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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했던 생각은 취소.

이건 만족스럽지 않다. 간신히 기절을 했는데, 이렇게나 노골적인 꿈과 마주하는 상황은 절대로, 만족스럽지 않다. 아니, 오히려 난감하기만 하다.

"...."

나는 눈살을 찡그렸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추억 속 익숙한 광경이 보였다. 낡은 24평 주공아파트 현관. 그 너머로 보이는 낯익은 구조의 거실과 주방. 보는 순간 어디인지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20대까지 살았던 집이다.

처음엔 부모님과 함께. 나중에 나 혼자 남아. 그렇게 살다가 나왔던 집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은, 그 집에서 살았던 날들 중에서 가장 극적으로 참담한 기분을 느껴야 했던, 그런 순간이었다.

내가 전역을 했던 날이니까. 전역을 하고 집에 왔는데 맞이해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으니까. 엄마가 이미 세상을 떠나신 뒤였으니까. 그런데 왜 하필 나는 이 순간을 꿈으로 보게 된 걸까.

"...후우."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꿈인데도 그 감각마저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현관 거울에 비쳐 보이는, 군복을 입은 20대 시절의 내 모습마저도 지나치게 실감이 나서 오히려 믿기지가 않았다.

'왜 이런 꿈을 꾸는 거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보는 거실. 청소가 된 지 한참이 지나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소파. 그날 보았던 그대로의 광경 속에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문득, 과거의 이날에 머금었던 다짐을 새삼 떠올렸다.

'그래. 나는....'

억울하다고 생각했더랬다.

아버지를 뇌졸중으로 잃었다. 어머니를 암으로 보내드려야 했다. 삽시간에 혼자가 되어 버린 현실이 억울했다. 미웠다. 왜 내게만 이런 일이 생긴 거냐고. 어째서 나만 이런 식으로 혼자가 되어 버린 거냐고. 할 수만 있다면 누군가에게 따지고 싶었다.

그래서 이곳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던가. 그 끝에 남몰래 다짐을 했던가. 사람 살리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나 같은 일을 겪는 사람을 돕고 싶다고.

그때 처음으로, 막연하게나마 그런 생각을 잠깐 해보았던 것 같다. 그 후로도 돈이라는 현실의 벽 때문에 잠시간 방황을 했지만, 끝내는 그 다짐을 새삼 떠올리며 용기를 얻었던 것도 같다.

그래서 한의대를 들어갔다. 한의사가 되었다. 하지만 이날의 다짐은 금방 색이 바랬던가.

"...."

나는 비교적 금방 속물이 되었던 것 같다. 순수하게 사람을 살리겠다는 다짐? 나 같은 사람을 돕겠다는 각오? 금방 잊었다.

혼자 세상을 살아가며, 살아남으며, 어느 사이엔가 잊어버렸다. 현실과 타협했다. 남들처럼 돈을 버는 일에 집착했다. 그게 살아가는 방법이었으니까. 당연한 거라고 여기며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그렇게 지금까지 줄곧, 속물의 얼굴로 숨 쉬며 사는 건지도 모르겠다.

'죽기 싫으니까.'

보너스 수명을 얻겠다고. 병원을 차리고. 사람을 모으고. 남을 돕겠다는 생각? 그보단 내가 먼저 살겠다는 생각 하나. 오직 그것만을 붙잡고 살아가는 지금의 나.

'그렇다고... 나쁜 건 아니잖아?'

애써 합리화하며 웃었다.

낡은 거실을 둘러보았다. 지금 내가 바라는 건 한 가지다. 이런 꿈, 이쯤에서 대충 끝내고 다른 꿈이나 꾸었으면 싶다.

가슴이 아픈 건 싫으니까.

이제는.

좀.

괜찮아지고 싶다.

"다행히 이젠 괜찮으십니다."

고요한 침실에 가르딘 경의 목소리가 울렸다. 왕녀 아델린은 참고 있던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러한가? 정말로 황태자께서는 괜찮으신 건가?"

"예, 앙부아즈의 왕녀시여."

가르딘 경이 청진기를 주섬주섬 챙겼다. 여전히 의식을 찾지 못한 황태자 라키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호흡도, 맥박도 모두 정상이십니다. 열도 없고 말입니다."

"그럼 어째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는 거지?"

"아마도 짧은 시간에 급격히 무리를 하신 탓이겠지요. 몸이 자연스럽게 휴식을 원하며 깊은 숙면에 빠지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대로 푹 주무시게 놔두는 게 최선이겠지요. 별일은 없을 겁니다."

가르딘 경이 희미하게 웃었다.

사실은 누구보다도 놀랐던 그였다. 별궁의 입원 환자들을 돌보던 중이었던가. 황태자 전하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었던 때는 얼마나 가슴이 철렁했던지.

"원래부터 체질이 건강한 분은 아니십니다. 실은 매우... 허약한 체질을 타고난 분이시지요."

"그런가. 내가 큰 폐를 끼쳤군."

"아닙니다, 앙부아즈의 왕녀시여. 실은 전하께서 제게 미리 당부하신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당부? 그대에게?"

"예, 왕녀시여."

가르딘 경이 전날의 기억을 되짚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왕녀님을 치료해드리는 일이 전하 당신께 꽤나 고통스러운 일이 되리라고. 어쩌면 기절할 정도로 힘겨울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너무 놀라지는 말라고 제게 미리 당부를 하셨지요."

"...그렇다고 그대가 놀라지 않은 건 아닌 듯한데."

"왜 아니 놀라겠습니까."

가르딘 경이 자리에 앉았다. 아델린을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실은 전하께서는 종종 이러십니다."

"종종? 이러하신다고?"

"예, 왕녀시여. 언제나 전하 당신보다 환자를 먼저 생각하는 분이셔서 말입니다."

"...."

오늘처럼.

아까처럼.

그런 건가.

아델린은 문득 생각했다. 자신의 명치를 향해 발출했던 강맹한 마나. 그럼에도 타격이 느껴지지 않던 뱃속의 신기한 감각. 사실은 그것이 황태자의 희생 덕분이었음을.

'진료를 받기로 결정한 이상... 당신은 내 환자니까.'

"...."

황태자의 말이 떠올랐다. 가르딘 경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항상 걱정입니다. 저는 황태자 전하의 유일한 주치의니까 말입니다. 제가 돌보아드려야 하는데. 그게 당연한 일인데. 제가 챙겨드려야 할 분이, 되레 남들을 돌보느라 이토록 힘겨워하시는 걸 볼 때마다 저는... 후우."

"...."

아델린은 보았다.

가르딘 경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덤덤한 듯 말하면서도 가슴이 아픈 탓이리라. 한데도 주군을 쉽사리 말리지 못하는 까닭이리라. 그만큼 황태자의 마음이 진심이라서 그런 걸까.

"...."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황태자는 그런 사람인 듯하다. 한 사람이라도 대가 없이 챙기려는 마음. 환자를 위해서라면 희생도 기꺼이 감내하는 용기. 그 일념으로 움직이는, 그런 사람이었던 듯하다.

그렇기에 아까 보았듯 수많은 환자를 대가 없이 돌보는 것이겠지. 그러니까 날 여기로 부르고, 내게 자각 못 하던 병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그걸 고쳐주겠다고 나선 것이겠지.

'그 모든 행동이... 진심이었던 거야.'

그렇지 않다면 오늘 같은 희생을 하였을 리가 없다.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부끄러웠다. 이렇게 훌륭한 사람을 믿지 못했던 자신이. 의심하고 미워했던 옹졸한 자신이. 부끄럽고, 미안했다.

"...."

아델린은 조용히 손을 뻗었다. 잠든 라키엘의 손등을 조심스레 토닥였다. 그녀의 라키엘을 향한 눈빛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어쩌면 그런 덕분이었을 것이다.

딩동!

[환자를 향한 당신의 헌신적 행동이 한 사람의 마음속에 감동을 불러왔습니다.]

[사실 이러한 당신의 헌신은 개인적인 이기적 목표를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환자에게 닿은, 당신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마음만은 진심이었습니다. 이러한 헌신과 진심은 앞으로도 수많은 긍정적 변화를 불러올 것입니다.]

[환자 : 아델린과 당신 사이에 최고 단계의 의료적 신뢰도가 형성되었습니다. 이제 환자 : 아델린은 당신의 진료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를 것입니다. 그녀는 당신의 어떠한 의료 행위에도 의심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의심으로 가득하던 환자의 마음을 완벽하게 얻어내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이에 오장육부가 당신을 진심으로 성원합니다.]

[오장육부가 1,5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한 HP : 2,500]

잠든 라키엘의 의식 속으로. 스스로를 자책하는 그의 눈꺼풀 앞으로. 고요 속의 훈훈한 메시지가 조용히 새겨졌다.

97화. 정성과 신뢰 사이 (2)

아침이 밝았다.

라키엘은 해가 뜰 무렵 정신을 차렸다. 다행히 기운도 제법 쌩쌩했다.

"황태자께선 이젠 좀 괜찮으신 건가요?"

"원래부터 괜찮았습니다?"

"퍽이나."

딸각, 딸각.

왕녀 아델린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럴수록 라키엘의 샐러드를 뒤적이는 포크 움직임이 격렬해졌다. 하지만 아델린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가 기다란 식탁 너머 라키엘을 향해 두 눈을 반짝였다.

"어젠 기절하기 직전에 뭐라셨더라. 엄청나게 오글거렸던 거, 기억하세요?"

"아뇨. 기억 안 납니다?"

"그럴 리가. 제 눈을 똑똑히 보며 말씀하셨는데. 그러니까 뭐랬더라."

"오늘 진료는 여기까지입니다?"

"진료를 받기로 한 이상...."

"그만."

"당신은 내...."

"거기까지."

"환자니까...."

"아 씨."

라키엘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아침부터 이러려고 오신 겁니까?"

"아뇨. 절대로요?"

"그럴 리가. 지금 절 똑똑히 보며 놀리고 계신데. 그러니까 이걸 뭐라고 하더라."

"호의로 가득한 문병?"

"퍽이나."

와삭.

라키엘이 당근 조각을 씹으며 투덜거렸다.

"어쨌건 전 괜찮습니다. 어제 일은... 치료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했던 부분이고요. 그러니 치료에 지장이 있을까 싶은 걱정은 접어두셔도 됩니다."

사실이었다.

왕녀의 담석을 치료하기 위한 체외충격파 치료법. 그걸 시행하려면 자신이 충격을 흡수해야 한다는 것쯤은 각오하고 있었다. 실제로 데미안과 연습을 하면서 체험하기도 했다. 다만, 왕녀가 정권으로 발출하는 마나의 위력이 예상보다 강했을 뿐이었다.

'역시 중급 익스퍼트의 격투가다운 위력이었지.'

검을 주로 쓰는 데미안이 맨손으로 발출하던 마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걸 유도해서 흡수하던 순간엔 뱃속이 왈칵 뒤집히는 느낌마저 들었던가.

명절날 3살 조카 손에 쥐어진 프라모델 피규어가 그런 심정일까 싶었다. 식도와 십이지장 융털돌기와 괄약근이 손에 손 잡고 인수분해됐다가 상냥하고 보람차게 재조립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한 치료법이었다.

악으로 깡으로 버텼다.

그 끝에 기절했다. 거기까진 좋았다. 문제는 환자 앞에서 못나고 미덥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이었다. 라키엘이 가장 걱정하는 부분도 그 점이었다.

"어쨌건 치료는 지장 없이 계속될 겁니다. 일단 오늘 오전에는 제가 일반 환자들을 진료할 예정이니, 정오에 다시 와주시면 됩니다. 오후 시간은 담석 치료를 위해 통으로 비워둘 테니까 말입니다. 아, 시술의 안정성을 위해 최소 세 시간은 금식해주셔야 하겠고요."

라키엘은 열심히 당부했다. 그렇게라도 왕녀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려놓고 싶었다.

일단 왕녀가 이쪽의 진료를 의심하면 안 된다. 이쪽의 실력에 의문을 느껴도 곤란하다. 이쪽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수월하게 진료를 이어나갈 수 있다.

'그러니 오늘은 기절하지 말자. 절대로.'

그는 내심 각오를 다졌다.

그때였다.

"흐훗."

왕녀 아델린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황태자께서는 제가 이곳의 치료법을 못 미덥다 여길까 걱정을 하시는가 보군요?"

"...."

들켰나. 라키엘이 미간을 찡그리려던 무렵, 아델린이 뜻밖의 말을 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저는 고마운걸요."

"...예?"

"어제 보았거든요. 황태자께서 절 치료하려 얼마나 애를 쓰셨는지. 혼자서 얼마나 많은 걸 감내하셨는지. 그러고도 아무 내색조차 하지 않던 모습까지도요."

"...."

"그래서랍니다. 황태자께서 제게 해주시는 치료를 믿습니다. 어제 그 순간 이후부터는 담석이라는 것도, 그걸 없애야 제가 죽지 않으리라는 것도 믿기로 했습니다."

"어, 진짜로요?"

"네. 기꺼이."

아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한 진심이었다.

"사실 처음엔 황태자께서 무슨 의도를 품은 건지, 혹여나 저를 농락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더랬지요. 제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믿겠습니다. 황도의 수많은 이들을 무상으로 기꺼이 치료하는 그 숭고한 마음도. 잠재적인 경쟁국의 왕족인 제게 선뜻 건네어 주신 그 이타적인 호의도 말입니다."

"어, 음, 그럼, 왕녀께서 지금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절 찾아오신 건...?"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거든요. 감사하다고요."

"...흠흠!"

라키엘은 짐짓 헛기침으로 화끈해진 얼굴을 가렸다. 이렇게 대놓고 얼굴에 금칠을 하다니. 솔직히 예상 못 했다. 좋은데 민망하고 뻘쭘했다.

'난 그냥, 아침밥 먹는 시간부터 냅다 쳐들어오길래 뭔가 컴플레인이라도 하려는 건 줄 알았는데.'

항의하러 온 건가 싶었다. 혹은 앞으로의 치료에 대해 의문을 표하러 온 건가 싶었다. 하여 열심히 변명을 하고 어필하려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듯했다. 어쩌다 보니 나름 괜찮은(?) 오해를 받게 된 듯도 했다.

'숭고한 마음과 이타적인 호의라.... 내가?'

절대로 아니다.

사실은 정반대다.

황도의 사람들을 치료하는 거? 어떻게든 보너스 수명을 박박 긁어모아서 살아남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에 불과하다. 왕녀를 여기까지 불러서 치료하는 거? 앞으로 벌어질 대전쟁과, 그로 생겨날 손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다.

즉, 이 모든 치료행위가 오직 나 자신을 위한 개인적이고도 이기적인 투자에 불과하다. 한데 그런 행동들이 왕녀에겐 다르게 보인 듯했다.

'뭐, 그렇게 봐준다면야. 굳이 오해를 정정해줄 필요는 없겠지.'

그래야 이득이 되니까.

라키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결론을 내린 즉시 안면 가득 철판을 연말마다 갈아치우는 보도블록처럼 촥촥 깔았다.

"후우. 그러실 줄 알고 한사코 모른 척을 하려 했던 건데. 민망하군요."

"...그건 아닌 거 같았는데."

"흠흠! 어쨌건! 어제의 일은 치료를 위해 제가 당연히 감당해야 할 부분이었습니다. 이미 각오하고 있었지요. 솔직히 두렵고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환자를 위해야 한다는 마음이 더 강했기에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달까요."

"...."

"뭐, 대강 그렇습니다."

"...묘하게 느끼해지신 거 같은데."

"커흠흠!"

어쨌건, 왕녀가 이쪽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됐다는 것은 확실했다. 굉장한 소득이었다. 라키엘은 그 기세를 살렸다. 그날부터 본격적인 담석 깨기에 들어갔다. 매일 오후마다 체외충격파 치료를 감행했다.

"쏩니다?"

"오세요."

아델린이 물었다.

라키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직후.

투풋-!

왕녀의 주먹이 자신의 명치 오른쪽에 셀프샷을 날렸다. 강력한 마나가 발출되었다. 동시에 라키엘이 움직였다.

아스라한 심법으로 왕녀가 발출한 마나를 끌어당겼다. 유도했다. 습타 크래프트의 고스트가 뉴클리어를 유도하듯이. 혹은 백상아리가 정모를 벌이는 풀장에 신선한 혈액 한 뚝배기를 던지듯이.

한 점으로 유인했다.

담석을 때리게 했다.

파즉!

"...!"

그때마다 라키엘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하지만 이제 그는 전처럼 기절하지 않았다. 안색이 창백해지지도 않았다. 어느새 조금씩 적응한 덕분이었다.

'읍! 웁! 급! 긱! 궵!'

나름의 버텨내는 요령이 생겼다.

한 차례의 충격파가 올 때마다 숨을 참았다. 복식호흡으로 배를 부풀리고 복압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역도선수나 헬스 마니아들이 사용하는 발살바(Valsalva) 호흡을 응용했다. 동시에 마나써클을 활짝 열었다.

