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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본사에 잠깐 들러서 후딱 밀린 결재부터 마치고 바로 천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규선 씨를 만나자마자 한 병 정도 챙겨온 와인부터 건넸다.
"이게 뭐예요?"
"일단 잡솨봐. 몸에 좋은 거니 쭈욱 들이키십쇼."
무슨 약장수가 하는 말처럼 느껴졌는지, 규선 씨가 피식 웃으면서 와인을 마셨다.
"뭐야, 이거 술이에요?"
"어때요?"
"... 엄청 맛있네요? 저 술 싫어하는데."
"그렇죠? 그런데 거기에... 넥타르라는 성분이 들어있대요."
"넥타르요? 그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거 아니에요?"
"그렇대요."
"... 신화 말고도 어디서 들어본 거 같기도 한데."
굳이 규선 씨에게는 숨길 게 별로 없어서, 서브 클래스를 얻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랬더니 놀란 눈으로 잠깐 와인을 바라보다가, 그걸 들고 급히 어디론가 갔다.
"어, 어디 가요?"
"분석부터 해봐야죠."
그리고 한참 뒤.
실험실에서 나온 규선 씨가 내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과학적으로는 별다른 성분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그냥 와인이에요."
"... 그래요?"
그런데 확실히 뭔가 다르긴 다르던데.
"네, 하지만 연금술로는 다르죠. 과학이 파악할 수 있는 영역은 한정적이니까요."
"오호."
"그리고 어디서 들어본 거 같았는데, 역시나였어요."
"... 네?"
"엘릭서 제조법 서두에 나와 있어요. 나는 넥타르(Nectar)나 암리타(Amrita)와 같은 것의 발치에라도 이르기 위해 이것을 만든다. 라고요."
연금약액 엘릭서.
연금술 테크트리의 끝판왕이라고 불러도 좋을 법한 그것이...
"넥타르랑 암..."
"암리타요. 인도 경전에 나오는 신들이 마시는 음료죠. 넥타르 역시 마찬가지고요."
"... 그러니까 그 말대로라면... 엘릭서가 인공 넥타르 뭐 그런 겁니까?"
"그것도 아주 조악한 형태죠. 연금술의 시조에 따르면 그래요."
... 대단할 줄은 알았는데 생각보다도 엄청나게 대단한 거였군.
연금술의 최종 숙련 단계에서 엘릭시르라는 희귀 재료까지 사용해서 간신히 만들 수 있는 게 엘릭서인데, 그게 고작해야 열화판 넥타르였다는 거지?
"연금술 스킬을 활용하면 추출할 수도 있어요. 100% 추출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80% 정도는 가능해요."
"음."
0.1%의 넥타르가 깃든다고 했지?
거기에 80%면 0.08% 정도 분량의 순수한 넥타르를 추출할 수 있다는 거다.
1리터를 추출하면 0.8밀리리터 정도인가.
"이게 넥타르에요."
무지개빛의 오묘한 빛을 내면서 빛나는 액체.
그게 작은 바이알 병에 들어있었다.
"괜찮으시다면 이걸로 뭘 좀 만들어봐도 될까요?"
"환영입니다."
"더 얻을 수는 없겠죠? 양이 너무 적어서..."
"... 노력해 볼게요."
프랑스에 두고 온 분량이 조금 아쉽긴 한데.
그래도 새로 만들면 될 테니까.
양조장부터 하나 만들어볼까?
**
다음 날.
최 헌터를 만나기 위해 제피로스가 부른 곳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장소였다.
강서구의 한 보훈병원.
거기에 최 헌터가 있었다.
어디 아픈가?
"오셨어요?"
제피로스와 함께 한 1인 병실에 들어서니,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우리에게... 정확히는 제피로스에게 꾸벅 인사했다.
"응, 아버지 잘 계시니?"
"..."
"더 안 좋아진 모양이구나."
여학생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고, 이내 뚝뚝 떨어지기까지.
"걱정 말거라. 어쩌면 저 친구,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 저, 정말로요?"
"이 아저씨가 거짓말이나 하고 다니는 사람은 아니잖니."
여학생을 가볍게 진정시킨 제피로스가, 침대를 둘러친 커튼을 걷었다.
거기에는 멀뚱히 눈을 뜬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거구의 남자가 있었다.
비록 엄청나게 마르긴 했지만, 그 골격 자체를 숨길 수는 없으니까.
"이 친구야, 나 왔네."
"... 왔나."
"병문안 선물이야. 정확히는 이 친구 선물이군."
파워큐 엘릭서 한 박스를 머리맡에 내려놓고서, 제피로스가 옆의 의자에 앉아 말했다.
"요즘 TV는 보고 사는가?"
"... 안 봐."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들어야지."
"듣는다고 해도 이젠 가보지도 못할 세상인데."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흘끗 그의 상태를 확인한 내가 제피로스에게 앤서블 이어링으로 물었다.
'설마. 그거예요?'
─그래, 나랑 원인은 비슷해. 이 친구가 나보다 한참 더 몸을 험하게 굴렸을 뿐.
'세상에.'
불활성 마나가 이제는 태울 수도 없을 정도로 쌓여버린 거다.
그래서 전신이 마비 상태에 이른 것.
심지어 이 양반은 제피로스와는 다르게 전신이 근육이다.
아무리 강인한 정신력이 있어도, 저걸 건드렸다가는 최소 쇼크사다.
게다가 일시적인 해결책에 불과했다.
─심지어 저 친구는 내공이 아니라 외공 계통이야. 클래스가 금강역사(金剛力士)인가...
'근육 자체가 계속해서 불활성 마나를 형성하는 모양이네요.'
일시적으로 어마어마한 고통을 참아내고 치료를 받아도, 곧 다시 불활성 마나가 근육 전체에 빵빵하게 들어찬다.
그걸 몇 차례 반복하고서, 포기했으리라.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선택한 거다.
─어떻게... 해결해 줄 수 있겠어?
'봐야 알죠.'
그렇다고 해도...
사실 제피로스를 처음 치료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스펙업을 한 상태인 나다.
"제가 잠깐 봐도 될까요?"
"... 자넨 누군가?"
"이 사람, 진짜 뉴스 안 보는군. 이 친구가 김세균이야."
"... 김세균?"
오히려 뒤쪽에서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요즘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헌터예요!"
"... 그런가."
그러든가 말든가.
거의 그 수준의 반응인데?
"그리고, 날 현역으로 복귀시켜준 사람이기도 하지."
심드렁하던 최강 씨의 눈이 그제야 휘둥그레 커졌다.
"자네를?"
제피로스가 웃으면서 기사 하나를 보여주었다.
그가 최근 신기록을 경신하고 다닌 5~60단계의 게이트들의 기사였다.
"전성기보다도 낫다고 심지어."
"어, 어떻게...?"
제피로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없이 내 쪽을 가리켰다.
"허, 허허..."
"그래서, 할 거야 안 할 거야."
"... 나는 자네처럼 부자가 아니야."
최강 씨가 은퇴한 건 제피로스보다도 한참 이전이니까.
심지어 그 상태로 계속해서 병원 신세를 졌다면 재산이 별로 없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저런 대단한 친구에게 치료비를 낼 정도로 재산이 많진 않다고. 그렇다고 이 나이에 다시 헌터 노릇을 할 수도 없고."
"나도 하는데 자네라고 못할 거 있나? 뭐, 그렇다고 헌터를 하라는 건 아니고..."
"어쨌든, 차라리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이나마 딸아이에게 남기겠네."
"아빠! 그게 무슨 소리세요!"
뾰족하게 외치는 여학생을 잠깐 제지하고서, 내가 웃으며 말했다.
"비용은 없습니다."
"... 비용이... 없다고?"
"대신에 절 좀 지켜주십시오.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누굴 지키는 데 있어서, 최 선배님을 따를 사람은 세계적으로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이름처럼 최강의 자리를 다투던 세계적인 탱커.
그게 눈앞의 이 중년인이었다.
"자넬 지키라고... 허."
"어차피 선배님 정도의 상태라면 제가 자주 봐줘야 할 겁니다."
제피로스 정도의 상태라면 종종 봐줘도 되지만, 저런 중증이면 마비의 효과도 오래 가지 못한다.
적어도 이삼일에 한 번쯤은 봐줘야 계속 효과를 유지할 수 있을 터였다.
"저랑 같이 다니시죠. 월급도 드리겠습니다."
"... 정말 일어날 수만 있다면야. 뭐든 못하겠나."
"그러면 바로 가시죠."
인벤토리에서 보톨리눔 균주를 꺼내어 활성화했다.
이미 제피로스를 대상으로 많이 해본 치료였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대신에 범위와 정도가 굉장히 광범위하여 조금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이었다.
"다 됐네요."
"... 별로 바뀐 건 없는 거 같은데."
"이제 이걸 마셔."
제피로스가 파워큐 엘릭서 병을 꺼내어 그에게 건넸다.
사실 내용물은 진본 엘릭서였지만...
자칫하면 쇼크로 죽을 수도 있는 엘릭서였지만, 제피로스는 확신을 가지고서 먹였다.
"... 엘릭서?"
"그냥 에너지드링크야. 그렇게 비싼 걸 먹이겠냐?"
굳이 설명하기도 귀찮았는지, 제피로스는 속이고서 진본 엘릭서, 그것도 두 배 효과의 것을 먹였다.
꿀꺽,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 엘릭서가 순식간에 최 헌터의 전신에 작용하기 시작했다.
"움직여 봐."
"안 움직이는... 어?"
다리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워낙 광범위한 범위에, 그것도 꽤 오랜 기간 불활성 마나가 쌓여 있었는지, 일부 부위만 움직였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놀라움에 눈을 부릅뜨는 최 헌터였지만.
"이거 다 먹어."
무려 한 박스.
시가로는 10억이 넘어가는 엘릭서를 전부 먹은 뒤에야, 그제야 최 헌터의 몸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상에서 일어나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입을 가린 채 울기만 하는 딸을 안아주는 거였다.
한참이나 딸을 안고 있다가, 그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 자네를 경호해야 한다고?"
"네, 부탁드립니다."
"... 안 되겠네."
뭐야, 화장실 들어올 때랑 나올 때가 다른 거야?
아무리 그래도... 일시적인 현상일 텐데.
하지만, 다행히도 그게 말의 끝이 아니었다.
"지금 상태로는."
"... 예?"
"어이, 제피로스."
"... 그래."
제피로스라고 불리는 걸 유난히 부끄러워하는 선생님이 헛기침을 하며 답하자, 최 헌터가 물었다.
"자네 훈련 시설은 아직 있겠지?"
"있지."
"잠깐 써도 되겠지?"
전성기에 비하면 한참 쪼그라들긴 했지만, 여전히 우락부락한 근육을 부풀리면서.
최강 씨가 말했다.
"근손실이 너무 심해서, 이런 상태로는 이 친구를 지킬 수가 없다고."
... 아니 충분히 강해 보이시는데요.
최강(2)
최강(2)
"... 저러니 몸이 성하질 않죠."
최강 씨의 훈련 모습을 본 소감이었다.
그야말로, 몸을 혹사시킨다는 게 어떤 건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달까.
내 말에 제피로스 역시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저런 놈들을 뭐... 헬창? 그렇게 부른다면서? 저 자식이 원조 헬창이다."
동감이다.
3대 5천이라니.
들어본 적도 없는 수치인데.
던전 기술로 만들어진 중력 수련장에서, 최고 수치를 연신 경신하면서 계속해서 중량을 늘려가는 최강 씨였다.
"으하하하! 맛있다! 맛있어!"
... 뭐야 저거 무서워.
"야 이 미친놈아! 적당히 하고 그만해!"
"으하하하하! 지금 딱 적당하다고! 김세균 이 친구가 어떻게 해놨는지는 모르겠는데! 이 정도 고중량은 쳐야 자극이 딱 와!"
"정신 차려 미친놈아아─!"
저 사람... 괜찮을까.
그렇게 3대 6천에 도전하려다 제피로스의 만류로 멈춘 최강 씨가 아쉬움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여기 프로틴 없..."
"없어 임마!"
"쳇, 사다 놔야겠군."
"트럭 채로 사다 놓으면 죽인다. 먹을 만치 사놔."
"그게 먹을 만치인데."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제피로스.
한바탕 소란이 끝나고, 땀 한 방울도 안 난 최강 씨가 내려왔다.
"오랜만에 한 판 해볼까?"
"나랑? 야 임마, 난 현역 복귀한 지 한 달도 넘었어. 어딜 이제 막 병상에서 일어난 놈이 비비려고 그래?"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콧방귀를 뀌는 제피로스.
그래도 궁금하긴 하네.
과연 제피로스랑 왕년에 쌍벽을 이뤘던 남자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저랑 한 번 하시죠?"
또 궁금한 건 못 참지.
"으잉? 자네랑? 아직 레벨도 낮다면서?"
그새 또 뉴스는 검색해 보신 모양이네.
"그 레벨 낮은 친구가 나랑 싸우면 이겨."
"그으래?"
"그렇다고 이 친구가 마냥 고기방패는 아니야. 금강역사가 뭔 줄 아니?"
"... 금강산도 식후경?"
아니 그렇게 한숨 쉬지 마세요.
무식해서 죄송.
"불교에 나오는 금강저, 바즈라를 양손에 든 수문장 같은 존재지. 이 친구가 그냥 근육돼지처럼 보여도... 나름 세계 최고 레벨의 탱커까지 오를 수 있던 이유는 기동성과 딜을 갖춘 탱커여서야. 딜탱이라고."
말로만 들어서는 잘 모르겠는데.
"으하하하! 그럼 어디 몸이나 한번 풀어볼까?"
인벤토리를 열고, 양손에 짧은 단검 같은 걸 들었다.
그런데...
뭐야 저거 스파크야?
놀랍게도 한 쌍의 단검... 그러니까, 바즈라에서 뿜어지는 전격이 그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아무리 내 세균들이 강해도, 저기 닿으면 튀겨지겠는데?
"대련 방식은 어떻게 할까?"
"음."
그러게.
전력을 다하면 어떻게 물량공세로 뚫어내긴 할 거 같은데.
그렇다고 서로한테 상처를 낼 수도 없고.
