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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텄다.

잭은 오늘도 과일을 판매하기 위해 판매대를 정리하다 말고 멀리서 걸어오는 피떡 둘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처음엔 웬 귀신이 나타난 건가 했으나 피떡을 업고 있는 피떡의 얼굴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잭이 사과를 던져주며 물었다.

"그거 혹시 네 피냐?"

"후욱, 후욱... 짐승 피입니다. 대부분은."

과일 가게에 도착한 레이가 알레시아를 내려놨다.

알레시아는 지면에 두 발을 딛고도 여전히 레이의 등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레이가 손짓했다.

"사과 주스."

"미친놈."

잭은 투덜대면서도 사과 주스 한 컵을 내주었다.

레이가 고아를 주워올 때마다 여기서 주스 한 잔씩 먹이고 가는 게 이젠 일과처럼 되어버렸다.

알레시아를 달래며 주스를 먹이는 레이를 바라보며, 잭이 턱을 괸 채 물었다

"근데 그건 또 어디서 주워 온 거냐?"

듣던 알레시아가 발끈했다.

"말조심 하거라, 평민. 나는 필립스가의 하나뿐인 영애 알레시아다!"

"..."

여전히 턱을 괴고 있는 잭에게 레이가 한마디 했다.

"얘가 머리를 좀 다쳐서, 지가 어디 귀족인 줄 알아요. 그냥 웃고 넘어가 주세요."

잭은 잠깐 고민했다.

저 거지보다 못한 행색을 한 소녀가 진짜 필립스 가의 영애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길가다 벼락을 두 번 정도 맞고 다시 살아날 확률쯤 되지 않을까.

허나 저걸 주워온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레이다.

직감적으로 이 새끼는 필립스 가의 영애를 주워오고도 남을 새끼라는 걸 알아챈 잭이 판매대를 나와 무릎 한쪽을 꿇었다.

"제가 평민이라 예법에 무지한 걸 용서해주십시오, 아가씨."

"흠, 흐음. 되었다. 눈이 아주 삐뚤어지지는 않은 모양이로구나."

알레시아는 스스로가 '귀족 아우라'를 발산하고 있다고 굳게 믿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레이가 똥 씹은 표정으로 당부했다.

"일단 비밀로 좀 해주세요."

"뭐... 그래. 아가씨를 납치라도 해 온 것은 아닌 것 같으니. 근데 어떻게 된 일이냐?"

"멋대로 산에 올랐다가 죽을 뻔한 걸 살려 왔죠. 주스 잘 마셨습니다."

"그래. 그리고 이거 가져가라. 내 마누라가 양아치들 족쳐준 거 고맙다고 건네주라 하더라."

사과잼이었다. 레이가 꾸벅 고개를 숙인 후 다시 알레시아를 업었다.

*

레이는 알레시아를 보육원에 데려다 놨다.

아델은 잭과 달리 '얘가 머리를 다쳐서 지가 귀족인 줄 안다'는 레이의 주장을 의심 없이 믿었다.

알레시아는 레이와 떨어지지 않겠다고 떼를 썼지만 부상 치료를 위해서라도 아델을 따라가라는 레이의 타박에 풀이 죽은 채 보육원으로 들어갔다.

알레시아를 안내하려던 아델이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레이는 괜찮니? 적지 않게 다친 것 같은데."

"당장 할 일이 있어서요. 이따가 오후에 치료받겠습니다."

핏물 아래, 옆으로 길게 찢어진 레이의 얼굴을 바라본 아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에는 들리도록 하렴. 더 방치하면 흉이 질 테니."

레이는 감사 인사를 하고 보육원을 나섰다.

곧장 홍등가 안에서 지미가 사용하던 사무실을 방문한 레이는 푸른 깃털을 지닌 새를 찾아냈다.

브릿지라 불리는 푸른 깃털을 지닌 새는 평범한 조류보다 훨씬 똑똑해 영물로 분류됐다.

사람 얼굴과 복장까지 정확히 구분할 줄 알아 이쪽 세상에서 전서구로 활용됐다.

지미에게 브릿지를 선물한 사람이 다름 아닌 필립스 백작임을 감안하면, 지미가 괜히 백작령 암흑가의 거두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백작에게 보낼 편지... 뭐라고 써야... 아으, 눈에 초점이 안 잡히네."

그냥 간단하게 쓰자.

가출한 딸 보호하고 있다는 앞뒤 맥락이야 백작이 어련히 이해할 것이다.

여담이지만 레이는 하루종일 산 속을 수색했고, 마나와 체력을 극한까지 소비해가며 마물을 죽였고, 밤을 새가며 알레시아를 보육원까지 옮겼다.

도저히 제대로 된 문장을 길게 쓸 자신이 없었던 레이는 몽롱한 상태에서 최대한 간결하게 문장을 만들었다.

[집 나간 알레시아는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

뉘앙스가 살짝 이상하지 않나 싶었지만 레이는 꿋꿋이 다음 줄을 썼다.

지금도 글씨가 하나로 보였다 두 개로 보였다 하는데 펜을 오래 붙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앞의 사정은 샐롯이 전달해 주었을 터다.

[지미 보육원으로 찾으러 오시면 됩니다. 혹시 직접 방문하시게 되면, 마법사 한 번 대동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왕 일이 이렇게 된 거, 마법사를 보육원에 초대해서 혹시 마법사 눈에 띄는 애가 없나 간 좀 볼 생각이었다.

가출한 딸내미를 찾아주었으니 무리한 요구는 아니었지만, 백작을 대면한 뒤 부탁해도 될 걸 굳이 편지에 적어넣는 시점에서 레이는 영 제정신이 아니었다.

[지미 드림.]

평소처럼 지미의 이름을 팔아먹은 레이가 브릿지의 다리에 편지를 매달았다.

브릿지를 날려보내는 순간 아르노가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아르노는 지미 곁에 꽤 오래 머물렀던 조직원인 만큼 레이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오, 레이. 얼굴이 박살이 났구나. 원래부터 더러운 인상이 더 안 좋아졌어."

"별 거... 아니에요. 그보다 입 무거운 패밀리 몇 명... 붙여줄 수 있나요? 회수해야 할 인간... 아니아니, 마물 사체... 있어요."

"그건 힘들 것 같구나."

아르노가 자기 허리춤에 묶어둔 장비들을 툭툭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지금 비상사태야."

"비상...?"

"어제 저녁쯤에 온 지미의 연락으로 필수 인력을 제외한 패밀리 전원이 영주성으로 향했어. 병사들도 마찬가지고. 소문을 듣기로는 수색 작업을 해야 한다던데, 일이 잘 안 풀렸는지 마지막 남은 간부인 나까지 부르네."

움직임을 멈춘 레이가 길게 앓는 소리를 냈다.

"수색 작업?"

"그래, 수색 작업. 누구를 찾는지는 모르겠지만 시그니 산맥을 수색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위험한 곳이지."

"안 가보셔도 될 것 같네요."

"뭐라고?"

아르노의 반문에 답하지 않은 레이가 의자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브릿지는 이미 하늘을 훨훨 날아 시야를 벗어나 있었다.

"끄응, 그냥 내 이름을 써넣을 걸 그랬나."

지미를 비롯해 패밀리까지 전부 동원될 걸 보니 생각보다 일이 많이 커진 것 같았다.

시그니 산맥을 뒤지다 말고 백작에게 불려가게 생긴 지미를 생각하며, 레이가 고개를 떨구었다.

쿠웅!

"어? 레이? 레이! 정신 차려!"

책상 위에 쓰러진 레이를 향해 아르노가 곧장 달려갔다.

알레시아 (4)

14화

"도움을 청하러 왔네."

"아, 아니 백, 백작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

사무실에 편하게 앉아서 서류를 보던 지미가 기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릎을 꿇으려는 지미를 멈춰 세운 필립스 백작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일단 듣게. 알레시아가 사라졌네. 시녀를 농락하고 도망쳤다더군. 이 도시 안이야 얼마든지 활개치고 다녀도 안전하겠지만 되도록 빨리 찾아내고 싶군."

"아, 아, 그렇군요.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생각을 정리한 지미가 입을 열었다.

"어디서 실종되셨습니까?"

"요정의 날개에서 시녀에게 옷을 입어보라 권하고는 사라졌네. 시간은... 3시간이 안 되었겠군. 영주성의 고용인들이 전부 나가서 찾다 안 되자 내게 보고가 들어왔네."

"다행히 오래되진 않았군요. 근데, 으음..."

"혹시 아가씨께서 마나를 각성했습니까?"

갑작스러운 매튜의 질문에 백작을 호위하던 모하메드가 곧장 검 자루에 손을 가져다 댔다.

"무엄하다!!"

마나는 귀족을 위한 특혜에 가깝다.

평민들은 상상도 못할 지원을 몰아받으며 비교적 이른 나이에 마나를 각성하게 된다.

그들은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기초적인 검술과 마법을 배운다.

허나 어린 귀족의 성과에 대해 타인이, 심지어 평민이나 천민이 궁금증을 드러내는 건 굉장한 결례였다.

모하메드의 분노는 지당했으나 백작이 손을 휘저어 입을 막았다.

"왜 물어보는 것이지?"

"아가씨께서 재능이 뛰어나시다면 지금쯤 마나를 각성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허나 제대로 다루기 위해선 2년은 더 걸리시겠죠. 잘못하면 마물들의 이목을 끌 겁니다."

"한 달 됐네. 도움이 됐나?"

"..."

지미와 눈을 마주친 매튜가 지도를 가져왔다.

지미가 책상 위에 지도를 펼쳐놓고는 시그니 산맥 쪽을 가리켰다.

"최소한의 인원을 남겨두고 일단 시그니 산맥 주위를 탐문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알레시아는 예전부터 산을 좋아했네."

"그건... 안 좋은 소식이군요. 설령 확률이 낮다 해도 시그니 산맥 근방부터 탐문을 진행해야 합니다. 백작님께서도 아시다시피 도시 안은 비교적 안전합니다. 제가 장담하겠습니다. 가장 위험한 곳부터 확인하는 게 맞습니다."

"도움이 됐군. 인력을 빌려줄 수 있겠나? 보상은 충분히 하겠네."

"매튜."

매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사무실 아래로 내려갔다.

지미 또한 사무실을 나서며 백작에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간단한 무장만 마친 후 직접 시그니 산맥으로 가보겠습니다."

"나도 같이 가겠네. 어서 준비해 오게."

"알겠습니다."

문을 나서는 지미를 모하메드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식한 암흑가 우두머리인줄 알았는데, 상황을 분석하고 정리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백작이 지도를 살피며 말했다.

"잔뼈 굵은 용병이야. 이런 일에는 기사보다 낫네."

"죄송합니다."

"됐네. 말을 더 준비하고 병사들을 불러모으게. 최소한의 필수 인력만 남기고 전부."

"명 받들겠습니다."

*

필립스 백작이 지미의 사무실을 방문하고 한 시간 후.

알레시아라고 판단되는 아이를 시그니 산맥 근처에서 목격했다는 증언이 확보됐다.

곧장 비상이 걸렸다. 예비 병력들이 전부 소집됐고 지미 또한 패밀리를 박박 긁어모았다. 백작령에 머물던 용병 또한 싸그리 고용됐다.

지미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사람 찾는 일에 인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지만 그게 또 절대적인 건 아니었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어두워진다.

추적술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병사들은 도리어 알레시아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해 수색에 혼선을 줄 수 있었다.

패밀리의 지휘까지 모하메드에게 일임한 지미가 매튜와 함께 적극적으로 현장을 수색했다.

그리고, 성과가 나왔다.

"이건..."

침을 한 번 삼킨 지미가 백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와일드호그의 흔적입니다."

"와일드호그는 산맥 깊숙한 곳에 서식하는 것으로 아네만."

"..."

"여긴 아직 시그니 산맥 초입일세."

"..."

침묵하는 지미를 향해 백작이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와일드호그가 상대라면 병력을 너무 분산해서는 안 됩니다. 5인 1조로 편성한 뒤 신호탄을 나누어준 후 수색을 계속해야 합니다."

"지금도 병력이 부족해 수색이 늦어지는데 5인 1조로 병사들을 편성하자고?"

"..."

"...그리 하게."

백작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음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지미 또한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지미와 매튜는 이번 일이 잘못되면 목이 날아가도 이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물론 필립스 백작은 관대하고 이성적인 귀족이었으나, 딸아이의 찢어진 시체를 보고도 그 이성이 유지될지는 알 수 없었다.

한숨을 깊게 쉰 지미가 매튜와 함께 와일드호그의 흔적을 집중적으로 쫓았다.

'빌어먹을. 해가 지지만 않았어도.'

병력들은 길게 대열을 갖춰 산을 타고 올라갔고, 패밀리와 용병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다른 흔적이 없는지 수색하고 있었다.

허나 해가 진 상황에서 마나를 사용할 수 없는 일반인은 그 한계가 명확했다.

지미와 매튜조차 낮보다 수색 속도가 배는 늦어지는 중이었다.

'이건 위험하다. 정말 위험해.'

와일드호그가 무엇을 노리고 인간의 구역 가까이 접근했을지는 정황이 너무 분명했다.

불안이 미친 듯이 차올랐다.

지미조차 이럴진대, 알레시아의 아버지인 백작의 심정은 어떠할지 지미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산맥을 계속해서 수색했다.

전진하는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온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전신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어느새 지평선 너머로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수색은 한층 더 수월해지겠으나 그만큼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의미였다.

지미는 잎사귀에 묻은 혈흔을 하나 발견했다.

입에 넣고 씹어보았다. 하루 이상 지나지 않은 혈흔이다. 그리고, 인간의 것이었다.

"시발."

지미는 도망가고 싶었다.

이후의 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 순간 매튜의 목소리가 산속을 메아리쳤다.

"이리 와보십시오!!"

지미가 먼저 도착했고, 이어서 백작과 모하메드가 도착했다.

백작의 호흡은 이미 더 가빠질 수가 없을 만큼 거칠어져 있었다.

백작의 눈치를 한 번 살핀 매튜가 자신이 발견한 것을 가리켰다.

"아가씨께서 머문... 흔적처럼 보입니다."

거대한 무언가에 짓밟힌 듯 박살 난 모닥불 사이로 백작에게 익숙한 책이 하나 보였다.

[바람의 정령 루시아 : 제국 여행기]

"큭... 크크큭... 으흐흐흐흐흑..."

백작이 실성한 것처럼 웃기 시작했다.

무릎을 꿇은 백작이 찢어져 나뒹구는 알레시아의 침대보를 움켜쥐었다.

붉게 물든 눈물이 새하얀 침대보에 뚝뚝 떨어졌다.

입술을 꽉 깨문 지미가 모하메드에게 말했다.

"모하메드 경, 경께서는 백작님을 모시고 돌아가 주십시오. 남은 수색은 제가 책임지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아니, 아니야."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가세. 가서 봐야지. 내 눈으로 봐야겠네. 수색을 계속하게."

"..."

백작을 말릴 방도는 지미에게도, 모하메드에게도 없었다.

날도 밝았고, 이제 알레시아와 와일드호그의 흔적이 대놓고 이어져 있었다.

조금 더 흔적을 따라가자 둔감한 사람이 보아도 바로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여기저기 혈흔이 묻어 있었다.

몸을 휘청이는 백작을 모하메드가 지탱했다.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는 건 모하메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상하군요."

지미가 중얼거렸다.

"이건... 인간의 혈액이 아닙니다. 마물의 것입니다."

입으로 혈흔을 빨아본 지미가 주변을 훑어보았다.

"누군가 와일드호그와 전투를 치렀습니다."

"...확신할 수 있나?"

"확신합니다."

죽어버린 백작의 눈에 약간의 빛이 돌아왔다.

이미 꺼져버렸다고 생각한 희망이 미약하게나마 되살아났다.

백작이 다시 자기 다리로 몸을 지탱했다.

혈흔을 계속 추적하자 얼마 안 가 모두가 발견할 수 있었다.

와일드호그의 거체가 난도질을 당한 채 쓰러져 있는 모습을.

"..."

잠시 침묵이 돌았다.

언뜻 봐선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지미가 조심스레 물었다.

"영애께서 직접 행하셨을 가능성은?"

"내 딸은 괴물이 아니네."

고개를 끄덕인 지미가 와일드호그의 사체로 향했다.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현재 백작령에 정착한 모든 사람을 통틀어 지미보다 짐승의 사체를 분석하는 데 우수한 인력은 없었다.

지미는 고약한 냄새가 나는 와일드호그의 사체를 눈 한 번 깜박하지 않고 자세히 살폈다.

살덩이가 뭉개진 방향에 따라 와일드호그가 어떤 충격을 받았는지 지미의 눈에 고스란히 보였다.

지미는 계속해서 사체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보고드리겠습니다."

"어서 하게."

"마법은 아닙니다. 강력한 검기에 당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애초에 검기가 아니면 아무리 날카로운 명검이라도 와일드호그의 가죽을 이렇게 찢어내기는 불가능합니다."

곤죽이 된 와일드호그의 창자를 주물러 본 지미가 의아함을 내비쳤다.

"굉장히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을 겁니다. 헌데 와일드호그를 사냥한 자는... 와일드호그를 죽이고 나서 굳이 난도질을 행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검기에 의한 상흔을 지우려는 목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굳이 검기의 흔적을 지우려 했다?"

"그렇습니다. 음,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좀 더 수색해봐야겠지만, 아가씨께서 무사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정체불명의 검객이 검기의 흔적을 지우려고 시도한 것을 보았을 때..."

"정체를 숨기고, 불순한 의도로 알레시아를 데려갔을 수도 있다는 의미인가."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그렇습니다."

백작이 호흡을 골랐다.

여전히 돌아버릴 것 같았지만, 상황은 호전되었다.

비록 알레시아가 납치되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방금 전까지 갈기갈기 찢긴 딸의 시신과 마주하는 걸 각오하고 있었다.

살아만 있다면, 괜찮았다. 살아만 있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겠는가?"

"수색을 계속함과 동시에 이 검객을 쫓아야 합니다. 물론 아직까지 어떤 혐의가 특정 된 것은 아닙니다만... 기사급 인원이 더 필요합니다. 상대는 강력한 검기를 다루는 소드 엑스퍼트입니다."

"모하메드 경."

삐익-!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남은 기사를 전부 이곳으로 집결시키라는 명령을 내리려던 백작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모하메드가 검을 뽑아들었으나, 이내 울음소리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손아귀에서 힘을 뺐다.

푸른 깃털을 가진 영물, 브릿지였다.

브릿지가 백작의 팔뚝에 내려앉아 편지가 묶인 다리를 내밀었다.

백작과 지미의 눈가가 동시에 좁아졌다.

꽁지깃이 위로 치솟은 브릿지는, 백작이 지미에게 하사한 전서구였다.

일단 편지를 열어본 백작이 첫 문장을 읽었다.

"집 나간 알레시아는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지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백작은 중간 문장을 생략하고 마지막 단어를 읽었다.

"지미 드림."

모두의 시선이 지미에게 돌아갔다.

다리에 힘이 풀린 지미가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이, 이건 모함입니다!! 아, 아니, 생각해보니 그거 딱 봐도 그 새끼가...!!"

"됐네. 누가 보낸 것인지 알 것 같군."

아직 앳된 글씨체로 이런 건방진 소리를 귀족에게 보낼 인간은 백작이 기억하기로 한 명밖에 없었다.

"레이 그놈이로군. 생각해보니 알레시아를 잃어버린 시녀가 레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했어. 우리보다 먼저 산에 올라 와일드호그로부터 알레시아를 구했나 보군. 편지에 적혀있길, 지금 알레시아는 보육원에 있다고 하네."

"하, 하하!"

식은땀을 줄줄 흘리던 지미가 손아귀를 말아쥐며 희열을 드러냈다.

'레이, 네가 해냈구나! 해냈어! 으하하하! 네가 우리 모두를 구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른다. 허나 과정 따위야 상관없다.

필립스 가의 영애를 구해냈다는 결과 하나가 중요했다.

'대체 왜 편지를 저따위로 보냈는지는 모르겠다만...'

심장이 떨어질 뻔한 지미가 안도의 한숨과 함께 허리를 일으키려 했다.

"잠시 그대로 있게."

"예? 예, 알겠습니다."

지미의 등허리에 편지지를 놓은 백작이 품에서 펜을 꺼내 들었다.

그 자리에서 답장을 작성하기 시작한 백작이 지미에게 말했다.

"큰 공을 세웠군, 지미. 자네가 키운 보육원의 아이가 내 딸을 구해냈으니, 이는 곧 자네의 공이라 할 수 있네."

"감사합니다. 백작님."

"헌데 의아하군."

"...?"

"자네는 와일드호그를 죽인 무인이 엑스퍼트급이라 확신했네."

"..."

"나도 레이가 마나를 다룰 수 있다는 정보는 들었네. 허나 그 아이가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랐을 리는 없지 않은가? 고작 9살인데 말이지. 헌데 자네의 반응을 보니 레이가 와일드호그를 죽였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같군."

지미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그제야 지미는 아가리를 너무 과하게 털어댔다는 걸 깨달았다.

"그, 그것이..."

"되었네. 어쨌든 이번에 받은 도움은 잊지 않겠네."

"가, 감사합니다."

"다 썼군. 이제 일어나게."

편지를 묶어 브릿지를 날려보낸 백작이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을 내리누르던 끔찍한 압박이 서서히 사그라드는 게 느껴졌다.

살아있었구나, 살아있었어.

백작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리자 모두가 등을 돌린 채 숲속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자리를 지키던 백작이 눈가를 닦았다.

진이 완전히 빠져버렸으나 그럼에도 귀족의 위엄을 잃을 수는 없었다.

다리에 힘을 준 백작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만약이란 것이 있으니. 모하메드 경, 기사 세 명을 차출해 와일드호그를 베어낸 검객의 흔적을 쫓으라 하게. 흔적이 보육원으로 이어져 있으면 복귀하라 이르고."

"명 받들겠습니다."

"또한 믿을 만한 사람에게 가장 빠른 말을 주어 보육원으로 보내게. 알레시아가 무사한지만 확인하면 되네. 무사하다면, 딸아이는 이틀 뒤 내가 직접 데리러 가겠네."

"신속히 처리하겠습니다."

"알레시아의 안전을 확인할 때까지 병사들의 수색은 계속 진행시키게. 나는 이만 돌아가겠네. 정리해야 할 일이 아주 많겠어."

*

레이는 의식이 몽롱한 와중에도 손아귀에 탱탱하고 축축한 무언가가 닿는 걸 느꼈다.

한참을 고민하던 레이가 제 손에 닿아있는 게 어린아이의 볼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끄응... 으응?"

간신히 눈을 뜬 레이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손에 닿았던 촉감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열려있는 문으로 붉은 머리카락이 휙 지나가는 게 시야에 스쳤다.

"끄으응... 쟤 아직 삐쳐 있었지."

손에 묻은 액체를 혀에 대보자 짠 맛이 났다.

"울긴 또 왜 울었... 근데 내가 왜 보육원 안에 누워있더라."

레이는 그제야 아르노와 이야기를 하다말고 기절해 쓰러졌다는 걸 깨달았다.

"무리하긴 했지."

하루종일 산을 뒤졌고, 와일드호그와 전투 직후 알레시아를 업고 몇 시간을 산길을 내려와 보육원까지 도달했으니.

사실 중간부터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기억을 찬찬히 되새겨본 레이는 마지막에 가서 몸을 굳혔다.

"내가 편지를... 뭐라고 썼더라."

레이는 직감적으로 자기가 병신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어도 그렇지, 편지를 앞뒤 맥락도 없이 그런 식으로 적어 보내다니.

이게 좀 가벼운 사안이었다면 모르겠는데, 알레시아가 엮여 있는 일인지라 오해를 받았다간 일이 복잡해질 수 있었다.

뒷수습을 위해 몸을 일으키는데 아델이 문을 닫고 들어왔다.

"일어났구나."

"치료해주셔서 감사해요, 아델. 또 은혜를 입었네요."

신성력을 지닌 사제의 치료는 본디 부르는 게 값이다.

베푼 호의를 잊지 않고 감사를 전하는 레이의 모습에 아델이 환하게 웃으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이 새가 네 잠자리를 계속 맴돌더구나. 널 찾아온 게 맞니?"

