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22

"...끄흠?"

연회가 끝난 밤이었다.

아직 새벽 어스름이 물들지도 않은 새벽, 귀족원장은 적당한 취기에 젖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모처럼의 연회도 마음에 들었다. 음식은 취향에 맞았고, 술은 향긋했다. 황태자의 미묘한 술수가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 정도 심리전은 이 바닥에선 일상이나 다름없기에 개의치 않았다.

덕분에 기분 좋은 꿈도 꾸었다. 온 세상이 파스텔 색감으로 물들었다. 연보랏빛 아름다운 하늘을 훨훨 날았다. 아이 같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행복했다. 느닷없는 통증이 발을 물어뜯기 전까지는.

...콰작!

"긋?"

갑작스러운 격통이었다. 놀라서 아래를 보았다. 상어가 보였다. 송곳 같은 이빨로 자신의 오른발을 물어뜯고 있었다. 아니, 씹어대고 있었다. 이미 걸레짝이 되어 버린 발. 너덜거리는 살점과 드러난 뼈마디. 울컥울컥 쏟아져 나오는 선혈.

상어가 온몸을 흔들었다. 생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뜯겼다. 추락했다. 아래로. 더 아래로. 파스텔 아름다운 하늘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오직 아래에서 자신을 삼키려 드는 핏빛 바다만 끝없이 넘실거릴 뿐.

풍덩!

"...으아아아악!"

핏물 흥건하여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공포의 바다. 시뻘건 파도가 자신을 덮치는 순간, 귀족원장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이마에는 이미 식은땀이 흥건했다. 거칠어진 숨을 내쉬며 이불을 걷어냈다. 자신의 오른발부터 살폈다.

멀쩡했다.

꿈이었구나.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이었다.

"읍?"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격통이 오른발을 후려쳤다. 아니, 생살을 찢듯이 잡아 뜯었다. 척추가 절로 오그라들 정도의 무시무시한 고통이었다.

"그, 그으으읏?"

귀족원장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그 고통이다. 이미 몇 차례 겪어 본 적이 있는 지옥 같은 통증이다. 그럼에도 주치의조차도 원인을 찾아내지 못한 그 격통이다.

'무슨... 이런...!'

후욱, 후욱,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버석거리며 이불이 발에 닿는 순간도 아팠다. 칼에 베이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내쉬는 숨결이 피부에 닿는 것마저도 아팠다! 저절로 눈물과 신음이 번갈아 흘러나왔다. 번데기처럼 온몸을 말고서 끙끙 앓았다.

그 서슬에 아내가 잠에서 깼다.

"여보? 여보!"

공작부인은 기겁했다. 동시에 깨달았다. 몇 차례인가 본 남편의 모습이었다. 이럴 때면 전엔 어떻게 했더라.

그녀는 머리맡의 줄을 잡아당겼다. 맑은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침실 문이 열렸다. 야간 담당으로 대기 중이던 집사가 황급히 들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주치의를 부를까요?"

공작부인은 그러라고 말하려 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아니!"

끙끙 앓던 에스토크 공작이 외치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고는 뜻밖의 명을 내렸다.

"마차... 마차를... 준비하라."

"예?"

집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차를?

이 시간에?

저토록 식은땀에 절어서?

"마차라니요? 이 야심한 시간에 어디를 방문하시려고...."

"별궁, 별궁... 한의원으로. 전하를 뵈러 갈 것이니, 어서!"

에스토크 공작이 식은땀을 흘리며 외쳤다.

차라리 발을 자르고 싶어지는 고통. 원인조차 모르는 이 고통. 그런데 주치의를 부른다고 해서... 이게 해결될까?

'아니.'

아닐 것이다.

자신의 주치의는 평소처럼 진통에 효험이 있다는 약초를 짓이긴 괴상한 물약만 먹이겠지. 그러면 자신은 평소처럼 여전히 끙끙 앓으며,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그 진통제에만 의지해야겠지.

그건 싫었다.

겪어 봤기에 더 싫었다.

아주 그냥 지긋지긋했다.

그런데 아까 연회장에서, 황태자는 어떠했던가.

'내 증상을... 들여다본 것처럼 상세하게 짚어냈지. 심지어 그 원인까지도.'

증상을 짚어내고.

원인을 유추하고.

그게 가능하다면, 치료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최소한 자신을 이 지옥 같은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해방시켜 줄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이토록 야심한 시간이니... 차라리 잘 되었어. 내 별궁 출입이 누군가의 눈에 띌 일은 없겠지!'

없어야 한다.

없으면 좋겠다.

아니, 있어도 상관없다.

별궁에 가면 안 아플 수 있을 듯하니까. 정치적 계산? 줄타기? 당장 아파서 죽을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소용인가!

그렇게, 귀족원장 에스토크는 통풍 발작이 주는 어마어마한 아픔에 굴복(?)하여 전격적인 별궁행을 결심하였다.

232화. 아프니까 병원이다 (2)

"전하께서 곧 나오실 겁니다."

"...."

꿀꺽.

별궁 한의원 당직 의사의 말을 듣는 순간, 귀족원장 에스토크는 무의식중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내심 한편으로 생각하였다.

'내가 실수를 한 것은 아닐까.'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 별궁 한의원의 응급실이라고 하였던가. 말 그대로 야심한 시각에도 응급한 환자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한 장소라고 했던 것 같다.

생각보다 본격적이다.

그래서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이렇게 덜컥 별궁에 와 버리다니.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도대체 어쩌자고 자신은 이런 판단을 하였을까.

너무 아파서?

그냥 아프다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발목을 통째로 자르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물론 그랬다.

사실은 지금도 아팠다. 남들의 보는 시선 때문에 필사적으로 참고 있지만, 그럼에도 힘들었다. 발끝에 바람만 스쳐도 온몸에 힘이 꽉 들어갔다. 안 그러면 비명이 터져 나올 것만 같으니까. 귀족으로서의 긍지를 잃게 될 테니까.

게다가 생각해보면, 고통에 몸부림치던 내내 황태자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던 것 같기도 하다.

'어제, 연회장에서....'

자신의 아픈 증상을 족집게처럼 짚어내던 황태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치의조차도 몇 년째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던 아픔인데. 그런데 황태자는 그 원인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술술 말했던가.

그 말은 즉, 치료법도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후우. 어떤 얼굴로 황태자를 뵈어야 하는 것인가, 나는.'

귀족원장 에스토크는 아픔과 초조함이 버무려진 심정 속에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대로 기다리며 황태자에게 치료를 받자는 생각과, 당장 저택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수시로 교차했다.

물론 그는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했고, 그러는 사이에 황태자가 응급실로 왔다.

"환자는?"

"저쪽에 있습니다."

조금은 졸음이 덜 가신 목소리. 당직 의사의 안내를 받으며 반쯤 뛰어오던 황태자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이쪽을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공작님?"

"화,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이젠 다 끝났다.

도망칠(?) 타이밍도 놓쳤다.

에스토크 공작은 내심 눈을 질끈 감으며 예를 표했다. 그리고 두 가지 염원을 품었다. 첫 번째 염원은 자신이 오늘 내린 판단이 부디 훗날의 정치적 곤경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염원은... 뜻밖에도 곧바로 이루어졌다.

"괜찮습니다. 너무 그렇게 미안해하지 마세요."

황태자가 뜻밖의 말을 건네어 왔다.

공작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예?"

"이런 새벽에 별궁을, 예고도 없이 덜컥 방문하는 바람에 엄청나게 민폐를 끼쳤다는 기색을 너무 가감 없이 드러내고 계셔서 말입니다."

"아...."

내가 그랬던가.

한데, 이게 민폐인 건 맞지 않는가. 그래서 이번 일로 황태자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를 내심 염원하고 있었는데. 에스토크 공작은 더욱 불안함을 느꼈다.

라키엘은 싱긋 웃고 말았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 공작님은 귀족원장으로서 황태자를 만나러 온 것입니까? 아닐 텐데요."

"아, 예. 저는...."

"압니다. 많이 아파 보이는군요."

"...."

"그러니 자책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민폐를 끼친 것도, 무례를 범한 것도 아니니까요. 지금은 그저 한 사람의 환자로서 의료인을 찾아온 것이니까 말입니다."

라키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사실은 정말로 당연한 일이었다. 환자가 아픈 것은 어떤 경우라도 의료인에게 민폐가 아니다. 그걸 민폐로 여기는 의료인은 환자를 대할 자격이 없다. 세상에 일부러 아픈 사람은 없으니까.

그것이 라키엘이 평소부터 지니고 있던 생각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공작을 최상위의 귀족이 아닌, 그저 아파서 병원으로 찾아온 환자로서 대하였다. 그 첫 번째는 환자가 느끼고 있을 민망함과 두려움, 불안함을 다독이는 것이었다.

"아프니까 의사를 찾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설령 그게 한밤중이든 새벽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전하...."

"그러니 괜찮습니다. 뭐, 한밤중에 저를 깨운 일이 그렇게 마음이 쓰이시면, 나중에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해 주시죠."

"아, 알겠습니다, 전하."

"그럼 이제 아픈 곳을 좀 살펴볼까요. 이쪽 발이 아픈 거죠?"

"예... 예, 전하."

본격적인 진료의 시간이다.

에스토크 공작은 살짝 긴장했다.

소문으로 들은 바로는 황태자는 기존의 의사들과 판이한, 굉장히 독특한 진단과 치료법을 지니고 있다던데. 과연 그게 뭘까. 혹시 엄청나게 아프거나 한 건 아닐까.

그의 불안감 서린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역시. 통풍이 맞군요."

"그, 그렇습니까?"

"전형적인 통풍 발작입니다. 전에도 이런 일이 몇 차례 있었지요?"

"아, 예... 전하."

"요산의 과도한 생성과 축적 때문입니다. 아마도 평소에 섭취해 왔던 음식이 지나치게 풍족했겠지요. 필요 이상으로 섭취한 단백질이 대사되는 과정에서 퓨린(Purine)의 농도가 높아졌고, 그 결과 요산염 결정체가 이곳, 발가락의 관절에 사이토카인(Cytokine)과 단백질 분해효소(Proteolytic enzymes)에 의한 염증 손상을 발생시킨 것이지요. 그게 지금 공작님이 느끼는 통증의 원인입니다."

"...."

공작은 대답할 말을 잃었다.

대신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제대로 진단을 한 게... 맞나?'

아무래도 미덥지가 않았다. 황태자의 말이 복잡하고 현란해서 더욱 그랬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황태자는 청진기를 들지도, 자신의 입속을 빤히 들여다보지도, 귓구멍 속의 귓밥을 닦아내어 관찰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황태자는 그저, 한 손으로 자신의 발등과 발목을 살짝 매만졌을 뿐이었다. 그것도 겨우 몇 초 정도만!

'그런 걸로 저런 자세한 내용과 원인을 알 수 있다고?'

너무 건성으로 빠르게 진찰한 것에 비해서, 나오는 내용이 상세하니까 오히려 더욱 미심쩍게 느껴졌다.

물론 라키엘은 그런 공작의 심리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역시나. 잘 믿질 못하는구만.'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사실 자신은 제대로 진단을 했다. 공작과 대면하는 순간부터 이미 경혈 스캐닝을 돌리고 있었다. 거기에 공작의 발목을 슬쩍슬쩍 매만지고 살피면서 진맥 스킬도 사용했다. 덕분에 자신의 오장육부가 공작의 오장육부와 상담까지 마친 상황이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딩동!

[종합 소견 : 전반적으로 각종 영양이 과도하여 문제가 되는 신체입니다. 대량의 내장지방이 관찰되는 복부비만 상태입니다. 특히, 무분별하고 불규칙한 식습관이 불러온 고요산혈증(Hyperuricacidemia)과 그에 따른 전형적인 간헐기 통풍이 감지되었습니다. 또한, 현재 상태로 미루어 향후 고혈압과 심각한 지질이상증, 당뇨 등의 합병증 발생 확률이 대단히 높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가급적 적극적인 치료 및 식단 관리를 통한 체질 개선이 시급합니다.]

일단 종합 소견 결과는 제법 암울했다. 오장육부의 상담 결과는? 더했다.

딩동!

[당신의 오장육부가 에스토크 공작의 엉망진창인 신체 상태에 놀라움을 드러냅니다.]

[심장 : 이야. 저게 사람 몸이냐ㅋㅋㅋ]

[허파 : 허프핳하핳ㅋㅋㅋㅋㅋ]

[대장 : 저는 보았지 말입니다. 부럽지 말입니다.]

[간장 : 지금까지 본 진료 대상 중에 제일 폭신한 내장지방에 감싸인 저쪽 대장? 뭐 다른 건 모르겠고 쿠션감 하나는 쩔겠더만ㅋㅋ]

[위장 : 야, 그래도 진료 대상인데 너무 비웃는 건 자제하자. 원래 사람이든 뭐든 겉모습보다는 내면이 중요한 거임.]

[콩팥 : 예를 들자면?]

[비장 : 냉장고?]

[심장 : 올ㅋ]

[오장육부 리포트 : 고요산혈증 때문에 콩팥 상태가 특히 폐급임. 요로결석 발생 위험성 개상타ㅋ 간도 엉망이고 심장도 허파도 만신창이임. 제발 식단 관리 좀 시켜라. 뒈지기 전에.]

"...."

뭐, 일단 전반적으로 안 좋다는 건 충분히 알겠다. 더불어 공작이 본인의 심각한 상태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알겠다.

그러니 이제는, 적극적인 치료와 관리가 필요하겠다.

"일단 입원을 하시죠."

"...예?"

눈을 동그랗게 뜨는 공작.

하지만 개의치 않고 말했다.

"그리 길게까지 입원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우선 지금 통증 발작부터 완전히 가라앉혀야겠지요. 그 후에는 통원하면서 진료와 처방을 받아서 관리를 하면 되실 거고."

"그럼 얼마나...."

"길면 열흘쯤 걸릴 겁니다."

"열흘 말입니까? 하면, 그 안에 이 통증이 가라앉을까요?"

"일단 열심히 치료를 해봐야겠지요."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장담할 수는 없다. 언제까지 명쾌하게 딱 나을 거다, 라고 잘라서 말할 수 있으면 자신도 참 좋겠다.

물론 마음 같아선 당장 내손약손 스킬을 써서 통증부터 가라앉혀 주고 싶긴 하지만...섣불리 그랬다간 그 뒤의 치료에 지장이 생길 것이 염려가 되었다.

'아마도 그럴 거야. 너무 초장부터 통증만 확 없애 버리면, 그 뒤로 이어질 꾸준하고도 빡센 치료를 받겠다는 의지가 금방 사라질 거거든. 내손약손만 받으면 금방 편해지니까. 점점 거기에만 의존해서 근본적인 치료를 멀리하게 될 거고.'

그러니 내손약손은 치료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뒤로 미루자. 지금은 그런 게 있다는 걸 알려주지 말자.

그렇듯 확답을 해 주지 않아서였을까.

공작의 표정이 흐려졌다.

"하면... 정말로 입원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전하?"

역시나 흔들린다. 이쪽에 대한 믿음이 두텁지 않은 까닭이겠지. 라키엘은 공작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이런 새벽에, 여기까지 오신 걸 보면 달리 의지할 다른 곳은 없어 보이는데 말입니다."

"...."

"이대로 돌아가면 따로 뾰족한 수가 있습니까?"

"그건...."

없다.

공작은 단언할 수 있었다.

이곳을 떠나면 자신에게 남는 치료 수단이라고는 주치의뿐인데, 그 작자는 이제 별로 신뢰가 가질 않는다. 게다가 이미 별궁까지 와서 황태자를 깨워 버린 마당이 아닌가.

이제 돌아가기엔 늦었다.

결국,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하. 대신 부탁이...."

"입원 사실을 외부에 숨기고, 다른 이들이 공작님의 모습을 볼 수 없게 해 달라는 거겠지요? 물론 가능합니다. 이런 때를 대비한 VIP 병실이 있으니까요."

"그게 정말입니까?"

"아무렴요. 일단 그럼 앞으로의 치료에 동의한 것으로 보고, 지금 바로 치료부터 시작하도록 하지요."

"지금... 말입니까?"

"예. 혹시 문제라도?"

"...."

아직 마음의 준비가....

꿀꺽.

공작은 병원 치료를 앞둔 대부분의 사람들이 품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에 불과했다. 당장 발가락이 너무나 아팠다. 한데 곧바로 치료부터 해 주겠다니, 이 얼마나 고마운가 말이다.

"감사합니다, 전하.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예, 그래 주면 저야 고맙지요. 그럼 이제부터...."

나는 어떤 치료를 받게 되는 걸까. 소문에 따르자면 황태자는 굉장히 독특한 치료법을 쓴다던데.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아픔에서 해방되어 황태자를 칭송하기도 한다던데. 그럼 나도 혹시 이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부디 그러면 좋겠다.

제발 그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어떤 치료라도 기꺼이, 달게 받겠다.

...라고 공작이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이걸로 공작님을 좀 여러 번 찌르겠습니다."

황태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손가락보다 기다란 하얀색 가시를 치켜들더니 아픈 발가락을 정조준으로 겨누었다.

"...예에?"

그걸로요?

저를요?

왜요?

본격적인 한방 치료 체험(?)을 예감한 공작이 흠칫했다. 라키엘이 별일 아니라는 듯이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 끝나면 돈까스 드릴게요."

"...."

공작의 얼굴에서 핏기가 조금, 사라졌다.

233화. 아프니까 병원이다 (3)

오늘도 별궁 한의원의 힘찬 하루가 밝았다. 어느 VIP 진료실에서도 힘찬(?) 비명이 옴팡지게 울려 퍼졌다.

톳!

"...끱!"

토톳!

"흽...?"

톳!

"그, 그만...!"

"그만요? 벌써?"

"...제발."

"안 아픈 거 압니다. 엄살 뚝."

"하, 하지만..."

톳!

"긔입!"

황도 마젠타의 유서 깊은 귀족원, 그곳을 이끄는 귀족원장 에스토크. 무려 공작의 신분이자, 황제의 처남이기도 한 남자. 권세로만 따지면 황실 의전 서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무조건 들어가는 어마어마한 존재.

하지만 그도 병상 위에서는 한 사람의 초라한 인간일 뿐이었다. 의료인 앞에서는 환자일 뿐이었으며, 난생처음 침술을 맞으면서는 뾰족한 가시가 몸을 찌를 때마다 절로 온몸을 움찔대는 가련한 영혼일 따름이었다.

그는 두려웠다.

'내가... 왜 이런 치료를 받아야 하지?'

공작은 망연자실한 눈초리로 자신의 오른발을 쳐다보았다. 빼곡했다. 뭐가? 가시가. 새하얀 가시가 자신의 발가락이며 발등, 발목, 심지어 발바닥에까지 박혀 있었다!

가장 기괴하고도 끔찍한 꿈에서조차 이런 모습은 본 적이 없었는데. 이게 과연 현실일까. 혹은 내가 지금 지독한 악몽을 꾸고 있는 걸까.

하지만 꿈은 확실히 아니었다. 발가락 관절이 여전히 죽여주게 아프니까. 생각 같아선 당장 발목을 잘라내서 반대편 발로 뻥 차 버리면 속이 후련할 것처럼 아프니까.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헛소리를 감히 지껄이는 자가 있다면 당장 멱살을 잡고서 다섯 바퀴쯤 공중에서 돌려준 다음에 땅바닥과 극적이고도 과격한 키스를 시켜주고플 만큼 아팠다.

그러니까 이건 절대로 꿈이 아니었다. 자신의 발에 빼곡하게 꽂힌 의문의 가시도. 심지어 그걸 더 추가하고 있는 황태자의 모습도.

"저기... 전하?"

"몇 개나 더 꽂을 거냐고요? 3개 남았습니다."

"...."

그게 궁금한 게 아닌데.

사실은....

"이런 걸로 치료가 되느냐는 궁금증을 많이 느끼고 있겠지요. 압니다. 이런 치료법이 생소하다는 거. 불안하겠지요.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라키엘은 웃으며 새로운 가시를 집어들었다. 통증이 전혀 없는 하얀색 무자극 가시를 공작의 엄지발가락 발톱 뿌리 바깥쪽 모서리 어름에 톡, 가뿐하게 꽂아 넣었다. 족궐음간경(足厥陰肝經)을 이루며, 흉추 쪽의 긴장을 풀어 줄 수 있는 혈자리인 대돈혈(大敦穴)이었다.

톳!

가시가 꽂히는 순간 공작이 비대한 몸을 가녀리게 떨었다. 아무리 찔려도 저 가시는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라키엘은 그의 반응을 일부러 무심하게 대했다. 자고로 괜찮다고 계속 반복해서 말하면 어쩐지 더 불안해지는 게 사람의 심리니까.

대신 그는 공작의 불안감을 자연스럽게 해소해 줄 화제를 언급했다.

"그나저나, 통풍이 제법 진행이 된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이렇게 될 때까지 정말로 많이 아팠겠습니다."

"으으, 예, 그랬습니다."

"몇 년쯤 됐지요?"

"대략 4년이 조금 넘은 듯합니다, 전하."

"하지만 그럼에도 꿋꿋하게 참아냈군요?"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허허허."

"그랬습니까?"

"물론이지요, 전하."

공작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짐짓 꿋꿋한 척하며 웃었다. 라키엘이 은근슬쩍 분위기를 유도하며 깔아준 멍석(?) 덕분이었다.

"많이 괴로운 순간도 있긴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누구겠습니까. 제 어깨에 귀족원의 긍지와 앞날이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기에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좀처럼 내색을 하지 않았지요, 허허."

물론 구라(?)였다.

많이 아픈 날은 체면이고 긍지고 뭐고 없이 이불을 부여잡고 데굴데굴 구르며 거의 울었다. 주치의가 주는 진통제를 달고 살았다. 그럼에도 진통제 효력이 영 별로인 것 같다며, 한 시간이 멀다 하고 주치의를 닦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에게 편리하도록 망각을 하는 존재인 법. 공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지난 몇 년을 꽉 채운 고통의 기억을 스스로 각색했다. 고통에 쩔쩔맸던 기억은 최대한 축소시켰고, 아주 가끔 잘 참아낸 순간들만 한껏 부풀렸다.

