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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판타지 세계에 환생했다.

시간이 흘러 9살이 된 나는 냇가에서 와일드호그의 창자 조각을 열심히 닦고 있었다.

멧돼지를 닮은 몬스터인 와일드호그의 창자는 탄성이 뛰어나 이쪽 세계에선 피임기구로 애용됐다.

창자 조각을 잡아당기니 누릿하고 묽은 액체가 손 위로 주르륵 새어 나왔다.

자연히 입이 걸어졌다.

"하. 돌아버리겠네."

나는 판타지 세계에서.

매춘부 아들로 환생했다.

내가 아니야

1화

가끔씩 구멍 방향을 착각하면 이런 불상사가 생긴다.

손가락을 살며시 비비자 끈적이는 액체가 손아귀에 눌어붙었다.

참으로 좆같은 촉감에 어깨가 치솟으며 안면에 경기가 인다. 당장이라도 때려치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고 세척을 계속했다.

시간이 지나, 냇가 한켠에 마련해둔 간이 건조대에 와일드호그의 창자 조각을 늘어놓고 나서야 부들대는 입꼬리가 멈췄다.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은 채 줄줄 흘러가는 냇가를 바라본다.

"경치는 좋아."

이 세상의 나뭇잎은 반투명한 경우가 다수다.

낱개로 보면 지구 것과 크게 다를 게 없다만 이리 수목이 우거진 공간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수백 장의 나뭇잎이 하나의 프리즘처럼 작용해 햇살을 쪼갠다.

무지갯빛으로 나누어진 햇살이 이리저리 뒤섞여 지면에 내려앉는 풍경은, 지구에서보다 다채롭고 운치 있었다.

어둑어둑한 내 얼굴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왜 이렇게 됐더라."

전생. 그러니까 이 몸뚱어리로 환생하기 이전에 말이다.

전생의 나는 눈이 나쁜 탓인지 작은 글자를 읽다 보면 제자리에서도 멀미를 했다.

때문에 남들 다 스마트폰 보고 문화생활 즐길 때 모니터 큰 데스크톱 컴퓨터를 불가피하게 고집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불알 친구놈 하나와 여러 플랫폼의 아이디를 공유하게 됐다.

그 새끼는 스마트폰, 나는 컴퓨터. 대개의 경우 스마트폰과 컴퓨터는 중복 로그인과 동시 사용이 가능했기에 불편함 없이 반값으로 유료 컨탠츠를 즐길 수 있었다.

물론 부적절한 행위이긴 하다.

허나 이 정도 수위의 편법은... 다들 사용하며 살지 않나.

하여튼 그 새끼는 소설 읽는 걸 참 좋아하는 녀석이었고 더해서 힙스터 기질까지 갖춘 오타쿠였다.

'내가 이 소설의 김독자다!!'

시발년이 진짜.

'김독자'는 장르 소설계의 슈퍼 메가 히트작 '전지적 시점'의 주인공 이름이다.

특정 소설이 현실이 되어버린 세계관에서, 유일하게 특정 소설을 결말까지 읽었던 캐릭터다.

이 망할 자식은 본인 또한 김독자가 되고 싶다며 컨샙질을 시작했다.

70화를 넘어섰을 때 독자수가 한 자리로 떨어졌고, 150화부터는 그 새끼가 혼자 결제하며 보던 소설, '제국멸망기'.

이름부터 개쌉노잼처럼 보이는 그 소설을 그 새끼는 1000화가 넘게 따라갔다. 재밌어서 본 것도 아니고 컨샙질을 유지한다고 시간과 돈을 투자한 거다.

소설 회차만 1000화가 넘어가니 김독자 노릇만 3년 가까이 한 꼴이다.

그리 오래도 컨샙질을 했으니 소설 빙의 형벌 정도는 달게 받아야지.

문제는 그 대가를 그 새끼가 아니라 내가 대신 받았다는 거다.

"좆 돼버렸쥬?"

지구에서의 마지막 기억이 굉장히 흐릿한 탓에, 내가 소설 캐릭터에 '빙의'를 한 건지 이쪽 세계관에 '환생'을 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찌 됐든 나는, 지구에서의 기억을 지닌 채 판타지 세계에서 비교적 유복한 가정집의 갓난아기로 태어났었다.

태어났'었'다고.

"시발."

어쩌지. 입에서 욕설이 떨어지지 않아.

듣는 사람은 천박하다 한 소리 하겠다만 나랑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누구든 비슷한 반응을 보일 터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용돈 모아 시장 바닥에서 산 녹슨 검을 손에 쥐었다.

내 키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폼멜이 낡아 덜그럭거리지만 이게 내가 구할 수 있는 최고의 검이었다.

검을 빙글 돌리다 무게 중심이 흐트러져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허리를 굽혔다.

"역시 재능이 없어."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

전생의 이름은 한시현. 현생의 이름은 레이.

레이는 환생 직전 초월적인 존재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초월적인 존재는 당시 장르 소설 클리셰마냥 밉살맞게 아가리를 털어대지는 않았다.

단지 레이를 의식했고, 그 찰나의 마주침만으로 본인의 의지를 레이의 대가리에 강제로 쑤셔 넣었다.

문제는 격의 차이 때문에 상호교류가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레이는 속으로 '김독자는 내가 아니라 그 새끼라고 머저리 새끼야!'라고 외쳤지만 초월적인 존재에겐 뜻이 전달되지 않았다.

레이는 뒤늦게 웹소설 플랫폼 회원가입을 본인 명의로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후회했지만 너무도 뒤늦은 후회였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생의 기억을 지닌 갓난아기가 되어 있었다.

초월적인 존재가 환생에 개입해 레이의 기억을 보존시킨 이유는 실로 전형적이었다.

세계의 구원.

"응~ 이 세계는 좆됐어, 병신아."

뭐 쥐뿔이라도 아는 게 있어야 움직여보든 말든 하지.

레이는 김독자가 아니었다. 이 세계에 대해서 딱 쥐톨만큼 알았다.

김독자 컨샙의 불알친구가 옆에서 떠들었던 파편적인 지식이 끝이다. 정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을 정보였다.

멸망한 세계를 구하긴 개뿔,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처지였다.

대충 살다 대충 죽자.

레이는 그리 마음먹었으면서도 다 녹슨 검을 쥐고 냇가 가까이에 서 있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근본이 성실했던 한시현-레이-이었기에, 처음 각오처럼 대충만은 살지 못하고 있었다.

'날 이꼴로 만든 머저리 새끼가 환생 특전이라고 준 것들은...'

상태창 같은 건 없다.

대신 초월적 존재는 레이의 머리에 '기술' 혹은 '권능' 네 가지를 박아넣었다.

이름 모를 검술.

이름 모를 마나 정제법.

'해독'이라는 권능에 가까운 능력.

그리고 자살 방법 하나.

해독의 기초적인 쓰임새 중 하나는 자동 통역이다. 허나 응용 영역이 단순 통역만이 아님을 레이는 인지하고 있었다.

해독 덕분에 레이는 환생하자마자 한국어와 전혀 다른 언어를 이해할 수 있었다.

허나 쓸만한 건 해독 하나뿐, 검술과 마나 정제법은 계륵이었다.

"마나 연공법을 빼먹으면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마나 연공법으로 마나를 쌓고, 검술에 맞는 마나 정제법으로 마나를 제련하고, 검술로 발현한다.

이중 첫 스탭이 꼬여버렸으니 실력이 발전할 수가 없다.

초월적 존재가 쥐여준 검술 또한 고강한 무술이긴 했다만, 너무 고강해서 문제였다.

이도류를 기반으로 한 이 검술은 동작 대부분이 발재간과 구르기에 치중된, 검술이라기보단 회피술 혹은 도주술에 가까웠다.

그리 도망다니다 허공에 칼질을 촥촥하는 게 동작의 전부.

레이는 이 검술의 의도를 대충은 눈치챘다.

이건 마나를 무식하게 쌓은 숙련된 검사를 위한 검술이었다.

허공에서 행해지는 칼질은 검기를 뿌리라는 뜻일 터다. 적들의 공격을 일방적으로 회피하며 소나기처럼 검기를 뿌려댄다면 그야 무적의 검술이라 할만했다.

전제 조건부터가 말이 안 돼서 문제지.

게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상호 간의 경지가 비슷하면 필연적으로 접근을 허용하게 될 터다.

그러니 이 검술은 일대일이 아닌 일대 다수를 상정한 양민학살용에 가까웠다.

"끄응... 구원자 흉내라도 내보려면 그 머저리 새끼가 날 이곳에 환생시킨 이유를 파악해야 하는데..."

초월자가 굳이 김독자-라고 착각한 레이-를 이 동네에 환생시킨 이유.

그걸 알아내야 행동 방침을 정할 수 있었다.

"혹시라도 내가 용사일 경우는..."

본인이 인류 무력의 정수인 용사로 환생했다는 가설은-

"말도 안 되지."

곧바로 폐기했다.

용사라기엔 재능이 일천했다.

육체 능력 자체는 '한시현'의 육체보다 '레이'의 육체가 훨씬 뛰어나긴 했지만 범인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이야기다.

동체시력, 근력, 반사신경, etc.

수재 수준은 되는 것 같았지만 초인을 바라볼 재능은 아니다.

진정 일인군단 역할을 할 용사의 재능을 타고났다면 마나쯤은 연공법 없이도 빨아들여야 했고 초월자가 쥐여준 검술의 묘리쯤은 몇 년 전에 파악이 끝났어야 한다.

"역시 인재 발굴하라고 환생시킨 건가?"

설득력 있는 가설이었다.

이거라면 이리 병신 같은 가정사와 열악한 환경을 지닌 인물의 육체로 환생시킨 이유가 설명된다.

인류를 구원할 주요한 인재가 이 시골 바닥에서 재능을 피우지 못하고 썩고 있다는 걸 환생한 김독자가 알았다면 반드시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아니면 미래의 악당이라도 죽여버리라고?"

두 번째 가설과 반대되면서도 본질적으로 유사한 역할이다.

이 시골 바닥에서 장차 거악으로 성장할 씨앗이 존재한다면 구원을 부탁받은 입장에서 당연히 제거해야 했다.

미래를 아는 자라면 발굴자 역할과 암살자 역할을 복합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을 터다.

"근데 난 김독자가 아니네?"

효율적인 헤드 헌팅은 불가능했다.

"아이 싯팔 진짜."

불평불만을 하면서도 체력단련이랍시고 검을 계속 휘둘렀다.

녹슨 검병이 삐그덕거리는 소음과 냇물이 줄줄 흘러가는 소리가 불협화음을 만들어 낸다.

횡베기와 종베기를 각각 오백 개씩 채운 레이는 자세를 바꾸었다.

머리에 새겨진 검술에 따라 스탭을 밟으며 몸을 지면 위로 굴린다.

한참을 데굴데굴 구른 후, 품 속에 가두어덨던 검을 예리하게 앞으로 쏘아냈다.

후욱!

작은 바람이 검에서부터 흘러나왔다.

무지갯빛 햇살이 어지럽게 섞여 있는 풍경 속에서, 보일 듯 말 듯 한 흐릿한 빛무리가 녹슨 검신을 따라 맺혀 있었다.

"걸음마 시작하고 근 8년을 투자해서 겨우 검기 한 번 반짝이라."

그동안의 개고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간다.

생전 처음 맺어보는 검기에 환호성이 터져 나올 만도 했지만 레이는 이마부터 붙잡고 비틀댔다.

마나가 부족한 탓에 머리가 핑 돌았다. 이게 다 마나 연공을 할 줄 몰라서였다.

가까스로 자세를 유지하며 허공에 검을 휘둘렀지만 검기가 쏘아지긴커녕 제자리에서 증발해버렸다.

"역시 검에는 썩 재능이 없어."

그래도 날붙이를 든 건장한 성인 남성의 위협 정도는 대응 가능한 최소한의 무력을 갖추게 됐다.

그동안은 몸을 사렸지만, 이제 슬슬 활동 영역을 넓혀도 될듯싶었다.

"헤드 헌팅이 불가능하니 물량 쓸어모으며 얻어걸리기라도 바라야지."

레이가 환생하고 계속해왔던 일.

"옆 도시엔 비범한 고아 좀 있으려나?"

쓸만해 보이는 고아 수집이었다.

조금이라도 쓸만해 보이면 죄다 데려와서 영웅으로서 자질이 있나 간을 보고 있었다.

물론 레이는 9살이었기에 밥벌이도 못 하는 어린 고아를 품어줄 여력은 없었다.

그렇다고 길에다 다시 유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뒤처리는 항상 다른 사람의 몫이었다.

"지미가 지랄할테지만 어쩔 수 있나."

낄낄 웃으며 몸을 씻은 레이는 와일드호그의 창자 조각을 회수해 냇가를 떠났다.

"오늘도 고아 가챠 돌리러 가 보자!"

남들이 들으면 기겁을 할 인성 터진 발언이었지만 불행히도 레이는 스스로의 비정함을 인지하지 못했다.

환생 9년차. 고달픈 삶이었다.

*

스스스슥!

레이가 사라지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세된 바람이 숲을 한 차례 휩쓸었다.

단단한 목피(木皮)에 감싸인 나무들은 평소와 같이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그들 사이로 수백 장의 나뭇잎들이 절삭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숲 한가운데 난데없이 무지개가 피어났다.

반원을 그리는 무지개는 중간이 뚝 끊겨있었다.

600년 전 완전히 실전되었다고 알려진 제국검술의 정점, 하르시아 류 공간검.

검기 조각이 터져나왔던 공간의 균열이 이내 맞붙어 아물었다.

루나 (1)

2화

집 안에 본인을 제외한 온기가 없어진 지 사흘이 지났다.

루나는 탁해진 눈을 깜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얼마 없던 재화와 쓸만한 가구들은 이미 누군가가 쓸어간 후였다.

여기저기 찢어진 낡은 옷가지를 저며본다.

봄날임에도 불구하고 속살을 파고드는 시린 한기는, 달라붙은 뱃가죽 탓인지 뻥 뚫린 마음탓인지 사라지지 않고 곁에 머물고 있었다.

오랜 굶주림에 속이 배배 꼬이며 도리어 구역질이 났지만 입으로 나오는 것은 없었다.

죽지 않기 위해선 당장에라도 움직여야 했으나 루나는 자리를 지켰다. 그게 효율적이었으니까.

"에이 시발, 이 새끼들 도망갔네?"

마른 남자 하나가 삐걱거리는 문을 걷어차고 들어와 성질을 냈다.

뒤이어 들어온 덩치 좋은 남자가 집 안을 한 번 돌아보더니 푹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칼 형님. 그사이 날랐을 줄은..."

"이게 주둥아리만 살아가지고. 그 새끼들이 안 갚고 튄 빚이 얼만데. 네가 대신 갚을 거냐? 어!"

"죄송합니다. 그래도 부모라는 놈들이 제 자식 새끼까지 버리고 도망갈 줄은 몰랐습니다."

"에이씨, 일단 저거라도 붙들고 와. 돈 생기면 찾으러 오겠지."

어설픈 연기였다.

루나에게 아직 감정을 짜낼 기력이 남아있었다면 분명 비웃었을 터다.

힘이 모자라 숨을 끅끅 쉬고 있는 루나를 향해 덩치 좋은 남자가 다가왔다.

"엄마 보고 싶냐?"

보고 싶지 않았다. 허나 보고 싶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덩치가 웃었다.

"그럼 아저씨랑 같이 가자. 울지 말고. 그럼 엄마 만나게 해줄게."

성인 남성의 기세에 루나는 어깨를 좁히면서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덩치 좋은 남자는 아이 우는 소리를 안 들어도 된다는 것에 만족해하며 가느다란 루나의 팔을 끌어당겼다.

아이가 추후 어디로 팔려가 어떤 꼴을 당할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남자에겐 관심 밖이었다.

아이를 넘긴 후 자신에게 두둑이 떨어질 수당으로 행할 수 있는 사치만이 머리를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입꼬리를 길게 찢으며 집을 걸어 나오는데 집 앞에 웬 세상 싸가지 없이 생긴 꼬맹이 하나가 무릎을 접은 채 앉아있었다.

"...? 야, 꺼져."

저 나이 때 애들은 대개 인상 한 번 쓰면 후다닥 도망가기 일쑤였다.

헌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검은 머리 소년은 똑같이 인상을 한 번 쓰더니 루나를 가리키며 되물었다.

"저거 가져다 팔 거지?"

*

레이가 머물고 있던 마을은 필립스 백작령 외곽에 위치해 있었다.

말이 백작령이지 이미 한참 전에 세가 기울어서 땅덩어리 자체는 쬐끄만 했다.

돈이 많이 도는 것도 아니고 지리적 요충지도 아니여서 중앙 정부 입장에선 관심 밖에 나 있는 지역이었다.

레이는 보통 필립스 백작령 내에서만 빨빨거리며 돌아다녔으나, 오늘은 필립스 백작령과 오시리스 백작령 사이에 낑긴, 가디 자작령에 속한 마을에 발을 들였다.

'거리가 깨끗하단 말이지.'

가디 자작의 수완이 좋았던 탓일까.

가디 자작령은 백작령 사이에 낑기고도 꽤 경제적 호황을 누리던 지역이었다.

다만 후계를 얻지 못한 가디 자작이 작위를 내려놓고 은퇴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분위기가 숭숭한 곳이기도 했다.

레이는 돌맹이를 툭툭 차며 길을 걸었다.

필립스 백작령에 있을 때는 굳이 레이에게 먼저 시비를 거는 자가 없었다.

애새끼가 건방지게 녹슨 검을 차고 다녀도, 가게에서 과일 한두 개를 훔쳐먹어도 대부분 겉으로는 웃어주며 넘어갔다.

허나 이곳은 '지미의 영역'이 아니다.

자작령 내에서도 낙후된 지역을 걷고 있자면 꼭 시비가 걸려 왔다.

"어이, 검 좋아 보인다?"

애들 용돈 모아 산 싸구려 검이라 해도 대장간 가서 팔아먹으면 간식값은 받는다.

레이는 망설임 없이 가운뎃손가락을 올리고 튀었다.

"어어? 저 새끼 잡아!!"

양아치들이 쫓아왔지만 몸뚱아리가 가벼운 레이는 남들이 보기보다 굉장히 오래 뛸 수 있었다.

양아치들을 따돌린 후 마을을 돌아다니며 어디 길거리에 나앉은 애들 없나 하고 살피길 한참.

홀쭉한 소녀가 우악스러운 손길에 이끌려 나오는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집 앞에 앉아 잠시 상황을 지켜보다, 인상을 쓰는 남자에게 되물었다.

"저거 가져다 팔 거지?"

"이게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곧장 손찌검이 날아왔지만 쓱 몸을 기울여 피한 레이가 소녀가 끌려 나온 집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냉기가 서린 집은 텅텅 비어있어, 집주인이 이미 짐을 들고 날랐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레이는 다시 한번 소녀, 루나를 바라봤다.

어린 아이에게 미색 운운하는 것도 웃긴 일이었으나 피부가 하얗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탓에 누가 보아도 예쁘다고 칭찬해줄 만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저런 아이들은 구매자만 잘 찾으면 목돈을 만질 수 있다.

허나 어린아이의 인신매매라는 게 세력을 지닌 깡패들에게도 리스크가 꽤 큰일이라, 대부분의 경우 트러블이 생기지 않도록 밑 작업을 친다.

예컨데 가난한 부모를 꼬셔 꽤 많은 액수의 금전을 빌려준 후 갚지 못해 도망가게 만든다던가.

그 와중에 자식을 버리고 가면 뒤를 쫓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흘린다던가.

"진짜 버리고 튀었나 보네."

자주 있는 일이다.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자식 버리는 일은 종종 일어나는데 기초 교육 시스템도 제대로 안 되어 있는 이쪽 세계에선 비도덕적인 선택은 더욱 자주 일어난다.

작업을 친 갱들은 채무자를 찾을 때까지 아이를 보호한답시고 데려갈 터다.

그리고 잃어버리겠지. 남들에겐 꼬맹이 새끼가 도망갔다고 툴툴댈 거다.

눈에 빤히 보이는 짓이었지만 개인이 아닌 조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니만큼 혹시라도 문제 생길 때를 대비해 그림 예쁘게 그리는 게 중요했다.

"뭐, 어쨌든..."

루나와 눈이 마주쳤다.

표정을 잃어버린 소녀는, 돌발적인 상황에서도 입을 다문 채 그저 고요한 눈빛으로 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어린아이의 모습에 누군가는 괴이함을, 누군가는 안타까움을 느꼈을 테지만.

정작 레이는 감탄하며 눈을 빛냈다.

'안 우네?'

본디 열 살도 못 먹은 애들은 우는 게 일이었다.

지 감정 조금 수틀리거나 피부에 생채기만 나도 빽빽거리며 울어 재끼기 바빴다.

근데 부모는 도망가고 생전 처음 보는 남자에게 끌려가고 있는 상황에서 덤덤함을 유지한다?

누가 봐도 비범한 아이였다.

'레어 떴다!'

레이의 뇌리 속에서 루나의 평가가 '노멀'에서 '레어'로 상승했다.

혹자는 루나의 태도가 학대의 방증이라며 슬픔을 느끼겠지만 레이의 인성은 앳저녁에 박살 난 지 오래였다.

한동안 노멀 고아만 마주쳤던 레이는 비범한 루나의 모습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꼬마야, 나랑 같이 갈래?"

꼬마가 꼬마보고 꼬마라 부르며 손을 내미는 꼴을 보며 덩치 좋은 남자, 한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거 완전 정신 나간 새끼 아니야. 뒤지고 싶어 환장했냐?"

"잠깐."

아이 상대로도 거리낌 없이 단검을 뽑아 드는 한스의 어깨를 칼이 붙잡았다.

"왜 그러십니까? 칼 형님?"

"저거 그놈이다."

세상 싸가지 없어 보이는 눈매. 검은 머리. 아이가 다루기엔 지나치게 무겁고 큰 녹슨 검. 마지막으로 겁 없이 고아에게 접근해 손을 내미는 모습까지.

"필립스의 고아 수집가, 레이."

"네? 그 정신 나간 꼬맹이가 이 녀석이라고요?"

"쭉 찢어진 눈매 가진 놈 중 저렇게 사리 분별 못하는 애새끼가 이 근방에 또 있겠냐?"

둘의 대화를 들으며 레이가 뒷목을 긁적였다.

언제 저런 병신 같은 이명이 자신에게 붙었지? 이명만 보면 고아 잡아다 실험하는 흑마법사 같다.

