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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구 태릉 대통령 관저 집무실.
최근 들어 자주 열리는 NSC에서 대통령의 분노에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아니, 우리나라의 사이버 보안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됩니까? 전국적인 통신망 마비라니요!"
"... 송구합니다."
강민국 대통령의 분노 섞인 외침에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고개를 푹 숙였다.
국방부장관 역시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사실상 사이버보안 분야에는 국방부의 비중도 꽤 컸으니 말이다.
"휴우... 수습까지는 얼마나 걸릴 예정입니까?"
"최대 이틀은 잡아야 할 듯 합니다."
"이틀이라니."
아파오는 머리를 부여잡은 강민국 대통령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품에서 꺼낸 두통약을 물과 함께 넘겼다.
"재경부 장관, 이틀이면 경제에 미칠 영향이 어느 정도 될 것 같습니까?"
"단기적으로는 10조 원 이상... 장기적으로는 100조 원 이상의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합니다."
"대외신인도 약화, 주가 폭락, 전쟁 리스크 따위의 이유겠군요."
"그렇습니다."
"북한이 이번 일을 일으킨 배경은 뭡니까?"
강민국 대통령의 질문에, 국방부 장관이 흘끗, 건너편에 배석한 각성자관리부 장관을 바라보고는 다시 강민국 대통령 쪽으로 시선을 옮긴 채 입을 열었다.
"함경북도에서의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보입니다. 그 이후로 북한 수뇌부의 정권 장악력이 현저히 떨어졌고, 내부 다잡기용 보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국가안보실장도 동의한다는 듯 국방부장관의 발언에 힘을 실었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이게 다행일지도 모릅니다."
"... 다행이라고요? 이게?"
황당해하는 강민국 대통령에게, 안보실장이 설명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국 영토에서 핵폭발이 일어날 정도의 사건이었습니다. 북한이 군사적으로 도발할 역량이 남아 있었다면 이미 일을 저지르고도 말았을 겁니다. 달리 말하자면..."
"군부, 그리고 헌터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군."
"예, 김세균 헌터의 활약으로 북한의 다섯 헌터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는 중이니... 친위대의 전력 50%가 증발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제대로 주먹 뻗을 힘은 없으니 다른 방법으로라도 보복하는 중이라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문제는 이에 제대로 대처할 역량이 솔직히 부족합니다."
흘끗, 과기부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과기부 장관이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다급히 마이크를 잡고 입을 열었다.
"지난 20년 동안, 대한민국은 분명히 발전해왔습니다.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만... 사이버 보안 분야... 그를 넘어서 일반적인 과학 분야에서의 발전은 경제의 발전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했습니다."
"..."
강민국 대통령의 말문이 막혔다.
대한민국 경제는 각성자에 의해 돌아갔고, 산업은 그에 초점을 맞춰 성장하고 있었다.
이외의 분야는 다소 등한시되는 경향을 부정하기 힘들었다.
"저쪽에서 대놓고 오랜 시간 동안 창을 벼려왔다면... 사실상 이런 사태는 예견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당하는 건 결과대로라고 치고. 앞으로의 대응은요?"
"북한이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반복해서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보장하기 힘듭니다. 저쪽은 꽤 오랜 시간 준비한 결과물이니..."
순간 분위기가 침울해지고, 강민국 대통령의 입에 허탈한 미소가 걸렸다.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상황이 좋지 않을 줄은 몰랐군요."
"저, 대통령님."
강민국 대통령이 손을 든 외교부장관에게 고개를 끄덕여 발언을 허락하자 외교부장관이 말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건 어떻겠습니까?"
"미국...?"
"미국 정가에 꽤 여러 명의 실력자가 있지만... 그 중 하나가 미국 최강의 헌터로 손꼽히는 카이저입니다."
"카이저, 그가 이번 일이랑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겁니까?"
"그가 김세균 헌터에게 원하는 게 있다는 이야기가..."
또 김세균인가.
강민국 대통령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요."
외교부장관 대신에, 국방부장관이 나서며 대신 말했다.
"사실 김세균 헌터의 억지에 가까운 요청을 들어주다가 이 지경이 된 게 아닙니까. 결자해지라고 생각하셔도..."
"이보세요, 국방부장관! 그게 지금 말이 되는 소리라고..."
"아, 사실상 각성자관리부도 상당한 책임이 있겠군요. 정 장관님이 책임진다고 하고 북으로 보냈던 거 아닙니까? 이 상황은 책임 못 지십니까?"
"북한 독재 정권을 거의 붕괴 가까운 상황까지 이끌고 북한의 주력 헌터 다섯을 제거하고 온 사람한테, 뭐... 책임이요? 지금 장난합니까?"
"김세균 헌터를 북에 그걸 해달라고 보냈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국정원의 대북 휴민트가 배신한 게..."
말하고 나서도 아차 싶었는지 정 장관이 입을 다물었다.
국정원장 류현수는 친 각성자 쪽의 인사였으니까.
"다들 그쯤 하세요."
강민국 대통령의 중재로 멈추었지만, 이미 저쪽이 기세가 올랐음을 정인현 장관도 직감하고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외교부장관의 말대로 미국 쪽에 방어를 요청해보긴 하겠습니다. 하지만, 김세균 헌터를 파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국가에서도 김세균 헌터를 위해 많은 자원을 투입하여 지원한 만큼..."
"그건 이쯤에서 끝냅시다. 더 언급하지 마십시오."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는지, 국방부를 위시한 비각성자 쪽 내각 인사들도 한발 물러섰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대통령님. 국정원장입니다."
"연결하세요."
화상회의시스템으로 연결된 국정원장 류현수.
─대통령님, 지금 김세균 헌터랑 서울로 올라가는 중입니다.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NSC는 대충 마무리 단계니까요. 이번 사건 대응에 주력해 주세요."
원래 NSC 배석 위원 중 하나인 국정원장이었기에 참석해야 했지만, 하필 타이밍도 얄궂게 김세균을 맞이하러 진해에 내려가 있던 동안 일에 터진 거였다.
덕분에 국정원 쪽에서는 1차장이 대리 자격으로 나와 있었다.
─대통령님, 그게 아닙니다. 김세균 헌터가 이번 사건... 해결할 수 있답니다.
"... 그게 무슨."
김세균의 능력이 다재다능한 건 인정했다.
광범위 공격 능력부터 치료 등.
정부 기관조차도 그의 제대로 된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능력의 기원은 어디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그런데...
"김세균 헌터가 언제 사이버 보안 분야에도 정통했죠?"
─저도 모릅니다.
"..."
"국정원장! 여기 NSC에요! 대통령님과 장난을..."
안보실장의 외침에, 제피로스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장난으로 보입니까?
"..."
─어쨌든, 정부에서 믿건 믿지 않건, 저는 분당의 N사 데이터센터로 향합니다.
대한민국 최대 크기의 데이터센터로 유명한 곳이었다.
─국정원 이름으로 협조 요청 보내뒀습니다. 참고하시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국정원에서 영장도 없이 사기업의 데이터센터에 접근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국정원에 국내 작전권은..."
이전 정권에서 국정원의 권한이 꽤 축소된 상황.
하지만...
─대공업무입니다.
그 한마디 앞에서는, 다들 침묵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권한을 많이 잃었다고 해도, 대공 분야에서는 대한민국에서 국정원보다 큰 우선권을 보유한 국가 기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다들 협조해주거나, 뒷짐 지고 있거나... 결정하십시오. 이상입니다.
먼저 화상통신을 끊어버리는 국정원장의 모습에, 몇몇 위원들은 똥 씹은 표정을 했지만, 그와 가까운 정인현 각성자관리부 장관과 강민국 대통령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일단 우리는 우리대로 할 수 있는 걸 합시다. 사이버보안사령부도 막기 힘들다고 해도 최대한 방어를 해보십시오. 국정원에서도 최대한 움직이고요."
"그리고... 김세균 헌터를 믿어보시는 겁니까?"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언제 그 사람이 할 수 있다고 말하고서 못한 게 있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강민국 대통령의 목소리에는, 강한 확신이 들어 있었다.
"모든 정부 부처가 김세균 헌터를 적극 지원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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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센터 인근에 도착한 뒤에, 착륙할 틈도 없이 그대로 뛰어내렸다.
이카로스의 날개 효과로 미끄러지듯 활강해서 착륙하니, 데이터센터 직원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급합니다. 빨리 내부로 안내하세요."
"예, 자, 잠시만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몇 층 올라가자.
"여기가 저희 데이터센터입니다. 지금은 완전히 난장판으로 수습 중입니다만..."
"예, 여기서부터는 제가 처리하죠. 다들 자리 좀 비워주십시오."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뒤에, 그리드를 풀어놓았다.
사람의 뇌, 그것도 엄청나게 큰 뇌를 닮은 형상의 그리드가 인벤토리에서 풀려나와 기지개를 켜듯 펼쳐졌다.
"뭘 하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음대로 해봐."
─ 내 . 가 . 닥 . 은 . 무 . 기 . 물 . 에 . 대 . 한 . 통 . 제 . 력 . 을 . 얻 . 는 . 다.
그러면서, 그리드가 자신의 촉수 가닥을 데이터센터 내부의 수많은 컴퓨터들과 네트워크 선에 박아넣는다.
─ 이 . 것 . 역 . 시 . 물 . 질.
이른바 광섬유라고 불리는, 수억 km에 달하는 길이의 엄청나게 가느다란 선들도 마찬가지로 순식간의 그리드의 촉수와 연결되었다.
분명 그냥 전선에 불과했던 광섬유들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 뭘 어떻게 하려고?"
─ 현 . 상 . 의 . 근 . 원 . 을 . 찾 . 는 . 다.
북한 해커들을 찾는다는 소린가?
"... 그 다음에는?"
─ 그 . 들 . 이 . 해 . 결 . 하 . 게 . 한 . 다.
"...?"
이게 대체 뭔 소리야.
─ 해 . 결 . 후 . 에 . 는 . 죽 . 인 . 다.
... 죽인다고? 비유적인 표현인가?
─ 그 . 들 . 의 . 생 . 명 . 활 . 동 . 을 . 멈 . 춘 . 다.
내가 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직접적으로 말했다.
이게 뭔 소리래.
"여기 한국 땅에서... 북한 해커들을 죽인다고?"
─ 그 . 렇 . 다.
"어떻게?"
한동안 답 없이 있던 그리드가...
약 10분이 지난 뒤에 말했다.
─ 이 . 미 . 죽 . 었 . 다.
알아듣지 못할 말에 당황해서 바라보고 있을 때.
귓가에 제피로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야! 북한 쪽에서 모든 해킹 공격이 멈췄다는데, 네 짓이야?
"... 그런 거 같은데요?"
황당함 절반.
무서움 절반을 품고서...
눈앞의 뇌 형태의 그리드를 보았다.
이 새끼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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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민국 정찰총국 121국.
사이버전 기술 개발을 전담하는 110연구소와 함께 북한의 사이버 작전을 전담하기로 유명한 부서.
이곳의 해커들은 비록 헌터는 아니었지만, 거의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각종 해킹이나 랜섬웨어 등으로, 헌터들보다도 더 많은 외화를 벌어다 주는 북한의 일등공신이기 때문이었다.
"남조선 아새끼들이래, 아주 형편이 없습네다."
"그 얼라들 얼빠진 거 이제 알았어야?"
"김세균이니 뭐니 날뛰어도, 이 콤퓨타 세상에서야 우리가 최고 아닙네까."
사이버전으로는 세계 최강을 다투는 중국 해커들로부터 모든 기술을 배우고, 심지어 이제는 그들 이상으로 성장한 것이 121국이었다.
정상적인 국가가 아닌 북한은, 오직 전쟁이나 다른 국가를 협박하는 것으로만 국가를 존속할 수 있다는 것이 북한 수뇌부의 판단.
그들이 그래서 사활을 걸고 키운 것이 핵전력, 헌터 전력, 사이버 전력으로 대변되는 삼대 전력이었다.
"다들 적당히 날뛰어야. 오늘만 천둥벌거숭이처럼 굴고 끝낼 거 아니지 않간?"
"그렇습네다. 몇 번이고 들락거릴 수도 있습네다."
히히덕거리며 한참이나 키보드를 두드리던 121국의 해커들.
그런데.
번쩍! 점멸하는 모니터.
"응?"
"뭐 문제라도 있간?"
"아닙네다. 잠깐 콤퓨타가..."
"전기 문제간?"
"그런 것 같습네다."
"발전기 날래 돌리라고 하겠어야."
북한이야 평양도 제대로 전력 공급이 힘들었지만, 여기 121국은 예외였다.
어렵게 구한 석유 발전기를 무한히 돌릴 수도 있는 것이 121국이었다.
심지어 석유가 저렴해진 현재는 국제적인 제재를 피해서 수급하기도 어렵지 않아서 전력이 부족했던 적은 없었다.
이번에는 인터넷 연결 상태가 좋지 않다는 메시지가 떠오르자, 해커가 난처하게 말했다.
"인너네트 문제인 거 같기도 합네다."
"조금 기다리면 좋아질 거이야."
그 순간.
컴퓨터 뒤에 연결된 랜선의 피복이 터지면서.
슉! 무언가가 튀어나와 정확히 그의 미간을 꿰뚫었다.
고작 케이블 한 가닥이었다.
"꺼윽!"
비명조차도 나오지 않는 엄청난 격통이 그의 머리에서 휘몰아치더니...
침이 줄줄 흘러나왔다.
다른 해커들 역시 터져 나온 랜선의 가닥에 그대로 미간을 관통당했다.
이윽고, 그들의 뇌리에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 명령이 내려왔다.
─ 이 . 것 . 들 . 을 . 모 . 두 . 정 . 상 . 화 . 해.
그들이 따르는 독재자의 명령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마치 신이 내리는 듯한 절대의 명령.
그들은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대로 명령을 따랐다.
그리고 모든 명령이 끝났을 때.
─ 안 . 식 . 이 . 다.
그들의 뇌는 곤죽이 되어 그대로 활동을 멈추었다.
이날.
북한의 절대적 해킹 전력이라는 121국은 단 10분도 되지 않아 보유한 모든 해커를 잃었다.
무제한의 세균술사 101화
#통일의 길(1)
#통일의 길(1)
"대체 어떻게 죽였다는 거야?"
뭐, 해킹(물리) 이런 거라도 되는 거냐?
─ 비 . 슷 , 해.
"... 북한까지 물리적으로?"
─ 소 . 환 . 자 . 는 . 멍 . 청.
이쉐키가.
눈을 부라리자, 조금 찔끔하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간략히 하자면...
여기서 평양까지의 거리는 대략 잡아서 250km 이내.
통신망이 중국을 경유해서 평양으로 들어온다고 쳐도, 2000km 정도의 길이를 넘지 않았다.
광섬유 한가닥이 1m 기준 약 0.1g 정도의 무게니까...
"2000km라고 해도 250kg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건가..."
─ 내 . 물 . 질 . 통 . 제 . 능 . 력 . 은 . 그 . 것 . 보 . 다 . 아 . 득 . 히 . 우 . 월 . 해.
그건 그렇지.
거의 수십 수백톤에 달하는 금속을 거대 로봇처럼 부리던 놈이니까.
심지어 내 통제력의 영향까지 생각하면야...