"아픔이요? 참을 수 있습니다. 귀족으로서의 본보기를 생각하면 말입니다. 고통이 주는 불편함도 물론입니다. 황실의 친척으로서 지켜야 할 권위가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얼마든지... 띕!"

톳!

"...차, 참아낼 수 있습니다."

"역시. 훌륭하군요. 자아, 다 끝났습니다."

공작이 스스로에게 잠깐 심취해서 떠드는 사이에 시침이 무사히 끝났다. 덕분에 공작은 의아함을 느껴야 하였다.

"저기, 그런데 전하?"

"예?"

"이런 말씀을 드리기가 대단히 송구하오나...."

"가시를 이렇게 많이 꽂았는데도 통증이 여전히 똑같은 것 같다고요?"

"...예."

사실이었다.

발가락이 전과 똑같이 아팠다. 혹시나 변화가 천천히 오나 싶어서 기다려 보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아팠다. 달라진 점이 전혀 느껴지지가 않았다.

덜컥 의심이 들었다. 혹시 황태자의 의술은 겉보기로만 요란하고 특이한, 그러나 실상은 내실이 전혀 없는 빈 깡통 같은 야바위가 아닌지.

"원래 그런 겁니다."

"...예에?"

"통풍 발작이 주는 통증이 그토록 쉽게, 단순한 시침만으로 곧바로 가라앉지는 않는 법이니까요. 이건 앞으로의 치료를 위한 시작에 불과합니다. 어쩌면 지금 시침 때문에 발가락이 조금 더 아파질 수도 있고 말입니다."

"...예에에?"

경악감에 물들며 휘둥그레지는 공작의 두 눈.

라키엘은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방금 시침으로 하지의 혈행을 개선했습니다. 아마 혈류량이 증가하면서 염증 반응이 약간 더 격해질 수도 있을 테고요."

"그럼...."

"잠시 후에 소염 진통 효과가 있는 약침이라는 걸 환부에 놓을 겁니다. 그럼 조금 나아지겠지요."

그때부터였다.

본격적인 치료가 시작되었다.

첫 과정은 요산 침착으로 인한 관절 부위의 염증을 누그러뜨려 줄 약침 시술이었다. 그 시술에는 아피로스 여왕 애벌레 꾸꾸의 도움이 힘을 발휘하였다.

"그러니까 꾸꾸야?"

"꾸꺄?"

"여기, 가시 끝에 침 좀 발라 줄래?"

"꾸?"

"알잖아. 네 침에 약간의 소염 진통 성분이 있는 거. 지금 그게 필요하거든."

"꺄?"

"네가 침을 발라 주면 여기 공작님이 덜 아파질 거야."

"꾸꾸?"

"응, 정말로."

"꺄!"

"그래, 그래. 응, 그렇지. 가시에 안 찔리게 조심조심... 잘했다. 고마워?"

"꾸꺄!"

꾸꾸의 도움 덕분이었다. 약침 시술이 무난하게 치러졌고, 새벽부터 내내 고통에 절어 찡그려져 있었던 공작의 얼굴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그걸로 급한 불을 끈 다음의 단계는 약물 치료였다.

'공작은 체내의 요산이 과다한 게 원인이니까 한국의 병원에 갔다면 아마도 요산을 배출해 주는 약을 처방받았겠지. 예를 들자면 알x푸리놀 같은 거라든가. 하지만 여기선 당연히 그런 걸 처방해 줄 수 없으니까....'

대신 탕약을 미리 개발했다.

언제?

연회를 준비하던 며칠 사이에. 연회를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꼭 필요해질 것이라 예상하고, 연구했으며, 만들어냈다.

그것이 바로 '안티-통풍탕'이었다.

'안티-통풍탕의 주요 역할은 신체의 수액 대사를 조절하는 이수(利水)의 이치로.'

주 약재는 총 14가지였다.

우선, 벌채한 소나무 뿌리에 기생하는 균핵 덩어리인 복령(茯苓), 그리고 방기(防己), 일명 쇠태나물이라 불리는 식물의 뿌리인 택사(澤瀉) 등은 테트라드린(tetrandrine), 시노메닌(sinomenine), 트릴로빈(trilobine) 등의 성분으로 이뇨 작용을 돕는 역할을 맡았다.

또한, 조직 내의 노폐물을 제거하여 통증과 염증을 완화하는 역할은 아트락티놀(atractylol), 히네솔(hinesol) 등을 함유한 창출(蒼朮), 그리고 말린 귤껍질인 진피(陳皮)에게 맡겨 관절의 동통 개선을 꾀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황금(黃芩), 사상자(蛇床子), 고삼(苦蔘), 몰약(沒藥), 오가피(五加皮), 유향(乳香), 우슬(牛膝), 천궁(川芎), 당귀(當歸)를 적절히 배합하였다.

그로써 바이칼린(baicalin), 마트린(matrin), 트리테르페노이드 사포닌(triterpenoid saponin), 세사민(sesamin), 페롤리라인(perlolyrine) 등의 주요 성분을 통한 염증 제거, 혈행 순환을 꾀하는 조합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 결과는 사뭇 파괴적이었다. 특히, 공작의 미각을 파괴하는 데에 탁월한(?) 효능을 발휘하였다.

"...거으어억. 쿨룩! 우, 으웨엑?"

시커먼 탕약의 첫 모금을 들이킨 공작이 즉각 반응을 보였다. 전형적인 속이 뒤집혀 구토를 하려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 반응쯤은 이미 예상하던 라키엘이었다.

그는 공작이 미처 헛구역질을 끝내기도 전에 재빨리 손을 뻗었다. 그리고 헛구역질을 하느라 벌어진 공작의 입속으로 동그랗고 달달한 사탕을 쏙 집어넣었다.

"자두맛입니다."

"...읍, 급?"

"어떻습니까. 단맛을 보니까 조금 괜찮아지지요?"

"어, 예, 전하. 우읍, 여전히 좀... 속이 이상하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렇군요. 처음 마셔보는 탕약이라서 제법 쓰지요?"

"예, 전하. 굳이 표현을 하자면-"

"표현 안 하셔도 되는데."

"소똥 밟은 불곰 발바닥을 핥는 맛이랄까요."

"꼭 경험해 보신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그렇다는 뜻이었습니다, 전하."

"어째 악담처럼 들리는데요."

"허허. 그럴 리가요."

"그렇습니까?"

"예, 전하."

"하면 마저 드시지요."

"...예?"

공작이 흠칫했다. 그의 떨리는 동공이 라키엘을 향해 애원의 감정을 아련하게 흩뿌렸다. 그러나 라키엘은 단호하기가 이를 데가 없었다.

그가 철벽을 치듯이 딱 잘라서 말했다.

"약은 전부 드셔야지요. 겨우 한 모금만 드셨지 않습니까. 아직 많이 남았는데 말입니다."

"저기, 전하? 맛을 봤으니 이쯤이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전혀요. 택도 없습니다. 이 그릇에 담긴 전체 분량이 1회 복용량입니다."

"하, 하지만 벌써부터 약효가 느껴지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착각입니다."

"사탕도 먹었는데."

"그건 잠깐 뱉었다가 탕약 마신 뒤에 다시 드시면 되잖습니까."

"그, 그래도...."

"자아. 츄라이 츄라이. 입 벌리시고. 코 막으시고. 쭉쭉. 어으 잘 들어간다. 원샷."

"...거윽, 커걱? 그웍, 걱."

결국, 공작은 눈물 콧물을 흘려가며 안티-통풍탕을 전부 마셨다. 그런 일이 입원 기간 내내 삼시 세끼 반복되었다. 덕분에 공작은 유린당하고 짓밟힌 미각의 회한을 곱씹으며 매일 밤 남몰래 눈물로 베개를 적셨다.

아, 내가 이러자고 별궁 한의원에 입원을 하였나.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런 맛을 보면서까지 살아야 하나. 하루에 세 번 미각이 파괴당하는 것보단 차라리 발이 좀 아픈 게 낫지 않을까.

뒤늦은 후회(?)가 쑴펑쑴펑 피어났다.

그러나 약효만큼은 진짜였다.

전격적인 별궁 한의원 입원을 감행한 지 나흘째 아침. 공작은 처음으로 안티-통풍탕의 약효를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발가락 각질에서부터 십이지장 융털돌기를 거쳐 정수리의 듬성듬성해진 모공 뿌리까지, 신체의 모든 부분이 디테일하게 상큼해지는 뜻밖의 기분이었다.

234화. 자발적인 지지 선언 (1)

"으음...."

이른 아침이었다.

갓 떠오른 햇살이 방금 구워낸 빵처럼 땅을 물들이는 시간, 에스토크 공작은 평소와 거의 똑같은 시간에 습관처럼 눈을 떴다. 그리고 평소처럼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얼굴부터 찡그렸다.

이유는 달리 없었다.

습관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느껴지는 발의 고통.

벌써 수차례 그런 경험을 해 오다 보니, 딱히 아프지 않은 날에도 얼굴부터 찡그리며 깨어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혹시나 오늘도 아픈 걸까.

고통은 이제 그만 맛보고 싶은데.

그런 생각이 무의식 깊숙한 곳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매일 아침을 찡그린 얼굴로 맞이하게 만들었다.

물론 오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습관처럼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눈을 떴고, 하품을 하며 상체를 일으켰으며, 최근 크게 말썽을 부린 자신의 오른발을 쳐다보았다.

역시나 오늘도 엄청나게 아프겠지. 어제도, 그제도 그랬으니까. 너무나 아파서 별궁 한의원에 입원까지 해 버렸으니까. 그러니 당연하지만 오늘도 마찬가지로....

"...어?"

두 번째 하품을 하던 공작은 멈칫했다.

이상하다.

발이 아프지가 않았다.

물론 아예 안 아픈 건 아니었다. 약간 아릿하고 뻐근한 감각이 조금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어젯밤까지 아프던 정도에 비하자면... 이건 간지러운 수준도 되지 않았다.

'왜 이러지?'

의아했다.

엄습해 올 고통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참인데. 한데 그런 각오가 무색하게도 하룻밤 사이에 통증이 싹 내려가 버린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때였다.

똑똑똑.

누군가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공작은 문밖의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았다.

"역시 내 기척을 들었나 보구만. 들어오게."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조용히 열리는 문. 이젠 익숙해진 얼굴의 간호사가 들어왔다. 아니스라고 불리는 수간호사. 사실은 웨어울프라고 하였던가.

"표정이 밝아지셨군요, 공작님?"

"아, 그래 보이는가?"

"네. 통증이 가라앉았나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으이."

"킁킁. 킁. 냄새로 보아 확실히 그렇군요. 열도 제법 내려간 것 같고요."

"그게 느껴지는가?"

"전 웨어울프니까요."

아니스는 당연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체취를 통해 상대의 대략적인 신체 상태를 파악하는 일은 그녀에겐 쉬운 일이었다.

웨어울프니까. 개코를 능가하는 개코니까. 미묘한 컨디션의 변화, 고통을 느끼는 정도, 심지어 감정의 기복까지.

"냄새는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전해준답니다. 그럼 아침을 준비시키도록 하지요. 그리고...."

"그 탕약, 오늘도 먹어야겠지?"

"어쩔 수가 없어요, 공작님."

"알고 있네."

아니스가 물러간 후, 공작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자신의 발을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발가락 뿌리 어름의 부기가 제법 빠진 것도 같았다. 전에는 벌겋게 퉁퉁 부어 있었는데.

신기했다.

조심스럽게 만져 보았다. 그럼에도 별다른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이불만 스치면 아파서 죽을 것 같았는데. 이 또한 신기했다.

'그 끔찍한 맛을 지닌 탕약이 효과가 있는 건가.'

정말로 그런 걸까.

아침 식사를 받고.

식후에 탕약을 마시고.

어김없이 미각을 파괴당했다.

한데 그 끔찍한 맛이 전과는 살짝 다르게 느껴졌다. 조금은 마실 만했다. 기분 탓일까. 혹은 오늘만 평소보다 아주 약간 덜 쓰게 달여진 걸까. 스스로의 변화가 새삼스러운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조금 걷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겠는가?"

"물론이에요, 공작님. 발에 과도한 자극이 가지 않는 선에서는 오히려 조금씩 움직여 주시는 게 도움이 될 거랍니다."

"그렇군. 고맙네, 아니스 양."

"별말씀을."

공작은 조심스럽게 병상에서 내려왔다. 슬리퍼를 신은 발이 땅에 닿는 감촉. 그러고 보니 나흘 전의 새벽에 실려 온 이후로는 스스로 디뎌 보는 첫걸음이었다. 그동안은 너무나 아파서 제대로 걷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신중하게 한 걸음.

"...."

썩 괜찮다. 조금 욱신거리긴 하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겠다.

공작은 자신감을 얻었다.

두 걸음, 세 걸음, 천천히 걸음을 이어 갔다. 마치 어린 시절 걸음마를 처음 배우던 때가 이러했을까.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병실을 나섰다.

순간 잠깐이나마 흠칫했다.

복도로 나가면 다른 이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텐데. 자신이 이곳 별궁 한의원에 입원한 사실은 아직 외부에 알리지 않았는데. 비밀인데.

"...."

하지만 갑갑하다.

나흘 동안이나 병실에 갇혀 있었다. 이곳 병실만 아니라면 어디든 좀 나가 보고 싶다. 게다가 지금은 평소에 쓰고 다니던 가발도 벗고 있다. 한껏 꾸미지도 못한 환자복 차림이다. 하니 누군가가 자신을 곧바로 알아볼 수 있을까.

'아니겠지. 아닐 거야.'

부디 그러길 바란다.

이대로 병실에만 처박혀 있기엔 너무나 갑갑하니까. 이렇듯 조금은 무리한 소망이나마 변명으로 삼아 밖으로 나가는 게 좋겠다. 변명? 핑계? 아무래도 좋다.

"후우."

복도로 나왔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간호사들. 모두가 웨어울프일 이들이 자신을 향해 목례하며 지나갔다.

그들을 지나치며 아무 곳으로나 걸었다. 목적지는 딱히 없었다. 그저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이니까. 아무래도 좋았다.

천천히 걷는 내내 지난 며칠 동안 품고 있던 생각이 떠올랐다. 생각의 정체는 의구심이었다. 의구심의 대상은 황태자였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황태자의 치료법에 자꾸만 의문과 의심이 들었더랬다.

'조금... 많이 생소하고 특이한 치료법이었으니까.'

아니.

차라리 이상하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공작은 쓴웃음과 함께 나흘 동안 받았던 치료의 과정을 떠올렸다. 아침마다 발이 가시투성이가 되어야 했다.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끔찍한 맛의 탕약을 마셔대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거의 반강제로 매일 엄청난 양의 물을 마셨다. 하루에 거의 3리터는 마신 것 같다. 그것 또한 익숙하지 않아서 고역이었다. 덕분에 소변은 또 얼마나 자주 마렵던지. 병실에 딸린 화장실로 부축을 받으며 갈 때마다 또 어찌나 괴롭던지.

한데 나흘 내내 아픔은 좀처럼 가시지가 않았다. 그럴 기미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어제까지는 분명 그랬다. 하여 의구심만 잔뜩 들었더랬다.

'과연... 황태자의 치료법이 효과가 있을지... 믿음이 가질 않았지.'

솔직히 그랬다.

헛짓거리 같았다.

때로는 황태자의 모든 진료 행위가 돌팔이의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론 대놓고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속 의구심을 떨쳐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제까지는, 분명 그러했다.

어쩌면 방금까지도, 조금은 그렇게 여기고 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여기가 아직 욱신거린다고?"

"예, 전하."

"흐음. 생각보다 뭉친 게 오래 가네."

"죄송합니다, 전하."

"죄송하긴 무슨."

정처 없이(?) 걷다 보니 도착한 어느 장소. 복도의 끝. 멍하니 상념에 잠긴 채 걷던 공작은 앞쪽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복도가 끝나는 막다른 지점에 출입문이 있었다. 출입문 위에 걸린 '물리치료실'이라는 생소한 문패가 보였다.

말소리는 물리치료실 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혹시 요즘에도 계속 무리해서 근육을 쓰고 있나? 원래 한번 뭉친 자리는 약해져. 충분히 풀어 주지 않고 무리를 하게 되면 금방 또 뭉칠 테니까, 당분간은 훈련의 강도를 적절하게 조절하는 게 좋겠는데."

"하지만, 전하? 제가 마음대로 그렇게 하기에는...."

"왜? 프란델 경이 뭐라고 해?"

"예, 전하...."

"쯧. 그럼 내가 말해 두도록 하지."

"예?"

"근위기사 단체 훈련에서 경을 당분간 열외시키라고 말이야. 그렇게 말해 두면 되겠지?"

"그게... 저, 정말이십니까?"

"정말이지, 그럼 거짓말을 할까. 프란델 경이 얼마나 쇠고집인데. 그나마 내가 말을 해야 씨알이라도 먹히지."

"하지만 전하...."

"조용히 해. 가시 빗나간다."

"...끱!"

조금은 까칠한 말투. 그럼에도 상대를 묘하게 배려하는 듯한 어조. 최근 나흘 동안 매일 들어서 익숙해진 목소리.

'황태자 전하?'

공작은 문가에서 안쪽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물리치료실 안쪽, 몇 개의 침상을 건장한 사내들이 차지하고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등판이며 다리 등등에 꽂힌 가시도 보였다.

황태자는 그들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상태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세르지오? 여기는 어떻지?"

"으윽... 괜찮습니다, 전하."

"괜찮기는 개뿔."

"...."

"그때 시체 폭발의 충격파에 제대로 당한 자리가 벌써 나았을 리가 없지. 자, 이렇게 하면?"

"...그아악!"

"역시. 그대도 당분간 좀 쉬어. 호위근무 일정도 조절하고."

"하지만 전하?"

"말 들어. 무리하지 말고. 누구는 그쪽만 좋으라고 이러는 줄 알어?"

"...예?"

"빨리 나아서 나를 더 잘 지켜줘야지. 그대들의 건강이 내 안전이고 건강인 거야. 따지고 보면 이거 전부 나를 위한 투자라니깐? 그러니까 딴생각 말고 당분간은 회복에만 집중하도록 해."

"전하...."

수염 숭숭한 근육질 사내가 울먹였다. 황태자가 까칠한 타박으로 응수했다. 그럼에도 사내의 젖은 눈가는 마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주위의 다른 사내들도 마찬가지였다. 근위대 기사들. 특근대라고 불리던 사내들. 그들 모두가 황태자의 까칠한 말을 들으며 정성껏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공작은 내심 크게 놀랐다.

아니,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황족이.

존귀한 핏줄이.

심지어 황태자인 분이.

그저 칼받이 호위에 불과한 이들을 위해 손수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다.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보살피고 있다. 그럼에도 어떠한 요구도 없이,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희미하게 웃고 있다.

마치, 자신의 타고난 일인 듯.

저들의 치유가 자신의 기쁨인 듯.

'저런 일이 가능한 분이... 그런 황족이... 계셨던가.'

없었다.

그런 사람은 본 적이 없다.

한데 그렇듯 놀라운 행위를 자연스럽게 행하고 있는 사람이 저기에 있다. 이 황실의 미래이며, 황제가 될 분이 그러하시다.

'내가 지금까지 전하를 아주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저 병약하여 후계자 구도가 불안정한 황족이라고만 여겼다. 최근 벼락치기를 하듯 세운 공적 몇 가지로 으스댄다고도 여겼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병원놀이라는, 괴악한 취미를 지닌 자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

지금 저곳에 있는 황태자는 그렇듯 단순하게 치부할 인물이 아닌 듯했다.

후계자 구도가 불안정하다고? 벼락치기를 하듯이 공적 몇 가지를 세웠다고? 듣지도, 보지도 못한 병원놀이 취미라고?

'그게 전부... 섣부른 생각이었구나.'

내가 어리석었구나.

어리석어 보는 눈이 없었구나.

그렇기에 어쩌면, 마젠타노 황가를 역사상 가장 찬란한 반석 위로 올려놓게 될 수도 있을, 저러한 성군의 씨앗을 지금까지 몰라보았던 것이로구나.

'나는....'

공작은 굳은 다짐을 하였다.

이제부터, 귀족원장의 이름과 직책, 그리고 모든 권한을 걸고서, 황태자를 평생 지지하는 든든한 후원자가 되겠노라고.

235화. 자발적인 지지 선언 (2)

이틀이 지났다.

그사이, 황도 마젠타의 귀족가에는 요상한 소문 한 가지가 물잔에 떨어뜨린 잉크 한 방울처럼 알음알음 번져나갔다.

"들으셨어요? 귀족원장님이 말여요, 글쎄... 속닥속닥...."

"들었어요. 귀족원장님이 별궁 한의원에서... 숙덕숙덕...."

"들었소. 귀족원장님이 그곳에 입원을... 소곤소곤...."

"들었다네. 귀족원장님이...."

"...그만해, 미친 자들아."

이곳은 별궁 한의원 원장실.

그곳에서 라키엘이 일침했다. 그에게 속닥속닥, 숙덕숙덕, 소문을 재현하면서 전달하던 가르딘 경과 특근대원들이 목을 움츠렸다.

"아니, 그게, 전하? 저희는 그저 소문의 생생한 모습을 그대로 전하께 전달해 드리려는 일념이었지 말입니다."

가르딘 경이 자라처럼 움츠린 목으로 꿍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의 가녀린 항변은 황태자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됐고. 수염 숭숭 난 아저씨들이 귀부인 성대모사하는 꼴을 더 듣다간 내가 소름이 돋아서 입원할 거 같거든."

"하지만 현장의 생생한 분위기를...."

"어휴."

"...."

"어쨌건 요점만 말해 보도록."

"어, 흠흠! 알겠습니다. 일단, 요약을 하자면 전하께서 의도하신 내용의 소문이 착실하게 퍼지는 중입니다."

"귀족원장이 별궁 한의원에 입원해 있다는 내용의 소문?"

"그렇습니다, 전하."

