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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과연 라키엘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저기, 환자분? 여기 접수증에 써주신 내용 때문에 그러는데요. 성함이랑 연령, 아프신 곳 등등을 솔직하게 써넣어 주셔야 접수가 되는데 말이죠. 혹여 잘못 작성한 부분들 확인이 가능하실까요?"

"확인? 접수증 내용 말인가?"

"네."

"그거라면 정확히 적었다만."

"성함은 포르티스. 증상은 충수염. 그런데 연령을... 3,610세로 작성하셨는데 이게 정확한 내용이라고요?"

"대략 그렇다."

드래곤 포르티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을 미심쩍은 눈초리로 쳐다보는 접수창구 간호사의 시선을 받으며 슬쩍 웃어 보였다.

"내가 그것보단 좀 어려 보이나?"

245화. 본체 현신 (1)

'엄마, 전 왜 태어났어요?'

'위대한 종족의 일원으로 존재하기 위해 태어났단다.'

'아니, 그런 거 말구요.'

'그럼?'

'제가 태어난 궁극적인 목적 같은 거요.'

'그런 건 없단다.'

'어? 왜요?'

'넌 태어난 순간부터 완벽했고, 마지막까지 그러할 테니까. 존재 그 자체로 말이다.'

'왜요?'

'우린 원래 그런 종족이란다.'

'드래곤은 다 그런 거예요?'

'그렇단다.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정신의 가장 구석진 부분까지도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홀로 완벽무결한 종족이 우리란다.'

'그럼... 실수를 하는 건요?'

'그 실수조차도 완벽의 일부란다.'

'안 완벽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럼?'

'그렇단다. 그것이 우리가 지닌 축복이자 저주의 정체이지.'

...라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그랬는데.

분명히 그랬는데.

'어머니? 저, 완벽하다면서요?'

그런데 어째서 염증을 일으켜서 터지는 것만이 유일한 기능인 장기 따위가 제 몸뚱이에 달려 있는 걸까요. 어째서 그 맹장인지 충수 쪼가리인지 하는 것 때문에 제가 한낱 미물 같은 인간들에게 궁둥짝을 까 보여야 하는 신세가 된 걸까요.

'설마, 이것도 제가 완벽하기 때문인 겁니까!'

드래곤, 등갑룡 포르티스는 내심 온몸으로 절규했다. 기억 속 어머니를 향해. 물론 돌아가시진 않았지만, 어쨌건 어린 시절의 인자했던 어머니를 향해 진심으로 따졌다.

울고 싶었다.

충수염이라니.

고작 그것 때문에 대장 내시경인지 뭔지를 받아야 한다니. 이런 신세가 된 것을... 감내해야 한다니.

'용생 진짜.'

하드코어한 시궁창 속으로 처박히는 기분이 이런 것인가. 그는 드래곤 하트 가득 쑴펑쑴펑 피어오르는 자괴감을 애써 씹어 삼켰다. 그리고 겉으로나마 한껏 침착하고 오만한 표정으로 눈앞의 상대를 쳐다보았다.

그곳에 인간의 황태자가 있었다.

"정말로 잘 생각하셨습니다, 포르티스 님."

"...."

"많이 어려운 결정이셨을 겁니다. 부담도 많이 되셨을 테고요. 그러니 여기로 돌아오는 데에 시간이 필요하셨겠지요. 내시경이라는 거, 그게 원래 처음이 정말 어렵고 거부감이 심한 거라서 말입니다."

"...."

"그러니 그토록 학을 떼셨던 거, 유달리 특별한 반응은 아니셨습니다. 다들 그러시니까요. 그러니 너무 신경 쓰거나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로 중요한 건 따로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정말로 중요한 것?"

"예."

"그게 뭐지?"

"환자분, 포르티스 님의 건강해지는 모습입니다."

"...."

방긋방긋 웃으며 잘도 말하는 황태자.

그 모습에 포르티스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사실 별궁 한의원으로 돌아오는 건 정말로 쉽지가 않았다.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충수염을 제거하려면 대장 내시경이 최선이라는 이성적인 계산과, 시시때때로 확 몰려오는 수치심이라는 감정 사이에서 얼마나 번민했는지.

미물에 불과한 인간 따위는 결코 모를 것이다. 이해할 수도 없겠지.

하지만 포르티스는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이미 시술을 받기로 결심했으니까. 그래서 여기로 돌아왔으니까.

"어쭙잖은 칭찬이나 격려 따위는 필요 없다. 그런 건 빼고 해야 할 것부터 진행하면 좋겠는데."

"예, 물론이죠. 그럼 진맥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진맥?"

"예. 진찰을 하는 겁니다."

"내가 충수염이 있다고 네놈에게 알려줬을 텐데."

"그래도 확인은 해야지요. 혹시 모를, 자각하지 못하고 계실 합병증이 있을지도 모르는 거고 말입니다."

라키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실제로도 당연한 소리였다. 세상 어느 의사나 한의사가 환자의 말만 듣고 진찰이나 진단을 생략하겠는가. 그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드래곤 포르티스는 라키엘의 대답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지금 감히, 네놈은 내 말을 신뢰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자신은 완벽하다.

그런 종족이니까.

한데 고작 인간 주제에 자신의 말을 신뢰하지 않겠다니. 어이가 없었다. 물론 포르티스의 반응을 본 라키엘도 어이가 없어졌다.

"제가 왜 포르티스 님을 신뢰하지 않겠습니까? 신뢰합니다. 오히려 제가 묻고 싶습니다. 포르티스 님은 저를 신뢰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어?"

"저를 신뢰하지 않는데, 어째서 제게 치료를 맡기려 하십니까?"

"그건...."

"한의사로서 드리는 제 말도 좀 믿어주시죠. 어차피 저나 포르티스 님이나 피차 완벽한 존재는 아니지 않습니까."

"감히 무슨 말을. 나는 존재 자체로 완벽한 몸이다."

"그래서 맹장이 탱글탱글하게 부어서 절 찾아오신 거고요?"

"...."

"진맥하겠습니다아. 손목 주세요."

"...."

나는 완벽한 존재가 맞는데. 그걸 가볍게 증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맞는 건데. 한데 어째서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가 않는 걸까.

나... 완벽한 거 맞나....

포르티스는 새삼 영혼의 뿌리까지 착잡해지는 자괴감을 느끼며 손목을 내밀었다.

라키엘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진맥.'

내가 드래곤의 손목을 잡고서 진맥을 하는 날이 올 줄이야. 새삼 경이로운 기분을 느끼며 정신을 집중했다. 한편으로는 드래곤을 진맥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곧 스킬의 반응이 왔다.

딩동!

[진맥을 시작합니다.]

[스캔 중.]

[3... 2... 1...]

[진맥 결과 연산 중....]

[연산 중....]

[지직... 지지직....]

[지짖짖... 짖짖... 푸스스....]

'어?'

진맥 스킬이 중단되었다?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진짜로 스킬이 강제로 중단되었다. 마치 과열돼서 꺼져 버린 기계처럼, 귓가에는 익숙한 스킬 안내 음성 대신 연기 새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덕분에 멀쩡히 잘 있던 이쪽의 오장육부도 때아닌 난리가 났다.

딩동! 딩동! 딩동!

[지직거리는 요란한 소음이 오장육부를 자극합니다.]

[오장육부가 당신의 무분별한 스킬 사용에 항의하며 초인종을 연타합니다.]

[우리 모두 이웃을 위한 생활소음 감소에 동참합시다♡]

"...."

어쨌건 알겠다.

'혹시 진맥 결과가 안 나오는 건가?'

아마도 그런 듯했다. 그러고 보니 언뜻 짚이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포르티스를 마주 보았다.

"저기, 드래곤이시여?"

"음. 무슨 문제가 있나? 혹은 충수염 말고 다른 증상이 느껴지나?"

"아닙니다. 그건 아니고...."

"그럼?"

"혹시 지금 포르티스 님의 상태가 말입니다. 신체 내부의 마나 흐름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본체와 아주 많이 다른 상태인 거겠지요?"

"당연하지."

포르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대한 이 몸의 본모습을 보는 순간, 너 따위 미물은 두려움에 질려 바짓자락을 흠뻑 적시고 말 것이다."

"아 예...."

"그뿐일까.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이성이 잡아먹혀 바닥에 벌레처럼 엎드리고서 살려달라 빌겠지. 벌써부터 그 꼬락서니가 궁금해지는군."

"아 예에...."

라키엘은 대충 반응해주며 내심 확신했다.

'본래의 모습이 아니어서 진맥이 제대로 안 되는 거구만!'

알겠다.

그러고 보니 소설 마검황의 설정이 떠올랐다. 마검황의 드래곤도 여타의 다른 소설들과 비슷한 설정을 지니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폴리모프' 마법이었다.

'폴리모프. 일종의 초 고위급 변신 마법이지. 어떤 종족의 모습으로도 원하는 대로 변신할 수 있는.'

눈앞의 포르티스도 마찬가지다.

폴리모프 마법을 통해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 본질은 드래곤일 것이다. 그 엄청난 갭 차이, 괴리가 진맥 스킬의 오작동을 불러일으켰겠지.

그럼 결론은 간단하다.

폴리모프를 풀면 된다. 본체 상태로 진맥을 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건 당장 무지성으로 추진해선 안 될 일이기도 하다.

"우선 그럼, 황궁에 공문을 좀 뿌려야겠습니다."

"공문? 무슨 공문?"

라키엘의 말에 드래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인간, 진맥을 하겠답시고 설치더니 갑자기 공문이라니?

"아무 예고도 없이 포르티스 님의 본체가 별궁에 모습을 드러내면 그야말로 엄청난 난리가 날 테니까 말입니다."

"흐음? 역시 그런 건가? 이 위대한 몸의 위엄 때문에?"

"예. 아마도 황도 방위군에 총동원령이 내려지고, 전시에 준하는 계엄령이 내려지고, 식재료를 포함한 생필품 사재기 사태가 일어나고, 피난 행렬이 생겨나고, 경제가 흔들리고, 가정이 무너지겠지요."

"후후. 그게 이 몸의 위력이지."

"예, 그렇습니다. 그러니 하루만 시간을 주시지요."

"그쯤이야."

간단하게 포르티스의 양해를 구해냈다. 라키엘은 진맥을 잠시 미루고 시종장을 불렀다. 그리고 황궁으로 보낼 공문을 작성하게 하였다.

공문 내용을 들은 시종장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드... 드래곤이... 별궁 정원에 말입니까?"

"으음, 그대로 쓰면 돼."

"하지만, 전하?"

"왜? 경도 저 환자분의 정체가 드래곤이라는 건 알고 있을 텐데? 가르딘 경에게 들었을 거 아냐."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기겁을 해?"

"다름이 아니옵고, 거대한 드래곤이 정원에서 본모습을 드러내면...."

"그 결과 일어날 혼란이 걱정되는 건가? 그래서 공문을 쓰는 건데?"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그럼?"

"정원에 심어둔 귀한 화초가...."

"어?"

"그중엔 제가 이름을 붙이고 매일 아침마다 직접 물을 주는 화초도...."

"...."

"이름이 아나스타샤라고...."

"됐고. 시행해."

"...전하아!"

시종장의 애타는 절규(?)도 소용이 없었다. 공문이 얄짤없이 작성되어 초고속으로 황궁에 배달되었다. 황궁의 놀람도 잠시.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덕분에 다음 날 정오, 별궁 정원이 싹 비워졌다. 드래곤의 본체 현신을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황제 아스테리온이 그 모습을 확인하러 친히 움직였다.

"하온데 폐하, 괜찮으시겠사옵니까?"

이곳은 별궁 본관 옥상.

그곳에서 황제의 호위, 근위대장 로베르토 경이 물었다.

"이렇듯 모습을 숨기시기보다는 아래로 내려가시어 황태자 전하와 함께 참관하시는 쪽이...."

"아니 된다."

칼 같은 확신을 품고서 로베르토 경의 조언을 자르는 황제.

그의 단호한 말이 이어졌다.

"짐이 내려가 녀석과 동석하는 순간, 녀석은 기고만장해지게 될 것이야."

"하오나 폐하? 전하는...."

"그래. 알고 있도다. 그렇게 쉽게 자만할 녀석은 아니지. 하지만 그럴 여지를 조금이라도 주고 싶지는 않군."

"...."

"실은 어제, 녀석이 보낸 공문을 받았을 때는 실로 경악하였도다. 설마하니 녀석이 드래곤을 구워삶을 줄은 몰랐거든."

정말이었다.

물론 드래곤 환자가 별궁 한의원에 나타났고, 작은 소란을 피운 후에 떠났다는 보고를 며칠 전에 받기는 했던 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정도에서 끝날 줄 알았다. 설마하니 드래곤이 돌아오게 될 줄도, 정말로 별궁 한의원의 환자가 될 줄도 몰랐다.

'저 아이는... 어디까지 뻗어 가게 되는 것일까.'

어쩌면 자신은, 훗날 인류사에 길이 회자될 존재의 아버지로 역사서에 새겨지는 건 아닐까. 생각만 해도 날아갈 듯이 감격스러웠다. 보는 눈만 없다면 제자리에서 벙벙 뛰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였다.

자신이 이토록 붕 뜨는 기분인데, 당사자인 아들은 어떻겠는가.

"세상 어느 의사가 드래곤을 환자로 받아 진료를 해보았을까. 그런 위업을 세운 이가 또 누가 있을까. 없었도다. 적어도 짐이 아는 내에선 그러하지. 아마 녀석도 그런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터이고."

"그렇기에... 황태자 전하가 자만할 여지를 주지 않으시겠다는 뜻이시옵니까?"

"그래. 자만은 나태와 방종을 부르는 법이니까."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아들의 능력을 인정한다. 그렇기에 새로운 걱정이 생겨 버렸다.

아들이 자신의 출중함에 취해 버릴까 봐. 하여 성장이 정체되거나 그릇된 길로 빠질까 봐. 오직 그것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자꾸만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부모가 된다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었던가.'

걱정을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건가.

이게 부모가 된다는 것인가.

새삼스러운 실감을 느끼며 황제는 아래쪽, 별궁 정원을 굽어보았다. 그곳에 자신의 아들과, 드래곤으로 추정되는 사내가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황제와 별궁의 식구들이 보는 앞에서, 몸길이 120미터, 체중 6,500톤의, 초 경도 다이아몬드 180겹 엠보싱으로 이루어진 등갑을 지닌, 등갑룡 포르티스가 별궁 정원 시종장의 소중한 난초 '아나스타샤'를 쿠쾅 짓밟으며 본체로 현신하였다.

246화. 본체 현신 (2)

"아난샤. 당신은 정말 그걸 바라는 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마젠타노 황실은 강하오."

"알고 있습니다."

"그에 비하여 우리의 세가 한 줌도 되지 않음 또한?"

"역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끝내 뜻을 관철하겠다는 것이오?"

"물론."

아난샤라 불린 젊은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묵직하고도 진중한 동작으로. 자신을 향해 모인 5인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었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웃기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이오."

"우리가 이렇게 모여 있는 상황이 말입니다."

사내, 아난샤가 잔을 들었다. 잔에 담긴 맑고 향긋한 차가 한낮의 햇살을 일렁이며 반사했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 사이로 어린아이들의 재잘대는 소리가 흘러왔다.

소도시의 아름다운 정오.

봄날의 잔디밭과 피크닉 바구니.

조금 까슬거리지만 푹신한 돗자리.

거기에 삶은 달걀과 빵, 따스한 차가 곁들여진 회합을 나누는 여섯 명의 흑마법사라니.

"이렇게 안 어울리는 조합이 또 있을까요."

"하지만 어쩔 수 없소."

"알고 있습니다.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이게 최선이라는 것쯤은 말입니다."

사실이다.

흑마법사라고 하여 자정의 음침한 지하실에 검은 후드를 눌러쓰고서 모일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런 식의 티 나는 회합은 주의의 눈길을 끌기 십상이니까. 그럴 바엔 차라리 한낮에 모인 한량들의 야유회로 보이는 게 낫다.

"그걸 다 알고 있을 텐데, 뭐가 웃긴다는 거요."

"우리가 모여 있는 이 상황 자체가 말입니다."

아난샤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쓰리게 변하였다. 그가 차를 홀짝이고는 말했다.

"300년입니다."

"...."

"익히 알고 계시겠지요? 300년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론이오. 그걸 모를 수는 없겠지. 우리 중의 어느 누구라도."

"예. 마젠타노의 대토벌이 있었지요. 당시 열두 지파 중에 다섯의 맥이 끊겼고, 남은 일곱은 간신히 지하에 숨어 명맥을 남겨 우리에게 이어졌고 말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요."

"그중에 또 하나의 맥이 이번에 끊겼습니다. 다들 크라노스에서 전해진 소식을 들으셨겠지요?"

"황태자에게 토벌당한 강령술의 카르투 말이오?"

"예."

"그래서, 정말로 마젠타노에 맞서겠다는 거요?"

"예."

아난샤가 담백한 목소리로 답했다.

"한 번 일어난 사건은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두 번은 아닐 테니까 말입니다."

"...."

"왕국 시절에 한 번, 제국에 이르러 두 번째입니다. 마젠타노에게 두 번이나 토벌을 당했으면 이제는 우리도 슬슬 감을 잡아야겠지요. 우리와 마젠타노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지낼 수 없는 관계라는 걸 말입니다. 아니, 이 경우엔 다들 알고는 있었음에도 애써 무시해 왔던 진실이라 말해야 더 정확하겠군요."

"하지만 아난샤. 아까도 말했지만 마젠타노는 강성하오."

"압니다."

"...."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다른 이도 아닌 황실이 직접 나선 일입니다. 그중에서도 황족의 중심이자 미래인 황태자가 친히 나서서 카르투를 토벌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일까요. 과연, 다음 차례의 토벌이 없으리란 보장이 있을까요?"

"그건...."

"당장 다음 차례의 목표가 당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즈단."

"...."

하즈단이라 불린 흑마법사가 입을 다물었다. 아난샤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압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카르투, 그 작자는 홀로 지냈으니 당한 것이라 말하고 싶겠지요. 사실이긴 합니다. 그의 지파는 대대로 우리와 담을 쌓고서 지냈으니까. 그의 스승도, 스승의 스승 또한."

"맞소. 아난샤. 반면에 우리는...."

"예. 오늘처럼 아주 가끔 교류를 나누긴 하지요. 그렇다고 뭐 카르투와 다를 게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제부터 달라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뜻에 동참하라는 것이오? 정녕, 마젠타노를 함께 치자고?"

"예."

"...."

"두려우십니까?"

아무도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역시나 두려운 거다. 부담스럽겠지. 아난샤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잘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제안을 하나 하지요."

"제안...?"

"예. 제가 먼저 시범을 보이겠습니다."

"무슨 시범을 말이오?"

"먼저 마젠타노의 중심부를 치겠습니다."

"설마."

"예. 황도부터 시작해 볼까 합니다."

"...."

"만약 제가 거사에 성공하면, 그 후에도 살아남아 우리의 힘을 증명한다면, 그때에는 다들 제 뜻에 동참하시리라 믿겠습니다."

"알겠소."

5인의 흑마법사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난샤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따스한 햇살 아래 평화로운 어느 소도시의 잔디밭. 이곳에서, 라키엘이 행한 크라노스에서의 토벌에 의하여, 원작 마검황에선 발생한 적이 없었던 작은 눈덩이가 구르기 시작하였다.

쑥쓰럽다.

민망하다.

차라리 미친놈처럼 눈밭에서 알몸으로 데굴데굴 구르는 게 낫겠다.

세상에서 제일 단단한 드래곤, 등갑룡 포르티스는 내심 한숨을 내쉬며 작고 은밀한 자괴감에 휩싸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왕 모습을 드러낸 거, 위엄이 넘치는 상황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했다.

드래곤으로서의 자부심. 자신의 어마어마한 본체가 뿜어내는 위용!

그 앞에 두려워하는 미물들의 모습을 감상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웠다. 짜릿했다. 해도 해도 질리지가 않았다. 3,600년이 넘는 기나긴 용생 내내 그러하였다.

한데 오늘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신의 강림이라며 엎드리고 경배하는 초창기 농경 시대의 부족도, 난폭한 용에 맞서 고향을 지키겠노라 버둥거리는 고대의 전사도, 긴장된 몸짓으로 진형을 가다듬으려 애쓰는 군대의 모습도, 굴욕감을 참으며 보물을 바치는 드워프 왕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사방에서 들려오는 쑥덕거림이라고는....

'봐봐, 저게 드래곤이래.'

'우와, 크구만.'

'그런데 날개는 왜 없지?'

'대신 등껍질이 있는데? 거북이인가?'

'거북이는 개뿔. 드래곤이라잖아.'

'아니 그런데 왜 날개 대신 등딱지가 있냐고. 아 게딱지에 보리밥 비벼 먹고 싶네.'

"...."

다 밟아 죽이고 싶다.

포르티스는 다시금 한숨을 집어삼켰다.

드넓은 별궁 정원에서 본체의 모습으로 현신한 자신. 그런 자신을 구경하는 별궁의 시종, 시녀와 근위대원들. 저들의 이쪽을 향한 시선에는 놀람은 있을지언정, 공포와 경외의 감정은 별로 엿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황태자, 저놈이 미리 뿌린 공문 때문이겠지.'

포르티스는 자신의 앞쪽에서 알짱거리고 있는 자그마한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은발의 왜소한청년. 제국의 황태자 라키엘.

저 인간이 공문을 사방팔방 뿌려댄 까닭이다. 모월 모일 정오, 별궁 정원에서 드래곤이 본체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니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놀라지도 말고, 어쩌고저쩌고 블라블라 하던 그 공문 말이다.

"...."

쯧.

그 공문 내용 때문에 김이 빠져 버렸다. 대저 인간이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뭔가를 확 접해야 놀라고 두려움을 드러내는 것들인데. 한데 이쪽의 존재를 미리 다 알아 버렸으니, 공포보다는 호기심과 흥미를 더 내보이고 있는 것이겠지.

'그게 황태자 저놈이 바란 상황일 테지만.'

본체 현신에 따른 소란을 최소화하는 것. 아마 그게 황태자가 바란 바겠지. 그래도 아쉬웠다. 한편으로는 굴욕적이었다. 마치 구경거리가 된 듯한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저기, 포르티스 님? 죄송한데 진맥하는 동안에는 움직이지 말아 주세요."

"계속 이렇게 가만히만 있어야 하나?"

"예."

"어째서?"

"저 아직 깔려 죽기 싫어서요."

"...알았다."

하여간 작고 나약한 인간이란.

포르티스는 라키엘의 진심이 서린 엄살(?)에 혀를 차고 말았다. 하지만 라키엘의 당부를 지켜주는 것은 잊지 않았다.

덕분에 라키엘의 드래곤 진맥이 조금은 수월해졌다.

'후아. 덩치가 커서 그런가. 이거, 진맥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라키엘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드래곤이 클 거라고 상상은 했다. 예상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보니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동물원의 코끼리? 영화에 나오는 공룡? 그것들 '따위'는 눈앞의 드래곤에 비하면 벼룩 수준일 것 같았다.

'이건 그냥... 생물체라기보다는 동네 뒷산 같은 느낌인데.'

실제로 그랬다.

진맥에 소요되는 시간 또한 그러했다.

딩동! 딩동동!

귓가에 계속해서 울리는 안내음.

그리고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

모두 난리가 나고 있었다.

[진맥을 시행하는 중입니다.]

[스캔 중.]

[3...2... 1... 1의 반... 1의 반의 반...반의 반의 반....]

"...."

느렸다.

느려도 너무 느렸다.

아마도 진맥 대상이 너무 크고 범위가 광활한 탓인 것 같았다. 덕분에 라키엘은 어린 시절 동네 학원 386 컴퓨터 A: 드라이브에 디스켓을 꽂아 넣고 게임 파일을 압축하던 시절 기다림의 미학과 향수(?)를 오랜만에 만끽해야 했다.

다행히 인내의 시간은 심하게까지 길진 않았다.

딩동!

마침내 결과가 나왔다.

[종합검진표]

[검진 대상 : 등갑룡 포르티스]

[종족 : 드래곤]

[성별 : 남자]

[연령 : 3,610세]

[체장 : 122 m]

[체중 : 6,513 t]

[혈액형 : Dk- Ⅲ]

[종합 소견 : 모든 부분에서 이상적이며 완벽에 가까운 신체입니다. 다만, 전형적인 충수염(appendicitis) 증상이 감지됩니다. 충수돌기 개구부가 확연히 폐쇄되었으며, 점막 하 림프소포(lymphoid follicle)가 과증식을 반복한 것이 원인으로 추정됩니다. 가급적 수술을 통한 신속한 절제로 증상의 진행을 막는 것을 강력히 권장합니다.]

