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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바로 카이저 타워였다.

미국 제 2위의 마천루.

과거 미국의 유통기업 시어스가 건설했으나, 파산을 거듭하며 카이저의 손에 들어온 것이었다.

이곳의 최상층이, 바로 알렉산더 하인리히라는 희대의 던전 정복자가 살면서 업무를 보는 공간이다.

"부르셨어요?"

소피아 하인리히.

던전에서 사망한 카이저의 아들 부부를 대신하여, 카이저를 이어받을 것으로 여겨지는 카이저의 유일한 혈육이자 후계자.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 존경을 담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왔느냐."

"네, 할아버지. 어쩐 일로..."

"한국에 갔다고 들었다. 성과는 있었더냐?"

"그게..."

"러시아."

"... 예?"

"그가 러시아의 골칫거리 게이트를 정리했다던데."

"아, 거기요..."

소피아 하인리히의 얼굴에 난처함이 물들었다.

한참 망설이다가,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물론 대단하긴 한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아버지가 신경 쓸 정도의 헌터는... 아직..."

"전까진 그러했지. 이젠 아니고."

"러시아의 그 게이트가 그렇게까지..."

무어라 항변해 보려는 소피아의 입을 막고서, 카이저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스스로를 입증했다. 루키를 훌쩍 벗어난 체급임을... 고작해야 20레벨 초반대에 입증했지. 나도 그러지 못했고, 아흐마드도 그러지 못했다. 그런 이를 특별하다 말하지 않는다면, 무얼 특별하다 말해야 할꼬?"

"하, 하지만... 그는 너무 오만해요...! 제게도 무례를..."

본인이 저지른 무례는 생각하지도 않은 채 말하는 그녀에게, 카이저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피아."

"예, 할아버지."

"만약 그가 너를 달라고 하거든, 난 너를 보낼 거다."

"하, 할아버지! 어, 어떻게! 그런!"

"정확히는... 널 보내서라도 그를 내 가문에 들이고 싶구나."

"아, 안 돼요! 그럴 수는...!"

"싫거든."

모든 걸 위압하는 시선으로 소피아의 항변을 쏙 찍어 누르면서, 카이저의 입이 열렸다.

"그를 설득하거라."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마치고, 소피아는 잔뜩 힘이 빠진 어깨로 털레털레 밖으로 걸어 나왔다.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녀는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쥔 채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어, 어쩌지..."

낭만(1)

낭만(1)

"강남에 내려주면 되냐?"

"예."

"알겠다. 너네 회사에 차 두고 나는 택시 타고 갈게."

"그냥 선생님이 타세요."

"야! 아파트에 자리가 없어, 자리가. 스폰서로 받은 것만 다섯 대다. 네 연락처 모른다고 이 자식이 나한테 차를 보내서..."

"하하... 그럼 제가 쓸게요."

그런데 이런 차는 원래 기사가 모는 차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차에 있는 제로 콜라를 한 모금 마시려 입에 가져다 댄 순간이었다.

푸우우우!

그대로 고스란히 뿜어버렸다.

씨발, 이거 뭐야.

"뭐, 뭐야?"

"이거 기사..."

콜라를 머금으며 무의식적으로 포털 사이트 메인을 열었는데, 거기에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나 있었다.

[불가사의 공략자, '김세균 헌터' 러시아로 귀화하나? 정부의 각성자 관리 능력 이대로 괜찮은가?]

하나가 아니었다.

연관 기사만 수십 개.

[헌터 김세균, 러시아 대통령의 사위로 등극하나?]

[불가사의 공략자, 그의 강함은 러시아의 지원 때문?]

[다음 불가사의 던전 소재지 강원도 지역 던전 개발 업체들 주가 대폭락.]

"이거 미친놈들 아냐?"

막 운전을 시작하려다가 차를 멈추고 휴대폰을 보던 제피로스가 바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 김 기자. 이런 식으로 나오면 섭섭해? 다른 어중이떠중이는 몰라도 당신은 나한테 크로스체크 되잖아? 이러기야? 아선일보 보이콧 한 번 해봐? 몰랐다고? 모르기는 개뿔이. 업계 사람 중에 김세균이 소식통이 나란 거 모르는 사람도 있어?"

기자인가?

아마 그런 모양이다.

"뭐? 러시아 지국에서 날아온 소식이라고? 김 기자! 지금 김세균이 내 옆에 있다! 당사자 입에서 듣는 소식보다도 정확한 게 있어? 그래! 지금 당장 정정보도 때리고. 사실무근이라고 해!"

이렇게 화난 모습도 드물게 보는 거 같은데.

잔뜩 화난 채 전화 너머의 상대를 윽박지르던 제피로스가 씩씩대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개새끼들. 크로스체크도 안 하고 기사를 내? 아무리 루키라고 해도 기본적인 예의가 탑재가 안 되어 있어!"

나는 화나는 것도 화나는 거지만, 어안이 벙벙했다.

정말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기도 하는구나 싶기도 하고.

아, 제안을 받긴 했으니 아니 땐 건 아니고... 때다 만 굴뚝 정도인가?

다행히도 제피로스가 전화 한번 하니, 정정기사가 속속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김세균 헌터, 러시아 귀화, '사실무근'.]

[대한민국 각성자관리부, '김세균 헌터의 귀화 계획 전혀 없어.']

[각성자관리부 장관, '대한민국의 각성자 안보 철저히 지켜나갈 것.']

난리가 났네, 난리가 났어.

내가 연관되어 있긴 하지만, 솔직히 조금은 다른 나라 이야기 같아서 어이없이 웃으며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울리는 휴대폰.

모르는 번호인데, 스팸인가?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김세균 헌터 휴대폰 맞습니까?

"... 누구십니까? 번호는 또 어떻게 알았어요?"

아니, 내 번호는 또 어떻게 알아낸 거야?

여기 저장된 번호도 몇 개 없는 새 번호인데.

─저는 각성자관리부의 조형빈 국장이라고 합니다.

"... 정부요?"

─그렇습니다. 번호는 신원조회를 통해 연락드려 불편 끼쳐드린 점, 먼저 사과드립니다.

내 전화 통화를 듣던 제피로스가, 입을 뻐끔거리며 스피커폰, 이라고 작게 속삭였다.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돌려놓고 입을 열었다.

"혹시 그 기사 때문에 연락하신 겁니까? 그거라면 이미 정정 기사가 나갔을 텐데요."

─아닙니다. 그 건은 저희도 사실무근인 걸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게 사실이었다면 애초에 러시아에서 귀국하시지도 않았겠죠.

"... 뭐 그렇긴 하네요."

─저희가 연락드린 건, 김세균 헌터, 귀하께서 정부의 중점 관리 대상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자 함입니다.

제피로스는 놀란 눈으로 벌써? 하며 입을 뻐끔거렸다.

그게 뭔지 모르는 나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게 뭡니까?"

─군대는 다녀오신 걸로 압니다.

"다녀왔죠."

그래서 존나 억울하다.

각성자면 군대도 대체복무할 수 있는데.

알보병 땅개로 다녀오고 나니 각성해서.

─예비군이나 민방위 같은 것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비군과 같은 훈련은 없지만, 민방위보다는 강력한 제약이 있습니다. 출국 제한이나 전시 최우선 소집 같은 조항입니다. 일반 각성자보다는 조금 더 제약사항이 있죠.

"출국 제한이요?"

─아, 아주 제한적인 경우에 한해서입니다.

"... 그렇습니까."

갑자기 귀화 마려워지는데?

내 굳은 목소리를 들었는지, 조형빈 국장이 다급히 덧붙였다.

─무, 물론 제약만 있는 건 아닙니다. 일단 월 10억 원 상당의 비과세 품위유지비가 주어집니다.

연 120억?

푼돈 가지고 장난치냐, 라는 말이 순간 욱하고 나올 뻔했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진행되는 모든 경매에서 이미 낙찰된 아이템도 일정 기간 동안 낙찰가와 동일한 금액으로 가져올 수 있습니다. 랭킹 순위대로 우선권이 주어집니다.

이건 조금 쓸만하고.

또?

─국가 행사에서 차관급 의전을 받으실 수 있고...

무어라 말을 이어가려는 그의 말을, 제피로스가 나서 끊었다.

"조 국장. 나야, 류현수."

─류 헌터님? 거기 계셨습니까.

"나머진 내가 설명하지."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뒤에, 제피로스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랭커급 헌터가 된 걸 축하한다."

"... 이게 랭커급 헌터가 된 거예요?"

"그래, 통상 각성관리부의 집중관리대상이 되면 랭킹이 정해지고, 그때부터 랭커급 헌터라고 부른다. 물론 네 정도 레벨에 랭커급이 된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지만."

랭커라.

평생을 선망하던 그 위치가 이제 현실로 내려왔다.

그런데, 선망은 선망할 수 있기에 의미가 있다는 말이 이제야 체감이 된다.

랭커라는 위치가 당연한 지금에 이른 상태에서 이야기를 들으니, 왜 전혀 감흥이 없지?

"대부분의 자잘한 혜택은 조 국장이 거의 말한 거 같고... 네게 제일 큰 혜택 하나만 말 안 했네."

"제일 큰 혜택요?"

지금은 조금 실망스럽긴 하다.

그렇다고 나라 버리고 어디 귀화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쳐도...

갑자기 출국금지에 전시 최우선 소집 이런 제약이 달린 것치고는 혜택이 전혀 아니올시다인데.

"공략 불가 게이트 클리어 시의 혜택. 계산식은 조금 복잡하긴 한데... 아마 공략 불가 게이트의 클리어 불가 기간, 게이트의 단계, 평정으로 인해 얻어지는 세수 증가액 등등. 요소들을 돌려서 나온 값의 일정 비율을 비과세 국채로 매년 지급한다. 공략 불가가 아니라 일반 게이트 클리어 시에도 세금의 일정 비율을 연금처럼 국채로 적립해서 주고... 그러니까 10년 뒤에 받을 수 있는 일부 면세 혜택 같은 거지."

"... 매년요?"

"매년. 심지어 소급까지 될걸? 네가 클리어한 3단계와 11단계 던전 있지? 거긴 공략 불가 기간이 길어서 합쳐서 얼추 매년 천억 단위는 나올 거다."

평정으로 인한 경제 효과를 생각하면 작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고작해야(?) 120억 정도인 품위유지비에 비하면 거액이다.

"그 두 개는 단계가 낮아서 비율이 낮은 거고... 경기도의 67단계 게이트 같은 곳을 공략하면... 아마 매년 조 단위는 나올걸? 현금이 아니라 국채로 나오긴 하지만."

"... 먹튀 방지인가요?"

"그런 느낌이지. 10년물 국채인데, 귀화해버리면 국채는 휴지 조각 되는 거야. 깡 해서 어디다 팔지도 못하고. 본인이 아니면 행사를 못 하거든."

적어도 10년은 묶어둘 수 있다는 건가.

와, 나 같아도 헌터 활동하면서 잔뜩 쌓인 국채를 버리고 타국으로 귀화?

그 금액을 보전해 준다고 해도 좀 아깝겠는데?

우리나라 정부, 어쩐 일로 머리 잘 썼다.

"각성자 엑소더스를 이 정책 하나로 막았으니 뭐... 나도 국채 꽤 많다. 이대로는 어디 못 가."