가르딘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전하께서 철저하게 당부하신 그대로, 저희가 일부러 소문을 퍼뜨리진 않았습니다. 환자의 개인정보는 소중하게 지켜주어야 한다... 라고 말씀하셨던가요. 어쨌건, 현재 황도 귀족가에 퍼져 있는 소문은 모두 자연적으로 퍼진 것입니다."

"그렇겠지. 이틀 전부터 귀족원장이 입원실 밖으로 조금씩 돌아다니기 시작했으니까."

사실이었다.

귀족원장 에스토크 공작.

아마도 통풍 발작이 지속되는 내내 병실에만 갇혀 지내다 보니 답답했던 듯했다. 통증이 가라앉기가 무섭게 복도를 거닐기 시작했다. 나름 자신의 모습이 평소와 제법 다르니까,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안심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한의원에 내원하는 일반 환자들이야 평민이 대다수니까 귀족원장을 알아볼 사람이 드물다고 해도, 별궁에서 일하는 시종과 시녀들은 전혀 아니거든.'

그러했다.

귀족원장의 모습은 당연하게도 시종과 시녀들의 눈에 띄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조금 의아한 구석이 있었다. 그걸 모를 귀족원장이 아닐 텐데. 어쩌면 소문이 퍼지든 말든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 걸까.

어쨌건 그때부터였다. 황도 곳곳에 귀족원장의 별궁 한의원 입원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럼 소문의 분위기는? 좀 어떻지?"

"생각보다 더 술렁이는 느낌입니다."

"술렁여?"

"예, 전하."

"더 자세히."

라키엘이 채근했다.

가르딘 경이 답하였다.

"정확히 말씀을 드리자면 소문을 접한 제법 많은 수의 귀족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이미 통풍을 지니고 있는 이들로 보입니다."

"흐음, 좋아."

"그럼 곧... 그들도 전하를 찾아오겠지요?"

"아마도?"

라키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는 다들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귀족원장이 그 분위기를 깨는 총대를 멨으니까?"

"총대...라뇨?"

"그런 게 있어. 다들 꺼리던 일의 첫 스타트를 열었다고."

"아, 예."

"아무튼, 전에는 다들 마음 편히 한의원에 올 수가 없었을 거야. 한의원에 오려면 별궁을 들락거려야 하고, 그 방문이 다른 이들의 눈에는 정치적 줄을 대는 행동으로 보이기 십상일 테니까."

"그랬을 겁니다. 귀족들은 대부분 적이 많으니까요."

"그렇지. 별궁을 출입한 사실이 훗날의 정적에게 어떤 빌미로 쓰일지 모르니까. 그런 불안요소를 일부러 떠맡기는 싫었겠지. 그래서 연회장에서 내가 통풍에 대한 이야기를 대놓고 꺼냈음에도 애써 못 들은 척했을 거고."

"하지만 사실은 다들 속으로 혹하진 않았을까요?"

"그랬으니까 지금 귀족원장의 소식을 들으며 동요하고 있는 거겠지."

라키엘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맺혔다.

슬슬 확신이 들었다.

계획대로다.

연회장에서 던졌던 떡밥이 드디어 결실을 맺어 가는 게 보였다. 며칠 남지 않았다. 이제 곧, 더욱 부풀려질 소문이 무수한 귀족 통풍 환자들의 마음속 억제기(?)를 해제할 것이다.

그러면 그 후엔?

'다들 내게 와서 비는 거지. 제발 통풍을 치료해 달라고. 크하하하!'

곧 다가올 미래가 훤히 그려졌다. 절로 싱글벙글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러한 라키엘의 예상은 고스란히 들어맞았다. 딱히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가르딘 경에게서 소문에 대한 보고를 받은 그날 밤, 마침내 새로운 통풍 환자가 별궁 한의원 응급실 문을 두드렸다.

"이, 이보시오! 의사... 전하를... 제발!"

무슨 뭐시기 자작인지 뭔지 하는 중년의 사내가 하인에게 업혀 와서는 눈물 콧물을 흘려 가며 고통을 호소했다.

물론 라키엘은 귀족원장 때와 똑같이,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자다가 깼음에도 싫거나 귀찮은 티를 조금도 내지 않고서 진료를 시작하였다.

그날부터였다.

매일 밤마다 새로운 응급환자가 꼬박꼬박 찾아왔다. 대부분이 통풍을 앓는 귀족들이었다. 덕분에 라키엘은 며칠 내내 자다가 불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어오. 왜들 밤에만 찾아오는 건데!'

불평을 하면서도 그 이유가 짐작이 갔다. 다들 여전히 주위의 눈치를 보는 거다. 그래서 남들의 눈을 피해서, 일부러 한밤중에 별궁을 방문하는 거다.

하지만 그런 귀족들의 꼼수(?)도 곧 박살이 났다. 이유는 달리 없었다. 통풍을 호소하며 밤에 찾아오는 귀족들의 숫자가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저, 전하...! 한밤중에 이렇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감히 바라건대 제 아픔을... 어?"

"으으윽, 저도 전하... 전하를 뵙고자 이곳까지... 어?"

어느 밤, 두 귀족 남성이 응급실에서 딱 마주쳤다. 공교롭게도 똑같이 왼발을 부여잡고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하인에게 업히다시피 하고서였다.

한데 더욱 공교로운 점은, 두 남자가 평소부터 으르렁거리는 철천지원수 라이벌 가문의 귀족이라는 사실이었다.

"...베네토?"

"페르모?"

"허, 그대가 이곳엔 어쩐 일이지?"

"내가 물을 소리. 그대는 여기에 무슨 일로 온 것이지?"

"나, 나는 산책을 나온 것일세."

"하!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하인에게 업혀서 산책을? 그것도 이곳 별궁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는 베네토 그대도 나와 똑같은 모습인 것 같은데?"

"나, 나는 별 구경을 나온 것일 뿐일세."

"하!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하인에게 업혀서 별 구경을? 그것도 이곳 별궁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대는 지금 내가 했던 말을 일부러 따라 하는 것인가?"

"그대가 내 행동을 따라 하는 것이겠지."

"나는 그대처럼 아파서 꼴사납게 쩔쩔매거나 하진 않고 있는데?"

"나도 전혀 아픈 곳이 없다네."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다만?"

"그쪽이야말로?"

"증명할 수 있겠나?"

"어디 한번 덤벼 보시지."

두 귀족 남성은 응급실 병상에 나란히 눕는 와중에도 당장 결투를 치를 것처럼 설전을 이어 갔다. 오늘도 여전히 불면의 밤을 투덜거리며 가운을 챙겨입고 나오던 라키엘은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응급실에서는 결투 금지. 어기면 둘 다 쫓아낼 거야."

"...."

"뻔하네. 둘 다 통풍이지?"

"저, 저는 산책을...."

"저는 그저 별 구경을...."

"응급실에서는 거짓말 금지. 어기면 둘 다 쫓아낼 거야."

"...전하아! 통풍이 맞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전하!"

"제가 먼저 왔습니다, 저부터 치료를!"

"아닙니다! 진료 접수는 제 하인이 먼저 했습니다! 그러니 부디 저부터!"

"아니, 그대는 별 구경을 나왔다며?"

"그대야말로 산책이라고 했으면서!"

"...그만하라고, 이 미친놈들아."

라는 식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며 응급실에서, 병실에서, 혹은 입원 병동 복도에서 마주치는 귀족들이 늘어갔다.

그런 까닭일까.

차츰 귀족들이 대담해졌다.

'저 작자도 별궁에 버젓이 입원해 있는데, 나라고 문제 될 게 있겠어?'

'귀족원장님도 입원해 계시는데 나도 괜찮겠지!'

...라는 식의 심리였다.

덕분에 별궁 출입 자체를 눈치 보던 행동이 점점 사라져 갔다. 다들 차츰 떳떳해졌다.

분위기의 힘이었다.

학교에서 나만 조퇴를 하려면 살짝 눈치가 보인다. 그런데 다들 아폴로 눈병이든 뭐든 팍팍 걸려서 단체로 조퇴를 하게 되면 오히려 당당해진다.

회사에서도 그렇다. 나만 지각을 하면 때려죽일 몹쓸 놈이 된 것만 같다. 그런데 회사 근처 지하철 전체가 마비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그래서 대리님, 과장님, 부장님까지 다 함께 지각을 하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법이 아니겠는가.

그런 덕분이었다.

차츰 황도 귀족들이 대놓고 별궁 한의원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아니, 어느 순간부터는 별궁 한의원 로비가 귀족들의 인싸(?) 사교의 장이 되어 버렸다.

다들 유행에 뒤처지지 않게, 아픈 곳이 없어도 일부러 별궁 한의원을 찾아왔다. 온 김에 평소 뻐근하던 곳을 찜질도 받고 하면서 수다와 교분을 나누었다.

"...라는 분위기가 만들어져 버렸군요. 이것도 귀족원장님 덕분일까요."

"허허허. 송구합니다, 전하."

"아닙니다. 이제는 알겠습니다. 귀족원장님이 입원한 본인의 모습을 일부러 남들 앞에 보였다는 것도 말입니다."

"들켰습니까?"

"너무 노골적이셔서요."

라키엘은 쓴웃음을 지으며 원장실 다탁 건너편으로 눈길을 던졌다. 그곳에 방금 퇴원수속을 마친 귀족원장, 에스토크 공작이 있었다.

"저는 그저... 생각을 조금 바꾸었을 뿐입니다, 전하."

"생각을요?"

"예, 전하."

공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적절한 진료이니까 말입니다. 그 앞에 다른 정치적 이유나 구실이 굳이 필요할까,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귀족들이 주위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이곳으로 올 수 있을 계기를 만들어 주셨다는 말씀인가요."

"계기라. 그리 거창하게 치장하여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복도를 거닐었을 뿐입니다, 전하."

"그게 고마운 겁니다."

"아닙니다. 그저 제가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여 퇴원하기 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저에 대한 지지 선언을 하시겠다고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공작은 흠칫했다.

라키엘이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애초부터 그 정도 생각을 품지 않으셨으면, 다른 귀족들을 끌어들이지도 않으셨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런. 또 들켰습니까?"

"역시나 너무 노골적이셔서 말입니다."

라키엘은 다시금 싱긋 웃었다. 공작도 비슷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면, 전하? 제가 어떤 식으로 지지 선언을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혹여 원하시는 방식이 있으시다면 제가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공작이 예의상 물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예상했다.

대략 귀족원 회의를 소집하고, 그곳에서 공식 선언을 하고 등등의 통상적인 지지 선언 절차가 떠올랐다.

아마 이번에도 그렇게 하면 되겠지.

그게 무난하겠지.

...라고 공작이 생각하던 무렵이었다.

"아, 방법이라면 준비해 둔 게 있습니다. 이봐? 딘라이어?"

딱!

황태자가 원장실 바깥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곱상한 차림의 앳된 귀족 남성이 냉큼 부름에 응답하며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응. 불렀지. 준비물은 잘 챙겨왔고?"

"물론입니다, 전하."

"그럼 시작할까?"

"예, 전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딘라이어 영식이라고 불린 젊은 귀족이 주섬주섬 여러 물건을 원장실로 가지고 들어왔다.

한데 그 물건들이....

"...저게 뭡니까, 전하?"

갑작스러운 상황의 급발진(?)에 얼떨떨해진 공작이 물었다. 라키엘이 뭘 그렇게 놀라느냐는 듯이 태평하게 대답했다.

"보면 아실 텐데요. 캔버스, 물감, 붓, 기타 등등. 그림 그릴 준비를 하는 겁니다. 저 친구, 예전에 어머니를 치료받고 제 전담 화가로 취직했거든요."

"전담 화가 말입니까? 그런데, 그림...이라니요?"

그림을?

지금?

여기서?

어째서?

공작의 머릿속에 물음표 백만 개가 떠올랐다. 라키엘이 더욱 싱글벙글 태연하게 웃었다.

"지지 선언을 제가 원하는 형태로 해 주겠노라 하셨지요?"

"예, 전하. 하온데...."

"그러니까 박아야지요, 인증샷."

"...예?"

"자자, 이쪽으로 와서 저와 나란히 앉으시죠. 이왕이면 엄지도 척. 미소도 지으시고."

"이, 이렇게 말입니까?"

"에헤이. 좀 더 자연스럽게."

"아, 예...."

공작은 황망함에 허둥거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황태자와 나란히 앉아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딘라이어 영식이 그런 황태자와 공작을 재빠르게 그렸다. 즉석 그림에 적합한 크로키 스타일로. 채색도 가능한 한 단순하게.

그리고 다음 날.

공작의 지지 선언을 겸한 입원 인증샷이 한의원 로비에 뙇 내걸렸다. 그 아래에는 공작의 친필로 쓰인 후기와 서명도 야물딱지게 새겨졌다.

[별점 : 10.0]

[원장님이 친절하고 탕약이 맛있습니다. 재방문 의사 있음.]

236화. 인증샷은 보상을 싣고 (1)

인증샷은 중요하다.

특히 유명인사의 인증샷은 더욱 중요하다. 누구나 최소 한 번쯤은 이런 식당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연예인, 유명인 등이 남긴 인증샷과 사인 수십 개를 한쪽 벽면에 완전히 도배해놓은 곳을 말이다.

그건 은근 중요하다.

처음 와보는 사람에게도 '오, 여기 유명한 맛집인가 봐'라는 인상을 은연중에 꽝 찍어주게 된다. 첫인상부터 좋게 먹고 들어가는 셈이다. 또한, 그렇게 입소문이 시작되는 셈이기도 하다.

'여기서도 마찬가지.'

라키엘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별궁 한의원 로비 한쪽 벽면. 그곳에 방금 내걸린 액자가 있었다. 자신과 귀족원장 에스토크 공작이 나란히 정답게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진 액자였다.

액자 아래에는 에스토크 공작의 친필 서명과 후기도 야물딱지게 새겨져 있었다.

[별점 : 10.0]

[원장님이 친절하고 탕약이 맛있습니다. 재방문 의사 있음.]

그림이 완성된 직후였던가.

후기를 써달라는 말에 공작이 내보이던 반응이 떠올랐다. 뜻밖에도 공작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쪽의 뜻을 단번에 간파한 듯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어 왔다.

"전하께서는... 허공에 한 번 울려 퍼지고 끝날 지지선언이 아닌, 오래도록 박제처럼 새겨질 형태의 선언을 원하시는 것이로군요. 잘 알겠습니다."

...라고 말하던 공작의 모습.

내심 놀라웠다. 과연 오랜 시간 귀족계 정치판에서 구른 짬밥(?)이 어디 가지 않는구나 싶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남길 후기가 발휘할 영향력, 파급력을 꿰뚫어본 것이겠지. 이를테면 지금, 별궁 한의원 로비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 같은 것들을 말이다.

수군수군....

전에는 그저 사람들이 지나치기만 하던 한의원 로비였다. 진료를 위해 방문한 사람들이 접수를 하고, 진료과를 배정받고, 병동으로 안내받아 떠나는, 집의 현관 역할을 하는 장소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다.

사람들이 그저 생각 없이 지나치지 않았다. 로비로 들어오는 순간 일단 발길을 멈추었다. 정면에 내걸린 인증샷 때문이었다. 당연했다. 일부러 눈길이 제일 먼저 닿는 자리에 액자를 내걸었으니까.

다음으로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수군거림이었다. 다들 하나같이 고개를 갸웃, 묘한 눈초리로 인증샷을 구경하다가 옆 사람과 문답을 나누곤 했다.

저거 황태자 전하 아니시냐. 전하와 나란히 있는 인물은 누구냐. 암만 봐도 귀족원장인데. 그럼 설마 귀족원장도 여기서 진료를 받은 거냐. 그만큼 여기가 엄청난 곳이었구나. 숙덕숙덕. 와글와글. 블라블라. 기타 등등.

'좋아. 딱 좋아.'

라키엘은 방긋 웃었다. 딱 기대했던 반응이었다. 이래서 인증샷을 남기게 한 거다. 귀족원장의 공식적 지지선언이라는 메가톤급 이벤트가 1회성으로 끝나길 바라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걸 단순히 귀족원 회의에서 말로 하는 선언으로 끝내? 물론 의사록이야 남겠지. 기록의 형태로도 남겠지. 하지만 기록으로 남겨봤자 대중이 그걸 피부로 체감을 해주나? 아니. 관심을 많이 가지는 소수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잘 모를걸.'

생각해보면 간단한 일이었다.

한국에서 살던 시절을 생각해도 그러했다. 말로 하는 선언, 이벤트는 효과가 오래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순간에야 사람들이 우와아, 뜨겁게 반응을 보이다가도, 금방 터지는 다른 이슈에 순식간에 묻히기 일쑤였다.

그래서였다.

불특정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쉽게, 매일, 눈으로 체감하며 볼 수 있는 곳에 공작의 지지선언을 박제(?)하여 버렸다.

물론 라키엘은 그걸로 만족하지 않았다.

귀족원장의 공식적 지지선언?

이건 시작일 뿐이었다.

또한 구실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톨레도 집정관님? 통풍 발작이 완전히 가라앉았습니다. 축하합니다."

"가, 감사합니다, 전하!"

"감사는 뭘요. 저는 집정관님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아주 작은 노력과 관심을 기울였을 뿐입니다."

"아닙니다, 전하.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전하의 치료가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도 여전히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며칠 전부터 제게 해주신 그...."

"내 손은 약손 시술요?"

"예, 전하. 그게 또 얼마나 신묘하고 신기한지. 저는 그런 기적은 처음 느꼈습니다. 그러니...."

"인증샷을 남겨주시겠다고요?"

"예, 전하."

"이런이런. 제가 먼저 요청을 하지도 않았는데. 고마우셔라."

"그야... 에스토크 공작께서 좋은 선례를 남겨주었으니 말입니다. 허허허."

귀족원의 집정관, 톨레도 후작이 사람 좋게 웃었다. 그는 라키엘을 향해 은근슬쩍한 눈빛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혹시나 해서 말입니다. 전하, 제가 인증샷이라는 걸 남기는 두 번째 귀족이... 맞습니까?"

"그렇지요. 에스토크 공작에 이어 아주 훌륭한 선례를 남기게 되셨군요. 축하합니다."

"아, 역시 그렇군요. 실로 감사합니다, 전하!"

"감사하면 별점은... 알지요?"

"물론 10점을 드려야겠지요?"

"하하하. 이래서 제가 집정관님을 좋아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저도 10점을 새기게 되어서 기쁘기가 그지없습니다, 전하."

당연하게도 별점은 무조건 10점.

그렇게 또 한 폭의 인증샷이 한의원 로비에 내걸렸다.

[별점 : 10.0]

[여기 로비 너머에 행복 있다. 내 손은 약손 만세! 황태자 전하 만세!]

귀족원장의 첫 인증샷.

집정관의 두 번째 인증샷.

그걸로 게임(?)은 터졌, 아니, 끝났다.

귀족원에서 가장 영향력이 커다란 주요인사 쌍두마차가 퇴원을 하며 기념으로 인증샷과 낭낭한 별점을 남겼다. 그런 선례가 생기니, 다른 귀족들도 자연스럽게 인증샷의 행렬에 동참했다.

즉, 귀족이 별궁 한의원에서 진료를 받고 퇴원을 하면 인증샷과 후기를 남겨야 함이 당연한 암묵적 매너이자 필수 코스가 되었다.

인증샷이 인증샷을 불렀다. 대세와 유행이 귀족들의 발길을 불렀다.

더욱 많은 귀족이 별궁 한의원의 원장실을 방문하고, 진료실에서 침을 맞고, 내손 약손 스킬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탕약의 맛을 온몸으로 체감했으며, 또 하나의 인증샷을 남겼다.

그렇게 2개월이 지났다. 100번째의 인증샷이 한의원 로비에 내걸렸다. 마침내 귀족원 과반수의 지지선언을 받아낸 것이었다.

그걸 보는 별궁 식구들은 새삼스러운 감회에 휩싸였다.

'우리 전하께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예전의 별궁은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었는데.'

그러했다.

항상 파리만 날리는 곳이 별궁이었다.

황태자가 기거하고 있음에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곳. 그 어떤 귀족도 친밀하게 다가오지 않던 권력의 외딴 섬.

황도 내에서의 별궁은 그런 곳이었다. 별궁에서 최소 5년 이상 근무한 이곳의 시종, 시녀들은 그러했던 과거를 너무나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마음으로 외쳤다.

'...그때가 편했는데!'

역시 그러했다.

장사가 안 되는 가게에서 근무해본 사람은 안다. 시급은 꼬박꼬박 받으면서 꿀을 빠는 그 느낌! 시간을 때우며 파리만 날리는데 그냥 돈이 통장에 촵촵 꽂히는 그 느낌!

한때 이 별궁이 그러한 꿀보직(?)이었다. 물론 병약한 황태자의 히스테리를 감당하는 순간은 고역이긴 했지만, 그것만 빼면 대체적으로 근무하기에 정말로 널널한 곳이 여기였다.

황태자가 병약하니까 연회를 열지 않았다. 사냥도 즐기지 않았다. 외부 행사 같은 것도 없었다. 방문자도 없었다. 덕분에 청소와 황태자 수발만 열심히 들면 되었다.

한데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바빠서... 미칠 것 같아.'

'내 원래 업무는 그냥... 황태자 전하의 침구를 세탁하고 정리하는 것이었는데. 그런데 어째서 입원 병동에서 나오는 침구 전체를 떠맡게 됐지?'

'난 그냥... 황태자 전하의 식사에 쓰이는 식기만 닦으면 됐는데! 어째서! 왜! 100개가 넘는 환자들 식판을 다 정리해야 하는 거냐고!'

...그러했다.

어느새 별궁 한의원의 훌륭한 역군(?)으로 거듭나게 되어 버린 시종과 시녀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겉으로는 투덜거렸으되, 솔직한 마음으로는 지금 상황을 딱히 비관하지는 않았다.

황태자의 달라진 모습과 위상 덕분이었다.

귀족원장의 지지를 받는 황태자. 귀족들의 발길로 북적이는 별궁. 이런 장소에서 근무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본인과 가족에 대한 주위의 인식과 대접이 달라졌다. 더불어 자부심도 함께 느끼게 되었다.