"이걸 가슴팍에 달아."
제피로스가 천으로 된 작은 공을 하나씩 우리에게 건넸다.
"거기에 먼저 상처를 입히는 쪽이 이기는 걸로 하면 되지."
"오, 합리적이네요."
가슴 쪽이면 치명상이니까.
그러면... 준비는 해둬야지.
인벤토리에서 바로 지팡이를 꺼내서 들고.
희생의 번제까지.
대인전이니까 프리셋을 어떻게 배열하지?
좀 고민하다가.
1번 슬롯은 당연히 언제나 영원한 나의 1호기인 분해 군단.
2번 슬롯은 CC기로 접착 세균.
3번 슬롯은 혹시나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보톨리누스를 탑재했다.
4번 슬롯은 화염 내성균.
마지막 5번 슬롯이 남는데...
여기는 희생의 번제용으로 남는 세균을 넣어야겠다.
지금 남는 건 술 담그느라 잔뜩 일으켰던 수천억 단위의 효모균들.
이 정도면 뭐 버티는 데는 전혀 문제없겠지.
"가실까요?"
"그럴까? 아 그나저나 자네가 준비하는 사이에 제피로스 저 친구가 조언을 하나 해주더군."
"조언요? 무슨 조언요?"
"무조건..."
순간 그 자리에서 사라지며 내 지근거리까지 접근하는 최강.
또냐!
"... 선빵필승이라고!"
가슴에 매달린 공을 향해 날아드는 바즈라.
그대로 당해줄 것 같아?
2호기!
"엇?"
순간 끈끈하게 붙어버린 발에 스텝이 엉켜버린 최강.
기동성을 겸비한 탱커라면.
기동성을 묶어버리면 공격력이 급감일 거다.
그런데...
파즈즈즈즉! 그의 말에서 스파크가 잔뜩 튀면서, 순식간에 접착 물질이 타서 눌어붙는다.
묶였던 발걸음이 다시 가벼워지는 건 당연지사.
이 양반이 어쩌면 제피로스보다 나한테는 상극일지도 모르겠는데?
발이 풀려서 순식간에 접근한 그가, 내 가슴팍에 바즈라를 찔러넣었다.
그런데...
[희생의 번제가 당신을 향하는 공격을 막아냅니다.]
[번제의 대상이 대폭 강화된 상태입니다. 희생하는 개체가 대폭 감소합니다.]
[희생한 언데드 개체, 약 100만 개.]
백만? 고작?
제피로스의 강기를 막아내는 데는 무려 수십억 단위가 소모됐는데.
백만이라고?
이 양반이 약한 거야, 아니면 제피로스가 강한 거야?
그것도 아니면...
"잠깐, 타임."
뒤로 물러나면서 타임을 선언하자, 최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역시 물러섰다.
"허, 진짜 신기하네. 이게 무슨 스킬이지...?"
그가 내 희생의 번제를 곱씹고 있을 때, 나는 제피로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실험해볼 게 있어서요. 선생님. 강기 한 방 찔러주시죠."
"... 미쳤냐?"
"지극히 정상입니다."
"하아...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또라이 미친놈들이야."
한숨을 내쉬면서,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내 강기를 두른다.
"그냥 찌르면 돼?"
"네, 전력으로요. 지난번 대련 마지막 일격 정도?"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제피로스가 이제는 말도 꺼내기 싫었는지 말없이 그저 검을 찔렀다.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온 쾌검이 내 목에 도달했다.
[희생의 번제가 당신을 향하는 공격을 막아냅니다.]
[번제의 대상이 대폭 강화된 상태입니다. 희생하는 개체가 대폭 감소합니다.]
[희생한 언데드 개체, 약 800만 개.]
"와..."
뭐야 이거.
이전에 전력을 다한 제피로스의 일격이 대략 110억 정도를 희생하고 막을 수 있었으니...
800만이면 대체 얼마나 효율이 좋아진 거야?
이유가 대체 뭐지?
제피로스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뭐지? 지난번보다 더 질겨졌다고 해야 하나."
"저 친구 마법사 맞아? 어지간한 탱커 수준인데? 이거 내가 필요하기나 하겠어?"
탱킹력이 좋아지긴 했는데, 희생의 번제가 지팡이를 들고 있어야지만 발동되니, 상시발동형이 아니라 경호해줄 사람이 필요하긴 하다.
마나도 엄청나게 잡아먹기도 하고.
"자, 잠깐 이유 좀 알아볼게요."
왜 이렇게 좋아진 거야?
[현재 유지 중인 언데드]
(5) Saccharomyces Ellipsoideus (사카로미세스 엘립소이데우스)
─개체수 : 약 3,300억 개
─설명 : 포도에서 흔히 발견되는 효모로, 주로 포도주의 발효에 사용된다. 근원을 알 수 없는 기적에 노출되어 강화되었다. 모든 유형의 외부적 힘에 강력한 내성을 보인다.
근원을 알 수 없는 기적?
... 설마 너.
"넥타르."
"응? 뭐라고?"
"아, 아뇨."
그래, 생각해 보니 이거... 넥타르를 만들었던 효모지?
그러면 넥타르에 노출되어서 강해졌다는 건가?
"죄송한데, 오늘 대련은 여기까지 하죠."
"어어, 그래. 그래라."
"뭐 이 정도면 견적은 서로 충분히 봤지."
"저는 할 게 있어서 먼저 좀 가볼게요."
정말 내 세균 군단이 넥타르에 노출되어 강화되는 거라면...
다시 한번 스텝업할 절호의 기회였다.
**
세균이 나간 자리.
둘만 남게 된 류현수와 최강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쓰게 웃었다.
"씁쓸하네."
"너만 느끼는 건 아니구나."
"예전엔 우리가 최고였는데."
"그랬지."
"저 친구, 확실히 강하더군."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는 않았지만...
마법 계열이 저런 방어력이라니.
"내 이름은 떼다 저쪽에 박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어."
"흐흐. 네가 이름값 하려면 노력 좀 더 해야지."
"이 나이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
"나는 너처럼 엘릭서를 물 마시듯이 마시고 다닌 몸이 아니라고."
그러면서도, 최강은 일어나서 다시 바벨을 쥐었다.
그런 그의 등에 대고, 제피로스가 말했다.
"오랜만에 나왔는데, 그쯤하고 가자."
"어딜 가자고?"
"한잔하러. 우리 집에."
제피로스의 말에, 최강이 고개를 내저었다.
"왜?"
"술 마시면 근손실 생겨."
"... 일관적인 새끼."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제피로스가 먼저 훈련장 문으로 향하면서 말했다.
"불이나 잘 끄고 나와."
"오케이."
그렇게 홀로 남은 훈련장에서, 한동안 바벨 들어 올리는 기합성만이 울렸다.
반복적으로.
꾸준히.
밤새도록.
**
시카고 오헤어를 출발하여 보르도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카이저의 전용기가 프랑스 상공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귀 항공기는 프랑스 공군에게 인터셉트되었다. 식별을 위해 호출부호, 비행계획, 출발지 공항, 목적지 공항을 말하도록.
어느새 따라붙은 두 대의 프랑스제 라팔 전투기가 창밖으로 보였다.
그걸 보는 카이저의 미간이 한껏 좁아졌다.
"... 카이저님. 프랑스 공군이 보르도가 아니라 파리로 유도합니다. 파리로 향해야 할 거 같습니다."
"아흐마드..."
파리는 보르도에서는 비행기로만 2시간이나 떨어진 거리.
굳이 공군 전력까지 동원해서 파리로 착륙을 유도하게 만드는 건 한 사람뿐일 터였다.
"카이저님, 독일 스팽달럼 기지에 52 전투비행단이 있습니다."
카이저는 미군 전력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되었다.
그걸 아는 미 공군 출신 전용기 기장이 말한 것이었다.
유럽에는 미군이 NATO 방위를 위해 주둔하고 있다.
독일 52 전투비행단에서 비행기를 스크램블하면 아마도 늦어도 20분 이내에 도달할 거다.
프랑스 영공이긴 했지만, NATO로서의 작전권이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 미 공군기를 프랑스 영공으로 불러서 프랑스 공군과 기싸움을 벌이면?
가능은 했지만, 정치적으로 손해가 너무 컸다.
화는 났지만, 어느 정도 기싸움은 있을 건 예상했고, 그리고 용인하려고 했기에 숨을 가다듬으며 당황하는 조종사에게 말했다.
"다 협조하게."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쩔 수 없지.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했으니."
굴욕적이긴 했지만, 프랑스 땅에 왔으니... 저 '프랑스의 신'처럼 군림하는 자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파리 오를리 공항에 유도되어 착륙한 카이저의 전용기.
아니나 다를까.
내리자마자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유들거리며 웃고 있었다.
앞에는 대규모의 언데드 군단까지 거느린 채로 말이다.
심지어 가장 선두에는...
최강의 언데드로 손꼽히는 데스 나이트까지 두 기가 있었다.
양옆으로 데스 나이트를 거느린 상태에서, 가운데에서 불쑥 나온 한 남자.
"아니! 이게 누굽니까! 전설적인 카이저를 내 고향에서 뵙다니! 오늘 내가 운이 무척 좋은 모양입니다? 여권 주십쇼. 슈퍼 패스트하게 처리해드리지."
아흐마드의 프랑스인 억양 잔뜩 섞인 어설픈 영어로 말하는 모습에 카이저가 미간을 찌푸렸다.
"장난 칠 기분 아닐세. 왜 파리로 날 유도했는지 이유가 있어야 할 거야."
"뭐 이유야 많지 않겠어요? 저 비행기에 마약이 있다는 제보도 있었고, 밀수품이 있다는 제보도 있었고."
"그 제보가 왠지 한 사람에게서 나온 헛소문일 거 같다는 건 내 착각인가?"
"글쎄요? 마약수사국에 세관총국까지 수사하려면 비행기는 하루 이틀은 여기서 잡혀있어야 할 거 같은데. 그동안 나랑 놀죠?"
"미안하네만."
카이저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인벤토리 안에서 거대한 대검이 뽑혀 나오고.
검에 어마어마한 광휘가 서리기 시작했다.
"늙은이의 시간과 젊은 녀석의 시간은 가치가 다르지. 등가(等價)가 되려면 자네가 뭘 몇 개 더 얹어야 할 거 같은데."
그 광휘를 정면으로 받은 아흐마드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뒤로 몇 발짝이나 물러섰다.
물러선 그의 앞을 가리는 언데드 군단들.
하지만 그것들 역시 눈에 뜨일 정도로 약화되고 있었다.
"알아서 받아 갈까? 데스나이트 정도라면 괜찮을 거 같기도 하군."
데스나이트 한 구를 만드는 데 얼마만큼의 돈이 들어가는지, 카이저는 안다.
심지어 아흐마드의 데스나이트는... 거의 국가권력 수준의 자원을 먹어 만들어졌다.
그런 데스나이트가 역소환당하면, 재소환에 제작 비용의 1할은 들어간다.
엄청난 손해를 끼치겠다는 소리에 아흐마드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언데드 군단 전체를 뒤로 물렸다.
"자, 장난이우, 장난. 장난도 못 치나."
"... 그러면 이 늙은이가 보르도로 다시 가도 되겠나?"
"얼마든지."
카이저는 대검을 다시 인벤토리에 갈무리한 채로 등을 돌려 비행기에 다시 탑승했다.
곧바로 급유만 받고 다시 이륙하는 카이저의 전용기.
그의 전용기가 뜰 때까지 보고 있던 아흐마드의 입에서 험한 소리가 나왔다.
"다 늙어가던 노인네가 무슨 보약을 처먹어서 다시 저렇게 정정해졌어? 보르도는 대체 왜 오는 거고?"
최근 보르도에서 일어난 굵직한 사건이라고 하면.
"브라더가 공략했던 거랑... 페트뤼스 와이너리의 미친 와인."
카이저는 둘 중 어느 쪽에 관심이 있는 것일까?
둘 다 이상하긴 했다.
이미 남이 공략한 단물 빠진 던전.
그리고 대단하긴 하지만 고작해야 엄청나게 맛있는 와인.
아흐마드 역시 마셔보았음에도 카이저가 이렇게까지 바로 날아올 만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꼽자면...
"단물 빠진 던전보다는 와인에 뭔가 있다는 건가."
창공을 다시 날기 시작하는 카이저의 전용기를 바라보는 아흐마드의 표정이 한껏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신제품(1)
신제품(1)
내가 바로 향한 곳은 천안 연구소였다.
제피로스의 훈련 시설이 있는 파주에서 천안.
거의 경기도와 서울을 북에서 남으로 가로질러서 충북까지 지나가야 하는 거리였다.
진짜 오지게 머네.
전용기로는 부족하고, 헬리콥터라도 한 대 더 장만해야겠다.
"응? 오늘 파주 가신다고 못 오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 파주에서 왔습니다..."
"어머. 잘 오셨어요 그래도. 안 그래도 연구 결과 보내드리려고 했는데."
"결과가 벌써 나왔어요?"
"네, 동물실험 결과요. 극미량 경구투여에 단기간 실험인데도 불구하고 결과값이 명확하게 나와서요. 역시나 넥타르다 싶다는 느낌?"
오오 넥타르 오오.
"이거 보세요. 늙은 모르모트, 젊은 정상 모르모트, 장애가 있는 모르모트, 세 대조군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예요. 명확하게 나이 든 개체에서 압도적인 효과를 보여요."
"효과를 보인다는 게..."
"텔로미어가 재연장된다는 소리죠."
"... 한국말로 설명해주시면요."
"어, 음... 회춘(回春)?"
... 충격적이긴 한데, 하긴 그쯤은 되어야 엘릭서 상위호환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엘릭서가 수명의 유지라면, 넥타르는 회춘인가.
"장애가 있는 개체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단순히 회춘에 필요한 것보다도 훨씬 많은 양이 필요해요. 예를 들어서 이 개체는 선천적으로 앞다리가 발달하지 않았는데, 이거 보이시죠?"
없는 앞다리 쪽에, 아주 찔끔.
빨간색의 돌기 같은 게 돋아나 있었다.
"여드름 아니에요?"
"네에?"
입을 가리고 쿡쿡 웃어대던 규선 씨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리가 발달하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충분한 양이 없어서 거기까지만 발달한 거죠."
