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약점을 찾아라 (1)
어째서 눈물이 나려고 하는 걸까.
어째서 그립고 벅찬 기분이 드는 걸까.
그래.
이것은 마치 고향에 돌아온 느낌. 혹은 애타게 바라왔던 오아시스에 마침내 도달한 감격, 혹은 환희.
'이 손맛이야.'
쟈빌론은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대신 안구에 힘을 빡 주어 일렁이는 눈길을 들었다. 그러자 보였다. 자신에게 사로잡힌 황태자. 이쪽으로 손길을 뻗고 있는 야윈 안색의 은발 청년이.
"...."
순간 기억의 혼란이 그를 엄습했다.
황태자?
나쁜놈이다.
어째서?
간단하다.
'저 모습, 기억나.'
언제였는지는 모르겠다. 불타는 평원. 갈대밭. 그 속에서 쫓고 쫓기던 기억의 파편들. 그 속에서 맞섰던 순간들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이내 엄청나게 거대해진 황태자가 자신을 붙잡고 북어포 두드리듯이 땅바닥에 이리저리 내동댕이를....
"으윽."
다시금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그러한 고통도 잠시였다.
"내 손은 약손~ 내 손은 약소온~ 에헤이야↘↗"
사아악...!
괴상한 노랫가락과 함께, 잠깐 치밀던 두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가히 전설로만 전해지는 생명수만큼이나 즉각적인 효능(?)이었다.
그 상큼한 감각이 쟈빌론에게 또다시 혼란을 안겨주었다.
'어째서지?'
대체 어째서, 황태자가 리한 군의관의 손맛을 똑같이 내는 걸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진짜 리한 군의관은 따로 있는데. 자신이 얼마 전에 찾아냈는데. 마침내 만났는데. 그런데 그 리한 군의관은....
'날 치료하지 못했어.'
그러했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는 했다. 한데 그 손길이 어쩐지 어설펐다. 노랫가락도 전과 달랐다. 효과는 말할 것도 없이 전무했다. 아무리 머리를 쓰다듬어 주어도 두통이 전혀 가시지가 않았다.
하여 의심스러웠다. 혹시 리한 군의관이 아닌가? 혹은 너무 오랜만이라 기술이 퇴보했나? 그럼 안 되는데. 쓸모가 없어지는 건데.
의구심이 들어서 추궁했더랬다. 한데 리한 군의관이 뭐라고 대답했더라. 아, 그래. 제국의 나쁜 황태자가 치료 능력을 빼앗아갔다고 했지. 그래서 황태자를 납치해야 한다고도 했지. 그런 이유로 내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이고.
"...."
쟈빌론은 묘한 눈길로 황태자를 쳐다보았다. 순간 고민이 들었다. 자신의 목적은 두통의 치료니까. 그러니까 능력을 잃은 리한 군의관은 버리고 황태자로 갈아탈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리한 군의관을 버릴 수는 없어!'
자신은 그 정도로 신의가 없는 인물은 아니다. 비록 자신이 좀 막 나가는 경향이 있다는 건 스스로도 알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내 사람들마저 헌신짝처럼 버리는 건 싫다. 그러니 버리지 않는다. 리한 군의관은 나의 것이니까.
"허튼수작은 그만두시오, 제국의 황태자."
꽈악!
그는 순간적인 유혹(?)을 이겨냈다. 황태자의 목덜미를 더욱 단호하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황태자가 즉각적으로 대꾸했다.
"꾸웳...!"
"...."
"걻, 긃, 걁, 굵!"
"...."
아, 너무 세게 쥐었나.
쟈빌론은 자신의 실수를 겸허히 인정하며 손아귀의 힘을 살짝 풀었다. 덕분에 샛노란색, 시뻘건색을 넘어서 파란색 보라색으로 버라이어티한 무지개빛 총천연색을 띠어가던 라키엘의 안색이 비로소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컥! 쿠룱! 쿨럭! 켁!"
"이 정도로 엄살 피우지 마시오. 제국의 황태자라면 말이오."
"쿨룩! 컥, 허억, 헉...! 아이고, 후욱! 훅!"
"...."
"이봐요, 쟈빌론 씨? 나 못 알아보겠어?"
"뭐?"
"나잖아, 나. 리한 군의관."
"...."
"우리, 전에 좀 안 좋은 마무리를 겪긴 했지만 그래도 이럴 사이까진 아니지 않아?"
"...."
어디서 수작질을.
쟈빌론의 손이 단호하게 움직였다.
"리한 군의관은 따로 있소. 시끄러우니 입 다무시오."
"헙?"
터업!
"읍읍!"
쟈빌론의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입을 통째로 틀어막았다. 라키엘이 힘껏 버둥거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 이게 무슨.'
너무나 황당했다.
자신은 신성교단의 성인으로 시성되고 있었는데. 시성식장에서 만인의 우러름과 박수를 받고 있었는데. 그런데 귀빈석으로 문득 눈길을 던졌다가 쟈빌론을 발견했다. 그것만도 황당한데, 쟈빌론이 대뜸 단상으로 돌격해 와서 자신을 사로잡아 버렸다.
덕분에 때아닌 인질극이 벌어지게 되었음은 물론이었다.
"광장을 폐쇄하라!"
"모두 움직이지 마시오!"
시성식장 외곽을 온통 뒤흔드는 근위대 병사들의 외침. 혼란에 빠져 도망치려다 억지로 앉혀지는 사람들. 그리고 단상에 올라 대치하고 있는 네 명의 날카로운 눈길까지.
'키에르사 경과 아이젤 경, 그리고 프란델 경에다가... 데미안까지.'
라키엘은 빠르게 눈동자를 굴리며 상황을 파악했다.
자신은 쟈빌론에게 붙잡혀 버렸다.
즉, 인질이 되었다.
그런 이쪽의 쟈빌론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대치하고 있는 이들은 총 넷이었다. 제국 황실이 보유한 소드마스터, 그중의 하나인 키에르사 경. 그리고 신성교단에서 시성식 거행을 위해 파견된 성기사 아이젤 경.
'나머지 둘은... 우리 별궁 근위대 지휘관인 프란델 경과... 데미안.'
그럼 남은 소드마스터는?
슬쩍 눈길을 돌려보니, 로베르토 경이 황제를 호위하며 거리를 벌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쪽을 애타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황제와도 눈길이 마주쳤다.
저런 눈빛, 본 적이 있는데. 그래. 나 어릴 때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놀다가 물에 빠졌을 때. 그때 달려오던 아버지가 딱 저런 눈빛이셨는데.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주위의 그 누구도 선뜻 이쪽을 건져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파도보다도 무서운 소드마스터가 이쪽을 사로잡아 버린 상황이니까. 인질극을 벌이며 대치하게 되었으니까.
"후우...."
쟈빌론의 차분해진 숨결이 느껴졌다. 놈은 전혀 흥분하고 있지 않았다. 최악이었다. 더욱 최악인 점은, 놈이 맨손으로 오러소드를 생성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손가락 하나마다 하나씩, 다섯 줄기나.
츠즈즈즈...!
...이건 뭐 가위손도 아니고.
그런데 정말로 비슷했다. 쟈빌론이 앞으로 뻗은 오른손. 그 손가락 하나마다 오러소드가 한 줄기씩 1미터 이상이나 생성되어 있었다. 덕분에 손가락의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다섯 자루의 오러소드가 현란하게 공간을 헤집었다.
게다가 그중에 엄지를 통해 생성된 한 자루는 이쪽을 목덜미를 겨누고 있기도 했다.
"다들, 다가오지 마시오. 그 순간 황태자의 목이 몸통과 분리될 터이니."
"...읍읍!"
쟈빌론 씨?
혹시 수전증이 있는 건 아니겠죠? 제발 아니라고 말해줘.
목덜미 앞에서 이글거리는 오러소드가 살랑살랑 움직이니까 쫄려서 미칠 것 같다. 스치기만 해도 정말로 목이 잘릴 테니까.
덕분에 이쪽과 대치한 데미안과 프란델 경, 키에르사 경들을 향해 다급한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쟈빌론을 자극하지 말라고. 자칫 그랬다가 이 미친놈이 손가락 잘못 움직여서 내 목이 쑹컹 날아갈 것 같다고.
'이놈, 전에는 두통을 사라지게 하면 오러소드를 구현하기 어려워했는데.'
그런데 이번에는 달라졌다.
심지어 맨손으로 오러소드를 생성했다!
그 의미는 명확하다.
전보다 훨씬 강해졌다는 것.
"...."
이놈, 반란에 실패한 직후에 앙부아즈 왕가의 마법 실험실로 잡혀갔다고 들었는데. 그런데 그곳에서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이렇게 강해진 걸까. 게다가....
'앙부아즈 왕실은 대체 이놈을 어떻게 관리했길래 여기까지 와서 날뛰고 있는 거냐고.'
라키엘은 진심을 담아 한탄했다.
동시에 한편으로 깨달았다.
오직 자신만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진맥!'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몰라도 과거의 쟈빌론보다 훨씬 강해졌다. 게다가 이쪽이 인질로 잡히게 된 상황이라, 데미안이라 해도 당장 어찌할 수가 없게 됐다. 자칫하다간 이쪽이 다칠 테니까.
그러니 직접 해결해야 한다.
한데 가만 보자니, 쟈빌론의 기색이 뭔가 이상한 구석이 보이긴 했다. 뭐랄까. 말투가 예전과 비슷하긴 한데 어딘가 나사가 빠진 느낌? 살짝 어눌한 느낌?
'분명 뭔가 있어. 날 못 알아보는 것도 그렇고.'
그래서였다.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 은근슬쩍 손을 뻗었다. 아까처럼 내손약손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입이 막혀서 노래를 못 부르니까. 대신 진맥 스킬을 발동하였다.
딩동!
[진맥을 시작합니다.]
[스캔 중.]
[3... 2... 1...]
[진맥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래의 <종합검진표>를 확인해주세요.]
