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0

*

"칠공자 보좌라고...?"

침묵하는 천무기 대신 유령마군이 입을 열었다.

붕대에 가려 표정은 모르겠으나, 눈빛만 보면 불신과 황당함이 뒤섞인 모습.

그리고 이러한 감정은 무표정으로 내내 일관 중인 천무기도 마찬가지였다.

'막내의 처우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보좌가 나를 찾아왔다?'

속에선 코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예측한 수십 가지의 전개 중 어디에도 이런 상황은 없었기 때문.

그래서인가, 장이서에게 느껴지는 첫 감정은 호기심이었다.

"보좌란 작자가 감히 허락도 없이 이곳에 숨어들었단 말이냐?"

유령마군의 갈퀴는 목소리가 매섭게 쏘아졌다.

"숨어들었다는 말은 좀 그렇고. 이거 보여주니 바로 들여보내 주던데."

장이서가 품에서 명패를 꺼냈다. 한 면엔 마귀가 그려져 있고, 뒤에는 삼(三)자가 적혀 있는 패. 3급귀를 상징하는 신패다.

이를 본 유령마군의 눈이 부릅떠지고, 흑화위는 난색에 젖었다.

일백에 달하는 인사들이 모이는 날이었다.

3급귀쯤 되는 고위 신분이라면 묻지 않고 통과시키는 게 관례적 행위.

하나.

"헛소리. 초대된 적도 없는 놈이 뻔뻔하게 자리해 있었다는 건, 염탐의 목적이 아니더냐. 주제를 벗어나지 마라."

유령마군의 일침에 장이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법이네. 죽이려고 칼 던질 땐 그냥 무식한 마두인 줄 알았더니. 머리는 있구나.

하나.

"염탐? 왜 그렇게 생각하지. 오늘 이 자리가 누군가 염탐할 만큼 떳떳하지 못한 자리였나. 아니면 그저 실책을 면하기 위한 책임자의 항변인가."

"닥치거라! 감히 보좌 따위가 내가 누군 줄 알고 하대를 치는 것이냐."

"보좌잖아. 나랑 같은 3급귀."

"이놈이...."

콰앙! 유령마군의 몸에서 폭음과 함께 막대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결국 참지 못하고 내기가 폭발한 것.

이를 본 장이서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공자 보좌 유령마군. 듣던 것보다 머리는 있지만, 참을성은 없구나. 무공은... 보좌 중에선 단연 최상위고. 여러모로 껄끄러운 상대.'

암각 최고의 요원다운 빠른 분석.

한데 이를 얻고자 벌인 어깃장치고는 대가가 너무 참혹해 보인다.

이미 흑화위가 퇴로를 막았고, 유령마군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세는 천장을 뚫고 나갈 정도였다.

장이서가 감당하기엔 장로에 필적하는 대마두다운 극강의 경지.

물론, 믿는 구석은 있었다.

"환사."

활화산 같던 유령마군의 기세를 이름만 불러 단번에 종식할 존재.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대공자 천무기.

바로 그였다.

"막내가 내게 보낸 자다. 그래도 얘기는 들어봐야 하지 않겠느냐."

83.

#처음 뵙겠습니다, 대공자님 (2)

후우우!

유령마군의 뿜어지던 위압적인 기세가 깨진 항아리에 담긴 물처럼 찬찬히 사라졌다.

일시에 날리기엔 내공이 너무나 방대하기 때문.

'괴물은 괴물이네.'

장이서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유령마군 환사.

지금이야 3급귀 보좌에 불과하지만, 이십여 년 전엔 중원을 혈겁에 빠트렸던 대마두였다.

그의 손에 이슬로 사라진 구파일방의 무림인만 수백 명.

한마디로 전국적으로 알아주는 고수라는 얘기.

물론 그런 괴물의 살광에도 눈썹 하나 깜짝 않는 철면피가 바로 장이서다.

'듣던 것과는 다르구나.'

그리고 이러한 장이서의 모습에 천무기는 호기심을 넘어 짙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는 7급귀 출신의 무능한 돈 귀신.

하나 지금은 아무리 봐도 그런 어수룩한 범부의 모습이 아니었다. 배짱도 있고, 감춰둔 실력도 있다.

물론 마오가 백인장의 인을 얻은 순간, 어느 정도는 예상은 했었다.

어쩌면 그가.

사해령이 심어 놓은 진짜 비장의 칼일지도 모른다는 가설 말이다.

그런데 이제 보니 알겠다.

'확실하구나. 셋째가 숨겨둔 검이.'

"찾아온 용건이 무엇이냐."

그러니 지금 하는 대답이 무엇이든.

오늘 이곳을 절대로 살아나가지 못하리라.

한데.

"앞으로 칠소궁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삼공녀를 위해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무어라? 하하하!"

처음으로 천무기의 얼굴에서 웃음이 터졌다.

이 사달을 벌여놓고 이제 와서 뭐라? 삼공녀를 위해 움직이지 않겠다?

"그 말은 곧... 셋째를 배신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

"애초에 삼공녀께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으니 배신이 아닙니다."

"그게 네가 할 말은 아닐 텐데."

"무슨 말씀이신지."

장이서가 생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천무기는 가소롭다는 듯 대꾸했다.

"애초에 너는 셋째가 심어 놓은 간자가 아니더냐."

"어째서 그리 생각하십니까."

"네가 셋째의 추천을 받아 들어갔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설마 내가 그것도 모를 줄 알았더냐."

천무기의 손가락에 스산한 기운이 스민다.

아니라 말하든, 맞다 말하든. 목구멍에 지풍을 꽂아주리라.

한데.

"본디 제가 몸담은 곳은 방첩대입니다."

장이서의 입에서 뚱딴지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근 10년을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그때 따랐던 방첩대주는 겸사익이라는 자로 금전을 무척이나 밝힙니다. 하여 녹 주는 자가 주인이라는 신념으로 살아가는 자이죠."

겸사익이라면 익히 잘 알고 있다. 어디에도 줄을 서지 않아 지닌 무예나 업적에 비해 실로 조촐한 직급을 가진 자. 하여 그도 포기한 자가 아닌가.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이냐."

"절 삼공녀한테 추천서를 써준 자가 바로 겸 대주입니다. 이는 확인해 보시면 금방 아실 겁니다."

"뭐?"

"한데 그럼 전 겸 대주가 심어둔 사람이 되는 겁니까?"

하! 천무기가 탁자를 내리쳤다.

"억지다."

"그렇지 않습니다. 명을 받고 사는 몸. 소속이 바뀌면 당연히 입장도 바뀌는 것 아닙니까."

"실로 궁색한 변명이로구나. 그래서 지금 네놈은 삼공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냐?"

그래. 근데 애초에 나는 그녀의 사람이었던 적이 없다. 무림맹 소속이었지.

"중요한 건 지금 제가 서 있는 곳이 대공자님 앞이라는 것입니다."

천무기가 턱을 괴며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혓바닥이 간악한 녀석이로다."

"대세를 따를 뿐입니다."

"하긴. 여긴 너 같은 놈이 살아남는 곳이지."

그건 말이 좀 심한데. 장이서가 이를 물고 억지로 씨익 웃었다.

어쨌든 표정을 봐선 대공자의 의심이 어느 정도는 걷힌 듯했다.

어설픈 변명보다 확실한 노선을 밝히는 게 천무기에게는 더 와닿았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이곳은 그런 곳이니.

"막내의 뜻도 너와 같더냐."

한결 풀어진 어조로 그가 물었다.

"칠공자께선 어느 쪽에도 서지 않고 조용히. 무탈하게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계십니다. 사실 별 관심도 없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겁니다."

"흠, 그러고도 남을 아이이지."

그간의 마오를 생각하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일.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천무기의 입이 열렸다.

"너희 생각은 무엇이냐."

"감히 말씀드리옵건대, 저희는 이번 모집일에 삼소궁으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굳이 대주들을 설득하지 않으셔도 이번 계획은 실패할 겁니다."

"그래서."

"하지만 앞으로 삼공녀는 계속해서 이를 얻어내려 할 것입니다. 무슨 수를 써 서든."

"그렇겠지. 셋째는 제 것으로 판단하면 무엇이든 쉽게 포기할 녀석이 아니니."

그게 신패든, 자리든, 사람이든. 그 집요함은 천무기도 인정하는 바였다.

"하나 그건 이공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음?"

"그 역시도 욕심을 부릴 공산이 큽니다. 그의 부름에 달려올 오룡당의 무사들은 많을 테니까요."

천무기의 미간이 꿈틀거린다.

일리 있는 말이기 때문.

이공자는 단순하고 포악한 만큼 욕심이 크다.

지금이야 삼공녀가 먼저 손을 썼으니 막기에 급급하나, 그다음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천무기의 목소리에 살짝 갈증이 얹어진다.

이에 장이서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제게 백인장의 인을 시원하게 날려버릴 묘책이 있습니다."

"묘책?"

"예."

장이서가 당차게 호언을 뱉는다.

표정이 너무 당당해서 묻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

심지어 유령마군은 저도 모르게 제 푸른 입술마저 할짝거렸다. 그만큼 궁금하다는 얘기.

하지만.

"하하하하!"

천무기는 묻지도 않고 대소부터 터트렸다.

그러곤 자릴 박차고 일어나 앞의 탁자까지 퍽! 하고 날려버렸다.

이내 맹렬하게 앞으로 손을 쭉 뻗어내자.

"큭!"

장이서의 육신이 속절없이 끌려와 그의 손아귀에 저절로 목이 붙잡혔다.

그것도 실제로 손에 잡힌 게 아니라 손끝에서 한 치 앞두고 무형의 기운에 사로잡힌 것이었다. 실로 엄청난 공력!

"감히 누구 앞에서 수작을 부리는 것이냐?"

"무슨... 말씀이신지...."

장이서는 새빨개진 얼굴로 억울하다는 듯 간신히 말을 뱉었다.

하나.

"내가 널 정말 믿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냐."

장이서의 눈이 부릅떠졌다.

"애초에 이 사태를 획책한 게 바로 너 아니더냐."

"...!"

꽈드득! 목이 더 거세게 조여온다.

이를 버텨내는 건 온전히 내력의 싸움. 그리고 이에 장이서는 뱀 앞의 쥐처럼 엄청난 무력감을 느껴야 했다.

한낱 절정 초입에 불과한 자신과 달리 천무기의 내력은 이미 초절정을 넘어선 경지였기 때문.

장이서의 얼굴이 사색(死色)으로 물들자 천무기는 가소롭다는 듯 노려보곤 그대로 퍽! 벽에다 내던졌다.

"컥...."

바닥에 털썩 쓰러진 장이서를 두고 천무기는 픽 웃고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이번 일은 졸렬하고, 간사하면서도, 영악하다. 그건 사해령의 방식도, 나락의 방식도 아니다. 지금까진 전혀 맡지 못했던 낯선 마인의 냄새지."

"...!"

"그래, 너. 바로 너 말이다."

장이서가 굳어진 눈매로 바라본다. 이에 천무기는 확신을 굳혔다.

"이제야 알겠다. 넌 셋째가 숨겨둔 검이 아니라 셋째도 이용한 것이야. 그 아이를 앞에 세워 나와 둘째를 움직이려 한 것이지. 어째서냐. 어째서 이런 짓을 벌인 것이냐."

우우웅!

천무기의 몸에서 막대한 살기가 뿜어졌다.

어찌나 강렬한지 전신에 화살 수십 발이 관통하는 기분.

확실히 난 놈은 난 놈이었다.

무공도, 영민함도. 그 어느 것도 부족할 게 없다.

완전히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무엇도 믿지 않는 치밀함까지.

하나....

'그렇기에 넌 속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이서가 내면의 웃음을 감추고 말했다.

"두어 달 뒤에.... 마가에서 칠공자와 무혈공의 대결이 있사옵니다."

"뭐?"

"그리고 칠공자께서 패하면 전 마가의 사람이 됩니다. 저를 내기에 걸었기 때문이지요."

"보좌인 너를 말이냐...?"

"예. 무혈공께선 저를 탐내었습니다."

무혈공 마이신. 그의 이름이 개입되자 천무기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어찌 됐든 자신과 더불어 최고의 후기지수로 꼽히던 자.

그가 눈여겨볼 정도라면 확실히 보통은 아닌 놈이다.

"해서 어차피 떠나야 하는 신세라면.... 뭐라도 손에 쥐고 가는 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었구나. 네놈이 이곳에 온 이유가.

천무기는 속으로 무릎을 탁! 쳤다.

이제야 말이 맞아떨어졌기 때문.

가진 것 하나 없는 비천한 놈이 간신히 칠공자 옆에 붙었는데, 오자마자 마가에 종속되게 생긴 것.

하여 판을 짠 것이다.

제깟 놈에게 자신이 귀를 기울여줄 커다란 판을.

그럼 모든 게 다 맞아떨어진다.

"하하하! 이제 보니... 간악한 게 아니라 그냥 모자란 놈이 아니냐. 이리하면 네놈의 말을 내 들어줄 줄 알았더냐."

천무기의 비소에 장이서는 침묵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응. 네놈은 내 말을 들어줄 것이다.

왜냐하면.

'넌 이제 내게 진짜 묘책이 있다고 믿게 되었으니까.'

다른 어떠한 사심 없이 단 하나.

그저 한탕 해 먹기 위해 영악한 미꾸라지가 개입했다고 생각할 테니까.

아무리 대범하게 행동해도 넌 구렁이만 가득한 실리주의니까.

그러니 넌 내 말을 들을 것이다.

"흐음...."

그리고 이러한 예측은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천무기의 표정에서 고심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장이서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말했다.

"전 방첩대 출신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방첩대주 겸사익에게 배웠고, 그는 금전을 심히 밝히는 자입니다."

"어쩌라는 것이냐. 설마... 내게 돈을 달라는 것이냐?!"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묘책입니다."

뭐 이딴 놈이.... 천무기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자 유령마군이 결국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네 이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입을 함부로 놀리는 것이냐!"

어느 안전이긴. 마교의 잡배들 앞이 아니냐.

장이서가 픽 비웃자 유령마군의 눈이 뒤집힌다.

하나.

"되었다. 그거 하나 바라고 목숨 걸어 예까지 온 놈이다."

"하오나 대공자님!"

천무기가 손을 들어 올린다. 더 떠들지 말라는 얘기.

"그래, 좋다. 무엇이냐. 그 묘책이라는 게. 쓸만하면 그간 네놈의 기만은 묻어주도록 하마."

"...."

"왜. 싫으냐? 그럼 죽거라."

우우웅!

다시금 천무기의 몸에서 막대한 내기가 솟아오른다.

하나 장이서는 그딴 건 관심 없다는 듯 아랑곳없이 말했다.

"은원보 백 개."

"뭐?"

"이를 주시면 이공자, 삼공녀. 모두 백인장의 인을 넘보지 못하게 아예 무용지물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하."

"어차피 제가 이 자리에서 죽는다고 달라질 것도 없지 않습니까. 삼공녀도, 이공자도. 모두 칠공자에게 갈 것입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대공자님께서도 그들과 불필요한 소모전을 벌이셔야 합니다."

"내가 왜. 녀석들이 가기 전에 막내가 죽어주면 될 일을."

"마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일장로는 나와 한배를 탄 몸. 내가 버린 자식보다 못할까."

"대신 그 대가는 은원보 백 개로는 어림도 없겠지요."

"하하, 그래서. 네놈에게 주는 것이 싸게 먹히는 거다?"

"서역에서 비단길을 타고 들어오는 은자가 엄청나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가와 맹가. 천가에서 이를 관리하지요. 그러니 대공자님껜 그리 큰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한텐 인생을 걸 만한 액수지만요."

하! 대공자 천무기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84.

#처음 뵙겠습니다, 대공자님 (3)

'참으로 뻔뻔한 놈이로구나.'

은원보 백 개가 별게 아니라니. 그 돈이면 흑화원을 일 년 굴리고, 무사 수백을 고용할 액수다. 한데 그걸 푼돈처럼 말하다니.

이걸 가증스럽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대범하다고 해야 하나.

하나 천무기는 인재에 있어선 돈을 아끼지 않는 자. 그만한 가치가 있다면. 또 제대로 해낼 수 있다면. 수백을 주나 하나를 주나 별반 다를 거 없는 일.

"마이신이 네놈을 원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감사합니다."

"간사한 것."

"적어도 대공자님 앞에선 공명정대할 것입니다."

"그 말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예!"

"말해 보거라."

됐다. 장이서의 내면에 잔잔한 웃음이 서렸다.

그러곤 쉴 새 없이 몰아치듯 말했다.

"그냥 모자란 놈들로 채워버리면 됩니다."

"음?"

"백인장의 인은 누구든 한 번 쓰임을 다하면 더는 무를 수 없습니다. 이를 역으로 이용하는 겁니다. 무공이라곤 일절 모르는 교인들로 채워놓거나. 아니면 교외의 천한 이들을 들여와도 됩니다. 어쨌든 먼저 채워만 놓는다면. 그럼 누구도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말은 된다. 하나.

"그걸 가만히 두고 보겠느냐?"

"다른 이는 해낼 수 없습니다. 하나 저는 가능합니다. 보좌이지 않습니까."

"...재밌구나."

천무기가 활짝 웃는다. 그야말로 확실한 묘수. 이 말대로라면 아무런 문제 없이 날려버릴 수 있다.

그리고....

"제가 해내겠습니다."

아무런 문제 없이 세를 키울 수 있다.

장이서가 납작 엎드린 채 고갤 든다. 그리고 천무기 역시 우뚝 선 채 이를 내려본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 얽혔다.

그리고 동시에 입꼬리에 웃음이 서렸다.

*

장이서가 나가고 난 후.

흑화위까지 물리고, 방 안엔 천무기와 유령마군 둘만이 남겨졌다.

"어찌 생각하느냐."

그리고 천무기는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그가 사라진 문가를 바라보며 묻는다.

유령마군이 답했다.

"...시건방진 놈입니다."

픽. 동감이다. 천무기가 내색 없이 다시 물었다.

"그리고?"

유령마군은 짐짓 고민 후에 입을 열었다.

"쓸 만한 놈입니다."

"극찬이군. 장로들이 뽑아준 흑화위도 내켜 하지 않는 천하의 환사가 처음 본 놈을 마음에 들어 하다니."

"날아드는 검을 피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으나, 누가 던졌는지 알면서도 웃는 건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정확히 이쪽을 보고 웃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상대가 누군지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이는 무슨 이유에서든 그만한 자신이 있기 때문.

"그리고 그 후엔 느긋한 걸음으로 불같았던 기류를 단숨에 바꾸었습니다. 이는 전장의 흐름을 다룰 줄 아는 것이지요."

하나 이해는 되지 않았다.

전장의 흐름을 바꾸는 건 유령마군처럼 연륜이 뒤따르는 노장들도 쉽지 않은 일.

타고난 재능에 가혹한 수련. 여기에 숱한 아수라장을 지나온 경험이 있어야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자네 말대로라면 마가에 넘기기엔 아까운 녀석이로군."

한데 유령마군은 천무기의 말에 이번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분명 기개가 높고, 총명하긴 하나 태생적 한계가 분명한 놈입니다. 한낱 푼돈에 눈이 멀어 이런 일을 벌였다는 건 앞으로도 그 정도밖에 못 할 놈인 겁니다."

"그리 생각하나."

"예."

유령마군의 확답에 천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리 볼 수도 있다. 아니, 정황만 놓고 보면 그의 말이 맞다.

가진 재주는 비범하나 고작 돈이나 쫓는 삼류 인생.

한데 어째서일까.

왜인지 모르지만, 속내엔 계속 일말의 의심이 서렸다.