"...."

역시나 충수염이 맞구나.

다행히 다른 합병증이나 주의할 질환은 없었다. 드래곤의 장기와 상담을 마치고 돌아온 오장육부의 보고 또한 그러하였다.

딩동!

[당신의 오장육부가 초월적 대상과 만나며 현타를 느끼고 있습니다.]

[심장 : 와... 씨....]

[허파 : 허... 파하....]

[대장 : 살면서 본 제일 거대한 똥덩어리였지 말입니다....]

[간장 : 나도....]

[위장 : 그렇게 큰 융털돌기도 처음 봤음....]

[콩팥 : 크고... 아름다웠어....]

[비장 : 막창자 꼬리도 탱탱하더만... 후우.]

"...."

아니, 진단을 하라고 미친놈들아.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어쨌건 진맥은 다행히 성공적이었다. 그는 개운해진 얼굴로 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다 됐습니다, 포르티스 님."

"진맥이 끝난 건가? 벌써?"

"예."

"그럼 이제 뭘 하면 되지?"

"조심스럽게 뒤로 돌아 주시면 될 거 같은데요."

"뒤로? 돌아? 왜?"

"사이즈를 측정해야 하니까요."

"사이즈? 무엇의?"

"대장내시경이 들어갈 입구(?)의 사이즈요."

"...."

"그걸 대강이라도 알아야 포르티스 님을 위한 전용 대장내시경을 제작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

"괜찮습니다. 아무 일 없을 거니 너무 걱정은 마시고요."

"...."

아니, 전혀 안 괜찮을 거 같은데.

확 그냥 다 죽여 버릴까.

아니면 이대로 도망칠까.

'내 위엄은... 어디로?'

포르티스는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아냈다. 칠성장어 승천댄스를 추며 증발하는 자존감. 3,600년 용생을 통틀어 처음 느껴보는 굴욕감과 수치심을 만끽하며 그는 문득 생각했다.

세상에서 병원이 제일 싫다고.

그리고 다음 날.

라키엘이 고안하고 설계한 드래곤 전용 대장내시경의 제작 발주를 받은 황실의 드워프 장인들이 눈물을 좍좍 흘리며 환호하였다.

드래곤에게 핍박받았던 먼 고대의 조상님들. 드래곤을 원수로 여겼으나 힘이 부족하여 설욕하지 못하였던 조상님들.

저희 후손이 드디어 해냈습니드아!

247화. 결전 병기의 위력 (1)

결전 병기.

국가적, 민족적, 종족적 운명을 건 거대한 전쟁에서 결판을 내기 위하여 사용하는, 최강 최후의 종결급 무기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 만큼, 고대 이후로 수많은 결전 병기가 역사의 페이지를 피와 오욕, 영광으로 장식하여 왔다.

인류 초창기 역사의 오버 테크놀로지 웨폰인 철제 무기. 동로마 제국의 액체 화학 병기인 그리스의 불. 냉전 시대를 거쳐 21세기까지 현재 진행형으로 군림 중인 핵무기까지.

물론 이곳 로라시아 대륙의 종족들도 비슷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드워프 종족에게는 유독 수많은 결전 병기가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최고의 대장장이가 100년의 세월 동안 두드려서 만든, 세상 어떤 물질이라도 베어낼 수 있는 극한의 검날이 있었다. 그러나 딱 한 번 드래곤의 비늘을 베어낸 직후, 빡친 드래곤의 딱밤에 의해 사용자와 함께 두 동강이 나는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 외에도 드래곤에 맞서도록 착용자의 전투력을 대폭 올려주는 기계 전투 갑옷, 드래곤의 습격에 대비하여 도시의 상공을 지키는 초대형 지대공 석궁, 드래곤의 일격을 능히 버틸 수 있는 거신의 방패까지.

그야말로 수많은 결전 병기를 만들어 낸 종족이 드워프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종족의 역사 초창기 시절부터 유독 드래곤에게 시달림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었다.

금광을 찾아내는 본능적인 재주가 있어서. 보물 세공에 뛰어난 재주를 지녀서.

드워프는 언제나 드래곤의 표적이 되었다. 속된 말로 하루가 멀다 하고 삥뜯기고 털리며 살았다.

물론 드워프라고 해서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나름 반항을 시도했다. 보석 세공에 뛰어난 손재주를 무기 개발과 제조에 발휘하였다. 덕분에 그들의 무기 제조 능력은 나날이 발전하였으며, 위에 나열된 수많은 결전 병기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드래곤을 상대로는 효력이 없었다는 게 비극이었지.'

황실 공방의 드워프 장인, 아일스 코기두스는 굵은 눈썹을 찡그렸다. 조상들이 겪어온 수난과 굴욕, 좌절의 역사를 되새길 때마다 절로 숙연한 심정이 들었다.

자신이 아버지에게 전수받은 망치질과 풀무질. 그 모든 대장장이 기술에 피와 땀으로 점철된 조상들의 드래곤 극복 의지가 깃들어 있음을 떠올리면, 사뭇 비장해지기까지 하였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 간신히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조상님들, 드디어, 저희가 해냈습니다."

그는 감격이 서린 시선을 들었다. 그의 말에 공방의 모든 드워프 대장장이들도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 그곳에 방금 탄생한 새로운 결전 병기가 놓여 있었다.

이전의 어떤 무기와도 달랐다.

일단 사이즈부터가 거대했다.

총 길이는 약 200미터.

그 형상은 장대한 뱀을 닮아 있었다. 앞머리는 둥그렇고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졌다. 최고의 유리 장인이 달라붙은 덕분에 두께가 지극히 균일하여, 모든 방향에서의 압력에 능히 버텨낼 수 있는 뛰어난 내구성을 갖추었다.

거기에 몸통은 어떠한가.

장장 200미터, 지름 3미터에 달하는 원통형 몸통은, 각각 5미터 길이의 관절 39개로 이루어져 지극히 유연하게 구불거리며 움직일 수 있었다. 또한 관절의 둘레에는 탄성이 좋은 금속 뼈대가 두루 쓰였기에, 어떤 각도에서든 충분한 강도를 보장할 수 있을 것이었다.

"동지들이여, 우리가 만든 결전 병기의 모습을 보게."

"코기두스 백년장님, 우리가... 해낸 것 같습니다."

"조상님들의 염원을 드디어 풀 수 있을 듯합니다."

"마침내... 우리가... 흐흑!"

드워프 장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눈시울을 붉혔다.

그 어찌 아니 붉히겠는가. 자신들의 손에서 창조된 무기가 마침내 드래곤을 마음껏 유린할 수 있게 되었는데. 장대한 드워프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드래곤의 입에서 앓는 소리를 끌어낼 수 있게 되었음인데.

"그런데 코기두스 백년장님?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으음, 물어보게."

드워프 장인들의 리더이자, 황실 대장간의 100년을 책임지는 백년장 코기두스가 동료 대장장이를 돌아보았다. 동료 대장장이가 물었다.

"생각해 보니 이번에 우리가 만든 이 결전 병기 말입니다. 완성이 되었음에도 아직껏 마땅한 이름을 붙이지 않은 듯하여서...."

"아, 이름이라. 그건 이미 전하께서 붙여 주셨다네."

"황태자 전하께서요?"

"으음."

코기두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랑스러운 감격을 담아서 말하였다.

"전하께서는 역사상 최초로 드래곤을 유린할 이 무기에, '대장내시경'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음이야."

"대장... 내시경...."

"뭔가 강력하면서도 오묘한 느낌을 주는 이름이로군요."

"일단 대장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니 과연 드래곤을 상대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무기라는 느낌이 확 듭니다."

"그럼, 이걸로 별궁에 모습을 나타냈다는 드래곤을 박살 내는 겁니까?"

"아마도 그렇겠지. 자, 그러니 어서 모이게! 어서!"

코기두스의 성화에 모두가 최신형 결전 병기(?) 대장내시경 앞으로 후다닥 모였다. 그리고 각자가 포즈를 취하였다. 그러자 인간 화가가 대장간에 들어왔다. 그러고는 캔버스를 펼치고 붓을 들었다.

대장장이들은 의아함을 느꼈다.

"저기, 백년장님? 또 궁금한 게 생겼는데 말입니다?"

"으음, 물어보게."

"저 인간은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며, 우리는 지금 뭘 하는 겁니까?"

"황도의 최신 유행을 따르는 중일세."

"유행...이라니요?"

"쯧쯧. 자네들은 아직도 못 들어보았는가? 인증샷 말일세. 인증샷."

"예에?"

"황태자 전하의 별궁에 입원했던 귀족들이 한의원을 떠날 때마다 이런 걸 남긴다더군. 병이 완쾌되어 퇴원하는 순간을 기념으로 남기기 위해서 말이야. 그러니 우리도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마침내 드래곤을 제압할 결전 병기를 완성한 이런 뜻깊은 순간이라면 더더욱 말일세."

"...아!"

"그런 뜻이!"

"결전 병기와 우리의 기념비적인 모습을 종족의 역사에 대대로 남기실 생각이신 거로군요."

"역시... 백년장님다우신 안목!"

와글와글, 바글바글, 들뜬 드워프 장인들이 해맑게 웃으며 대장내시경과 더불어 인증샷을 남겼다.

그날 오후, 완성된 대장내시경이 마침내 별궁 정원으로 배송(?)되었다. 그 과정과 모습 또한 지극히 장관이었다. 무려 40대의 특대형 수레가 동원되었다. 기다란 대장내시경을 싣고서, 열차처럼 줄줄이 연결된 수레 행렬이 황도 시가지를 가로질렀다.

황궁 대장간에서 별궁까지.

수많은 구경꾼과 호사가들의 시선을 받았다. 별궁에서 기다리던 라키엘은 생각보다 훌륭한 퀄리티의 내시경에 방긋 웃었다. 그걸 본 드래곤, 등갑룡 포르티스의 행복지수가 음차원의 영역으로 추락하였음을 물론이었다.

"저걸... 내 몸에 넣는다고?"

"예, 포르티스 님."

"그게 가능할까?"

"당연하지요."

"정말?"

"예."

"...."

좀 아니라고 해주면 안 돼?

포르티스는 애타는 시선으로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내키지 않았다. 항문을 통해서 수술을 진행할 기구를 넣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뜨악했지만, 막상 자신의 궁둥짝을 유린할 실물을 보게 되자 더더욱 거부감이 심해졌다.

정말로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대로 도망치고 싶었다. 과연 자신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냥... 충수염이 좀 짜증 나게 아프고 계속 회복마법을 걸어서 터진 자리를 메꿔야 하지만... 저딴 걸 내 몸에 넣을 바엔 그냥....'

이대로 좀 불편하고 아프게 사는 게 낫지 않을까, 라는 자괴감이 실시간으로 전두엽 대뇌피질을 콕콕 쑤셔왔다.

그러나 이미 너무 멀리(?) 온 마당이었다. 눈앞의 인간이 자신을 위해서랍시고 저런 비싼 기구까지 만들어 버렸으니, 이제 와서 싫다고 내뺀다면 무슨 욕을 먹겠는가 말이다.

'게다가... 지금 와서 도망치면 내가 겁을 먹은 거라고 생각하겠지?'

황태자를 비롯한, 이번 일을 아는 모든 인간이 그렇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건 더 싫었다. 자신은 위대한 드래곤이었다. 한데 한낱 인간과 드워프가 만든 도구 따위에 겁을 먹고 도망쳤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차라리 죽고 말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니... 이제는 도망칠 수 없다. 너무 늦어 버렸다.

'젠장... 젠장!'

외통수에 몰려 실시간으로 허물어지는 멘탈을 부여잡았다. 하지만 그의 멘탈을 더욱 와르르 흔들어댈 사실이 더 남아 있었다.

"어차피 저 대장내시경을 통해서 저와 데미안, 가르딘 경이 포르티스 님의 대장 내부로 들어갈 거니까 말입니다."

"...뭐?"

"...예?"

"...네?"

라키엘의 폭탄선언.

그걸 들은 포르티스와 데미안, 가르딘 경의 눈빛이 다 함께 손잡고 멸망의 세레나데를 불러제끼듯 몹시 흔들렸다.

제일 먼저 반문을 꺼낸 이는 포르티스였다.

"저기, 잠깐만. 내가 방금 뭔갈 잘못 들은 거 같은데."

"저와 데미안, 가르딘 경이 대장내시경을 통해서 포르티스 님의 내부로 들어갈 거라는 이야기 말인가요?"

"어. 그거."

"제대로 들으셨는데요."

"...어째서!"

포르티스가 빼액 외쳤다.

라키엘이 뭘 그리 놀라냐는 듯이 대꾸했다.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포르티스 님의 육체는 너무나 완벽하고 무결하며 튼튼해서, 외부에서는 결코 상처를 입힐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비늘을 가르지 못하고, 개복 수술을 할 수가 없으니까 항문을 통해서 내시경을 넣는 거고요."

"아니, 그러니까 내시경은 그렇다 치고, 너희는 왜...."

"사람이 들어가야 수술을 하지요. 탱탱해진 충수를 절제해서 떼어내야 할 것 아닙니까."

"...."

"게다가 여기 가르딘 경은 외상 관리와 수술에 관해서는 저보다 훨씬 뛰어난 의사입니다. 믿고 맡기셔도 될 겁니다."

라키엘이 흐뭇하게 웃으며 가르딘 경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덕분에 가르딘 경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저기, 전하...?"

"응?"

"꼭... 이 방법이어야 하는 겁니까?"

"으음? 뭐가? 왜?"

"아니, 그게, 꼭 드래곤... 님의 뱃속으로 직접 들어가야 하는 건지가 궁금해서 말입니다?"

"당연히 들어가야지."

"그렇지만...."

"그렇지만 뭐. 방금 내가 포르티스 님한테 해드린 설명을 들었을 텐데."

"예...."

"그럼 이유는 충분히 알겠네."

"...."

"게다가 생각해 봐. 가르딘 경? 이번 기회에 인류 최초로 드래곤의 항문에 들어간 사람으로 역사서에 길이 남겨지...."

"...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아아!"

가르딘 경이 눈물을 뿌리며 진료실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의 텅 빈 자리만큼 진료실이 순식간에 숙연(?)해졌다.

데미안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저, 퇴직...."

"하지 마."

"...."

"하기만 해봐, 아주."

"...."

데미안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잠깐이나마 진심으로 생각했다. 드래곤 항문 돌입조라니. 그럴 바엔 차라리 마계왕을 확 깨워 버릴까. 온 세상이 멸망하면 자신이 드래곤 항문으로 들어갈 일도 사라질 테니까. 어쩌면 그게 낫지 않을까.

'인생 진짜.'

데미안의 한숨이 깊어졌다. 그걸 보는 드래곤 포르티스의 눈빛이 우수에 젖었다.

'용생 진짜.'

...그렇듯, 라키엘의 거친 생각과, 모두의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드래곤의 회한 가득한 번민 속에서 마침내, 역사적인 드래곤 대장내시경 시술이 Ang 하고 시작되었다.

248화. 결전병기의 위력 (2)

"자기야, 앙?"

"아앙."

"꺄르륵-!"

"...."

흑마법사 아난샤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국의 황도 마젠타. 이 역사적인 도시에 첫발을 디딘 유의미한 순간에 들려온 저런 끔찍한 염장질이라니.

그는 약간의 원망이 담긴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방금 고농축 천일염을 팍팍 뿌려댄 커플은 어느새 인파 속으로 사라져 찾을 길이 없었다.

"쯧."

신경 쓰지 말자. 이제부터는 이곳에 온 목적에만 집중하자. 그는 새삼스럽게 다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이 황도 마젠타인가.'

드넓은 거리는 화사했다.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인종과 종족이 뒤섞여 다니고 있었다. 그야말로 대륙의 모든 인종과 종족을 다 모아놓은 전시장 같은 느낌. 과연 제국의 수도다웠다. 괜히 이곳이 '온 세상의 도시'라고 불리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 거사를 벌이려 한다.

"...."

아난샤는 자신이 지닌 힘을 떠올렸다. 다른 흑마법사들에게도 숨겨온 온전한 자신의 정체 또한 떠올렸다.

그러니 이제부터....

"말 좀 묻겠소."

아난샤가 한창 다짐을 곱씹던 도중이었다. 때아닌 물음이 그의 고막을 푹 파고들었다. 누가? 고개를 돌려보니, 2미터에 육박할 키의 거한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뭡니까?"

언제 다가왔지?

아난샤는 경계심을 품으며 거한을 살폈다. 자신 못지않게 멀리서 온 여행자인 걸까. 엄청나게 초라한 행색이었다. 제법 배를 곯았는지 볼은 푹 꺼졌으며, 옷도 군데군데 찢기고 해져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초리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또렷하고 형형했다.

거한이 물음을 던져왔다.

"사람을 찾고 있는데, 말 좀 묻겠소."

"사람을... 말입니까?"

"그렇소."

거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난샤는 자신도 외지인이며, 방금 황도에 도착한 거라고 말하며 물러나고 싶었다. 그런데 거한은 그럴 틈을 주지 않고서 다짜고짜 물음을 던져댔다.

"리한 군의관을... 아시오?"

"예?"

"리한 군의관 말이오. 통통하고. 빨간 머리에. 좀 건방지지만 이야기는 잘 들어주는 사람인데."

"그게... 누굽니까?"

"도망을 쳤소. 감히. 날 버리고."

"...."

"그래서 쫓아갔는데... 리한 군의관이 이만큼 커져서...날 패대기쳤소. 쿵쿵. 쾅쿵쾅."

"...."

"하지만 난 그를 원망할 생각이 없소. 그저 꼭 찾고 싶은 생각뿐이오. 아니, 반드시 찾아야 하오. 그가 머리를 쓰다듬어 줘야 두통이 사라지거든."

"...예에?"

무슨 소리일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데 거한은 더욱 이해 불가의 행동을 보였다.

"리한 군의관의 노래와 함께 말이오. 내 손은 약손~ 내 손은 약손~ 에헤이야~"

"...."

뭐지 이 미친놈은.

아난샤는 한 발짝 샤샥 물러났다.

"미안합니다. 그런 사람 모릅니다."

"하지만 저기...."

"다른 분한테 물어보십시오."

확실하다.

미친놈이 맞다.

괜히 말 섞어 주다간 골치만 아파질 것 같으니 무시하자. 결론을 내린 아난샤는 재빨리 거한과의 거리를 벌렸다. 인파 속으로 능숙하게 섞였다. 다행히 거한이 더 따라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제야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돌릴 수 있었다.

'쯧. 제국의 황도라서 그런가. 별의별 인간이 다 있군.'

참으로 성가시기가 그지없다. 그러니 얼른 거사나 준비하자. 권속들을 불러들이자. 거사를 통하여 다른 흑마법사들을 끌어들이고 장대한 계획의 주춧돌을 심자.

아난샤는 결심하며 황도의 대로를 가로질렀다. 물론 그는 까맣게 몰랐다. 방금 자신이 받았던 질문의 탐색 대상이 바로....

"리한 군의관... 별명이 황태자인 거 같던데."

아난샤를 놓친 거한, 한때의 반란자 쟈빌론이 아픈 머리를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수시로 혼탁하게 꼬이는 기억. 그러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단 하나의 강렬한 목표. 쟈빌론은 거리의 다른 행인들을 붙잡고서 똑같은 질문을 던져 대기 시작하였다.

"황태자여, 내가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도다."

"예. 물어보시지요, 위대한 드래곤이시여."

"꼭 이런 자세여야 하나?"

"예. 꼭 이런 자세여야 합니다."

라키엘이 당연하다는 듯 빵긋 웃었다. 그 웃음에 드래곤, 포르티스의 거대한 안면 가득 먹구름이 끼었다. 그는 불만스럽게 꼬리를 탕탕 흔들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재차 물었다.

"그러니까, 대장내시경이라는 걸 받기 위해서, 시술이 진행되는 내내 이런 수치스러운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고?"

"그래야 내시경이 안전하게 잘 들어가니까요?"

"...."

위험했다.

순간 납득할 뻔했어.

포르티스는 그 사실에 작은 비애감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유지하고 있는 이 '수치스러운 자세'를 새삼 점검하였다.

자신은 옆으로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 두 팔로 뒷다리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에 반해 꼬리는 한껏 뒤로 젖혔다. 덕분에 둔부가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나 버렸다!

"하지만 안심하세요. 환자분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이곳 정원에 출입금지령을 내렸으니까요."

"그런데 저것들은 뭐지?"

"아, 이제부터 시작될 시술을 도울 인원들입니다."

"저 많은 것들이? 전부? 족히 30명은 되는 것 같은데?"

"예. 저희 별궁 한의원의 훌륭한 간호사님들이지요."

"훌륭하고 자시고 간에, 어째서 저것들이 내 수치스러운 모습을 구경하게 되는 거지?"

"말씀드렸잖습니까. 시술을 도울 인원들이라고 말입니다."

"무슨 도울 일이 있다고!"

"도울 일이 많지요. 워낙 규모가 큰 시술일 거라서."

"하지만!"

"시술... 이제 와서 안 받으시려고요?"

"...."

"혹시 두려우신 겁니까?"

"천만에!"

포르티스는 울고 싶어졌다.

라키엘은 더욱 방긋 웃었다.

"네. 당연히 두려움 같은 건 없으시겠지요. 위대한 드래곤이신데. 시술 동의서도 손수 다 작성을 하셨는데."

"...."

"그럼 이제 시술을 시작하겠습니다?"

"...크흣."

"예?"

"아, 아니다. 빨리 시작하라."

"물론이죠."

"...."

음차원의 영역으로 쑴펑쑴펑 추락하는 포르티스의 행복지수!

그 사이, 라키엘이 눈짓을 주었다. 황태자의 눈짓을 받은 데미안과 가르딘 경의 행복지수도 장렬한 번지점프를 선보였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드래곤처럼 말대꾸를 해 볼 권한이나 배짱도 없었다.

까라면 까야 하니까.

그것이 직업인의 비애니까.

그래서 깠다. 걸치고 있던 외투를 까듯이 벗고, 특수복을 입었다. 아니, 그것은 옷이라기보다는 우주복이라고 불러야 더 어울릴 모습의 방호복이었다.

"으, 우읏."

미스릴을 비롯한 특수 금속. 거기에 갖가지 보호 마법이 덕지덕지. 황궁의 드워프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드래곤 대장내시경 시술용 특수방호복.

덕분에 20킬로그램이 넘어가는 묵직한 중량을 자랑했다. 나름 건장한 체격의 가르딘 경마저도 잠시 비틀거렸을 정도였다.

물론 라키엘도 예외가 아니었다.

'후아. 장난이 아니네, 이거.'

실제로 입어보니 전신이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걸 입지 않고서 드래곤의 창자 속으로 들어갔다가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르니까. 최악의 경우엔 소화액에 전신이 녹아 버릴 수도 있으니까.

라키엘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숨기며 고개를 들었다.

"그럼, 이제부터 시작될 시술에 앞서 다시금 주의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다 안다. 뱃속이 거북하게 느껴져도 움직이지 말라고?"

"예. 기억해 주시니 다행이로군요."

"넌 드래곤의 기억력을 뭘로 보는 건가."

"죄송합니다. 어쨌건 그럼, 시술을 시작하겠습니다. 우루스!"

라키엘이 신호를 보냈다.

대기하던 우루스가 화답하였다.

"누우우!"

콰르륵!

미노타우로스의 왕이 전신의 근육을 불끈거리며 대장내시경을 붙잡았다. 그 사이, 보호복을 착용한 라키엘과 데미안, 가르딘 경이 차례로 내시경 내부로 들어갔다. 아니, 탑승했다.

"시작해."

탑승(?)을 마친 라키엘이 엄지를 들어 보였다. 우루스가 화답하였다.

"누우-!"

쿠구구...!

우루스가 거대한 내시경 머리를 짊어졌다. 쿵, 쿵, 묵직한 걸음을 옮겼다. 그 걸음이 향하는 곳에 드래곤의 웅장한 궁둥짝이 있었다. 그 중심에 목표(?)가 보였다.

"누우!"

저곳(?)으로 찌르면 되는 거랬지.