그렇겠네, 제피로스가 공략한 게이트도 한두 개가 아닐 테니.

그중엔 최초 공략 게이트도 다수다.

"그런데 정부에서도 많이 똥줄 탔던 모양이다. 네 레벨에 벌써 랭커라니... 하긴... 그럴 만도 한가. 나처럼 국채도 많이 쌓여 있고, 한국에 엮인 게 많은 놈들은 어지간한 조건으로는 영입도 힘드니까."

"하지만 전..."

"한국에 엮인 게 없잖아? 막말로 네가 러시아 공주님이랑 쎄쎄쎄했다고 해도 졸라 부럽다고 욕이나 하겠지. 뭔 손해를 줄 수 있겠어?"

쎄, 쎄쎄쎄는 무슨...

"제일 취약한 시점에, 랭커라는 감투까지 준 거지. 뭐 문제는 있지만."

문제?

"랭커 시스템이라는 게 솔직히 개같거든. 특히 저 계산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단 말이지. 그런데 그걸 판단하는 건 누구다? 사람이다."

"... 객관적인 척도가 되질 못하는군요."

"엉, 그런데 그 주관적인 척도가 실제로 영향을 미친다는 게 문제지. 네가 랭킹 몇 위인지는 모르겠는데..."

"어? 잠깐만요."

뭐지 이거?

[각성자관리부, '불가사의 공략자' 김세균 헌터 신규 랭커로 지정!]

[대한민국 랭킹 48위로 시작하는 김세균 헌터.]

[김세균 헌터의 랭킹, 과연 합당한가?]

또 기사가 미친 듯이 뜨고 있었다.

"48위... 라는데요?"

"관리부 미친 새끼들."

제피로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난 네가 48위인 것도 저평가라고 생각한다마는... 뭐, 당연하지. 나도 이겼는데."

복귀한 제피로스의 순위는 무려 3위.

은퇴 전에는 당연히 압도적인 1위였다.

지금도 실력으로는 1위를 하는 게 맞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마음의 준비는 해 두는 편이 좋겠다."

"... 설마."

그런 남자가, 씨익 웃으며 내 등을 두드렸다.

"그래, 너 때문에 한 단계씩 밀린 49위 이하 놈들이 이제 대놓고 물어뜯으러 올 테니까."

"그러면... 증명해야죠."

"증명?"

"감히 뜯고 싶은 엄두도 안 나게끔 말이죠."

슬슬, 속도도 올려야지.

**

김세균의 랭킹 순위가 발표된 날.

대한민국의 헌터 관련 커뮤니티들은 그야말로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김세균 48위 이거 맞냐? 얘 아직 20레벨 초반대 아님?

└러시아에서 비공식으로 50레벨도 갈아먹었던 그 이상한 변이 게이트 혼자 클리어한 거 아냐? 그게 맞으면 48위도 모자란 듯.

└아무리 그래도 20렙 초반에 48위가 맞나 싶다 나는.

─49위 이하 랭커놈들 존나 꼴받을 듯 ㅋㅋㅋ

└왜 꼴받음? 이제 그 위로 계속 올라가실 분인데.

└여기 세균단 하나 추가요.

└세균단 새끼들 진짜 적당히 해라 ㅋㅋ 헐겠다!

─김세균 제피로스랑 붙었는데 제피로스도 이겼다는 썰도 있음.

└나 제피로스인데 이거 맞다.

└지랄하네 ㅋㅋㅋㅋㅋ 제피로스가 좆으로 보임? 지금 몇 년 만에 복귀해도 랭킹 3위인 사람인데.

└제피로스랑 비비는 건 진짜 선 넘었지. 아무리 그래도.

└심지어 김세균 마법사임. 제피로스를 일댈로 어떻게 이기냐? 병신인가 윗놈들.

세균의 랭킹을 두고서 갑론을박이 벌어진 인터넷 커뮤니티.

그 커뮤니티에, 하루 사이에 폭탄이 더 떨어졌다.

하나도.

[김세균 님께서 24단계 게이트, '하늘 아래 너른땅'을 최초로 토벌하셨습니다!]

[대한민국, 강원도 지방이 평정되었습니다!]

[강원도 지방의 모든 게이트에 출현하는 몬스터들이 약화됩니다!]

둘도 아닌.

[김세균 님께서 24단계 게이트, '외뿔말의 무덤'을 최초로 토벌하셨습니다!]

[대한민국, 경상남도 지방이 평정되었습니다!]

[경상남도 지방의 모든 게이트에 출현하는 몬스터들이 약화됩니다!]

셋이.

[김세균 님께서 25단계 게이트, '백색의 소란'을 최초로 토벌하셨습니다!]

[대한민국, 전라북도 지방이 평정되었습니다!]

[전라북도 지방의 모든 게이트에 출현하는 몬스터들이 약화됩니다!]

─김세균 이 미친놈!

─사랑한다 김세균! 니 덕분에 오늘 국장 불장이다!

└씨발 뭐든 붙잡아! 뚫고 올라간다!

└와 국장 서킷브레이커 걸린 듯! 이거 얼마 만이냐!

─지금까지 20레벨이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추진력이 거의 로켓 엔진급인데?

└설마 랭커 달면 보상금 나오는 거 때문에 이제야 공략하는 거임?

└12가... 있어...!

─이러면 대체 다음 주에는 랭킹 얼마를 줘야 하냐?

└역대 최저레벨 랭킹 1위 다는 거 아님?

└그건 몰라도 하난 확실하네... 50레벨 대에 주차 박은 랭커들 ㅈㄴ 쪽팔릴 듯.

50레벨은 최상위 각성자의 척도 같은 레벨이었다.

50레벨 던전에서부터 마정석이 드랍되는데, 이게 상온초전도체로 핵융합 발전의 필수요소.

그래서 50레벨 대만 되어도 충분히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굳이 목숨 걸고 그보다 위에 도전하는 대신에, 안주하고 같은 던전만 돌았는데, 속칭 '주차'라고 불렀다.

몬스터의 레벨 차이가 5레벨을 넘어서면 더는 경험치를 주지 않으니, 레벨 올릴 생각은 없이 자기보다 낮은 수준의 쉬운 던전만을 계속 도는 것이었다.

이 레벨대의 헌터들이, 랭커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 필요성에 대해서 부정하는 이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 결과로 이미 헌터들의 개척 정신이나 공략 불가, 혹은 새로운 던전을 돌파하는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고 있었다.

─진짜, 이게 헌터지.

이러한, 전설이 옛 이야기가 되어 버린 시대에.

낭만이 다시 재림했다.

낭만(2)

낭만(2)

[김세균 헌터, 무려 하루 만에 세 개의 불가사의 클리어?]

[코스피, 두 번의 서킷브레이커, 단 한 사람이 이루어 낸 경제적 가치를 계산하면?]

['의심하는 놈들 다 나와!' 김세균 헌터, 자신을 증명하다!]

"아이고... 죽겠다..."

"무리하기는..."

"그래도 낭만 있잖아요."

하루에 세 게이트라니.

심지어 모두가 공략 불가 판정 게이트들.

그것도 강원도에서 경남, 전라북도를 넘나드는 클리어였다.

다행히도 이동 수단은 헬기였다.

랭커가 된 김에, 하루 만에 세 개의 공략 불가 게이트를 공략하겠다고 했더니 관리부에서 알아서 제공해줬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동만 하다가 하루가 다 갔겠지.

다행히, 지금 내 수준에서는 세 게이트 모두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요상한 기믹이 있긴 했는데, 그것도 힘의 격차가 어느 정도 적당할 때의 이야기지...

이 정도로 압도적인 차이가 있다면, 기믹 따위는 큰 의미 없이 분쇄되기 마련이다.

물론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던전에선 방심할 수 없기에 내내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그 결과로 극심한 피로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이제 딱 두 개 남았네."

대한민국에 있는 7대 공략 불가 판정 게이트 중에, 5개를 나 혼자 클리어했다.

충청북도, 제주도, 강원도, 경상남도, 전라북도 순이었다.

남은 건 50레벨 게이트인 경상북도.

마지막이 64레벨 게이트이자 대한민국의 최대 경제권, 서울-경기-인천 권역의 마지막 남은 방점이었다.

지역단위가 서울경인으로 묶여 있기에 평정 효과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할 지경.

그러니 클리어하면 조 단위를 주겠지.

그렇다고 단기간 안에 60레벨 대에 오를 수는 없으니 일단은 패스다.

"네가 얼른 내 레벨대로 올라와야 레벨 컨트롤을 푸는데."

"금방 갈게요."

레벨 컨트롤이라...

헌터 업계에 큰 관심이 없던 나는 이제야 알게 된 개념이었다.

이건 국가별 최고 레벨 헌터의 숙명 같은 거였다.

한 국가에 열리는 게이트의 단계는, 그 국가 국적의 최고 레벨 헌터의 것과 같다.

즉, 해당 국가의 최고 레벨 헌터가 70레벨이라면, 70단계 게이트까지 공개된다.

당연히 최고 레벨 헌터가 레벨업해서 게이트가 새로 공개되면, 평정 효과는 깨진다.

경기도의 64단계 게이트는 그런 의미에서 제피로스에게 남은 유일한 한 같은 존재였다.

63단계까지 일부 공략 불가 판정 게이트를 제외하면 잘 클리어해 온 제피로스 파티는 당연히 64레벨로 올라섰고, 하필이면 대한민국 최대 경제권인 서울경인 지방에 64단계 게이트가 형성되었다.

그렇게 무려 3년이나 64단계 게이트에 도전했지만, 결국 제피로스와 동료들은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67레벨이 되었고, 다행히도 65~67단계의 게이트들은 클리어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64단계 게이트는 벽으로 남아 대한민국 최대 경제권에 남은 유일한 오점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절망하고, 기량 하락까지 겹치면서 제피로스는 은퇴했다.

제피로스의 은퇴 이후로 67단계는 대한민국 헌터들의 레벨 제한 같은 것이 되었다.

현 랭킹 1위의 레벨은 66레벨.

의도적인 레벨 컨트롤 중으로, 여전히 제피로스는 한국 최고 레벨 헌터였다.

레벨만 따지면 카이저랑도 거의 차이가 없긴 하다.

카이저의 레벨은 70.

그도 70레벨에 정체되어 있는 이유는 미국에 형성된 여러 개의 70단계 게이트들 탓이었다.

70레벨이 되어 다섯 개의 70단계 게이트를 트라이해 본 카이저는, 트라이 이후에 단언했다.

70단계부터는 60단계 대의 게이트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타국 헌터들의 70레벨 진출을 추천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실제로 카이저조차도 70단계 게이트 중에 클리어한 곳이 하나도 없었고, 그 유명한 유럽의 아흐마드 트리아인도 69레벨에 멈춰 있었다.

프랑스 정부와의 굉장한 실랑이 끝에 멈췄다고 들었다.

이렇게 1세대의 최강자, 카이저가 연 언더 세븐티(Under Seventy)의 시대가 거의 십 년 가까이 이어져 오고 있었다.

새로운 게이트가 열렸다는 소식도.

공략 불가 게이트가 열렸다는 소식도.

하루걸러 들려오던 시절은 끝나고 그냥 공무원처럼 정형화된 공략 패턴으로 이미 밝혀진 게이트만 공략하는 시대가 열렸다.

