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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1)

[SG제약(구 세일제약), 세계 최초로 포션 제작에 성공!]

[이제 비각성자도 포션을 마실 수 있다?]

[아이템 아닌 포션, 효과는 아이템 포션과 동등?]

[의료계 대격변! 향후 질병 치료의 전망은?]

포션을 역설계해서 양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언론에 공개된 것은 연금술 저널에 내용이 공개되고 조금 뒤의 일이었다.

당연히, 커뮤니티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또 당신입니까 GOAT

└세균맨이 언제부터 염소임?

└오늘부터!

└솔직히 세균맨 업적 생각하면 제피로스도 이제 한 수 접어야지 한국 헌터계 GOAT 인정해야 함

└??? : 타닥타닥 ... 세균맨... 한국... GOAT여야...

─세균맨이 만든 것도 아니구만. 세균맨 회사에 있는 연금술사가 만들었다는데. 세균단 놈들 억빠 진짜 답도 없다...

└그 연금술사가 세균맨이 인수하면서 같이 데려온 멤버거든.

└원래 성광 연구소 출신이라던데.

─파워큐 엘릭서도 성광에 있을 때 처음 개발했던 거라고 함

└성광에서 고소 안 함?

└ㅇㅇ 성광 때 만들었던 거랑 완전히 재료가 달랐대. 개념만 같았음

─성광에서 정치당해서 회사 나왔다는데 ㅋㅋㅋ 그러니 성광이 망하지

└성광 망함?

└요즘 국장 불장인데 성광그룹만 안 오름

내 이름도 회자되지만, 역시 규선 씨가 하루아침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

본인은 별로 내켜 하는 기색은 아니긴 해도...

도저히 유명해지는 걸 막을 수 없을 정도로, 포션 생산이라는 건 세계적으로 그만큼 큰 파급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공개되자마자 세계 각지에서 쏟아지는 라이선스 생산 요청.

혹은 완제품에 대한 주문 요청까지.

예상은 했지만, 난리도 그냥 난리가 아니었다.

뭐 일단은 국내 수요부터 채우고 나서 해외 수출도 시작할 생각이긴 했지만...

오민욱 교수의 수술이 잘 끝나면 아마도 국내에서 1차 물량은 전부 소진될 거다.

건강보험공단 쪽에서도 효용성이 입증만 되면 바로 지원 범위에 넣겠다고 확답을 받아낸 상태.

이것만 이루어지면...

적어도 국내에서 암으로 죽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될 거다.

그리고 제피로스의 말에 따르면...

"요즘 건강보험공단 돈 많아. 아마도 그 정도는 해줄 거 같은데?"

"그래요?"

"원래 건강보험료라는 게 상한선이 있긴 한데. 그게 제법 세거든. 그런데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헌터들은 대부분이 지역가입자로 들어가니까."

"아하."

"한국에 백만장자랑 억만장자 헌터가 좀 많이 늘었냐. 그 사람들이 전부 건강보험료 몇백씩 내주는데 돈 안 많아지고 배기겠냐? 뭐 재정 적자니, 고갈 위험이니... 그거 다 옛말이다."

"한국 많이 좋아졌네요."

제피로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세균을 바라보았다.

"안 좋아질 수도 있었어. 누구 덕분에 그래도 괜찮게 사는 거다."

"강민국 대통령요?"

"너 임마, 너."

"... 저요?"

"네가 대체 얼마나 많은 경제적 효과를 내고 있는지, 너 자신도 잘 모를 거다."

"제가 그랬어요?"

그냥 해외 나가서 공략 좀 하고, 외화 좀 벌어온 정도 아닌가?

작다고 할 수는 없지만...

뭐 국가 전체의 대들보 같은 건 오버인 거 같은데.

"네가 전국적으로 미공략 게이트들을 평정해둔 덕에, 1차로 던전 기업들의 펀더멘털이 뻥 뛰었고, 그런 기업 가치의 급격한 상승 덕에 대만이나 일본과는 다르게 개방되었을 때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아무리 강민국이라고 해도, 강민국이 아니라 강민국 할애비가 와도 미국 자본을 너 없이 막아낼 수 있었을 거 같아?"

"구심점을 중심으로 똑같이 뭉치면..."

"선후관계가 완전히 틀렸어."

제피로스가 고개를 저었다.

"뭉쳐서, 막아낼 만하니까 뭉쳐놓은 거야. 강민국이 정치적 리스크까지 안으면서."

"그러면 만약 제가 없었다면..."

"계산상 미국과 중국 자본에 다 먹혔어. 지금 일본처럼. 마치 신이 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완벽한 타이밍에 네가 출현했지. 아마 중국이나 미국 애들은 황당할걸? 유럽은 안 되겠으니까 동아시아로 선회한 건데, 다된 밥에 재를 거하게 뿌렸으니."

제피로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이어 말했다.

"어떻게 아냐고? 내가 정부 TF 자문에 있었으니까."

"선생님이요?"

"최악의 경우에는 5대 메이저 중에 RHS를 포함해서 딱 3개만 통합해서 막자는 게 정부 아이디어였다. 내가 현역 복귀하는 게 조건이었고."

"... 제가 없었으면 현역 복귀하시려면..."

"죽어나갔겠지. 그래서 나도 고민했고. 그게 딱 너랑 만났던 그 시기였어."

지금도 엊그제 일 같다.

스킬창도 제대로 안 보고 갔다가 제대로 쪽 당하고, 다시 가서 제피로스의 검집을 분해했던 그날.

그 인연이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네.

"그러고 보니... 그때 10억에 사신 가슴팍 광고... 아직 안 쓰고 계시네요."

"내 비밀 무기야. 나한테 잘못하면 가슴에 쪽팔리는 사진 달아주려고."

"네? 푸하하!"

한참 서로를 바라보며 웃던 중, 제피로스가 아! 하면서 떠오른 무언가를 말했다.

"요즘 카이저 상태가 영 아니라던데?"

"... 카이저가요? 술독에라도 빠졌대요?"

"어, 어떻게 알았어?"

"우리 회사에서 술만 3천억어치 사갔잖아요. 미친 사람인가 했는데."

낄낄 웃으면서 제피로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노친네, 젊어서는 술은 입에도 안 대더니 늙어서 무슨 주책인지."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카이저 코퍼레이션에서는 전면 부인 중인데, 주가는 거짓말 안 하지. 헤지펀드 몇이 이탈하는 조짐이라던데."

"헐, 그래요?"

카이저의 그 절대적인 권력에도 금이 가는 건가?

"라이언 스펜서랑 로버트 가르시아가 손잡고서 이탈하는 헤지펀드들에게서 투자 받아서 독립해서 나온다는 이야기도 있어."

"뭐 미국 1, 2위면 남 밑에 있기도 뭐하겠죠."

"그 1, 2위가 카이저의 밑에 있어서 만들어졌단 생각은 안 하고?"

"... 그랬어요?"

"세상일이 그렇게 정의롭게만 돌아가진 않더라고."

어깨를 으쓱여 보인 제피로스가 이어 말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게 아니고... 몇몇 헤지펀드는 우리 쪽에도 제안이 왔다."

"무슨 제안요?"

"합치자고."

"... 합쳐요?"

"자기들이 보유한 던전개발회사 몇 개를 들고서 찢어져서 나올 테니, 합병하자 이거지."

"미국 던전개발회사를 우리가 인수한다고요?"

그거... 괜찮은 거 맞나?

"미국에도 사업을 확장할 생각이 있다면야 나쁘지 않은 제안이긴 하지."

"그러면 하면 되죠."

"아직은 찔러 보기 정도라 조건이 별로야. 우리가 아니라 아마 전세계의 거대 던전개발회사에는 전부 연락 돌렸을 거다."

"... 그래도 카이저가 가만히 있어요?"

"모르지? 가만히 있다가 다 털릴 수도 있고, 아니면 정신차리고 지금이라도 나서서 단도리할 수도 있고."

바로 그 순간.

두 사람의 휴대폰이 동시에 울렸다.

뉴스 알림이었다.

아무래도 상장사를 경영하다 보니, 국내외 주식 시장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할 거 같아서 유료로 결제해서 구독하는 뉴스였다.

[알렉산더 "카이저" 하인리히, 두 달 만에 공식 석상 출현, 건재 확인.]

[현역 복귀 및 70단계 게이트 재공략 선언, 언더 세븐티의 시대 종식 선언.]

"정신 나갔나?"

뉴스를 본 제피로스의 짧은 반응이었다.

내 생각도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70단계 게이트는...

"... 단도리 치는 거 치고는 너무 거창한 거 아냐? 이 양반이 무슨 헛바람이 든 거지? 전성기 때도 못 하던 70단계 게이트를 어떻게 공략해?"

그런데...

다음에 뜨는 뉴스가 핵심이었다.

[카이저, 언더 세븐티의 종식, 혼자서는 무리, 헌터들에게 70레벨 달성 촉구.]

[WDDO를 발효한 올해가 적기, 이제 국가적 논리에서 벗어나 초국가적인 헌터 드림팀의 창설 필요성 역설.]

[70단계의 벽을 깨고 인류에게 새로운 장을 열자고 주장.]

허. 여기서 이런 얘기가 나온다는 거지?

"WDDO 발효부터 애초에 여기까지 봤던 걸까요?"

"... 가능성은 높지."

세계 던전 시장 개방화 전이라면, 각국이 레벨 통제 없이 무작정 70레벨을 열어버리는 건 재앙이었다.

평정 효과를 대거 잃어버리면서, 던전 경제 자체가 침체될 터였다.

하지만, 개방된 지금이라면...

각국의 헌터들이 연수하고 공동 공략하는 것도 한층 수월해진 상황이다.

문제는 이 전 세계 던전 개방화까지 오는 데, 너무 오랜 세월이 걸렸다.

팔팔한 현역이던 카이저가 은퇴한 헌터가 될 정도였다.

그렇다고 카이저를 제외하면 누굴 꼽을 수 있을까?

세계에 69레벨 헌터, 소위 말하는 현재 만렙 헌터는 꽤 많았다.

제피로스만 해도 69레벨이고, 미국 랭킹 1,2위 2인방도 69레벨에 위치해 있었다.

그렇지만, 그중 전성기 카이저에 버금가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괜히 그가 여전히 '절대자' 수준으로 추앙받는 게 아니었다.

대충 현역 69레벨 몇 명을 70레벨로 올려서 함께 공략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면, 언더 세븐티라는 이름이 수십 년을 이어오지도 않았을 터다.

대체, 카이저는 무슨 생각을...

띠링! 다시 울리는 뉴스 알림.

[카이저, 헌터 김세균에게 집중하다.]

... 뭐?

[헌터 김세균이 70레벨이 되는 날, 언더 세븐티의 시대는 깨질 것.]

[카이저, 김세균과 함께 70단계 던전을 공략하고 싶다 선언.]

[카이저, 오직 김세균만이 본인의 파티원이 될 자격이 있다.]

제피로스도 같은 기사를 보고 있던 듯 헛웃음을 짓다가, 짧은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 이게, 대체..."

"미친 노인네가, 진짜 노망이 났나."

제피로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까지 화를 낼 내용... 인가요?"

얼핏 봐서는 나를 띄워주는 거 같은데.

"일단 네 레벨업 페이스를 어그러트리려는 목적이 첫 번째다."

