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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파는 황태자 # 문백경,망기 >

1화. 내 몸은 내가 챙긴다

차라리 내게 소설 같은 일이 벌어졌으면. 비틀비틀 양화대교를 걸으며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후회했다.

이러려고 내가 한의사가 된 건 아니었는데. 개원하고 3년도 못 버티고 문을 닫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빚더미에 깔리게 될 줄도 정말로, 몰랐는데.

하지만 이때의 나는 예감하지 못했다.

양화대교에서 떨어진 내가.

소설 속 제국 황태자가 되어.

뱀파이어 등짝을 쑥뜸으로 지지고.

드래곤 날갯죽지에 장침을 꽂으며.

소설 속 세상의 신의로 불리게 될 거란 사실을, 이때만 해도 나는 솔직히, 정말로 몰랐다.

[HP(건강 점수=Health Point) 시스템이 활성화됩니다.]

[당신은 진료 행위를 통해 본인의 오장육부(五臟六腑)에게서 HP를 후원받을 수 있습니다.]

[획득한 HP를 투자하여 각종 스킬을 개방하거나 환상종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0]

'으으, 덥다.'

머릿속을 톡톡 두드리는 목소리.

낯선 알림음에 이한은 미간을 찡그렸다. 어찌 된 일인지 자는 와중에도 더위가 느껴졌다.

혹시 아직 술이 덜 깬 걸까.

아니면 지독한 숙취에 시달리고 있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조금 전까지 걷던 양화대교엔 한겨울 칼바람이 쌩쌩 불었으니까. 거기 구석에 쓰러져 잠들었다면 엄청난 추위가 느껴져야 할 테니까. 아니, 사실 나는....

'떨어졌어.'

이한은 순간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고 보니 떠올랐다.

떨어질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가슴이 너무나 갑갑해서.

취한 김에 속 시원히 외쳐볼까 싶어서.

양화대교 난간을 잡고서 목청을 높였더랬다.

그러다가 그만 난간 너머로 떨어졌더랬다.

'그럼 나, 지금 한겨울 한강 물에 빠져 있다는 건데.'

마음에도 없던 죽음이라니. 덜컥, 겁이 났다. 한데 어쩐지 이상하게도 춥지가 않았다.

오히려 더웠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로 입가에 히죽, 웃음이 배어났다.

한데 그때였다.

"...자 전하."

낯선 목소리가 귓가를 두드려 왔다.

어딘지 걱정 가득한 느낌의 음성이 다시금 톡톡.

이쪽을 불렀다.

"황태자 전하, 정신이 드십니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부드러운 감촉의 손바닥이 이쪽의 어깨를 꾹꾹. 염려하듯 흔들어 왔다.

...뭘까.

난 지금 온몸을 다 바쳐 한강 수온을 체크(?)하는 중일 텐데. 혹시 119가 벌써 재빠르게 출동했나. 그래서 내가 죽기 전에 물에서 건져준 걸까.

'역시 갓한민국 119.'

이한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구나 싶었다.

그럼 됐다. 살아 있으면 된 거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한의원 간판 내리면서 쌓인 빚, 그게 무섭긴 해도 최소한 죽는 것보단 나으니까.

'이번엔 잘해보자.'

빚, 갚으려면 고생 많이 할 거다.

그래도 용기를 내보자고.

새출발 해보자고.

굳게 다짐하며 눈을 떴다.

그리고 멍해지고 말았다.

"...어?"

눈앞의 풍경이 한강과 너무나 달랐다.

앞에 있는 사람도 119대원이 아니었다.

"전하! 제가 보이십니까?"

울먹이며 이쪽을 흔드는 남자.

외국인이었다.

그것도, 엄청난 잘생김을 뿜어내는 미중년이었다. 매끈한 얼굴, 갈색 머리칼과 콧수염. 헐리웃 스타 브래드 패트와 톰 크루브를 5:5 비율로 얍얍촵촵 섞으면 짜잔, 하고 만들어질 것 같은 외모랄까.

이한은 얼떨떨함을 되삼키며 저도 모르게 물었다.

"저기, 누구세요?"

"...예?"

딱 한마디 물었을 뿐인데.

미중년 남자의 얼굴이 한층 울상이 되었다. 돌아오는 목소리에도 울음이 배어났다.

"흐, 흐흑...! 전하, 설마 제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그래도 저는 전하를 계속 따르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저는 전하의 주치의 가르딘이니까 말입니다!"

"...."

뭔가 상황이 이상한데.

처음엔 장난이라도 치는 건 줄 알았다.

한데 가만 보니 아니었다.

연기치고는 울먹임이 너무 리얼했다.

저게 연기라면? 대종상, 아니, 아카데미 주연상도 넉넉히 가능할 거다. 게다가 미중년 너머로 보이는 이곳 풍경도 이상했다.

'실내다. 게다가 엄청 화려해. 여기, 뭐지.'

이한은 눈동자만 데룩데룩 굴렸다.

과장 좀 섞어서 100평은 될 법한 실내였다. 그런데 벽이며 천장이며 호사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런 이쪽의 기색을 눈치챈 걸까.

자신을 '가르딘'이라고 밝힌 사내가 재빨리 말했다.

"혹시 기억나십니까? 전하의 침실입니다. 조금 전에 일기를 쓰시기에 제가 자리를 비웠었는데... 시간이 지나도 부르시질 않아 들어와 보니 피를 토하고서 혼절해 계셨습니다."

침실? 여기가?

'그런데 내가 전하라고? 왜?'

점점 모르겠다.

혼란스럽다.

이한은 냉철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여전히 울먹이는 미중년 사내를 향해 말했다.

"저기, 제가 목이 좀 마른데. 혹시 물...."

"여기 있습니다!"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사내가 빛의 속도로 물잔을 내밀어 왔다. 금이며 은이며 보석까지 알뜰살뜰하게 장식된 엄청난 물잔이었다.

"...."

여기 박힌 다이아, 암만 봐도 큐빅은 아닌 거 같은데. 손잡이도 보면 볼수록 이거... 24k 삘인데.

입을 대려니 어쩐지 황송해졌다.

하지만 목마름이 우선이었다.

물잔을 받았다.

기울였다.

벌컥, 벌컥, 크게 마셨다.

그러다가 우연히, 멀찍한 곳에 세워진 커다란 거울에 시선이 닿았다. 그 속에 낯설고 창백한 모습의 청년이 있었다.

"...."

침대에서 상체만 일으킨 남자. 물잔을 마시다가 거울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 남자. 한데 거울 속 남자가 들고 있는 물잔이 낯설지가 않았다.

24k 금 손잡이.

큐빅과는 차원이 다른 다이아마저 박힌.

엄청나고 황송해서 입이라도 댈까 싶은.

그런 물잔을 들고서 목을 축이다가....

"...푸읍!"

뿜었다.

이쪽도, 거울 속의 남자도.

동시에 물을 왕창 뿜어내고 말았다.

"저, 전하!"

가르딘이 화들짝 놀라며 수건을 꺼냈다. 이쪽의 입가와 앞섶을 금이야 옥이야 닦아주었다.

그동안 이한은 거울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거울 속에 비친 가르딘도 젊은 남자의 입가를 닦아주고 있었다.

'저거, 나야?'

40대 초반의 아재가 아니었다.

20대 초반의 파릇한 나이였다.

게다가 그 모습이 어쩐지 묘하게 눈에 익었다.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기억이 났다.

분명하다.

저 창백한 얼굴.

까칠한 표정과 눈빛.

아까 오후까지 읽었던 소설.

'마검의 황제'... 일명 '마검황'의 등장인물이다. 그 소설에 나오던 황태자의 일러스트와 똑같다. 아니, 아예 판박이로 현실에 붙여놓은 것만 같다.

'그런데, 지금 내가, 라키엘이라고?'

이거, 실화 맞나.

아니, 꿈 같은데.

하지만 아무리 봐도 현실이었다.

믿기지가 않지만 자신의 몸 감각도, 주위의 풍경도. 그저 꿈이나 착각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선명하고 생생했다.

"하, 하하...."

새삼스러운 깨달음.

절로 웃음이 나왔다.

뭐랄까.

족쇄가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그럼 나, 소설 속의 황태자가 된 건가?'

아무래도 그런 듯하다.

그 뜻은 명확했다.

한의원이 망하면서 남은 엄청난 대출 빚과 이자. 그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뜻이다. 더는 빚을 갚으려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 하하하, 하하."

길 가다가 로또 1등 용지를 주우면 딱 이런 기분이겠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벌떡 일어났다.

한데 그때였다.

"...어?"

피잉.

갑자기.

느닷없이.

세상이 빙글 돌았다.

빈혈? 어지러움증?

알 수 없었다.

그저 다리가 풀렸다.

덕분에 반도 일어나지 못하고 침대에 주저앉아야 했다.

"아앗? 저, 전하!"

기겁한 가르딘이 재빨리 이쪽을 부축해주었다.

"으읏, 나... 왜...?"

이렇게 전신에 힘이 없는 걸까.

이상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20대 초반의 나이면 한창 팔팔할 때인데. 그런데 이렇게 열흘쯤 굶은 것처럼 비리비리한 느낌이라니. 40대였던 원래 자신의 몸보다 훨씬 무기력했다.

"...잠깐만."

이한은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거울을 향했다.

"...."

그러고 보니 떠올랐다.

소설 마검황의 초반 스토리.

황태자 라키엘은 주인공이 아니다. 그저 초반에만 잠깐 등장하는 배경 인물, 조연에 불과하다.

어릴 때부터 앓던 지병이 악화되었다.

침대에서 겔겔거리다가 꽥.

고작 22살의 나이에 죽는다.

이후 제국은 대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린다. 그 혼란 속에서 진짜 주인공이 진정한 영웅의 길을 걷는다.

그것이 바로 소설 '마검황'의 도입부였다.

'...요약해보자. 그러니까 이거, 내가, 소설 초반부에 지병에 시달리다가 켁, 하고 죽는 병약한 황태자로 빙의한 거잖아.'

황족이 되었다며.

고생 끝이라며.

날아갈 듯하던 기분이 쌔하게 가라앉았다. 비로소 깨달음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확실하게 말하는 건데.

이게 정말로 실화라면.

나는 ㅈ됐다.

"후우. 이건 진짜구나."

30분이 지났다.

이한, 아니, 라키엘은 예의 거울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 속에 창백한 외모의 은빛 머리칼 남자가 서 있었다.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였다.

'신기하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신기했다.

거울 속 저게 자신의 모습이라니.

솔직히 잘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라키엘은 미간을 찡그렸다.

황태자가 됐건 어쨌건.

권력과 돈을 쥐고 있든 말든.

꽥하고 죽으면 그냥 게임 끝인 거다.

게다가 알면 알수록 상황이 더욱 좋지 않았다.

"가르딘. 내 나이가 지금 21살이라고?"

"그렇습니다, 전하."

"...."

현재 나이 21세.

소설 속의 전개를 떠올리자면?

'최대한 길게 잡아도 남은 수명이 1년밖에 안 된다는 건데.'

생각하자니 한숨이 푹 흘러나왔다.

자신이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나 싶었다.

'이건 무슨 소설도 아니고.'

어쩌다가 자신이 소설 속 인물이 되어 버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다만 확실한 팩트가 하나 있었다.

'모처럼 높은 신분이 됐고, 탱자탱자 편하게 살 수 있게 됐어.'

그런데 장애물이 있다.

장애물이 좀 심하게 크다.

'1년도 못 살고 죽어야 한다니.'

라키엘은 연신 흘러나오는 한숨 속에서 소설 초반의 전개를 떠올렸다. 다행히 기억력이 아주 좋은 편이라, 대부분의 내용을 되짚을 수 있었다.

'라키엘은 황태자였고, 황실의 모든 치료를 다 받았어.'

최상의 의료 혜택을 다 누렸다.

성직자의 축복도 무수히 받았다.

그러나 모두 소용없었다.

황실의 역량을 사골육수 붓듯 모조리 쏟아부었음에도, 소설 속 황태자 라키엘은 병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니까 답은 하나야.'

이곳의 의술로는 살아날 희망이 없다. 뛰어난 성직자들을 동원해도 마찬가지다. 그건 소설에서도 다 실패한 방법이니까.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이곳의 의술에만 의존할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다.

라키엘은 결론을 내렸다.

'약속된 부귀영화 황족 라이프를 놔두고 내가 소설처럼, 허망하게 죽을 거 같냐.'

절대로 죽기 싫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 거다.

게다가 정말 다행스럽게도, 자신에겐 이곳에선 시도된 적 없는 한의술이 있었다.

"후우. 가르딘?"

"예, 전하?"

라키엘은 가르딘을 향해 말했다.

"이제부터 침술... 아니, 할 일이 있으니까 나가서 바늘 좀 가져와 줘. 크기는 상관없고 최대한 많이."

"...예?"

움찔 놀라는 가르딘.

라키엘은 생긋 웃었다.

그리고 내심 굳게 다짐했다.

자신이 죽음을 앞둔 황태자라면.

한데 이곳의 의술로 자신을 살릴 수 없다면.

체질개선, 원기회복, 자양강장, 활력증진까지.

이제부터, 내 몸은 내가 챙겨야겠다.

2화. 오장육부와 춤을 (1)

"나가서 바늘 좀 가져와 줘. 크기는 상관없고 최대한 많이."

"...예?"

가르딘이 움찔 놀랐다.

이내 잘생긴 얼굴로 고개를 갸웃. 아무래도 이쪽의 말이 다소 뜬금없었나 보다.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뭐,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바늘로 뭘 할지는 차차 보게 될 테니까.

"부탁일까, 명령일까?"

"...!"

혹시나 해서 슬쩍 찔러봤다.

그 효과는 대단했다.

가르딘 경이 빛의 속도로 뛰어나갔다.

그 사이, 라키엘은 호흡을 골랐다.

'일단은 진단부터 해보자. 이 몸뚱이의 뭐가 문제인지.'

그걸 정확히 파악해야 제대로 된 진료를 시작할 수 있다.

천천히 맥을 짚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쓰읍."

혀를 차고 말았다.

당혹감이 쑴펑쑴펑 치솟은 까닭이었다.