"그러면 젊고 건강한 개체면."
"효과가 없진 않지만 체감할 정도는 아니죠."
그래서 내가 먹었을 때는 그냥 맛있는 술 정도였구나.
"솔직히 말해서, 신의 물질, 그 자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어요. 왜 연금술의 시조가 절망했는지 이해가 가더라고요."
엘릭서도 엄청난 물질이다.
그걸 만들어 낸 연금술의 시조라는 작자도 대단한 존재고.
그렇다고 해도...
신을 쫓기엔 역부족이겠지.
"아, 제 연구 결과는 이걸로 끝이에요, 세균 씨가 갑자기 연구소를 찾은 이유는요?"
"제 세균 군단이 말이죠."
넥타르를 주조하는 데 일조했던 세균들이 강화됐다는 걸 말하자, 규선 씨가 팔짱을 낀 채 으음, 하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어떤 게 의문이신데요?"
"언데드는 성(聖) 속성에 약한 거 아니었어요?"
그런데, 언데드가 넥타르로 막 강화돼도 되나?
사멸해야 하는 거 아냐?
내가 아는 지식으로는 그랬다.
그걸 들은 규선 씨는 웃었지만.
"사람들이 자주 헷갈리는 내용인데, 세균 씨도 헷갈리시네요. 세균 씨 같은 유명한 헌터가 이러시면 곤란하죠."
"... 끄응. 그러지 말고 알려주십쇼."
"뭐 하긴... 신 속성이 흔하진 않으니까요. 헷갈릴 만도 해요. 신(神), 성(聖), 광(光). 다 별개의 속성이에요. 음... 이렇게 설명하면 되려나. 하데스 아시죠?"
"알죠."
내가 이래 봬도 어렸을 때 그리스 로마 신화 만화책을 완독...
"명부의 신이잖아요."
"네. 그러면 하데스는 성 속성일까요?"
"글쎄요?"
성 속성인가?
가상의 신에게 속성을 부여하는 게 좀 우습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음침한 신이 성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데.
"광 속성일까요?"
"그건 아니죠."
지옥이 빛이랑은 백만 광년쯤은 떨어져 있을 거 같은데.
"네, 하지만 신(神)이기는 하죠."
"아?"
이해가 될랑말랑.
"연금술에서 신은 이렇게 규정해요. 모든 것을 뜻대로 이루는 궁극적인 의지의 힘. 거기에 인간이 규정한 선과 악의 개념은 없어요."
"... 사기네요?"
"맞아요. 전능하죠. 넥타르처럼."
아, 그러네.
"그러면 성 속성은 뭔가요?"
내친김에 과외를 받아 놓자.
"성 속성은 역리(逆理)를 배제하는 힘이라고 해요."
"... 저 가방끈 짧아요."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가 순리고, 그걸 거스르는 게 역리예요. 대표적으로... 여기 있네요."
규선 씨가 내 가슴을 툭툭 건드렸다.
"저요?"
"세균 씨가 부리는 언데드들요. 세상의 원리대로 보면 이상하잖아요?"
"... 그러네요."
"신성력 같은 게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것도, 치유력이라는 순리를 한껏 강화하는 원리에요. 어쨌든, 그래서 역리에 강하죠."
"마지막으로 빛은."
"제일 하위 속성요. 그냥 말 그대로 빛이에요. 빛 자체에도 어느 정도의 신성이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약간일 뿐이죠."
잠깐, 그러면.
"혹시 신 속성으로 강화된 언데드는..."
"상위 속성이니 하위인 성 속성이나 광 속성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죠. 물론 성 속성은 역리에 강력하게 작용하긴 하지만... 거의 대부분이 상쇄될 거예요."
"어쩐지..."
'모든 유형의 외부적 힘에 강력한 내성을 보인다.'
넥타르에 노출되었던 효모균에 쓰여있던 설명이었다.
"그렇다면 언데드라고 해서 신 속성에 닿으면 막 녹아내리거나 역소환되거나 그런 게 아니라는 거죠?"
"그렇다니까요. 애초에 북유럽 신화의 헬(Hell)이나 멕시코의 산타 무에르테(Santa Muerte) 같은 신격들은 언데드처럼 생겼어요. 그렇다고 신이 아닌 건 아니잖아요?"
"맨날 신관이나 크루세이더에 빌빌대는 네크로맨서만 봐서 그래요. 클리셰잖아요."
"클리셰요?"
"아, 아니에요."
흠흠. 이 사람은 헌터문학 덕후가 아니구나.
연구 덕후지.
그나저나...
신 속성의 언데드라.
이거 사기 아니야?
공격력도, 유틸성도, 방어까지도 갖춘 현재...
무서운 건 성 속성의 게이트나 성 속성의 헌터들 정도뿐이었다.
그걸 유일하게 커버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긴 거였다.
지금 다른 게 급한 게 아니다.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넥타르의 양산 체계를 갖춰야겠다.
이게 내 전력의 절반쯤은 책임질 거 같으니까.
... 어쩌면 지갑의 절반도.
**
와인이 포도만으로 이루어내는 마법이라면, 우리나라의 전통주는 그보다는 조금 더 뭔가가 필요했다.
일단 자체적으로 효모와 수분을 내포한 포도와는 다르게, 쌀에는 수분이나 효모가 없으니까.
그걸 보충해서 만들어야 하는 거다.
좋게 말하면 인간이 개입할 여지가 더 많은 거고, 나쁘게 말하면 더 인위적인 술이라는 거겠지.
물론 그렇기 때문에, 세균을 철저히 통제할 수 있는 내게는 와인보다 더 쉬울 수도 있는 술이었다.
... 라고 생각했다.
"야, 배불러서 이제 못 마시겠다. 끄어억... 트름할 때마다 누룩 냄새가 올라와."
"여긴 어떠셨어요?"
"어떻긴 어때. 똑같지."
"쩝."
역시 그런가.
"그나저나 선배님은 진짜 안 드세요?"
"나는 근손실 때문에 술 안 마신다. 알코올은 단백질 합성을 억제하고 영양 흡수를 방해하고 호르몬 균형을..."
"... 됐어요."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안주발, 그것도 단백질만 드신다고 고기만 주워 드시는 게 조금 꼴 보기 싫어서 말해봤어요.
일단 내가 목표로 삼는 술은 청주였다.
쌀로 담근 발효주인 막걸리를 걸러 깨끗하게 내린 거 말이다.
와, 그런데 이게 쉽지가 않았다.
업계 최고 장인이라는 사람들의 청주를 가져다가 그대로 재현해봤는데...
넥타르 따위는 형성되지도 않았다.
뭐가 문제인지 싶었는데.
"내가 말했잖냐. 우리나라 전통주 시장은 말이 전통주지, 사실상 현대주야. 진짜들은 이미 일제강점기에 한 번, 6~70년대 막걸리 주조금지 정책에서 두 번 망해서 멸종했었다고."
"들어서 알긴 하는데."
이게 문제인 거 같긴 하다.
"그러니까 어차피 전통도 별로 없는 술들을 참고해서 뭐해. 차라리 네가 직접 알아서 만드는 편이 나을걸? 술 잘 빚더만?"
"그건 와인이고요..."
그것도 페트뤼스의 재료로 페트뤼스 방식대로 만들었으니 당연히 좋았을 수밖에.
페트뤼스처럼 확고한 업계 최고 레벨의 레퍼런스가 있는 편이 편한데.
"그러면 차라리 일본 사케를 참고해보는 건 어때?"
"그건 좀."
물론 사케가 세계적으로 더 대중화되어 있고, 잘 연구되어 있다는 건 안다.
그래도...
아니 뭐 국뽕까진 아닌데.
민족적 자존심이 용납을 못 한다고 할까.
한국에서 세계적인 사케!를 만든다고 하면 좀 쪽팔리잖아.
"누가 사케를 만들래? 연구를 해보라고. 비슷하지만 확실히 다른 면이 있는 술이잖아."
"아?"
"그리고, 어차피 현대주에 가까운 한국 전통주를 만들거면... 네 맘대로 만들어보는 건 어때?"
"안 그래도 그래야 할 판이에요."
레퍼런스들이 이래서야...
그렇다고 그 술이 나쁘단 소리는 아니지만.
넥타르가 생성될 정도로 띠용 하는 명주가 아니라는 거였다.
"아니, 너만 할 수 있는 방식이 있을 거 아냐. 그러니까 뭔가 엄청난 걸 자꾸 만들어내지."
"... 뭐 그렇긴 한데."
"형과 태를 파괴하면 더 나아진 경지가 나오는 법이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그런 방향성으로 생각해 볼까?
**
일단 제피로스의 조언대로 일본 사케부터 연구해봤다.
사케와 한국 청주의 가장 큰 차이는 역시나 누룩.
입국을 사용해서 통제된 환경에서 주조하는 사케와는 달리, 한국의 전통 누룩은 통제되긴 하지만 이론적으로 완벽히 통제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최소 20종 이상의 박테리아나 세균이 누룩에 들어간다니까 말이다.
대신에 한국 누룩은 더 다양한 맛을 내며, 동시에 당화력 또한 뛰어나다고 했다.
당화력은 같은 양의 녹말, 그러니까 전분을 당분으로 바꾸는 정도를 말했다.
더 많은 당분을 생산하니, 더 높은 도수를 내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 도수 높은 청주라."
드래곤을 반 죽여놨던 그런 도수까진 필요 없었다.
40도 정도만 되어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강제로 증류한 소주 등의 주정을 넣어서 도수를 올린 술이 아니라, 내 강력한 효모균들이 생성한 고도수 말이다.
제피로스의 말처럼 형에 얽매이지 않으니, 가능성이 무궁무진해졌다.
물론, 고도수로 갈수록 메탄올과 같은 몸에 안 좋은 성분도 함께 나오지만...
도와줘요, 규선에몽.
연금 기술로, 메탄올을 걸러내는 방법을 개발해줬다.
그 덕분에 20, 30, 40도로 나눠가며 술을 만들 수 있었다.
적어도 담그고 며칠씩은 기다려야 하는 과정이 순식간에 생략되니, 엄청난 양의 술이 순식간에 양산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일주일 정도 지난 시점에.
[주조한 술 가운데, 약 100ml 분량이 완벽히 만들어졌습니다. 넥타르가 형성되었습니다.]
아주 적은 양이었지만, 그래도 넥타르를 품은 술이 나왔다.
이제 이 병이 레퍼런스다.
하나의 레퍼런스를 두고, 계속해서 발전시켜나갔다.
심지어, 포도주에나 쓰이는 페트뤼스의 효모균도 사용해 보았다.
그 결과로...
[주조한 술 가운데, 약 3L 분량이 완벽히 만들어졌습니다. 넥타르가 형성되었습니다.]
[주조한 술 가운데, 약 5L 분량이 완벽히 만들어졌습니다. 넥타르가 형성되었습니다.]
[주조한 술 가운데, 약 10L 분량이 완벽히 만들어졌습니다. 넥타르가 형성되었습니다.]
재료만 쌀과 물과 누룩일 뿐...
아니, 정확히는 누룩에서 추출한 몇몇 세균들을 사용한 거지.
어쨌든, 전통주라고는 볼 수 없는 녀석이 나왔다.
그렇지만 넥타르가 형성된 걸 보니 이건 성공작이다.
내 입에는 아주 짝짝 달라붙는데.
그래도 술꾼 평을 들어야지.
완성된 술 한 병을 제피로스에게 가져다주었다.
명색이 와인 마스터인가 뭔가라면서.
"이건 또 뭐냐?"
"청주요."
"... 이게? 향에서 무슨... 그랑크뤼 와인 느낌이 나지?"
코가 민감하긴 하네 이 아재.
"페트뤼스, 거기서 가져온 효모를 썼거든요."
"아, 역시나. 쌀로 만들었는데 고급 포도주 느낌이야. 괜찮은데?"
그리고 목으로 넘긴 순간.
"윽!"
고작해야 10도 대인 청주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강렬함이 목을 친다.
40도짜리 청주, 맛이나 보셨으려나.
그것도 증류주의 천편일률적인 알코올 원액의 맛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목이 따가웠는지 미간을 잠깐 찌푸리더니, 쌀에서 나오는 모든 풍미를 간직한 고도수 술의 맛에 푹 빠져서, 한참이나 잔을 붙들고 홀짝였다.
이거 시음이라니까요.
적당히 드셔야지.
"한잔 더."
"괜찮으시겠어요? 이거 독해요."
"괜찮지. 위스키도 마시는데."
연신 내가 만든 이상한 청주(?)를 홀짝이던 끝에, 제피로스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지, 뭔가 이상한가?
"뭐가 이상하면 말을..."
"아니... 웃겨서."
"... 뭐가요?"
"나는 이제 위스키 같은 건 절대 입에도 안 댈 거 같거든."
"사케는요?"
"사케가 뭐야? 그런 술도 있었니?"
됐다.
이 정도면 대성공이다.
여기서 80%의 넥타르를 추출해서 뺀다고 해도, 술맛에는 엄청난 차이가 없을 거다.
효능은 확실히 한참 줄겠지만.
그러면 넥타르는 넥타르대로 뽑아내서 쓰고, 술은 팔면 된다.
어쩔 수 없다.
술을 몸 좋아지려고 먹는 미친놈은 없잖아?
.
.
.
그리고 불과 며칠 뒤에...
페트뤼스 양조장에서 대신 사고를 쳐줬다.
내가 남기고 온 와인을 그대로 세상에 팔아버린 거였다.
이제 온 세상이 넥타르 들어간 술을 부르짖을 거다.
신제품(2)
신제품(2)
이륙까지 마친 카이저의 입에서 안도의 숨이 흘러나왔다.
"휴우..."
분명, 최근에는 뿜어낼 수 없었던 광휘였다.
아마 아흐마드도 놀랐겠지.
그 와인의 힘이 없었더라면, 이런 광휘를 낼 수 없었으리라.
물론 데스나이트를 역소환시키겠다는 말은 허세에 가까웠다.
잠깐 내뿜은 것만으로도 다시 희미해지기 시작한 광휘를 가지고 저 미친놈의 군단을 상대할 수는 없다.