우루스는 자신의 임무를 떠올리며 어깨 삼각근에 힘을 불끈 주었다. 내시경 머리를 한껏 치켜들었다. 조준했다. 앞으로 돌격하였다.

"누우우우우!"

쿠콰콰콰콰-!

전력으로 달려갔다. 한계까지 속도를 올렸다. 체중을 한껏 실어 내시경을 앞으로 찔렀다. 동그란 유리로 만들어진 내시경 앞머리가 드래곤의 항문을 단숨에....

"...!"

포르티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째서 눈가에 눈물이 흐르는 걸까. 용생은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만약 내가 궁둥짝에 힘을 주면, 내시경에 탑승한 황태자와 나머지 둘은 괄약근에 끼어서 죽는 인류 최초의 인간이 되는 걸까.

비애감과 함께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 사이, 슬라임 젤을 듬뿍 바른 내시경이 드래곤의 대장 내부로 쑥쑥 들어갔다. 드워프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내시경 몸체의 관절 구조 덕분이었다.

끼릭, 끼릭!

모든 방향으로 90도까지 꺾일 수 있는 39개의 복합 관절 구조! 거기에 동그랗게 만들어진 앞부분까지. 모든 요소가 시너지를 발휘하였다.

덕분에 구불구불한 창자 속에서도 유연하게 움직이며 경로를 찾아갈 수 있었다.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드래곤의 대장 속으로 역주행하며 거슬러 올라갔다.

물론 그동안 라키엘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전방 20미터 지점에서 좌회전!"

그는 내시경 앞머리의 유리를 통해 경로를 관찰했다. 경혈 스캐닝도 발동하였다. 목표물인 맹장, 충수를 찾아 눈을 번득였다.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경로를 정확하게 지시했다.

그의 지시를 받은 데미안이 외쳤다.

"좌회전-!"

데미안의 우렁찬 외침이 내시경 소리관을 타고 웅장하게 울렸다. 머나먼 뒤쪽, 내시경 바깥으로 전달되었다. 그러자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웨어울프 간호사가 귀를 쫑긋거렸다. 자신이 들은 외침을 다른 간호사들에게 전달했다.

지시대로의 조종이 즉각 이루어졌다.

"크르릉-!"

변신 상태의 웨어울프 간호사들이 대장내시경 꼬리 부분의 거대한 도르래를 힘껏 밀고 돌렸다. 도르래를 통해 발생한 기계식 동력이 내시경 관절을 움직이게 했다. 구불구불, 내시경 앞머리가 뱀처럼 움직이며 부드러운 좌회전을 선보였다.

그런 모두의 노력과 협동 플레이 덕분이었다. 드래곤의 대장 속을 전진하던 어느 무렵, 라키엘이 두 눈을 번득였다.

'...찾았다!'

경혈 스캐닝을 통해 보였다.

대장 벽을 따라 균일하게 흐르던 마나의 기세가 꼬이고 흐트러진 지점이 포착되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시뻘겋고 탱탱하게 부은 조직 일부가 보였다.

대장 안쪽에서 포착된, 충수로 통하는 맹관 입구였다.

그런데 막상 스캐닝을 통해 실물(?)로 보게 된 드래곤 충수의 모습이....

'어? 잠깐만. 저거, 왜 산삼이랑 똑같이 생겼어?'

확실하다.

진짜다.

딱 산삼이다.

그런데 크다.

그것도 x나 큰 산삼이다.

'이건 못 참지!'

라키엘의 눈알에 희번덕 탐욕이 촵촵 떠올랐다.

249화. 드래곤 대장내시경 시술법 (1)

'이건 못 참지!'

라키엘의 눈알에 희번덕 탐욕이 쑴펑쑴펑 치솟았다.

산삼은 비싸다.

산삼은 몸에 좋다.

어쨌건 그래서 산삼은 비싸다.

비싼 건 좋은 거고, 좋은 게 좋은 거다. 아무튼 좋다. 산삼이면 아무래도 좋아. 산삼이니까. 일단 생긴 게 산삼이랑 똑같으니까. 뭔가 비슷한 구석이 있겠지. 그러니까....

'게다가 드래곤 맹장, 충수잖아?'

문득, 한국에 있던 시절 종종 읽었던 무협 소설들이 떠올랐다. 요즘 최신 무협은 몰라도, 고전 무협을 보면 꼭 등장하는 '내단'이라는 놈이 있었더랬다.

영물이나 귀하고 영험하신 신비의 동물 등등을 잡으면 나오는 보상, 심장, 쓸개라든지 뭐 그런 것들 말이다.

어쨌건 그런 걸 주인공이 먹으면....

'내공이 몇 갑자씩 팍팍 늘어나고, 만독불침의 신체를 얻고, 환골탈태하면서 키 크면서 얼굴도 잘생겨지고, 기타 등등!'

어쩌면 눈앞의 저 탱글탱글하게 잘 익어... 아니, 부어 있는 드래곤 충수도 비슷하지 않을까. 드래곤이니까. 이곳 세상의 영험한 영물로는 최고봉인 존재니까. 그런 존재의 내장 쪼가리면 뭐라도 좋은 게 있진 않겠느냐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후우, 생각지도 못한 추가 소득, 나이스.'

어차피 수술로 떼어낼 충수다. 그걸 챙길 생각을 하자 야물딱진 웃음이 절로 빵긋 맺혔다.

"자, 그럼 연장, 아니, 수술 도구 챙기자고들."

그의 목소리에도 즐거운 각오가 팍 들어갔다. 반면, 데미안과 가르딘 경은 전혀 그렇지 못했긴 했지만 말이다.

"후우... 알겠습니다."

"예... 전하...."

터덜터덜, 비실비실. 모시는 분의 유별남 덕분에 팔자에도 없던 드래곤 창자 탐험(?)을 하게 된 두 사람이 한숨을 쉬며 도구를 주섬주섬 챙겼다.

하지만 라키엘은 개의치 않았다. 두 사람을 향해 오늘의 임무를 다시금 상기시켰다.

"잘 들어. 나가면 바로 상황이 시작될 거야. 드래곤의 소화액이 지독할 수 있으니 마음의 각오를 해둬야 해. 알겠지? 그리고 데미안?"

"예, 전하."

"네가 오늘 메스 역할을 해야 해. 알고 있지?"

"예,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반복해서 설명을 들었으니까요."

"그럼 다시 듣자. 내가 지시하는 부위를 따라서 신속하고 정확하게. 대량의 출혈이 일어나면 휩쓸려서 떠내려갈 수 있으니 절개 직후에 특히 주의하고."

"예, 전하."

"그럼 가르딘 경?"

"예에...."

"안색이 왜 그래? 무서워?"

"아닙니다, 전하."

"이미 여기까지 왔잖아. 자자, 힘내자고. 오늘 경의 손에 봉합과 뒷정리가 달려 있으니까. 긴장하지 말고."

"저기, 긴장이 아니라...."

"아니라?"

"소변이 좀... 마렵습니다."

"응. 긴장한 거 맞네."

"잠깐만 내시경 좀 밖으로 빼서 화장실 다녀오면 안 될까요?"

"응. 안 돼."

"어, 어째서 말입니까?"

"소변? 화장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힘들여서 넣은 내시경을 뺐다가 다시 넣겠다고 하면, 드래곤이 참 좋아하겠다. 그치?"

"...."

"차라리 그냥 지려. 그게 분노한 드래곤한테 밟혀 죽는 것보단 훨씬 나을 테니까. 게다가 그 방호복, 보기보다 방수도 엄청 잘된다?"

"...."

"안 새니까 안에서 말리면 아무도 모를 거야."

"전하?"

"응?"

"...아닙니다."

"방금 욕 하려고 그랬지?"

"아닙니다."

"이번에만 대답이 빠르다?"

"...."

"됐고. 그럼 시작하자."

세 사람은 내시경 2번째 칸으로 옮겨갔다. 그곳에 바깥 출입을 위해 특수 제작된 2중 해치 격실이 있었다. 우주선에서 외부로 나갈 때처럼, 격실로 들어갔다. 격실에서 내부로 향하는 출입문을 닫았다. 그 후에 외부 해치를 열었다.

콰르르르르!

외부 해치를 열자마자 드래곤의 대장에 가득 차 있던 소화액이 쏟아져 들어왔다. 하지만 이미 예상한 바였다. 셋은 당황하지 않았다. 격실이 소화액으로 가득 차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각자의 호흡을 점검했다.

'오케이. 이상 없고.'

내시경 실내와 방호복을 연결해 주는 굵은 생명줄. 그 속에 공기 순환 호스를 삽입한 덕분에 호흡에도 지장이 없었다.

"그럼 가자."

셋은 해치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대장 내부의 소화액은 흐름이 거칠지 않았다. 세 사람은 해저를 걷듯이 느릿하게 이동했고, 곧 대장과 맹관 경계 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라키엘이 데미안과 가르딘 경을 돌아보았다.

"이제부터 잘 들어. 여기부터 여기까지, 맹관으로 통하는 지점 전체를 절개할 거야. 그 후에는? 안쪽에서 절개된 충수 조직을 잡아당겨서 안으로 끌어올 거고. 봉합은 그 직후에 신속하게. 대장 내부의 물질이 복막으로 흘러나가지 못하도록. 알겠지?"

고개를 끄덕이는 데미안과 가르딘 경.

라키엘은 흡족하게 웃었다. 역시 이 두 사람이 제일 믿음직하다. 그러니 여기까지 같이 들어온 것이고.

"그럼 시작하자."

라키엘은 경혈 스캐닝을 발동하였다. 다시금 충수와 조직 일대의 기혈 흐름을 실시간으로 관측했다. 그렇게 수술의 전체적인 집도를 맡았다.

데미안이 검을 빼들었다. 그가 오늘의 메스였다. 날카롭게 벼린 검이 드래곤의 대장 내벽을 조준하였다.

그 옆에서 가르딘 경이 특수 사이즈 겸자를 비롯한 수술 도구를 착착 정리했다. 데미안의 절개 작업을 보조하며, 이후의 봉합과 뒤처리를 도맡을 준비를 마쳤다.

"절개하겠습니다."

데미안이 검을 움직였다. 라키엘이 알려준 절개 방향을 따라 신중하게 검을 그었다. 혹여나 너무 큰 상처를 내면 큰일이 날 테니까. 최대한 조심스럽게....

...태앵!

검이 튕겨 나왔다?

"어?"

데미안은 흠칫했다. 뭘까, 이 엄청난 반탄력은. 아니, 마치 한없이 질긴 가죽을 억지로 베려다가 실패한 듯한 이 손맛은.

"왜 그래?"

마침 황태자가 물어왔다. 데미안은 별일 아니라는 듯 빠르게 대꾸했다.

"아, 생각보다 대장 내벽이 조금 질긴 것 같습니다."

역시 드래곤이라서 그런가 보다.

보기보다 말랑하지가 않다.

'그럼 조금 더 세게.'

데미안은 다시 검을 그었다.

하지만....

태앵!

검이 또 튕겨 나왔다?

"...."

다시. 더 강하게.

지짖짓....

그제야 겨우 스크래치가 나기 시작하는 대장 내벽! 역혈의 심법을 동원해야 겨우 흠집이 나는 수준이라니. 말도 안 되는 강도였다.

'내장 조직마저 이렇게 단단할 수 있는 건가.'

과연 등갑룡이라고 불리는 드래곤다운 위엄(?)이었다. 데미안은 내심 혀를 내두르며 역혈의 심법을 전개했다. 거의 소드마스터 쟈빌론을 제압하던 때만큼의 힘을 가하였다. 그제야 검 끝이 대장 내벽을 몇 센티가량 파고들었다.

그때부터였다.

검을 찌른 채 옆으로 밀었다. 데미안의 팔뚝에 힘줄이 돋았다. 대장 내벽에 기다란 칼빵(?)이 새겨졌다. 1분에 30센티씩.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꾸준히.

그 순간이었다.

투캉-!

검이 부러졌다.

아니, 검 끝이 으스러졌다.

"무슨...."

데미안은 흠칫했다. 내장이 얼마나 질기면 1미터도 자르지 못했는데 검 끝이 으스러지고 뭉개지는 걸까.

하지만 그는 당황하지는 않았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여러 자루의 검을 챙겨왔으니까.

"가르딘 경?"

"으음. 받게나."

새 검을 받았다. 다시 절개 작업을 이어 갔다. 하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챙강!

1미터 남짓을 겨우 절개한 끝에 검이 부러지고 말았다.

"...전하."

"응, 나도 봤어."

"이제 검이 다섯 자루가 남았는데. 어떡하죠."

"흐음...."

라키엘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내심 철렁하는 낭패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거 난리 났네.'

두쿵두쿵, 심장이 실시간으로 16비트 봉산탈춤을 추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x 됐다는 예감이 친환경 차르봄바처럼 펑펑 터져 나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직 절개할 부분이 한참 남았는데. 이대로면 암만 봐도 검이 모자랄 거 같은데?'

딱 봐도 그랬다.

대략 견적(?)을 보자니 한 자루의 검으로 절개할 수 있는 길이는 대략 1미터 남짓. 남은 검은 5자루. 그러니 앞으로 절개 가능한 길이가 5미터쯤 될 거라는 소리다.

아주 신중하게 아껴서 써도 최대로 잡아야 6미터쯤?

그런데 그걸로는 택도 없겠다.

'당연하지. 저거 지금, 절개 깊이도 얕잖아. 스캐닝으로 보이는 대장 벽 두께를 생각하면 한참 모자라. 같은 자리를 최소 세 번씩은 더 절개해야 해. 그렇게 계산을 해 보면... 대략... 필요한 절개 길이는....'

얼추 12미터쯤 되겠다.

그러니까 결론은 명백하다.

'ㅈ됐다!'

라키엘은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메스 역할을 해 줄 검이 모자라다. 검이 없으면? 아무리 데미안이라도 절개 작업을 진행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면 결국?

'수술을 진행하지 못하고 대장내시경을 빼야 하는 참사가 생기는 건데.'

과연 그 사태(?)를 드래곤이 용납할까?

아니.

절대로.

'난리 났네.'

앞으로 진행될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착착 그려졌다. 너무나 뻔했다. 아무리 드래곤 포르티스가 관대하다고 해도, 이런 굴욕적인 시술을 또 받으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솔직히 지금 이렇게 한 번의 시술을 받게 한 것조차도 거의 기적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굴욕을 감수했는데도 시술에 실패하고, 목적은 달성하지도 못한 채로 내시경을 빼면? 아, 메스 역할을 해 줄 검을 모자라게 챙겨서 말입니다? 이번엔 잘 챙겼으니 다시 엉덩이 좀... 이라고 말하면?'

...과연, 드래곤이 관대하게 방긋 웃어 줄까?

아니.

천만의 말씀.

개빡쳐서 별궁 한의원을 가루로 만들지도 모른다. 생각지도 못한 파국 엔딩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메스로 쓸 검이 모자라서! 고작 그 이유 때문에!

'후우.'

라키엘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설마하니 내장 조직마저 이렇게 질기고 단단할 줄은 몰랐다. 그걸 예상 못 했다는 게 자신의 실수였다. 검을 더 챙겨왔어야 했다.

하지만 실수와 별개로 이미 닥친 상황이었다.

'여기서 뭐라도 해야 해.'

이대로 빼는 건 안 된다. 그렇게 죽도 밥도 안 되면 모든 게 끝이다. 다시는 드래곤의 신뢰를 얻지도 못할 것이고, 추가 시술을 못 할 것이며, 최악의 경우엔 드래곤의 원수로 찍힐 수도 있다.

그러니 무조건, 여기 이 자리에서 해결법을 떠올려야 한다. 만들어야 한다. 검이 없으면 손톱으로 긁어서라도.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어서라도. 뭐든지....

'잠깐.'

라키엘은 멈칫했다.

필사적으로 쥐어짜던 대뇌 전두엽 끄트머리에서 해법이 반짝, 떠올랐다. 그 해법의 정체는 바로.

'만년필!'

방패 만년설과 짝을 이루는 화염의 무구. 오늘 수술에서는 긴급 지혈용으로 쓰일까 싶어서 챙겨왔던 만년필에 생각이 닿았다.

그는 도구 가방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하였다. 최대한 섬세하게. 원하는 온도의 출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츠즈즉...!

만년필 끄트머리에 시뻘건 잉크가 맺히기 시작했다. 딱 봐도 엄청나게 뜨거워 보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잉크를 대장 내벽, 절개 부위에 슥슥 발랐다.

곧 반응이 왔다.

치이이익-!

지글거리는 불판 위에서나 날 법한 그리운(?) 소리와 함께, 대장 내벽 절개 부위가 살포시 익었다. 그걸 보며 라키엘은 추억의 한순간을 츄릅 떠올렸다.

'아, 막창 구워 먹고 싶다.'

동시에 한편으로 그는, 한국의 일상에서 얻었던 삶의 지혜 또한 떠올렸다. 아주 간단한, 한 번이라도 삼겹살을 구워 먹어 본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몸으로 체득하는 원리였다.

그건 바로....

"자, 데미안? 이제 다시 절개해 봐. 고기가 충분히 익었으니까, 아까보단 훨씬 쉽게 잘릴 거야."

250화. 드래곤 대장내시경 시술법 (2)

치이익!

불판 위에서 익어가는 고기 소리.

저 소리는 아름답다. 황홀하다. 육즙이 쫄깃쫄깃. 상상력이 쑥쑥. 절로 군침이 후룸라이드를 타고 식도를 초전도 펄스 패턴으로 안마하게 만드는 바로 그 향기와 맛, 소리!

하지만 고기를 구울 때는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심지어 그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고기를 자르는 순간이 밑줄 칠 정도로 매우 중요하다.

'중요하지. 잘못 자르면 고기가 너덜너덜해지고. 어 왜 안 잘려? 이러면서 막 뒤적거리다가 육즙 다 빠져서 퍽퍽해지고. 그럼 너무 아깝잖아.'

그러니까 고기를 자를 때는 한 방에 깔끔하게 잘라내야 한다. 그러자면 고기가 너무 덜 익은 상태에서 가위질을 시작하면 안 된다. 생각보다 고기가 질겅거려서 깔끔하게 잘리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지 않는가. 가위질하는 모습을 보면 고기 얼마나 구워 봤는지 견적이 딱 나온다고.

'즉, 고기를 자를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굽기의 정도.'

지금도 똑같다. 드래곤 창자도 따지고 보면 고기니까. 그런데 고기가 안 잘려? 칼이 안 들어가고 부러져? 그래서 수술을 못 해? 그럼 간단하다. 익히면 된다. 적당히 구워 버리면 서겅서겅 수겅수겅 잘도 잘릴 거다.

"...라는 원리인 거지. 어때?"

꿀꺽.

데미안과 가르딘 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혼돈에 휩싸인 목젖의 출렁임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눈빛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라키엘이 눈치채지 못할 빛의 속도로 눈빛을 샤샤샥 교환했다. 우리 황태자 전하, 괜찮으실까요. 괜찮다네. 원래 좀 이상했잖나. 아하 역시.

"다 보인다. 눈빛 나누는 거."

"...."

머쓱해(?)진 두 사람을 향해 라키엘이 말했다.

"이거 왜 이래. 고기 안 구워 봤어?"

"구워 봤습니다."

"그렇지?"

"예, 전하. 그런데-"

가르딘 경이 조금은 해쓱해진 낯빛으로 걱정스럽게 반문했다.

"이래도 괜찮을까요?"

"괜찮겠느냐니, 뭐가?"

"드래곤 말입니다. 지금 실시간으로 대장 조직이 뜨거운 열에 익어 버렸는데...."

"아, 이거?"

라키엘이 만년필의 뜨거운 잉크에 익어 버린 수술 부위를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렸다. 그의 입가에 별일 아니라는 여유로운 미소가 내걸렸다.

"괜찮아. 조금 따끔하겠지만."

"따끔...이요?"

"어. 우리한테는 엄청 크게 보이는 부위지만, 덩치가 언덕만 한 드래곤에게는 뾰루지 정도의 면적으로 느껴질 거니까. 아마 손등에 촛농을 떨어뜨린 정도일 거야."

"그, 그렇습니까?"

"어. 게다가 수술이 시작되기 전에 셀프로 마취 마법도 걸더라고."

사실이었다.

이쪽이 드래곤 포르티스에게 미리 당부한 일이었다. 대장내시경은 그저 살짝 거슬리는 감각으로 그치겠지만, 본격적인 충수 절제가 시작되면 제법 아플 거라고. 그래서 묻는 건데, 혹시 셀프로 마취가 가능하냐고.

드래곤의 대답은 '예스'였다. 완전한 마취까지는 아니지만, 국소적으로 감각을 둔화시키는 마법은 가능하다고 했다. 하여 마법 사용을 부탁했다.

"그래야 우리도 안전해지니까. 만약 수술의 통증 때문에 드래곤이 몸을 비틀어대거나, 드래곤의 대장 조직이 꿀렁거리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생각해 볼 사람?"

"...."

가르딘 경의 목젖이 상상력을 싣고 꿀꺽 움직였다.

"아마도, 음, 우리, 무사하진 못하겠지요?"

"분쇄되겠지."

"...."

"아마 최소한 아름답지는 못한 결과가 만들어질 거야. 그러니까 어쨌건, 이 정도 화상은 드래곤에겐 별일 아니니까 상관하지 말 것. 지금은 눈앞의 수술에 집중할 것. 알겠어? 데미안도?"

"예, 전하."

데미안은 다시금 검을 들었다. 호흡을 고르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절개가 중단되었던 수술 부위를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잘될까.

부디 검이 오래 버텨 주기를. 그리하여 황태자의 호언장담처럼 수술이 성공적으로 치러지기를.

바라며 신중하고도 과감하게 검을 움직였다.

그 결과는....

수걱!

"...!"

생각보다 검이 스무스하게 대장 내벽을 파고들었다. 물론 여전히 엄청나게 질기고 단단했지만, 아까보다는 아니었다. 아까가 바위를 검으로 힘껏 긋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삼나무 책상을 검으로 가르는 기분이 들었다.

즉, 어찌어찌 할 만해졌다?

'이게 될 줄이야.'

수술 부위를 절개하면서도 데미안은 내심 어처구니를 떨어뜨리는 웃음을 머금고야 말았다. 설마하니 수술 부위를 연하게 만들기 위하여 고기 굽기를 사용해 버리다니. 이토록 급진적이면서도 효율적인 방법을 떠올린 황태자가 새삼 정상적인 인간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게다가 황태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내 손은 약손~ 내 손은 약손~ 에헤이야↗"

급기야 아예 옆에서 수술 부위 근처를 두 손으로 쓰다듬으며 괴상한 노래를 불러 대기 시작했다. 예전, 앙부아즈에서 숱하게 듣고 보았던 그 괴상한 마취법이었다.

덕분에 집중력이 깨진 데미안은 칼질을 하다 말고 라키엘을 슬쩍 쳐다보아야 했다.

"뭘 봐?"

"...음, 그게, 지금 그 노래를 부른다고 하셔도 과연 소용이 있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약빨 있거든?"

"그, 그렇습니까?"

"당연하지. 그러니 너는 곱창... 아니, 창자를 썰거라. 나는 노래를 할 테니."

"...."

"뭐 해. 고고고."

"...."

신경 쓰지 말자. 정신 차리자. 데미안은 흔들리려는 멘탈을 힘껏 붙잡았다. 그리고 다시금 수술 부위 절개에 집중하였다.

썰고(?) 또 썰었다.

물론 마냥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익혔다 하여도 드래곤의 대장 내벽은 여전히 엄청난 강도를 자랑했다. 검이 부러졌다. 새로운 검을 다시 쥐었다. 또 절개했다. 부러졌다. 다시 새 검으로. 또. 땀을 흘려 가며.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검이 부러진 순간.

탱강!

"...."

데미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손에 들린 반쪽짜리 검. 이제 더는 남은 예비 검이 없는데. 설마 실패인 걸까. 여기서 끝인 걸까.

아니었다.

옆에서 들려온 황태자의 신속한 지시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절개 완료. 이제부터가 중요하니 빨리 움직여. 빨리."

정신을 차려보니 황태자가 예의 괴상한 노래를 중단하고서 재빠르게 손을 뻗고 있었다. 절개가 끝난 충수 조직을....

"잡고, 당겨!"

지시에 따랐다.