"잠깐만... 그러면."
이론상으로는 세계 어디에 있건, 인터넷을 격하고 광섬유를 움직여 죽일 수 있다는 건가.
─ 그 . 건 . 그 . 들 . 이 . 약 . 해 . 서.
아 그렇지.
해커들은 비각성자였을테니, 고작 광섬유 몇 가닥으로도 죽일 수 있었겠지만...
다른 각성자들은 쉽지 않겠네.
그렇다고 해도 엄청난 무기다.
게다가 해커를 비롯한 컴퓨터 전문가들은 대부분 비각성자니까.
"... 진짜 해킹(물리)잖아. 이거."
CIA나 NSA, 중국의 국가안전부 같은 해커로 유명한 국가기관들도 이 능력 앞에서는 긴장해야 할 거다.
"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언제 죽이랬어."
─ 가 . 장 . 쉬 . 운 . 방 . 법.
"그래도, 다음부터는 자의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적어도 사람 죽이는 건은 나한테 꼭 물어보고 해. 아, 사람 다치는 것도 포함해서."
─ 그 . 건 . 비 . 효 . 율 . 적.
"원래 사람 사는 세상이 효율만 따지면서 살 수가 없는 거야. 짜식아."
─ 이 . 해 . 불 . 능.
괜찮아.
"원래 이런 건 맞으면서 알아가는 거거든."
뇌 형태의 그리드 주변을, 안개로 된 글러트니들이 자욱하게 둘렀다.
─ 잘 . 못 . 했 . 다.
"뭘 잘못했는지 육하원칙에 의거해서 5분 이내에 답하도록."
역시...
신입 교육은 내리갈굼이 최고지.
이런 거 보면 군대가 아주 쓸모없지는 않았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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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정찰총국 소속 121국 본부.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정치위원은 컴퓨터 앞에 엎어져 잠들어 있는 해커들을 보며 불같이 성을 냈다.
"다들 지금 제정신이간! 느기들 자아비판! 아니 총살감이야! 위대한 지도자 동지께서 내린 명을 수행하는 중에 죄 퍼질러 자?"
그러면서 가장 가까이 있는 해커들에게로 다가가 그의 정강이를 퍽 걷어찼다.
그런데.
나무토막처럼 쓰러지는 해커의 모습.
외관상으로는 멀쩡했다.
미간 쪽에 보이는 약간의 붉은 점만 빼면...
"서, 설마."
다른 이들도 하나하나 확인해 본 정치위원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121국의 해커들이... 모두 죽었다.
"이, 이거이 대체 어찌..."
잠시 패닉에 빠졌지만,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즉시 정찰총국 본부를 거쳐 주석궁에 보고가 갔다.
"미제의 초소형 살인 무인기의 소행으로 추정됩네다."
북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수반이자 국가 지도자인 김조은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미제는 아이야."
"예?"
"지금 미제 아새끼들이래 남조선을 도울 이유가 없어야."
남조선을 도울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미국에서 정보를 보내줄 이유가 없었다.
그 정보가 거짓 정보나 역정보도 아니었고 사실이었다.
다만...
상대가 상상 이상으로 강했을 뿐.
"하, 하지만 이런 기술은 미제가 아니면... 아니 미제에서도 굉장히 실험적인 기술로 알고 있슴네다. 남조선 놈들이 갖고 있을 리 만무합네다."
"그렇다면 그 기술이 아니라 다른 방법이갔지."
초소형 살인 드론 기술도 무섭지만.
아예 정체 모를 수단이 더 무서웠다.
"지하 벙커로 피심하심이 좋을 것 같습네다."
"... 그래야갔어."
김조은은 비각성자였다.
수많은 각성자들의 호위를 받고 있긴 했지만...
그들조차도 121국 해커들이 어떻게 살해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121국의 소재지가 주석궁에서 먼 것도 아니었다.
같은 평양 소재.
김조은은 짐짓 태연을 가장했지만, 이면에서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리고 지도자 동지... 아무래도 평양 외의 지역에서 불순분자들이 날뛰는 것 같습네다."
"놔두라. 저거 때려잡는다고 얼마 남지도 않은 사냥꾼들 풀었다가는 평양이 위험해야. 평양만 안전하면 나중에 단번에 때려죽이면 그만이야."
"예! 알겠습네다!"
"핵폭탄에도 살아남는 사냥꾼이라니..."
김조은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미제 아새끼들에게 제대로 속았지 뭐이간."
정보만 맞았다.
김조은은 혼자의 힘으로 다섯 명의 혁명기수를 상대하고, 동시에 핵무기를 맞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헌터가 있을 거라고 감히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세상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혁명기수들은 중국의 최상위 랭커들과 붙어도 손색이 없던 압도적인 사냥꾼들이었다.
"일단 사냥꾼들의 사기만 안 떨어지게 잘 붙잡아봐야겠지."
평양의 친위사냥꾼전단 전력과 충성심만 유지된다면, 그의 권력은 여전히 공고할 것이었다.
결국, 그들이 공화국 전력의 핵심이었으니까.
그렇게 안도하며 벙커로 내려가려던 때였다.
"지, 지도자 동지 크. 큰일났습네다!"
"무슨 일이네?"
"특수작전군이 돌아섰습네다! 리정춘 사령관이...!"
"리정춘이가?"
감히, 군부 따위가?
예전에야 어떻게든 군을 장악하려고 애썼지만, 각성 시대 이후로는 헌터 전력이 훨씬 우선순위에서 앞섰다.
공화국의 사냥꾼들 앞에서, 아무리 단련한 이들이라고는 해도 비각성자에 불과한 특수작전군이 뭘 할 수 있을까?
"친위사냥꾼전단의 사냥꾼 8할이 죽었습네다."
"뭐, 뭐라?"
8할의 사망...
2할이 전단에서도 가장 강력한 이들만 남았다고 해도 이제는 권력이 흔들리기에 충분한 수치였다.
창백해진 김조은이 다급히 외쳤다.
"어, 어떻게!"
"기습이었습네다. 대 사냥꾼 저격여단이 나섰습네다."
비각성자의 힘으로 각성자를 상대할 수는 없을까.
정말 비각성자는 이제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일까?
그런 의문에서 시작한 부대.
엄청난 훈련과 각종 장비를 통해서 제한적으로나마 헌터 전력에 대한 전투가 가능한 특수부대였다.
"리정춘이 이 반동분자 새끼!"
이를 으드득 가는 김조은.
"생존자들은 주석궁으로 모여들고 있습네다."
"... 리정춘이 혼자서 생각한 일이 아닐기야. 그럴 깜냥이 되는 놈이 아니간."
"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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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각.
중국 북부전구의 북한 접경지대에 위치한 329, 330여단과 그 후방 집단군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그 소식은 곧바로 각국의 정보기관으로 전달되었고, 최고 권력자들에게로 보고되었다.
"중국이 북으로 밀고 들어올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 아예 북한 전체를 먹을 생각은 없을 겁니다. 아마도 접경 지대 일부 정도를 북한의 요청에 의해 관리한다는 명분으로 내려올 가능성은 높습니다."
제피로스가 차장들로부터 보고받은 내용을 브리핑하면서 이어 말했다.
"선제적 대응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북을 치자는 겁니까?"
"중국이 밀고 내려오는 건 막아야지요."
"문제는 명분이 없어요."
북한에는 친중파는 있어도, 친한파는 없었다.
예전에는 있었을지 몰라도, 김조은이 승계 과정에서 권력구도를 다잡으면서 북한 초고위 수뇌부와의 접점은 거의 끊어진 지 오래였다.
중국이야 친중파들이 북한을 쿠데타로 장악하면서 지원을 요청하기라도 하겠지만...
한국의 지원을 요청할 북한의 권력자가 있을까?
"... 없진 않습니다."
"누가 있지요?"
"북한에는 없지만, 우리 대한민국에는 있지요."
"그게 무슨 소... 아!"
"예, 얼마 전까지 북한의 최고 권력 체계 핵심에 있었으며... 모종의 사건으로 망명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북쪽 시민들에게 평판도 좋은 사람이지요."
"주체사상의 성기사."
"예, 이제는 민주주의의 성기사가 되겠지만요."
주체사상의 성기사가 전향하여.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전파하러 북으로 돌아간다.
그림은 완벽했다.
"이성혁 씨 본인의 의사는?"
"... 본인은 권력에 전혀 욕심이 없지만, 평온무비한 권력 이양과 북한 주민들의 차별을 막기 위해서라면 한 몸 불태우겠다고 합니다."
"의지도 있고. 이거 머뭇거리면 바보군요. 바로 진행합시다. 다른 위원들은 이견 있습니까?"
묵묵부답.
내각 내의 비각성자 파의 발언권이 다시금 팍 줄어든 상태였다.
당연히 김세균의 방법조차 알 수 없는 활약 덕분.
사실인지 거짓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말에 따르면 더 이상 해킹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로...
국방부장관 등의 비각성자 파벌 장관들은 고개만 끄덕였다.
"정 장관."
"예, 대통령님."
"각성자관리부에서 반발 없이 전쟁 소집 가능한 헌터가 몇 정도 되겠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지만, 미리 준비했던 것이었기에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랭커들은 전부 소집 가능할 것 같습니다. 최근의 사태로 출국 자제령을 내려서 대다수가 국내에 있기도 하고... 그들은 국가로부터 받은 것도 많으니까요."
"랭커 외에는?"
"최상위권 헌터 3천 명 정도까지는 소집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의 전제가 필수적입니다."
"어떤 전제지요? 보상?"
"보상은 그 다음이고... 가장 우선으로 내세운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잠시 망설이다가.
정 장관이 휴우, 하는 한숨과 함께 말했다.
"김세균 헌터가 동반할 것을 하나같이 요청하고 있습니다."
"끄응."
강민국 대통령도 그 이름에는 머리가 아파 왔는지, 깊은 신음을 흘렸다.
"그에게는 그저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너무 많은 걸 기대는군요."
"... 죄송합니다."
"정 장관이 죄송할 일도 아니고, 헌터들의 마음도 이해합니다."
원래 던전 안에서도... 위대한 헌터의 존재감이라는 것이 그런 거였다.
그냥 따르기만 해도, 괜히 목숨이 안전해질 것만 같은 그런 든든함과 안정감.
"그건 김 헌터의 의사에 따르기로 합시다. 그가 거절한다면 다시 요구하지는 않겠습니다."
"... 불참한다면 헌터들이 동요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미 우리나라는 그에게 너무 많은 걸 받았어요."
강민국 대통령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위대한 헌터라고 해도, 그 역시 인간이며 한 개인입니다. 국가를 위해 개인의 자유가 어느 정도는 희생될 수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게 너무 과해지지 않도록 막는 것도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할 일입니다."
"알겠습니다."
위원들이 한껏 숙연해졌다.
"그러면 일단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
"중국과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겁니다. 그를 위해서 이성혁 헌터를 필두로, 우리 헌터들이 의용지원군 형식으로 파견되는 걸로 처리하겠습니다."
"전면전이 펼쳐지면 곤란하겠지요."
"예, 아직 전시작전권은 우리나라에 없으니, 미국이 끼어드는 걸 막으려면 최대한 전면전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진행해야 합니다."
일단 헌터 전력은 군인은 아니었으니 당연히 군대도 아니고 전쟁도 아니라는 논리.
"서두릅시다. 그리고..."
강민국 대통령이 위원 하나하나를 눈에 담으며 말했다.
"각 부처의 알력다툼이 있는 건 알고 있습니다. 없을 수가 없지요. 하지만 지금만큼은 참아주었으면 합니다. 오직 국가를 위해 어떤 것이 옳은지만을 판단의 근거로 삼길 바랍니다. 다들 아시겠습니까?"
예, 하는 소리와 함께 장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거의 세기를 넘어서 이제야 민족이 하나될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그걸 망쳤다가는 그냥 망친 수준이 아니라 매국노로 역사에 남게 될 겁니다. 그걸 원하시는 건 아니겠지요들?"
역사의 반역자가 되지 말자.
그 경고에, 장관들이 한껏 움츠러들었다.
그제야 강민국 대통령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
"뭐요?"
"이성혁 씨가 무너진 북한 정권을 일시적으로 맡아주기로 했다. 우리나라는 고위 헌터 전력을 파견할 예정이고."
"... 그거 맞아요?"
"공식적으로는 국가 차원이 아니고 PHMC 형태지. 좀 큰 PHMC지만, 미국놈들도 잘만 하는데 뭐."
"그 PHMC가 설마."
"SG그룹이지. 그래서 회장인 네 승인이 필요하고."
국가 차원에서 대놓고 적국이라지만, 타국에 헌터 전력을 보낼 수는 없었다.
망명한 고위 권력층인 이성혁이 고용하는 형태가 훨씬 보기가 좋은 건 사실이었다.
그렇긴 한데.
"이럴려고 한 회사로 모아놨나."
"없지 않아 있지."
"우씨..."
도장의 의미를 이제는 확실히 안다.
내가 이 북한 침공(?)의 책임을 오롯이 진다는 거다.
"혹시라도 문제될 일은 없겠죠?"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이제 넌 그냥 성역이야. 누가 널 어떻게 건드리니?"
"그럼 됐죠 뭐."
"아, 그리고... 너도 갈 거지?"
"가야죠."
사람 죽이는 건 여전히 너무 싫지만.
안 죽이려면 오히려 내가 가야 했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던가...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라던가...
국력은 방어에 있는 것이 아니고...
... 아니 이건 취소.
여하튼 강력한 힘이 오히려 평화를 낳을 수 있다는 건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진리.
... 그러니까.
"이 전쟁을 끝내러 갈 겁니다."
무제한의 세균술사 102화
#통일의 길(2)
#통일의 길(2)
이성혁.
전(前) 주체사상의 성기사.
현(現) 세균교(?)의 교단 수호기사.
그는 요즘 수련에 여념이 없었다.
최강이나 이성혁이나, 서로 궤는 다르지만, 강력한 방어력과 지구력으로 버티는 방식의 전투를 즐겼다.
이른바 힘세고 오래가는 두 좀비들.
그런 둘이 맞붙었으니 엄청난 지구전이 벌어졌다.
"뭐 보약이라도 먹었나? 날이 갈수록 이길 수가 없군."
대련을 마치면서, 그 최강이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갔습네까? 김세균 동지가 저를 믿어주셨습네다."
"... 이 김세균 빠돌이랑 뭔 얘길 하냐. 야! 류현수! 일어나!"
최강의 외침에 침을 주륵 흘리며 잠들었던 제피로스가 벌떡 일어섰다.
"뭐! 왜! 뭐!"
"... 끝났다고."
"어우, 땀내 나는 새끼들."
두 사람에게야 땀에 손을... 아니 손에 땀을 쥐는 지구전이었지, 관전자에게는 지루한 근육파티였다.
입을 쩍 벌려 하품한 제피로스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래서, 결정은 내린 건가?"
"그렇습네다. 북으로 가겠습네다."
"...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그러면서도, 의심을 담은 시선을 보냈다.
만약에라도 그에게 사심이 있다면, 대한민국이 새로운 북의 독재자를 만들어 주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원하는 건 통일의 과도기를 책임지며 완충 작용을 할 임시직 통치자였지 김씨가문 대신에 이씨가문을 만드는 게 아니었다.
