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레리온 영지]
'오! 벌써 탑이 완성됐네!'
드워프의 실력이 훌륭한 건지, 아니면 프레디 시장의 능력이 뛰어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200여 미터나 되는 탑이 영주관 뒤쪽에 우뚝 솟아 있었다.
2층 구조에 4면에 긴 정박지가 있었고, 양쪽에 배를 델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한 면에 2대씩, 4면에 8척의 비공정을 정박할 수 있었고, 2층 구조였으니, 총 16척의 비공정을 정박할 수 있었다.
"일단 영주관 앞에 착륙해라."
"네!"
촤르르르! 고오오오!
우린 영주관 앞쪽 기간트 연병장에 착륙했다.
구조상 완벽히 땅에 내려올 수 없었기에 살짝 떠 있는 상태로 해치를 내려 기간트와 오크 해병대부터 내렸다.
그리고 비공정은 기간트 공방으로 보냈다.
나머지 비공정도 차례로 기간트와 기사들만 내리고, 개조할 오리지널 기간트와 부서진 마장기는 모두 기간트 공방으로 보냈다.
"잘 되겠죠?"
날아가는 비공정을 보며 리오넬 대령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보안 때문에 우리 기간트 공방을 보여줄 순 없지만, 개조가 끝난 오리지널 기간트는 바로 테스트할 수 있도록 이리로 가져오겠습니다."
"휴! 알겠습니다."
옆에 있던 비에르 왕자가 말했다.
"타일러 후작님, 혹시 그동안 제가 탈 기간트가 없겠습니까? 하루라도 연습하지 않으면 실력이 줄어들어서요."
기특한 생각이네.
"룩급 기간트를 하나 배정해 드리죠."
"감사합니다."
그리고 보니 비에르 왕자랑 나랑 나이가 비슷하겠네.
저 나이에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를 몰 정도니 그도 천재라고 불릴 만했다.
난 마키아스 단장을 쳐다봤다.
물론 우리 천재가 더 뛰어나긴 하지만.
"우리 기사들과 대련을 해도 좋을 겁니다."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비에르 왕자가 아까부터 마키아스의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를 보고 있었기에 한 말이었다.
서로 대련하다 보면 실력이 쌓이겠지.
그리고 비에르 왕자가 아리칸 왕국의 다음 왕이 될 수도 있으니 잘해 줘야지.
흐뭇한 상상을 해본다.
"영주님!"
프레디 시장이 다가왔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애들아!]
비숍급 기간트 해치가 열리더니, 콜벳이 뛰어내렸다.
그리곤 프레디 시장 뒤쪽에 있는 부인과 아이들을 향해 달렸다.
'아! 가족들이 왔군.'
콜벳은 가족들과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반가운 얼굴이 다가왔다.
"충!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장!"
"마크, 어째 체격이 더 커진 거 같은데?"
"틈날 때마다 몸을 키워야죠. 몸이 튼튼해야 정신도 맑고, 기간트도 잘 탈 수 있는 겁니다."
"녀석, 여전하군. 가족들은?"
"여기 계시는 프레디 시장님께서 이층집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는 가족들을 데리러 갔던 남은 한 명의 기사였다.
난 프레디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군."
"다른 기사들의 숙소도 전부 영주관 뒤쪽에 따로 마련했습니다."
프레디는 역시 일을 잘한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하니까.
난 마크에게 말했다.
"가서 동료들과 인사해야지."
"네!"
마크는 하얀 악마 기사들을 향해 움직였다.
1년 6개월의 긴 비행석 원정 동안 함께한 전우들이었기에 우애도 남달랐다.
"프레디, 영지에 별일은 없었고?"
"왜 없겠습니까. 우리 영지의 기사가 되고 싶다고, 기사 후보생들이 몰려 왔습니다."
"뭐?"
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우리 영지에 기사가 되겠다고 온 사람들인가?"
"네! 황립 사관학교 기간트 생도 출신도 있고, 대수림에 전진 기지에 근무했던 기사도 있습니다. 주변 영지에서 온 기사도 있고요."
"신분은 확인했나?"
"1차로 찰스 정보국장님께서 신상 정보를 주셔서 문제없을 만한 사람들만 추려서 남겼습니다. 마을 여관에 묵고 있는데 보시겠습니까?"
"알았네. 나중에 직접 살펴보지."
133. 대수림은 처음이지?
133. 대수림은 처음이지?
하긴 내게 비공정과 기간트가 있다는 건, 이제 모르는 곳이 없겠지.
아리칸 전선의 제국 기사들이 모두 귀국했을 테니까.
이제 내 이름과 우리 발레리온 영지 기사들의 활약이 제국 전역에 퍼지는 것도 금방일 것이다. 그리고 베르가니 영지와 영지전은 진작 퍼져 있었고.
영지 간 영지전이 벌어지지 않은 것인 상당히 오래됐기에 다들 관심이 있었고, 우리 영지의 기간트 숫자가 훨씬 적은대 상대를 피해 없이 물리친 것도 큰 화젯거리였다.
'그래도 황립 사관학교 졸업생까지 왔다는 건 조금 의외네.'
아베르크 제국의 최대 장점은 인재가 많다는 것이다.
특히 황실 사관학교는 매년 기간트 생도 100여 명이 졸업하는데, 최상위권은 당연히 황실 근위 기사단에 들어가고, 그다음 우수생들은 황제 밑에 있는 5개의 군단에서 뽑아간다.
그리고 중위권 생도들은 북부군, 동부군, 서부군에서 뽑아간다.
나머지 생도들은 자신들이 원하면 지방의 영지군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지방 영지군엔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영지에 들어갈 수도 없는 것이 대영지는 자체적으로 기사를 양성했기 때문에 뽑는 숫자가 별로 없었다.
그러니 우리 영지에 황립 사관학교 출신이 지원했다는 우리 영지의 위상이 올라갔다는 말이었다.
'괜찮은 놈들이 많이 왔으면 좋겠군.'
그렇다고 아무나 다 받을 순 없었다.
옥석은 가려서 받아야지.
"다른 소식은?"
"아! 며칠 전 대수림 정보대에서 소식을 알려왔습니다. 카야킨 전진 기지 남쪽에 차원 균열이 생겼다고 합니다."
"뭐? 여기도?"
"그리고 가디언 제국에도 관문 근처에 균열이 하나 생겼답니다."
"그럼 내가 알고 있는 것만 벌써 4개군."
대수림에 차원 균열은 여러 개다.
엘프 차원과 드워프 차원, 오크 차원과 연결된 균열도 여러 개였고, 이번에 생긴 차원 균열도 여러 개였다.
그런데 왜 장벽 가까이에 생긴 것인지 의문이었다.
'설마 차원 균열이 장벽 너머에도 생기진 않겠지?'
살짝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자! 영주님께 인사드려야지."
콜벳이 가족들을 데리고 왔다.
"타일러 영주님을 뵈옵니다."
"영주님, 안녕하세요!"
콜벳의 부인과 네 아이가 내게 인사했다.
부인은 단아한 미인이었고, 아이들은 똘망똘망해 보였다.
"우와! 영주님, 잘 생기셨네요."
"응?"
"키도 크시고, 피부도 좋으세요."
8살 어린 여자아이가 대 놓고 내 외모를 칭찬했다.
아이들도 잘생긴 건 아나 보다.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좋긴 했다.
그리고 다른 녀석들도 날 칭찬하기 시작했다.
젊은 나이에 영주가 되어 대단하다느니, 날 언제 봤다고 인품이 훌륭하다는 말까지 거침없이 말했다.
꼭 누가 날 칭찬하라고 교육한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5살 꼬맹이가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영주님, 집이 조금 좁던데 더 넓은 곳으로 옮겨 주실 순 없으실까요?"
"뭐?"
"제 방이 필요해서요. 형들과 누나는 방이 있는데, 전 엄마랑 방을 함께 쓰고 있거든요."
너무 맑아 보이는 막내의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어서 큰 집으로 옮겨 줘야 할 것 같았다.
난 프레디를 쳐다봤다.
"집이 좁은가?"
"이층집에 방이 4개라 좁진 않습니다. 이 집은 식구가 조금 많긴 합니다."
난 콜벳 내외를 쳐다봤다.
콜벳은 자신이 시킨 것이 아니라고 양손을 흔들고 있었고, 콜벳 부인은 곤란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순간 콜벳이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우 같은 자식들과 토끼 같은 마누라가 있다더니······.
'그게 진짜였어?'
난 고개를 흔들었다.
"프레디 시장, 조금 더 큰 집이 없나?"
"있긴 한데 영주관에서 조금 멉니다."
"그 집으로 옮겨 주게. 콜벳이 조금 더 걸으면 되지."
"네! 알겠습니다."
"야호!"
"감사합니다. 영주님!"
막내 꼬맹이하고 아이들이 내게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예의는 바르네.
녀석들이 쪼르르 부모에게 달려가 자랑했다.
가족들이 한곳에 모여 있는 모습이 살짝 부럽기도 했다.
난 전생에 40대가 되도록 연애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가까운 사람이 죽고 내 마법인형이 되는 상황이 반복되자, 아예 마음의 문을 닫기도 했고.
그리고 나 말고 가족들의 상봉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다.
쿠훌린과 오크 해병들이었다.
'이런, 그러고 보면 오크 차원만 가지 않았네······.'
엘프 차원에선 힘멜 일족을 구했고, 드워프 차원에선 수천 명의 드워프를 구해왔다.
하지만 오크 차원은 아직 가보지도 못했다.
오크들도 가족이나 다른 오크 종족을 구하고 싶을 텐데,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건 부탁을 잘 하지 못하는 그들의 성향이기도 했다.
지금 새롭게 생긴 차원 균열 보다, 아무래도 오크 차원부터 가야 할 것 같았다.
어차피 균열 밖으로 괴수가 나오진 않았으니, 급할 건 없었다.
새로운 이계 난민들이 나온 것도 아니고.
"프레디 시장, 가디언 제국의 움직임은 어때?"
"찰스 국장님께서 별말씀은 없었습니다."
"아직 조용한가 보군. 알았네."
일단 기사들도 뽑고 이곳 정리가 끝나는 대로 오크 해병들을 이끌고 오크 차원으로 가야겠다.
그곳에 또 어떤 괴물들이 있을지 살짝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나도 이제 마법인형만으로 30기나 되는 기간트를 운용할 수 있었고, 비공정과 괴수인형도 많으니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
[발레리온 기간트 공방]
새로운 기간트 공방은 지하에 있었다.
지상엔 드워프 기술자들의 집과 케네스 영감의 저택이 있었다.
그래서 겉에서 보기엔 전혀 공방처럼 보이지 않았다.
"여! 타일러여! 어서 오게."
글러드 왕자와 드워프들이 날 반겼다.
난 드워프들과 먼저 일일이 인사를 하고 내부를 둘러봤다.
"규모가 엄청나군."
"아직 완공하려면 2년은 더 걸릴 거다."
"글러드, 너무 크게 짓는 거 아냐?"
"아니다. 본격적으로 기간트를 생산하려면, 더 넓어야 한다."
그때 케네스 영감이 왔다.
"영주님! 맨날 일거리만 잔뜩 들고 오십니다."
"하하! 미안합니다."
케네스 영감의 말투가 또다시 바뀌었다.
그래도 영주님인데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다고 했다.
"방학 때 앨리슨이 왔다 갔습니다."
"아! 그랬군요."
나도 알곤 있었다.
분신인형 짹을 통해 봤으니까.
"많이 섭섭해하더군요."
케네스가 더 서운해하는 것 같았다.
"이번에 가져온 오리지널 기간트 말입니다. 배터리 부분만 요즘 생산하는 기간트에 맞게 개조해 주면 됩니까?"
"네. 그렇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케네스 영감이 뭔가를 가져왔다.
그건 한 장의 설계도였다.
"신형 마석 배터리 설계도입니다. 제대로 만든다면 지금 나오는 마석 배터리보다 효율을 1.2배나 늘릴 수 있습니다."
"1.2배요? 오! 이런 걸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제가 아닙니다. 앨리슨이 영주님께 드릴 선물로 가져온 겁니다."
"아!"
앨리슨에게 미안했다.
하도 바빠서 저번에 수도에 가서도 들리지 못했다.
그런데 녀석은 황립 사관학교 수업을 받으면서도 이런 걸 다 연구해 선물로 주었다.
다음에 수도에 가면 꼭 들려야겠다.
"개조하는 김에 이 신형 마석 배터리를 만들어 테스트해보고 오리지널 기간트 적용하면 어떻겠습니까?"
난 고개를 흔들었다.
"테스트는 필요 없을 겁니다. 앨리슨이 만든 거면 잘 될 겁니다. 다만 그 마석 배터리는 이번에 만드는 우리 오리지널 기간트에만 적용해 만들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부서진 오리지널 마장기도 가능하면 전부 신형 배터리를 장착할 수 있게 개조해 주시고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신형 배터리의 존재는 아직 알려지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랬기에 우리 오리지널 기체들부터 바꾸고, 그다음에 우리가 보유한 양산형 기간트부터 적용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우리 영지가 커지고 제국이 안정되면, 그때 다시 개조해 주겠다고 하고, 아리칸 왕국에 은혜를 베풀면서 우리 신형 마석 배터리를 팔아도 되는 것이고.
"그리고 전에 맡기신 25미터 거신 갑옷 말입니다. 기간트로 만드는데 시간이 꽤 걸릴 거 같습니다. 설계도와 작업대를 만드는 것부터 해서, 괴수 부산물까지 필요한 재료가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비행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갑옷도 워낙 무거워 작업이 쉽지 않고, 이대로 만들면 마석 배터리가 수십 개는 들어갈 겁니다. 하지만 강습 갑옷처럼 비행석을 이용해 평소엔 무게를 줄이고, 전투 시에만 쓴다면 훨씬 효율적일 겁니다."
"아! 그게 좋겠군요. 비행석이라면 많으니, 놓고 가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새로 만드는 오리지널 기간트에도 적용할 수 있으면 시범적으로 장착해 주십시오."
"네! 드워프들이 있으니 어렵진 않을 겁니다."
이번에 탈로스 왕국에서 얻은 잘 가공된 비행석을 100개 정도 놓고 갈 생각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참! 괴수 부산물이 슬슬 바닥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수림에서 사냥을 좀 해야겠군요."
그동안 내가 챙긴 부산물이 상당했지만, 오리지널 기간트를 만들고 기간트를 수리하는데 많이 소모했다.
그러니 오크 차원으로 가는 길에 괴수 사냥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보름간 정신없이 작업 지시를 내리고, 영주관으로 돌아갔다.
***
[영주관]
문밖에 10명의 기사 후보생이 일렬로 대기하고 있었다.
난 눈으로 마나를 뿜어내며 그들의 마나량을 확인했다.
'이번 조는 마나량이 별로군.'
황립 사관학교 출신이라 기대를 했는데, 대부분 폰급 기간트를 겨우 몰 수준이었다.
내가 일일이 그들을 만날 시간이 없었기에 면접은 마키아스와 펠릭스 두 기사단장에게 맡겼다.
펠릭스는 황립 사관학교 출신이었기에 황립 사관학교 출신 후보생 면접을 보게 했고, 그 외에는 전부 마키아스가 면접을 봤다.
그리고 난 특별한 인재가 없는지 그것만 확인하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 대기실에 있는 기사 후보생까지 모두 살펴봤지만, 마나량이 많거나 체내 마나 흐름이 특별히 빠른 기사는 없었다.
고개를 흔들었다.
'하긴 특별한 기사가 이곳에 올 리가 없지.'
하지만 괜찮다.
우리에겐 롤랑의 마나 수련법이 있으니까.
키우고 훈련받다 보면 트라스의 개 용병 출신 기사들처럼 크게 성장할 순 있었다.
물론 혹독한 훈련 때문에 포기할 수도 있지만.
그때 커다란 마나 덩어리 넷이 영주관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난 순간 그들이 누군지 알았다.
'하하! 이렇게 기사들을 빼가면 황제가 싫어할 텐데······.'
그들은 나와 함께 탈로스 기간트 공방을 박살 낸 영웅 기사들이었다.
나와 아베르크 황제를 구하기도 했고, 훈장도 함께 받은 기사들.
게다가 넷 모두 오리지널 기간트에 탈 실력을 갖춘 기사들이었다.
반가움에 입구로 마중 나갔다.
"어서들 오게."
"와! 정말 영주님이셨네요."
크리스티나 중령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후버 대령이 물었다.
"그런데 우리가 탈 기간트는 있는 겁니까?"
"하하! 우린 기간트는 넘쳐나네. 기사들이 없지."
"영지가 아기자기한 것이 예쁘네요. 길도 잘 닦여 있고요."
라이너 대령은 거짓말을 못 하는 사내였으니, 진짜 칭찬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반갑기는 했으나, 살짝 걱정됐다.
모두 소속 부대에서 룩급 기간트에 탈 정도로 뛰어난 기사들이었으니, 서부군 사령관이 순순히 보내줬을 리가 없었다.
그와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길라드 대장이 그냥 보내주던가?"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말도 마십시오. 제국법까지 운운하며 처벌하겠다고 난리를 쳤습니다."
"맞습니다. 계급을 강등시키고 감옥에 가둔다고 겁도 줬죠."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온 거지?"
"발레리온 영지로 간다고 하니까. 윌리엄 호세스 공군 사령관께서 힘을 써 주셨습니다."
"뭐? 윌리엄 그 양반이 공군 사령관이라고?"