'이 맥은 대체 뭐냐.'

그는 어처구니가 실종되는 심정을 느꼈다. 진심 이런 맥은 처음이었다. 살필수록 당혹감이 커져만 갔다.

맥이 이상했다.

아니, 끔찍했다.

생각할 수 있는 나쁜 예후가 모조리 다 느껴졌다.

일단 맥이 고르지 않았다. 잘 뛰다가 맥이 돌연 멈추곤 했다. 호흡 열 번을 채우지도 못하고 멈추고. 또 멈추고. 전형적인 대맥(代脈) 증상이 느껴졌다.

심각한 정도였다.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란 점이었다.

'대맥 증상 사이에도 불규칙한 맥이 더 섞여 있어. 갑자기 빨라졌다가, 멈췄다가, 이건 '촉맥(促脈)' 증상인데.'

오장에 열이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기이한 맥이 손에 손잡고 비엔나소시지처럼 줄줄이 더 느껴졌다.

'부비맥(釜沸脈), 어상맥(魚翔脈), 탄석맥(彈石脈), 해색맥(解索脈), 옥루맥(屋漏脈), 하유맥(鰕遊脈), 작탁맥(雀啄脈), 언도맥(偃刀脈), 전두맥(轉豆脈), 마촉맥(麻促脈)까지... 와나. 이거, 치료 난이도 실화인가.'

절로 한숨이 푹 흘러나왔다.

이건 나빠도 너무 나빴다.

이른바 십괴맥(十怪脈)이라고 불리는 증상들. 하나라도 증상이 보인다면 목숨이 위태롭다는 특이한 맥상이 모조리, 싸그리, 전부 다, 하나도 빠짐없이 알차게 다 느껴지고 있었다.

'이건 무슨 조기사망 종합패키지도 아니고.'

한의사로 제법 많은 맥을 짚어본 자신이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개막장 맥이 한몸에 죄다 모일 수가 있는 걸까. 이게 가능은 한 걸까.

아니,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한데 그게 실화라는 게 문제다.

라키엘은 침대 옆 거울을 돌아보았다.

병약한 인상의 얼굴이 그 속에 있었다.

'쯧쯧. 이래서 1년도 못 살고 죽은 거구나, 너는.'

문득, 소설 '마검황' 속 초반 전개가 떠올랐다. 소설에서 황태자 라키엘의 병명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수많은 의사가 달라붙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엔 전부 포기했다.

아무도 병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심지어 누군가는 마법에 의한 저주라는 의견까지 냈을 정도였다.

'근데 이건 나도 진심 모르겠네.'

어디 한 군데가 확실하게 안 좋은 게 차라리 낫다. 그곳에 관련된 질환을 추적하고, 치료하면 되니까.

한데 지금은?

'그냥 전부 다 안 좋아. 어디 하나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곳이 없는 몸이야, 이건.'

어처구니도 없고.

황당하고.

'인생 난이도 진짜.'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면 한국에서의 삶도 쉬운 인생은 아니었다.

'그놈의 대출, 쉽게 갚을 줄 알았는데.'

한국에서의 마지막 몇 개월을 떠올린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치를 떨었다. 30대 후반의 나이에 한의원을 개업할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대출을 풀로 땡겼지만.

금방 갚을 수 있으리라고.

후딱 메꿀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고, 확신했더랬다.

'목이 좋은 자리였으니까.'

나름 괜찮은, 수도권 신도시 중심상권의 상가 2층이었다. 그만큼 임대료가 비싸긴 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유동인구가 충분했다. 아파트 단지에 둘러싸여 있었다. 덕분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한데 그 확신과 믿음이 한 큐에 날아갔다.

'...코로나만 아니었어도.'

전국적인, 아니, 전 세계적인 바이러스 사태가 터졌다. 그 여파로 한의원을 꾸준히 찾던 발길이 줄어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의원 방문 환자 중에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다. 심지어 2명이나 연달아 나왔다. 그 소식이 지역 아파트 인터넷 카페에 입소문으로 좌악 돌았다.

그게 결정타였다.

환자가 아무도 오지 않게 됐다.

수입이 거의 끊겨 버렸다.

대출 이자는 물론이고, 건물 임대료마저 내기가 빠듯해졌다. 개원할 땐 장점이라 생각했던 상권의 좋은 자리가, 팬데믹 사태에선 높은 임대료라는 치명타가 되어 돌아왔다.

그렇게 한의원이 망했다.

억 소리가 7옥타브로 나오는 어마어마한 대출금만 남긴 채였다.

한데 지금은?

'겨우 그 신세에서 벗어났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더 난리가 난 것 같다.

라키엘은 한숨을 되삼키며 상념에서 벗어났다.

한국에서의 자신이 금융적 위기에 내몰렸다면? 지금은 생존의 위기에 몰리게 됐다.

'얼 타면서 있다간 초고속 다이렉트로 염라대왕이랑 면담 일정 잡겠지.'

이대로 있다간 죽는다.

뭐라도 해야 한다.

어떻게든 치료해봐야 한다.

안 그러면 연고도 없는 이 낯선 동네에서, 팔자에도 없던 병약 요절 크리티컬에 당첨될 것이다.

'그건 싫어. 산다. 꼭 살아남아서 떵떵거리며 살 거다.'

어차피 한국에는 미련도 없었다.

부모님은 진즉 돌아가셨다.

형제나 친척도 딱히 없다.

여자친구도 없... 다.

빚만 잔뜩 남았다.

'그래도 뭐... 원호야, 은수야. 나 여기서 잘 살아볼게, 짜식들아.'

그나마 한국에서 유일하게 정 붙이던 친구놈들에게 안녕을 고했다. 꼭 살아남겠다는 다짐을 새삼 되새겼다.

그때쯤 가르딘 경이 돌아왔다.

기대 이상의 성과(?)를 한 아름 안고서였다.

"후, 후욱! 전하? 분부대로 바늘을... 모조리 가져왔습니다."

털퍽!

그가 보따리를 내려놓았다.

그 안에는 최소 백 개는 훨씬 넘어 보이는 바늘이 수북이 담겨 있었다.

"...."

"전하?"

"어."

"분부대로 바늘을 가져왔는데...."

"응."

"시키신 대로 최대한 많이 가져오려고 뛰어다녔는데...."

"그래... 잘했어."

"감사합니다!"

"그럼 보따리 좀 펼쳐줄래? 바늘 좀 골라보게."

"명 받들겠습니다."

쏴르르!

가르딘 경이 보따리를 뒤집었다.

갖가지 다양한 크기의 바늘 수백 개가 테이블 위를 점령하며 반짝반짝 존재감을 뿜어냈다.

라키엘은 그중에서 그나마 가늘고 작은 바늘들을 골라냈다.

'이거 제법 따끔하겠네.'

골라낸 바늘을 보자니 숨이 절로 거칠어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걱정이 되어서였다.

'이렇게 큰 바늘로 셀프 침술을 펼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진짜.'

사실 한의원에서 침술에 쓰이는 침은 보통의 바늘과 달랐다. 훨씬 가늘었다. 끝도 살짝 둥글었다. 병원에서 쓰는 주삿바늘보다 덜 아픈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한데 그런 침에 비하자면 지금 골라낸 바늘들은?

'이건 뭐 몽둥이네, 몽둥이.'

그래도 시침을 하는 데에 지장은 없으리라.

라키엘은 열심히 바늘을 골라냈다.

바늘 끝을 촛불로 소독했다.

그런 이쪽의 행동이 생소했던 걸까.

"저기, 전하?"

"으음?"

"이렇게 여쭙는 것이 외람되지만... 그 바늘로 지금 무얼 하시려 함이신지...."

가르딘 경이 쭈뼛쭈뼛 눈치를 보며 물어왔다.

라키엘은 싱긋 웃었다.

별일 아니라는 듯이 답해주었다.

"간단해. 이걸로 내 몸을 살짝 찌를 거야."

그러니까, 시침(施鍼)을 할 거다.

소설 속 라키엘은 갖은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엔 죽었다. 즉, 이곳의 의술이나 성직자의 축복이 도움이 안 됐다는 소리다. 그러니 죽지 않으려면 뭔가 다른 걸 해야 한다.

한데 마침 이쪽에겐?

한의술이 있다.

이곳에 없는 방식의 의술이다.

이 한의술이 어쩌면, 일말의 희망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그래서였다.

'일단 침술부터 시작해보자. 약재는 구하려면 시간과 준비가 필요할 테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걸로는 이게 최선이겠지.'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한데 그런 이쪽의 대답이 가르딘 경에겐 경악스러웠던 걸까. 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에?"

"뭘 그리 놀라. 찌를 거라고. 살짝."

"...."

"괜찮아. 안 죽어."

"...즈어어언하-!"

가르딘 경이 빛의 속도로 찰싹 무릎을 꿇었다. 그림처럼 잘생긴 얼굴에 울상을 새록새록 새기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제발, 자해만은 아니 되십니다아!"

"...."

"전하께선 황가를 이어가실 분이십니다. 한데 아무리 병마에 시달려 심신이 고단하고 힘겹더라도 이런 식의 자해라니요. 전하? 그러니 제발 진정하시고...."

"진정은 그쪽이 해야 할 거 같은데."

"즈어어언하아아-!"

"귀 떨어지겠네. 자해 아니라니깐."

"하지만 전하?"

"쯧. 그만. 거기까지."

가르딘 경의 애원을 중단시켰다.

그러나 경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이쪽을 올려다보는 그의 표정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오해를 지우려면 간단하게나마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라키엘은 웃음기를 지우며 말했다.

"이걸 안 하면 내가 죽어."

"...예에?"

"그래서 하는 거야."

"그게 무슨...."

"경이 주치의로서 날 걱정해주는 마음은 알겠어.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일단 한 번만, 내가 하는 걸 믿고 지켜봐 주면 안 될까?"

"전하."

"만약 문제가 생기면 다시는 안 할게. 대신-"

망설이는 가르딘 경을 향해 쐐기를 박듯 말했다.

"별일이 없으면 앞으로도 날 믿어줘."

"...."

"그래 줄 수 있겠어?"

"...."

가르딘 경은 얼결에 설득되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어째서였는지는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전하께서, 원래 이런 분이셨나?'

이상했다.

아까 혼절했다가 깨어났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말투도, 행동도, 심지어 표정이나 눈빛도 미묘하게 달라지셨다.

한데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아직은 판단이 잘 서지가 않았다.

'적어도 전처럼 맥없이 흐릿한 눈빛은 아니신데.'

오히려 또렷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다.

언제나 병약했던 황태자.

나약하기 짝이 없던 황태자.

그런 황태자에게서 처음으로 보는 눈빛이었다.

어쩌면 그 눈빛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가르딘 경은 황태자의 말을 수긍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전하."

"그래. 고마워."

라키엘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일단 작은 산 하나는 넘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진짜다.

그는 첫 번째 바늘을 들었다.

엉망진창인 자신의 몸.

어디에 침을 놓을지는 내심 정해둔 바였다.

'역시 시작은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이겠지.'

아까 진맥했던 게 떠올랐다.

온몸이 다 엉망진창.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시급한 곳을 딱 하나 꼽으라면?

단연코 호흡기일 것이다.

'일단 숨이 편안해져야 뭐라도 하니까.'

호흡이 가장 중요한 기본이다.

그게 원활해야 병마와 싸울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러기엔 인체 십이정경(十二正經)의 시작점이자, 폐부와 가장 크게 연관되는 수태음폐경부터 다스림이 옳을 듯하였다.

"후...."

누워서 셔츠를 벗었다.

숨을 골랐다.

바늘을 왼쪽 쇄골뼈 끄트머리로 가져갔다.

어깨와 쇄골이 이어지는 어름의 아래.

빗장아래오목(infraclavicular fossa) 귀퉁이.

앞정중선에서 바깥쪽으로 6촌 부위.

늑간신경통과 흉통, 기관지천식.

호흡곤란, 기침 등을 다스릴 때.

가장 중하게 다루는 폐의 모혈.

일명, 응중수(膺中兪)라고도 불리는 혈자리.

중부혈(中府穴)을 바늘로 찔렀다.

톳!

바늘 끄트머리가 정확히 5푼 깊이로 중부혈을 파고들었다.

'읏.'

바늘이 커서 그런지.

생각보다 더 따끔했다.

한데 그때였다.

별안간, 예상치 못한 맑은 알림 소리가 들려왔다.

딩동!

난데없이 고막을 콕콕 두드리는 벨소리. 동시에 눈앞에 주르륵, 뜻밖의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신의 정확한 침술에 의해 신체가 기분 좋은 자극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오장육부(五臟六腑)가 약간의 제 기능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신의 허파가 깨어났습니다.]

[허파가 당신에게 따봉을 보냅니다.]

[허파가 당신에게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3화. 오장육부와 춤을 (2)

[당신의 허파가 깨어났습니다.]

[허파가 당신에게 따봉을 보냅니다.]

[허파가 당신에게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100]

"...뭐?"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의문사를 내뱉었다.

중부혈에 셀프로 침을 놓았을 뿐인데.

눈앞에 웬 희한한 메시지가 떴다.

'뭐지. 나 아무 약도 안 먹었는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도 고개가 움직이며 바뀌는 시야와 함께 옮겨졌다. 마치, VR 게임을 체험하며 보는 풍경 같았다.

'대체 뭐냐 이건.'

하지만 라키엘은 더 의문을 느낄 수 없었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마저 살펴보기도 전에, 가르딘 경의 염려 섞인 목소리가 달팽이관을 뾱뾱 찔러온 까닭이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돌아보니 가르딘 경은 이미 안절부절. 마치 물가에 병아리 내놓은 어미 닭 같은 안색이었다.

그렇게나 걱정되는 걸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괜찮아. 말했잖아. 별거 아니라고."

"하지만 전하. 바늘이...."

"쉿. 하던 것부터 마저 하고."

"...."

가르딘 경을 간단히 침묵시켰다.

두 번째 바늘을 들었다.

중부혈 바로 위쪽.

어깨뼈 부리돌기 안쪽.

찾아냈다.

조준했다.

망설임 없이 찔렀다.

톳.