괜히 죽 쒀서 개 주는 꼴은 사양이었기에, 제피로스의 가늘어진 눈이 이성혁을 훑었다.
물론, 이성혁의 얼굴에는 확신만이 있을 뿐이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네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 있는 목적은 명확했다.
'내가 할 일은 하나뿐이다.'
외부에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는 김세균 교단의 수호기사였다.
수호기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당연히 교세 확장이었다.
'북조선의 불쌍한 인민들에게, 위대한 김세균 동지의 복음과 구원을 전파하는 것... 그것이 나의 사명이다.'
처음에는 고사했다가, 다시 북조선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게 바로 그 이유였다.
비록 김세균 본인은 마다했지만...
'그것이야말로 더 신의 모습이 아니던가.'
거짓된 신은 자신을 섬기길 원하며, 자신의 찬양으로 모든 성서를 뒤덮는다.
주체사상이 그랬다.
온갖 허황되며 입발린 소리 뒤에는, 결과적으로 김씨 일가에 대한 찬양 고무와 강제적인 신앙의 주입이 있었다.
진짜 신은 섬기라고 말하지도 않고,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준다고 하지도 않는다.
그저 하늘의 태양처럼 빛을 내릴 뿐이다.
거짓된 신을 모시다가 이제 진짜(?) 신을 모시게 된 이성혁의 생각이었다.
**
중국의 헌터 관련 정책은 조금 늦게 시작되었고, 타국에 비해 뒤처졌던 것이 사실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일반적인 인간보다 더 우월한 능력을 지닌 각성자들을 공산당의 위협으로 생각했고, 초창기부터 그런 각성자들을 탄압하는 정책을 펼쳤던 것이었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의 당대 주석인 자오윈첸이 정권을 잡은 이후로는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이른바 엽사궐기(獵師蹶起)로 불리는 정책을 내세운 중국은, 13억이 넘는 인구에서 발휘되는 압도적인 헌터의 숫자로 순식간에 발전해 나갔다.
물론, 이런 급격한 변혁은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가장 큰 문제는 인구에 비해 너무 적은 게이트의 숫자.
그걸 커버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일대일로(一大一路) 정책을 펼쳐, 아프리카나 중앙아시아 등지의 게이트를 확보했지만, 그것 역시도 최근에는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21세기 식민지 정책이라는 반발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국과 손을 잡고 추진한 것이 국제 던전 시장 개방.
개방 정책 때문에 정체하던 중국의 헌터 산업은 다시 숨통이라도 튼 것처럼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우리 헌터가 나가서 남의 나라 좋은 일 하는 거 아니냐?'
던전 자체는 개방할지라도, 거기에 부과하는 세율은 각국의 자율이었다.
자국 헌터와 외국 헌터에 대한 차별만 없으면 됐다.
심지어 각 국가들은 헌터들에게 여러 편의를 주면서 게이트 공략으로 벌어들인 수입을 최대한 자국에서 사용하도록 유도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땅은 넓고 인구는 적었던 국가들의 세입이 순식간에 올라갔다.
중국 헌터들이 유입되면서 늘어난 세입에, 해당 국가에서 장기 거주하며 공략을 진행하기 위해 부동산 수요도 폭증해서였다.
남미, 러시아, 아프리카 등지의 부동산은 이제 '버블'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올랐다.
결과적으로.
일대일로로 다수의 외국 게이트를 확보했을 때보다도 중국 정부의 세입 자체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휴우, 그렇다고 옛날처럼 할 수도 없고..."
헌터들의 머리가 너무 굵어졌다.
이미 인민해방군 전력보다도 헌터 전력이 더 중요하게 평가받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들을 강제로 탄압하고, 해외 소득을 전부 국내로 가져올 것을 강제한다면?
쿠데타도 가능했다.
심지어 거물 헌터들은 과거의 군벌처럼 각 지역을 장악하고 휘하에 헌터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거기서 새로운 헌터도 교육한다.
자오 주석이 보기에, 작금의 중국은 청 말엽 각지에 군벌이 창궐했던 때와 비슷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심화되면 춘추전국시대가 된다.
즉, 이걸 잘 컨트롤하지 못하면 최악의 경우 중국은 쪼개진다.
이미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었다.
'전대 주석들이 이래서 엽사(헌터)들을 탄압했던 거긴 하지.'
중국 공산당의 수뇌부들이 바보는 아니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어쩔 수 없었다.
각성자가 경제는 물론이거니와 국방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 2010년대 이후로, 그에 따라가지 않으면 정권은 지킬지언정 국력 자체가 엄청나게 쪼그라들 가능성이 컸다.
그런 와중에 옆 나라에서 나타난 규격 외 헌터는 중국에 큰 위기감으로 다가왔다.
최근까지도 중국 국가안전부나 인민해방군의 과격파는 암살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가 더 성장하기 전에 암살해야 합니다!"
"그는 만세(萬世)의 적이 될 겁니다!"
그런데.
북한에서 일이 벌어졌다.
"킬로톤급의 전술핵이긴 합니다만..."
"핵의 폭심지에서도 살아남았다는 건가."
비록 메가톤급의 전략핵은 아닐지언정...
어쨌든 이러나저러나 폭발의 범위가 다를 뿐, 폭심지에서의 충격은 큰 차이가 없었을 터다.
그때가 되어서야 중국의 과격파들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모든 중국 국가기관에 방침이 떨어졌다.
김세균과 연관된 어떤 작전도 피할 것.
"자연재해는 피하는 거다, 맞서는 게 아니라."
핵에도 안 죽는 헌터는 인간이 아니었다.
자연재해였다.
태풍보다 약하다고 절망하는 인간이 없는 것처럼.
김세균은 중국 정부가 판단하건대 재해에 가까운 존재였다.
문제는...
"북조선의 리정춘이 주석궁을 장악했습니다. 인민해방군에 협조를 요청 중입니다."
"제안으로 장백산 전체, 그리고 두만강 이남 일부 영토를 할양하기로 했습니다."
"북조선 내 여러 공업지대 투자도 제안했습니다."
너무 좋은 제안이었다.
공으로 국가의 영토를 늘릴 수 있는데 거절하는 것도 바보짓.
오직 자오 주석의 심기를 건드리는 건 하나뿐이었다.
"남한의 개입 가능성은?"
"아주 높습니다. 그들은 북한을 자국 영토로 생각합니다."
"남한 헌법에도 그렇게 규정하고 있으니, 아무리 리정춘의 요청으로 북한 영토에 들어선다고 해도 충돌할 가능성은 자명합니다."
"그... 김세균이라는 헌터의 개입 가능성은?"
"무조건입니다."
"애초에 북조선에서의 사건이 그 헌터 때문에 일어난 일 아닙니까?"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 북조선의 혁명기수들의 전력이 어느 정도 수준이라고 했지?"
"오황(五皇)에 있는 본국의 엽사들과 비교하면 한참 떨어지고, 십왕(十王) 하위권과 비슷한 수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협의 나라 아니랄까 봐, 랭킹 시스템 대신에 오황, 십왕 등의 등급과 각종 별호로 불리는 중국 헌터들이었다.
"십왕 하위권 다섯을 상대로 압도적 승리라..."
"너무 걱정 마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북조선 엽사 따위와는 다르게 오황은 격이 다릅니다."
검황, 도황, 권황. 성황, 마황의 별호로 불리는 중국의 5대 헌터.
대외적으로는 그다지 노출되지 않았지만, 중국 네티즌들은 항상 이들 오황과 기존 최강자, 카이저나 아흐마드와 비교하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국가기관은 정확히 평가했다.
"카이저는 1:1로는 무리, 둘이면 동수를 이룰 수 있고, 셋이면 이길 수 있다."
"아흐마드는 변수가 많지만, 언데드를 제대로 전개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두 명이면 충분하고, 언데드가 모두 전개된다면 네 명이나 다섯 명이 협력해야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김세균이었다.
다섯 명의 오황이 모두 모인다면 김세균을 상대할 수 있을까?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자신이 넘쳤지만...
자오 주석은 아니었다.
"일단 리정춘의 제안은 받는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김세균과 충돌할 상황이 벌어지면 무조건 물러나는 것을 전제한다."
"주석님!"
"그, 그건!"
"소국(小國)의 엽사 따위에게 굴복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습니다!"
비명에 가까운 각료들의 외침에도, 자오 주석은 단호했다.
"김세균과 괜한 드잡이를 벌이다가 오황 중 일부가 죽기라도 하면 국가적 타격이 너무 심각하다. 미국과의 힘싸움에서 바로 밀릴 거야."
"우리 대중국에 오황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 그렇지만 최상위급 엽사의 가치는 중요하네. 그렇게 지시하도록."
하지만...
자오 주석은 간과했다.
최상위에 오른.
그 상태로 오랜 세월을 보내며 강력한 권력과 힘을 구축한 이의 오만을.
그리고 아집을.
각료들 중에는 그 사실을 파악하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굳이 그것을 주석에게 말하지 않았다.
오만과 아집은 헌터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다.
대중화(大中華)라는 이름 아래에서 세계의 슈퍼 파워로 등극한 중국 공산당의 고위 각료들에게도.
당연히 그 감정은 이미 싹트다 못해 정신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
오황(五皇).
그들은 하나하나가 중국에서 한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패자들이었다.
물론 기본적으로 중국 정부의 통제를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중국 공산당의 고위 간부조차도 우습게 볼 정도의 무력과 권력이 있었다.
그런 다섯의 강자 중에 최고를 꼽기는 어려웠지만, 대중의 평가... 그리고 심지어 오황들 사이에서도 최강자로 인정받는 인물이 바로 검황(劍皇) 남궁무준이었다.
무협에서도 유명한 남궁세가이지만, 사실 각성 시대 전의 그는 그저 평범한 상해의 회사원일 뿐이었다.
그런 그가 각성 시대가 열리고서는, 정말로 위대한 검사가 되어 남궁세가라는 검문을 일궜다.
"... 지금 뭐라고 말했나?"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남한 엽사 김세균과의 교전을 허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주석 각하의 명령입니다."
이미 북한을 해방한다는 명목 아래에서 북한과의 접경지대에 다른 네 명의 오황들과 모인 남궁무준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그러니까, 도망치라? 김세균인지 뭔지 하는 자의 발치만 보여도 부리나케 도망치라 그 말인가? 그게 주석 각하의 뜻이야?"
"... 그렇게까지 말씀하시지는..."
"알겠네. 그만 가보게."
손을 휘휘 저어 공산당 쪽 간부를 보낸 뒤에, 남궁무준이 오황의 나머지 넷을 불러모았다.
"자네들도 이야기는 들었겠지?"
"아아, 김세균을 보면 바로 튀란 거? 들었지."
"솔직히 좀 세 보이긴 하던데? 카이저나 아흐마드보다는 확실히 강해 보여."
"핵폭발도 버텼다고 하는데."
마지막 말에, 마황(魔皇) 용일건(龙逸乾, 롱이첸)이 코웃음을 쳤다.
"아이템이겠지. 나도 핵폭발을 잠깐 피할 방법은 있어. 다들 쉽진 않아도 그 정도는 가능하잖아?"
"잠깐 피할 방법은 있겠지. 하지만 폭심지에서 아예 살아남을 방법은..."
"아주 뛰어난 아이템이겠지. 그리고... 보통 그런 아이템에는 제약이 있고. 보통은 일회성이거나, 재사용 시간이 매우 길거나 하지 않나? 원래 여벌의 목숨 같은 구명(救命) 아이템은 다들 몇 개씩 숨겨두고 있잖아, 너희들도? 아니야?"
모두가 마황 용일건의 말에 눈을 빛냈다.
"그렇다면?"
"이미 써서 살아남았다면..."
"이번에는 그 아이템의 효과를 이미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뜻이겠군."
"그러면... 다들 합의가 된 건가?"
"흐흐, 겁쟁이처럼 싸워보지도 않고서 꽁무니를 뺄 수는 없잖아."
오황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말했다.
"혹시 또 모르지... 김세균을 잡고, 그 엄청난 아이템을 얻으면 더 강해질 수 있을지도."
그 말을 들은 순간.
그들의 눈에 일순 탐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
북한으로의 급파가 결정되고 나서 헌터들의 소집은 즉각 이루어졌다.
중국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독도급 상륙함에 타고 바로 함경북도 쪽으로 상륙작전을 벌일 예정이었다.
이미 북한군의 힘으로 상륙에 대응하기는 힘든 상태라는 정보 아래에서 내려진 결정이었다.
그 결정이 내려졌다고 해도 수천 명에 달하는 헌터를 소집하는 게, 그냥 딸깍. 으로 되는 건 아니었다.
헌터들을 소집하는 데 걸리는 시간 동안.
나는 잠깐 대련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괴물 새끼가 더 괴물이 됐네."
"괴물이라고 하지 마, 괴물이 불쌍해."
"그럼 뭐라고 부르지?"
불쑥 튀어나온 이성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말했다.
"... 위대한 김세균 동지?"
"아오 이 빠돌이 자식."
최강 선배.
제피로스.
이성혁의 전력을 다한 공세를...
막아내고 세 사람을 제압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5분.
심지어 살상 능력은 사용하지도 않고서 벌인 일이었다.
"큰일 났네."
너무 강해진 게 문제였다.
이들 세 사람은 대련할 대로 대련해봐서 견적이 뻔하니 쉽게 제압할 수 있었지만...
이거 중국 헌터들을 상대로는 그게 힘들었다.
그 와중에 힘조절 잘못 했다가는...
오황이 오/// (...) ///황 이 되는 걸 볼 거 같은데?
무제한의 세균술사 103화
#통일의 길(3)
#통일의 길(3)
독도급 상륙수송함 초도함 독도함.
함경북도 인근 동해상, 독도함 갑판에서 떠오른 일곱 대의 헬리콥터가 나란히 두만강 지역 접경지대로 비행을 시작했다.
물론 일곱 대라고 해봐야 기껏해야 일이백 명 정도 탑승할 수 있는 게 전부였기에, 나머지 3천명은 상륙선으로 상륙하여 육상으로 천천히 합류할 예정이었다.
즉, 이 일곱 대에 탑승하고 있는 헌터들이야말로 정예 중 정예라는 소리였다.
나를 비롯해 최강 선배, 이성혁 씨에... 국정원장인 제피로스도 이번 작전만은 강력한 요청으로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참여했다.
거기에 대한민국 최고를 다투는 랭커들이 대부분 참여했다.
그런 헬기답게.
분위기는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삐삐삐삐삐! 다급한 경고음과 함께 기내 전체가 붉게 빛나기 전까지는.
"SAM! SAM!"
다급한 파일럿의 외침과는 다르게, 대부분의 탑승객들은 오히려 태연했다.
한 명이 일어나 이미 열려 있는 램프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더니.
자신의 활을 들고서 거기에 세 대의 화살을 쟀다.
퐁! 별다른 힘을 들이지도 않고서 날아간 화살이, 순식간에 날아드는 세 개의 미사일을 관통했다.
그대로 허공에서 폭발하는 지대공미사일.
그런 지대공미사일 초소에, 옆 헬리콥터에서 펼쳐진 마법 세례가 쏟아졌다.