'고작 돈이나 쫓는 자가 나를 비롯해 둘째와 셋째. 나아가 막내까지 모두를 이용할 계획을 품었다...?'

아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제대로 미친놈이거나.

아니면....

훨씬 더 난 놈이거나.

그리고 천무기는 후자 쪽에 좀 더 무게를 실었다.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미약했지만, 놈에게서 느껴진 마기가 분명 범상치 않아 보였다.'

한데 이를 한낱 7급귀 출신 보좌가 품고 있다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

하여 천무기는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는 놈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는....

"오랜만에 넷째를 봐야겠구나."

"사공자님 말입니까?"

"그래. 조만간 내게 들르라 전하거라."

사공자 정도라면 충분히 알아봐 줄 것이다.

장이서가 제 옆에 둘만한 놈인지, 아니면 이대로 마가로 끌려가 노예로 썩어도 될 놈인지.

어떤 결과든지 말이다.

천무기가 다시금 붓을 쥐었다. 그리고 슥. 점정을 찍듯 마지막 잎사귀를 그었다.

무엇보다도 첨예하고, 또 강렬하게.

장이서.

그의 이름을 머릿속에 되새기면서 말이다.

* * *

"후...."

한편 장원 밖으로 나온 장이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목표는 원하는 대로 이루었지만, 마냥 편히 웃을 순 없었다.

이는 앞으로 싸워야 할 이들의 수준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기 때문.

'천무기.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강하구나.'

붉어진 목덜미를 저도 모르게 어루만졌다.

내기를 정밀히 다루는 건 고도의 집중력과 실력을 요했다. 보이지 않는 내기의 끈으로 떨어진 물건을 가져오는 격공섭물만 하더라도 절정의 경지는 기본이오, 정밀한 감각이 아니라면 불가한 일.

한데 천무기는 이런 기본을 훨씬 더 상회했다.

'날 단숨에 끌어당긴 것도 모자라 내기만으로 내 목을 조여 올렸다.'

차라리 손이라면 칼로 베든, 악력으로 떼어내기라도 할 텐데.

이는 완전한 공력 싸움.

고작 절정 초입에 든 장이서로서는 그야말로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정도로 깊이 있는 운용력은 상상도 하기 힘든 경지였다.

이미 겪어 본 적이 없었다면, 보고도 믿기 힘든 일.

'하나 난 그와 유사한 일을 겪어본 적이 있다.'

천마 진우광.

분명 그가 자신을 일으켜 세울 때도 이러했었다.

보이지 않는 내기의 끈이 자신을 옭아맨 듯한 느낌.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천마의 자식들은 그에게 선택받은 후부터 압도적인 성장을 해 왔으니까.

대표적인 예로 본래 마이신이 마교 제일의 후기지수였다면, 지금은 그보다 강한 동년배가 최소 넷은 존재했다.

마교에서 유일하게 별호에 임금 제(帝)자를 쓸 수 있는 자들.

대공자 흑화마제(黑火魔帝) 천무기.

이공자 패왕권제(霸王拳帝) 무한성.

삼공녀 빙화검제(氷火劍帝) 사해령.

사공자 살영도제(殺影刀帝) 한.

흔히 사왕(四王)으로 통하는 절대 경지에 올라선 천마의 자식들이다.

오공녀 맹원원이나 육공자 맹휘도 분명 또래에 비해 빼놓을 수 없는 강자들이나 이들 넷과는 비교가 불가했다.

이들은 나이를 떠나 당장 천하의 수많은 고수를 발아래 무릎 꿇릴 수 있는 진정한 마두(魔頭)들이었으니.

그리고 모두 마오가 소교주가 되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이기도 했다.

'강해져야 한다. 마오도, 그리고 나도. 지금보다 훨씬 더.'

비록 천마는 자신이 강해질 방법이 없을 것이라 여겼지만, 아직 하나 남았다. 강해질 방법이.

'이제 들를 때가 됐지.'

지금껏 9천 번이 넘게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마벽(魔壁).

슬슬 그 끝을 볼 시간이다.

* * *

- 호룡당 당주실.

지대호는 오랜만에 심신이 평안했다.

본디 성정상 자리에 올랐다고 가만히 있을 양반이 아니었지만, 요즘은 부쩍 본교가 잠잠했다.

덕분에 호피 위 의자에 앉아 따스한 햇볕을 맞으며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여유까지 생겼다.

늘 오늘만 같았으면.

그런 생각도 가져보았다.

한데.

"다, 당주님-!"

왜 꼭 쉬려고 하면 이리 소란인 건지, 원.

헐레벌떡 달려온 부관이 문을 벌컥! 열었다.

"크하아아앙!"

그와 동시에 지대호의 노호가 터졌다. 이에 부관은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더니 물 밖에 나온 잉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조용히. 천천히 말하거라. 호들갑 떨지 말고."

지대호의 엄포에 부관이 침을 꼴깍 삼키고 말했다.

"그, 그게 비룡당이...."

"비룡당이 왜. 드디어 철마적을 잡았다더냐?"

"그, 그게 아니라...."

"아니면 뭐!"

"철마적한테 당했답니다!"

크하아아앙!

호룡당에 기다란 노호가 울려 퍼졌다.

* * *

- 천산북로 황야.

다그닥, 다그닥.

백마를 탄 십여 명의 무사들이 흙먼지를 흩뿌리며 언덕 사이의 길목을 쏜살처럼 달려 나간다.

이들은 행색부터가 범상치 않았는데, 모두가 새처럼 소매가 넓은 백색 무복에 백립. 심지어 백색 복면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스스로를 백색 안에 완전히 감춘 것.

그나마 등 뒤에 수 놓아진 한 글자만이 그들의 신원을 증명했다.

날 비(飛).

마교의 오대 세력 중 하나이자, 외교와 정보를 담당하는 비룡당이다.

그리고 이들이 이토록 필사적으로 쫓는 상대는 놀랍게도 말을 타고 도주 중인 여인이었다.

어두운 갈색 피부에 머리를 한 줄기로 땋은 강인한 눈매의 미녀.

"절대 놓쳐선 안 된다!"

비룡당이 흙먼지까지 삼켜가며 그녀를 쫓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가 바로 도살방에게 미혼산을 제공한 철마적이기 때문.

호룡당의 요청으로 수사 끝에 간신히 꼬리를 잡은 것이다.

여인임에도 어찌나 말을 잘 다루는지, 이대로 계속 길이 뚫려 있었다면 아마 잡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히이이잉-!

하지만 운이 없던 것인지, 오래지 않아 그녀는 달리던 말을 멈춰야만 했다.

좌측도, 우측도. 그리고 전방에도.

모두 드높은 구릉이 길을 가로막아 버린 것이다.

하필 골라도 막다른 길을 골랐던 것.

"드디어 잡았구나!"

뒤늦게 도착한 비룡당이 유일한 퇴로마저 빼앗아버렸다.

그야말로 사면초가.

"얌전히 굴면 크게 다치지는 않을 것이다."

겉만 봐선 다수의 마인이 죄 없는 여인을 핍박하는 모양새.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당장 끌고 가...."

퍽! 선두에 있던 무사가 뒤를 돌아보며 지시를 내리는 그 순간. 끔찍한 타격음과 함께 털썩. 무사가 말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새하얗던 무복이 붉게 물든다.

관자놀이에 박힌 화살.

모두가 이를 내려 살피곤 경악한 채 눈을 부릅떴다.

이윽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컥!"

어느새 말에서 내린 여인이 자릴 박차고 뛰어올라, 무사의 어깨 위에 목마를 타고 앉아 있었다.

그러곤 그대로 회전하며 빠각! 머리를 꺾었다.

털썩. 즉사다.

그제야 비룡당 무사들은 상황을 깨달았다.

그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저 구릉 위에 개미처럼 모여 포위하듯이 둘러싼 자들이 바로....

"처, 철마적-!"

자신들이 뒤쫓던 몸체라는 것을 말이다.

"함정이었구나!"

개구멍에 홀로 나와 있는 쥐꼬리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범꼬리였다.

그것도 자신들을 한입에 집어삼킬 수 있는 거대한 범.

저 여인을 쫓아 온 것이 오히려 함정이었을 줄이야.

난처함에 빠진 그 순간.

피이이잉!

언덕 위에서 화살 세례가 쏘아져 내렸다.

하나하나가 쇠뇌처럼 엄청난 힘이 담겨 있다. 한낱 마적으로 치부하기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실력.

"숨어라!"

하나 상대는 마교의 핵심 세력인 비룡당.

함정에 빠졌다고 해도 어수룩하게 당하진 않는다.

파파파팟!

비룡당 무사들은 곧장 말에서 뛰어내린 채, 고삐를 당겨 타고 온 말을 주저앉혔다.

그러곤 뒤에 숨어 말들을 방패 삼아 화살을 막아냈다.

히이이이잉-!

85.

#철마적 (1)

말들의 비명이 울려 퍼지고, 바닥은 온통 핏물에 적셔진다.

참으로 잔혹한 수법이나, 목숨을 내어줄 순 없는 일. 비통함은 뒤로한 채 누군가가 외쳤다.

"쳐라!"

스릉! 비룡당 무사들이 일시에 날카로운 검을 뽑아 들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경공술에서는 그 어느 곳도 비룡당을 따를 수 없다.

이까짓 언덕쯤이야 단숨에 날아오르면 그만.

당장 올라가 모두의 목을 베어내리라.

그렇게 마음을 먹은 채 경공을 펼치려 무릎을 굽힌 그 순간.

쿠우웅-!

꼭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굉음이 흩날렸다.

"큭!"

이어 사방에 흙먼지가 피어오름과 동시에 대지도 출렁였다.

이에 도약할 시기를 놓친 비룡당은 황사로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주변만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잠시 후에 자연스레 밝혀졌다.

그것도 귓가에 아주 생생하고, 끔찍하게.

퍽!

"누, 누구냐!"

퍽!

"끄아아악!"

퍽!

"대체 무슨...!"

퍽!

"컥!"

퍽!

"오, 오지 말아라!"

퍽!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잔혹한 소음. 그리고 꺼져가는 동료들의 숨소리.

딱, 딱, 딱, 딱, 딱.

어느새 고요가 찾아들고, 홀로 남겨졌음을 깨달은 무사는 이빨을 사정없이 부딪쳤다.

공포다. 그것도 형언할 수 없는 지독한 공포.

잠시 후. 서서히 가라앉는 흙먼지 사이로 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사람을 압도하는 체격에 흉터와 근육으로 가득한 상체.

그 위에 길게 풀어 헤쳐진 머리카락과 흉신악살보다 무서운 적색 안광.

퍽!

그것이 살아생전 무사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이내 적안의 사내가 상황을 정리하자 여인은 시체들을 훑고는 정중히 보고를 올렸다.

「마교의 비룡당입니다.」

중원의 말은 아니다.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언어.

「아무래도 도살방 놈들한테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어찌할까요.」

역시 그들이다.

도살방에게 미혼산을 공급했던 철마적!

「...새로운 거래처를 찾는다.」

「위험합니다.」

아니, 이미 위험해졌다. 비룡당이 뒤를 쫓기 시작했다는 건 이제 곧 자신들의 실체에 더 가까워진다는 얘기.

하지만 사내는 담담했다.

「아직 저들은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알았다면 아신, 네가 아니라 과평부터 찾았을 거다.」

또한.

「사도철은 당했다고 해도... 우리는 당하지 않는다.」

태생적으로 느껴지는 자신감.

여인은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감히 누구 앞에서 이런 주제넘은 걱정을 했단 말인가.

그는 철마적의 대장이자, 전장의 용.

인간 따위는 절대로 상대할 수 없는 최강자.

「따르겠습니다.」

여인이 고개 숙여 답하곤 타고 온 말에 올라, 왔던 길로 돌아 나갔다.

그리고 혼자 남겨진 긴 머리의 사내는....

콰아앙!

단 한 번의 도약으로 구릉 위로 사라졌다.

비룡당의 시체들과 발돋움으로 부서진 황야만을 남겨둔 채.

철마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 월하촌 취선루.

해 질 무렵, 대공자와 만남을 마치고 돌아온 장이서.

취선루 2층엔 등롱이 오색찬란하게 반짝거리고, 1층 입구에는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왁자지껄한 소음과 풍성한 활기.

돈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마음이 흐뭇해진다.

"오셨습니까."

막힘없는 걸음으로 어느새 취선루 꼭대기 층에 다다르자, 오늘도 어김없이 수려한 홍란이 다소곳한 인사로 맞이한다.

그러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 장이서의 붉어진 목덜미를 보더니 밝았던 표정이 흠칫 굳었다.

"오다 긁혔어."

도대체 뭐에 긁혀야 저렇게 될까. 홍란은 속상한 마음을 숨긴 채 애써 웃었다.

이내 방 안에 들어와 그녀가 또르르 술을 따르자, 장이서는 이를 받아 들곤 입을 열었다.

"당분간 대공자가 날뛰는 일은 없을 거야."

대공자한테 긁혔구나. 그새 또 말없이 큰일을 치르고 오신 거야. 홍란은 걱정과 안도의 숨을 깊이 삼키곤 답했다.

"무사하셔서 천만다행입니다."

다행이지. 이번엔 정말 죽을 뻔했거든.

장이서가 픽 웃자 그녀가 조심스레 말했다.

"의원을 부를까요?"

"괜찮아. 은원보 100개에 이 정도면 찰과상 수준이지."

"설마 가셔서 그것까지 요구하신 건가요?! 세상에."

홍란이 경악했다.

거기가 어디라고 가서 돈을 받아낸단 말인가. 말없이 들어갔다 살아 돌아오는 것도 기적 같은 곳이거늘.

심지어.

'주인님께는 그리 큰돈도 아닐 텐데 왜....'

천무기는 은원보 100개를 푼돈처럼 요구한 게 뻔뻔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장이서한텐 푼돈 맞다.

취선루에서 벌어들이는 돈도 돈이지만, 천마고에 쌓인 금은보화.

그리고 이곳저곳 투자해놓은 것까지 감안하면 그야말로 부호(富戶) 중에 대부호(大富戶)다.

근데 고작 은원보 100개에 목숨을 내걸다니.

하나 장이서한텐 이를 요구한 이유가 두 가지나 존재했다.

"알잖아. 여긴 대가 없는 희생은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 이거라도 안 불렀으면 내 목이 달아났을걸?"

하나는 대공자의 상식에서 납득이 될 만한 요구가 필요했다는 것.

마교는 정파와 달리 이유에 대가가 없다면 의심이 기본이고, 의심은 곧 죽음이다.

거기다 은원보 100개라면 한낱 7급귀 출신인 자신이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거금. 충분히 욕심내 볼 만한 액수다.

뭣보다 가장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그리고 내 돈으로 생색내는 것보단 남의 돈으로 내야 제맛이거든."

"예?"

"다 쓸 데가 있다는 말이야."

"예."

홍란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지만, 속으론 놀란 가슴을 간신히 붙잡았다.

도대체 대공자한테 가서 무슨 짓을 벌이고 온 것인가.

그야말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 금 보따리 들고나온 격.

봐도 봐도 상식의 규격을 넘어선 사람이다.

"어쨌든 시간을 조금 끈 것뿐이야. 중요한 건 이제부터지. 알아보라고 했던 건?"

그의 물음에 홍란은 고개를 휘휘 젓고는 자못 진지한 얼굴로 보고를 올렸다.

"교외에서 가장 주목할 이들은 단연 돌궐족입니다."

돌궐족.

그들에 대해서라면 장이서도 알고 있었다.

과거 유목 부족 중 하나로, 북방에 몇 없는 비옥한 토지를 놓고 벌어진 대규모 전쟁에서 승리하여 정착하게 된 자들.

지금은 여러 부족을 흡수하였고, 통칭 산왕가(山王家).

"이 근방에 있는 세력 중 교에서 유일하게 인정하는 자들이기도 하지."

"예. 그리고 그중 오군장(五軍匠)이라 불리는 다섯 장수의 무력은 오룡당주에 필적한다고도 알려져 있죠."

장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주들도 각자 실력이 달라 뭐라고 단언할 순 없겠지만, 분명 그런 소문이 있긴 했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사실일 겁니다. 아니었다면 여태 살아 있지 못했을 테니까요."

그것도 그렇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마교에서 이런 말을 듣고도 가만 놔뒀을 리 없는 일. 그들이 멀쩡하다는 게 증거라면 증거겠다.

"하지만 산왕가는 이미 자리를 잡은 자들이야. 우리 쪽으로 회유하긴 어려울 텐데?"

"맞습니다. 그런데 전쟁 당시에 산왕가를 패망 직전까지 몰고 간 자들이 있다는 걸 아시나요? 그때 오군장 중 하나가 당했고요."

"전혀."

장이서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큰 관심사가 아니기도 했고, 직접 전쟁에 끼어든 게 아니니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리 강한 부족이라면 자신이 분명 한 번은 들어봤을 텐데....

"정확히는 부족이 아니라 부족에 고용된 자들이었습니다. 북방은 중원에 비해 열악하여 살기 위해 전쟁에 뛰어드는 이들도 허다하니까요."

"음...."

"그들도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어느 부족에서 우연히 굶주린 그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었고, 이에 보답하겠다며 참전하게 된 게 시작이라고 하더군요."

"결초보은(結草報恩)이라. 방법이 제법 거칠긴 하지만 도의를 아는 자들이군."

삭막한 북방에서 보기 힘든 유형. 장이서가 깍지를 낀 채 눈을 빛냈다.

"예. 처음엔 아무 기대가 없었으나 갈수록 승전을 거듭했고, 누구도 그들을 막지 못했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산왕가에선 오군장이 당했음에도 그들을 어떻게든 회유하려 했죠. 물론, 실패했지만요."

그 정도면 실력은 충분하다는 얘기.

"근데 어떻게 산왕가가 승리한 거지?"

"그들의 회유는 실패했지만, 고용한 부족을 회유하는 데엔 성공했으니까요."

하! 장이서가 무릎을 탁! 쳤다. 전쟁은 무릇 힘으로만 하는 게 아니다. 아무리 빼어난 장수라도 나라를 잃으면 오갈 곳 없는 나그네일 뿐.

"그리고 그때부터 산왕가의 복수가 시작되었습니다. 힘이 아닌 권력으로 짓누른 거죠. 누구도 그들에게 일을 주지도, 도움을 주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물 한 모금도요. 그들을 외면했던 건 고용했던 부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힘이 안 되니 아예 피를 말려 죽이기로 한 거군."

알만했다. 오군장을 없앤 것으로도 모자라 회유까지 거절했으니 산왕가 입장에선 위험 요소를 살려둘 이유가 없었던 것.

아니, 아예 입에 오르내리는 것 자체를 차단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혹독한 결과.

하지만 그렇기에 더.

장이서는 그들에게 깊은 끌림을 느꼈다.

'회유당하지 않을 만큼 심지가 곧고, 작은 은혜도 외면치 않을 만큼 도의를 아는 자들이다. 그런 이들이 권력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가슴 깊은 곳에 숨겨둔 정도인의 심기가 불타올랐다.

그야말로 자신이 찾던 이들.

"그래서 지금은? 설마 죽은 건 아니지?"

장이서가 눈을 부릅뜨고 묻자, 취홍란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서로 말은 안 하지만, 장이서의 진면목이 얼핏 엿보이는 모습이었기 때문.

"다행히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 뒤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합니다."

"이런...."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목소리. 이에 홍란은 다급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금방 찾아낼 겁니다. 다행히 그들의 수장이 누구였는지 알아냈거든요."

"누군데?"

장이서가 다시금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묻는다.

이에 홍란이 픽 웃고는 헛기침을 터트린 뒤 말했다.