"아이고. 벌써 답장이 왔네."

이리 된 이상 백작이 개떡 같은 편지를 찰떡 같이 알아들었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레이가 머리를 짚으며 편지를 펼쳐보았다.

[레이, 이 편지를 보낸 이가 너일 것으로 짐작한다.

알레시아를 구해주어서 고맙다. 이번에 입은 은혜는 잊지 않겠다.

지미에게서 네가 와일드호그와 얼마나 치열한 전투를 치렀을지 자세하게 전해 들었다. 부디 무사했으면 좋겠구나.

이틀 뒤에 찾아가겠다. 그동안 딸아이를 잘 부탁한다.

추신 1) 다음부터는 편지를 좀 더 길게 적어 보내도록 해라.

추신 2) 귀족에게 남의 이름을 팔았다간 사기죄나 귀족 모욕죄로 처벌될 수 있다. 이번 한 번은 넘어가겠다.]

"..."

다행히 상황은 오해 없이 잘 풀린 듯 했다.

천민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표현한 것을 보면 필립스 백작은 허용 가능한 최대한도의 고마움을 레이에게 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보육원에 이틀 뒤에 들리겠다는 것은, 알레시아를 수색하는데 백작령의 모든 인적 자원을 가져다 썼으니 그걸 다시 정리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배경이 있을 테고.

다만 레이에게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편지의 세 번째 문단이었다.

'들켰다, 시발.'

검기로 와일드호그 족친 거, 들킨 게 틀림없었다.

교류 (1)

15화

'숨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마물의 사체를 회수하지 못한 게 실책이었다.

현실적으로, 9살 먹은 꼬마가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랐다는 가설보다 이제 막 마나를 각성한 아이가 천운이 겹쳐 와일드호그를 죽였다는 게 훨씬 그럴 듯했다.

증거만 없다면 백작 또한 '레이가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고 납득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허나 편지를 보아하니 지미가 백작에게 와일드호그가 어떤 수단과 방식으로 참살되었는지 자세히 보고한 게 틀림 없었다.

'지미라면 난도질 좀 했다고 검기의 흔적을 못 알아볼 리 없으니.'

레이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필립스 백작은 분명 관대하고 이성적이며 말이 참 잘 통하는 귀족이었다.

레이의 성취를 알게 된다면, '적절한 대가'를 매개로 아낌없는 지원을 베풀어 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레이가 백작에게 정보를 숨긴 건 역시나 리스크 때문이었다.

나이를 좀 먹으면 철부지 꼬맹이였던 놈들이 무서운 속도로 따라잡기 시작하겠다만, 현시점에서 레이의 성취는 지나치게 앞서 있었다.

아무리 이성적인 필립스 백작이라도 불세출의 천재처럼 보이는 레이를 보고 눈이 돌아가 돌발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하아, 들켰으니 어쩔 수 없지.'

비밀을 지키겠다고 백작 뚝배기를 깰 수는 없는 노릇이니.

편히 휴식을 취하라 당부한 아델이 자리를 비켜준 후 침대에 한 시간 정도 뻗어있던 레이가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온몸이 쑤시네. 며칠 더 고생하겠어. 근데 알레시아는 어디..."

삐걱!

힘차게 열린 문으로 밝게 빛나는 금발이 너울졌다.

레이가 깨어난 걸 확인한 알레시아가 사뿐사뿐 뛰어왔다.

"레이! 일어났구나!"

"너 왜 그렇게 말짱하냐?"

스쳤다곤 하나 와일드호그에 한 번 치인 것치고는 굉장히 쌩쌩해 보였다.

'아, 쟤는 내 등에 업혀서 퍼 잤구나.'

레이가 죽을 둥 살 둥 하며 산을 내려올 동안 알레시아는 등에 업힌 채 코까지 골며 숙면을 취했다.

보육원에 도착한 후엔 아델에게 신성력으로 치료까지 받았으니 활기가 넘치는 게 충분히 이해됐다.

레이가 굉장히 꼽다는 얼굴로 무게를 잡고 있자 알레시아가 축 처진 목소리로 물었다.

"얼굴은... 왜 그런 것이냐?"

레이가 자기 얼굴을 더듬었다.

얼굴 절반을 가로지르는 상처 위로 거즈와 비슷한 천이 덧대져 있었다.

상처를 만져보니 전투 때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와일드호그에 매달려 있다가 나뭇가지에 걸려서 피부가 찢어졌던 것 같은데. 눈깔 안 뽑힌 게 다행이지. 고개 안 쳐들었으면 평생 지팡이 쥐고 다닐 뻔했어."

"으우..."

제자리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알레시아를 향해 레이가 턱을 괴었다.

"뭘 고민해?"

"귀족을 미끼로 쓴 천민에게 감사 인사를 하기가 좀 그렇구나..."

"이년이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악!"

뒤통수를 한 대 맞은 알레시아가 뒷머리를 쓱쓱 비비며 투덜댔다.

"흉 안 지게 관리 잘하거라. 타고난 얼굴도 별로인데 하자까지 생기면 안 되지 않느냐."

"그걸 네가 왜 걱정해?"

"레이, 나는 잘 생긴 사람이 좋다. 하지만 레이는 눈매가 사나워 나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구나."

"지금 시비거냐?"

"그러니까 정진하라는 의미이다."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은 알레시아가 잠시 딴청을 피우다 평소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그보다 레이, 듣고 놀라지 말아라. 내가 오늘 아주 진기한 것을 보았다!"

"어이구, 우리 아가씨는 이 보잘것없는 보육원에서 대체 어떤 진기한 것을 보셨을까?"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천민을 보았다! 레이 말고 글을 읽고 쓸줄 아는 천민이 또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구나!"

레이가 다시 한 번 알레시아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

이틀이 좀 안 되는 시간 동안 보육원에서 알레시아를 보호하게 되었다.

귀족 영애가 보육원에 있다는 이야기가 퍼져봤자 좋을 일이 하나도 없으므로, 백작가 사용인의 동의 아래 알레시아는 잠시 동안 가짜 평민 신분을 얻게 되었다.

문제는 알레시아가 이러한 합의안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자기가 귀족이라고 떠들고 다녔다는 점이다.

알레시아의 입을 틀어막길 포기한 레이는 일단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나 지켜봤다.

말 끝마다 '천민! 천민!'거리며 목에 힘을 빳빳이 주고 다니는 탓에 따돌림이나 당하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알레시아는 보육원 아이들과 잘 어울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를 귀족이라 칭하는 알레시아를 보육원 아이들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쫓아다녔다.

살면서 귀족을 한 번도 접해볼 기회가 없었던 아이들에게 있어 알레시아라는 존재는 굉장히 신비롭고 우아하게 다가왔다.

"귀족은 그리 천박하게 걷지 않는다. 뒤꿈치부터 바닥에 닿아 쿵쿵 소리가 나지 않느냐."

"그, 그럼 이렇게 걸으면 되나요?"

"허리가 너무 굽혀졌구나. 엉덩이에 좀 더 힘을 주고 시선은 정면을 향하도록 하여라."

보육원에 때아닌 교양 붐이 일어났다.

여자아이들은 알레시아의 비위를 맞추며 귀족의 교양에 관한 것을 꼬치꼬치 캐물었고, 남자아이들은 귀족의 하얀 피부를 본답시고 난간을 붙잡고 알레시아가 머무는 방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예컨데 카렌의 경우, 알레시아가 귀족이라는 소리를 믿지도 않았고, 알레시아를 데려올 때 레이가 잔뜩 다쳐서 돌아온데다, 레이에게 자꾸만 친한 척을 하는 알레시아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들었다.

아직 '삐친' 상태를 유지 중이라 레이에게 뭐라 따질 수도 없어 더욱 애가 탔다.

그런 카렌의 마음을 모르는 레이는 시끌벅적한 보육원을 지켜보며 이마를 짚었다.

"아주 소문 다 내고 다녀라. 필립스 가의 영애가 여기 있다고."

벽을 탕탕 내려친 레이가 아이들의 이목이 쏠린 것을 확인하고 외쳤다.

"다들 수업 준비해!"

몸뚱이 상태가 영 말이 아니긴 했지만 수업을 건너뛸 수는 없었다.

시간표를 확인한 아이들 중 몇몇이 우르르 교실로 몰려갔다.

그 모습을 보며 알레시아가 호기심 어린 눈을 빛냈다.

결국 교단 옆에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앉은 알레시아가, 수업을 듣다 말고 손을 벌벌 떨며 레이의 팔을 붙잡았다.

"레, 레이..."

"또 왜?"

"천민들이 구구단을 할 줄 아는구나..."

천민들은 숫자를 열까지밖에 못 셀 것이라 여겼던 알레시아가 충격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레이가 알레시아의 뒤통수를 몇 번이나 더 후려야 얘가 정신을 차릴까 고민 하던 순간, 교실 끝자락에 앉아있던 카렌이 책상을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야! 거짓말쟁이! 자꾸 귀족 흉내 낼 거야?"

"거짓말쟁이? 지금 나보고 한 소리인가?"

"그래, 이 거짓말쟁이야. 귀족도 아니면서 귀족 흉내나 내고. 얌전히 걷는 법이랑 귀족이랑 대체 무슨 상관인데!"

"교양도 모르는 천민이 구구단 좀 할줄 안다고 기세등등하구나."

"그러는 너야말로 귀족이라면서 구구단은 제대로 할 줄 아는 거야?"

"구구단쯤이야 나는 걸음마 할 때 떼었다."

"거짓말! 그렇게 자신 있으면 나랑 붙어 보던가!"

"호오, 지금 내게 수학으로 도전하겠다는 건가? 그 도전, 받아주마. 못 배운 천민에게 귀족이 왜 귀족이라 불리는지 알려주는 것도 관용이라 해야 할 것이야."

그렇게 시작된 수학 배틀.

둘 사이 낑긴 레이가 될 대로 되란 식으로 이런저런 문제를 출제했다.

카렌과 알레시아의 실력은 막상막하였다.

연산력은 카렌이 나은 듯 했지만 나이가 하나 많은 알레시아가 답을 찾아내는 감각이 더 좋았다.

승부가 길어지자 카렌의 얼굴이 흥분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이대로는 알레시아를 이기기도 힘들고, 이기더라도 근소한 차이밖에 보여주지 못할 터였다.

카렌은 알레시아의 콧대를 꺾어 놓고 싶었다. 자기 자존심을 버리더라도 말이다.

갈등을 거듭하던 카렌은 결국 이를 꽉 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렌이 교실 밖으로 뛰어나가자 알레시아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흥,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구나."

허나 도망간 줄 알았던 카렌은 얼마 안 가 익숙한 얼굴을 한 명 데리고 교실로 복귀했다.

레이가 경악했다.

"아니 좀 치사한 거 아니냐? 여기서 그 비대칭 전력을 쓰겠다고?"

"...?"

난데없이 카렌에게 끌려온 루나가 상황 파악을 못 하고 눈을 깜박였다.

그 맹해 보이는 모습에 알레시아가 자신만만히 소리쳤다.

"내 다음 상대인가? 얼마든지 더 데려와 보거라. 우둔한 천민에게 귀족의 위대함을 가르쳐 주겠다!"

*

"우에에에... 우에에엥..."

루나에게 일방적으로 개털린 알레시아가 자기 무릎을 껴안은 채 교실 한구석에서 질질 짜고 있었다.

"이, 이럴 리가 없다. 내가 천민에게 패배할 리가..."

우는 알레시아를 내버려 두고 레이가 운동장을 가리켰다.

"난 그만 가볼게. 태권도 수업 있어서."

"우에에엥..."

계속해서 질질 짜던 알레시아는 레이가 정말로 교실을 나가버리자 허공에 팔을 휘두르며 분노를 드러냈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귀족의 위엄을 세워야 하느니라!"

근데 어떻게?

두뇌 싸움에선 도저히 방금 그 괴물 같은 소녀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이 명확했다.

저게 내가 아는 그 천민이라고? 그게 말이 되나? 레이가 나를 놀리려고 다른 영지에서 귀족을 데려온 게 아닐까?

끙끙 앓아가며 쓰라린 패배를 곱씹던 알레시아가 자기 가슴 아래를 바라보았다.

천민에게 귀족의 위엄을 세울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결정적인 수단을 알레시아는 이미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빠가 마법은 남에게 함부로 보이면 안 된다고 하셨다..."

마법은 정말 최후의 수단이다.

천민들에게 함부로 드러냈다간 아빠에게 무지하게 혼날 것이 분명했다.

축 처진 얼굴로 고민을 거듭하던 알레시아가 운동장을 내다봤다.

보육원의 아이들이 전부 모여 동일한 동작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그 광경을 보고 알레시아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래! 마법이 안 된다면 검술을 보여주면 되겠구나!"

자존심을 회복할 기회를 발견한 알레시아가 무릎을 탁탁 털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슬그머니 기어나오는 알레시아를 보고 카렌이 콧방귀를 뀌었다.

"뭐야, 거짓말쟁이잖아?"

"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말을 가려서 하거라, 못 배운 천민!"

"귀족이라면서 천민한테 졌잖아."

"그, 그건 방심해서 그런 것이다! 아직 몸도 회복이 덜 되었다! 그러니 오늘은 운이 좋은 줄 알거라!"

씩씩댄 알레시아가 발차기를 하는 아이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이상한 것을 가르치는구나. 저걸 대체 왜 배우는 것이냐?"

"지금 레이가 가르쳐준 태권도 무시하는 거야? 너는 이렇게 멋있는 발차기 할 줄 알아?"

"우문이구나. 대체 발차기를 익혀 어디에 써먹는단 말이냐? 천민이라고 전장에서 칼을 버리고 다리로 싸우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그, 그건...!"

이번만큼은 카렌의 답변이 궁색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레이는 몸 쓰는 감각이나 미리 익혀 두라고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친 것이지 무술로서 가치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알레시아가 카렌을 향해 비웃음을 드러냈다.

"진정한 귀족은 발길질 따위는 하지 않는다. 너는 검을 쓸 줄 아느냐?"

"다, 당연하지!"

"흥미롭구나. 나와 한 번 검을 겨뤄보겠느냐?"

알레시아의 도발은 아이들, 특히 남자아이들에게 큰 관심을 끌었다.

평소에도 막무가내로 막대기를 들고 기사 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알레시아를 감쌌다.

"알레시아님은 검술도 배웠어요?"

"진검 들어봤어요?"

"저, 저랑도 대련 한 번 해줄 수 있어요?"

"알레시아님은 강해요?"

"검기 날릴 수 있어요?"

열광적인 반응에 알레시아가 목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려 보거라. 원한다면 한 명 한 명 순서대로 가르침을 내려주도록 하마. 영광으로 알거라."

상황을 지켜보던 레이가 중얼거렸다.

"저건 정말로 일방적이겠군."

알레시아는 비록 교양일지언정 고급 검술을 어릴 때부터 배웠다.

반면에 보육원의 아이들은 제대로 된 검술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다.

그로부터 오는 차이는 너무나도 극명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가 지켜보는 아래서 알레시아를 필두로 한 목검 대련이 시작됐다.

퍼퍽!

"으악!"

휘릭- 타닥!!

"와악!!"

빠각!

"아아악!!"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레이는 가까이에서 대련을 지켜봤으나 알레시아는 대련을 신청한 보육원 아이 대부분을 2합 안에 마무리 지었다.

너무나도 일방적인 결과.

심지어 패배한 아이들 중에는 알레시아보다 몇 살 연상의 남자까지 있었다.

아이들의 눈이 재차 선망으로 물들기 시작하자 카렌이 손을 까닥였다.

뒤에서 검술 대련을 지켜보던 요하나가 쪼르르 다가왔다.

"카렌, 나 불렀어?"

"요하나, 저 거짓말쟁이 이길 수 있겠어?"

"으응? 음..."

잠시 고민한 요하나가 방긋 웃었다.

"노력해볼게!"

교류 (2)

16화

"흠, 너무 쉽구나. 귀족과 천민 사이에 까마득한 격차가 있다는 것을 이제 다들..."

대련을 신청한 아이들을 전부 패배시키고 검끝으로 주변을 훑던 알레시아가 레이와 눈이 마주쳤다.

기세등등했던 알레시아는 곧장 쭈구리가 되어 목소리를 죽였다.

아무리 귀족 뽕에 취한 알레시아라 해도 맨정신으로 레이에게 검을 들고 까불 수는 없었다.

'레이는 괴물인 것이야...'

자기보다 덩치가 10배는 큰 마물을 레이가 검 두 자루로 때려잡았다는 사실이 알레시아는 여전히 잘 믿기지 않았다.

알레시아가 침묵하자 잠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이대로 대련이 끝나나 했는데 쾌활한 목소리가 카렌의 뒤에서 울려 퍼졌다.

"나도! 나도 해 봐도 될까요?"

요하나가 팔을 번쩍 들고 소리치자 알레시아가 오만한 미소와 함께 턱 끝을 까닥였다.

"얼마든지 오거라."

자신감을 회복한 알레시아가 언젠가 동화책에서 봤던 악역의 대사를 읊었다.

"이대로면 준비운동도 되지 못할 듯 싶으니, 너는 나를 좀 더 즐겁게 해주었으면 좋겠구나."

"노력해볼게요!"

요하나는 검을 제대로 휘두른 경험이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목검을 건네받은 요하나가 알레시아의 파지법을 따라 해보며 팔을 쭉 폈다 접기를 반복했다.

언뜻 보기엔 몸을 푸는 것처럼 보였지만, 요하나는 검을 들었을 때 어디까지 리치가 늘어나는가 거리감을 조절하고 있었다.

검이 휘둘러지는 반경을 어느 정도 파악한 요하나가 환한 웃음과 함께 알레시아 앞에 섰다.

"준비됐어요!"

만약을 위해 조금 더 거리를 좁힌 레이가 두 손을 맞부딪쳤다.

"시작."

"이얍!"

요하나가 용기 있게 검을 찌르고 들어갔다.

알레시아는 찌르기를 익숙하게 옆으로 흘리며 도리어 요하나의 명치를 노렸다.

요하나가 허리를 뒤틀며 공격을 피하려 하자 시계 방향으로 검을 돌린 알레시아가 어느새 요하나의 우측을 점하곤 검을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우왓!"

정말 미세한 간극이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공격을 피해낸 요하나가 호다닥 거리를 벌렸다.

"운이 좋구나, 천민!"

"나 베일 뻔했어요!"

둘 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레이가 보기엔 아니었다.

'항상 느끼지만... 요하나는 거리감각이 자로 잰 것처럼 정확하단 말이지.'

천부적인 재능이라 할만했다.

같은 길이의 목검을 몇 번 휘둘러 본 것만으로 상대의 타격 거리까지 본능적으로 감을 잡았으니까.

알레시아는 자신의 검을 받아낸 요하나가 대견한지 뿌듯한 미소와 함께 거리를 좁혔다.

"어디, 운이 계속 따라주나 한 번 보자꾸나."

쇄액! 타타탁!

확실히 알레시아는 고급 검술을 배운 티를 냈다.

상대의 힘을 역이용할 줄 알았고, 동작의 연계가 다채롭고 자연스러웠다.

알레시아는 상대가 검술 초짜인 요하나인 만큼 다소 무리한 동작 또한 연습 삼아 시도해 볼 수 있었다.

문제는, 수십 번의 공방 동안 요하나가 결정적인 타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모조리 피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번에도 운이 좋았어요! 오늘은 운이 아주 좋은 것 같아요!"

"...?"

이 천민이 지금 날 농락하나?

알레시아가 도끼눈을 하고 째려봤으나 요하나의 표정에는 운이 좋았다는 순수한 기쁨밖에 보이지 않았다.

알레시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운이 조금 좋다고 수십 번의 검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내는 게 가능할 리가 없잖은가.

당황하는 알레시아를 보며 레이가 낄낄댔다.

'암, 어떻게 뽑은 레어인데 저 정도 퍼포먼스는 보여줘야지.'

레어 하나 더 뽑아보겠다고 가챠를 또 얼마나 돌려댔던가.

레이는 지난날의 고생이 이 순간 작게나마 보답 받는 기분이었다.

레이가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는 동안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알레시아가 검을 고쳐 잡았다.

지금까지 지도를 해준다는 마음으로 힘을 좀 빼고 했는데, 이제 인내심의 한계가 찾아왔다.

촥촥촥촥촥!!

알레시아의 검술이 급격히 거칠어졌다.

갑작스레 빨라진 검속에 당황한 요하나가 몸을 뒤로 뺐다.

요하나는 고민했다.

운이 좋아 공격을 피하고는 있지만, 알레시아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알레시아의 검술은 보기보다 방어에 치중된 검술이었다.

제 아무리 요하나의 재능이 뛰어나다 해도 몇 번 잡아보지도 않은 목검으로 알레시아의 방벽을 뚫어낼 수는 없었다.

'잘하는 걸 응용해보자!'

레이는 항상 응용이 중요하다고 했으니까.

요하나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건 1080° 돌려차기였다.

해답을 찾은 요하나가 알레시아에게 등을 보인 채 운동장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으응? 지금 도망가는 것이냐?"

당황한 알레시아가 움직임을 멈춘 사이.

운동장 반대쪽에서 목검을 흔들며 신호를 보낸 요하나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질주를 시작했다.

"?"

삽시간에 가까워지는 요하나를 보며 알레시아가 말을 더듬었다.

"저, 저 천민이 지금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알레시아가 와일드호그가 돌진해오던 광경을 떠올리고 몸을 굳힌 순간 요하나가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도약했다.

휘리리릭!

공중에서 회전을 시작하는 요하나를 보고 알레시아가 입을 헤 벌렸다.

알레시아는 짧은 삶을 살아가며 이처럼 족보 없는 검술은 겪어본 적이 없었다.

알레시아가 경험만 충분했다면 족보 없는 검술에 당황했더라도 일단 거리를 벌린 후 요하나가 착지하는 순간을 노렸겠지만, 불행히도 알레시아는 실전 경험이 일천했다.

"이얍!"

세 바퀴 회전을 끝낸 요하나가 평소에 뻗던 다리 대신 검을 크게 휘둘렀다.

멍하니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알레시아가 그제야 방어 자세를 취했다.

허나 족보가 있고 없고를 떠나 공중 삼 회전 돌려 베기는 위력 하나만큼은 절륜했다.

파각!

"우왁!"

검이 부딪친 충격을 이기지 못한 알레시아가 손에서 무기를 놓쳤다.

목검이 바닥을 도르르르 구르는 소리와 함께 운동장에 경악이 내려앉았다.

잠시 눈을 깜박이던 요하나가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내가 이겼어요!"

정통적인 대련이야 검을 놓쳤다고 승패가 갈리진 않는다만, 애들 싸움에서 검 놓치면 패배한 게 맞긴 했다.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뛴 요하나가 레이에게 외쳤다.

"운이 엄청 엄청 좋았어요!"

'기만하는 거 봐라.'

레이는 슬슬 의구심이 들었다.

요하나는 그냥 바보인 척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바보를 흉내 내며 상대방 속 박박 긁는 걸 내심 즐기고 있는 건 아닐까?

말도 안 되는 가정을 떠올린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알레시아는 괜찮나?'

알레시아는 패배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는지 자리에 주저앉아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하, 한 번 더 하자구나! 내, 내가 방심했다!"

뒤늦게 재경기를 외치는 알레시아의 위로 그림자가 하나 졌다.

알레시아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오랜지 빛 눈동자를 지닌 카렌이 한쪽 입꼬리를 추켜올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검술도 졌네?"

*

다음 날.

알레시아는 여전히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검술 대련에서 한 번 지는 바람에 가오가 좀 상했다고 해도 알레시아가 보여준 우아한 검술은 아이들의 뇌리에 여전히 깊게 박혀 있었다.

식당에서 아이들의 대접을 받으며 떵떵거리는 알레시아에게 카렌이 지나가며 한 마디씩 던졌다.

"흥, 수학 대결도 졌으면서."

"..."

"흥, 검술 대련도 졌으면서."

"...."

"거짓말쟁이."

계속되는 시비에 결국 알레시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카렌이라고 하였느냐? 너는 천민치고도 염치가 없구나! 내가 설령, 우연이 겹치고 겹쳐 실책을 두 번이나 저질렀다고 해도 너와는 관련 없는 일이다!"

