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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 *

- 섬서성 화산 연화봉

중원의 5대 악산 중 하나인 화산(華山).

그중 서쪽 끝에 오르다 죽은 이가 오른 이보다 많다는 연화봉(蓮花峰).

장이윤. 아니, 선유가 몸담은 화산파(華山派)는 바로 이곳 정상에 있었다.

그가 이곳에 오게 된 건 14년 전.

그의 나이 고작 5살이던 해였다.

'윤아. 어른들 말씀 꼭 잘 들어야 해. 알았지?'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형.

그와 헤어진 날이었다.

'형아는?'

'형은... 잠깐 어디 갔다가 나중에 윤이 찾으러 올 거야.'

그때는 몰랐다. 왜 형의 표정이 그렇게 슬퍼 보였는지.

그냥 그게 안타까워서 꼭 끌어안아 주었다.

'언제?'

'음... 윤이가 강해졌을 때?'

'형아보다 더?'

'앞으로 네가 머물 곳에서 가장 강해졌을 때. 그때 올게.'

'나 그럼 빨리 강해질래. 그래서 형아랑 같이 살래.'

'그래. 그렇게 하자.'

'약속.'

'약속....'

그렇게 따스운 바람이 불던 날.

환하게 웃으며 형을 보냈다.

그때 형이 울었던 건 아마도 너무 밝은 제 모습이 더 미안해서였으리라.

"근데 형."

선유는 정상에 자리한 초라한 가옥 앞에서 고인 눈물을 훔쳐내곤 중얼거렸다.

"그런 약속을 할 거면... 좀 쉬운 데로 보내주지 그랬어."

이내 그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들어 살피자, 여든이 넘었음에도 눈매가 부리부리한 백발의 도인이 뒷짐 지고 자리해 있었다.

굳건한 태산처럼 느껴지는 화산의 살아 있는 전설.

무림맹주와 함께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정도의 큰 어른.

형과의 약속으로 치자면 범접 불가의 절대 장벽!

신주오절(神州五絶) 서검(西劍) 여중악.

바로 그의 태사부였다.

"이노오오오오옴-!"

여중악의 쩌렁쩌렁한 고함에 산세가 흔들리고, 새들은 푸드득 떼 지어 도망친다.

오늘도 그의 공력이 얼마나 건강한지를 보여주는 일례다.

'이러다 다 늙어서 형 보겠네.'

선유에게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니다.

"감히 네가 화산의 질서를 어지럽히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본래 평소에도 호랑이처럼 엄하기로 유명한 게 여중악이다.

손속에도 자비가 없어 서악(西惡)이라 불리기도 했었다.

오죽하면 장문인이 지금도 그를 보면 쩔쩔맬까.

"...등선할 때까지 속세의 일은 관심 끈다더니."

하나 선유에게는 이제 이마저도 지긋지긋한 일상이었다.

불려오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네 이노오오오옴!"

까악, 까악. 목청 큰 까마귀가 타산으로 둥지 틀러 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다 떠나면 화산은 누가 지키나.

"정녕 네놈의 잘못을 아직도 모르겠단 말이더냐?"

"예."

선유는 코웃음 치며 고갤 돌렸다.

당대 장문인은 물론이고, 오절이 봤다면 기절초풍할 일.

하나 남들은 몰라도 둘만 있을 때 선유는 가능했다.

본디 여중악은 쉽게 정을 주는 이도 아닐뿐더러, 제자 보는 눈이 깐깐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여 제 직전제자들인 화산칠진(華山七眞)은 장로가 된 지금도 성에 안 찼다.

한데 선유는 달랐다.

'네가... 그걸 어찌 펼친 것이냐?'

'보고....'

고작 다섯 살에 불과했던 아이가 자신이 말년에 얻은 검법을 우연히 한 번 봤다고 몸동작을 따라 하고 있던 것.

아무에게도 가르친 적이 없는 미완성의 검법을 말이다.

여중악은 그때 결심했다.

이 아이야말로 자신의 뒤를 이을 화산의 보배라고.

하여 십수 년 동안 제 처소까지 오르내리며 수발을 들게 하였다.

어차피 선유의 사부인 구자기는 20년 전 단전이 부서져 무공을 펼치지 못하는 몸. 명분도 적절했다.

그리고 판단도 옳았다.

선유의 성취는 그 나이 때의 자신마저 넘어설 정도였으니.

문제는.

'내 깨달음을 온전히 이어받아야 할 놈이.... 하필 내 고집까지 빼닮았구나.'

한번 정하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

"선광이는 네 사형이다. 그것도 열 살 터울의 대사형. 한데 하늘과도 같은 형한테 하극상이라니. 내가 널 그리 가르쳤더냐?!"

"사형이 대련하자고 했고, 응해준 것뿐입니다."

"내 함부로 실력을 드러내지 말라 그리 일렀거늘! 단 일격에 기절시켜놓고 그게 할 말이더냐!"

"태사부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강한 상대를 꺾을 땐 초장에 확실하게...."

딱! 언제 주워 든 것인지 여중악이 나뭇가지로 선유의 머리를 갈겼다.

때리고 아차 싶었다. 너무 세게 때렸기 때문.

힘주면 톡 하고 부러질 작은 가지지만 여중악이 쥐면 천하의 명검이다.

이마에서 피가 흐른다.

"...하라고요."

한데도 선유는 무표정 그대로 신음 한 번을 안 뱉었다.

정말 보통 고집 아니다.

"네놈이 하산시켜 달라고 행패 부리는 거란 걸 내 모를 줄 알았더냐?"

"...아시면 허락해 주십시오. 저 형 찾아야 합니다."

"네 형하고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이 비좁은 봉우리에 갇혀 그럼 어떻게 찾습니까. 나가서 사방천지를 밤새 돌아다녀도 될까 말까인데."

하, 답답한지고.

"네 형이 약속했다지 않았느냐. 이곳에서 가장 강해지라고. 그럼 알아서 찾아오겠다고 말이다. 그럼 그리될 노력을 할 생각을 해야지!"

"그럼 빨리 좀 가시든지요!"

"가다니. 어딜?"

선유가 책망하듯 검지로 툭! 하늘을 찔렀다.

죽으라는 얘기.

"이, 이런 천인공노할 놈이!"

"그럼 어찌합니까! 등선하시기 전까진 이길 방법이 없는데. 아니, 태사부님을 이길 수 있는 자가 이 땅에 존재하긴 하는 겁니까?"

"크흠...."

허를 찌르는 선유의 물음에 여중악은 휙 몸을 돌리곤 제 수염을 쓰다듬었다.

저를 이길 존재라....

이내 진중한 어조로 물었다.

"알고 싶으냐?"

"아니요?"

"천기를 말해주마."

"아니, 안 궁금...."

"날 이길 자는 이 땅에 없다."

쿵! 알고 싶진 않았지만, 실로 충격적인 말.

그 말인즉슨 자신이 천하제일인이란 얘기 아닌가.

"근데 어떻게 이기라고!"

선유가 악에 받쳐 소릴 지른다.

하나 여기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다.

'천마도, 련주도. 하물며 오절 중 중리성과 소림의 동승(東僧)만 하더라도 날 이길 순 있겠지.'

하지만.

'완전히 날 이길 자는 없다.'

천마와 싸우면 아홉 번 질지언정 한 번은 이길 것이고, 련주나 맹주와 싸우면 서너 번은 이길 것이다.

하지만 열 번의 승부를 펼쳤을 때 열 번을 다 이길 존재는 없었다.

굳이 꼽자면 그건 단 한 명....

여중악의 머릿속에 오래전 마주했던 누군가의 모습이 어렴풋이 그려졌다.

정도의 사내였으나 정도를 걷지 아니했던 자.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단전을 폐하고...."

"시끄럽다! 당장 무림맹으로 가거라."

"예...?"

"3년간 사문엔 돌아올 생각 말고, 중원을 위해 봉사하거라. 그게 네가 치러야 할 죗값이니."

여중악의 뜬금없는 명령에 선유는 눈을 토끼처럼 떴다.

그 말인즉슨... 화산에 적을 둔 채 하산시켜주겠다는 말이 아닌가.

"정말입니까...?"

"장문인과도 이야기 마쳤다. 꼴도 보기 싫으니 지금 당장 떠나거라."

"딴말하기 없는 겁니다. 갑니다, 정말?"

"물러주랴?"

"아뇨!"

선유가 크게 절을 올리곤 후다닥 달려 나갔다. 그리고 한참 내려가 까마득하게 보일 때쯤 목청껏 외쳤다.

"감사합니다! 태사부님! 정말 감사합니다!"

"흥."

여중악은 코웃음을 치곤 몸을 돌렸다.

시원섭섭했다.

무려 십몇 년을 함께 했거늘. 저리 좋다고 뛰쳐나가니.

하지만 이해도 됐다.

선유의 나이 열아홉.

강호를 떠돌며 수많은 것을 보고, 느낄 나이.

자신도 저맘때쯤 수많은 경쟁자를 만났고, 함께 성장했었다.

"오늘따라 그대가 자주 생각이 나는군."

여중악은 저 멀리 까마득한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옛 벗을 그렸다.

이젠 중원에서 영영 지워진 자.

자신이 일평생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유일한 존재.

'무영(無影)....'

바로 그의 이름을 말이다.

"강해지거라, 선유. 그리고... 화산의 검이 되거라."

화산의 어느 날이었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마오와 장이서는 엉뚱한 곳에 도착해 있었다.

그것도 연고도 없는 마을 초입에.

"정말 여기 있는 거 맞아?"

"들은 대로라면요."

"하."

마오가 머리를 긁적이며 어수선한 주변을 살폈다.

"자, 골라보시오. 세기의 명검이 여기 다 있소이다!"

"시원한 백주 한잔하고 가셔요!"

"진귀한 보물이 담긴 지도가 은자 한 냥!"

아침부터 상인들의 왁자지껄한 소음이 빗발치고, 인파가 물결을 이루는 마을.

온갖 잡동사니가 거르지 않고 다 들어온다는 바로 그곳.

집하촌(集荷村).

바로 불문객잔이 있는 그 마을이었다.

"하여튼 이 꼬맹이 자식 잡히기만 해 봐."

마오는 괜히 마음에도 없는 성질을 부렸다. 지난밤 맹원원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었다.

맹휘가 왜 철마적을 쫓아 혼자 이리로 온 것인지.

'너희랑 같이 있고 싶었대.'

멍청한 자식. 그럼 그렇다고 그냥 말을 하면 되지. 쓸데없이 여긴 왜 오나. 차라리 가출을 하든가.

마오가 속으로 괜스레 푸념을 늘어놓았다. 물론 억지인 건 안다. 그게 됐으면 애초에 왜 맹가에서 벗어나고 싶었겠는가.

자신이 버려진 삶이라면, 그는 새장에 갇힌 삶이다.

"이제 어디로 가면 돼. 빨리 찾아보고 가자. 졸려 죽겠어."

마오가 귀찮아하는 말과는 다르게 콧김을 뿜고 의지를 불태웠다. 이에 장이서는 보이지 않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되는 모양이구나. 나쁘지 않은 감정이다.'

누군가를 아낀다는 건, 그만큼 정도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니.

장이서가 웃음을 짓고는 성큼성큼 걸어 나가자, 마오도 이를 뒤따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곳은 안팎으로 새장 속에 비둘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구사방(鳩舍房 - 전서구를 기르는 곳)이다.

96.

#불문객잔 (1)

"뭐야, 여기가 불문객잔이라고? 이건 전서구 보내는 곳이잖아."

"볼일이 있어 들른 거니 기다리십시오."

"야, 이 씨! 빨리 찾고 가자니까? 다음에 해. 나 졸려 죽겠다고!"

눈만 봐도 알아. 하지만 뭐든 만반의 준비를 끝내놓고 움직이는 게 첩자의 기본.

구유가 정말 당주급의 고수라면 함부로 움직여서 될 일은 아니다.

게다가 광의라는 변수까지 고려하면 더더욱.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네가 내 말을 들을 리 없지. 가라, 이 자식아."

장이서는 들은 체도 안 하고 구사방에 들어가 서신 하나를 붙이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기다리던 마오가 퉁명스레 물었다.

"누구한테 붙이는 건데?"

"그나마 믿을 만한 사람한테요."

"그게 누군데."

"가죠. 졸리다면서."

"궁금하다고!"

"따라오기나 하십시오."

"알려줘, 알려줘. 장이서!"

장이서가 무시하고 걸어가자 마오가 좌우를 왔다 갔다 거리며 총총 따라붙는다. 이제는 누가 봐도 꽤 사이가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알려주진 않는다. 그게 장이서다.

어느새 노점상이 좌우에 가득한 비좁은 골목 앞에 다다랐다. 불문객잔이 있는 곳은 저 길 끝이다.

두 사람이 골목으로 들어서자 곳곳에서 호객이 들끓었다.

죄다 중원에서는 보기 힘든 서역의 물건이다.

"자, 골라, 골라! 서역에서 직수입한 무공 비급이 하나에 두 냥, 두 개에 세 냥! 독파하면 삼 일 뒤에 부활!"

"자, 장이서! 비급이 두 냥이래. 저거 살까? 죽었다가 살아난다잖아!"

성경이다. 회개하고 싶으면 사든지. 장이서는 정신 팔린 마오를 붙잡아 끌고 나섰다.

당연한 얘기지만, 장이서는 서역어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첩자로서 수많은 언어에 능통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니.

어느새 골목을 지나치자 산왕가에서 관리하는 마을과 마교의 경계선인 중앙대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객잔 하나.

[불문객잔(不問客棧)]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곳에 대해서라면 장이서도 익히 알고 있었다. 북부의 정보통이자 돈만 있으면 모든 정보를 살 수 있는 곳.

첩자로서 이를 모른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다만 위치가 너무 공개적이라 이용해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게다가 보이는 게 다도 아니었다.

'마교와 새외의 경계선에서 이처럼 장사를 한다는 건 양측에 연줄이 꽤 깊숙이 박혀 있다는 것이고, 그간 정보를 대놓고 사고, 팔면서도 별 탈이 없었다는 건 그만큼 버틸 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불문객잔이라는 이름으로 보이는 건 어디까지나 빙산의 일각일 공산이 크다. 만만히 볼 자들은 아니었다.

"들어가죠."

장이서가 나오는 손님들을 지나쳐 굳은 눈매로 끼이이익,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2층까지 한눈에 담기는 실내 전경이 펼쳐진다. 대충 훑어봐도 거의 다 만석.

"음?"

이내 고개를 돌리다 보니 바로 옆 계산대에 검은 안경을 쓴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어?"

그 역시 놀란 얼굴로 장이서를 바라본다.

이곳 불문객잔의 주인인 소오다.

백오문의 소문주이자 숨겨진 신분은 우수 고객 장이서의 담당자다.

'뭐야, 장이서 네가 왜 여길?'

까마귀 가면 없이 이렇게 맨얼굴로 만난 건 처음.

덕분에 소오는 그답지 않게 당황했다.

"어서... 오세요?"

장이서는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 틀었다. 뭐지, 이 이상한 말투는. 끝말을 올리는 기괴한 어조. 비교적 짧은 머리. 목에 걸린 십자가. 서역의 목회자인가.

이에 소오는 절 못 알아보는 모습에 아차 싶었는지 하하하 머리를 긁적이며 괜스레 부언했다.

"아, 이거 처음 보는 얼굴들이라. 예약하고 오신 건 아닐 거고. 무슨 일로 오셨을까. 이렇게 용안도 훤히 드러내시고."

"용안? 얼굴이 왜."

마오가 되묻자 장이서는 별거 아니라는 듯 주변을 향해 턱짓했다. 해서 바라보니 대부분이 복면을 쓴 채 머리에 뭘 다 두르고 있었다.

"남의 뒤를 캐고 다닐 땐 제 속내를 감추는 게 기본이죠."

"아."

마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하나 배웠다.

물론.

'그 말을 장이서 네가 하니까 완전 와닿는데? 하하.'

소오는 억지로 웃음을 크게 지었다.

'보기만큼 가벼운 자군.'

이에 장이서는 그에게 관심을 끄곤 주변을 둘러 살폈다. 딱 세 자리가 비었다. 이중 중간에 놓인 자리로 가서 앉았다.

이에 슬금슬금 뒤따라온 소오가 괜스레 손을 비비며 옆에 섰다.

본래 주인인 그가 직접 안내에 나서는 경우는 몇 없다. 하지만 그는 장이서를 잘 알고 있었다.

사도철을 일대일로 꺾을 만큼 강하다는 것.

머리가 비상할 정도로 좋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돈이 아-주 많다는 것.

마지막 세 번째가 핵심이다.

"야, 이거 마침 딱 예약이 안 된 자리를 고르셨네. 운이 좋으신 건가, 아니면 눈썰미가 좋으신 건가?"

알아서 뭐 하게. 장이서는 퉁명스레 답했다.

"들어올 때 손님이 나갔다. 그리고 정돈된 다른 자리에 비해 여기만 의자가 비틀려 나와 있더군. 그들이 앉았던 자리란 얘기겠지."

"정확해."

소오가 씩 웃는다. 이를 본 장이서는 묘한 기시감에 물었다.

"우리가 만난 적이 있나?"

독사 같은 눈빛에 갑작스러운 물음.

소오는 색안경을 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장이서라면 눈썹 한 올만 흔들려도 다 알아챌 놈이니.

하나 그 역시 장막에 가려진 비밀 청소부 단체 백오문의 소문주.

"처음인 것 같아 말해주자면 우리 가게 이름이 불문객잔이야. 아니 불(不), 물을 문(問). 묻지 마라. 물을 거면 돈 내라. 이런 뜻이지. 근데 우리 손님께서 먼저 답해주셨으니 나도 얘기해 줄게."

"...."

"만난 적 있어, 우리."

"어디서?"

"더 물으려면 돈 내셔야지. 근데 액수가 좀 커. 내 입이 고급이라. 물론 답이 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우리 손님 영역이고."

답이 별거 아니어도 값은 후하게 받겠다?

황당하다는 듯 그를 살폈다. 태연하게 웃는다. 보통은 아닌 놈이다. 좋아. 개인사는 차차 알아보도록 하고.

"장이서다. 사람을 찾으러 왔다."

장이서가 통성명을 건네자 소오는 앞에 재빠르게 마주 앉고는 제 턱에 꽃받침을 하고선 방긋 웃었다.

"난 소오. 여기 주인."

주인? 장이서가 오묘한 시선으로 그를 살피자 그가 이빨을 드러내며 더 활짝 웃는다. 치아는 곱다.

"여기는 손님한테 인사를 이런 식으로 하는가 보군."

"별로야? 다 좋아하던데."

"퍽이나."

"보기보다 까칠하시네."

소오가 픽 웃고는 다리를 꼰 채 몸을 뒤로 젖힌다.

탕!

그러자 성질 급한 마오가 탁상을 내리치며 본론을 던졌다.

"시끄럽고. 주인이라니 잘됐네. 며칠 전 여기 왔던 꼬마 하나 있지? 걔 지금 어딨어."

한데 반응이 영 시원찮다. 소오는 어디서 개가 짖나 하는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불(不), 물을 문(問). 묻지 말라니까 그러시네, 거참. 근데도 굳-이. 꼭 굳-이 답을 들어야겠으면 뭐라도 대가는 치르셔야지."

"뭐?"

듣고 싶으면 돈부터 꺼내라는 얘기. 마오가 황당하다는 듯 노려보자, 소오는 색안경의 가운데를 슥 내렸다가 한 번 마주 보곤 다시 슥 올리며 속삭였다.

"아이고 무서워라. 눈에서 불 나오겠네."

근데 이 새끼가! 마오가 자리를 박차고 따지려는 순간, 장이서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러곤 주변을 슥 둘러보며 물었다.

"당신이 여기 주인이라고 했나."

"그랬지. 봐봐. 다 알아, 여기."

소오가 주변을 둘러보며 손님들에게 손 인사를 건넨다. 이에 몇몇 사람들이 마주 인사한다.