전성기라면 또 모를까.
그래도 한 번 눌러놓은 가치는 있었다.
'아마 모종의 정보 채널을 통해서 내 광휘가 약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겠지.'
정부 기관까지 동원해서 극비로 막고 있지만,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는 법.
특히 상대도 프랑스라는 대국을 주무르는 거물 권력자라면 더 숨기기가 힘들다.
이런 상황이니 강제로 파리에 착륙까지 시켜서 뻗댄 거다.
카이저에게는 그것까지도 예상한 바에 있었지만 말이다.
광휘를 일부 회복하고, 의도적으로 프랑스에 가기로 한 거였다.
이렇게 시비를 걸릴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 아흐마드는 혼란스러울 거다.
자신의 정보 채널을 믿기도 어렵겠지.
단지 일시적으로 광휘를 되찾았다는 그 한 가지 사실을 바탕으로, 카이저는 이 정도의 이득을 끌어냈다.
허세가 제대로 먹히기 위한 모든 상황을 세팅해 둔 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만족할 수 없었다.
'힘을 되찾아야 한다.'
압도적인 힘이 있던 전성기 시절이었다면, 감히 저딴 네크로맨서가 자신에게 까불 수 있었을까?
감히?
여전히 세계 최고의 헌터 중 하나로 손꼽힘에도...
늘 그 자리를 유지해오던 카이저에게 절대자가 아니라는 건 무척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잠시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그에게, 조종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이저님, 이제 보르도 공항에 도착합니다."
"김세균... 그가 얼마 전에 왔다 갔다지."
"예, 공략 불가 게이트 하나를 클리어했답니다."
게이트 해방.
러시아에서도 만들어냈던 듣도 보도 못한 위업을 다시 달성해냈다.
처음이라는 건 항상 두려운 거다.
그걸 이룩하려는 사람에게도.
이룩한 것을 보는 사람에게도 말이다.
카이저는 항상 전자의 입장에서 두려운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후자였다.
그는 두려웠다.
김세균이 대체 저 최초의 위업으로 무슨 말도 안 되는 보상을 받았을까.
과거의 그도 공략 불가 게이트를 클리어하며 최초의 위업을 다수 달성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렇기에, 그가 더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이뤄내기 전에 본인이 전성기의 힘을 되찾아야 했다.
혹자는 노화를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하지만, 가능하게 만들 셈이었다.
그는 카이저니까.
미리 요청해둔 자동차를 타고 페트뤼스 양조장까지 바로 향했다.
가는 길마다 아득히 넓은 땅에 포도나무가 가득 있었지만,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의 초대형 와이너리도 몇 개는 가지고 있는 카이저에게는 전혀 감흥이 없는 광경이었다.
와인도 캘리포니아 와인만 먹는 내츄럴 본 아메리칸에 가까운 그로서는, 이곳 구대륙의 와이너리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굴욕적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페트뤼스 양조장.
카이저가 대문 근처에 있는 남자에게 인사를 걸었다.
"안녕하신가."
"아, 지금 저희 와이너리는 한동안 손님은 받지 않고..."
"자넨 누군가?"
"저는 이 와이너리의 후계자인 사람입니다."
"으흠. 그러면 내 질문에 예 아니오로만 답해주게. 알겠나?"
"... 제가 왜 그래야 하죠?"
"그래야 자네가 천만 달러를 받아 갈 테니까."
후계자, 쟝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천만 달러..."
아무리 세계적인 와이너리라고 해도 페트뤼스는 규모가 작았다.
최근에 가내수공업 수준으로 간신히 와인 몇십 병 정도를 팔아서 거액을 먹었지만...
그 금액이라고 해봐야 200만 유로 선이다.
통상적인 연매출은 작황에 따라 다르지만 좋지 않은 올해를 기준으로는 6000만 유로가 간신히 넘는 선이다.
적진 않아도 나파밸리의 기업형 와이너리에 비하면 작은 편이다.
그런 페트뤼스에 천만 달러면 절대 작은 돈이 아니다.
특히 여러 실험을 해볼 생각인 쟝에게는 더욱이.
그 과정에서 매출이 줄어들 수도, 명성이 깎일 수도 있었으니... 돈을 모아두는 건 좋을 터였다.
"약속만 하면 바로 천만 달러를 줌세. 그것도 미국 국채로."
미국 국채면 사실상 현금이나 다름없었다.
"... 물어보십시오. 하지만 개인적이거나 민감한 질문은..."
"알아서 답하게나. 예 아니오면 되네."
"알겠습니다."
"그 와인, 마셔보았다네."
"음?"
10만 유로에 판 사람의 리스트는 전부 알고 있었다.
다들 단골 중 단골이었으니까.
그 사람들은 아직 리셀하지 않은 걸로 아는데.
한 사람만 빼면.
"설마 380만 유로를 주고 샀다는 그 호구색... 아니 거부가 손님이셨습니까?"
"... 그렇다네."
"세상에."
돈이 썩어나도 이렇게 썩어날 수가 있나.
하긴, 말만 해도 천만 달러를 주겠다는 사람인데, 380만 유로가 돈이겠어?
"그 와인을 만든 게 자네인가 자네 부친인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쟝.
그가 이윽고 작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둘 모두 아닙니다. 하지만 판매 권한을 받은 건 틀림없죠."
"페트뤼스의 와인이 아니다? 그러면 누구 것일꼬?"
"...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쟝의 말에, 카이저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네는 알고 있어."
"어떻게..."
"혹시 만든 사람이 김세균 헌터인가?"
"... 그렇지 않습니다."
"거짓말이군."
설마 하는 마음에, 쟝이 입술을 깨물며 되물었다.
"혹시 거짓말 간파 스킬이..."
"있네."
선과 악의 명확한 심판을 위해, 크루세이더는 거짓을 간파해야만 했다.
비록 엄청나게 어렵게 구하긴 했지만, 나름 쏠쏠하게 쓰고 있는 스킬이었다.
단지 직접 대면해야지만 활용할 수 있어서, 이렇듯 보르도까지 직접 올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 숨길 수가 없겠군요."
상대에게 거짓말 간파가 있는 이상, 애초에 대화를 나눈 순간부터 상대는 정보를 분리할 능력이 있는 셈이었다.
"허허..."
일단 김세균이 아니라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저 와인의 제작자는 김세균이었다.
겉보기로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어 보였지만, 카이저의 속은 그야말로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왜 하필! 또 김세균과 엮여있다는 말인가!
"제조와 관련된 그 어떠한 내용도 저는 알려드릴 수가..."
"그건 무용하네. 내가 필요한 정보는 모두 얻었네."
뒤따르던 비서가 천만 달러 짜리 국채를 쟝에게 건넸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고서, 쟝이 조금 머쓱해져서는 말했다.
"와인이라도 한 병 가져가시렵니까?"
"... 헌터 김세균이 만든 와인인가? 혹시 남은 게 있다면 모조리 주게."
"마침 딱 한 병 있군요. 그런데..."
"400만 달러 정도면 되겠나?"
"..."
이건 뭐지.
술에 미친 사람인가?
카이저를 보는 쟝의 시선에 오해가 물들었다.
**
처음에 페트뤼스 양조장에서 와인을 내놓았을 때만 해도 미친놈 취급받았지만, 평론가의 평론 한방에 상황은 역전되었다.
심지어 몇백만 유로에 낙찰되기까지.
조금 아쉬운 건, 우리나라 청주는 와인 정도의 시장성이 아직은 없다는 거였다.
사케도 컸지만, 그조차도 와인의 발끝도 따라가기 힘든 시장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일단 한 번 입소문만 타면, 자신은 있었으니까.
SG그룹이 생기면서 SG제약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편입된 세일제약.
이곳의 자회사로 작게 SG주조를 만들었다.
술 담그는 데는 물이 중요하다길래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있는 전통주 양조장을 인수해서 만든 작은 회사였다.
물론, 이 작은 회사가 세계적으로 일으킬 파장은 전혀 작지 않을 테지만.
처음 나온 제품의 이름은 '천상(天上)' 이었다.
영문명은 Celestial.
이 양조장에서 처음 이 천상을 내놓으려고 한 가격은 병당 3천만 원이었다.
나름 합리적인 금액 책정이었다.
페트뤼스 양조장에서 10만 유로, 우리 돈 1억 5천만 원 정도에 팔았으니, 거기서 80%의 넥타르를 뽑아내고 20%만 남긴 술은 일단 1/5 정도 가격에 파는 게 맞다는 생각... 이었는데.
경매에서 무슨 380만 유로에 낙찰되고 이런 모습을 보니 더 올려도 되겠다 싶어서 병당 3억.
딱 10배만 부풀려 올려놨다.
당연히 반응은...
─세균맨 회사에서 무슨 이상한 주조? 주류회사가 생겨서 사이트 들어가 봤는데... 청주 한 병에 3억 뭐냐.
└아직 가격 업데이트 안 한 거인 듯. 그냥 아무 가격이나 샘플로 넣어봤나 봐.
─오류야 오류. 도수 표기도 잘못되어 있네. 청주가 40도가 말이 됨?
└ㅋㅋㅋㅋ 저거 사면 환불해 주냐?
└진짜 사면 어그로 ㅆㅇㅈ
싸늘하기는커녕, 애초에 진지하게 생각하지조차 않았다.
당연한 소리인가...
"역시 초반 진입장벽이 너무..."
회사 직원들이나 제피로스나, 시음해본 모두가 3억 원의 가치를 인정했다.
그렇다면 심리적 장벽을 어떤 광고로 깨야 할까?
어차피 병당 3억 원짜리 술을 일반인이 사서 마실 수는 없다.
그렇다면, 최고 수준의 헌터나 부호들을 상대로 홍보가 들어가야 하는데...
라고 생각했다.
"... 회장님?"
"예."
"조금 전에 주문 들어왔는데요?"
"오... 장난 주문 아니죠?"
"네, 장난식으로 들어오는 주문은... 선결제로 3억을 긁어야 하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 그런데 지금 주문은요?"
잠시 머뭇거리다가.
"누가 인터넷에 세팅해 놓은 재고 전체를 주문해버렸습니다. 총 999병. 2,997억 원 전량 매진되었습니다."
... 이건 또 어떤 미친 새끼야?
다행히 싹 긁어모으면 간신히 999병 재고는 있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3000억 짜리 장난을 칠 미친놈은 없을 테고.
"어디서 들어온 주문입니까?"
"... 미국, 배송지는 일리노이 주 시카고입니다. 주소가 카이저 타워라고 쓰여있네요."
아니 카이저 이 양반이...
술독에 빠져 죽으려고 작정했나?
**
어떻게 해야 하지?
와인 한 병을 들고서 미국으로 돌아온 카이저는 한동안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김세균과 접촉해야 한다는 건 알았다.
그런데 이제... 줄 게 없었다.
이미 김세균은 충분히 거물이 되었다.
한국은 분명 작은 나라지만, 그 한국을 좌지우지할 만한 거물이 되었다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카이저 본인이 용 머리를 포기할 수 없는 이상, 그가 김세균에게 제시할 수 있는 건 용 꼬리가 전부였다.
그런데, 상대는 뱀 머리다.
꼬리만 흔들어서 어떻게 현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면 머리를 쪼개서라도 나눠줘야 한다는 거였는데...
과연 그게 메리트가 있을지, 그게 맞는지조차 판단이 서질 않았다.
바로 그 때였다.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세균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술이 올라온 게.
"이거다!"
카이저는 확신했다.
그리고 바로 구매해버렸다.
그 결과.
그의 손안에 999병의 청주가 들어왔다.
맛 같은 건 신경쓸 겨를도 없었다.
이게 사기당한 건지, 아닌지만 확인해 보기만 하면 됐다.
바로 들이켰다.
"푸흡!"
뿜을 뻔했다.
아니, 이거 뭔데 이렇게 독해?
그래도 병당 3억짜리 술을 뱉을 수는 없었다.
독한 걸 참아내고 간신히 넘긴 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신이 빚어낸 음료의 편린을 마셨습니다! 당신의 빛바랜 신앙이 아주 약하게 빛을 찾습니다!]
"... 편린? 약하게?"
뭔가 이상한데?
검을 들어 광휘를 뽑아보니...
진짜 약하게, 신앙이 늘어나 있었다.
기껏해야 와인의 오분의 일 정도일까.
그래도 괜찮다.
999병이나 있으니 저걸 다 마시면...
"저걸."
그제야 라벨에 있는.
"다."
40도라는 도수가.
"마시면."
카이저의 눈에 들어왔다.
고작해야 십몇도짜리 와인이 아니라... 40도 술을.
그것도 5배 많은 양을 마셔야 했다.
"으아아아아아아!"
카이저의 집무실에서,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신제품(3)
신제품(3)
아직 아무 제품도 팔지 않았음에도 벌써 사람들이 들락거리기 시작한 SG주조 사이트.
그곳의 팝업에 누구도 예상치 못한 내용이 떠올랐다.
[SG주조 천상(Celestial), 초도물량 999병 전량 매진,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2차 판매 일정은 추후 공지됩니다.]
3억짜리 술을 두고서 오류라고 호언장담하던 사람들의 반응이 무색하게, 진짜로 매진된 모습에 사람들이 당황했다.
─오류라면서?
└아니 오류가 아니면... 3억 짜리 술이 999병이 나간 거야?
└거의 3천억인데...
└저걸 누가 샀어?
─ㅅㅂ 3억 술 미친 존나 그사세네. 부자 헌터들이 샀겠지 뭐.
└아니 저런 거 나오면 꼭 인별에 올리는 셀럽 헌터 있는데 걔도 안 올렸던데?
─이거 10주작 아니냐?
└세균햄이 얼굴은 못생겼어도 그럴 사람이 아님
└1억 뀨뀨단 극대노할 소리 하지 마셈.
└뀨뀨! (1억 뀨뀨단이라니 10억이겠지라는 뜻)
└뀨뀨뀨! (10억 뀨뀨단이라니 20억이겠지라는 뜻)
제대로 홍보도 하지 않은 병당 3억짜리 술이 천 병이나 팔렸다?
너무 황당하게 들리는 이야기였다.
그게 얼마나 황당하게 들렸는지, 곧 이야기는 이렇게 와전되고 있었다.