"네, 비공정과 상륙 기간트 부대를 통합한 공군이 창설됐습니다. 그리고 초대 사령관에 윌리엄 원수께서 임명되셨고요."
"허! 원수로 진급도 했네."
앞으로 비공정과 하늘의 전투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다.
전략 전술의 폭도 넓어지고.
윌리엄이 비행석을 가져왔으니, 공군 사령관이 된 것은 이해가 되지만, 원수라니!
이제 아베르크 제국엔 원수가 2명이었다.
"그럼 북부군 사령관은 누가 됐지?"
"북부군 사령관 자리는 공석이고, 매러덕 소장이 중장으로 진급하며 헬다임 장벽 사령관이 됐습니다."
"매러덕이······?"
매러덕은 엘프 원정대의 부사령관을 했던 인물이었다.
나랑은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그는 황태자의 사람이었다.
'케인 황제가 진짜 여우로군.'
윌리엄이 공군 원수가 되고, 그의 부하들과 5군단이 공군에 편입되면서 갑자기 시안 7황자의 세력이 급격히 늘어났다.
이제 황태자나 3황자의 세력보다 더 클 수 있었다.
기간트가 포함된 비공정의 위력은 지상군 몇 배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러자 이번엔 중요한 장벽 사령관을 황태자의 사람을 앉혀 다시 균형을 맞춘 것이다.
"이제 저희는 뭘 하면 됩니까?"
"전투도 없으니 기간트 훈련이나 하면 되겠죠?"
나는 씨잇 웃어줬다.
"다들 대수림은 처음이지?"
"네?"
"갑자기 대수림이라니요?"
"마침 잘 왔어. 뜨거운 전우애를 만들어 줄 테니까."
난 이들과 오크 해병대를 데리고 대수림을 뚫고 오크 차원으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134. 서리 부족.
134. 서리 부족.
[오크 차원]
희뿌연 먼지와 우중충한 회색빛 하늘.
대지는 까맣고, 숲은 사라졌으며, 산은 무너졌고, 강은 메말랐다.
"맙소사! 대체 여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차라리 저 끔찍한 대수림이 나았네······."
라이너와 크리스티나는 눈앞에 폐허를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나도 좀 충격이긴 했다.
엘프 차원과 드워프 차원도 망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환경이 엉망은 아니었다.
이곳은 화산재 같은 것들이 사방에서 흩날리고 있어 숨쉬기도 힘들었다.
"쿠오크! 타일러여! 돌아가자."
쿠훌린이 다가와 말했다.
"무슨 소리야? 여기까지 와서."
"쿠오크! 이런 폐허 속에 살아남을 오크는 없다."
쿠훌린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레드불 제사장이 다가왔다.
"쿠오크! 타일러여! 인정하기 싫지만, 쿠훌린 족장 옳다. 이 세상은 재만 남았다."
"쿠오오오!"
"쿠오크!"
힘없는 오크들의 울림이 처량하다.
그들이 이곳을 떠났을 때 이미 세상은 불바다였다.
쿠훌린의 말로는 이 땅을 이렇게 만든 것이 화염의 거수라고 했다.
그가 묘사한 생김새를 듣자마자, 난 단번에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레기우스와 불카누스!
레기우스는 이데아 제국의 위대한 열두 기사였으며 화염의 마법사였고, 불카누스는 거신 시대의 마지막 화염의 드래곤이었다.
열두 기사와 수많은 영웅이 힘을 합쳐 이 땅을 침범한 초거수를 죽였으나, 레기우스는 죽은 초거수의 포자를 흡입해 온몸이 화염에 이글거리는 괴물이 됐고, 불카누스는 포자와 초거수의 피를 마시고 거대해졌으며 화염과 재를 뿜어내는 저주받은 거수가 됐다.
이 오크 세상을 멸망시킨 것이 두 괴수였다.
어떻게 그 괴수들이 오크 차원으로 왔는지, 왜 이 세상을 폐허로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은 파괴하고, 또 파괴했으며, 거수는 더 커졌고, 몸에서 떨어져 나간 덩어리에서 화염의 괴수가 태어났다.
그리고 그 화염 괴수들이 오크들을 공격했다.
'아쉽지만, 여긴 내가 봐도 가망이 없겠어.'
비공정 위에서 아무리 둘러봐도 푸른색 식물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물이 없었다.
이곳은 생명체가 도저히 살 수 없는 땅이 되었다.
에테나가 말했다.
"타일러님! 혹시 이곳도 섬 지역이 있으면 그쪽으로 피하지 않았을까요?"
난 쿠훌린을 쳐다봤다.
"오크들이 바다 건너 큰 섬에 피신할 가능성은 없어?"
"쿠오크! 오크는 큰 배를 만들지 못한다. 바다 못 간다."
한가지 희망이 사라졌다.
에테나도 오크어를 할 줄 알기에 함께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오크를 왕창 구해가려고 난민 기지에 들려 추가로 완성된 드워프제 비공정 5개를 추가해 총 11대나 가지고 왔다.
그리고 이 비공정엔 오크 해병대 100명과 11척의 비공정을 조종할 엘프 200명, 기간트 기사 넷이 함께 타고 있었다.
'그런데 그냥 돌아가야 한다니······.'
오크는 워낙 많이 먹기에 일부러 주변 영지와 헬다임까지 가서 식량도 엄청나게 챙겨왔건만······, 이제 다 소용없었다.
그렇게 체념하고 있을 때였다.
불현듯 뭔가 떠올랐다.
"쿠훌린, 혹시 이곳에도 추운 지방이 있나?"
"쿠오크! 북쪽은 너무 춥다. 식량 부족하다. 오크 살지 않는다."
"하지만 오크는 추위에 강하잖아. 피신했을 수도 있지."
쿠훌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모르니까 북쪽으로 가볼까요?"
에테나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화염 괴수들이라 추운 곳에선 위력이 떨어질 거고, 왠지 나라면 뜨거운 열기를 피해 추운 지역으로 올라갔을 것 같았다.
그때 제사장 레드불이 그의 몽둥이를 들고 말했다.
"쿠오크! 옛날에 북쪽 얼음에 땅에 서리 부족이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쩌면 그들이 아직 버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가볼 만하겠는데?"
잠깐 고민했지만, 답은 나와 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확인은 해봐야 했다.
"기수를 북쪽으로 돌려라!"
"네!"
촤르르르르!
우린 북쪽으로 향했다.
***
비공정은 구름 위를 날아간다.
두 달이나 북쪽을 항해가고 있었지만, 아직 산맥은 보이지 않았다.
희박한 공기 때문인지, 호흡이 힘들고 매서운 바람이 불어 매우 추웠다.
하지만 이 아래는 그야말로 지옥이 펼쳐져 있었기에 이곳 하늘이 백 배쯤 나았다.
엘프나 인간들은 갑판 안쪽으로 들어가 추위를 피했지만, 나와 오크들은 북쪽 대륙의 스토막 산맥을 찾고 있었다.
스토막은 대륙에서 가장 높은 산맥으로 수천 미터의 높이와 1년 내내 눈과 얼음에 덮여 있는 산맥이었다.
그곳이라면 오크가 생존할 가능성이 있었다.
턱벅! 터벅!
쿠훌린이 선미 갑판으로 올라았다.
"쿠오크! 타일러여! 고맙다."
"생뚱맞긴! 우린 형제라며? 형제가 이 정도는 해야지."
"쿠오크! 그대는 정말 대족장의 영혼이 깃든 자다. 나 쿠훌린, 늘 감사하다."
평소 감정 표현을 거의 하지 않은 오크였다.
그들의 감정 표현은 분노하고 함성을 지르는 것이 전부였지만, 오늘 쿠훌린은 뭔가 달랐다.
"다른 오크도 너희와 성향이 비슷해?"
"쿠오크! 오크도 부족마다 다르다! 인간도 서로 다르다! 하지만 오크는 용맹한 자를 최고로 치며, 거짓말하는 자를 배척한다. 그리고 은혜는 반드시 갚는다. 모든 오크 똑같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다른 오크 부족도 이들 사이얀족처럼 은혜를 갚는다는 말이었다.
그건 인간보다 확실히 낫다.
"쿠오크! 타일러여! 저길 봐라!"
쿠훌린이 놀란 표정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곳엔 거대한 대륙이 보였다.
아니 저건 구름 위로 솟은 산맥이었다.
"오! 절벽에 눈이 있다."
"쿠오크! 눈 덮인 숲도 보인다!"
"쿠오오오오크!"
갑판에 오크들이 흥분해 소리를 질렀다.
눈에 덮인 숲이었지만, 그것은 아직 생명체가 살 수 있다는 증거였다.
어쩌면 레드불 말처럼 아직 살아있는 오크 일족이 있을 수도 있었다.
"좋아! 다들 꽉 잡아라! 산맥을 넘는다!"
휘이잉! 휘이이이잉!
거센 눈보라가 친다.
화산재만 보다가 하얀색 눈보라를 보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거대한 산맥이 회색 구름을 막고 있었고, 산맥 너머는 하얀 얼음의 땅이었다.
하지만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쿠오크! 타일러여! 이런 곳에서 어떻게 오크를 찾는가?"
쿠훌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나도 궁금하다.
높은 산맥과 혹독한 날씨 때문에 아직 화염 괴수들의 공격을 받지 않은 듯싶었다.
그렇게 산맥 안쪽으로 한참을 날아가자, 조금씩 눈발이 약해졌다.
그리고 시야가 트이자, 눈 덮인 거대한 숲이 보였다.
"오크도 추울 테니, 불빛이나 연기를 찾아라!"
"쿠오크 알았다!"
난 그래도 레어 조끼를 입고 있었기에 추위를 막아주고 있었지만, 오크 해병들은 지금 강습 갑옷도 입지 않고, 맨살로 갑판에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강습 갑옷은 아무래도 시야가 제한적이라 지금은 벗고 있었다.
"쿠오크! 연기다! 연기가 보인다!"
선수에 있는 레드불이 소리쳤다.
저건 희망의 연기였다.
멀리서 보니, 사방은 눈과 얼음에 덮여 있었는데 일렁이는 커다란 호수가 보였고, 무슨 일인지 그 주변만은 푸른색이 가득했다.
'아래에 용암이라도 흐르나?'
가까이 다가가자, 호숫가에 수백 채의 집들이 보였다.
그리고 우리를 쳐다보는 오크들도 보였다.
저곳은 오크 마을이었다!
오크들이 무기를 들고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쿠오크! 타일러여! 우릴 근처에 내려다오!"
오크들이 우릴 적인 줄 알고 공격할 수 있기에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비공정을 착륙시켰다.
그리고 오크 해병들이 내려서 오크 마을로 향했다.
우린 잠시 호숫가에서 기다렸다.
"신기하네요. 여긴 봄날처럼 따뜻해요."
에테나가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봤다.
나도 호숫물에 손을 넣어봤다.
얼음같이 차가운 줄 알았는데, 물이 미지근했다.
그리고 호수에 물고기도 산다.
"영주님, 여기라면 오크가 계속 살 수 있는 거 아닌가요?"
크리스티나가 물었다.
"이 상태를 지속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산맥 아래 세상은 이미 망했어. 여기도 오래 버틸 순 없을 거야."
크리스티나와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따라 영웅 기사들의 표정이 매우 힘들어 보였다.
그들은 이곳까지 오면서 생사의 갈림길에 몇 번이나 부딪쳤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비공정을 타고 가다가 B등급 이상의 괴수를 발견하면 무조건 사냥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A등급 괴수 5마리를 한꺼번에 상대했을 땐, 정말 다들 죽을 뻔했다.
하지만 내가 드라우켄을 꺼내자,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됐다.
물론 기사들은 경악했지만.
그리고 수백 마리의 늑대 괴수 무리와 만났을 땐, 30기나 되는 내 그림자 기사단을 보고 다시 경악했다.
그때부터 기사들은 내 말이면 아예 죽는시늉까지 한다.
나더러 거신이 내린 마법사라나.
진짜 거신 마법사도 있는데······.
"저기 오네요."
라이너가 쿠훌린과 오크들이 돌아온다고 말했다.
"쿠훌린, 어떻게 됐어? 내 말은 전했어?"
"쿠오크! 타일러여! 지금 이곳엔 저들의 족장이 없다. 이곳은 노인과 여자, 아이만 있다."
"그래?"
"쿠오크! 남쪽 얼음 협곡에 가면 족장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다른 오크 일족의 족장도 그곳에 있다."
"얼음 협곡이라, 그리 이동하자!"
쿠훌린이 정보를 알아 왔다.
이곳은 산맥 내부에 거대한 분지였고, 이런 따뜻한 호수가 십여 개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곳은 원래부터 크로우족이라는 서리 오크 부족이 대대로 살던 곳인데, 북쪽에 다른 2개 부족이 괴수에게 쫓겨 도망쳐 합류해, 현재는 3개 부족 만여 명이 넘는 오크가 이곳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얼음 협곡에서 족장들과 오크 전사들이 산맥으로 들어오는 화염 괴수를 막고 있다고 했다.
'만 명이 넘다니, 이거 오크들을 다 옮기려면 3번은 왕복해야겠네······.'
하지만 그건 행복한 고민이었다.
오크를 살릴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으니까.
우린 지금 그 얼음 협곡을 향해 가고 있었다.
***
눈보라 치는 협곡 위쪽에 비공정을 내렸다.
그리고 쿠훌린과 오크 해병들이 먼저 내렸고, 우린 이번에도 기다렸다.
잠시 후 쿠훌린과 피부가 회색인 서리 오크들의 안내를 받아 협곡 아래로 이동했다.
이곳은 협곡 중간에 있는 거대 동굴이었다.
"쿠오크! 난 크로우족 족장 호빌테다! 다른 오크들은 우릴 강철 서리 부족이라고 부르지."
"쿠옥! 난 카이와족 족장 아나키드다!"
"쿠오크! 난 아라파족 족장 랑가스다!"
세 명의 오크 족장이 자신들을 소개했다.
7천 명의 부족원을 거느린 서리 족장이 가운데 앉았고, 3천 명의 부족원을 거느린 카이와족 족장이 오른쪽에 앉았다. 그리고 2천 명의 부족원을 거느린 아라파족이 왼쪽에 앉았다.
특이한 것은 서리 부족은 키가 다른 오크들보다 한 뼘은 컸고, 카이와족은 족장과 대전사가 모두 여자인 모계 부족이었다.
"반갑다! 난 타일러다!"
"쿠오크! 쿠훌린 족장에게 들었다. 대족장의 영혼을 잇는 자여! 말하라! 우린 선조의 말을 듣겠다."
난 오크들에게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쿠훌린과 사이안족 오크를 예로 들었다.
세 족장은 내 이야기를 듣고는 서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결론은 금방 나왔다.
"쿠오크! 우리 크로우족은 화염 괴수를 잘 막고 있다. 그리고 수천 년간 살아온 조상의 땅을 떠나지 않는다!"
"쿠옥! 우리 카이와족도 이 땅을 떠나지 않는다!"
"쿠오크! 아라파족도 이 땅에 남을 것이다!"
설득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아무래도 얼음 협곡을 오르는 화염 괴수를 잘 막고 있었기에 이곳을 떠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산맥 안쪽에 있는 따뜻한 거대 분지에 먹을 것이 있었으니 계속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크로우족은 이곳에서 수천 년을 살았으니까.
"쿠오크! 타일러여! 그대는 할 만큼 했다. 저들의 의지가 확고해 꺾을 순 없다."
쿠훌린이 내 어깨를 두들겼다.
그래도 오크들이 많이 살아있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들은 시한부 인생.
언젠간 모두 죽을 것이다.
뿌우웅! 뿌우웅!
밖에서 뿔나팔 소리가 들렸다.
"이건 무슨 소리지?"
"쿠오크! 화염 괴수가 올라온다!"
"쿠옥! 대족장의 영혼을 잇는 자에게 우리 실력을 보여주자!"
"쿠오크! 쿠오크!"
우린 족장들을 따라 협곡을 막고 있는 오크 요새로 갔다.
이곳은 과거 서리 오크 부족과 북쪽의 오크 부족들이 전쟁을 치를 때 사용했던 요새로 서리 오크의 땅으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길목이었다.
"쿠르르르!"
"콰르르륵!"
그리고 저 멀리 협곡을 향해 달려오는 붉은 괴수들이 보였다.
'오크가 어떻게 싸우는지 잠깐 볼까?'
135. 싸우기 딱 좋은 날씨네.
135. 싸우기 딱 좋은 날씨네.
서리 오크들이 요새 위에 집결했다.
이곳은 얼음을 깎아 만든 높이 50미터, 넓이 800미터의 얼음 요새로 협곡을 완벽히 틀어막고 있었다.
"쿠오크! 전투를 준비하라!"
서리 오크들이 방패와 커다란 도끼를 들었다.
무기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요새 좌우에 높은 협곡 곳곳엔 카이와족 오크 여전사들이 2미터 50이나 되는 길고 커다란 활과 화살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아라파족은 투척용 창을 5개씩 들고 이들 두 부족 사이에 섰다.
'무기는 별거 없는데? 이걸로 저 화염 괴수를 막는다고?'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화염 괴수가 지척에 도달했다.
"콰르르르!"
선두로 달려오던 붉은 화염 괴수가 멈춰서더니, 입을 벌리며 으르렁거렸다.
화염 괴수는 몸길이 2미터에 피부가 식은 용암처럼 딱딱해 보였고, 머리와 주둥이가 매우 길었다.