이런 시대니, 사람들이 낭만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조금 부담스럽긴 하네요."

"짜식. 보태는 거 같아서 할 말 없긴 한데. 그래도 언더 세븐티 구도를 깰 사람이 세상에 단 한 명이 있다면, 나는 카이저도 아흐마드도 아니고, 널 꼽겠다."

"무슨 소리세요, 같이 하셔야죠."

"하하. 그래. 내가 그때도 퇴물이 아니라면."

웃으며 나랑 술잔을 나누는 제피로스.

이전에 마셨던 자크 셀로스인가 하는 샴페인을 또 마셨다.

장소도 제피로스의 집이었다.

둘이 거나하게 취해가는 밤.

제피로스의 휴대폰이 울렸다.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휴대폰이었기에, 제피로스가 한숨을 한 번 내쉬며 투덜거리고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장관님."

장관?

"늦긴 늦었는데 잠깐 통화는 괜찮습니다. 예. 예?"

순간 취기가 전부 달아난 듯 제피로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어 내공을 운용해 알코올을 몰아내는 듯, 마나가 유동하는 것이 느껴지며 제피로스의 전신 모공에서 술냄새가 팍 풍겨나왔다.

"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죠?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겠습니다. 예. 들어가십쇼."

전화를 끊은 제피로스.

그가 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왜, 왜요? 장관이면 누구에요?"

"나한테 전화 걸 장관이 누가 있겠냐? 각성자관리부 장관이지."

"아아. 뭐 문제라도 있대요?"

"문제? 있지. 그런데 내 문제는 아니고."

"그럼... 저요?"

나를 가리키는 제피로스의 손가락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장관이 절 왜요?"

"너랑 할 대화가 있다는데?"

"헐, 그런데 왜 저한테 전화를 안 하고요? 조형빈인가 누군가, 그 국장은 턱턱 전화도 잘 걸더니."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데?

나랑 전화하는 건 국장급까지라는 건가?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거 같다. 나한테 먼저 의사 타전 부탁하고, 수락하면 직접 연락한단다."

아아.

"그러면 뭐... 손해 볼 일은 없겠죠?"

"... 그냥 보는 정도로는 딱히 없지 않을까 싶다만."

"뭐 그러면 알겠어요. 선생님도 같이 가시죠?"

"네가 그러길 원한다고 해두마."

아무리 내가 이런 일에 익숙해지고 있다고는 해도, 잔뼈 굵은 정치인들을 상대할 정도는 아니니까. 제피로스 같은 조언자가 옆에 있으면 좋겠지.

"답장은 보내뒀으니, 너한테 이번 주 중으로 연락 올 거다."

"네, 알겠습니다."

장관이라.

뭐, 대통령도 아닌데.

러시아 대통령도 만난 나다. 쫄릴 거 없잖아?

그리고 다음 날.

─김세균 헌터. 나 강민국입니다. 잠깐 통화 가능하겠습니까?

우리나라 대통령에게서까지 연락이 올 줄은 몰랐지...

**

강민국 대통령.

대한민국 최초의 제3지대 정당에서 당선된 대통령으로, 양당제에 가까운 한국 정치 구도에 혁신을 가져온 인물.

이라고 위키에서 그런다.

사실 정치에는 큰 관심이 없긴 하다.

그냥 크게 욕도 안 먹고, 지지율도 7~80% 선에서 방어하고 있는 준수한 대통령.

그렇게 알 뿐이었다.

음, 그게 대단한 건가...?

그런데, 제피로스의 말은 뜻밖이었다.

"그 사람이야."

"... 네?"

"각성자 채권 보상 제도. 그 정책을 만든 양반이 강민국 대통령 그 사람이라고."

"그래요?"

"그래. 심지어 무명이긴 했지만, 헌터 출신이지. 그 경력 살려서 정치권에 헌터 관련 정책을 내놓으면서 입성했고, 각성자관리부 장관으로 한자리 꿰찼다가 각성자 채권 보상 제도가 대박치고 나서 대통령까지 했지. 난 사람은 난 사람이라니까?"

"와. 몰랐네요."

"그래서 헌터들 사이에서는 지지율이 꽤 높아."

제피로스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대통령 관저에 도착해 있었다.

재수 없게도 게이트가 열려 대중에 공개된 청와대를 대체해서 새로 만들어진 대통령 관저.

구 육군사관학교 골프장 부지를 활용하여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해 있었다.

옛날에 살던 곳이 도봉구였던지라 지나가면서 가끔 봤었는데, 여길 들어갈 줄은 몰랐네.

"류 헌터."

"장관님."

먼저 만난 건 정인현 각성자관리부 장관이었다.

"김 헌터는 처음 보지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예? 예."

아 쪽팔리게 조금 얼 탔네.

그래도, 내가 크렘린도 보고! 다해쓰! 한 몸이란 말이지.

정신 차리자.

"처음 뵙습니다. 김세균입니다."

대차게 악수를 받으니, 정 장관이 조금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가, 이내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요즘 떠들썩한 헌터를 만나니 기분이 좋네요. 자, 가시죠. 대통령님께서 기다리십니다. 류 헌터는 잠깐 밖에 있지?"

"잠시만요. 제피로스... 아니 류현수 선배님도 함께 배석하는 게 조건이었을 텐데요?"

"물론 그렇게 할 겁니다. 조금 뒤의 공식 대담에서는."

"그러면 지금은..."

"그냥 간단히 인사만 나눈다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잠깐 제피로스를 보니, 어깨를 으쓱이고는 앤서블 이어링의 효과로 생각을 내게 전했다.

─어차피 필요한 내용이 있으면 이걸로 상의하면 되잖아.

'그러네요.'

─다녀와. 기다리고 있을게.

어차피 독대가 아니어도 의사소통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하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안쪽으로 들어서자, 각성자로 추정되는 몇 사람들이 경호 중인 정장 차림의 한 사람이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TV에서 많이 본 얼굴.

그다, 강민국 대통령.

그가 인기척을 느낀 듯 모니터에 두고 있던 시선을 떼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나를 향해 걸어오며 환히 웃어 보였다.

"어서 와요! 우리 대한민국의 자랑! 김세균 헌터!"

자랑...? 언제부터...?

"반가워요. 나 강민국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통령님."

악수를 청하며 건네는 손을 맞잡았다.

두껍고 거칠지만 따뜻한 손이 느껴졌다.

뭔가...

러시아 대통령이랑 악수할 때랑은 기분이 좀 다른데.

처음 보는 건 매한가지인데, 더 친근한 느낌이 든다.

"바쁜 와중에 이런 곳까지 불러서 미안합니다."

"아, 아닙니다.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일단 대통령님이시기 이전에 저보다 한참 연장자이십니다."

적어도 삼촌, 잘 쳐주면 아버지뻘인데 뭐.

"하하,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러면 그렇게 하겠네."

강민국 대통령이 빙그레 웃으면서 맞잡은 내 손에 다른 쪽 손을 올려 힘을 더했다.

이어, 그가 경호원들을 향해 말했다.

"잠깐 자리 좀 비켜주게들."

"대통령님!"

깜짝 놀라 외치는 경호원들에게, 대통령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자네들도 대단한 건 아네만, 그런 자네들도 인정하지 않았나. 자네들이 있어도 이 친구가 만약 나쁜 마음을 품으면 막을 수나 있겠나? 그 무시무시한 김세균 헌터인데 말야."

"그렇긴 하지만..."

거참. 내가 그러니까 대통령을 암살이라도 한다는 거야 뭐야.

경호원들이니 걱정은 이해하긴 하지만...

"부탁하네."

"후우... 알겠습니다. 시간은 얼마나..."

"5분 정도면 되네."

"5분 뒤에는 들어오겠습니다."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이자. 경호 총책임자가 손짓해서 경호원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

그들이 나간 걸 확인하자, 강민국 대통령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 시간이 얼마 없군. 본론부터 말할까?"

"..."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자네에게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부탁하겠네. 대한민국의 구원자가 되어주게."

"... 예?"

그게 무슨... 소리지?

내가 잘못 들었나?

제피로스, 이거 뭔 소리죠?

─일단 더 들어보자.

차분히 답하는 제피로스의 말에, 급히 뛰던 심장이 점차 잦아들었다.

뭔 소리를 하려는 거지.

"무슨 말씀이신지..."

"WDDO라고 알고 있나?"

"잘 모르겠습니다."

"UN 협력 기구 중 하나로, 세계던전개발기구(World Dungeon Development Organization)을 의미하네."

"... 거기가 저랑 무슨 관계가..."

"이건 대외비인데, 다음 달에 WDDO의 뉴욕 라운드가 타결될 예정이네."

뭔 소리인지 모르겠어서 제피로스에게 그대로 말하니, 반대편에서 경악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뉴욕 라운드 타결? 미친!

'그게 뭔데요. 같이 놀라요.'

제피로스 대신에, 강민국 대통령의 설명이 이어졌다.

"잘 모를 것 같으니 말하자면... 전 세계 던전 시장이 개방된다는 걸 의미하네. 자네와 함께 온 류 헌터는 잘 알겠지. 왜냐면 이건..."

─사실상 던전 업계가 내가 활약하던 1세대로 돌아간다는 소리야!

두 사람의 목소리가 서라운드처럼 겹쳐 들렸다.

"던전 관련 법안이나 규제가 전무하던 각성 초기. 그리고 레벨 컨트롤이나 던전의 경제적 가치 같은 건 전혀 알지도 못했던 시기. 그 시기에 홀연히 한 사람과 집단이 나타나서 전 세계의 미공략 던전들을 공략하고 다녔지."

이건 누군지 말 안 해도 알 거 같다.

"그 과정에서 그 사람과 협력해서 미국 정부는 막대한 이득을 얻었지. 상당한 국가들이 던전 자생력을 잃고 미국에 의존하게 되었네. 던전 제국주의, 혹은 던전 식민주의라고도 부르는 일이 벌어진 걸세."

이후의 이야기는 나도 안다.

각국이 던전을 봉쇄하며 보호주의에 들어갔고...

자국의 헌터를 육성하기 시작했다는 거.

하지만, 그 상태가 되기 전, 카이저 코퍼레이션은 전 세계의 국가에서 막대한 이권을 받아 챙겼다.

던전 영구 임대 계약이라던가, 산출물의 영구 분배권 같은...

그 돈으로 새로운 헌터들을 영입하고... 다시 제3세계 국가들의 던전을 장악하고...

무한 반복이다.

가끔 새로운 정부가 출범해서 카이저 코퍼레이션과의 계약을 무력화하면?

바로 미군이 민주주의 전파하러 날아간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대한민국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단 겁니까?"

"각국의 공략 불가능 게이트를 공략해주면서 이권을 챙긴다. 어디서 들어본 적 없나?"

들어본 적 없냐고?

... 내 얘기인가?

"저... 말씀이십니까?"

"카이저 코퍼레이션의 초기 사업 모델도 같았지. 이제 시장 개방이 될 우리나라의 던전개발회사들을 그 압도적 자본으로 먹어 치우러 들어올 그 카이저 코퍼레이션 말이지."

"그, 그렇네요."

"유럽의 트리아인 네트워크 같은 회사도 그렇고."