말인즉슨 져도 너한테 진 건 아니니 입 다물라는 소리였다.

카렌 또한 친구의 승리를 들먹이며 알레시아를 긁어대는 것이 꼴불견이란 자각은 있었다.

허나 알레시아는 이미 본인의 무덤을 너무 깊게 파둔 뒤였다.

"천민과 귀족 사이에선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며?"

"윽!"

"근데 졌잖아."

"그, 그건 우연이 겹쳐서..."

"너 정말 귀족이야?"

"그러하다!

"그러면 천민한테 패배한 허접 귀족이네?"

알레시아가 입을 쩍 벌렸다.

허접이란 단어가... 귀족 앞에 붙을 수 있는 수식이었나?

"지, 지금 뭐라 하였느냐?"

"알레시아는 천민한테 패배한 허~접 귀족이라고."

"...!!"

알레시아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쳤다.

"내, 내가 이, 이런 굴욕을..."

부들부들 몸을 떤 알레시아가 입술을 콱 깨물었다.

이대로는 못 물러난다. 오늘 오후에 아빠가 찾아오기로 했으니 저 건방진 천민의 입을 다물게 해줄 기회는 앞으로 몇 시간도 남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건방진 천민을 아빠에게 일러바치고 싶었지만 두 번의 패배를 시인해야 한다는 쪽팔림과 상대가 레이와 깊게 연관된 보육원의 아이라는 것이 신경 쓰였다.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

"더 이상은 못 참겠구나! 모두 운동장으로 따라나오거라! 귀족이 왜 귀족인지 내가 친히 증명해주겠다!!"

"와아아!!"

볼거리가 생긴 아이들이 숟가락을 머리 위로 들고 환호성을 질렀다.

방에 있던 아이들도 운동장으로 우르르 쏟아져 나가는 인파를 보고 같이 운동장으로 달려나갔다.

"장작을 가져오거라!"

알레시아의 명령에 하루 만에 반쯤 추종자가 된 아이 몇이 나무토막을 한 아름 안고 달려왔다.

수북이 쌓이는 장작더미를 보고 흡족히 웃은 알레시아가 아이들을 뒤로 물렸다.

"모두 두 눈 똑바로 뜨고 보거라. 고귀한 귀족에게만 허락된 마나의 기적을!"

알레시아는 팔을 높게 들어 올리고 굳이 필요치 않은 주문을 덧붙였다.

"여기 고귀한 핏줄이 명하노니, 어둠을 밝히는 불꽃이여! 죄를 태우는 화염이여! 지금 내 앞에 현현하라!"

레이가 보았다면 분명 뒤통수를 세 대쯤 후렸을 터다.

다행히도 레이가 아침 일찍 일을 볼 게 있다고 사라졌기에, 방해 없이 몇 마디 더 쓸모 없는 수식을 덧붙인 알레시아가 팔을 앞으로 뻗었다.

"파이어!"

화르륵!!

"우와아아아아아!!!!"

붉은 불꽃이 장작을 집어삼키고 높이 타오름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태어나서 처음 제대로 된 마법을 접한 아이들은 강렬한 충격을 느끼며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알레시아를 우러러봤다.

기세가 등등해진 알레시아가 멀찍이 떨어져 있는 카렌을 향해 한쪽 입꼬리를 쓰윽 올렸다.

"보아라. 이제 더는 거짓말 타령은 하지 못할 것이다!"

너울지는 불꽃을 바라보던 카렌의 눈시울이 금방 붉게 변하였다.

"씨이..."

카렌의 곁에 서 있던 루나가 가만히 카렌을 바라봤다.

루나는 카렌이 어째서 서글퍼하는지 잘 공감하지 못했다.

"흑! 흐윽!"

질시와 열등감이 뒤섞인 눈물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독점욕과 승부욕이 강한 카렌은 레이가 항상 자신을 우선해주기를 바랐다.

허나 레이의 관심을 독차지하기엔 카렌의 재능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카렌은 성실함을 내세웠지만, 레이가 사실은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열심히 노력했다. 노력했는데, 이제는 보육원 친구도 아닌 마법까지 부릴 줄 아는 진짜 귀족이 레이 곁을 떡하니 차지하려고 치근대고 있었다.

카렌은 용납할 수 없었다.

루나나 요하나가 레이의 옆자리를 차지했다면 숟가락이라도 들이대 볼 수 있었지만 귀족은 안 되었다.

알레시아가 진짜 귀족이라면, 더더욱 쫓아내야 했다. 저 귀족보다 우리가 우수함을 증명해야 했다. 그래야 레이가 이곳을 떠나지 않을 터였다.

"흐윽! 루나..."

카렌이 루나의 손을 잡아왔다.

"루나는 나보다 훨씬 똑똑하니까, 마법도 쓸 수 있을 거야. 저런 허접 귀족보다 훨씬 더 멋진 마법을. 그렇지?"

루나가 카렌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카렌의 감정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허나 카렌은, 최근 들어 레이 일로 몇 번 틱틱 댔을지언정.

루나가 처음 보육원에 들어왔을 때부터 따뜻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다른 아이들과 거리를 좁힐 수 있도록 계속해서 곁을 지켜주었다.

그러니까 루나는.

처음 사귄 친구인 카렌을 위해서 마법 한 번쯤은 펼쳐줄 수 있었다.

루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빵이 가득 든 바구니를 든 레이가 끙끙대며 보육원으로 복귀하고 있었다.

오는 길에 아르노에게 백작이 몇 시간 안에 보육원에 도착할 것이란 소식을 전해들었다.

'애들 간식부터 좀 맥이고... 입단속 시킬 것 좀 시키고, 용모랑 복장 좀 단정히 하고 대기하라고 말해두면 되겠지.'

대충 계획을 정리한 레이는 자기가 없는 사이 보육원에 별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이미 멀리서부터 운동장 한가운데 모닥불이 타오르는 광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낮에 캠프파이어... 알레시아 짓이네."

큰 문제는 없을 터다.

대외비라고 하나 귀족들 마법 익히는 거 어차피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딸내미 목숨 값을 빚진 필립스 백작이 알레시아가 애들 앞에서 기초 마법 시현 한 번 했다고 트집을 잡지는 않을 것이다.

"..."

떠들석한 보육원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던 레이가 빵을 떨어뜨렸다.

반쯤 '개안'된 눈이 흐르기 시작한 마나를 시각화해 억지로 풍경 위에 겹친다.

보육원을 흐르던 하늘이 온통 붉게 변했다.

"아니지, 아니야. 저건 아니야."

레이가 달리기 시작했다.

"네가 벌써 그런 걸 하려고 들면 안 돼."

근육에 깃든 마나가 신체를 폭발적으로 가속시켰다.

"그건 너무도 비상식적인 성취야."

허리춤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결코 남에게 내보여선 안 돼."

저 재능이 밖으로 드러나는 순간 도저히 감당키 힘든 마수가 사방에서 뻗쳐올 터다.

"제길."

레이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야 했다.

등급 측정을 잘못했다.

마법사 (1)

17화

코어와 서클.

마나를 근원으로 하는 두 동력원은 그 상이한 성질로 인해 각각 기사와 마법사의 선택을 받았다.

정제된 마나를 심장 내부에 응축시켜 생성하는 코어.

코어로부터 뻗어 나가는 마나는 높은 안정성과 불변성을 지닌다.

기사들은 코어의 마나를 활용해 강화한 육체와 무기로 적을 베어낸다.

반면에 서클은, 그 자체로는 동력원이라기보다 일종의 마나 연산자에 가깝다.

심장을 회전하는 서클은 유동적으로 변화하며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불가사의한 현상을 구현한다.

코어와 서클은 본디 인위적으로 생성해야 하는 동력원이었지만, 아주 드물게도 선천적으로 서클을 타고나는 천재도 있었다.

허나 레이는 루나가 그러한 '천재'에 속한 존재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서클은 심장을 중심으로 도는 마나의 고리다.

심장을 중심으로 도는, 두 주먹을 합친 만한 반경의 고리다.

허나 반쯤 개안된 레이의 눈에 비친, 루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흐릿한 빛 무리는.

반경이 3 m가 넘었다.

쾅!

담벼락을 짓밟은 레이가 마나를 폭발시키다시피 해 몸을 쏘아냈다.

루나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마나의 고리에 마법적인 술식이 새겨지기 시작한다.

루나는 마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때문에 지금의 과정은 온전히 알레시아 행했던 작업의 모방이었다.

같은 마법이라도 그릇의 크기가 달랐다.

같은 마법이어도 고작 모닥불을 만들어낸 불꽃이, 하늘을 뒤덮는 화염이 될 수 있었다.

물론 루나는, 그조차도 천부적인 감각으로 연산해내어 원하는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관심 없었다.

레이는 마법의 발현 자체를 반드시 저지할 생각이었다.

찰나 간에 레이의 검신에 푸른 빛이 번쩍였다.

수식이 새겨진 서클의 일각을 검으로 겨눈 레이가 루나의 지근거리에 떨어져 내렸다.

츠즉-!

공간을 변질시키는 검기의 접촉에 마법적인 수식이 타격을 입는다.

레이가 지면에 다리를 박아넣음과 동시에 흐트러진 마법이 역류하며 거대한 돌풍을 사방으로 뿜어냈다.

콰앙! 화아아아아악!!

*

알레시아가 보여준 마법의 신비에 푹 빠진 아이들은 루나가 모닥불에 접근하든 말든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허나 피부로 느껴지는 열기가 점점 강해지고, 얌전했던 모닥불이 괴이한 방향으로 뒤틀리기 시작하자 환호를 멈춘 채 시선을 하나로 모으기 시작했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붉은색이 번진다.

그 순간 번쩍이는 낙뢰가 모닥불과 루나의 사이에 떨어졌다.

콰앙! 화아아아아악!!

"우와악?!"

갑작스레 돌풍이 불어 닥치자 몸을 지탱하지 못한 아이들이 허우적거리며 바닥을 굴렀다.

한참이 지나 돌풍이 그치고 나서야 아이들은 운동장의 한가운데 낙뢰처럼 떨어져 내렸던 레이를 제대로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잠깐의 침묵 후.

아이들의 환호성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

아이들의 감상은 간단했다. 개쩐다!

뭔가 번쩍거리기도 했고 열풍도 휘몰아쳤고 아무튼 개쩔었다.

보육원의 리더 격인 레이가 귀족의 마법보다 대단한 무언가를 보여주자 아이들은 가슴이 격하게 뛰는 걸 느끼며 방방 뛰어댔다.

뿌듯하게 느껴질 법도 한 광경이었지만, 레이는 무표정하게 오른 주먹을 들어 올렸다.

"다들 조용."

"..."

마나가 실린 목소리에 아이들이 삽시간에 입을 다물었다.

갈려나간 무릎 관절을 붙잡은 레이가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

"귀한 손님께서 보육원에 들를 수도 있으니, 전부 세안 마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대기하고 있어."

"레이, 혹시 귀한 손님이 아ㅃ...!"

"개인적인 질문은 나중에. 다들 알아들었으면 실시."

"실시!!"

뭔지는 모르겠지만 개쩌는 장면을 본 아이들이 군기가 바짝 들어 보육원 안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레이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오, 뒤질 뻔했네."

정말 간발의 차였다.

하마터면 불타오르기 시작한 화염 속에 몸을 던져 숯덩이가 될 뻔했다.

숨을 몰아쉰 레이가 남은 아이들을 바라봤다.

"알레시아, 카렌, 루나. 아침부터 왜 불장난이야?"

"그게 말이다, 레이!"

알레시아가 나서서 카렌이 자꾸만 시비를 걸어왔다는 사실과 자신이 얼마나 많이 인내하였는가에 대해서 미주알고주알 떠들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잘 들으세요."

"...응?"

갑자기 변한 호칭에 알레시아가 당황했다.

"왜, 왜 그러느냐?"

"카렌은 아가씨를 위해 자기 역할을 다했을 뿐이에요."

"어, 어째서 저 천민의 편을 드는 것이냐? 저 천민은 귀족인 나를 모욕했다."

"카렌은 귀족을 모욕하지 않았어요. 이 보육원을 나설 때까지 아가씨는 귀족이 아니라 평민의 신분이시니까요."

"나는 평민이 아닌 귀족이다!"

"아가씨, 이건 백작가와 합의된 사안이라고 몇 번을 말씀드렸잖아요."

귀족 영애가 보육원에 있다는 소식이 퍼져봤자 좋을 것 하나 없다.

때문에 백작가 사용인의 동의 아래 가짜 평민 신분을 알레시아에게 부여한 거다.

"아가씨께서 떼를 쓰는 바람에 이도 저도 아니게 됐지만... 어쨌든, 아가씨가 평민처럼 행동하길 바라고, 제가 아가씨를 평민처럼 대한 것은 아가씨를 위험에서 지키기 위해서였어요. 이해하시죠?"

"이해는 한다만..."

"자 아가씨,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저희가 아가씨를 평민처럼 대하려고 했던 이유가 뭐라고요?"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렇죠. 꿀밤을 때리거나 뒤통수를 후리거나 시비를 걸거나 무시를 한 것도 전부, 아가씨를 평민처럼 대하려는 과정의 일환이었습니다."

"그, 그런 거냐?"

"그러니 카렌의 모든 행동도 그저 아가씨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겁니다."

"나를... 지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에 정신을 못 차리던 알레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빽 소리쳤다.

"레이! 날 또 속이려고 하는구나!"

"루시아가 쓴 책은 그리 철석같이 믿으면서 절 상대할 땐 왜 그리 의심이 많아요?"

"네가 나를 한두 번 속이느냐!"

"알레시아."

알레시아가 휘둘러오는 주먹을 몸으로 맞아준 레이가 고개를 숙였다.

"마음 상한 거 있으면 대신 사과할게요. 오해가 있었을 뿐이니까 마음 깊이 담아두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주먹질을 멈춘 알레시아가 팔짱을 낀 채 장담했다.

"레이! 날 뭘로 보고! 걱정 마라. 나는 어떤 천민처럼 그렇게 마음이 옹졸하지 않으니 말이다! 보육원에서 있었던 일은 담아두지 않도록 하겠다!"

가볍게 웃음을 터뜨린 레이가 카렌을 돌아보았다.

카렌은 여전히 붉어진 눈으로 말없이 레이의 발밑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을 달싹인 레이가 본래 하려던 말을 삼키고 입꼬리를 올렸다.

"카렌, 너도 들어가서 얼굴 좀 닦고 쉬고 있어."

카렌이 이번에 좀 겁 없고 철없는 행동을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제대로 케어 못한 레이의 잘못이 컸다.

당장 화를 내기보단 삐친 것도 해소할겸 날을 잡고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레이는, 급격히 심각해진 얼굴로 루나를 마주봤다.

"루나."

"..."

루나를 껴안다시피 거리를 좁힌 레이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다시는, 다시는 함부로, '그걸' 쓰려고 하지 마. 내 허락이 있기 전까지는, 결코. 약속해, 루나."

"...미안해요. 안 할게요."

"자세한 건 다음에 이야기하자. 너도 들어가 있어."

카렌과 루나까지 들여보내고 나자 알레시아와 둘만 남게 되었다.

레이가 곧장 얼굴에 붙어있던 붕대를 거칠게 뜯었다.

얼굴을 반으로 가로지르는 상처에서 피딱지가 떨어지며 멈추었던 진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알레시아가 기겁하며 외쳤다.

"레, 레이! 뭐 하는 짓이냐!"

"곧 필립스 백작님께서 이 근처로 오신답니다."

"그건 기쁜 소식이다만 네가 붕대를 떼어낸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협상 전 약간의 쇼맨십 같은 거죠."

느그 딸내미 구하려다 이렇게 얼굴에 기스 났다, 뭐 그런 생색 내기였다.

*

필립스 백작은 백 명이 넘는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무릎과 고개를 숙이는 광경을 원치 않았으므로, 보육원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 마차를 세우고 알레시아와 레이를 불러냈다.

기사와 함께 보육원에 들어선 지미가 레이와 눈을 마주쳤다.

서로에게 입 모양으로 일 처리 똑바로 안 하냐고 욕한 둘은 겉으론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알레시아에게 무릎 한쪽을 꿇은 기사가 말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아가씨.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머지 않은 거리에 마차 두 대가 세워져 있었다.

"아빠아아!!"

기운 차게 백작에게 달려가던 알레시아가 얼마 못 가 속도를 줄이더니 결국 고개를 푹 숙인 채 제자리에서 꾸물거렸다.

백작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차 안으로 들어가 있거라."

사고를 거하게 쳤다는 걸 그제야 제대로 자각한 알레시아가 기가 죽은 채로 작은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백작과 거리를 좁힌 레이는 검을 멀리 내려놓고 무릎 하나를 낮게 꿇으려 했으나 백작이 손을 휘저으며 말렸다.

"됐네. 신세를 정말 크게 졌군, 레이. 얼굴에 그건 알레시아를 구할 때 생긴 상처인가?"

"별거 아닙니다."

"생색내려고 붕대까지 풀어 헤치고 내 앞에 와놓고는 겸양이 지나치군."

레이와 백작이 동시에 웃음을 흘렸다.

둘의 나이와 신분을 생각하면 굉장히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둘은 사이가 꽤 좋았다.

인사를 마친 레이가 기이한 감각을 느끼고 눈을 돌렸다.

웬 로브 차림의 남자가 마차 옆에 가만히 서서 하늘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레이는 실례임을 알고서도 대놓고 물었다.

"저분이 누구 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 소개하마. 다비드님이시다."

다비드라 불린 남자가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통보했다.

"잠시,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다녀오시죠."

일방적인 통보가 거슬리는 듯했으나, 백작은 최대한 싫은 기색을 내비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다비드가 사라지고 나서야 눈가를 슬쩍 좁힌 백작이 설명을 덧붙였다.

"조금 제멋대로이긴 하나, 저래 봬도 6서클에 닿은 대단한 마법사다."

6서클.

본격적으로 고위 마법사로 분류되는 경지였다.

레이가 하늘을 바라봤다. 기사보다 외부의 마나에 민감한 마법사는 5서클에 이르렀을 때 진즉 개안을 끝낸다.

개안이 완벽히 끝난 눈으로 본 지금의 하늘은 과연 무슨 색일까.

하늘에 아직, 휘몰아치던 마나의 잔향이 남아있을까?

레이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너라면 눈치챘겠지만, 알레시아의 마법 수업을 잠시 맡아주고 계신다."

"아가씨께서 좋은 스승님을 두셨군요."

"피차 길게 예의를 지키는 건 좋아하지 않으니 마차에서 단둘이 대화를 하지 않겠느냐? 네 공을 마음껏 치하하기엔 보는 눈이 조금 많구나."

레이 또한 바라던 바였으나, 여전히 하늘이 거슬렸다.

잠시 양해를 구한 레이가 지미와 매튜에게 부탁했다.

"지미, 매튜. 저 없는 사이 보육원에 좀 가 있어줄래요? 왠지 조금 불안하네요."

난데 없는 부탁이었으나 지미와 매튜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둘에게 감사를 표한 레이가 백작이 타고 온 커다란 마차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텅!

마차의 문이 닫혔다.

마법사 (2)

18화

견고하게 설계된 마차는 문을 닫은 것만으로 외부의 소음을 대부분 차단해 주었다.

자리를 찾아 앉은 레이가 머리를 쓸어올리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백작과 독대를 하게 된 것치고 꽤 담대한 행동이었지만 백작은 타박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알레시아는 잘 지냈는가?"

"불쾌하게 받아들이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생각보다 애들이랑 잘 어울리더군요."

"그건 아쉽군. 벌이 되길 바랐는데."

말을 이용한다면 보육원과 백작가까지 하루에 2번 왕복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백작은 알레시아의 무사만 확인한 후 곧장 알레시아를 데려가지 않았다.

알레시아의 일탈 한 번에 근 하루 동안 백작령의 모든 업무가 마비되고 병력 운용에 상당한 부하가 걸렸다.

지미 패밀리와 용병에게 지출해야 할 금전 또한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알레시아의 빠른 복귀를 위해 마차를 대동한 호위 병력을 곧장 편성하길 백작은 원치 않았다.

거기에 더해 약간의 징벌적인 의미를 담아 하루를 보육원에서 보내게 한건데, 이 때문에 고생한 건 알레시아가 아닌 보육원 사람들이 되었다.

"산속에서 이불 깔고 자려 했던 아가씨가 보육원에서 하루 지낸다고 어디 벌이 되겠습니까. 오히려 즐거워하더군요. 다음엔 그냥 방에 며칠 가둬두십시오."

"그래야겠어. 심심한 걸 못 참는 아이니."

알레시아가 들었다면 기겁할 이야기를 마친 백작은 가감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원하는 걸 말해보게."

레이는 조금 전 보았던 마법사의 눈빛을 떠올렸다. 섬뜩한 탐욕.

그것이 과연 긍정적인 신호인가?

스스로의 안이함을 자각하며 콧잔등을 꾹꾹 누른 레이가 생각해놨던 보상안을 꺼냈다.

"기사를 동경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나 또한 이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기사를 동경하네."

"재능이 뛰어난 아이도 몇 있습니다."

"본론을, 말하게."

"기사를 파견해 아이들에게 기초적인 마나 연공법과 검술을 배울 기회를 제공해 주십시오."

"들어주기 힘든 부탁이군."

레이가 표정 변화 없이 눈을 깜박였다.

백작이 미미한 웃음을 입가에 그린 채 이야기를 계속했다.

"차라리 자네의 성장에만 집중하는 게 어떤가? 비록 영세하긴 했으나, 필립스 가는 한때 제국의 기둥 중 하나라 불리었던 가문이야. 필립스 가에 전해 내려오는 무술과 관련된 자료 전부를, 자네가 열람할 수 있게 해주겠네."

"..."

기초적인 마나연공법과 검술은 제아무리 대단한 가문의 것이라도 그 수준과 형식이 비슷하다.

어디까지나 기초니까.

보육원 아이들 중 마나 연공법을 제대로 익힐 수 있는 건 소수일 테고,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쯤이야 백작에게도 크게 부담될 사안이 아니었다.

반면에 레이에게 필립스 가문의 비전 전부를 제공하는 것은 훨씬 더 중대하고 민감한 사안이었다.

그럼에도 백작은, 레이에게 후자를 선택하길 권했다.

레이가 머리를 짚었다.

'일이 이렇게 될 것 같더라니.'

"백작님, 보육원의 아이들은 백작님께 은혜를 느끼고, 백작님께 충성합니다."

"날 바보로 만들지 말게, 레이."

백작이 벽 너머에 있을 보육원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아이들이 식사하기 전에 나의 성과 작위를 외우며 은혜를 입에 담는 이유가 무엇인가? 교단과 영지민과 지미의 패밀리에게 감사를 표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

"자네가 그리 시켰기 때문이지."

"백작님."

"저들이 성장하면 과연 나의 병사들을 이끌까? 아니야. 저들은 자네의 군단을 이끌 거야. 그 무엇보다 충성스러운 검이 되어서."

"저는 그런 걸 바라지도 않고, 그렇게 될 일도 없을 겁니다."

"차라리."

백작이 숨겨두었던 본론을 꺼냈다.

"알레시아와 연을 맺게."

"끙."

레이가 대놓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레이도 예상을 했지만, 역시나 백작은 레이라는 존재를 자신의 품 안에 묶어두고 싶어했다.

때문에 레이가 세력을 이루고 독립할 저변이 될 수 있는 보육원 아이들의 성장을 껄끄러워 한 것이다.

"나의 성을 이어주게. 그럼 자네에게 가문의 모든 것을 지원토록 하지. 보육원 아이들에게 또한 연공법과 검술을 비롯해 많은 지원을 베풀도록 하겠네."

제법 합리적으로 들리는 이야기였다.

백작의 욕심이 많이 들어가긴 했으나, 레이에게도 나쁜 제안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레이는 자신이 귀족을 상대하고 있다는 긴장을 고의로 느슨하게 풀었다.

그래야 지금부터의 설득이 통할 것이다.

"제가 알레시아와 짝짜꿍 연을 맺는다 쳐봅시다. 아가씨가 다시 가출할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요."

"...?"

묘하게 시건방져진 레이의 말투를 느낀 백작이 고개를 갸웃했다.