몸집이 그리 크진 않았지만, 저 입에서 화염을 뿜어낸다고 했기에 꽤 위협적으로 보였다.
먼저 온 놈들은 뒤쪽에 화염 괴수가 다가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오크들도 화염 괴수가 더 모이길 기다리고 있었다.
"쿠오크! 아나키드여!"
서리 족장 호빌테가 소리치자, 카이와족 족장이 아래에 있는 화염 괴수를 가리켰다.
"쿠옥! 괴수를 죽여라!"
"쿠오오오!"
"쿠오오오!"
갑자기 오크들이 괴성을 지르며 하늘을 쳐다봤다.
'화살은 안 쏘고 뭐 하는 거지?'
옆에서 쿠훌린이 말했다.
"쿠오크! 타일러여, 저건 고대 짐승의 영혼을 불러오는 거다!"
"응?"
"쿠오크! 이 땅에 살던 고대의 짐승들은 크고 강했다."
그 순간 아나키드와 카이와족 오크 여전사의 몸이 연한 푸른 빛에 휩싸였다.
그들의 몸에 깃든 형상은 거대한 곰처럼 생겼다.
2미터 50센치의 묵직하고 커다란 활이 당겨지고, 인간이 들었다면 창이라고 오인할 만한 화살이 아래에 화염 괴수를 노렸다.
파앙! 파앙!
화살이 쏘아지자, 여기저기 파공성이 들렸다.
푹! 푸욱!
"쿠에엑!"
"쿠악!"
화염 괴수들의 머리와 몸에 화살이 박혔고,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화살촉에 얼음이 발라져 있었다.
화염 괴수를 쓰러트리는데, 얼음 코팅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다.
"쿠오크! 저들의 쏘는 활은 고대 곰의 영혼이 필요하다."
저 크고 강한 활시위를 당길 수 있는 강함 힘이 필요한 거다.
화살로 화염 괴수의 숫자를 줄이곤 있지만, 모여드는 화염 괴수들은 점점 많아졌다.
이윽고!
"쿠르르르!"
"쿠르르륵!"
화염 괴수들이 얼음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발에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지는지, 놈들이 발로 벽을 대자 연기가 피어오르고, 얼음이 녹으며 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파인 틈을 이용해 화염 괴수가 수직 얼음 장벽을 오르고 있었다.
"쿠오크! 랑가스여!"
이번엔 투창을 든 아라파족이 움직였다.
그들 역시 하늘을 보며 함성을 지르자, 연한 녹색의 빛이 몸을 휘감으며 늑대의 형상이 깃들었다.
"쿠오크! 고대 늑대는 힘도 좋고, 눈도 좋다."
그들은 3미터의 창을 얼음벽 아래를 향해 겨눴다.
그리고 랑가스 족장이 먼저 힘껏 던졌다.
쉐에엑!
퍽! 퍼억!
창이 괴수의 몸을 뚫고, 뒤에 있는 괴수의 몸에 박히며, 화염 괴수 두 마리가 동시에 떨어졌다.
쉐엑! 쉐에엑!
아라파족의 공격에 화염 괴수들이 우르르 아래로 떨어지며 죽었다.
하지만 몇몇은 기어이 요새 벽 위로 올라왔다.
"쿠오오오크!"
사자의 형상을 한 연한 붉은 빛이 이번엔 서리 부족의 몸에 깃들었다.
"쿠오크! 괴수를 죽여라!"
부웅! 부웅!
퍽! 퍼퍼퍽!
도끼에 맞은 화염 괴수가 아래로 떨어졌다.
약 2천여 명의 세 부족 오크 전사들은 생각보다 화염 괴수를 잘 막고 있었다.
이들은 이런 식으로 꽤 오랫동안 화염 괴수를 막아온 것 같았다.
"쿠오크! 화염이다!"
화아아아!
벽에 매달린 화염 괴수가 입을 벌리며 화염을 쏘았다.
화염의 길이가 10미터에 달했다.
"쿠아아악!"
아래로 창을 던지고 있던 아라파족 오크 한 마리가 거센 불에 휩싸였다.
오크는 곧바로 요새 아래로 몸을 던졌다.
자신 때문에 다른 오크에게 피해가 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렇듯 오크는 희생적이었다.
오크들이 잘 막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전사자와 부상자도 생겼다.
과거에 다른 종족끼리 서로 반목하며 싸우던 오크는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가끔 요새 벽 위로 올라온 괴수가 있었고, 한 마리가 화염을 쏘는 바람에 오크 셋이 불에 휩싸이기도 했다.
다행히 방패로 막았고, 오크가 괴수를 빨리 죽였기에 온몸이 화염에 그슬린 상처만 입었다.
화염 괴수는 접근하기 전에 죽이는 것이 관건이었다.
'목을 부풀리고 입을 벌리며 액체를 뿜어내는구나! 이빨과 이빨 사이를 부딪치며 불꽃을 일으키고.'
화염 괴수가 화염을 쏘는 모습을 관찰했다.
놈들은 불을 쏘기까지 약 3초간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러니 그 전에 멱을 따거나 머리통을 부숴야 했다.
"쿠오오크! 괴수가 물러간다!"
"쿠오크! 쿠오크!"
한참을 싸우던 오크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허! 정말 막았네.'
수백 마리의 화염 괴수를 막았다.
그때 아래쪽에 있던 4미터 크기의 화염 괴수가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괴수는 나를 보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곤 몸을 돌려 도망쳤다.
뭔가 찝찝했지만, 순식간에 내 운명의 실타래 범위를 벗어나 사라졌기에 죽일 순 없었다.
"쿠오크! 보았는가, 대족장의 영혼이 깃든 자여!"
"호빌테여! 오크들이 잘 싸운 것은 봤다. 하지만 저것이 끝이라고 생각지는 마라! 더 강한 화염 괴수도 많다. 두 족장은 알고 있을 것이 아닌가!"
난 서리 부족이 아닌 옆에 있는 카이와족과 아라파족 족장을 쳐다봤다.
아나키드와 랑가스 족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들은 용맹한 오크였지만, 두려운 것은 두려운 거다.
"쿠옥! 큰 괴수는 추운 산맥으로 오지 않는다."
"쿠오크! 그렇다. 지난 몇 년간 오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이다."
두 오크 족장은 애써 상황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리 부족장은 매번 전사자가 나오긴 하지만, 그 정도는 감당할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난 가까운 마을에서 내일 출발하겠다. 혹시 어느 부족이라도 생각이 바뀌면 말해라."
두 족장은 날 쳐다보지도 않았다.
난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을 데려가는 것은 포기했다.
대신.
"이 근처에 거대한 나무와 숲으로 이어진 차원 균열이 있는가?"
그때 한 서리 부족의 대전사가 대답했다.
"쿠오크! 북쪽 혹한의 땅에 커다란 균열이 있다!"
"호빌테여!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면 오크를 이끌고 그쪽으로 도망쳐라! 그리고 균열을 통과하면 무조건 남쪽으로 내려와라!"
서리 족장 호빌테는 어금니를 보이며 웃었다.
"쿠오크! 대족장의 영혼을 잇는 자여! 그럴 일은 없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우린 비공정으로 돌아갔다.
"타일러 영주님, 그냥 이대로 돌아가는 건가요?"
에테나가 물었다.
"어쩔 수 없지. 강제로 데려갈 순 없잖아."
"하지만 이곳에 있다간······."
나도 어쩔 순 없는 일이었다.
우린 비공정에 타고 가장 가까운 오크 마을로 향했다.
그곳에서 길을 물어 북쪽 혹한의 땅으로 가기로 했다.
남쪽에 있는 차원 균열까진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렸기에 가까운 차원 균열을 통과해 대수림으로 나가는 것이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우린 오크 마을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 출발을 서둘렀다.
그때 에테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그런데 비행석 상자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왜? 물이 얼까 봐?"
"내 따뜻하게 불을 피우곤 있지만, 혹한의 땅은 오크에게도 너무 추운 곳이라고 들었어요."
"괜찮을 거야. 물을 채우지 않고도 마석 엔진을 최대한 이용하면,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고도를 낮출 수 있으니까."
에테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내가 바로 출발하지 않은 것은 어제 도망쳤던 4미터 크기의 화염 괴수 때문이었다.
왠지 불길한 느낌에 하루 정도는 머물면서 상황을 지켜본 것이다.
그냥 기우였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쿠오오크!"
쿠훌린이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곳엔 날개 길이가 10여 미터나 되는 거대한 새가 내려오고 있었다.
"쿠오크! 아직 살아있는 그리핀이 있다니!"
가까이서 보니, 반은 독수리고 반은 사자인 회색 그리핀이었다.
그리고 서리 오크 한 마리가 그리핀에 타고 있었다.
"끼아아아!"
그리핀이 마을에 내렸다.
그리고 서리 오크가 달려왔다.
"쿠오크! 호빌테 족장이 부른다!"
"나를?"
"쿠오크! 그렇다! 정찰대가 화염 괴수를 발견했다. 너무 많다."
그의 다급한 표정에서 내가 생각한 불길한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어서 비공정에 타라! 얼음 요새로 간다."
순식간에 얼음 요새에 도착했지만, 화염 괴수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멀리서 거대한 불덩어리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난 얼음 요새로 내려가지 않고, 불덩어리를 향해 날아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불덩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젠장, 불길한 일은 꼭 일어난단 말이야.'
수만 마리의 화염 괴수가 몰려오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들을 이끄는 것이 레기우스나 불카누스는 아니었다.
20미터 크기의 대군주였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10여 미터의 큰 괴수도 보였다.
놈은 군단장급이었고, 그보다 작은 4미터짜리는 중간 지휘관처럼 보였다.
놈들은 마구잡이 괴수가 아니었다.
하나의 군단이었다.
젠장, 인생 쉽게 가는 법이 없다.
'왜 그동안 가만히 있다가 오늘 이렇게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는 거지?'
설마, 나 때문인가?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오크들은 몇 년, 혹은 몇십 년 더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멸망은 정해진 결과였다.
지금이야 화산재와 화염 먼지를 산맥이 어느 정도 막고 있지만, 생태계가 파괴된 이상 이곳도 오래 버티진 못할 것이다.
'차라리 지금 터진 게 나을 거야!'
지금 중요한 것은 오크들을 피신시키는 것이었다.
저 화염의 군단은 2천 오크 전사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서둘러 얼음 계곡으로 돌아갔다.
"호빌테여! 당장 피해야 한다!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다."
그의 표정에 당혹감이 묻어 있었다.
그도 그리핀 정찰병에게 보고를 받았으니, 지금 상황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나를 부른 거고.
"쿠오크! 어디로 간단 말인가?"
"혹한의 땅에 차원 균열이 있지 않은가. 그곳으로 오크를 피신시켜라!"
"쿠오크! 우린 노인과 아이도 있다. 그들은 버티지 못할 거다."
"내게 하늘을 나는 배가 있다. 노인과 아이들은 배를 이용해 옮기고, 오크 전사들은 걸어서 이동하면 된다."
내가 말을 했지만, 호빌테와 다른 족장들은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보여줬다.
10척의 비공정을 꺼내는 모습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 괴수인형도 보았다.
오크들은 경악했지만, 내 능력을 보자 다들 가운뎃손가락을 펼치고 대족장의 능력이라며 경외했다.
결국, 오크들은 내 뜻을 따르기로 했다.
지금 그들이 살 방법은 나밖에 없었으니까.
"서둘러라! 각 마을로 가서 오크를 모아 북쪽 균열로 가라!"
난 먼저 비공정에 엘프들을 나눠 태웠다.
"쿠오크! 타일러여! 그대는 가지 않는가?"
"난 이곳에서 놈들을 막고 시간을 벌겠다."
"쿠오크?"
"쿠옥?"
오크 족장들과 대전사들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쿠옥! 하지만 괴수가 너무 많다! 위험하다!"
난 여유 있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타이탄을 꺼냈다.
이제 20명이 된 자동인형과 꼭두각시 10명도 모두 나왔다.
쿠훌린 족장이 다가와 다른 족장들에게 말했다.
"쿠오크! 그는 위대한 전사다! 우린 방해만 될 것이다."
옆에 있던 레드불 제사장도 한마디 했다.
"쿠오크! 그렇다! 우린 대족장의 영혼이 깃든 자를 믿고, 오크들을 살려야 한다!"
오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쿠훌린과 레드불의 마음을 다들 알고 있었다.
두 지도자는 사이얀족 오크 전사들은 살렸지만, 그 가족들은 모두 죽었다.
그 슬픔을 알기에 다들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쿠오크! 서리 오크들은 들어라! 각 마을로 날아가라! 노인과 아이는 배에 태우고 나머진 걸어서 이동한다!"
"쿠옥! 서둘러라!"
명령이 떨어지자, 오크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난 11척의 비공정을 모두 오크 수송에 동원했다.
그리고 에테나와 네 기간트 기사에겐 비공정에 타고 먼저 가서 차원 균열 밖에 위험을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모두 요새를 빠져나갔다.
"모두 타이탄에 타라!"
"네! 주군!"
기이잉! 쿵! 쿵!
30기의 타이탄이 얼음 요새 위에 섰다.
아직 개조 전이었기에 효율은 조금 떨어지지만, 괴수를 상대로 싸우기엔 크기가 조금이라도 큰 타이탄이 적격이었다.
난 이 타이탄으로 끝까지 싸울 것이다.
30대의 타이탄을 버리고, 오크 만2천여 명을 구할 수 있다면 수지맞는 장사였으니까.
'오크들에게 큰 은혜를 베푸는 것은 덤이고.'
화염의 대군주와 수만 마리의 화염 괴수 군단이 협곡을 붉게 물들며 몰려오고 있었다.
갑자기 요새 주변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세상을 하얗게 덮기 시작했다.
'거! 싸우기 딱 좋은 날씨네······.'
136. 빙결의 오브.
136. 빙결의 오브.
잠깐 서 있었을 뿐인데 타이탄의 기체에 소복이 눈이 쌓인다.
들고 있는 방패와 검에도.
'방패 앞으로!'
[하아!]
쿵! 쿠쿠쿠쿵!
자동인형이 탄 타이탄들이 방패를 내밀고 앞발을 굴렀다.
눈발이 사방으로 휘날린다.
'기사들에게 내리는 명령은 하나다! 눈앞에 괴수를 죽여라!'
[네! 주군!]
이제 자동인형 20명은 각자 최선을 다해 싸울 것이다.
이들은 내 그림자 기사단이고 웨슬리라는 뛰어난 지휘관도 있었다.
우측에 선 꼭두각시는 내가 직접 지시를 내릴 생각이었다.
저기 눈앞에 대군주처럼.
화염 괴수들이 속속들이 얼음 요새 앞 협곡에 도착했지만, 바로 공격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 중앙에 20미터 크기의 대군주가 날 노려보고 있었다.
'전에도 그랬어. 대군주는 부하들이 거의 다 죽어가기 전엔 직접 나서지 않았지.'
나도 지금은 일부러 기간트나 마장기에도 타지 않고, 뒤쪽에 조금 높은 단상에서 전장을 바라보며 지휘를 하고 있었다.
물론 내 옆에 보디가드는 있었다.
킹콩인형과 표범인형!
난 표범인형에 올라탔다.
"끄어어어어!"
대군주가 괴성을 지르며 나를 향해 시뻘건 검을 겨눴다.
"쿠르르르!"
"콰르르륵!"
두두두두! 두두두!
공격 신호에 화염 괴수들이 몰려온다.
'허! 많기도 하다!'
전쟁엔 내 마법인형의 숫자가 많았고, 큰 괴수를 공격했는데.
지금은 반대로 내 마법인형의 숫자는 적지만 크고 강하고, 달려드는 놈들의 숫자가 많다.
주변에 도와주는 이 하나 없지만 괜찮다.
난 원래 혼자였다.
그리고 내 마법인형을 믿는다!
그 순간 괴수들이 성벽 위로 올라왔다.
"싸워라!"
쾅! 콰콰쾅!
타이탄들이 육중한 방패로 괴수들을 밀었다.
9미터, 11미터의 타이탄이 30기다.
얼음 요새를 지키는데 빈틈이란 있을 수 없었다.
"올라오는 괴수들을 향해 검을 내려쳐라!"
우측에 있는 꼭두각시들의 타이탄이 사정없이 검을 내려친다.
부아앙! 쩍!
"쿠악!"
서리 오크가 도끼로 내려쳤을 땐 두개골이 박살 났지만, 타이탄이 검을 내려치자, 괴수가 아예 반 토막이 났다.
2미터의 괴수는 타이탄의 검에 스치기만 해도 사망이다.
타닥!
얼음 성벽 위로 올라온 괴수.
"크롸롸!"
목을 잔뜩 부풀리고 화염을······.
퍼억!
타이탄의 발길질에 날아가 아래로 떨어졌다.
퍼엉! 화르륵!
괴수가 추락하자 화염이 치솟았다.
"쉬지 말고 방패로 막고 검을 찔러라! 너희는 지치지 않는다!"
쾅! 푸푹!
육중한 타이탄의 공격에 화염 괴수들이 성벽 위에 올라 불을 뿜을 새도 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아직 상한 타이탄도 없었고, 내 마법인형은 지치지 않는다.
'진정한 기갑은 역시 괴수를 잡을 때 빛이 나는 법이지!'
촤악! 푹!
타이탄이 검을 찌르면 괴수의 몸통이 뚫렸고, 검을 휘두르면 어김없이 괴수의 몸과 사지가 잘렸다.