힘을 썼다. 당겼다. 거대한 뾰루지처럼 염증으로 탱탱해진 충수가 대장 안으로 확 딸려 들어왔다. 하지만 안심하기엔 일렀다. 황태자의 지시가 속사포처럼 이어진 까닭이었다.

"난 여기. 가르딘 경은 그쪽. 잡았으면 당겨서 맞물리게!"

황태자와 가르딘 경이 절개된 대장 내벽 양쪽을 잡아당겨 맞물리게 했다.

"데미안은 봉합용 바늘 들고! 찔러!"

외침의 뜻을 즉각 이해할 수 있었다. 드래곤의 내장 조직이 생각보다 질기고 단단하니, 가르딘 경의 힘으로는 봉합 바늘로 찌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즉석에서 역할을 바꾼 것이겠지.

그때부터였다.

데미안은 봉합 바늘을 들었다. 가르딘 경의 지시에 따라 차근차근 봉합을 실시했다. 다행히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조금 비뚤비뚤하긴 하지만, 옷을 바느질하는 것과 얼추 비슷하게 느껴졌으니까.

그렇게 어찌어찌 수술이 끝났다. 떼어낸 충수 조직을 대장내시경 끝에 고정했다. 내시경 안으로 돌아왔다. 물론 보호복을 벗을 수는 없었다. 보호복이 온통 드래곤의 소화액으로 범벅이 된 까닭이었다.

"갑갑하겠지만 조금만 참아. 나가서 물로 깨끗이 씻어낸 후에 벗어야 안전할 테니까."

"예, 전하."

...이렇게 다 끝낸 건가.

데미안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땀에 젖어서 이마며 얼굴에 온통 달라붙은 머리칼을 좀 떼어내고 싶었다. 솔직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웃음도 나왔다.

"오늘 저 없었으면 어쩌려고 그러셨습니까."

저도 모르게 곁의 황태자를 향해 툭, 내려놓듯이 물었다. 들어왔던 때와 반대 경로로 빠져나가고 있는 대장내시경. 그 안에 나란히 앉아 숨을 돌리던 황태자가 소리 없이 웃었다.

"글쎄."

"망하셨겠지요?"

"아마도?"

"인정하시는 겁니까?"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어? 저기 회충이다."

"...예?"

"못 봤어? 방금 엄청 크고 허연 회충 한 마리 지나갔는데."

"그런 게 있었습니까?"

"어. 있었어. 나만 봤나? 아깝다, 아까워. 우리 데미안, 진귀한 구경거릴 놓쳤네."

"그런 건 딱히 안 봐도...."

"살면서 드래곤 회충 직관할 기회가 얼마나 있겠냐."

"...."

그런 거 필요 없다니깐요.

데미안은 내심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입가에는 그와 반대로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곁에 있던 가르딘 경도 마찬가지였다.

"전하. 저도 궁금한 게 있는데 말입니다."

"응? 가르딘 경도?"

"예, 전하."

가르딘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은근슬쩍 진심을 담아서 물었다.

"저는 딱히 안 들어와도 지장이 없었을 것 같지 않습니까?"

"...."

"생각보다 한 게 별로 없는 거 같아서...."

"...."

"그런데 왜 데리고 오셨습니까?"

"어, 봉합할 때 써먹으려고?"

"정작 바늘은 카이엔 경이 잡았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봉합할 조직을 양쪽에서 잡아당겨 줬잖아? 나랑 같이."

"그건 딱히 제가 아니었어도...."

"...."

"저보다 힘세고 잘 당길 사람들, 별궁에 수두룩했을 텐데...."

"음, 그렇게 들어오기 싫었어?"

"아니,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아, 나와 함께 고난을 극복하는 게 싫었던 거구나. 그랬구나."

"아뇨, 그게 아니라...."

"뭐가 아니야. 맞는데."

"...."

"우리 가르딘 경, 그랬네. 그랬어."

"...."

궁지(?)에 몰린 가르딘 경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그걸 보며 라키엘은 소리 없이 흐뭇하게 웃었다. 사실은 가르딘 경이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자책을 하는 거겠지. 자신이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원래 봉합 담당이었으니까. 한데 그 역할을 데미안에게 맡겨야 했으니까. 아마도 미안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느껴졌다.

하지만 라키엘은 굳이 그걸 위로해 주진 않았다. 대놓고 그러면 나중에 가르딘 경이 혼자 더 자책할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그는 그냥....

"오늘 둘 다 수고했어."

툭 내려놓아 건네듯이.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무심한 듯하게 슬며시.

좌우의 가르딘 경과 데미안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역시 이런 방식이 낫다. 내심 흐뭇한 훈훈함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가르딘 경이 여전히 훌쩍이는 듯한 어조로 물어왔다.

"그런데 전하?"

"응?"

"그럼 이제 우리 말입니다. 드래곤의 항문에 돌입한 최초의 사람으로 역사서에 새겨지는 거겠지요?"

"어? 아마도?"

"크흑!"

"...."

그냥 그게 싫었던 거구나.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어, 음, 미안."

"...흐흑!"

"너무 그러지 말고. 수당 챙겨줄게. 보너스? 응?"

그 후로도 라키엘은 상심(?)한 가르딘 경을 한참 달래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내시경이 드래곤의 대장에서 완전히 빠져나오는 순간, 반가운 소리가 그의 귓가를 가득 채웠다.

딩동!

[세계사 등급 업적 달성!]

[당신은 세계 최초로 드래곤 대장내시경 맹장 수술을 성공리에 마친, 역사적 의료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이에 걸맞은 거대한 보상이 당신에게 주어집니다.]

251화. 내시경 시술의 후폭뿡 (1)

[세계사 등급 업적 달성!]

딩동!

'오?'

역시나.

기다렸다.

이 정도가 뜨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바보다. 그러니까 나는 바보인 거 같다. 설마하니 드래곤한테 대장내시경 시술을 해준 걸로 세계사에 이름이 떡하니 박히게 될 줄은 몰랐거든.

'이거 실화냐....'

라키엘은 실감이 나지 않는 눈길을 던졌다. 그 눈길을 따라 알찬 내용의 메시지가 야물딱지게 떠올랐다.

[당신은 세계 최초로 드래곤 대장내시경 맹장수술을 성공리에 마친, 역사적 의료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이에 걸맞은 거대한 보상이 당신에게 주어집니다.]

어떤 보상일까.

'아마도 보너스 수명은 아니겠지?'

그건 아닐 거다.

사람이 충수염으로 수술을 못 받으면 100% 죽지만, 드래곤은 다를 테니까. 실제로 포르티스도 충수가 터질 때마다 셀프 회복마법으로 버텼다니까. 그러니 이번 수술은 드래곤의 수명을 늘려줬다기보다는, 불편을 개선해준 정도라고 보아야겠지.

그러한 예상은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당신이 시행한 수술은 드래곤의 수명 자체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았지만, 기나긴 용생의 편의와 행복지수를 증진하는 데에 크게 일조하였습니다.]

[세계 최초의 드래곤 대장내시경 시술을 받은 환자 : 포르티스가 매우 큰 만족감을 느낍니다.]

[드래곤 포르티스가 당신을 용생의 은인으로 여깁니다.]

[드래곤 포르티스가 감사의 마음을 담아 당신에게 '드래곤의 가호'를 선물합니다.]

'음?'

드래곤의 가호라니?

저건 또 무슨 소리일까.

생소한 용어 앞에서 라키엘은 어리둥절함을 느꼈다.

'드래곤의 가호 같은 설정은 소설 마검황에서도 나온 적이 없었는데. 좋은 건가? 좋은 거겠지? 그럴 거야. 제발!'

일단 타이틀(?)만 보자면 제법 굵직한 보상의 냄새가 킁킁 느껴졌다. 기대감이 절로 빵빵하게 부풀었다. 과연 이어지는 내용은 그 기대를 충족해주기에 충분했다.

[<드래곤의 가호>는 드래곤이 타 종족에게 부여할 수 있는 최고의 명예 증서입니다.]

[<드래곤의 가호>는 드래곤이 공증하는 후원서이기도 합니다.]

[<드래곤의 가호>에는 크게 2가지의 특전이 주어집니다.]

[1. 방어적 권리]

[1-1. 이 가호를 받은 당신은 세상의 모든 드래곤에게 공격받지 않을 강력한 권리를 지닙니다. 이 권리는 가호를 부여한 드래곤, <포르티스>가 공인하고 보증하는 권리입니다.]

[1-2. 이 가호를 무시하고 당신을 공격하는 드래곤은 그 즉시 <포르티스>의 철천지원수가 될 것입니다. 또한, 세계의 모든 드래곤에게 중범죄를 저지른 공적으로 낙인찍히게 될 것입니다.]

'오오.'

나쁘지 않다.

일단 이걸 지니고 있으면 어떤 드래곤에게든 시밤쾅 하고 비명횡사 당할 일은 없겠다. 그럼 두 번째 특전은 뭘까. 이어지는 설명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거기부터가... 더 대박이었다.

[2. 권능 대여]

[2-1. 이 가호를 지닌 당신은 1개월당 1회에 한하여, 가호를 수여한 드래곤의 특정한 권능을 무상으로 빌릴 수 있습니다.]

[2-2. 당신에게 가호를 수여한 드래곤은 <등갑룡 포르티스>입니다.]

[2-3. <등갑룡 포르티스>는 용왕을 제외한 세계의 모든 드래곤을 통틀어 가장 튼튼한 신체를 지녔습니다.]

[2-4. <등갑룡 포르티스>가 당신에게 빌려주는 권능은 <금강불괴>입니다.]

[2-5. <금강불괴>의 권능을 발현하는 동안, 당신은 외부로부터의 그 어떠한 험난하고 흉악한 공격에도 상처를 입지 않는 절대적 방어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2-6. 권능의 대여 시간은 1회당 5분입니다.]

[2-7. 권능의 대여 쿨타임 기간인 1개월은 '보름달'의 월출을 기준으로 합니다.]

[2-8. 보름달이 뜨기 전에 사용하지 않고 남겨둔 권능은 다음 차례로 이월되지 않고 자동으로 소진됩니다.]

'...미친. 대애박.'

입이 쩍 벌어졌다.

요약하자면 딱 이거다.

'절대 방어 능력이네.'

1개월에 1회, 5분이라는 제한이 있지만... 적어도 권능이 발현되는 동안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피를 볼 일이 없게 됐다. 말 그대로 활용하기에 따라서 여벌의 목숨을 왕창 지니게 된 것이나 다름없겠다.

게다가 보상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딩동!

[당신은 드래곤 대장내시경 시술이라는 세계 최초의 사례를 통하여, 로라시아 대륙의 의료계에 기념비적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지금까지 로라시아 대륙의 외과 수술은 신체 외부로부터의 절개와 봉합에만 치중되어 있었고, 이것이 당연한 상식으로 통용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환자의 소화관과 복강 등의 내부로 삽입한 기구를 통한 내측으로부터의 수술'이라는, 이곳 세계에서 완전히 혁명적인 신개념을 선보였습니다.]

[이러한 업적은 비단 의료계뿐만이 아닌, 로라시아 대륙 인류의 역사에 길이길이 새겨질 것입니다.]

[당신의 이러한 기념비적 업적이 두루 인정되어, 명의 포인트(GDP : Great Doctor Point)가 수여됩니다.]

[162 GDP 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명의 포인트(GDP) = 264]

'후아.'

보상 폭풍이다.

이로써 GDP로 바꿀 수 있을 거짓말 이용권이 2장이 되었다.

'좋다, 좋아. 그런데 보상이 여기서 끝? 설마? 아니지?'

라키엘은 대만족의 미소를 지으면서도 여전히 탐욕의 눈길을 반짜닥 불태웠다. 그리고 은근슬쩍 대놓고 오장육부를 압박했다.

'어이? 뭐 해? 내가 이런 공적을 세웠는데 너희는 축하 같은 거 안 하냐? HP 없어? 응?'

그랬더니 역시나(?) 반응이 왔다.

딩동!

[강요에 떠밀린 당신의 오장육부가 마지못해 박수를 칩니다.]

[심장 : ...어휴. 굳이 안 그래도 줄려고 했는데.]

[허파 : 허허허... 퍼허헣....]

[대장 : 주고 싶다가도 대놓고 저러면 참 주기 싫어지지 말입니다ㅎ]

[간장 : 더러워서 주고 만다ㅋ 안 그래도 우리 사실상 24시간 풀근무인 것도 빡치는데ㅋㅋ]

[위장 : 난 그래서 이름도 개명할라고.]

[콩팥 : 개명? 뭘로?]

[위장 : 야그누스 수당리스 잔업키우스.]

[비장 :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심장 : 야잌ㅋㅋㅋㅋㅋ 미친놈앜ㅋㅋㅋㅋㅋㅋ]

[오장육부가 당신의 거대한 업적과 성과를 축하하며 2,5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18,400]

보고만 있어도 든든해지는 보상 보따리는 여기까지였다. 솔직히 오늘은 밥을 안 먹어도 계속 배가 부를 것 같다고 생각하며 라키엘은 고개를 들었다.

'게다가 드래곤 맹장까지도 통째로 챙겼고 말이지.'

어느새 드래곤의 항문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오게 된 내시경. 그 앞머리 유리창 바깥에 매달아 놓은 맹장이 보였다. 아무리 봐도 산삼이랑 똑같이 생겼다. 그럼 효능은 어떨까. 벌써부터 기대감에 심장이 두쿵두쿵 훌라춤을 추는 느낌이었다.

물론 넘어야 할 산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제 다 끝난 건가?"

내시경 해치 밖으로 나와서 보호복을 세척하고 벗자마자, 위쪽에서 묵직한 물음이 날아왔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한 목소리. 드래곤 포르티스가 호박색 거대한 눈동자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 끝났습니다. 혹시 아프진 않으셨는지요?"

"별로."

포르티스가 장대한 콧등을 잔뜩 찡그렸다.

"아프지는 않았는데... 아랫배가 거북하군. 제법 많이."

"당연히 그러실 겁니다."

"당연히?"

"예."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복부에 팽만감이 느껴지실 겁니다. 내시경이 장에 원활하게 들어갈 수 있도록 공기를 주입해서 말입니다."

"공기를...?"

"예. 여기, 내시경 앞머리에 작은 관이 여럿 보이실 겁니다. 이게 후방의 외부에 설치된 수동 공기 주입기, 풀무와 연결되어 있거든요."

"풀무? 그럼 설마 아까부터 웨어울프 간호사들이 눌러대던 손잡이가 바로...."

"보셨군요. 예, 맞습니다. 열심히 풀무질을 해서 포르티스 님의 장에 공기를 넣은 겁니다. 풍선에 공기를 넣듯이 말이지요. 그래야 내시경 시술이 편해지니까 말입니다."

사실이었다.

내시경 시술을 할 때 장에 약간의 공기를 주입해야 한다. 그래야 장 내벽이 달라붙지 않아서 내시경으로 장 내부를 제대로 관찰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그렇게 해야 공간이 확보가 돼서 장에 상처가 안 생기니까요."

"...그런 건가."

"예. 그래서 아마도 방귀가 제법 나올 겁니다."

"방귀?"

"예. 생각보다 좀 많이 나오실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제 여길 떠나실 테니 그건 별로 문제가 안 되겠지만요."

라키엘은 역시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드래곤에게서 뜻밖의 반응이 돌아왔다.

"여길 떠난다고? 틀렸다."

"예?"

저건 또 무슨 소리일까.

드래곤이 짧게 웃듯 콧김을 풍, 뿜었다.

"당분간 여기서 머무를 거다. 그걸 인간들은 '입원'이라고 하였던가."

"예에? 입원을요? 포르티스 님이, 여기 별궁에요?"

"그렇다."

"왜요?"

"왜긴. 내 장기 일부를 떼어냈지 않나."

드래곤의 시선이 내시경 앞머리에 매달린 자신의 맹장을 향했다.

"인간이 알지는 모르겠지만, 드래곤은 태어나면서부터 완전무결한 존재다. 즉, 신체의 모든 기관이 지극히 조화롭게 균형이 맞추어져 있다는 뜻이지. 그런데 오늘의 수술 때문에 그 조화가 흐트러졌다."

"아...."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건가?"

"예. 대략은. 오늘 수술로 장기 하나를 떼어냄으로서 마나의 조화가 흐트러졌고, 그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서 요양이 필요하다는 뜻이시겠지요?"

"정확하다."

"그런데 그 요양을 왜 굳이 이런 누추한 인간의 시설에서...."

"이곳이 제일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지."

"...예?"

"마나의 조화를 되찾기 전까지는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게 됐다. 다른 드래곤의 침입이나 습격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을 거라는 소리지. 그래서 여기가 제일 안전하다는 거다."

"어째서 말입니까?"

라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작 인간의 별궁인 이곳이 다른 드래곤의 습격으로부터 제일 안전할 거라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해답은 돌아오는 포르티스의 대답에 있었다.

"간단한 문제다. 용왕 베르키스 님이 선포한 '드래곤의 율법' 때문이지.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 어떤 드래곤도 합당한 명분 없이 타 종족을 수탈하거나 살육할 수 없도록 행동을 제한한 율법이다."

"그런 율법이 있었습니까?"

"뭐, 인간의 법과 비슷하다. 항상 올바르게 칼 같이 지켜지는 건 아니지. 하지만 적어도 여기처럼 유명하고 주목을 받는 곳이라면 그 율법을 어겨가면서 날 공격할 놈은 없을 거다."

"...아하."

그러니까 이 드래곤, 인간 제국의 황도 별궁인 한의원을 방패로 삼겠다는 거구만.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쁜 거래는 아닐 것 같다. 이쪽도 대가로 뭔가를 요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그럼 대신...."

"떼어낸 내 맹장을 갖겠다고?"

"...눈치채셨습니까?"

"아까부터. 내 맹장 덩어리를 볼 때마다 내비치던 탐욕에 찌든 시선을 어떻게 못 알아볼까."

"그럼...."

"가져라. 날 도와준 대가로 충분하다면 말이다. 어차피 내게는 의미가 없어진 덩어리이기도 하니."

"감사합니다!"

...득템!

쾌재를 부르며 딜의 성사를 외쳤다.

그렇게 드래곤 포르티스가 별궁 한의원의 입원 환자가 되었다. 다만, 그는 폴리모프 마법을 사용하지는 못했다. 신체 마나의 조화와 균형이 깨져서 당분간은 용언 마법의 사용도 조심해야 한다나.

"그럼 정원 한쪽에 드래곤의 신체로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드리겠습니다. 제일 넓은 잔디밭이면서도 주위가 야트막한 숲으로 둘러싸인 달구름의 별정원이 적당할 듯한데, 괜찮겠습니까?"

"뭐, 알아서 해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녁부터 방귀가 제법 많이 나오게 되실 텐데...."

"혹시 위력이 너무 클까 봐 염려가 되는 건가?"

"죄송합니다. 워낙 강력한 분이셔서...."

"아니, 괜찮다. 알아서 잘 조절하도록 하지."

"예, 감사합니다."

그 후로 내시경 시술 후의 주의점을 몇 가지 알려주었다. 그걸로 시술의 마무리 절차가 종료되었다. 쾌재를 부르며 드래곤 맹장을 챙겼고, 드래곤을 달구름의 별정원으로 안내했다.

모처럼 마음이 후련해졌다.

졸지에 떠맡은 드래곤 환자를 성공적으로 치료해서. 빵빵한 보상까지 챙겨서. 더는 걱정할 게 없다고 느껴졌다.

적어도, 한밤중에 지축이 흔들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콰아아아앙-!

"...!"

자정 무렵의 난데없는 대폭발.

별궁 한의원 정원의 부속 소영빈관 건물 한 채가, 포르티스의 폭풍 같은 드래곤 방귀에 휘말려 저 하늘의 별나라로 시밤쾅 사출되어 버리고 말았다. 반짝.

252화. 내시경 시술의 후폭뿡 (2)

내 몸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은 은근히 많다.

시외버스를 타자마자 하핫 터져라! 를 외치며 빵빵해지기 시작하는 방광, 하체 운동을 처음 해본 다음 날 계단을 내려가다가 나도 모르게 순정만화 여주인공 자세로 풀썩 쓰러지게 만드는 저질 다리, 수술 후의 가녀린 궁둥짝을 비집고 나오는 웅장한 방귀까지.

그리고 오늘 여기.

또 하나의 비련(?)의 주인공이 탄생하였다.

그의 이름은 포르티스. 방년 3,610세의 꽃다...우진 않은 드래곤. 본의 아니게 자신의 항문을 인간들에게 개방한 역사 최초의 드래곤. 조금 전까지의 그는 나름 편안한 잠에 빠져들어 있었더랬다.

오랜만에 배가 아프지 않았다. 수년째 앓았던 충수염의 고통에서 해방된 첫날 저녁은 이 어찌나 안락하던지. 매 순간 습관처럼 시전해야 했던 셀프 회복마법을 쓰지 않아도 되는 잠자리는 또 어찌나 홀가분하던지.

게다가 이곳은 인간 제국의 중심, 황도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별궁의 정원이었다. 그만큼 유명하고, 세간의 이목을 받는 곳이기에 안심할 수 있었다. 그 어떤 주도면밀한 드래곤이라 해도 이런 곳을 뒤탈 없이 침공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세상에서 더없이 안전하게 느껴졌다. 평소 자신과 으르렁거렸던 몇몇 드래곤이, 자신의 수술 회복기를 절호의 설욕 기회로 여길 것임을 생각하자면 더욱 그러했다.

이곳은 안전하다.

그리고 나는 편안하다.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그러한 안도감이 그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팽팽하던 신경이 느슨해졌다. 느슨해진 안락함이 방심을 불렀다.

그리고 방심이 참사를 만들었다.

쿠와아아아아앙-!

그것은 아무런 예고도 없는 대폭발이었다.

"...긋?"

모처럼의 편안한 잠에 빠져들어 있던 포르티스는 기겁해서 일어났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습격인 줄 알았다. 그만큼 엄청나게 웅장한 폭발음이었으니까. 몸을 누이고 있던 지축이 흔들렸을 정도였으니까.

'어디지? 감히. 누구냐.'

순식간에 되찾은 팽팽한 긴장감. 적당한 경계심 속에서 포르티스는 날카로운 눈빛을 번득였다. 감히 이곳까지 자신을 찾아온 대담한 적을 찾아내려 전신의 근육을 활성화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꾸르륵?

아직 적을 찾지도 못했는데 돌연, 아랫배에서 이질적인 소리가 났다. 묘하게 배가 부글거리는 불쾌감. 거북한 느낌. 마치, 뱃속에 천둥이 도사리는 기분.

'뭐지?'

포르티스는 의아함을 느꼈다.

3,600년이 넘는 용생에서 처음으로 겪어보는 종류의 이질감이었다. 어리고 어설프던 시절 마력 운용을 하다가 드래곤하트의 마나가 꼬였을 때도 이런 감각은 느껴보지 못했는데. 그런데 어째서 하필이면 누군가의 습격이 있는지도 모를 순간에 아랫배가 이러는 걸까.

...라고 생각하려던 무렵.

그는 느꼈다.

자신의 궁둥짝 골짜기 사이에서 용솟음치는 대폭풍의 칠성장어 승천댄스 회오리를.

쿠콰아앙아아앙!

"...!"

막을 수도 없었다.

참을 새도 없었다.

어? 하는 사이에 터져 나온 막대한 폭풍이 후방에 있던 모든 것을 휩쓸었다. 파릇파릇 자라나던 미래의 희망 같던 수양버들도. 어느 까치 부부가 오순도순 만든 둥지도. 그 언젠가 사랑스러운 어린이들이 소원 새긴 자갈을 던져넣은 아담한 연못도.

그 모든 소중하고, 사랑스럽고, 포근하던 것들이 머나먼 저 하늘의 별나라로 사출되었다. 드래곤의 괄약근이 부주의하고도 힘차게 내뿜어낸 방귀 한 방에 의해서.

"무, 무슨...?"

포르티스는 대단히 당황하고 말았다. 그는 멍해진 눈초리로 폐허가 되어 버린 후방을 돌아보았다. 믿기지가 않았다. 꿈이라도 꾸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때로 현실은 악몽보다도 잔인(?)한 법.

...꾸르르륵?

"크읍?"

또다.

또 아랫배가 부글거린다. 묘하게 치닫는 불쾌감. 거북한 느낌. 뱃속에서 천둥의 잎사귀가 자라나는 파멸적 예감. 그리고 또....

콰아아아아앙-!

"...어윽."

시원하다.