"레이, 자네에게도 나쁜 제안이 아니야."

"그 연이란 것이 구두 약속은 아닐 겁니다. 공식적으로 제 이름을 제국 귀족 명부에 적혀있는 알레시아 옆에 올리겠다는 의미겠죠."

"...그렇다."

"백작가가 천민을 데릴사위로 들인다는 소식이 펴지면 저어기 황궁에 계신 황제 폐하도 어전회의를 하다말고 옥좌를 쾅 치고 일어나서 '어어 필립스 걔 노망난 거 아니냐?'고 외치실 겁니다."

노망?

레이의 단어 선택에 강한 혼란을 느낀 백작이 얼른 정신을 수습하고 답했다.

"그 부분은 걱정할 필요 없네. 자네 신분을 새롭게 만들 방법은 충분히 존재하..."

"백작님 슬하에 자식이 여러 명이었다면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현시점에서 알레시아가 백작님의 유일한 후계라는 겁니다. 아무리 관심이 떨어지는 변방 영지라도 백작가가 유일한 후계자의 데릴사위를 들인다고 하면 다들 조사 한 번씩은 해볼 겁니다."

틀린 말이 아니기에 백작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리고 저는 백작령에서... 불행히도 굉장히 유명한 존재지요. 제가 천민인 게 드러나면 황제 폐하는 다시 옥좌를 치고 일어나시며 '역시 필립스 걔 노망난 게 맞다니까!'라고 외치실겁니다. 그래서 조사 인력을 파견했는데, 생각보다 백작님이 멀쩡하시더랍니다."

그 이후에 벌어질 일은 뻔하다.

맨정신으로 나이도 어린 천민을 데릴사위로 들여? 그럼 그 천민이란 놈의 능력이 어마무시하겠군!

다들 이런 생각을 하며 백작령에 사람을 보내 집요한 조사를 시작할 것이다.

레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은 백작이 자세를 바로 하고 장담했다.

"레이, 나는 자네를 지킬 것이다."

"모든 귀족이 백작님처럼 관대하고 이성적이진 않을 겁니다. 처음엔 절 회유도 해보겠지만, 하다 안 되면 어찌 행동할까요?"

필립스 백작의 손에 소드 마스터라는 전력이 들어오는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까?

"저는 '가질 수 없으면 부숴버리겠어'라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제가 누구보다 어린 나이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인재라는 것이 간파된다면."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타국에서는 기회가 되는대로 저를 죽이려고 할 겁니다. 위험한 선택이지만 저는 제대로 된 배경이 없으니까요. 저 하나 은밀히 쓱싹해도 출신이 천하니 제국 또한 분노를 드러내기 힘들 겁니다."

어디까지나 일이 더럽게 꼬였을 때의 가정이었다.

허나 레이의 존재가 워낙 강렬했기에, 여러 세력이 뒤섞여 투닥거리기 시작하면 일이 더럽게 안 풀릴 가능성이 굉장히 높았다.

물론 이러한 사태를 피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백작님이 노망난 척하면 해결될 문제이긴 합니다. 노망날 연세가 아니시긴 합니다만, 말에서 한 번 떨어졌다고 합시다."

"..."

"일단 두 달 정도 벽에 똥칠 좀 하시면서 소문이 퍼지길 기다리시죠. 알레시아와 제가 연을 맺은 이후에도 식사도 좀 흘리며 드시고 벽에 계속 똥칠을 하셔야 합니다. 멀쩡하다는 사실을 제가 아닌 누구에게도 들키면 안 됩니다."

언제까지?

"제가 마스터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과연 얼마나 걸릴까?

백작은 레이의 재능을 감안해 넉넉잡아 20년 정도의 기간이 걸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 사이에 노망난 백작의 살을 뜯어 먹겠다고 도둑놈들이 주변을 뱅뱅 돌겠지.

제국 전역의 견제보다는 낫다만 그 길도 결코 편한 길은 아니었다.

"어떻게, 노망난 연기 좀 하시렵니까? 그럼 오늘 당장 낙마부터 하시..."

"레이, 레이, 레이!"

쾅!

의자를 내려친 백작이 이마를 붙잡은 채 긴 한숨을 쉬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는 듣겠네. 다만, 어휘를 좀 순화해서 표현하면 안 되겠는가?"

"제가 실성하거나 백작님을 모욕하고 싶어 이러는 건 아닙니다."

그럼 뭔데?

백작이 굉장히 아니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레이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다시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할 때다.

"저는 백작님이 정말 현명하신 분이라 생각합니다. 허나 제 재능은 백작님과 같이 현명한 분의 눈도 잠시 멀게할 만큼 과하게 반짝이지요. 백작님이 다시 눈을 뜨시고 지혜를 되찾길 바랐기에, 조금 과격한 어휘를 택했습니다. 일종의 충격요법이지요."

"..."

한동안 말이 없던 백작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네가 알레시아보다 한 살 어리다고."

"...그렇긴 하죠?"

"혹시 내 딸이 바보인가?"

"제가 잘난 겁니다."

"제발 다른 귀족 앞에서는 입 간수 좀 잘하게. 내가 아니었으면 말을 하다 말고 목이 잘려나갔을거야."

"백작님의 자비에는 항상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내가 자네를 완전히 품고자 하는 게 과한 욕심인가?"

레이가 턱을 긁적였다.

"굳이 품으려고 하지 않으셔도, 저는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셔도 되리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백작이 품에서 검을 뽑아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증명이나 해보게."

레이가 어렵지 않게 검기를 생성했다.

백작은 생각했다. 직접 보니 생각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광경이라고.

"괜히 짜증이 나는군."

"물론 백작님이 어제 잠자리에 드셨을 때 이불을 퍽퍽 차면서 '큭큭, 내 사위가 소드 마스터라고?'를 외치면서 흥분하셨을 거라는 건 알고 있습니..."

"레이! 레이!"

얼굴이 시뻘게진 백작이 외쳤다.

"정신 차렸으니 그만 입 간수 좀 똑바로 하게!"

"죄송합니다."

"디디에 경을 보육원으로 파견해주겠네. 오랜 시간 나를 보필해준 기사 가문의 적통한 후계자이자 모하메드 경의 아들 되는 자일세."

백작으로선 가장 믿음직한 기사 중 한 명을 파견해주는 셈이었다.

"기사도를 중시하며 아주 성실한 사내지. 천민들이라고 일방적으로 무시하진 않을 걸세. 자네 또한 이 기회에 제대로 된 연공법과 검술을 경험해 보게. 더 필요한 게 생기면 이후 다시 연락하게. 웬만하면 지원해주지."

"감사합니다."

"정말 진이 다 빠지는군."

가만히 자리에 앉아 흥분을 진정시킨 백작이 다시 레이를 마주 봤다.

얼굴 절반을 가로지르는 상흔이 아주 잘 눈에 들어왔다.

"그거 효과가 좀 있군."

"네?"

"패용하고 다니는 검이 꽤 낡았더군. 내 검을 가져가게. 가문의 문양이 박혀 있으니 필요하면 써먹고 보고하게. 알레시아를 구해주어서 정말 고맙네. 이건 진심이야."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리고 편지에 적힌 내용을 보니 마법에 재능을 보이는 아이를 발견한 모양이던데."

레이가 표정을 굳혔다.

아직 레이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루나의 재능이 지나치게 뛰어났다.

그건 레어나 유니크와 같이 묶기에는 아예 궤를 달리하는 재능이었다.

본래라면 레전더리 떴다고 환호성을 지르며 엉덩이춤을 췄겠지만 여전히 마법사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하나 조언하지. 마법사는 위험한 존재야."

"...?"

"편협한 이야기라는 것은 아네만, 마법사는 대개 본인의 마도를 극도로 우선하네. 인간성과 사회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자들이 태반이지."

"..."

"그들이 재능있는 자를 찾았다고 흡족해하며 자신의 제자로 받아줄 것 같은가? 상대가 귀족의 자제라면 그럴 수도 있지. 허나 상대가 배경 없는 천민이라면, 마법사 대부분은 다른 선택을 할 걸세."

"..."

"납치하든 말로 홀리든 곁으로 데려와 본인의 마도를 발전시키기 위해 끔찍한 희생을 강요할 거야."

레이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가는 걸 보며 백작은 조언을 마쳤다.

"마법사를 상대하려거든 조심하게. 오늘은 양해를 구하고 다비드와 동행했지만, 나는 다비드에게 보육원의 아이들을 살펴달라 강제할 수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네. 그는 아주 '전형적인' 마법사거든. 다른 마법사들 또한 난 그리 신뢰하지 않네."

"잠시만요."

레이는 머리를 망치로 크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다비드의 움직임을 백작님이 제어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마법사가 정신병자 집단이란 정보보다 이게 더 충격적이었다.

백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나는 수평한 계약 관계네. 격식에 맞는 사과와 충분한 금전을 지불하면 언제든 깨질 수 있는 관계지. 알레시아의 교육에 관한 문제를 제외하곤 무언가를 강제할 수는 없네. 다른 마법사도 마찬가지야. 계약서 밖의 내용은 간섭할 수 없지. 그들은 기사와 달라."

"..."

레이는 눈앞이 아찔해짐을 느꼈다.

'잘못 생각했다. 완전히 잘못 생각했어.'

레이는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자신의 실력을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다.

허나 백작가의 기사에게 엑스퍼트라는 경지를 들킨다고 해도 당장은 무마 가능했다.

기사는 백작에게 충성하기에, 백작이 함구를 원한다면 기사 또한 주인의 의지를 따를 터였다.

레이는 여기서 실수했다. 기사와 마법사를 멋대로 겹쳐봤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설령 경천동지할 마법적 재능을 보육원의 누군가가 타고 났고, 그걸 마법사에게 들킨다 해도.

지금처럼 백작만 잘 구슬리면 뒤처리가 가능하리라 오판했다.

'백작의 권위가... 마탑 출신의 마법사에게도 통하리라 생각했지.'

즉흥적으로 마법사의 초대를 부탁한 후 굳이 부탁을 정정하지 않은 건 그런 안이한 판단 탓도 있었다.

돌이켜 보니 너무 멍청하고 성급한 사고였다.

루나의 등급을 잘못 측정했고.

마법사가 정신병자 집단이며.

그들의 행동을 강제할 수단마저 부족한데다.

상대가 하필 알레시아의 교육을 위해 특별히 초청된 고위 마법사라면.

'루나가 많이 위험하다.'

미간을 누른 레이가 속마음을 내색 않고 입 꼬리를 올렸다.

"...조언 감사드립니다."

"혹시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없습니다."

"그럼 이만 나가보게. 이른 시일 내에 디디에 경을 파견토록 하겠네."

레이가 허리를 깊게 숙인 후 마차에서 내렸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백작이 허공을 보고 중얼거렸다.

"욕심. 욕심이라. 욕심에 잠시 눈이 멀었던 건가."

제 혼자 끌끌 웃은 백작이 고개를 한 번 저었다.

"정말 난 놈이군. 억지로 품었다간 확실히 체하겠어."

*

다비드는 누군가가 줄줄 흘리고 다닌 마나의 흔적을 뒤쫓았다.

흔적이 전혀 정제되지 않았다는 것이 도리어 기꺼웠다.

마법을 따로 배운 적이 없으면서도 이 정도의 마나 잔향을 대기에 남길 정도의 재능이라.

부동심을 중히 여기는 다비드의 입꼬리가 거칠게 뒤틀렸다.

마나의 흔적 끝에 푸른 머리칼의 소녀가 언뜻 보였다.

방 안으로 사라지는 소녀를 쫓아 발을 옮기려던 순간 칼이 뽑혀나오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여기는 외부인 출입이 불가능한 공간입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다비드가 지미를 마주봤다.

"천한 용병이 상황 파악이 안 되는가?"

"충분히 하고 있습니다. 제 보육원에 허가받지 않은 외부인이 돌아다니고 있군요."

다비드의 손아귀가 로브 밖으로 빠져나왔다.

서클에서 발산된 마나가 사방으로 번지며 돌풍을 일으켰다.

"쥐새끼 같은 용병답게, 목숨을 부지하고 싶으면 조용히 꺼지도록."

"용병이란."

지미가 검기를 생성하며 웃었다.

"계약과 그에 따른 의무를 중시하는 직업입니다."

동족혐오 (1)

19화

검객과 마법사의 대결은 언제나 흥미로운 소재거리다.

다만 전투를 조금이라도 아는 자들은 암습과 같은 특수한 전제를 깔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전장에서 마법사가 전술적 우위를 지닌다고 말한다.

옳은 이야기다.

특히 6서클 이상의 고위 마법사가 상대라면 엑스퍼트 급 무인이 분대 단위로 달려들어도 승기를 잡기가 쉽지 않다.

적어도 엑스퍼트를 넘어선 그래듀에이트 급 무인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나, 이 또한 최소 조건에 가까웠다.

그러니 지미가 정면에서 다비드와 대치한 건 자살 행위에 가까웠다.

다비드는 잠시 잠깐 지미를 죽여버리겠다는 충동에 휩싸였으나 곧바로 부동심을 되찾았다.

다비드는 적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위치는? 천장 너머. 지붕 위.

반쪽짜리 엑스퍼트 둘을 죽이는 건 너무도 수월한 일이다.

허나 저들은 잔뼈가 굵은 용병. 작정하고 발악하면, 조용히 제압하기 힘들다.

근방에 백작까지 행차한 시점에서 전투의 소음이 외부로 새나가면 대단히 곤란했다.

용병 둘을 죽인 것이야 무마할 수 있겠지만, 만약에 일이 커지면 소식을 들은 다른 마법사들이 의아해 할 것이다.

그건 정말 곤란하다.

'저것'은 결코 타인에게 뺏길 수는 없다. 반드시 독차지해야 한다.

하루 이틀 차이로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아직 아무도 '저것'이 지니는 가치를 눈치채지 못했으니. 부동심을 지니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야 했다.

다비드의 손아귀가 다시 로브의 그림자에 숨었다.

저벅 저벅

다비드가 걷기 시작했다.

지미는 여전히 검기를 생성한 채 두 다리 가득 힘을 주고 있었다.

다비드는 계속 걸어, 마침내 지미 곁에 섰다.

"..."

다비드는 그대로 지미를 지나쳤다.

지미의 콧잔등에 식은땀이 맺혔다가 떨어졌다.

극도의 긴장을 유지한 채 한참을 서 있던 지미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갔어, 대장."

"후우우우우우."

축축히 젖은 머리를 올려 넘긴 지미가 벽에 등을 기댄 채 물었다.

"나간 거 맞아?"

"보육원을 나가는 걸 확인했어."

"빌어먹을, 압박감만 보면 분명 고위 마법사였어!"

"백작가 측 인물 같던데, 고위 마법사라면 아가씨의 교육을 위해 초청된 다비드야."

"그 개 같은 새끼는 갑자기 왜 보육원에 쳐들어와서 지랄이야!"

지미가 벽을 후려쳤다.

용병질하며 비대해진 간덩이 덕분에 그럴듯하게 가오는 잡았지만 이번엔 정말 죽을 뻔했다.

기실 용병 시절에도 고위 마법사를 정면에서 대적한 적은 없었다. 그랬으면 진작 뒤졌겠지.

"둘 다 괜찮아요?"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아이의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레이가 복도에 서 있었다.

"혹시 무슨 일 있었나요?"

"아주 좆같은 일이 있었지. 백작가 마법사가 실성했는지 여길 기어들어..."

지미가 말을 하다말고 눈가를 좁혔다.

"너 이 새끼 설마 이럴 줄 알고 우릴 보낸 거냐?"

"...마주칠 수 있겠다고 생각은 했죠?"

지미가 방긋 웃었다.

"야 이 개새끼야!!!"

이번 건은 레이도 할 말이 없었다.

얌전히 멱살을 잡힌 레이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이어지는 지미의 욕설을 들었다.

"크아아악!! 너 이 새끼, 사실 날 치우고 네가 대가리 해먹으려는 거지?!"

"제가 왜 바지사장을 치우고 싶어 하겠어요."

"이 미친놈아 내가 왜 바지사장이야!!"

고막이 아파올 때까지 욕설을 이어간 지미는 한참이 지나 레이를 내려놓고 따져 물었다.

"그래서 그 마법사 놈은 여길 왜 기어들어온 거냐?"

"...잘 모르겠네요. 보육원으로 향하는 것 같기에 믿을 사람이 지미와 매튜 밖에 없어서 부탁했어요."

"아무리 그래도 언질도 없이 우릴 사지로 밀어넣어!!"

"무사할 줄 알았어요, 지미."

진심이었다.

마법사가 루나의 존재를 눈치 챈 뒤 수작을 부리려 했더라도 '전투'가 성립하는 상대가 보육원에 있다면 일단은 물러나리라 예측했다. 백작이 근방에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경고 없이 위험한 부탁을 한 게 사실이라 레이는 솔직히 사과했다.

"미안해요. 아이들을 지켜줘서 고맙고요."

"하아, 됐어. 이 얘긴 집어치우자. 지금도 간 떨려 죽겠으니까."

자리에 주저앉은 지미가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가슴을 진정시킨 지미는 요 며칠간 계속 궁금했던 문제를 꺼냈다.

"너 편지는 왜 그따위로 써서 보낸 거냐?"

"사정이 있긴 한데."

작게 웃은 레이가 말을 이었다.

"하루 종일 산 뒤지다가, 와일드호그 잡아 죽이고, 찡찡대는 알레시아 업은 채 날밤 까며 산에서 내려오니까 도저히 정신을 못 차리겠더라고요."

뭐라 한 마디 하려했던 지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미 또한 용병질하며 극한 상황에 자주 처했다. 사람이 잠을 못 자고 체력 떨어지면 판단력 흐려지는 걸 넘어 헛소리를 하기 시작한다.

그중 얌전히 엄마 찾는 새끼들은 양반이었다.

"이해는 되네."

"그러는 지미야 말로 백작님께 나 검기 쓸 줄 안다고 아주 못을 박아 놨던데요."

"얌마, 아가씨가 사라졌다 해서 백작님 대동하고 시그니 산맥 수색하는데 와일드호그가 난도질이 되어 뒤져 있는 거야."

침을 한 번 삼킨 지미가 자기 배때기를 가리켰다.

"근데 어떤 멍청한 놈이 세상 허접하게 검기에 베인 흔적을 덮어놨어. 그래서 비장하게 '백작님, 검기를 숨긴 흔적을 보니 아가씨께서 납치되었을 수도 있겠습니다.'라고 보고하니까 하늘에서 브릿지가 날아오더라."

"하하하!"

상황이 그려진 레이가 웃음을 터뜨리자 지미와 매튜도 따라 웃었다.

한참을 웃던 지미가 레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여튼 고맙다. 나는 이번 일 끝나면 목 간수하기 힘들 줄 알았다. 네 덕분엔 한시름 덜었어. 아가씨가 와일드호그에 갈기갈기 찢기기라도 했다면, 아우, 상상도 하기 싫네. 근데 백작님께 보상으로 뭘 달라고 했냐? 어지간한 건 다 챙겨주실 텐데."

"기사를 파견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기, 기사? 그걸 들어주셨냐?"

"흔쾌히 들어주시던데요. 보육원의 '아이들'에게 기초적인 마나 연공법과 검술을 배울 기회를 베풀어 주시겠다 약속하셨죠."

지미와 매튜의 눈빛이 변했다.

"...마나 연공법?"

"...검술? 기사들이 쓰는?"

"네. 비록 기초지만, 제대로 된 기사들이 쓰는 마나 연공법과 검술을..."

"오오오오오오..."

"오오오오오옥..."

"마나 정제법은 기초가 끝나면 부탁드려볼 생각..."

"마, 마나 정제법!"

"오오오오오옥...!"

지미와 매튜의 반응이 영 이상하자 이번엔 레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대체 왜 그래요?"

"그, 레이, 있잖냐."

거리를 좁힌 지미가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되물었다.

"보육원의 '아이들'에, 우리도 포함이 되냐?"

이 인간이 마법사 상대하다 대가리가 깨졌나?

레이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지미를 보다 이내 이해한다는 듯 표정을 풀었다.

용병질을 하며 싸구려 마나 기술을 익혀서 엑스퍼트 흉내를 내게 된 둘이다.

재능이 충분하나 개화하지 못했으니, 제대로 된 배움에 대한 갈망이 상당할 것이다.

지금와서 체계화된 마나 연공법과 검술을 배워봤자 대성하긴 힘들겠지만, 그거야 지미와 매튜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뭐어, 일단 부탁은 드려 볼게요."

"으히히히히히힣!!"

"으하하하하하항!!"

지미와 매튜가 서로를 마주보고 기괴한 웃음을 토했다.

착잡한 시선으로 둘을 지켜보던 레이는, 입에 맴돌던 질문을 결국 털어놨다.

"지미, 궁금한 게 있어요."

"왜?"

"패밀리 전력을 전부 동원하면 6서클 마법사를 죽일 수 있을까요?"

예상치 못한 레이의 질문에 방금까지 킬킬거리던 지미의 손이 흠칫 떨렸다.

침묵이 길어지자 옆에 있던 매튜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다. 고위마법사는 그래듀에이트 급 무인보다 더 까다로운 상대다. 술식 걸려있는 아티팩트만 여럿 달고 다닐 테고."

"저까지 전력에 포함한다면요?"

매튜가 레이의 눈을 바라봤다.

지금의 질문이 단순 호기심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존재하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너의 공간검은 미완성 상태다."

"그렇죠."

"마법사는 전투가 시작되면 결코 한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요격을 피하기 위해 계속해서 움직이지. 거기다 고위 마법사라면 검기를 발현할 만큼 마나가 집약되는 순간 무조건 눈치를 챌 거다."

"저는 지금 공간 도약의 딜레이를 조절하지 못하니까..."

"암습한다 해도 일이 꼬이면 허공만 벨 거다. 적중시킨다 해서 고위마법사가 단칼에 죽어줄지 의문이고, 첫 공격에 못 끝내면 못 이긴다."

"얌마, 죽일 수 있다 쳐도."

지미가 끼어들었다.

"뒷감당이 안 돼. 마법사 놈들 한두 달 연락 끊기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만, 그 이상 실종이 길어지면 소속된 마탑에서 나설 거야. 아무리 백작님이라도 마법사 일에 우리 편은 안 들어 줄거고, 걸리면 다 죽는 거야."

레이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죽이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고 죽였다간 뒷수습이 불가하다.

선택을 해야 했다. 누구를 살릴지.

보육원을 통째로 불태울 생각이 아니라면 당장에 남은 방법은...

내주는 거다. 마법사가 원하는걸.

'내줘?'

누구를? 루나를?

"큭큭..."

몇 년 동안 개 같이 가챠 돌려서 간신히 뽑아낸 레전더리 고아를 오늘 처음 본 마법사 새끼한테 내주자고?

그럴거면 지금까지 이 개고생을 왜 한 거지?

유니크와 레전더리가 나올 때마다, 그 고아를 탐내는 새끼가 나타날 때마다 족족 가져다 바쳐야 하나?

그 따위로 살 거면 이 짓은 시작도 안 했다.

어차피 모 아니면 도였고, 레이는 뒤지더라도 모가 나올 때가지 윷을 굴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과연 꼬맹이 하나 지키는데 목숨을 걸자는 주장에 동의해 줄까?

레이는 회의적이었다.

동의하는 새끼가 있다면 그 새끼가 미친놈이었다.

6서클 마법사와 적대하자는 건 단순히 목숨 한 번 걸어보자는 것과 궤를 달리했다.

계속해서 낄낄거리던 레이는 불현듯 웃음을 멈췄다.

"뭘 고민하고 있는 건지."

레이는 '자기 것'을 뺏길 생각이 결코 없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말이다.

*

"흑, 흐윽!"

마차 안에서 백작에게 혼이 난 알레시아가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닦았다.

딸아이가 우는 모습에 백작 또한 마음이 심란했으나 이번 일은 응석을 받아주고 대충 치워버릴 사안이 아니었다.

그래도 요 며칠 고생했을 딸아이를 생각하자 의지가 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어, 백작은 질책을 그만하고 알레시아를 타일렀다.

"그만 울거라. 잘못을 알았으면 되었다."

"흑! 네에..."