─쯔쯔, 경영도 모르는 놈들이 저걸 그대로 믿네, 저거 탈세하려고 저러는 거야.
└ㄹㅇ? 하긴 그쯤 아니면 이해 안됨
└아무리 그래도 세균맨이 ㅂㅅ이 아닌 이상 저렇게 티 나게 하겠음?
└티 안 나게 하려고 했는데 티가 나버린 거지, 그래서 홍보도 하나도 안 태웠잖아.
─현직 세무학과 학생입니다. 저거 탈세 맞습니다.
└현직 세무사입니다. 그냥 지나가겠습니다.
└그냥 지나가지 말고 설명하고 가 ㅋㅋㅋ
─세금 문제 때문에 자전거래 돌린 거 같은데
└그게 가능함?
└사실 나도 몰?루
뭐, 이해는 된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 저랬다고 생각하는 게 정상이겠지.
그런데.
심지어 이 떡밥을 국회에서까지 물었다는 게 레전드.
국회 청문회까지 올라갈 기세이자, 그래서 전화까지 왔다.
관리부 조형빈 국장이었다.
─그, 새로 만드신 회사 있잖습니까.
"... 설마 정부에서까지 진지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죠?"
─아, 아닙니다!
목소리만 들어도 맞구만, 뭐가 아니야.
─크흠, 사실은 요즘 말이 많아서. 저흰 아니라는 거 알고 있지만...
"세금은 아직 낼 때가 안 됐고, 입금내역만 까면 되죠?"
─예! 그래 주신다면 너무 감사드리겠습니다!
"제가 관리부 편의 한 번 봐 드리는 거예요."
─예예, 알죠, 알죠.
이럴 때 생색 한 번 내야지.
전화를 끊은 뒤에 잠시 고민에 빠졌다.
누가 샀는지도 까야 하나?
까야 믿을 만하겠지.
"아, 이왕 까는 거... 밑의 라인업도 같이 오픈해야겠다."
한 번에 대량으로 공장식으로 빚으면 당연히 넥타르는 형성되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술 빚는 데 정성이 들어가야 넥타르가 형성되는 모양.
게다가 그렇게 정성으로 빚은 모든 술이 넥타르를 포함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넥타르 없는 술이 하자가 있느냐, 하면 당연히 아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모종의 이유로 '완벽'에 한두 스푼 모자랄 뿐.
넥타르가 형성되지 않은 술도 무척 훌륭했다.
아마 일반적인 술들과는 경쟁 구도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수준.
가격대를 정하는 게 고민이긴 한데...
그것도 생각해둔 게 있지.
**
한국의 위스키 전문 Y튜버 김유선.
구독자 80만 명을 자랑하는, 한국에서는 최고의 체급을 달리는 Y튜버인 그는 국내에 진출하는 수많은 주류회사로부터 초청을 받는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어지간한 광고 한 번 보다 그의 리뷰 영상 하나가 더 효과가 좋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에게, 신생 주류업체라는 SG주조로부터 초청장이 날아왔다.
처음에는 무시하려고 했다.
그에게 초청이 오는 곳이 한두 개는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알아보니, SG주조의 모회사가 SG그룹이며, 거기가 요즘 한국의 국가대표 헌터라고 불리는 김세균의 회사라지 않은가?
최근 메이저 던전개발회사를 전부 통합하면서 국장을 불장으로 만들어 그의 주식 계좌를 따뜻하게 만들어 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마지막에 화제의 3억 술 시음까지 있다고 하니, 이걸 거절할 수가 있나.
3억 술 리뷰만 해도 조회수가 터질 거다.
지금 한국 전체가 SG주조의 3억짜리 술에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이러나저러나 손해 볼 건 없다는 생각으로 강남의 한 특급호텔에 도착했다.
이번 행사가 열리는 행사장이었다.
그런데 행사장에...
외국인이 좀 많다?
그것도 익숙한 얼굴들이 많았다.
"... 저 사람 앵그리 데이비 아냐?"
한 명까지 동반 가능하기에 데려온 그의 PD에게 물었다.
촬영하느라 여념이 없던 PD의 카메라가 한쪽의 백인 남자에게로 향했다.
"... 맞는 거 같은데요?"
구독자 3천만 명의 미국 백인 아재.
미국 버번 위스키를 주로 다루는 주류 전문 리뷰어였다.
그의 뒤로 덩치 큰 흑인이 불쑥 걸어갔다.
"판타지 브루어리?"
"... 그것도 맞는 거 같고요."
구독자 2천 3백만의 칵테일 전문 Y튜버.
이외에도 주류 업계의 올스타 같은 이들이 주륵 나타났다.
그라고 모든 사람을 아는 건 아니었으니, 모르는 이들도 전부 자신만큼... 아니 자신보다도 유명할 게 뻔한 상황.
"와, 기죽는데요 행님."
"... 한국에선 우리가 먹어줘. 여기가 어디다?"
"한국이죠."
"그래, 어깨 펴."
그 와중에, 익숙한 얼굴이 하나 더 보였다.
이번에는 사람들도 웅성거렸다.
주류 업계에서, 이 사람만큼의 유명세를 지닌 사람은 드물었으니까.
이 남자의 리뷰 자체가 하나의 산업을 움직였다.
"로저... 파커..."
"저 엉덩이 무거운 양반까지 납셨다 이거지?"
와인 리뷰의 전설까지 나타나니, 대체 김세균이 세계 주류계의 유명인들을 모아놓고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건지 궁금할 따름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행사가 시작되었다.
예상 밖으로 김세균은 나타나지 않아서 조금은 아쉬웠다.
혹시 뀨뀨를 볼 수 있을까 싶어서 기대했는데 말이다.
요즘 뀨뀨 영상이 Y튜브의 치트키라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니까.
대신에 전문 행사 진행 MC가 행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오늘 여러분이 하실 건, 세 번의 시음입니다. 시음 후에 평가를 작성하시고, 이 정도 가격에 팔면 되겠다. 생각이 드시는 가격을 적으시면 됩니다."
간단한 시음 행사였다.
처음에 나온 잔에, 행사 담당 직원들이 술병을 가져와 한 잔씩 따라주었다.
색을 볼 수 있도록 투명한, 향을 모아주는 노징 글라스였다.
"자신있는 모양인데."
"왜요?"
"향을 모아주는 노징 글라스는 안 좋은 향도 같이 모아준다는 문제점이 있거든. 그런데 청주와 같은 우리 전통술은 필연적으로 누룩취가 따라올 수밖에 없어."
"누룩취도 같이 모은다는 거죠?"
"응, 그걸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불호 쪽은 엄청 불호지. 문제는 누룩취에 익숙하지 않을 외국인들이 다수라는 거고."
"일단 마셔보시죠."
고개를 끄덕이고, 김유선이 향을 맡다가 잔을 깔끔하게 비웠다.
"... 와."
"왜요, 왜요. 어떤데."
"너도 마셔봐."
동반인에게도 한 잔씩 나오는 술을 마신 PD 역시 탄성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와, 이거..."
"응, 대한민국 청주 중에는 압도적 1등 인정. 어지간히 비싼 사케도 못 비비겠다. 누룩취 같은 건 1도 없다."
"그런데 도수가... 그냥 청주 도수 같은데요?"
"그러게. 40도라고 하지 않았나?"
"그럼 이게 3억짜리 술이 아닌가 봐요."
"3잔 마신다니 뒤에 나오겠지."
발효주로 40도라니.
솔직히 말하면 기대는 없었다.
어차피 주정 같은 걸 타서 도수를 올렸을 터.
그렇게 하면 발효주의 향미는 떨어트리고 쓸데없이 도수만 올라간 기형적인 술이 된다.
하지만, 다음 잔을 마셨을 때.
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 이거..."
지금까지 먹어본 적이 없는 맛.
도수는 30도 정도 되는 것 같았지만, 체감 도수는 훨씬 순했다.
느껴지는 압축된 쌀의 향미에, 은은히 도는 포도와 같은 과실의 풍미까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거, 주정 안 섞었어."
"... 아니 형님이 그거 불가능하다면서요. 뭐 효모가 죽는다며."
"과학적으로는 안 되지."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 과학만 있냐?"
"어?"
"김세균이 누구냐? 헌터 업계에서도 먹어주는 사람 아니냐? 그런 사람이라면 뭔가 방법을 찾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지."
"와, 그러면 이게 던전 기술로 만든 술이라는 거예요?"
"응, 주정 섞으면 이런 맛 절대 안 나. 좀 짜증 나는 쓴맛 같은 게 난다고. 그런데 이건 그냥 앞에 먹은 도수 낮은 청주를 그대로 응축해놓은 맛이잖아."
주변 전문가들의 반응도 같았다.
특히 로저 파커의 입에 시선이 집중됐는데, 그 역시도 탄성하며 말했다.
"이건 발효주의 한계를 극복했군요. 과학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아마도 던전 테크놀로지가 결합된 거 같습니다."
영어로 된 말을 알아들은 김유선이 의기양양하게 PD에게 말했다.
"저봐 저봐. 로저 파커 저 양반도 똑같이 말하잖아. 던전 테크놀로지라고."
"그러네요, 역시 행님이십니다. 그런데 이것도 오크통 숙성 같은 걸 하면 더 맛있지 않을까요?"
"솔직히 말해서 위스키 중에 알콜맛이 역하니까 통빨로 묻어보려는 게 한둘이냐? 이렇게 술의 기본 체급이 높아버리면, 오히려 오크통에서 나오는 바닐린 향이 그걸 해친다고."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나오는 마지막 술.
훅 하고 나오는 뜨거운 알코올 증기가 느껴지는 걸로 봐서는 고도수.
사람들은 이게 3억짜리 술이라고 장담했다.
사방에서 3억, 혹은 20만 달러, 20만 유로 등의 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마신 사람들의 소감은.
"이게 40도 짜리 그거 같은데, 30도 짜리보다 확실히 좋아, 좋은데."
"이걸 3억에 판다고 하면 안 살 거 같죠?"
"나는 안 산다. 가격 세팅이 너무 잘못됐어. 대체 어떤 호구 새끼가 이걸 천 통이나 다 샀다는 거야?"
"그거 언플 아니었어요?"
"아니라잖아. 세균햄은 거짓말 안 해."
"예이예이, 이래서 세균단은."
사람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로저 파커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반응 사이에서 나직이 울렸다.
"좋습니다. 좋은 술이에요. 세상에 없던 술이라는 상징성까지 고려해서, 보르도 그랑크뤼급 와인 정도의 가격 책정 정도라도 받아들일 만했을 겁니다. 제가 여기에 낼 수 있는 최대 금액은 만 유로 정도겠네요. 그것도 조금 과하고... 7~8천 유로면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20만 유로면..."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로저 파커.
다른 사람들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잔을 비우는 건 잊지 않았다.
20만 유로의 가치는 없어도, 7~8천 유로 가치의 술도 귀한 술인 건 마찬가지니까.
그렇게 시음 행사가 조금 싱겁게 끝났다.
... 라고 사람들이 생각할 무렵.
─오늘의 특별 시음, 네 번째 병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대하시던 그게 맞습니다.
MC의 목소리에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 네 번째?"
"아니, 그러면 조금 전에 마셨던 게..."
"3억 짜리가 아니었단 거야?"
꿀꺽, 침을 삼키면서 들어오는 병을 보았다.
그리고 한 잔씩, 새로운 잔에 따라지기 시작하는 술.
3억짜리 술 답지 않게 제법 인심 좋게 따라주었다.
"이거 좀 보세요!"
다른 사람들이 술 자체를 멍하니 보고 있을 때.
로저 파커가 하얀 A4용지에 대고 술의 색깔을 확인하고는 탄성을 터트렸다.
약간 노란 빛의 청주에서, 무지개빛이 옅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뭔가 다르긴 한가 본데."
"마셔보세요. 궁금해 미치겠네."
그리고 사람들이 술을 한 모금 마셨을 때.
한동안 이어지는 정적.
정적을 깬 건 이번에도 로저 파커의 목소리였다.
"... 태어나서 신의 경지에 달한 술을 만나는 건, 지난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아니군요. 여기에도 신이 있었어요."
신. 그 단어가 너무도 잘 어울리는 술이었다.
그리고.
"하필 그가 보르도에 방문했을 때 이런 신의 경지에 달한 술이 나왔고, 그가 파는 술에서 같은 느낌을 받았다니... 세상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이제 확신이 드네요. 페트뤼스 양조장의 그 술은... 아마 헌터 킴이 만들었거나 도운 게 분명합니다."
로저 파커의 말에 사방에서 탄성이 터졌다.
거기까지 연계해서 생각할 수 있다니.
하지만, 어쩌면 당연한 추론이었다.
"그리고 누가 이 술을 샀는지 부러워지는군요. 알았다면 저도 두세병쯤은 사놓았을 텐데요."
3억의 가치가, 세계 최고의 평론가의 입으로 공인되는 순간이었다.
─아, 그리고 누가 이걸 다 사 갔는지 많이들 궁금해하셨죠? 당연히 세간에서 나오는 탈세 같은 건 절대 아니고요. 구매자는... 다름아닌...
**
[SG주조, 3억 술 천상(天上), 너무 비싸다고요? 하위 라인업, 천하(天下) 40, 천하 30, 천하 20 출시 예정!]
[3억짜리 술 999병을 주문한 건 카이저?]
[SG주조 관계자, 카이저 코퍼레이션에서 전부 주문한 게 맞다.]
[카이저, 저점매수 신화 다시 시작되나?]
[세계 최고의 와인 평론가, 로저 파커. 천상은 3억의 가치 충분하다!]
사람들의 카이저 찬양이 다시 시작되었다.
대체 어떻게 가치를 알고서 미리 샀냐는 의문부터 해서, 카이저와 세균 사이의 커넥션이 아니냐, 3천억은 계약금이고 김세균은 카이저 코퍼레이션에 이적한다는 등의 루머도 퍼졌다.
하지만, 카이저는 그런 루머를 신경 쓸 틈도 없었다.
카이저 코퍼레이션 이사회.
오늘도 불참한 카이저 대신에 참석한 소피아 하인리히에게, 투자자인 헤지펀드 대표들의 불퉁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하인리히 대표이사께서 거의 2.2억 달러에 달하는 사재를 써서 천 병 가까운 술을 샀다는 게 사실입니까?"