[종합검진표]
[검진 대상 : 쟈빌론 플랑베르 앙부아즈]
[종족 : 인간]
[성별 : 남자]
[연령 : 38세]
[신장 : 193.4 Cm]
[체중 : 87.6 Kg]
[혈액형 : Rh+ AB]
으흠, 나름 고생을 해서 그런가. 전보다 살이 좀 빠지셨구나. 아,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라키엘은 재빨리 아래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종합 소견 : 지극히 강건한 신체입니다. 대사조절 기능, 면역력 등의 모든 항목에서 최적의 상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만, 심각한 수준의 만성 신경성 편두통이 감지됩니다. 또한, 연이은 정신적 충격으로 사고체계의 혼란과 호르몬 불균형 상태가 감지됩니다. 최근 대뇌의 마나와 뉴런 연결 체계에 가해진 인위적인 조작이 감지되며, 이에 따른 심각한 수준의 인지부조화 및 강박증이 포착되었습니다. 장기적이며 체계적인 정서적 치료를 강력히 권장합니다.]
"...."
이 인간,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거야.
확실히 뭔가 있다는 게 느껴졌다. 특히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진 부분이 확 감지되었다. 라키엘은 오장육부를 향해 물었다.
'다들, 쟈빌론의 오장육부와 상담 잘 마쳤겠지?'
대답은 즉시 돌아왔다.
[당신의 오장육부가 쟈빌론의 정신상태에 흥미를 드러냅니다.]
[심장 : 야 이거 너무 뻔한데ㅋㅋㅋㅋㅋㅋㅋ]
[허파 : 허파하하핳ㅎㅎㅎㅎㅎ]
[대장 : 암만 봐도 이 인간, 지금 정신지배 빡쎄게 받고 있지 말입니다?]
[간장 : 그냥 정신지배가 아니라 거의 세뇌 수준인데?]
[위장 : 내 리한 군의관을 리한 군의관이라 부르지 못하고ㅋㅋㅋㅋㅋ]
[콩팥 : 그런데 저런 정신마법은 대체 무슨 원리일까?]
[비장 : 보기 드문 원리?]
[콩팥 : 아하.]
[오장육부 리포트 : 쟈빌론 플랑베르 앙부아즈는 강력한 정신지배 마법에 속박되어 있음. 아마도? 아무튼 확실함. 저희 쇤네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구먼유.]
"...."
정신지배 마법이라.
비로소 알겠다.
쟈빌론 이 인간,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다는 거다. 그럼 조종을 하는 놈은 아마도....
'흑마법사 같은데?'
뱀파이어들을 부리던 흑막.
황도에 뱀파이어 변이증을 퍼뜨린 흉수.
딱 그놈부터 떠올랐다. 당연했다. 쟈빌론씩이나 되는 실력자에게 정신지배 마법을 걸려면 최소 그 정도 수준은 되어야 할 테니까. 그 정도 거물쯤은 되어야 이런 짓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그놈이 최근까지 황도에서 설치기도 했고.
'그러니까, 쟈빌론으로 하여금 날 이용한 인질극을 하게 만들고, 이런 답이 없는 대치상황에서 자신이 짜잔, 하고 나서며 쟈빌론을 제압하고, 그 사회적 공로를 인정받으시겠다?'
딱 보니까 의도가 훤히 보였다.
동시에 다른 것도 보였다.
바로 기억 속에 자리한, 소설 마검황에서 언급이 나온 적이 있는, 정신지배 마법의 사소하지만 중대한 약점이었다.
'...빙고.'
그 약점을 떠올린 순간.
라키엘은 보람차게 빵긋 웃어 버리고 말았다.
275화. 약점을 찾아라 (2)
약점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보이지가 않는다.
데미안 카이엔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황태자를 사로잡고서 대치하고 있는 거구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쟈빌론.'
앙부아즈 내전.
그 혼란의 끄트머리에서 자신에게 제압되었던 반란자. 그 후에 놈은 앙부아즈 왕국군에게 인계되었는데. 마법실험실로 끌려갔다고 들었는데. 한데 어떻게 여기에, 저런 모습으로 나타나 이런 일을 벌이는 걸까.
아니 그보다는, 대체 어찌하여 나는 놈의 행각을 막지 못하였나.
"...."
막기엔 너무나 멀었다.
알아차린 후엔 늦었다.
애초부터 윗분들의 명령 때문에 시성식 행사장의 외곽인 광장 둘레에 배치되었던 자신이었다. 행사의 열기에 흥분한 군중이 광장으로 우르르 밀려 들어오지 못하도록 제지하는 것. 그것이 오늘 자신이 맡은 임무였다.
물론 그럼에도 황태자가 있는 단상 쪽으로 신경을 쓰기는 했다. 하지만 이런 일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예를 들자면, 일반적인 소드마스터를 능가하게 된 미친놈이 단상과 가까운 거리에서 감행한 급습 같은 것들.
하지만 그건 모두 핑계다.
'내가 너무 안일했어.'
윗분들의 명령이라 해도 따르지 말았어야 했다. 고집을 부려서라도 단상과 가까운 곳에 있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쟈빌론을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황태자가 인질이 된 지금 같은 상황도 벌어지지 않았겠지.
'전하.'
그는 초조한 시선으로 황태자와 쟈빌론을 살폈다. 상황은 일촉즉발이었다. 쟈빌론은 황태자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 황태자를 잡지 않은 맨손에서 오러소드를 줄줄이 뽑아내고 있었다. 심지어 다섯 줄기나.
"무슨 저런...."
곁에서 나란히 검을 든 프란델 경이 창백해진 얼굴로 침음성을 내뱉었다. 그동안 데미안은 쟈빌론의 허점을 찾기 위해 모든 감각을 날카롭게 벼려냈다.
'내가 최대한의 속도로 급습을 하면? 가능할까.'
아니.
불가능.
맨손으로 검기를 뽑아내는 경지에 이른 쟈빌론이었다. 전보다 강력해졌다는 뜻이다. 자칫, 자신보다 쟈빌론이 먼저 반응을 하면 황태자의 신변이 위험해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다면 기만법은?
'어떻겠습니까?'
데미안은 옆으로 눈짓을 보냈다. 그의 눈길을 받은 황실의 소드마스터, 키에르사 경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도 좀처럼 쟈빌론의 허점을 찾아내지 못하는 듯했다.
'저격을 기대해야 하나. 아니. 그것도 별로 쉽진 않을 듯한데.'
광장 주위의 건물 옥상마다 배치된 샤프슈터들도 미덥지가 않았다. 아무리 그들이 명사수라고 해도 상황이 너무나 좋지 않았다. 황태자가 방패막이가 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래서였다.
"...."
역혈의 심법을 써야 하는 걸까.
어쩌면 그래야 할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황태자가 더 위험해진다면, 어쩔 수 없이라도....
...라고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데미안은 황태자와 눈길이 마주쳤다. 그리고 발견할 수 있었다. 쟈빌론에게 붙잡힌 채로 빵긋 웃고 있는 황태자의 얼굴을.
'....'
저거, 보통 인질이 짓는 표정인 건가. 아닌데. 내 상식으로는 절대 아닌데. 그런데 전하는 왜 저러고 계신 것일까. 혹시 정신이 나가셨나. 그것도 아닌데. 원래 평소부터 정신이 좀 나가 계신 분이니까.
'어째서입니까?'
눈짓으로 물었다.
황태자도 이쪽의 의아함을 알아본 건지 더욱 대놓고 씨익 웃어 보였다. 심지어 한쪽 눈을 찡긋거리기까지 했다!
"...."
즐기고 계신 건가.
에이, 아니겠지 설마.
그런데 어째서 나는 전하의 저 웃음을 보는 순간, 안심이 되는 걸까.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아직 황태자가 적의 수중에 붙잡혀 있는 상황인데. 한데도 황태자의 미소를 보니까 마음이 놓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어쩐지 그랬다.
이유는 간단했다.
'저런 표정을 짓는 전하께는 언제나 계획이 있었으니까.'
항상 그랬다.
믿을 수 있었다.
지금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슨 심산이신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기다리겠습니다.'
분명 황태자가 뭔가를 파악하고 계획을 세운 것이라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며 자신이 할 일은 하나다. 황태자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에 때를 맞추어 적절하게 호응하는 것.
그때부터였다.
스윽....
데미안은 손에 쥔 검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렸다. 전신의 긴장을 풀었다. 여전히 열은 펄펄 끓고 컨디션은 엉망이었지만,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감각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때를 기다렸다.
덕분에 라키엘의 마음도 든든해졌다.
'좋아.'
다행히 데미안이 이쪽의 뜻을 어느 정도 파악한 듯했다. 마음이 놓였다. 이쪽이 움직이기 전에 주위에서 섣불리 움직이면 망하니까. 방금 자신이 파악한 쟈빌론의 상태를 적절하게 이용할 수 없게 될 테니까.
'이놈, 분명 정신지배를 당하고 있어.'
라키엘은 곁눈질로 쟈빌론의 옆얼굴을 살폈다. 방금 진맥 스킬을 통해 파악한 내용 또한 떠올렸다. 심각한 수준의 인지부조화와 강박증. 그리고 세뇌에 가까운 정신지배를 받는 상태라고 하였던가.
'정신지배 마법이라.'
문득, 소설 마검황의 내용이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소설 속 데미안이 정신지배 마법에 구속된 8인의 광전사와 대결했던 에피소드가 새록새록 기억 속에서 피어났다.
'그 에피소드에서 데미안은 거의 죽을 뻔했지. 8인의 광전사 하나하나가 강력했을뿐더러, 마치 한 사람이 조종하는 것처럼 너무나 유기적으로 공수일체의 압박을 가했거든.'
하지만 결국 데미안이 이겼다.
비결은 간단했다.
위기의 순간에 정신지배 마법의 사소하지만 중대한 약점을 역이용한 덕분이었다.
'그것은 바로... 정신지배 마법의 시전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감각의 공유.'