순식간에 수백 마리를 죽었다.
일방적인 싸움이지만, 방심하지 않는다.
놈들은 수만이니까.
[인형술사 레벨이 올랐습니다.]
[lv.63-> lv.64]
대수림을 통과하면서 많은 괴수를 잡았지만, 레벨이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 자동인형들이 총력전으로 막아서고, 단숨에 수백 마리를 죽이자, 경험치가 쌓이고 레벨이 올랐다.
훗! 이러다가 나도 SS급 헌터로 올라가는 거 아닌가?
전생에 SS급 헌터는 전 세계에 단 6명뿐이었다.
SS급 헌터는 혼자 S급 헌터 대여섯을 상대할 정도로 강했다.
물론 그래봤자, 초거수에 죽는 건 같았지만.
'어? 놈이 불을 뿜지 못하게 죽여!'
꼭두각시가 조종하는 타이탄이 성벽으로 올라와 입을 벌리고 있는 화염 괴수의 머리통을 찔렀다.
쩍! 퍼엉!
화염이 터지며 타이탄의 몸을 휘감았다.
한발 늦었다.
잠시 레벨업에 흥분해 놈을 놓쳤다.
'이건 거의 자폭 수준인데······.'
다행히 타이탄은 팔꿈치 장갑만 떨어졌고, 기체는 그을린 수준이었다.
자동인형은 스스로 우선순위를 알고 있었다.
화염을 먼저 뿜을 것 같은 괴수가 있으면, 달려가 놈부터 처리한다.
하지만 꼭두각시는 이런 디테일한 명령이 힘들다.
그저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면, 몸에 익은 대로 명령에 맞춰 싸울 뿐이었다.
일일이 명령을 내려야 하니 효율이 떨어지고, 내 운명의 실타래 범위에서 벗어나지도 못한다.
그것이 내 꼭두각시들을 빨리 자동인형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쿠와!"
촤악! 촤악!
화염 괴수의 발톱 공격에 타이탄 기체도 상처가 났다.
타이탄이 검을 수직으로 찌르며 놈을 죽였다.
하지만 또 다른 놈들이 팔에 올라타 입으로 기체를 물어뜯었다.
타이탄이 검으로 털어냈다.
그 사이에 괴수 두 마리가 더 올라왔다.
놈들은 팔과 다리를 공격했다.
점점 꼭두각시 쪽이 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한 마리가 달려와 몸통에 붙어 배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이건 위험했다.
'해치가 뚫린다! 옆에서 도와줘!'
기이잉! 콰앙!
옆에 꼭두각시가 방패로 배를 공격하던 괴수를 떨어냈다.
그리고 발로 밟았다.
쾅! 콰직!
점점 성벽으로 올라오는 괴수들이 많아져 자동인형들도 밀리기 시작했다.
화르르르르!
게다가 화염까지 뿜어내니, 정신이 없었다.
'최선을 다해 막아라!'
그래도 아직 타이탄은 쓰러지지 않았다.
내 마법인형은 두려움을 모르는 기사들이다.
가끔 타이탄을 넘어 내 옆으로 다가오는 괴수는.
"쿠아아!"
콰직!
킹콩인형이 두 손으로 내려쳐 괴수의 몸통을 박살 냈다.
화염 괴수가 몸을 날리며 타이탄의 배를 노렸다.
콰앙!
타이탄이 방패를 놓고, 손으로 괴수의 목을 잡아 들었다.
그리고 검을 찔러 마무리!
그런데 또 다른 괴수가 올라와 또 배를 공격했다.
'응? 집중적으로 해치만 노리네!'
난 다른 타이탄을 쳐다봤다.
그곳의 괴수들도 집요할 정도로 배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뭐지?'
난 대군주를 쳐다봤다.
'설마, 타이탄의 약점을 알아낸 건가?'
소형 괴수만 계속 공격시킨 이유가 그건가?
적의 약점을 알아내기 위해?
순간 소름이 돋았다.
이거 해치를 강화해야 하나?
하지만 아직 여유는 있었다.
타이탄은 튼튼하니까.
'방패로 해치를 가리고 검을 휘둘러라!'
꼭두각시들에게 극악의 처방을 내렸다.
꼭두각시 본체에 타격이라도 입으면 운명의 실이 끊어지고, 잘못하면 애써 올린 레벨이 초기화되기 때문이었다.
많은 괴수가 올라온다.
콰직! 화아아아!
타이탄의 장갑이 뜯기고 팔다리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버릴 각오로 싸우고 있었기에 계속 싸우게 했다.
[꼭두각시(lv.10)가 자아를 각성했습니다.]
[자동인형(lv.1)이 만들어졌습니다.]
레벨이 높았던 꼭두각시가 자동인형으로 업그레이드됐다.
[어? 여긴 어디?]
자동인형이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생각하지 말고 본능에 맡기고 눈앞에 괴수를 죽여라!'
[네!]
설명해줄 시간이 없었다.
분위기에 휩쓸린 자동인형은 본능적으로 눈앞에 괴수를 찔렀다.
얼음 장벽 밑으로 화염 괴수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오크도 구하고, 내 레벨도 올리고, 그리고 자동인형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전투가 마냥 나쁜 건 아니었다.
[꼭두각시(lv.9)가 자아를 각성했습니다.]
[자동인형(lv.1)이 만들어졌습니다.]
좋아!
또 하나의 꼭두각시가 자동인형으로 업그레이드됐다.
경험치도 많이 들어오고, 꼭두각시들도 연이어 자아를 각성하기 시작했다.
'밀리지 마라! 싸워라!'
[꼭두각시(lv.9)가 자아를 각성했습니다.]
[꼭두각시(lv.7)가 자아를 각성했습니다.]
[꼭두각시(lv.8)가 자아를 각성했습니다.]
.
.
필사적으로 괴수를 막고, 싸우자 꼭두각시들이 대부분 자동인형으로 업그레이드했다.
이것만으로도 이번 원정은 성공이었다.
[주군!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웨슬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동인형이 지키는 쪽으로 4미터와 10미터짜리 화염 괴수가 올라왔다.
4미터짜린 그래도 단칼에 베어 버렸지만, 10미터짜리 화염 괴수가 웨슬리의 룩급 타이탄의 팔을 잘라버렸다.
더는 무리다!
이젠 마지막 수를 쓸 때였다.
'인형의 집으로!'
웨슬리를 먼저 인형의 집에 넣었다.
그때 꼭두각시가 탄 타이탄 한 기가 쓰러져 해치를 집중 공격당했다.
난 재빨리 꼭두각시를 인형의 집에 넣었다.
그리고 주변을 살피자 다른 자동인형들도 버거운지 뒤로 밀렸다.
사방에 화염이 치솟고, 기간트 장갑과 기체도 녹기 시작했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모두 다 인형의 집으로!'
자동인형과 꼭두각시를 모두 인형의 집에 넣었다.
그래도 화염 괴수들은 타이탄이 살아있는 생명체라고 여기는 듯 연신 물고 화염을 뿜으며 공격했다.
'나와라! 괴조인형!'
"끼이아아!"
괴조인형이 내 키만 한 작은 토우인형 하나를 입에 물고, 손에 큰 구슬 하나를 가지고 인형의 집에서 나왔다.
"위로 올라가!"
괴조가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공중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난 괴조가 가지고 나온 커다란 오브를 두 손에 들었다.
그리고 오브에 마나를 계속 주입했다.
그사이 타이탄을 공격하고 부수던 화염 괴수들이 내게 달리기 시작했다.
난 놈들이 코앞까지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빙결의 오브를 깼다.
순간 주변으로 엄청난 냉기가 휘몰아치는 것이 느껴졌다.
쩍! 쩌쩍!
'인형 바꿔치기!'
휘익!
눈을 뜨자, 난 지금 괴조의 입에 있었고 하늘을 날고 있었다.
"휴! 조금만 늦었으면 동태 될 뻔했네."
지금 스킬은 인형술사 고유 스킬로 토우인형 스킬이었다.
내 모근이 남아 있는 머리카락들을 붙여 만든 토우인형과 내 위치를 바꾸는 스킬.
토우인형은 한번 쓰고 부서진다.
'젠장, 머리카락을 또 뽑아야겠네······.'
비상용 토우인형은 항상 하나는 가지고 있어야 했기에 새로 만들어야 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오브에서 뻗어 나온 냉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더 빨리 올라가!'
잘못하면 냉기에 먹힐 수도 있었다.
이 빙결의 오브 범위는 500미터였다.
물을 만나면 훨씬 더 커지고, 이런 추운 지역에서라면 그 위력과 범위가 몇 배는 더 늘어난다!
다행히 우린 냉기를 피했다.
"오! 대군주를 삼켰네!"
얼음 요새에서 500미터 정도밖에 안 떨어져 있던 대군주는 얼음에 완전히 삼켜졌다.
그리고 수천 마리의 화염 괴수 역시 얼음 감옥에 갇혔다.
'이걸로 시간을 좀 벌겠지.'
그때였다.
화염 괴수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어 불을 뿜어내며 대군주가 갇혀 있는 얼음을 녹이기 시작했다.
'젠장! 금방 따라오겠네.'
얼음의 범위가 엄청나게 넓었지만, 얼음에 갇히지 않은 화염 괴수가 수만 마리다.
저것들이 일제히 불을 뿜으면 아무리 큰 얼음도 오래 버티진 못할 것이다.
'북쪽으로 가자!'
"끼이이아!"
괴조를 타고 차원 균열을 향해 날아갔다.
북쪽으로 날아가다 균열로 향하는 긴 오크 행렬이 보였다.
그리고 맨 뒤에서 걸어가는 쿠훌린과 오크 해병들이 보였다.
난 아래로 내려갔다.
"쿠오크! 타일러다!"
"쿠오크! 쿠오크!"
쿠훌린과 오크들이 나를 보고 일제히 가운뎃손가락을 펼쳤다.
"쿠훌린 어떻게 됐어?"
"쿠오크! 노인과 아이, 여자 오크들은 이미 비공정에 태워 차원 균열로 보냈다. 우리가 마지막이다."
"잘했어!"
그래도 순조롭게 이동하고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앞쪽에 있던 서리 부족 오크 족장이 내게 다가왔다.
"쿠오크! 타일러여! 고맙다!"
"그 말은 무사히 차원 균열 너머에 도착한 후에 해!"
"쿠오크! 알았다. 타일러여!"
"그리고 다들 긴장해! 언제 화염 괴수가 쫓아올지 모르니까."
"쿠오크!"
난 표범인형을 꺼내 타고, 이들과 맨 후방에서 함께 이동했다.
***
다행히 우리가 차원 균열에 도착할 때까지 화염 괴수들은 따라오지 않았다.
아무리 화염을 뿜어내는 괴수라고 해도 역시 추운 지역에서 얼음을 녹이는 건 쉽지 않은가 보다.
그리고 빙결의 오브 능력이 생각보다 강력했다.
"서둘러라!"
"쿠오크! 어서 균열 안으로 들어가라!"
그때 쿠훌린이 다가와 말했다.
"쿠오크! 타일러여! 저길 봐라!"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화염과 검은 연기가 치솟는 모습이 보였다.
저쪽은 카이와족 마을 방향이었다.
"쿠옥! 우리 마을이······."
카이와족 족장 아나키드가 분노로 손을 부르르 떨었다.
괴수가 호수 옆 오크 마을을 불태운 것이다.
그리고 다른 곳에도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어차피 이곳은 불타 없어질 세상.
"놈들이 오기 전에 들어가."
억지로 오크들을 차원 균열로 밀어 넣었다.
미련이 남을수록 새로운 땅에 정착은 힘들 테니까.
맨 마지막으로 나와 쿠훌린도 안으로 들어갔다.
137. 대이주.
137. 대이주.
"휴! 겨우 끝났네."
긴장이 풀리자, 몸에서 힘이 쫙 빠지는 느낌이다.
저쪽 세상은 낮이었는데, 균열 넘어 대수림은 깊은 밤이다.
순간 주변에서 날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이 느껴졌다.
사방에 지친 오크가 가득했다.
대부분 짐도 없이 맨몸이었다.
겨우 목숨은 구했으나, 이들의 여정은 이제 시작이다.
12,000명이 넘는 오크를 데리고 대수림을 통과할 생각을 하니 벌써 까마득하네.
기이잉! 쿵! 쿵!
[영주님! 무사하셨네요!]
[오셨습니까. 영주님.]
라이너와 룩급 기간트에 탄 기사들이 다가왔다.
그래도 네 명의 기사가 있어 다행이다.
에테나도.
"영주님! 비공정은 모두 안전하게 이동했어요."
"잘했어."
난 라이너의 기간트를 쳐다봤다.
"근처에 괴수는 없었어?"
[왜 없었겠습니까?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던 괴수를 다섯 마리나 잡았습니다.]
라이너의 기간트가 가리킨 곳엔 A등급 괴수 3마리와 B등급 괴수 2마리의 사체가 있었다.
그런데 기사들이 타고 있는 기간트에 큰 상처가 없는 것이 나와 대수림에서 사냥하면서 실력이 많이 늘어난 티가 났다.
"다들 고생했어."
영지로 돌아가면 다들 오리지널 기간트를 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들은 그걸 받을 실력과 자격이 충분했다.
"쿠오오오!"
"쿠오크! 쿠오크!"
오크들이 우르르 다가왔다.
그들은 오크 족장들과 대전사들이었다.
"쿠오크! 타일러여! 대체 그 많은 괴수를 어떻게 막은 것인가?"
"쿠옥! 정말 대단하다."
"쿠오크! 대족장의 영혼이 깃든 자여! 그대처럼 용맹한 자는 처음이다!"
"쿠오크! 고맙다! 대족장이여!"
오크들은 저마다 나를 칭찬했다.
몇몇은 날 아예 대족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난 가볍게 웃었다.
"모두 무사했으면 됐다."
"쿠오크! 급히 나온다고 식량을 챙기지 못했다."
"쿠옥! 우리 카이와족도 맨몸이다."
"다들 걱정하지마, 몇 달은 먹을 것이 있으니까."
"쿠오크!"
오크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들은 내가 식량을 보여주지 않아도 내 말을 온전히 믿고 있었다.
이미 생명의 은혜를 입었으니, 날 신뢰함이다.
"자! 족장들과 대전사들이 다들 모였으니까 앞으로 일정을 말해주마."
오크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먼저 이곳에서 오크는 고대 짐승의 영혼을 부르지 못한다."
"쿠옥! 그럴 리가 없다."
"쿠오크! 고대 영혼을 부르지 못한다고?"
다들 당황한 표정으로 수군거렸다.
이곳은 저들의 차원이 아니니, 어쩔 수 없다.
쿠훌린도 쓰지 못했으니까.
카이와족 족장인 아나키드가 고대 곰의 영혼을 부르려 했지만 역시나 실패했다.
다른 오크들도 굳이 시험해 봤다.
"쿠오크! 이럴 수가!"
"쿠옥! 우리의 힘이······."
"쿠아아아?"
오크들이 단체로 맨붕에 빠졌다.
수천, 수만 년간 쓰던 힘이 사라졌으니, 지금 그들의 기분이 얼마나 절망스러울까?
나도 이 세계에 맨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 1레벨 상태창을 보고 당황했었지.
이제 그들은 가장 강력한 무기를 잃었다.
"쿠훌린과 오크 해병들은 모두 강습 갑옷을 입고 와라!"
"쿠오크! 알았다. 대족장이여!"
"······?"
오크 해병들이 비공정으로 향했다.
그런데 쿠훌린도 날 대족장이라고 부르네.
왠지 오크들에게 인정받는 거 같아 기분은 좋았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내가 말한 대로 오크의 능력을 강화할 수 있는 갑옷을 만들었다."
"쿠오크! 우린 원래 갑옷을 입지 않는다!"
"쿠오크! 갑옷은 약한 오크나 입는 것이다!"
서리 오크들이 목소리가 가장 컸다.
서리 오크는 평균 체격이 2미터가 넘고, 오크 중에서 힘이 가장 좋기에 자긍심이 높았다.
그들은 갑옷은 고사하고 방패조차 들지 않았다.
그래봤자, 조금 전까지 괴수에게 쫓겨 도망쳐놓고선.
난 고개를 흔들었다.
'내 오크 해병대를 보면, 생각이 바뀔걸.'
휘이익! 쿵! 쿵! 쿵!
오크 해병대가 비공정 갑판에서 뛰어내렸다.
"쿠옥?"
오크들이 3미터 크기가 된 오크 강습병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쿠훌린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손짓했다.
쿠훌린은 커다란 도끼를 들고 내 옆에 섰다.
"여기 쿠훌린 족장과 싸워볼 용맹한 오크 전사가 있는가?"
호빌테 족장이 나섰다.
"쿠오크! 일대일 싸움이라면 난 져본 적이 없다! 내가 하지."
호빌테는 키가 2미터 30으로 서리 오크 중에서도 가장 컸다.
하지만 호빌테 하나론 부족하다.
"그러지 말고 다른 오크 족장도 함께 덤비지 그래?"
"쿠오크?"
"쿠옥?"
오크들이 단체로 인상을 찡그렸다.
"쿠오크! 우리를 무시하는가 대족장이여!"
"글쎄, 쿠훌린의 체격이 커졌기 때문에 두려운 거야?"
"쿠옥! 괴수도 아니고 같은 오크인데 두려울 것이 무엇인가! 난 싸워보겠다."
아나키드가 칼을 들고 나섰다.