내심 '필립스 백작령의 어린 성자'같은 별명을 바랐던 레이는 자기 행적은 고려도 안 한 채 억울함을 내비쳤다.

"좋은 단어 다 내버려두고 대체 왜..."

"주변에서 오냐오냐해주니 간이 배 밖에 나왔나보군요. 우리 구역까지 와서 기웃대다니."

"일단 단검은 집어 넣어. 어쨌든 지미의 관심을 받는 녀석이니, 괜히 죽였다간 곤란해질 수 있으니까."

"씁, 알겠습니다."

"그리고 꼬맹아, 놀 거면 너희 구역 가서 놀아라. 여기는 지미의 구역이 아니야. 거기서처럼 까불었다간 팔다리 병신 돼서 돌아갈 거다. 특히 이번처럼 조직의 일을 방해하면 정말 재미없을 거야."

"아니, 아조씨, 조직의 일도 조직의 일 나름이죠."

서슬 퍼런 칼의 기색에도 레이가 코웃음을 치며 되물었다.

"애들 인신매매는 룰 밖의 일이잖아요? 안 그래요?"

갱스터, 그러니까 깡패 집단 간의 암묵적 합의 안에 미성년 아이의 인신매매는 속해있지 않았다.

말인즉슨 해도 상관은 없지만, 하다가 들킬 경우 무력 충돌이나 익명 고발 등의 방해 행위를 받아도 불평할 수 없다는 거다.

"너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아가리를...?"

"맛있는 거 주는 곳으로 갈래요."

"?"

모두의 시선이 루나에게 쏠렸다.

깡패들의 한가운데서 여전히 덤덤함을 유지하던 루나는, 또박또박 자신의 의사를 재차 표했다.

"맛있는 거, 많이 주는 곳으로 갈래요."

"하!"

하도 어이가 없으니 웃음부터 나온다.

고개를 저은 칼이 입꼬리를 올리며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 마라, 꼬마야. 날 따라오면 평생 구경도 못 할 음식을 하루종일 대접받게 될 테니까."

재수가 좋아 친절한 귀족에게 팔린다면 식도락이야 원 없이 즐길 수 있을 터다. '할 일'만 똑바로 한다면 귀한 옷과 장신구도 선물 받을 수 있겠지.

루나가 눈을 깜박이며 레이를 쳐다봤다.

프레젠테이션을 요구하는 눈빛에 레이가 레이저포인터를 찾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정신을 차렸다.

"잠깐. 저 아저씨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지만, 그, 이름이?"

"...루나."

"그래, 루나양. 이런 말이 있어. 높은 리턴엔 높은 리스크가 따른다. 뭐, 저 인간들 따라갔다가 마음씨 좋은 귀족에게 팔려 가면 꿀 빨 수도 있긴 하겠지만 그런 귀족이 몇이나 되겠어? 하물며 어린 소녀를 굳이 음지에서 돈 주고 사가는 인간이 뭐 얼마나 제대로 된 인격자겠냐 이 말이야. 반면에 이쪽은 낮은 리턴에 비해-"

"...낮은 리스크?"

레이가 두 손을 마주쳤다.

"그렇지! 변태 귀족이나 상인한테 팔려 가서 못 볼 꼴 보지 말고 자애와 사랑이 넘치는 우리 지미 보육원에..."

"이런 시발."

한스가 참지 못하고 단검을 뽑아 들었다.

"형님, 언제까지 애새끼 놀음에 어울려줘야 합니까?"

"후우. 어이, 꼬맹아. '룰 밖의 일'이란건 말이다, 불만 있으면 그 자리에서 힘으로 해결하란 뜻이다. 알아듣냐?"

최후의 경고였다.

적당히 까불고 꺼지라는.

지미가 신경 쓰는 아이든 뭐든 더 이상 성질을 긁으면 아예 병신을 만들어 묻어버릴 생각이었다.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감지한 루나는, 슬그머니 레이와 거리를 벌리며 칼과 한스 쪽으로 몸을 붙였다.

건장한 성인 남성 둘과 비실거리는 꼬맹이 하나.

무력 충돌이 일어나면 승자가 누가 될지는 누굴 붙잡아 물어도 뻔했다.

참으로 현명한 루나의 선택에 레이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월척인데?'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차분함.

논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선택지를 고르는 판단력.

머릿속에서 내린 결론을 곧장 행동으로 옮기는 신속함과 대담함까지.

도저히 레이의 또래라고는 보이지 않는 비범함이었다.

'저건 데려가야 해.'

루나에 대한 레이의 평가가 '레어'에서 '유니크'로 상승했다.

유니크 고아라면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무조건 확보해야 하는 인재였다.

결단코 변태들의 노리개로 낭비되는 꼴은 볼 수 없었다.

충돌을 감수한다.

레이의 입가에 머문 시건방진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좋아. 힘으로 해결하자고."

쾅!

흥분을 참지 못하고 지면을 박찬 한스가 다짜고짜 앞발질을 해왔다.

삽시간에 시야를 가득 메우는 한스의 발바닥에 레이가 혀를 찼다.

'신장이 두 배쯤 차이나니까 뭔 거인이랑 싸우는 것 같네.'

곧장 옆으로 뺀 왼발을 축으로 삼은 레이는 몸을 한 바퀴 회전시켜 공격을 피한 후 한스의 허벅지를 팔꿈치로 찍어버렸다.

"크악!"

급소를 찍힌 한스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어설프게 단검을 휘둘렀다.

단검을 피한 레이가 한 발짝 물러서며 균형을 다시 잡으려는 순간 머리 위에서 철심이 박힌 몽둥이가 휘둘러졌다.

타격 범위가 광범위하다.

레이는 회피를 포기하고 녹슨 검을 검집 채로 들어올렸다.

까앙!!

성인이 힘껏 휘두른 쇠몽둥이다.

꼬맹이의 가냘픈 팔뚝으론 버텨낼 수 있는 위력이 아니었다.

허나 레이가 들어올린 검집은 쇠몽둥이의 충격을 완벽히 상쇄시켰다.

'마나가 좋긴 하군.'

극소량의 마나라도 근육에 깃들이면 범인을 웃도는 강인함을 부여한다.

마나통이 조루라 함부로 사용할 순 없었지만 일시적이나마 성인과의 힘싸움을 가능케 했다.

칼은 제 몽둥이질이 막혔다는데 당혹하면서도 아래로 레이를 찍어눌렀다.

"건방진 새끼가!!"

그 틈을 노리가 한스가 레이의 옆구리를 향해 단검을 찔러 넣었다.

옆구리에 구멍이 생기기 직전. 레이가 검을 휘둘렀다.

우득!

싸구려 목재로 이루어진 검집에 파열음이 울린다.

직후 검집을 부수고 검신을 드러낸 녹슨 검이 맞닿은 몽둥이를 파고들었다.

까가각!!

몽둥이 내부의 철심이 휘어지는 충격에 칼이 몽둥이를 놓쳤다.

반달을 그린 검이 한스의 팔뚝을 깊게 베었다.

"끄아악!!"

녹슨 검인지라 날붙이가 울퉁불퉁해 살갗을 거칠게 찢어놓았다.

비명을 지르는 한스와 몇 발 물러선 칼을 둘러보며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지미가 왜 날 싸고돌며 좋아하는 지 알아?"

구라였다. 지미는 레이를 정말로 끔찍하게 생각했다. 안 좋은 쪽으로.

"내가 잘나서 그래."

이 또한 구라였으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고 웃어재끼는 꼬맹이의 모습은 칼과 한스의 오금을 저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루나 (2)

3화

"아악! 이 미친 작가 새끼!"

"왜 또 지랄이냐."

"용사가 마왕한테 죽었어!"

용사가 죽어?

침대 위에 엎드려 있던 한시현이 몸을 돌려 발광하는 불알친구를 쳐다봤다.

"그 소설 이야기지?"

"응."

"용사 키운다고 빌드업만 한 300화 하지 않았냐? 다시 소생시키겠지."

"아니라고! 쪽도 못 써보고 진짜 영혼까지 싹 쓸려 뒤졌다니까?"

"용사 존나 강하다며? 어케 한큐에 골로 가냐?"

"몰라, 이씨... 꼭 하꼬 새끼들이 작가병 걸려서 클리셰 비튼다고 급발진을 한다니까? 아악!"

장장 10분이 넘게 불알친구의 지랄이 계속되자 한시현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근데 마왕은 정체가 뭐냐? 고위 마족 그런거야?"

"떡밥 조금씩 뿌려지는 거 보면 인간 같던데? 말만 마왕이지 고위 마족이랑 맨날 트러블 있고 그래."

"인간? 인간이 왜 용사를 패죽이고 다니냐."

"어디서 인간한테 험한 일이라도 당했나 보지. 좆간, 좆간 네버 체인지..."

"하긴 니가 하는 얘기만 들어보면 그쪽 세계 좆간들도 어지간하긴 해?"

*

기절해 널브러져 있는 한스의 팔을 지혈한 레이가 마찬가지로 널브러져 있는 칼의 턱을 툭툭 찼다.

여기서 칼과 한스를 죽여버리기라도 하면 조직과 조직과의 싸움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지라 손속을 두었다.

다만 기절한 녀석들이 언제 깨어날지 모르기에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고개를 돌린 레이가 손을 뻗자 줄을 잘못 섰던 루나가 찔끔 놀라며 목을 움츠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름이 줄줄 흐르는 루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준 레이가 등을 내보였다.

"업혀봐."

빨리 주변을 떠야하는데 아무리 봐도 루나는 체력이 부족해 보였다.

망설이는 루나를 억지로 잡아당겨 들쳐맨 레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루나는 정말로 가벼웠지만, 그렇다고 9살 먹은 육체에 아무 부담이 안 갈 만큼 가볍지는 않았다.

"아이고 허리 휜다."

혹시나 쫓아오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참 열심히 달렸다.

영지와 영지 사이에 위치한 자그마한 숲을 지나치고 나서야 레이는 긴장을 좀 풀었다.

꼬맹이가 꼬맹이를 업은 채 핵핵거리며 걷는 모습을 마주한 마을 사람들이 한 마디 씩 던졌다.

"저놈 저거 또 시작이네."

"이번엔 또 어디서 데려왔데?"

"저러고도 잘도 안 쫒겨나고 붙어있는구먼."

"철이 없어도 저렇게 없을 수가. 엥이."

'아니 왜 애니멀 호더 취급이지?'

레이는 억울해했지만 마을 사람들 입장에서 레이는 오펀 호더가 맞았다.

저리 데려가서 깡패가 운영하는 보육원에 맡기는데 마을 사람들 눈에 보육원은 양아치 도둑놈 양성소였다.

"거 좋은 일 하는 애한테 다들 왜 그래?"

그나마 과일장수 잭이 유일하게 편을 들어주며 사과 하나를 던져주었다.

사과를 잡아챈 레이는 잠시 고민하다 업혀있던 루나를 내려놓았다.

목덜미에 닿는 호흡이 불규칙하면서도 미약한 것이 어째 영 상태가 안 좋아 보았다.

굶주린지 오래된 듯한데, 아무거나 던져줬다가는 곧장 체할 모양새라 레이는 자기 입에 사과를 가져가며 잭을 바라봤다.

"사과 주스 만들어 놓은 것좀 있으면 꺼내봐요."

"맡겨뒀냐?"

"거 미래의 새싹들을 위해 사과주스 한 잔쯤은 투자할 수 있잖아요? 자꾸 째째하게 굴 거예요?"

"너는 그 밉쌍스러운 아가리만 덜 놀려도 충분히 사랑받을 거다."

"좀 믿어봐요. 오늘의 사과주스 한 잔이 이십 년 후 지평선 너머로 이어지는 거대한 과수원으로 돌아올거니까."

"다물고 이거나 먹여라. 비실비실한 게 금방이라도 눈 뒤집어 질 것 같네."

잭은 툴툴대면서도 오늘 아침에 갓 만들어낸 사과주스를 건네 주었다.

컵을 받아든 루나는 조심스레 한 모금 맛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황급히 컵을 기울였다.

"천천히 씹어 마셔. 괜히 체해서 고생하지 말고."

컵바닥을 붙잡은 채 타박을 놓은 레이를 향해 잭이 사과 하나를 더 던져주었다.

"이 동네 고아는 네가 다 주워갔을 텐데 저건 또 어디서 주워온 거냐?"

"디나르에 갔다 왔어요."

"디나르? 거긴 자작령 아니냐? 사고 친 건 아니겠지?"

"뭐, 지미가 어떻게든 해주겠죠."

"...그러다 오래 못 산다."

"충고 고마워요, 잭. 사과는 외상 장부에 달아놓으세요. 기한은 20년으로."

"일 없다. 주스 한 잔 더 주랴?"

옆을 돌아보니 루나가 컵 안 쪽을 열심히 혀로 핥고 있었다.

냉정히 컵을 뺏어들어 잭에게 돌려준 레이가 손을 흔들었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그래, 잘 들어 가라."

루나는 생기가 좀 돌아온 것처럼 보였기에 제발로 걷게 시켰다.

시장을 지나, 활기가 도는 번성한 마을을 지나쳐서, 조금은 낙후되고 음습해 보이는 길거리로 들어섰다.

밤이 되면 꽤나 화려해지지만 이곳이 홍등가라는 것을 모르는 루나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기 시작했다.

말로 해봤자 오해가 풀리지 않을 걸 알기에 레이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가는 루나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어? 레이 형이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아이들 여럿이 마당에서 뛰어놀고 있는 보육원이 눈에 들어왔다.

레이가 왔다는 소식에 보육원 안에서도 아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어머?"

그리고 아이들 사이에서, 수녀복을 입은 중년의 여자가 종종 걸음으로 다가왔다.

지미 보육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봉사를 하고 있는 아델이었다.

"레이, 또 새로운 친구를 데려왔니?"

"루나라고 한다네요. 잘 부탁드려요."

꼬질꼬질한 루나의 몸을 한 번 더듬은 아델이 측은한 얼굴로 루나의 손을 맞잡았다.

"많이 야위었구나. 씻고 식사부터 하자꾸나."

루나는 말 없이 아델을 바라보다 우스꽝스럽게 표정을 일그러뜨리기 시작했다.

혹시 속은 게 아닐까. 더러운 굴로 끌고 가져 못볼 꼴을 당하는 게 아닐까.

아님 또 다시 길거리에 버려지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끊임없이 피어오르던 의심과 불안에서 벗어나.

또래 아이들이 밝은 얼굴로 머물고 있는 보육원에 발을 들인 루나가 그제서야 울음을 터뜨렸다.

"흑, 흑, 흐윽..."

"괜찮다. 괜찮아. 고생 많았구나."

"흐아아앙..."

아델의 위로에 더는 자기 감정을 주체 못하고 눈물을 줄줄 흘리는 루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레이가 뚱한 얼굴을 했다.

'으음... 저건 쫌 '평범'한 애들 같지 않나?'

내심 루나가 보육원에 도착하고나서도 첫만남과 같은 냉정함을 유지해줄줄 알았던 레이는 실망을 숨기지 못했다.

'평가를 유니크에서 레어로 하향 조정 해야하나...'

그는 어느새 전생의 자신이 '좆간'이라 표현했던 종족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

루나에게 아이들의 관심이 쏠린 덕분에 레이는 잠깐의 여유를 되찾았다.

물론 트러블이 끊임 없이 발생하는 보육원답게 입구에서부터 금세 큰소리가 울렸다.

"여기 원장 어디갔어!!"

정문의 울타리를 박차고 들어온 남자는 사내 아이의 귀를 거칠게 붙들고 씩씩대고 있었다.

레이는 뺨에 멍자국이 난 아이를 확인하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이의 이름은 마스.

이 보육원에 들어온지 3년 정도 된 아이였는데, 영 말을 안 들어처먹은 놈이었다.

그렇다고 가만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라 뻐근한 몸을 일으켜 세우며 입구로 걸어갔다.

"아저씨, 여기 보육원 원장은 지미야. 지미 불러줘?"

지미라는 이름에 흠칫 놀란 남자, 리오가 말을 더듬으며 보육원을 가리켰다.

"그, 그 원장 말고! 이 새끼 먹이고 가르친 선생 데려오라고!"

"리오, 목소리 좀 낮춰."

리오는 레이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흠칫 놀라 얼을 탔다.

리오 입장에서야 레이의 얼굴을 스쳐지나가듯 몇 번 봤을 뿐이지만 레이는 리오를 잘 알고 있었다.

리오는 여러 도시와 마을을 돌아다니며 잡다한 심부름이나 사냥을 하며 하루 먹고 하루 사는 모험가로, 운이 좋아 목돈을 만질 때마다 창관을 방문했다.

그는 요즘 리사라는 예명을 사용하는 매춘부에게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리사는 '라일락의 저녁'이라는 창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이 근방에선 가장 알아주는 창관이었다.

그리고 '라일락의 저녁'에서 가장 인기 많은 매춘부가-

'내 엄마지.'

친모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환생하니 엄마가 용주골 에이스라.'

그녀에게 불만은 없었다. 그녀는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레이로서의 삶이 꼬인 건 어디까지나 생물학적 애미 애비의 탓이었다.

"하여튼 리오."

흥분이 좀 가라앉은 리오에게 레이가 말투를 바꿔 물었다.

"마스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렇게 화가 났어요?"

"그, 그, 이 새끼가 내 주머니를 털고 도망갔다고!"

"소매치기를 당했다고요?"

"그래! 안 그래도 요즘 소매치기가 많아졌다고 주점에서 떠드는 녀석들이 많던데, 이제보니 그게 다 여기 고아 새끼들이 저지른 일이었어!! 윽!!"

대화 도중 리오의 손길을 뿌리친 마스가 보육원 안쪽으로 도망가려 했다.

레이가 손을 뻗어 마스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이거 놔!"

레이의 제지를 가소롭게 여긴 마스가 거칠게 어깨를 털었다.

마스는 레이보다 나이가 많았고 신장 또한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완력에서 본인의 우위를 자신한 마스였으나, 레이가 작정하고 손아귀에 힘을 주자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아아악!!"

"으음, 리오, 털린 물건은 돌려받았죠?"

"그, 그야 이 녀석을 내가 잡았으니까. 그래도 피해자가 한둘이 아닌...!"

"일단 미안해요, 리오. 앞으로 이런 일 없게, 이 녀석은 내가 잘 교육해 놓을게요."

리오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으나 이어지는 레이의 설득에 표정을 풀었다.

"한 번만 너그럽게 넘어가 줘요. 리오는 참 정의롭고도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리사에게 잘 이야기해 둘 게요. 알잖아요? 거기 누나들이 나 귀여워하는 거."

꽤 혹하는 이야기에 리오가 헛기침을 했다.

"흠, 정, 정말이냐?"

"당연하죠. 그리고 리사 누나는 리오가 해주는 여행 이야기를 엄청 좋아해요. 그러니 다음주쯤 한 번 들러 저번에 끊겼던 이야기 좀 마저 해주세요. 궁금해서 애가 탄다고 하네요."

"크흠!"

리오는 만연하게 떠오른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두 번 정도 더 확답을 받은 리오가 보육원을 떠나자, 제자리서 버둥거리던 마스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이, 이거 안 놔?!"

"..."

레이는 평소 아이들을 다룰 때 폭력을 잘 사용하지 않았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는데, 하나는 힘 자체가 부족해서고, 나머지 하나는 제어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일탈이 아직까지는 발생하지 않아서였다.

허나 이제 상황이 변했다.

쫘악!!

고작 9살 아이의 손찌검에 채찍 휘두르는 소리가 터졌다.

너무도 큰 충격에 정신을 못차리고 휘청거리는 마스의 멱살을 레이가 붙잡았다.

"대가리 원위치."

"..."

"대가리 원위치."

"..."

쫘악!!!

"대가리 원위치."

"흑... 흑..."

"질질 짜지 말고 대답해."

레이가 재차 손을 들어올리자 마스가 질겁하며 팔을 들어올렸다.

마스의 팔을 툭툭 쳐낸 레이가 얼굴을 들이댔다.

"소매치기, 혼자 했어?"

"그, 그건 아닌데..."

"같이 한 새끼들이 누구야."

"피, 필립이랑 드웨인... 마, 마리도 했고..."

"처음 종용한 새끼가 누구야."

"조, 종용?"

"꼬신 새끼들이 누구냐고. 니들끼리 갑자기 미쳐서 그런 짓을 시작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잠시 레이의 상황을 복기하자면.

레이가 굳이 절망에 빠진 고아들을 수집하는 이유는 그들 중에 '영웅의 자질을 지녔으나 제대로 피지 못한 아이' 혹은 '열약한 환경 탓에 타락해 결국 거악이 된 아이'가 존재할지도 몰라서였다.

때문에 레이가 가장 경계하는 건 자기가 모아 놓은 아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요인들이었다.

가뜩이나 환경이 환경인지라 못볼 꼴도 자주 보는데 아이들에게 대놓고 범죄를 종용하는 자들이 있다?

'작살을 내야한다.'

레이의 가설(초월자가 발굴자/암살자 역할을 레이에게 맡겼다는 설)이 옳다는 전제하에, 어릴 때부터 아이들이 범죄에 노출되다보면 어떤 나비 효과가 발생할지 예측조차 할 수 없었다.

예컨데 용사의 씨앗이 어릴적 소매치기 경험을 바탕으로 뒷골목 거악으로 성장한다면, 이쪽 세계는 나가리였다.

"야, 누가 꼬셨냐고."

사실 이런 저런 이유를 떠나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가르쳐놨더니 은혜 모르는 짐승 새끼가 되어서 짖어대는 꼴을 레이는 볼 생각이 없었다.

레이의 감정에 감응한 마나가 살기와 뒤섞여 맞닿아 있는 마스를 찍어눌렀다.

공포에 빠져 덜덜 떨기 시작한 마스가 절로 입을 열었다.

"로, 론 형님이랑 나기아 형님이 방법을 가르쳐줬어. 너희들도 빨리 1인분 몫은 해야한다고..."

론과 나기아라면 지미가 우두머리로 있는 조직의 조직원들이었다.

레이는 상황을 이해했다.

지미의 부하들 중 대다수가 보육원의 존재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열심히 돌아다니며 수금한 돈 중 상당한 액수가 보육원 유지에 투자되고 있으니 불만이 없을리가.

때문에 보육원의 아이들보고 앵벌이라도 시켜야된다며 자주 불만을 드러내곤 했다.

"그래. 기강 잡을 때가 되긴 했지."

