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5

**

얼마 지나지 않아 평원 전체를 새까맣게 뒤덮으며 오는 마수와 마족, 그리고 마왕들까지.

그레모리와 권속들은 새까맣게 죽은 안색으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레모리!

불에 뒤덮인 사자 형상의 존재가 우렁우렁한 사자후를 날린다.

─거기서 틈을 본다고 어떻게 되지는 않을 거다! 지금이라도 합류할 기회를 주겠다! 고작해야 72위에 불과한 네 영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흘끗, 내 눈치를 괜히 보던 그레모리가.

호기롭게 외쳤다.

"이분은 내 영지의 구원자이시다! 나는 신의를 배반치 않으리라! 소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흥! 좋다! 소원대로 해주마!

물론 그렇게 외치고 나서는, 나를 바라보면서 울상을 지었지만.

"저자는 45위의 마왕, 비네여요. 인간이 공개하고 싶지 않아 하는 이름을 알아내 공개하는 악취미를 가진 녀석이에요."

"당연히 72위인 당신보다는 강하겠군요."

"... 저도 구원자님이 내리신 은총 덕분에 강해져서 쉽게 패하지는 않겠지만."

비네의 군세가 끝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들판을 덮으며 끝없이 도착하는 마왕의 군세들.

그 군세가 갈라지며, 동쪽 방향에서 한 존재가 천천히 나타났다.

그레모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내 뒤로 슬금슬금 피했다.

... 마왕 맞냐고 이 누나.

"... 그가 바알이에요. 지옥의 대공작, 250 군단의 지배자, 마왕 서열 1위 자리를 놓쳐본 적이 없는 자죠."

얼핏 보면 훤칠한 남자처럼 보였지만, 턱에 거미 다리를 달아놓고, 개구리와 고양이 얼굴이 양옆에 달려있는 끔찍한 괴물이었다.

"오. 250군단이면 대충 몇 명이죠?"

"마계 군단 하나에 배속된 마족과 마수가 대충 1만 정도 되니..."

"250만?"

어딜 250만으로 비벼?

어 그래, 형이야.

형이 지배하는 군단은 수천조야.

위축될 필요가 없었다.

당당하게 나서며 말하려 했는데.

─바알! 당신의 위대한 250개 군단은 어디에 두고 단기(單騎)로 왔다는 말이오!

먼저 군단이란 군단은 다 이끌고 왔던 비네의 항의에, 바알이 쯧쯧 혀를 찼다.

─아이야, 네가 모르는 것을 나는 알고 있으며, 그 현명함이 너와 나의 판단을 가른단다.

─아, 아이라고?!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그리고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진 바알이, 비네의 앞에 나타나 사자머리의 목을 확 움켜쥐었다.

불타오르던 몸이 순식간에 불어닥친 한기에 확 꺼지고, 목을 잡힌 비네가 컥컥대며 고통을 호소했다.

─사, 살려...

─어리석은 놈.

휙, 비네의 군단 쪽으로 거구의 비네를 던져버린 바알이, 내 쪽을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소개가 늦었소, '작은 것들의 지배자'여. 아니, 그의 후계라고 해야 하나? 나는 바알. 지옥 동부에서 머무는 한 보잘것없는 노인이오.

바알은 그리드가 말한 것처럼, 내 정체를 정확히 아는 듯 보였다.

그러니까 이 양반은 그 성좌 양반을 본 적 있다 이거지?

재밌네.

"김세균입니다. 노인은 공경하자는 주의지만, 오늘은 이렇게 다들 몰려들었으니 본의 아니게 노인을 공격하는 날이 되겠습니다."

─어차피 싸우게 될 것이라면 서두를 것 없지.

"저는 있어서요."

합공당하는 것보다는 각개격파가 낫잖아?

가뜩이나 대가리도 모자란데.

"그런데 250 군단은 어디 가고 혼자 오셨어요?"

─작은 것들의 지배자에게 어설프게 머릿수를 들이밀 정도로 어리석진 않소이다. 홀로 선 것으로 보이나, 그대에게는 이 마계의 모든 마왕과 그들의 권속을 합한 것보다도 더 많은 권속이 있는 것을 알고 있소.

쳇, 들켰나.

내 능력의 어드밴티지 중에는 능력의 근원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도 있는데.

역시 고인물이란.

고인물 넘어서 석유쯤은 됐을 텐데, 이렇게 뉴비를 핍박해도 되나 몰라.

─그대는 오직 이 본신의 힘으로만 대적할 수 있는 존재. 여기에 고작해야 권속들이 낄 자리는 없소이다.

하지만 언제나 말썽꾸러기는 있는 법이지.

바알에게 쪽 당한 비네가 벌떡 일어서더니..

─나의 군단들이여! 연합들이여! 모두 진격하라! 진격하라!

동시에, 비네의 군단을 비롯한 다른 하위 마왕들의 군세도 돌격을 시작했다.

─쯧쯧.

혀를 차는 바알.

... 뭐, 내가 저걸 다 쓸어버릴 줄 알고 저러는 건가?

뭔가 저러면 기대에 부응해 줘야 할 거 같은 기분이 드는데.

백만, 백여 개 군단에 달하는 비네 연합의 군세.

그게 다 인간이었다면 나도 좀 양심의 가책이 있었을 텐데.

"대부분이 마수군요?"

"네헤? 네, 마, 맞아요."

백만 마수 군단에 압도당한 그레모리가 덜덜 떨면서 눈을 질끈 감은 채 돌아섰다.

짓밟힐 자신의 영지라도 상상했던 모양이지?

하긴, 첨탑 몇 개 날아간 걸로 통곡하던 여자니까...

마왕이라고 해도 생각보다 여리구만.

"마수면 뭐, 봐줄 것도 없지."

내가 동물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나 물어뜯으러 오는 개새끼까지 좋아해 줄 수는 없다고.

자고로 사람 무는 개는 몽둥이로 패서라도 가르쳐야 된다는 게 지론이다.

"가라."

열 배 마나통이 늘어났지만, 글러트니를 열 배만큼 확충하지는 못했다.

애초에 얘들이 먹어치우는 넥타르 양이 엄청나서...

단기간에 열 배나 확충하긴 힘들지.

"그래도... 다섯 배 정도는 된다고."

기존의 수백 조에서... 2천 조 정도는 됐다.

만땅으로 채우면 이제 경 단위는 아슬아슬하게 채울 수도 있겠지만...

그걸 채우려면 넥타르를 대체 얼마나 더 뽑아야 하는 거야?

천천히 채워야지.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지금 이런 상황에 처하니 조금 후회되긴 하네.

그렇다고 해도.

백만 대 일?

아니, 2천조 대 백만이다.

내 몸에서 휘몰아치는 거대한 세균의 안개가, 고스란히 백만 군단을 덮쳤다.

최선두에 선 비네의 정예 군단은 조금 버티는 듯했지만 곧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 그건 좀 비효율적이잖아. 머리만 날려."

잔인하긴 해도, 몸 전체를 다 분해할 필요가 없었다.

내 명령대로, 글러트니들이 마수들의 머리 위주로 순식간에 분해하기 시작했다.

100만이었던 군단이 앞에서부터 서서히, 눈에 보일 정도의 속도로 줄어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백만의 시체만 남은 벌판에서, 글러트니들은 남은 신체를 맛있게 포식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이럴 수는 없다!

군단이 날아가면서, 거대한 불사자가 점차 쪼그라드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권속은 무력이기도 하지만 곧 마왕 자신의 힘이기도 하지. 그런 권속을 소모성으로 사용하는 네 녀석이 나와 같은 마왕이라는 소리를 듣는 존재라니.

─바, 바알... 어째서...

─말렸잖나?

이 정도라고 말했어야지!

비네의 외침에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들어갔다.

바알의 잘못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이미 만류했다.

아니, 애초에 권속은 바알이 훨씬 많았다.

지금 수 명의 마왕이 연합한 결과가 100만, 100개 군단인데.

바알은 혼자서 250개의 군단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 그가 한 명의 권속도 데려오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이걸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냐고!

억울했지만, 억울함을 표출할 수조차 없었다.

비네의 시선이 그레모리의 옆에 선 인간을 향했다.

대체 바알은 저 인간의 정체를 어떻게 알았던 거지?

비네는 혼란스러웠다.

물론, 바알이 태초부터 존재한 마왕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태초의 이야기는 그도 구전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설마, 그 구전이...

─바알! 당신을 비롯한 태초의 마왕들이 설마 과거를 숨겼던 거요?!

─말해도 믿지 않았을 터인데, 우리가 왜 말해줘야겠는가?

─하지만!

그 순간.

삐이이이이!

가늘고 높게 울리는 새의 울음소리가 전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바알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도 왔군.

─... 아가레스.

지옥 동부를 바알과 양분하는 마왕.

바알의 뒤를 이어, 그 역시 2위의 자리를 단 한 차례도 놓쳐본 적이 없었다.

울음소리로 아가레스가 당도하였음을 알린 참매 한 마리가, 평원 멀리서 나타난 노인의 어깨에 안착했다.

─오랜만이군.

─오랜만이구려, 바알. 그리고...

지옥에서도 가장 학식이 뛰어난 자이기도 한, 소위 '지옥의 현인'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노인.

그가 나를 흘끗 바라보며 말했다.

"더 오랜만에 보는 존재도 있구려."

그의 목소리가 울림으로 퍼진 게 아니라.

내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깜짝 놀라 옆을 바라보니, 언제 그랬냐는 듯 노인은 내 옆에 서 있었다.

"아득히 오랜 시간이 지났군. 그 동안에 우리가 오로지 원하던 것은 하나뿐이었소. '낙원'의 재창조. 이미 지옥이 되어버린 옛 '낙원'을 다시 얻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바라는 바요."

그러면서.

그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해 말하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보내줄 수 없소, '낙원의 창조자'여."

무제한의 세균술사 109화

#시간 문제(5)

#시간 문제(5)

낙원의 창조자?

"아니, 그러니까 나는 그런 게 아니라니깐."

"알고 있소."

아가레스가 그 늙은 입꼬리에 미소를 걸었다.

"하지만 그대야말로 낙원의 유지에 있어 가장 필요한 인물이라는 건 확실하지. 그쯤이면 낙원의 창조자라고 해도 되지 않겠소?"

"아가레스."

어느새 옆에 나타난 바알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굳이 그런 사실까지 알릴 필요는 없다."

"바알, 이쪽이 효과가 더 좋을 거요. 의무의 각인 중 하나이니."

"효과는 좋지만..."

노인네들이 사람 앞에 놓고서 자꾸 씹어대네?

생각해 보니 어차피 명확히 적대하러 온 이들이다.

지금 조금 온건하게 군다고 해서 내가 마냥 받아줄 필요가 없지.

내가 무슨 성인군자도 아니고.

싸움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냐면...

선빵이다!

순식간에 백만 대군을 녹이고 회수된 글러트니들이, 그대로 확 퍼지면서 아가레스와 바알을 덮쳤다.

순식간에 흩어지는 아가레스와 바알의 형체.

그런데...

미시안으로 글러트니들의 감각을 공유할 수 있는 나는, 글러트니의 '허기'가 전혀 채워지지 않았음을 알아챘다.

즉, 허공만 공격했다는 것이었다.

"당대의 창조자는 굉장히 성급하군.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네."

멀찍이 나타난 아가레스의 목소리에.

나는 사방으로 최대한 글러트니를 퍼트렸다.

하지만.

여전히 글러트니는 적을 포착하지 못했다.

이쯤이면...

설마 실체가 아니라는 건가?

"허허, 우리는 낙원의 창조주와 함께 낙원을 만들었다네. 그자의 능력은 모두 꿰고 있지."

"'식탐'은 분명 위험한 개체이긴 하지만..."

"실체를 잡아내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아니겠나?"

아주 두 늙은이가 쌍으로 티키타카가 잘 맞는구만.

"협조할 생각이 없다면..."

"강제로라도 협조하게 하는 수밖에."

"어차피 '그'가 왔어도 협조하리라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우리를 제물 삼아 '별'의 자리에 이른, 이기적인 자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우리 역시... '그'의 총애를 입은 자네를 제물로 삼는 수밖에."

... 이 새끼들이 뭐라고 떠드는 거야?

"능력 되면 해보시던가."

이미 대비는 만전이었다.

그런데.

나와 눈을 마주친 바알이.

... 웃어?

"아직 격(格)을 올리지 않고서도 그 정도의 능력인 것은 분명 대단하네만... 하위 격에 머무르는 것의 장점도 있겠지만, 단점이 너무도 명확하지."

"각아(覺我, 스스로 깨달음)의 부재."

순간.

왜에에엥...

희미하게 울리는 파리 소리 같은 것에 나도 모르게 멍해졌다.

이거... 뭐지?

그때.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른다.

[마왕, '바알'이 자신의 권능, '파리대왕'을 사용합니다.]

[마왕, '아가레스'가 자신의 권속을 일시적으로 '바알'에게 양도합니다!]

['바알'의 권능이 한껏 강화됩니다!]

[권능, '파리대왕'의 효과로 당신의 정신이 '바알'에게 종속되려 합니다!]

뭐?

조, 종속된다고?

"물질의 격에 남아 있다는 건, 상위의 격을 제대로 갈고 닦지 못했다는 뜻이지."

"허허, '낙원의 창조주'의 후계여, 본래라면 우리가 나설 충분한 '인과'가 부족했겠지만..."

"물질의 격에 남아 있는 채로 너무도 강력해진 것이 문제지."

... 그러니까 대충 해석하면.

저레벨 상태에서 너무 세다 이 말이야?

그래서 최종보스가 떴고?

이런 씨발...

안 그래도 이제 올리려고 했다고, 레벨!

"잘 가시게."

"자네의 능력은 우리의 낙원을 만드는 데 잘 쓰겠네."

동시에 파리 날개짓 소리가 점점 커지며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이제 제정신 차리기가 어렵다.

이대로...

정말 이대로...

['그레모리의 권능 ─ 매혹'이 당신의 정신을 방어합니다!]

... 죽으라는 법은 없나.

구하러 왔구나! 그레모리!

"... 그레모리, 마왕답지 않구나. 마왕에게는 목숨같은 권능까지 벌써 저자에게 양도했더냐?"

조금 당황하는 듯 보이던 바알이.

더 세찬 날갯짓 소리를 내자.

[바알의 권능이 그레모리의 권능 합계를 아득히 초월합니다.]

[마왕, '그레모리'가 함께 제압됩니다!]

그러면서 내 앞에 뿅 나타나는 그레모리의 모습.

"..."

"..."

내가 빤히 바라보자, 울상이 된 그레모리가 고개를 푹 떨궜다.

"후에엥... 죄송해요... 저도 잡혔어요..."

망했다.

**

"실로 다행이군."

넋이 나간 채 굳어 있는 김세균의 몸.

그리고 그 옆에 선 그레모리까지.

둘을 보면서 바알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벌써 이렇게까지 강력해졌다니. 석년의 '그'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 아니, 더 우월한 건가."

"단순한 강함으로만 따지자면 그렇겠지."

"일단 가두어 두었으니, 그래도 안심이군. 한번 갇힌 이상, 저 안에서 나올 방법은 거의 없으니."

바알의 권능 중 하나인 '아득한 환영의 심연'.

저곳에 빠진 이상, 결과는 하나밖에 없었다.

무한한 심연의 나락에서, 그저 마모되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다가 그대로 산화되는 것.

파괴된 정신은 바알에게 귀속될 것이며, 귀속된 정신으로 바알은 '낙원의 창조주'의 권능을 고스란히 사용할 수 있으리라.

'김세균'을 통해서.

당장 저 무방비 상태인 김세균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죽이지 않는 이유가 그거였다.

김세균을 죽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의 권능이 훨씬 중요했다.

"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거지?"

"모르겠네. 아득하고 또 아득한 시간이 지났지."

"이번에야말로 저 무책임한 창조주 대신에 제대로 된 낙원을 만들 책임이 있네."

"그랬지."

아가레스와 바알.

두 마왕이 잠시,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하게 퇴색된 아주 먼 옛날의 일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

헬리움.

수많은 우주에 존재하는 한 세상의 이름이었다.

지구와는 또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던 세상.

'바알'과 '아가레스'.

그리고 또 몇몇 사람들.

그들이 헬리움의 절대자로 군림하는 군주였다.

그들은 마법을 활용할 수 있었으며, 이 마법이라는 범인(凡人)이 감히 따르지도 못할 힘으로 모두에게 군림할 수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이 헬리움에 한 마법사가 나타났다.

지금까지의 마법 체계와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마법을 들고서.

그는 보이지 않는 미세한 것들의 지배자였다.

아득한 강자인 바알과 아가레스조차도 감히 그 힘을 짐작조차 하지 못할 위대한 힘이 있었지만, 그 남자는 군림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수많은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어느 날 고향에 돌아왔다.

그리고 군주들에게 말했다.

"모두에게 영생을 선물한다면, 축복이 될 것인가? 아니면 저주가 될 것인가? 그대들의 판단에 따르겠다."

누구보다도 강력하였으나, 영원한 삶은 없었던 군주들은 반색했다.

"당연히 축복이지."

"축복이고말고."

특히 바알과 아가레스는 더욱 기뻐했다.

역사를 놓고서도 감히 비견할 바 없던 강자였던 그들조차도,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고 있던 때였으니까.

"그대들의 판단을 후회하지 않겠소?"

"당연하지!"

"감히 군주를 어찌 보고! 한 입으로 두 말 하지 않는다!"

"좋소, 그렇다면."

그렇게...

'낙원'이 열렸다.

'수명'이 사라진 세계.

모두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세계.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은 '낙원'이 평화롭게 유지될 수 없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일단 먼저 '자원'이 문제였다.

위대한 군주들이 자신들의 힘을 동원하여 어떻게든 자원을 분배해보려 했지만...

죽지 않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쌓이며 행성 전체를 포화했다.

그들을 모두 구제할 방법은 비록 위대한 군주인 그들이었지만, 존재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군주들은 명령을 내렸다.

"투쟁하라, 서로 싸워라."

"오직 강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살 수 있는' 세계였지만.

'사는' 세계는 아니었다.

그렇게...

헬리움.

아니.

헬(Hell)은.

영원한 투쟁만이 남은 지옥이 되었다.

이럴 줄은 몰랐다.

태초의 군주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이 원하던 건 낙원이지 영원한 투쟁의 지옥이 아니었다.

그리고...

"만약 '낙원의 창조자'가 다시 온다면."

"이번에는 모두에게 영원을 주는 우를 범하지는 않겠다."

"오직 우리만이..."

"영원할 수 있는 존재가 될 것이다."

**

미치겠네.

"하아."

그래,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랭킹 72위따리가 1위랑 2위 합공을 방어하는 게 맞냐.

그게 더 밸런스 붕괴겠다.

"저는 어지간한 정신적인 공격에는 강력한 면역이 있는데... 역시 태초의 마왕들이에요. 특히 바알은 이쪽으로 워낙에 유명해요. 아가레스 역시 마찬가지고요."