아흐마드 트리아인이 보유한 던전개발회사인 트리아인 네트워크 역시 카이저 코퍼레이션이 공략하지 못했던 서유럽 각지의 게이트들을 공략하면서 이권을 챙긴 것으로 성장했다.

물론, EU 전체의 지원이 있던 건 당연하다.

"그렇다면... 김세균 주식회사... 같은 게 나오지 말란 법도 없지 않나?"

낭만(3)

낭만(3)

이후로 이어진 대통령과의 공식 대화는 오히려 별것 없었다.

하긴, 이런 폭탄 발언을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할 수는 없겠지만.

돌아오는 길, 대통령과의 대화를 자세히 말하자 제피로스가 말했다.

"그래서, 진심이야?"

"뭐, 나쁘지는 않은 거 같기도 하고..."

"아니, 그 회사 이름 진심이냐고. 김세균 주식회사."

"... 역시 이상하죠?"

대통령도 웃으면서 회사 이름은 농담이라고 덧붙이기까지 했지.

이름으로 꽤 놀림 받으면서 크긴 했는데... 그 덕분에 세균 능력을 각성하기라도 한 거 같아서 최근엔 자부심이 좀 있었지만, 그 자부심은 한순간에 물 건너갔다.

"회사 이름은 나중에 생각하고... 제안은 어때요? 이상해요?"

"미쳤냐? 국가 차원에서 대놓고 밀어준다는데, 당연히 못 먹어도 고지. 그런 제안을 누가 받을 수나 있는 줄 알아? 나도 그런 제안은 듣도 보도 못했다. 물론 내 시대에는 헌터가 천대받긴 했지만."

"정부들이 유난히 헌터계에 비친화적이었다고 듣긴 했어요."

"그래, 은퇴한 이후라서 지금 대통령은 소문만 들었는데... 강단 있네. 던전 시장 개방 압력을 너를 통해서 역으로 돌파하겠다는 의지 아니냐. 역시 그 지지율이 뻘로 나온 게 아냐."

크흠, 워낙 정치엔 관심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그 양반 되게 대단한 거더라고...

제피로스한테 무식한 놈 소리 더 안 들으려면, 생활 상식 좀 더 늘려야겠다.

여하튼 던전 시장 개방이 실행되면, 타국 헌터와 자국 헌터를 차별할 수 없게 된다.

그건 기업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이저 코퍼레이션 같은 국제적인 거대 자본을 보유한 던전 개발 기업들이 활개를 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뜻이다.

반대로...

내가 해외에서 자유롭게 활약할 여지가 많아진다는 뜻이기도 하고.

"이제 대놓고 시장이 개방되고, 정부 차원에서 개입하면 제약이 크니까... 네 회사를 키워서 간접 방어하겠다는 거지. 회사로 회사를 대항하는 건 문제가 없잖아."

"그렇겠네요."

"다행히도... 네 덕분에 카운트다운 시간이 훨씬 늘어났다는 거지."

"제 덕분요? 아..."

순식간에 세 개의 지역을 평정했으니, 그 지역에 딸린 게이트들을 보유한 던전개발회사들의 주가도 폭등했다.

괜히 코스피에 서킷브레이커가 몇 차례나 걸린 게 아니겠지.

"그래, 주가가 단시간에 너무 올랐으니 아무리 돈이 화수분처럼 많은 카이저라고 해도 쉽사리 들어오진 못할 거야. 대신에 다른 곳을 먼저 노리겠지. 예를 들면... 일본 같은."

"일본..."

우리나라만큼이나 던전 시장 개방에 부정적이고 폐쇄적인 국가 중 하나였다.

기본적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의 성향 같은 거지.

특히 일본은 더 심했는데, '갈라파고스'라 불릴 정도의 극단적인 내수 던전 경제가 특징이었다.

소위 말하는 '스타 헌터'의 부재 역시도 특징.

골칫거리인 특이한 기믹의 던전은 외국 용병들을 일시적으로 들여와 클리어해버리고, 보편적인 던전들만, 아주 보편적인 형태의 헌터를 육성해서 클리어한다.

헌터가 던전 경제의 부품처럼 돌아가기로 유명한 게 일본이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도 종종 웃음거리가 되곤 했는데, 예를 들면 60레벨 대의 초고레벨 헌터가 고작해야 40단계의 특이한 기믹 던전에서 난처해하거나 이상한 방식으로 클리어하는 등의 영상이 종종 올라왔다.

그야말로 레벨만 높았지, 교과서에 나올 법한 던전만 클리어할 수 있는 일본 헌터들의 특징을 잘 나타낸 영상이었다.

"지금까지야 그런 방식이 잘 먹히긴 했는데... 반강제로 이렇게 던전 시장을 개방해버리면... 골치 아프겠네... 일본 정부도."

그러면서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해 본 제피로스가 쓰게 웃으며 내게 보여주었다.

[아메리카 최강 헌터, 라이언 스펜서 상 하네다 공항으로 입국! 10대 팬들 인산인해!]

[라이언 스펜서 상의 라이벌, 로버트 가르시아 상, 본국 헌터들과의 대련에서 압승 거둬...]

[라이언 스펜서 상, 입국 이유는 예능 출연?]

일본 포털 사이트의 번역된 기사 내용이었다.

"벌써 시작이다."

"아직 던전 시장이 개방도 안 됐는데요?"

"헌터 업계라는 게 어느 정도는 셀러브리티, 그러니까 연예인과 비슷한 포지션이 되었거든. 쉽게 말하면 옛날 야구로 따져서 베이브 루스고, 축구로 따지면 펠레나 마라도나가 국내 리그에 뛰러 온다는 거다. 지금까지는 그걸 일본 정부가 강력한 규제로 막아왔지만... 막지 못하는 이상..."

"여론이 작살나겠는데요?"

가뜩이나 개인기가 처참한 일본 헌터들인데...

"당연하지. 말이 예능이지 어떤 내용일까?"

"일본 헌터들이 박살 나는 내용이겠죠."

"여론이 형성되는 과정이지. 아마 라이언 스펜서가 출연한다는 예능 프로 만드는 방송국 지분 보면 미국 쪽 자본이 많이 들어와 있을 거다."

와 씨. 개 무서운데?

저렇게 여론이 만들어져 버리면, 해외 헌터들과 자본의 진출을 막을 방법이 없어진다.

과거에는 단순한 원자재 공급원이던 던전.

그러한 던전 공략 자체를 일반인도 즐길 수 있는 여흥으로 만들어 세계 최강의 엔터테인먼트로 만든 게 카이저 코퍼레이션이다.

그 엔터테인먼트의 맛을 국내에서 볼 수 있다면...

사람들이 열광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소속 헌터들 사이의 인간 관계까지도 철저히 각본을 만들어서 조절하지. 라이언 스펜서와 로버트 가르시아. 둘 사이가 엄청 나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절친한 친구 사이야."

카이저 코퍼레이션 소속의 현역 미국 랭킹 1, 2위의 헌터들.

나도 둘이 반목하면서 만날 때마다 거의 서로를 죽일 듯이 싸우고, 엄청난 라이벌리를 형성해서 경쟁하듯 던전을 클리어하는 영상을 봐서 알았다.

그런데 둘이 친구라고?

조금 배신감까지 든다.

내 감정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 제피로스가 가볍게 읊조렸다.

"그게 아메리칸 엔터테인먼트의 사전 정지작업이다. 이미 제 3세계를 헌터로 지배한 게 아니라 미디어로 먼저 지배한 게 카이저고."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등지의 어딜 가도, 카이저 코퍼레이션의 소속 랭커급 헌터의 사진이 없는 마을이 없다고 했던가.

"강민국 대통령은 그런 미디어에 맞설 적임자로 너를 정한 거다. 당연하잖아?"

제피로스가 히죽 웃으면서, 나직이 이어 말했다.

"아무리 잘 짜낸 각본의 엔터테인먼트도, 진짜 낭만을 이겨낼 수는 없는 법이니까."

**

"젠장, 대체 이런 병신같은 놀음은 얼마나 해야 하는 거야?"

자신의 매니저를 향해 강한 불만을 토해내는 장신의 금발 백인 남자.

그가 현역 북미 랭킹 1위의 헌터 라이언 스펜서였다.

"잽들은 이런 유치한 애들 장난이나 좋아한다고? 정말 이게 맞아?"

"라이언, 카이저께서 직접 고르고 골라서 인수한 방송사야. 그중에서도 최고의 예능 제작진을 영입한 거고."

"알아, 안다고."

카이저 이야기까지 꺼내면 그로서도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등받이에 근육질의 몸을 기댄 채 눈을 지그시 감는 스펜서.

그가 눈만 감은 채 입을 열었다.

"차라리 한국으로 가는 게 나았겠어."

"한국은..."

"그래. 세균 킴인가 뭔가 때문에 안 된다고 했지. 별명이 뭐였더라?"

"애니힐레이터(Annihilator, 섬멸자)."

최근 서구권에서 세균에게 붙고 있는 별명이었다.

휘유, 스펜서가 휘파람을 불었다.

"좆같이 어썸한 별명이군. 하여튼 그놈이랑 붙었으면 조금 더 봐줄 만했겠지."

"... 69레벨 헌터가 20레벨 대 루키를 이긴다고 해서 나아질 건 없어. 아무리 루키가 대단해도 한계는 명확하니까."

"흥, 싹이 트기 전에 밟아놓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네가 이기더라도, 만에 하나라도 네가 고전하는 일말의 모습이라도 보이면 얼마나 손해인 줄은 알고서 말하는 거지? 가뜩이나 그 헌터 킴 때문에 동아시아 시장 공략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단 말이야."

여론전을 주도하려면 화제 자체를 집중시켜야 하는데, 화제성 하면 최고인 전역 메시지가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동아시아 전역에 울렸다.

그것만으로도 카이저 코퍼레이션이 본 유무형의 손해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인터넷 여론의 언급량(버즈, Buzz) 흐름을 바꾸기 위해 바이럴에 드는 비용은 상상을 초월했으니까.

심지어 바이럴에 거액을 투입한 지금도...

─그래서 스펜서랑 애니힐레이터랑 싸우면 누가 이길까?

└아직 레벨 차 때문에 무리이긴 할 텐데, 레벨만 맞추면 애니힐레이터 압승 아닐까?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엮이는 스트레스가 있었다.

"기억해, 엮이면 무조건 네가 손해야. 아무리 무시무시한 루키라고 해도, 북미 1위이자 카이저의 정식 후계자인 너랑은 비교도 안 된단 말이야. 어림도 없다고."

"기분이 좆같으니 그렇지."

"여자들 몇 넣어줄 테니 기분전환이나 하고, 인터뷰나 준비해."

그제야 스펜서의 입가에 화색이 돌았다.

"진작 그럴 것이지."

**

반쯤 기절한 전라의 여자 셋을 침대 위에 대충 남겨두고 나온 스펜서가 코디네이터와 스타일리스트들의 관리를 받고서 인터뷰장에 들어섰다.

'오, 이 년도 제법...'

일본의 유명 인터뷰어를 보는 스펜서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위아래로 슬며시 훑는 시선.

그러면서도 입에서는 예의를 잃지 않는다.

여자 하나 따위로 애써 구축한 이미지를 잃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반갑습니다. 미국의 평범한 헌터, 라이언 스펜서입니다."