동네 양아치놈들이나 철 없는 애새끼들이나.

마나도 활성화시켰으니 괜히 더 나쁜 물 퍼뜨리기 전에 기강을 잡아야 했다.

작게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길게는 세계를 위해, 궁극적으론 레이 본인을 위해 말이다.

루나 (3)

4화

하루 동안 루나는 아델에게 보육원의 시설과 앞으로의 생활에 대해서 설명 받았다.

외워야할 자잘한 규칙들이 많았으나, 아델은 루나의 안정을 위해 간단한 주의사항만 설명한 후 앞으로 지내게 될 기숙사로 안내해주었다.

지미 보육원은 기본적으로 방 하나에 4명이 같이 생활한다.

루나가 방에 들어서자 세 쌍의 시선이 동시에 루나에게 향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으나, 본래 방을 사용하던 세 명의 아이들 중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가 씩씩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서 허리에 손을 붙였다.

"안녕! 난 카렌이야! 넌 이름이 뭐니?"

"...루나."

"루나구나! 내가 이 방 방장이니까, 모르는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

"...응, 고마워."

카렌은 활발했고, 말이 많았고, 또한 적극적이었기에 루나는 좋으나 싫으나 방의 아이들과 빠르게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카렌, 미아, 요하나.

셋의 대화를 이끄는 건 대개 카렌이었고, 대화의 주제는 대개 레이가 연관되어 있었다.

100명이 넘어가는 보육원의 아이들 중 8할가량은 레이의 노력으로 보육원과 인연을 맺었다. '너는 어쩌다가 여기 오게 됐냐?'라는 질문이 곧 '너는 어떻게 레이와 만나게 됐냐?'로 귀결되니 아이들의 공통분모엔 항상 레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떠들던 카렌은 루나 옆에 바싹 붙은 채 흥분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일은 레이의 수업이 있어."

"...수업?"

"응! 산수 수업! 레이는 엄청 똑똑해서 우리보다 훨씬 나이 많은 오빠 언니들도 직접 가르치고 있어!"

"...우와."

루나는 눈치껏 감탄하는 흉내를 냈다.

카렌은 루나의 처세가 마음에 들었는지 콧바람을 흥흥 흘리며 목에 힘을 주었다.

"뭐, 레이 다음으로 내가 똑똑하겠지만! 어쨌든 수업은 열심히 들어야 해! 잘 못하면 벌을 받거든!"

벌이란 말에 미아는 덤덤함을 유지했으나 요하나는 두려운 기색으로 목을 움츠렸다.

루나는 가만 앉아서 '벌'이 무엇일지 상상했다. 엉덩이를 맞는 걸까? 아니면 밥을 굶나? 그도 아니면 바닥 청소를 하루 종일 해야 하나?

루나가 불안한 눈빛을 카렌에게 보냈지만 카렌은 손가락을 입에 붙이며 외쳤다.

"자세한 건 비밀이야!"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루나는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덮어썼다.

이제 취침 시간이었다.

여전히 '벌'을 비롯한 여러 가지 불안이 마음에 남아있었지만 지금 덮고 있는 이불처럼 따뜻한 식사와 잠자리만 제공된다면, 그깟 벌쯤이야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다고 다짐하며 루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음날.

약 20여 명의 학생들이 보육원 내의 교실로 우르르 몰려갔다.

스쿼트를 하던 레이는 제시간에 맞춰 모든 아이들이 도착하자 교실 문을 닫으며 첫 마디를 뗐다.

"앞으로는 나한테 존댓말을 쓰도록 해. 너희 전부."

"존댓말?"

"그래, 존댓말."

"나도 해?"

"그래, 카렌 너도 해."

"나는 레이랑 똑같이 9살인데?"

아닌 게 아니라 교실 내에는 레이보다 나이 많은 아이들도 많았다.

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본인을 가리켰다.

"나는 너희들의 선생님이니까. 제자는 선생님을 존중해야 할 필요가 있어. 앞으로 나한테 반말하면 무조건 벌점이야."

"우씨! 그럼 레이가 나한테 오빠야? 레이 오빠라고 불러?"

"호칭은 마음대로 해."

"바보! 멍청이! 똥개! 말미잘!!"

"선생님이라고 불러."

"싫어! 완전 싫어! 레이라고 부를래!"

"알겠으니까 존댓말. 한 번만 더 반말하면 벌점 줄 거야."

카렌의 입이 댓 발 튀어나왔지만 레이는 무시했다.

아이들의 서열 간에 있어 나이가 꽤 중요한 요소라는 걸 레이는 알고 있었고, 보육원의 기강을 다잡기 위해선 레이 스스로가 차별화를 꾀할 필요가 있었다.

존대는 의도치 않았다고 해도 은연중에 서로의 상하 관계를 규정하고 속박하니까 한 명 한 명 때려잡을 게 아니면 이쪽이 편하고 빨랐다.

"어쨌든... 루나, 셈 할 줄 알아?"

"?"

"더하기 빼기 할 줄 아냐고."

"...알아요."

"글자도 알고 더하기 빼기도 할 줄 알고. 훌륭하네."

8살에 이 정도면 이 세계에선 엘리트였다.

물론 루나는 따로 배운 것이 아닌 어깨너머로 보았던 것을 기억해둔 것이지만, 레이는 거기까지 물어보지 않았다.

"두자릿수 덧셈도 가능해?"

"...?"

"34 더하기 77은?"

"...111이요."

주변에서 경악 어린 헛숨이 터져 나왔다.

맙소사! 레이의 수업도 들은 적 없으면서 두 자릿수 덧셈을 할 줄 안다니! 게다가 답이 세 자릿수야!

모두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던 와중 카렌이 자기 손톱을 으득 깨물었다. 강력한 경쟁자의 출현을 직감한 것이다.

잠시 옆 머리를 긁적인 레이가 되물었다.

"곱하기 나누기는 할 줄 알아?"

"...?"

"ok."

레이는 교단으로 걸어나가 곱하기와 나누기의 개념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사과가 두 개씩 세 묶음이 있어요~ 그럼 사과는 여섯 개가 되지요~ 와 같이 아이들 알아듣기 쉽게 말이다.

"복습은 된 것 같고, 다들 구구단 외워왔지? 오늘은 안 봐줄 거야."

"네!!"

호기로운 외침 중에 카렌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그 용기를 가상히 여긴 레이가 묵직한 주머니를 들고 카렌에게 다가갔다.

"6 곱하기 5는?"

"30!"

"3 곱하기 7은?"

"21!"

"훌륭한데."

"히히!"

레이가 주머니에서 곰돌이 모양의 쿠키를 꺼내 카렌에게 주었다.

카렌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곧장 쿠키를 입에 넣어 깨물었다.

누가 보아도 흐뭇한 광경이었지만, 정작 카렌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요하나는 사색이 된 채로 레이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점점 더 책상 아래로 기어들어가는 요하나를 향해 레이가 운을 뗐다.

"요하나, 4 곱하기 7은?"

"..."

"5, 4, 3..."

"이, 이십 사?"

"마지막 기회다. 9 곱하기 4는?"

"...이, 이십 육?"

"공부 다시 해와."

"흐에엥..."

울상이 된 요하나 앞에 레이가 마주 섰다.

"벌 받아야지?"

"아, 안 돼! 안 돼요!"

요한나의 비명이 처량하게 울렸으나 레이는 굳은 얼굴로 곰돌이 쿠키를 꺼내 들었다.

손가락 사이에 힘을 주자 '뽀각!' 소리와 함께 분리된 곰돌이 대가리가 반댓손으로 떨어졌다.

요한나는 일말의 희망을, 그러니까 곰돌이의 몸통을 레이가 건네주길 바랐으나.

"다음에도 틀리면 요것도 없어."

역시나 돌아온 건 손가락 한 마디 크기 밖에 안 되는 곰돌이 대가리였다.

"후에에엥..."

곰돌이 대가리를 받아든 요하나가 허망한 얼굴로 울음을 터뜨렸다.

그꼴을 바라본 루나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웠다.

벌 준다며? 벌이 저거야? 간식 좀 덜 주는 게 벌이라고? 그게 서럽다고 요한나는 또 펑펑 울고 있고?

요한나가 깨작거리며 곰돌이 대가리를 긁어먹는 모습을 루나는 혼란에 빠진 채로 지켜봤다.

그 사이에도 구구단 퀴즈는 계속 이어져서, 아이들 대다수에게 쿠키를 돌린 레이가 루나 앞에 섰다.

"2 곱하기 3은?"

"...6."

"3 곱하기 2는?"

"...6."

"잘했어."

레이가 루나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후 마지막 남은 쿠키를 꺼내려던 순간.

"잠깐! 잠깐만요!"

카렌이 소리를 빽 지르며 일어났다.

"왜 루나한테만 쉬운 문제 내!! 반칙이야!! 불공평해!!"

"존댓말."

"불공평해요!!"

"그래, 불공평하지."

곱셈을 오늘 배운 친구한테 난이도 똑같이 맞추라는 카렌 네가 말이야.

카렌도 자기 고집을 아주 모르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경쟁자의 등장에 서로의 실력 차이를 명확히 다져두고자 하는 마음이 한참 앞서 있었다.

네가 똑똑해 봤자 얼마나 똑똑하려고?

나도 세 자릿수 덧셈 정도는 할 줄 알거든? 구구단도 완벽하게 외웠거든?

경쟁심에 불타는 카렌의 눈을 바라본 레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뭐어, 그렇다면..."

마침 레이도 루나의 수리 감각과 연산 능력이 궁금하던 참이었다.

"9 곱하기 7은?"

"...63."

"6 곱하기 8은?"

"...48."

"12 곱하기 27은?"

"...324."

두 자릿수 곱셈!!

여기저기서 재차 경악이 튀어나오는 중 카렌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오늘 막 곱셈은 배운 녀석이 벌써 두 자릿수 곱셈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 수나 막 뱉었겠지. 카렌은 확신했다.

한편 레이는 위화감을 느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답이 맞은 거야 둘째 치고, 어째 루나는 쉬운 곱셈이나 어려운 곱셈이나 답을 말하기까지 딜레이가 동일했다.

레이는 혹시나 해서 다시 물었다.

"1254 곱하기 627은?"

"...786258."

"..."

레이는 가만히 굳어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얼핏 보면 경악한 것처럼 보였는데, 사실 암산하느라 바쁜 거였다.

그냥 연필 잡고 계산했다간 선생으로서 권위가 우르르 무너져 내릴 게 뻔했기에 식은땀을 뒤로 흘리며 두뇌를 팽팽 돌렸다.

답이 나오기까지 30초가 넘게 걸렸다.

"어, 음."

786258. 정답이었다.

"잘했어, 루나. 정답이네."

"말도 안 돼! 그냥 막 던진 거겠지! 아니면 레이, 루나랑 짜고서 우릴 놀리는 거야?!"

"내가 굳이 왜 그러겠어, 카렌."

"그럼 나도 못 푸는 문제를 루나가 풀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카렌."

너는 레어 고아지만 루나는 유니크 고아란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속담을 들어본 적 있니? 루나가 바로 나는 놈이야. 네가 얼마를 뺑이쳐가며 뛰어가도 멀어지는 나는 놈의 꽁무니만 바라보게 되겠지.

머리 속을 주르륵 훑고 지나간 문장들을 레이는 최대한 순화해서 표현했다.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났네? 긴장해야겠어, 카렌."

카렌의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

"아이고야, 얘는 진짜 천재네."

레이는 사과를 우적우적 씹어내며 루나가 적어낸 공식을 바라봤다.

사실 곱하기 빼기 연산이 빠른 것 정도야 그렇구나하고 넘겨버릴 수 있다.

연산 속도가 지능의 무조건적인 척도도 아닐뿐더러, 루나가 어딘가에서 암산법을 따로 배워왔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레이는 루나를 따로 앉혀 놓고 약 1시간 동안 곱셈, 나눗셈, 데카르트 좌표계, 면적 개념, 직각 사각형과 삼각형의 넓이 공식, 미지수, 명제논리에 대해 가볍게 줄줄 읊었다.

그러고선 둔각 삼각형을 하나 그려준 후 밑변과 높이만 알려주고 넓이를 구하라고 했더니 그 자리에서 루나는 곧장 공식을 도출했다.

(a+χ) × h ÷ 2 - χ × h ÷ 2 = a × h ÷ 2

"아니 시발... 이게 어떻게 되지?"

둔각 삼각형 넓이 공식이야 대한민국 초등학생도 알고 있지만 그걸 한큐에 유추하고 증명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그것도 수학 배운지 1시간 된 친구가 말이다.

혹시 우연인가 싶어 좌표평면에 곡선 길게 그어놓고 넓이 근사값 구해보라고 했더니 곧장 x축과 직각으로 곡선을 잘게 쪼갠 후 높이 평균 내서 직사각형 넓이 합을 더해서 가져왔다.

"얘도 대한민국에서 환생했나?"

환생이 아니라면 루나의 지능은 평범한 영재의 영역조차 훨씬 뛰어넘어 있었다.

어지간한 인간은 원숭이랑 엇비슷하게 보이지 않을까? 우끼끼 우끼끼?

"선생이 필요해."

학문적인 부분이야 레이가 상당 부분 케어할 수 있긴 하다.

아아, 이건 미적분학의 기본정리라고 한다. 대학 가면 첫날 배우는 거지.

아아, 이건 패러데이 법칙이라고 한다. 이걸 알면 전기 발전이 가능하지. 대한민국에선 중학생도 아는 상식이다.

하여튼.

보육원에 비범한 아이는 몇 있었지만 그들이 지닌 재질의 정확한 쓰임새까지 레이가 재단할 수는 없었다.

꽃 피울 수 있는 분야를 찾아주기 위해서는 각 분야의 선생들이 필요했다.

루나도 연산력과 지능만 놓고 보면 고위 마법사의 재목처럼 보였지만 마나를 다루는 소양이 젬병일 수도 있고 마법이 아닌 평범한 학문에 뜻을 가질 수도 있는 법이었다.

"어쨌든 마법사와 기사는 주기적으로 초청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문제는 지미를 설득해야 한다는 거지."

지미가 아무리 호구라고 해도 보육원 애들 가르치는데 마법사나 기사를 초청해줄 리는 없었다.

"뭐, 지미의 호구력이면 몇 달 꼬시면 한 번쯤은 들어줄지도...?"

"그만 처먹어라."

잭이 레이가 쥐었던 세 번째 사과를 뺏어가며 툴툴거렸다.

"요즘 팔아먹는 것보다 니들 패밀리에 뜯기는 게 더 많을 지경이다."

잭의 불만에 짐작 가는 게 있었던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물이 좀 안 좋아지긴 했죠? 조직 커지기 전에는 다들 지미 말도 잘 듣고 얌전했는데 말이죠. 보호세를 제외한 갈취 행위는 두 번만 걸려도 손목을 잘라놓겠다고 으름장을 놨는데도 변하는 게 없네요."

"네가 할 소리냐?"

한숨을 푹 내쉰 잭이 사과를 다시 던져주며 부탁했다.

"네가 지미에게 잘 좀 얘기해봐. 근래 들어 길거리 분위기가 많이 안 좋아졌어. 저런 행패가 계속 벌어진다면 나도 널 도와주기가 힘들 것 같구나."

잭이 눈짓을 보낸 건너편 가게 안에서 사람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불안과 분노에 휩싸인 잭의 주먹이 가늘게 떨렸다.

잭의 감정을 이해한 레이가 사과를 마저 씹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 그래도 기강을 좀 다져야겠다고 생각하고 벼르고 있긴 했어요."

"...레이?"

"원래는 지미가 직접 해결할 때까지 시간을 가질까 하기도 했는데, 자기 어필도 좀 해야 될 것 같고 저런 새끼들은 빠르게 조져놔야 되기도 하고..."

소란이 일어난 가게로 걸어가려는 레이를 잭이 붙잡았다.

"잠깐만, 레이. 위험해. 지미 말도 제대로 안 들어 먹는 놈들이야."

"걱정 마요, 잭."

레이가 시원스레 웃었다.

보육원 애들 꼬셔다가 범죄 행위 동원하는 새끼들과 지미 말 안 들어 처먹고 조직 기강 해이하게 만드는 새끼들, 같은 놈들이었다.

"기강만 좀 다지고 올게요."

기강 (1)

5화

"지금 상황에서 마나를 활용한 육체 강화까지 공개적으로 선보이기엔 어그로가 너무 과한 감이 있는데 말이지."

내가 이 세상에 환생한 지 9년의 세월이 흘렀다.

환생 이후 절반 가까이의 시간을 가챠 돌린답시고 길거리를 쏘다니며 고아를 수집했다.

수북이 쌓여가는 노멀 고아 관리하기 위해 백작가와 교단에 얼굴을 비추었고, 그 와중 간간이 뽑혀나오는 레어 고아의 교육을 위해 선생 역할을 자처했다.

누군가는 나를 미친놈이라 손가락질 했다.

누군가는 나를 범상치 않은 특출난 인재라고 평가했다.

어그로가 끌렸다는 소리다. 좋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나는 천민이었고, 매춘부의 자식이었다.

"소설로 쓰면 제목 어그로는 오질 것 같은데. 엠창 환생? 빡촌 환생? 니미 바로 검열들어가겠네. 유료화는커녕 신문 기사가 먼저 나가겠어."

남성향 소설에 만연한 여성 혐오, 이대로 괜찮은가. 대처 미흡한 문피아 향해 비판 쏟아져. 금강 입장문 발표, "차후 적절한 대책 마련할 것."

"상상만 해도 좆같군. 좀 더 부드러운 제목이 필요해."

어쨌든.

기껏해야 천민 계급인 나는 트러블이 발생했을 때 대처가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충분히 어그로를 끌어 놓은 상태에서 내가 '마나'를 다루는 데까지 재능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골치 아픈 일이 늘어날 수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몸 사려가며 세태에 순응하고 살거였으면 가챠 돌리겠다고 설치지도 않았을 거다.

현 시점에서 양아치 새끼들이 분위기 흐리는 거 방치하면 기껏 모아놓은 고오급 고아들 남깡여창 루트 타는 거 시간문제였다.

"에휴, 드가자."

최선을 다해보되 일 꼬이면 코 박고 죽으면 될 일이었다.

이 세상이 멸망해도 내가 죄책감을 느낄 일은 없었다. 나는 김독자가 아니었으니까.

마음을 가볍게 먹으며 가게 문을 열어젖혔다.

*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하니웰은 비싼 고기를 구워내면서 떫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고기를 돈 받고 파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껄렁껄렁한 잡배들이 자리 대부분을 차지하고서 돈 생각 안 하고 술을 처마시고 있었다.

보호세 수금을 하러 왔으면 얌전히 돈만 받아 갈 것이지, 뭐 이리 가게 기둥뿌리까지 뽑아먹으려고 달려든단 말인가.

하니웰은 한숨을 쉬면서도 불만을 내뱉지 못했다.

어찌되었든 이 근방은 지미의 영향력 아래였고, 저들은 지미가 키운 조직의 조직원들이었다.

요새는 수도에서부터 번진 유행에 따라 자기들을 '지미 패밀리'라고 자칭하고 다녔는데, 하니웰 입장에선 웃기지도 않은 농담이었다.

"하니, 여기 고기 떨어졌잖아!"

"네네, 나가요."

하니웰이 다급히 고기가 담긴 접시를 가지고 나가자 론이 큼직한 손으로 하니웰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왜 이렇게 얼굴이 떫어? 우리가 공짜로 먹고 가겠다는 것도 아닌데?"

"후... 후후. 아니에요. 부담 갖지 말고 드세요."

"에이, 왜 이래. 받아 받아. 오늘 아주 좋은 날이니까."

론이 하니웰의 가슴골 사이로 골드 하나를 집어넣었다.

여기서 말하는 골드는 금덩이가 아닌 제국 내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동전 화폐로, 금이 소량 섞여 있다고는 하나 기껏해야 밥 두 끼 먹을 금액이었다.

하니웰은 삐뚤어지려는 웃음을 어떻게든 다잡았다.

론은 하니웰의 손아귀가 부들부들 떨리는 걸 뻔히 알면서도 껄껄 웃었다.

"요즘 내 기분이 아주 좋아. 식충이 중에서도 밥값 하는 놈이 늘고 있거든. 안 그러냐? 자! 모두! 오늘의 주인공 필립에게 박수! 오늘 고기는 필립이 산다!"

"우와아!!"

우렁찬 함성과 박수 소리가 조직원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필립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고양감 탓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론은 필립이 옆 마을에서 소매치기로 털어온 주머니를 꺼내 보이며 잘그락 소리를 냈다.

"돼지 새끼도 아니고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제 몫은 해야지? 언제까지 입 벌리고 어른들이 벌어오는 돈으로 밥만 축내고 살 거야? 그치?"

"예,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필립은 패밀리의 '형님'들이 좋았다.

그들은 강하고, 호쾌하고, 또한 군림했다.

식당에서 돈을 내지 않아도 누구도 뭐라 하지 못했고 여자의 엉덩이를 쓰다듬어도 감히 저항하지 못했다.

필립에게 형님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레이가 나눠주는 쿠키 따위. 진정한 패밀리가 된다면 제가 먹고 싶을 때 가서 마음껏 주워 먹을 수 있었다.

한참 필립이 끈적한 욕구에 빠져 웃음을 주체 못하던 순간.

"그만 놓아주시겠습니까."

생소한 남자의 목소리가 곁에서 울렸다.

하니웰의 엉덩이를 매만지던 론의 팔목을 움켜쥔 남자는, 가게의 주인이자 하니웰의 남편인 핀이었다.

"제 아내입니다."

"여, 여보! 괜찮아요! 들어가서 일 봐요."

하니웰이 기겁했으나 론은 사람 좋게 웃으며 순순히 손을 뗐다.

"하하, 이거 미안하군. 친근함의 표시였는데 불쾌했나 봐."

쩌억!!

큼직한 손아귀가 기습적으로 핀의 뺨을 강타했다.

고개가 돌아간 핀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런데 시발아 니 마누라 엉덩이 좀 만질 수도 있지 뭐 좆도 아닌 걸로 생색이야, 어?!"

연속해서 발길질이 이어졌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핀이 무방비로 복부를 얻어맞자 하니웰이 기겁을 하며 자기 몸으로 핀을 가렸다.

"꺄악! 그만 해요!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에이 시발. 밥맛 떨어지게 말이야."

론이 밥그릇을 던지며 투덜대자 다른 조직원들이 낄낄거리며 호응했다.

