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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335

325화 역시 알아도 쉽지가 않아. (1)

콰아아아앙!

"끼에에에엑!"

길리언의 두 자루 도끼가 움직이자 그에게 몰려들던 그렉스들이 핏물이 되어 사라졌다.

뿌드득.

이를 악문 길리언의 눈에서 푸른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부풀어 오른 근육에는 힘줄이 터질 듯이 튀어나왔다.

그는 단번에 모든 힘을 끌어올렸다. 힘을 조금이라도 아끼면 이 엄청난 수의 그렉스들을 뚫고 갈 수가 없었다.

콰앙! 콰앙! 콰아앙!

단 몇 번의 도끼질만으로 그렉스 수십여 마리가 몸이 터져 나갔다.

하지만 길리언이 옮긴 발걸음은 고작 몇 걸음뿐이었다. 그 정도로 그렉스들은 끝도 없이 몰려오고 있었다.

길리언은 깊이 숨을 내쉬었다. 데스몬드군과 싸울 때도 이런 막막함은 느껴보지 못했다.

개체의 힘이 약한 건 의미가 없었다. 죽음을 불사하는 군대와 싸운다고 생각해야 했다.

콰아아아앙!

길리언은 마치 폭주한 오우거처럼, 제 앞을 막는 모든 걸 쓸어버렸다.

그의 무지막지한 힘에 요새 위에서 싸우던 병사들도 넋을 잃을 정도였다.

"뭐 해! 쉬지 말고 공격해라!"

"한눈팔지 마!"

"우리가 더 죽여야 길리언 님이 안전하다!"

곳곳에서 지휘관들이 고함을 질렀다. 이들은 지셀을 따라다닌 베테랑 병사 출신답게 혼란스러운 상황을 잘 통제하고 있었다.

파아아아앗!

수없이 많은 화살이 길리언의 옆으로 쏟아졌다. 병사들이 도운 덕분에 그렉스들은 길리언에게 일정 수 이상 몰려들지 못했다.

하지만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드드드드드!

숲이 더 크게 울리고 있었다. 저 멀리서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그렉스들이 몰려오는 게 느껴졌다.

'영주님....'

지셀은 아직 숲에서 나오지도 못했다. 저 붉은 해일에 삼켜지면 아무리 지셀이라도 살아나오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길리언은 온 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갔다.

파아아악!

"끼에에엑!"

분명 눈앞에 몰린 그렉스들을 베어 냈다. 하지만 마치 환상을 베어 낸 것처럼, 비었던 공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렉스들로 다시 채워졌다.

어느 순간부터 길리언은 한 걸음도 제대로 나아가지 못했다. 아무리 베고 베어도 앞은 그렉스들로 가득 차 있었다.

콰앙! 콰아앙!

"크읏...."

아무리 그렉스들을 처죽여도 제자리에서 도끼만 휘두르는 느낌이었다.

펜리스에서 파괴력 하나는 손에 꼽히는 실력자인 길리언이다. 그런 그가 앞으로 제대로 나아가지도 못할 정도다.

이건 차라리 자연재해라고 하는 게 옳았다.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재해.

막막함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을 때, 그의 뒤에서 수십 개의 단검이 날아들었다.

파파파팍!

"끼에에엑!"

누군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벨린다가 뒤에서 같이 싸워 주고 있던 것이다.

"후우!"

길리언은 그제야 막혔던 숨이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영리하게 싸우고 있었다. 벨린다의 몸에 연결된 수십 개의 단검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단검들은 앞을 막고 있는 몬스터를 공격하면서 주변의 그렉스를 유인했다.

그렉스들의 공격이 분산되니 길리언은 느릿하지만 조금씩 다시 나아갈 수 있었다.

뒤에서 그녀의 숨 가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의외로 합이 잘 맞네요?"

"...부정할 순 없군."

길리언은 한 마디 툭 내뱉고 도끼를 휘두르는 것에만 전념했다.

벨린다는 이미 힘겨운 작전에 참여하고 온 상태였다. 짧은 한마디로도 호흡이 흐트러진 게 충분히 느껴졌다.

두 사람은 서로 힘을 합쳐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얼핏 무모해 보일 수 있지만, 그래도 해야 했다. 아무리 지셀의 실력이 뛰어나도 이만한 수에 계속 둘러싸이면 결국 힘이 떨어질 것이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면 어떻게든 몬스터 떼를 뚫고 가서 만나야 했다.

요새에 있던 사람들도 그걸 알기에 두 사람을 엄호하는 데 바빴다.

"쉬지 말고 쏴라!"

"요새에 붙는 놈들은 창으로 처리해!"

"더 붙어! 피하지 말고 더 붙으란 말이다!"

영주가 아직 오지 않았으니 투석기도 쓸 수 없고 마법도 쓸 수가 없다. 어떻게 휘말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공격은 화살로 견제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쉬지 않고 화살을 쐈음에도 몬스터의 파도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끼에에엑!"

그렉스들은 요새에 붙어 열심히 기어오르고 있었다. 날카로운 발톱을 목책에 박으며 올라갔다.

밑에 쌓인 사체들도 그렉스들이 올라오는 데 도움이 되었다.

"더 힘을 내라!"

푸욱! 푸욱! 푸욱!

지휘관들의 외침을 배경음으로, 병사들이 달라붙는 그렉스들을 창으로 찌르고 쳐내었다. 만약 요새를 만들지 않았으면 절대 이렇게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영주의 준비성에 감탄할 겨를도 없을 만큼 전투는 치열해져 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바네사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길을 만들어야겠어요."

옆에 있는 마법사가 정중하게 말했다. 펜리스 마법 연구소장이 된 바네사에게는 이제 누구도 함부로 굴 수 없었다.

"지금 마법을 쓰면 다시 마력을 모아야 합니다. 그 시간 동안 병사들이 버텨야 할 겁니다."

"어차피 영주님이 오지 않으시면 어떤 준비든 소용이 없어요. 그럴 바에는 이 상황을 빨리 해결하는 게 좋아요."

"...알겠습니다."

구우우우우웅!

바네사가 손을 뻗자 바닥에 새겨진 마법진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이번 작전을 위해 영지에 남은 모든 룬스톤을 긁어모았다. 그중 일부는 마력을 모으기 쉽게 마법진 주변에 박아 넣었다.

거기다 수십 명의 마법사가 마력을 마법진에 모아 둔 상태였다. 그 마력이 바네사에게 흘러 들어갔다.

곧 그녀의 입에서 영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스 스피어."

드드드득.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물이 뭉치며 얼음의 창들이 나타났다.

어마어마한 마력이 6서클 마법사의 깨달음과 만나자 순식간에 얼음의 창 수백 개가 생성되었다.

"가라."

그녀가 한마디를 내뱉자 얼음의 창이 쏘아져 나갔다.

콰콰콰콰콰쾅!

"끼에에에엑!"

거대한 얼음의 창들은 순식간에 길리언과 벨린다의 양옆을 쓸어버렸다.

바네사는 다시 그렉스들이 몰리기 전에 바로 마법을 이어 나갔다.

"어스 월."

쿠쿠쿠쿠쿵!

길리언과 벨린다의 옆으로 거대한 흙의 벽이 솟아올랐다.

"오래 버티진 못할 거예요."

바네사는 그 말을 끝으로 마력을 거두었다. 더 이상 마력을 소모하면 준비한 마법을 사용할 수가 없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명상하며 다시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곁에 있는 마법사들 또한 그녀를 따라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바네사 덕분에 길리언과 벨린다는 더 빠르게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양옆으로 벽이 생성되어 그렉스들이 바로 넘어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네사 덕분에 살았네요. 도대체 도련님은 왜 항상 그렇게 무모한 건지!"

벨린다가 싸우면서도 투덜거렸다. 변함없는 그녀의 잔소리를 들으며 길리언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 웃음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영주님이다."

콰아아앙!

저 앞에서 그렉스들이 수도 없이 튕겨 나가는 게 보였다. 지셀도 힘겹게 몬스터를 쳐 내며 요새 쪽으로 오고 있던 것이다.

지셀은 길리언과 벨린다보다 더 많은 그렉스들과 싸우고 있었다.

"끼에에에엑!"

수백의 그렉스들이 단숨에 지셀을 덮쳤다. 순식간에 몸이 가려 안 보일 정도였다.

콰아아아앙!

그렉스들은 지셀을 덮침과 동시에 터져 나갔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그렉스들이 금세 다시 지셀을 덮쳤다.

콰아아아앙!

다시 그렉스가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그사이 지셀이 재빠르게 앞으로 구르며 자리를 벗어났지만, 몬스터들은 끊임없이 지셀을 향해 덤벼들었다.

"후, 이거 장난 아닌데?"

지셀은 싸우면서도 혀를 내둘렀다.

지금 자신의 실력으로는 수천의 군대도 단숨에 뚫어 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렉스들의 육탄 공격은 그런 그도 쉽게 뚫을 수 없었다.

인간은 기세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선두의 수백 명만 단숨에 죽여도 뒤에 남은 자들은 사기가 떨어진다.

상대가 인간이 아니더라도 그런 공포를 이용할 수 있다. 본능을 따르는 몬스터들도 죽음은 두려워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렉스들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그것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예 그런 개념 자체가 없는 듯했다.

퀸 그렉스의 명령에 따라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움직이는 군대.

이것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이면서도 가장 공포스러운 군대라 할 수 있었다.

"역시 알아도 쉽지가 않아."

온몸이 피로 범벅이 된 지셀은 쉴새 없이 검을 휘두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전생의 정보만 봐도 꽤 힘들 거라 예상은 했지만... 직접 겪어 보니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짜릿하네."

치이이이익!

지셀의 몸에서 붉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위험한 상황에도 그의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지셀은 본래 전투를 즐기는 성미다. 특히 이렇게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전투를 말이다.

콰아아앙!

그는 붉은 눈을 빛내며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최근에 완성한 새로운 방어술은 이번 전투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렉스들이 아무리 할퀴고 긁어도 제대로 된 상처 하나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단 하나.

'요새에 갈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지금 같은 상황이면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렉스가 어림잡아도 10만 마리는 몰려온 거 같았다. 심지어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처죽였는데도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었다. 마치 그렉스로 이루어진 벽이 눈앞에 수천 겹으로 펼쳐진 느낌이었다.

남은 힘을 가늠해 봤을 때 자신이 무사히 무사히 도착할 확률은 절반 이하다.

'그래도 가야지.'

어떻게든 가야 한다. 이런 곳에서 죽으려고 숲에 들어온 건 아니었다.

언제나처럼, 마지막에만 성공하면 되는 일이다.

콰아앙!

지셀은 잡생각을 버리고 검을 휘두르는 데만 집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앞에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앞에서 누군가가 접근하는 것도 뒤늦게 알아차릴 정도로 그는 전투에 빠져 있었다.

"영주님!"

"도련님!"

"길리언? 벨린다?"

나오지 말라고 했더니 참 말을 안 듣는다. 하지만 지셀은 웃었다.

"이제 절반은 되겠군."

무사히 돌아갈 확률이 더 올라갔다. 세 사람이 뭉치자 그렉스들을 뚫고 나아가는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다.

콰앙! 콰아앙! 콰아앙!

"끼에에에엑!"

마나가 폭발하는 소리와 그렉스들의 비명이 끊임없이 울렸다.

바네사가 만들어 준 벽은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마법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 법이다.

쿠르르르릉!

마력이 다하자 벽은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금껏 벽에 막혀 있던 그렉스들이 세 사람에게 몰려들었다.

탁 트인 공터에 진입하자마자 그들은 다시 그렉스들의 해일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요새에 있던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영주님이다! 영주님이 오셨다!"

"더 빨리 쏴라! 길을 만들어야 한다!"

"투석기 준비해라!"

영주가 어디 있는지 밝혀진 이상 투석기를 아낄 필요가 없어졌다.

갈바릭은 드워프들과 함께 투석기들을 조정해 공격 방향을 잡았다.

훌륭한 공병이기도 한 그들은 이미 이 주변의 측량을 모두 마친 상태였다.

적당히 거리를 가늠한 갈바릭이 외쳤다.

"쏴라!"

파앙! 파앙! 파아앙!

수십 대의 투석기가 거대한 돌덩이들을 쏘아 댔다.

드워프들은 왜 지셀이 정교할 필요가 없다고 했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콰아앙! 콰아아앙! 콰아아앙!

"끼에에에엑!"

지셀의 뒤쪽에서 달려오던 그렉스들이 시원할 정도로 돌덩이에 맞아 죽어 갔다.

빗나가는 건 없었다. 빽빽하게 몰려 있으니 못 맞추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투석기 공격이 시작되자 확실히 뒤쪽에서 오는 그렉스들의 기세가 조금 주춤했다. 돌덩이들이 이동을 방해하고, 점점 쌓여 가는 시체들도 걸리적거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큰 효과는 없었다. 여전히 지셀 일행의 앞쪽에는 그렉스들이 너무나 많이 몰려 있었고, 그도 부족하다는 듯 양옆에서도 수없이 많이 몰려들었다.

콰앙! 콰아앙! 콰앙!

분명 그렉스들이 세 사람의 공격에 튕겨 나가고 찢기는 모습이 요새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도 세 사람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길만 내면 금방 도착할 실력자들인데 너무 많은 수에 밀리고 만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바네사가 다시 일어났다.

"다시 길을 만들겠어요."

그 말에 마법사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까보다 그렉스들이 더 많아졌다. 그렇다는 건 더 많은 마력을 써야 한다는 뜻이다.

"마법진과 룬스톤으로 마력을 모으는 건 이제 한계입니다."

"이번에 모은 마력을 쓰면 영주님이 계획했던 마법은 쓰지 못할 겁니다."

"일단은 조금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준비한 마법을 쓰지 못한다면 저 엄청난 그렉스들과 몇 날 며칠을 싸워야 할 수도 있다. 수많은 병사가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바네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더 기다릴 수 없어요. 위험한 상황이에요."

마법사들은 반대할 수도 없었다. 정말 영주가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없으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해하고 있을 때, 잠깐 쉬며 숨을 고른 카오르가 다가왔다.

"내가 대충 얘기 들어 보니까 지금 마법을 쓰면 안 될 거 같은데?"

"어쩔 수 없어요. 저기를 보세요. 더 늦어지면 손도 쓸 수 없을 거예요."

바네사가 숲을 가리켰다. 숲은 이제 완전히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기가 막힐 정도로 많은 그렉스가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카오르가 바닥에 침을 한번 뱉더니 말했다.

"잠깐만 길을 만들면 되는 거잖아?"

"방법이 있나요?"

"우리가 영주한테 제일 많이 훈련받은 게 돌격이야. 잠깐 길을 뚫는 건 우리가 왕국 최고지."

기사 400명이 시도하는 충격 전술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비록 짧은 순간만 낼 수 있는 힘이지만 말이다.

카오르가 손을 젓자 병사 몇 명이 그의 갑옷을 가져왔다.

"이거 쪽팔려서 안 입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영감이 나 한 번 도와줬으니까."

그가 신형 갑옷을 잘 안 입는 이유는 하나였다. 길리언도 안 입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갑옷이 필요했다.

카오르의 갑옷은 다른 기사들의 것과 마찬가지로 한쪽 가슴에 펜리스의 문장이 그려져 있다.

다만 등 부분에도 그림이 추가되어 있다는 게 조금 달랐다. 그의 갑옷 뒤쪽에는 흉포한 송곳니를 드러낸 검은 개가 그려져 있었다.

"야! 빨리 모여라!"

갑옷을 챙겨 입은 카오르가 외치자, 목책에 달라붙은 그렉스들을 쳐 내고 있던 기사들이 전부 모였다.

이미 그들도 내려갈 준비를 전부 마친 상태였다.

"가자. 길 만들러."

철컥.

카오르가 투구를 내리며 말하자 기사들이 모두 마나를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반쪽짜리 기사다 보니 언제나 힘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분배해 아껴 가며 싸웠다. 하지만 지금은 힘을 최대한 발휘할 때였다.

지잉―!

기사들의 갑옷 틈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326화 역시 알아도 쉽지가 않아. (2)

촤아악!

벨린다가 주변에서 달려들던 그렉스를 꿰어 죽이며 지친 어조로 말했다.

"도련님, 우리 요새까지 갈 수 있겠어요?"

"그럼, 걱정하지 마. 충분히 갈 수 있으니까. 둘이 와 준 덕분에 확률이 많이 올랐거든. 아, 물론 나 혼자서도 갈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두 사람이 와서 더 쉬워진 건 사실이지."

천진난만한 지셀의 대답에 벨린다는 열이 확 올랐다.

"도대체! 왜 언제나 그렇게 자신만만한 거예요! 지금 제대로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있는데!"

자신도 길리언도 힘이 상당히 빠졌다. 그렉스는 처음보다 더 늘어난 거 같다. 도무지 뚫고 갈 방안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셀은 웃으면서 검을 휘둘렀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고. 얼마 안 남았잖아?"

"힘이 다 떨어졌다고요! 우리는 아까부터 전혀 전진도 못 하고 있고요! 제가 어떻게든 길을 낼 테니 도련님이라도 먼저 가세요!"

"아니야, 여기까지 왔으면 됐어. 피오테가 도와줄 거야."

"뭐라고요?"

뜬금없는 소리에 벨린다가 순간 단검을 휘두르는 것도 잊고 되물었다. 길리언도 놀라 숨을 들이켤 정도였다.

피오테는 사제다. 지금도 부상자들을 돌보고 있을 것이다. 이곳까지 와서 전투를 도와줄 실력도, 능력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셀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이럴 때는 같은 편을 믿어 보라고. 괜히 성자라고 불리는 게 아니니까. 아, 성녀인가?"

콰앙! 콰앙! 콰앙!

잡담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세 사람은 이를 악물고 그렉스들과 싸웠다. 이제는 호흡도 허투루 내뱉으면 안 될 정도로 체력이 떨어졌다.

요새에는 피오테를 제외한 열 명의 사제들이 있었다.

이 사제들은 저번 전쟁에서 투자 피해자들의 군대를 따라왔다가 지셀에게 잡혀 돌아가지 못했던 자들이었다.

지셀이 포리스코에게 편지를 보내 임시 발령장을 받아 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마수의 숲까지 끌려온 이들은 열심히 신성력을 쓰며 뒤에서 병사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바쁘게 뛰어다니던 피오테는 기사들이 출전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았다.

'내가 도와줘야 해.'

그도 지셀에게 전투 훈련도 받고 있긴 하지만, 아직 직접 싸우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피오테는 다시 전장을 둘러보았다.

"물러서지 마라! 물러서면 끝이다!"

"빨리 밀어내라! 붙은 놈은 떨어뜨려!"

"영주님이 오고 계신다! 어서 엄호해!"

다들 정신없이 싸우고 있었다. 그들에게 덤벼드는 어마어마한 수의 몬스터들을 보니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그는 이런 살육의 현장을 직접 본 적이 없다. 토악질이 나올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그래도 눈을 돌릴 수는 없었다. 삿된 것들과 싸우는 것 또한 여신이 내린 사명이다. 경전은 몬스터를 세계의 이질적인 존재로 규정했다.

마법사들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마법을 쓰지 않는 것을 보니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건 영주가 와야 쓸 수 있는 것임을 피오테는 깨달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눈에 누워서 헐떡이고 있는 알포이가 들어왔다.

'...쟤 아직 안 죽었네.'

피오테는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깜짝 놀라 고개를 마구 저었다.

신을 모시는 사제가 사사로운 원한을 품다니! 얄미운 놈이지만 용서하기로 한 피오테는 숨을 크게 내쉬며 눈을 감았다.

'여신이시여....'

계시를 받은 뒤로 피오테의 몸은 알 수 없는 변화를 겪었다. 신성력의 수발이 더 매끄러워졌고, 쓰면 쓸수록 신성력의 양도 빠르게 늘어났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곧 여신이 내린 축복이란 걸 깨달았다. 그리고 이런 힘을 얻게 된 자신에게는 분명 그만한 책임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피오테의 몸에서 신성력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구우우우웅!

자신은 전쟁을 잘 모른다. 언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에 대해 무지하다.

하지만 영주가 고립되어 있고 마법사들이 기회를 노리고 있다. 기사들이 길을 만들려 하고 있다.

작전을 시작하기 전, 영주는 자신을 따로 불러 말했다.

― 사실 이번 작전은 무척 위험해. 납치조가 제때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을 거야. 그때 너의 힘이 필요해.

― 제가요?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 납치조나 요새의 병력이 위험해지는 순간이 올 거야. 그때 네가 도와줘야 해. 내가 없을 때는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 저, 저는 그런 걸 볼 줄 몰라요. 언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주세요.

그 말에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 언제가 될지는 나도 알 수 없어. 전장의 상황은 계속 변하니까. 하지만 느낌이 올 거야. 전투의 흐름을 잘 지켜보면, 네가 언제 힘을 써야 하는지 알게 될 거다.

그는 지금이 바로 영주가 말했던 그 순간인 걸 깨달았다. 지금 힘을 써야 하는 게 맞으리라.

피오테가 눈을 감고 하늘을 향해 손을 뻗자 두 손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경전의 구절들이 흘러나왔다.

[보라, 너희가 여신 안에서 그 힘으로 강건하여지리라. 삿된 것들을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내려 주시는 전신 갑주를 입으라.]

파아아앗!

밝은 빛은 사방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 빛은 요새 주변을 모두 감쌀 정도로 넓게 퍼져 나갔다.

[여신께서 이르시길, 내가 너희에게 그것들을 짓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여신이시여... 이들을 지켜 주소서."

피오테가 감았던 눈을 뜬 순간.

쩌엉!

퍼져 나가던 빛은 갑자기 눈부신 섬광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리고 빛이 사라진 직후.

"우, 우와아아! 이게 뭐야!"

"힘이 넘친다!"

"상처가 다 나았어!"

전투 중이던 병사들은 자신들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경악 어린 외침을 내뱉었다.

온몸에서 힘이 넘쳤다. 자잘한 부상은 단번에 치유되었다. 후방으로 옮겨져 누워 있던 부상병들까지 벌떡 일어났다.

힘이 넘친다는 말은, 단순히 체력만 돌아왔다는 뜻이 아니었다.

퍼어어억!

