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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연쇄 힐링마의 계획 (1)

수술은 무섭다.

누구나 그렇다.

마취가 있어도 마찬가지다.

혹시 자신이 마취가 잘 안 먹는 희귀한 체질이면 어쩌지? 수술하다가 중간에 마취가 깨 버리는 건 아닐까. 진짜 혹시나 의료사고가 나서 마취에서 못 깨어나진 않을까, 등등. 수술을 앞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해 볼 고민, 혹은 망상이 되시겠다.

'한국에서 알던 지인 백경 씨도 수술 중간에 잠깐 의식이 깼다고 했지, 아마?'

담낭 제거 수술을 하던 때였다던가. 수술 중간에 잠이 깨듯 눈이 스르르 떠졌다고 했다.

비몽사몽한 채로 '뜨으, 의사쌤...' 이라고 하니까 의사쌤이 친절하게 다시 자장자장 재워(?)주셨다던가.

어쨌건, 생살을 찢고 가르고 꿰매는 수술은 마취가 있어도 무섭다. 두렵다. 절로 갖가지 걱정과 번뇌를 불러온다. 하물며 마취가 없는 시대는 오죽할까.

"그러니까 이젠 괜찮을 거야. 알겠지? 내 손이 약손~ 내 손이 야아악손~"

"그, 그럼... 전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혹시 제 팔을 자르는 겁니까?"

"아니. 내 손은 약손~"

부상병 티에리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내 손은 약손 스킬 덕분에 어깨 부위의 통각이 마취되었음에도 여전히 두려움을 다 떨쳐내진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라키엘은 스킬의 유지를 위해 꾸준히 노래를 부르며 대답했다.

"내 손은 약손~ 자르진 않고 꿰매기만 할 거야. 화살촉을 뽑으면서 상처 부위를 제대로 정리를 안 해놔서. 내 손은 약손~ 에헤이야~ 피부 조직에 괴사도 생겼고 하니까."

티에리를 안심시켰다. 그 와중에 손도 열심히 움직였다. 수술할 팔뚝 주위를 꾸준히 쓰다듬었다.

그런 덕분일까.

딩동!

[당신은 환자 : 티에리의 통증을 성공적으로 누그러뜨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첫 경험이 스킬의 성장에 귀중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내 손은 약손 스킬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반가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스킬명 : 내 손은 약손 Lv.2]

[대상의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통증을 감소시킵니다. 국소마취(+20%) 수준의 통증 감소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마취의 강도와 범위, 지속 시간은 스킬의 레벨 성장과 함께 증가할 것입니다. (발동 조건 : '내 손은 약손~ 내 손은 약손~ 에헤이야~' 라는 주문을 운율에 따라 정확하게, 지속적으로 불러주어야 함. 단, 주문의 노랫소리가 마취 대상과 주변인들에게 들릴 정도로 또렷하고 낭랑하지 못하면 마취 효과가 취소됨.)]

'오옷?'

생각보다 스킬 레벨의 성장이 제법 빨랐다. 게다가 마취 성능이 20%나 향상되었단다.

'과연 효과는?'

라키엘은 시험을 위해 티에리의 팔뚝을 아까보다 세게 꼬집었다.

꼬집!

하지만 티에리는 딱히 얼굴을 찡그리거나 하지 않았다. 여전히 별다른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성능 확실하다. 마취가 제대로 되고 있다. 라키엘은 확신을 느꼈다. 하지만 쉽게 방심하지는 않았다.

'아직은 내손약손 스킬, 국소마취 정도밖에 안 되니까.'

환자가 고통을 완전히 잊을 수 있도록, 긴장하지 않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궁리를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마침 대대장의 간이 테이블 위에 놓인 적당한 물건이 보였다.

체스판이었다.

"티에리 하급병사? 혹시 체스 좋아하나?"

"...예?"

"체스, 좋아하냐고. 내 손은 약손~"

"저, 적당히 둘 줄은 압니다. 그런데 그건 왜...."

"수술하는 동안 체스나 한판 두면 좋겠다 싶어서."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의아해하는 티에리에게 문득 떠오르는 고사 한 가지를 말해주었다.

"아주 옛날 옛적에 말이야. 잊혀진 고대의 왕국이 있어. 한나라라고. 내 손은 약손. 못 들어봤지?"

"예...."

"그 나라가 몰락하던 시기에 관우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어느 날 팔뚝에 독화살을 맞았어. 내 손은 약손~ 하급병사, 자네의 팔뚝과 거의 똑같은 자리에 말이야."

"그렇, 습니까?"

"어. 내 손은 약손~ 한데 관우라는 그 양반의 사정은 조금 더 지독했어. 화살촉에 묻은 독이 뼈에 스몄거든. 내 손은 약손~ 에헤이야~ 어쨌건 그래서 그 양반도 수술을 받게 됐지. 팔을 찢고, 독이 스민 뼈를 긁어내는 수술을 받았어. 아무런 마취도 없이."

"그게... 가능했습니까?"

"어. 수술을 받는 동안 앉아서 태연하게 체스 비슷한 걸 뒀다더라고. 내 손은 약손~"

"...."

"그러니 우리도 오늘 비슷한 걸 해볼 거야. 봉합수술을 하는 동안 마음 편히 체스나 둬 보자고. 내 손은 약손~ 그래서 여기, 체스 둘 줄 아는 사람?"

주위의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어느 상급병사가 주춤주춤 손을 들었다.

"잘됐네. 맞은편에 앉아."

체스판이 펼쳐졌다.

라키엘은 티에리를 조심스럽게 일으켜 앉혔다. 내손약손 스킬을 유지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눈길을 받은 가르딘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술 준비가 끝났다는 무언의 대답이었다.

"그럼 시작하지."

이쪽의 말에 부상병 티에리가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가 이내 체스판 위의 폰을 움직였다. 동시에 가르딘 경이 칼을 들었다. 수술용이라기보단, 차라리 고문이나 도축에 어울릴 듯한 모양의 칼이었다.

하지만 티에리는 그걸 보지 못했다. 체스판에 눈길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라키엘이 내손약손 스킬을 사용하는 쪽의 팔을 이용해서 티에리의 시선을 일부러 가로막기도 했다.

'사람은 시각에 많은 영향을 받으니까. 아무리 국소마취가 되어 있어도, 저런 흉악하고 살벌한 비주얼의 칼을 본다면? 그 칼이 자기 생살을 서걱서걱 잘라낼 장면을 상상하게 될 거고. 그때부터 심리적인 통증을 왕창 느끼게 될 거거든.'

자칫 잘못하면 내손약손 스킬이 풀릴지도 모른다. 지옥 같은 고통이 한 큐에 몰려올 거다.

그러면?

수술이고 뭐고 끝이다.

괜히 체스를 권한 게 아닌 것이다.

'어떻게든 저 살벌한 도구들에 신경 쓰지 못하게 해야 해.'

열심히 내손약손 스킬을 사용하며 요령껏 티에리의 시야를 가렸다. 그러면서 가르딘 경이 진행하는 수술을 힐끔 살폈다. 과연 가르딘 경의 외과 수술 솜씨는....

슥, 스슥!

'오오.'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그만큼 가르딘 경의 솜씨는 예상보다 빠르고, 정확하고, 깔끔했다. 현대적인 교육을 받은 입장에서 보아도 그러할 정도였다.

'저거, 그냥 칼질이 아닌데? 봉합에 앞서 혈액 공급이 끊긴 피부층 아래 지방 조직만 깔끔하게 전절제를 해냈어. 저러면... 세균이 퍼지며 생겨날 감염이 효과적으로 예방되지. 완전 제대로 된 실력이야.'

뒤이어 봉합이 이어졌다.

그 과정도 깔끔했다.

차착, 착!

바늘잡개 도구가 신들린 듯 움직였다. 마치 한국인의 젓가락질을 보는 듯했다. 덕분에 바늘이 봉합 부위의 층을 정확하게 맞추며 조직을 봉합했다.

근막은 근막끼리.

진피와 진피.

표피와 표피.

어느 한 층도 어긋남이 없이 맞물리는 깔끔한 봉합이었다. 심지어 활용하는 봉합법마저도 범상치가 않았다.

'저거 설마?'

라키엘은 눈을 가늘게 떴다. 보고 있자니 한의대에서 실습하던 때가 떠올랐다.

'저거, 수직 매트리스 봉합법 같은데?'

암만 봐도 맞았다. 상처가 아물 때 흉터가 최소화되는, 상처 모서리를 외전시켜서 봉합하는 테크닉이었다!

'헐.'

이 시대에도 저게 가능한 사람이 있구나. 그런데 그게 가르딘 경이라니. 외과 수술이 주특기라더니. 그게 허풍이 아니었다. 실로 엄청난 실력이었다.

'우리 가르딘 경, 괜히 젊은 나이에 황궁 주치의로 일하는 게 아니었구만.'

이렇게 보니 새삼 사람이 달라 보였다. 감탄하는 사이에 마무리 매듭까지 끝이 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너덜너덜했던 상처였다. 누군가의 무성의한 손길에 화살촉이 뽑히는 과정에서 피부와 주변 조직이 그야말로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괴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깔끔해졌어.'

제대로 붙였다.

한 땀 한 땀. 이탈리아 장인이 정성껏 만든 핸드백처럼 단 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는 바느질로 완벽한 봉합이 이루어졌다. 낫기만 하면 흉터도 크게 남지 않을 것이다.

"자아, 그럼 옆구리 들어가자."

"예, 전ㅎ... 도련님."

팔뚝 다음은 옆구리였다.

다행히 옆구리도 팔뚝과 상태는 비슷했다. 화살촉이 내장이나 복막까지 건드리진 않았다. 덕분에 한층 흉흉한 수술 도구를 동원하지 않아도 되었다. 가르딘 경의 깔끔한 바느질 솜씨가 마음껏 발휘될 수 있었다.

물론, 라키엘의 내손약손 스킬도 효력을 십분 발휘했다.

'내장이나 복막까지 건드린 상처였다면 곤란할 뻔했어.'

그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자신의 내손약손 스킬은 국소마취 수준밖에 안 된다. 그런데 국소마취로는 피부와 근처 근육 조직만 마취할 수 있을 뿐, 더 깊은 부위까지는 커버할 수가 없다.

라키엘은 그러한 자신의 한계를 새삼 명심했다. 하지만 주위에서 그를 보는 병사들의 시선은 달랐다.

'저 뚱보 군의관, 진짜야?'

'수술받는 부상병 저거, 정말로 통증을 못 느끼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으으, 생살을 잘라내는데 태연하게 체스를 두고 있어....'

'저게 가능한 겁니까?'

'바늘이 옆구리를 들락날락하는데 어떻게 하면 저렇게 평온할 수 있지?'

'심지어 입에 칼집을 물지도 않았지 말입니다.'

그러했다.

라키엘의 내손약손 스킬. 그리고 적절히 시야를 가려준 요령.

덕분에 부상병 티에리는 어느새 체스에 집중해 있었다. 수술에 대한 걸 잠시나마 거의 잊었다. 때마침 맞상대를 하는 병사의 체스 실력이 자신과 엇비슷해서. 체스판 위에서 때아닌 격전(?)이 벌어진 바람에.

더욱 체스에 몰입할 수 있었다. 평온한 얼굴일 수 있었다. 그 모습이 수술을 구경하던 캠프 관리병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설마 우리 몰래 아편 탄 술을 먹인 건 아니겠지 말입니다?'

'바보냐? 그러는 거 못 봤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저건... 기적이야. 확실해.'

'하긴, 제가 봐도 그렇지 말입니다. 술이나 마약도 쓰지 않았는데 저런 거라면... 그건 극소수의 성자들이나 행할 수 있다는 기적이 확실한 거 같지 말입니다.'

'그렇지? 내가 봐도 그렇다. 우린 지금 대단한 걸 목격하는 중인 거야.'

'예. 그런데 저 노래는 좀....'

'요상하긴 하구만.'

병사들이 수군거리는 사이에 옆구리 수술도 끝났다. 라키엘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맺혔다.

"어때? 기분이?"

"...."

부상병 티에리는 침만 꿀꺽 삼켰다.

"생각보다는 버틸 만했지?"

"...예. 그런데, 벌써 끝난 겁니까?"

"어."

"...."

"그래도 아직은 안심할 수 없어. 사실 이제부터가 더 진짜거든. 감염 예방과 회복이 최우선이니까. 이제부터는 푹 쉬면서 잘 먹는 게 중요해. 이틀 뒤에 보급이 오면서부터는 탕약도 처방해 줄 테니까 그것도 잘 마셔두고. 알았지?"

"...."

티에리는 말없이 라키엘을 쳐다보았다. 이 뚱보 군의관은 뭐 하는 사람일까. 어째서 이러는 걸까. 사실은 아까부터 많이 궁금했더랬다.

"그런데... 군의관님께서는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시는 겁니까?"

솔직히 짐작이 되지가 않았다. 아까 처음 이곳에 실려오던 때부터 그랬다. 대대장이 군의관에게 내기 제안을 하던 때도. 그랬다가 군의관 일행에게 제압당하던 때에도. 이후에 수술을 받으면서도 내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는 부상병입니다. 당장 전투를 치를 수도 없고, 누워서 식량만 축내는 존재입니다. 모두가 저를 그렇게 여기더군요. 저를 전쟁터로 끌고 갔던 영주님도, 이곳 부상병 캠프의 사람들도, 모두가 말입니다."

그런데 달랐다.

"군의관님이 처음입니다. 저를 이렇게 다르게 대해 주신 분은 말입니다. 제 아픈 곳을 어루만지고, 달래 주고, 제대로 치료를 해 주셨지요. 그래서 저는...."

"이해가 잘 되지가 않는다고?"

"예,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싶었다.

무엇을 위해, 무얼 하려고 자신을 치료해 준 건지. 미리 알고나 있으면 조금은 마음의 대비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뚱보 군의관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사람 살리는 데에 이유가 있나?"

"...예?"

"자네는 다친 병사고, 나는 다친 병사를 치료하는 군의관이야. 그거면 충분하지. 내가 자네를 치료하는 데에 더 이상의 특별한 이유가 필요해?"

"...."

"그러니까 쓸데없는 잡생각은 접어두고 푹 쉬셔. 알겠지?"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자신이 부상병을 치료하는 이유? 당연히 보너스 수명 때문이다! 그거 챙기려고 이 짓을 하는 거다!

하지만 그걸 솔직하게 말해주진 않았다. 때론 모르는 게 약인 사실도 있으니까.

"어쨌건 궁금한 점이 다 풀렸으면 여기까지. 난 다른 부상병들도 살펴봐야 하니까. 그럼 이만."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얼굴 가득 철판을 깔았다. 그걸로 끝일 줄 알았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크흐읍. 크흑. 가, 감사... 감사합니다."

티에리가 펑펑 울기 시작했다. 참았던 눈물보가 얼마나 쌓였던 건지. 혹은 그동안 감내했던 두려움과 절망이 얼마나 깊었던 건지. 이쪽의 말이 끝나자마자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그런데 티에리뿐만이 아니었다.

"후, 후우...."

"커흠! 흠!"

캠프의 관리병들도 황급히 고개를 돌려댔다. 제각각 당황스러운 손길로 눈가를 훔쳐댔다.

"...."

이건 또 무슨 상황인 걸까. 설마 내 거짓말에 다들 감동해서 저러는 걸까. 라키엘의 양심이 내심 뜨끔하는 그때.

뜻밖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환자 : 티에리와 주위의 관리병들이 당신의 발언에 커다란 충격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발언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상병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개념을 접하였습니다.]

[발언의 근거가 본심이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앞으로 부상병 캠프 전체에 당신의 미담이 널리 퍼질 것입니다.]

[앞으로 당신은 부상병 캠프의 모두에게 성자에 준하는 존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당신은 전쟁터에서의 부상병 관리에 대한 혁명적인 신개념을 최초로 제시한 인물로 의학의 역사서에 길이 새겨질 것입니다.]

[이러한 특별한 사회적, 역사적 의료 업적에 대한 보상으로 5,000 HP가 특별 지급됩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한 HP : 5,400]

"...."

그저 적당한 거짓말을 한 번 했을 뿐인데. 대박 보상이 쏟아져 내렸다. 절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뭉클한 깨달음도 다가왔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더 열심히 거짓말하라는 거지?'

라키엘의 입가에 사악한 웃음꽃이 보람차게 활짝 피었다.

107화. 연쇄 힐링마의 계획 (2)

[이러한 특별한 사회적, 역사적 의료 업적에 대한 보상으로 5,000 HP가 특별 지급됩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한 HP : 5,400]

'허허, 허허허.'

라키엘은 벌쭉 웃었다.

자신은 그저 부상병을 안심시키기 위해, 딱히 둘러댈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성의 없는 핑계를 댔을 뿐이었다. 군의관이 부상병을 치료하는 게 뭐가 이상하냐고. 그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나름의 상식선에서 그야말로 당연한 대꾸를 했다.

한데 그게 이런 파급효과(?)를 불러오다니. 보상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딩동!

십이지장 융털돌기를 찌르르 울리는 상큼한 알림음. 뒤이어 비루한 각막 쪼가리를 은혜롭게 수놓아 주는 메시지.

[오늘, 당신은 성자의 기적에 가까운 능력을 선보이며 부상병의 통증을 완벽하게 차단하였습니다.]

[다수의 캠프 관리병들이 당신의 이러한 모습을 목격하였습니다.]

[캠프 관리병들이 경악감을 느꼈습니다.]

[캠프 관리병들이 진심 어린 경외의 시선으로 당신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이러한 위업이 소문을 타고 부상병 캠프 전체로 퍼지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명망이 가파른 기세로 드높아질 것입니다.]

[76 GD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명의 포인트(GDP) = 98]

[현재 보유 중인 GDP로 구매할 수 있는 거짓말 이용권 : 0 장]

'...후아.'

여기서 끝인 줄 알았다.

하지만 보상 폭격은 계속 이어졌다.

딩동!

[당신은 '내 손은 약손' 스킬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마취를 통하여 환자 : 티에리에 대한 수술을 무난하게 마쳤습니다. 이는 당신의 '내 손의 약손' 스킬의 첫 성공적 성과입니다. 이러한 첫 성공의 경험이 스킬의 성장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내 손은 약손 스킬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스킬명 : 내 손은 약손 Lv.3]

[대상의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통증을 감소시킵니다. 국소마취(+40%) 수준의 통증 감소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이전의 레벨업 메시지와 비슷했다. 한데 그 뒤에 따라오는 안내문이 색달랐다.

[스킬의 레벨이 상승하며 새로운 영역의 마취 능력이 개방되었습니다.]

[상완신경총 마취가 가능해집니다.]

[인체의 어깨에 있는 상완신경총(사각근, 쇄골의 위와 아래, 겨드랑이) 지점을 쓰다듬어 팔 부위 전체를 완벽하게 마취할 수 있습니다.]