그 자체가 그에게 특훈이 되었다.

딩동!

[당신은 아스라한 심법을 활용하여 외부의 강력한 마나 충격을 연달아 흡수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신은 무식하게 충격을 버텨내는 것이 아닌, 충격을 흡수하고, 중화하여,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요령을 습득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당신의 아스라한 심법에 귀중한 경험적 자산이 되었습니다.]

[아스라한 심법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열심히 충격파를 참아내는 와중에 날아온 반가운 메시지. 라키엘은 재빨리 메시지를 읽었다.

[스킬명 : 아스라한 심법]

[단계 : 싱글 써클 Lv.4]

[주위의 마나를 흡수합니다. 흡수한 마나를 심장 둘레에 써클로 가공/증폭하여 운용합니다. 써클의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증폭률이 대폭 상승합니다.]

[마나 증폭률 : 170%]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HP : 1,800]

[현재 보유 중인 HP : 2,500]

'오옷!'

이보다 훌륭한 활력소가 있을까.

[아스라한 심법의 성장에 따라, 당신이 보유한 써클 슬롯도 함께 영향을 받습니다.]

[써클 슬롯의 저장공간이 확장됩니다.]

[1번 슬롯이 확장되었습니다.]

[1번 슬롯의 최대 용량 : 12리터 -> 13리터]

통증을 참느라 혼미해지려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덕분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하루하루가 지났다. 매일 오후마다 꼬박꼬박 하나씩, 총 15개의 담석을 깼다. 아스라한 심법은 싱글 써클 6레벨로 상승했다. 써클 슬롯의 용량도 무려 15리터로 확장되었다.

그런 덕분이었을 것이다.

체외충격파가 주는 충격을 버텨내는 일이 한결 익숙해졌다. 마치 맷집 단련을 하듯이 써클이 튼튼해졌다. 써클 슬롯이 단단해졌다. 복근도 조금은 질겨졌다. 인내심도 늘어갔다. 덕분에 전처럼 쉽게 기절하지는 않게 되었다.

"대신 이렇게 헛구역질만 하는 걸로 거뜬히, 남자답게 참아낼 수 있게 되었지요. 오애애애액-"

"...."

"걱정 마시지요. 그저 헛구역질일 뿐입니... 오애액-"

"...."

"아니 왕녀께선 왜 계속 그런 눈으로... 오애애액-"

"...그 헛구역질, 저쪽으로 가서 해주시면 안 될까 싶어서 말이지요."

"하지만... 우읍, 담석이 잘 깨졌는지 확인을 좀 해봐야...."

"그 오애액, 한 번만 더 하면 명치를 콱."

"...."

"들어갔죠? 헛구역질."

"옙."

"후후후."

"...."

라키엘은 목구멍에 하이킥을 날려대는 헛구역질을 가까스로 밀어 넣었다. 자신보다 머리 반 개는 키가 큰 왕녀였다. 어릴 때부터 격투를 연마한 덕분인지 피지컬마저도 탄탄했다. 그런 왕녀가 앞에서 으르렁거리니, 절로 공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오, 내가 한국에서의 몸 정도만 됐어도!'

배는 조금 나왔었지만 그래도 멸치는 아니었는데. 라키엘은 비분강개의 심정을 삼키며 웃었다.

"자꾸 그렇게 위협하시면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어쩔 수 없으면요?"

"강대국 황가의 권력을 무자비하게 휘둘러 버릴까 합니다만."

"...치사하게."

"뭐 어쨌건. 열다섯 번째 담석도 잘 깨졌군요. 과정이 순조로우니까 이대로 며칠만 더 치료를 하면 남은 담석도 전부 처리할 수 있을 듯하고요."

"그런가요? 벌써?"

"예."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녀님께서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신 덕분입니다. 발출하시는 충격파가 워낙 묵직하고 강력해서."

"담석이 잘 깨진다는 거죠?"

"예. 제 생명력도 종종 같이 깨질 것 같은 위협이 느껴지지만 말입니다."

"또, 또. 그렇게 양심 찌르신다."

"사실이잖아요?"

"...쓰읍. 미안해지게."

"차라리 고마워하시죠."

"고마워하라는 말씀은, 어쩐지 보답을 하라는 뜻으로도 들리는데요?"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럼 황태자께선 제 어떤 보답으로 비로소 만족을 하실까요?"

"으음, 예를 들자면-"

"들자면?"

"우리 마젠타노를 상대로 전쟁만 안 일으켜주면 좋겠습니다. 평생 동안."

나름의 진심을 담아서 아델린에게 말했다. 그 말에 그녀가 멈칫했다. 이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상당히 노골적인데 뭔가 묘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과 마주하니 절로 어깨가 움츠러졌다.

"왜, 왜요?"

왜 저렇게 빤히 쳐다보는 걸까. 설마 이쪽이 방금 꺼낸 말이 어딘가 선을 넘은 걸까. 아델린은 이쪽의 물음에 대답을 하진 않았다. 대신 더욱 아리송한 말만 꺼냈다.

"글쎄요. 갑자기 너무 뜻밖의 말씀을 하셔서."

"...."

뭐가 뜻밖이란 걸까.

"게다가 황태자님 같은 분은 뭐랄까... 신기할 정도로 처음이라서."

"...."

대체 무슨 뜻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아리송한 말을 마친 그녀가 이쪽을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는 것이었다.

"어쨌건 오늘의 진료는 여기까지라는 거군요.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그럼 내일 뵙죠."

"아, 예...."

사람 마음 같은 거.

여자 마음 같은 거.

정말로 모르겠다.

난 그냥 바라는 걸 솔직하게 슬쩍 밝혔을 뿐인데. 왜 저런 눈빛으로 사람을 쳐다보며 묘한 미소를 머금는 걸까. 어째서 진료실에서 뒤돌아 나가면서도 은근슬쩍 두 번이나 이쪽을 돌아보는 걸까.

아리송했다. 그래서였다. 그저 멋쩍게 웃어 주었다. 물론 이쪽도, 그녀도 이때까지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치료를 위해 매일 이쪽의 진료실을 드나드는 왕녀 아델린. 그녀에게 오후 진료 시간을 통으로 할애하고 있는 이쪽. 그런 우리 둘을 두고서, 별궁의 모든 사람들이 묘한 이야기를 숙덕거리고 있음을. 그 숙덕거림이 소문이 되고, 풍문이 되어 황도 전체로 번져가고 있음을.

그 이야기가 마침내 뇌졸중 재활치료를 받던 황제의 귀에까지 닿게 될 것임 또한. 이때까지만 해도, 정말로 몰랐다.

98화. 정성과 신뢰 사이 (3)

...드디어 오늘인가.

황제, 아스테리온은 눈을 떴다. 벌써 한 달째 누워서 올려다본 VVIP 병실 천장. 이 천장도 오늘이 마지막이겠지. 다시 이곳에 누워 지내는 일은 없겠지.

반드시 그리되어야 할 터다.

"하면 폐하, 이제 시작하겠사옵니다."

"...."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고개를 힘겹게 돌렸다. 반쯤 떠진 눈꺼풀. 그 사이로 새하얀 법복을 입은 노인이 보였다.

대주교였다.

그 옆으로 서너 명이 더 있었다. 시종장. 근위대장. 맏아들 라키엘까지.

"...."

라키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근래에 들었던 어떤 소문이 문득 떠올랐다. 과연 그게 사실일까. 사실이라면 짐은 어찌 반응하면 좋을 것인가. 황제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그래, 부탁함세.'

황제는 대주교를 향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바로 오늘이다. 한 달 동안 기다려온, 대주교의 신성 축원이 가능해지는 날. 이젠 지긋지긋한 병상 생활도 끝이다. 한 달 내내 힘썼던 재활치료와도 작별이다.

가슴이 뛰었다.

걱정도 들었다.

그 사이, 대주교가 병상 옆으로 다가왔다. 손을 뻗어왔다.

눈을 감았다.

파아앗...!

대주교의 전신에 서리는 은은한 광휘. 그 손길을 통해 따스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어깨를 간질이고, 가슴을 지나, 전신으로, 발끝까지, 다시 척추를 따라 목덜미로, 얼굴을 거쳐 머릿속까지.

맑아졌다.

모든 병마의 찌꺼기. 번뇌의 마지막 티끌까지. 말끔히 씻어냈다. 뇌졸중을 겪으며 손상되었던 소뇌 조직이 복구되었다. 뒤틀렸던 신경조직이 정비되었다. 근육이 제자리를 되찾았다. 관절이 다시금 맞추어졌다.

황제는 저도 모르게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폐하!"

시종장과 근위대장의 감격에 찬 외침. 탈진해서 물러나는 대주교. 그들의 눈빛을 받으며 황제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

뒤틀렸던 손목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모든 감각이 제자리를 되찾았음이 느껴졌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황제는 고개를 들었다.

"황태자여."

"예, 폐하."

"날짜는 언제로 잡을 생각이더냐."

"...예?"

"날짜 말이다."

"송구하오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라키엘은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 날짜라니. 저게 웬 뚱딴지같은 말일까. 문득, 6번 척추가 바르르 떨리는 걱정과 불길함이 쑴펑쑴펑 샘솟았다.

'날짜라니, 저거 뭔 소리야. 황제가 왜 갑자기 헛소리를 하지? 혹시 뇌졸중이 다 안 나았나? 아니면 후유증이 남았나?'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아까부터 경혈 스캐닝으로 황제의 상태를 관찰하고 있던 터였다. 덕분에 대주교의 신성축원으로 황제의 소뇌와 신경 조직이 완벽하게 복구되는 과정을 모두 확인했다.

'그러니까 후유증이 남을 리가 없는데? 한 달 내내 재활도 빡쎄게 했는데?'

그럼 대체 뭘까.

아리송한 불길함이 모락모락 피어나려던 무렵. 황제의 눈길이 이쪽을 똑바로 쏘아보듯 콕 찔러 왔다.

"앙부아즈의 왕녀를 일컬음이니라."

"예에?"

"예, 는 무슨. 듣자 하니 짐이 병상에 누운 사이에 네가 제법 앙큼한 일을 벌였더구나."

"앙큼한 일이라심은...?"

"네가 어떤 수로 앙부아즈의 대사를 홀렸는지는 따로 묻지 않겠다. 앙부아즈의 국왕, 그 여우처럼 교활한 늙은이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도 굳이 따지지 않겠노라. 어떠한 수단을 썼든 간에, 그것은 결과적으로 모두 너의 기량이 빚어낸 성과일 터이니 말이다. 한데-"

이쪽을 보는 황제의 눈길이 엄숙해졌다.

"그렇듯 묘책과 기책을 발휘하여 벌인다는 일이 고작 여인과 시시덕거리는 일이었더냐?"

"...."

"물론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허나, 너는 장차 황가를 어깨에 짊어질 사람이다. 제국의 수백, 수천만 백성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다. 한데 그러한 너의 혼사를 주위와의 아무런 상의도, 의논도 없이 독단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는 말이더냐?"

"...."

"황태자는 어찌하여 대답이 없는가."

"으음, 그것이."

라키엘은 멋쩍게 웃고 말았다. 황제의 타박을 듣다 보니, 제대로 오해를 샀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뭐야. 설마 내가 왕녀와 썸이라도 타는 걸로 아는 건가.'

생각해보니 그럴 법도 했다. 처음엔 앙부아즈의 대사도 비슷한 오해를 했더랬다. 게다가 실제로 왕녀가 담석 치료 때문에 요즘 하루도 빼먹지 않고 진료실을 들락거리고 있다. 주위에서 오해의 시선을 보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오해를 정정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설픈 변명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왕녀를 그냥 놔두면 담석으로 죽을 거고, 그 죽음이 정치적인 도미노가 되어 대전쟁이 벌어질 거라는 말을 해봤자 과연 황제가 믿어주겠느냔 말이지.'

그건 오직 소설 마검황을 읽은 자신만이 아는 역사다. 말한다고 해서 믿어주는 게 비정상이다. 그래서였다. 그는 어설픈 변명 대신 능청스러운 대응을 선택했다.

"실은, 제가 차였습니다."

"...뭐?"

대놓고 거짓말을 했다.

황제가 멈칫했다.

좋아. 먹힌다.

용기(?)를 얻은 라키엘은 풀악셀을 밟았다.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잘못 생각하였습니다. 폐하께서 병상에 누워계신 틈을 타서 삿된 생각으로 수작을 부려보았습니다. 처음엔 시도가 잘 먹히는 듯했습니다. 들으셨다시피, 왕녀를 황도까지 불러오는 데에는 성공했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 뒤가 생각대로 되지가 않았습니다. 차였습니다."

"설마."

"떠올리신 그 설마가 맞으실 겁니다."

"들이댔던 것이더냐?"

"예."

"그래서 결국?"

"예."

"쯧쯧, 못난 놈!"

"...."

"기왕 일을 벌였으면 유의미한 성과를 내었어야 마땅한 것임을. 어찌 그리도 못난 짓을 벌였더냐."

"...."

"짐의 반의 반만 닮았어도 그리 꼴사나운 지경에 달하지는 아니하였을 것을. 쯧!"

"...."

억울...하다.

사실 난 들이댄 적도 없는데.

라키엘은 이 광활한 우주에서 아무런 존재가치도 없는 미물 쪼가리로 전락하려는 멘탈을 씁쓸하게 부여잡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심 안도했다. 독단적으로 앙부아즈의 대사를 움직여서 왕녀를 부른 일을 이 정도 타박으로 무마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쓴소리 몇 마디 듣는 걸로 땡치면 나야 이득이지.'

실질적으로 얻을 것은 다 얻었다. 왕녀의 담석을 성공적으로 제거하고 있는 요즘이다. 이대로면 대전쟁을 막아낼 수 있을 거다. 게다가 황제의 뇌졸중도 제대로 완치되었다.

그거면 됐다.

'아쉽게도... 황제를 시해하려 한 범인을 찾아내진 못했지만.'

황제의 몸속에 비정상적인 혈전을 만든 흉수가 있을 터였다. 그동안 찾으려 나름 애를 썼다. 데미안 등에게 뒷조사를 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너무나 감쪽같았다.

'당분간 주의하는 수밖에.'

밝혀지지 않은 흉수의 존재에 대한 것은 일찌감치 황제에게 알려준 터였다. 그러니 그 일은 황제가 알아서 더 조심할 거다.

그러니 이제 이쪽은?

황제의 쏟아지는 잔소리를 피해서 무사히 탈출(?)하기만 하면 된다. 라키엘은 정시퇴근을 갈망하는 사원처럼 슬금슬금 궁둥이를 뒤로 뺐다. 탈출각을 쟀다. 하지만 황제는 만만한 상사가 아니었다.

"어딜 일어나려는 것이더냐. 아직 짐의 훈계가 끝나지 않았거늘."

"...옙."

"짐이 비록 그동안 누워 있었다고는 하나, 눈과 귀마저 막힌 것은 아니었도다. 어찌하여 너는 그토록 아우보다 못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더냐."

"예?"

"네 아우, 2황자 말이다."

"...."

"짐이 이곳에 누워 있는 동안 그 녀석은 거의 매일처럼 이곳을 드나들며 짐을 문병하였지. 한데 그동안 너는 어찌하였더냐?"

"그야 낮에는 환자들을 진료하고...."

"오후에는 왕녀에게 들이대고."

"...하오나 밤에는!"

"짐을 간호하였노라고?"

"예, 폐하."

"그래서, 이런 타박이 억울하더냐?"

"예, 폐하."

"억울하다 한들 달리 뾰족한 수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폐하."

라키엘은 쑴펑쑴펑 피어나는 탄식에 한숨 한 스푼을 얹었다. 반면, 그 모습을 보던 시종장과 근위대장은 몰래 미소를 머금었다. 평생 곁에서 황제를 보필한 그들이었다. 덕분에 황제의 본심을 누구보다도 눈치껏 잘 느낄 수 있었다.

시종장과 근위대장은 몰래 눈짓을 교환했다.

'보이십니까, 로베르토 경? 폐하의 왼쪽 콧구멍이 미세하게 벌렁거리고 있으시군요.'

'예, 저도 봤습니다. 분명 매우 흡족해하시는 것일 테지요.'

'황태자 전하를 매우 자랑스러워하고 계신 듯하고 말입니다.'

'필경 그러하실 겁니다.'

물론 라키엘도 그런 황제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사실은 조금 난감했다.

"...."

이렇게 살갑게 투닥거리는 거. 이렇듯 훈훈하게 타박하는 거. 과연 자신이 받아도 되는 대접일까. 회의감이 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쨌거나 나는 당신의 친아들이 아니니까.'

진짜 라키엘이 아니다, 자신은. 그저 이유도 모른 채 황태자 라키엘의 몸으로 들어온 이질적인 존재일 뿐이다, 자신은. 그렇게, 이 세상과 동떨어진 존재일 뿐이다, 자신은. 그러니까 이런 살가운 대접, 선뜻 받는 건 선을 넘는 거다.

"...."