"일단 이걸 깰 방법부터 생각해 보죠."

상대가 강하단 이야기는 들어봐야 전혀 위안거리가 안 된다고.

"그나저나 여긴 어디지..."

"정신세계일 거예요."

"정신세계?"

"여기에 아득한 세월 동안 제압해 두면서, 우리의 정신 장벽을 무너트리려는 속셈이겠죠."

"아득한 세월이면."

"적어도 수십만, 수백만 년이요."

... 아무리 시간 많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기다린다고?

"바깥에서는 찰나의 시간이겠지만요. 어차피 개념적 세계에 갇힌 거라서, 시간은 중요치 않아요."

망할.

그럼 그렇지.

그래도 뭔가 어찌 된 영문인지 알기라도 하니 다행이다.

아니, 다행이 아닌 건가.

더 절망적이긴 한데.

"어쨌든, 해결할 시간은 충분하겠군요."

그런데...

정신세계에 갇혔는데 왜 내 아이템들은 다 멀쩡히 착용 상태지?

"인벤토리도 열리네."

시스템에는 개입하지 못하는 건가.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여기에 빠졌는데 아이템까지 없었으면 절망스러울 뻔했거든.

내 반쯤은 템빨이니까.

"일단 그레모리 당신은 나갈 궁리를 좀..."

"나갈 수가 없어요."

너무 즉답 아냐? 

노오력이 부족한 거 아냐?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얼굴을 붉히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마왕 사이의 상하관계는 절대적이에요. 저걸 파훼하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어요. 제가 바알... 아니 바알과 아가레스를 합한 것만큼의 권능을 얻는 것... 이 안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죠."

괜히 지레 포기한 게 아니구만.

"그레모리."

"네, 구원자님."

"구원자는 무슨. 나 때문에 다 망했는데. 원망해도 돼요."

"아, 아뇨...!"

그레모리가 손사래를 치며 단호히 말했다.

"마족이 아니셔서 마왕이 권능을 나누었다는 걸 잘 모르시는 거 같네요. 마족이 누군가에게 권능을 나누었다는 건, 그와 운명을 함께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에요. 이런 상황도 제가 선택한 운명이라는 거죠."

"운명치고는 기구하네요."

나도 그렇고.

너무 세져서 이렇게 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세상 모든 걸 다 분해해 버리는 능력으로도 상대가 안 되는 존재가 있을 줄도 몰랐다.

그렇다고 딱히 방심했던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벌러덩 드러누운 채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한동안 시간은 있을 테니, 생각 좀 해보자.

여기서 나가려면 그레모리의 권능이 둘을 능가해야 한다고 했지?

권능을 어떻게 올리지?

뭐, 드래곤X마냥 여기서 수련해?

그런다고 올라가긴 하려나.

"... 그러고 보니."

넥타르를 보고서 마신의 힘 어쩌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레모리."

"네."

"그 마신의 힘."

"아!!"

어디서 그런 박력이 나왔는지, 황급히 내게로 우다다 달려와 얼굴을 맞댄다.

가까워! 너무 가깝다고!

"그, 그게 있었지요?! 혹시 더..."

"있긴 있지요."

그날 다 쓰고, 몇 달 정도 열심히 술 빚으면서 만들어뒀거든.

5배로 추출량이 늘어나서 이제 꽤 만드는 보람이 있었다.

"그, 그거라면 가능해요. 무, 물론... 많아야 하긴 하지만."

"흠."

여기서 탈출한다고 괜히 다른 괴물 하나 더 만드는 거 아닌가 몰라.

그렇긴 해도.

확실히 이것보다 확실한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그다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가지고 있는 넥타르 분량만으로 충분하려나?

당연히 부족하겠지?

그렇다고 여기서 숨을 담글 수도 없고...

... 라고 생각하면서 땅을 보니까.

 

"... 흙이네."

마계의 거무칙칙한, 철분 많아 보이는 흙이었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흙에 영양을 공급하는 건 99% 미생물의 영향이다.

미생물?

그거 내 전문이잖아.

내게는 지금 군단들도 고스란히 있었고, 아이템도 있고, 인벤토리도 있었다.

규선 씨와 연락이 닿으면 더 좋겠지만, 나도 공부 열심히 했단 말이지.

종자는 많이 있었다.

연구하려고 쌀 종자는 꽤 구해다가 종류별로 갖고 있거든.

정신세계에서 이게 가능한 짓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가능한지 안 가능한지 알아보려면 해보면 되는 거 아니겠어?

"뭐, 뭘 하시려고..."

"농사나 좀... 지어보려고요."

순간 그레모리의 시선에 황당함이 담겼다.

알아, 알아. 미친놈 보듯이 보지 말라고.

"다 생각이 있어서 그래요, 생각이."

일단 쌀만 지어서 수확할 수 있으면, 나머지는 싹 해결이다.

"일단 이거부터 마시고 있어 봐요."

가지고 있던 넥타르를 전부 그레모리에게 건네주었다.

아깝긴 하지만, 원래 이길 도박에는 판돈을 아끼지 말라고 그랬다.

도박으로 패가망신한 놈이나 할 것 같은 말이긴 하군.

그렇게...

옆에는 넥타르의 힘에 거나하게 취해가는 그레모리를 두고서.

내 농사가 시작되었다.

무제한의 세균술사 110화

#대반격(1)

#대반격(1)

"농사짓는 분들이 봤다가는 극대노할 광경이군."

사실 농사짓는다고 말하기도 민망했다.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모든 과정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니까.

우선 그리드를 풀어 농사짓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금속 성분을 회수했다.

그 과정에서...

[별의 유물 파편]

[금 조각]

[백금 조각]

여러 귀금속이 딸려 나온 건 덤이었다.

그런데 신기하네.

정신 공간이라면서 아이템은 전부 사용할 수 있고, 이런 물질도 아이템으로 나오다니.

"어쩌면 내가 시스템의 원리에 접근한 거일지도?"

... 그래서?

접근했으면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뭐 없지 뭐...

헛생각 하지 말고 여기서 탈출할 생각이나 하자.

일단 금속 성분을 회수하고, 프라이드로 변형한 미생물들로 밭을 활성화하는 것까지는 쉬웠다.

문제는 물인데.

"그건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

마왕쯤 되면 아무래도 마법은 일가견이 있을 수밖에 없는 건가.

그레모리의 손짓에, 갑자기 쏴아아 비가 내렸다.

한 번 촉촉하게 젖은 땅에, 글러트니가 쫙 고랑까지 팠다.

"자, 이제 일합시다."

"... 저도요?"

"그럼 여기 일할 사람이 누가 있어요? 빨리 해야 빨리 나가요. 안 나가고 싶어요?"

"나가고 싶어요..."

"그러면 서두릅시다."

오랜만에 아테나까지 꺼냈다.

아테나는 팔을 길쭉하게 삽 모양으로 바꿔서 일했다.

... 잘하는데?

그때였다.

[뀨뀨가 소환을 원합니다.]

아니 뀨뀨까지 소환이 되는 거야?

이 공간 대체 뭐야?

"뀨뀨 소환."

─뀨우우우우우!

나오자마자 내 품에 안겨서 한동안 비비적대던 뀨뀨가, 밭으로 나가서 몸을 뒹굴었다.

"뀨뀨야, 흙 묻어! 지지야 지지."

말렸는데도 이젠 아예 땅까지 파고든다.

그런데...

[슬라임 로드, '뀨뀨'가 방대한 범위를 비옥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소요 시간 : 1시간 7분 8초]

"와우."

뀨뀨 너까지 밥값을 해주는구나.

그냥 존재 자체도 귀여워서 밥값이긴 하지만.

그러면 우리도 빨리 움직여야지.

글러트니가 낸 고랑을 따라, 나랑 그레모리, 아테나는 종자를 하나씩 심기 시작했다.

다른 건 몰라도 종자는 귀하니까.

조심히 키워야지.

"허리가 아파요..."

"어허, 두 번 심고 허리 펴면 됩니까 안 됩니까?"

"... 안 되나요."

"원래 세 번 심고 펴는 게 국룰이에요."

"후아앙..."

고귀한 마왕님이 언제 이런 경험을 해봤겠냐 싶긴 하네.

그래도 농촌 체험... 요즘은 돈 내고도 하는 경험인데.

다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하세요.

뭐 간만에 군대 생각나고 좋네.

아, 좋진 않고.

그렇게 거의 열 시간 넘게 종자를 심은 뒤에야 가지고 있던 종자가 끝이 났다.

이제 기다리는 것만 남았네.

아무리 바깥에서는 시간이 거의 안 흐른다고 해도, 여기서 뭐 하냐.

미생물들로 통상 속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작물 성장 속도를 끌어올리긴 했지만.

그래도 하루 이틀로 될 일은 아니다.

한동안 심심할 거 같긴 한데.

오히려 잘 됐다.

"또 당할 수는 없지."

이 바알 놈의 새끼.

거기 꼼짝 말고 있어라.

나가서 아주 마/왕을 만들어 주겠어.

**

바알과 아가레스는 김세균의 혼 빠진 육신을 둔 채로, 한동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기다림이라."

"한동안 느끼기 힘든 감정이었지."

마왕이 된 이후에는 기다릴 일이 거의 없었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이면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으니까.

"그냥 배속을 높이면 안 되나?"

"그랬다가는 종속되는 게 아니라 정신이 파괴될 수도 있네. 적당한 수준으로 배속은 걸어두고, 지켜봐야겠지. 원하는 게 시체였다면 어렵지도 않았지, 그렇지 않나?"

"... 자네 말이 맞겠지."

"자, 그러면 뭘 하고 있는지 한 번 볼까?"

그런데.

바알이 신경 쓰게 하는 마기의 흐름이 인근에서 느껴졌다.

"아몬인가."

제 7마왕 아몬.

6마왕 까지는 태초의 마왕들이었기에 굳이 방해하지는 않을 터였다.

3~6마왕은 이미 권태에 빠져버린 이들.

그들은 권속의 힘을 바알과 아가레스에게 양도하고는 모든 것을 위임했다.

하지만, 7마왕부터는...

마계의 '창세'를 알지 못하는.

'낙원'을 알지 못하는, 투쟁의 시대 이후의 존재들이었다.

─바알이여! 아가레스여! 그대들이 '마신'의 힘을 독점하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도다! 그 힘은 나의 것이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탐욕. 강욕이 아가레스의 미간을 찌푸리게 했다.

감정의 통제를 미덕으로 삼는 절제의 마왕답게, 아가레스는 그 강욕의 파편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불쾌감을 느꼈다.

아몬뿐만이 아니었다.

상위 격의 마왕들이 대규모로 몰려들고 있었다.

"어리석은 것들... 마신의 힘 같은 허상에 현혹되다니."

"잘 된 게 아니겠는가. 어차피 새 낙원에서는 쓸어버려야 할 것들이었으니."

"그렇긴 하지."

"내가 맡지."

아가레스가 앞으로 나서며 아득히 많은 지옥의 군세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광범위한 범위에 지진이 발생하며, 수많은 군세들이 그대로 갈라진 틈으로 삼켜졌다.

삼켜진 뒤에 다시 닫히는 지면.

아가레스의 단순한 일수에, 거의 수백만에 달하는 마족과 마수들이 사라졌다.

─아가레스으으으으!!

분노한 아몬과 몇몇 마왕들이 덤볐지만.

"쯧쯧."

혀를 차며 다시 손을 휘두르자.

그들의 몸에서 수많은 희끄무레한 팔이 튀어나왔다.

─이, 이게 뭐냐!

당황한 듯 놀란 아몬이, 순식간에 자신의 몸에서 돋아난 팔에 전신이 압박당했다.

─커흐윽!

아몬의 목을 조르는 손.

바알이 그걸 보며 빙그레 웃었다.

"역시, 업(業)을 쓰는 힘은 여전하군."

상대의 격이 높으면 높을수록.

영적으로 존엄하면 존엄한 존재일수록.

아가레스의 힘은 덩달아 강해졌다.

그는 격 높은 상대의 업을 비틀어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죄업(罪業)이 많은 존재라면 더욱 상대하기 쉬웠다.

다른 마왕들도 덤벼들다가 아가레스에게 제압당한 뒤에 분통을 터트렸다.

"마신의 힘을 독점하려 들다니!"

"... 그렇게 말하는 자네들도 혼자 먹을 수 있다면 먹으려고 오지 않았던가?"

"..."

"그렇지만 걱정하지 말게나. 어차피 그런 힘은 거의 남지 않았으니."

바알이 웃으며 그런 아가레스를 지켜보다가, 서서히 자신의 심연으로 시선을 옮겼다.

수만 배의 시간 배수를 걸어놨으니, 이 잠깐의 시간 동안에도 몇 개월은 족히 지났으리라.

과연 심상세계에서, 김세균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을까.

미쳤을까?

분노로 여전히 빠져나올 방법을 궁리 중일까?

"뭐... 아직은 너무 이르지."

이제 반응을 보면서 서서히 그를 정신적으로 말려죽일 일만 남았다.

그레모리라는 존재가 함께 들어간 건 예상 밖이었지만...

어차피 둘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의지할 상대가 있으니 조금 더 길어지긴 하겠지만.

그 길어짐의 시간배수도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는 것이 그의 심상세계이니.

수백만 년의 시간도 하루아침에 만들어낼 수 있었다.

"어디 보자..."

바알이 자신의 그 늙고 깊은 눈을 심연으로 옮겼을 때.

그의 눈에.

이례적으로 당황한 기색이 물들었다.

대체... 저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그가 본 것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버린 들판과 무언가에 거나하게 취해버린 그레모리의 모습이었다.

잠시 멍해져서 어떻게 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가만히 둘 수는 없..."

바로 그때.

잔뜩 취한 그레모리가 휘청거리며 일어나더니...

─야!! 영감탱이!!

알 수 없는 외침과 함께.

그대로 공간을 향해 정권을 날려버렸다.

쩌어어어억!

유리처럼 금이 쩍 가는 공간.

"크아아아아악!"

심연을 바라보고 있던 바알의 눈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그의 입에서도, 귀에서도...

전신의 모든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눈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바알은 어떻게든 깨진 심상세계를 수습하려 애를 썼다.

그러나...

"그, 그레모리... 어째서..."

어떻게.

그녀에게 '신'이...!

"바알! 어떻게 된 일인가!"

아가레스가 당황해서 물었지만, 그에 답할 정신조차도 없었다.

멍하니 있던 그의 머릿속 심상세계가.

심연이.

쨍!

그대로 깨지는 소리가 머릿속 전체에 울렸다.

"우웨에에에엑!"

검은색의 악취 가득한 물질과 파리 떼가 그의 입에서 쏟아져나왔다.

동시에.

김세균과 그레모리의 몸에,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하는 걸 느끼는 아가레스.

"이런..."

완전히 정신을 차린 김세균이.

그제야 후우,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흘끗 보더니.

"안에서 1년 동안 농사짓고 술만 담갔다 씹새들아."

울분을 담아.

"다 뒤졌다."

한껏 으르렁거렸다.

문제는 김세균뿐이 아니었다.

"그레... 모리..."

김세균과는 다르게, 그 아름다운 미소를 담아 싱긋 웃는 그레모리.

그러나, 그 웃음 이면에 담긴 분노의 감정을 모를 리 없는 아가레스다.

잔뜩 술에 취해 배시시 웃으면서...

"아가레스... 딸꾹... 언제 이렇게... 딸꾹... 작아지셨나요?"

마왕은 물리적 크기로 상대를 판단하지 않는다.

오직 격의 차이를 볼 뿐이다.

그레모리가 보는 아가레스와 바알의 크기는...

아득한 거인이었던 이전과는 명백히 달랐다.

**

1년이었다.

거의 1년을 쌀 재배에 그레모리에게 술 먹이고를 반복.

다행인 건 그레모리가 마왕의 육체를 입고 있기에 술에 좀 취해도 알코올 중독이 될 일은 없다는 거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레모리가 심연의 장벽을 부쉈다.

장벽이 부서지자, 의식이 순식간에 빨려 나가는 걸 느꼈다.

"... 내 몸이네."

그제야 안도감이 들었다.

흘끗 두 노인네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날 1년 동안 개고생을 시켜?

"아가레... 스...! 정신 차려라! 아직 끝나지 않았...!"

피를 토하면서 외치는 바알.

그 외침에 아가레스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 거기서 빠져나왔다고 해도, 네 녀석은 아직 멀었다. '질투'가 없는 이상 우리를 상대로 승리할 수 없다..."

질투? 

그건 또 좋은 개체인가 보지?

언젠간 얻어야겠지만.

"직접 상대할 힘이 없다면... 머리를 써야지."

안에서 시간이 많았다.

그레모리와 그 많은 시간 동안에 뭘 했겠어?

쎄쎄쎄?

아니.

나와서 저 둘을 이길 궁리만 했다.

그 결과로 내린 결론은.

"보급선을 끊으면 되는 거 아냐?"

병력은 먹어야 싸울 수 있는 것처럼.

마왕도 '권속'들이 있어야 '왕'의 힘을 쓸 수 있다.

본인이 쌓아 올린 격도 충분히 강하겠지만.

본격적인 힘은...

권속들을 통해 수급받는 힘이다.

그렇다면야...

"힘을 공급할 권속만 없으면 되는 거 아냐?"

동시에.

메탄균으로 형성한 메탄을 점화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내 속셈을 알아차렸는지, 바알이 다급히 촉수를 뻗었지만.

"두 분은 제가 상대해드릴게요."

그레모리가 희게 웃으며 길게 뻗어지는 바알의 팔을 잘라버렸다.

바알과 아가레스의 안색이 순간 창백해졌다.

물론, 그레모리가 아무리 강해졌다고 해도 그들 둘의 힘을 순식간에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심상공간을 깨고 나올 정도였을 뿐.

하지만...

발을 묶어두기엔 충분한 강함이었다.

그러면 그레모리가 발을 묶는 동안에...

"안 돼!"

아무리 '질투'를 가지고 있지 못해서 그들 둘을 직접적으로 상대할 힘이 없다지만.

권속들은 예외였다.

수백만, 수천만에 달하는 권속들은.

순식간에 쓸려 나갈 터였다.

식탐(글러트니)은...

그런 존재였다.

식탐의 무서움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바알과 아가레스가 떨며 외쳤다.

"막아!"

"누구라도! 막아라!"

그렇지만, 내 비행을 막으러 날아드는 마수들은...

감히 접근조차 하지 못한 채 흩어져 사라질 뿐이었다.

"마계를 석기시대로 만들어 주마."

이게 1년 동안 갇혀서 쌀농사만 지은 사람의 분노다.

쌀농사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무제한의 세균술사 111화

#대반격(2)

#대반격(2)

마족이라고 해도 인격체였다.

게다가 예전에 인간이었다니...

이걸 다 쓸어버리는 데 거부감이 없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레모리와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누면서 거부감이 거의 다 희석되었다.