[스킬을 사용하여 마취를 시행할 시에는, 일반적으로 상완신경총 마취에 함께 따라오는 부작용과 위험성(중추신경계의 합병증, 심박수 저하, 심정지, 부정맥, 기흉, 횡격막 신경 마비에 의한 호흡곤란)은 전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정성을 담아 마음껏 쓰다듬어 주세요?]

'헐?'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완신경총 마취라니. 내손약손으로? 그냥 쓰다듬어서?

'미친 거 아냐?'

처음엔 장난을 치나 싶었다. 한데 거듭 읽어 보니 아니었다. 확실한 진짜였다.

'대박.'

라키엘은 남몰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상완신경총 마취. 이건 어깨 부위를 지나가는 신경 줄기를 마취하여 팔의 감각을 없애는 마취술이었다. 신체적으로 부담이 가는 전신마취를 피하면서도 팔 부위를 완벽하게 마취할 수 있다는 굉장한 장점이 있었다.

'그럼 이제 팔 부위를 수술할 때는 체스나 눈 가리기 등등의 꼼수를 안 써도 돼. 멘탈 튼튼한 병사라면 자기 팔이 꿰매지는 모습을 봐도 아무 감각을 못 느낄 거니까. 게다가 상완신경총 마취에 따라오는 일반적인 부작용 위험도 없대. 이거, 실환가 진짜.'

라키엘은 절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3레벨에 상완신경총 마취가 뚫렸다는 건? 레벨을 더 올리면 더욱 유용한 마취 기술이 개방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예를 들자면 경막외마취라거나. 척추마취라거나. 나중엔 전신마취도 가능해지겠네.'

그게 실화가 된다면, 정말로 이루어진다면, 진료 범위가 확 넓어지게 될 것이다.

'거의 고시원 골방에서 강남 34평 아파트급으로 넓어지는 거겠지!'

단순한 수술뿐만이 아니다.

고난이도 하드코어한 레벨의 뜸. 혹은 벌독을 이용한 봉침 치료. 온몸을 레고처럼 다루는 교정. 그 밖에도 갖가지 치료에 내손약손의 마취를 응용할 수 있으리라.

'그러니까 이건 기회야. 이참에 스킬 경험치도 팍팍 쌓아보자.'

라키엘은 전의(?)를 다졌다.

가르딘 경과 함께 부상병 캠프를 순회했다. 당장 수술이 가능한 부상병부터 치료했다. 열심히 쓰다듬고, 마취했다.

다만 절단 수술은 하지 않았다. 이 시대의 기준으로는 당장 팔다리를 잘라내어야 할 병사들이 보이긴 했다. 대부분이 병장기에 베이거나 찔린 상처를 입은 이들이었다. 그런 병사가 실려 올 때마다 가르딘 경이 난색을 표했다.

"전ㅎ... 아니, 도련님? 이거, 당장 안 잘라내면 상처가 썩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도 안 돼."

"하지만...."

"다 생각이 있으니까 일단 상처 부위 정리와 봉합부터."

"...알겠습니다."

가르딘 경이 못내 수긍했다.

사실 그의 말에 틀린 구석은 없었다. 이곳 세계의 의료 수준이라면 이런 상처들, 절단을 하는 게 최선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지구 역사의 근대 전쟁터에서도 그랬으니까.

'당장 1800년대인 나폴레옹 전쟁이나 남북전쟁 때만 해도 야전병원엔 병사들의 잘린 팔다리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지. 다들 총에 맞거나 칼에 맞아서? 아니. 단순한 피부의 생채기 때문에도 상처가 괴사하고 썩었으니까.'

그게 바로, 군대를 다녀온 대한민국 예비역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봉와직염'이었다.

'현대 사회에서야 마데카솔이나 빨간약만 있어도 나을 상처가, 그때는 절단 수술이라는 대참사로 이어졌으니까. 안 그러면 감염으로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

아마 가르딘 경의 걱정도 그래서일 것이다. 하지만 무시했다. 다 생각이 있으니까.

"그래서야. 두 사람을 이렇게 따로 부른 건."

당장의 급한 수술을 모두 마치니 이틀이나 시간이 지나 있었다. 라키엘은 가르딘 경과 데미안을 지휘관 천막으로 불러들였다. 둘을 향해 말했다.

"우선 가르딘 경?"

"예, 도련님."

"경은 내가 없는 동안 캠프의 위생 상태를 개선해줘. 부상병이 머무는 천막과 침구, 의복을 모조리 새것으로 교체해. 마침 오늘 보급이 왔으니까 충분히 가능할 거야. 식단 개선에도 신경을 써주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도련님께서 없는 동안이라니요?"

"잠깐 어딜 좀 다녀올 거거든. 데미안이랑 같이."

"예에?"

가르딘 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데미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를 데리고 어딜 다녀올 생각이신지."

"아주 으슥한 곳?"

"...."

"꼭 필요한 일이야. 안 그러면 부상병들이 죄다 죽어나갈 거라서."

라키엘은 희미하게 웃었다.

방금 말한 그대로였다. 병사들 대부분의 부상 부위를 '봉합만' 해둔 상태였다. 한데 그들을 이대로 방치하면? 대부분이 응급 수술을 한 보람도 없이 감염으로 죽게 될 것이다.

"감염을 막고 치료할 약이 필요해. 한데 여긴 그런 항생제가 없어. 그럼 방법이 뭐가 있을까. 직접 만들어야지."

"...."

항생제?

가르딘 경과 데미안은 눈을 끔벅거리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처음 들어보는 종류의 약이었다. 어쨌건 엄청 좋은 건가 보다. 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는 사이, 라키엘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야. 항생제 만들 재료를 좀 구해와야겠다."

"보급을 받거나 사들이면 안 되는 겁니까?"

"응. 안 돼."

"...."

"그런 방식으로는 못 구하니까. 아직 사람들이 잘 모르는 재료라서."

사실이었다.

지금 자신이 구하려는 재료의 존재를 이곳 사람들은 '아직은' 모른다. 그게 알려지는 건 몇 년이 더 지난 후가 될 것이다.

'마검황에서 그랬거든.'

문득, 소설 중후반부의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엘프 왕국 에피소드였을 것이다. 엘프들이 사용하는 특이한 약재와, 그걸 활용한 치료법이 나온 적이 있었다. 덕분에 반죽음 상태였던 데미안이 살아났다.

자신은 그때 본 내용을 응용할 생각이었다. 언제부터?

'별궁을 떠나 앙부아즈로 오는 마차 안에서. 그동안 내내 고민하고 궁리했거든. 병사들의 감염 방지책을 말이지.'

전쟁터의 부상병을 돌보러 오는 길이었다. 당연히 외상과 그에 따르는 감염 방지 대책이 필요했다. 하여 고민했고 떠올렸다.

"어쨌건, 그런 이유로 지금 당장 출발할까 싶고."

"지금 당장 말입니까?"

"어."

황당한 듯 되묻는 데미안. 녀석을 향해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당장 움직여야지. 재료를 구하는 데에 시간이 걸릴 거고, 그걸 가져와서 손질하는 데에 시간이 또 걸릴 건데. 그동안 부상병들은? 그들의 부상 부위는? 그게 얌전히 우릴 기다려 주나?"

"...."

"그래서 지금 바로 움직이는 거야. 잊지 마. 환자는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아요."

"하지만 도련님은...."

"내가 뭐?"

"항생제라니. 그런 약이 있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재료라고 하셨는데, 도련님께서는 그런 걸 어떻게 아신 건지."

"미심쩍다고? 책에서 봤다. 됐냐?"

"어떤 책이었는지...."

"기억 안 나는데."

"...."

"뭐. 왜. 뭐. 어쩌라고."

"...."

데미안은 할 말이 없어졌다. 하지만 라키엘을 향한 미심쩍은 시선을 거두지는 않았다.

'황태자는 가끔씩, 조금 이상하니까.'

갑자기 대뜸 앙부아즈까지 온 결정이 그러했다. 부상병의 다친 곳을 어루만지며 괴상한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 통증을 누그러뜨리는 것이 그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치 이 세상을 한 계단 위에서 훤히 내려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곤 해. 바로 지금처럼.'

가끔 저런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다. 미리 세상을 한 번 살다 온 사람 같은 느낌? 혹은 다른 상위의 세상에서 이곳을 둘러본 경험이 있는 느낌?

그렇듯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그런 느낌을 주는 때가 가끔씩 있었다. 지금이 딱 그랬다.

"...."

하지만 데미안은 이내 표정을 가다듬었다. 의혹을 드러내는 대신 평소처럼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따르도록 하지요. 다만-"

"다만?"

"수당을 따로 챙겨주셔야겠습니다."

"...콜."

협상(?)이 성사되었다. 곧바로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라키엘은 데미안에 이어 왕녀가 붙여 준 여섯 명의 기사도 함께 차출했다. 인근의 지리에 밝은 길잡이 병사도 불러들였다. 그렇게 총 9명의 일행이 캠프를 출발했다.

"이 일대에서 사람의 발길이 가장 드문 깊은 숲으로. 안내해줘."

길잡이 병사에게 주문했다.

병사가 앞장을 섰다.

캠프를 떠나.

개울과 들판을 건너.

완만한 산기슭을 올랐다.

숲이 울창해졌다. 사람 다니는 오솔길이 점점 드문드문해졌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전진했다. 마침내 사냥꾼들이 아주 가끔 사용하는 외딴 오두막마저 보이지 않게 되었다.

푸스스스....

깊은 숲은 심연과 흡사했다. 오로지 바람과 새 소리만 이따금 흘러드는 공간. 그 외의 익숙한 기척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거, 강원도 생각나는구만.'

문득, 홍천에 갔던 때가 떠올랐다. 당시에 선배와 트래킹을 하다가 샛길로 잘못 들어간 적이 있었다. 홍천에서 양구로 넘어가는, 군인들만 아주 가끔 사용하는 길이었던가.

아차 하면 우랄산맥 떡멧돼지와 조우해서 하이파이브를 하게 될 법한 분위기였다. 그때 봤던 풍경이 지금과 비슷했다. 일행도 비슷한 기분을 느낀 듯했다.

"너무 깊은 곳까지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만."

데미안이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염려가 배어나는 말투였다.

"이런 곳이라면 몬스터와 맞닥뜨릴 수도 있습니다. 특히 이렇게 인적이 드문 곳이면 의도치 않게 아피로스 둥지의 영역에 발을 들이게 될 수도 있고 말입니다."

"어. 아마 그렇겠지."

"예. 그래서 다들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데미안의 말이 사실이었다.

왕녀가 보내준 기사들도. 길잡이 병사도. 모두 긴장된 기색이 역력했다. 이쪽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건지 알고 싶다는 눈치였다.

'다들 안심시켜 줘야겠네.'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일행을 향해 말했다.

"다들 불안해할 필요 없어. 아피로스 둥지? 그래. 이런 외진 숲이라면 놈들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될 수도 있겠지. 아피로스는 마젠타노 중부에서부터 이곳 앙부아즈 중북부 일대에 폭넓게 무리를 짓고 서식하는 몬스터니까."

모두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향해 더욱 신뢰감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다들 알잖아? 아피로스는 누군가가 먼저 둥지나 애벌레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비교적 얌전하다는 거. 그게 상식 아닌가?"

끄덕.

모두가 다시금 끄덕.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나마 저 뚱땡이 군의관이 거대 꿀벌인 아피로스의 습성을 모르지는 않는구나. 그러니까 개념 없는 뻘짓을 하지는 않겠구나.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확실히 나름의 생각이 있긴 한가 보구나, 라고.

그러니까 우리, 크게 위험한 일을 겪진 않겠지. 다들 조금은 안도했다. 약간이나마 불안감을 내려놓았다. 그 순간, 라키엘의 미소가 의미심장해졌다.

"그래서야."

여기까지 온 것은.

감염을 예방하고 치료할 항생 물질, 그걸 구하기 위해 이제부터 해야 할 짓은 바로....

"이제부터 우리는, 아피로스 둥지의 여왕 애벌레를 납치할 거다."

108화. 꿀벌 잡는 말벌 (1)

[심장 : 이제부터 우리는ㅋㅋㅋ 여왕 애벌레를 납치할 거닼ㅋㅋㅋㅋㅋ]

[허파 : 헠ㅋ 파핰ㅋㅋㅋㅋㅋ]

[대장 : 와 우리 몸뚱이 양심ㅋㅋㅋ]

[간장 : 이거 이거 이 인간 이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일부러 입 싹 닫고 있다가 이제 와서 알려주는 인성 보소ㅋㅋ]

[위장 : 아 미리 스포하면 탈주한다고ㅋㅋㅋ]

[오장육부가 당신의 인성을 비난하며 미운 놈한테 떡 주듯 HP를 던져줍니다.]

[오장육부가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한 HP : 5,500]

"...."

저런 비난, 들어도 할 말이 없다. 사실 일부러 지금까지 안 알려준 게 맞으니까. 미리 알려주면 죄다 동행을 거부하거나 캠프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할까 봐 불안했으니까.

'뭐, 어쨌건 계획은 대성공.'

라키엘의 입가에 사악한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일행은 모조리 경악의 도가니에서 어푸어푸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무리도 아니지. 거대 꿀벌인 아피로스는 깊은 숲에 흔하게 서식하는 것과는 별개로 제법 강한 몬스터니까. 개체 하나하나는 별거 아니겠지만, 집단으로 모이면 어지간한 오우거도 찜쪄먹는 놈들이니까.'

문득, 마검황 속의 스토리가 떠올랐다. 소설 중후반이었을 것이다. 그때쯤 아피로스가 제대로 언급된 적이 있었다.

'아피로스는 은근히 순한 생물이라고 했지. 성향 자체는 공격적이지 않아. 인간이나 침입자가 둥지 근처를 배회해도 먼저 공격하는 일도 드물고. 하지만 누가 둥지나 애벌레를 건드리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지.'

그 어떤 몬스터보다도 공격적으로 변하게 된다. 침입자를 죽을 때까지 추적한다. 지구가 끝장날 때까지 달려든다. 본인(?)들의 목숨도 도외시할 정도로 집요해진다.

'특히나 여왕 애벌레를 건드리면? 그건 더 말할 필요도 없는 거고.'

그만큼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여왕 애벌레가 분비하는 물질이 엄청난 항생 성분을 갖추고 있으니까.'

소설 마검황에서 그랬다. 그 분비물 덕분에 다 죽어가던 데미안이 살아났다. 덤으로 엘프들이 여왕 애벌레의 분비물을 추출하는 장면도 자세하게 묘사가 되었다.

'엘프 특유의 동물과의 교감 능력을 활용했지. 물론 내가 그걸 따라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내 나름의 방법으로 추출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여왕 애벌레를 손에 넣어야 한다. 그 분비물만 뽑아내면? 캠프의 수많은 부상병들을 감염에서 해방할 수 있을 것이다. 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보너스 수명을 왕창 챙길 수 있을 것이다. 풍요롭고 야물딱진 황족 라이프를 탱자탱자 즐기는 삶을 누리게 되리라.

'....'

순간 설렜다.

하지만 라키엘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다짐하며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경악의 풀장에서 첨벙거리고 있는 일행을 둘러보았다.

"다들 표정이 왜들 그래? 왜. 문제 있어?"

"물론 문제야 있습니다만-"

데미안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애벌레를, 그것도 여왕 애벌레를 납치하겠다는 말씀이 얼마나 위험한 발언인지는 알고 계신 겁니까?"

"응."

"그럼, 그걸 행동으로 옮겼을 때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도 알고 계신 겁니까?"

"응."

"그런데 그걸 하겠다고요?"

"응."

"...."

데미안의 표정이 굳었다.

"가끔 황당할 정도로 무모한 일을 벌이시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모시면서 겪었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아닙니다. 선을 넘으셨습니다."

"선을 넘었어? 내가?"

"예. 여왕 애벌레를 납치하는 역할을 누구에게 맡기겠다는 겁니까. 그 역할을 맡는 사람은 반드시 아피로스 둥지의 모든 벌들에게 집중 공격을 당할 겁니다."

"응. 그렇겠지."

"그리고 십중팔구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한 채로 끔찍하게 당할 겁니다."

"응. 그렇겠지."

"설마 그 역할을 일행 중의 하나에게 시키겠다는 겁니까?"

"응. 그럴 거야."

"제정신이십니까?"

"응."

"...설마."

"응?"

"그런 미친 짓을 직접 하시겠다는 건 아니겠지요?"

"에이. 당연히 아니지."

라키엘은 방긋 웃었다. 데미안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났다.

"그럼 누구에게...?"

"너."

"...예?"

"너라고."

"잘 못 들었습니다?"

"시치미 떼는 컨셉 잡지 말고. 너라고요. 너."

"...."

데미안의 한쪽 눈썹이 씰룩.

라키엘도 한쪽 입술로 씰룩.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안 다쳐. 안 죽어. 안전하게 해낼 방법이 있으니까."

"안전한 방법이 있단 말입니까?"

"어. 요 녀석 덕분에."

툭.

안주머니가 있는 가슴께를 툭 쳤다. 안쪽에서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꼬슴!"

그 대답을 들으며 말해주었다.

"내 계획을 말해주자면, 네가 아피로스 둥지에 접근해야 해. 그리고 검으로 가장 강력한 일격을 둥지 옆구리에 콱- 그럼 둥지의 벌 떼가 화를 내겠지?"

"아마 그렇겠지요."

"그래. 그럼 넌 달려드는 벌 떼 앞에서 10초만 댄스 타임으로 춤 좀 춰주고."

"그럼 더 화를 낼 텐데요."

"응. 그러라고 그러는 거야."

"...."

"어쨌건, 둥지의 아피로스들을 최대한 화나게 만들어야 해. 너한테 모든 어그ㄹ... 이목이 집중되도록. 오직 너만 공격하도록."

"그럼 저는?"

"도망쳐야지. 최대한 멀리. 최대한 오래. 모든 벌 떼를 데리고. 꾸준하게."

"...유인작전이로군요. 맞습니까?"

"어."

"하지만 제가 끝까지 도망칠 수는 없을 듯합니다만."

"그때 얘를 쓰면 돼."

툭.

"꼬슴!"

재차 들려오는 꼬슴이의 대답.

"얘한테 빨간 해바라기씨를 먹여. 그럼 커질 거야."

"커지면, 어떡하면 됩니까?"

"그 아래에 깔려."

"예?"

"꼬슴이가 널 배 아래에 깔고서 웅크리며 가시를 세울 거야. 그러면 돼."

"...설마."

"감이 잡혔냐?"

"예. 아피로스는 크기가 1미터는 족히 되는 놈들이니까... 꼬슴 경의 촘촘한 가시를 뚫지 못하겠지요."

"바로 그거지. 선인장 작전."

"...."

"그렇게 네가 둥지의 모든 아피로스를 끌고 가서 버티는 사이에 우리가 둥지로 들어가서 여왕 애벌레를 슥삭."

"...."