꽈과과과광! 폭격을 방불케 할 정도의 거대한 폭발과 함께, 지대공미사일 사이트 몇 곳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휘유, 하며 최강 선배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거 우리가 힘쓸 필요도 없는데?"
"저 사람들도 명색이 랭커니까."
"흥, 다들 약해빠져서."
"네가 지나치게 건장한 거야."
내 덕에 현역에 복귀한 이후에, 최강 선배는 순식간에 뒤처졌던 성장을 회복했다.
오피셜 랭킹은 밑에 있었지만, 제피로스의 평가로는 우리 멤버 정도는 되어야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거라나 뭐라나.
어쨌든, 플레어나 회피기동을 벌이기도 전에 끝나버린 상황에 헬기 조종사는 황당해하면서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30분 뒤 LZ 도착합니다. 착륙 어려운 상황에서는 레펠로 강하 바랍니다."
다행히도 이후로는 지대공미사일 공격 등은 없었다.
아무래도 북한 쪽도 쿠데타군인 만큼 전국적인 군부 장악은 힘들었겠지.
그 한계를 중국, 그러니까 외세로 극복하겠다는 수작이었을 테고.
30분 정도 지나니 두만강이 보였다.
그다지 넓지 않은 얕은 강만 도하하면 중국 땅.
남한에서는 올 수 없던, 대륙으로의 진출로라고 생각하니 조금 기분이 묘하네.
다행히, 착륙지점에는 별다른 위협이 없어서 일곱 대의 헬기가 나란히 너른 땅에 착륙하며 헌터들을 내렸다.
두만강 건너편에서 대기 중이던 중국 군인들이 눈을 끔뻑이며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 오황인지 뭔지는 안 온 건가?
그때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저쪽 두만강 이북에도 헬기가 먼지구름을 피우며 착륙했다.
쌍안경으로 그들의 얼굴을 확인한 제피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황이 맞아."
"도하가능지점은 잘 감시 중이지요?"
"어, 우리나라 몇 안 되는 인공위성 수명 깎아가면서 여기 몰빵이야."
미국처럼 정찰위성이 많으면야 돌아가면서 쓰면 되지만, 몇 대 없는 한국이 음영 상태 없이 계속해서 감시 상태를 유지하려면 추진체를 사용해 가며 궤도를 계속 유지해야 했다.
인공위성의 연료, 추진체는 재보충이 불가능한만큼, 인공위성의 수명과도 같았다.
적어도 10년은 더 쓸 위성의 수명을 5년 밑으로 떨어트리는 것이었지만, 강민국 대통령은 단호했다.
"숫자로는 확실히 밀리겠군."
오황이 끝이 아니었다.
군인만 해도 수만 명.
그리고 복장으로 보아, 군인이 아닌 듯한 헌터들의 숫자도 수천 단위가 넘어갔다.
물론, 우리 쪽에서도 3천 명 정도의 헌터를 동원하긴 했지만...
일단 당장 있는 건 백여 명인데.
아무리 최상위권 랭커라고 해도 숫자 싸움을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거기에 저쪽도 최상위권 랭커가 없지 않을 테고..."
그 순간.
저쪽에서 나선 마법사 복장의 여자가 지팡이를 들고 무어라 주문을 외더니.
쩌저저적! 그대로 두만강 물을 꽁꽁 얼려버렸다.
프로스트 수준은 안 되어도... 프로스트보다 다재다능한 여자였지 아마.
"리우 샤오샤오, 리소소. 원소 마법 모두를 수준급으로 다루기로 유명한 여자다."
아무리 얕아도 꽤 넓었는데, 배도 없이 어떻게 도강하려나 싶었는데... 저런 방법이 있었군.
그렇게 얼려 놓은 두만강 위로, 백기를 든 한 명의 군인이 천천히 내려왔다.
... 전령이겠지?
"네가 받아."
"... 제가요? 왜요? 제피로스가 받아야죠?"
"네가 1위니까. 원래 그런 거야."
제피로스의 강권에 가까운 말에 어쩔 수 없이 전령 앞으로 나섰다.
그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건네고는 그대로 돌아갔다.
설마 중국어로 편지를 보낸 건 아니겠지...?
다행히 한국어 능력자가 있는지, 한국어로 쓰인 편지였다.
내용은 대충...
"공화국군 최고 사령관 리정춘 원수의 요청에 따라 평양으로 남하중이니 방해하지 말 것, 방해하면 강행돌파도 감수할 예정. 1시간 이내 결정할 것?"
제피로스와 이성혁에게도 건네주어 읽게 했다.
그런데, 이성혁이 손을 들었다.
"... 질문 있습네다."
"질문요?"
"최고 사령관 리정춘 원수가 대체 누굽네까?"
그걸 당신이 모르면 어떻게 알아?
"인민군에 리정춘이라는 장성은 특수군사령관 리정춘 중장뿐인데 말입네다."
"그놈 맞아."
"... 그놈이 원수를 칭한단 말입네까?"
"어제 평양을 장악하고 김조은이 목 따고서 인민최고위원회 추대 받았단다. 고작해야 별 두 개 짜리가..."
아 북한군은 중장이면 별 두 개였지? 준장이 없고 소장부터 시작이니.
별 두 개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 장악? 데자뷰인가...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쿠데타냐?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벌린 채 있던 이성혁이, 갑자기 말했다.
"종이랑 펜 있습네까?"
"응, 여기."
제피로스가 건넨 종이와 펜으로, 무언가 일필휘지로 써나가는 이성혁.
얼마 지나지 않아 종이를 채운 내용은...
"인민군 최고사령관을 참칭하는 반역자에게는 귀국 군대를 월경(越境)토록 할 권한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사기꾼의 입발린 소리에 현혹되지 말고 회군을 요망한다. ─ 공화국 인민군 최고원수 이성혁."
짧은 내용이었지만...
임팩트 하나는 끝내주네.
"... 인민국 최고원수였어요?"
"명목상 직함이지만 그랬습네다."
"아직도 공식적으로는 유지야."
제피로스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김조은이 인민들의 동요를 막겠다고 이 친구의 귀순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은 상태였거든. 인민최고회의에서 자격을 박탈하는 과정이 아직 안 이루어졌으니... 이 친구는 잠시 남쪽에 휴가 갔다가 돌아온 인민군 최고원수라는 말이지."
"세상에."
이걸 이렇게 얼레벌레?
"... 그러니까 남쪽 귀순한 최고원수 vs 인민최고회의를 무력 진압하고 김조은을 살해한 쿠데타 중장의 대결이란 말이죠?"
탈주 원수 대 쿠데타 중장 대결 실화냐?
거 가슴이 웅장해지네.
"이러면 명분으로는 우리쪽이 더 유리한가?"
그렇다고 해도...
명분은 어디까지나 명분에 불과하다.
저쪽이 명분 밀린다고 순순히 물러나 줄 놈들도 아니고... 저쪽 명분도 아예 근거 없는 개소리는 아니니까.
"어쩔 수 없이 붙게 되겠군요."
"그렇지."
명분이 아예 없는 쪽이라면 몰라도, 양쪽 다 근거가 있으면 물러날 가능성은 없었다.
"제발... 저쪽이 똑똑하게 생각해 주면 좋겠는데."
진짜로 저 병력을 다 밀고 내려오면.
나도 방법이 없다.
머릿수를 보탤 수밖에.
그냥 머릿수로만 생각하면 100 대 수만이지만...
내가 머릿수를 보태면 수십조 대 수만이다.
아무리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수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가루로 만들어?
적이라고 해도 난 사이코가 아니다.
그리고 잠시 뒤 저쪽에서 다시 온 전령이 가져온 전언을 확인했을 때.
나는 황당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기투(一騎鬪).
... 이 새끼들이 여기가 무슨 삼국지 시대인 줄 아나.
**
황당해서 처음에는 세부 내용을 볼 생각도 못 했는데...
내용은 더 황당했다.
"연승전, 대신에 이쪽에서는 세균이 너가 출전할 수 없다는군."
"아니, 그건 무슨 개소리에요?"
"자신들 쪽의 전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만큼, 그 정도 패널티는 감수해야 일기투에 의미가 있다는군. 어차피 세균이 네가 나오면 뭐... 사실상 일대일 연승전이라고 해도 게임이 되겠니?"
최강 선배와 이성혁 씨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교활한 되놈들입네다. 위대한 세균 동지를 묶어두려 하다니 말입네다."
"받으면. 저쪽에서는 당연히 오황이 나올 테고."
"여긴 우리 셋에 랭커 중에서 둘을 골라야지."
"일고의 가치도 없어요."
미친 소리였다.
"밀고 내려오라고 하세요. 다 쓸어버릴 테니."
그런 내 말에, 제피로스가 내 손을 잡은 채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네가 그걸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 필요하다면 해야죠."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낫지."
"그렇다고 선생님과 여러분을..."
"야!"
제피로스가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못 믿냐?"
"..."
"네 정도는 아니어도. 나 제피로스 류현수다. 검황? 도황? 다 내가 이겨."
"... 혹시라도 위험해지시면 일기투고 자시고 난입할 겁니다."
욕 좀 먹는 게 낫지.
그렇게...
21세기에 때아닌 일기투로 국지전이 결정되게 생겼다.
**
연승전인만큼 대진을 잘 세워야 했다.
가장 좋은 대진은...
"권황은 최강 선배가 상대하는 게 맞고... 성황은 같은 성기사인 이성혁 씨가 상대하는 게 맞아요. 그러면 나머지인데."
"검황과 도황은 내가 책임지지. 마황과 성황을 이성혁이 책임지고. 권황은 강이 네가 맡을 수 있지?"
"둘도 까딱없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애당초 현역 복귀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기에 객관적 전력상 가장 뒤떨어지는 최강 선배가 하나를 맡고, 두 명이 둘씩 상대하기로 했다.
요식적으로 랭킹 4위와 5위의 헌터 두 명이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그들에게까지 턴을 넘길 생각이 없는 셋이었다.
두만강 복판의 하중도의 무성한 풀들을 순식간에 태워 없앤 마황.
국경이 걸쳐 있는 이 하중도가 전투가 벌어질 장소였다.
선봉으로 나선 건 최강 선배.
반대편에서도 최강 선배와 비슷한 체구의 거한이 권갑을 낀 채 나섰다.
"최강 선배."
"응?"
"잠깐 와 보세요."
다가온 그의 전신에...
[개체, '프라이드'가 'Gluconacetobacter Xylinus'로 변형됩니다.]
프라이드로 변형한 개체를 골고루 둘러 주었다.
천연 고분자 물질, 셀룰로오스를 형성하는 세균 개체.
신축성 있고, 생체 결합력 또한 뛰어나며, 물리적 충격을 적층 구조로 완벽히 감쇄할 수도 있는 신물질을 형성하는 개체였다.
우리 회사의 차세대 제품으로 연구하는 개체였다.
당연히 우리 임트키, 임규선 씨의 작품이고.
반칙 같긴 해도...
안 걸리면 되는 거잖아?
꼬우면 너희들도 하던가?
그리고 시작된 전투에서.
두 사람은...
꽈아아아앙!
문답무용으로 서로의 죽빵...
아니 얼굴에 주먹을 꽂아넣었다.
저 무식한 인간들 같으니.
최강 중국 버전도 있을 줄은 몰랐다.
물론, 결과는...
"크허어어어억!!"
피분수를 토하며 멀찌감치 나가떨어지는 권황과.
"... 왜 맞는 느낌이 하나도 없지?"
머리를 긁적거리며 중얼거리는 최강 선배의 모습이 극명하게 나뉘어 있었다.
무제한의 세균술사 104화
#통일의 길(4)
#통일의 길(4)
일격에 나가떨어진 권황.
반면에 어떤 타격도 없어 보이는 한국의 이름 모를 헌터.
물론, 과거에 한국 국내에서는 이름을 날렸다지만....
"하다못해 제피로스였다면 또 모를까."
제피로스의 명성은 중국에서도 자자했다.
오황의 반열에는 이르지 못해도 그 밑인 왕(王)급에는 들어갈 거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인물이 나와서 권황을 압도했다.
"아직 안 끝났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일어난 권황이 휘청거리면서도 으르렁댔다.
"죽인다..."
순식간에 달려들어서,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쾌속한 권격을 쏟아내는 권황.
최강은 그걸 막지도 않고, 그저 받아내었다.
권황의 연격에 서서히 힘이 빠질 때쯤...
최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벌써 지쳤나?"
한국말은 몰랐지만, 권황은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 거 같았다.
천천히 들어 올린 최강이 들고 있는 바즈라에는, 샛노란 전격이 잔뜩 맺혀 있었다.
바즈라가, 그대로 심장부를 직격한다.
그 한방으로 끝이었다.
눈을 하얗게 까뒤집은 채 쓰러지는 권황.
심장이 멎었는지, 간헐적으로 움찔거리는 것 외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주, 죽었나."
아무리 생사투(生死鬪)를 제안했다고 해도...
자신들 쪽에서.
그것도 이렇게 간단하게 한 명이 죽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도황의 목소리가 얇게 떨렸다.
그런데...
최강이 뚜벅뚜벅 쓰러진 권황에게로 다가왔다.
다시금 주먹에 전격을 두른 채로.
"이미 쓰러진 자를 상대로 무슨 짓을!"
"저자에게는 명예도 없단 말이냐!"
중국 측에서 공분하여 외쳐댔다.
도황 역시 화를 내며 나서려 했지만, 그런 그를 검황이 막아섰다.
그 와중에 그저 뚜벅뚜벅 다가온 최강이.
권황의 가슴팍에 대고 전격을 가했다.
투쾅! 몇 번 전격을 강력히 가하자...
움찔거리던 권황이 그대로 커흑 하는 소리와 함께 숨을 몰아쉬며 일어났다.
일어나서 어리둥절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권황이, 주변의 반응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며 그대로 다시 누웠다.
"졌군... 게다가..."
분명 숨이 끊어졌었다.
그걸 되살린 게...
"저 자인가."
적에게 구명을 받다니.
권사로서 엄청난 수치감에 권황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대결은 정당(?)했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서, 최강을 향해 천천히 걸어간 권황이 손을 내밀었다.
"... 악수?"
손을 잡아 악수를 나눈 두 사람.
이어 권황이 손을 모아 포권을 취해 보였다.
"구명의 은혜, 잊지 않겠소."
정당한 대결.
죽게 내버려둔다고해도 아무도 질타하지 못했을 터였다.
구명지은(救命之恩)보다 큰 은혜가 세상 어디 있겠는가.
엄청난 짐을 안고서 패주한 권황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 미안하외다."
"복수는 내게 맡겨라."
도황이 앞으로 성큼 나서며 자신의 도(刀)를 뽑아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방심이라는 기색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
"... 음 좀 미안한데?"
나가떨어진 권황을 보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셀룰로오스 구조를 활용한 적층장갑은 권황 같은 타격계에 그야말로 쥐약이었다.
타격 자체의 위력이 전신으로 분산되니까.
일점을 베는 검황이나 도황에게였다면 이 정도의 위력은 발휘하지 못했을 터였다.
이유를 아는 나와는 다르게, 제피로스나 이성혁은 어안이 벙벙해졌는지 눈을 비볐다.
"쟤, 쟤가 원래 저렇게 단단했나?"
"자, 잘 모르겠습네다."