언제부터 알레시아가 이렇게 사고를 치기 시작했지?

과거에도 말괄량이긴 했으나 이리 대책 없이 가출을 하진 않았다.

갑작스레 말을 더 안 듣기 시작했던 시점이...

'신분을 가려가며 사람을 사귀라고 혼냈을 때군.'

백작이 혹시나 해서 입을 열었다.

"알레시아, 신분을 가려가며 사람을 사귀라고 충고한 것이 그리도 마음에 안 들었더냐?"

알레시아의 몸이 움찔 떨렸다.

백작은 골이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허나 체면 때문에 대놓고 관자놀이는 누르지 못한 채 대화를 계속했다.

"그들의 피가 천하다는 이유 하나로 교류를 막은 것은 아니다. 사람은 결국 환경에 물들게 되어 있다. 제대로 된 배움을 얻지 못한 자들은 무식하고, 천박하고, 무절제하고, 고집스러워지는 법이지."

"..."

"너는 그들을 이끌어야 하기에, 그들에게 물들어선 안 된다."

알레시아가 다리를 앞뒤로 휘휘 젓기 시작했다. 대놓고 툴툴대는 거다.

백작은 다시 한 번 관자놀이를 짓누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다만 레이 그 녀석은 다르더구나."

알레시아의 다리가 멈췄다.

"너의 또래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현명한 아이다. 또한 선하고, 충직하다."

알레시아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 게 느껴진다.

백작은 딸아이의 반응을 보며 여러모로 골치가 아팠다.

"그리 현명한 아이가 지도하는 보육원에서 거주하는 아이들이라면, 너와 어울리는 데 크게 부족함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 아이들과 교류하는 것은 막지 않겠다."

알레시아의 입술이 이리저리 실룩였다.

알레시아는 나름 티를 안 낸다고 노력했지만 백작 눈에는 그대로 보였다.

사실 저런 게 보여서 레이와 더욱 거리를 두라고 야단치긴 했다.

이제와서는 도리어 사이가 좀 좁아지길 기도해야 하게 생겼지만.

알레시아가 히죽거리며 물었다.

"아빠, 레이는 엄청 강했어요."

"그래. 뛰어난 자질을 타고났더구나."

"레이라면 기사가 될 수 있을까요?"

기사? 고작?

백작이 생각하기에, 지금이 난세였다면 레이는 제국 하나를 건국할만한 인재였다.

"충분히 될 수 있을 거다."

"으음... 으으음... 이히히..."

무슨 상상을 하기에 저렇게 기분 좋게 웃을까.

알아봤자 머리만 더 아플 것 같기에 백작은 물어보길 포기했다.

"근데 다비드 님은 아직인가?"

마차의 창문을 열자 마침 다비드가 마차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백작은 다비드가 마차에 타길 기다렸으나, 백작과 눈이 마주친 다비드는 제자리에 선 채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백작님, 한 달 동안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한 달.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기에 이번엔 백작 또한 불쾌감을 표했다.

"다비드님, 우리는 계약을 맺었습니다. 앞으로 3개월간은, 알레시아의 수업에 집중해 주셔야 합니다."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져, 당장 움직여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백작님과 계약을 충실히 이행하지 못한 점에 있어 복귀 후에 충분한 보상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비드는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였고, 결코 말의 무게가 가벼운 자가 아니었다.

사과도 들었고 보상 또한 약속했으니 더는 서로 감정 상할 필요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리하십시오."

"백작님의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한 번 더 고개를 숙인 다비드가 마차에서 멀어졌다.

백작은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마법사가 제멋대로 행동하는 건 늘상 있는 일이었으니.

동족혐오 (2)

20화

알레시아를 보내고 하루가 지났다.

편지를 매단 브릿지를 날려보낸 후 가만히 앉아 고민했다.

참 여러모로 상황이 개같이 꼬였지만 후회한다고 일이 해결되지는 않았다.

다비드는 루나를 원했다. 앞뒤 정황을 보았을 때 제자로 들이고 싶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6서클 고위 마법사 다비드로부터 루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가.

루나를 백작에게 의탁해서 다비드와 접촉을 막아달라 할까?

아주 잠시 동안 문제를 미룰 수는 있겠지만 그건 해답이 아니다.

백작가에도 다비드를 제외한 마법사는 있다.

그들은 기사처럼 백작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는다.

백작과 마법사는 단순 고용 관계에 가까웠다.

내가 잘 몰랐고 간과했던 부분이다. 허나 이제는 알았다.

다비드와 마찬가지로, 백작가 내의 마법사들에게 루나의 재능을 들키면 그놈들도 본색을 드러내고 수작을 부릴 거다.

더군다나 다비드는 당장은 루나를 독차지하길 원하겠지만 여의치 않으면 지분을 나누는 한이 있더라도 지원을 불러 루나를 손에 넣을 것이다.

루나에 관한 정보가 여기저기 돌기 시작하면 제국 전역 마탑이 숟가락을 쳐들고 대가리를 들이밀 테고.

천운으로 일이 잘 풀려 제정신 박힌 대마법사가 딱 등장해 루나를 보호하기 위해 나설 수야 있겠다만.

"하하."

조소가 터져 나올 만큼 허황된 가정이었다.

내가 알레시아와 연을 맺지 않겠다고 단호히 주장한 이유가 무엇인가.

상황이 극단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 뭐..."

일단.

"죽이자."

뒤처리를 어찌할지는 죽여놓고 고민할 부분이었다.

"어떻게 죽이느냐가 문제인데."

지미와 매튜에게 솔직히 털어놓고 루나 지키자고 설득해봐?

멍청한 판단이다.

루나는 마법에 제대로 입문도 하지 못했다.

아직 가공되지 않은 재능이 산발적으로 표출되는 단계이기에 개안이 제대로 이루어진 자가 아니라면 직관적으로 그 가치를 깨닫기가 어려웠다.

설령 루나가 대단한 재능을 지닌 인재임을 깨닫더라도.

그녀는 이 보육원의 누구와도, 심지어 레이에게도 그저 '남'이었다.

미래가 불확실한 그녀를 위해 6서클 고위 마법사와 대적해줄 바보는 어디에도 없었다.

지미도, 매튜도, 심지어 필립스 백작도.

애미애비가 버리고 간, 재능이 탁월하다 하나 아직 개화도 덜 된 천민 하나를 위해.

고위 마법사, 더 나아가 마탑과 대적하려는 멍청한 선택은 결코 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다.

적당한 대가를 받고 루나를 넘겨주면 넘겨줬지.

오로지 내가 유일했다.

그 아이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인간은.

그 속내가 시커멓더라도 말이다.

"공간검으로 고위 마법사를 암살하는 건..."

아무리 고민해도 실패 확률이 너무 높았다.

공간검으로 암살에 성공하기 위해선 내가 충분한 거리를 두고 검기를 생성했을 때 다비드가 제자리를 지켜야 한다.

백작령 내에도 엑스퍼트 급 기사는 있으니 다비드가 검기의 존재를 눈치채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는 있다.

문제는 검기를 적중시킨다 해도 일격에 죽이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다비드는 암습에 대한 대비를 하고 지낼 것이며, 주렁주렁 차고 다니는 아티펙트엔 방위 마법이 충분히 새겨져 있을 것이다.

금속으로 된 검에서 떠나간 검기는 관통력이 크게 떨어진다.

고위 마법사의 방위를 뚫으려면, 글쎄. 최소 4번은 검기를 중첩시켜야 하지 않을까.

현재 나는 검기가 공간을 도약하기까지 딜레이를 제어하지 못한다.

마구잡이로 도약시킨 4개의 검기가 일시에 다비드를 향해 떨어져 내릴 확률은?

0.002% 정도 되려나?

실패하면 다비드는 곧장 회피를 시도할 것이고 암살은 실패한다.

시도할 가치 없는 무식한 도박이었다.

"...하르시아. 600년도 더 된 영웅이라 했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좀 더 깨끗한 것으로 갈아입었다.

신성 교단에 들려야 했다.

*

백작령 근방에 제대로 된 도서관이 존재할 리 만무했다.

이 근방에 가장 많은 책이 모여 있는 곳은 영주성과, 교회였다.

"레이! 교회는 오랜만에 방문하는구나!"

수녀복을 입고 있는 아델이 날 반갑게 맞아주었다.

꾸벅 인사를 하고 교회 안으로 들어섰다.

아델은 내가 기도와 같은 종교활동에 거의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교회를 들리는 목적은 대개 책이 필요해서였다.

"오늘은 어떤 책이 필요하니?"

"으음..."

천진난만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물었다.

"하르시아님에 대해 궁금해서 찾아왔어요."

"하르시아! 대단한 영웅이시지."

아델은 따뜻한 웃음과 함께 하르시아와 관련된 책을 찾는 것을 도와주었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이 6권, 역사서가 3권.

총 9권의 책에 하르시아에 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었다.

역사서에는 하르시아가 세운 업적들이 담담하게 기술되어 있었고, 동화책엔 그린 듯한 영웅의 모험담이 제각각 기술되어 있었다.

역사서 간에서조차 하르시아의 행적은 서로 모순되는 부분이 많았다.

무려 600년 이상 지난 인물이다.

책들에 적힌 내용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구분할 방법은 없었다.

다만.

모든 책에서 그는 거대한 정령을 부렸으며, 대지를 얼음으로 뒤덮었다.

"하르시아님은 마법도 다룰 줄 아셨나요?"

"얼음 마법... 빙결 마법이라고 하나? 전투에서 언제나 한기를 몰고 다녔다고 하는구나."

"하지만 하르시아님은 소드 마스터셨다고 들었는데..."

"마법도 다룰 줄 아는 마검사였단다."

"마검사가 흔한가요?"

"기사도 마법사도, 서클과 코어를 만들어낼 수는 있단다. 그들은 마나를 다루는 재능을 인정받은 사람들이니까."

잠시 고민한 아델이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체내에 두 개의 마나핵을 생성한다는 건 비효율적이고 위험한 일이란다. 서클과 코어는 특성이 상반돼서 서로 호환될 수 없고, 도리어 상대의 제어를 어렵게 하기도 한단다."

내 생각에도, 코어와 서클을 동시에 운용하는 건 무식한 짓이 맞았다.

그럼에도 하르시아는 마법을 익혔다. 정확히는 빙결 마법을 익혔지.

어째서? 단순히 코어와 서클을 동시에 무리 없이 다룰 만큼 재능이 뛰어나서?

그게 아니라면.

공간검의 해석 혹은 완성에 빙결 마법이 연관되어 있나?

"마법..."

가슴 아래를 내려다봤다.

난 서클을 타고나지 못했다.

또한 서클을 만들어볼 생각 또한 하지 않았다.

비교적 단순한 구조의 코어와 달리 마나 연산자라고도 불리는 서클은 내 지식과 직관을 한참 넘어서 있었다.

"시도를 해봐야 할까."

서클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은 마법사들의 전유물이다.

대충 마나를 심장 주변으로 돌린다고 서클이 짠 생기는 것이 아니다.

허나 인공적인 서클은 결국 선천적으로 서클을 타고난 자의 것들을 모방한 것이다.

나는 반경 3 m가 넘어가는 서클의 소유자를 한 명 알고 있었다.

"모방이 가능할는지."

남의 서클을 눈으로 관찰해 그 구조를 재현할 만큼의 재능이 내게 있었으면 내가 직접 마왕을 때려잡았을 것이다.

재능이 부족하니, 꼼수를 부려야 했다.

아델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귀한 책들이 모여 있는 서고로 걸음을 옮겼다.

책장의 꼭대기에, 피처럼 붉게 물들어 있는 책 한 권이 눈에 비친다.

자리에서 책을 펼쳤다.

룬 문자가 새겨진, 아주 값비싼 책이었다.

교회의 도서관에서조차 룬 문자가 새겨진 책은 오로지 단 한 권뿐이었다.

나는 룬 문자를 이해할 수도, 읽어낼 수도 없었다.

나는 도저히, 이 어린아이가 낙서한 듯한 자국이 세상의 근원과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니 억지를 부려볼 생각이었다.

뿌득

흰자에서 실핏줄이 터져나가며 피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세상이 붉게 물들며, 책에 새겨진 어린아이의 낙서가 전능한 목소리가 되어 뇌리를 찌르기 시작했다.

[불꽃. 작열하는. 심판. 돌이킬 수 없는. 검은 재.]

"젠장."

강렬한 두통과 함께 룬 문자가 새겨진 책에서 눈을 돌렸다.

이 해독과 관련된 권능은 써먹기가 쉽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뇌에 걸리는 부하가 너무 심했다.

해독하고자 하는 현상을 내가 깊이 파악하고 있을수록 부하가 약해졌는데, 부하를 견딜 수 있을 만큼 깊이 파악하고 있는 현상은 굳이 권능까지 써서 해석할 이유가 적었다.

결국 해독 권능은 한 번 풀어본 문제 검산할 때나 유용했다.

"어째 하나같이 계륵이야."

검술도 권능도.

아직 내가 숙련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꼭 나사가 하나씩 빠져 있었다.

"그래도 시도는 해 봐야겠지."

책을 돌려놓은 후 아델에게 인사했다.

루나를 만나 서클을 살피기 위해 보육원으로 향하려는데 하늘 높이서 브릿지가 날아왔다.

삐익-!

어깨에 내려앉은 브릿지의 다리에서 편지를 풀어냈다.

백작이 전해 온 답장이 적혀있었다.

[레이.

내키진 않으나, 자네가 다비드 님을 만나 뵙고 싶다면 자리를 주선해 줄 수는 있네.

허나 당장은 불가능하네. 다비드 님은 급한 사정이 생겨서 현재 자리를 비운 상태야.

한 달 정도 걸린다고 하니, 그때가 되어서도 마음이 변치 않았다면 다시 연락하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 탓에 편지지가 구겨졌다.

"다비드, 단단히 작정했군."

다비드는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루나를 확보하기 위해 백작에게까지 모습을 숨겼다.

이리 되면 먼저 다비드를 찾아가 허를 찌르는 작전은 불가능해졌다.

그저 불안에 떨며, 다비드가 찾아오는 걸 기다려야 했다.

언뜻 보면 방어전이 유리할까 싶었지만, 제대로 준비한 고위 마법사를 상대로 어설픈 함정을 파봤자 미리 경고만 날려주는 꼴밖에 안 됐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내일이라도 마법사를 죽이면, 뒤처리할 시간을 한 달 벌 수 있다.

백작의 답장이 적힌 종이를 씹어 삼킨 레이가 브릿지를 놓아주었다.

동족혐오 (3)

21화

웬만한 일에는 무던했던 루나가 피눈물을 뚝뚝 흘리는 레이를 보고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서클을 해독하던 레이는 찌르는 듯한 두통을 느끼며 책상 위에 머리를 쿵 박았다.

"포기, 포기."

상황이 다급하니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도전해봤으나 역시 실패했다.

해독은 어디까지나 95%가량 해결한 문제에 대해 마지막 방향성을 짚어주는 용도였다.

룬 문자고 서클이고 완전히 무지한 상태에서 권능을 사용하니 무언가를 습득하긴커녕 정신 분열만 올 것 같았다.

'서클을 분석할 거면 개안부터 완벽히 마친 다음 마법학의 기본적인 조예는 갖춰야 할 것 같은데.'

시간이 많이 필요한 일이었다.

"무게 잡고 눈 부라린다고 답 안 나오는구먼."

레이는 대단한 기적을 바랐던 몇 시간 전의 자신을 질책하며 몸에 힘을 뺐다.

억지로 날카롭게 다져놓은 눈빛이 느슨하게 풀렸다.

"평소처럼 하자."

최선을 다하되, 마음을 가볍게 먹자.

집착을 버리니 다비드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는 가닥이 잡혔다.

다비드를 죽이는 데 실패하면? 얌전히 목이 따여주면 된다.

환생 후 레이의 모토 중 하나가 '뒤지면 어쩔 수 없지'였다.

"근데 루나."

"...네."

눈가에서 피를 훔쳐낸 레이가 루나를 마주 봤다.

여전히 흰자위가 붉게 물들어 있어 사람보단 귀신에 가까운 몰골이었다.

루나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레이가 옆에 있던 수건으로 얼굴을 덮은 채 대화를 계속했다.

"내가 남의 과거 묻는 걸 좋아하진 않아. 우리끼리 옛날 일 꺼내봐야 부모 욕밖에 할 게 없거든. 누구 부모가 더 개새끼인지 토론하는 게 뭐가 재밌겠어."

사실 재미는 있었다.

누구 부모가 더 개새끼인가 개새끼 지수 매겨가며 낄낄대면 시간은 꽤 잘 갔다. 얻을 게 없어서 그렇지. 기껏해야 세상에 쓰레기는 많다는 교훈 하나 배울 수 있었다.

"아, 내가 항상 욕하는 부모는 생물학적 애미... 엄마아빠를 말하는 거야. 나는 나를 길러주신 엄마를 존경해.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신 분이지."

"..."

"그렇다고 루나 네 부모님 욕을 하는 건 아니고. 욕은 네가 해야지. 하여튼."

루나는 레이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근래 계속해서 고민 많아 보였던 레이는, 피눈물을 한 번 흘린 후 그 시니컬함을 되찾아 있었다.

"루나, 너는 마법사의 자질을 타고났어."

레이가 뒤집어쓴 수건을 나풀나풀 흔들었다.

"잘 들어, 루나. 재능을 타고나는 건 축복 받은 일이야. 문제는 네 재능을 탐내는 나쁜 사람들이 많다는 거지."

"나쁜... 사람들?"

"그래, 나쁜 사람들. '사람'을 '물건'처럼 여기는 쓰레기들. 물론 내 이야기는 절대 아니고."

사족을 덧붙인 레이가 얼굴에서 수건을 치웠다.

"전적으로 내 안일함 탓이긴 한데, 네가 서클을 한 번 드러내는 바람에 내가 고생을 조금 하게 생겼어. 앞으로는 꼭꼭 숨기고 다니자."

"...미안해요."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내가 마법사에 대한 이미지를 너무 멋대로 상상했던 거 같아. 약간 좀... 현자까지는 아니더라도 고집스러운 학자 이미지를 떠올리곤 했거든."

백작에게 고위 마법사와 관련된 사건 사고 썰을 자세히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전에도 한 번 했던 말이지만, 내게 배운 지식을 절대 남에게 말하고 다니면 안 돼. 상대가 부모든, 귀족이든, 선생이든, 나 말고 다른 사람 앞에서 똑똑한 척 하지 마. 어려운 암산 같은 거 하지 말라고. 서클이랑 마법도 마찬가지야."

레이는 말을 하다말고 이마를 눌렀다.

마법사는 학자가 아니었고 루나는 단순히 지능만 높은 게 아니었다.

루나가 무언가를 배울 때 학습 속도를 자의적으로 늦추면 타인의 탐욕을 피하거나 느슨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잘못됐었다.

"기준을 세워줄게. 카렌이 못하는 건 아예 하려고 하지 마. 내 앞에서 말고는, 절대로. 그게 안전해."

"...알겠어요."

"어쨌든 내가 궁금한 사안은 이거야. 네가 서클을 처음 각성했던 시기가 언제이며, 네가 서클과 마법을 다룰 줄 아는 걸 다른 누군가에게 보인 적이 있냐는 거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루나가 입을 열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후 레이가 한마디 했다.

"내가 폭탄을 주워왔네."

루나가 죽은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레이가 손을 휘저었다.

"네 원망을 하는 건 아니고."

루나는 믿지 않았다.

"차라리 잘 됐네. 운이 좋다면 잘 엮어서 뒤짚어 씌울 수도 있겠어. 어렵겠지만."

결론을 내린 레이가 크게 기지개를 켰다.

"한 달만 조금 고생해 보자."

한 달 동안 노력해보고 수습 못 하면 뒤지면 되는 문제였다.

"아, 루나."

"?"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마지막 당부를 마친 레이가 재차 확인했다.

"알아들었지?"

"...네."

"좋아. 그만 나가봐도 돼."

루나를 내보내고 난 레이는 잠시 고민했다.

당장 며칠 후에 뒤질 수도 있는데, 그전에 꼭 해결하고 싶은 일이 남아있던가?

"아, 카렌이나 달래주자."

*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매튜."

"네 덕분에 제대로 된 검술을 익힐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매튜가 레이를 앞에 태운 채 보육원을 향해 말을 몰았다.

"대장이나 나나, 마음속 깊이 품고 있던 갈망 중 하나였다. 고맙다, 레이."

"시기가 많이 늦지는 않았나요?"

"늦었지. 하지만 대장과 나는 심장에 코어조차 만들지 못했어. 마나를 그냥 몸속을 순환하게 내버려 두었지. 제대로 된 기술을 익힌다면 반쪽 짜리 엑스퍼트는 벗어날 수 있을 거다."

"정제법도 부탁을 드려 볼게요. 아마 들어주실 거예요."

"큭큭, 작위가 아니더라도 널 위해 두 번 정도는 목숨을 걸 수 있을 것 같구나."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매튜는 이미 레이 때문에 목숨이 간당간당한 처지였다. 본인은 몰랐지만.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어 보였다.

"사흘 뒤에 디디에 경이 보육원에 오시기로 했다."

"매우 좋은 소식이네요."

"너도 검술을 배우는 게 기대되는 거냐?"

"음... 뭐, 그런 걸로 치죠."

디디에가 하루종일 보육원에 머물지는 않겠지만 그 존재 자체가 다비드에겐 껄끄러울 거다. 소식을 들었다면 일을 빨리 끝내려 하겠지.

레이는 다비드가 찾아올 타이밍을 좁힐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다 와 가네요."

"바로 잡아와라."

운동장에 나와 있던 아이들이 말이 달려오는 소리에 하나둘 반응했다.

커다란 덩치를 지닌 말이 멋진 갈기를 휘날리며 다가오자 아이들은 환호성을 터뜨렸다.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던 카렌도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을 바라보다, 이내 안장 위에 레이가 앉아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입을 삐죽인 카렌이 보육원 안으로 들어가려 한 순간 레이가 안장 위에서 몸을 던졌다.

촤촤촥!

지면을 두 바퀴 굴러 충격을 줄인 레이가 쏜살같이 달려가 카렌의 허리를 잡아챘다.

"흐악?"

깜짝 놀란 카렌이 몸을 버둥거렸지만 레이는 그대로 카렌을 납치해 다시 말 위로 뛰어올랐다.

레이와 카렌을 태운 매튜가 고삐를 돌리자 말은 그대로 운동장을 U턴해서 보육원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요하나가 헤벌쭉 웃었다.

"역시 레이는 카렌을 좋아해!"

*

"와악! 와악!"

카렌이 혀 짧은 비명을 연거푸 내뱉으며 안장 위에서 몸을 버둥거렸다.

갑자기 높아진 시야와 휙휙 지나가는 풍경 탓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허나 카렌은 선천적으로 운동 신경이 좋고 성향이 담대했다.

얼마 안 가 위아래로 요동치는 안장에 적응한 카렌이 두 팔을 넓게 벌려 온몸으로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우와아!"

레이가 카렌의 허리를 붙잡은 손에서 힘을 살짝 뺐다.

매튜는 한소리 하려다가, 레이가 엑스퍼트라는 것을 되새기며 그냥 기분 좋게 웃었다.

매튜가 조금 더 속도를 높이자 헤실 거리며 까불던 카렌이 곧장 몸을 낮췄다.

레이가 다시 카렌의 허리를 잡아주었다.

"카렌."

카렌의 볼이 슬그머니 부풀어 오른다.

레이가 손을 뻗어 볼을 움켜쥐었다.

"언제까지 삐쳐 있게?"

"나 안 삐쳤어."

"나만 보면 볼에 바람 넣고 다니면서 뭘 안 삐쳤데?"

"...레이가 날 별로 안 좋아하니까, 나도 레이를 안 좋아할래."

매튜가 눈치껏 속도를 낮춰 바람 소리를 줄여주었다.

"카렌, 나는 카렌을 좋아해."

"나는 요하나보다 운동을 못 해. 루나보다 똑똑하지 않아."

울적한 얼굴을 한 카렌이 먼지가 들어간 눈가를 닦았다.

"그러니까 레이 말은 거짓말이야."

"아이고, 요 녀석아."

"으앗!"

