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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걸 대표.

RHS 던전개발유한회사의 사장이자 공동 창립자 중 하나인 사람이었다.

그런 신 대표는 최근 큰 꿈에 부풀어 있었다.

카이저 코퍼레이션에서 그에게 접촉한 거였다.

그 외에도 월가의 자본을 등에 업은 거대 던전개발회사들이 다수 접근했다.

지금까지야 팔고 싶어도 던전 안보인가 뭔가 때문에 팔 수 없었지만 이제 곧 세계 던전 시장이 개방된다고 하지 않는가.

"팔아야지, 암. 당연히 팔아야지."

RHS 정도 되는 체급의 회사면 유럽이나 미국이었다면 더 높은 가치 평가를 받았을 텐데도, 흔히 박스피라고 부르는 국장에 갇혀서 본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생각 중인 신 대표였다.

"뭘 팔아?"

소스라치게 놀라며 의자에서 자빠지는 신 대표.

그가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고는 성을 버럭 냈다.

"인기척 좀 내고 다녀!"

"냈는데. 네가 무슨 딴생각에 빠져 있어서 그랬겠지."

"딴생각은 무슨."

"팔긴 뭘 파냐니까."

"... 사생활이다."

"쯧."

"용건만 말하고 가."

신 대표에게는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애초에 얼굴마담으로 영입하긴 했지만, 세상 사람들은 RHS를 류현수, 제피로스의 회사로 알았다.

같은 창립 멤버이긴 했지만.

게다가 RHS라는 이름도 류현수에서 따긴 했지만.

이 회사를 지금까지 이끌어 온 게 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콤플렉스 탓일까, 제피로스는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음에도 신 대표와 제피로스 류현수의 사이는 점차 나빠져 왔다.

그래서 제피로스가 진행한 김세균이라는 루키의 스폰서 계약을 임의로 파기시키기까지 했다.

엄청난 거물이 된 김세균 탓에 최근에 꽤 문제가 생겼지만.

아마 지금은 가슴팍 광고 스폰서라면 가격이 수천억 단위로 시작할 거다.

그걸 생각하면 속이 쓰리는 그였다.

"사실 나도 팔 게 있는데."

"... 뭐?"

"내 스톡옵션, 이제 행사해야겠다."

"... 설마 팔려고?"

"당연하지. 그냥 들고 있으려고 행사하겠냐? 옵션 형태로 들고 있는 게 훨씬 편한데."

신 대표 본인을 제외하면 창립 멤버들 다 가지고 있는 옵션은 똑같다.

행사가는 천억.

현재 주가로는 약 5천억 정도 가치일 거였다.

크긴 하지만 현재 RHS의 시총에 비하면 엄청난 금액은 아니다.

그러나, 류현수의 스톡옵션은 상징적인 의미가 훨씬 컸다.

"시장에 던지면 주가는 대폭락이야."

"알 바야? 그거 던지고 나가면 내 회사도 아닌데."

"회사도 같이 나간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댓츠 롸잇!"

신 대표는 갑자기 몰려드는 두통에 머리를 짚었다.

이 새끼는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뭐 들은 거라도 있나?

안 된다.

적어도 카이저에서 인수할 시점까지는 남아 있어야 했다.

그래야 제 가치 이상을 받고 지분을 팔 수 있다.

류현수가 나가면 딱 보유한 던전 등의 기본 가치로 팔아먹는 게 한계다.

최근에 현역 복귀한 류현수로 인해 올라간 주가가 얼마던가.

그 주가가 고스란히 쭉 빠져 버릴 거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블록딜로 흡수해줄 테니까. 적어도 지금 시장에 던지는 것보다는 나을 거다."

"싫은데?"

"뭐?"

"누구 좋으라고?"

"이 새끼가! 야! 너 갑자기 왜 이래? 미쳤어?"

"사실, 이미 팔고 왔어. 지금쯤 뉴스에도 아마..."

신 대표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테이블 위에 있는 리모콘으로 TV를 틀자, 앵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속보입니다. 대한민국의 5대 메이저 던전개발회사 중 하나인 RHS 던전개발회사의 창립 멤버인 류현수 씨가 오늘 종가로 보유한 회사 지분 전부를 블록딜로 매각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인터뷰에 따르면...]

"나왔네."

"이 미친놈이!"

다급히 확인을 위해 전화기를 드는 신 대표의 손목을 턱 붙잡는 제피로스.

"너... 뭐 하는 짓이야!"

"전화 걸기 전에 내 말, 한마디만 듣고 걸어."

"... 말해."

"네 지분이 한 10% 정도 되지?"

다른 창립 멤버와는 다르게 경영을 맡으면서 계속해서 지분을 늘려온 신 대표였기에 압도적으로 많았다.

"... 그런데."

"네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 첫째, 이대로 주가가 폭락한 뒤에 팔지도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경영권을 빼앗기고 장부 까인 다음에 횡령, 배임 혐의로 감방 신세 진다."

"뭐? 이 새끼가! 말이면 다인 줄 알아? 횡령 배임이 뭐가 어째?"

"둘째, 오늘 종가 기준으로 얌전히 블록딜로 지분 넘긴다. 괜히 악당이 되긴 싫거든. 소액주주들 피해 보기 전에 깔끔하게 해결하고 싶은데."

"...!"

눈을 휘둥그레 뜬 신 대표가 헛웃음을 지으면서 제피로스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경영권을 노리고 이런다는 거야? 너 따위가?"

"응. 경영권을 노리고 이러는 거야."

"미친 새끼. 내 우호 지분이 얼마나 되는 줄 알아?"

"54% 정도 됐던가? 일단 거기서 27%는 빼."

"27%...?"

"던전개발공사랑 국민연금공단은 네 손을 결코 들어주지 않을 테니까. 거기에 8%도 빼야겠지. 창립멤버 친구들은 나를 조금 더 좋아하거든. 이미 이야기는 나누고 왔고."

창립멤버의 8%, 국부펀드의 27%가 빠지니...

순식간에 본인 지분 10% 포함 우호 지분이 19%밖에 안 남았다.

"쉽게 가려면 내일 박살 난 주가에서 주워 담기만 하면 돼. 우호 지분 35%니까 15%만 더 모으면 되겠네. 고작해야 장중에 15% 모으는 게 어렵겠어? 다 투매 분위기일 텐데."

다만, 주가를 의도적으로 떨어트렸다는 의심의 눈초리는 벗을 수 없을 터.

"하지만 우리나라 개미님들 손해 보시게 할 수는 없지."

정부에서 대놓고 메이저급 회사들을 몰아준다.

그런 와중에 소액 투자자들, 그러니까 국민들에게 손해를 끼치면 더 이미지가 안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잡음 없이 몸 사리면서 조심스럽게 인수하려는 게 제피로스의 생각이었다.

"아, 그리고 이거."

제피로스가 품에서 꺼낸 무언가를 신 대표에게 건넸다.

"이게..."

압수수색영장 신청서.

보기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랄 문구에 신 대표가 흠칫 놀라며 툭 떨어트렸다.

땅에 떨어진 종이를 주우면서 제피로스가 웃으며 말했다.

"제안 안 받으면, 이따 중앙지법에 이거 신청서가 들어간다나 뭐라나."

"너 씨발... 대체 어디서 내려온 끈을 잡은 거야. 아니, 경영권에는 관심도 없던 새끼가 대체 왜! 왜 지금!"

"그러게. 강민국 그 양반이 영 맹탕은 아니더라고. 미국 자본에 그냥 빤스벗고 백기 들지는 않겠다는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대통령 이름까지 나온 순간, 신 대표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버렸다.

"좋게 말할 때 좋게 가자. 친구야."

희게 웃는 제피로스의 얼굴이, 신 대표에게는 악마의 미소처럼 보였다.

**

다음 날.

제피로스의 블록딜 매각 소식에 RHS에 투자한 개미들의 입에서는 한숨이 푹푹 나왔다.

주식 스트리머인 남보원 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 씨발, 오버나잇 하지 말 걸."

─남보원 이 개새끼야! 너가 RHS 달나라 간다며!

채팅창에 올라온 글에 남보원이 미간을 팍 찌푸리며 외쳤다.

"야 이 개새끼야! 내가 제피로스 그 미친 새끼가 털고 나갈 줄 알았냐? 내가 신이야? 어?!"

─ㅋㅋㅋㅋ 시발 맞는 말이긴 하네

─아오 제피로스 개새끼...

─그래서 얼마 떨어질까요?

"하방 30%는 감수해야죠."

하한가는 기본 예상되니, 최소 30% 손해.

나아가서는 반토막도 감수해야 하는 상태.

담배만 푹푹 피면서 한숨을 내쉬고 있던 와중.

─와 미친, 이거 기사 보셈!

그러면서 올라온 링크에 흔한 어그로라고 생각하고 미간을 찌푸리는 남보원.

그가 차단을 먹이면서 말했다.

"어그로 씨발 밴입니다. 어그로 끌지 마세요."

그런데.

─형! 어그로 아냐! ㅆㅂ! 찐이야!

─야! 속보 떴다! 김세균이라고! 김세균이 블록딜 물량 받았대!

"뭐?"

하도 올라오는 채팅에 남보원이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RHS를 검색하자.

[류현수 씨가 매각한 블록딜 지분, 인수자는 김세균 헌터?]

[김세균 헌터, RHS 던전개발회사 인수 선언!]

"끼야오오오오옷!"

인간의 것이라고 볼 수 없는 괴성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채팅에는...

─세균단 만세! 세균맨 만세!

─야 븅신아, 요즘 누가 세균단이라고 하냐?

─그럼?

─뀨뀨!

─아? 뀨뀨!

─뀨뀨단 만세! 

─만세 말고, 그냥 뀨뀨!

그렇게, 채팅창은 한동안 뀨뀨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그걸 막아야 할 스트리머 역시.

"뀨뀨! 뀨뀨! 뀨뀨신님이 보우하신다!"

거의... 모두가 미쳐가고 있었다.

프랑스(1)

프랑스(1)

8월 1일.

무척이나 더웠던 여름날.

세계 던전 업계에 폭탄이 떨어졌다.

WDDO, 세계 던전 개발 기구에서 발표한 뉴욕 라운드의 발효로, 이제 WDDO에 참여한 세계 각국은 자국 던전 시장에 적용된 규제를 모두 풀어야만 했다.

예를 들자면 던전 개발 회사에 대한 외국 자본을 일정 이하로 해야 한다거나, 타국 헌터들의 던전 공략을 제한하는 등의 규제는 WDDO의 합의 사항에 위배되었다.

WDDO의 참여국은 거의 전세계 150개국.

사실상 전세계가 참여하는 수준이었다.

이 규제 철폐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국가들은 역시나 던전 시장 보호에 앞장섰던 국가들.

한국, 일본, 대만 등이 대표적이었다.

혹자는 사실상 동아시아 저격이라고 보는 경우도 많았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자국은 보호 무역으로 죄어놓고, 던전이 개방된 다른 국가에서 외화까지 벌어오는 것을 미국과 서유럽이 아니꼽게 봤다는 것이 팩트.

그렇다고 이 합의를 거부하고 WDDO를 탈퇴한다?

모든 물산이 자국의 던전만으로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현대 산업에 필수적인 물자 가운데는 해외 던전에서만 나오는 것들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서유럽의 독점 물자인 엘릭시르 같은 것은 사회 기득권층들에게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재가 되었는데, WDDO에 참여하지 않으면 엘릭시르의 유통을 해당 국가에는 철저히 막아버리겠다는 서유럽의 엄포가 있었다.

'부자 놈들 때문에 빤쓰 다 벗어주고 대문 열어주는 거 아니냐! 서민들은 어쩌라고!'

이렇게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그다지 그 목소리가 크게 울리지는 않았다.

확성기는 결국 부자들의 것이니까, 당연한 일.

소수 음모론자들의 헛소리로 치부될 뿐이었다.

그래서 6월에서 8월 사이에 벌어진 국가들의 짧은 대응 기간 동안 가장 큰 피해를 보는 동아시아 3국은 어떻게 되었는가?

우선 대만.

대만은 내 덕택에 일시적으로 주가가 오르면서 외자 유입이 주춤했다.

내 덕택이라고 하면 민망하지만, 그게 맞긴 하니까.

그렇지만, 이렇다 할 대응책을 내지 못하고 풍전등화 상태였다.

그렇다면 일본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

무슨 일인지 당초 예상된 것처럼 카이저 코퍼레이션이 일본 시장을 완벽하게 장악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업체들이 경쟁적으로 진출했다.

각 지역의 자생 업체들이 순식간에 고사하고, 유럽과 미국의 업체들이 진출해서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웃긴 건, 일본의 대기업들은 그걸 그다지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독점으로 통제되었던 던전 원자재 가격이 해외 업체의 진출로 엄청나게 내려가고 있었거든.

던전 경제에 짓눌려 있던 기존 대기업들까지 편승하니, 일본 던전 시장은 순식간에 함락.

마지막이 우리나라인데...

난 아직도 이게 맞나 싶다.

강남 가장 알짜배기 땅의 50층 건물.

거기 위에 SG라고 되어 있는 로고가 있었다.

깨알같이 배경에 올라와 있는 뀨뀨의 캐리커처도 포함해서.

"SG그룹 회장님, 소감이 어떠십니까요?"

간신같이 간드러진 목소리를 짐짓 흉내 내며 말하는 제피로스.

"기분이 썩 좋구나. 가서 주지육림을 대령... 아아! 아파요! 장난! 장난!"

"짜식, 장난칠 기력은 있나 보구나. 난 힘들어 뒤질 뻔했는데."

힘든 게 당연하지.

2달 동안에 대한민국 5대 메이저 던전개발회사에, 7대 중견 회사까지 인수했다.