"전장의 용, 구유. 분명 그리 불렀습니다."

전장의 용, 구유.

장이서의 머릿속에 그의 이름이 낙인처럼 틀어박혔다.

오래지 않아 만나게 될 거라는 예감과 함께.

"반드시 찾아. 구유. 어쩌면 우리한테 꼭 필요한 자일지도 몰라."

"예!"

"좋아. 그리고 당분간 종종 궁에 들러 우리 도련님 좀 챙겨줘. 위험한 걸 맡겨놔서 그런가, 영 걱정이 돼서 말이야."

장이서가 씨익 웃는다.

"그거야 어렵진 않습니다만...."

꼭 어디 갈 것처럼 얘길 하는 건지. 그녀의 표정을 본 장이서가 금세 이해하곤 부언을 붙였다.

"내가 며칠 자릴 비워야 할 거 같거든."

"무슨 일 때문이신지...."

"그런 게 있어. 아주 지긋지긋한 거."

그 이름은 마벽. 수천 번을 두드려도 문 한 번 안 열어주던 녀석이지.

"그러니까 부탁 좀 할게."

장이서는 활짝 웃으며 채워진 술잔을 털어 넣었다.

급한 일들은 끝냈고.

지금 만나러 간다.

천마고.

86.

#철마적 (2)

- 천산 동부 주마지(走馬地).

명마의 언덕이라 불리는 이곳 주마지에 한 소년이 단창을 등에 멘 채 고민 가득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의 이름은 맹휘.

삼장로 맹철용의 친자이자 천마의 여섯 번째 후계다.

"뭐라고 얘기하지...."

뭔가 고민이 있는 모양새다. 괜스레 바닥에 잡초를 뽑곤 바람에 스르륵 날려 보내기만 수차례.

그 이유는 맹철용이 지시한 폐관 수련의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안 가겠다고 떼라도 써 볼까. 틀렸어. 역정만 내시겠지. 아니면... 그냥 솔직하게 당분간 칠소궁에 있겠다고 말해? 아니야. 다리몽둥이를 부서트리실걸."

하아. 어느 쪽으로 생각해도 나오는 건 한숨뿐.

들려오는 소문에 따르면 지금 칠소궁은 백인장의 인 때문에 고군분투 중이라는데.

걱정 반 기대 반에 솔직한 마음으로는 당장 짐 싸 들고 달려가고 싶었다.

이건 단순히 장이서에 대한 집착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냥 이곳에 있는 게 숨이 턱 막혔다.

어디를 가든 저를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에 모든 곳이 가시방석이었다.

'심지어 저기서 말똥을 치우는 장 씨도 힐끔거리며 날 감시하고 있다고.'

당연히 이를 지시한 건 제 친부인 맹철용일 터.

이러니 숨만 쉬어도 지칠 수밖에.

그런 의미에서 멍청이 마오와 다정한 장이서가 있는 칠소궁은 낙원 그 자체였다.

"뭘 그렇게 고민해?"

그때였다. 온갖 상념에 젖어 있던 그의 옆으로 아직 앳돼 보이는 소녀가 다가섰다.

열여섯 나이에 세상만사 어려운 일 하나 없다는 밝은 표정.

"누님...."

육공자 맹휘의 사촌 누나.

오공녀 맹원원이었다.

본래 둘이 그다지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다. 명확히 말하자면 맹휘가 맹원원을 어려워했다.

그녀는 저와 달리 늘 사랑받으며 자랐는데, 그래서인가 밝기만 한 모습이 왠지 모르게 불편했다.

특히 맑은 눈을 하고서 가차 없이 살초(殺招)를 날릴 때는 아주 섬찟 그 자체. 그래 놓고 실수라며 웃어넘기지만,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가족은 가족이라는 건가.'

한데 상심해 있는 저를 보고 이리 친절히 다가와 말을 걸어주다니. 안 그래도 터놓을 곳 없는 처지에 뭉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

"앉아도 되지?"

"어? 응."

그녀가 맹휘의 옆자리를 한 번 힐긋 살폈다. 그러자 뒤쪽에 시립해 있던 그녀의 보좌가 쿵쿵거리며 다가섰다.

삐뚤빼뚤한 이빨과 이목구비.

다리보다 길고 두꺼운 팔.

여기에 웬만한 장정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크고, 몸집은 대여섯 합친 것처럼 장대하다.

아마 크기로만 놓고 보자면 마교 제일.

오공녀 보좌 대거인(大巨人) 왕우였다.

그가 어울리지 않게 손바닥만 한 천 하나를 꺼내 바닥에 깔았다. 그에겐 손바닥이지만, 맹원원이 편히 앉기엔 충분한 크기.

다시 쿵쿵거리며 왕우가 거리를 벌린다.

그야말로 믿음직한 충신.

"여전하네."

맹휘는 부러움에 계속 곁눈질로 왕우를 살폈다.

제 보좌는 제가 뭘 하든 코빼기도 비추질 않는데. 아마 죽고 나면 시체나 주우러 오겠다.

"그래서. 무슨 고민인데?"

맹원원의 물음에 맹휘는 입맛을 다시며 오물거렸다.

"아니, 뭐...."

뭐라고 말하지. 폐관 수련을 무르고 칠소궁에 가서 살고 싶다고 말하면 되나. 픽. 제가 생각하고도 어이가 없다. 아마 비웃기만 할 것이다.

"왜, 말해 봐."

하지만 맹원원이 맑은 눈으로 재촉하자 맹휘의 문도 금세 열렸다.

이내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더는... 맹가의 뜻대로 살고 싶지 않아."

"뭐어?"

"웃기지? 알아, 나도. 배부른 소리라는 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맹원원을 보며 맹휘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맹가의 직계라는 이유로 온갖 지원은 다 받고 자라놓고, 이제 와 됐다니.

방계인 맹원원 입장에선 얼마나 한심하게 볼지.

하지만 진심이었다.

"왜? 이유가 뭐야?"

이유라. 맹휘는 그의 말을 떠올렸다.

'타인의 힘에 기대 살면, 결국 타인의 기대대로 살아가야 하는 겁니다.'

이젠 하도 되뇌어져 주문처럼 느껴지는 그 말.

바로 장이서가 했던 말이다.

솔직히 소교주니, 뭐니. 자신은 처음부터 아무 관심이 없었다.

관심을 가지라니까 가졌던 거지.

그저 맹휘가 바라는 건.

'삶....'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일을 겪고, 그래서 제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그저 유유히 떠다니는 한 마리의 나비처럼.

하지만....

'누구 마음대로 포기한단 말입니까! 누구 마음대로.'

가주인 맹철용은 용납하지 않을 게 뻔했다.

맹휘는 침을 꼴깍 삼켜 꽉 막힌 가슴을 뚫어내곤 말했다.

"난 더 이상 맹가의 꼭두각시로 살고 싶지 않아."

그러자 맹원원이 활짝 웃는다.

"다 컸네, 우리 맹휘. 그럼 그렇게 말씀드리면 되잖아."

"응? 아니, 뭐...."

그게 쉬워야 말이지. 맹휘가 풀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알잖아. 아버지.... 아니 삼장로님은 절대 내 말 들어줄 분이 아니라는 거. 아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날 가둬버리실걸? 그리고 난 이제 여기에도 있고 싶지 않아."

"그럼?"

"...듣고 비웃지 마."

맹휘가 당부하듯 검지를 툭 세운다. 그러자 맹원원도 눈썹을 곧게 한 채 대답했다.

"절대로."

"칠소궁...."

"푸하!"

"뭐야, 씨! 안 웃는다며!"

그러려고 했는데, 어지간해야 말이지. 칠소궁이 웬 말이니. 맹원원이 겨우 웃음을 참고는 말했다.

"진심이야?"

"어, 진심."

"너 마오 싫어하던 거 아니었어?"

솔직히 위에서 싫어하니까 싫어한 거지. 진심으로 싫어했던 적은 없었다. 게다가.

"걔가 좋아서라기보단.... 장이서. 그 옆에 좀 더 있고 싶어. 그 사람은 이곳에 있는 자들하고는 뭔가 조금 다르거든."

맹휘가 얼굴을 슬쩍 붉혔다. 이에 맹원원이 화들짝 놀란다.

"장이서라면.... 설마 이번에 새로 들어온 보좌?"

"응."

"세상에... 궁금해지네. 도대체 누구길래 널 이렇게 바꿔놓은 거지?"

"바뀐 게 아니라 이젠 날 위해 살겠다는 것뿐이야."

그게 바뀐 거야. 넌 원래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하는 애거든. 태어나기 전부터 쭉.

"아무튼. 그래서 백부님께 허락을 받고 싶다?"

"응. 방법이 없을까."

"흐음, 있긴 하지."

이렇게 쉽게? 맹휘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뭔데?!"

"간단해. 초절정 경지에 오르거나."

"말도 안 돼!"

그건 알지.

"공을 세워오거나."

공이라니.... 그건 생각 못 한 부분이다. 맹휘가 큰 관심을 보이자 맹원원은 피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철마적이라고 알아?"

철마적?! 맹휘는 눈을 살짝 올려 뜬 채 기억을 떠올렸다. 하지만 금세 고개가 좌우로 저어진다. 이름만 들어보면 한낱 마적단인데. 그럼 뭐든 기억할 급은 아니지 않나. 아무튼 금시초문이다.

"전혀 모르겠는데."

"최근에 불쑥 나타난 마적단인데, 요즘 그들 문제로 본산이 꽤 시끄럽나 봐."

"말이 돼?"

반신반의하는 표정이다. 본교가 어디인가. 단일로는 중원 최강이라 칭해지는 천마신교 아닌가. 한데 고작 마적단에 시끄러울 것까지야.

"거기서 우리 쪽에 몰래 미혼산을 퍼트렸나 봐. 너도 알지? 도살방이라고. 걔들이 다리 역할을 한 모양이더라고."

"도살방?! 그래서 용태가...."

맹휘는 문득 칠소궁 별관에 놓여 있던 자루를 떠올렸다. 용태가 가져왔던 새하얀 미혼산 가루.

"어머, 너 뭐 아는구나?"

"마저 얘기해줘."

"흐응, 처음엔 호룡당이 수사에 나섰는데, 철마적은 본교에 적을 두고 있는 자들이 아니니까 비룡당에 협조 요청을 한 거지."

맞는 말. 교외의 일은 비룡당의 몫이니.

맹휘가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비룡당에서 나섰는데... 실종됐대."

"누가. 철마적이?"

"아니, 비룡당이."

"맙소사."

맹휘가 탄식을 터트렸다. 비룡당이 어디인가.

장로원과 함께 교내의 중추 세력이라 할 수 있는 오룡당 중 하나이자, 세상 깐깐하고 성질 사나운 비룡당주가 관리하는 곳이다.

한데 실종이라니.

그것도 한낱 신생 마적단한테?!

"난리 났겠네...."

"난리 났지."

맹휘와 맹원원이 나란히 한숨을 쉬었다. 비룡당주의 드높은 자존심은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 괜히 여기까지 드높은 고성이 귀에 들리는 듯했다.

'아버지와 비룡당주는 사이가 좋지 않아. 만약 내가 이 일을 해결하면 당주의 코를 납작하게 해줬다고 좋아하실 거야. 맞아. 그럼 내 청도 받아주시지 않을까?'

맹휘의 눈에 환한 이채가 서린다. 마음을 굳혔다.

"그래서. 그 녀석들은 지금 어디 있는데? 철마적. 그 건방진 놈들 말이야."

그새 걔들이 건방져진 거야? 단순도 하지. 맹원원이 피식 웃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모르지. 하지만 알만한 사람은 알아."

"비룡당은 안 돼. 그쪽 모르게 먼저 처리해야 해."

흐응. 맹원원이 제 입술을 톡톡 두드리곤 말했다.

"집하촌. 불문객잔으로 가 봐. 비룡당이 실종된 곳도 그 근처라고 했거든."

불문객잔.... 들어본 기억이 있다. 맹휘가 환한 얼굴로 인사했다.

"고마워, 누님!"

그러곤 벌떡 일어나 포권을 취하더니 갈색 명마에 올라탄 채 달려 나갔다.

이를 본 맹원원은 멍해진 얼굴로 저 녀석, 정말 진심이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아, 맞다. 근데 실종된 당원이 수십이 넘는다는 말을 까먹었네. 잘해 봐, 맹휘. 죽을지도 모르지만."

맹원원이 사랑스러운 얼굴로 활짝 웃는다. 그야말로 맑은 눈의 광인.

"갈래."

쿵, 쿵! 그녀의 말에 보좌 왕우가 저보다 작은 백마를 이끌고 다가온다. 그러곤 무릎을 꿇어 손바닥을 받쳐 그녀를 올려 태웠다.

이내 일어나 말의 고삐를 붙잡고 고개 돌려 그녀를 살폈다.

어디로 가냐는 얘기.

맹원원은 아주 짧은 고민 끝에 씨익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칠소궁. 누군지 궁금해졌어."

그녀의 다음 행선지가 정해졌다.

* * *

한편 맹원원이 그리 궁금해하는 장이서는.

"쓰으으으읍, 하아."

두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린 채 변태처럼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살짝 비릿하면서도 가슴 속이 풍성해지고 아량이 넓어질 것 같은 이 냄새, 돈 냄새.

"좋다. 좋아."

그렇게 실컷 향을 음미한 뒤, 슬쩍 눈을 뜨자 푸른 안개가 어른거리는 공동 안에 엄청난 금은보화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천마고(天魔庫).

마침내 이곳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뇌전법과 백뢰를 얻게 된 기연의 장소!

그뿐이 아니다.

이곳엔 장이서가 방첩대 생활을 하며 십 년 넘게 모아둔 온갖 재물이 가득했다.

산처럼 쌓인 은과 금. 그리고 하나하나가 혀를 내두르는 명장의 무기들. 봐도 봐도 압도적인 물량이다.

그저 남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

하나 오늘 볼일은 이쪽이 아니었다.

"오랜만이다."

공동 안쪽에 자리한 커다랗고도 신묘한 벽.

뇌전법을 익히고도 그동안 구천 번이 넘는 시도에도 단 한 번을 개문에 성공하지 못했던 바로 그곳.

마귀의 얼굴이 새겨진 마벽이었다.

87.

#천마고의 전인 (1)

장이서는 확신했다.

"이번에도 열지 못하면 앞으로도 쉽지 않을 거다."

지금 자신은 절정 초입의 단계.

과거 혼탁한 내기로 일류에 불과했던 때와는 달랐다.

그야말로 일취월장한 상태.

하지만 천마는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했다.

바꿔 말하자면 지금이 생에 가장 강한 순간일 수도 있다는 얘기.

덜컥 돌무더기가 떨어진 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진다.

하나 장이서는 적진에서 십수 년을 살아온 암각 최고의 요원이다.

"절망은 아직이다. 할 수 있는 것 다 해보고 해도 늦지 않아."

이 정도에 주눅 들면 그가 아니다.

그리고 뇌전법이라는 기상천외한 사술을 남겨놓은 전인이 절대로 아무거나 남겨뒀을 리는 없을 것이다.

"후...."

장이서는 깊이 심호흡을 뱉고는 벽으로부터 십여 보 떨어진 지점에 우뚝 섰다. 그러곤 오른쪽 어깨를 풀며 중얼거렸다.

"오늘로 구천팔백칠십... 됐다. 몇 번째든 오늘로 끝내주마."

장이서가 눈매를 굳히곤 왼손으로 목표를 잡고, 오른손은 뒤로 빼냈다.

그리고 아주 작게. 소리 없이 숨을 조금 들이마셨다가 호흡을 멈추는 그 순간.

『백뢰(白雷)』

눈이 번쩍 떠지며 우수가 뻗쳐졌다.

쐐애애액, 콱!

그리고 정확히 벽 중앙 홈에 날아든 비도가 꽂힌다. 과거와 달리 안정된 내기로 이젠 백발백중.

이어 비도와 완갑 사이에 이어진 쇠 끈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장이서는 단숨에 내기를 발출했다.

우우웅!

그러자 백색 무복이 펄럭이고, 그의 눈매는 더 강렬해진다.

그리고 서서히 풍겨 나오는 지독한 마기.

과거 탁하기만 했던 일류의 내기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지 차이.

하나 이는 시작일 뿐이다.

『뇌전법(雷轉法)』

파직! 파지지직!

장이서의 몸에서 유유히 흘러가던 내기가 단숨에 벼락으로 변해 대주천을 끝냈다. 이내 눈에선 흑광이 뿜어지고, 전신에는 전류가 꿈틀거렸다.

그야말로 뇌신(雷神)의 현현!

콰아아앙!

이내 내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리자 어느덧 벽면에는 마귀의 얼굴이 검은 광채를 뿜어내며 채워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경이적일 만큼 엄청난 속도.

3할.

5할.

7할.

9할.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마귀의 두 눈에 점안을 찍는 그 순간.

쿠구구구구!

거대한 진동과 함께 마벽이 두 쪽으로 갈라지며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본 장이서는 활짝 트인 얼굴로 소리쳤다.

"됐다!"

촤르르르륵! 백뢰를 회수함과 동시에 희열에 젖었다. 불끈 쥔 주먹이 파르르 떨린다.

대체 이게 얼마 만인가.

자그마치 7년 동안 9천 번이 넘는 도전을 행했다.

한데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마벽을 드디어 함락시킨 것이다.

쿠웅!

패배를 시인하듯 짙은 떨림과 함께 드디어 마벽은 완전히 개문했다.

그리고 나타난 두 번째 공동.

장이서는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레 한 걸음씩 나아갔다.

걸으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의문들이 새삼 다시 떠오른다.

도대체 이 뇌전법을 남긴 전인은 누구였을까.

천산에 있으니 당연히 마교 사람이겠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도대체 뭣 때문에 이렇게 지하 깊숙한 곳에 꼭꼭 숨겨둔단 말인가. 그것도 우물에 비밀 통로까지 만들어서.

심지어 구(舊) 호룡당 초소에 있던 우물은 천마전으로 이어졌었다.

혹 당시의 천마가 심심하기라도 했나?

모르겠다. 하나 확실한 건.

"이건...."

전인의 안배는 뇌전법이 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벽에 새겨진 글귀 중 첫머리의 세 글자.

[조화술(造化術)]

이 안엔 그가 남겨놓은 또 하나의 기공(奇功)이 존재했다.

장이서는 그 순간 두 가지를 깨달았다.

"나한텐 아직 강해질 방법이 있다."

천마의 말대로 지금이 절대 한계치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암어를 다 풀어낸다면 말이지."

이곳을 만든 전인은 이전에도 그렇고, 친절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

첫머리를 제하곤 온통 이해할 수 없는 암어로 새겨진 글귀.

씨익, 장이서의 입꼬리가 올라섰다.

"얼마나 걸리든... 전부 해석해주마."

그렇게 전인과의 소통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

똑, 똑, 똑.

물방울 소리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일정하게 울린다.

이쯤 들으면 지겨워 미칠 법도 하거늘.

장이서는 들리지도 않는지, 돌 하나 움켜쥐고 바닥만 박박 그었다.

그리고 그 넓던 바닥은 빼곡하게 낙서해 놓은 것처럼 새하얀 글귀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가 꼬박 하루에 가까운 긴 시간 끝에 굽은 허리를 폈을 땐.

"후...."

마침내 저 지긋지긋한 암어의 해독이 모두 끝났다.

이는 암각 최고의 요원 장이서였기에 가능했던 일.

초췌해진 얼굴에 진심으로 미소가 서렸다.

이내 자신이 바닥에 적어둔 암호문과 비교해 가며 전인이 남긴 기문(奇文)을 벽에다 돌로 써 내리며 읽어나갔다.