이것은 파괴의 쾌감일까. 혹은 방출이 안겨주는 해방감일까.

도저히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겠다.

'이게... 방귀?'

태어나서 처음을 뀌어보는 드래곤 방귀였다.

더불어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이 사태가 누군가의 습격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방귀가 만들어낸 재난(?) 상황이라는 것을.

그제야 뒤늦게 떠올랐다. 아까 낮에 인간의 황태자가 신신당부를 했던가. 대장내시경 시술 후에는 방귀가 많이 나올 거니까 참고하라고.

'큰일 났네.'

방귀라는 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아니, 그보다도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어떤 변명을 해야 완벽한 존재인 자신의 위엄과 품위를 지켜낼 수 있을까.

열심히 생각을 했다.

그러나 반응은 두뇌가 아닌, 괄약근이 먼저 했다.

뿌콰아아아아아앙-!

'어윽, 제발!'

포르티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참고 싶었다. 자신도 이러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그게 안 됐다. 아랫배와 괄약근이 말을 듣질 않았다.

마법?

쓰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수술로 장기 일부를 떼어낸 것이 불과 반나절 전이었다. 덕분에 아직 신체의 마나 균형이 엉망이었다. 마나하트에서 마력을 끌어내는 것조차도 쉽지가 않았다.

뿡쾅아가아캌아아쾅, 뿌다아아알갸!

"...."

아아, 눈가에 흐르는 뜨거운 이것.

이것이 눈물이라는 이름의 참담함인가.

몇 번의 시도를 반복했음에도 무심한 방귀는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그때마다 포르티스는 땅바닥을 넘어 행성 내핵까지 파묻히는 자존감의 쪼가리를 느끼며 소리 없이 울었고, 서서히 자포자기의 심정에 젖어들었다.

하여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누웠다. 옆으로 다소곳하게. 두 손으로 무릎을 끌어안고서. 궁둥짝은 그나마 부술 물체가 적어 보이는 곳을 향해 두고서. 준비된 사수로부터. 발사.

뿌다다다콰카쾅!

폭음 사이로 멀리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소리들. 황도의 밤하늘을 온통 채우는 한밤의 경보음. 인간들의 다급한 외침. 수술 후의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이니 다들 진정하라는 황태자의 목소리까지.

'이제는 나도... 모르겠어....'

그날, 방년 3,610세의 드래곤 포르티스는 기나긴 용생에서 처음으로 이슬 대신 눈물로 가슴을 적시는 촉촉한 밤을 보내어야 하였더랬다.

무심한 밤은 한층 깊었다.

더욱 무심한 괄약근은 밤새 뿌쾅 울었다.

"...미안하다."

"괜찮습니다."

"정말로 미안하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포르티스는 아침 일찍부터 자신을 찾아온 황태자를 내려다보며 깊고 진한 에스프레소 액기스 10톤을 원샷한 듯한 씁쓸함을 느꼈다.

"나 때문에 밤새 잠을 설쳤겠군."

"뭐, 자다가 깨는 건 저한테는 흔한 일입니다. 특히 최근엔 밤에 통풍 환자가 많이 찾아오기도 했고요."

"다른 이들은?"

"조금 뒤척였겠지요."

"...면목이 없군."

그리고 수치스럽다. 황도의 수만, 수십만에 달하는 인간들이 모두 자신의 방귀 소리를 밤새도록 감상(?)했을 테니까. 그 생각만 하면 당장에라도 극지방까지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렇다고 대놓고 수치스러움을 드러내는 포르티스를 애써 위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무심하게, 별일 없었다는 듯이 대하였다.

"그럼 이제는 좀 괜찮으신가요?"

"보다시피."

"네. 장에 찼던 가스는 무사히 다 빠져나온 것 같군요."

"...날 탓하지 않는 건가?"

"예?"

"망가진 정원 말이다. 건물도 한 채 날아갔는데."

"소영빈관 말입니까? 괜찮습니다. 어차피 사람이 없어서 인명피해도 없고. 마침 제법 낡아 있던 터라 허물고 다시 지을까 생각하던 중이었거든요."

"그, 그런가?"

"예. 오히려 철거 비용을 아끼게 됐으니 이것도 나쁘진 않은 듯합니다?"

"...."

그게 아닌 거 같은데.

포르티스는 더욱 침울해졌다. 그리고 문득 눈길을 돌렸다. 초토화가 된 정원 한쪽이 보였다. 그냥 아주 제대로 갈아엎었다. 바위고 나무고 뭐고 남은 게 없었다. 아예 당장 농사를 지어도 될 수준이었다.

"다시금 말하지만, 면목이 없군. 저 손해는 내가 반드시 배상하도록 하지."

"레어에 쌓아 두신 보물로 말입니까?"

"그렇게 해서 만족이 된다면."

진심이다.

인간에게 방귀로 민폐나 끼친 드래곤으로 기록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어떤 형태로든 이번 일을 황태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보상해주고 싶었다.

한데 그런 이쪽의 마음을 꿰뚫어본 걸까.

황태자가 냉큼 말했다.

"실은 제가 보물이나 금전은 이미 넉넉한 편이라서 말입니다. 가능하다면 다른 방식으로 보상을 받고 싶은데요."

"다른 방식?"

"예."

"말하라."

"포르티스 님에게서 채취한 맹장을 약재로 활용하는 법을 좀 알려주시죠."

"...."

"어제 수술을 마친 후에 제 환상종에게 부탁해서 성분을 분석해봤는데 말입니다. 글쎄 이게, 생긴 건 산삼인데 약성이 지나치게 강력해서 말입니다. 그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지나치게 강한 약은 독이나 다름없다고."

라키엘의 입가에 쓴웃음이 피어났다. 사실이었다. 어제 저녁이었던가. 뽀복이에게 부탁해서 드래곤 맹장의 성분을 분석했다. 분명 유효한 약 성분이 잔뜩 있었다. 그런데 너무 잔뜩이라서 문제였다.

"저걸 그대로 약재로 만들어서 사람에게 먹이면... 난리가 날 겁니다. 저 약기운을 견뎌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으니까요."

"허. 그래서 지나치게 강한 약성을 중화할 방법을 알려달라?"

"예."

"그건 간단하다."

포르티스가 피식 웃었다.

"고위급 뱀파이어의 송곳니를 갈아서 만든 가루를 넉넉하게 뿌리면 된다."

"...예?"

"뱀파이어의 송곳니는 거의 모든 종류의 독성을 해독하는 필터 역할을 하거든."

뜻밖의 대답에 라키엘이 멈칫하는 사이, 포르티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 흡혈귀들은 인간을 포함하여 온갖 사냥감의 피를 빨면서 다니지. 그런데 그 다양한 사냥감들이 전부 깨끗하고 맑은 피만 지니고 있을까? 아니. 당연히 아니야. 병에 걸린 놈, 중독된 놈, 혈액 자체에 유해한 성분이 있는 놈까지. 별별 사냥감이 다 있지."

"어... 그래서, 송곳니가 사냥감의 혈액에 있는 유해한 성분을 걸러내고 중화하는 필터 역할을 한다는 겁니까?"

"그렇지. 이해가 빠르군. 덕분에 뱀파이어의 송곳니 가루는 최고의 해독제로 불리지. 인간들은 잘 모르는 사실이겠지만."

"그, 그렇군요."

"그럼 너의 요구대로 내 맹장의 중화법을 알려줬으니, 내 방귀... 아니, 부주의로 인해 생겨난 정원의 피해 보상은 마무리가 된 것인가?"

"예, 뭐, 음, 그렇습니다."

라키엘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속으로 아차 싶었다. 설마하니 드래곤 맹장의 약성을 누그러뜨리는 데에 저렇게 초 희귀한 재료가 필요할 줄은 몰랐던 까닭이었다.

'하아. 망했다.'

차라리 보물이라도 달라고 할걸.

그는 쑴펑쑴펑 샘솟는 난감함 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 이 세계의 기반이 되는 소설인 마검황. 그 내용 속에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던가.

없었다.

아예 없었다.

뱀파이어의 뱀 자도 나온 적이 없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내가 뱀파이어를 볼 일 자체가 거의 없을 거 같은데. 그놈들 송곳니를 어떻게 구해?'

절로 막막해졌다.

기껏 엄청난 영약이 될 법한 드래곤 맹장을 얻었는데, 그걸 유용하게 써먹을 길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쯧. 아깝다. 배가... 아프다....'

어젯밤의 드래곤이 대장내시경 시술의 후폭풍으로 배가 아팠다면, 지금의 자신은 먹음직한 보상을 꿀꺽하지 못하는 갈망으로 아랫배가 살살 아파지는 기분이었다.

아쉬웠다.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런 기분이 며칠이나 갔다.

덕분에 이런 생각마저 살포시 들었다.

차라리 별궁 한의원에 치과를 신설하면 어떨까. 그럼 치아 건강에 관심이 많을 뱀파이어들이 알아서 찾아오지 않을까. 그러면 치료를 핑계로 살짝 썩은 송곳니 몇 개쯤 뽑아서 수집(?)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253화. 뱀파이어 변이증 (1)

"아욱!"

이곳은 황도 마젠타의 광장. 저녁노을이 드리우기 시작하는 시간. 한적한 광장 한쪽 구석에서 엄살 섞인 앳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별궁 한의원의 의사, 발렌티노는 문득 시선을 돌렸다.

어린아이가 입가를 감싸 쥐고 있었다. 그 앞에선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인이 싱글벙글이었다.

"욘석아, 엄살은. 자, 여깄다. 시원하게 쑥 빠졌지?"

"우으... 엄마?"

"응?"

"그거 송곳니 아닌 거 같은데."

"으응?"

"송곳니 말고 옆에꺼 뽑은 거 같은데."

"...."

잠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엄마가 실을 잘못 끼웠니 어쩌니. 에그머니 내 정신 좀 어쩌고 저쩌고.

그 모습에 발렌티노는 싱긋 웃고 말았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했다. 어제 저녁이었던가. 길었던 하루의 진료를 모두 마치고 쉬려는데 황태자가 자신을 불러서 말하기를....

"무슨 생각해?"

"...어?"

생각에 젖어 있던 발렌티노는 흠칫 놀랐다. 그는 자신을 째릿 쳐다보는 시선과 마주해야 했다. 함께 미래를 약속한 약혼녀의 샐쭉한 눈빛이었다.

"혼자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방긋방긋 웃어?"

"아, 그게...."

발렌티노는 멋쩍은 얼굴로 뒤통수를 긁었다.

"어제 전하께서 나와 상의하신 일이 있어서."

"또 한의원 이야기?"

"어, 응. 미안. 모처럼 오랜만에 만났는데 혼자 딴생각만 하고."

"괜찮아. 원래 그랬잖아. 말해봐요. 무슨 일이었는데?"

"그게, 전하께서 치과를 개설하고 싶다 하시더라고."

"치과?"

"으음. 치아와 잇몸 같이 입속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과라고 해야 하나."

"썩은 이를 막 뽑아내고 그러는?"

"응."

"혹시 그걸 당신한테 맡겨보시려는 걸까?"

"정확해."

발렌티노는 다시금 빙긋.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내가 원래 의료대학 시절부터 환자들의 치아 상태나 관리에 관심이 좀 있었잖아. 아마 전하께서도 그걸 눈여겨보셨던 듯해."

"그럼... 설마, 맡을 거야?"

"왜? 싫어?"

"고문 기술자 같아서."

"응?"

발렌티노는 깜짝 놀랐다.

약혼녀가 난감한 듯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당신, 이는 잘 뽑아줄 거 같긴 해."

"그, 그런가."

"응. 확실히."

약혼녀의 말에 발렌티노도 웃고 말았다.

"뽑을 때는 뽑아야겠지.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라."

"그럼?"

"제일 좋은 건 애초에 뽑을 일이 생기지 않게 관리를 하는 거지. 치석이 쌓이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섬세하게 긁어낸다든가. 혹은 충치가 생기는 초기에 그 부분만 갈아서 제거를 하고 그 위에 뭔가 단단한 물질을 씌워서 이후의 오염을 방지한다든가."

"하지만 당신, 의료대학에서 그런 이론을 주장했다가 비웃음만 받았었잖아?"

"맞아. 그런데 전하께서는 내 생각을 알아 주시는 것 같아."

"정말로?"

"응."

사실이었다.

지난 저녁, 황태자가 자신을 부른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노라 했다. 의료대학 시절에 제출했던 논문을 봤다면서. 치아 관리에 관한 그 논문의 내용이 인상적이었다면서. 그러니 별궁에 치과를 개설하면, 그곳의 과장이 되어 주지 않겠느냐 의견을 물었더랬다.

하여 자신은....

"생각 좀 해보겠다고 했어. 그래서 오늘 하루 휴가를 요청한 거고."

"그랬구나."

"응, 미안."

"왜?"

"내 고민만 잔뜩 늘어놓은 거 같아서?"

"무슨 소리야. 당신 고민이 내 고민인데. 안 그래요? 발렌티노 예비 치과장님?"

"치과장...이라...."

발렌티노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오래전에 잠시 꾸었다가 포기했던 꿈이 문득 떠올랐다. 사람의 치아를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분야를 개척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의료대학 교수 중에 치아 관리라는 분야에 관심을 주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었다.

하여 포기해야 했다. 좋은 성적과 졸업을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꿈을 가슴속에 묻어두었다. 그러다가 황태자와 엮이고, 어찌어찌 별궁 한의원에 취직하게 되었던가.

'그리고 황태자 전하에게... 엄청나게 혼이 나고....'

한 번은 자신을 찾아왔던 치매 할머니와 그 아들 환자를 냉랭하게 대하다가 황태자에게 딱 걸린 적이 있었다. 당시 얼마나 식겁했던지. 그리고 얼마나 반성하였던지.

그 후로 나름 열심히 지냈다.

환자를 성심껏 대하려 노력했다.

물론 그럼에도 오랜 꿈을 실현할 거라는 기대를 품은 적은 없었다. 아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치아 관리였으니까. 비현실적인 꿈이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게 달라졌다.

지난 저녁 황태자에게 받은 제안 덕분이었다.

'나,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솔직히 막상 해보려니 두렵기도 하다. 그래도 열심히 하면 길이 있지 않을까. 절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약혼녀를 집에 바래다준 이후에도 계속 그러했다.

'후우. 조금 더 걸을까.'

괜히 들뜨는 기분. 뭔가 싱숭생숭한 느낌. 밤공기마저 훈훈하여 썩 나쁘지 않았다.

하여 발렌티노는 황도의 저녁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어제 받은 제안과 자신의 오랜 꿈, 앞으로의 계획을 차근차근 정리하고 다져보았다.

한데 그렇듯 너무 생각에 몰두하며 걸은 탓일까.

터억!

그는 앞에서 걸어오던 사람을 미처 보지 못하고 본의 아니게 어깨빵(?)을 놓게 되었다.

"어엇? 죄송합니다."

황급히 사과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부딪친 사람이 이쪽을 보며 소리 없이 웃는데... 소름이 돋았다.

왜일까. 알 수 없었다. 어째서 눈이 마주치자 다리가 풀리는 건지. 기분이 멍해져서 저 사람을 따라 걸어가는 건지. 아무도 없을 골목으로 걷게 되는 건지. 나도 모르게 셔츠 목덜미 깃을 풀어놓게 되는 건지.

그리고 어째서....

"싱싱한 놈이로군. 내 주군의 권속이 되기에 충분함을 자랑스럽게 여기거라."

저렇게 말하는 상대의 송곳니가 유독 길고 날카롭게 번득이는 건지.

'왜?'

알 수 없다고 멍하니 생각하는 순간. 상대가 입을 벌리고 다가왔다. 나, 설마 깨물리는 걸까. 저릿하고 뜨거운 통증. 섬뜩한 소리가 목덜미에서 울렸다.

...콰즉!

섬뜩한 소리가 방패에서 울렸다. 저릿하고 뻑뻑한 통증. 나, 설마 얻어맞은 걸까. 황제가 검을 옆으로 돌리며 다가왔다. 그걸 멍하니 바라보는 순간.

"방어를 잊은 것이더냐."

황제의 준엄한 목소리가 달팽이관을 콕 쑤셔왔다.

"...!"

반사적으로 방패를 고쳐 들었다.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이 검을 뿌려오는 황제.

콰작!

'거억.'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방패를 지탱하는 팔뚝이 다시금 찌르르 울렸다. 이거, 혹시 팔뚝이 부러진 건 아닐까. 최소한 손목은 나간 거 같은데.

'만년설만 쓰다가... 오랜만에 그냥 방패를 써서 이런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이런 빡쎈 방어는 오랜만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이쪽을 봐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드래곤을 입원시킨 것도, 드래곤의 치료에 황실 대장간 백년장의 도움을 받은 것도, 짐은 모두 묵인하였도다. 수많은 대신들이 너의 안전과 황도의 안위를 염려하는 뜻을 내비쳤지만, 그 또한 모두 묵살하였도다."

담담한 말투.

그렇지 못한 검격.

쿼즉!

"...긋!"

다시금 방패를 타고서 팔뚝을 후려쳐 오는 충격. 그 사이로 계속 들려오는 황제의 질책. 아니, 대련을 빙자한 갈굼.

"짐이 왜 그러하였겠느냐. 너는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

"그, 그건...."

쿠작!

"...겍!"

"고작 이 정도에 호흡이 끊기어 변명조차 끝맺음을 못 할 정도였더냐?"

"그건 아니옵고...!"

"아니면, 짐의 검격이 지나치게 무겁더냐?"

"아, 아마도...."

"너의 어깨에 짊어지워진 책임은 더욱 무겁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겠느냐?"

"...."

와 씨.

진짜 할 말 없게 만드네.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 황제가 이렇듯 대련을 빙자하며 일방적 구타를 선물(?)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짐은 네가 정말로 잘못된 줄로만 알았도다. 한밤에 별궁이 있는 방향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던 때에는 말이다."

"...."

"그것뿐이었을까. 폭음에 뒤이어 거대한 버섯구름도 치솟았지. 심지어 지축까지 흔들렸도다. 오죽하면 짐의 침실 샹들리에마저 난데없이 몸을 떨어대었을까."

"저기, 그것은...."

"영락없는 대참사로 느껴지더구나. 심장이 떨어질 듯 날뛰고, 식은땀이 샘솟듯이 나고, 손아귀가 떨릴 정도로 두려웠도다, 짐은, 너를 잃어버린 것인가 하여."

콰앙-!

"...걱!"

저기, 계속 이러다간 지금 저를 잃으실 것 같은데요.

라키엘은 진심으로 외치고 싶었다. 한 번만 더 방금 같은 검격을 막다간 자신의 팔뚝, 혹은 손목 연골 어딘가쯤이 저세상으로 사출될 것 같다고.

하지만 차마 대꾸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보는 황제의 눈빛 때문이었다.

"다시는, 그런 걱정을 시키지 말거라. 알겠느냐."

"...."

"대답. 안 하겠느냐."

"저는...."

"그런 대답 말고."

황제가 검을 비스듬히 세워 자세를 잡았다. 날카로워진 그의 눈빛이 이쪽의 오른손을 향하였다. 정확히는 오른손에 쥔 검을 향한 것이겠지.

"그것으로 대답하거라."

"괘, 괜찮으시겠사옵니까?"

"물론."

대답을 듣자마자 움직였다. 검을 재빠르게 당겨 잡았다. 찌르기와 내리치기의 중간 궤도로 비스듬히 찍듯이 베었다. 누군가에게 배운 동작은 아니었다. 다만....

'복수다아!'

지금까지 두드려 맞은 울분(?)을 가득 담았다. 물론 검술에 숙련된 황제는 그걸 너무나 쉽게 막아냈다.

카캉-!

거대한 벽을 후려친 기분이었다. 검신을 타고 온 반탄력 때문에 순간 검을 놓칠 뻔했다. 동시에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쪽을 향해 아주 잠깐 내비친, 황제의 희미한 미소를. 그 속에 담긴 거대한 기쁨과 흐뭇함을.

"...."

아마 방금 일격을 통해, 내가 크라노스에서 얻은 마나하트를 느낀 거겠지. 그간 더욱 강력해진 마나써클의 존재 또한 느꼈겠지. 그렇기에 저토록 기뻐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나는....

'당신의 진짜 아들이 아닌데.'

이렇게 함부로 기쁨을 안겨 주어도 되는 것일까. 이것조차 기만이 아닐까. 일순간이었지만 양심이라는 이름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양심의 고통보다는 당장의 갈굼에서 벗어나는 일이 급선무였으니까.

하여 다소 뻔뻔하게 물었다.

"이 정도면 대답이 되었겠사옵니까?"

"한없이 부족하구나. 더욱 갈고 닦거라."

"...예."

"방패는 제법 다룬다만, 검격이 겨우 그따위여서야...."

"...."

"숙제라도 내어주어야 하겠느냐?"

"아니옵니다!"

당연히 절대 거절이다.

당장 별궁 한의원을 운영하는 것만도 바쁘니까. 모처럼 얻은 드래곤 맹장의 약성을 누그러뜨릴 방법을 궁리하는 것도 벅차니까.

'게다가 유일하게 알아낸 그 방법이라는 게,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고위급 뱀파이어 송곳니를 얻어야 하는 거잖아?'

솔직히 막막했다. 그런데 거기에 검술 훈련 숙제라니.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다행히(?) 황제도 반쯤은 빈말이었는지, 정말로 숙제를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더욱 다행스럽게도 대련을 빙자한 갈굼 또한 거기까지였다.

"하오면 저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사옵니다."

"아니 물러가도 될 터인데."

"공사가 다망하신 폐하의 시간을 더는 빼앗을 수 없사옵니다."

"짐은 오늘 별로 바쁘지 않다만."

"공사가 다망한 저의 시간을 더는 빼앗으실 순 없사옵니다."

"...."

"소, 송구하옵니다."

"쯧. 되었다. 물러가거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렇게 간신히 탈압박(?)에 성공했다. 도망치듯 황궁을 나섰다. 별궁으로 돌아가는 내내 마차 안에서 고민에 휩싸였다.

'그나저나, 고위급 뱀파이어 송곳니를 어디서 구하지?'

문득, 최근 드래곤 포르티스에게 들은 조언이 떠올랐다. 고위급 뱀파이어의 송곳니에는 자체 필터링, 독성 중화 기능이 있다고 하였다. 덕분에 드래곤 맹장의 지나치게 강한 약성을 중화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문제는 뱀파이어의 송곳니는커녕, 뱀파이어와 만나기도 쉽지가 않다는 점이었다.

'만나는 건 고사하고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거나 어깨빵 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할 거야. 그만큼 신비에 휩싸인 종족이니까. 소설 마검황에서조차 제대로 등장한 적이 없으니, 말 다 했지.'

난감했다.

이곳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가장 큰 무기가 소설 마검황을 읽었기에 지닌 '정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과제는 참으로 난해하고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니까 발렌티노가 내 제의를 잘 받아들이면 좋겠는데.'

별궁 한의원에 치과를 개설해보자고. 잘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그렇게 제의했다. 혹시나 치과가 흥하게 되면 치아 관리를 위해 뱀파이어가 알아서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 때문이었다.

물론 아직은 발렌티노에게 대답을 듣지는 못했다.

그런데 마침....

"음?"

별궁에 도착한 마차에서 내리는데 낯익은 이가 건너편에 보였다. 별궁 한의원 로비로 휘적휘적 들어가고 있는 하얀 가운의 뒷모습.

"발렌티노?"

마침 잘 만났다. 불렀다.

이쪽의 부름을 들은 걸까.

발렌티노가 멈칫했다. 이쪽을 향해 돌아섰다. 그런데 그 안색이 조금... 이상했다. 창백했다. 눈가엔 팬더와 의형제 먹을 수준의 다크써클이 가득했다. 몸살일까. 혹은 독감이라도 걸린 건가.

'뭐지?'

라키엘은 미간을 찡그렸다.

하루 이틀 사이에 확 수척해진 발렌티노의 모습을 보자마자, 오랜 시간 한의사로서 쌓아온 촉이 묘하게 꿈틀거렸다. 그 즉시 경혈 스캐닝을 발동해서 발렌티노를 관찰했다.

그런데 스캐닝 결과가... 심히 엄청났다.

맹세코 처음 보는 증상이었다.

굳이 표현을 하자면, 안구를 이태리타월로 박박 닦아보고 싶어지는 느낌이었달까.

254화. 뱀파이어 변이증 (2)

'뭐야. 이거 왜 이래?'