아, 그건 그럴 수도 있겠네.

안 그래도 대체 언제 50레벨 찍고 불가사의 공략하냐는 사람들 말이 슬금슬금 나오더라고?

"사람들이 제가 70레벨이 되어서 70단계급 이상의 게이트들을 공략하는 걸 기대하기 때문이겠군요."

"응, 그런 사람들 때문에 물론 페이스가 바뀌지는 않겠지만... 여론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

이제 카이저가 말했으니, 한두 곳에서 70레벨을 언급하진 않을 터였다.

마음 먹고 레벨을 끌어올린다면 1년 내에 도달할 수도 있었다.

단순히 레벨만을 올리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뻥 레벨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녔다.

일본 헌터들이 같은 69레벨을 맞추고도 미국의 스펜서에게 처참하게 털리는 것도 같은 이유고.

헌터의 강함에는 스킬, 아이템, 숙련도 등...

아주 많은 요소가 있었다.

"두 번째는, 네 지금부터의 불가사의 공략을 김새게 만들어서 여론의 관심도를 떨어트리려는 수작이지."

"어차피 70단계도 도전해 볼 만한 사람이 고작해야 밑단계를 클리어하는 건 일도 아니라 이런 거겠죠?"

사실 뭐 지금 스펙으로 어려울 건 없지만...

던전이라는 게 압도적인 힘만으로 클리어가 되는 거였으면 공략 불가 판정이 왜 생겼겠는가?

대부분은 엄청나게 변태적인 기믹 탓에 어지간해서는 도전조차 불가능한 게이트들이었다.

"세 번째로... 끝까지 널 자신의 밑으로 놓았다. 파티원이라니. 미친 노인네."

그것까지 디테일하게도 세팅해뒀군.

"그런데 의도적인지 실수인지는 모르겠는데... 네 번째... 이게 문제다."

"... 문제요?"

"카이저가 전 세계의 만렙, 그러니까 최고위 헌터들에게 광역 어그로를 날렸어. 중간에 너를 쿠션으로 세워서. 쉽게 말하면... 김세균 말고 헌터 놈들 중에 사람 새끼가 없더라. 이렇게 말한 거나 다름없다고."

... 최고위 헌터들은 자존심 하나로 먹고 사는 양반들이다.

그런 인간들이 저런 소리를 듣는다면...

"바로 70레벨 달리겠죠?"

"... 두말하면 잔소리지."

오랫동안 69레벨에 주차해서 먼지까지 쌓인 수많은 차들이, 부릉부릉 시동 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정도였다.

"헉! 설마... 여기까지 생각하고...?"

"... 왜요, 불안하게."

"각국의 69레벨 주차가 풀리고, 70레벨을 열어버리면 무슨 일이 생기겠냐?"

"각지에 70단계 게이트들이 생기면서 평정 효과가 풀리죠."

"그러면 네가 공략하는 하위 단계의 불가사의 게이트 하나의 공략만으로 평정 효과를 볼 확률이 더 낮아지지."

유일한 퍼즐조각이어서 가치가 있는 건데.

70단계 게이트라는 미친 퍼즐 조각 하나가 이가 빠져버리면...

"의미가 많이 퇴색되겠군요."

"네가 볼 수 있는 이득도 줄어들고."

"재라도 뿌려 보겠다는 심산인가."

"... 가능성 있는 소리지."

대놓고 날 저격하겠다는 건데.

"쯧. 잘 되는 걸 두고 못 보는 놈들이 꼭 있다니까요."

이렇게 나오면...

조금 힘들어도, 빨리 움직이는 수밖에...

바로 조형빈 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헌터님. 혹시 카이저 쪽에서 내보낸 보도자료...

"예, 지금 봤습니다."

─지금 해당 언론 플레이로 발생할 파급 효과를 각성자관리부 내부 싱크탱크에서 시뮬레이션 중입니다.

"그것도 좋은데... 일단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 거 같네요. 협상 타결되었던 곳, 몇 개 있죠?"

─완전히 타결된 곳은 세 곳, 일부 타결되어 세부 내용 협상 중인 곳은 다섯 곳 있습니다.

"세부 협상 중인 곳은 그냥 적당한 선에서 타협 봐주세요."

─예?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디를...?

저쪽이 잽을 날렸으면.

"다섯 곳 전부요."

이쪽에서는 스트레이트로 응수해 주는 게 정석이다.

"이번 주 안에, 공략 불가 게이트 여덟 곳 모두 공략합니다."

아무래도 30레벨대는...

속전속결로 끝내야겠다.

무제한의 세균술사 66화

#격변(2)

#격변(2)

30레벨에 오르고 나서 여러 바쁜 일이 많이 있어서 공략 페이스가 늦춰지기는 했다.

사실, 10레벨 단위로 게이트의 난이도는 순식간에 올라가 버린다.

그렇기에, 20레벨대의 게이트와 30레벨 대의 게이트는 또 다른 문제였다.

아마 세간에서는 30레벨 대의 공략 불가 게이트를 공략한다는 건 내게도 무리가 아닐까, 하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사업에 집중하고, 공략을 늦추고 있다는 게 세간의 생각이다.

카이저의 전략도 내가 기껏해야 한두 개의 공략 불가 게이트를 공략하는 것에 맞추어져 있을 터.

그들의 상식을 파괴하는 움직임을 보일 생각이었다.

내 레벨 페이스를 올릴 생각이라고?

그러면 공략 불가 게이트로만 레벨을 올리면 그만이다.

최초 공략 보상에, 각국과의 협상으로 얻어낸 보상까지 함께 얻어내면서, 레벨 페이스도 올릴 방법은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30레벨 보상을 잊고 있었다.

['재료 아이템 선택권(小)'를 사용합니다.]

[당신이 원하는 재료 아이템 1가지를 1kg 제공합니다.]

지금 필요한 재료 아이템이라고 하면... 당연히 혈금이다.

별의 유물은 어느 정도 보충해서 스펙업을 마친 상태였지만, 내가 처음 얻은 상태 그대로 정체되어 있는 게 아테나였다.

이제는 내 전력이 너무 올라서 나올 기회를 별로 잡지 못하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과연 혈금을 주려나?

[초월급 재료 아이템, '혈금'을 선택하셨습니다.]

[혈금 1kg이 인벤토리에 생성되었습니다.]

오 주네.

그러면 뭐 이제... 할 일이 정해져 있지.

오랜만에 부르는 거 같구만.

"아테나."

─부르셨습니까, 소환자님.

"... 목소리가 좀 차가운데?"

─그럴 리가요. 제게 감정 같은 건 없습니다.

그래, 기분 탓이겠지.

어쩄든 너무 오랜만에 불러서 미안하다 야.

이게 보상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새로 혈금을 얻었어. 다 네 거야."

인벤토리에서 꺼낸 혈금을 내려놓자, 순식간에 흡수해버리는 아테나.

1kg이면 적다면 적다고 할 수도 있는 분량이었는데, 제법 커졌다.

아마 금의 연성이 좋아서 1kg이면 부피는 엄청나게 부풀릴 수도 있는 모양.

이제는 15cm 피규어 크기에서, 1m 남짓의 어린아이가 되었다.

눈에 좀 많이 띄겠는데.

엄한 의미로...

내 생각을 읽었는지, 아테나가 바로 말했다.

"크기는 조절할 수 있습니다."

주욱 늘어나더니, 이제 정말 170cm 정도의 여전사 사이즈가 되었다.

와, 이게 아테나 여신이지.

"이 상태에서는 너무 얇아져서 방호력과 공격력이 떨어져 추천드리지는 않습니다."

"응, 그래도 만약 인간 형태로 있어야 한다면 이 정도 사이즈는 되어야 할 거 같아."

1m짜리 여자애를 데리고 다니면...

내 사회적 이미지가 곤란하다고.

그런데, 아테나는 단호했다.

"적절한 대응을 위해서 적합한 형태가 아닙니다. 일시적이라면 모를까, 이 상태를 유지하는 건 소환자님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내 안전?"

"반지 상태로는 대응에 한계점을 확인했습니다. 허락해주신다면, 현계 상태로 따르고 싶습니다."

한계점을 확인했다는 게...

아, 그 저격 사건을 말하는 건가.

한 박자 늦게 반응하긴 했지.

뭔가 자존심 상해 보이는 표정인데.

"제가 소환된 현계 상태였다면 그런 화살 따위는 소환자님의 근처에도 접근할 수 없었을 겁니다."

얘 자존심 상한 거 맞네.

"뭐, 최강 선배도 이제 내 경호에서 규선 씨로 돌리기도 했고..."

최강 선배는 당분간 내 경호가 아니라 규선 씨의 경호를 맡기로 했다.

새로 얻은 모자가 아니었더라면 나도 불안해서 최강 선배를 어디 보낼 수 없었겠지만, 알로이스 교황의 서클릿 덕분에 꽤 안전해졌다.

"어차피 죽음에 이를 타격에서는 영체로 변하니까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아무리 암살 시도가 있어도 첫 1타만 막으면, 지팡이 들고서 희생의 번제를 사용해 버리면 그만이다.

술 담그느라 강화 효모는 넘쳐나거든.

그런데, 내 자신감을 박살내는 한마디.

"해당 아이템의 발동 조건은 죽음에 이를 타격입니다. 그 말은, 죽음에 이르지 않을 정도의 중상과 같은 부상에는 발동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 그러네?"

이러면 다시 쫄리는데.

최강 선배를 다시 불러들일 수도 없고.

"현계 상태라면, 제가 대응할 수 있습니다."

"... 반지에서 나오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지?"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냐, 농담이야."

하는 수 없나.

이걸 SD 캐릭터라고 부르던가...

어쨌든, 1m 남짓의 짧똥한 아테나가 종종걸음으로 걷는 모습이 귀엽긴 했다.

여기에 뀨뀨까지 더하면?

─뀨?

뀨뀨가 아테나의 어깨로 스물스물 기어가 올라탔다.

이어 새근새근 잠드는 뀨뀨.

성장기라 잠이 많았다.

그나저나 귀여운 거에 귀여운 걸 더하니... 왕귀엽다.

한동안 아빠미소로, 그 흐뭇한 두 귀여운 것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

그렇게 처음 아테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을 때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숨겨진 딸이라면서 스캔들이 터졌는데...

놀랍게도 그 스캔들의 주된 의견들은.

─속보! 긴급속보! 세균맨 숨겨진 딸 있음!

└사진 인증 가능?

└ (사진)

└와, 세균맨 와꾸에서 나올 수 있는 딸이 아닌데?

└유전자 단위로 불가능한 귀여움인데.

─이렇게 귀여운데 세균맨의 딸일 리가 없어.

└아니 엘프랑 자식 낳음?

└모계 혈통만 받아야 가능할 듯.

└꼭 저런 못생긴 유전자가 우성이더라.

─너네 우리 세균이 형 무시하냐? (형 그래서 어디서 입양했어?)

─그 여자애 어깨에 뀨뀨 얹고 가는 거 봄?

└귀여운 거랑 귀여운 게 합쳐지니 저세상 귀여움임.

└진짜 미쳤다.

└여자애 이름 뭐냐...

─뀨뀨단의 경쟁자가 생겼다.