권황의 권격은 전혀 약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걸 눈으로 확인했기에, 상대가 전혀 약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그저...
최강이 지나치게 타격을 받지 않았을 뿐이다.
최강 본인 역시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왔다.
"물주먹은 아니었는데..."
"체력은 멀쩡해 보이는데. 연승전 방식이라 다음 타자로 나갈 수도 있어."
제피로스의 말에, 최강이 전격을 타닥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내가 나선다!"
"아뇨."
당연히 말려야지.
지금 저 자신감으로 나갔다가는, 상성이 안 좋은 참격에 엉뚱하게 당할 수도 있다.
게다가 저 도황이란 양반 얼굴 좀 보라고.
완전히 이 갈았다.
"계획대로 하시죠, 선생님이 나가주십쇼."
무어라 반발하려다가, 내 시선을 마주하고는 한발 물러서는 최강 선배다.
"끄응, 알겠어."
그렇게 시작된 도황과의 대결은...
선생님이 다섯 합 만에 도황의 도를 두 동강 내면서 허무하게 끝이 났다.
내가 뭐 해줬냐고?
아니, 이번에는 적당한 버프가 없어서... 효율적이진 않더라도 최강 선배에게 걸어줬던 버프랑 같은 것만 걸어주고 말았다.
그마저도 공격을 당하지도 않았으니 의미가 없는 상황.
뭐야, 이 양반...
언제 이렇게 괴물이 됐어?
**
제피로스 류현수.
그가 김세균과 대련을 벌인 횟수는 얼마나 될까?
열 번을 넘은 시점부터는 세지 않았지만...
아마도 백 번은 넘을 듯했다.
루키 시절의 김세균부터...
최근 괴물이 되어가기 시작한 김세균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김세균을 상대하면서, 제피로스는 절감했다.
저 괴물을 상대로 이제 이기진 못하겠구나.
그래도 적어도... 대인전의 상대라도 되어주려면.
상대조차 되지 않는 싱거운 대련이 되지 않게 해주려면...
그에게 가장 필요한 건, 오러의 집적도였다.
아직도 김세균이 정확히 어떤 능력의 소유자인지는 몰랐다.
그래도 확실한 건, 수많은 미세한 존재들이 그의 오러를 물어뜯는다는 거였다.
그것은 오러의 내구도를 순식간에 깎아먹었고, 결국에는 오러의 유지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깨버렸다.
처음에는 김세균이 그의 견고한 오러를 깨는 것에 가까웠지만, 이제는...
'내가 김세균 저 자식의 공격을 버티는 것에 가깝지.'
김세균의 공격은 어느 날 갑자기 훅 강해졌다.
갑자기 술을 빚는다거나 하는 되도 않는 일을 시작할 때와 비슷한 시점이었다.
그 이후로, 류현수는 한 번도 김세균을 상대로 대련에서 승리할 수 없었다.
승리하기는커녕, 처음에는 단 3초도 버티지 못하고 검의 오러가 깨졌다.
충격적이었다.
그 이후로,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오러의 내구도와 집적도를 우선순위로 두었다.
여전히 김세균을 이길 수는 없었지만...
이제는 3분 이상을 오러를 꺼트리지 않은 채 김세균의 공격으로부터 버티는 게 가능했다.
3초에서 3분.
이 직접적인 변화를 김세균과의 대련 외에서 체감할 방법은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
3초를 버틸 수 있는 집적도의 오러나.
3분을 버틸 수 있는 오러나.
어차피 공격력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류현수는 도황과의 한 합만에 그 차이를 명확히 느끼고 있었다.
"이게 무슨..."
도황이 한 합을 겨루고 뒤로 몇 발짝을 물러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뭔가 데자뷰가 느껴지는 반응이었다.
'내가... 갑자기 강해진 김세균 저 녀석과 처음 대련했을 때와 똑같은 반응이군.'
분명 며칠 전까지는 몇 분 정도는 버텼는데.
순식간에 3초만에 오러가 깎여 나가며 유지력을 잃고 깨질 때의 그 기분을 알 사람이 있을까?
'뭐, 오러 자체의 강화에 집중하는 사람은 많지 않긴 하지.'
아니, 애초에 오러를 더 강화하여 내구성을 올릴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도 거의 없을 거다.
오러가 깨질 일은 여간해서는 없다.
같은 오러와 맞부딪힌다고 해도, 오러가 꺼지기 전에, 검법이나 도법의 유불리로 결판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
어차피 상대도 비슷한 수준의 강자라면, 오러를 깨트리려는 건 바보나 할 짓이었다.
상대의 오러가 깨질 정도의 타격을 주면, 내 오러 역시도 깨질 테니까.
결과는 동일할 터다.
그런데 김세균과의 대련에서 버티기 위해 오러 자체의 강화에 매진한 결과...
도황의 오러, 강기는 단 일격으로 걸레짝이 되었다.
오러라고 부르기도 힘들 정도로 일렁이며 흔들리는 도황의 강기(剛氣).
다시 내공을 불어넣으며 강기를 다잡는 도황이었지만, 이미 마음이 꺾였다.
그게, 바뀐 도법의 기수식에서도 보였다.
"... 흘려내려는 건가."
정면으로 부딪히면 오러가 버티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도황이.
강 대 강의 대결을 포기했다.
문제가 있다면...
"검이 아니라 도잖아? 도법으로 검법을 흉내내면 쓰나."
검수(劍手)로서 황당한 소리였다.
저런 건 양날을 사용하는 검에나 어울릴 방법이지, 도법은 저런 게 아니었다.
산을 쪼개버릴 듯한 역발산의 기세로 밀어붙이는 것.
그게 도법이다.
완전히 위축되어 자신의 본질을 잃은 도객에게...
승산은 한 합에 이미 결판난 듯 보였다.
제피로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순식간에 쇄도하여 연격을 가했다.
꽝! 꽝! 꽝! 꽝!
폭탄이라도 터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이어진 네 번의 연격의 마지막에.
그의 검이 도황의 강기를 완전히 깨버리고 검을 두동강을 냈다.
도황은 아연한 표정으로 반쪽이 된 도를 회수한 채 물러나려 했지만...
이미 류현수의 검이 도황의 목에 닿아 있었다.
"져, 졌다."
대륙오황(大陸五皇).
비록 외부와의 큰 교류 없이 중국 내부의 평가로 만들어진 자리였지만, 중국인들은 대륙오황이 타국의 최강급 헌터들과 비교해도 한 급 위에 있다고 장담했다.
그도 그럴 것이, 13억 인구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인물들이었으니까.
그런데...
고작해야 오천만 인구 소국(小國)의 두 헌터에게.
순식간에 오황의 둘이 패배했다.
그것도 완패였다.
김세균 외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던 중국 측의 동요가, 한국의 헌터들에게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
"아니, 뭐가 이렇게 휙휙 끝나요?"
도황과의 대결을 마치고 돌아온 제피로스에게 묻자, 어깨를 으쓱여 보일 뿐이었다.
"상성이 좋았어."
도(刀)는 검과 다르게 강과 강의 대결 위주로 가게 되는데, 오러의 집적도 위주로 단련한 제피로스에게 그게 상성으로 먹혔다는 설명.
"아마 이걸 알았으니, 검황은 힘으로 덤비지 않겠지."
"클래스가 만검자(萬劍者)라죠?"
만검자 클래스.
검사 클래스 중에 최고 사기 클래스였다.
이 클래스는 모든 유형의 검술을 익히는 데 제약이 없었다.
그래서 검황은 중국에서 가장 많은 검술을 아는 사람.
실제로도, 엄청나게 희귀한 검술 스킬북들을 죄다 익힌 인물이기도 했다.
유물급 검술 스킬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익힌 사람으로 추정되기도 했고.
괜히 중국 최강자가 아니겠지.
"그래, 차라리 검황이 먼저 나왔다면 허를 찔러서 밀어붙이겠지만... 이 어드밴티지를 제대로 이용하긴 힘들 거다."
그냥 간단히 말해서...
검황은 '딸깍'으로 이길 상대가 아니라는 소리네.
"제가 상대해도 됩네다."
"아니, 내가 해보지. 어차피 패한다고 해도, 쉽게 패배해 줄 생각은 없으니까."
제피로스가 최대한 타격을 입히고서 패한다면, 아무리 검황이라고 해도 감히 이성혁을 상대하러 또 나올 수는 없으리라.
그러면 남은 둘을 이성혁이 상대해서 승리하면 끝이다.
그래도...
이왕이면 선생님이 이기면 좋겠는데.
뭔가 방법이 없으려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 나 . 태.
갑작스러운 그리드의 말에 정신이 확 들었다.
뭐? 나태?
─ 그 . 녀 . 석 . 의 . 힘 . 이 . 면 . 가 . 능.
또 다른 개체인가.
그런데 지금 당장 나태를 어디서 구해?
─ 흉 . 내 . 쟁 . 이.
흉내쟁이... 프라이드를 말하는 거냐?
─ 그 . 래.
프라이드는 같은 격의 존재로는 의태할 수 없을 텐데.
─ 식 . 탐 . 과 . 비 . 슷.
무슨 말이야 그게.
... 아!
그리드나 프라이드와는 다르게...
글러트니는 본래의 개체가 신의 힘을 받아 진화한 형태였다.
그러니까 슬로스라는 개체도...
"기본 개체가 신의 힘을 받아서 변화한다는 건가."
그러면 의외로 나태 자체도 쉽게 구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하위 격의 개체에 넥타르만 먹이면...
─ 멍 . 청 . 한 . 주 . 인.
또 왜!
─ 식 . 탐 . 은 . 그 . 걸. 먹 . 을 . 수 . 있 . 지 . 만 . 다 . 른 . 개 . 체 . 는 . 아 . 니 . 야.
아?
생각해 보니 그러네.
넥타르에 담근다고 다 글러트니 같은 개체로 진화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일반적인 개체보다는 강화되긴 하지만 말이지.
글러트니는 그 자체가 '식탐'.
즉 원본이 되는 개체가 넥타르를 '먹어' 진화한 개체일 터다.
그러면 또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건데...
아니, 지금 급한 건 그게 아니다.
그리드, 혹시 네가 나태의 원본 개체를 알고 있는 거냐?
─ 알 . 아 . 흉 . 내 . 쟁 . 이 . 에 . 게 . 알 . 려 . 줄 . 게.
프라이드를 꺼내자.
그리드가 아주 가느다란 촉수 가닥을 뽑아내며 프라이드 개체개체에 박아 넣는다.
순식간에 그리드의 정보가 프라이드에게로 전해지면서...
프라이드가 변형을 시작했다.
[개체, '프라이드'가 'Chronobacter Cerebralis'로 변형됩니다.]
[Pride(Chronobacter Cerebralis로 의태 중)]
─설명 : 신대(神代)의 박테리아, 크로노박터 세레브라리스로 의태 중인 프라이드 개체. 이 개체는 두뇌의 시간중추에 침투하여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시간의 신, 크로노스의 힘을 얻으면, 실제 시간에 개입할 수 있다는 전승이 전해진다.
─능력 : 최대 10배수(기본 5배수, 통제력 적용)까지 대상의 체내 시간중추를 조작할 수 있다.
무제한의 세균술사 105화
#시간 문제(1)
#시간 문제(1)
슬로스의 원본이 된다는 개체의 능력을 곱씹기도 전에, 메시지가 쭉 떠올랐다.
[신적인 업적! 당신은 인류 최초로 시간의 신 크로노스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보상으로 '시간 파편(한 조각)'이 주어집니다.]
[시간 파편(한 조각)]
품격 : 창세급 사용 아이템
설명 : 창세에 시간의 개념을 창조했다는 신 크로노스의 힘을 극미량 담고 있는 파편이다.
내용 : 한 조각의 파편으로 10초의 시간을 과거로 돌릴 수 있다. 이 힘은 하나의 세계에 국한된다.
10초 전 과거라...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엄청나게 쓰일 가능성이 농후한 미친 아이템이었다.
아껴뒀다가 잘 써야지.
그런데...
슬로스의 원본 개체가 시간의 힘을 얻으면 뭐 어떻게 된다고 하지 않았어?
혹시 싶어서 프라이드에게 가져다 댔는데.
[의태 상태의 개체는 더 상위 격으로 진화할 수 없습니다.]
역시나군.
흉내 낸 개체가 아니라 원조를 찾아야 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원본만 찾으면 이 파편으로 격을 올릴 수 있다는 소리니까.
게다가 흉내 낸 개체로도 능력은 충분히 활용할 수 있겠지.
시간 중추를 10배수로 조작할 수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10배 빨라진다는 소리인가?
의태한 프라이드를 일단 제피로스에게 붙였다.
그러자 제피로스가 깜짝 놀라 내 쪽을 바라보더니 앤서블 이어링으로 속삭였다.
─뭘 한 거야?
'좋은 거요.'
─... 이거 반칙 같은데.
'뭐 어때요. 제가 안 나서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게다가, 성황이나 마황의 버프는 저쪽도 받고 나오고 있다고.
굳이 언급하지 않아서 그렇지, 바보가 아니라니깐.
─알겠어, 그러면 굳이 마나로 막진 않는다.
'예.'
제피로스가 봉쇄해두었던 두뇌 쪽으로 향하는 마나의 통로의 봉쇄를 풀자.
[프라이드가 대상의 시간중추에 개입합니다.]
[현재 대상이 견딜 수 있는 최대의 배수는 2.2배입니다.]
[그 이상의 배수를 적용할 경우, 두뇌에 영구적인 장해를 입힐 수도 있습니다.]
10배까지 가능하긴 했는데...
두뇌에 영구적 장해를 입히면서까지 할 수는 없지.
그냥 2배 정도로 하자.
천천히, 검황과 겨루기 위해 나서는 제피로스를 기다렸다가.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
[시간중추를 2배로 가속합니다.]
딸깍.
스위치를 올렸다.
**
검황 남궁무준.
그의 클래스는 만검자.
일반적인 검사 클래스는, 자신의 클래스 성향이 분명 존재했다.
예를 들어 제피로스의 클래스인 '청풍검수'는 중검(重劍) 타입의 검법을 익힐 수 없었다.
심지어 그 유명한 카이저도, 그가 익힐 수 있는 검법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에 반해서, 남궁무준은 모든 종류, 모든 유형의 검법을 익힐 수 있었다.
그래서, 검사를 상대함에 있어서 그는 항상 압도적인 우위에 섰다.
카이저처럼 상성을 무시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면 모를까.
같은 힘이라면, 남궁무준은 모든 검사의 정점에 있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악몽을 꾸는 듯했다.
"이게..."
제피로스의 검법은 쾌(快)와 환(幻)속성.
쉽게 말하면, 빠르고 변화가 많다는 거였다.
이미 그 정보를 알고 있던 만검자는, 상성이라 할 수 있는 방패를 꺼내들었다.
작은 버클러 형태의 방패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쾌환 속성의 검술은 많은 이점을 잃는다.
그런데.
분명 그래야 했는데.
'바, 반응을 못 하겠어.'
제피로스는 그가 예상한 것보다도 두 배는 빠르게 그의 공격에 대응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방패로 막지 못한 곳에 제피로스의 강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크윽!"
살이 지져지는 고통에 검황이 미간을 찌푸렸다.
