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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345

335화 뭐가 그렇게 좋은 거지? (1)

드레이크 용병단은 서부 최대의 용병단이다.

무려 500여 명의 용병이 속해 있고 산하 용병단만 수십에 이른다.

이들이 모두 모이면 약 3천에 이르는 병력이 된다. 그야말로 왕국 최대의 용병단이라 할 수 있었다.

북부는 용병이라 해 봐야 허접한 놈들밖에 없고, 동부엔 제법 괜찮은 용병단이 몇몇 있긴 하지만 서부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서부에는 수많은 상단과 귀족들이 드나드니 그 어느 곳보다 일감도 많고 돈도 많이 풀렸다. 그렇기에 용병도 그만큼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서부 최대의 용병단을 수족처럼 부리는 자가 바로 로드리크 후작가의 이 공자, 마르틴이었다.

드레이크 용병단은 평범한 용병 일도 많이 하지만 로드리크 후작가의 더러운 일도 그에 못지않게 많이 한다.

그래서 높은 명성만큼 악명도 꽤나 커진 상태였다.

"후우...."

드레이크 용병단의 단장, 도미닉은 매일같이 화가 난 표정으로 술을 마셨다. 눈빛에 은은하게 어린 살기 탓에 본래도 날카롭던 인상이 더 매서워 보였다.

그는 드레이크 용병단을 여기까지 키워 낸 실력자였지만, 요새는 다 때려치우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개 같은 자식...."

그가 욕하는 대상은 마르틴이었다.

도미닉은 마르틴의 명에 따라 더러운 짓을 수도 없이 했다. 이권 다툼에 끼어드는 거야 그렇다 쳐도, 쓸데없이 양민을 납치하거나 죽이는 추잡한 짓들까지 해야 했다.

그가 마르틴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가족이 누명을 쓰고 인질로 잡혀 있기 때문이었다.

"원수의 말을 따라야 한다니...."

마르틴은 이미 도미닉의 가족 중 한 명을 본보기로 죽인 전적이 있었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임에도 남은 가족의 목숨이 걸려 있어 그놈에게 반항할 수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마르틴은 도미닉이 축출될 것을 대비해 다른 간부들의 가족까지 인질로 붙잡아 둔 아주 비열한 놈이었다.

"도무지 빠져나갈 방법이 없구나...."

용병단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그놈에게 약점을 잡혀 있으니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다른 귀족에게 선을 대거나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조금이라도 수상한 짓을 하려고 하면 마르틴은 바로 잔악무도하게 인질을 죽였다.

다른 간부들도 가족들이 죽은 경험이 있어 마르틴에게 꼼짝도 못 했다. 이러니 드레이크 용병단은 뭐든 그놈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악마 같은 놈이 권력과 배경까지 쥐고 있으니 정말 X 같은 세상이야."

그의 아비는 서부군 총사령관이자 서부의 맹주인 로드리크 후작이다. 드레이크 용병단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로드리크 후작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그러니 매일같이 술을 마시며 썩은 속을 달래는 수밖에.

도미닉이 끝없이 술을 퍼마시던 중, 수하 하나가 들어와서 말했다.

"단장님, 새로운 명령이 왔습니다."

"또 누굴 죽이라더냐?"

"...네, 산적으로 위장하여 켐벨 상단을 습격하라고 합니다."

"미친 새끼."

켐벨 상단은 마르틴이 거느리고 있는 상단과 경쟁하는 곳이다. 그만큼 자금력도 꽤 있고, 귀족이 뒷배를 봐준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런 곳을 아무렇지도 않게 습격하고 짓밟으라니. 걸리면 자신들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마르틴은 이런 식으로 자신들을 마구 다뤘다.

"제 아비인 로드리크 후작을 믿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른 귀족의 상단을 쓸어 버리라니... 그 새끼도 초조한 모양이군."

마르틴 또한 욕심이 있어, 형을 제치고 자신이 후계자 자리를 꿰차고 싶어 했다.

그렇기에 자신의 세력을 불리고 힘을 키울 수만 있다면 무리한 수도 서슴없이 강행했다.

도미닉은 술잔을 내려놓고 다시 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다가는 조만간 우리가 먼저 죽겠구나."

날이 갈수록 요구가 과격해지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들이 강력한 용병단이라 해도 힘에 한계가 있다.

자칫 잘못하면 귀족들의 협공을 받아 자신들이 죽을 수도 있다. 그러면 인질들도 죽는다.

로드리크 후작과 마르틴은 자신들이 죽어도 모른 척할 것이다. 아니, 죽어도 그냥은 못 죽게 할 것이다.

아마 정적과의 싸움에 던져 놓고 서로 죽게 할 것이다. 그들은 그 정도로 잔인하고 악독한 놈들이었으니까.

드레이크 용병단은 이미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진작 북부로 갈 걸 그랬다."

도미닉이 한숨을 내쉬었다.

요새 북부는 예전과 다르게 굉장히 활기차다고 한다. 펜리스 백작 덕분에 여러 산업이 발달하고 용병들이 할 일도 많아졌다는 소문은 이미 퍼질 대로 퍼진 상태였다.

만약 북부에서 세력을 키웠으면 로드리크 후작가에 이렇게 붙들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북부에서 지냈다면 그 유명한 펜리스 백작도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아마... 만난다면 전쟁 때 만나게 되겠지요."

"그렇겠지."

도미닉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로드리크 후작은 공작파의 대영주다. 그리고 펜리스 백작은 공작파와 적대하는 영주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죽기 전에 꼭 한 번쯤은 만나 보고 싶긴 해. 용병들을 데리고 시작해서 그런 업적을 이뤘다고 했으니까. 나도 용병이라 그런지 이야기만 들어도 가슴이 많이 뛰더라고."

도미닉은 지셀의 소문을 듣고, 차라리 따른다면 그런 사람을 따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더러운 자의 명만 따르는 자신의 상황이 비참해서 더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지셀이란 인물을 더욱더 선망하고 동경했다. 그에 관해서는 꾸준히 흥미를 보이며, 소식을 빠짐없이 들으려 했다.

그것이 그에게 남은 유일한 낙이었으니까.

하지만 수하는 냉정하게 현실을 얘기했다.

"몰래 만나게 되면 로드리크의 이 공자가 가만히 있지 않겠죠. 인질들을 하나씩 죽일 겁니다."

"그래, 나는 이제 사람 하나도 제대로 못 만나는 몸이 됐구나."

도미닉은 다시 자조적인 웃음을 내뱉었다.

자신의 인생은 이제 여기서 끝이 난 것과 다름이 없다. 평생 남의 개로 목줄이 매인 채 살다가 악명만 잔뜩 얻은 채로 생을 마감할 것이다.

그때,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우와아아악! 습격이다!"

"이 새끼들 뭐야! 왜 이렇게 빨라!"

"단장님이 있는 곳으로 간다! 잡아! 어서 막으라고!"

한껏 시끄러운 소리에 도미닉이 인상을 찌푸리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콰앙!

곧 문짝이 부서지며 일단의 무리가 들어왔다. 참으로 간도 큰 놈들이었다. 이곳이 어디라고 이리 깽판을 친단 말인가.

곧 수십의 수하들이 달려 들어와 침입자들을 에워쌌다. 안에 다 들어올 수가 없어 바깥에도 진을 쳤다.

도미닉은 침입자들의 선두에 선 젊은 남자를 보며 물었다.

"넌 뭐냐?"

남자는 그런 도미닉을 보며 씨익 웃었다.

"오다가 소문 좀 들었는데 너 내 팬이라며? 얘기가 좀 빨라지겠어."

"뭐?"

"내가 바로 펜리스 백작이다."

갑자기 난입한 자는 지셀이었다. 그는 엄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도미닉은 눈살을 찌푸리며 지셀을 바라보았다.

수하들은 갑자기 난입한 사람이 귀족이라 우기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쯧쯧, 후작가에 하도 당해서 다들 기개를 잃었어. 나도 할 말은 없다만.'

도미닉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펜리스 백작은 자신이 동경하고 선망하는 인물이다. 당연히 꼭 만나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자의 말은 믿을 수가 없었다.

무슨 북부의 대영주가 이렇게 다짜고짜 쳐들어온다는 말인가? 그것도 몇 안 되는 수행원들만 이렇게 데리고 돌아다닌다고?

미친놈이 아닌 이상 그럴 수는 없다. 공작파의 귀족이 알면 어떻게든 암살을 하고 싶어서 난리를 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상대의 말이 거짓이라고 도미닉이 자신하는 이유는 또 하나가 있었다.

"너는 펜리스 백작이 아니다."

"무슨 소리야? 내가 펜리스 백작인데."

"나는 펜리스 백작의 얼굴을 알고 있다."

"뭐? 내 얼굴을?"

"네가 아니라 펜리스 백작의 얼굴. 그래서 잘 알고 있지. 내 소문을 어디서 얻어듣고 사기를 치러 온 모양인데 그딴 어설픈 수는 통하지 않는다."

"...?"

이번에는 지셀이 황당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 얼굴을 알고 있다면서 펜리스 백작이 아니라고? 누가 나를 사칭하고 다니는 건가?'

"내가 여기까지 비밀리에 온 건 맞는데, 펜리스 백작 맞다니까?"

지셀이 자신의 신분증을 꺼내 내밀었다. 무척이나 고급스럽게 문장이 새겨진 귀족의 신분증이었다.

도미닉은 그걸 보고서도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돈만 많으면 신분증 위조하는 건 어렵지 않지. 우리가 그런 일도 같이 대행하고 있거든. 마음만 먹으면 몇 개든 만들 수 있다."

"...."

지셀은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망나니 취급은 수도 없이 당해 봤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당한 건 처음이다.

그래서 따지듯이 물었다.

"아니, 내가 펜리스 백작이라는데 왜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아니라고 해?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렇게 말하는 건데?"

"나한테 펜리스 백작의 초상화가 있으니까. 그것도 아주 자세하고 정확한 초상화가 말이야."

"...?"

지셀은 눈을 끔뻑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렸을 때 말고는 초상화를 그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도미닉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집무실의 한쪽 구석으로 갔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큰 상자를 하나 들고 왔다.

곧 도미닉은 상자에서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것은 바로 초상화가 들어 있는 고급스러운 액자였다.

"봐라, 이게 내가 비싼 돈을 주고 사들인 펜리스 백작의 초상화다."

술을 마시던 중이라 도미닉은 살짝 취한 상태였다.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지셀에게 초상화를 보여 주었다.

짠!

"...와우."

도미닉이 자랑스럽게 내민 초상화를 본 지셀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왜 내 얼굴이... 저 모양이야?'

미묘하게 닮기는 했다. 그런데 너무 과하게 보정이 된 느낌이었다.

코는 너무 바짝 솟아서 콧구멍이 숨쉬기 힘들 정도로 작다. 턱은 너무 갸름해서 거기 찔리면 사람이 죽을 것만 같았다.

얼굴 전체에 각이 날카롭게 서 있는 것이, 무슨 조각상을 그려 놓은 것만 같았다.

"너... 그 초상화가 진짜 펜리스 백작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얼굴도 모르면서 그것만 보고 믿는다고?"

그러자 도미닉이 거만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믿을 만한 사람한테 거액을 주고 산 거다. 이미 확실한 인증도 받았지."

"...믿을 만한 사람?"

"난 펜리스 백작에 대해 무척 잘 알고 있다. 정말 많은 애장품을 가지고 있거든."

"...애장품?"

지셀이 얼빠진 표정으로 묻자 도미닉은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못 믿는 거 같은데, 사칭범인 너에게 특별히 보여 주도록 하지. 앞으로는 펜리스 백작을 사칭하지 말도록."

특별히가 아니라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두꺼운 책 하나를 상자에서 꺼내 소중하게 매만졌다.

"이건 펜리스 백작의 일대기다. 망나니라 불리던 시절부터 데스몬드 백작과의 전투까지 기록한 초판본이지. 앞으로 더 발간될 예정이야. 가격도 무척 비싸다고."

'누가 그딴 걸 쓴 거지?'

절대 펜리스에서 진행하는 사업이 아니다. 지셀은 그딴 걸 지시한 적도 없고 계획한 적도 없었다.

도미닉은 지셀의 반응에는 관심이 없었다. 자신의 물건을 자랑하기에만 바빴다. 그는 상자에서 이것저것을 꺼내 지셀에게 보여 주기 바빴다.

"이건 펜리스 백작이 쓰던 물잔이다. 이것도 엄청 비싸게 주고 산 거야."

"...?"

"이건 펜리스 백작이 쓰던 말의 안장이다. 이것도 가격이 꽤 나가서 구하기 힘들었어."

"...??"

"이건 펜리스 백작이 입던 외출복이다. 정말 힘들게 경매로 구한 물건이지. 그리고 이건 속옷...."

"...???"

지셀은 도미닉이 꺼내는 물건들을 보고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정말 자신이 예전에 썼던 물건 같았기 때문이다.

별별 물건들이 다 있었다. 집에 도둑놈이 들어와서 거하게 한번 털어 간 듯한 느낌이었다.

긴가민가하고 있을 때 도미닉이 결정적인 물건을 꺼냈다.

"자, 봐라. 이건 펜리스 백작이 전쟁터에서 직접 쓰던 검이다. 내 애장품 중에서 순위를 다툴 정도로 귀한 물건이지."

'저거... 진짜 내 검이잖아?'

다른 물건들은 비슷한 것들이 많아 확신할 수 없었지만 검은 확실히 진짜였다.

지셀은 딱히 무기를 가리거나 아끼지 않는다. 되는대로 마구 주워다 쓰고 집어 던진다. 그래서 전장에 버려지는 무기도 참 많았다.

그래도 자신이 썼던 검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애초에 영주의 검에는 특별한 인장이 찍혀 나오니 구분을 못 하는 게 이상하다.

저건 분명 자신이 쓰던 검이었다. 도대체 자신이 쓰던 물건들이 어떻게 유출이 됐단 말인가? 전장에 버리고 와도 어지간하면 병사들이 다시 수거해 왔을 텐데?

지셀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그 물건들 다 어디서 구한 거야?"

"믿을 만한 사람한테 구했다니까?"

"그러니까 믿을 만한 사람 누구?"

도미닉은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펜리스의 총관님에게 구했다. 그분이 직접 인증서도 써 주셨지."

"...총관?"

"그래, 내 수하가 직접 펜리스의 총관을 만나서 받아온 것이다. 그것도 경매를 통해서 아주 비싸게 말이지. 내가 직접 가고 싶었지만 사정상 이 지역을 벗어나기 힘들어서 말이다."

"...."

도미닉의 말을 들은 지셀은 눈을 감았다.

얘기를 들으면서 설마 했지만 역시 클로드 그 새끼가 범인이었다.

336화 뭐가 그렇게 좋은 거지? (2)

자신의 눈을 피해 이런 짓을 벌이다니. 바쁜 와중에도 저런 부수입을 올린 걸 보면 난 놈이긴 난 놈이다.

지셀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그런데... 경매라고? 경매를 어디서 해?"

"흐음, 그건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인데."

"비밀?"

"그래, 아무한테나 알려 줄 수는 없다. 진짜 추종자들에게만 귀한 애장품을 팔겠다는 펜리스 총관님의 깊은 뜻이니까. 애장품을 사서 더 비싸게 되파는 악질 장사꾼 놈들이 꼭 있거든."

"그, 그래.... 그런데 경매까지 할 정도라면 내 물건을 사는 사람이 많다는 거야?"

"네가 아니라 펜리스 백작 물건. 사칭범이 그런 것도 모르나? 펜리스 백작이 데스몬드 백작을 쓰러뜨린 뒤 왕국에서 인기가 어마어마해졌다. 수도에서는 성자라는 소문도 돌고 있어서 더욱 그렇지."

"인기가 있다고?"

"그래, 그러니 추종자가 많아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사칭범 주제에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쯧쯧."

대륙의 유명한 무희나 기사들은 인기가 많은 만큼 그들을 따르는 사람도 많다.

그런 인기인들을 이용해 사업을 하는 사람도 그만큼 많다. 그들의 이야기를 엮어 책으로도 판매하고 그들이 쓰는 물건도 비싼 값에 팔곤 했다.

인기인들이 입은 옷이나 장신구가 금세 유행을 타기도 하니, 상단에서 특별히 제작해 그들에게 제공하기도 한다.

당장 수도의 메리엘이 그러했지 않은가. 그녀는 수도 귀부인들의 유행을 선도한다.

페르디움에 사는 리카르도 역시 그 잘생긴 얼굴 하나로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니 지셀을 추종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도 자신이 영지민들에게 인기가 있는 건 알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극성 추종자들이 생겨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와... 전생에도 이런 적은 없었던 거 같은데.... 내가 내 인기를 잘 몰랐던 건가?'

전생엔 대륙 7강에 용병왕이니 유명하긴 했다. 인기도 어느 정도 있었던 걸로 기억하지만, 조금 비주류라 할 수 있었다.

유명한 산적 같은 취급이랄까?

어쨌든 클로드는 지셀의 인기를 이용해서 짭짤한 부수입을 올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웬디는 알면서 눈감아 준 게 분명하다.

'아무래도 조만간 호위를 바꿔야겠네.'

전에도 금화 좀 빼돌렸다는 소리를 들은 거 같다. 웬디는 그때도 눈을 감아 줬고.

웬디 같은 사람도 결국 클로드 옆에 있으면 알게 모르게 마음이 약해지는 모양이다.

지셀은 자기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다시 물었다.

"아니, 그런데 아무리 팬이라고 해도... 굳이 그런 걸 살 필요가 있는 거냐...."

"그럼, 추종자로서 당연한 게 아닌가.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보는 게 내게 유일하게 남은 낙이다. 그러니 애장품도 갖고 싶은 거지. 쯧쯧, 그런 마음도 모르면서 사칭을 하고 다닌 거냐?"

도미닉은 혀를 찬 뒤 자신의 애장품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둘러보았다.

"하아...."

'이 새끼... 뭔가 위험해.'

역시 사람은 진솔한 대화를 나눠 봐야 아는 법이다. 지셀은 전생에 도미닉을 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이런 성격인 줄 전혀 몰랐다.

드레이크 용병단과 도미닉은 불같은 기세를 내뿜으며 용병왕의 군대와 싸웠다.

그 당시에도 로드리크 후작가에 목줄이 매여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지셀에게 덤벼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기개와 실력은 지셀도 인정할 정도로 대단했다. 드레이크 용병단은 어지간한 왕국의 군대보다 강했고 단장인 도미닉 또한 뛰어난 실력자이자 지휘관이었다.

그리고 내전 때도 드레이크 용병단은 가장 먼저 앞장서서 싸웠다. 로드리크 후작가는 드레이크 용병단을 화살받이 정도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막상 후작가도 드레이크 용병단의 전투력에 깜짝 놀라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단장이란 놈이 알고 보니 이렇게 인기인에 환장하는 인간이었을 줄이야.