정신지배 마법은 무적이 아니다.
당연히 대가를 바쳐야 한다.
그것이 '감각의 공유'였다.
'마검황의 내용에 따르자면, 정신지배 마법을 시전할 때마다 시전자와 피지배자 사이에서 한 가지의 감각이 공유되며 묶인다고 했지. 말 그대로 무작위, 랜덤으로 한 가지만.'
때로는 통증일 수도 있다.
혹은 미각이나 후각일 수도 있다.
아마 쟈빌론과 흑마법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엔 뭘까.'
자세히 파악해보자.
'진맥!'
다시금 진맥 스킬을 시전했다.
딩동!
아까와 다름없는 종합검진표와 종합소견이 떠올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신경쓰지 않았다.
'오장육부, 이번엔 확실하게 더 자세히 상담을 했겠지?'
잠시 기다렸다.
역시나 상담 결과가 떠올랐다.
딩동!
[당신의 오장육부가 쟈빌론의 오장육부와 다시금 실시한 상담 결과를 보고합니다.]
[심장 : 일단 공유된 감각이 심장박동은 아님ㅋ]
[허파 : 허파도 아님... 허픕ㅋ]
[대장 : 장의 연동운동이나 괄약근 움직임도 공유되진 않았지 말입니다?]
[간장 : 아깝다!]
[위장 : 응? 왜?]
[콩팥 : 생각해봐. 괄약근이 공유된 거였으면 그냥 게임 한 큐에 터지는 거 아니겠음?ㅋㅋ]
[비장 : 그게 말이 됨? 아무리 그래도 한쪽이 힘 꽉 주고 참으면서 틀어막으면?]
[콩팥 : 그래도 상관없음. 무거운 덩어리로 뚫으면 됨ㅋ]
[비장 : 어떻게?]
[콩팥 : 크하핫 ㄸ...아니, 천근추!]
[비장 : 천 근? 요즘은 그런 단위 안 쓰는데?]
[콩팥 : 크하핫 1322.77357 lb추!]
[무단으로 야드-파운드법을 사용하여 사회질서에 크나큰 혼란을 불러온 콩팥이 근신형에 처해졌습니다.]
"...."
그만해 미친놈들아.
상담을 하고 오랬더니 이게 무슨.
라키엘은 한탄했다. 한편으로는 오장육부의 상담으로는 정신지배로 공유된 감각의 정체까지는 밝혀낼 수가 없음을 절감할 수 있었다.
그러니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내가 직접 알아내야지.'
결심한 라키엘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우렁찬 비명을 느닷없이 꽥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사람 살려어!"
혼신의 힘을 다해서 질렀다. 아예 고막 뻥 터지라고, 달팽이관 무너지라고, 일부러 쟈빌론의 귀에 입을 바싹 붙이고서 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덕분에 천하의 쟈빌론조차 기겁하고 말았다.
"...그읏? 무슨 짓이오? 조용히 못 하겠소?"
"싫어!"
"...."
"인질인데 비명도 못 지르나! 끄아아아... 읍읍!"
"...."
무슨 이런 미친놈이.
미친 쟈빌론이 황태자를 미친놈 쳐다보듯 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동안 라키엘은 전혀 개의치 않고 광장을 재빠르게 훑어보았다.
혹시 귀를 감싸 쥐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보였다.
'오호?'
라키엘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쪽을 살펴보았다.
광장 외곽에 가까운 자리. 귀빈석 말고 일반석. 그곳에 운집한 사람들 가운데 고개를 숙이고서 왼쪽 귀를 감싸 쥔 사람이 보였다. 나이가 많지는 않은 남자 같았다.
"...."
영락없이, 아무런 대비도 없던 상태에서 귓가에 굉음을 접수(?)한 사람 같은 괴로운 몸짓이었다. 혹시 우연찮게도 방금 저 사람 주위에서 소리를 지른 이가 있었을까. 아니. 없는 거 같은데. 설마 공유된 감각이... 청각인가.
그럼 한 번 더 확인.
'흐읍!'
순간적으로 아스라한 심법을 사용했다. 체내의 마나를 증폭시켰다. 그 힘을 목과 턱 근육에 집중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입을 틀어막은 쟈빌론의 손바닥을 살짝 밀어내고 틈을 만들기에는 충분한 힘이었다.
그 순간, 재빠르게 비명 추가타를 날렸다.
"갸아아아아아악-!"
뜻밖의 고막 테러(?)를 또 당한 쟈빌론이 얼굴을 찡그리고 괴로워하며 목을 움츠렸다.
그리고 동시에... 일반석에 있던 예의 그 사내가 쟈빌론과 똑같이 괴로워하며 왼쪽 귀를 부여잡는 것이 보였다.
찾았다.
확신이라는 감정이 찡긋 윙크를 날리며 전두엽을 똥똥 때렸다.
"저놈이다!"
라키엘은 즉시 그곳을 가리키며 고자질하듯 알렸다.
"저기! 일반석 바깥에서 다섯 번째 줄! 왼쪽 귀 감싸고 있는 저놈!"
"...!"
이쪽의 외침을 들은 걸까. 아마도 그런 거겠지. 쟈빌론과 청각이 공유되고 있을 테니까. 너무나 생생하게 들리겠지. 그러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 테고.
놈이 화들짝 놀라며 왼쪽 귀를 감싸던 손을 내리는 게 보였다.
'넌 낚였어, x끼야.'
라키엘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즉시 외쳤다.
"저거저거! 방금 귀 감싸다가 놀라서 손 내린 놈!"
"...!"
"자긴 아니라는 듯이 어색하게 고개 갸웃거리면서 담 걸린 척 뒷목 주무르고 있네 저거저거!"
"...!"
"하얀 셔츠에 파란 망토! 유행 지난 느끼한 갈색 곱슬 장발! 뒤로 물러서려다가 뒷사람 어깨빵 때렸다! 어? 어어? 부딪친 사람한테 미안하다고도 안 해? 인성 봐라 참내!"
"...!"
"저놈이 인질범을 조종하는 진짜 흉수다! 저놈부터 밟아!"
"...!"
인파 속에 파묻혀 자신이 나설 타이밍을 재고 있던 사내. 오늘의 거사 계획이 완벽하다며 내심 만족스럽게 웃고 있던 흑마법사.
안심하고 있다가 졸지에 지목을 당한 아난샤는 몹시 당황하며 저도 모르게 허둥지둥, 영덕대게 스텝을 밟고 말았다.
276화. 콩깍지를 벗겨라 (1)
"저놈이 인질범을 조종하는 진짜 흉수다! 저놈부터 밟아! 아니, 잡아!"
"...!"
안심하고 있었다.
탄로 날 일은 없을 줄 알았다.
아난샤는 그렇게만 굳게 믿고 있었더랬다. 정신지배 마법은 겉으로 결코 드러나지 않으니까. 조종당하는 대상과 조종하는 마법사 사이의 연결을 알아챌 방법이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
'그나마 유일한 방법이... 공유된 감각을 통해서 연결된 조종자를 찾는 방법이긴 한데... 그걸 바로 짚어냈다고? 저 황태자가?'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믿기지가 않았다. 여전히 웅웅거리는 왼쪽 귀. 멍했다. 황태자가 왁 내질렀던 외마디 소리의 잔향이 여전히 남아서 고막을 잡아 늘이는 느낌이었다.
'아니, 그건 둘째 치고. 대체 어떻게 정신지배 마법을 알아차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감각의 공유?
그 전에 정신지배 마법을 짚어내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을 텐데. 뛰어난 마법사라도 그걸 감지하기 어려운데. 황태자가 마법을 익혔다는 등의 이야기는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그런데 어떻게?
짐작이 되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더 당황스러웠다.
주위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저 사람이?'
'흉수라고?'
'정신지배? 그게 무슨 소리야?'
주변의 근위병들이 멈칫했다. 갑작스러운 황태자 납치 인질극. 그 초유의 사태가 불러온 충격과 군중의 혼란을 수습하려 애쓰던 근위병들이었다. 현장의 그 누구도 광장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다급히 통제를 하던 와중이었다.
그렇기에 근위병 중에 누구도 라키엘의 외침에 담긴 뜻을 선뜻 알아내지 못하였다. 다들 서로를 돌아보며 의아한 눈빛을 나누었다. 긴가민가했다.
그런 사정은 단상 위에서 쟈빌론과 대치하던 이들도 비슷하였다. 별궁 경비 책임자인 프란델 경도, 황가의 소드마스터인 키에르사 경도, 황제를 긴급히 보호하던 근위대장도, 교단의 성기사 또한 다를 바가 없었다.
라키엘이 너무나 갑작스레 외친 탓에, 뜻밖의 생뚱맞은 이를 지목한 탓에, 각자 그 뜻을 나름으로 해석하느라 멈칫하였다.
만약, 현장에서 유일하게 라키엘의 뜻을 즉각적으로 알아들은 데미안이 아니었다면, 흑마법사가 탈출에 성공했을지도 몰랐을 일이었다.
타앗!
라키엘의 외침이 끝나자마자였다.
데미안이 가장 먼저 단상을 박찼다. 모두가 머뭇거리는 사이, 오직 그만이 홀로 몸을 날렸다. 그는 라키엘의 외침을 듣자마자 그 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저놈이다.'
끓어오르는 집중력. 그 속에서 확장되는 시야. 중심에 포착되는 한 남자. 하얀 셔츠에 푸른 망토. 흠칫하며 단상을 바라보는 표정. 저 사내다. 저자가 황태자의 지목을 받은 흉수다.
어째서 저 남자가 흉수라는 걸까.
정확한 근거가 있는 걸까.
라는 따위의 의문은 조금도 품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황태자가 지목했으니까. 전하는 틀린 적이 없으니까. 무조건 따른다.
'단지 그뿐.'
파아앗!
허공에 몸을 날렸다. 혼란에 빠진 시성식장의 바람이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중력의 힘이 전신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마침 보이는 적당한 재도약 지점. 체중을 적절히 이동시키고, 전신의 균형을 가다듬으며, 밟았다.