이 정도면 거짓은 아닌 모양.

그렇다면.

"천하의 불문객잔 주인이 지금 제가 대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모른다면 그건 그거대로 무능인 거고. 알고도 버릇없이 군다는 건 죽어도 할 말이 없다는 얘긴데.... 어느 쪽이지? 아, 답은 이거로 하지."

턱! 장이서가 탁상 위에 허리춤에서 꺼낸 단도를 올렸다.

그러자 곳곳에서 은은히 지켜보던 호위들이 흠칫거리며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간다.

"아."

그리고 소오는 색안경을 슥 내린 채 눈을 크게 깜빡였다.

"갑자기 이렇게 세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이제라도 알았으면 행실은 똑바로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장이서가 서늘하게 노려보자 소오는 입맛을 몇 번 다시더니 헛기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드륵 의자를 밀어 넣더니 공손히 배 앞에 손을 가져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불문객잔의 소오입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칠공자님."

그의 인사에 장내가 한순간에 합죽했다.

그야말로 적막 그 자체.

그때 장이서가 일어나 일언했다.

"소란 떨지 말고 하던 일 마저 하거라."

그제야 누군가는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 객잔을 빠져나갔고, 또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대화를 이었다.

그렇게 한차례 소동이 끝나고서야 마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새끼 내가 누군지 다 알면서 아까 나한테 돈 내놓으라고 한 거야?"

"하하, 그게 바로 서양식 인사지요. 우린 이걸 조크라고 합니다."

"x같은 소리하고 있네."

마오가 언성을 높이자 장이서가 진정하라는 듯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말했다시피 우리는 며칠 내 이곳에 들렀던 사람을 찾고 있다. 일을 마치면 두 배를 주지."

탁! 은원보 하나가 탁상에 꺼내 올려졌다. 이에 소오의 눈이 반짝인다.

'칠공자임을 밝혀 갑의 위치에 서 놓고, 바로 미끼도 던지신다? 하여튼 장이서, 저 자식. 사람 부릴 줄 안다니까.'

픽. 소오가 입꼬리를 올리곤 재빠르게 은원보를 챙겼다. 그러곤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어떻게. 뭐부터 알려드리면 되나."

"어디까지 알고 있지?"

"모르는 거 빼곤 다 알지."

"실력부터 보고 싶군."

"보좌 장이서. 방첩대 삼조장 출신이었으나 최근 보좌로 취임하여 신분 상승. 방첩대 시절 능력 출중. 가장 컸던 일은 비룡당의 부당주 환익을 첩자로 잡아넣은 전례가 있음. 덕분에 비룡당주와는 사이가 여전히 안 좋으시고. 더 해야 하나?"

장이서가 서늘하게 노려본다. 이에 소오는 머쓱하게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충분한가 보네.

"며칠 전 이곳에 소년이 들른 것으로 알고 있다."

장이서의 말에 소오는 기억을 회상하듯 눈을 올려 뜬 뒤에 말했다.

"며칠 전이라... 왔었지. 꼬마 하나가 오긴 했지."

"꼬마? 또 그쪽의 무능을 논해야 하나?"

장이서가 노려보자 소오가 급하게 말을 정정했다.

"라고 말하기는 그렇고. 그분. 어. 그분이라고 하자. 깐깐하네, 장 보좌. 아무튼 오셨어. 엿새 전 신시(15~17시)쯤 됐나."

근데 왜 자꾸 반말이지. 장이서가 눈매를 꿈틀거리며 말했다.

"그래서."

"근데 금방 갔어. 누구에 대해 좀 묻는가 싶더니 듣지도 않고 금세 사라지시데? 나도 직접 본 건 아니야. 얘기만 들었지. 그땐 좀 바빴거든."

사라졌다고?

97.

#불문객잔 (2)

마오와 장이서가 서로를 살폈다. 듣기도 전에 없어졌다니.

"어디로."

장이서가 들어온 남문과 반대편의 북문을 번갈아 눈짓했다. 그러자 소오가 고개를 돌려 북쪽 문을 바라본다.

마교가 아닌 외지.

본교 밖으로 나가는 문이다.

"장이서...."

"음."

장이서와 마오의 낯빛이 흑색으로 변했다.

1급귀는 신패만 있다면 허가 없이 교내외 출입이 가능한 위치. 당연히 북문으로 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나가는 순간부터 안전은 보장되지 않는다.

게다가 말도 안 하고 나갔다는 건 이 안에서 뭔가를 봤다는 얘기.

그 말인즉....

"꼬맹이가 위험하잖아."

마오가 아연실색한 얼굴로 외쳤다. 장이서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소오에게 따지듯 물었다.

"설마 그분이 누군지 알면서 그냥 보내진 않았을 텐데?"

그렇다. 육공자 정도라면 마교에서 1급귀에 오른 거물 중의 거물. 그의 이해 불가한 행보를 그냥 넘겼을 리 없다.

하나.

"그냥 보냈지. 안 보내면 어쩔 거야."

"뭐?"

"저 뒷문은 나도 못 나가. 왜 계산대가 남쪽에 있겠어. 저긴 내 영역 밖이야."

"외지인인 네가 왜?"

"왜 이래? 나도 본교 소속이야. 보면 몰라? 천마지존 만마앙복."

툭. 소오가 탁상 위에 검은 패 하나를 꺼내 올렸다. 한 면엔 마귀가 그려져 있고, 뒤에는 삼(三)자가 적혀 있는 패.

장이서와 같은 3급귀를 상징하는 신패였다.

틀림없는 진품.

"하?"

장이서는 황당함에 눈이 커지고 헛숨을 뱉었다.

아니, 그럼 십자가 목걸이는 무엇이고, 색안경은 또 무엇인가. 누가 봐도 서역인이지 않은가.

"자란 건 서역이 맞는데, 핏줄은 중원. 뭐, 여기서 장사하려면 개종해야 한다고 그러더라고. 원래 내 아버지가 신부셨거든? 알지? 모태신앙. 근데 먹고살려면 어쩔 수 있나. 돈 앞에 장사 없는 거지. 장 보좌는 내 마음 알 거야."

"입 닥쳐."

"응."

탕! 장이서가 답답함에 탁상을 내리쳤다. 그냥 사라진 거면 모르겠지만 북문이라면 분명 철마적을 쫓아 나갔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놈들은....

'구유는 산왕가의 오군장마저 꺾은 자. 게다가 사호정의 말에 따르면 간부들의 실력도 만만치 않다.'

장이서는 고심 끝에 다시 질문을 던졌다.

"다시 돌아오지 않은 건 확실해?"

"모르지. 바깥길로 들어올 수도 있고. 근데 소식은 없네."

"그분이 물은 자들에 대해선 뭐라고 답하려 그랬지?"

철마적. 생략된 주어다.

그들에 대해서라면 소오도 이제 막 알아 가는 중이었다.

하나 한 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지금, 이 불문객잔 안에 그들이 있다는 것.

또한 그런 그들을 추적하기 위해 비룡당이 건물 밖 곳곳에 은신해 있다는 것.

한마디로 지금 이곳이 이제 곧 추격전이 시작될 장소라는 것이었다.

'장이서.... 내가 지금 너라는 변수를 이 판에 끌어들이는 게 이득일까, 아니면 그냥 조용히 전부 내보내는 게 이득일까.'

한데 바로 그 순간. 턱!

탁상 위에 은원보 하나가 올려졌다.

소오가 고개를 번쩍 드니 그다.

장이서.

"고민은 이거로 끝내지."

장이서의 말에 소오는 푸하!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튼, 재밌는 놈이라니까. 근데 이거 돈 때문에 알려주는 거 아니다. 네가 내 우수 고객이라 알려주는 거지.

그가 손가락을 탁 튕기며 말했다.

"그들에 대해서라면 나도 잘 몰라. 하지만 그때 그분이 딱 그들의 이름 세 글자를 꺼내자마자 저 밖으로 나가셨단 말이지."

이름을 말하자마자 밖으로 나갔다?

순간 장이서의 머리가 번쩍 울리고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이에 소오는 시간을 아끼라며 제 입으로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철, 마, 적."

그러곤 상 위에 엎드리듯이 몸을 숙이더니 검지를 제 겨드랑이 쪽에 넣어 한쪽을 가리켰다.

이에 장이서와 마오의 고개가 천천히 움직이고, 어느 한 곳에 다다른 그때.

「젠장....」

북문 앞에 앉아 있는 네 사람과 눈이 딱 마주쳤다.

얼핏 봐도 기골이 장대하고, 복면을 썼음에도 용모가 야수처럼 강렬한 자들. 두툼한 털옷을 입은 자들이다.

저자들이...!

「흩어져!」

와당탕! 그들도 불길한 낌새를 느낀 것인지 삽시간에 상을 뒤집고 사방에 암기를 흩뿌리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으악-!

이에 마오 옆에 있던 이가 암기에 맞아 쓰러지고, 객잔은 아비규환에 빠졌다.

장이서는 바로 상을 뒤엎어 푸푹! 날아든 암기를 막아냈다.

"여기 좀 보고 계십시오!"

그러곤 상 위로 뛰어올라 그들의 뒤를 쫓았다.

"야, 장이서! 이런 젠장.... 이봐, 괜찮아?"

마오는 암기에 맞아 쓰러진 자들을 살피며 입술을 질끈 물었다. 다행히 급소는 아니다. 이를 본 소오도 한숨을 내쉬며 상황을 정리했다.

"자, 교인 분들은 남쪽, 아닌 분들은 북쪽으로 천천히 나가시오! 줄 맞춰서 천천히. 어, 거기 그쪽. 교인도 아니면서 남문으로 가면 안 되지. 거기 가면 평생 못 나온다? 자자, 이동, 이동!"

곳곳에 호위 서던 그의 수하들까지 가세하자 혼란은 금세 진정되고, 상시 대기 중이던 의원이 달려와 다친 자들을 살폈다.

그리고 소오는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는 마오의 어깨를 툭 두드리며 말했다.

"계속 여기 계실 겁니까? 따라가 보셔야죠."

"장이서가 있으라잖아."

"별로 말도 안 듣게 생기셨구만."

"뭐, 인마?"

"설마 저대로 장 보좌 그냥 보내시게요? 허가서나 1급귀 동행 없이 본교 밖으로 나가면 반역죄인 건 아시죠? 그리고 아까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 장 보좌 그 친구 비룡당이랑 사이 안 좋습니다."

"그게 왜."

"이 근처에 비룡당 애들 쫙 깔렸거든요."

"그걸 왜 이제 말해!"

마오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를 본 소오는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뭐야. 듣던 거랑 다르네. 장이서를 아끼는 건가? 망나니 칠공자가?'

정보를 사고파는 자가 칠공자를 모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연히 그도 마오에 대해서라면 잘 알고 있었다.

사람 알기를 우습게 알고, 무공이라곤 익힌 적도 없는 재능충.

'장이서는 유능해. 돈이 많거든. 뒷배도 없는 놈이 몰래 그 정도 벌었으면 최상위 인재인 거다.'

소오는 백오문의 소문주이자 장이서 담당. 그간 그의 뒤처리를 하면서 추산해 본 자산은 감히 상상 불가.

한마디로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았다는 얘기.

'근데 그런 녀석이 굳이 왜 보좌를 택한 거지? 그것도 희망도 없는 칠공자 보좌를.'

처음엔 그냥 명예욕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7급귀. 돈도 벌 만큼 벌었으니 이제는 명예 찾아가는 줄 알았다.

한데 그러기엔 너무 열심히 아닌가.

심지어 사도철까지 몰래 없애버리고.

'만약에. 아주 만약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칠공자가 진짜 소교주라도 된다면? 장이서가 상상도 못 할 큰 판을 짜고 있는 거라면? 그럼... 이거 대박 아니야?'

소오의 입이 벌려졌다. 냄새가 난다. 냄새가. 인생을 걸 만큼 커다란 도박판의 냄새가.

"장이서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

마오가 그의 상념을 깨고 다급히 질문을 던졌다.

불타오르는 눈매. 꾹 닫힌 입술.

확실하다.

칠공자, 이 꼬맹이... 옛날의 그 망나니가 아니다.

"모르죠. 근데 알아낼 방법은 알죠."

소오가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이에 마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가자."

그렇게 두 사람이 북문으로 향했다.

*

한편 밖으로 나온 장이서는 삐이이이- 울려 퍼지는 호각 소리에 입술을 질끈 물었다. 허가서도 없이 본교 밖으로 나온 것이 벌써 교내 감시자들 눈에 발각된 것.

그리고 이럴 때 가장 먼저 움직이는 건 교외를 담당하는 비룡당. 장이서와 썩 좋은 인연은 아니다.

다그닥, 다그닥!

하나 멀어져 가는 말발굽 소리에 잡념은 던져버리고 주변을 살폈다.

앞서 빠져나간 놈들이다.

미리 객잔 앞에 말까지 묶어 놓은 거 보면 확실히 뒤가 구린 놈들.

더구나 각자 다른 골목으로 흩어지는 걸 보니 한두 번 연습한 솜씨도 아니었다.

치밀하게 퇴로를 확보하고 준비된 계획.

'다 잡는 건 무리다.'

팟! 장이서가 경공을 펼쳐 3층 건물 위로 옷자락을 펄럭이며 올라섰다. 그러곤 빠르게 건물 사이로 솟아오르는 흙먼지를 훑었다. 좌측 둘, 우측 하나, 북측 하나.

하지만 좌측과 우측은 출로가 없다. 타고 갈 말까지 준비한 이들이 이를 몰랐을 리는 없을 터.

바꿔 말하면 셋은 탈출할 목적이 아니라는 얘기.

'저놈들은 미끼!'

그렇다면 진짜는 하나. 장이서의 시선이 북측에 꽂혔다. 말을 타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맹렬한 속도로 달려 나가는 사내.

'저쪽이 머리다!'

파파파팟! 삽시간에 판단을 내린 장이서가 그대로 자객처럼 지붕 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하나 거리가 쉽게 좁혀지진 않았다.

상대가 탄 말은 다리가 짧고, 몸집이 작은 북방의 조랑말. 겉보기엔 빈약해 보이지만 근본이 추운 지방의 야생마이고, 기동성과 회전력이 좋아 후퇴 전술에 유리했다.

게다가.

'본래 북방 일족의 말 타는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한데 저자는 그중에서도 평균을 훨씬 더 상회한다.'

골목에서 방향을 튕기듯이 회전하며 빠져나가는 솜씨는 누가 봐도 기마술을 제대로 배운 자.

이대로면 놓치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그럴 순 없지.'

장이서가 의기를 다진 그 순간. 파지직! 달려가던 몸에서 검은 뇌기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뇌전법(雷轉法)』

장거리면 모를까, 단거리라면 충분하다.

빛보다 빠른 건 없으니까.

콰아앙! 단숨에 한계까지 끌어올리자 폭발하듯 전신에 내기가 가득 휘몰아친다.

벌써 대주천이 끝난 것.

그리고 팍-!

그가 서 있던 자리의 기와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그의 신형이 벼락처럼 사라졌다.

*

「쳇! 불문객잔도 이제 끝인 건가.」

한편 회색 조랑말을 타고 도주 중이던 사내는 휑한 뒤를 돌아보며 안도의 숨을 뱉었다.

분명 피부색은 중원 쪽인데 이목구비와 눈썹이 부리부리한 게 서역인을 닮았다.

그의 이름은 과평.

모두가 그토록 찾고 있는 철마적의 간부이자, 지난번 사호정과 거래를 트기로 약속이 되어 있던 장본인이었다.

그리고 그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대략 흘러가는 분위기 정도는 읽고 있었다.

도살방이 당했고, 마교에서 자신들을 추적하는 움직임이 생겼다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새로운 거래처를 물색 중이었다.

한데 믿었던 불문객잔 주인이 대놓고 입을 열어버릴 줄이야.

「비겁한 족속들.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 대장에게 간다.」

과평이 미간을 와락 일그러트린 채 더 거세게 말을 몰았다.

그리고 마침내 초원으로 이어지는 길목이 보이는 그 순간.

히이이잉!

「컥?!」

일순 말이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중심을 잃고는 와당탕 먼지바람과 함께 나뒹굴었다.

극심한 통증에 몸부림치던 과평은 이빨을 꽉 물곤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이 타고 온 말을 일으키려고 손을 댄 그 순간.

「죽었...어?」

98.

#흉노의 후예

미동도 없는 단단한 피부를 느끼며 말의 죽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가라앉은 먼지 아래로 무언가에 찔려 죽은 것처럼 피를 철철 흘리는 모습이 눈에 담겼다.

어떻게 이런....

분명 뒤쫓는 자는 없었거늘.

의문으로 머릿속이 멍해질 무렵.

"그쪽이 철마적인가?"

인근 건물 지붕 위에서 한 사내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이에 고개를 올려 드니 툭. 어느새 그림자처럼 바닥에 떨어져 내린 사내가 자신을 마주했다.

백색 무복에 평범한 용모. 아까 불문객잔에서 눈이 마주쳤던 그놈이다.

「...네 짓인가?」

과평은 한껏 차가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말의 죽음에 감정이 과잉되는 건 아니었다.

본디 전장에 나갈 땐 말을 대여섯 마리까지 끌고 나갔다. 지치면 갈아타고, 배고프면 잡아먹기 위함.

단지 절 쫓아온 게 고작 한 놈이라는 사실에 화가 일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열심히 달릴 필요도 없었을 것을.

「덕분에 나만 호들갑을 떤 멍청이가 되어버렸군. 굳이 대장에게 갈 필요도 없었을 일을.」

과평은 한어가 아니라 특이한 언어로 중얼거렸다.

이에 장이서는 눈매를 좁히곤 다시 물었다.

"중원 말을 하지 못하는 건가? 다시 묻겠다. 며칠 전 열다섯 살짜리 소년 하나가 객잔에 왔었다. 그 아이. 너희가 데려간 것인가?"

「며칠 전 소년? 아, 아. 발칙하게 우리 뒤를 밟은 그 맹랑한 놈을 말하는 건가. 넌 그 아이를 찾으러 온 녀석이었군. 후후, 난 또 비룡당 놈들이 위장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별거 아닌 놈이었어.」

"무슨 말이지?"

「몰라도 된다. 어쨌든 꼬마 녀석이라.... 근데 어쩌지? 찾기엔 이미 늦어버렸는데.」

과평이 약 올리듯 씨익 웃는다. 이에 장이서가 전혀 못 알아듣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더더욱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꼬마 놈도 그렇고, 무슨 일로 자꾸 우리 앞에 얼쩡거리는지 모르겠지만 포기해라. 너희 멍청한 마교 놈들은 또 우릴 찾는다고 북방을 뒤지겠지만 하등 소용없는 일. 지금쯤이면 그 꼬마는 사해(死海)에 끌려가 있을 테니. 크큭.」

"사해...? 설마 천산남로에 있는 죽음의 사막을 뜻하는 것이냐?"

「오, 용케 아는구나! 마교에도 해박한 놈이 있었군. 근데 잠깐....」

과평의 두 눈이 뒤통수 세게 맞은 사람처럼 멍해진다.

"왜 그러지?"

「왜냐고? 이상하지 않으냐.」

"뭐가 말이냐."

「지금 네놈이 내게 묻고 있는 것 자체가 말이다!」

"그게 왜."

「이이익! 어떻게 내 말에 일일이 답을 하고 있냐는 것이다!」

과평의 얼굴이 야차처럼 붉어지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에 장이서가 소름 끼치게 씩 미소를 짓는다.

그때 깨달았다.

「이, 이놈. 나를 속였구나-! 우리 말을 알고 있었어!」

이제 알았나.

장이서는 더 속일 것도 없다는 듯 한술 더 떠 말했다.

「너희는... 흉노족의 후예였군.」

그렇다. 그가 뱉은 말은 흉노족의 언어.

아주 먼 옛날, 북방을 지배했던 때도 있었으나 현재는 패망해 작은 촌락만이 간신히 맥을 유지하는 자들이었다.