└뀨뀨! (불경하다! 그런데 귀엽긴 하다! 라는 뜻)

└뀨뀨! (그래도 나는 뀨뀨님이 더 좋다는 뜻)

... 내가 그렇게 못생겼니.

조금 마음의 상처를 입을 무렵에, 전화가 왔다.

─저, 김세균 헌터님.

"예. 조 국장님."

─그... 아니시죠?

"... 숨겨진 딸 논란이라면 아닙니다."

─휴우... 다행입니다.

뭐지, 너 따위한테 그런 딸이 없어서 다행이라는 듯한 안도의 한숨은.

─그러면 누구 자제분...

"자제분이 아니라 골렘이에요, 골렘."

─헉! 그랬습니까?

"네, 제가 소환한 골렘 아테나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해명하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그렇게 정부가 나서니, 순식간에 해명이 되었다.

주요 일간지 전체에 정정기사와 해명기사가 싹 올라갔다.

[숨겨진 딸 의혹? 김세균 헌터, '소환한 골렘 아테나']

[저세상 귀여움의 골렘이 나타났다? 뀨뀨에 이은 새로운 차원의 귀여움. 귀여움의 미학에 대하여.]

─그럼 그렇지, 세균맨 딸 아니래.

└딸일 거라고 믿은 사람 여기 10%도 안 될 듯.

└10%? 1%도 안 됐을 거 같은데.

─이름 아테나란다. 이름도 개이쁨

└아테나단 회원 절찬리 모집 중

└네가 안 모집해도 이미 한 삼천개쯤은 생겼을 듯.

인터넷 반응은 오히려 더 폭발적이었다.

진짜 내 딸이거나... 해서 어린아이라면 속되게 말해서 '빠는 데' 불가피한 윤리적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골렘이라면 그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니까.

뀨뀨에 이은 제2의 마스코트 등장이었는데, 파급 효과는 오히려 더 커 보였다.

공개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사방에서 문의 전화가 솟구쳐서 SG그룹 공보실의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대부분은 스폰서 계약 건.

─아동복 라인업이 있는 모든 명품 브랜드에서 다 연락이 온 거 같다.

내 부재시에 나를 대행해서 SG그룹의 업무를 맡는 부회장이기도 한 제피로스의 연락에 머쓱하게 웃었다.

아테나에 명품 아동복이라니.

나름 귀여울 거 같기도.

─그런데, 정말 너... 뭐 없지?

"없다니까요."

─... 에휴 불쌍한 놈.

"남 말은. 전 그래도 아직 결혼 적령기 안 지났거든요?"

노총각께서 말이 많으셔.

─얌마, 난 젊을 때 애인이 트럭 단위로 있었어. 지금도 어디 나가면 다 오빠라고...

"예이예이, 그러시겠지요."

─... 너도 나처럼 살지 말고 시간 날 때 연애나 해라.

"시간이 나야죠."

─말실수를 했네. 시간 날 때 말고, 시간 내서.

제피로스와 앤서블 이어링으로 농담 섞인 대화를 나누면서도.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30단계 게이트, '작은 암살자들의 도시'를 최초로 토벌하셨습니다.]

나는 태국의 공략 불가 게이트를 클리어했다.

이 게이트는 수억 마리의 개미 군집으로 가득했는데,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토벌하는 게 클리어 조건이었다.

심지어 보통 개미도 아니었다.

잘못 걸렸다가는 순식간에 뼈만 남고 분해해버리는...

어쩌면 내 글러트니랑 비슷한 녀석들.

물론, 내 글러트니가 훨씬 작고 훨씬 위력적이었기에.

수억에 달하는 개미 군집은 순식간에 분해되어 사라졌다.

수십 년이 넘게 공략되지 못한 채 미답으로 남아 있던 이 게이트는 입장 후 불과 1시간도 지나지 않아 허무할 정도로 쉽게 공략되었다.

이후로 31단계부터 36단계에 이르기까지.

여러 국가에 걸친 8개의 게이트를 차례로 공략하면서 36레벨에 이르렀다.

며칠 되지도 않아서 8개의 최초 공략.

아마 각성 초창기 정도... 아니, 각성 초창기에도 이 정도는 없었으리라.

그나마 처음 클리어한 개미굴... 아니 작은 암살자들의 도시가 조금 까다로웠고, 나머지는 그냥 힘으로 밀어붙여 클리어할 수 있는 비교적 단순한 기믹의 던전들이었다.

이렇게 되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김세균 헌터의 공략 방식은 과연 옳은가?]

[내용 : 그는 물론 위대한 헌터다. 아직 고레벨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위업과 족적을 남기고 있다. 이 정도라면 역사상 최고에 도전할 자격이 있음을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중략) 그러나 그의 공략 방식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는 일반적인 헌터들이 하는 던전 반복 공략을 통한 레벨업을 전혀 진행하지 않는다. 그가 최대한 미공략 던전의 최초 클리어를 위해서 레벨을 통제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하지만, 미공략 던전, 이른바 공략 불가 판정 게이트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판정을 받은 것이다. 물론 김세균 헌터의 능력이 그것을 공략하기에 충분하다는 건 확실하지만, 그것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의 공략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공략 불가 판정 게이트만 클리어해서는 레벨 성장이 더딤은 피할 수 없다. (중략)

카이저를 비롯한 세계의 헌터들이 언더 세븐티 시대의 종결을 선언했다. 그러면서 김세균 헌터의 합류를 촉구했다. 

고작해야 '언더 세븐티'로도 인류는 이렇게까지 성장했다. 70단계 위의 게이트에서 대체 어떤 부산물이 나올지,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도 없다.

물론, 최초 공략의 보상은 좋지만, 인류의 발전을 위한 김세균 헌터의 대승적인 판단을 기대하는 바이다.]

내가 공략을 시작하기 전, 위와 같은 내용의 논조의 사설들이 세계 각 언론사에 풀리기 시작했다.

원흉이 누구인지는 짐작이 가긴 하는데...

순식간에 여덟 개의 게이트를 클리어한 이후에는, 내가 굳이 상대할 필요가 없어졌다.

─기자 병신쉑 ㅋㅋㅋㅋㅋㅋ

└공략 불가 게이트만 클리어해서 레벨업을 못한다고? 해드렸습니다.

└ㅈㄴ 웃음벨이네 ㅋㅋㅋㅋㅋ 

─어 형이야. 형은 닷새에 불가사의를 여덟 개 공략해. 그래그래, 그건 사실이야.

└오랜 시간의 공략 준비 = 하루

─30렙에서 36렙을 닷새 만에 찍는 게 가능하긴 함? 누가 세균맨 렙업 느리대?

└이게 다 뀨뀨신의 은총임, 뀨뀨!

└아님! 아테나신의 은총임!

여론이, 알아서 싸워주고 있었다.

몇몇 언론사는 워낙 좋지 않은 반응에 댓글창을 닫아두거나, 기사를 내리기까지 했다.

기사를 내렸어도 상관없다.

내 추종자(?)들은 다른 기사에까지 가서 자발적으로 폭격해주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구시대'의 방법인 언론사를 통해 여론을 호도해 보려던 카이저의 방식이...

'대중'의 힘으로 막히고 있었다.

무제한의 세균술사 67화

#격변(3)

#격변(3)

"쯧."

인터넷 여론을 확인하던 카이저의 입에서 기어이 혀 차는 소리가 나왔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자로군."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뒤에, 그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일은 거의 없었다.

마지막으로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 반독점법에 걸렸던 일 정도?

그것조차도 결과적으로는 의지대로 되었다.

카이저 코퍼레이션에 반독점법을 적용했던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했고, 차기 대통령들은 모두 그의 좋은 협력자가 되었으니까.

이제 대통령들조차도 그의 의견을 '존중' 한다.

그런데, 고작 저 작은 나라의 헌터 따위와 엮이면, 모든 일이 틀어졌다.

서유럽의 구원자로 불리는 한 네크로맨서와는 또 다른 느낌의 인물이었다.

그 네크로맨서가 예단할 수 없는 광기에서 오는 공포라면...

김세균의 경우에는, 미지에 대한 공포라고 해야 할까.

도무지 그 끝을 알 수 없는 자였다.

1을 예상하면 10이 나오고, 10을 예상하면 100이 튀어나온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김세균을 견제하고자 했던 건 어디까지나 부차적 목표에 불과했다는 것이었다.

주된 목적은 카이저 코퍼레이션 내부에서 흔들리던 위상과 권력을 공고화하는 것.

그 작전은, 철저히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

외부 세계에서는 전쟁의 여파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중동에서는 지옥이 펼쳐지고 있었다.

수니파 세력의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의 군대가 북예멘의 시아파 후티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밀고 내려왔는데, 초반에는 후티 세력이 턱없이 밀리는 듯 했다.

당연했다.

기본적인 체급의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었으니까.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무리 쪼그라들었다고 해도, 중동 최고의 부국이자 강국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터였다.

거기에 미국으로부터 고용한 PHMC가 합류하면서 전황은 더 압도적... 이 되었어야 했지만.

비대칭 전력인 암살자들은 역시나 무서운 존재였다.

중동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시아파 암살교단 하사신.

애당초 암살자를 의미하는 단어인 어쌔신(Assasin)의 어원이기도 한 이들은 전원이 암살자 및 연관 클래스의 각성자들이었다.

여러 기상천외한 방식의 암살 시도로 인해서 사우디 고위 공무원이나 왕족, 전장에서의 고위 장교나 장성, 혹은 PHMC 소속의 미국 용병들까지도 죽어 나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전황은 결코 사우디아라비아에 유리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쉽게 북예멘의 후티를 토벌하고 전쟁을 끝마쳐서 대내적으로는 국민을 통합하고, 대외적으로는 중동 패권국의 모습을 보여주려던 사우디 왕가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아무리 김세균 덕분에 평정 효과니, 새로 생긴 던전으로 얻은 수입이니 해도, 기본적으로 사우디 경제는 침체 중이었다.

오랜 전쟁을, 그것도 용병까지 써가면서 진행할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 전쟁이 질질 끌렸다.

그렇게 되면 가장 먼저 벌어지는 일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바에 의하면 용병이 먼저 이탈한다.

승기 있는 쪽에 붙어서 승전의 과실만을 챙기려 붙은 용병들이, 질질 끌리는 전쟁을 두고만 볼 리 없었다.

그렇다고 단순히 이탈할 수는 없었다.

돈 벌려고 온 전쟁에서, 돈도 못 벌고 아무것도 챙기지 못한 채 나갈 수는 없지 않은가.

북예멘군의 반격으로 퇴각하면서, PHMC는 하사신의 리더에게 남기는 물건을 놓고 갔다.

그리고 그것은, 하사신의 리더인 '산상노인(山上老人)'에게 전달되었다.

물건은 다름 아닌...

[앤서블 이어링 II]

흔히 통신용 귀걸이로 불리는 한 쌍의 귀걸이 중 다른 한 짝이었다.

산상노인은 그것을 착용하고 입을 열었다.

"나를 찾았다고 들었는데."

─산상노인. 아니, 하산 알무타나.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산상노인의 몸이 흠칫 떨렸다.

"무슨 소리를..."

─발뺌하지 않아도 되네, 심지어 우리는 던전도 함께 돌아보았던 사이 아닌가.

"... 카이저."

놀랍게도 하사신, 암살교단의 교주와 카이저는 왕년에 던전까지 함께 돌던 사이였다.