그는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쉬지 않고 이쪽을 꾸중하고 있는 황제. 그 준엄한 표정 속에 깃든 애정이 조금씩 엿보였다. 그래서 난처하고, 미안했다. 이쪽을 아들로 여기고 있을 그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이 났다.

하지만 진실을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라키엘은 한 발짝 선을 긋듯 물러났다.

"염려하시는 바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송구하오나,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어딜 가려는 것이더냐?"

"다른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들이 아닌데도 아들 취급을 받으면서 황제를 속이는 거. 그렇게 뻔뻔하도록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다간 스스로가 가증스럽게 느껴질 것 같았다. 그래서였다. 붙잡기 전에 일어났다. 얼른 예를 표하고 병실에서 빠져나왔다.

"후우."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도망치듯 익숙한 진료실로 걸음을 옮겼다. 반가운 목소리가 이쪽을 반겼다.

"이제야 오시는군요. 환자를 기다리게 만드는 의사라니. 이거, 실례인 건 충분히 알고 계시겠지요?"

이쪽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타박하는 왕녀 아델린. 어쩐지 여기서나 저기서나 두루두루 받는 타박만 받는 게 오늘의 운세인가 보다.

"미안합니다. 다른 VVIP분의 마무리 진료를 하고 오느라."

"다른 VVIP라니요?"

"있습니다, 엄청나게 중요한 분이."

"설마 저보다요?"

"당연하지요?"

"어머나, 매정하셔라?"

"매정하다 매도할 것까지야. 설마 혹시, 왕녀께선 스스로를 굉장히 대단하다고 여기고 계셨는지?"

"...."

아델린이 가자미눈으로 째릿. 그 모습에 쓴웃음만 흘러나왔다.

"어쨌건, 이제 시작합시다. 알죠? 이제 마지막 담석만 딱 하나가 남아 있는 거."

"네. 마지막 담석이 제일 크다고도 하셨죠."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각오는 황태자께서 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야 뭐 항상 각오가 되어 있기는 한데...."

"그럼요?"

"마지막 담석을 깨느라 힘들고 아프면 제가 좀 징징거릴 예정이라서 말입니다."

"설마 그걸 받아줄 거란 기대를 하는 건 아니죠?"

"조금은요?"

"퍽이나."

"와, 매정하셔라."

"매정하다 매도하실 것까지야. 혹시, 황태자께선 스스로를 굉장히 대단하다고 여기고 계셨는지?"

"...."

한 방 먹었다.

라키엘의 쓴웃음이 더욱 짙어지고 말았다.

"그럼 일단 시작합시다. 준비하시고. 쏘시고."

"얍."

"...긕↗!"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하자마자 전신을 쾅, 하고 때려오는 충격파.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다. 혼자라는 사실을 아까 새삼 되새겼으니까.

그러니까 목표에만 집중하면 된다. 왕녀를 치료하고. 대전쟁을 막아내고. 탱자탱자 잘 먹고 잘살면 되는 거다. 그러니까, 지금에 집중하자.

"...흡!"

연달아 몰려오는 충격파를 버텨내며 라키엘은 더욱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한편, 같은 시각. 황도 마젠타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대로.

투두두두두...!

어느 기수가 거칠게 말을 몰고 있었다. 황도 마젠타를 향해 다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앙부아즈에서 출발한, 본국의 급보를 왕녀에게 알리기 위해 서두르는, 앙부아즈의 전령이었다.

99화. 뒤틀린 역사 (1)

투두두두두...!

말발굽이 달린다. 아니, 마나가 달려온다. 대지를 박차고, 아니, 담석을 박살 낼 기세로 달린다. 달려와서 부딪친다.

꽝, 하고.

투콱-!

"...긔입!"

라키엘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했다.

아델린이 발출한 마나. 담석을 때린 마나. 그래서 발생한 충격파. 이걸 끌어들이는 순간은 언제나 극적이라고. 충격파를 흡수해서 타격을 감당할 때마다 식도와 괄약근이 하이파이브를 하며 선수 교체를 외칠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아직 멀었나?'

라키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눈길을 들었다. 앞쪽에 띄워놓은 뽀복이의 불꽃 지느러미 디스플레이 속에 울퉁불퉁한 갈색 구슬이 비치고 있었다. 아델린의 담낭 속 마지막 담석이었다.

거의 다 깨져 간다. 조금만 더 하면 된다. 감개무량한 마음이 퐁퐁 솟구쳤다.

'하. 길었다.'

정확히 16일 동안의 여정이었다. 그동안 아델린이 발출하는 마나의 충격파를 몇 번이나 감당하고 버텼을까. 100번? 200번? 아니. 줄잡아 500번은 족히 될 듯했다.

'그동안 총 6번 기절했지. 헛구역질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했고.'

이처럼 밀도 높은 혹사의 나날을 보낸 적이 있었을까. 결단코 없었다. 역대급 개고생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 짓도 끝이 보였다.

"자아, 거의 끝나 갑니다. 아마도 한 방만 더 때리면 될 거 같은데."

"정말요?"

"예."

"아쉽네요."

"...예?"

"아뇨. 갑니다?"

투컥-!

"긥!"

아델린의 말이 끝나자마자였다.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강렬한 충격파가 쇄도해 왔다. 대비하고 자시고도 없었다. 명치가 푸확 뚫리는 기분. 예전이었다면 반드시 기절했을 충격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읍!'

버텨냈다. 고개를 들었다. 디스플레이 속 담석의 모습부터 확인했다.

'...됐다!'

담석이 제대로 뽀개져 있었다. 그걸 확인한 순간, 상큼한 알림음이 귓가에 울렸다.

딩동!

[당신은 외부에서 가해져 오는 501회의 마나 충격파를 굳건하게 버텨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신은 아스라한 심법을 한계까지 활용하여 충격파를 흡수, 해소하려 노력하였습니다. 이러한 특별한 히스토리가 당신의 마나써클을 한층 견고한 단계로 성장시키는 귀중한 경험적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아스라한 심법에 새로운 옵션이 개방됩니다.]

[스킬 전용 옵션 ② : 격침불가 - 발동시 마나써클의 굳건한 내구력이 신경계를 보호합니다. 옵션 기능이 발동되는 시간 동안 어떠한 충격을 받아도 절대로 기절하거나 의식을 잃지 않고 버텨낼 수 있습니다. (제한 : 하루 1회 / 5분간 발동 가능)]

"...."

이건 뭘까.

뜻밖의 메시지 내용이었다.

'격침불가? 발동하면 하루에 한 번, 5분 동안은 절대로 기절하지 않는다고?'

군침이 절로 츄릅 넘어갔다.

딩동!

[오장육부가 새로운 스킬 옵션에 환호합니다.]

[심장 : 무려 500번이나 넘는 충격파를 버텨냈다. 우리는 강해졌다. 트라하하하!]

[허파 : 허파파파파!]

[대장 : 근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 말입니다.]

[간장 : 싸다구로만 500대 맞아도 댕근마켓에서 묫자리 알아봐야 할 각일 건데ㅋㅋ]

[위장 : 우리 주인이 선택한 길이었으니까 악으로 깡으로 버티긴 했는데 아ㅋㅋ]

[오장육부가 당신에게 2,2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4,700]

'굿!'

라키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덤으로 HP 후원까지 받아냈다. 거기에 '격침불가'도 꿀옵션 냄새가 났다.

'당연하지. 하루에 5분 동안은 기절에 면역인 거잖아. 살다 보면 기절할 거 같은데 기절하면 안 되는 상황이 몇 번은 있을 거니까.'

응급상황이라거나, 왕녀 같은 사람한테 얻어터지면서 도망쳐야 하는 상황과 맞닥뜨릴 수도 있다. 하다못해 야식을 한 입이라도 더 먹고 싶은데 미칠 듯이 졸려서 쓰러질 거 같을 때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건 잘 됐어.'

라키엘은 만족감을 야물딱지게 촵촵 접어 넣었다. 아직은 이 정도로 만족할 때가 아니었다. 왕녀를 향해 말했다.

"후우, 다 끝났습니다."

"...정말요?"

"예. 여기 보이시죠?"

지느러미 디스플레이 속의 깨진 담석을 가리켰다. 왕녀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렇군요. 그럼 이제 이 치료도 끝이겠군요. 한데-"

그녀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저렇게 깨진 담석은 어떻게 되는 거죠? 혹시 몸속으로 흡수돼서 사라지는 건가요?"

"아뇨."

라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몸 밖으로 자연스럽게 배출될 겁니다."

"어떻게요?"

"밥 먹었던 거랑 같이요."

"...."

"끄응차."

"...."

"흠흠, 어쨌건.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엔 이릅니다. 치료 자체가 다 끝나진 않았으니까 말입니다."

"설마 치료할 게 더 남았나요?"

"예. 이제부터 꾸준하게 관리를 해야지요."

라키엘이 말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담석 치료는 담석만 없앴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이후가 더 중요하다.

"원래는 담석이 너무 많이 생긴 경우엔 수술로 담낭 자체를 제거하는 게 제일 깔끔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런 수술을 해드릴 실력은 안 되고. 해서 담석만 제거한 거지요. 그러니 앞으로 관리를 안 하면 담석이 다시 생길 겁니다."

"...다시 생긴다고요?"

"예. 이렇게 젊은 나이에 이만한 담석이 벌써부터 생겼다는 것은 즉, 왕녀께서 담석이 잘 생기는 체질이라는 뜻이니까 말입니다."

"...."

"그래도 걱정은 마세요. 담즙의 배출이 원활해지도록 돕는 약을 처방해드릴 거니까 말입니다."

"그걸 먹으면 담석이 안 생기는 건가요?"

"담즙이 잘 흐르니 고이지 않을 거고, 돌처럼 뭉치는 일이 적어지겠지요. 설령 작은 알맹이가 생긴다 해도 원활한 담석의 흐름에 쉽게 쓸려 나올 겁니다. 알맹이가 커져서 문제가 생기기 전에 말이지요."

사실이었다. 그게 관리의 기본이 될 것이다. 라키엘은 그 점을 명심하며 말했다.

"해서 인진호탕(茵蔯蒿湯)을 달여드릴 겁니다. 일단 보름 동안 그걸 꾸준히 복용하며 탕약이 체질에 맞는지, 담즙의 순환과 배출이 원활히 이루어지는지 살펴볼 거고 말입니다."

"그게 체질에 잘 맞으면요?"

"평생 드셔야죠."

"...."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

"표정이 왜 그러신지...."

"설마 그 인진호탕인지 뭔지, 그것도 코끼리 겨드랑이 맛이 나나 싶어서요."

"어쩔 수 없습니다. 원래 몸에 좋은 약이 입에는 쓴 법이니까요."

라키엘은 방긋 웃었다. 왕녀가 느낄 맛이 끔찍하든 말든, 자신이 먹을 게 아니니까 상관없었다.

그는 곧바로 인진호탕 생산을 시작했다. 인진호탕은 중국 한나라 시절의 상한론(傷寒論)과 조선의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 두루두루 언급된 바가 있었다.

'특히 한의학의 올타임 레전드인 허준 선배님(?)도 즐겨 사용하신 처방이지. 간과 담낭에 열이 차는 증상, 황달, 습열의 징후가 있을 때 이만한 처방이 없거든.'

특히나 담석 생성을 예방하는 데에 탁월한 탕약이었다. 그는 미리 손질된 재료들을 꺼냈다. 인진호탕을 달이는 법은 비교적 간단했다. 먼저 인진호를 팔팔 달였다. 타이밍을 쟀다. 정확한 시점에 대황과 치자를 추가했다. 누그러뜨린 불로 한참을 은근하게 달였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보글보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속에서 인진호탕이 완성되었다.

"...."

왕녀 아델린은 그릇 속의 탕약을 마뜩잖은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솔직히 먹기 싫다. 이미 냄새에서부터 사람을 압도(?)하는 기세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이쪽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태자는 즐기듯이 빙글빙글 웃을 뿐이었다.

"자, 제가 정성으로 달여낸 탕약입니다. 천천히, 차근차근 드셔 보시죠."

"이거, 정말로 꼭 먹어야 하는 건가요?"

"예."

"꼭 이렇게 끔찍한 냄새가 나는 약밖에 없는 건가요?"

"예."

"이걸 먹으면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게 좋아진다는 거죠?"

"듣고 싶으십니까?"

"예."

아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들려 있는 인진호탕이라는 이 괴상한 탕약. 이걸 한 번만 먹는 거라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다.

한데 문제는 이걸 평생 먹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게 싫었다. 벌써부터 끔찍했다. 할 수만 있다면, 핑계를 대서라도 좀 먹기 좋은 다른 약으로 바꾸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간절한 바람은 이어지는 라키엘의 무호흡 16비트 자진모리장단의 연구논문 설명에 부질없이 쓸려가고 말았다.

"그럼 말씀드리지요. 흠흠! 우선 인진호탕이 담석증에 미치는 영향과 작용기전을 조사한 연구논문에 따르자면, 인진호탕 치료는 실험동물의 혈청 및 간의 생화학적 이상을 개선하고, 담도 불균형을 조정했습니다. 또한, 간과 소장에서 관찰되던 ATP 결합 카세트 서브 패밀리 G 멤버 5/8, 스캐빈저 수용체 클래스 B타입 l및 Niemann-Pick C1 Like 1의 발현 증가가 인진호탕에 의해 역전되었지요."

"...."

"이러한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보자면 말입니다. 인진호탕이 결석 유발 식이에 의해 담석증이 유발된 실험동물의 체내에서 담즙 콜레스테롤의 과포화와 콜레스테롤 대사 조절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즉, 담석의 생성을 매우 효율적으로 억제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

"왕녀님?"

"...네?"

"이 정도면 설명이 됐을까요?"

"제가 잘못했어요."

뭔 말인지 모르겠는데 일단 사과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모든 설명이 왼쪽 귓구멍으로 들어와서 전두엽을 찰싹 때리고는 오른쪽 귓구멍으로 숑숑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무슨 반박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결국, 그녀는 항복하고 말았다. 인진호탕을 원샷했다. 맛은 역시나 썼다.

'...이번엔 바다거북이 겨드랑이맛.'

그나마 코끼리 겨드랑이맛보단 좀 나은 걸까. 아델린은 구역질을 참아내며 라키엘이 건네는 사탕을 허겁지겁 받았다. 그렇게 그녀가 사탕을 오도독 씹는 순간이었다.

딩동!

라키엘의 눈앞에 반가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신은 직접 조제한 인진호탕을 환자 : 아델린 보아르네 앙부아즈에게 복용시켰습니다.]

[스킬 : 탕약조제 (Lv.1)의 효과로 약효가 10% 증가하였습니다.]

[환자 : 아델린은 당신의 적극적인 체외충격파 치료를 통해 체내의 담석을 모두 제거 받았습니다. 또한, 당신이 처방해준 인진호탕을 꾸준히 복용함으로써 앞으로 생겨날 담석과 그로 인한 각종 질환을 예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진료비 청구 (Lv.2) 스킬이 발동됩니다.]

[환자 : 아델린은 당신의 치료를 통해 총 67년 10개월의 기대수명 연장 혜택을 받았습니다. 이에 당신은 67년 10개월의 1/1950에 해당하는 보너스 수명을 정산받습니다.]

[12.52일의 보너스 수명이 계산되었습니다.]

[정산되는 수명의 최소 단위는 1일입니다.]

[정산되는 보너스 수명이 반올림 처리됩니다.]

[총 13일의 보너스 수명이 정산됩니다.]

[당신의 예상 기대수명 : 176일]

'나이스. 굿!'

불끈 쥔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됐다. 드디어 해냈다. 왕녀가 완치되었다. 앞으로 그녀가 인진호탕만 꾸준히 복용해준다면? 담석증 때문에 사망할 일은 없을 것이다. 무사히 앙부아즈의 국왕이 될 것이다.

그러면 된다. 소설 마검황에서 마젠타노 황가를 무너뜨린 대전쟁. 그 끔찍한 참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예방될 것이다.

'원작에서 대전쟁을 일으킨 그 폭군, 쟈빌론이 왕위를 받지 못할 테니까. 왕녀가 건재하기만 하면 계속 그럴 거니까.'

그러니까 해낸 거다. 보람찼다. 감개무량했다. 진심으로 왕녀 아델린을 축하해 주려 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쿵쿵쿵!

별안간 밖에서 누군가가 진료실 문을 다급히 두드렸다. 설마 응급환자인 걸까. 그런 생각이 떠오르던 무렵.

"왕녀님! 안에 계십니까! 급보, 본국으로부터의 급보입니다!"

앙부아즈 특유의 억양 섞인 외침이 울려 퍼졌다.

"본국 서부의 방계 왕족, 쟈빌론이 일으킨 반란에 의한 내전이 발발했습니다!"

100화. 뒤틀린 역사 (2)

"본국 서부의 방계 왕족, 쟈빌론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덜컹!

진료실 문이 열렸다. 기사가 뛰어들어왔다. 낯이 익은 자. 왕녀 아델린의 수행기사였다.

"뭐?"