수태음폐경의 두 번째 혈자리, 운문혈(雲門穴)에 따끔한 자극이 왔다. 동시에 라키엘은 눈앞에 떠오르는 추가 메시지를 확인했다.

딩동!

운문혈을 찌르자마자 온 세상에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 이윽고 눈앞에 주르륵 떠오르는 메시지.

[당신은 정확한 방법으로 운문혈을 시침하였습니다.]

[당신의 기관지가 시원한 자극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기관지천식 증상이 소폭 완화됩니다.]

[당신의 가슴 답답한 느낌이 소폭 해소됩니다.]

[허파가 당신을 그윽하게 바라봅니다.]

[허파가 당신에게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200]

또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메시지가 떴다.

"...."

이 메시지는 대체 뭘까.

이젠 놀랍다기보단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흥미가 생기기도 했다.

라키엘은 세 번째 바늘을 들었다.

조준했다.

'다음은 천부혈(天府穴).'

천부혈은 위쪽 팔뚝에 자리했다.

위팔두갈래근(biceps brachii muscle)의 바로 바깥쪽 모서리, 앞겨드랑이 주름에서 아래로 3촌 위치. 그곳을 5푼 깊이로 찔렀다.

톳!

"...윽."

맨정신인 상태에서 생팔뚝을 셀프로 폭폭 찌르는 기분을 아는가. 라키엘의 미간이 콱 찡그려졌다. 하지만 그의 눈길은 새로 떠오르는 메시지를 놓치지 않았다.

딩동!

[당신의 기침 증상이 조금 가라앉습니다.]

[허파가 기쁨의 들숨날숨을 내뱉습니다.]

[허파가 당신에게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300]

...역시 또다.

이젠 확실하다.

눈앞의 메시지는 착각도, 환각도 아니다.

'그럼 뭔가 의미가 있다는 건데.'

일단은 계속 시침해보자. 그러다 보면 이 메시지의 보다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겠지. 이걸 어떤 형태로든 써먹고 활용할 수도 있겠지.

그때부터였다.

라키엘은 더욱 시침에 집중했다.

톱!

협백혈(俠白穴)을 보람차게 찔렀다.

가슴이 아프고 구역질이 나거나, 호흡곤란, 기침이 올 때 주로 다스리는 혈이었다. 과연 혈에 자극이 가해지니 목구멍에서 간질거리던 감각이 살짝 내려갔다.

한데 거슬리는 점이 하나 있었다.

"가르딘 경?"

"...."

라키엘은 옆을 돌아보았다.

가르딘 경이 무릎을 꿇고서 뭔가를 간절히 중얼거리고 있었다. 설마 기도라도 하는 걸까.

'...시침이나 마저 하자.'

톳!

가르딘 경이 걱정하건 말건.

이번에는 척택혈(尺澤穴)을 찔렀다.

팔오금주름(cubital crease)과 위팔두갈래근 힘줄(biceps brachii tendon) 사이의 오목한 곳, 한마디로 팔꿈치가 접히는 주름 안쪽의 야들야들한 곳에 있는 혈자리였다.

"쓰읍."

이번엔 진짜 따끔했다. 이쪽을 보는 가르딘 경의 표정도 통증으로 물들었다. 라키엘은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물었다.

"허. 내가 찔렸는데 왜 그쪽이 아파해?"

"그, 그게, 구경하다 보니...."

"그보단, 내가 골라놓은 바늘 끄트머리 좀 촛불로 소독해줄 수 있을까?"

"...예?"

"그게 기도보다는 나한테 더 도움이 될 거 같아서."

"아, 알겠습니다, 전하."

가르딘이 엉거주춤 바늘을 소독하는 가운데.

이번에는 공최혈(孔最穴)을 찔렀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톳! 토돗! 톳!

바늘을 연달아 꽂았다.

아래팔 엄지의 힘줄이 지나가는 곳의 열결혈(列缺穴). 손목 가까운 곳 요골동맥이 만져지는 자리의 경거혈(經渠穴). 손목의 태연혈(太淵穴). 엄지 뿌리 바깥쪽의 어제혈(魚際穴)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찔렀다.

그제야 오랜만에(?) 메시지가 떴다.

딩동!

[당신의 능숙한 침술이 여러 혈자리에 두루두루 자극을 주고 있습니다.]

[당신의 허파가 편안하게 늘어졌습니다.]

[허파가 안마 의자를 찾고 있습니다.]

'뭐냐. 네가 왜 안마 의자를 찾아. 게다가 이번엔 왜 HP 안 주는 건데.'

저도 모르게 오기(?)가 솟아났다.

라키엘은 11번째 바늘을 집어들었다.

바늘을 정조준했다.

소상혈(少商穴).

위치는 엄지손가락 손톱 뿌리 바깥쪽 0.1지촌.

쉽게 말하자면?

급체가 왔을 때 할머니들이 손을 따주는, 바로 그 유명한 자리였다.

톳!

그 순간이었다.

[당신은 자신의 좌반신 수태음폐경에 대한 적절한 방법의 시침을 완료하였습니다.]

[당신의 허파가 환호의 탭댄스를 춥니다.]

[탭댄스의 리듬이 폐부와 짝을 이루는 전도지부(傳導之府)의 장기, 대장을 일깨웁니다.]

[당신의 대장 융털돌기가 리듬에 맞추어 기분 좋은 꿀렁임을 선보입니다.]

[대장이 당신에게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허파가 당신에게 2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600]

'어?'

허파뿐만 아니라 대장까지?

깨어나서 HP를 후원했다는 메시지가 주르륵 떴다.

메시지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당신이 보유한 HP가 스킬 개방 가능 수치에 도달하였습니다.]

[당신은 첫 스킬을 선택/개방할 수 있습니다.]

[개방 가능한 스킬은 현재 당신이 보유한 분야의 지식/능력에 기반합니다.]

[개방 가능한 스킬 목록을 열람하시겠습니까?]

[YES / NO]

"...."

라키엘은 눈을 끔벅였다.

황당하고 신기했다.

자신의 오장육부에게 포인트를 후원받는 것도 솔직히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인데. 이제는 그 포인트로 스킬을 개방할 수 있단다.

하지만 라키엘은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뭐, 황당한 걸로 치면 소설 속의 인물이 된 걸로 이미 게임 끝 아닌가.'

그러니 겨우(?) 이런 정도로 놀라지 말자.

놀랄 시간이 있다면 이득부터 챙기자.

그는 다짐하며 'YES'를 선택했다.

[개방 가능한 스킬 목록을 열람합니다.]

화아악-!

눈앞에 두루마리가 펼쳐지듯.

메시지가 위아래로 길어졌다.

<개방 가능한 스킬 목록>

[1. 진맥]

[2. 침술]

[3. 부항]

[4. 뜸]

[5. 탕약 조제]

[6. 약재 감별]

[7. 약초 탐색]

[8. 약술 주조]

[9. 진료비 청구]

[10. 아스라한 심법]

'...후우.'

진짜로 떴다.

그것도, 생각보다 제법 많이 떴다.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배어났다.

'이거, 전부 한국에서 내가 밥벌이로 하던 것들이네. 딱 하나만 빼고.'

그의 시선이 목록 제일 아래쪽을 향했다. 그곳에 '아스라한 심법'이라는 스킬 후보가 있었다.

'저건... 소설에서 봤던 거구나.'

문득, 소설 마검황의 설정들이 떠올랐다.

아스라한 심법.

그것은 마젠타노 황실의 직계 후손에게만 전수되는 강력한 심법이었다. 몇 번 지나가듯 언급된 바로는 약 300년 전, 전설의 그랜드 마스터 '하비엘 아스라한'과, 그가 모셨던 '로이드 프론테라'가 공동으로 창안한 심법이라 했던가.

'뭐, 지금 내가 황태자니까. 이 몸도 어린 시절에 아스라한 심법을 익히긴 했겠지.'

다만 지병 때문에 건강이 만신창이라서. 그래서 심법 활용을 전혀 못 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저 심법이 목록에 뜨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지금은 저걸 선택할 때가 아니야.'

라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스라한 심법은 전투용이다.

한데 지금 자신은?

누군가와 싸움을 벌일 일이 없다.

아니, 지금 자신이 싸워야 할 대상은 병마다.

'그러니까 신중하게 골라야 해.'

라키엘은 목록을 노려보았다.

깊게 고심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1번, 진맥.'

모든 진료의 시작은 진단부터다. 그게 기본이다. 정확한 진단이 있어야 정확한 처방과 진료가 가능해지는 법이니까.

[목록 1번. 진맥을 선택하셨습니다.]

[스킬 개방(1회차) 비용 : 500 HP]

[500 HP가 소모됩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100]

HP가 왕창 소모되었다.

메시지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딩동!

[당신이 지닌 진맥 지식과 경험이 스킬로 개방됩니다.]

[스킬명 : 진맥 Lv.1]

[대상의 맥을 짚어 대략적인 건강 상태를 진단합니다. 진맥 결과는 <초급 종합검진표>를 통해 일목요연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됐다.

아니, 진짜로 된 건지는 아직 모르겠다.

'종합검진표라.'

라키엘은 확인을 위해 오른손을 움직였다.

왼쪽 손목 맥을 짚었다.

집중했다.

그러자 스킬이 저절로 발동됐다.

딩동.

[진맥을 시작합니다.]

[스캔 중.]

[3... 2... 1...]

[진맥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래의 <종합검진표>를 확인해주세요.]

안내에 따랐다.

이윽고 눈앞에 간단한 양식의 표가 떠올랐다.

[초급 종합검진표]

[검진 대상 :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종족 : 인간]

[성별 : 남자]

[연령 : 21세]

[신장 : 176.2 Cm]

[체중 : 53.3 Kg]

[혈액형 : Rh+ O]

"...."

이 몸,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멸치구나. 라키엘은 내심 뜨악하는 기분으로 검진표를 살폈다.

[아직 스킬 레벨이 낮아, 각 항목의 결과가 간략히 표시됩니다.]

[심장기능 : F]

[폐기능 : F]

[간기능 : F]

[비장기능 : F]

[신장기능 : F]

[오장(五臟) 종합지수 : F]

[위장기능 : F]

[소장기능 : F]

[대장기능 : F]

[쓸개기능 : F]

[방광기능 : D]

[경락기능 : F]

[육부(六腑) 종합지수 : F]

[종합 소견 : 모든 항목에서 심각한 예후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발성 장기부전 및 급성 폐렴, 심근경색의 징후가 있습니다. 위험 수준의 면역력 저하가 감지됩니다. 심각한 영양 결핍 상태입니다. 현재 흡수 중인 영양 성분이 전무합니다. 위장의 부담이 적은 음식 섭취를 권장합니다.]

여러 의미로 엄청난 결과였다.

한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검진표 제일 아래쪽을 보고 있자니 입안에서 마른침이 트위스트를 추었다.

[예상 기대수명 : 91일]

'...후아, 미친.'

절로 욕이 나왔다.

딸랑 3개월 뒤면 죽게 된다니. 막상 저 시한부 카운트 숫자를 직접 보게 되니, 공포심이나 막막함보다는 오히려 오기가 치솟았다.

'그렇게 만만하게 죽어줄 줄 알고. 내가, 어? 진료실에 들어온 코로나 확진자 두 명이랑 대면하고도 검사 결과 음성 뜬 사람이란 말이다.'

라키엘은 콧김을 풍 내뿜었다.

이대로 죽기 싫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

마음을 먹으며 오른손을 움직였다. 왼쪽 쇄골에서부터 팔뚝을 거쳐 엄지까지. 11개의 수태음폐경 혈자리에 꽂힌 바늘들을 차례대로 뽑았다.

순서대로.

차근차근.

정확하고 야물딱지게.

"후우."

숨을 내쉬는 순간.

염전보사(捻轉補瀉)의 보(補)법에 따라 바늘을 시계방향으로 돌렸다. 호흡보사(呼吸補瀉)의 사(瀉)법에 따라 내쉬는 호흡과 함께 바늘을 뽑았다.

그동안 라키엘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산다. 꼭 산다, 내가.'

그래서 황족이라는 지위가 주는 달달한 꿀맛 라이프를 마음껏 즐기리라. 반드시 그렇게 하고 말리라. 집념을 불태우며. 마침내 11개의 바늘을 전부 뽑는 순간.

딩동.

집념에 대답해주듯,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신의 예상 기대수명이 (+)1일 증가하였습니다.]

4화. 맹독도 때론 약이 된다 (1)

시한부 인생은 서글프다.

예정된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야 하는 기분. 거부할 방법도, 미룰 수도 없는 그 기분. 그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흔한 드라마, 영화.

수많은 매체들에서.

수없이 다루는 시한부 인생이지만, 그건 적어도 시한부 환자를 곁에서 보살피고 지켜본 사람쯤 되어야 어떤 기분인지 약간은 알 거라고, 라키엘은 생각했다.

한국에서, 아버지를 그렇게 보내드린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막막하고도 승산 없는 싸움을 가족으로서 치러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건....'

[당신의 예상 기대수명이 (+)1일 증가하였습니다.]

[예상 기대수명 : 92일]

꿀꺼덕.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떡하니 실현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진심 실화인가.'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자신은, 이 몸뚱이는 시한부 환자였다. 진맥 스킬로 살펴본 결과가 딱 그랬다. 앞으로 91일밖에 못 살 거라고 했다. 남은 인생이 휴대폰 약정보다도 짧았다.

분명 그랬는데.

'침술 덕분에 기대수명이 늘어났다고?'

자신의 침술이 그렇게 대단한 거였던가.

라키엘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냥, 한의원에서 보통 환자들한테 해주는 침술, 그거보다 조금 더 각 잡고 했을 뿐인데.'

한데 그 침술이 분명 효과가 있는 게 느껴졌다. 일단 숨이 아까보다 편해졌다. 고장 난 피리처럼 쌕쌕거리던 소리도 한결 줄었다.

'그럼 또 해보자!'

깊은 산 속 옹달샘에서 아라비아 유전 터지듯, 가슴 깊이 잠들어 있던 의욕이 팍팍 솟구쳤다.

"바늘, 다 소독했어?"

"예, 전하. 한데... 설마 또 찌르시려는 겁니까?"

"당연하지. 이리로. 얼른."

