장의 무기를....

스르륵.

손을 뻗었다. 쟈빌론의 머리를 챱, 하고 짚었다.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내 손은 약손~ 내 손은 약손~ 에헤이야~"

긴박한 상황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구성진 노랫가락이 흘러나오는 순간.

"...!"

쟈빌론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흡떠졌다. 동시에 그는 온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이 손맛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