아델린의 표정이 굳었다.

"반란이라니. 내전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말씀 그대로입니다, 왕녀님. 방금 본국에서 보낸 전령이 왔습니다. 쟈빌론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서부의 귀족 다수가 반란에 호응하여 군사를 동원하였고, 현재 국왕 전하의 중앙군이 그들과 대치 중이라는 소식입니다."

"...더 자세히. 그자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와 명분은?"

"그게...."

"가감 없이 고하도록."

아델린의 목소리는 더없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말로는 표현 못 할 묘한 압도감. 듣는 동안 살짝 소름이 돋았다. 수행기사도 비슷한 기분을 느낀 걸까.

"아, 알겠습니다. 우선, 쟈빌론은 보다 위대해질 앙부아즈를 위하여 현재의 나약한 왕실을 타도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보다 위대해져? 지금의 왕실이 나약하다고?"

"쟈빌론의 주장에 따르면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이 왕실을 비난하는 근거가 있나?"

"그것이...."

왜일까.

수행기사가 이쪽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러더니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그들은... 국왕 전하께서 마젠타노에 쉽게 굴복한 외교적 나약함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무어라?"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건넨 무리한 요구를 아무런 저항 없이 수용한 국왕 전하의 결정이 굴욕적 외교였노라고, 왕족을 타국의 볼모로 손쉽게 보내 버리는 나약함을 방관할 수 없노라고,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

"어쨌건, 그 주장과 함께 쟈빌론이 반란을 선포했습니다."

"그에게 가담한 서부의 귀족들은?"

"아마도...."

"그들은 평소 동부의 중앙 귀족들에 비해 입지가 약했지. 그런 대우에 품고 있던 불만을 이번 기회에 드러낸 것일 테고. 맞나?"

"정확하십니다."

수행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왕녀 아델린은 굳은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팔뚝과 주먹에는 힘줄이 잔뜩 돋아나 있었다.

분노한 탓이리라. 본국에서 예고도 없이 날아온 급보. 방계 왕족 주제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자에 대한 노여움. 화가 난 것이겠지. 지금 이쪽의 심정과 똑같이.

'후우. 미치겠네.'

라키엘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엄청난 보람을 느끼고 있던 그였다. 무려 16일 동안 왕녀의 담석 치료에 매달렸다. 그 끝에 모든 담석을 제거하고, 왕녀의 수명을 성공적으로 연장시켰다.

이렇게 역사를 바꾸었노라고. 소설 속의 대전쟁을 예방해 냈노라고. 자신이 만든 성과에 뿌듯해하고 있던 터였다. 한데 그 행복감과 성취감이 앙부아즈에서 날아온 소식 한 방에 와르르 박살 났다.

'내가 기껏 왕녀를 살려놨더니만. 그래서 왕녀가 안정적으로 왕위를 물려받고 평화의 시대를 열 수 있게 멍석까지 다 깔아놔 줬더니. 뭐? 반란? 바아안란?'

...x발 미친 거 아냐?

욕이 나올 거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뛰어가서 쟈빌론이라는 놈의 멱살을 짤짤짤 흔들고 싶었다.

'미친놈. 어오, 그 미친놈이 진짜.'

하지만 마냥 화만 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대강 상황은 알겠다. 쟈빌론이라는 그놈. 원래부터 야심이 많은 놈이었던 거다. 내가 그 점을 너무 얕봤던 거다. 그래서 대전쟁이 아니라 앙부아즈에서 내전이 터져 버린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왕녀와 수행기사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럼 현재 전황은?"

"전령이 가져온 소식에 따르자면 이미 수차례 큰 규모의 접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접전?"

"예, 안타깝게도...."

"...."

"처음에는 국왕 전하께서 직접 지휘하시는 중앙군이 반란군을 밀어붙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쟈빌론, 그 반란군의 수괴가 직접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뒤부터...."

"역공을 받았다는 것이로군. 맞나?"

"예, 왕녀님."

수행기사의 대답이 이어졌다.

"국왕 전하의 중앙군이 위험에 처한 적마저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로는 전열을 재정비하였지만... 이미 처음의 기세를 잃어버린 뒤였고, 발루아 요새까지 물러나 방어선을 구축하였다는 소식입니다."

"아바마마의 중앙군이, 물러나서 방어선을 구축하였다고?"

"예, 왕녀님."

"...."

"앞선 큰 규모의 접전을 거치는 동안 입은 주력군의 손실이 심하다고 합니다. 예상보다 많은 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현재는 동부와 중앙 귀족들의 지원군을 기다리며 대치하는 상황이라고 하였습니다."

"어찌 그런."

아델린의 입에서 탄식이 나왔다.

생각보다 심각한 듯한 전황. 주력군이 많이 죽고 다친 상황. 그런 소식을 듣다 보면 절로 탄식이 나오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순간이었다. 라키엘의 머릿속으로 뭔가, 새로운 생각이 번쩍하고 뇌주름을 스쳐 갔다.

'...어라? 잠깐?'

그는 멈칫했다.

방금 뇌리에 스친 새로운 생각. 그 생각의 꼬리를 추적했다. 붙잡았다. 떠올렸다.

'앙부아즈. 타국에서 생긴 내전. 주력군이 많이 다쳤다고? 부상병?'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앞선 생각이 따라오는 생각을 이끌었다. 서서히 새로운 발상이 뿌리를 내렸다. 펼쳐졌다. 거침없이. 활짝.

'엄청나게 생긴 부상병... 치료해야 할 사람들... 그러니까... 그들을 치료해주면? 살려주면? 그거 전부... 보너스 수명이라는 소린데?'

쿠쿵!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생각의 흐름에 가속이 붙었다.

'물론 전쟁은 안타까운 일이야. 비극적인 사건이지. 하지만 이미 벌어졌어. 그걸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어. 대신 이미 다친 사람들은? 내가 치료할 수 있어. 하나라도 더 살릴 수 있어. 그렇게만 되면? 나도 보너스 수명, 왕창 챙길 수 있어.'

마치 한철 대목 장사를 하는 것처럼. 한 시즌에 왕창 뽑아먹는 것처럼. 보너스 수명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별궁 한의원을 몇 년 동안이나 운영해야 얻을 보너스 수명을 이번 기회에 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건... 대목 찬스!'

라키엘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차피 터진 내전.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은 소설 마검황의 내용과 달리 황제가 건재한 상황이었다. 2황자가 제국을 이끌던 때와 다르니, 설령 쟈빌론이 반란에 성공하여 대전쟁을 일으킨다 해도 소설에서처럼 제국이 무너지는 상황은 나오지 않을 듯했다.

즉, 저 내전은 강 건너편의 불이다.

그러니까 이건 기회다. 기회를 놓치면 바보다. 아니, 그냥 호구가 된다. 이런 기회는 무조건 잡아야 한다. 잘만 하면 수년 동안은 죽을 걱정 없는 수명을 챙길 수도 있으니까!

두쿵! 두쿵!

생각의 물살이 빨라지며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런 이쪽의 생각을 감지한 건지 오장육부도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발상에 혀를 내두릅니다.]

[심장 : 부상병들 살려서 보너스 수명? 와 미친놈 진짜....]

[허파 : 허허허허허파핳ㅋ]

[대장 : 우리 몸뚱이 인성 끝내주지 말입니다.]

[간장 : 근데 뭐 어차피 지들끼리 치고받는 전쟁인데, 부상병들 챙겨주고 살려주면 착한 행동 아님?]

[위장 : 그건 맞지. 그런데 그걸로 한철 장사를 하겠다는 마인드가 레전드인 거짘ㅋㅋ]

[오장육부가 당신의 미친 발상에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한 HP : 4,800]

"...."

뭐, 비난받아도 어쩔 수 없다.

전쟁이 불행한 일이라는 거. 부상병들이 그 피해자라는 거. 충분히 알고 공감한다. 하지만 이쪽도 별궁 한의원을 운영하면서 받는 보너스 수명으로 겨우겨우 연명하는 처지다. 게다가 이미 벌어진 내전이었다. 그걸 이쪽이 어찌할 수는 없다.

'그래서야. 차라리 내가 할 수 있는 거. 사람 치료하고 살리는 거. 그걸 하면서 내 이득도 왕창 챙겨 보겠다는 거지.'

모두가 좋아지는 일이다. 모두에게 이득이 될 일이다.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니 이제는, 수작질(?)을 부릴 때다.

라키엘은 결심했다.

"왕녀님."

수행기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아델린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표정에, 분노가 가득했다. 본국에서 날아온 소식에 비통함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동시에 안타까워하는 기색도 엿보였다. 마치, 집에 일이 생겼는데 퇴근할 수가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내 요구 때문에 6개월간 황도에 머물러야 하니까.'

애초에 황도에 놀러 온 왕녀가 아니었다. 이쪽이 요구한 일이었다. 앙부아즈의 국왕이 수락한 일이었다.

즉, 그녀가 이곳에 온 것은 마젠타노와 앙부아즈 사이의 협정에 의한 결과였다. 그러니 그녀는 본국에 일이 생겼다고 해서, 돌아가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돌아갈 수 없다.

'내 허락이 없다면 말이지.'

싱긋.

라키엘의 입가에 사악한 웃음꽃이 피었다. 그는 미소를 얼른 감추고는 말했다.

"앙부아즈의 소식은 매우 안타깝습니다. 듣고 있자니 비통함을 금할 수가 없군요."

최대한 슬프게 들리도록. 왕녀의 분노에 공감하는 것처럼. 말했다. 미끼를 툭 던졌다.

"하면, 왕녀께서는 이제 바로 본국으로 돌아가실 예정이십니까?"

과연 아델린이 미끼를 콱 물었다.

"아뇨.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어서 말이지요."

그녀가 이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음만큼은 지금 당장에라도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아바마마를 도와 중앙군의 선봉에 서서 반란군을 깨부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허락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제 허락 말입니까?"

"네. 부디."

아델린이 간절한 눈길을 보내어 왔다. 좋다. 입질이 왔다. 라키엘은 회심의 미소를 삼키며 말했다.

"제 허락이라. 그럼 저도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조건인가요?"

"저도 데려가 주시죠."

"...네?"

이쪽의 부탁이 뚱딴지같아서였을까. 아델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왕녀께서 본국으로 돌아가실 때, 저도 함께 데려가 달라는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저를 수행원단에 포함시켜 주십시오. 신분은 적당히 위장하면 될 듯하고. 왕녀님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는 인물 정도면 적당할 겁니다."

"...."

"제가 왜 이런 부탁을 하는지 궁금하실 텐데 말입니다."

"물론이죠."

"밝혀드릴까요?"

"당연히요."

"앙부아즈 왕국군의 후방 부대에 군의관으로 위장 취업을 하고 싶습니다."

"...네에?"

"별거 아닙니다. 방금 귀중한 이웃인 앙부아즈에서 발발한 내전의 소식을 함께 듣지 않았습니까. 저 또한 그 소식을 들으며 비통함을 느꼈습니다. 안타까움도 느꼈습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생각이었죠?"

"제 나름의 방법으로 앙부아즈를 돕고 싶다고 말입니다."

"설마."

"예, 그 설마가 맞습니다. 왕국군의 후방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앙부아즈의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싶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보고 싶습니다. 그게 제가 드릴 수 있을 도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황태자님."

"예?"

"감사합니다."

아델린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엄청나게 감동받은 걸까.

"...."

사실은 앙부아즈를 돕겠다는 마음, 거의 없는데. 그냥 보너스 수명만 잔뜩 챙기겠다는 한철 장사꾼 다짐이 전부인데. 잠깐, 조금은 머쓱해졌다. 하지만 그런 본심은 금방 접어두었다.

"어쨌건 알겠습니다. 그럼 왕녀께서는 본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서둘러 주시지요. 그동안 저는 다른 준비를 좀 해두겠습니다."

"다른 준비라 하심은?"

"황제 폐하 말입니다."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안정적인 앙부아즈행을 위하여. 보너스 수명 한철 대목 장사를 위하여. 이제는 황제와 담판을 지을 때였다. 물론, 황제를 구워삶을 무기도 이미 있다.

101화. 전설은 위장 취업으로부터 (1)

"그래서 짜잔, 황제 폐하께 써먹은 비장의 무기가 제대로 먹혀들었습니다."

"...그대는 누구지?"

왕녀 아델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별궁의 숙소로 들어온 사내를 쳐다보며 눈꼬리를 가늘게 떴다.

황태자 라키엘이 황제를 만나러 가겠다며 나선 것이 한 시간 전의 일이었다. 반드시 이쪽의 일행에 합류하겠다고. 앙부아즈로 가서 의술을 펼쳐 부상병들을 치료하겠노라고. 그렇게 돕겠다고, 고마운 제안을 건넸더랬다.

하지만 그녀는 황태자의 제안을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마젠타노의 황제가 그걸 허락할까.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생각해볼수록 회의적이었다.

그래서 먼저 별궁 별채로 돌아왔다. 수행원들을 시켜 짐을 싸게 하였다. 황태자가 돌아오면 작별 인사를 하고선 곧바로 본국으로 출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겨우 한 시간쯤 되었을까.

난데없이 낯선 사내 하나가 별채 숙소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다가오더니 이렇듯 뜬금없고도 괴상한 소리를 늘어놓는 것이 아닌가.

'뭐지?'

이상했다.

말투와 목소리가 황태자와 똑같았다. 처음 목소리만 들었을 땐 황태자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외모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은발벽안에 창백한 안색의 황태자와 정반대였다.

적색 곱슬머리와 눈동자. 얼굴에는 주근깨도 있었다. 심지어 체격도 달랐다. 왜소하기 그지없는 황태자와 달리, 저 흑발의 사내는 배를 때리면 통통 소리가 날 듯이 빵빵한(?) 체형이었다.

그나마 키만 황태자와 비슷할까.

참으로 이상했다. 희한하기가 그지없었다. 뚱보를 향한 아델린의 미간이 한층 찡그려졌다.

"쯧. 어째서 대답이 없을까. 나는 앙부아즈의 왕녀로서 방금 그대에게 누구인지를 물었건만."

"접니다, 저."

"누구?"

"황태자. 라키엘이요."

"...티에리 경? 이 자를 체포해. 죄목은 황태자 사칭죄다."

왕녀가 곁의 수행기사를 불렀다.

수행기사가 적발의 뚱보에게 위압적으로 다가갔다. 적발 뚱보가 억울하게 외쳤다.

"아니, 진짜라니깐? 힘을 합쳐서 담석 16개를 열심히 뽀갠 지난날의 우정을 잊은 겁니까?"

"...뭐?"

아델린이 멈칫했다.

뚱보의 외침이 이어졌다.

"내가, 어! 왕녀 당신이 쏘는 마나 충격파도 500번이나 넘게 맞아주고, 어! 바다거북 겨드랑이 맛이 난다는 인진호탕도 정성껏 달여서 호호 불어주고, 어! 그랬는데!"

"...."

"게다가 내가, 어! 탕약 먹일 때마다 자두맛 사탕이랑 청포도맛 사탕도 꼬박꼬박 챙겨주고, 어!"

"설마. 진짜 황태자, 당신이에요?"

"맞다니깐요!"

적발 뚱보가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때였다.

"그분은 황태자 전하가 맞으십니다, 앙부아즈의 왕녀시여."

잘생긴 중년의 사내가 숙소로 들어오며 말했다. 눈에 익은 모습. 황태자의 주치의. 가르딘 경이었다. 뒤이어 흑발의 사내, 데미안도 따라 들어오며 덧붙였다.

"외모만 보아선 절대로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말입니다."

"...."

가르딘과 데미안.

둘 다 황태자의 심복이다.

그러니 저 말은 사실이리라.

적발 뚱보, 아니, 라키엘(?)을 돌아보는 왕녀의 눈길에 황당함이 배어났다.

"아니, 이게 진짜. 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셨지요?"

"꼴이라니요. 지금 내 모습이 어때서요?"

"최소 1년은 매일 꾸준하게 밤새도록 야식을 즐긴 것 같은 몸매인데요?"

"행복한 몸매 아닙니까?"

"우리 인류는 그걸 비만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

"어쨌건, 황태자 당신의 심복 두 사람의 증언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믿지 못했을 거예요.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무슨 일이 있었기에 황제 폐하게 허락을 받으러 갔던 황태자께서 이런 모습으로 돌아오신 건지...."

왕녀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라키엘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피어났다.

"뭐, 아까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황제 폐하께 허락을 받으려고 준비한 비장의 무기가 제대로 먹혔습니다. 허락을 받아냈지요."

"허락을요?"

"예."

라키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문득, 아까 황제에게 허락을 받으러 갔던 때의 일이 떠올랐다. 사실 허락을 받는 일은 쉬웠다. 그냥 쉬운 정도가 아니었다.

엄청나게 쉬웠다.

'앙부아즈로 가고 싶은 이유를 황제의 취향에 적당히 맞춰서 말하면 됐으니까.'

내전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었노라고. 부상병이 엄청나게 생겼고, 생길 것이라고.