"알겠지?"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부분이 있습니다."

"뭔데."

"여왕 애벌레를 성공적으로 납치한다 해도, 저와 꼬슴 경은 어떡합니까? 제가 알기로 아피로스는 침입자에게 집요하기로 유명한 몬스터인데 말입니다."

"그건 그렇지. 아마 굶어 죽을 때까지 포위망을 풀지 않겠지. 둥지에 불이라도 나지 않는 한에는."

"...."

"또 감 잡았지?"

"전ㅎ... 아니, 도련님. 당신은 정말 악랄한 인간입니다."

"응. 악랄해서 미안해."

"...."

"불 살짝만 지를 거야. 둥지 겉면만 살포시 그슬릴 정도로. 그 정도만 해주면 널 포위하고 있던 벌 떼가 모조리 둥지로 돌아올 거고. 둥지에 붙은 불도 분비액으로 금방 꺼뜨릴 수 있겠지. 그러니까 놈들한테도 큰 피해는 없을 거고. 그 사이에 너랑 꼬슴이도 도망칠 수 있고."

라키엘은 안면 가득 철판을 촥촥 깔며 말했다. 데미안의 입가에 한숨이 서렸다.

"후우. 그럼 어쨌건, 제가 미끼 역할을 맡게 될 거라는 말씀이시군요."

"응. 그래서 위험수당 신청하게?"

"예."

"원하는 금액은?"

"주급의 30배가 적당할 듯합니다."

"쯧. 욕심이 과한데."

"싫으시면 제가 오늘부로 퇴직하면 되겠습니까?"

"협박이야?"

"진심입니다."

"아주 부자 되시겠어?"

"가급적 그러고 싶습니다."

"그럼 20배로 가자."

"퇴직하겠습니다."

"25배는 어때."

"감사합니다."

그렇게 데미안과도 극적으로 협상 타결!

일행은 다시금 꾸준히 전진했다. 물론 다들 불안감을 떨쳐내지는 못했다. 아무리 계획이 있다 한들, 아피로스는 여전히 위험한 몬스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불안감보다 라키엘에 대한 믿음이 아주 조금 더 컸다.

'아무리 그래도 진짜 정체는 마젠타노의 황태자니까. 일정 이상의 위험한 짓은 안 벌이겠지?'

...라고 왕녀가 붙여 준 기사들은 생각했다. 그들은 왕녀 아델린을 따라 황도 마젠타를 방문했던 수행원이기도 했다. 라키엘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그럼 길잡이 병사는?

'저 군의관, 기적을 행했다고 들었어. 그럼 우리가 다치거나 해도 그 기적으로 우릴 살려줄 수 있겠지?'

캠프에 쫙 깔린 소문을 떠올렸다. 뚱땡이 군의관이 성자의 기적을 행했다고 하였던가. 그러니 자신들이 위험해져도 무사할 거라는 믿음이 생겨났다.

모두의 오해(?) 속에 반나절이 더 지났다. 그동안 라키엘은 각자의 역할을 숙지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찾았습니다. 저 앞, 개울 건너편 비탈 앞 공터에 둥지가 있는 걸 봤습니다."

길잡이 병사가 아피로스의 둥지를 발견했다. 일행의 표정에 긴장감이 서렸다.

"좋아. 일단 확인부터."

풀숲 속에 몸을 낮추었다.

천천히 전진했다.

얼마나 기다시피 움직였을까. 길잡이 병사의 말대로 둥지가 보였다.

'어우야. 크기 보소.'

말이 벌집 둥지지, 엄청나게 컸다. 거의 어지간한 동네 작은 마트 정도?

최소한 그 정도 크기는 되어 보이는 돔 모양의 둥지가 지면 위에 견고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 주위로는 진돗개 덩치는 되어 보이는 벌들이 붕붕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말이 붕붕이지, 저거, 거의 오토바이 소리가 나네?'

마치 배달 오토바이 수십 대가 날아다니는 풍경 같았다. 라키엘은 일행을 돌아보았다.

"시작하자. 계획대로."

"...."

다들 말없이 끄덕.

그때부터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곳까지 오며 한 아름씩 따온 들꽃을 꺼냈다. 꽃이며 줄기며 구분 없이 온몸에 비볐다. 라키엘도 똑같이 했다. 탐사복이 금방 꽃잎과 줄기에서 나온 즙으로 범벅이 되었다.

'이래야 아피로스들이 우리를 덜 적대할 테니까.'

마검황에서 나온 언급이었다.

이러면 온몸에 들꽃 냄새가 밴다고. 벌들이 적대감을 덜 느끼게 된다고. 그걸 떠올리며 더욱 열심히 비비고, 발랐다.

"다음. 횃불."

"준비됐습니다."

기사들이 횃대를 꺼냈다. 송진을 잔뜩 발랐다. 작은 불꽃만 튀기면 곧바로 불을 붙일 수 있게 준비를 갖추었다.

'이만하면 됐어.'

라키엘은 심호흡을 하며 데미안을 돌아보았다.

"자신 있지?"

"없습니다."

"그래도 해야지?"

"...후우. 꼬슴 경이나 건네주시죠."

꼬슴이를 건네주었다.

데미안이 몸을 풀었다. 일행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둥지를 노려보았다. 어느새 날카로워진 눈길로 주위 아피로스 떼를 관찰했다.

놈들의 움직임을 익히고, 적절한 타이밍을 재면서, 서서히 접근했다. 가장 강력한 일격을 위해, 둥지에 최대한 강한 타격을 주기 위해 검을 움켜쥐었다.

한데 그때였다.

부브브브브우우웅-!

둥지 주위를 날아다니던 아피로스 떼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분주해졌다. 날갯짓이 훨씬 빨라졌다. 사나워졌다. 마치 적을 만난 듯한 반응. 혹은 침입자를 감지한 듯한 움직임이었다.

"...!"

데미안은 움찔했다.

설마 벌써 이쪽의 의도를 간파한 걸까. 그래서 저러는 걸까. 그는 검을 움켜쥔 채로 라키엘을 돌아보았다. 눈빛으로 강하게 항의했다.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라키엘도 데미안을 째려보며 눈빛으로 대꾸했다.

'네가 너무 일찍부터 티 낸 거 아니냐?'

'설마요. 기척을 최대한 죽였습니다.'

'어설프게 죽인 거 같은데?'

'어쨌건, 그럼 이제 어떡할까요.'

'어떡하긴. 기왕 이렇게 된 거 당장 한 대 치고 도망쳐.'

'...알겠습니다.'

쯧.

데미안은 혀를 찼다. 그리고 다시금 검을 움켜쥐었다. 질질 시간을 끌 때가 아닌 듯했다.

'그러니까 그동안 연마했던 가장 강력한 일격을.'

꽈드득!

그의 손등에, 팔뚝에, 어깨와 상반신 전체에 힘줄이 돋아났다. 심장에 깃든 마나하트가 사납게 포효했다.

검을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기 직전이었다.

콰아아아아아-!

하늘에서 갑작스러운 굉음이 울렸다. 거대한 실루엣이 내리꽂히듯 떨어졌다. 불운한 아피로스 한 마리를 순식간에 덮쳤다. 무지막지한 위턱으로 물었다. 찢었다. 아니, 잘랐다. 단숨에. 반응할 틈도 없이.

그리고 포효했다.

키이이이아악-!

"...!"

코뿔소만큼이나 거대한 말벌이었다. 그런데 한 놈이 아니었다. 첫 습격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게 무슨....'

데미안이 두 눈을 부릅뜨는 사이. 거대한 말벌 수십 마리가 아피로스 둥지를 향해 쏟아져 내려왔다.

자비 없는 사냥.

학살의 시작이었다.

109화. 꿀벌 잡는 말벌 (2)

콰아아아아아-!

굉음이 울렸다.

주위의 공기를 모조리 찢어발기는 듯한 폭음의 연속.

'이거, 완전 헬리콥터 소린데?'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풀숲 속으로 더욱 깊게 몸을 낮추었다. 그리고 눈길만 빼꼼 들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헬리콥터 소리를 내는 괴물들이 있었다. 코뿔소 사이즈의 말벌이었다.

'...미친.'

아까 아피로스 떼가 날아다니던 소리가 오토바이의 것이었다면, 새로 등장한 거대 말벌은 정말로 공격헬기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렇듯 살벌하게 사방으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키이이이아아악! 콰작! 콱!

유성처럼 내리꽂혔다.

아피로스를 덮쳤다.

아피로스가 저항하며 반격했다.

하지만 아피로스의 몸부림은 애처로울 정도로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그저 말벌의 거대한 턱에 잡혔다. 콰직, 소리와 함께 목이 잘렸다. 허리가 동강 났다.

키이이악!

그런 말벌이 수십 마리였다.

턱질 한 번에 아피로스 한 마리씩을 으깨고 조각냈다. 아피로스 떼가 수없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마치 병아리 떼 속으로 달려든 호랑이 같은 기세였다.

그러니까 저건, 사냥이 아니다.

학살이다.

꿀꺽.

라키엘은 초조하게 마른침을 삼켰다.

'저런 놈들이 어디서 나타난 거지.'

보고 있자니 소름이 돋았다. 그 정도로 일방적인 학살극이었다. 만약 이쪽이 조금만 더 일찍 작전을 시작했다면? 그래서 움직이고 있는 상황에서 저 말벌 떼가 둥지를 습격했다면?

'우리도 공격을 받았겠지.'

나름 운이 좋았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에 나란히 엎드린 병사가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구, 구, 군의관님? 우리, 우리 이제, 어떡합니까?"

"어떡하긴. 일단 숨어 있어야지."

"하, 하,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혹시 뭔가 알고 있나? 있으면 설명부터. 침착하게."

"그게, 그... 저 말벌 같은 괴물 말입니다. 저거, 베스파로스입니다."

"베스파로스?"

"예, 군의관님. 저놈들, 아피로스를 주식으로 삼는 놈들입니다. 혼자서 아피로스를 백 마리는 거뜬히 죽이는 놈들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놈들이 사냥과 학살을 마친 후에 주변을 꼼꼼하게 정리한다는 점입니다."

"정리?"

"예. 주위에 널브러진 아피로스 사체를 정리해서 한곳으로 모은다고 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숨이 붙어 있거나, 숨어 있던 아피로스를 찾아내서 죽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잠깐, 그 말은...."

"저 사냥과 학살이 끝나면 저놈들, 이 일대를 샅샅이 수색하면서 쥐새끼 한 마리도 살려두지 않을 겁니다. 물론 우리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

병사의 말에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허풍이나 낭설이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최대한 빨리, 지금 당장이라도 도망쳐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거네.'

식은땀이 줄줄 흘러나왔다.

한편으로는 눈물도 나올 것 같았다.

'그래. 일단은 다 알겠는데. 도망은 쳐야겠는데. 내 여왕 애벌레는 어떡하냐.'

여왕 애벌레를 야물딱지게 납치하려 했는데. 항생물질을 왕창 얻어서 부상병을 치료하고 싶었는데. 그래야 보너스 수명도 알뜰살뜰하게 챙길 텐데.

그 계획이 뿌리부터 박살 나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유린당하고 있는 아피로스 둥지와 함께 말이다.

'어오, 진짜.'

라키엘은 아쉬움 가득한 눈길을 던졌다. 이 순간에도 아피로스 떼가 무수히 죽어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장수말벌에게 습격당한 꿀벌 둥지를 보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저 난리의 끝도 뻔하리라.

'저 둥지, 망했네.'

다 죽을 거다.

여왕 애벌레고 뭐고 아무도 못 살아남을 거다. 그러면 이쪽의 계획도 망하는 거겠지.

'여기선 여왕 애벌레를 구하는 건 완전히 텄어. 나가리야. 그렇다고 다른 숲에 가서 처음부터 다시 수색을 하는 건? 다른 아피로스 둥지를 탐색하는 건? 무리지. 안 돼, 그건.'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모자랐다. 이미 이곳 숲을 수색하느라 하루가 넘는 시간을 보낸 터였다. 한데 여기서 시간을 더 끌면?

캠프의 부상병들이 버티지 못할 것이다. 각종 감염에 시달리며 죽어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 계획은 명백하게 망했다. 비분강개의 심정이 절로 쑴펑쑴펑 샘솟았다.

'하아. 차라리 나는 자연인이다 57회 말벌 아저씨로 빙의하고 싶다. 그 아저씨처럼 용맹하게 호다닥 달려가서 말벌이고 뭐고 전부 찰싹찰싹 후려쳐서 쫓아내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왜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이런 타이밍에 이런 일이 벌어지나 싶었다. 너무 짜 맞춘 거 아니냐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쩌면 이 세계가 일부러 나를 굴리고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건 아닐까 싶은 피해망상도 들었다.

만약 이게 소설 속 일이라면, 이따위 전개를 쓰는 작가에게 현피라도 신청하고 싶다는 충동마저 새록새록 돋아났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 눈물을 훔쳤다. 늦기 전에 도망치자고 모두에게 신호를 보내려 했다.

한데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아아-!

머리 바로 위쪽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다. 가까웠다. 그것도 너무 심하게 가까웠다. 반사적으로 위쪽을 홱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덜컥, 온몸이 굳었다.

"...!"

머리 위쪽 5미터 상공.

딱 2층 창문 높이에서 베스파로스 한 마리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저놈과 눈이 마주쳤다고.

키아아아악!

베스파로스가 포효했다. 놈이 이쪽을 향해 급강하로 내리꽂혀 왔다!

"허억?"

너무나 빠른 속도였다.

집게처럼 거대한 위턱이 엇, 하는 사이에 지척까지 쇄도해 오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굴렸다. 그 직후, 엎드려 있던 지면이 강제로 지형개조(?)를 당했다.

푸크걱!

베스파로스의 위턱이 땅바닥을 푹 찔렀다. 놈이 거대한 머리를 휘저었다. 지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 와중에 땅속의 커다란 바위가 위턱에 물린 걸까.

놈이 턱에 힘을 주었다.

콰득!

짐볼 크기의 바위가 단숨에 으깨졌다. 만약 방금 때맞춰 몸을 피하지 못했다면?

'허리가 잘렸겠지.'

소름이 쫙 돋았다.

"도망쳐!"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그 외침이 신호라도 된 듯, 일행이 모조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함께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후우웅!

"...!"

뒤쪽에서 들려오는 공기 찢어지는 소리. 듣자마자 몸을 날렸다. 굴렀다.

처컹-!

거대한 위턱이 공기를 가르며 허공에서 맞물렸다. 그 살벌한 소리가 머리 바로 위쪽에서 들려왔다. 그러나 안도할 틈은 없었다.

커다란 쇠파이프, 아니, 가로등 기둥 같은 물체가 옆에서부터 날아왔다. 전신을 후려쳤다.

뻐억!

"...컥!"

일순간 세상이 흔들렸다. 온몸이 허공에 붕 떴다. 의식이 멍해졌다.

'앞다리?'

아마도 난 베스파로스의 앞다리에 맞은 거겠지. 빨리 일어나야 하는데. 그래야 도망치는데.

생각하는 사이에 추락의 순간이 다가왔다.

콰당탕!

"...끄억!"

아프지는 않았다. 아니, 아픈 줄도 몰랐다. 그저 어지러웠다.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버둥거리며 일어나려 애를 썼다.

하지만 베스파로스의 공격적 대응이 더 빨랐다.

키아아아악!

"...!"

몸을 일으키며 위를 보는 순간. 바로 위에서 도사리고 있던 베스파로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놈이 거대한 위턱을 벌렸다. 그걸 아래로 내리찍었다.

이쪽으로. 전신을 세로로 쪼갤 기세로. 한데 그걸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끝장....'

오싹 다가오는 예감. 그 속에서 눈을 부릅떴다. 동시에 강렬한 충격이 옆구리를 걷어찼다.

"피하십시오!"

뻐억-!

"...꽤액!"

혹시 몸이 기역자로 접히며 날아가는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있다. 언제? 한강 공원에서. 산책하다가. 쫄쫄이 입은 라이더의 자전거에 받혀서.

지금, 그때와 똑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물론 이번의 원인은 자전거가 아니었다. 데미안이었다. 녀석이 다리를 뻗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명백하고도 확실한 옆차기 자세였다.

'...크레모에서도 이러더니, 또?'

그때도 옆차기로 날 후려차서 위기를 모면하게 했지, 아마?

쿠당탕!

"거억!"

오늘 몇 번을 넘어져 뒹구는 걸까. 하지만 불평할 틈은 없었다. 그 사이에 데미안이 베스파로스의 위턱을 막아내고 있었다.

카카카카카캉-!

사납게 번득이며 몰아치는 데미안의 검격! 베스파로스가 위턱을 벌리며 맞섰다. 데미안의 검이 살벌하게 번득일 때마다 베스파로스의 위턱에 커다란 흠집이 새겨졌다. 때로는 날개가 잘려나갔다.

마침내 데미안의 폭풍 같은 연격이 끝났을 때.

...키이이이익!

그곳에는 양쪽 위턱과 날개를 모두 잃고서 애처롭게 버둥거리는 베스파로스가 남아 있었다.

"지금입니다! 뛰십시오!"

데미안이 이쪽으로 뛰어왔다. 녀석과 나란히 달렸다. 뒤에선 위턱을 잃은 베스파로스가 발광을 하며 쫓아왔다. 성난 코뿔소 같았다. 저 덩치의 돌진에 깔리면? 상상하기 싫었다.

더 바쁘게 뛰었다.

하지만 상황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콰아아아아아-!

새로운 굉음, 아니,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위를 보았다.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목격해야 했다.

'아 진짜.'

이번엔 스무 마리도 넘는 베스파로스가 위쪽에서 살벌한 선회비행을 하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게다가 암담한 상황에 처한 건 이쪽뿐만이 아니었다.

"으아아악! 저리 가! 살려줘!"

"이쪽으로! 물러서!"

"방패! 막아!"

길잡이 병사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러댔다. 앙부아즈 기사들이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걸 보자 절망적인 확신이 들었다.

'이대로 있다간... 다 죽겠어.'

동시에 깨달음이 몰려왔다. 베스파로스 떼가 일행을 감지한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작전을 준비하느라 온몸에 묻힌 들꽃 가루. 그리고 전신에 비벼서 바른 꽃잎과 줄기 수액 때문이야.'

그것들 때문이다. 아피로스의 적대감을 누그러뜨리려 바른 준비물 때문이다. 그것들 때문에 오히려 베스파로스가 이쪽을 아피로스로 인식해 버렸다. 즉, 아피로스와 똑같은 사냥감이 되어 버린 셈이다.

'그럼 어떡하지?'

무작정 도망쳐서는 답이 없을 것이다. 이미 사냥감으로 낙인찍힌 이상, 베스파로스 떼가 끝까지 일행을 추격해 올 것이다.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뿌리치지 못할 것이다.

'그럼 맞서 싸워?'