도미닉은 자신의 애장품들을 다시 조심스럽게 상자에 담았다. 정리하는 손길이 노련했다.

펜리스 백작 얘기가 나올 때마다 꺼내서 자랑해 온 덕분이었다. 수집가들은 자신의 애장품을 자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법이다.

자랑이 끝나자마자 그는 어느새 용병단의 단장다운 날카로운 태도로 돌아와 말했다.

"이제 내가 왜 너를 안 믿는지 알겠지? 난 누구보다 펜리스 백작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아마 이곳에서 나만큼 펜리스 백작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

"흠."

지셀은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남이 입던 옷까지 광적으로 모은 놈이다. 이 정도로 열정이 있다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습게 보이지만 우습게 볼 수가 없었다. 그가 왜 그렇게 수집에 빠져들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벗어날 수 없는 족쇄에 묶인 자다. 인질이 된 가족 때문에 떠나지도 못한다. 그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무언가 심취할 게 필요했을 것이다.

지치고 힘든 마음을 달래 줄, 현실을 잊게 해 줄 그 무언가가.

그리고 보통은 그 대상에 자신의 강한 욕망을 투영한다.

―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

북부의 망나니라 불리던 자, 주변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는 자, 힘으로 자신의 앞을 개척한 자, 모두가 이길 수 없다는 북부의 대영주를 결국 쓰러뜨린 자.

도미닉은 지셀이 영웅처럼 나타나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깨부숴 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정말로 지셀이 그의 사정을 알고 찾아왔다.

하지만 도미닉은 자신이 선망하던 사람이 눈앞에 나타난 것도 모르는 채, 서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영웅을 사칭하고 이곳에서 난리를 피웠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겠지?"

그가 검을 뽑으며 사나운 기세를 뿜어냈다. 과연 서부 최대의 용병단 단장다운 모습이었다.

그의 수하들 또한 험악한 표정으로 지셀의 일행을 에워쌌다. 그사이 밖에는 수십 명이 더 몰려와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 모습을 천천히 둘러본 지셀이 도미닉을 바라보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 거지?"

"무슨 말이냐."

"네 애장품의 주인 말이다."

그 말에 도미닉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가장 좋은 건 역시 막무가내란 소문이지."

"막무가내?"

"그래, 모두가 겁을 먹고 모두가 반대하고 모두가 말려도 무작정 밀어붙이는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취향 참 특이하네. 그런 게 마음에 드나? 다들 별로 안 좋아하던데 말이지."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으니까."

도미닉 또한 그렇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럴 능력도, 강단도 없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모습은 조금 자조적이면서도 울분에 차 보였다.

고개를 몇 번 저은 도미닉이 검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이제 이 사칭범을 치워라. 죽일 필요까지는 없으니 적당히 다져서 보내 버려."

"그런 모습을 좋아한다면 보여 주지. 나도 말로만 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하거든."

"뭐?"

퍼억!

지셀이 씨익 웃으며 주먹을 휘두르자 가장 가까이 있던 용병이 코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죽이지는 말아라. 다 우리 편이 될 놈들이니까."

지셀의 말에 기사들은 잽싸게 품에서 짧은 봉 하나를 꺼냈다. 갈바니움으로 만든 특제 제압용 봉이었다.

지잉!

기사들이 든 봉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용병들은 그걸 보고 깜짝 놀랐다.

"마, 마나?"

"이놈들 기사였어?"

"빨리 쳐!"

수적 우위는 용병들에게 있다. 그들은 경험 많은 용병답게 기사들이 제대로 진형을 꾸리기 전에 덤벼들었다.

퍼억! 퍼억! 퍼억!

"크어어억!"

용병들은 덤벼드는 족족 얻어터지며 나동그라졌다. 하지만 좁은 공간이라 기사들도 제대로 진형을 만들지 못했다.

실력 있는 용병들은 금세 그 빈틈을 파고들었다.

"잡았다!"

몇몇 용병들이 기사들의 허리를 붙잡고 그대로 밀어붙였다.

"어? 어?"

펜리스 기사들은 검을 쓰지 않고 마나를 폭발시키지 않으면 여전히 초급 수준이다.

전보다는 훨씬 나아졌지만, 무기도 쓰지 못하고 상대를 죽이면 안 되는 싸움에서는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수에 밀린 기사들 몇 명이 결국 버티지 못하고 넘어졌다. 넘어진 기사들의 몸 위로 용병들이 덮치자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했다.

"야이! 비켜! 이 새끼들아!"

"그냥 밟아 버려!"

양측이 고성을 내지르며 손과 발을 마구 휘저었다. 바깥에서도 용병들이 몽둥이를 들고 계속 몰려오고 있었다.

콰앙!

용병들에게 깔린 기사들은 결국 마나를 폭발시킬 수밖에 없었다. 기사들이 갑작스럽게 힘이 세지자 용병들은 깜짝 놀랐다.

"으헉! 이놈들 갑자기 뭐야!"

몇 대 얻어맞은 기사들은 씩씩거리며 일어나 다시 봉을 휘둘렀다. 죽여서는 안 되기에 힘 조절은 해야 했다.

하지만 힘을 너무 적게 주면 쓰러졌던 놈도 다시 일어났다.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덤벼드니 기사들은 상당히 애를 먹고 있었다.

지셀은 제게 덤벼드는 용병들을 쳐 내며 슬쩍슬쩍 혀를 찼다.

"쯧쯧, 왜 아직도 저 모양들일까?"

그렇게 굴리고 수련을 해도 여전히 성에 차지 않는다. 하여튼 조금이라도 틈을 주면 나태해지는 놈들이라 안심을 할 수가 없었다.

"빨리 끝내야겠네."

영지로 돌아가서 저놈들을 더 굴려야겠다고 마음먹은 지셀이 발로 땅을 찍었다.

콰앙!

"으헉!"

바닥에 지셀의 발자국이 깊게 찍히며 건물이 흔들렸다. 용병들이고 기사들이고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조금 비틀거리긴 했지만 쓰러지지 않고 버틴 건 도미닉 한 명뿐이었다.

지셀은 바로 빠르게 움직이며 용병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퍼억!

"컥!"

퍼억!

"켁!"

퍽! 퍽! 퍽!

지셀이 한 대 칠 때마다 마나를 익히지 못한 용병들은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그의 마나 운용 실력은 전생의 수준 그대로였다. 힘을 적절하게 조절해 상대를 기절시키는 건 일도 아니었다.

드레이크 용병단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간부들 외에는 마나를 제대로 익힌 자가 드물었다.

"문 막아라!"

순식간에 내부의 용병들을 전부 기절시킨 지셀이 외치자 기사들이 부서진 문 앞을 막았다.

밖에 있던 용병들이 끊임없이 밀고 들어오려 했지만, 좁은 곳을 막고 있는 기사들을 뚫기는 어려웠다.

도미닉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기, 기사들이 여기를 왜?"

초급 기사 정도로 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마나를 쓰는 기사들이었다. 거기다 사칭범은 자신이 봐도 경지를 짐작하기가 힘들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순간 머리가 복잡해져 아무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떤 상황인지 이해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마르틴이 자신들을 쳐 내려는 건가? 그러면 인질들은? 아니면 원한을 품은 다른 귀족인가? 아니면 마르틴과 후계 다툼을 하는 후작가의 다른 공자?

온갖 생각이 떠올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지셀이 갑자기 손을 뻗었다.

"이딴 물건들은 버려라. 내가 더 좋은 걸 주지. 솔직히 기분이 좀... 그래."

애장품 상자의 문이 열리며 갖가지 물건들이 지셀의 손짓을 따라 끌려 나왔다.

"어, 어, 어?"

도미닉은 자신도 모르게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어찌 물건이 저절로 하늘을 날아 움직인단 말인가?

순간 '펜리스 백작 일대기'에서 봤던 글이 생각났다. 펜리스 백작은 분명 주변의 물건들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

"자, 잠깐!"

애장품이 없어지기 전에 확인을 해 봐야 한다.

하지만 지셀은 도미닉의 말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신 앞에 쌓인 애장품들을 향해 주먹을 꽉 쥐었다.

불길함을 느낀 도미닉이 애타게 외쳤다.

"아, 안 돼!"

"돼."

콰지직!

모든 애장품이 단번에 찢기며 조각났다. 허무하게 바닥으로 떨어지는 애장품의 조각들을 보며 도미닉이 울부짖었다.

"이놈! 감히 내 소중한 물건들을!"

어떻게 모은 물건들인가! 이걸 모으려고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을 들였던가!

도미닉은 저 물건들을 단순히 추종자로서 소장하기만 하던 게 아니었다. 애장품은 힘들고 지칠 때마다 자신의 마음을 달래 주던 유일한 안식처였다.

눈앞에 있는 놈은 그런 '수집가'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보물을 없애 버린 것이다.

"죽어라!"

분노로 눈이 먼 도미닉이 곧바로 지셀에게 쏘아져 나가며 검을 휘둘렀다.

파앙!

엄청난 속도와 깔끔한 일격.

펜리스의 어지간한 기사들보다 나은 실력이었다. 지셀도 순간 감탄 어린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정도로 지셀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술 취했으니 조금 자고 일어나라. 대화는 맑은 정신으로 해야지?"

퍼억!

공격을 가볍게 피한 지셀이 도미닉의 관자놀이에 강하게 주먹을 꽂아 넣었다.

"커헉...."

도미닉은 살면서 이런 강렬한 충격은 처음 느껴 봤다. 한 대 맞았을 뿐인데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아아... 몽롱하다.'

이 자신이 주먹질 한 방에 기절할 줄이야.

쓰러지는 도미닉의 눈에, 붉은빛을 뿜어내고 있는 지셀의 두 눈이 보였다.

"...진짜였군."

쿠웅.

그 말을 끝으로 도미닉은 기절하고 말았다.

337화 내가 해결해 줄 테니까. (1)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도미닉은 모든 수하를 물린 뒤, 지셀에게 고개를 숙였다.

"믿겠습니다."

"안 믿는 거 같은데."

"아닙니다. 믿습니다."

"진짜 믿으면 그런 말 안 하지."

"...."

솔직히 아직 약간 의심이 남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뭔가 묘하게 초상화와 닮았기도 하고 실력도 확실했다.

자신은 중급 기사 수준에 이른 실력자다. 일부러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였다지만, 그래도 주먹 한 방에 기절시키기란 쉽지 않다.

특히 붉은 빛을 내는 마나 연공법은 흔치 않다. 그러니 높은 확률로 펜리스 백작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말했다.

"믿습니다!"

"...그래, 그거야 차차 보여 주면 되는 일이고... 내가 여기 찾아온 이유가 있어."

"의뢰 때문입니까?"

"아니, 필요한 게 있어서 왔다."

"무엇입니까?"

"너."

그러자 도미닉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제가 백작님의 열렬한 추종자긴 하지만 그렇게 갑작스럽게 말씀하시면.... 저는 아직 그 정도 마음의 준비는...."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드레이크 용병단을 내 밑에 두려고 왔다."

"네? 저희를요?"

착각을 벗어던진 도미닉이 깜짝 놀랐다.

아무리 귀족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기본적으로 용병들은 자유를 추구하는 자들이니까. 그래서 병사가 아니라 용병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용병단을 집어삼키겠다고 하다니. 그것도 산하 단체까지 합하면 수천에 이르는, 왕국 최대의 용병단인 자신들을 말이다.

'후작가도 이딴 말은 안 했는데.'

로드리크 후작가도 직접 용병단을 흡수할 수는 없다는 걸 알기에 도미닉과 간부들의 가족을 인질로 잡았다.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누명을 씌우고 하나씩 잡아들여서 겨우 지금 같은 상황을 만든 것이다.

강대한 힘과 자본을 가진 로드리크 후작가라 가능한 일이었다.

용병들이 정치와 계략에 약한 편이라 결국 당하고 말았지만, 로드리크 후작가 정도가 아니라면 감히 자신들을 속박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지셀이 한 말은 정말 미친놈이나 할 법한 발언이었다.

그제야 도미닉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미친 사람은 왕국에 흔치 않다.

'믿겠다. 너는 정말 펜리스 백작이 맞군.'

도미닉은 눈앞에 있는 자가 펜리스 백작이라고 확신했다. 그의 눈빛이 갑자기 초롱초롱해졌다.

그 부담스러운 눈길을 살짝 피한 지셀이 말을 이었다.

"말 빙빙 돌리고 떠보는 취미는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내 밑에서 활동해라. 용병단은 그대로 유지하게 해 주고 왕국 최고의 대우를 해 주겠다."

"왜... 저희를?"

"당연히 전쟁 때도 쓰고 일할 때도 쓰려고 그러지. 그거 말고 용병들 데리고 할 일이 있나? 너희가 서부에서 제일 크잖아? 왕국에서 손꼽히는 용병단이기도 하고. 그러니 우리 펜리스 용병단의 산하로 들어오라는 얘기지."

담백하고 솔직하다. 도미닉은 이렇게 직설적인 화법으로 말하는 귀족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펜리스 용병단이라고?'

펜리스에서 용병단을 만들었다는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다. 하지만 어떤 의도인지는 알 거 같았다.

펜리스 백작이 별별 사업을 다 한다는 건 유명했으니까.

북부의 용병단들을 다 합해 봐야 그들에게 비할 바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단번에 세력을 확장하려면 드레이크 용병단을 흡수하는 것이 확실히 빠른 길이었다.

'내가 이분과 함께....'

도미닉은 조금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차피 지금도 다른 놈 밑에서 더러운 짓을 하는 처지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서부 최고의 용병단이라 추켜세우지만, 그 실상은 실로 추악하고 비참하다.

그런 상황에서 동경하던 사람이 자신에게 오라고 한다. 심지어 그 사람은 보상을 확실히 하기로도 유명한 사람이다. 분명 엄청난 대우를 해 줄 것이다.

'가고 싶다.'

마르틴의 개처럼 사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거절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도미닉만큼 지셀에게 가고 싶은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동경하는 영웅과 함께하는 건 모든 추종자의 꿈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지.'

도미닉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그럴 수 없습니다. 저희에게는 나름의 사정이...."

"알아."

"네?"

"로드리크 후작가의 이 공자한테 인질들이 잡혀 있지?"

"그, 그걸 어떻게?"

로드리크 후작가는 자신들이 드레이크 용병단의 목줄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괜한 소란을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소문이 아예 안 돌지는 않았지만, 가끔 말이 나와도 후작가의 수작질로 금세 가라앉았다.

처음에는 용병단에서도 소문을 내려고 해 봤지만, 성과도 없이 인질들만 더 죽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 비밀을 아예 다른 지역에서 사는 펜리스 백작이 알고 있다니. 도미닉은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아 입만 뻐끔거렸다.

지셀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는 다 알아. 그러니까 숨기지 않아도 된다."

지셀은 전생에 서부를 불태우고 드레이크 용병단과도 싸웠다. 성을 점령할 때마다 비밀문서를 보면서 귀족들이 자행했던 협잡과 비리를 알게 되었다.

드레이크 용병단이 가족 때문에 로드리크 후작가에 목줄이 매여 있다는 것도 당시에 얻은 정보였다.

복잡한 표정으로 지셀을 바라보던 도미닉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문은 들었지만, 일대기에 적힌 대로 정보력이 대단하신 분이군요. 신비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오, 거기에 그런 것도 쓰여 있어?"

"사실은 대부분 찍거나 그냥 밀어붙였는데 운 좋게 얻어걸렸다고 쓰여 있긴 합니다."

"어떤 새끼가 쓴 걸까...."

범인이 누군지는 알겠지만 그래도 확인을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어쨌든 지셀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백작님이 말입니까?"

"그래, 내가 인질들을 구해 주면 로드리크 후작가에 더 이상 매여 있을 필요가 없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도미닉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인질을 구하는 건 누구보다 자신들이 더 바라는 일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혹시나 인질들이 위험해질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기에 자신들도 차마 구출할 시도를 하지 못한 것이다.

지셀 또한 도미닉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두렵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나를 믿으라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군.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인질들을 구할 수 있다."

"...."

"확실한 건, 이대로 가다가는 너희들도 인질들도 모두 죽는다는 것이다."

그 말도 틀리지 않았다. 마르틴이 하는 짓이 점점 과격해지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사방에 적이 생길 판이었다.

거기에 공작파와 친왕파의 사이가 갈수록 험악해져 간다는 소문도 있다. 언제 내전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흉흉한 분위기가 서서히 퍼져 가고 있었다.

정말 내전이 일어난다면 자신들은 분명 후작가의 화살받이로 쓰이게 될 것이다.

싸우다 죽는 것이 용병들의 숙명이긴 하지만, 원수들에게 도구로 취급당하다가 죽는 건 무척이나 비참한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도미닉은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간부들과... 상의를 조금 하고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니. 만약 소문이라도 나면 나도 실패할 수 있다."

"저 혼자 결정할 수가 없는...."

"결정해라."

펜리스 백작이 막무가내라 좋아한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막무가내일 줄은 몰랐다. 이런 중대한 일을 어떻게 혼자 결정한다는 말인가.

도미닉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지셀이 단호하게 말했다.

"거절하면 돌아가겠다. 하지만 너희 용병단과 인질들은 반드시 죽을 것이다."

"지금 협박하시는 겁니까?"

"아니. 사실을 말하는 거다. 지금 내 손을 잡지 않으면 곧 나와 전장에서 적으로 만나게 될 테니까."

그 말에 도미닉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펜리스 백작은 공작파 귀족들의 목을 치며 성장해 왔다. 공작파가 언제 시비를 걸어 전쟁을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다.

로드리크 후작령은 교통의 요충지인 데다 수도에서도 가깝다. 내전이 일어나면 친왕파는 이곳부터 치려고 할 것이다.

동부는 친왕파의 영역이나 마찬가지고 남부는 공작가의 본거지였으니까.

북부를 접수한 펜리스 백작이 뻗어 나온다면 가장 먼저 서부를 치리라는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저는...."

도미닉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셀은 정말 마지막이라는 듯 말했다.

"결정해라."

"저는...."

"결정해라."

"저, 저는...."

"빨리 결정해."

"...."

은근히 집요하다. 펜리스 백작은 한번 결정하면 뒤로 안 물러난다더니, 원하는 건 어떻게든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입술을 몇 번이나 깨문 도미닉은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해 보겠습니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눈앞에 있는 사람을 믿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말했다.

지셀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잘했어. 속이 시원하지?"

"그렇군요."

도미닉도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매일같이 속이 썩어 들어가도 참고 살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변명하면서.

하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드레이크 용병단과 가족들은 모두 죽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시간을 늦추고 싶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누가 자신을 이끌어 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끝까지 발버둥 쳐 보리라.

결단을 내린 도미닉이 결연한 눈빛으로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런 눈빛 좋아. 최대한 빨리 내가 말하는 것들을 준비해 둬. 그리고... 가족들이 잡혀 있는 곳에 한번 가 보자."