"뭐야? 왜 이래?"

뛰어오르던 그렉스의 머리에 창을 내지른 병사는 자기가 찔러 놓고 깜짝 놀랐다.

병사는 순간 자신이 소드마스터라도 된 줄 알았다. 창질 한 번에 너무나도 쉽게 그렉스의 머리가 박살 났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요새에 있던 사람들 모두에게 일어났다. 병사들이 내지르는 창은 더욱 강해졌고, 화살 또한 몇 마리씩 뚫을 정도로 위력이 무지막지해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모든 사람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끼에에엑!"

카앙!

"...?"

목책 위까지 올라온 그렉스의 발톱에 맞은 병사가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땅도 파고드는 저 강력한 손톱에 맞으면 살이 찢겨야 정상이다. 같은 공격에 맞아 크게 다친 병사가 이미 여럿 있었다.

하지만 그렉스의 공격은 병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막혔다. 병사는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으, 으하하하!"

병사가 크게 웃으며 창으로 그렉스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이러면 얘기가 달라진다. 저 많은 그렉스들이 전혀 무섭지 않아졌다.

거기에 힘도 넘치니 공격 속도가 빨라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퍼퍼퍼퍼퍼퍽!

"끼에에에엑!"

자신감을 얻은 병사들은 몸을 돌보지 않고 미친 듯이 창을 휘둘렀다. 화살은 처음보다 훨씬 더 빠르게 전장을 뒤덮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다들 누가 이런 기적을 행했는지 금세 깨달았다.

"성녀님이 또 기적을 발휘했다!"

"여신께서 우리를 보살피신다!"

"와아아아아아! 다 죽여라!"

병사들의 사기가 몰라볼 정도로 올라갔다.

피오테는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비틀거렸다. 코에서는 피가 주룩주룩 흘러나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됐어.... 이제 영주님을 구할 수 있을 거야."

혼자 중얼거리던 피오테는 그대로 눈을 감고 쓰러지고 말았다.

이런 엄청난 힘을 쓰고 몸이 멀쩡할 리가 없다. 피오테는 정말 자신을 보호할 힘조차 남기지 않고 써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쥬아나의 파견 사제들은 몸을 덜덜 떨었다.

"이... 이 무슨...."

"말단 사제가 어떻게 이런 힘을...."

"소, 소문이 저, 정말 사실이었단 말인가?"

그들도 피오테가 성녀라는 소문은 익히 들어왔다. 물론 피오테가 남자라는 걸 아는 사제들은 코웃음을 치며 소문을 무시했다.

그냥 북부의 촌놈들이 신성력을 접하고 과하게 예를 갖춘다 생각한 것이다.

지셀에게 잡혀 곳곳에서 강제로 일을 하는 자신들도 무지렁이들에게는 높이 추앙받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보니 단순히 소문으로 치부할 만한 힘이 아니었다.

"보, 보고를 해야 해...."

"미, 믿을까? 안 믿을 거 같은데?"

"모르겠다...."

피오테가 보여 준 힘은 일반적인 사제가 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들도 성녀를 본 적은 없지만, 정말 그 정도는 되어야 저런 힘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사제들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무시하던 말단 사제가 저런 힘을 얻었다는 게 질투가 나면서 허무하기도 했다.

'아무리 신성력이 불공평한 힘이라지만....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야?!'

사제들이 배 아파하는 사이, 피오테가 보인 기적 같은 힘으로 전장의 상황이 잠깐이나마 바뀌었다.

"끼에에엑!"

그렉스들이 몰려오는 기세가 죽었다. 공터를 채우는 수보다 죽어 가는 수가 더 많아졌다.

그리고 그 잠깐의 틈을 카오르는 놓치지 않았다.

"지금이다."

이미 돌격할 준비를 끝낸 기사들이다. 피오테의 힘에 놀라 잠깐 머뭇거렸지만 그 덕분에 상황이 더 좋아졌다.

기사들의 몸에도 신성력의 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방어에 돌릴 마나까지 전부 다리에 집중했다.

"가자!"

카오르와 400여 명의 기사들이 요새에서 뛰어내렸다.

펜리스 기사들의 돌격은 대형을 갖춘 수천의 병사들도 뚫고 간다.

비록 말은 없지만, 그보다 더 강한 마나의 힘이 그들의 다리에서 폭발했다.

콰아아앙!

"끼에에에엑!"

대검을 들고 달리는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렉스들은 달려드는 족족 몸이 터져 나갔다.

기사들은 옆을 돌아보지 않았다. 오직 앞을 막고 있는 붉은 벽을 꿰뚫으며 달릴 뿐이었다.

그 반대쪽, 세 사람의 상황도 요새에 있던 자들과 비슷했다.

지셀이 눈을 더욱더 붉게 빛내며 웃었다.

"봤지? 피오테가 해낼 줄 알았다니까."

벨린다와 길리언도 웃으면서 무기를 꽉 쥐었다.

"역시 도련님은 다 계획이 있었네요."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영주님."

세 사람의 체력은 이미 최고조로 돌아온 상태였다. 마나는 회복되지 않았지만 그 이상의 힘이 느껴졌다.

그렉스들의 공격도 벨린다와 길리언, 두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못하고 있다. 오직 앞을 향해 달려 나가기만 하면 된다.

"자, 가자. 이 힘도 오래 지속되는 건 아니니까."

콰아아앙!

지셀이 검을 휘두르며 다시 그렉스들의 벽을 뚫고 나갔다. 다른 두 사람도 이제 방어를 도외시하고 달려 나갔다.

온 힘을 공격에만 집중하니 지지부진하던 돌파가 다시 이뤄졌다.

카가가가가가각!

"끼에에에엑!"

마치 그렉스들을 앞뒤로 포위한 것처럼, 카오르가 이끄는 기사들과 지셀 일행이 서로를 향해 나아갔다.

그 사이에 있던 그렉스들은 몸이 갈리듯이 찢겨 나갔다. 힘이 넘칠 대로 넘치는 기사들의 돌격을 그렉스 따위가 막을 수는 없었다.

빈자리에 새로운 그렉스가 무지막지하게 충원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요새 위에서 쏟아지는 지원 덕분에 기사들과 지셀 일행은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기사들과 지셀이 만났다.

콰아아앙!

앞을 막고 있던 그렉스들을 날려 버린 지셀이 험악하게 웃었다.

"이 새끼들, 요새 지키고 있으라니까."

카오르와 기사들이 건들거리며 웃었다.

"우리도 영주 닮아서 말을 잘 안 듣거든."

"그래, 그래도 덕분에 더 빨리 갈 수 있겠네. 가자!"

지셀과 길리언, 카오르가 앞장섰다. 그리고 기사들이 뒤를 따랐다. 벨린다는 중간에 쏙 숨어서 말했다.

"아휴, 피곤해라. 이제 좀 쉬어야겠네."

콰아아아아앙!

지셀이 이끄는 펜리스 기사단은 왕국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강한 돌파력을 자랑한다.

그들은 그간 쌓아 온 실력과 명성에 걸맞은 어마어마한 힘을 보여 주었다.

그렉스들은 제대로 달라붙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갈려 나갔다.

요새에서 행하는 적극적인 공격도 지셀과 기사들의 돌파를 수월하게 해 주었다.

"뒤쪽에서 오는 접근을 막아라!"

요새 위에서 갈바릭이 큰 소리로 방향을 지시했다. 그 외침에 따라 투석기들의 위치가 조정되었다.

콰앙! 콰아앙! 콰아아앙!

수십 개의 돌이 단숨에 날아가, 기사들의 뒤를 쫓던 그렉스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동시에 요새에 지어진 망루에서도 기사들의 양옆으로 화살 비를 쏟아 냈다.

덕분에 지셀과 기사들은 요새 앞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자 요새에서 하늘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울렸다.

"영주님이 오셨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와아아아아아!"

병사들의 환호를 받으며 지셀과 기사들이 요새로 올라갔다. 미리 내려 둔 밧줄 덕분에 그들은 몇 번의 도움닫기만으로도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

피로 범벅이 된 지셀이 자신을 따라 올라오는 그렉스의 목을 베며 외쳤다.

"낙오자 있냐!"

"없습니다!"

기사들은 우렁차게 외치며 알아서 곳곳으로 퍼져 병사들을 도와주었다.

지셀이 돌아오자 병사들의 사기는 극대화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렉스들의 수는 많았다. 그렇게 싸우고 싸웠는데도 숲과 땅을 울리는 붉은 해일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피오테가 행한 가호도 이제 힘을 잃었는지 병사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이제 준비한 필살의 일격을 보여 줄 때였다.

"바네사!"

지셀이 외치자 지금까지 힘을 비축하고 있던 바네사가 앞으로 나섰다.

구우우우웅!

동시에 어마어마한 마력이 요새 주변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327화 어때? 내 말 맞지? (1)

바네사가 마력을 끌어올리자 그녀가 팔에 차고 있던 팔찌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법진에 모인 마력이 그녀에게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엄청난 마력이 켜켜이 쌓이며 주변에 강력한 압박감이 퍼져 나갔다.

이 마법진에는 이미 많은 마법사가 꾸준하게 마력을 모아 둔 상태였다. 페르디움 공방전 때보다 몇 배나 많은 마력이다. 버티기 쉬울 리가 없었다.

"으읏!"

바네사의 몸에 그때처럼 검은 핏줄이 올라오고, 코에서 코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6서클에 이른 깨달음으로 어떻게든 고통을 버티며 정신을 놓지 않았다.

드드드드드드!

마력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공기가 떨리기 시작했다.

"끼에에에엑!"

요새의 거센 반격에 밀려났던 그렉스들은 다시 새빨갛게 모여들었다. 피오테의 가호가 사라지니 병사들은 더 극심한 탈력 상태에 빠졌다.

바네사는 이를 사리물고 한쪽 팔을 앞으로 뻗었다.

"...체인 라이트닝."

이번 작전에 쓰기 위해 펜리스는 영지에 남아 있는 모든 룬스톤을 긁어 왔다. 그것들에 전부 술식을 새겨 요새 앞에 있는 공터에 촘촘하게 묻어 둔 상태였다.

파직!

저 멀리, 미리 술식을 새겨 놓은 룬스톤을 박아 둔 땅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거기서 뻗어 나간 번개의 줄기는 조금 떨어진 곳의 다른 룬스톤과 연결되었다.

곧 수백 개의 룬스톤이 서로 연결되어 푸른 빛줄기의 바다를 만들어 냈다.

잠시 후.

콰지지직!

땅 곳곳에서 솟아오른 번개들이 붉은 해일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끼에엑?"

순간 찌릿한 느낌에 그렉스들이 멈칫했다.

6서클 마법, 체인 라이트닝.

여러 명의 적을 체인처럼 이어서 한 번에 공격할 수 있는 마법이다.

하지만 아무리 6서클 마법사라 해도 이 정도로 많은 숫자를 동시에 공격하지는 못한다. 마력이 부족하면 이어지던 번개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펜리스는 이 마법에 사활을 걸고 남은 룬스톤을 전부 동원해 왔다.

"카아악!"

달려오던 수많은 그렉스가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 멈춰 서서 몸을 움찔거린다.

곧이어 강렬한 푸른 빛이 모든 그렉스를 삼키기 시작했다.

콰르르르르릉!

사방에서 우레와 같은 소리가 울리며 빛이 번쩍인다. 마치 붉은 구름 사이로 천둥이 치는 것만 같았다.

콰아앙! 콰아앙! 콰아앙!

"끼에에에에엑!"

그렉스들은 비명을 지르며 터져 나갔다. 푸른 빛줄기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며 그렉스들의 몸을 타고 움직였다.

번개는 이미 요새 앞에 몰려와 있던 그렉스들뿐만이 아니라 숲에서 나오고 있던 그렉스도 삼켰다.

콰아아앙! 퍼어어억!

어마어마한 마력을 품은 전격의 힘은 사정없이 그렉스들을 공격하고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의 입에서 절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 우와아아아아!"

"저렇게 잡을 줄이야!"

"정말 엄청나잖아!"

끝도 없이 이어지는 번개에 그렉스들은 마구 튀겨졌다. 새로 몰려오는 그렉스들도 푸른 빛의 그물에 걸려 오는 족족 죽어 나갔다.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보기만 해도 속이 시원해졌기 때문이다.

지셀 또한 흡족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네사가 있어서 다행이야.'

큰일은 마법사가 한다는 말이 있다. 과연 6서클에 오른 바네사는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할 때마다 최고의 활약을 해 주고 있었다.

페르디움 공방전 때처럼 불의 장벽을 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대규모 화염 공격은 자칫하면 이쪽도 큰 피해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지셀은 바네사에게 전격 마법을 준비시켰다. 이미 이런 대규모의 적과 싸울 때 효과가 좋은 걸 직접 본 적이 있었으니까.

'그놈이 이런 건 참 잘했는데.'

전생에 티격태격했던 마법사 친구가 대규모로 몰려오는 마수들을 잡을 때 즐겨 쓰던 방식이었다.

마력만 충분하다면 적들에게 끊임없이 연쇄되어 나간다. 잔뜩 몰려오는 것들에게는 정말 효과적인 공격 방법이었다.

전생에 봤던 기억을 떠올리고 바네사에게 비슷한 마법을 준비시켜 훌륭하게 성공했다.

바네사의 뛰어난 감각과 통제력, 그리고 마법사들의 마력과 룬스톤 중 하나라도 부족했다면 성공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콰콰콰콰쾅!

무려 서른여 명에 가까운 마법사의 마력을 모으고 룬스톤을 이용해 또 증폭했다. 페르디움 공방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양이었다.

이 어마어마한 마력 덕분에 번개는 끊임없이 퍼져 나가며 그렉스들을 잡아 죽였다.

지셀은 그 모습을 보며 즐거운 듯이 웃었다.

"좋군, 벌써 많이 줄어들었네. 인간하고 다르게 몬스터들은 함정에 잘 당해 줘서 참 편하단 말이지."

데스몬드 백작은 페르디움전에서 함정에 한 번 당한 뒤로는 신중하게 조사를 하며 움직였다.

하지만 지성이 없는 그렉스들이 그런 걸 알 리가 없었다. 그러니 미리 준비한 함정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병사들은 남아 있는 그렉스들을 공격하며 환호를 내질렀다.

"엄청나게 줄어들었어!"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와아아아아!"

몰려오던 그렉스들의 수가 순식간에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그만큼 번개의 줄기도 약해졌지만, 여전히 그렉스들을 타고 다니며 죽이고 있었다. 아무리 약해졌어도 6서클 마법을 그렉스들이 맨몸으로 버틸 수는 없었다.

이미 요새 앞의 공간은 하나의 마법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렉스들은 달려오는 족족 죽어 나갔다.

이쯤에서 물러나도 되지만 바네사는 조금 더 욕심을 부렸다.

지이이잉―!

그녀의 전면에 십여 개의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하지만 마력이 부족한지 곧 몇 개가 희미해지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력이 부족해요!"

바네사의 외침에 예비 인원으로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눈물을 흘리며 마법진으로 올라갔다.

작전에 참여했다는 핑계로 쉬고 있던 알포이는 슬쩍 뒤로 기어가 몸을 숨겼다.

지이이잉―!

마력이 채워지자 마법진이 다시 모습을 갖춘다. 바네사는 부들부들 떨며 양손을 앞으로 펼쳤다.

콰아아아앙!

생성된 마법진들에서 거대한 벼락 줄기가 뿜어져 나갔다.

퍼엉! 퍼엉! 퍼어엉!

붉은 해일의 곳곳에 큰 구멍이 뚫리며 남은 그렉스들이 터져 나갔다.

벼락 줄기는 사체고 뭐고 가리지 않았다. 그냥 뻗어 나가는 대로 모든 걸 파괴했다.

그리고 그걸 본 병사들은 다시 환호를 내질렀다.

"우와아아아! 끝내준다!"

"최고다! 최고!"

"역시 바네사 님이다!"

병사들의 사기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다들 웃으면서 무기를 휘둘렸다.

하지만 그런 이적을 일으킨 바네사는 멀쩡하지 못했다. 룬스톤도 이용하지 않고 마법사들만의 마력을 이용해 강력한 마법을 시전했다. 그 충격이 작을 리가 없었다.

단번에 마력을 모두 소모하고 반동을 견디지 못한 바네사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지셀은 쓰러지는 바네사를 부축하며 말했다.

"벨린다, 바네사와 마법사들을 안전하게 보살펴 줘."

"알겠어요. 도련님은요?"

"남은 것들을 처리해야지."

지셀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렉스들은 번개의 줄기에 죽어 나가면서도 여전히 다가오고 있었다. 마법이 점차 사그라들고 있기에 남은 것들은 직접 처리해야 했다.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어디 보자. 대충 1만은 되어 보이는데."

여전히 많지만 이 정도면 이제 병사들끼리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그렉스들이 요새에 계속 달라붙고는 있지만 위기는 이미 사라졌다. 전략도 전술도 없고 지능도 없는 그렉스들은 그냥 무작정 요새에 달라붙을 뿐이었다.

지셀은 곳곳에서 싸우고 있는 기사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다시 내려가서 빨리 쓸어버리자!"

"좋습니다!"

바네사와 마법사들의 활약 덕분에 여유가 생긴 기사들이 무기를 쥐어 들었다.

드워프들이 특수 제작한 대검을 든 기사들이 웃으면서 지셀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어지간히 강한 놈이 아니라면, 몬스터를 잡는 데는 대형 검이 최고다. 몬스터들은 기술이랄 게 없기 때문이다.

수가 줄어든 그렉스들은 전혀 무서울 게 없었다. 이미 승리는 확실시된 상황이다.

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요새 밖으로 뛰어내렸다.

"끼에에에엑!"

콰아아앙!

밑에 내려온 지셀과 기사들을 향해 남은 그렉스들이 전부 달라붙었지만, 이제는 역부족이다.

여전히 수많은 탑에서 화살이 쏟아지고 있었고 투석기도 가장 뒤쪽의 그렉스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콰앙! 콰앙! 콰아앙!

"끼에에엑!"

지금까지 그렉스가 우세했던 이유는 단 하나, 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1만 남짓한 그렉스들로는 요새에서 쏟아지는 공격과 기사들의 공격을 막을 수가 없었다.

"후...."

어느 순간 지셀은 검을 휘두르는 걸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블러드 퓌톤을 잡을 때처럼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은 그렉스들의 사체가 발 디딜 틈도 없이 널려 있었다. 피로 범벅이 된 기사들 또한 석양 때문인지 더욱더 붉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붉은 하늘, 붉은 사체, 붉은 사람들.

온 세상이 붉게 물든 것만 같았다.

'아아... 그때와 비슷하군.'

전생의 마지막 전투.

그때도 온 세상이 이렇게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 공간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는 자신의 목을 베었던, 눈이 시리도록 새하얀 갑옷을 입은 아이던과 그를 따르는 기사들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지셀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너도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래, 그놈은 이제 전생보다 더 빨리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생각에 이르자 짜릿한 쾌감이 몸을 감쌌다. 어서 빨리 그놈을 만나고 싶었다.

불쑥 솟아오른 감정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요새에서 사람들의 환호가 들려왔다.

"와아아아아!"

기사들과 병사들, 엘프들과 드워프들, 사제들과 인부들까지.

다들 한 마음이 되어 외치고 있었다.

"우리가 승리했다!"

* * *

그렉스는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전멸했다.

애초에 퀸 그렉스가 이곳에 잡힌 이상 그것들은 계속 덤벼들 수밖에 없었다.

남은 것은 퀸 그렉스 하나뿐이다.

"끼아아아악!"

퀸 그렉스는 처음엔 쉴 새 없이 발버둥 치며 비명을 질러 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그렉스들이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발버둥을 멈추고 거친 숨만 내쉬고 있었다.

마수의 숲은 몬스터들끼리도 서로 먹고 먹히며 사는 곳이다. 그리고 패배자에게는 가차 없이 죽음이 내린다.

그렉스와 달리 약간의 지능이 있는 퀸 그렉스는 자신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듯했다.

스각!

지셀은 마지막 그렉스를 죽이자마자 다가와 퀸 그렉스를 단숨에 베었다.

퀸 그렉스는 목이 떨어질 때까지, 그 머리에 달려 있는 수많은 눈으로 오직 한 사람만 노려보고 있었다.

뜨거운 눈길을 받은 알포이는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몸이 유인해 온 거다."

짝짝짝.

사람들은 영혼 없는 박수를 보냈다. 어쨌든 큰일을 한 건 맞지만 다른 사람들이 너무 엄청난 활약을 해서 조금 묻힌 감이 있었다.

"후우...."

지셀은 피곤해하는 눈빛으로 퀸 그렉스의 사체를 바라보았다.

목표까지의 여정 중 가장 위험한 몬스터를 처리했다. 이제 남은 길은 비교적 어렵지 않았다.

퀸 그렉스의 영토가 워낙 방대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처리할 수 있어서 다행이군."

룬스톤만을 구하려면 퀸 그렉스의 영역을 피해 멀리 길을 돌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 숲에 있는 몬스터들은 침입자를 무조건 공격한다.

결국 퀸 그렉스의 영역을 피해 룬스톤까지 길을 멀리 내더라도 언젠가는 퀸 그렉스의 군대에 공격당하게 될 것이다. 그럴 바에는 제대로 먼저 토벌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게 나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룬스톤 말고도 얻어야 할 것이 있었다.

지셀은 환호하는 병사들을 치하하고 바로 전장 정리를 시작했다.

"당분간 진군을 멈추고 주변을 정리한다. 페르디움에서 인부들을 최대한 모아 와. 보수는 두 배로 준다고 해라."

전투가 끝난 요새 주변은 그렉스들의 사체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엄청난 수의 사체를 모두 땅에 묻어야 한다. 사람이 많을수록 더 빨리 끝낼 수 있다.

땅을 파는 건 문제가 안 된다. 공사에 프로인 마법사와 드워프들이 있기 때문이다.

"디그."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울 때마다 땅이 움푹 꺼지며 그렉스들이 뭉텅이로 파묻혔다. 혹시 모를 전염병이나 불상사에 대비해 아주 깊숙하게 파묻었다.

그러면 인부들이 달라붙어 땅을 단단하게 다지고 고르게 했다.