그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데미안이 전력을 다 쏟아부어야 고작 예닐곱 마리를 막아낼 수 있을까. 나머지 기사들까지 가세한다 해도 열 마리쯤 감당하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그런데 베스파로스 떼는 최소 수십 마리 이상이었다.

'어떡해야 하지?'

손끝과 입술이 차가워졌다.

식은땀이 송골송골 배어났다.

당장 쇄도해 오기 직전인 머리 위의 베스파로스 스무 마리. 뒤에서 광분하며 달려오는 한 마리. 놈들을 피해 달리며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머리를 굴렸다. 궁리를 짜냈다. 목숨을 건 고민을 거듭했다.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다.

그리고 마침내.

머릿속에 섬광 한 줄기가 떠올랐다.

'...그거다!'

번쩍 떠오르는 기억. 한의원에 약재를 납품하던 거래처의 대표님. 몇 번인가 술자리도 함께했을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 그분 취미가 양봉이라고 했다.

한데 매일 말벌 피해 때문에 골머리를 앓으셨다고 했던가. 그러다가 어느 날, 단순한데 기막히는 덫을 개발했다며 자랑했던가.

'그거, 어쩌면 통할지도.'

통해야 한다.

그래야 산다.

"배낭!"

라키엘은 자신의 배낭을 다급히 뒤적였다. 찾던 물건이 잡혔다. 꺼냈다. 수통이었다. 한데 수통엔 물이 담겨 있지 않았다. 술이 담겨 있었다. 임시 소독용으로 쓰려고 가져온 독한 술이었다.

수통 뚜껑을 열었다.

"니들도 말벌이면! 술 좋아할 거다! 아니, 제발 좋아해 주라!"

소망을 한껏 담아 수통을 내던졌다. 수통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갔다. 나무 그루터기에 맞았다.

바닥에 떨어지며 술이 콸콸 흘러나왔다. 냄새가 퍼졌다. 그 순간이었다.

...키이악?

일행을 향해 달려들던 베스파로스 떼가 일제히 동작을 멈추며 더듬이를 쫑긋 세웠다.

110화. 말벌 잡는 인간 (1)

취향의 세계는 다양하다.

특히 음식에 대한 취향은 더욱 다양하다. 누군가는 민트초코를 좋아한다. 어떤 이는 피자 위에 파인애플을 올린다. 망설임 없이 소스를 탕수육에 붓는 만행을 저지른다.

또 누군가는 일부러 김을 뺀 콜라를 선호하기도 한다. 아니, 심지어 콜라에 밥을 말아 먹는 사람도 있다!

그렇듯 입맛의 세계는 천차만별의 차원이라 할 수 있다. 비단 인간만이 그런 게 아니다. 사회적 곤충인 벌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 이곳에서 날뛰는 베스파로스 무리 또한 그랬다.

...키이악?

일행을 향해 달려들던 베스파로스 떼가 일제히 멈칫했다. 더듬이를 쫑긋 세웠다. 놈들의 후각중추에 강렬한 자극이 가해졌다.

그러니까 이건... 알코올이다!

...키아아악?

선두의 베스파로스가 몸을 돌렸다. 방금 라키엘이 술병을 던진 방향을 향해서였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다른 놈들도 연이어 바삐 몸을 돌렸다. 철컥철컥 뛰기 시작했다. 아예 날갯짓을 하며 뛰는 놈도 생겨났다.

모두가 술병이 떨어진 곳을 향해 달려갔다. 마치, 출근 시간에 닫히기 직전의 전철 문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같았다. 그걸 보며 라키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다!'

성공이다.

확신이 들었다.

의도가 딱 들어맞았다.

'이거, 될까 말까 긴가민가했는데.'

문득, 한국에 있던 때가 생각이 났다.

한의원에 약재를 납품하던 거래처의 대표님. 인심 좋은 어르신이셨다. 나름의 친분이 있어서 가끔 술자리를 겸한 식사도 함께하던 사이였다.

그러던 어느 식사 자리에서였던가. 그 대표님이 자랑을 했더랬다.

자신의 취미가 양봉이라고. 주말에만 가는 농막을 강원도에 지어두고 뒷마당에 벌통을 장만했다고. 그런데 말벌이 자꾸 벌통을 건드려서 골치였는데 그걸 해결했노라 하셨던가.

사실 처음엔 별로 흥미가 없었다. 그냥 예, 예, 대답만 했다. 그러다가 그 대표님한테서 해결법을 들었던 순간,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던 기억이 났다.

'그 방법, 엄청 심플하면서도 효율적이었지. 바로 알코올에 대한 꿀벌과 말벌의 취향 차이를 이용한 덫이 비결이었으니까.'

꿀벌과 말벌의 취향 차이.

꿀벌은 알코올 냄새를 싫어한단다. 반면에 말벌은? 알코올이라면 환장한단다. 냄새만 맡으면 홀린 듯이 모여든단다.

그런 취향(?)을 이용한 간단한 덫.

그것이 바로....

'막걸리 트랩이라고 했지.'

그냥 2리터 페트병에 막걸리를 1/3 정도 채워서 벌통 근처 곳곳에 걸어두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만 해두면?

만사 오케이.

이삼일만 지나면 막걸리에 빠져 죽어서 동동 떠 있는 말벌들의 모습을 직관할 수 있다고도 했다.

'그거, 여기서도 통할지 확신이 없었는데. 혹시나 했는데....'

통했다.

성공이다.

지금, 이쪽을 덮치다 말고 술병을 향해 쿠쾅쾅 몰려드는 베스파로스 떼의 모습을 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덕분에 시간을 벌었다. 나머지 일행들도 대강 돌아가는 상황을 깨달은 걸까.

"지금이야!"

"뛰어!"

다들 허겁지겁 뛰었다. 지금만이 도망칠 유일한 기회라 여긴 듯했다. 그러나 라키엘의 생각은 달랐다.

"다들 그만!"

촤아악!

도망치려던 기사의 앞을 가로막았다. 길잡이 병사에게 팔을 뻗었다. 이쪽과 부딪칠 뻔한 기사가 다급히 외쳤다.

"무, 무슨 짓입니까!"

"군의관님도 이 틈에 얼른 도망쳐야지요!"

길잡이 병사의 목에도 핏대가 섰다. 하지만 라키엘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빠르게 말했다.

"내가 보증하지. 지금 도망치면 다 죽어."

"...!"

"잠깐 틈이 생겼다고 뛰어서 도망을 쳐? 그 잠깐의 틈이 얼마나 될까. 단순하게 무지성으로 뛴다 한들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까."

"그, 그게 무슨!"

"사실이야. 지금 저놈들, 내가 던진 수통의 술 냄새에 이끌려서 저러는 거니까. 하지만 술에 들어 있는 알코올은 공기 중으로 금방 기화되어서 사라지지. 술의 양이 적을수록 그건 더 빠를 거고."

"...."

"고작 수통에 들어 있는 술이야. 저렇게 커다란 놈들이 핥아대면? 공기에 노출돼서 기화되면? 술 냄새가 얼마나 유지될까. 그게 유지되는 동안에 안전한 곳까지 도망칠 자신들이 있나?"

"...."

모두는 깨달았다.

없다.

아무리 빨리 뛰어도 날개가 달린 저놈들의 추격을 뿌리칠 정도로 멀리까지 도망칠 수는 없다. 금방 따라잡힐 거다. 그리고 몰살당하겠지.

소름이 쫙 돋았다.

"그럼, 이 틈에 숨으면 되는 겁니까?"

기사 하나가 물었다.

라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 몸에 꽃가루를 발라둬서 불가능해. 금방 발각될 거야."

"그러면 대체 어떻게...."

"불을 지르자."

"...예에?"

"다들 준비한 횃대 있지? 꺼내."

어물쩡거릴 시간이 없다. 그런 의도를 제일 먼저 깨달은 이는 데미안인 듯했다.

"알겠습니다."

데미안이 군말 없이 횃대를 꺼내 들었다. 그가 먼저 움직이자, 기사들이 동조했다. 길잡이 병사도 울상이 된 채로 마지못해 횃대를 꺼냈다.

불을 붙였다.

횃불이 활활.

"던져!"

8가닥의 불길이 숲 곳곳으로 떨어졌다. 처음엔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 탄내가 솔솔. 이윽고....

화르르륵!

불이 붙었다. 불길이 순식간에 번졌다. 나무를 휘감고, 덤불을 집어삼켰다. 숲이 붉게 물들어 갔다. 그제야 알코올 냄새에 몰려들었던 베스파로스 떼가 반응했다.

키이악?

하지만 늦었다. 잠깐 알코올에 정신이 팔린 대가는 컸다.

후우우욱!

...!

순식간에 몰아닥치는 열풍!

그 열기에 베스파로스 떼가 혼란에 빠졌다. 더듬이의 후각 중추를 탄내가 점령했다. 적외선 감지기관이 온통 끔찍한 열기에 폭주했다. 베스파로스 떼는 본능적인 공포심을 느꼈다.

콰아아아아아-!

앞다투어 날아올랐다.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빠르게 번지는 숲의 화재가 예상보다 훨씬 끔찍한 열기를 상공으로 밀어 올렸다. 그 열기에 얇은 피막으로 이루어진 날개가 눌어붙었다. 불길에 그슬린 비닐처럼. 타고, 쪼그라들었다.

그 결과는 추락이었다.

키아아아악-!

베스파로스 떼가 비명을 질렀다.

더욱 힘껏 날갯짓을 했다.

하지만 실시간으로 열기에 노출되어 쪼그라드는 날개로는 더 솟아오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떨어졌다. 어느새 반토막이 난 날개를 헛되이 퍼덕이며. 추락했다.

쿠콰앙-! 콰앙!

곳곳에서 굉음이 울렸다.

운이 나쁜 베스파로스는 이글거리는 불구덩이에 고스란히 떨어졌다. 불길 속에서 발악을 하며 버둥거리다가 그대로 전신이 익어 버렸다. 어떤 놈은 반쯤 남은 뾰족한 그루터기에 떨어져 머리가 꿰뚫렸다.

나머지는 맨바닥에 떨어졌다.

물론 무사하지는 못했다.

키이이! 키이악!

워낙 큰 덩치와 육중한 체중을 자랑하던 놈들이었다. 그런 덩치로 추락을 당했다. 최소 한두 군데씩은 부러지거나 으깨졌다.

숲 곳곳이 추락의 충격으로 다친 베스파로스 떼의 비명과 버둥거림에 뒤덮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불길이 더욱 넓게 번졌다. 산불의 규모로 발전했다. 숲을 집어삼켰다. 숲에 떨어져 버둥거리던 베스파로스 떼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도망치는 라키엘 일행도 포함해서였다.

"뛰어! 얼른!"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헉! 허억, 쿨룩! 콜록, 컥!"

일행은 뛰었다.

열기를 피해서 달렸다.

데미안이 외쳤다.

"도련님. 이쪽으로! 어서!"

"헉, 허억... 콜록! 쿨룩!"

"제 손을 잡으십시오!"

"훅, 후욱!"

라키엘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불을 지른 것까진 좋았는데. 작전이 대성공을 거두며 베스파로스 떼를 박살 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젠 내 기관지가 박살 나게 생겼네?'

라키엘은 숨을 헐떡였다.

불이 생각보다 너무 크게 번져 버렸다. 결코 이 정도를 예상했던 게 아니었다. 사실 그저 약간만 불이 나고 연기만 피어나도 충분하리라 여겼다. 그 정도라도 베스파로스의 감각을 혼동시킬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불길이 지나치게 맹렬해졌다. 연기가 엄청났다. 주위가 온통 공기 반, 연기 반일 지경이었다.

한데 그 와중에 뛰려니 숨이 차서 죽을 것 같았다. 정말이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격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목이 매캐한 건 둘째치고, 현기증이 실시간으로 뒤통수를 훅훅 때려왔다.

오장육부도 난리를 떨어댔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호흡 상태에 기겁하고 있습니다.]

[심장 : 야? 이거 무슨 일이냐? 응? 허파 왜 이래? ]

[허파 : 허... 파흐... 흐... 흐ㅇ응으... tlqkf....]

[대장 : 형님들 우리 몸뚱이가 숨 막혀 뒈지기 직전이지 말입니다?]

[간장 : 그럼 오늘 엔딩각 뜨는 거임?]

[위장 : 훈제 일산화탄소 먹방 엔딩ㅋㅋ 엌ㅋ]

[오장육부가 심각한 위기를 느끼고 있습니다.]

[오장육부가 당신을 격려하며 5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한 HP : 6,000]

"...쿨룩! 콜록! 씨익! 쌔액!"

메시지가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숨을 쉬기가 너무나 괴로웠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목구멍의 피리 소리. 전형적인 천식 증상이었다.

'산소가 모자라....'

시야가 흔들렸다.

땅과 하늘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어지러웠다. 만약, 때맞춰 데미안이 손을 뻗어 주지 않았다면, 든든하게 붙잡아 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쓰러졌을 것이었다.

터텁!

"정신 차리십시오!"

철썩!

뺨이 화끈해졌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여전히 멍했다. 데미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표정.

'설마 나 버리려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문득 드는 순간이었다.

"업겠습니다."

녀석이 재빨리 돌아섰다. 등을 보이며 몸을 숙였다. 뒤로 팔을 뻗으며 이쪽을 끌어당겼다. 녀석의 등을 향해 몸이 기울어졌다. 아니, 넘어졌다.

푹.

단단한 등이 온몸을 떠받쳐 주었다. 그 즉시 전신이 두둥실 떠올랐다. 아니, 나는 데미안에게 업힌 걸까.

"꼭 붙잡으십시오."

녀석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콰아-!

"...!"

세상이 빨라졌다. 데미안이 질주하고 있었다. 불길에 타오르는 숲이 옆으로 휙휙, 열기 가득한 바람이 볼을 긁으며 지나갔다.

뜨거웠다.

데미안의 등도 그러했다.

문득, 멍한 의식 속에서 녀석의 정체가 떠올랐다. 그거, 위험한데.

'이대로... 데미안이 더 위험해지면 안 되는데.'

그러면 정말로 큰일이 난다.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일단은 이곳을 무사히 벗어나야....'

다행히 일행 중에 낙오자는 없는 듯했다. 왕녀가 붙여 준 기사들, 길잡이 병사까지. 모두가 헉헉 숨을 몰아쉬며 잘도 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됐다.

다들 이대로만 달려 준다면.

이렇게만 도망친다면.

'모두가 안전해지겠지.'

그래.

그거면 된 거다.

일단은 그 정도로 만족하자.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

돌연 하늘이 시끄러워졌다. 멍한 의식 속에서도 고막이 아플 정도였다.

...뭘까.

설마.

그 순간이었다.

"어쩌면 우리, 여기까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데미안 녀석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그 말꼬리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왜?

어째서?

녀석이 이토록 긴장한 걸까.

이유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쿠우우웅-!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 데미안의 등을 타고 움찔거리듯 전해져 오는 긴장감. 이윽고 데미안의 어깨 너머로 뭔가가 보였다. 이글거리는 불길과 열기 사이에 군림하듯 도사린 실루엣. 그것은 베스파로스의 실루엣이었다.

한데 거대했다. 아까 본 베스파로스보다 훨씬 거대했다. 보통의 베스파로스가 코뿔소 덩치였다면? 지금 저놈은 최소 코끼리 이상으로 보였다.

"...."

멍해진 의식 때문에 보이는 착각일까. 아니었다. 뒤이어지는 놈의 포효가, 그런 희망을 확실하게 분쇄해 주었다.

쿠와아아아아악-!

"...!"

소리에 맞아서 온몸이 아픈 기분은 처음이었다. 나머지 일행들도 비슷한 공포심에 젖은 걸까.

"히, 히이익... 여, 여왕 베스파로스!"

길잡이 병사가 중얼거리며 주저앉았다. 기사들이 창백해진 얼굴로 뒷걸음질쳤다. 데미안의 전신 근육도 긴장감으로 꽉 굳었다.

녀석에게 업혀 있기에, 긴장하는 근육의 경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동시에 위기감이 뒷골을 잡았다.

'이래선 안 돼.'

멍하던 의식이 확 깨어났다. 호랑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보유 주식이 고점에 물려서 좌악 미끄러져도 충동적인 패닉셀, 손절만 하지 않으면 존버의 각이 보인다고 했다.

그러니 지금은 공포에 사로잡히면 안 된다. 일행 모두가 그렇다. 데미안이 특히나 더 그렇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데미안마저 긴장하고 위축되면... 절대로 안 돼.'

데미안이 일행의 가장 든든한 칼이다. 일행의 가장 튼튼한 방패이다. 그런데 녀석이 위축되면? 모든 게 끝장이다. 그러니 녀석의 긴장부터 풀어야 한다.

그걸 깨달은 순간.

'경혈 스캐닝!'

데미안의 기혈 움직임을 파악하리라. 가장 효율적인 최소한의 간결한 침술로 녀석의 긴장감을 풀어주는 경혈을 찌르리라. 다짐하며 두 눈에 힘을 주었다.

딩동!

[진맥 스킬 전용 옵션 ① : 경혈 스캐닝이 발동됩니다.]

[Lock-on 대상을 탐색합니다.]

[Lock-on 대상 탐색이 완료되었습니다.]

지이잉-!

시야 한쪽에 <Lock-on>이라는 문자가 떠올랐다. 그 아래로 초록색 화살표도 떠올랐다. 그런데 화살표가 가리키는 대상이....

'여왕 베스파로스?'

라키엘은 눈을 부릅떴다.

이쪽은 데미안을 스캐닝하려고 옵션을 켠 건데. 그런데 뜬금없이 베스파로스 여왕이 Lock-on 대상으로 잡혀 있었다. 그는 이내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데미안에게 업혀 있어서... 시야 정면에 처음으로 들어오는 대상이 저놈이라서?'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하여 더욱 놀라웠다. 생각지도 못한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벌레한테도 경혈이 있는 거였나?'

생각해 보니 지극히 당연한 소리였다. 엄연히 살아 숨 쉬는 생물이니까. 하지만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이거, 어쩌면....'

온통 어두운 절망 속에서 섬광처럼 비치는 일말의 가능성.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베스파로스 여왕의 기혈 흐름이 다 보인다면. 데미안이 이쪽의 뜻대로 움직여준다면.

그게 실현만 된다면.

'생존이 문제가 아니라... 잘하면 오늘 베스파로스 여왕으로 말벌주 담그겠는데?'

111화. 말벌 잡는 인간 (2)

'이거, 생존이 문제가 아닌데? 잘하면 오늘....'

저 베스파로스 여왕으로 말벌주를 담글 수도 있겠다.

허풍이 아니다.

진짜다.

라키엘은 묘한 일말의 가능성을 엿보았다.

'해보자.'

판단이 드는 순간. 그는 베스파로스 여왕을 똑바로 주시했다.

딩동!

[경혈 스캐닝 옵션이 Lock-on 대상을 포착하였습니다.]

[대상이 성공적으로 Lock-on 되었습니다.]