그러자 랑가스 족장도 창을 들었고.
마지막으로 인상을 찡그리며 호빌테 족장도 도끼를 들고 나섰다.
이건 나를 신뢰하는 것과는 다른 오크들의 자존심 문제였다.
3 대 1의 싸움.
"쿠오크!"
"쿠옥!"
오크 족장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쩡! 쾅! 퍽!
"쿠옥?"
단체로 경악한 표정을 짓는다.
강습 갑옷에 흠집은 났지만, 자신들의 힘을 다한 공격을 그냥 몸으로 막아냈기에 놀란 것이다.
착! 치이익!
부웅!
"쿠오크! 오크가 난다!"
쿠훌린이 몸을 날려 오크 족장들을 뛰어넘었다.
다시 강습 갑옷의 낙하 장치를 작동시키자, 착지했다.
그리고 달려들었다.
부우웅! 콰앙!
"쿠악!"
아나키드가 도끼를 막다가 힘에 밀려 몇 바퀴나 구르며 쓰러졌다.
쉐엑! 탱!
옆에서 아라파족 랑가스가 창을 찔렸으나 갑옷을 뚫지 못하고, 옆으로 튕겼다.
쿠훌린이 씨익 웃으면서 발길질했다.
퍼억!
"쿠엑!"
쿵!
랑가스가 공중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자존심이 매우 상한 두 오크 족장이 물러섰다.
이제 남은 건 호빌테 족장뿐이었다.
"쿠오크!"
"쿠오오!"
팟! 팟!
두 오크가 힘 싸움에 들어갔다.
둘은 도끼까지 내려 놓고, 손을 마주잡았다.
강습 갑옷 때문에 체격이 훨씬 큰 쿠훌린이었지만, 갑옷이 오크의 기본적인 힘을 올려주진 않는다.
"쿠옥?"
하지만 힘 싸움에서 패한 건 호빌테 족장이었다.
쿵! 쿵!
호빌테가 무릎을 꿇었다.
퍼억!
"쿠악!"
호빌테도 뒤로 쓰러졌다.
가장 놀란 것은 쿠훌린이었다.
자신의 힘에 놀란 것이다.
'당연하지!'
강습 갑옷은 무게가 50kg이다.
오크 해병대는 저 무거운 것을 매일 입고 3년 가까이 훈련했다.
그들의 근력은 이미 오크를 초월했다.
"보았는가! 나 대족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쿠훌린은 혼자 10명의 오크 대전사를 상대할 수 있다. 이건 아무리 강한 고대 짐승의 영혼이 깃들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오크 족장들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부족원들도.
"다들 실망하지 마라! 너희도 여기 쿠훌린처럼 강해질 수 있다. 자존심은 내 가족과 내 부족을 지킬 수 있을 때 생기는 것이다."
그때 카이와족 아나키드 족장이 물었다.
"쿠옥! 대족장이여! 우리도 저 갑옷을 입을 수 있는 건가?"
"당연하다. 이건 몸을 보호하는 단순한 갑옷이 아니다. 날카로운 도끼와 같은 것이다. 너희의 집과 터전을 빼앗은 괴수를 죽이기 위한 무기다! 누구든 원하는 자가 있다면 만들어 주겠다!"
"쿠오크! 나도 만들어다오!"
"쿠옥! 나도 강한 무기를 원한다!"
대전사들이 먼저 나섰고, 오크 족장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의 삶과 터전을 짓밟은 괴수를 죽일 힘을 마다할 오크는 없었다.
"쿠오오오오!"
"쿠오크! 쿠오크!"
오크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그들의 자신감이 살아났다.
'휴! 다행이야.'
이곳에서 저들에게 희망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자신들의 고유 능력과 힘이 사라졌다는 건 금방 알아챌 것이고, 좌절할 것이다.
그럼 이 많은 오크를 이끌고 대수림을 통과하기가 너무 힘들어진다.
하지만 이젠 오크들은 더 강해지고, 복수할 힘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기에 힘을 낼 것이다.
***
이렇게 힘든 적은 있었던가?
비공정 11척, 기간트 35기를 동원했다.
노인과 아이는 11척의 비공정에 거의 다 태웠다.
그 숫자가 5천에 달했다.
그리고 지상으로 7천 명의 오크들이 함께 이동했다.
그 많은 인원을 보호해야 하기에 내 기사와 내 마법인형이 탄 기간트들은 쉴새 없이 움직여야 했다. 오크 해병대는 비공정을 보호했고.
나도 정신없이 바빴다.
기간트에도 직접 탔고, 괴수인형을 이용해 하늘의 괴수도 막아야지 지상의 괴수도 막아야 했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대수림에 쏟아지는 폭우와 벌레였다.
강철 체력의 오크도 한 번도 느끼지 못한 더위와 끈적끈적한 습기, 그리고 살인 벌레에 점점 지쳐갔다.
하지만 희망이 그들을 버티게 해주었다.
난 영지 서쪽 산악 지대에 그들의 터전을 마련해 주기로 했다.
원래 살던 산맥과 비슷하기도 했고, 사람들과 부딪치는 일도 적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교류를 한다면, 그들도 새로운 세상에 잘 적응할 것이다.
[주군 난민 기지가 보입니다!]
선두에 있던 웨슬리가 달려왔다.
[그래 나도 확인했다.]
비공정이 먼저 난민 기지로 향했다.
우리가 난민 기지에 도착하자, 많은 인파가 몰려나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시노우엘, 돌아왔군."
반가운 얼굴도 보였다.
다른 엘프 일족을 설득하겠다고 떠난 하이엘프 시노우엘이 돌아와 있었다.
"탈로스 왕국에 협력하던 가이든 일족과 서쪽 대수림에 숨어 있던 트아르 일족을 데려왔습니다."
"오! 좋은 소식이군. 모두 몇 명이나 되지?"
"두 일족을 합쳐 3천 명이 조금 넘습니다."
"3천 명이나?"
난 살짝 놀랐다.
오크도 만2천 명이나 데려왔는데, 엘프까지 인구가 폭증하겠다.
"이곳에 주거지가 부족하겠군."
"일단 거신목과 주변 나무를 연결해 통로를 만들고 임시 거주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많이 부족할 텐데?"
"맞습니다. 식량도 부족하고."
"식량은 왜? 카야킨 전진 기지에서 요청하면 구해줄 텐데?"
"그것이 전진 기지 사령관이 바뀌었다고 들었습니다. 식량도 구하기 힘들고, 이젠 마석도 가격을 너무 낮게 매입한다고 합니다."
"뭐?"
장벽 사령관이 바뀌었으니, 당연히 전진 기지 사령관도 바뀐 것이다.
하지만 마석 매입 가격을 낮춘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석이 더 귀해졌을 텐데, 가격을 올리지 못할망정 낮게 부른다?
'이거 나와 척을 지겠다는 말이군······.'
장벽 사령관 매러덕 중장은 황태자 라인이다.
아무래도 윌리엄 공군 원수와 가까운 나를 견제하겠다는 말인 거 같았다.
그럼 관문 통과도 쉽지 않을 텐데.
이 말은 12,000명이 넘는 오크를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이미 오크 해병대의 소문이 쫙 퍼졌을 테니, 이 많은 오크가 제국으로 들어가면 고스란히 7황자의 힘이 된다고 생각할 것이니까.
뭐 상관은 없다.
'아리칸 왕국의 관문을 넘어야겠어!'
과거라면 석 달은 걸리는 거리였지만, 비공정과 안당고낙이 있으니, 한 달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리칸에도 비공정 7척이 있으니 그것을 빌리면, 2번 정도 왕복하면 내 영지로 오크를 모두 이동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엔 합류한 트아르 일족 2천 명을 영지로 옮길 수 없을까요? 아무래도 공간이 협소해서요."
"알았네. 이번에 오크와 함께 이동하면 되겠군."
이곳 난민 기지가 포화상태라 엘프도 상당수 이동시켜야겠다.
난 시노우엘을 가만히 쳐다봤다.
"이제 이곳 거신목에 세계수를 심을 생각인가?"
"그렇습니다. 허락을 받고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좋아! 허락하지."
엘프가 정령을 쓰기 위해선 20년은 기다려야 했지만, 이건 일종의 투자였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
"세계수 씨앗을 거신목에 심으면, 생각보다 훨씬 빨리 자랄 듯 보입니다."
"오! 정말 좋은 소식이군. 최선을 다해주게."
더도 말고 10년만 단축하면 좋겠다.
"그리고 앞으로 식량이나 필요한 물자는 카야킨 기지가 아니라 아리칸 왕국의 노바스 전진 기지에 요청하게. 그쪽과는 내가 따로 이야기할 테니까."
"네! 영주님."
피식 미소를 지었다.
방금 시노우엘이 날 영주님이라 불렀다.
그녀도 이제 날 인정하고 있음이다.
"이틀 동안 여기서 쉴 테니까, 트아르 일족 이동을 준비해 주게."
"네, 영주님."
"아! 그리고 암 드로운 경이 이곳에 있습니다."
"뭐? 지금 어디 있나?"
"함께 오신 분들과 주변에서 괴수를 사냥하고 있습니다. 저녁때쯤 돌아오실 겁니다."
순간 10년 묵은 체증이 가라앉는 것 같다.
드디어 암 드로운과 알리사 엘가가 돌아왔다.
이제 두 거신이 돌아오지 못할까 봐 가슴 졸일 필요는 없었다.
'잠깐! 함께 오신 분들이라고?'
138. 제자가 생겼다.
138. 제자가 생겼다.
암 드로운이 사냥에서 돌아오길 기다렸다.
내 최대 전력이자, S등급 괴수인형인 드라우켄과 일대일로 맞짱 뜰 수 있는 유일한 자동인형.
드라우켄이 자동인형이 된다면, 당연히 암 드로운보다 더 강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괴수인형은 아직 자아를 각성한 적이 없었기에 현재 내 최고의 마법인형은 암 드로운이었다.
'내가 자기 기간트를 만들고 있다는 걸 알면 좋아하겠지?'
드워프 글러드 왕자의 말로는 최소 4, 5년은 걸린다고 했기에 아직 먼 이야기지만.
전에 25미터짜리 초 거인의 갑옷을 이데아 발굴지 대장간에서 발견했다. 그 갑옷으로 만든 초거대 기간트가 이 세상에 나오는 순간 난 더는 다른 사람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된다.
아무리 강심장이라고 해도, 암 드로운이 초거대 기간트를 타고 앞서고 내 영지의 기간트 군단이 진군하는 순간 꼬리를 내릴 테니까.
그랬기에 앞으로 5년만 잘 더 버티면 내가 원하는 영지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니 난 누가 황제가 되든 관심이 없는데······.'
왜 하필 지금 시기에 황태자가 날 견제를 하는 거지?
게다가 이건 너무 노골적이었다.
난민 기지에 식량 공급을 끊고, 마석을 싸게 매입한다?
가디언 제국과 전쟁이 벌어졌다는 소식은 없었다.
그런 소식이 있었다면, 알베르토가 난민 기지에 알려왔을 테니까.
'그럼, 본격적인 후계 싸움이 시작된 건가?'
옆에 강대한 가디언 제국을 놔두고?
가디언 제국이 가만히 있는 것은 분명 꿍꿍이가 있는 거다.
가디언 제국은 비공정이 훨씬 더 많음에도 계속 만들고 있었고, 마장기도 계속 찍어내고 있다고 들었다.
반면에 아베르크 제국은 엘프 차원 원정에서 기간트를 200기나 잃었고, 이번에 아리칸 왕국 전선에서도 100여 기의 기간트를 잃었다.
그리고 동맹인 아리칸 왕국은 이제야 전쟁을 끝내고 수습하고 있었고, 전체 전력의 절반이나 되는 기간트를 잃었기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나라면 이런 상황이라면 당장에 공격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공격하지 않았다는 것은 기다리면 더 좋은 기회가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다는 뜻이다.
그들이 기대하는 것이 정치적인 싸움이 아닐까?
가디언 제국은 진작 루이스 사황자 후계가 완전히 굳어진 상태라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었지만, 아베르크 제국은 비슷한 세력의 후계자가 셋이라 매우 혼란스러웠다.
내가 안드레아스라고 해도 이걸 이용하고 싶을 거고.
'멍청한 것들이 서로 싸우다가 가디언 제국에게 더 좋은 기회를 만들어 주는 건 아닌지 슬슬 불안해지네.'
그리고 내가 불안한 생각을 하면 왠지 꼭······.
누가 뭐라고 해도 후계 싸움은 절대 가담하지 말아야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주님,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하세요?"
"응?"
"제가 바로 옆에 있는 것도 모르시고."
에테나가 옆자리에 앉았다.
"오크 이주가 걱정되세요?"
"그거야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겠지."
"그럼 다른 고민이시구나. 얼굴에 고민한다고 쓰여 있어요."
"그냥 멍청한 인간들 때문에 일이 생길까 봐 걱정이지."
에테나가 갑자기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왜?"
"여자 오크들에게 인기가 좋으시네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저기 안 보이세요. 뜨거운 눈길이."
"응?"
내가 앉아 있는 주변으로 여자 오크 전사들이 날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카이와족 족장인 아나키드까지.
"어? 뭐야?"
"제가 여 오크들이 하는 말을 살짝 들어보니까, 대족장의 씨를 가지면 강한 오크가 태어난다고 하던데요?"
"뭐?"
"그래서 여 오크들이 영주님을 유심히 살피고 있데요."
순간 기겁했다.
"타일러 영주님도 슬슬 짝을 찾으셔야죠. 후계자도 만드시고."
"뭐, 언젠간 그래야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누구도 건들지 못하는 강한 영지를 만든다면 모를까, 아직은 아니었다.
기간트와 초거대 기간트, 거대 비공정을 만들기 위해선 괴수 부산물이 많이 필요하기에 대수림에서 사냥도 계속해야 하고.
제국의 정치 상황도 불안했으니까.
"아무래도 오크들에게 강력히 경고해야겠어. 인간은 결혼하기 전에는 절대 짝짓기하지 않는다고!"
에테나가 피식 웃었다.
'어? 왔다!'
난 고개를 한쪽으로 돌렸다.
내 운명의 실타래에 암 드로운이 들어왔다.
그 순간 상당한 경험치가 정산됐다.
[인형술사 레벨이 올랐습니다.]
[lv.64-> lv.65]
[암 드로운 자동인형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암 드로운 자동인형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암 드로운 자동인형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암 드로운 자동인형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암 드로운(lv.10) -> 암 드로운(lv.14)]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내 인형술사 레벨도 오르고 암 드로운도 레벨이 4나 올랐다.
저쪽 차원에서 내내 싸움만 했나?
쿵쿵쿵!
암 드로운이 기지를 돌아 내 앞으로 다가왔다.
"충! 주군을 뵈옵니다."
암 드로운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뒤에 있던 두 명의 거신을 향해 손짓했다.
"주군께 무릎을 꿇어라!"
"네? 저 조그마한 인간이 주군이라고요?"
두 거신이 날 내려다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어? 알리사 엘가가 아니네?'
알리사는 어디 가고 나이가 어려 보이는 거신들이 내 앞에 있었다.
한 거신은 키 9미터에 건장한 청년 거신이었고, 그 옆엔 키 7미터의 여자 거신이었다.
둘 다 괴이한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암 드로운이 노려보자, 두 거신도 억지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쿵! 쿵!
"주군을 뵙습니다."
"주군을 뵈옵니다."
이거 엎드려 절받기네.
"셋 다 일어나게!"
암 드로운과 거신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쿠옥?"
"쿠오오오!"
주변에 오크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기간트야 인간이 타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놀라진 않았지만, 눈앞에 거신은 자신들보다 훨씬 컸기에 놀란 것이다.
게다가 그 거신들이 내게 무릎을 꿇은 모습을 보고는 나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암 드로운, 알리사는?"
"알리사 경은 거신 왕국을 찾아 이동했습니다."
"뭐?"
"그곳에 가서 거신들을 설득해 동맹을 만들고 돌아갈 테니, 제게 먼저 돌아가서 주군을 도우라는 말을 했습니다."
거신 왕국이라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처음부터 천천히 전부 다 말해봐."
암 드로운이 내게 설명했다.
차원 마법진으로 이동한 세상을.
두 사람이 차원 마법진으로 이동하자마자 본 풍경은 대수림 비슷한 울창하고 거대한 숲이었다. 그리고 거신들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문제는 그곳도 거대 괴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둘은 괴수를 죽이고 숲을 이동했고, 몇 달 만에 수인족들의 마을을 찾았고, 그곳에서 거신의 존재를 확인했다.
고대 거신들은 이데아 제국의 수도가 완전히 화산재와 용암에 덮이기 전에 속성 마석을 최대한 모아 차원 마법진을 여러 차례 발동시켰고, 주변에 있던 수백 명의 거신과 수십 명의 마법사를 이곳 차원으로 보냈다.
원래 차원 이동은 금지된 상황이었지만, 죽음의 위협 앞에 빠져나갈 길은 이곳밖에 없었기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차원으로 탈출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곳은 수인들이 사는 세상이고, 그곳에 거신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쪽 세상을 수색하다가 거신들의 왕국이 있다고 해서 알리사 경이 찾으러 갔습니다. 그리고 너무 기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제게 먼저 돌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휴우!"
그래도 암 드로운이 왔으니 다행이었다.
"주군, 그리고 그곳에도 차원 균열이 발생했다고 들었습니다."
"뭐? 그럼 그쪽 세상도 망하는 거 아냐?"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지.