이 워딩까지도 사전에 협의된 거였다.

동아시아 쪽에서는 겸손을 미덕으로 여긴다나?

힘은 내세워야지 겸손은 개뿔이.

병신 같은 문화라고는 생각했지만,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라야지 어쩌겠는가?

협의된 워딩에, 협의된, 과장된 웃음이 인터뷰어에게서 튀어나왔다.

"너무 겸손하세요! 평범한 헌터라뇨! 누가 북미 랭킹 1위 헌터를 두고 그렇게 말할 수 있겠어요?"

"항상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머나, 그러면 스펜서 씨가 생각하시는 평범하지 않은 헌터는 누가 있나요?"

"한 사람밖에 더 있겠습니까? 제가 존경하는 제 멘토, 그분뿐이지요."

"저도 알고 시청자 여러분들도 아는 그분이겠군요!"

이후로도 사전에 협의한 틀에 박힌 인터뷰가 이어졌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지루해진 스펜서가 흘끗 카메라 옆을 바라보았다.

매니저가 팔로 X 표시를 그리고 있었다.

'젠장, 아직도 더 남았다니.'

속으로 욕을 내뱉으면서도 거의 반사적으로 인터뷰어의 질문에 답하던 순간이었다.

[김세균 님께서 23단계 게이트, '천변만화의 미궁'을 최초로 토벌하셨습니다!]

[중화민국, 타오위안 시가 평정되었습니다!]

[타오위안 시의 모든 게이트에 출현하는 몬스터들이 약화됩니다!]

그의 눈앞에, 최근에는 두 번째로 전역 메시지가 떠올랐다.

한 번은 하와이주에서의 그 던전 클리어 메시지였고, 두 번째가 이번이었다.

공통점은... 두 경우 모두 공통된 공략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

"어..."

인터뷰어 역시 각성자였던 듯 메시지를 보았는지 당황한 눈초리로 카메라맨을 바라보았다.

이어 그녀가 스펜서를 바라보았을 때.

그의 얼굴이 형편없이 굳어져 있는 걸 확인했다.

그렇다고 라이브 인터뷰를 이렇게 애매하게 끝낼 수는 없는 법.

그녀가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방금 보, 보셨을지 모르겠는데..."

그러면서도, 그녀의 머릿속에 경고가 떠올랐다.

절대 김세균과 관련된 내용은 언급하지 말라는 것.

그렇다고 각성자라면 시청자들도 다 전역 메시지를 보았을 텐데, 언급하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그래서 어정쩡한 질문이 되었다.

"...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루키로서의 어드밴티지를 잘 챙기고 있을 뿐이죠. 저도 왕년에 공략 불가 판정 던전쯤은 몇 곳이고 클리어했습니다."

비록 혼자의 힘은 아니고, 항상 파티형의 던전이었고, 그것도 카이저가 안배해둔 곳이긴 했지만.

그래도, 클리어하긴 했다.

"아, 그러시군요! 네, 정말 멋진 말씀입니다! 인터뷰는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이 시점까지는 스펜서도 몰랐다.

─야, 천변만화의 미궁 익숙한데?

└스펜서가 10년 전 루키 시절에 도전했다가 대차게 실패했던 거기잖아.

└뭐야 그럼, 김세균이 지금 스펜서가 공략 실패했던 던전 클리어한 거야?

└그런데 스펜서는 루키 어드밴티지 운운한 거라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기억력 좋은 이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기 시작할 거라고는.

그리고,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 던전이 그가 공략 실패했던 던전이었다고는 말이다.

낭만(4)

낭만(4)

"대만 던전을 공략하고 싶으시다고요?"

전에 전화 통화를 나누었던 조형빈 국장이 눈앞에 있었다.

제피로스에게는 장관이 직접 연락하고, 내게는 국장급? 이라고 조금 무시받는 느낌이 들었던 때도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도 무식한 생각이었다.

요즘 무식이 좀 통통 튀는 거 같은데. 어쩌겠어? 얼마 전까지 국장이니 장관이니 만나볼 여지도 없던 서민이었는데.

이제부터 나아지면 되지.

그나저나 무식한 생각이었던 이유는...

장차관급, 그리고 차관보급까지는 1급 공무원으로 실질적인 실무는 잘 맡지 않고, 중앙부처 국장이 2급 공무원으로 실질적인 실무의 총책임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실무를 맡은 공무원 중 제일 높은 양반이 실무를 위해 전화했는데 더 높은 사람 없냐고 불평했던 거다.

크흠, 아무튼...

조형빈 국장 이 양반, 높으신 분이다.

목소리가 젊어서 잘 몰랐는데, 실제로 외관도 젊어 뵈네.

"저기... 김세균 헌터? 제 말 듣고 계십니까?"

"아, 그럼요. 그럼그럼."

"예, 그러면 대만 정부와 협상을 진행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뒤에 있던 제피로스가 말했다.

"조 국장, 또 외교부나 산자부랑 핑퐁하면서 보낼 시간 없어. 최대한 서두르라고."

"외교부요? 산자부?"

"해외 쪽 던전 하나 어떻게 뚫어보려고 문의하면 외교는 외교부에 맡겨야 한다고 핑퐁하고, 외교부에서는 던전은 산업 분야라 산자부에서 관리한다고 지랄하고..."

"아... 류 헌터님 요즘 관리부랑 같이 일 안 하셨죠?"

"... 뭐?"

"지금 강민국 대통령님 새로 취임하시자마자 싹 바뀌었어요. 던전 관련 외교, 산업 업무는 싹 다 각성자관리부로 일원화하라는 정부 개편안이 있었습니다."

"와 씨 미친... 나 강민국 그 양반 팬 될 거 같아."

역시 소중한 한 표라니까. 하고서 감동한 표정을 짓는 제피로스.

흠... 그정둔가?

"너는 진짜... 좋은 세상에서 사는 거다..."

이 양반 거의 울겠네, 울겠어.

한참 감격의 도가니탕에 빠져 있던 제피로스가 헛기침을 터트리며 표정을 고쳤다.

"대만 쪽이랑 협상할 카드는..."

이어지는 말을 경청하던 조 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관리부에서도 이미 그런 논조로 진행하려고 했습니다. 잘 해보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류 헌터님. 혹시라도 더 조언할 게 있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 뭐야 너네... 무서워..."

"예?"

"너네 이런 캐릭터 아니었잖아? 철밥통들이..."

"에이, 철밥통이면 이제 못 버팁니다. 조직에 물갈이가 싹 되었습니다. 던전 산업이야말로 온전하고 완전한 미래 먹거리라는 게 대통령님의 지론이라서요. 아마 아시던 철밥통들은 전부 퇴직하거나 한직으로 밀려났을 겁니다. 어디 지방 던전관리사무소 지국 같은 곳으로 갔을걸요?"

"하면 되는 놈들이..."

그러면서 세균아, 너는 투표 진짜 잘해야 한다고 두 번째 강조하시는 제피로스다.

알겠다고요...

조 국장이 나간 다음에, 제피로스가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나저나, 던전... 클리어 자신은 있는 거지?"

"없죠."

"뭐?"

"실패할 자신이."

"어휴, 말장난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지금 체급으로는 아무리 불가사의급이라고 해도 20레벨 초반대 게이트로는 내 발목을 잡을 수 없다.

거기에다...

최근에 던전을 돌면서 아이템 없는 순수 숙련도 B를 달성하자마자 바로 숙련도 상승권을 사용했다. 최고의 효율을 보려고 아껴뒀었는데, 잘 됐지.

[스킬 숙련도 상승권(숙련도 A 미만)를 사용하셨습니다.]

[언데드 라이즈(고유)의 숙련도가 A로 상승했습니다.]

[성좌 아비센나의 왕홀 효과로 언데드 라이즈(고유)의 숙련도가 S로 상승합니다.]

[숙련도 A 효과 : (1) 총 5종류의 언데드를 유지할 수 있다. (2) 마나를 소비하여 언데드를 일시적으로 강화할 수 있다. (3) 프리셋 2종을 사용할 수 있다.]

일단 숙련도 A에서 생긴 효과는 프리셋.

언데드 다섯 종류를 세트로 스왑할 수 있는 효과였다.

실질적으로 10종류의 언데드를 사용할 수 있는 것.

물론, 프리셋 교체에 30초라는 쿨타임이 있고, 서로 다른 프리셋의 언데드를 동시에 사용할 수는 없으니, 배치를 잘 생각해 봐야 할 거 같긴 했다.

그리고 대망의, 지팡이까지 사용했을 때의 숙련도 S에서 새로 생긴 효과는...

[숙련도 S 효과 : .... (4) 언데드 파괴 시에 숙련도 S의 환류 효과를 적용한다.]

[환류] 

설명 : 이 효과가 적용된 모든 유형의 추종자에 대해서 (25%, 숙련도 S 효과 적용)의 마나를 환급한다. 이 효과로 환급된 마나는 일시적으로 최대치를 돌파한다. 최대치를 돌파한 마나는 10초 뒤 흩어진다.

누가 숙련도 S 아니랄까 봐 이것도 대박이다.

환류 효과.

말 그대로 마나 재활용이다.

더 좋은 건, 최대치를 돌파해서 오른다는 거다.

보통 자연 마나 회복량만큼의 언데드를 유지하는 네크로맨서들에게, 환류 스킬은 가뭄의 단비같았다. 언데드를 최대치로 유지하면 마나 회복 효과가 없다시피 하기에, 일부가 환류된다는 건 그런 와중에 마나가 회복된다는 뜻이니까.

통상 네크로맨서들에게도 최고의 효율을 보일 수 있는 스킬이지만, 내게는 더 그러했다.

이제 다 갖춰졌으니... 세균들만 준비해두면 되겠다.

규선 씨, 지금 갑니다.

**

"아, 오셨어요?"

"네. 오랜만... 은 아니죠?"

"어제도 봤으니까요. 그래도 매일 봐도 좋아요."

규선 씨가 환하게 웃는 모습은 예쁘긴 한데, 조금 소름이 돋긴 한다.

저 웃음 뒤에 감추고 있는 연구 욕구불만을 내가 다 해소해 주려다가는 아마 성치 못할 거다.

최대한 자제시켜야지...

"그나저나 부탁한 건..."

"아, 네. 여기요. 농축한 각종 균주 사체들이에요. 종류별로 뚜껑 색이 다르니까 외워두시면 편할 거예요."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뭘. 저도 연구하다 자연사멸한 균주들을 재활용하는 느낌이라 좋은데요? 아, 그리고 이거..."

"이게 뭡니까?"

뭔 주황색 왕꿈틀이 같은 게 있는데.

"세균은 아니긴 한데... 혹시나 몰라서요. 이번에 공략하는 게 미궁이라면서요?"

"예, 그렇긴 합니다만."

미궁도 사실상 내겐 벽이라는 게 없다시피하니까.

그냥 1호기로 다 벽을 분쇄하면서 돌파할 생각이었는데.

"세균보다는 개체당 크기가 크긴 해요, 점균류니까요. 그래도 만약에 이것도 사용하실 수 있다면, 분명히 아주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럼 시험 삼아 한 번..."

언데드 라이즈 스킬을 사멸해서 말라비틀어진 점균이라는 거에 사용했다.

[Physarum Polycephalum 균주 사체 약 380만 개를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충실한 수하가 되어 따를 것입니다.]