[나는 한무영이다.]

처음이었다.

그에 대해서 알게 된 건. 그답게 짧지만, 묵직한 인사. 장이서가 포권을 취하며 답했다.

"장이서입니다."

고작 서로 이름 하나를 주고받은 것뿐이거늘, 묘하게 정감이 서렸다. 시간을 거슬러 이 자리에 서 있었을 전인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리고 이어진 글귀.

[천마는 신이다.]

피식. 허탈한 웃음이 뱉어졌다. 시대를 넘어 그들의 존재감은 변함이 없구나.

뭐, 이해는 간다. 지금의 천마도 딱히 인간으로 보이진 않으니.

한데.

[그리고 나는... 신을 죽였다.]

쿵! 장이서는 순간 넋을 잃었다.

대체 이게 무슨... 그럼!

"천마를... 죽였다?!"

그는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제 손으로 천마를 죽였다고.

[임무는 완수했다.]

심지어 누군가의 명을 받고서.

머릿속이 얼얼했다.

"당신도... 나와 같은 첩자였어...."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갔다.

뇌전법이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는 마공이어야 했던 이유.

곳곳에 암어가 가득하고, 천마전으로 향하는 비로가 존재했던 이유.

이 모든 건....

그가 천마를 죽이기 위해 투입된 첩자이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장이서는 다급히 정신을 차리곤 다시 암어를 해독했다.

그리고.

[하지만 해서는 안 될 임무였다.]

또다시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이제 오래지 않아 그가 동면을 깨고 나올 것이다.]

파르르 떨리는 동공.

[불사(不死)의 존재.]

그륵, 그륵. 툭.

장이서가 두 글자를 적고선 돌멩이를 떨어트렸다.

도저히 믿기 힘든 두 글자.

[혈존(血尊).]

그 악명 높은 혈교의 주인.

장이서는 입이 떡 벌어졌다.

감당하기 힘든 이름들이 연거푸 나온 탓이다.

차라리 아무개가 쓴 소설이라면 더 믿기가 쉽겠다.

"말이 안 되잖아. 전인이 천마를 죽였고, 천마를 죽이니까 혈존이 나타났다니."

무슨 산 넘어 산도 아니고, 중원의 안녕을 생각하면 실로 끔찍한 일.

더구나 지금으로서는 납득하기도 어려운 말이었다.

"일단 혈교 자체가 존재하지를 않는다고."

왜? 이미 멸망해 버렸으니까.

장이서는 빠르게 고개를 휘젓고 현실적으로 생각했다.

"말마따나 전인이 살던 시대가 언제인지도 모르잖아. 암어만 해도 구식이야. 종잡을 수 없는 상형문자지. 게다가 이곳을 아무도 몰랐다는 것도 그래. 최소 백 년은 더 전의 일일 거다."

그리 생각하니까 머릿속이 한결 편해진다.

분명 놀라운 비사이긴 하나,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를 일.

불사(不死)라는 말이 영 꺼림칙했으나, 괜히 호들갑 떨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전인인 한무영이 남긴 서신도 여기까지였다.

이 이후부터는 그가 남긴 조화술의 구결.

장이서는 고개를 휘저어 잡념을 터럭도 남기지 않고 털어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이 조화술을 익히는 거니까."

해야 할 일에 집중하자.

장이서는 다시 바닥의 돌멩이를 주웠다. 그리고 글귀와 암호문을 대조한다.

그윽, 그윽. 벽에 하나씩 새겨지는 구결들.

이윽고 다시 한참의 시간이 지나 벽면이 가득 채워지고 이를 두어 차례 더 읽어 내려갔을 때.

툭. 돌이 다시 바닥에 떨어지고, 장이서에겐 참오의 시간이 찾아들었다.

"...지금까지는 뇌전법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했다. 마오의 다다익권처럼 내기를 모아서 쓸 수도 없었고, 발출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왜? 너무 빠르니까."

그랬다. 마오에겐 천천히 운기하는 법부터 가르쳤지만, 정작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던 건 장이서였다.

뇌기의 속도가 빛처럼 빨라 다루질 못했기 때문.

하여 기의 성질을 뇌로 바꾸고, 소주천과 대주천을 속결(速結)할 수는 있어도 압도적인 위력을 선보이지는 못했다.

그나마 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건, 뇌기를 흡수하는 백뢰를 사용할 때 정도.

그리고 그건 전인도 같은 생각이었다.

"조화술의 구결에 따르면 뇌기는 의념으로도 쫓을 수 없다고 했다. 인위적인 힘으로는 자연의 기운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 바꿔 말해 이미 흘러간 기는 결단코 조종할 수 없다."

그래서 전인은 생각을 바꾸기로 하였다.

뇌기를 다루는 게 아니라, 원하는 곳에 유도하기로.

그리고 그 방법을 깨닫게 해준 것이 바로 백뢰였다.

"백뢰는 뇌기를 끌어당기는 성질을 지녔다. 해서 조금만 운기를 해도 알아서 스며들지. 날붙이만 남겨둔 것도, 그리고 이를 완갑에 넣어둔 것도. 조금이라도 방해 없이 뇌기를 축적하기 위해서야."

바꿔 말하자면, 제 알아서 뇌기가 모여든다는 것.

조화술은 바로 여기서 착안한 기공이었다.

"심법이란 내기를 다루는 운용법. 그런 의미로 보자면 조화술은 심법이지만 심법이 아니야. 내기를 다루는 게 아니니까. 조화술은 몸 안의 내재된 모든 기운을 다루는 비술이다."

그렇다. 이것이 전인이 조화술을 심법(心法)이 아닌 술(術)이라고 명명한 이유.

장이서는 왼손바닥을 펼친 뒤 앞으로 뻗었다. 그러곤 서서히 내공을 운기하며 말했다.

"조화술은 오랜 시간 내기를 쌓는 연공법이 아니다. 그저 몸 안의 기운들을 정교하게 다룰 수 있게 해주는 응용술이지. 하지만 뇌전법을 다루는 내겐 그 무엇보다도 훌륭한 심법이다."

우우웅!

장이서의 몸에서 내기가 용솟음친다. 그리고 천천히 손끝의 혈 자리로 이를 집중시켰다. 그러자 거뭇한 마기가 그의 손에 어른거렸다.

이것이 바로 일반적으로 기를 모으는 형태.

하지만 이를 뇌기로 바꾼다면.

『뇌전법(雷轉法)』

파지직! 모여 있던 손바닥의 내기가 단숨에 번쩍거리며 전신으로 흩어졌다.

"역시 일반적인 방법으로 뇌기를 모은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

장이서는 뇌전법을 흘려보내곤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구결에는 두 가지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는 음양의 기운으로 내기와 몸을 보호하는 기호공(氣護功). 그리고 두 번째가 몸 안에 자력을 발생시켜 원하는 곳에 뇌기가 모여들도록 하는 축전공(蓄電功)이다.'

그리고 장이서가 당장 큰 기대를 안고 있는 건 두 번째인 축전공이었다.

그것만 성공시킬 수 있다면, 뇌전법의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음양의 기운을 다루어야만 한다.

88.

#천마고의 전인 (2)

'사람의 몸은 미세한 개구리알처럼 수많은 기운이 존재한다. 오행과 음양은 기본이오, 이외에도 셀 수 없이 다양하다.'

하지만 어떻게.

대체 어떻게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생전 만져본 적도, 느껴본 적도 없는 음양의 기운을 그중에서 찾아내 다룰 수 있단 말인가.

"후...."

호흡을 뱉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전인은 불친절한 사람이다.

방법을 쉽게 전수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결코 거짓을 고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분명 찾아낼 방법이 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우우웅!

장이서가 운기를 시작했다.

단전에서 뿜어진 천마의 마기가 서서히 몸 안을 주유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육신을 이루는 수많은 기운이 느껴졌다.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

화(火)가 많은 자는 성미가 급하고, 수(水)가 강한 자는 유연하다. 목(木)을 많이 심은 자는 베푸는 성향을 더러 보인다.

어느 쪽이든 보통은 강한 기운이 있기 마련. 하여 이는 곧 그의 성질(性質)이 된다.

한데 장이서는....

혼돈(渾沌).

마치 오만 가지의 색상으로 이루어진 사막을 바라보듯.

셀 수 없이 많은 기운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 안에서 음양을 찾아낸다는 건 집채만 한 거인이 사막에서 모래 알갱이만 한 보석을 찾아내는 것과도 같은 일.

하지만 장이서는 구규지체로 오성과 감각이 종극에 달한 자다.

전인이 해냈다면 그도 해낼 수 있다.

거짓이 아니라면 찾아낼 수 있다.

느껴지는가? 아니.

그럼 다시.

느껴지는가? 아무것도.

그럼 다시.

그렇게 장이서는 조급함 없이 자신만의 세계에 점점 빠져들었다.

10번, 100번, 1,000번.

그리고 어느덧 무아지경에 빠져들었을 때.

문득 옛 기억 속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음양은 천지 만물을 이루는 근간이오, 흐름이니라. 때로는 대립하나, 때로는 공존하며, 어느덧 조화와 평형이 유지되니 그것이 곧 우주이리라.'

검 한 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 떠나갔던 자.

정파의 최고 어른인 신주오절 중 하나이자, 중리성(中理星)으로 불리는 자.

무당파의 원로이자 현 무림맹주인 현청진인이 했던 말이었다.

왜 잊고 있던 그의 말이 갑자기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장이서는 이 순간 홀린 듯 그가 했던 말을 체감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먼저 느끼고 있었기에 가장 먼저 그의 말이 떠오른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 무엇이 먼저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지금 장이서의 몸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립과 공존. 낮과 밤이 서로를 밀어내고, 또 서로를 당기듯. 양에서 음으로. 다시 음에서 양으로. 하나이자 둘인, 둘이자 하나인. 서로에게 상호 반응하는 그것이 바로....'

음양(陰陽)이다.

콰앙!

내면에서 폭음이 울리고 두둥실 떠오른 장이서의 등 뒤로 무형의 고리 하나가 커다랗게 자리매김했다가 사라졌다.

흑백으로 이루어진 태극의 고리.

아마 이를 무당의 원로인 무림맹주가 봤다면 그를 마교로 보낸 걸 땅을 치고 후회했을 거였다.

장이서는 이때 인지하지 못했지만, 이는 도교에서도 전설 속에나 존재하는 단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었기 때문.

본디 도교 무학을 익히기 위해선 육신이 선기(仙氣)를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가 되어야 하는데, 이는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졌다.

하나는 오행을 받아들일 신체로 단련하는 오기조원(五氣朝元).

극양의 기운을 삼단전을 거쳐 정수리 백회혈로 보내는 삼화취정(三花聚頂).

그리고 마지막으로 음양의 이기(二氣)를 화합(和合)시켜 하나의 새로운 단일기(單一氣)로 안착하는 것이 바로 전설 속에 나오는 음양일원(陰陽一元)의 단계였다.

보통은 심공의 성취와 함께 자연스레 터득하는 것이었지만, 장이서가 고작 절정 초입에 불과함에도 오기조원과 삼화취정을 건너뛰고 단숨에 음양일원의 경계를 깨우친 것이다.

이는 전설 속 도교의 극상승 무공을 익힐 준비가 된 초월적 자질의 탄생이자, 섭혼술을 비롯한 그 어떤 귀령술(鬼靈術)에도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방패를 지니게 된 것과도 상통했다.

장이서라는 구규지체를 가진 비교 불가의 오성을 가진 존재가 조화술이라는 상식파괴의 비술을 익히는 과정에서 얻어낸 기적의 결과.

솨아아아-

어느새 고리는 흩어지고, 장이서는 다시금 바닥에 내려섰다.

이내 그의 눈이 스륵 떠졌다.

일전에도 깊이가 있는 눈매였으나, 지금은 마치 고승을 바라보듯 정제된 깊이가 담겨 있다.

"음...."

그리고 처음 뱉어진 말은 외마디의 침음이었다.

분명 음양의 기운을 찾았고, 이를 하나로 모아 그 안에 빨려 들어가듯 심취한 것까진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후로는 얼떨떨했다.

지금으로선 머리로 손과 발을 인지하듯, 음양의 기운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정도.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했다.

"할 수 있다."

조화술을 이루는 기호공과 축전공을 펼칠 수 있을 거라는 확신.

슥.

장이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 앞에 다시 우뚝 섰다.

그러곤 좌수를 앞으로 뻗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솨아아아-

이내 음양의 기운을 손바닥에 집중시키자 알 수 없는 느낌이 스멀스멀 몰려들었다.

따스하면서도 서늘한.

밝으면서도 어두운.

무어라 딱 잘라 표현하기 어려운 느낌.

이내 그 기운을 다시 둘로 나누었다.

한쪽은 양(陽). 그리고 다른 한쪽은 음(陰).

웅웅웅!

그러자 미약한 공명음과 함께 무언가를 빨아들이는 듯한 자력이 생성되었다.

"이것이 바로... 축전공...."

아마 잘은 모르지만, 전인인 한무영이 봤다면 뭐 이딴 새끼가 다 있냐며 기함을 터트렸을 것이다.

그만큼 거침없는 성공.

이제 남은 건 하나.

우우웅!

장이서의 단전에 천마의 마기가 선회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눈을 부릅뜸과 동시에.

『뇌전법(雷轉法)』

파직! 검은 광채가 번쩍하며 장내에 가득 퍼졌다.

"큭?!"

그리고 장이서는 신음을 터트리며 기함했다. 동시에 오른손으로 미쳐 날뛸 것만 같은 왼손 팔목을 척! 움켜쥐었다.

"이게 무슨...!"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결과.

지이이잉-!

왼손에 몰려든 뇌기가 엄청난 공명음과 함께 손바닥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뇌구(雷球)를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검은 전류가 번쩍이며 미친 듯이 회전하는 손바닥만 한 구체를.

그리고 그 힘은 장이서의 상상을 훨씬 더 상회할 만큼 강대했다. 삽시간에 단전의 내기가 빠져나가고, 손은 터져버릴 것처럼 꿀렁였다.

"크윽...!"

이대로는 정말 손이 터져버릴지도 모르는 상황.

"으아아아아아-!"

결국 장이서는 비명에 가까운 절규와 함께 벽에다 일장을 뻗어냈다.

파지지지직-!

그러자 막대한 전류가 터져나가는 음색과 함께.

꽈아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빛무리가 장내를 휘몰아쳤다.

"하아. 하아...."

잠시 후 장이서의 어깨는 축 늘어졌고, 모든 힘이 빠져나간 것처럼 단내 나는 숨이 뱉어졌다. 건드리면 그대로 쓰러질 것처럼 두 다리가 떨렸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지금 장이서의 모든 신경을 빼앗아 간 건 눈 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투두두둑.

마치 벽에 운석을 처박아 넣은 것처럼 오 장(15m) 길이로 움푹 파인 모습.

방금 일어난 일임을 알려주는 부스러져 내리는 흙더미.

이젠 진짜 믿어야겠다.

"천마를 죽인 게... 맞구나."

장이서는 황당함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 정도면 술(術)이 아니라 신공(神功)이다.

뇌기를 함축시키자 이런 말도 안 되는 위력이 나오다니.

"한무영... 도대체 당신 누굽니까."

그가 궁금했다.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도대체 누구기에. 어디서 온 자이기에.

도인처럼 음양의 기운을 다루고, 막대한 뇌기를 쏟아냈던 것인가.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천마고에 쌓아둔 금은보화라도 풀어 찾아내고 싶었다.

그의 흔적을.

"천마라면 혹 알지 않을까."

장이서의 머릿속에 진우광의 모습이 그려졌다.

아무도 몰랐던 구규지체의 치료법까지 알고 있을 만큼, 무에 있어선 광적일 정도로 박식한 존재.

진짜 그라면 뇌전법의 창시자이자 천마를 죽였다고 주장하는 한무영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쓸데없이 일 키우는 건 첩자인 내가 할 짓이 아니야."

더 나서면 안 된다.

힘을 가질수록 더욱더 조신해야 한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므로.

"한데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하나."

장이서가 다시금 움푹 파인 벽을 보며 픽 웃었다.

다시 말하지만 전인인 한무영은 실로 무심했다.

조화술이라는 이론은 담아두되, 이를 응용하는 법도, 그리하여 창안해낸 초식도. 아무것도 적어두지 않았다.

한마디로 조금 전 펼쳤던 구체는 장이서만의 초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일.

"축뢰환(築雷丸)이라고 하자."

그렇게 첫 번째 초식의 이름이 지어졌다.

장이서는 옷매무새를 다듬고 벽 앞에 섰다.

이미 훼손이 많이 되어 예를 갖추기도 송구하다.

하나 할 건 해야 할 일.

털썩. 장이서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

"본래라면 진즉 사제지간의 예를 올렸어야 했으나, 제 처지가 처지인지라. 상황이 다르지 않으셨을 테니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장이서는 무림맹의 인물이자 마교에 숨어든 첩자.

하여 이름도, 신분도 알 수 없는 이에게 구배지례를 올릴 순 없었다. 하나 이젠 그의 이름이 한무영임을 알게 되었고, 과거 천마를 죽이기 위해 투입된 첩자였음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최소한의 예는 갖추는 것이 옳다고 여기었다.

"죽을 때까지 감사함을 잊지 않겠습니다."

장이서는 그렇게 계수배(稽首拜)를 올리고 그를 마음으로나마 자신을 가르쳐 준 사부라 생각하게 되었다.

남은 건 평생 그 존함을 잊지 않고, 올바르게 힘을 사용하는 것뿐.

그렇게 장이서는 조화술이라는 새로운 비술을 터득한 채 천마고 밖으로 나섰다.

언제고 다시 마주할 그의 흔적을 고대하며.

* * *

- 마해산 천마전 정상.

천마전이 자리한 까마득한 절벽.

그 드높은 정상에 올라선 사내가 후면에 자리한 바다처럼 드넓은 호수를 내려다본다.

삼라만상을 다 깨우친 듯한 심해처럼 깊은 눈동자.

또렷한 이목구비. 날카로운 턱선.

사연마저 느껴지는 풍성한 백발.

뭐 하나쯤은 빠질 법도 하거늘.

실로 조각처럼 잘난 용모의 사내다.

믿을 게 그것 하나뿐이라면 그나마 위로가 되겠지만, 아쉽게도 그는 다른 것 역시 완벽했다.

세상을 뒤흔들만한 세력. 경천동지할 무공. 거기에 무려 고희(70살)를 넘긴 나이까지도.

하나 이 모든 불공평함이 허용되는 두 글자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천마다.

그렇다.

당대의 천마, 진우광.

바로 그였다.

그리고 홀연히 자릴 비운 그를 찾아 각기 흑과 백으로 통일한 복식의 두 사내가 등 뒤에 나타나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역시 여기 계셨군요."

"우사. 역시라니. 예견한 건 나이거늘. 역시 여기 계셨군요."

우사 흑야와 좌사 백야다.

진우광의 최측근이자 그보다도 전대에 활약했던 두 사람.

둘이 합하여 춘추가 200세를 넘어가니 그야말로 마교 역사의 산증인들이다.

89.

#칼과 친해지는 법

진우광은 그들의 등장에도 별다른 말 없이 반짝이는 호숫가를 살폈다.

이에 우사 흑야가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 아이에게 부쩍 관심을 두시기에, 올해는 여기 안 오실 줄 알았습니다."

좌사 백야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는다.

"그 아이?"

"있네. 교주님께서 직접 천마전으로 부른 아이. 내가 신패도 내려주었지."

"그런 일이 있었다고? 나는 모르는 일인데?"

"알면. 또 쪼르르 달려가 다 말하고 다니게?"

"허!"