타닷!
어느 귀빈의 어깨를 가볍게 박찼다. 너무나 절묘한 충격의 분산. 덕분에 데미안에게 짓밟힌(?) 귀빈은 거의 충격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저 작은 참새 한 마리가 어깻죽지를 짚고 날아가는 정도의 지극을 느꼈을 뿐.
그사이, 이미 데미안은 두 번째와 세 번째 귀빈의 어깨를 밟고서 드넓은 시성식장의 허공을 훌쩍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네 번째 착륙 지점을 향해 서늘한 눈빛을 품었다. 그곳에 푸른 망토의 사내가 있었다. 목표. 황태자가 지목한 흉수였다.
...철걱!
엄지로 검집 고리를 밀었다. 풀려나는 고삐. 드러나는 맹수의 송곳니. 번득임과 함께 검신이 예기를 드러냈다. 그대로 당겨 뽑았다. 뽑는 동시에 밀었다. 허공을 가르고, 공간을 저며냈다. 그 끝에 목표가 있었다.
"...!"
데미안의 목표로 딱 걸린 아난샤는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너무나 빠른 돌격이었다.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경이로운 속도. 지난번에 충돌했던 저 괴물 소드마스터 쟈빌론?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이게 무슨!'
가슴이 철렁. 동시에 깨달았다. 당황할 틈도, 경악할 여유도 없다. 곧바로 반응하지 못하면?
'...죽는다!'
깨달음과 동시에 아난샤의 두 손이 움직였다. 그는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타인의 피를 제물로 삼아 200년 이상을 살아온 이였다. 나름의 기나긴 생애를 통하여 갖가지 비술과 비전을 섭렵하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중의 한 가지 비술이 그의 생존을 도와주었다.
'흡!'
눈을 부릅떴다. 두 번 빠르게 깜빡였다. 깜빡임의 사이에 염원을 담았다. 눈꺼풀에 달린 속눈썹, 그 자그마한 가닥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더욱 자그마한 공기의 흐름. 그 속에 조절된 마나의 흐름을 실었다.
손으로 수인을 맺지 않고도 사소한 규모의 마법을 시전할 수 있는, '깃털 타래의 비술'이었다.
츠즛!
두 번의 깜빡임과 마나의 흐름이 재빠르게 완성되는 순간, 그의 몸이 흐릿해졌다. 순식간에 전신이 아래로 푹 꺼졌다. 마치 지면을 수면으로 삼아 잠수를 하듯, 자신의 그림자 속으로 깃들어 사라졌다.
동시에 데미안의 검 끝이 쇄도했다. 아난샤의 머리칼 두 가닥을 베어냈다. 허무하게 흩날리는 두 가닥. 하지만 데미안은 당황하지 않았다. 상대가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지만, 그래서 목표를 놓쳤지만, 여전히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너무나 태연하게 착지를 하고, 몸을 반 바퀴 돌렸다. 다시 지면을 박찼다. 흠칫하는 귀빈들의 틈바구니를 자연스럽게 헤치며 돌격했다. 6미터 떨어진 지점. 그곳의 깃발 그림자 속에서 솟구치는 아난샤를 향하여.
스릉!
"...!"
그림자 밖으로 몸을 꺼내자마자 자신을 맞이하며 달려드는 검격!
아난샤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어떻게?'
자신이 방금 시전한 '그림자 걷기'의 마법은 말 그대로 그림자 속에 일순간 몸을 숨기고, 일정 거리의 동떨어진 다른 그림자로 공간이동을 하는 마법이었다. 기척? 당연히 있을 리가 없다. 따라서 추적 또한 불가능하다.
그런데... 황태자의 흑발 호위가 그걸 해내고 있다!
'미친!'
까드득!
이건 못 피한다. 아난샤는 깨달은 즉시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눈 깜빡임을 통한 그림자 걷기의 마법은 이미 써 버렸다. 피하기에도 너무 늦었다. 남은 방법은 막거나 흘려내는 것뿐!
'네 검에 찔려 죽게 해주마!'
파츠즈!
아난샤의 두 손이 벌어졌다. 일정 거리를 두고서 시계방향으로 회전하며 원을 그렸다. 왜곡된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소규모의 포털이 공간을 점령하며 비틀었다.
그 직후, 데미안의 검이 찔러져 들어갔다. 포털이 검 끝을 집어삼켰다. 동시에 데미안의 등 뒤쪽에 또 다른 소규모 포털이 생성되었다. 그곳을 통해 검 끝이 튀어나왔다. 데미안이 내뻗어서 포털로 들어갔던 검이 오히려 데미안의 등을 노리며 찔러져 들어왔다.
'됐다!'
아난샤의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빠르게 찌른 검격일수록 반대편 포털로 빠르게 나오는 법. 그만큼 피해내기가 어려워지는 법.
...이 그가 지닌 상식이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까지는 그러했는데....
스륵!
데미안의 몸이 기이할 정도의 반응 속도로 움직였다. 너무나 빠르고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느릿하게 보이는 움직임. 그의 등 뒤를 찔러오던 검이 허무할 정도로 빗나갔다.
그 순간, 데미안이 아예 검을 놓아 버렸다. 찌르던 기세 그대로. 검 자체가 포털 속으로 완전히 들어갔다. 그리고 데미안의 등 뒤쪽 포털에서 튀어나와 통째로 유성처럼 날아왔다. 다시 포털 속으로 들어갔다. 뒤쪽의 포털로 튀어나왔다.
두 포털 사이를 무한 루프로 찌르며 오가는 롱소드!
덕분에 아난샤는 깨달았다.
'...!'
포털이 만들어낸 루프에 묶였다.
자신의 꾀에 자신이 걸려들었다.
'이제... 포털을 없앨 수가 없게 됐어?'
그러했다.
포털을 없애는 즉시 검이 통째로 날아올 것이다. 유성보다 빠른 속도로 쇄도하여 올 것이다. 그걸 피할 수 있을까? 아니. 절대로.
그렇다고 포털을 유지한 채로 움직이면? 포털도 자신을 따라온다. 두 손으로 생성했으니까. 포털만 남겨두고 몸만 빠져나갈 수가 없다. 즉, 두 개의 포털 속에서 무한 루프를 그리며 날아들게 된 롱소드 또한 자신을 계속 따라올 것이라는 뜻이다.
...꿀꺽.
깨달음의 끝에서 마른침이 목구멍을 긁었다. 하지만 그 마른침을 채 삼키기도 전에, 검을 버린 데미안이 그를 향해 쇄도했다.
퍼억!
"...!"
명치를 파고드는 강렬한 주먹!
입이 쩍 벌어졌다. 숨이 콱 막히며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삼키려던 마른침만 역류하여 입 밖으로 튀어나왔을 뿐.
"...힙, 끅! 허... 흑!"
단 일격에 허리가 굽혀졌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지면이 일렁거리며 노랗게 보였다. 포털 마법을 유지하던 두 손이 풀렸다. 포털이 사라졌다. 그 속에서 무한 루프를 그리던 롱소드가 화살처럼 날아왔다.
"...!"
죽는다.
가까스로 들어 올린 고개. 절망적인 예감에 사로잡히는 순간.
터억!
롱소드가 눈앞에서 멈추었다. 대신, 검 손잡이를 낚아채듯 움켜쥔 흑발 호위의 서늘한 눈길이 안면에 꽂혀 왔다.
"움직이면 벤다."
"...."
나, 생포된 건가.
아난샤는 숨 막히는 복부의 통증 속에서 깨달았다.
'무슨... 이런 괴물이....'
황태자가 자신을 지목하며 외친 뒤로부터 지금까지 흐른 시간은 고작 10초 미만. 그는 눈앞의 흑발 호위가 쟈빌론을 뛰어넘는 미증유의 실력자라는 것을 뒤늦게야 절감하였다.
동시에 쟈빌론 또한 가슴이 철렁했다.
"...리한 군의과안-!"
애타게 외쳤다.
품속의 황태자가 갑작스럽게 리한 군의관을 지목해서. 흑발 호위가 리한 군의관을 괴롭히고 사로잡아서. 그 과정이 너무나 전광석화 같았기에, 미처 도우러 달려갈 틈조차 없었다.
"안 돼, 이놈들! 리한 군의관을!"
절로 다급해졌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리한 군의관을 얼마나 찾아 헤맸던가. 그 얼마나 많은 고난과 인내 끝에 다시 만난 리한 군의관이던가. 한데 그를 여기서 잃는다면? 끔찍했다. 생각하기도 싫었다. 할 수만 있다면 사로잡은 황태자 따위, 내버리고 당장에라도 리한 군의관을 구하러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걸 허락해 주지 않았다.
"허허? 리한 군의관? 저 흉수의 정체가 리한 군의관인 것이야?"
"...!"
품속에서 들려오는 음흉한 목소리. 고개를 내려보니, 황태자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더없이 야비한 목소리로 잔혹한 말을 던져왔다.
"그럼 쟈빌론 씨? 한 가지 제안을 하지. 이제부턴 나 건드리면, 저 리한 군의관이 죽는다?"
"...!"
삽시간에 완성(?)된 인질 협박 역전 세계! 라키엘의 선을 부수는 역제안에 쟈빌론의 눈동자가 쾌지나 칭칭나게 흔들렸다.
277화. 콩깍지를 벗겨라 (2)
"그럼 쟈빌론 씨? 한 가지 제안을 하지. 이제부터 나 건드리면, 저 리한 군의관이 죽는다아?"
"...!"
가슴이 철렁.
눈앞이 캄캄.
쟈빌론은 암담한 심정을 느꼈다. 동시에 절박하고도 다급한 맥박이 머릿속을 온통 움켜쥐었다.
'안 돼!'
리한 군의관이 죽는다니.
그건 안 된다.