본래 선대부터 근골이 강대하고 말을 잘 몰기로 유명했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이목구비나 중원에서 보기 힘든 체격도 이해가 가는 일.

"똑바로 답해라! 네놈이 어떻게 우리 말을 아는 것이냐!"

과평은 더 숨길 것도 없는지 말을 바꿔 한어로 추궁했다.

이에 장이서는 받은 대로 답했다.

"흉노족인 네가 중원의 말을 아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니겠나."

"헛소리!"

그래. 헛소리다. 사실 과평은 그냥 운이 없었던 것.

하필 만나도 온갖 언어에 통달한 암각 최고의 요원인 장이서를 만났으니 말이다.

장이서가 담담하게 한 걸음씩 다가온다.

"어쨌든 맹휘를 너희가 사해로 데려갔다는 건 잘 알겠고. 그럼 우리도 대화가 더 필요할 것 같은데."

대화? 이게 내 대화다. 장이서의 제안에 과평은 척 권각술의 자세를 취하고는 소리쳤다.

"네놈은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었다. 반드시 네놈을 죽여 그 입을 막고 가야겠다."

"제 입으로 실컷 떠들어 놓고 이제 와 남 탓을 하다니. 너무 억지가 아닌가."

「죽어라-!」

언어는 통해도 대화가 안 통한다는 게 이런 경우. 과평이 쏜살같이 달려 나와 커다란 주먹을 휘둘렀다.

부웅!

왼손은 당겨 아래턱을 방비하고, 오른손은 체중을 실어 횡으로 날아든다.

'서역의 체술인가.'

중원의 무공은 아니지만, 기골이 천성적으로 타고난 흉노족이다. 더구나 과평은 그중에서도 날고 기는 장사.

돌진하는 힘이나 실린 무게. 어수룩하게 볼 수준이 아니다.

쉬익!

장이서가 뒤로 몸을 날려 피해내자, 곧이어 과평은 다시 허리를 틀며 왼손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빠른 전환!

"이쪽 대화가 더 편하다면 얼마든지."

하나 겉만 보면 우락부락한 과평과 비교할 수 없겠지만, 장이서 역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몸으로 하는 대화라면 누구보다 솔직하고 과감한 편.

우우웅!

장이서가 달려오는 과평의 가슴팍을 향해 일장을 내질렀다. 과거라면 모를까, 이미 천마의 내공으로 무장한 상태.

뒤늦게 쏘아졌지만, 군더더기 없이 날카롭다.

「흥! 그깟 고사리 같은 손으로 뭘 어쩌겠다는 거냐!」

한데 과평은 피할 마음이 일절 없는지 주먹을 거두지 않고 그대로 속행했다. 일장 정도는 얼마든지 맞고 받아쳐 주겠다는 뜻.

하지만 이는 장이서를 제대로 얕본 것.

겉보기와 달리 그의 손바닥에 담긴 마기는 암석을 가루로 만들고도 남을 수준이다.

그리고 얕본 대가는 확실했다.

빠각.

「카학-!」

끔찍한 소음과 함께 장이서의 옆구리 근처까지 다다른 그의 왼손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멈춰졌다. 입에선 타액이 흐르고,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떨어지는 암석도 견딘 굳건한 뼈에 금이 간 것.

「이 새...끼....」

하나 놀란 건 장이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돌도 부술 절정 고수의 일장이 고작 뼈에 선만 긋고 끝나다니. 도대체 뭘 먹고 자란 것인가.

더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죽여주마-!」

과평은 눈이 회까닥 돌더니 고통 따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더 폭주한 짐승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붕! 부웅!

심지어 분노가 힘의 근원인지 더 빨라졌고, 강해졌다.

장이서가 뒤로 빠지며 이를 피해내자 어느덧 작은 건물의 벽에 다다랐다.

그리고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주먹.

"이런."

이에 장이서가 몸을 확 낮춰 피해내자, 콰아아앙!

주먹에 부딪힌 벽이 터져나가듯 부서져 흩날렸다. 한데도 그의 손은 그저 돌가루만 묻었을 뿐,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다.

그야말로 무식하기 짝이 없는 몸.

'이 정도면 절정 고수라고 봐도 이상할 게 없겠구나. 사호정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겠어.'

확실히 무시할 수 없는 상대. 더구나 지금은 뵈는 것도 없는지 콧김까지 내뿜는다. 그야말로 이성까지 잃었다.

휙. 장이서는 옆으로 돌아 나와 공간을 확보했다.

이내 숨을 고르곤 그대로 허리춤에서 단도를 빼 들었다.

'분명 강하긴 하나 왕우보다 한 수 아래다. 뇌전법을 쓰면 금방이겠지만....'

그에겐 들어야 할 말들이 아직 많다.

아직 죽어선 안 될 자라는 얘기.

그러니까.

「들어와라.」

실력으로 상대해준다.

장이서가 비소를 지으며 손을 까딱거렸다.

「크아아아아!」

격분하여 돌진하는 과평.

이에 호응하듯 장이서 역시 빛살처럼 쏘아졌다.

파파팟!

두 사람의 접전은 순식간에 십여 합이 지나갔다.

과평이 강력한 두 주먹과 체력으로 승부수를 던졌다면, 장이서는 빠르고 확실한 칼질로 응수했다.

그리고 결과는 과평이 뱉은 말로 충분했다.

「이 미꾸라지 같은 새끼...!」

장이서는 마치 예측이라도 하는 것처럼 정확히 한 치의 거리를 두고 피해냈다.

그만큼 간격이 줄어드니 이어지는 반격의 속도도 기가 막혔다.

푸푸푹!

「큭!」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 과평의 몸엔 무려 다섯 개의 자상이 새겨졌다.

다행이라면 말처럼 단단하고 질긴 그의 근육이 치명상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

「이 자식!」

이에 과평은 아예 제 몸을 내주고 반격을 가했다.

그야말로 막무가내식 전법.

하나 효과는 확실했다.

퍽!

그가 내지른 주먹에 장이서가 한참을 밀려 뒤로 날아갔다.

두 팔을 교차로 올려 막아냈음에도 이 정도.

「제법 버티는구나!」

기세를 잡은 과평은 성난 코뿔소처럼 돌진했다.

그와 동시에 펼쳐지는 무차별한 연격.

파파파파팍!

장이서는 이에 속절없이 뒤로 밀렸다. 막고 피하기 급급한 상황.

'어지간한 자들이 아니면 상대하기 쉽지 않겠구나. 확실히 강하다.'

타고난 근골과 움직임도 훌륭하나, 분명 과평의 주먹엔 공력이 실려있었다.

어디서 배웠는진 몰라도 절대 무시 못 할 수준.

더구나 도주 전략도 그렇고, 일부러 흉노족의 언어로 교란을 주려 한 것도 그렇고. 조직력 또한 훌륭했다.

'확실히 아까운 자들이다. 미혼산에 손을 대고 맹휘만 납치하지 않았어도....'

하나 이미 물은 엎질러진 일.

'이제 곧 있으면 비룡당이 올 거다.'

원만한 사이는 아니지만, 육공자가 납치된 사건. 아무리 미쳤어도 그 정도 사리 분별은 있을 터.

지금은 그들과 공조하여 맹휘를 찾는 게 우선이다.

장이서가 과평의 공격을 흘리며 시간을 끌었다.

그러자 잠시 후.

[멈춰라-!]

날카로운 육합전성이 울려 퍼지고, 새하얀 도포를 입은 무사들이 소나기처럼 우르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왔구나!'

펑퍼짐한 소맷자락에 등에는 황금색으로 비(飛)자를 수놓은 무사들.

"비룡...당."

과평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비룡당.

천마신교 밖에서 활동하는 자들에겐 저승사자와도 같은 존재들.

마침내 그들이 당도했다.

"젠장...."

자연스레 두 사람의 싸움도 멈춰졌다. 아무리 야생마처럼 날뛰는 과평이라 해도 비룡당이 사방을 포위한 채 칼을 들이미는데 더 나댈 재주는 없다.

그야말로 외통수.

하지만 당황에 빠진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장이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이자들이 여길...?!'

분명 자신이 기다리던 비룡당의 무사들이다. 하지만 이건 예상과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비(飛)자가 황금으로 수놓아져 있다는 건 최정예임을 뜻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단체로 나타났다는 건, 오직 한 가지 경우만을 의미했다.

"호호호! 지금부터 움직이는 녀석 몸엔 깃털을 하나씩 꽂아주마. 꽤 따끔할 것이야."

표독스러운 목소리가 장내에 울렸다.

장이서와 과평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건물 지붕 위에 선 그녀의 모습이 눈에 담겼다.

이마 한가운데에 초록 보석을 박고, 새처럼 새하얀 털로 가득한 기이한 옷차림을 한 여인.

불혹이 넘은 나이임에도 삼십 대의 날카로운 미녀처럼 보이는 용모.

외관부터 풍겨 나오는 기세까지, 그야말로 엄청난 존재감.

"저 여인은 누구지?"

과평이 바짝 긴장한 채 물었다.

장이서는 마른침을 삼키곤 답했다.

"비룡당주...."

장이서와는 지독한 악연.

만리를 나는 새.

비룡당주 만리신조(萬里身鳥) 묘채경이었다.

"감히 허가서도 없이 교외 밖으로 튀어나오다니. 호호호, 여전히 너는 제정신이 아니로구나."

99.

#비룡당주의 음모 (1)

툭. 새처럼 바닥에 내려선 묘채경은 과평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서슬 퍼런 살기를 쏘아내며 장이서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지척에 다다라 또박또박 이렇게 말했다.

"장, 이, 서."

지독한 악연의 연장선이다.

*

비룡당주 만리신조 묘채경.

그녀와의 악연은 오래전 장이서가 방첩대 조장이었을 무렵, 그러니까 비룡당 부당주였던 환익을 첩자로 도라옥에 처넣으면서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그의 조카가 환익의 집에서 기밀 문건을 훔쳐 넘긴 혐의로 방첩대에 붙잡혀 오면서부터였다.

'내 조카는 어디에 있느냐! 당장 풀어주지 못할까! 이것들이 내가 누군 줄 알고-!'

환익은 다짜고짜 방첩대를 찾아와 제 조카를 풀어달라며 온갖 행패를 부렸고, 하필 그 자리엔 장이서가 있었다.

그 후로는 알려진 대로였다.

장이서는 전력을 발휘해 환익의 뒤를 밟았고, 조카는 사실상 표면일 뿐. 실상 모든 걸 꾸민 건 그였음을 만천하에 밝혀버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조카를 이용해 일부러 정보를 훔치도록 흘렸던 것. 제 조카가 실수로 저지른 만행으로 덮으려 했던 것이었다.

그 일로 환익은 도라옥에 갇혔고, 장이서는 그의 모든 재산을 압수해 절반을 죽은 대원의 가족에게 넘겨주었다.

사건은 그렇게 종결됐다.

하지만.

'감히 방첩대 조장 따위가 비룡당을 건드려? 호호호호. 이런 수모가 다 있나.'

첩자를 양성하고 관리하는 비룡당의 역사에 큰 흠이 생겨버린 것.

그 덕에 장이서는 비룡당주 묘채경의 머릿속에 이름 석 자를 각인시켰다.

언제고 잡아 처넣어야 할 불구대천의 이름으로.

"호호호호! 복수의 날이 오늘이 될 줄이야. 드디어 너를 내 손으로 도라옥에 잡아 처넣을 수 있게 되었구나."

"...오랜만입니다, 당주."

"오랜만입니다, 당주?! 지금 내게 감히 그딴 식으로 말을 한 것이냐? 네깟 게?!"

우우우웅!

묘채경의 새하얀 털옷이 펄럭였다. 피부가 베일 듯한 엄청난 내력.

확실히 고수다. 왕우보다도 한 수 위!

"당주를 당주라 부르지, 무어라 부르겠습니까. 알겠지만 이젠 나도 그냥 삼조장은 아니라서."

발칙한! 파파파팟! 묘채경이 손을 휘젓자 장이서 주변에 새하얀 깃털 수십 개가 땅바닥을 뚫고 꽂혔다. 단단한 돌바닥임을 감안하면 얼마나 첨예한지 짐작이 간다.

하나 그중 장이서의 몸에 박힌 건 단 하나도 없었다.

과거였다면 작살을 내놨겠지만, 이젠 확실히 급이 달라졌다는 것.

잔챙이가 아니라 잘못 건드리면 세게 물릴 대어라는 얘기다.

"호호호! 좋다. 주제에 보좌가 되었다지?"

묘채경이 노기를 드러내며 웃음을 지었다. 실로 마귀가 따로 없는 모습.

"당주께서 환익 그 첩자 새끼를 고작 1년 만에 도라옥에서 석방해 주는 걸 보곤 권력이 답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한번 올라와 봤는데. 와서 보니 나쁘진 않군요."

"호호호호, 아니지. 그게 아니지 않으냐. 넌 그냥 첩자인 것이다. 본교로 숨어 들어온 비열하고 간악한 벌레 새끼일 뿐이지. 위에서 명을 받았으니 보좌가 된 것이고."

"무슨...."

"왜. 똑같이 당해 보니 억울한 것이냐? 호호호! 그러게, 너도 상대를 보고 건드리지 그랬느냐."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정확해서.

"서로 공사가 바쁘니 헛소리는 이쯤 하시지요."

"허, 헛소리?!"

"인근에 계셨던 거면 이미 아실 텐데요. 내가 여기 혼자 온 게 아니라는 거."

묘채경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진다. 그래, 알고 있다. 칠공자와 함께 왔다는 것을. 첩자니, 뭐니 몰아세운 건 그저 화풀이.

장이서가 의뭉스러운 시선으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당주께서 이곳에 오신 이유가 뭡니까."

"왜겠느냐? 네놈이 호룡당에 맡긴 일 때문이지."

"철마적 때문입니까?"

"그렇다. 그러니 저놈은 우리에게 넘기고 너는 그만 꺼지거라. 당장 잡아 처넣기 전에."

그녀가 고갯짓하자 수하들이 한 걸음씩 다가온다.

비켜주지 않을 이유가 없는 일.

장이서는 걸음을 한 보 떼었다.

한데 왜일까.

그 순간 속이 알싸하고, 기분이 묘했다.

'나는 이자가 철마적이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이내 슥 고개를 돌려 묘채경을 살폈다.

그리고 보았다.

표정에서 보이는 미묘한 떨림을.

'또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냐.'

장이서는 작금의 상황을 재해석했다.

'묘채경은 이자가 철마적인 걸 알고 있다. 지대호의 요청에 꽤 긴 시간을 추적해 왔을 테니 그럴 수도 있다. 한데 왜 이제 와서.... 잡을 거면 불문객잔에서 잡는 게 더 쉬웠을 텐데?'

장이서가 주변을 다시 훑었다. 드러내진 않지만, 모두의 눈에 힘이 없고 입술은 말라 있다.

이는 심히 불안하다는 징조.

게다가 최정예답지 않게 걸음걸이가 느슨하고, 손에는 주저함이 있다.

그 말인즉슨.

'이자를 잡을 마음이 없다?'

왜.

당연히 한 패일 리는 없고. 그럼 일부러 놔주겠다는 것인가.

풀어줘서 뭘 얻어내려고.

설마.

'철마적의 근거지를 찾아내겠다는 건가?'

충분히 일리 있는 일.

한데....

"뭣 하는 것이냐? 어서 꺼지지 않고."

소리치는 비룡당주 묘채경.

장이서는 그녀를 보니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비룡당주는 한가한 자가 아니야. 웬만한 일이 아니면 직접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처럼 부러 실패해야 하는 임무라면 더더욱. 한데 최정예들을 이끌고 직접 이곳에 와 있다.'

그 말은 곧 이번 임무가 직접 나서야 할 만큼 중대하다는 얘기.

왜.

'설마 맹휘가 납치된 걸 알고 있는 건가?'

장이서의 눈매가 좁혀졌다.

그녀의 단화와 옷에 먼지가 가득하다. 평소 그리 백색을 좋아하고 깔끔한 걸 선호하는 그녀답지 않은 모습.

이는 하루 이틀 된 모습이 아니다.

엿새 전에도 이미 이곳에 있었을 수 있다는 얘기.

그렇다면....

'어째서 구하지 않은 거지? 아니, 왜 육공자가 납치된 사실이 아직도 본산에 알려지지 않은 거냐. 엿새나 지났는데.'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다. 등골이 서늘했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대부분 제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묘채경은 전형적인 마교의 마인. 누구보다 비정하고, 제 목표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다. 더구나 맹가와 당주의 사이는 견원지간.'

만일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면.

먼저 맹휘의 납치를 방관하고 근거지를 찾으려 했던 것이라면.

그러다 사해(死海)까지 가서 놓쳐버린 것이라면...?

그럼....

[눈치챘구나?]

"...!"

바로 그때 장이서의 생각을 챙그랑 깨부수는 섬찟한 전음이 귓가에 파고들었다.

묘채경.

그녀가 차갑게 식은 얼굴로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너는 늘 알지 말아야 할 걸 아는구나. 그게 네 명을 재촉하는 줄도 모르고.]

빌어먹을. 장이서가 입술을 질끈 물었다.

너무 성급했다. 상대는 비룡당주 묘채경. 온갖 권모술수의 달인. 자신이 그녀의 표정을 읽었듯, 그녀도 자신을 읽을 수 있음을 자각했어야 했다. 생각을 멈췄어야 했다.

"다들 잘 들어라! 3급귀 보좌 장이서는 허가서도 없이 교외로 나온 것도 모자라 뻔뻔하게도 철마적과 내통을 하였다."

이런 미친!

비룡당주의 말 같지도 않은 선포에 장이서는 기함했다.

이건 멀쩡히 있던 과평도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

"누가 누구랑 한편이라는 거냐! 이 새대가리 같은 년... 큭!"

푹! 과평이 홧김에 나서려는 순간 그의 손등에 깃털 하나가 꽂혔다. 피가 뚝뚝 떨어진다. 그만큼 그녀의 성취가 높다는 것.

"비룡당주인 내가 그리 결론을 내렸다. 그럼 그냥 그런 것이다. 알겠느냐?"

뭐 이런 정신 나간 인간이 다 있는가. 과평은 경악했다.

하지만 이런 광종들이 넘쳐나는 곳이 바로 마교다.

「어이,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거냐.」

과평이 장이서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이에 장이서는 표정으로 답했다. 아주 x된 상황.

"너희는 한 패였으나 작은 욕심에 내분이 일었고, 이곳에서 싸우다 죽은 것이다. 호호호호!"

진심이구나. 그녀가 지금 비룡당의 실책을 덮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 들고 있다.

"당주. 지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요?"

"어차피 안 되는 말도 되게 만드는 게 내 일이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이만 죽거라. 염라가 왜 왔냐고 묻거든 네놈의 쓸데없이 굴러가는 머리 때문이라 말하고."

묘채경이 올라간 입꼬리를 슥 내리곤 수하들에게 고갯짓했다.

그러자 스스슥! 무사들이 아까와 달리 섬뜩한 살기를 뿜으며 다가온다.

그야말로 사방이 포위된 상태.

이에 서로 뒷걸음질 치던 과평과 장이서가 서로 등을 맞대는 기괴한 상황이 펼쳐졌다.

「크큭, 저자들 모두 너와 같은 편 아니었나?」

「세상엔 내 편보다 늘 남의 편이 더 많더라.」

이 와중에 농담이 나오나. 과평은 장이서의 반응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장이서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묻자.」

갑자기 같은 처지가 된 것에 동병상련이 인 것일까. 과평은 최대한 악의 없이 답했다.

「뭐냐.」

「너희가 데려간 그 꼬마. 아직 살아 있는 거냐?」

「누명까지 쓰고도 그 꼬마가 걱정되는 거냐?」

「시간 없다. 묻는 말에나 답해라.」

'이 새끼....'

과평은 새삼 장이서가 다시 보였다. 꽤 의로운 자가 아닌가.