"그들은 마족이에요.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투쟁하다가 더 강한 힘에 패배하여 스러지는 것. 그거야말로 마족의 운명이랍니다. 여기는 마계니..."

"마계에서는 마계의 법도를 따르라 이 말입니까?"

"그거예요."

어차피 바알이나 아가레스를 잡을 별다른 방법이 없기도 했다.

2차원의 존재가 아무리 강해져도 3차원을 이길 수 없는 것처럼.

그레모리는 위상(位相) 자체가 다르다고 했다.

"상대하기 위해서는 위상을 격하시키거나 맞추는 수밖에 없어요."

"... 위상을 이 안에서 당장 맞출 방법은 없으니."

"네, 위상을 격하하는 거죠."

며칠 쌀농사를 지으며 마음을 정리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생각해 보니까... 이승에서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가는데, 지옥에서 죄를 지으면 어디 가겠어요? 더 갈 데가 없잖아?"

그걸 우리말로 '갈 데까지 간 놈'이라고 하지.

그게 나야.

갈 데까지 간 놈.

"네?"

"... 그냥 헛소리에요."

마계 친구들은 역시 농담에 약하다.

그러니 빨리 이 재미없는 곳에서 나가야겠다.

**

제일 먼저 향한 것은 아가레스의 영지였다.

동쪽 끝에 있는 바알의 영지와 접경지대에 있는 아가레스의 영지에 먼저 도달하는 건 당연했다.

그곳은 그레모리의 영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되어 있었다.

역시 대감집이다.

서둘러야겠다.

그레모리가 얼마나 버텨줄지 모르니.

괜히 머뭇거리다가 두 마왕이 와서 방해하면 죽도 밥도 안 될 거다.

그건 사양이지.

아가레스의 영지를 쭉 날면서, 글러트니를 광범위한 범위에 퍼트렸다.

아가레스의 영지는 엄청나게 거대했다.

하지만, 어느 땅이나 그렇듯 인구 밀집 지대는 정해져 있었다.

아가레스 영지의 수도 격이라 할 수 있는 곳에, 중점적으로 글러트니가 퍼져 나갔다.

글러트니뿐이 아니었다.

프라이드도 생명체라면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인수공통전염병으로 둔갑해 퍼졌다.

메탄생성균으로 폭격 비스무리한 것까지 해 볼까 하다가 참았다.

─뀨! 

거기에 뀨뀨가 자신에게도 맡겨달라길래 풀어줬더니...

─뀨우우우우!!

아가레스의 영지성 지하에도 슬라임들은 존재했던 듯, 뀨뀨의 외침에 스멀스멀 지상으로 올라왔다.

슬라임이 만들어내는 축축한 환경이야말로 역병 창궐에는 가장 적합했다.

거기에, 마계라고 해도 전염병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지.

하수구 슬라임들이 보유한 막대한 전염병을 향해, 프라이드 군체들이 명령을 내렸다.

프라이드의 권능인 더 낮은 격의 병원체를 향한 지배력의 투사가 펼쳐졌다.

하늘을 날면서 불과 몇십 초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드, 너도 한따까리 할래?"

─ 흥 . 미 . 없 . 다.

까탈스러운 녀석 같으니.

그래도 그리드의 힘 정도면 꽤 도움이 될 텐데.

본인이 거절하는데 굳이 억지로 시킬 생각은 없다.

나머지로 안 되면 그 때 동원하지 뭐.

그렇게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퍼트린 뒤에...

내가 할 일은 잠자코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시작은, 글러트니 군체가 지상에 안착한 직후였다.

순식간에 분해되는 마족과 마수 개체들.

그런데...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응?"

처음에 메시지 하나로 시작했던 것이..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50레벨을 달성하셨습니다.]

[보상으로 '재료 아이템 선택권(大)'이 주어집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60레벨을 달성하셨습니다.]

[보상으로 메인 스테이터스가 증가합니다.]

[당신의 메인 스테이터스 '통제력'이 10% 증가하였습니다.]

뭐야 이거... 무서워.

뭐가 어떻게 된... 

아, 잠깐 잊고 있었는데.

여기 게이트 안이었지?

그러면 여기 안의 존재들은 기본적으로 몬스터 판정이고.

그 말인즉슨...

레벨이...

미친 듯이 올랐다.

단번에 근 17레벨은 오른 거 같은데.

이제 60레벨이다.

그리고, 드디어 250%의 벽을 깨고 통제력이 올랐다.

260%라니.

대체 얼마 만에 250%를 넘은 통제력이지.

60레벨이 되니까 오르는 걸 보니... 이것도 레벨 제한에 막혀 있던 건가.

뭐 생각을 이어갈 틈도 없이...

[필드 보스, '칼리만'이 사망했습니다.]

[지역 보스, '갈리오런데'가 사망했습니다.]

....

각종 보스 클리어 사인까지.

칭호도 셀 수 없이 많이 받았다.

그 과정에서...

[통제력] : 300%

드디어 300%에 올랐다.

[통제력이 300%에 도달하여 '글러트니'의 추가 권능, '사냥개의 허기'가 발현됩니다.]

[사냥개의 허기]

설명 : 크르르륵! 컹컹! 크르륵! 컹컹컹!

내용 : 한 번 추적 대상으로 삼은 개체에 표식을 남긴다. 표식이 남은 적은 글러트니의 인지범위에 들어온다면 바로 공격 대상이 된다. 표식이 남은 적을 추격할 때, 글러트니의 비행 속도가 1000% 증가한다.

[통제력이 300%에 도달하여 '프라이드'의 추가 권능, '생물화'가 발현됩니다.]

[생물화]

설명 : 인간? 그거 고작해야 40조의 세포로 이루어진 존재 아니던가? 모든 미생물로 분화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세포로 변하지 못하리라는 법도 없겠지.

내용 : 충분한 개체가 갖춰진다면, 해당 군집을 특정 생물의 형태로 변화시킬 수 있다. 해당 생물의 '격'에 따라 재현도가 달라진다. 원하는 생물체로 변화시키려면 미시안을 사용해서 대상을 충분히 관찰하여 100%의 관찰도를 얻어야 한다.

추가 권능이 발현된 건 두 개의 개체들.

그리드 왜 너는 아무것도 없냐.

─ 나 . 는 . 스 . 스 . 로 . 개 . 선 . 중.

아아, 그래...

그나저나 레벨 상승은 60에서 끝난 게 아니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다시 상승 러쉬를 시작하는 레벨이다.

이러다가 여기서 70레벨 찍는 거 아니야?

생각해 보니 여기 레벨 스케일링 게이트였지.

가능성 있겠는데...

케에에에엑!

쓸려가는 아가레스의 영지에서, 몇 차례 비행 타입의 마수나 마족이 날아 올라와서 공격하기도 했지만, 곧바로 분해될 따름이었다.

새로운 권능을 얻은 글러트니 군단은 날개라도 단 듯이 적극적으로 아가레스의 권속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다음은 바알 영지인가.

서둘러야겠다.

그레모리, 잘 버티고 있겠지?

**

"격은 애써 맞춰왔다만..."

"그레모리, 너와 우리 경험의 차이는 파리와 용의 차이보다도 거대하도다."

"차라리 우리에게 합류하는 건 어떻겠더냐. 네게도 새로 열릴 '낙원'의 지분을 양도하겠다."

바알, 아가레스와 맞선 그레모리는 그들의 사탕 발린 말에 피식 웃었다.

"내가 구원자님과 지분을 나누었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요."

"기껏해야 일부 정도겠지."

"그 정도는 우리가 해결해 줄 수 있다."

"일부? 분명 일부긴 했지요."

하지만.

"그 정도나 되는 마신님의 은총을 받으면서 지분이 그대로일 수가 없잖아요."

"설마설마 했더니."

"정말로 '신격'의 힘을 그 애송이가..."

"이미 제 힘의 절반은 그분의 것이에요. 저는 더 넘기고 싶었지만, 거절하시더군요."

사실 절반에 약간 못 미쳤다.

과반 지분을 넘으면 그 사람이 '마왕'의 격을 얻기에...

마왕이 되고 싶지 않았던 세균이 절반 이상을 받는 걸 강력 거부한 거였다.

"어쨌든, 이 힘의 절반이나 되는 것을 부담할 수 있다면 부담해보시죠."

"..."

묵묵부답이 되는 아가레스와 그레모리다.

그들에게 필적할 수준의 격을 만들어 온 그레모리의 격의 절반이다.

그걸 지금 시점에서 부담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게 김세균에게로 향하면.

과연 감당이 될까?

"어쩔 수 없군."

"그레모리 너를 죽이고, 네 힘을 취하겠다."

"... 할 수 있으면 해보던가. 영감탱이들."

그레모리의 예쁜 입에서 험한 말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아가레스의 손이 뻗어지며 그레모리의 전신에서 손이 튀어나왔다.

45위의 마왕조차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했던 아가레스의 권능.

그것에 휘말린 그레모리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어리석네요, 그 현명하다던 아가레스 당신이 눈이 흐려졌을까요?"

"...?"

그레모리가 살짝 힘을 주자.

쩌저저적! 순식간에 몸을 둘러싼 손에 거미줄같은 실금이 가더니, 그대로 산산이 파편이 되어 부서졌다.

아가레스의 미간에 거미줄보다도 깊고 성긴 주름이 생겨났다.

"... 그런가."

"이제 아시네요."

이미 절반의 지분을 양도한 그레모리의 격은...

가진 힘의 절반.

하지만, 실제 사용할 수 있는 힘은 김세균에게 위임받은 전부다.

아가레스의 권능은 실체의 격에 근거해서 발동되지만.

실제 힘은 그 두배니까...

"이게 당신의 그 아득한 권능에 대한 파훼법이었어요."

"그래, 탐욕 그득한 마왕 중에서는 그 파훼법을 따를 녀석이 없을 줄 알았다만."

마왕에게 힘은 목숨과도 같은 것이다.

그 힘을 절반이나 남에게 양도할 수 있는 마왕은 없다시피 했다.

"하는 수 없군."

권능이 없는 상태에서도, 아가레스는 충분히 강했다.

게다가, 그 뒤에는 바알까지 있었다.

다만, 바알은 이미 심상세계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타격을 입은 상황.

"힘든 건 알겠지만, 서둘러야겠어. 창조자의 '식탐'을 막을 수 있는 건 우리뿐이라네."

"... 알겠다."

바알이 몸을 일으켜 나서려는 그 순간.

아가레스가 심장을 부여잡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커흐윽!"

"괜찮나?!"

"괘, 괜찮... 우우욱!"

얼핏 보아도 괜찮지 않았다.

그의 전신에서 희끄무레한 권능이 빠져나가는 모습이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바알이 창백한 안색으로 외쳤다.

"어찌 벌써!"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의 '낙원의 창조주'를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상대하는 건 '김세균'이지 '창조주'가 아니었다.

거의 비슷하긴 했지만...

당시의 창조주에게는...

김세균과 같은 엄청난 비행 능력이 없었다.

눈으로 쫓기도 힘들 정도의 음속 몇 배의 속도로 날아가는 김세균.

그 상태에서 상공에서 최대한 넓은 권역에 권속을 흩뿌리며, 동시에 그 개체들에 전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압도적 지배력까지.

"크하아아아악!"

바알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니, 그것보다 더 심각하게.

검은 피를 몇 바가지나 쏟아내는 아가레스.

권속들에게서 공유받은 힘이 빠져나가면서, 상위 격의 형상이 유지되지 못하고 붕괴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이제 마계에는 무한한 생명의 근원도 없었다.

권속들에게서 힘의 지분을 받아 그것으로 버티던 아가레스에게서 권속이 사라지자...

형편없이 순식간에 늙어버렸다.

심지어, 그의 '악마의 형상'도 사라졌다.

볼품없는 인간만이 거기에 남을 뿐이었다.

"아가레스...!"

바알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사라지려고 몸을 흩어버리기 시작했다.

마계 그 어떤 공간이라도 순간이동할 수 있는 바알의 권능 중 하나였다.

물론, 가만히 두고 볼 그레모리가 아니다.

"바알, 잊으셨나요? 여기가 당신의 영지라면 제가 당신의 권능을 막을 방법이 없지만..."

여기는.

그레모리의 땅.

마왕 그레모리의 영지였고, 이들은 침략군이었다.

"크윽..."

바알이 자신의 발을 휘감은 가시투성이의 장미 줄기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힘의 차이가 압도적일 때야 영지고 뭐고 압도적인 힘으로 무시할 수 있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당신이 모든 마왕, 아니 마계 전체에 가르친 교훈 아니었던가요?'

그레모리가 희게 웃으며 손을 들어올리자.

그녀의 권속들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레모리는 알고 있었다.

오랜 시간 저 거대한 힘을 다루어 온 바알, 아가레스와는 다르게.

그녀는 이렇게 거대한 힘을 쥐고 있더라도 제대로 다룰 수 없다는 것을.

그렇다면...

그레모리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그녀의 남은 힘들이.

영지의 권속들에게로 전달되었다.

강력한 힘을 얻은 그레모리 영지의 마족과 마수들이 감히 바라볼 수조차 없었던 바알을 향해 이를 들이밀었다.

"저는, 당신들이 만든 마계의 질서를 거부합니다."

바알과 아가레스가 권속들로부터 일방적으로 힘을 착취하는 존재라면.

아니, 모든 마왕이.

마계의 구조가 그런 것이라면.

그레모리는...

질서를 거부할 것이었다.

그녀는.

마계에 새 질서를 창조할 것이었다.

무제한의 세균술사 112화

#게이트주(1)

#게이트주(1)

한참 동안이나 바알의 권속들을 쓸어버리고 있을 무렵.

[더 이상 당신을 적대하는 대상이 없습니다.]

[대서사시 임무 69/70, '영원의 종말'이 완료되었습니다.]

[대서사시 임무 70/70, '새로운 땅'이 시작됩니다.]

[그레모리를 만나십시오.]

메시지가 떠올랐다.

... 벌써 끝났나?

그레모리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니.

피를 쏟은 채 쓰러진 아가레스와 바알, 그리고 엄청난 격전을 벌인 듯 초토화되어있는 주변이 보였다.

설마 그레모리도...

"구원자님."

아니군, 다행이다.

"괜찮아요? 어디 다친 곳은..."

"제 권능을 아시면서..."

아... 치유의 권능이었지.

"심지어 마신의 힘을 계속 얻으면서 권능이 더 강해졌답니다."

"잘됐네요."

그녀와 잠깐 가볍게 얘기를 나누고 있자니...

뒤쪽에서 바알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레...모리... 속지... 마라... 그...는 파...괴...자..."

"아직까지 그 소리인가요?"

"지옥...찬탈자...가... 누구 것인...지..."

지옥찬탈자?

그리드를 말하는 건가?

그리드가 뭐 어쨌는데?

"그... 는..."

바알이 마지막 힘을 담아 무어라 말하려고 할 때였다.

바알이 걸치고 있는 옷에서 황금이 모이더니, 주변에 떨어져 있던 황금이 액체 상태로 녹아 그대로 바알 앞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인간 한 명 정도의 크기로 뭉친 황금이, 한 명의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했다.

"바... 사... 고..."

배를 드러낸 황금빛 식스팩 근육질 몸매에 당연히 금발을 한...

어... 금발 태닝 양아치?

...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남자였다.

내가 경계하며 글러트니를 끌어모으자, 바사고라 불린 금태양... 이 양손을 올리며 항복 의사를 표했다.

"워워, 난 싸울 생각 없다고. 이미 양도했던 권속도 회수했고."

"3마왕 바사고예요. 비교적 온건하고 인간에게도 호의적인 몇 안 되는 마왕 중 하나죠."

"후후, 그레모리 당신만 할까. 오랜만이야, 예쁜이."

그레모리는 기겁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마왕이기도 하고요."

"그건 슬픈 소리로군."

"여기 온 그 꿍꿍이부터 풀어놓으세요."

"꿍꿍이라니, 섭섭하군. 그냥 사과도 좀 하고..."

"사과?"

"어찌 되었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권속을 빌려주었으니까. 창조주의 후계인 그쪽을 적대했다고 생각해도 이상하지는 않지."

그랬지.

3마왕부터 6마왕까지 두 마왕에게 권속을 양도했다고 했다.

회수권도 있나 보군.

"궁금할 것 같아서. 옛날 이야기나 좀 하러 왔지. 아마 거기 있는 그레모리는 모르는 이야기일 테고."

"그냥 이야기만 하려는 거면 굳이 적대할 필요는 없겠죠."

"그럼그럼. 나랑 얘기나 하자고. 자 앉아."

그가 손을 뻗자, 어느새 황금으로 된 의자와 탁자, 그리고 작은 집까지 생겨났다.

대체 이게 돈으로 따지면 얼마야?

"황금의 마왕. 그의 별명이에요."

"... 안 알려줘도 알 것 같은 별명이네요."

"사실 왕자였지. 인간이던 시절에는. 뭐, 지금도 딱히 인간이 아닌 건 아니다만."

그레모리와의 대화에 끼어들어 툭 뱉어놓는 금태양, 아니 바사고.

왕자라... 이미지랑 맞긴 하네.

"해상무역으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던 왕국의 1왕자, 즉 왕위계승권자가 나였어. 바알은 아카데미의 수석이었고, 아가레스는 차석이었지. 나머지 녀석들도 한딱가리 하는 친구들이었고... 하지만 그중 가장 대단했던 건 역시나 아비센나였다."

아비센나...

내 클래스의 스승 같은 존재.

본 적은 없지만 나를 물심양면 지원해주고 있는 '성좌'였다.

그의 인간 시절 이야기라니.

이건 못 참지.

"각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던 우리는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애초에 서로가 아니라면 친해질 수 있는 대상이 없었지. 다른 놈들은 말이 안 통했거든. 그러던 어느 날... 아비센나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면서 사라졌다. 돌아왔던 건 우리가 늙어 비틀어져가던 때였어. 녀석만큼은 사라질 때의 그 모습 그대로였지만."

그러면서 얼굴을 잠시 매만지자.

호쾌한 쾌남 왕자의 것은 어디 가고, 순식간에 늙어빠진 늙은이가 나타났다.

"이 상태일지라도, 우리는 삶에 대한 욕구는 명확했다. 당연하지. 아직 할 수 있는 게 세상에 넘쳐나는데... 그냥 죽을 수는 없잖아. 그래서 아비센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여기까지는 들어서 알던 이야기였다.

영원한 생명을 줬다고 했지.

"그런데 여기서부터는 바알이나 아가레스 녀석도 모를 텐데... 어느 날 내게만 몰래 찾아왔어."

"... 설마 찾아왔다는 사람이."

"아비센나, 그 녀석이지 누구겠어?"

그의 말에 다 죽어가던 바알이 눈을 부릅떴다.

"찾... 아... 너... 를..."

"그래, 곧 '영원'이 끝난다고 하더군. 그러면서 내게 물었다. 인간에게 가장 호의적인 군주들이 누구냐고. 몇 명을 추려서 보내줬지. 그중 선택받은 게 자네야."