숫자는 되게 적은데?

기본 몇십억에서 몇백억, 많게는 몇천억 단위도 유지하는 다른 군단에 비하면 적어도 한참 적었다.

[현재 유지 중인 언데드]

(프리셋 1번)

<감춰짐 >

(프리셋 2번)

(1) Physarum Polycephalum(황색망사점균)

─개체수 : 약 380만 개

─설명 : 곰팡이를 섭식하며 군체 점막을 사방으로 뻗어 성장하는 단세포 생물이다. 원시적인 뉴런을 보유하여 학습 능력을 지닌다.

─능력 : 10만 개체당 1.3m/h의 군체 점막 확장 (기본 1cm/h, 통제력 230% 효과 적용)

"황색망사점균?"

"네, 맞아요. 점균류에요. 영어로는 슬라임."

내가 봤던 주황색 왕꿈틀이랑은 다르게, 내가 일으킨 녀석들은 조금 칙칙한 색깔이었다.

능력을 한 번 사용해 보려고 했는데...

"음... 속도가..."

통제력으로 강화됐는데도... 성장 속도가 너무 느리다.

시간당 1.3m인데 던전에서 길 찾으려면 아마 일주일은 넘게 걸리겠네.

개체를 늘리면 될 일이긴 한데...

그렇게 말하니, 규선 씨가 난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점균류의 성장은 세균류랑 조금 달라서요. 이분법으로 계속 두 개의 동일 세포를 분열하면서 성장하는 세균류랑은 다르게, 점균류는 다핵체로 성장해서 세균류에 비하면 성장 속도가 훨씬 느려요."

"아, 그런가 보네요."

"혹시나 세균 씨의 능력이 결합되면 도움이 될 거 같았는데, 아쉽네요."

그러게.

스스로 의식을 가진 채 인공지능처럼 뻗어나가면서 최적의 경로를 탐색하는 균체.

분명 매력적이긴 한데... 성능이 조금 많이 아쉽다.

그래도 나중에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네.

일단 지금 당장에는 쓸 일 없을 거 같으니, 역소환 해둬야지.

**

관리부에서 대만 정부와의 협상을 마쳤다는 소식이 들려온 건 바로 하루 뒤의 일이었다.

평정 효과로 대만 자국의 던전개발기업 주가를 끌어올리면 한국처럼 카이저 코퍼레이션의 무차별 인수를 일시적으로 피할 수 있을 거라는 설득.

거기에 던전 시장 개방이 얼마 남지 않았고, 일본은 이미 공격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까지 들이미니, 대만 정부도 꽤 저자세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클리어 하나만 해도 3조요?"

아니, 이건 좀... 그렇다고 쳐도 너무 많이 얻어낸 거 아닌가?

"대만의 GDP는 상당 부분 던전 산업에 의존 중이라서요. 이번 던전 시장 개방의 타격이 꽤 큽니다. 돈을 써서라도 막을 수 있다면 막고 싶을 겁니다. 게다가 타오위안 지역은 대만의 핵심 게이트들이 전부 몰려 있는 알짜 지역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동일 게이트를 카이저 코퍼레이션에 약 10년 전에 의뢰했던 비용만 해도 약 1조 남짓이었습니다. 이후로 물가 상승률과 공략 불가 기간이 10년 추가된 시간가치를 추가한 비용 산정이었습니다. 일단 최선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만... 만족스럽지 않으시다면 재협상을..."

"아, 아뇨. 대만족인데요."

이런 계약을 술술 따온 관리부 만세다.

역시 전문가들은 다르구만.

"예, 그러면 바로 출국하시면 됩니다."

"지금요?"

"네, 김포국제공항에 전용기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뭐, 이 사람들 일처리가 왜 이렇게 빨라...

공무원 맞아?

**

현지에 도착하니 대만 공무원들이 게이트까지 직접 안내해주었다.

대사관... 아니, 대만은 국가가 아니라 대표부가 있다던가.

그래도 각성 시대가 열린 이후로 시스템이 대만을 '중화민국'으로 표기해서 대만 국민들의 결집력이 높아졌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다.

반대로 어떻게든 중화민국 표기를 막으려던 중국은 닭 쫓던 개 꼴이 되었고.

원리조차 모르는 시스템을 바꿀 수는 없으니까.

어쨌든, 대표부에서 대만 쪽에 요청한 모양이었다.

[23단계 게이트, '천변만화의 미궁'에 입장합니다.]

그렇게, 거의 결정한 지 하루 하고도 반나절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 나는 게이트에 입장했다.

천변만화의 미궁의 기믹은 간단했다.

미궁을 뚫고, 도착 지점에 들어가면 던전 클리어.

문제는 정말로, 이 미궁이 천변만화하다는 게 문제였지만.

벽이 실시간으로 변하면서 도착 지점으로 향하는 걸 방해하고, 똑같이 생긴 주변은 그 방향성을 잃게 만들기 딱 좋았다.

"와 씨... 내가 들었던 거랑 좀 다른데."

받은 정보가 거의 필요가 없을 정도로, 미궁은 엄청난 형태로 변해 있었다.

"이거 다 뚫고 지나가려면 한세월일 거 같은데?"

미궁이 점점 자라며 복잡해진다는 특성이 있었는데, 무려 몇십 년을 공략되지 않은 채 방치된 던전이다.

미궁의 복잡도와 밀도는 그야말로 극한에 달해 있었다.

이거 골치 아픈데.

여차하면 미궁의 모든 벽을 1호기로 밀어버릴 생각까지 했는데, 그러려다가는 적어도 며칠은 걸리겠다.

"그래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낫지."

일단 한 방향으로 벽을 뚫으면서 걸으려던 찰나였다.

내 앞을 가로막으며 나타나는 몬스터 하나.

"슬라임인가."

이 미궁의 주력 몬스터인 미궁 슬라임이었다.

산성 물질로 대상을 휘감아 질식시킨 뒤에 서서히 녹여 분해시키는 몬스터.

물론...

1호기에게 흔적도 남지 않고 그대로 분해될 뿐이었다.

그렇게 슬라임과 벽을 분해시켜가며 한참을 걸었지만, 당연히 도착 지점은 나오지 않았다.

"음, 정말 그 황색 점균인지 뭔지가 아쉬워지네."

아닌가? 비슷한가?

차라리 벽을 다 밀어버리는 게 나을지도.

그 순간.

꿈틀거리면서 생겨나는 건너편의 벽이 느껴졌다.

실시간으로 생기는 벽이라니. 진짜 벽이 무슨 몬스터라도 되나.

"... 엥?"

지금 나, 뭔가 정답에 가까워진 거 같은데.

[스킬, '미시안'을 사용합니다.]

[스킬, '미시안'이 '미궁 슬라임의 사체로 이루어진 벽'으로부터 미시세계의 존재를 포착했습니다.]

[미궁 슬라임]

─설명 : 점균류가 생명석에 의해 강력한 분열 능력과 결집력을 갖추었다. 흔히 단일 개체로 오해받지만, 사실은 수천만~수억 단위의 점균류 개체의 결합체다. 마나를 통해 대규모로 분열하여 군체를 뻗어나갈 수 있다. 군체는 사멸하면서 단단히 굳어지는 특성이 있다.

뭐야 이거...

던전 버전 황색망사점균이냐?

그러고 보니...

'네, 맞아요. 점균류에요. 영어로는 슬라임.'

와씨... 이제야 생각나네. 점균류가 영어로 슬라임이었구나.

그나저나 어차피 말 그대로 '미시세계' 보이지 않는 존재들만 소환할 수 있는 나였기에, 눈에 보일 정도로 거대한 슬라임을 되살릴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저게 수억 점균류의 결합체라면...

[언데드 라이즈 스킬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대상 : 미궁 슬라임 균주 사체 약 132경 9999조 9999억 개.]

[주의! 공간에 되살릴 수 있는 균주가 너무 많습니다! 원하는 양을 지정해주십시오!]

아무리 점균류의 성장이 느리다고 해도...

이 미궁이라는 공간에서 수십 년 동안 리젠되며 성장해온 슬라임들의 사체는...

감히 내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쌓여 있었다.

애초에 저 셀 수 없을 만치 많은 미궁 벽들이, 전부 슬라임의 사체들...

이거 뭐...

대놓고 클리어해달라고 하는 수준인데?

뀨(1)

뀨(1)

미궁의 벽이 슬라임의 사체이며, 슬라임이 내가 일으킬 수 있는 대상이라는 걸 깨달은 다음에는 전혀 어려울 게 없었다.

굳이 무리해서 어마어마하게 많은 슬라임을 일으킬 필요도 없었다.

"점균류는 뉴런에 담긴 기억을 공유한다고 했지."

전혀 새로운 점균류 개체를 특정 미로에 학습된 개체에 합치면, 새로운 개체 역시 미로에 관한 정보를 학습한다.

그렇다면... 미궁 전체가 연결되어 있는 이상.

내가 일으킨 어떤 슬라임 개체라도...

이 던전 전체의 구조를 학습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당신은 23단계 게이트, '천변만화의 미궁'을 최초로 토벌하셨습니다.]

[최초 클리어 보상으로, '추종자 소환권(미궁 슬라임)'이 주어집니다.]

미궁 전체와 동기화된 언데드 미궁 슬라임이 꿈틀거리면서 길을 알려주었고, 20분도 채 되지 않아 도착 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번 보상은 특이하네. 추종자 소환권? 그것도 소환 대상이 정해져 있잖아.

뭔지 확인이나 해볼까.

"사용, 추종자 소환권."

[아이템, '추종자 소환권(미궁 슬라임)'을 사용하셨습니다.]

아이템을 사용했다는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손에서 사라진 티켓.

... 그래서?

뭐 아무것도 없는데?

한참 주변을 둘러봤는데도 아무것도 없어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 씨... 설마 최초 클리어 보상이 꽝이야? 나 꽝 친 거야?"

이건 또 처음 겪는 일이네.

에이씨, 대만 정부에서 너무 돈을 많이 뜯어냈다고 벌 받았나.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한숨 한 번 내쉬고 주변을 둘러보니...

"어?"

"김세균 헌터! 질문 하나만 받아주십시오오옥─!"

멀찌감치서 달려오는 한 여자.

저거 경공술이냐 설마.

폴짝폴짝 뛰어서 내게 가까이 와서는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헥헥... 저, 저랑 제일 먼저 인터뷰해주실 거죠?"

"... 누구세요?"

"가장 빠른 통신! 가장 빠른 인터뷰! TNN의 주위잉(周玉蔭)입니닷! 클리어 메시지 보고서 바로 달려왔습니닷!"

어떻게 사람 이름이 위잉?

와, 그나저나 경공 쓰는 각성자를 리포터로 쓰는 거야?

대만 힙하네.

"예, 위, 위잉 씨."

아 웃음이 나오려는데, 참아야겠지.

그런데... 내 앞에 있는 저 리포터도 뭔가 웃음을 참는 듯한 건 기분 탓인가?

"... 왜 웃으시죠?"

"저, 저기... 머리에 그건... 트레이드마크나 시그니처 캐릭터 같은 걸까요?"

"... 머리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머리를 만졌더니.

물컹.

"워매 쓰벌 이게 뭐야!"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네.