가르딘 경을 재촉했다.

새 바늘 11개를 건네받았다.

다시 자리를 잡고 누웠다.

이번엔 왼손으로 바늘을 잡았다. 우반신 수태음폐경에 바늘을 찔러갔다.

톳! 토돗! 톳!

아까와 똑같은 순서와 깊이로.

침착하고 신속하게.

중부혈을 시작으로.

운문, 천부, 협백.

계속해서 찌르고.

적절히 자극하고.

마지막으로 소상혈까지 빠짐없이 알차게 찔렀다.

그러자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딩동!

[당신은 자신의 우반신 수태음폐경에 대한 시침을 완료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당신의 신체가 과도한 시침을 버거워합니다.]

[현재 당신의 체력 수준으로는 3일에 1회 시침을 권장합니다.]

[과도하고 무리한 침술에 오장육부가 난색을 표합니다.]

[허파꽈리가 지나친 자극에 어깨를 움츠립니다.]

[허파의 멘탈이 쑴펑쑴펑 증발하고 있습니다.]

[대장 융털돌기가 칠성장어 승천댄스를 춥니다.]

'...컥.'

깜빡했다.

침술은 만능이 아니다. 침으로 신경, 혈맥을 자극하는 행위는 엄연히 환자의 체력을 필요로 한다. 괜히 침몸살 걸린다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다.

한데 지금 이 몸뚱이는?

체력이랄 게 없었다.

이 몸에 깃들어 있을 체력보다는 차라리, 성급하게 부어 버린 탕수육 소스 속에 남아 있을 행복지수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후우, 후욱."

살짝 현기증이 몰려왔다. 확실히 저 메시지대로 몸에 무리가 간 것 같았다.

라키엘은 숨을 골라 쉬며 바늘을 뽑았다.

한편으로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렸다.

'정리를 한 번 해보자. 눈앞에 떠오르는 저 메시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침술이 효과가 있긴 해. 기대수명이 하루 늘어났으니까. 그런데 단점이 있어. 3일에 한 번만 사용할 수 있어.'

3일에 한 번 시침.

그때마다 기대수명이 하루씩 늘어난다면? 죽는 날을 대략 한 달 정도는 늦출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죽는 걸 미루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더 확실한 방법이 필요하다.

'아니면 체력을 길러서 매일 침을 맞을 수 있게 되거나.'

그러면 매일 기대수명을 늘릴 수 있으리라. 죽음을 팍팍 미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보약이 최고지!'

자연스럽게 결론이 나왔다.

자고로 자양강장, 원기회복에는 보약이 갑이다.

'밥도 팍팍 더 챙겨 먹고. 보약도 챙기는 거야. 몸에 좋다는 건 다 먹으면서 차근차근 운동도 해주고.'

그러면 저질 체력 신세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라키엘은 궁리의 정주행을 시작했다.

어떤 탕약을 조제할 것인지.

약재는 어떻게 구할 것인지.

생각하고, 소설 초반의 전개를 내심 정리해보며. 그는 탐색과 모색, 고민의 밤을 지새웠다.

새벽 어스름이 밝았다.

라키엘은 눈을 뜨자마자 손부터 들었다.

"...."

창가로 새어 들어오는 어스름한 새벽 박명 속에서 자신의 손등을 물끄러미.

그런데 없다.

손등 중간에 새겨져 있던 흉터가 보이지 않았다.

'진돌이하고 산책 나가다가 생긴 흉터였는데.'

너무나 신나서 날뛰던 덩치 큰 녀석.

그만 녀석의 발톱에 제대로 긁혔더랬다. 생각보다 크게 까졌던 터라, 몇 년이 지났어도 사라지지 않고서 손등 중간을 차지하고 있던 흉터였다.

한데 지금 자신의 손등은?

매끈했다.

흉터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다.

심지어 고생이라곤 해본 적도 없는, 곱디고운 손이었다.

'...혹시나 했는데 진짜네.'

자고 일어나면 한국의 내 방이 아닐까. 잠결에 잠깐 기대도 해보았더랬다.

하지만 역시나 아니었다.

'쯧.'

이제는 확실하다.

착각도, 꿈도 아닌 거다. 이곳의 삶이 현실이 된 거다.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의 인생을 살게 된 거다.

딱 91일 남은 시한부 인생을 말이다.

'후우, 내 팔자야.'

라키엘은 넌더리를 내며 손을 뻗었다. 침대 옆, 손 닿는 곳에 자그마한 황금 종이 있었다.

딸랑딸랑.

종을 울리자마자 침실 저쪽 건너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부스럭부스럭, 잠깐 끙끙거리나 싶더니.

"...전하? 부르셨습니까?"

침실 한쪽에 마련된 보조 방에서 가르딘 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창 곤했던 걸까. 아직 잠이 덜 깬 목소리였다.

라키엘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제 일어났나? 경은 생긴 것과는 다르게 양심이 참 없네."

"예? 양심이... 없다니요?"

눈곱을 떼어내며 보조 방에서 나오던 가르딘 경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라키엘의 입가에 투덜거림이 걸렸다.

"얼굴도 잘생겼어. 키도 커. 참 번듯하지. 외모만 봐도 어디 하나 빠짐없이 완벽할 것처럼 말이야."

"가,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난 지금 경을 책망하고 있는 건데."

"...예?"

"내 주치의라며. 내 건강을 지키는 게 경의 일이라며. 한데 환자보다 늦잠을 자?"

"어, 그것은...."

가르딘 경의 안색이 흐트러졌다.

제대로 정곡을 찔린 표정이었다.

그를 향해 말했다.

"물론 나도 알아. 경도 피곤하겠지. 온종일 날 보살피느라고 지치겠지. 하지만 한 시간 뒤면 해가 뜰 거야. 제대로 된 주치의라면, 보살피고 있는 환자가 중환자라면, 보통은 이 시간쯤엔 일어나서 환자의 상태를 점검하는 게 기본인 거잖아."

"...옳은 말씀이십니다. 송구합니다."

가르딘 경의 잘생긴 미중년 얼굴이 자괴감으로 물들었다. 라키엘은 내심 일말의 미안함을 느꼈다.

'아침 댓바람부터 갈궈서 미안, 가르딘 경.'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어쨌거나 가르딘 경은 이쪽의 주치의다. 그런데 새벽에 이쪽을 방치하고 편하게 잠을 자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내 남은 기대수명으로 봐선 새벽에 고열이나 발작, 호흡 곤란 등을 겪을 수도 있으니까.'

원래 대부분의 병은 밤과 새벽 사이에 기승을 부린다. 지독한 감기나 몸살 정도만 겪어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한데 지금 자신은?

생명이 3개월 남짓 남은 중환자다. 도중에 어떤 응급상황이 생길지 모른다. 하니 주치의를 조금 괴롭히는 한이 있어도, 새벽에 깨어서 곁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

그 목적을 새삼 되새기며.

라키엘은 짐짓 날카로운 눈초리를 했다.

"그러니 앞으로 늦잠 압수. 이제부터는 무조건 나보다 먼저 일어나서 내 상태를 체크하도록. 알겠어?"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가르딘 경이 수긍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쯤이면 됐을 거다.

어쨌거나 가르딘 경은 충직한 자니까.

'소설 마검황의 초반 내용을 봐도 그랬어.'

가르딘 경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나온 적은 없었다. 하지만 소설의 전개나 사건을 보면 가르딘 경이 충직한 자였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황태자 라키엘의 병세가 날로 악화되었지. 그래서 처음엔 제법 많았던 주치의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내려놓고 떠났어. 아니, 말이 떠난 거지 사실은 탈출한 거였다고 해야 하나.'

대부분의 주치의들은 어느 시점에서부터 눈치를 챘을 것이다. 황태자에겐 가망이 없다는 걸.

아무리 치료를 해도.

정성껏 간호를 해도.

결국엔 얼마 가지 않아 죽게 되리라는 걸.

그걸 깨달은 순간부터 주치의들은? 갖가지 그럴듯한 개인적인 이유와 핑계를 대며 자리를 내려놓았다. 아니, 대탈출을 감행했다.

죽기 싫어서였다.

'황족이 죽으면 그 황족을 담당하던 주치의도 책임을 지고 처형당하게 되니까.'

그러다 보니 결국, 보조 의사였던 가르딘 한 사람만이 주치의로 남게 되었다.

가장 우직하고.

가장 충직하며.

가장 책임감 있었던 사람이, 종국엔 모든 책임을 지고 원샷 참수형 당첨.

'...이라는 새드엔딩을 맞이했던 거지.'

라키엘은 고개를 들었다.

이쪽의 때아닌 모닝 갈굼에 안절부절못하는 가르딘 경. 낯선 세상의 병약한 몸으로 빙의한 자신에게 저런 충신이나마 있다는 게 참으로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어젯밤에 짜둔 계획을 실행하려면... 이런 충신이 필수니까.'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어떤 또라이 같은 일을 벌여도.

이쪽을 믿고 함께 가줄 사람이 필요했다. 바로 눈앞의 가르딘 경과 같은 인재가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가르딘 경?"

"예, 전하?"

"내가 경에게 시킬 일이 하나 있어."

"어떤... 일입니까?"

"왜? 벌써 걱정되고 겁나?"

"...."

"혹시 내가 어젯밤처럼 또 이상한 거 시킬까 봐?"

"...."

"후우.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말고 차라리 그냥 고개를 끄덕이지 그래."

끄덕끄덕.

"...."

이쪽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가르딘.

라키엘은 그만 싱긋 웃어 버렸다.

"미리 안심을 시켜주자면, 이상한 짓 하려는 거 아니야."

"정말...이십니까?"

"당연하지."

"하오나 전하."

"응?"

"어젯밤엔 바늘로 자해를 하셨지 않습니까."

"...자해 아니라니까."

"그래도 목덜미부터 어깨며 팔뚝과 손까지 바늘로 푹푹."

"아니거든."

"전 무서웠습니다."

"...."

"그런데 지금 전하의 표정이 어떤지 아십니까?"

"왜. 내 표정이 어떻길래."

"어젯밤에 바늘 가져오라고 하시던 때와 똑같은 표정을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날 걱정해주는 거야?"

"예, 전하."

"설마 내가 미친 짓이라도 할까 봐?"

"...예, 전하."

"쯧. 됐어.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진짜로 이상하거나 미친 짓 거들라고 시키진 않을 거니까."

"그렇, 습니까?"

"당연하지."

라키엘은 콧김을 풍 뿜어냈다.

"그래서 묻는 말인데, 이 별궁 식자재 창고에 말이야. 일반 음식 재료 말고, 좀 독한 것들도 있지?"

"예? 특별한 것이라면...."

"독약 만드는 재료."

"그거야 당연히 있습니다. 여긴 궁이니까 말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럼 투구꽃 뿌리도?"

"있습니다. 독약 만들기 좋은 재료니까요."

"잘됐네. 그거 몸에 좋은 건데. 가져와."

"예?"

"가져오라고."

"...설마."

"응. 먹을 거야."

라키엘이 신뢰감을 팍팍 심어주듯 화사하게 웃었다.

가르딘 경은 '우리 미친 또라이 황태자님 어떡하죠' 사연을 전국만방에 뿌릴 것 같은 눈빛으로 울먹이기 시작했다.

5화. 맹독도 때론 약이 된다 (2)

투구꽃.

아름다운 보랏빛 꽃을 지닌 관상용 화초. 그러나 실상은 뿌리에 맹독을 품은 독초. 덕분에 수많은 독약의 제조에 쓰인 바가 있었다.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허가 없이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사형. 조선에서는 사약으로 널리 쓰였다. 심지어 그 독성은 현대에 와서도 제법 쓰였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1986년에 일본에서 발생한 '투구꽃 살인사건' 정도가 있겠네.'

어쨌건, 투구꽃의 독성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두루두루 제대로 증명이 됐다고 할 수 있을 터였다. 지금, 가르딘 경이 미친 또라이 보는 눈빛을 이쪽으로 던져대는 이유가 엄연히 있는 것이다.

"...전하?"

"어."

"혹시 열이 나는지 좀 살펴봐 드려도 되겠습니까?"

"미열은 있는데 심하진 않아."

"하지만 전하."

"응."

"아직, 희망의 끈을 놓으시면 안 됩니다."

"안 놨는데."

"인생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전하."

"나도 그건 아는데."

"생명은 소중한 것이고요."

"알고 있거든."

"그러니까 전하, 행여나 그런 흉악한 독초를 드시겠다는 말씀을 다시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네?"

"싫은데. 먹을 건데."

"즈어어언하아!"

"...어오, 씨. 깜짝이야."

라키엘은 인상을 팍 찡그렸다.

"가르딘 경.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그건 아닙니다, 전하. 하오나-"

"하오나?"

"이대로 전하께서 모든 걸 포기하시고 스스로 망가지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제 의무이고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난 경이 의무와 책임을 다하도록 도우려고 이러는 건데."

"궤변이십니다, 전하. 바늘로 자해를 하다 못해, 급기야 이제는 음독자살을 시도하려 하심이라니요!"

"...후우. 자해 아니고. 음독자살 아니고. 치료의 과정이거든."

"하오나 전하."

"독성분을 약화시키고 다스려서 약으로 삼을 거거든."

"예?"

"잔말 말고 가져와. 5분 준다."

"...전하."

"늦으면 진짜로 자해할 거야."

"...!"

"하나, 둘...."

"흐, 흐흑!"

버티고 버티던 가르딘 경이 결국, 울먹이기 시작했다. 솔직히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모시던 황태자가 이상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젯밤에 혼절했다가 깨어난 뒤부터 진짜로 이상해졌다. 말투가 달라졌다. 눈빛도, 인상도 어딘가 모르게 바뀌었다.

'전엔 까칠하긴 했어도... 최소한 미친 짓은 안 하는 분이셨는데... 흐흑.'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성격이 바뀐다던데 혹시 그건가.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잖아.'

너무 갑자기 모든 것이 달라져 버렸다. 오밤중에 바늘을 왕창 가져오라고 하질 않나. 급기야 바늘을 촛불로 지져서 어깨며 팔뚝에 꽂지를 않나.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압권은....