그렇게 모두가 달라붙자 사흘 만에 그 많은 그렉스들의 사체가 땅에 파묻혔다.

물론 사체만 묻는다고 끝이 아니었다. 요새에 달라붙은 그렉스들의 살점과 핏자국도 치워야 하고 병장기들도 다시 점검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건 인부들에게 맡겨도 된다. 지셀은 바로 병력의 절반과 기사들을 이끌고 움직였다.

"얼마 남지 않았다."

엄청난 수의 그렉스들과 싸워 이긴 병사들은 지친 기색도 없이 희희낙락하며 지셀을 따랐다.

숲에 처음 들어왔을 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방심했었다면 지금은 자신감과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퀸 그렉스의 영토였기에 다른 몬스터들은 보이지 않았다. 지셀은 쉽게 원하던 곳을 찾아갔다.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들은 비명을 지를 정도로 놀랐다.

"우와! 이, 이게 다 뭐야?"

"설마 이거...."

"요정의 축복이다! 이거 분명히 요정의 축복이야!"

퀸 그렉스의 영역 한쪽에는 광대한 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요정의 축복. 금과 맞먹거나 때로는 더 가치 있다고 알려진 비싼 꽃이다.

지셀이 길리언의 딸인 레이첼의 병을 고칠 때 썼던 재료이기도 했으며, 고급 포션의 재료로도 쓰이는 귀한 꽃이 이곳에서는 마치 잡초처럼 자라고 있었다.

벨린다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우, 우리 룬스톤 구하러 왔다고 하지 않았나요?"

지셀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이건 덤이지. 이제 우리는 여기서 요정의 축복을 재배한다. 바로 방어벽을 세우자고."

"루, 룬스톤은요?"

"그거?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돼. 애초에 룬스톤을 얻으러 온 건데 당연히 그것도 가져가야지. 전에 가져갔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있어."

그 말에 사람들은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327화 어때? 내 말 맞지? (1)

바네사가 마력을 끌어올리자 그녀가 팔에 차고 있던 팔찌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법진에 모인 마력이 그녀에게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엄청난 마력이 켜켜이 쌓이며 주변에 강력한 압박감이 퍼져 나갔다.

이 마법진에는 이미 많은 마법사가 꾸준하게 마력을 모아 둔 상태였다. 페르디움 공방전 때보다 몇 배나 많은 마력이다. 버티기 쉬울 리가 없었다.

"으읏!"

바네사의 몸에 그때처럼 검은 핏줄이 올라오고, 코에서 코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6서클에 이른 깨달음으로 어떻게든 고통을 버티며 정신을 놓지 않았다.

드드드드드드!

마력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공기가 떨리기 시작했다.

"끼에에에엑!"

요새의 거센 반격에 밀려났던 그렉스들은 다시 새빨갛게 모여들었다. 피오테의 가호가 사라지니 병사들은 더 극심한 탈력 상태에 빠졌다.

바네사는 이를 사리물고 한쪽 팔을 앞으로 뻗었다.

"...체인 라이트닝."

이번 작전에 쓰기 위해 펜리스는 영지에 남아 있는 모든 룬스톤을 긁어 왔다. 그것들에 전부 술식을 새겨 요새 앞에 있는 공터에 촘촘하게 묻어 둔 상태였다.

파직!

저 멀리, 미리 술식을 새겨 놓은 룬스톤을 박아 둔 땅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거기서 뻗어 나간 번개의 줄기는 조금 떨어진 곳의 다른 룬스톤과 연결되었다.

곧 수백 개의 룬스톤이 서로 연결되어 푸른 빛줄기의 바다를 만들어 냈다.

잠시 후.

콰지지직!

땅 곳곳에서 솟아오른 번개들이 붉은 해일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끼에엑?"

순간 찌릿한 느낌에 그렉스들이 멈칫했다.

6서클 마법, 체인 라이트닝.

여러 명의 적을 체인처럼 이어서 한 번에 공격할 수 있는 마법이다.

하지만 아무리 6서클 마법사라 해도 이 정도로 많은 숫자를 동시에 공격하지는 못한다. 마력이 부족하면 이어지던 번개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펜리스는 이 마법에 사활을 걸고 남은 룬스톤을 전부 동원해 왔다.

"카아악!"

달려오던 수많은 그렉스가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 멈춰 서서 몸을 움찔거린다.

곧이어 강렬한 푸른 빛이 모든 그렉스를 삼키기 시작했다.

콰르르르르릉!

사방에서 우레와 같은 소리가 울리며 빛이 번쩍인다. 마치 붉은 구름 사이로 천둥이 치는 것만 같았다.

콰아앙! 콰아앙! 콰아앙!

"끼에에에에엑!"

그렉스들은 비명을 지르며 터져 나갔다. 푸른 빛줄기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며 그렉스들의 몸을 타고 움직였다.

번개는 이미 요새 앞에 몰려와 있던 그렉스들뿐만이 아니라 숲에서 나오고 있던 그렉스도 삼켰다.

콰아아앙! 퍼어어억!

어마어마한 마력을 품은 전격의 힘은 사정없이 그렉스들을 공격하고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의 입에서 절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 우와아아아아!"

"저렇게 잡을 줄이야!"

"정말 엄청나잖아!"

끝도 없이 이어지는 번개에 그렉스들은 마구 튀겨졌다. 새로 몰려오는 그렉스들도 푸른 빛의 그물에 걸려 오는 족족 죽어 나갔다.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보기만 해도 속이 시원해졌기 때문이다.

지셀 또한 흡족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네사가 있어서 다행이야.'

큰일은 마법사가 한다는 말이 있다. 과연 6서클에 오른 바네사는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할 때마다 최고의 활약을 해 주고 있었다.

페르디움 공방전 때처럼 불의 장벽을 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대규모 화염 공격은 자칫하면 이쪽도 큰 피해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지셀은 바네사에게 전격 마법을 준비시켰다. 이미 이런 대규모의 적과 싸울 때 효과가 좋은 걸 직접 본 적이 있었으니까.

'그놈이 이런 건 참 잘했는데.'

전생에 티격태격했던 마법사 친구가 대규모로 몰려오는 마수들을 잡을 때 즐겨 쓰던 방식이었다.

마력만 충분하다면 적들에게 끊임없이 연쇄되어 나간다. 잔뜩 몰려오는 것들에게는 정말 효과적인 공격 방법이었다.

전생에 봤던 기억을 떠올리고 바네사에게 비슷한 마법을 준비시켜 훌륭하게 성공했다.

바네사의 뛰어난 감각과 통제력, 그리고 마법사들의 마력과 룬스톤 중 하나라도 부족했다면 성공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콰콰콰콰쾅!

무려 서른여 명에 가까운 마법사의 마력을 모으고 룬스톤을 이용해 또 증폭했다. 페르디움 공방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양이었다.

이 어마어마한 마력 덕분에 번개는 끊임없이 퍼져 나가며 그렉스들을 잡아 죽였다.

지셀은 그 모습을 보며 즐거운 듯이 웃었다.

"좋군, 벌써 많이 줄어들었네. 인간하고 다르게 몬스터들은 함정에 잘 당해 줘서 참 편하단 말이지."

데스몬드 백작은 페르디움전에서 함정에 한 번 당한 뒤로는 신중하게 조사를 하며 움직였다.

하지만 지성이 없는 그렉스들이 그런 걸 알 리가 없었다. 그러니 미리 준비한 함정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병사들은 남아 있는 그렉스들을 공격하며 환호를 내질렀다.

"엄청나게 줄어들었어!"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와아아아아!"

몰려오던 그렉스들의 수가 순식간에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그만큼 번개의 줄기도 약해졌지만, 여전히 그렉스들을 타고 다니며 죽이고 있었다. 아무리 약해졌어도 6서클 마법을 그렉스들이 맨몸으로 버틸 수는 없었다.

이미 요새 앞의 공간은 하나의 마법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렉스들은 달려오는 족족 죽어 나갔다.

이쯤에서 물러나도 되지만 바네사는 조금 더 욕심을 부렸다.

지이이잉―!

그녀의 전면에 십여 개의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하지만 마력이 부족한지 곧 몇 개가 희미해지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력이 부족해요!"

바네사의 외침에 예비 인원으로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눈물을 흘리며 마법진으로 올라갔다.

작전에 참여했다는 핑계로 쉬고 있던 알포이는 슬쩍 뒤로 기어가 몸을 숨겼다.

지이이잉―!

마력이 채워지자 마법진이 다시 모습을 갖춘다. 바네사는 부들부들 떨며 양손을 앞으로 펼쳤다.

콰아아아앙!

생성된 마법진들에서 거대한 벼락 줄기가 뿜어져 나갔다.

퍼엉! 퍼엉! 퍼어엉!

붉은 해일의 곳곳에 큰 구멍이 뚫리며 남은 그렉스들이 터져 나갔다.

벼락 줄기는 사체고 뭐고 가리지 않았다. 그냥 뻗어 나가는 대로 모든 걸 파괴했다.

그리고 그걸 본 병사들은 다시 환호를 내질렀다.

"우와아아아! 끝내준다!"

"최고다! 최고!"

"역시 바네사 님이다!"

병사들의 사기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다들 웃으면서 무기를 휘둘렸다.

하지만 그런 이적을 일으킨 바네사는 멀쩡하지 못했다. 룬스톤도 이용하지 않고 마법사들만의 마력을 이용해 강력한 마법을 시전했다. 그 충격이 작을 리가 없었다.

단번에 마력을 모두 소모하고 반동을 견디지 못한 바네사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지셀은 쓰러지는 바네사를 부축하며 말했다.

"벨린다, 바네사와 마법사들을 안전하게 보살펴 줘."

"알겠어요. 도련님은요?"

"남은 것들을 처리해야지."

지셀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렉스들은 번개의 줄기에 죽어 나가면서도 여전히 다가오고 있었다. 마법이 점차 사그라들고 있기에 남은 것들은 직접 처리해야 했다.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어디 보자. 대충 1만은 되어 보이는데."

여전히 많지만 이 정도면 이제 병사들끼리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그렉스들이 요새에 계속 달라붙고는 있지만 위기는 이미 사라졌다. 전략도 전술도 없고 지능도 없는 그렉스들은 그냥 무작정 요새에 달라붙을 뿐이었다.

지셀은 곳곳에서 싸우고 있는 기사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다시 내려가서 빨리 쓸어버리자!"

"좋습니다!"

바네사와 마법사들의 활약 덕분에 여유가 생긴 기사들이 무기를 쥐어 들었다.

드워프들이 특수 제작한 대검을 든 기사들이 웃으면서 지셀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어지간히 강한 놈이 아니라면, 몬스터를 잡는 데는 대형 검이 최고다. 몬스터들은 기술이랄 게 없기 때문이다.

수가 줄어든 그렉스들은 전혀 무서울 게 없었다. 이미 승리는 확실시된 상황이다.

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요새 밖으로 뛰어내렸다.

"끼에에에엑!"

콰아아앙!

밑에 내려온 지셀과 기사들을 향해 남은 그렉스들이 전부 달라붙었지만, 이제는 역부족이다.

여전히 수많은 탑에서 화살이 쏟아지고 있었고 투석기도 가장 뒤쪽의 그렉스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콰앙! 콰앙! 콰아앙!

"끼에에엑!"

지금까지 그렉스가 우세했던 이유는 단 하나, 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1만 남짓한 그렉스들로는 요새에서 쏟아지는 공격과 기사들의 공격을 막을 수가 없었다.

"후...."

어느 순간 지셀은 검을 휘두르는 걸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블러드 퓌톤을 잡을 때처럼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은 그렉스들의 사체가 발 디딜 틈도 없이 널려 있었다. 피로 범벅이 된 기사들 또한 석양 때문인지 더욱더 붉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붉은 하늘, 붉은 사체, 붉은 사람들.

온 세상이 붉게 물든 것만 같았다.

'아아... 그때와 비슷하군.'

전생의 마지막 전투.

그때도 온 세상이 이렇게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 공간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는 자신의 목을 베었던, 눈이 시리도록 새하얀 갑옷을 입은 아이던과 그를 따르는 기사들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지셀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너도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래, 그놈은 이제 전생보다 더 빨리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생각에 이르자 짜릿한 쾌감이 몸을 감쌌다. 어서 빨리 그놈을 만나고 싶었다.

불쑥 솟아오른 감정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요새에서 사람들의 환호가 들려왔다.

"와아아아아!"

기사들과 병사들, 엘프들과 드워프들, 사제들과 인부들까지.

다들 한 마음이 되어 외치고 있었다.

"우리가 승리했다!"

* * *

그렉스는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전멸했다.

애초에 퀸 그렉스가 이곳에 잡힌 이상 그것들은 계속 덤벼들 수밖에 없었다.

남은 것은 퀸 그렉스 하나뿐이다.

"끼아아아악!"

퀸 그렉스는 처음엔 쉴 새 없이 발버둥 치며 비명을 질러 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그렉스들이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발버둥을 멈추고 거친 숨만 내쉬고 있었다.

마수의 숲은 몬스터들끼리도 서로 먹고 먹히며 사는 곳이다. 그리고 패배자에게는 가차 없이 죽음이 내린다.

그렉스와 달리 약간의 지능이 있는 퀸 그렉스는 자신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듯했다.

스각!

지셀은 마지막 그렉스를 죽이자마자 다가와 퀸 그렉스를 단숨에 베었다.

퀸 그렉스는 목이 떨어질 때까지, 그 머리에 달려 있는 수많은 눈으로 오직 한 사람만 노려보고 있었다.

뜨거운 눈길을 받은 알포이는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몸이 유인해 온 거다."

짝짝짝.

사람들은 영혼 없는 박수를 보냈다. 어쨌든 큰일을 한 건 맞지만 다른 사람들이 너무 엄청난 활약을 해서 조금 묻힌 감이 있었다.

"후우...."

지셀은 피곤해하는 눈빛으로 퀸 그렉스의 사체를 바라보았다.

목표까지의 여정 중 가장 위험한 몬스터를 처리했다. 이제 남은 길은 비교적 어렵지 않았다.

퀸 그렉스의 영토가 워낙 방대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처리할 수 있어서 다행이군."

룬스톤만을 구하려면 퀸 그렉스의 영역을 피해 멀리 길을 돌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 숲에 있는 몬스터들은 침입자를 무조건 공격한다.

결국 퀸 그렉스의 영역을 피해 룬스톤까지 길을 멀리 내더라도 언젠가는 퀸 그렉스의 군대에 공격당하게 될 것이다. 그럴 바에는 제대로 먼저 토벌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게 나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룬스톤 말고도 얻어야 할 것이 있었다.

지셀은 환호하는 병사들을 치하하고 바로 전장 정리를 시작했다.

"당분간 진군을 멈추고 주변을 정리한다. 페르디움에서 인부들을 최대한 모아 와. 보수는 두 배로 준다고 해라."

전투가 끝난 요새 주변은 그렉스들의 사체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엄청난 수의 사체를 모두 땅에 묻어야 한다. 사람이 많을수록 더 빨리 끝낼 수 있다.

땅을 파는 건 문제가 안 된다. 공사에 프로인 마법사와 드워프들이 있기 때문이다.

"디그."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울 때마다 땅이 움푹 꺼지며 그렉스들이 뭉텅이로 파묻혔다. 혹시 모를 전염병이나 불상사에 대비해 아주 깊숙하게 파묻었다.

그러면 인부들이 달라붙어 땅을 단단하게 다지고 고르게 했다.

그렇게 모두가 달라붙자 사흘 만에 그 많은 그렉스들의 사체가 땅에 파묻혔다.

물론 사체만 묻는다고 끝이 아니었다. 요새에 달라붙은 그렉스들의 살점과 핏자국도 치워야 하고 병장기들도 다시 점검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건 인부들에게 맡겨도 된다. 지셀은 바로 병력의 절반과 기사들을 이끌고 움직였다.

"얼마 남지 않았다."

엄청난 수의 그렉스들과 싸워 이긴 병사들은 지친 기색도 없이 희희낙락하며 지셀을 따랐다.

숲에 처음 들어왔을 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방심했었다면 지금은 자신감과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퀸 그렉스의 영토였기에 다른 몬스터들은 보이지 않았다. 지셀은 쉽게 원하던 곳을 찾아갔다.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들은 비명을 지를 정도로 놀랐다.

"우와! 이, 이게 다 뭐야?"

"설마 이거...."

"요정의 축복이다! 이거 분명히 요정의 축복이야!"

퀸 그렉스의 영역 한쪽에는 광대한 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요정의 축복. 금과 맞먹거나 때로는 더 가치 있다고 알려진 비싼 꽃이다.

지셀이 길리언의 딸인 레이첼의 병을 고칠 때 썼던 재료이기도 했으며, 고급 포션의 재료로도 쓰이는 귀한 꽃이 이곳에서는 마치 잡초처럼 자라고 있었다.

벨린다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우, 우리 룬스톤 구하러 왔다고 하지 않았나요?"

지셀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이건 덤이지. 이제 우리는 여기서 요정의 축복을 재배한다. 바로 방어벽을 세우자고."

"루, 룬스톤은요?"

"그거?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돼. 애초에 룬스톤을 얻으러 온 건데 당연히 그것도 가져가야지. 전에 가져갔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있어."

그 말에 사람들은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328화 어때? 내 말 맞지? (2)

전에 얻은 룬스톤만으로도 북부 최강이 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정말 이리저리 알차게 쓰긴 했다. 경작지도 만들고, 마탑과 거래도 하고, 마나 집속진도 만들고... 그냥 마법이 들어가는 건 다 썼다.

펑펑 써 댔기에 룬스톤을 벌써 다 써 버렸지만, 바꿔 얘기하면 영지를 발전시킬 수 있을 정도로 룬스톤이 많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때 얻은 것보다 더 많은 룬스톤이라니! 거기에 값어치만큼은 룬스톤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 요정의 축복까지 발견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다들 어안이 벙벙해졌다.

"꺄아아아악!"

벨린다가 뒤늦게 상황을 인지하고 신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 룬스톤이 진짜 많이 있는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요정의 축복만으로도 기뻐하기는 충분했다.

그녀가 이렇게 기뻐하는 건 다름 아닌 클로드 때문이었다.

'총관 이 새끼! 이제 돈 없다고 괴롭히지 않겠지!'

영지의 큼직한 일은 모두 지셀이 지시하는 것이니 무조건 시행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지의 모든 일이 지셀의 명령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다. 자잘한 일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 자잘한 일들까지 지셀이 신경 쓸 수는 없었다. 그러니 다들 각자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일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돈을 내주는 자가 바로 총관인 클로드였다.

그는 절대 재무 관리 권한을 남에게 넘기지 않았다.

'매일 돈 없다고 빡빡하게 줬었지? 두고 보자!'

벨린다는 성의 집사장이다. 당연히 사용인들을 관리하고 성의 살림을 꾸리는 데 돈이 필요하다.

집사장 권한으로 운용하는 가문 비자금이 있긴 하지만, 그걸 공적인 용무에 쓸 수는 없다. 그러니 클로드에게 매일 아쉬운 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소리를 하는 건 벨린다뿐만이 아니다.

수천의 군대와 홀로 맞설 수 있는 강심장을 자랑하는 길리언도, 세상을 뒤집는 이적을 행사하는 바네사도, 위대한 대장장이인 갈바릭도, 여신의 기적을 일으키는 피오테도, 자연과 함께하며 세상사에 초탈해진 루미나도.

모두가 돈을 받으러 갈 때는 클로드에게 굽실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새끼는 자신의 힘을 너무나도 적절하게 잘 이용할 줄 알았다.

"이제 고생 끝이야아아아아! 돈이 넘쳐 나!"

벨린다의 외침에 다른 이들도 모두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간 클로드에게 너무 치사하게 당했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총관인 그가 자금을 집행하겠지만 이제 돈 없다고 깐깐하고 치사하게 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벨린다가 정말 온몸에 바람구멍을 내버릴 테니까.

사람들은 기쁜 표정으로 주변의 나무를 베고 목책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행여나 꽃을 밟을까 봐 멀찍이서 구경만 하고 조심스러워했다.

공사 현장을 감독하던 길리언이 지셀에게 말했다.

"요새를 정비하던 인부들도 도착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우리는 다음 장소로 이동하자. 다들 준비시켜."

"알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지셀은 차근차근 영토를 확보하며 움직였다.

인부들이야 넘쳐나니 시간은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퀸 그렉스의 영토가 워낙 방대하여 몬스터도 많이 나오지 않았다.

가끔 나오는 떠돌이 몬스터들도 압도적인 수로 밀어붙이니 순식간에 다진 고기가 되었다.

이미 큰 고비를 넘긴 그들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이동하던 개척대는 마침내 목적지인 룬스톤 산출지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룬스톤을 보고서는 요정의 축복을 발견했을 때처럼 놀라지도 못했다. 그냥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입만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오직 지셀만이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때? 내 말 맞지?"

산출지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근처에는 아직도 나무들이 빽빽해 상당히 어두웠다.

그런 어두운 숲속에서도 산출지는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루, 룬스톤이 이렇게 많다니...."

"저번에도 엄청 많았는데 말이야. 이건 거의 그때의 두 배는 되는 거 같은데. 아니 세 배인가?"

"미쳤다! 미쳤다는 말밖에 안 나와."

바깥에서는 구하기도 힘들고 부르는 게 값인 룬스톤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이미 지셀을 따라 룬스톤을 얻어 본 경험이 있는 기사들마저 놀랄 정도였다.

마법사들은 그냥 덜덜 떨기만 했다. 그들에게 룬스톤은 최고의 보물이다.

"왜 이 숲이 비정상적인지 알겠어."

"그냥 마력의 보고야, 여기는."

"이러니 죄다 괴상망측해지지."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마법사들은 저릿할 정도로 농도 진한 마력을 느끼고 있었다. 특정 지역에 이렇게 마력이 몰려 있으니 기괴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와아아아아아!"

사람들은 뒤늦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 믿기지 않는 결과를 자신들이 얻어 낸 것이다.

물론 이 룬스톤들이 그들의 것은 아니지만, 다들 알고 있다. 영주가 쏠 때는 또 확실히 쏜다는 것을.