묶여 있던 카렌의 머리카락을 풀어 확확 헤집은 레이가 꿀밤을 살짝 먹였다.

"카렌, 너는 보육원의 리더야."

"...리더?"

"성실하고, 똑똑하고, 착하고, 강하잖아. 보육원의 모두가 널 좋아해. 나도 그렇고. 내가 없으면, 네가 보육원의 리더야."

"...레이가 없는 건 싫어."

"알았어. 걱정하지 마. 그래도 내가 자리를 비우는 일이 생길 때는, 네가 아이들을 이끄는 거야."

"내가... 이끌어?"

"카렌, 너보다 특정 분야에서 더 재능있는 아이는 있을 수 있지만, 네 역할을 대신해줄 수 있는 아이는 없어.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져."

"..."

카렌의 표정이 다시 슬금슬금 풀리자 레이는 이제야 삐친 게 풀렸구나 싶었다.

허나 카렌은, 레이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레이가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보육원에 루나와 요하나와 데런이 있기 때문이야.'

루나와 요하나와 데런이 없었다면, 레이는 보육원에, 그리고 카렌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카렌은 생각했다.

마치 기생하는 것 같다고.

자신보다 더 재능 넘치는 아이들 곁에 붙어 레이의 관심을 나눠 가지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런 기생충 같다고.

카렌은 고개를 쓱쓱 저었다.

더 노력할 것이다. 더 노력해서, 다른 아이들이 없더라도 레이가 날 좋아하게 할 것이다.

허나 노력하고 노력해도 레이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면, 그때는...

"레이!"

"응?"

"나 레이가 엄청 좋아!"

"그래, 나도 카렌이 엄청 좋아."

한 번 더 카렌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레이가 이번엔 꽤 강하게 꿀밤을 때렸다.

"아얏!"

"그리고 귀족한테는 까불지 말고."

"레이가 알레시아는 평민이라며!"

"그때는 사정이 있었어. 아무튼, 앞으로 귀족처럼 보이는 사람한테는 함부로 접근하지도 마."

"알레시아는 귀족처럼 안 보였어!"

"그렇긴 해."

고개를 저은 레이가 앞으로 할 일에 한 가지를 추가했다.

필립스 백작은 워낙 성향이 관대하여 면전에서 까불어도 허허 웃으며 넘어가겠지만, 추후 다른 귀족을 만나게 될 경우를 대비해 아이들에게 경고를 해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너무 오냐오냐 키운 탓에, 말 한 마디 잘못해서 목이 날아가는 험악한 세상에 대해 아이들이 무지했다.

"자, 이제 내릴 준비해."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보육원으로 되돌아오자 아이들이 우르를 몰려와 손을 치켜들었다.

"다음은 내가 탈래!"

"아니야, 내가 탈 거야!!"

"가위바위보 해서 정하자니까!"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친구들은 다음 기회에."

충격적인 소식에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카렌에게 향했다.

원망과 질투가 서린 그런 시선들이 카렌은 썩 싫지가 않았다. 사실 내심 우쭐해지는 기분이었다.

잠깐의 침묵 뒤에 분노가 우르르 터져 나왔다.

"레이는 맨날 카렌만 신경 써!"

"레이는 카렌만 좋아해!!"

"우리도 차별하지 마! 말 태워줘!"

"말 태워줘어!!"

"에혀, 다음에 태워주겠다니까. 그때까지 순서 좀 정하자."

"그럼 왜 오늘은 카렌만 태워줬어?"

"존댓말."

"태워줬어요?"

"그야 카렌이 이 보육원의 4인자니까. 우선권이 있는 거지."

4인자?

4인자란 단어 뒤에 당연히 따라올 궁금증 탓에 모두가 잠시 목소리를 죽였다.

요하나가 대표해서 물었다.

"3인자는 누구예요?"

"매튜지."

"?"

내가 3인자라고?

말 안장에 앉아 있던 매튜가 도끼눈을 하고 레이를 쳐다봤다.

요하나가 다시 물었다.

"2인자는요?"

"지미지."

"1인자는요?"

"뭘 당연한 걸 묻고 있어. 당연히 나지."

"아니 저 시발 새..."

매튜가 욕을 하려다 말고 이마를 짚었다.

여기서 말싸움해봤자 손해 보는 건 이러나저러나 매튜였다.

왁자지껄한 아이들을 두고 매튜가 고삐를 돌렸다.

*

말에서 내린 후 몸을 닦은 카렌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밖은 어느새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다들 슬슬 이부자리를 깔고 있기에, 카렌은 자리에서 머뭇거리다 루나에게 다가갔다.

"루나..."

"...?"

"그동안 레이한테 수업받는 거 방해해서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내가 부탁했을 때, 날 도와줘서."

카렌은 루나가 마법을 실제로 행하려 했다는 건 알지 못했지만, 루나가 자기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는 건 알고 있었다.

카렌을 바라보던 루나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카렌은... 친구니까요."

잠시 눈을 크게 떴던 카렌이 방긋 웃었다.

"고마워. 그리고 말 편하게 해! 루나와 나는 친구잖아."

"...응, 알았어."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요하나가 헤벌쭉하게 웃었다.

"히히! 드디어 화해했다."

그동안 묘한 분위기가 방을 흐르고 있어 엄청나게 답답하던 참이었다.

둘을 안고 이부자리에 쓰러진 요하나는 자기 이불 위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오늘부터 다시 누워서 얘기할 수 있어!"

"불 끄고 이야기하면 레이가 뭐라고 해."

"그럼 불 끄기 전까지 이야기하자!"

편한 자세로 누워서 재잘재잘 떠들다 보니 어느새 취침 시간이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요하나가 초를 꺼트리자 완전한 어둠이 방에 찾아왔다.

루나가 천장을 보고 눈을 깜박거렸다.

때마침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꽈르릉!

조금 놀랐지만, 루나는 금세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때 요하나가 벌떡 일어나 얼핏 반가워하는 목소리로 외쳤다.

"번개 친다!"

곧장 이불을 둘둘 만 요하나가 옆에 있던 미아를 툭툭 밀었다.

미아 또한 이불을 둘둘 말더니 루나가 있는 곳까지 요하나와 같이 굴러 왔다.

잠시 눈치를 보던 카렌도 이불을 데굴데굴 말아 루나 곁으로 굴러왔다.

"?"

양쪽에 낀 루나가 당황하자 요하나가 외쳤다.

"번개 칠 때는 원래 이러고 자는 거야!"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사람의 온기와 꼼지락대다 스치는 팔다리들.

익숙치 않은 감각에 루나는 잠시 불편함을 느꼈지만, 이내 그 따스함에 몸을 맡겼다.

하늘이 번쩍이며 계속해서 천둥소리를 쏟아냈지만 루나는 평온함 속에 눈을 감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보육원의 모든 아이들이 잠들었다.

"..."

어두운 복도에 그림자 하나가 스며들었다.

소리 없이 움직이는 그림자는 제자리에 멈추어 방향을 잡더니, 이내 머뭇거림 없이 복도 위를 흘러갔다.

문앞에서 움직임을 멈춘 그림자가 손가락을 앞으로 세웠다.

본래 시끄러운 쇳소리를 내던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그림자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4명의 아이들이 이리저리 엉켜있어, 하나만 잡아당기면 누군가는 깨어날 가능성이 높은 모양새였다.

다른 아이가 깨어나 이번 일을 들키면 곤란해진다.

해결책은 간단했다. 목표였던 푸른 머리 소녀를 제외하고 남은 아이들은 조용히 죽인 후 시체를 챙기면 됐다.

짐이 조금 늘어나겠지만 아직 어린 아이들이니 들어봄직했다.

보육원에서 아이들이 도망가는 건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이니 아이들의 실종은 남들의 관심을 사지 못할 터였다.

핏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심장만을 얼려버리려고 손가락을 뻗은 순간.

다비드는 움직임을 멈췄다.

"야, 건들지 마."

"..."

"그건 내 거야."

다비드가 물었다.

"...네 것?"

"그래. 내가 돌 맞아가며 줍고 다닌, 내 소유물이라고."

몸을 돌린 다비드가 레이를 마주 봤다.

서로의 눈동자가 거울처럼 닮아 있는 상대의 감정을 비춘다.

끈적한 탐욕.

그 시작점과 방향성은 달랐을지언정, 결국 같은 종착지에 도달한 검붉은 감정이 서로의 눈동자에 비쳤다.

레이와 다비드는 동시에 생각했다.

원래 죽일 생각이긴 했는데.

반드시 죽여버려야겠다고.

동족혐오 (4)

22화

"큼큼. 오해를 산 것 같은데,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구나."

다비드가 사람 좋게 웃었다.

"여기서는 아이들이 깰 수도 있으니, 자리를 좀 옮기는 게 어떻겠니?"

"좋아요."

레이 또한 순진한 아이의 표정을 흉내 냈다.

서로의 속내를 뻔히 알고서도 의견이 통했다.

둘 모두, 이 자리에서 전투를 벌여 '자기 물건'이 다치는 걸 원치 않았다.

둘은 나란히 서서 복도를 걸었다.

빗발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보육원 밖으로 나온 다비드와 레이는 후문으로 향했다.

다비드는 친절하게도 장막을 펼쳐 레이가 비를 맞지 않게 배려해주었다.

대부분의 진동을 흡수해주는 다비드의 장막은 내부의 소리를 밖으로 흘리지 않았다.

"오해하지 말아주었으면 싶구나."

"오해요?"

"나는 누군가를 해치고 싶어서 이곳을 찾아온 게 아니란다."

"하지만 허락받지 않고 보육원에 들어왔잖아요?"

"본디 마법사란 비밀스러운 족속이지. 이해해주길 바란다."

"보육원엔 왜 찾아왔나요?"

"참으로 재능 넘치는 아이를 보았다.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그 아이를 만나고 싶었단다."

"루나를 말씀하시는 거죠? 그럼 루나를 마법사님의 제자로 받아주시는 건가요?"

보육원 후문을 넘어서자 텅 빈 공터가 나왔다.

보육원은 마을의 외곽에 위치해 있었기에, 이 방향으로 걸어가면 다른 마을이 나올 때까지 사람을 만나기가 힘들었다.

다비드가 걷는 속도를 줄였다.

"아이야, 강대한 서클을 타고난다 해도 반드시 높은 경지에 닿을 수 있는 건 아니란다. 아무리 많은 마나를 지녔어도, 술식을 이해하고 구성할 수 있는 지능이 부족하면 간단한 마법조차 제어할 수 없지."

레이는 웃었다.

레이는 루나의 지능이, 환생 전에 역사책에서 본 세기의 천재들과 비견될 것이라 확신했다.

물론 다비드를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담담히 물었다.

"제자로 받아주시는 게 아닌가요?"

"그 아이에겐 그것보다 더 훌륭한 쓰임새가 있단다. 예컨데..."

다비드가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심장을 뽑아낸다든가."

"심장을요?"

"그래. 심장을 뽑아 마법적인 가공을 거치면, 막대한 마나를 저장할 수 있는 훌륭한 마나 배터리를 제작할 수 있단다. 일종의 생체 아티펙트지. 물론 고위 마법사 정도는 돼야 시도할 수 있는 제작법이란다."

"하지만 심장을 뽑으면 사람은 죽잖아요?"

다비드가 웃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니."

뒷머리를 긁적인 레이가 물었다.

"다비드님."

"음?"

"마법사는 다 그꼴인가요?"

"마도를 걷는데 인간성은 불필요한 법이란다."

"그렇군요."

레이가 검을 뽑았다.

*

레이는 다비드가 찾아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 어떤 사소한 방비조차 하지 않았다.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음은 물론, 보육원의 경비를 늘리지도, 함정을 파지도, 값비싸고 강력한 무기를 준비하지도 않았다.

다비드에게 그 어떤 의심도 사지 않도록 철저하게 일상을 가장했다.

때문에 다비드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늘 레이와의 만남이 오로지 우연에 의해 발생한 변수였음을.

다비드는 신중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아이들이야 몇 명이 실종되든 상관없었다.

허나 아이들의 실종에 어떤 강압의 흔적도 발견되어선 안 되었다.

그래야만 일이 깔끔했다.

때문에 다비드는, 레이가 또 다른 변수를 만들어내는 걸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일단 레이를 바로 옆에 두었다.

설령 수백 미터 떨어져 있더라도 레이를 죽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혹시라도 레이가 비명을 지르거나 도주를 택할까 염려되어, 그 과정에서 다른 누군가가 이변을 눈치채지 않을까 염려되어 바짝 거리를 좁혔다.

레이가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레이가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목소리가 외부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레이가 토해낼 핏물이 지면을 적셔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다비드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주위에 마법을 펼쳤다.

레이가 검을 뽑자 다비드는 참으로 기꺼워했다.

다비드는 신중했기에, 레이를 자기 손길이 닿는 거리에서 확실히 마무리 짓고 싶었다.

레이가 검을 휘둘렀다.

*

두 번째 9살을 맞이한 레이는 확답할 수 있었다.

9살은 생각보다도 개념이 굉장히 부족한 나이였다.

전생에 레이가 9살이었을 적에, 진심으로 싸우면 어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뭔 병신 같은 생각이냐고 할 수 있는데, 그만큼 9살이란 나이는 경험이 부족해 자기객관화가 잘 되지 않았고 상대와의 격차를 인식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동안은 간과했지만 근래 들어 보육원 애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 명확히 깨달았다.

9살은 개념이 없었다.

그렇기에 레이는 철저하게 9살을 흉내냈다.

자신이 진심으로 싸우면 어른도 이길 수 있을 거라 믿는, 철없는 9살을 흉내냈다.

더군다나 레이는 실제로 마나를 각성해 어른 여럿을 때려눕혔다.

자신감이 하늘을 찔러 눈이 뒤집혀도 이상치 않을 상황이었다.

때문에 고위 마법사의 무서움을 겪어본 적 없는 레이는, 자신이 진심으로 싸우면 마법사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다비드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레이는 최선을 다했다.

검을 뽑는 속도도, 휘두르는 속도도.

이제 막 마나를 각성한 꼬맹이 수준에 걸맞게 한참을 늦췄다.

다비드가 사방에 보조 마법을 펼쳤다.

그 수많은 마법 대부분이 외부의 간섭과 관측을 차단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다비드는 스스로가 방심했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

다비드는 삶을 살면서 마법을, 특히 감지 마법을 익힌 후로 단 한 번도 이토록 가까운 거리를, 이토록 오랜 시간 타인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모든 방위 시도와 암습을 포기한 대가로 레이가 얻어낸.

단 한 번의 기회였다.

검이 다비드에게 향한다.

다비드는 방어 마법을 펼치지 않았으나, 아티펙트가 자동으로 마나 실드를 전개했다.

레이의 심장이 뒤틀렸다.

급격하게 활성화된 코어가 신체에 걸리는 부하를 무시하고 폭주하다시피 마나를 쏟아냈다.

검에 푸른빛이 치솟아오른다.

휘둘러지던 검이 삽시간에 가속했다.

'검기?'

비현실적인 광경을 앞에 두고 다비드는 무심코 팔을 뻗었다가 조소했다.

아티펙트에서 전개된 실드는 '어지간한 종류의 검기'는 몇 번이고 상쇄시킬 수 있을 만큼 단단했다.

검기와 실드가 충돌했다.

끄드득!

공간이 변형된다.

검기와 맞닿은 실드의 형태가 기이하게 꺾였다.

반발력 탓에 흐트러질 뻔한 검기는, 금속으로 된 검에 의지해 다시금 응집됐다.

뿌드드득!

실드가 관통된다.

앞으로 나와 있던 다비드의 왼팔이 먼저 잘려나갔다.

핏물을 증발시킨 검기는 다비드의 가슴마저 양단하기 위해 떨어져 내렸다.

우웅-!

다비드가 착용하고 있던 모든 아티펙트가 동시에 반응했다.

강력한 마나 실드가 심장 주위로 전개됨과 동시에 고밀도로 압축된 마나가 레이를 요격하기 위해 쏘아졌다.

레이는 살이 타들어가는 와중에도 실드에 막혀버린 검에 자기 몸을 들이댔다.

온몸의 무게를 실어 검기를 다비드의 심장에 꽂아넣고자 발악했다.

다비드가 분노했다.

"네놈이 감히...!!"

다비드의 손아귀에 불꽃이 일어난다.

아티펙트의 요격 탓에 이미 레이의 사지는 벌겋게 익어가는 중이었다.

레이는 고통을 느끼며 웃음 지었다.

공간을 변형시키는 기이한 검기가 실드를 부순다.

동시에 다비드의 화염구가 레이에게 적중했다.

콰앙!!

폭팔음과 함께 레이가 수십 미터를 튕겨져 나갔다.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허나 다비드는 본래, 이 근방을 불바다로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레이를 아예 증발시켜버릴 생각이었다.

헌데 쓰러져 있는 레이의 몸엔 팔다리가 전부 멀쩡하게 붙어있었다.

다비드가 각혈했다.

"크륵!! 쿨럭!! 쿨럭!!"

다비드의 가슴에 검기가 파고든 상흔이 새겨져 있었다.

분열된 서클 6개 중 2개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남은 서클 또한 무사하진 않았다.

레이가 몸을 일으켰다.

온 몸이 화상으로 가득했지만, 붉게 달아오른 피부는 장대비에 의해 금방 식었다.

비틀거린 레이는 자신의 가슴 위를 만져보더니 입꼬리를 깊게 올렸다.

"나의 코어는 무사한데, 당신의 서클은 어떨지 모르겠군."

"네, 네놈... 네놈이...!"

"얼추 밸런스가 맞기를 기대하며, 계속해보지."

레이가 지면을 박찼다.

흔들리던 다비드의 눈동자에 초점이 잡혔다.

이 빌어먹을 보육원이 대체 무슨 괴물들을 키워내고 있는지 혼란스러웠으나, 지금은 부동심이 필요했다.

기습을 허용한 대가로 다비드의 전력은 4서클 마법사에 가깝게 떨어져 내렸다.

아직은 충분히 유리했다.

사방이 물이었기에, 특기는 아니었으나 빙결 마법을 운용했다.

지면이 얼어붙으며 거대한 얼음송곳이 레이를 향해 치솟았다.

레이가 사각에서 짓쳐들어오는 얼음송곳을 피해 몸을 굴리자 허공에서 뇌전이 떨어져내렸다.

콰가가각!!

"큽...!!"

전격 마법은 회피가 불가능하다.

마나가 깃든 전류를 오로지 피격자의 마나 저항력만으로 견뎌내야 했다.

레이의 몸을 흐르는 가공할 성질의 마나가 외부의 마나에 강력한 저항력을 부여해주었으나 잠시 몸이 굳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그 틈을 타 사방에서 얼음송곳이 치솟아 올랐다.

"아, 시발."

레이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 나이에 이런 거 쓰면 키 안 크는데."

전생에 키가 작은 편이었던 레이는 이번 생엔 한 번 멀대 같은 신장을 가져보고 싶었다.

아무래도 그른 것 같았다.

'동화책에 기술 이름이 뭐라고 적혀있었더라? 오버드라이브?'

하르시아는 언제나 더 빠르게 움직이고 싶어 했다.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그 누구보다 뛰어난 민첩함을 갖추고도 그러한 욕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르시아는 발상의 전환을 꾀했다.

근육을 마나로 강화해봤자 그 한계가 분명하니, 근육을 배제하고 신체를 가속시킬 방법을 찾았다.

고민하던 하르시아는 마나의 성질을 변형시켜 관절 사이에 응축, 폭발시켰다.

마나의 폭발력을 활용해 관절이 회전하는 속도를 억지로 끌어올린 거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지만 않으면 효과는 확실했다. 떨어져 나가지만 않으면.

"아오, 시발. 이딴 걸 비기라고."

초월자 덕분에 오버드라이브의 원리 자체는 꿰뚫고 있었다.

몸에 걸리는 부하가 말도 안 되게 강해 써볼 생각도 안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레이는 장신의 꿈을 단념했다.

콰앙!

관절 사이에 응축된 마나가 폭발한다.

뒤틀린 관절이 채찍처럼 휘둘러짐과 동시에 레이의 몸이 삽시간에 얼음 송곳을 뚫고 나갔다.

촤아악!!

속도를 제어 못 해 바닥을 한 바퀴 구른 레이가 곧장 다비드를 향해 가속했다.

성장판이 작살나는 고통을 느끼며 레이가 중얼거렸다.

"이번 생도 운 좋아야 170따리겠네."

"네 녀석은 대체...!!"

안 그래도 몸뚱이가 가벼웠던 레이다.

하르시아의 비기를 사용하자 그 속도가 완숙한 그래듀에이트 급 무인과 비견될 정도로 상승했다.

당황한 다비드가 넓은 범위에 걸쳐 무수한 마법을 쏟아냈다.

촤자자자자작!!

레이의 온몸에 상처가 새겨졌다.

허나 위력이 분산된 마법으론 레이를 멈춰 세울 수 없었다.

설령 힘줄이 잘려나가더라도, 하르시아의 비기는 팔다리만 달려있으면 움직임을 가능케 했다.

적어도 4서클 마법을 적중시켜야 했다.

다비드의 얼굴이 악귀처럼 구겨졌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눈앞의 꼬맹이를 상대로 승리를 취하기 위해선 목숨을 걸어야 했다.

망가진 여섯 개의 서클이 일시에 빛을 발한다.

드드드득!

4개의 마법이 동시에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 찰나 레이가 뒷걸음치던 다비드를 따라잡았다.

허리를 향해 솟구치는 얼음 송곳을 검기로 베어낸 레이가 잔상을 남기고 사라졌다.

다비드는 레이를 눈으로 쫓지 않았다. 그는 눈보다 마법을 믿었다.

다비드가 전개한 탐지 마법이 어느새 뒤를 잡은 레이의 위치를 간파했다.

탐지 마법과 연동되어 있던 화염구가 레이를 지향하여 폭발했다.

콰아앙!!

"큭...!!"

폭발에 휘말려 뒤로 밀려난 레이가 다비드의 하나 남은 팔에 붉은 마법진이 펼쳐지는 모습을 확인했다.

위험하다.

레이는 회피를 준비하면서도 최악의 경우 동귀어진을 시도하기 위해 두 번째 검을 뽑아들었다.

마법이 쏘아지는 즉시 지면을 구르려고 했으나, 레이는 움직임을 멈췄다.

"..."

"..."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돌았다.

4서클 혼합 마법 '레드 레이(Red Ray)'.

초고열의 열선을 방사해 사선의 모든 것을 불태우는 섬멸 마법.

그리고 다비드는, 레이가 아닌 보육원을 향해 마법을 겨누고 있었다.

레이가 제자리에서 가만히 멈춰서 있자 다비드가 웃었다.

"네놈은 멍청한지 똑똑한지 알 수가 없군. 네 목숨보다 저 보육원이 소중한가?"

"거기다 쏘면, 너도 뒤지는 거야."

"기왕이면... 네 목숨 하나로 끝내는 게 낫지 않나?"

"..."

촤악!

레이가 허공에 양손의 검을 휘둘렀다.

다비드는 순간 검기라도 방출하는 것이 아닌가 경계했지만, 레이의 검에는 검기가 깔끔하게 증발해 있었다.

레이가 다비드 쪽으로 검을 던졌다.

지면을 구르는 두 자루의 검을 보며 다비드는 실소를 터뜨렸다.

"멍청한 놈."

다비드가 레이를 향해 레드레이를 겨누었다.

숨을 몰아쉰 레이는, 다비드의 머리 위를 응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개수작 부리지 말고 나한테 바로 쏘지 그랬어."

다비드가 의아함을 품기도 전에.

허공에 얇은 실금 두 가닥이 새겨졌다.

묘비

23화

다비드가 위화감을 느꼈을 때는 이미.

갈라져 나간 허공에서 찬란히 빛나는 검기가 아가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우웅-!

아티펙트가 재차 실드를 전개했으나 앞서 한 번 실드가 부서지며 과부하가 걸린 아티펙트로는 공간검을 완전히 막아낼 수 없었다.

실드가 바스러진다.

뿌드드드득!

무방비하게 노출된 다비드의 쇄골이 검기와 맞닿아 주저앉기 시작한다.

다비드는 그제야, 레이에게 일격을 허용했을 때 어째서 자신의 실드가 그리 손쉽게 관통당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하르시아...!!"