"알겠습니다."

지셀은 도미닉과 함께 로브를 뒤집어쓰고 마르틴의 저택 주변을 살폈다.

이곳은 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 중에 하나다. 그리고 마르틴은 아버지인 로드리크 후작 덕분에 이곳의 시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가 머무는 저택은 작은 요새에 가까웠다. 지셀은 마르틴의 저택을 보며 웃었다.

"겁이 아주 많은 놈이군."

거대한 건물을 중심으로 주변에 작은 건물 여러 채가 서 있는, 무척이나 큰 장원이었다. 높은 담장이 성벽처럼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니, 이 정도면 성벽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성벽이었다.

곳곳에 감시탑이 세워져 있고 병사들이 벽 위에서 서슬 퍼런 눈빛으로 경계를 서고 있었으니까.

마르틴의 사병 외에도 도시의 경비대가 저택 부지에 상주하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거기다 도시 수비군의 주둔지까지 이 저택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몇 명 정도 있지?"

"저택 내에 있는 병사는 약 500명 정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인근에 상주한 도시 수비군은 대략 천 명에 이릅니다. 기사의 수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후작가에서 파견 나오거나 다시 돌아가는 기사들이 꽤 많아서 말입니다."

"무슨 저택에 군대가 상주하고 있어?"

지셀이 혀를 찼다. 예전에 클로드를 구하러 가서 봤던 오스턴 남작이 500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런데 일개 시장이 어지간한 남작 수준을 상회하는 병력을 거느리고 있다. 무지막지하게 돈이 많아야 가능한 일이다.

로드리크 후작가가 괜히 서부의 맹주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도미닉도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지은 죄가 많아서 그런 거겠죠."

"하긴 악독하기로 소문이 난 놈이니까. 언제 칼 맞을지 모르니 저렇게라도 자신을 보호해야겠지."

이제 그놈한테 한 방 먹여야 한다. 저택의 주변을 상세하게 살핀 지셀이 물었다.

"당연히 저 저택의 도면은 구해 놨겠지?"

"그렇습니다. 저희도 예전부터 가족들을 구하려고 했었으니까요. 하지만 도무지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들어갈 때야 몰래 들어갈 수 있어도 나올 때가 문제겠지. 일반인들을 잔뜩 끌고 나와야 하니까."

"맞습니다. 그렇다고 정면으로 들어가는 것도 무리입니다. 가족들을 구하기도 전에 수비군이 몰려올 테니까요. 가족들이 어느 건물에 묵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방법을 쓰든, 가족들을 찾으려면 결국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드레이크 용병단은 저택의 모든 병력 뚫고 가족들을 구해 올 수 있다는 자신도 확신도 없었다.

만약 상대가 다른 귀족이었으면 어떻게든, 힘으로라도 시도해 봤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무려 서부 최강이라 불리는 대영주의 아들이다.

설사 인질을 구출하는 데 성공한다 해도 결국 로드리크 후작가에 잡혀 죽을 게 뻔했다. 그러니 어떤 방법도 실행할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지셀은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도시 안에 용병단이 소유한 건물은 있지?"

"네, 꽤 많습니다. 저희도 이것저것 하는 일이 많아서요."

"조금 둘러보자."

지셀은 도미닉의 안내에 따라 용병단이 소유한 건물들을 둘러보았다. 몇 군데를 둘러본 지셀은 그중 하나를 고른 뒤 말했다.

"일단 여기를 우리 작전의 근거지로 하지. 내부는 싹 다 치우고 외부에서 사람들이 못 들어오게 경계를 세워라."

"으음... 어떤 생각이신지 알 수 있겠습니까?"

"여기가 침투하기가 좋을 거 같아서."

지셀이 고른 건물은 마르틴의 저택에서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이었다.

주변이 조금 한적하고 도시 밖으로 길이 쭉 뻗어 있어 빠르게 도시를 빠져나가기 좋았다.

애초에 여러 물건을 적재해 놓고 창고 용도로 쓰는 건물이어서 그런 것이다.

도미닉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침투요? 여기서 어떻게 침투를 한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인질들이 어디에 있는 줄 알고요?"

그러자 지셀이 저택의 도면을 펼친 뒤 손가락으로 한 건물을 짚었다.

"인질들은 여기에 있다."

중앙의 저택과 가장 가까운 건물이었다. 도미닉은 그걸 지셀이 어떻게 아는지 궁금했다.

"확실합니까? 저희가 병사들도 포섭해 물어봤는데 전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지셀이 씨익 웃었다.

"확실하니까 믿어."

그는 저 장원의 비밀을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338화 내가 해결해 줄 테니까. (2)

지셀이 드레이크 용병단과 마르틴에 관해 잘 알고 있는 건 그도 당시에 용병이었기 때문이다.

드레이크 용병단은 정말 훌륭하게 싸웠다. 단장인 도미닉은 그 당시에 지금보다 훨씬 더 성장한 실력자였다.

재능도 타고났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대단한 실력이었다. 왜 그렇게 강해졌었는지 대충은 짐작이 갔다.

'아마 가족들을 어떻게든 구하고 싶었겠지.'

내전에서는 공작가가 쉽게 승리했다. 로드리크 후작가는 더 강성해졌으니 당장 용병단이 망할 위기는 넘기게 되었다.

그래도 로드리크 후작가의 수족처럼 부려지는 신세인 건 마찬가지였다. 도미닉은 그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술을 끊고 수련에 전념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라도 현실을 잊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나를 만난 거고.'

왕국을 휩쓴 용병왕의 군대는 내전 당시의 친왕파와는 전혀 달랐다.

무려 대륙에서 가장 강하다는 일곱 명 중의 한 명이 이끄는 군대다. 개전한 지 일주일 만에 수도를 점령하고, 맞붙은 곳은 모두 박살 낼 정도로 강력했다.

용병왕의 군대가 서부를 침공했을 때 로드리크 후작가는 당연히 드레이크 용병단을 앞에 세웠다.

도미닉은 인질을 살리기 위해서 어떻게든 살아서 돌아가야 했다. 드레이크 용병단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온 힘을 다해 용병왕의 군대에 맞선 것이다.

로드리크 후작과 마르틴을 잡아 죽인 뒤, 지셀은 드레이크 용병단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 아쉽군.

용병왕의 눈에 들 정도로 강한 용병단이었다. 만약 인질이 잡혀 있지만 않았다면 자신을 따랐을 것이다.

같은 용병으로서 그 점이 못내 아쉽고 안타까웠다. 그 마음에 드레이크 용병단이 유독 기억에 오래 남았다.

그때 기억했던 정보가 지금에서야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번 생에는 나를 따르면 된다.'

전생에는 그렇지 못했지만, 이제는 용병답게 살게 해 주리라.

지셀은 전생에 얻은 정보로 인질들이 계속 이곳에서 머물렀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마르틴 입장에서도 드레이크 용병단은 중요한 자산이었다. 그러니 인질들을 가장 안전한 곳에 숨겨 두어야 했다.

언제든 자신이 감시할 수 있고 누구도 함부로 빼 가지 못하는 곳 말이다.

"어쨌든 이 건물을 목표로 침투할 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라. 넌 내가 말하는 것만 잘 준비해 두면 돼."

그곳은 장원 안의 건물 중 유일하게 저택과 지하 통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외부로 빠져나갈 수 있는 비밀 통로가 설치된 다른 건물과도 이어져 있다.

마르틴은 겁이 많은 놈답게 저택을 개조해서 빠져나갈 구멍을 여러 개 만들어 놓았다.

최고 비밀이다 보니 비밀 통로에 관해서는 극소수 측근들만 알고 있었다. 마르틴은 그걸 이용해 인질들을 철저하게 숨겼다.

자세한 얘기는 하나도 해 주지 않으니 도미닉으로서는 지셀을 믿기가 힘들었지만, '펜리스 백작 일대기'에도 저렇게 혼자 다 아는 척 우기다 결국은 성공한다고 했으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제는 그냥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그러면 침투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침투의 스페셜리스트들의 도움을 받아야지?"

"네?"

"드레이크 용병단은 도시 검문을 피할 수 있지?"

"그렇습니다."

마르틴의 수족이나 마찬가지니 검문 자체를 받지 않는다. 그 정도의 편의는 누릴 수 있었다. 어차피 인질이 잡혀 있는 이상 다른 짓을 할 수도 없으니까.

"짐마차를 준비해라. 데리고 올 사람들이 있다. 단원들은 쓰지 말고 내 수하들을 위장해서 보내."

지셀은 거침없이 지시를 내렸다. 마치 모든 걸 이미 계획하고 온 사람 같았다.

도미닉은 순순히 지셀의 말에 따랐다. 어떻게 할지 궁금하기도 했고, 지셀이 바쁘게 움직여서 따질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셀을 따라온 기사들은 드레이크 용병단의 신분을 얻고 인장이 찍힌 마차를 얻었다.

밤이 되어서야 도미닉이 바깥으로 보낸 짐마차가 도착했다. 그리고 여러 대의 짐마차에서 수십 명의 사람이 내렸다.

무척이나 키가 작지만 몸은 다부지게 떡 벌어진 사람들을 보고 도미닉이 깜짝 놀랐다.

"드워프들?"

지셀이 숨겨 데리고 온 사람들은 드워프들이었다. 그것도 무려 50여 명이나 데리고 온 것이다.

가장 앞에 선 드워프가 도미닉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반갑소. 갈바릭이라 하오."

"헉! 위대한 대장장이?"

"응? 나를 아시오?"

"펜리스 백작 일대기에서 봤습니다."

"뭐? 그런 게 있었어? 왜 난 모르지? 영주, 그런 거 만들었으면 좀 알려 줘야 할 거 아니오. 내가 나왔는데도 모르고 있었다니. 어떻게 썼는지 궁금하군."

"...나도 몰랐다."

누가 은밀하게 제작해서 팔고 있으니 다들 모르는 게 당연했다.

드워프는 공식적으로는 노예지만, 도미닉은 경어를 사용하며 깍듯하게 대했다.

펜리스 백작의 팬이다 보니 일대기에 나온 인물들도 다 소중했기 때문이다. 이건 정말 추종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부담스러운 도미닉의 눈길을 피해 지셀을 돌아보며 갈바릭이 물었다.

"그래, 어디에 땅굴을 파면 되오?"

그 말에 도미닉이 깜짝 놀랐다.

"땅굴? 땅굴을 파서 들어가겠다는 말입니까?"

지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외부에서 접근할 수는 없으니 안으로 몰래 파고 들어가야지."

"안 됩니다. 도시 안에서 땅굴 공사라니요. 저희도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게 아닙니다. 분명 소리가 나고 걸릴 겁니다."

"걱정하지 마. 드워프들은 '절대' 안 걸려."

갈바릭도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한테 이 정도 거리 땅굴 파는 건 식은 수프 먹기보다 더 쉬워. 정교한 측량을 통해 지지대를 만들면 소음을 막을 수가 있는데...."

갈바릭은 바네사처럼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바네사는 무척이나 똑똑해 보였다. 그녀와 같이 작업을 하면서 유심히 지켜본 바로는, 아마 설명을 잘해서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갈바릭은 바네사를 따라 할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았다.

지셀이 바로 막지 않았다면 종일 설명을 이어 갔을 것이다.

"설명은 나중에 하고 바로 작업할 준비나 하자고. 내부 공사 한다는 핑계 대고 필요한 자재들 전부 여기로 들여와."

도미닉은 불안해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저, 정말 괜찮겠습니까?"

그러자 갈바릭이 도면을 집어 유심히 보더니 한쪽을 짚으며 말했다.

"이쪽에다가 구멍을 내면 되오. 건물 배치상 이곳에는 경계가 없을 거 같군."

갈바릭이 짚은 곳은 목표 건물과 옆 건물 사이에 있는 틈이었다. 확실히 가끔 순찰을 하는 인원 외에 추가 인원을 배치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장원 내부는 아무래도 외곽보다 경계가 느슨할 수밖에 없다. 워낙 넓기에 걸리지 않고 들어갈 수는 있을 거 같았다.

"그, 그래도 인질을 구해 오려면 결국 건물 내로 진입해야 하잖습니까. 전투는 필연적입니다."

지셀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질을 구한 뒤부터는 시간 싸움이지. 최대한 빠르게 내부 인원들을 처치하고 움직여야 해. 다시 땅굴을 통해 이곳으로 돌아올 거야."

"그러면...."

"그래, 여기에 마차를 준비하고 바로 도시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게 준비해라. 그리고...."

지셀이 서늘한 눈빛으로 도미닉을 바라보았다.

"도시 바깥에 모든 병력을 모아둬라. 추적해온 놈들이 포기하고 돌아갈 수 있게. 알겠나?"

"...."

도미닉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성격이 급하다고는 들었는데 이렇게 급박하게 움직일 줄은 전혀 몰랐다.

뭔가 허술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딱히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믿어라, 된다.' 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책으로 읽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정말 느낌이 확 달랐다.

그런데 어쩌랴, 이미 시작하고 만 것을.

"...알겠습니다."

만약 실패하면 죽기 전에 그냥 그대로 마르틴의 저택으로 쳐들어가 그 새끼라도 죽일 생각이었다.

그렇게 지셀의 뜻대로 모든 게 준비되기 시작했다.

도미닉은 최선을 다해 용병단의 모든 자원을 제공해 주었다. 자재를 구해 주었고 드워프들이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게 편의를 봐주었다.

인부들은 구하지 않았다. 최대한 비밀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오직 드워프들만이 땅굴 작업을 진행했다.

용병단의 재산을 빼돌리는 작업도 조금씩 진행했다.

모든 걸 다 가져갈 수는 없지만 중요한 건 챙겨 가려는 속셈이었다.

물론 용병단의 모든 인물이 순순히 따른 건 아니었다. 몇몇 간부들과 산하 용병단의 단장들이 도미닉을 찾아왔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

"말씀 좀 해 주십쇼. 왜 갑자기 병력을 모으고 물자를 옮기는 겁니까? 그리고 갑자기 창고 내부 공사는 왜 하는 겁니까?"

"...의뢰를 받았다."

"무슨 의뢰입니까?"

"무척 중요한 의뢰다. 아직 확정되지 않아서 자세한 내용은 말하기가 힘들다."

"단장님!"

도미닉은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그는 곤란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중요한 일이다. 나를 믿고 기다려줄 수 없겠나? 조만간 꼭 말해 줄 테니 이번 한 번만 날 믿고 따라줬으면 한다."

"으음...."

뭔가 숨기는 게 분명했지만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따지러 온 이들은 대부분 마르틴에게 가족들이 인질로 잡힌 사람들이었다. 아예 가족이 없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도 도미닉과 함께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자들이었다.

도미닉은 지금까지 훌륭하게 용병단을 이끈 남자다.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부탁을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단순하고 호쾌한 그들은 도미닉을 믿기로 했다.

"알겠수, 단장님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형님이 뭐 우리한테 안 좋은 일을 할 리도 없고."

"다 되면 바로 말씀이나 해 주쇼."

다들 웃으며 그냥 넘기는 분위기였다. 도미닉도 그들에게 고맙다며 웃었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은 조금 달랐다. 지셀이 작전을 시작하기 직전에 해 준 말 때문이었다.

― 마르틴의 수하가 용병단에 숨어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있던 놈이야.

― 그, 그러면 어찌해야 합니까? 걸리는 거 아닙니까? 뭐라고 해야 합니까?

― 그냥 숨겨라.

― 그러면 의심하고 저를 계속 감시할 겁니다.

― 그러라고 하는 거야. 그래야 땅굴 쪽에는 신경을 못 쓸 테니까. 계속 분주하게 움직여라. 마르틴의 시선이 너에게만 쏠리도록. 그리고 나에 대해서는 시킨 대로만 말해라.

도미닉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잘하지도 못하는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냥 어영부영 넘기기만 해도 그를 의심하며 지켜볼 터였다.

과연 한 사람이 도미닉에게 살짝 떠보듯이 물었다.

"얼마 전에 무슨 펜리스 백작이라는 사람이 찾아왔지 않습니까? 애들이 그러던데요?"

지셀이 쳐들어왔을 때 그의 이름을 들었던 자들이 꽤 있었다. 벌써 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아아, 그거 말이냐. 그냥 싸움 좀 잘하던 사칭범이었다. 펜리스 백작이 미쳤다고 여기에 올 리가 없잖아? 다른 놈이 이름을 판 거였더라고."

용병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 정도 되는 거물이 수하 몇 명만 데리고 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놈이 누구였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럼 그놈은 누구였습니까? 왜 왔다고 합니까? 들어보니 애들도 엄청나게 깨졌다면서요?"

"다른 귀족이 보낸 자였다."

"네?"

"우리가 켐벨 상단을 치려는 게 그쪽 귀에 들어갔나 보더라. 그쪽에서 친 거 같아.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만 하고 돌아갔다."

"으음, 그러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래서 나도 준비하는 거다. 일단 준비가 다 끝나면 사정을 말해 주도록 하지."

남자는 조금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일일이 따져 봤자 진실을 알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도미닉이 부하들을 다독이는 사이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 드워프들은 공사의 스페셜리스트답게 무척이나 빠르고 조용하게 땅굴을 팠다.

이 속도가 유지된다면 며칠 만에 내부로 통하는 길을 만들 수 있을 거 같았다.

지셀은 기사들과 함께 인근의 여관에 머물며 땅굴이 완성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동안 도미닉은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쉬지 못하고 계속 불안감 가득한 기색으로 집무실 안을 서성였다.

일단 지셀이 시킨 대로 대놓고 물자를 옮기거나 병력을 모으면서 시선을 끌고는 있었지만....

'정말 괜찮은 걸까.'

실패하면 그렇게 지키려고 했던 인질들의 목숨은 끝이다.

마르틴이 도미닉을 단장 자리에서 끌어내리지 못했던 건 이 용병단 자체가 도미닉이 키워 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없으면 용병단도 와해되기에 지금껏 단장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마르틴의 성격에, 자신이 이빨을 드러내는 것까지 참아 줄 리가 없었다.

대신 지셀이 말한 대로 된 일도 있었다.

'경비대의 병력이 외부로 더 많이 나왔어.'

마르틴이 무언가 의심을 한 모양이었다. 내부에 있어야 할 도시의 경비대가 순찰을 더 자주 나왔다.

특히 공사 중인 창고 주변을 서성이는 자들이 전보다 확실히 많아졌다.

'의심하고 있다. 의심하고 있어.'

드레이크 용병단의 단장이라는 권위가 있어서 아직 의심만 하고 있는 것이지, 언제 이곳을 보자고 강제로 쳐들어올지 몰랐다.

그러니 도미닉은 매일같이 불안감에 떨 수밖에 없었다.

도미닉의 걱정은 알 바 없이 드워프들은 즐겁게 작업에 전념했다.

"캬, 영주 따라다니니 이런 스릴 있는 일도 하네."