과연 지셀은 그들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를 베풀 때 쪼잔하고 꼼꼼하게 계산하지 않는다. 그가 빡빡하게 구는 건 거래를 할 때뿐이다.

지셀은 대충 '이 정도 벌었으면 이 정도는 줘야겠지?' 하고 질러 버렸다.

"너희들 덕분에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영지를 위해 고생을 했으면 응당 그 대가가 있어야 하는 법. 돌아가서 3년 치의 급여를 추가 수당으로 지급하겠다."

"우와아아아아!"

"역시 돈 자랑은 영주님이 최고다!"

"감사합니다!"

다들 무기를 집어 던지고 환호를 내지르기 바빴다.

하지만 벨린다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악! 그럼 또 돈이 엄청 나가고 총관이 엄살을 부릴 거 아냐!"

무려 4천이 넘는 병력을 끌고 왔다. 그들의 3년 치 급여를 맞춰 주려면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지출이 커질 것이다.

클로드가 엄살을 부리면 또 돈 타내기가 힘들어진다.

그래도 어쩌랴. 저게 도련님의 매력인 것을.

뒤늦게 도착한 인부들도 3배의 추가 수당을 약속받고 자지러지듯이 기뻐했다. 그동안 벨린다의 주름이 하나 더 늘어 버렸다.

알포이는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쫑알거렸다.

'저거 진짜 3에 뭐 꽂힌 게 분명해. 뭐 받아낼 때도 3배씩 받아 내더니 줄 때도 3에 맞춰 주네.'

병사들과 인부들은 신이 나서 작업에 전념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길리언이 나서서 엄포를 놓았다.

"부스러기 하나라도 건드리지 마라. 걸리면 군율에 따라 다스릴 것이다."

몇몇 마법사들과 용병 출신 기사들이 살짝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숲에 들어온 적 있는 기사들은 이미 겪어 봤다고, 별 반응 없이 작업에만 전념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고든이 구석에 끌려가서 기사들에게 맞기 시작했다.

"악! 나는 그냥 미리 보너스를 받으려고! 악! 그만 때려!"

아무래도 또 사타구니에 몰래 숨겨 넣었다가 걸린 모양이었다. 그 뒤로 알포이와 아스콘, 마법사들 몇 명이 밧줄에 묶여 끌려갔다.

한쪽에선 그런 난리가 일어났지만 룬스톤 채취 작업은 전반적으로 순조롭게 이뤄졌다.

당장은 예전처럼 수레에 잔뜩 채워 끌고 나갈 것이지만, 곧 여기도 방어벽이 세워지고 제대로 된 영토로서 기능할 것이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지셀이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이곳을 차지하는구나."

예전에는 도전할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길만 겨우 내고 룬스톤을 캐 가는 게 전부였다.

아직 마수의 숲을 전부 차지한 건 아니지만, 작은 영지 하나 정도는 되는 땅을 확보했다.

이제 페르디움은 이곳에서 어마어마한 식량을 확보하고 일자리를 창출해 낼 것이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지."

룬스톤과 요정의 꽃을 비롯한 다양한 자원들을 얻었다. 두 가지가 너무 가치가 커서 조금 빛이 바랬지만, 그 외에도 수많은 약초와 목재도 잔뜩 얻었다.

이것들은 모두 영지를 키우는 밑바탕이 될 것이다. 지셀은 재력 하나만큼은 이제 공작파의 어느 귀족에게도 지지 않을 수준이 되었다.

그리고 그 힘은 공작가와 계속 싸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줄 게 분명하다.

지셀이 이번에도 마수의 숲 개척에 성공했다는 소문은 금세 페르디움에 퍼졌다.

"아이고! 우리 대공자님이 또 큰일을 해내셨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이럴 줄 알았어!"

"여기 우리한테 빌려주기로 하신 거 잊으면 안 됩니다? 공짜죠? 공짜 맞죠?"

페르디움의 총관인 호메른과 재무관인 알버트가 찾아와 지셀에게 아부를 떨며 약속을 재확인했다.

페르디움의 사람들도 모두 모여 지셀을 칭송하기 바빴다.

"역시 우리 대공자님이라니까!"

"마수의 숲을 이렇게 밀어 버리는 날을 보게 되다니.... 정말 대공자님이 북부 최강이라는 말이 맞았구나."

"100서클 마법사님도 같이 왔다며? 그런 대단한 분이 우리 대공자님을 따르는 거지?"

다들 신이 나서 지셀에 관한 얘기만 떠들었다. 작업에 참여한 인부들이 양념을 치고 허풍을 떠니 소문은 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그에 따라 지셀의 명성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지셀은 몇 명의 관리들을 상주시키고 개척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 나머지 자잘한 일들을 맡겼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자신이 이미 해결했다. 단순히 영역을 확보하고 방어벽을 세우는 건 관리들도 해낼 수 있는 일이다.

경작지로 이용하는 사업 또한 페르디움에 일임했으니 알아서 할 것이다. 자신은 거기서 나는 소출의 일부만 받아 갈 계획이었다.

필요한 재원을 확보했으니 이제 다음 일을 준비할 차례였다.

지셀은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영지로 돌아간다."

* * *

공작가의 두뇌, '절름발이의 악마'라 불리는 라울은 새로운 보고를 받았다. 바로 펜리스에 관한 조사 내용이었다.

그중 그가 가장 첫 번째로 조사하라 지시한 것은 펜리스 영지의 주요 인물들에 관한 정보였다.

라울은 인물에 대한 정보를 중요시한다. 상대의 성향과 능력을 알아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상대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친왕파를 상대하느라 바쁘긴 하지만 북부의 최강자로 떠오른 펜리스를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내전이 일어나면 빠르게 쓸어버려야 하니 미리미리 준비해 둬야 했다.

"흠... 생각보다 빠르게 알아 왔군."

라울의 말에 참모 하나가 고개를 숙였다.

"네, 주요 인물에 관한 정보는 딱히 숨기지 않아 알아보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미 영지민들 사이에서도 유명해진 인사들도 있었습니다."

"그래? 해럴드가 준 정보와 차이가 크게 나던가?"

공작가엔 이미 해럴드가 조사해 올린 보고서도 있었지만 너무 예전 정보였다. 또한 자존심 강한 해럴드가 정말 중요한 자료는 손에 쥐고 안 내놓았을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라울도 재조사를 명령했던 것이다.

참모는 라울의 생각이 맞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래도 시간이 꽤 흘렀고, 펜리스 백작이 새로 영입한 인물도 있어서 꽤 차이가 있긴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아, 아닙니다. 일단 직접 읽어 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라울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보고서의 첫 장을 펼쳐 보았다.

"펜리스의 하얀 사자, 길리언이라...."

첫 장부터 그럴듯한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

그도 소식을 들어서 알고 있다. 스톤헤이븐 요새에서 데스몬드군의 발목을 잡은 자.

칭호는 곧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함축적으로 나타낸다. 하얀 사자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실력이 뛰어나고 용맹한 자일 거라고 자연스럽게 예상됐다.

과연 보고서에는 그의 활약이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호오... 이자가 허튼 남작과 동수를 이룰 정도의 실력자였단 말이지? 북부제일검에 근접할 정도로?"

"일단 파악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위르겐이 아멜리아에게 격살당했기에 직접적으로 비교는 할 수 없지만, 허튼 남작의 실력으로 유추해 보면 그리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그래, 그래. 허튼 남작은 뛰어난 기사였지."

그렇다면 이 길리언이란 자의 무력을 북부제일검 수준으로 산정하고 상대하면 될 것이다.

실력을 알면 대응하기도 쉬워진다.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자를 보내면 되니까.

"용병 출신이라... 타국에서 활동했었군. 그때도 제법 뛰어난 용병이었다고... 흠, 펜리스 백작이 좋은 인물을 거뒀구나."

그 외에도 보고서에는 길리언이 언제부터 지셀을 따랐고 어떤 일들을 해냈는지 적혀 있었다. 무슨 업무를 맡고 있고 어떤 성격인지, 심지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까지도.

그런 부분은 꽤 유명한지 의혹이 드는 부분은 거의 없었다.

이 정도면 길리언이란 인물에 대해서는 대충 파악이 끝났다고 할 수 있다.

라울은 흡족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넘겼다.

그리고 다음 장에 적힌 내용을 본 그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북부의 뇌물왕, 도박중독자, 폭풍의 수사꾼, 입만 열면 거짓말, 실종된 진실, 돈의 추적자, 패배의 승부사, 깡패와 의형제, 종신 노예....]

괴상한 별명이 참 많다. 라울은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그자의 이름을 살펴보았다.

[총관 클로드.]

"...."

라울은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참모는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이제 북부 최강이라 불리는 곳이 펜리스 영지다. 명실공히 대영지라 불리는 곳의 총관한테 이런 별명이 붙어 있다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라울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이게 뭐지? 대영지의 총관한테 붙은 별명이 이런 거라고? 지금 어디 저잣거리의 건달을 알아 온 건가?"

"아, 아닙니다. 총관이 확실합니다."

"확실하다고? 이딴 별명이 붙은 자가 총관의 직책을 맡고 있다고?"

"확실합니다! 모든 영지민들이 그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라울이 차갑게 노려보자 참모는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거기 있는 새끼들 뭔가 다 이상합니다!"

329화 내가 궁금한 게 참 많아. (1)

절규하는 참모의 모습은 정말 너무나도 억울해 보였다. 하지만 라울은 무표정하게 참모를 바라보며 말했다.

"장난하는 건가? 이딴 걸 보고라고 들고 와서는 그놈들이 이상하다고?"

그러자 보고하던 참모는 겁을 먹고 덜덜 떨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참모들도 마찬가지였다.

라울은 '절름발이의 악마'라 불릴 정도로 잔인한 자였다. 그에게 찍혀서 온전히 살아남은 자가 없을 정도다.

그래도 참모는 용기를 바닥까지 긁어내어 입을 열었다. 펜리스의 이상한 놈들 때문에 이렇게 억울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저, 정말입니다. 다들 소문이 정상이 아닙니다. 몇 번이나 확인하고 몇 번이나 첩자들을 보내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 애절한 모습에, 평소 같았으면 참모를 바로 감옥으로 보냈을 라울도 화를 억누르며 물었다.

"정보를 제대로 알아 오지 못한 게 아니고?"

"아닙니다. 영지민들도 모두 똑같이 얘기합니다. 다들 영지에서 유명한 인물들이라 숨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라울은 한참이나 참모를 노려보았다. 확실히 거짓말을 하는 거 같지는 않았다.

다들 정상이 아니라는 건 다른 인물들도 뭔가 이상하다는 뜻이다.

숨을 고른 라울은 다음 장을 펼쳤다.

[오우거 슬레이어, 북부의 가죽왕, 미친개, 폭력의 천재, 건방진 머저리, 반항아....]

[기사 카오르]

이놈도 별명들이 심상치 않다. 아무리 봐도 기사 작위를 얻을 만한 놈으로 보이지 않았다.

더 읽어 보니 영지에서 하는 일도 가관이다.

"후.... 영지에서 치안 업무를 맡고, 가끔 훈련도 하고, 죄수들 감독도 하고, 공사도 하는데 외부 파견도 나가서 가죽도 구해 온다고?"

"네."

"이놈은 그냥 아무 일이나 되는 대로 하는 잡부 놈인가?"

"...그런 거 같습니다."

라울은 관자놀이를 몇 번 누르다가 다음 장을 살폈다.

[흑막의 유모, 벨린다]

자세히 읽을 엄두도 안 난다. 어차피 읽어도 믿기 힘들 거 같았다. 그래서 그냥 참모에게 바로 묻기로 했다.

"이건 뭐야?"

"성의 집사장이자 펜리스 백작을 어렸을 때부터 돌본 가정교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영주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특히...."

"특히?"

"음식 투정은 용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

[악마의 산술사, 로웰]

"이건 뭐냐?"

"계산이 무척 빠르다고 합니다. 7자리까지의 숫자 계산은 즉시 암산을 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래? 그렇게 계산이 빠르면 영지의 재무를 담당하고 있겠군."

"첩보관이라고 합니다. 돈 관리는 총관이란 놈이 절대 아무도 안 준다고 합니다. 그놈이 돈을 무지하게 밝혀서 말입니다."

"...그래."

[6서클 하녀 마법사, 바네사]

"...하녀?"

"네... 마탑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하녀 출신이라고 합니다."

"하녀가... 6서클 마법사가 될 수 있나?"

"놀랍게도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설명하는 걸 무척 좋아한다고 합니다."

"...뭘 설명해?"

"무엇이든지요."

"...그래."

[위대한 대장장이, 갈바릭]

라울은 자신도 모르게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대놓고 위대하다고 쓰여 있는데도 정상처럼 보였다.

"그 드워프가 펜리스 백작과 함께 영지의 기술을 몇 단계나 끌어 올렸다고 합니다."

"그래, 이 드워프는 더 알아보도록. 정말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확보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이제 제대로 된 정보가 나오나 보군. 어디 다음 놈은...."

[절제할 수 없는 분노, 아스콘]

"...이건 뭔데?"

"엘프인데 분노 조절 장애가 있다고 합니다."

"...."

좀 정상적인 사람이 나오나 했더니 또 시작이다. 라울은 그냥 다음 장으로 넘겼다.

[쥬아나의 성녀, 피오테]

"성녀?"

대충 넘기려던 라울이 예상치 못한 단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성녀가 나타난 건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소리지? 성녀가 나타났다면 이미 왕국 전역에 소문이 퍼졌어야 하지 않는가. 왕실에도 보고가 되지 않은 건가?"

성녀가 있는 곳은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 그렇기에 이리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참모는 고개를 마구 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쥬아나 교단에 확인해 봤는데 그런 일은 없다고 합니다. 그냥 사제인데 영지민들에게 인심을 많이 얻어 그렇게 불리는 거 같습니다. 다만...."

"다만?"

"계시를 받는 모습을 실제로 본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확인이 더 필요할 거 같습니다."

"계시를 받는 걸 본 사람들의 증언 내용이 같은가?"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정말 성녀일 수도 있지 않은가? 교단에서 숨기려고 한다거나 알력 때문에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거나...."

"그게... 교단에 확인해 보니 남자라고 합니다. 남자는 성녀가 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냥 생긴 게 여자처럼 생겨서 그렇지, 어렸을 때부터 교단에서 키운 남자가 확실하다고 합니다. 몇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라울은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어떻게 된 놈들인지 죄다 상식을 벗어나고 있다. 이래서는 어떤 놈들인지 파악하고 싶어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머리가 아파진 라울은 보고서를 덮었다. 더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서늘한 눈빛으로 참모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간이 짧았던 점을 감안해 줄 테니 다시 제대로 조사해 오도록."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더 안 보셔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전부 이상한 놈들만 있을 거 아니냐. 다시 조사해 오면 그때 보도록 하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말과 어린이들의 친구' 루미나, '총관 뒷바라지' 웬디, '근육의 오줌싸개' 고든 등 다양한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런 이들이야 그냥 넘긴다 해도 한 번은 확인해야 할 인물이 있었다.

"알포이란 인물에 관한 정보는 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알포이?"

"네, 소문이 심상치 않아서...."

그 말에 라울은 신경질적으로 보고서를 펼쳤다.

[신을 이긴 남자, 알포이]

"...이게 정상적인 사람에게 붙을 수 있는 별명인가? 이런 놈을 내버려 두고 있다고?"

신을 이기다니? 지금 같은 시대에 이런 별명을 달고 다니다가는 바로 모든 교단의 적이 된다. 한 마디로 흑마법사 취급을 받는다는 뜻이다.

오해를 사기 싫다면 펜리스 백작이 진작에 잡아 죽였어야 했다. 그런데 보고서를 읽어 보니 대놓고 영지에서 이렇게 자칭하고 다닌단다. 신성 모독도 이런 모독이 없었다.

"이게 사실이라고?"

"네, 그가 여신의 힘을 견뎌내는 걸 실제로 많은 이들이 봤다고 합니다. 그래서 펜리스 백작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거 같습니다."

정확히는 관심도 없는 게 맞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별명 때문에 이들은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라울은 머리가 아파져 관자놀이를 계속 눌렀다. 도무지 뭐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본래도 펜리스 백작이 미친놈이란 소문은 세간에 자자하긴 했다. 자신이 직접 봤을 때도 보통 간덩이가 부은 놈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수하들도 이런 미친 별명이 붙어 있을 줄이야.

"적염의 마탑 출신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그쪽에도 알아보니 나름 촉망받는 기재에 마탑의 후계자라고 합니다."

"흐음, 그렇다면 제법 재능이 넘치거나... 실력이 뛰어난 놈이겠군."

"그런 거 같습니다. 참모진에서 회의를 통해 1차로 결론을 냈는데... 아무래도 이자가 펜리스의 숨겨진 전력 같습니다."

"숨겨진 전력?"

"그렇습니다. 아직 크게 유명하지 않은데 이런 별명이 붙었다는 게 이상합니다. 분명 어떤 계기로 숨겨진 힘을 보였을 겁니다. 마탑 출신이니 최대한 정체를 감춰야 하니까요."

"소문에는 무슨 도박을 하다가 벌어진 일이라 하지 않았나?"

"우연한 계기로 숨겨진 힘이 드러나니 그걸 감추려고 소문을 조작한 거 같습니다. 고작 그런 걸로 저런 별명이 붙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마탑의 후계자가 도박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합니다. 적염의 마탑은 예전에 북부 제일이라 불렸던 명문입니다."

그 말에 라울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일단 알포이란 놈은 따로 특별 관리 대상으로 분류하도록."

괜히 이런 별명이 붙을 리가 없다. 사실이든 아니든, 뭔가 있는 놈이 분명했다.

그렇게 알포이는 '위험인물'로 분류되어 특별 보고 및 관리 대상에 들어갔다.

라울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진홍의 마탑에 적염의 마탑 쪽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다시 확인해라. 펜리스 때문에 그쪽도 너무 지지부진해졌어. 그리고... 주요 인물 전원의 소문이 이 정도로 이상하다는 건, 어느 정도 조작을 한 게 분명하다. 외부의 관심을 피하려는 게 틀림없어."

그런 건 없다. 지셀은 영지의 주요 생산량과 군사력, 신기술 등의 전력을 숨기기에 바쁘다.

클로드나 알포이 같은 놈을 숨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공작가의 참모들은 최대한 상식적인 선에서 추측하고 말았다. 생각이 많은 것이 오히려 독이 된 것이다.

라울 또한 참모들이 가져오는 보고에 의지할 수밖에 없으니, 참모들과 비슷한 결론을 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찝찝한 보고를 그대로 믿을 사람은 아니었다.

"인원과 자금은 무제한으로 지원해 줄 테니 더 자세히 알아 오도록 해라. 계속 같은 정보가 나오면 그때 가서 다시 판단하겠다."

"알겠습니다."

공작가는 무척이나 정확하게 조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쓸데없는 힘과 시간을 다시 쏟아붓기로 했다.

펜리스에 대한 정보를 치워 버린 라울이 다른 걸 물었다.

"아멜리아는?"

"관리할 사람을 보냈습니다. 곧 도착할 겁니다."

"그래. 레이폴드를 이용해서 펜리스를 견제하는 전략을 세워라. 펜리스의 애송이가 북부에서 튀어나오지 못하게만 막으라고 해. 친왕파를 처리한 뒤에 북부를 정리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저기, 그런데...."

우물쭈물하는 참모를 보며 라울이 인상을 찡그렸다.

"말해라."

"아멜리아가 요구하는 것이 점점 과해지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발루아 남작의 반란을 아직도 평정하지 못했고, 북부 영주들과 싸우느라 재정이 바닥났다고 합니다."

"벌써? 얼마나 지원해 달라고 하지?"

"네, 일단 식량과 말, 병장기, 목재, 철, 룬스톤, 약초...."

참모가 말하는 양은 끝도 없었다. 그 수량도 어마어마했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 안 하는 라울도 순간 말을 잃을 정도였다.

펜리스 백작 일도 골치 아픈데 아멜리아는 다른 의미로 골칫거리가 되었다.

다른 참모들도 분개하며 말했다.

"능력 없는 계집이 영지를 차지하니 벌써 재정이 흔들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빨리 저희의 통제 안에 넣어야겠습니다. 이러다가 영지가 거덜 나게 생겼습니다."

"도대체 데스몬드 백작은 왜 그런 여자를 밀어줬던 겁니까? 차라리 4공자 데이븐이 세력도 없고 더 나았을 거 같습니다."

분개하는 참모들과 달리, 라울은 아무 말 없이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서 한 몫 단단히 챙기겠다는 건가? 제법 정치적 식견은 있는 거 같다만, 어차피 자기도 사냥이 끝나면 삶아질 처지라는 건 모르는 모양이구나.'

라울은 아직 아멜리아에 대해 잘 모른다. 그렇기에 현 상황만을 보고 그녀가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고 있다고 여겼다.

"일단 절반만 지원해 줘라. 어차피 우리가 보낸 사람이 관리할 테니까. 통제가 힘들 거 같으면 주인을 바꿀 계획도 수립해 두도록."

"알겠습니다."

"북부 쪽은 어차피 해럴드가 실패했으니 지역을 봉쇄하는 방향으로 진행한다. 친왕파는 어떻게 하고 있지?"

라울은 브랜포드 후작에게 협박성이 짙은 경고를 보냈었다. 순순히 자리에서 물러나고 왕위를 이양하라는 경고를 말이다.

당연히 브랜포드 후작이 그런 굴욕적인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브랜포드 후작이 무척이나 분노했다고 합니다. 동부의 군대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맥쿼리 후작이 왕국군을 소집하고 있습니다. 언제든 건들면 바로 움직이겠다고 엄포를 놓은 상태입니다."

"에일즈버 백작가 또한 어마어마한 군자금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저들도 준비를 꽤 많이 한 모양입니다."

라울은 참모들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욕심도 많군. 그렇게 오래 권좌에 앉아 있었으면 내려올 때도 되었는데 말이야."

사실은 그도 알고 있다. 브랜포드 후작이 자리에서 내려오는 순간 왕실은 끝장난다.

그러니 브랜포드 후작은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할 것이다.

"흐음, 어쨌든 예전과는 조금 다른 행보군. 다른 놈들도 딱히 겁을 먹은 거 같지 않아."