키이이잉!

시야가 변했다.

불길에 타오르던 숲이 순식간에 살짝 어두워졌다. 대신 포효하는 베스파로스 여왕의 몸체에만 밝은 형광색의 외곽선이 덧씌워졌다.

동시에 자연스럽게 보였다. 날개를 접는 베스파로스 여왕의 몸체. 그 내부에 흐르는 기혈의 움직임. 모든 것들이 낱낱이 보였다.

베스파로스의 신체를 따라 어떤 식으로 경혈이 배치되어 있는지. 주요 대맥의 흐름 방향이 어떠한지. 그 흐름들이 어떤 방식으로 조화롭게 어우러져 신체의 순환과 균형을 만드는지까지.

'보인다. 전부 보여.'

확실하게.

일목요연하게.

마치 네x버 길찾기 내비게이션을 띄운 것처럼. 어떤 도로가 막히는지 일목요연하게 관측하는 것처럼. 혹은 모의고사 점수를 통해 어떤 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지 미리 각을 재보는 것처럼.

베스파로스 여왕의 움직임과 기혈이 모조리 보였다.

'...대박.'

사실 살아 있는 생명체라면 기혈을 지닌 것이 당연한 이야기였다. 모든 생명에는 기가 순환하니까. 그래야 살아 있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곤충이나 벌레에게도 사람과 비슷한 기혈이 있을 거란 생각을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없었다.

'어쨌건 있어. 그러니까, 할 수 있다.'

라키엘은 팔뚝에 힘을 주었다. 데미안에게 업힌 자세를 더욱 안정적으로 유지하려 애쓰며 외쳤다.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움찔!

이쪽을 업고 있는 데미안의 어깨와 등이 크게 흠칫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베스파로스 여왕의 위용에 녀석도 긴장하고 있었던 걸까. 돌아오는 대답을 들어보니 과연 그랬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녀석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굳어 있었다. 하긴 그럴 법도 했다. 코끼리 사이즈의 장수말벌 여왕이 눈앞에 나타나서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서 포효하는 중이었다. 특유의 압도적인 위압감을 한껏 드러내는 중이었다.

전에 크레모 항구에서 맞섰던 우루스? 당시의 우루스보다 훨씬 흉포한 기세였다.

'아마도 여왕이라서 그런 거겠지.'

선천적으로 평생 다른 개체를 압도해온 지배자 특유의 위압감이 느껴졌다. 똑바로 쳐다보고 있자니 저절로 오금이 꽉 저려 올 정도였다. 아니, 이미 앙부아즈의 기사들을 비롯한 일행 모두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마치, 독사와 마주쳐 버린 생쥐 같았다.

라키엘은 후들거리려는 다리에 힘을 꽉 주며 재빨리 말했다.

"이제부터 무조건 내가 시키는 대로 움직여. 걸으라면 걷고. 뛰라면 뛰고. 검으로 막아내는 지점, 공격하는 방향, 그 모든 걸 전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살고 싶으면 내 말을 들어. 내가 저놈의 움직임을 예측해서 알려줄 테니까."

"알려주겠다고요? 저놈의 움직임을?"

"그래."

"하지만 그걸 어떻게...."

데미안은 곤혹스럽게 미간을 찡그렸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검술에 조예도 없는 황태자가 무슨 수로 저 거대한 말벌 여왕의 움직임을 예측한단 말인가.

그렇게 반문하려던 순간.

"주저앉아!"

등에 업힌 황태자가 외쳤다.

그와 동시에.

쿠와아아악-!

베스파로스 여왕이 포효했다.

놈의 거대한 날개가 한 차례 크게 떨쳐졌다. 공기가 부서졌다. 밀려났다. 막강한 반탄력이 생성되었다. 코끼리 사이즈의 거대한 몸체가 앞으로 밀려 나갔다. 아니, 튀어 나갔다.

콰학-!

아무런 예비 동작도 없는 돌진!

"...!"

데미안의 눈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눈매가 벌어지는 그 사이에 이미 베스파로스 여왕의 위턱이 벌어졌다. 순식간에 쇄도해 왔다. 반응하기도 어려운 속도였다.

만약, 앞서 들은 황태자의 외침이 없었다면, 정말로 반응하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크읏!"

데미안은 본능적으로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직후, 머리 위에서 섬뜩한 굉음이 터졌다.

처컹-!

집게, 혹은 단두대 같은 위턱이 머리 바로 반 뼘 위에서 맞물렸다. 불똥이 튀었다. 방금 조금만 반응이 늦었더라면? 몸통이나 목이 잘렸을 것이다. 깔끔하게.

그러나 돋아나는 소름을 느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주저앉은 그대로 앞으로 다섯 걸음!"

"...!"

황태자가 외쳤다.

고개를 들었다.

베스파로스 여왕의 머리 아래쪽.

지면과 머리 사이에 공간이 보였다.

즉시 움직였다.

파사사삭!

앉은 채로 다섯 걸음을 신속히 전진했다. 그 직후, 베스파로스 여왕의 허공을 갈랐던 위턱이 아래로 내리꽂혔다. 콰작! 지면이 푹 파였다.

만일 방금 앞이 아니라 옆이나 뒤로 움직였다면? 황태자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운 좋게 저 내리찍기를 피했더라도... 다음 동작에서 회피할 방향이 모두 막혔겠지.'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그때 황태자의 외침이 또 들려왔다.

"우전방! 2시 방향으로 굴러! 놈의 왼쪽 앞다리와 중간다리 사이 공간으로!"

"...!"

즉시 굴렀다. 동시에 베스파로스 여왕의 다리가 움직였다. 놈의 몸 전체가 시계 방향으로 살짝 회전했다.

쿠작작! 쿠작!

통나무 굵기의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지면을 짓뭉갰다. 그 틈을 아슬아슬하게 굴러서 통과했다.

"앞으로 도약!"

황태자의 외침이 귀를 찔러 왔다. 듣자마자 땅을 박찼다.

콰드작!

몸을 띄운 직후.

방금 박찬 자리에 베스파로스 여왕의 다리가 꽂혔다. 그 순간 황태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시계 방향으로 몸 틀면서 정중단 횡베기!"

"...흡!"

데미안의 허리와 코어에 힘이 들어갔다. 공중에서 몸을 뒤틀었다. 오른손의 검을 옆으로 눕혔다. 흩뿌리듯 가로로 크게 베었다.

'허공을 베라는 걸까.'

견제를 위한 베기?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 했다.

황태자의 말이 계속 들어맞고 있으니까. 허공을 베었다. 아니, 휘두르고 보니 허공이 아니었다. 베스파로스 여왕의 더듬이 한쪽이 살벌한 기세로 쏘아져 오고 있었다.

"...!"

말이 더듬이지, 곤봉보다 두꺼웠다. 끝머리는 모닝스타 그 자체였다. 맞부딪치는 충격 또한 그러했다.

콰앙-!

"...큽!"

어깨 관절이 빠질 뻔했다. 가까스로 검이 부러지지 않았다. 대신 전신이 허공에서 확 밀려났다.

"안정적으로 착지!"

콰츠즈즈즉!

무려 10미터 넘게 날려와 지면에 두 줄기 고랑을 기다랗게 만들었다. 등에 업힌 황태자가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잘했어. 예술점수 10점!"

"...."

"계속 이렇게만 하자, 응?"

"...."

"왜? 어디 다쳤어?"

"아닙니다. 그런데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데미안은 자세를 가다듬으며 재빠르게 물었다.

"설마 진짜로 저놈의 움직임이 보이는 겁니까."

"어. 내가 말했잖아. 보인다고. 그러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대체 어떻게...."

"아 그냥 보이는데 뭘 어쩌라고! 앞으로 달려! 다섯 걸음!"

"...!"

뒤가 아니고 앞으로?

순간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파앗!

땅을 박차는 순간.

베스파로스 여왕도 돌진했다. 거대한 몸체가 순식간에 쇄도해 왔다.

"검 세우고! 왼쪽 위턱 쳐내면서! 동시에 왼발 축으로 시계 방향 턴!"

카캉! 츠즛!

쳐냈다. 몸을 돌렸다. 여왕의 위턱이 아슬아슬하게 뒤쪽을 스쳐 갔다.

그때부터였다.

라키엘이 숨 가쁘게 외쳤다.

"제자리 뛰며 내리치기! 반동으로 썸머솔트! 착지하며 오른쪽으로 굴러! 일어나면서 메롱! 한 템포 죽이며 비스듬히 위로 찌르기!"

콰작!

데미안의 검 끝이 여왕의 오른쪽 뒷다리 두 번째 관절을 찔렀다. 여왕이 처음으로 움찔했다. 놀라움이 분노의 포효로 변했다.

퀴아아아악-!

하지만 라키엘의 입은 절대로 멈추지 않았다. 데미안의 동작도 물 흐르듯이 이어졌다. 그것은 일종의 목숨을 건 청기 백기 게임이었다.

"검 뽑으며 뒤로 벌러덩! 왼쪽으로 두 바퀴 데굴데굴 굴러! 구른 뒤에... 그위의이잉입! 오른쪽으로 두 걸음 도약! 위쪽 쳐내고! 긔위의이잉입은 따라 하지 마, 멍충아!"

"긔위이잉... 크긋!"

"집중해! 왼쪽 두 걸음! 전방으로 세 걸음 문설트 도약! 수직 회전베기! 등 위로 착지하며 왼쪽 뒷날개 뿌리 쪽 내리찍기!"

콰적!

이번에는 데미안의 검이 여왕의 등에 꽂혔다. 물론 깊지는 못했다. 단숨에 관통하기엔 베스파로스 여왕의 키틴질 외골격이 너무나 튼튼하고 두꺼웠다.

하지만 라키엘은 상관하지 않았다.

"검 뽑고! 제자리 탭댄스 두 걸음! 오른쪽에서 날아오는 날개 밟아! 도약! 날려 간다! 균형 잡고!"

파앗!

성가신 이쪽을 떨쳐내듯 날아오는 여왕의 날개. 그 날개를 오히려 밟았다. 반동으로 몸을 띄웠다.

"뒤쪽! 나무 위에 착지!"

타앗....

마침 날려가는 방향에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굵은 가지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데미안은 흐르는 땀방울을 훔쳐내며 콧등을 찡그렸다.

"이거, 정말로 저놈의 움직임이 보이시는 거로군요."

겪어 보니 확실하다. 황태자의 연이은 지시가 모조리 맞았다.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한 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수많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좋습니다. 그렇지만 계속 이런 식이라면 곤란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곤란? 무슨 곤란?"

"제 검이 놈의 껍질을 뚫지 못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데미안이 재빠르게 말했다.

"보셨을 겁니다. 전하의 지시에 따라 공격이 두어 차례 성공했을 때 말입니다. 놈의 다리 관절과 등을 찔렀습니다. 하지만 놈에겐...."

"아무런 타격이 없는 것 같다?"

"예."

사실이었다.

찌르며 느낄 수 있었다. 검이 껍질을 완전히 뚫지 못했다. 그저 끄트머리 뾰족한 몇 센티만 간신히 부드러운 속살을 찔렀을 뿐이었다.

"인간이 상대라면 그 정도라도 조금씩 타격을 줄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저놈의 덩치는 거대합니다. 고작 몇 센티 깊이의 상처라면 수백 군데를 찔러도 제대로 된 타격을 줄 수 없을 겁니다."

그 또한 사실이었다. 막막했다. 한데 황태자의 생각은 조금 다른 걸까.

"제대로 된 타격? 이미 들어가고 있어."

"예?"

"그러니까 지금까지처럼 시키는 대로만 잘해 보자고. 온다."

"...!"

"나무 꼭대기로! 뛰어!"

"흡!"

파앗!

나뭇가지를 박찼다.

그 직후, 베스파로스 여왕이 날아왔다. 몸통으로 나무줄기를 으깨 버렸다. 나무가 쓰러졌다. 잔해가 여왕의 등 위로 어지러이 떨어졌다.

"잔해에 섞여서 엉덩이 위로 착지! 세 번째 가로무늬 중앙에 내리찍기!"

콰작!

또 몇 센티.

검 끝이 여왕의 배 부분 위쪽을 찍었다.

"뽑으면서 왼쪽으로 넘어져! 옆구리로 착지!"

"크억!"

"일어나며 위로 찌르기! 다섯 번째 가로무늬 중앙!"

콰즉!

"오른쪽으로 굴러! 그읩! 일어나면서 등 돌리고 저쪽으로 전력 도주! 도망쳐!"

"훅! 후욱!"

"몸 돌려!"

"후욱!"

"가만히 서 있어!"

"...예?"

"서 있으라고!"

황태자가 빼액 외쳤다. 그 말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분노한 베스파로스 여왕이 사방을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이쪽과 눈이 마주쳤다.

"...!"

하지만 놈은 곧바로 돌격해오지 않았다. 마치 이쪽을 경계하는 것 같았다. 매번 공격을 해도 다 피하는 놈. 까다로운 사냥감. 그렇게 인식한 걸까.

과연 그런 듯했다.

하지만 여왕의 신중한 경계심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라키엘 때문이었다.

"매혹적인 양갈래 머리!"

"...!"

라키엘의 손이 움직였다.

데미안에게 업힌 채로, 데미안의 머리칼을 붙잡았다. 두 손으로 양갈래 머리를 만들었다. 요란하게 펄럭펄럭 흔들어댔다. 덕분에 베스파로스 여왕의 본능(?)도 흔들렸다.

...퀴쉬이익!

먼 조상 시절부터 벌집을 털어댄 최대의 숙적, 곰에 대항하기 위해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 모든 벌이 지닌, 검정색 털에 대한 선천적인 적대감과 호전성. 그 본능이 베스파로스 여왕의 분노를 일깨웠다.

퀴아아아악!

여왕이 신중함을 버리고 돌진했다. 라키엘이 외쳤다.

"양갈래 머리 흩날리며 도망치기!"

"...."

"뛰어!"

"크읏!"

데미안은 뛰었다. 돌진해 오는 여왕을 피해 쫓기듯 뛰었다. 여왕의 분노한 날갯짓 소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져 왔다.

하지만 라키엘은 데미안의 양갈래 머리를 풀지 않았다. 더욱 맹렬히 흔들었다. 여왕의 돌진도 한층 맹렬해졌다. 혹은 맹목적으로 변했다. 이쪽을 향해 도약했다.

퀴아악-!

땅을 박차며.

날개를 한껏 펼치며.

온몸으로 라키엘과 데미안을 덮쳤다. 거대한 위턱으로 두 인간을 겨누었다.

한데 그때였다.

"검 던져!"

라키엘이 외쳤다.

"왼쪽 겹눈 아래 반 뼘 지점!"

외침과 함께 데미안이 몸을 휙 돌렸다. 그가 던진 검이 허공을 갈랐다. 검 끝이 여왕의 왼쪽 겹눈 아래를 찔렀다.

콰즛!

물론 깊게 찌르진 못했다. 두꺼운 껍질에 겨우 박혔다. 속살을 고작 3센티쯤 찔렀다. 별다른 타격조차 주지 못했다.

여왕은 가소로운 듯 포효했다. 아니, 포효하려 했다. 그런데 어쩐지 포효가 나오질 않았다. 심지어 갑작스럽게 온몸에서 힘이 쭈욱 빠지기 시작했다!

...키익?

여왕의 벌어진 위턱이 당혹감에 떨리는 순간. 라키엘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맺혔다.

'빙고.'

그것은, 처음 찔러 보는 경혈의 조합 효과에 실험적 확신을 얻은 한의사의 미소였다.

112화. 뜻밖의 횡재 (1)

...퀴어어어억?

베스파로스 여왕의 겹눈이 경련했다. 더듬이가 서슴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의도치 않았는데도 다리가 움찔댔다. 뱃속에 숨겨둔 독침마저도 흔들렸다.

도대체 왜 이런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쿼어억? 퀴이이익!

별다른 타격을 받은 적도 없었다. 검을 든 인간에게 따끔하게 네댓 번 찔렸을 뿐이다. 그저 작은 생채기. 신경 쓸 필요도 없을 미미한 타격.

그런데 세상이 흔들려 보였다. 모든 감각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위와 아래가 뒤섞이고, 앞과 뒤가 뒤바뀐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어지러웠다. 동시에 전신에서 힘이 쭈욱 빠져나갔다.

퀴이아악!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다.

군체를 모조리 끌고 온 사냥이었다. 이번 사냥을 성공해야 그 양분으로 건강한 알을 낳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세대의 애벌레를 배부르게 먹이고 성공적으로 키워낼 수 있을 터다. 그러니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베스파로스 여왕은 전신을 경련하며 흐려진 눈길을 들어 인간들을 노려보았다. 그곳에 회심의 미소를 짓는 라키엘이 있었다.

'빙고!'

라키엘은 환호하며 외쳤다. 성공이었다. 그것도 기대 이상의 대성공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흉포하게 날뛰었던 베스파로스 여왕이, 이제는 마치 에프킬라를 정통으로 맞은 모기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게 정말로 될까 싶었는데....'

경혈 스캐닝으로 또렷하게 보이던 베스파로스 여왕의 기혈 움직임. 경혈의 배치와 흐름. 덕분에 여왕의 의도와 움직임을 모조리 예상할 수 있었다. 데미안에게 외치며 적절한 동작 지시를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피하기만 하다간 승산이 없으리라 보았다. 그래서였다. 데미안에게 반격을 시켰다.

최소한의 힘으로.

낭비 없는 동작으로.

위험을 최대한 줄였다. 여왕의 경혈만 골라서 찌르게 했다. 물론 아무 경혈이나 되는대로 찌른 게 아니었다.

'여왕의 다리 관절, 그리고 가슴의 등과 배의 아래쪽, 마지막으로 겹눈 아래 지점....'

사람으로 치면 독맥과 임맥의 주요 경혈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호흡의 기운이 나가고 들어오는 곳. 기운이 뻗치고 수렴되는 곳. 시작과 끝. 끝과 시작. 그 과정이 맞물리며 순환하고 교류하는 자리들. 그곳들만 골라서 쏙쏙 찌르게 했다.

사람으로 치자면?

정수리의 독맥 백회혈(百會穴). 그리고 항문과 성기 사이의 임맥 회음혈(會陰穴). 두 곳을 파괴(!)당한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이었다.

물론 이 방법에 확신이 있는 건 아니었다. 곤충, 그것도 저렇게 거대한 곤충의 혈자리를 다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경혈 스캐닝으로 잠깐 파악한 것만으로는 효과를 100% 확신할 수가 없었다. 사람의 경우와 전혀 다른 효과가 나올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했다.

그것만이 최선이었으니까. 가장 가능성이 큰 방법이었으니까. 시도할 가치가 보였고, 질렀고, 생각보다 훨씬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바로, 지금처럼.

"...저거 어떻게 된 겁니까?"

데미안의 얼떨떨한 물음이 들려왔다. 상념에서 깨어난 라키엘은 빙긋 웃으며 데미안의 등에서 내려왔다.