─자네 정도 되는 헌터가 어느 순간 종적을 감추었을 때는 놀랐지. 그 헌터가 중동에 암살교단을 차리고 암살 사업을 벌일 때는 더 놀랐지만.

암살자라는 클래스 자체가 초기에는 몰라도, 고단계 던전으로 갈수록 던전에서 활약하기란 힘들어졌다.

대놓고 던전 밖에서의 활약이 권장되는 클래스.

"... 어떻게 알았지?"

─미국의 정보력을 무시하지 않는 게 좋을 게야.

"... 우리는 미국과는 적대할 생각이 없다."

─마음이 맞는군. 우리 역시 하사신을 상대할 생각은 없어.

"오랜 전우로서 충고하지. 지금이라도 자네의 용병들을 물리도록."

─그러려면 명분이 필요하다네.

"명분?"

잠시 말이 없어졌다가.

반대편에서 천천히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를 들자면, 우리 카이저 코퍼레이션의 대주주 몇이 갑자기 암살자에 의해 죽는다거나.

"그 대주주 가운데 네 이름은 없겠지?"

─능력이 된다면야...

능력? 산상노인인 그가 나선다고 해도 지금 통신을 이어가는 상대를 대상으로 암살을 성공시킬 가능성은 1%조차 되지 않았다.

그 정도의 괴물이었다.

"사양하지."

─후후. 대주주들이 살해된다면... 그걸 바탕으로 PHMC들을 물리겠네.

"... 아무 대주주나 살해하라는 소리는 아닐 테고."

─리스트를 말해주지.

그렇게 모종의 중동계 암살 조직에 의해서 순식간에 다섯 명이 넘는 월가의 헤지펀드 운용자들이 살해되었다.

공통점은, 카이저 코퍼레이션의 대주주들이라는 거였고, 더 세부적인 공통점을 따지자면...

카이저에게 반해서 경영권을 찬탈하려는 일당들이라는 거였다.

물론, 짐짓 분노한 카이저의 성명은 당연히 뒤따랐다.

동시에, 사우디에 파견되었던 PHMC들은 그걸 빌미로 삼아 이탈했다.

당연히 사우디 정부에서는 이탈을 막았다.

전장에서 용병들이 이탈하는 걸 내버려 뒀다가는 군대의 사기 자체가 폭락할 터였으니까.

전쟁 수행 능력이 반토막 이하가 나는 건 덤이었다.

그러나 카이저의 PHMC들이 누구인가.

온갖 블랙 옵스(비인가 작전)에는 통달한 이들이었다.

바로 현장의 사령관과 접촉했다.

"당신, 어차피 한두 달 안에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잘릴 거요."

사우디아라비아 군부 원정군의 총사령관, 압둘아지즈 알투와지리 중장의 만면이 일그러졌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북예멘 전쟁에서 밀린 것을 두고서 실각론이 계속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리가 이탈하는 걸 사우디 군부의 능력으로 막을 수도 없을 테고."

"... 그래서, 도망치겠다는 걸 광고라도 하고 도망치려는 건가."

"아니지. 당신같이 능력 있는 장군이 책임질 필요도 없는 일에 책임져서야 쓰나. 잘못한 건 애당초 왕가의 썩어빠진 왕족들이 아닌가?"

흠칫 놀란 압둘아지즈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입조심하시오! 여기가 어디라고!"

"여기가 어디긴, 여기 왕족은 없소! 오직 당신과 우리뿐이지. 그러니 결정을 내릴 수도 있는 거요."

"무슨 결정을 내린다는 거요."

"그대가 썩어빠진 사우디 왕가를 몰아내기로 마음먹는다면, 우리는 위대한 미국 시민으로서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해 얼마든지 협력할 생각이 있소이다."

"!!"

PHMC에서는 최고의 결정이었다.

여기서 이탈했다가는 약속한 돈이나 이권도 챙기지 못할 판이었으니까.

전쟁을 끝내면서, 동시에 이권도 챙길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

월스트리트 헤지펀드 매니저 연쇄 암살사건.

엄청나게 충격적인 사건에 전미가 들썩이고 있었다.

하필이면 전원이 카이저 코퍼레이션의 대주주들.

중동전쟁에 개입한 카이저 코퍼레이션에 대한 보복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전면에 나선 카이저는 현역 때에 버금가는 휘광을 내뿜으며 선포했다.

"암살자들은 곧 잡힐 것입니다. 감히 이런 짓을 벌인 이들은 후회하게 될 겁니다. 나의 검이,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누가 보아도 정의롭기 그지없는 크루세이더의 엄숙한 선언.

실제로 암살자들은 곧 잡혔고, 체포 과정에서의 격렬한 저항 끝에 카이저의 손에 직접 살해당했다.

이 사건 덕에...

압둘아지즈 중장의 쿠데타는 적어도 미국에서만큼은 큰 회자가 되지 못했다.

물론, 국제적으로는 이 사건이 훨씬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왕족을 죽여라!"

"버러지같은 왕족들을 모두 죽여라!"

"국민의 고혈을 빨아 배불리는 왕가의 벌레들을 쳐죽이자!"

경제 제재로 국민들이 굶주리는 와중에도 왕가의 화려함은 잃지 않았고, 상대적 박탈감에 휩싸여 있던 사우디 국민들은, 심지어 이번에는 쓸데없는 전쟁에 차출되기까지 했다.

그 분노가, 고스란히 왕가를 향했다.

물론 왕가의 전력은 만만치 않았지만...

카이저 코퍼레이션의 PHMC에 비하면 손색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압둘아지즈 중장은 사우디 왕가를 몰아내고 쿠데타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카이저 코퍼레이션이 있었다.

**

뉴스를 보다가, 헛웃음이 났다.

"이거 뭔가 데자뷰 같은 느낌인데."

"뭐가?"

"사우디아라비아요."

압둘광 중장이냐? 아니면 압성계의 북예멘 회군?

제피로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원래 쿠데타가 다 결은 비슷하지 뭐."

"그나저나 그 엄청나던 사우디 왕가가 저 꼴이 나다니."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랑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협상했던 그 사우디 왕세자는 해외로 망명했다.

사우디 군정에서는 범죄자이자 국가 반역자로 규정해서 송환청구를 계속 넣고 있지만.

"아니, 카이저는 아무리 그래도 이래도 되는 거예요? 남의 나라 쿠데타를 돕다니."

"뭐 뻔하지, 민주화 열풍에 휩싸인 압둘 중장의 의기에 감화되어 자발적으로 도운 거다... 내부적으로 징계하겠다. 하고서 솜방망이 징계 후에 엄청난 인센티브로 보상해주겠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국제적으로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도 되는 대국이 사기업의 손에 떨어진 거나 다름없는 셈이었으니까.

"그나저나 묘하단 말이지."

"... 뭐가요?"

"온전한 전성기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얼추 그 즈음으로 복구한 거 같은데?"

여러 차례, 힘을 발휘하는 카이저의 영상을 돌려 보면서 곰곰이 생각에 빠져드는 제피로스.

"저 양반, 뭘 쳐먹고 회춘했지?"

"글쎄요. 술이라도 마시고 회춘했나?"

농담으로 말했는데.

"... 그러고 보니."

시기가 어째 겹치는 거 같다?

내 술을 사간 시기랑...

공식석상에 나서서 무력을 표출하는 시기가.

분명 비슷했다.

심지어 카이저는 신을 모시는 크루세이더고, 내 술에는 신의 음료라는 넥타르가 들어있잖아.

마시고서 힘을 회복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게다가...

"그 샤토 페트뤼스의 와인을 낙찰받았던 것도 카이저라고 했죠?"

"응? 어, 아마 그랬을 거다."

무려 30억이나 주고서 말이지.

그때 마셔보고서, 무언가 효험을 느끼고서... 싹 다 선매했다?

가능성이 있는 소리네.

"원래 카이저가 술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죠?"

"싫어하는 쪽에 가까웠지. 명색이 저래도 사생활은 금욕주의자야. 저 양반이 현역 때 술 마시는 걸 본 적이 없다고."

"그런데 천 병을 사갔다라..."

내게 들어서 넥타르의 정체를 아는 제피로스도 그제야 알아차렸는지 헉! 하는 소리와 함께 말했다.

"설마 정말로 넥타르를 수급하려고 사간거야?"

이상하다 싶긴 했는데, 그게 정말로?

"그런데 이상하네요... 지금 나가는 술은 함량이 얼마 안 될 텐데."

에이 설마.

통상 넥타르 0.1% 함량에서 80%를 추출하고 20%니 0.02% 함량이다.

40도짜리 고도수 술의 0.02% 들어 있는 넥타르를 마셔서 원하는 양을 채우려면...

아마 수십 수백 병은 마셔야 될 텐데.

그 전에 알코올 중독자 확정이다.

그렇다고 저 0.02%를 추출하는 것도 쉽지 않을 터.

규선 씨 정도 되는 연금술사도 안 되니까 포기하고 출하하는 거다.

물론 술맛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기도 해서 남겨두는 것도 있지만.

어쨌든, 찜찜함을 남겨둘 필요는 없겠지.

"천상은 앞으로 국내에서 시음 목적으로만 팔아야겠습니다."

"엥? 그러면 수요가 확 줄어들 텐데?"

"원래도 수요가 엄청난 술은 아니었잖아요. 이상한 사람이 붙어서 이상한 수요가 생긴 거지."

"그렇긴 하다만."

"이제 천상은, 국내 고급 레스토랑이나 바에서만 취급 가능하도록 해야겠어요. 대신 가격을 좀 낮추고요."

3억은 너무하긴 했지.

희소성 때문에 형성된 일시적 가격이니, 이제 양산이 가능해진 현 시점에서는 낮출 필요가 있었다.

"1억 정도로 1/3 수준으로 낮추고, 바에서 잔술로도 팔면 그래도 수요가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한국까지 와서 마실까?"

"프랑스 현지 와이너리까지 가서 술 사서 오시는 분이 할 말씀이에요?"

"... 할말 없다."

피식 웃으면서,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애주가에게는, 국경 같은 건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나는 그러면 그게 궁금해지는데?"

"네?"

"과연 술 다 떨어진 카이저는 한국에 술 마시러 찾아올까?"

그 활극을 상상하면서.

나랑 제피로스는 한동안 배꼽이 빠져라 웃어댔다.

한참이나 그렇게 웃던 중.

휴대폰 울리는 소리에 확인해 보았다.

규선 씨?

"네, 여보세요?"

─저기... 대표님.

"예, 말씀하세요."

─... 저 좀 도와주셔야 할 거 같아요.

심장이 쿵 떨어지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다행히, 아직 최강 선배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그러면 위험하단 뜻은 아닐 테고.

─초월 퀘스트가 열렸어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위험하다는 소리보다 오히려 더 눈앞이 아득해졌다.

무제한의 세균술사 68화

#아르스 마그나(1)

#아르스 마그나(1)

급히 규선 씨가 있는 천안 연구소로 날아갔다.

말 그대로 날아갔다. 헬기를 타고서.

"규선 씨."

"네, 대표님."

그런 폭탄 발언을 떨어트렸던 사람치고는 워낙 멀쩡해 보였다.

"초, 초월 퀘스트라뇨. 정말이에요?"