'바늘로 찌르면서 뭔가(?) 느끼는 표정을 지으셨어!'

그렇다.

확실하다.

자해를 하며 즐기시는 거다. 어느새 고통이 주는 쾌락에 몸을 맡기신 거다. 그렇게,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 버리신 거다.

'전하아...!'

가르딘 경은 진심으로 눈물을 삼켰다.

오랜 투병 생활이 저토록 사람을 망가뜨릴 줄은 몰랐는데. 자신이 부족했다고. 황태자를 더 잘 보살폈어야 했다고. 하염없이 통곡하는 심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전하? 제발, 한 번만 다시 생각을 바꿔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안 돼. 바꿔줄 생각 없어. 돌아가."

"하오나 전하."

"후우...."

어느새 진짜로 눈물까지 글썽이는 가르딘 경. 그 모습을 보자니 한숨이 푹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마냥 강압적으로 시켜서는 목에 칼이 들어가도 말을 안 들을 기세다.

결국, 라키엘은 가르딘을 향해 약간의 지식을 풀어주었다.

"가르딘 경."

"예에, 전하."

"이제부터 잘 들어. 내가 투구꽃을 찾는 이유를 알려줄 테니."

"예?"

"경도 알다시피 투구꽃은 뿌리에 맹독이 있지. 그 뿌리를 어느 이국에선 두 가지로 분류하는데 그중에서 내가 먹으려는 게 모근(母根)에서 뻗어나온 자근(子根), 즉, 부자(附子)라는 거야."

"부...자, 말입니까?"

"그래. 부자. 라틴이라 불리는 또 다른 이국의 생약명으로는 Aconiti Lateralis Radix Preparata. 아코니틴계 맹독 성분을 잔뜩 품고 있어. 그 성분이 뇌간과 말초신경 말단부를 흥분시키고 마비시켜. 부교감신경을 폭주시키고, 결국엔 심장을 멎게 하지."

"...."

꿀꺽.

가르딘의 목젖이 위아래로 떨렸다.

라키엘은 침착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하지만 나는 그 독성을 중화하고 다스리는 법을 알고 있다. 어떻게 아는지는 묻지 마. 밝혀줄 생각 없으니까."

"독성을... 중화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과정을 이국의 말로는 법제(法製)라고 하지."

"법제...."

"그 과정을 거치면 부자의 독성을 내게 맞는 약으로 활용할 수 있어."

"그게, 사실입니까?"

"아무렴. 내가 거짓말을 할까."

라키엘은 피식 웃었다.

문득, 대한민국에서 한의원을 꾸리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도 간혹 부자를 약재로 처방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당시의 부자는 전문업체의 손길을 거친 것이었지만.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나는 그 법제 방법을 상세하게 알고 있어.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 방법을."

"...."

"그래서 가져오라는 거야. 이제는 좀 수긍이 되나?"

"...전하."

"어."

"솔직히 말씀드려서, 전혀 수긍이 안 됩니다."

"...."

"처음 들어보는 지식입니다. 출처가 어디인지도, 신뢰할 수 있는 사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전하의 말씀대로 그걸 약재로 쓰게 되면... 전하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이 확실합니까?"

"어떤 약을 써도 100퍼센트 확신을 할 수는 없겠지. 원래 약이라는 게 그런 거니까. 하지만 적어도 해가 되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이쯤이면 대답이 됐을 듯한데."

"예, 전하."

"그럼 경의 대답은?"

"...명하신 대로 투구꽃, 가져오겠습니다."

가르딘 경은 결심했다.

사실 황태자의 최근 건강 상태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였다. 나날이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어떤 약도 들지 않았다. 절망스럽던 요즘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가능하기만 하다면.

지푸라기 잡듯 어떤 시도라도 다 해보고 싶었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법제라. 한 번쯤 시도해볼 가치가... 있을까.'

조금은 희망을 걸어보고 싶었다. 최소한의 시도라도 해보고 싶어졌다.

'대신 법제라는 과정이 끝나면, 전하보다 내가 먼저 그걸 먹어서 안전함을 확인해봐야겠지.'

그런 후에야 황태자에게 복용을 허락할 것이다. 결심한 그는 비장한 눈빛으로 침실을 나섰다. 그가 투구꽃 뿌리를 한 아름 안고 돌아온 것은 10분가량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전하, 어느 정도를 원하시는지 잘 모르겠기에 일단 다 가져왔습니다."

"잘했어. 그럼 이제부터 커다란 대야 두 개와 그걸 가득 채울 맑은 물, 그리고 소금 한 포대도 가져와."

"법제에 필요한 물품입니까?"

"당연하지."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준비가 착착 갖추어졌다. 침실 한가운데에 맑은 물로 가득 채운 커다란 대야 두 개가 놓였다.

그때부터였다.

"자, 그럼 물에 소금 풀고."

"얼마나 풀면 됩니까?"

"왕창."

"...왕창이라시면?"

"확 부어. 내가 중단하라고 할 때까지."

"알겠습니다, 전하."

솨아아아-!

포대의 소금을 왕창 부었다.

라키엘은 직접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먹으며 소금 농도를 확인했다.

"자, 그럼 이제 담그자. 전부."

"예, 전하."

참방참방!

가르딘 경이 충실하게 움직이며 투구꽃 뿌리, 부자를 소금물에 푹 담갔다.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라키엘은 별궁의 시종들을 불러들였다. 그들에게 종이를 하나씩 건넸다.

"이제부터 너희는 이 별궁의 정원을 샅샅이 뒤져야 할 것이다."

"...예?"

시종들이 어리둥절한 기색을 보였다.

정원을 샅샅이 뒤지라니.

그 넓은 곳을?

무엇을 위해서?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긴 그럴 법도 했다.

말이 정원이지, 이곳 별궁의 정원은 엄청나게 광활했다. 대한민국의 행정구역으로 치자면 어지간한 동 하나쯤 면적? 혹은 예전에 썸녀와 가본 적 있는 경기도 가평의 아침북적 수목원? 아마 그 정도는 충분히 될 것이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황족의 여흥을 위한 사냥터로도 이용되는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라키엘은 시종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각자 받은 종이가 있지? 그림이 그려져 있을 거야. 그림과 똑같이 생긴 식물을 가져오면 돼."

그는 시종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었다. 한쪽 그룹은 정원 서쪽으로 보냈다. 마법에 의해 건조한 지대가 구현된 구역이었다.

"너희는 그림과 똑같이 생긴 관목이 있거든 통째로 뽑아오도록 해."

반면, 다른 그룹은 동쪽으로 보냈다. 마법에 의해 사시사철 봄이 유지되는, 산자락과 이어진 숲이었다.

"너희는 그림과 같은 풀을 가져오면 된다."

그는 두 그룹의 시종들을 보내며 야물딱진 당부를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며칠이 걸려도 좋다. 다만, 각각의 그룹에서 가장 먼저 내가 원하는 것을 가져오는 이에겐 황태자의 이름으로 황금 한 덩이를 상으로 주겠다. 하니 다들 분발하도록."

"...!"

시종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런 과감한 투자(?) 덕분이었다.

흡족한 결과가 반나절 만에 나왔다.

그날 저녁, 라키엘은 시종들이 가져온 약재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마황, 족두리풀...."

마황(麻黃)은 중국 북부, 내몽골 등의 건조지역에서 자생하는 떨기나무다. 족두리풀은 산지의 나무그늘 우묵한 곳에 하트 모양의 잎사귀를 펼치는 풀이다.

'설마 이것들이 정말로 정원에 있을 줄은 몰랐네.'

그저 혹시나 해서.

만약에 있다면 정말 좋을 듯해서.

로또 긁는 기분으로 시종들을 보냈던 거였다. 한데 이렇듯 뜻밖의 성과가 나왔다.

'잘됐다. 진짜 잘됐어.'

마황과 족두리풀.

둘 모두 한국에서 제법 써본 한약재였다. 부자와 상성이 기막히게 좋은 약재이기도 했다.

그때부터였다.

라키엘은 더욱 분발하며 가르딘 경을 부려먹었다.

"흠, 부자가 소금물에 푹 절여졌네?"

"그렇습니다, 전하."

"그럼 이제 뭘 해야 할까?"

"잘 모르겠습니다, 전하."

"모르긴 무슨. 그냥 내가 시키는 걸 하면 되지."

"하오시면?"

"부자 꺼내서 창가에 널자. 햇볕 잘 드는 자리에."

"예, 전하."

촥촥촥!

가르딘 경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부자를 널었다. 그렇게 반나절이 지나고 저녁이 오면?

"부자가 햇볕에 잘 말랐네. 그럼 이제는?"

"전하께서 시키는 걸 하면 되는 겁니까?"

"당연하지. 부자 담가."

"...예?"

"다시 담그라고. 소금물에. 풍덩."

참방참방!

가르딘 경이 기껏 말린 부자를 다시 소금물에 담갔다. 그리고 아침이 밝으면.

"가르딘 경, 부자 꺼내서 널어줘."

"예, 전하."

촵촵촵!

밤이 오면.

"부자 담가줘."

"넵, 전하."

첨벙첨벙!

아침이 오면.

"널어."

"옙!"

촵촵!

또 밤이 오면.

"담가."

"예!"

참방!

라키엘의 부지런한 손짓.

가르딘 경의 헌신적인 노가다.

둘이 쳇바퀴처럼 열심히 돌아갔다.

부자를 소금물에 담그고 말리기를 반복한 지 닷새째. 마침내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좋구나.'

라키엘은 햇볕에 말린 부자를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느새 부자 겉면 가득 소금 결정이 생겨나 있었다. 부자 자체도 전보다 제법 단단해져 있었다.

비로소 확신이 들었다.

'다 됐다.'

법제가 완료되었다.

그러니 이제는?

'탕약, 만들 수 있겠어.'

부자의 독성을 제거하고.

마황과 세신의 약효를 끌어내어.

절묘한 시너지를 일으킬 탕약 조제를 시작했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라키엘은 몰랐다.

자신이 조제하는 마황부자세신탕(麻黃附子細辛湯). 이 탕약이 어떤 뜻밖의 효능을 드러낼지를. 그리하여 꿈에도 기대하지 않았던, 마젠타노 황가 비전의 비기를 얻게 되리란 사실 또한.

6화. 전무후무한 획득 (1)

"전하, 진짜... 괜찮으시겠습니까?"

별궁 주방이 비워졌다.

비워진 주방에서 가르딘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물음에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흐음, 아직도 안심이 안 돼?"

"그야...."

"그래. 안심이 안 되겠지. 이거, 엄연히 독약에 쓰이는 거니까. 안 그래?"

"...."

라키엘이 집어든 부자.

전과 달리 겉면에 굳은 소금 결정이 가득 생겨나 있었다. 지난 며칠 내내 열심히 소금물에 절이고 햇볕에 말리기를 반복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가르딘은 영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불안해서 지난 며칠 내내 발가락을 꼬물거리며 잠을 설쳐야 했더랬다.

'이러다가 진짜 큰일 나는 건 아니겠지?'

시시때때로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우리 전하께서 저 뿌리에 대해 해박하신 것 같아도. 우리 전하께서 신기한 용어들을 설명해주셨어도. 우리 전하께서 저 독초 뿌리를 꿀꺽....

'...안 돼!'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그 뒤의 참극이 눈에 그려지듯 훤히 보이는 기분이었다.

우리 전하께서 독약 한 사발을 시원히 들이켜시고. 우리 전하께서 괜찮다는 듯 웃어 보이시다가. 우리 전하께서 피를 왈칵 토해내시며....

"즈어어언하-!"

"아 씨. 깜짝이야. 또 뭐. 이번엔 뭔데."

"이 마당까지 와서 이런 말씀을 드리긴 송구하오나, 한 번만 다시 생각을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생각? 무슨 생각?"

"그 뿌리 말입니다."

"응, 이거. 왜?"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아. 안 죽어."

"즈어어언하아!"

"어오. 귀청 떨어져서 죽겠네."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법제를 마치고 손질까지 된 부자로 탕약을 달이려는 참이다. 한데 지금껏 잘 협력했던 가르딘 경이 이제 와서 난리다. 물론 왜 이러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여전히 불안한 거겠지.'

무리도 아니었다. 부자는 엄연히 독약의 재료다. 가르딘 경의 입장에선 엄청나게 불안할 터다.

라키엘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가르딘 경."

"예, 전하."

"실은 말이야, 경이 이런 반응을 보일 줄 알고 어젯밤 내가 생각해둔 방법이 있어."

"방법이라니요? 무엇입니까?"

"만약에 내가 이 독초로 약을 만들면, 경이 나보다 먼저 이걸 먹어봐 줄 수 있겠어?"

"물론입니다."

"...."

"전하?"

"어."

"왜 그런 눈빛으로 절 보시는지...."

"아, 좀 놀라서."

솔직히 놀랐다.

저렇게 1초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일 줄도 몰랐다.

사실은 그냥 물어본 말이었다. 나보다 먼저 탕약을 마셔보겠느냐고. 독성이 있는지 확인을 해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그러면 가르딘 경도 안심하지 않을까. 탕약 제조를 순순히 돕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물은 것이었다.

'뭐, 겸사겸사 가르딘 경의 반응도 확인해보는 거고.'

자신에게 얼마나 충실한지.

얼마나 헌신적인 사람인지.

짚어보고 싶었다.

앞으로 가르딘 경에게 의지할 일이 많을 테니까.

'그런데 저렇듯 아무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일 줄은 진짜로 몰랐어.'

솔직히 조금 놀라웠다.

가르딘 경에게 물었다.

"정말로? 나 대신 탕약을 먼저 마셔서 독성 유무를 확인하겠다고?"

"예, 전하."

"진심이야?"

"물론입니다."

"...."

저 진지한 눈빛. 진짜다.

'후우.'

약간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고마웠다.

라키엘은 그런 마음을 짐짓 감추었다.

"좋아. 그럼 이제 조금 안심이 되겠군. 안 그래?"

"예, 조금 마음이 놓입니다."

비로소 가르딘 경이 살짝 웃었다.

정말로 마음이 놓였다.

설령 최악의 경우가 생긴다고 해도, 독 때문에 고생할 사람은 황태자가 아닌 자신이 될 테니까.