그레모리가 바사고에게 지목당하고서는 흠칫 놀랐다.

아비센나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마계의 창조주란다.

사실상 마신 아닌가.

그런 마신이 자신을 지목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엔 지옥찬탈자를 자네 영지에 풀었지."

"뭐, 뭐라고요?!"

그 미친놈의 괴물 때문에 대체 얼마나 고생했던가?

중위권이었던 순위가 최하위권으로 추락하고, 그녀의 권속들도 고생해야 했다.

그걸 저지른 게, 마신이었다니.

"만약에 자네가 인간과 협력해서 그걸 해결하지 않았더라면 그 지옥찬탈자가 결국 수만 년에 걸쳐 힘을 확충하여 마계 전체를 파괴했을 테지."

이미 그레모리 영지의 힘으로는 무리일 정도로 성장했던 지옥찬탈자(그리드)였다.

수만 년이 지난다면 마계 전체를 파괴했으리라는 것도 과장이 아니다.

"그런데 그 수수께끼 같던 친구도 아마 자네가 나타나리라는 것만큼은 몰랐던 모양이야."

나를 바라보면서 웃어 보이는 바사고.

"원래 지옥찬탈자는 파괴되는 걸 상정했었는데, 그걸 '다스려' 버렸으니... 마계의 영원이 제 주인으로 착각하는 것도 당연하지."

... 문득 그 '시공의 폭풍'인가 뭔가가 불어닥칠 때의 일이 생각났다.

대충 그리드가 했던 말이 이제야 아귀가 맞네.

원래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자기가 사라져서 나타났다고 했던가.

그의 이야기를 듣자니, 문득 궁금해졌다.

"왜 당신은 저랑 안 싸우려는 겁니까?"

"뭐야, 안 싸우는 것도 불만인가? 그런 호전적인 관상은 아닌데."

"... 제 관상이 어때서요."

"쫄보?"

이 아저씨 용하네.

"쯧, 어차피 영원은 사라졌고, 이제 필멸의 존재가 되었는데, 싸울 시간이 어디 있어? 서서히 늙어가면서 죽기 시작할 텐데, 죽기 전에 싸우는 건 멍청한 짓이지. 특히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는데, 이 친구들은 아직도 어리석은 꿈을 꾸는군."

이제 아예 의식을 잃은 바알과, 이미 쓰러진 아가레스를 바라보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대의 마족들이야 시간이 가장 젊은 시절, 20대 초반에 멈추어 있으니 시간이 다시 흐른다고 해도 꽤 많은 시간이 있을 테지. 특히 마왕급의 녀석들이라면 그래도 족히 천년은 더 살 테고... 그쪽 이쁜이는 만년은 살겠지. 하지만 우리는 아니야."

그들은 이미 한없이 늙어버린 상태에서 시간이 멈추었다.

그런데 시간이 다시 흐르니...

쏘아진 화살을 멈출 수 없는 것처럼, 태초의 마왕들은 불멸의 상실에서 더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득히 오랜 세월을 살았어, 그러면 정리해야 할 것도 아득히 많다네. 남은 몇 년의 수명이 모자랄 정도로. 가마진, 마르바스, 발레포르. 모두 같은 생각이라네."

각기 서열 4위, 5위, 6위의 태초의 마왕들의 이름.

그들을 언급한 뒤에.

"그레모리."

그레모리를 부르는 바사고.

"왜 부르시죠?"

"우리가 마계의 최상위 지배자가 된 이유는 경험뿐이야. 그대들은 알지 못하는 경험을 축적해온 존재였기 때문이지. 이제 자네가 그렇게 되어야 하네. 당분간 혼란이 가득할 마계에 질서를 찾기 위해서는, 그레모리 그대의 역할이 너무도 커."

"... 감수해야겠죠."

"내가 돕지."

"당신이요?"

"내 정도 경험이면 충분히 도움이 될 거야."

"무, 물론 그렇긴 하겠지만."

지금 당신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정리할 게 많다고.

"어차피 내 권속들은 다들 독립적이어서, 나는 가마진 녀석처럼 후계구도를 정립해줄 필요도 없고, 마르바스처럼 자신이 보유한 막대한 유산들을 나누느라 신경 쓸 필요도 없지. 그녀가 마계의 새로운 질서가 될 수 있도록 돕겠네."

"... 도와주시겠다면야."

대충 교통정리 끝난 거 같은데?

그런 내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대서사시 임무 70/70, '새로운 땅'이 완료되었습니다.]

오, 드디어.

그런데.

[이제 마계에서 서브 임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현재 수행 가능 임무 숫자 : 323,971개]

... 뭐? 몇 개?

저거 뭐, 평생 해도 끝나긴 하겠니?

헛웃음을 짓고 있을 때.

[대서사시 임무를 전부 달성하여 게이트, '마계'의 모든 권한이 당신에게 주어집니다.]

[당신은 최초로 게이트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게이트의 소유자는 입장 조건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원하는 대상의 게이트 입장을 허용하거나, 불허할 수 있습니다.]

[게이트 입장 상태에서도, 당신의 의사에 따라 바로 방출 가능합니다.]

... 마계 자체가 내 소유라고?

정확히 말하면 마계로 통하는 연결 통로인 '게이트'가 내 소유라는 거긴 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마계는 그냥 작은 던전이 아니었다.

하나의 대륙... 아니 하나의 세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계 전체 사이즈가 대충 어림잡아도 유라시아 대륙 정도는 됐던 거 같은데?

그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통로를 내가 독점한다는 건...

난리 나겠는데?

심지어 그 마계의 지배자가... 나랑 사업(?) 파트너 같은 거다.

그레모리의 지분 49%가 내거니까.

마계에서 할 수 있는 사업이 뭐가 있지?

... 너무 많아서 뇌정지가 오네.

사실 마계의 넓은 땅덩어리만 활용해도 나쁘지 않을 거 같긴 한데.

... 잠깐만.

생각해 보니, 마계는 완전 오픈 월드 던전이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그 말인즉슨...

원하는 던전을 찾아 다닐 필요 없이, 마계 안에서 모든 게 해결될 수도 있다는 건데.

"그레모리."

"네, 구원자님."

"... 혹시 용역 안 필요합니까?"

"용역이요...?"

저 많은 서브 퀘스트를 나 혼자 깰 수는 없잖아?

다행히도...

저 반대편 세계에는 '퀘스트'나 '보상'소리만 들으면 자다가도 침을 질질 흘리는 족속들이 몇천만 명은 있다는 거였다.

**

"... 진짜 어떻게 된 건 아니겠지?"

제피로스 류현수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국정원에서 멀쩡히 있던 놈이 갑자기 아오지로 날아가서 게이트로 들어가더니, 벌써 한 달째 소식이 없었다.

심지어 앤서블 이어링으로도 연락이 닿질 않았다.

[김세균 헌터, 북한 아오지 게이트에서 한 달째 연락 두절.]

[게이트, '지옥광산'은 대체 어디?]

[북한 헌터들, '지옥 같은 곳이었다.' 과연 김세균 헌터는 클리어할 수 있을까?]

여러 기사들이 오늘도 지면을 메웠다.

게이트는 여전히 활성화 상태.

그렇다면 죽지는 않았다는 거였다.

"... 미치겠군."

가뜩이나 국정원장으로서도 골치 아픈 일이 넘쳐났다.

김세균의 부재를 노리고 들어오는 중국이나 미국 쪽 스파이나 헌터들도 있었고, 더 큰 문제는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터졌다.

"이성혁... 이 빠돌이 자식이."

북한에서 정권을 잡은 이성혁이 북한의 김씨 일가를 우상화했던 작업 그대로, 김세균을 우상화하고 있다는 첩보가 다수 들어오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강제성이 있다거나 하는 건 아니고 그저 홍보 정도였지만...

김씨 일가의 독재를 경험했고 학을 떼는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이성혁의 순수한(?) 빠심에 의심을 품었다.

그 홍보가 김세균의 지시라던가, 김세균이 북한 아오지 게이트에 공을 들이는 이유도 세력 기반을 북한으로 바꾸어서 북한의 독재자가 될 생각 아니냐는 소설 수준의 주장에 이르기까지.

강민국 대통령은 일축했고, 류현수도 적극적으로 부정했지만...

'솔직히 전혀 의심스럽지는 않아!'

평소 김세균의 성격을 생각하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잘 아는 류현수였다.

그렇다고 해도...

"본인이 와서 해명을 해야지..."

와서 해명 한마디만 해도 해결될 일이, 하필이면 북한 쪽 게이트에 계속 있으면서 계속 꼬이고 있었다.

그 꼬이는 걸 해결해야 하는 건 류현수였으니, 요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거기에 더 큰 문제는...

북한의 아예 망해버린 경제력이었다.

갑자기 땡전 한 푼 없는 3천만 인구가 대한민국에 생긴 꼴이었으니까...

아무리 한국이 잘 나가는 중이라고 해도, 북한 정도 되는 규모의 최빈국에 자금을 지원하다보면 허리 휘는 건 순식간이다.

그래서 정부에서 이성혁의 활동에 더 난리를 피우는 것이었다.

통일을 전제로 연간 백여 조에 달하는 지원금이 들어가고 있었다.

민간 차원에서 정부 권유(에 가까운 반강제)로 지원되는 자금까지 합하면 백조 단위가 넘었다.

그런 돈을 투입했다가 이성혁이 갑자기 새로운 이북리더(以北Leader)가 되기라도 하면...

더 최악은 김세균이 북한의 새로운 독재자가 되는 거였다.

대한민국 최강의 헌터에 돈까지 잃는 거였으니까.

이해는 됐다.

갑자기 정부 연간 예산의 수 분의 일이 뭉텅이로 날아갔으니, 정치인이나 공무원 입장에서는 히스테릭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게 다 돈 문제니까...

해결하려면. 

"북한이 자립할 수 있는 자금이 필요한데..."

그것도 내수로 돌아가는, 그러니까 남한에서 빠져나가는 돈이 아니라 외화.

달러여야 했다.

문제는 달러 나올 구석이 하루아침에 생길 리 만무하지 않은가.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에 전자담배를 입에 가져다 물었을 때.

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김세균 님께서 게이트, '마계'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해당 게이트는 '김세균'의 관리에 놓입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북도가 평정되었습니다!]

무제한의 세균술사 113화

#게이트주(2)

#게이트주(2)

북한 내부의 쿠데타와 내전의 발발로 인한 정권 교체.

그로 인하여 한동안 정세는 불안해 보였으나, 불안한 정세는 한 사람의 등장으로 인해서 수습되어 가는 것으로 보였다.

대한민국에 귀순했다가 한국 헌터들의 지원을 받으며 중국 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이성혁이 그 장본인이었다.

주체사상의 성기사.

사실 이전부터 해외나 한국 커뮤니티에서도 아주 유명했다.

놀림거리의 대상으로 유명하긴 했지만.

─어떻게 모시는 신이 돼지 3부자 ㅋㅋㅋㅋ

└ㅋㅋㅋㅋ 레전드

─위대하신 하나님도 아니고, 부처나 이슬람교의 선지자도 아니고... 독재자를 신앙으로 섬기는 성기사가 가능하다고? lol

└그 덕분에 북한의 2인자가 되었잖아... 해볼 만한 딜 아닌가?

└OMG 북한 독재자의 뒤나 빨아주고 2인자가 되는 거라면 난 못할 거 같은데.

└비위 좋은 놈들 많네 lol

그런 이성혁이 처음 남쪽에 귀순했다는 뉴스도 충격적이었지만, 그가 남쪽의 지원을 받아 북한을 다시 장악하러 올라갔다는 건 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진짜 큰 충격은 따로 있었다.

북한 원정에 참가했던 한국 3위 랭커, 김유라의 한 대형 개인방송에서의 발언이었다.

"김유라씨, 썰도 좀 풀어주셔야죠."

구독자 천만 명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최대 Y튜브 채널 K-헌터스.

이곳의 채널 주인이자 진행자인 설태산의 말에 김유라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나 비밀유지서약 쓰고 올라갔어요. 잘못 입 놀리면 철컹철컹이라니깐?"

"에이, 대한민국 랭킹 3위가 뭔 철컹철컹이야."

"요즘 뭐, 김세균이나 제피로스 그 양반이나 알아주지 나는 뭐 찬밥이잖아요? 빈집털이라는 사람도 많던데? 제피로스 그 아저씨는 뭔 좋은 걸 먹고 그렇게 회춘했나 몰라."

"에이 그런 말에 긁히는 건 아니죠?"

"나도 사람인데! 긁힐 수도 있지!"

버럭 성을 냈지만 진짜 화내는 기색은 아니고 장난스러운 미소가 입가에 걸려 있었다.

"뭐 사실 긁힐 수도 없어. 워낙 넘사잖아 김세균은. 솔직히 질투도 안 나, 대한민국 헌터 입장에서는 고마워해야지 그리고. 그 친구 덕분에 본 이득이 한두 푼도 아닌데."

"그렇긴 하죠. 평정했다고 뭐 크게 이득 보는 것도 없잖아, 김세균이."

"그러니까, 정부 지원금도 푼돈이고. 신인 때면 이름값이라도 올렸다고 쳐도 지금 김세균이 평정해주는 건 솔직히 무료봉사야, 무료봉사. 난 김세균한테 유감 없어요. 그 인터넷에 짤방 만드는 새끼들은 이것도 같이 올려라. 괜히 이상하게 편집해서 올리지 말고."

잠시 말을 멈췄던 김유라가, 짐짓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세균님, 남은 두 개 미공략 게이트도 잘 부탁합니다."

"푸하하하학!"

진행자와 시청자들이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고 있을 때.

"아, 그나저나 내가 썰 하나 풀어?"

김유라의 말에 반색해서 외치는 진행자.

"풀어요 풀어, 뭐가 됐든 풀어."

"이게 풀어도 되려나 안 되려나 모르겠네."

"되는 거야, 안 돼도 되는 거야. 무조건 고지."

"쳇, 이 조회수에 미친 악귀놈한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아, 누님! 나 좀 먹고 살자! 오늘 김유라가 북한 썰 푼다고 떡밥 거하게 풀어놨는데 안 풀고 가면 민심 떡락이야!"

혀를 한 번 친 김유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 제가 미국 진출했던 거 아시죠."

"알지. 나쁘지 않았잖아?"

"응, 괜찮았어. 근데 미국 진출 시절에 내가 카이저랑 팀업했던 건 아는 사람 있으려나 몰라?"

갑자기 풀리는 카이저 썰에 채팅창이 폭발했다.

이제는 전(前)이라는 접두사가 붙긴 하지만, 세계 최강이라는 타이틀은 분명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누님 카이저랑 파티했던 적 있어요?"

"엉, 땜빵으로 한번."

"왜 몰랐지?"

"그쪽도 비밀유지서약 덕지덕지 둘둘이었으니까."

"그럼 지금 썰 풀어도 되는 거야?"

"응, 기간 끝나서 이젠 말해도 되는데... 사실 말할 기회가 없었지. 내가 왕년에 카이저랑 팀도 한 번 해봤는데... 하면 너무 짜치잖아. 심지어 정규팀도 아니고 땜빵이었다고."

"짜칠 게 뭐 있어. 당시에 카이저랑 던전 돌아본 사람 타이틀이면 훈장급이지 훈장급. 제피로스도 못 해봤을걸?"

띄워주는 말에 호호 입을 가리고 웃어 보이던 김유라가 진지하게 표정을 고치며 말했다.

"아무튼, 카이저 진짜 쎄더라. 놀랐어. 내가 봤던 크루세이더중에 그 정도로 강했던 사람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강했어."

"그렇겠지. 그러니까 세계 최강이지."

"그 당시면 그래도 전성기에서 조금 내려왔거나 전성기 끝자락? 그쯤이었거든. 찐 전성기도 아닌데 사람이 그 정도로 강하더라."

"카이저 강한 거 모르는 사람도 있나? 그래서... 이번 북한 원정에서 김세균이 카이저보다 강했어?"

그 말에 김유라가 코웃음을 쳤다.

"김세균은 그냥 넘사벽이야, 논외라고. 전성기 카이저 몇 명 데려와도 상대 안 될 거다."

"그 정도야?"

"그 정도야. 제대로 보여주진 않았는데, 가끔 나설 때가 있었거든. 그럴 때마다 소름이 돋더라. 너무 세서."

"그럼 카이저 썰은..."

"아아, 이성혁. 그 사람도 성기사잖아. 난 솔직히 북한 최강이라고 해봐야 별거 아닐 줄 알았거든? 근데... 이성혁이 내가 봤던 카이저급은 되더라고."

김유라의 폭탄 발언에 채팅창이 들끓었다.

그리고 불과 몇 시간 만에.

대한민국 유수의 헌터 언론들의 모든 메인 기사가 김유라의 발언으로 가득 메워졌다.

하루 남짓 지났을 시점에는...

미국 유수 언론에도 똑같은 발언이 올라왔다.

한국과 미국의 네티즌들의 반응은 경악에 가까웠다.

명색이 한 나라의 랭킹 1위까지 올랐던 헌터가 이런 걸로 거짓말을 했겠느냐는 반응 절반.

나머지 절반은 그냥 조회수를 위한 과장된 썰이라는 거였다.

물론, 카이저 코퍼레이션은 극렬하게 반박하며 나섰다.

[카이저 코퍼레이션, 한국 헌터 '김유라'의 발언에 '불쾌'.]

[카이저 코퍼레이션, '카이저의 명예를 훼손하는 그 어떤 유형의 발언도 용납하지 않겠다.']

[카이저 코퍼레이션, '김유라'의 발언 정정 요청.]

평소 같았더라면 그냥 굽히고 농담이라고 하고 말았을 김유라였겠지만, 이번에는 그녀도 조금 화가 났다.

아침부터 미국 대사관에서부터 카이저 코퍼레이션 한국 지사 사람.

거기에 미국 쪽 에이전시에서까지 거의 열통 넘는 전화를 받아서였다.

그녀는 홧김에 대한민국 최대 일간지에 연락을 넣었다.

[헌터 김유라, 발언 정정할 의사 없다.]

[북한 최강 헌터, 카이저보다 강하다?]

[세계 최강의 크루세이더는 카이저가 아니라고? 헌터 김유라 발언 일파만파.]

그리고 고작해야 농담 섞인 썰 하나가 낳은 파급 효과는...

생각보다 거대했다.

**

카이저의 일상은 다섯 개의 일간지 종이신문으로 시작된다.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종이신문은 읽느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카이저는 옛날 사람으로서 적어도 뉴스만은 종이신문을 선호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첫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구겨 버릴 수밖에 없었다.

[South Korean former No.1 hunter said North Korean Hunter and New Leader; Sung-Hyeok Lee is better than Kaiser!]

전부 비슷한 논조의 헤드라인들이 1면에 있었다.

웃음거리밖에 안 되던 주체사상의 성기사 따위가 자신보다 강하다니.