"네, 정말이에요."

"세상에."

클래스 전용 스킬의 숙련도가 마스터 등급에 달하고도,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지만 열리는 것이 초월 퀘스트였다.

내가 알기로는 연금술계에서는 아직까지 초월 등급에 이른 사람이 없던 걸로 아는데.

아니 그를 넘어서서...

애초에 초월 퀘스트 조건을 달성한 이조차 없었다.

그러니까.

이 눈앞의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는 여자가...

현재 연금술의 정점에 있다는 뜻이었다.

충격적인 이야기구만.

[대위업 ─아르스 마그나 (ARS MAGNA)─]

그녀가 말해준 연금술 초월등급 퀘스트의 이름이었다.

이름 한 번 거창하구만.

내 네크로맨시 초월등급 퀘스트 이름은 뭐려나.

"그런데 어쩌다가 열린 거예요?"

"넥타르를 연구한 후에 퀘스트 조건이 한 개 남았다는 메시지는 봤었어요. 그런데... 33레벨을 달성하니까 딱 열리더라고요."

퀘스트 조건이, 넥타르 추출과 33레벨 달성인가?

"이 정보는 우리끼리만 알고 있는 편이 좋겠습니다."

"네, 알겠어요."

규선 씨 성격 같아서는 학계에 공개하고 싶겠지만, 그러려면 넥타르의 존재를 공개해야 하니까. 

넥타르의 소유주이자 유일한 생산자인 내 의견에 따르는 거겠지.

그나저나 벌써 33레벨일 줄은 몰랐네.

던전을 돌지 않아도 생산 계열은 스킬 사용만으로도 경험치를 얻어 레벨이 오르긴 했다.

쥐꼬리만한 게 문제지만...

그런데 그 쥐꼬리 경험치를 모아서 나랑 레벨이 비슷하다니.

대체 연구를 얼마나 하신 겁니까...

"그나저나 도와달라는 건 뭐죠? 혹시 연구비가 필요한 거라면 얼마든지 가져다 쓰세요."

"... 그거 참 괜찮은 소리... 추릅... 아니에요..."

저거 연구비 무제한이라는 소리에 침 흘리다가 삼킨 거 맞지?

"헤헤, 사실 게이트를 공략하래요."

"게, 게이트를요?"

"네, 동반 1인과 함께요."

그래도 양심은 있네.

비전투계 클래스인 연금술사한테 혼자서 게이트 밀라고 했으면 진짜 하지 말란 소리였을 텐데.

"38레벨 이하만 동반 가능하대요."

"... 어휴."

조질 뻔했네.

지금이 36레벨이었으니 타이밍 좋았다.

하필이면 게이트 밀다가 규선 씨의 초월 퀘스트도 못 도울 뻔했다.

"어딜 공략하면 되는 겁니까?"

"일단 콜롬비아의 33단계 게이트, '거짓된 황금의 제국'을 공략하라네요." 

"콜롬비아 33단계..."

헌터들이면 대부분 사용하는 국제 게이트 정보 데이터베이스에서 확인하니...

"구아타비타 호수? 라는 곳에 있는 게이트군요. 오, 미공략 상태인가."

또 공략 불가 판정 게이트 공략이야 내 특기지.

제피로스에게 바로 연락했다.

"콜롬비아 구아타비타 호수의 '거짓된 황금의 제국' 33단계 게이트, 조사 좀 해주세요."

─콜롬비아? 그 인외마경은 왜 가려고?

"그렇게 됐슴다."

─... 인생이 순탄해서 막 지옥을 찾아다니고 싶고 그래?

"그렇게 미친 동네에요? 거기도 사람 사는 곳 아니에요?"

─나 현역 때도 절대 공략하러 안 가는 나라가 몇 개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콜롬비아야. 헌터고 자시고, 갔다가 재수 없어서 뒈지면 시체도 못 찾는 곳이라고. 던전 밖이 던전 안보다 위험해 그 동네는.

조금 쫄리는데.

"그래도 꼭 가야겠다면요."

─하아... 뭐, 그래. 너야 뭐 몸 간수는 하겠지.

"... 규선 씨도 데려가야 되는데요."

─뭐? 너 미쳤어? 제정신이야? 누굴 데려가!

"그게..."

연금술 초월 퀘스트라는 소리에 처음은 놀라고, 마지막에는 한숨을 깊게 내쉬는 제피로스다.

─하아, 왜 하필 그 동네에...

"그러게 말임다."

각성 시대가 열리고 이전 시대와 가장 큰 차이점을 꼽으라고 하면, 국가의 부유함이나 기술 수준과는 상관없이, 인구만 받쳐준다면 일정 이상의 전력을 뽑아낼 수 있다는 거였다.

아 물론, 중국이나 인도처럼 던전 공급에 비해서 너무 '무식하게' 많으면 또 문제지만.

적당한 수준으로 많은 인구는 곧 국가의 무력과도 직결되었다.

남미 2위에 빛나는 5200만이라는 다수의 인구를 바탕으로, 콜롬비아에서도 많은 헌터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언제나 양성적인 것보다는 음성적인 쪽이 더 돈이 되는 법.

콜롬비아의 각성자, 헌터들은 자연스럽게 카르텔 쪽에 몸을 담았다.

그 결과, 콜롬비아의 카르텔은 각성 이전 시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세력을 자랑했으며, 미국조차도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

미국에 마약을 공급한다는 의혹이 있으면 바로 DEA나 미군을 파견하여 카르텔부터 조져놓았던 과거와는 달랐다.

헌터 전력으로 강화된 카르텔을 공략하려면 미국도 꽤 큰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것.

─거긴 우리나라 정도로 인구가 비슷하니까 헌터 숫자도 우리나라 정도 되겠지? 

"그렇겠죠."

─아니, 우리나라의 1.5배다.

"... 어떻게요?"

─우리나라 기준으로는 전투에 안 맞는 놈들도 해 먹고 살게 없으니까 꾸역꾸역 헌터 쪽으로 와서 어떻게든 스킬이나 전투기술을 발전시키는 거지. 그리고 그 헌터 중에 몇 퍼센트가 카르텔 소속이게?

"... 10%?"

─50%가 넘는다. 사실상 무정부상태야. 그래서.

보고타와 같은 수도조차 특정 지역은 정부에서 개입조차 못 하는 마경이란다.

지방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일단 안 갈 수는 없으니 내가 최대한 인맥을 총동원해서 신경이야 써주겠다만, 제발 조심해라.

"... 알겠어요."

저 동네에서는...

아마 지팡이에서 손을 못 떼고 있을 거 같은데?

**

몇 가지 준비를 마친 뒤에, 전용기를 타고 규선 씨, 그리고 그녀를 경호할 최강 선배와 함께 콜롬비아로 향했다.

"그래도 같이 해외 나가는 건 처음이네요?"

"오, 그렇네요."

꽤 오래 같이 지냈는데, 해외 한 번 같이 가본 적이 없었구만.

하필 처음 가는 곳이 이런 곳이라 문제긴 하지만.

나름 재미는 있었다.

둘이 이야기 나눌 거리가 전부 세균인 건 조금 생각해 볼만한 거리이긴 했지만...

이야기도 나누다가, 뀨뀨랑도 놀다가.

그렇게 도착했다.

한동안 이어진 장시간 비행 끝에 착륙한 공항은 콜롬비아 보고타의 엘 도라도 국제공항.

말 그대로 엘도라도, 황금의 도시라는 이름에서 따온 공항 이름이었다.

공항에서 우릴 반기는 건, 꽃무늬 반팔 반바지를 입은 백인 아저씨였다.

"그 유명한 김세균을 여기서야 처음 보는군. 아이언월은 구면이죠?"

"기억나네. 볼리비아인가에서 봤던 거 같은데?"

"예예, 기억력도 좋으시네."

"어쩌다가 이 험한 동네까지 왔나?"

"어쩌고 자시고, 애초에 여기가 고향입니다. 하하. 반가워. 난 전직 헌터, 페르난도 로페즈야."

"반갑습니다. 김세균입니다."

가볍게 악수를 나눈 뒤에, 로페즈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구아타비타 호수에 가겠다고?"

"네."

"안내해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문제가 하나 있어. 제일 큰 문제이긴 한데... 거기가 카르텔 지역이거든."

"... 카르텔 지역 아닌 데는 있습니까?"

"사실 없지. 그걸 알고 있다니, 이미 콜롬비아에 가이드가 필요 없겠는데?"

망할 카르텔.

"다행인 게 하나 있어."

"뭔데요?"

"구아타비타 지역의 지배자인 나르코(마약상)랑 친한 다른 나르코가 있거든."

사돈의 팔촌... 이런 거 아니지?

"그 나르코가 한류 광팬이야."

"... 네?"

"한국 음식도 겁나게 좋아하고, 노래며 뭐며... 심지어 한국 헌터들도 좋아해. 아이언월 당신 팬이기도 했을 거야."

... 제피로스를 데려왔어야 했나?

"아마 김세균 당신도."

"그래서, 그 양반의 환심을 사서 구아타비타의 나르코에게 접근해라?"

"그렇지."

괜히 유통 단계 복잡해지는 느낌인데.

"그냥 바로 구아타비타의 나르코에게 접근하면 안 됩니까? 어차피 평정 효과 받으면 그쪽도 이득일 텐데."

"해당 지역에는 공략 불가 판정 게이트가 두 개야. 그걸 클리어한다고 평정이 되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그 나르코가 지역 전체의 온전한 지배자인 것도 아니고."

"남 좋은 일 시킬 일 없다는 거네요."

원교근공이라고 했다.

가까이 붙어 있으면 보통은 웬수다.

아마 구아타비타 호수를 지배하는 나르코와 인근의 나르코는 경쟁 관계겠지.

"휴, 알겠습니다. 그래서 그 나르코는 어디 있는데요?"

"차에 타라고."

... 최강 씨 포함해서 셋이 타긴 버거운 차 같은데.

오랜만에 타는 똥차였다.

매번 리무진이나 고급 세단, 스포츠카, 하이퍼카 같은 것만 타다 보니 오히려 색다른 느낌.

간신히 낑겨 타고서 도착한 곳은, 겉보기에도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저택이었다.

말 그대로 돈을 발라서 만든 것 같은 저택.

"여기가 디에고 몬테로의 저택이야. 연락은 해뒀으니 지금 나올 거 같은데..."

말하기가 무섭게, 칼과 활, 총 등으로 무장한 수많은 헌터를 거느린 한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거친 수염과 대비되는 깔끔하게 각 잡힌 정장 와이셔츠에, 소매는 걷어 올렸다.

걷어 올린 소매에 스위스제 명품 시계가 보이네.

예전 같으면 알아보지도 못했을 텐데, 김세균 많이 컸다.

"어서 오시게나. 요즘 명성이 자자한 한국 헌터를 만나보게 되어 영광이군. 그리고 이쪽은... 아이언월! 어서 오시오!"

"반갑습니다."

나를 필두로 한 명씩 악수를 나누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규선 씨와 악수를 나눌 때 눈빛이 좀 묘했는데.

과민반응인가.

"그래서, 예까지 오신 이유가... 구아타비타의 그 게이트를 공략하시겠다?"

"그렇습니다."

"거긴 라울의 영역일세. 나라고 해도 함부로 어떻게 할 수 없지."