「...우릴 뭐로 보는 것이냐! 우린 여인과 애새끼는 죽이지 않는다.」

「진짜냐?」

과평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팔아버릴 뿐이지.」

근데 이 새끼가.... 장이서가 서늘하게 노려보자 과평이 당황하며 해명했다.

「진정해라! 아직은 무사할 거다. 노예시장이 열리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후, 불행 중 다행. 장이서가 안도의 숨을 뱉으며 더 가까워진 비룡당 무사들을 살핀 뒤 다급히 물었다.

「시간은 얼마나 남았지?」

「대충... 사나흘?」

「이런, 미친! 본거지가 사해라며.」

장이서가 경악을 토했다. 사나흘이면 북로인 이곳에서 사해라 불리는 남로의 사막까지는 내내 달려도 도착할지 미지수였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얘기.

게다가 노예로 팔려 간다는 건 서역으로 끌려간다는 것이고, 그럼 영영 돌아오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그냥 맹휘는 평생 생판 모르는 땅에서 노역만 하다가 죽게 될 거라는 얘기.

'아무리 마교의 후계라 하나 이제 겨우 열다섯 나이. 더군다나 조금이나마 인간답게 살고 싶어 하는 그 아이를 이렇게 보낼 순 없다.'

장이서가 입술을 질끈 물었다.

안 봤다면 모를까, 한동안 어울리며 맹휘의 아픔과 바람을 보았다.

그걸 보고도 외면한다면 어찌 정도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어느새 다섯 걸음 앞까지 포위망을 좁혀 온 비룡당 무사들.

장이서가 결단을 내렸다.

남은 방법은 하나다.

'묘채경. 오늘은 네 뜻대로 해주지.'

「살고 싶나?」

장이서가 다급한 어조로 과평에게 물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그럼 죽고 싶은 놈도 있냐?」

아니라면 다행이고.

「보다시피 상황이 이렇게 됐다. 내가 바라는 건 사라진 소년의 안위뿐. 날 데려가 주면 널 빼내 주겠다.」

「그걸 믿으라고...?」

「안 믿으면 죽어야지.」

어느새 비룡당의 서슬 퍼런 검들이 지척까지 다가섰다.

젠장.

100.

#비룡당주의 음모 (2)

과평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구해줄 방법은 있는 거냐?」

방법? 이것밖에 더 있나.

「일단... 쳐!」

파앗!

두 사람이 동시에 앞으로 튀어 나가며 각자 비룡당 정예 무사들을 상대해 나갔다.

퍽!

과평은 검의 옆 날을 오른손 주먹으로 쳐내자마자 안으로 파고들어 왼손으로 얼굴에 주먹을 꽂았고.

푸푸푹!

장이서는 자세를 낮춘 채 벼락처럼 스며 들어가 단도로 허벅지와 옆구리를 순식간에 세 번을 찔렀다.

"크악!"

"놈들을 잡아라-!"

이에 비룡당 최정예 무사들도 준비된 것처럼 둘로 나누어져 장이서와 과평을 상대해 나갔다.

슈슈슈슉!

피할 곳 하나 없이 대여섯 명이 동시에 칼끝을 찔러댄다.

한낱 당원이면 모를까, 이들은 황금으로 글귀를 수놓은 최정예 무사들.

"큭!"

장이서는 뒷걸음질 치며 간신히 피해냈고, 과평은 몸을 웅크린 채 들어 올린 팔등에 벌써 수차례를 베였다. 단단한 근골이 아니었다면 이미 너덜너덜해졌을 수준.

과평이 원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이딴 게 방법이냐!」

쐐애애액! 퍽!

장이서가 백뢰를 쏘아 과평을 압박하던 무사 다리에 박아 넣었다.

그러곤 다급히 고개를 들어 건물 지붕 위를 흘겼다.

엎드린 채 경악에 빠져 있는 두 사람.

마오와 소오다.

장이서는 다급히 그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수화다.

[북문 앞에 말을 준비해.]

불문객잔의 주인이 정말 유능한 정보상이라면 이 정도도 못 알아들을 리는 없을 터.

"호호호호! 장이서. 네놈이 아주 미쳤구나! 이건 그냥 둘이 한패라는 걸 인정하겠다는 꼴이 아니더냐."

멀찍이서 묘채경의 조소가 울린다.

'당주는 직접 나서지 않을 거다. 내 손에 제 수하들이 크게 다칠수록 명분도 커질 테니.'

그리고 누누이 얘기하지만, 장이서는 오늘만큼은 그녀의 뜻에 맞춰줄 생각이었다.

「이쪽으로!」

장이서가 비좁은 건물 사이로 물러서며 외치자 과평은 허겁지겁 달려온다.

하지만 그리 썩 좋아 보이는 생각은 아니다.

일찍이 간파한 비룡당이 앞뒤로 포위한 형국이 되어버린 것.

이젠 도망칠 곳도 없다.

「제정신이냐?」

「충분히.」

「뭐?」

장이서는 씩 웃고는 품에서 손가락 마디 사이에 웬 두툼한 쇠구슬들을 세 개씩 끼워 꺼냈다.

그리고.

파파팟!

삽시간에 앞뒤로 던져버렸다.

"이건...?"

이를 알아본 비룡당의 무사들 표정이 망연자실로 물든다.

"피, 피해라!"

하나 늦었다.

콰아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건물이 무너지며 연기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도살방을 상대할 때 썼던 진천뢰다!

그리고.

파직!

장이서는 그사이 과평을 안아 든 채 갈지(之)자로 벽을 타고 사라졌다.

마치 검은 벼락처럼.

삽시간에 상황은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화를 면치 못한 비룡당의 무사들은 무너진 건물 사이에 깔려 신음을 토했다.

"크윽!"

"노, 놓치면 안 된다! 잡아!"

하나 이미 장이서와 과평은 빠져나간 후.

간신히 거리를 벌린 두 사람은 죽을힘을 다해 마을 밖으로 달렸다.

그러자 먼발치에 말을 탄 채 기다리는 두 사람이 보였다.

"장이서-!"

적발의 장신 마오.

"이봐,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용케 수화를 알아들은 불문객잔의 주인 소오.

장이서와 과평은 서로를 보곤 고개를 끄덕인 뒤, 곧장 무리에 합류해 여분의 말 위에 올랐다.

「가자-!」

히이이잉! 이내 과평의 외침과 함께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황야를 달려 나가는 무리.

목적지는 죽음의 사막, 사해라 불리는 곳.

맹휘가 있는 철마적의 본거지다.

이들의 기이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장, 이, 서어어어어어-!"

쑥대밭이 된 현장을 바라보며 비룡당주 묘채경의 한 맺힌 비명이 울려 퍼졌다.

*

"장이서, 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 감히 진천뢰를 뿌리고 도망을 쳐?"

묘채경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댔다. 화를 피하지 못한 제 수하 중 일부는 실려 나갔고, 남은 건 무너진 건물의 잔재와 피뿐이었다.

원래도 제정신이 아닌 놈인 줄은 알았지만, 하다 하다 당원을 해치고 도주할 줄이야.

"이제 어찌할까요."

뒤늦게 합류한 부관이 묻자 그녀는 겨우 성질을 죽이곤 코웃음을 쳤다.

"놓친 건 아쉽지만, 성급할 건 없다. 허가도 없이 교외로 나온 것도 모자라 당원을 해하고 도망치지 않았느냐. 제 스스로 첩자라 시인한 꼴이지."

"하오나...."

묘채경의 말에 부관이 주변 눈치를 살피곤, 조용히 읊조렸다.

"과평의 뒤를 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대로면 육공자를 찾아낼 방도가 없습니다. 혹여 저희가 부러 납치된 걸 알면서도 방치했단 걸 본산에서 알게 되는 날엔...."

역시 장이서가 예상한 그대로다. 겁 많은 부관은 마른 입술을 적신 뒤 마저 말을 이었다.

"게다가 불문객잔에서 칠공자도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장이서와 합류한 것으로 추정되며, 만일 그가 첩자가 아니라 단순히 철마적의 뒤를 쫓아 나왔던 것이라면...."

"호호호! 당연히 놈은 첩자가 아니지. 무공도 제대로 못 펼쳐 비루하게 진천뢰나 던져대는 놈이 무슨 첩자 짓을 한단 말이냐? 그놈은 그저 사라진 육공자를 찾으러 온 것뿐이다. 넌 부관이라는 자가 그것도 몰랐단 말이냐?"

부관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 그럼 어째서...."

"어째서 첩자로 몰았느냐고? 넌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이냐? 장이서 그놈이 난 놈이니까 없애려는 것 아니겠느냐!"

부관이 황당함에 입을 떡 벌렸다. 난 놈인데 첩자로 몰아 죽이겠다니. 이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본교의 재원이면 잘해줘야지.

"멍청하기는! 네가 말한 우리가 한 짓을 놈이 알아버렸다 이 말이다."

"어, 어찌...!"

부관은 절망에 휩싸였다.

대체 그걸 어찌 안단 말인가. 내부에서 누가 제 입으로 불지 않고서야....

"그러니 난 놈인 게지."

부관의 표정을 읽은 묘채경이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우스운 얘기지만, 마교에서 장이서의 두뇌를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게 바로 그녀였다.

환익을 첩자로 밝혀내는 과정에서 설마 그녀가 손 놓고 보고만 있었겠는가.

뒤에서 온갖 수단을 다 펼쳐 막으려 했었다.

어떻게든 비룡당 내에서 문제를 끝내려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왜?

수많은 머리가 장이서 그놈 하나를 이기지 못해서.

"놈은 반드시 죽여 없애야 한다. 아니면 우리가 먹힐 수도 있으니."

묘채경의 살벌한 말에 부관은 침을 꼴깍 삼켰다.

도대체 어디까지 갈 생각인 것인가.

애초에 육공자가 납치될 때 이를 방관한다는 전략도 그는 반대했었다.

한데 이젠 이를 알아챈 보좌마저 첩자로 몰아세우겠다니.

과욕이다. 그녀의 지나친 과욕이 참사를 일으키고 있다.

'심지어 당주님과 맹가주인 삼장로는 원수와도 같은 사이. 만약 육공자가 잘못돼 본산에서 이를 두고 조사라도 나온다면....'

극형. 당주만 믿고 따라가다가 모조리 모가지다.

부관의 눈에 일순 섬찟한 역모의 안광이 서렸다.

그러자 묘채경이 뭔가 생각난 듯이 말을 꺼냈다.

"한데 참으로 신기하구나. 장이서는 어찌 알고 이곳에 왔을까. 육공자가 사라진 걸 아는 건 오직 우리뿐이거늘. 혹 내부에 첩자가 있는 것은 아니냐."

그녀의 눈이 표독스럽게 부관을 노려본다. 누가 봐도 의심하는 눈빛. 이에 부관은 펄쩍 놀라며 소리쳤다.

"아닙니다!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아니면 아닌 거지, 너답지 않게 뭘 그리 놀라느냐?"

"그것이...."

"그래. 아니어야지. 날 보는 네놈 눈이 망덕하여 잠시 의심하였다."

"제, 제가 감히 어찌...."

부관은 다급히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뒤통수가 터질 듯 따가움을 느꼈다. 아마 묘채경이 사납게 노려보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야말로 독사가 머릿속을 헤집고 나오는 기분.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바닥에 뚝 떨어진다. 그러자 묘채경의 입이 열렸다.

"부관. 내가 왜 굳이 이리 돌아가는지 아느냐?"

"소, 송구합니다."

"비룡당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구해주진 못해도 복수는 우리 손으로 해줘야지. 왜? 그래야 너희도 이해 못 할 작전을 믿고 계속 따라줄 것 아니냐. 하여 보여주려는 것이다. 너희가 하는 일은 틀리지 않았다고."

꿀꺽. 부관은 고개 숙여 잘 넘어가지도 않는 침을 삼켰다.

시키는 일은 이해하려 들지 말고, 그냥 따르라는 얘기.

딴생각 같은 건 일절 품지 말라는 뜻이다.

"기, 깊이 새기겠습니다."

"그래. 새기거라. 비룡당을 건드는 놈은. 행여라도 혼자 살겠다고 딴생각을 품는 놈은.... 내 얼마가 걸리든 반드시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이니 말이다."

"예, 예...."

부관이 잔뜩 겁먹은 채 답하자 그제야 뒤통수에 싸늘한 기운이 걷혔다. 부관은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묘채경이 차갑게 지시를 내렸다.

"어차피 놈들은 남로의 사해(死海)로 가게 될 것이다. 그 안에 철마적의 본거지가 있음은 확실한 일이니. 우리가 먼저 가서 기다리면 된다."

그래, 그러면 된다. 어차피 놈들은 천산 바깥으로 돌아야 할 것이고, 자신들이야 그냥 남쪽으로 가로지르면 될 일.

문제는....

'사해엔 모래폭풍이 심해 우리 힘만으로는 추적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맹가의 귀마대(鬼馬隊)가 나서준다면 쉽게 풀릴 법도 한데....'

하나 가주인 맹철용과 그녀는 원수지간.

게다가 그 아들내미가 납치되는 걸 알고도 방치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바로 창살이 날아와 전신에 구멍을 숭숭 뚫을 게 뻔했다.

"넌 우선 어디서 정보가 새 나간 건지. 그것부터 알아내거라."

"그것이...."

"왜. 의심 가는 것이라도 있는 것이냐?"

"혹, 장이서가 오공녀와 만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룡당은 마교의 정보 총책.

사라진 맹휘가 마지막으로 만난 이가 오공녀라는 사실은 이미 조사를 마쳤다.

또한 철마적에 대해 알려준 것도 그녀일 것으로 추정했다.

그녀가 교주와의 조찬 후 돌아오는 길에 철마적에 대해 들은 것까지 확인했으니.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묘채경이 제 턱을 어루만졌다. 어차피 세상에 안 복잡한 일은 없다.

그런 일들을 풀고, 꼬고, 조작하고.

결과적으로 유리하게 만들어내는 게 바로 비룡당주의 일.

'애초에 육공자를 사지로 내몬 것은 그녀다. 한데 여기다 칠공자까지 밀어버린 것으로 잘만 다듬으면....'

그녀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섰다. 그때 부관이 조심스레 물었다.

"한데 당주님.... 더는 육공자의 실종을 숨길 수 없지 않겠습니까. 오늘 일을 본 자들이 많습니다. 혹여 저희가 말하기 전에 삼장로께서 알게 되었다간...."

"당연히 알려야지. 누가 숨기기라도 했단 말이냐?"

"예? 분명 절대 함구해야...."

부관은 말을 끝까지 뱉지 못했다. 묘채경이 야차 같은 얼굴로 노려봤기 때문. 눈치껏 입 처닫으라는 말.

"제 아들이 납치가 됐다. 이를 아비가 몰라서 되겠느냐? 당연히 알려야지."

"그럼...."

"잘 듣거라. 육공자는 보좌 장이서가 철마적과 손을 잡고 납치해 간 것이다. 목적은... 그래. 돈을 노린 것이다. 출신 자체가 미천한 7급귀가 벌일 만한 짓이지."

미치겠다. 이 미친년을 상대하다가 제가 먼저 미치겠다.

부관의 목젖이 크게 꿀렁였다.

101.

#불편한 진실 (1)

"하오나 칠공자는 어찌합니까. 지금쯤 함께 있을 텐데...."

부관은 최대한 묘채경이 기분 상하지 않게 조심히 입을 열었다. 지금 그녀가 하는 말은 시기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소리.

하나.

"무슨 상관이더냐. 장이서 그놈만 먼저 죽여 버리면 그만인 것을. 이미 죽어 없어진 놈 무죄를 주장해봤자 누가 칠공자 말에 귀나 기울여주겠느냐? 호호호호!"

마귀처럼 웃어젖히는 묘채경.

부관은 그제야 새삼 다시 깨달았다.

묘채경이 어떤 인물인지를.

상황을 교란시키고, 제 입맛대로 답을 지어버리는. 후에 누군가 이의를 제기해도 충격이 덜하면 신경도 쓰지 않는 그런 미친년이라는 것을.

"내 직접 맹가로 갈 것이다. 가서 비보를 전할 것이다. 한낱 보좌 때문에 자식이 납치된 걸 안다면 삼장로가 얼마나 분하겠느냐. 호호호호!"

묘채경이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휙 돌린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본산.

그 안에서도 삼장로 맹철용이 머무는 곳이다.

'장이서.... 넌 철마적과 함께 사해에 묻히는 것이다. 내가 그리 만들어줄 것이니.'

독버섯 같은 음모가 서서히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 * *

장이서가 천산을 떠나 동쪽으로 달려온 지도 한참이 흘렀다.

중간중간 마을에 들러 지친 말을 갈아타고, 물통만 채워 떠나오기를 두어 차례.

어느덧 반짝이는 은하수가 황야의 밤을 밝힌다.

일행은 정찰이 용이한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낮의 더위는 달을 피해 사라지고, 공기는 서늘해졌다.

지독한 한서(추위와 더위)가 하루 안에 공존하는 북방만의 열악한 환경이다.

그리고 냉랭한 건 이들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적과의 동침이라니. 이거 뒤통수 무서워서 잠이나 제대로 올지 모르겠어."

마오가 불편을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당연한 얘기다.

맹휘가 납치된 것도 기막힌데, 범인과 동행이라니.

더군다나 상대는 미혼산까지 팔아치운 철마적.

중간에 마을에서 알게 됐을 때도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쉬운 건 이쪽인데.

「싫으면 이쯤에서 각자 갈 길 가든지.」

부리부리한 용모의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철마적의 간부 과평이다.

"야. 내가 우리말로 하랬지!"

「이게 우리 말이다, 이 멍청아.」

"뭐, 인마? 너 지금 나 욕했지. 덤벼."

「걸어오는 싸움은 사양 안 하지. 와라, 애송이.」

장시간 말을 타고 달렸으니 지칠 법도 하거늘. 둘 다 참 대단한 체력이다.

"이봐, 장 보좌. 저들 좀 말려 봐. 난 배가 아파서. 오늘 못 눴거든. 쒀리."

안 물어봤다. 알고 싶지도 않고. 장이서가 인상을 찌푸리자 소오가 멋쩍은 인사와 함께 자리를 피한다.

쟨 이 밤에도 색안경은 왜 쓰는 건지.

아무튼.

"그만."

장이서가 사이 좋게 이마를 딱 붙이고 있는 두 사내를 좌우로 갈랐다.

"저것들 밥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일 다 끝내고 싸우든지."

아우우우울!

말 끝나기 무섭게 먼발치서 늑대의 울음이 울린다. 하늘엔 수리들이 기회만 엿보며 빙빙 돌고 있고.

「흥.」

"쳇."

마오와 과평이 토라진 사람처럼 서로 몸을 돌렸다.

"장이서. 나 이거 반대야. 도대체 저 자식을 어떻게 믿고 따라가는데? 말마따나 저들 소굴로 데리고 가면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잘된 거지.

"우린 그 소굴로 가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가서 찾지."

"그, 그런 거였냐?!"

그럼 뭔 줄 알았냐. 장이서가 고개를 휘휘 젓자 옆에 선 과평이 키득거리며 웃는다.

「네 형편도 알만하군. 저런 철부지 도련님이나 모시고 사는 신세라니. 차라리 우리 쪽에 넘어오는 건 어때? 아까 보니 딱히 좋은 대우 받는 거 같지도 않던데.」

그렇긴 한데, 마교 대신 마적은 좀.

장이서는 얕게 숨을 뱉고는 말했다.

"제대로 가고 있는 건 맞겠지?"

「의심이 많은 걸 보니 너도 천생 마교로군. 아, 마교라는 말은 싫어하나? 어쨌든 걱정 마라. 우린 너희랑 다르게 목숨 구해준 값은 확실히 치르니까.」

그럼 다행이고.

"밤새 보초 설 거 아니면 앉지."

장이서가 먼저 자리에 앉는다. 그러곤 모아둔 가지에 삼매진화로 화르륵! 불을 지폈다.