백야가 개탄스럽다는 듯 숨을 뱉는다.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있었다니. 장이서. 그의 이야기다.

하나.

"더 볼 일 없는 아이다."

진우광은 칼같이 선을 그었다.

그가 보기에 장이서는 지금 올라와 있는 위치가 그의 한계였다.

그리고 천마는 더 올라오지도 못할 자를 계속 내려다보고 관심을 둘 만큼 자애로운 존재가 아니다.

"기개가 높고 패기도 있어 제법 쓸만해 보였는데.... 거기까지였나 보군요."

오히려 아쉬워하는 건 흑야였다. 그의 눈엔 현 후계들이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

'흐음, 교주님께서 눈여겨보신 아이 중엔 가장 나아 보였거늘.'

하나 그가 그렇게 정했다면 어쩔 수 없는 일.

흑야마저 관심을 싹 거두곤 화제를 바꿔 물었다.

"아직도 그분 생각이 나시는 겁니까."

진우광은 미약하게나마 픽 웃으며 반응을 보였다.

남들이 들으면 떠나간 연인이라도 떠올리는가 싶겠다.

하나 이곳은 마교. 그리고 그는 천마다.

그런 어수룩한 감정은 어울리지 않는 일.

진우광이 그리는 이는 그런 풋풋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도 강했고, 위압적이었으며, 또 그를 내려다볼 수 있는 유일한 절대자였다.

"어느덧 더는 올라갈 곳이 없으니 더욱더 생각이 나는구나. 지금의 나라면 이길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분께서 살아 돌아오신다고 해도, 지금의 지존을 이기진 못할 것입니다."

"후후, 그러한가."

좌사의 입바른 말에 진우광이 편안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말을 믿어서는 아니다.

어차피 그는 돌아올 수 없는 자.

성사될 수 없는 싸움에 미련을 덜기 위함일 뿐.

어느새 그의 동공이 흐려지고, 이젠 기억도 희미한 그의 뒷모습이 그려졌다.

'그래도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당신이 살아 돌아오면 꼭 한 번 겨루어 보고 싶군. 지금의 당신과 나. 누가 더 위에 있는지.'

진우광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어느 날 인사도 없이 사라져버린.

전대의 정점.

무영(無影)을 기리며.

* * *

- 천산북로 황야.

황야가 내려다보이는 어느 구릉 위.

수십에 달하는 백색 도포의 무사들을 뒤로한 채, 한 중년 여인이 벼랑 끝 놓인 의자에 앉아 있다.

복색이 참으로 특이한데 하얀 매처럼 깃털이 가득하고, 이마에는 녹색의 보석이 박혀 있었다.

이미 불혹이 훌쩍 넘었음에도 성숙함과 아름다움이 스며있고, 그사이 노련한 섬찟함도 담겼다.

그녀의 이름은 묘채경.

마교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이자 외교와 정보를 담당하는 비룡당(飛龍堂)의 당주였다.

그리고 고상하게 차나 마실 것 같은 그녀가 이런 험지에서 고운 이마를 찌푸리고 있는 이유는 하나.

'이 발칙한 것들. 대체 어디 숨어 있는 것이냐!'

최근 호룡당에서 공조를 요청해온 일 때문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철마적.

신강을 중심으로 한 북부 지역에서 활동하는 조직이었다.

'철마적? 별거 아닌 놈들이겠군요. 열흘. 아니, 사흘 안에 잡아드리죠. 그럼... 당주께선 뭘 해주실 건가요?'

처음 지대호에게 부탁받았을 땐 만만히 보고 큰소리친 게 사실이었다.

북방에서 날고 기는 일족도 아니고, 중원의 주요 세력도 아니고.

기껏해야 소일거리 받아먹듯 잡일이나 거들고 약탈하는 보잘것없는 도적들이라 생각했으니.

하지만....

꽈득.

그녀가 제 엄지손가락을 질끈 물었다. 이게 지금 심경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상황은 배배 꼬였고, 사흘 안에 잡겠다는 약속은 물 건너간 지 오래.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이란 말이냐.'

솔직히 마교에서 정보라면 제일로 꼽히는 그녀도 그들에 대해 알게 된 건 오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도 알아 가는 중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기껏해야 보잘것없는 마적단 아닌가.

하지만 알아낼수록 심상치 않음을 깨닫는 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놈들 손에 누가 당해?'

'오군장(五軍長)이라고 산왕가의 충신으로서....'

'네놈이 날 바보로 아는 것이냐?! 그걸 누가 모르느냐. 그럼 그때 죽었다는 게....'

'예. 그들의 소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엔 철마적이 아니라 일개 병졸로 참전했던 터라....'

'그걸 왜 이제 아는 것이야!'

'산왕가에서 이를 쉬쉬하였던 터라... 송구합니다.'

'쓸모없는 놈!'

꽈득.

그녀가 옛 생각에 또다시 제 엄지손가락을 물었다. 진작 알았다면 어쭙잖게 보내진 않았을 텐데.

그것만 아니었다면....

'감히 비룡당을 건드려? 이 씹어 죽일 것들.'

제 수하들이 사라지는 수모는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야말로 치욕 그 자체.

사실 이것만으로도 비룡당 혼자 수사할 게 아니라 오룡당 전체가 나서야 할 중대 문제였다.

하지만 묘채경의 자존심이 이를 허락지 않았다.

뭣보다 이 일의 최초 보고자가 장이서라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는 더더욱 그랬다.

"장이서... 이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놈."

생각만 해도 욕설이 내뱉어졌다.

2급귀 당주씩이나 되는 거물인 그녀가 도대체 무슨 원한이 있어 그를 원망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표정이나 어투를 보건대 하루 이틀 된 악연은 아니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 때문에라도 그녀는 직접 철마적을 도륙해야만 성이 풀릴 것 같았다.

아니, 최소한 놈들의 본거지라도 알아내야 했다.

그게 마지막 자존심이다.

"분명 놈들은 다시 나타날 것이다. 이토록 대범한 녀석들이라면 본교라는 가장 큰 먹잇감을 놓칠 리 없지. 그러니 미끼를 물 때까지 기다린다."

묘채경의 눈매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가 택한 방법은 대대적인 수색이 아니라 칼을 숨긴 채 조용히 기다리는 것.

천산으로 이어지는 열여덟 개의 마을과 관문에 당원들을 매복시켰다.

그리고.

"당주님!"

뒤쪽에서 희망찬 음색이 들려왔다.

그녀가 벌떡 일어나 돌아보자 백마를 타고 달려온 부관이 말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앞에 부복한 채 외쳤다.

"철마적을 찾았습니다!"

드디어... 미끼를 물었구나!

"어디냐!"

그녀의 굳어 있던 얼굴에 화색이 돌고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자 무관이 잔뜩 경직된 얼굴로 답했다.

"불문객잔 인근이옵니다. 그런데...."

"그런데?"

묘채경이 의문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에 부관은 참담한 목소리로 외쳤다.

"육공자께서 놈들에게 납치되셨다고 합니다!"

"뭐라고?!"

맹휘의 실종.

긴급 상황이 벌어졌다.

* * *

- 월하촌 칠소궁.

창공에 노을이 진다.

안 그래도 붉은 머리가 더 빨갛게 빛난다.

화가 잔뜩 난 얼굴도 마찬가지.

"이 자식이! 감히 내 뒤통수를 까?!"

마오의 이야기다. 그리고 화풀이 대상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 뚝 떼고 늠름하게 뻗은 창룡도였다.

친구 된 기념으로 그저 내기만 조금 흘려보냈을 뿐이거늘.

'하마터면 장이서까지 베어버릴 뻔했잖아!'

생각할수록 간담이 서늘했다. 이 정도면 요물 그 자체.

"잠깐. 이거 혹시 진짜 요괴 아니야?"

오! 획기적인 추론. 마오가 집게손가락을 제 턱에 가져갔다.

그러곤 쪼그려 앉아 칼을 바닥에 탕탕 두드리며 말했다.

"야. 말해 봐. 말해 보라고."

하지만 당연히 반응이 있을 리가.

"버티시겠다? 이래도?"

퉤퉤퉤! 마오가 치졸하게 칼날에 침을 뱉는다.

"이 새끼, 딱 걸렸어! 얼굴 점점 빨개지잖아."

노을빛이다.

"아니네."

금세 시들해진 마오가 입맛을 다셨다.

차라리 요괴면 낫지. 말이라도 섞게.

"잠깐. 말? 누가 그랬는데. 칼은 두들겨 패줘야 말을 듣는 거라고. 어, 맞아."

바로 그거다.

마오가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이내 정원 구석에 놓인 커다란 돌덩이에 시선이 꽂힌다. 거북이 등처럼 둥그런 암석. 아주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놈이다.

"으흐흐. 네가 아주 날 졸로 봤나 본데. 너 딱 걸렸어."

마오가 총총 달려가더니,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곤 두 다리 살짝 벌리고, 엉성한 자세로 그대로 암석에 후려쳤다.

부우우웅!

하지만 이는 칼을 조금이라도 다뤄봤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

왜냐하면.

까앙!

"크아악!"

튕기는 반동력에 팔만 죽어 나갈 테니 말이다.

심지어 벤 것도 아니고, 후렸으니 오죽하랴.

"나 죽어!"

처참하게 뒤로 나자빠진 마오는 바닥만 데구루루 굴렀다.

벼락 맞은 것처럼 찌르르 울리는 두 팔.

눈물도 살짝 고였다.

멀찍이서 오늘 공사를 마친 용태와 메기는 도련님 또 술 드셨냐며 낄낄대며 집으로 돌아갔다.

"으아아악! 이 개자식!"

간신히 눈물을 떨구고 주저앉은 마오는 씩씩대며 칼을 들어 올렸다.

마음 같아선 멀리 내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하지만 그 순간 장이서의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계속 쥐고 계십시오. 잘 때든, 깰 때든, 어디를 가든. 웬만해선 절대 놓지 마십시오. 우선 손이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럼 어느 순간 내 칼이 나한테 바라는 게 무언지 조금은 느껴지게 될 겁니다.'

젠장.

"도대체 얘가 나한테 바라는 게 뭔데. 아니, 친해지는 게 가능하긴 한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장이서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낱 쇠붙이 아닌가.

"하아...."

어느새 하늘은 어두워지고, 괜히 한숨만 늘어지게 나온다.

장이서도 없고.

차라리 어디 털어놓고 물을 곳이라도 있으면....

"공자님, 어디 불편하신가요?"

그때였다.

청량한 음색이 귓가에 시원하게 스며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미녀의 모습이 눈에 담겼다.

"루주...?"

취선루주 취홍란.

본래는 중원의 명망 높은 모용세가의 여식.

그녀가 바구니에 도시락을 싸 들고 찾아왔다.

*

"그러니까 장 보좌님께서 그 칼과 친해지라고 하셨다고요?"

"그렇다니까."

마오는 정원에 홍란과 마주 앉아 심통 맞은 얼굴로 과일을 우걱우걱 씹었다.

처음엔 그냥 하도 답답해서 속풀이나 할까 싶었던 건데.

그녀가 활짝 웃는 얼굴로 사근사근 말을 잘 받아주니, 속내가 술술 나온다.

"또 손에서 절대 놓지 말라더라고. 아주 이러다 똥 싸고 칼로 닦게 생겼어."

"푸훗."

"웃기지? 근데 진짜라니까. 미치겠다고."

"속상하시겠어요."

"어. 그리고 얘가 얼마나 까칠한 줄 알아? 내공만 넣으면 아주 미쳐 날뛰어요. 돌아버려. 장이서까지 베어버릴 뻔했다니까."

"정말요?"

"근데 이런 애랑 어떻게 친해지냐고. 장이서 말로는 계속 쥐고 있으면 뭐. 얘가 원하는 게 들린다나, 뭐라나."

마오는 별 기대 없이 한 말이지만, 홍란은 제법 진지하게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는 그녀도 어렴풋이나마 장이서의 말이 이해가 간 탓이었다.

모용세가는 오호십육국이 창궐했던 천 년도 더 된 시절부터 권세를 누린 뼈대 깊은 일족.

그래서 수많은 무공은 기본이고, 온갖 기물들도 가득했었다.

그중 기억에 가장 남는 건 조부가 사용한 파천필(破天筆)이라는 신병이기(神兵利器)였다.

'란아, 쥐어보겠느냐?'

유년 시절 조부는 그녀를 무릎에 앉히곤 고사리 같은 손에 파천필을 쥐여줬었다.

그러자 미묘한 떨림이 일었고, 조부는 크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었다.

'하하, 이 녀석은 란이 네가 마음에 쏙 드는가 보구나. 처음 내게 왔을 땐 그리도 무시하고 날뛰던 녀석이.'

그때는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되었다.

신물은 직접 주인을 택하며, 이후에도 오랜 시간 합을 맞춰야만, 비로소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90.

#오공녀 맹원원 (1)

"장 보좌님께서 하신 친해지라는 의미는... 창룡도의 말을 먼저 들어주라는 뜻이 아닐까요."

"루주 생각도 그렇지?! 역시, 이 자식 말할 줄 안다니까! 처음 쥘 때부터 느낌이 싸하더라고."

하하, 제 말은 그게 아니고요. 홍란이 당황한 듯 웃으며 다시 부언했다.

"칼의 언어는 점과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고도 하죠. 베고, 찌르고. 그때 생겨나는 칼날의 길이 곧 그들의 언어라는 얘기이죠."

정확히는 제 부친이자 가주였던 검성(劍聖) 모용학에게 들은 말이다.

"오...?!"

"그러니까 창룡도의 말을 들어주라는 건, 따라가 보라는 것 아닐까요? 칼날의 흐름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그럼 다음은 어디로 향할지 알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오오?!"

마오의 눈이 띠용했다.

충분히 일리 있는 말. 아무리 날뛴다고 해도 어떻게 움직이는지만 미리 안다면 멍청하게 끌려다닐 이유가 없다.

더 강하게 벨 수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이를 알고 방향을 틀 수도 있다.

그야말로 이 녀석을 다룰 수 있게 되는 것.

"부족한 제 생각일 뿐입니다."

"아니야. 그럴싸해. 루주 천잰데?!"

"감사합니다."

마오는 그녀를 새삼 다시 봤다. 겸손해하는 듯 보이지만,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전에 도살방 놈들이 쳐들어왔을 때 말이야."

흠칫. 취홍란은 갑작스러운 주제 전환에 다소 놀랐다.

너무 과하게 아는 척을 했나. 숨기는 게 적지 않은 터라 제 발이 저렸던 것.

"취선루에 갔던 놈들은 싹 다 죽어 있었지, 아마? 그중에 서열 3위도 있었다던데."

분명히 그랬다.

당시에는 다들 경황이 없어 쉬쉬 묻고 지나갔지만, 분명 도살방 서열 3위 색월 금화빈도 시체 중에 끼어 있었다. 그것도 참혹한 모습으로. 심지어 그녀는 마오도 알 만큼 이름난 고수.

"이거 수상한데. 가만 보면 평범한 루주가 아니잖아?"

마오가 삿대질하며 미간을 좁힌다. 취홍란은 굳어진 얼굴로 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

"평범하지 않다면 어떤...."

"평범하지 않은 루주겠지."

"...예?"

"왜. 뭐."

때론.... 마오의 단순함과 무관심은 상식을 파괴한다.

"그건 그거고. 루주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네. 이름이 취선란인가."

"홍란입니다."

"집은 어디야?"

"집이요?"

마오의 물음에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깜빡였다.

"왜. 설마 없어?"

그녀가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없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몸.

장이서는 언제고 자신이 꼭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가 봤자 받아주지 않을 테니까.'

처음에는 고된 그리움에 진정 어린 회포를 풀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파에서. 그것도 명예를 중시하는 모용세가에서. 실종된 막내딸이 마공을 익혀 돌아왔다면.... 그럼 받아줄 수 있을까?'

아니, 전혀.

분명 가문의 수치라 생각할 것이고, 단전을 폐한 뒤 사지의 힘줄을 잘라 내쫓을 게 뻔했다.

그리고 홍란은 절대 그런 일은 겪고 싶진 않았다.

고통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버림받는 슬픔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근데 요즘 둘이서 도대체 뭐 하고 다니는 거야?"

마오를 바라보자 아까 물은 건 더는 관심도 없다는 듯 딴청을 부리며 묻는다.

홍란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글쎄요. 장 보좌님께서 어디를 가시는지는 저도...."

"뭐래. 누굴 바보로 아나. 둘이 맨날 짝짜꿍하는 거 모를 줄 알아? 아버님께 받은 백인장의 인. 그거 쓰려고 한 거 아니야. 그래서 방까지 붙이고 다닌 거고."

"알고... 계셨습니까?"

홍란이 너무 놀라 제 입을 가렸다.

"여기서 백 걸음만 걸어가도 다 들리더라."

너무 요란스럽긴 했다. 홍란은 겸연쩍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죄송은 무슨. 어차피 말해도 난 잘 몰라. 그런 건 둘이 더 잘 알겠지. 그래서. 잘되고 있는 거고?"

홍란은 내심 크게 감탄했다.

'주인님에게 크게 의존하는 거겠지. 오히려 칠공자가 보좌의 눈치를 보게 하시다니. 역학 관계가 뒤바뀌었어. 고작 몇 달 만에....'

"마땅한 자들을 찾는 중입니다."

"아, 그래? 삼소궁에서 공개적으로 모집한다고 하던데."

"그건 대공자님께서 막으셔서...."

"그, 그래?"

"예. 하지만 어떻게든 찾아낼 겁니다."

"그래야 할 텐데...."

음. 마오가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잠겼다.

이런 모습도 있구나.

홍란의 입장에선 다소 놀라웠다. 그가 변해가고 있음은 알고 있었지만, 누구보다 망나니의 모습을 오래 봐왔기 때문.

"걱정되시나요?"

"걱정은 무슨. 그냥. 잘은 모르지만, 어쨌든 중요한 기회잖아. 세를 키운다는 거. 장이서나 루주는 열심히 발 벗고 나서는데. 나는 뭐.... 여기서 과일이나 씹어먹는 게 다니까."

마오가 멋쩍게 웃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녀석하고 얼른 친해져야지. 그럼 아마 장이서가 깜짝 놀라겠지? 우하하하!"

마오가 벌떡 일어나 창룡도를 휙휙 휘두른다.

'주인님께서 이 모습을 보셔야 하는데.'

그리고 취홍란은 대견하다는 듯 배시시 웃으며 그를 살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한 사람을 기다리며 오붓한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쿵, 쿵!

"음?"

일순 바깥에서 웅장한 굉음과 함께 대지가 울리기 시작했다.

"장이서?"

이에 마오가 반가움에 몸을 돌리고 달려 나가려는 그 순간.

콰아아앙-!

입구에서 폭음이 터지며 마오를 향해 커다란 돌덩이가 위협적으로 날아들었다.

"뭐, 뭐야!"

갑작스러운 상황에 방비도 못 하고 넋을 잃은 마오.

"공자님-!"

바로 그때 홍란이 빛살처럼 날아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콰아앙!

이내 굉음과 함께 엄청난 흙먼지가 사방을 뒤덮는다.

"루, 루주?!"

그리고 간신히 위협을 면한 마오는 제 앞에 서 있는 여인을 보며 기함했다.

흩날리는 새하얀 백발에 기다란 붉은 손톱.

그리고 시뻘겋게 변해버린 혈안.

그녀는 정말 평범한 루주가 아니었다.

'마귀할멈이었어!'

그냥 마공의 부작용이다.

"조심...하십시오."

홍란의 힘겨워 보이는 말에 마오는 그제야 다시 정신을 번쩍 차렸다.

날아든 돌덩이는 루주가 일장을 휘갈겨 처리했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쿠웅! 쿵!