"그래. 좋아. 하면 이제부터는 내가 하는 걸 지켜만 보도록."

"알겠습니다, 전하."

가르딘 경이 한발 물러났다.

라키엘은 그런 경을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놀랍고, 고마웠다. 물론 그런 고마움과는 별개로, 가르딘 경에게 탕약을 먼저 먹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 좋은 걸 왜 먹여.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내가 싹싹 다 핥아 먹어야지, 내가.'

그런 양보(?)는 사양이다.

탕약을 다 달이고 나면? 가르딘 경이 나서기도 전에 재빨리 후루룩 원샷을 해 버릴 거다. 애초부터 그게 계획이기도 했다.

'뭐, 일단 가르딘 경이 속았으니까 성공이네.'

경이 기겁하며 말리지 않게 됐다.

그러니 이제는?

계획한 일을 할 때다.

'어디 보자.'

라키엘은 주방을 둘러보았다. 주방엔 탕약 조제를 위한 대부분의 물건이 그럭저럭 갖추어져 있었다.

적당한 크기의 유리그릇.

법제를 마친 부자.

손질된 마황.

족두리풀 뿌리를 말린 세신(細辛).

흐르는 샘물에서 갓 떠온 청천수(淸泉水)까지.

'그리고 마지막 준비물은 나.'

라키엘은 숨을 평온하게 골랐다.

옛 문헌에서 이르길, 자고로 한약재를 다루는 데에는 세 가지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처방하고 약을 지어주는 의원의 정성. 약을 잘 달여주는 보호자의 정성. 때를 거르지 않고 믿는 마음으로 약을 먹는 환자의 정성.

그러한 정성들이 모이고 제 역할을 하여야 비로소 탕약이 제 몫을 해낼 수 있다고 하였더랬다.

'지금은 내가 일인삼역을 해야 할 때네.'

스스로 처방하고, 달이고, 셀프 원샷까지.

'해보자.'

마음을 다진 라키엘은 탕약을 달이기 시작했다.

유리그릇에 청천수와 약재를 넣었다. 처음에는 강한 불(武火)로 한 차례 화끈하게 끓였다. 다음엔 약한 불(文火)로 약액의 넘침을 막았다.

그리고 서서히 달였다.

처음 부은 물이 절반 이하가 남을 때까지.

최대한 천천히.

가능한 한 꾸준히.

달이고. 곁을 지키고.

힘겨울 때는 앉아서 숨을 고르며.

그럼에도 두 눈 부릅뜨고서.

불가를 지켰다.

끝끝내 세 시간이 넘도록.

다행히 혼절하지 않고서.

"...해냈다."

라키엘은 현기증을 참아내며 웃었다.

약액이 제대로 달여졌다. 마황부자세신탕(麻黃附子細辛湯)의 완성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음을 놓지 않았다. 유리그릇 속 달여진 약액의 찌꺼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주걱으로 위쪽의 맑은 약액만 떠서 잔에 담았다.

물론 바로 마시지는 않았다.

그는 바닥에 정좌하였다.

그리고 기다렸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옆에서 이쪽의 눈치를 보며 꼼지락대는 가르딘 경의 모습에 문득, 웃음이 나왔다.

"가르딘 경. 할 말이 있으면 해. 옆에서 눈만 끔벅거리지 말고."

"저기, 전하?"

"어."

"제가 감히 이런 질문을 드려도 괜찮은지는 모르겠지만...."

"응."

"저기, 약을 다 끓이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응. 그래서?"

"이제 제가 마시면 되겠습니까?"

"아니. 아직 안 돼."

라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가르딘 경의 표정에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전하, 혹시 마음이 바뀌신 겁니까? 아까는 분명 제게 먼저 먹여서 독성을 시험할 거라 말씀하셨는데...."

가르딘 경의 얼굴이 나름의 비장함으로 물들었다. 저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아까 했던 말들이 진심이 맞았나 보다.

"허. 참."

라키엘은 그만 웃어 버렸다.

여전히 굳은 결의가 담긴 눈길을 내비치는 가르딘 경. 그 눈빛에서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다.

라키엘은 든든함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꼈다.

'쯧쯧. 이러니까 원작에서 속절없이 죽었지, 이 사람아.'

원작 마검황에서 끝까지 황태자 라키엘의 곁에 남았던 주치의, 가르딘.

원래 그는 주치의가 아니었다.

진짜 주치의의 조수였다.

한데도 끝까지 남았다.

그리고 처형당했다.

모시던 황태자의 죽음.

그 죽음의 책임을 추궁받은 결과였다.

우직하고 충직하고, 듬직하고 충실하다. 요령도 없고, 그저 순진하고, 충성스럽게 자신의 역할을 다할 뿐. 아무래도 그게 가르딘이라는 자의 본질인가 보다.

'이런 사람이 잘돼야 하는 건데.'

원작에서 가르딘 경이 맞이했던 허망한 최후를 떠올리며 라키엘은 입맛이 씁쓸해지는 걸 느꼈다. 사실 사람 사는 곳이 이런 경우가 많았다. 대한민국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성실하게 묵묵히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성공 가도를 달리는 거, 너무 꿈같은 이야기지. 아주 가끔만 있는, 그래서 동화 속 이야기처럼만 느껴지도록 희귀한. 사실은 요령 좋은 사람들이 더 잘 사는 경우가 훨씬 많아서.'

그게 현실이었다.

성실하게 묵묵히.

그렇게 책임만 다하며 살다간?

묵묵하게 말없이 잘려나가는 꼬리가 될 뿐이니까. 원작 속 가르딘처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뿐이니까.

라키엘은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후. 됐고. 왜 그렇게까지 극단적이야, 사람이?"

"...예?"

"위험한 거라면서 본인이 직접 시험하고 그러지 좀 말자고. 정말 위험할 거 같으면 다른 방법 많잖아."

"다른 방법이라시면...."

"하다못해 개구리나 쥐한테 먹여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아...!"

"그렇지?"

"그럼 당장 쥐를 잡아올까요?"

"...조금 있다가. 이 탕약, 원래 식혀서 마시는 거야."

"예에?"

"원래 식혀서 마시는 거라고. 부자가 들어간 탕약은."

"원래... 말입니까?"

"어. 그래서 충분히 식기를 기다리는 중인 거고."

"...."

"왜 또. 이번엔 뭐가 궁금한데."

"방금 원래, 라고 말씀하셨...."

"...."

아뿔싸.

라키엘은 재빠르게 말했다.

"꿈에서 봤어. 요즘 들어 매일 밤, 대현자의 기운을 풍기는 마법사가 내 꿈에 찾아와서 약재를 다루는 방법과 침으로 건강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려주거든. 됐나?"

"꿈에서... 말입니까?"

"믿기지 않겠지. 하지만 경이라면 믿어줄 거라고 보는데. 그래서 경에게만 말해주는 거고. 미리 일러두는 거지만, 경만 알고 있어야 해. 알겠어?"

"아, 알겠습니다, 전하."

짐짓 엄격한 투로 말했다.

가르딘 경이 황망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둘러댄 게 먹혔나.

'조심해야겠어.'

아마도 가르딘의 충성심은 이쪽이 아닌, '황태자 라키엘'을 향한 것일 터다. 그러니 이쪽은 어디까지나 황태자 라키엘이어야 한다.

한데 방금은 경솔했다.

원래 한의학이 이런 거다, 라는 투로 말했다니. 다음부턴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라키엘은 탕약을 살폈다. 마침 그 사이 잔이 충분히 식어 있었다.

'좋아.'

제발 약효가 있기를.

그래서 지금의 삶을 연장할 수 있기를.

라키엘은 바라고 바라며 손을 뻗었다.

가르딘 경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서.

적당히 식은 잔을 재빠르게 들었다.

입가로 가져왔다.

기울였다.

꿀꺽!

"...어어!"

가르딘 경의 기겁하는 소리.

개의치 않고 단숨에 마셨다.

식도를 알싸하게 찌르는 자극.

그 순간이었다.

딩동!

청량한 알림음이 울렸다.

그리고....

[당신은 정확한 방법으로 조제된 마황부자세신탕을 섭취하였습니다.]

[마황과 세신이 기관지를 안정시킵니다. 인후통 증상을 가라앉힙니다. 해열 작용과 진해, 거담 작용을 돕습니다.]

[부자가 냉증과 통증을 제거하고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돕습니다.]

[부자의 적절한 강심작용이 심장의 혈행을 원활하게 합니다.]

[원활해진 자극에 의해 오장육부의 왕, 심장이 깨어납니다.]

[당신의 심장에 새겨져 있었지만 허약한 체질 때문에 활용하지 못하고 있던 황가 직계의 비전, 아스라한 심법이 눈을 뜨고 있습니다.]

7화. 전무후무한 획득 (2)

[당신의 심장에 새겨져 있었지만 허약한 체질 때문에 활용하지 못하고 있던 황가 직계의 비전, 아스라한 심법이 눈을 뜨고 있습니다.]

눈앞에 서슴없이 떠오르는 메시지.

라키엘의 눈이 점점 휘둥그레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스라한 심법?'

...대박이다.

이 세계의 원작인 '마검의 황제'. 그 이야기 속 마젠타노의 황족들만이 사용하던 특수한 마나 심법이 바로 아스라한 심법이었다.

'대략 300년 전에 창안된 심법이라고 했지.'

역사에 길이 남은 그랜드 마스터.

하비엘 아스라한이라 했던가.

그가 자신의 주인인 '로이드 프론테라'와 함께 공동으로 창안했다고 했다. 그 뒤로 마젠타노 황가의 심법이 되어 직계 후손에게만 전해졌다고도 하였더랬다.

'그게 내게도 전해진 거야.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이 몸, 라키엘의 몸에 심어져 있던 거겠지. 라키엘은 황태자니까. 황가를 이을 적통이니까.'

그러나 지금까지는?

'심법을 지니고는 있었지만, 허약체질 때문에 전혀 사용하지 못하던 거였어.'

한데 이제는 달라졌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가 알려주고 있었다. 그 아스라한 심법이 눈을 뜨고 있다고. 오롯한 네 것이 되었노라고.

딩동.

[아스라한 심법 스킬이 개방되었습니다.]

[스킬명 : 아스라한 심법]

[단계 : 싱글 써클 Lv. 1]

[주위의 마나를 흡수합니다. 흡수한 마나를 심장 둘레에 생성한 써클로 가공/증폭하여 운용합니다. 써클의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증폭률이 대폭 상승합니다.]

[마나 증폭률 : 120%]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HP : 1,000]

[현재 보유 중인 HP : 100]

키이이잉-!

'오오옷.'

혹시 심장 둘레로 매끈한 도넛이 돌아가는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지금, 써클이 돌아가는 감각이 딱 그러했다.

'이게 마나란 걸까.'

마나써클이 회전할 때마다.

그렇게 호흡을 할 때마다.

들이마신 공기에서 기이한 힘이 써클로 흡수되었다. 흡수되고, 증폭되며, 경혈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몸에 약간의 활력이 솟아났다. 약해빠진 라키엘의 육신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종류의 활력이었다.

'잠 안 깨는 아침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원샷한 기분이네.'

심법에 의해 저절로 회전하는 마나써클. 그걸 조절하는 것도 약간은 가능했다. 마치 걸음마를 하듯이. 처음 자전거 타는 요령을 익힌 직후처럼. 라키엘은 마나써클의 회전수를 이리저리 조절해보았다.

어설펐지만, 조금씩 조절이 됐다.

'연습이 좀 필요하겠어.'

라키엘은 신기한 기분으로 써클의 첫 감각을 즐겼다.

한데 그러던 도중이었다.

쿠우웅!

'어?'

잘 돌아가던 써클이 주춤했다.

그러더니 갑작스럽게.

키아아아아-!

"...!"

한껏 거칠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의도한 바도, 원했던 바도 아니었다. 심장을 터뜨릴 듯이 옥죄는 격통이 쇄도해 왔다.

'...컥!'

라키엘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숨도 쉴 수 없어서.

가슴을 움켜쥐지도 못하고 목에 핏대만 세웠다.

'무슨?'

어째서 갑자기 이런 격통이 몰려오는 건지. 왜 심장이 뜯겨 나갈 것처럼 아픈 건지. 써클이 미친 듯이 날뛰는 이유는 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현상이었다.

'뭐, 뭐야, 이거.'

써클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제멋대로 거칠게 회전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원래 써클은 심장을 넉넉하게 둘러싼 마나의 고리였다. 한데 지금 생겨난 써클은?

달랐다.

너무 작았다.

그 작은 써클에 심장이 끼어 있는 형국이었다. 아니, 끼어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이러다간... 심장이 터지겠어.'

마치 제천대성의 머리를 죄는 긴고아처럼. 혹은 먹잇감의 목을 사정없이 물어뜯는 맹수처럼. 써클이 심장을 찢어발길 듯이 압박하고 있었다. 압박한 채로 회전하고 있었다.

'크... 그흡!'

그는 가까스로 패닉에 빠지지 않았다.

순식간에 돋아난 식은땀 속에서. 서슴없이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이쪽을 향해 무어라 말하는 가르딘 경이 어렴풋이 보였다.

아니, 소리치고 있는 건가.

왜 그러시느냐고.

괜찮으시냐고.

이쪽의 어깨를 잡고서. 이쪽의 상태를 살피려 애쓰고 있는 건가.

'쯧.'

법석을 떠는 건 가르딘 경만이 아니었다.

딩동.

[마나써클이 심장을 과도하게 압박합니다.]

[마나써클과 심장의 발달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심장이 기절하기 직전입니다.]

심장을 비롯한 각종 장기들이 비명 섞인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피었다가 명멸하는 메시지들. 어지러웠다. 하지만 덕분에 이 난데없는 사태의 원인을 짐작해볼 수 있었다.

'마나써클과 심장의 발달 균형이 맞지 않는다고?'

그러고 보니 그 말대로였다.

조금 전에 눈을 뜬 아스라한 심법. 덕분에 존재감을 드러내며 회전을 시작한 마나써클.