그를 찾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하였던가. 얼마나 되찾고 싶었던가. 평생 주치의로 삼아 곁에 붙잡아두고 싶었다. 오직 그것만이 최선의 목표였다. 그래야 두통에 시달리지 않을 테니까. 끔찍한 고통에서 해방되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자신의 두통을 해결해 줄 유일한 존재인 리한 군의관이 죽는다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다시는 곁에 잡아둘 수 없게 되어 버린다면?
"...."
거대한 상실감.
아득한 절망감.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위기감이 쟈빌론의 뒤통수에 소름을 돋게 하였다. 그의 대답이 다급해졌다.
"허, 헛소리! 리한 군의관을 털끝 하나라도 다치게 하면... 황태자 그대의 목숨도 장담할 수 없게 될 것이야!"
"그럼 리한 군의관이 죽는데?"
"...!"
"말했잖아, 쟈빌론 씨. 나 건드리면 리한 군의관이 죽는다고. 이거 장난 같아? 난 아닌데?"
더욱 흔들리는 쟈빌론의 눈동자.
그걸 빤히 쳐다보며 라키엘이 외쳤다.
"데미안!"
그의 외침은 그리 크진 않았다. 하지만 데미안의 날카로운 청각에 닿기에는 충분하였다.
"그놈의 귓불을 잘라!"
"...!"
쟈빌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와 동시에, 데미안의 검이 일언반구의 반문조차 없이 즉시 움직였다.
스핏!
"그읏!"
데미안의 롱소드가 가볍게 움직인 직후, 아난샤의 오른쪽 귓불 아랫부분이 0.5센티 가량 예리하게 잘려나갔다. 저릿한 통증. 흘러나온 피가 삽시간에 목덜미와 셔츠 깃을 검붉게 물들였다.
쟈빌론을 돌아보는 라키엘의 눈초리가 의미심장해졌다.
"봤지?"
"무슨...."
"나를 벨 건가?"
"...."
"명심해. 다음 차례는 목이야."
"이러고도, 그대는 무사하길 바라나, 황태자?"
"누가 무사할지는 조금 더 지켜보면 알겠지?"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역시나 쟈빌론 이 인간, 이쪽을 전혀 알아보질 못한다. 이쪽을 수중에 붙잡아두고 있으면서도 엉뚱한 놈을 향해 '리한 군의관!'을 외치는 모습이라니.
생각할수록 이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쪽이 리한 군의관이라고 호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하지만 뭐 어쨌건, 나이스 데미안.'
데미안이 신속하게 움직여 준 덕분이다. 말 그대로 전광석화. 쟈빌론이 제대로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서 흑마법사를 제압해 준 덕에 이쪽이 칼자루를 쥐게 됐다.
라키엘은 주위의 상황을 스윽 훑어보았다.
다들 이제야 분위기를 파악한 걸까.
근위대 병력 일부가 데미안과 흑마법사 쪽으로 우르르 달려가고 있었다. 대광장의 포위망 또한 한층 견고해졌다. 좋다. 이제는 저 흑마법사도, 쟈빌론도 자력으로는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시나리오 한번 돌려보자고.'
재빠른 상황 파악.
더욱 재빠른 즉석 작전 수립.
라키엘의 대뇌피질이 뽕 맞은 슈퍼카 12기통 자연흡기 엔진처럼 격렬하고도 거칠게 부아아앙 돌아갔다. 떠오르는 예상 시나리오와 대응법, 추후의 사건 전개까지. 잠깐 사이에 몇 가지의 가능성과 결과를 떠올리고, 계산했다.
그리고 최적의 작전을 뽑아냈다.
'작전을 뽑았으면, 곧바로 실행.'
...촵촵촵!
그의 혓바닥이 찰진 엡실론-델타 논법의 현란한 기하학적 그래프를 그리며 입술 가득 침을 촵촵 발랐다. 그리고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황제를 향해 외쳤다.
"황제 폐하! 저, 마젠타노의 적법한 후계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가 폐하께 드릴 청이 있사옵니다!"
낭랑하게 울려 퍼진 외침.
그 외침에 모두가 자신의 달팽이관을 확인하고 싶어지는 충동을 느꼈다. 대뇌피질 전두엽을 땅 때리는 의문과 함께였다.
'폐하께? 청을? 지금?'
시성식장에 난입한 괴한에게 붙잡혀 인질이 된 황태자. 그런데 인질극의 진짜 흉수 또한 황태자의 호위에게 붙잡혔다. 서로가 인질이 되어 대치하게 된 상황.
그런데 황태자는, 이런 상황에서 황제에게 무슨 부탁을 하려는 것일까. 대체 무슨 꿍꿍이를 품은 것일까.
광장의 모든 이가 의문을 느끼는 가운데, 라키엘의 외침이 이어졌다.
"가능하시다면, 미천한 저를 위하여 약조를 하여주시옵소서!"
"...."
황제는 미간에 주름을 그려내었다.
사실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빠르게 심장이 뛰고 있던 황제였다. 아까 이미 가슴이 철렁했다. 손바닥 가득 진땀이 흥건히 배어났다. 소중한 장남에게 행여나 흉한 일이라도 생길까 싶어서. 차라리 자신이 대신 인질이 되는 게 낫겠다 싶어서.
그럼에도 그는 황제였다.
아들을 위협당하는 아비이기 이전에, 만인의 위에 군림하는 자로서 함부로 당황하는 모습을 내보일 수가 없었다. 특히, 지금은 더욱 그러하였다. 자칫 제국과 황실의 위신이 추락할 수도 있는 지금과 같은 순간에는 더더욱.
"...황태자는 생각하는 바를 고하도록 하여라."
그는 아들의 안위를 묻고픈 외침을 가까스로 참아내었다. 대신 궁정 마법사에게 눈짓하여 음성 확장 마법을 지시하였고, 그 후에야 마법의 힘을 빌려 침착한 목소리로 응답하였다.
라키엘이 외쳤다.
"실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여 감히 고하노니, 이제부터! 저 납치범 일당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공격도 하지 않겠노라는 폐하의 약조가 필요하옵니다!"
"...뭐?"
이번에는 황제도 당혹감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하였다.
"무슨 뜻인지 더욱 상세히 고하라."
"예, 폐하! 이제부터 저는 저자와 인질 맞교환을 협상할 것이옵니다! 그렇기에 저자에게 믿음을 줄 약조가 필요하옵니다!"
"저자를 치지 않겠다는 약조 말이더냐?"
"그렇사옵니다, 폐하!"
"점이 약조를 통해 무엇을 걸면 되겠느냐?"
"황실의 명예와! 폐하의 신앙을 걸어주소서!"
"설마, 짐더러, 약조를 깨면 교단으로부터 파문을 당하라는 뜻이더냐?"
"정확하시옵니다, 폐하!"
"...."
미친 거 아닐까. 혹시나 황태자가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리다 보니 판단력이 많이 흐트러진 건 아닐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황제는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제법 먼 거리였지만, 이쪽을 쳐다보는 황태자의 눈빛이 보였다. 혼란과 당황감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지극히 침착한 눈동자였다.
마치, 지금 상황을 모조리 지배하며 조율하려는 자의 눈빛 같은.
'너는....'
필시 무언가를 꾸미고 있구나. 이런 상황에서도 절대로 손해를 보지 않을 생각을 품고 있구나.
황제는 불현듯 깨달았다.
그러한 깨달음 덕분이었을 것이다.
"...좋다. 황태자의 뜻을 알겠노라."
황제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에서 짐이 약조하노니, 마젠타노 황가는 금일 황태자를 능욕한 일당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공격과 체포 시도도 행하지 아니하겠으며, 만약 이 약조를 어길 시에는 황가의 모든 명예를 내려놓고서 짐이 파문의 길을 걷겠도다. 또한, 지금 이 광장에 모인 모든 이가 이 약조의 증인이 될 것이니라."
그의 선언이 마력의 힘을 타고서 광장 구석까지 중후하게 퍼졌다.
"...이제 되었느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라키엘이 힘차게 외쳤다.
동시에 웃음을 삼켰다.
됐다.
'이걸로 작전 실행을 위한 세팅(?) 완료.'
뇌주름 구석구석 야물딱지게 잔머리가 팍팍 돌아가는 가운데, 라키엘이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데미안에게 붙잡혀 있는 흑마법사가 보였다.
"어이."
제법 먼 거리였지만, 황제와 대화할 때와는 달리 외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을 붙잡고 있는 쟈빌론과 저놈의 청각이 공유되고 있을 테니까.
그는 쟈빌론을 무전기(?) 삼아서 흑마법사에게 말을 걸었다.
"들리지? 들리면 고개 들어봐."
"...."
귓불을 잃은 통증과 굴욕감에 어깨를 부들부들 떨던 아난샤가 고개를 들었다. 쟈빌론과 연결된 청각을 통해 라키엘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방금 다 들었을 거다. 우리 폐하께서 어떤 약조를 해주셨는지."
"...."
"지금 우리 상황은 너도 알겠지? 서로 인질이 되어서 묶였지만, 누가 불리한지도 충분히 깨닫고 있을 테고."
"...."
아난샤는 소리 없이 이를 갈았다. 그도 돌아가는 상황을 충분히 실감하고 있었다.
계획이 모조리 망했다. 쟈빌론을 시켜 황태자를 위협하고, 모두가 곤란에 빠진 순간 자신이 나서려 했다. 정신지배의 우위를 이용하여 만인이 보는 앞에서 쟈빌론을 죽이려 했다.
그러면?
자신이 영웅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황태자를 구한 공로자, 혹은 사회의 공헌자, 황실의 명예를 지켜준 수호자로서.
하지만 그 계획은 망했다. 그냥 망한 정도가 아니라, 이젠 아예 x됐다. 계획은 탄로가 났고, 자신마저 황태자의 호위에게 제압되었다.
'이젠... 자력으로 여길 빠져나갈 수 없겠구나.'
그는 상황을 인정했다.