"라울 가르시아와 친하시다고 들었습니다."

"가끔 만나서 술 한 잔 정도는 하지."

혹시 몰라서 챙겨오길 잘했네.

"그러면 이것도 좋아하시겠군요."

그러면서 인벤토리를 열었더니...

철컥철컥! 사방에서 권총 슬라이드 당기는 소리랑 활시위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씨발, 살벌한 거 보소.

몬테로가 가볍게 손을 들자, 내게로 겨눈 권총과 활시위를 거두는 이들.

"이 동네에서 인벤토리는 함부로 여는 게 아닐세. 친구."

그의 조언에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선물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

인벤토리에서 꺼낸 것을 건네자, 이 마약상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거...! 그거 아닌가!"

"맞습니다. 천상(天上)."

"한 병에 20만 달러가 넘는다는 그 술! 카이저 미친 노인네 때문에 사보지도 못했는데!"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응?"

"이제 한국 밖으로 수출하지 않기로 결정했거든요."

"아니! 왜!"

"내수로도 수요가 충분해서요."

충분할지 아닐진 모르지만.

어쨌든 일단 그런 거다.

내가 꺼내어 든 술병에, 그가 탐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라울 가르시아와 이 술을 몇 잔 나누시면, 그도 기분이 좋아져서 공략을 허락하지 않을까요?"

"크흠... 그 정도 성의라면 꼭 설득해봐야겠군."

잠시 고민하던 끝에, 그가 결정을 내렸는지 호탕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 좋네. 대신에 조건이 있네."

조건?

"그 여자는 두고 가게. 어차피 험한 곳이라, 여기 있는 편이 좋을 거야."

이 씨발놈이?

고양이 생선 걱정하는 소리를...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고서 웃어 보였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같이 공략해야 할 사람이라서요."

"그럴 리가. 전투계통이 아닌데?"

"마법사입니다."

"흐흐, 아무리 마법 계열이라고 해도 전투마법사인 이상 다 태가 나지. 자네처럼."

"아무튼, 저랑 같이 공략할 사람입니다."

"그 여잘 두고 가지 않는다면, 허락하지 않겠네."

한참이나 시선을 마주하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술병도 다시 인벤토리에 넣고.

"죄송합니다. 저흴 도와주시지는 못할 분 같군요."

협상 결렬이다. 씹새야.

그렇게 나가려는 우리의 앞을...

검을 든 헌터들이 막아선다.

"... 뭐 하자는 겁니까?"

"앉게, 아직 초대는 안 끝났는데 어딜 가려고 하나?"

"객이 가겠다는데 막는 초대도 있습니까?"

"있지, 콜롬비아에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으르렁댔다.

"내가 허락하기 전에는, 아무도 나가지 못한다."

어쩐지. 이렇게 될 거 같더라고.

순순히 쇼파 쪽으로 다시 다가와 털썩 앉았다.

불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규선 씨와, 벌써 몸에 스파크를 조금씩 튀기기 시작하는 최강 선배.

"자신 있습니까?"

"자신? 뭐,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게 카이저라도 되나? 10년 뒤였다면 내가 쫄았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지."

한국 음식도 좋아하고, 한국 영화 드라마도 좋아하고, 한국 헌터도 좋아하는데...

한국 여자는 좋아하지 말라는 법 없겠지.

그런데...

"발정난 개새끼마냥 여자 때문에 나랑 척을 지겠다고?"

"... 이미 내게 무례를 범했군. 하지만 넓은 아량으로 용서하지. 그리고 되묻겠네.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나랑 척을 지겠다는 건가?"

숨을 한 번 가다듬고.

"죄송합니다."

"하하하! 그렇지."

"질문 하나만 하겠습니다."

"질문? 마음껏 하게나."

"혹시 지금까지 사람을 죽여본 적 있습니까?"

"뭐?"

예상치 못한 질문에 조금 당황했다가.

와하하하! 웃음을 터트리는 디에고.

그가 부하들을 향해 껄껄 웃으며 외쳤다.

"이 친구가 내가 사람을 죽여봤냐는군!"

푸하하하! 사방에서 비웃음 섞인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답이 됐나?"

"충분히요."

"흐흐, 그런 걸 굳이 물어본 이유는 뭔가?"

"왜냐면..."

이게 내 인생 첫 살인이 될 거 같은데...

사람 새끼를 죽이면 좀 찜찜할 거 같아서.

"이왕이면 개새끼로 개시하는 게 좋잖아?"

그와 동시에.

내 몸 전체에서 사방으로 안개가 퍼져 나갔다.

미리 대비한 듯 마나를 끌어올리는 헌터들이었지만, 소용없었다.

무기도, 방어구도. 방어 스킬도 공평하게.

순식간에 먼지가 되어 흩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사라져가는 디에고 카르텔의 일원들.

"... 어?"

생경한 장면이었다.

분명, 거기 서 있었던 수많던 사람들이.

눈 한 번 감았다 떠보니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끄어어어..."

오직 한 사람만이, 그나마 버티고 있었다.

마나의 근원인 단전부로부터 뻗어 나오는 강기의 보호막이,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다.

고작해야... 백분의 일 정도의 글러트니를.

다른 모두를 먹어치운 글러트니가 붙었을 때.

그는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부하들과 똑같이 사라져버렸다.

수많은 카르텔 헌터들이 있던 공간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무제한의 세균술사 69화

#아르스 마그나(2)

#아르스 마그나(2)

분명 생존을 위한 행동이었다.

그랬음에도, 기분이 썩 좋지 않은 건 저들이 쓰레기일지언정 나랑 비슷한 모습을 한 같은 종족이어서겠지.

"처음이냐?"

툭,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하는 최강 선배.

"... 네."

"고생했다."

내가 무서울 만도 한데, 규선 씨도 애써 떨리는 다리를 일으켜 내게 다가와 나를 안아주었다.

"고마워요. 지켜줘서."

"..."

"절 지키려고 과하게 하신 거 알아요."

그렇긴 했다.

조금이라도 손속을 두었다가 최강 선배나 규선 씨가 다치길 바라진 않았으니까.

"선배님은..."

"물론, 나도 경험이 있지. 많지는 않지만."

"... 언제였습니까?"

"굳이 기억하게 만드는 거냐? 언제였더라... 사실 우리 때는 비일비재했어서."

제피로스 曰, 지금이야 농담 섞어서 소위 낭만의 시대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야만의 시대였다고 했다.

"던전에서 아이템 좋은 거 떴다고 뒷빵 놓는 새끼들은 그냥 다 죽이던 시대지. 반대로 말하면, 약한 놈들은 그 뒷빵에 다 죽었고. 나 죽이겠다는 놈들에게 어설프게 굴던 놈들은 다 죽었거든."

최강 선배가 내 행동에 거의 거부감이 없는.

아니, 오히려 잘했다고 하는 이유였다.

"세균들도 종종 그래요."

갑작스러운 규선 씨의 말에 흠칫 놀라 되물었다.

"... 네?"

"자기사멸사(Autolysis)라고 하는데. 종종 집단의 생존을 위하여 개체조절을 하여 자원 경쟁을 줄이거나 생존에 유리한 환경을 유지하죠. 그렇게 죽은 세균들의 유전물질이나 영양분은 다른 집단을 위해 쓰이고요. 쉽게 말해서... 세균도 동족을 죽인다고요."

"...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날 위로하려고 하는 거겠지.

맞는 말이긴 한데...

그런데 위로된다기보다는...

"푸흡."

"... 진지한 이야기인데!"

"그럼요, 엄청 도움됐어요."

"다시는 위로 안 할거예요. 엄청 고민해서 말한 건데."

"하하, 제가 웃었으니 위로가 성공한 거 아니에요?"

"그런가?"

그렇게 먼지만이 남은 저택에서 한참이나 웃었다.

백여 명의 사람을 분해해버리고서 웃고 있으니 뭔가 사이코라도 된 거 같긴 한데.

세균도 그렇게 한다잖아.

나와 내 소중한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서.

'김' 세균도 못 할 건 아무것도 없다.

**

페르난도 로페즈인가 하는 전직 헌터는 우리를 내려주고 돌아갔으니, 타고 돌아갈 차가 필요했다.

다행히도, 디에고인가 하는 나르코의 차고에는 차가 넘쳐났다.

그것도 각종 고급차들로 가득했다.

차고 한쪽에 있는 키 중에 하나를 골랐다.

벤츠 G바겐 AMG였다.

고른 이유는 뭐... 여기가 워낙 산골짜기라서 오프로드 차량이 좋을 거 같아서.

그걸 타고 보고타 시내로 돌아갔다.

바로 구아타비타 호수가 있는 지역으로 가고 싶었지만, 괜한 시비가 또 걸리는 건 질색이었다.

내가 무슨 희대의 살인마도 아니고.

대량 학살은 하루에 한 번이면 족하다.

자칫해서 구아타비타의 나르코와 시비가 걸리면 똑같은 일이 반복될 테니...

일단 어떻게든 상황은 수습하고 가야지.

정 안 되면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보고타 시내 경계에 들어서니...

소총을 든 이들이 날 막아섰다.

소총만 있는 게 아니었다.

뒤쪽에서 RPG같은 대전차화기까지 차를 겨누고 있었다.

대체 이 동네는 뭐 하는 동네야?

나와서 모습을 드러내자, 길을 막았던 놈들이 당황했다.

그들의 지휘관쯤으로 보이는 이가 뒤쪽에서 나타나 내게 물었다.

"... 그건 디에고의 차인데. 디에고 몬테로는 어디에 있나?"

아, 이 차를 알아보고 세우려고 한 거였구나.

하긴, 자기 구역에 다른 구역의 보스 차가 들어오면 경계할 만도 하지.

"그와는 무슨 관계지?"

"원수다."

역시 원교근공.

나르코들끼리도 사이가 극과 극이라더니, 보고타 시내의 나르코와 약간 교외의 나르코인 디에고 몬테로의 사이는 험악한 모양이었다.

"댁들 원수, 내가 해결해 준 거 같은데."

"...!"

"그쯤이면 당신들 이름은 들을 만하지 않을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당신은 내 부모의 원수를 갚은 은인이다."

남자의 손짓에, 내게 총을 겨눈 이들이 총을 내렸다.

대전차화기 역시도 거두었다.

그가 내게로 다가와서는 손을 건네며 악수를 청했다.

"라울 마르케스다."

"김세균이야."

"당신이?!"

이제는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까지 알아보는 건가.

유명해지는 것도 피곤하다니까.

"그 차는 디에고 몬테로가 가장 아끼는 차 중 하나다. 그걸 타고 왔다는 건..."

"이제 디에고 몬테로인가 뭔가 하는 놈은 세상에 없어. 그의 조직도 마찬가지고."

"맙소사. 당신이 아무리 강한 헌터라고 해도 여긴 콜롬비아다. 카르텔이 두렵지도 않나? 카르텔의 암살자 가운데는 높은 레벨의 인물들도 존재한다."

"그러는 당신은 카르텔 아냐?"

왜 본인은 아닌 것처럼...

"오해한 모양이군. 나는 보고타 자경단을 이끄는 사람이다."

"자경단이라고?"

"우린 마약을 거래하지 않아. 우리 수입원은 오직 던전 공략으로 얻어지는 부산물이다. 우리는 콜롬비아가 더는 마약을 재배하지 않더라도 던전 공략 부산물만으로도 충분히 경제 성장을 일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허."