"듣긴 했지만, 정말 요사스럽군. 손에서 불꽃을 일으키다니."

그러자 과평은 신기하다는 듯 져주는 척 자리에 앉았다. 마오 역시 못 이기는 척 입술을 빼쭉 내밀곤 착석했다.

"공부가 깊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 나도 배울 수 있나?"

과평의 물음에 장이서가 지그시 그를 살피곤 고개를 끄덕였다.

서역의 것이라 투박하긴 해도 내공을 쌓은 건 같으니.

잘만 다듬어주면 가능할 거다.

"아마도."

"오...."

과평이 짙은 관심을 보이며, 낙타 가죽으로 만든 물통 하나를 허리춤에서 꺼내 건넸다.

"마셔라. 황야의 밤은 차다. 추위를 견디기 좋을 거다."

얼떨결에 받은 장이서는 물끄러미 바라보다 향을 맡았다. 독한 신 내와 함께 주향이 올라온다.

"술인가?"

"말젖으로 만든 술이다. 많이 마시면 배탈이 나니, 독 탔다고 원망 말고 조금만 먹어라."

과평이 웃으면서 먹어 보라 손짓으로 시늉했다.

솔직히 먹지 않아도 밤을 보내는 데 문제는 없다. 일류였던 시절엔 한서에 대한 방비가 어려웠지만, 지금은 절정 초입. 이 정도는 견딜 만했다.

양기로 가득한 마오는 덥다며 웃옷 벗어 던진 지 오래고.

"왜. 독이라도 탔을까 봐...."

꿀꺽, 꿀꺽.

장이서는 과평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망설임 없이 벌컥 두 모금을 들이켰다.

"크음...."

시다. 술이 독한 건 아닌데 미간이 찌푸려질 정도로 셨다.

이를 본 과평은 도리어 제가 놀라 입을 열었다.

"의심도 안 하고 넙죽 받아먹는군. 독이라도 탔으면 어쩌려고?"

"안 탔다고 말하려던 거 아니었나?"

"보기랑 달리 순진한 거냐? 내 말을 어떻게 믿고."

"수작 부리려면 진즉 했겠지. 오는 동안 도망칠 기회도 많았을 텐데."

"...이봐. 세상 너무 쉽게 보는 거 아니야? 황야의 마적들은 비정하다고."

자랑이다. 장이서가 픽 웃는다.

물론 맹목적 믿음은 아니었다. 그러기엔 장이서의 삶과 직업이 그리 녹록지 않다.

이미 먹은 흔적이 보이는 젖은 구멍, 반도 안 되는 양, 변색이 없는 가죽 수통.

모든 걸 종합한 결과였다.

그리고.

"목숨 구해준 값은 확실하다며."

"뭐, 그, 그거야 그렇지. 크흠!"

과평의 얼굴이 붉게 물든다.

상대로부터 공감을 형성해 친밀도를 높이는 건 첩자의 기본.

저를 믿어줬다는 것에 살짝 감동한 것이다.

'이리 쉽게 넘어가는 걸 보면 천성이 나쁜 녀석은 아닌 듯한데....'

장이서는 고개가 갸웃했다. 그간 해온 짓이나 마적이라는 꼬리표에 비해 악인처럼 보이진 않았기 때문.

한데 왜 이런 짓들을 벌인 것일까.

"과평이다."

장이서가 상념을 깨고 고개를 돌리니 그가 씩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이미 들은 이름이다.

하지만 전과는 다른 의미였다.

일전이 죽일 놈의 이름은 알고 싸우자는 뜻이었다면, 지금은 화해의 통성명.

과평은 곧장 마오에게도 술을 건넸다. 역시나 화해하자는 의미.

"너 꼬맹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가만 안 둔다."

"크큭, 걱정 마라. 아직 아무 일 없을 테니."

"쳇. 마오다."

이에 마오는 고개를 휙 돌리며 인사를 받았다. 바로 그때 누가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나 입을 열었다.

"난 소오. 알다시피 불문객잔 주인장. 우리 철마적 고객님, 아깐 내가 미안하네. 그러니까 밀고한 건 비밀로 좀. 하하!"

어느새 볼 일을 마치고 돌아온 그가 남은 빈자리에 앉는다. 이에 과평이 인상을 구긴 채 날을 세웠다.

「흥, 신의라고는 내다 버린 쥐 같은 새끼!」

「쥐는 좀 그렇고. 까마귀는 안 될까.」

「뭐냐. 너도 우리 말을 아는 거냐?」

「내가 워낙 다방면 인재라.」

「빌어먹을.」

"야! 우리말로 하라고, 이것들아!"

「이게 우리말이다!」

"뭐, 이 새끼야? 너 또 내 욕했지. 덤벼."

무슨 기승전(起承轉) 싸움이냐.

장이서는 중재하듯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장이서다."

그러자 합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세 사람이 일순 조용해진다.

의도한 건 아니다.

다만.

'쳇.'

'이봐, 이번엔 또 무슨 재밌는 일을 벌이려는 거냐?'

'어쨌든, 놈한텐 목숨을 빚졌다.'

각자 이유는 달라도 그만큼은 인정하기 때문.

알게 모르게 이들 사이에 우뚝 올라서고 있는 장이서였다.

어쨌든 냉랭하던 분위기는 통성명을 마치니 한결 나아졌다.

그리고 대화의 주도는 장이서를 통해 이루어졌다.

"본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시작부터 위압적인 질문.

어쨌든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젠 철마적과 엮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최대한 대화를 통해 알아내는 수밖에.

"왜 서열이라도 나누게? 윗사람 행세하고 싶은 거면 집어치워라. 너희한테 고개 숙여줄 마음 없으니."

근데 시작부터 순조롭진 않다. 과평은 언짢아진 어조에 언제 풀렸냐는 듯 바짝 경계를 드러냈다.

허나 이는 장이서가 유도한 바였다.

"궁금한 것뿐이다. 너희가 누군지. 왜 이런 짓들을 벌였는지. 네가 이유 없이 그럴 사람처럼 보이진 않으니까."

격앙된 감정을 멋쩍게 만들어버리는 절묘한 어법.

"그, 그건... 크흠. 뭐, 그렇긴 하지."

과평은 괜스레 헛기침을 터트리곤 민망함을 달래고자 빠르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해봤자 너흰 모른다. 너희 눈엔 우리가 그저 기어가는 벌레에 불과할 테니. 걷다 보면 저도 모르게 짓밟혀 죽어 있는 그런 벌레 말이다."

과평의 목소리엔 미묘한 원망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 있는 자신들을 향한 건 아니었다.

북방의 지배자라는 마교라는 조직을 향한 미움에 가까웠다.

"그간 당한 게 많았나 보군."

"북방에 너희한테 당하지 않은 놈들도 있나? 모두 힘이 없어 숙이는 거지, 좋아서 숙이는 게 아니다."

"그래서 본교에 미혼산을 뿌리고 사람을 납치한 건가? 그게 억울해서?"

"그건...!"

과평이 더 답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치운다. 이에 장이서는 이해한다는 듯 끄덕였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 하지만 네 말대로 본교엔 힘이 있다. 모르고 밟아도 죽일 만큼. 그런데 작정하고 노린다면 어떻게 될 것 같나?"

"지금... 날 협박하는 거냐?"

"사실을 말하는 거다. 하필 너희가 데려간 그 소년이 건드려선 안 될 분이라."

"뭐, 교주 아들이라도 되나? 크큭."

"그래."

「뭐, 뭐라고?!」

과평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흉노족의 말이 튀어나왔다.

"이름은 맹휘. 교주님의 여섯 번째 아드님이다."

미친.... 이젠 말도 안 나온다. 그냥 입이 붕어처럼 뻐끔거렸다.

'잠깐. 아까 저 애송이 자식이 분명 꼬맹이라고 불렀는데.... 그럼?!'

이내 화들짝 놀라며 마오를 가리켰다.

"설마 쟤도?!"

과평이 묻고는 바로 장이서를 살폈다. 한데 눈빛이 호수처럼 잠잠하고, 입은 바위처럼 닫혀 있다.

그렇다면....

"돌겠군!"

일을 너무 크게 벌여버렸다.

102.

#불편한 진실 (2)

과평은 세상 무너진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아까 비룡당주가 나타났을 때부터 기분이 싸하더라니. 아주 제대로 잘못 걸렸구나. 이런 젠장...."

참 이상한 자다. 마교를 두려워하는 건 분명한데. 대체 뭔 생각으로 이리 큰일들을 벌인 것인지.

장이서의 시선을 느꼈기 때문인가. 과평이 눈치껏 입을 열었다.

"그럼 도대체 왜 비룡당이 널 공격한 거지? 같은 편 아닌가?"

"뭐, 본교에선 흔한 일이다. 워낙 싸움에 이골이 난 곳이라.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기도 하지."

"정말 의리라고는 쥐뿔도 없는 녀석들이군."

마적은 있냐? 장이서가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볼 것 없다. 적어도 우리는 살려고 발버둥 친 것뿐이니까."

"미혼산을 만들어 멀쩡한 사람 망가트리고, 납치에 도적질을 일삼는 게 발버둥인가? 그런 건 죄악이라고 하는 거다."

"알고 있다. 근데 그건.... 아니, 근데 내가 왜 그런 얘기를 마인(魔人)인 너한테 들어야 하지? 정의는 개똥보다 쓸 일이 없는 게 너희 아닌가?"

"...."

그건 그렇지. 억울한데 할 말이 없네.

장이서가 입을 다물자 과평이 코웃음 치곤 이어 말했다.

"적어도 우린 너희처럼 제 마음에 안 든다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다 죽이진 않는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천산 인근에 사는 수많은 부족이 왜 마교를 유독 두려워하겠는가.

이유는 하나.

본교를 우습게 본 자에게 주는 보복성 형벌 때문이었다.

멸문, 멸족, 멸살.

이른바 삼멸(三滅)의 법칙.

그 덕에 수많은 일족과 문파가 멸망했다.

쳐다봐서, 거슬려서, 마음에 안 들어서. 온갖 사유를 다 가져다 대면서 말이다.

실로 씁쓸한 현실.

장이서의 얼굴에 그늘이 지자 이번엔 과평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흘겼다.

마교의 악행을 이리 쉽게 인정하는 자는 또 처음이기 때문.

본래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한번 건드리면 뿌리까지 다 태워 죽이는 게 마교 아닌가.

"넌 정말 이상한 녀석이군."

"원래 이상한 자들만 모인 곳이 본교다. 나 정도면 평범한 축에 속하지."

"크큭. 그런가."

아니? 아닌데. 마오와 소오가 동시에 부정하며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둘이 끼어들 틈은 없다.

"이미 알겠지만... 우린 흉노족의 후예다."

장이서가 조금은 다르다 느꼈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낱 죄악으로 치부되는 게 싫었던 탓일까.

과평은 나지막이 자신들의 상황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먼 과거에는 황야를 내달리며 북방을 지배했던 때도 있다지만, 지금은 동화처럼 내려오는 구전일 뿐."

어느 곳에나 흥망성쇠는 있다. 하지만 흉노족은 이미 쇠락의 길마저 지나 역사의 뒤안길에 남은 자들.

"지금은 몇 명 남지 않은 가난한 마을 하나가 전부이지. 연명하기 어려워 어릴 때부터 직접 전쟁터에 제 몸을 팔아야 하는 그런 마을이지만.... 그만큼 유대감이 끈끈한 그런 마을 말이다."

과평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서린다. 그만큼 애정이 크다는 얘기.

"그래서. 마적 질도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건가. 마을을 지키기 위해?"

"궤변인 건 안다. 부정하지는 않겠다. 우린 무슨 짓이든 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럼?"

"본래 우린 서역에서 군인으로 활동했었다. 우연히 마을에 들른 패잔병들이 제안한 일이었지."

그런가. 무공과 체계적인 전술은 모두 그곳에서 배웠던 거겠군. 장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십 년이 지나지 않아 전쟁은 끝이 났고, 우리는 다시 마을로 되돌아왔다. 제법 두둑한 목돈을 쥐고서. 아마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때였던 것 같군."

과평은 기억을 회상하는 게 즐거운지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곳에 정착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아까도 말했다시피 흉노족은 유대 관계가 두텁다. 마을 사람들을 버리고 떠날 순 없는 일. 그렇다고 다 데리고 가기엔 부족했지. 그래도 뭐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과평이 바닥의 돌멩이를 하나 쥐곤 멀찍이 던졌다. 그러자 벌레를 노리던 도마뱀이 황급히 도망친다.

"하지만 우리한테 재주라곤 싸우는 것뿐. 벌어 온 돈은 금방 떨어졌고, 우리는 점점 말라만 갔다. 그해 겨울이 위기였지.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는지 어느 부족이 선의를 베풀었다. 해서 우린 이를 갚아주고 싶었다. 은원은 반드시 돌려주는 게 우리 흉노족의 자긍심이니까."

이후의 일들은 굳이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홍란이 해줬던 이야기대로 그들은 부족 간의 전쟁에 끼어들었고, 산왕가와의 악연이 시작된 것이다.

"늘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모든 게 불리했다. 하지만 우린 승전을 거듭했다. 왜? 그것만이 받은 은혜를 갚는 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상대 일가에서 우릴 찾아와 그러더군. 자신들 품으로 들어오라고."

과평은 인상을 구기며 남은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지금 생각해도 분통하다는 표정. 결과는 뻔했다.

"거절했겠군."

"당연하지. 우릴 위해준 이들을 배신하는 건 흉노족의 수치이자 모욕이니까. 그래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우릴 고용한 부족에게도 말했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반드시 승리를 안겨주겠다고."

하지만 전쟁은 흉노족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다.

그들을 고용한 일가가 상대 일가에게 항복을 선언해 버린 것.

그리고 그때가 바로 흉노족의 삶이 내리막길로 접어든 전환점이었다.

"우리는 다시 말라 죽어갔다. 차라리 칼을 들고 싸우다 죽었다면 이렇게 수치스럽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놈들은 잔혹했다.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주지 않았고, 물 한 모금도 나눠주지 않았다. 철저한 외면. 이 땅에서 고립되어 간 거지. 빌어먹을 것들."

과평이 생각만 해도 억울한지 주먹으로 애꿎은 바닥을 내리쳤다.

전형적인 보복 행위였다.

제안을 거절했으니 인근엔 발도 못 붙이게 하겠다는 잔혹한 형벌.

"아니, 그 새끼들은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한 건데?"

잠자코 듣던 마오가 어느새 이야기에 푹 빠졌는지 노성을 지르며 끼어들었다. 이에 과평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왜냐고? 그거야 당연히 우리 대장이 두려웠기 때문이지.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이길 자신은 없으니까. 비겁한 새끼들."

"너희 대장...?"

마오의 물음에 과평은 자랑스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부언했다.

"대장은 서역에서 전장의 용으로 불렸었다. 왜인지 아나? 용은 감히 인간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

"전쟁의 용!"

"...전장의 용이다. 마음대로 바꿔 부르지 마라."

장이서의 눈에 진한 호기심이 서렸다. 과평도 분명 어디 가서 빠지지 않을 실력자.

한데 그런 그가 이리도 경외할 정도라면....

궁금해진다. 대장이라는 자가 어느 정도로 강한지.

"그러니까 너희도 명심해라. 가서 조용히 너희 도련님만 챙겨서 떠나. 허튼짓이라도 하려 했다간 대장 손에 다 죽게 될 테니."

"경고인가?"

"충고다. 어쨌든 네놈은 다른 마인들하곤 좀 다른 거 같거든. 싫다는 뜻은 아니다."

장이서가 피식 웃었다.

어쨌든 상황은 알겠다. 일족들이 단합해 흉노족에게 억압을 가했다는 얘기. 그래서 먹고살기 어려워 마적이 된 것이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미혼산까지 손댄 건 선을 넘은 거다."

"그건...."

솨아아-

뭘까. 순간적으로 과평의 기운이 달라졌다. 표정은 어두워졌고, 은은히 살기도 비쳤다.

광의하고 얽힌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는 건가.

"목숨을 구해준 값은 반드시 치른다. 기간 안에 데려가 주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거기까지. 그 이상의 책임을 묻는다면 각오는 해야 할 거다."

"...알았다."

알아내는 건 여기까지. 장이서는 한발을 물렀다.

어차피 가게 되면 알게 될 일.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

과평은 더 말할 기분이 아닌지, 그대로 몸을 돌려 누웠다.

"귀한 도련님 구하려면 내일 종일 달려야 할 텐데. 조금이라도 자둬야 할 거다. 한 시진 뒤에 깨우면 그땐 내가 보초를 서지."

그러곤 열 세기도 전에 잠에 빠졌다.

삽시간에 잠잠해진 황야.

"성질하고는. 어쨌든 가기만 하면 된다는 거 아냐."

마오가 상황을 정리한다.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도 벌러덩 눕고는 눈을 감았다.

"좋아. 그럼 나도 저 자식 깨울 때 깨워. 놈이 뭔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잔다!"

그리고 역시 열 세기 전에 드르렁. 둘 다 단순해서 좋다.

그렇게 두 사람이 잠들고, 자연스레 소오와 장이서는 당번이 되었다.

잠시간의 적막이 흐르고, 장이서는 지나가듯 말을 붙였다.

"흔적은 다 지웠나?"

물론 내용은 허를 찌른다.

"무슨 흔적. 내가 싼 똥의 흔적?"

"오는 내내 네가 추적이 힘들도록 뒤를 지웠다는 걸 알고 있다. 아까 일 보러 다녀온다고 했던 것도 이곳으로 온 흔적을 지우기 위함이겠지."

"하하.... 우리 장 보좌, 눈치가 보통이 아니네."

그는 마을에 들러 새로운 말로 갈아탈 때마다 후미에 남아 기존의 말들을 각기 전혀 다른 방향으로 떠나보냈다.

이는 추적을 방해하기 위한 기본 작업.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근데 그걸 알면서도 모닥불을 피웠다?"

"어차피 아무도 우릴 쫓지 않을 테니까."

"무슨 말이야?"

"상대는 우리가 어디로 갈지 이미 알고 있다는 얘기다."

"뭐야, 그런 거였어? 그럼 말을 해줘야 할 거 아니야!"

"솜씨가 제법이길래. 신기해서."

"참나. 성격 희한하네. 어깨너머 배운 솜씨 가지고."

소오는 별거 아니라는 듯 툴툴거렸다.

하지만 장이서 생각은 달랐다.

수화도 그렇고, 무리한 일정을 소화해내는 체력도 그렇고. 가만히 앉아 정보나 파는 객잔 주인이라고 보기엔 비범한 게 많다.

여러모로 매우 의심스러운 자.

하지만.

"인사가 늦었다. 아까는 고마웠다."

장이서는 다 제쳐두곤 감사 인사를 표했다. 어쨌든 그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비룡당한테 큰 곤욕을 치를 뻔했다.

당연히 감사를 표하는 게 맞는 일.

한데.

"헐...."

소오가 인사는 안 받고, 입을 벌린 채 색안경 가운데를 검지로 슥 당겨 내린다. 실로 어이가 없다는 눈동자.

"왜 그렇게 보지?"

"참 신기해, 우리 장 보좌는. 이런 예의는 어디서 가르쳤을까."

"이걸 가르쳐야만 아는 거냐?"

"아니, 가르쳐도 모르지. 우리 사는 데가 그렇잖아."

"헛살았군. 본교라고 전부 그런 건 아니다."

그런가? 소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건 장이서의 말이 옳다. 마교라고 해서 모두가 다 썩어빠진 건 아니다. 정파라고 모두가 다 선한 게 아니듯.

"어쨌든 고마웠다."

장이서가 다시금 인사를 건네자 이번엔 소오도 웃으며 이를 받았다.

"고마우면 돈으로 갚든지."

"그건 힘들고. 먼저 자라. 보초는 나 혼자 서지."

"하하하! 돈 귀한 줄 아는 친구네."