어이가 없다.

살다살다 이런 건 처음 본다.

라키엘은 마른침을 꿀떡 넘기며 안구에 힘을 빡 주었다. 경혈 스캐닝에 한층 집중하며 스캐닝 대상, 의사 발렌티노를 째릿 노려보았다.

키이이잉-!

다시금 떠오르는 관측 결과.

'이거... 정상인가?'

새삼스럽게 말하는 거지만, 경혈 스캐닝은 대상의 내부에 존재하는 경혈의 흐름을 낱낱이 관측할 수 있는 기술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관찰 대상으로 지정된 의사 발렌티노의 신체 내부 경혈의 흐름이 모조리 보였다.

그래서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거, 암만 봐도 존재할 수가 없는 흐름인데?'

온통 헝클어져 있었다.

마치, 파카 안주머니에 쑤셔 박아 놓고선 6개월쯤 까먹었다가 뒤늦게 발견한 유선 이어폰줄의 꼬임을 보는 것 같았다. 그만큼 난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게다가 그렇듯 꼬인 경혈 흐름의 범위도 엄청났다. 그냥 아예 전신의 경혈 흐름이 죄다 꼬여 있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손을 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을 만큼.

"...이봐? 괜찮아?"

원래 특이체질이었던 걸까.

아니면 뭔가 이상이 생긴 걸까.

발렌티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발렌티노가 힘없이 웃으며 예를 표했다.

"아, 전하를 뵙습니다...."

"전하는 무슨. 한의원 진료시간엔 원장님이지."

"아, 예...."

"그런데 괜찮나?"

"...예에?"

"어디 아프지 않느냐고."

"아, 저는... 그냥 오늘 좀... 멍합니다."

"멍해?"

"예...."

"어제 기껏 휴가 내고 밖에 다녀오더니, 그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 약혼녀 만날 거랬잖아."

"아, 예. 만났습니다...."

"혹시 차였어?"

"그건... 아닙니다...."

"그럼 왜 그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발렌티노는 멍하니 대답했다. 솔직한 사실이었다. 정말로 모르겠다. 어째서 자신이 이토록 몽롱한 것인지.

아침부터 이랬다. 눈을 뜨던 순간부터 내내 이러했다. 마치 먹지 말아야 할 독한 약이나 술을 잔뜩 들이켠 기분이었다. 숙취? 아닐 텐데. 난 어제 술 같은 건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진짜로 모르겠다. 어젯밤엔 그저 약혼녀를 만나고, 함께 걷고, 집에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홀로 산책을 조금 하다가... 하다가... 하다가....

'그 후엔... 어떻게 됐지...?'

흐릿했다.

아무리 떠올리려 애를 써도 도통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 뒤의 모든 일이 짙은 안개에 휩싸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생애를 통틀어 다시는 없을 듯한 지독한 몽롱함이 동반된, 그런 아침.

그런 이쪽을 황태자도 이상하게 여긴 걸까.

"잠깐 진맥 좀. 손 줘봐."

"예... 전하...."

시키는 대로 했다.

황태자가 손목을 짚어왔다. 잠깐 그러고 있더니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쓰읍. 진짜 이해가 안 되네."

라키엘은 난감함을 느꼈다.

딱 봐도 이상한 발렌티노의 안색과 분위기. 더욱 이상하게 보이는 경혈 스캐닝의 결과. 하여 진맥 스킬을 썼다. 오장육부 상담까지 했다.

그런데 결과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부분 정상이라는 답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딩동!

[종합소견 : 대부분의 항목에서 큰 질환이 보이지 않는 신체입니다. 젊고, 영양상태가 우수하며, 피로의 누적도 관찰되지 않습니다. 다만 경미한 수준의 빈혈 증상과 부교감신경의 활성화가 감지됩니다. 가급적 편안한 휴식을 권장합니다.]

"...."

뭐, 약간의 빈혈이나 부교감신경의 활성화 정도야 누구에게나 있을 순 있겠다. 그 외에 정상이라는 말도 알겠다.

그래서 더욱 이상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눈으로 당장 보이는 발렌티노의 상태는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진맥 스킬은 '정상!'을 외치고 있으니 혼동이 왔다. 지금까지 진맥 스킬이 거짓말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 너희가 보기엔 어땠냐?'

라키엘은 자신의 오장육부에게 물었다. 마침 발렌티노의 신체와 상담을 마치고 온 오장육부가 곧바로 응답해 왔다.

한데 그 응답의 내용도 의미심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딩동!

[당신의 오장육부가 발렌티노의 정상적인 신체 상태에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심장 : 하... 괜찮은데... 분명 괜찮은 게 맞는데... 그런데 좀...?]

[허파 : 허어... 파하... ㅎ]

[대장 : 분명 이거 뭔가가 있지 말입니다?]

[간장 :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 뭔가가 보이지가 않음.]

[위장 : 우리 몸뚱이의 여자친구처럼?]

[콩팥 : 엌ㅋㅋㅋㅋㅋㅋㅋ x박ㅋㅋㅋㅋㅋㅋㅋㅋ]

[비장 : 깜빡이 켜고 들어오라고ㅋㅋ 아ㅋㅋㅋㅋㅋ]

[오장육부 리포트 : 뭔가 찜찜한데 그게 뭔진 모르겠음. 쏴리-(찡긋)]

"...."

야 이 영양소만 축내는 x끼들아.

라키엘은 때아닌 디스에 눈물을 삼키며 리포트를 접었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발렌티노를 쳐다보았다.

"저기... 제가... 좀... 이상합니까, 전하...?"

"응. 충분히."

"아... 제가 생각해도...."

"어떤데?"

"모르겠습니다...."

"...."

쯧.

안 되겠다.

"오늘은 우선 쉬자. 그 전에 탕약부터 좀 타가고."

"탕약... 말입니까?"

"어. 내가 간호사실에 처방전 보내놓을게. 점심쯤엔 탕약이 달여져 있을 테니까 받아가서 마셔. 그 외에 다른 짓은 하지 말고. 숙소에서 푹 자라, 좀."

"아, 그...."

"또 뭐."

"감사...합니다, 전하...."

"...."

얘 원래 이런 놈 아니었는데.

전엔 엄청 빠릿빠릿했는데. 오히려 한때는 자기 똑똑한 맛에 취해서 환자를 싸가지 없이 대하기도 했던 놈인데. 그 후에 반성하는 마음으로 더 성실해졌던 친군데.

그런데 하룻밤 새에 너무나 달라져 버렸다. 그냥 몸살? 빈혈? 모르겠다. 저 멍한 눈빛과 표정도. 여전히 경혈 스캐닝으로 엿보이는 엉망진창인 비정상적 기혈의 흐름도.

'일단 지켜봐야겠어.'

비틀비틀 돌아서서 멀어지는 발렌티노의 뒷모습을 보며 라키엘은 내심 혀를 찼다. 난감했다. 내심 새로 개설할 치과를 저 친구에게 맡기려 했는데 말이다.

'별일이 아니면 좋겠는데.'

원장실로 올라온 라키엘은 빈혈과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되는 조합의 탕약 처방전을 슥슥 써서 간호사실로 보냈다. 그리고 내심 기원했다. 발렌티노의 저 기혈 흐름이 그저 특이체질에 의한 일시적인 증상이기를.

다음 날이 밝았다.

그리고 라키엘은 깨달았다.

'이거... 의외로 흔한 체질이었던 건가. 그런 거야?'

그는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눈길을 들었다. 원장실 책상 건너편, 자신과 마주앉은 아저씨 환자가 보였다. 뭔가 멍한 눈빛과 표정. 어쩐지 축 늘어진 어깨. 어눌한 말투. 거기에 엉망진창인 기혈 흐름까지.

어제 발렌티노에게서 보았던 모습과 똑같았다.

덕분에 잠깐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그런 티를 내지는 않았다. 환자 앞에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절대적으로 참아내야 하니까. 환자를 더 불안하게 만들어 버리면 큰일이 나니까.

라키엘은 심호흡으로 흔들리려던 동공을 꽉 붙들고는 환자에게 물었다.

"자, 그럼 환자분? 어디가 제일 아프세요?"

"모르겠...습니다...."

"음, 그럼, 최근에 큰 외상이나 충격을 받은 적이 있나요?"

"그것도 잘.... 죄송합니다...."

어째 대답하는 모양새마저 어제 발렌티노가 보였던 것과 거의 똑같다. 심지어 진맥 결과와 오장육부 리포트마저도 흡사했다.

이거, 우연일까.

"...."

아닌 것 같다.

그런 쌔한 생각은 다음 환자를 받으며 확신으로 바뀌었다.

"저기... 제가 오늘 아침부터... 갑자기... 너무 멍해져서...."

"...."

또다.

연달아 똑같은 증상.

똑같은 어눌함과 멍함.

'이거 뭔가 있는데?'

직감하자마자 라키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장실을 나섰다. 대기하고 있는 환자들을 훑어보았다. 굳이 일부러 세세하게 훑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원장실 앞 의자에 앉아 대기하고 있는 환자들의 숫자는 약 15명. 그중에 무려 11명이 멍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친."

심상치 않은 사태를 깨달은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주군이시여. 일이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가."

"예, 주군."

"그래. 수고하였다."

반쯤 열린 창문.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의 햇볕.

그 아래의 흑마법사, 아난샤는 쥐고 있던 주전자를 기울였다. 주전자에 담긴 맑은 물이 쪼르륵 흘러나와 화분으로 떨어졌다. 갓 싹을 튼 새싹이 듬뿍 젖었다.

아난샤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희미하게 맺혔다.

"배가 부르더냐."

새싹을 향해 건넨 질문일까. 무릎 꿇은 권속을 향해 내린 하문일까. 다만 그의 권속은 아주 오랜 시간을 충성한 자였다. 덕분에 주군의 뜻을 곧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아직 부족합니다, 주군."

"그래. 마땅히 그래야겠지. 그래야 나의 권속답지."

"...예. 제법 오랜만의 활동이니까요."

"벌써 그렇게 됐나."

"예, 주군."

"정확히 얼마나 됐지?"

"127년입니다."

"미안하군. 내 뜻 때문에 그대들이 고초를 겪어서."

"아닙니다, 주군. 뜻깊은 기다림이었습니다."

"...그래. 기나긴 기다림 끝의 한 모금이 맛있는 법이지. 물도. 피도. 모두."

아난샤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의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엇비쳤다.

"듣자하니 그대들에게 물린 자들 중의 다수가 황태자의 별궁을 찾아가고 있다 하던데. 맞나?"

"예. 정확하십니다, 주군."

"그래. 예상대로군."

"하온데 주군? 제가 감히 한 가지를 염려해도 되겠습니까?"

"염려?"

"예."

"말해보도록."

"감사합니다, 주군. 감히 여쭙자면, 변이증을 지니게 된 자들이 이토록 일찍 황태자를 찾아가면 자칫... 주군의 계획이 틀어질까 염려가 됩니다."

"혹여 변이증을 지닌 자들 중에 황태자에게 성공적으로 치료받는 자가 생길 것을 두려워함인가?"

"...예.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다. 그대의 염려가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니."

아난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충성스러운 권속의 염려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는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자면, 황태자는 실로 뛰어난 의술을 지녔기에 고치지 못하는 병이 없다고 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연... 우리 위대한 혈족이 선사하는 변이증의 시험을 막아낼 수 있을까? 아니."

그렇다.

변이증은 단순한 병이 아니니까. 자신의 혈족이 선사하는 밤의 축복이기에, 성직자의 축복과 신성력조차 통하지 않으니까.

"축복을 이겨내지 못한 자들은 생명을 잃을 것이며, 이겨낸 자들은 나의 권속이 될 자격을 얻겠지. 그런 것이다, 변이증이라는 시험은. 그러니 결코-"

절대적으로.

어떠한 이변조차 없이.

"황태자는 변이증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결국에는 황태자도 변이증을 지닌 숙주에게 물리는 신세가 될 것이며, 끝내 우리 일족이 내리는 시험 앞에 무릎을 꿇을 터."

아난샤의 목소리에 확신이 깃들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한국인의 사실상의 주식이자, 소울 식자재이며, 대 뱀파이어용 궁극의 병기인 마늘이라는 존재를.

255화. 뱀파이어 변이증 (3)

"음? 뭐지? 오늘 점심 왜 이래?"

"무슨... 문제가 있으십니까, 전하?"

곁에 시립해 있다가 놀란 기색으로 물어오는 시종장. 라키엘은 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조금 아쉽다는 듯이 툭, 말했다.

"이 수프 말이야. 마늘이 좀 적게 들어간 것 같은데?"

"그, 그렇습니까?"

"어."

진심이다.

"오늘 유독 좀 밍밍해. 왜 이렇지? 이상하네."

라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껏 이곳 세상에 잘 적응해온 그였지만, 유독 적응이 느린 분야(?)가 있었다. 바로 음식이었다.

'하여간 이 동네 음식들은 죄다 밍밍해서. 원 참.'

김치찌개, 된장, 순댓국, 불닭, 매운탕과 시뻘건 육개장까지. 전형적인 한국적 입맛을 지닌 그였다. 덕분에 아직까지도 종종 맵고 자극적인 찌개를 원샷하는 꿈을 간혹 꾸기도 했다.

물론 이곳에서도 고추를 구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고추는 한국의 것과 어딘가 달랐다. 고추장은 언감생심 바랄 수도 없었다. 고춧가루? 있긴 했는데, 뭔가 영 다르고 슴슴했다.

그래서 마늘이 소중했다.

그나마 한국에서 먹던 맛과 비슷했다. 어떤 요리이건 마늘을 무식하게 때려부으면 대강 참고 먹을 수준이 됐다. 그래서였다. 그는 항상 별궁의 요리장에게 특별히 주문하곤 했다. 마늘 넉넉히!

"음, 오늘은 요리장이 잠깐 주문사항을 까먹었나 보군."

아마도 그런 거겠지.

바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뭐.

라키엘은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기며 스푼을 들었다. 한데 이쪽의 말을 들은 시종장의 반응은....

"설마 그럴 리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전하. 제가 확인해보겠습니다."

"어?"

뭐라고?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시종장은 이미 붙잡을 새도 없이 복도로 우다다 달려나가고 있었다.

"...."

아뿔싸.

내가 실수를 했구나.

과연 곧, 그 실수의 결과가 드러났다.

"전하! 저를 죽여 주시옵소서!"

"...."

시종장에게 불려온 별궁 요리장이 울먹이며 들어왔다. 그걸 본 순간 라키엘은 아차 싶은 기분을 느꼈다. 엄청난 난감함과 미안함도 물론이었다.

'후아. 이거 참. 그냥 오늘 마늘이 좀 적게 들어간 거 같다는 말만 했을 뿐인데....'

설마하니 요리장이 이렇게 직접 달려와서 울먹이기까지 할 줄이야.

문득, 생각 없이 던진 돌에 맞아 죽는 개구리 생각이 났다. 지금이 딱 그런 꼴이었다. 군대에선 사단장이 재채기만 해도 사단 전체가 감기에 걸린다고 했던가. 혹은 기업 회장님이 강림하시면 제일 죽어나가는 건 제일 밑바닥 사원이라고 했던가.

한데 지금은 내가 그런 짓을 저질러 버렸다. 무의식중에 벌인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러니 깔끔하게 인정하자. 사과하고 수습하자.

라키엘은 솔직하게 말했다.

"미안해.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항상 애쓰면서 신경 써주는 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아닙니다, 전하. 제가 전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탓입니다. 오늘 같은 날은 제가 전하의 기분과 취향을 미리 헤아려 마늘 사용량을 두 배로 늘렸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던 저의 잘못입니다, 전하."

"으음?"

라키엘은 멈칫했다.

저게 무슨 소리일까.

"마늘 사용량을 두 배로 올리지 못한 게 잘못이라고?"

"예, 전하."

"그럼, 오늘 점심 요리에 평소랑 같은 양의 마늘을 넣었다는 건가?"

"그렇게 해서 실로 송구합니다, 전하."

"...."

요리장이 더욱 울먹이며 고개를 숙였다. 기색을 보자니 절대로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듯했다. 평소와 같은 마늘 투입량. 그런데 그걸 밍밍하게 느낀 자신.

그럼 결론은 하나다.

내가 피곤해서 맛에 둔감해졌다는 거.

"...허어."

아까보다 더 미안해졌다. 한편으로는 다음부턴 요리가 조금 마음에 안 들어도 절대 티를 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라키엘은 스푼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의 바닥에 무릎을 꿇을 기세인 요리장에게 다가가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여 주었다.

"요리장? 그대의 말을 들어보니 오늘 일은 내 착오였던 것 같군. 그대에겐 일말의 잘못도 없어. 오히려 내가 미안해.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대를 타박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는데."

"저, 전하?"

"그러니 그대는 그대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도록. 오늘날 내가 이전보다 건강해진 데에는 요리장의 숨은 헌신과 노력의 공로 또한 있음이니 말이야."

"전하...."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 이만 물러가도록. 그리고 이번엔 특별히, 그대를 오해했던 내 잘못을 반성하고 속죄하는 의미로 상을 내리도록 하지. 요리장? 그대의 외동아들이 전부터 미노타우로스를 구경하고 싶어했다지?"

"아? 예, 예! 그렇습니다, 전하."

"역시. 시종들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맞군. 그럼 내일은 그대의 아들을 별궁으로 데리고 오도록. 아이가 미노타우로스와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말이야."

"그게... 정말이십니까, 전하?"

"물론. 그럼 내가 허언을 할까. 우루스에겐 내가 따로 말해두도록 하지."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요리장의 울먹이던 얼굴이 다소 펴졌다. 그걸 보자니 그럭저럭 마음이 놓였다. 다행이다. 어찌어찌 수습에는 성공했어.

"후우."

요리장이 물러나고 비로소 소란(?)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한편으로 깨달아야 했다. 잠깐의 소란 덕분에 소중한 점심시간이 절반쯤 날아갔다는 사실을.

"...."

인생 진짜.

그때부터였다. 라키엘은 살짝 식은 점심을 와구와구 마시듯이 전투적으로 먹었다.

미적거릴 시간은 없었다. 당장 오후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한무더기니까. 게다가 지금은 원인을 모를 증세로 자신을 찾아온 환자들로만 신도림역 플랫폼을 꽉꽉 채울 수도 있을 듯하니까.

"...."

그나저나 지금 몰려드는 환자들은 대체 뭘까. 어쩌다가 다들 하나같이 멍한 상태가 되어 버린 걸까. 그럼에도 어째서 진맥 스킬에는 아무런 병명이 잡히지 않는 걸까.

'정작 경혈 스캐닝을 해보면 기혈 흐름은 엉망진창이고. 대체 뭐지, 진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쌔한 느낌이 더해졌다.

그래서였다.

라키엘은 한층 바쁘게 스푼과 포크를 놀렸다.

'어휴, 바쁘다 바빠.'

그는 식사만 간신히 마치고 곧바로 가운을 입어야 했다. 얼마나 시간이 빠듯했느냐면, 양치질을 깜빡했을 정도였다.

"다음 환자 들어오세요."

대망의(?) 오후 첫 진료. 호명을 받은 환자가 비척비척 진료실로 들어왔다. 익숙한 사람, 별궁 한의원의 의사인 발렌티노였다.

"뭐야. 아직도 상태가 안 좋아?"

"예에에...?"

"...."

어제보다 더 흐리멍덩해진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발렌티노. 이제는 아예 눈에 초점조차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걸 보는 라키엘의 표정이 굳었다.

'이 친구, 너무 똑똑해서 오히려 제 잘난 맛으로 지낼 정도였는데. 대체 어쩌다가....'

확실히 보통 질환이 아니다.

그냥 몸살이나 빈혈?

절대로 아니다.

거의 확신한 라키엘은 다시금 발렌티노의 손목을 짚고 진맥 스킬을 사용했다. 반드시 정확한 진단을 해내리라 다짐하며 집중했다. 눈을 감았다.

그동안 발렌티노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

목이 말랐다. 멍하고 흐릿한 의식 속에서 점점 또렷해지는 갈증. 목이 마르다. 뭔가를 마시고 싶다. 시원한 물? 아니. 그런 거 말고. 훨씬 진하고 생명에 가까운 것. 이를테면....

'피.'

붉고 진한 액체.

생명의 근원을 이루는 혈액.

그걸 마셔야지만 지금의 갈증이 가라앉을 것 같다. 정말이다. 당장 목구멍에 불이 나는 것만 같다. 메마른 식도가 갈라지며 전신이 뭉개질 것만 같다. 그러니까 당장, 지금 당장, 마셔야겠다.

누구의 것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스윽.

발렌티노는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상체를 앞으로 살짝 숙였다. 충동적인 본능이 가리키는 사냥감. 눈앞의 황태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마침 황태자는 진맥에 집중을 하느라 눈을 감고 있었다. 이쪽의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기회다. 지금뿐이다.

스흡.

입을 살짝 벌렸다. 황태자의 무방비하게 드러난 목덜미. 새하얀 목덜미. 깨물어야지. 솟구치는 피를 벌컥벌컥. 한 방울의 남김도 없이. 마셔 버리겠어.

...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고조되는 흥분감에 발렌티노는 입을 벌린 채 숨을 크게 들이켰다. 한 모금의 공기가 코와 입으로 훅 들어왔다. 때마침 황태자가 내뱉은 날숨 일부도 섞여서 훅 들어왔다. 황태자가 바빠서 미처 양치질로 날려보내지 못한, 마늘 듬뿍 수프 냄새도 훅 들어왔다.

"...!"

멸망의 냄새!

콰당탕!

발렌티노는 본능적으로 기겁하며 뒤로 확 물러났다. 아예 의자와 함께 와당탕 넘어졌다. 덕분에 진맥에 집중하던 라키엘은 깜짝 놀랐다.

"엇, 뭐야? 왜 그래?"

"히, 히이이이익!"

"발렌티노?"

"흐아아악! 흐아악! 오지 마! 오지 마아!"

발렌티노가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뭔가 못 볼 것이라도 본 듯이 공포감에 휩싸여 손을 휘저어댔다.

라키엘의 표정이 굳었다.

동시에 귓가에 오장육부의 보고가 올라왔다.

딩동!

[당신의 허파가 발렌티노의 신체에서 특이한 반응을 포착하였습니다.]

[허파 : 쟤 허파 방금... 마늘 냄새 맡더니 자지러졌어... 저런 애 처음 봤음. 퍼헣...ㅋㅋ]

"...."

간단한 보고였다. 그러나 그 내용이 전해주는 의미심장함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평소의 똑똑함은 온데간데없이 멍해진 행동. 빈혈 증상. 마늘 냄새를 맡더니 공포감에 휩싸여 자지러짐. 그리고 이제야 보이는....

'저 목덜미의 상처.'

라키엘은 발렌티노의 목덜미를 주시했다. 때마침 발렌티노가 몸부림을 치는 통에 옷차림이 크게 흐트러졌다. 덕분에 셔츠 목깃이 헝클어졌다. 내내 목깃에 가려져 있던 목덜미 아래쪽이 살짝 드러났다.

그곳에 특이한 상처가 나 있었다. 마치 송곳 두 개로 나란히 찌른 듯한 상처. 그런데 그 상처의 간격이 마치....

'고전 공포 영화에서 보이던 자국 같은데? 흡혈귀 송곳니 자국.'

딱 그랬다.

보자마자 느낌이 왔다.

"아니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수간호사 아니스를 불러 명하였다.

"지금 대기실에 앉아 있는 똑같은 증상의 환자들, 목덜미를 검사해봐."

"목덜미를요?"

"응. 전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여기 발렌티노의 목이 보이지? 이것과 똑같은 상처가 있는지만 보면 돼."

"알겠습니다, 전하."

뭔가 심상치가 않다는 걸 알아챈 걸까. 아니스가 곧바로 복도로 나갔다. 잠시 후 돌아온 그녀의 보고는 과연 예상대로였다.

"전하? 전하께서 말씀하신 상처가 정말로 있습니다."

"그래? 대기 중인 환자 모두가?"

"네. 멍한 증상을 보이는 환자는 전부 다요."

"...."

비로소 알겠다.

감이 왔다.

'맞네. 물린 거네. 뱀파이어한테.'

그럼 발렌티노와 환자들이 전부 뱀파이어가 되어가고 있다는 걸까.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잘 들어, 아니스. 황태자이자 별궁 한의원의 원장으로서 긴급령을 내리겠다."