드워프들도 지셀과 함께하니 이제 간덩이가 부을 대로 부은 상태였다. 그들에게 지셀이 하는 일은 언제나 성공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조금 긴장감이 떨어진 상태긴 하지만 별문제는 없었다. 공사하는 거야 워낙 익숙하니 언제나처럼만 하면 되는 문제였다.

"됐다, 이쯤이면 거의 다 온 거 같아."

드워프들의 측량 실력은 최고 수준이다. 그들은 지도와 도면을 몇 번이나 검토하며 거리를 가늠했다.

이제 위쪽으로만 파면 된다. 완전히 뚫는 건 영주가 온 뒤에 하겠지만 정확하게 팠는지 위치는 한번 확인해야 한다.

밤까지 기다린 갈바릭은 여유 있는 표정으로 아주 작은 구멍을 만들었다. 머리 하나만 살짝 내밀어 볼 수 있는 크기였다.

그렇게 천천히 머리를 내민 갈바릭이 곧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얼라?"

갈바릭은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위치를 확인했고 병사들이 경계를 서지 않는 장소일 거라 확신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수많은 병사가 험악한 표정으로 그에게 무기를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339화 내가 해결해 줄 테니까. (3)

저택의 순찰 당번인 피핀은 하품을 하며 숙소 밖으로 나왔다.

"아, 짜증 나. 졸려 죽겠는데."

이 저택의 단점은 순찰을 해야 할 곳이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거의 요새 수준으로 넓기 때문이다.

병력이 500명이나 있으면 뭘 하는가? 죄다 외곽과 본채 주변에만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데.

그러니 소수 병사만으로 이 넓은 저택의 부지를 다 돌아야만 했다.

"후후, 오늘도 나의 비밀 장소로 가야겠군."

피핀은 요령을 잘 피웠다. 그는 저택에서 남들 눈에 잘 안 띄고 경계도 없는 사각지대를 알고 있다.

언제나 그곳에서 한숨 자고 난 뒤 순찰을 하고 온 척했다. 걸리면 크게 혼이 나겠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걸린 적이 없었다.

순찰 당번이 자신인데 누가 누구한테 혼이 난다는 말인가? 저택 부지가 너무 넓어서 걸리기가 더 어렵다.

피핀은 그렇게 자신만의 비밀 공간으로 가 바닥에 그냥 누워 버렸다. 워낙 험하게 자라서 땅에 뒹구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두두....

"응?"

바닥에 귀를 대니 묘한 소리가 들렸다.

"뭘까? 왜 이런 소리가 들리는 걸까?"

아주 미약하긴 하지만 분명 무슨 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에이, 잘못 들었나 보지."

잘 들리지 않았기에 그는 그대로 누워서 휴식을 취했다. 너무 깊이 잠들면 안 되니 살짝 조는 정도로 휴식을 취한 것이다.

이미 몇 번이나 해 봐서 익숙했다. 그는 한참이나 그렇게 쉬다가 돌아갔다.

내부 순찰 인원이 적어서 이틀 뒤 다시 순찰 당번이 된 그는 비밀 장소에 가 휴식을 취했다.

다시 땅에 눕자 전에 들었던 그 소리가 들려왔다.

두두두....

"으음?"

고개를 드니 들리지 않는다. 땅에 귀를 대야 겨우 들리는 수준이었다.

"밑에 뭐가 사나? 물이 흐르나?"

그날도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돌아갔다. 하지만 세 번째로 그 소리를 들었을 때는 강한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두두두....

"뭔가 있어."

며칠 전부터 들려오던 소리다. 땅에 귀를 가져다 대면 소리가 날이 갈수록 커지는 것이 확실히 들렸다.

그는 열심히 고민했다.

"땅에서 왜 이런 소리가 들리는 걸까?"

몬스터가 살고 있다면 그 위에 건물을 짓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정체가 알려졌을 테고.

물이 흐르는 소리도 아니다. 궁금함이 생긴 그는 귀를 아예 바닥에 붙이고 집중해 보았다.

쿠웅, 쿠웅....

뭔가 부수고 파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삽을 하나 가져와 땅을 조금 파 보았다.

정말 땅 밑에 뭔가 있다면, 아래쪽에서 소리가 더 잘 들릴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과연 땅을 파고 귀를 가져대자 소리는 조금 더 크게 들려왔다. 한참 소리를 듣던 그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땅굴?"

무심코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강한 확신이 들었다. 며칠 전부터 들리던, 갈수록 더 커지는 소리. 이제는 미묘하게 땅도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확실해, 이거 지금 밑에서 누가 땅을 파고 있는 거야. 여기로 몰래 들어오려고."

피핀의 눈빛에 강한 열망이 어렸다. 이걸 보고하기만 한다면 큰 보상을 받을 것이다. 아무도 오지 않는 장소에서 발견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다.

사실은 그냥 쉬려고 땅바닥에 누웠을 뿐이지만.

그는 헐레벌떡 달려가 상급자에게 보고했다. 자신이 아니었으면 이걸 발견하지 못했을 거라고 공을 엄청나게 강조하면서 말이다.

병사 몇 명이 더 와서 땅을 파고 귀를 대 보며 확인했다.

"정말 지금 밑에서 누가 땅을 파고 있는 거 같습니다."

다른 병사들의 증언이 이어지자 기사들까지 와서 확인했다. 마나를 쓰는 기사들이라 병사들보다 소리를 더 잘 들었다.

"이곳에 병력을 대기시켜라."

어떤 간도 큰 놈이 땅굴을 파는 걸까? 위쪽에 보고가 올라가고 기사와 병사들이 대기했다.

과연 하루가 지난 뒤, 땅이 조그맣게 들썩이더니 사람 머리 하나가 쏙 올라왔다.

이미 횃불까지 옆에 세워 놓고 대기하던 기사와 병사들은 상대의 모습을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드워프?"

누구도 드워프가 들어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다들 몇 번이나 눈을 껌뻑이며 확인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기사가 갈바릭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대며 으르렁거렸다.

"너희는 뭐냐? 여기까지 어떻게 굴을 판 거지?"

갈바릭은 눈알만 뒤룩뒤룩 굴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도... 도둑일까?"

"이 미친 드워프가...."

한참 동안 그를 노려보던 기사가 병사들에게 외쳤다.

"이놈들을 당장 감옥으로 끌고 가서 가둬 놔! 내가 공자님에게 보고하겠다! 일단 땅굴이 어디로 이어졌는지부터 확인해!"

그렇게 갈바릭과 드워프들은 줄줄이 잡혀 끌려갔다.

그들은 끌려가면서도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자신들이 조금 긴장감이 풀어졌었다지만 어떻게 이리 쉽게 걸릴 수 있었을까?

분명 공사도 아주 조용하게 진행했고, 목표 지점도 사각지대일 거라 확신했는데 말이다.

드워프들은 생각보다 이곳의 경계가 대단했던 모양이라고 투덜댔다. 아주 빈틈없이 꽉꽉 채워서 감시했던 게 아니라면 절대 들킬 리가 없다고.

실상은 그냥 요령 피우던 병사 하나가 운 좋게 찾아낸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드워프들은 굴만 파 놓고 바로 감옥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보고를 받은 마르틴은 무척이나 분노해서 말했다.

"어디서 들어온 거야! 당장 찾아!"

"지금 확인하고 있습니다. 다만 시간이 조금 걸릴 거 같습니다."

"왜? 그냥 어디로 연결됐는지 땅굴 안을 확인하면 되잖아?"

"병사들을 보냈는데 문에 막혀서 확인이 어려웠습니다."

"뭐? 땅굴에 문을 만들어?"

"네, 무척이나 두꺼운 문입니다. 그런데 그게 구조가 이상해서... 열리지 않았습니다. 안에서 잠긴 거 같기도 하고...."

"그게 말이 돼? 그러면 드워프들은 어떻게 돌아가려고 그랬겠어? 아니, 안 열리면 그냥 부수면 되잖아!"

"그 문이... 지지대 역할도 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강제로 열거나 부수면 그 부분이 무너지고 길이 막힐 거 같아서...."

"이익!"

만약에 굴이 무너지면 어디서 들어왔는지 확인할 길은 영영 사라질 것이다. 과연 도둑놈들이 드워프들이라더니 별 괴상한 걸 만들어 놓았다.

걸렸을 때를 대비해 만들어 둔 게 확실했다.

잠깐 고민하던 마르틴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당장 도미닉 그 새끼 창고부터 털어 봐. 거기 얼마 전부터 공사한다고 했었지? 거기서 들어온 게 분명해. 인질들을 구하려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기사와 병사들이 바로 도미닉의 창고로 향했다.

창고 주변을 지키던 용병들은 기사의 험악한 엄포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그들은 안에서 뭘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가려던 기사와 병사들은 곧 한 사람에게 막히고 말았다.

바로 드레이크 용병단의 단장 도미닉이었다.

"무슨 일이지?"

도미닉이 서늘한 안색으로 묻자 기사가 비웃으며 검을 들었다.

"이 밤에 왜 여기에 있나? 안에 뭘 숨기고 있나 보지?"

"여기는 내가 개인적인 용무를 보는 곳이다. 아무리 기사라지만 멋대로 들어오는 건 용납할 수 없다."

"공자님의 명이다. 저택에 도둑놈이 들었는데 안을 조금 확인해 봐야겠다."

"나는 모르는 일이니 그냥 돌아가라."

기사는 고개를 삐딱하게 하며 말했다.

"도미닉, 시건방지게 굴지 말고 비켜라. 용병 주제에 공자님이 대우를 좀 해 주니까 뭐라도 된 거 같아?"

"아무리 공자님이라도 내 사적인 영역까지 침범할 수는 없다."

"개소리 말고 비켜! 공자님이 이 도시를 다스리는 분이다!"

기사가 외치자 병사들이 무기를 강하게 쥐고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밖에서 경계를 서던 용병들도 모두 무기를 들고 들어왔다.

어쨌든 단장이 막고 있으니 그들도 끼어들 수밖에 없던 것이다.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언제든 양쪽이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주변을 슬쩍 둘러본 기사가 이죽거렸다.

"어이, 이렇게 나와도 되는 거야? 여기서 내가 다치거나 물러나면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

은근한 협박에 도미닉이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실력이라면 눈앞에 있는 기사와 병사들은 당장 치워 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일을 감당할 수 없었다.

"후우...."

한숨을 크게 내쉰 도미닉은 한 발자국 옆으로 물러났다.

"대충 확인하고 빨리 사라져라."

"진작 그럴 것이지."

기사는 건방지게 웃으며 도미닉을 한번 훑어본 뒤 문을 열었다.

끼익....

두근!

문이 열리자 도미닉의 숨이 조금 가빠졌다. 심장이 마구 뛰고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만 같았다.

기사는 안에 들어가자마자 외쳤다.

"바닥을 확인해 봐! 분명 땅굴이 연결되어 있을 거다!"

'걸렸구나!'

설마 했던 도미닉은 도둑이란 소리에 드워프들이 잡혔다는 걸 확신했다.

첩자가 용병단 안에 숨어 있다. 그놈은 창고 건도 수상하다고 보고를 올렸을 게 분명하다.

그러니 마르틴은 사건이 벌어지자마자 바로 이곳으로 사람을 보냈고, 자신을 감시하던 이들이 함께 창고를 확인하러 온 것이다.

창고 안은 집무실처럼 꾸며져 있었지만, 기사와 병사들은 거침없이 바닥을 확인했다.

카펫을 치우고 무기로 마구 찍고 누르며 수상한 곳을 한참 동안 찾았다.

하지만 그들은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뭐지? 여기가 아닌가?"

아무리 뒤지고 확인해 봐도 땅굴 입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기사는 마나까지 사용하며 아예 바닥을 깨부쉈지만 소용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 공터도 뒤져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몇 번 더 주위를 확인한 기사는 도미닉을 노려보며 말했다.

"무슨 짓 하는지 모르겠지만 조심해. 계속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기사는 그렇게 경고를 남긴 뒤 병사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간 뒤에도 도미닉은 한참을 서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야 겨우 식은땀을 닦으며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휴... 당장은 살았구나."

입구는 이 건물이 아니었다. 이 건물조차도 적들의 정보에 혼선을 주기 위해 공사를 하는 척했을 뿐이다.

실제로 공사를 진행한 곳은 도시 밖이었다. 어차피 드워프들에게는 도시 안이든 밖이든 큰 차이가 없다.

오히려 도시 밖이 자재를 옮기기도 쉽고 초반에 크게 작업을 하기도 좋았다.

그렇게 위기를 넘겼지만,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다. 드워프들이 잡혔다면 언제 걸릴지 몰랐다.

드워프들은 자존심이 무척 강하다고 하지만 고문을 당하면 입을 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침이 밝자 도미닉은 변장을 하고 바로 지셀을 찾아갔다. 이미 도시에는 시장 저택에 드워프 도둑놈들이 들었다고 소문이 쫙 퍼진 상태였다.

소식을 들은 지셀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 세상일이 그래. 하다 보면 별일이 다 생길 수 있어. 그래서 재미있는 거지."

어쩌다 걸렸는지는 지셀도 모른다. 드워프들이 실수했을 수도 있고, 저쪽 경계가 의외로 치밀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운 좋게 누군가가 발견했을 수도 있는 거고.

세상 모든 일에는 이렇게 변수가 존재한다.

이런 일은 전생에도, 회귀한 후에도 자주 벌어졌다. 그래서 지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느긋했다.

하지만 지셀만 믿고 있던 도미닉으로서는 그럴 수 없었다.

"아, 아니... 지금 그렇게 태연할 때가 아닙니다. 드워프들이 잡혔다니까요? 마르틴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괜찮아. 그놈도 귀족이라서 드워프 비싼 거 알거든. 당장은 함부로 다루지 못할 거야. 아마 회유하려고 하겠지?"

도미닉은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계획이 들통났다는데 왜 저렇게 태평스럽고 무책임하게 군다는 말인가!

그런데 지셀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계획은 계획일 뿐이야. 언제든 상황에 따라 중간에 바뀔 수 있는 거지. 중요한 건 과정이 아니야."

"그럼 중요한 게 뭡니까?"

"결과만 원하는 대로 나오면 된다는 거지."

"네? 지금 일이 다 망했는데 어떻게 하시려고요?"

"어떻게 하긴. 내가 들어가서 드워프들도 구하고 사람들도 구해 와야지."

"...?"

도미닉이 어리둥절해하자 지셀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병력은 바로 모을 수 있지?"

"네, 네.... 모두 무장을 하고 대기하라고 일렀습니다."

"중요한 짐도 다 빼 놨고?"

"네, 모든 재산을 가져갈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들은 따로 빼 놨습니다."

"그럼 준비 다 됐네. 이제 시작하자. 너는 이제 약속한 장소에서 병력을 이끌고 기다려라."

"아, 아니.... 도대체 어떻게 하시려고."

지셀은 그 물음엔 대답하지 않고 도미닉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내가 해결해 줄 테니까 지금 당장 준비해. 이제 절대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알겠어?"

그 박력에 밀려 도미닉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도미닉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마르틴이 그를 의심하고 있다. 차라리 병력을 모아 놓았다가 지셀이 실패하면 바로 저택을 치는 게 나을 것이다.

"만약 실패하면 그대로 마르틴을 짓밟겠습니다."

"그러면 인질들도 죽을 텐데?"

"실패하면 결국 다 죽을 목숨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죽을 바에는 그 새끼라도 데리고 가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도미닉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그간 참고 참았던 분노가 지셀을 만나고 깨어난 것이다.

지셀은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훨씬 더 보기 좋아졌네. 용병이라면 그 정도 강단은 있어야지."

"바로 준비 시작하겠습니다."

"좋아, 나도 이제 움직여야겠네. 어이, 너희들은 땅굴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어라."

지셀은 자신이 데리고 온 20명의 기사들에게도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이제 이들은 드워프들이 막아 놓은 문 앞에서 지셀을 기다릴 것이다.

도미닉과 기사들이 움직이자 지셀은 술로 입을 헹군 뒤 뱉어 냈다.

그 뒤에 몸 곳곳에서 술을 조금 뿌렸다.

곧 그의 몸에서 술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되겠네."

그는 술 냄새를 펄펄 풍기며 마르틴의 저택으로 향했다.

"정지! 너 뭐야?"

문 앞을 지키던 경비병이 지셀을 막았다. 지셀은 살짝 비틀거리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경비병을 바라보았다.

"너 뭐냐니까?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와? 어휴, 술 냄새. 어서 안 꺼져?"

병사가 소리를 지르며 지셀의 어깨를 밀쳤다.

"어? 쳤어?"

지셀이 살짝 비틀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병사가 성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쳤다. 어쩔래?"

병사의 말에 지셀이 픽 웃었다.

그러고는 바로 달려가 병사의 얼굴에 날아 차기를 시전했다.

퍼억!

340화 그냥 지금 시작하자. (1)

지셀의 발차기에 맞은 경비병이 바로 쓰러졌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경비병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이 미친 새끼는 뭐야!"

저택 앞에는 경비병들이 꽤 많았다. 경비병들은 모두 달려가 지셀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퍽! 퍽! 퍽!

지셀은 쓰러진 채 밟히며 외쳤다.

"이 더러운 세상! 누구는 이런 큰 저택에서 매일 놀고먹기나 하고! 누구는 하루 먹을 빵도 제대로 없는데! 불공평하다!"

"이 새끼 지금 뭐라는 거야? 너 미쳤냐!"

퍼억! 퍼억! 퍼억!

병사들의 발길질이 더 거세졌다. 지셀은 맞으면서도 떠드는 걸 멈추지 않았다.

"야이! 개 같은 세상아! 귀족 새끼들은 다 창으로 다 찔러 죽여야 해! 혁명이 필요하다! 자유와 평등! 우리는 모두 형제다!"

혁명이란 단어가 나오자 병사들을 구타를 멈추고 깜짝 놀랐다.

"미, 미친놈인가? 지금 무슨 말을 내뱉는 거야?"

"이 새끼 혁명단이야?"

"그냥 술 취한 놈 같은데.... 어쨌든 사상이 위험한 놈인 건 맞잖아?"

혁명단은 세상을 뒤엎으려는 단체다. 예전에 클로드도 그들 때문에 누명을 쓴 적이 있었다.

그 뒤로는 어디서든 혁명이라는 단어를 언급만 해도 바로 끌려가서 고초를 치른다. 병사들은 구타를 멈추고 쓰러진 지셀을 붙잡았다.

"일단 이 새끼 가둬. 가두고 위에 보고해. 혁명단을 언급했다고."

그냥 술에 취한 놈이면 실컷 패고 속 좀 푼 다음에 보내면 된다. 부랑자라고 감옥에 가둘 수도 있었다. 그건 병사의 마음이다.

하지만 저놈 입에서 혁명이라는 말이 나온 이상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이놈이 진짜 혁명단의 끄나풀일 수도 있고, 혁명단과 관계가 없더라도 저런 생각을 하는 놈은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셀은 밧줄로 묶인 채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

감옥 안에는 죄인이 여럿 갇혀 있었다. 대부분은 잡범이거나 억울하게 잡혀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음, 방이 가득 찼네."