예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전에는 황가의 시종, 시녀들 사이에서 은연중에 무시를 당하곤 했다.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비슷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내가 전보다 조금 바빠지고 피곤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차라리 이게 좋아.'

물론 정신적인 만족감뿐만이 아니었다. 황태자는 실제로도 별궁 식구들에게 두둑한 특별수당, 보너스를 챙겨 주곤 했다. 마음과 주머니가 모두 빵빵해지니, 전보다 고단해진 업무를 감당하면서도 절로 힘이 났다.

모두는 생각했다. 이 모든 게 예전과 너무나 달라진 황태자 전하 덕분이라고. 이제 더는 예전의 병약하고 무능했던 황태자 전하가 아니시라고.

'...라는 눈빛으로 다들 나를 쳐다보긴 하는데, 어째서 황제 이 양반한테서는 소식이 없냐.'

100번째의 인증샷이 로비에 걸린 날.

바빴던 하루 진료를 모두 마치며 라키엘은 쓰린 입맛을 쩝, 하고 다셨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낮보다 한산해진 로비를 돌아보았다.

드넓은 로비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인증샷 액자. 이미 이 소식이 황제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지금쯤은 황제도 자신이 내기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째 소식이 영 없었다.

'이 양반 혹시 모른 체하면서 은근슬쩍 넘기려는 거 아니야?'

덜컥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매번 잘도 들어맞는 건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소화도 다 끝내지 못한 이른 밤, 황궁에서 사람이 왔다. 황제의 친필 서한을 가지고 온 칙사였다.

'흐음, 과연?'

황제는 서한에 어떤 내용을 담아 두었을까. 라키엘은 서한의 내용을 살폈다. 안쪽에 쓰인 글귀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네가 짐에게 호언장담하였던 일을 마침내 현실로 이루었구나. 실로 장하도다. 또한, 매우 축하하는 바로다. 이로써 너는 짐과의 내기에서 승리하였으니, 충분히 자부심을 느껴도 좋을 것이로다.]

...라는 내용이었다.

'에계? 이걸로 끝?'

라키엘은 서한을 후루룩 읽자마자 미간을 콱 찡그렸다. 서한 내용이 생각보다 너무 심플하고 알맹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뭔가 더 있어야 할 내용이 좀 빠진 거 같은데?'

혹시 황제가 숨겨둔 기믹(?)이나 이스터에그가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였다. 서한을 김 굽듯이 촛불에 살랑살랑 그슬려 보았다. 한데도 따로 생겨나는 글자가 없었다. 식초를 뿌려 보기도 했다. 결과는 역시나였다.

'뭔데 이거. 기껏 내기로 사람 애쓰게 만들어놓고, 자기가 졌으니까 칭찬만 하고 끝이라고? 지금 장난해?'

빠직, 혈압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즉시 시종장을 불렀다.

"마차를 준비해줘."

"전하? 이 늦은 시간에 어디를 가시려 함이십니까?"

시종장이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라키엘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황궁."

"예에?"

"지금 당장 폐하를 좀 뵈어야겠다."

그렇게 마차에 올랐다. 빛의 속도로 입궁을 감행했다. 다행히 황제는 아직 침소에 들지 않았노라 했다. 덕분에 알현까지의 모든 과정이 프리패스였다.

"너는 어찌하여 이런 시간에 무턱대고 짐을 찾아온 것이더냐."

살짝 졸린 걸까. 알현실로 들어오는 황제의 모습은 평소보다 다소 노곤해 보였다. 그러나 라키엘은 개의치 않았다.

오늘은 부탁을 하러 온 게 아니니까. 따지고, 권리를 찾으러 온 것이니까.

그러니까 거두절미하고.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가 이 땅의 합당한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를 뵙나이다. 또한,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폐하와의 내기에 승리한 보상으로 황실 비고 상위 구역의 열람권을 요구하고자 하옵니다."

질렀다.

황제가 흠칫했다.

237화. 인증샷은 보상을 싣고 (2)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가 이 땅의 합당한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를 뵙나이다. 또한,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폐하와의 내기에 승리한 보상으로 황실 비고 상위 구역의 열람권을 요구하고자 하옵니다."

거두절미하고 질렀다.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하면 안 된다. 괜히 쓸데없는 말을 섞었다간 황제의 페이스에 말려들기 딱 좋다. 황제 저 양반은 그런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뭔가를 요구하려면 딱 그것부터 꺼내야 한다.

이게 바로 선빵필승 아니겠는가.

'됐다.'

라키엘은 내심 주먹을 쥐었다. 황제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덕분에 느낄 수 있었다. 황제의 몸이 아주 미세하게 흠칫. 눈썹이 꿈틀. 당황하는 게 보였다. 경혈 스캐닝으로도 관찰할 수 있었다.

키이이잉-!

경혈 스캐닝을 발동한 시야 속. 황제의 기혈 흐름이 쿵더덕쿵덕 16비트의 급격한 엇박을 타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이쪽이 내지른 요구에 내심 크게 당황한 탓이겠지.

그런데 황제의 표정만큼은 여전히 포커페이스 일변도로 태연했다.

"허. 황실 비고 상위 구역의 열람권이라. 짐이 하나 묻겠도다. 황태자여, 그대는 그 권한을 짐에게 일찌감치 맡겨둔 적이 있었더냐?"

"맡겨둔 적은 없사옵니다."

"한데 너는 어찌하여 그 권리를 이토록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이더냐?"

"제게 그 권리를 요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옵니다."

"근거가 무엇이더냐?"

"이미 말씀을 드렸지 않사옵니까?"

"짐과의 내기에서 승리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더냐?"

"예, 그러하옵니다, 폐하."

라키엘은 고개를 숙였다.

사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다른 이와도 아닌, 무려 황제와의 내기였다. 3개월 안에 귀족원 구성원 과반수의 공식적 지지선언을 얻어내겠노라 하였다. 당시 황제의 반응은 어떠하였던가.

"당시, 폐하께서는 제가 그 일을 해낼 수 없으리라 확신한 듯이 코웃음을 치셨사옵니다. 이미 당신께서 승리한 내기라 여기시는 듯하시었지요. 하오나 보시다시피 저는 그 말도 안 되는 불가능해 보이던 일을 현실로 일구어 내었사옵니다."

"그래서 짐이 축하의 뜻을 담은 서한을 내렸지 않았더냐. 혹여 아직 받지 못한 것이더냐?"

"서한은 잘 받았사옵니다."

"한데 무엇이 문제인가."

"서한'만' 받은 것이 문제이옵니다."

"칭찬의 말로만 입을 닦고 끝내지 말라는 뜻인가?"

"그러하옵니다, 폐하."

"노골적이로구나."

"제가 이렇게 나오지 않으면 폐하께서 끝내 저의 마음을 몰라 주실까 우려가 되어 한달음에 달려왔기 때문이옵니다."

"뻔뻔하기까지."

"송구하옵니다, 폐하."

"진심으로 송구하긴 하더냐?"

"그 역시 송구하옵니다, 폐하."

"하."

황제는 헛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사실 요즘 들어서 매일 흐뭇함에 흠뻑 빠져 있던 터였다. 연일 전해져 오는 별궁 소식 덕분이었다.

어제는 귀족 누구누구가 별궁 한의원을 찾았고. 또 오늘 아침엔 어떤 귀족이 퇴원을 하면서 인증샷이라는 이름의 액자를 별궁 로비에 걸었고. 오후에는 별로 아프지도 않은 귀족들 여럿이 감기 핑계를 대면서 별궁으로 모여들었고. 등등, 등등.

별궁에 심어둔 정보원들이 거의 실시간으로 올리는 보고에 아빠 미소가 절로 연달아 터졌더랬다. 물론 신하들 앞에서는 근엄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였지만, 그 와중에도 희미하게 실룩거리는 왼쪽 오른쪽 콧구멍은 멈출 수가 없었더랬다.

들을 때마다 흐뭇했다.

접할 때마다 짜릿했다.

오랜 시간 앓던 이가 확 빠진 듯이 시원하기도 하였다.

이유는 달리 없었다.

'그동안 이 녀석의 입지는 매우 불안정하였지. 딛고 선 바닥은 황태자라는 이름이되, 실상 그 바닥의 얇기가 그지없어서 살얼음 위에 겨우 서 있는 형국이었다.'

그러했다.

자신의 맏아들, 황태자 라키엘. 녀석의 입지는 탄탄하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20년간 이어왔던 투병 생활 때문이었다.

비록 근래에는 그 인식을 제법 바꾸어놓고 있다고는 하나, 그럼에도 아직 많은 이들이 황태자의 앞날에 물음표를 달아두곤 했다. 언제 다시금 건강이 악화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특히나 상위 귀족들이 그런 경향이 강했다. 그들만큼 정치적 줄타기에 민감한 이들이 없으니까. 행여나 섣불리 황태자에게 줄을 댔다가, 황태자의 건강이 악화되면 자신의 입지 또한 줄어들 테니까.

'그런 사태를 우려하여 아직 이 녀석과 거리를 두는 귀족이 대다수였지. 한데....'

이 녀석은 그걸 바꾸어 보겠노라 호언장담을 하였다. 그것도 단 3개월 안에 해낼 수 있노라 가슴을 탕탕 쳤다.

솔직히 기도 차지 않았다. 근래 이 녀석이 놀라운 성과를 연이어 보이긴 하였으나, 거기까지는 무리라고 여겼다.

한데 그럼에도 기이한 기대감을 한편에 품고는 있었다. 혹시나 이번에도 또, 어쩌면 이 녀석이 다시, 라는 묘한 기대감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설마하니 이 정도로 해낼 줄은 몰랐다. 생각할수록 흐뭇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였다.

녀석에게 서한을 보냈다. 내용에서 일부러 알맹이를 쏙 뺐다. 그걸 통해 이 녀석을 다시금 시험하였다.

그 결과 또한 대성공이었다.

'그렇다고 서한을 받자마자 짐을 만나러 이렇게 달려올 줄이야. 허허허. 허헛!'

지배자가 될 이는 마땅히 이래야 한다.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 이득, 무형의 모든 자산, 그것들이 보이는 순간 기민하게 움직여야 한다. 움켜쥐어야 한다. 설령 놓치더라도, 움켜쥐기 위해 손이라도 뻗어야 한다.

라키엘에게 그런 모습을 기대한 황제였다. 하여 일부러 칭찬으로만 퉁치는 내용의 서한을 보낸 그였다. 하여 오늘 부리나케 달려온 라키엘의 모습을 보자니 더없이 기쁘고 행복하였다.

라키엘을 향해 건네는 그의 목소리에도 흐뭇함이 배어났다.

"그래. 이토록 뻔뻔하고 무엄하며 경우조차 모르는 황태자여. 정리를 하자면, 너는 지금, 내기를 제안하던 당시에 협의하지도 않았던 내용의 보상을 짐에게 요구하겠다는 것이더냐?"

"예, 폐하."

"쯧쯧, 실로 두꺼운 안면이로다. 대관절 누구를 닮아서 이런 것인지."

"알고 계시리라 믿사옵니다, 폐하."

"버릇이 없기까지."

"하오나 저의 요구가 무리하지는 않은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폐하."

"어찌하여 감히 그렇게 장담하는 것이더냐."

"제가 이렇게 찾아올 것을 폐하께서 기대하고 계셨지 않사옵니까?"

"헛소리가 길구나."

"하온데 어찌하여 조금 전부터 계속하여 웃음을 짓고 계신 것이시온지."

"하도 가당찮기에 나오는 비웃음이로다. 너는 이런 것도 못 알아보느냐?"

"제 눈에는 오직 황태자의 적절한 요청에 흐뭇해하시는 인자한 폐하의 모습만 보이옵니다."

"감히 감언이설로 짐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려 드는구나."

"저의 솔직한 마음이 감언이설로 들리시었다면 그 또한 저의 책임이자 부족함의 소치이오니, 실로 송구하옵니다, 폐하."

"...허."

기쁘다.

너무 기뻐서 당장 공중제비라도 돌고 싶다.

황제는 함부로 실룩거리려는 입꼬리와 수염을 애써 붙들어 당겼다. 후계자 앞에서 기쁜 모습을 쉽게 보이는 것은 경망하고도 헤픈 일이니까.

그는 짐짓 엄한 목소리로 잘라내듯 말하였다.

"짐은 황태자의 요구를 거절한다."

"예?"

"대신 특별히 명하노니, 황태자는 짐의 명에 따라, 현시점으로부터 자정까지, 황실 비고 상위 구역을 열람하고 한 가지 물건에 한하여 자유로운 취득을 하도록 하여라."

"...그게 그거 아니옵니까?"

"엄연히 다르도다."

"대체 어디가...."

"짐이 너의 요구를 헤프게 들어주는 쉬운 사람으로 보이더냐? 착각하지 말지어다. 이것은 단지 짐의 명일 뿐이니라."

"아, 예...."

"하면 어서 물러가 보거라. 더는 짐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지 말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물러가라 하였거늘."

"명을 받드옵니다, 폐하."

라키엘이 샤샤샥 물러났다.

그렇게 황제는 알현실에 홀로 남겨졌다. 덕분에, 그때부터 은밀하게 흔들어 재낀 황제의 기쁨의 실룩실룩 댄스타임은 누구도 모를 역사의 비밀로 남게 되었다.

"전하, 솔직히 조금 궁금합니다."

"뭐가?"

마침내 황제의 허락을 얻어 황궁비고로 향하는 길이었다. 호위로 동행하던 데미안 녀석이 의문을 표했다.

"전하께서 폐하와의 내기에서 이기신 것도, 확실한 보상을 얻고자 하심도 알겠는데... 어째서 굳이 황궁비고를 콕 짚어 언급하신 건지가 말입니다."

"아하. 내가 찍어놓은 물건이 있는 것 같다?"

"예. 꼭 그렇게 보입니다, 전하."

"정답이야."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노리는 물건이 있었다. 언제부터? 최근부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황궁비고 관리를 도맡았던 어느 고위 귀족에게서 지지선언을 받은 뒤부터였다.

"리브라노 백작이라고 알지?"

"예, 압니다. 통풍 때문에 유난히 남들보다 더 아파했던 귀족이었지요?"

"어. 유난히 통증이 심했지. 내손 약손을 해줘도 은근하게 계속 아파했을 정도였으니까. 어쨌건, 그자가 인증샷을 그리는 도중에 내 만년설을 보더니 슬쩍 알려주더라고. 황궁 비고 상위 구역에 내 만년설과 짝이 되는 무구가 보관되어 있다고."

"만년설과 짝이 되는 무구 말입니까?"

"어."

사실이었다.

처음 알게 된 사실이기도 했다.

리브라노 백작이 알려준 말에 따르자면, 만년설과 그 무구는 짝을 이룰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위력을 발휘한다고 하였다. 물론 까다로운 사용 조건이 있다고는 했지만, 그건 자신이 있었다. 애초에 만년설도 사용하기가 쉬운 물건은 아니었으니까.

"어쨌건, 들어가자."

두 사람은 비고 입구에서 절차를 밟았다. 하급 구역에만 들어가며 아쉬움을 느꼈던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상급 구역으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상급 구역의 구조도 하급과 비슷했다.

'딱 마트네, 마트.'

드넓은 공간에 카테고리로 나누어진 수많은 진열대가 있었다. 그러나 하급 구역을 헤맸던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의 라키엘은 자신이 찾고자 하는 물건의 정확한 위치를 손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진열 번호가 JA-0928이라고 했는데. 그래, 이쪽인가.'

입구에 비치된 안내도를 통해 진열대 위치를 단숨에 짚었다. 그곳으로 갔다. 과연 찾고자 하던 물건이 정확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마침내 찾아냈다. 만년설과 짝을 이루도록 만들어진 마법의 세트 무구.

그 앞에는 이런 안내 문구가 쓰여 있었다.

[이름 : 만년필]

[분류 : 도검류]

[입수처 : 불명]

[분류 등급 : 상급]

[용도 : 사용자가 마나를 주입할 시, 본체의 코어가 마나를 변환하여 펜촉을 통해 화염의 잉크를 방출 및 분사합니다.]

[특이사항 : 사용자의 마나 조절 능력이 지극히 섬세할 경우, 분출하는 화염 잉크의 온도를 큰 폭으로 조절할 수 있습니다.]

안내 문구를 읽은 라키엘의 눈이 탐욕으로 반짝였다.

'찾았다. 내 한의원용 온열 찜질 치료기.'

238화. 만년필의 위력 (1)

'찾았다. 내 한의원용 온열 찜질 치료기.'

라키엘의 눈이 탐욕으로 반짝 물들었다. 그는 진열대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적당한 길이의 뭉툭한 물건이 놓여 있었다.

바로 만년설과 짝을 이룬다는 1+1 세트(?) 무구, '만년필'이었다.

"...."

이거, 작명 센스 진짜.

라키엘은 잠시 흔들리려는 멘탈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차분해진 시선으로 만년필의 모양을 살폈다.

'전체적으로는... XL 사이즈 유성매직 같은 느낌이네.'

길이는 15센티 정도. 두께는 배드민턴 라켓 손잡이와 비슷했다. 한쪽은 뭉툭하고, 한쪽은 볼펜 앞머리처럼 뾰족했다. 뾰족한 쪽은 유리로 세공된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그러니까 저쪽이 바로....

'화염의 잉크가 분사되는 쪽이란 거지?'

딱 보니까 알겠다. 크기도, 작동 방식도 모두, 그냥 화염 잉크를 뿜어내는 유성매직인 거다. 한데 그 모습이 데미안 녀석에겐 생소하게 느껴진 걸까.

"이게 전하께서 찾으시던 물건입니까?"

"어."

"한데... 모양이 좀... 볼품이 없군요."

"그래?"

"예. 전하."

데미안 녀석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손잡이만 덜렁 있어서 굉장히 허전해 보입니다. 안내 문구를 살펴보자면 한쪽으로 화염이 분사되는 것 같기는 한데, 손잡이를 보호하는 가드도 없고, 무게중심이 잘 맞을지도 걱정이고, 전하께서도...."

"나? 내가 왜?"

"검을 제대로 사용하시는 걸 좀처럼 보질 못해서 말입니다."

"아하. 내 검을 다루는 능력이 허섭해서 그냥 칼도 아닌, 이런 화염 뿜어대는 검을 다루다가 다칠 거 같다, 이 말씀이지?"

"예, 정확하십니다. 만일 그러한 불행한 일이 생기고, 심지어 전하께서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내가 잘못되면?"

"저는 직업을 잃겠지요?"

"...."

"호위할 대상이 죽어서 사라지는 거니까, 특근대원들도 전부 실업자가 될 거고."

"...."

"요즘 몇몇은 이성과 교제를 시작한 이들도 있던데 말입니다. 누구는 벌써 결혼 계획까지 꾸리고 있고요."

"...."

"그런 이들마저 실업자가 된다면... 후우, 그거 참."

"어이."

"예, 전하."

"내가 댁들 직업 셔틀이야?"

"셔틀이 뭡니까?"

"...쯧, 됐다."

라키엘은 피식 웃고 말았다. 데미안 녀석이 말은 저렇게 하지만, 실제 마음은 다르다는 걸 안다. 그저 '전하가 걱정됩니다'라는 말을 그대로 하기에 낯이 뜨거워서, 어쩐지 민망해서 일부러 저렇게 말하는 것 또한 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자. 내가 걱정되면 그렇다고 하면 되잖아?"

"...글쎄요?"

"어?"

"저는 전하가 걱정된다는 말씀은 드린 적이 없고, 드릴 생각도 딱히는...."

"...."

"어쨌건, 전하께서 이 무구를 제대로 안전하게 다루실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그거라면 괜찮아."

"어떻게 말입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쪽을 돌아보는 데미안. 좀처럼 이해가 안 된다는 투였다. 물론 그렇겠지. 내가 생각해도 화염의 검을 능숙하게 다루는 내 모습이 잘 상상이 안 되니까.

하지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당연하다.

"검으로 안 쓸 거야."

"예? 그럼...?"

"온열 찜질기로 쓸 거거든."

"...."

"한의원이니까 찜질기가 있어야지. 만년설로 냉찜질, 만년필로 온찜질. 딱 좋네. 이제 좀 구색이 갖춰지네. 어오 속이 후련해진다, 진짜."

라키엘은 만면에 진심 가득한 웃음을 머금었다. 사실 그동안 별궁 한의원을 운영하면서 내내 아쉽고 불만인 점이 있었다. 바로, 물리치료 기구가 부실하다는 점이었다.

별궁 한의원도 나름 한의원인데. 한데 어째서 제대로 된 찜질 기구가 없는가. 이게 말이 되는가.

한의원 하면 물리치료.

물리치료 하면 한의원.

그게 보편타당한 상식인의 국룰(?)일진대.

한데 어째서, 별궁 한의원에는 제대로 갖춰진 찜질 기구가 없는 것인가... 라는 근원적인 공허함과 아쉬움이 내내 마음 한쪽에 덜렁덜렁 걸려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하."

"응?"

"지금도 찜질기는 있지 않습니까?"

"데운 모래주머니를 천으로 감싸서 환부에 올려주는 거?"

"예, 전하."

"그래도 그거 불편하잖아."

"예?"

"일단 모래라서 무겁고. 게다가 은근히 잘 식거든."

"잘 식다니요? 제가 느끼기로는 30분은 너끈히...."

"그게 잘 식는 거지. 최소 한 시간은 온기가 가야지. 그래야 찜질하면서 잠도 푹 자고."

당연한 이야기다. 자고로 물리치료 찜질을 받으면서 때리는(?) 낮잠만큼 꿀잠이 없다.

한데 지금 별궁 한의원의 찜질은? 그걸 제대로 충족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온기가 금방 식는 찜질 방식 때문에 모래주머니를 갈아줘야 하고, 그 어수선함 때문에 환자가 편히 쉴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거, 호신용으로도 은근 쓸 만할 거야. 여차하면 최대 출력으로 화염을 뿜어낼 수도 있고. 그거 대놓고 화염방사기니까.'

오히려 어설픈 무기보다 훨씬 나으리라.