그것도 단 한 번밖에 그와 파티를 이룬 적이 없던 땜빵 아시안 따위의 발언에 모두 경도되는 건 도저히 넘기기가 힘들었다.

헌터 업계에서는 이런 게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그렇다고 북한 헌터와 진짜로 싸워볼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저 발언 하나로 오는 타격은 너무 컸다.

일단 카이저 코퍼레이션과 그 계열사의 주가부터 대폭락했다.

바로 소집된 대책 회의.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저런 발언을 했을 리가 없습니다. 이건 우리 카이저 코퍼레이션에 대한 공격이 분명합니다."

"맞습니다. 헌터 김유라는 SG그룹 계열사 소속입니다."

"그런데 한국 헌터 98%는 SG그룹 소속... 아닙니다..."

누군가 진실을 말하려 했지만, 격양된 분위기에서 바로 묻혀 버릴 뿐이었다.

"우리도 그룹 차원에서 보복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복을..."

"음..."

한국은 세계에서 이례적일 정도로 카이저 코퍼레이션의 입김이 닿지 않는 국가 중 하나였다.

던전 시장 개방으로 카이저 코퍼레이션의 대규모 자금이 들어가려 했지만, 그 전에 한국 정부가 아슬아슬하게 방어에 성공하여 김세균이라는 구심점 아래에 뭉친 상태였으니까.

한참 임원들의 논의를 듣던 카이저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 됐어, 나가들 보게나."

"카이저..."

"안 들리나?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나가들 보라고."

"... 알겠습니다."

임원들이 모두 나가고, 카이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 나 카이저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

대한민국 대통령 집무실.

각료회의에 참여 중인 기획재정부 장관은 거의 비명에 가까운 토로를 내지르고 있었다.

"세수를 여기서 더 확충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이미 한계까지 세수를 끌어다 쓰고 있어요. 여기서 잘못 더 건드렸다가는 장기 침체에 들어설 수도 있습니다!"

과도기 이원 정부 유지 후에 흡수통일하는 방안을 추진 중인 대한민국.

그런데, 들어가는 세수가 너무 많았다.

"다행히 국고 여유분이 제법 있어서 그걸로 2년 정도는 충당할 수 있겠지만, 이대로 재원 확충 없이 유지했다가는 디폴트입니다."

"세수 인상..."

"그러면 어떤 세목을 인상하실 겁니까?"

"법인세를..."

"일반 기업들의 실적은 계속 평이하게 유지되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법인세를 인상했다가는 국제적 가격 경쟁에서 형편없이 밀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던전개발회사들의 실적은 역대 최고치를 찍고 있습니다만..."

"그러면 차등 법인세를... 아...! 죄송합니다."

던전개발회사와 일반 기업 간의 차등 법인세.

과거에는 분명 시행되던 법이었다.

던전 개발 초기에는 오히려 던전개발회사에 적용되던 법인세가 적었다.

산업 발전을 위한 일종의 보상이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던전개발회사에 적용되는 법인세는 일반 기업보다 1.5배 정도 높았다.

기본적으로 인건비 외에는 들어가는 비용이 없는 데다가, 인프라를 확충할 필요도 없기에 막대한 이득을 보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WDDO의 던전 개방.

던전 개방으로 인한 문제는 외국 자본의 유입뿐만이 아니었다.

차별적인 법인세나 소득세도 WDDO 던전 개방 조약 아래에서는 조약 위반으로 취급되었다.

한국에서는 아니었지만, 헌터들의 소득이 워낙 높다 보니, 일부 국가에서는 일반인보다 더 많은 소득세율을 적용하기도 했는데, WDDO 조약에서는 이것도 전부 위반.

한국에서 유지되던 차별적인 법인세도 WDDO 개방과 함께 정정되었다.

그래서 SG그룹의 실적은 역대 최고 수준을 달렸다.

정부 입장에서는 딜레마였다.

법인세 자체를 올려버리면 던전개발회사에 비해서 순이익율이 적은 일반 회사들이 죽어나고, 법인세를 유지하자면 던전개발회사가 너무 이득을 가져갔다.

그렇다고 차별적 법인세 정책을 도입하자니 WDDO 조약 위반이었다.

"네, 차별적 법인세만 도입할 수 있다면야 모든 문제가 해결입니다만."

"결국은 북한이 자립하는 게 최선이긴 하군요."

"예... 미국이 최대한 빨리 테러지원국을 해제해 주는 게 상책입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나아지진 않겠지만 훨씬 낫긴 하겠지요."

지금 북한이 시장을 개방하려고 해도, 아직 미국의 테러지원국 지정이 해제되지 않은 상태였다.

한국 정부와 북한 정부가 모두 요구했지만, 미국은 묵묵부답.

한국의 통일을 꺼리는 일본의 입김에, 미국 쪽 인사들이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외교부 장관. 어떻습니까? 미국이랑 이야기는 좀 잘 되어가고 있어요?"

강민국 대통령의 물음에, 외교부 장관이 난처함의 한숨을 내쉬었다.

"완강합니다. 북한의 '실체적인 의지'를 보아야겠다는데 그게 뭔 소리인지 원..."

"핵사찰도 합의했고, 핵폐기도 단계적으로 추진하겠다고 했고, 인권 관련 사항도 준수하겠다고 했고... 또 뭐 있지요? 아무튼 다 해주겠다는데 그게 모자라단 겁니까?"

다 해줬잖아!

북한의 정상화를 위해 모든 걸 다 하겠다는 이성혁과 대한민국의 의향에도, 미국에서는 완고했다.

"미국 정가에서도 의문이라고는 합니다. 이 정도면 북한에서도 엄청나게 양보한 건데, 왜 미국이 받아주지 않느냐는 말이 있다더군요."

그들의 대화에, 국정원장 제피로스가 발언했다.

"국정원에서는 VIP의 개입으로 보고 있습니다."

"VIP면...?"

"카이저 말입니다."

"카, 카이저요?"

"갑자기 카이저요?"

대통령이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되물었다.

"카이저가 대체 왜요?"

"... 긁혔답니다."

"긁혀요?"

얼마 전 세계를 강타했던 김유라의 발언을 다시 언급하면서 설명을 이어가는 류현수.

그 이야기를 들은 대통령이 황당해져서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정말 그 소문 때문에 이런 짓을 벌였다는 말입니까? 쪼잔하게?"

"카이저는 한국 정부의 공작으로 생각한다더군요."

1세대답게 카이저 코퍼레이션 내부에도 꽤 인맥이 있는 제피로스가 들은 정보로는 그러했다.

"우리 정부가 그럴 이유가 없잖습니까?"

"... 그러게 말입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제피로스가 설명을 이어갔다.

"어쨌든 현 대통령의 슈퍼팩(대규모 후원자) 중 하나로서, 카이저가 대통령에게 강력히 요청했답니다."

"... 북한 제재를 풀지 말라 그런 겁니까?"

"예."

고작해야 개별 헌터의 발언 하나가 여기까지 굴러갈지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다고 이걸 김유라 헌터를 탓할 수도 없지요. 저 정도 개인적 발언이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뭐 잘못이라면 카이저가 저 정도로 쪼잔할지 몰랐다는 것 정도겠지요."

강민국 대통령의 토로에 작은 웃음이 곳곳에서 피어났다.

"이러면 한동안 꽤 힘들겠군요. 여전히 세계 질서는 미국이 주도하고 있으니..."

그런 주도를 깨려면...

엄청난 일 정도는 일어나야 했다.

하지만 대통령으로서 그런 요행에 기대는 건 어리석은 짓.

그걸 알면서도, 강민국 대통령은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상황은 쉽지 않았다.

3천만 인구의 파산 직전 국가를 지원하려다가 같이 국가 전체가 침체해 버리는 상황은 그가 원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일단은 지켜봅시다. 그리고 미국 쪽에도 계속해서 북한 제재 해제를 요청해보고요. 쉽진 않겠지만."

슈퍼팩이 완강히 거부권을 발동하고 있는 이상, 미국 대통령도 어지간해서는 거스르기가 쉽지 않았다.

심지어 재선이 한 번 남은 초선 대통령으로서는 더욱이 말이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인간의 일을 최대한으로 하면, 하늘이 그에 응답하겠지요."

그리고...

**

'게이트의 주인'

일반적으로 세계 협약에 따라 게이트의 주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국가가 주인이긴 했고, 국가 차원에서는 게이트 입장을 통제한다거나 하는 등의 규제를 둘 수 있었지만...

아예 게이트 입구가 있는 지역 전체를 통제하는 식으로 막는 것이지, 실제로 입장 자체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누군가 들어와서 게이트로 갑자기 쏙 들어간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것.

그저 나오는 걸 기다렸다가 잡아서 체포하거나, 손해배상을 청구하거나 하는 식이다.

그런데.

김세균이 또 일을 저질렀다.

─세균햄 이제는 게이트주(主)됐다!

└ㅋㅋㅋㅋㅋ 지린다. 건물주도 모자라서 게이트주임.

└조물주 위에 건물주 위에 게이트주 ㅋㅋㅋㅋㅋ

세계에서 지금껏 없던 일에, 많은 사람들이 난리가 났지만.

가장 분주해진 건 각국의 법률 전문가들이었다.

기본적으로 게이트의 주인은 국가라는 게 판례였는데...

정말로 '게이트 주인'이 생겨버린 거였다.

─그런데 게이트 이름 ㅈㄴ 살벌하네. 마계라니.

└입장 제한 레벨도 없음. 단계가 없어.

└원래 레벨 스케일링 게이트이긴 했음.

─세균햄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마계의 주인이라니... 그러면... 당신이...

└대마왕 세균맨?

└ㄷㄷㄷㄷ 개지린다.

처음에는 단순히 김세균의 활약과 게이트 주인이라는 최초의 개념에 집중하던 사람들이...

─그런데 마계면 대체 뭐가 나올까?

─보상도 좋을 거 같은데...

─마계라니, 남자라면 한 번 가보고 싶은 이름 아님?

└여자도 가고 싶거든!

마계라는 이름과 게이트 자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SG그룹으로 복귀한 김세균의 지시에 따라, 한국에서 첫 마계 원정대가 파견되었을 때.

그들은 기존 게이트와는 개념 자체가 다른 '마계'라는 새로운 게이트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입장 제한 인원 없음'

'거의 행성급 넓이.'

'퀘스트가 수십만 개'

그들의 발언을 종합하자면...

결론은 명백했다.

'이건 게이트가 아니다. 이건 하나의 세계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다른 결론이 도출되었다.

'김세균이... 하나의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국경의 빗장을 닫아걸고 오로지 대한민국 쪽으로만 국경을 열어둔 북한.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서.

수십만 명에 달하는 헌터가 대한민국으로 입국하기 시작했다.

무제한의 세균술사 114화

#게이트주(3)

#게이트주(3)

판문점.

한때는 분단의 상징 같은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어!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외국인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왜 막는 건데!"

"우린 북한으로 갈 거라고!"

중국 쪽 접경지대도 있긴 했지만, 그쪽도 철통 방어 중.

한국인에게 개방된 판문점 쪽 국경이 유일한 길이었기에, 외국인들이 몰려든 것이었다.

"WDDO 협약에 따라서 협약 가맹국의 게이트는 차별 없이 입장 가능하다고!"

누군가는 WDDO 협약을 들먹이면서 입장하겠다고 당당히 나섰지만...

"북한은 WDDO 협약 미가맹국입니다. 북한 정부에서는 당분간 대한민국 국적 소유자 외에는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북한 정부와의 협의에 따라서 그 어떤 외국 국적자도 북한에 올려보낼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각성자관리부 직원이 단호하게 말하자,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더 점점 많은 헌터들이 몰려드는 것을 본 공무원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냥 헌터들도 아니고,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강한 헌터들이었다.

지금이야 국가의 통제에 따르는 척이라도 하지만...

누군가 먼저 나서서 룰(Rule)을 깨기라도 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게 분명해 보였다.

"SG그룹에 지원 요청해야 합니다!"

"누가 모르냐! 망할 외교부 자식들 같으니..."

저렇게 많은 헌터들을 누가 입국 허가한 거야? 하면서 투덜댔지만, 외교부 입장에서도 할 말이 있었다.

'WDDO 협약 때문에 던전 공략하겠다고 들어오면 막을 방법이 없는데 우리보고 어쩌라고!'

헌터가 중범죄자가 아니라면 WDDO 가맹국에서는 입국을 막을 수 없었다.

단기 던전 공략 비자도 무조건 내주어야 했다.

헌터가 21세기 귀족 소리를 괜히 듣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비자 발급받기 어려운 3세계 국가 사람들이라도 국제 공인 헌터 자격증만 있으면 WDDO 가맹국은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었으니까.

물론 국제 공인 자격증이 쉽게 나오는 건 아니었다.

그게 더 큰 문제였다.

한국에 최근 입국한 수십만에 달하는 헌터들이 다 '쉽지 않은' 절차를 걸친 헌터들이라는 것이었으니까.

어중이떠중이가 걸러진 '찐'들이었다.

"이대로라면 뚫려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알겠어! 내가 연락할게!"

물론 그가 SG그룹에 바로 연락을 취할 수도 있었지만...

SG그룹 쪽을 전담하는 전담자가 있었다.

SG그룹 핸들링 건만으로도 차기 차관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인사.

내부에서는 '김세균 라인'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인 사람.

"조 국장님, 급히 SG그룹 쪽과 이야기 좀 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여기 판문점 난리도 아니에요!"

조형빈 국장이었다.

**

마계에서 나와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 사흘 밤낮을 잤다.

솔직히 세상이 난리가 날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걸 신경 쓸 여지도 없을 정도로 피곤이 몰려왔다.

원래 게이트 하나 클리어하는 것도 피로도가 큰데, 마계는 그냥 '게이트' 수준이 아니었다.

제피로스나, 심지어 대통령의 면담 요청까지 거절하고 사흘을 잔 뒤에야 집 밖으로 나섰다.

"잘 잤냐?"

나오자마자 만난 건 당연히 제피로스 선생님.

"뭐야, 흰머리가 그새 느셨네?"

"너 때문이야 임마, 너 때문에."

"멀쩡하게 게이트 잘 클리어하고 온 사람한테 별말씀을 다 하시네."

"야! 너... 에휴, 말을 말자."

"대충 인터넷 반응은 봤는데. 게이트주가 뭐 어쩌고... 재밌더라고요."

"정말 네가 게이트 주인이 된 거냐?"

"그럼요."

간단하게 어꺠를 으쓱이며 내 권한과 마계가 어떤 곳인지를 늘어놓자, 제피로스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처음엔 놀라움에서, 나중에는 걱정으로 발전했다.

"그러면... 거의 하나의 세계나 다름없다는 거잖아?"

"지구보다도 포텐셜이 있어 보여요, 제 생각에는."

마계는 지구처럼 인구 밀집도가 높지 않거든.

거의 한국만 한 땅에 마족이라고 해봐야 백만도 안 될 거다.

참고로 수십만에 달하는 서브퀘스트가 발생시킬 변수에 대해서는 고려도 안 하고서 내린 결론이다.

"그런 게이트라는 말이지? 그게 북한에 있고..."

흠, 하는 고민과 함께 제피로스가 말했다.

"너, 세금은 낼 거지?"

"세금? 내야죠. 세금 안 내고 사는 사람도 있나."

"아니, 북한에 내야지."

"북한에요?"

"아무리 게이트의 실질적인 주인이 너라고 해도, 국제법상 게이트는 기본적으로 소재지 국가 소유야."

"아, 물론이죠. 당연히 내야지."

나도 양심 터지진 않았다고.

오케이, 감 잡았어. 라고 중얼거리면서 쾌재를 부르는 제피로스.

뭐야, 나 모르게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사실은 말이다...."

이어지는 제피로스의 말을 다 들으니, 분통이 터졌다.

"아니, 이제 개방하고 시장경제 받아들이겠다는 국가한테 아직도 제재를 안 풀었다고요?"

이 새끼들이?

"그것 떄문에 북한에 물자 수출하는 우리나라도 제재 협약 위반으로 대외 수출이 싹 막혔어."

강민국 대통령이 저런 압박에 굴할 쫄보도 아니었으니 강행했던 모양인데...

아무리 그래도 천조국이다.

"그런데, 원래 시장 질서는 다 돈에서 비롯되는 거거든. 북한이 우리 지원 없이도 수입이 짱짱하면... 천조국이 아니라 천조국 할애비가 와도 달럿돈 받으려고 줄을 선다. 특히 북한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가 어디냐?"

"중국이죠."

"그래, 중국도 공식적으로는 제재에 참여 중이니까 대놓고는 못해도, 아마 밀거래만으로도 북한 내부에 필요한 물자를 모두 공급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들어올걸?"

"괜히 세계의 공장이 아니니까..."

중국이 대외적 이미지는 안 좋아도, '세계의 공장'이라는 타이틀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거기에 지금 중국 상태가 말이 아니라서... 아마도 앞다퉈서 북한에서 돈 벌어들이려고 혈안이 될 거다."

중국은 지금 예상대로 산산이 쪼개지고 있었다.

오황을 필두로 한 헌터들이 군벌화하면서 각 지역의 패자로 등극.

그걸 북경의 공산당이 막고 있는 형세였다.

"북경 공산당이 북한과의 접경지대를 장악하고 있으니 북한이 돈만 있으면 외화 번다고 동북 지역의 모든 물자를 쏟아부을걸? 그러면 상해의 검황은 북경 공산당이 돈을 버는 걸 지켜만 보겠냐? 천만의 말씀이지."

동북지역의 물자에 이어서 상해의 어마어마한 물류가 북한으로 고스란히 향해주기만 한다면 북한 내 물자 부족은 일거에 일소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많은 외화를 우리 쪽에서 대놓고 보낼 방법이 없었다는 건데. 만약에 네가 소유한 게이트가 가치가 충분하다면야..."

"가치는 차고 넘쳐요. 일단 SG그룹 선발대부터 실사단으로 보내죠."

마계의 장점은, 오픈월드에 저레벨부터 고레벨까지 다양하게 누릴 수 있는 컨텐츠가 있다는 것이었다.

"실사단이 다녀와서 후기를 뿌리면, 아마 세계에서 줄을 서서 오려고 할 겁니다."

**

그리고...

그 예상은 불과 일주일 뒤에 현실이 되었다.

좀 내 예상을 많이 뛰어넘어서 그렇지.

이게 다 선발대 덕분...

그중에서도, 제피로스 복귀, 그리고 내가 랭킹 1위에 오르기 전까지 한국 랭킹 1위를 굳건히 고수했던 한 누님 덕분이었다.

백경(白鯨, 흰 고래) 김유라.

'포세이돈의 창'의 소유자이자 '해룡창법(海龍槍法)'의 대가로, 해양 던전 공략에서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누님이었다.

보통 해양 던전이 조금 아웃사이더들의 전유물이긴 했는데, 그녀가 한국 랭킹 1위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건, 육상에서도 능력이 고스란히 발휘되기 때문.