병사는 눈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감옥은 가득 차 있었다. 그간 붙잡아 둔 사람이 많기도 했지만 50여 명이나 되는 드워프들이 한꺼번에 잡혀 왔기 때문이다.

빈둥거리며 누워 있던 드워프들은 지셀이 잡혀 들어오자 깜짝 놀랐다.

그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똑같았다.

'저 인간이 혼자 그냥 잡혀 올 인간이 아닌데?'

드워프들은 다년간의 경험으로 확신했다. 영주가 잡혔다는 건 일부러 잡혀 왔다는 뜻이다.

갈바릭과 드워프들은 히죽거렸다. 영주의 무지막지한 실력이면 여기서 탈출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지셀은 갈바릭이 있는 방의 맞은편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이미 다른 죄수들이 갇혀 있는 상태였다.

원래 혁명단 같은 위험 분자는 따로 가둬야 하지만, 공교롭게도 감옥이 가득 차서 일단 아무 데나 넣어 둔 것이다.

간수장은 병사들에게 말했다.

"저 이상한 놈에 관해서는 내가 따로 보고를 올리겠다. 그리고 드워프들도 내일 특별 감옥으로 옮길 테니까 잘 감시하고 있어라."

특별 감옥은 기사를 구속하거나 귀족처럼 신분이 높은 자들을 감금하는 곳이다.

드워프들은 비싼 노예다. 마르틴이 그런 노예들을 그냥 둘 리가 없다. 회유하든 협박하든 할 것이다.

일단은 회유가 우선일 테니 드워프들을 좋은 곳으로 옮겨 둘 생각이었다.

지셀이 바로 움직인 이유가 이것이다. 당장은 몰라도, 비싼 드워프들을 계속 일반 감옥에 가둬 두진 않을 테니까.

병사들이 물러나자 갈바릭이 철장을 붙잡고 지셀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역시 영주야! 우리를 구하러 왔구나!"

"아니, 나도 잡혔어."

"...."

뚱한 표정으로 말하는 지셀의 모습에 갈바릭은 눈을 피했다.

'저 새끼 저거 삐졌네.'

갈바릭은 내심 혀를 찼다. 어쨌든 일을 실패한 건 자신들의 잘못이 맞다.

하지만 그도 억울했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는데 운 나쁘게 걸려 버렸다.

드워프들은 감옥으로 끌려오는 동안 병사들의 대화를 엿듣고 자신들이 왜 걸렸는지 알게 되었다.

갈바릭은 다급하게 제 억울함을 피력했다. 어찌나 억울한지 평소와는 다른 말투가 튀어나왔다.

"영주! 내 말 좀 들어 봐. 우리 계획은 완벽했다니까? 근데 하필이면 요령 피우는 병사 하나가 거기 숨어서 자고 있었어. 하필이면 그날! 그 시간에! 이건 진짜 하늘이 우리를 억지로 깐 거라니까?"

그 말에 지셀이 피식 웃었다.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갈바릭의 모습이 귀엽기도 했다.

예상치 못한 문제는 언제나 생길 수 있었다. 아무리 정보를 알고 계획을 세워도 이런 얼토당토않은 일이 생길 수는 있는 것이다.

그게 실수 탓이든, 운이 나빴던 탓이든, 적의 능력이 좋았던 탓이든 간에 말이다.

하지만 그런 문제가 생겨도 지셀은 결국 해결해 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뭐, 생각해 보면 조용히 진행했던 일이 없는 거 같기는 해."

항상 조용히 일을 처리하려 해도 결국은 시끄러워졌다. 대부분이 남들의 상식을 벗어난 일이거나, 막무가내로 진행한 일이었으니까.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이번에도 조금 시끄럽게 진행하는 수밖에.

"밤이 되면 움직일 테니까 잘 쉬고 있어. 내가 움직이면 바로 땅굴로 가.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 알겠어?"

"우리도 안 싸워도 되겠어?"

드워프들도 싸움을 꽤 잘한다. 솔직히 그들이 마음먹고 싸우면 어지간한 병사 몇 명은 그냥 때려잡을 것이다.

하지만 지셀은 드워프들까지 끼워 줄 생각이 없었다.

"됐어. 너희가 다치거나 잡히면 더 골치 아파. 바로 움직여."

"그, 그래. 그렇게 할게."

솔직히 영주 실력이면 혼자서 여기를 빠져나가는 건 문제도 안 된다. 문제는 인질들이다.

마르틴의 사병들과 경비대, 도시 수비군을 합하면 천 명이 넘어간다. 아무리 영주라도 그 인원을 상대로 인질들을 무사히 구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까지 고려한다면 자신들은 자리를 피해 주는 게 나을 거 같았다.

그렇게 밤까지 기다리기로 정했을 때 다른 곳에서 시비가 걸려 왔다.

"어이, 신입. 새로 들어왔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드워프들이 신기해? 어차피 다른 곳에 갈 놈들인데 뭘 자꾸 그렇게 말을 걸고 있어?"

지셀이 뒤를 돌아보았다. 털북숭이 거한이 누워서 배를 긁고 있었다. 옷도 제대로 안 입고 다 벗고 있는 꼴이 무척이나 흉해 보였다.

지셀이 아무런 말도 안 하고 바라만 보고 있자 거한이 손을 까닥거렸다.

"무슨 죄로 잡혀 왔는지는 모르겠는데 얼굴도 하얗고 곱게 자란 거 같네. 이리 와 봐. 예뻐해 줄게."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이들은 구석에 최대한 붙어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다. 보아하니 저 거한이 이 방의 대장인 거 같았다.

아니, 한 명의 중년인은 원독이 가득한 눈빛으로 거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년인은 온몸이 멍투성이에 피투성이였다. 어지간히도 두들겨 맞은 모양이었다.

지셀이 양쪽을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자 거한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저놈이 왜 저런 꼴인지 궁금해? 여기서 나한테 뒈지게 맞았거든. 주제도 모르고 날 죽이려고 해서 말이야. 저 새끼 내가 날 잡아서 몰래 죽일 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거한의 말에 지셀은 조금 궁금해져서 물었다.

"넌 죄목이 뭐냐?"

"강도, 강간, 살인이지. 흐흐흐."

자신이 저지를 죄를 자랑스럽게 얘기한다. 그런데 이어진 얘기는 더 충격적이었다.

"저 새끼 딸이었거든. 저 병신은 기사한테 따지다가 여기 잡혀 온 거고. 참, 여기 놈들도 악취미야. 아비랑 원수를 같은 방에 넣고 말이야. 나야 재미있었지만. 키키킥."

"이 개자식아!"

거한이 낄낄거리며 즐거워하자 중년인은 몸도 제대로 못 가누면서 그에게 덤벼들었다. 그러자 거한이 벌떡 일어나 중년인을 발로 걷어찼다.

퍼억!

"크윽!"

중년인은 발길질 한 번에 나가떨어졌다. 거한은 건들거리며 다가가더니 중년인을 마구 밟았다.

"야, 이 병신아! 네까짓 게 나한테 될 거 같아? 어딜 주제도 모르고 덤벼들어! 이 개새끼야!"

퍼억! 퍼억! 퍼억!

중년인은 정말 무지막지하게 짓밟혔다. 다른 사람들은 벽에 더 바짝 붙어서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재미있다는 듯 구경하던 갈바릭과 드워프들도 얘기를 들은 뒤에는 눈을 잔뜩 찌푸렸다.

실컷 중년인을 짓밟은 거한은 지셀을 노려보며 말했다.

"봤지? 나는 눈 돌아가면 막 나가는 놈이야. 좋은 말 할 때 옷 벗고 여기로 와라."

"안 가면?"

"그러면 여기서 나한테 죽는 거지. 참고로 나는 사람을 다섯 명이나 죽여 봤다. 흐흐흐. 재수 없게 저 새끼 딸을 건드렸다가 잡혔지만. 오늘 여섯 명이 될 수도 있는 거야."

거한의 말에 갈바릭과 드워프들이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지금 살인 병기를 앞에 두고 다섯 명이나 죽였다고 자랑하다니. 빨리 죽을 놈은 뭐가 달라도 다른 모양이었다.

지셀은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약한 놈을 괴롭히는 취미는 없어."

"뭐?"

"그런데 쓰레기는 잘 치우는 편이지."

"이 개새끼가 자꾸 뭐라는 거야? 넌 죽었어, 이 개새끼야."

거한이 인상을 잔뜩 쓰면서 지셀에게 다가왔다. 아니, 다가가려고 했다.

덜컥!

"어?"

지셀이 천천히 손을 뻗자 거한은 자리에 덜컥 멈춰 섰다. 마치 무언가에 단단히 묶인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뭐, 뭐야? 뭐야?"

거한이 움직이려고 이를 악물며 힘을 줄 때, 지셀의 손이 살짝 돌아갔다.

드드득!

"끄아아아악!"

거한의 한쪽 팔이 뒤틀리며 정상적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방향으로 꺾였다. 곧이어 다른 팔과 양다리도 모두 같은 형상으로 변했다.

털썩.

결국 거한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끄, 끄으으윽...."

거한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법사 같은데... 왜 마법사가 이런 일반 감옥으로 들어왔다는 말인가!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후회만이 사무치도록 몰려왔다.

지셀은 쓰러진 거한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철창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스각.

철창 일부가 잘려 나갔다. 지셀이 철봉 하나를 쥐어 들고 마나를 뿜어내 끝부분을 아주 날카롭게 갈았다.

찌르면 사람 하나 정도는 쉽게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저벅. 저벅.

지셀이 다가가자 거한은 침을 질질 흘리며 애원했다.

"사, 살려 주십쇼. 제, 제가 귀인을 몰라뵈었습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누워서 꿈틀거리며 입만 뻐끔댈 뿐이다.

잠깐 거한을 바라본 지셀은 꼬챙이를 중년인의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복수의 맛은 해 본 사람만 아는 법이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꼬챙이를 받은 중년인은 곧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딸의 원수는 지금 사지가 꺾인 채 쓰러져 바둥거리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는 날카로운 무기가 있다.

이 얼마나 바라고 바라던 순간인가!

중년인은 비틀거리며 거한에게 다가갔다. 주변 사람들의 모두 숨을 멈춘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갈바릭과 드워프들도, 그 모습이 보이는 다른 방의 죄수들도.

"끄흐흐... 아, 안 돼.... 사, 살려 줘."

거한의 애처로운 음성을 들은 중년인이 살기 어린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내 딸도 그렇게 말했겠지."

"사, 살려 줘...."

"지옥에 가서 내 딸에게 사과해라."

중년인은 쓰러진 거한의 몸에 올라탔다. 거한은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지만 몸만 겨우 꿈틀거릴 뿐이었다.

푸욱!

중년인이 손에 든 꼬챙이를 거한의 목에 단호하게 내리꽂았다.

"끄어어억!"

거한이 피거품을 내뿜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중년인은 멈추지 않고 계속 꼬챙이를 찔렀다.

푸욱! 푸욱! 푸욱! 푸욱!

어찌나 원한이 깊었는지 중년인의 손속에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쉴새 없이 창에 찔린 거한의 목은 금세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졌다.

"컥... 꺼어어억...."

얼마 지나지 않아 거한은 마지막 비명을 내지르며 죽었다. 눈도 제대로 감지 못했다.

한참 그 모습을 바라보던 중년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중년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경하던 사람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주로 다른 방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사, 사람이 죽었다!"

곳곳에서 시끄러워지니 즉시 병사들이 달려왔다.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어떻게 죽인 거야!"

"그냥 싸우고 있던 게 아니었어?"

병사들은 평소처럼 감옥 문 앞에서 졸거나 수다를 떨며 쉬고 있었다. 그들은 죄수들끼리 싸우는 데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런데 감옥 안에서 사람을 죽일 줄이야. 아니, 죽어도 되긴 한다. 간혹 험악한 놈이 구타로 사람을 죽일 때도 있다.

그럴 때는 그냥 시체만 치워도 된다. 차라리 그게 편하다.

하지만 이렇게 무기를 쓴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런 경우 자신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 무기를 숨겨 들어온 걸 놓쳤기 때문이다.

"당장 저 새끼들 끌어내! 다들 엎드려!"

한 병사의 외침에 사람들이 모두 벽에 붙어 엎드렸다. 이런 경우 재수 없게 걸리면 무지막지한 구타가 이어지니 바로 말을 들어야 한다.

지셀은 그런 소란을 신경 쓰지 않고 소매를 걷으며 중년인에게 물었다.

"가족은 있나?"

"없습니다. 딸이 죽고 혼자가 됐습니다."

"그래, 갈 곳 없으면 북부의 펜리스 영지로 와라. 오면 먹고사는 데는 문제 없을 거야. 저런 놈도 거의 없을 테고."

"네? 저, 전 죄수인데. 어떻게.... "

그러자 지셀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가 풀어 줄게. 오늘 여기 애들 많이 죽을 테니 쉽게 잡으러 오지 못할 거야."

철컹!

철창이 열리고 병사들이 노기 어린 기세를 풍기며 들어왔다.

갈바릭은 그 모습을 보고 중얼거렸다.

"바, 밤까지 기다리는 거 아니었나?"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밤까지 기다리기는 그른 거 같았다.

병사는 바로 지셀을 향해 몽둥이를 휘두르며 외쳤다.

"엎드리라고! 이 새끼야!"

턱.

"...?"

몽둥이는 지셀의 손에 막혔다. 지셀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조용히 진행되는 적이 없어요."

계획이란 건 원래 틀어질 때도 있는 법이다. 결과만 원하는 대로 나오면 된다.

비록 그 과정이 무척이나 시끄러워도 말이다.

콰앙!

병사는 단번에 문밖으로 튕겨 나갔다. 지셀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뭐, 뭐야...."

병사와 죄수를 가리지 않고 다들 놀라서 몸이 굳었다. 지셀이 씨익 웃으며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냥 지금 시작하자."

이제 인질들을 구하고 탈출할 시간이었다.

341화 그냥 지금 시작하자. (2)

퍼억!

"커억!"

퍼억!

"크악!"

퍼억!

"으아악!"

지셀이 한번 손을 휘저을 때마다 병사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기사도 없는 이곳에서 그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뭐, 뭐야! 왜 이런 괴물이 여기에 있는 거야!"

병사들은 감히 그에게 덤벼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딱 봐도 자신들이 덤빌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인물은 마나 구속구를 채워서 기사들이 감시해야만 했다.

"이놈 진짜 혁명단 놈이야!"

"일부러 여기 잡혀 들어온 게 분명해!"

"간부야! 혁명단 간부가 왔다고!"

처음에는 그냥 혁명단 끄나풀이나 술 취한 정신병자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실력을 보니 이 도시를 엎으려고 보낸 간부급 인사인 것만 같았다.

혁명단은 잔인하기로 대륙에 소문난 단체다. 혁명에 성공하면 그 성에 사는 귀족들뿐만 아니라 귀족들을 따르던 병력까지 모두 몰살한다.

병사들은 혹시나 자신들도 그런 꼴이 될까 두려워하며 머뭇댔다.

병사들이 알아서 착각해 주니 지셀은 연기를 계속하기로 했다.

"혁명이다! 이 더러운 세상!"

지셀이 그렇게 외치자 병사들은 혼비백산하며 무기를 집어 던졌다.

"으아아악! 도망가!"

"우리가 절대 못 이겨!"

"빨리 기사님들을 불러!"

지셀은 달아나는 병사들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검 하나를 들고 감옥의 철창들을 모두 베었다.

"다들 도망가고 싶으면 나를 따라와라. 알겠나?"

갇혀 있던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지셀을 바라만 보았다.

"뭐 해? 따라오라니까?"

그제야 사람들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어차피 감옥에 갇히면 십중팔구는 여기서 죽어 나간다.

죄가 있든 없든 상관없었다. 억울하게 잡혀 들어온 사람도 그냥 존재 자체가 잊혀서 감옥에서 썩을 때도 많았다.

마르틴의 행정 능력은 개판이라는 말이 칭찬일 정도로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네, 네! 따라가겠습니다!"

사람들은 지셀이 움직이자 바로 그의 뒤를 따랐다.

저 중에는 억울한 사람도 있을 테고 실제 죄인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당장 구분할 수 없으니 지셀은 일단 다 풀어 주었다.

감옥에서 벗어난 갈바릭이 물었다.

"영주! 이제 어떻게 할 거요? 저 사람들도 다 구해 줄 거요?"

"빠르게 땅굴로 가야지. 기사들을 데리고 와야 하니까. 저들은 그냥 가는 김에 겸사겸사 데리고 가는 거야."

지셀과 사람들은 바로 땅굴 쪽으로 향했다.

이미 주변은 난리가 난 상태였다. 감옥을 가득 채웠던 사람들이 탈출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사방에서 고성이 오가며 병사들이 움직였다. 외곽에서 경계를 서던 병사들과 경비대가 움직인 듯했다.

땅굴 쪽에도 몇 명의 병사가 경계를 서고 있었다. 아직 드워프들이 어디서 왔는지 확인이 안 되었으니 땅굴을 메우지 않고 나무판자만 덮어 놓고 지키는 상태였다.

"죄수들이 탈출했다!"

곳곳에서 이런 소리가 들리니 땅굴을 지키던 병사들도 무기를 들고 잔뜩 긴장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지셀과 사람들을 보고 외쳤다.

"죄수들이 이쪽으로 온다!"

촤악!

"커억!"

지셀은 단숨에 병사들을 처리했다. 아직 난리 통이라 당장 이곳에 병사들이 오진 않았지만 곧 더 많은 병력이 모여들 것이다.

드워프들은 잽싸게 땅굴로 들어가서 막아 놓았던 문을 조작했다.

철컥! 철컥! 철컥!

문은 마치 퍼즐처럼 나무 조각들을 맞춰야 열리는 구조다. 걸릴 때를 대비해서 만든 것도 맞지만, 적을 막고 땅굴을 무너뜨리는 데 쓰려는 의도가 더 컸다.

"영주님!"

문 너머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들은 문이 열리자 바로 들어왔다.

"도시 수비군이 오기 전에 인질들을 구출해야 한다. 빨리 가자."

지셀이 20여 명의 기사들을 이끌고 다시 땅굴 밖으로 나갔다. 드워프들은 문을 닫은 뒤 준비해 뒀던 무기를 들고 대기했다.

사람들도 모두 문 안으로 안전하게 들어왔다. 분명 이들 중에는 흉악한 놈도 있을 테지만, 괜한 짓을 했다간 드워프들에게 도끼질을 당할 테니 경거망동하지 못할 것이다.

드워프들은 무척이나 훌륭한 전사이기도 했으니까.

여전히 밖은 풀려난 사람들 때문에 난리였다.

"땅굴 쪽으로 갔다!"