소오가 활짝 웃으며 다리를 꼬곤 드러누웠다. 이에 장이서는 지나가듯 넌지시 물었다.

"근데 왜 묻지 않는 거지?"

"뭘."

"비룡당과의 일 말이다."

충분히 오해할 소지가 가득한 일. 어쨌든 함께 비룡당주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지 않았는가. 그도 3급귀라면 이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 알 터.

한데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건 나보단 저쪽 네 주인한테 물어야 할 말 아닌가? 네 주인도 안 묻는데 내가 뭐라고."

그의 말에 장이서는 흠칫했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마오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따라와 줬을 뿐. 궁금한 건 물어야 직성이 풀리는 녀석이....

103.

#조금만 더 견뎌라, 맹휘

마오를 바라보는 장이서의 눈이 여려진다. 이에 소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그만큼 널 신뢰한다는 거겠지? 천하의 망나니 칠공자가 바로 장 보좌 자네를 말이야. 난 그게 궁금하더라고. 도대체 둘이 무슨 사이인지. 아니, 칠공자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말이야. 내가 궁금한 건 못 참거든. 하하하!"

역시. 얘도 정상은 아니다.

"자, 그럼 나도 이만 실례. 안 자면 피부 상해서."

소오는 제 눈썹에 검결지를 대었다 떼어내곤 옆으로 몸을 휙 돌려 누웠다.

홀로 남은 장이서는 헛웃음을 뱉었다.

그리고 잠이 든 마오를 살폈다.

태평하게 잘도 잔다.

'이젠 제법 어른이 됐구나.'

예전의 철없던 모습을 생각하면 상당히 의젓한 모습.

절로 입꼬리가 올라선다.

그러다 이를 자각하곤 황급히 다시 내렸다.

첩자가 정을 주는 건 임무를 망치는 가장 위험한 일.

'이번엔 풀어야 할 일들이 많다. 묘채경도, 광의도, 전장의 용 구유도. 하지만 우선은 너다.'

장이서는 복잡한 생각은 미뤄두고 끝없는 황야를 보며 오직 하나만을 떠올렸다.

'맹휘. 조금만 더 견뎌라.'

오직 그의 무사를 말이다.

* * *

- 천산남로 사해 구룡성(九龍城).

북쪽의 천산과 남쪽의 곤륜산맥 사이에 사막이 팔 할을 차지하는 타림 분지.

그 안에는 사해(死海)라 불리는 구역이 있다.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

잘못 발 디디면 거센 모래폭풍에 휘말려 질식사하는 경우가 태반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머나먼 과거엔 커다란 마을이 자리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그야말로 모래에 덮인 폐가만이 남겨진 죽음의 땅이었다.

단 하나.

철옹성처럼 겉면에 나무와 철판을 덧대어 이제는 기괴한 성탑이 되어버린 구룡성(九龍城)을 제한다면 말이다.

*

"끄...."

미약한 신음과 함께 소년의 눈꺼풀이 떠진다.

빛 한 점 없는 어두운 공간. 너무 어두워 눈이 떠졌다는 사실도 잠시 망각했다.

"여긴... 큭!"

돌아오는 감각에 몸을 일으키려 하자 머리가 깨지는 듯한 두통이 밀려든다.

철컹!

심지어 두 발엔 쇠사슬이 벽에 붙은 족쇄까지 채워져 있다.

"미친...."

마지막 기억을 돌이켰다.

불문객잔에 갔었고, 철마적으로 의심이 가는 자들을 따라나섰다. 어느 골목에서 별안간 기습당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이었다.

그렇다.

그의 이름은 맹휘.

장이서가 무사를 바라던 바로 그 녀석이다.

"멍청하게 당해버렸네."

막연한 절망감보다 쪽팔린 수치심이 먼저 스몄다.

어두워서 다행이다.

잔뜩 붉어진 제 얼굴이 안 보일 테니.

"미치겠네. 마오나 할 법한 짓을 내가...."

겁이 많긴 해도 그래도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었는데.

정말 생각지도 못하게 당해버렸다.

"설마 뒤에서 독침을 꽂을 줄이야."

한낱 마적 나부랭이인 줄 알았는데. 더 치밀한 놈들이었다.

가만 생각해 보면 골목으로 간 것도 일부러 유인한 거다.

"너무 얕봤어. 근데 분명 비룡당 자식들이 날 봤을 텐데...."

그들은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맹휘는 분명히 봤다.

기척을 숨기고 지붕 위에 숨어 있던 등에 황금색 비(飛)자가 적힌 최정예 무사들을.

솔직히 그들에게 철마적을 뺏길까 봐, 막무가내로 따라간 탓도 있었다.

"설마 그들도 당한 건가.... 그럼 더 최악인데."

모르겠다. 일단은 당장의 상황부터 판단하는 게 우선.

"후. 겁먹지 말고 집중."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우웅!

심법을 운용하자 공명음과 함께 몸 안에 기운이 생경하게 느껴진다.

우선 단전은 멀쩡했다. 내공도 그대로. 마지막 희망은 남아 있는 셈이다.

"좋아."

다시 눈을 뜬 맹휘가 한껏 밝아진 목소리로 이번엔 기감을 끌어올렸다.

꿉꿉한 냄새. 멀리까지 퍼지는 숨소리. 그리고 미약한 신...음?

"크으...."

정신이 번쩍 든 맹휘가 벌떡 일어섰다.

어둠 속에서 낯선 이의 신음이 들려왔기 때문.

"누, 누구야!"

귀신인가? 그럴 리가.

"신입...인가...? 쿨럭...."

이번엔 정확히 들었다. 안쪽 구석에서 탁한 음색이 들렸다. 자신 외에도 이 안에 사람이 있다.

눈매를 좁혔다. 컴컴해 잘 보이지 않는다. 하나 내공을 운기하자 안개가 걷히듯 실내의 전경이 서서히 눈에 담겼다.

"당신은...."

반대 측 벽에 대(大)자로 매달린 것처럼 팔다리에 쇠고랑이 채워진 노인.

얼마나 굶은 것인지, 헐거운 옷에 뼈밖에 안 보인다.

게다가.

'누, 눈이....'

고개를 든 그의 눈동자가 뿌연 백색이었다.

"이번엔 꽤 어린 녀석이 왔구나. 클클클...."

"당신... 여기 계속 갇혀 있었던 거야?"

"그랬지. 얼마나 갇혀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네가 나를 좀 풀어다오.... 제발...."

노부가 애원하듯 말하자 맹휘는 침을 꼴깍 삼켰다. 피폐한 모습만 봐도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만하다.

하지만.

"나도 도와주고 싶긴 한데...."

제 다리에도 이미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그나마 쇠사슬이 있어 노인처럼 아예 벽에 딱 달라붙은 처지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도와주기엔 너무 먼 거리.

"미안. 묵흑이라도 있다면 부수고 도와줄 텐데. 지금은 무리야."

"무...리?"

"어."

맹휘가 머쓱하게 답하자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곤 무섭게 눈을 부릅뜨고는 소리쳤다.

"무리? 무리? 무리...?! 무리이이이이이-!"

"왜, 왜 이래! 미쳤어?"

"이런 쓸모없는 놈! 병신 같은 새끼! 머저리 같은 년! 네가 깨어나는 걸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이제 와 무리라고? 으히히히히! 으하하하하하하!"

노부가 광인처럼 웃어젖히자 맹휘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미친 영감탱이...."

백색 안구는 광자처럼 따로 돌아가고, 떡 벌어진 입은 꿈에 나올까 무서운 모습이다.

"여기 어디야! 그거나 말해!"

위기감을 느낀 맹휘는 경계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한참을 웃던 노인이 돌연 정색하고는 또박또박 중얼거렸다.

"그걸 왜 나한테 묻느냐. 널 잡아 온 저놈한테 물어야지."

뭐?

맹휘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끼이이익!

그러자 철문이 열리며 후광과 함께 두 개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중 맹휘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웃통을 벗고 선 엄청난 근육의 사내였다.

풀어 헤쳐진 긴 머리에 보기만 해도 위축되는 섬찟한 붉은색의 눈.

그리고 상체를 휘감듯이 그려진....

'용(龍)?'

"낄낄낄. 꼬마야, 조심하거라. 저놈이 바로 널 잡아 온 철마적의 수장이자 이곳 구룡성의 패자. 구유이니."

"저자가...!"

그렇다. 이른바 전장의 용.

머나먼 과거 흉노족을 전성기로 이끌었던 2대 족장 묵돌(冒頓)의 환생이라 추앙받는 구유였다.

"...."

그가 무심한 눈으로 노인과 맹휘를 번갈아 살폈다.

이내 고갯짓하자 한 줄기로 땋은 머리의 여인이 다가온다.

과평과 함께 철마적의 간부인 아신이다.

"마셔라."

그녀가 다가와 신경질적인 어조로 수통을 던졌다.

툭!

한데 맹휘는 그저 멀뚱히 서 있기만 할 뿐. 다가설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이에 아신이 고운 이마를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하자 차갑게 대꾸했다.

"멀어."

하. 누가 마교 녀석 아니랄까 봐, 어린 게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아신이 겨우 인내하곤 다가와 수통을 주웠다. 그러곤 지척까지 와 이를 손으로 건넨다.

"받아라."

맹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허리춤을 살폈다.

가지런히 꽂혀 있는 짤막한 칠흑색의 단창.

그의 신물인 묵흑이다.

'너희는 내 내공부터 금했어야 했다.'

수통을 받는 척 손을 뻗는 맹휘. 순간 그의 눈빛이 맹수처럼 바뀌었다.

그리고 파팍!

마치 뻗은 독사가 된 것처럼 순식간에 아신의 팔목에 요혈을 쳐냈다.

"흡!"

퉁! 저릿한 감각에 수통을 떨어트리고, 그와 동시에 반사적으로 그녀는 뒤로 한 발을 물렸다.

이내 허전해진 제 허리춤을 살피고 다시 고개를 들자.

까앙!

어느새 묵흑을 손에 쥔 맹휘가 제 다리의 족쇄를 부서트리고 있었다. 제대로 방심했다. 고작 지학(15살)의 나이이지만, 엄연히 절정의 벽을 넘은 마교의 고수.

아신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감히...!"

"감히는 내가 할 말이고. 물 주면 고맙다고 할 줄 알았냐? 내가 아주 우스워 보였나 본데."

파아앗!

자유를 얻은 맹휘의 신형이 앞으로 화살처럼 쏘아졌다. 이에 아신이 입술을 물고 일각을 펼쳐 응수한다.

한데 그 순간, 분명히 제 앞에 왔어야 할 맹휘가 사라졌다.

휙 고개를 돌리니 옆으로 빠져나간 것.

몸을 회전하지 않고 한순간에 직각으로 방향을 트는 맹가의 보법 마횡보(馬橫步)였다.

순식간에 사라져 처음 겪는 자들은 대부분 당황하기 마련.

"이봐, 영감! 딱 기다려!"

맹휘는 열린 문으로 나가는 쪽이 아니라 갇힌 영감을 향해 내달렸다. 그부터 풀어주겠다는 전략.

"으히히히히! 오거라! 어서 오거라! 어서, 어서, 어서! 어서어어어어!"

으... x나 가기 싫어.

하지만 상대는 둘.

어쨌든 저 미치광이 영감이 여기 갇혀 있는 것 자체가 저들의 적이라는 얘기.

처지가 같다면 무조건 한편!

오월동주(吳越同舟)다.

"힘 꽉 줘! 안 주면 손목 나간다!"

맹휘는 달리면서 좌수를 앞으로 뻗어 단창을 내지를 자세를 취했다.

단 한 수만에 수십 보 밖까지 열 구멍을 뚫어버리는 대파열창술 제2식, 십광파(十光波)다.

아직 경지가 낮은 맹휘로서는 세 걸음이 한계였지만, 지금으로선 그거면 충분했다.

'간다!'

그리고 어느새 지척에 다다른 그가 창을 내지르는 순간.

그의 시야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장면이 담겼다.

분명 입구에 서 있었거늘, 지금 제 앞을 가로막고 선 사내.

"...."

구유.

철마적의 대장이자, 전장의 용으로 불리는 자.

바로 그였다.

『대파열창술(大破裂槍術) 제2식 십광파(十光波)』

도저히 무를 수 없는 상황.

'죽어도 원망 말라고!'

맹휘가 이 악물고 그의 육신에 창광(槍光)을 쏘아냈다.

그리고.

"컥!"

삽시간에 맹휘의 시야가 천장으로 뒤바뀌며 바닥에 뒤통수가 쾅! 떨어져 내렸다.

위이잉- 귀에서 쇠가 갈리듯 이명이 울리고 온몸에는 힘이 빠진다.

도대체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어, 어떻게...."

맹휘는 도저히 방금 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그에게 십광파를 쏘아 보냈고, 창광이 그의 육신에 열 개의 구멍을 내어줄 차례였다.

한데.

'왜 내가 누워 있는 거지?'

놀랍게도 구유는 그 짧은 순간, 열 번의 찌르기를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 피해내고 그의 이마에 일장을 날렸다.

그리고 지금이 그 결과였다.

"사, 사술...?"

맹휘가 고통에 파르르 떨며 그나마 가장 합리적인 말을 뱉었다.

사술.

그게 아니고선 도저히 믿기 힘든 일.

어떻게 그 짧은 거리에서 막아낸 것도 아니고, 열 번의 공격을 다 피하고 반격한단 말인가.

"이 개 같은 자식들... 내가 이대로 당할 줄 알아!"

맹휘가 마지막 힘을 다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명이 울리고 어지럽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야말로 필사즉생의 각오로 다시 노부에게로 날아들려는 그 순간.

타타타탓! 퍽!

"어...억...."

우두커니 선 구유의 옆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온 아신의 일각이 맹휘의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와당탕! 그대로 날아가 벽에 머리를 처박고 쓰러지는 맹휘.

시야에 암전이 닥쳤다.

104.

#삼장로의 분노

「...송구합니다.」

머리를 한 줄기로 땋은 어두운 피부색의 미녀.

아신이 맹휘의 신물을 다시 챙기고 돌아와 고개를 숙인다.

이에 구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데 실력이 제법이군. 저자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다른 방에 가둬라.」

「예.」

그의 명에 아신이 다시금 맹휘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노부가 조소를 퍼부으며 중얼거렸다.

"낄낄낄, 애와 여인은 건들지 않는 게 자네 원칙 아니었나? 이제 보니 다 위선이었구먼. 애새끼를 죽도록 패다니. 크크크큭. 으히히히히!"

이 와중에도 입이 살아 있는 걸 보니 보통 노인이 아니다.

물론 듣고만 있을 아신이 아니다.

그녀가 가던 걸음을 멈추곤 재빠르게 달려 나갔다.

타타타탓!

그리고 빠악!

"끼아아악!"

노인의 가슴에 거침없이 일각을 꽂아 넣었다.

구토할 것 같은 얼굴로 새 같은 비명을 지르는 노인.

구유는 이를 무심히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널 살려두는 이유를 잊지 말아라. 광의."

광의(狂醫)!

구유는 분명 그렇게 말하였다.

광의 공손절.

육장로 독산마의와 동문수학한 자이자 미혼산을 만들어낸 주범.

그가 이곳에 감금되어 있었다.

"크, 크큭... 으히히...."

그의 음산한 웃음만을 남기고.

끼이이익. 쿵!

다시금 구룡성 뇌옥에 어둠이 찾아들었다.

* * *

육공자 맹휘가 실종됐다!

충격적인 소문은 천산에 날개를 단 것처럼 빠르게 퍼졌다.

물론 구체적인 내용이 없어, 아직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한 곳만은 달랐다.

"다시 말하여라. 누가 사라져?"

천산 동부 끝 언덕 위에 홀로 지어진 맹가의 장원.

삼장로 맹철용은 태사의에 앉아 흉신악살의 얼굴로 기세를 내뿜었다.

드드드드!

이윽고 몸에서 뿜어지는 위압적인 마기에 방 안에 있는 온갖 기구들이 지진인 인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챙그랑!

도자기는 떨어지고, 화분은 깨져 흙이 주르륵 흘렀다.

그야말로 장로의 위상이 느껴지는 엄청난 공력.

'늙은이가 기력이 그새 더 좋아졌구나. 도대체 뭘 처먹는 것이야?'

소식을 전하러 온 전인(專人)은 놀란 속을 숨기고자 애써 고상한 척 탁상의 차를 호록 들이켜고 말했다.

"정확히는 사라진 게 아니라 납치입니다. 철마적이란 놈들에게 잡혀가셨지요."

서신을 읽듯 냉혹하게 납치를 선고하는 새하얀 매.

마교의 실권자 중 하나이자, 사태를 여기까지 끌고 온 주범.

비룡당주 묘채경이다.

그녀가 맹가로 직접 비보를 전하러 온 것이다.

그것도 평소 견원지간이라는 삼장로 맹철용에게 직접!

"확실한 것인가?"

솨아아아-

맹철용의 몸에서 짙은 살기가 뿜어졌다. 꼭 수작 부리면 심장에 구멍을 뚫어버리겠다는 무언의 협박처럼 들린다.

'제 자식이 납치됐다는데 끝까지 허세는.'

하나 묘채경의 눈엔 그마저도 부질없는 발악처럼 보였다.

무공에 있어선 당연히 삼장로가 위일지 모르지만, 자신은 제자리에서 만리를 관장하는 새.

수 싸움에선 두말할 것도 없이 위라고 여겼다.

"제가 직접 확인한 사안입니다."

콰직! 맹철용이 주먹을 내리치자 태사의 손잡이가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이 얼마나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일인가.

제 아들이. 맹가의 핏줄이. 한낱 마적 따위에게 납치나 당하다니!

거기다 그걸 비룡당주에게 듣고 앉았으니 말이다.

'지존께서 아셨으면 파양하실지도 모르겠구나....'

그야말로 참담 그 자체.

맹철용의 눈에 불똥이 번졌다.

그리고 이를 본 묘채경은 코웃음 치는 표정을 짓고는 차만 호록 마셨다.

바로 저 무식함이 그녀가 삼장로를 싫어하는 이유였다.

힘들면 힘들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막막하면 그냥 도와달라고 빌면 될 일을. 나이가 몇인데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리는지.

"날 직접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냐?"

지금도 저 권위적인 말투가 영 마음에 안 들었다.

도와주러 온 사람에게 저리 죽일 듯 노려보면서 쏘아붙이는 꼴이라니.

"누가 보면 제가 납치라도 한 줄 알겠습니다."

"날 비웃으러 온 거라면 헛걸음이다. 육공자님의 안위는 지존께서 고려하실 일. 그러니 몸 성히 나가고 싶다면, 지금 꺼져라."

"비웃다니요. 장로께선 제가 그리 한가해 보이십니까? 그리고 너무 염려하지 마시지요. 아직 위엔 보고하지 않았으니."

맹철용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보고를 안 했다니. 그럼 천마전에선 아직 이 사실을 모른다는 것인가.

묘채경이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탁상의 찻잔으로 손을 가져가려는 그 순간.

파앗!

삼장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뻗자 한 측 진열대에 걸린 창 한 자루가 날아와 그의 손에 붙잡힌다. 그러곤 단숨에 작살처럼 내던졌다.

콰직!

그러자 한순간에 눈앞에 먼지가 폭풍처럼 일더니.

"이... 무슨...."

탁자와 찻잔은 온데간데없고, 가루가 된 잔재와 바닥에 꽂힌 고고한 창 한 자루만이 남겨져 있었다.

지이잉!

까불지 말라는 듯 미세한 잔떨림이 남은 삼장로의 창만이 말이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것이냐."

맹철용이 지독히 매서운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전신에 구멍이 송송 뚫리는 기분.

이것이 신창마귀라 불리는 삼장로 맹철용의 위엄!

묘채경은 처음보다 다소 공손해진 어투로 답했다.

"수작이라니요."

"육공자님의 일은 맹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분은 지존의 영식(令息). 광명우사께서 나서야 한다는 얘기다. 한데 만일 네가 내게 뭔가를 얻어내려는 수작이었다면.... 당주는 이 자리에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지금부터 하는 말은 심사숙고하라는 얘기.