거기에 신경이 쏠리니, 더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마침내, 몇 군데 더 타격을 입은 검황이 다급히 외쳤다.
"하, 항복! 항복!"
대륙의 최강자가.
한국의 옛 최강자에게 패배하는 순간이었다.
그것도 목숨을 구걸하다시피...
처참한 모습으로 말이었다.
**
최강자인 검황까지 패배했으니, 3패로 중국 측은 나머지 두 명이 나설 여지도 없이 패배한 거였다.
"원한다면 덤비라우."
이성혁은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마황과 성황에게 손을 까딱였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몸에서 피어나온 막대한 양의 신성력을 확인한 성황이 창백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황 역시 성기사.
성기사 사이의 상하관계는 다른 어떤 클래스들보다도 명확하다.
그는 이성혁이 자신과는 차원이 다른 어느 곳에 있다는 것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성황까지 싸우길 포기했으니, 마황은 거의 반강제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더 할 생각입니까?"
여기서 약속을 깨고 더 하겠다면야...
오황은 여기서 가루만 남겠지 뭐.
그러면 오황분(粉)인가.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정신을 차린 그들의 수장 검황이 나서며 내게 포권을 했다.
누가 무협 감성의 나라 아니랄까 봐.
"... 애당초 김 선생이 여기 왔을 때부터 우리의 계획은 틀어졌다고 보아야겠지. 우리의 응석을 받아주어 감사하오."
"별말씀을."
"약속대로, 우리는 물러나겠소이다."
생각보다 쿨하네?
어깨를 으쓱이며 보내주려고 할 때.
제피로스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야, 저 새끼들...
'왜요, 뭐 있어요?'
─잠깐 와서 이것 좀 봐봐.
손을 들어서 검황에게 양해를 구하고, 제피로스에게 가니...
─그러면... 다들 합의가 된 건가?
─흐흐, 겁쟁이처럼 싸워보지도 않고서 꽁무니를 뺄 수는 없잖아.
─혹시 또 모르지... 김세균을 잡고, 그 엄청난 아이템을 얻으면 더 강해질 수 있을지도.
뭐야 이거?
"위성으로 감청한 대화 내용이다. 통신 상황이 안 좋아서 이제야 왔네."
저렇게 호박씨를 까놓고서 나한테는 무슨 일기투니 뭐니 제안했던 거야?
"... 널 빼놓은 상위권 랭커들, 그러니까 우리 견적 보고서... 만만했다면 너한테 다같이 덤벼들었겠는데?"
"무협 감성은 개뿔이나."
"뭐?"
"아니에요."
이걸 봤는데도 가만히 있으면 호구 병신이지.
안 그래?
"그거 좀 주세요."
제피로스에게 태블릿 PC를 받아서 천천히 기다리는 검황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똑같은 영상을 재생시키자...
그의 안색이 순간 창백해졌다.
"이, 이건..."
"뭐, 많은 건 안 바라고. 우리 고대로부터 유명한 명언 있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함무라비 선생님이 안 가르쳐주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유물급 아이템 하나씩만 놓고 가세요."
"이, 이런 굴욕을 우리가 감수할 것 같소?"
"굴욕?"
어이가 없네.
어이, 그리드.
─ 왜 . 부 . 르 . 나.
쟤들한테 어이 좀 심어주자.
그리고 내 명령과 동시에.
우르르르르릉!
대지가 움찔거리더니, 거대한 언덕이 되어 일어났다.
끝이냐고?
그럴 리가.
"산을 만드는 건 오랜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거 중국에서는 우씨 늙은이도 하는 일이라죠?"
그런데.
"중국에 산을 없앤다는 이야기도 있습니까?"
동시에.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서.
저 뒤쪽, 중국 쪽 영토에 솟아올라 있는 작은 봉우리가.
그대로 먼지가 되어 흩어지는 모습이,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뇌리에 틀어박혔다.
한국 쪽도, 중국 쪽도.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거 좋은 것 좀 주고 가지."
오황에게서 하나씩 삥... 뜯은 유물급 아이템은 뭐 만족스러운 성능까지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좋은 걸 주지는 않았겠지.
그래도 유물급이니만큼 기본빵은 하는 물건들이었다.
성황에게서 받아낸 투구는 이성혁에게 주었고.
검황에게서 받은 검과 도황의 장갑은 제피로스에게.
권황의 신발은 최강 선배에게.
마지막으로 마황의 목걸이가 내 차지였다.
이게 나름 골때리는 물건이었다.
[신선놀음]
품격 : 유물급 목걸이
설명 : 생각도, 고민도 없이 그저 모든 속세를 잊고 노닐았더니 신선이 되었도다.
내용 : 반사신경 –90%, 선인지체(仙人之體) 발동.
[신선지체(神仙之體) (사용 아이템 스킬)]
설명 : 신선이 되었더니, 자연의 이치를 깨달았도다.
내용 : 최대 마나 상승 +1,000%
일단 효과는 최대 마나가 10배가 늘어난다는 거다.
미친 효과지.
그렇긴 하지.
문제가 있다면...
반사신경이 10%로 폭락한다는 거였다.
몸 쓰는 클래스도 아닌데 반사신경이 무슨 상관이냐?
아, 일반인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조금만이라도 헌터 업계애 몸담아본 사람이라면, 반사신경 능력치가 마법사에게도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터였다.
"어우, 못 써먹겠다. 유물급 뱉고 가랬더니 똥템만 뱉고 갔네."
뭐, 어쩔 수 없지.
나 같아도 그럴 테니까.
잠깐 착용해봤다가 바로 해제했다.
글러트니고 뭐고, 전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던 탓이다.
마나 최대치와 회복량이 지배 가능한 개체수에 영향을 미치고.
통제력이 개체수의 성능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걸 세세하게 통제하는 능력은 반사신경의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그게 10%가 되니까...
이건 뭐, 거의 60년은 늙은 느낌이다.
어떤 명령을 내리건, 한 박자 느리게 반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나중에 개체수 펌핑이 필요할 때나 써먹어야겠네."
중얼거리고 있을 때, 뒤늦게 온 정부 쪽 사람이랑 무어라 이야기를 한참 나누며 지시를 마친 제피로스가 슬그머니 나타났다.
"뭘 그렇게 혼자 또 중얼거리고 있냐."
"아니에요. 일처리는 다 끝나셨어요?"
"그럭저럭. 이제 성혁이... 한테 랭커들이랑 헌터들 붙여서 평양으로 보내려고."
"괜찮겠죠?"
걱정되긴 했는데, 의외로 제피로스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중국 애들이 문제였지, 북한 내부는 사실상 별거 없어. 물론 방심할 필요는 없겠지만. 내부 사정은 저 녀석이 더 훤할 테니... 게다가 북한 내에서도 워낙 평판이 좋았던 친구라. 어렵지 않게 정권은 장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쿠데타 일으켰다는 장군은요?"
"유일한 끈이 중국이었는데 그게 떨어졌으니까. 끈 떨어진 연 신세지."
"그러면 정말 통일이에요?"
"... 그건 또 뭔 소리냐."
"인터넷에서 그러던데."
통일 되는 거 아니냐고.
정확히는 우리 군대 안 가도 되는 거 아니냐는 미필들의 댓글이 90%쯤 됐던 것 같지만.
"... 가능성은 있지."
"오, 정말로요?"
"일단 남북 교류 단계부터 시작하겠지만...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다."
"설마 성혁 씨가 새로운 독재자가 된다거나..."
"네가 꽉 잡고 있는 거 아니었어? 거의 북쪽 수령님 수준으로 모시던데."
"제가 무슨..."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는 제피로스를 애써 무시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중국 최강 헌터를 꺾으신 소감은요?"
"치트키 쓰고도 지면 사람 새끼냐? 대체 내 몸에 뭘 했던 거야?"
"글쎄요, 그 소감을 듣고 싶어서 묻는 건데."
나도 아직 안 써봤거든요.
"말 그대로 시간이 두 배로 느려지는 느낌이던데? 그런데 그게 느낌뿐이 아니더라. 실제로 움직이고 나니까 어쩐 일로 근육이 아려. 이제 어지간히 격한 활동으로는 근섬유가 파괴되지도 않을 정도로 단련된 육체인데..."
제피로스가 팔을 걷어 내게 보여주었다.
"헉."
잔뜩 터진 실핏줄이 조금은 흉측하다 싶을 정도로 거미줄처럼 드러나 있었다.
"괜찮으신 거 맞죠?"
"오히려 좋지. 근력의 성장은 근섬유의 파괴와 회복에서 나오는 건데, 이제 근육 내구도가 너무 올라서 파괴가 안 되니까."
그게 전사 계통 클래스의 성장 정체 요인 중 하나긴 하지.
그냥 평범한 아재처럼 보여도...
저 안에는 '실전 압축 근육'이 꽉꽉 들어차 있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그 '실압근'이 다 터질 정도로 극강의 기동을 펼쳤다는 것.
"덕분에 근력 수치가 조금씩 올랐다. 반사신경은 대폭 올랐고. 그러니까... 정체구간이 뚫렸어."
둘 다, 검사 클래스에는 필수적인 능력치였다.
계 타셨네, 우리 선생님.
응? 그런데.
"반사신경요?"
"응, 네가 걸어준 버프... 그거 반사신경 올려주는 버프 아니야? 거의 두 배가 뛰었던데?"
... 아니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반사신경은 상황에 대처하고 판단하는 모든 정신적, 육체적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치.
그런데 내 시간이 두 배로 느리게 흐른다면.
상대적으로 내 인지 능력도, 대응도, 판단력도.
두 배가 되는 거나 다름없었다.
아니... 열 배까지 된다고 했던가?
무제한의 세균술사 106화
#시간 문제(2)
#시간 문제(2)
중국 헌터들의 회군 결정.
그리고 오황의 충격적인 패배.
처음에 이 소식이 대중들에게 전해졌을 때, 중국 인민들의 반응은 처음에는 놀라긴 했어도 심드렁한 편이었다.
─어차피 우리나라에 땅도 많은데 북한 땅 따위는 아깝지도 않아.
└대체 거기는 왜 들쑤시고 온 건지 이해가 안 가.
정신승리형 반응도 있었고.
─김 따거(김세균)는 역시 이길 수가 없구나. 13억 인민들의 최강 5인도 상대가 되질 않다니.
└축구가 유행할 때도 그랬지. 중국은 한 번도 한국을 이겨본 적이 없었어.
└공한증은 끝나지 않았다.
─김 따거는 역시 세계최강이야. 그가 나섰다면 어쩔 수 없지.
김세균의 인기는 중국에서도 꽤 높았다.
애초에 새로운 세계 최강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강자의 인기가 없으면 더 이상한 법이겠지만.
그런데.
오황이 패배하였다면 당연히 김세균이 개입했을 것이 명백했던 상황에서, 진실이 알려졌다.
─우리 형이 인민해방군 소속인데, 김세균은 나서지도 않았다는데?
└가짜 뉴스는 범죄야.
└진짜야, 동영상도 봤어.
그 글을 시작으로 일파만파 들썩이기 시작하던 여론은...
마침내, 누군가가 공개한 동영상에 폭발하기 시작했다.
전면전은 애초에 열리지도 않았고.
오황은 자신들의 강함을 과신하여 일기투를 신청했고.
김세균은 그걸 받아들였으며...
오만했던 오황들은 김세균은 나서지도 않은 채 한국의 헌터들에게 대패했다.
그렇게만 보이는 상황이었다.
─제피로스는 알겠는데, 나머지는 누구임?
└나서지 않은 한 명은 북한 1위로 꼽히던 이성혁. 권황 개박살낸 사람은... 모름.
└옛날에 은퇴했다가 복귀한 사람이라는군.
─뻔하지, 뻔해. 뱃속에 기름기만 낀 멍청한 놈들이 또 방심한 거지. 한국 헌터들은 존중하는 자세로 최선을 다했는데, 설렁거리다가 그냥 개박살났군.
중국인들에게는 그야말로 대충격이었다.
김세균이야 이미 규격 외로 인정했지만, 김세균을 뺀 다른 이들은 오황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생각했던 중국인들에게는 방심 외의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이 퍼짐과 동시에, 대놓고 오황을 비난하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대표적인 건 오황의 바로 밑에 있으면서, 그들의 위상에 가려 꽤 많은 손해를 봐왔던 십왕(十王)들.
그리고, 중국 정부 역시도 이번 기회에 오황의 위상을 떨어트리겠다는 듯 관영 매체를 통해 오황에 대한 비난에 열을 올렸다.
물론, 방심하지도 않았고, 전력을 다했던 오황들의 입장에서는 기가 찰 일이었다.
나라를 위해 별다른 대가 없이도 나섰고, 김세균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일기투라는 최대한 합리적인 방법을 구상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렇게 된 게 자신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한국 헌터들이 예상보다 너무 강했다고 해서 그게 본인들의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이자들이 토끼 사냥이 끝나니 개를 삶으려 드는구나! 이대로 당해줄 수는 없다!"
오황은 개인이 아니었다.
제자, 부하, 수하, 문하, 교도.
등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지만, 오황들은 하나같이 한 단체의 수장들이었다.
게다가, 중국 정부나 십왕이나.
완벽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한국 헌터들이 너무 강했던 것이지...
오황이 적어도 여전히 중국에서는 그 이름이 어울릴 정도의 강자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었다.
검황의 만검회(萬劍會)가 십왕 중 1인인 검왕의 조직을 박살 내는 것으로 오황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중국 각지의 패자들이 움직이면서...
50년을 넘게 이어온 중국 공산당의 견고한 권력 구도에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오황 역시도 중국 공산당의 권위는 존중하겠다는 입장으로 시작하기는 했지만, 이미 그들이 지배한 지역의 성장(城長)을 구금하는 등,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중국의 분열은.
이미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보였다.
**
생각해 보니 반사신경을 10배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면...
90% 패널티가 거의 다 상쇄되는 셈이잖아?
"아,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가 있네."
지금 목걸이 슬롯이 안 비어 있다는 거였다.
목 자리에는 통역 목걸이가 있었다.
전투에는 영향이 없는 순수 유틸용이었지만, 너무 쓸만한데.
그렇다고 스왑하면서 사용하기에는...
"절차가 너무 귀찮은데?"
게다가 목걸이를 빼면 증가한 최대 마나치가 다시 내려가니까.
애써 유지해 놓은 군단이 사라져 버리는 건 덤이다.
나는 마나통 유지가 중요한 클래스라서 사실상 스왑은 불가능.
그렇다고 통역 버려?
아, 물론 현실적으로는 버려야지.
버리는 게 맞긴 하지...
그런데 지금 와서 다시 언어를 배우는 것도 뭐하고...
통역사를 데리고 다니는 것도 귀찮고.
아무리 영어 정도 배운다고 해도, 언어 가리지 않고 다 통역해 주는 이 목걸이의 편리함을 따른다는 건 불가능하다.
"다른 부위로 알아봐야 하나. 예를 들면 반지 정도?"
일단 반지로 알아봐야겠다.
제일 남는 슬롯이니까.
이왕이면 헌터 협회 포인트도 좀 쓰고.
쌓이기만 쌓이고, 쓸 일이 좀처럼 안 생긴다는 말이지.
내친김에 바로 연락해야지.
"협회장님?"