분명 예전에는 공작가가 살짝 기침만 해도 몸을 사리던 게 친왕파의 귀족들이었다. 웬만하면 싸움을 피하려 했고 대부분이 눈치만 보고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처럼 분위기가 바뀐 건 단 한 사람 덕분이다.

"아무래도... 펜리스 백작이 계속 승승장구하니 해볼 만하다고 생각한 거 같습니다."

북부의 강자라 불리는 카발디 백작과 데스몬드 백작이 연달아서 박살이 났다. 그것도,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던 북부의 망나니라 불리는 자에게 말이다.

그러니 공작가가 만만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친왕파가 간덩이가 부은 것처럼 구는 것도 이해가 갔다.

라울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놈 때문에 일이 완전히 헝클어졌구나."

"브랜포드 후작이 왜 그런 놈을 밀어주나 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친왕파 내부에서도 말이 많긴 한데 다 찍어누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 브랜포드 후작이 그리 만만한 자가 아니었지."

라울은 그를 인정했다. 만약 브랜포드 후작이 없었다면 왕국은 이미 10년 전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

브랜포드 후작가는 자기 안위밖에 모르는 한심한 친왕파 귀족들을 이끌고 지금까지 공작가에 대항해 왔던 사람이다.

거기에 애송이였던 지셀을 밀어줘서 이만큼 키운 것도 그다.

북부 최강이라 불리는 데스몬드 백작마저 쓰러진 이상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브랜포드 후작의 도박이 성공했다고.

참모가 살짝 라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북부 쪽 일이 실패한 이상... 이제는 회유와 협박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귀족들은 별로 남지 않았습니다. 이미 펜리스 백작 때문에 소강상태가 되었습니다. 결국 브랜포드 후작의 의도대로 계속 지금 상황이 유지될 게 뻔합니다."

"이제 남은 방법은 내전밖에 없다는 뜻이지."

"지금 전쟁을 일으키면... 우리도 어느 정도는 피해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참모의 말에 라울이 다시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마수의 숲을 개척하는 게 더 힘들어지겠지."

그는 참모들도 모르는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 말이야.'

라울이 그토록 내전을 피하며 병력을 아끼려는 이유.

그것은 바로 마수의 숲 때문이었다.

330화 내가 궁금한 게 참 많아. (2)

라울은 루타니아가 아닌 다른 왕국 출신이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공작가의 사람들도 모른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공작의 신임을 받고 작위를 얻어 공작가의 대소사를 맡았다.

처음엔 오랫동안 공작을 섬겨 온 가신들이 크게 반발했지만, 그런 자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 저 악마 같은 놈이 공작가에 온 뒤부터 전하께서 변하셨다.

사람들이 수군거렸지만 이미 모든 권한을 쥔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공작은 마음대로 하라며 라울에게 모든 걸 맡겼다.

라울이 마수의 숲과 관련된 비밀을 약간이나마 아는 것은, 그가 속한 단체에서 모아 두었던 구전과 여러 문헌 덕분이다.

'마수의 숲은 무척 위험한 곳이지. 왕국의 전력을 모두 쏟아부어도 공략이 성공할까 말까 불확실해. 그리고 그 이후... '그날'이 왔을 때도 많은 병력이 필요해.'

그래서 라울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병력을 아꼈다.

물론 참모들은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그저 그게 공작가에서 제시한 방향이니 이해가 가지 않아도 따르는 것뿐이다.

어쨌든 라울은 오랜 시간을 들여 귀족들을 회유하며 공작파의 세력을 불렸고 친왕파의 힘을 줄여 나갔다.

원래부터 왕국 최고의 힘을 가졌던 공작가다. 그 힘을 등에 업고 움직이니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기만 했다.

지셀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놈이 그 정도일 줄이야. 믿을 수가 없군.'

라울은 브랜포드 후작의 연회 때 직접 가서 지셀을 만났었다.

그때도 지셀이 제법 대단한 놈이라고는 생각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

특히 자신을 앞에 두고도 주눅 들지 않는 담력이 대단했다. 오히려 원한에 찬 눈빛까지 보여 의아할 정도였다.

그래도 해럴드가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정도로 당시의 지셀과 해럴드는 격차가 상당히 컸었으니까.

'그랬던 놈이... 이제는 해럴드를 꺾고 북부 최강이라 불리게 되었다니.'

자신의 실수라고 하기에는 그놈이 벌인 일들이 너무나도 대단했다.

드러난 정보로만 봐도 그렇다. 이건 단순히 천재라고 불리기에도 부족하다.

마치... 자신들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일.'

라울은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털어 냈다.

'어차피 그놈이 마수의 숲을 건든 이상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지셀이 마수의 숲을 개척하고 룬스톤을 얻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라울은 지체하지 않고 해럴드에게 페르디움을 멸망시키라고 명했다.

마수의 숲은 그 정도로 라울에게 중요한 장소였다.

'누구도 건드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애송이 놈이 간도 크게 그런 일을 벌일 줄이야. 심지어 성공했단 말이지.'

비록 초입이긴 하지만, 지셀이 마수의 숲을 개척한 건 라울에게 상당히 거슬리는 일이었다.

결국 명령을 받은 해럴드가 디갈드를 이용해 전쟁을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일이 하나둘 꼬이기 시작하더니 지금 상황까지 와 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지. 펜리스의 애송이는 내 차후에 직접 찢어 죽이겠다. 이제 큰일을 시작할 준비를 해라."

"그 말씀은...."

라울은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결정했다. 대신 최대한 적은 피해로 내전에 승리할 수 있도록 준비해라. 그리고 준비하는 동안 회유가 가능한 자들을 최대한 빨리 회유하도록."

"알겠습니다."

참모들은 표정을 굳힌 채 자리를 떠났다.

내전은 단순한 영지전과는 다르다. 왕국의 모든 영주와 귀족들이 두 패로 갈라져서 싸우게 된다.

공작은 내전으로 자신들 쪽이 피해를 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눈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전쟁을 하더라도 최소한의 피해로 승리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일을 해낼 수 있다.

그러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심혈을 기울여서 한 치의 실수도 없도록 해야 한다.

참모들이 나가고 홀로 남자 라울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여전히 속을 알 수가 없구나."

지셀이 아니다. 바로 자신이 모시는 에른하르트에 대한 말이었다.

분명 공작을 직접 만나 사명을 깨우치게 하고 새로운 길로 인도한 건 자신과, 자신이 속한 단체였다.

그런데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알아서 하라며 모든 걸 일임했기에 원하는 대로 이끌 수 있었다. 하지만 가끔 보이는 그 섬뜩한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처음 만났을 때, 공작가의 비밀을 알려주고 그의 사명을 깨우쳐 주자 에른하르트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 역시 나는 특별한 사람이었구나. 내 오랜 의문이 조금은 풀렸도다.

공작은 담담하게 자신의 사명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이후 그가 보인 행보는 라울에게도 꽤 충격적이었다.

에른하르트는 자신의 부인을 직접 죽였다. 부인의 가문까지 아예 잿더미로 만들었다.

― 공작 부인이 부정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있어. 그래서 분노에 겨워서 그런 거야.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며 공작의 편을 들어 주었다.

인자하고 사람 좋기로 소문난 공작이 괜히 그럴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공작은 자신의 자식들을 죽였다.

― 그들이 아버지의 자리를 찬탈하려고 했어. 그건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

사람들은 그때도 그렇게 공작의 편을 들어 주었다.

이후 공작은 다시 형제자매들과 방계의 모든 혈족을 죽였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공작가의 핏줄은 단 하나도 남겨 두지 않았다.

출가한 자가 있다면 데리고 와서 죽였고, 그자의 핏줄이 있다면 그마저도 죽였다. 거절하면 상대 가문까지도 짓밟았다.

이쯤 되자 사람들은 더 이상 공작의 편을 들어 주지 못했다.

아무런 힘도 없는 방계와 다른 가문으로 출가한 자들까지 죽이는 건 어떤 핑계를 끌고 와도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공작은 한바탕 살육을 벌여 자신의 모든 친인척과 혈족을 깡그리 세상에서 지워 버렸다.

마지막 남은 혈족을 죽였던 그날, 이제 세상에 홀로 남은 공작은 피에 전 얼굴로 웃었다. 그러고선 한 마디만을 남겼을 뿐이다.

― 이제야 나는 작은 자유를 얻었도다. 나를 옭아매고 있는 무거운 사슬을 하나 끊었구나.

공작이 미쳤다고 소문이 난 건 그때부터였다. 그나마 그를 편드는 몇몇 사람들도 라울이 뒤에서 시켰다고 애써 음모론을 짜내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라울은 전혀 그런 걸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도 공작이 그런 짓을 저지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자신들의 대업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공작은 기어코 살육을 벌였다. 그러고는 모든 걸 라울에게 일임하고 칩거했다.

왜 공작이 그러한 일을 벌였는지 라울은 아직도 알지 못한다.

"정말 미친 걸지도...."

라울은 혀를 차고는 생각을 돌렸다. 공작이 미쳤든, 미치지 않았든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의 임무는 루타니아 왕국과 마수의 숲을 차지하는 것이다.

라울의 시선이 앞에 있는 거대한 지도로 향했다.

지도에는 루타니아 왕국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이 대륙에 있는 모든 국가와 독립 세력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중 몇몇 지역에는 이글거리는 검은 태양이 그려져 있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이 루타니아 왕국 위도 곧 같은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그것이 라울의 목표였다.

* * *

"그놈이 또 마수의 숲으로 갔다고?"

아멜리아는 베르나프의 보고를 받고 인상을 찡그렸다.

이미 지셀은 자신에게 뜯어낸 돈으로 마수의 숲 개척에 성공해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

솔직히 지셀이 이렇게까지 큰 건 자신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마수의 숲 얘기만 들으면 짜증부터 치솟았다.

아멜리아의 날카로운 물음에 베르나프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네, 첩자들이 보내 준 보고에 따르면 얼마 전에 병력을 이끌고 마수의 숲으로 갔다고 합니다."

레이폴드는 같은 북부에 있어 공작가보다 펜리스에 관한 정보를 더 빠르게 얻을 수 있다. 지셀이 영지 봉쇄도 풀었기에 펜리스 영지에는 첩자들이 득실거렸다.

물론 정말 중요한 시설이나 정보는 여전히 철저하게 숨기기에 쉽게 알 수 없다. 하지만 대략적인 영지의 상황은 이제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흠, 이번에도 성공할까?"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요? 이미 성공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아, 거기에 그렇게 귀한 자원이 있는 줄 알았으면 우리가 미리 먹을 걸 그랬습니다."

베르나프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지셀은 싸움을 잘한다. 펜리스군도 강하다. 그러니 이미 한번 성공했던 마수의 숲에서 또 귀한 걸 얻어 올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베르나프와 달랐다. 성공 여부를 의심한다는 게 아니라, 그 방법이 의문스러웠다.

'그게 그렇게 쉬웠으면 이미 오래전에 마수의 숲이 개척됐을 거야.'

아멜리아도 북부 출신이니 잘 알고 있다. 마수의 숲은 이 북부에서 오래전부터 금기시되던 곳이다. 소문도 흉흉하고, 실제로도 사업성이 없었다.

아주 옛날부터 마수의 숲을 개척하려는 시도는 몇 번이나 있었다. 페르디움의 선조들이 그러했고, 다른 영지의 영주들도 힘을 합해 시도한 적이 있다.

그것이 모두 실패했기에 마수의 숲이 금기가 된 것이다. 기록으로도 남아 있기에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그런 숲을 일개 애송이 신분이던 지셀이 홀로 개척해 냈다. 비록 초입에 불과하다지만, 북부의 영주들은 지금껏 그 정도도 해내지 못했었다.

그러니 아멜리아로서는 궁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했던 거지? 당시 지셀의 전력이 압도적으로 강했던 것도 아닌데.'

아무리 페르디움이 가난하다 해도 북방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정예들이 있는 영지다.

그런 곳에서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지셀이 해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법을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데 베르나프가 뜻밖의 말을 건넸다.

"어떤 미친놈이 자기가 펜리스 백작과 함께 마수의 숲에 다녀왔다고 합니다. 술만 마시면 그런 소리를 한다는데, 소문으로 퍼진 얘기가 꽤 재미있긴 하더라고요. 말도 안 되는 몬스터들이 있다던데요."

"뭐?"

아멜리아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셀이 이끄는 기사 중에 마수의 숲 개척을 함께했던 용병들이 있다는 건 유명한 얘기였다.

그들은 그 이후 단 한 명도 이탈하지 않고 모두 펜리스의 기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마수의 숲을 다녀온 놈이 있을 리가 없다.

"처음 마수의 숲에 함께 들어갔던 용병들은 모두 지셀의 밑에 있지 않나?"

"그러니까 다들 믿지는 않습니다. 펜리스 기사들이야 이제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 하는 놈 정도로 생각하지요. 저도 그놈을 살짝 본 적이 있는데, 정말로 마수의 숲에서 살아남을 만한 놈이 아닙니다."

"그놈이 뭐라고 하는데?"

"뭐 자기가 어떻게 따라다녔고 어떤 몬스터랑 싸웠는지 얘기하고 그럽니다. 펜리스 백작 욕도 많이 하고요. 그냥 헛소리입니다, 헛소리. 갑자기 마수의 숲 하니까 생각나서 그냥 말씀드린 겁니다."

그 말에 아멜리아가 잠시 생각하다 다시 물었다.

"말도 안 되는 몬스터가 뭐지?"

"아... 뭐라더라, 무슨 빛이 없으면 공격이 안 통하는 몬스터가 있다던데요. 수도 몇백 마리씩이나 되고. 그래서 마나를 쓰지 않으면 죽이지도 못한다고 합니다."

"그걸 어떻게 잡았대? 그 당시 용병들은 마나를 쓰지 못했을 텐데."

"펜리스 백작이 그런 놈들이 나오는 걸 미리 알고 라이트 스크롤들을 준비해 뒀답니다. 유인해서 한 번에 잡았다고. 아, 그게 말이 됩니까? 세상에 그런 몬스터가 어디 있습니까? 진짜 있다고 해도, 마수의 숲에 관해서는 아무런 정보가 없는데 그걸 어떻게 알고 미리 준비해요. 아니, 아무리 지어낸 이야기지만 개연성이 너무 없잖아요. 하하하하."

베르나프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웃지 않았다.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바스테트가 한심하다는 듯이 울었다.

냐앙!

그러자 베르나프가 웃음을 그치고 머리를 긁적였다.

아멜리아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놈 잡아 와."

"네? 그런 허풍쟁이를 왜요?"

"당장."

"넵! 알겠습니다!"

누구의 명이라고 거역할까. 바로 병사들이 움직여서 소문의 남자를 잡아 왔다.

남자는 무척이나 추레한 모습이었다. 제대로 씻지도 않았는지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여, 영주님을 뵙습니다."

쥐 상의 남자는 대전 바닥에 엎드려, 상석에 앉아 있는 아멜리아에게 예를 갖췄다.

단지 영주라서 예를 지킨 게 아니다. 어느 정도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레이폴드에 사는 사람으로서 아멜리아는 고마운 영주였다. 각 도시와 마을에 자주 식량을 나눠주어 굶는 사람이 없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도 레이폴드에 온 뒤부터 떠나지 않고 이곳에서 살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그냥 술 마시고 헛소리하는 놈으로밖에 안 보였다.

그래도 그녀는 남자를 바로 돌려보내지 않고 물었다.

"그래, 네가 펜리스 백작과 마수의 숲에 다녀왔다는 용병이 맞느냐?"

그 말에 남자는 조금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사실 비밀로 해야 하는 얘기였다. 그런데 술에 취할 때마다 무심코 허세를 부리며 말을 조금씩 흘렸었다.

아무래도 그게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다.

남자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제가 마수의 숲에 다녀온 경험이 있습니다."

제법 담담하게 말하는 투에 아멜리아가 흥미 어린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제 이름은... 마누스라고 합니다."

남자는 지셀과 함께 마수의 숲에 갔다가, 블러드 퓌톤을 만났을 때 혼자 도망쳤던 마누스였다.

놀랍게도 그는 그곳에서 살아나와 레이폴드에 숨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직업은?"

"지금은... 조금 쉬고 있지만 원래는 용병이었습니다."

아멜리아는 마누스의 신상에 관해 이것저것 물은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가 마수의 숲에 조금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러는데 당시의 일을 상세히 듣고 싶구나."

그 말에 마누스는 비열하게 눈을 빛냈다.

'지금 영주가 내 얘기를 듣고 싶어 한다 그거지?'

원래 비밀로 하려고 했던 일이었지만 이미 술에 취해 몇 번이나 실수했다. 이왕 밝혀진 거 이 기회를 살려야 했다.

그는 평소에도 불평불만이 많고 사람들을 선동하기를 좋아한다. 그만큼 상황을 이용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는 아멜리아에게 한 몫 단단히 뜯어내서 이곳을 뜨자고 생각하고는 짐짓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드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영주님께 작은 부탁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제 목숨을 걸고 얻어 낸 정보입니다. 정보료를 조금만 받았으면 합니다."

"정보료?"

감히 자신에게 정보를 핑계로 흥정을 건단 말인가?

아멜리아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330화 내가 궁금한 게 참 많아. (2)

라울은 루타니아가 아닌 다른 왕국 출신이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공작가의 사람들도 모른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공작의 신임을 받고 작위를 얻어 공작가의 대소사를 맡았다.

처음엔 오랫동안 공작을 섬겨 온 가신들이 크게 반발했지만, 그런 자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 저 악마 같은 놈이 공작가에 온 뒤부터 전하께서 변하셨다.

사람들이 수군거렸지만 이미 모든 권한을 쥔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공작은 마음대로 하라며 라울에게 모든 걸 맡겼다.

라울이 마수의 숲과 관련된 비밀을 약간이나마 아는 것은, 그가 속한 단체에서 모아 두었던 구전과 여러 문헌 덕분이다.

'마수의 숲은 무척 위험한 곳이지. 왕국의 전력을 모두 쏟아부어도 공략이 성공할까 말까 불확실해. 그리고 그 이후... '그날'이 왔을 때도 많은 병력이 필요해.'

그래서 라울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병력을 아꼈다.

물론 참모들은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그저 그게 공작가에서 제시한 방향이니 이해가 가지 않아도 따르는 것뿐이다.

어쨌든 라울은 오랜 시간을 들여 귀족들을 회유하며 공작파의 세력을 불렸고 친왕파의 힘을 줄여 나갔다.

원래부터 왕국 최고의 힘을 가졌던 공작가다. 그 힘을 등에 업고 움직이니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기만 했다.

지셀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놈이 그 정도일 줄이야. 믿을 수가 없군.'

라울은 브랜포드 후작의 연회 때 직접 가서 지셀을 만났었다.

그때도 지셀이 제법 대단한 놈이라고는 생각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

특히 자신을 앞에 두고도 주눅 들지 않는 담력이 대단했다. 오히려 원한에 찬 눈빛까지 보여 의아할 정도였다.

그래도 해럴드가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정도로 당시의 지셀과 해럴드는 격차가 상당히 컸었으니까.

'그랬던 놈이... 이제는 해럴드를 꺾고 북부 최강이라 불리게 되었다니.'

자신의 실수라고 하기에는 그놈이 벌인 일들이 너무나도 대단했다.

드러난 정보로만 봐도 그렇다. 이건 단순히 천재라고 불리기에도 부족하다.

마치... 자신들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일.'

라울은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털어 냈다.

'어차피 그놈이 마수의 숲을 건든 이상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지셀이 마수의 숲을 개척하고 룬스톤을 얻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라울은 지체하지 않고 해럴드에게 페르디움을 멸망시키라고 명했다.

마수의 숲은 그 정도로 라울에게 중요한 장소였다.

'누구도 건드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애송이 놈이 간도 크게 그런 일을 벌일 줄이야. 심지어 성공했단 말이지.'

비록 초입이긴 하지만, 지셀이 마수의 숲을 개척한 건 라울에게 상당히 거슬리는 일이었다.

결국 명령을 받은 해럴드가 디갈드를 이용해 전쟁을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일이 하나둘 꼬이기 시작하더니 지금 상황까지 와 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지. 펜리스의 애송이는 내 차후에 직접 찢어 죽이겠다. 이제 큰일을 시작할 준비를 해라."

"그 말씀은...."

라울은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결정했다. 대신 최대한 적은 피해로 내전에 승리할 수 있도록 준비해라. 그리고 준비하는 동안 회유가 가능한 자들을 최대한 빨리 회유하도록."

"알겠습니다."

참모들은 표정을 굳힌 채 자리를 떠났다.

내전은 단순한 영지전과는 다르다. 왕국의 모든 영주와 귀족들이 두 패로 갈라져서 싸우게 된다.

공작은 내전으로 자신들 쪽이 피해를 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눈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전쟁을 하더라도 최소한의 피해로 승리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일을 해낼 수 있다.

그러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심혈을 기울여서 한 치의 실수도 없도록 해야 한다.

참모들이 나가고 홀로 남자 라울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여전히 속을 알 수가 없구나."

지셀이 아니다. 바로 자신이 모시는 에른하르트에 대한 말이었다.

분명 공작을 직접 만나 사명을 깨우치게 하고 새로운 길로 인도한 건 자신과, 자신이 속한 단체였다.

그런데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알아서 하라며 모든 걸 일임했기에 원하는 대로 이끌 수 있었다. 하지만 가끔 보이는 그 섬뜩한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처음 만났을 때, 공작가의 비밀을 알려주고 그의 사명을 깨우쳐 주자 에른하르트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 역시 나는 특별한 사람이었구나. 내 오랜 의문이 조금은 풀렸도다.

공작은 담담하게 자신의 사명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이후 그가 보인 행보는 라울에게도 꽤 충격적이었다.

에른하르트는 자신의 부인을 직접 죽였다. 부인의 가문까지 아예 잿더미로 만들었다.

― 공작 부인이 부정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있어. 그래서 분노에 겨워서 그런 거야.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며 공작의 편을 들어 주었다.

인자하고 사람 좋기로 소문난 공작이 괜히 그럴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공작은 자신의 자식들을 죽였다.

― 그들이 아버지의 자리를 찬탈하려고 했어. 그건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

사람들은 그때도 그렇게 공작의 편을 들어 주었다.