위급한 상황이 되면 만년필로 주위를 다 태우고, 그 와중에 자신은 만년설의 냉기로 안전하게 보호받고. 게다가 사용하기에 따라서 휴대용 라이터나 손난로, 횃불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서바이벌 용도로도 썩 괜찮은 셈이 아니겠는가.

'생각할수록 괜찮은 멀티툴이거든.'

문득, 황궁 비고 관리관이었다는 리브라노 백작에게서 만년필에 대한 정보를 들었던 때가 떠올랐다. 그 이후부터 나름으로 틈틈이 했던 자료 조사도 떠올랐다.

"마침 리브라노 백작을 통해서 비고 소장 목록과 개별 안내서를 입수할 수 있었지. 황족만 열람이 가능하다는 조건이 있긴 했지만, 그건 나한테는 문제가 안 됐고. 어쨌건- 자료를 찾다 보니까 만년설과 만년필에 흥미로운 사실이 있더라고."

"흥미로운 사실이라니요?"

"어. 이 세트 무구를 만든 존재가 드래곤이더라?"

사실이었다.

흥미로웠다.

게다가 그 드래곤의 정체는 더 흥미로웠다.

"플로레스? 라는 이름의 해츨링이래. 기록에 따르면 용왕 베르키스라는 드래곤의 아주 어린 동생이라나. 어쨌건, 플로레스라는 그 드래곤은 엄청난 마법적 재능을 지녔다더군. 덕분에 성체가 되지도 않은 시점에 마법 무구를 창조할 수준에 이르렀다고도 하고."

"그게 전하의 만년설과 이 만년필인 겁니까."

"어. 이게 그 해츨링의 첫 작품인 것 같아. 친구였던 샤를로트 대제에게 선물한."

"샤를로트 대제...."

"너도 알지?"

"예, 조금은요."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도 당연히 모를 수가 없겠지. 샤를로트 대제는 마젠타노 황가의 천 년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대한 군주니까. 이전엔 왕국이었던 마젠타노가, 그녀의 대에 이르러 마침내 제국으로 성장을 하였으니까 말이다.

'딱 그거지. 고구려에 광개토대왕, 조선에 세종대왕이 계신다면... 여기 마젠타노에는 샤를로트 대제가 있다는 거. 그만큼 길이길이 존경을 받는 위대한 군주라는 거지.'

샤를로트 대제의 이곳에서의 포지션이 딱 그러했다. 게다가 소설 마검황에 나왔던 설정을 돌이켜보자면....

'그녀는 그녀 못지않게 성군이었던 어머니와, 잔머리가 엄청나게 비상했다는 아버지의 장점을 두루 물려받았다지. 게다가 검술 스승은 그 유명한 공전절후의 그랜드 마스터 하비엘 아스라한이라고 했고. 드래곤을 친구로 두었고. 스펙 보소.'

생각할수록 감탄이 나왔다.

그 후로 이어진 마젠타노 황가의 계보 또한 그러했다. 세월이 지나며 그랜드 마스터 하비엘 아스라한의 손녀가 샤를로트 대제의 아들과 결혼을 하였다던가.

그러니까, 마젠타노 황가에는 엄청난 능력자들의 핏줄이 야물딱지게 비빈 짬짜면처럼 꼼꼼하게 얽혀 있는 셈이다.

그 결과물이 바로....

'지금 내 몸뚱이라는 거지. 근데 이 몸은 왜 이런 거냐, 대체.'

상념의 끄트머리에 이르러 터져 나오는 때아닌 탄식!

라키엘, 아니, 이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찌어찌 자신이 차지하게 된 황태자 라키엘의 몸 상태를 떠올리자니, 불량품(?)을 잘못 받은 기분이 든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런 탄식과는 별개로, 데미안의 의문에 잠긴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여기, 이 무구의 안내문에는 입수처가 '불명'이라고 쓰여 있는데 말입니다."

"아 그거? 구라... 아니, 위장이야."

"위장이요?"

"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누군가가 비고에 숨어들어 무구를 훔치는 사태에 대비한 조치야. 무구의 가치를 정확히 알아볼 수 없도록 말이지. 원래는 세트인 두 무구가 상급과 하급 구역에 나뉘어서 비치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고."

"그렇군요. 어쨌건 드래곤이 창조한 무구... 샤를로트 대제... 그럼 전하의 만년설과 이 만년필 모두가 아스라한 심법 사용자를 위해 만들어진 최적의 무구라는 뜻이겠군요."

"어, 정답."

데미안의 짐작대로였다.

아스라한 심법은 마젠타노 황가에 대대로 전해진 고유의 심법. 만년설과 만년필은 그 심법의 사용자만이 진가를 끌어낼 수 있는, 딱 그런 사용 방식의 무구였다.

"그러니까 너는 사용 못 해. 미안."

"...딱히 부럽진 않습니다."

"그런데 왜 침은 꼴깍 삼키지?"

"그냥 목이 말라서요."

"그냥?"

"예."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고?"

"전혀 아닙니다."

"아프면 말해야 해. 알지?"

"...알고 있습니다."

물론이다. 전에 황태자가 신신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마계왕. 그의 각성 방식이 아주 고약할 거라고 했던가. 치유할 수 없는 치명적인 병을 일으키며 자신의 육신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을 것이라 하였던가.

"아마도 마계왕은 지금도 널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고 싶어서 안달일 거야. 그런데 외부적으로는 그걸 할 방법이 없으니까, 네 몸에 불치병을 일으킬 거고."

"그럼 그 위기 때문에 제 몸이 더욱 각성의 길에 가까워지는 거겠지요?"

"어. 그러니 뭔가 몸이 불편하다, 어디가 좀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알려줘. 그래야 최대한 일찍 치료를 시작할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전하. 어쨌건 지금은 딱히 불편한 곳은... 딱 하나 있긴 합니다."

"어딘데?"

"아까부터 계속 귀에 걸려 있는 전하의 싱글벙글 입매가 좀 불편하고 거슬리는군요."

"...내 입매가 어때서?"

"못생기셔서요."

"...."

"죄송합니다."

"아, 잠깐 역모죄 선고 마려웠네."

라키엘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비고 관리인을 불렀다. 적법한 절차에 따라 만년필을 손에 넣었다. 그렇게 이 확인 서류, 저 서약 각서, 여러 문서를 작성한 후에야 비고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별궁으로 돌아온 라키엘은 곧바로 안뜰 연무장으로 향했다. 사방이 트인 모래 바닥이라 불장난(?)을 치기에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만년필과 만년설을 꺼냈다.

웅웅웅-!

두 무구를 양손에 쥐자마자, 녀석들이 서로의 존재를 인식했는지 가늘게 떨며 공명음을 토해냈다. 마치,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나 상봉한 형제 무구에게 기쁨을 표현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좋아."

라키엘은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하였다.

...키이이잉!

익숙한 감각. 거칠게 날뛰는 써클의 포효. 증폭된 마나를 세심하게 조절하였다. 우선 왼손의 만년설에 마나를 투입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츠즈즈즈!

냉기의 실드가 전개되었다.

그다음은 만년필 차례였다.

'후우. 처음이니까 조심스럽게. 아주 약하게.'

어느 정도의 마나를 투입해야 화염 잉크가 분사되는지, 그 화염을 찜질에 맞도록 약하게 하려면 마나를 얼마큼 조절해야 하는지, 아직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능한 최소한의 강도로, 엄청나게 축소한 마나를 밀어 넣었다.

곧 반응이 왔다.

후우욱?

'어?'

생각보다 반응이 좀 쎈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퍼엉-!

앞으로 내민 만년필 끄트머리에서, 화염방사기를 아득하게 능가하는 기세의 화염이 화산폭발처럼 분출하며 연무장의 20% 면적을 날려 버렸다.

239화. 만년필의 위력 (2)

퍼어엉-!

"...!"

앞으로 내밀고 있던 만년필 끄트머리에서, 화염방사기를 아득하게 능가하는 기세의 화염이 터져 나왔다. 마치 화산폭발을 초근거리에서 직관(?)하는 것 같았다. 결과 또한 그러했다.

투확!

화염 방사를 맞은 연무장 일부가 송두리째 날아갔다. 지면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파였다. 열기에 의해 만들어진 구름이 버섯 모양으로 치솟았다. 주위의 모든 공기가 충격파로 터져 나갔고, 연무장과 맞닿은 별궁 별채의 건물 창문이 모조리....

와장창-!

깨졌다.

물론 이쪽이라고 완전히 무사하지는 못했다.

"...어억!"

폭발의 반동 때문에 뒤로 넘어졌다. 아니, 아예 날아갔다. 몇 바퀴를 구른 걸까. 데굴데굴 한참을 하늘과 땅이 자리바꿈했다. 만일, 때마침 뻗어온 데미안의 손이 아니었다면, 연무장 반대편 끝까지 굴러갔을지도 몰랐을 일이었다.

터억!

"컥!"

갑작스러운 급정거(?).

숨이 턱 막혔다. 동시에 깨달을 수 있었다. 방금 진짜로 큰일이 날 뻔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헉, 허억....'

눈길을 들었다.

비로소 즉석에서 뚝딱 만들어진 결과물을 볼 수 있었다.

연무장 한쪽 귀퉁이에 반질반질한 구덩이가 생겨나 있었다. 방금 만년필로 겨누었던 방향이었다. 끔찍한 열기에 녹은 지면이 유리처럼 매끈해졌다. 아니. 유리처럼이 아니라....

'진짜 유리가 만들어졌네.'

그 면적의 길이와 폭이 각각 20미터는 되어 보였다. 주위라고 멀쩡할 리는 물론 없었다. 엉망이었다. 마치 라면 10인분이 담긴 솥을 거실 바닥에 떨어뜨리면 만들어질 결말을 보는 듯했다.

그만큼 엉망이었다. 온통 그슬리고, 파편으로 헤집어지고, 뒤집히고. 솔직히 당장 씨앗을 뿌리면 딱 좋을 정도로 연무장 한쪽을 발칵 뒤집어놓았다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괜찮으십니까?"

"응 아니."

데미안 녀석의 물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막이 웅웅거렸다. 만약 만년필 사용에 앞서서 만년설을 발동하고 있지 않았다면? 냉기의 실드가 보호를 해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폭발 순간의 끔찍한 열기에 고스란히 노출됐을 것이다. 화염을 정면으로 받지 않았더라도, 순간적인 복사열 때문에 전신화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그 생각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비로소, 어찌하여 만년설과 만년필이 세트 무구인지를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사용하면서 찜닭 신세가 되지 말라는 깊은 뜻이 있었구만!'

거참 이거 만든 그 해츨링, 사상 한번 화끈하구나. 라키엘은 새삼스럽게 새록새록 돋아나는 소름을 툴툴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이, 별궁은 이미 난리가 나 있었다.

"비상! 비상!"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연무장 방향입니다!"

야밤에 잠들어 있던 근위대, 특근대 모두가 다 깨어나서 현란한 비상사태 대응 지침을 온몸으로 구현하며 달려왔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누우우? 누우!"

정원에서 자다 깼는지, 우루스가 기겁한 기색으로 쿵쿵쿵 달려왔다. 야간 근무 중이던 웨어울프 간호사들마저도 모조리 변신한 모습으로 몰려왔다. 심지어 별채에서 잘 자다가 창문이 깨지는 날벼락을 겪은 시종, 시녀들도 산발이 된 채로 뛰쳐나왔다.

즉, 별궁 식구 대부분이 때아닌 공습경보(?)에 다들 간덩이가 철렁 떨어진 몰골이 되어 버렸다.

"전하아아아! 괜찮으십니까아!"

잠옷 바람으로 뛰쳐나오다가 이쪽을 딱 본 가르딘 경마저도 울부짖듯 외치며 달려왔다. 그 모습에 결국, 라키엘은 자신의 죄(?)를 자백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어, 다들 미안."

어찌할 수 없는 민망한 쓴웃음만 자꾸 흘러나왔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확실하게 알겠다.

만년필 이거, 쉬운 물건이 아니구나.

"후우. 이거 장난이 아니네...."

그날 밤, 사고를 대강 수습한 후.

겨우 별궁 식구들을 달래고 침실로 올라온 라키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온몸이 쑤셨다. 아까 때아닌 폭발에 뒤로 날아가며 데굴데굴 구른 탓일까. 전신에 2인분 같은 타박상을 낭낭하게 받아 버렸다.

'생각보다 화력이 심각하게 화끈한데?'

그는 손에 쥔 만년필을 슬쩍 쳐다보았다. 고작 바나나 절반 크기의 유성 매직. 겨우 요만한 물건에서 나온 화력이 그 정도라니. 혹시나 해서 아무도 없고 탁 트인 연무장에서 사용해보길 잘했다. 안 그랬으면?

'어쩌면 별궁을 홀라당 다 태워먹었을지도.'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한편으로는 심각한 고민이 쑴펑쑴펑 피어나서 미간에 칼주름을 만들었다.

'이거, 어떻게 써먹지?'

아스라한 심법으로 마나를 가공해서 밀어 넣는 건 맞다. 실제로 그렇게 해서 작동에는 성공을 했으니까. 다만, 함부로 사용했다간 초가삼간 다 태워먹기 딱 좋다는 점이 너무나 크리티컬한 문제였다.

'마나를 훨씬 약하게 넣어봐야 하나? 아닌데. 아까가 내가 투입할 수 있는 마나의 최소량이었는데.'

정말로 그러했다.

아무래도 화염을 사용하는 무구이다 보니, 사고가 날까 봐 염려가 되었다. 하여 시험 가동의 원칙을 떠올리며, 마나를 최소한으로 가장 약하게 해서 투입을 하였더랬다.

그런데 아까 같은 정신이 가출한 수준의 화력이 뿜어져 나왔다. 솔직히 말해서 그 정도면 대전차 지뢰의 폭발을 능가할 위력인 거 같았다.

'이러면 진짜 곤란한데.'

라키엘의 미간에 더욱 깊은 주름이 생겨났다.

제일 약하게 마나를 투입했더니 대전차 지뢰 수준의 위력이 퍼펑. 그럼 더 많은 마나를 넣으면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걸까. 어쩌면 도시 하나를 날려 버리는 건 아닐까.

어쨌건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겠다. 이대로는 안 된다. 환자를 찜질? 아니, 택도 없다. 그저 한 큐에 저세상으로 사출시켜 염라대왕 상담실로 총알배송 보내기 딱 좋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웠다.

'이거 분명히 마나를 조절하면 제대로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안내문에도 분명 그렇게 쓰여 있었는데.'

다른 건 몰라도 안내문의 기능 설명은 위장이 아니었다. 따로 해본 조사 결과 또한 그러했다.

'쓰읍.'

[특이사항 : 사용자의 마나 조절 능력이 지극히 섬세할 경우, 분출하는 화염 잉크의 온도를 큰 폭으로 조절할 수 있습니다.]

분명 안내문에 쓰인 내용은 저랬다.

그렇다면 방법이 있을 것이다.

다만 자신이 모르고 있을 뿐.

'그게 대체 뭘까.'

라키엘은 밤이 깊도록 고민을 거듭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러한 고민은 다음 날까지도 이어졌다. 황제의 호출을 받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짐이 방금, 너에게 괜찮으냐고 하문한 것을 듣지 못하였더냐?"

"아, 예?"

라키엘은 정신이 퍼뜩.

근엄한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묘한 눈빛을 보내오는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어젯밤에 말이다. 별궁에서 큰 소란을 일으켰다고 들었노라."

"아, 예. 그러하옵니다, 폐하."

"비고에서 가져간 무구로 폭발을 일으켰다지?"

"송구하옵니다, 폐하."

"아니, 되었다."

네가 무사하면 그걸로 충분하단다. 황제는 이어서 나오려던 뒷말을 삼켰다. 대신 엄격한 눈빛으로 라키엘을 일별하였다.

"혹여 어젯밤 비고에서 챙겨간 물건이, 화염을 내뿜는 물건이었더냐?"

"예. 그렇사옵니다, 폐하."

"쯧쯧. 어설픈지고. 사용법조차 모르는 물건을 손에 넣고서 신을 내다가 사고나 치는 꼬락서니라니."

"...."

"나름으로 조심을 한다고 잔뜩 몸을 사리다가 그런 사단을 벌였겠지. 그 모습 또한 눈에 선하도다."

"...."

어쩐지 이번만큼은 변명할 말이 없다. 그러는 한편으로, 황제의 갈굼에 서린 묘한 어조 또한 은근슬쩍 느껴졌다.

마치, 만년필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혹여, 폐하께서는 만년필의 사용법을 알고 계신 것이시옵니까?"

"짐이 말인가?"

"예, 폐하."

확실하다.

황제가 뭔가 알고 있는 것 같다. 이쪽을 굽어보는 눈빛도, 표정도, 말투의 뉘앙스도 모두 그렇다. 그러니까 이건....

'뭔가를 내놓으면 꿀팁을 알려주겠다는 느낌인데?'

라키엘은 황제의 의중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쪽에게서 뭔가를 받아내려는 거다. 지금 자신을 부른 것도 단순한 걱정이나 책망이 아닌, '거래'를 위한 거다.

'뭐지. 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지.'

슬쩍 황제를 살폈다. 여전한 포커페이스였다. 너무 엄격해서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다.

그 모습을 보자 절로 골치가 아파졌다.

'설마 또 한의원 접고 후계자 수업을 받으라는 건 아니겠지?'

황제 저 양반의 성격으로 보아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만약 정말로 그런 대가를 요구한다면 자신은 어떻게 방어를 하면 좋을까. 잠시 고민한 라키엘은 입을 열었다.

"부디 청컨대, 폐하께서는 제게 원하는 것을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일단 요구 조건을 들어보자 싶었다.

다시금 정신무장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황제의 대답이 돌아왔다.

"근래에 듣자 하니, 네가 무수한 귀족들의 통증을 어루만져 달래어 주는 신묘한 의술을 발휘하였노라 들었다."

"예, 그렇사옵니다."

혹시 내손 약손 스킬을 말하는 건가. 그럼 혹시... 그걸 사술이라며 비난하려는 걸까. 이쪽을 내려다보는 황제의 표정이 더욱 엄격해졌다.

"그러해? 하면 참으로 실망이로다."

"...."

역시.

또 이러는 건가.

...라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황태자여. 너는 무수한 귀족들에게는 그런 신묘한 재주를 잘도 발휘하면서, 짐에게는 그걸 써볼 생각을 한 번도 아니하였더란 말인가?"

"예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놀라움은 시작일 뿐이었다.

"참으로 실망이로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로다. 참으로 개탄스러운지고."

"...."

"평생을 병상에 누워 제 몫도 못 해내던 녀석의 지위를 내내 보존하여 주었건만, 그 오랜 시간 내내 기대감을 놓지 아니하여 주었건만, 짐에게 돌아오는 보답이 고작 이런 따돌림이란 말이더냐?"

"...예에?"

"그렇지 않더냐. 짐이 틀린 말을 하였느냐? 아니면, 네가 그 통증을 삭여준다는 의술을 짐도 모르는 사이에 짐에게 사용하였는데, 그걸 하필이면 짐만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더냐? 그건 아니지 않느냐?"

"아, 예... 하오면...."

"하오면?"

"지금... 폐하께선 아픈 곳이 있으신 것이옵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황제가 불쾌한 듯 눈살을 팍 찡그렸다.

"네가 이 나이가 되어 보거라. 몸이 멀쩡해도 아니 아픈 곳이 없는 법이니. 온종일 국정에 매달리느라 목은 굳고, 어깨는 결리고, 뒷목은 수시로 당기지 아니하는 순간이 없도다. 한데도 이런 당연한 사실을 모르는 황태자는 대체 무엇인가. 국정에 매달려 본 적이 없기에 그 고단함을 모르는 것이겠지?"

"저기, 저는...."

"쯧쯧. 아직도 짐의 뜻을 모르겠느냐?"

"아... 알겠사옵니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큼 황제에게 다가갔다. 황제는 뭐가 그리도 못마땅한지 여전히 까칠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행동은 달랐다. 이쪽이 다가서기가 무섭게, 몸을 돌리고 등을 내밀었다.

"어깨부터."

주물러 달라는 건가. 그러고 보니 황제의 어깨를 주물러 준 적은 한 번도 없었구나 싶었다. 아니,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어깨를 주물러드린 게 언제였더라.

'내심 서운했던 건가.'

이쪽이 자신만 쏙 빼놓고서 귀족들에게 내손 약손을 써줬던 일 때문이었나 보다. 그래서 오늘 황제의 심기가 내내 불편했던 것이었나 보다.

'참나. 솔직하지 못해서 문제라니까, 이 양반은.'

황제의 뭉친 어깨를 주물러 주고 있자니,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한편으로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이 사람의 진짜 아들이 아닌데.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그 감정은, 죄책감을 닮아 있었다.

하지만 간신히 내색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황제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덕분에 곧, 황제에게서 만년필의 진정한 사용법을 들을 수 있었다.

의외로 간단한 방법이었다.

240화. 만년필의 위력 (3)

"그러니까, 마나의 투입량을 거꾸로 하면 된다는 겁니까?"

"어."

"마나를 강하게 투입해야 화염이 약하게 나오는 거라구요?"

"그렇대."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앞쪽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다시 연무장.

정면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하다. 이제부터 저 앞쪽으로 화염의 무구, 만년필을 사용할 거니까. 그런데 일부러 저쪽에 자리를 잡고서 바삭바삭 인간 튀김이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물론 이번에도 시험 가동에 실패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말이다.

"폐하께서 그러시더라. 생각을 전환하라고. 강하게만 한다고 해서 무조건 강하게 나오란 법이 있겠느냐고."

"그게 전하께서 얻은 힌트입니까?"

"어."

"한데 과연, 폐하의 그 말씀이 마나의 투입량과 화염의 분출량이 반비례한다는 뜻인 게... 확실합니까?"

"뭐, 아직은 모르지."

당연히 해봐야 안다. 데미안의 불안함 섞인 의문에 라키엘은 어깨만 슬쩍 으쓱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황제를 살포시 원망(?)해보았다.

'하여간 그 양반!'