아무리 정부의 지원이 있었다지만, 누가 그걸 쉽다고 할 수 있겠어?

결과적으로 이제 나는 하루아침에 산하에 12개의 던전개발회사를 거느리는 거물이 되었다.

그래서 세상의 반응은 어떠냐 하면...

**

주미한국대사가 초치되어 미국 정부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는 소식을 확인한 강민국 대통령은, 바로 주한미국대사를 초치했다.

"대통령님. 안녕하쉽니까."

약간 어색하지만. 꽤 능숙한 한국어로 인사하는 주한미국대사.

강민국 대통령은 인벤토리에서 꺼낸 통역 목걸이를 착용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화이트 대사. 오랜만이오."

"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통역 목걸이를 착용하니, 어색함 하나 없는 깔끔한 한국말이 대통령의 귓가에 들려왔다.

보통은 대사들 쪽에서 착용하지만, 주한미국대사는 비각성자이니 어쩔 수 없이 착용한 거였다.

"우리 쪽 최 대사를 백악관에 불러서 괴롭히셨다고?"

"대통령님! 괴롭힌 것이 아니라..."

"잘못한 게 없는데 초치한 것이 괴롭힌 게 아니면 또 뭐라고 말하겠소?"

"대통령님. 우리 미국 정부는 SG그룹의 결합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적극 지원한 사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동네 어린아이도 알 이야기를 미국 정부가 모르면 곤란하지. 그래서요?"

"이는 뉴욕 라운드의 합의 취지에 어긋나는..."

대사의 말에 잠깐 미간을 찌푸린 강민국 대통령.

그가 헛웃음을 흘리며 되물었다.

"뉴욕 라운드의 취지가 대체 뭐요?"

"각국의 블록을 해제하고, 세계 헌터들에게 자율성을 부여하여 던전 시장의 보호 무역을 철폐하고..."

"지금 사전적 의미를 듣자는 게 아니잖소! 그 과정에서 이득을 보는 곳이 대체 어디오?"

"던전 개발에 낙후된 3세계 국가들에 헌터 인프라를 적극 제공하며..."

"거대 던전 메이저들이 던전 자원을 수탈하겠지."

"대통령님!"

"우리 다 아는 소리를 굳이 포장하려 들지 맙시다. 그리고 SG그룹을 뭐라고 하려면, 우선 귀국의 카이저 코퍼레이션부터 건드려야 하지 않겠소? 50%가 넘는 과점 아니오."

화이트 대사는 이미 예상했던 질문이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본국에서는 독과점법으로 꽤 많은 과징금을 물리고, 카이저 코퍼레이션의 일부를 강제로 해체한 바가 있습니다."

"예전 정부 이야기지. 우리 쪽 조사에 따르면 카이저 코퍼레이션의 점유율이 심상치 않던데? 몇몇 헤지펀드 자본과 붙어서 비공식적인 점유율을 80%까지 끌어올렸더군."

"일국의 대통령께서 주식 시장의 헛소문을 믿으시면 곤란합니다."

"헛소문인지 아닌지는 까보면 알 테고... 어쨌든 과점 아니오. 미국의 시장 규모를 생각해 보면 우리의 독점으로는 비교도 안 되겠군."

"어쨌든, 우리 미국과 WDDO의 가맹국들은 SG그룹의 조약 무력화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경계는 무슨. 어거지로 묶어둬도 구심점 없이는 망해버리는 게 던전 산업인 거 모르고 하는 말은 아닐 테고."

그게 말처럼 쉬웠으면 다른 나라들도 다 묶어서 거대 공룡 하나만 남겨뒀으리라.

카이저가 거대 기업을 키울 수 있던 이유.

트리아인도 마찬가지고.

그 이유는 명확했다.

그들이 '평정'이라는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지역의 던전 산업을 일순간에 뻥튀기할 수 있는 능력.

그러니까... 공략 불가 던전을 클리어할 능력.

카이저는 1세대의 불가사의를 클리어해오며 성장했고, 트리아인은 카이저조차 클리어하지 못했던 곳을 클리어하며 컸다.

그리하여 열린 3세대.

그 둘이 클리어하지 못한 곳을 클리어할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났다.

"그냥, 인정하시오. 카이저, 트리아인에 이은 3의 존재가 출현했다고."

"....."

미국 입장에서는, '하필' 소리가 나와도 이상할 게 없는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이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공들였는가?

유럽과 미국이 손을 잡아 조약에 가장 미온적인 동아시아 3국 정부를 압박했다.

나중에는 던전 개방이 절실했던 중국까지 가세했다.

그렇게 세계의 슈퍼 파워가 무려 10년 이상을 압박해서 체결에 성공한 조약이었다.

경제 제재까지도 불사하는 어르고 달램이 배후에 수백 차례는 있었을 거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3의 거물이 나왔다.

이렇게 되면 세계 시장 개방은 오히려 이 거물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꼴이다.

"과욕은 언제나 해가 되는 법입니다."

당장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과하게 달리지 않도록 경고하는 정도.

그 경고에, 강민국 대통령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을 국민들의 아버지라고 생각하오. 그리고 나는, 아들의 원대한 포부와 뜻을, 미처 피어보기도 전에 꺾는 못난 아비가 되고 싶지는 않소이다. 대한민국은 언제나 김세균 헌터의 든든한 배후로 남을 거요."

"... 대통령님의 의사는 잘 확인했습니다. 본국에 전달토록 하겠습니다."

꾸벅 인사하고 집무실을 나가는 미국 대사.

홀로 남은 강 대통령이 통역 목걸이를 갈무리해서 인벤토리에 넣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저 시작인가. 자식놈 키우는 게 역시 쉽지가 않군."

사적으로도 한 명의 아버지인 강민국 대통령.

하지만, 지금 그가 말하는 자식은 본인의 친자식이 아니라...

세계 시장에 나서게 될 한 헌터와 그 헌터가 이끄는 한국의 거대 던전 개발 회사였다.

**

해외 쪽 언론이나 국가들은 내가 SG그룹을 설립한 거에 대해서 완전 난리가 났다고 한다.

그에 반해서 국내 언론은 조용하거나 호의적이었다.

대중들의 여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놓고 회사를 밀어줬음에도 불구하고 조용했는데, 주된 이유는 역시...

─국장 폼 미쳤따이!

└이게 다 뀨뀨신의 은총이다!

└뀨뀨!

어디서 이상하게 유행한 뀨뀨신 같은 소리는 제쳐두고...

일단 어설프게 회사 가치를 떨어트리면서 억지로 인수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그러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해서 불가능한 일이지만...

정부가 강제로 묶으려고 마음먹은 이상 온갖 방법이 동원되었다.

사실 던전 산업이라는 게 손에 검댕이 묻히기 참 쉽다.

항상 말하듯이, 던전 내부의 일은 누구도 모른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탈세도 많고, 배임이나 횡령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어느 정도 특수성을 고려해서 눈감아주고 있던 걸 털기 시작하면...

털어서 먼지 안 나올 사람이 없는 수준이다.

그런 정부 차원의 압박을 동원해서, 적당한 선에 지분 매입을 성공했다.

그러니, 다음에는 내가 인수했다는 호재 때문에 매입한 지분이 상승하는 일만 남았다.

주가가 상승했다고 해도, 일단 경영권을 얻은 뒤에는 꽤 저렴하게 지분을 늘릴 수 있다.

자사주 매입이라던가, 3자배정 증자라던가 하는 방식 말이다.

"개미들 좋고, 나도 좋고... 뭐 그런 거지."

박스피의 오명을 떨쳐내고, 역대급 호황을 맞은 국장이었다.

당연히 투자자들의 반응은 최고조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항상 정부가 하는 일에는 부정적이어야 할 언론이 왜 조용하냐면...

[강민국 정부의 쌍팔년도식 기업 몰아주기. 이게 맞아?]

뭐 비판적인 언론이 없던 건 아니지만...

─기자 ㅆㅂ새끼가 진짜.

─저런 개새끼들은 아마 이순신 장군이 살아있었어도 지랄했을 거야.

─개좆같은 매국노 새끼.

해외 던전 메이저에 맞서는 애국투사(?) 같은 이미지를 얻은 내게 생긴 방패는 생각보다 단단해서...

제피로스 말로는 살인이나 강간급 사고가 아니면 쉴드 깨질 일은 없을 거라던데.

그래서 이 엄청난 일을 끝내고 지금 내가 어디 있느냐고 하면...

프랑스에 있다.

**

뀨뀨로 한바탕 난리가 난 미국과 일본, 동남아 국가들과는 다르게, 서유럽 국가들은 그렇게까지 난리가 나지는 않았다.

적당한 수준의 팬들이 공항에 몰려들어 있었다.

... 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공항을 착각한 팬들이 이상한 곳에서 기다리던 거였지만.

보통 해외에서 파리를 들어왔다고 하면 샤를 드 골 공항으로 들어오지만, 나는 전용기를 타고 와서 오를리 공항으로 입국했다.

아, 결국 전용기 샀다.

이제 해외 갈 일이 더 많을 텐데, 없으면 너무 불편할 거 같아서.

"휴, 그나저나 뀨뀨한테 역소환이 먹혀서 너무 다행이야."

펫도 역소환 스킬로 아공간 저편에 보내놓을 수 있었다.

미안한 이야기였지만...

만약 뀨뀨를 어깨에 매달고 이 복잡한 파리에 나왔다가는 1m 움직이는 데 10분은 넘게 걸리는 대참사를 겪었을 거다.

뭐 여전히 내게 몰려드는 사람은 많지만.

"저기, 잠깐 지나가야..."

몰려드는 인파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달그락. 달그락.

순간 멀찍이서 들려오는 무언가 뼈 부딪히는 소리.

그 소리에,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이 흩어지고 있었다.

흩어진 사람들 사이로, 하얀 백골이 마치 호위병처럼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백골이 연 길로,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마흔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

프랑스인 아니랄까 봐 온갖 명품을 두른 멋쟁이 하나가 있었다.

"안녕?"

... 이 사람이 바로...

현 시대의 최강자.

사상 최강, 최악의 네크로맨서.

"아흐마드 트리아인이다."

아무리 바빠도, 이 남자의 정중한 초대를 거절하긴 어렵잖아?

프랑스(2)

프랑스(2)

"아흐마드 트리아인, 그 양반은 어때요?"

"글쎄, 나랑 활동 시기가 안 맞아서... 하지만 본 적도 있고, 이야기도 들어봐서 어느 정도는 알긴 하지. 그런데 재밌게도... 카이저랑 완전히 대칭 같은 작자라는 이야기는 들었어."

"카이저랑요?"

"그래. 일단 카이저의 클래스는 크루세이더고 아흐마드는 네크로맨서지. 명과 암, 전사와 마법 계통으로 완벽하게 반대에 있어."

"오. 그러네요."

"게다가 클래스답지 않게 꽤 음흉하고 흉계를 꾸미는 카이저랑은 다르게... 아흐마드 트리아인은... 노빠꾸 상남자라고 들었다. 둘이 거의 상극 수준이야."

노빠꾸 상남자 네크로맨서라...

뭔가 신기한 조합이긴 한데?

**

잠깐 제피로스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안녕하십..."

"아, 그거 알아?"

"예?"

"라틴어권에는 따로 존칭의 표현을 한국어처럼 잘 구별해놓지 않는다는 말이지. 우린 기본적으로 평어가 존대거든."

갑자기 이건 뭔 소리야?

"그래서 통역 목걸이로 들으면 네가 하는 존댓말은 프랑스어로는 극존칭으로 들려. 왕족에게나 말하는 거 같이 낯간지러울 정도로."

"아."

"그러니까 너도 말 편하게 해. 두드러기 나려고 하니까."

"... 알겠어."

그러기엔 나이 차이가 좀 있긴 한데.

일단 게스트니까 호스트의 의향 정도는 들어줘야겠지.

"형이라고 불러도 좋고."

음, 한술 더 뜨는데.

이 양반 뭐야... E인가?

"그건... 좀 더 친해지면."

극 I의 입장에서는 절로 거리 두고픈 타입이다.

"그럼 가볼까?"

세계 최강 헌터의 차는 뭘까?

롤스로이스? 벤틀리?

아니면 부가티 같은 하이퍼카?

다 틀렸다.

시부럴 이건 뭔 관광버스여?

"... 이게 차야?"

"응, 내 차."

눈앞에 있는 겉보기에도 엄청 고급스러운 외장의 관광버스.

안에 타니 더 가관이다.

중동 부자의 저택에라도 들어온 느낌이다.

응접실부터 침실까지 쫙 갖추어진 하나의 집.

더 황당한 건, 앞에 운전대를 붙잡은 기사다.

"... 뼈다귀?"

백골로 된 스켈레톤이 버스를 운전하고 있었다.

아니, 좀 문화충격인데.

"앉아. 차? 커피?"

"밀크티."

요즘 맛 들였는데 썩 좋더라고.

"좋아."

캠퍼의 응접실(?)에 앉아 기다리자, 뒤쪽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스켈레톤이 찻잔을 들고왔다.

더 혼미해진다.

"왜, 이상해?"

"... 정상은 아닌 거 같긴 한데."

"예쁜 미녀가 아니라서 안타깝겠지만, 썩어가는 미녀보다는 깨끗한 백골이 낫잖아? 쟤들 나름 박박 씻어서 방부처리까지 한 해골이야."

"하, 하하..."

"이 정도로 놀라면 시내 나가면 기절하겠구만."

쯔쯔, 하고 혀를 차는 트리아인.

이것보다 더 놀랄 일이 시내에 있다고?

"파리는 처음이랬지?"

"응."

"그러면 에펠탑이랑 몽마르트는 봐야지."

아니, 나 관광하러 온 거 아닌데.