이후 공작은 다시 형제자매들과 방계의 모든 혈족을 죽였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공작가의 핏줄은 단 하나도 남겨 두지 않았다.

출가한 자가 있다면 데리고 와서 죽였고, 그자의 핏줄이 있다면 그마저도 죽였다. 거절하면 상대 가문까지도 짓밟았다.

이쯤 되자 사람들은 더 이상 공작의 편을 들어 주지 못했다.

아무런 힘도 없는 방계와 다른 가문으로 출가한 자들까지 죽이는 건 어떤 핑계를 끌고 와도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공작은 한바탕 살육을 벌여 자신의 모든 친인척과 혈족을 깡그리 세상에서 지워 버렸다.

마지막 남은 혈족을 죽였던 그날, 이제 세상에 홀로 남은 공작은 피에 전 얼굴로 웃었다. 그러고선 한 마디만을 남겼을 뿐이다.

― 이제야 나는 작은 자유를 얻었도다. 나를 옭아매고 있는 무거운 사슬을 하나 끊었구나.

공작이 미쳤다고 소문이 난 건 그때부터였다. 그나마 그를 편드는 몇몇 사람들도 라울이 뒤에서 시켰다고 애써 음모론을 짜내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라울은 전혀 그런 걸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도 공작이 그런 짓을 저지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자신들의 대업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공작은 기어코 살육을 벌였다. 그러고는 모든 걸 라울에게 일임하고 칩거했다.

왜 공작이 그러한 일을 벌였는지 라울은 아직도 알지 못한다.

"정말 미친 걸지도...."

라울은 혀를 차고는 생각을 돌렸다. 공작이 미쳤든, 미치지 않았든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의 임무는 루타니아 왕국과 마수의 숲을 차지하는 것이다.

라울의 시선이 앞에 있는 거대한 지도로 향했다.

지도에는 루타니아 왕국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이 대륙에 있는 모든 국가와 독립 세력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중 몇몇 지역에는 이글거리는 검은 태양이 그려져 있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이 루타니아 왕국 위도 곧 같은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그것이 라울의 목표였다.

* * *

"그놈이 또 마수의 숲으로 갔다고?"

아멜리아는 베르나프의 보고를 받고 인상을 찡그렸다.

이미 지셀은 자신에게 뜯어낸 돈으로 마수의 숲 개척에 성공해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

솔직히 지셀이 이렇게까지 큰 건 자신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마수의 숲 얘기만 들으면 짜증부터 치솟았다.

아멜리아의 날카로운 물음에 베르나프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네, 첩자들이 보내 준 보고에 따르면 얼마 전에 병력을 이끌고 마수의 숲으로 갔다고 합니다."

레이폴드는 같은 북부에 있어 공작가보다 펜리스에 관한 정보를 더 빠르게 얻을 수 있다. 지셀이 영지 봉쇄도 풀었기에 펜리스 영지에는 첩자들이 득실거렸다.

물론 정말 중요한 시설이나 정보는 여전히 철저하게 숨기기에 쉽게 알 수 없다. 하지만 대략적인 영지의 상황은 이제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흠, 이번에도 성공할까?"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요? 이미 성공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아, 거기에 그렇게 귀한 자원이 있는 줄 알았으면 우리가 미리 먹을 걸 그랬습니다."

베르나프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지셀은 싸움을 잘한다. 펜리스군도 강하다. 그러니 이미 한번 성공했던 마수의 숲에서 또 귀한 걸 얻어 올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베르나프와 달랐다. 성공 여부를 의심한다는 게 아니라, 그 방법이 의문스러웠다.

'그게 그렇게 쉬웠으면 이미 오래전에 마수의 숲이 개척됐을 거야.'

아멜리아도 북부 출신이니 잘 알고 있다. 마수의 숲은 이 북부에서 오래전부터 금기시되던 곳이다. 소문도 흉흉하고, 실제로도 사업성이 없었다.

아주 옛날부터 마수의 숲을 개척하려는 시도는 몇 번이나 있었다. 페르디움의 선조들이 그러했고, 다른 영지의 영주들도 힘을 합해 시도한 적이 있다.

그것이 모두 실패했기에 마수의 숲이 금기가 된 것이다. 기록으로도 남아 있기에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그런 숲을 일개 애송이 신분이던 지셀이 홀로 개척해 냈다. 비록 초입에 불과하다지만, 북부의 영주들은 지금껏 그 정도도 해내지 못했었다.

그러니 아멜리아로서는 궁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했던 거지? 당시 지셀의 전력이 압도적으로 강했던 것도 아닌데.'

아무리 페르디움이 가난하다 해도 북방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정예들이 있는 영지다.

그런 곳에서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지셀이 해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법을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데 베르나프가 뜻밖의 말을 건넸다.

"어떤 미친놈이 자기가 펜리스 백작과 함께 마수의 숲에 다녀왔다고 합니다. 술만 마시면 그런 소리를 한다는데, 소문으로 퍼진 얘기가 꽤 재미있긴 하더라고요. 말도 안 되는 몬스터들이 있다던데요."

"뭐?"

아멜리아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셀이 이끄는 기사 중에 마수의 숲 개척을 함께했던 용병들이 있다는 건 유명한 얘기였다.

그들은 그 이후 단 한 명도 이탈하지 않고 모두 펜리스의 기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마수의 숲을 다녀온 놈이 있을 리가 없다.

"처음 마수의 숲에 함께 들어갔던 용병들은 모두 지셀의 밑에 있지 않나?"

"그러니까 다들 믿지는 않습니다. 펜리스 기사들이야 이제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 하는 놈 정도로 생각하지요. 저도 그놈을 살짝 본 적이 있는데, 정말로 마수의 숲에서 살아남을 만한 놈이 아닙니다."

"그놈이 뭐라고 하는데?"

"뭐 자기가 어떻게 따라다녔고 어떤 몬스터랑 싸웠는지 얘기하고 그럽니다. 펜리스 백작 욕도 많이 하고요. 그냥 헛소리입니다, 헛소리. 갑자기 마수의 숲 하니까 생각나서 그냥 말씀드린 겁니다."

그 말에 아멜리아가 잠시 생각하다 다시 물었다.

"말도 안 되는 몬스터가 뭐지?"

"아... 뭐라더라, 무슨 빛이 없으면 공격이 안 통하는 몬스터가 있다던데요. 수도 몇백 마리씩이나 되고. 그래서 마나를 쓰지 않으면 죽이지도 못한다고 합니다."

"그걸 어떻게 잡았대? 그 당시 용병들은 마나를 쓰지 못했을 텐데."

"펜리스 백작이 그런 놈들이 나오는 걸 미리 알고 라이트 스크롤들을 준비해 뒀답니다. 유인해서 한 번에 잡았다고. 아, 그게 말이 됩니까? 세상에 그런 몬스터가 어디 있습니까? 진짜 있다고 해도, 마수의 숲에 관해서는 아무런 정보가 없는데 그걸 어떻게 알고 미리 준비해요. 아니, 아무리 지어낸 이야기지만 개연성이 너무 없잖아요. 하하하하."

베르나프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웃지 않았다.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바스테트가 한심하다는 듯이 울었다.

냐앙!

그러자 베르나프가 웃음을 그치고 머리를 긁적였다.

아멜리아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놈 잡아 와."

"네? 그런 허풍쟁이를 왜요?"

"당장."

"넵! 알겠습니다!"

누구의 명이라고 거역할까. 바로 병사들이 움직여서 소문의 남자를 잡아 왔다.

남자는 무척이나 추레한 모습이었다. 제대로 씻지도 않았는지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여, 영주님을 뵙습니다."

쥐 상의 남자는 대전 바닥에 엎드려, 상석에 앉아 있는 아멜리아에게 예를 갖췄다.

단지 영주라서 예를 지킨 게 아니다. 어느 정도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레이폴드에 사는 사람으로서 아멜리아는 고마운 영주였다. 각 도시와 마을에 자주 식량을 나눠주어 굶는 사람이 없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도 레이폴드에 온 뒤부터 떠나지 않고 이곳에서 살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그냥 술 마시고 헛소리하는 놈으로밖에 안 보였다.

그래도 그녀는 남자를 바로 돌려보내지 않고 물었다.

"그래, 네가 펜리스 백작과 마수의 숲에 다녀왔다는 용병이 맞느냐?"

그 말에 남자는 조금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사실 비밀로 해야 하는 얘기였다. 그런데 술에 취할 때마다 무심코 허세를 부리며 말을 조금씩 흘렸었다.

아무래도 그게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다.

남자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제가 마수의 숲에 다녀온 경험이 있습니다."

제법 담담하게 말하는 투에 아멜리아가 흥미 어린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제 이름은... 마누스라고 합니다."

남자는 지셀과 함께 마수의 숲에 갔다가, 블러드 퓌톤을 만났을 때 혼자 도망쳤던 마누스였다.

놀랍게도 그는 그곳에서 살아나와 레이폴드에 숨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직업은?"

"지금은... 조금 쉬고 있지만 원래는 용병이었습니다."

아멜리아는 마누스의 신상에 관해 이것저것 물은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가 마수의 숲에 조금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러는데 당시의 일을 상세히 듣고 싶구나."

그 말에 마누스는 비열하게 눈을 빛냈다.

'지금 영주가 내 얘기를 듣고 싶어 한다 그거지?'

원래 비밀로 하려고 했던 일이었지만 이미 술에 취해 몇 번이나 실수했다. 이왕 밝혀진 거 이 기회를 살려야 했다.

그는 평소에도 불평불만이 많고 사람들을 선동하기를 좋아한다. 그만큼 상황을 이용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는 아멜리아에게 한 몫 단단히 뜯어내서 이곳을 뜨자고 생각하고는 짐짓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드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영주님께 작은 부탁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제 목숨을 걸고 얻어 낸 정보입니다. 정보료를 조금만 받았으면 합니다."

"정보료?"

감히 자신에게 정보를 핑계로 흥정을 건단 말인가?

아멜리아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331화 내가 궁금한 게 참 많아. (3)

마누스는 그런 아멜리아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네, 마수의 숲은 비밀로 싸인 곳입니다. 비록 초입이지만 룬스톤이 있던 곳까지 간 경험입니다. 정당한 대가를 받고 싶습니다."

"아하...."

아멜리아가 여전히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찮은 정보라도 받으면 응당 대가를 주어야 하는 법이다. 그것이 바로 귀족의 품격이다.

"그래, 얼마를 원하느냐?"

"2천 골드를 원합니다."

그 말에 대전에 있는 사람들의 안색이 험악해졌다. 2천 골드면 어지간한 평민이 팔자를 고칠 수 있는 금액이다.

감히 정보료를 핑계로 과한 요구를 하는 걸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아멜리아 앞에서는 충심으로도 함부로 나서면 안 된다.

냐앙!

오직 바스테트만이 기분 나쁜 티를 마음대로 낼 수 있었다.

아멜리아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정보료 치고는 너무 비싸구나."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정보입니다.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마누스도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간 큰 짓을 벌이는 게 아니다. 그는 자신이 안전할 거라 생각했다.

'여기 영주님이 그렇게 마음씨가 곱다지? 사람도 함부로 안 죽인다고 했어. 적당히 흥정하다가 가격을 깎으면 될 거야.'

아무리 영주라도 명분 없이 영지민을 죽이기는 힘들다. 한번 폭군으로 찍히면 영지민들이 영주를 신뢰하지 않고, 죽은 사람이 다른 영지 소속이라면 자칫 영지전의 명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들 귀족의 의무니, 품격이니 따지며 평판에 신경을 쓰는 것이다.

'게다가 난 술집에서 갑자기 잡혀 왔어. 많은 사람이 봤으니 당장 어떻게 할 수도 없을 거야. 분위기 보고 안 통하면 튀자.'

영주가 넘어가도 가끔 꼴통 같은 수하들이 사고를 칠 때가 있다. 때로는 엄한 누명을 씌워 벌을 줄 때도 있다.

아멜리아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건 믿고 있지만, 의심 많은 마누스는 그런 경우까지 계산해 두었다.

'일단 크게 부르고 흥정을 해서 적당히 깎아 주자. 2천 골드를 다 받을 생각은 없으니 걱정 마쇼, 영주님. 크흐흐....'

용병 시절부터 몸에 익은 거래 방식이다. 어차피 아쉬운 사람이 질 수밖에 없다.

과연 아멜리아는 마누스의 흥정에 응해 주었다.

"2천 골드는 너무 과하다. 그래도 내 상당히 궁금한 정보니 200골드까지 주겠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느냐?"

"으음... 1500골드로 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이건 정말 들으면 깜짝 놀랄 정도로 귀중한 정보입니다."

대전에 있는 가신들의 표정이 더 험악해졌다. 200골드도 어마어마한 금액인데 저 천한 놈이 계속 욕심을 부리고 있었다.

마누스는 그런 분위기에 크게 겁먹지 않았다. 어차피 용병 시절에 귀족들과 이런 흥정을 하는 일은 흔했다.

가신들이 아무리 기분 나쁜 티를 내도 마누스와 협상하는 상대는 그들이 아니다. 착한 사람으로 소문난 영주와 흥정하는 게 무서울 리가 없었다.

잠시 고운 이마를 찡그린 아멜리아가 옆에 있는 베르나프에게 조용히 물었다.

"어디서 데리고 왔지?"

"술집에서 데리고 왔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마누스에게 말했다.

"1500골드도 너무 과하구나. 정보가 궁금은 하다만 그렇게는 힘들 거 같다. 일단 돌아가도록 해라."

"어? 영주님? 이거 정말 들으면 놀랄 만한 정보입니다."

마누스가 살짝 놀라며 말하자 아멜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너무 비싸다. 내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영지의 중요한 자금을 쓸 수는 없다."

'쳇, 영지민을 위해서만 돈을 쓰기에 검소하다더니 사실이었군. 할 수 없지.'

"그, 그러면 1천 골드는 어떻습니까?"

"그 또한 너무 비싸다. 200골드도 내 무리한 상황이다."

"그러면 500골드에 해 드리겠습니다!"

500골드만 해도 대단히 큰 금액이다. 그래도 안 되면 정말 200골드라도 받고 이 영지를 뜰 생각이었다.

아멜리아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말했다.

"그건 생각을 해 보겠다. 일단 물러가도록. 베르나프, 저자에게 오늘 하루 배불리 먹고 잘 수 있는 돈을 주도록 해라. 시간을 뺏었으니 응당 대가를 치러야지."

"알겠습니다."

베르나프가 고갯짓하자 사용인 한 명이 마누스에게 다가가 금화 하나를 주었다.

마누스는 금화를 받고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흐흐, 고민하는 걸 보니 조금만 더 하면 통하겠구나. 밀고 당기기에 무척 서투르군.'

다년간의 흥정 경험으로 마누스는 상대에게 아직 흥미가 남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제대로 흥정도 못 하고 고민하는 걸 보니 이런 일을 별로 해 본 적이 없는 게 분명했다.

'하긴, 방에서 책만 읽고 곱게 자란 아가씨가 이런 걸 어떻게 하겠어? 돈은 다 주기 싫고 정보는 얻고 싶고. 머리 아프겠지. 크크큭.'

마누스는 속으로 아멜리아를 비웃으며 일단은 물러났다. 손에 쥔 금화가 오늘따라 너무나 예뻐 보인다.

"캬, 그래도 잠깐 불렀다고 이렇게 돈을 줄 줄이야. 역시 순한 영주님이라니까. 여기저기서 뒤통수 많이 맞겠어. 쯧쯧."

혀를 몇 번 차며 아멜리아를 걱정해 준 마누스는 곧 기분을 내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오랜만에 제 돈을 내고 술을 마셨다. 그간 번 돈도 거의 다 써서 최근에는 제대로 먹고 마신 적도 없었다.

"크으, 좋네. 하, 그때 도망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술에 취하니 옛날 일이 생각난다. 당시에는 도망친 처지라 짐바르 용병 길드에는 다시 찾아가지도 못했다.

지셀이 죽었다면 모를까, 살아남은 건 그도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영지를 돌아다니며 적당히 잡일이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들려오는 소문 내용이 대단해졌다.

"그 애송이 공자가 이제는 백작에 북부 최강이라니... 미친 광견단 놈들이 기사가 됐다고? 하, 참... 오줌싸개 고든 새끼도 기사가 되고 마나 연공법도 배우고...."

생각할수록 속이 쓰렸다. 전쟁 때마다 그 애송이 귀족 새끼가 죽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영지와 그를 따르는 기사들도 죄다 망했으면 싶었다.

그런데 망하기는커녕 오히려 다들 승승장구하고 있다. 지셀은 북부에서 제일 잘 나가는 영주가 됐고 펜리스의 기사들도 큰 명성을 쌓고 있었다.

"아오, 시발. 나도 거기에 껴 있으면 마나 연공법도 배우고 기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그런 기회를 얻었으면 더 잘했을 거라고."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마누스는 모른다. 그저 결과만 보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다.

술에 취해 실컷 지셀을 욕하던 마누스는 비틀거리며 숙소로 돌아갔다.

허름한 여관이기는 하지만 꽤 오래 지내서 그런지 이제는 마음이 편하다.

다 무너져 가는 침대에 누운 마누스는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여기 영주한테 돈 좀 받으면 다른 데 가서 장사나 해야겠다. 두고 보자, 내가 아주 크게 성공해서 그 애송이 귀족 새끼도 쩔쩔매게 해 줄 테니까... 음냐...."

그렇게 잠이 든 마누스는 뭔가 불편한 느낌에 다시 눈을 떴다.

술이 덜 깨서 그런지 아직은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어두운 공간에 한 여자가 고혹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이제 깼나? 정신이 들어?"

"어... 영주님?"

눈앞에 보이는 아름다운 여자는 아멜리아였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마누스가 곧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남자가 그리우시면 따로 부르셔도 되는데 이런 누추한 곳까지 직접 찾아오시다니...."

상황을 단단히 착각한 마누스는 천박한 말을 내뱉으며 아멜리아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철컹.

그런데 무언가가 자신의 양손을 묶고 있다. 의아함을 느낀 그가 눈을 껌뻑이며 고개를 돌렸다.

"어?"

양손을 구속한 쇠사슬이 벽과 이어져 있다. 깜짝 놀란 그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촛불 몇 개만 켜진 어두운 방. 자신의 숙소가 아니었다. 어딘가 분위기가 음습한 게 꼭 지하 감옥 같았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 여기는...."

정신이 들자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용병 출신인 그는 그것이 쇠 냄새와 피 냄새라는 걸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으, 으아아아!"

철컹! 철컹!

발버둥을 쳐 봤지만 구속구는 단단하게 그를 옭매고 있었다.

저벅. 저벅.

아멜리아의 옆에 누군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무척이나 험상궂게 생긴 남자는 곧 여러 가지 도구를 마누스의 앞에 펼쳤다.

마누스는 이제 여기가 어디인지 확실히 깨달았다. 이곳은 고문실이다.

아마도 성의 지하에 은밀히 숨겨져 있는 곳이리라.

"여, 영주님! 왜 이러십니까!"

마누스가 절규하며 물었지만 아멜리아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부, 분명히 착한 영주라고 했는데? 실제로도 그런 거 같았는데?'

어느 영주가 사재를 털어서 영지민들을 위해 쓰겠는가? 몇 달이나 지켜본 아멜리아는 분명 그런 사람이었다.

그간 본 바로는 영지민들의 충성도도 무척이나 높았다. 상냥한 척하며 몇 번 베푼다고 얻을 수 있는 평판이 절대 아니었다.

아주 오랫동안 진심으로 영지민을 위해 일해야만 한다. 실제로 아멜리아는 그러했다.

그런데 이런 일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덜덜 떠는 마누스를 일별한 아멜리아가 고문관에게 말했다.

"내가 궁금한 게 참 많아. 난 궁금한 건 절대 못 참는 성격이거든."

고문관이 고개를 숙이며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10년 전 오늘 저녁에 뭘 먹었는지까지 기억나도록 하겠습니다."

"살려 달라는 말이 나오면 안 될 거야."

"그 말씀은...?"

고문관이 긴장한 표정을 짓자 아멜리아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제발 죽여 달라는 말이 나오게 해."

"...알겠습니다."

그러려면 섬세하게 고문해야 한다. 고문관은 장인 정신으로 자신의 도구를 다시 한번 꼼꼼하게 점검했다.

그 모습을 본 마누스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아멜리아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마누스가 욕심을 적당히 부렸으면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것이다. 원하는 만큼 돈을 주고 부드럽게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그런데 감히 얼토당토않은 금액을 불러 자신에게 바가지를 씌우며 흥정을 하려고 했다.

'멍청한 놈.'

정보를 얻은 뒤 다시 돈을 회수해도 된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저 마누스란 놈이 어떤 인간인지 단번에 깨달았다.

저런 놈은 자신이 가진 정보를 무기 삼아 휘두르며 제대로 말을 안 해 줄 게 뻔하다. 시간을 질질 끌며 그걸 이용해 받아 낼 수 있는 건 다 받아 낼 인간이다.

그러면 그냥 빠르게 가는 게 낫다. 그녀는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촤아아악.

고문실 앞에 커튼이 쳐졌다. 필요하다면 잔인한 광경도 얼마든지 볼 수 있지만, 굳이 안 봐도 되는 걸 볼 이유는 없었다.

"으아아아아악!"

지하에 마누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멜리아는 그 소리를 음악 삼아 들으며 눈을 감고 차를 마셨다.

* * *

고문은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정신력이 약한 마누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토해 내고 죽었다.

정말 살려 달라는 게 아니라 죽여 달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잔혹한 고문이 이루어졌다.

아멜리아는 마누스의 말이 이어질수록 경악과 불신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해 봐도 마누스의 말은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아멜리아는 몇 번이나 방 안을 서성이며 생각에 잠겼다.

"말도 안 돼.... 뭐가 나올지 정말 다 알고 준비까지 해 놨다고?"

마수의 숲은 오래전 모두가 개척을 포기한 곳이다. 그러니 정보도 없다. 그런데 지셀은 마치 마수의 숲에 갔다 와 본 사람 같았다고 한다.