그들을 치료하겠다는 구실로 왕녀의 도움을 받아 앙부아즈 왕국군에 위장취업(?)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비교적 안전한 후방에서 복무하며 타국의 지휘체계, 군사행정, 운용, 전황의 흐름을 직접 보고 느낄 기회라고.

이런 생생한 경험의 기회는 흔치 않을 것이라고. 반드시 가서 많이 배워오고 싶노라고.

그렇게 말했다.

그랬더니?

손에 합격 목걸이가 쥐어졌다. 요청의 내용이 황제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덕분이었다.

'그 요청을 듣자마자 황제가 반색했지.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자식들을 끊임없이 시험에 빠뜨리는 황제였다. 어떻게든 후계자를 조금이라도 더 빡쎄게 단련시키려고 기를 쓰는 자였다.

한데 이쪽이 먼저 타국의 전쟁터로 가겠노라고, 적당히 몸을 사리며 생생한 경험치를 빵빵하게 채우고 오겠노라고 요청을 한 것이었다.

한국으로 치자면?

엄마 나 영어 학원 더 다닐게요. 엄마 나 과외 하나만 더 해줘요. ...라는 요청과 비슷한 게 아닐까.

어떤 부모라도 아이에게서 저런 자발적인 요청을 받으면 엄청나게 기뻐할 것이다. 가정 형편이 허락하는 한 요청을 들어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요청을 듣자마자 호탕하게 웃었다. 더욱 자세한 계획을 물어왔다. 조금만 더 나갔으면 아예 기립박수까지 할 기세였다.

"...그래서입니다. 궁정마법사의 변장 마법을 요청했지요. 물론 폐하께선 흔쾌히 허락하셨고 말입니다."

"덕분에 온몸이 빵빵해지신 거군요?"

"너무 직설적인데요. 기왕이면 후덕해졌다고 해주시죠."

"그래서 스테이크 몇 장까지 드실 수 있으세요?"

"겉모습만 이런 거지, 신체적인 특징은 원래 그대로입니다."

아델린의 짓궂은 물음.

라키엘이 콧김을 풍 내뿜었다.

"모습만 바뀐 겁니다. 체중은 원래 그대로고 말입니다. 뭐, 소화력이 달려서 입이 짧은 것도 그대로일 겁니다. 이건 그저 '겉모습만' 바꿔주는 변장 마법이라서 말이지요."

"아, 그런 건가요?"

"예. 심지어 강한 물리적 충격을 받으면 변장 마법이 풀릴 수도 있습니다."

"강한 충격이라면 어느 정도...?"

"한 방에 기절할 정도쯤이라더군요."

"그럼 일상생활에선 마법이 풀릴 걱정이 없겠군요?"

"예. 덕분에 안심하며 위장 신분을 유지할 수 있을 테고요. 예를 들자면 이런 신분 말이죠."

팔랑!

라키엘이 서류를 내밀었다.

아델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황제 폐하께서 마련해 주신 위장 신분증명서입니다."

"...."

아델린의 눈길이 증명서를 훑었다.

"이름... 리한 벨킨... 나이는 23세... 몰락한 귀족가 벨킨 가문의 후예이며, 황도 마젠타에서 공공 의료교육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하였음... 이라고요?"

"뭐, 구색만 그럴듯하게 갖춘 가짜 신분입니다."

"이름이 리한이라. 특이한 이름이군요."

"그냥 생각나는 대로 즉석에서 지은 겁니다."

라키엘은 멋쩍게 웃었다.

리한.

사실은 자신의 한국 본명을 영문 표기로 부르던 이름이었다.

"어쨌건, 그게 앞으로 제가 써먹을 위장 신분입니다. 몰락 귀족인 젊은 의사 리한, 앙부아즈에서 온 왕녀와 우연히 친교를 다지게 되었고, 왕녀에게서 후원을 약속받고서 앙부아즈로 동행하게 되는 인물이지요."

"소설 같은 이야기로군요?"

"뭐, 그렇게 왕녀의 후원을 받으며 앙부아즈 왕국군의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자신의 재능을 연마하려는 진취적인 청년이랄까요."

"진취적인...."

"왜요. 이상합니까?"

"네."

"...."

아델린의 돌직구가 명치에 콱 꽂혔다.

그녀가 물었다.

"그럼 여기 두 사람은요? 혹시 동행하는 건가요?"

그녀가 가르딘 경과 데미안을 가리켰다. 라키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 둘은 이제부터 저를 도련님이라고 부르게 될 겁니다."

"도련님이라뇨?"

"몰락한 가문에 남은 충신이라는 설정이지요."

"...의외로 설정에 충실하시군요."

"그래야 위장 신분이 그럴듯해질 테니까 말입니다."

어쨌건 앙부아즈에 갔을 때 티만 나지 않으면 된다. 내전이 끝날 때까지 적당히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게다가 후방에서 근무하는 일개 군의관이 주목을 받을 일도 없을 거니까.'

말 그대로 내전이 끝날 때까지 열심히 부상병들만 돌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한철 장사에 매진하듯. 대목 시즌에 아주 뽕을 뽑듯이. 그렇게 얻어낼 이득만 치킨 다리만 빼먹듯이 쏙쏙 챙길 생각이었다.

'그거만 마치고 돌아오면 되는 거야. 그러면 보너스 수명, 왕창 얻을 수 있어. 잘만 하면 별궁 한의원을 몇 년씩 운영해야 얻을 수명을 단기간에 챙길 수 있을 거야.'

그러기 위한 준비도 착착 갖추었다. 별궁 한의원은 웨어울프 간호사들에게 임시로 맡겼다. 뛰어난 후각으로 자잘한 병은 진단이 가능한 간호사들이었다. 심지어 어지간한 의사들보다 적중률이 뛰어날 정도였다.

그들에게 각 병의 치료에 적합한 탕약 몇 가지의 레시피를 전수했다. 기존의 입원 환자들 각각에 맞는 처방도 모조리 기록하여 전달했다. 최소 몇 개월 정도는 자신이 없어도 그럭저럭 한의원을 굴리는 데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황태자 라키엘은 당분간 건강의 이상을 이유로 침상에 누워 요양하며 외부인과의 접촉을 최소화한다... 라고 대외에 알려질 겁니다."

"그럼, 이제 준비가 끝난 건가요?"

"예. 왕녀님 측은?"

"우리도 끝났습니다."

왕녀가 마차에 올라탔다.

라키엘도 함께 탑승했다.

이로써 모든 준비가 끝났다.

덜컹!

마차가 출발했다.

왕녀의 수행원단에 섞여 별궁을 떠났다. 황도 마젠타를 금방 벗어났다.

관문을 지나.

대로를 가로질러.

들판과 강을 건너고.

언덕과 산을 넘었다.

몇 개의 도시와 요새를 지나쳤다. 낮과 밤이 몇 차례씩 바쁘게 뒤바뀌었다. 마젠타노와 앙부아즈 사이의 국경을 통과했다.

국경을 넘으며 라키엘은 내심 다짐했다.

'부상병들 치료, 잘해보자.'

최대한 많이 살려내리라. 보너스 수명을 왕창 얻어내리라. 그 외엔 어떠한 일에도 신경 쓰지 않으리라. 오직 부상병 치료와 보너스 수명 획득에만 집중하는 몇 개월을 보내리라.

'그러니까 절대로 튀지도 말고. 내 할 일만 묵묵하게 하면 돼.'

굳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래서였다.

그는 몰랐다.

절대 튀지 않겠다는 다짐. 묵묵히 부상병만 살리겠다는 다짐. 그렇게 보너스 수명만 야물딱지게 쌓겠다는 다짐.

그 개인적이고도 이기적인 자신의 다짐이 앞으로 앙부아즈의 국가적 내전에 얼마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지를, 장차 역사서에 길이 새겨질 거대한 업적을 만들어내게 될지를. 이 순간의 그는 전혀 예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102화. 전설은 위장 취업으로부터 (2)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데미안, 자네도 그러한가?"

"예, 가르딘 경."

"그 예감, 아마도 착각이 아닐 걸세."

"하면 우리는 이제 어쩌면 좋을까요."

"방법이 있나. 우리가 선택한 주군이니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지."

"...."

따각따각 천천히 움직이는 일행. 그 행렬의 끄트머리에서 데미안과 가르딘 경은 나란히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의 눈길은 행렬 중간의 마차를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마차에 타고 있을 황태자를 향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하시는 걸까요."

"그러게나 말일세. 솔직히 나도 이해가 안 되는군."

"가르딘 경도 그렇습니까?"

"그렇지. 대체 누가 선뜻 이해하겠나. 자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타국의, 그것도 일개 부상병들을 치료하겠다며 선뜻 나서는 황족이라니."

"덕분에 가르딘 경과 저까지 함께 묶여서 여기까지 끌려오게 됐죠."

"...하아."

"후우."

두 사람의 한숨이 깊어졌다.

이것은 악덕 업주의 전횡에 신음하는 피고용인의 애환!

"하아. 난 다음 주에 약속이 있었는데."

"예? 약속이라니요?"

"데이트 말일세. 데이트."

"...교제하는 여성분이 있었습니까?"

"교제까지는 아니고."

"그럼?"

"그냥 만나는 거지."

"...."

"원래 다들 그러는 거 아닌가? 그러다가 마음 맞으면 교제하는 거고. 교제하다가 마음이 떠나면 헤어지는 거고. 난 항상 그래 왔는데 말이지. 한... 스무 번쯤? 아니, 더 되나?"

"...."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지?"

"아닙니다. 그냥 잠깐 화가 나고, 이게 나라인가 싶어서."

"...으음? 왜?"

"됐습니다. 그나저나, 가르딘 경께서는 데이트 약속을 놓치셨으니 그만큼 더 많은 수당을 요구하셨겠습니다?"

"수당?"

"예."

"무슨 수당?"

가르딘 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데미안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 대꾸했다.

"파견 수당 말입니다."

"파견... 수당?"

"예. 황태자 전하를 따라 이렇게 멀리, 타국인 앙부아즈까지 왔지 않습니까."

"그, 그렇지."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장거리 파견 업무인 거고. 당연히 수당을 받아야지요. 게다가 이곳은 내전, 즉 전쟁 중인 국가입니다. 당연히 근무 환경의 위험성에 대한 위험수당도 따로 보장받아야 할 거고 말입니다."

"음, 어...."

"왜 그러십니까?"

"아니, 그게...."

"그게?"

"난 그런 거, 몰랐는데."

"설마. 수당 협상을 안 했습니까?"

"...어."

"훗."

"...."

"1승 1패."

"...쩝."

가르딘 경과 데미안.

두 남자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서렸다. 사실 말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둘 다 앙부아즈까지 온 사실에 대한 불만은 거의 없었다. 아니, 사실은 황태자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나에게 의술이 있고, 저곳에 치료가 필요한 환자가 있으니, 마땅히 만사를 제치고 달려가 환자를 돕고 구한다... 사실은 그게 당연한 일인데. 그 당연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전하께서 선뜻 실천하실 줄이야....'

가르딘 경은 가슴이 뜀을 느꼈다.

문득, 처음 의술을 배우던 시절이 떠올랐다. 지금보다 조금은 더 순수하고, 순진했던 시절이었다. 당연한 일을 실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만 여겼던 시절이었다.

한데 지금 자신의 모습은 어떠한가. 달라졌다. 어느 샌가부터 황태자 전하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의술을 펼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아직 한참 멀었구나.'

그는 반성했다.

제멋대로 오해한 황태자의 모습을 보며 다짐했다. 전하의 저러한 마음가짐을 배우자고. 더 노력하자고.

한편, 데미안의 감탄은 결이 조금 달랐다.

'타국의 부상병을 치료하러 달려가는 황태자. 과연 진짜가 맞을까. 그런 미친 인간이 현실에 존재한다고?'

그런데 존재하는 것 같다. 무려 자신이 모시는 황태자다. 진심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상관없나. 나는 그저 수당만 제대로 챙겨 받으면 되니까.'

그게 전부라고 데미안은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일행이 마침내 앙부아즈 왕국군과 합류했다.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라키엘은 왕녀 아델린의 지원을 받았다. 그녀의 보증과 후원 덕분에 무사히 앙부아즈 왕국군의 군의관으로 위장 취업(?)할 수 있었다.

곧바로 부임지를 배정받았다.

안전한 후방의 부상병 캠프였다.

"고맙습니다. 왕녀님 덕분에 일 처리가 매우 간단했군요."

"무슨 그런 말씀을. 저야말로 고맙지요."

팔랑!

왕녀 아델린이 빙긋 웃으며 종잇조각을 흔들었다.

"여기 적힌 레시피대로 하면 인진호탕을 달일 수 있다는 거죠?"

"예. 인진호탕에 들어가는 약재가 단순한 편이라,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대신-"

"절대 빼먹지 말고 매일 복용할 것. 그래야 담석이 생기는 걸 효과적으로 예방할 수 있을 테니까. 맞나요?"

"...맞습니다. 이제 한의사 다 되신 듯."

"그럼, 부상병 캠프에서도 부디 무탈하시구요."

"안전한 후방이니 별일 없을 겁니다."

"네. 그럼."

그렇게 아델린의 배웅을 받았다. 데미안, 가르딘 경, 그리고 왕녀가 붙여준 십여 명의 호위기사와 함께 왕국군 본진을 출발했다.

다시 여정이 이어졌다.

산 넘고 물 건너...진 않았다. 후방의 부상병 캠프는 왕국군 본진이 주둔한 발루아 요새에서 불과 반나절 거리에 있었다.

'체감되는 거리로 따지면, 으음. 서울 연세대 앞에서 일산 정도?'

덕분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한데 도착한 부상병 캠프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상하다기보다는....

"뭐야. 여기 왜 이렇게 허름해?"

본진에서 불과 반나절 떨어진 거리인데. 지척에 불과한 곳인데. 그런데 캠프의 상태가 굉장히 허름해 보였다.

"...."

라키엘은 캠프를 슥 둘러보았다. 캠프 주위로 둘러쳐진 목책은 허술하기가 짝이 없었다. 유사시를 위한 방비나 방어? 사치일 듯했다. 저걸론 좀도둑도 제대로 못 막을 듯했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곳곳에 세워진 천막 상태 실화? 찢어져서 너덜거리는 건 기본에다가, 최소한의 보수를 한 흔적도 거의 안 보여. 그냥 넝마 상태인데. 비라도 오면 줄줄 새겠구만.'

보고 있자니 이상했다.

라키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설마.'

문득 떠오른 역사적 지식.

그 순간 그의 걸음이 바빠졌다.

"여기, 의무병은 없나?"

펄럭!

가까이에 있는 천막으로 다가갔다. 천막 휘장을 걷으며 안쪽을 향해 물었다. 그 직후, 그는 흠칫해야 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안쪽의 참상을 목격한 까닭이었다.

"...."

천막 안쪽에서는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죽은 사람은 대답을 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천막 안쪽의 이들은 모두 죽어 있었다.

'이게 무슨.'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새까만 파리 떼. 그 아래에 있는 여덟 구의 시신.

반듯하게 눕혀진 것도 아니었다. 나뒹굴고 있었다. 저렇게 방치된 지 얼마나 된 걸까. 이틀? 사흘? 나흘? 족히 그 이상은 되어 보였다. 이미 부패가 진행되는 시신도 있으니까.

그때였다.

"거기 누구십니까?"

뒤에서 누군가의 물음이 날아왔다.

돌아보았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병사가 보였다. 앙부아즈 왕국군의 군복을 입은 병사였다. 희한하게도, 병사의 군복은 전혀 허름하지 않았다. 표정도 태연했다.

천막 안쪽에는 방치되어 나뒹구는 여덟 구의 시신. 천막 바깥에는 멀쩡한 모양새의 왕국군 병사. 넝마가 된 천막 쪼가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서 나란히 놓인, 너무나 대조적인 광경.

이상했다.

정말로 이상했다.

라키엘은 굳은 눈길로 병사를 쳐다보았다.

"내가 누군지보다 그쪽부터. 누구지?"

"아, 본진에서 내려온 장교이십니까?"

"그쪽이 누구인지 물었다."

"저는 부상병 캠프의 관리병입니다. 그런데 본진에서 내려온 장교가 맞으십니까?"

"군의관이다."

"군의...관 말입니까?"

"그래."

"으음, 그런 분이 오신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병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태연한 모습이 너무나 이상했다. 라키엘은 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쪽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여기, 이 천막 안쪽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는 있는 건가?"

사람 여덟이 죽었다. 그러고도 며칠째 방치된 모습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부상병 캠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돌아오는 병사의 대답은, 더욱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천막 안쪽 말입니까? 알고 있습니다. 다 죽었겠지요."

"...뭐?"

"아, 혹시 아직 안 죽은 인원이 있습니까? 그럼 곤란한데 말입니다. 다음 부상병들을 넣어둘 자리가 모자랄 거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이지?"

"아아. 군의관님께서는 부상병 캠프가 처음이시라 아직 잘 모르시나 봅니다. 천막 안의 인원이 다 죽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리를 비울 거고, 다음 부상병들을 채워 넣을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뭐?"