─아이고, 김세균 헌터님이 어쩐 일로 다 저한테 전화를...
제피로스 선생님 후배라고 했던가?
신임 대한민국 헌터 협회장은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저자세로 나왔다.
뭐, 잘해주면 나한테는 좋은 거지만.
"통역 기능 있는 반지 하나 매물 있으면 좀 알려주시겠어요? 사려고요."
─통역 기능 반지 말씀이십니까? 김세균 헌터님은 '바람 정령의 속삭임'이 있지 않으십니까?
"목걸이 슬롯이 필요해서요."
─아! 그렇겠군요! 제가 멍청한 소리를...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최대한 빠르게 확인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만, 바람 정령의 속삭임 수준의 반지는 전설급 내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제 지식 선에서는 그렇습니다.
"유물급이어도 괜찮아요."
─예,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난처한 듯한 목소리로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
─저, 김세균 헌터님. 죄송하지만 통역 관련 반지 매물이 데이터베이스에서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부 목걸이만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목걸이들은 사실상 바람 정령의 속삭임의 하위호환이고요. 그리고 데이터베이스의 거래 기록을 전부 뒤져도... 통역 기능의 반지는 이게 전부입니다.
그가 보낸 데이터를 보니...
이게 뭐야...
[속삭임의 반지]
품격 : 전설급 반지
설명 : 당신의 마음을 속삭일 수 있는 반지.
내용 : 24시간에 10회까지, 대상을 지정할 수 있다. 해당 대상은 당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다.
─10회의 대상 제한도 있고, 한 번에 한 명에게만 말할 수 있습니다. 통역 기능을 포함한 반지는 이 정도가 끝입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헌터 협회장과 전화를 끊고서 고민에 빠져들었다.
구관이 명관... 수준이 아니라 명명명관이다.
하는 수 없이 저거라도 구해다 껴야 하나 싶던 차.
아, 그러고 보니 나 40레벨 보상을 아직도 안 썼네.
[착용 아이템 선택권(전설)]
내용 : 전설급의 착용 아이템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아이템명이나, 아이템의 기능과 착용 부위 등으로 검색 대상을 좁힐 수 있다.
전설급 아이템이라고 좀 무시했었는데.
이걸로 해결이 되면 좋겠는데?
"아이템 사용."
[착용 아이템 선택권(전설)을 사용합니다.]
[어떤 아이템을 선택하시길 원하십니까?]
"부위 반지, 통역 기능."
[검색 중...]
[5개의 검색 결과가 나왔습니다.]
오 5개나?
반색하며 검색 결과를 보았는데...
"에라이."
다섯 개 모두 성능은 비슷비슷했다.
아까 봤던 속삭임의 반지도 있었다.
지금 착용하는 목걸이처럼 마음에 차는 것은 없었다.
"목걸이 성능이 딱 반지 부위로 바뀌면 좋을 텐데."
[검색 중...]
응? 이런 거도 검색이 돼?
[1개의 검색 결과가 나왔습니다.]
[파괴왕 푸거스가 좋아하는 랜덤 게임]
품격 : 전설급 무기
설명 : 명장(名匠)이었으나 너무 잦은 제작과 강화 실패로 원성을 듣던 한 대장장이의 힘이 일부 담긴 망치. 낮은 확률로 엉뚱한 결과를 낳는다고 한다.
내용 : 1시간에 1회 사용 가능. 10% 확률로 전설급 이하의 아이템을 무작위 부위로 변형한다. 40% 확률로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는다. 50% 확률로 아이템은 파괴된다.
어, 음...
... 세계에 통역 목걸이 매물이 몇 개나 있더라.
아주아주아주 다행인 것은.
통역 목걸이가 그나마 흔한 매물이라는 거였다.
왜냐면 제작 가능한 목걸이였거든.
물론 전설급이니 재료도 비싸고 엄청나게 안 나오긴 하지만.
그랬으니까 헌터 협회 포인트 1만이면 구매 가능한 거였지.
일단 100개 정도만 사서 시작했다.
성공 확률 10%에, 부위는 랜덤.
대충 따져도 1% 정도 확률이었으니 100개 중 하나는 나오겠지 싶었는데...
"아아아악!"
내가 이런 확률에는 전혀 운이 없다는 걸 오랜만에 깨닫게 됐다.
헌터 협회 포인트 138만을 써서 거의 138개에 달하는 통역 목걸이를 사용한 뒤에야 간신히 원하는 반지 형태로 변형되었다.
시간도 138시간이 걸린 게 함정이지만, 이 정도 선에서 나온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성공한 나머지 12개는... 그야말로 제멋대로였다.
단검으로 변형된 것도 있었고, 투구도 있었고...
팔아먹을까 하다가 일단은 갖고 있기로 했다.
언젠가 뭐 쓸모가 있을 수도 있겠지.
어쨌든, 이제 통역 기능을 유지한 채로 '신선놀음'을 착용할 수 있었다.
상시 일정 분량의 프라이드를 반사신경을 끌어올리는 데 사용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10배의 최대 마나치에 비하면 그건 문제도 아니었다.
10배라...
말이 10배지.
지구상에 이제 날 위협할 게 있긴 할까?
**
오황과의 대결 이후로 그렇게 몇 개월 정도가 지났다.
[중국 내전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는 가운데...]
"쯧쯧, 저놈의 동네는 왜들 싸우는지 몰라."
"... 그걸 몰라서 말하는 건 아니지?"
"모르는데요?"
왜 싸우는 거지?
어차피 남의 나라 이야기인데, 더 관심이 있어야 하나?
원래도 저런 거엔 좀 시니컬하긴 했는데, 10배 강해지고 나니 그게 더 심해진 느낌이다.
이제 지구에서 벌어지는 일엔 썩 관심이 없어진 느낌.
빨리 레벨 올려서 70레벨대 던전이나 들어가고 싶었다.
"... 말을 말자."
뭐지. 남성 갱년기인가.
"야, 그나저나 너는 일도 없냐?"
"일 많았죠. 그러니까 쉬어야죠."
태어나서 제일 바빴던 시기인 거 같은데.
일단 열배 강해진 걸 빼면...
이성혁이 북한 정권을 장악하는 걸 도왔다.
어렵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북한에서 가장 명망 있는 사람 중 하나인 이성혁이 나섰다.
대중이나 헌터나, 심지어 군부도 이성혁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다.
물론 반발하는 이들이 없던 건 아니지만...
와, 나는 이성혁이 그렇게 무서운 사람인 줄 몰랐다.
아주 부모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필사적으로 지역적으로 발악하는 군부나 헌터들을 진압했다.
내가 나설 틈조차 없이 말이다.
어쨌든, 그렇게 북한 전역을 장악한 뒤에는...
본업을 시작했다.
북한에 존재하는 내가 현재 클리어할 수 있는 모든 미공략 게이트를 다 클리어했다.
동시에, 대한민국 헌터들에게 한정해서 허가를 받고 북한 지역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것이 허용되자, 마치 서부개척시대... 아니 북부개척시대라도 열린 듯 대한민국 헌터들이 싹 북한으로 몰려갔다.
심지어 북한은 WDDO 미가맹국.
아직 통일이 되기 전이었으니, WDDO에서도 북한이 게이트를 통제하는 걸 어떻게 제재할 수가 없었다.
실질적 통일 상태가 아니냐면서 WDDO 실사단이 나와서 항의를 하기도 했지만... 강민국 대통령이나 이성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반은 가볍게 일축했다.
'북한은 독립국입니다.'
'조선은 대한민국과는 연관이 없는 독립국입네다. 다만 긴밀한 관계에 있을 뿐입네다.'
물론 이 상태가 지속되면 WDDO에서도 미가맹국에 계속해서 헌터를 파견하는 대한민국에 경제 제재 등을 내릴 수도 있다고 압박해오긴 했지만...
이미 그 조치의 주축이 되어줄 한 축인 중국이 저렇게 흔들리는 상황에서 WDDO도 흔들리고 있었다.
미국이 남아 있긴 했지만 말이다.
여하튼...
"제가 지난 몇 달 동안 클리어한 미공략 게이트가 몇 곳인지 아시면서..."
"그래, 너 바빴던 거 알겠다. 알겠는데..."
제피로스가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힐링을 국정원장 집무실에서 하냐고!"
"여기가 TV가 커서요."
여기에 초대형 TV가 있거든.
화상회의용 TV이긴 했지만.
"네 사무실에도 놔줄 테니 제발 좀 가라."
"오, 정말요? 같은 사이즈로?"
"그래, 알겠으니까 좀."
노닥거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래 봬도 정식 출근 상태다.
국정원 청사 전체에 세균들을 퍼트려 감시 중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비밀리에 들어와서 보안 검사를 펼치고 있었다.
덕분에 간첩이나 정보 유출 건은 제대로 막고 있다는 거.
"안 그래도 일 다 끝냈어요. 이제 퇴근할 겁니다."
"그래, 빨리 좀 가라."
손을 휘휘 저어 인사하고서 국정원을 빠져나왔다.
[남은 시간 : 2일 2시간 23분]
"마왕 총회도 얼마 안 남았네."
6개월이나 남았던 시간이 거의 다 흘렀다.
슬슬 북한 쪽으로 넘어가야 할 때였다.
다행히도 그 전에 북한 쪽 사정이 해결되어서, 입장하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이거 하나 들어가려고 북한 정권을 무너트리고 통일 직전까지 됐네.
실화인가.
[남은 시간 : 2일 2시간 22분]
그런데, 시간이 1분 줄어들어 바뀐 순간.
[대규모 폭풍이 마계를 덮습니다.]
[마왕 총회가 마계에서의 돌발 상황으로 인해 취소되었습니다.]
[대서사시 임무 54/70, '그레모리의 생존'이 이어집니다.]
[즉시 그레모리의 영지로 돌아오십시오!]
[남은 시간 : 22분]
[마왕 그레모리의 사망 시 임무가 실패합니다!]
갑자기 주륵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
"뭐, 뭐야?"
분명 2일 2시간 22분이 남았었다고!
갑자기 폭풍은 또 뭐고, 2일 2시간은 어디로 간 거야!
"아니, 진짜... 이런 개억까가 어디 있냐고."
이틀이면 충분히 일찍 돌아가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 서울에서 22분 안에 함경북도까지...
"부지런히 날아야겠네."
메탄생성균을 양손에 만들어진 부스터에 집중하면서.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음속을 주파하면서 찢어지는 소닉붐과 함께 비행이 시작되었다.
**
그레모리의 영지.
수백 년 만의 마왕 총회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던 그녀의 영지에는...
마왕의 힘으로도 감히 막을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압도적인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마계에는 종종 저런 폭풍이 휘몰아치고는 했다.
그레모리는 자신의 마왕으로서의 권능을 활용해서 그런 폭풍을 상쇄하기도 했고.
그렇지만 지금은...
최상급의 마왕조차도 막을 수 있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는 종류의 폭풍이었다.
"그레모리님! 피하셔야 합니다!"
"... 그분께서 오신다면 막을 수 있을 거다!"
"하, 하지만...!"
저걸 대체 무슨 수로?
마왕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기로 손꼽히는 바알 정도는 나서야 어떻게 되지 않을까.
아무리 72마계의 구원자가 대단하기로서니...
바로 그 순간.
환한 빛과 함께 그레모리의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세균이었다.
"구원자님!"
그레모리가 반색하며 외치고, 그녀의 권속들 역시 기대감을 품고 그를 바라보았다.
완전히 형체가 구현되고, 정신을 차린 세균이 그레모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가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저기..."
그리고 그가 눈앞에 보이는 엄청난 규모의 폭풍을 확인한 뒤에...
"... 다들 뭐해요?"
"예?"
"안 도망치고."
가장 먼저 폭풍의 반대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무제한의 세균술사 107화
#시간 문제(3)
#시간 문제(3)
아오지까지 대충 잡아서 서울부터 600km가 넘었으니 마하 2.5 정도 속도는 내야 안정적으로 22분 이내에 도달할 수 있었다.
쎄빠져라 날아서 간신히 20분만에 도착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입장부터 실랑이를 벌일 필요는 없었다.
바로 게이트로 입장.
입장하니 그레모리의 얼굴이 보였다.
"구원자님!"
"뭐가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저기..."
[대규모 폭풍으로부터 살아남으십시오. 마왕 그레모리는 생존해야 합니다.]
[폭풍 지속 시간 : 2시간 2분]
뭐야 시발 저거.
무서워.
"다들 안 튀고 뭐해요!"
설마 저딴 걸 내가 막아줄 거라고 기대한 거라면...
얘들도 제정신들이 아니네.
꽃밭이여, 꽃밭.
"구, 구원자님!"
"왜요!"
왜 불러! 도망치느라 힘든데!
돌아보자, 완전히 울상이 된 그레모리가 말했다.
"여긴 제 영지랍니다. 영지를 잃으면 제 권능도, 마왕으로서의 자격도 사라지게 되어요."
"그게 목숨보다 소중하진 않잖아요!"
"죄송합니다만... 마족에게 영지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 에이 씨. 그렇다고 저 폭풍 앞에서 뭘 할 수 있는데요!"
나 혼자라도 튈까.
아무리 임무가 중요해도 목숨보단 소중하잖아?
"... 쩝."
그래도 도전조차 안 해보고 도망칠 수는 없지.
심지어 열 배 강해진 세균맨 상태인데 말이지.
"그리드!"
─ 왜 . 부 . 르 . 나.
"방공호를 만들어야겠다. 돔 형태로."
이런 방공호 구조가 대부분 그런 모양이더라고.
뭐, 공기 역학적으로나 구조적 강도가 뛰어나단 이야기도 들었고.
Y튜브는 역시 신이라니까.
아마 거긴 가짜 뉴스 같은 건 하나도 없을 거야.
"이 영지 전체를 덮는 형태로, 최대한 강력한 재질로... 가능하겠어?"
─ 전 . 체 . 는 . 불 . 가.
그렇다면.
"그레모리, 전체를 막는 건 불가능할 거 같습니다. 최대한 중요한 곳을 말해요."
"... 성, 성은 막아야 해요."
"성 위주로."
─ 구 . 조 . 물 . 이 . 너 . 무 . 높 . 아 . 비 . 효 . 율 . 적.
"... 구조물이 너무 높은 거 같군요."
그대로 말하니, 그레모리가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주, 중앙 첨탑 정도는... 괜찮아요... 다시 지으면..."
저렇게 서러울 일인가.
아니, 그리고 마왕 맞아?
마왕이 뭐 저렇게 눈물이 많어.
중앙 첨탑을 없애면 가능해?
─ 모 . 든 . 첨 . 탑.
"... 모든 첨탑을 없애야 할 것 같습니다."
"흐아아앙!"
"... 이러고 있을 시간 없다니까!"
"어, 없애도 되어요..."
그녀의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글러트니 군단을 풀어 첨탑을 분해했다.
[마왕 그레모리의 성이 권능으로 보호받고 있습니다.]
[당신은 마왕 그레모리의 영지에 지분이 존재합니다.]
[보호가 해제됩니다.]
뭔가 보호막이 있었던 거 같은데 굳이 글러트니가 깰 필요도 없이 해제되었다.
분해되는 첨탑을 보는 그레모리는 거의 오열 직전.