마지막에 만난 블러드 퓌톤을 제외하고는, 무엇을 만나든 어떻게 싸워야 할지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알려지지도 않은, 사람들이 모르는 몬스터의 습성과 약점까지 다 알고 있었다고? 말이 안 돼....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당시 지셀의 환경과 위치를 생각하면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에겐 그럴 만한 경험도 없었고 나이도 너무 젊었다.

숙련된 용병들도 몬스터에 관해 완벽히 파악하고 있기는 쉽지 않다. 하물며 아무런 정보도 없고 새로운 몬스터들이 즐비한 마수의 숲에서는 더더욱.

"거기에 룬스톤이 있는 방향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니...."

믿을 수가 없는 말인데 실제로 결과가 나왔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전까지는 단순히 뛰어난 실력에 운이 더해져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참을 서성이던 아멜리아가 걸음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그놈... 어디선가 정보를 얻고 있는 게 분명해. 남들은 모르는 것들을 말이야."

332화 이거 꼭 해 보고 싶었어. (1)

지셀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보여 줬던 모습을 생각하면, 형편없는 놈처럼 행세하며 북부의 망나니로 불리던 시절에도 어느 정도는 실력을 숨기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수의 숲에 관해 아는 건 검술 실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혼자 생각해 낸 건 아닐 거야. 그런 게 통할 곳이 아니지."

지금은 후작이 된 당시 페르디움 백작도 마수의 숲에 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뭔가 알았다면 더 일찍 숲을 개척했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지셀이 어디선가 따로 정보를 얻었다는 뜻이다.

하나는 확실하다. 적어도 마수의 숲 초입 부분에 관해서는 확실한 정보가 있다는 점이다.

정보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크다. 자신도 만약 어떤 몬스터가 나올지 알고 있다면 마수의 숲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다.

아멜리아는 지셀의 행적을 돌아보았다. 마수의 숲 개척 외에도 지금까지 그가 한 일들은 혼자서 생각해 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기술 개발이야 드워프들이 도와줄 수도 있다. 가뭄을 예측한 것도 운이 좋았다고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외의 것들은 대부분 정보 없이는 성공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배후가 있는 건가? 아니면 오래된 문헌을 찾았나?"

어쩌면 페르디움가에서 그간 선조들이 마수의 숲을 개척하려고 시도했던 기록을 발견했을 수도 있다.

북부 영주들 모두가 개척을 포기한 뒤 잊혀 있던 것을 지셀이 발견하고 시도해 봤을 수도 있다. 지금으로서는 가장 유력한 가설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마법사나 현자 같은 누군가가 옆에 붙어 조언해 주고 있을 수도 있었다.

"확실한 건 남들이 모르는 정보를 알 만큼 정보력이 좋다는 것이야."

자신의 반란을 예측하고 움직였던 것도 정보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정보의 출처가 숨겨진 세력이든 정보 조직이든, 어쨌든 지셀에게는 무언가 있는 게 분명하다.

만약 그가 어떻게 정보를 얻는지만 안다면 자신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역으로 그 정보를 이용하거나 정보력을 뺏어 올 수도 있을 테니까.

"조심해야겠어. 어쩌면 지금도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을 수도 있겠네."

아멜리아는 지셀이 회귀자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에게 대단한 정보력이 있다는 걸 깨달은 것만으로도 의미가 컸다.

지금까지 말도 안 되는 운과 우연으로 치부했던 일들을 정보력으로 바꾸면 모든 게 이치에 들어맞는다.

물론, 정보가 있다고 해서 그런 일들을 실제로 해낼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스럽긴 했지만.

"참, 사람 궁금하게 하는 놈이란 말이지."

아멜리아는 불쾌함 섞인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는 지셀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면서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 그러면 예측할 수 없게 움직여야겠지."

상대가 비상식적이라면 자신도 비상식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지셀과 싸워서 좋을 게 없다.

그녀는 북부 최강의 자리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훨씬 더 높은 곳에 존재하니까.

그러니 당장은 지셀을 조심하되, 그를 상대하려고 힘을 쏟을 필요는 없었다.

"슬슬 올 시간인가?"

자신을 감시하는 건 지셀뿐만이 아니다. 해럴드를 잃은 공작가는 자신을 감시하는 걸 넘어 아예 통제하려 한다.

그러니 그쪽에서도 예측할 수 없게 움직여야만 했다.

"먼저 온다는 대리인부터 처리해야겠지."

아멜리아의 얼굴에 서늘한 살기가 번져 갔다.

* * *

"우와아아아! 영주님 최고!"

클로드는 지셀을 보자마자 자지러지게 소리를 지르며 기뻐했다.

이미 개척에 성공했다는 소식은 먼저 온 전령을 통해 들었다. 이번에 획득한 자원의 종류와 수량을 들었을 때는 기절할 뻔했다.

"살았다! 이제 살았어!"

룬스톤도 다 떨어졌고 현금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화장품 판매와 식량 판매, 배송 사업, 도로 사업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엄청났지만, 그걸로도 부족했다.

자금이 부족하니 최근에는 영지의 성장세도 조금 주춤했다. 벌린 일들이 많아서 나가는 돈은 무지막지하게 많은데 수입은 아직 그만큼 따라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자원을 얻었으니 이제 한시름 놓았다고 할 수 있다.

방방 뛰는 클로드를 보고 지셀이 피식 웃었다.

"좋냐?"

"아, 그럼요! 점점 돈이 떨어져 가서 내가 얼마나 머리가 아팠는데!"

호들갑을 떠는 클로드에게 지셀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잘됐네. 이번에 개척에 참여한 자들한테 보상을 줘야 하니까 그것부터 먼저 처리해."

"그래야죠. 제가 적당히 산정해서...."

"아니, 내가 이미 말했는데."

"...어떻게요?"

클로드는 불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셀이 쓸 때는 또 대단하게 쓴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지셀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개척단은 3년 치 급여를 한 번에. 인부들은 수당의 3배."

"...."

"빨리 처리해 줘."

"...저기... 우리가 당장 그만한 돈은 없는데요."

"지금 잔뜩 가져왔잖아? 앞으로도 계속 가져올 거고. 우리 이제 그 정도 줄 돈은 충분하잖아?"

"그건 현물이잖아요.... 보상금 주려면 돈으로 바꿔야 하잖아요...."

"아, 몰라. 아무튼 빨리 처리해 줘."

"...."

지셀은 제 할 말만 던지고 성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클로드는 황당하다는 듯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으아아아! 왜 난 행복할 수가 없어!"

기껏 돈 되는 것들을 구해 와서 살았다 싶었는데 또 돈이 엄청나게 나가게 생겼다.

그보다 더 힘든 건, 개척 보상금은 당장 처리해야 한다는 점이다.

고생한 자들을 치하하며 무려 영주가 직접 한 말이다. 제때 지키지 않으면 사람들이 영주에 대한 신뢰를 잃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영지에서 하는 일에 반발심을 품게 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클로드는 관리들을 불러서 닦달했다.

"빨리 상단들하고 마탑에 연락해!"

펜리스는 북부 최강이자 식량 생산의 중심지인 영지다. 무려 그곳 총관이 내린 호출이다.

펜리스 주변의 상단들은 하던 일을 모두 제쳐 두고 바로 달려왔다.

상단주들이 모이자 클로드는 거만한 표정으로 다리를 꼬며 말했다.

"내가 이번에는 '수고료'를 받지 않겠다."

뇌물왕이 뇌물을 안 받겠다고 하니 상단주들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대신 최대한 많이 사 가도록."

클로드가 내놓은 물건들을 보고 상단주들은 입을 쩍 벌렸다.

언제나 파는 식량과 철광석에 더해 각종 약재까지 즐비했기 때문이다.

클로드는 현금이 급한 와중에도 룬스톤과 요정의 축복은 팔지 않았다.

룬스톤은 마탑과도 거래해야 하고, 룬스톤이야말로 영지의 최고 전략 물자이기 때문에 내놓지 않았다.

앞으로 마법사들과 기사들의 실력을 빠르게 늘리기 위해서는 룬스톤이 많이 필요했다.

요정의 축복은 지셀이 따로 사용할 곳이 잔뜩 있다고 말해 두어서 건드리지 못했다.

제일 중요한 자원이 빠진 것을 모르는 상단들은 클로드가 내놓은 물건들을 앞다투어 잔뜩 사 갔다.

"평소에는 식량하고 철광석을 더 달라고 해도 통제하더니 이번에는 크게 내놓네?"

"소문을 듣자 하니 마수의 숲 개척에 다녀왔다던데? 병사들에게 줄 보상이 필요한가 봐."

"뭐, 그래도 이번에는 뇌물을 안 받아서 다행이네. 현금이 급하긴 급했나 봐."

"그러게. 이야, 이 만드라고라 뿌리 튼실한 것 봐 봐. 어디서 구해 온 거지? 보통 것들보다 두 배는 더 큰 거 같은데?"

클로드가 뇌물을 안 받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상인들은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거래를 하고 돌아갔다.

펜리스에서 대량의 룬스톤을 확보했다는 소식은 적염의 마탑에도 전해졌다.

마탑은 그간 식량을 사느라 룬스톤의 매입 수량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슬슬 식량 사정도 나아지던 차에, 룬스톤을 더 많이 살 수 있다는 소식까지 듣고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장로들은 호들갑을 떨며 휴베르트에게 말했다.

"탑주님! 이번에도 잔뜩 얻어 왔나 봅니다!"

"그간 왕래가 조금 뜸했는데 한번 찾아가시죠?"

"얼굴을 자주 보여야 더 친해질 거 아닙니까!"

장로들이 닦달했지만 휴베르트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싫어.... 나 가기 싫어...."

"아! 왜요!"

"걔 백작 됐잖아.... 거기에 이제 북부 최강이라며... 만나면 예의 지켜야 하잖아...."

"고작 그 이유로?"

"고작이라니! 그게 고작이라니!"

휴베르트는 장로들에게 삿대질까지 하며 열을 냈다.

그간 휴베르트가 지셀에게 굴욕당한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마탑의 탑주라는 신분 덕분에 윗사람 대접은 받을 수 있어서 어떻게든 자존심을 지켜 왔다.

그런데 이제는 그마저도 소용이 없게 되었다. 이제 지셀의 위치는 자신보다 높으면 높았지, 절대 낮지 않다.

"안 가! 나 안 갈 거야! 다시는 안 만날 거야! 나도 자존심이 있다고!"

휴베르트는 그 능력과 별개로 속이 좁고 유치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성격을 잘 아는 장로들은 어찌하지 못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망할 뻔한 마탑을 살려 준 사람이 펜리스 백작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고집을 부리는 걸 보면 사람이 참 한결같다.

어쨌든 자신들이라도 찾아가서 축하해 주고 선물이라도 바쳐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도 룬스톤을 얻으며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해서, 적염의 마탑에서도 장로들이 여러 마법 도구들을 선물로 바리바리 싸 들고 펜리스 영지에 찾아갔다.

클로드가 놀라운 수완을 발휘한 덕분에 펜리스는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현금을 확보했다.

그간 클로드가 쌓아 온 상단의 인맥(?) 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빨리 가져가라!"

그는 신경질적으로 병사들과 인부들에게 개척 보상을 나눠주었다. 원하는 자는 식량을 일부 섞어 받아 갔다.

그렇게 보상 처리가 끝나자 영지는 축제 분위기에 빠졌다.

"우와아아아! 내 생전 이렇게 큰돈은 처음 만져봐!"

"진짜 영주님 따라가기를 잘했다니까?"

"우리 영지 최고다! 영주님 최고다!"

개척단의 병사들과 인부들은 매일같이 지셀을 칭송하고 환호하기 바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건 꿈도 꾸지 못했다.

누군가는 하루 먹고살기도 힘들었고, 누군가는 제대로 일을 해도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 북부의 사람들은 그렇게 희망없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지셀이 영주가 된 뒤 모든 게 바뀌었다. 이들에게는 세상이 변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런 환경 변화는 놀라운 효과를 가져왔다.

"내가 죽더라도 이 영지를 지킬 거야."

"우리의 희망은 이곳밖에 없어."

"끝까지 영주님만 따르면 돼."

모두가 정당한 보상을 받으니 재산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당연히 삶의 질도 점점 좋아졌다.

그러자 사람들의 마음가짐도 예전과는 달라졌다. 돈이 됐든, 가족이 됐든 지킬 게 있는 사람은 강해지는 법이다.

특히 지셀에 대한 충성심은 몰라볼 정도로 높이 올라갔다.

한 번에 목돈을 얻은 사람들은 영지에서 펑펑 돈을 썼다. 주변의 상단들도 여러 사치품과 주류들을 들고 영지를 찾아왔다.

경제가 활성화된 덕분에 영지는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차게 변했다.

"우리 영주님이 진짜 대단하다니까? 100만 마리의 적을 혼자 뚫고 오는데. 캬!"

"진짜? 진짜 몬스터가 100만 마리나 나왔어?"

"아! 그렇다니까! 그것들을 이 몸이 같이 잡았다는 거 아니냐."

소문에는 언제나 살이 붙기 마련이다. 어느 순간 지셀은 100만 대군을 뚫고 승리를 거둔 초인이 되어 있었다.

병사들은 그렉스가 정확히 몇이나 몰려왔는지는 잘 모른다. 그냥 무지막지하게 많았다는 것만 안다.

그래서 그냥 되는대로 막 지르다 보니 얼토당토않은 숫자가 퍼진 것이다.

소문이 부푸는 만큼 영지에는 활기가 넘쳤지만, 클로드의 얼굴은 거무죽죽하게 죽어 가기 시작했다.

"돈... 돈이 없어...."

급하게 보상금을 나눠 주느라 현금이 또 바닥난 것이다.

물론 여전히 자원은 넘친다. 그 자원은 앞으로 계속 쌓일 것이다. 시간을 들여 팔면 다시 큰돈을 확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주변 상단들도 이번 거래 때문에 현금 주머니가 말랐다는 점이다. 당장 쓸 돈이 부족하니 클로드도 골치가 아팠다.

"에이! 짜증 나! 다들 이번 달은 아껴 쓰라고 해! 돈 없다!"

매일같이 신경질을 내는 클로드를 보고 벨린다와 길리언, 바네사, 갈바릭 등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돈 될 걸 잔뜩 벌어 왔는데 돈이 없다니, 이렇게 짜증 나는 영지가 또 어디 있냐고!'

남들은 다 즐거운데 혼자만 기분이 우중충한 클로드가 서류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으음... 그래도 어찌어찌 굴러가겠네. 두어 달 정도만 지나면 현금이 확보될 거야."

자원은 넘치니 결국은 시간이 문제다. 클로드는 잠시만 허리띠 꽉 졸라매고 잘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다.

"뭐 이제 사업들도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었으니.... 설마 영주가 또 할 일을 만들어 오진 않겠지?"

데스몬드 영지를 병합하고 군사력도 착실하게 증강하는 중이다. 각종 생산량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사람들의 생활이나 문화 수준을 올리는 건 멀리 봐야 하는 일이다. 이대로만 쭉 가면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주가 이제 뭔가 더 하자고 할 일은 없는 거 같았다.

"좋아, 이제 영주도 얌전히 영지에서 하는 일이나 구경할...."

클로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셀이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다음 일을 시작하겠다."

"...뭔데요?"

"펜리스 용병단을 창설한다."

클로드가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333화 이거 꼭 해 보고 싶었어. (2)

그럼 그렇지. 이 인간은 가만히 있을 인간이 아니었다. 뭔가를 안 하면 몸이 쑤셔서 죽는 병에 걸렸나 보다.

클로드는 마음을 가라앉힌 뒤 물었다.

"용병단을 왜 만들어요?"

"필요하니까."

"그런 거 필요 없거든요? 우리가 그런 일을 왜 하냐고요!"

말을 하다가 열이 뻗친 클로드가 발광하기 시작했다.

용병 짓을 하는 영지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드물지만 아예 영주와 영지 자체가 타국의 용병으로 뛰는 일도 있긴 하다.

보통 그런 영지는 작고, 가난하고, 생산되는 자원이 거의 없는 영지다.

하지만 지금 펜리스는 북부 최강이라 불리는 영지다. 식량 생산량만 해도 어마어마하고, 이번 개척으로 얻은 자원까지 고려하면 왕국의 어떤 영주와 비교해도 자금력이 뒤지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용병단을 만든다니, 도대체 그딴 짓을 왜 한단 말인가?

클로드의 발광에도 지셀은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왕국의 모든 용병을 내 밑에 둘 거다."

"와... 야망 뭐야...."

"지금 우리가 도로 사업하고 배송 사업을 하고 있잖아. 용병 사업도 거기 묶어서 같이 하면 돈이 될 거야."

"끄응... 그건 그렇지만, 굳이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드네요. 오히려 골치만 더 아플 거 같은데요."

솔직히 용병이라는 건, 어딘가에 소속되어 일하기 싫어하는 놈들이 태반이다.

안정적인 일자리도 거부한다. 일확천금을 노리니까 용병 짓을 하는 것이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이 그렇다.

한 마디로 자유를 즐기는 놈들이란 뜻이다.

거기에 말도 안 듣고 거친 놈들 천지다. 그런 놈들을 거둘 바에는 정예병을 하나 더 키우는 게 낫다.

"뭐든 하면 좋겠죠. 뭐든 많으면 좋고요. 그런데 그만큼 돈과 시간이 들어갑니다. 더 효율적인 일에 쓸 수 있지 않을까요?"

지셀도 클로드가 반대하는 이유를 모르는 게 아니다. 용병들은 개개인의 실력이 뛰어나도 집단전에 들어가면 정규군보다 약하다는 건 정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용병들을 얻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우리 군사력이 늘어나는 속도가 이제 한계에 부딪혔다. 지금 상태에서는 훈련을 아무리 해도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어. 그런데 아직 한참은 부족하거든."

"우리...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요?"

데스몬드를 차지하고 포로들까지 모두 받아들였다. 이제 펜리스의 병력은 거의 2만에 육박했다.

비록 하나로 통합하기는 했지만 지셀은 펜리스, 카발디, 데스몬드 3개의 영토와 3개의 작위를 거머쥔 대귀족이다.

홀로 이 정도 영토와 군사력을 가진 영주는 흔치 않다.

거기에 기술력과 자금력은 왕국 최고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부족하다고?

지셀은 여전히 배가 고프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 정도로는 절대 공작가를 이길 수 없어. 조금이라도 더 모아야 한다."

지셀은 단정적으로 평가를 내렸다.

사람들은 제대로 모른다. 공작가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자신과 친왕파가 힘을 합해도 공작가 하나를 당할 수 없다. 거기에 공작가를 따르는 영주들까지 더하면 정면 승부로는 필패다.

여기서 더 성장하려면 다른 영지를 또 차지해야 한다. 물론 언젠가는 그렇게 할 거지만,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공작가는 최대한 적은 손실로 왕국을 차지하고 싶어 해.'

분명 전생에는 그랬다. 상황마저 공작가에 유리하게 돌아갔기에 결국 그들은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 때문에 이제는 과격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겠지.'

공작가는 이제 힘으로 왕국을 뺏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손실을 피하려는 성격은 어디 가지 않는다. 철저하게 준비해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할 게 뻔했다.

'그전까지 조금이라도 더 전력을 강화하고 대비를 해야 한다.'

지셀은 클로드에게 상황을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공작가가 왕국 최강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이쪽과 얼마나 격차가 큰지는 다들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셀의 설명을 들은 클로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그 정도로 차이가 난다고요? 공작령에서만 10만 이상을 움직일 수 있다고요?"

"그래, 그것도 병사들만이야. 그 밑에 즐비한 수준 높은 기사들과 마법사들까지 따지면 어마어마한 전력이지."

공작가 휘하의 대영주들까지 합한다면 그들은 능히 수십 만의 대군을 소집할 수 있다.

친왕파 귀족들이 영지민을 다 다 긁어모아도 그 대군을 상대할 수는 없다. 전생에 자신이 직접 싸워 봤으니 이견조차 나올 일이 없었다.

클로드는 여전히 믿을 수 없었지만, 영주가 하는 말이다. 이제 영주가 하는 말은 설령 헛소리라도 허투루 들을 수가 없었다.

"끄응... 그렇다면 왕국 전역의 용병을 우리가 거느려도 격차를 줄이긴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하지만 용병은 용병 나름의 쓸모가 있는 법이야. 그리고 전력 차이가 크다, 작다 따질 필요 없이 조금이라도 우리 전력을 올리는 게 맞고."

"정말... 이길 수 있는 거 맞습니까?"

그러자 지셀이 갑자기 살기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이겨야지. 그러기 위해서 내가 있는 거니까. 오직 이 왕국에서 나만이 공작가를 박살 낼 수 있다."

무척이나 오만한 말이었다. 하지만 클로드는 왠지 모르게 그게 진실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셀이 클로드의 양어깨를 잡고 물었다.

"클로드, 우리보다 강력한 적을 상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어? 우리가 여기서 더 빠르게 강해질 수 없다면? 당장은 공작가보다 더 강해지기가 힘들다면?"

"에...."

박력 있는 지셀의 모습에 클로드는 순간 놀라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그러자 지셀이 사납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적을 약화해야지. 우리가 싸울 만하게 말이야. 각개격파를 해서 적의 전체 전력을 낮춰야겠지?"

"그, 그러면... 우리 다음 목표가 로드리크 후작령이니... 설마 그곳에서 활동하는 용병단을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렇지, 바로 그 용병단이 우선 목표야."

클로드는 그제야 지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로드리크 후작령은 지셀이 내전 때 가장 먼저 치기로 한 목표다. 서부의 요충지로 수많은 상단이 오고 가며 엄청난 돈이 도는 영지.

당연히 왕국에서 가장 많은 용병이 활동하는 곳이기도 했다. 상단들을 경호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도적 토벌과 호송 임무까지, 용병이 맡을 만한 일이 많기 때문이다.

페르디움 영지도 야만인들과 싸우느라 용병이 할 만한 일은 많지만, 영지에 돈이 없어서 용병들이 별로 몰리지 않는 편이었다.

"그, 그렇군요. 그곳에 왕국 최대의 용병단이 있으니까요. 잠깐, 그 용병단을 어떻게 뺏어 올 건데요? 로드리크 후작가와 긴밀한 관계라고 소문난 곳이잖아요."