"그래서 저는 천막 상태를 확인하러 온 겁니다. 안쪽의 인원이 때맞춰서 다 죽어 있으면 시신을 치워서 소각장으로 보내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혹시 안쪽에 파리가 많이 생겼습니까?"

"그건 왜?"

"시신 치울 때 성가셔서 말입니다."

"...."

라키엘은 침묵했다.

아까 얼핏 떠올랐던 역사적 지식. 언젠가 책을 통해 보았던 역사의 단편. 그 내용이 다시금 뇌리에 주르륵 펼쳐졌다.

'중세 유럽. 그 시대의 전쟁과 부상병....'

당시엔 부상병에 대한 대우가 매우 열악했다고 했던가. 전쟁터에 끌려온 징집병은 죽으면 끝인 소모품으로 여겨졌노라 했다. 그래서인지 부상병에 대한 제대로 된 치료나 간호, 재활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었다고 했다.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조금 다치면? 아무도 신경을 안 썼다지. 그렇다고 해서 크게 다치면?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로 중상을 입으면? 마찬가지로 아무도 신경을 안 썼어.'

그저 후방으로 옮겨두기만 했다고 하였다. 그 이유도 회복이나 치료를 위해서가 아니었다고 했던가.

'중상을 입은 자들을 부대에 함께 두면... 함께 이동하기가 번거롭고 나머지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지. 그래서였어. 부상병들을 후방으로 옮긴 것은. 그저 보이지 않는 곳에 팽개쳐두고 방치하기 위함이었지.'

그럼 후방으로 옮겨진 부상병들의 운명은 어떠했을까. 비참했다고 했다. 정말 최소한의 치료만 받아도 감지덕지. 대부분은 방치되며 알아서 죽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했다.

개중에 기적적으로 회복되는 병사는?

그게 운명이었다며.

신의 은총이 깃들었다며.

커다란 행운을 받았다며.

다시 전쟁터로 보내지는 게 다였다!

'딱 그거지. 알아서 죽거나. 운 좋으면 살아서 다시 전쟁터로 보내지거나.'

당시엔 책을 읽으며 얼마나 혀를 내둘렀던지. 뭐 저런 엿 같은 곳이 다 있나 싶었다. 그런데 여기 부상병 캠프가 딱 그런 듯했다.

눈앞의 태연한 병사를 보아도. 천막 안쪽의 죽어 있는 이들을 보아도. 도저히 아니라고 부정할 수가 없었다.

'하아. 인생 진짜.'

절로 깊은 탄식이 나왔다.

비참하게 죽은 부상병들의 모습에 연민을 느껴서? 생각지도 못한 컬처 쇼크를 느껴서? 그건 당연했다. 한편으로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기껏 이렇게 멀리까지 왔는데 캠프 상태가 이러면, 보너스 수명은 어떻게 얻지?'

이대로면 망하는 각이다.

이래선 안 된다.

캠프의 분위기를 바꾸어야 한다. 부상병에 대한 인식과 대우를 개선해야 한다. 그래야 부상병들이 산다. 자신도 여기까지 온 목적을 이룰 수 있다. 그야말로 모두에게 윈윈이 되는 셈이다.

그러자면?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

결심한 라키엘이 입을 열었다.

"그쪽, 캠프의 관리병이라고 했나."

"네? 네!"

"이름과 소속은?"

관등성명을 물었다. 이쪽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걸까. 병사가 얼른 답했다.

"21 지원대대 소속의 루에노 상등병사입니다."

"그래. 루에노 상등병사. 그럼 이 캠프의 책임자가 누구지?"

"그... 대대장님이십니다."

"대대장 누구."

"프로뱅 자작님이신데 말입니다."

"그래? 프로뱅 자작이라. 지금 이 캠프에 있어?"

"예, 그렇습니다."

"잘됐네. 튀어오라 그래."

"...예?"

상등병사가 흠칫했다.

하지만 라키엘은 개의치 않았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듯, 확신을 품고서 오히려 한결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서 전하란 말이다. 여기 대대장이라는 작자, 1분 줄 테니까 당장 튀어오라고."

103화. 전설은 위장 취업으로부터 (3)

물론 대대장이 당장 튀어오는 일은 없었다. 그는 이쪽의 말을 아예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래서 이젠 직접 쳐들어가시는 겁니까?"

"어. 그래야지."

라키엘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데미안이 뒤를 따르며 물었다.

"괜찮으실까요?"

"음?"

무슨 뜻일까, 저 물음은.

녀석을 돌아보았다.

"지금은 위장 신분을 쓰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 덕분에 표면적으로는 일개 군의관일 뿐이고, 대대장이 내 말을 순순히 들을 리가 없을 거다?"

"송구하지만, 예."

"괜찮아."

라키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아리송하다는 기색을 내비치는 데미안. 녀석을 뒤로 두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대대장의 지휘 천막을 찾기는 매우 쉬웠다. 가장 크고, 화려하고, 멀쩡한 천막을 찾으면 되었으니까.

'거의 대궐이구만.'

뻥 좀 섞자면 한국에서 살았던 투룸 전셋집 크기는 되어 보이는 천막이었다.

그 안으로 들어갔다.

펄럭!

"실례합니드아."

안쪽을 향해 상큼한 인사를 건넸다. 물론 돌아오는 훈훈한 화답은 없었다. 대신 노골적으로 삐딱한 시선만이 날아왔을 뿐.

"댁이 오늘 부임했다는 새 군의관이오?"

검은 콧수염을 기른 중년인이 간이 침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아마도 대대장이라는 프로뱅 자작인 듯했다. 그런데 저 작자, 설마 해가 중천에 떠오른 지금까지 자다가 일어난 걸까.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라키엘의 입가에 조소가 맺혔다.

"맞습니다. 군의관 리한입니다. 그런데 혹시 아까 상등병사를 통해 전달한 말을 못 들으셨는지?"

"들었소. 나보고 당장 와보라고 하셨다지?"

"그렇습니다만."

"그게 얼마나 경우 없는 행동인지에 대한 자각은 있소?"

"어떤 점에서 말입니까?"

이쪽을 향해 노골적으로 따져 오는 대대장. 하지만 라키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태연하게 반문했다.

대대장의 콧수염이 꿈틀거렸다.

"나는 이곳 부상병 캠프의 최고 책임자요. 지휘관이기도 하고. 한데 일개 군의관인 그쪽이 나를 더러 오라 가라 할 수 있단 말이오?"

"아. 그래서 불만이셨군요."

"당연하지. 군의관이 귀하다고는 하지만 내게 특별대우를 받으려는 생각은 일찌감치 접으시오."

대대장의 말투가 근엄해졌다. 자신의 권위가 통한다고 착각한 걸까. 아무래도 그런 거겠지.

같잖다.

라키엘은 더욱 노골적인 조소를 머금었다.

"특별대우라. 그건 제가 아니라, 부상병들이 받아야 하는 거 아닐까요."

"...뭐요?"

멈칫하는 대대장.

그를 향해 말했다.

"오면서 봤습니다. 아니, 오자마자 봤지요. 이곳 캠프의 부상병들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말입니다."

"취급이라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요?"

"제때에 치료받지 못하고 있더군요. 방치에 가까운 상태로 죽어가는 이들이 수두룩했습니다. 그런데 대대장님은 조금 전까지, 해가 중천에 떠오르도록 늦잠을 즐기고 있었지요. 하여 묻고 싶습니다. 여기, 부상병 캠프가 맞습니까?"

"당연히 맞소. 부상병이 있으니까 부상병 캠프지."

"...."

방금, 엄청난 대답을 들은 것 같은데.

라키엘은 귀를 의심했다. 대대장의 상식을 짓밟는 대꾸가 이어졌다.

"부상병이 모여 있으면 그게 부상병 캠프지, 뭐겠소? 그리고 나는 부상병을 관리하는 몸이오. 저들이 누워서 잘 수 있는 잠자리, 굶어 죽지 않도록 먹을 음식과 물을 관리하고 제공하는 사람이오. 그거면 충분한 것 아니오?"

"뭐라고요?"

"틀렸소? 까놓고 말해서, 부상병이라는 것들 말이오. 어차피 못나고 약하니까 전쟁터에서 못 버티고 다친 것들 아닌가? 더 강하고 빨랐으면, 영리하게 움직일 줄 아는 놈이었으면, 저렇게들 멍청하게 다치고 다 죽어가는 꼴로 실려 오지도 않았을 테지. 안 그렇소?"

"...."

"그러니까 나약하고 멍청한 것들한테 무슨 거창한 정성을 쏟는단 말이오? 잠도 재워주고 밥도 주면 됐지. 그 정도면 오히려 감사해 하면서 알아서 나아야 하는 거 아닌가 말이오."

"...."

"내 말 틀렸소? 그러다가 못 나으면? 그것도 나쁘진 않지. 쓸데없는 입을 줄이는 거니까. 당장 전쟁터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밥만 축내는 놈들이 사라져 주는 거니까.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

"...."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리 적당히 서로 봐주면서 지냅시다. 어? 나 안 그래도 바빠. 힘들어. 여기서 매일 죽어나가는 것들 태워서 처리하는 것도 지겹고. 이따위 거지 같은 좌천직에서 벗어나서 전쟁터로 돌아가고 싶고. 적군의 모가지를 썩썩 베면서 다시금 명예도 되찾고 싶단 말이오. 어?"

"...."

"그러니까 나는 여기서 몇 달쯤 부대시설 관리에나 힘쓰며 실적이나 쌓다가 다시 상부의 내 자리로 돌아갈 거요. 그러니까 당신도 적당히 합시다, 어? 보아하니 솜털도 보송보송한 것이, 전쟁터도 처음인 것 같은데. 괜히 쓸데없는 의욕으로 서로 피곤할 일이나 만들지 말고 말이오."

"...하."

라키엘은 웃어 버렸다. 제일 먼저 든 고민은 뭐라고 쌍욕을 박을까였다.

'이 인간, 대놓고 쓰레기 꼰대 스타일이네.'

몇 마디 주절거리는 걸 듣다 보니 파악이 됐다. 한국에서도 저런 인간들 제법 봤으니까. 특히 전경 시절에 그랬다.

'철밥통 간부들이 딱 저랬지. 조금만 신경을 쓰면, 조금만 더 노력하면 얼마든지 생활을 개선할 수 있었어. 갖가지 부조리를 없앨 수 있었어. 모두가 나아질 수 있었어. 하지만 그걸 하지 않았지. 왜냐. 당장 귀찮으니까. 자신한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였다.

자기 편한 일만 추구했다. 아랫사람들이 힘들든 말든 나 몰라라 했다. 차라리 거기까지였으면 나쁘진 않았을 것이다.

'더 최악은... 부조리를 바꾸려는 의욕을 보이는 사람에게 사사건건 태클을 걸었다는 점이야.'

번번이 개혁 의지를 꺾어 버리곤 했다. 부조리와 불합리에 물든 현재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왜냐.

그게 자신에게 편하니까. 유리하니까. 그렇게 했다.

'뭐, 사회에서도 저런 스타일 제법 봤고.'

자신의 한의원에 영업을 오던 제약사 직원도 떠올랐다. 하루는 상사 때문에 고민이 많노라던 하소연도 들어주었다. 그 영업 직원의 상사도 저런 스타일이었더랬다.

그런 덕분이었다.

라키엘은 대대장의 의도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인간도 똑같아. 현상 유지. 현재 상태가 얼마나 거지 같든 말든, 상관없이 현상 유지만 하는 게 목표인 거야.'

그래선 곤란하다.

자신은 부상병들을 살려야 한다. 그래야 보너스 수명을 알뜰살뜰 적립할 수 있다.

'한데 하필이면 내가 부임한 곳의 관리 책임자가 오직 현상 유지만을 목표로 두는 철밥통 스타일이라. 그럼, 마지막 기회만 살짝 줘볼까.'

대대장을 보는 라키엘의 눈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입가에는 미소를 유지했다. 그가 말했다.

"쓸데없는 의욕으로 서로 피곤할 일이라....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그래서 저도 몇 가지 요청만 좀 하고 싶은데 말입니다."

"요청 말이오?"

"예."

"하아, 나 참. 뭘 요청하고 싶은 거요?"

"우선 부상병들이 머무는 천막부터 상급 신품으로 교체해 주십시오."

"...뭐요?"

"말씀 그대로입니다. 오면서 캠프를 둘러보니 부상병들이 사용 중인 천막이 너무 심하게 낡았더군요. 추위나 비바람을 제대로 막을 수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면 곤란합니다. 부상병들이 최대한 편안하게 휴식하며 체력을 보존할 수 있어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게 무슨 헛소...."

"헛소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캠프의 기간병을 동원하겠습니다."

"기간병을? 어째서 말이오?"

"부상병을 분류해야 하니까 말입니다."

"분류...?"

"예. 트리아지(triage) 방식을 곁들일까 합니다. 워낙 다양한 부상병이 섞여 있으니까 말입니다. 중증부터 경증까지. 치료가 시급한 부상병과 다소 여유가 있는 부상병을 구분해야 합니다. 치료의 우선순위를 정해서 치료를 시행해야 합니다. 부상병은 많고, 일손은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

"그리고 개인 위생과 보급에도 더욱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조금 전에 오면서 봤는데 부상병에게 지급되는 음식의 상태가...."

"그만!"

"...."

라키엘은 대대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대대장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허. 참. 아까 내가 한 소리 못 들었소? 서로 피곤하지 않게 하자고 했잖소. 그런데 뭐? 천막을 전량 교체? 환자 분류? 위생? 음식을 뭐? 지금 이거, 뭐 하자는 거요?"

"부상병을 살리자는 겁니다."

"허. 이거 참. 사람 또 피곤하게 만드시는구만. 이보시오, 군의관. 내가 댁 같은 군의관을 처음 겪어보는 줄 아는 거요?"

"더 있었습니까?"

"물론이지. 더 있었지. 제법 있었소. 다들 처음 부상병 캠프에 보송보송하고 순진한 얼굴로 부임 받아 와서는, 댁처럼 의욕을 불태우지. 순수한 열의와 열정을 내보이곤 하오. 환경을 바꿔야 한다고. 하나라도 더 살려야 한다고 말이오."

"...."

"그렇게 설치면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오. 처음엔 나도 호응해 주었소. 어쨌건 부상병이 조금이라도 살아나는 게 나쁜 일까진 아니니까. 귀찮아도 그 정도는 감내할 만하니까. 그런데 그렇게 호응해 준 결과가 뭐였는지 아시오?"

"뭐였습니까."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다들 도망치더이다. 약속이나 한 듯이,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말이오."

대대장이 이를 갈았다.

"하. 그래서 솜털 보송보송한 애송이들 장단에 맞춰 주는 게 아니었는데. 설치기는 더럽게 설치고. 그렇다고 딱히 부상병들이 더 많이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괜히 사람 피곤하게만 만들면서 성과는 없고. 그러다가 스스로 감당이 안 되니까 얼굴도 못 들고서 다른 편한 곳으로 줄행랑을 치고 말이오."

대대장이 울분을 터뜨렸다.

"그래서요. 나는 댁 같은 애송이들이 싫소. 제대로 피를 만져본 적도, 죽어가는 사람을 간호해본 경험도 없는, 오로지 책으로만 머릿속에 지식을 욱여넣은 애송이들 주제에 자기가 뭐라도 된 듯이 나서서 설치곤 하지. 그거, 서로 피곤해지는 거요. 알겠소? 댁도 다를 거라는 보장, 있소?"

"...."

"어째서 대답이 없소? 그럼 나와 내기 하나 합시다."

"무슨 내기 말입니까?"

"내가 보는 앞에서 부상병 하나를 살려보시오. 그럼 댁의 실력을 인정하고 순순히 협력해주지. 어떻소?"

"...."

대대장 이 작자, 미친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대대장이 휘하의 병사를 불렀다. 뭐라고 지시했다. 병사가 뛰어나갔다. 이윽고 천막 바깥이 분주해졌다.

그리고....

"명대로 부상병을 데려왔습니다."

병사들이 들것을 가지고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들것에 부상병이 실려 있었다. 딱 봐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대대장이 부상병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보시오. 댁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려는 부상병을 데려왔소. 그러니 여기, 이 자리에서 이 부상병을 살려내 보시오. 어디 실력부터 좀 봅시다."

대대장의 목소리는 어느덧 기세등등해져 있었다. 이쪽이 위축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이쪽을 그렇게나 애송이로 여긴 걸까.

웃음이 나왔다.

'허허허.'

이래 봬도 내가 한의원을 꾸리던 인간이었다. 지금도 별궁 한의원의 원장이다. 어쨌건, 대대장의 태도를 보니 확신이 들었다.

'협상 결렬이네.'

솔직히 마지막 기회를 주려고 했다. 최대한 좋게 좋게 협력을 받아보려 했다. 그래야 자신도 편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곳 캠프의 운영 실태, 각종 물자의 보급 상태, 장구류 현황, 각 제대의 관리병 인원 동향 등등의 행정적인 부분을 저 인간이 가장 잘 꿰고 있을 테니까.'