그래도... 뭐, 보는 게 나쁘진 않으니까...

사실 유럽 자체가 처음이다.

촌놈이 에펠탑 구경도 다 해보게 생겼구만.

그렇게 시내로 들어서자...

창밖으로 보이는 광경에 눈을 비볐다.

"... 저게 뭐여?"

"뭐긴 뭐야, 스켈레톤이지."

"아니... 경찰관복... 맞지?"

"응."

경찰관복을 입은 스켈레톤들이 혼잡한 교통을 통제하며 트리아인의 버스를 시내로 인도하고 있었다.

"파리 시내가 얼마나 복잡한지 알아? 이런 대형 버스 타고 다니려면 교통 통제는 필수야."

아니 화상아, 그냥 작은 차를 타고 다니면 되잖아?

그 목소리가 목구멍까지 나왔다 들어갔다.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게 있어서였다.

"설마 스켈레톤이 진짜 경찰이야?"

"어. 파리 경시청에서 아웃소싱 좀 받았지. 사실상 무료봉사 수준이야. 경시청에 돈이 어딨어. 적당히 경찰들 도움 주는 거지."

자세히 보니 스켈레톤만 있지는 않았고, 한두 명의 경찰이 스켈레톤을 통제해서 이용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한참 지나가다 보니, 대규모 시위대가 광장 앞에 보였다.

"저저, 시위대 새끼들... 어휴, 너네 나라는 저런 거 없지? 저놈들이 아주 사회의 암적인 존재들이야. 사회에 도움도 안 되는 것들이 바라는 건 많아요."

쯧쯧, 혀를 차면서 손을 한 번 휘적이자, 시위대와 대치하던 경찰복을 입은 스켈레톤 무리들이 시위대를 그대로 밀어버렸다.

뼈다귀밖에 없긴 해도, 트리아인의 마나로 강화된 스켈레톤의 완력은 일반인이 상대할 수준이 아니다.

순식간에 밀려나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시위대들.

스켈레톤들이 무심하게 뼈몽둥이로 퍽퍽 때려서 튀는 피에 시위대가 든 프랑스 삼색기의 하얀 부분이 붉게 물들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게 자유, 평등, 박애의 나라라 이거지?

"손님을 초대해놓고 험한 걸 보여서 미안하네? 얼른 보고 돌아가자."

에펠탑과 몽마르트 언덕의 샤크레쾨르 대성당을 보았는데,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구경은 다 했지? 우리 집으로 가자."

이윽고 버스가 향한 곳은 고풍스러운 건물로 가득한 파리에서 이질적일 정도로 현대적인 빌딩이었다.

"밀어버리고 새로 지으려고 했는데, 시(市)에서 난리를 치더라고. 문화유산이라나 뭐라나? 곰팡내 나는 몇백 년 된 집이 무슨 유산이냐? 안 그래? 바로 언데드로 시청부터 밀겠다고 엄포를 놨지. 그제야 조용하더라고."

이 양반, 진짜 법이고 자시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사는 노빠꾸 인생이구만.

제피로스가 노빠꾸 상남자라고 말한 이유를 알겠다.

그나저나, 이 인간이 대체 날 왜 보자고 했을까?

"오늘, 소감이 어때?"

"... 갑자기?"

"보고 느낀 게 있을 거 아냐?"

"인상 깊긴 했지."

스켈레톤으로 시위대 후드려 패는 게 말이지.

푸흐흐, 하고 웃음을 터트린 그가 손을 뻗자, 인벤토리에서 병 하나가 나왔다.

술병인가?

"샤토 도뇽 2000년산이야. 말 그대로 도뇽(Donjon) 그러니까 던전(Dungeon)표 와인이지."

던전에서 와인도 나와?

"보르도 지방의 던전 중에는 포도나무가 나오는 던전이 있어. 거기서 나오는 포도 열매로 와인을 담그면 현실에서는 도저히 따를 수가 없는 풍미를 내지."

포도가 나오는 거구나.

그래도 신기하긴 하네. 누가 프랑스 아니랄까 봐.

"일반인들이 이런 와인을 만들 수 있을까?"

"... 전제부터 불가능하잖아."

던전에서 나오는 포도를 일반인, 비각성자가 어떻게 수급해?

"바로 그거지. 우리는 비각성자들이랑은 아예 다른 수준에 서 있다는 거야. 그런데 사회는 자꾸 평등하대. 인간은 같다네? 밑의 것을 위로 올려 치는 것도 문제지만, 위에 있는 걸 밑으로 깔아버리는 거도 문제 아니야?"

갑자기 위험한 소릴 하는데.

"그렇다고 각성자만 사는 사회를 만들 수도 없잖아. 어차피 함께 사는 사회인 이상..."

"아아, 당연하지. 그럼 무슨 재미야? 원래 사람은 비교에서 우월감을 느낀다고. 비각성자가 없어지면 각성자들이 우월감을 느낄 대상이 사라지겠지. 그럼 각성자들끼리 우월을 또 비교하게 될 거야. 굳이 그렇게 만들 필요 없지."

"... 뭘 원하는 건데?"

어느새 다가온 스켈레톤이 놓은 와인잔 두 개에 샤토 도뇽 와인을 차례로 따른 트리아인이 빙그레 웃었다.

"너랑 나 같은. 위대한 헌터들이 지배하는 시대. 병신같은 정치인도, 쓰레기 같은 시위대도 없는 세상."

"... 그, 나는 빼줬으면 좋겠는데."

사이코 정복광이 될 생각은 없는뎁쇼.

"네가 딱이야."

"아니 왜 하필 나야? 카이저도 있고..."

말하고 보니 좀 소름 돋긴 하네.

카이저와 트리아인이 손잡고 지구정복?

오우 쉣.

"카이저 그 할배같이 기득권에 영합한 작자는 필요 없어."

이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다.

"들어봐, 이게 썩 나쁜 소리가 아니라니깐?"

댁한테는 그렇겠지.

"내 계획대로 이루어진다면, 비각성자들에게도 전혀 나쁜 세상이 아냐."

"머리 위에 당신이라는 불완전한 신을 두고 사는 셈인데?"

"고래로부터 피지배층이 지배 계층에게 불만이 생기는 이유는 하나야. 지배 계층이 피지배층을 수탈해서 꿀을 빨기 때문이지. 난 그럴 생각 없다니까? 그럴 이유도 없고. 오히려 난 그들에게 자유를 선사할 거야. 노동으로부터의 자유."

마침 바깥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불이라도 난 모양인데.

그걸 들은 트리아인이 웃으며 말했다.

"불을 위험하게 사람이 끌 필요 있나? 경찰은? 하다못해 저기 편의점의 점원은? 군인들은 어떨까?"

"... 그걸 당신이 다 컨트롤한다고?"

불가능하다.

언데드에는 그런 개별적인 판단 능력과 의지가 있을 수 없다.

아무리 트리아인 급의 네크로맨서라고 해도 그건 불가능했다.

경찰로 쓰는 언데드들도, 임의로 인간 경찰들에게 통제권을 부여하고 그걸 경찰들이 도구처럼 활용하는 것뿐이다.

"그럼. 가능하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트리아인이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아이템 하나만 있으면."

"대체 뭔 놈의 미친 아이템이길래 그런 효과를 낼 수 있는지 궁금한데."

"나도 기록에서만 확인했지. 하지만 확신한다. 그 아이템만 있으면 내가 꿈꾸는 세상이 열린다. 그 아이템 이름은... '미친 황제의 권위'."

음, 미친 황제의 권위...

미친... 황제... 

어디서 많이 들어본...

시선이 자연스레 내 손가락으로 향했다.

... 내 반지?

"그 아이템의 효과, '제국 칙령'만 있으면 내 군단의 통제권을 무생물에도 부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게임 끝이지. 트리아인 네트워크가 보유한 회사 중에는 AI 관련 회사가 넘쳐나거든. 개별 언데드들을 AI가 통제하는 거다."

내가 가진 유물급 아이템을 트리아인이 노린다고?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면서 헛기침을 터트렸다.

"아, 잠깐 화장실이 급해서."

"다녀와. 아무리 진지한 이야기라도 배설 활동보다 급할까?"

화장실에 들어와서 일단 세수부터 했다.

이제야 정신이 좀 드네.

설마, 내가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걸 알고 부른 건 아니겠지?

하긴, 그랬으면 일단 죽이려고 들지 않았을까?

저렇게 절실한데.

게다가... 날 죽일 거면 집에 초대하는 건 그에게 좋은 방법이 아녔다.

네크로맨서가 가장 약한 건 언데드 군단에게 보호받지 못하는 상태일 때다.

세계 최강이라는 칭호를 딱지 쳐서 얻은 건 아닐 테니, 맨몸으로도 꽤 강하겠지만...

아무리 자신 있어도 나를 죽이려고 하면서 맨몸으로 나와 맞서는 리스크를 감수하진 않았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언제든 군단을 방출하고 인벤토리의 지팡이를 쥘 준비 정도는 해뒀다.

이어 천천히 태연하게 자리로 돌아와 말했다.

"그래서, 댁이 북 치고 장구 치는 세상에서 난 뭐 하려고 영입하는 건데?"

"강한 힘, 그것도 네 정도로 강한 힘이 필요 없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을걸. 내 언데드만으로 통제가 되는 건 아니니까. 일반인은 통제된다고 쳐도... 각성자들을 통제하려면 다른 힘도 필요하지."

"흠..."

일단 여기서 굳이 어그로를 끌 필요가 없나.

어차피 유물급 아이템은 전설급 이하와는 다르게 유일하다. 

전설급은 원본의 복사본이지만, 유물급은 정말 유물 그 자체, 진본이니까.

그 말인즉슨, 내가 이 아이템을 잘 가지고만 있으면... 트리아인이 이걸 가지게 될 일은 없다는 뜻이다.

아무도 모르면 된다.

아무도... 모르면...

"뭐, 나쁜 제안은 아니네."

"그렇지?"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웃는 트리아인.

그가 껄껄 웃으면서 와인잔을 들었다.

"긍정적인 반응, 기쁘네."

"하지만... 그 아이템이 없으면 물 건너가는 소리인 건 알지?"

"알지. 그러니 너도 혹시라도 던전 돌다 찾으면... 내게 달라고. 그렇게만 해주면... 나랑 동등한 위치에서 세상을 지배할 테니까."

"좋아."

"하하, 그러면 이제 우린 파트너다! 아니, 형제로 할까?"

엄청 좋아하네.

그러니까 댁 같은 형은 무섭다니까.

IT재벌 출신 사업가 네크로맨서가 사이코 정복자일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형제가 먼 길 찾았는데 좋은 기회를 줘야겠지. 누벨아키텐 레지옹의 보르도 쪽 미공략 던전이야. 27단계고."

누벨 뭐?

어쨌든 27단계면 지금 레벨로 딱 입장 가능하겠네.

"클리어하면 20년간 해당 지역 던전 총 산출량의 10%를 줄게. 정부에서도 10억 유로 정도는 보상해줄 테고."

"... 뭐라고?"

이 스케일 엄청난 퍼주기는 뭐야?

이건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보상인데.

던전 하나도 아니고, 지역... 그러니까 프랑스로 따지면 '레지옹' 전체의 산출량 10%다.

단위가 다를 텐데.

"어차피 평정 효과 받으면 대충 20% 정도 효율 높아질 테니, 대충 따지면 그 정도는 되어야 너도 공략할 맛이 나겠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걸 개인이 정하고 말고 할 수 있는 거야?"

"어차피 그 지역의 던전은 다 내 소유거든."

히죽, 웃으며 말하는 트리아인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뜰 때.

"뭘 그렇게 놀라? 한국의 던전도 이제 거의 다 네 거잖아?"

그건... 좀 다르지 않나?

어쨌든 27단계 공략 불가 정도면 금방 클리어하겠지?

땅에 떨어진 돈이라도 줍는 기분...

내 그런 표정을 읽었는지, 트리아인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자신감 있는 건 좋은데, 너무 방심하진 않는 게 좋을 거야. 아직까지 이 던전의 기믹을 해결한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

"그야 그렇겠지."

그러니까 불가사의지.

"문제는... 기믹을 무시한 강행 돌파로는 지금의 나조차도 뚫을 수 없는 던전이라는 거고."

... 69레벨, 그것도 세계 최강 헌터가.

고작해야 27단계 던전을 못 뚫는다고?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곳이야?

내기(1)

내기(1)

친절하게도 아흐마드는 나를 보르도까지 직접 안내해줬다.

그... 관광버스를 타고서.

원래 비행기를 타고 갈 거리긴 했는데, 이곳저곳 육로로 관광하는 편이 나을 거라고 해서 아흐마드의 차를 타고 보르도로 간다.

육로로 무려 8시간이 넘는 거리였지만, 차가 아니라 그냥 집인데 뭐.

집구석에 누워있는 것도 힘든 사람이라면 힘들 수도 있겠다.

적어도 나는 아니다.

오는 길에, 아흐마드는 내게 친절하고 자세하게 던전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이런 것만 보면 그냥 좋은 형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인데.

곱게 미쳤어야지...

"듣고 있는 거야?"

"응. 듣고 있지."

"그래, 쉽게 말하면 웨이브 디펜스 던전이야."

잠깐의 휴식 시간과 준비 시간 이후에 웨이브가 몰려오는 형식의 던전.

보통 중앙부의 생명석 같은 걸 일정 시간 이상 막아내면 성공이다.

헌터들은 선호하지 않는 유형의 던전이기도 하다.

보통 타임어택이라고 불리는 최적화 공략을 통해서 시간을 단축하는 게 던전의 다회차 공략의 핵심인데, 웨이브형 디펜스 타입의 던전은 아무리 단축해도 시간을 쓸 수밖에 없다.