물을 자유자재로 지배하면서, 동시에 조화롭게 펼쳐지는 창술까지 결합되는 일종의 마창사(魔槍士)였다.

이 누님이 최근에 카이저를 제대로 긁어버리는 대형 사고를 치긴 했다.

그래서 쪼잔하게 북한의 경제 제재를 풀어주지 않는다는 소문...을 빙자한 사실이 있을 정도.

그래도, 그게 뭐 잘못은 아니잖아.

아주 일부 인사들이 김유라 헌터의 발언에 제재를 가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있었음에도, 정부에서도 카이저가 쪼잔한 거지, 그걸 탓할 수는 없다고 공언했다.

어쨌든 명색이 전 랭킹 1위 헌터였으니, 정부 쪽 소문은 듣긴 듣는지 그녀의 귀에도 이야기가 들어가긴 했단다.

나 같은 쫄보라면 조금 위축될 거 같기도 한데...

이 누님은 아주 배짱이 장난 아니었다.

오히려 방송에서 계속 카이저 얘기만 하더라고.

특히 마계 내부에서 진행하는 방송에서의 어그로가...

어우, 미쳤다.

─자, 여긴 좀 쎄네요, 아마 카이저도 못 깰걸요? 깰 수 있으면 직접 오던가.

─카이저요? 그 사람은 늙어서 못 올 걸요? 은퇴해야지. 아직도 현역 타이틀 붙이고 있는 건 솔직히 좀 억지 아닌가?

─이쪽 필드는 마수들이 너무 계속 나와서 지구력이 좀 필요할 거 같네요, 카이저처럼 늙은 헌터들은 안 오는 게 낫겠어요.

여전히 미국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카이저의 팬들은 번역되어 나온 그녀의 발언에 분노의 악플을 달아댔지만, 김유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카이저를 계속 언급해댔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더니... 개무섭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어그로는 마계 쇼케이스의 초대박에 일조했다.

한국의 구 최강 헌터가.

구 세계 최강 헌터를 계속해서 씹어대는데 이게 어그로가 안 끌리면 이상하지.

결과적으로 판문점의 수십만 헌터가 몰린 것의 한 절반쯤은 책임지지 않았을려나 싶다.

특히...

이 거물들의 출현은 무조건...

김유라 헌터의 어그로 때문일 게 분명하다.

─라이언 스펜서 씨! 방한하신 이유가 북한 입국을 위해서라는데 맞습니까?

─맞습니다. 한국의 한 건방진 헌터를 응징하러 온 것도 있고요.

─설마 그 헌터가 화이트 웨일(백경) 김유라입니까?

─그렇습니다. 감히 다시는 그 입에 카이저를 담을 수 없게 하겠습니다.

인천공항에 수많은 기자들을 몰리게 만든 한 남자가 입국했다.

미국의 랭킹 1위 라이언 스펜서.

그리고...

2위 헌터 로버트 가르시아까지.

두 사람이 거의 비슷한 시간에 경쟁하듯 전용기를 타고 착륙했다.

이제 업계에 대해서 잘 아는 나는 두 사람이 실제로 경쟁자라기보다는 의도된 쇼맨십으로 경쟁 구도를 연출한다는 걸 알아서 코웃음이 났다.

착륙을 거의 비슷하게 하면서도 라이언 스펜서의 전용기가 아주 약간 빠르게 착륙한 것도 1, 2인자 구도를 설정하기 위한 연출일 거다.

─대한민국 정부는 현재 북한으로 향하는 국경을 막은 상태인데요?

─국경을 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심플하게 답한 뒤에, 두 사람은 바로 미군기지로 향했다.

거기서 미군 수송기가 떴다.

그래, 아직 주한미군이 있었지...

주한미군은 작전권이 있으니, 굳이 한국 정부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미군 비행기로 즉시 날아갈 생각인 듯 보였다.

"뭐, 가는 건 마음대로이긴 할 텐데."

그리고 한 시간쯤 뒤.

미군 비행기에서 낙하한 두 사람이 게이트에 입장했다는 메시지가 내 눈앞에 떠올랐다.

[라이언 스펜서가 '마계'에 입장했습니다.]

[로버트 가르시아가 '마계에 입장했습니다.]

던전 내부의 상황까지 전부 생중계 가능한 장비까지 둘둘 차고서.

아주 북한 정부나 우리 정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쯧쯧."

메시지를 제대로 안 보는구만.

게이트 주인이 나라니까?

서울에서 누워서 두 사람의 생방송을 켠 채로.

나는...

딸깍.

"라이언 스펜서와 로버트 가르시아를 마계에서 방출한다."

[라이언 스펜서가 '마계'에서 강제 방출됩니다.]

[로버트 가르시아가 '마계'에서 강제 방출됩니다.]

그대로 당황한 채 게이트에서 방출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재입장하려고 했지만...

"라이언 스펜서와 로버트 가르시아를 마계에 입장할 수 없게 설정한다."

[라이언 스펜서의 '마계' 입장이 차단되었습니다.]

[로버트 가르시아의 '마계' 입장이 차단되었습니다.]

이 새끼들이.

조물주 위의 건물주 위의 게이트주를 뭘로 보고.

방출되어서 당황하는 그들의 생중계 화면에 시선을 집중한 채로.

조형빈 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조 국장님, 접니다."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현재 판문점에서 대기 중인 외국인 헌터들, 올려보내세요. 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은 이성혁.

"이성혁 씨... 아니 위원장님. 네네, 지금 올려보내는 헌터들한테, 국경에서 입국세 징수하시고, 게이트 앞에서는 입장료 받으세요. 안 내고 몰래 들어가는 놈들은 시간 적어서 보내시고요. 입장료요? 글쎄, 얼마나 받으면 좋으려나."

그건 생각 안 해봤는데.

"일단 쇼케이스니까. 저렴하게 1만 달러부터 시작해 볼까요? 영구 입장요? 장사 하루이틀... 아, 장사 안 해봤겠구나. 당연히 24시간 이용료죠."

24시간에 1만 달러면... 뭐 엄청 많지 않잖아요?

헌터들 다 부자라고.

"네, 그리고 그 근처에 사는 북한 인민들 동원해서 수익 활동도 진행하세요. 뭐 함바집... 아니 밥집 같은 거 말이예요."

자본주의를 잘 모르는 양반이니, 제대로 알려줘야겠지.

외국 헌터들.

오게 두어라...

북한 인민이 굶주렸다.

무제한의 세균술사 115화

#게이트주(4)

#게이트주(4)

며칠 전.

미국 백악관 각료회의.

이곳의 분위기는 심각했다.

"허, 개인이 게이트를 소유할 수 있는 거였다니."

법무부장관과 하원의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각성자가 나타나면서 많은 것이 격변했지만, 가장 바빴던 조직은 그 격변에 발맞춘 법률 집행 기관과 법률 제정 기관들이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단순히 게이트를 사유화할 수 있다는 거였다면, 큰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관련법만 제정하면 되는 거였으니까.

문제는 그 게이트의 가치.

그리고... '소유'의 한계였다.

"일단 게이트의 가치부터... 어떻게 추정하고 있습니까?"

"한국 내 정보망이 거의 붕괴된 터라... 다행히 주한미군과 대사관 쪽 정보망으로 확인해본 결과..."

쭈뼛거리며 보고를 망설이던 CIA 국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치는 무궁무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무궁무진해요? 정확한 수치화는 불가능합니까?"

그래봐야 던전이 던전이겠지.

던전 자체가 금으로 뒤덮여 있는 던전이 아닌 이상 무슨 가치가 있겠냐는 듯 심드렁한 각료들의 반응에.

"일단 유라시아 대륙보다 넓은 건 확실합니다."

"푸허억!"

사방에서 헛바람 들이키는 소리와 마시던 걸 뿜어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 유라시아 대륙... 장난이 심하군요. 국장!"

"... 최소치입니다. 내부 지도로 확인되는 지역만이고, 미답지도 여럿 있답니다."

"... 미친."

말이 유라시아 대륙이지...

지구상 최대 크기의 면적을 보유한 국가인 러시아.

아니, 그를 넘어서 과거 구소련도 유라시아 대륙의 절반도 가지지 못했다.

"... 꼭 넓은 땅이 가치가 높으리라는 법은 없잖소."

한 장관의 말에, 국무부장관이 버럭 성을 내며 외쳤다.

"장난해요? 방귀가 잦으면 똥이 나오는 법입니다! 면적이 유라시아급이면 1% 지역에서만 자원이 나온다고 해도 지구 전체를 흔들어 놓을 분량입니다!"

"... 그건 그렇소만."

"대통령님. 이건 중대한 안보 문제입니다."

국무부장관의 다급한 말에, 국방부장관이 받아서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다행인 건 북한 지역에 있다는 것이겠군요."

국방부장관의 중얼거림에 다들 눈을 번쩍 빛냈다.

"아직 테러지원국이죠?"

"핵무기도 있고..."

"생물 병기도 있을 테고."

그야말로 '악의 축 중에서도 축'.

지금까지 미국이 '민주주의'를 배달했던 여러 국가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명분이 확실한 국가였다.

비록 정권이 바뀌었다지만.

시장 경제를 받아들이겠다지만.

한국과 통일을 추진 중이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미국이 '허락'했을 때의 이야기다.

허락하기 전까지는.

북한은 국제 사회에서 그저 테러 국가일 뿐이다.

백악관의 대표적인 매파 장관인 국방부장관 데이빗 필드가 말을 이어갔다.

"우리 미군은 북한의 해방을 위해 지금 당장이라도 나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진짜 자꾸 그런 헛소리만 할 거예요?"

국무부 장관 트리샤의 뾰족한 외침에 필드 장관이 미간을 찌푸렸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당신도 장관이면 생각 없는 소리는 그쯤 해둬요. 지금 한국에 누가 있는지 알고서 말하는 거예요? 심지어 그 게이트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고 말하는 거고요?"

"김세균..."

"알면 입 좀 닥쳐요. 핵 맞아도 안 죽고, 손짓 하나로 도시 하나를 가루로 만드는 헌터를 상대로 재래식 군대로 뭘 어쩌려고요?"

"우리 미국에도 강력한 헌터들이 여럿..."

"그럼 초인부 장관이 말해야지 왜 당신이 말하냐고."

원래도 국무부의 파워가 가장 강한 미국이었지만, 초인부가 등장하면서 더 추락해 버린 국방부의 위상에 필드 장관은 깨갱하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저희 초인부(Department of Superpowers)에서는 섣부르게 김세균과 교전 활동을 벌이는 것을 강력히 반대합니다. 자연재해는 막는 게 아니라 피해가는 겁니다."

세계 최강국.

미국마저도 피해 갈 정도의 자연재해(?)가 된 김세균이었다.

"그러면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냥 저 신규 던전... 아니 신세계(新世界)를 그냥 넘겨준단 말입니까?"

고민 중인 장관들을 향해, 초인부장관이 입을 열었다.

"일단, '권한' 이 어디까지인지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 같습니다."

"... 그게 무슨 소립니까?"

권한이 어디까지냐니.

권한은 당연히...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긴 하군요."

지금까지 누가 게이트를 '소유'한 적이 없었으니.

게이트 '소유'에 수반하는 권한 역시도 알려진 바 없다.

"입장 가능한 인원은 얼마인지, 입장 제한은 어떤지, 김세균의 권한으로 입장 가능한 사람을 통제할 수 있는지, 이미 들어가버린 인원을 방출할 수 있는지. 이에 따라서 예상할 수 있는 권한의 수준을 단계별로 정하고, 그 단계에 따라서 우리의 전략을 함께 수립하면 됩니다."

"그걸 알기 위해서는..."

"일단 강행돌파해야겠지요. 스토리까지 더해지면 더 좋고."

현 초인부장관은...

카이저 라인을 타고 장관에까지 오른 친(親) 카이저의 대표적 인물.

그가 말했다.

"김세균에게 최상위 권한이라고 할 수 있는 '방출' 권한이 없음을 확인하면 더 좋고, 있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상관없다니요? 혹시라도 우리 미국 헌터들이 배제되기라도 하면..."

"WDDO가 있지 않습니까."

"북한은 미가맹국..."

"김세균은 가맹국 사람이니까요. WDDO의 던전 시장 개방 협약 조항을 잘 읽어 보십시오."

(1) 본 조약에 가맹한 모든 국가, 그리고 해당 국가의 단체, 기관, 개인은 어떠한 차별 없이 던전 입장을 허용해야 한다.

"개방을 허용해야 하는 건 국가뿐이 아닙니다. 해당 국가에 소속된 단체나 기관, 개인 역시도 던전 입장을 막을 수 없지요."

"김세균 개인은 저걸로 어떻게 한다고 해도, 북한이 막을 수도 있잖아요?"

국무부장관의 말에, 초인부장관이 빙그레 웃으며 나직이 말했다.

"그러면 북한은... 국제 사회에서 영원히 정상 국가가 될 수 없을 겁니다."

**

라이언 스펜서와 로버트 가르시아.

둘은 던전에서 방출된 뒤에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까지도 고스란히 방송에 송출되었다.

분개한 표정으로, 라이언 스펜서가 주먹을 불끈 움켜쥔 채 오연히 외쳤다.

"김세균! 네가 남자라면 이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당당한 남자의 도전을 아예 기회조차 주지 않고 꺾어버리다니!"

"흥, 라이언 네 녀석이 맞는 말을 할 때도 있군. 나도 동감이다. '마계'라는 던전... 우리 둘도 공략할 수 있을지도 몰랐는데. 이런 추악한 짓을 하다니. 대범한 남자인 줄 알았는데, 김세균... 실망이군."

누가 보아도 연기임이 확실한 극적인 말투로 주고받던 두 사람.

"아쉬운 대로 우리의 방송은 여기서 종료하도록 하겠습니다."

"쯧, 나와 너, 그리고 김세균과의 경쟁은 미룰 수밖에 없나."

그대로 방송은 허무하게 종료되었다.

급히 방송을 종료하고서, 라이언 스펜서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조금 전의 말투와는 명확히 다른 평범한 목소리였다.

"정말로 김세균에게 방출 권한이 있었다니."

"그래도 예상했던 바잖아."

"이런 권한까진 없길 바랐을 뿐이지."

"그래도 시청자 반응은 나쁘지 않군."

위성인터넷으로 확인하는 시청자 반응은 꽤 좋았다.

미국의 골수팬들은 김세균을 극도로 성토하는 분위기였고, 글로벌에서도 이번에는 김세균이 심했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두 사람이 여론을 확인하고 있을 무렵, 북한 군인들이 왔다.

그들을 보조하기 위한 한국 헌터들도 같이 왔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명색이 미국 최강 헌터들이 아니겠는가.

대놓고 저항하겠다고 나서면 막을 길이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손을 든 채 순순히 투항했다.

옛날 북한이라면 모를까, 지금 북한이라면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

막대한 입국세를 청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 헌터들은 물밀듯이 북한으로 몰려갔다.

한국 헌터들은 입국세가 없었기에 더 자유롭게 입국할 수 있었다.

심지어 입국세가 끝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좋지 않은 북한의 도로 및 철도 인프라 탓에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아오지 지역에 도착한 헌터들은 1만 달러에 달하는 입장료를 청구받았다.

심지어 24시간 한정 입장료였다.

일단 그 절반은 내 거였는데...

"연리 1%의 개발 채권으로 되살게요, 당분간 그 돈은 전부 북한에서 사용하세요."

─정말 감사합네다. 온 조선 인민들이 위대한 김세균 동지의 위업을 기억할 겁네다.

"... 위대한은 좀 뺴라니까."

일단 절반을 고스란히 북한에 투자하기로 했다.

투자도 아니었다.

연리 1%면 사실상 기부지 기부.

어차피 돈은 넘쳐나고, 그 돈 들어온다고 해도 딱히 쓸 곳도 없으니, 친구 돕는 셈 치고 투자하는 거다.

─아, 그 미제 간나새끼들은 추방했습네다.

"잘했어요.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는 귀찮아질 테니까."

그냥 비행기 타고 날아가서 바로 들어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것도 북한에 들어가다니.

미친놈들이 따로 없지.

심지어 그 마지막에 본 발연기는...

아니, 저딴 걸 보고서 환호하는 멍청이들도 있다고?

미국놈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이성혁과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전화를 종료했다.

슬슬 나도 다시 마계로 돌아가 봐야겠다.

그레모리랑 이야기도 해 봐야 하고.

아무리 마계가 넓어도 수십만에 달하는 헌터들의 유입이 과연 괜찮은 건지도 확인해야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무렵.

─세균아.

앤서블 이어링으로 들려오는 제피로스의 목소리.

"예, 선생님."

─... 그 미국에서 WDDO에 널 제소했단다.

"더블유... 뭐요?"

─WDDO, 국제 던전 개발 기구.

"... 제가 국가도 아니고 거기에 왜 절 제소해요?"

─그게 정확히는... 네가 국적을 둔 우리나라를 제소했다고 해야 하나?

아니 그거 설마...

"제가 걔네 방출했다고 제소한 거예요?"

─... 그렇겠지.

"미친놈들 아니에요? 거긴 우리나라 게이트도 아닌데. 북한은 미가맹국이잖아요."

─그게... 조항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 일단 우리나라에서도 최대한 싸워볼 것 같긴 한데. 네가 알다시피...

"네, 알죠."

미국이랑 외교전으로 붙어서 이길 나라가 있겠냐.

─심지어 지금 상황이 더 불리해. 왜냐면...

그냥 던전도 아니고, 아예 세계 하나가 생긴 급이었다.

탐내는 게 미국뿐일까.

미국이 싸워서 얻어낸다면, 다른 국가들도 똑같이 수혜를 볼 테니, 외교적으로도 한국이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국 쪽에서 원하는 게 뭔데요?"

─북한의 WDDO 가맹.

그건 정상 국가가 되려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그리고 네 방출 권한 봉인.

"... 뭐요? 그건 안되죠!"

─알아, 우리 쪽에서도 그건 절대 불가함을 천명했고, 아마 미국에서도 그냥 던져본 것 같다.

"그러면 진짜 원하는 건 따로 있다는 건데."

─차별 없는 입장을 원하겠지.

"..."

─일단 너도 이쪽으로 와서 고민 좀 해보자. 나 외교부야. 우리 쪽에서도 국제법이랑 국제 기구 쪽 전문가들이 싹 모여서 조약 파헤치고 있다. 방법이 나오겠지.

"알겠습니다."

갑자기... 일이 커졌는데?

무슨 국제 조약이 나오고...

일단 급히 외교부로 향했다.

나도 조약을 보긴 봤는데, 하얀 건 글자고 검은 건 종이... 아니 반대구나.

빼곡한 글씨를 보니 정신 나갈 것 같아서 그런다.

그러던 중...

문득...

(1) 본 조약에 가맹한 모든 국가, 그리고 해당 국가의 단체, 기관, 개인은 어떠한 차별 없이 던전 입장을 허용해야 한다.

(2) 단, 합리적이고 차별 없는 입장료 징수는 허용한다.