"네? 긴급령이라시면...."

"입원 병동 두 개를 싹 비워. 1병동에는 멍한 증상을 보이는 환자들을 격리시키고, 2병동에는 그 환자들의 가족을 격리시켜. 그리고 1, 2병동의 환자식 메뉴를 통일한다."

"어떤 메뉴로 말이죠?"

"생마늘과 쑥."

"...네?"

아니스가 흠칫했다.

라키엘이 확신을 담아 명했다.

"우리 수간호사가 알지는 모르겠지만, 자고로 사람 아닌 존재를 사람으로 만드는 데에는 마늘과 쑥만큼 직빵인 식재료가 없었거든."

확실하다.

역사와 신화가 증명하는 전통(?)의 요법이니까.

그렇게, 별궁 한의원에서 뱀파이어 변이증을 치료하기 위한, 전격적인 '웅녀 테라피'가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256화. 웅녀 테라피의 효능 (1)

사람을 비로소 사람으로 존재하게 해주는 것.

그것 중에 신을 향한 경건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만큼 으뜸인 것이 있을까. 황도 마젠타 교구의 대주교, 베르토나는 평소부터 그러한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오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여 그는 기뻤다.

모처럼 황태자의 부름을 받아 별궁까지 오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대주교 베르토나는 남몰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솔직히 전부터 황태자와 교분을 다지고 싶었다. 한데 마땅한 계기가 없었다. 황제 아스테리온의 뇌졸중을 치료하던 때에만 잠시 접점이 있었을 뿐, 그 후로 황태자가 자신을 한 번도 부르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래선 안 되지. 곤란해.'

정말로 곤란했다.

장차 황가의 주인이 될 황태자였다. 한데 선대의 황제와 달리, 교단과 친밀하게 지내려는 기색을 영 보이질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황태자는 아예 별궁에 한의원이라는 것을 만들고, 나날이 키워갔다. 무상으로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최근엔 귀족들마저 한의원을 들락거리게 되었다. 덕분에... 황도 마젠타 교구의 수입이 25퍼센트나 줄어들어 버렸다!

"...."

대주교의 표정이 아주 잠깐 침울해졌다.

사실 교단이라고 땅 파서 운영을 하는 게 아니었다. 신이라는 분은 사랑은 베풀어 주시되, 찰떡 크림빵을 내려주지는 않으셨다. 현실적으로 돈이 없으면 교단을 굴릴 수가 없었다.

그러한 교단의 가장 큰 수입원은 기부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치료에 대한 감사의 기부였다. 교단의 성직자와 수도사들은 미약한 축복을 사용할 수 있고, 나름의 약초학에 조예가 깊었다. 사소한 감기나 몸살 정도의 질환은 다스리기에 충분한 역량이었다.

그렇게 명목상으로는 무상인 치료를 해주면, 치료를 받은 사람들은 감사의 형태로 기부를 하였다. 그것이 관례였고, 교단을 굴러가게 하는 경제적인 토대였다.

한데 황태자의 별궁 한의원 때문에 그 수입원이 왕창 깎였다. 이제 황도의 시민들은 아픈 곳이 생기면 근처의 수도원이 아닌, 별궁 한의원부터 찾게 되었다. 무상이니까. 치료 실력마저 더 뛰어나다는 소문이 자자하니까.

"...하아."

다시금 흘러나오는 한숨.

솔직히 황태자를 찾아가 부탁이라도 하고 싶었다. 물론 불가능했다. 대놓고 '우리 수입원 끊기니까 당신네 한의원 영업 좀 줄입시다'라는 말을 황태자에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런데 오늘, 찬스가 왔다!

황태자와 만날 기회가 생겼다!

'무슨 일로 날 부른 걸까.'

알 수는 없었다.

다만, 기대감은 생겼다.

그동안 자신을 한 번도 찾지 않던 황태자의 부름이니, 분명 뭔가 아쉬워서 부탁할 일이 있겠거니 싶었다.

그러면 된다. 그거면 충분하다. 황태자의 부탁을 들어주면 이쪽의 요구를 은근슬쩍 끼워 넣을 여지가 생겨날 테니까. 어떻게든 협상이라는 걸 해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제발....'

나한테 부탁을 좀 해주세요, 황태자 전하!

대주교 베르토나는 바라고 또 바라며 별궁으로 들어갔다. 시종장의 안내를 받았다.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시종장이 안내를 하는 방향이 영 엉뚱했다.

"이쪽은 별궁 본관이 아닌 듯한데, 우리 어디로 가는 것인가?"

황태자를 만나는 거라면 응접실이 있는 별궁 본관이어야 할 텐데. 지금은 아니었다. 본관과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시종장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예, 대주교님. 황태자 전하께서는 1병동에서 대주교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1병동?"

"예, 대주교님."

"...."

뭘까.

어째서 자신을 환자들이 있을 병동으로 부르는 것일까. 해답은 병동에서 황태자와 비로소 마주하게 되고서야 알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대주교님. 먼 길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그나저나, 이 환자 말입니다. 혹시 보고서 느껴지는 것이 있으십니까?"

"...예?"

자신을 보자마자 대뜸 환자 하나를 보여주는 황태자. 대주교는 얼떨떨함을 느꼈다. 그러다 이내 흠칫하게 되었다.

"어엇?"

황태자가 가리키는 환자를 보자마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마주쳐서는 안 될 존재와 맞닥뜨린 기분. 지극히 사악하고 음습하며 불쾌한 존재의 잔향. 찜찜함과 위기감, 경계심이 한꺼번에 범벅이 되어 뒷골에 달라붙었다.

"이건...."

"제 개인적인 진단이 맞는 걸까요, 대주교님?"

"진단을... 하신 겁니까, 전하?"

"예. 뱀파이어, 맞습니까?"

"...."

대주교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확인이 필요해 보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런 그의 손에는 어느새 신성 교단의 둥근 상징물이 들려 있었다.

한데 대주교가 내민 상징물을 본 환자가....

"그흡?"

눈을 홉떴다. 온몸을 경직시켰다. 그러더니 소리를 쳤다.

"사, 사람 살려어! 살려줘!"

"...!"

너무나 갑작스러운 난동이었다. 환자가 당장 이곳에서 뛰쳐나갈 기세로 날뛰었다. 만약, 적절하게 나선 수간호사 아니스의 손길이 아니었다면 환자는 누가 말리기도 전에 창밖으로 뛰어내렸을지도 몰랐을 일이었다.

꽈악!

"...긥!"

아니스의 엄청난 악력이 환자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환자가 꼼짝도 못 하고 짓눌려 식은땀을 뻘뻘 흘려댔다.

대주교의 표정이 굳었다.

"성물을 보며 이런 반응이라면... 이자... 뱀파이어, 혹은 비슷한 다른 언데드로 몸이 변이되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습니까?"

"예, 전하."

"역시...."

라키엘의 표정도 굳었다. 솔직히 혹시나 싶었다. 모든 환자들의 목덜미에 새겨진 송곳니 자국. 그리고 마늘 냄새를 기피하는 행동. 그걸 보며 '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대주교를 불렀다.

자고로 뱀파이어, 흡혈귀를 때려잡는 데에는 성직자만 한 존재가 없을 테니까. 그래서 확인을 부탁했더니 결과가 역시나였다.

대주교가 심각해진 눈초리로 물어왔다.

"전하? 이런 자를... 어떻게 데리고 있게 되신 겁니까?"

"어쩌다 보니 이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별궁으로 몰려오게 됐습니다."

"몰려오게... 됐다고요?"

"예."

"그 숫자가 얼마나 됩니까, 전하?"

"대략 200명이 좀 넘는 듯하군요."

"...."

이제는 심각하다 못해 아연실색하는 대주교. 그를 향해 라키엘이 물었다.

"그래서 대주교님께 묻고 싶은 점이 있습니다. 혹시 교단에서는 뱀파이어로 변이되는 사람을 치료할 수 있습니까?"

어쩌면 치료가 가능할지 모른다. 교단이니까. 과연 잠깐의 당혹감을 털어낸 대주교가 믿음직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전하."

"그렇습니까?"

"예. 열 명이든 백 명이든 상관없습니다. 전원 치료가 가능합니다."

"오오. 어떤 방법을 쓰는 겁니까?"

치료율 100퍼센트라니.

이건 못 참지.

라키엘은 배움과 참고의 기회를 느끼며 물었다. 한데 돌아오는 대주교의 대답은....

"불에 태우면 됩니다."

"예?"

"자고로 뱀파이어 변이증에 걸린 사람은 정화의 불꽃으로 깨끗하게 태워서 재로 만들면 되는 법이니까요."

"무슨...."

"그렇게 남는 재는 안전하고 깨끗합니다. 정화의 불꽃이니까 말입니다. 당연히 변이증도 더 진행이 되질 않습니다, 전하."

"...."

어이가 없어졌다. 말이 정화의 불꽃이지, 직역하자면 그냥 환자를 화형하자는 뜻이 아닌가 말이다.

'뭐 이렇게 극단적인 거냐고.'

그래. 태워서 없애면 변이증도 사라지는 건 맞긴 하네. 참 좋네. 깔끔하고. 여한 없이 한 줌 다이옥신으로 승천하고. 미세먼지 수치는 치솟고. 지구온난화는 가속되고. 호흡기 건강과도 영원한 안녕을 고하고. 아무튼.

"교단에서 쓰는 치료법이 설마, 그걸로 끝인 겁니까?"

"예, 전하."

"...."

"교단에서는 예로부터 가장 확실하고 전통적인 치료법으로 화형을 택했습니다. 물론 어이가 없으시겠지요. 선뜻 이해가 안 되시겠지요. 하지만 다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이유입니까?"

"애초에 뱀파이어 변이증이 치료가 불가능한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변이증 환자를 보는 대주교의 눈빛에 안타까움이 스몄다.

"화형이 극단적이라는 점은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단은 예로부터 수많은 언데드, 그중에서도 뱀파이어와 대립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변이증의 결과는 변이, 혹은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변이, 혹은 죽음이라...."

"예, 전하. 교단에 쌓인 옛 기록에 따르면 변이증에 걸린 사람 20명 중의 하나가 뱀파이어로 거듭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반면, 나머지 19명은...."

"죽는 겁니까?"

"예. 아마도 신체의 급격한 변이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 원인일 테지요."

"...쯧."

비로소 교단이 화형을 유일한 선택지로 택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한편으로 의문이 들었다.

"그럼 혹시 말입니다. 교단에서도 변이증 환자에게 갖가지 치료 시도를 해보았을 텐데, 그중에 마늘 요법이 있었습니까?"

"예?"

고개를 갸웃하는 대주교.

그 모습을 보자 예감이 들었다. 마늘을 써본 적은 없구나. 동시에 희망의 불꽃이 살포시 피어났다.

"그럼 대주교님? 다른 환자를 데려올 테니, 그의 상태도 한번 보아주시겠습니까."

"다른 환자라니요?"

"나흘 동안 생마늘과 쑥만 먹인 환자입니다."

"...예?"

대주교의 눈동자가 진도 8.0 규모의 동공지진을 일으켰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개의치 않았다. 복도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이내 다른 환자가 들어왔다. 한때는 별궁 한의원의 의사였던 자, 발렌티노였다.

"이 환자입니다. 최초로 목격된 변이증 환자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럼 이 환자에게, 나흘 내내 생마늘과 쑥만 먹였다는 겁니까, 전하?"

"예."

"그거, 고문 아닙니까?"

"변이증을 극복하고 인간으로 돌아오기 위한 치료법입니다."

"...."

그게요?

왜요?

대주교는 묻고 싶었다.

라키엘은 자신감(?)을 담아서 말했다.

"우연히 발견한 사실인데, 변이증을 지닌 이들이 마늘 냄새에 기겁을 하더군요. 예외가 없었습니다. 그걸 보니 문득 떠오르더군요. 동방의 어느 고대 왕국의 건국 신화가 말입니다."

"건국... 신화요?"

"예. 저도 우연히 접한 문서를 통해 알게 된 사실입니다. 그 건국 신화에 따르자면, 인간이 되고 싶은 곰이 마늘과 쑥만 먹고서 그 꿈(?)을 이뤘다더군요."

"하지만 그건 비유적인 신화일 뿐인 듯한데...."

"게다가 뱀파이어가 마늘을 극혐, 아니, 싫어하는 건 유명한 사실이지 않겠습니까?"

"아뇨. 처음 들어봅니다, 전하."

"그래요?"

"예."

"...."

이쪽 세계에선 그 사실이 안 알려져 있었구나. 애초에 여기 사람들이 마늘을 적게 먹어서 그런 건가.

뭐 어쨌건.

"그러한 발견을 통해, 저는 하나의 가설을 세웠습니다. 뱀파이어 변이증을 앓는 환자에게, 뱀파이어가 기겁하는 마늘을 대량으로 먹이면 변이증의 진행을 억제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 환자에게 생마늘을...."

"예. 먹였죠. 꼬박꼬박. 삼시세끼."

"...."

미친 새끼.

대주교는 황태자의 마수(?)에 걸린 환자에게 안쓰러움을 느꼈다. 아닌 게 아니라, 눈앞에 새로 데려온 변이증 환자의 안색이 매우 칙칙했다. 볼은 움푹 들어갔고, 눈 아래는 퀭했다. 당장에라도 손대면 톡 하고 터질... 아니, 쓰러질 것만 같았다.

'세상에. 얼마나 괴롭게 시달렸으면 이 지경일까.'

안쓰러웠다. 보고 있자니 비통함과 인류애가 쑴펑쑴펑 치솟을 지경이었다. 차라리 화형으로 편하게 해주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전하?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기엔 조금 주제넘을지는 모르겠으나... 마늘을 먹인 이 환자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보입니다."

"그렇지요?"

"예, 전하."

"그럼 아까 환자에게 하셨던 것처럼, 이 환자에게도 성물을 내밀어 보시지 않겠습니까?"

"...."

왜?

의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대주교는 순순히 황태자의 말을 따랐다. 아까처럼 성물을 내밀었다. 그랬더니 역시나, 환자 발렌티노의 멍하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 우으아악!"

아까의 환자와 똑같은 반응이었다. 성물을 보자마자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역시나. 마늘 같은 건 아무런 효과가 없는 거다.

...라고 대주교가 착잡한 생각을 떠올리던 무렵.

황태자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발렌티노? 성물이 좋아, 마늘이 좋아?"

"...성물이요!"

와락!

대주교가 어찌 반응할 틈도 없었다. 환자 발렌티노가 열렬한(?) 표정으로 성물을 와락 껴안았다.

로라시아 대륙에 전혀 알려진 바가 없던 뱀파이어 변이증의 신개념 치료법, '웅녀 테라피'의 효능이 처음으로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257화. 웅녀 테라피의 효능 (2)

치이이이익-!

불판에 오겹살 굽듯 퍼지는 향긋한(?) 소리! 동시에 밀려오는 짜릿한 화끈함! 뱀파이어 변이증 환자, 발렌티노는 대주교의 성물을 꼭 끌어안았다. 그럴수록 성물과 닿은 볼, 손바닥이 한층 뜨거워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발렌티노는 웃었다.

'마늘 지옥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오히려 좋아!'

편식은 나빠요.

그런데 마늘은 더 나빠요.

아침에 눈을 뜨면 황태자가 빵긋 웃으며 내미는 생마늘 한 접시가 면전에 있었다. 거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거부는 거부당했다. 황태자의 명이라는 말 앞에선 개인의 취미와 기호와 입맛 따위는 소용이 없었다. 까라면 까야 했다. 먹으라면 씹어먹어야 했다.

울었다. 마늘이 매워서. 너무나 강렬하게 쏘는 향에 혓바닥 융털돌기와 미각세포와 후각 세포가 손에 손잡고 멸망의 칠성장어 승천댄스를 추어서. 그걸 억지로 삼킬 때마다 식도와 창자가 친절하게 인수분해됐다가 재배열되는 기분을 만끽해야 해서.

그렇다고 그게 끝이었을까?

아니.

점심에도, 저녁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삼시세끼 생마늘만 씹어야 했다. 아니, 심지어 '야식 먹을래?'라며 자기 직전에도 입에 생마늘을 욱여넣었다!

"...."

엄마, 저 울어도 될까요.

잠시 최근의 과거를 회상한 발렌티노는 삽시간에 울적해졌다. 황태자의 만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 번은 이렇게 마늘만 먹을 바엔 차라리 죽겠다고 외쳤다. 그랬더니 황태자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었다. 다른 게 먹고 싶냐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황태자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잘되었노라고, 마침 다른 먹을 것을 가져왔노라고 하며....

쑥을 내밀었다.

'....'

ㄱㅅ끼.

솔직히 진짜 욕을 한 바가지쯤 부어주고 싶었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항변하고 싶었다. 그 울분이 쌓이고 쌓였을 무렵, 이렇게 황태자에게 불려왔다. 대주교라는 분과도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렇게 뜻밖에 대면하게 된 대주교의 '성물'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두렵고 끔찍하던지. 보는 순간 다리에 힘이 턱 풀렸다. 본능적인 공포감이 이성을 지배했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감정이었다. 무작정 도망치고 싶었다.

한데 그때 황태자가 속삭이듯 물어왔던가.

'발렌티노? 성물이 좋아, 마늘이 좋아?'

'성물이요!'

숨도 안 쉬고 대답했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너무나 명확한 답이었다. 눈앞의 성물이 좀 많이 무섭고 본능적으로 두렵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나흘간 자신을 괴롭힌 마늘에 비하자면 천사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래서였다.

행여나 황태자가 자신의 대답을 믿지 않을까 불안해졌다. 증명하고 싶었다. 누가 말릴 겨를도 없이 성물을 와락 끌어안았다.

성물과 닿은 볼과 손바닥이 엄청나게 뜨거워졌다. 마치 화상을 입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진짜로 삼시세끼 생마늘과 쑥만 씹는 나날에 비하자면 이건 고통도 아니었으니까.

그런 행동 때문에 대주교도 당황한 걸까.

"허? 허허? 무슨... 이런...."

"보셨습니까, 대주교님?"

"아, 예... 전하... 이런 일이... 어떻게...."

대주교 베르토나는 황망한 눈길로 자신의 성물을 끌어안아 부비부비(?)를 시전하고 있는 발렌티노를 쳐다보았다. 믿기지가 않았다. 불가능하다 여겼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자고로 뱀파이어 변이증을 앓는 이는 성물을 보자마자 공포에 질려 발광을 하는 법인데. 그게 정상적인 반응일 터인데. 대관절 어떻게 하면 오히려 성물을 끌어안을 수가 있지? 아니, 그 전에....'

체내의 변이된 마력과 성물의 성력이 충돌하며 주는 고통이 제법... 클 텐데. 더 나아가 온몸이 불길에 휩싸이게 될 텐데.

그런 결과가 나오지가 않았다. 이상했다.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황태자의 말이 귓가를 콕콕 찔러왔다.

"다행이군요. 웅녀 테라피의 효능이 생각보다 확실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예에? 웅녀... 무슨?"

"테라피요."

"...."

"아까 말씀을 드렸다시피, 나흘 동안 생마늘과 쑥만 먹였습니다. 물론 쉬운 과정은 아니었지요. 그러니 마늘보다 성물이 좋다고 이러는 것일 테고요."

"...."

그거, 물구나무를 서고 발바닥으로 들어봐도 테라피가 아니라 고문일 거 같은데요. 대주교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라키엘의 미소는 여전히 평화롭고 인자하며 상콤했다.

"겉으로는 좀 과격해 보일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엄연히 실험과 확인을 마친 요법입니다."

"실험...이라니요?"

"생마늘을 먹일 때마다 환자들의 체내 마나의 흐름을 추적했습니다."

라키엘이 말했다.

사실이었다.

실제로 마늘을 먹일 때마다 진맥과 경혈 스캐닝을 통해 환자의 상태를 면밀히 살폈다. 그 결과, 매우 특이한 체내의 반응이 관찰되었다.

"뱀파이어의 독소에 의해 변이된 마나가 생마늘 성분에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이더군요."

"거부 반응을 말입니까?"

"예. 마치 체내에서 전쟁을 벌이듯이 말입니다."

그 또한 사실이었다.

마늘을 먹일 때마다 환자의 몸속에서 아예 전쟁이 일어났다. 뱀파이어 변이증에 의해 오염된 마나와 마늘 성분의 혈전이었다. 그때마다 환자는 고통에 몸을 떨었지만, 그만큼 변이증의 진행을 멈출 수 있었다.

"생각보다 효과적이었습니다. 만약 그 요법이 아니었다면 여기 발렌티노, 이 친구는 이미 변이 증상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거나 뱀파이어로 변이가 완료되는 운명을 맞이했겠지요."

"그 정도였습니까?"

"예. 게다가 지금은 보십시오. 대주교님의 성물과 부비부ㅂ... 아니, 격렬한 포옹을 하면서도 정화의 불길에 휩싸이지는 않는 걸 말입니다. 그래서 실은 제가 대주교님께 드리고 싶은 부탁이 있는데...."

"예, 전하."

왔다.

이거다.

대주교 베르토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최근 황태자의 별궁 한의원 때문에 왕창 줄어든 황도 교구의 수입. 그 때문에 고민을 거듭했던 나날들. 그런데 오늘 황태자의 부탁을 들어준다면? 대가로 황도 교구의 수입 회복을 위한 협상을 걸어볼 수 있으리라.

라고 생각하며 기대하는 순간이었다.

"대주교님의 성물을 빌려다가 반으로 좀 잘라도 되겠습니까?"

"...."

"살살 자르겠습니다."

"...."

"나중에 돌려드릴 땐 다시 붙여서 드릴게요."

"...."

오 신이시여.

제가 이 x끼의 대갈통을 반으로 살살 잘랐다가 다시 붙여도 되겠나이까.

한순간 대주교 베르토나는 온화하고 자애로운 성직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빡쎄게 시험받았다. 필사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였다. 그는 한쪽 눈썹을 꿈틀, 하는 것으로 욕설 발사를 간신히 참아내었다.

"...어째서, 입니까, 전하?"

"뱀파이어 변이증의 완전한 치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입니까, 전하?"

"지금 보고 계시다시피, 마늘 요법을 받은 환자는 뱀파이어 변이증의 진행이 중단되어 성물과 접촉을 해도 몸이 불에 타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변이증이 조금씩 호전되지요. 지금 발렌티노, 이 친구처럼 말입니다."

치이이익....

말이 끝나자마자 실내에 아스라이 울려 퍼지는 오겹살 굽는 소리. 성물과 부비부비를 시전하는 발렌티노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한편으로 모두는 확연히 알아볼 수 있었다. 발렌티노의 안색이 조금 전보다 다소 맑아졌음을. 눈가의 퀭하던 다크써클 또한 가라앉고 있음을.

"그래서입니다. 환자의 몸에서 뱀파이어 변이증을 완전하게 제거를 하기 위해서는, 성물의 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실이었다.

라키엘은 인정했다. 자신의 실력만으로는 뱀파이어 변이증을 완벽하게 치료할 수가 없음을 말이다.

'이건 한의학만으로는 안 돼. 성물의 도움이 필요해.'

나흘 동안의 경험이 말해주고 있었다.

마늘을 꾸역꾸역 먹이는 웅녀 테라피. 거기에 독한 생마늘로부터 위장을 보호해줄 탕약. 그렇게 환자의 건강과 체력을 최대한 보존하며 변이증의 진행을 막는 것.

자신이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은 거기까지였다. 진행을 막을 수는 있어도, 근본적인 치료를 해낼 수는 없었다. 그 이상은 아무리 해도 불가능했다. 자연스럽게 결론이 나왔다. 상위급 신성력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여, 성물의 위력(?)을 확인하기 위하여 대주교를 부른 것이었다.

'성물은 교단의 최상위급 인물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아티팩트지. 듣기로는 신이 내려준 힘의 티끌이 깃들어 있다고 했어.'

그 정도면 치료에 충분한 효능을 발휘하리라 보았다. 과연 확인을 해보니, 그 예측이 맞았다.

"하, 하지만 전하?"

"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성물인데...."

"예, 그래서요?"

"성물을 어찌 반으로 자른다는 말씀을 그리도 쉽게 하시는 것인지...."

대주교는 진심으로 당혹스러웠다. 처음에는 화가 났는데, 이제는 오히려 황태자가 미친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황태자에게서 돌아온 대답이 대주교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다.

"성물은 성물일 뿐이지, 그것이 곧 신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에?"