"적당히 해. 마누라 엉덩이를 남편이 챙겨야지 아님 누가 챙기냐? 네가 챙길래? 하하하!"

"형님, 거 빨리 일으켜 드리고 고기 좀 더 가져오라고 말씀 좀 전해주십쇼! 으흐흐!"

모욕적인 언사에도 핀은 더는 반항하지 못하고 앓는 소리만 냈다.

여기서 개처럼 얻어맞은 후 반병신이 된다 해도 하소연할 곳이 없는 게 작금의 현실이었다.

하니웰이 희롱당하자 일순 화를 못 참고 나서긴 했지만 미련한 선택이었다고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끄응... 으윽..."

"빨리 안 일어나? 이 새끼가 어디서 엄살이야?"

"죄송합니다... 잠시, 잠시만..."

"쓰읍, 정신 안 차려?"

복부를 붙잡은 채 헛구역질을 하는 핀을 향해 론이 재차 허벅지에 힘을 주며 발길질을 준비했다.

"공짜 밥 처먹을 거면 아가리라도 여물고 드시지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아 높고 고운 목소리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재밌게들 노십니다."

모두의 시선이 가게 문으로 쏠렸다.

"아주 저렴하게들 놀아요."

레이가 고개를 저으며 식당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

은퇴 후에 홍등가에서 주먹으로 밥이나 빌어먹으려던 지미가 반쯤 타의로 백작령 뒷골목의 거두가 된 이후.

세력의 급격한 확장과 통합 탓에 말을 안 듣는 조직원들이 늘어나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입지가 탄탄하지 않은 지미는 당장은 몸을 사리며 상황을 지켜보길 선택했고, 기세가 등등해진 양아치들은 제 손에 들어온 알량한 권력을 믿고 여기저기 패악질을 부리고 다녔다.

레이는 바닥을 기고 있는 핀을 바라보며 애늙은이 마냥 혀를 찼다.

"론 형님, 요즘 자꾸 선을 넘으시네요?"

"하하! 선을 넘어? 내가?"

"적당히 나대세요, 제발. 손목 잘리기 싫으면."

"미친놈. 즈그 애미가 아무한테나 다리 벌리고 다닌다고 자식새끼도 똥오줌 못 가리고 주둥아리를 놀려 대네. 이래서 핏줄 천박한 놈이랑은 상종을 하면 안 된다니까."

"?"

레이가 경악했다.

패드립에 충격을 먹은 건 아니었다.

느금마 용주골 에이스가 팩트인데 화가 날 게 뭐 있는가.

다만 고아인 론이 저런 모욕을 내뱉었다는 게 경악스러울 따름이었다.

'우리끼리 핏줄 타령 해봤자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꼴 아닌가? 즈그 엄마도 궁핍하다고 자식 버리고 튀었잖아?'

혼란에 빠진 레이가 되물었다.

"천박해요? 론 형님은 뭐, 고귀한 귀족 태생이라도 되십니까?"

"내 애미애비가 귀족인지 천민인지는 만나봐야 알지 새끼야. 아무렴 너보다 천할까."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 굉장히 관대하시네요. 긍정적인 사고 보기 좋아요."

"뭔 개소리야?"

"됐습니다. 하던 이야기나 마저 끝내자고요."

레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론과 거리를 좁혔다.

"겁대가리가 너무 없네요. 조직, 패밀리 규칙 몰라요? 보호세를 제외한 갈취 행위, 보육원 아이들 범죄 동원, 민간인 폭행... 하지 말라는 건 다 골라 하고 계시네요."

"하하, 그럼 우리가 샛빠지게 벌어온 돈으로 너희 보육원 놈들 뒹굴 거리는 꼴을 언제까지 봐야 하지? 응?"

레이는 어깨를 한 번 더 으쓱이고 말았다.

지미가 지금처럼 안정적으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이유는 백작가의 높으신 분들이 지미 패밀리의 성장을 암묵적으로 용인했기 때문이다.

암묵적 용인의 이유 중 하나는 지미가 보육원 등의 복지활동에 많은 자금을 쏟아부어 사회안정에 기여했기 때문이고.

론은 그러한 선후 관계를 무시하고 자기 불만을 내뱉고 있었다.

'저 무식한 깡패놈들 잡아다 앉혀 놓고 사정 설명하며 개화시키려 노력해봤자 들어먹을 것 같지도 않고.'

말귀를 못 알아먹는 걸 확인했으니 더는 주저할 게 없었다.

"론, 당신은 근 몇 달간 패밀리의 규칙을 수백 번은 넘게 어겼어요."

"하하, 그래서?"

"말을 안 들어 먹으면 어찌 되는지 모범을 보여줘야죠. 지미의 권위를 위해서라도요."

"걸레 년들 치마폭 사이에서 자라더니 눈에 뵈는 게 없어졌네."

기가 막혔던 론은 다짜고짜 의자를 잡아 레이에게 휘둘렀다.

레이가 허리에 찬 녹슨 검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뒤지게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목재 의자는 조잡했으나 검보다 사거리가 길었다.

레이는 앞으로 걸었다.

단지, 빠르게 앞으로 걸었다.

걸음은 단정하고 정갈했으나 어딘가 모르게 괴이했다.

혹자의 눈에 레이는, 흡사 지면을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콰드득!!

목재 의자가 바닥을 내리쳤다.

론은 의자가 부서지고 나서야 레이가 자신의 품 안에 들어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기겁하며 다시 의자를 들어 올렸지만 어째 균형이 맞지 않았다.

론이 고개를 들어 의자를 살폈다.

오른쪽 팔이 잘려나가 의자에 매달려 있었다.

한 발 늦게 비명이 울려 퍼졌다.

"흐아아아악!!"

"아쉽게 됐어, 론."

피를 뒤집어쓴 레이가 웃었다.

"네 독단적인 행동은 조직, 패밀리의 존속을 위태롭게 했어. 그러니 대가를 치러야지. 마음 같아선 죽여버리고 싶지만 거기까진 내 주관이 아니라서. 그게 아쉽다는 거야."

우아한 발걸음으로 몸을 반 바퀴 회전시킨 레이가 망설임 없이 론의 발목을 베어버렸다.

두 다리의 아킬레스건이 끊어진 론은 재차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끄아아아아악!!"

"하나 남은 팔로 지혈 잘하고 있어."

론 한 명으로 끝날 일은 아니다.

일을 벌였으니, 적어도 이 자리에 모인 조직원들은 전부 본보기로 삼을 필요가 있었다.

레이가 녹슨 검의 피를 털어낸 후 바닥으로 던졌다.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돼 도망칠까 덤벼들까 고민하던 조직원들은 레이가 무기를 버리자 금세 흉흉한 기세를 뿜어냈다.

"덮쳐!!"

"죽여!! 죽여버려!!"

"이 미친 새끼가!!"

자리를 박찬 조직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천천히 손목을 풀어낸 레이가 쥐꼬리만 한 마나를 본격적으로 운용했다.

이런 상황을 유도하기 위해 검을 버리긴 했지만 장정 여덟 명이 동시에 달려드는 광경은 심장을 꽤나 쫄깃하게 만들었다.

"쓰읍, 지면 개쪽인데."

판을 벌였으니 무조건 이겨야 했다.

기강 (2)

6화

"개새끼가!!"

조직원 하나가 명치를 향해 단검을 찔러 온다.

슬쩍 허리를 틀며 조직원의 팔을 어깨 사이에 끼운 레이가 관절의 역방향으로 힘을 실었다.

뿌득!!

"끄아아아악!!"

팔이 완전히 꺾여버린 조직원이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다.

직후 사방에서 주먹과 흉기가 무질서하게 휘둘러졌다.

레이는 곧장 바닥을 굴렀다. 원을 그리듯 가게 안을 데굴데굴 구르자 조직원들 간의 동선이 꼬여 우왕좌왕했다.

기회를 포착한 레이가 허리를 낮춘 채 몸을 쏘아내 어설프게 주먹을 휘두르던 조직원의 다리를 붙잡고 넘어뜨렸다.

'이렇게 잡고 꺾는 거였나?'

전생에 종합격투기 프로그램에서 보고 기억해둔 관절기 '힐 훅'.

우악스러운 레이의 손길에 여지없이 다리가 돌아간 조직원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해냈다.

"아악!! 아아악!!"

'검술이 좋긴 하네.'

마나량이 낮은 레이가 정면에서 성인 다수를 상대하긴 힘들었다.

허나 가벼운 몸뚱이의 이점과 검술에 속한 보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자 어렵지 않게 1대1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실수 한 번이 벗어날 수 없는 매타작으로 이어지겠지만, 레이는 침착하고 치밀했다.

"잠깐마으아아아악!!!"

다섯 번째 조직원의 다리가 '앞으로' 접혔다.

이쯤되니 팔다리가 멀쩡한 조직원들도 기세가 꺾여 의견이 나뉘었다.

"뭐, 뭐야?! 저 새끼 완전 괴물이잖아!!"

"도망쳐! 도망치라고!"

"지랄하지 마! 한꺼번에 덮치면 돼!!"

투쟁을 선언한 조직원의 몽둥이가 횡으로 휘둘러진다.

고양이마냥 몽둥이를 타고 넘은 레이가 조직원의 팔에 다리를 감고 매달렸다.

마나에 의해 일시적으로 증폭된 근력에 레이의 몸무게까지 더해지자 팔꿈치가 쉽사리 꺾였다.

비명이 울리고, 입구에서 서성이던 조직원 두 명이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가게 밖으로 도망쳤다.

"후욱! 후욱!"

숨을 몰아쉰 레이가 다시 한 번 호흡을 골랐다.

최대한 효율적으로 싸운다고 싸웠지만 체력도 마나도 거덜 나기 직전이었다.

그냥 놓아줄까 고민이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뒷처리는 확실하게 해야지."

레이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단검 두 자루를 양손에 움켜쥐었다.

투척술은 만약을 대비해 틈틈이 연습해놓았던 참이었다.

거리를 잰 후 팔을 휘둘렀다.

쐐액- 퍽퍽!!

엉덩이 바로 아래 허벅지에 단검을 맞은 양아치들이 길바닥에 고꾸라졌다.

금세 지면이 붉게 물든다. 해당 부위 근방으로 두꺼운 동맥이 지나간다고 배운 것 같긴 한데, 레이는 과다출혈로 뒤지는 거까지 신경 써줄 생각은 없었다.

"크흡! 후욱! 후우..."

벽에 등을 기댄 채 호흡을 안정시켰다.

너무 무리했다. 원하는 결과를 얻긴 했지만 명백히 위험한 도박이었다.

상대가 조금이라도 합을 맞출 줄 알았다면 싸움이 이렇게 쉽게 풀리진 않았을 것이다.

'깡패랍시고 가오만 잡을 줄 알지 별 볼 일 없는 양아치라는 건 알고 들이댔다만.'

예상보다 체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쥐꼬리만한 마나 아끼겠다고 근육에 마나를 넣었다 뺐다 반복한 게 원인이었다.

급격한 강화와 탈력의 반복이 근육에 엄청난 부하를 가했다.

'주의 좀 해야겠어.'

물을 한 컵 따라 마신 레이가 녹슨 검을 회수했다.

'후환은 제거한다.'

레이가 생각하기에 팔 병신은 다리 병신보다 위협적이었다.

때문에 가게 안을 돌아다니며 팔만 꺾어놓았던 조직원들의 아킬레스건을 하나씩 베어주었다.

초장부터 다리가 돌아갔던 조직원들은 운이 좋았다.

다시 한번 자지러지는 비명이 가게 안을 울린 후.

빈 잔에 물을 채운 레이가 의자를 끌고 와 필립 맞은 편에 앉았다.

"필립."

"..."

"눈 내리깔지 말고 날 쳐다봐."

필립은 제가 칼에 베이기라도 한 듯 끅끅댔다.

사색이 된 필립의 고개를 슬쩍 들어 올린 레이가 입을 열었다.

"보육원은 울타리야. 내가 만든 울타리지. 걸음마 떼고 난 후 개처럼 굴러가며 만든 빌어먹을 울타리라고."

"..."

"자랑은 아니지만 잘 만들어 놓긴 했어. 홍등가 맞은편이라는 끝내주는 생활 여건까지 감안하면 기적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

"..."

"울타리 안에서 생활하고 싶으면 울타리 내부의 문화와 규칙을 존중하고 따라야 해. 그게 좆같아서 울타리를 뛰쳐나가는 것까지는 말릴 생각 없어."

"..."

"하지만, 하지만 말이지."

레이의 안면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울타리를 부수려는 새끼는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사지를 찢어 놓을 거야. 필립, 알아들어?"

"..."

"알아 듣냐고 묻잖아 이 새끼야!!"

필립의 바지 아래로 노란 물이 질질 새었다.

얼어붙은 필립을 앞에 두고 물컵을 비운 레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 말은 많았지만 머리가 핑핑 돌아대서 더는 아가리를 놀리기가 힘들었다.

"사춘기인 거 감안해서 딱 한 번 더 기회를 줄게. 보육원이 마음에 안 들면 분위기 씹창내지 말고 이 마을에서 조용히 꺼져. 그게 싫으면 얌전히 살고."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리자, 삐걱거리는 가게 문 너머로 황망하게 서 있는 잭의 모습이 보였다.

레이는 잭에게 론의 품에 들었던 돈주머니를 건네주며 당부했다.

"뒷정리 좀 부탁할게요. 보복 걱정은 마시고요. 이게 다 지미가 시켜서 한 겁니다. 테이블 몇 개 박살 낸 건 외상으로 달아둘게요."

"레, 레이..."

"제가 좀 피곤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게를 나온 레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소보다 몇 배는 소란스러웠던 거리의 소음이 뚝 멈추었다.

온전히 레이를 향해 쏠려 있는 거리의 시선에 담겨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레이는 알 수 없었다.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내일이 되면 모두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 오늘의 작은 소란은 금세 잊을 테니까.

물론 예외는 있었다.

"며칠 귀찮겠군."

한동안 지미에게 시달릴 걸 생각하니 두통이 조금 더 강해졌다.

*

다음날.

날씨가 화창했다.

레이가 쑤시는 근육을 끌고서 홍등가를 찾아갔다. 아르바이트하는 날이었다.

레이는 매춘부들을 좋아했다. 오해를 덜기 위해 설명을 덧붙이자면, 인간적으로 좋아한다는 의미였다.

그녀들은 대개 실없는 소리에도 쉽게 웃어 주고 낙천적이었다.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이겠다만.

감정 없는 웃음을 내보여야 하는 그녀들은, 만만하고 부담 없는 상대인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꽤 좋아했다.

"우리 귀염둥이 왔엉?"

리사가 꺅꺅거리며 레이를 안아주었다.

레이와 리사는 홍등가의 거리를 걸으면서 잡담을 나누었다.

"사고 쳤다며!"

"벌써 소문 퍼졌어요?"

"벌써라니? 이미 어젯밤부터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몸은 괜찮아?"

"예, 뭐. 크게 상한 곳은 없어요."

"우와! 우리 레이 무서운 사람이었네?"

"크앙크앙."

"꺄악! 살려주세요, 레이님!"

누가 누굴 놀아주는지 모를 대화가 지나간 후.

며칠 전 보육원에 들렀던 리오에 관해서 이야기하던 레이가 서서히 표정을 구겼다.

매번 아르바이트의 내용물을 받아가던 건물에 도착한 것이다.

종종 걸음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섰던 리사는 금세 바구니 두 개를 들고 레이 앞에 나타났다.

"짜잔! 이번에도 잘 부탁해!"

"네, 뭐..."

표정이 썩어가는 레이를 향해 리사가 깔깔거렸다.

"레이가 있어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우리가 일일이 가져가서 세척하기는 귀찮은데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그렇다고 남한테 맡기자니 불안하고!"

"역시 저밖에 없죠?"

"그럼. 아! 그리고 오른쪽 바구니에 들어있는 건 좀 더 신경 써서 세척해줘!"

"어, 왜요?"

대답을 들은 레이는 괜히 물어봤다 싶었다.

"엉덩이에 들어갔던 거거든!"

아니 미친련아 엉덩이 옵션 있다는 이야기는 나한테 안 했잖아.

*

냇가로 가는 길에 맞바람이 불었다.

이게 무슨 의미냐. 바구니에서 올라오던 냄새가 내 콧구멍으로 몰아쳤단 뜻이다.

"아 좆같네 진짜."

뭐? 입이 너무 거칠다고?

그리 점잔 떠는 새끼한테는 똥 묻은 몬스터 창자 조각을 아가리에 쑤셔 넣은 후 똑같은 소리가 나오는지 지켜봐야 한다.

"사는 게 만만치가 않다."

사실 내가 먹고 살기가 어려워 이 짓을 하는 건 아니었다.

이런 극한 알바 안 뛰어도 보육원에서 밥 자체는 꼬박꼬박 나왔다.

보육원이 아니더라도 용주골 에이스인 엄마가 내 의식주는 충분히 해결해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알바를 뛰는 이유는 애들 간식 사기 위해서였다.

한 주에 두 번씩 먹이는 애들 간식. 애들 숫자가 100명 가까이 되니 한 주에 200명분 간식이 필요하다.

그런 보상이라도 있어야 애들이 수업을 잘 따라왔다.

물론 지미를 뒷배로 끼고서 반협박으로 제과점에서 간식을 제공받을 수도 있었다.

허나 그래선 안 됐다.

아이들에겐 내가 모범이 되어야 했으니까. 정직한 대가, 정직한 노동의 가치를 알려줘야 했다.

"근데 이게... 정직한 노동에 부합하는 일감이 맞나?"

일단 21세기 대한민국 기준으로 아동학대다.

"신경 쓰지 말자."

냇가 하류에 도착해 와일드호그의 창자 조각에 물을 채웠다.

여담인데 평범한 가축의 창자로도 피임구는 만들 수 있었다. 다만 쉽게 찢어지는 탓에 두께가 굉장히 두꺼웠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무지하게 질긴 와일드호그의 창자 조각으로 피임구를 만들었는데, 이건 엄청 비쌌다.

상대가 몬스터(마물)이기도 하고, 피임구 생산 과정에서 마법적인 처리도 필요해서 고급 물품으로 취급받았다.

그래서 재활용해서 써먹는다.

허나 밤에 일한 매춘부가 아침에 나와 이걸 닦는 것도 귀찮은 일이고, 남에게 맡겼다가 세척을 대충하면 대형사고가 터지니, 일 처리가 꼼꼼한 레이에게까지 순서가 돌아왔다.

"뭐, 고집부리는 꼬맹이한테 굳이 목돈까지 쥐여주며 일거리 양보해 준 거니 내가 감사해야 할..."

찍!

와일드호그의 창자로 만든 고급 피임구라 해도 안 찢어지는 건 아니었다.

때문에 물을 채워서 찢어진 부분이 있는지 확인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마침 손상된 피임구에서 묽은 액체가 쭉 뿜어져 나왔다.

가끔 있는 일이었다. 피임구에 구멍이 뚫리는 일도, 그 구멍 사이로 뿜어져 나온 액체가 하필 얼굴에 튀는 일도.

"..."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액체의 촉감에 몸이 돌처럼 굳었다.

흘러내린 액체가 입술을 지나쳐 지면에 떨어진 후 슬쩍 한쪽 눈을 떠 방금 피임구를 꺼냈던 바구니의 위치를 확인했다.

오른쪽.

"빌어먹을 엠생."

곧장 냇가에 얼굴을 담갔다.

*

작은 불상사가 있었지만 피임구의 세척을 무사히 끝낸 후 건조대에 늘어놨다.

이제부터는 훈련 시간이다.

검을 한참 휘두르다 검기를 맺었다. 직후 쏘아낸다.

"...이게 왜 안 되지?"

검기가 또 제자리에서 증발했다.

이건 확실히 이상했다.

일단 검기를 검에 두를 수만 있다면 쏘아내는 건 아무나 한다.

대개의 경우 검기를 맺기까지 개고생을 하거나, 혹은 검기를 쏘아낼 때 조준점 잡느라 개고생을 하지, 검에 맺힌 검기를 못 날려서 고생을 하지는 않았다.

근데... 검기를 못 쏘아내?

"내가 재능이 존나 없긴 하구나..."

지미에게 도움을 좀 요청해야겠다.

은퇴 전 지미는 검기를 구사할 수 있는 실력 좋은 용병이었다. 검기를 쏘아내는 노하우 쯤은 충분히 전수해줄 수 있을 거다.

내가 검기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것도 지미에게만은 밝힐 생각이었으니 거리낄 것 없었다.

"...응?"

마음을 다잡으며 주변을 돌다가 위화감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평소보다 태양 빛의 눈 부심이 조금 강렬했다.

내리쬐는 무지개 사이로 나뭇잎이 잘려나간 흔적이 눈에 띈다.

"저건 뭐야?"

그제야 자세히 지면을 살피자 무언가에 잘린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져 있었다.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검으로 잘랐다기엔 말이 안 되고 검기가 지나간 흔적이라기엔 지나치게 거친 감이 있었다.

뭐지? 혹시 마법의 흔적인가?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내가 항상 훈련을 진행하던 주변에서 검기나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누군가가 머문 흔적이 있다?

"곤란한데."

내가 숨기고 있던 밑천이 얼굴도 모르는 인간에게 털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앓는 소리가 나왔다.

이 근방에서 검기나 마법 사용자가 흔하지는 않을 텐데 대체 누구지?

고민이 깊어지던 와중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검 자루에 손을 올렸다가 이내 긴장을 풀었다.

"오랜만이에요."

"그래. 오랜만이다, 레이."

"저 데리러 온 거죠? 지미가 불렀나요?"

"잘 알고 있구나. 사고를 친 자각은 있는 것 같네."

"미안하게 생각하긴 해요, 매튜."

용병 시절부터 지미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믿음직한 부하이자 친우, 매튜.

그가 나를 찾아왔다.

"날 따라와라."

"아, 잠시만요. 널어놨던 피임구 좀 회수하고요."

잠시 언짢은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던 매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수표

7화

지미는 자신의 영향력이 넓어진 후 백작령 중심과 가까운 위치에 사무실을 하나 마련했다.

좁아터진 백작령이라 해도 거리가 좀 있는 탓에, 레이는 매튜가 대여한 말 한 필을 같이 탄 채 짧은 여행길에 오르게 됐다.

맞바람을 맞아주며 말을 몰던 매튜는 산길이 끝나갈 무렵에 입을 열었다.

"독학으로 마나의 활용법을 터득한 건가?"

"그런 셈이죠."