"다 방법이 있지. 그건 걱정하지 마. 그쪽은 내가 맡을 테니 너는 일단 북부에 있는 중소 용병단들을 흡수하도록 해. 할 수 있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북부에 있는 용병단들이야 이제 다 약한 놈들밖에 없지 않습니까? 저한테 맡겨 주시죠."

클로드도 눈을 빛내며 지셀의 말에 동의했다.

어차피 공작가와 싸우는 건 정해진 일이다. 그래도 클로드는 친왕파와 힘을 합하면 공작가와 어느 정도는 힘겨루기를 할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셀의 말을 들어 보니 그게 아니었다. 믿기도 어렵고 믿고 싶지도 않은 말이지만,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어쨌든 이 영지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자신들이 살아날 확률도 높아지는 건 사실이니까.

열의 넘치는 클로드를 보고 지셀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좋아, 이제부터 다시 바쁘게 움직여 보자고."

* * *

목표가 정해지면 바로 움직이는 게 펜리스 사람들의 습성이다.

원래 그랬던 건 아니고, 지셀과 함께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클로드가 잔뜩 쌓인 서류들을 로웰에게 넘기며 말했다.

"우리 이제 용병 사업도 한다는 거 잘 알지?"

"에... 그럼요."

로웰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셀의 측근들은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다 전달받았다.

일이 바빠서 솔직히 하기 싫지만, 어차피 영주가 까라면 까야 하는 거다.

"왕실의 재가를 받으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어. 그러니 일단 영주 휘하의 용병단을 설립하는 걸 우선으로 할 거야."

귀족이 용병단을 다루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용병단을 개인적으로 후원하거나 거느리는 방법으로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다.

그런 방법을 쓰는 귀족은 용병단을 자신의 대리로 삼아 일을 시키거나 여러 사업에 쓰기도 한다. 더러운 일에도 종종 쓰는 편이다.

다른 하나는 영주와 영지군 자체가 용병단으로 활약하는 방법이다.

흔치 않은 일이긴 하지만 너무 가난하거나 자원이 없는 영지는 그렇게 몸으로 때우기도 한다. 아니면 영주가 싸움에 미친 놈이거나.

이 방식을 쓰려면 왕실의 재가와 보증을 받아야 한다. 영지 전체가 용병단으로서 움직인다면 영주가 돈을 받고 타국의 전쟁에도 끼어들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일어나는 전쟁에도 쉽게 끼어들지 못하도록 심한 제약을 건다. 그냥 내버려 두면 여기저기 끼어들어 사고를 칠 수 있기 때문이다.

펜리스 영지에서도 용병단 허가를 받기 위해 각종 서류를 준비해 브래포드 후작에게 보내 두었다.

하지만 처리되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기에 클로드는 먼저 용병단을 흡수하는 일부터 진행하기로 했다.

"나 한 바퀴 돌고 올 테니까 영지 잘 관리하고 있어."

"근데... 총관님이 용병들을 다 꼬셔 올 수 있겠어요?"

그러자 클로드가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돈이면 안 되는 게 없어. 어차피 요새 북부 용병들은 거의 다 우리 쪽 일을 하고 있잖아? 인부로 지원하는 놈들도 많은 판국이라 어렵지 않지."

클로드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돈을 많이 준다면 펜리스를 위해 일할 것이다. 그게 용병이니까.

지셀도 한때 북부 용병들을 잔뜩 고용한 적이 있다. 그때도 다 돈으로 처리했다.

하지만 펜리스 용병단의 산하로 넣는 건 좀 다른 얘기다.

"돈으로 들어오는 놈들도 있겠지만, 싫다는 놈들도 많을 텐데요?"

"아아, 어차피 펜리스의 군 소속이 아니라 용병단의 산하 단체로 거둬들일 거라 자주성과 독립성을 최대한 인정해 줄 거야."

"에이, 그걸 누가 믿어요. 자주성이고 뭐고, 위에서 필요할 때 부르면 굴러야 하고 수입도 바쳐야 할 텐데. 게다가 자유를 좋아하는 놈들이라 조금이라도 제한이 생기는 건 싫어하고요. 분명 거절하는 놈들 꽤 나올 겁니다."

그러자 클로드가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진심을 전하면 다 통하는 법이야."

그 말에 로웰은 무척이나 찝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새끼가 말하는 진심은 정상이 아니던데.'

로웰의 속마음을 알 리가 없는 클로드는 영지의 일을 그에게 맡기고 바로 움직였다.

북부의 용병단들은 다들 규모도 작고 가난하다. 그들은 클로드의 제안에 솔깃한 기색을 보였다.

"펜리스 용병단? 펜리스 백작님이 용병단을 만든다고요?"

"그럼, 이미 다 등록도 했어. 우리가 북부 최강인 거 알지?"

"아니, 그런데 그런 곳에서 왜 용병단을 만들고 우리를 영입합니까?"

"그야 너희들 열심히 굴리려고.... 아니, 우리가 여러 가지 사업을 하잖아? 이제 용병 사업도 진출하려는 거지. 아주 크게 말이야."

"오오...."

펜리스 백작이 왕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다양한 사업을 하는 건 다들 잘 알고 있다.

마수의 숲 개척, 식량 판매, 화장품 판매, 도로 건설, 배송 사업 등 굵직한 사업들로 이미 유명해진 상태다.

"이미 우리가 건설한 도로로 친왕파 영지가 거의 다 연결되어 있다는 건 잘 알지? 거기에 배송 사업도 성황리에 이루어지고 있고. 그래서 아무래도 많은 인력이 필요해. 특히 호위나 운송 업무에는 용병들이 제격이잖아?"

용병들은 클로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 가장 많이 맡는 일이 호위나 운송이다.

싸움도 하고, 건설도 하고, 아무튼 사람이 필요한 데라면 여기저기 다 돈 받고 가는 게 용병이었다.

"으음, 좋습니다. 저희도 끼도록 하죠. 대신 저희 용병단이 그대로 유지되는 조건은 맞죠?"

"아, 그럼. 우리 펜리스 산하에서 필요할 때만 같이 움직이면 되는 거야. 그리고 보수를 받으면 일정 상납금만 바치면 되는 거고. 대신 우리가 뒤를 봐주고 여러 일감도 구해 줄게."

"좋습니다. 펜리스 용병단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어차피 작은 용병단들은 잡일거리 말고는 구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펜리스 용병단 밑으로 들어간다면 더 비싸고 좋은 일거리를 많이 수주할 수 있을 것이다.

펜리스 영지에서는 많은 일을 하고 있고, 그중 괜찮은 일감은 아무래도 자신들 산하 단체에 더 몰아 주고 싶어 할 테니까.

물론 전쟁이 나면 꼼짝없이 같은 편으로 끌려가겠지만 그들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북부 최강인데 뭔 문제가 있겠어? 거기에다가 친왕파의 브랜포드 후작이 밀어주는 거물인데.'

그 정도로 지셀의 명성과 권위는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올라가 있었다.

아주 작은 소규모 용병단은 좋은 조건을 몇 가지만 제시해도 쉽게 넘어왔다. 딱히 자신들의 자유를 침해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혜택은 더 좋았다. 든든한 뒷배도 생기고 말이다.

하지만 모든 용병단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50여 명의 용병들을 이끄는 '빅풋 용병단'의 단장 제이크는 클로드의 제안에 단호하게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하하...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희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덩치가 무척 컸다. 특히 발이 매우 커서 별명도 '빅풋'이라고 붙었다. 큰 덩치만큼 힘이 좋아 최근에는 꽤 이름을 날리는 자였다.

언제나 사나이답게 행동해 남자 중의 남자로 알려진 사람이지만, 그만큼 거만하기도 했다.

건방진 표정으로 말하는 그를 보며 클로드가 생각했다.

'감히 내 제안을 거절해?'

속물 중의 속물인 클로드다. 그는 자신의 제안을 단번에, 그리고 건방진 표정으로 거절한 제이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새끼 조져야겠다.'

말을 안 들으면 조져야 한다. 클로드가 지셀에게 가장 확실하게 배운 것이었다.

334화 이거 꼭 해 보고 싶었어. (3)

혹시 제이크가 한번 튕겨 본 걸 수도 있다. 그런 거라면 봐줄 수 있다.

클로드는 답답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왜? 우리 용병단 산하에 들어와도 딱히 간섭도 안 하고 일감도 많이 몰아주고 혜택도 많이 줄 거라니까? 이득이면 이득이지, 손해 볼 일이 없어. 사람이 큰물에서 놀아야지."

제이크도 클로드가 하는 말에 틀린 점이 없는 건 알고 있다. 그도 펜리스에서 하는 여러 사업에 몇 번 참여한 경험이 있다.

보수도 다른 곳보다 많이, 정해진 날 확실히 준다. 그럼에도 거절하는 이유가 있었다.

'펜리스 백작은 전쟁광이야. 분명해. 게다가 소문만 들었을 때는 정상이 아닌 사람이었어.'

디갈드 백작령, 카발디 백작령, 데스몬드 백작령까지. 단 몇 년 사이에 큰 전쟁을 세 번이나 치른 사람이다. 한 마디로 정복 군주라 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그가 하는 일을 보면 미친 사람이나 생각할 법한 게 대부분이었다.

그런 자의 산하로 들어간다면 언제 목숨이 위험해질지 모른다.

'공작가와 사이도 나쁘다지? 아무리 친왕파가 뒤를 봐준다고 해도, 내전이 일어나면 우리도 어쩔 수 없이 끌려갈 거야.'

전쟁이 용병들에게 가장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라고는 하지만, 위험한 전쟁에 자발적으로 끼어드는 용병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참여하더라도 승리가 확실한 곳에 붙거나, 최소한 이길 가능성이 있는 쪽에 끼어든다. 하지만 펜리스 백작 밑으로 들어가면 그런 판단조차 할 수 없이 말려들 것이다.

용병치고는 신중한 편인 제이크는 그런 일에는 끼고 싶지 않았다.

"저희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이런 얘기는 좀 불편합니다. 총관님."

"진짜? 진짜 생각 없어?"

"네, 그렇습니다."

"후... 그래, 일단은 오늘은 물러날게. 다음에 보자고."

클로드가 순순히 물러나자 제이크가 예의 그 건방진 웃음을 지었다.

"이거 참, 죄송하게 됐습니다. 다음에는 좀 싸게 일을 맡아 드릴 테니 이런 얘기는 안 하셨으면 합니다."

"금방 다시 보게 될 거야."

그렇게 물러난 클로드는 다음날 수백의 병사들을 끌고 다시 제이크를 찾아왔다.

"이게... 무슨 뜻이십니까?"

제이크가 불쾌하다는 듯 클로드를 노려보았다.

딱히 겁을 먹지는 않았다. 만약 여기서 힘으로 겁박한다면 펜리스 백작의 명성에 크게 금이 갈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 일을 벌이면 오히려 다른 용병단도 회유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제법 경험이 많은 제이크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건방진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클로드도 병사들을 뒤로 물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병사들로 협박을 하려고 온 건 아니니까."

"그러면 이번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그러자 클로드가 목소리를 몇 번 가다듬더니 크게 소리쳤다.

"나, 클로드는 빅풋 용병단의 단장 제이크에게... '모리아나의 인정'을 요청하겠다!"

전쟁의 여신 모리아나의 이름을 내걸고 하는 대결. 바로 지셀이 카오르를 쥐어패고 힘으로 설득할 때 썼던 방식이었다.

지금 클로드는 자신의 허약한 몸으로 용병단 단장과 싸우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가장 먼저 웬디가 황당한 표정으로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뒤를 이어 따라온 병사들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영지에서 몸으로 최약체를 따지자면 단연코 클로드는 순위권에 드는 남자다. 오죽하면 너무 바쁘고 힘이 없을 때는 웬디가 업고 다니기까지 했다. 거의 신생아 수준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저 거친 용병과 대결을 하겠다고? 보통 용병도 아니고, 용병단 단장이다.

아무리 작은 용병단이라도 단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최소한의 무력과 경험을 갖추어야 오를 수 있는 자리다.

다들 황당해하는 동안 클로드는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가며 외쳤다.

"뭐 해! 어서 대결을 받아야지! 이런 건 피하면 안 되는 거라며!"

제이크도 당황하며 몸을 뒤로 뺐다.

"그... 무슨 소리입니까? 그건 용병들끼리의 내기입니다. 총관님이 하실 만한 게 아닙니다."

"나는 펜리스 용병단의 총관이다. 용병단 소속이면 나도 용병이야."

억지다. 억지인데 명분 자체는 그럴듯했다. 실제로 펜리스 용병단은 정식 단체로 설립 보고를 했고 여러 지역의 용병 길드에도 등록했기 때문이다.

"어, 어...."

제이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저런 말라깽이 정도야 한 번에 피떡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그런데 진짜 피떡으로 만들어도 되나?

'명분이야 있으니 다들 뭐라고 못할 테지만....'

대결을 청해 놓고 뒈지면 뒈진 쪽이 비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자신에게 뭐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차마 할 수는 없었다. 제이크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거절하겠습니다."

'거절했다고 내 명성이 떨어지진 않겠지.'

피한다고 해서 딱히 수치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누가 이런 자와 용병단을 걸고 내기를 한단 말인가?

하지만 클로드는 생각보다 집요했다.

"너 그러면 내가 진짜 소문 크게 낸다? 네 수하들이야 이해해 준다 쳐도 다른 사람들은 과연 그럴까? 그걸로 항상 시비 걸거나 비웃을 텐데? 다른 지역으로 가면 쫓아가서 소문낼 거야."

"이익...."

제이크는 이를 갈았다. 클로드의 말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다. 거친 용병들이 상대의 상황을 고려하고 놀릴 리가 없다. 툭하면 그걸로 시비를 걸거나 조롱할 게 확실했다.

'놀릴 거리가 생겼는데 안 그럴 놈은 없지. 시비 걸고 싶으면 그걸 이용해도 되고 말이야.'

거기에 클로드에 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정말 자신이 무서워서 피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명성도 떨어지고 일감도 줄어들 게 뻔했다.

원래 소문이란 게 그렇다.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기는 쉽지만 그걸 바로잡기 위해서는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

즉 자신은 쓸데없는 일에 힘을 빼고 고생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죽여야 하나?'

제이크의 눈에 슬슬 살기가 감돌자 웬디가 클로드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지금 뭐 하세요? 싸움도 못 하면서 무슨 대결이에요!"

"오... 나 걱정하는 거야? 그렇게 열 내는 건 오랜만에 보는데?"

"지금 장난하세요? 당장 취소하세요."

"사나이의 대결에 취소는 없다. 나는 지는 싸움을 하는 승부사가 아니야."

278년짜리 노예 클로드가 거창하게 말하며 소매를 휙 잡아 뺐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순간 얼이 빠져 웬디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진 상황에서 클로드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뭐 해! 어서 안 묶고!"

용병들이 다가와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제이크와 클로드의 손을 묶었다.

그들도 묶으면서 '뭔가 이건 좀 아닌데'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갔다.

두 사람이 단검을 들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덩치부터 거의 두 배쯤 차이 난다. 키도 제이크가 머리 하나 반 정도는 더 커 보였다.

'진짜! 왜 항상 저 모양이야!'

웬디는 어쩔 수 없이 단검을 꺼냈다. 공격이 시작되면 강제로 클로드를 구출해 올 생각이었다.

미우나 고우나 영지의 총관이자 중요한 사람이다. 저 인간이 없으면 영지가 제대로 안 돌아간다.

제이크는 클로드를 노려보며 단검을 매만졌다.

'어떻게 하지? 적당히 고통을 줘서 항복하게 해야 하나?'

대결을 무를 수는 없으니 몸 몇 군데에 구멍 좀 뚫으면 될 것이다. 뭔가 이상할 정도로 죽이고 싶은 놈이긴 하지만 진짜 죽일 자신은 없었다.

대영지의 총관을 죽였다가는 이겨도 피곤한 인생이 될 게 뻔했다.

'하, 진짜 이상한 놈한테 걸려서는....'

상처를 내도 세심하게 내야 한다. 제이크가 마음을 다잡고 찌를 곳을 신중하게 가늠하고 있을 때, 클로드가 아주 작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제이크, 38세. 빅풋 용병단 단장."

"...?"

뜬금없이 자기 이름은 왜 부른다는 말인가? 제이크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이 클로드의 말이 이어졌다.

"항상 호쾌한 남자인 척을 하지만 다 연기. 사실은 무척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성격."

"...?"

"15살 무렵 동부에서 가죽 공예사로 일하다가 가죽의 매력에 흠뻑 빠짐."

"서, 설마...."

제이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지금 클로드의 입에서는 자신의 비밀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후 가죽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한때 가죽으로 만든 속옷만 입고 다녔으며.... 가죽 채찍을 만들어 당시 만나던 여자에게 때려 달라고 했다가 바로 차임."

"자, 잠깐!"

"소문이 나자 북부로 도망쳐 와서 용병계에 투신. 이후 밤마다 정체를 숨기고 은밀하게 밖에 나가 돈을 줄 테니 가죽으로 자기를 때려 달라 부탁을.... 용병을 한 이유도 맞을 때 기분이 좋아서.... 손수 만든 가죽 채찍의 이름은 '릴리스'. 채찍을 숨긴 곳은.... 최근에는 보름 전에.... 어휴, 이래 놓고 무슨 남자 중의 남자? 항상 주변 눈치 보면서 몸 사리는 주제에."

클로드는 제이크의 부끄러운 비밀을 마구 뱉어 냈다.

제이크는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이게 소문이 난다면 자신은 절대 이곳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다.

'죽여야 해!'

안색이 창백해진 제이크가 움직이기도 전에 클로드가 무척 빠르게 말했다.

"이거 다 문서로 남겨 둠. 아는 동생한테도 말해 둠. 나 죽으면 오늘 내로 소문 다 남."

아는 동생은 로웰이었다. 어쩔 수 없이 제이크는 눈치를 보며 강하게 속삭였다.

"총관님! 차라리 따로 만나서 조용히 말씀하셨어도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클로드가 해맑게 웃으면서 답했다.

"나 사람들 앞에서 이거 꼭 해 보고 싶었어. 그래서 구경하라고 병사들도 많이 데리고 온 거라고."

'아, 이거 진짜 미친 새낀가?'

이딴 일에 병사들을 수백이나 동원해? 자기 과시를 하려고?

제이크는 이를 악물었다. 숨이 가빠지고 온몸에 식은땀이 마구 흘렀다. 웬 미친놈한테 걸려도 정말 단단히 잘못 걸린 거 같았다.

"뭐, 더 말해 줘? 이거 말고도 재미있는 거 많던데? 어우, 너란 남자 정말...."

"헤헤...."

제이크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소문이 나면 자신은 사회에서 매장을 당할 것이다.

사람들은 왜 둘이 안 싸우고 저렇게 입만 달싹이는지 궁금해했다.

조금 떨어져 있던 용병은 두 사람이 얘기를 멈춘 듯하자 손을 들며 외쳤다.

"시작!"

원래라면 바로 서로의 단검이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제이크는 단검을 든 손을 바들바들 떨 뿐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클로드가 괜히 멋진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안 와? 그럼 내가 먼저 가지. 이얍!"

단검을 내지르는 그는 정말 한심할 정도로 느리고, 동작도 엉망이었다.

하지만 제이크는 그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그냥 가슴에 찔리고 말았다.

푹!

얕다. 힘도 더럽게 약해서 단검은 제이크의 가슴 근육조차 제대로 뚫지 못했다. 피가 한 방울 난 게 전부였다.

제이크가 이 상태에서 단검을 휘두르면 클로드는 바로 목이 베일 것이다.

다들 긴장한 상태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웬디는 바로 뛰쳐나갔다. 그런데 입술만 부들거리던 제이크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으, 아악!"

무척이나 어색한 외침을 내지르며 제이크는 바로 쓰러졌다. 그러고선 다시 말했다.

"제가, 제가 졌습니다! 그만! 이, 이렇게 강할 수가! 제가 죽을 거 같습니다! 아! 소드마스터인 줄!"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벌리고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왜 저딴 공격을 받고 저렇게 쉽게 항복한단 말인가?

하지만 클로드는 거만한 표정으로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훗, 시시해서 죽고 싶어졌다."

그러고는 손을 묶은 줄을 끊으려고 단검을 열심히 움직였다. 하지만 클로드의 힘으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줄이 잘 끊기지 않았다.

웬디가 잽싸게 다가와 줄을 잘라 내고 말했다.

"뭐예요? 뭘 어떻게 한 거예요?"

"난 이거 백 번도 넘게 해 봤거든."

"...."

지셀이 카오르와 싸울 때 저 말을 했던 건 은근히 잘 알려졌다. 클로드는 그걸 따라 한 것이다. 꼭 한번 해 보고 싶었다.

팔에 엉킨 줄을 다 풀어낸 클로드는 쓰러진 제이크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말했다.

"우리 이제 함께하는 거지? 용병단은 안 뺏을게. 펜리스 용병단의 밑으로만 들어오면 되는 거야. 일감은 많이 줄 테니까 상납금은 제때제때 보내고. 주변 정보들도 같이."

"그, 그럼요. 제가 졌으니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사람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저렇게 약한 사람이 용병단 단장을 이길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건 빅풋 용병단 소속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단장이 일부러 져 줬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펜리스가 북부를 다 집어삼키는 중인데 뻗대서 좋을 건 없다. 그러니 그냥 명분을 만들려고 그랬다고 생각한 것이다.

진실은 클로드와 제이크 두 사람... 아니, 정보를 잔뜩 긁어 온 첩보관 로웰까지 세 사람만이 알고 있는 것이지만.

클로드는 그런 식으로 북부에서 활동하는 용병단들을 집어삼켰다.

"휴, 이거 너무 쉬운데? 우리 영주님은 잘하고 계시려나 몰라."

클로드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대부분이 소규모 용병단이니 적절한 회유와 협박이 무척이나 잘 통했다.

말 안 들으면 그냥 부끄러운 비밀을 속삭여 주면 된다. 그게 클로드의 특기였으니까.

북부에서 일이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되는 동안, 지셀은 측근들과 함께 서부의 한 도시에 들어섰다.

335화 뭐가 그렇게 좋은 거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