뒤늦은 경악과 분노가 얼굴을 뒤덮었다.

다비드는 발악하려 했지만 허공을 부수고 튀어나온 두 번째 검기에 깊은 절망을 느꼈다.

촤악!!

다비드의 남은 팔이 잘려나간다.

쇄골을 무너뜨리고 심장 근처까지 파고든 검기가 서클 대부분을 망가뜨린 후 사그라졌다.

그리고 레이는, 허공에 실금이 새겨진 순간부터 이미 다비드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콱!

다비드를 향해 던졌던 검을 주운 레이가 마지막 마나를 쥐어짜 검기를 생성했다.

레이는 마법사란 존재를 잘 몰랐다.

그들의 성격도, 생리도, 또한 그들이 일으킬 수 있는 기적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이를 한 번 간과했기에 오늘과 같은 위기를 초래했다.

때문에 레이는 이번엔 변수를 만들 생각이 없었다.

"아쉽게 됐군."

푸욱!!

다비드의 심장에 검을 꽂아넣은 레이가,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다비드의 눈동자를 마주 보며 웃었다.

"내가 마법사였다면, 네 심장을 꺼내 가공할 수 있었을 텐데."

촤악!!

레이가 하나 남은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툭! 투둑!

저항하지 못하고 잘려나간 다비드의 머리가 지면을 굴렀다.

머리를 잃고 휘청거린 다비드의 몸뚱이가 무릎을 꿇었다.

전투가, 끝났다.

"후우, 빌어먹을."

레이는 다비드의 가슴에 박혀 있는 검을 뽑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관절 사이사이 고인 피가 찢어진 상처로 흘러나왔다.

우웅-!

다비드의 서클과 다비드가 발현하려던 마법에 깃들었던 마나가 통제를 잃고 팽창했다.

공기가 뜨거워진다.

몸이 멀쩡했다면 괜찮겠지만, 아무래도 지금 상태로는 산발적으로 폭주하는 마나를 막아내기 어려웠다.

레이는 혹시나 해서 물었다.

"이거 혹시 제어 가능하냐?"

"..."

서클이 빛난다.

불규칙하게 응집되어 공기를 데우던 마나가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레이가 제자리에 선 채 보육원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비드가 전투 직전 펼쳐 놓았던 보조 마법들이 증발하며 비를 맞고 있는 루나의 모습이 장막 너머로 드러났다.

푸른 머리카락이 푹 젖은 채 얼굴을 덮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루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그리고 고맙긴 한데, 앞으로 이런 일 있으면 이불 밑에 꼭꼭 숨어 있어. 나중에 마법 좀 배우면 같이 나서주고."

"나 때문... 인가요?"

"내가 이놈이랑 싸운 거? 너 때문이긴 하지."

자리에서 비틀거리던 레이가 픽 쓰러졌다가 낑낑대며 다시 일어났다.

"근데 단어 선택은 똑바로 해야지. 네가 원인이긴 한데, 네게 잘못이 있는 건 아니야. 여기 목 떨어진 놈이 미친놈인 거지. 너 안 쫓아낼 테니까 걱정하지 마."

검을 지팡이 삼아 균형을 잡은 레이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전히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레이는 비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꽤 기꺼웠다.

자잘한 흔적이 빗물과 함께 씻겨져 나갈 테니.

검에 의지한 레이는 뜯어져 나갈 것 같은 무릎을 이끌며 보육원 울타리 근처로 다가갔다.

간간히 활용하던 수레가 있던 장소였다.

천을 들추니, 지미에게 삥 뜯어 놨던 포션 한 병이 보였다.

극적인 효과는 없었지만 일단 입에 물고 들이켰다.

용병들이 애용하는 포션답게 마취 성분과 마약 성분이 좀 포함되어 있어 기분이 나아졌다.

"그만 들어가. 가서 빗물 닦고 자. 감기 걸리겠다. 오늘 일은 당연히 비밀이고."

레이는 계속해서 자신을 따라오는 루나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잠시 제자리에 서 있던 루나가 머리에 얹어져 있는 레이의 손을 붙잡았다.

"...왜, 날 지켜줘요?"

"흠."

레이는 잠시 고민했다.

레이가 루나를 지키고자 하는 이유야 꽤 명쾌했지만, 그걸 남에게 설명하긴 좀 껄끄러웠다.

약 기운 탓에 비실비실 웃은 레이가 답했다.

"나중에 호강하려고 그러는 거지."

"...호강?"

"그래. 나중에 루나가 뛰어난 마법사가 되면 나한테 떡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겠냐."

대마법사를 지인으로 두면 마음이 아주 든든할 터다.

루나가 다비드와 같이 인성이 변질돼버리지만 않으면 말이다.

"마음 착하게 먹고, 나중에 나한테 잘해라."

"...네. 꼭 잘할게요."

"오냐."

낄낄거린 레이는 수레를 끌고 가려다 말고 도끼눈을 했다.

"아, 그런데 루나. 다른 건 다 괜찮은데."

"...?"

"나중에 나보고 키 작다고 놀리면 대가리를 깨버릴 거야."

환생하고도 170따리 호빗 인생이라니.

레이는 삐걱거리는 관절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

다비드의 떨어져 나간 목을 주워들며 간절히 바랐다.

내가 모르는 기능의 아티펙트, 예컨대 주인의 심장이 멈추면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게 설계된 아티펙트를 다비드가 가지고 있지 않기를 말이다.

"보육원 오는데 자기 목 날아갈 걱정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만."

천으로 다비드의 시체를 둘둘 말은 뒤 수레 위에 고정했다.

그 위를 한 번 더 천으로 덮었고, 그 위에 다시 지푸라기를 얹었다.

이 정도면 사람 시체를 실은 것처럼 보이진 않을 거다.

지금은 야밤이고 비가 장대처럼 내리니 사람 마주칠 일도 거의 없을 것이다.

설령 마주친다 해도, 현시점에서 내게 시비를 건 후 수레를 수색할 수 있는 인간은 백작령 내에서도 기사 정도는 되어야 했다.

"일단... 숨겨놓고, 고민하자고."

한 달 정도는 여유가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수레를 끌고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 깊숙이 들어가 시체를 버린 후 짐승에게 뜯어먹게 하는 것도 일견 나쁜 생각은 아닌 것 같았으나, 다비드는 결코 '실종'이 되어서는 안 됐다.

고위 마법사가 실종됐다고 판단되면 무조건 마법사 여럿이 조사를 위해 파견될 거고, 백작령을 전부 들쑤시고 다닐 거다.

게다가 나는 마법에 대해 무지했기에 마법사의 시야를 벗어날 방법을 몰랐다.

그러니 실종 처리는 안 됐다.

한 달 뒤에는 무조건 다비드의 시체를 내보여야 했다.

내가 죽였다고 고백하든, 남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든 말이다.

"케냐의 저장고가 이쯤이었는데."

케냐는 과거 백작령 암흑가를 이끌던 여자 중 하나로, 손속이 꽤 잔인했다.

덕분에 필립스 백작의 눈 밖에 나 꽤 수월하게 처형대에 올릴 수 있었다.

아무튼 과거, 케냐는 사람을 죽여놓고 추적을 피하기 위해 자기만의 시체 저장고를 만들었다.

산 속에 굴을 파고 적절한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공을 들였다고 들었는데, 케냐의 저장고 내부는 일정한 습기와 낮은 온도가 유지되고 있어 시체의 부패를 아주 자연스럽게 늦춰주었다.

케냐는 저장고에 시체를 몇 달 보관해 사망 시점을 특정짓기 어렵게 만든 후 다른 장소에 가져다 놓아 알리바이를 챙기고 수사에 혼란을 주곤 했다.

"지미가 사용할 일이 없어서 닫아놓긴 했는데, 결국 내가 사용하는구먼."

입 안이 텁텁해지는 걸 느끼며, 시체 냄새가 배어있는 케냐의 저장고에 다비드를 던져 놓았다.

시체의 습기가 증발해 미라처럼 되지 않게 방수천을 덮은 후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온몸이 젖은 채로 영하에 가까운 저장고에 들어갔다 나오니 몸이 꽤 추웠다.

잠시 제자리에 서 있었다.

오늘은 꽤 힘든 날이었다.

포션을 한 병 정도 더 마시고 싶었다.

"다들 이렇게 중독되어 가는 거지."

고개를 저은 후 마차를 끌었다. 오늘처럼 일이 좀 꼬여, 기분이 울적해질 때마다 습관적으로 찾아가는 곳이 있었다.

마침 이곳과 가까우니 들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흠, 술과 꽃이 필요하겠는데."

오랜만에 아버지를 뵙고 싶었다.

*

지미가 보호하는 가게의 술을 하나 털어온 레이는 다시 비를 맞으면서 공동묘지로 향했다.

지나가는 길에 피어 있는 수수한 꽃을 꺾어 손에 쥐었다.

공동묘지에 도착한 레이는 작은 묘비 앞에 섰다.

이 세계에선 성묘 예절이 좀 다르긴 하다만, 레이는 술을 묘비 앞에 둔 채 절을 두 번 하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반가워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버지."

술 병을 딴 레이가 묘비 주변에 술을 세 번에 나눠서 부었다.

"어차피 여기 찾아와 관리하는 사람이 저밖에 없으니 기왕이면 반가워해 주셨으면 싶네요."

낄낄 웃으며 술병을 탈탈 털던 레이가 위화감을 느꼈다.

근래 몇 주 정도 묘비에 찾아온 적이 없었는데, 묘비의 풀이 한 번 다듬어져 있었다.

레이가 주변을 한 번 돌아봤다.

야밤에 장대비까지 쏟아지는지라 설령 사람이 있다고 해도 인기척을 느끼기가 쉽지 않았다.

딱히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아버지 묘비에 손님이 늘어났다는 건 좋은 소식이었다.

"아이고."

묘비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은 레이가 하늘을 보았다.

참 많이 힘들었다.

피부는 난자당하고 관절은 박살 나고 장신의 꿈은 무너졌다.

당장이라도 교단에 찾아가 자고 있는 아델을 깨워 치료를 받고 싶었지만 이번만은 불가능했다.

현재 레이의 몸에 새겨진 상처들은 명백히 마법에 의한 상흔이었다.

이걸 남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이건 홀로 가지고 가야 하는 고통이었다.

"아버지께 드릴 말씀은 아닙니다만, 세상 구해본다고 설치는 게 생각보다도 참 좆 같습니다."

기껏 레전드리 고아 하나 뽑아놨더니 6서클 마법사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앞으로는 레어와 유니크 위주로 나왔으면 싶다. 고아 가챠 돌려보면 노멀 비율이 너무 높았다. 개창렬 가챠 같으니라고.

낄낄거린 레이가 호흡을 줄이며 눈을 감았다.

"앞으로 일이 더 잘 풀리길 바라주십시오. 내키지 않으시더라도."

*

김독자 컨샙질 하던 친구 새끼 대신 판타지 세계에 갓난아기로 환생했다.

미치고 돌아버릴 일이긴 했지만, 나름 두근거리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내가 활약하지 않으면 이 세계가 멸망한다는 점이다.

근데 굳이... 세계의 구원에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 세계가 멸망한다면 그 이유는 일 처리 똑바로 안 한 초월자 새끼 탓이었다.

내가 죄책감이나 책임감을 느낄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지금 갓난아기였고, 행동방침을 정하기엔 시기가 일렀다.

심지어 난 지금 앞도 제대로 안 보였다.

신생아는 눈을 제대로 뜨기까지 몇 개월 걸린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는데, 설마 그걸 직접 체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

"~~~"

"$$$"

그나마 소리는 잘 들렸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해독 권능이 빛을 발했다.

어제까지는 부모님이 떠드는 문장 중에 단어 몇 개만 해석이 됐는데, 이제 슬슬 문장 전체가 해석되기 시작했다.

누군가 귓가에 대고 익숙한 언어로 더빙해주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부모님의 대화를 들으며 보이지 않는 눈을 감았다. 갓난아기는 잠이 많았다.

"♡"

음, 시발.

신음 소리가 들렸다.

부모님 금슬이 좋다는 건 긍정적인 소식이다.

눈도 못 뜬 갓난아기 옆에서 떡... 사랑을 나누는 건... 뭐, 지혜로운 행동이라 생각했다.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는 갓난아기잖는가. 뭘 하든 옆에 두고 있는 게 현명했다.

근데 뭐 이리 대낮부터 몸에 열을 내고 있는가. 지나치게 금슬이 좋은 것도 생각해볼 문제였다.

"~~~%$?"

부모님이 몸을 겹치며 뭐라 떠들어 댔다.

무슨 뜻인지 전혀 알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아직 해독 권능을 끄고 켜는 게 익숙지가 않았다. 언어에 있어서는 거의 반 자동적으로 권능이 발동되기도 했고.

남자가 헉헉 거리며 말했다.

어때, 남편보다 좋아?

여자가 앙앙 거리며 답했다.

자기 너무 좋아.

"?"

권능이 고장나기라도 했나, 시발 이거 더빙이 좀 이상한데.

아니 시발 더빙이 존나 이상하다고.

디디에 (1)

24화

귀가 들리고 난 후 알게 된 사실은 내가 꽤 부유한 가정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귀족은 아니었지만 나름의 영민함과 성실함을 토대로 적지 않은 재산을 모았다.

헌데 여자 보는 눈은 영 없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가정에도 충실한 훌륭한 사람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내 친부가 아니었다.

생물학적 애미애비가 떠드는 소리를 듣고 알게 되었다.

시이발 내가 뻐꾸기라니. 내가 뻐꾸기라니!

이세계 환생까지 해놓고 뻐꾸기 처지라니!!

이제 슬슬 의심이 든다. 초월자란 새끼는 그저 날 엿 먹이고 싶어서 여기다 떨군 것이 아닐까?

세계를 구원하라고?

개-새끼야 그럼 지원이나 똑바로 해주든가.

다시 한 번 귓구멍에 남녀의 교접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아직 나지도 않은 이가 갈리는 것을 느꼈다.

이딴 식으로 날 엿먹이다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들끓어 올랐다.

이렇게 된 이상 마왕 편에 선다. 마왕 옆에 붙어서 내가 먼저 제국을 밀어버릴 것이다.

제국을 멸망시킨 날 반드시 하늘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세울 것이다.

신음 소리는 계속해서 들렸다.

"아우에으, 아바바바(작작 좀 해, 시발년놈들아)!!"

혼심의 힘을 다해 욕설을 뱉었지만 아가리로 나오는 건 옹알이뿐이다.

생물학적 애미가 날 쓱 보더니 깔깔 웃었다.

"자기, 우리 둘째도 만들까?"

"둘째는 누가 키우라고?"

"설마 자기 보고 키우라고 하겠어?"

생물학적 애미애비가 깔깔거렸다.

그들은 관계를 맺으며 조미료를 치듯 내 호적상 아버지를 모욕했다.

진짜 돌아버릴 것 같네.

마음 깊이 맹세했다.

제국을 지워버리기 전에, 일단 도구를 들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저 년놈부터 찔러죽여 버리겠다고.

허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패륜을 저지를 직접적인 기회를 잡는 일은 없었다.

*

"야."

"...?"

"죽어. 여기서 계속 자면?"

"끙, 그러게요. 궁색 좀 그만 떨어야지."

레이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서서히 줄어가던 호흡이 강제적으로 안정을 찾았다.

몸이 추웠고 묘비에 기대고 있던 등이 아팠다.

무엇보다 거지 같은 꿈을 꿔서 기분이 나빴다.

갓난아기 때의 기억은 정말 여러모로 상기하고 싶지가 않았다.

굳이 생물학적 애미애비와 함께했던 병신 같은 기억을 제하고라도, 바깥세상과 접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갓난아기의 몸뚱이는 툭하면 열이 오르길 반복했다.

태어난 후 몇 달 동안은 하루종일 감기를 달고 사는 느낌이었다.

"후우, 후우."

그래, 지금처럼.

레이가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닦아냈다.

일어나기 위해 몸을 들썩이는데 묘지 옆에 서 있던 여자가 물었다.

"너가 했어?"

"뭘요."

"관리."

"?"

"묘비 관리."

"그렇죠. 저 말고 딱히 할 사람이 없는지라."

"알아?"

"네?"

"이 사람. 아냐고."

레이가 여자를 바라보았다.

말 하는 게 나사 하나가 빠져있는 것 같아 무시하고 지나칠까 싶었지만, 알 수 없는 위화감이 여자에게 느껴졌다.

'내가 아는 사람인가?'

어두워서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신장이나 차림새를 고려하면 나이가 적지는 않아 보였다.

기억을 뒤져봤지만 안면이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잠시 고민한 레이가 답했다.

"제 아버지였다고 합니다. 친부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요."

"친부?"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의미죠."

"...아빠라면서?"

"그러니까 제 말은."

레이가 머리카락의 물을 신경질적으로 털어냈다.

"이분이 호적에 제 아버지라고 등록되어 있었긴 합니다만, 제 애미에게 씨앗을 준 생물학적 애비는 다른 사람이었다, 이 말입니다."

"...!"

여자는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입을 벌리고 있다가 되물었다.

"그럼 아니잖아?"

"뭐가요."

"아빠 아니잖아?"

"호적상으로는 아버지셨습니다. 피붙이는 아니지만 이 묘비 관리할 사람이 저밖에 없어서 말이죠, 제가 아버지 묘비를 관리해 왔어요. 물론 아버지는 제게 아버지라 불리는 게 싫으실 수도 있겠지만."

어깨를 으쓱한 레이가 묘비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찾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으니, 불만이 좀 있어도 접어두셨을 겁니다."

몸이 더 얼어붙기 전에 지붕 있는 곳으로 들어가야 했다.

비틀거리던 레이가 균형을 바로잡고 여자를 마주 봤다.

"저는 가볼게요. 혹시 아버지랑 인연이 있으셨다면 가끔 찾아와주세요. 외로우신 분인지라. 아, 깨워주신 거 감사했습니다."

레이가 등을 돌렸다.

비틀거리며 두 발자국 정도 걸었을까. 유리병 하나가 지면을 데구루루 굴렀다.

안에 담긴 시푸른 액체를 보며 레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뭡니까?"

"포션."

"나 먹으라고요?"

"다쳤잖아."

"혹시 저 누군지 아시나요?"

"몰라. 하지만 이제 알아. 다음에 봐."

"다음에요?"

"응. 지금은 해야 돼."

"뭘 해요?"

"약속들. 지켜야 해."

"뭐, 일 잘 풀리길 바랄게요."

고개를 끄덕인 여자가 멀어졌다.

레이는 땅에 굴러다니는 포션을 주워들었다.

시푸른 액체 위로 푸른 빛이 은은히 흘러가는 게 마치...

"방사능 덩어리 같은데."

대체 무슨 포션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작정 입에 넣기는 불안해 보였다.

애초에 모험가들이 가장 경계하는 것 중 하나가 '남이 준 포션'이었다.

레이는 찰랑거리는 액체를 보며 고민하다, 비에 축 젖어 무거워진 옷을 느끼며 불현듯 깨달았다.

"아, 그렇군."

여자에게서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

"옷이 젖지 않았어."

마법사인지 기사인지 모르겠으나 마나를 쓸 줄 아는 게 분명했다.

얼굴을 한 번 쓸어올린 레이가 포션을 들이켰다.

맛은 생각보다 상쾌했다.

*

다비드가 죽고나서도 며칠이 지났다.

거울을 보며 몸 단장을 마친 지미가 레이를 향해 물었다.

"너 얼굴 그거 치료 안 받을 거냐?"

"얼굴요?"

레이가 자기 콧잔등을 가로지르는 흉터를 더듬었다.

큰 상처였지만 신성력을 활용해 집중적으로 치료받으면 흉터를 없앨 수 있었다.

비용이야 많이 깨지겠지만 아델에게 부탁했으면 푼돈만 받고 치료를 해주었을 것이다.

레이 또한 얼굴에 그림 그리는 취미는 없었다. 허나 아델을 찾아갔다간 온몸에 새겨진 상처를 들킬 게 분명했다.

포션도 좋은 걸 먹었으니 다비드와 전투 흔적이 완전히 아물 때까지는 아델에게 접근 금지였다.

레이가 말이 없자 지미가 큰 흉터가 새겨져 있는 자기 어깨를 보여주며 충고했다.

"그거 시기 놓치면 나중에 지우려 해도 안 지워질 텐데. 게다가 얼굴이잖아."

"뭐, 큰 상관..."

레이가 적당히 대답하고 넘기려다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말을 멈췄다.

지미와 매튜가 도끼눈을 한 채 레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의심받고 있네.'

잘 받고 있던 치료를 안 받겠다고 하니 의심이 들만 했다.

평소에도 골 때리는 사고를 워낙 많이 치고 다녔던 레이였기에 둘의 경계심은 이미 최고치에 이르러 있었다.

어물거리며 넘겼다간 일이 귀찮아질 것을 예감한 레이가 목을 가다듬었다.

"음. 지미, 매튜. 이건 다른 사람들한테 비밀인데."

"응?"

"거울을 보니까 상처가 좀 멋있게 보이더라고요."

"뭐?"

"좀 더 남자다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강해 보이기도 하고. 얼굴에 새겨진 흉터를 남이 보면 위압감 같은 것도 느끼지 않겠어요?"

"..."

납득이 될 듯 말 듯했던 지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9살 꼬맹이라면 충분히 저런 생각을 가질만했다.

저 나이 때 애들은 놀다가 팔뚝이 찢어지면 한참 울다가도 나중 가서는 영광의 흉터라고 다른 애들한테 자랑하고 다니고는 했다.

그러니 9살짜리 꼬맹이가 저런 소리를 하는 건 전혀 이상치 않았지만, 상대가 레이다 보니 껄끄러움이 가시질 않았다.

"레이, 지금 네 인상도 충분히 더러워."

지미가 남들에 비해 길게 찢어진 레이의 눈을 흉내내듯 양손을 눈가에 가져다 댄 채 좌우로 당겼다.

"관리만 잘해도 성격 나빠 보인다는 소리 듣고 살 텐데 거기서 굳이 더 힘든 길을 걸어야 겠냐?"

"이런 인종차별자 새끼..."

"지금 뭐라고 했냐?"

"저는 야성미 넘치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했어요."

레이가 내심 울컥한 감정을 숨기며 입꼬리를 올렸다.

지미와 매튜는 의심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면서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슬슬 준비하지 그러냐? 디디에 경이 곧 도착하실 거다."

"마중은 잘 부탁할게요."

"너 정도 재능에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운다면 발전이 훨씬 빨라질 텐데, 넌 기대도 안 되냐? 왜 그렇게 평온해?"

"글쎄요."

레이는 이미 하르시아의 검술을 알고 있다.

마나 연공법 또한 함부로 익혔다간 몸이 부하를 감당 못할 가능성이 있기에 익히기가 조심스러웠다.

기사를 보육원에 초대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서였다.

레이가 기사를 상대로 무언가를 확실히 얻는 방법은...

"대련을 한번 해보고 싶네요. 기사님이랑."

*

디디에는 굳은 얼굴로 말을 몰고 보육원으로 향했다.

간소한 무장을 했고, 주변의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 종자 또한 대동하지 않았다.

미리 보육원 앞에 마중을 나와 있던 지미와 매튜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디디에 경."

부모 없는 천민 아이들을 상대로 검술을 가르치는 일이다.

기사로서 불명예스러운 일이라고 여긴다 해도 반박하기 어려웠다.

지미와 매튜는 고개를 숙인 채 분위기를 살폈다.

차게 가라앉은 디디에의 눈동자가 보육원을 한 바퀴 훑었다.

디디에 (2)

25화

보육원을 훑어본 디디에가 말에서 내렸다.

지미와 매튜는 가까워지는 디디에의 그림자를 보며 입에 담겨 있던 침을 꿀꺽 삼켰다.

바짝 긴장해 있는 둘을 번갈아 본 디디에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지미 님, 매튜 님."

님?

지금 님이라고 했나?

예상치 못한 호칭에 지미와 매튜는 바로 답변을 못하고 얼을 탔다.

디디에는 얼음장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부드러웠다.