이미 광장이 몇 겹으로 포위가 되었다. 서로 인질이 된 황태자와 자신. 인질 맞교환을 통해 자유를 얻어도? 그 후에 근위대와 소드마스터들의 공세를 감당할 수 있을까. 아니. 절대로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내게 신뢰를 주려고 황제의 약조를 얻어낸 것인가?"
아난샤가 외쳤다.
라키엘이 한쪽 입술만으로 웃었다.
"당연하지. 안 그러면 이 자리에서 댁이 맞교환에 응할까? 아니겠지?"
"...."
"그렇다고 인적 없는 곳으로 가서 맞교환을 할 것도 아니잖아. 우리 폐하가 그걸 가만히 지켜보실 리도 없고."
"...."
"그래서 서로에게 답이 없는 협상 따위를 생략하려고 내가 배려를 해주는 거야. 어때, 여기서 인질 맞교환을 하는 건?"
"...."
아난샤는 순간 고민했다. 황태자의 제안을 믿을 수 있을까. 당연한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젠장.'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선택의 자유도 없다. 오히려 저 제안이야말로 완전한 외통수 속에서 내려온 구원의 동아줄이다.
아난샤는 상황을 인정했다.
'그래도 황제가 이 자리의 모든 이를 증인으로 삼아 약속까지 했으니까. 심지어 교단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겠노라고 직접 공언했으니까. 그건... 믿어볼 수 있겠지.'
냉정하게 따져보면 그랬다.
파문은 결코 장난이 아니다.
단순히 황제 개인의 신앙 상실? 그 정도가 아니다.
황제가 파문을 당하면, 자동으로 황가와 제국 전체가 파문을 당한다. 즉, 제국과 교단의 모든 교류와 협력이 끊긴다. 신성교단의 모든 수도원이 제국으로부터 철수할 것이고, 제국의 국제적 위상과 민심은 나락으로 추락할 것이다.
말 그대로 장난이 아닌 사태가 펼쳐지는 셈이다.
'그런 조건까지 걸었으니... 설마 약속을 대놓고 어기지는 않겠지.'
물론 이 광장을 벗어난 후에는 은밀한 공격을 가해올 것이다. 사람들 몰래 추격대를 붙이겠지. 하지만 그건 상관없다. 강력한 괴물 소드마스터 쟈빌론과 자신이 힘을 합치면, 얼마든지 추격을 뿌리칠 수 있을 테니까.
"...좋다!"
나름의 계산을 마친 아난샤가 외쳤다.
"황태자의 제안에 동의한다! 그럼! 셋을 세면 서로가 풀려나는 것으로 하면 어떻겠는가?"
"콜."
라키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작전 성공을 위한 마지막 조약돌을 던질 차례다. 그는 자신을 붙잡아둔 쟈빌론을 돌아보며 의미심장하게 빵긋, 웃었다.
"방금 들었지? 셋을 세면 날 풀어주면 된대."
"...운이 좋은 줄 아시오, 황태자여."
쟈빌론이 살기 서린 눈빛으로 응수해 왔다.
하지만 라키엘은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그러게. 내가 운이 좋지. 실험실로 끌려가서 죽은 줄 알았던 당신을 이렇게 또 만나게도 되고."
"...뭐?"
"그땐 미안했다고."
"...."
"치료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한 달에 한 번씩 기도를 올려야 한다고 했던 거짓말로 댁을 속이고 도망치려 했던 거, 미안해."
"무슨...."
"갑자기 덩치가 무진장 커져서 그쪽을 이리저리 패대기쳤던 것도 미안하고. 아프고 쪽팔렸을 텐데. 그렇지?"
"...."
"그런데 말이야. 미술 학교 입학에 실패한 거, 생각해 보면 이제는 상관없지 않나 싶은데. 그냥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는 취미를 계속 살려 가면 되는 거 아닌가?"
"...."
"아, 오지랖이었다면 또 미안. 오늘은 미안하다고 말할 일이 좀 많네."
"그대는...."
...누구야?
대체 누군데, 나와 리한 군의관만 아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꺼내는 거지?
라키엘을 쳐다보는 쟈빌론. 그의 눈에서 살기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아난샤의 정신지배 마법이 걸어둔 거짓된 콩깍지가 한 큐에 홀라당 벗겨지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278화. 콩깍지를 벗겨라 (3)
누구에게나 특정한 사람과만 공유하는 기억이 있다. 사소한 비밀이라거나, 특별한 사건의 순간이라거나 하는 것들. 그러한 기억의 꾸러미들. 흔히 사람들은 그것을 '추억'이라고 부르곤 한다.
쟈빌론도 마찬가지였다.
리한 군의관. 평생 주치의로 붙잡아두고픈 사람. 반드시 찾아내고 싶은 중요한 존재.
그런 리한 군의관과의 추억은 그에게 각별한 기억이었다.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마법 실험실에서 갖가지 가혹한 정신 실험을 받는 동안에도 그러했다. 리한 군의관과의 기억 덕분에 고통을 버텨낼 수 있었다.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실험실에서 탈출한 뒤로도 마찬가지였다. 잔혹한 실험 때문에 정신이 망가졌지만, 기억의 실타래가 무참히 뒤엉켰지만, 그럼에도 리한 군의관과의 기억은 소중했다. 잊고 싶지 않았다. 끝끝내 품어서 지켜냈다.
그건, 캄캄한 절망 속의 자신에게 유일하게 비추어지는 등불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대는, 어떻게 그 일들을 알고 있는 거지?"
쟈빌론의 목소리가 떨렸다.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을 속이고 도망치려 했던 리한 군의관. 그때 리한 군의관이 댔던 핑계가 떠올랐다. 한 달에 한 번, 달을 향해 기도를 올려야 한다고 했더랬다. 그걸 하지 않으면 두통을 사라지게 해주는 능력을 잃는다고 하였다.
솔직히 당시에도 의구심을 느꼈다. 하지만 리한 군의관을 향한 의구심보다, 그의 능력이 사라지면 겪어야 할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컸다.
하여 못 이기는 척 허락했다.
그리고 속았다.
리한 군의관이 도망쳤다. 자신을 버리고서. 너무나 냉정하게.
"...말해보도록. 황태자, 어찌하여 그대가 리한 군의관이 했던 거짓말을 알고 있는 거지?"
"어, 음, 어쩌다 보니까?"
라키엘이 싱긋 웃었다.
혼란에 휩싸인 쟈빌론과 달리, 그는 여전히 태연한 기색을 유지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리한 군의관이라는 주장을 직접적으로 펼치지도 않았다.
'당연하지. 내가 내 입으로, 내가 리한 군의관이야! 이러면 오히려 더 못 믿을 수도 있으니까.'
사칭을 한다는 반발심을 살 수도 있다. 의심을 얻게 되고, 신뢰를 잃게 된다. 하여 라키엘은 얼굴 가득 티타늄 3중 엠보싱 철판을 깔고서 능청스럽게 말했다.
"뭐... 그냥, 생각이 나서?"
"생각이... 나서?"
"그냥 기억 같은 거랄까. 아, 맞다. 그때 생각나나? 당신이 내 다릴 자르려고 했던 거. 내가 말 타고 도망치고 있는데 대놓고 검을 휘둘렀잖아."
"...."
"그땐 좀 무서웠거든. 안 잘려서 다행이지. 안 그래?"
"그대는 진짜... 누구야?"
"황태자. 마젠타노의."
"그런데 어떻게, 리한 군의관과 나만 아는 일들을 직접 겪은 것처럼 떠드는 거지?"
"글쎄?"
시치미를 뚝.
한층 궁금해하도록.
안달이 나서 못 참도록.
조바심에 잡아먹혀 버리도록.
'조약돌을 던지는 건 여기까지.'
이쯤이면 됐다. 이만큼으로도 이미 쟈빌론의 마음속에는 의구심과 당혹감의 파문이 해일처럼 몰아닥치고 있을 테니까.
'여기서 더 밀어붙이면 역효과가 나겠지.'
그러니 여기서 딱 끊는 게 좋다.
답답해 죽도록. 더 궁금해하도록.
라키엘은 쟈빌론의 질문을 무시했다. 대신 고개를 들어 광장 건너편에 있는 아난샤를 향해 외쳤다.
"맞교환을 하려면! 이쪽으로 오도록!"
"...좋다!"
아난샤가 즉시 응했다.
사실은 실시간으로 가슴이 철렁철렁 바운스를 그리고 있던 아난샤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황태자 저놈, 지금 무슨 짓을 꾸미려는 거지?'
인질 맞교환을 하자고 해놓고.
서로 협의까지 다 봐놓고.
조금 전부터 갑자기 쟈빌론에게 이상한 말들을 건네기 시작했다. 쟈빌론과 청각이 공유된 상태라서 그 말들이 자신에게도 다 들렸다.
한데 그 내용이 심상치가 않았다.
'설마...진짜로, 황태자가 리한 군의관이었다고?'
예전에 그런 의심을 잠깐 품은 적이 있었다. 물론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보기엔 그럴 가능성이 낮았으니까. 억측이라고 치부했다. 적어도 당시엔 그랬다.
한데 지금 보니 쟈빌론의 반응이 너무나 의미심장했다. 황태자의 말들. 그게 리한 군의관과 쟈빌론 둘만이 아는 기억인 듯했다. 그걸 눈치채는 순간 간담이 철렁했다. 말 그대로 엄청난 위기감이 엄습해왔다.
'저 입을... 다물게 해야 해!'
애초부터 자신을 리한 군의관으로 인식을 시켰다. 그렇게 세뇌를 건 덕분에 정신지배에 성공했다. 한데 그 세뇌가 깨지면? 거짓된 콩깍지가 벗겨지면? 자신이 리한 군의관이 아니라는 사실을 쟈빌론이 깨달으면?
그 순간 정신지배도 풀린다. 저 괴물 같은 소드마스터마저 적대적으로 돌아서게 될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게 끝이야.'
아난샤는 다급해졌다.
황태자의 입을 한시라도 빨리 막기 위해 서둘렀다.
"가, 가자고. 갑시다, 얼른!"