"반항하는 놈은 모두 죽여라!"

"빨리 잡아!"

병사들이 성난 기세로 몰려왔다. 가까이 있던 기사들도 몇 명 합류한 상태였다.

지셀은 검에 묻은 피를 한번 털고 말했다.

"갑옷들 잘 챙겨 왔지?"

그러자 기사들이 로브를 옆으로 젖히며 씨익 웃었다. 도시 밖에 숨겨 뒀던 갑옷들을 다 챙겨입고 온 상태였다.

"그럼 가자."

지잉―!

이번 작전은 속도가 생명이다. 기사들은 처음부터 갑옷의 힘을 활성화했다.

콰앙!

가장 먼저 지셀이 눈을 붉게 빛내며 움직였다. 땅굴 쪽으로 달려오던 선두의 병사들은 단번에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콰앙! 콰앙!

뒤를 이어 기사들이 난입하니 순식간에 병사 수십 명의 목이 날아갔다.

적들 사이도 기사 몇 명이 섞여 있었지만 지셀 일행을 막지는 못했다.

수준이 낮기도 했고 수도 다섯 명이 채 안 됐기 때문이다.

"으아아악! 이놈들 뭐야!"

선두에 서 있던 기사들과 병사들이 단번에 죽어 나가자 나머지 병사들은 비명만 질러 댔다.

이들은 제대로 된 전투를 해 본 경험이 없는 자들이다. 마르틴이 정예군을 키울 생각 없이 돈과 권력으로 숫자만 부풀렸으니 당연한 일이다.

사실 병사들 본인도 훈련에 제대로 참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서부에서 로드리크 후작가에게 대항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렇기에 병사들은 나태해질 수밖에 없었다.

콰앙! 콰앙! 콰앙!

지셀과 펜리스 기사들에게 덤벼드는 병사들은 부딪치는 족족 날아갔다. 덤벼들지 않는 병사도 지나가는 길에 있으면 그냥 얻어터졌다.

지셀과 기사들은 빠르게 목표로 삼았던 건물에 도착했다.

[에메랄드 회랑]

귀족 손님들이 묵고 연회를 즐기기 위해 지어진 건물. 하지만 실상은 드레이크 용병단의 가족들을 가둬 두는 데 쓰이는 곳이었다.

실제로 가끔 귀족 손님들이 사용하기도 한다. 인질들이 같은 건물에 갇혀 있는 걸 모를 뿐.

"여기다, 들어가자."

기사들은 지셀이 어떻게 아는지 묻지 않았다. 영주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다.

경비병을 처치하고 들어가자 어두운 공간만이 이들을 반겼다.

손님들도 없고 연회도 열리지 않아서 건물은 텅텅 빈 것 같았다.

'여기가 맞나?'

지셀을 따라 계단을 올라가던 기사들은 의문을 표했다. 정말 아무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곧 그게 더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도 없는 게 말이 안 되지.'

아무리 빈 건물이라 해도 성대하게 꾸며진 건물이다. 건물을 관리하는 사용인들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덜컥! 덜컥! 덜컥!

사방에서 문이 열리며 병사들이 튀어나왔다. 바깥에 있는 병사들과는 다르게 절도 있고 정예병다운 기세를 풍겼다.

몇몇 이들은 기존 병사들과는 무기도, 옷차림도 확연하게 달랐다.

통일되지 않은 그들의 복장을 확인하고 기사들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저렇게 제 마음대로 입고 다니는 놈들은 보통 산적이나 도적 떼, 혹은....

"용병인가?"

기사들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봐도 이들은 용병에 가까웠다.

여기에는 용병 출신 기사들도 있기에 더 쉽게 알아보았다.

지셀이 적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드레이크 용병단의 배신자들이지."

"이놈들이요?"

"그래, 이미 오래전부터 마르틴의 돈을 먹은 추잡한 놈들이다. 그래서 더 불안하니 여기를 지키는 거야."

"배신자가 이렇게 많다고요? 도미닉이란 놈은 그것도 모르는 겁니까?"

"속이려면 충분히 속일 수 있지. 서로 일이 없을 때 돌아가면서 지키면 되니까. 그런데... 오늘은 어째 꽤 많이 모인 거 같네?"

지셀이 웃으며 말하자 험상궂게 생긴 용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넌 뭐냐? 어떻게 그걸 다 알고 있는 거지?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러는 너는 누군데?"

"드레이크 용병단의 부단장, 햄프턴이다. 다시 한번 묻지. 너 뭐냐?"

"드레이크 용병단의 새 주인."

"뭐?"

"내가 이제 용병단을 거둘 테니까."

"하, 이거 미친놈 아니야. 설마 네놈이 도미닉에게 용병들을 소집하라고 시킨 건가?"

"그래. 너희는 왜 안 가고 여기에 있는 거지? 단장이 불렀으면 바로 가야 하는 거 아냐? 배신자들이라서 말을 안 듣는 건가?"

그러자 햄프턴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여기를 치려는 게 아니었나? 병력을 다 모아 놓고 고작 여기엔 이 정도만 보냈다고? 너희들은 미끼인가?"

햄프턴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 같았다. 그는 도미닉이 최후의 발악으로 이곳을 칠 줄 알고 배신자들을 모은 것이다.

도미닉이 용병단을 모두 소집하면 무려 3천에 가까운 병력이 모인다. 도시 수비군을 전부 소집하고 저택을 끼고 싸워도 이기기는 쉽지 않다.

내부에서 분란을 일으키기도 힘들었다. 도미닉이 갑자기 병력을 소집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도미닉은 용병단을 처음부터 키워 낸 사람이라 용병들에게 막대한 지지를 얻고 있기에 이간질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인질들을 이용하기 위해 배신자들과 자신을 따르는 단원들만을 데리고 온 것이다.

지셀은 금세 상황을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 알아서 착각해서 이렇게 모여 준 거네. 쓰레기들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겠어."

"까불지 마라. 인질들이 우리 손에 있는 이상 네놈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고작 그 정도 수로 여기를 뚫을 수 있을 거 같냐?"

이곳을 지키는 인원은 용병들까지 포함해 무려 200여 명이었다. 병사들은 그 절반도 채 되지 않았지만, 용병단의 배신자들이 모두 모이니 무시할 수 없는 숫자가 되었다.

고작 20여 명의 침입자를 못 막아 낼 리 없었다.

햄프턴은 거대한 철퇴를 빙빙 휘두르며 외쳤다.

"다 죽여!"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철퇴가 지셀을 향해 날아들었다.

스윽.

콰아앙!

"어?"

그러나 철퇴는 애꿎은 바닥만 부쉈다. 그 자리에 있던 지셀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 뒤였다.

"그르르륵...."

의아함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리려던 햄프턴은 곧 피거품을 뿜어내며 쓰러졌다.

깔끔하게 베인 그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순식간에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모두가 놀라서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지셀은 어느새 병사들을 뚫고 지나가 있었다.

마나를 쓰지 못하는 이들은 그의 움직임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다. 그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햄프턴의 시체와 지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야? 해, 햄프턴이 단칼에 죽었다고?"

"보, 보이지도 않았어."

"어떻게 한 거지? 아무리 기사라 해도...."

햄프턴은 마나도 쓸 수 있는 초급 기사 정도의 수준이다. 그래서 용병단의 부단장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설령 상대 모두가 기사라 해도 이 정도 인원을 쉽게 당해 낼 수는 없다고, 자신들이 이길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햄프턴의 목을 베고는, 이 인원까지 뚫고 지나가다니!

평화로운 서부의 도시에 살던 이들은 이런 실력을 구경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지셀은 차가운 눈빛으로 기사들을 힐긋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다 죽여라. 먼저 올라갈 테니."

아무리 훈련이 잘되어 있다 하더라도 고작 저택 경비병과 용병들일 뿐이다. 펜리스 기사들에게는 어려울 게 전혀 없었다.

지셀의 명령을 받은 기사들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들은 바로 마나를 뿜어내며 병사들과 용병들의 틈으로 파고들었다.

콰앙! 콰앙! 콰앙!

"으아아악!"

기사들이 움직이자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양 떼에 뛰어든 늑대들 같았다. 펜리스의 늑대들은 너무나도 쉽게 병사들과 용병들을 학살했다.

그간 수많은 전투를 경험한 이들에게 평화와 나태에 찌든 자들은 상대 같지도 않았다.

기사들이 그렇게 적들을 학살하는 동안, 지셀은 위층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까지 순식간에 모두 죽였다.

그리고 갇혀 있던 사람들을 구출하기 시작했다.

"모두 나와라! 빨리 탈출해야 한다!"

지셀이 소리를 지르며 방문을 열자 갇혀 있던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도미닉이 보낸 사람이다! 어서 나와라!"

그의 외침을 들은 다른 방에서도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왔다. 그들은 병사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지만 금세 상황을 파악하고 복도 한쪽에 모여 섰다.

모든 방의 문이 열리자 무려 50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지셀은 꼼꼼하게 남은 방들을 모두 확인한 뒤 외쳤다.

"따라와라! 병사들이 모이기 전에 여기를 빠져나간다!"

사람들은 바로 움직이지 못했다. 병사들의 시체를 보고 상황은 파악했지만, 그간 쌓인 두려움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마르틴은 그 정도로 이들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콰앙!

정신을 못 차리는 이들을 보고 지셀이 혀를 차며 바닥을 발로 밟았다.

바닥이 깨져 나가며 사람들이 비틀거렸다. 두려움 섞인 시선이 지셀에게로 향했다.

이들을 일일이 설득하고 달래 줄 시간이 없었다. 무조건 따라야 한다. 지셀은 단호하게 말했다.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

사람들은 두려운 기색으로 지셀의 뒤를 따랐다. 병사들을 혼자 죽이는 엄청난 실력자다. 방금 보여 준 한 수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원래 협박받고 살던 사람들이라 그런지 협박이 무척 잘 통했다.

지셀이 위층에서 사람들을 모으는 사이 이미 아래층도 정리가 되어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기사들과 가득 쌓인 시체들을 보고 사람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일행이 건물 밖으로 나오자 사방에서 병사들이 몰려왔다. 지셀은 가장 먼저 앞으로 나가며 외쳤다.

"내가 길을 뚫겠다! 사람들을 지켜라!"

콰앙!

지셀이 돌파를 시도하자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뚫렸다. 제대로 진형도 안 갖추고 마구잡이로 덤벼드는 병사들이 그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물론 마르틴의 병사들이 진형을 짜 봤자 거기서 거기였겠지만.

"으아아악!"

"이 새끼 뭐야!"

"막아라!"

병사들은 어떻게든 대항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스각!

지셀의 검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한 사람의 목이 날아간다. 그걸 보고는 달려오던 병사 중 몇몇은 오히려 뒤로 물러났다.

지셀은 그렇게 순식간에 병사들을 뚫고, 금세 땅굴 입구까지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빨리 들어가라!"

지셀의 기세에 압도된 사람들은 순순히 땅굴로 들어갔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였다.

지셀이 이제 끝났나 한시름 놓으려던 그때, 한 여자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 단장님의 가족이 보이지 않아요."

"뭐?"

"도미닉 단장님의 가족이 보이지 않아요!"

가족별로 다른 방에 갇혀 있었으니 어찌 된 영문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지셀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적들은 지금 도미닉이 병력을 모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도미닉의 가족만 따로 빼돌려 두었을 수도 있다.

다른 인질도 가치가 있지만, 단장의 가족은 훨씬 더 가치가 크니까.

그리고 만약 따로 데려갔다면 그들이 지금 있는 곳은 마르틴의 옆일 것이다.

지셀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번 일은 쉬울 거라 생각했는데 참 뭔가 잘 안 풀리네."

갈바릭이 운 나쁘게 잡힌 것부터, 뭔가 자꾸 꼬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제는 쉬운 일이 있었던가?

지셀은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아까보다 훨씬 더 많은 병사가 몰려오고 있었다. 저택에 있는 기사들도 대부분 땅굴 쪽으로 모인 듯했다.

크게 숨을 한번 내쉰 지셀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루카스, 고든, 따라와라. 빠진 이들을 다시 구하러 간다."

호명된 두 사람이 화들짝 놀랐다.

342화 돌아갈 때는 쉽게 가자고. (1)

두 사람은 지금 무척 피곤한 상태였다. 잠깐이지만 무려 200여 명과 싸웠다.

실력 차이 때문에 쉽게 잡긴 했지만 마나를 쓰면 쓸수록 이들의 몸 상태는 안 좋아진다.

솔직히 이제 집에 가고 싶었다. 그리고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이제... 적들이 너무 많이 오는 거 같은데요?"

저택에 있던 경비대가 모두 움직였고, 도시 수비군까지 몰려오고 있었다.

병사들의 수는 전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늘어났다. 거기에 기사들도 끼어 있다.

세 사람이 저들을 뚫고 가려면 상당히 힘들 터였다.

"그래도 가야 해. 한 사람도 놓칠 수 없다."

그들을 구하지 못하더라도 도미닉은 이해할 것이다. 피해가 전혀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지셀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가족을 잃는 슬픔을 그는 누구보다 사무치게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 혼자 가면 인질들을 구하기 힘들어진다. 빨리 따라와라."

도미닉의 가족은 노모와 아들 둘뿐이다. 자신이 쉽게 길을 뚫으려면 다른 사람이 안전하게 인질들을 업고 움직여야 한다.

지셀은 더 말하지 않고 바로 뛰쳐나갔다.

싸움은 기세다. 많은 적을 상대할 때는 초반에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

콰앙!

"으아아악!"

지셀이 검을 휘두르자 선두의 병사들이 단번에 터져 나갔다.

물론 이들도 그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수의 이점을 살려 지셀을 향해 동시에 창을 내질렀다.

지셀은 피하지도, 막지도 않았다.

타타타타탕!

강철을 때리는 듯한 느낌에 병사들이 깜짝 놀랐다. 아무리 기사라고 해도 이렇게 대놓고 공격을 당하면 상처가 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찌르는 부위에 붉은빛이 번뜩이며 아예 무기가 들어가지 않았다.

"뭐, 뭐야...."

병사들이 당혹스러워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넋이 나가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게 그들의 인생 마지막 말이 되었다.

콰앙!

지셀의 검에서 마나가 폭발하며 주변을 다 날려 버렸다.

"이놈!"

한 기사가 뛰어들며 지셀에게 검을 휘둘렀다. 온 힘을 쏟아부은 듯, 검신에 마나가 일렁였다.

아무리 지셀이라도 마나가 담긴 검은 맞아 줄 수 없었다. 대신 피하지도 않았다.

지금 그가 보여 주어야 할 건 혼자서도 여기 있는 모두를 죽일 수 있다는 위세다.

콰아앙!

지셀이 마주 검을 휘두르자 기사의 검이 그대로 박살이 났다. 압도적인 힘의 격차에 기사의 눈빛이 떨렸다.

스각!

지셀의 검이 붉은 선을 그리고 기사의 목이 떨어졌다.

지셀은 그런 식으로 수많은 적을 베며 중앙을 돌파했다.

뒤따르던 고든과 루카스는 그 모습을 보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어째... 전보다 더 강해진 거 같지?"

"우리가 뭐 할 게 있나?"

정말 혼자서 이 도시의 모든 병력을 없애 버릴 것만 같은 기세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알고 있다. 마나라는 건 무한하지 않다. 저 무지막지한 방어력도, 공격당할 때마다 마나를 소모하며 유지하는 것이다.

자신들보다야 지속 시간이 길지만, 영주도 폭발하는 힘을 오래 쓸 수는 없다는 것도 이제 잘 알고 있었다.

기사들의 마나 연공법은 지셀의 마나 연공법과 그 근본 구조가 같기 때문이다.

단지 기사들이 안전하게 수련할 수 있게 조금 더 부작용을 줄였을 뿐이다.

그래서 두 사람도 빠르게 전투에 끼어들었다.

콰앙! 콰앙!

"으아아악! 이놈들 도대체 뭐야!"

세 사람이 돌파를 시도하자 병사들은 도저히 그들을 막지 못했다.

고든과 루카스는 조금씩 상처를 입어 갔지만, 지셀이 무지막지한 힘으로 앞을 뚫어 주니 그들이 상대해야 할 적은 무척이나 적었다.

적 기사들도 분전했지만 세 사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거친 북부의 기사들보다 약했다.

실력은 개개인의 재능과 노력에 따른 차이도 있지만, 지내 온 환경의 영향도 큰 탓이었다.

콰아아앙!

지셀이 마나를 아끼지 않고 폭발시키니 수백의 병사들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무너졌다. 단숨에 마르틴의 저택까지 도착한 지셀은 그대로 밀고 들어갔다.

"막아라!"

저택에는 바깥보다 훨씬 더 많은 기사가 있었다. 얼핏 봐도 20명은 넘어 보였다.

과연 서부 최대 부호인 후작가의 아들다웠다.

"하, 그래도 아들이라는 건가? 기사를 이렇게나 많이 붙여 주다니."

고작 공자의 신분에 이만한 기사들을 직접 거느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전부 제 아비인 로드리크 후작이 지원해 줬으리라.

"병사들을 맡아라!"

지셀은 뒤따라오던 두 사람에게 말한 뒤 바로 저택의 기사들과 싸움에 돌입했다.

차앙! 차앙! 차앙!

순식간에 수십 번의 공방이 이루어졌다. 확실히 지금까지 상대했던 기사들과는 달랐다.

후작가가 마르틴을 보호하기 위해 신경 써서 보내 준 기사들이 분명했다.

지셀은 즉시 3단계의 코어를 활성화했다.

콰아앙!

"크윽!"

가장 앞서 싸우던 기사는 지셀이 힘을 폭발시키며 찌른 검에 그대로 가슴이 뚫렸다.

양옆에서 달려들던 기사 두 명은 붉은 빛이 번쩍이자 목이 날아갔다.

"어? 어?"

뒤쪽에 있던 기사는 갑작스럽게 더 강해진 지셀에게 미처 적응하지 못하고 몸이 굳었다.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다가오는 붉은 선뿐이었다. 도무지 어느 방향으로 검이 다가오는지 예측조차 할 수가 없었다.

스각!

붉은 선은 순식간에 지셀의 주변에 있던 기사들을 베고 뒤쪽에 있는 기사마저 베었다.

세 사람의 앞을 막고 있던 기사들의 절반이 사라졌다. 지셀은 이들과 계속 싸울 생각이 없었다.

이미 3단계의 힘을 활성화했다. 돌아갈 때까지 버티려면 힘을 잘 분배해야만 한다.

"무시하고 따라와라!"

지셀이 앞을 막고 있는 남은 병사들을 뚫으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든과 루카스도 최대한 피할 수 있을 만큼 피하며 지셀의 뒤를 따랐다.

콰앙! 콰앙! 콰앙!

지셀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병사들은 제대로 대응도 못 하고 터져 나갔다. 그렇게 몇 번 더 병사들의 벽을 뚫고 드디어 지셀은 마르틴을 만날 수 있었다.