두 조항에 눈이 갔다.

옆에서 나처럼 정신 나가기 직전의 제피로스에게 물었다.

"... 보통 게이트 입장료 징수할 때 단계에 따라 차별 징수하죠?"

"응? 당연하지."

저단계 게이트와 고단계 게이트는 당연히 그 산출 가치에서부터 차원이 달랐다.

"... 마계는 여러 단계의 게이트가 한데 모여 있는 복합 게이트라고 생각해도 되겠고요."

"그렇겠지."

"그러면... 요금을 차등으로 받아도 상관 없는 거 아니에요?"

지금이야 체험 기간(?) 이라서 24시간에 1만 달러지만.

어차피 테스트가 끝나면 입장 인원 컨트롤이나 여러 요인을 위해서 입장료를 조정할 생각은 있었거든.

"예를 들면, 미국 65단계 게이트 중에서 가장 입장료가 비싼 곳이 어디죠?"

"산타 바바라의 게이트. 1회 입장에 1000만 달러 정도 받지."

무슨 1000만 달러냐고, 미친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 산타 바바라의 게이트에서 나오는 마정석이 미국 서부 전체의 발전을 책임졌다.

미국 최상위 헌터들이 1회 공략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입장료 천만 달러는 우스울 정도로 많았다.

"오겠다면 오라고 하세요. 대신 우리도 받죠. 천만 달러. 60레벨 이상부터."

"... 뭐?"

"아, 참고로 24시간에 천만 달러입니다."

그렇게 무차별적인 입장을 원한다면야.

자본주의적으로 가보자고.

그리고...

"또, 하나 더 있어요."

"... 뭔데?"

"입장을 차별 없이 허용해야 한다고 했죠?"

"응, 그렇지."

"입장'만'?"

"... 무슨 꿍꿍이야?"

어, 그래.

입장은 어디 한 번 마음대로 해 봐라.

그런데 그거 아니?

마계의 최고 권력자가 누구인지?

너네가 지구에서나 슈퍼 파워지...

그 슈퍼 파워, 마계에서도 통할까?

**

라이언 스펜서와 로버트 가르시아.

북한에서 추방되어 한국으로 왔던 두 사람은, 다시 의기양양하게 북한으로 넘어왔다.

"God bless America, God bless America!(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

방송까지 켜고서, 한껏 거만한 태도로, 라이언 스펜서는 미국을 찬양했다.

감히 소국 따위가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를 거부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렇게 아오지의 마계 게이트 앞에 도착한 그들에게...

"뭐? 천만 달러?"

"24시간에 천만 달러라고?"

놀라는 그들에게, 북한 공무원이 퉁명스럽게, 거친 영어 발음으로 응수했다.

"60레벨 이상의 헌터들에게는 앞으로 그렇게 징수하기로 됐다."

"언제부터!"

"어제부터."

로버트 가르시아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대체 기준이 뭐요?"

"미국 쪽의 최고 입장료에 맞췄다."

"아니! 그건!"

"여기가 그 정도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면, 돌아가면 그만이다."

그들의 안색이 한껏 일그러졌다.

반박할 거리가 없어서였다.

"쯧, 어쩔 수 없지. 계좌이체..."

"현금만 가능하다."

"미친! 현금으로 천만 달러를 들고 다니는 미친놈이 어디 있어!"

"미국의 경제 제재로 인해서 우리나라는 계좌 송금이 불가능하다."

"이런 썅! 나중에 낼게!"

"외상 불가. 선불만 가능하다."

바로 앞에서 이게 무슨 꼴이야!

결국 그들의 첫날 입장은 좌절되었다.

그렇게 다음 날, 긴급 공수된 현금 2천만 달러를 지불하고 입장한 마계.

"오, 여기가 마계인가."

"이제 본격적인..."

그런데, 그들의 앞에, 바로 창이 들이밀어졌다.

몬스터인가?

바로 반응하며 싸우려고 했지만.

'무, 무슨 압력이...'

'이, 이건 못 이긴다.'

단지 기세만으로도 압도당한 두 사람이 얼어붙어 있을 때.

"나는 위대하신 마신(魔神) 그레모리님의 총군단장, 벨리모스다."

마신의 총군단장...

얼핏 듣기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강해보이는 이름에 한껏 긴장한 그들에게.

벨리모스가 말을 이어갔다.

"방송 꺼."

"... 예?"

"마계는 방송 송출 불가 지역이다."

마계는.

입장부터 그들에게 전혀 호의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무제한의 세균술사 116화

#게이트주(5)

#게이트주(5)

갑자기 대박나면 용케도 알아차린 친척과 지인들의 전화가 난무한다고 했던가.

내가 그랬다.

뭐, 원래도 못난 건 아니었지만...

마계는 좀 개념이 다른 문제였으니까.

─저도 꼭 방문하고 싶습니다.

"얼마든지 오세요, 프로스트 씨는 영구 입장료 면제입니다."

─워, 원래 천만 달러라고 하지 않았어요?

"프로스트 씨라면 당연히 면제해야죠."

프로스트.

영국 최강의 헌터.

내게 아서 왕의 반지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아이템을 선물해준 장본인.

이 사람이라면야 천만 달러가 뭐야.

일억 달러 입장료라도 면제해 줄 수 있다.

─그래도 되는 건가요...

"뭐 어때요, 내 건데."

─하하, 정말이군요. 정말로 헌터 킴의 소유에요.

"시스템은 거짓말 안 하죠."

─그러게요. 그러면 조만간에 갈게요. 북한 쪽 구경도 해보고 싶었으니.

북한 구경이라.

그러고 보니 나도 아직 못 해봤네.

고난의 행군 때 워낙 나무를 베어 써서 민둥산이 많아서 볼품없긴 하다던데.

그래도 그 유명한 금강산이나 개마고원 같은 건 보고 싶긴 하다.

또 북한에도 꽤 괜찮은 게이트들도 많다고 들었고.

이게 다 시간이 없어서 그래.

시간이 있어야 가지.

프로스트와 조금 더 안부 인사를 나누고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도 확인 안 하고 무의식 중에 받았는데.

─요! 브라더!

아니 이 목소리는.

"... 아흐마드."

─뭐야, 브라더. 왜 이렇게 떨떠름해. 안 반가워?

"반갑죠. 반갑죠."

반갑긴 한데.

왜 전화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아서 조금 떨린달까.

"어쩐 일로 갑자기 전화를."

─아아, 알면서 묻는 거지?

"마계 때문이군요."

─이거 쑥스럽네. 꼭 내가 그것 때문에만 전화한 것처럼 보이잖아?

"아니었어요?"

정말 아니었어?

─섭섭하게. 우리 브라더 안부도 좀 묻고 겸사겸사 전화한 거지.

"아, 예예."

개미 눈꼽만큼은 그랬겠지.

"공사가 다망하시니 뭐."

─그놈의 공사, 아주 지긋지긋하다. 이제 다 때려치우고 한국으로 넘어가서 살까?

"... 네?"

뭐 귀화 선언이야?

프랑스 정부에서 들으면 발작할 소릴 하시네.

─솔직히 말해서, 한국에서 살고 싶다니까. 언데드 수리소도 있어서 저렴하게 언데드 수리도 되지, 이제 마계까지 생겼잖아? 마계... 크으, 딱 들어도 네크로맨서가 활약할 장소 아니야?

그렇긴 하지.

마계처럼 넓은 오픈 필드야말로 네크로맨서가 활개 치기 딱 좋은 곳이다.

한국 정부에서 육성한 네크로맨서들도 마계야말로 네크로맨서의 터전이라고 확신하는 판이고.

마계에 오면 한가닥 할 건 분명하다.

음, 그런데 교통정리가 좀 힘들 거 같긴 한데.

아흐마드의 전력(全力)은 잘 몰라도, 마계에서도 제법 강한 수준일 건 분명하니까.

"정말 오시게요?"

─정부 때문에 못 가.

역시 그렇겠지.

─가면 아까워서라도 몇 개월쯤은 붙들고 공략할 거 같은데, 그랬다가는...

어어, 그건 아니지.

당장 엘렉시르 수급에 차질이 생길 텐데.

여전히 세계 전체를 통틀어도 엘릭시르가 생산되는 던전은 프랑스의 게이트 하나뿐이었고, 거길 공략할 만한 능력을 보유한 사람은 프랑스에 아흐마드 혼자였다.

─아아, 누가 나 대신에 엘릭시르 좀 캐주면 좋겠다.

엘릭시르는 이제 세계적인 필수 재화.

엘릭시르의 수급이 멈추면 곧 엘릭서의 공급이 멈춘다는 뜻이었고, 그러면 세계적인 권력자들이 '장생'할 길이 막히는 거다.

뭐, 나는 이제 불로장생이니 상관없긴 한데.

다른 사람들은 아니니까.

"누구 맡길 만한 사람 없어요?"

─없어, 던전 기믹상 네크로맨서가 아니면 사실상 효율적으로 사냥하기가 힘들거든. 그 던전에서는 카이저 그 양반도 힘 못 써.

그렇게 말한 아흐마드가.

잠시 고민하다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 꼭 네크로맨서일 필요는 없긴 하지.

"... 생각난 사람이 있는 거 같은데."

─응, 브라더.

"네."

─아니, 네가 적임자라고.

... 이건 또 뭔 헛소리야?

농담인가 싶었는데.

─브라더, 나랑 바통터치 한 번만 해줘라. 대신 그 기간 동안에 얻어지는 엘릭시르 수입은 브라더가 다 먹고. 물론 세금 정도는 내야겠지만.

"... 진심이에요?"

엘릭시르는 지금까지 그 어떤 누구도 캐지 못했던 아흐마드의 전유물이었는데.

그걸 이렇게 나한테 양보한다고?

─나한테 마계는 그만큼 절실해. 언더 세븐티 시대를 깨려면 더 강해져야지. 마계야말로 내 강함을 수련하기에 가장 적합한 공간이지.

"가보지도 않으시고서..."

마계에 꿀 발라놨나.

어떻게 이렇게까지 확신하는 거지?

... 설마.

클래스 퀘스트가 마계에서 수행하는 거라던가...

... 떠보자.

"누가 들으면 마계를 원래 알고 있던 것처럼 들리네요."

─... 브라더 날카로운데?

아흐마드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이러면 딜레마다.

물론 내가 지금은 아흐마드보다 압도적으로 강할 거다.

그렇다고, 내 아이템을 호시탐탐 노리는 양반을 그냥 마음 놓고 키워줄 수도 없는 노릇.

지금은 호의적이지만.

내가 갖고 있는 반지 중 하나가 '그 반지'임을 알게 되어도 호의적일지는 의문이다.

─어때, 내 제안은?

"지금은 저도 마계에서 처리할 일이 많이 남아서요. 그게 끝나면 생각해 보죠."

진짜 그렇기도 했고.

마계 일이 다 끝난 게 아니어서 지금도 계속 오가고 있었다.

─하하! 알겠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지.

그렇게 끝난 전화.

휴, 일단 넘기긴 했는데...

앞으로 어쩌지?

계속 오고 싶다고 조를 텐데.

모르겠다. 일단 마계로 가자.

아, 그 전에...

"보상은 써먹어야지."

예전에는 보상 하나하나가 소중해서 바로바로 썼던 거 같은데, 요즘은 자꾸 밀린다.

['재료 아이템 선택권(大)'를 사용합니다.]

50레벨 보상인 재료 아이템 선택권.

小가 1kg을 줫으니.

대 사이즈는 아무래도...

[당신이 원하는 재료 아이템 1가지를 100kg 제공합니다.]

오, 10kg 정도를 예상했지만 역시나 제일 보상 좋다는 50레벨 보상이다.

무려 100kg의 재료.

고를 재료는 둘 중 하나겠지 당연히.

혈금 아니면 별의 유물이다.

"1톤 정도가 100%라고 했으니, 100kg이면 한 번에 10%는 채우겠네."

반면에 별의 유물로 받으면...

아마 50% 정도는 채울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20%당 기능 하나가 해금이니, 왕홀의 40%, 60% 기능 두 개가 해방이다.

고민스러운데.

혈금이냐, 별의 유물이냐.

"그래, 결정했다."

역시 혈금이지.

지금 1%도 채 안 되는 정도로도 아테나의 활약상은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10%가 채워지면 어떨까?

정말 전사 클래스의 최상위급 랭커... 아니 그 이상을 패밀리어로 데리고 다니는 꼴일 거다.

왕홀도 확실히 중요하긴 하지만...

아니다. 미련 갖지 말자.

나중에 또 기회가 오겠지.

"나는 혈금을..."

─세균 씨.

"... 규선 씨?"

앤서블 이어링으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내게 앤서블 이어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둘뿐이다.

한 명은 제피로스, 선생님이고.

다른 하나는 임규선 씨.

"무슨 일 있어요?"

─잠깐 와보셔야겠어요.

"... 금방 가죠."

요즘 들어서 이 정도로 급하게 찾던 적이 없었는데?

뭐, 어쩔 수 없지.

귀인께서 부르시면 돌쇠는 닥치고 따르는 수밖에.

일단 선택은 미뤄둘까.

**

"... 아이고 힘들다."

"고생했어요."

강남에서 천안이 좀 멀긴 하네.

헬기를 부를 수도 있지만 너무 특권 같아서 어지간히 급하지 않고서야 차 타고 다닌다.

그나저나 예전에야 돈이 없었으니 여기다가 연구소를 지었지만, 지금은 강남 한복판에 연구소를 지어도 될 정도로 돈이 있다.

물론 그건 낭비긴 하지만.

적당히 서울 중심부로 옮기는 건 가능할 거 같은데.

"연구소 서울로 옮길래요?"

"아뇨? 여기가 좋은데요?"

아니 내가 힘들다고, 내가.

그래도 취향은 존중해 줄 수밖에...

내가 을이다. 을.

"... 네."

"네, 서울은 시끄러워요."

네, 취향 참 한결같아서 좋시다.

"그런데 왜 부르신 거예요?"

"아. 저 레벨 많이 올랐어요."

"레벨요?"

"갑자기 오르던데요."

갑자기 올라?

아, 나 설마...

[경험의 공유] [ON]

설명 : 대부분의 위대한 업적은 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험을 공유하여 서로 더 나은 곳으로 올라설 수 있다.

내용 : 습득 경험치의 50%를 당신과 연결된 대상(임규선)과 공유합니다. 언제든 스킬을 사용하여 경험치 공유 여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내가 한방에 60레벨 후반대까지 올랐으니...

"설마 지금 레벨이."

"66이요."

미쳤다...

원래 레벨 올리기 겁나게 힘든 비전투 계열이 66레벨이면...

비전투 계열 중에서 최고 레벨 아닐까.

"그, 그것 때문에 부른 거예요?"

"아, 그것도 있고요... 전에 혈금인가? 물어보시지 않았어요?"

갑자기 혈금은 왜 나와.

"그랬죠?"

"이제 만들 수 있게 됐어요."

"... 예?"

"아, 물론 성공률도 아직 낮긴 하고, 재료도 많이 들어요. 대충 1kg의 혈금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가... 10kg의 순수한 금과 기타 연금술 재료들이더라고요."

재료비가 무려 최소 금의 10배가 넘는 가격.

그렇지만...

만들 수 있는 것과 없는 건 차원이 다르다.

물론 운 좋게 대량의 재료를 얻을 때도 있지만, 이렇게 요행으로 얻어지는 재료는 한계가 명확했다.

내가 헌터로 데뷔하고 나서 얻은 혈금과 별의 유물이 하늘에 별 딸 정도로 적었다는 게 그걸 증명했다.

별의 유물은 그리드를 통해서 던전 내에서 아주 극미량을 채굴하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게다가...

넘치는 돈을 쓸 데도 있어야지.

"그, 금은 얼마든지 쓰세요. 그냥... 무한으로 돈 가져다 써도 됩니다. 혈금, 혈금만 만들 수 있으면..."

"네, 그럴게요. 용건은 이게 끝이에요. 그냥 메시지로 말씀드릴까 하다가... 그냥 얼굴도 오랜만에 보고 싶어서 불렀어요. 폐였나요?"

"폐는요. 저도 보고 싶었어요."

"후후, 거짓말인 거 아는데 기분은 좋네요. 기분좋은 김에."

그녀가 주먹만 한 크기의 꿀렁거리는 붉은 액체를 건네주었다.

"여기요."

"이게..."

"혈금이에요."

"제가 아는 혈금이랑 조금 다른 거 같은데."

"용액에 포화시켜서 그래요. 거기서 용액을 날려버리면 순수한 혈금이 된답니다."

아테나, 맞아?

─맞습니다. 저 상태로도 제가 흡수할 수 있습니다.

대박 났다.

이러면 무조건 별의 유물로 골라야지.

섣부르게 선택하지 않기를 잘했다.

운이 좋았네.

**

그래서 결과적으로 별의 유물을 선택하게 됐다.

[초월급 재료 아이템, '별의 유물'을 선택하셨습니다.]

[별의 유물 100kg이 인벤토리에 생성되었습니다.]

바로 아비센나의 왕홀을 꺼내어...

흡수 개시.

[성좌 아비센나의 왕홀]

[품격] : 성좌의 유산

[설명] : 성좌 아비센나가 인간 시절 항상 사용하던 지팡이다. 그의 권위를 상징한다. 구성 물질이 일부 보충되어, 조금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구성 물질을 추가로 보충하면, 봉인된 기능을 해방할 수 있다.

[내용] : 

─보유한 모든 스킬의 숙련도가 한 단계 증가한다.

─스킬, '희생의 번제'를 사용할 수 있다.

─형태를 반지로 변형할 수 있다.

─스킬, '위상 변환'을 사용할 수 있다. (개체, '프라이드'를 40조 개 이상 보유하고 있고, 개체가 '생물화'를 사용할 수 있을 때 발동 가능)

─이 기능은 봉인된 상태입니다.

<현재 잔여 구성 물질 : 73.21%>

[위상 변환(사용 아이템 스킬)]

설명 : 세포 단위까지 모든 면에서 일치한다면, 과연 그것을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직 중요한 건 나의 의식일 뿐이다.

내용 : 개체 '프라이드'의 '생물화'로 술자와 동일한 형태의 소체를 만들어 해당 소체과 현재 위치를 맞바꾼다.

설명이 간단하면서도 뭔가 복잡한 거 같은데...

위상 변환 스킬은 일단 미뤄두고.

세 번째로 해금된 능력은...

[성좌 아비센나의 왕홀의 형태를 반지로 변형하시겠습니까?]

네! 네! 네!

이놈의 희생의 번제 때문에 매번 왕홀 꺼내서 들기가 얼마나 귀찮았는데!

이게 웬 떡이야!

무제한의 세균술사 117화

#마계에서

#마계에서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지금까지 이놈의 지팡이 때문에 불편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말이지.

아무리 인벤토리에서 바로 꺼내서 착용할 수 있다고 해도, 사람이 일상생활 중에 계속 들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예전처럼 하꼬였을 때면 모를까.