"너는 마나를 다루는데 있어서도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났군. 용병질 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녔지만 너 같은 놈은 생전 처음 봤다."

"칭찬 맞죠?"

"빈정대지 마. 이미 열 받아 있으니까. 마나 좀 각성했다고 그렇게 날뛰어 댄 거냐?"

"해야 할 일을 한 거죠."

"그따위로 처리해야 할 일이 아니었어. 너야 항상 선을 넘고 살지만 이번 일은 많이 과했다. 너무 많이."

서서히 속도를 줄인 매튜가 한숨을 깊게 쉬었다.

"우리는 배움이 짧고 우둔한 양아치 집단이기에 더욱 권위를 필요로 한다. 너는 지미의 권위를 상하게 한 패밀리들을 처벌하겠다고 나섰지만 네 행동이야말로 지미의 권위를 추락시켰어."

레이는 본인의 축출 행위가 지미의 허가 아래 이루어졌다고 입을 놀렸으나 그 주장을 모두가 믿지는 않았다.

9살 꼬맹이에게 휘둘리는 조직의 리더. 우습게 보이기 딱 좋았다.

"쯧, 길게 말해봤자 입만 아프지."

레이는 염치가 없지 지능이 모자라진 않았다.

기실 9살이란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비상한 사고력과 관찰력을 지니고 있었으니, 매튜가 하고자 하는 말뜻은 전부 알아들었으리라.

"이번만큼은 가서 싹싹 빌어라. 평소처럼 아가리질 하지 말고."

"충고 감사합니다. 매튜 형님."

"정말 돌아버리겠군."

매튜는 자기 팔자를 생각하며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 도저히 아이 같지 않은 비상한 면모 탓에 어디에서든 크게 될 놈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마나를 다루는 데까지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다.

9살 나이에 독학으로 마나를 활용한 신체 강화법을 깨우친다?

그게 가능한 천재가 전 대륙을 통틀어도 대체 몇 명이나 존재할까?

성인이 된다면 지미와 매튜가 감히 상대하기 어려울 만큼의 '힘'을 거머쥘 게 확연하기에, 당장 목을 벨 게 아니라면 반드시 돈독한 사이를 유지해야 했다.

'끙. 여기 자리 잡을 때만 해도 9살 꼬맹이의 눈치를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인생이란 게 참 좆 같고 불공평한 거다.

연초를 꺼내 문 매튜는 레이와 함께 말에서 내렸다.

미리 직원들을 내보낸 건물에 들어서자 지미가 사무실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레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 만에 보는 지미의 얼굴에 레이가 입꼬리를 길게 찢자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지미가 책상을 내려쳤다.

콰앙!!

"뭘 잘했다고 쪼개 이 개새끼야!!"

지미는 매튜에 비해 꽤 다혈질이었다.

*

어지간히 열을 받았는지 지미는 인사도 생략하고 짜증을 쏟아냈다.

"너는 나에 대한 리스펙트가 전혀 없는 거냐? 존중 말이다, 존중!! 몇 주 얼굴 안 비쳤다고 이딴 대형사고를 쳐?!"

"아니 지미 형님, 좀 진정하시고..."

"내가 니 시다바리냐? 시다바리야? 내가 너 사고 쳐 놓은 거 치우려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줄 알아?! 크아악!"

"형님, 드리고 싶은 말씀이..."

"크윽! 내가 어쩌다 저 악마 같은 놈과 엮여 가지고 이 고생을... 이 고생을!"

지미가 얼굴을 쥐어뜯으며 자기 인생을 반추했다.

지미는 용병이었다. 먹고 살기 위해 피치 못하고 선택한 직업이었다.

다행히 지미는 운도 좋고 재능도 있었다.

전장을 돌아다니며 얻은 싸구려 마나 연공법을 체득해 결국 검기를 구사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이르렀으니까.

지미는 꽤 잘 나갔다.

힘 있는 귀족에게 아양을 떨며 더러운 물에 몸을 담갔다면, 단승 작위 하나쯤은 받아 낼 수 있었을 정도로.

태생의 신분을 벗어날 수 있다는 유혹은 참으로 달콤하고 달콤했지만.

지미는 결국 용병단장의 자리를 내려놓고 은퇴했다.

그게 지미의 한계였고 또한 본질이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칼을 들었지만 마음이 유약했고, 따뜻했다.

은퇴 후 지미는 적당한 변경 지역에 자리 잡고 홍등가의 '주먹' 노릇이나 하면서 평화롭게 살겠다고 다짐했다.

필립스 백작령에 도착한 후엔 어린 날 배를 곪았던 기억이 너무도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있어 모아두었던 자금으로 작은 보육원도 하나 세웠다.

유일무이한 친우인 매튜가 그 여정을 함께했다.

지미는 참 많은 것을 포기하고 필립스 백작령에 정착했지만 은퇴 후 생활에 만족했다.

어떤 악마 같은 애새끼와 엮이기 직전까지 말이다.

"크아악! 내가 왜! 하필! 하필 필립스 백작령에 정착해서!"

"지미, 드릴 말씀이 있어요."

"크악! 크으윽..."

경기를 일으키던 지미가 자리에 주저앉아 간신히 호흡을 골랐다.

드릴 말씀? 미안하다고 사과 한 번 하겠지.

말뿐인 사과겠지만 일단 듣기는 해야겠다는 생각에 인내심을 발휘했다.

"해 봐."

"보육원에 기사랑 마법사가 필요해요."

"그래, 기사랑 마법... 뭐, 시발?"

"특히 마법사요. 몸 쓰는 재능이야 저도 알아볼 수 있지만 마법적인 재능은 아니잖아요? 어떻게든 믿을 만한 마법사를 한 번이라도 초청 가능할..."

"이 씹어먹을 자식아!!"

결국 인내심의 끈이 끊어지는 지미의 모습을 보며 매튜가 이마를 짚었다.

'두통이 오는군.'

"기사랑 마법사가 돈만 주면 오는 용병인 줄 알아?! 걔들은 말단부터도 준귀족 대접을 받아!! 그리고 기사? 그게 왜 필요해? 너 보육원 애들한테 이상한 발차기 가르치는 거 있잖아! 그거면 됐지 또 뭘 가르치게?!"

"태권도요? 그건 실전 무술이라기엔 좀... 그냥 스트레칭 좀 하고 몸 쓰는 법 좀 익히라고 가르쳐 준거죠."

물론 가르쳐 놨더니 1080° 회전 돌려차기를 슝슝 날려대는 녀석도 한두 명 생겼지만 진짜 필요한 건 마나 연공법과 무기술이었다.

"기사가 안 된다면 마법사라도..."

"그게 더 힘들어!! 제발 이상한 욕심 좀 그만 부려. 애들은 그냥 순리에 맞게 키우라고!"

"여기 생활 여건 고려했을 때 순리에 맞게 키우면 깡패 새끼랑 매춘부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게 문제냐?"

"문제죠."

"크아악!!"

머리를 쥐어뜯은 지미가 거품을 물었다.

"네가 지금 무슨 사고를 쳐 놨는지는 알고 이렇게 당당하냐?"

"지미의 권위를 실추시킬만한 행동을 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그것도 그거고!! 제기랄, 레이 네가 어디 소속인지는 자각하고 있어?"

"자애와 사랑이 넘치는 지미 보육원 소속이죠."

"그래! 내 피와 살과 머리카락을 짜 먹고 사는 빌어먹을 보육원 소속이지!! 그런 네놈이 내부 단속한다며 사람 패 죽이고 다니면 남들은 어떻게 보겠냐?"

레이는 지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지미 보육원의 원생이 지미의 적들을 패죽이고 다니면 남들이 보육원을 어떻게 보겠는가.

살인 기계를 육성하는 깡패 훈련소로 볼 거다.

보육원이 순전히 지미의 자금으로 돌아갔다면 상관 없겠지만 백작가와 신성 교단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보육원 흉내를 내며 귀족과 교단을 우롱한 후 뒤에선 전투원을 육성하고 있었다는 오해를 받는다면 지미는 얄짤 없이 좆되는 거였다.

"너무 걱정하진 마요. 백작가랑 교단이 저 꼴통인 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이 미친놈이 남의 일이라고 지금!!"

"하여튼 지미, 기사든 마법사든 모셔올 방법 좀 고민해 봐요."

"제기랄!! 이렇게는 못 살아!! 거긴 내 돈 주고 마련한 내 보육원이야!! 내 보육원에서 당장 꺼져!!"

"쥐꼬리만 했던 보육원 제가 키웠잖아요."

"누가 키워달라고 무릎 꿇고 부탁하기라도 했냐?"

끔찍한 스트레스 탓에 혈압이 치솟은 지미가 가슴을 부여잡고 소리쳤다.

"매튜! 이 새끼 데리고 나가!"

매튜가 한숨을 쉬며 다가오자 레이가 허리춤에 있던 녹슨 검을 뽑아들었다.

지미와 매튜는 당황했지만 긴장하지는 않았다.

구르고 구른 용병인 둘은 마나 조금 다룰 줄 아는 꼬맹이 하나쯤은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얼마 못 가.

지미와 매튜는 제자리에서 돌처럼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이... 눈앞에서 벌어졌으니까.

츠즈즈즉

유형화된 마나가 레이의 검신에 맺혔다.

검기. 엑스퍼트에 도달한 무인의 상징.

마나를 활용하여 신체를 강화하는 기초적인 단계를 넘어서.

체내의 마나를 길들이고 정제하여, 자신의 의지를 사물에 깃들일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경지.

엑스퍼트.

지미와 매튜 또한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라 있었지만, 눈앞의 꼬맹이는 9살이었다.

역사에 이름을 새긴 세기의 천재들조차.

가장 이른 시기에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랐다고 기록된 나이가 12살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눈앞의 꼬맹이는... 무엇이지?

"지미, 매튜. 내가 누구?"

"..."

"제국 역대 최연소 소드 마스터."

한 박자 쉰 레이가 덧붙였다.

"-내정자."

개소리다.

개소리여야 하는데. 눈앞에 뚜렷한 증거물이 있었다.

눈앞의 검기를 보고도 레이의 말을 부정할 수 있는 인간은 제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레이가 검을 휘둘렀다.

철제가 덧대진 탁자가 괴이한 소음과 함께 반으로 잘렸다.

"지미, 매튜. 당신들은 따뜻한 사람들이야."

그리고 귀한 사람들이다.

세상의 쓴맛을 두루 보고도 본인의 신념을 관철하기는 성자라 해도 쉽지 않았다.

"당신들을 만난 건 나의 가장 축복받은 행운 중 하나겠지."

키득거린 레이가 검을 회수했다.

"조금만 더 날 믿고 내게 투자해줘."

레이가 하늘 위에 별처럼 빛나게 될 순간이 찾아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터다.

"과거에 놓고 온 단승 작위? 그딴 걸 아쉬워할 필요는 없어."

때가 되면 세습 가능한 진짜 작위쯤이야 얼마든지 쥐여줄 수 있을 테니.

"제국 역대 최연소 소드 마스터의 측근이 되어, 진짜 귀족이 되는 거야."

레이가 웃었다.

"날 믿어. 당신들이 베풀어 온 온정과 희망을, 반드시 당신들에게 돌려주도록 할게."

물론 레이는, 본인이 마스터의 경지에 닿을 수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건 공수표였다.

계륵 (1)

8화

이게 적절한 비유가 될지는 모르겠다만.

예컨데 내가 학문적인 소양이 리셋된 채 지구에서 갓난아기로 회귀를 했다면.

흔히 SKY로 대표되는 명문대쯤은 우습게 들어갈 수 있었을 터다.

하고자 한다면 남들보다 10년은 일찍 수능을 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도 있을 테지.

헌데 수능 봐서 서울대 의대를 들어갈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확답하기 힘들었다.

학부생 수준을 벗어나 특정 학문에 기릴만한 흔적을 남길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더욱 대답이 궁색해지고.

더 나아가 노벨상을 수상할 정도의 업적을 세울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불가능하다고 답할 것이다.

마스터의 경지에 이를 수 없으리라고 확신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나는 그저 시작이 빠를 뿐이다.

현 육체의 재능이 우수했고, 초월자의 지원까지 받았기에 남들이 경악할 만한 경지를 어린 나이에 개척할 수 있었지만...

결국 정점에 달할 수 있는 자는 정점의 재능을 타고나는 이였다.

내가 정점의 재능을 타고났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당장 검기도 못 날려서 헤매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공수표를 날렸다.

사기를 친 셈이었지만 미안함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가챠 돌린 거 싸그리 말아먹고 아무 성과 없이 보육원 문을 닫는다면 작위 같은 걸 걱정할 게 아니었다.

작위를 나눠줄 제국이 증발할 테니까.

반면에 열심히 가르친 보육원 아이들 중 인류의 위기를 막아낼 영웅이 배출된다면 지미와 매튜는 자연히 명예를 얻게 될 것이다.

작위를 쥐여줄 주체만 바뀐 꼴이니 내 기준에선 노 프라블럼이었다.

"그래서, 어렵다는 말인가요?"

"마법사는 특히 그래. 네 생각보다도 아주 폐쇄적인 조직이야. 이건 돈으로도 해결 안 되는 문제지. 고용은 가능하지만 가정 교사처럼 부릴 수는 없어."

지미가 고개를 저었다.

어느 조직에 속한 마법사든 폐쇄성은 디폴트 값이다.

저들 간의 교류야 필요에 의해 진행하고 있지만 외부인에게 지식을 공유하지는 않는다.

"물론 고위 귀족 정도 되면 특정 세력에 소속되지 않는다고 해도 기본기 정도는 교육해줄 수 있겠지. 하지만... 우리 같은 천한 족속과는 상종을 하지 않으려 들 거다. 아무리 재능이 있다 해도 호의적인 반응은 기대하기 어려울 거야."

"무슨 말씀인지 알겠네요."

"물론 하자가 좀 있는 녀석들은 구하려면 구해볼 수 있어. 용병 중에도 쫓겨난 마법사가 가끔 있었지."

"그건 안 돼요. 배울 거면 정석으로 배워야죠. 급하다고 야매로 때우면 나중 가서 고생해요."

기껏 유니크 고아 뽑아놓고서 스킬 트리 잘못 태워 망캐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렵네요."

"하나만 확실히 하자. 제대로 된 기사나 마법사와 접선하고 싶으면 귀족의 도움이 있어야 해."

백작가에 얼굴을 비쳐야 한다는 소리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급하게 진행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정 원하면 내 마나 연공법을 애들에게 전수해줄 수는 있어."

"미안한데요 지미, 지미의 연공법은 너무 싸구려예요."

"큭큭! 그렇긴 하지."

용병 시절 길거리에 굴러다니던 걸 찾아 익힌 거니까.

지미는 자기가 익힌 것이 매우 저렴한 연공법이란 걸 굳이 부정하진 않았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든 안정적인 마나 연공법만 하나 구한 후 내 머릿속에 있는 마나 정제법과 검술을 아이들에게 전수해주는 방법도 고려해봐야 할 것 같다.

평생 나 혼자 가지고 있어봐야 썩히는 꼴밖에 되지 않으니.

"일단 알겠어요. 그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지미와 매튜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더 있어요."

"..."

기세를 날카롭게 세운 지미와 매튜가 잔뜩 긴장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지금까지 벌여놓은 게 있어 오해를 받아도 할 말이 없긴 했지만, 이번 부탁은 정말 간단히 들어줄 수 있는 종류였다.

"검기 날리는 노하우 좀 전수해줘요."

"...뭐?"

당황스러운 기색을 내비친 지미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 나나 매튜는 평범한 검기밖에 방출할 줄 몰라."

"네?"

"목표를 쫓아가는 유도 검기나 쏘아내면 여러 개로 나누어지는 분열 검기는 사용할 줄 몰라."

"아뇨 그딴 거 말고, 그냥 퓨어한 검기 쏘아내는 방법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검기 만들어낼 줄 알잖아?"

"근데 어떻게 쏘아내는지 모르겠더라고요."

"?? 너 병신이니?"

"작위 받기 싫어요?"

"껄껄, 우리 레이에게도 인간적인 면모가 있으셨구나! 하긴 사람이 완벽할 수만은 없지!"

용병 시절 처세를 몸에 불러온 지미가 뒤에 서 있던 매튜에게 손짓했다.

"매튜, 이 근방에 마련해 놓은 훈련장으로 가보자고."

*

다져진 산길에서 옆으로 틀어 빽빽한 나무 사이로 수십 분 걸어가자 넓은 공터가 나왔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공터 위에는 거대한 바위가 일정 간격을 두고 촘촘히 자리하고 있었다.

지미와 매튜가 검기를 수련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훈련장이었다.

"생각해보니 레이 네가 독학으로 검기를 뽑아낼 수준에 이르렀다는 걸 간과했어."

어지간히 현실성이 없어야 말이지.

엑스퍼트의 경지에 이르렀기에 자연히 다른 것들도 완벽할 줄 알았건만, 기실 레이는 경험이 일천한 빈 쭉정이 상태였다.

"일단 기초적인 것부터 설명해주마. 검기. 다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어떤 연공법과 정제법을 익혔느냐에 따라 그 성질이 조금씩 변화하지."

지미가 검기를 생성한 후 허공에 천천히 검을 휘둘렀다.

소름끼치는 바람 소리와 함께, 검의 궤적을 따라 미약한 열기가 공기를 데웠다.

"족보 없는 마나 연공법 기반의 검기는 성질이 다 비슷비슷하지. 절삭력과 열기."

매튜 또한 검기를 생성해 레이에게 보여주었다.

지미에 비해 좀 더 날카롭고, 대신 열기는 약한 검기가 허공을 베었다.

이윽고 지미와 매튜의 검기가 맞닿는다.

일순 강렬한 섬광이 터지며 검기에 가두어져 있던 열기가 주변을 휩쓸었다.

카가각!!

"검기끼리 충돌하면 각자의 성질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

레이는 심장 박동이 거세짐을 느꼈다.

건너건너 들었던 정보를 지미와 매튜가 직접 펼쳐 보이자 묘한 긴장과 희열이 피를 타고 흘렀다.

"레이, 검기를 한 번 일으켜 봐."

"알겠어요."

"자, 한번 천천히 부딪쳐 보자고. 제국 역대 최연소 소드 마스터가 되실 분의 검기는 과연 어떤 맛일지."

그리 말하면서도 지미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레이는 독학으로 엑스퍼트의 경지까지 올라갔고, 마나 연공법이나 정제법이 족보 없는 건 지미와 피차일반이었다.

독특해봐야 얼마나 독특하겠어.

그런 안이한 마음으로 검을 마주 댄 직후.

터엉!!

반발을 이기지 못한 검이 손아귀에서 튕겨 나갔다.

부메랑처럼 회전하는 검은 지미 옆에 서 있던 매튜를 덮쳤다.

"흐어억!!!!"

허리를 뒤로 꺾어 간신히 검을 피한 매튜가 지면에 엎어졌다.

허공을 가로지른 검은 한참 떨어져 있던 나무를 반쯤 파고들고 움직임을 멈췄다.

"..."

"..."

"..."

잠시 침묵이 일었다.

손아귀가 터져 철철 피가 흐르는 지미와, 친우의 칼에 유명을 달리 할 뻔 했던 매튜가 약속이라도 한 듯 연초를 꺼내 물었다.

"후우... 인생이란 게 참 좆 같고..."

"불공평한 거야."

지미와 매튜는 레이와 검을 맞대는 순간 일어난 현상을 분명하게 포착했다.

반발? 왜곡? 현상의 정체까지 정확히 통찰할 수는 없었으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레이의 검기는 평범한 검기와는 아예 비교가 불가했다.

"불세출의 천재 아니랄까 봐. 족보 없다고 무시했더니 지 혼자 족보를 처음부터 짜내고 앉아있었네."

"족보고 나발이고 앞으로 검 좀 꽉 잡고 다녀, 대장. 뒤질 뻔했잖아."

"네가 한번 부딪쳐봐. 손목 안 꺾인 게 용할 지경이었으니까."

"지미, 매튜."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산불 날 수 있으니까 담배 좀 꺼요."

저저 시발련.

지미와 매튜가 눈으로 욕을 하고는 연초를 지면에 비볐다.

"흠, 근데 검기를 날리지 못할 정도로 검기의 밀도가 떨어지는 것 같지는 않던데."

의아함을 내비친 매튜가 나무에 박힌 검을 뽑아낸 후 바위를 가리켰다.

"검기를 방출하는 노하우를 알려주기 전에 경고하자면, 실전에서 검기를 마구 쏘아대는 건 자살 행위다. 효율이 나빠."

매튜가 10 m가량 떨어진 바위에 검기를 방출했다.

반달 모양으로 쏘아진 검기가 바위를 파고든 순간 후끈한 열기와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먼지가 가라앉고 드러난 바위는 처음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만큼 부서져 있었다.

"개인 기량 차이가 있지만 거리가 멀어지면 이렇게 되지."

150 m가량 떨어진 바위를 향해 검기가 방출됐다.

쏜살같이 쇄도한 검기는, 바위와 맞닿을 쯤에 그 찬란함이 많이 옅어진 채였다.

콰가각!!

10 m 표적에 비해 훨씬 넓은 면적이 검기에 피탄됐지만 정작 표적인 바위는 금이 약간 가고 말았다.

"100 m 이상 떨어진 표적은 맞힐 자신이 있다해도 검기를 쏘아내길 다들 꺼린다. 위력이 형편없이 줄거든. 자, 그럼 검기를 정확하게 쏘아내는 노하우를 가르쳐 주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매튜가 말을 이었다.

"흔히 검기를 처음 날릴 때 실수가 잦은 이유는... 그래, '쏘아낸다'는 단어에 인식이 매몰되는 탓이다."

엑스퍼트에 경지에 들어서면 유형화된 마나에 주인의 의지가 깃든다.

집중해야 할 건 바로 그 부분이다.

"레이, 너는 검기를 쏘아내는 게 목적이냐? 아니지. 표적을 맞히는 게 목적이지. 때문에 검기를 '쏘아낸다'는 행위에 집중하면 조준점이 흐트러지거나 아예 검기가 흩어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 시점에서 약간의 상상을 발휘할 필요가 있었다.

"차라리... 네 검이 찰나 간 길게 늘어난다고 상상해봐. 수십 미터가 넘게 떨어진 표적을, 찰나 간 길게 늘어난 검의 사선과 일치시키는 거지."

레이는 박수를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평화로운 곳에서 지내다 보니 자주 망각했지만, 과연 지미와 매튜는 수많은 전장을 헤쳐온 베터랑 용병이었다.