거기에다, 여긴 조금 특이한 모양이다.

"여긴 기믹을 안 깨면 웨이브가 안 끝나. 클리어 가능 레벨일 때는 78 웨이브까지 갔고, 최근에는 199 웨이브까지 갔지. 안 끝나더라고. 세간에서는 웨이브가 너무 길어서 내가 짜증나서 그냥 홧김에 나온 줄 알지."

"그게 아니었어?"

웨이브형 디펜스 던전에서 네크로맨서는 거의 신에 가깝다.

계속해서 소체가 튀어나오고, 그건 네크로맨서의 언데드 군단을 강화시키는 꼴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200 웨이브까지 가려면 못해도 물리적으로 일주일은 걸렸을 거다.

인내심이 바닥나도 바닥날 만한 시간인데.

"200 웨이브에 뭐가 나오는 줄 알아?"

"... 뭐길래?"

"드래곤."

"... 그런 몬스터가 있어?"

70단계에도 그런 몬스터는 없었던 걸로 아는데.

"몬스터? 그건 몬스터 같은 게 아니었어. 음, 쉽게 설명하면 이런 느낌? 너 적당히 하고 꺼저라?"

"... 어차피 기믹을 달성하는 게 아니면 깰 수 없으니 더 헛수고하지 마라, 그런 거야?"

"맞아, 딱 그거지."

손가락을 부딪쳐 딱! 소리를 내면서 그가 웃었다.

"내 언데드 정예 군단을 다 태워도 못 잡겠더라고 그건. 괜히 깝치다가 그냥 한 방에 갈 거 같은데 어떻게 버티겠어? 바로 튀었지."

"웨이브는 그렇다고 치고... 기믹은 뭔데?"

"몰라."

"모, 모른다고?"

"대충 추정할 뿐이지. 정확히 알진 못해. 그걸 알았으면 깼겠지."

"그렇긴 하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나만이 줄 수 있는 힌트는 있지."

다른 사람이 줄 수 없는 힌트라면...

"200번째 웨이브에서 나온 힌트인 모양이네."

"눈치 빨라서 좋은데? 내 브라더 더 마음에 들어."

"..."

댁이 이렇게 말하면 진짜 소름 돋는다니까.

"흠흠, 그 드래곤은 이렇게 말했지."

한껏 목소리를 저음으로 깔고서.

"이렇게 많은 시간을 주었거늘!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못하다니! 역시 너희들은 구제불능이로구나! 살아남을 자격도 없다!"

"... 그렇게 말했다고?"

"응."

뭔가를... 만들 걸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가?

"혹시 생산계통을 위한 게이트가 아닐까?"

"그러려면 웨이브가 없어야지."

"그것도 그러네..."

하지만 핵심은 뭔가를 만드는 건가?

그러면... 안에 들어가서 뭘 만들 수 있는지부터 확인해봐야겠군.

**

[27단계 게이트, '오만의 시험'에 입장합니다.]

보르도에 도착해서 게이트에 입장했을 때 눈앞에 보이는 건, 하나의 마을이었다.

지금까지의 게이트랑은 확실히 달랐다.

거기엔 NPC들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혼자보단 낫네."

공략에 며칠은 걸릴 수도 있는 디펜스형 던전에 혼자 있다가는 진짜 정신병 걸릴 수도 있다.

정확히는 개인 인스턴스형 웨이브 디펜스 던전.

일단 NPC들이랑 통성명부터 해볼까?

"안녕하십니까."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나를 흘끗 올려다보는 작은 키의 난쟁이.

근육으로 우락부락한 수염투성이만 보아도, 옛날에 보았던 '반지의 제왕' 영화의 '김리'가 떠올랐다.

저게 드워프구나.

고단계 게이트에 가면 종종 우호 세력으로 나온다고 들었다.

처음 보네.

"인간인가?"

"... 그렇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여길..."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뭐, 상관없나. 하고 작게 중얼거린 드워프가 이어 말했다.

"개죽음당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도망가. 어차피 네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있을지도 모르죠."

"태생부터 불가능해. 이 도린처럼 타고난 장인이 아니라면 해낼 수 없지."

오, 시작부터 괜찮은 단서다.

뭘 만들어야 되는 던전에서, 만드는 사람이라니.

"뭘 만들어야 합니까? 이 마을은 대체 무슨 목적으로 있는 겁니까?"

대놓고 묻자, 도린이 껄껄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간은 알 필요 없는 일이야."

"왜 알 필요가 없습니까? 저도 이제 이 마을 사람인데요."

아예 입을 닫아버렸네.

에이, 여기서는 더 캐낼 정보가 없겠다.

... 싶었을 때.

"정 궁금하면, 귀쟁이들한테 가서 들어."

"... 귀쟁이요?"

도린이라는 NPC가 가리킨 방향을 보니, 작은 숲이 있었다.

[첫 번째 웨이브까지 남은 시간 : 13분 11초]

아직 웨이브까지 시간이 좀 있었으니, 대충 숲에 뭐가 있나 보고 올까?

귀쟁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못 알아들었는데, 숲에, 귀, 그리고 드워프와의 앙숙.

하나밖에 더 있겠어? 

엘프. 판타지 클리셰다.

"계십니까? 마을에 새로 들어온 인간입니다!"

숲 입구에서 크게 외치니, 거의 헐벗다시피 한 미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오우야 소리가 절로 나오네.

그 길쭉한 귀만이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요소였다.

"새로 온 인간이라고? 어떻게 인간이 여길..."

"뭐, 어떻게든 들어왔습니다."

게이트로 입장했다고 말해도 못 알아들을 거잖아.

이미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많이 실험한 결과다.

NPC들은 게임 속의 존재들처럼, 여기가 게이트 안쪽 세상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당장 도망가. 여기는 인간이 버틸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도린이라는 드워프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더군요."

도린을 언급하자, 엘프 여자의 미간이 팍 찌푸려졌다.

"여기서 그 땅딸보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알겠습니다. 그러면..."

"인간과 더 나눌 말은 없을 거 같군."

아니, 이 여자... 아니 이 엘프녀도 쌍으로 지랄이네.

혹시나 웨이브를 클리어하면 뭔가 달라지려나?

잠시 기다려 보니, 마을의 방벽으로 뭔가 달려들기 시작했다.

고블린 무리였다.

허공에 흩뿌려 둔 1호기의 안개들이 순식간에 전멸시켰지만.

[고블린 무리가 너무 강한 힘에 놀라 와해됩니다.]

[첫 번째 웨이브가 조기 클리어되었습니다.]

[다음 웨이브까지 남은 시간 : 59분 58초]

[드워프 무리가 당신이 보인 미지의 힘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는 것을 꺼릴 것입니다.]

[엘프 무리가 당신이 보인 미지의 힘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는 것을 꺼릴 것입니다.]

아니 씨발, 더 망했잖아.

무섭다고 이제 눈도 안 마주치는데.

조졌네.

잠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메시지가 떠올랐다.

[추종자, '뀨뀨'가 나오고 싶어 합니다!]

아, 산책 시간.

펫은 언데드랑 달라서 무한정 아공간에 넣어둘 수는 없었다.

밥도 주고, 산책(?)도 시켜주고, 챙겨야 했다.

프랑스에 오느라 까먹었네.

"뀨뀨 소환."

─뀨?

언제나처럼 귀여운 소리를 내면서 꿈틀거리던 뀨뀨가, 숲 쪽을 바라보더니 그쪽으로 엄청난 속도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아니 저기는 엘프..."

숲으로는 들어오지 말라고 엄포까지 놨는데. 어쩌지?

그렇게 숲 바로 초입까지 들어선 순간.

나타난 엘프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 조졌...

"... 귀, 귀엽..."

얼굴까지 붉히던 여자 엘프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이 주인인가요?"

"그런데요."

"아, 안아봐도 될까요?"

"... 쟤가 된다고 하면요."

─뀨!

다행히 싫어하진 않는 거 같네.

엘프 여자가 뀨뀨를 안고서, 잠시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터트렸다.

"... 흠흠, 슬라임 로드의 주인이라니, 범상한 인간은 아니었군요."

그러니까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거야?

"쉽게 제 주인을 정하지 않는 슬라임 로드의 충성까지 받는 인간이라면 우리 엘프들도 믿을 수 있지요. 저는 엘라인이에요."

"김세균입니다."

그런데 걔는 계속 안고 있을 거니?

배고파서 버둥대는 거 같은데.

그녀가 아쉬움 가득한 기색으로 뀨뀨를 내려놓자, 뀨뀨는 숲의 음지에 가득한 균류를 섭취하기 위해 신나서 기어갔다.

"이곳엔 어떻게 오신 거죠?"

던전 클리어하러 왔지.

"제가 묻고 싶은 소리군요. 대체 여기서 엘프가 드워프랑 뭘 하는 겁니까?"

"... 후우, 일족의 허물을 인간에게 늘어놓고 싶지는 않았는데. 어쩔 수 없군요."

이어지는 그녀의 이야기를 요약해 보면 대충...

예전에 엘프 부족의 족장과 드워프 부족의 족장이 시비가 붙었다.

드워프는 엘프들에게 불도 안 쓰는 미개한 놈들이라고 했고, 엘프는 그런 드워프들에게 마법도 쓸 수 없는 무식쟁이들이라고 했단다.

그래서 내기가 붙었는데...

재수 없게, '지나가던' 드래곤이 와서 재밌겠다고 끼어들고서 여기 가뒀다는 거다.

"그리고 재촉한다면서 계속해서 몬스터를 보내고 있죠."

역시 판타지 만악의 근원, 비만 도마뱀다운 짓거리네.

200번째 웨이브에 나온다는 그 드래곤이 저건가보다.

"처음엔 간단한 몬스터 무리였지만, 지금은 점차 버거워지고 있어요. 이대로 있다가는 모두 죽는 것도 시간문제에요."

"드워프랑 힘을 합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종족별로 각자 주어진 임무가 달라요."

"그게 뭡니까?"

"우리 쪽은 불 없이 드래곤조차 취할 술을 빚어야 하고요..."

**

"... 우리 쪽은 마법 없이 드래곤조차 감탄할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까 불 없이 드래곤이 취할 술.

마법 없이 드래곤이 감탄할 무기.

정리하면 이거 두 개가 던전 기믹이군.

"불가능한 일이죠."

엘라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리 술을 잘 빚어도, 발효로 낼 수 있는 도수는 한계가 명확해요."

그건 그렇지?

나도 술에 대해서는 잘 몰랐는데, 술꾼 제피로스랑 다니면서 알게 됐다.

발효로는 일정 도수까지밖에 못 만든다더라고.

알코올 도수가 너무 높아지면 효모가 죽는다나 뭐라나.

효모가 자기가 만들어낸 알코올에 빠져 죽는다는 거다.

그래서 고도수의 술을 위해서는 불을 활용한 '증류'가 필수적이었다.

"우리 쪽도 불가능한 일이야. 드래곤도 놀라게 하려면 희소금속만 고르고 골라 모아서 만들어야 하는데, 희소금속은 마법 화로의 화력이 아니면 충분히 녹일 수 없어."

"음."

뭐, 보통은 불가능한 이야기긴 할 텐데...

나한테는...

"되는데요?"

그것도 너무 쉬울 거 같은데?

일단 앞에 건 껌이고...

효모가 알코올에 죽는 게 문제인데, 원래 효모는 알코올 도수 18도 정도에서 사멸하지만...

효모도 세균이다.

내 마법으로 언데드 상태로 일어나면, 통제력에 의한 내구도 상승 효과를 받는다는 거.

18도면 소주 정도인데, 내 세균이 소주에 빠진다고 죽진 않을 거 아냐.

순수한 알코올에도 아마 안 죽을 거 같은데.

그리고 드워프 쪽이 조금 문제인데...

마법이 직접 적용되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냐?

마법 없이 화력이 부족하면...

만들어주면 되잖아?

"드워프는 쌀 거 같고... 엘프도 똥은 싸죠?"

"무, 무슨 무례한 질문을!"

"대답은 된 거 같네요, 혹시 화장실이 어딥니까?"

중세 판타지 세계관에 수세식 화장실은 아니겠지?

내기(2)

내기(2)

"정말, 이런 걸 왜 보자고 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요..."

일단 먼저 드워프 화장실에부터 다녀왔다가 엘프 화장실로 왔다.

드워프야 사람 화장실이랑 크게 다를 거 없고.

아니, 의외로 깔끔했다.

역시 드워프 기술력이라고 해야 하나.

밖으로 냄새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잘 마련되어 있었다.

반면에 엘프 화장실은...

외양간...?

왜 정겨운 시골 냄새가...

아, 엘프는 채식만 하는구나.

그러면 아마도 엘프 쪽에서 만드는 게 나을 거 같다.

위장 구조가 소나 양 같이 반추동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메탄을 만드는 데는 더 낫겠지.

지팡이를 들고서 이전에 불도마뱀에게서 얻었던 메탄생성균을 뿌렸다.

저곳에도 메탄생성균이 존재는 하겠지만, 불도마뱀 개체의 메탄생성균은 고압의 메탄 하이드레이트, 그러니까 고체 형태로 형성하기에 연료 활용성이 더 좋다.

굳이 변... 이 아니어도 다른 유기물로도 생성할 수 있지만, 제일 효율이 좋으니까.

그릭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얀 얼음들이 둥둥 떠올랐다.

"건지세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신기했는지, 미리 만들어둔 잠자리채 같은 걸로 얼음을 건져낸다.

"얼음... 인가요?"

"메탄이 갇힌 얼음이죠."

이래서 과학은 배워둬야 한다니까.

요즘 규선 씨에게 과외를 받는 것도 모자라서, 열심히 공부 중이다.

아마 이렇게 공부했으면 서울대는 갔겠... 아니, 망언 죄송.