강퍅하게 생긴 마르틴은 지셀에게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너, 너! 뭐야! 뭔데 감히 이곳까지 들어왔단 말이냐!"

그의 옆에는 병사 두 명이 각각 인질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남은 기사들은 모두 마르틴을 지키려고 그의 앞을 막아섰다.

"후...."

드디어 전투를 멈춘 지셀이 피를 뒤집어쓴 채 숨을 골랐다.

곧바로 도착한 고든과 루카스도 지셀의 옆에서 주변을 경계했다.

다다다다다다!

뒤이어 저택의 남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모두 몰려왔다. 모든 공간이 빽빽하게 들어찰 정도였다.

그들은 무기를 들고 지셀을 포위했다. 저택이 꽉 차 들어오지 못한 수비군은 바깥에서 진을 치고 대기했다.

숫자 차이가 어마어마하니 자신감을 얻은 마르틴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네놈! 감히 인질들하고 죄수들을 탈출시켜? 도미닉이 보낸 놈이 분명하군! 감히 용병 나부랭이들 주제에 나에게 반항을 해? 감히 개새끼들 주제에 주인을 물어?"

지셀이 그런 마르틴을 보며 이죽거렸다.

"'감히'라는 말을 몇 번이나 쓰는 거야? 네가 그렇게 대단하냐?"

"닥쳐라! 쓰레기 같은 용병 새끼 주제에!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마르틴은 들끓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드레이크 용병단은 자신이 부릴 수 있는 중요한 무력 단체 중 하나였다. 앞으로 그들을 이용해서 빠르게 세력을 불릴 생각이었다.

후계 다툼을 하는 그로서는, 이들처럼 언제든 쓰다 버릴 수 있는 패를 많이 쥐고 있을수록 좋았다. 자신의 기사와 병사들을 위험한 일에 투입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근시안적인 생각이었지만 마르틴은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드레이크 용병단이 위험한 일을 대신해 줬기에 짧은 기간 내에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었다.

마르틴은 지셀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발광해 댔다.

"인질들을 탈출시킨다고 네놈들이 안전할 거 같으냐? 드레이크 용병단은 아버지가 나에게 선물로 준 놈들이다! 그러니까 그 목숨도 내 것이나 마찬가지다! 감히 주인을 배신하다니, 전부 죽여 버리겠다!"

로드리크 후작은 자식들에게 여러 힘을 선물해 주었다. 드레이크 용병단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인질들을 뺏긴 이상 이제는 마르틴 마음대로 다룰 수 없게 되었다.

길길이 날뛰는 마르틴을 보고 지셀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중요한 거면 소중하게 대했어야지."

"뭐? 지금 감히 나한테 훈계를 하는 거냐?"

"그래. 중요한 사람일수록 소중하게 대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나는 그런 사람이거든."

그 말에 고든과 루카스가 짠 내 나는 표정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영지 사람들이 들었으면 전부 목뒤를 잡았을 것이다.

특히 클로드가 말이다.

여유 있는 지셀의 모습에 마르틴이 폭발했다.

"너!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인질들을 죽이겠다! 도미닉 그 새끼의 엄마랑 아들인 거 알지? 당장 무기를 버려라!"

지셀은 여기까지 수많은 병사를 쳐 죽이고 왔다. 이곳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마르틴 자신도 안전하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인질들을 붙잡고 협박을 한 것이다.

인질들은 겁을 먹고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에는 단단한 심지가 보였다. 용병단장의 가족다운 모습이었다.

도미닉의 어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도망가세요. 아들한테는... 이제 자유롭게 살라고 꼭 전해 주세요.... 더 이상 이 못난 어미 때문에 그렇게 살 필요 없다고... 꼭 네가 원하는 대로 살라고."

그러고는 옆에 있는 소년을 바라보고 슬픈 미소를 지었다.

"아가, 미안하구나.... 하지만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단다. 이제 이 할머니랑 가자꾸나...."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그녀를 보고 소년은 눈을 꼭 감았다.

잠시 울먹거리던 소년은 갑자기 지셀을 향해 말했다.

"아빠한테 전 괜찮다고 전해 주세요.... 그리고... 그리고...."

소년은 곧 붉게 충혈된 눈으로 마르틴을 노려보며 크게 외쳤다.

"이 새끼 꼭 죽여 달라고 전해 주세요!"

인질들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모습이었다. 마르틴은 그게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닥쳐라! 이 천한 것들이 어디서 감히!"

마르틴이 성을 내자 병사들이 인질들의 목에 검을 더 깊숙하게 대었다. 피부가 살짝 베여 피가 흘러나왔다.

인질들을 가만히 보던 지셀이 천천히 검을 내려놓고 손을 들었다.

마르틴은 화색을 띠었다. 검을 내려놓은 걸 보니 반항은 포기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마나를 쓰는 실력자들은 주먹만으로도 사람을 때려죽일 수 있으니까.

그는 갑자기 좋은 생각을 떠올리고 히죽 웃었다.

"너, 실력이 대단한 거 같은데 내 밑으로 올 생각이 없나? 최고의 대우를 해 주도록 하지. 어때?"

수많은 병사가 죽었음에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탐욕이 가득한 마르틴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지셀이 소년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훌륭하다. 네 뜻은 내가 꼭 전달해 주마."

마음에 든다. 무릇 거대 단체를 이끄는 용병단장의 아들이라면 저래야 한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허무하게 죽게 놔둘 생각은 없었다.

살짝 허공에 들려 있던 지셀의 양손이 주먹을 쥐었다.

덜컥!

"어?"

인질들을 붙잡고 있던 병사들은 갑자기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자 깜짝 놀랐다.

드드득!

"크아아악!"

곧 병사들의 몸이 뒤틀리며 인질들이 풀려났다. 병사들은 인질들을 다시 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비명만을 질러 댔다.

지셀이 양손을 뒤로 당김과 동시에 인질들이 끌려오듯이 순식간에 지셀 쪽으로 날아들었다.

그렇게 다가온 인질을 고든과 루카스가 바로 품에 안았다. 드디어 인질을 뺏은 것이다.

"뭐, 뭐야!"

마르틴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손짓으로만 인질들을 뺏어 갔는지 그의 실력으로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호위 기사들은 순식간에 주변을 장악한 마나의 흐름을 느끼고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런 기술은 구경조차 해 본 적이 없다. 눈앞에 있는 상대는 자신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강자였던 것이다.

"주, 죽여! 당장 저놈들을 다 죽여라!"

마르틴이 고함치며 발악했지만 기사들과 병사들은 쉽게 지셀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긴장한 그들을 둘러본 지셀이 조금 전 바닥에 떨어트린 검을 주워 들었다.

"고든, 루카스. 인질들을 잘 지켜라."

"알겠습니다!"

"돌아갈 때는 조금 쉽게 가자고."

지셀이 붉은 눈을 빛내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수많은 기사가 지키고 있는 마르틴을 향해서였다.

"쳐라!"

다가오는 지셀을 향해 기사들이 크게 외치며 검을 휘둘렀다. 그들 또한 온 힘을 다했는지 검에서 푸른 빛이 강하게 퍼져 나왔다.

파앗!

하지만 지셀은 그들과 맞붙지 않았다. 순식간에 허공에 뛰어오른 그는 기사들을 휙 넘어서 마르틴의 앞에 착지했다.

"어, 어...."

마르틴은 자신의 앞에 선 지셀을 보고 몸이 굳어 버렸다. 피로 범벅이 된 악마를 마주한 것 같았다.

상황을 파악한 기사들이 다급하게 몸을 돌렸지만, 지셀의 움직임이 조금 더 빨랐다.

"멈춰라."

지셀이 마르틴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대고 경고하자 모두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주변을 한번 둘러본 뒤, 마르틴을 향해 말했다.

"이제 네가 인질이야."

343화 돌아갈 때는 쉽게 가자고. (2)

순식간에 지셀에게 잡힌 마르틴은 고함을 질러 댔다.

"이, 이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감히!"

지셀은 마르틴이 발광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끌고 갔다.

"자, 비켜라. 이 철딱서니 없는 도련님 목에 칼 들어가기 전에."

완전히 산적이나 다름없었다. 지셀의 엄포에 기사들과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이놈! 날 놓으란 말이다! 우리 아버지가 가만히 있을 거 같으냐! 네놈들을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마르틴이 계속 발악했지만 소용없었다. 지셀은 그의 멱살을 잡고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기습이 올 것을 대비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이곳 기사들의 실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상대방도 그걸 아는지 슬금슬금 지셀의 뒤를 따라갈 뿐이었다.

"이놈 여기서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비켜라."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력도 마찬가지였다. 지셀이 마르틴의 목을 쥐고 나타나자 마치 바다가 갈라지듯 병력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 누구도 감히 마르틴을 섣불리 구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괜히 상처라도 나면 구해 줘도 죽을 테니까.

그 정도로 마르틴은 이들에게 충성을 받지 못했다. 그저 다들 후환이 두려워 구하는 척 따라갈 뿐이었다.

고든이 옆에서 지셀에게 속삭였다.

"저기... 무사히 탈출하면 놔줄 거죠? 죽이면 일이 상당히 커질 거 같은데."

그러자 지셀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알 바야? 어차피 싸워야 할 놈들인데 뭘 눈치를 봐. 뭐, 그래도 내가 죽이진 않을 거야."

"그럼 누가 죽일 건데요?"

"그건 드레이크 용병단이 결정하겠지. 이놈이 그들의 원수니까."

마르틴은 이미 드레이크 용병단원들 몇몇의 가족을 본보기로 죽였다. 그 원한이 절대 가볍지 않을 터.

지셀이 대신 죽여 줄 수도 있지만, 복수는 직접 해야 그 한이 풀리는 법이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지셀은 마르틴을 그들에게 넘길 생각이었다.

고든과 루카스는 그 말을 듣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씨, 일 또 커지겠네.'

'하여간 조용히 끝난 적이 없다니까.'

무려 서부의 맹주라 불리는 후작가의 둘째 아들이다. 이놈을 죽였다가는 로드리크 후작이 어마어마하게 분노할 것이다.

그런데 그 원수 놈들이 펜리스 영지로 터를 옮긴다? 로드리크 후작가는 분명 펜리스까지 죽이려고 할 것이다.

물론 지셀이 로드리크 후작가를 다음 목표로 삼은 건 안다. 그래도 정치적 이유로 적대하게 된 것과 사적인 이유로 적대하게 된 건 위험도가 완전히 달랐다.

정치적인 적대 관계라면 상황에 따라 다시 손을 잡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가문의 원수가 되면, 명예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했다.

'끄응, 아무리 그래도 굳이 먼저 적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사람 일 나중에 어찌 될지 모르는 건데.... 가끔 보면 영주님은 너무 과격하다니까.'

지셀이 전생부터 쌓은 원한, 그가 회귀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두 사람으로서는 찝찝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속삭였어도 바로 옆에 있는 마르틴이 그걸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는 찜찜해 하는 고든과 루카스의 표정을 보고서는, 지셀이 진심으로 자길 죽이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마르틴은 경기라도 들린 듯 발버둥 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뭐, 뭣들 하느냐! 날 구해! 어서 날 구하란 말이다! 이놈들이 지금 날 도미닉 그 새끼한테 넘기려고 한다고!"

천 명에 가까운 병력이 따라오면 뭘 하는가? 아무도 마르틴을 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럴 만한 실력자도, 충신도 없었다.

그렇게 지셀은 마르틴을 이끌고 땅굴까지 무사히 걸어갔다.

마르틴의 병사들도 따라왔지만 그들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오, 영주! 무사히 왔구려!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갈바릭이 낄낄거리며 문을 열어 주었다.

지셀은 고든과 루카스, 인질들을 먼저 들여보내고 자신은 마지막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안쪽에서 문을 닫아 버리니 병사들은 더 따라오지 못했다.

"이제 도시 밖으로 가자. 저놈들도 대충 눈치채고 거기로 올 테니까."

"알겠소. 그러면 이제 무너뜨려야겠군."

인질들과 죄수들이 기사들의 안내를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갈바릭은 땅굴을 막아 놓은 문을 무너뜨렸다.

쿠르르르릉!

굉음이 터지며 먼지가 수북하게 피어올랐다. 드워프들의 기술로 만들어진 문은 땅굴을 완벽하게 막아 버렸다.

"어... 어떡하지?"

"시장님을 구하러 가야 하는데...."

"후작님한테 우리 다 죽을 수도 있어."

뒤따라오던 병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굴렀다. 호위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마르틴이 잡혀갔으니 어떻게든 계속 따라가야 하는데 땅굴이 막혀 쫓아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땅굴이 시작된 장소를 예상할 머리도 되지 않았다.

그나마 도시 수비군의 수비대장이 고민하다가 한 기사에게 물었다.

"도미닉이 병력을 모으고 있다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늘 이곳을 친다는 첩보가 들어와서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도시 밖에 진을 쳤을 겁니다. 내부에서 그만한 병력을 소집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일단 밖으로 나가 봅시다."

그래도 수비군의 지휘관이라고 제법 머리를 굴릴 줄 알았다. 그들은 일단 병력을 재정비한 뒤 도시 밖으로 향했다.

그사이 지셀과 사람들은 땅굴을 벗어나 약속된 장소에 도착했다.

도착한 장소에는 무장을 갖춘 사람들이 모여서 험악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인질들은 그 모습을 보고 주눅이 들었지만, 곧 상대방을 알아보고 화색을 띠었다. 바로 자신들의 가족인 드레이크 용병단의 용병들이었으니까.

"여, 여보!"

"아버지!"

"아이고! 내 아들!"

인질들이 울면서 뛰쳐나가자 드레이크 용병단에서도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인질들과 용병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울었다.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된 모습을 보고 거친 용병들도 코끝을 훔쳤다. 드레이크 용병단에서 오래 지낸 용병들은 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장으로서 큰 중압감을 버티며 살아왔던 도미닉은 누구보다 더 격한 감정을 보여 주었다.

"아빠!"

아들이 달려온다. 그 옆으로 같이 달려오는 어머니가 보인다.

도미닉은 두 사람을 얼싸안고 그간 참아 왔던 아픈 눈물을 흘렸다.

"아아...."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는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드워프들이 잡혀가고 지셀이 잡혀간 뒤에는, 인질을 구하기는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오히려 분노를 더 끌어올리며 오늘 죽더라도 마르틴만은 반드시 죽이리라 각오를 다졌다.

그런데 정말 인질들을 모두 구해 올 줄이야!

한참을 흐느끼던 도미닉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지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선물이 하나 더 있어."

지셀은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말하며 마르틴을 집어 던졌다.

"크윽! 이, 이 미친 새끼가 감히!"

"마르틴!"

도미닉은 마르틴을 발견하자마자 검을 뽑았다. 주변에 있던 용병들도 마르틴을 보고 모두 무기를 꺼내 들었다.

얼마나 죽이고 싶던 놈인가! 저놈 때문에 가족들이 인질로 잡히고 죽어 갔다. 찢어 죽여도 성에 차지 않을 놈이었다.

"뭐, 뭐야? 네놈들 지금 나를 죽이려고? 지금 인질들을 구했다고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거야? 날 건드리면 우리 아버지가 가만히 있을 거 같냐고!"

마르틴은 벌떡 일어나 용병들을 노려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양새였다.

"이 왕국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네놈들을 잡아 죽일 거다! 우리 아버지가 공작파의 대귀족인 거 알지? 공작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그는 강대한 후작가의 아들로 태어나 그간 살면서 어떤 어려움도 겪은 적이 없다. 그러니 감히 용병들 주제에 자신을 어떻게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을 건드리면 후작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도미닉은 검을 뽑아 들고서도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신의 부인과 아버지를 죽인 철천지원수다. 당장 씹어 먹어도 원한이 풀리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마르틴을 죽인다면? 드레이크 용병단은 평생을 쫓겨 다니게 될 것이다.

이미 서로 원한을 맺은 상태이지만, 마르틴을 죽이면 후작가의 마음가짐이 또 달라진다. 정말 철저하게 자신들을 파멸시키려 할 것이다.

'이놈을... 이놈을 죽여야 하는데....'

자신은 용병단을 이끄는 단장이다. 다른 사람들의 목숨도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책임을 지는 자리에 앉은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이었다.

그렇게 이도 저도 못 하고 있을 때 지셀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복수는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백작님."

"후환을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들은 이제 펜리스로 올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로드리크 후작가는 반드시 펜리스를 멸망시키려 할 것입니다. 그리고 후작은 공작파의 대영주입니다."

그러자 지셀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너희들을 감당할 정도는 된다. 걱정할 필요 없다."

"...."

도미닉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로드리크 후작은 가난한 북부가 아닌 서부의 유서 깊은 대영주, 심지어 서부의 맹주라 불리는 자다. 로드리크 후작가는 서부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아무리 펜리스가 북부 최강의 자리를 거머쥔 대영주라 해도 아직은 로드리크 후작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은인에게 그런 부담을 줄 수는 없다. 도미닉은 부들부들 떨던 손에서 힘을 빼고 검을 내렸다.

"남은 가족들을 구했으니... 이 정도로 만족하겠습니다. 애초에 이것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마르틴을 살려 주면 로드리크 후작가도 굳이 펜리스와 싸워 힘을 소모할 필요가 없다. 기회가 나면 드레이크 용병단 정도만 손봐 주려 할 것이다.

하지만 마르틴을 죽인다면 그때부터는 얘기가 달라진다. 드레이크 용병단뿐만 아니라 용병단을 거둔 펜리스도 로드리크 후작가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지셀은 도미닉을 바라보며 말했다.

"후회하지 않겠어?"

"...가슴에 묻겠습니다."

그러자 지셀이 고개를 저었다.

"가슴에 묻는 복수 따위는 세상에 없다. 오직 용서와 복수, 둘 중 하나뿐이다."

"백작님...."

"다시 한번 말하지. 후환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다. 그래도 네가 싫다면 강요하지는 않겠다. 네가 용서하고 싶다면 해도 좋다. 그건 너의 자유니까. 다만...."

여전히 머뭇거리는 도미닉을 보며 지셀이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네가 마르틴을 죽이든 말든 나는 로드리크 후작가를 멸망시킬 거다. 그리고 공작가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누가 와도 말릴 수 없다."

"...!"

"그러니 펜리스와 로드리크 사이의 문제는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다. 하지만 그래도 네 마음에 짐이 남는다면."

도미닉이 떨리는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지셀 또한 도미닉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후작가와 싸울 때 내 군대의 선봉에 서라. 그거면 족하다."

도미닉은 한참 동안 지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다들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턱!

도미닉은 마르틴에게 빠르게 다가가 그의 목을 한 손으로 우악스럽게 잡았다.

"컥, 커억! 이, 이놈이! 감히 누구를 잡는 것이냐! 놔라! 놓으란 말이다!"