"사재의 용처까지 이사회에서 밝힐 필요가 있을까요?"
"그 사재를 사용한 정보의 입수처가 회사를 통했다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회사를 통해 얻은 정보라면, 당연히 회사의 자산으로 구매해서 회사 차원에서 관리가 이루어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정보를 회사 차원에서 입수한 거란 증거는요? 그건 그냥 대표님의 개인적인 취미로..."
"열 병을 사면, 취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백 병을 샀다? 그것도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천 병? 2억 달러? 그쯤 되면 사업과 투자의 영역 아닙니까?"
헤지펀드 대표들의 항의에도, 소피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들의 어떤 외침도 영향을 미칠 수 없을 정도로, 카이저의 위세는 여전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마지막 하나의 질문이, 소피아의 심기를 거슬렀다.
"하인리히 대표가 요 며칠 사이 두문불출하는 이유가, 혹시 계속 술을 마시고 있어서는 아닙니까?"
그는 카이저 코퍼레이션의 경영권을 노리는 헤지펀드의 대표였다.
계속해서 후계자 리스크를 언급하기도 했다.
소피아 하인리히.
그녀는 카이저 코퍼레이션을 이끌 능력이 없고, 카이저는 너무 노쇠했으니 새로운 대표이사를 선임해야 한다는 여론을 계속 만드는 작자였다.
그런 작자가.
한껏 입꼬리를 올린 채 이어 말했다.
"경영자가 알코올 중독자라는 건 경영 결격사유의 중대 사유입니다."
"할아버... 아니 대표님은 위대한 헌터에요!"
"아무리 위대한 헌터라고 해도 술이나 마약으로 무너진 사례를 우리는 많이 보아왔죠."
웅성웅성.
웅성거리는 이사회에서, 소피아 하인리히는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메카(1)
메카(1)
엄청나게 쌓인 술병을 보는 카이저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며칠 동안 열심히 마신 게 고작해야 10병.
지금은 술만 봐도 헛구역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마나를 통해 주정을 몰아내는 건 가능한 일이긴 했다.
문제는, 알코올과 그 모종의 성분이 구분이 안 된다는 거였다.
[신이 빚어낸 음료의 편린을 방출했습니다! 당신의 신앙이 빛을 잃습니다!]
오른 신앙이 떨어졌다.
그것도 올랐던 것보다 더 많이.
분명 좋은 술이었고, 맛있기도 했는데...
맛있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심지어 급성 알코올 중독의 위험성도 있었다.
다행히도, 대처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체내의 수분을 늘리면, 그만큼 혈중 알코올 농도를 낮출 수 있었다.
지금도 수액주사와 헌혈팩을 단 채였다.
"고작해야 술 마시자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이런 식으로는 안된다.
그래서 연금술사까지 불러봤다.
안에서 신앙과 관련된 특정 성분만 추출할 수 있냐고.
그의 답은 명확했다.
분명 성분이 존재하긴 하는데, 추출하긴 어려울 거 같다. 추출할 수 있다고 해도 아주 극미량만, 그것도 비효율적으로 추출될 거다.
일단 몇 병은 추가로 세계 최고 레벨의 연금술 연구소에 성분분석을 보내서 성분 재현이나 양산이 가능한지를 의뢰 보내놓은 상태였다.
그 결과가 제발 잘 나와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대로라면...
신앙 전에 몸이 먼저 죽어버릴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
SG주조를 포함한 SG그룹의 일을 대충 처리하고 나서야 시간이 좀 생겼다.
진짜, 역대급으로 바쁜 나날이었지만, 다행히도 제피로스가 앞장서서 교통 통제를 해주니 상황이 좀 나았다.
서로 다른 문화의 회사를 묶어놓으니 잡음이 엄청났는데, 그걸 현재 대한민국 최고 수준의 헌터인 제피로스가 잘 컨트롤해준 거였다.
그래서 이제 다음 공략 장소를 정했는데.
다름 아닌 사우디아라비아였다.
여기도 진짜 엄청나게 말 많았지.
처음에 그곳으로 공략한다고 하니, 조형빈 국장이 물어봤다.
"혹시 종교는 없으시죠?"
없다고 하니 안도의 숨을 내쉬며 하는 말.
"사우디 쪽에서 무교까진 어떻게든 해보겠다는데, 이교는 안 된다고 해서요."
"... 이슬람은 무교를 더 안 좋게 보는 거 아니었어요?"
어디 인터넷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무신론주의적 무교세요?"
"그냥 종교에 아무 생각이 없는데요."
먹고살기 바쁜데 뭔 종교여.
"네, 혹시 무신론적 성향을 SNS나 평소에 어필하고 다니시지는 않으셨죠?"
"... 네."
"그럼 상관없습니다. 유신론적 무종교자로 처리할 겁니다."
아니, 각성자가 판치는 세상에 여전히 종교 가지고 씨름하는 게 솔직히 좀 어이가 없긴 한데...
하긴, 저쪽이야 각성도 신의 은총이라고 하는 사람들이구나.
이해한다.
"공략 장소가 장소이니, 너른 이해 부탁드립니다."
"뭐, 어쩔 수 없죠. 메카... 라고 했던가요?"
"예."
이슬람교 최대의 성지 메카.
내가 가게 될 던전은 거기에 있었다.
**
"메카 던전을 이제 이교도... 아니 무종교자한테도 열었다니. 세상 많이 변했군."
이제는 내 경호원이 된 최강 씨가 전용기 안에서도 여전히 스쿼트를 하며 말했다.
이 헬창 아재를 어찌 하오리까.
"왜요? 안 열려 있었어요?"
"내 시절엔 무슬림만 공략 가능하다고 도장 쾅쾅 박아놨었지."
"흐응."
"요즘 사우디가 많이 급하다더니, 그게 정말인가 보군."
"메카 지역 근처에 사우디 GDP 대부분을 책임지는 알짜 게이트들이 즐비하다고 하긴 하더라고요. 평정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가 엄청나다고."
"종교고 자시고, 먹고 사는 문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물론 석유는 여전히 팔리긴 팔렸다.
당연하다.
플라스틱 등 여러 원료 용도로도 필요한 게 석유니까.
게다가 던전 에너지가 발전하지 못한 국가에서는 여전히 에너지 용도로도 활용했다.
문제는 그 용도를 다 합해도 기존 용도의 20% 정도밖에 수요를 채우지 못한다는 거였다.
미국 기준으로 해운, 차량, 항공 등에 사용되던 것이 66%다.
지금?
일정 규모 이상의 선박 가운데 엔진을 사용하는 건 전무하다.
대부분이 상용화된 소형 융합로를 사용한다.
차량이야 거의 전기차로 대체되었고...
기껏해야 항공기 정도?
그것도 요즘 전기 비행기다 뭐다 나오는 거 같던데.
처음 던전의 상온초전도체가 에너지 산업을 대체했을 때만 해도 석유는 30% 정도 하락한 선에서 계속 팔렸지만, 거기서 15년 정도 지나며, 점차 관련 산업이 석유를 배제하고 발전하면서 지금 석유는 연일 저점을 갱신하고 있었다.
그 저점 갱신의 와중에, 사우디가 드디어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그럼에도, 확실히 꽤 이례적인 선택이었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말 많이 나올 텐데."
"... 그것 때문에 안 그래도 뭐 거의 사상 검증 수준으로 인터뷰했어요. 사우디 대사관에서. 사우디 쪽에서 인터뷰 내용 가지고 율법학자들에게 맡겨서 논의까지 하고, 최종 공략 허용 결정이 나서 가는 거예요."
이런 것까지 하고서 공략을 해야 하나 자괴감이 조금 들긴 했는데, 워낙 보상이 다른 곳이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컸다.
일단 공략 현상금만 30억 달러.
거기에 추가로 사우디 내 여러 국책 사업에 대한 우선 수주 권한까지.
원래대로라면 별 필요 없었겠지만, 지금은 SG그룹이라는 거대 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그중에는 건설 계열사를 지닌 던전개발회사도 많았고.
회사에 먹거리를 물어다 주는 것.
그것도 오너가 해야 할 일 중 하나였다.
애초에 그런 시너지를 노리고 국가에서도 SG그룹을 만들어준 것이기도 했다.
현상금조차 줄 여력이 없는 3세계 국가들은 인프라 부설권 같은 걸 주고 공략을 요청하기도 하니까.
그런 권한은 김세균 개인에게는 전혀 쓸모없는 거지만, 전체 회사 차원에서는 그야말로 돈줄이고 젖줄이다.
"흠, 메카라... 요즘도 무슬림들만 들어갈 수 있지?"
"그렇다더라고요."
이슬람교의 성지이다 보니, 이슬람교도, 즉 무슬림이 아니면 원래는 도시 자체에 들어서는 게 불가능했다.
나랑 내 수행원들은 뭐라더라... 일시적 축성을 받는다던가.
요식행위처럼 느껴졌지만, 종교인들에게는 중요하겠지.
그렇게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의 킹 압둘 아지즈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내리니, 하얀 전통복 차림의 사람들이 나를 맞이해주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어서 오십시오! 김세균 헌터! 반갑습니다!"
"예, 반갑습니다. 왕세자님."
나를 반기는 건 사우디의 왕세자.
말이 왕세자지, 사실상 노쇠한 국왕 대신에 사우디아라비아를 지배하는 통치자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반대 여론이 많다고 들었는데, 그걸 감수하고서 제게 게이트 공략을 맡겨주셔서 일단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하하, 그것 또한 인샬라(신의 뜻)이겠지요."
인샬라.
신의 뜻대로. 라는 뜻의 무슬림 관용어구와 함께 웃어 보이는 왕세자.
"그러면 여기서부터는 이쪽의 파하드가 안내할 겁니다."
역시 바쁜 양반이라, 가볍게 인사만 나누고 사라진다.
대신에 책임자로 보이는 파하드라는 사람이 날 안내했다.
그가 준비해둔 리무진을 타고, 70km 정도 떨어진 메카로 향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메카로 향하는 길은...
"이건 사막이 아니잖아?"
고속도로를 따라, 녹음이 우거진 녹지가 있었다.
"이 아득한 사막조차 녹지로 바꾸어놓는, 신의 기적입니다."
파하드의 자랑스러운 목소리에, 다른 수행원들이 작게 '알라후 아크바르' 라고 속삭인다.
'신은 위대하시다'라는 뜻.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던전 테크놀로지 같은데.
그런데 던전 기술을 썼다고 해도, 저 정도 지역을 녹지로 바꾸려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돈이 깨졌을 거다.
땅 파서 돈 벌던 양반들 답게, 무서운 줄 모르고 돈을 썼구만.
저렇게 돈을 썼으니 석유값 폭락한 지금은 돈이 모자라서 내게 공략을 요청하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70km니 제법 가야겠네.
하품하며 잠깐 눈을 감으려던 순간.
창문에서 무언가가 순식간에 가까워지다가.
쩌저적! 방탄유리를 단번에 깨부수며 내게로 날아들었다.
내 미간에 틀어박혔다가 툭 떨어지는 물체.
뒤늦게 반지의 아테나가 머리 쪽으로 펼쳐졌다.
"화, 화살?"
뭐, 뭐야 나 지금 죽을 뻔한 거야?
지팡이도 안 들고 있었으니, 희생의 번제 효과도 받을 수 없었다.
아테나도 반응하지 못하고 뒤늦게 펼쳐질 정도로 빠른 화살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았지?
유리를 깨면서 위력이 줄었나?
그 대답을, 시스템 메시지가 나 대신에 해주었다.
[시전자, '최강'의 금강역사 클래스 전용 스킬, '인드라망'의 효과로 당신을 향한 모든 피해가 시전자에게 전가되었습니다.]
[인드라망] (현재 결속됨)
설명 : 인드라의 그물은 세상 모든 것을 결속하며, 그것은 만물이 하나임을 의미한다. 당신 역시 결속의 대상일 뿐이다.
내용 : 최대 5명의 대상을 지정하여 결속할 수 있다. 결속한 대상의 피해를 전가하여 받는다. 결속한 대상이 많아질수록 나누어 받을 수 있는 피해는 줄어든다. (현재 결속된 대상 : 김세균)
그리고, 내 옆의 헬창 아재는...
간지럽다는 듯 미간을 긁적이고 있었다.
살았다...
역시 최강 탱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바로 지팡이를 꺼내어 들었다.
희생의 번제도 사용했다.
와,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화살이 날아오다니.
그것도 방탄유리까지 깨고서...
무슨 호크아이냐?
각성자가 틀림없었다.
그리고 뒤늦게 앞에서 난리가 났다.
"저격이다!"
"저격수를 찾아라!"
누군진 모르겠지만 감히 나를 죽이려고 들어?
차에서 내려서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멀찍이 모래 언덕이 있었다.
아마 저 언덕 뒤에서 날아온 거 같은데.
"어이, 위험해."
몸을 아예 드러내고 있으니, 최강이 나를 말리며 말했다.
"지금은 괜찮아요."
희생의 번제를 켜놨으니.
아니, 지팡이 효과를 상시로 받을 수는 없나?
"괜찮기는, 미리 인드라망을 안 써놨으면 큰일날 뻔했구만."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든든 그 자체다.
물몸 마법사는 한 번 죽을 뻔했더니, 탱커의 소중함을 느낀다고 하던가.
이제야 느낀다.
장거리 저격, 진짜 무서웠다고.
"너무 믿진 마라. 피해를 마냥 무한히 전가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나도 못 버티는 피해면 그냥 결속이 깨진다."
"네, 알겠습니다."
물론 저 어마어마한 근육 갑옷을 보면 깨질 것 같지가 않다는 게 문제지만.
"그나저나, 꽤 실력 좋은 궁수군."
"그 새끼 때문에 뒤질 뻔했어요. 잡아야겠어요."
"내 말 못 들었냐? 궁수는 잡히면 뒈지는 거야. 아마 거리 벌리는 건 이골이 나 있을 텐데. 네 기동력이나 내 기동력으로는 거리 좁히는 건 무리일 텐데."
그렇겠지.