"새로운 연료라고 드워프들에게 가져다주세요."

"이게 연료라고요?"

"네, 급합니다."

상온이면 저 상태로 녹아서 금방 기체가 되거든.

"혹시 냉각 마법 같은 거 있으면 사용해줘요. 상온에선 금방 녹아서요."

"아, 알겠어요. 나 참, 내가 드워프를 도우려고 마법을..."

"자꾸 불평하면 그쪽도 안 도와줍니다?"

"알겠어요..."

엄밀히 말하면 둘 모두 도울 필요는 없었다.

어느 한쪽만 도와도 조건은 달성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래도 혹시나 두 쪽을 전부 도우면 뭔가 특별 보상이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라고 하면 너무 속물적이니까, 선택받지 못한 쪽이 불쌍해서라고 포장해 볼까.

사실 그게 진심이기도 하다.

아무리 그냥 던전의 NPC라고는 해도, 뭔가 사람 같다.

능력이 안 되면 모를까, 능력이 되는데 귀찮다고 버릴 수는 없었다.

엘라인과 함께 찾아간 드워프 마을에다 얼음으로 보이는 물건을 툭 건네니 도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저게 그렇게까지 뛰어난 연료라는 말인가?"

"적어도 석탄이나 목탄보다는 훨씬요."

석탄으로는 철을 연화(軟化)하는 정도만 가능하지, 녹일 수는 없다.

석탄의 발연점이 1200도 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 금속을 녹여야 하는 수준의 공정에서는, 드워프들은 마법 전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흐음..."

"못 믿겠으면 그냥 가져..."

솥뚜껑같은 손이 내 팔목을 턱 움켜쥔다.

"어허, 못 믿다니."

드워프의 호기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한다.

일단 이게 새로운 연료라고 들은 이상, 아마 써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을걸?

"일단 사용해 보겠네."

"조심하는 편이 좋을 거예요."

"누구보고 말하는 거야? 우린 드워프라고."

그렇긴 하지.

불을 다루는 데 있어서, 드워프보다 듬직한 종족은 없을 테니까.

클리셰에 따르면 말이지...

그리고 잠시 뒤...

"이럴 수가! 이런 화력이라니!"

도린이 눈을 부릅뜨며 달려 나왔다.

당연히 놀랄 수밖에.

저게 현대 화력발전의 주요 원료인 천연가스다.

지금이야 핵융합 발전이 활성화되면서 사용량이 많이 줄었지만, 적어도 화력 면에서는 석탄의 근 두 배다.

그런데...

"혹시 눈썹 탄 거예요?"

"... 화력이 예상보다 너무 강해서 그만."

이 난쟁이들 믿어도 되는 거 맞어?

드워프가 되어서 불도 제대로 못 다루고 눈썹을 홀라당 태워 먹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는지, 도린이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을 터트렸다.

"흠흠, 아무튼... 이런 연료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네."

"좋아요, 맡겨둘게요."

어차피 웨이브야 1호기를 뿌려두었으니, 마을에는 접근하기도 전에 계속 증발할 거다.

벌써 10웨이브까지 순식간에 클리어된 상태였다.

그러면, 나는 마음 놓고 술이나 담그면 되겠다.

**

다시 엘프 마을로 엘라인과 함께 돌아와서, 그녀에게 물었다.

"여기 과일이나 꿀 같은 게 있습니까?"

"그게 우리 주식인걸요."

"그러면 그걸 포함해서 당분이 들어 있는 건 최대한 가져와 주세요."

내 요청에 꽤 많은 과일들이 와서 쌓였다.

항아리도 같이.

항아리에 있는 건 아마 꿀이겠지.

이 작은 숲에서 과일을 많이도 재배했다.

이게 엘프들의 능력인가.

주된 작물은 포도.

실제로 포도에는 효모가 많이 있어서 발효주를 만들기에 가장 적절하다.

알을 하나 따서 먹어보았는데...

"와, 이게 꿀이지."

세상에, 태어나서 먹어봤던 과일 중에 이렇게 달고 맛있었던 게 있었나 싶을 정도의 맛이었다.

엘프산 포도, 가지고 나가서 사업하고 싶어질 정도네.

술로 담그기 아까울 지경인데?

그래도 포도는 필수로 들어가야 한다.

거기에...

"설탕은 없을테고... 꿀을 넣죠."

효모는 당분을 먹고 알코올을 배출한다.

그러니까, 들어간 당분의 양이 알코올의 도수를 결정하는 셈.

원래대로라면 18도 정도에서 효모가 죽어서 발효주의 도수는 거기서 멈추지만, 내 효모는 멈추지 않는다고 Boy.

와인을 담그는 방식 그대로, 포도를 으깨서 통에 담고, 원래대로라면 포도의 당도만으로도 도수를 만드는데 충분하지만, 드래곤마저 취할 고도수의 술을 만들어야 하니까, 계속해서 가당하면서 알코올을 늘려야 한다.

"하지만 술을 만드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려요. 아무리 단축한다고 해도..."

"더 단축하면 되죠."

일반적인 효모의 활동을 가속하는 방법은 한정적이지만...

내 효모는 내 명령을 듣는 언데드 군단이다.

"일단 포도 으깬 것부터 준비해 봐요."

"알겠어요."

이미 엘프들이 이전에 만들어두었던 포도주에서, 대량의 포도 효모 찌꺼기들... 그러니까 사체들을 부활시킨 채였다.

그 효모들을 새로 으깬 포도주에 고스란히 빠트려서 명령을 내렸다.

최대한 빠르게 당분을 알코올로 만들라고.

그러자 불과 3분도 지나지 않아 포도주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마, 말도 안 돼!"

적어도 몇십 시간은 있어야 볼 수 있는 반응이, 순식간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렇게 20분 정도 지난 뒤에, 표면에 떠 있는 액체를 떠서 마셔보았다.

그 정도로 달디달았던 포도로 만들었는데, 단맛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완벽하게 드라이한 레드와인이 나온 것이었다.

컵을 옆에 있는 엘라인에게 건네자, 그녀가 마셔보고서는 눈을 부릅떴다.

"세, 세상에. 이렇게 빠르게 술을 담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그러게, 그러고 보니 이거 밖에 나가서 사업으로도 할 수 있는 거 아냐?

뭐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이제 가당하죠. 꿀도 좋고, 포도즙도 좋고. 달달한 건 전부 다."

도수를 빨리 올리려면 압도적인 당도를 지닌 꿀이 낫겠지 아무래도.

원래 순수한 꿀에는 뛰어난 항균 효과가 있어서 그냥 넣어버리면 효모는 다 몰살! 이지만...

내 효모 군단은 오히려 당분을 신나게 먹어 치우며 늘어나고 있었다.

너무 늘어버리면 안 되니까, 늘어난 개체들은 역소환으로 어느 정도 조절하면서 계속해서 꿀을 넣고 발효, 꿀을 넣고 발효를 반복했다.

그 결과.

"와, 씨 이건..."

먹었다가는 바로 골로 갈 수준의 어마어마한 고도수가 나왔다.

도수를 재는 장비가 없어서 얼마나 강한 도수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가까이만 가도 눈이 따가울 지경이다.

조금 떠서 손에 바르니, 순식간에 증발해버리는 모습.

이 정도면 술이 아니라 독극물 아냐?

용가리가 아니라 용가리 할애비가 와도 안 취할 수가 없겠다.

"이제 찌꺼기를 걸러내서 순수한 술만 남기면 됩니다."

"네... 정말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

엘라인은 거의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아, 그리고 이제 어쩌면 됩니까?"

"완성품을 봉헌의 제단에 올리면, 드래곤이 와서 시험할 거예요."

"그러면 조금 기다리죠. 드워프랑 함께 올리자고요."

"네, 알겠습니다. 은인이시여."

이제 호칭이 바뀌었네?

"은인 소리 들을 만한지는 드래곤이 저거 마시고 골로 가나 안 가나 보고 하자고요."

"...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해도... 저건 좀..."

그건 그렇지.

저 정도면 거의 화학 병기다. 술이 아니라.

그냥 도수만 높은 게 아니라, 증류주처럼 발효주 특유의 메탄올이나 에스테르 같은 잡성분이 걸러지지 않고 오히려 증폭되어서, 사람은 마셨다가는 죽을 수도 있었다.

드래곤이야 내 알 바야?

마시고 죽으면 그것도 엄청나긴 하겠네...

설마 명색이 드래곤인데 죽기야 하겠어?

그렇게 잠깐 기다리고 있을 때, 드워프 쪽에서도 소식이 들려왔다.

"내 일생일대의 걸작일세. 마법 전로도 없이 이런 걸작을 만들어낼 수 있다니."

눈물을 뚝뚝 흘리는 도린.

그가 내 손을 척 붙잡았다.

"은인에게 어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소."

"감사는요. 엘프들이랑 싸우지나 마세요. 당신들도 마찬가지고."

"당연하지. 귀쟁이... 아니 엘프들이랑 잘 지내겠네."

"면목이 없어요. 저희도 드워프 일족과 화해하고 교류하겠어요."

둘의 화해까지 이끈 뒤에, 도린이 자신의 걸작을, 엘라인이 독극물... 아니 술 한 항아리를 들고 봉헌의 제단에 동시에 올려놨다.

그 순간이었다.

[오만의 시험이 시작됩니다!]

[시험관, '베르키르엘'이 강림합니다!]

눈을 뜰 수도 없는 엄청난 돌풍과 함께 앞에 순식간에 나타나는 거체.

씨바, 저게 드래곤이구나.

내가 알던, 매체에서 보던 드래곤의 모습 판박이여서 오히려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상상의 존재를 저렇게까지 잘 묘사했다고?

엘프와 드워프들은 땅에 거의 처박히다시피 해서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었다.

내겐 뭐, 그 정도는 아니었으니 그저 고개를 들고 바라볼 뿐이었다.

─흐음, 내 생각보다도 빠르게 완성했구나. 어디 보자... 시간은 거의 동시에 봉헌했다고 봐야겠구나.

마치 앤서블 이어링으로 제피로스에게 듣는 것처럼, 드래곤의 목소리가 뇌리에 직접 틀어박혔다.

─그것을 도운 건... 저 인간인가?

나를 바라보며 묻는 드래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당당히 말했다.

"그렇습니다. 외부의 조력이 있으면 안 된다는 조건은 없었던 듯하여..."

─외부의 조력 없이는 저들의 굳은 머리로 이룰 수 없는 일이었지. 잘했다. 인간. 그대의 이름은?

"김세균입니다."

─김세균. 세상 모두가 지나치는 작은 것을 보고 다스리는 자여.

저 도마뱀 뭐지?

내 능력의 기원이 뽀록난 건 처음이다.

역시 명색이 드래곤이라는 건가.

─그대는 미물(微物)을 지나치지 않듯, 이들의 고난 역시 지나치지 않았구나. 장하다.

다행히 트집 잡는 것 대신에 칭찬이군.

"감사합니다."

─그러면 어디, 제대로 시험을 통과했는지 확인해 볼까?

그러면서 점차 작아지더니, 인간의 형상으로 바뀌는 드래곤.

와, 설마 폴리모프까지... 

여기 판타지 세계관은 클리셰 덩어리냐?

옛날 판타지 소설 보는 느낌이 물씬 나네.

드래곤의 폴리모프가 끝났을 때, 눈앞에는 적발의 늘씬한 여자가 하나 있었다.

"누님... 아니 드래곤... 맞죠?"

"그렇다. 내가 거산의 지배자 베르키르엘이다."

그러더니, 그녀가 천천히 먼저 드워프 쪽으로 다가갔다.

"마법적 조치가 취해지지 않은 게 확실하구나. 연료를 만드는 데는 엄밀히 말하면 마법이 적용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결과적으로 제작 공정에는 어떤 마법적 터치도 없었으니 그건 눈감도록 하마. 확실히 너희 일족이 만들었던 것 중에서도 제일이기도 하고."

"위, 위대한 존재의 은총에 감사드립나이다!"

감사드립나이다! 

드워프 일족의 우렁우렁한 외침에 귓가를 울렸다.

"그리고 엘프 쪽은..."

술독을 흘끗 바라보고는, 약간 창백해진 드래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 합격이다."

"예? 가, 감사합니다!"

엘라인을 비롯한 엘프들도 환호성을 터트렸다.

오직 나만이, 빤히 드래곤을 바라보며 되물을 뿐이었다.

"시험 내용은 드래곤도 취할 술 아니었어요?"

"으응?"

"마셔야죠?"

내가 개고생해서 만들었는데.

마셔야지.

"정말 취하는지 확인해야 하지 않겠어요?"

"아니, 그게."

"자 누님, 한 잔 쭉 들이켜십쇼. 본체의 덩치에 맞게 만들어서 양은 많습니다."

얼추 천리터는 만든 거 같다.

"가, 가져가서 마시겠노라."

"그러고서 나중에 취하지 못했으니 시험은 불합격이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르니..."

"드래곤의 약속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냐!"

"시험 내용도 약속이잖아요?"

"아니 그건."

그냥 이렇게 얼레벌레 넘어갔다가 제대로 클리어 달성이 안 되면 어떡하라고?

어떻게든 먹여야겠다.

"후우... 알겠다."

역시 달성 조건이 맞았다.

어설프게 넘어가려던 드래곤을 압박하여 마시게 하니.

단 한 방에 반응이 온다.

또렷하던 파충류 눈이 흐릿해지는데?

[당신은 27단계 게이트, '오만의 시험'을 최초로 토벌하셨습니다.]

[최초 클리어 보상으로, 최대 마나가 증가합니다.]

이제야 게이트가 클리어되네.

역시 술 먹이는게 맞았다니까.

오, 그나저나 최대 마나라니.