거신들의 왕국이 있다고 했으니, 쉽게 망하진 않겠지?
그리고 수인들의 키가 3미터에 달한다고 했으니, 어느 정도 버티긴 할 거다.
이러다가 거신과 수인들도 이계 난민이 되는 거 아냐?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 뒤에 두 거신은 뭐야?"
"거신들을 찾아 이동하다가 괴수와 싸우는 수인족을 발견했습니다. 이들 남매는 수인들이 고용한 용병이었습니다."
"용병이라고?"
"네, 하지만 괴수가 크고 강했기에 밀리고 있었고, 저와 알리사 경이 나서서 처리했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여긴 왜 데려온 거야?"
암 드로운이 두 사람을 쳐다봤다.
"타일러 주군께 인사드려라!"
"갈라그란트라 합니다."
"릴리안입니다."
"갈라그란트는 검술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 절 따라왔고, 릴리안은 마법사 지망생인데, 알리사 경이 영주님께 마법을 배우라고 권했답니다."
"뭐? 내게?"
릴리안이 미소를 지으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타일러 스승님."
"하아!"
나더러 마법을 가르치라는 거야?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아니! 기사님, 제 동생이 이 쪼그만 인간에게 뭘 배웁니까?"
"어허! 네놈이 감히 주군께 무슨 망발이냐?"
"솔직히 이런 작은 인간이 주군이라니요. 그냥 한번 밟으면 끝날 것 같은데요."
"뭐라?"
"잠깐!"
암 드로운이 갈라그란트를 혼내려는 순간 멈춰 세웠다.
"뒤로 물러나."
암 드로운이 가만히 뒤로 물러섰다.
난 갈라그란트를 올려다봤다.
"네가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솔직히 너무 쉬울 것 같은데?"
갈라그란트가 양팔을 들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원래 용병들은 다 그런가?
꼭 실력을 확인해야 수긍한다니까.
아직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젊은 거신에게 서열 정리를 확실하게 해줄 필요가 있었다.
"좋아! 그럼 한 번 덤벼봐!"
난 손을 까딱거렸다.
갈라그란트는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암 드로운을 쳐다봤다.
암 드로운은 내 지시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걸 승낙의 뜻으로 알았는지 갈라그란트는 손가락을 풀더니, 비릿하게 웃으며 곧장 내가 다가왔다.
"그냥 딱밤 한 대만 맞자!"
'그냥 눌러버려!'
"크아아아!"
쿠웅!
"우웩!"
갈라그란트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드라우켄을 인형의 집에서 꺼내 녀석을 완전히 눌러버렸다.
어깨높이가 20미터에 몸길이가 40미터나 되는 드라우켄이 몸으로 누르자, 갈라그란트는 지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사, 살려주세요."
눈에 마나를 뿜어내며 갈라그란트의 몸을 살펴봤다.
'마나량은 나쁘지 않네.'
물론 암 드로운에 비하면 반의반도 안 되지만, 그래도 거신이라고 기본적인 마나량은 갖추고 있었다.
저쪽 세상도 대수림이 있다고 하더니 환경이 비슷한가 보다.
이번엔 동생인 릴리안을 쳐다봤다.
마법사 지망생답게 제법 많은 마나를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알리사 엘가에 비하면 형편없었지만.
그런데 마법을 어떻게 가르치라는 거지?
알리사가 허언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내 의식을 들여다봤기에 그런 말을 했을 건데······.
'아! 메제트의 탑에서 챙긴 마법 서적들이 있지.'
난 릴리안을 쳐다봤다.
그녀는 자기 오빠가 당하는 모습을 보더니,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서 있었다.
"마법 계열은?"
"화염 마법을 조금 배웠습니다."
"그랬군."
피식 웃었다.
"내가 마법을 가르쳐줄 순 있다. 하지만 나와 함께 다니는 동안은 두껍고 무거운 갑옷을 입어야 해. 투구도 쓰고."
"네!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정말 마법을 배우고 싶어 했다.
난 인형의 집을 열고, 화염의 탑에서 찾은 마법 책들을 뒤졌다.
그중에 기초 이론이 담긴 서적 3권을 선택했다.
"쿠아!"
쿵!
킹콩 인형이 3권의 책을 가지고 나타났다.
"와! 스승님의 마법은 정말 최곱니다!"
릴리안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 책을 읽고 연습해!"
"헉! 설마, 마법 서적입니까?"
릴리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귀한 것을!"
역시 저쪽 세계에선 마법서가 귀한 것 같았다.
고대에 이쪽 차원에서 마법사들이 많이 넘어가긴 했지만, 그들이 만든 마법서는 머릿속에 내용을 적은 것이지, 체계적으로 적혀 있는 진짜 마법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오랜 세월이 흐르며 실전됐을 수도 있고.
하지만 내가 가진 마법서는 마탑에 거주한 거신 마법사들이 연구해 기록한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내용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진짜 마법서였다.
아무래도 이게 알리사가 내게 릴리안을 보낸 이유 같았다.
"와! 스승님, 정말 감사합니다."
릴리안은 책을 받고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러나 갈라그란트는······.
"커헉! 제발 살려주십시오."
"이제 막 경외감이 생기나?"
"제, 제가 잘 못 했습니다. 주군!"
갈라그란트는 숨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139. 후계 싸움.
139. 후계 싸움.
"그만 풀어줘!"
"크릉!"
드라우켄이 앞발을 들고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갈라그란트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용서는 한 번뿐이다. 그리고 보이는 겉모습이 전부는 아니야."
"헥헥! 명심하겠습니다."
거신의 눈으로 보면, 수인족보다 작은 인간이 하찮아 보이겠지.
하지만 이번에 크게 혼이 났으니, 앞으로 인간을 함부로 대하진 못할 거다.
"이제부터 갈라그란트는 암 드로운을 스승으로 섬기고, 릴리안과 마찬가지로 항상 갑옷을 입고 다녀야 한다. 내 명령을 어기면 그땐 저 녀석에게 던져주지."
"크르르릉!"
드라우켄이 옆에서 침까지 흘리며 으르렁거리자, 갈라그란트는 흠칫 놀라며 뒤로 한발 물러섰다.
"아, 알겠습니다."
난 인형의 집에서 비숍급과 나이트급 거신 갑옷을 꺼냈다.
"둘 다 항상 그걸 입어라!"
"네!"
이전에 아리칸 왕국에서 부서진 오리지널 마장기를 14기나 가져와 공방에 맡겼다. 이 마장기들은 수리하고 배터리 부분만 개조하면 됐기에, 거신 갑옷으로 새로 오리지널 기간트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시간이 짧았다.
그렇기에 일단 거신 갑옷은 내 인형의 집에 넣었다.
그리고 방금 그중에 2개를 꺼낸 것이다.
저기에 보호 장갑만 달면 대충 기간트처럼 보이겠지.
'그런데 또 다른 차원이 멸망의 위험에 처하다니······.'
어쩌면 대수림이나 장벽 너머에 저쪽 차원과 연결된 균열이 생기는 건 아닌지 불안했다.
내겐 어떤 패턴이 보였다.
엘프나 드워프 차원도 차원 균열이 먼저 나타나 괴수들이 튀어나왔고, 그쪽 세계에 살던 지배종들이 괴수들을 막았지만, 역부족으로 밀렸다.
그리고 세상이 거의 멸망을 앞두고 있을 때, 대수림과 연결된 차원 균열이 생겼고, 이계 난민들이 이쪽 세계로 넘어왔다.
이유나 방법은 모르겠지만, 마치 누군가 차원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그 힘으로 이곳 차원에 균열을 만드는 느낌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최종 목적지가 장벽 너머가 아닐까?
'에이, 아니겠지.'
고개를 흔들었다.
[으헉! 설마 거신입니까?]
[세상에! 거신이 살아 있다니!]
주변을 순찰하던 영웅 기사들이 한쪽에서 갑옷을 입고 있는 거신들을 보며, 경악했다.
하긴 기사들은 이번에 거신을 처음 봤다.
기사들이 기간트에서 나와 거신들을 보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 영주님은 대체 어떤 분입니까? 거신들을 부하로 두시다니요."
크리스티나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물었다.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이 이야기하자면 며칠 밤을 새워도 부족해. 나중에 천천히 말해주지"
"알겠습니다."
"아! 당분간은 비밀이네. 아직 우리 힘을 드러낼 때가 아니야."
"네!"
그날 밤은 그렇게 저물었다.
***
화륵!
허공에 화살 모양의 화염이 이글거렸다.
"화이어 에로우!"
휘이잉! 퍼엉!
폭발과 함께 거센 불길이 거신목 밑동을 휘감았다.
"헉! 헉!"
투구를 벗은 릴리안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벌써 지친 거야?"
"마나가 너무 빨리 소모돼요. 그래서 다들 마법진이나 지팡이를 사용하나 봐요."
난 고개를 흔들었다.
"화살 모양을 형상화하는 데 쓸데없이 너무 집중하니까 과하게 마나가 소모되는 거야."
"네? 아! 어렵네요."
릴리안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법을 사용하는 릴리안의 마나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뿜어내는 마나량은 만들어낸 화살 모양보다 2배는 더 컸다.
너무 과하게 사용하는 거다.
그리고 마법이 날아가는 과정에서 그 외의 마나는 모두 허공에 흩어진다.
"아니야 잘하고 있어. 첫 훈련에 그 정도면 아주 훌륭해. 오늘은 그만하고, 우선 마나를 호흡하며 마나량부터 계속 늘리자."
7미터 크기의 릴리안이 내게 다가오더니, 머리를 숙였다.
난 커다란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헤헤! 감사합니다. 스승님!"
살짝 머리가 아팠다.
칭찬을 바라는 거신 제자라니!
"아! 그리고 입고 있는 갑옷에 기초 화염 마법진을 몇 개 그려 줄 테니까. 그거부터 능숙하게 사용해봐. 그럼 마나량을 조절하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
"오오! 감사합니다."
릴리안은 마법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았다.
사람 머리통만 한 불덩이를 만드는 수준에서 하루 만에 사람 크기만 한 화염 화살을 만들어냈으니까.
다만 스승이 없었기에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뿐이다.
마법도 못 쓰는 내가 거신 마법사 제자를 키우다니······.
그래도 릴리안이 아름다운 미소녀였기에 7미터라도 귀염성 있게 봐줄 만했다.
근데 릴리안이 마법을 쓰는 걸 보니까, 잘하면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히얍!"
쿵쿵! 붕! 부웅!
옆에선 암 드로운이 갈라그란트에게 검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마나량은 충분하나 검술이 너무 단조로웠다.
아마 한 번도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운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저러고도 용병 일을 하다니······.
어젯밤 자기 전에 릴리안에게 저쪽 세상 이야기를 들었다.
꼭 옛날에 보던 소설 속 판타지 세상과 비슷했다.
거신들은 오랜 세월 그곳 세상에 정착했고, 조금씩 인구가 늘어났다.
그러다가 작은 왕국을 세웠고, 점점 세력을 펼쳤다.
곳곳에 거신 도시와 마을이 생겨났으며, 토착민이던 수인족들을 규합하고, 대수림을 개척해 거대 왕국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수많은 개척촌과 왕국을 오가는 상단이 생겨나고 괴수로부터 상단을 보호할 용병들도 생겨난 것이다.
두 남매가 암 드로운과 알리사를 만난 건 행운이다.
목숨을 구하기도 했고, 나를 만났으니까.
지금 두 사람이 입은 거신 갑옷은 그냥 단순히 단단한 갑옷은 아니었다.
갑옷에 수많은 고대 거신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고, 그것은 갑옷의 방어력을 몇 배로 높이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지금 갈라그란트가 입은 갑옷은 동작을 민첩하게 해주는 기능과 힘이 늘어나는 기능이 추가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갈라그란트는 거신 갑옷만 입고 있어도 실력이 오르는 것이다.
물론 거신 갑옷의 기능을 쓰기 위해선 마나가 당연히 필요하고.
그래도 오늘은 두 거신 남매의 성장 가능성을 보았기에 내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특히 거신 마법사의 존재는 비밀 무기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더 성장해야 했지만.
거대 비공정을 만드는 라스칼의 공방으로 향했다.
"비공정 완성은 멀었지?"
"타일러여!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시간이 걸린다."
"나도 알아. 괴수 부산물이 필요하면 말하고."
"어제 가져온 것으로 당분간은 괜찮다."
오크 차원 원정을 다녀오면서 잡은 수많은 괴수 부산물을 이곳에 모두 털어 넣어야 했다.
그만큼 거대 비공정은 괴수 부산물이 많이 든다.
"그런데 왜 여러 군데서 작업하는 거야?"
"비공정이 너무 커서 12개로 나눠 만들 생각이다. 그리고 쉽게 분해와 조립을 할 수 있도록 제작 중이지."
"아! 그것까지 생각하다니, 잘했어."
이건 나를 위한 배려였다.
내 인형의 집에 넣을 수 있는 무게는 마법인형이 들 수 있는 무게를 초과할 수 없었다.
드라우켄과 암 드로운이 있었지만, 거대 비공정은 너무 무거워 한 번에 인형의 집에 넣을 순 없었다.
그러나 12개로 나눌 수 있으면, 몇 번 왕복해 넣을 수 있었다.
내가 거대 비공정을 만드는 이유는 있었다.
갑판 위에 기간트를 배치해 대수림 하늘에서 괴수와 싸울 수 있게 만들려는 것이다. 그럼 비공정을 숨기기 위해 대수림 아래로 비행할 필요도 없었고, 사냥도 더 편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2개로 분해해 인형의 집에 넣을 수 있으면 장벽 안에서도 쓸 수 있었다!
초거대 기간트와 기간트 군단, 초거대 비공정, 거기에 오크 해병대까지 배치한다면, 정말 무서울 게 없을 것 같았다.
난 병력이 적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앞서가야 안정된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래 5년만 버티자.
늦은 밤 오랜만에 군주와 기사가 모닥불에 앉았다.
암 드로운에게 물었다.
"저쪽 세상에서 모험하니까 기분이 어때?"
"처음엔 그저 주군께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새로운 세상을 보고, 새로운 거신들을 만나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제가 원래 그들과 같은 존재였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리고 뭔가 자유로움도 느껴졌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암 드로운의 상태를 살폈다.
아무래도 자동인형이 나와 멀리 오랫동안 떨어지면, 독립성이 강해지는 것 같았다.
운명의 실타래도 약해지고.
내가 죽으면 마법인형들도 사라지는 거겠지?
네크로맨서가 죽으면 사역 된 언데드가 사라지듯이.
그러니 난 오래 살아야 했다.
그리고 마법인형들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 주고 싶었다.
암 드로운의 팔을 주먹으로 쳤다.
퉁!
"아무튼, 난 네가 돌아와서 기쁘다."
"저도 기쁩니다. 주군!"
암 드로운이 날 보며 환하게 웃었다.
오늘은 그만 쉬어야겠다.
내일부턴 다시 오크와 엘프를 데리고 대이주를 떠나야 했으니까.
***
[아리칸 왕국 장벽 관문]
드르르륵!
마지막 세 번째 관문이 올라가고 기간트들이 앞으로 나왔다.
[허억!]
[뭐, 뭐야?]
관문에서 나온 기간트 기사들이 멍하니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기간트 해치에 걸터앉아 있었다.
"뭐해? 난 타일러 후작이다! 여기 있는 이계 난민들을 통과해 내 영지로 가려 한다. 어서 헥토르 사령관님께 연락해라."
[아, 알겠습니다.]
기간트 기사는 서둘러 관문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놀랄 수밖에 없겠지.
지금 관문 앞에 오크와 엘프가 우글우글했으니까.
잠시 후.
헥토르 후작의 부관인 나이엘 대령이 도착했고, 우린 장벽을 통과했다.
통과하는 데만 해도 온종일 걸릴 것이다.
난 기사들에게 이곳을 맡기고, 곧바로 헥토르 후작을 찾아갔다.
***
[아리칸 장벽 사령관실]
"타일러 후작! 어서 오시오."
"오랜만입니다. 헥토르 후작님."
헥토르 후작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난리요?"
"모두 제 영지민들입니다."
"허허! 오크 숫자가 엄청나던데, 대체 어디서 데려온 것이오?"
"오크 차원으로 넘어가 살아남은 오크를 모두 데리고 왔습니다."
"허허! 타일러 경의 추진력은 정말 대단하다고밖에 할 수 없겠군요. 저 많은 오크가 병사가 된다면······."
헥토르 후작은 마른침을 삼켰다.
"타일러 경이 우리 동맹이라 다행이오."
"모두 다 병사는 아닙니다. 아이들과 노인, 여자들도 많습니다."
"그래도 대륙에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하셨소. 내가 보기엔 타일러 경은 그냥 한 지역의 영주로 끝낼 분은 아니시오."
"큰 욕심은 없습니다. 그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은 영지를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러니 영주가 끝이 아닐 겁니다."
헥토르 후작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궁금한 일이 있어서 급히 왔습니다."
"혹시 아베르크 황궁 일 때문이오?"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갑자기 헬다임 장벽 사령관이 저를 배척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리석군."
헥토르 후작이 고개를 흔들었다.
"짐작하고 있듯이 아베르크 황궁에 변고가 생겼소. 케인 황제가 병환으로 몸져누웠고, 후계자들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소."
"병환이요? 마지막으로 봤을 땐, 건강하셨는데······."
"케인 황제의 나이가 일흔이 넘었소. 노인의 건강은 알 수 없는 법이지요."