한데 써클의 크기가 비정상적으로 작았다. 원래는 심장을 넉넉하게 둘러싸고 있어야 하는 도넛 모양의 써클이, 지금은 마치 한없이 작은 반지가 손가락을 압박하듯 심장을 짓눌러 오고 있었다.

'발달 상태... 균형....'

잠깐.

서서히 떠올랐다.

그것은 하나의 가설이었다.

'발달 상태라면, 신체의 심장은 다 자랐는데... 써클은 아니라는 건가.'

고통으로 혼미해지는 의식.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한 심장.

확연해진 심장마비의 전조 속에서 생각을 이어갔다.

'그래, 생각해보니 당연한 걸지도. 이 몸의 원래 주인, 라키엘은 황태자였으니까. 태어날 때부터 황제의 장자였으니까. 한데 아스라한 심법은 황가의 비전이자 직계에게만 전수되는 비기라고 했지.'

분명, 소설 '마검황'에서 그렇게 나왔었다. 아까 처음 아스라한 심법을 얻었을 때 나왔던 메시지도 그랬다.

이쪽의 심장에 '새겨져 있었지만' 허약한 체질 때문에 활용하지 못하고 있던 황가 직계의 비전이 '눈을 뜨고 있'노라고.

'그러니까 라키엘은 황태자로 태어났고, 태어난 직후에 황가의 비전인 아스라한 심법을 물려받은 거야.'

아마 황제가 직접 갓난아기였던 라키엘의 심장에 써클을 새겨주었을 것이다. 황가의 직계들이 대를 이어 치렀던 의식처럼. 태어나자마자 아스라한 심법을 얻었을 것이다.

한데 그다음이 문제였겠지.

'라키엘은 선천적인 병약 체질이었어. 눈을 뜨기도 전부터 시름시름 앓았다고 했지.'

어린 시절부터 평생 병마에 시달렸다고 했다. 한데 그런 몸으로 아스라한 심법을 사용할 수 있었을까?

'아니.'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병마에 찌든 육체로는 심법의 사용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심법을 사용해야 발동되는 마나써클은?

'한 번도 회전시켜본 적이 없었던 거겠지. 아니, 갓난아기 시절에 장착된 이후로 단 한 번도, 일깨워본 적이 없었던 거야.'

말 그대로 이 써클은 평생 반강제적인 동면상태로 지내왔던 거다. 그래서 갓난아기 시절의 크기와 형태에서 조금도 자라나지 못했던 거다. 한데 그 사이, 라키엘의 신체가 자라며 심장만 커져 버린 거다.

'그러니까 균형이 안 맞지.'

성인의 심장.

신생아의 써클.

말도 안 되는, 희귀하고도 아이러니한 조합이었다.

한데 저 조합이 지금 본인의 가슴속에서 대환장 파티를 벌이고 있으니, 실로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었다.

'어떻게든 해야 해.'

이대로 있다간 죽는다.

장난이 아니라 진짜다.

원작의 라키엘은 써클을 아예 안 깨워서 그저 평화롭게 죽었지만, 지금 이쪽의 사정은 다르다.

일단 써클을 깨워 버렸으니, 뭐라도 해야 한다. 심장과 써클의 균형을 맞춰줘야 한다. 안 그러면 곧 심장마비 티켓을 끊고 염라대왕과 진로상담을 시작하게 될 거다.

'생각해. 뭐든 좋으니 떠올려.'

집중하며 머리를 굴렸다.

방금 짐작해낸 원인.

문제를 해결할 해답.

필사적으로 헤집었다.

악착같이 움켜쥐었다.

마침내 결론을 얻어냈다.

둘의 균형을 맞추자면 결국 방법은 하나였다.

심장을 줄일 수는 없으니....

'써클을 늘린다!'

답을 얻어낸 순간.

라키엘은 폭주하며 날뛰는 써클을 더는 진정시키려 노력하지 않았다. 오히려 광포한 회전을 더욱 부추겼다.

키아아아아-!

빠르게.

더 빠르게.

거칠고 숨가쁘게.

사납고 난폭하게.

써클의 회전수를 올렸다.

목적은 오직 하나. 원심력을 이용해서 써클을 강제로 늘려 버리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그것은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카아아아아-악!

'...크읏!'

심장이 써클에 갈렸다.

엄청난 격통이 몰려왔다.

진심으로 거의 까무러칠 뻔했다.

하지만 정신을 잃으면 끝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버텼다.

참아냈다.

그저 참을성이 많아서?

아니었다.

'가슴... 아파. 엄청나게 아프다. 그래도, 이 정도는... 한국에서 한의원 망해가던 때에 비교하면 가슴 아픈 것도 아니야!'

그는 최근 가장 가슴 아팠던 기억을 떠올렸다. 코로나 사태 때문에 한의원이 망해가던 시절의 기억이었다.

'확진자 두 명이 방문했다는 이유로... 인터넷 카페랑... 아파트 단톡방이랑... 동네방네 소문 다 나고... 환자 발길 뚝 끊기고... 아무도 안 오는 진료실에서 한숨만 푹푹 쉬고... 없던 탈모까지 생기고...!'

아무리 아프다 한들.

그때만큼 아플까.

'그런데도 임대료에 대출 이자는 잘도 빼 가더라. 아무나, 누구 하나 붙잡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더라. 전세방 빼고, 월세 원룸으로 옮기고, 그렇게라도 메꿔보려고 했는데... x발, 내 전세.'

전세방에서 짐 정리하던 날 혼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한데 지금 가슴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그때에 비하면 아픈 것도 아니야. 그때가 훨씬 가슴 찢어지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는 이를 갈았다.

이건 아픈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참아낼 수 있다. 이까짓 마나써클이 늘어나는 통증 따위,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다.

'마나써클? 네가 장사 망해가는 기분을 알아? 대한민국 자영업자의 고통을 아냐고!'

써클을 향해 되뇌었다.

짓씹듯 으르렁거렸다.

그렇게 버텨냈다.

억겁의 시간처럼 이어지던 고통도. 한계를 돌파한 마나써클의 회전도. 그렇게 원심력에 찢기고 늘어나는 써클의 격통도. 모두 버텨내고, 인내하고, 받아냈다.

이윽고 써클이 화답했다.

카아아아아-! 카드득!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써클이 늘어났다. 짓눌리던 심장에 해방감이 찾아왔다. 격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대신 유리처럼 매끈해진 써클의 회전이 느껴졌다.

키이이이잉....

마치 잘 길들여진 짐승처럼. 혹은 손질이 잘된 엔진처럼. 네가 원하면 언제든 최고의 힘을 뿜어주겠노라고 말하는 듯한 회전이었다.

라키엘이 그 새로운 감각에 눈을 뜨는 순간. 눈앞에 수많은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딩동!

[당신은 심장과 마나써클의 발달 균형을 완벽하게 맞추었습니다.]

[당신의 마나써클은 오랜 동면 상태에서 수축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정상적인 활용이 절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번득이는 직감과 대담한 실행력, 단호한 의지와 불굴의 인내력으로 마나써클을 강제로 찢고 늘리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일련의 과정에서 당신의 마나하트는 소유자의 의지에 따라 강제로 찢기고 늘어나는, 매우 희귀한 성장 단계를 거쳤습니다.]

[이렇듯 독특하고 유니크한 성장 히스토리에 의해, 당신의 마나써클에 특수한 속성이 부여됩니다.]

[당신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마나써클 슬롯'을 획득하였습니다.]

눈앞을 채우는 광명 같은 메시지.

그걸 보며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이것은, 목숨을 걸었던 도박이 초대형 잭팟으로 돌아오는, 역사적인 성공의 순간이었다.

8화. 전무후무한 획득 (3)

[당신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마나써클 슬롯'을 획득하였습니다.]

눈앞을 광명처럼 채워오는 메시지.

그것은 목숨을 건 도박이 성공했음을 알려주는 이정표였다. 동시에, 그 결과로 뜻밖의 거대한 보상을 얻게 되었음을 전해주는 승전보였다.

'마나써클 슬롯?'

대체 그건 뭘까.

라키엘은 뒤이어 떠오르는 메시지를 주시했다.

[당신의 마나써클은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강제로 찢기고 확장되는 과정에서 일종의 빈 공간, 보이드(void)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 보이드가 진화하여 물질과 마나를 담을 수 있는 저장공간, 슬롯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하나의 써클에 하나의 슬롯을 장착하게 됩니다.]

[슬롯의 저장공간은 써클의 레벨이 상승함에 따라 확장됩니다.]

[슬롯은 입을 통하여 섭취하는 행위로 채울 수 있습니다.]

['1번 슬롯'이 개방되었습니다.]

[1번 슬롯이 비워져 있습니다.]

[1번 슬롯의 최대 용량 : 10리터]

[1번 슬롯의 현재 저장 용량 : 0 리터]

"...."

메시지를 읽은 라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장공간?

슬롯?

그런데 용량이 10리터라고?

'게임 인벤토리나 아이템 슬롯 같은 건가.'

간혹 즐기던 게임들이 떠올랐다. 그런 게임 속에서의 인벤토리 등을 생각하니 메시지의 뜻이 대강 짐작이 되었다.

'말 그대로 내 써클에 인벤토리가 생긴 거네?'

정리해 보니 그랬다.

무언가를 먹어서 무려 10리터나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단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점점, 다양한 활용법들이 떠올랐다.

'이거 어쩌면....'

생각보다 엄청난 가능성을 얻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이 마나써클의 슬롯 속에....

그때였다.

"저기, 전하?"

떨리는 듯, 조심스럽게 귓가로 날아드는 목소리. 라키엘은 달팽이관의 이끌림에 따라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가르딘 경이 있었다. 가르딘 경은 거의 울먹이는 중이었다.

행여나 이쪽이 괜찮은 건지.

어디 잘못되진 않았는지.

마치 오늘 사서 개통한 휴대폰을 타일 바닥에 투쾅 떨어뜨린 사람 같은 표정과 눈빛이었다.

그렇다면 휴대폰이 무사(?)함을 알려줘야겠지. 라키엘은 짐짓 빙긋 웃었다.

"어. 왜."

"저기, 괜찮으신 겁니까?"

"보다시피?"

"저기, 아까는 엄청나게 괴로워하셨는데."

"잠깐 목이 막히더라고."

"목이... 말입니까?"

"어."

대수롭지 않게.

걱정 끼치지 않게.

"탕약을 너무 성급하게 마셔서. 사레가 콱 들려 버렸거든."

"사레가 들리셨다고요?"

"어. 그렇게 안 보였어?"

"예. 그렇게 안 보였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고."

"저기, 하지만 전하."

"자꾸 왜."

"분명히 굉장히 위급한 모습이셨는데."

"괜찮아. 지금 보고 있잖아? 내가 멀쩡한 거."

"하지만...."

끝내 말끝을 흐리는 가르딘 경. 그런 경의 눈빛은 빈 잔을 향해 있었다. 마황부자세신탕을 담았던 잔이었다.

혹시 그는 스스로를 책망하는 걸까. 이쪽보다 먼저 저걸 마셨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후우, 괜히 또.'

라키엘은 짐짓 피식 웃었다.

"됐고. 좋은 거니까 내가 먼저 마셨지. 약간이라도 이상한 거였어봐. 내가 냉큼 마셨겠어? 그러니까 안심해. 진짜 위험하다 싶은 건 경이 거부해도 마구 먹여 버릴 거니까."

"...예?"

"거부해도 소용없어. 강제로 입 벌리고 깔때기 꽂아서 확 부어 버릴 거거든."

"...예에?"

"그때도 부디 지금처럼 충직한 모습이길 바란다."

"...."

"알았으면 여기 정리해줘. 난 먼저 침실에 올라가서 좀 쉴게. 아, 그리고-"

"예?"

"고맙다."

"예에에?"

"못 알아들었으면 됐고."

...괜히 말했나.

라키엘은 황급히 주방을 떠났다.

침실로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오늘 얻어낸 마나써클 슬롯.

그걸 활용할 방법과 가능성에 골몰했다.

'저장 용량이 10리터라고 했어. 그 용량이 허용하는 한도 안에서는 물질을 마나와 뒤섞어서 보관할 수 있다는 거겠지.'

물론 그걸 채우는 방법은?

'섭취. 즉, 먹어서 채울 수 있다고 했고.'

아까 떠올랐던 메시지에선 분명 그렇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럼... 진짜로 되는 건지 실험부터 해보자.'

실험 방법은 간단했다.

무언가를 먹어보면 알 것이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라키엘은 침실을 휘휘 둘러보았다. 마침 시험 삼아 먹어보기에 적당한 게 보였다. 그것은 커다란 크리스털 병에 담긴 물이었다.

'이런 실험엔 물이 딱이겠지.'

흔하게 구할 수 있고. 먹기에 역하거나 부담스럽지 않고. 반수치사량이 높아서 많은 양을 먹어도 안전한 게 물이었다.

'반수치사량, 그거 중요하지. 특히 많은 양을 먹어보는 실험을 해야 하는 지금 같은 순간이라면 더더욱.'

반수치사량(LD50).

그것은 어떤 물질의 독성을 실험할 때, 실험에 참가한 인원의 절반(50%)이 사망하게 되는 물질의 섭취량을 뜻하는 말이었다.

'완전치사량(LD100)의 개념도 있지만, 그건 오히려 부정확하지. 예를 들어 똑같은 독을 먹어도 사람마다 체질이 조금씩 달라서 죽게 되는 양이 차이가 날 테니까.'

그렇기에 물질을 완전치사량으로만 다루게 되면? 1리터를 먹으면 죽는다고 해서 800밀리리터만 안심하고 먹었는데, 체질에 따라서 꽥 하고 죽어 버리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다.

그래서 사용하는 개념이 반수치사량이었다.

'대강 이쯤 먹으면 뒈질 확률이 50%쯤 되는 거고, 안 죽어도 최소한 개고생을 하거나 식물인간, 혹은 반병신이 될 수 있으니까 알아서 사려라, 라는 수치랄까.'

즉, 먹었다가 운이 좋으면 응급실이나 중환자실행. 운이 나쁘면? 영안실로 당일 배송돼서 염라대왕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양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모든 물질은 반수치사량을 지니고 있었다.

맹물도 마찬가지였다.