콜롬비아에도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있긴 있구만.

그랬다.

각성 전 시대라면 몰라도, 각성 후 시대였다.

인구도 받쳐주는 콜롬비아는 굳이 마약 사업을 벌이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었다.

오히려 마약 같은 음성적 분야의 산업보다도 훨씬 더 성장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계속해서 마약 산업이 이어지는 이유는 뭐 하나겠지.

관성이다.

계속해서 마약으로 이끌어져 왔던 국가였기에, 계속 그렇게 이어지는 거다.

누가 악순환의 사슬고리를 끊을 수가 없으니, 그렇게 계속 말이다.

뒤에서 잠자코 우리 이야기를 듣던... 듣던?

아,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통역 목걸이가 없지.

멀뚱히 우리를 바라보던 중, 최강 선배가 나서서 투박한 영어로 물었다.

"내가 아는 라울 마르케스가 있는데. 자네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늙었을 거야."

"... 그쪽 분은 아이언월 선생님이십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허리까지 꾸벅 숙이면서 그가 극상의 예를 표했다.

"제 풀네임은 라울 마르케스 후니오르(Junior)입니다. 아시는 분은 작고한 부친이실 겁니다. 생전에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무식한 놈이라고 욕이나 했겠지. 그나저나 죽었다고? 라울이?"

"예, 십 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허. 돈 많이 벌어서 고향에 돌아가서 행복하게 살겠다고 한 친구였는데."

"그 돈이 탐욕스러운 자들을 이끄는 독이 되었지요. 디에고 몬테로, 그 작자가 돈을 노리고 저희 부친을 살해했습니다."

최강 선배와 함께 던전을 공략하던 사람이었으면 분명 범상치 않은 능력이 있었을 텐데도, 카르텔의 손에 속수무책으로 죽은 모양이다.

"디에고인지 뭔지는 이 친구가 처리했으니 걱정 말게나."

"... 정말이었군요."

뭐야, 내 말은 못 믿었다는 거냐?

"감사합니다. 김세균 헌터."

떨리는 목소리로 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받을 일을 한 게 없습니다."

"아닙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들어드리겠습니다."

뭐든? 그거 쉽게 할 말 아닌데.

그래도 말이나 꺼내 볼까.

"사실 우리가 여기 온 목적은 구아타비타 호수의 33단계 게이트를 클리어하기 위함입니다."

"구아타비타라면, 가르시아의 영역이군요. 알겠습니다."

"... 이렇게 쉽게요?"

"쉽지는 않습니다만... 말씀하신대로라면 디에고 몬테로의 세력이 무너졌다는 건데... 아마 그 세력을 흡수하는 데도 바쁠 겁니다. 그 기간 중에 우리랑 각을 세우고 싶지 않을 거예요."

"라울 가르시아가 디에고 몬테로랑 친했다던데?"

"예, 친했지요."

"친구를 죽인 저를 순순히 보내줄 거 같습니까?"

"친구요? 나르코 놈들에게 친구란 없습니다. 비즈니스 파트너일 뿐이죠. 친구가 죽으면 복수를 하지만, 비즈니스 파트너가 죽으면 장례식장에 꽃이나 하나 던지고 오면 끝인 법이죠."

피식 웃으며 시니컬하게 말하는 마르케스.

"하루만 시간을 주시죠. 내일까지 가르시아 놈에게서 답을 받아 올 테니."

그의 호언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제발, 던전 클리어 좀 하자.

클리어 해준다니까!

입장부터 이렇게 빡센 던전은 여기가 처음이다!

**

디에고 몬테로가 지배하는 지역에 있던 사람들은, 뭔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걸 느꼈다.

언제나 그렇듯 그들을 감시하는 눈길이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 듯한 느낌.

잔챙이인 하위 마약 거래상 그룹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들도 그 어떤 접선과도 연락이 닿질 않아서 당황하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보고타 자경단의 깃발을 단 무리가 진격해 들어왔다.

심지어 디에고 몬테로의 저택까지도 들어가서, 그대로 점령해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함을 감지한 라울 가르시아도 디에고 몬테로의 지역에 도달했지만, 이미 휘날리고 있는 보고타 자경단의 깃발을 보고는 헛웃음만 흘렸다.

"감히, 우리 카르텔의 지역에서... 겁대가리를 상실했군."

보고타, 그것도 낙후 지역에서 골목대장 놀이하는 것까진 용납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는 보고타 밖이다.

심지어 디에고 몬테로와 싸웠다면... 아마 전력의 손해도 극심할 터.

디에고의 죽음은 조금 안타깝긴 했지만...

그래도 이번 기회에 권역을 확장할 수 있다면야.

히죽 웃던 가르시아의 앞에, 천천히 몬테로의 저택이었던 곳에서 걸어 나오는 일단의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너무 멀쩡했다.

어디 다치거나 한 것도 없이.

지극히 멀쩡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것도 수백 명에 달하는 인원이, 완전 무장한 채로 말이다.

가르시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지다 못해 창백해졌다.

어떻게...

이길 수 없다.

디에고 몬테로를 상대하고도 남은 보고타 자경단의 세력이 저 정도라면, 카르텔 본단의 힘을 빌려야만 했다.

바로 그 때였다.

세차게 울리는 가르시아의 휴대폰.

발신자는...

"돈 세뇰!"

Don Senor.

존경하는 주인이라는 의미의 별명.

이런 거창한 별명을 지닌 이는 콜롬비아 마약계에 한 명뿐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잔혹하다는 메데인 카르텔 본단의 수장.

알레한드로 모랄레스가 별명의 주인이다.

그의 전화를 받은 가르시아가 의기양양해졌다.

당장에라도 본단의 지원을 받아 저 자경단을 싹 쓸어버리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가 무섭게.

─지금 당장 물러나도록.

짜게 식는 존경하는 보스의 한마디.

가르시아는, 감히 그의 명령에 대꾸했다.

"돈 세뇰! 그게 무슨... 안 됩니다!"

감히 그가 의심을 품기가 무섭게.

푸화아아악!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격통과 뿜어져 나오는 선혈.

"어, 어떻..."

 

그의 옆에 언제나처럼 서 있던 2인자가 그의 목에 어느새 꺼낸 단검을 찔러 넣은 것이었다.

"돈 세뇰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그러면서 그가 떨어트린 전화기를 주워 받는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아, 그리고...

지방 나르코 조직의 2인자까지도 철저하게 손안에 넣고 있는 콜롬비아의 절대자.

그가 한참 망설이다가, 작은 한숨과 함께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김세균이라는 헌터의 공략 편의를 최대한 봐주도록.

"예? 아, 알겠습니다!"

이런 유사시의 나르코들의 반발을 통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돈 세뇰에 의해 심어져 있던 그의 심복.

그런 그마저도 이해하기 힘든 명령에, 순간 당황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돈 세뇰을 향한 절대적인 충성심은 살아 있었으나...

살짝 떨리는, 체념한 듯한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돈 세뇰께서... 겁먹으셨다고?'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불경한 생각만큼은, 어떻게 참을 길이 없었다.

무제한의 세균술사 70화

#아르스 마그나(3)

#아르스 마그나(3)

콜롬비아의 마약 업계 절대자. 돈 세뇰.

그의 많은 뒷배 중 하나가 세계 정점의 한 헌터라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아마 알려진다면 엄청난 충격이 되리라.

정의로운 이미지의 성기사가 대중들에게의 그 헌터의 이미지였으니까.

다행히 자주 연락을 나누는 사이는 아니었다.

돈 세뇰도 그런 구역질 나는 위선자와 굳이 자주 연락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실로 오랜만에 그 남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잘 지냈나?

"아까까진 잘 지냈는데 말이오. 갑자기 어쩐 일이신지?"

─부탁이 하나 있다네.

그의 부탁은, 콜롬비아에 곧 입국하는 어떤 헌터의 발을 붙잡아달라는 것.

"어렵지 않지."

그때만 해도, 전혀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운 좋게도 그를 따르는 나르코 중 하나의 저택에 갔다고 듣자, 생각은 확신이 되었다.

그런데...

"마, 맙소사."

각 나르코들의 저택에 설치된 CCTV 정도는 해킹해서 확보해 둔 돈 세뇰이었다.

물론 나르코들은 모르는 일이었다.

당연했다. 그래야 유사시에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더라도 제압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CCTV로 확인한 영상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 이런 게 인간의 힘으로 가당키나 한 건가?"

헛웃음과 함께 중얼거리는 돈 세뇰.

CCTV를 확인할 수 있는 건 돈 세뇰 본인뿐이기에, 다른 누구도 보지 못했다.

그로서는 답답할 노릇이었지만, CCTV를 공개하게 되면 그가 나르코들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퍼져 나갈 수도 있기 때문에, 공개할 수도 없었다.

"여전히 카이저 그 작자의 지시는 유효하지만..."

발목을 붙잡으라는 카이저의 요청 아닌 지시는 여전히 유효했다.

하지만...

"두렵군."

카이저에게서 느끼는 게 위압이라면.

모든 걸 집어삼켜 분해해버리는 저 미지의 존재 앞에서는...

그는 압도적인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

우여곡절 끝에 결국 구아타비타 호수에 도착했다.

이곳이 그 유명한 '엘도라도'의 전설이 깃든 호수라 이거지?

여기서 고대의 한 부족이 족장의 권위를 위해 호수의 신에게 정기적으로 보물을 던졌다는 전설이 있었다.

실제로 호수의 물을 빼고 조사해보면 밑바닥에 꽤 많은 보물이 가라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서 거짓 소문은 아니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물을 빼고 조사할 때마다 사고가 터져서 대량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기로 유명했다.

혹자는 '보물의 저주'라고 부를 정도.

이곳의 33단계 게이트는, 그 보물의 저주가 구현된 듯한 던전이었다.

[33단계 게이트, '거짓된 황금의 제국'에 입장합니다.]

미안하지만 레벨이 안 맞는 최강 선배는 밖에 두고.

나랑 규선 씨가 게이트 안에 입장했다.

게이트에 입장하자 보이는 건...

"와아아아...."

"와... 미친..."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보면 더 어마어마한 황금성.

통짜 황금으로 이루어진 피라미드 형태의 성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일단 저곳에 도달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 거 같아요."

기믹은 명확했다.

황금성에서 계속해서 쏟아지는 웨이브를 뚫고서, 황금성에 도달하기만 하면 됐다.

보통은 웨이브를 방어하는 게 기믹이라면, 여기는 웨이브를 아예 돌파해야 하니...

역웨이브 던전이라고 해야 하나?

"딱 봐도 멀어 뵈는데."

그래도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도 있으니까...

"가볼까요?"

"네!"

내가 앞장서며 성큼 걷자, 규선 씨도 내 뒤에 착 달라붙은 채로 걷고 있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종종걸음으로 우릴 따르는 아테나에게도 말했다.

"난 희생의 번제를 켜고 있으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규선 씨를 최우선으로 보호해줘."

"네, 알겠습니다."

그런 아테나를, 번쩍 안아 드는 규선.

"아이 귀여워라. 네가 날 지켜준다는 거지?"

아테나를 향한 규선의 관심은 꾸준했다.