그래도 이상했다.
아리칸 전선에 파견되기 전에 황제의 모습을 직접 봤다.
걸음걸이도 힘차고, 허리도 꼿꼿했다.
분명 뭔가 의심스러웠다.
"어느 쪽이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주변에서 들리는 소문엔 아직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쏠리진 않은 것 같소. 프란 오르도 황태자와 추밀원장이 주축이 된 세력은 수도와 황궁, 헬다임 장벽을 장악했고, 1군단과 서부군이 지지하고 있다고 들었소. 2군단과 남부군, 남부 대다수 영지는 호엘 삼황자를 지지하고 있고, 특이하게 시안 황자는 5군단과 공군 말고는 특별히 지지하는 세력이 없는데도 비공정 때문인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소. 3군단과 4군단, 동부군은 가디언 제국 때문에 움직일 수 없을 거고."
"상황이 복잡하군요."
"복잡할 건 없는 것 같소만. 난 누가 이길지 알 것 같소."
헥토르 후작은 자기 생각을 확신하고 있었다.
"어느 쪽이 이길 것 같습니까?"
"그야 타일러 경이 밀어주는 쪽이 이기지 않겠소?"
"네? 절 너무 높이 평가하시는군요."
"겉으로 드러난 전력이야, 기간트 20기 정도와 비공정 2척뿐이지만. 그게 아닌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알지 않소? 지금 저 밖에 있는 오크만 해도 무시무시하고."
헥토르 후작이 살짝 몸을 떨었다.
난 피식 웃어줬다.
"하지만 전 후계 싸움에 끼어들 생각이 없습니다."
"과연 저들도 그렇게 생각하겠소? 모르긴 몰라도 발레리온 영지에 이미 타일러 경과 손잡기 위해 사람을 보냈을 것이오."
생각해 보니, 누군가 내 영지에 와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난 가디언 제국과 전쟁도 아니고, 후계 싸움엔 참여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날 건들지 않는다면 말이다.
140. 저를 믿으시면 됩니다.
140. 저를 믿으시면 됩니다.
내가 아리칸 왕국에 요청한 비공정 7척이 도착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인물이 함께 타고 있었다.
"오랜만이오. 타일러 후작."
"라호트 페르도 후작님, 오랜만입니다."
라호트 후작은 내게 아리칸의 오리지널 기간트 개조를 맡기는데 반대표를 던졌던 인물이었다.
그는 후계 서열 2위로 마르틴 페르도 국왕의 사촌 동생이었고, 서열 1위인 헥토르 후작의 나이가 환갑이 넘었기에 실질적으로 아리칸의 다음 국왕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큰 사내였다.
"하늘에서 보니까, 오크가 아주 많소."
"어쩌다 보니, 많이 구하게 되었습니다."
"어떻소? 동맹국에 오크 3천 명 정도는 양보해 주실 수 있지 않소?"
"네?"
순간 화가 나는 것을 꾹 참고 대답했다.
"오크는 물건이 아닙니다."
"아! 내 말뜻을 오해하셨나 보오. 우리 왕국에 오크들이 살만한 터전을 만들어 주겠다는 소리요. 발레리온 영지에 이 많은 오크 난민을 전부 수용할 수 있겠소?"
그 말의 숨은 의미를 알기에 화가 났지만,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아리칸 왕국은 지금까지 이계 난민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갑자기 왜 관심을 두십니까?"
"그야 타일러 경의 오크 강습병 때문이오. 전에는 오크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 줄 몰랐는데, 이 전에 비공정 전투에서 본 오크의 능력은 정말 놀라웠소."
"결국, 오크에게 터전을 만들어 준다고 하고선, 그들의 능력을 이용하실 생각이시군요."
"어차피 타일러 경도 터전을 만들어 주고 오크를 이용할 것이 아니오?"
"그건 다릅니다!"
정색하며 대답했다.
"그들은 이제 제 영지민입니다. 내가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지요. 그리고 그들이 날 위해 싸우는 것은 영지의 병사로서 전투에 참여하는 겁니다."
라호트 후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 쳐다봤다.
"난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소만?"
"간단히 말하자면, 난 그들을 구하러 수백km의 대수림을 뚫고 갔고, 화염 괴수들이 가득한 차원에서 그들을 구했으며, 다시 수백km의 대수림을 통과해 돌아왔습니다. 먼저 그들을 영지민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영주로써 신뢰와 책임감을 보인 거지요. 하지만 라호트 후작께선 그저 오크를 병력으로 쓰기 위해서 터전을 마련해 주겠다는 겁니다. 그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뭐, 무슨 말인지는 알겠소. 오해는 하지 마시오. 난 그저 오크가 아리칸 왕국에 이득이 될 것 같아서 꺼내 본 말이니까."
이제 보니 저돌적인 스타일이 페르도 가문의 특성인가 보다.
"경께서 왕국을 위해 하는 말인 것은 알겠으나, 다음부턴 말씀을 가려서 하시오. 난 아리칸 왕국의 후작이기 전에 마르틴 국왕과 동맹을 맺은 사람이오."
라호트 후작의 얼굴이 붉어지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곧 내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방금 했던 말은 내가 경솔했소. 동맹을 훼손하려는 의도는 없었소. 사과하오."
"그 사과는 받아들이죠.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니까요."
물론 두 번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동맹이라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오크가 있다고 다가 아닙니다. 그들이 능력을 펼치기 위해선 강습 갑옷이 필요하고, 강습 갑옷을 만들기 위해선 비행석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지금 아리칸 왕국은 비행석이 전혀 없지 않습니까. 지금 타고 오신 비공정도 다 제가 나포해서 드린 거고요."
라호트 후작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 다른 방식으로 오크 해병대를 대체할 무언가를 만드는 게 나을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가디언 제국은 이미 뭔가를 만들었을 겁니다."
라호트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일러 경의 말이 맞소. 가디언 제국은 3미터 크기의 작은 전투용 기간트를 만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소. 그 때문에 내 마음이 급해져서 큰 실례를 저질렀소. 아시다시피 우린 기간트를 만들 기술이 없지 않소."
조바심 때문에 이리 왔구나!
아베르크 제국이나 가디언 제국은 비공정을 계속 생산하고, 거기에 오크 해병대를 상대할 소형 기간트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칸 왕국은 그저 저번 전쟁에 부서진 기간트를 수리하고, 내게 맡긴 오리지널 기간트가 돌아오기만을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점은 크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동맹이 있다는 게 뭡니까. 서로 부족한 점을 보완하면 되는 겁니다. 아리칸 왕국의 하늘이 위협을 받는다면, 제가 당장 달려올 겁니다."
"그리 말을 해주시니, 고맙소."
이제야 라호트 후작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약소국의 신하로 사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 많은 오크를 언제 다 옮기려는 거요?"
"우리 발레리온의 비공정 11척에 이미 5천 명의 오크를 먼저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제 곧 돌아올 때가 됐습니다."
"11척? 탈로스 왕국의 비공정을 나포했던 그 강력한 비공정이 11척이란 말씀이시오?"
"그렇습니다."
"헉! 2척이 아니었군요."
라호트 후작이 입을 살짝 벌렸다.
"그러니 당분간 하늘은 저를 믿으시면 됩니다. 그 11척의 비공정에 기간트와 오크 해병대를 가득 싣고 언제든 아리칸 왕국을 지원하겠습니다."
"오! 고맙소. 이제야 나도 좀 안심이 되오."
가슴을 쓸어내리는 라호트 후작 옆으로 이동해 친한 척을 하며 어깨동무를 했다.
"응?"
"그래서 드리는 말인데요. 대수림에 있는 제 전진 기지에 식량이 부족해서 그러는데, 아리칸 왕국이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시, 식량이오?"
"네, 그리고 아리칸 왕국에 마석이 부족하다고 들었습니다. 동맹국의 배려 차원으로 마석을 적당한 가격에 넘기겠습니다."
난 아베르크 제국과 거래하던 식량과 마석을 아리칸 왕국과 거래하기로 했다.
물론 아베르크 제국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
"와! 이 비공정에 우리도 탈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요?"
내 제자 릴리안은 좀 들뜬 목소리였다.
"해치가 닫히면 좀 답답할 거야."
"아! 그러게 창문이 너무 작네요."
"그래도 걸어서 가는 것보단 낫지?"
"네! 스승님!"
대답이 힘차다.
그에 반에 갈라그란트는 눈을 감고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 고소공포증이라도 있나 보다.
기사들이야 기간트에서 내려서 갑판 위로 올라오면 되지만, 거신은 일단 비공정에 타면, 좁은 공간에 갇혀 있어야 했기에 지금, 이 비공정엔 암 드로운과 두 거신만 태웠다.
그렇게 오크 이주민 2차 수송 작전이 벌어졌다.
1차로 아이와 노인을 옮기고 돌아온 11척의 비공정과 아리칸 왕국의 비공정 7척을 더해 총 18척이 발레리온 영지가 있는 동쪽으로 이동했다.
영지로 가는 길은 장벽을 쭉 따라가다가 한 번만 남쪽으로 꺾으면 되는 길이라 매우 쉬웠다.
난 내 선실로 들어가 인형의 집을 열었다.
자동인형 30명이 기간트에 타고 집단 전투 훈련이 한창이었다.
이번에 오크 차원에서 오크를 구하고 대수림을 통과하면서 내 꼭두각시 기사들이 모두 자동인형으로 업그레이드했다.
이제 룩급 기간트 10기와 비숍급 기간트 15기, 나이트급 기간트 5기를 운영할 수 있었기에 웬만한 중급 영지에 맞먹는다.
기간트가 30기지만 아직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이제 남은 허수아비는 10명.
모두 기사 출신 마법인형이라 꼭두각시로 만들고 1년이면 자동인형으로 각성할 것이다.
그리고 구석에 있는 대군주(lv.1) 허수아비 마법인형.
엘프 차원에서 탈출할 때, 오리지널 기간트들이 힘을 합쳐 잡은 20미터 크기의 대군주였다.
S등급 괴수였기에 드라우켄과 함께 운용하면 꽤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운명의 실이 부족해 여태껏 꼭두각시로 만들지 않았다.
이번에 만2천 명의 오크를 데리고 대수림을 통과하면서 운명의 실타래 레벨이 올랐기에 운명의 실(800)에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허수아비 마나인형 10명을 꼭두각시로 만드느냐, 대군주 허수아비를 꼭두각시로 만드느냐의 고민이 들었다.
꼭두각시 10명을 만드는 데는 운명의 실타래 500개가 필요하고, 대군주 꼭두각시를 만드는 데는 600개가 필요했다.
그러니 둘 중 하나만 만들어야 했다.
강한 것은 대군주 꼭두각시였고 대수림에서 대형 괴수와 싸울 때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자동인형 업그레이드를 생각하면 10명의 마나인형이 유리했고.
'일단 자동인형부터 늘리자!'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제국의 정치 상황이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괴수인형을 제국 안에서 풀어 쓸 순 없었다.
그러니 제국에서 쓸 수 있는 기간트를 조종하는 마나인형부터 늘릴 생각이었다.
그래서 10명의 허수아비를 꼭두각시로 업그레이드했다.
이제 난 머지않아 40기의 기간트를 운용할 수 있었다.
난 아래 갑판으로 내려갔다.
"스승님! 심심해 죽겠어요. 비공정 안이라 마법을 연습할 수도 없고. 이러고 얼마나 가야 해요?"
날 보자마자, 릴리안이 죽는소리했다.
출발한 지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았는데······.
"마법 책 줬잖아! 달달 외워."
"다 외웠어요. 그리고 어떻게 맨날 공부만 해요?"
"공부만이 살길이야."
"치!"
릴리안의 입술이 대발 나왔다.
어째 앨리슨을 보는 것 같다.
"곧 네가 힘을 좀 써야 할 때가 올 거 같아."
"오! 전투인가요? 그 전투 갑옷에 탄 기사들하고요?"
"그래. 그러니까 부지런히 공부하고, 연습해. 첫 전투에 죽을 순 없잖아."
릴리안이 입술에 침을 묻혔다.
저쪽 차원에서 괴수와 싸운 경험은 그래도 좀 있는데, 기간트하고 전투는 처음이라 조금 긴장한 것 같았다.
난 팔에서 마나 팔찌를 뺐다.
그리고 릴리안에게 내밀었다.
"이거 손가락에 껴봐."
"이거 뭐에요?"
릴리안이 손가락에 끼우더니 바로 눈동자가 두 배로 커졌다.
"헉! 스승님! 마나량이 갑자기 늘었어요! 주변의 마나도 더 잘 느껴지고요!"
"마나 반지야. 차고 있으면 마나 친화도가 올라가 마나도 더 빨리 많이 늘어날 거야."
"와!"
"스승, 잘 만난 줄 알아!"
"네! 감사합니다. 타일러 스승님."
릴리안은 바로 눈을 감고 마나를 호흡했다.
몸에 마나가 축적되는 느낌이 확연히 늘어나자, 입술을 씰룩거리며 좋아했다.
이제 한 녀석은 완전히 내 전력이 된 거 같은데, 고소공포증에 떨고 있는 갈라그란트는 제 몫을 할 수 있을지 살짝 걱정이 들었다.
***
오크들을 베르가니 영지에 내렸다.
드워프들이 동원되어 이미 이곳 동쪽 산악지대에 오크들의 터전을 만들고 있었다.
이곳은 발레리온 영지와도 가깝기도 했고, 인가가 거의 없기에 오크들이 적응하며 살기 충분했다.
그리고 나중에 발레리온과 오크 정착지, 베르가니 영지를 잇는 긴 가도를 깔아줄 생각이었다.
아리칸의 비공정은 아리칸 수도로 돌려보냈고, 9척의 비공정은 아리칸의 장벽 관문 도시로 보냈다.
아직 남은 오크와 엘프들을 태우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곳엔 에테나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난 2척의 비공정에 기사들과 거신들을 태우고 발레리온 영지로 향했다.
[발레리온 영지]
타워 선착장에 두 척의 비공정이 접안한 상태였다.
'누구지?'
서로 반대편에 배를 댄 것을 보면, 일행은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한 척은 확실히 알겠다.
검은 독수리 마크가 선체 옆구리에 선명한 공군 소속 비공정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척은 1군단 마크였다.
'삼황자만 안 왔네······.'
141. 차도살인.
141. 차도살인.
먼저 기간트와 거신들을 비공정에서 내리고 바로 기간트 공방으로 보냈다.
기사들의 기간트는 정비가 필요했고, 거신들의 갑옷은 장갑을 추가하고 투구를 기간트처럼 개조하기 위해 보낸 것이다.
난 비공정을 선착장에 대고, 1군단 소속 비공정 앞으로 이동했다.
'역시, 조금이라도 나중에 만들어진 비공정이 좋구나.'
생김새는 기존에 만들어진 공군의 비공정과 똑같았지만, 1군단 비공정은 후면에 프로펠러 크기가 더 컸고, 프로펠러 위치가 내 비공정과 비슷했다.
아무래도 아리칸 전선에서 내 비공정의 성능을 보고 최대한 비슷하게 따라 만든 것 같았다.
황태자가 할데가르 기간트 공방과 추밀원의 기술국을 장악했으니, 기간트 생산과 비공정 개발도 앞서가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황태자가 유리해지겠어.'
난 아래로 내려갔다.
프레디 시장이 타워 선착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영주님,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프레디 시장이 더하겠지. 오크 이주 작업은 잘 진행 중인가?"
"제니퍼 베르가니 시장이 맡아서 잘하고 있습니다."
"응? 제니퍼 시장이라고? 자네 부인은 발레리온 시의 도시계획 담당이 아닌가?"
"이번에 제니퍼가 베르가니 시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영주님이 없으니, 누군가 명령을 내려야 말을 듣지 않겠습니까."
"너무 가족끼리 다 해 먹는 거 아닌가?"
"저도 그게 걱정입니다. 빨리 책임자를 임명해 주십시오. 제 몸에서 홀아비 냄새가 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니 살짝 쿰쿰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이마에 주름과 머리에 새치도 늘어난 것 같다.
조금 미안했다.
"쉬엄쉬엄하게. 몸도 좀 챙기고."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그런데 쉴 틈이 없습니다. 일이 몇 년 치는 밀려 있습니다."
"몇 년?"
영지를 얻었다고 끝이 아니었다.
기사들만 있으면 알아서 굴러갈 줄 알았는데······.
"그리고 오크와 엘프 이주에 막대한 예산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석 달 전부터 난민 기지에서 마석 판매 금화가 전혀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나도 알아. 일단 다음 달부턴 아리칸 왕국에서 금화가 좀 들어올 거야. 그리고 부족한 건······."
마석도 얼마 남지 않았고, 괴수 부산물도 거대 비공정을 만드는데 다 주고 왔다.
마르지 않을 것 같던 인형의 집도 텅텅 비었다.
기간트 생산과 수리, 오리지널 기간트 제작, 그리고 초대형 기간트와 초대형 비공정까지 괴수 부산물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
기간트를 좀 팔까?
기간트와 마장기, 타이탄은 여유가 있었다.
아니면 비행석을 팔아?
아니야! 비행석은 전략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재료였다.
그러니 아무리 궁해도 팔아선 안 된다.
'일단 돈을 벌어야겠군.'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래, 영지가 안정되면 알아서 금화가 들어올 거야.
지금은 벌인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거다.
"그리고 손님이 와 계십니다."
"알아. 황태자 쪽과 시안 황자 쪽이겠지."