실전에서 몸으로 습득한 노하우를 풀어서 설명해주니 다가오는 무게가 달랐다.

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10 m가량 떨어진 바위를 향해 검을 겨누자 지미가 기겁을 했다.

"야야!! 지랄 말고 저거 노려!! 저거!! 코앞에 검기 쐈다가 또 뭐가 튀어나올지 어떻게 알고!!"

매튜가 지미의 말에 동의했다.

"최대한 멀리 있는 거 노려라. 나도 9살 꼬맹이 눈먼 칼에 맞아 죽긴 싫다."

가장 멀리 있는 표적이라면 거리가 200 m가량 됐다.

레이가 고개를 끄덕인 후 몸을 틀었다.

'지금까지는 무언가를 베어내겠다는 의지도 없이 검기를 쏘아내려 했지. 집중하자. 표적을 인식해. 내가 부수어야 할 것. 상상해. 길게 늘어나는 검. 궤적, 그리고 사선.'

시야가 급격히 좁아지며 점처럼 보이는 자그마한 바위에 모든 의식이 집중된다.

이를 갈아낸 레이가 검을 휘둘렀다.

후욱!

"...?"

"뭐야?"

"음?"

한 발 떨어져 지켜보던 지미와 매튜가 눈을 크게 뜨며 당혹스러워했다.

검기가 제자리에서 증발했다. 이건 지미와 매튜도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검기를 방출하는 데 실패한다고 해도, 마나가 역류하거나 외부로 폭발하지, 저런 식으로 허공에서 증발하진 않았다.

애초에 바위를 부수는 에너지가 아무 징조 없이 소멸할 리가 없지 않은가.

"아니 대체..."

눈을 끔벅이고 있는 레이에게 다가간 지미가 레이의 검에 조심스레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힘의 반발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나가 정말로 증발해버린 거다.

"그만한 검기가 대체 어디 간..."

지미의 중얼거림은 뒤늦게 터져 나오는 폭음에 묻혀버렸다.

콰가가가각!!!

셋의 눈동자가 동시에 폭음의 진원지로 돌아갔다.

200 m 떨어진 바위가 완전히 박살 나서 지면을 구르고 있었다.

지미와 매튜의 눈동자가 다시 레이에게 돌아갔다.

레이가 억울해했다.

"아니, 왜 날 봐요?"

계륵 (2)

9화

레이는 썩 억울한 심정이었다.

정황이 좀 이상하긴 했다. 이상하긴 했지만, 레이에게 지미와 매튜 몰래 검기를 200 m 떨어진 바위를 향해 날려보낼 방법은 없었다.

뻔뻔한 레이를 앞에 두고 눈을 부라리던 지미가 다른 바위를 가리켰다.

"잔말 말고 검기 한 번 더 방출해봐."

"마나 후달려서 힘든데요."

"잔말 말고."

기실 레이도 지미도 매튜도.

난데 없이 검기가 증발한 레이의 검신에 정신을 집중하느라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도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다.

결국 의심은 드니 가장 빠른 해결 방법은 한 번 더 시도해보는 것이다.

"끄응, 힘든데..."

몇 번 튕기며 지미와 매튜의 속을 박박 긁어 놓은 레이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번에 노릴 표적은 150 m가량 떨어져 있는, 방금 전 매튜가 공격을 가했던 바위였다.

레이는 평정을 가장하면서도 몇 번인가 검자루를 다시 쥐었다.

고였던 침이 한 번 넘어가고.

손가락 마디만큼 작게 보이는 바위를 향해 모든 의식을 집중했다.

'베어낸다. 파괴해. 검을 휘둘러. 채찍처럼. 길게 늘어나서. 닿는다. 사선에.'

검이 휘둘러진다.

후욱!

이번에도 역시 검기가 허공에 증발했다.

다만 조금 전과 다르게, 모두의 시선은 레이가 표적으로 했던 바위에 결집되어 있었다.

그리고.

까득!

뭐라 형용키 힘든 괴이한 소음과 함께.

바위 앞의 공간에 얇은 실금이 새겨졌다.

분별도 힘든 찰나의 순간.

얇은 실금 너머로 결단코 존재해선 안 될 본인의 모습이 거울처럼 비침을, 레이의 눈동자가 인식했다.

직후 허공에서 검기가 튀어나와 바위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콰가가가가가각!!!

굉음과 함께 산산조각 난 바위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누가봐도 범인은 명확했다.

"어, 시발."

내가 쏜 게 맞네.

레이가 무안해하며 턱을 매만졌다.

매튜는 제자리에서 굳어버렸고 지미는 뒷목을 잡으며 끅끅 소리를 냈다.

어색한 침묵이 계속 이어지자 레이는 선수를 친답시고 덜컥 화를 냈다.

"매, 매튜! 제 검기가 이상해요! 나한테 대체 뭘 가르친 거예요?"

"그걸 왜 나한테 따져 이 새끼야!"

"크아악! 지랄하지 마! 지랄하지 말라고!!"

머리를 쥐어뜯은 지미가 검을 뽑아서 검기까지 만들어내며 분노했다.

"저 검술을 독학했다고? 지랄하지 마! 어떤 새끼가 가르쳐 준거야!"

"지미, 진정해요. 독학했다고 했잖아요."

"내가 그딴 거짓말을 믿을 것 같아? 독학했다는 새끼의 검기가 공간을 도약해? 그딴 기적이 가능한 검술은 제국 역사에도 하르시아의 공간검 밖에 없었어!!"

"공간검요?"

"제기랄, 600년 전 실전됐다는 하르시아류 공간검!! 대체 어디서 배워온 거야?!"

"600년 전 실전요?"

"그래!! 600년 전 실전...!"

"지미."

레이가 말을 잘랐다.

"600년 전 실전됐다는 검술을 제가 누구한테 배워요?"

"그, 그건 네가 대답해야지!!"

"지미, 잘 들어요."

레이는 일단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그냥, 내 재능이 너무 뛰어날 뿐이에요."

너무나도 당당한 레이의 태도에 지미가 입을 쩍 벌렸다.

"굳이 누군가에게 배우지 않아도, 저와 같은 천재들은 본능적으로 궁극에 이르는 길을 찾아내죠. 제 검술은 하르시아 류가 아니에요. 그저 같은 방향을 선택했을 뿐이죠. 교류가 없더라도, 설령 수백 년의 시차가 있다 해도. 불세출의 천재끼리는 서로를 닮아가는 법이죠."

"큭, 크윽...!"

"받아들여요. 이건 지미 같은 범인의 한계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현상이에요. 이해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요. 주제 넘게 머리 굴리지 말고."

"끄으아악...!"

혈압이 너무 오른 지미는 배가 아파 뒤질 것 같다는 얼굴로 지면에 쓰러져 실신했다.

꼽다. 존나게 꼬와서 죽여버리고 싶다.

엇나간 질투 탓에 과호흡에 시달리며 지면을 기는 지미를 매튜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배가 더럽게 아픈 거야 매튜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그보다 일이 꽤 지랄 맞게 꼬였다는 직감이 먼저 들었다.

생각을 정리한 매튜가 무섭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레이."

"말해요."

"하르시아 류든 레이 네 오리지날이든, 남에게 절대 보여선 안 된다."

매튜는 확신했다.

레이가 공간검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백작령 전체가 풀 한 포기도 못 남기고 사라질 거다."

*

"계륵이군."

지미와 매튜와 헤어진 레이가 제과점으로 향하며 중얼거렸다.

제국 검술의 정점, 하르시아류 공간검.

이게 존나 개쩌는 검술인 건 레이도 인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제국 역사상 가장 이른 나이인 12살에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랐다는 불세출의 천재, 하르시아.

그가 만들어낸 전설적인 검술, 공간검.

정확한 원리는 감도 잡히지 않지만, 하르시아류 공간검의 검기는 공간을 도약해 표적의 코앞에서 떨어져 내렸다.

'기본이 이도류인 이유가 있었어.'

같은 경지의 적을 맞상대 한다고 가정했을 때 칼 하나로 방어하며 남은 칼로 도약 검기를 날려대면 얌전히 뒤질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마스터하면 검기가 도약 되는 위치와 시간까지 조율 가능한 모양인데.'

검기 도약의 유예 시간이 30초만 되어도 검기 수십 개를 표적 하나에 시간 차로 중첩시킨 후 한 번에 폭격을 쏟아부을 수 있다.

물론 레이는 불가하다.

제대로 이해하고 쓰는 검술이 아닌지라 검기 방출 후 공간 도약까지 걸리는 시간조차 제어가 불가했다.

훈련장에서 마나와 체력을 털어가며 실험했지만, 같은 거리에 있는 표적이라도 공간을 도약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들쭉날쭉했다.

도약시킨 검기의 정확한 출연 위치 또한 현재로선 제어가 불가능했고.

'역시 나는 검에 재능이 없다...고는 못 하겠군, 이제.'

정말 미친 검술이다.

제국이 미쳐버린 게 아닌 이상 하르시아류 공간검이 실전되는 꼴을 가만히 두고 봤을 리가 없다.

제국은 공간검을 존속시키기 위해 제국의 기재를 다 끌어모았다.

그럼에도 하르시아가 죽고 난 후 채 100년도 채 되지 않아 공간검의 실전이라는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공간검을 익히고자 한 대부분의 기재가 실패하거나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이걸 익힐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레이의 몸뚱이는 억만금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마나 연공법을 굳이 생략한 이유도 알겠어.'

공간검을 위해 정제된 마나는 제국이 끌어모은 기재들조차 대부분 병신을 만들어버릴 만큼 강력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레이가 연공법으로 대책 없이 마나부터 늘린 후 정제 과정에 들어갔다면 죽음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젠장. 좋은 거 쥐여줬다는 건 알겠는데 지금 시점에선 계륵이라고."

공간검이 부활했다는 사실이 외부로 유출되면 대체 어떤 난리가 날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매튜는 말했다.

네가 우리의 예상보다도 지나치게 뛰어났기에, 상상 이상의 리스크를 떠안게 되었다고.

"보는 눈 있는 곳에선 못 써먹어. 포텐은 미쳐 돌아가지만 그걸 개화시킬 능력도 부족해."

여기에 더해 애들한테 전수도 못 한다.

보안 문제도 보안 문제고 익히다 죽을 확률이 월등히 높았으니까.

쯧.

혀를 찬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전장에 직접 서게 되는 경우도 각오는 해야겠군.'

본인이 용사는 못 돼도, 추후 수준급의 무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고 레이는 드디어 인정했다.

전장. 전장이라.

영 떫은 표정을 한 레이가 제과점에 들어섰다.

다른 손님을 상대하던 제빵사 부르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다가왔다.

"이걸 가져가시면 됩니다."

'단골 노릇 한 지 몇 년째인데 이제야 경어를 들어보는군.'

피식 웃으며 과자를 받은 레이가 다음 주 간식 대금을 부르에게 건넸다.

대금을 받은 부르는 잠깐 망설이더니 돈주머니를 레이에게 돌려주려 했다.

"그, 다음부터는 값을 절반 정도만 받겠습니다."

"눈치 볼 것 없어요, 부르."

고개를 저은 레이가 과자 보따리를 툭툭 두들겼다.

"눈치, 볼 것 없어요. 애들 먹을 거에 장난만 치지 않으면요. 앞으로도 쭉. 알겠나요?"

"어, 아, 알겠습니다."

"그럼 빵 많이 파세요."

레이가 키득거리며 제과점을 떠났다.

잠깐 사이 기가 빠진 부르는 의자에 잠시 주저앉아 휴식을 취해야 했다.

*

"오늘은 품새 '고려'를 같이 배워볼 거예요!"

아델이 운동장에 모인 아이들에게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왕년에 그녀는 이단심문관으로서 메이스를 들고 이단의 뚝배기를 깨부수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성직자의 소양 중 하나로서 무술을 익혔기에 몸을 쓰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과거 주기적으로 봉사를 나가는 보육원의 한 아이가 요상한 무술을 애들한테 가르치기에 같이 놀아준다고 따라 배웠는데, 이제는 레이가 자리를 비웠을 때 대신 수업을 맡아줄 정도로 태권도에 빠삭해져 있었다.

"동작을 아직 못 외운 친구들도 일단 옆의 친구들을 보고 따라 해 보세요!"

'고려'라면 태권도 품새 중에서도 난도가 꽤 높은 품새다.

고려를 이제 막 두 번째 접해 본 루나는 거듭옆차기를 어떻게 한 번 해보려다 무게 중심을 잃고 꽈당 넘어졌다.

루나를 계속 주시하고 있던 카렌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쟤 운동은 잘 못하는구나!'

근래 숫자 계산이고 뭐고 어쨌든 머리 쓰는 사안이면 루나에게 일방적으로 개털렸던 카렌이 손아귀를 꽉 말아쥐며 환희했다.

과연 사람이란 게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다.

머리가 좀 밀리면 어떤가. 운동으로 찍어누르면 되는 법이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카렌은 다시 쭈그리가 되어 입을 댓 발 내밀게 되었다.

"데런, 잘 잡고 있어!"

"걱정하지 마, 요하나 누나."

헤벌쭉하게 웃어 재낀 요하나가 땅을 박찼다.

가벼운 몸뚱이의 이점을 살려 빠르게 가속한 요하나는 하늘을 향해 힘껏 점프했다.

휘리리리릭!!

흡사 팽이처럼 몸을 핑그르르 돌린 요하나가 허공에서만 세 바퀴를 회전에 성공한 후 데런이 들고 있던 나무판자를 걷어찼다.

파각!!

"성공!!"

'바보 요하나! 바보 요하나! 바보 주제에!'

카렌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애초에 공부 쪽에 노력을 좀 더 집중했던 이유가 요하나와 데런의 운동 신경을 따라잡기 버거워서였음이 상기됐다.

'이대로는 안 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카렌이 요하나에게 다가갔다.

"나도 해볼래!"

"응? 으응? 괜찮겠어?"

"당연히 괜찮지! 나도 돌려차기 정도는 할 줄 안다고!"

아득바득 우기며 요하나에게 나무 판자를 맡긴 카렌이 충분히 가속할 수 있을 만큼 거리를 벌렸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최대한 정신을 집중해 지면을 달리기 시작한 카렌이 이를 악물고 몸을 띄웠다.

한 바퀴.

두 바퀴.

그리고 세 바퀴를 반쯤 돌았을 때.

카렌의 몸은 이미 지면과 맞닿아 있었다.

"으갹!!"

너무 무리한 시도였다.

착지 타이밍을 실수하는 바람에 발목을 접질린 카렌은 완전히 균형을 잃어버렸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팔까지 꼬여 얼굴부터 흙바닥에 떨어졌다.

다음 순간 찾아올 고통에 카렌이 몸을 떨며 눈을 감았다.

터억!

"...응? 으응?"

누군가의 손길이 갑자기 무게를 지탱해주자 잔뜩 쫄아있던 카렌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신경질적인 인상을 한 남자아이가 눈가를 찌푸리고 있었다.

"뭐하냐, 너?"

"레이!"

한껏 목소리를 올린 카렌이 곧장 레이에게 안겨왔다.

레이는 굳이 카렌을 제지하지 않은 채 이마를 톡톡 두들겼다.

"도전하는 건 좋은데 굳이 안 되는 거 하려고 무리하진 마라니까."

"흥. 아닌걸. 나도 할 수 있는 걸!"

한동안 안 이러더니 다시 몸을 막 굴리는 걸 보니 원인은 보나마나 루나였다.

카렌의 심리를 파악한 레이가 카렌의 턱을 쓰다듬어주며 위로했다.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 하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건 꾸준히 노력할 줄 아는 사람이야."

"흠흠."

카렌이 더해보라는 듯 눈을 빛냈다.

레이가 가벼운 한숨과 함께 덧붙였다.

"카렌은 항상 노력하잖아. 공부도, 운동도, 그리고 친구들을 위해서도. 새롭게 보육원에 오게 된 친구들을 카렌이 항상 신경 써주고 어울려줘서 난 정말 기뻐."

"히히! 뽀뽀!"

얌전히 볼을 내준 레이가 앵겨있는 카렌과 함께 몸을 움직였다.

카렌. 가챠 중에 처음으로 뽑은 레어 등급으로, 어느 분야에 유별나게 특출난 면은 없지만 역으로 모든 분야에 재능을 보이는 노력가였다.

새롭게 보육원에 들어온 아이들의 적응을 항상 적극적으로 도왔기에 많은 아이들이 카렌을 잘 따랐다.

보육원이 원활히 돌아가는 데 카렌의 지분이 정말로 컸다.

'다만...'

소유욕이 좀 많이 강했다.

당장 레이의 볼에 침을 묻혀대고 있는 것도 애정 표현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게 이건 내 것이라고 경고하는 과시 행위에 가까웠다.

레이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애정결핍 있는 아이가 소유욕이 좀 비대해지는 것도 자주 있는 일이고.

당장은 레이에게 집착하고 있지만 집착의 대상이 또 언제 변할지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레이만 해도 전생에 유치원~초등학교 저학년 사이 결혼과 이혼을 최소 세 번은 반복했으니. 어린애 소꿉장난에 과한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기분이 나쁘진 않네.'

당장은 귀여운 딸이 하나 생긴 느낌이라 되도록 카렌의 사춘기가 늦게 오길 바라는 중이었다.

슬슬 침이 흐르기 시작하기에 카렌을 떼어낸 레이가 필립의 앞에 섰다.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필립이 가늘게 몸을 떨었다.

"남아있었나 봐, 필립."

"으, 응."

"잘 선택했어. 이것 좀 애들한테 돌려."

"어, 응. 고마워."

"존댓말."

"고맙습니다..."

과자 보따리를 건네준 레이가 몸을 반 바퀴 돌려 운동장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가챠 돌려서 모아 놓은 아이들이 한꺼번에 눈에 담겼다.

앞으로의 일이 잘 풀리든 나쁘게 풀리든. 자기 몸 하나를 건사하기 위해선 반드시 무력이 필요해지는 시기가 찾아올 거다.

"백작가에 제대로 이야기 좀 해봐야겠군."

마법사가 안 된다면 기사라도 필요했다.

마음을 굳힌 레이가 다시 몸을 돌렸다.

천재

10화

문답을 주고받던 레이가 책을 덮으며 한숨을 쉬었다.

루나는 차분하게 자리를 지키며 레이의 수업이 재개되길 기다렸다.

루나의 태도는 언뜻 순종적으로 보였으나, 아직 여유가 느껴지는 분위기를 보고 레이는 혀를 차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밑천 모조리 털리는데 2년이면 충분하겠군.'

오늘 하루 만에 남들은 몇 개월을 걸릴 진도가 물 흐르듯이 지나갔다.

정말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레이가 지닌 학문적 지식이 모두 털릴 때까지 2년이면 떡을 칠 것이다.

레이가 기껏해야 학부생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이건 정말이지 비정상적인 속도였다.

과거 책에서나 누군 7살에 6개 국어를 마스터 했네, 누군 12살에 정수론을 가르쳤네, 누군 17살에 세계 난제를 풀어냈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보았지만.

눈앞에서 범접 불가할 천재를 마주하니 확실히 다가오는 느낌이 달랐다.

'지미가 느낀 심정이 이런 거겠군.'

따지자면 지미 쪽이 좀 더 심각했을 터다.

레이가 턱을 긁적였다.

밑천이 모조리 털리는 데까지는 2년이지만, 앞으로 몇 개월 이내에 루나는 레이가 지닌 한계를 간파할 것이다.

벌써부터 숫자를 바라보는 루나의 천부적인 감각에 말려 수업을 하다말고 입이 막혀 고민에 잠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좋게 좋게 생각하자고.'

레이는 2년 시간을 벌었다고 여기기로 마음먹었다.

2년 안에 마법사든 뭐든 데려와서 다른 분야에 재능은 없는지 알아볼 생각이었다.

머리 속으로 계획표를 짜본 레이가 다시 책을 펴려고 하자 뒤에 매달려 있던 카렌이 귀를 콱 물었다.

"아프다, 아파."

"루느믄 슨긍쓰 애애!"

"뭐라는지 안 들리는데?"

"왜 루나만 신경 써줘!"

카렌이 레이의 어깨 위를 머리로 콩콩 찧으며 억울해했다.

"요즘 맨날 루나만 특별 수업해주고!"

"너가 원해서 같이 듣게 해줬잖아."

"진도가 너무 빠르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카렌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아침에 삼각형 넓이 공식 외우고 있다가 저녁에 유리함수의 정적분이 로그함수임을 증명하고 있는 괴물이 누굴까?

눈앞의 루나다.

최근에 레이는 어제 진도를 어디까지 뺐는지 헷갈려 노트를 한참 뒤적일 지경이었다.

카렌도 나름 19×19단까지 외워가며 루나를 쫓아가기 위해 열심히였지만 상대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카렌, 이런 속담이 있어."

"응?"

"뛰는 기사 위에 나는 마법사 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카렌이 속담의 뜻을 알아듣고 빽 소리쳤다.

"레이는 너무해!"

"어허, 선생님한테는 존댓말."

"레이는 바보예요! 레이는 멍청이예요! 레이는 똥개예요!"

"자꾸 그러면 벌점이야."

"레이는 나빠!"

끝끝내 다시 책을 피는 레이의 모습에 카렌은 귀를 한 번 더 질근질근 물고는 교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찰랑이는 카렌의 묶음 머리를 향해 레이가 경고했다.

"삐친 척하지 마. 이번엔 안 속아."

요 몇 년간 카렌이 앙탈을 부릴 때마다 쫓아가 달래주었더니 근래 들어선 시답잖은 이유로 삐진 척을 하며 레이가 자신을 찾아오게 만들기 시작했다.

본인이 9살짜리 꼬맹이한테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는 걸 자각한 레이는 고개를 저으며 선을 그었다.

"난 분명 이야기했어. 또 이불 뒤집어쓰고 나 기다리지 마."

자신의 노림수가 들통 났다는 걸 깨달은 카렌이 입을 댓 발 내민 채 레이를 노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이는 수업을 재개했다.

루나와 레이를 번갈아 노려보던 카렌은 울먹이며 교실을 뛰쳐나갔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레이가 한숨 쉬었다.

'이번엔 진짜로 삐치겠군.'

어디보자. 다음번에 매튜한테 부탁해서 말이라도 태워줘야겠다.

말을 타고 백작령 중심부까지 가서 카렌이 좋아하는 고기 요리를 파는 음식점에 들러 보자.