체중 60킬로그램인 사람을 기준으로 한다면? 맹물의 반수치사량은 약 5.4리터였다. 체중 1킬로그램당 90g의 물인 셈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 체중으로 물의 반수치사량을 계산하면 대략... 3.9리터쯤 되겠네.'

라키엘은 크리스털 물병의 용량을 눈대중으로 재보았다.

대강 가늠해보자니....

'2리터 페트병 크기구만. 딱 좋아. 됐어.'

혹시나 이걸 다 마셔도 몸에 이상이 생기진 않을 듯했다. 안심한 라키엘은 물병을 들었다.

후들거리는 팔뚝을 느끼며.

입가로 가져왔다.

천천히 기울였다.

'고작 이거 들었다고 팔뚝 후달리면서 떨리는 거 보소. 어오 이 저질체력 몸뚱이.'

투덜거리면서도 한 방울이라도 흘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벌컥, 벌컥!

시원한 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그 순간, 라키엘은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시켰다. 마나써클을 향해 명령하듯 되뇌었다.

'지금 마시는 물을 슬롯에 저장하고 싶다.'

그러자 써클이 곧바로 반응했다.

키이이잉-!

경쾌하게 회전을 시작한 써클. 회전하는 힘에 흡인력이 생겨났다. 그리고 식도를 통해 위장으로 내려가던 물을 죄다 빨아들였다.

'오? 오오?'

그것은 매우 신기한 경험이었다.

분명 물을 병째로 왕창 들이마시고 있는데. 숨도 안 쉬고 머슴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는데. 그래서 식도가 꿀렁꿀렁 물을 내려보내고 있는데. 위장에 물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물이 전부 써클에 흡수되고 있어. 진짜다. 메시지 내용이 사실이야.'

터엉.

어느새 비어 버린 물병을 내려놓았다. 2리터 정도쯤 되는 물을 원샷해 버린 것이었다. 한데 물배가 차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신기했다.

물 먹는 하마가 된 기분이었다.

더 해보고 싶었다.

입맛을 다신 라키엘은 침실을 나섰다. 침실과 이어진 복도의 다른 방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응접실로 보이는 방에서 또 다른 물병을 찾아냈다.

마침 딱 4개.

'잘됐네. 남은 8리터도 마저 채워보자.'

기왕 시작한 실험이니 끝까지.

결심한 라키엘은 물병을 들었다. 거침없이 벌컥벌컥 비우기 시작했다.

2리터 받고 2리터 추가로.

비우고, 또 비우고.

전혀 배가 차지 않음을 느끼며.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음 또한 실감하며. 무려 도합 8리터나 되는 물을 추가로 원샷했다.

"...꺼어억."

솔직히, 조금 뿌듯해졌다. 인생 살면서 언제 10리터나 되는 물을 원샷해봤겠는가.

'그랬으면 죽었겠지. 반수치사량이고 뭐고 배 터져서 죽었겠네.'

문득, 전경 시절이 떠올랐다.

자신이 있던 곳에선 진급 때마다 물을 먹이는 나름의 전통이 있었다. 3리터는 족히 넘는 주전자에 물을 떠 와서 그걸 원샷시키는 악습이었다.

물론 그걸 성공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략 1리터쯤 마시다가 물비린내에 못 버티고 화장실로 달려가 나이아가라 폭포 같은 물대포를 게워낼 뿐.

당시의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후우, 그런데 지금은 다르네. 10리터를 마셨는데도 부담이 전혀 없잖아. 배가 부르지도 않고, 위장에 물이 차지도 않았고.'

방금 마신 10리터의 물은 고스란히 써클의 슬롯에 저장되었다.

'그럼 실험의 다음 단계로 가보자.'

그는 침실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음 날엔 온종일 물을 전혀 마시지 않았다. 대신 써클 슬롯의 활용법을 천천히 익혀나갔다.

'목이 마르다고 느껴질 때면... 이렇게.'

키이이잉....

써클을 천천히 회전시켰다.

그러자 곧바로 반응이 왔다.

딩동!

[써클 슬롯에 저장된 물을 체내로 내보냅니다.]

[방출량을 설정해주십시오.]

'0.1리터.'

[0.1 리터의 물을 체내로 방출합니다.]

[1번 슬롯 현재 저장 용량 : 9.9 리터)

키이잉-!

써클이 역방향으로 회전했다.

슬롯에 저장되었던 물이 마나에 담겨 체내로 방출되었다. 마나의 흐름을 따라 혈관을 돌아다니며 체세포에 다이렉트로 총알배송되었다.

그 즉시 목마르던 감각이 사라졌다.

'오오. 낙타다, 낙타. 완전 인간낙타.'

혹에 물과 영양분을 저장해서 사막을 누비는 낙타가 이런 기분인 걸까.

그 뒤로도 수시로 목이 마를 때마다 써클 슬롯을 활용했다. 덕분에 온종일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도 갈증에 시달리지 않았다.

그 와중에 써클 슬롯의 성질을 차츰 알아나갈 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써클 슬롯에는 여러 음식이나 물질을 섞어서 저장할 수는 없었다.

'물이면 물만, 밥이면 밥만 담아두는 게 가능하다는 식이구만. 이거 1인 1메뉴도 아니고 쯧. 그런데... 흐음, 슬롯을 한꺼번에 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어느새 다시금 찾아온 자정.

한밤의 고요한 침실에서 그는 고민에 휩싸였다.

'슬롯을 채우는 법과 사용하는 법을 대강 알았으니 이젠 탕약을 슬롯에 넣어보고 싶은데. 그런데 이거, 슬롯을 어떻게 비워야 되지?'

남은 물을 한꺼번에 체내로 방출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물의 양이 너무나 많았다.

'아직 8.5리터나 남아 있어. 그걸 전부 몸 안에 풀었다간 즉사 당첨이야.'

그럼 천천히 시간을 들여 소비하든가. 혹은 한꺼번에 몸 밖으로 빼내야 한다는 소리인데.

"...."

문득, 가능성이 하나 떠올랐다. 소설 '마검황'에서 종종 언급되었던 아스라한 심법의 특성에 대한 설정이었다.

'마나의 흡수와 증폭, 발산에 특화된 심법이라고 했지.'

그게 아스라한 심법의 특징이었다.

그럼 지금은?

'증폭과 발산. 그 특성을 사용하면 가능할지도 몰라. 그래, 한번 해보자.'

그는 몸을 일으켰다.

한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했다.

키이이잉....

써클이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했다.

그 회전 방향을 역으로 돌렸다. 슬롯에 저장된 남은 물을 응집시켰다. 그걸 모조리 몸 밖으로 내보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순간.

키이이이잉-!

써클의 역회전이 거세졌다.

써클에 담긴 마나가 요동쳤다. 슬롯에 담긴 8.5리터의 물이 마나와 공명했다. 공명하며, 증폭되어 마나와 뒤섞였다.

[써클 슬롯에 저장된 물질이 증폭됩니다.]

[저장된 8.5리터의 물이 방출됩니다.]

증폭되며, 응축되었다.

응축되고, 써클의 질주를 따라, 심장을 박차고, 혈맥 속을 내달려.

퍼어엉-!

도합 8.5리터의 응축된 물의 구체가 폭발적으로 발사되었다. 손바닥이 가리키던 크리스털 병을 단숨에 박살 냈다.

9화. 프로 갑질러의 다짐 (1)

퍼어엉-!

딱 봐도 비싸 보이는 크리스털 병이 단숨에 박살 났다.

손이 닿지도 않았는데. 그저 탁자 위에 놓였던 병인데. 손바닥에서 폭발적으로 발사된 물 덩어리에 맞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당황스러웠다.

'뭐, 뭐야.'

이쪽은 손으로 물을 배출하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물이 마나에 실려 배출되면 그저 수돗물 정도로 쪼르륵 흘러나오지 않을까 여겼더랬다.

그래서 안 흘리고 받아내려고 빈 병도 야물딱지게 준비해놨던 건데. 물을 안 흘리긴커녕, 대놓고 물폭탄이 터져 버렸다.

'허어. 이거 실화인가.'

직접 벌여놓고도 믿기지 않는 결과였다. 덕분에 망연자실 침실만 둘러보았다. 침실은 졸지에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사방이 물바다였다.

8리터가 넘는 물폭탄이 터지며 탁자는 밀려났고, 바닥이며 침대엔 물이 흥건했다. 심지어 천장까지도 물이 튀었다.

튄 것은 물뿐만이 아니었다.

"아큭."

뒤로 걸음을 옮기던 라키엘은 돌연 느껴지는 따끔함에 발을 움츠렸다. 발바닥에 쌀알 크기의 크리스털 조각이 박혀 있었다.

"어오 씨."

병이 얼마나 철저하게 박살 났는지, 사방이 크리스털 유리조각이었다. 유리조각이 튀지 않은 곳이 없어 침실 바닥이 구석구석 반짝거렸다. 제법 커다란 왕건이(?) 파편 몇 개는 대놓고 벽면에 살짝 박히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절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저 파편에 맞았으면 제법 다쳤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이 엉망진창을 어떻게 수습하면 좋을까를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황태자 전하!"

벌컥, 콰앙!

침실 두 곳의 문이 동시에 열렸다.

하나는 침실 안쪽의 쪽방 문이었다. 가르딘 경이 잠이 덜 깬 얼굴로 다급히 뛰쳐나왔다.

나머지 하나는 복도 쪽 문이었다.

"전하! 무사하십니까!"

열 명이 넘는 근위병이 침실로 우르르 몰아닥쳤다. 하나같이 긴장된 얼굴로 언제든 검을 뽑아들 태세였다.

한데 쪽방 문을 열고 나온 가르딘 경도. 침실로 들이닥친 근위병들도. 엉망이 된 침실 광경을 감상하고서는 똑같은 표정이 되었다.

"허?"

뭔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서 달려왔을 터다.

황태자에 대한 테러?

혹은 암살 시도?

대강 그런 위급한 상황을 상상하며 뛰어왔을 터다.

한데 이쪽은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고, 침실은 엉망진창 물난리고, 유리조각은 사방에 흩어져 있고.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안 되겠지.

'뭐라고 둘러대지?'

순간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몰래 나쁜 짓이라도 하다가 들킨 기분이었다. 상황을 솔직하게 말하기도 좀 그랬다.

'손을 뻗었더니 써클에 저장되어 있던 물폭탄이 증폭되고 터져서 이렇게 됐다. 오밤중에 근무하느라 고생 많을 텐데 놀래켜서 이거 참 미안하다, 허허.'

...라고 말하는 게 더 이상할 테니까. 아니, 미친놈 취급받기 딱 좋을 테니까.

잠깐 고민하던 그는 나름의 핑계를 댔다.

"어, 그게. 잠깐 화가 나서."

"...예?"

근위병 조장이 긴장된 얼굴로 반응했다.

그를 향해 멋쩍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홧김에 그냥. 물이 담긴 병을 휘두르다가 탁자에 내리쳤어."

"전하?"

"그래서 이렇게 된 거야. 미안."

"...."

근위병들도, 가르딘 경도.

다들 잠시 말이 없었다.

그 모습에 금방 후회가 들었다.

'안 통하나. 쯧. 내가 생각해도 너무 조잡한 핑계이긴 한데.'

잘 있던 황태자가 오밤중에 갑자기 히스테리를 부리듯 유리병을 휘두르고 깨뜨려서 침실이 이렇듯 엉망진창 난리가 난 거라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다소 엉성하고 어설픈 변명이었다.

'쯧. 안 믿어주겠네. 바보도 아니고 이걸 누가 믿어. 그럼 이젠 뭐라고 둘러대야 하....'

그때였다.

근위병 조장이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전하."

"...어?"

"전하께선 다치신 곳이 없으십니까?"

"어, 유리조각에 발을 좀 찔린 거 말고는 그닥?"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그쪽엔 유리조각이 많으니 이쪽으로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어, 음, 그래."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근위대 조장이 이쪽의 말을 너무나 쉽게 믿어주어서였다.

'어째서? 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쪽이 황태자고 황족이라서?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라도 있나?

하지만 의문을 풀 겨를은 없었다.

근위병 조장이 군화로 유리조각을 바즈락바즈락 밟고 걸어와 이쪽을 업었다. 그리고 안전지대(?)로 옮겨주었다.

"여긴 엉망이 되었으니 제2 침실로 전하를 모시겠습니다. 가르딘 경? 이동하기 전에 전하의 발을 우선 살펴봐 주시지요."

"아, 예."

그 뒤로 다들 분주해졌다.

근위병들은 침실에 남은 위험요소가 없는지를 살폈다. 가르딘 경은 이쪽의 발에 박힌 유리조각을 빼고 약을 발라주느라 진땀을 흘렸다. 그동안 라키엘은 떠오르는 의구심을 삼켜야 했다.

'쯧. 암만 봐도 내가 댄 핑계, 진짜로 어설펐는데.'

그런데도 아무런 의심 없이 다들 믿어주는 눈치다. 이런 게 황족의 편리함이란 걸까.

'뭐, 운이 좋았던 셈 치자.'

근위병 조장의 안내에 따라 제2 침실로 자리를 옮겼다. 낯선 침대에 누워 눈만 말똥말똥. 아까의 일을 떠올리며 한참을 뒤척였다.

'그거, 뭐였지.'

마나와 융합된 물폭탄을 터뜨리던 순간의 감각. 그 느낌이 여전히 손바닥에 선명했다.

아니, 손바닥뿐만이 아니었다.

심장의 써클에서부터 주위의 혈맥, 어깨와 팔뚝을 내달리듯 질주하던 마나의 격류, 증폭, 폭발, 분출까지.

속이 뻥 뚫리는 듯 호쾌한 감각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느껴보고 싶은 감각이기도 했다.

"...."

일단 자자.

이러다가 또 사고 칠라.

억지로 눈을 감았다.

아직 이쪽에겐 훨씬 중한 일이 있다고. 지금은 일단 빌어먹을 이 몸뚱이의 체질을 개선하는 게 훨씬 급하다고. 애써 되뇌며 잠을 청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계획했다.

성능 테스트까지 확실하게 마친 써클 슬롯. 이걸 자신의 치료에 어떻게 활용할지를 생각하고, 궁리하다가, 마침내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