자신을 붙잡고 있는 데미안을 오히려 재촉했다. 종종걸음으로 광장을 가로질렀다. 마침내 황태자와 열 발짝 떨어진 곳까지 다다랐다.
황태자가 묘하게 여유 가득한 미소로 이쪽을 맞이했다.
"어유. 이 사태의 흉수께서 바쁘게 오시는구만."
"...."
"그럼, 인질 맞교환을 시작할까?"
"좋다!"
"아, 그전에 조금 궁금한 점이 있는데."
"필요 없으니 인질 맞교환부터 하자."
"싫은데?"
"...."
"궁금증이 풀리기 전에는 풀려나기 싫은데 어떡하지?"
"...!"
황태자 이 x끼, 미친 거 아닌가?
아난샤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하지만 그가 초조함에 분통을 터뜨리거나 말거나, 라키엘은 제 질문만 태연하게 툭툭 던져댔다.
"그쪽, 이름이 뭐지?"
"...나?"
"그래. 감히 수하를 시켜 시성식장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제국의 황태자인 나를 납치하려 시도한 흉수의 이름 정도는 알아야지? 적어도 나는 그걸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날 수배할 생각인가?"
"아니. 폐하께서 약조를 하셨잖아. 일체의 공격도 하지 않겠다고."
"...."
"이런 대담한 짓을 벌인 주제에 이름을 밝히는 건 불안한가? 보기보단 소심하...."
"리한 군의관. 내 이름은 리한이다."
"아하. 그러셔?"
"그렇다."
아난샤는 짓씹듯 대꾸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황태자를 억류하고 있는 쟈빌론을 슬쩍 살펴보았다.
"...."
기색이 좋지가 않다.
자신이 리한 군의관이라고 이름을 밝히는 순간, 이쪽을 보던 눈초리에 분명히 의구심을 드러냈다. 아주 작은 의심의 균열. 하지만 거대한 제방도 결국에는 작은 균열 때문에 무너지는 법이 아니겠는가.
'좋지 않아. 저런 의심은... 계속 방치하면 위험해져.'
의심은 독버섯과도 같다. 한 번 뿌리를 내리면, 제아무리 정신지배 마법으로도 제어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니 생기는 즉시 제거해야 한다.
결심한 아난샤는 입을 열었다. 쟈빌론의 내면에서 자라나기 시작한 의심을 제거하기 위한, 나름의 심혈을 기울여 꾸며낸 말들을 꺼냈다.
"나는 한때 군의관으로 일했지. 전쟁터를 전전했다. 그러다가 앙부아즈에서 내전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참전했다."
"그랬나?"
"그래. 그곳에서 저자를 만났지."
아난샤는 며칠 사이에 쟈빌론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앙부아즈 내전. 리한 군의관과의 만남. 함께 보낸 시간들까지. 그 기억을 최대한 그럴듯하게 포장하며 말했다.
"쟈빌론, 저 사람을 만나자마자 나는 깨달았다. 끔찍한 두통에 고통을 받고 있구나. 그래서 나는 저자의 두통을 다스려 주었지. 그것은 실로...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그래애?"
"그렇다. 그 일이 인연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졌지. 한순간도 서로를 저버리지 않는 신뢰를 품고서. 서로를 배신하거나 떠난다는 따위의 일은 상상조차 못 하는 완벽한 신뢰의 관계로 말이다."
"아하, 그런가?"
"당연하지. 다만, 내가 잠깐 그와 떨어져서 지낸 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내 본심이 아니었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 그래서 무척이나 가슴이 아팠고."
"허허, 그러셨어?"
"물론. 황태자, 당신처럼 평생 높은 지위와 권력에 취해서 아랫사람을 부리는 부류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겠지. 순수하게 서로를 믿는 완벽한 신뢰의 관계를 말이다. 나, 리한 군의관과 저 사람의 관계 같은 것은 평생 누려볼 수도 없을 테고."
목소리에 자부심을 가득 실었다.
쟈빌론이 잠깐 품었을 의심을 녹여내기 위해, 최대한 진지하며 진중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쟈빌론을 향해 따스한 눈길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 될 거라고 여겼다.
쟈빌론 또한 의심을 잊을 거라고, 이쪽을 리한 군의관으로 보아줄 거라고, 마침내 리한 군의관과 함께 있게 되어 무척 기쁘다고, 최근 그랬던 것처럼 반응해줄 것이라고 여겼다.
덕분에 쟈빌론의 반응은....
"하하, 하하하."
웃었다!
이쪽을 보며 환하게 웃어 주었다!
"역시 리한 군의관. 그대는...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거였군?"
"그렇습니다.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다행이다.
믿어 준다!
아난샤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쪽의 적당히 꾸민 거짓말이 통한 듯했다. 아난샤는 그 믿음에 쐐기를 박고자 서둘러 말했다.
"저는 항상 당신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한시도 떨어지기 싫은, 잃고 싶지도 않은 중요한 분이라고 말입니다."
"그래. 그렇지. 그거야."
"당연하지요. 항상 말했지 않습니까? 저는 당신의 것이라고 말입니다. 마치, 가족처럼 말이지요."
"가족?"
"예, 가족. 너무나 소중하고 따스한."
"가족... 소중... 따스한...?"
"제겐 당신이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가?"
"예. 정말로요."
더욱 신뢰감 있는 얼굴로 친근하게. 실제 리한 군의관이 그랬을 것처럼. 아난샤는 쟈빌론의 말에 열심히 호응해 주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환하게 웃던 쟈빌론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가족? 따스해?"
"네?"
"이상한데. 리한 군의관?"
"예?"
"나한테 가족은 따스하지 않았는데?"
"무슨...."
철렁.
아난샤는 멈칫했다.
쟈빌론의 미소가 조금씩 굳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쪽을 향해 문득 던져오는 질문 또한, 그러했다.
"특히 내 아버지... 말이야...."
"아, 그건...."
"리한 군의관? 예전에 내가 말해준 비밀이 하나 있었는데, 혹시 기억하나?"
"물론이죠."
"내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또한?"
"다, 당연히...."
"누구의 손에 돌아가셨지?"
이제 쟈빌론의 얼굴에서 미소는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 빈자리를 차지한 표정은 서러움, 혹은 분노 같은 무엇이었다.
아난샤는 저도 모르게 쿵쿵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쟈빌론이 아버지의 죽음을 언급하며 저런 표정을 짓는다면? 필시 슬프고 분한 사연이 있는 거겠지. 그는 그러한 예상에 맞추어서 적당한 대답을 했다.
"그건... 참으로 아프고 슬픈 일이었죠. 아직까지도 그 원수 같은 놈을 생각하면 저 또한 가슴이 아픕니다."
"...그래?"
"예. 당신처럼요."
"그런가?"
"물론이죠."
"그래. 그렇군."
"예."
휴우, 정답인가. 살았다.
...라며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려던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내 손에 돌아가셨는데."
"...네?"
"네놈은 누구지?"
"...."
"리한 군의관이... 아니었군?"
마침내 벗겨진 거짓된 세뇌.
아난샤는 전신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을 느꼈다.
279화. 흑마법사보다 독한 놈 (1)
"리한 군의관이... 아니었군?"
쟈빌론은 되뇌었다.
되뇌임이 귓가에 스며들고.
뇌리를 적셔 기억을 일깨웠다.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그리고 저자는 어떤 이인가. 과연 내가 아는, 알던, 알고 싶던, 리한 군의관이 맞는가.
'나는....'
모르겠다.
눈을 가늘게 떴다.
눈길을 던져 당황한 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리한 군의관의 모습이 있었다. 곱슬거리는 붉은 머리칼. 그래. 나는 그대의 그 머리칼 색이 참 마음에 들어. 불꽃과 피를 연상시키거든. 마음이 차분해진달까.
그리고 통통한 체구. 싸움이나 다툼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을 것만 같은 자세. 누군가의 피를 저며낸 경험이 없어 보이는 동작. 그런데도 묘하게 당찬 구석이 있지. 그게 바로 그대의 신기한 점이기도 하고.
그런데....
'달라.'
눈앞의 리한 군의관은 기억 속의 모습과 어딘가 달랐다. 겉모습이? 아니. 느낌이 달랐다.
'그러고 보면 리한 군의관은 저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았는데.'
사소한 동작이나 자세가 그랬다.
다른 이라면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미묘한 차이지만, 쟈빌론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만큼 리한 군의관을 항상 눈여겨 보았기에,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며 더욱 세밀한 감각과 관찰력을 얻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느낄 수 있었다. 어딘가 다르다. 리한 군의관의 움직임이 아니다. 나는 그걸 왜 이제서야 알아차리고 있는 걸까.
'어째서?'
쟈빌론은 스스로를 향해 물었다. 꼬인 기억의 실타래가 뇌리를 서슴없이 쑤셔왔다. 잔혹하던 마법 실험실. 엄습하던 고통. 일그러지던 이성. 냉랭하게 내려다보던 눈동자. 탈출. 목숨을 걸고서. 가까스로. 그 후로 나는....
'한참을....'
방황했다.
리한 군의관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만났노라고, 찾아냈노라 기뻐하였다. 그게 저 앞에 서 있는 리한 군의관이었다.
그런데... 아닌 것 같다.
오직 리한 군의관에게만 말해줬던 이야기. 둘만의 비밀. 사소하지만 자신에게는 중요한 기억. 지금처럼 일그러진 의식 사이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악몽 같던 실수의 순간. 아버지의 죽음. 자신의 검에 묻어났던 피. 흥건한. 그래서 더욱 지울 수 없어져 버린.
'그 이야기를... 모른다고? 리한 군의관이?'
아니.
그건 불가능하다.
내가 이야기해 준 적이 있으니까. 살면서 오직 한 사람, 리한 군의관에게만 솔직하게 밝혔던 자신의 이야기니까. 그러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리한 군의관만큼은 그 이야기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눈앞의 저 리한 군의관은 그걸 모르는 듯하다. 방금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그러했다. 이상했다. 말이 되지가 않았다.