솔직하지 못한 점이 문제다. 아울러, 여전히 사람 고생시키길 좋아하는 점도 문제다. 그러니까 기껏 어깨까지 정성껏 주물러줬더니, 황제는 애매모호한 힌트만 꿀팁이랍시고 던져준 것이 아니겠는가.

'때로는 약함이 강함을 부르는 법이라.'

그게 황제가 건네준 딱 한 마디 조언이었다. 뭐, 듣는 순간 무슨 뜻인지 대략 파악할 수 있긴 했다. 100% 확실한 게 아니라는 점이 문제라서 그렇지.

"어쨌건, 폐하의 말씀대로라면 이 무구는 청개구리 같은 특성을 지닌 거야. 그걸 확인하려면 직접 시험해보는 수밖에."

"제가 하면 안 되겠습니까?"

"응 안 돼."

"어째서입니까?"

걱정스레 이쪽을 쳐다보는 데미안을 향해 대꾸를 돌려주었다.

"내 거니까."

"...."

"앞으로 내가 계속 사용해야 할 물건인데, 당연히 내가 시험을 해봐야지. 그래야 정확한 사용법에 대한 감이 오지. 안 그런가?"

"하지만...."

"게다가 넌 아스라한 심법도 없잖냐. 내가 말했지? 만년설과 만년필, 이 무구들은 아스라한 심법 사용자를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라고."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전하의 뒤에 서서 지켜드리겠습니다."

"당연하지. 어제처럼 나 반동에 날아가면 쿠션... 아니, 받아줘야지. 그럼 다른 데 있으려고 그랬냐?"

"...."

"방향이 조금 비뚤한 거 같은데? 카이엔 경? 설마 여차하면 피하려는 건 아니지? 조금 왼쪽으로."

"이렇게 말입니까?"

"그래, 좋아. 후우."

라키엘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주위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수십 명의 인원이 연무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혹여나 생겨날 화재 사태에 대비하여 물동이를 들고 있는 근위대와 특근대원들이었다.

'뭐, 잘되겠지.'

이미 확신은 서 있다.

남은 일은 확인하는 것뿐.

라키엘은 만년필을 쥐고서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하였다.

'최대치로!'

키이이이잉-!

마나를 약하게 투입해서 강력한 화염이 나왔으니까, 이제는 대놓고 가장 강한 마나의 출력으로!

투입했다.

만년필을 앞으로 내밀었다.

확신과는 별개로, 무의식중에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어젯밤의 엄청난 분출과 폭발, 반동의 묵직한 기억을 몸이 간직한 탓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젯밤과 달랐다.

...보골보골?

폭발음이 들려오지 않았다. 무지막지한 화염이 쏟아져 나오는 일도 없었다. 대신 만년필 끄트머리에서 물 끓는 듯한 소리가 살며시 들려왔다.

'어?'

찡그린 눈가를 풀었다. 조심스럽게 만년필 끄트머리를 확인해보았다. 덕분에 볼 수 있었다.

'살짝 끓는 잉크가 흘러나오고 있네?'

그러했다.

반투명한 잉크가 만년필 끝에 몇 방울쯤 맺혀서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그럼 온도는 얼마쯤 될까. 보통의 물처럼 100℃로 끓고 있는 걸까.

"데미안, 수건 좀."

"예?"

"수건이든 손수건이든 아무거나. 빨리."

"아, 예."

녀석이 주섬주섬 내미는 손수건을 받았다. 손수건에 끓는 잉크를 슥슥 발랐다. 유성매직으로 낙서를 하듯이. 그렇게 끓는 잉크를 묻힌 손수건을 조심스럽게 톡톡, 터치해보았다.

'오?'

별로 뜨겁지가 않았다. 비교를 하자면 제일 뜨거울 때의 손난로 정도? 내친김에 아예 주먹으로 쥐었다. 그래도 화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건....

'됐다!'

예상대로였다.

이 만년필이라는 무구, 투입하는 마나의 강도와 화염의 출력이 거꾸로인 거다. 언뜻 생각하기엔 비효율적일 수도 있겠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아니었다.

'이거, 나름의 안전장치인 거야. 아스라한 심법은 애초부터 마나의 증폭이 특징이니까. 아예 그게 기본 성질이니까.'

그렇기에 별생각 없이 심법을 발동하면? 마나가 몇 배로 뻥튀기가 되어 강력해지기 일쑤였다. 오하려 마나를 약하게 만드는 게 훨씬 어려웠다.

'그러니까 마나의 투입과 화염의 출력을 반비례로 만든 거겠지. 그럼 아무 생각 없이 마나를 뻥튀기해서 사용해도 강한 화염이 나오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야 주위에 뜻하지 않은 피해를 입히거나, 사용자 본인이 다치지 않는다. 최소한 부주의한 사고는 줄어들 수 있으리라.

'딱 그거지. 강한 화염을 쓰기가 어렵도록 세팅을 한 거야.'

아마도 이 무구를 제작한 '플로레스'라는 해츨링의 의도가 그런 듯했다.

'그럼 시험을 더 해볼까.'

다시금 만년필을 잡았다.

극도로 증폭하던 마나를 살짝 줄여 보았다. 그랬더니 역시나, 곧바로 반응이 왔다.

부화악?

귀엽게 보글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만년필 끄트머리에서 불길이 슬금슬금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럼 다시 마나 투입을 강하게!'

...보글보글.

이제 제대로 알겠다.

'그럼....'

완전한 확신을 얻은 라키엘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사냥감(?)을 물색했다. 마침 적당한 대상이 포착되었다.

"세르지오?"

"예! 전하!"

특근대의 최연장자 세르지오가 용맹하게 답하며 달려왔다. 언제 봐도 든든한 사내다. 라키엘은 흐뭇하고 인자하게 웃으며 세르지오에게 물었다.

"요즘도 등이 쑤신다고 그랬지?"

"예? 아, 예, 그렇습니다."

"역시. 크라노스에서 입은 근육 부상이 제법 오래 가는 것 같은데. 지금 좀 봐줄까?"

"예?"

"잠깐 돌아서서 상의 걷어봐."

"...."

전하께서는 뭘 하시려는 걸까. 세르지오는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지시에 따랐다. 그리고 곧 기겁해야 했다. 황태자가 돌연, 엄청난 화염을 뿜어낼 수도 있는 마법의 무구 끄트머리를 자신의 등에 갖다대었기 때문이었다.

촵?

"...전하?"

저도 모르게 움찔.

세르지오가 놀라는 순간.

"괜찮아, 괜찮아. 흐읍!"

라키엘이 기합과 함께 최대 출력의 마나를 만년필에 투입했다. 보글보글, 특유의 발동음(?)과 함께 만년필에서 따끈하게 데워진 잉크가 흘러나왔다. 세르지오가 뭐라 반응하거나 빼기도 전에 잉크를 허리춤의 척추기립근 가득 촵촵 발라주었다.

마치 유성매직으로 낙서를 하듯이.

혹은 물파스를 발라 주듯이.

그 직후.

"어... 엇?"

세르지오는 더욱 놀랐다. 따끈했다. 아니, 후끈했다. 황태자가 자신의 허리에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마치 딱 좋게 데운 모래주머니를 근육에 붙여준 것만 같았다.

"오, 오옷...."

기분이 좋았다.

때아닌 느낌에 긴장이 절로 풀렸다.

라키엘의 입꼬리도 귀에 걸렸다.

"어때?"

"이게... 대체 뭡니까, 전하?"

"별궁 한의원 최초의 본격적인 온열 찜질 물리치료?"

"찜질... 물리치료 말입니까?"

세르지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태자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몸으로는 이미 알 것 같았다. 따끈하니 참 좋았으니까.

그 후로 이틀이 더 지났다.

그동안 라키엘은 특근대원들을 상대로 만년필의 다양한 사용 실험을 했다. 더불어 만년필로 출력하는 잉크의 온도 조절도 더욱 섬세하게 연습했다.

환자를 상대로 실수가 생기면 안 되니까.

자칫 의료사고가 날 테니까.

더욱 심혈을 기울여 연습했다.

덕분에 찜질에 적당한 온도 모드(?)를 5단계로 조절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아울러 온기가 유지되는 시간 또한 3단계로 설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날부터였다.

별궁 한의원에 새로운 클리닉이 개설되었다. 만년필을 활용한 온찜질, 만년설을 이용한 냉찜질, 거기에 내 손은 약손 스킬을 적극 도입한 '통증 클리닉'이었다.

'이게 환자의 수명을 늘려 주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이것 때문에 찾아오는 환자가 더 늘겠지!'

그러면 된다.

별궁 한의원이 흥할수록.

입소문이 널리 퍼질수록.

진짜로 아픈 환자들이 찾아올 확률 또한 올라간다. 그럼 자신의 보너스 수명 확보도 더 쉬워질 것이다.

'아주 천년만년 부유하게 탱자탱자 살아 주마!'

그렇듯 야물딱진 야망과 함께 오픈한 통증 클리닉 덕분이었다. 과연 라키엘의 예상대로 순식간에 새로운 소문이 퍼졌다.

앞서 귀족들의 통풍을 치료한 성과.

거기에 새로 오픈한 통증 클리닉까지.

"여보, 혹시 들었어요? 황태자 전하께서 손만 대면 아프던 사람의 통증이 싹 가신다고 해요."

"정말이오? 그럼...."

"네, 아버님 댁에 황태자 전하 놔드려야겠어요."

"하하.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게 말여요."

"그럼... 이럴 때가 아니군. 내가 아버지를 모시고 황도로 가봐야겠어."

...라는 식으로 황도의 별궁 한의원행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소문이 퍼진 곳은 비단 황도 마젠타 인근이나, 제국 영토 안쪽만이 아니었다. 풍문이라는 이름의 발 없는 말은 순식간에 국경마저 넘었다. 이웃한 왕국의 도시, 주점, 심지어 산자락에 위치한 깡촌에까지도 용하다는 황태자의 소문이 퍼져 나갔다.

덕분에 어느 소도시의 뒷골목.

그곳을 방황하던 어느 몰락한 거한의 귓가에도 황태자의 소문이 닿았다.

"내 손은 약손~ 내 손은 약손~ 에헤이야~"

"...그 요상망측한 노래는 대체 뭔가?"

"어허. 자네는 아직도 이걸 못 들어봤나?"

"그게 뭔데."

"제국의 황태자 말일세. 글쎄, 그가 이 노래를 부르면서 환자를 어루만지면 아픈 곳이 씻은 듯이 낫는다더구만."

"허허? 허? 무슨 그런 헛소리가 다 있나?"

"헛소리라니? 진짜라니깐?"

"에잉, 쯧쯧! 이 친구 취했구만, 취했어."

"취한 건 자네겠지!"

"아 됐고. 어서 오기나 하게. 이러다간 늦겠어."

"에잉, 쯧. 집에 좀 늦게 들어가면 어디 인생이 끝나나?"

"당연하지! 우리 마누라가 얼마나 무서운데."

"어휴, 쯧쯧!"

두 술주정뱅이가 걸음을 재촉하며 멀어졌다. 그들은 몰랐다. 자신들이 생각 없이 나눈 이야기가 골목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어느 거한의 귀에 닿았음을.

"내 손은... 약손...?"

거한이 움찔했다.

들어본 적이 있는 노래였다.

반복된 정신계 마법 실험의 후유증 때문에 뒤엉켜 버린 이성의 실타래 속에서도, 저 요상한 노랫가락만큼은 어쩐지 강렬하고도 그리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리한... 군의관...."

한때 앙부아즈의 권력을 거의 움켜쥘 뻔하였던 반란자. 동시에 극강의 소드마스터였던 사내. 몰락한 거한, 쟈빌론의 눈빛에 갈망의 열기가 피어났다.

241화. 무시무시한 환자 (1)

"리한... 군의관...."

작은 속삭임. 그 사이에서 명멸하는 기억의 조각. 쟈빌론은 흐리멍덩해진 눈을 가늘게 뜨며 필사적으로 기억의 서랍을 뒤적였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서랍이 망가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있다. 리한 군의관이라는 이름이 자꾸만 떠오른다. 어째서? 방금, 저 노래를 들었기에.

'내 손은... 약손... 내 손은... 약손....'

기이하던 노랫가락. 어쩐지 흥겹게도 들리던 박자와 후렴. 그걸 들으면 편안했다. 아프지 않았다. 살면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안도감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행복의 형태를 닮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평생 누리고 싶었다.

언제나 곁에 두고 싶었다.

절대로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그런데.

'나는....'

어째서 그를 잃었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으며 애를 써도 도통 떠오르지가 않았다. 기억의 서랍이 망가져서 그렇다. 마치 머릿속 어느 부분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았다. 그 구멍으로 중요한 기억들이 빠져나간 것만 같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숨만 쉬어도 아팠다. 평생을 두통에 시달린 그였지만, 지금의 아픔은 예전보다 더했다. 차원이 달라졌다. 자비 없는 마법 실험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나쁜 사람들....'

마법 실험실.

그곳을 떠올리자마자 쟈빌론은 건장한 어깨를 한껏 움츠렸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몰려왔다. 다시는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서 받아야 했던 수많은 마법 실험도 끔찍했지만, 실험을 진행하는 내내 무표정하던 사람들의 표정이 더욱 무서웠다.

'나는....'

그런 꼴을 겪고 싶지 않았는데. 딱히 크게 잘못한 일은 없는 것 같은데. 그런데 온종일 사람을 얼음 구덩이에 밀어 넣고.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굉음 속에 던져넣고. 갖가지 약을 억지로 먹이고. 어둠 속에 구겨 넣고. 그렇게 생각을 파먹고.

"...흐읍."

숨이 막혔다.

아니, 호흡이 과도하게 빨라졌다.

한 번 들이마신 호흡을 도저히 뱉을 수가 없었다. 폐가 터질 것 같았다. 숨을 내쉴 수가 없다. 죽을 것 같다. 이대로 공기 속에서 질식할 것 같다. 살려줘. 살려줘. 누가 좀 살려줘!

"...그아아아악! 쿨룩! 콜록! 커흐, 쿨룩!"

간신히 비명처럼 내뱉은 숨결.

그 서슬에 골목 어귀를 어슬렁거리던 고양이 두어 마리가 놀라서 달아났다. 달아나는 뒷모습을 보자니, 잃어버린 기억 속의 어느 순간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달아나던 뒷모습.

날 버리고 뛰어가던 뒷모습.

누가?

리한 군의관이.

날 배신하고. 떠나고. 마지막에는....

'나와 맞서고.'

그랬다.

맞섰던 것 같다. 냉기 풀풀 나는 방패를 앞세우고 대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검은 머리칼 놈이 나타났지. 무감정한 눈빛으로 내 앞을 막아서고. 그래. 난 무감정한 눈빛이 싫어. 날 괴롭히고. 실험을 가하고. 차갑게 쳐다보고.

"...."

죽이고 싶다.

보고 싶다.

그런데 내가 누굴 떠올리고 있었더라. 어쩌다가 내가 그 끔찍한 정신 실험실을 떠올리게 됐지.

그나저나 나는... 누구지?

"쟈빌론."

그래.

나는 앙부아즈의 위대한 반란자.

잠깐 제정신을 차린 쟈빌론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아주 잠깐 되찾은 이성의 틈새에서, 그는 자신이 어쩌다가 이름 모를 이곳 소도시의 골목까지 흘러왔는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탈출했다.

끔찍했던 마법 실험실에서.

그 과정에서 거의 반쯤 죽을 뻔했지만, 끝끝내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물론 대가 또한 치러야 했다. 지독한 후유증을 앓게 됐다. 며칠에 겨우 한 번, 이렇듯 잠깐 이성을 찾는 시간 외에는 거의 제정신이 아닌 채로 지내게 됐....

"리한...이 누구였지...?"

그의 눈이 다시금 흐려졌다.

하지만 어느새 몸은 천천히 자리를 털며 일어나고 있었다. 흐려진 눈빛과는 달리, 나름의 명확한 목적을 지닌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리한... 군의관...."

그를 찾아야 한다.

내 것이니까.

내 것이어야 하니까.

영원히 곁에 잡아두고서 날 치료하게 만들어야 하니까.

"그러니까... 황도... 마젠타로...."

그가 있다는 곳으로 가야지.

물론 황도 마젠타가 어디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상관없다. 걷다 보면 언젠가는 도착할 테니까. 그때에는, 리한 군의관을 찾아내면,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놓치지 않아.'

저벅, 저벅....

몰락한 반란자 쟈빌론의 걸음이 비틀비틀, 황도 마젠타를 향한 맹목적인 첫발을 내디뎠다.

"의사 선생님? 저는 전하께 진료를 받을 수만 있다면 죽어도 좋습니다."

"아, 그건 좀...."

"예? 안 됩니까?"

"아니, 안 된다기보다는요."

이곳은 이른 아침의 별궁 한의원.

그곳의 내과 진료실에서 의사, 발렌티노는 하루의 첫 환자를 맞이하며 난감한 웃음을 짓고야 말았다. 요즘 종종 이런 식이다. 환자가 진료실에 들어오자마자 황태자 전하께 진료를 받고 싶다며 애원하는 상황이 말이다.

"전하께서는 정말로 적절한 치료가 필요한, 심각하거나 위중한 환자만 받고 계십니다. 그러니 일단 환자분의 증상부터 좀 살펴보는 게 우선일 것 같은데요."

"아... 하지만...."

"혹시 진료를 받는 데에 곤란한 점이 있으실까요?"

"아뇨, 그건 아니긴 한데... 그래도 의사 선생님?"

"예?"

"제가 이틀이나 걸려서 황도까지 왔는데 말입니다."

"예."

"전하께 진료를 꼭 받고 싶어서 말이지요."

"...아하하. 저도 진료를 잘 해드릴 수 있습니다. 만약 제 능력이 닿지 못하는 질환을 지니고 계신 거라면 당연히 전하께 보내드릴 거고요."

"그, 그렇습니까?"

"예."

발렌티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쓴웃음이 자꾸만 짙어졌다. 요즘, 계속 이런 식이라서 이젠 익숙해져 버렸다. 그는 당혹스러운 기색을 드러내는 중년의 환자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지난 며칠 동안 수없이 말해서 이젠 입에 착 달라붙어 버린 멘트를 십분 활용하며.

"환자분께서는 여기에 와서 저와 이렇게 마주앉아 계시는 걸 오히려 행운으로 여기셔야 합니다."

"예? 어째서 말입니까?"

"그만큼 덜 심각한 병을 지니셨다는 뜻일 테니까요."

"아...."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전하의 진료실에는 심각하고 위중한 질환을 지닌 분들만 선택을 받아서 들어가십니다. 그만큼 많이 아픈 분들이라는 뜻이지요."

"그럼...."

"예, 일단 여기서 진찰부터 해보고요. 우선은 전하를 뵐 일이 없기를 바라시는 게 맞겠지 싶습니다?"

"아, 예...."

그제야 겨우 수긍하는 환자.

그 모습에 입맛이 살포시 씁쓸해졌다.

이게 다 황태자의 명성이 지나치게 드높아진 까닭이었다. 특히 최근에 시행하기 시작한 통증 클리닉이 결정적이었다. 온열과 냉기 찜질. 거기에 황태자의 손길이 가미된 내 손은 약손까지.

그 구수하고 신비한(?) 노랫가락을 들으면 아픈 환자들의 통증이 거짓말처럼 싹 가시곤 했다. 원리는 황태자 외엔 아무도 몰랐다. 그렇기에 더욱 신비롭게 느껴졌다.

덕분에 황도는 물론이고 제국 영토 구석까지, 심지어 국경 너머까지 소문이 퍼지고 말았다. 황도 마젠타의 황태자가 손만 대면 죽어가던 사람마저 낫는다고. 사제가 아닌데도 연일 기적을 행한다고.

그런 까닭에 최근의 별궁 한의원은 그야말로 인산인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게 됐다.

물론 한의원에 고용된 의사들도 죽을(?) 맛이었다. 정신없이 바빠졌다. 그 와중에 황태자에게 진료받기를 애원하는 환자들을 설득하고 달래는 일마저 종일 치러야 했으니 오죽할까.

'후우.'

발렌티노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오늘은 또 몇 명의 환자를 어르고 달래며 설득해야 할까. 제발 오늘은 고집스러운 환자가 안 걸리면 좋겠다.

그런 생각은 일반 의사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어느새 별궁 한의원의 부원장이 된 가르딘 경 또한 나름의 고민에 빠져들게 됐다.

"저기, 전하?"

"응?"

"조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 점심 먹는 중인데?"

"이럴 때가 아니면 말씀을 드릴 틈이 없어서 말입니다."

가르딘 경은 식탁 건너편의 황태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말이었다. 요즘 환자가 하도 몰려드는 통에 다들 너무 바빠졌다. 황태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럴 때가 아니면 말을 걸기도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다행히 라키엘도 그런 가르딘 경의 심정을 헤아려주었다.

"뭐, 중요한 일이니까 경이 이러는 거겠지?"

"감사합니다, 전하."

"난 아직 허락 안 했는데?"

"그래도 들어주실 거 같은데 말입니다."

"알았어. 무슨 일인데."

"전하, 요즘 환자가 너무 심각하게 몰려들어서 말입니다. 조금... 환자를 가려서 받는 건 어떠실지요?"

"응. 안 돼."

"...예?"

"내가 환자 가려 받으려고 한의원을 열었나? 가려서 받을 생각이었으면 진즉 진료비부터 왕창 매겼겠지."

"하지만 전하."

가르딘 경의 어조가 간곡해졌다.

"전하께서 알고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환자 예약이 하도 밀린 나머지, 아예 황도 여관에 닷새가 넘도록 투숙을 하면서 대기하는 환자들마저 있다고? 나도 알고 있어."

"그럼... 대책이 따로 있으신 겁니까?"

"물론."

라키엘은 샐러드를 와삭 씹으며 말했다.

"예약을 받을 때부터 환자의 위급한 정도에 따라서 순위를 매길 거야. 위급한 환자가 예약이 밀려서 기다리다가 잘못되면 곤란해지니까. 대신 규칙을 세워야겠지. 위급하지 않은데 엄살로 허위기재를 하고 빠른 순번을 받은 것이 적발될 때에는 별궁 한의원에서 진료받을 자격을 박탈한다거나 하는."