어쨌건 대대장이니까.

지휘관이니까.

협조를 받으면 그런 자잘한 부분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질 거라고 보았다. 그러면 자신도 의술에만 힘을 쏟을 수 있으리라 보았다.

하여 협조할 각을 재었다.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그런데 방금, 저 인간이 스스로 기회를 걷어찼다.

그렇다면 결론은 명확하다. 이쪽이 행할 일도 확실하다. 라키엘의 시선이 한층 서늘해졌다.

"데미안."

곁의 데미안을 불렀다. 대대장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 자를 제압하고 구금해."

"알겠습니다."

명령과 실행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이쪽이 명령하자마자 데미안이 검을 검집째 들었다. 대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 하는 사이에 데미안이 움직였다.

후웅, 뻐걱!

"...억!"

데미안이 낮게 휘두른 검집이 대대장의 발목을 후려쳤다. 대대장의 두 다리가 허공에 떴다. 등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커억!"

대대장이 나뒹굴었다.

옆의 병사들이 움찔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반응할 틈은 없었다. 어느새 검집에서 뽑힌 데미안의 검 끝이 쓰러진 대대장의 면전에 들이대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커, 커으읍, 이, 이게 무슨 짓이오!"

대대장이 시뻘게진 얼굴로 빼액 외쳤다.

"당신, 미쳤어? 어! 이게 무슨 짓이야! 여긴 내 캠프고, 내가 이곳의 지휘관이야! 지금 당신, 일개 군의관 주제에 이런 하극상을 벌이고도 무사할 줄 알아? 어!"

그가 이쪽을 삿대질했다. 소리치며 침을 튀겨댔다. 보고 있자니 비웃음이 나왔다.

"그만. 거기까지 합시다."

"뭐? 내가 댁이 그만 하라면 그만 하는 뭐 그런 사람...!"

"이어야겠지. 이걸 본 뒤라면 말이지."

팔랑!

더는 저 짖어대는 소리를 듣기 싫었다. 저 인간의 장단에 맞춰 주기도 싫었다.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넘어져 있는 대대장의 면전에 들이밀어 보여주었다.

"보이나?"

"이, 이건...?"

"왕국의 왕위계승 서열 1위이신 왕녀, 아델린 보아르네 앙부아즈께서 내게 직접 내리신 부상병 캠프의 전권 위임장이지."

"...."

"그런데 뭐? 저 부상병을 살리면 나한테 협력하겠다고? 내 실력을 인정하겠다고? 그쪽이, 감히, 날 평가하려고?"

"...어, 그, 그게."

"그러니까 내가 좋은 마음으로 튀어오라고 했을 때 튀어왔어야지. 협력을 요청했을 때 순순히 응했어야지."

"그, 저, 그건...."

"데미안. 끌고 가."

이쯤이면 많이 참아줬다. 변명을 더 들어줄 필요는 없다.

데미안에게 명령했다.

시뻘겋게 달아올랐던 대대장의 얼굴이 극적으로 창백해졌다.

104화. 획기적인 마취법 (1)

대대장은 구금되었다.

이미 마지막 기회까지 인심 낭낭하게 안겨줬던 터였다. 그런데도 대대장 본인이 그 기회를 대기권 돌파슛 쏘는 기세로 걷어찼으니, 봐주고 자시고 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끌려가면서 발악하진 않았고?"

"의외로 얌전했습니다."

"얌전했어?"

"네."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라키엘. 그런 자신의 황태자를 바라보며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세상 다 끝난 듯이 고개를 숙이고서 한숨만 푹푹 내쉬더군요. 이제 승진이고 뭐고 다 끝났다나 뭐라나."

"뭐,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라키엘은 콧방귀를 퐁 뀌었다. 여기는 부상병 캠프다. 엄연히 부상병을 치료하기 위해 마련된 곳이다.

그런데 그 임무를 소홀히 한 자였다. 아니, 소홀한 정도를 넘어서 태업에 가까운 행태를 보였다. 심지어 개선안을 제시했음에도 거부하는 작태까지 보였다.

용서할 건덕지가 조금도 없었다.

"그 인간은 그대로 가둬둬. 나중에 왕녀께는 내가 알릴 테니까. 일단 그보다 지금은-"

라키엘은 이젠 자신의 소유(?)가 된 대대장 천막 안쪽을 죽 둘러보았다. 눈길을 받은 병사 서넛이 움찔했다. 아까 대대장의 명령을 받고서 부상병을 데려온 병사들이었다.

하지만 라키엘의 시선은 그들에게 머무르지 않았다.

"일단 여기 부상병부터 좀."

그는 실려온 부상병의 상세부터 살폈다.

"으음...."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화살에 다친 부상병이었다. 팔뚝에 두 발, 옆구리에 한 발. 어설픈 솜씨로 화살촉을 뽑아낸 자리에 붕대를 감아둔 게 보였다.

그런데 이 붕대, 마지막으로 갈아준 게 언제였을까. 과장 좀 섞자면 덕지덕지 배어난 시커먼 핏자국에 곰팡이가 피어날 기세였다.

라키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상처 부위 자체는 치명적이진 않아. 그런데 관리 상태가 너무 심하게 엉망이야. 이러다간 살릴 사람도 못 살리겠어.'

그야말로 처참할 지경이었다. 라키엘은 새삼 이곳 세상의 부상병에 대한 인식과 대우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소설 마검황의 전쟁 장면에서도 이런 상황을 묘사하던 부분이 아주 살짝 있었지. 잠깐 지나가는 듯하던 배경 묘사로.'

문득 떠올랐다.

데미안이 앙부아즈와 마젠타노의 대전쟁에 휘말렸던 에피소드였던가. 소설 속 그 지문이 뭐였더라.

[어디에나 널브러져 있는 부상병들의 모습. 그들을 동원한 영주들에게 버림받다시피 방치되어 죽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데미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부상병이 죽은 신세나 다름없다지만, 그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그럼에도 저런 모습에 안타까운 심정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라고 했던 것 같다.

'당시엔 그냥 지나가는 듯하던 묘사라서 딱히 신경을 쓰진 않았는데. 그게 이렇게 정확한 묘사일 줄은 몰랐네, 진짜.'

생각할수록 한숨이 나왔다.

지구의 역사와 비교하면? 거의 17-18세기 수준쯤 될까 싶었다.

'사실 지구에서도 멀리 갈 것도 없이, 1800년대 중반까지만 거슬러 가도 부상병에 대한 대우가 엄청나게 열악했지. 나이팅게일이 왜 유명해졌겠어. 전쟁터에서의 부상자 관리에 대한 신개념을 제시한 인물이니까 그런 거지.'

그만큼 전근대 전장에서 부상병의 신세는 암울했다. 하지만 라키엘은 이걸 그대로 놔둘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 많은 부상병을 살려내리라. 보너스 수명을 쑴펑쑴펑 퍼 받으리라. 야물딱진 다짐을 새기며 명령했다.

"데미안."

"네, 리한 도련님."

"당장 가르딘 경을 데려와 줘."

"알겠습니다."

잠시 후 가르딘 경이 천막으로 들어왔다. 예를 표하기도 전에 흠칫 놀랐다. 그의 눈길은 이미 부상병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경이 보기엔 어떤 것 같아?"

"당장 응급수술이 필요합니다, 전... 도련님."

"그렇지?"

"예."

가르딘 경의 눈빛은 지금까지 본 어떤 순간보다도 활활 빛나고 있었다. 라키엘은 내심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가르딘 경을 데리고 오길 잘했어.'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가르딘 경의 전공에 대한 사실이었다.

'얼마 전에 가르딘 경이 털어놓은 게 있었지. 실은 자신은 외과 수술이 주특기라고. 그래서 다른 주치의들이 다 도망가고 자신만 내 곁에 남았을 때, 솔직히 엄청나게 막막했다고 말이야.'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소설에선 엑스트라에 불과한 가르딘 경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었으니까. 당연히 가르딘 경의 특기가 무엇인지, 의술의 어떤 파트를 전공으로 삼았는지도 나오지 않았더랬다.

'그런데 마침 가르딘 경이 외과 수술 전문이라면... 나한테 딱 필요한 인재인 셈이지.'

라키엘은 자신이 익힌 한의술, 한의대의 커리큘럼을 되새겼다. 거기서 외과에 관련된 교육을 아예 안 받은 건 아니었다. 본과 과정에서 응급의학, 외과학을 익혔다. 해부학과 해부학 실습도 거쳤다.

하지만 거기까지일 뿐이었다.

졸업 후에 외과 수술에 대한 경험을 쌓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별궁 한의원을 운영하며 난감한 때가 종종 있었다.

한데 가르딘 경이 외과적 능력으로 지원을 해준다면?

'내 가장 커다란 약점을 메꿀 수 있어. 진료 범위를 획기적으로 넓힐 수 있을 거야.'

특히 온갖 외상이 난무하는 전쟁터의 부상병을 치료하자면? 가르딘 경의 조력이 필수일 것이다. 그래서 여기까지 데려왔다.

이제는 그 실력을 확인할 때였다.

"그럼 지금 당장 응급수술, 할 수 있겠어?"

"예, 물론입니다."

기대감을 품으며 물었다.

가르딘 경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커다란 배낭을 테이블 위에 턱, 하고 내려놓았다. 배낭을 열었다. 수술 도구들을 척척, 테이블 위로 가지런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한데 그 도구들의 모양새가 조금 이상했다.

터턱!

가르딘 경이 제일 먼저 테이블에 올려놓은 도구는 수술용 칼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종종 보는 메스? 그거랑은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비슷한 걸 꼽자면 오히려....

'낫처럼 생겼는데? 칼날이 왜 저렇게 길고 커? 아예 정글도를 앞으로 휘어지게 만든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수술 도구가 아니었다. 차라리 망나니가 죄인 목 쑹컹쑹컹 베는 칼이라고 하는 게 맞을 듯했다.

그렇듯 망연자실(?)해진 이쪽의 눈길을 깨달은 걸까. 가르딘 경이 수줍게 웃으면서 말했다.

"살 찢는 칼입니다. 절단 수술을 할 때 피부와 근육을 잘라내는 용도로 쓰이지요."

"...그게?"

"예, 도련님. 칼날이 묵직하고 앞으로 휘어 있어서, 힘을 적게 들이면서 근육을 한 번에 크게크게 잘라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터텅!

이번엔 톱이 테이블 위로 등장했다. 물론 역시나 심상치 않은 비주얼이었다.

'나 저거 본 것 같아. 철물점에서 파는 줄톱이잖아, 저거.'

딱 철물점에서 파는, 두 갈래로 갈라진 줄톱과 거의 똑같이 생겼다. 가르딘 경이 여전히 수줍은 기색으로 말했다.

"뼈톱입니다. 사람의 뼈라는 게 워낙 단단해서 말이지요. 팔다리 절단 수술을 최대한 빨리 마치려면 반드시 필요한 도구입니다. 빠르게 끝낼수록 고통과 출혈이 적어지니까요. 참고로 저는 3분 이내에 장단지뼈를 잘라낼 수 있습니다."

"3분... 이내에?"

"예. 그 정도는 되어야 4명 중에 3명은 살릴 수 있거든요. 아, 그리고 이건 더 특별한 도구입니다."

터턱!

이번에 등장한 흉기(?)는 전기톱을 닮은 도구였다. 아니, 아예 전기톱 한쪽에 수동으로 돌릴 수 있는 손잡이를 붙여둔 물건이었다.

라키엘은 아득해지는 심정으로 물었다.

"설마 그거, 체인톱은 아니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

"수동으로 여기, 체인 톱날을 회전시키는 톱입니다. 뼈칼을 대기에 애매한 부위나 두개골을 갈아낼 때 쓰는 톱이지요. 이래 봬도 최근에 구매한 최신품입니다."

"어. 좋겠네."

"물론입니다. 그리고 이거, 이거, 이것도...."

턱, 터턱! 턱!

뒤이어 갖가지 다양한 고문, 아니, 수술 도구가 흉흉한 비주얼을 뽐냈다.

생살을 쫮 찢어 벌려서 그 안의 화살촉을 푸확 뽑아내는 화살촉 제거기. 여러 개의 대못을 한 큐에 살갗에 푹 찔러서 피를 왕창 뽑아낸다는 인조 거머리 기구. 대놓고 처형 도구처럼 생긴 두개골 관통기. 강제로 신선한 바람을 한껏 뿜어 넣어 인간의 항문을 활짝 오픈한다는 직장 관장기까지.

가르딘 경의 멋쩍은 표정 아래.

버라이어티한 고문 도구들이.

수줍은 자태를 착착 드러냈다.

그걸 보던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설마 이것들로 비밀기지 위치를 자백하게 만들려는 거야?"

"...예?"

"아, 아니. 농담이고. 조금 놀라서. 그나저나 그럼 마취는?"

라키엘은 물었다.

이토록 살벌한 수술 도구를 쓰려면 마취가 필수일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한데 가르딘 경이 당연하지 않다는 듯 되물어왔다.

"마취가... 뭡니까?"

"어?"

"아, 혹시 도련님께서는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방법을 물으신 겁니까? 그런 방법은 물론 있습니다."

"그래?"

다행이다. 마취가 뭐냐고 물어오는 통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는데.

라키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성급한 안심이었다.

"보통은 독한 럼주에 아편을 타서 마시게 합니다."

"...어?"

"그러면 환자가 인사불성이 되니까 말입니다. 맨정신으로 수술을 받는 것보단 한결 낫습니다. 까무러치거나 죽는 경우가 제법 줄어드니까 말입니다."

"...."

"하지만 제 경험상 럼주는 별로 좋지가 않더군요. 그래서 저는 다른 방법을 씁니다."

"다른 방법? 어떤?"

제발.

좀 정상적인 방법 좀.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그 희망도 금방 깨지고 말았다.

"보드카가 훨씬 낫습니다. 보드카에 레몬즙을 뿌리고 아편을 섞으면 됩니다."

"...그럼 뭐가 더 좋아지는데?"

"더 맛있다고 환자들이 좋아하더군요."

"...."

"두려운 수술을 앞두고서 조금이라도 더 맛있는 술을 맛보면 환자도 조금은 용기를 얻는 법이니까 말입니다."

"x발."

"...예?"

"아니, 못 들었으면 됐고. 어쨌건, 그럼 지금 하려는 수술은 뭐지?"

"절단 수술입니다."

"뭐?"

"우선 화살에 맞은 쪽의 팔부터 잘라내면 어떨까 합니다."

"...됐어."

"예?"

"그 고문, 아니, 수술 도구 당장 넣어둬."

라키엘은 넌더리를 내며 명했다. 가르딘 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술 도구를 넣어두라니, 그럼 지금 수술을 안 하는 겁니까?"

"어.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해."

"어째서 말입니까?"

"당장 환자를 죽일 수는 없잖아."

그는 확신을 담아서 말했다.

들어보니 마약을 푼 술을 진탕 먹이고서 진행하는, 무식하기 그지없는 무마취 수술이다. 한데 지금 실려온 부상병은? 이미 상태가 좋지 않았다.

부상 부위가 감염된 건지 열이 제법 끓고 있었다.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진 것은 물론이고, 면역력도 상당히 떨어져 있을 터였다.

한데 이런 상태에서 마취도 없이 수술을 진행한다면? 심지어 다짜고짜 팔을 잘라내는 절단 수술이라면?

'환자가 못 버텨. 십중팔구 죽을 거야.'

라키엘은 쓰린 입맛을 다셨다.

자신은 이런 식으로 생사람을 잡는 치료를 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효율적인 진료로 부상병을 살리고 싶었다.

그러자면?

'마취가 필수야.'

팔다리를 자르든 뭘 하든. 하다못해 가벼운 봉합수술을 하더라도 마취는 필수일 것이다.

그는 가르딘 경을 비롯한 모든 이들을 물러나게 했다. 부상병과 둘만 남은 채 치열한 궁리와 고민을 시작했다.

'마취. 효율적이고 신속하면서도 안전한 마취 방법이 필요해.'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가르딘 경의 방식은 절대 불가능.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침술을 응용해볼까. 아니스와 웨어울프 간호사들에게 시술해주었던 신경 교란 시술법은?

'아니, 안 돼. 그건 특정 부위의 신경을 다른 신체 부위의 감각으로 대체하는 방법이니까. 통증 자체를 없애지는 못해.'

팔에서 느껴질 고통을 다른 곳에서 느끼게 할 뿐이다. 즉, 고통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다. 마취 효과가 없는 셈이다.

'차라리 쿠스만에게서 강탈한 마비독? 아니야. 그건 통각 신경을 차단하는 효과보다 다른 위험성이 너무 크고.'

그럼 어떻게 할까. 어떤 방법을 써야 부상병을 마취시킬 수 있을까. 치열하게 고민하는 와중이었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고민을 엿듣고서 흥미를 나타냅니다.]