"아가씨의 흔적을 수색할 때 큰 도움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두 분이 아니었다면 수색이 크게 지체되었을 겁니다. 필립스 가의 기사로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눈알을 빙글빙글 돌리던 지미가 뒤늦게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평소에 백작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겸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아버지께서도 이번 일로 식견이 넓어졌다며 한 말씀 하셨습니다."

"그, 가, 감사합니다."

"백작님께서 제게 보은을 대신 행하라 명하셨으니, 백작님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임무에 충실할 생각입니다. 잘 부탁하겠습니다."

"자, 잘 부탁드립니다."

디디에와 눈이 마주친 지미와 매튜기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였다.

*

보육원에 기사가 온다는 소문은 그제부터 아이들 사이에 돌고 있었다.

검술 교육이 시작되면 어차피 막지 못할 이야기인지라 레이는 입단속을 포기하고 아이들의 정신 무장에 신경 썼다.

기껏 기사까지 초청했는데 아이들의 태도가 해이하여 기사의 눈 밖에 난다면 손해가 막심했다.

'지금 봐서는 크게 걱정 안 해도 되겠다만.'

이 세계의 사람들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기사에 관한 영웅담을 동경한다.

일신의 무력이 군단과 버금가는 인간병기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이니, 영웅담에서 풀어내는 기사를 향한 선망과 공포는 나이를 가리지 않고 마음 깊이 내제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언제 기사가 올지 모른다며 아침부터 발을 맞춰 걸으며 군기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들뜬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피식 웃은 레이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 보육원 정문을 바라봤다.

'저 사람이... 디디에구나.'

체격이 무시무시했다.

평범한 남성에 비해 건장한 편인 지미와 비교해도 몸집이 눈에 띄게 차이 났다.

지면에서 일어선 레이가 먼저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여기까지 찾아와주셔서 영광입니다, 디디에 경."

레이를 내려다보는 디디에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대가 레이로군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아가씨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야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낮춰주십시오. 기사님께서 신분이 천한 저를 이리 높여주시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알겠다."

디디에는 헛웃음이 새어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레이가 혓바닥을 꽤 잘 굴린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으나, 레이에게서 느껴지는 정적인 감정이 디디에를 당황시켰다.

'기사를 처음 마주한 아이는 으레 흥분해서 목소리를 떨길 마련인데.'

레이는 지나치게 차분했다.

무지에서 나오는 평온이라 하기엔 위화감이 짙었다.

디디에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역시 기대가 됐다.

"보육원을 한 번 둘러봐도 되겠는가?"

"제가 안내해 드려도 될까요?"

"부탁하지."

레이가 시종처럼 디디에의 곁을 걸었다.

울타리를 끼고 돌면서 디디에가 감탄했다.

"다들 얼굴에 생기가 도는구나."

"의외입니까?"

"좀 더 어두울 것이라 생각했지. 선의가 느껴지는 곳이야. 벌써 작은 선입견이 벗겨지는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수업 말입니다만, 5명 내외의 인원으로 조를 쪼개 검술 지도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적절한 인원이야."

"첫 번째 수업은 가장 재능 넘치고 열의 넘치는 친구들을 모았습니다. 잘 살펴주시길 바라요."

"나는 백작님의 보은을 대리하여 왔다. 최선을 다할 테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아이들의 성취가 백작님께 보고될까요?"

"그렇다."

"백작님에게만 보고되는 겁니까?"

"..."

자리에서 멈춘 디디에가 레이를 돌아보았다.

자기들의 성취를 보고해 백작님의 눈에 띄게 해 달라. 레이가 그런 속셈을 품고 이야기를 꺼낸 줄 알았으나 두 번째 질문을 보니 아니었다.

당돌한 질문이었으나 순순히 답해 주었다.

"백작님께서 내게 맡기신 임무다. 임무의 내용은 함부로 누설하지 않는다. 백작님의 허가 없이는 내 아버지께라도 보육원의 일을 함부로 입에 담지 않을 것이다."

"과연 기사시군요."

"불쾌한 질문이었다."

"죄송해요. 근래 마법사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워낙 많이 접해서요."

"하하하!"

디디에가 웃음을 터뜨렸다.

입술 위는 여전히 차갑게 굳어 있었지만 어쨌든 처음 보인 표정 변화였다.

"기사와 마법사는 지향하는 가치가 많이 다르다. 마법사에 대한 소문이야 나도 잘 안다만, 기사와 겹쳐보면 서운하지."

"죄송해요."

레이가 속으로 혀를 찼다.

마법사에게 한 번 데이고 나니 의심병이 도지는 느낌이다.

디디에가 겉으로 보이는 만큼 속까지 충직한 기사이길 바라며 보육원의 뒤쪽 공터로 향했다.

하루 전 사람들을 시켜 공터 중앙에 나무 기둥을 빽빽이 세워 목책을 만들어 놨다.

일단 기사의 가르침이니, 함부로 남에게 보일 수 없었다.

목책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람에 휘날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가장 먼저 보였다.

카렌이 몸에 잔뜩 힘을 주고 외쳤다.

"안녕하세요! 카렌이라고 합니다!"

"와! 진짜 기사님이다! 전 요하나라고 해요! 히히!"

요하나는 마냥 좋다는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물론 긴장을 안 한 건 요하나 혼자였다.

"악! 저저, 데, 데런이라고 합니다!"

멍하니 서 있던 데렌은 뒤에 서 있던 지미가 등을 살짝 꼬집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했고, 이안은 사지를 벌벌 떨며 몇 번이고 말을 더듬었다.

"이, 이, 이, 이, 이안이라고 하, 하, 합니다."

"만나서 반갑다. 디디에라고 한다. 디디에 경...은 너무 딱딱하군. 그냥 교관님이라고 불러도 된다."

아이들을 하나하나 살핀 디디에는 귀족이 아닌 자가 기사에게 배움을 청할 기회가 닿는다는 게 얼마나 귀중하고 축복받은 일인지 설명했다.

백작님의 관대함을 찬양했고, 또한 지미와 매튜, 레이에게 감사하라고 충고했다.

할 말을 마친 디디에가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요하나, 카렌, 데런, 이안. 첫 번째 수업은 이 네 학생이 참가하는 것이 맞습니까?"

"큼, 그, 디디에 경."

눈치를 보던 지미와 매튜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우리에게도 가르침을 내려주실 수 있습니까?"

"...?"

디디에가 잠시 당황하고 있자 레이가 백작과 브릿지로 주고받은 편지를 건네었다.

"백작님께 허락은 구했습니다."

"허. 백작님께서 널 정말 아끼시는구나."

"관대하시게도 제 건방을 용인해주고 계시죠."

"좋다. 바로 수업을 시작하도록 하지. 축기라는 개념부터 설명하겠다."

*

마나는 세상 만물에 존재한다.

인간 또한 삶을 살아가며 체내에 자연스레 마나가 쌓인다.

이를 억지로 집약시켜 밀도를 높이는 게 축기의 첫 번째 과정이다.

밀도가 일정 수치 이상 높아진 마나는 자연스레 응집력을 가지며 주변의 마나를 끌어당긴다.

"마나 연공법은 주요 혈관을 따라 응집된 마나를 순환시켜 체내의 마나를 온전히 흡수하고 주변의 마나를 체내로 끌어당기는 기술을 일컫는다."

물론 체내에 응집된 마나를 바로 활용하는 건 비효율적인 짓이다.

성질이 상이하고 그 농도조차 들쭉날쭉해 검기로 뽑아내봤자 쉽게 바스러졌다.

때문에 기사들은 마나 정제법을 활용해 마나의 성질을 하나로 고정시키고 심장에 코어를 생성했다.

"마나의 압축, 제어, 가속 등의 모든 행위에 있어 심장의 코어는 필수적인 역할을 맡는다. 체내에 아무리 마나가 많아도 코어가 없다면 마나를 다루는데 한계가 생기지. 그럼 이제 마나 연공법에 대해 본격적으로 배워보겠다."

디디에가 수건과 봉투 하나를 요하나에게 쥐여주었다.

"지금부터 압축한 마나를 네 몸에 주입해 연공법에 따라 순환시키겠다. 마나가 순환하는 감각을 잘 기억하도록."

"네!"

요하나는 일단 고개부터 끄덕였다.

디디에가 고농도의 마나를 요하나의 심장에 주입해 주요 혈관을 거쳐 순환시키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고밀도의 마나를 생전 처음 받아보는 요하나의 혈관이 곧장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응윽?"

삽시간에 꼬여가는 속을 느낀 요하나가 윽윽 거리며 몸을 떨다 입을 헤 벌렸다.

"우에에에에엑..."

토했다.

쏟아져 내리는 토사물에 다른 아이들이 기겁하며 한 발짝 물러섰지만 디디에는 표정 하나 안 변하고 마나가 정상적인 길을 따라 순환토록 인도했다.

애초에 구역질은 마나 연공법 전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현상이다.

한 바퀴 순환을 마친 디디에가 마나의 제어를 멈췄다. 요하나는 당연하다는 듯 제어를 넘겨받아 두 번째 순환을 시작했다.

"우에에에엑..."

계속해서 토했다.

디디에의 미간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가 되돌아왔다.

"두 번째 순환을 마무리한 후 속을 다스리고 있어라."

다음 순서는 카렌이다.

토사물과 하나 된 요하나의 끔찍한 몰골을 확인한 카렌이 레이에게 눈을 돌렸다.

"나, 나가!"

"응?"

"나가 있으라고!"

"카렌, 구역질이야 마나 연공법 배우면서 누구나 다 거치는 과정이야. 굳이 숨기려 할 필요 없어."

"레이는 변태야!! 빨리 나가!!"

"등 돌리고 있을 게."

"그냥 나가라고!"

카렌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등을 퍽퍽 치자 레이는 못 이기는 척하며 울타리 밖으로 나갔다.

되도록이면 집중해야 하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좋았다.

잠시 뒤 새로운 구역질 소리가 목책 안에서 들렸다.

"흡! 흡! 흐우우에에엑..."

계속해서 구역질을 이어가던 카렌이 토사물에 피가 좀 섞여 나왔는지 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으엑.... 나 피나왔어요. 나 죽는 거예요?"

"걱정 안 해도 된다. 자연스러운 과정이니."

"레이, 나 피나와. 나 괜찮은 거야? 레이, 나 죽을 것 같아."

"아이고, 괜찮다니까."

결국 다시 목책 안으로 들어선 레이가 여러 이물질로 범벅되어 있는 카렌의 입을 수건으로 닦아주며 속이 진정될 때까지 달래주었다.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린 카렌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레이와 등지고 앉았다.

그 사이에 아이들 모두에게 마나 연공법을 지도해준 준 디디에가 지미에게 다가갔다.

"연공법을 제대로 배우신 적 있습니까?"

"길바닥에 돌아다니는 책을 주워 감으로 익혔습니다."

"흠, 일단 한 번 제 인도에 따라 마나를 순환시켜 보시겠습니까?"

디디에가 수건과 봉투를 건네자 지미가 손을 저었다.

"이래 봬도 잔뼈 굵은 용병입니다. 너무 아이 취급은 하지 말아주십쇼."

"음... 알겠습니다."

잠시 뒤 피 분수와 토사물이 지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크에에에에엑!!!"

"꺄아악!!"

사방에 뿌려지는 지미의 분비물을 뒤집어쓴 아이들이 비명을 질러대며 도망쳤다.

매튜 뒤에 선 레이가 벌레 씹은 표정을 했다.

디디에 (3)

26화

못 볼 꼴을 본 매튜가 봉투를 귀에다 건 후 자기 입 아래에 단단히 붙였다.

지미가 하늘에 무지개가 맺힐 만큼 토사물을 뱉어내는 통에 아이들은 계속해서 목책 안을 뛰어다니며 비명을 질렀다.

매튜를 방패로 내세운 레이가 아이들을 불러 모아 한소리 했다.

"다들 조용."

"으에에..."

"냄새나."

"하늘에 무지개 떴어."

"무지개 더러워..."

"조용."

레이가 눈에 힘을 주자 그제야 아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다들 기사가 되고 싶다고 했잖아. 기사는 항상 번쩍번쩍한 갑옷을 입고 고결하게 전장을 누비는 존재가 아니야. 때로는 똥물에 몸을 담그고, 때로는 며칠을 굶어가며 임무를 수행하지. 근데 고작 남의 토사물 좀 묻었다고 우는 소리 할 거야?"

아이들이 풀이 죽은 채 고개를 작게 저었다.

"아니요..."

"다들 정신 차려. 기사님 앞에서 오두방정 떨지 마. ...근데 냄새가 좀 나긴 하네."

점심에 뭘 퍼먹은 거야 대체.

투덜거린 레이가 수건을 탈탈 털고서 아이들의 머리를 꼼꼼히 닦아주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속이 안정된 지미가 지면에 쓰러진 채 꿈틀거렸다.

잠시 레이에게 눈길을 준 디디에가 지미를 보며 묘한 표정을 했다.

"잘못된 마나 운용 탓에 혈맥의 2할가량이 막혀있습니다. 이 상태로 검기까지 활용했던 겁니까?"

"그륵, 그에엑..."

"어린 나이에 제대로 배웠다면... 음, 아닙니다."

쓸데 없는 소리였다.

고개를 저은 디디에가 첨언했다.

"지금은 막힌 혈도를 다시 개척하는 데 집중해야겠습니다. 꽤 시간이 걸리겠지만, 계속 정진하면 엑스퍼트 끝자락에 닿을 수 있을 겁니다."

디디에가 마나의 밀도를 좀 더 높여 지미의 몸 안에 주입했다.

반응은 곧장 돌아왔다.

"크에에에엑!!"

토사물이 와다다다 쏟아졌다.

바들바들 떠는 지미를 빙 돌아간 레이가 물었다.

"공복 상태에서 훈련을 진행하는 게 낫지 않나요?"

"속이 차 있는 게 좋다. 아니면 위장이 망가지는 경우가 생긴다."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래."

디디에는 얼굴에 튄 토사물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은 실제로 똥물에 입수하거나 짐승의 내장에 머리부터 들이미는 훈련을 거친다.

토사물이 튄 걸로 엄살떨기엔 디디에는 충분히 숙련된 기사였다.

"아이들의 재능이 훌륭한 편이더군."

"다행이네요. 보육원 에이스들이라서, 평가가 박하면 어쩌나 했어요."

"...그대의 수업은 언제 진행하지? 원한다면 야밤에 따로 시간을 잡아도 된다."

"연공법 수업보다 다른 걸 부탁드리고 싶어요."

"...? 검술을 시사 받길 원하나?"

"대련을 부탁드리고 싶어요."

잠시 말이 없던 디디에가 턱을 훑었다.

"네 재능이 훌륭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헌데 가진 재능을 완전히 개화시키기 위해선, 기초를 잘 다져 놓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디디에가 지미와 매튜를 번갈아 바라봤다. 미약한 안타까움이 눈가에 번졌다.

"저 두 분 또한 나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자질을 타고났을 터다. 허나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울 기회가 없어 제자리에 머물고 있지. 너는 기회를 잡았으니,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길 바란다."

레이는 한 번 더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할 시간이 왔음을 느꼈다.

천재 코스프레를 시작한 시점에서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허나 그 또한 범인의 이야기지요. 저는 다릅니다."

"..."

디디에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레이는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이를 꽉 깨물고 쪽팔림을 참았다.

마나 연공법은 함부로 익힐 수 없었고, 기초 검술은 하르시아의 공간검에도 내재되어 있었다.

자세 몇 개쯤은 교정받아도 되겠지만 그보다 대련을 통해 검술을 숙련하고 실전 감각을 익히는 게 훨씬 효율적이고, 급했다.

"흠."

디디에는 잠시 고민했다.

'머리가 좀 똑똑하다 해도... 역시 9살은 9살인가?'

어린 아이 특유의 고집과 스스로를 향한 과신이 레이에게서 느껴졌다.

저 나이에 벌써 마나를 각성하고 어른들을 때려눕혔으니 세상 오만한 감정을 가져도 어리석다고 폄하할 이유는 없다.

다만 스스로의 오만에 빠져 가르침을 거부한다면 불세출의 재능을 지녔다고 해도 마스터에 오를 시기가 10년 이상 늦춰질 터였다.

'자존심을 한 번 철저히 꺾어야겠군. 마침 백작님이 내리신 임무도 있으니.'

레이의 실력을 정확히 파악해달라.

백작이 내린 임무 중 하나였다.

디디에는 레이가 이제 막 마나를 각성했다고 알고 있었지만 혹시 또 모를 일이었다.

기왕 이리된 거, 레이의 한계를 끝까지 끌어내 볼 생각이었다.

"네 부탁을 들어주겠다. 대신 내기를 하나 하자꾸나."

"내기요?"

"5분간의 대련에서 내게 마나를 쓰게 만들어라. 성공하면 보상을 하겠다."

"마나... 감각의 보조는 어찌하실 건가요?"

기사급의 전투에선 마나를 활용한 오감의 강화가 필수적이다.

디디에가 고개를 저었다.

"마나는 전혀 사용하지 않을 거다. 그 정도 핸디캡은 있어야 내기가 성립할 거다."

"근력을 강화하지만 않으시면 돼요. 그래야 균형이 맞겠네요."

디디에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레이의 재능이 뛰어나다 해도 이건 너무 주제 파악을 못 했다.

디디에는 실망한 기색을 감추며 큼직한 미끼를 던졌다.

"네가 성공한다면, 내 역량이 허하는 선에서, 기사도에 어긋나지 않는 부탁을 하나 반드시 들어주겠다."

"진심이세요?"

"내 기사로서 명예를 걸고."

"음... 제가 실패한다면, 앞으로 디디에 경의 교육을 충실히 따를게요. 또한 마찬가지로 디디에 경의 부탁을 하나 들어 드릴게요. 이 정도면 될까요?"

"나는 기사로서 명예를 걸었으니, 그대도 그대의 의지를 증명해야지."

디디에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내심 레이의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던진 농이었는데, 레이는 표정 하나 안 변하고 답했다.

"제 어머니의 명예를 걸겠습니다."

"그래, 그대 어머니의 명예를... 어머니?"

사전 조사를 통해 레이의 어머니가 누군지 알고 있던 디디에가 눈을 콱 좁혔다.

이게 어디서 개수작이냐.

대충 그런 의미가 담겨 있는 디디에의 시선을 받으며 레이가 뻔뻔하게 아가리를 털었다.

"밑바닥 천민에게도 명예가 있습니다. 저는 항상 제 어머니를 존경해 왔습니다."

"..."

디디에가 입을 우물거렸다.

뭐라 한마디 하고 싶긴 한데 뭐라 해도 패드립이 될 것 같아 할 말이 궁했다.

고민하던 디디에는 깨달았다.

'외통수다.'

9살과 진지하게 느금마 명예의 가치에 대해 말싸움할 게 아니면 결국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으음... 그래, 알겠다."

"바로 시작하실 건가요?"

"그래. 그러자꾸나."

졸지에 기사와 매춘부의 명예를 동일 선상에 놓게 된 디디에가 찜찜함을 버리지 못하고 목검을 들었다.

어째 말리고 시작하는 기분이다.

설마 의도한 걸까? 어처구니없는 가정에 괜히 입꼬리가 실룩였다.

한편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지미가 서로에게 목검을 겨눈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레이 저놈이 기사님까지 등쳐먹으려 드는구나!'

디디에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다.

저 족보도 없는 놈이 재능만 믿고 아가리를 터는구나! 내가 오늘 참된 교육을 뼛속 깊이 새겨주겠다!

'근데 생각대로 될 리가 없지.'

지미가 디디에에게 측은한 눈빛을 보냈다.

디디에는 지미의 눈빛을 이해 못한 채 레이를 향한 기세를 가다듬었다.

"시작하지. 선공을 양보하겠다."

"알겠습니다."

목검을 손에 쥔 레이가 호흡을 골랐다.

실력을 숨겨야 하나 고민했지만 이미 백작에게 들킨 뒤다.

제대로 된 성장을 위해선 결국 검을 받아줄 상대가 필요했다.

상대를 고를 거면 백작 휘하의 충직한 기사만큼 적절한 인물도 없었다.

'최선을 다한다.'

화악!

땅을 툭툭 밀어낸 레이가 어느새 디디에 앞에 섰다.

예상보다 빠르다.

디디에가 그런 생각을 품은 순간 레이가 잔상을 남기고 사라졌다.

사아악!

흙바닥을 긁는 소리가 뒤늦게 디디에의 귓가를 때렸다.

날카로운 섬찟함이 등골을 타고 오르는 것을 느끼며, 몸을 회전시킨 디디에는 기꺼이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콰앙!!

"?!"

엄청난 반발력에 몸이 밀려난 레이가 지면을 한 바퀴 구른 후 자세를 다시 잡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위력의 충돌이었다. 목검이 반쯤 파여 있을 지경이었다.

'뭐지?'

고작 검 한 번 부딪쳤을 뿐인데 이 꼴이다.

아무리 디디에가 고강도의 훈련을 거친 대단한 기사라 해도 마나를 사용 않고 이만한 괴력을 낼 수는 없었다.

고개를 처들은 레이가 흠칫 놀라 몸을 굳혔다.

그 냉철해 보였던 디디에가 웃고 있었다.

만면에 웃음꽃을 피운 채, 참으로 기껍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출하고 있었다.

디디에가 팔을 휘둘렀다.

쾅!

디디에의 짐 근처에서 기파가 터지며 검 두 자루가 허공을 날았다.

여러 차례 회전한 검 두 자루가 레이와 디디에를 사이에 두고 지면에 박혔다.

디디에가 시퍼런 예기를 발산하는 검을 뽑아들었다.

"내기는 내가 졌다."

단 일격이었지만 디디에는 깨달을 수 있었다.

레이의 속도, 발재간, 검속, 검로, 검압, 대응.

그 모든 것들이 제대로 된 엑스퍼트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디디에는 백작에게 감사했다.

가히 영광이었다. 미래의 소드 마스터에게 짧은 시간이라도 스승의 역할을 자처하게 되었다는 건.

"지금부터 제대로 덤벼 봐라."

레이 또한 검을 뽑았다.

망설일 것 없었다.

"기꺼이."

*

"엉덩이가 아프구나아아..."

"승마를 배우긴 하셨어야 합니다."

모하메드가 바짝 붙어 알레시아가 탄 말을 이끌며 웃었다.

"결국 이리 익히실 걸, 왜 그렇게 배우기 싫다 고집을 부리셨습니까?"

"시야가 높아서 무섭구나. 아버지가 보육원을 왕복할 때 마차를 금하지만 않으셨으면 평생 말을 타지 않았을 것이다아..."

"보육원을 안 가면 되는 것 아닙니까?"

모하메드가 순진한 척하며 물었다.

입술을 삐죽거린 알레시아가 중얼거렸다.

"나의 기사는 내가 관리해야 하는 게야..."

저앞에 보육원이 보였다.

금세 말을 타고 보육원 입구에 당도한 알레시아가 말 위에서 몸을 파닥거렸다.

속으로 한숨을 쉰 모하메드가 알레시아를 붙잡아 말에서 내려주었다.

"너는 저번에 보았던 얼굴이구나."

"허억!"

지미 패밀리에 소속되어 있으며 보육원 경비 업무를 하고 있던 졸탄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알레시아가 보육원에 머물렀을 때 남에게 말도 못하고 부담감 때문에 홀로 끙끙 앓았는데, 얼마 되지도 않아 알레시아를 다시 마주하니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곧장 한쪽 무릎을 꿇은 졸탄이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음, 레이가 검을 배운다기에 실력을 보러 왔느니라!"

"그, 그, 그럼 들어가 보시죠."

보육원에 들어서자 알레시아를 발견한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일일히 손을 흔들어주며 마음껏 인기를 즐긴 알레시아가 목책을 향해 걸었다.

목책 내부에서부터 엄청난 굉음이 연거푸 울리고 있었다.

카앙!! 콰콰쾅!!

"오! 전투를 벌이고 있나보구나. 모하메드 경! 나를 좀 올려주게나!"

"아가씨, 그건 위험하..."

"어서 올려주게나!"

"..."

감각을 최대한 날카롭게 갈아낸 모하메드가 알레시아의 겨드랑이를 붙잡고 하늘 높이 들어주었다.

시야가 확 높아지며 목책 안의 광경이 알레시아의 눈에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