"그냥... 처음부터 환자를 가려서 받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응. 안 된다니까."

"어째서입니까?"

가르딘 경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황태자가 어째서 이토록 진료에 집착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황태자의 지위라면 원하는 환자만 얼마든지 골라서 받을 수 있을 텐데. 그래도 아무도 비난하지 못할 텐데.

'그런데 어째서 굳이 험난한 일을 자처하시는 걸까.'

혹시 백성들을 조금이라도 더 보살피려는 마음 때문이신 걸까. 어쩌면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더욱 존경스러운 분인 것인지도.

...라고 가르딘 경이 멋대로 생각하는 사이, 라키엘은 피식 웃고 말았다.

'당연히 보너스 수명 때문이지!'

환자를 골라서 받을 수는 있다. 솔직히 그래도 된다. 하지만 그렇게 걸러낸 환자 중에 정말로 위중한데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환자가 있을 수도 있다.

그건 싫었다.

게다가 문득, 한국에서 만났던 어떤 의사분도 떠올랐다. 우연히 지인을 통해서 알게 된 암 전문의였다. 서울의 빅5 병원 중의 하나에 소속된 분이었다. 한 번은 그분에게서 인상 깊은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다른 병원은 몰라도, 자기가 있는 병원에서는 다른 병원에서 이전해 오는 암 환자들을 절대로 가려 받거나 차별하지 않는다고 했지. 환자를 거부하면 안 된다고. 자기가 있는 병원은 전국에서 갖가지 암 치료를 다 해보다가, 마지막으로 지푸라기 잡듯이 찾아오는 최후의 장소라고. 그런데 거부를 하면 그 환자들은 아무 곳에도 의지할 수 없게 된다고.'

그 이야기를 하던 때의 그 의사분이 정말로 멋져 보였다. 배우고 싶은 태도였다. 지금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 소문을 듣고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찾아온 사람들이야. 그런데 그걸 걸러서 받는 게 말이 될까. 안 돼. 설령 내가 더 바빠지는 한이 있어도 말이야."

"그렇습니까...."

"어."

...물론 실제로 더 바빠지는 건 내가 아니라 한의원에 소속된 다른 의사들이겠지만.

라키엘은 애써 뒷말에 담긴 진실(?)을 삼켰다. 그러라고 고용을 한 거다. 각종 보너스와 복리후생을 빵빵하게 챙겨주는 거다.

'받은 만큼 일을 해야지!'

...라는 철저한 기업가 마인드!

물론 그런 라키엘의 속내를 모르는 가르딘 경은 다시금 감동의 물결에 젖어 버렸다. 밀려드는 환자의 물결에 지쳐가던 의욕의 불길을 다시금 활활 태웠다. 오후 진료를 더욱 열심히 하리라 새삼 다짐을 하였다.

그러나 가르딘 경의 그러한 다짐은 오후 첫 환자를 만나는 순간 무참하게 박살이 나고야 말았다.

"뭐냐, 너 같은 나부랭이는."

"...."

뭘까, 이 환자는.

어째서 진료실에 들어오자마자 대뜸 저따위 말을 꺼내는 걸까. 대관절 어찌하여 저런 오만한 눈으로 벌레 보듯이 날 쳐다보는 걸까.

게다가....

"허허. 젊은 환자분께서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전하께서는 정말로 위중한 환자만 만나고 계시니, 일단은 이곳에서 진찰부터...."

"위대한 이 몸께서는 이름도 모를 너 따위에게 진료를 받으러 온 것이 아니다. 당장 황태자를 불러와."

"...예?"

"못 들었나? 황태자를 불러오라고."

"저기, 환자분?"

가르딘 경은 정말로 힘껏 애써서 미소를 유지했다.

"환자분께서는 여기가 어디인지, 전하께서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르고 있나 본데 말입니다...."

"잘 알고 있다. 황족이 머무는 별궁이며, 그 황족의 일원이자 제국 황가의 후계자가 될 황태자가 이곳 병원을 이끌고 있지. 그래서 이 위대한 몸께서는 황태자에게 직접 진료를 받으러 친히 이곳까지 온 것이다만."

"...."

이 x끼, 미친놈인가.

가르딘 경은 증발하려는 어처구니를 겨우 붙잡았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눈길로 눈앞의 진상 싸가지 환자를 쳐다보았다.

젊었다. 딱 보기에도 절대로 20대 중반은 넘지 않을 듯했다. 옷차림은 제법 화려했다. 그렇지만 그 외에 그 어떤 드높은 신분의 냄새나 건덕지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아무리 신분이 높아 봤자, 황태자보다 높을 수는 없을 텐데.

'이 사람 대체 뭐지?'

진짜로 미친 걸까. 심각한 광증 때문에 한의원을 찾아온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잠깐 찾아왔던 분노가 사그러들었다. 대신 안타까운 심정이 장착되었다.

"후우, 환자분? 정신적인 고통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희망을 잃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니 저와 차근차근 상담부터 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뭐?"

"괜찮습니다. 불안해하지 마시고요."

"네놈, 미쳤나?"

"예?"

"내가 정신병을 앓는 걸로 보여?"

"아, 딱히 그렇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모든 병의 진료는 상태를 진단하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법이니, 조금은 마음을 진정시키시고...."

"이 위대한 드래곤, 등갑룡 포르티스께서 한낱 정신병 따위를 앓는 것 같다고?"

"예에?"

"죽고 싶나?"

"...."

진짜로 답답해서 죽고 싶다.

뭐 이런 미친 x끼가 온 거지.

가르딘 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물론 그는 까맣게 몰랐다.

눈앞의 진상 싸가지 환자의 자기소개(?)가 진심이고 실화이며 지극히 솔직담백한 트루라는 무시무시한 사실을.

242화. 무시무시한 환자 (2)

미치겠다.

이건 진짜 미친놈이 확실하다.

가르딘 경은 16비트 자진모리장단으로 지끈거리는 뒷골을 부여잡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라 혼신의 인내심을 발휘하였다.

"후우, 그러니까 환자분?"

"포르티스다."

"그게 이름이신가요?"

"그러하다. 등갑룡 포르티스 님이라 부르도록."

"...."

아 x발 진짜.

가르딘 경은 그답지 않게 하마터면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솔직히 험한 말이 혀끝을 박차고 아름다운 810도 배치기 다이빙을 선보일 뻔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역시나 참아냈다.

진료실은 신성한 곳.

환자를 돌보는 뜻깊은 곳.

이런 곳에서 욕설이라니 말도 안 된다.

"흠흠! 커흠! 어, 그럼, 포르티스 환자분? 어디가 아파서 오신 건지 말씀을 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화가 날수록 더욱 정중하게.

상대는 아파서 온 사람이니까.

가능한 한 부드럽고 친절하게.

혼신의 힘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물었다. 그러나 환자는 그의 마음을 좀처럼 알아주질 않았다.

"너 따위와는 나눌 이야기가 없다."

"...."

"아까부터 이 위대한 몸께서 누누이 이야기했을 터인데. 황태자를 불러오라고."

"저기, 환자분? 저도 누차 말씀드리는 거지만, 정말로 위급하거나 중한 병을 앓는 분들만 황태자 전하를 뵐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선 저에게 증상을 말씀하시고 진찰부터 받은 후에, 정말로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면 자연스럽게 황태자 전하께 진료를 받을 수 있을 거고요."

"고작 비루한 필멸자 타르디온(Tardion) 주제에. 이 위대한 몸에게 훈계를 늘어놓으려는 것인가? 혹은 알량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의 규칙을 내게 들이밀려는 것인가?"

"...."

울고 싶다.

누가 이 미친놈을 좀 데려가 줘.

'전하.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가르딘 경은 참으로 크나큰 난감함을 만끽했다. 이건 도무지 말이 씨알도 먹히지가 않았다. 아까부터 똑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나 반복한 건지. 황태자 전하를 바로 만날 수는 없는 법이라고 누차 얘기했는데도 이 미친놈은 알아먹을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게다가 저 말도 안 되는 태도라니.

'드래곤? 본인이? 진짜 미친 거 같은데.'

가르딘 경은 거의 확신했다.

솔직히 정말로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누가 별궁에서 이런 식으로 행동을 하겠는가. 다른 이도 아닌 황족, 그것도 황태자가 기거하는 별궁에서 말이다.

덕분에 별궁 한의원이 개원한 이래로 지금까지, 진상을 부린 환자는 거의 없었다. 실제로 다쳐서 실려 온 불량배도 이러지는 못했다. 제아무리 거칠고 막 나가는 폭력배라도 별궁 한의원에 실려 오면 갓 입양된 토끼처럼 얌전해졌다.

곳곳에 근위병과 기사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이 이곳 별궁이었다. 심지어 간호사마저 모두가 웨어울프였다. 그런데 누가 감히 이곳에서 진상을 부리겠는가.

가르딘 경은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후우. 이 환자, 아무래도 정신병이 있는 게 맞는 듯하군. 안색이나 목소리, 행동으로 미루어 기력은 넘치도록 충분해 보이고. 딱히 열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호흡도 안정적이야. 그러니 이건... 정신병이다. 확실해. 그것도 심각한 수준의 정신병.'

아까부터 본인을 등갑룡이니 뭐니 하고 떠드는 것도 그랬다. 쥐뿔도 없어 보이는데 황태자를 오라 가라 하는 태도 또한 그러했다.

'과대망상증인가. 쯧쯧쯧, 참 안됐구나.'

진상(?) 환자, 포르티스를 향한 가르딘 경의 눈길에 애잔한 안쓰러움이 스몄다. 젊고 허우대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어쩌다가 이런 고약한 지경에 처하였을까.

자연 포르티스를 대하는 가르딘 경의 목소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환자분? 혹시 머리가 아프시진 않나요?"

"머리?"

"예."

"감히 필멸자 주제에 내 증세를 짐작하려 드는 것인가? 당장 업화의 불길에 재가 되고 싶은 것이로군, 그래."

"...."

"뭣하는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면 당장 꿇어 엎드려 사죄하지 않고."

"...크흠! 흠! 어흠! 죄송합니다, 좀 놀라서. 흐음, 그럼 과를 배정해드리겠습니다."

다시 릴렉스. 또 릴렉스. 상대는 정신이 아픈 환자니까. 화내지 말고 릴렉스.

가르딘 경은 존경스러운 황태자 전하가 평소에 환자들을 어떻게 대하였는지를 새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더욱 친절하게 말했다.

"포르티스 환자분께서는, 으음, 말레나 선생님을 찾아가시면 되겠습니다. 아마 저보다는 환자분을 한결 능숙하게 진단하여 적절한 치료 방향을 잡아주실 겁니다."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

황태자가 의료대학에서 잡아온(?) 의사 말레나는 정신질환을 지닌 환자를 대하는 데에 능숙하니까. 특히 그녀의 사려 깊고 친절한 상담술 앞에서는 그 어떤 정신질환 환자라도 거짓말처럼 차분해지곤 하니까.

'그 선생님이 근육이 좀 많이... 빵빵하거든.'

그러했다.

별궁 한의원의 유일한 정신과 전문의 말레나.

그녀는 엄청난 근육과 떡대의 소유자였다. 멧돼지를 꿀밤 한 방으로 침묵시켰다는 소문이 있었다. 항간에 들리는 풍문으로는 변신 상태의 웨어울프 간호사와의 팔씨름에서도 무승부를 기록했다는 놀라운 일화마저 있었다.

덕분에 그녀의 진료실에 들어가는 정신질환 환자들은 그녀의 시커먼 눈썹과 강인한 턱, 빵빵하게 단추가 터질 것 같은 불끈불끈 흰 가운을 보자마자 지극히 공손해진다 하였던가.

아마 이 환자도 그러할 것이다.

가르딘 경은 나름의 확신을 담아서 말했다.

"그러니 간호사님? 이분을 말레나 선생님께 안내해드리도록 하세요. 다음 환자분 불러주시고요."

대기하고 있던 간호사를 불렀다. 웨어울프 간호사가 평소처럼 환자를 안내하기 위해 나섰다. 그런데 이 미친 환자가 또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지금 무슨 짓거리지?"

"예? 아, 방금 안내를 드렸다시피 환자분께 더 적절한 치료를 위해...."

"그래서 지금, 이 냄새 나는 털복숭이 똥개로 하여금 이 위대한 몸을 안내하도록 조치하겠다고?"

"...예에?"

가르딘 경은 쩌적 굳었다. 그리고 슬쩍 간호사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털복숭이 똥개'라는 때아닌 폭언을 들은 간호사의 표정이 살벌하게 굳어 있었다.

환자의 어깨를 짚는 간호사의 손길 또한 그러했다.

"환자분, 가시죠."

뼈 부러뜨리기 전에.

...라는 말이 왜 환청처럼 들려오는 걸까.

꽈득!

환자, 포르티스의 어깨를 짚은 웨어울프 간호사가 손아귀에 은근한 힘을 주었다. 난동을 부리려는 환자? 평소에도 이 정도면 충분히 신속하게 공손해졌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보았다.

한데 아니었다.

"감히. 똥개 주제에 이 위대한 몸의 어깨에 손을 얹어? 게다가 아까부터 황태자를 불러오라는 이 몸의 말을 계속해서 무시하기까지 해? 도저히 말로는 안 되겠군. 역시 비루한 필멸자 타르디온들이란."

포르티스의 안색이 싸늘해졌다.

그와 동시에 강렬한 마나의 기파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주위를 순식간에 휩쓸었다. 가르딘 경과 웨어울프 간호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엇?"

"크릉!"

순식간에 몰아치는 마나의 소용돌이! 가르딘 경의 두 발이 허공에 떴다. 웨어울프 간호사가 다급히 변신했지만 마찬가지로 허공에 둥둥 떴다. 아예 거꾸로 매달렸다. 힘껏 버둥거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으, 으아악! 이게 무슨 짓입니까!"

놀란 가르딘 경이 허공에 거꾸로 매달린 채로 소리쳤다. 그 외침이 새어나간 덕분일까. 마침 복도를 지나던 근위병들이 진료실로 뛰쳐 들어왔다. 안쪽의 참상(?)을 목격했다. 그리고 근위병들도 가르딘 경과 똑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으, 으어엇?"

"으억!"

똑같이 허공에 거꾸로 대롱대롱.

그들을 보는 포르티스의 눈동자가 청금색으로 물들었다.

"이 몸께서 누차 말하였지. 황태자를 데려오라. 오직 그만이 나를 진료할 수 있음이니."

마나의 힘을 실은 목소리가 조용하게, 동시에 웅혼한 기세로 별궁 전체를 쩌렁쩌렁 흔들었다. 물론 라키엘과 데미안도 그 목소리를 들었다. 아니,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부터 이미 마나의 기세를 감지하고 있었다.

"...뭐냐, 이건."

전신을 송두리째 들쑤시는 섬뜩한 감각.

마침 환자의 등에 시침을 하던 라키엘은 하마터면 삑사리(?) 사고를 낼 뻔했다. 그는 온몸으로 느껴지는 엄청난 마나의 기세에 화들짝 놀라며 곁을 돌아보았다.

그곳에 데미안이 있었다.

녀석이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닙니다. 제 안의... 그것도 아니고요."

"어. 아니겠지. 너야 내 옆에 있고. 이게 느껴지는 방향은...."

"저쪽. 가르딘 경의 진료실인 것 같습니다."

"가보자."

"하지만 전하? 마나의 기세가 심상치가 않은데...."

"내 별궁에서 내가 도망을 치면 어떡하냐. 가자."

지체할 틈이 없었다.

시침 중이던 환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냅다 달려갔다. 도착은 금방이었다. 이미 난리가 난 것을 모두가 감지한 덕분일까. 가르딘 경의 진료실 앞 복도는 긴장한 근위기사와 근위병, 특근대원들로 북적북적했다.

"전하? 위험하십니다!"

만류하는 근위대 지휘관 테오도르 경의 만류를 뿌리쳤다. 길을 트게 하였다. 진료실 입구로 들어갔다. 안쪽의 광경은 장난이 아니었다.

"...흡."

온통 어질러진 진료실도.

허공에 휘날리는 서류와 집기도.

거꾸로 매달린 가르딘 경 등도.

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진료실 중앙에 도사리듯 앉아 있는 군청색 머리칼의 남자. 그를 보자마자 시선이 고정되었다. 다른 어떤 곳에도 눈길을 줄 수가 없게 되었다.

압도적인 존재감.

더욱 압도적인 마나의 기세 때문이었다.

'무슨 저런.'

반사적으로 경혈 스캐닝을 켰다.

스캔 결과는 더욱 경악 그 자체였다.

라키엘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사람이... 이게 가능한가.'

도도한 강물?

아니.

아예 거대한 바다가 경혈을 따라 흐르는 느낌이었다. 보통 사람의 경혈에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과는 차원 자체가 달랐다. 규모도 달랐다. 소드마스터였던 쟈빌론? 저 남자가 지닌 마나에 비하면 병아리 수준도 안 될 듯했다.

자연히 결론이 나왔다.

사람이 아니다.

"여기는... 어떻게 찾아오신 겁니까."

라키엘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드래곤, 포르티스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황태자?"

"예, 맞습니다만. 여기는 환자를 진료하는 곳입니다. 한데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건지."

"그대에게 진료를 받으러 왔지."

"제게요?"

"그래."

포르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위대한 드래곤, 등갑룡 포르티스. 최근 그대에 대한 신묘한 소문을 들었지. 손만 대면 환자의 아픈 곳을 낫게 하는 기적을 발휘한다지?"

"...그런데요?"

"그래서 그대를 찾아왔지."

"드래곤인... 당신이 말입니까?"

쓰읍.

이거 쌔한데.

라키엘은 어깨를 움츠렸다.

무려 드래곤이 찾아와 버렸다.

그런데 드래곤씩이나 되는 존재가 대체 어디가 어떻게 아파서 자신을 찾아온 걸까. 감도 잡히지 않았다. 부담스러웠다. 드래곤도 스스로 치료하지 못해서 난감한 병이라면, 자신이 어떻게 그걸 치료해주나 싶었다.

'설마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하면 깽판 부리는 거 아냐? 그럼 감당 안 될 거 같은데.'

제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라며 물었다.

"하면 드래곤 환자분께서는... 대체 어디가 아파서 저를 찾아오신 건지?"

"호오. 날 진료해주겠다는 건가?"

"여긴 제 한의원이니까요."

"좋군. 내가 아픈 곳은...."

...꿀꺽.

어디일까.

어디가 아픈 걸까.

제발 내가 치료해 줄 수 있는 곳이길.

진심으로 조마조마하게 바라는 사이.

등갑룡 포르티스의 입이 열렸다.

"맹장, 충수염이다."

"...예?"

고작?

그걸로?

드래곤이?

의아함이 느껴지는 순간, 포르티스의 안색이 살포시 우울해졌다.

"그런데 내 다이아몬드 비늘이 너무 단단해서 말이다. 소드 마스터의 오러로도 흠집조차 나질 않아서 수술을 할 수가...."

"...."

뭐 이런 병.

243화. 더 무시무시한 치료법 (1)

충수염(appendicitis).

흔히 '맹장염'이라고 말하는 질환.

이건 아프다. 진짜 진짜 아프다. 오직 걸려본 사람만이 아는 극악의 헬게이트 롤러코스터 고통이다.

게다가 은근슬쩍 흔하기까지 하다. 보통의 일반적인 인간관계를 지닌 사람이라면, 주변인들 중에 서너 다리쯤 건너면 충수염 수술을 했던 사람을 거의 반드시 찾을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동시에 충수염은 위험하다.

제법 흔하고 어려운 수술이 아니라는 인식 때문에 만만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굉장히 치명적인 질환이다. 어느 정도로 치명적이냐 하면, 걸렸는데 수술을 받지 못하면 사망률이 100%에 수렴할 정도다.

'실제로도 인류의 평균수명을 가장 극적으로 확 끌어올린 의료 기술이 바로 충수염 수술이지. 페니실린? 항생제? 그거보다 충수염이 평균수명을 더 올려줬을 거야. 예전엔 충수염은 걸리면 그냥 무조건 죽는, 아니, 죽어야 하는 질환이었으니까.'

정말로 그랬다.

오랜 과거로 갈 필요도 없다.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충수염은 걸리면 무조건 죽는 병이었다.

수술을 받지 못하면 맹장 끝의 충수돌기가 염증으로 붓다가 터지고, 썩는다. 대장 일부까지 썩는다.

그런데도 수술을 못 받으면?

장에 구멍이 뻥 뚫린다. 장 내부의 물질들이 복강으로 쏟아져 나온다. 즉, 소화되다가 만 분변들이 복강으로 흘러든다. 100% 확률로 복막염에 걸린다. 100% 확률로 패혈증이 진행된다. 100% 확률로 죽는다.

'그냥 아주 저승 진학률 100% 찍는 거지, 뭐.'

그만큼 의외로 무서운 질환이 충수염이다. 이게 은근히 골때리는 점이, 수술 외에는 뚜렷한 치료법이 없다는 거다. 오죽하면 비밀 임무를 수행 중이던 러시아 잠수함 승무원마저도 충수염 때문에 미군에게 긴급 도움을 받아서 수술까지 했을까.

그런데....

"맹장, 충수염 말입니까? 환자분... 아니, 드래곤께서?"

"그렇다."

자신을 등갑룡이라고 밝힌 드래곤, 포르티스가 특유의 오만한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왜? 이상한가?"

"...."

예. x나게 이상합니다.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목구멍까지 올라온 솔직한 대답을 간신히 삼켰다. 무리도 아니었다. 드래곤이 충수염이라니. 이건 불사조가 감기 걸려서 뒈졌다는 소리만큼이나 괴상했다.

'뭐지. 진짜 뭐지. 이거 드래곤 맞아?'

그는 새삼스러운 의혹의 시선으로 포르티스를 째릿 쳐다보았다.

물론 경혈 스캐닝으로 보이는 결과는 '드래곤이 맞다'였다. 인간이라면 저런 거대한 마나의 흐름을 몸속에 지닐 수는 없을 테니까. 설령 드래곤이 아니라 해도, 최소한 그에 필적하는 존재임은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드래곤씩이나 되는 존재가 고작 충수염 때문에 별궁 한의원까지 찾아와서 난리를 부리는 걸까. 어째서 '황태자 나와'를 시전하며 진상까지 부려댄 걸까.