뭐, 나도 내 집이 다 분해된다고 생각하면 속상하긴 할 거 같다.
─ 이 . 제 . 가 . 능.
"얼른 해."
첨탑이 분해되어 낮아진 성을 위주로, 꽤 광범위한 범위에 돔 형태의 쉘터가 생겨났다.
"안으로 들어가죠."
내부에서는, 그리드가 땅으로 촉수를 잔뜩 뻗은 채 내부를 강화하고 있었다.
겉은 콘크리트 같은 재질이라면, 내부에는 금속 재질을 덧댄 형태.
"너 이 정도면 건축업에 종사해도 떼돈 벌겠다 야."
─ 멍 . 청 . 한 . 소 . 리.
"농담도 못 하냐."
─ 인 . 간 . 의 . 화 . 폐 . 따 . 위 . 를 . 원 . 한 . 다 . 면 . 방 . 법 . 은 . 넘 . 쳐 . 나.
"... 그랬어?"
─ 여 . 기 . 의 . 흙 . 에 . 도 . 귀 . 금 . 속 . 이 . 많 . 아 . 인 . 간 . 들 . 은 . 바 . 보.
"헐, 뭐가 있는데?"
─ 이 . 런 . 거.
[별의 유물 파편]
품격 : 별의 유산
설명 : 별의 정수가 담긴 파편이다.
내용 : 유물급, 혹은 몇몇 특수 아이템의 수리나 강화에 사용되는 귀중한 재료.
미친...
러시아에서 한 번 보고 나서는 본 적도 없는 물건이었는데.
여기 있었다고?
물론 아주 극미량에 불과했지만, 이게 어디야.
그렇게 새로운 사실에 놀라고 있을 때쯤.
"저, 구원자님...? 이걸로 괜찮을..."
어느새 가까워진 폭풍의 소리에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레모리.
그야 나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꽝!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방공호 상부에서 울렸다.
그레모리와 권속들이 모두 움츠러들었다.
마왕에 마족이라면서...
"괜찮을 겁니다. 이대로 버티죠."
폭풍 지속시간이 이제 1시간 50분 정도 남았으려나.
[폭풍 지속 시간 : 1시간 52분]
역시나.
방공호 짓고 하는데 10분 정도 쓴 거 같았으니까.
이제 저것만 버티면...
[폭풍 지속 시간 : 2시간 52분]
"뭣?"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폭풍 지속 시간 : 3시간 52분]
[폭풍 지속 시간 : 4시간 52분]
.
.
.
[폭풍 지속 시간 : 142시간 52분]
순간 시야를 확 뒤덮으면서 메시지가 주륵 떠올랐다.
... 이게 뭐가 어떻게 된 거야?
─ 나 . 태 . 녀 . 석.
"... 나태라고 했어?"
─ 원 . 래 . 여 . 기 . 있 . 으 . 면 . 안 . 돼.
"그런데 왜 있는 건데?"
─ 내 . 가 . 사 . 라 . 져 . 서.
이게 뭔 뚱딴지같은 선문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 이상한 짓거리가 '나태'의 짓이라는 건가.
─ 말 . 려 . 야 . 해.
"나도 말리고 싶다."
말릴 수 있어야 말이지.
─ 시 . 간 . 과 . 공 . 간 . 의 . 괴 . 리 . 로 . 발 . 생 . 한 . 폭 . 풍 . 이 . 야.
시공간의 괴리로 발생한 폭풍?
시공의 폭풍...?
─ 그 . 래.
그래, 뭔가 이름만 들어도 불길하기 짝이 없네.
그래서, 막을 방법은?
─ 어 . 긋 . 난 . 시 . 간 . 을 . 보 . 충 . 해 . 야 . 해.
"그걸 어떻게 하는데."
─ 몰 . 라 . 나 . 태 . 녀 . 석 . 만 . 알 . 거 . 야.
장난하니?
... 그래도 방법이 저거라면.
최대한 생각해 보긴 해야겠지.
"그레모리."
"네, 구원자님..."
"혹시 시공의 폭풍이라고 들어봤어요?"
"네, 마계 북쪽 끝의 뒤틀린 대지에 불어닥치는 폭풍이라고 알고 있어요."
"... 거긴 그게 왜 생긴 건데요?"
"거긴 마신님의 영역이라 마왕들도 잘 알지 못해요."
도움이 안 되네.
"서, 설마 저게 그 폭풍인가요?"
"그런 거 같아요."
"... 세상에."
더 패닉에 빠지는 그레모리와 그녀의 권속들.
괜히 나까지 더 멘붕하게 되는 거 같아서, 잠깐 눈을 감고 귀를 닫은 채 생각했다.
... 이제 나한테 남은 시간 관련 아이템은 하나뿐인데.
[시간 파편(한 조각)]
품격 : 창세급 사용 아이템
설명 : 창세에 시간의 개념을 창조했다는 신 크로노스의 힘을 극미량 담고 있는 파편이다.
내용 : 한 조각의 파편으로 10초의 시간을 과거로 돌릴 수 있다. 이 힘은 하나의 세계에 국한된다.
듣도 보도 못한 창세급 아이템.
시간 파편.
하지만...
고작해야 10초 시간을 과거로 돌리는 정도로 해결이 될 리가 없잖아.
그런데, 그리드가 이례적으로 깜짝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 그 . 거 . 어 . 디 . 서.
보상으로 받았는데?
─ 그 . 거 . 면 . 충 . 분 . 어 . 서 . 사 . 용 . 해.
음, 아깝긴 한데.
어차피 10초 과거로 돌아가는 정도로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긴 하지.
"어쩔 수 없지. 시간 파편을 사용한다."
그러자.
환한 빛을 내면서 사라지는 작은 파편.
[시간 파편 한 조각을 사용합니다.]
[당신은 시공 왜곡 지대에 있습니다.]
[시간의 힘이 세계의 시간을 과거로 돌리는 대신에 시공 왜곡에 흡수됩니다.]
[시공 왜곡이 사라집니다!]
동시에...
폭풍 지속 시간이 눈에 보일 정도로 확확 깎여나가더니.
[폭풍 지속 시간 : 1초]
마침내, 폭풍이 완전히 사라졌다.
동시에 그리드가 뻗은 촉수를 해제하자, 방공호 돔이 단숨에 먼지로 픽 흩어졌다.
완전히 엉망진창이 된 그레모리의 영지.
그래도, 그레모리와 권속들은 살아남았다는 것에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그들과 기쁨을 나누는 대신에, 다급히 폭풍이 휘몰아쳤던 지점을 향해 미시안을 사용했다.
[신규 개체, 'Sloth(슬로스)'의 사체를 발견하셨습니다.]
사체라.
일단 되살리고 보면 되겠지.
"언데드 라이즈."
[언데드 라이즈 스킬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대상 : Sloth 사체 약 10만 개.]
고개를 끄덕이자.
옅은 빛과 함께...
미시안으로도 존재 정도만 간신히 느낄 수 있는 미세한 것들이 내 권속이 되었다.
이제 슬로스냐.
글러트니, 프라이드, 그리드에 이어 벌써 4개 째.
예상치도 못하게 마계에서만 2종을 얻었다.
엄청 큰 수확인데?
남은 3개는 또 어디서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네 개만 해도 엄청난 거지.
안 그래?
"... 그렇겠지?"
혹시나 슬로스는 성능이 별로라던가 그렇진 않겠지?
(4) Sloth (슬로스) (권능 제한됨)
─개체수 : 약 10만 개
─설명 : 미생물이라기보다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부여하고 회수하는 입자에 가까운 개체. 불로초(不老草), 서왕모의 반도(蟠桃) 등에 일부 존재한다고 전해진다. 태초부터 존재하던 기본입자 가운데서도 가장 희귀한 존재다. 사멸하면서 시간을 다스리는 힘은 거의 잃은 상태다. 모든 권능을 잃었지만, 술자의 강력한 통제력으로 되살아나 권능의 아주 미세한 부분은 사용할 수 있다.
─내용 : 이 개체는 역소환할 수 없으며, 오직 술자의 신체 내부에서만 공생하며 술자에게 여러 영향을 미친다. (현재 권능 제한됨)
─상세 내용 :
1) 술자는 늙지 않으며 무한한 수명을 얻는다.
2) 술자의 현재 레벨보다 낮은 레벨 상태를 최대 5시간(기본 3분, 통제력 250% 효과) 유지할 수 있다. 지속 시간 이후에는 기존 레벨로 돌아온다. 낮은 레벨 상태를 유지하는 동안에는 능력치가 일정 비율로 감소한다.
... 잘못 본 건 아니겠지.
눈을 비비고.
다시 설명을 읽어보았다.
1) 술자는 늙지 않고 무한한 수명을 얻는다.
"... 미친."
불로불사.
죽음을 걱정할 나이는 전혀 아니었지만...
길가메시, 진시황, 기타 등등...
세상의 모든 절대자들이 바라마지 않던 그게 내게 들어왔다.
이거... 감당 되려나.
첫 번째에 비하면 두 번째는 뭔지 잘 모르겠는데.
현재 레벨보다 낮은 레벨 상태를 유지...
능력치도 감소된다는데, 뭐가 좋은 거지?
"아... 아아아아아아!!"
미친.
레벨이 올라서 공략 못했던 미공략 게이트를 공략할 수 있단 소리잖아.
거기에, 레벨 컨트롤도 이제 전혀 필요 없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금 당장 70레벨로 넘어가도 된다.
공략 불가 게이트들은 천천히 레벨다운해서 깨면 그만이니까.
[대서사시 임무 54/70, '그레모리의 생존'이 완료되었습니다.]
슬로스의 어마어마한 능력을 감탄하고 있을 때.
54번 임무의 완료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래, 당신도 있었지.
"역시 위대한 구원자님... 저희를 또 구하셨군요!"
"..."
마왕씩이나 되셔서 거 너무 버스만 타는 거 아니오.
"이건 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저는 감히 짐작조차 안 된답니다..."
"뭐 보답이야."
그건 고봉밥으로 받은 거 같긴 합니다만.
슬로스 성능이 이런 거인 줄 누가 알았겠어.
바로 그 순간.
[통상 방식과 다른 방법으로 임무를 달성하여, 55~68번 임무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대서사시 임무 69/70, '영원의 종말'이 이어집니다.]
[영원의 순환이 '김세균'에게 귀속되었습니다.]
[모든 마계의 존재들은 '김세균'을 살해하고 영원의 순환을 얻으십시오.]
"... 뭐?"
[마왕, '그레모리'에게 선택권이 주어집니다.]
[첫 번째 선택 : '김세균'을 살해하여 '불완전한 영원의 순환'의 소유자가 되십시오.]
[두 번째 선택 : '김세균'을 도와 새로운 마계를 여십시오.]
그 모든 메시지가 끝나고.
내게도 메시지가 떠올랐다.
['영원의 종말' 임무 종료까지, 당신은 현재 게이트에서 나갈 수 없습니다.]
[당신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생존하십시오.]
꿀 빨게 됐다고 좋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Man vs 마계가 되었다.
무제한의 세균술사 108화
#시간 문제(4)
#시간 문제(4)
게이트에서 못 나간다니.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사회적 위치와 체면이 있지.
정신 차려야겠다.
내가 혼란스러워하면 이건 못 깬다.
"절 죽일 겁니까?"
어안이 벙벙해진 채 아무 말도 잇지 못하던 그레모리과 내 물음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 그럴 리가요."
"말 더듬는 걸 보니 수상한데."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피식, 괜히 웃음이 나왔다.
아직 제대로 사건이 안 펼쳐져서 상황 파악이 안 된 거일지도 모르겠지만.
긴장감을 느끼기엔 이몸, 너무 강해졌을지도.
감히 누가 나를 막...
... 폭풍에 빤쓰런하던 게 조금 전이었지.
그래, 긴장하자, 겸손하자 세균아.
이 바닥 겸손해야 오래 간다.
"믿어도 되겠습니까?"
"저, 72마왕 그레모리와 제 권속들은 세균 님을 도와 맞설 겁니다."
"잘 생각해 봐요. 마계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거라니까?"
"... 사, 사사사... 상관없..."
그렇게 떨면서 말하면 당신 권속들이 더 떨잖아.
오뉴월 서리맞은 개 떨듯이 떠는 그레모리와 그녀의 권속들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상황 정리부터 합시다. 아무리 경우가 없어도 이 메시지를 받은 쪽도 상황 파악은 하고 오겠지."
"예, 세균님."
"영원의 순환이 대체 뭡니까?"
뭔데 그걸 내가 가져갔다는 거야?
대충 짐작은 간다.
슬로스가 그 비스무리한 거겠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마계 전체가 날뛸 정도로 대단한지는 잘 모르겠다.
불로불사 좋지, 좋은데.
마왕들은 원래 불로불사 아냐?
"마계 전체에 영원을 공급하던 마신님의 은총이에요."
"영원이 뭔데요?"
"단어 그대로예요. 영원이 있기에 마계의 존재들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지요."
"... 없어지면요?"
"인간들과 같은 필멸의 존재로 격하되는 거죠."
어우, 나 죽이려고 난리 난 게 이해가 가네.
─ 우 . 습 . 다.
... 넌 또 뭐가 웃겨.
─ 본 . 래 . 그 . 들 . 도 . 인 . 간 . 정 . 상 . 화 . 일 . 뿐.
정상화라고?
마족들이 인간이었어?
─ 그 . 래.
영원인가 뭔가는 뭔 소리인데?
─ 게 . 으 . 름 . 뱅 . 이 . 녀 . 석.
게으름뱅이... 나태?
나태, 슬로스가 영원이란 소리야?
─ 맞 . 아.
갑자기 머리가 아픈데.
뭔 소리인지 물어봐야...
─ 그 . 녀 . 는 . 몰 . 라 . 태 . 초 . 의 . 마 . 족 . 만 . 알 . 것.
그레모리는 태초의 마족이 아냐? 마왕씩이나 되어서?
─ 마 . 왕 . 중 . 극 . 히 . 일 . 부 . 만 . 알 . 아.
도움이 안 된다는 소리군.
어쨌든, 마신의 힘이라는 게 영원이고, 그 영원을 내가 후루룩 쩝쩝한 건 사실이다.
─ 아 . 냐.
아냐? 그러면 뭔데?
─ 원 . 래 . 별 . 로 . 없 . 었 . 어 . 네 . 가 . 얻 . 은 . 건 . 조 . 각 . 에 . 불 . 과.
원래 없었는데 왜 나한테 지랄이야?
─ 대 . 부 . 분 . 은 . 바 . 보 . 하 . 지 . 만 . 태 . 초 . 의 . 마 . 왕 . 들 . 은 . 달 . 라.
이어지는 그리드의 설명을 듣자니...
태초의 마왕들은 이미 영원이 감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단다.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내게 오는 건...
─ 옛 . 주 . 인 . 과 . 연 . 관 . 있 . 는 . 존 . 재 . 로 . 착 . 각.
성좌 양반의 능력을 사용하는 내가 그 양반이랑 뭔가 연관이 있다고 착각해서라는데...
인질극이라도 벌이겠다는 거야 뭐야?
모르겠다.
일단은... 최대한 싸워봐야겠다.
원래 그런 거 아니겠어?
이긴 놈의 말이 맞는 거다.
그리고, 내 말은 맞을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