혹시나 해서 규선 씨에게 의뢰해서 여러 종류의 세균을 준비해두길 잘했다.
인벤토리에서 꺼낸 사멸 개체를 향해 언데드 라이즈 스킬을 사용했다.
'마그모필레를 프리셋 2번으로 옮긴다.'
화염내성균을 프리셋 2번으로 바꾸고.
빈 자리에...
(4) Magnetospirillum Magneticum(마그네토스피릴럼 마그네티컴)
─개체수 : 약 300억 개
─설명 : 혐기성의 박테리아로 체내에 자성 나노입자를 형성하여 자기장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능력 : 자기장의 흐름을 매우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다. 언데드화되어 약점이 극복되었다.
새로운 개체를 소환했다.
세상의 모든 자기장의 흐름을 민감하게 반응하는 세균군.
그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저쪽 모래 언덕에 있는 자기장의 흐름을 확인해줘."
현대인이라면 휴대폰 같은 건 들고 다니겠지.
전자기기가 하나도 없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
인체 역시 미세하지만 생체 전기를 형성하며, 거기에서도 자기장이 나오니까.
즉...
살아 숨쉬는 인간이라면.
이 세균의 추적을 피할 수 없다는 거다.
메카(2)
메카(2)
"아이고 힘들어... 젠장, 튀었네. 빠르잖아."
힘겹게 모래 언덕을 올라가니 역시나 약간의 흔적만 남긴 채 사라져버린 궁수.
"못 잡을 거라고 했잖나. 저격 실패 시의 도주 경로까지 전부 짜놓는 게 탑 클래스급 궁수라고."
"괜찮아요."
그래도 괜찮다.
이미 자기장의 패턴은 파악해둔 상태였으니.
이 신형 추적용 세균군은 인간의 미미한 세포단위에서 나오는 생체전기의 자기장 패턴까지 파악할 수 있다.
즉 모든 인간의 세포 배열이 다른만큼, 마치 지문처럼 모든 인간은 다른 자기장 패턴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었다.
"메카 방향으로 향한 거 같네요."
"... 흔적은 우리가 왔던 제다 방향으로 남아 있는데?"
"탑 클래스 궁수라면서요?"
"... 아?"
탑 클래스면 흔적 바꾸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겠지.
"메카엔 사람이 많으니까, 그 안에 섞이려는 생각일 거예요."
"섞인 다음에 찾을 수는 있고?"
"당연하죠."
몸 안에 있는 세포 단위 하나에서 나오는 자기장까지도 추적 가능한 세균이다.
'인간' 하나를 추적하는 건 일도 아니지.
"아, 여기서 도주용 차를 탔군."
모래 언덕 반대편으로 내려가 보니, 역시나 메카 방향으로 향한 차량의 바퀴 자국이 있었다.
"아무래도 제다로 도주한 거 같... 어?"
뒤늦게 우리를 찾아온 사우디측 경호팀이 메카 방향의 바퀴 자국을 확인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메카로 가야겠습니다. 차부터 부르세요, 서두르죠. 메카 경찰에도 연락하고요."
"아, 알겠습니다. 메카 근처에서 테러리스트라니... 이 무슨!"
이들도 말이 경호팀이지, 사실상 경찰국 산하의 경찰들이다.
그렇기에 신성한 성지인 메카 인근에서 테러가 일어났다는 사실에 분개하고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빨리 가야 한다.
더 늦었다가는 메카에서도 도망칠 테니까.
**
에에에엥! 경광등까지 켜고 교통 통제를 받으며 메카에 입성했다.
혼잡하기로 유명한 메카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경찰들이 삼엄한 검문을 진행 중이었는데...
그게 되겠냐고.
각성자에겐 인벤토리가 있고, 심지어 도주 위장에 능한 궁수 계통이라면 더 잡기 어려울 거다.
"애먼 사람들만 잡아놨네."
용의자랍시고 사람들을 쫙 잡아서 줄 세워 놨는데, 자기장 패턴이 일치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저 중엔 없어요, 다 풀어줘요."
"예? 어떻게..."
"영업비밀."
헌터가 이게 좋다니까.
영업비밀 한 마디로 끝난다.
반신반의하면서도 당사자인 내가 풀어주라니 하는 수 없이 풀어주는 경찰들.
졸지에 용의자로 잡혔던 이들이 내게 꾸벅 감사를 표했다.
그나저나 메카가 생각보다 크네.
성지순례 기간이 아니어도 거의 200만 명 이상이 사는 대도시다.
여기서 사람 하나 찾는다는 건 정말 사막에서 바늘 찾는 격인데.
그 사막의 바늘이...
보였다!
"가시죠!"
최강을 이끌고 급히 달렸다.
젠장, 공간이 한정적인 던전 안에서는 기동력 딸려서 고생해본 적이 별로 없는데 밖에서는 힘드네.
기동력을 확충할 뭔가가 필요하긴 하겠다.
게이트 밖에서 싸울 일이 없어서 필요성을 못 느꼈는데 나름 좋은 기회였다.
이 개자식을 잡기만 하면 말이지.
한참 뛰어서 도착한 곳은...
"어?"
모여 있는 경찰기동대의 한 무리였다.
그리고 분명히, 저 안에서 같은 자기장을 감지했다.
경찰 중 하나라고?
아니면 위장이라도 한 건가?
뭐가 어찌 된 거든, 등잔 밑에 제대로 숨었는데?
내 능력이 없었으면 진짜 찾지도 못했겠다.
"누구냐!"
문제가 있다면...
이 메카 경찰들은 아직 내 얼굴을 모른다.
누가 봐도 이국적인 외모의 나를 보고서 경계하는 경찰들.
"이번에 메카 게이트를 공략하러 왔다가 저격당한 헌터 김세균이 나입니다."
"거기 서 있어!"
나를 멈춰두고 무전을 나누기 시작하는 기동대의 대장.
이내 내 인상착의를 들었는지 거수경례를 올려붙였다.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뭐든 협조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과할 정도로 느껴지는 예의.
하지만, 무슬림 문화권에서 최상위 헌터에 대한 존경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기본적으로 각성을 신의 은총으로 생각하니.
각성자 중에서도 가장 강한 사람들인 최상위권 헌터는 이슬람의 개념에서 신의 은총을 강하게 받은 사람이다.
"잠깐 길 좀."
내가 걸어가는 길이 홍해처럼 갈라졌다.
아, 모세는 이슬람에서도 존경받는 선지자라니까 이런 표현도 괜찮겠지.
이래봬도 오기 전에 이슬람 교 공부 좀 하고 왔다고.
... 위키에서.
길이 갈라지다가.
한 경찰이 똑같이 옆으로 물러나려는 걸 2호기로 붙잡았다.
발이 접착제로 붙은 듯 움직이지 않는 걸 확인한 경찰이 당황한 듯 눈을 부릅떴다.
"왜, 왜 이러십니까?"
"넌 나한테 왜 그랬냐? 이 씹새끼야."
"무, 무슨...!"
내 반응에 기동대장이 다급히 와서 묻는다.
"저희 기동대원이 무슨 무례라도..."
"당신 기동대원이 아닙니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당신 기동대원으로 위장한 거죠."
"예? 아니... 그게..."
"아닙니다! 대장님! 이 사람이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전 아닙니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거의 주저앉다시피 한 채로 싹싹 비는 테러리스트.
그런데... 어떻게 입증하지?
자기장이 같다고?
그럼 내 세균도 증명해야 하고...
복잡해지는데.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최강이 천천히 다가와서는, 테러리스트의 손을 낚아챘다.
"맞네, 궁수."
그가 손에 역력히 박여 있는 굳은살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저 정도 달인의 실력까지 궁술을 높이려면, 당연히 손에 굳은살이 박일 수밖에 없었다.
역시 짬밥.
덕분에 귀찮음을 덜었다.
"얼굴이나 복식까진 어떻게 위장할 수 있어도, 손까지 위장할 수는 없지."
최강의 말에 기동대장이 와서 손의 굳은살을 확인하고는, 굳은 표정으로 멱살을 움켜쥐었다.
"대체 누구냐! 파이살은 어딨어!"
저 원래 얼굴의 주인이 파이살인 모양이다.
그제야 어떻게 발뺌할 수 없음을 깨달았는지, 파이살의 얼굴이 천천히 녹아내리며 새로운 모습이 드러났다.
놀라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나는 기동대장.
그의 앞으로 나서면서, 물었다.
"왜 그랬어?"
"... 이교도에게 메카의 신성한 게이트를 개방하다니. 용납할 수 없다."
"나 무교라는 거 못 들었어? 아마 알 자지러진다... 아니 자지라인가 거기서 방송도 많이 나왔을 텐데."
대중적인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사전에 사우디 정부에서 대중을 꽤 설득했다.
사우디 국민뿐만 아니라 범 이슬람교에 이르는 채널로.
뭐, 메카가 사우디 땅에 있긴 하지만 전 세계의 무슬림들이 성지순례까지 오는 워낙 성스러운 곳이니 당연하긴 했다.
"믿음 없는 자도 이교도나 다름없다! 죽여라! 이교도의 손에 죽는 것은 전혀 두렵지 않다!"
"쯧. 그냥 미친 종교쟁이였나."
"저, 저희가 체포하겠습니다."
"죽여! 죽이라고!"
널 왜 죽이니.
살아 있어야 사우디 정부에 계속 생색낼 수 있는데.
내가 어디 나가서 사우디 가서 죽을 뻔한 썰만 풀어도 사우디 정부의 신인도는 폭망이다.
그러면 사우디에 와서 공략하겠다는 제대로 된 외국 헌터들은 줄어들 거다.
고로 내 입을 막으려면 아주 비쌀 거라고.
"강한 헌터니까... 경찰들만으로 그냥 데려가기에는 힘들 겁니다. 혹시 근처에 병원 있습니까?"
"...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네 있답니다."
"구급차랑 산소호흡기 있으면 가져오라고 하세요."
의아해하면서도 구급차를 불러왔을 때.
보톨리누스를 움직여 테러리스트 놈의 몸속에 침투시켰다.
마나로 격렬히 저항해서 파괴되는 양도 많았지만, 파괴되는 그 순간까지도 보톨리눔을 한 방울까지 짜낸 뒤에 파괴되는 충성스러운 세균 군단들.
그가 눈을 부릅뜬 채 그대로 마비되었다.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 채, 안면 근육부터 그대로 마비된 모습은 기괴하기까지 해 보였다.
불쌍하긴 해도, 날 죽이려던 놈에게 이 정도만 한 것도 적당히 참은 거다.
"얼른 산소호흡기 채우세요. 자발 호흡이 불가능한 상태일 겁니다."
"...!"
두렵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경찰들.
그도 그렇겠지.
앉은 자리에서 순식간에 사람 하나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어놨으니.
"몇십 시간 정도는 지속될 테니, 구금하고 조사하기엔 충분한 시간일 겁니다."
"가, 감사합니다."
"그러게요, 감사해야죠. 먼 이국땅에 와서 테러까지 당하고 범인도 직접 잡아줬으니. 왕세자님께도 이 이야기가 똑똑히 들어갔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경찰들이 테러리스트를 호송하고 남은 자리에...
"응?"
신발 한 쌍이 놓여 있었다.
아, 내가 접착제로 붙여놔서...
결국 떼지 못하고 벗긴 모양이다.
생긴 모양이 고풍스러운 걸 보니 아이템 같은데.
뭐 별거 있으려나.
[순례자의 바라카 신발]
[품격] : 전설급 신발
[설명] : 위대한 순례자가 신었다는 신발. 신의 은총이 깃들었다고도 한다.
[내용] : 향시 '순례자의 발걸음' 상태에 들어선다.
[순례자의 발걸음(아이템 스킬)]
설명 : 성지로 향하는 순례자의 발걸음은 언제나 가볍다.
내용 : 성지로 향하는 방위로 이동할 때 이동 속도가 최대 1,000%까지 증가한다. 기본적으로 성지는 '메카'이며, 한 달에 한 번 현재 위치를 성지로 지정할 수 있다. 게이트 내부에서는 입장 위치가 성지로 정해진다. 성지에서 멀어질 때, 이동 속도는 기본 상태가 된다.
... 전설급 신발이라니.
용돈벌이 정도는 됐네.
게다가 내용을 보니 꽤 쓸만해 보인다.
게이트 바깥에서 쓰기는 조금 까다로워도, 게이트 내부에서는 분명 사기 아이템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거리를 벌리면서 싸워야 하는데, 입장 위치가 성지로 세팅되면 후퇴할 때 속도 보너스를 받는다는 거니까.
그나저나 이 테러리스트 자식, 왜 이렇게 빠른가 했더니 이 아이템 효과였네.
메카가 성지로 세팅되어 있었을 테고... 천 퍼센트 효과까지 받으면 엄청난 속도였겠지.
궁수나 마법사처럼 거리를 벌리는 게 이득인 클래스에게 찰떡궁합인 아이템이다.
경황없어서 아무도 안 보는 김에 슬쩍해야지.
나중에 물어보면 내가 인수한다고 하면 되지.
원래 신고 있던 신발을 벗고 갈아신었다.
아이템 장비의 좋은 점은, 사이즈가 자동 조절된다는 거다.
거의 인체공학적으로 딱 맞게.
새 신, 아니 헌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
"억!"
속도가 주체가 안 되네.
벽에 부딪힐 뻔했다.
뭐 하냐는 듯 한심하게 보는 최강 씨.
아니 이게...
아무래도 메카, 성지 근처라서 효과를 강하게 받는 모양이다.
이거 익숙해지려면 좀 걸리겠는데?
**
범인을 잡았긴 했지만,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게이트 입장을 조금만 미뤄달라는 사우디 당국의 요청 탓에 호텔에서 대기 중이었다.
메카에서 제일 좋은 호텔이라는데, 확실히 넓고 호화롭긴 했다.
그 안에서 내가 하는 짓은 가관이었지만.
쿵!
"아악!"
쾅!
"어억!"
드넓은 호텔방 이리저리 들이받으면서, 1000%에 달하는 속도를 주체해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벨을 덤벨처럼 들어 올리며 보는 최강 씨는 고개만 절레절레 내저을 뿐이었지만.
"아니, 그 바벨은 또 어디서 가져오셨어요?"