마음에 드는 보상이다.

마나통이 곧 스펙인 내게는 좋은 현상.

[숨겨진 임무를 완료하여 게이트가 1단계 게이트, '완료된 시험'으로 변경됩니다.]

[게이트를 두 번째로 해방하셨습니다.]

[게이트 해방의 보상으로, 서브 클래스 슬롯이 생성됩니다.]

이번에도 러시아 때처럼 게이트가 해방되어서 단계가 바뀌었다.

아마도 기믹 두 개를 모두 클리어해서 그런 모양이다.

그런데 서브 클래스 슬롯? 이건 뭐지?

[서브 클래스는 업적이나 임무, 보상 등으로 습득할 수 있습니다.]

[서브 클래스는 자유롭게 변경할 수 있습니다. 대신에 변경한 서브 클래스의 스킬은 사라지며, 숙련도가 초기화됩니다.]

서브 클래스가 뭔지 곱씹으려던 찰나, 게이트 밖으로 방출되기 전에 덤이 주르륵 떠올랐다.

[위대한 업적! 당신은 인류 최초로 드래곤을 취하게 했습니다.]

[보상으로 '드래곤을 취하게 한' 칭호가 주어집니다.]

['드래곤을 취하게 한' 칭호 획득 효과로 모든 주조 관련 스킬의 숙련도가 S에서 시작합니다.]

오 이런 업적도 있나.

주조 관련 스킬이 없는 게 문제지만... 언젠가 쓸모가 있겠지.

[전설적인 업적! 당신은 인류 최초로 드래곤에게 큰 고통을 주었습니다.]

[보상으로 '드래곤을 크게 고통스럽게 한' 칭호가 주어집니다.]

['드래곤을 크게 고통스럽게 한' 칭호 획득 효과로 모든 아룡족 계통 몬스터에 대한 공격력이 10% 증가합니다.]

... 고통?

"목이! 장이! 타들어 간다! 크아악!"

음, 취해서 발작하기 전에 빨리 튀는 편이 좋겠다.

"던전 퇴장."

그렇게, 나는 땅을 뒹굴며 고통스러워하는 드래곤을 두고서 던전을 빠져나왔다.

빛무리와 함께 던전을 빠져나온 내 눈앞에, 마지막 업적이 떠올랐다.

[신적인 업적! 주조에서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대한 업적으로, 이름을 알 수 없는 신이 당신에게 보상을 내립니다.]

[서브 클래스, '넥타르의 주조사'를 습득하실 수 있습니다.]

주조사?

... 이제 술이나 빚고 살라고?

넥타르(1)

넥타르(1)

그런데 주조사 앞에 우수리가 있네?

넥타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데.

가물거리는 기억 속에서 빛무리가 걷혔다.

게이트 안에서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아흐마드의 차는 사라지고 없었다.

하긴 공사다망한 양반이 여기서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겠지.

그럼 여기서 어떻게 돌아가야 하지?

잠깐 고민할 때쯤이었다.

빵빵! 클락션 소리에 흘끗 옆을 바라보니, 길가에 리무진 한 대가 있었다.

당연히 리무진 안에 타고 있는 건 스켈레톤.

차에 타니, 바로 전화가 걸려 오면서 환한 아흐마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브라더! 내가 바빠서 먼저 가서 미안해! 차는 한 대 보내뒀어!

"아냐 아냐, 바쁜데 거기서 뭐 하러 기다려."

─하하! 그나저나 던전을 정말로 깬 거야? 설마 드래곤 잡은 건 아니지?

드래곤 속 뒤집어지게 하긴 했는데.

"드래곤을 어떻게 잡아, 기믹 달성이야."

─오오! 어떻게 한 건지 궁금해지는걸?

"영업 비밀."

─에이, 어쩔 수 없지.

헌터들 사이의 불문율이다 보니, 클리어 방식까지 캐묻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도 러시아 쪽 던전처럼 1단계로 바뀌었네?

설마 이 양반이, 그거 트집 잡아서 평정 못 했으니 10%는 못 내준다고...

─일단 언데드들 보내서 통제할게.

"응?"

─클리어 권한은 경매 붙여야지. 그 돈은 전부 네 거고.

... 세상에 마상에.

─LMHC 그룹 회장 손자가 최근에 각성했다고 들었으니, 그 양반이 구미가 좀 당길 거야. 내가 잘 말해보지.

"아니, 그렇게까지?"

─최초 클리어 보상은 꽤 크니까.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돈 주고도 못 산다고.

워낙 밥 먹듯이 해서 무심코 넘기는데, 크긴 하지.

─고생 많았으니 부수입 좀 챙기라고. 혹시라도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요청하고.

양심이 좀 찔리긴 하는데, 준다는 걸 안 받을 필요는 없으니까.

"고마워."

─아, 그리고 와인 좋아하나?

"와인?"

나는 뭐 그냥저냥이긴 한데...

자크 셀로스라는 그 샴페인 정도는 좋아한다.

그런데, 내 가장 친한 사람에게는 다른 이야기.

집에 아예 셀러로만 찬 방이 있을 정도의 와인 애호가가 제피로스다.

"좋아하지."

제피로스가.

─하하, 잘됐네. 보르도에 가서 와이너리 구경도 안 하면 쓰나. 보르도에 있는 와이너리 가운데 50% 정도는 내 소유고, 나머지 절반도 원하면 언제든지 구경 정도는 할 수 있으니 말만 해. 투어도 좋고, 원한다면 빈티지 보틀도 얼마든지 가져가라고.

비싼 와인, 그것도 빈티지라고 불릴 정도로 오래된 비싼 와인이라면 적어도 병당 몇천에서 몇 억은 할 텐데.

그냥 콜라 한 캔 주듯이 말하네.

역시 스케일이 다르다.

"혹시 손님 하나 불러도 되나?"

─그 손님이 제피로스라면 당연히 환영이지.

좋았어.

프랑스 온 김에 구경이나 하고 가자.

아, 물론 그 전에... 서브 클래스가 대체 뭐인지도 확인해 보고.

**

보르도의 와이너리 중에는 호텔도 함께 운영하는 곳이 많았다.

프랑스의 와이너리 이름에 샤토(Chateau)라는 이름이 붙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말로 하면 성(城).

그러니까, 원래는 이 와이너리들이 귀족의 영지 같은 거였고, 그들이 살던 성이 있는 거였다.

그리고 내 요청에, 아니 정확히는 아흐마드의 요청이겠지만...

어쨌든 요청하니 성을 통째로 내주었다.

성에서 프랑스 귀족이나 왕족 같은 하룻밤을 보내는 동안에, 서브 클래스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놀랍게도 헌터 커뮤니티에는 서브 클래스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제피로스도 그게 뭐냐고 반문했지.

그렇다면... 서브 클래스를 얻은 게 내가 처음이라는 거다.

하긴, 게이트 해방 보상이고, 게이트를 두 번이나 해방한 게 나뿐이었으니.

당연한 건가?

다음으로 넥타르.

검색해 보고서 정보를 들었을 때는 깜짝 놀랐다.

신의 음료라던가.

마시기만 해도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음료.

그런 음료를 만들 수 있는 주조사라니.

당연히 범상한 클래스는 아니겠지 싶었다.

게다가 서브클래스는 원하면 변경까지 가능하다니.

굳이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서브 클래스, 넥타르의 주조사로 전직한다."

[당신의 서브 클래스가 '넥타르의 주조사'가 되었습니다.]

[넥타르의 주조사 전용 스킬, '주조의 이해(고유)'를 습득하셨습니다.]

['드래곤을 취하게 한' 칭호의 효과가 적용되어, '주조의 이해' 스킬의 숙련도가 S에서 시작합니다.]

[주조의 이해(고유)]

설명 : 완벽한 결과물에는 신이 깃드는 법. 신의 경지에 이르러 종국에는 그 자체로 신이 되었던 한 신화적인 주조사의 경험이 여기에 녹아들어 있다. (숙련도 S 효과 : 완벽한 수준으로 주조된 술에 0.1%의 넥타르가 깃든다.)

음, 뭔가 바뀌는 건 없는 것 같...

"억!"

갑자기 무언가가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감각에, 머리를 부여잡고 그대로 침대에 철푸덕 쓰러졌다.

이게 대체 뭐야?

모르는 지식이, 홍수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그리고 지식은 전부...

술?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술을 빚는데 필요한 각종 지식들이 망라되어 흘러들어왔다.

단순한 레시피가 아니었다.

어떤 성분이 술맛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어떤 효과를 내는지.

무엇을 통제하고 무엇을 증폭해야 술맛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지.

그런 지식들이었다.

그 지식을 머릿속에 한가득 담은 채.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얼마나 기절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똑똑, 노크 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들어오세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와서 식탁 위에 음식을 놓아주는 한 아주머니.

내가 지금 머무는 이 와이너리는 원래 이런 투숙이 가능한 곳이 아니었는데, 아흐마드의 요청으로 특별히 손님 방에 머무르고 있는 거였다.

방금 음식을 놓아준 분도 이 와이너리의 사모님.

프랑스 가정식을 맛있게 다 비우고서 나오니, 한창 와인 만드느라 바빠서 날 신경 쓸 틈도 없었다.

뭐, 오히려 좋지.

한쪽에 앉아 차분히 구경했다.

"오, 역시나."

주조의 이해 스킬로 얻은 지식으로도, 이 양조장의 제조 과정은 완벽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와이너리의 이름은 '샤토 페트뤼스'.

보르도의 가장 유명한 5대 샤토는 아닌 소규모 지역의 와인이지만, 그게 오히려 이 와이너리의 명성을 높였다.

빈티지에 따라 다르지만, 병당 2~3천 유로는 기본으로 깔고 가는 최상급의 와인이었다.

그런 와인을 제조하는 곳이 흠잡을 데가 따로 있을 리가.

물론, 굳이 트집을 잡자면 잡지 못할 것도 없지만, 그건 말 그대로 트집일 뿐이다.

"한잔 드셔보시겠습니까?"

잠깐 넋놓고 보고 있자니, 와이너리의 후계자쯤으로 보이는 젊은 친구가 와서 와인잔을 건넸다.

이어 다른 손에 들고 있는 큰 병을 보여준다.

"보르도 우안 최고의 빈티지 중 하나로 손꼽히는 2010년산입니다. 흔히 '세기의 빈티지'라고도 부르지요. 점수로 평가하는 건 내켜 하지는 않는 일이지만, 유명 평론가가 100점으로 매겨주었던 빈티지입니다."

"마다할 수가 있나요."

저 정도면 한 병에 몇천은 할 텐데. 

"김세균 헌터의 위대한 공략에 찬사를 보내며, 한 잔 올리겠습니다."

"... 각성자였군요?"

내 물음에 그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조사입니다."

"예?"

아니, 당신도 주조사였어?

놀라는 내 눈을 보고서 제대로 오해했는지, 그가 설명을 이어갔다.

"흔한 클래스는 아니죠? 생산 계통 클래스인데, 이쪽에는 꽤 많이들 각성하는 클래스입니다. 저도 마법사나 검사 같은 게 되어서 이 와이너리를 탈출하고 싶었는데, 주조사로 각성하고 나니, 이쯤 되면 운명이다 싶더군요."

아니, 당신은 그게 메인 클래스잖아?

그런데 나는... 어, 음...

"이러나저러나, 보르도의 와인 산업과 게이트는 떼놓을 수 없습니다. 요즘 보르도 와인 대부분이 던전에서 나온 포도 품종인 도뇽 누아(Donjon Noir)를 블렌딩하니까요."

"이 와인도 그런 겁니까?"

"네, 그래서 더 특별한 빈티지이기도 하죠. 그 해부터 우리 와이너리에서 도뇽 누아를 섞기 시작했습니다."

순수 던전 포도로 와인을 담그면 너무 비싸니까, 최고급 와이너리에서, 그것도 일부만 섞는 거다.

그 섞은 일부만으로도 제조 원가가 폭등.

그래도 그 가치가 충분하다고 들었다.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이제 던전 포도가 없는 와인은 심심해서 먹지 못할 지경이라고 하니... 당연히 시대의 흐름 상 섞을 수밖에 없었겠지.

"우리 지방의 공략 불가 게이트를 정리해 주셨으니, 곧 평정 효과로 포도 생산량도 늘겠죠. 가격도 좀 내려갈 테고요. 보르도 와이너리들의 가장 큰 바람 중 하나가, 도뇽 누아의 가격이 내려가는 겁니다. 하하."

맛을 생각하면 안 섞을 수는 없는데, 굳이 거금을 주고 외부에서 사와야 하니까, 고스란히 손해겠지.

"덕분에 제 입이 호사를 누립니다."

한 모금 머금어 마셔보았는데.

확실히, 주조사 클래스를 얻기 전과는 느껴지는 게 달랐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

아, 이 경우에는 아는 만큼 맛을 느낀다에 가깝나?

웃으면서, 나도 모르게 말했다.

"재밌네요."

"네?"

"아, 이 와인을 알아가는 게 재밌다고 말한 거였습니다."

정말로, 재밌었다.

어떤 형태로, 어떤 방향성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알아차리는 게 말이다.

"푸하하! 재밌다니... 그거야말로 재밌는 반응이네요."

페트뤼스 와이너리의 후계자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 빈티지의 와인을 대접한 사람이 한둘은 아니지만, 그런 반응은 처음입니다!"

"직접 만들어볼 수도 있을까요?"

"와인을요?"

"예, 조금만이어도 좋습니다. 비용은 지불하죠."

"하하, 아흐마드 씨가 경을 칠 소리네요. 본인에게 가장 중요한 손님이니, 뭐든 원하는 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하셨는걸요. 따라오세요."

이어 한쪽에 있는, 수확해 놓은 포도가 가득 쌓인 공간에 안내받았다.