식사를 마치고 보육원으로 돌아올 때쯤에는 화가 풀려 있을 테지.

그런 생각을 하며 수학 이론을 읊던 레이가 자기 뺨을 찰싹 쳤다.

루나라는 괴물을 상대로 생각 없이 이론만 줄줄 읊었다간 역으로 병신 되기 십상이었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

미간을 누르며 집중을 되뇌는 레이의 모습을, 루나는 변함없이 차분하게 지켜보았다.

*

볼을 있는 대로 부풀린 카렌이 운동장에 있던 요하나와 데런을 발견하곤 다가갔다.

둘은 어떻게 해야 허공에서 몸을 4바퀴 이상 회전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 나름 심도 깊은 논의를 진행 중이었다.

"팔을 붙이면 회전이 빨라져."

"발은 마지막에 뻗어야 해."

"근데 누나, 이미 둘 다 하고 있잖아?"

"생각해보니 그러네. 그럼 우유 많이 마셔서 힘을 키우자!"

재잘재잘 떠들고 있는 둘 사이에 끼어든 카렌이 자기 불만을 투덜댔다.

"레이가 변했어. 요즘 맨날 루나한테만 붙어있고. 노력하는 사람이 좋다고 해놓고서, 사실 똑똑한 사람이 좋았던 거야. 레이는 거짓말쟁이야."

뜬끔 없는 카렌의 투정에도 요하나는 따뜻한 위로를 건네주었다.

"레이가 카렌에게 거짓말을 했을 리가 없어.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내가 맨날맨날 좋아한다고 말해줬는데. 나는 레이를 정말정말 좋아하는데. 레이는...!"

"응, 나도 레이가 정말 좋아!"

"?"

예상도 못 한 타이밍에 요하나가 이니시를 걸어오자 카렌이 숙였던 고개를 쳐들었다.

눈이 마주친 요하나가 세상 순수한 얼굴로 헤벌쭉하게 웃었다.

"레이도 우리를 정말 좋아해! 그러니까 카렌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요, 요하나? 저번에는 분명 데런을 좋아한다고 나한테 얘기했잖아?"

"응, 데런도 좋아해. 근데 레이를 조금 더 좋아하는 것 같아!"

옆에서 듣던 데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요하나 누나를 정말 좋아해. 하지만 레이 형을 조금 더 좋아하는 것 같아. 레이 형은 강하고 멋지니까."

"그런 게 어디 있어? 둘 다 이상해!"

"카렌, 화내지 마.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사과할게."

안 된다.

이야기가 전혀 안 통한다.

카렌의 '좋아'와, 요하나와 데런의 '좋아'는 용어만 같이 완전히 다른 성질을 가리키고 있었다.

혼자 씩씩거리다 결국 설명을 포기한 카렌이 나무판을 요하나에게 건네주었다.

"이거 잡아줘. 이번에야말로 성공시켜 볼래."

"괜찮겠어?"

"나도 할 수 있어."

입을 삐죽인 카렌이 최선을 다해 지면을 박찼다.

허나 세상 일이 의지만으로 되는 게 아님을 방증하듯, 카렌은 다시 한 번 착지에 실패해 몸을 크게 휘청였다.

"우악!"

무리를 한 탓에 카렌은 꽤 크게 발을 헛디뎠다.

무릎이든 팔꿈치든 어디 하나를 제대로 깨먹을 위기 속에서 카렌은 겁을 집어먹었다.

그 순간.

후욱!

때마침 불어온 강풍이 카렌의 가벼운 몸을 잠시 잠깐 지탱해주었다.

그틈을 놓치지 않고 카렌의 양팔을 붙든 요하나와 데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잡았어!"

"다행이야."

"...?"

생전 처음 경험 해보는 강풍의 위력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던 카렌이 문득 보육원 건물로 눈을 돌렸다.

아직 교실에 남아있던 루나가 차분한 눈으로 카렌을 바라보다, 고개를 낮춰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바지를 털어낸 카렌은, 무릎이 깨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레이와 루나가 있을 교실을 향해 입을 삐죽이며 자기 방을 찾아 들어갔다.

*

카렌이 레이와 대화를 안 하기 시작한 지 이틀이 지났다.

레이는 겸사겸사 지미의 사무실을 들려 차를 얻어 마시고 있었다.

"검 멋지네요, 지미."

조금은 맥락 없이 느껴지는 레이의 칭찬에 지미는 당황하면서도 흡족한 얼굴로 책상 위에 검을 내려놨다.

"그래? 미래의 소드 마스터께서 보기에도 내 검이 괜찮아 보이나?"

지미가 누구인가? 한때 잘나갔던 용병이다.

용병에게 있어 무기는 여벌의 목숨이나 다름없기에 대부분의 용병이 좋은 무기를 구비하는데 집착했다.

지미 또한, 기본적으로 사치에 무관심했지만 무기에 관해서 만큼은 달랐다.

그는 용병 시절 좋은 검을 구하기 위해 빚까지 져가며 자금을 마련했고, 그때 구입했던 검이 참 많이도 지미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은퇴 후에도 자기 마누라라며 관리를 잘 해왔기에 지미의 검엔 여전히 고급진 윤기가 흘렀다.

"그러니까 레이, 이걸 어떻게 구하게 됐냐면..."

껄껄 웃으며 물어보지도 않은 과거를 신나서 떠벌리던 지미가 무심코 매튜를 쳐다봤다가 몸을 굳혔다.

매튜가 자기 애검을 코트 안쪽으로 슬금슬금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지미는 기억해냈다.

이제는 까마득한 과거, 용병업에 뛰어든지 얼마 안 되어 아직 미숙하고 약해빠졌던 그 시절.

시큼한 땀 냄새와 큼직한 근육을 자랑하던 업계 선배들이 자신을 삥 뜯을 때마다 써먹었던 레퍼토리가 무엇이었는지를.

어이, 지미! 코트 좋아 보이는데!

어이, 지미! 오늘 신고 온 신발이 참 멋지군!

어이, 지미! 웬일이야! 방패를 다 들고오고!

"익... 이익..."

과거의 악몽을 떠올린 지미가 부들거리는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안 돼!! 안 된다 이놈!! 내 검만큼은 안 돼!! 이건 내 마누라야!!"

"지미, 갑자기 왜 그래요? 내가 언제 검이라도 바치라고 그랬어요?"

"그, 그렇지? 하하, 내가 괜히 흥분했네!"

"근데 지미, 들리지 않아요?"

"...? 들리긴 뭐가 들려?"

"영지 크기가 쪼그라드는 소리가요."

"이런 빌어먹을!!"

분개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지미가 자기 애검을 검집 채로 레이에게 던졌다.

"꺼져!! 가지고 꺼져 버려, 이 빌어먹을 자식아!!"

"아이고, 농담인데 왜 그렇게 화를 내요."

낄낄 웃으며 손을 흔든 레이가 책상의 서랍 안쪽을 가리켰다.

"근데 칼 한 자루는 새로 마련해야겠더라고요. 저금해 놓은 돈이 없어서 그러는데 조금만 빌려줄 수 있나요?"

"끙, 그냥 필요한 만큼 가져가. 검 몇 자루쯤이야, 어차피 수련하다 보면 자주 부숴 먹게 될 테니."

"고마워요. 사양하진 않을게요. 근데 제가 부탁했던 정보는 어떻게 됐나요?"

"백작가 관련된 거 말하는 거지?"

"네, 맞아요."

자세를 고쳐 앉은 지미가 진지한 눈으로 레이를 마주 봤다.

알레시아 (1)

11화

"없어."

지미의 단언에 레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없어요?"

"없다니까. 아니, 설령 있다고 해도 우리한테 차례가 돌아오겠냐? 그게 다 약점인데."

이번만큼은 지미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레이는 '최근 백작가가 곤란해하고 있는 사안이 있다면 알아봐 달라'고 지미에게 부탁했었다.

큰 기대를 안 한 건 사실이지만,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오자 속이 좀 답답해짐을 느꼈다.

"흐음."

"어울리지 않게 왜 그래? 다짜고짜 고개 들이밀고 강짜부터 부려보지."

"제가 대가리부터 들이민 적이 많긴 하지만 각이 아예 안 나오는 곳으로 몸을 던지지는 않아요."

필립스 백작이 귀족 중에서도 융통성이 굉장히 훌륭한 편이기는 하다만.

아무리 그래도 보육원에 기사를 파견해서 기초 검술 교육 좀 해달라는 개소리를 들어줄 리 만무했다.

일단 빚이라도 지워볼 심산으로 정보를 캐봤지만 소득은 전무.

레이가 고민에 빠져 있자 지미가 낮은 웃음을 흘리며 돈주머니를 꺼내놓았다.

"200골드 정도 될 거야. 내 비자금이긴 한데 그냥 가져다 써라. 연습용 검 스무 자루는 살 수 있겠지."

"고마워요."

"그리고 정 안 되겠으면 백작가 영애께라도 넌지시 여쭤 보던가. 영애께서 너를 꽤 마음에 들어 하잖아."

"그건 좀 힘들겠네요."

몇 년 전, 6살 때였나.

레이는 다짜고짜 백작가를 찾아가 이렇게 외쳤다.

백작령 암흑가의 다섯 수장 중 하나인 지미의 대리인이 백작님을 만나고 싶어 찾아왔소!

누굴 붙잡고 물어봐도 명백한 미친놈이었다.

당시에도 반쯤 미쳐가지고 도박수를 던진 건데, 마침 정문을 지나가던 알레시아가 레이에게 호기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레이는 경비병에게 맞아 죽었을 확률이 높았다.

"백작님이 아끼는 말괄량이 따님이신데 어설프게 수작을 부릴 바에야 백작님을 직접 찾아가는 게 나아요. 알레시아가 요즘 저랑 대화하는 걸 싫어하기도 하고."

"영애께서 너를 마음에 들어 한 거 아니었나?"

"귀족 예법 같은 걸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눈도 안 마주치려 해요."

"큭큭. 무슨 일인지 알겠네."

10살이 넘어설 때쯤 해서 귀족가의 자제들은 '진정한 귀족'이 되기 위한 여러 학문을 배우는데 이때부터 '신분'에 대한 인식이 확고해진다.

'귀족 뽕? 신분 뽕? 뭐, 그런 걸 잔뜩 채워주지.'

너는 고귀한 핏줄이니 뭐니. 귀족의 본분이 어쩌고 아래 것들의 본분이 저쩌구.

신분제 사회에서 지도자가 되는 데 꼭 필요한 수업이긴 했다.

어쨌든 이제 막 제대로 된 귀족 교육을 받기 시작한 알레시아는 그야말로 신분 뽕이 최대치로 차 있을 시기였다.

'근래엔 나를 불결한 벌레와 비슷한 무언가쯤으로 여기던 거 같던데...'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을 걸어오던 때가 생각나 조금 많이 아니꼬웠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가 사람 무시하는 법부터 배워서는 쯧쯧.

남은 차를 쭉 들이켠 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볼게요. 대장간이나 가봐야겠네요."

"레이."

레이를 멈춰 세운 매튜가 당부했다.

"네가 원하는 정보는 위험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계속해서 알아보겠다. 그러니, 괜히, 사고는 치지 마라. 제발."

"걱정하지 말아요 매튜. 제가 언제 '수습 불가능한' 사고를 치고 다녔나요."

"인과관계를 뒤집지 마라. 어떻게든 수습을 했기 때문에 우리 목이 아직 예쁘게 붙어 있는 거다."

낄낄거린 레이가 손을 흔들며 사무실을 나갔다.

지미와 매튜는 나란히 두통을 느끼며 얼굴을 쓸었다.

"이러다 스트레스 때문에 죽겠어. 작위고 뭐고 다 포기하고 낙향하고 싶은걸."

"이미 한 번 낙향을 해서 온 곳이 여기야, 대장."

"이런 맙소사."

도망치는 곳에 낙원은 없다.

옛날 어떤 전설적인 검사가 했다는 말을 되새기며 지미가 벌레 씹은 표정을 했다.

*

제대로 된 무기를 만드는 대장간이라 해봐야 이 근방에 한 군데밖에 없다.

쇠를 두드리는 소리와 뜨거운 열기가 흘러나오는 대장간을 찾아간 레이는 판매대를 한 바퀴 돌아보다 검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을 발견했다.

슬그머니 다가가 검을 뽑아보려는 레이를 판매대를 지키던 남자가 제지했다.

"애들은 가라. 무기는 신원이 확인된 어른들만 살 수 있다."

눈을 깜박인 레이가 되돌아가 지미나 매튜를 데리고 대장간으로 와야 하나 고민했다.

'쯧. 귀찮지만 어쩔 수 없나.'

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농기구를 보던 남자가 화들짝 놀라 외쳤다.

"헉! 너는 고아 수집가 레이!"

여기까지는 가끔 있는 일이었다.

뒷골목을 손에 쥔 지미와 그가 운영하는 보육원에 끊임없이 고아를 주워가는 레이는 시민들 사이에서도 꽤 유명인사였으니까.

"레이? 레이라고? 지금 레이라고 했나?"

다만 레이는 간과하고 있었다.

근래들어 소문에 상당한 변화를 일으킬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대장간 물건을 구경하던 손님들이 레이의 이름을 듣고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쳤다.

"허억! 진짜 레이잖아! 지미의 비밀병기!"

"레이? 감정이 말살된 암살자로 키워졌다던 그 살인 기계 말인가?"

"적대하는 조직원 수십을 혼자서 토막 냈다고 하더군!"

"맙소사! 지미 그 악당은 하늘이 두렵지도 않단 말인가! 어찌 저런 극악무도한 존재를 길러 냈단 말인가!"

껄껄, 지랄들을 하시네요.

고개를 저은 레이가 진열되어있던 검 한 자루를 뽑아냈다.

날카로운 검신이 모습을 드러내자 대장간의 고객들은 경기를 일으키며 우르르 도망갔다.

"..."

혼자 남은 판매대의 남자가 슬금슬금 뒷걸음질치다 레이와 눈이 마주쳤다.

레이가 물었다.

"검 좀 봐도 되나요?"

"봐, 봐주십쇼!"

"아니, 뭐, 예, 검 좀 볼게요."

고개를 다시 한번 저은 레이가 검신을 손가락으로 통통 튕겨보았다.

아무 이유 없이 해본 거였다. 레이는 딱히 검을 감정할 줄 몰랐다.

'마나만 살짝 불어넣어 보고 문제없으면 사자.'

깡!

멀쩡했던 검신의 중앙이 제 혼자 똑 부러지며 땅으로 떨어졌다.

"..."

"..."

판매대의 남자가 고개를 쓱 내밀었다가 레이와 다시 눈을 마주치고 황급히 판매대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결함이 있었네."

깡!

깡!

깡!

네 자루째 검을 깨먹은 레이가 자기가 항상 가지고 다니던 녹슨 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저기 녹슬어 고물 취급받았지만 왕년엔 꽤나 고급품이었다는 진실을 레이는 그제야 눈치챘다.

'금속의 성분과 밀도가 균일하지 않으니 마나를 불어넣었을 때 크랙이 발생하는군.'

"이걸 어쩐다."

어쩌긴 어째. 멀쩡한 놈 나올 때까지 계속 돌려봐야지.

환생하고 나서 현실 가챠 하나는 이골나게 하고 있는 레이다.

망설임 없이 다음 검으로 손을 뻗는데 두꺼운 손이 가냘픈 레이의 팔목을 틀어쥐었다.

"기사 양반이라도 방문한 줄 알았는데 꼬맹이였군. 소문이 마냥 헛되지는 않은 모양이야."

어깨를 으쓱인 레이가 물었다.

"지미 소개받고 왔는데 괜찮은 검 좀 있습니까?"

"영주성에 납품할 정도의 고급품은 함부로 취급하지 않는다."

덮수룩한 수염을 쓰다듬은 대장장이가 대장간 안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지미의 이름을 거들먹거리니, 한 자루쯤은 내어줘야겠군."

검을 받아 마나를 미약하게 흘려본 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춤을 뒤졌다.

"얼마나 드리면 되죠?"

"200 골드."

레이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바깥에 진열된 롱소드가 10골드도 안 하는 걸로 압니다만."

"네게 건넨 한 자루가 밖에 걸어둔 결합품 스무 개 가치도 못할 것처럼 보이나?"

"제기랄. 바가지 씌운 거면 다음에 지미 데리고 올 거예요."

"다음부터는 단골 할인도 고려해보지."

결국 있는 돈을 다 털린 레이가 허리띠 양쪽에 검을 꽂아넣고는 다시 거리로 나왔다.

"에휴."

어쨌든 검을 구했으니 됐다.

슬슬 보육원으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는데 어떤 여자 하나가 대로를 뛰어다니는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시선을 안 줄 수가 없었던 게, 여자는 다른 이들에 비해 굉장히 화려한 옷과 장신구로 몸을 치장한 채 사람들 사이를 다급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한 가지 더해 맨발이었다.

머리가 좀 아프신 분인가 싶어 여자를 자세히 살펴본 레이가 눈가를 좁히며 중얼거렸다.

"뭐야? 샐롯이잖아?"

샐롯의 동생이 라일락의 저녁에서 일하고 있는 탓에 얼굴을 볼 기회가 몇 번 있었다.

"영주성에서 일한다고 하지 않았나?"

의아함을 느낀 레이가 뛰어다니던 샐롯을 붙잡았다.

"샐롯."

"뭐야?! 누구...!! 아, 아? 아! 레이, 레이구나!"

"안녕하세요, 샐롯. 혹시 무슨 문제 있어요?"

"아! 그러니까! 레이, 제발 나 좀 도와줘. 사례는 꼭 할게."

"진정하고 무슨 일인지 설명해 봐요."

샐롯의 사연은 과거에도 종종 발생했던 종류의 것이었다.

말괄량이 아가씨인 알레시아가 사용인을 골탕먹이고 실종되는 일은 뻔질나게 있었으니까.

문제는 기껏해야 영주성 내에서 발생했던 실종 사건이 영주성 바깥에서 벌어졌단 점일까.

고급 옷가게에 들려 알레시아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분칠을 받던 샐롯은 알레시아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거리로 뛰쳐나왔다.

레이는 헐떡이는 샐롯을 향해 최대한 친절해 보이는 웃음을 머금었다.

"괜찮아요, 샐롯. 아직 늦지 않았어요."

"그치? 혹시 주변에... 그 지미님 친구들? 그런 사람들과 같이 아가씨 좀 찾아줄 수 있을까?"

"샐롯, 지랄 말고 정신 좀 차려요."

레이는 웃는 얼굴 그대로 목소리를 굳혔다.

"당장 백작가로 돌아가 알레시아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리세요."

"레이! 그러면 나는...!"

"기껏해야 매질을 조금 당하거나 급여 몇 달 깎이겠죠.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알아요. 어차피 알레시아는 멀리 가지 않았을 테고, 이 근방은 안전하고, 찾아만 낸다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화로운 내일을 시작할 수도 있을 거예요."

다만 만약, 만약의 경우.

샐롯이 알레시아를 찾아내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가고, 그 사이에 알레시아가 어떤 사고에 휘말렸다면.

"샐롯, 이런 일에 목숨 걸지 마요. 부탁이니까 지금 바로 백작가로 돌아가 그 말괄량이 아가씨가 모습을 숨겼다고 보고해요. 가족을 위해서라도요. 일이 잘못되면, 샐롯 한 명으로 책임질 사안이 아니게 돼요."

입을 꽉 깨문 샐롯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게 맞겠지. 정신 차리게 해줘서 고마워. 근데 부탁 하나만 더 해도 될까? 너도 아가씨를 한 번 찾아봐 줄래? 아가씨께선 널 귀여워했으니까, 혹시 마음이 통할지도 몰라."

"알겠어요. 늦기 전에 돌아가요."

샐롯은 몇 번 더 레이에게 확답을 받고는 영주성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기지개를 피며 몸을 푼 레이는 뒷목을 긁적이며 북쪽을 바라보았다.

"별일이야 있겠어. 어... 등산만 안 했다면."

필립스 백작령 영주성엔 작은 뒷산이 하나 있다.

크기도 작고 맹수도 살지 않아 어린아이가 올라가도 저체온증만 주의하면 문제 생길 일은 없었다.

그 자그마한 뒷산 측면에 북부로 길게 이어지는 시그니 산맥만 붙어있지 않았다면 누가 올라가도 안전했을 것이다.

"...상황이 좀 묘하네?"

철 없는 귀족 아가씨께서 항상 부르짖던 모험과 보물을 떠올린 레이는 새로 구매한 검을 반쯤 뽑았다가 집어넣었다.

까짓 거 나도 한 번 등산 좀 해보지, 뭐.

만약의 만약이지만.

필립스 백작에게 그리 갈망하던 빚 하나를 달아둘 괜찮을 기회가 될지도 몰랐으니.

알레시아 (2)

12화

산은 넓다.

뒷산도 제대로 뒤져보려면 한세월인데 그 측면에는 제국에서 두 손가락 안에 꼽히는 넓이를 자랑하는 시그니 산맥까지 붙어있다.

시그니 산맥 초입에서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레이는 지금 제가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안 되겠는데."

확률이 낮아도 너무 낮았다.

알레시아가 정말 등산을 했고, 레이가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고 해도.

하루종일 산을 뒤져봤자 알레시아와 마주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로부터 2시간 더 막무가내로 산을 뒤져 본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접자, 접어."

따로 추적술이라도 배워놨으면 모를까 이건 진짜 답이 없었다.

"지미와 매튜를 끌고 오는 건 너무 억지라고 생각해 말았는데... 판단을 잘못했어."

레이는 혀를 차면서도 크게 긴장 없는 얼굴로 지면에 주저앉았다.

이변이 없다면 지금쯤 알레시아는 거리를 돌아다니다 백작가 사람에게 잡혀 영주성으로 돌아갔을 터다.

만약 진짜 등산을 했다 해도 영주성 뒷산 좀 찔끔 올라가서 헤매고 있겠지.

"그대로 보육원으로 돌아갈까."

여기서 반대 방향으로 산을 넘어가면 자애와 사랑이 넘치는 지미 보육원이 있는 마을이 나왔다.

엉덩이를 툴툴 턴 레이가 발을 옮겨려다 말고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똥 밟았다.

"짐승의 변인데."

지면에 발을 문지른 레이는 그대로 땅을 보고 걸었다.

지워지기 시작한 짐승의 발자국을 따라 얼마 더 걷다 보니 뻣뻣한 검은 털 몇 개를 주울 수 있었다.

"흐음."