"글쎄. 약점을 정확히 공략한 덕분인 것 같은데."

"약점 말입니까?"

"어."

"설마."

"눈치챘냐?"

"예."

데미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찌르라고 지시한 자리, 모두 미리 간파한 약점들이었군요. 맞습니까?"

"물론."

"한데 그 약점들을 대체 어떻게...."

"파악했느냐고?"

"예."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황태자도 처음 보는 베스파로스였을 텐데. 그 약점을 간파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황태자의 대답은 뻔뻔 그 자체였다.

"난 그냥 보이던데? 넌 안 보였냐?"

"...예?"

"아니. 보면 보이잖아. 아, 쟤는 저길 때리면 아파하겠구나. 저길 찌르면 죽겠구나. 뭐 그런 거. 그게 안 보여?"

"...."

"참 이상하네. 이해가 안 되네."

"...."

"노력 좀 하자. 노력 좀. 응?"

"...."

이해가 안 되는 건 오히려 이쪽이다. 뭐가 보인다는 건지. 뭐가 저리 당연하다는 건지.

하지만 데미안은 마냥 의문에만 빠져 있진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몸으로 황태자 앞을 막아섰다.

"어쨌건, 물러나시죠. 아직은 위험합니다."

약점을 공략당했건.

큰 타격을 입었건.

어쨌건 간에 베스파로스 여왕이 아직 살아 있었다. 전신을 부들거리고 있을지언정 언제 어떻게 돌변해서 달려들지 알 수 없었다.

데미안은 전신을 다시금 팽팽하게 조였다. 검을 겨누고서 베스파로스 여왕의 동태를 살폈다. 한데 뒤쪽의 황태자는 생각이 조금 다른 듯했다.

"아니. 이제 위험해진 건 저놈인 것 같은데."

"쉽게 마음을 놓으셔선 안 됩니다."

"정말인데."

"하지만 우리에겐 저놈의 튼튼한 껍질을 쉽게 깰 수단이 없습니다. 다른 기사들에겐 무리입니다. 제가 전력을 다해도... 같은 자리를 몇 번씩 베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타격을 줄 수 있을 테고 말입니다."

"아하. 그래서 다른 약점도 빨리 알려달라는 거지?"

"예. 가급적 신속하고 안전하게 끝내겠습니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위를 봐."

"...예?"

그게 무슨 뜻입니까?

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물음을 던지려는 순간이었다.

부브브브브우웅-!

돌연, 숲 상공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엄청난 숫자의 날갯짓 소리였다.

"...!"

설마 살아남은 나머지 베스파로스 무리가? 자신들의 여왕을 구하려고? 데미안은 경악과 위기감을 느끼며 검을 움켜쥐었다. 위쪽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부브브브브!

수십 마리의 아피로스 떼가 날아오고 있었다. 숲의 불길과 매캐한 연기를 뚫고서. 이곳을 향하여 내리꽂히듯 급강하를 감행하고 있었다.

이쪽을 목표로 삼아서?

아니었다.

'베스파로스 여왕.'

데미안이 직감한 순간.

수십 마리의 아피로스 떼가 베스파로스 여왕을 덮쳤다. 까맣게 뒤덮었다.

퀴아아아아악-!

여왕이 사나운 포효를 내질렀다.

하지만 여왕보다 한참 작은 아피로스 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더욱 집요하게 여왕의 전신에 달라붙었다. 다만 여왕을 물어뜯거나 독침으로 찌르진 않았다. 대신 엄청난 기세로 날개를 진동시켰다.

부브브브브브브브!

"...!"

순간, 일대의 공기가 모조리 공명하고 진동했다. 지면마저 국지적 지진을 만난 듯 떨었다. 고막이 파괴될 것 같은 공명음, 상식을 초월하는 주파수의 날갯짓이었다.

날갯짓을 일으키는 아피로스의 근육이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체온이 급상승했다. 그 상태로 베스파로스 여왕에게 더욱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한 놈이 달라붙고. 두 놈이 그 위를 뒤덮고. 다섯 놈이 다시 그 위를 덮었다. 둥글게. 공처럼. 빠져나갈 틈조차 없이. 공기가 통하지 않게. 치솟는 체온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몇 겹으로 둘러싸고서. 더욱 필사적으로.

브브브브브브-!

체온의 열기가 끔찍한 지옥의 업화로 변했다. 가장 안쪽, 여왕에게 직접 달라붙어 있는 아피로스의 전신이 열기에 익어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날개 진동을 멈추지 않았다.

기진맥진하던 베스파로스 여왕이 발악했다. 하지만 아피로스 떼를 떨쳐내지 못했다. 라키엘에게 맞은 침술 때문이었다.

일시적으로 전신의 힘이 빠져 있어서. 모든 감각이 모조리 둔해져 있어서. 마취에서 덜 풀린 것처럼 힘을 쓰질 못했다. 하여 평소라면 가볍게 털어냈을 아피로스 떼 속에 갇혀 속수무책으로 버둥거리기만 했다.

...!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단말마마저 아피로스 떼의 초진동에 묻혔다.

여왕의 날개와 더듬이가 녹았다. 껍질이 까맣게 탔다. 더듬이가 끊어졌다. 겹눈이 뭉개졌다. 이윽고 속살과 근육, 내장 조직이 통째로 익어 버렸다. 깊은 숲을 호령하던 베스파로스 군체의 심장이자 우두머리, 여왕의 허망한 최후였다.

그러나 여왕을 끝장낸 아피로스 떼도 무사하진 못했다.

브즈... 브즈즈....

여왕의 전신을 익혔을 정도로 엄청난 열기였다. 안쪽의 아피로스 떼는 여왕과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바깥쪽의 아피로스 떼도 탈진해서 차례차례 죽어갔다.

그렇게 모든 벌떼가 사라졌다.

날뛰던 베스파로스도.

저항하던 아피로스도.

타오르는 숲 곳곳에 벌떼의 시체만이 가득했다. 그 위로 하늘의 눈물이 쏟아졌다.

쏴아아아...!

소나기가 불길을 짓눌렀다. 번지던 산불이 주춤했다. 이내 사그라들었다. 불에 탄 잔해와 새하얀 연기만이 자욱한 숲에 적막이 깔렸다. 그 사이에서 앙부아즈의 기사들과 길잡이 병사가 환호했다.

살았노라고. 다행이라고. 서로를 얼싸안고서 안도의 웃음을 터뜨렸다.

반면 라키엘은?

'...후우. 살긴 살았는데, 망했구나.'

회한의 탄식을 푹푹 내뿜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왕 베스파로스? 잡으면 뭐하냐. 얻으려고 했던 아피로스 여왕 애벌레는 구하지도 못하게 됐는데.'

침울해진 눈길을 들었다.

그의 눈길이 향한 곳, 그곳에 반쯤 뭉개진 아피로스 둥지가 있었다. 베스파로스의 습격과 학살, 그리고 숲의 화재 때문에 곳곳이 무너지고 열기에 뭉개진 채였다.

둥지 안쪽에선 어떠한 기척이나 소리도 느껴지지 않았다. 몰살당한 것이리라. 서글픈 확신이 라키엘의 한숨을 더욱 깊어지게 했다.

'쯧. 망했네. 망했어.'

원래는 야물딱지게 아피로스 여왕 애벌레를 납치하려고 했는데. 여왕 애벌레가 분비한다는 항생물질을 얻어서 부상병들을 치료하려고 했는데.

'그래야 여기서 보너스 수명 왕창 얻을 수 있는 건데.'

그 계획이 때아닌 베스파로스의 습격 때문에 틀어져 버렸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른 아피로스 둥지를 찾을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러려면 다른 숲으로 이동해야 하고, 새 둥지를 찾아야 하고, 며칠은 족히 걸리겠지. 그 사이에 부상병들은 죄다 죽어나갈 거고.'

그러니 이번 계획은 쫄딱 망했다. 각을 잴수록 더욱 서글퍼졌다.

"후우. 데미안?"

"예."

"둥지에 남은 거라도 챙기자."

"남은 거라고 하심은?"

"꿀은 있을 거 아니냐."

아피로스가 거대한 꿀벌이니까. 최소한 둥지에 꿀은 남아 있으리라. 그거나마 챙겨서 부상병들에게 먹이면 원기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라키엘은 그런 생각으로 데미안과 함께 둥지에 들어갔다.

둥지 안쪽은 어두웠다. 그나마 커다랗게 뚫린 통로 덕분에 움직이긴 쉬웠다.

'역시, 다 죽어 있네.'

곳곳에 몸통과 머리가 잘린 아피로스 시체가 보였다. 아주 가끔씩은 산 채로 찜이 되어서 죽은 베스파로스도 보였다. 물론 그 주위엔 열기를 만드느라 죽은 아피로스 수십 마리도 함께였다.

'그래서 꿀. 꿀은 어딨냐.'

라키엘은 둥지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꼬불꼬불한 통로를 따라, 동네 마트에서 특정한 물건을 찾기 위해 이 통로 저 통로를 서성거리듯. 점점 안쪽으로 들어가며 탐색의 범위를 넓혔다.

그렇게 얼마나 어두운 통로를 헤맸을까.

키륵... 키륵....

안쪽에서 웬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가 벽을 긁는 듯한 소리였다.

'살아남은 놈이 있나?'

아피로스?

혹은 베스파로스?

"전하. 제가 먼저."

앞장서는 데미안과 함께 전진했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다가갔다. 마지막 모퉁이를 돌았다. 그리고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에 있는 건 바로....

"아피로스 여왕?"

여왕벌이 웅크리고 있었다. 다만 이미 죽은 채였다. 한데 그때였다.

키륵...! 키륵!

죽은 여왕벌의 몸체가 들썩였다. 품속에서 예의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뭔가가 불쑥, 여왕의 몸통을 간신히 밀어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라키엘은 깜짝 놀랐다.

"어?"

낯선 생명체였다.

동글동글한 얼굴과 통통한 몸매. 똘망똘망한 눈동자와 해맑은 입매. 전신을 뽀송뽀송하게 뒤덮은 하얀 솜털. 마치 새끼 물개처럼 보이는 그 생명체는 바로....

"...아피로스, 여왕 애벌레?"

라키엘이 설마 하는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애벌레가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꾸꺄!"

113화. 뜻밖의 횡재 (2)

"꾸꺄!"

"...."

"꾸꺄아?"

"...."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뽀송뽀송한 생명체를 쳐다보았다.

'...바나나킥 닮았네.'

혹은 솜털 보송보송한 아기 물개 같았다. 이쪽을 올려다보는 해맑은 까만 눈망울이 특히 그러했다.

"꾸꺄! 꾸꾸꺄!"

꼬물꼬물!

눈이 마주치자마자 반가운 듯 빵긋 웃었다. 그러더니 겁도 먹지 않고서 열심히 기어오기 시작했다. 라키엘은 긴장하며 물러났다.

'속임수일지도 몰라.'

저러다가 거리가 가까워지면? 갑자기 돌변해서 콱 깨물지도 모른다. 데미안도 비슷하게 느낀 듯했다.

"때려서 기절시킬까요?"

녀석이 검집에 손을 가져갔다. 그때였다.

"...꾸까아?"

열심히 기어오던 여왕 애벌레가 동작을 딱 멈추었다. 이쪽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그 눈망울이 어느새 그렁그렁해져 있었다. 마치, '나 때릴 거야?'라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뭐지. 설마 이쪽 말을 알아듣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꾸꺄아...?"

녀석이 반대쪽으로 고개를 갸웃. 눈망울을 더욱 그렁그렁하게. 몸을 돌리고 옆구리를 보였다. 그러더니 이쪽을 향해 떼구르르 굴러 왔다!

"...어엇?"

방심하고 있던 터였다. 라키엘은 녀석의 갑작스러운 고속(?) 이동에 미처 대처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굴러 온 녀석이 제 뱃살로 이쪽의 발등을 폭, 덮었다. 그러고서야 구르기를 멈추었다.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꾸꺄!"

"...."

여전히 해맑은 눈망울이었다. 깨물리진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던 걸까. 라키엘은 내심 안도하며 애벌레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있잖아?"

"꾸?"

"너, 내 말을 알아들어?"

"꺄!"

끄덕끄덕!

애벌레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진짜인 걸까. 라키엘은 시험을 해보았다.

"오른쪽."

"꾸!"

"왼쪽."

"꺄!"

"...."

진짜다.

라키엘은 놀라움에 잠긴 눈으로 애벌레를 쳐다보았다. 이 녀석, 오른쪽 왼쪽을 말할 때마다 정확한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자니 문득, 소설 마검황의 내용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아피로스 여왕이나 여왕 애벌레는 엘프들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식의 언급이 있었지. 지능이 높은 건가? 아니면 특별한 교감 능력이 있는 건지도.'

라키엘은 생각에 잠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원래는 여왕이 머물렀을 아늑하고 넓은 공간. 지금은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쓰러진 여왕의 시체는 더욱 엉망이었다.

그때였다.

"꾸꺄아?"

이쪽의 발등을 뱃살로 덮은 애벌레가 정강이에 머리를 부벼 왔다. 동시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녀석의 말을 조금씩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마치 머릿속에 실시간 번역기가 켜진 듯한 느낌. 환상종과 대화할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선척전인 교감 능력인 건가.'

그렇게 추측하는 사이, 애벌레 녀석의 칭얼거림이 이어졌다.

"꾸우? 꺄아?"

"...어, 음, 그러니까, 엄마가 아까부터 이상하다고?"

"꾸! 꾸꺄!"

"뭐? 쟤랑 싸우고 나선 계속 코오 잔다고?"

"꾸!"

"...."

고갯짓으로 한쪽을 가리키는 애벌레. 녀석이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그제야 구석 그늘진 어둠 속에 쓰러져 있는 거대한 형체가 보였다. 베스파로스 병정벌이었다.

'헐.'

병정벌도 죽어 있었다. 놈의 전신에도 상처가 가득했다. 상처의 깊이나 크기가 아피로스 여왕벌의 위턱 크기와 거의 딱 들어맞았다. 머리 정중앙에는 지름 5센티쯤 되는 구멍도 뚫려 있었다. 아마도 여왕벌의 독침이 관통한 자리일 테지.

"...."

살펴보니 대략적인 상황을 알 것 같았다. 아피로스 여왕벌이 단독으로 이놈에게 맞서 싸운 거다. 전신을 난자당하면서도 끝까지 싸웠고, 거의 동시에 서로 죽게 된 거다. 여왕의 그런 필사적인 저항 덕분에 애벌레가 살아남은 거겠지.

애벌레는 그런 것도 모르고 여전히 해맑은 눈망울만 똘망똘망하게 뜨고 있었다.

"꾸우? 꾸꺄!"

"...어, 응. 그러니까 엄마가 얼른 일어나면 좋겠단 거지?"

"꾸꾸! 꺄!"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서 걱정된다고?"

"꾸꺄!"

"...."

"꾸꺄꺄?"

여전히 해맑기만 한 눈빛. 라키엘은 잠시 고민했다. 고민의 끄트머리에서 애써 웃음을 머금었다.

"어, 으음, 엄마 일어날 거야. 나중에. 조금 더 있다가."

"꺄?"

"음, 그러니까 엄청 나중에. 네 엄마가 저 덩치 큰 나쁜 놈이랑 싸우고 나서 많이 피곤해진 거거든. 그래서 좀 많이 자야 한대."

"꺄꾸?"

"응, 진짜야. 진짜."

"꾸꺄!"

"...."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 엄마가 그냥 자는 거라는 말에 기뻐하는 여왕 애벌레의 순진무구한 눈빛. 그 눈망울을 바라보고 있자니 '네 엄마가 죽었다'라는 말이 차마 나오지가 않았다.

'후우.'

과연 이런 거짓말이 옳은 걸까. 순간 양심의 가책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아피로스 무리가 전멸했으니까. 이 녀석, 여기 남겨지면 백 퍼센트 죽겠지. 게다가 사실은 처음부터 이 녀석을 납치하려고 여기 왔던 거니까.'

어쨌건 목표는 달성이다.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아피로스 둥지가 천적에게 습격당하는 사고가 발생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애벌레나마 살아남아서 정말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까 도망치지 않길 잘했어.'

베스파로스 여왕을 처치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이 애벌레마저도 베스파로스 무리에게 잡혀 고깃덩이 신세가 되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넌 나한테 감사해야 해."

"꾸꺄아?"

"생명의 은인이라고, 들어봤어?

"꾸우?"

"못 들어봤으면 됐고. 어쨌건 너, 나랑 놀러 갈래?"

"꺄아?"

"네 엄마가 푹 자고 있으니까. 우리가 여기서 떠들고 있으면 엄마가 잠을 설칠 거야."

"꺄아아?"

"그러니까 나랑 가서 놀자. 어때?"

"꾸꺄!"

에벌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 쌍의 짧고 통통한 다리를 열심히 뽈뽈 움직이며 정강이를 기어서 올라와 품에 폭 안겨 왔다. 예상보다 훨씬 통통하고 복실복실했다.

뽀송하고 따스한 감촉.

귓가에 상큼한 알림음도 울렸다.

딩동!

[오장육부가 포근한 감촉에 힐링을 느낍니다.]

[심장 : 아... 폭신하구나아....]

[허파 : 허어... 파아....]

[대장 : 형님들 우리 이 몸뚱이랑 다니면서 이렇게 훈훈한 건 오랜만이지 말입니다? 요 보송보송한 놈 이름은 꾸꾸 어떻습니까?]

[간장 : 꾸꾸 좋네. 애벌레 주제에 커엽게 생겨갖고ㅋ 눈망울 까만 거 보소. 이게 힐링이지 캬.]

[위장 : 꾸꾸ㅋㅋㅋ 애벌레쉨ㅋ 딱밤 마렵네ㅋㅋ]

[오장육부가 뜻밖의 힐링에 기뻐합니다.]

[오장육부가 꾸꾸의 동심을 지켜준 당신의 임기응변에 박수를 보내며 5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한 HP : 6,500]

그렇게 아기 여왕 애벌레, 꾸꾸(?)를 품고 나왔다. 둥지를 빠져나오는 내내 꾸꾸의 머리를 품에 폭 파묻어 주었다. 눈도 살포시 가려 주었다.

사방에 널브러진 동족의 시신.

망가지고 무너진 소중한 둥지.

그런 참상을 보여주기 싫었다.

나오는 내내 꾸꾸가 품속에서 칭얼거렸다.

"꾸우? 꺄아?"

"응? 손 좀 치워 보라고?"

"꾸꺄!"

"안 돼."

"꾸?"

"지금 이것도 놀이거든."

"꾸우우?"

"내가 눈 가리고 있을 테니까, 그동안 넌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맞춰 보기. 어때?"

"꾸꺄!"

"그럼 시작한다?"

"꺄!"