휴대폰을 꺼내 셀카모드로 확인해 보니...

머리 위에 작은 슬라임 한 마리가 제대로 안착해 있었다.

야, 설마 소환을 저기다가...

"... 내려와."

한숨을 내쉬며 명령하니, 꿈틀거리며 그대로 몸을 타고 내려왔다.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그걸 바라보는 리포터.

"너, 너무 귀여워요!"

... 취향이 좀.

"이름이 뭘까요! 시청자들이 많이 궁금해할 거 같은데요!"

"이름... 그냥 슬라..."

아니, 대놓고 그렇게 실망하는 눈 하지 마요.

─뀨!

"어머나!"

이제는 완전 얼굴까지 붉히면서 슬라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정도야?

─뀨?

... 귀엽긴 한데.

아니, 그런데 뭔 이딴 게 보상이냐고.

이상하게 머리 위에 소환되서 쪽 판 건 둘째치고...

[뀨뀨]

설명 : 미궁의 정복자인 당신을 기꺼이 따르기로 결심한 슬라임의 일부 군집이다. 특유의 귀여움으로 인기가 많을지도?

내용 : 뀨?

그러니까 이게 뭔데?

아 설마 이거...

룩ㄸ... 아니, 치장용이야?

던전에서 나오는 아이템이 모두 성능을 위해서만 나오는 건 아니었다.

나야 외형에는 거의 신경도 안 쓰고 성능을 위해서만 아이템을 맞추지만, 소위 말하는 치장용 외형 아이템도 존재하긴 했고, 꽤 비싼 가격에 팔렸다.

헌터들이 돈이 좀 많아야지.

원래, 사람이 돈이 많아지면 쓸데없는 자기과시에 취미가 생기는 법이다.

내 기준으로는 능력치도 없는 치장템을 쓰는 건 돈지랄로밖에 생각 안 들지만...

그런데 이 추종자는 아마...

치장용 펫?

아, 아이템 설명 보고 소환할걸...

이 정도 귀여웠으면 그냥 가져다 팔았어도 꽤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작은 한숨을 내쉬는 내게, 위잉 기자가 다시금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 뀨뀨랍니다."

"뀨뀨! 와! 세균 헌터님에게는 이렇게 귀여운 펫도 있답니다! 개인기 같은 건 없나요?"

여보세요, 당신 나랑 인터뷰하러 온 거 아니었어...?

"글쎄요."

"손은 안 되나요?"

슬라임한테 손을 달라고 해보라고?

"손이 없어가... 뭐 뒤집어 정도는 되겠네요."

"오, 보여주세요!"

세상에 슬라임 뒤집는 걸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뒤집어."

"와아아아아! 귀여워어어어─!"

이 여자도 거의 같이 뒤집힐 기세인데?

그렇게 한참이나 뀨뀨라는 새로 생긴 슬라임 추종자의 인터뷰만 하다시피 하다가, 다른 언론사들이 찾아온 걸 보고 울상이 되는 위잉 씨다.

"인터뷰... 더 안 되겠죠...?"

"죄송합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나도 곤란하다고, 빨리 빠져나가려 했는데 당신이 붙잡아서 저 많은 사람들이랑 인터뷰를 다 해야 하잖아.

언제 이렇게 몰려든 거야?

**

클리어를 마친 다음에 바로 한국으로 넘어가려 했는데, 어찌저찌 시간이 끌려서 대만에 하루 더 체류하게 되었다.

호텔은 서울 남산에도 있는 H 호텔 체인이 타이베이에도 있어서 그곳으로 잡았다.

─뀨뀨라고? 푸하하학!

도착하자마자 제피로스에게 연락해서 설명했는데..

대번에 웃음을 터트리는 제피로스와...

태평하게 뀨? 하는 공명음을 내는 슬라임.

"너무 웃으시는 거 아니에요?"

─크흐흐흑... 

웃다 울겠네, 울겠어.

─가끔 그런 꽝인 보상도 나오기 마련이지. 그냥 받아들여. 어쩌겠냐? 맨날 꿀이나 빨 수 있을 거 같아?

"전 꿀벌이라 맨날 꿀만 빨면서 살고 싶은데요."

─꿈 깨라 짜식.

"흐흐, 예예. 내일 갈게요. 그만 주무세요."

─그래, 조심히 와라.

통신을 마치고서 한숨을 내쉬며 뀨뀨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이거 뭘 먹여야 하는 거야?

언데드가 아니고 진짜 살아있는 슬라임이니 먹이를 먹여야 할 거 아냐?

고민하고 있는데, 낡은 호텔의 구석구석을 들어가서 벽지에 검게 물든 곰팡이를 먹기 시작했다.

아, 균류가 먹이랬지.

한참 먹이를 먹는 뀨뀨를 보는데, 이거 제법 중독성 있는데?

이 맛에 애완동물 키우는 건가?

잠시 생각하고 있는데, 머릿속에 목소리가 또 울렸다.

─슬라임 로드의 진핵(眞核)이라니, 놀랍군요.

"... 응? 아테나 너냐?"

─네, 소환자님.

"그런데 슬라임 로드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모든 유형의 슬라임으로 분화할 가능성이 있는 원류의 슬라임을 말합니다.

"... 이 뀨뀨가?"

... 로드 어쩌고라고?

치장펫 아니고?

"확실해?"

─제가 보유한 지식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아까 소환 시점부터 계속해서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뭐 분석할 게 있긴 있었나?

뀨뀨거리고 뒤집은 게 끝인데.

─슬라임 로드는 최고의 유전적 다양성을 보유한 슬라임 개체입니다. 창조주께서도 유용하게 활용하셨던 좋은 패밀리어입니다.

"쟤를 어떻게 활용하면 되는데?"

─소환자님의 역량으로는 아직 활용하기 힘듭니다. 더 상위의 지식을 익히셔야 합니다.

얘가 갑자기 팩폭을 날려버리네.

어쨌든, 키우면 나중에 쓸모가 있다는 거지?

알겠다. 잘 키워 봐야지...

슬라임을 어떻게 키우라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지.

**

라이언 스펜서의 첫 일본 예능 출연은 대박이 났다. 

나쁜 의미로 대박이 난 게 문제였지만.

"아니 왜 그런 말은 해서..."

"... 실수라고 했잖아. 그 전에, 그 썅년은 뭐야? 그걸 기어이 물어보고..."

"리포터 탓이 아냐. 그 상황에서 오히려 안 물어봤으면 더 논란이 됐을 수도 있어."

"Fuck!"

한바탕 욕을 내뱉고서, 스펜서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하필... 그 던전을 공략하다니."

이제야 기억났다.

그 악몽 같던 개 같은 미궁.

스펜서에게 그 미궁이 자신 있던 이유는 있었다.

전설급 아이템, 길잡이의 요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

하지만, 길잡이의 요정도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던전 앞에서 쓸모가 없었다.

결국, 미궁 중간에 갇혀서 굶어 죽기 직전까지 몰렸다가,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 간신히 시작 지점을 찾아 목숨을 건졌다.

69레벨이라는 세계 최고 수준에 오른 지금조차도, 그 때만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한 스펜서였다.

"차라리 로버트가 친 사고였으면 상관없었을 텐데. 네가 친 사고라서 문제가 커."

"끄응."

로버트 가르시아.

그의 절친이자 북미 현역 랭킹 2위인 녀석.

라이언 스펜서와 라이벌리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그는 철저한 악역 캐릭터였다.

반면에 라이언 스펜서는 선역.

아이들의 친구이자 우상이 라이언 스펜서고, 로버트 가르시아는 영원한 라이언 스펜서의 적이었다.

그런데, 지금 행동은 전혀 선역답지 않았다.

뛰어난 루키를 완전히 개무시했는데, 그걸 고스란히 실시간으로 반격당한 꼴이 아닌가?

"공개 사과부터 하자."

"Fuck! 죽어도 싫어!"

"스펜서!"

"싫다면 싫은 줄 알아!"

안 그래도 최근에 신경 쓰이는 이야기를 들었다.

카이저가 김세균이라는 루키에게 자기 딸인 소피아를 주려 한다는 소문.

뜬소문으로 생각했지만, 전전긍긍하는 소피아 하인리히의 모습을 본 라이언 스펜서는 그게 뜬소문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스펜서! 사과도 타이밍이라는 게 있어! 지금 타이밍을 놓치면 주워 담을 수도 없다고! 지금 네 이미지라면 여기선 사과를 해야 해. 사과만으로도 부족해! 헌터 킴에게 가서 악수라도 하면서 사진 한 컷이라도 찍어야 한다고!"

그 악수 한 번에 얼마나 많은 돈을 써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게 필요했다.

"아냐, 이럴 때일수록 정면 돌파하자."

"뭐?"

"일본 최고 난도 던전이 어디야? 불가사의 빼고."

"삿포로의 67단계 던전이지."

일본 국적의 최고 레벨 헌터가 67레벨이니, 67단계가 최고 게이트였다.

"그거 타임어택 어때? 신기록 세우면 조금 낫겠지. 안 그래?"

"그걸론 부족해. 네가 나섰는데 신기록은 당연한 거니까."

"... 그다음엔... 그래, 그걸로 가자. 미담 흘리기."

"미담?"

"왜 그런 거 있잖아. 내가 그런 말을 했던 건 루키가 자만하지 않고 더 성장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이런 거. 내가 이런 말을 한 것처럼 언론에 뒤로 흘리자고. 캐치프레이즈도 딱 나왔네. 내가 루키를 위해 악역 하나 못 맡을 정도로 못난 선배처럼 보이냐고."

"김세균을 띄우려고 일부러 했던 발언으로 가자는 건가?"

"그렇지. 그리고 로버트 녀석 동원해서 김세균 그놈한테 시비 걸고, 그걸 내가 막는 쪽으로 가자고."

"후배 위하는 선배 기믹으로 가자는 거지?"

"이제야 감이 잡히는 모양이구만."

언제 의기소침했냐는 듯, 기세등등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스펜서다.

"나 라이언 스펜서야. 이런 실언 하나로 무너질 거 같아?"

**

그렇게 긴급히 일본 정부의 협조까지 얻어 클리어한 67단계 삿포로 던전.

당연하게도 일본의 헌터들도 무난히 클리어할 수 있을 정도로 평이한 던전이었으니, 신기록이 나왔다.

그것도 거의 1분 이상 단축한 압도적 신기록.

"스펜서! 고생했어!"

"라이브 방송은 어때?"

엄청나게 비싸지만, 카이저 코퍼레이션에는 던전 내부 상황을 실시간 중계할 수 있는 마법 장비까지도 있었다.

일반적인 회사에서는 불가능한 던전 라이브 방송까지 동원한 거였다.

당연히 반응은 폭발적.

순식간에 인기 급상승 동영상 1위에 올라갔다.

일본에서도 그랬고, 국제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뿌듯하게 웃으며 피드백을 위해 댓글 창을 보는 스펜서.

그런데...

댓글이 이상했다.

─뀨?

└뀨뀨?

└뀨!

└뀨뀨뀨!

"뭐야 이 어디 모자란 댓글들은."

"응? 뭐지 이게?"

그리고 그들이 그 댓글의 진원지를 알게 된 건.

불과 몇십 분 뒤, 순식간에 공략 영상을 깔아뭉개며 1위로 급부상한 대만 리포터의 인터뷰 영상을 보고 나서였다.