"혹시 대주교님께서는 신이 아닌 성물을 섬기시는 것입니까?"

"그건...."

"게다가 사익을 위한 사용이 아닌, 사악한 뱀파이어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치료하고 구원하기 위한 사용입니다. 오히려 이런 일에 성물이 옳게 쓰임을 더욱 기뻐하셔야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

뭐지.

할 말이 없어졌다.

대주교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라키엘의 신랄한 말이 이어졌다.

"혹은 성물은 그저 대주교님의 신분과 지위를 밝히는 데에만 쓰이는 기념품 같은 물건인 것입니까?"

"그, 그건 물론!"

"아니지요?"

"예. 당연합니다, 전하."

"그럼 사악한 뱀파이어 변이증을 퇴치하는 데에 성물이 쓰이는 것이, 잘못된 일이겠습니까?"

"물론 그것은...."

꿀꺽.

원론적으로는 맞는데.

들어보니 묘하게 다 맞는데.

분명 황태자의 말이 옳긴 한데.

그런데 섣불리 대답이 나오지가 않았다. 두려웠다. 이런 일은 예측도 못 했으니까. 선뜻 동의를 하기엔 사안이 너무나 크고 부담스러웠다. 그렇기에....

'정말 이래도... 되나....'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정확한 확인도 필요했다.

추후에 교단으로부터 받을 추궁에도 대비를 해야 할 테니까. 그러니까....

"하면 제가 감히 전하께 여쭈어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성물을 잘라서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묻고 싶으신 거겠지요?"

"예. 정확하십니다, 전하. 제게 알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물론이지요."

라키엘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물건도 아닌, 대주교의 성물을 반갈ㅈ... 아니, 반으로 뚝 잘라서 사용하게 될 예정이다. 이걸로 무슨 짓(?)을 할지는 알려주는 것이 인지상정이자 보편타당한 국룰이 아니겠는가.

"제가 성물을 잘라서 시행하고 싶은 치료법은 바로...."

꿀꺽.

또다시 출렁이는 대주교의 목울대.

그걸 보며 상냥하게 알려주었다.

"아스라한 심법의 흡입력과, 반으로 자른 성물의 반구 형태를 활용하는, 성물 정화 부항치료 요법입니다."

258화. 흡입한다 부하아아앙 (1)

성물은 그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신이 내린 권능의 일부가 깃들어 있다. 그 양이 티끌에 불과할 극소량이라 해도, 발휘하는 신성력은 결코 조금이 아니었다.

게다가 상징성 또한 드높았다. 교단의 최상위 사제들에게만 주어지는 권위와 지위의 상징이었다. 대주교 이상급의 허락이 없으면 감히 지니거나 만지지도 못할 물건이기도 했다.

그런데 훼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신의 진노를 받을 일이다.

신성함을 모독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행위다.

'...라고 생각했는데.'

대주교 베르토나는 마른침을 꿀꺼덕 삼켰다. 눈치도 없는 전신 모공에서는 식은땀이 갓 캐낸 아라비아 유전처럼 쑴펑쑴펑 치솟았다.

그는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찌하여 성물이 작업용 고정쇠에 단단하게 물린 채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것인지. 어째서 자신이 톱을 들고 그 앞에 서 있는 건지.

"대주교님? 괜찮으십니까?"

믿기지 않는 상황에 멍하니 있던 탓일까. 대주교는 자신을 향해 날아온 질문을 잠시 후에야 인지했다.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들었다. 맞은 편에서 방긋거리는 은발 젊은이의 미소가 보였다. 황태자 라키엘이었다.

"혹시 이제부터 할 일에 법복이 불편하시면, 갈아입을 편한 의복을 드릴까요?"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전하."

"흐음, 괜찮다고 하시는 것에 비해선 땀을 많이 흘리고 계신데."

"그야...."

황태자, 댁이 성물을 반으로 뚝 자르자며 톱을 들고 왔으니까! 심지어 그걸 내 손에 쥐여줬잖나!

대주교는 속으로나마 빼액 외쳤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했다.

'나, 이래도 되는 걸까.'

자신의 손에 들린 톱은 살벌했다. 날이 삐죽삐죽. 손만 갖다 대어도 상처가 날 것 같았다. 한데 이걸로 귀한 성물을 잘라야 한다니.

감히 상상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이런 짓을 자신이 직접 하게 되리라곤 더욱 상상한 적이 없었다.

"신이시여...."

절로 신음성 섞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황태자도 그걸 들은 걸까. 묘한 눈초리로 이쪽을 쳐다보더니 이런 말을 툭, 건네어 왔다.

"대주교님? 혹시 두려우십니까?"

"예? 물론...."

"저도 두렵습니다."

"...."

두렵다는 사람이 성물을 톱으로 자르자는 미친 생각을 이렇게 행동으로 옮깁니까?

대주교는 반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곧 깨달아야 했다. 황태자가 내뱉은 '두렵다'라는 말의 의미를 자신이 오해했음을.

"대주교님, 저는 환자들이 치료되지 못할 것이 두렵습니다."

"...."

"저를 희망으로 삼아 찾아온 사람들이, 끝내 좋은 결과를 맞이하지 못하여 더 아프게 될 것이 두렵습니다."

"...."

"그래서입니다. 성물이요? 백 번도 자를 수 있습니다. 만약 신이라는 분께서 정말로 우리 인간을 사랑하고 아끼신다면, 당신께서 내리신 물건이 사람을 치유하는 일에 쓰임을 오히려 기뻐하시지 않을까요. 저는 감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전하...."

"예, 대주교님."

"정말로, 그러실까요?"

"답은 대주교님께서 저보다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

대주교 베르토나는 선뜻 대꾸할 말을 잃었다. 문득 부끄러워졌기 때문이었다. 감히 신의 성물을 자르려 하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 행위를 걱정하던 조금 전까지의 자신의 태도와 마음가짐이 부끄러웠다.

'나는 성물을 섬기는 사람이 아닌데.'

새삼 떠오르는 깨달음.

신을 섬기는 길에 처음 들어서던 시절의 다짐. 너무나 젊고 치기가 없었던, 그래서 오히려 지금보다 순수할 수 있었던, 그러나 오랜 시간 잊고 있던 다짐이 떠올랐다.

신을 섬기는 일은 사람을 섬기는 일이라고. 이웃을 사랑하고, 타인을 자애롭게 대하는 마음을 품으며, 그 마음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만으로도 신에 대한 봉양은 자연히 되는 것이리라고.

"...."

나는 언제부터 그 깨달음을 잊고 있었던 걸까. 어쩌면 나는 생각보다 속세의 때에 더 많이 물들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는지.

대주교는 진심으로 반성하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안겨준 황태자에게 순수하게 감사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감사는 30초도 유지되지 못하였다.

"그러니까 대주교님? 톱 좀 똑바로 잡아주시죠."

"아, 예, 전하...."

"이거, 우리 호흡이 잘 맞아야 잘 썰리는 겁니다?"

"아, 예에...."

"꽉 잡으셨죠?"

"예, 전하."

"그럼 시작합니다?"

황태자가 기다란 톱의 반대쪽 손잡이를 잡았다. 대주교도 비장한 각오로 톱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이 톱은 양쪽에 손잡이가 있고, 중간에 기다란 톱날이 있는 형태였다. 그렇게 성물을 사이에 두고서, 2인용 톱질이 삐걱삐걱 시작되었다.

"영차, 영차, 하나둘, 하나둘!"

"끗, 급? 끳, 흡!"

"...대주교님?"

"예에?"

"혹시 톱질 처음 해보시는 겁니까?"

"아, 예. 보시다시피...."

"후우."

"...."

대주교는 문득 억울해졌다. 정말로 톱질이 처음인데. 영 손에 익지가 않아서 서투를 수밖에 없는 건데. 사람이면 그게 자연스러운 건데. 어째서 나는 고작 톱질 때문에 황태자에게 혼이 나며 눈치를 보아야 하는 걸까.

"대주교님? 호흡을 잘 맞춰야 톱질이 잘되고, 그래야 톱질로 썰리는 물건의 단면이 깔끔해지는 법입니다."

"아, 예...."

"그런데 이렇게 삐걱거리면 성물에 흠집이 잔뜩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

"기왕 반갈ㅈ... 아니, 뚝 자르는 거, 깔끔하게 해야 나중에 붙여도 뒤탈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긴 한데 말입니다. 전하?"

"예?"

"이걸 왜 저와 전하가 직접 해야 하는 것입니까?"

대주교는 진심을 담아 물었다. 솔직히 정말로 궁금했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잘 되지가 않았다. 그렇게 중요한 톱질을 어째서 서투른 자신과 존귀한 황태자가 직접 해야 하는가. 기왕 하는 거면, 익숙한 이들에게 시키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돌아오는 황태자의 대답은 뜻밖에도 너무나 단호했다.

"다른 이들을 시키자구요? 안 됩니다."

"예? 어째서...."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이 이런 짓을 하면 꼼짝없이 화형 당첨일 테니까요."

라키엘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말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대주교님은 원래부터 신을 섬겨오신 분이시니, 설령 신의 진노를 받더라도 덜 억울하시겠지요. 게다가 엄연히 이 성물의 소유자이자 관리자이니 이런 일은 직접 하심이 옳고 말입니다."

"그럼 전하께서는...?"

"저야 이 짓을 하자고 꼬드긴 사람이니 책임을 져야죠. 게다가 제국의 황태자이니 화형까지 당할 일은 없을 거고."

"아...."

"이해가 되셨습니까?"

"예, 전하. 다른 이들에게 덤터기를 씌우지 않겠다는 뜻이신 거로군요."

"감사합니다. 정확하게 이해해 주셔서."

"벼, 별말씀을."

대주교는 당혹감을 감추며 간신히 대답했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황태자를 슬며시 쳐다보았다.

방금은 솔직히 조금 놀랐다.

'황태자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자신은 황태자와 딱히 교분을 다지거나 교류를 한 적이 없었다. 다만 주위를 통해 들은 바는 있었다. 병약한 시절에는 예민하고 신경질적이었던 황태자가, 건강을 조금씩 되찾으며 소탈한 모습으로 바뀌었노라고.

그런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심지어 주위를 이런 식으로 배려하는 사람일 줄은 더더욱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황족인데. 그러면 자신의 안위부터 지나칠 정도로 챙기는 것이 몸에 밴 당연한 습관일 터인데. 그런데 신의 진노를 살지도 모를 이런 일을 스스로 감행하다니. 그걸 남에게 미루지 않는 이유가, 억울한 피해를 입히지 않겠다는 뜻이었다니.'

이런 생각을 하는 황족을... 자신은 본 적이 있던가.

아니, 결코.

없다.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으며, 문헌으로도 좀처럼 찾아보지 못하였다.

한데 그런 전대미문적 사람이 눈앞에 있다. 심지어 셔츠 소매를 둘둘 걷어 올리고서 자신과 마주하며 씨익 웃어 보이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젊은 시절에 추구했던 이상적인 성직자의 모습과 닮아 보이는 것은 자신만의 착각일까. 그래서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일까.

"...전하?"

"예?"

"아, 아닙니다. 톱질, 다시 시작할 테니 구령을 넣어주시지요."

"당연하죠. 그럼 쉬려고 그러셨습니까?"

"예에? 그건 당연히...."

"우리 대주교님, 그렇게 안 봤는데 말입니다?"

"허허. 저도 마찬가지로 전하를 보며 놀라는 중입니다."

"좋은 뜻으로 주신 말씀이시겠지요?"

"허허허. 당연하지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럼 시작할까요? 각오는 되셨지요?"

"전하께서야말로 이번에는 감탄할 준비를 하셔야 할 것입니다."

"과연. 지켜보겠습니다. 영차, 영차!"

"하나둘! 하나둘!"

...신이시여.

이 모자란 이가 당신께서 내리신 물건을 감히 훼손하나니, 그 대가로 저를 벌하시되 많은 사람을 아픔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소서.

대주교는 성심껏 기원하며 톱질에 집중했다. 황태자와의 호흡을 맞추려 노력했다.

그런 덕분이었을까.

혹은 톱이 좋은 덕이었을까.

성물은 의외로 톱질 몇 번 만에 깔끔하게 뚝 잘렸고, 속이 빈 반구 두 쪽으로 거듭났다.

"후우, 고생하셨습니다, 대주교님. 그럼 이걸로 바로 치료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때부터였다.

자른 성물의 단면을 매끈하게 정리한 라키엘은 곧바로 치료를 개시했다. 환자가 된 발렌티노를 일으켜 세우고 상의를 벗겼다. 꼬슴이표 하얀 가시를 빼곡하게 꺼내 들고 시침을 시작하였다.

톳! 토돗! 톳!

우선, 척추를 따라 독맥(督脈)을 이루고 있는 척중혈(脊中穴), 현추혈(懸樞穴), 근축혈(筋縮穴)을 연달아 찔렀다. 한데 그 시침의 방법이 이전까지와 판이하게 달랐다.

푹푹푹푹푹푹푹푹!

찌르고자 하는 경혈을 마구잡이로 여러 차례 찔러댔다. 무자비하게, 바늘로 인형에게 화풀이를 하듯, 혹은 가학적인 새디스트가 성취감을 맛보듯.

덕분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엇?"

"허어?"

발렌티노를 잡아주던 아니스도, 소문이 자자한 황태자의 침술을 직관하게 된 대주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라키엘은 개의치 않았다.

'다음은 임맥(任脈).'

독맥이 뒤쪽이라면, 임맥은 앞쪽이었다. 그는 임맥을 이루는 배꼽 위쪽의 하완혈(下脘穴)을 시작으로 더 위의 수분혈(水分穴)과 중완혈(中脘穴)에 시침을 하였다.

물론 방법은 아까와 동일했다.

푹푹푹푹푹푹푹푹!

스트레스 해소에 좋은 마구잡이로 찌르기!

"...."

저거, 정말로 치료를 하는 게 맞는 걸까. 모두가 그런 생각을 떠올릴 무렵이었다.

라키엘이 반구 형태로 잘린 성물 두 쪽을 부항컵 잡듯이 양손에 나누어 들었다. 양쪽 성물의 잘린 단면을 발렌티노의 배와 등에 갖다 대었다. 조금 전에 마구잡이 시침을 선보였던 자리였다.

포폭.

마치 밥그릇 두 개로 배와 등을 꾹 덮는 듯한 모양새.

라키엘이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했다. 그의 심장에 자리한 써클이 거세게 회전하며 강력한 흡입력을 호로록 발휘했다.

키이이이잉-!

흡입력에 이끌린 혈맥 속의 마나가 독맥의 척중혈, 현추혈, 근축혈로 몰려왔다. 아까 라키엘이 과격한 시침으로 낸 피부의 구멍을 통해 약간의 혈액과 함께 빠져나왔다.

뱀파이어 변이증에 오염된 피였다.

그 피를 부항컵 역할을 하는 성물이 맞이했다. 가두었다. 컵 바깥으로 흘러나가지 못하도록. 그리고....

...치이이익!

오염된 혈액이 성물 안쪽 면과 만났다. 빛의 속도로 순삭, 아니, 정화당하며 16비트 칠성장어 승천댄스를 흔들어 재꼈다. 뱀파이어 변이증 완치의 성공적인 첫걸음이었다.

259화. 흡입한다 부하아아앙 (2)

딩동!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합니다.]

[써클 회전수 최대치!]

[흡입 모드, On!]

눈앞에 야물딱지게 떠오르는 메시지. 갓 건져 올린 생선처럼 펄떡펄떡 맥동하는 마나써클. 써클의 회전력이 막강한 흡인력을 발휘했다. 모든 걸 다 빨아들일 기세였다. 이 정도면 손바닥으로 진공청소기 코스프레 각이 날카롭게 설 것 같다.

'좋아. 이 정도면 됐어.'

흡인력을 유지하며 손을 뻗었다.

목표는 환자 발렌티노의 등.

정확히는 등에 갖다 댄 성물 부항컵을 향해서였다.

촵.

손바닥이 성물 부항컵 둥근 면에 물 묻힌 깻잎처럼 착 달라붙었다. 대짜 사이즈 밥공기 아랫면을 포근하게 감싸 쥔 것 같은 그립감(?)이 일품이었다.

그 상태에서 흡인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키이이잉-!

본격적으로 발동되는 아스라한 심법, 흡입 모드. 목표 대상은 발렌티노의 등짝과 성물 부항컵의 움푹한 안쪽 면 사이에 있을 공기였다. 즉, 공기를 빨아내었다.

쏴아압!

약간의 공기가 손바닥으로 끌려왔다. 물론 손바닥과 공기층 사이에는 성물이 있었기에, 공기 분자 자체가 성물을 통과해서 손바닥으로 들어오지는 못했다. 대신 공기 대부분이 성물 안쪽 면의 움푹한 부분으로 확 몰렸다.

마치 종이를 사이에 두고 자석에 이끌린 클립처럼.

그거면 충분했다.

부항컵 내부에서 상당한 기압차가 발생했다. 대부분의 공기가 움푹한 쪽으로 몰려오며, 발렌티노의 등이 있는 넓적한 쪽의 기압이 뚝 떨어졌다.

성물 부항컵이 욕실 벽면 타일에 붙여두는 문어빨판처럼 발렌티노의 등에 쫙 달라붙었다. 낮은 기압으로 피부를 쭈아압 잡아당겼다.

그 힘에 의해 피부 아래의 모세혈관과 세포 조직이 미세하게 파열되었다. 혈액과 림프가 조직에서 새어나왔다. 음압이 당기는 방향을 향해서. 피부 바깥을 향해. 자유를 찾아. 힘차게. 무럭무럭. 쑴펑쑴펑.

왈칵!

마침 라키엘이 하얀 가시로 피부를 콱콱 찔러둔 터였다. 그렇게 미리 개통(?)해둔 구멍들이 림프액과 혈액이 손쉽게 나올 수 있는 하이패스 통로가 되었다.

덕분에 제법 많은 혈액이 피부 밖으로 흘러나왔다. 성물 부항컵 안쪽에 고였다. 정화되었다. 격렬하게.

...치이이이익!

삽시간에 진료실을 가득 채우는 고등어 굽는 냄새!

"이, 이건...."

그 과정을 지켜보던 대주교, 베르토나는 입을 떡 벌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의 교묘한 혀놀림에 함락되어 끝내 성물을 지키지(?) 못한 그였다. 아마 신께서도 사람을 긍휼히 여기기 위한 성물의 훼손에는 찬성하시리라 여긴 까닭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못내 불안하였다. 과연 황태자가 두 쪽으로 자른 성물을 어떻게 활용하여 환자를 치료할 것인가. 궁금하고, 걱정이 되었다. 하여 초조한 심정으로 황태자의 하는 양을 지켜보았던 것인데....

'마나 심법으로 일으킨 압력을 통해서 환자의 몸에서 오염된 피를 뽑아냈구나. 그걸 잘라낸 성물 안쪽 면에 가두어서 정화하는 것이었어.'

보자마자 원리를 깨달을 수 있었다.

덕분에 무릎을 탁 쳤다.

'세상에. 신이시여. 이런 식으로 뱀파이어 변이증에 맞서 싸울 수 있을 줄이야.'

절로 찬탄이 나왔다. 소문에 듣기로는 드래곤마저도 치료를 받고자 황태자를 찾아왔다더니, 과연 그 명성이 헛되지 않은 것이었구나 싶었다.

그때부터였다. 대주교는 걱정하던 마음을 뇌주름 다리미로 다리듯 훌훌 날려 보냈다. 대신 한편으로는 감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팝콘을 와작와작 씹는 심정으로 마른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라키엘의 치료를 지켜보았다.

'흐읍!'

라키엘의 이마에 땀이 삐질삐질 솟구쳤다. 그의 입꼬리에 미소가 슬며시 맺혔다.

'좋아. 1단계는 성공.'

생각보다 괜찮다.

흡입력으로 뽑아낸 오염된 피가 제법 됐다. 게다가 성물의 위력 또한 생각 이상으로 절륜했다. 덕분에 뽑아낸 분량만큼의 혈액이 한 큐에 정화되었다. 그러니 이제는....

'다시 몸으로 투입하고 반대편, 배 쪽으로!'

키이이이잉-!

마나써클의 회전수를 조절했다.

오른손의 흡입력을 풀었다.

반대로 왼손에 흡입력을 넣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환자 발렌티노의 명치에 갖다 댄 성물 부항컵에서 아까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 명치 방향으로 혈액이 쑴펑쑴펑 뽑혔다. 반면, 등으로 뽑혀서 정화가 완료된 혈액은 다시 피부 조직 속으로 들어갔다.

한쪽에서는 오염된 피를 뽑아서 정화하고. 반대쪽에서는 정화를 마친 피를 몸으로 돌려주고. 이쪽에선 뽑아내고. 저쪽으론 주입하고. 그렇게 전신의 혈액이 모두 정화될 때까지 반복 수행!

물론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것은 부항요법을 빙자한 인간 혈액 투석기의 역할!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그는 잔뜩 긴장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딩동!

[당신의 오장육부가 부항요법의 성공을 기원하며 응원봉을 휘두릅니다.]

[심장 : 흡입한다! 부하아아아아앙-!]

[허파 : 흡입... 파하아....]

[대장 : 어? 형님들? 방금 허파 형님 연기 뿜은 거 같은데 말입니다?]

[간장 : 설마 흡연? 미친 거 아님?]

[위장 : 이거 전연령이라고!]

[콩팥 : 잠깐? 흡연이 아니다! 다들 자세히 봐!]

[비장 : 폐활량도 후달리는데... 너무 열심히 흡입 구호 외치느라고... 허파꽈리 모터가 과열됐....]

[허파 : ...푸쉬쉬....]

[오장육부가 하느님이랑 인생 다시보기 시청각이 날카롭게 뜬 허파를 애도합니다.]

'...그만해, 미친놈들아.'

한숨이 푸욱.

그래도 덕분에 긴장은 좀 풀렸다. 계속해서 부항 정화 시술을 이어갔다. 그 후로도 얼마나 진땀을 뚝뚝 흘렸을까. 옆에서 지켜보던 대주교가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가 폈을까. 마침내 환자 발렌티노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엇?"

시술을 잘 받던 발렌티노가 흠칫!

놀라더니 이쪽을 돌아보았다. 이내 더욱 놀라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어왔다.

"저, 전하?"

"...."

"지금 뭐 하시는 겁니ㄲ... 엇? 이건 뭡니까?"

발렌티노는 크게 당황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잠깐 멍하게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이 상의를 홀라당 벗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황태자가 괴상한 밥그릇 같은 물건 두 개를 잡고서 자신의 등과 명치에 갖다 대고 있었다. 한데 그쪽 부위들이 제법 욱신거렸다. 마치 수십 번쯤 꼬집기를 당한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는 깜짝 놀랐음에도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황태자의 표정 때문이었다. 진지했다. 이마며 콧등이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낯설지는 않은 황태자의 기색. 이건 바로....

'크게 신경이 쓰이는 환자를 치료할 때 가끔 보이시던 모습인데. 그런데....'

지금 자신에게 뭔가를 하며 저런 표정을 보이고 있다.

어째서?

설마 치료를?

'내가... 치료를 받던 중이었다고?'

그는 당혹감을 억누르며 기억을 더듬었다. 짙은 안개에 휩싸인 듯이 멍하던 상태에서 벗어나니, 파묻혀 있던 기억이 조금씩 살아났다.

연인을 바래다주고 혼자 돌아오던 골목. 그곳에서 마주쳤던 괴한. 송곳니. 목덜미. 피. 그리고....

"허억."

죄다 떠올랐다.

그는 경악에 잠긴 눈길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라키엘이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이제 사람으로 돌아왔구만?"

그 순간이었다.

딩동!

[당신은 성물의 과감한 활용과 부항 요법의 응용으로 환자 : 발렌티노의 뱀파이어 변이증을 성공적으로 진료하였습니다. 그는 심각한 변이성 질환에서 벗어났으며, 적절한 안정을 취할 시 별다른 후유증 없이 완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료비 청구 (Lv.2) 스킬이 발동됩니다.]

온세상을 울리는 맑고 고운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동시에 라키엘은 깨달을 수 있었다.

됐다고. 이제는 보너스 수명과 보상을 팍팍 퍼받을 때가 왔노라고. 나머지 변이증 환자들의 오염된 피를 쭉쭉 뽑아서 정화하는 만큼 보상 또한 스택 쌓이듯이 팍팍 늘어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