"이게 끝입니다."

"예?"

"포도를 압착해서 만들어낸 즙을, 포도 껍질에 있는 자연적인 효모균이 발효하여 와인이 되는 거죠. 필요한 건 포도와 자연. 두 개로 끝입니다. 포도는 여기 있고, 자연도 여기 있지 않습니까?"

더 뭐가 필요해? 하는 표정으로 보는 후계자 씨.

음, 내 생각에는...

그게 변인을 고정적으로 통제한다는 이야기로 들리는데.

그런데, 환경과 동일한 품종의 포도만으로 완벽하게 통제될 리가 없다.

그렇기에, 최대한 통제한다고는 해도 같은 포도주라고 해도 매년 맛이 달라지는 거고, 더 크게는 포도밭별로 맛이 다른 거다.

매년 점수가 크게 오락가락하는 것도 같은 이유고.

변인이 통제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이 세균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통제할 수 있다.

샤토 페트뤼스의 10년 빈티지 와인병 바닥에 남아 있던 효모 찌꺼기에서 효모들을 되살렸다.

저게 최고의 빈티지라니까.

효모도 최고겠지.

놀랍게도, 2010년 이후로 무려 수십 년을 사멸해 있던 효모 찌꺼기로부터, 효모들이 다시 일어났다.

이어 압착해 놓은 포도즙에, 효모들이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최고'로 손꼽히는 빈티지의 와인에서 느낀 여러 요인들을 구현하기 위해, 효모들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효모뿐만이 아니었다.

와인의 부드러운 맛을 결정하는 젖산균과 같은 여러 균류들도 일으켜 움직였다.

마침내, 한 통의 와인이 완성됐다.

불과 몇십 분도 되지 않는 시간에.

이번에는 단순히 무식하게 알코올의 농도만 끌어올린 게 아니라, 최대한 같은 맛을 구현할 수 있도록 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니까.

일단은, 최대한 저 최고라는 와인에 어떻게든 가까워질 수 있도록 해봤다.

결과물은?

[완벽하게 주조되지 못했습니다. 넥타르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쩝, 실패인가."

"뭐, 뭘 하신 거죠?"

"아, 제가 와인을 망쳤네요. 죄송하지만... 여기 있는 포도를 좀 더 써도 될까요?"

"어차피 만일을 대비한 여분의 포도이니 상관은 없습니다만..."

"감사합니다. 술 담그는 것도 은근히 재밌네요."

이래서 아재들이 집에 담금주 쌓아두고 그러는 건가?

이제 슬슬 감이 잡힌다.

아직은 혼재되어 있는 세균의 통제 능력과 주조 관련 지식이, 점차 섞여가는 기분이었다.

조금만 더 해보면 될 거 같은데?

**

페트뤼스 와이너리의 후계자, 쟝(Jean)은 무언가 귀신에라도 홀린 기분이었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길래, 저런 격렬한 발효가 단기간에 일어날 수 있는 거지?

동시에, 웃었다.

저렇게 급조된 와인이 맛을 낼 수 없다고, 장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와인은 사람이 빚는 게 아니라, 자연이 빚어내는 거다.

자연과 시간의 예술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아주 약간의 방향성을 잡아주는 것뿐이다.

그렇게, 평생을 생각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증조부도...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던 선조 이래로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그렇다고 해도.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음..."

호기심을 차마 참지 못하고.

이미 침전물이 가라앉은 와인 통의 윗물을, 조심스럽게 잔으로 떠올렸다.

저 남자가 '실패'라고 규정한 와인.

그걸 코에 가져다 대었을 때.

쟝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 이게... 어떻게..."

향기만 맡았음에도, 확신할 수 있었다.

그의 코가 그렇게 말했고...

'주조사' 클래스로서의 '시스템'도 말하고 있었다.

이건...

페트뤼스의 와인이라고.

맛보는 게 두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한 모금 머금었다.

"... 맙소사."

오크통에 넣어 숙성하기 이전의 페트뤼스 와인.

뱅 누보(Vin Nouveau, 숙성 전의 와인) 상태 그 자체였다.

문제가 있다면.

작황이나 날씨가 좋지 않은 올해의 빈티지 상태가 아니라, 그가 제대로 와인 업계에 들어오기도 전 맛보았던 어릴 적의 그 전설적인 빈티지.

2010년의 맛이 나고 있었다.

그 순간, 쟝의 마음이 꺾여 버렸다.

호기심이 그의 심장을 관통했다.

"저 사람... 대, 대체 뭐야?"

도무지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한쪽 의자에 망연하게 앉은 채, 포도를 가지고 계속해서 작업을 이어가는 김세균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그러다가 깜빡 잠들었다가 인기척에 눈을 떴다.

눈을 뜬 그의 앞에, 불쑥 들이밀어진 유리잔이 있었다.

"정신이 좀 들어요?"

"아, 제가..."

"들어가서 편하게 주무시지. 언제 여기서 주무셨어요? 감시 안 해도 뭐 안 훔쳐가는데."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농담이에요."

피식 웃으면서 김세균이 건넨 와인잔을 받아 든 쟝.

"마셔봐요. 이제야 좀 만족스럽네. 그래도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은 잡혔으니까, 앞으로는 쉽게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

이미 아까 실패작이라고 했던 것도 거의 완벽했는데.

이제는 두려울 지경이었다.

"이게..."

잠깐 향만 맡았는데도 아찔했다.

이런 복합미가 포도만으로 가능하다고?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그가 와인을 한 모금 마셨을 때였다.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경지의 결과물을 접했습니다. 당신의 와인에 대한 이해의 지평이 넓어집니다. '와인 주조의 이해' 스킬의 숙련도가 SS로 상승하였습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지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신을 앞에 두고서.

'이제 나는 와인을 만들어도 되는가?'

그것만이 쟝의 머릿속을 가득 메운 생각이었다.

넥타르(2)

넥타르(2)

[완벽하게 주조되지 못했습니다. 넥타르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계속해서 실패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주조한 술 가운데 총 500ml 분량이 완벽히 만들어졌습니다. 넥타르가 형성되었습니다.]

아주 일부 분량이긴 하지만, 술통에서 일부분이 '완벽'이라는 것을 얻었다.

그렇다면.

그 완벽을 따라 세균을 통제해 나가면 된다.

밤을 새워가면서 계속해서 완벽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주조한 술 가운데, 약 2L 분량이 완벽히 빚어졌습니다. 넥타르가 형성되었습니다.]

[주조한 술 가운데, 약 5L 분량이 완벽히 빚어졌습니다. 넥타르가 형성되었습니다.]

100%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엄청나게 높은 확률로 성공시키고 있었다.

"저기."

"... 예?"

이 양반 완전 넋이 나가 있네.

쟝인가 하는 페트뤼스의 후계자에게 시험 삼아 먹였더니 근 10분은 저 모양으로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저, 저는 계속... 와인을 만들 자신이 없습니다."

"... 뭐라고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저는 페트뤼스의 와인이 유일은 아니지만, 최고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조금 전의 그걸 마신 순간 넘어서기는커녕 가까이조차 갈 수 있다는 희망이 꺾였습니다."

... 나 뭔가 큰 실수를 한 거 같은데.

그렇다고 이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최고 와이너리의 후계자 싹을 이렇게 잘라버릴 수는 없다.

뭐라고 말하지?

"그건... 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아, 이거다.

"어떻게 아셨대."

"... 예?"

"와인이 아닌데요."

"아니, 그게 말이 되는..."

"생각해 보세요. 와인에서 날 수 없는 복합미가 났죠?"

"... 예."

"풍미나 여러 면에서, 원래 만들던 와인 같은 느낌이 아니었고요."

"... 그랬죠."

"와인이 아니라서 그런 거라니까."

말문이 턱 막혀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표정이 되는 쟝 씨.

그가 이윽고 헛웃음을 흘리며 되물었다.

"노, 놀리시는 겁니까?"

"진심입니다."

"포도만 가지고 만들었는데, 그게 와인이 아니라고요?"

"확신할 수 있어요? 포도만 가지고 만들었는지."

"그러면 다른 게 또 들어갔단 말입니까?"

들어갔지, 내 언데드 세균.

거기에 완성품에 생긴 넥타르까지도.

하지만, 그것까지 말할 수는 없으니.

"영업 비밀을 토해내라고 하시는 건 아닐 테고."

그저 웃으면서 말할 뿐이다.

"이건 와인이 아니니까, 쟝 씨는 계속해서 와인을 만드시면 됩니다.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른 겁니다. 누군가는 제가 만든 것보다 당신의 와인에서 더 큰 감동을 느낄지도 몰라요."

"... 혀가 마비된 사람이 아니면 아닐 텐데요."

내가 생각해도 이건 너무 갔나.

"크흠."

"어쨌든, 이제 이해는 됩니다. 뭔가 새로운 접근이 있었던 모양이군요."

그래도 이해해준 모양인지, 흐리멍덩하던 눈에 그나마 생기가 좀 돈다.

"맞습니다. 핸드볼이랑 농구가 둘다 손으로 공 던지는 스포츠라고 같이 뛸 수는 없잖습니까."

내 비유에는 별로 납득한 모양새는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쟝 씨는 주먹을 불끈 움켜쥔 채 말했다.

"그것보다는... 목표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제 와인이 향해야 할 최종적인 목표."

"... 언젠가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그래도 다행이다.

그 유명한 샤토 페트뤼스의 후계자가 와인업을 접었다면...

게다가 그 원흉이 나라면...

아마 제피로스에게 잔소리 듣는 정도로는 안 끝났을 테니.

그나저나 이 양반은 언제 오는 거야?

전용기 타고 오니까 파리 환승도 아니고 보르도로 바로 올 텐데.

갑자기 이 넥타르가 들어간 술을 마신 제피로스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어떤 반응일까?

**

호랑이도 부르면 온다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보르도 공항에서 택시 타고 오고 있다는 제피로스의 전화가 왔다.

그리고 제피로스가 왔을 때.

"마스터 류!"

"오랜만입니다. 프랑수아!"

후계자가 아니라 내게는 처음에 인사만 나누고 코빼기도 안 비추시던 이 와이너리의 주인, 장-프랑수아가 버선발로 나왔다.

뭐 진짜 버선을 신은 건 아니고.

"왜 이렇게 뜸했소? 얼굴 까먹을 뻔 했소!"

"하하, 은퇴하고 나니 프랑스에 올 명분이 있어야죠."

"이거 섭섭하오, 여기가 명분이 있어야 오는 것이오?"

"그건 아니지만요, 하하."

거의 뭐 절친인데.

"뭐야, 표정이 왜 그래?"

"아니, 사장이랑 언제 이렇게 친했어요?"

"너도 와인을 거의 매년 도매상급으로 사다 놔 봐라. 안 친해질 수가 있나. 페트뤼스는 빈티지마다 박스떼기로 사다 놨어. 여기 와이너리에서 몇 년 전쯤에는 바비큐 파티도 했을걸?"

"끙."

"헌터 류가 너무 겸손하시네요."

뒤에서 끼어든 후계자, 쟝이 웃으며 말했다.

"와인 업계에서도 몇 명 취득하지 못한 와인 최고 전문가 과정, 마스터 오브 와인의 취득자이시기도 하죠. 아마 와인업계에서 마스터 류를 모른다면 의심해봐도 될 일입니다."

아니, 제피로스 이 아재가 그 정도야?

"이 젊은 친구가 바로 비행기를 태워버리네? 에이 기분이다. 오늘 빈티지 재고 다 풀어버려. 바가지 씌워도 좋으니."

"하하, 저희 와인은 조금만 드셔야 할 거 같네요. 여기 계신 분이 엄청난 일을 저질렀거든요."

"... 너 사고 쳤냐?"

"뭐, 치긴 쳤죠, 사고."

스케일이 좀 크게 친 거 같긴 하지만.

**

제피로스의 반응은 뭐, 비슷했다.

그런데, 조금 더 사실적이었다.

"먹어본 적이 있다."

"... 네?"

"분명, 인생에 단 한 번이었지만. 느껴본 적 있는 맛이었다. 물론 이게 훨씬 진하지만."

"어, 어디서요?"

넥타르의 주조사는 나 혼자가 아니었나?

"젊었을 때, 조지아의 어떤 와이너리에서 우연히."

"조지아요?"

의외의 나라였다.

사실 어디 붙어 있는 줄도 모르는 나라고.

"조지아는 와인의 발상지입니다. 세계 최초의 와인 제조 흔적이 거기서 발견되었거든요."

쟝의 부연설명에 그제야 수긍이 갔다.

그렇구나, 조지아가...

"오."

"문제는... 그 와이너리의 수많은 병과 크베브리라고 불리우는 항아리들 가운데서도 단 한 병 뿐이었어. 같은 빈티지의, 심지어 같은 항아리에서 병입된 보틀을 전부 마셔봤는데도 그 맛은 나지 않았지. 와이너리의 주인 역시 나랑 그 병의 와인을 함께 마셨었지. 그리고..."

작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그 맛을 구현하기 위해 십수 년을 매달린 끝에 결국에 목표를 이룩하지 못하고 죽었다. 나는 그와 종종 만났는데, 완전히 폐인이 다 된 말년의 그는 이렇게 말하더구나. 인간의 위업에는 종종 신이 깃든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행운일 뿐이라고. 신을 향해 무엄히 날아들려던 자에게는 추락뿐이라고. 그렇게 말했다."

신이 깃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조금 찔끔했다.

스킬 설명에서 보았던 것과 같았으니까.

그러면 혹시.

"저, 쟝 씨. 주조사라고 하셨죠?"

"예."

"시스템 상으로 '완벽'하다는 판정을 받는 와인은 얼마나 나오나요?"