반복하자면, 레이는 추적술이나 사냥술을 결코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다.

허나 이 뻣뻣한 검은 털은 정말 익숙한 종류의 것이었다.

"조금만 더 찾아볼까."

*

알레시아는 약간 실망했다.

해가 다 들어가도록 산속에서 동굴을 찾아내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멋진 동굴을 찾아 아지트로 활용하려 했던 완벽한 계획이 처음부터 어그러지고 말았다.

조금 꿍해 있던 알레시아는 금방 기운을 차렸다.

당장 비가 올 날씨도 아니니, 동굴이야 느긋하게 찾으면 된다.

다만 안전한 숙박을 위해 불을 지펴야 했다.

돌과 나뭇가지를 모아온 알레시아는 열심히 돌로 테두리를 만든 후 나뭇가지를 쌓아올렸다.

"흠, 흐음."

흡족한 얼굴로 자신의 완성품을 바라본 알레시아가 살짝 몸을 숙인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수월한 발화(發火)를 위해선 도구가 필요했으나 알레시아의 수중에는 발화석이나 성냥이 존재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주변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알레시아가 나뭇가지로 손을 뻗었다.

"파이어."

마나가 응집되며 서로를 공명시키기 시작했다.

너울거리며 물결친 마나가 마침내 뜨거운 빛을 뿜어내자 마른 나뭇가지에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후욱!

"아자!"

히히, 벌써부터 이리 마법을 잘 다루다니. 역시 나는 천재로구나.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면서 알레시아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가방을 뒤졌다.

[바람의 정령 루시아 : 제국 여행기]

요 몇 년 새 알레시아가 가장 자주 읽었던, 가장 좋아하는 책이자 여행기였다.

이 책을 들고 읽을 때마다 어떤 건방진 놈이 한 소리씩 하긴 했지만 알레시아는 여전히 루시아의 제국 여행기를 사랑했고, 선망했다.

따뜻한 불의 온기를 마주한 채 제국 여행기에 적힌 '홀로 여행할 때의 주의점'을 읽던 알레시아가 피곤함을 느끼며 가방을 뒤적였다.

집에서 몰래 챙겨온 고급 실크 천이 가방에서 주르륵 딸려 나오는 순간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야."

"꺄아악!!"

알레시아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레이가 한심하단 투로 한마디 했다.

"그 책 쓴 년 사기꾼이라니까?"

"히익! 흐약! 흐윽...?"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참 동안 호흡을 고른 알레시아가 책을 내려놓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누군가 했더니 못 배운 천민이로구나."

"오냐, 천민이다."

어두워서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땀범벅이 된 레이의 얼굴엔 피로감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참 오래도 알레시아를 찾아다녔다.

알레시아가 불을 피우지 않았다면 더 헤맸거나, 늦었을 것이다.

레이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타박했다.

"루시아 그 년, 여행기 대부분이 지가 가보지도 않은 곳 허구로 지어내서 적어놓은 거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아직도 옆구리에 끼고 다니냐?"

"되었다! 그 얘기 좀 그만하거라! 루시아님을 그 이상 모욕하면 아무리 너라 해도 더는 용서치 않을 것이다!"

툴툴거린 알레시아가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슬그머니 목소리를 낮췄다.

"큼, 근데 레이... 혹시 혼자 온 것이냐? 날 찾아서?"

"일단은?"

"따라온 사람은 없느냐?"

"없어."

"호오, 그럼 우릴 지켜보는 이가 아무도 없단 의미로군."

입꼬리를 실룩거린 알레시아가 목에 힘을 준 채 자기 앞의 바위를 발로 툭툭 쳤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 귀족과 마주 앉을 수 있는 특혜를 네게 하사하도록 하마."

"야, 너 말투 존나 이상해. 그냥 옛날처럼 해."

"이익! 이 못 배운 천민이! 말대답하지 말고 빨리 앉거라!"

레이는 일단 자리에 앉았다.

"알레시아, 넌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어허, 귀족에게 자꾸 말을 함부로 할 것인가!"

"...세상에는 사기꾼이 정말 많습니다. 특히 루시아 같은 입만 산 사기꾼은 넘쳐나죠."

"사기꾼? 사기꾼이라니. 너는 대체 무얼 보고 루시아님을 자꾸 사기꾼이라 매도한단 말이냐?"

"소드 마스터도 루시아 그 년이 써놓은 것처럼 마경을 헤집고 다녔다간 100% 죽습니다."

"어허, 그렇기에 루시아님이 최고의 모험가이자 여행가라고 찬사받는 것이다. 천민은 그런 것도 모르나?"

레이가 웃었다.

"가끔 헷갈리고는 합니다."

"무엇을?"

"우리 알레시아는 순수한 건지 멍청한 건지."

"레이! 적당히 하거라! 지엄한 제국의 법도가 있거늘! 어찌 천민이 귀족에게 입을 함부로 놀린단 말인가!"

잠시 고민한 레이가 한마디 했다.

"바보."

"어찌 천민이!"

"멍청이."

"귀족에게 입을 함부로...!"

"똥개."

"야!! 적당히 해!!"

"알레시아, 그거 알아?"

한 박자 쉰 레이가 허리춤에서 검을 반쯤 뽑아냈다.

"알레시아가 좋아하는 야생에는 귀족 천민 구분이 없어."

흠칫 놀라며 몸을 뒤로 뺀 알레시아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만나 기뻤는데 계속 타박이나 놓고. 괜히 겁주지 말고 좀 재밌는 이야기를 해보아라. 부디 날 슬프게 하지 말거라."

알레시아의 눈가가 일렁인다.

잠시 고민한 레이가 검을 반쯤 뽑아낸 그대로 검집을 내려놓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재밌는 이야기라.

마침 적당한 이야기가 생각난 레이가 넌지시 물었다.

"아가씨, 제가 아가씨를 어떻게 찾아낸 것 같아요?"

"오! 마침 나도 궁금하던 참이었다. 나는 분명 아버님의 기사가 가장 먼저 나를 찾아올 줄 알았다."

"한 번 맞춰보세요."

"흐음... 천민에겐 고귀한 피를 알아보는 더듬이라도 달린 것이냐?"

그래야 생존율이 올라가니까.

본능적으로 고귀한 피를 알아보고 알아서 바닥을 기는 거지.

알레시아는 자신의 추론이 썩 논리적이라고 자찬했다.

레이는 '저저 시발년'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상대가 기껏해야 10살 언저리라는 것을 되새기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가씨, 동네 강아지가 마스터급 무인보다 뛰어난 감각이 무엇인지 아세요?"

"동네 강아지가 마스터급 무인보다 뛰어난 감각이 있다고? 난 처음 듣는구나!"

"바로 후각입니다. 어지간한 똥강아지가, 어지간한 소드 마스터보다 냄새 맡는 분야에 있어선 더 낫다고 볼 수 있지요."

"흥미롭구나. 확실히, 개들은 산 하나를 넘어가도 후각으로 목표를 쫓을 수 있다고 들었다."

"마물도 마찬가지예요."

"마물도 후각이 좋은 것이냐?"

"후각 이야기는 아닙니다. 마물은 마나를 감지하는 능력이 정말 뛰어나거든요."

마물에게 있어, 마나는 매혹적인 존재임과 동시에 주의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마나를 품고 있는 생물은 참으로 먹음직한 사냥감이나, 강대한 마나를 쌓은 존재는 굉장히 위협적인 적이었다.

이를 잘 구분하기 위해 마물들 다수는 마나를 감지하는 기관이 상당히 발달되어 있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제 막 마나 각성해서 자기 마나 제대로 갈무리할 줄도 모르고 줄줄 흘리고 다니는 애송이는, 마물들에게 굉장히 매혹적이고 찾기 편한 먹잇감이라는 뜻입니다."

시드니 산맥 깊은 곳에서 활동하던 마물이 위험을 감수하고 인간들의 영역에 접근할 정도로 말이다.

"루시아의 책에는 안 적혀 있었습니까?"

"..."

심각한 분위기를 감지한 알레시아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눈치를 보았다.

"그, 그, 레이, 사실 천민한테 알려주면 안 되는 비밀이다만. 사실 난 말이다..."

"저는 아가씨를 쫓아온 게 아닙니다."

레이가 반쯤 뽑아놨던 검을 다시 들었다.

"안타깝게도, 저는 아가씨를 쫓아온 게 아닙니다. 아가씨를 쫓았으면 1주일을 줘도 찾아내지 못했을 테죠."

스르릉

달빛 아래 유려한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는 마물을 쫓아왔습니다. 아주 익숙한 마물을."

"크르르르..."

짐승의 울음소리가 서늘했던 밤 공기를 데운다.

벌벌 떨리기 시작한 알레시아의 어깨 너머로, 눈을 붉게 물들인 존재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레이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하필 네 녀석이냐."

와일드호그. 멧돼지를 닮은 몬스터.

다만 덩치가 호랑이만 하고, 마기를 받아들인 육체의 강도는 여느 짐승과 비할 바가 못 된다.

저 검디검은 마물은 분명 마나를 좀 다룰 줄 아는 무인이 와도 제대로 대응할 수 없는 강력한 존재였다.

"거, 너희랑 내가 인연이 좀 깊긴 한가 봐. 주로 창자였지만."

"크르르르..."

와일드호그의 울음소리에 맞춰 알레시아의 온몸이 덜덜 떨렸다.

자기 뒤를 힐끗 돌아본 알레시아가 곧장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쳤다.

"힉! 흐악!"

물러나다 말고 모닥불에 걸려 넘어질 뻔한 알레시아를 레이가 받아냈다.

레이의 옷깃을 꽉 붙잡은 알레시아가 헉헉대며 물어왔다.

"레, 레이! 저 마물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어, 좀 애매하네요. 힘도 좋고, 마물 중에서도 특히 질겨서 칼이 안 박히거든요. 창자만 해도 무지하게 질겨서 그... 어쨌든 되게 안 찢어져요."

"그럼 우린 죽는 건가...?"

"걱정 마세요, 아가씨."

한 발 앞으로 나간 레이가 와일드호그와 대치했다.

"제가 시간을 벌어보겠습니다. 아가씨는 어서 도망치세요."

"레이! 어떻게 널 혼자 두고 내가...!"

"어서 도망가세요! 빨리 내려가서 사람을 불러주세요! 빨리!"

"흑, 흐윽! 레이! 잘 버티고 있어야 한다! 반드시 돌아올 테니!"

눈물을 펑펑 흘린 알레시아가 다급히 산 아래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멀어지기 시작한 알레시아를 흘깃 바라본 레이가, 다시 검을 집어넣으며 와일드호그에게 물었다.

"뭐해? 안 쫓아가고."

"크르르르...!!"

알레시아는 두 가지를 간과했다.

첫째. 와일드호그는 애초에 알레시아의 마나를 노리고 인간의 영역 근방까지 접근했다. 레이 또한 마나를 품고 있었지만, 그 양이 쥐꼬리만 하고 제어에 능숙한 탓에 와일드호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둘째. 와일드호그는 달아나는 사냥감을 쫓아 들이박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와일드호그에게 등을 보이고 도망간다는 건 대놓고 어그로를 끌겠다는 의미와 동일했다.

"크르륵!!"

레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지나친 와일드호그가 곧장 알레시아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알레시아의 비명이 산속을 메아리쳤다.

"꺄아아아아아악!!!"

"거 사기꾼 조심 좀 하라니까."

레이가 혀를 끌끌 찼다.

알레시아 (3)

13화

내리막길을 뛰어 내려가던 알레시아는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끔찍한 소리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나무가 바스러지고 지면이 파여대는 굉음 사이로 짐승의 울음소리가 섞여 들렸다.

삽시간에 울음소리의 근원이 가까워지자 알레시아는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빽빽한 나무 사이로 방향을 틀었다.

'어찌 저리 바로 쫓아오는 것이냐. 레이는 괜찮은 것인가?'

어차피 상황이 이리되었다면 알레시아는 레이라도 무사하길 바랐다.

레이가 반항도 못하고 와일드호그의 송곳니에 꿰뚫린 것이 아닐까, 그런 두려운 생각도 들었지만 애써 그러한 가능성을 잊었다.

'짐승은 내리막길을 달리는 걸 어려워한다고 들었다.'

알레시아는 책에서 본 정보에 의지해 내리막길을 달림과 동시에 계속해서 방향을 틀었다.

알레시아의 판단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와일드호그는 오르막보다 내리막에서 느렸고, 한 번 가속이 붙은 뒤로는 방향전환에 능숙하지 못했다.

허나 그러한 불리함을 모두 감수하고도.

와일드호그는 알레시아보다 월등히 빠르고 민첩했다.

"크르르륵!!"

"히이익!!"

등뒤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알레시아가 경기를 일으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길게 뻗어난 송곳니를 앞세운 와일드호그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알레시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굴렸다.

알레시아가 달리던 경로를 직선으로 휩쓸고 간 와일드호그가 굵은 나무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가각!!

성인 남자가 팔을 벌려야 간신히 감쌀 수 있을 크기의 나무가 단번에 박살 나 옆으로 쓰러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알레시아가 휘청이는 다리를 붙잡았다.

도망갈 수 없다.

운이 좋아 충돌을 몇 번 피한다고 해도.

이 연약한 육체로는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저 짐승의 송곳니에 허리를 꿰뚫릴 게 틀림없었다.

"흑! 흐윽!"

도망도 치지 못한다면, 그럼 내게 남은 것이 대체 무엇이냐.

기껏해야 모닥불을 피워낼 수 있는 마법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 보잘것없는 화염 마법으로 저 거대한 짐승을 내쫓을 수 있을까?

모른다. 모르겠다.

산을 달려 내려가던 알레시아는 짐승이 토해내는 뜨거운 호흡이 두피를 간지럽힐 지경이 되어서야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달았다.

마나가 진동한다.

알레시아는 눈앞이 하얗게 변할 만큼 혈압이 치솟은 와중에도 극한의 상황이 내려주는 집중력으로 마법을 완성했다.

뒤를 돌아서, 자신에게 돌진해오는 짐승을 마주한다.

"파이어!"

"크륵?"

좌측 뒤통수에 불이 붙은 와일드호그가 검은 털이 타들어 가는 감각을 느끼며 고개를 신경질적으로 털었다.

그 작은 움직임이 와일드호그가 돌진하던 경로를 살짝 비틀었다.

와일드호그의 거체가 알레시아의 연약한 몸뚱이를 옆으로 비껴 치고 지나갔다.

투웅!

"꺄악!!"

고작 스쳤을 뿐이나, 알레시아에겐 어마어마한 충격량이 전달됐다.

허공을 날아간 알레시아는 지면을 데굴데굴 구르다 나무에 몸을 부딪친 후 더는 일어서지 못했다.

온몸을 찌르르 울리는 격통 탓에 몸을 말아낸 알레시아가 얼굴을 무릎에 파묻은 채 신음을 흘렸다.

"으으... 으윽..."

무력화된 사냥감의 호소를 들으며 와일드호그가 천천히 접근했다.

참으로 매혹적인 사냥감의 냄새에 와일드호그는 계속해서 코를 벌름거렸다.

쿵쿵 울리는 땅과, 귓가에 들리는 와일드호그의 숨소리에 알레시아가 두 귀를 틀어막으며 중얼거렸다.

"레이... 날 두고 어디로 간 것이냐..."

"크르르..."

와일드호그가 입을 쩍 벌리며 거대하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동시에.

와일드 호그를 둘러싼 공간에 얇은 실금 두 개가 새겨졌다.

"크륵?"

콰가가가각!!!!

허공에서 검기가 떨어져 내렸다.

와일드호그가 이상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제가 디뎠던 지면이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중이었다.

어마어마한 검기의 위력에 와일드호그의 뱃가죽이 갈려나가며 내장의 절반이 밖으로 터져나왔다.

격통을 느낀 와일드호그가 산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크라라락!!"

"사냥감에 눈을 뺏긴 포식자만큼 무방비한 상대가 또 없지."

두 번째 검을 검집으로 회수한 레이가 하나 남은 검을 양손으로 붙잡고 와일드호그를 겨누었다.

"마물이라 해봐야 결국은 짐승이군."

*

산속에서 알레시아를 찾아낸 시점에서 레이는 많이 지쳐있었다.

늦기 전에 와일드호그의 흔적을 쫓아 알레시아에게 도달하기 위해 얼마 없는 마나까지 끌어 쓴 상태였다.

검기를 몇 번이나 날려대며 와일드호그를 상대할 여력은, 이미 그 시점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도약 검기의 위력과 은밀성은 대단했지만 레이는 검기가 공간을 도약하기까지 딜레이를 조절할 수 없었다.

마나에 민감한 와일드호그는 검기를 뽑아내는 순간 레이의 존재에 반응할 터였다.

검기를 눈치챈 와일드호그가 어떻게 행동할지 레이는 예측할 수 없었고, 이리저리 날뛰어대는 적을 상대로 도약 검기를 적중시킬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알레시아를 미끼로 사용했다.

리스크가 컸지만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나쁘지 않게 풀렸군."

알레시아가 안 죽었고 와일드호그에게 검기를 명중시켰다.

레이는 내심, 와일드호그가 그대로 도주해주길 바랐다. 물론 흉포한 마물이 레이의 바람을 들어줄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올 거면 빨리 와라."

레이의 검신에 푸른 빛이 흘러나왔다.

아직까지도 알레시아에게 관심을 거두지 못했던 와일드호그가, 드디어 레이에게 온전히 정신을 집중했다.

"크륵, 크라락!!"

돌진.

와일드호그는 내장을 줄줄 흘리면서도 눈을 붉게 빛내며 지면을 박찼다.

레이 또한 지쳐서 잘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움직였다.

검기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30초.

어차피 죽을 놈이 상대라지만, 그 안에 목숨을 끊어놔야 안전했다.

'흥분하지 마. 놈의 동선은 단순하고 가장 까다로운 질긴 가죽은 이미 터뜨려 놨다.'

정면에서 짓쳐들어오는 와일드호그를 바라보며 레이가 타이밍을 쟀다.

서로의 거리가 2 m도 남지 않은 순간.

레이가 우아하게 몸을 회전시켰다.

스르륵

제자리에서 도는 듯했으나 어느새 레이는 와일드호그의 돌진 경로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뒤늦게 옆구리를 내준 걸 알아 챈 와일드호그가 방향을 틀기 위해 지면을 걷어찼으나 그보다 앞서 레이의 검이 갈라진 가죽 사이로 박혀 들었다.

푸욱!

"크르르륵!!"

와일드호그가 피거품을 물며 날뛰어대기 시작했다.

레이는 와일드호그의 억센 털을 붙잡고 매달린 채 남은 한 손으로 검을 역수로 바꿔잡았다.

발악하는 와일드호그 탓에 나무와 바위에 계속 몸을 부딪쳤지만, 레이는 기계적으로 와일드 호그의 상흔 사이로 검을 쑤셔넣었다.

푹! 푹! 푹! 푹! 푹!

처음에 탱탱했던 촉감의 내장들이 갈수록 묽어진다.

레이는 검기의 빛이 꺼질 때까지 팔을 쉬지 않았다.

그렇게 30초가 지나.

몸에 남아있는 내장보다 밖으로 흘린 내장이 훨씬 많을 지경이 되어서야.

"크륵..."

힘이 빠진 와일드호그가 지면에 쓰러진 채 숨을 거두었다.

쿠웅!!

거체가 옆으로 쓰러지고 나서야 레이는 지면과 맞닿을 수 있었다.

몸을 한 바퀴 굴린 레이가 그대로 대(大)자로 엎어졌다.

"흡! 흐읍! 흡...!"

레이는 한참 동안 호흡을 몰아쉬었다.

승리했다는 안도감 탓에 의식이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 같았지만 혀를 씹으며 버텼다.

"일어나자. 일어나야 된다."

들썩이는 가슴이 조금씩 진정된다.

핏물을 뱉어내며 몸을 일으킨 레이가 죽은 와일드호그의 뱃가죽을 다시 쑤시기 시작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검기에 베인 상흔'을 좀 지워보려는 의도였다.

당장의 시체 회수가 불가한 탓에 추후 패밀리의 도움을 받아 시체를 처리할 생각이었지만, 혹시나 제삼자에게 발견되는 경우를 염두에 두고 한 행동이었다.

'효과가 있을는지는 모르겠다만.'

전신에 온통 핏물을 뒤집어쓴 레이가 검을 수납했다.

전투는 잘 끝났다. 이겼으니 됐고, 살렸으니 된 거다.

레이가 알레시아가 몸을 웅크리고 있던 장소로 걸어갔다.

온몸에 흙을 뒤집어쓰고 있던 알레시아가 새롭게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 어깨를 벌벌 떨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마물이 아닌 사람의 것임을 깨달은 알레시아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아른거리는 시야 너머로, 익숙한 인영이 절뚝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잠시 말을 잃은 알레시아가 이내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으으으... 으에에... 으에에에엥..."

엉망이 된 알레시아의 얼굴을 보고 레이가 웃었다.

"알레시아, 내가 누구?"

"으아앙... 못 배운 천미인..."

"이년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딱밤을 한 대 때린 레이가 알레시아에게 묻은 흙을 털어주었다.

좀 다친 것 같긴 한데, 다행히 어디가 부러진 것 같진 않았다.

잠시 고민한 레이가 한숨과 함께 등을 내주었다.

"업혀봐."

"으에에... 으에에엥...."

레이의 목과 허리를 꽉 움켜쥔 알레시아가 레이의 등에 얼굴을 부비며 계속 울었다.

레이 또한 체력이 떨어져 죽을 맛이었지만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여기서 다른 마물이 더 꼬였다간 레이 본인은 몰라도 알레시아까지 지킬 수는 없었다.

"디나르 방향으로 갈 거야. 진짜 디나르로 가겠다는 게 아니고, 여기서는 영주성보다 보육원이 있는 마을이 더 가까워. 산에서 최대한 빠르게 벗어나야 해."

"우에에엥..."

"야, 말 듣고 있냐?"

"못 배운 천민이이... 날 미끼로 쓰다니이이... 귀족을 미끼로 쓰는 천민이 어디 있느냐아..."

뭐야, 들켰었나.

어깨를 흠칫 떤 레이가 헛기침과 함께 괜히 알레시아를 타박했다.

"그러게 누가 함부로 까불고 다니래?"

"천민은 다 거짓말쟁이다아..."

"야, 너 진짜 여기다 버리고 간다."

"그건 안 된다아..."

알레시아가 훌쩍이며 레이의 등에 더욱 몸을 밀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