─뀨?

엄청나게 귀여운 슬라임을 머리 위에 달고 있는 김세균과의 인터뷰.

심지어 김세균이 아니라 슬라임 인터뷰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김세균보다도 슬라임의 모습이 훨씬 많이 나왔다.

─존나 귀엽네 미친...

─영상만 봐도 힐링된다...

─나만 슬라임 없어...

한참 슬라임의 귀여움을 찬양하던 댓글들은 곧...

─뀨?

└뀨뀨?

└뀨!

마치 무언가 짜기라도 한 듯, 그저 '뀨' 일색으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인간의 광기는 예측할 수 없다고 했던가...

그러한 흐름은 단지 그 영상에 국한된 게 아니라, Y튜브 전체에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있었다.

뀨(2)

뀨(2)

바이럴(Viral).

바이러스의 형용사형으로, 바이러스처럼 전파되거나 전염된다는 뜻.

마케팅적으로는, 입소문에 가까웠다.

동시에 밈(Meme)도 있었다.

인터넷 상에서 발생하는 특정한 유머 코드나 사건에 대한 유행.

이 둘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따로 이유 없이 퍼져 나가며,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없고, 막고자 하면 더 거세게 퍼져 나간다는 것이었다.

라이언 스펜서의 채널에서는 처음에는 의미 없는 쓰레기 댓글로 생각해서 지우기 시작했다.

그런 댓글을 다는 계정들을 차단도 했다.

그런데, 그 반발 심리가 더 크게 작용했다.

"하, 하하하..."

라이언 스펜서는 거의 실성하기 직전이었다.

큰맘 먹고 이 악물고 공략한 던전 영상에 달린 반응이...

─뀨?

└뀨뀨?

└뀨뀨뀨!

개판이 나 있었다.

처음에는 한국어 댓글로 시작한 흐름이...

일본어.

─999

└9999

└99999

일본어의 9 발음이 뀨에 가까워서, 일본어는 9를 계속 반복으로 다는 댓글이 달렸고.

영어로는...

─QQQQQ

Q였다. 귀엽다는 뜻을 지닌 Cute의 축약어이기도 했다.

각자 표현은 달랐지만, 결과는 같았다.

─뀨뀨!

─99!

─QQ!

뀨와 9와 Q로 점철된 댓글을 보는 라이언 스펜서는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Fucking shit!"

욕을 내뱉으며 노트북을 거칠게 닫는 스펜서.

"차라리 김세균이랑 거하게 한판 붙은 거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뭔 어이없는 슬라임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스펜서의 매니저이자 동아시아 시장 개척 담당자이기도 한, 힐리언은 화낼 기력조차 없어서 허탈하게 웃었다.

귀여움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긴 했지만, 정말로 그냥 '귀엽기만' 한 슬라임 한 마리가 일을 망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면... 이제 네가 김세균 디스한 건 아무도 관심도 없어."

묻히긴 묻혔는데, 최악의 방향으로 묻혔다.

"스펜서, 네가 집에서 개 키운다고 하지 않았어?"

"말리노이즈랑 셰퍼드. 로버트 녀석은 고양이."

"... 우리도 펫방으로 노선을 바꿔볼까. 헌터의 애완동물... 이런 걸로."

"..."

미친 소리라는 건 알았지만...

그 미친 소리가 솔깃하게 들릴 정도로 지금 상황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

솔직히 말해서 내가 잘생긴 얼굴은 아니다.

그렇다고 혐오스럽게 생긴 '세균맨' 같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비쥬얼만으로도 반은 먹고 들어가는 미남 미녀 헌터들에 비하면 불리한 위치라는 거지.

눈앞의 이 아저씨 보라고, 제피로스가 유명했던 건 강한 헌터였기 때문도 있지만, 잘생겨서도 있었다.

젊을 때 소녀팬들을 끌고 다녔고, 나이 들어서도 미중년으로 유명했다.

그에 반해서 나?

─세균오빠 멋있어요! (덜렁)

└그렇지, 세균맨한테 여성팬이 있을 수는 없지.

└세균단 일동은 남자 성비 99.999%를 엄숙히 선언합니다!

└여자가 0.0001%나 있다고? 너 우리 세균이 형 무시하냐?

... 시발...

이렇게 된 이유는 여러 개가 있는데...

첫째로 앞서 말한 외모가 한 몫이고, 두 번째로는 내 공략 스타일이다.

죄다 분해해버리는 호쾌한 스타일 때문에 남자들에게 유난히 인기가 많았다.

셋째 이유는...

대체 팬덤 이름이 왜 세균단이야 !!

세상에 어떤 여자가 세균단에 가입하고 싶겠어!

내 이름 탓인 건 알아! 그래도...

하... 아니다.

그런 내 인생에, 여성팬만 가득 몰려드는 날이 오다니.

'꺅! 뀨뀨 보여주세요! 뀨뀨! 아니 세균맨 말고 뀨뀨요!'

문제가 있다면, 날 보러 온 게 아니라는 거지만.

고작 하루 남짓 지난 시점에 공항에는 이미 몇백 명에 달하는 인파가 몰려 있었다.

그런데 지금 밖에 나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도 짐작이 안 간다.

"아 이제야 좀 숨이 쉬어지네."

제피로스 이 양반은 태평하게 웃고만 있었다.

기어이 눈물까지 흘리며 웃었는지,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숨을 몰아쉬다가.

풉! 다시 웃음을 터트린다.

"아니, 상황이 웃기잖아 상황이. 넌 안 웃기냐?"

"... 자괴감이 드는데요."

"야, 원래 아이돌 그룹도 비쥬얼 담당이랑 실력파는 따로 있는 거야. 쟤는 비쥬얼 담당, 너는 실력파. 좋잖아?"

"실력파 애들도 기본빵은 하잖아요."

"그렇긴 하지."

급 시무룩해지는군.

"야, 업계에 어떻게든 이름 한 번 띄우려고 개지랄하는 놈들이 한둘이냐? 펫이 아니라 펫 할애비라도 들고 와서 뜰 수 있으면 한 번이라도 뜨게 해달라고 소원 비는 놈들이 넘칠 거다. 저런 귀여운 펫도 능력이야, 능력."

그렇기는 한데...

한숨을 내쉬며 뀨뀨에게 송이버섯을 주었다.

규선 씨가 버섯도 균류이니 줘도 된다고 해서 마트에서 각종 버섯을 사다 뷔페처럼 깔아 두고 먹여봤다.

팽이, 목이, 송이, 영지 등등...

하필 입이 고급이라 송이를 좋아하는 건 생각해 볼 만한 일이지.

너, 어릴 때부터 이렇게 입이 고급이면 곤란해.

라떼는 말이야...

"어우, 내가 뭔 생각을."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뀨뀨를 어깨에 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게?"

"가야죠, 출근."

보안 취약한 강남 내 집에는 있을 수가 없어서, 제피로스의 집에 잠깐 머물게 된 거였으니까.

이렇게 된 이상 강남에 제대로 된 집 하나 마련해놔야겠다.

보안 빵빵한 곳으로.

"방송 제안 같은 건 어쩔 거야?"

"고민 중이에요."

원래였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거절이었겠지만...

미디어를 적극 활용하며 동아시아를 공략하는 카이저에 대항하려면 고사리 손... 아니 슬라임 손이라도 빌려야 할 거 같기도 하고.

슬라임은 손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그 슬라임... 뀨뀨가 네 효자다. 효녀인가? 암컷이야 수컷이야?"

"슬라임에 성별도 있어요?"

"... 없던가?"

"..."

"크흠, 아무튼... 네 체급에 비해서 사실 대중 인지도가 부족하긴 했거든. 던전 업계나 각성자들에게는 여러 차례 전역 메시지를 통해서 인지도를 높였지만, 일단 네가 라이브 방송을 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 대중 인지도를 이런 식으로 채울 줄은 몰랐는데.

뀨? 하는 소리를 내는 오른쪽 어깨의 뀨뀨를 흘끗 바라보며 쓰다듬었다.

"아 맞아, 조 국장이 찾더라."

"그 양반은 또 왜요?"

"아마도... 시작하려는 모양인데?"

"벌써요?"

"서두르면 더 좋으니까."

한껏 진지해진 표정으로, 제피로스가 말했다.

"던전 시장 개방이 되기 전에, 최대한 뭉쳐 둬야지."

프로젝트명 합종연횡.

그 시작은...

"역시 RHS부터 시작할 거 같다."

"그렇군요."

"일단 제일 쉬우니까."

"그쪽은 철저히 맡기겠습니다. 제 이름은 얼마든지 가져다 쓰세요. 뭐 필요하다면... 뀨뀨까지요."

─뀨?

아무것도 모르는 뀨뀨의 울음소리가 어느 때보다도 크게 울렸다.

**

대한민국 대통령 관저.

각성자관리부 장관 정인현이 내민 서류에, 강민국 대통령은 마지막까지도 사인을 망설이고 있었다.

"대통령님."

"음. 그래."

그 고민의 시간은 충분히 보냈는지, 강민국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류에 슥슥 서명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안락의자에 몸을 맡기면서 쭉 누운 강민국 대통령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이런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 한스럽군. 후세들은 나를 어떻게 판단할까? 정경유착... 아니 정헌유착의 부패한 정치인?"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많은 힘이 주어지긴 합니다만."

"그래. 과거 해방 직후의 기업들과 같은 상황이지. 적어도 체급은 맞춰야 개방 시장에서 싸워볼 수 있지 않겠나."

카이저 코퍼레이션, 트리아인 네트워크.

그 외에도 월가의 헤지펀드 자본이 들어간 초거대 공룡급 던전개발회사들은 많았다.

게다가 영국의 더 시티 자본이나 중국 자본도 있었다.

그런 자본들이 시장 개방과 동시에 물밀듯 흘러 들어올 거다.

그 상황에서 강민국 대통령이 내린 결론은, 김세균에게 한국의 메이저급 던전개발회사들을 합쳐 쥐여주는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그저 우리나라 기업들을 몰아준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반대로 생각하시죠."

"어떻게?"

"이번처럼 힘을 몰아주면, 해외에서 외화를 가져오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그에게 한국이라는 땅은 너무 좁습니다. 그냥, 그가 국제적으로 제대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준다고 생각하시지요."

정인현 장관의 말에 강민국 대통령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자네 말을 들으니 그래도 마음이 편해지는군."

"후세가 어떻게 판단할 거냐고 물으셨지요? 구국의 결단으로 던전 안보를 지켜낸 영웅으로 판단할 겁니다."

"자화자찬은 그쯤으로 됐네. 처음 계획은 어떻게 진행할 생각인가?"

"먼저 RHS 던전개발회사의 인수를 도울 겁니다. 던전개발공사와 국민연금공단의 지원이 있으면 어렵지 않게 인수할 수 있을 겁니다. 내부에서 류현수 헌터도 함께 움직이기로 했습니다."

"정부에서 사기업의 인수합병에 개입한다고 언론에서 말이 많을 텐데. 수습 방법은 계획해 뒀나?"

"계획한 건 몇 개 있긴 합니다만..."

정 장관이 난처함을 담아, 그리고 황당함도 일부 담아...

멋쩍게 웃어 보였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따로 있다?"

"네, 아마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