다시금 굉음과 함께 대지가 울리고, 피어오르는 흙먼지 사이로 거대한 사내의 그림자가 드러났다.

아직 공사 중이던 문을 때려 부순 채 안으로 들어오는 무례한 불청객.

"...와, 왕우?!"

그의 이름은 왕우.

대거인으로 통하는 오공녀 보좌.

그리고 가라앉은 먼지 뒤로 활짝 웃으며 총총걸음으로 들어오는 소녀가 바로....

"여기가 칠소궁이구나."

소소마륜(笑笑魔輪) 오공녀 맹원원이었다.

그녀가 칠소궁을 찾아왔다.

"마오, 오랜만."

칠공자 보좌 장이서.

바로 그를 만나기 위해.

"도대체 네가 왜 여길...."

"너라니. 누님이라고 불러야지."

"너 같은 애한테 누님은 무슨."

"그게 싫으면 칠공자 자리에서 내려와도 좋고."

맹원원은 활짝 웃고는 칠소궁을 둘러보며 살폈다. 그러곤 제 앞에 선 백발의 마녀, 취홍란을 보며 물었다.

"어머, 그쪽이 장이서? 사내가 아니라 여인이었어?"

그럴 리가. 하지만 진짜가 무엇이든 이젠 별로 중요치가 않아졌다.

"근데. 눈... 왜 그렇게 떠?"

취홍란이 내뿜는 지독한 살기에 맹원원의 기분이 팍 상했기 때문.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단지 홍란이 익힌 마공인 백백혈마공은 본래 그랬다.

한번 펼치면 일정 시간이 흐를 때까진 원래대로 돌아갈 수도 없거니와, 머릿속이 살의로 가득 채워졌다.

지금도 마찬가지.

"왕우."

문제는 맹원원이 이런 무례를 가만히 참고 넘어가 줄 위인이 아니라는 것.

그녀의 부름에 대거인 왕우가 육중한 무게로 쿵, 쿵. 앞으로 나섰다.

"야, 야! 뭔데. 지금 뭐 하려고!"

화들짝 놀란 마오가 뒷걸음질 치며 소리친다. 하나 이미 늦었다.

쐐애애애액!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왕우는 홍란을 향해 거대한 주먹을 쏘아냈다.

겉보기와 달리 엄청난 속도!

'루주가 마귀할멈이래도 이건 못 피해!'

마오가 다급함에 뛰쳐나가려는 순간.

서걱!

"음!"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펼쳐졌다.

왕우의 내뻗어진 팔목 위엔 백발의 마녀가 고양이처럼 올라타 있었고, 그의 팔에선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일격을 피해낸 것도 모자라 붉고 긴 손톱으로 그사이 세 번을 베어낸 것.

"너, 제법이구나?"

이에 맹원원의 입이 활짝 올라갔다. 하지만 마오는 안다. 저게 기분이 좋아서가 아니라 상대를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는 신호라는 것을.

'말려야 해. 저 미친년이 돌기라도 하면....'

잘 모르는 이들이 얼핏 볼 땐 맹원원이 순하고 맹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천만에. 마오가 보기에 가장 마(魔)에 어울리는 악녀가 바로 그녀였다.

맑은 눈을 하고서 아무렇지 않게 사람 간이고, 쓸개고 다 찢어놓는 마귀!

"지금 뭣들 하는 거야! 당장 그만...!"

마오가 중재하려 나서는 그 순간.

쉭! 그의 목 옆으로 톱날이 박힌 둥그런 륜(輪)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리고 크게 돌아 다시 주인의 손에 안착했다.

잔월륜(殘月輪).

맹원원이 교주로부터 받은 신물이다!

"마오야. 움직이면... 다음엔 머리 떨어진다?"

파르르. 저, 저, 저 미친년!

"너 진짜 제정신이야?!"

"걱정 마. 쟤 안 죽여. 팔다리만 잘라갈게."

그게 그거잖아! 마오의 이가 바득 갈렸다.

그리고 그사이 왕우와 취홍란의 격한 접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크아아아!"

왕우는 괴성을 내지르곤, 본격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아까보다도 훨씬 더 빠르고 강하다.

쾅! 콰앙! 쾅쾅쾅!

그저 바닥을 내려찍는 것뿐인데도 길고 큰 팔이 마치 기둥으로 휘갈기는 기분.

물론 그녀도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서걱!

"크아아아!"

정말 마귀라도 된 것처럼, 발걸음도 없이 잔상을 흩뿌리며 왕우를 상대해 나갔다.

아니, 이 정도면 확실히 그녀가 한 수 위다.

그러니 이를 본 맹원원과 마오가 놀라는 건 당연지사.

'쟤 뭐야? 뭔데. 저런 애가 있다는 말은 없었잖아!'

'마귀할멈은... 강해!'

이는 도살방 서열 3위 색월을 상대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경우였다.

당연한 얘기.

보좌란 직책은 대주보다도 높은 3급귀.

바꿔 말해 괴물이 아닌 자가 없다.

더 쉽게 말하자면 마교 공식 서열 100위를 지칭하는 일백마성(一百魔星)은 기본이라는 얘기!

"크아아아아아!"

한껏 수세에 몰리던 왕우가 끝내 고통의 포효를 터트렸다.

이미 전신에 새겨진 붉은 실선만 수백 개.

"루주, 대단하잖아!"

이에 마오는 주먹을 불끈 쥐고 승리를 예감했다.

하나, 그건 그만의 생각일 뿐.

"호호, 넌 정말 왕우가 질 거라고 생각하니?"

"뭔 소리야? 누가 봐도 지고 있고만."

"똑똑히 봐."

맹원원이 자신감 넘치는 콧소리로 단언했다.

이에 마오가 미간을 찌푸린 채 전방을 살피자.

'뭐야... 마귀할멈이 헐떡이고 있잖아.'

그랬다.

분명 공격을 쉴 새 없이 퍼부은 건 홍란이거늘, 정작 지친 건 왕우가 아니라 그녀였다.

91.

#오공녀 맹원원 (2)

더구나 상처가 많긴 해도 치명적인 중상도 없다.

깊이가 얕았다.

"웬만한 도검으로는 흠집도 못 내는 왕우의 몸을 저 정도로 베어낸 건 훌륭해. 하지만 그뿐이야. 내기도 제어 못 하는 저런 형편없는 무공으로 상대하겠다니. 너무 웃기지 않아?"

그걸 나한테 묻는 네가 더 웃기다! 마오는 인상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그로서는 맹원원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순 없었지만, 틀린 말 하나 없었다.

피부부터 근골까지. 괴물처럼 단단한 도검불침의 체구를 베어내기엔 그녀의 성취가 부족했던 것.

더구나 대성하지도 못한 백백혈마공을 장시간 펼치기엔 뒤틀리는 호흡이 따라가질 못했다.

그리고 이는 예견된 결과로 드러났다.

퍽!

수백 합을 겨루며 우세를 취하던 취홍란이 삽시간에 밀리기 시작하더니 끝내 복부에 일격이 꽂힌 것.

"악!"

그대로 허리가 새우등처럼 휘어지고, 혈안이 부릅떠졌다. 와당탕! 이내 별관까지 날아가 무력하게 쓰러지는 그녀.

"이봐, 괜찮아?!"

달려온 마오가 이빨을 꽉 물고 그녀를 안아 살폈다. 어느새 충혈되어 있던 두 눈과 백발이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온다.

"괜...찮습니다."

힘겹게 뱉어내는 음색. 마오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가 잇새로 새어 나왔다.

제게도 힘이 있었다면.

그랬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차라리 이 녀석이라도....'

마오가 제 손에 들린 창룡도를 물끄러미 살폈다.

회색빛 도면이 달빛을 머금곤 제게 속삭이는 듯한 기분.

제게 양기를 달라고. 저자들을 같이 육참골단 해버리자고.

두근, 두근.

가슴이 떨려옴과 동시에 손이 꽉 쥐어진다.

내공만 보내면... 그러면....

"거봐. 웃기지?"

바로 그때 맹원원이 해맑게 웃으며 상념을 깨웠다.

"젠장...."

이에 마오는 창룡도를 칼집에 넣어두곤 외쳤다.

"너... 진짜 미쳤어?"

"그래도 조금은 기대했는데. 뭐, 별거 없네."

"야!"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마오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하지만 그녀는 맑은 눈의 광인.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배시시 웃는다.

"그래도 제법이야. 보좌랑 단둘이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앙큼한 고양이처럼 몰래 세를 키우고 있었다니. 더 있으면 숨기지 말고 다 꺼내 봐. 오늘 왕우도 몸 좀 풀고 싶다는데."

"입 닥쳐! 너 내가 이거 그냥 넘어갈 거 같아?"

"안 넘어가면? 방법은 있고? 소용없어. 네 편 아무도 없잖아."

마오가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그래 맞다. 아무도 없다. 아니,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저벅, 저벅.

마오의 시선이 맹원원 뒤쪽에 있는 입구로 향했다. 이에 그녀도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이쪽을 향해 무심한 얼굴로 걸어오는 백색 무복의 사내. 지극히 평범한 관상이지만 볼수록 정이 가는 새끼.

"장이서...."

유일한 내 편.

"돌아왔습니다."

그가 귀환했다.

*

장이서는 펼쳐진 상황을 보곤 안도의 숨을 뱉었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큰일 날뻔했구나.

"그쪽이... 장이서?"

맹원원의 물음에 장이서는 힐긋 일별하곤 대꾸도 없이 걸어 들어왔다.

"하."

이에 그녀가 황당하다는 듯 헛숨을 뱉는다. 하나 장이서는 아랑곳없었다.

자릴 너무 오래 비웠단 생각에 불쑥 불안해져 쉬지 않고 달려왔거늘.

"괜찮으십니까?"

"장이서...."

어찌 된 게 자리만 비우면 이 모양인지.

비 맞은 개처럼 쳐다보는 마오에게 장이서는 이제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기대앉아 간신히 숨을 고르며 인사하는 취홍란을 바라보며 눈으로 말했다.

'애썼다. 쉬고 있어.'

'감사합니다, 주인님.'

보기만 해도 대략 상황은 알겠다.

이제 항변을 들어볼 차례. 장이서가 슥 고개를 돌리자, 맹원원이 입꼬리를 삐죽 올리며 인사했다.

"안 그렇게 생겼는데 성질이 고약하네. 반가워. 나 누군지 알지?"

왜 모르겠는가.

말 못 하는 바위만 한 사내와 말 많은 조막만 한 여아.

이리 대칭되는 조합은 그가 알기로 하나뿐이다.

맹가의 핏줄이자 맹휘에게는 사촌 누나가 되는 오공녀 맹원원.

'한데 대낮도 아니고.'

장이서는 슬쩍 고개를 들어 창공을 살폈다.

별이 아주 잘 보이는 밤이다. 한데 이 시간에 불쑥 찾아와 행패라니.

다친 홍란이나 대문이 부서져 있는 것만 봐도 좋은 의도는 절대 아니다.

이 정도면 오공녀가 칠소궁을 선공했다고 봐도 무방한 일.

'혹시 맹휘 때문인가?'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한동안 이곳에 머무르며 어울렸으니 그게 문제가 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이든 이건 상식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행위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맹원원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뭐가 말입니까."

"나 누군지 몰라?"

얼마나 더 알아야 하지. 장이서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자 옆으로 다가선 마오가 침을 꼴깍 삼키곤 최대한 소리 죽여 설명했다.

"오공녀야. 조심하는 게 좋아. 쟤 보통 아니니까. 오자마자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어놨어."

"마오야, 다 들려. 인사 좀 한 거 가지고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인사? 이게 인사냐?! 뻔뻔한 년!"

"년?"

맹원원의 눈빛이 서늘해진다. 딱 인사만 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우리 마오.

그녀의 시선이 뒤쪽에 앉아 있는 홍란에게 향했다.

"장이서, 네가 궁금해서 와 봤는데, 됐어. 오늘은 흥미가 식었어. 대신 나 저 계집 줘. 그럼 그냥 조용히 돌아가 줄게."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발언. 이게 지금 웃으면서 할 소리인가. 장이서의 눈살이 미약하게 찌푸려졌다.

어떤 유형인지 대충은 알겠다.

사람 이마에 등급표 붙여놓고 일정 이하는 인간 취급도 안 하는 안하무인.

방첩대 시절 장이서에게 1순위 정리 대상이던 전형적인 마교의 표본.

슬슬 피로가 느껴져 퉁명스레 말을 뱉었다.

"여기 오신 진짜 이유가 뭡니까."

"너 때문에 왔다고 말했는데. 흐응, 이제 보니 믿음이 없구나? 얼굴에 불신이 많아. 맹휘가 왜 그렇게 삐뚤어졌는지 이제 알겠어."

"제게 용건이 뭡니까."

다시 한번 싸늘하게 통보하자 맹원원은 여전히 웃는 표정 그대로 읊조렸다.

"맹휘하고 친했다며."

역시 그 때문인가. 장이서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문제가 됩니까?"

"되지. 애가 너무 변했어. 이젠 맹가랑 연을 끊겠다고 하더라고."

맹휘가? 장이서와 마오의 얼굴이 동시에 변했다.

금방 온다고 하고 떠나더니 본가에 가서 그런 짓을....

대체 왜.

"왜겠어. 헛바람이 든 거지. 원래 심성이 약한 애잖아. 백부님은 아직도 그런 애가 소교주 위에 오를 수 있다고 믿고 계시니. 부자가 참 바보 같아. 안 그래?"

맹원원은 키득거리며 혼자 조소를 짓더니 자연스레 말을 이어 나갔다.

"근데 고작 너 때문에 걔가 다 포기한 걸 알면 백부님이 얼마나 화나실까? 아마 가만 안 두실 거야. 삼족을 멸하고도 남을걸? 아, 너무 걱정은 마. 아직 네 얘기는 안 했으니까."

"야, 이 씨! 그딴 억지가 어디 있어! 맹휘 그 꼬맹이랑 장이서랑 뭔 상관인데!"

"상관이 왜 없어? 맹휘 입으로 똑똑히 장이서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뭐? 야, 이 사기꾼 새끼들아! 너희 돌아가면서 아주 작정하고 온 거지. 어? 어디서 약을 팔아!"

마오가 노발대발하자 장이서는 고개를 저어 말리곤 차분히 물었다.

"그래서. 육공자님을 설득이라도 해달라는 겁니까?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아니?"

음?

"포기하라고 해."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다 모인 자리에서 날 지지한다고 선언하라고 해. 한 가문에 후계가 둘이나 있는 건 아무래도 보기가 좀 그렇잖아? 집중도 잘 안되고."

하, 이것 때문이었나.

권력 투쟁이다. 맹휘를 위하는 척하지만, 실상은 누구보다 적대하고 있던 것.

"애초에 할 맘도 없는 걔보단 내가 낫지 않겠어?"

맹휘의 삶이 어땠을지도 빤히 상상이 갔다. 왜 그렇게 심약한 아이가 되었는지도.

태어났을 때부터 주변에 저런 독사들이 기웃거렸을 테니 오죽하겠는가.

"왜 접니까. 그리 싫으셨으면 육공자님께 직접 얘기했어도 될 일을."

"흐음, 걔가 널 잘 따르는 거 같더라고. 원래 좋아하는 사람이 상처 주면 더 아프잖아. 후후."

고작 그런 이유로?

장이서와 마오는 활짝 웃는 맹원원을 보며 썩은 뱀을 삼킨 것처럼 역겨움을 느꼈다.

"어때. 쉽지? 거절은 안 듣는 거로 할게. 그럼 내가 상처받을 것 같거든. 그건 속상해서 싫어."

맹원원이 슬쩍 눈짓하자 쿵, 쿵! 거구의 남자 왕우가 듬직하게 앞으로 다가선다.

거절하는 순간 힘으로 보여주겠다는 무언의 협박.

"장이서...."

마오가 난색을 드러낸다.

그럴 만도 하다.

아무리 이쪽에 문외한인 마오라고 해도 왕우의 명성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말이 있다.

'설산에 설인이 있다면, 맹가엔 왕우가 있다.'

한마디로 맹가에 사는 괴물 그 자체.

태어났을 때부터 삐뚤빼뚤한 이빨에 잘려 나간 혓바닥.

그리고 다리보다 긴 팔과 상상을 넘어서는 괴력.

그것이 바로 대거인 왕우였다.

일백마성에 오르게 된 경위도 유명했는데, 맹가의 식객이 된 광검나찰(光劍羅刹)이 노비 실력 한번 보겠다고 시비를 건 게 이유였다.

처음엔 왕우가 바보처럼 서서 그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가 싶었지만, 싸워도 된다는 삼장로의 허락이 떨어진 순간.

'크아아아악!'

단 일격에 기둥 같은 팔로 정수리를 내리찍어 싸움을 종결시켰다.

즉사(卽死).

무려 일백마성이었던 광검나찰을 단 일격에 죽여버린 것이다.

"왜 대답이 없어? 물었으면 대답해 주는 게 예의 아닌가?"

맹원원이 다시금 웃으며 재촉해 오자, 마오가 뭐 씹은 얼굴로 포기하듯 속삭였다.

"장이서. 일단 알겠다고 해. 알겠다고 하고 시간부터 벌자. 내일도 해는 떠야지. 그래야 뭐라도 하지."

"그러길 바라십니까?"

"어?"

"칠공자님께서 힘을 기르고 싶은 이유. 이런 일에 더는 휘둘리고 싶지 않아서 아니었습니까?"

"아니, 그건 맞는데...."

"칠공자님이 없어도 내일 해는 뜹니다. 하지만 오늘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겁니다."

장이서의 비수 같은 말에 가슴이 움찔했다.

다시 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

"내일 말고 오늘. 지금 칠공자님이 원하시는 게 뭡니까."

내가 원하는 거...?

마오는 제 손에 들린 창룡도를 내려 살폈다.

'....'

이유 없는 희생이 싫다. 끌려다니기 싫다. 당하기만 하는 건 너무 억울하다. 마이신이고, 오공녀고. 이 개자식들 죽도록 패주고 싶을 만큼 밉다.

하지만....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지금 당장 힘이 없는데...."

"언제는 있었답니까?"

"야, 이 씨!"

"천하엔 강한 자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럼 그들을 만날 때마다 계속 물러서실 겁니까? 그런다고 뭐가 바뀌던가요. 아뇨. 이건 시작일 뿐입니다. 칠공자님이 벼랑 밑으로 떨어질 때까진 누구도 멈추지 않을 겁니다."

마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구구절절 맞는 말. 직접 겪어봤기에 더 크게 느껴진다.

마이신의 뜻대로 고개를 조아렸고, 입을 다물고 살았다.

이게 할 수 있는 최선이라며 위로했고, 누가 더 다치지 않았음에 감사했다.

하지만 그게 진심이었을까.

천만에.

열불이 터지고, 피눈물이 흘렀다.

마이신은 멈추지 않았고, 장이서도, 월하촌 사람들도 죽을 뻔했다.

그러니까.

"장이서, 이제 나 알겠어. 물러서는 게 능사가 아님을. 진짜 최선은...."

마오가 결의에 찬 눈으로 칼끝을 척 앞으로 겨누며 말했다.

"오늘 죽더라도 다 내 손으로 작살내는 거야-! 맹원원. 너부터 죽여 주마!"

"쟤, 지금 뭐라는 거니?"

칼 내려.

그거 아니야.

92.

#오공녀 맹원원 (3)

장이서는 씩씩대는 마오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애가 단순해서 좋긴 한데, '적당히'를 몰라.

황당함에 얼어붙은 오공녀를 뒤로하고, 마오에게 담담히 말했다.