묘채경은 얕게 침을 삼키곤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번 일은 단순한 마적의 소행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칠공자 보좌 장이서. 모든 건 그가 계획한 일입니다."

쿵! 그녀의 입에서 기어코 그의 이름이 뱉어졌다.

"장이서...?"

"예. 그가 철마적과 내통하여 육공자님을 납치하였습니다. 즉, 내부의 소행이란 얘기지요."

"그걸 지금 믿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장이서라면 맹철용도 아는 자였다.

처음 보좌가 생겼다고 했을 때 이미 인명록부터 훑었으니.

하나.

'고작 7급귀 출신의 결함이 있는 자가 아닌가. 그런 자에게 맹휘가 납치되었다?'

믿어달라고 사정해도 믿기 힘든 일.

한데 묘채경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었다.

"한동안 육공자께서 칠소궁에 머무셨던 건 알고 계십니까. 그곳에서 사이가 아주 가까워지셨다는 것도요."

맹철용 무섭게 인상을 찌푸렸다.

"당주. 말이라고 다 같은 말이 아니다. 내가 언제까지 네 세 치 혀에 시간을 할애해야 하지?"

더는 들을 가치도 없으니 그만 꺼지라는 얘기.

하지만 묘채경은 온갖 권모술수가 넘쳐나는 비룡당의 주인.

이미 이 정도는 예상했다.

맹철용은 자존심이 강해 자신이 직접 보기 전까진 제 치욕을 인정하지 않으려 들 것이 분명했다.

해서.

'이곳에 오기 전에 내 미리 준비해둔 것이 있지.'

그녀의 입가에 졸렬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커다랗게 외쳤다.

"들어오시지요!"

이내 뒤쪽에 문이 열리며 빼꼼 모습을 드러내는 소녀.

맹철용의 눈이 부릅떠졌다.

지존의 다섯 번째 영애.

맹가의 자부심 중 하나.

"백부님, 안녕."

맑은 눈의 광인.

오공녀 맹원원, 바로 그녀였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맹철용이 묻는다. 그러자 맹원원이 답했다.

"맹휘는...."

"음?"

"앞으로 칠소궁에 머물고 싶댔어."

"그게 무슨?!"

"그래서 그거 허락받으려고 철마적한테 간 거야. 공이라도 세우면 백부님 생각이 달라질까 해서."

맹철용은 기함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맹휘가 그런 생각을 품다니.

하나 다른 이도 아닌 맹원원의 증언.

이는 저 간악한 비룡당주의 혓바닥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맹휘가 대체 왜. 뭐가 부족해서.

그의 정신이 멍해지고, 동공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사이 맹원원과 묘채경은 서로를 살폈다.

눈빛은 딱 이렇게 말을 하는 듯했다.

'잘하셨습니다.'

'뒤처리는 확실한 거지?'

사전에 얘기된 거래.

그랬다.

맹원원이 오늘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하나.

앞서 묘채경이 자신을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

*

*

- 며칠 전, 천산 동부 주마지.

오공녀 맹원원은 말들이 뛰어노는 언덕 위에서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앉아 있었다.

"히, 히이익!"

칠소궁을 다녀온 후로 수풀이 흩날리는 작은 소리에도 경기를 일으켰다.

보좌인 왕우는 몸져누워 한 달 넘게 요양해야 하고, 하사받은 신물은 빼앗겼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무서운 건 자신이 예지안으로 바라본 미래였다.

『백뢰(白雷)』

번쩍이며 검은 번개를 쏘아내던 괴물.

바로 장이서 말이다.

그에게 맛본 죽음이 너무도 섬찟했고, 생생했다.

솔직히 미래를 본 적은 여러 번이지만, 진짜 죽음을 본 건 처음이었다.

아프고, 무섭고, 우울했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맹가의 핏줄이자 교주의 자식인 자신을 누가 진짜 죽이려 들겠는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데... 그런 미친놈이 칠소궁에 있었다.

그것도 아주 무서운 장이서라는 미친놈이.

"어떡하지? 맹휘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날 죽이러 올 거야."

이빨 사이에 낀 엄지가 질겅질겅 씹힌다. 극도의 불안감. 그렇게 두려움에 서서히 미쳐가고 있던 때였다.

"이곳에 계셨군요."

언덕 아래를 내려다 살피니 웬 하얀 도포의 무사들 틈에서 매 한 마리가 저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비룡당주...?"

비룡당주 묘채경. 만리신조로 통하는 그녀였다.

지척까지 다가온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리자 뒤쪽에 대기하던 비룡당의 정예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경신술로는 마교 내에 따를 조직이 없다더니 명불허전이다.

한데....

겨우 그딴 거나 인증하려고 나타난 건 아닐 테고.

"여긴 무슨 일이지? 당주는 맹가라면 이를 갈던 거 아니었어?"

안 그래도 심기 불편하던 오공녀다. 당연히 말이 곱게 나갈 리 없다.

하나 묘채경은 오히려 그게 더 마음에 들었다.

평소 늘 웃는 척, 재밌는 척. 가면을 쓰던 모습이 실로 가증스러웠거늘. 오늘은 그래도 솔직한 편이다.

그러니 본론.

"육공자께서 홀로 철마적을 뒤쫓다 납치당하셨습니다. 하여 가족분들께 이 비보를 전하러 온 것이고요.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할 일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뭐라고?! 납치!"

맹원원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진다. 그리고 이에 정비례하듯 묘채경의 입꼬리는 길쭉하게 올라섰다.

"이미 시간이 지나 생사는 확인이 어렵고.... 축하드립니다. 오공녀님. 호호호! 결국 뜻한 바를 이루시는군요. 집안의 경쟁자를 숙청한 기분이 어떠십니까."

"숙청이라니! 그게 무슨 헛소리야!"

"숨기실 것 없습니다. 이미 철마적에 대한 정보를 흘린 게 오공녀님이라는 걸 모두 확인하였으니 말이죠."

파르르. 맹원원의 눈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렸다.

"그, 그건...!"

"괜찮습니다. 서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경쟁하고, 빼앗고, 없애고. 당연한 거 아닙니까. 본교에서 정당함을 찾는 게 더 우스운 일이지요. 오히려 전 그 마음을 칭찬해 드리고 싶군요. 단...."

다정히 웃던 묘채경의 얼굴이 싸늘히 식는다.

"들키지는 마셨어야지요."

105.

#죽음의 사막 (1)

묘채경이 표독스러운 미소로 말했다.

"원래 이런 일은 끝까지 아무도 몰라야 완성되는 겁니다. 한데.... 과연 삼장로께서 조카가 제 자식을 해했다는 걸 아시면 가만히 계실까요?"

맹원원의 얼굴이 멀미하듯 새하얘졌다.

가만히 있을 리가... 당연히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의기양양해하는 묘채경을 향해 눈을 슥 올려 뜨며 물었다.

"...증거 있어?"

"무슨...?"

"없잖아. 내가 맹휘한테 그런 말 했다는 증거."

묘채경의 얼굴이 일면 멍해졌다. 그러곤 서서히 입꼬리를 올리더니 이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호호호호!"

"왜 웃어?"

"바로 그겁니다, 오공녀님! 그래야 완성이 되는 거지요. 예, 맞습니다. 증거는 없지요. 당연히 없어야지요."

묘채경이 다가와 맹원원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뭐 하는 거지? 노망이야?

어이가 없어서 노려보지만 묘채경은 여전히 싱글벙글했다.

당연했다. 모처럼 맹가의 인물과 뜻이 통했으니.

"그런 의미에서... 제가 제안을 하나 드리고 싶은데요."

"제안?"

"별것 아닙니다. 삼장로님 앞에서 한마디만 해주시면 됩니다."

"무슨 얘기."

"모든 건 장이서. 그자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고 말이지요."

맹원원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

*

*

맹원원이 넋을 잃은 맹철용을 뒤로한 채 몸을 돌렸다.

그러곤 나직이 말했다.

"그럼 먼저 가볼게."

"버, 벌써 말입니까?"

이에 오히려 당황한 건 묘채경이었다. 고작 그 얘기만 하고 어딜 가는가. 할 거면 제대로 장이서를 몰락시키고 가야지.

하나 맹원원 생각은 달랐다.

'당주. 네 계획대로 장이서가 없어져 주면 다행이겠지만.... 글쎄. 그렇게 쉽게 될까? 장이서, 걔. 만만한 사람 아니야.'

더구나.

'한마디만 하면 된댔으니까.'

영악한 건 맹원원 역시 마찬가지.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휙 돌아 나간다.

물론, 이런 정황을 알 수 없는 묘채경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청안의 광녀라 불릴 만큼 성정이 악독하다더니. 이제 보니 순 헛똑똑이지 않은가. 제가 일을 꾸며 놓고 저리 겁먹은 꼴이라니. 맹가의 명성도 여기까지구나.'

동상이몽이다. 하나 묘채경은 알까.

지금의 장이서는 과거에 자신이 알던 그가 아니라는 것을.

"도대체... 왜!"

맹원원이 사라지고 나자 콰직! 맹철용은 고함을 치며 태사의 자체를 한주먹에 날려버렸다.

만인의 주인이 되어야 할 제 아들이 도대체 왜 칠소궁에 집착한단 말인가.

실로 생각이 많아진다.

하나 그때야말로 묘채경이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상대의 마음을 재량껏 휘두를 수 있는 최적의 시간.

"왜겠습니까. 장이서가 육공자님을 현혹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간악한 자입니까. 이런 말 하기 부끄럽습니다만...."

묘채경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이에 맹철용의 눈매가 좁혀진다. 늘 콧대만 높던 그녀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기 때문.

"얼마 전 교외에선 저희 비룡당 최정예 무사들을 해하고, 철마적의 간부와 함께 사라져버렸습니다.... 그것도 제가 보는 앞에서 말이지요."

"그럼 그것 때문에!"

맹철용의 눈에 이제야 이해가 서렸다.

묘채경 역시 자신의 실책을 감추고자 따로 보고하지 않고 자신을 찾아왔다고 생각하게 된 것.

'너만 그런 게 아닌 걸 알았으면, 이제 그만 격분하고 내 말대로 따르기나 하거라. 잡으러 가야 할 것 아니냐.'

사실과 뒤섞인 교묘한 거짓.

맹휘가 사라진 시점과 칠소궁에 머물렀던 시간. 그리고 장이서가 과평과 사라지게 된 배경. 그 모든 것이 감춰져 있었지만, 지금 맹철용의 귀엔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하나.

"그래도 다행인 건 녀석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해(死海). 남로의 사막이지요. 바로 그곳에 육공자님과 철마적. 그리고 장이서가 머물고 있을 겁니다."

"사해...."

"모래폭풍이 심해 웬만한 이들은 들어갈 수 없겠으나.... 북부의 폭설도 뚫었다는 맹가의 맹갑귀마대(孟鉀鬼馬隊)라면. 그럼 얘기가 다르지 않겠습니까. 어떠하십니까. 아직 바로 잡을 시간이 있습니다. 저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묘채경의 수가 던져졌다. 삼장로의 눈이 흔들린다. 하나 곧 다시 세워졌다.

어차피 답은 하나.

"내가 직접 갈 것이다."

됐다. 비룡당주 묘채경의 입꼬리가 서늘하게 올라섰다.

이로써 모든 준비가 끝났다.

삼장로와 맹갑귀마대까지 등에 업었으니 이제 사해든, 어디든 아무 문제 없는 일.

철마적과 장이서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터. 그리고 그 공로는....

모두 비룡당의 몫이 될 것이다.

'장이서, 날 너무 원망하지 말거라. 네가 거기 나타난 게 죄인 것이니.'

호호호호! 그녀의 내면에 들리지 않는 마귀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 천산남로 타림 분지.

한편 장이서와 일행은 어두운 그림자가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른 채, 사해가 있는 타림 분지에 들어서고 있었다.

걸린 시간은 이틀하고도 반나절.

보통 사나흘이 넘게 걸리는 걸 감안하면 얼마나 쉬지 않고 달렸는지 알만하다.

하나 사막에 들어선 순간부턴 행군 속도가 확연히 느려졌다. 뙤약볕으로 달궈진 모래 위라 무더위가 더욱 극심해졌기 때문.

그 덕에 복장도 서역 상단처럼 머리와 입에 천을 두르고, 몸엔 통풍이 잘되는 흰색 장옷 하나만을 가볍게 걸쳤다.

물론 그럼에도 더운 건 여전했다.

절정 고수라면 한서불침(寒暑不侵)까지는 아니어도 웬만한 기온은 무시할 수 있을 텐데도, 장이서와 소오의 이마에 땀이 가득했다.

철저히 단련된 철마적도 최대한 숨을 아끼며 뚝뚝 깎이는 체력을 방비했다.

그야말로 걷는 것 자체가 고행.

딱 한 명.

"하아암, 날씨 좋다."

충만한 양기로 똘똘 뭉친 천양지체의 마오만 제하고 말이다.

「교주의 자식은 다 이런 건가? 정말 대단하군....」

속을 모르는 과평은 입을 떡 벌린 채 마오를 재평가했다.

그렇게 무더위 탓에 자연스레 걸음이 느려지자, 과묵하던 일행도 조금씩 대화가 나누어졌다. 시작을 연 건 마오였다.

"근데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왜 자꾸 새끼 낙타들이 죽어 있는 거야? 어미는 어디 가고. 좀 지켜주지."

그의 말대로다. 사막에 들어서자 죽어 있는 새끼 낙타들이 종종 보였다. 누가 봐도 이상한 광경.

"별걸 다 궁금해하는군."

이에 과평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하지만 눈빛은 그리 썩 좋지 않았다. 씁쓸함이 느껴지는 기분.

"뭐야. 뭔데."

"알 거 없다."

"알려줘. 뭔데."

낌새를 느낀 마오가 귀찮게 되묻자, 묵묵히 가던 장이서에게서 답이 들려왔다.

"저건 장사(葬事)입니다."

"장사? 죽은 사람 매장하는 거?"

"예. 유목민들은 터전이 자주 바뀌니 시체를 묻었던 장소를 기억하기 힘듭니다. 저건 그 위치를 기억하기 위함이죠. 어미와 새끼를 같이 데려가 새끼를 죽이면. 어미는 다음 해에도, 또 그다음 해에도 그 자리를 기억하고 찾아갑니다."

"그, 그런 거야?!"

마오는 경악했다. 그냥 물은 질문인데 그런 속사정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럼 아까 시체들이 있던 곳이... 무덤?!

과평은 놀란 마오를 뒤로한 채 장이서한테 물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이쪽에 대해 아는 게 많군. 사해를 알던 것도 그렇고."

"원래 하던 일이 누굴 좀 잡으러 다니던 일이라."

"그렇다고 우리 흉노족의 말까지 배우긴 쉽지 않았을 텐데. 누구한테 배운 거지?"

날카로운 질문. 이에 소오도 의문인 듯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흉노족의 말은 이제는 사용하는 이가 거의 없다시피 한 사어(死語).

단지 갑골문을 쓰는 고대 언어라 음지 계열에서 종종 익히곤 했다.

이를테면 정보원, 청소부, 자객. 그도 아니면 첩자.

뭐 그런 경우 말이다.

'장이서. 넌 어느 쪽이냐?'

소오가 눈을 빛낸다. 애초에 장이서가 그냥 평범한 방첩대원 출신이라곤 생각도 안 했다.

한데.

"객잔 주인도 아는 건데 뭐 대단한 일이라고."

장이서는 픽 웃고는 도리어 소오를 물었다.

"이봐, 장 보좌. 나는 입장이 다르지!"

"뭐가 말인가?"

"나는 각계각층의 다양한 이들을 만나는 사람으로서...."

"장사치치고는 현장 지식이 꽤 능숙해 보이던데. 꼭 교외로 몰래 나가본 사람처럼."

"어디나 예외는 있지. 응, 맞네. 흉노어가 알고 보면 쉬워."

뭐라는 거냐. 과평은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다.

장이서와 소오는 서로를 지그시 노려보며 알게 모르게 기세 전을 펼쳤다.

그리고 그사이 생각을 정리한 마오가 원점으로 돌아와 입을 열었다.

"근데 꼭 이렇게까지 떠돌아다녀야 해? 그냥 정착해서 살면 되잖아."

정착? 푸하! 과평은 대소를 터트리곤 일갈했다.

"도련님답게 철딱서니 없는 소리를 다 하는군. 보거라. 여기 가축들이 뜯어먹을 풀이나 있는지. 척박한 이 땅에 정착할 수 있는 건 오직 전쟁에서 승리한 소수의 강자뿐이다. 약자들은 떠나지 않으면 죽는다. 사는 게 전쟁터라는 거지."

"그럼 싸우든가. 너희 강하다며?"

"강하지. 한데 고작 백도 안 되는 인원으로 너희랑 무슨 수로 싸우지?"

너희? 누구. 우리?

"본교가 왜 나와."

"그럼 누구랑 싸운단 말이냐? 이 땅의 지배자는 너희 아니더냐. 전쟁에서 승리한 일족도 너희에게 공금을 바쳐야 한다. 그것만 아니어도 어떻게든 살아가겠지. 하나 버티다 밉보이면? 너희 손에 잿더미가 되어버리는 게 다반사다."

"설마 그렇게까지...."

"크큭, 그것도 몰랐단 말이냐? 교주의 자식이라더니 정말 철부지 도련님이군."

마오가 입을 떡 벌리곤 장이서를 찾았다. 이게 사실이야? 장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미화된 부분도 조금은 있다. 마교는 상대가 밉보여야만 죽이는 게 아니다. 그냥 때가 돼도 없앴다.

한 일족이 너무 오랫동안 군림하면, 언젠간 마교의 아성을 넘보려 할 테니까.

그래서 적당한 시점에 일족 자체를 없애버렸다. 멸족의 순환이다.

"몰랐어...."

마오는 큰 충격을 받은 듯 중얼거렸다. 진짜 몰랐다. 한낱 서자였던 그가 바깥 정세를 얼마나 알았겠는가.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알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내 앞에 닥친 일이 아니니 아무 관심도 없었다.

"몰랐든 알았든 달라질 건 없다. 네놈들이 마교라는 건 달라지지 않으니."

퉤! 과평은 인상을 확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간 당한 게 억울해서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마교라는 놈들이 왜 저딴 양심적인 표정을 짓고 지랄인 거냐.'

마교가 마교답지 않은 게 영 거슬린다.

무시하고 앞서가던 과평이 결국 화를 못 참고 멈춰 섰다. 그러곤 사납게 윽박질렀다.

"너희한테 한 짓이 죄악이라고? 천만에. 너흰 당해도 싸다. 우린 그저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더는 떠돌지 않고, 자식을 팔아넘기지도 않으며. 서로 웃으면서 인사하는. 그런 소소한 삶 말이다. 너희만 아니었어도.... 제기랄."

마오의 두 눈이 충격에 물들었다.

106.

#죽음의 사막 (2)

끝내 독설을 다 뱉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과평.

마오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분명 자신은 꽤 불행한 삶이라고 생각했었다. 서자로 태어나 매일매일을 핍박받았고, 주변 사람들마저 잃어야 했으니까.

한데 이제 보니 잘 모르겠다.

천산 밖에 이런 지옥이 펼쳐져 있을 줄이야.

"저들이 불쌍하십니까?"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장이서...."

그다. 그의 물음에 마오는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기분이 오묘했다.

"모르겠어."

마오가 침울한 얼굴로 솔직히 답하자 장이서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성장통이라고 생각했다.

망나니 애새끼처럼 살아오던 마오가 이제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그리고 장이서는 그 과정이 부디 의미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랐다.

그를 위해서도, 천하를 위해서도.

"저들은 우리에게 악입니다. 맹휘를 납치했고, 미혼산을 팔았으며, 수많은 이를 해하였을 테니. 동정할 대상은 아닙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다른 모두에겐 우리가 더 큰 악이었을 겁니다. 북부에서 안착하지 못하고 떠돌아야 했던 데엔 분명 본교의 탓이 가장 컸을 테니까요."