"... 한 해에 한 병 정도? 그것도 최고의 빈티지라고 평가받는 해에만 나오는 것 같군요. 우리는 그걸 우니크 앙 송이라고 부릅니다. 영어로는 One of a kind 정도 되겠네요. 아쉽게도 최근 빈티지에는 없습니다."

원 오브 어 카인드라.

"이 와이너리에서 만드는 병이 몇 병인데요?"

"못해도 4만 병은 됩니다."

"와이너리치고는 적은 편이지."

그래도 4만 분의 1 확률.

그마저도 빈티지에 따라 나올 수도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세상에.

'완벽'이라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거였구나.

그런데 나는 그걸 지금... 얼마나 만들어낸 거지?

아무리 여기가 좋은 포도에 좋은 자연환경을 갖춘 최고 레벨의 양조장이라고 해도...

이쯤 되면.

내 본래 클래스와의 시너지가 미쳐버린 것 같다는 건 확실했다.

정신을 차리고서, 쟝 씨에게 신신당부했다.

"당신은 이상한 생각 하면 안 돼요!"

"예? 아..."

쟝이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행운은 행운일 뿐입니다. 프랑스의 어느 누구도 우니크 앙 송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낸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예전엔 있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지요."

잘 생각했네.

이건 사실상 치트라고.

뱁새가 황새... 그러니까 노말 유저가 치트 유저 따르려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지는 게 아니라 꼬접 확정이다.

**

다음 날.

김세균과 제피로스가 샤토 페트뤼스 와이너리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이런 걸 두고 가면... 하하."

쟝은 난처하게 세균이 선물이라면서 두고 간 '신의 술'을 바라보았다.

가져가라고 말했음에도, 본인은 새로 만들면 된다고 기어이 두고 갔다.

이게 와인 생산업자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모르기에 한 말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모차르트를 바라보는 살리에리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아무리 신경 쓰지 않고 정진할 거라고 말했지만, 이런 걸 계속 곁에 두었다가는.

계속 마시기라도 했다가는.

아마 정신이 나가버릴지도 몰랐다.

이 대책 없는 남자의 호의가, 쟝에게는 그야말로 큰 부담이었다.

한참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 고통을 나만 받을 필요는 없잖아?"

세계의 와인 애호가들도 나와 이 고통을 함께 나눠야 한다.

그의 머릿속에 순간 떠오른 것은 악의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괴롭히고자 하는 악의는 항상 인간을 발전시켜왔다.

이번에도 그렇게 될 예정이었다.

**

Le Nouveau de Dieu Petrvs (르 누보 드 디유 페트뤼스)

샤토 페트뤼스에서 이러한 이름을 단 와인을 한정판으로 출시하겠다고 선포했을 때, 와인업계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뜻은 신의 누보 페트뤼스.

뭐 수식어를 다 빼놓고 보면...

그냥 누보 와인이었다.

"하! 페트뤼스가 정신이 나가버린 모양이군! 누보라니!"

"이건 가만히 둬서는 안 됩니다!"

좋게 말해 누보지, 제대로 오크통에 숙성하지 않은 와인.

그러니까, 제대로 와인으로 인정조차 받지 못하는 것이 누보였다.

대표적인 누보가 보졸레 지역 같은 곳에서 와인도 모르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혹은 싸게 취할 수 있는 술 느낌으로 박리다매로 팔아 재끼는 보졸레 누보 같은 싸구려 술이었다.

당연히, 페트뤼스 양조장의 역사에서 숙성하지 않은 누보를 판 역사는 없었다.

그런데 페트뤼스에서 누보를.

그것도 병당 10만 유로가 넘는 미친 가격으로 책정해서 팔겠다고 나섰다.

프랑스 전역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동시에, 궁금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과연 페트뤼스가 누보를 10만 유로에 팔면 당연히 욕을 먹으리라는 걸 모르고 내놓았을까?

그런 명성의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팔고 있다면, 그 이면에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욕 반, 기대 반을 안은 채 르 누보 드 디유 페트뤼스가 시장에 출하되었다.

물량은 얼마 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20병 정도.

그래도 물량은 순식간에 팔려나갔다.

반신반의하면서도, 페트뤼스의 이름값을 믿고 사본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는...

세계 최고의 와인 평론가인 로저 파커도 있었다.

뭐, 와인 평론가라고 해도 10만 유로를 그냥 태울 수는 없는 법.

그의 후원자가 사주면서 평가를 부탁한 거였다.

그가 평론한다는 소식에 세계 와인 애호가들의 시선이 모두 쏠렸다.

과연 혹평할 것인가, 호평할 것인가.

고작해야 누보 따위에 호평이 가당키나 해?

갑론을박의 가운데에서.

한줄평이 나왔다.

─이건 와인이 아니다. 이것은 신(God)이다. 페트뤼스는 신을 만들어냈다.

그 순간.

10만 유로짜리 와인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올라갔다.

경매장에서 380만 유로에 낙찰되었을 정도.

그 380만 유로짜리 와인이, 지금 여기 있었다.

"할아버지! 생신 선물이에요!"

소피아 하인리히가 의기양양하게 들고 와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건넸다.

카이저는 쓴웃음을 지으며 와인병을 받아 들었다.

얼마 전까지 고작해야 10만 유로인 와인을 380만유로에 낙찰받아 온 자신의 손녀를 향한 쓴웃음이었으며, 그 손녀가 의기양양하게 쓴 돈이 결국엔 자신의 돈이라는 것에서 온 쓴웃음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하나뿐인 손녀의 선물에 작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시자."

가볍게 병을 따서 와인잔에 나누어 따랐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향기가 와인잔을 타고 올라와 피어났다.

"... 허."

세계 최고의 헌터였던 사람답게, 세상의 온갖 좋은 것은 다 먹어본 카이저.

그에게도, 지금 이 술에서 나는 주향은 맡아보지 못했던 종류의 것이었다.

"할아버지, 드셔보세요!"

"그, 그래."

카이저가 차분히 한 모금을 들이켠다.

그 순간, 그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신이 빚어낸 음료를 마셨습니다! 당신의 빛바랜 신앙이 일시적으로 빛을 찾습니다!]

그가 은퇴할 수밖에 없던 이유 중 하나.

사실은 낡아버린 육신보다도 이쪽이 더 컸다.

그것은 세속과 엮일수록 빛바래기만 했던 크루세이더로서의 신앙.

그런데...

고작해야 와인 하나에 빛을 찾을 수가 있었던가.

"... 소피아."

"네? 우와, 이거 엄청 맛있..."

"이 와인... 페트뤼스에서 만들었다고 하였더냐?"

"네? 네, 그런데요."

"가자."

"... 어딜요?"

"프랑스로."

그 순간.

바랬던 빛을 잠시간 되찾은 거인(巨人)이 일어났다.

최강(1)

최강(1)

정부의 지원을 받는 랭커급 헌터가 되고 전용기까지 사면서 가장 느껴지는 체감?

일단은 입국이었다.

뭐 인천공항도 내국인 입국심사야 어려울 건 없었지만, 결정적인 건 공항이었다.

랭커는 유사시 군사 자원으로 소집되기에 준 군사 자원으로 취급되었다. 

때문에, 원한다면 성남의 군공항인 서울공항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대한민국 최대의 기업인 성광의 총수도 전용기를 내릴 수 있는 건 김포공항이니, 군공항을 이용할 수 있는 건 대기업 총수도 누릴 수 없는 랭커급 헌터만의 특전.

서울공항은 강남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여기 착륙하면 서울의 교통체증을 최소한으로 느끼면서 집으로 갈 수 있었다.

물론 서울공항에는 비행기를 장기간 주기해놓을 수 있는 장소가 없어서 평소에는 다시 띄워서 김포공항에 보관해야 하니 그냥 김포공항에 내리는 게 낫긴 했다.

일반적인 랭커급 헌터에게는 그저 상징적인 의미에 불과했다.

하지만, 내게 특혜가 하나 더 주어졌다.

"주기장 하나 내주고 공군 쪽에서 정비도 맡아준단다. 앞으로는 서울공항으로 다니면 돼."

"오, 어쩐 일이래요?"

"네가 그만큼 거물이 됐단 뜻이지. 뭐, 아무리 거물이 됐다고 해도 이런 특혜는 항상 시비가 붙기 마련이니까... 대통령이 신경 좀 썼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

강민국 대통령... 점점 맘에 드는데.

술이라도 좀 가져다줄까?

... 뇌물수수 같은 걸로 걸리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서울공항에 착륙해서 내리자, 사방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특히 병사들이 보내는 선망의 시선은 피부가 따가울 정도였다.

이제 나도 제법 유명인이 됐다 싶었다.

병사들의 옆을 지나다가 대화를 우연히 듣기 전까지는.

"야, 뀨뀨는 어딨어?"

"뀨뀨 보고싶었는데."

"뀨뀨 왜 없냐, 뀨뀨."

... 뀨뀨단은 어디에나 있는가!

그렇게 병사들을 지나 차를 향해 가는데, 우리 앞에 누군가 불쑥 나타났다.

"김세균 헌터님. 류 헌터님도 같이 계셨군요."

"조 국장? 무슨 일이야?"

"우선 이번 프랑스 쪽의 공략 불가 판정 게이트 공략의 결과로 김 헌터님이 랭킹 19위로 상승했다는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어차피 큰 의미는 없는 숫자놀음이었지만, 그래도 오르는 게 떨어지는 것보다는 낫다.

"... 그거 알려주려고 여기까지 오신 건 아니죠?"

"아닙니다. 리스트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리스트? 무슨 리스트를..."

"공략하실만한 공략 불가 게이트 목록입니다. 이미 각국과는 1차 협상이 끝났습니다. 확정만 내리시면, 바로 해당 국가들과 최종 협상에 들어서겠습니다. 외교 기밀이라서 디지털 형태로 송신하지 못하고 제가 직접 찾아왔습니다. 확인하신 뒤에는 제가 회수해야 합니다."

음, 생각보다 철저하네.

하긴... 내가 어딜 공략한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이미 그쪽 주식 시장은 개판이 될 테니까.

어디 보자...

사우디아라비아, UAE 같은 중동 쪽도 있고... 아제르바이잔? 아이슬란드?

들어는 보았는데 정확히 무슨 국가인지는 모르는 곳도 있었다.

조건은 대동소이했다.

석유 가지고 세계를 휘두르던 옛날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지만, 사우디아라비아나 UAE도 던전 산업이 활성화되면서 꽤 쪼그라든 국가니까.

던전에서 나오는 마나석, 그러니까 상온초전도체의 보급으로 인한 핵융합 발전 탓에, 중동의 석유 자원 가치는 거의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나마 사우디아라비아처럼 채산성이 좋은 국가들은 염가로 팔아 간신히 유지 중.

반대로 베네수엘라처럼 매장량은 많지만 심해에 있어서 채굴단가가 높은 나라들은 그대로 박살났다.

"당장 정할 필요는 없죠?"

"네, 심사숙고하시고 정해주십시오."

어딜 가야 하나.

"아, 그리고 앞으로 저희와의 통화는 이걸 사용해주십시오."

"... 핸드폰?"

그런데 좀 투박해 보이는데.

"비화기입니다."

"비화기가 뭐죠?"

"비밀통화기. 도청 방지 기능이 포함된 전화기야."

대신 말해주는 제피로스.

아하, 그런 기능이 있었군.

"저희가 파악한 것만 38개 이상의 정보 기관에서 김 헌터님의 통화를 도청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11개국의 정부 기관에서 첩보원을 붙였습니다."

"... 나한테요?"

"예. 국정원에서 파악한 내용입니다."

"헐."

나한테 뭐 먹을 게 있다고?

"다행인 것은 SG그룹 출범 이후로는 많이 줄어들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경호 인력을 확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예, 알겠습니다."

조 국장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갔다.

동시에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저렇게까지 많은 정보기관에서 날 노리고 있다는 거지?

"경호원이 필요해."

"경호원요?"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는데. 그나저나 어지간한 친구들은 없는 것보다도 못하잖아?"

"그렇긴 하죠."

내 전투 능력이 있는데.

"고레벨의 랭커급을 데려오는 게 이상적이긴 한데. 그런 친구들이 네 경호원이나 하고 있을 리 만무하고."

"그것도 맞죠."

연봉을 수백억 수천억 단위로 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효율이 너무 떨어진다.

"그래서 생각한 건데... 은퇴 헌터 녀석들 어떠냐?"

"은퇴 헌터..."

"그래, 옛날 랭커급. 특히 나같은 놈들 몇 있거든."

"... 치료해서 전력을 끌어올려서 경호원으로 쓰란 말씀이시군요."

"응, 다들 나처럼 던전에 미친놈들은 아니니까."

"은퇴한 랭커면 다들 돈도 많을 테고, 편하게 여생을 보내고 있을 텐데 굳이 경호원 노릇까지 하면서 복귀하려고 할까요?"

"적어도 한 명은 확실해. 사실 그 친구 한 명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한 명으로 충분하다?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란 말이지?

"누군데요?"

"최강."

"그러니까 최강의 헌터 누구요."

"이름이 최강이야. 성이 최에 이름이 강."

"최강... 최강..."

아! 눈이 번쩍 뜨인다.

"초창기에 선생님이랑 라이벌 관계였던 그분 맞죠? 철벽 최강."

"그래. 그 친구 맞다."

"이야, 그러고 보니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네요."

"보러 갈래?"

"내일 가시죠.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그래, 내일 점심에 보자."

철벽 최강이라.

진짜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

제피로스의 라이벌이었으니 내가 그렇게까지 좋아했던 헌터는 아니었긴 하지만.

그래도 과거 헌터계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한 이름이었다.

당장에라도 가고 싶긴 했지만.

오늘은 갈 곳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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