"맞습니다. 누구부터 만나 보시겠습니까?"
"선물이나 금화를 가져온 쪽이 있나?"
"아니 없습니다."
"참! 사람들이 양심이 없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나와 프레디가 동시에 고개를 흔들었다.
이럴 때 금화를 왕창 안겨준다면, 혹시 아는가?
마음이 움직일지.
"황태자 측과 먼저 만나보지."
"네! 영주관으로 모시겠습니다."
난 프레디 시장과 영주관으로 향했다.
***
"오랜만입니다. 타일러 영주님."
"어서 오시오. 마이클 준장."
아리칸 왕국 전선에서 안면을 튼 1군단의 참모가 들어왔다.
"오래 기다리셨소?"
"그렇습니다. 하지만 프란 황태자께서 다른 영지는 몰라도 발레리온 영지의 타일러 영주님은 반드시 만나 뵙고 오라고 하셨기에 기다렸습니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황태자께서 하찮은 저희 영지를 생각해 주시는군요."
"하찮다니요. 비공정도 2척이나 있고, 기간트 기사들의 능력도 뛰어나고, 오리지널 기간트도 4기나 보유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오크까지 병사로 부리시니, 이제 발레리온 영지는 북부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시지요."
아리칸 전쟁에 참여한 병력은 고스란히 세상에 드러났다.
그러니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된 것은 분명했다.
"그럼, 여기까지 오신 이유를 들어볼까요?"
"이미 제국의 상황은 아실 테니,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프란 황태자께선 인재를 귀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타일러 후작님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그러니 황태자 전하의 편에 서 주십시오."
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마이클 경의 말이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소. 하지만 난 후계 싸움에 끼고 싶은 생각이 없소."
"싸움에 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냥 가만히 영지에 계시기만 하시면 됩니다. 이미 황태자 전하를 따르는 세력은 많이 있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니, 내가 원하는 것이군요."
괜히 걱정했네.
황태자는 내가 시안 황자 측에 설까 봐 걱정하는 것이었다.
중립이라면 누구보다 내가 원하는 것이었다.
"그럼 그만 자물쇠를 풀어주시오."
"무슨 말씀이신지?"
"장벽 관문 말이오. 매러덕 사령관이 이계 난민의 출입을 금지했다고 들었소. 아시다시피 이계 난민들은 모두 제 영지민들이오. 이제 중립을 지키기로 약속했으니, 통행을 풀어 주시오."
마이클 준장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말씀은 드리겠지만, 당분간은 힘들 것 같습니다."
"내가 중립을 지키기로 했는데도?"
"황태자 전하와 윗분들은 혹시나 타일러 영주께서 시안 황자의 편에 설까 걱정하십니다. 타일러 후작님께서 윌리엄 공군 원수와 워낙 막역한 사이가 아닙니까. 그래서 일종의 보험을 든 것입니다."
"보험이 아니라 내 숨통을 막고 있는 것이오. 대수림에 오가야 괴수를 잡고 부산물을 얻어 금화를 벌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난민 기지의 영지민에 식량도 공급해야 하고요."
"길어야 1, 2년일 겁니다. 그때까지 조금만 참고 있으면 황태자께서 황제 자리에 등극하실 거고. 모든 상황은 종료될 겁니다. 그리고 식량 문제는 제가 매러덕 장벽 사령관님과 상의해 보겠습니다."
조금 짜증이 나긴 했다.
이건 회유가 아니라 협박이었다.
만약 내가 시안 황자 편에 서면, 대수림의 난민 기지를 공격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고.
"무슨 말인지 알겠소.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그만 일어나 보시오."
마이클 준장이 일어섰다.
"대세는 이미 기울었습니다. 잘못된 선택으로 영지를 위험에 빠지게 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조심히 가시오."
마이클이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협박을 받았지만, 당장 병력을 내놓으라는 말은 아니었기에 그래도 참을 만했다.
난민 기지 문제야 당분간 아리칸 왕국의 관문을 이용하면 되고.
잠시 후.
시안 황자의 사람이 들어왔다.
역시나 아는 얼굴이었다.
"찰스 정보국장께선 이제 완전히 시안 황자 쪽으로 라인을 잡은 것이오?"
"이제 전 정보국장이 아닙니다."
"······?"
"얼마 전에 잘렸습니다. 지금은 공군 소속 참모일 뿐입니다."
보로스 추밀원장이 포지션이 애매한 찰스 정보국장을 정보국에 그대로 놓아둘 리가 없었다.
그 자리에 자기 사람을 앉혔을 거고, 찰스 국장은 윌리엄 사령관에게 붙은 것이다.
"그래, 무슨 일로 오셨소?"
"시안 황자님께 힘을 빌려주십시오. 아시다시피 지금 제국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수도에선 연일 황태자와 삼황자 세력이 싸움을 벌이고 있고, 가디언 제국은 우릴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이 난국을 헤쳐나가기 위해선 시안 황자밖에 없습니다."
난 피식 웃었다.
"우리끼리 꼭 그렇게 말해야겠소? 그냥 터놓고 합시다."
"아! 그런가요."
찰스 참모도 피식 웃었다.
"그리고 수도는 이미 황태자가 장악했다고 들었소."
"겉으로 보기엔 그렇지만, 삼황자를 따르는 세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매일 암살이 벌어지고, 집단 난투극도 심심치 않게 벌어집니다. 아직 기간트를 동원한 것은 아니지만, 시간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난 고개를 흔들었다.
"강대한 적이 바로 옆에서 노리고 있는데, 후계 싸움이라니."
"하지만 시안 황자께선 나서지 않고 오로지 가디언 제국을 상대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동부 전선에선 시안 황자의 인기가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가디언 제국의 루이스 사황자가 썼던 방법이군."
"맞습니다. 병력을 움직일 수가 없을 뿐이지. 제국의 병력 절반이 동부 전선에 있습니다."
세력이 없으니, 세력을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루이스는 단숨에 군부의 세력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
몇 년을 고생하며 전선에서 구르고 공을 세웠기에 인기를 얻을 수 있었고, 시안 황자는 아직 명성이 약했다.
"물론 단숨에 시안 황자의 인기를 루이스 황자만큼 올릴 순 없겠지요. 하지만 아베르크 제국의 영웅인 타일러 후작께서 함께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요."
"제가 제국의 영웅이라고요?"
"이미 아실 텐데요. 적진에서 시안 황자 저하의 목숨을 구했고, 황궁에선 케인 황제 폐하의 목숨을 구했지요. 그리고 대수림에서 재앙급 괴수를 잡아 아군의 피해를 줄였고, 엘프 차원에서 수많은 괴수의 포위를 뚫고, 아군을 구했으며, 이번에 아리칸 왕국 전선에서 보여준 무용담은 이미 제국 전역에 퍼졌습니다. 그것 말고도 타일러 후작께서 하신 일들이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군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제국을 위해서 참 많은 일을 하긴 했다.
이데아 발굴지에서도 가디언 제국과 평화 협정을 맺기도 했고, 하수도를 이용해 황궁을 먼저 발굴해 거신 갑옷을 대량으로 찾아낸 일등 공신이기도 했다.
"일부러 내 소문을 흘리는 거요?"
"그냥 있었던 일들이 자연스레 알려지는 겁니다. 솔직히 말하면 소문보다 더 많은 일을 하셨지 않습니까."
"미안하지만, 난 후계 싸움에 나서지 않을 겁니다. 지금도 저렇게 날 감시하고 있는데, 내가 나서면 제일 먼저 얻을 맞을 거요."
"지금 당장 시안 황자의 편에서 싸우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시안 황자 전하와 타일러 경이 함께 싸운 일화가 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윌리엄 원수님과 많은 일을 함께하셨기에 제국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타일러 경께서 이미 우리 쪽 사람인 줄 알고 있습니다."
하긴 내가 가만히 있어도 이미 지나온 발자취가 윌리엄 원수와 시안 황자와 이어져 있었으니, 황태자가 날 견제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내가 대답이 없자, 찰스 국장은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 당연히 대가는 있습니다."
"들어나 봅시다."
"만약 시안 황자께서 황제가 되시면 헬다임 장벽 사령관 자리를 약속하셨습니다."
속으로 살짝 놀랐다.
장벽 사령관 자리는 제국의 실세였다.
대수림의 전진 기지를 관리하고, 장벽을 넘어오는 모든 부산물과 마석을 관리하는 중책.
하긴 그 자리는 내가 제격이긴 하지.
많이 해먹을 수 있는 자리기도 하고.
군침이 나지만 덥석 물진 않았다.
"지금 당장 답을 해줄 순 없을 것 같소."
"저도 알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지금은 가만히 계셔도 됩니다. 저희가 원하는 건 결정적인 기회가 왔을 때! 그때 딱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머리를 칠 생각인가?
속셈은 모르겠지만, 시안 황자도 황제가 될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동부 전선에 모여 있는 병력의 지지를 받는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고.
"그리고 타일러 경께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찰스 공군 참모가 서류철 하나를 내밀었다.
"제가 정보국에서 잘리기 전에 수집한 따끈한 정보입니다."
선물을 열어봤다.
그 안엔 록체스터 대영지의 병력 규모와 위치가 자세히 나와 있었다.
그런데 꽤 많은 병력이 헬다임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 남쪽 영지인 에일 영지와 인접한 발루아 영지에 록체스터 대영지의 병력과 다른 북부 영지들의 병력이 계속 집결하고 있었다.
게다가 황제가 약속한 비공정은 8척이었는데, 이번에 지급한 비공정은 10척이나 됐다.
"록체스터 대영지가 황태자 쪽으로 넘어간 것이오?"
"그건 아닙니다. 록체스터 가문은 오래전부터 중립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우리 영지를 노리는 포석인데?"
아! 내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선 내 뒤통수를 칠 생각이구나.
그것도 자신들은 전혀 나서지 않고, 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록체스터 가문을 이용해서.
'차도살인이라······.'
황태자 곁에 그래도 머리 좋은 놈이 있군.
보로스 추밀원장인가?
"어떠십니까? 제가 가져온 선물이?"
"아주 좋은 선물이긴 하군요. 그런데 이거 하나만 달랑 주기엔 민망하지 않습니까? 병력을 지원해 주는 것도 아니고."
"죄송합니다. 저희 병력은 지금 동부 전선에 있습니다. 그리고 영지전에 병력을 투입하면, 황태자 쪽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록체스터 가문은 돈이 아주 많겠지요?"
"네? 당연합니다. 북부 제일의 대영지가 아닙니까."
왠지 큰 돈을 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142. 그럴싸한 계획.
142. 그럴싸한 계획.
[록체스터 대영지]
지휘관들이 모여 있는 집무실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덜컹!
오웬 베르가니 백작과 그의 기사들이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지휘관들이 이야기를 멈췄다.
"하하! 아버님, 이제야 그놈을 혼내주시는군요. 저도 타일러, 그놈을 잡을 때 함께 가겠습니다."
베닝 록체스터 공작이 다가오는 오웬 백작을 쳐다봤다.
"내가 별관에서 나오지 말라고 한 것 같은데?"
"하지만 제 복수를 해주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당연히 제가 직접 가서 그놈을 때려잡겠습니다. 저와 기사들에게 기간트를 주십시오."
베닝 공작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 참모 모르건 백작을 쳐다봤다.
"우리에게 남는 기간트가 있나?"
"있긴 합니다만, 오웬 경의 기사들이 잘 탈 수 있을지······."
모르건 백작은 대놓고 오웬 백작의 기사들을 무시했다.
하지만 오웬 백작은 아무 말도 못 했다.
기사들의 실력이 실제로 많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오웬과 기사들에게 기간트를 지급하게. 그리고 발루아 영지로 보내고."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제 복수를 직접 할 수 있게 해주셔서! 제가 반드시······."
"시끄럽다. 네놈의 복수 따위가 나와 무슨 상관이더냐?"
"네?"
장인의 매정한 말에 오웬 베르가니는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그럼 왜 발레리온 영지를 공격하시는 겁니까?"
"감히 내 구역에 와서 설치는 놈을 가만둘 순 없지. 기간트는 지급해 줄 것이니, 별관으로 가서 대기해라."
"네······."
베닝 공작이 쳐다보자, 오웬 백작은 뻘쭘한 표정을 짓고는 기사단장과 참모를 한번 쳐다보곤, 기사들과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저런 덜떨어진 놈이 사위라니!"
베닝 공작이 혀를 찼다.
"그냥 내치시지 왜 계속 데리고 계시는 겁니까? 저자는 이제 쓸모가 없습니다. 영지도 없지 않습니까."
베닝 공작의 장남인 파든 록체스터가 말했다.
"세상의 이목이 중요한 거다. 내가 중급 영지를 강제로 가져가기 위해 영지전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사위의 복수를 하고 영지를 대신 수복하기 위해 영지전을 하는 거 하고는 대의가 다르지. 그리고 저런 놈도 영주가 되면 영주회의에서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
"아!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파든 록체스터가 고개를 숙였다.
베닝은 참모를 쳐다봤다.
"모르건, 계속하게."
"네! 영주님."
참모 모르건 백작이 정보원이 보낸 문서를 다시 읽어 내려갔다.
"이틀 전 베르가니 영지 상공에서 비공정 9척을 추가로 확인함. 수천 명의 오크가 영지 동쪽에 거주 구역을 만들고 있음."
순간 지휘관들의 표정이 변했다.
록체스터의 기사단장 가레스 백작이 놀란 표정으로 베닝 공작을 쳐다봤다.
"비공정이 모두 11척이라니! 영주님의 말처럼 단순한 중급 영지가 아니군요."
"물론이다. 타일러 후작 같은 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질 순 없는 법이지."
"역시 윌리엄 원수가 뒤를 봐주는 게 분명하군요."
모르건 참모가 말했다.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 기간트도 우리가 파악한 것보다 더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럼 40기 아니라, 최소 60기는 있다고 생각해야겠군요."
"거기에 오리지널 기간트가 4기나 있으니, 중급 영지 수준은 아닌 거지."
가레스 백작이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영주께서 주변 영지의 기간트 병력을 괜히 발루아 영지에 집결시킨 것이 아니군요."
"물론이다. 그리고 사자는 토끼를 사냥할 때도 전력을 다하는 법이지."
베닝 공작은 북부의 대영지였고, 유일한 기간트 생산 공방이 있었으니, 제국 북부에서 그의 말을 거역할 영지는 거의 없었다.
그랬기에 발루아 영지엔 록체스터 대영지의 기간트 30기 외에도 주변 영지에서 모인 기간트 100여 기가 집결해 있었고, 지금도 계속 모이고 있었다.
그리고 헬다임 장벽 도시엔 솔버리 백작이 이끄는 기간트 70기가 진군을 준비하고 있었다.
장남 파든 록체스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거기에 비공정에 탈 기간트 100기를 더한다면, 우리 기간트가 300기가 넘는군요."
"그렇지."
베닝 공작이 비릿한 웃음을 짓더니, 갑자기 주먹을 쥐고 인상을 찡그렸다.
"건방진 놈! 감히, 제국 북부에 기간트 공방을 짓다니! 그건 나에 대한 도전이다. 아예 도시를 제국 지도상에서 사라지게 해주지."
가레스 백작도 영주와 같이 분노했다.
"맞습니다! 가뜩이나 할데가르 공방 때문에 일감이 줄어드는데, 다른 기간트 공방이라니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지휘관들 역시 주먹을 쥐었다.
그때 모르건 참모가 살짝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기 그런데 정말 괜찮을까요? 저들의 병력이야 우리가 압도한다지만, 시안 황자나 윌리엄 원수 쪽에서 타일러 후작을 도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라, 황태자 측과 이야기를 끝냈다. 만약 그들이 영지전에 관여한다면, 장벽 사령부와 1군단이 곧바로 개입하기로 했다."
"아! 저들도 그걸 알고 있을 테니, 7황자 쪽은 움직일 수 없겠군요."
모르건 참모가 말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닥에 지도를 보며 검은 돌을 이동시켰다.
"그럼 솔버리 백작이 동쪽에서 진군하고, 파든 공자께서 남쪽에서 밀고 올라가면 그걸 방어한다고 저들은 기간트를 모두 전선에 배치하겠군요."
"그렇겠지. 200기 넘는 기간트가 진군하는데, 전력을 다해 막으려고 하겠지."
"그리고 저들의 병력이 빠져 있을 때, 우리 비공정으로 영주관과 저들의 공방을 장악하면 영지전은 쉽게 끝나겠군요."
베닝 록체스터 공작이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쉽진 않을 것이야. 저들에게는 11척이나 되는 비공정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기간트도 없는 빈 비공정이 아닙니까."
"기간트는 없겠지만, 저들의 비공정엔 아리칸 전선에서 활약했다던 오크가 타 있겠지."
"아! 맞습니다. 오크들의 신체 능력이 무시무시해 절대로 공중에서 붙어 싸우면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비공정을 운영하는 것도 매우 신중해야겠군요."
베닝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네. 기간트를 저들의 도시에 안전하게 내릴 수 있다면, 전쟁은 쉽게 끝나지만, 만약 기간트를 내리기도 전에 공중에서 저들에게 공격을 받는다면 우리가 당할 수도 있네."
"아니면 우리 비공정으로 베르가니 영지를 공격하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거긴 장악해도 큰 의미가 없네. 기간트 공방이 발레리온 영지에 있으니, 무조건 거길 파괴해야 해."
베닝 공작과 지휘관들은 지도를 보며 전략 회의를 계속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