"칠공자님. 지금 그 마음 꼭 기억하십시오. 때로는 깨질지언정 부딪칠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마음. 그리고 싸워야 한다면 반드시 이기겠다는 마음. 그게 시작인 겁니다."

"마음...?"

"예. 우선은 그거면 됩니다. 그리고 칼은 내려두시고요. 이럴 땐 수하가 먼저 나서는 겁니다."

장이서가 다정히 웃으며 마오의 겨눈 칼을 누르듯 내렸다. 마치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어른처럼.

마오는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속 어딘가가 찌르르 울리고, 두 손은 꽉 쥐어졌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아까보다 내일에 대한 두려움이 한풀 꺾였다는 것.

"이길 수는 있고? 상대는 왕왕이랑 미친년이야."

왕우겠지.

"해봐야죠."

"안 되면 창룡도 봉인 해제할게."

"예, 제가 당하면 복수해 주십시오."

"시작해."

마오가 한 발 물러서고, 장이서는 한 발 나선다.

이에 맹원원은 못 볼 꼴을 본 사람처럼 헛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뭐라는 거야. 너희 장난하니? 빨리 대답이나 해! 어떡할 거야? 시키는 대로 할 거야?"

"...답변해 드리지요. 오공녀님께서 말씀하신 일들은 그 어느 것도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부서트린 칠소궁의 문과 여인에 대한 치료비 역시 맹가에 정식으로 요청하겠습니다."

"뭐어? 하하하하! 너 진짜 재밌구나. 왜 맹휘가 널 따랐는지 알겠어. 제 분수도 모르고 까부는 게 겁이 없잖아. 걔랑 다르게. 근데 어쩌지? 이러면 난 궁금해지는데. 정말 겁이 없는 건지. 아니면 겁날 만한 상황을 아직 못 겪어 본 건지 말이야."

맹원원이 고갯짓하자 쿵, 쿠웅! 굉음과 함께 장이서 머리 위에 짙은 그림자가 서렸다.

대거인 왕우.

그가 마주 선 것이다.

장이서는 위압적인 그의 기세를 온몸으로 받아넘기며 중얼거렸다.

"보좌 간의 공격은 후계 간의 전쟁을 의미합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깔깔깔! 전쟁도 급이 맞아야 하는 거지. 왜. 막상 붙으려니까 무서워? 너 7급귀 출신이라며. 한번 겪어봐. 위쪽 세계가 어느 정도인지. 왕우. 가르쳐 줘."

크어어어! 그녀의 명이 떨어진 그 순간, 왕우가 꽉 쥔 오른손을 머리 위로 크게 들어 올렸다. 어찌나 높이 올라가는지 지붕까지 닿을 기세.

그리고 어느새 몸과 일직선이 되는 순간.

부웅!

급속도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지는 것처럼 엄청난 위압감.

무엇보다도....

'빠르다!'

퍼억!

"자, 장이서!"

"장 보좌님!"

마오와 홍란이 소스라치며 외쳤다. 반면 맹원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소를 터트렸다.

"음...."

피할 줄 알았던 장이서가 그의 일격에 어깨를 허용하고 그대로 한쪽 무릎까지 꿇어버렸기 때문.

물론 두 팔을 교차로 올려 막아내긴 했지만, 어림없는 일.

이미 일그러진 표정만 봐도 얼마나 고통이 큰지 알만하다.

"뭐야. 고작 그거 하나 못 피할 정도였어? 그래 놓고 여태 그리 까분 거야? 재미없다, 장이서."

분통하지만 뭐라고 할 말이 없는 상황.

이에 마오가 창룡도를 움켜쥐고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이로써."

장이서의 입이 나지막이 열렸다.

"전쟁은 시작된 겁니다."

팟! 그와 동시에 떨어진 속도만큼 빠르게 왕우의 내려친 오른팔이 들어 올려졌다.

그리고 텅 빈 가슴에 꽂히는 장이서의 일장!

『철쇄장(鐵碎掌)』

빠악!

"크아악!"

주르륵! 왕우가 가슴을 붙잡은 채 일 장(3m)을 뒤로 밀려났다.

"와, 왕우?!"

맹원원의 눈이 화등잔처럼 활짝 떠졌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지금 제 보좌가 뒤로 밀린 것인가? 말도 안 돼. 하지만 바닥에 그려진 두 줄로 파인 흔적은 거짓이 아니다.

뭣보다도.

"지금부터 교리에 따라 오소궁은 적으로 간주. 제대로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진심이다. 장이서.

"웃기시네!"

이에 맹원원은 뇌리에 핑! 하고 이성이 끊어졌다.

제가 누군지 알면. 이 정도까지 말을 했으면.

그럼 그만 까불고 주제 것 길 줄 알아야지.

'너 뭘 믿고 까부니?'

속에서 열불이 활활 타오른다.

맹원원은 맑은 눈으로 또렷이 노려보며 당차게 말했다.

"왕우, 없애버려!"

그러자.

"크아아아아!"

왕우가 분노의 포효를 터트리며 부웅! 날아올랐다.

집채만 한 사내가 저런 도약력이라니. 보고도 믿기 힘든 일.

이내 장이서가 있던 자리에 그의 깍지 낀 두 주먹이 내리쳐졌다.

콰앙!

"큭?!"

이에 지축이 흔들리고, 부서진 땅에서 돌무더기가 솟아오른다.

졸지에 뒤에 서 있던 마오까지 여파가 일 정도.

맹원원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까보다 더 빠르고, 강해. 이번엔 못 견딜걸?'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장이서가 얌전히 맞아줬다면.

"아, 아니!"

맹원원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처참하게 고꾸라져 있어야 할 장이서가 왕우의 굽어진 등에 올라타 있었기 때문.

그것도 어느새 날카로운 단도 하나를 꺼내 든 채 말이다.

쐐애액!

이에 목덜미를 향해 떨어지는 칼끝.

진심이다. 진짜로 죽일 생각이다.

하지만.

카앙!

"음?"

도저히 사람의 피부에선 나올 수 없는 단단한 마찰음과 함께.

"크아아아아!"

왕우가 뒤로 손을 뻗어 장이서를 붙잡은 채 그대로 내던져버렸다.

촤아악!

다행히 꼴사나운 모습은 면하고 바닥에 착지한 장이서.

이내 손에 들린 단도를 바라보자 제대로 날이 상한 모습이 눈에 담겼다.

'도검불침인가?'

마가의 노군과 비슷하다. 어지간한 날붙이로는 실금 하나 만들기도 힘든 몸.

"왕우, 뭐 하고 있는 거야! 자꾸 이렇게 실망하게 할 거야? 빨리 없애 버리나니까?!"

"크으으...."

왕우는 낮게 침음을 뱉었다.

비록 말은 못 해도 그 역시 이성을 가진 존재.

특히 주인의 명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렇게 훈련된 존재였기에.

하지만 제 앞에 선 상대는 그렇게 쉽고 빠르게 없앨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너는... 강하다.'

왕우는 천성적으로 타고난 괴물.

그의 본능은 짐승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맹원원은 아직 미처 보지 못하고 있지만, 그의 눈엔 보였다.

장이서의 저 작은 몸 안에 엄청난 기운이 숨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깨어나면 자신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천마귀.

비록 그 이름까지 알 도리는 없지만, 왕우는 분명히 느꼈다.

하지만.

'너는... 아직 알에 불과하다. 깨어나지 않은 알.'

그러니까.

'내가 이긴다.'

"크아아아아아!"

왕우가 괴성과 함께 눈이 뒤집힌 채 무차별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이는 마치 폭주한 고릴라를 보는 것 같았다.

심지어 갈수록 그 힘과 속도는 더 강대해져 장이서의 움직임마저 따라잡기에 이르렀다.

"컥!"

옆구리를 허용 당한 장이서. 그대로 몸이 활처럼 휘고는 타액이 뱉어진다.

쾅! 쾅! 콰과과광!

한번 승기를 잡은 왕우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격을 퍼부었다.

"하하하! 그래, 그거야! 그거라고!"

맹원원은 신나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역시 별것도 없는 놈이었다. 그야말로 입만 산 놈.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다 죽어가는 장이서를 앞세워 맹휘를 협박하는 것도 괜찮겠다.

손이든, 발이든. 하나씩 잘라서 선물로 주면 좋아하겠지.

그렇게 맹원원이 섬찟한 상상을 하며 희희낙락했다.

'끝났다.'

그리고 왕우 역시 널브러진 장이서를 보며 확신했다.

이자는 더는 일어설 수 없다고.

해서 몸을 돌려세우는 순간.

"확실히... 강하네. 보좌들은 다 괴물이라더니."

장이서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에 웃던 맹원원도 돌아선 왕우도.

모두 얼굴에 짙은 그늘이 서렸다.

'어떻게 일어난 거지?'

왕우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분명 자신의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다.

한데 그걸 맞고도 멀쩡히 일어서다니.

허장성세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여태 그런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강한 자라도 제 공격을 이토록 순순히 견딘 자는 없었다.

한데 어떻게....

"장이서 미쳤어? 피해야지, 그걸 다 처맞고 있으면 어떡해!"

"아, 확인해 볼 게 있어서. 근데 두 번 견디긴 어렵겠군요."

"그걸 말이라고!"

마오와 장이서가 대화를 나눈다.

이를 들은 왕우는 기함했다.

'일부러 맞아준 거라고?'

점입가경이다. 기가 막혔다. 이런 허세는 재미도 없을뿐더러 화만 돋울 뿐.

하나 그의 말은 분명 사실이었다.

장이서는 천마고에서 익히고 한 번도 확인해 보지 못한 비술을 사용해 본 거였다.

조화술을 이용한 첫 번째 비술.

음양의 기운으로 내기와 몸을 보호하는 기호공(氣護功) 말이다.

'하마터면 당할 뻔했어. 기호공은 육신을 지켜주는 쪽보단 내력을 보호해주는 쪽에 더 가깝겠구나.'

내심 기대한 것은 마오의 철통방어였다.

제 머릿속에 자리 잡은 음양의 기운을 보내 타격을 상쇄시키려 했던 것.

하지만 어느 정도 상충은 되었어도 다 막아내진 못했다.

오히려 그보다는 안쪽에 더 효과가 있었다.

맞는 동안에도 일절 운기가 끊이지 않도록 천마의 마기를 보호해준 것.

"장이서, 힘들 것 같으면 말해. 도룡이 준비 완료다."

"시끄럽습니다."

장이서가 다시 앞으로 나선다.

이에 왕우 역시 진중한 얼굴로 그를 지그시 살폈다.

어떻게 버텨냈든 상관없다.

어차피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테니.

"크아아아아!"

왕우가 다시 포효를 내지르며, 부웅 떠올랐다.

그리고 떨어져 내림과 동시에 휘몰아치는 연격.

부웅! 부웅!

태풍이 일 듯이 곳곳에 강풍이 쏟아지고, 장이서 역시 이를 피해내며 반격을 가했다.

퍼퍼퍼퍽!

그야말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접전.

왕우는 생각했다.

'넌 강하다. 특히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은 최상위급. 여기에 내부를 관통하는 막대한 마기와 뒤지지 않는 속력까지. 하지만 아쉽게도 내 상대는 아니다. 이 정도 공격으로는 내게 아무런 충격도 줄 수 없다. 그러니까....'

어느새 구석으로 몰린 장이서.

그의 머리 위로 왕우의 깍지 낀 두 주먹이 번쩍 솟아올랐다.

'이기는 건 나다!'

"크아아아아아!"

괴성과 함께 천벌처럼 떨어져 내리는 두 주먹.

빠르다!

빠져나갈 길은 없고, 갈 곳은 오직 하나뿐.

파앗!

장이서가 벽을 박차고 그의 가슴에 일장을 내질렀다.

빠악!

그런데.

"음...!"

밀리지 않았다. 왕우는 우두커니 자리에 선 채 장이서를 내려 살폈다.

그러곤 오히려 예상했다는 듯 휙! 긴 팔로 장이서의 등허리를 감싸 안았다.

"자, 장이서!"

이어 번쩍 들어 올린 채 척추를 부숴버릴 것처럼 조이기 시작했다.

"큭!"

"깔깔깔! 잘했어! 부숴버려!"

승패가 갈렸다.

왕우의 두 주먹은 웬만한 장정의 허리보다 두껍고, 제 다리보다도 길었다.

그런 괴물 같은 두 손에 꼼짝없이 붙잡혔으니 빠져나갈 길은 없다.

이에 희비가 엇갈리고, 맹원원과 왕우는 승리를 확신했다.

한데.

척!

바로 그 순간, 장이서의 오른손 손바닥이 왕우의 가슴에 깃털처럼 얹어졌다.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93.

#이 정도로 강했나? (1)

다른 이들은 왕우의 거대한 몸에 가려 장이서가 보이지 않았으나, 그는 분명히 보았다.

'내 가슴에 손을 얹어? 이게 무슨 의미지? 살려달라는 항복 선언인가.'

전력을 다해 주먹을 휘갈겨도 봐줄까 말까인데 토닥여주는 수준이라니.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

한데 더 어이가 없는 건 그 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파직!

대뜸 마른하늘에 날벼락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축뢰환(築雷丸)』

콰지지직!

"크갸갸갸갸갸!"

손바닥에서 검은 뇌구(雷球)가 맹렬히 회전하며 제 몸을 갈가리 갈아버릴 듯 번쩍였다.

퍼억!

이내 끔찍한 타음과 함께 왕우가 한참을 날아가 넝마처럼 땅에 처박힌다.

눈, 코, 입. 모든 구멍에서 탄내와 함께 미약한 연기가 뿜어져 올라온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

이를 뒤에서 지켜보던 이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하나 놀란 건 당사자인 장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바로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조화술을 응용한 초식인 축뢰환.

이미 천마고에서도 느꼈지만, 실제 상대에게 써 보니 정말 보통이 아니었다.

움직임도 없이 그저 기운만 움직였을 뿐이거늘, 이만한 위력을 발휘하다니.

내력 소모가 큰 만큼 정말 효과가 확실했다.

'물론 자주 썼다간 내 몸부터 거덜 나겠지만.'

"장이서!"

"어, 어떻게...?"

한편 사태를 파악한 마오와 맹원원의 얼굴엔 다시 희비가 엇갈렸다.

마오는 감격에 겨워했고, 맹원원은 둔기로 뒤통수를 세게 후려 맞은 기분이었다.

왕우가 저렇게 볼썽사납게 나가떨어진 걸 본 적이 있던가. 아니, 살아생전 본 기억이 없다.

심지어 그가 내뱉었던 비명은....

'크갸갸갸갸갸!'

끔찍했어....

"너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거야?! 고작 7급귀 출신이라며. 근데 어떻게 왕우를...."

맞다. 7급귀 방첩대 삼조장. 하지만 그냥은 아니다.

장이서는 이제 일류가 아닌 절정. 그리고 혼탁한 잡기가 아닌 천마의 지고지순한 마기. 여기에 조화술을 익혀 위력적인 절초까지 손에 넣은 고수였다.

"크으으...."

잠깐 정신을 잃었던 왕우의 입에서 금세 신음이 뱉어졌다.

이를 본 장이서는 눈썹을 올렸다.

"그것까지 견뎌낼 줄은 몰랐는데."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왕우.

하나 장이서 눈엔 보였다. 이미 그의 육신은 한계에 다다랐음이.

당연한 일이다.

축뢰환은 단순히 외부에서만 타격을 주는 게 아니라, 뇌기로 속까지 뒤집어놓는 참혹한 무공이니.

단지 이는 의지의 문제였다. 제 주인을 두고 먼저 쓰러질 수 없다는 충신의 결의.

'그건 인정해 줘야겠군.'

장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마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왕우 또한 상대에 관한 생각을 정정했다.

'널 잘못 알았구나. 알을 깨지 못해 약한 게 아니라.... 알인 지금도 이미 강한 거였다. 너는 대체....'

떨렸다. 두려움을 느꼈다.

분명 저보다 강한 자들은 많다.

보좌 중에선 가장 약한 편이었고, 후계들과 당주. 외에도 장로들과 덜 알려진 고수들까지 생각하면 셀 것도 없는 일.

하나 이토록 끝이 짐작도 되지 않는 존재는 처음이었다.

도대체 그가 어디까지.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린 명에 죽고 사는 자. 아무리 네가 강하다고 해도 난 물러설 수 없다.'

왕우가 우뚝 선다.

그리고 장이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지는 높이 사겠다."

이윽고 뿔난 황소처럼 달려드는 왕우.

"크아아아아!"

바닥이 쿵쿵 울리고, 강풍이 몰아친다.

하지만 그래봤자 발악일 뿐.

장이서는 무심한 얼굴로 손바닥을 펼친 채 어깨를 뒤로 빼냈다.

다리는 어깨너비. 공력은 최대로.

"머, 멈춰!"

맹원원이 불길함을 느끼고 알 낳은 암탉처럼 소리친다.

하나 멈추기엔 이미 늦었다.

"크아아아아!"

왕우가 고함과 함께 장이서를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철쇄장(鐵碎掌)』

빠악!

장이서의 일장이 가차 없이 그의 가슴에 처박혔다.

"꺼어어어억!"

왕우가 비명과 함께 너풀거리며 날아간다.

쿠우우웅!

이내 바닥에 거대한 지진이 일며 쓰러졌다.

"너, 너...."

그야말로 일어나선 안 될 일이 벌어졌다.

갈려버린 승패.

오공녀 보좌인 대거인 왕우가.

일백마성인 그가.

칠공자 보좌에게 당했다. 그것도 일대일 대결에서. 아무런 암수도 없이.

"말도 안 돼...."

맹원원은 사색이 된 채 중얼거렸다. 하지만 말이 되고 말고는 그녀가 정하는 게 아니다.

장이서는 머리를 쓸어올리곤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아까 하던 얘기. 다시 시작해 볼까요?"

맹원원은 그 순간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아주 큰 잘못을 했다는 걸.

이곳에 절대 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

'장이서, 이 자식.... x나 멋있잖아!'

한편 마오는 장이서의 당당한 모습에 넋을 잃었다.

마이신 때도 이랬을까.

그때는 기절해 있던 터라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근데 아마 그랬을 것 같다. 그땐 저를 위해 화도 냈었으니까.

어쨌든 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이번으로 확실해졌다.

'내 보좌... 괜찮은데?'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나 일백마성인 왕우를 개박살 내놓는 모습이라니.

'근데 장이서가 원래 이 정도로 강했나?'

마오는 기뻐하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잘은 몰라도 분명히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뭔들 어때. 내 편인데.'

하나 그의 단순함은 불변의 법칙. 금세 히히거리며 활짝 웃었다.

물론, 이런 마오와 달리 똑같이 이를 지켜본 취홍란은 경악을 넘어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주인님이... 대체 얼마나 더 강해지신 거지?'

과거의 장이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물론 그때도 예상치 못한 신위를 보여주곤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류의 한계는 분명히 있었다.

게다가 상황을 뒤엎은 것도 어디까지나 빛살처럼 빨랐던 비수를 사용했을 때 얘기.

한데 지금은 그런 건 일절 사용치 않고, 맨손으로 상대를 제압했다.

그것도 도검불침의 오공녀 보좌 왕우를.

'이 정도면 마교뿐만 아니라 천하 어디에서도 주인님을 상대할 수 있는 자가 많지 않을 거야.'

이미 일백마성을 꺾었으니 마교에서 100위 안에 드는 건 당연지사.

여기에 정당한 대결이 아닌 생사를 건 싸움이라면....

'어쩌면 이미 당주급이라고 봐야 할지도....'

충분히 합리적인 생각이다.

그렇게 모두에게 경악을 선사한 장이서.

그리고 그중 가장 충격을 받은 건 당연히 오공녀 맹원원이었다.