라키엘은 머릿속 가득 백만 송이씩 피어나는 의문의 꽃다발을 촵촵 털어내었다. 대신 화사한 영업용 미소를 활짝 내걸고서 물었다.

"아, 이상하다기보다는 말입니다. 조금 의아한 구석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의아하다니?"

"제가 듣기로는 드래곤은 그 자체로 완벽하고 무결한 존재라 하였는데 말입니다."

"그렇지."

포르티스의 표정에 자부심이 슬쩍 드러났다.

라키엘은 계속 물었다.

"한데 어째서, 위대하고 완벽무결한 존재께서 본인의 맹장, 충수염을 스스로 치료하지 않으신 건지... 제 부족한 머리로는 이해하기가 조금 힘이 듭니다."

"그러니 가르침을 달라?"

"예, 그렇습니다."

"쯧! 멍청한 인간 같으니. 이 위대한 몸께서 아까 친히 이유를 밝혀 주었건만. 그걸 듣고도 그새 잊어버렸단 말인가?"

"그럼...."

"말했지 않나. 내 비늘이 너무 단단해서 수술을 할 수가 없다고."

"...."

"한번은 소드마스터라는 인간을 납치하기도 했지. 마침 내 서식지 근처에서 은거하며 홀로 수련하던 놈이 있어서.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어. 소드마스터라는 족속이 그토록 자랑하는 오러? 별것 아니더군. 내 비늘엔 생채기도 낼 수 없었으니까."

"...."

"하아. 이래서 문제야. 내가 너무나 완벽해서. 내 비늘이 지나치게 무결해서. 오러로도 흠집을 낼 수 없으니 배를 가를 수가 없고, 염증이 생겨나는 충수를 잘라낼 수가 없게 됐어. 이건... 그래, 이를테면 완벽무결함이 불러온 비극이랄까."

"...."

x신.

라키엘은 본능적으로 입에 머금어지던 욕설을 황급히 꿀꺽 삼켰다.

"그, 그럼... 회복 마법을 사용해보진 않으셨는지요?"

그 부분이 제일 의아했다.

드래곤이라면 당연히 마법의 마스터일 텐데. 한데 충수염이 회복마법으로 해결이 안 된 걸까.

그 이유는 곧 돌아온 드래곤의 투덜거림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회복마법? 하. 비루한 인간이여. 너는 회복 마법이 만능이라고 믿는 건가? 역시 열등한 족속다운 순진한 망상이로군."

"...."

"회복마법은 간단히 말하자면 세포 단위에서의 신진대사를 극적으로 끌어올려 신체의 자가복구 능력을 가속하는 기법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남용하면 암세포가 발현될 확률도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것이고. 어쨌건-"

이쪽을 보는 드래곤, 포르티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회복마법으로 충수돌기의 염증 자체를 없애는 건 불가능했다. 그저 충수가 터지면 그 상처를 메꾸는 데에만 쓸 수 있었지."

"아...."

듣고 보니 이해가 갔다.

그러니까 이 드래곤은, 충수가 터질 때마다 회복마법으로 땜질만 하면서 버텼던 거다. 그렇게 장 내의 물질이나 분변이 복강으로 흘러나오는 것만 막아냈던 거다.

"터질 때마다 회복마법으로 막고... 이후에 염증이 재차 진행되다가 터지면 또 막고... 그렇게 버텼던 겁니까?"

"그렇지."

"얼마나 그렇게 계셨습니까?"

"100년쯤?"

"...."

라키엘은 말문이 턱 막혔다.

100년 내내 충수염의 고통을 버텨냈다니. 새삼 여러(?) 의미로 드래곤이 대단하긴 하구나 싶었다.

동시에 또다른 의문들도 떠올랐다.

"하면, 인간이 발현하는 오러가 아닌 드래곤 당신께서 직접 시전하는 마법으로도 뱃가죽을 절개할 수가 없었던 겁니까?"

"물론. 이 몸은 완벽하게 단단하니까. 특히 내 비늘은 육각 벌집 결정 다층 구조의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용왕 베르키스 님이라면 모를까, 이 지상에서 그 외의 존재가 내게 외상을 입힐 방법은 없다. 일부러 떨어지는 운석에 직격당해 보았음에도 상처가 나지 않았으니까. 오죽하면 내 별칭이 등갑룡일까."

"그럼 용왕 베르키스 님이라는 분이 도와주시면 수술이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그랬겠지. 하지만...."

"하지만요?"

"그분께 도움을 받는 것은 불가능했다."

포르티스의 안색이 변했다. 뒤이어진 그의 발언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분은 낮잠을 너무 사랑하셔서 말이다. 찾아갔음에도 문전박대만 당했지. 오히려 죽을 뻔했다. 진심으로."

"...."

드래곤이 잠깐이나마 공포의 감정을 내비칠 수 있다니. 아니, 그 전에, 용왕이라는 작자는 얼마나 낮잠을 사랑하면 자신을 찾아왔다는 이유로 살인, 아니, 살룡을 감행하려 든 걸까.

'뭔... 드래곤이란 족속은 정상인이 없나?'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쨌건 지금 중요한 점은 그게 아니었다. 라키엘은 내심 상황을 정리하며 난감함을 느꼈다.

"그러면 말입니다. 등갑룡 님?"

"포르티스 님이라고 불러도 된다."

"아 예, 포르티스 님? 제가 여쭙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묻도록."

"예, 감사합니다. 제가 묻건대, 그럼 포르티스 님께서는 제게 어떤 진료를 받길 원하셔서 여기까지 찾아온 것입니까?"

"당연히 충수염 치료지."

"어떤 수단으로도 배를 쨀... 아니, 절개할 수가 없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제게 진료를 맡기시려고요?"

"방법이 있겠지."

"...예?"

"너 말이다. 제국의 황태자. 소문이 아주 자자하더군. 손만 대면 죽어가던 사람도 벌떡 일으킨다고 했던가. 아니, 아예 좀비를 살렸다는 소문도 있던데. 맞나?"

"...."

"그러니까 지금도 뭔가 방법이 있겠지. 그러니까 내가 널 찾아온 것이고."

"...."

알겠다.

나는 모르겠고, 네가 의사니까 어떻게든 해봐라, 라는 마인드라는 거지, 지금?

'하아. 미치겠네.'

라키엘은 한숨을 삼켰다.

난감했다.

'저 배를 어떻게 째지?'

다시금 말하지만, 충수염은 오직 수술만이 해결법이다. 항생제 투여? 그런 걸로 가라앉힐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노벨 의학상부터 받아야 한다.

답은 쨀(?)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그런데 저 단단한 드래곤의 배를 째는 건 용왕이 아니면 불가능하단다.

하니 결론은 간단했다.

'용왕을 불러오든가. 다른 뭔 수를 찾든가. 그런데 그 수를 찾아야 할 사람이 나야. 이건 진료 거부도 못 해. 상대가 드래곤이니까. 무슨 깽판을 부릴지 모르니까. 돌겠네, 진짜.'

생각만 해도 부담감이 턱턱 밀려왔다.

하지만 그럴수록 라키엘은 다년간 한의원을 운영하며 쌓인 짬을 바탕으로 프로의식을 발휘하였다. 즉, 당황한 티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 태연한 대응을 선보였다.

의료인이 흔들리면 환자가 불안해하니까.

그러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침착하게.

지금 또한 그러한 태도로.

환자에게 휘둘리지 않도록.

"알겠습니다. 그럼 포르티스 님? 진료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제 부탁을 좀 들어줄 수 있으실까요?"

"부탁? 무슨 부탁?"

"제 사람들을 좀... 원위치로 내려놓아 주실 수는 없을까 해서 말입니다."

라키엘은 침착하게 웃으며 슬쩍 눈짓을 보냈다. 그의 눈짓이 향한 곳. 그곳의 허공에 가르딘 경과 웨어울프 간호사, 근위병들이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아까부터 줄곧, 쭈욱 말이다.

"앞으로 제가 포르티스 님을 진료하고 치료해드리는 동안 함께 힘을 보탤 이들입니다. 조금만 관대함을 베풀어 주시지요."

"...흐음. 싫다면?"

"저도 포르티스 님을 진료해드릴 수 없을 겁니다."

"뭐라?"

이쪽을 보는 드래곤의 눈길이 살짝 살벌해졌다. 절로 소름이 오싹 돋았다. 하지만 라키엘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저 기세에 밀리면 안 된다고.

'당연하지. 지금 밀리면 끝이야, 끝.'

그러니까 이건 기싸움이다.

환자와의 기싸움이다.

여기서 밀리면 곤란해진다.

진료의 주도권을 환자가 쥐게 되고, 의료인이 거기에 질질 끌려다니게 되면 치료 과정이 제대로 굴러가지 못하게 된다. 특히, 환자가 여러 의미로 큰 영향력을 지닌 사람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심지어 내가 말이야. 건물주 아저씨가 왔을 때도 진료 주도권을 빼앗기진 않았다고!'

딱 한 번, 한의원이 있던 빌딩의 건물주 아저씨가 침을 맞으러 온 적이 있었다. 심지어 임대료가 살짝 밀리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덕분에 그땐 솔직히 좀 떨렸다. 하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다른 환자들을 대하듯이 똑같이 시침을 해드렸다.

라키엘은 그날의 기억을 되살리며 힘껏 침착함을 붙잡았다. 실시간으로 오싹해지는 드래곤의 냉랭한 눈길을 받아냈다. 버텨냈다. 동시에 절대로 배를 쨀 수 없는 대상의 충수염을 수술할 방법을 궁리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포르티스가 냉랭한 눈길을 거두지 않은 채로 물어왔다.

"이토록 건방진 필멸자를 마주하게 될 줄이야. 감히 내게 부탁을? 그 전에 하나 묻지. 너는 과연 어떻게, 내 충수염을 치료할 생각이지? 대륙 곳곳에 퍼져가는 막대한 명성에 걸맞은 치료법이 있는가?"

마치 자격을 시험하는 듯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흔들리지 않았다. 도리어 더욱 담대하게 받아쳤다.

"있습니다."

마침 고민 끝에 떠오르는 답이 있었다. 그거면 된다. 환자가 거대하고 튼튼한 드래곤이기에, 오히려 한결 편하고 안전하게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있다고? 그게 무엇인가."

의구심을 드러내는 드래곤의 눈빛.

그걸 똑바로 마주 보며 대답해 주었다.

"간단합니다. 비늘 때문에 배를 가를 수 없다면, 항문을 통해 대장 내시경을 밀어 넣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뭐?"

당신의 x꼬를 의학적으로 유린하겠다는 선언에 위대한 종족, 드래곤의 눈빛이 처음으로 몹시 흔들렸다.

244화. 더 무시무시한 치료법 (2)

"간단합니다. 비늘이 너무 튼튼해서 배를 가를 수 없다면, 항문을 통해서 대장 내시경을 밀어 넣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뭐?"

안 된다.

말도 안 된다.

듣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눈앞의 이 인간은 좀 미쳐 있는 거 같다고.

'죽으려고 발악을 하는 건가?'

이쪽의 x꼬를 의학적으로 유린하겠다는 선언에 드래곤, 포르티스의 눈빛이 몹시 흔들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상상도 못 해봤다. 감히. 무엄하게도. 누가 누구의 어디를 어떻게 하겠다고?

'이건 생각을 떠올리는 것조차 민망하기가 그지없군. 그런데 감히, 그따위 발언을 내 면전에서 버젓이 해? 심지어 필멸자 타르디온, 인간 주제에?'

포르티스는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얼마나 어이가 없었느냐면, 화를 낼 타이밍을 왕창 놓쳐 버렸을 정도였다.

덕분에 그가 간신히 꺼낸 반응은 '...뭐?'라고 망연자실하게 대꾸한 것이 전부였다.

그 사실이 라키엘의 자신감(?)을 북돋웠다.

"처음 들어보시는 개념이라 조금 당혹스러우실 순 있겠습니다. 하지만 안전합니다. 크게 아픈 것도 아니고요. 게다가 드래곤께서는 어마어마한 덩치만큼 항문과 대장 내부의 공간도 충분할 것이니까, 상대적으로 인간보다 훨씬 안전하게 시술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고...."

"아, 혹시나 내시경이 대장 내부에 상처를 내거나 자칫 구멍을 뚫어 버릴까 걱정되시는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그래도 안심하세요. 위대한 드래곤이시니까, 우리 인간보다 훨씬 두껍고 튼튼한 대장벽을 지니고 계시겠지요?"

"그건 물론이지. 나는 튼튼하니까."

"역시나. 다행입니다."

"...앗, 아니, 그게 아니고."

"예?"

"감히. 지금 이 몸 앞에서 무슨 소리를 지껄인 것이냐."

포르티스는 뒤늦게나마 간신히 화를 낼 타이밍(?)을 움켜잡을 수 있었다. 어느새 저도 모르게 시뻘게진 얼굴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라키엘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라키엘은 이미 완연한 여유를 찾은 상태였다. 눈앞의 상대가 드래곤이건 어떻건, 일단 증상을 함께 상의하고 치료 방법을 설명하는 분위기가 되자 자연히 긴장감이 풀렸다.

환자를 진료하는 시간은 이쪽의 홈그라운드! 십수 년간의 실전 진료 현장에서 단련되고 축적된, 한의사로서의 짬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괜찮습니다. 불안하신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워낙 익숙하지 않은 일이실 테니까요."드래곤을 향해 건네는, 더없이 부드럽고도 친절한 배려의 서비스 멘트!

사실 환자의 불안감을 달래는 일은 그의 가장 강력한 분야였다. 당연했다. 대한민국의 한의사라면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침 맞는 게 처음이라 불안해하는 환자. 뜸이 처음이라 주저하는 환자. 낯선 한의원이 무서워서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이 환자까지.

환자를 달래는 일은 그야말로 일상이었다. 그걸 못하면 한의사로 밥 벌어먹는 일에 심대한 차질이 생길 정도였다.

그런 덕분이었다.

"게다가 저는 믿습니다."

"...믿는다니, 뭘?"

"위대한 드래곤이시니까요."

"뭐?"

"저 같은 인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대한 분이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분명 잘 참아내실 겁니다. 아니, 애초에 참아낼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하찮은 일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

이것은 환자의 특성을 감안한 맞춤형 달래기! 드래곤의 자부심을 콕콕 들쑤시며 거부하지 못하는 분위기로 몰아가기!

그러나 드래곤은 역시나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헛소리. 지금 감히, 알량한 세 치 혓바닥으로 이 위대한 존재의 심리를 이용하려는 것인가? 그따위 일천한 화술 따위로?"

"아, 그건 아닙니다."

"아니야?"

"옙."

"맞는 것 같은데."

"그나저나 대장 내시경이 뭔지 궁금하진 않으십니까?"

"말 돌리지 말고."

"궁금하실 듯한데 말입니다."

"그건 좀 그렇긴 한데. 아니, 그게 아니고...."

"대장 내시경이란, 항문을 통해서 삽입하여 대장을 비롯한 소화기 내부의 상황을 관찰할 수 있는 기다란 일종의 기구입니다. 여차하면 그 내시경을 활용해서 배를 째... 아니, 개복을 하지 않고도 간단한 수술을 시행할 수도 있고 말입니다."

"딱히 궁금하다고 한 적 없다."

"하지만 귀는 쫑긋거리고 계셨는데."

"...."

"제 설명을 도중에 자르지도 않으셨는데."

"네가 하도 빠르게 쫑알거려서 미처 자를 틈이 없었던 것이다."

"어쨌건, 설명에는 만족하셨습니까?"

"전혀."

드래곤 포르티스는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아닌 게 아니라, 저 설명을 듣고 나니 더욱 뜨악하는 심정이 되었다. 항문에 그냥 뭔가를 넣는다는 것부터가 거부감이 드는데, 심지어 그걸로 창자 내부를 휘젓듯이 관찰까지 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심 혹하기도 했다. 생각을 해볼수록 이게 유일한 방법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까닭이었다.

'...하긴. 내 비늘은 너무 튼튼해서 나 스스로도 아무 상처를 입히지 못할 정도니까. 외부에서는 그 어떤 수단으로도 뱃가죽을 가를 수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남는 방법은... 젠장.'

그나마 야들야들한 항문을 공략(?)하는 것이 유일한 답이리라. 그렇듯 답이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동시에, 그 답을 반갑게 여기며 인정하게 되는 자신의 솔직한 마음에 분노가 치밀었다.

'빌어먹을!'

위대한 일족으로 태어나.

위대한 혈통으로 자라나.

위대한 영혼으로 살았다.

그리고 오늘, 의학적으로 항문을 유린당할 일생일대의 핀치에 내몰렸다.

이 사실이 기도 차지 않았다.

인정하기 싫었다.

그래서 화가 났다.

아니, 화를 내는 척했다.

그것만이 자신의 당혹스러움과 수치심을 가려줄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정말로 어쩔 수가 없었다.

"비루한 인간이여, 네가 정녕 죽고 싶어서 환장을 하였구나."

쿠구구구구...!

스산한 분노와 더불어 무시무시한 마나의 기세가 진료실을 가득 채웠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감당하기 어려웠을 살기였다.

그러나 라키엘은 괜찮았다.

아스라한 심법 덕분에?

아니, 데미안 덕분이었다.

"...."

어느새 곁에 선 데미안이 기세를 마주 일으켰다. 드래곤 포르티스의 살기에 맞섰다. 그런 호위가 내 뒤에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라키엘은 한결 안심이 되는 것을 느꼈다. 분노한 드래곤을 대하면서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저는 환자분께 도움이 될 치료 방향을 제시해드렸을 뿐입니다."

"그런 핑계로 위대한 이 몸에게 수치심을 안길 셈인가."

"강요 드린 적은 없습니다. 받아들이기가 어려우실 수도 있겠지요. 다만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선택은 환자분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뚫린 입이라고 잘도 말하는구나."

"누차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저는 오직 환자분을 위할 뿐입니다."

"끝까지 그 말뿐인가."

"진심이니까요."

"...."

드래곤을 마주 보았다. 정말로 진심이었다. 드래곤이 앓고 있는 충수염. 수술이 불가능한 상황. 사연을 모두 들어보니 떠오르는 자연스러운 해답은 내시경이었다.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하여 정면돌파를 택했다.

환자를 위한 명확한 솔루션과 방향을 제시했다. 이것이 자신의 최선이다. 받아들이는 것은 환자의 몫이다.

하지만 눈앞의 드래곤은 그걸 선뜻 받아들일 준비가 덜 된 걸까.

"...오늘 네놈은 운이 좋은 줄 알거라."

드르륵!

드래곤이 의자를 거칠게 밀어내며 일어섰다. 그러고는 이쪽을 한 차례 서늘하게 쳐다본 후 진료실을 나가 버렸다.

그게 끝이었다.

다행히 드래곤은 더는 난동을 부리거나 별궁을 부수지 않았다. 그저 쿨하게 떠나주었을 뿐.

다만 아주 피해가 없는 건 아니었다.

...후욱?

"어엇?"

그동안 내내 허공에 매달려 있던 가르딘 경과 웨어울프 간호사, 근위병이 마침내 해방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웨어울프 간호사와 근위병들은 뛰어난 운동신경을 발휘하며 그림 같은 착지를 선보였다.

하지만 가르딘 경은 예외였다.

콰당탕!

"아윽!"

등짝으로 착지한 가르딘 경이 허리를 부여잡았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허리 건강보다 황태자의 안위부터 걱정하는 충정을 발휘하였다.

"저, 전하? 으윽, 괜찮으시겠습니까?"

"음? 나? 경의 허리보다는 괜찮을 거 같은데."

"...."

"분노한 드래곤의 대응을 걱정하는 거라면 뭐, 별 탈 없을 거야. 말은 저래도 이미 이성으로는 내가 제시한 치료 방향을 받아들인 듯하니까."

"그, 그렇습니까?"

"어."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확실하다.

드래곤 포르티스가 마지막에 화를 내며 떠나던 순간의 눈빛을 보았다. 그 눈빛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성은 받아들였는데, 감정이 아직 허락을 못 한 것이라고.

'가끔 저런 분들 봤지.'

한국에서도 그랬다.

침술이나 뜸에 선천적인 거부감을 보이는 환자가 간혹 있었다. 그럴 때면 딱 저런 반응을 보이며 진료실에서 휙 나가 버리곤 했다. 물론 당시엔 이쪽도 당황했다. 그런데 계속 보니 깨달을 수 있었다.

"보통 저런 분들한텐 시간이 필요해."

"시간이요?"

"어. 지금 당장은 저래도 며칠 있으면 십중팔구 돌아오거든."

"그, 그렇습니까?"

"으음."

라키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딘 경은 의아함을 느꼈다.

'대체 전하께서는....'

어떻게 그걸 확신하는 것일까. 그리고 전하께서는 어째서 가끔, 이토록 진료에 능숙한 사람처럼 느껴지곤 하는 걸까.

'마치, 10년이 넘도록 매일 환자를 진료한 사람 같이.'

혹은 자신보다 더 진료 경험이 많은 사람 같이.

이상했다.

그저 신비로운 고대의 의술을 익혀서? 그걸 어디서? 어떻게? 전하의 말처럼 꿈을 통해서? 그건 더 이상한데. 하지만 아니라는 증거를 찾을 수는 없고. 차라리....

'완전히 다른 사람이 전하의 몸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발휘하고 있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더 신빙성이 있을 것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하던 가르딘 경은 내심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된다. 자신이 어쩌면 이토록 불충한 생각을 떠올린 걸까. 다시는 이런 생각을 하지도 말자.

그는 다짐하며, 한편으로는 드래곤의 실물을 영접(?)한 황망함을 애써 가다듬으며 허리를 주물렀다. 그리고 황태자의 말이 사실이기를 빌었다.

꿈을 통해서 신비로운 의술을 익혔다는 말이 사실이길. 드래곤이 며칠 내로 화를 풀고 돌아오길.

전부 그러하기를.

하여 평화롭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