"끙... 둘 다 최악이네."

장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에 들어와서 보면 모른다. 하지만 한 발만 떨어져서 마교를 바라보면 얼마나 근본이 악에 찌들어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특히 지금과 같은 평화를 참지 못하고, 알게 모르게 주변에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심지어 천무기나 무한성을 지지하는 자들 대부분이 가장 바라는 것도 피 튀기는 전쟁이었다.

만일 천마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활화산처럼 폭발해 세상을 피로 물들였을 거다.

"쟤들은 우리가 죽일 만큼 밉겠지?"

"예. 하지만 불가능하죠. 본교는 강하니까요."

"그럼 쟤들은. 그냥 저렇게 살아? 밖에서 태어난 걸 원망하면서?"

기특하네. 그런 생각도 다 할 줄 알고.

장이서가 다정히 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옆을 스쳐 지나며 말했다.

"그럼 칠공자님이 바꿔 보십시오."

내가? 마오가 당황하며 그와 걸음을 맞췄다. 그러자 장이서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더 이상 저런 자들이 나타나지 않도록, 칠공자님이 본교를 바꾸시라는 말입니다."

"에이... 그게 되냐."

"됩니다. 지존의 자리에 오르면. 그럼 바꿀 수 있습니다."

"지...존!"

그렇다. 마교는 오직 힘에 의해 모든 것이 지배되는 곳.

그렇기에 지금 중원의 평화도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꼭 지존이 되어주십시오."

"어...?"

장이서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마오는 그 말에 멍해져 걸음을 멈추었다.

두근, 두근.

지존이 되어 달라는 저 말. 그게 도대체 뭐라고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걸까.

되어주고 싶다. 아니, 되고 싶다.

그래서 장이서를. 모두를 웃게 해주고 싶다.

할 수 있을까? 응. 할 수 있다.

난 천재니까. 이제는 혼자가 아니니까.

마오가 장이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까짓거 해주지.'

처음으로 마오의 가슴 속에 커다란 목표가 세워지게 되는 순간이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우하하! 같이 가자!"

마오가 활짝 웃으며 장이서의 뒤를 쫓아 달렸다.

그리고.

'하여튼 재밌는 녀석들이라니까.'

후미에서 이를 지켜보던 소오 역시 웃음을 지었다.

*

휘이이잉!

타림 분지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반나절이 흘렀다.

중천에 있던 태양은 고개를 떨구고 점점 바람은 거세졌다.

그리고 선두에 가던 과평은 말에서 내리며 말했다.

"여기부터는 걸어간다."

그러곤 타고 온 말의 둔부를 때려 멀리 떠나보냈다.

이는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 그리고 타고 갈 상황도 아니었다.

휘이이잉-!

다시금 바람이 들이닥치자 시야에 모래 알갱이가 가득 메워졌다. 마치 반투명한 누런 장막을 씌운 것만 같다.

이 정도 황사를 조랑말이 견뎌낼 수는 없는 일.

그렇게 말들을 떠나보내고, 일행은 두 발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오래지 않아 모래폭풍은 점점 심해져 이젠 오 장(15m) 앞도 보이지 않는 지경이 되었다.

마침내 사시사철 폭풍이 몰아친다는 죽음의 사막.

사해(死海)에 다다른 것이다.

"사해에 온 걸 환영한다! 한 시진(2시간) 동안은 모래폭풍이 점점 심해질 거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면 단 이각(30분) 동안은 잠잠해지지. 그러니 더 격해지기 전에 안가로 들어가야 한다!"

선두에 있던 과평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에 마오가 고성을 지르며 답했다.

"뭐라고?!"

휘이이이잉!

칼날 같은 바람 소리가 쉴 새 없이 몰아치니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과평은 두어 번 더 설명하다가 포기했는지 어깨를 으쓱이며 짧게 외쳤다.

"따라와!"

"어-!"

이번엔 다들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꿋꿋이 뒤를 따랐다. 그렇게 다시 또 한참이 지나자 어느새 일행은 벽이 다 부서진 폐가에 도착했다.

과평은 강풍을 힘겹게 돌파하며 바닥에 숨겨진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텅!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 안가다.

과평이 들어가라 손짓하자 한 명씩 순서대로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마지막엔 자신도 문을 닫고 숨어들었다.

그제야 비로소 주변이 조용해졌다.

"후. 죽을 뻔했네. 너희 여기 사는 거 맞아? 우리 죽이려고 데려온 거 아니야?"

마오가 얼굴을 가린 천을 내리며 한숨을 토했다.

처음엔 덥다면서 왜 천을 두르나 싶었는데. 이게 아니었다면 귀며, 입이며 모래만 가득 먹을 뻔했다.

"너희랑 죽기엔 내가 너무 아깝지."

과평은 코웃음 치며 옷에 붙은 모래를 탈탈 털었다.

속옷까지 모래가 들어가 가볍게 털어도 바닥이 흠뻑 흙에 잠긴다.

"들어만 봤지, 직접 와본 건 처음이야. 사해(死海). 이 정도면 죽음의 바다라고 불릴 만도 해. 가만있다간 모래에 묻혀 죽겠어."

웬만한 일엔 놀라지도 않던 소오도 이번엔 정말 경악했다는 듯 고갤 저었다.

뿌옇게 된 색안경을 끼고 어떻게 쫓아왔는지는 의문이다.

"여기서 폭풍이 더 심해지면 그대로 숨도 못 쉬고 죽는 거지. 귀가 먹는 경우도 종종 있다."

과평의 말에 마오는 으스스함을 느꼈다.

안 봤다면 헛소리 말라며 비웃었을 텐데, 지금은 아니었다.

바람 소리가 어찌나 큰지. 마지막엔 정말 귀가 먹는 듯했다. 오죽하면 쇠가 긁고 가는 환청이 들릴 정도.

그만큼 사해는 사람 살 곳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자연의 저주다.

철마적이 여기 살고 있다는 게 아직도 안 믿길 지경.

"이 정도는 돼야 숨어 지낼 수 있는 거다. 이 정도 모래폭풍을 뚫고 들어올 자는 없으니까."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정도면 비룡당이 맹휘를 놓친 것도 이해가 간다.

"그래도 구룡성이 있는 곳은 그나마 덜하니 안심해도 된다."

"구룡성?"

장이서가 되물었다.

"우리가 머무는 성탑이다."

"얼마나 더 남은 거지?"

"다 왔다. 대략 거리로 치자면 오백 걸음(350m) 정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장이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이를 가장 먼저 눈치챈 소오가 나지막이 속삭이듯이 물었다.

"우리 장 보좌, 표정이 왜 그래?"

"올라가기 전에 할 말이 있다."

휘이이잉!

천장 위에서 바람이 휘몰아친다. 아까보다는 많이 줄어들었다. 이제 폭풍이 잠잠해지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

"왜. 막상 들어가려니 무서운 거냐? 크큭."

그럴 리가.

단지....

"어쩌면 근처에 이미 비룡당이 와 있을지도 모른다. 놈들은 이미 본거지가 사해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그럴 리가!」

장이서의 발언에 과평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하나 이어진 말에 더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육공자가 납치된 순간부터 비룡당은 이미 그 뒤를 추적하고 있었다. 그때 너희의 본거지를 알아내려고 했겠지만, 설마 모래폭풍이 불어닥칠 줄은 몰랐겠지."

"잠깐. 그럼 놈들이 맹휘를 미끼로 썼다는 말이야?"

마오가 믿을 수 없는 배신감에 파르르 떤다. 하지만 사실이다.

"비룡당주가 절 공격한 이유도 제가 그걸 알아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실책을 숨기기 위해."

"이런 미친! 그게 말이나 되냐고!"

말 된다. 이미 벌어졌으니까.

모두가 넋을 잃었다. 그만큼 큰 충격이었다.

"당주가 집하촌에 있던 이유도 과평 널 뒤쫓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널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근데 내가 나타나면서 상황이 복잡해진 거지."

과평이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꼬리가 너무 길긴 했다. 거래처를 찾으려고 계속 불문객잔을 찾았으니.

한데.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거냐?!"

당연히 그럴 수밖에.

"미리 말했으면. 그럼 넌 여길 오지 않았을 테니까."

"날 이용했단 말이냐!"

장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었다. 네 말대로 육공자를 구하려면 시간이 없었으니까."

"이런 빌어먹을!"

쾅! 과평이 발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하나 화내봤자 무의미한 일이다. 어차피 사해에 있음이 발각된 이상, 어떤 식으로든 마교는 본거지를 찾아냈을 거다.

이제야 일행은 모든 조각이 맞춰진 것처럼 허탈한 숨을 뱉었다.

그야말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

"미리 말하지 않은 건 미안하다. 하지만 최대한 너희 쪽에 피해가 가진 않도록 하겠다."

"빌어먹을 새끼...."

과평이 이를 꽉 깨물고 읊조렸다. 차라리 사과라도 말든가.

"됐다. 어차피 성에만 들어가면 끝이니까. 사해에서 대장을 이길 자는 없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장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남은 건 이각 안에 무사히 구룡성으로 들어가는 것뿐.

그리고 그 순간, 줄기차게 들려온 바람 소리도 마침내 잠잠해졌다.

모래폭풍이 멈춘 것이다.

모두의 눈이 번뜩이고,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다시금 과평이 선두에 서서 계단을 올랐다.

텅!

천장에 달린 문을 열고, 폐가 1층으로 나가자 어느새 시야를 가득 메우던 모래는 사라지고, 한 치 앞도 보지 못했던 사해의 전경이 눈에 담겼다.

"여기가 마을이었어?!"

마오가 경악하며 외쳤다. 그랬다. 폐가의 부서진 벽 사이로 보이는 건 마을이었다.

그것도 수천 명은 살았을 법한, 폐가가 수없이 늘어선 죽은 마을.

"그럼 저기가...."

마오가 이번엔 먼발치를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그의 손끝엔 드높게 솟아 있는 성탑 하나가 놓여 있었다.

갑판과 나무를 겉에 겹치듯이 덧대어 흉물처럼 지어진 탑.

"그래. 우리가 머무는 구룡성이다. 그리고 너희가 찾는 그 꼬마가 갇혀 있는 곳이기도 하지."

장이서의 눈에 빛이 서렸다. 드디어 왔구나. 맹휘가 있는 곳까지.

"서둘러라. 이각이 지나면 모래폭풍이 다시 시작된다. 구룡성의 문이 열려 있는 시간도 지금뿐. 이번에 놓치면 한 시진 동안 밖에서 모랠 맞으며 기다려야 할 거다."

과평의 말에 모두가 빠르게 걸어 나갔다.

모래가 쌓여 푸석한 바닥이라 걸음이 그리 빠르진 않다. 하지만 이제 남은 건 고작 백여 장(300m)가량. 이각이면 충분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물론, 아무런 방해가 없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두두두두!

"음?!"

바로 그 순간, 땅에서 묵중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죽음의 사막 (3)

107.

두두두두!

영문을 알 수 없는 진동. 당황해 뒤를 돌아보니 드높은 해일처럼 황사가 이는 모습이 보였다.

"뭐야. 아직 이각 안 지났잖아!"

"이럴 리가 없는데...?"

마오가 당황해 외치자 과평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여태 단 한 번도 시간이 어긋난 적은 없거늘.

게다가 주변을 둘러볼수록 더욱 이상했다. 모래폭풍이라면 저렇게 뒤쪽에서 올 게 아니라 사방에서 몰아쳐야 맞다.

한데....

"설마."

장이서와 소오가 동시에 바닥에 엎드려 기감을 끌어 올렸다.

두두두두-!

모래라서 덜하긴 하나 분명히 느껴지는 진동.

두 사람이 엎드린 채 심각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곤, 다시 벌떡 일어나 동시에 외쳤다.

"뛰어!"

"튀어!"

그리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는 모래폭풍의 정체.

두두두두두!

[단 한 놈도 놓치지 마라-!]

히이이이잉!

육합전성과 함께 모래바람마저 무시하고 뚫고 나오는 기마대였다.

그것도 모래마저 무시할 만큼 거대한 몸집에 철갑을 두른 맹갑귀마대!

북해의 폭설마저 뚫었다는 마교 내 최강의 기동성을 갖춘 맹가의 친위대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 선두에는....

『대파열창술(大破裂槍術) 제9식 대폭렬파(大爆裂波)』

콰과과과과광!

흑창을 내질러 전방위 대지를 분수처럼 터트리는 자.

철갑을 두르고 흑마를 탄 압도적인 신위!

삼장로 맹철용이 있었다.

*

'젠장!'

지금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보이는 그대로 말하자면, 십여 장(30m) 밖에서부터 바닥에 나무뿌리처럼 불긋한 선이 수천 갈래로 뻗쳐지고, 콰과과과쾅! 시작점부터 연달아 폭발하며 이쪽으로 쏘아졌다.

단 한 번의 창질에 초토화가 시작된 것.

그것도 말을 타고 뛰어올라 쿵 떨어져 내리며, 땅에다 흑창을 꽂은 게 다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땅엔 창끝이 닿지도 않았다. 발출된 마기가 땅속을 파고들어 와 대지를 폭발시킨 거다.

'이게 마교에서 열 손에 꼽힌다는 삼장로의 실력. 실로 엄청나구나.'

덕분에 장이서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뇌전법을 펼쳐야 했다.

보는 눈이 많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이대로 있으면 다 죽는다.'

파지직! 정순한 마기가 뇌기로 바뀌는 순간, 장이서의 신형이 벼락처럼 쏘아졌다. 그러곤 폭발의 범위에 서 있던 마오를 단숨에 낚아챘다.

"으아아악!"

이어 황당함에 입을 벌리고 서 있던 과평까지 밀쳐 구해냈다.

콰과과광!

그리고 주변을 휘감는 폭발음.

"괜찮은가?"

비처럼 떨어지는 모래 사이로 장이서가 과평에게 손을 내밀며 묻는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난장판이 따로 없다.

일격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그야말로 풍비박산.

대지는 가뭄이 인 것처럼 갈라져 있고, 수북했던 모래는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이게 단 일 초식 만에 벌어진 일이라니.

경천동지라는 말로도 부족한 수준.

물론 무림인을 잘 모르는 과평의 입장에선 장이서 역시 엄청난 건 마찬가지였다.

'이 자식들 대체 뭐야. 벼락처럼 구해주질 않나. 대지를 터트리질 않나. 이게 가능하다고?'

두려움과 고마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이내 침을 꼴깍 삼키곤 그의 손을 붙잡고 일어섰다.

목숨 빚 갚기 직전에 또 빚을 만들다니. 젠장.

"조심해라. 보통 상대가 아니니까."

"어, 뭐."

장이서는 과평의 어깨를 두드리곤 다시 전방을 살폈다.

위대한 흑마 위에 올라탄 채 이쪽을 바라보는 괴물. 맹철용이 보인다.

이내 그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자 그의 좌우에서 수십이 넘는 맹갑귀마대가 일렬로 서서 달려올 준비를 마친다.

'묘채경.... 설마 삼장로까지 끌어들일 줄이야. 너한텐 일말의 양심도 없는 거냐?'

장이서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먹구름처럼 느껴지는 맹갑귀마대의 위용은 보는 것만으로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조랑말의 세 배쯤 되는 압도적인 크기에 머리부터 안장, 말발굽까지. 최상급 철갑옷을 입힌 철기마(鐵騎馬)다.

저 무거운 걸 걸치고도 보법에 제약이 따르는 사막을 막대한 근력과 지구력으로 뚫고 온 거였다.

이 정도면 당연히 경이로울 수밖에.

무턱대고 싸웠다간 그야말로 백전백패다.

"이봐, 장 보좌. 나만 안 구해주고 너무한 거 아니야? 기다렸는데 말이야."

기다릴 시간에 먼저 피했겠다. 시커멓게 그을린 모습으로 다가온 소오. 그의 옆으로 마오와 과평도 나란히 함께 선다.

그리고.

[잡아라!]

삼장로의 육합전성과 함께.

두두두두두!

다시금 맹갑귀마대가 맹렬히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뛰어!"

일행 역시 돌아선 채 구룡성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구룡성까지의 거리는 이제 칠십 장(210m) 남짓.

[놓치지 마라-!]

뒤에선 삼장로의 육합전성이 계속 울리고, 맹갑귀마대는 숨 몇 번 고를 시간에 벌써 바짝 뒤까지 추격해 왔다.

장이서는 빠르게 상황을 살폈다.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바닥에 있다.'

과평이 왜 성에만 들어가면 끝이라고 했는지 알겠다.

탑은 그냥 하나의 고철처럼 입구 없이 꽉 막힌 채 솟아 있었고, 그보다 한참 떨어진 곳 바닥에 철로 된 양 문이 활짝 개방되어 있었다.

쉽게 말해 저 바닥 문을 통해 지하통로를 지나가야 구룡성으로 들어가는 진짜 문이 나온다는 얘기.

그러니 저 철문이 닫히고 모래폭풍이 위를 뒤덮으면 그사이엔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문제는.

'지금 속도면 절반도 채 가기 전에 붙잡힐 거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한다.'

하지만 무슨 수로.

장이서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졌다.

남은 시간을 고려하면 최소 일각은 더 버텨내야 했다.

심지어 삼장로는 지금 제 실력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드높은 경지의 고수.

그런 그와 맹갑귀마대까지 동시에 막아내야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물론....

안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팟!

달려가던 장이서가 팽이처럼 빙그르르 회전하며 코앞까지 쫓아온 철기마의 머리에 일각을 갈겼다.

빠아악!

"히이이이잉!"

말과 함께 바닥에 고꾸라지는 선봉. 그 즉시 장이서는 옆으로 벼락처럼 도약한 채 다른 기마병의 등 뒤에 올라탔다.

"아, 아니!"

당황한 기마병이 좌우로 뒤를 번갈아 살핀다. 하나 알아봤자 별다른 수는 없다.

"으아아악!"

장이서는 그대로 뒷목을 붙잡아 저 뒤로 던졌다. 와당탕! 이에 뒤쫓던 다른 기마병과 부딪쳐 동시에 둘이 나자빠진다. 그리고 장이서는 그 즉시 안장에 앉아 고삐를 쥐고 말의 허리를 안다리로 조였다.

히이이잉!

본래라면 주인이 아닌 이상 다루기 힘든 철기마지만, 지금은 긴장감이 넘쳐흐르는 전장. 바뀐 주인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철기마가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뒤이어 앞서 달리는 다른 기마병을 향해 오른손을 뻗쳤다.

『백뢰(白雷)』

번쩍! 그러자 검은 벼락이 쏘아지며 그대로 기마병의 등을 퍽! 뚫었다. 즉사다.

"과평!"

장이서가 소리치자 과평이 다급히 옆을 살피곤 주인 잃은 말 위로 단번에 뛰어올랐다.

됐다. 성공이다.

장이서는 곧장 백뢰를 회수하곤, 말을 타고 달리며 기마병을 하나 더 쓰러트렸다.

척하면 척.

이번엔 소오가 잽싸게 올라타 마오까지 제 등에 태운다.

비록 적들보다 기마 솜씨는 부족해도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무사히 구룡성까지 도달할 수 있다.

'후....'

그렇게 장이서가 안도의 숨을 뱉으며 뒤를 살피려는 순간이었다.

퍽!

살갗이 터지는 듯한 끔찍한 소음과 함께 와당탕!

"큭!"

타고 있던 말이 힘없이 쓰러지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낙법을 펼쳐 간신히 중상을 면한 장이서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깨달았다.

타고 있던 철기마는 온데간데없고, 산산조각이 난 말의 가죽만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는 것을.

그리고 제 앞에는.

"삼장로...."

태양을 가린 채 자신을 무심히 내려다보는 절대 고수.

맹가의 주인이자, 마교의 세 번째 장로.

신창마귀(神槍魔鬼) 맹철용.

그가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