"와, 왕우! 장난 그만해! 일어나!"

누가 봐도 장난은 아니다.

이미 왕우는 흰자위만 치켜뜬 채 혼절했다. 이건 흉내 내래도 하기 힘든 일.

"나 오공녀야! 오공녀, 맹원원! 너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맹원원은 제게 다가오는 장이서를 노려보며 고함질렀다.

이미 웃던 얼굴은 사라졌고, 팽팽한 피부엔 야차처럼 주름이 가득하다.

하나.

"무사?"

장이서는 숨김없이 서슬 퍼런 살기를 쏟아냈다.

"전쟁이라는 말뜻을 크게 잘못 알고 계신 모양인데. 이제부터 현명하게. 심사숙고해서 말하는 게 좋을 것이오."

"뭐, 뭐...? 너 지금 나한테 하대...."

"그럼. 곧 죽을 적한테 예라도 갖추길 바랐나?"

"이이익!"

맹원원이 이를 꽉 깨문 채 잔월륜을 세게 움켜쥐었다.

아무리 왕우가 당했다고 한들, 자신은 맹가의 혈통인 오공녀다.

한낱 아무개 보좌 따위가 막 대할 사람도 아니거니와, 일신의 무공 경지가 어디 가서 우습게 보일 수준도 당연히 아니다.

한데.

어째서.

'왜 떨리지?'

맹원원은 분통해하는 머리와 달리 간담이 서늘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상황.

하지만 더 혼란스러운 건 지금 장이서가 풍기는 기운이 매우 낯익다는 거였다.

어디서 이를 느꼈더라.

차가운 심해 속에 빠져 죽는 듯한 오싹하고도 서늘한 공포.

그녀는 분명 알고 있었다.

'이, 이건!'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어째서 자신의 두 다리가 덜덜 떨리고, 곧았던 두 눈이 사정없이 흔들리는지를.

'아버지...?'

천마 진우광.

자신이 경외하고, 유일하게 따르는 부친의 냄새였다.

만마를 굴종시키는 수컷의 향.

'도대체 너 따위가 어떻게 아버님의 기운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니다.

이대로면 꼼짝없이 당할 판국.

"내가 멍청히 당하고 있을 줄 알아?"

쉬이이익!

그녀의 손에서 잔월륜이 빛살처럼 날아갔다. 이내 서걱! 끔찍한 소음을 남기고 다시 부메랑처럼 돌아와 그녀의 손에 잡힌다.

그리고.

"어...?"

마오는 제 볼에 느껴지는 뜨거운 감촉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곤 비명을 내질렀다.

"으, 으아아악! 피, 피!"

피다. 그녀의 잔월륜이 볼을 베고 지나간 것이다.

"어때. 똑똑히 봤지? 전쟁이라며. 거기서 한 걸음만 더 오면 쟤 목이 날아갈 줄 알아. 네가 더 빠를까, 아니면 내 잔월륜이 더 빠를까. 판단은 알아서 해."

그녀가 또다시 출수할 것처럼 자세를 잡는다. 이내 내력이 흘러 들어가자 위이잉! 잔월륜의 바깥 면에 드러난 톱날이 쥐고만 있는 것임에도 맹렬한 속도로 회전했다.

그야말로 신물다운 기이함.

"이 치사한 자식아!"

마오가 분통함에 고함쳤다. 하나 이미 맹원원은 뵈는 거 없는 광인.

"시끄러워! 이번엔 네 목이야. 궁금하면 계속 까불어 보든지."

하. 장이서는 헛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찬찬히 끄덕였다.

맹원원의 말은 일말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다.

비록 어리긴 하나 그녀 역시 절정의 벽을 넘은 마교의 후계.

이리 쉽게 무너질 리가 없지.

"조용히 뒤로 물러서. 네 주인 죽는 거 보기 싫으면."

맹원원의 협박에 장이서가 고개를 끄덕이곤 뒤로 물러섰다.

이에 맹원원의 입가엔 활짝 미소가 피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이게 태생이 노예인 자들의 한계다. 제 주인의 목만 쥐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하찮은 것들.

이제 마오를 인질 삼아 빠져나가면 끝이다.

그런데.

"던져보든지."

장이서에게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뱉어졌다.

"어?"

"응?"

마오와 맹원원이 동시에 얼빠진 얼굴로 되묻는 그 순간. 장이서가 대뜸 오른손을 앞으로 쭉 뻗곤 이렇게 말했다.

"던지라고."

"이, 이게! 내가 못 던질 거 같아?"

맹원원이 소리를 빼액 질렀다. 그러곤 잡아든 륜을 뒤로 뻗었다. 위이잉! 칼날이 갈리는 소음과 함께 톱날은 더 빠르게 회전한다.

이대로 앞으로 내던지면 끝.

"야, 장이서. 이건 못 막을 거 같은데?!"

"압니다."

"아, 알아? 알면 이런 도발은 하면 안 되는 게 맞지 않나?"

"됩니다."

"돼? x발...?"

마오의 눈에 배신감이 가득 서린다. 하나 장이서는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싸움은 기세전.

그리고 그는 멍청하게 물러서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진짜 던진다? 칠공자 죽으면 알지? 보좌인 너도 죽는 거야!"

"그렇겠지. 근데 누가 더 빠를까."

"뭐?"

"우리 셋 중에 가장 먼저 죽는 거 말이야."

맹원원이 침을 꼴깍 삼키며 장이서를 힐긋 살폈다.

저를 향해 여유롭게 웃으며 손을 내밀고 있는 그를.

94.

#이 정도로 강했나? (2)

"허세 부리지 마!"

맹원원이 소리쳤다. 자신의 손에 들린 건 교주로부터 하사받은 신물 잔월륜이다.

거리상으로 보나, 속도로 보나.

자신이 마오를 죽이는 것보다 장이서가 더 빠를 순 없었다.

한마디로 마오가 무조건 먼저 죽는다는 얘기.

"그렇게 생각하면 던지시든지."

장이서가 마치 거대한 해룡이 숨어 있는 잔잔한 바다의 표면처럼 담담하게 말한다.

'도대체 뭘 믿고 저렇게 까부는 거야!'

맹원원은 속에서 열불이 치밀었다.

아무리 잘나봤자 후계를 위한 보좌 아닌가. 그것도 멍청이 칠공자 마오의 보좌.

'허세야. 저거 지금 날 가지고 노는 거라고. 죽인다. 다 죽여버릴 거야.'

맹원원의 눈에서 불똥이 튀고, 이내 륜을 움켜쥔 손가락에 힘줄이 돋았다.

그리고 내던지려는 그 순간.

핑!

맹원원의 동공이 새하얗게 변하곤, 머릿속에 하나의 장면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를 천마의 후계로 만들어준 근본이자 상단전이 일부 개방된 자들에게만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특권.

예지안(叡智眼).

극도로 불안한 감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잠시 후의 모습을 그려내게 한 것이다.

그리고 펼쳐진 이후의 장면은....

'죽어어어어-!'

악에 받친 목소리로 잔월륜을 날리는 자신.

그리고 이를 살 떨릴 만큼 서늘하게 바라보며.

『백뢰(白雷)』

번쩍!

오른손에서 검은 번개를 쏘아내는 장이서였다.

퍽!

그리고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뻥 뚫린 미간 사이로 흘러내리는 저의 피. 털썩. 뒤로 쓰러짐과 동시에 하늘로 뒤바뀌는 시야.

바로 제 죽음이었다.

즉사(卽死).

"헉!"

맹원원은 막힌 숨을 토해내며 현실로 되돌아왔다.

다시금 짙어지는 동공과 함께 살아 있다는 감각이 피부로 느껴진다.

이어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봤을 땐 그가 서 있었다. 단 일격에 자신을 절명 시킨 괴물 같은 흑뢰(黑雷)의 소유자.

"자, 장이서...."

맹원원은 냉골에 한참을 갇힌 사람처럼 바들바들 떨었다.

하관부터 팔, 다리, 심장. 어느 것 하나 떨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유는 하나.

'무서워....'

장이서가 너무도 무서웠다. 마치 거력을 숨긴 대마귀 같았다. 무엇보다도 진짜로 자신을 죽일 만큼 무자비한 그의 성정이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었다.

"안 할 건가?"

"힉!"

심지어 이젠 그냥 눈이 마주친 건데도 저를 집어삼킬 어두운 불꽃을 보는 기분이었다.

'장이서는... 괴물이야....'

그래, 맞다. 천마가 심장에 박아놓은 천마귀를 품은 괴물.

주제를 알았다면 그녀가 취해야 할 행동은 하나뿐.

챙그랑.

맹원원은 잔월륜을 떨어트리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전의 상실.

싸움은 끝났다. 아무리 후계라곤 하나 고작 열여섯에 불과한 맹원원이 상대하기엔 지금의 장이서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이는 그녀의 삶에 전환점이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모든 게 순탄했던 인생에 굴곡이 생기는 순간 말이다.

'잘 생각했다. 그걸 던지지 않은 게 네 목숨을 구한 것이니.'

장이서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오가 죽으면 제 임무도 끝.

뒤가 어찌 되든 당장 살리기 위해서라면 상대가 누구든 벤다. 그것이 지금의 결의였다.

그리고 무슨 이유인진 모르지만, 무기를 떨어트린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칠공자님."

멀뚱히 서 있는 마오를 불렀다.

"어, 왜."

"전쟁에서 이기면 전리품은 당연한 것. 이제 오공녀와 보좌의 목숨은 칠공자님께 달렸습니다."

"나?"

"예. 죽이라고 명하시면 둘의 목에 칼날이 그어질 것이고,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질 겁니다. 그리고 신음 한 번 내지 못한 채 허망한 죽음을 맞이하겠죠."

아니, 그걸 꼭 설명까지 해야 해? 장이서, 잔인하네. 마오가 머리를 긁적이는 사이 맹원원은 공포를 넘어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자, 어찌하시겠습니까?"

장이서의 살벌한 물음이 떨어졌다. 맹원원은 아이처럼 애처롭게 마오를 살폈고, 마오는 입맛을 다시며 가볍게 중얼거렸다.

"어떡하지. 그냥 놔줄까? 이 정도면 충분히 혼을 낸 것 같기도 하고. 뭐, 어쨌든 족보상으로는 누님인데, 죽이는 건 좀...."

"그건 옳은 처사가 아닙니다. 덤빈 건 저쪽인데 그냥 풀어준다는 건 우습게만 보일 뿐이니까요. 저희가 정파는 아니지 않습니까."

"당연히 아니지! 그래. 그럼 죽이자!"

"아니요. 그건 섣부른 판단입니다."

x발. 어떡하라고. 마오가 입맛을 다시자 장이서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오공녀님께 묻도록 하죠."

"어? 쟤한테?"

장이서는 눈매를 가지런히 늘어트리곤 맹원원을 살피며 물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먼저 선공을 취한 건 오소궁입니다. 게다가 밤은 늦었고, 숲은 조용하며, 여기엔 우리뿐이지요."

"그, 그게 왜...."

"누가 죽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입니다."

"히, 히익!"

맑던 두 눈이 공포에 젖어 완전히 무너졌다.

장이서는 내면에 웃음을 갈무리하곤 말했다.

"살고 싶습니까?"

"사, 살고 싶어! 살려줘!"

"살려드리면 뭘 해주실 겁니까."

그의 물음에 맹원원은 활짝 웃으며 다급히 대꾸했다.

"뭐, 뭐든지. 뭐든 다 줄게!"

"뭐든 말입니까?"

"어, 뭐든! 그러니까 살려줘. 일단 맹가로 돌아가면 내가 백부님께 말해서 꼭 네가 원하는 거 줄게. 돈이든, 뭐든. 응?"

맹원원이 울먹이며 바라보자 장이서가 한 걸음씩 다가와 그녀 앞에 섰다.

그러곤 나지막이 답했다.

"...좋습니다. 그럼 돌아가서 죽은 듯이 기다리십시오. 제가 다시 찾아갈 때까지. 아시겠습니까?"

섬찟한 살기에 맹원원은 사색이 된 채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 그래. 그럴게! 고마워!"

맹원원이 고맙다며 연신 호소한다. 이에 장이서는 됐다는 듯 뒤의 마오와 취홍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저 둘에게 사과하십시오."

"어? 어.... 왜지? 아, 아니야! 미안...."

맹원원이 다급히 사과하고 고개를 숙인다.

하나 그녀의 눈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원망이 서렸다.

'내가 왜 저딴 것들한테 사과해야 해? 오늘만 지나고 보자. 내가 받은 이 치욕 다 되갚아 줄 거야. 너희 다 가만두지 않을 거야!'

역시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녀는 속에서 칼을 박박 갈았다.

하나.

'맹원원. 순한 얼굴로 감추려 해도 네 본성은 못 숨긴다. 돌아가자마자 복수부터 꾀하려고 하겠지. 근데 그거 아나?'

그의 마음에 서늘한 미소가 피었다.

'가면 수십 개 쓴 구렁이들도 탈탈 털던 방첩대 악귀 조장이 바로 나 장이서다.'

동상이몽.

그녀는 절대 모를 것이다.

지금 자신이 발을 들인 장이서라는 늪이 얼마나 깊은지를.

장이서가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륜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단 믿음의 증표로 저것부터 받아두도록 하죠."

그녀가 오공녀임을 인정해 주는 증표이자 신물.

잔월륜이다.

"이런 법이 어디 있어!"

맹원원이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당연하다.

신물은 곧 교주의 자식임을 상징하는 신패.

이를 빼앗긴다는 건 목숨을 저당 잡히는 것과도 같은 일.

"제가 오공녀님을 어떻게 믿습니까. 나도 못 믿는데."

"아까 사과도 하래서 했잖아!"

"그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거고."

"믿어줘. 진짜야! 내가 거짓말할 사람으로 보여? 나, 그런 사람 아니야!"

오공녀가 울먹이며 순박한 눈으로 바라본다. 장이서는 골똘히 바라보다 답했다.

"칠공자님, 신물 챙기십시오."

"아, 안 돼!"

"안 되면 죽어야지."

스릉! 장이서가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냈다.

"히잉...."

맹원원의 눈에 결국 눈물이 고인다. 하나 어리광은 맹가에서나 통할 일.

마오는 슬금슬금 다가가 떨어진 잔월륜을 주워 들었다.

혹시 공격이라도 해올까 봐 창룡도를 휘휘 젓기도 했다.

하지만 맹원원은 그저 넋 놓고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제대로 기가 꺾인 것.

"당부드리는데 앞으로 육공자님께 혹여라도 무슨 일 생긴다면, 그건 전부 오공녀님께서 저지른 일로 알겠습니다. 그럼 그땐 저 신물은 다시 볼 생각하지 마십시오. 허튼수작도 허용 안 합니다. 복수? 꿈도 꾸지 마십시오. 우리 중 누구 하나라도 다치면 신물은 아무도 못 찾는 만리타향으로 보내버릴 테니."

"미, 미쳤어? 저거 교주님이 하사하신 거야!"

"그러니 동생분께 잘해주란 말입니다. 딴생각 품지 마시고."

"딴생각...?"

맹원원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물든다.

이미 철마적한테 보내버렸는데?!

그녀는 처음으로 동생에 대한 걱정이라는 걸 하게 되었다. 물론 제 안위를 위해서지만.

장이서가 그만 가보라는 듯 가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지, 집하촌!"

맹원원이 다급히 외친다. 이에 묵묵히 바라보던 취홍란과 잔월륜을 구경 중이던 마오. 그리고 돌아선 장이서까지.

모두가 의문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는 울먹이며 이렇게 말했다.

"맹휘... 혼자 거기로 갔어."

집하촌을? 거긴 왜.

"철마적 찾으러...."

장이서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 * *

맹원원과 왕우가 떠나간 뒤.

장이서와 홍란. 그리고 마오까지 세 사람은 별관 2층 집무실에 모였다.

이미 해가 완전히 저문 시각.

홍란은 산수화가 그려진 촛대 위에 불을 붙였다. 별다른 도구가 없는데도 손끝이 닿자 화륵 불꽃이 인다.

절정 상급 경지에 다다라야 펼칠 수 있다는 삼매진화(三昧眞火)의 묘리.

"이젠 숨기지도 않네."

예전 같으면 마오가 있어서 다른 수를 썼겠지만, 이미 들켜버린 일. 홍란이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자리에 앉았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철마적이 뭐. 설마 별일 있겠어? 그리고 맹가에서 움직이겠지. 기껏해야 마적 놈들 아니야."

마오가 먼저 탁자에 잔월륜을 턱 내려놓곤 입을 열었다.

철마적.

본 적도 없는데 참 무성히도 엮인다.

도살방 때부터 시작해 마의를 건너 이젠 맹휘까지.

하지만 인연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실은...."

홍란이 주저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에 장이서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답했다.

"전에 말씀드린 구유라는 자 말입니다."

"구유? 그게 뭔데."

"백인장의 인으로 저희 품에 거두려 했던 자입니다."

"뭐야. 그런 녀석도 있었어?"

마오의 물음에 홍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마오에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간략히 설명해 주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말했다.

"그 구유라는 자가... 아무래도 철마적을 이끄는 자인 듯합니다."

"뭐, 뭐야?"

"음...."

그녀의 말에 마오와 장이서 두 사람 다 놀랐다.

품으려 했던 구유가 철마적이라니.

"자세히 얘기해 봐."

"정확한 건 아니지만, 비룡당에서 최근 그 구유라는 자에 대해 수소문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당주의 명으로 워낙 대대적으로 움직인 터라 거짓은 절대 아닐 테고요."

"그렇군...."

지대호가 비룡당에게 협조를 요청했으니 시기적으로도 맞아떨어진다.

"한데 대대적으로 움직이다니. 당주가 그렇게 한가한 자는 아닐 텐데?"

"당원들이 당했다고 합니다."

"이런...."

사태가 커져 버렸구나.

95.

#집하촌으로

대략 상상이 간다.

당주인 묘채경은 남의 일이랍시고 대충 몇 명만 보냈을 거다. 하지만 상대는 산왕가의 오군장까지 없앤 실력자 구유.

추적하다가 도리어 당한 게 분명했다.

"아니, 잠깐. 근데 이러면 우리한텐 다행 아니야? 그런 위험한 애들 품었다가 아주 엿 될 뻔했잖아."

마오가 안도의 숨을 뱉으며 고개를 절절 젓는다.

뭐, 상황이 그렇게 되긴 했다.

솔직히 말해서 장이서 입장에선 비룡당을 죽였든 말든 그리 큰 상관은 없었다.

어쨌든 이곳은 마교.

자신도 언젠간 이들에게 칼을 들이밀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 해선 안 될 짓을 벌였다.

'미혼산은 건들지 말았어야 했다.'

미혼산은 무림인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반인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치는 독이었다.

이를 퍼트리는 건 정도인으로서 결단코 용서할 수 없는 일.

'하나 도대체 왜. 분명 그런 일을 벌일 자들로 보이진 않았거늘.'

그도 직접 본 게 아니고, 보고만 받은 것이니 실제와는 당연히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건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도살방과 손을 잡은 마적이 구유라니.

"근데 비룡당까지 당할 정도면... 꼬맹이도 혹시 위험한 거 아니야?"

마오가 생각할수록 걱정이 되는지 근심 어린 표정을 짓는다.

이에 장이서는 장고 끝에 결단을 내렸다.

"찾아가 보죠."

그들을 직접 만나보기로.

"진짜로?"

그들이 정말 같이 갈 만한 자들인지.

"왜 대답을 안 해!"

아니면 모두의 안녕을 위해 반드시 없애야 하는 자들인지.

"어디로 가는데?! 야! 장이서!"

알아봐야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