지금은 온갖 위협과 미친놈들이 날뛰는 세상에 희생의 번제 없이 내던져지면 이 연약한 마법사의 육신은 그냥 찢기겠지.

아, 물론 아테나도 있지만...

이미 사우디에서의 테러 사건으로 증명됐다.

아테나의 인지 범위는 이제 나보다 빠르지 않다.

내가 쪼렙이었을 때나 아테나의 방어가 나보다 빠르게 인지하고 적용되었지, 이제는 내 반사신경이 아테나보다 높은 수준.

결과적으로는 크게 도움이 되진 않는다.

방어력의 경우도 혈금이 물론 재질 자체가 뛰어나긴 하지만, 애당초 보조용 방어 수단이니까.

방어가 주된 수단이었으면 갑옷으로 만들었겠지... 기본적으로 아테나는 골렘이다.

전천후, 다용도.

이런 용어는 무척 좋아보이지만, 결과적으로 궁극으로 올라가면 모든 면에서 애매해질 수도 있다는 거였으니까.

다행히 '알로이스 교황의 서클릿'을 얻은 이후에는 즉사에 대한 위험은 많이 줄었지만.

즉사할 정도의 타격이 아니면 발동되지 않는 게 문제였다.

죽을 만큼 아파도 사람은 죽을 수 있으니...

그래도 그레모리의 치유의 권능 등, 여러 보완할 수단은 있지만.

희생의 번제라는 개사기 스킬이 있는데 굳이 뒤질 만큼 아픈 공격을 허용할 필요 없다.

다 좋은데 문제 하나가 저놈의 지팡이를 꼭 쥐어야 사용 가능했다는 거다.

그런데 이제 남아도는 반지 슬롯에 낄 수 있다.

이러면 프로스트에게 밥 한 끼가 아니라 몇 끼는 더 사야겠는데?

덕분에 슬롯이 많이 비어서 말이지.

바로 반지로 바꾸어서 착용했다.

뭐 전력상 달라진 건 없는데.

귀찮은 게 해소된 것이 제일 컸다.

"... 전력상 달라진 게 없어?"

아니지.

없긴 왜 없어.

"이제 손이 비잖아."

그 말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인벤토리를 뒤적여 무기를 꺼냈다.

[파괴왕 푸거스가 좋아하는 랜덤 게임]

요상한 이름의 망치.

이걸 쓰려고 꺼낸 건 아니고...

반지화된 왕홀과 중복 착용이 가능한지 보려고 착용해 본 거다.

그리고...

"되네."

손에 반지를 낀 채로, 무기 착용도 됐다.

미쳤네.

이... 워낙 사기라서 말을 안 했지만...

사실 '무기' 부위 자체의 성능으로는 성좌 아비센나의 왕홀은 좀 떨어지긴 했다.

무기는 유틸이나 방어도 방어긴 하지만, 대부분은 주력 공격 스킬의 강화가 핵심이니까.

"이렇게 되면... 무기부터 구해야겠는데?"

혈금에 무기까지.

... 갑자기 돈 들어갈 일이 많아졌다.

다행인 건...

전 세계에서 달러를 현금뭉치로 들고 오고 있다는 거였다.

**

규선 씨에게 혈금을 부탁하고서, 나는 마계로 들어왔다.

'게이트주'의 장점은 여러 개가 있지만...

그중 하나가 이거다.

[원격으로 당신이 소유한 게이트를 개방하시겠습니까?]

[본래 게이트 위치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더 많은 마나가 소모됩니다.]

아예 지구 반대편이면 또 모를까, 고작해야 서울에서 사용하는 정도로는 마나가 얼마 들지도 않았다.

부담 없이 원격으로 게이트를 개방하고 마계로 입장했다.

입장하는 위치도 다른 평민(?) 들과는 달랐다.

어허, 게이트주라니까, 게이트주.

"어머, 오셨나요?"

그레모리의 왕성... 아니 이제 마신에 올랐다니까 신성인가?

어쨌든 거기 가운데 떡하니 나타났다.

나오자마자 반겨주는 그레모리.

"마계 일은 어때요?"

"걱정해주신 덕분에 좋아요."

"새로 유입된 인간들은 어떻습니까? 말 잘 듣나요? 사고 치면 말만 해요."

바로 방출해 버리게.

방출당했다고 환불? 그딴 건 없다.

여기 북한이야 북한.

소비자보호법 따위가 있을 리가 없잖아.

이럴 땐 눈치 볼 필요 없는 독재국가도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뭐, 여러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자잘한 임무들이 빨리 해결되고 있어서 긍정적이에요."

"다행이네요."

사실 24시간에 만 달러.

그리고 60레벨 이상은 천만 달러의 입장료를 뽑으려면 꽤 시간이 걸릴 거다.

마계의 가치는 당연히 무궁무진하긴 하지만...

어느 정도 탐사가 이루어진 뒤에야 그 무궁무진함...

소위 말하는 꿀을 빨 수 있을 터다.

그런데 그 시간을 단축해 주는 것이 임무, 퀘스트였다.

퀘스트 과정에서 마계의 정보도 수집하면서, 보상으로 입장료를 커버할 수도 있으니까.

동시에 마계에도 이득이었다.

마계의 방대한 영토에 비해서 마족의 숫자는 극히 적었다.

... 뭐 할 말 없기는 한데 그 적은 숫자가 하필이면 나 때문에 더 적어졌으니까.

마계에서는 공백을 메우기 위해 외주(?) 줄 외부 인력이 절실하던 차에 딱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어머나."

그런데 나랑 인사를 나누던 그레모리가 내 손을 향해 시선을 두고서 떨어트릴 줄을 몰랐다.

"혹시 그 반지..."

아, 이 친구가 명품을 또 알아보는구만.

이런 맛에 명품 쓰고 다니는 건가?

"엄청난 격이네요."

"하하, 이게 말이죠."

형태 변환을 해제해서 지팡이로 다시 바꾸자, 그레모리의 눈이 휘둥그레 다시 커졌다.

"그 지팡이였군요. 그런 격을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숨기고 있던 건 아니고... 최근에 오르긴 한 거일 텐데.

"그렇다면 이제 지팡이가 비는 건가요?"

"그런 셈이죠."

"필요하신가요?"

"... 정말요?"

"그럼요, 마계의 모든 물건은 구원자님의 것이기도 한걸요."

아니 뭐, 그렇게까지 말하면...

못 이기는 척 하고.

흠흠.

"뭐 모든 물건까지는 필요 없고... 지팡이 하나 정도면 괜찮겠네요."

"일단 따라오세요."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가니...

아니 이게 다 뭐여.

거의 산처럼 쌓여 있는 아이템과 각종 재료들.

입이 떡 벌어졌다.

"조촐하죠?"

... 뭐라고요?

그레모리 너 이런 사람이었니?

낯설구나.

"본래 1마왕이던 바알의 재물만 해도 이 정도는 되었을걸요? 급히 마신의 위에 오르느라 재물들을 많이 수습하지 못했어요. 많이 유실되기도 했고요."

"... 아깝네요."

"어차피 마계의 존재들에게 돌아갔을 텐데요 뭐. 마계 전체가 저와 구원자님의 것이니 상관없어요."

쿨하신 마신님이시군.

"여기 있는 재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지팡이는..."

그레모리가 손을 뻗자.

쌓이고 쌓인 아이템 중에서도 가장 위에 있던 것이 휙 날아와 그녀의 손에 들어왔다.

"이거에요. 받으세요."

아비센나의 왕홀에 비하면 훨씬 화려하고 긴 지팡이.

인벤토리에서 꺼내고 빼기는 더 빡셀 거 같긴 한데, 아비센나의 왕홀처럼 상시로 들고 다닐 필요도 없으니까 뭐.

일단 받아서 능력치부터 확인해 보자.

[바알의 권위]

[품격] : 초월급 무기

[설명] : 마계의 최강자였던 바알이 과거 인간 시절부터 들고 다니며 애용했던 지팡이. 오랜 세월 그의 힘과 의지가 깃들어 단순한 유물에서 초월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내용] : 

─보유한 모든 스킬의 효율이 50% 증가한다. (아이템 스킬 제외)

─위대한 지혜에 접속할 수 있다.

─스킬, '투명화'를 사용할 수 있다.

─'희생'과 관련된 모든 스킬에 소모되는 제물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보유한 모든 스킬 효율 50%라니.

내가 최근에 봤던 유물급 스태프 매물이 몇 퍼센트였더라.

20% 였나.

심지어 그건 정확히 말하면 '매물'이 아니었다.

옛날 매물이었지...

어떤 마법사에게 팔린 걸로 아는데, 대략 가격이 3조는 넘었을 거다.

과거 거래 기록과 능력치만 확인했던 거다.

고정 수치가 아니라 퍼센트로 증가하는 건 그만큼 얻기 힘들었다.

그런데 50%라니.

"미쳐버렸군."

그 다음으로.

위대한 지혜는 뭐야?

[위대한 지혜 (상시발동형 아이템 스킬)]

설명 : 바알이 지금까지 축적한 모든 지식과 경험. 필요한 시점에 메시지로 상황에 적절한 조언을 보여준다.

... 바알위키(?) 같은 건가.

일단 이건 애매하니 넘어가고.

[투명화]

설명 : 바알의 권능 중 하나로, 사용자나 대상을 투명하게 만든다. 사용자가 투입한 마나에 따라 단순히 육체를 투명하게만 만들 수도, 인기척을 더 지울 수도 있다.

어, 음...

이상한 생각 하는 사람 없겠지.

마지막으로...

희생 계통의 모든 제물이 절반이라면.

희생의 번제 효율이 2배로 올랐네.

"마음에 드시나요?"

멍하니 설명을 읽어내려가던 내게, 그레모리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이건..."

"죽은 바알이 남긴 지팡이에요."

"이런 걸 저한테 주셔도 됩니까?"

"말씀드렸듯이 마계의 절반은 이미 구원자님의 것이니까요."

"... 거절하기엔 제가 낯이 좀 두꺼운가 봅니다."

이건 못 참지.

바로 인벤토리에 쓱 넣었다.

나중에 제대로 써먹어야지.

"잘 쓰겠습니다."

"별말씀을 다하시네요."

마계에 와서 생각지도 못한 득템을 하고 가네.

그러면 나도 선물은 줘야지.

"이거."

"이게 뭔가요?"

"넥타르... 아니 마신의 힘요."

"어, 어머나..."

그렇게 황홀하게 얼굴까지 붉히지 마.

아니 가까이 오지... 가까이 오지 말...

순식간에 말릴 틈도 없이 거대한 것에 내 얼굴을 묻어버리는 그레모리.

숨 막혀요...

"저, 정말 감사드려요."

마신의 위에 오르긴 했지만, 사실 '마신'이라는 소리를 듣기엔 그레모리는 격이 한참이나 부족했다.

옛 바알을 조금 넘는 정도.

그래서 각지에서 반발이 없지는 않았다.

마왕 중 1위라면 모를까.

마신이면 마왕들보다 위라는 뜻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앞으로 여기서 생활 잘하려면 팍팍 밀어줘야지.

그레모리 정도면 마왕 중에서는 엄청나게 관대한... 그리고 공정한 마왕이기도 했고.

"이번 건 많이 취하지는 않을 거예요."

규선 씨를 통해서 추출한 원본 넥타르니까.

근데 아쉬운 표정인 건 내 착각이지?

이 술고래 마왕... 마신 같으니.

"감사해요. 그리고..."

그리고, 뭐 또 있나?

"옛 마신의 신전에 가보시겠어요?"

"옛 마신?"

"구원자님의 스승님...? 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 성좌양반.

그 양반이 마신...

"여기서 신앙을 얻으셔서 그 신앙을 바탕으로 상위 차원계로 발돋움하셨던 것으로 알아요."

"... 설마 마신으로 오래 있으면 그레모리 당신도?"

"아, 아뇨. 저는 불가능할 거예요."

"왜죠?"

"신앙은 본래 닿지 않는 대상을 향할 때 가장 극대화되는 법이거든요. 그분이 신앙을 얻을 수 있으셨던 건 역설적이게도 마계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일 거예요."

어, 음... 이해가 가네.

나 같아도 내 눈앞에서 뻔히 살아 있는 양반이 신이랍시고 설치면 신앙보다는 반발심부터 들 거 같으니까.

"게다가 그분은 모두가 인정할 만한 '기적'을 남겨두고 가셨죠."

"기적? 아..."

영원인가 그거로군.

"네, 그 정도는 되어야 신격으로 성장할 신앙을 수집할 수 있어요. 저는... 말만 마신이죠."

"에이, 뭐 그렇게까지야."

"후후, 그렇다고 실망한다는 건 아니에요. 제가 어찌 그분과 동격에 설 수 있겠어요? 명칭만이라도 만족한답니다. 게다가 이제 영원을 잃은 마계에서 가장 오랜 세월을 버틸 수 있는 것이 저일 테니까요."

마신이 진짜 신에서 일종의 호칭이 되었다는 거군.

그것도 뭐 나쁘진 않지.

"자, 그러면 신전으로 가실까요?"

"가시죠."

성좌 양반의 신전.

과연 뭐가 남아 있으려나.

마신의 권한으로 워프 게이트를 연 그레모리의 뒤를 따라 순식간에 신전에 도착했다.

"여기가..."

"네, 마신의 신전이에요. 과거에는 여기서 '영원'이 나왔다고 하더군요."

이 공간에 오니 머릿속에서 '나태'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익숙함이라도 느끼는 거려나.

바로 그 때였다.

─오.. 라...

문득 들리는 목소리에 뒤를 홱 돌아보며 물었다.

"... 뭐라고 말했어요?"

"아뇨, 아무 말도 안 했는 걸요?"

... 그럼 이건 뭔 소리지?

환청이라도 들었나.

─성... 단... 

다시 들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인벤토리에서 꺼낸 바알의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자... 격... 이... 안... 돼...

이어지는 목소리가 들렸을 때.

[위대한 지혜가 발동됩니다.]

그러면서, 눈앞에 뿅 튀어나온 작은 노인네.

전에 봤던 바알의 모습을 똑 닮았는데, 고작해야 10cm 정도 되는 미니어처 바알이었다.

"안녕하신가."

"... 바알?"

"그의 사념 같은 거지. 다 죽고 남은 의식의 찌꺼기라고 해야 할까?"

"사이즈가 찌꺼기 사이즈이긴 하네요."

"끌끌, 새로운 주인은 무례한 놈이군. 어쨌든, 저건 '상위 차원'을 위한 입장 시험 같은 거야."

"... 상위 차원요?!"

"그래, 내 본신도 오랜 세월을 입장하길 원했지만, 실패했던 그것."

... 바알 그 깡패같이 쎈 양반도 입장하지 못했다면.

대체...

"본신의 격이 일정 수치를 넘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어려웠지. 인간 태생의 '종의 한계'라는 것이 있거든. 초월을 몇 차례씩 반복했어도 모자랐다는 거지. 내 본신은 그걸 권속의 힘으로 극복하려고 눈을 돌렸지만, 그걸로는 불가능했어. 결과적으로는 '본신의 격'만이 유일한 입장 자격이라는 거다."

본신의 격이 대체 뭐지.

"... 레벨?"

"그렇게도 부를 수 있겠지."

레벨이 올라야 들어갈 수 있는 신규 게이트 같은 셈인가.

얼마나 올려야 하는지는 감이 안 잡히긴 하는데.

일단 레벨부터 좀 올려볼까.

고삐도 풀렸으니까.

제대로.

무제한의 세균술사 118화

#오버 세븐티(1)

#오버 세븐티(1)

미니어처 바알이 목적을 완수했는지 사라지자, 그레모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누구랑 갑자기 이야기를 나누시던 건가요?"

"아, 안 보였어요?"

"네."

"바알이요."

"... 네?"

"정확히는 바알의 사념이라고 해야 하나."

바알의 지팡이에 얽힌 능력을 알려주자 그레모리가 꽤 놀라워했다.

"바알은 현명한 마왕이라는 이명으로도 불리던 존재였어요. 그의 지식이라면 구원자님께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그렇지만 때로는 의식의 사념에 불과한 존재일지라도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호도할 수도 있으니 주의하시길."

"네, 뭐."

나도 누군가가 하는 말이 항상 옳지만은 않다는 건 알 정도의 나이가 되었다고.

어떻게 알았냐면...

진실 같았던 것이 거짓이고.

정의 같았던 것이 불의인 일이.

혹은 그 반대가 심심찮게 나타나는 복마전이 있거든.

바로 한국의 온라인이다.

대한민국에서 인터넷깨나 했다는 사람들은 다 느낄 수 있을 거다.

다년간의 활동으로 단련된 지금에서는 바알의 세 치 혀 따위에 농락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나저나 현재 레벨이 68이다.

일단 70레벨 위로 맞추고 싶은데.

"그레모리, 내가 도울 일은 없을까요?"

"예? 아니 구원자님께는 이미 엄청난 도움을..."

"괜찮으니까 말해요. 누구 말 안 듣는 새끼 있어요?"

"... 정말 괜찮지만. 아무래도 10위권 이내의 기존 상위의 격 마왕들은 여전히 비협조적이긴 하답니다."

이 새끼들이.

"가서 깽 좀 놓고 와요?"

"깽을 놓아요?"

"... 겁 좀 주냐고요."

공포의 대명사인 마왕에게 겁을 주냐는 게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뭐 마왕도 이제 인간이었다는 게 드러난 마당에 뭘.

"괜찮아요. 그건 제가 스스로 해야 할 일이니까요. 정식으로 마신으로 인정받으려면, 마왕 정도는 스스로 다룰 수 있어야겠죠. 그게 상위 격의 마왕일지라도."

"그럼 뭐 부탁할 건..."

"글쎄요, 딱히 없긴 하지만... 구원자님께서 굳이 찾으신다면 고대 마수들의 거주지 같은 곳이 있긴 하지요. 굳이 건드리지 않으면 위협이 될 일이 없는 존재긴 하지만, 종종 내려와서 마족들을 죽이곤 해요. 예를 들면 삼두호(參頭虎) 같은 존재가 있겠네요."

"감히 짐승이 사람... 아니 마족을 죽이다니."

이제 불멸이 아니니까 마족도 사람인가?

어쨌든.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군.

절대 레벨 올리려고 그러는 건 아니다.

아무렴.

"제가 갑니다."

"... 정 그러시겠다면 그들을 토벌하고 삼두호의 가죽들을 가져다 주세요."

아무리 마신일지라도 동등한 격에 있는 내게 임무를 내릴 수는 없는지, 서브퀘스트가 뜨지는 않았다.

이건 단점이긴 하군.

하지만.

"원하시면 마계 최고의 장인들을 시켜 그 가죽으로 옷을 제작해 드릴게요."

퀘스트 보상보다 더 좋은 걸 할 수 있는 게 권력이다.

지금은 자각이 잘 안 되지만...

나는 거의 지구에 버금가는 크기인 한 세계의 공동 통치자쯤 된 셈이었으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