"호텔 피트니스 센터에 있던데. 가져간다니까 가져가래."
"..."
그럼 댁이 가져간다는데 누가 말리겠소?
플레이트를 거의 있는 거 없는 거 다 달아놨는데?
뭐, 거기다가 봉만 남겨두고 온 거야?
그러고도 투덜거린다.
"자극이 안 와, 너무 가벼워서."
저기에 휴대용 중력 발생기까지 사용해서 몇 배의 무게를 치고 있으면서도 저러는 거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호텔 문에서 노크가 들렸다.
거기서 들어온 건 무슬림 특유의 복장 대신에 검은 정장을 입은 한 남자였다.
"김세균 헌터, 저는 사우디아라비아 국가보안국의 수장을 맡고 있는 압둘아지즈 빈 모하메드 알-호와이리니입니다."
"압둘... 뭐요?"
"그냥 압둘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 예, 압둘 씨."
"이번 사건은 무척 유감입니다. 일단 저희 정보국에서 밝혀낸 1차 조사 결과를 알려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많이 다치셨군요. 전투가 격렬했나 봅니다..."
"... 네?"
... 나 다쳤어?
언제?
메카(3)
메카(3)
전투...?
어 그런게...
아... 설마 이리저리 벽에 들이받은 거 때문에 그런가?
흘끗 휴대폰을 들어 거울처럼 보니...
와, 내 얼굴 뭐냐.
잘생기지도 않은 얼굴 여기저기에 멍이 들어 있었다.
"아, 네."
"정말 죄송합니다. 두말할 것도 없는 우리 당국의 실수입니다."
"그렇겠지요."
"이번 일에 대한 보상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생포하신 암살자로부터 나온 아이템의 권한을 모두 김 헌터님께 양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괜찮은 게 있던가요?"
신발은 괜찮았는데.
"아직 모릅니다."
"예?"
"아이템을 순순히 인벤토리에서 꺼내놓지 않아서... 저희 보안국 차원의 '조치'가 있을 예정입니다."
헌터가 일단 인벤토리에 아이템을 넣어놓으면, 외부적으로 꺼낼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본인이 자의적으로 꺼내어 내놓아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 조치라면...
"고문?"
나도 모르게 물었더니, 그가 그저 희미하게 웃을 뿐이다.
어우 무섭다.
하긴, 미국도 테러리스트들에게는 가차 없는데, 하물며 아직도 태형이나 참수형 같은 전근대적 형벌이 남아 있는 사우디면 오죽할까.
"그리고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래서 여러 국가 정보기관들의 지원을 받아 조사 중이지만... 아마 맞는 거 같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압둘이 입을 열었다.
"세계 54개국에서 적색 수배가 떨어지고, 28개국에서 암살 및 테러를 수행했던, 하사신의 특급 암살자. 알-무르타다(Al-Murtada)로 보입니다."
... 내가 생각보다 거물을 잡은 거 같았다.
**
이번 사건으로 사우디아라비아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하사신이라고 해도 같은 이슬람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하사신은 페르시아 쪽, 그러니까 이란 계통이다.
즉 시아파라는 거였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대표적인 수니파 국가.
같은 이슬람교를 믿는데도, 서로를 이교도만큼이나 배척하는 게 저 두 종파였다.
오죽하면 수니파 계열의 모 테러리스트 조직은 '기독교인에게는 세금을 받되, 시아파는 그냥 죽여라.'라고 말했겠는가.
시아파 쪽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더 소수 종파인 만큼 힘이 없어서 목소리가 강하지 못할 뿐.
그런 시아파 계통의 테러리스트가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에 이어 두 번째로 거대한 도시인 제다와 성지 메카에까지 침투한 거였다.
자칫하면 사우디의 왕족이나 중요 인사가 암살당했을 수도 있던 상황.
─거기에 세계 헌터 협회에서 성명까지 낸단다. 그것도 두 개나.
제피로스의 말에 조금 놀랐다.
"저 때문에요?"
─그래. 세계 헌터 권리 헌장에 따라서 세계 헌터들은 누구나 게이트 공략으로 인해 박해받거나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거든. 같은 헌장에는 테러, 암살, 위해 등의 목적으로 이능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있고.
"... 두 개 다 개무시됐네요?"
─응, 그래서 성명 하나는 하사신을 향한 거고, 나머지 하나는 사우디 정부.
"사우디 정부에도요?"
좀 불쌍한데.
저 정도 수준의 각성자가 대놓고 암살하겠다고 들어오려면 그걸 막을 방법이 있나?
─정치적인 압박이야.
"... 여기서도 정치에요?"
─세상 돌아가는 원리가 다 정치지 뭐.
제피로스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WDDO 미가맹국이거든.
"오잉? 그래요?"
그걸 미가맹한 국가도 있었어?
세계 대부분 국가라며?
─WDDO의 주요 내용이 뭐지?
"게이트 공략의 제한 철폐... 아?"
─그래, 여기 가입하면 이교도에게 공략을 금허한다는 등의 정책을 세우는 게 불가능하니까 애초에 미가맹인거야. 그래서 사우디 경제가 많이 추락했고.
WDDO에 세계 모든 국가를 가입시키려고, 세계의 슈퍼파워들이 엄청난 경제적 보복까지 했으니까.
그걸 꿋꿋이 견디고 가입을 거부했으니... 종교의 힘이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미련하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절 초빙한 거군요."
─그래, 종교적인 문제와 완전 개방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내린 절충선이 너 정도인 거지.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 사우디 정부가 곤란하겠어요."
─곤란하다마다. 특히 강민국 대통령이 노발대발이야. 바로 사우디 대사 초치해서 3시간 동안 갈궜단다.
"안 그래도 주사우디 한국 대사님도 오셨더라고요. 괜찮냐고 묻던데요?"
얼굴이 좀 안 괜찮아 보이긴 했는데, 그래도 어디 다친 데는 없으니까.
─공략은 계속 진행할 생각이지?
"그럼요."
고생한 게 억울해서라도 클리어하고 와야겠다.
─그래, 사우디에서 뜯어낼 건 이쪽에서 던전관리부, 외교부랑 협의해서 왕창 뜯어내고 있으마. 몸 성하게만 돌아와.
"든든합니다잉."
제피로스와의 통신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뜸은 충분히 들였고...
이제 공략할 때가 된 거 같다.
**
사우디 정부의 본래 생각은 적당한 선에서 관심을 통제하고 속전속결로 메카의 미공략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거였겠지만, 이미 세계의 시선이 너무 쏠려 버렸다.
메카 앞에서 누군가는 클리어를 바라며 기도했고... 주식 샀니?
누군가는 이교도라면서 나를 욕했고.
누군가는 그저 흥미 본위로 기대하고 있었다.
이 정도의 관심을 받으면서 게이트에 입장해 본 건 처음인 거 같은데.
그렇게, 우여곡절 많았던 메카의 불가사의 게이트는...
[29단계 게이트, '광신도의 신전'에 입장합니다.]
메카라는 성지에 있기에는 뭔가 오묘한 이름을 하고 있었다.
실제 그 안에 있는 건 신전의 수호기사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신관들.
놀랍게도,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신전의 수호기사들은 갑옷만 덜그럭대며 움직이고, 신관들은 영체인지 뿌옇게 흐릿했다.
"일단 한 번 쓸어볼까."
간단하게 손가락 하나 까딱하자, 1호기의 안개가 순식간에 모든 수호기사를 덮쳐 분해했다.
딸깍, 한 번으로 쓸려나가는 기사들.
[레벨이 올랐습니다.]
[축하합니다! 30레벨을 달성하셨습니다.]
[보상으로 '재료 아이템 선택권(小)'이 주어집니다.]
아, 레벨 너무 오르면 안 되는데.
그래도 드디어 30레벨이다.
레벨 상승폭을 최대한 억제해서 이제야 30레벨이네.
그나저나 역시... 클리어 판정은 안 뜬다.
이 게이트가 공략 불가 판정을 받은 이유.
수호기사를 다 잡아도 클리어 판정이 안 뜬다는 거였다.
게다가 영체인 신관은 어떤 타입의 공격에도 데미지를 받지 않는다.
아마 저걸 어떻게든 잡아야 하는 거 같은데.
이미 알고 오긴 했는데, 기믹이 참 지랄 맞네.
설마 이러다 처음으로 공략 실패하는 건 아니겠지.
그 순간.
─감히...! 역리의 존재가! 이 신성한 신전에 발을 들였다는 말이냐!
응? 쟤네 말도 해?
영체인 신관.
그중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왕관 쓴 놈에게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다가.
─역리의 존재여! 사라지거라!
거대한 신성력의 파동이 몰아닥쳤다.
언데드인 내 세균들에게는 쥐약...
이었어야 했는데.
내가 바보냐?
네크로맨서가 그냥 신전에 오겠어? 딱 봐도 극 카운터인데.
[성스러운 파동이 당신의 권속들을 덮칩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기적이 성스러운 파동을 상쇄합니다!]
[파괴된 권속 : 0]
뭐? 성(聖) 속성?
내 군단은 말이지.
넥타르에 퐁당 입수하다 못해 흡수까지 한 놈들이란 말이야.
그러면서 이름까지 바뀌었다.
원래 퍼페투스 엑소모듈러스라는 이름에서.
(1) Gluttony (글러트니)
─개체수 : 약 1조 2천억 개
─설명 : 근원을 알 수 없는 기적을 몸에 품은 박테리아로, 종의 한계를 아득히 초월했다. 식욕 그 자체가 구현된 존재로 여겨진다.
이제 '글러트니' 라고.
처음 이놈들을 넥타르에 빠트렸을 때는 당황했다.
그냥 효모처럼 겉에 묻히기만 하려고 했는데, 통제할 수도 없이 그냥 다 처먹어버린 것.
아까워서 눈물까지 날 지경이었는데.
그러더니... 저렇게 진화했다.
저 상태에서 분열해서 늘어나진 않지만, 분열이 필요가 없을 정도다.
이제 어지간한 힘으로는 파괴가 안 돼서.
솔직히 얼마나 강한지도 잘 판단이 안 선다.
─역리의 존재가 어찌! 서, 설마...! 이럴 수가! 이럴 수는 없다! 어떻게 저런 존재에 신(神)이 깃든단 말이냐!
혼자 북 치고 장구 치시는 영체 신관.
"그게 그렇게 되더라."
응 나도 신기해.
─아아, 위대한 알로이스시여! 부디 그대의 힘을 저 사악한 존재를 상대하기 위해 내리소서!
쟤네 신 이름인가 본데.
그런데...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아! 저희를 버리시나이까! 알로이스시여!
신이랑 대화가 잘 안 통했나 봐?
그와 동시에.
신관들의 희고 밝은 빛이 순식간에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저게 흑화인가 뭔가 그거냐?
내가 분해했던 수호기사들도, 다시 빚어져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은은한 광택의 묵빛으로.
이제 뭐 어쩌라는 거지?
그냥 쓸어버리면 되나?
그런데.
기사들이 길을 열고, 신관의 우두머리가 내게 다가와 무릎을 꿇으며 쓰고 있던 관을 건넸다.
─알로이스조차 저버린 우리를 거둘 사람은 당신밖에 없소. 부디 우리를 거두어 당신의 칼과 방패로 쓰시오.
"... 거두라고?"
─역리를 다루는 당신이라면 우리를 거둘 수 있소.
... 아니 그게 말이지.
"그, 미안한데... 내가 일반 언데드는 전문이 아니라서. 그게 불가능한데."
실제로, 메시지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타락한 알로이스의 수호기사 50개체, 타락한 알로이스의 신관 20개체가 당신의 권속이 되길 바랍니다!]
[클래스의 제약으로 해당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미치겠네.
"안 된다네."
─... 우리는 결국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운명이구려.
"음."
조금 아까운데.
혹시 이런 것도 가능하려나.
"제국 칙령. 대상은 타락한 알로이스의 수호기사, 타락한 알로이스의 신관 모든 개체. 일시적으로 역소환 상태로 보관한다. 추후 권속 계약이 가능한 다른 이에게 양도할 수 있다."
[타락한 알로이스의 수호기사 50개체, 타락한 알로이스의 신관 20개체에 제국 칙령을 내립니다.]
[제국 칙령 내용 : 일시적으로 역소환 상태로 아공간에 보관한다. 다른 이에게 권속을 양도한다.]
[칙령 효과 지속 : 영구(통제력 250% 적용, 대상의 동의로 지속 시간이 연장됨)]
... 이게 되네.
혹시 쓸만한 언데드 사실 분?
아마 네크로맨서 업계가 난리가 나겠는데?
그렇게 제국 칙령으로 일시적으로 보관 상태가 된 타락한 신관과 수호기사들이 사라짐과 동시에, 내 손에 툭. 왕관이 떨어졌다.
아, 설마 이것도 아이템...
[알로이스 교황의 서클릿]
[품격] : 유물급 모자
[설명] : 알로이스 교단 교황의 권위를 상징하는 서클릿. 영혼에 대한 깊은 이해로 만들어진 서클릿이다.
[내용] : 사망에 이를 정도의 데미지를 받았을 경우, 그 데미지를 무마하고 일시적으로 영체로 변한다. (지속 시간 10초) 영체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유형의 공격은 회피할 수 없다. 영체 상태에서 마나를 움직이면, 영체 상태는 즉시 해제된다.
... 어떻게 이렇게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아이템이 딱 나와주지?
마지막으로...
[당신은 29단계 게이트, '광신도의 신전'을 최초로 토벌하셨습니다.]
[최초 클리어 보상으로, 최대 마나가 증가합니다.]
[숨겨진 임무를 완료하여 게이트가 29단계 게이트, '타락한 자들의 신전'으로 변경됩니다.]
[당신은 29단계 게이트, '타락한 자들의 신전'을 최초로 토벌하셨습니다.]
[최초 클리어 보상으로, 최대 마나가 증가합니다.]
... 최초 클리어 보상을 두 번을 받는 건 또 처음이네.
어쨌든, 클리어됐으면 다 잘 된 거겠지.
오늘도 많은 부수적 수입과 함께, 몸이 빛무리에 휩싸여 방출되기 시작했다.
김세균이 쏘아 올린 거대한 공(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