꺄르르 품속에서 꼼질거리는 꾸꾸. 녀석의 눈을 가린 채로 둥지에서 얼른 빠져나왔다. 둥지 밖의 일행과 합류했다. 걸음을 서둘렀다. 꾸준히 걸었다. 이동했다. 둥지가 완전히 보이지 않는 곳까지. 숲을 벗어났다.

그사이 꾸꾸는 품속에서 쌔근쌔근 잠들었다. 그때까지도 라키엘은 꾸꾸의 눈을 계속 가려 주었다.

그렇기에 그는 몰랐다. 자신들이 숲을 벗어난 후, 뒤늦게 산불이 났던 현장을 발견한 어느 숲의 일족이 진심으로 분노했다는 사실을.

"감히 숲에 불을...? 나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우리 동년배들은 이런 짓은 상상도 못 했는데. 하여간 요즘 어린 인간들은...."

파앗!

수백 년을 살아온 엘프 레인저가 땅을 박찼다. 그리고 라키엘 일행이 남긴 흔적을 맹렬히 추적하기 시작했다.

부상병 캠프로 돌아오는 길은 순탄했다. 일행은 숲을 벗어나고 만 하루가 지나서 무사히 캠프로 복귀할 수 있었다.

"...즈어어어어언-!"

"쉿."

"...."

복귀 소식에 맨발로 뛰어나오던 가르딘 경이 움찔했다. 경을 향해 째릿. 날카로운 눈초리를 쏘아 주었다. 뒤늦게 자신이 저지를 뻔한 실수(?)를 깨달은 가르딘 경이 멋쩍게 헛기침을 했다.

"흠흠! 오, 오셨습니까, 도련님?"

"어. 캠프에 별일은 없었고."

"네."

"부상병들은?"

"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기...."

"아, 요놈?"

이쪽의 품을 힐끗거리는 가르딘 경. 그를 향해 빙긋 웃어주며 품속의 꾸꾸를 깨웠다.

"꾸꾸야?"

"...꾸꺄?"

"우리 도착했어. 여기가 내가 말했던 부상병 캠프다?"

"꾸꺄!"

쌔근쌔근 자느라 품속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힘차게 드는 꾸꾸. 그러다가 녀석의 눈길이 가르딘 경과 정면으로 딱 마주쳤다.

"...꾸우?"

"헉?"

"꾸우우?"

"...."

"꾸꺄!"

꾸꾸가 더없이 반갑게 활짝 웃었다. 움찔하는 가르딘 경에게 말해 주었다.

"이름은 꾸꾸. 아피로스 여왕 애벌레야."

"여왕 애벌레... 말입니까?"

"어. 이제부터 부상병들의 감염 예방과 치료에 일익을 담당해 줄 녀석이기도 하고. 그런데 경이 놀랄 일은 이게 끝이 아닌데."

"예? 그게 무슨...?"

"꼬슴아? 무겁지? 이제 그거 내려놔도 돼."

"헥헥... 꼬슴!"

라키엘이 일행 뒤쪽을 향해 말했다. 그 순간, 쿠웅! 하고 묵직한 물체 떨어지는 소리가 땅을 타고 울렸다. 덕분에 가르딘 경은 뒤늦게나마 발견할 수 있었다.

"허억?"

커다란 말벌이 널브러져 있었다. 무려 코끼리 사이즈의 말벌이었다!

"저, 저거... 저거...."

"베스파로스 여왕벌이야."

"여왕... 벌... 말입니까?"

"어. 오는 길에 주웠어."

"주웠다니, 저걸 뭐에 쓰시려고...."

"술 담가야지."

"...예에?"

"당연한 거 아냐? 저 아까운 걸 왜 그냥 버려."

"...."

"아무튼 그런 게 있어. 어쨌건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라키엘은 베스파로스 여왕벌의 시체를 창고에 옮겨놓게 했다. 지금은 질질 시간을 끌 틈이 없었다. 환자는 이쪽을 기다려 주지 않으니까. 특히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은 환자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제는 꾸꾸에게 밥값을 시킬 때다.

"그러니까 꾸꾸야?"

"꾸우?"

"너 혹시 속이 불편하진 않아?"

"꺄아?"

"아, 그게 무슨 소리냐면, 누가 그러더라고. 네가 토해 주는 물질이 아픈 사람들을 아야 안 하게 해줄 수 있대."

"꾸꺄아?"

"정말이야."

"꾸꾸꺄?"

"응. 진짜로."

"...꺄꾸?"

"응. 맞아. 살짝만 구토해 주면 딱 좋을 거 같은데."

된다.

설득이 통한다!

라키엘은 희망에 부풀었다. 하지만 이내 돌아오는 꾸꾸의 반문에 그는 멈칫해야 했다.

"꾸꺄아? 꾸? 꾸꺄?"

"...뭐? 구토해 줘도 내가 그걸 잘 써줄지 모르겠다고?"

"꺄! 꾸!"

"그거 그냥 아무렇게나 쓴다고 해서 효과가 있는 게 아니라고? 게다가 한 달에 한 번만 토할 수 있어서 함부로 쓰기엔 아깝다고?"

"꾸꺄!"

"으음, 그러니까. 네가 구토해 준 물질을 내가 어떻게 활용할지 계획부터 들어보고 싶다는 거지?"

"꾸!"

"...."

라키엘은 꾸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요 녀석, 생각보다 만만(?)하지가 않았다. 해맑은 것과는 별개로 은근히 따질 건 따지는 성격인 건가.

'뭐.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라키엘은 자신의 계획을 말해 주었다.

"우선, 난 네가 구토해 주는 물질에 한방 재료를 섞을 거야."

"꾸우?"

"원래 한방에서 쓰는 자운고(紫雲膏)라는 연고가 있거든. 화상이나 피부 회복에 좋은 연고야. 약간의 항염 작용도 가능하고."

"꺄아?"

"거기에 네가 토해 주는 걸 섞어서 훨씬 강력한 외상치료 전문 항생연고를 만들려고. 그걸로 아야 하는 사람들 고쳐 주려고."

"꾸꾸꺄아?"

"연고 이름? 정해 놨냐고?"

"꾸꺄!"

"물론 정해 뒀지. 알려줘?"

"꾸우!"

"라키엘이 만든 연고니까 심플하게...."

"꺄아?"

꾸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키엘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라데카솔."

114화. 마음을 다하여 (1)

"오애애애애액-"

"옳지, 잘한다. 잘한다."

"오애애애액-"

꿀렁꿀렁!

꾸꾸의 포동포동한 몸이 꿀렁거렸다. 마치 크게 트림이라도 하려는 듯. 혹은 내면의 무언가를 우려내려(?)는 듯. 뽀송뽀송한 몸을 웅크리고서 열심히 기를 모았다.

그리고 다시 구역질을 했다.

"오애애애액-"

하지만 몸짓과 소리만 요란했을 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라키엘이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

"...꾸꺄아."

"으음, 생각처럼 구토가 잘 안 돼?"

"꾸꺄!"

"뭐? 사실은 구토해 보는 게 처음이라고?"

"꾸!"

"그래서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꺄!"

"...."

꾸꾸가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키엘은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쯧. 이거 생각보다 쉽지 않네.'

어찌어찌 꾸꾸를 잘 설득한 마당이었다. 구토해 주는 물질을 잘 쓸 수 있을 거라고. 한방 재료와 섞어서 연고를 만들어 병사들을 치료할 거라고. 내심 야물딱지게 정해둔 이름까지 알려준 터였다.

덕분에 꾸꾸가 선뜻 협조해 주기로 했다. 한데 이렇게 생각지도 못했던 난관이 생겨 버렸다.

'설마 구토하는 요령을 모를 줄이야.'

아직 너무 어려서 그런 걸까.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하긴. 아피로스 여왕의 덩치는 거의 2미터가 넘었으니까. 그런데 꾸꾸는? 딱 웰시코기 정도 사이즈밖에 안 되니까. 아직 한참 더 커야 할 아기인 거지.'

너무 어려서 요령이 없는 듯했다.

'난감하네.'

어떻게 하면 이 쬐끄마한 녀석을 토하게 할 수 있을까.

'확 명치라도 때려 줘야 하나. 아닌데. 그건 진짜 좀 아니고. 그럼 어떡하지?'

라키엘은 고민에 잠겼다. 그러다 문득, 뭔가를 떠올렸다.

"꾸꾸야?"

"꾸우?"

"너, 침 한번 맞아볼래?"

"꺄아?"

"침이 뭐냐면, 하나도 안 아픈 바늘이야. 그걸로 몸 이곳저곳을 아주 살짝만 콕콕 찌를 건데. 어때?"

"...꾸꺄?"

"진짜야. 아픈 거 아냐."

"꺄꾸?"

"어떻게 믿냐고? 음, 저기 데미안 아저씨 보이지?"

"...저 아저씨 아닙니다."

"넌 좀 가만히 있고."

"...."

"저기 데미안 아저씨 보이지?"

"꾸꺄!"

"피부 좋아 보이지?"

"꾸!"

"저게 다 나한테 침 맞아서 그런 거야."

"꺄?"

"진짜야. 정말로."

"꾸우우?"

"게다가 침을 꾸준하게 맞으면 몸이 튼튼해지고, 마음도 건강해지고, 가정이 똑바로 서고, 사회가 무너지지 않게 되고, 온 국민이 행복해지는 나라가 된다, 이 말씀이지."

"꺄아아?"

"그리고 너도 원하는 만큼 시원하게 구토할 수 있을 거야."

"꾸꺄?"

"내가 구토 중추를 좀 찔러 줄까 하거든. 그럼 완전 편하게 오애애애액- 오케이?"

"꾸꺄!"

뭔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좋은 거 같다. 그런 생각에 꾸꾸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키엘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음흉하게 피어났다.

"좋아 좋아. 그럼 지금 바로 시작하자."

미리 뽑아서 가지고 다니던 꼬슴이표 하얀 가시를 꺼냈다. 경혈 스캐닝 옵션도 켰다.

[진맥 스킬 옵션 ① : 경혈 스캐닝을 발동합니다.]

[경혈 스캐닝 옵션이 Lock-on 대상을 포착하였습니다.]

[대상이 성공적으로 Lock-on 되었습니다.]

키이이잉!

상큼한 알림음과 함께 시야가 변했다. 꾸꾸의 몸 주위로 밝은 외곽선이 생겨났다. 동시에 꾸꾸의 몸속 경혈의 배치가 낱낱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혈이 흐르는 방향. 교차하는 순서. 그 조화가 이루어내는 균형까지.

'흐음, 이렇구나.'

라키엘은 꾸꾸의 전신을 한참 관찰했다. 한데 그 눈길이 음침(?)했던 걸까.

"꾸우?"

꾸꾸가 불안한 눈빛을 보내어 왔다. 라키엘은 열심히 꾸꾸를 달래야 했다.

"괜찮아, 꾸꾸야. 해치지 않아요."

"꺄아?"

"어딜 찔러야 안 아플지 살펴보는 거야."

"...."

꾸꾸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식도를 거쳐 위장이 출렁였다. 덕분에 구토중추의 위치를 더욱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사람이랑 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르네.'

가시를 들었다.

꾸꾸의 옆구리를 겨누었다.

사람으로 치면 외릉혈(外陵穴)에 대응하는 자리를 콕, 찔렀다. 다만 그냥 찌르진 않았다. 구토를 유발하는 치료법인 용토법(涌吐法)의 원리를 응용했다.

쿡, 꾹꾹!

혈을 찌르며 반대되는 부위의 혈자리를 손으로 지그시 꾹 눌러주었다. 주혈에는 날카롭고 뾰족한 자극을, 반대되는 혈에는 둔하고도 은근한 자극을. 상반되는 자극이 꾸꾸의 구토중추를 제대로 건드렸다.

"꾸꾸야? 속이 좀 어때?"

"...꾸우? 꺄아?"

"이상해?"

"꾸꺄!"

"안 참아도 돼."

"오애애애액-"

꿀렁!

꾸꾸가 몸을 확 웅크렸다. 라키엘은 재빨리 그릇을 밑에 받쳐 주었다. 그 직후, 꾸꾸가 뭔가를 토해냈다.

"...꾸꺅!"

딸그랑!

뜻밖에도 액체가 아닌, 둥근 덩어리가 그릇에 떨어졌다. 당구공보다 조금 작은 구슬이었다. 한데 구슬에서 어쩐지 익숙한 향기가 느껴졌다.

'...민트초코 향이 왜 여기서 나와?'

덕분에 잠깐 떠오른 한국에서의 기억. 소개팅 자리에서 민트초코를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그녀.

'그래, 소개팅이 파투난 건 그 여자분 입맛 때문이야. 다른 건 몰라도 민트초코는 용서가 안 되지. 아암, 그렇고말고.'

그렇다.

소개팅이 망한 건 오로지 민트초코 때문이다. 결코, 절대로, 진짜로, 자신이 카페에서 일어나다가 정확한 딕션으로 3단 방귀를 '뿌뿌뿌잉↗' 하고 뀌어 버려서는 아니다. 심지어 그 방귀가 카페에서 흘러나오던 재즈에 정확한 비트를 맞춰 버린 탓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니까 민트초코가 나쁜 놈이다.

확실하다.

'....'

라키엘은 불현듯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한편으로는 그토록 원하던 항생물질을 마침내 얻었음에 순수하게 기뻐했다.

'어쨌건 해냈다...!'

아피로스 둥지를 찾기 위한 탐사. 베스파로스 무리의 습격. 예상치 못했던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 벌였던 일들까지. 며칠 내내 겪었던 개고생을 생각하자니 보람찬 감정이 쑴펑쑴펑 솟구쳤다.

하지만 라키엘은 이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옛말에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다. 삼겹살도 구워야 비로소 의미를 얻는 법이다.

그는 곧바로 연고 제조를 시작했다. 재료는 충분했다. 왕녀 아델린이 보내준 보급품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중에는 여러 가지 한약재도 있었다. 자근(紫根)과 당귀(當歸)도 물론이었다.

'둘 다 지금 꼭 필요한 약재지.'

자근은 지치라는 다년생 식물의 뿌리다. 예로부터 화상이나 동상 등을 치료하는 연고의 재료로 쓰여왔다.

당귀는 차고 습기가 있는 곳에서 싹을 틔우는 식물이다. 특히 동의보감에 나오는 수많은 약재 중에서, 무려 500회 정도나 언급될 정도로 한약 조제에 빠져서는 섭섭할 귀한 약초다.

하여 라키엘은 일찌감치 왕녀에게 두 약재의 보급에 특별히 신경 써 달라고 신신당부를 해 두었던 터였다. 애초부터 이렇게 사용할 계획이었으니까. 연고를 활용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럼 시작하자.'

밀랍을 끓였다.

끓는 밀랍에 당귀를 넣었다.

당귀의 색이 검게 탈 정도로 아궁이의 화력을 올렸다. 거기에 자근을 넣고 3분가량을 더 끓였다. 밀랍과 당귀, 자근이 섞인 용액이 걸쭉해졌다.

마침내 용액이 확연한 자적색으로 물들었을 무렵, 꾸꾸가 토해 준 항생 구슬을 걸쭉해진 용액에 넣었다. 큰 국자로 힘껏 다섯 차례 눌렀다. 용액 속에서 구슬이 으깨지는 느낌이 국자를 타고 전해져 왔다.

용액에서 민트초코 향이 솔솔 올라왔다. 그 순간, 라키엘이 데미안에게 신호를 보냈다.

"지금!"

두꺼운 장갑을 낀 데미안이 솥을 불에서 내렸다.

그때부터였다.

라키엘이 국자를 잡았다. 걸쭉해진 용액을 천천히, 부지런히 휘저었다.

'용액의 층이 분리되면 안 돼.'

한껏 달여진 약액이었다. 그렇기에 식는 과정에서 열심히 저어 주지 않으면 성분이 층을 이루며 분리될 가능성이 있었다. 혹은 바닥에 눌어붙을 가능성도 있었다.

카레를 끓일 때 국자로 열심히 휘저어 줘야 하듯이. 그런 정성을 들여야 비로소 맛있는 카레를 얻을 수 있듯이.

조금의 아쉬움도 없도록. 최고의 결과를 위하여 솥을 지켰다. 정확한 간격으로 꾸준히 저었다. 밤이 깊어 갔다. 달이 중천에 떠올랐다. 어깨가 점점 저려 왔다. 팔뚝도 뻐근해졌다. 하지만 남에게 국자를 넘기지 않았다.

'이건 무조건 내가 해야 해.'

꾸꾸의 말이 떠올랐다.

항생 구슬은 한 달에 한 번만 토할 수 있다고 했다. 즉, 이번에 연고 제조에 실패하면 속수무책으로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그동안 부상병들 다 죽겠지. 각종 감염 때문에.'

생각만 해도 끔찍한 결과였다.

게다가 이건 자신의 환자들에게 쓸 연고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러니 직접 해야 했다. 그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다짐하며 지친 육신을 독려했다. 피로감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그동안 솥이 식어 갔다.

용액도 식었다.

천천히 굳었다.

이른 새벽의 첫 동이 틀 무렵, 마침내 민트초코의 묘한 색감을 지닌 연고가 만들어졌다. 라키엘이 만든 외상치료 전문 연고, 라데카솔의 탄생이었다.

'됐다!'

절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정신을 상큼하게 일깨우는 알림음은 덤이었다.

딩동!

[당신은 로라시아 대륙 역사 최초의 항생 연고, '라데카솔' 제조에 성공하였습니다.]

[이러한 당신의 연고 라데카솔은 전례 없던 신개념적인 항생 치료의 보급과 대중화를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입니다. 또한, 당신은 이러한 업적을 통하여 '항생제 치료의 아버지'로 의학의 역사서에 길이 남겨질 것입니다.]

[후세의 의학도 꿈나무들이 팍팍 늘어난 시험 범위에 탄식하며 당신을 원망하게 됩니다.]

[앞으로 라데카솔을 통하여 당신의 명망이 더욱 높아질 것입니다.]

[오장육부가 당신의 업적에 기뻐하며, 동시에 불평을 터뜨립니다.]

[심장 : 아. 또 업적이네. 그래, 업적 세우는 건 좋다 이거야. 근데 또 밤샜네? 우린 대체 언제 쉬냐?]

[허파 : 허어... 파하악... ㅠㅠ]

[대장 : 요즘 수면이 불규칙해져서 변비도 생길 것 같지 말입니다.]

[간장 : 나도 요즘 미치겠음. 이 인간 이거 확 기절이라도 시킬 방법 없을까?]

[위장 : ...식도를 리본 모양으로 묶어 보자!]

[오장육부가 당신의 무리한 강행군에 염려의 기색을 드러냅니다.]

[오장육부가 당신의 건강을 갈아 넣은 업적에 떨떠름한 기쁨의 격려를 보내며 8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한 HP : 7,300]

'...후아.'

확실히 피곤하긴 했다. 날밤을 지새며 국자를 저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피로감보다 훨씬 큰 보람을 느꼈다. 마침내 완성한 외상치료 전문 항생제 연고, 이걸로 살려낼 수많은 부상병, 알차게 챙길 빵빵한 보너스 수명까지.