내 아버지를 죽인 흉수가 따로 있다고? 내가 아니라? 원수 같은 놈이 있어? 그놈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파?
'개소리.'
쟈빌론은 고개를 세차게 털어냈다.
스멀스멀 가슴으로 스며오는 확신. 저건 리한 군의관이 아닌 것 같다. 확신 속에서 다시금 눈길을 던졌다.
그러자 조금씩... 리한 군의관의 모습이 바뀌어 갔다. 곱슬거리던 붉은 머리칼의 색이 바랬다. 혼탁하게. 색 빠진 갈색으로. 길게 자라났다.
얼굴 또한 마찬가지였다. 탐스럽게 빵빵하던 볼살이 삽시간에 야위었다. 코가 오뚝하게 자라나고, 광대가 튀어나왔다. 눈썹 끝이 쳐졌다. 입술이 얇아졌다. 몸매도 그러했다. 지극히 평화적이던 통통한 몸매가 늘씬하게 변했다. 키도 커졌다.
'저건....'
완전히 다른 사람이잖아.
그런데 어째서 나는 저놈을 리한 군의관으로 여기고 있던 거지? 어떻게? 왜? 그는 스스로를 향한 의문과 경악, 혼란을 느꼈다. 뒤이어 분노 또한 느꼈다. 엉뚱한 놈에게 속아서 이용을 당하고 있었나? 나는? 정녕?
뒤섞인 혼란과 분노의 감정이 스민 눈길을 던졌다. 마지막 확인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제는 리한 군의관과 완전히 딴판의 모습이 된 남자가 돌연 이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 손끝에서 섬광이 번쩍, 하고 일었다.
"...!"
섬광이 시야를 온통 점령했다.
살면서 경험하여 본 가장 강렬한 눈부심이었다. 시야가 뒤덮였다. 사라졌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크읏!'
설마 기습인가.
불현듯, 불쾌한 기억이 살아났다. 마법 실험실. 그래. 그곳에서 나를 가지고 놀던 놈들이 이런 느낌을 줬지. 그래서 나는 마법이 싫어. 마법으로 조작하는 마나의 기색만 느껴도 갈가리 찢어서 죽이고 싶어지거든.
그런데... 마침 저놈이 그렇네.
"...크아아!"
콰앙-!
쟈빌론은 품속에 잡아두던 황태자를 내동댕이치며 버렸다. 지면을 박찼다. 순간적인 섬광에 시야가 사라졌지만 상관없었다. 소드마스터의 날카로운 감각만은 여전하니까.
쐐애액!
그의 거구가 믿기지 않는 속도로 쇄도했다. 방금 섬광 마법을 기습적으로 사용한 아난샤를 향해서. 조금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방향과 타이밍으로 돌진했다.
물론 그 방향과 타이밍이란, 0.5초 전의 시점을 기준으로 놓았을 때 '정확한' 것이긴 했다.
...후웅!
쟈빌론의 손가락에 생성된 다섯 줄기의 오러소드가 맹렬하게 공간을 헤집었다. 하지만 그곳에 걸리는 뼈와 살은 없었다. 강맹한 일격은 그저 허공만을 긁었을 뿐.
실제 아난샤는 1미터 떨어진 지점으로 아슬아슬하게 몸을 피한 직후였다.
'후읍!'
아난샤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간발의 차이로 코 앞을 스쳐 간 다섯 줄기의 오러. 걸리면 자신의 육신 따위는 정육점에 내걸린 고깃덩이보다도 못 한 신세가 될 것이다. 그걸 생각하자 발끝까지 소름이 오싹 돋았다.
하지만 그는 웃었다.
'날 건드리진 못할 테니까!'
쟈빌론에게 걸었던 정신지배가 풀리는 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감지한 그였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정신지배를 시전한 당사자였으니까.
그래서였다.
정신지배가 풀리는 기색을 감지한 순간, 위험 또한 온몸으로 느꼈다. 자신이 꼭두각시 인형 신세가 되어 있었다는 걸 깨닫는 쟈빌론이 가장 먼저 누구에게 살기를 드러낼까.
생각할 것도 없이 자신일 터였다.
하여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당하기 전에 친다.
그러나 전면전은 피한다.
쉽기 이기지 못할 테니까.
우선 이 자리를 모면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둔다.
'그러니까....'
일단 눈을 멀게 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최소 5분 동안은 장님 신세일 것이다. 그러니 다른 감각마저 멀게 하면, 안정적으로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겠지.
'...이렇게!'
파앗!
아난샤는 더욱 거리를 벌리며 손을 뻗었다. 한 차례 박수를 쳤다. 손바닥으로 치는 평범한 박수. 그러나 그 속에 실린 뒤틀린 마나가 만들어낸 결과는 사뭇 평범하지 않았다.
...째애앵-!
철판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생성되었다. 가장 커다란 북 100개를 합쳐서 두드리는 것 같은 음량으로. 거대하게 증폭되어. 전면의 좁은 범위로만 집중된 음파의 형태로 날아갔다. 오직 쟈빌론의 얼굴을 향해서였다.
원래 평소의 쟈빌론이었다면 그럭저럭 피해낼 수 있을 유형의 공격이었다. 당연했다. 앞서의 섬광과 달리, 이번의 공격은 음속의 속도에 그치는 것이었으니까. 멀쩡한 상태의 그였다면 어렵지 않게 공격 범위를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다.
사실 정신지배는 그 자체만으로도 심령에 커다란 타격을 준다. 그는 그러한 정신지배에서 풀려난 직후였다. 커다란 심령의 타격에서 회복되지도 못했고, 그만큼 반응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음파에 직격되었다
"...!"
고막이 사라지는 것 같은 충격. 혹은 세상의 상하좌우가 모조리 뒤틀리고 뒤섞이는 느낌!
"쿠, 으욱!"
시야에 이어 소리가 세상에서 사라졌다. 오직 삐- 하는 괴악한 외침만이 청각을 점령하였을 뿐.
그뿐만이 아니었다.
균형감각이 단숨에 상실되었다. 현기증. 빙빙 도는 듯한. 세상의 끝으로 내던져지는 듯한 어지러움. 저도 모르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속이 뒤집히며 참을 수 없는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아난샤에겐 그걸로 충분했다.
'됐어!'
그는 내심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물론 전혀 방심하지 않았다. 쟈빌론에게 덤벼들 생각 또한 조금도 품지 않았다. 지금이야 기습이 먹혀서 잠깐 감각이 상실되었지만, 어쨌거나 쟈빌론은 괴물 소드마스터니까.
'이 틈에 도망치자.'
어설프게 얕보고 덮쳤다간 되레 이쪽이 당한다. 그러니 기회가 있을 때 내빼야 한다. 마침 제국의 근위병들도 황제의 약속 때문에 이쪽을 공격하지 않고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게다가 도망치고 나면?
별다른 추격도 없을 것이다.
자신의 도구가 되어 황태자를 위협한 자의 정체가 쟈빌론이니까.
분명 마젠타노 제국과 앙부아즈 왕가 사이에 외교적 분쟁이 생겨나겠지. 쟈빌론을 관리하지 못한 앙부아즈 왕가에 책임을 묻겠지. 갈등이 피어나고, 그 갈등에 관심이 쏠린 사이에 자신은 종적을 감출 시간을 충분히 얻겠지.
애초에 그걸 노리고서 쟈빌론을 도구로 쓴 것이니까.
'그렇지? 황태자의 흑발 호위.'
아난샤는 도약을 준비하며 눈길을 슬쩍 돌렸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잡아두고 있던, 한쪽 귓불마저 베어낸 흑발 호위를 노려보았다. 이제는 황제의 약속 때문에 자신을 건드릴 수 없으리라고 확신하며. 도망치는 순간에 비웃음을 날려 주리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오산에 불과했다.
데미안을 향해 눈길을 돌린 아난샤. 그는 시야 가득, 자신을 향해 검집째 날아오는 데미안의 검격을 목격하여야 했다.
'어?'
나한테 검을? 휘둘러? 왜? 황제는? 약속은?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에 꽃다발처럼 활짝 피어나는 그 순간.
빠각!
허벅다리가 사라지는 충격이 엄습해 왔다.
"...!"
아난샤는 두 눈을 부릅떴다. 전신이 허공에 떴다. 세상이 옆으로 기울어져 보였다. 아니, 자신의 온몸이 뜬 채로 옆으로 넘어지고 있었다. 지면이 다가왔다. 맹렬하게. 자세를 잡고 대비할 틈도 없이.
콰당탕!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떡 벌어진 입에서는 소리도 나오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나 아파서. 특히나 검집으로 얻어맞은 다리가 숨도 못 쉬게 아파서. 전신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바르르 떨렸다.
'내, 내 다리...!'
사라진 건 아닐까.
사라진 거 같은데.
허벅지 아래가 느껴지지가 않는데.
그런데 아픈 건 왜지. 어째서? 날 공격한 거지? 황제의 약속은? 내 다리는?
'다리... 다리...!'
그는 버둥거리며 눈길을 내렸다. 덕분에 그제야 목도할 수 있었다. 자신의 양쪽 허벅다리가 90도로 가지런히(?) 부러져 있었다.
묵직한 고통은 한 발 늦게 찾아왔다.
"...그흡!"
열 손가락이 와락 오그라들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어야 했다. 다음 순간 아난샤가 절감한 것은 맹렬한 분노였다. 휴짓조각처럼 버려진 약속. 신뢰를 무참히 깬 상대의 불합리에 대한 마땅하고도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쳤다.
"화, 황태자아-! 어째서!"
그는 처절하게 외치며 황태자를 불같이 노려보았다.
라키엘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응, 불렀어?"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
황태자의 그러한 모습을 보는 순간, 아난샤는 깨달았다.
"...."
저 x끼.
상황에 따라 약속이고 뭐고도 없는, 나 같은 흑마법사보다 더 지독한 놈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