마르틴의 외침을 무시한 도미닉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의뢰비는 이걸로 먼저 받겠습니다."

그러고는 살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반드시 펜리스군의 선봉에 설 것입니다."

푸욱!

"커어억!"

도미닉의 검은 그대로 마르틴의 복부를 뚫고 들어갔다. 하지만 마르틴은 비틀거리기만 할 뿐 죽지 않았다.

도미닉은 인질이 붙잡혔던 간부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너희들 차례다."

드레이크 용병단의 간부들과 산하 용병단의 단장들이 날 선 눈빛으로 마르틴에게 다가갔다.

이들 또한 가족들을 잃은 경험이 있었다. 그러니 그 원한 또한 무척 깊을 수밖에 없었다.

마르틴은 용병들이 다가오자 배를 부여잡고 말했다.

"오, 오지 마. 아, 안 돼. 천한 네놈들이 가, 감히 나를.... 아버지가, 아버지가 절대 네놈들을 용서하지 않을...."

푸욱! 푸욱! 푸욱! 푸욱! 푸욱!

"컥, 꺼억...."

마르틴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용병들이 거침없이 그의 몸 곳곳을 찔렀기 때문이다.

푸욱! 푸욱! 푸욱!

"끄으으윽...."

마르틴은 정신이 나갈 듯한 고통을 느꼈다. 이 정도로 찔렸으면 진작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숙련된 용병들은 그를 그렇게 쉽게 죽이지 않았다. 최대한 오랫동안 고통을 느끼다 죽게 하려고 즉사하지 않는 부위만 골라 공격한 것이다.

털썩.

바닥에 쓰러진 마르틴은 숨을 헐떡이며 바르작거렸다. 피가 너무 많이 빠졌는지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보다 더 힘든 것은 온몸이 너무나도 아프다는 것이었다. 그는 태어나서 이런 고통을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끄... 으, 아아... 사, 살려 줘...."

도미닉과 용병들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자신의 가족들을 죽이고 인질로 잡아 더러운 짓만 시키던 놈이었다. 일말의 동정심조차 들지 않았다.

마르티는 가물거리는 눈을 억지로 뜨며 몇 번이나 껌뻑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인질을 구해 간 놈이 시야에 들어왔다.

지셀은 죽어 가는 마르틴의 곁에 다가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가서 기다려라. 네 아비도 조만간 보내 줄 테니까."

마르틴은 흐려지는 정신을 다잡고 도미닉과 지셀이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펜리스, 분명 펜리스라고 했다.

"네놈... 용병이 아니었구나.... 펜리스라고.... 너... 뭐냐...."

지셀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내가 바로 펜리스 백작이다. 그리고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가 모두의 귀에 닿았다.

"용병들의 왕이 될 사람이다."

그 선언은 모두의 마음을 크게 울렸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지셀의 말이 진실이 될 거라는 예감을 받았다.

지셀은 자신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믿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니 언젠가는.

용병왕의 깃발이 다시 왕국을 넘어 대륙을 뒤덮으리라.

344화 돌아갈 때는 쉽게 가자고. (3)

"끄르륵... 미친 새끼...."

피거품을 게워 내던 마르틴은 죽어 가면서도 황당해하는 눈빛을 지었다.

용병들의 왕이라니? 그런 칭호는 들어 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펜리스 백작이 미친놈이라는 건 유명했다. 그러니 그가 하는 말도 다 미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재수 없을 데가 있나.'

마르틴은 미친놈한테 걸려서 이렇게 죽는 게 너무 억울했다.

"아버지가... 반드시 네놈들을... 죽일 거다.... 찢어 죽일 거...."

마르틴은 저주의 말을 내뱉으며 고통 속에서 숨을 거뒀다.

드레이크 용병단은 마르틴의 시체를 보고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복수를 한 건 속이 시원했지만, 뒷감당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도미닉을 바라보며 웃었다.

"어때? 속이 시원하지?"

"네... 시원하긴 한데...."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무슨 용병이 이렇게 소심해? 나중에 싸워서 이기면 돼."

"...."

서부 최강 귀족의 아들을 죽여 놓고 걱정을 안 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도미닉은 지셀과 자신의 그릇이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난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 달라서 저쪽은 좀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이긴 해도 말이다.

두두두두두두!

그때, 말발굽 소리가 점차 커지며 일단의 병력이 몰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도미닉은 정신을 차리고 말에 올라탔다.

"전투를 준비해라!"

용병들도 그 말에 따라 대열을 갖추고 무기를 들었다.

달려오는 군대는 도시 수비군과 마르틴의 사병들이었다.

용병단 앞에 도착한 수비대장은 도미닉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도미닉! 네놈이 결국 사고를 쳤구나! 이 공자님은 어디에 계시느냐!"

도미닉은 지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바로 수비대장에게 마르틴의 시체를 집어 던지며 외쳤다.

"우리 가족들을 인질로 붙잡고 죽였기에 내가 죽였다. 이건 정당한 복수다."

"뭐? 뭐? 너, 너 미쳤느냐!"

수비대장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로드리크 후작가의 이 공자가 한낱 용병단 따위에게 죽고 말았다.

자칫 잘못하면 수비군 모두가 징계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당장 이놈들을 죽여야 한다. 안 그러면 자신들이 죽는다.

"다, 당장 저놈들을...."

수비대장은 명령을 끝까지 내리지 못했다. 험악한 용병들의 기세 때문이었다.

'치, 치면 우리가 죽는다.'

자신들 쪽은 모두 합쳐 천 명에 가까웠다. 절대로 적은 수가 아니었지만, 드레이크 용병단의 규모는 그 이상이었다.

임무 때문에 외부로 나간 인원과 아직 모이지 못한 인원은 빠진 상태였는데도 물경 2천에 가까워 보였다.

드레이크 용병단은 서부 최대의 용병단답게 경험이 많다. 그 위명도 절대 작지 않다.

'싸운다면 필패, 설령 이기더라도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볼 게 분명해.'

사실 저들을 상대로 이길 자신도 없었다. 이쪽의 병력은 전투 경험도 거의 없었다.

마르틴 정도 되는 강대한 귀족들은 용병단을 하찮게 봤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리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어, 어떡하지?'

돌아가도 죽고 싸워도 죽는다. 수비대장은 얼굴에 곤혹스럽다는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도미닉도 그걸 알고 있기에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실종으로 처리해라."

"뭐?"

"어차피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죽은 기사들, 병사들과 함께 외유를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걸로 처리해라. 그러면 되지 않겠나?"

"...."

수비대장은 침만 삼킬 뿐 대답하지 못했다.

당장은 그렇게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로드리크 후작가는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분명 시간이 지나면 조사를 할 것이고 결국 언젠가는 진상이 발각되고 말 것이다.

수비대장이 대답을 못 하고 있자 도미닉이 설득하듯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너희에게 방법은 없어. 우리랑 싸우고 여기서 죽든가, 솔직하게 말하고 후작가에 죽든가 둘밖에 없지. 그럴 바에는 일단 시간이라도 벌고 고민을 하는 게 낫지 않겠나?"

"...으, 으음."

"입단속만 잘하면 된다. 다들 죽고 싶지 않으면 말을 잘 듣겠지."

"하, 하지만 분명 걸릴 거야."

"그때는 우리 핑계를 대라. 우리가 납치한 거 같다고 말이야."

그렇게 해도 분명 벌을 받아 죽을 것이다. 로드리크 후작은 잔인한 자다.

하지만 당장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최대한 정보를 조작하고 숨기다가, 들킬 거 같으면 그 전에 다 같이 도망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 알겠다."

수비대장은 결국 도미닉의 제안을 수락했다. 마르틴은 충성을 받을 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도 자신의 목숨을 최대한 보전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지셀은 수비대와 마르틴의 사병들을 슬쩍 둘러보고 피식 웃었다.

"북부보다 형편없군."

아무리 돈이 많고 세가 강성하면 무엇하나. 나태해진 병사들은 충성심도 없고 열의도 없고 싸울 의지도 없었다.

북부에서 악독한 영주로 유명하던 카발디 백작의 병사들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거친 북부에서 살아온 자들은 적어도 일단 싸워 보자는 기질이 있었다.

물론 저들의 잘못은 절대 아니었다. 그 정도로 악독하게 사람들을 다룬 귀족들의 잘못이 훨씬 더 크다.

후작가의 직속 병력은 그래도 다르겠지만, 다른 영지의 사정은 안 봐도 뻔했다.

어쨌든 수비대장이 도미닉과 합의한 덕분에 전투 없이 상황이 종료됐다.

도미닉은 용병들을 돌아보며 손을 들었다.

"가자."

드레이크 용병단의 병력 대부분은 이미 짐을 꾸린 상태였다.

거리가 있어 아직 도착하지 못한 용병단과 다른 영지에 있는 산하 용병단, 임무를 수행 중인 용병들에게도 곧 소식이 전해질 것이다.

그들 또한 대부분이 짐을 꾸려 펜리스로 자리를 옮길 것이다.

어차피 도미닉이 사고를 친 이상 여기 남아 있어 봤자 결국 후작가에 시달릴 테니까.

떠나는 드레이크 용병단을 보며 수비대장이 갑자기 도미닉에게 물었다.

저 많은 인원이 서부를 떠나 어디에 정착할지 궁금해졌다.

"너희... 다 어디로 가는 거냐?"

어차피 활동하다 보면 금세 소문이 날 테니 도미닉은 굳이 숨기지 않았다.

"펜리스. 우리는 펜리스로 갈 것이다."

"펜리스...?"

수비대장도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요새 가장 유명한 영지. 북부의 신성이자 망나니가 영주로 있다는 곳이다.

지셀이 말에 올라탄 뒤 수비대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바로 펜리스 백작이다. 이제 이들은 내가 거둘 거니까 나중에 후작가에 걸리면 그렇게 말해.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

얼굴을 보니 마르틴을 납치한 놈이었다. 실력은 좋은 놈 같은데 살짝 미친 모양이다. 수비대장은 그냥 모르는 척했다.

지셀은 머쓱함에 입맛을 다셨고 도미닉은 그 모습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하긴 누가 믿겠는가? 북부의 영주가 이렇게 직접 찾아와서 날뛴다는 걸 말이다.

그렇게 드레이크 용병단은 자리를 떴고, 도시 수비군은 마르틴의 시체를 불태우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지셀은 펜리스로 향하는 도중에 도미닉에게 물었다.

"내 물건의 경매는 어디서 어떻게 진행되지?"

"...."

도미닉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추종자에게 우상의 물건을 몰래 구할 수 있다는 건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특히 수집광일수록 그런 성향이 더 강했다.

도미닉이 우물쭈물하자 지셀이 삐딱하게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어서 얘기하시지?"

"...네."

결국 도미닉은 모든 걸 털어놓았다. 접선 방법과 장소, 구매 방법 따위를 하나도 빠짐없이 말이다.

지셀은 이야기를 듣는 중간중간 한숨을 내쉬고 혀를 차면서 고개를 계속 끄덕였다.

이렇게 빨리 영지로 돌아가고 싶은 적은 처음이었다.

* * *

"자자, 오늘은 밤을 새워서라도 빨리 진행해야 해. 물량이 부족하다고."

영지의 한 건물에서 클로드가 사람들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펜리스 백작 일대기 – 2차 마수의 숲'을 제작하는 중이었다.

수많은 필경사가 모여 클로드의 지시 아래 열심히 글을 적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클로드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 이게 다 얼마야."

시작은 사소했다. 몇몇 상인이 영주가 요즘 인기 있다고 얘기해 주고, 은밀히 영주가 쓰던 물건들을 구할 수 있냐고 문의를 해 왔다.

영지 밖엔 나가 보지도 못하고 너무 바쁘게 살아온 클로드는 그런 걸 잘 몰랐다. 하지만 알고 보니 영주에게 상당한 추종자들이 있었던 게 아닌가!

"인기인과 관련된 상품은 잘 팔리는 게 상식이다. 크흐흐."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클로드는 바로 머리를 굴렸다. 영주의 인기를 이용한 사업을 몰래 하기로 말이다.

뇌물을 먹는 것도 아니고 영지의 재산을 착복하는 것도 아니다. 당당하게 일을 해서 버는 거니 그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웬디를 속이는 게 가장 어려웠지.'

클로드가 슬쩍 옆을 바라보았다. 과연 웬디는 불안해하는 표정으로 손톱만 물어뜯고 있었다.

저 강철 같은 여자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보니 괜히 속이 통쾌해졌다.

'크큭, 이 정도까지 왔으면 너도 어쩔 수 없겠지.'

클로드는 무척 조심스럽게 이 사업을 진행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영주의 일대기를 기록하는 것이었다.

웬디는 처음에 그걸 보고 물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음, 영주님의 행적을 기록하는 거지. 이런 건 원래 다들 하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모든 귀족 가문은 자신들에 관한 기록을 남긴다. 업적이 뛰어나다면 더 과장되게 남기기까지 한다.

문제는 기록하는 것 자체가 아니었다.

"그걸 왜 총관님이 직접 쓰세요?"

보통 이런 기록을 하는 사관은 따로 있다. 굳이 총관이 직접 저술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클로드는 뻔뻔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들 바쁘잖아? 그리고 나만큼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없거든. 내가 명필에 명문장가야."

클로드는 '어쨌든 업무의 일종이니 총관이 할 수도 있다' 하고 우겼다. 크게 틀린 말은 아니기에 웬디는 당장 말리지 못했다.

그는 틈틈이 일대기 작업을 하며 영지의 공문을 작성하는 필경사들에게 일대기를 똑같이 베끼라고 시켰다.

그 부분도 수상했지만 여러 사람에게 나눠 주려고 복사본을 남긴다는 말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클로드는 그 뒤로도 수상한 짓을 잔뜩 했다.

"어허, 총관인 내가 영주님의 의복을 확인해봐야 한다니까? 의전 관리는 집사장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영주님의 무기들을 가져와 봐. 상태를 점검해야겠다."

"흐음, 이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네. 따로 빼놔라. 부족한 점은 내가 공방에 전달하겠다."

"아, 집사장한테 말해서 버릴 것들은 이쪽으로 보내라고 해. 마지막으로 한번 확인해 봐야겠다."

이런 식으로 클로드는 자신의 권한을 이용해 지셀의 물건을 야금야금 빼돌렸다. 총관의 업무와 엮어 그럴듯하게 사람들을 속였다.

클로드는 영지의 총관이다. 당연히 거느리는 행정관들이 많다. 그러다 보니 그에게도 심복이 하나둘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클로드는 믿을 만한 심복들에게 물건을 맡기고 몰래 팔게 했다.

이 부분이 가장 어려웠다. 웬디에게 걸리지 않도록 단어를 나눠 쪽지를 주는 등 별짓을 다 해야 했기 때문이다.

추가로 상인들을 통해 추종자들에게 은밀하게 소문을 내게 했다.

'후후, 이때가 고비였지만 무사히 넘겼지.'

처음은 힘들었지만, 심복들이 클로드의 의중을 알아챈 뒤에는 눈짓만으로도 모든 게 통했다.

그렇게 해서 어둠의 경매장이 만들어지고 지셀의 물건이 추종자들에게 팔리게 된 것이다.

웬디가 알아챘을 때는 이미 물건이 팔릴 대로 팔려 나가고, 경매장의 규모도 커진 상태였다. 클로드는 그 뛰어난 머리로 영지의 모든 사람을 속이고 새로운 사업을 일궈 낸 것이다.

웬디는 경매장의 존재를 알게 된 뒤로 몇 날 며칠을 손톱만 깨물며 고민했다.

'어떡하지? 이걸 어떻게 보고해야 하지?'

영지의 공금을 빼돌린 것도 아니다. 무상으로 사람들을 부리는 것도 아니다.

자기 스스로 노력해서 새로운 사업을 일궈 냈고 그 수익으로 사람을 쓰고 있었다.

이놈은 영악하게도 벨린다가 다시 가져가는 물건은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 상태를 보고 처분하려는 것만 슬쩍 가져와서 팔았다.

아무리 버리는 것이라도 영주의 물건을 함부로 팔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게 참 애매하다.

원래대로라면 처음부터 보고해서 막았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이 너무 커져서 보고하기도 막막했다.

클로드는 웬디의 표정을 슬쩍 보고 속으로 웃었다.

'흐흐흐, 은근히 마음이 약하단 말이야? 너무 많은 사람이 엮여 있으니 보고하기도 힘들겠지.'

필경사들부터 물건을 판매하는 자들까지 모두 잠도 안 자고 일하고 있다. 다들 자의로 하는 일이니 막을 근거도 없다.

웬디는 도무지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잘못은 잘못인데 큰 잘못이 아니다. 어찌 보면 눈 감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지금이라도 막아야 하는데 분위기상 그게 쉽지 않았다.

클로드가 슬쩍 웬디에게 속삭였다.

"그냥 넘어가, 이미 늦었어. 너도 옆에서 계속 구경만 한 꼴이 된 지 오래라고. 이렇게 된 거 어쩔 건데?"

웬디가 노려보자 클로드가 고개를 휙 돌렸다. 정말 얄미운 새끼였다.

클로드는 필경사들에게만 일을 맡긴 게 아니었다. 그의 주위에는 다른 인물들도 각을 잡고 대기하고 있었다.

"자자, 글쟁이들은 열심히 쓰고 있으니까 그림쟁이들도 다들 모여 봐."

이들은 바로 펜리스 영지의 화가들이었다. 클로드는 제 명령으로 소집된 화가들을 쓱 한번 훑어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너희들 초상화 똑바로 안 그려? 영주 얼굴 아는 사람들한테 보정이 너무 심한 거 같다고 자꾸 항의가 들어오잖아!"

화가들은 클로드의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솔직히 억울했다. 무조건 잘생기게 그리라고 시킨 사람은 클로드였다.

심지어 그가 직접 작업물을 확인하고 통과시켰다. 그런데 불만이 접수되자 바로 저렇게 모르는 척하는 것이다.

참으로 뻔뻔한 놈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튼! 어! 다시 그려야 해! 알겠어? 이번에는 인공미를 최대한 줄여 보자고!"

"아, 알겠습니다."

"어쨌든 지금 환불 요청도 많이 들어왔고 다시 제작하라는 요청도 많아. 그러니까 지금까지 작업한 건 다 폐기하고 다시 그린다! 알겠나!"

"마, 만들어 놓은 게 오, 오백 장이나 되는데요?"

"오백 장이든 오천 장이든! 이건 신용이 달린 일이야! 그러니까 밤을 새워서라도 다시 그리는 거다!"

그 말에 화가들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가장 신용이 없는 놈이 신용을 외치며 방방 뛰고 있다. 진짜 한 대 패 버리고 싶었다.

클로드는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자자, 힘을 내! 하면 다 돼! 우리 오늘 열심히 달려 보자고!"

클로드는 화가들에게 열심히 달려 보자고 격려했다.

지금 이곳으로 진짜 누가 달려오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345화 미리 준비를 해야겠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