'흐흐흐!'

절로 샘솟는 흐뭇한 웃음 속에서 라키엘은 곧바로 움직였다. 부상병들의 치료에 항생제 연고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는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마침내 완성한 항생제 연고 라데카솔. 이걸로 그냥 보너스 수명만 챙길 줄로 알았다.

자신의 라데카솔이, 부상병들을 향한 치료가... 치열하게 전개되던 전쟁의 방향을 완전히 뒤엎어 버리며 역사에 남을 초월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줄은, 정말로 꿈에도 몰랐다.

115화. 마음을 다하여 (2)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라키엘은 꾸준히 부상병들을 돌보았다. 새벽이면 가장 먼저 눈을 떴다.

'내 보너스 수명!'

아무리 피곤해도, 온몸이 녹초처럼 느껴져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부상병들의 상태부터 가장 먼저 살폈다. 상처 부위에 라데카솔을 발라주었다.

전통적인 한방 연고인 '자운고'를 베이스로 삼은 연고였다. 당연히 효과가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자운고도 제법 쓸 만한 연고니까.'

갖가지 피부병과 화상, 외상 등에 두루 쓰이는 연고였다. 특히 자운고에 들어가는 당귀와 자근의 효과가 좋았다.

당귀는 피부에 영양을 공급하여 조직 재생을 촉진하는 효과가 있었다. 약간의 진통, 소염 효과도 갖추었다. 자근은 해열과 해독, 살균 능력을 지니고 있다. 거기에 아피로스 여왕 애벌레인 꾸꾸가 제공해 준 천연 항생물질이 첨가되었다.

그 효과는 엄청났다.

'좋아. 덧나서 부어 있던 곳이 눈에 띄게 가라앉고 있어.'

새벽에 부상병들을 살피며, 아침에 붕대를 열어 볼 때마다 사실은 조마조마한 기분이 들곤 했다.

상처의 끔찍한 모습 때문에?

물론 아니었다.

하루가 지나는 사이에 상처가 덧나 있을까 봐. 고름이 생기거나 염증으로 퉁퉁 부어 있을까 봐. 감염 반응 때문에 부상병의 상태가 악화될까 봐.

그게 제일 두려웠다.

이곳의 대부분이 중상을 입은 병사들이었다. 한데 세균 감염에 시달리면 회복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생명까지 위험해진다.

그걸 라데카솔이 효과적으로 막아 주었다. 덧날 곳은 가라앉혔다. 고름이 생겨 진물이 흐르던 상처도 진정시켰다. 말 그대로 새 살이 솔솔 돋아났다.

"자아, 오늘도 약 바를 시간이야. 움직이지 마시고."

"으... 으으...."

"따갑지?"

"괜찮습니다, 군의관님."

"좋아. 오늘도 잘 참아줬어. 꿰맨 곳도 잘 붙고 있고."

의도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다. 부상병들이 순조롭게 회복되고 있다.

그 사실이 희망을 주었다. 더 열심히 부상병들을 보살폈다. 거의 온종일 곁에 달라붙어 지냈다. 덕분에 일행도 덩달아 바빠졌다. 가르딘 경은 물론이었다. 라키엘의 호위를 위해 왕녀가 붙여준 앙부아즈의 기사들마저도 그러했다.

기사들도 소매를 걷었다. 라키엘과 가르딘을 도와 부상병을 돌보며 생각했다.

'마젠타노의 황태자 저 사람, 왜 이렇게 진심이지?'

'여기 부상병들, 따지고 보면 자기네 백성도 아닌데. 우리 앙부아즈의 백성인데. 왜 저렇게 열심인 걸까.'

아니,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부상병을 보살필 생각을 품은 적이라도 있었던가. 정성을 기울이면 살릴 수 있는 목숨이라는 생각이라도 해 본 적이 있었나.

'...아니.'

없다.

한 번도 없었다.

기사들은 내심 절감했다. 그리고 부상병에게 침을 놓아 주는 라키엘을 쳐다보았다.

"...."

문득, 부끄러워졌다.

자신들은 기사였다. 명예를 중시하는 자들이었다. 한데 죽어 가는 병사들에게 한 번도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었다. 오로지 왕가를 수호하고, 개인의 명예를 드높이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한데 진짜 명예라는 게 무엇일까. 전쟁터에서 용맹을 뽐내는 것? 왕실과 주군을 보호하는 것?

그것만이 다가 아니리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처음 느껴보는 낯선 생각과 감정이었다. 의외로 거부감이 들지가 않았다. 오히려 배우고 싶다고, 바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기분을 느낀 이는 기사들뿐만이 아니었다.

"저기, 도련님?"

어느새 깊은 밤.

가르딘 경은 부상병 곁에서 꾸벅꾸벅 조는 라키엘을 조심스럽게 깨웠다.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곤히 잠든 탓인지, 라키엘이 좀처럼 눈을 뜨지 않았다. 결국, 가르딘 경은 주군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도련님?"

"...으음, 어, 음?"

움찔하며 깨어나는 황태자. 이쪽을 멍하니 올려다보는 무방비한 모습에 가르딘 경은 그만 희미하게 웃고 말았다.

"괜찮으십니까?"

"어? 나?"

"예."

"...어우, 어깨야. 깜빡 졸았네.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침, 흘리고 계셨는데."

"...."

"거기 말고. 반대쪽."

"이잇!"

라키엘의 소매가 바쁘게 움직였다.

그 소매 사이로 보이는 손목과 팔뚝이 참 가느다랗다. 원래부터 제법 깡마른 체형이셨는데, 요즘엔 부쩍 더 마른 것 같다. 아마도 부상병들을 돌보느라 피곤에 절어서 그런 거겠지.

가르딘 경이 걱정스레 말했다.

"저기, 요즘 너무 무리하시는 게 아닌가 염려가 됩니다."

"나 말야?"

"예. 그러다 쓰러지실지도...."

"아 괜찮아, 괜찮아.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하지만 도련님. 아니, 전하."

가르딘 경이 정색했다.

"사실은 말입니다. 이런 말씀은 드리지 않으려 했는데, 오늘은 해야겠습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라키엘도 표정을 굳혔다.

혹시 가르딘 경, 항의를 하려는 걸까. 혹은 쓰린 충언이라도 꺼내려는 건가.

'하긴 내가 요즘 꽤나 무리하긴 했지. 날밤도 숱하게 지새고. 밥도 서서 허겁지겁 먹다시피 했고.'

물론 그럴 수밖에 없긴 했다.

치료의 손길을 기다리는 부상병은 넘쳐나는데, 일손은 한참이나 모자란 상황이었다. 잠을 쪼개고, 쉬는 시간을 줄이고, 밥 먹는 시간마저도 뭉개야 겨우 부상병들을 빠짐없이 돌볼 수 있었다.

덕분에 오장육부가 매일 항의를 해댔다. 이러다 쓰러진다고. 훅 간다고. 조만간 파업이라도 선언할 기세였다. 한데 이젠 가르딘 경까지 잔소리의 대열에 합류하려는 걸까.

'쓰읍. 만약에 진짜로 잔소리하면 그냥 혼내고 무시해야지.'

역시 권력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다. 라키엘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가르딘 경의 입에서 쓴소리가 아닌, 뜻밖의 말이 나왔다.

"저 요즘, 깊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응?"

"진심입니다."

"...."

저건 또 무슨 소리일까. 뭘 반성하게 됐다는 걸까. 가르딘 경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여기 처음 왔을 때 말입니다. 아니, 그 전에 전하를 따라 앙부아즈로 오던 때부터, 황도에서 출발할 때부터 저는 전하의 계획에 회의적이었습니다."

"회의적이었다고?"

"예."

가르딘 경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나서신다고 한들, 제가 전하를 돕는다고 한들, 병사들을 몇이나 살릴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여기 도착해서 캠프의 모습을 봤을 때도 그랬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서 다들 죽을 병사들, 제겐 그렇게만 보였으니까요. 그런데...."

"그런데?"

"전하께선 다르셨습니다."

어쩐지 묘한 확신이 배어나는 목소리로 가르딘 경이 말했다.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현실과 타협하지도, 물러나지도 않으셨습니다. 방법이 보이지 않을 때면 필사적으로 새로운 길을 뚫고, 그 길이 험난할 때면 앞장서길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입니다. 저, 이번에 많이 느끼면서 반성하고 있습니다."

"...어, 그래?"

"예, 전하. 앞으로도 더 많이 느끼고 배우겠습니다. 그래서 전하의 건강을 더욱 성심껏 보살펴 드리고 싶습니다."

가르딘 경이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진심이었다.

부상병들은 그저 방치되는 존재인 줄 알았다. 그게 당연한 줄로만 여겼더랬다. 하지만 아니었다.

주군을 따라 부상병들을 돌보며, 그렇게 치료받은 부상병들이 하나둘씩 병상을 털고 일어나는 모습을 보며, 그는 뼈저리게 반성했다. 자신이 나태했노라고. 더 많은 사람을 살릴 방법을 애써 찾으려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고 느꼈다.

"그러니 앞으로도 절 곁에서 놓아 주지 말아 주십시오. 감히 드리는 부탁입니다."

"...어, 으음, 솔직하게 대답해도 돼?"

"예, 전하."

"나 방금 오글거려서 미치는 줄."

"...."

"손발 전부 사라질 뻔했네, 진짜."

"...."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오밤중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소리 할 시간 있으면 캠프 한 바퀴 돌면서 부상병들이나 좀 살펴보자, 응? 자다가 열 끓는 병사가 있는지, 호흡은 편안한지, 다른 응급 상황은 없는지."

"...."

"잘하자? 응?"

"...예, 전하."

그렇게, 살짝 오글거리는 가르딘 경의 진심은 순식간에 진압(?)되었다.

치료의 나날이 이어졌다.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응급수술과 봉합을 하고, 라데카솔을 바르고, 탕약을 처방하고, 필요한 이에겐 침을 놓았다. 균형 잡힌 식사와 꼼꼼한 위생 관리는 기본이었다. 나날이 누적되는 라키엘의 피로와 함께 무더운 여름날이 흘러갔다.

하루, 이틀, 열흘, 보름, 한 달.

그사이에 많은 부상병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캠프에서 최초로 응급수술을 받았던 상급병사, 티에리도 그중의 하나였다.

'내가 이렇게 다시 걸을 수 있게 되다니.'

이거, 정말로 현실일까.

병상을 딛고 스스로 처음 일어선 첫날, 티에리는 감격에 젖은 얼굴을 들었다. 이마에 닿는 따가운 햇볕이 믿기지가 않았다. 이렇게 회복되어 멀쩡히 걸을 수 있다는 자체가 너무나 가슴 벅찼다.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스스로를 포기하고 있었다. 더러운 침상에서 죽어가고 있던 때엔 정말로 그랬다. 살아날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곪아 들어가는 상처가 너무나 아팠다.

차라리 이 고통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그저 이 삶의 끝이 너무 아프지 않기만을 바라며. 하루하루 헐떡이는 호흡을 내뱉으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더랬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토록 지독하던 상처가 나았다. 팔을 잘라내지도 않았다. 옆구리도 다 아물었다. 이렇게 두 다리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의 삶을 희망할 수 있게도 되었다.

그런 감격은 그의 것만이 아니었다. 다른 수많은 부상병들이 차례차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회복의 기쁨을 누리며 서로를 얼싸안았다. 캠프 전체가 안도와 기쁨의 미소로 물들어 들떴다.

하지만 단 한 명.

이 상황에서도 들뜨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라키엘이었다.

무려 서른 명째의 부상병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 저녁. 그 기념으로 캠프에서 조촐한 연회가 마련되던 와중이었다. 라키엘은 작고도 떠들썩한 병사들의 축배 사이를 조용히 빠져나왔다. 자신의 작은 텐트로 돌아와 궤짝을 열었다.

그 속에 다양한 잡동사니가 있었다. 아니, 사실 그것은 유품들이었다. 그동안 캠프에서 미처 살려내지 못했던 부상병들. 상처가 너무나 깊어서. 손을 쓰기엔 너무나 늦어서. 가능한 모든 치료를 했지만 역부족이어서. 안타깝게 죽어 간 병사들의 유품이었다.

누군가의 손때 묻은 장갑.

어떤 이의 초라한 목걸이.

모두가 라키엘의 당부로 죽은 병사에게서 한 가지씩 거두어들인 물건들이었다. 언젠가 훗날 유족들에게 전사자의 시신 대신에라도 보내어 주어야 할 유품이었다.

"...."

그의 눈길이 유품들을 쓸어보았다.

유품 하나하나를 볼 때마다 그걸 지녔던 병사들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헐떡이다가 끊어지던 숨결이, 채 감지 못하던 허망한 눈길이, 떨면서도 이쪽의 손을 꼭 그러쥐던 손길이. 모두가 방금 있었던 일인 것처럼 생생했다.

'내 실력이 조금 더 좋았더라면, 살릴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다.

나름 노력했지만, 정말로 열심히 했지만, 그게 위로가 되지는 못했다. 자신이 돌보던 환자들이었다. 끝끝내 살려내지 못한 이들이었다. 사실은 이런 경험이 낯설었다. 한의원에서는 돌보는 환자가 죽는 일 따위, 좀처럼 없으니까. 그런 환자들은 일찌감치 큰 병원 응급실로 가니까.

그래서였다.

자신이 돌보던 환자가 죽어가는 것도, 그런 환자를 무력하게 지켜보는 것도. 모두 처음이었다. 한 사람이 눈을 감을 때마다 가슴에 대못 하나가 박혔다. 영원히 빠지지 않을 못이었다.

아팠다.

미안했다.

그래서 이렇게, 떠난 이들의 유품을 매만지며 못난 눈물만 흘린다.

"...."

라키엘은 말없이 눈가를 훔쳤다. 한참을 우두커니 홀로 앉아 있었다.

그동안 천막 바깥에서는 수많은 눈길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연회에서 슬며시 사라진 군의관. 그런 군의관을 걱정하며 찾아온 부상병들이었다. 군의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안타깝게 죽어간 동료들. 그들의 유품을 매만지다 끝내 눈물을 보이는 군의관. 군의관의 뒷모습을 보는 병사들의 눈가도 서서히 젖어 갔다.

모두가 결심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설령 불구덩이에 뛰어들어야 하더라도. 언제까지고 저 군의관을 따르겠노라고. 영원토록 변치 않을 충성을 바치겠노라고.

116화. 등 뒤의 개소리 (1)

"그럼 지금부터, 앙부아즈의 합당한 지배자이신 국왕 전하께 영원한 충성을 다시금 표하오며, 전황 보고를 드리겠사옵니다."

이곳은 발루아 요새.

앙부아즈 왕국 중부 험준한 산맥의 유일한 통로. 그 천혜의 요새 회의실에서 앙부아즈의 국왕, 메로뱅거 발루아 앙부아즈는 정보참모의 보고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내심 분노했다. 그것은 반란을 일으킨 친족에 대한 새삼스러운 분노였다.

'쟈빌론, 그놈이 기어코....'

쟈빌론 플람베르 앙부아즈. 선대와 핏줄이 이어져 있는 방계 왕족. 동시에 그는 소드마스터였다.

귀한 인재였다.

하여 아꼈다.

애초에 소드마스터가 왕가에 둘밖에 없기에 더더욱 그러하였다.

'한데 그런 내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는가? 정녕?'

쟈빌론이 야심이 많은 자임은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몇몇 신하들은 노골적인 염려를 표하기도 하였다. 흑심이 많은 자라고. 그만큼 능력 또한 출중한 자라고. 그런 자에게 많은 권한을 주어선 아니 되신다고.

하지만 자신의 생각은 달랐다.

야심이 많은 자일수록 잘 품어야 한다고 여겼다. 지나치게 홀대를 하면 반발심이 쌓여 더욱 위험할 것이라 보았다. 오히려 적당한 권한을 주어 지닌 능력을 적절히 사용하도록 해주면 어느 정도는 야심을 달랠 수 있으리라고도 보았다.

하여 동부의 사령관직을 맡겼다. 몇 년 동안은 그 생각이 옳은 듯했다. 실제로 쟈빌론은 그동안 얌전했으니까.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여겼다.

한데 그 생각이 틀렸다.

"...를 드린 바와 같이, 현재는 북동부 일대의 소규모 교전을 빼면 큰 충돌은 없는 상황입니다. 물론 그 원인은 반란군의 주력이 이곳 발루아 요새를 목표로 집결 중이기 때문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귀를 쿡쿡 찌르는 정보참모의 보고. 국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곳으로 주력을 집결 중이라. 놈은 우리와의 일전을 피할 생각이 없는 게로군."

"아마 그런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후우."

국왕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반란군과의 거대한 일전이라. 부담감이 가슴을 꽉 채웠다.

"다른 보고할 것은 없는가?"

"아, 있사옵니다."

혹시나 조금 희망적인 소식은 없을까. 별다른 기대 없이 물었다. 한데 정보참모의 표정이 뜻밖에도 밝아졌다.

"최근 기이하도록 훌륭한 성과를 내고 있는 부상병 캠프가 있사옵니다."

"훌륭한 성과? 부상병 캠프가?"

"예, 전하."

국왕 메로뱅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란군과의 일대 격전을 앞둔 지금 시기에 고작 부상병 캠프에 대한 보고라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개 부상병 캠프가 성과를 내봤자 얼마나 되겠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정보참모의 보고가 그의 귀를 번쩍 뜨이게 했다.

"최근 2개월간 부상병 생존율이 무려 70퍼센트를 넘은 곳이옵니다."

"...뭐?"

70퍼센트?

국왕은 하마터면 목에 담이 쎄게 걸릴 뻔하였다. 믿어지지 않는 수치였다.

"그럼, 열 명이 다쳐서 실려 가면 그중에 일곱이 살아서 나온단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전하."

"정녕 그게 사실인가?"

"예, 전하. 실은 저도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사옵니다. 보통 부상병 캠프의 생존율이 기껏해야 10퍼센트 내외임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좋은 성과였기 때문이었사옵니다. 하온데...."

"하온데?"

"자체적인 조사 결과, 그 성과가 어떠한 조작도 없는 투명한 사실로 판명되었사옵니다."

"정말로 그게 사실이라고?"

"예, 전하. 심지어 현재 왕국군 각급 부대의 병사들 사이에도 해당 캠프의 소문이 널리 번지는 중이라 하옵니다."

"소문?"

"전장에서 어떻게 다치든 그곳, 21지원대대의 부상병 캠프로 실려 가면 살 수 있다는 믿음이 퍼지고 있사옵니다. 하여 병사들이 그곳을 부르는 별칭마저 생겨난 상황이옵니다."

"별칭마저?"

"예, 전하."

국왕의 물음에 정보참모가 싱긋 웃었다.

"병사들이 21지원대대를 가리켜 부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