[심장 : 마취? 고통을 덜어낸다고? 훗, 나약한 정신이로군. 그 정도는 악으로 깡으로 기합으로 참아내면 되는 거 아닌가?]

[허파 : 허! 팝! 헙! 파합!ㅎ]

[대장 : 에이 그래도 수술을 하려면 안 아픈 게 좋지 말입니다.]

[간장 : 어차피 못 피할 고통이면 즐기면 안 됨?]

[위장 : 아 막막하면 스킬이나 개방해보든가ㅋㅋ HP는 뭐하러 모으는데ㅋ]

[오장육부가 당신을 격려하며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한 HP : 4,900]

"...."

그래. 스킬. 어쩌면 길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라키엘은 일말의 가능성을 떠올리다가 혀를 찼다.

'쯧. 기왕이면 HP, 아껴두고 싶었는데.'

아무 때나 얻을 수는 없는 HP였다.

그만큼 귀한 자원이었다.

낭비하기 싫었다.

가급적이면 정말로 절체절명의 순간에 보유한 스킬의 레벨을 올리거나 하는 용도로 쓰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취를 성공하는 일이 가장 급선무야.'

그게 안 되면 아무것도 안 되는 상황이다. 기껏 머나먼 앙부아즈까지 고생하며 온 보람도 모두 사라진다.

그러니 가능성을 더듬어보자. 가능한 모든 방법을 써보자. 라키엘은 결심했다.

'스킬을 개방할 때마다 뜻밖의 부가기능을 얻었으니까. 진맥 스킬을 얻으면서는 종합검진과 경혈 스캐닝을 얻었고, 탕약 조제 스킬을 얻으면서는 내가 조제한 탕약의 성분과 효능을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게 됐지.'

게다가 진료비 청구 스킬은?

보너스 수명 획득이라는, 가장 귀중한 옵션을 안겨주었다.

'그러니 해보는 거야.'

자신이 개방할 수 있을 스킬들. 어쩌면 그중에 마취에 유용한 옵션이 있을지도 모른다. 가능성이 느껴졌다. 결심하며 시스템 창을 열었다.

반응은 곧바로 왔다.

딩동!

[개방 가능한 스킬 목록을 열람합니다.]

화아악-!

눈앞이 환해졌다.

메시지가 위아래로 길어졌다. 일목요연한 목록이 눈앞에 펼쳐졌다.

<개방 가능한 스킬 목록>

[1. 침술]

[2. 부항]

[3. 뜸]

[4. 약재 감별]

[5. 약초 탐색]

[6. 약술 주조]

[7...]

여기까진 전과 똑같았다. 그런데 제일 아래쪽에 새로운 목록이 생겨나 있었다.

[7. 내 손은 약손]

'어?'

목록을 보던 라키엘이 멈칫했다. 불현듯, 한 가지 가능성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설마?'

105화. 획기적인 마취법 (2)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촉이 오는 순간이 있다.

이유는 없다.

밑도 끝도 없다.

그런데 빡 하고 온다.

그런 촉이 전두엽 주름을 때리고, 십이지장 융털돌기를 짜르르 떨리게 하는 순간이 정말로, 가끔씩 있다. 지금이 바로, 그렇다.

'이거, 어쩌면... 미친 스킬인 거 같은데?'

라키엘은 트위스트를 추려는 눈동자를 꽉 붙잡았다. 그리고 개방 가능한 스킬 목록의 제일 아래쪽을 뚫어지도록 노려보았다.

전에 없던 스킬이 그곳에 있었다.

[7. 내 손은 약손]

"...."

저건 무슨 뜻일까.

일단 이름으로만 보아선....

'어릴 때 할머니나 엄마가 해주시던 거였는데. 배가 아프거나 할 때면 나 눕혀놓고선 손바닥으로 아픈 배를 살살. 그러면서 할매 손은 약손 하고 노래도 불러 주시고.'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할머니의 주름진 손등과 손바닥. 자신은 그 손을 요술 손바닥이라고 불렀던가. 어떻게 아프든, 어디가 아프든 할머니가 살살 쓰다듬어 주시면 거짓말처럼 아픈 게 나았더랬다.

'그럼 이거, 내 손은 약손이라는 거. 내 생각대로라면 지금 상황에 딱 필요한 엄청난 스킬일 거 같은데. 미리보기나 설명 같은 건 조금 들을 수 없나?'

그러면 선택하는 데에 도움이 될 듯한데. ...라는 생각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시는 순간이었다.

딩동!

설마 이쪽의 마음을 알아챈 걸까. 아니면 그냥 타이밍이 맞아떨어진 걸까. 새로운 메시지가 상큼하게 주르륵 떠올랐다.

[개방 가능한 스킬 목록은 언제나 실시간으로 갱신됩니다.]

[당신이 새로운 재능, 기술, 지식을 습득할 때마다 목록에 새로운 스킬 후보가 생성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지난 몇 개월 동안 수많은 환자를 정성으로 보살펴왔습니다. 그러한 마음가짐과 정성이 농염하게 농축된 끝에, 당신은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달래줄 수 있는 새로운 기예를 습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 손은 약손> 스킬은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에 탁월한 도움을 줄 것입니다.]

'이거다!'

라키엘은 주먹을 꽉 쥐었다.

역시나 촉이 맞았다.

더는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좋아. 선택!'

설명으로 보아도 확실하다. 저 스킬, 마취와 강력한 연관성이 있을 터였다. 확신하며 '내 손은 약손' 스킬을 선택했다.

딩동!

[목록 7번. <내 손은 약손>을 선택하셨습니다.]

[스킬 개방 (3회차) 비용 : 4,500 HP]

[스킬을 개방하시겠습니까?]

[YES / NO]

'...뭐? 4,500 HP?'

입이 쩍 벌어지는 비용이었다.

라키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럼, 이거 하나 개방하면 한 큐에 HP 개털 되는 거네?'

순간 고민이 되었다.

원래는 '내 손은 약손'부터 개방하고, 옵션을 확인한 후에 침술이나 다른 스킬도 이참에 개방할까 싶었다. 한데 그게 불가능해 보였다.

'지금 내가 가진 HP를 다 긁어모아야 4900인데. 스킬 하나를 개방하면 그냥 바닥이야. 다른 기회가 더 없어.'

그럼 어떻게 할까. 정말로 '내 손은 약손' 스킬을 눈 딱 감고 개방할까.

아마 침술 등의 다른 스킬에도 유용한 기능이 잔뜩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마취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 지금은 마취와 연관이 조금이라도 있는 '내 손은 약손' 스킬에 투자를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일 터.

'...가즈아!'

굵고도 짧은 고민이 끝났다. 라키엘은 과감하게 YES를 선택했다.

딩동!

[당신의 환자를 보살폈던 정성의 경험이 스킬로 변환됩니다.]

[<내 손은 약손> 스킬이 개방되었습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한 HP : 400]

그동안 열심히, 알뜰살뜰 모아두었던 HP가 쑴텅 깎여나갔다. 대신 새로운 스킬로 연성(?)되었다.

[스킬명 : 내 손은 약손 Lv.1]

[대상의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통증을 감소시킵니다. 국소마취 수준의 통증 감소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마취의 강도와 범위, 지속 시간은 스킬의 레벨 성장과 함께 증가할 것입니다. (발동 조건 : '내 손은 약손~ 내 손은 약손~ 에헤이야~'라는 주문을 운율에 따라 정확하게, 지속적으로 불러주어야 함. 단, 주문의 노랫소리가 마취 대상과 주변인들에게 들릴 정도로 또렷하고 낭랑하지 못하면 마취 효과가 취소됨.)]

'...됐다!'

과감하게 선택한 내 손은 약손 스킬. 설명을 다 읽은 라키엘은 내심 환호했다. 촉이 맞았다. 정말로 이거, 즉각적인 마취 스킬이 확실하다.

게다가 효과마저 엄청났다.

'이거, 어떠한 약물이나 도구도 없이 맨손으로 즉석에서 시전이 가능한 거잖아. 말 그대로 내 손이 휴대용 마취 도구가 된 거네.'

라키엘은 감탄했다.

놀라운 점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마취에 따르는 위험도 없어. 병원에서 약물로 마취를 시킬 때는 환자의 체중과 건강 상태를 전부 체크하면서 약의 양을 세심하게 조절해야 하는데. 안 그러면 바로 의료사고가 나 버리는데. 그걸 걱정할 필요가 없어. 이건 그냥 쓰다듬기만 하면 되니까.'

심지어 마취가 깨는 조건도 심플했다. 그냥 쓰다듬는 걸 그만두기만 하면 됐다!

'사기네. 사기야.'

언제든지 쓰다듬기만 하면 되고. 마취의 부작용이나 위험성은 없고. 마취가 풀리는 시기도 즉각적으로 맞출 수 있다니.

이건 전국, 아니, 전 세계 종합병원의 마취과 전문의가 본다면 기절할 때까지 텀블링을 뛰면서라도 얻고 싶어 할 그런 능력이 아닌가.

'...물론 요상한 노래를 다 들리게 불러야 한다는 조건이 있지만. 뭐, 그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약간의 쪽팔림.

엄청난 능력에 대한 대가치고는 싸다. 그렇게 생각하며 라키엘은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 이쪽의 명령을 듣고서 짐을 주섬주섬 싸고 있는 가르딘 경이 보였다.

당장 수술을 할 수 없다고, 이대로 마취도 없이 했다간 환자가 죽을 거라고, 그러니 수술은 접어두라고 했던 말 때문에 시무룩해진 걸까.

'가르딘 경, 침울해 보이네.'

아무래도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고 여긴 건가 보다. 그럼 이제는 오해를 풀어줘야겠다.

아까와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마취, 할 수 있을 듯하니까.

"가르딘 경."

"...예, 도련님?"

"아까 내가 했던 말 취소."

라키엘은 희미하게 웃었다.

"잠깐 기다려봐. 어쩌면 환자를 마취할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럼 술과 아편을 가져올까요?"

"아니. 다시 수술 도구 꺼내고 있어봐."

"예?"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르딘 경. 이쪽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적응이 안 되는 듯했다.

하지만 자잘한 설명을 해주진 않았다. 일단은 스킬의 성능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라키엘은 부상병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봐, 대답할 수 있겠나?"

"으음...."

겨우 눈을 뜨는 부상병.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 이름이 뭐지?"

"티에... 티에리... 하급병사입니다...."

"그래, 좋아. 티에리 하급병사. 이제부터 나와 여기 가르딘 경이 그쪽을 치료할 거야."

"그... 제 팔을... 자르시는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되고. 어딘갈 잘라내거나 하는 일은 최대한 없도록 할 생각이라서."

"하지만... 아프겠지요...?"

"안 아프게 해줄 거야."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하급병사 티에리는 힘겹게 웃었다. 사실 그의 웃음은 자조적인 한탄에 가까웠다.

평범하게 살던 농부였다. 그런데 어느 날 나라에 전쟁이 벌어졌다고 했다. 영주에게 징집되었다. 전쟁터로 끌려나갔다.

어떤 놈들이 적군인지는 전쟁터에 나가서야 뒤늦게 알았다. 같은 나라의, 똑같은 농부였다가 끌려온 자들이었다. 반란군이라고 했다.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어쨌건 싸웠다. 죽기 싫어서였다. 싸우고, 격한 숨을 토하고, 그러다가 화살에 맞았다. 무려 세 발이나.

그렇게 여기까지 수레에 실려 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희망은 있었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천만다행으로 화살촉이 내장을 찌르지 않았다고. 살갗과 근육만 찢어졌으니 죽을 일은 없을 거라고. 이제 치료를 받을 수 있겠다고. 다 나으면 감사의 인사를 꼭 해야겠다고.

...헛된 희망이었다.

죽지 않은 게 오히려 불운이었다. 치료를 받는 건 꿈 같은 사치였다. 일찍 죽었다면 받지 않았을 고통을, 살아서 천천히 받게 되었다.

'오늘도 똑같겠지.'

티에리는 아무런 기대감 없는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화살에 맞은 자리가 가만히 숨만 쉬어도 아팠다.

한데 그때였다.

촵.

누군가가 옆구리를 짚어 왔다.

눈을 떠보니, 방금까지 말을 걸어주었던 적발의 뚱보 군의관이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쉿. 이제부터 마취를 시작할 거야."

"...예?"

"내 손은... 약손. 내 손은 약손."

"...?"

내 손은 약손?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설마 사람 놀리는 건가. 티에리는 아픈 와중에도 짜증이 확 치솟는 걸 느꼈다.

한편 적발 뚱보 군의관, 라키엘은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어후. 이거 실제로 해보니까... 생각보다 훨씬 민망하네.'

하필이면 이런 노래를 구성지게 불러야 한다니. 엄청난 보상에 비하면 약간의 쪽팔림일 줄 알았다. 한데 막상 직접 해보니? 생각보다 훨씬 민망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라키엘은 눈을 질끈 감으며 노랫가락을 읊조렸다.

"내 손...은 약손. 내 손은... 약손...."

스사사사, 사삭.

나름 노랫가락을 읊으며 부상병의 옆구리 주변을 살살 쓰다듬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딩동!

[노래의 성의가 부족합니다.]

[<내 손은 약손 (Lv.1)>의 발동에 실패했습니다.]

"...."

인생 진짜.

라키엘은 이를 꽉 깨물었다. 작정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 손은 약손~ 내 손은 약소오온~ 에헤이야~"

아까보다 또렷하게. 확실하게. 어릴 때 듣던 할머니의 가락을 떠올리며. 구성지게 꺾던 할매표 바이브레이션 양념도 제대로 팍팍.

그러자 반응도 팍 왔다.

딩동!

[<내 손은 약손 (Lv.1)> 스킬이 발동됩니다.]

[환자 : 티에리의 통증이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츠즈즈즈...!

라키엘의 손끝에 미약한 빛이 일순간 깃들었다. 하급병사 티에리의 옆구리에 스며들었다. 티에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옆구리가 이상했다. 그러니까, 아프던 게 점점 사라졌다.

'뭐지?'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다.

별안간 자신의 옆구리를 쓰다듬으며 이상한 노래나 부르는 군의관을 향해 화가 나려던 참이었다. 치료를 못 받아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이런 식으로 모욕하는 것이냐고. 울분을 터뜨리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너무나 뜬금없이.

옆구리가 아프지 않았다.

'이게 무슨....'

화살을 맞은 뒤로, 성의 없게 화살을 뽑은 뒤로는 언제나 계속 아팠던 옆구리였다. 불로 지지는 듯하던 고통을 종일 느꼈던 터였다.

그런데 아픔이 확 줄어들었다!

절대로 착각이 아니었다!

"지금 무슨... 대체 뭘 하신 겁니까?"

저도 모르게 물었다. 뚱보 군의관이 뜻 모를 미소로 되물어 왔다.

"내 손은 약손~ 어때? 옆구리 아프던 건? 내 손은 야아아악손~"

"아... 안 아픕니다... 조금 욱신거리긴 하는데... 그래도 불에 지지는 듯이 아프던 전보다 훨씬 나아졌습니다. 이게,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다 방법이 있지. 내 손은 약손~ 내 손은 야아↘아악↗소오온~ 에헤라디야~"

"...."

부상병 티에리는 입을 다물었다.

진짜다.

비결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저 뚱땡이 군의관이 옆구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통증이 사라졌다. 확실하다. 이 군의관 덕분이다.

티에리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라키엘의 입꼬리는 귀에 걸렸다.

'됐다! 이 스킬, 정말로 확실히 효과가 있어.'

사실 그는 부상병의 옆구리를 문지르며 다른 손으로 근처를 강하게 꼬집고 있는 중이었다. 그냥 세게 꼬집은 정도가 아니었다. 아예 피멍이 들고 상처가 날 정도로 작정하고 꼬집었다.

그런데 부상병은 그걸 모르고 있었다. 그 뜻은 즉, 스킬의 효과가 보통을 넘어서 엄청나다는 뜻이다.

'이만하면 검증이 됐어.'

확신이 들었다.

고개를 들었다.

"가르딘 경?"

"예, 전ㅎ, 아니, 도련님."

"마취 됐다. 수술 시작하자. 일단은 제대로 봉합도 안 된 상처 부위 정리와 봉합부터."

"아, 알겠습니다."

가르딘 경이 허겁지겁 수술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동안 라키엘의 쓰담쓰담과 구성진 노랫가락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부상병 티에리는 통증에서 벗어나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선 수술을 앞둔 불안감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캠프의 관리병들은....

'봤어?'

'어. 봤지.'

'저거, 맨손으로 아프던 사람을 안 아프게 만든 거, 맞지?'

'맞는 거 같은데.'

'그럼 저거... 말로만 듣던....'

'기적이다. 기적을 행한 거야, 저 군의관이!'

오직 선택받은 극소수의 성자들만 행할 수 있다는 성스러운 기적. 라키엘이 그러한 기적을 행하였다는 오해(?)가 병사들 사이에 쫙 퍼지기 시작했다.

106화. 연쇄 힐링마의 계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