애초에 혈금이라는 미지의 금속 자체가 연금술사로서 관심이 가는 부분이기도 했고.

일단 지금 모습은 귀여우니까.

여자들은 귀여운 거에 약하다.

물론, 아테나 본인에게는 당황스러운지, 나를 계속 바라보았지만... 애써 시선을 돌렸다.

접대 잘하려무나...

이제 초월급 연금술사가 되실 귀하신 몸이란다...

그렇게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니, 앞에 황금빛의 전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들고 있는 건 화려한 금 장식의 대검.

이 시점에서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할 거다.

화려한 금으로 장식한 웨이브가 계속 나오면... 개꿀 아니냐고.

거기서 나오는 금만 가져다 팔아도 되는 거 아니겠냐고.

애석하게도, 이 게이트의 이름이 괜히 거짓된 황금의 제국이 아니다.

"세상에. 저 개체 하나하나가 위금(僞金)의 술로 제작된 거예요. 대체 저 성에는 무슨 연금술사가 있는 거지?"

납과 같은 금속에, 일시적으로 금(金)의 속성을 부여하는 연금술의 초월급 스킬이란다.

당연히 파괴되면 그냥 잡금속이다.

거짓된 황금... 맞네.

"아예 파괴하진 말고 샘플을 좀 남겨주실 수 있을까요?"

"분부대로 합지요, 니예니예."

어려운 것도 아닌데 뭐.

가볍게 동작부를 글러트니로 분해해 버리자, 팔다리만 남아 떨어졌다.

그러자 위금의 술로 일시적으로 변했던 조성이 순식간에 본래 형태로 돌아갔다.

그 작용을 확인한 규선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스를 더 보면 조금 더 익숙해질 거 같아요."

"... 네, 얼마든지 하죠."

황금성까지 길은 멀고, 웨이브는 많으니까.

성큼성큼 걸음을 걸으면서, 개체들은 생성되기가 무섭게 분해했다.

조금 미안한데?

그런데...

"헐."

"뭐, 왜, 뭐. 무슨 일 있어요?"

"조성이 조금씩 바뀌고 있어요."

"어?"

"... 조금 더 경화되고 있다고 해야 하나? 금은 금인데, 금이 아닌 거 같은 물질로 조금 변했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잠시 고민하더니, 규선 씨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말했다.

"공격에... 적응하고 있는 거 같아요."

"헐?"

"그런데, 공격이 너무 강력하다 보니까. 쉽사리 적응하지는 못하고 있어요."

그제야 생각났다.

이 게이트의 공략 후기에 있던 내용.

"웨이브가 지속될수록, 점차 내 공격이 무뎌지는 느낌이었다고 했던가."

그게, 지쳐서 무뎌지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 공격에 적응하여 강해지는 거라면?

그렇게 수십 개의 웨이브를 더 지나쳤다.

이제 황금성은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확실히 처음보다는..."

"분해 속도가 느리죠? 금속 조성이 세균군 공격에 적응하고 있는 거예요."

뭐 느리다고 해도... 0.1초가 1초 남짓이 된 정도였지만 말이지.

하품이 날 정도로 수월하게 뚫고서 황금성에 도착했을 때.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황금성이 당신의 공격에 완벽히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승리입니다.]

[황금성주를 알현할 자격을 얻습니다.]

클리어는 아닌가.

1페이즈 기믹을 클리어한 모양이다.

"오. 황금성주를 알현할 수 있대요."

"저도요. 그리고 저는 다른 보상도 받았어요."

"어떤 보상요?"

" '위금술' 스킬이랑 '위금술(僞金術) 응용편 ─ 적응형 장갑 제작법' 이요."

확실히 여기가 연금술사의 성지이긴 성지인 모양이다.

나는 클리어해도 쥐뿔도 없는데, 연금술사는 초월급 스킬도 척척 보상으로 받는 걸 보면 말이다.

이윽고 성문이 열리며, 대전으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천천히 걸어 대전에 도착하니, 황금 권좌에 앉은 한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앉아 있는 모습.

우리가 대전 가운데에 도착한 순간.

쾅! 큰 소리와 함께 열려 있던, 우리가 들어온 문이 쾅 닫혔다.

... 함정인가?

잠깐 당황하면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을 때.

황금성주로 추정되는 노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윽고 그의 입이 천천히 열리며, 대전 전체에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연금술사는 홀로 설 수 없는 존재. 위대한 연금술사의 곁에는 항상 위대한 보호자가 함께한다. 연금술사의 보호자여, 그대는 이미 힘을 입증하였도다.

어, 음... 그렇죠?

─하지만, 힘이 모든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 법. 나는 여기서 그대가 어떤 이인지 확인하겠노라.

확인?

─그대는 세상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작은 것들을 지배하는 지배자로구나. 거기에 더불어, 신이 사랑하는 주조의 능력도 갖추었다.

... 어떻게 알았지?

─그대는 연금술사가 한계에 봉착하였을 때, 그의 지평을 깨 줄 위대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고로 판정을 내리겠노라.

['자격의 시험 ─ 연금술사의 보호자'를 통과하셨습니다.]

[당신의 클래스가 연금술사와 아득히 높은 상승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으로 판정되었습니다!]

[전설적인 업적! 당신의 클래스가 연금술사를 보조하기에 매우 적합합니다.] 

[보상으로 칭호, '전설적인 연금술사의 보호자'를 획득하셨습니다.]

[칭호, '전설적인 연금술사의 보호자'의 효과로, 토글형 스킬, '경험의 공유'를 습득합니다.]

[경험의 공유] [OFF]

설명 : 대부분의 위대한 업적은 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험을 공유하여 서로 더 나은 곳으로 올라설 수 있다.

내용 : 습득 경험치의 50%를 당신과 연결된 대상(임규선)과 공유합니다. 언제든 스킬을 사용하여 경험치 공유 여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 오, 이거 좋은데?

가뜩이나 레벨 컨트롤 하느라 힘든데...

나는 레벨 컨트롤이 쉬워지고, 규선 씨는 올리기 힘든 레벨을 올릴 수 있을 거다.

바로 ON으로 바꿨다.

─연금술사여, 그대는 좋은 보호자를 두었구나. 시험을 통과하였노라.

나는 뭐 한참 말이 많더니, 규선 씨는 한 번에 통과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과업을 내겠노라.

그 말과 거의 동시에.

우르르르릉!

땅 울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 불길한데.

그리고 항상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가 않더라고.

[성이 곧 붕괴합니다!]

[생존하십시오.]

뭐, 이 정도야 예상한 바다.

"저, 이건..."

"일단 업히세요!"

일단 규선 씨를 들쳐업었다.

아테나는 반지 상태로 되돌리고...

"튀어!"

[순례자의 발걸음 효과가 최대로 적용됩니다.]

던전 입구를 향하기만 하면 1000%.

직선형 구조로 성까지 오는 구조였으니까...

무너지는 상에서 빠져나가는 건 내 느린 이동속도로도 순식간이다.

내 발걸음이 아무리 느려도 1000%나 보정을 받으면 말보다도 빠를 테니까.

 

"휴우."

한참 뛰어오다 보니, 뒤에서 피어오른 흙먼지도 잦아들었다.

그런데... 왜 클리어 판정이 안 뜨지?

"... 아마도 마지막 붕괴는 제가 막았어야 했던 거 같아요."

"예?"

"임무에 위금술을 활용하여 보호자와 자신을 위협으로부터 구하라고 되어 있거든요."

커헉.

그, 그러니까.

내가 트롤짓을 한 거야?

"뭐, 다행히도..."

그녀가 가볍게 굴러다니는 돌맹이 하나에 위금술 스킬을 사용하자, 돌맹이가 황금빛의 금으로 변했다.

일시적인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기하다니까.

[임규선님이 위금술을 사용하여 보호자와 자신을 위협으로부터 구하셨습니다.]

['자격의 시험 ─ 때로는 연금술사도 누군가를 보호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을 통과하였습니다.]

아니... 선후관계가 다르잖아...?

위금술을 써서 위협으로부터 구한 게 아니라, 위협에서 구해지고 나서 위금술을 쓴 거 아냐?

이레도 되는 거 맞아?

"... 어떻게 된 게, 꼼수로 깬 거 같은 느낌인데요."

극히 동감이었다.

그렇게 엄청난 찝찝함을 남긴 채...

[당신은 33단계 게이트, '거짓된 황금의 제국'을 최초로 토벌하셨습니다.]

[최초 클리어 보상으로, 최대 마나가 일부 상승하였습니다.]

우리는 최초 클리어 보상을 안고서 빛무리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무제한의 세균술사 71화

#구호(1)

#구호(1)

다행히도 꼼수 클리어에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나 보다.

퀘스트를 완료해서 초월 스킬을 받았다고 좋아하는 규선 씨.

휴, 어쨌든 다 됐다니 다행이다.

일단 이 망할 동네부터 나가야지.

어지간해서는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동네다.

던전에서 나오니...

"... 뭐 하세요?"

"보면 모르나? 운동하지!"

어디서 주워 왔는지, 거대한 암석을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하며 근력 운동 중인 최강 선배.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가벼우시죠?"

"그렇지, 이 정도는 너무 가볍지."

"무겁게 해 드릴까요?"

"오오! 그렇게 해줄 수 있겠나?"

이건 또 뭔 소리지.

웃으며 최강 선배가 내려놓은 암석에 다가간 규선 씨가.

그걸 짚더니 나직이 입을 열었다.

"발동, 위금술."

이어, 암석 덩어리가 백색의 광물질로 경화되며 변하기 시작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 빙그레 웃으며 퉁퉁 두드렸다.

"완성됐어요."

"허."

자신 있게 다가가 암석 덩어리를 들어보려던 최강 선배의 안색이 살짝 미묘하게 변했다.

"끄으으응!"

이번에는 마나까지 더해서.

그대로 금속 덩어리가 된 암석을 들어 올렸다.

힘겹게 몇 차례 금속을 든 채로 스쿼트를 마친 최강 선배가, 헉헉대며 땅에 주저앉았다.

"... 이게 대체 얼마나 무거워진 거지?"

"암석의 밀도가 세제곱센티미터당 2.5에서 3.0g 정도 되는데, 제가 암석을 오스뮴-이리듐 합금의 조성 구조로 바꿔놨으니까요."

"한국말로 해주겠나..."

"금의 밀도가 19g/cm^3 정도, 납의 밀도가 11g 정도, 강철의 밀도가 8g에요. 반면에 이 오스뮴-이리듐 합금은 자연계에서 가장 밀도가 높은 물질 중 하나죠. 대충 22.5g 정도 될 거예요. 암석에 비하면 같은 부피당 무게가 9배 정도 늘어난 셈이죠."

"... 헬스장 바벨보다는 훨씬 무겁더라니."

강철의 밀도가 8g가 채 안 되니까. 같은 부피의 바벨 대비 3배의 무게를 자랑하는...

미친 슈퍼 웨이트 트레이닝용 금속이 탄생한 거다.

최강 선배도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의 입가에 환희의 미소가 가득 찼다.

"고맙네! 고마워!"

그 솥뚜껑 같은 손으로 규선 씨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더니...

다시 암석... 아니, 미친 금속이 된 덩어리로 가서 트레이닝을 시작한다.

"자극이 온다... 온다아...! 끄오오오!"

안 볼란다. 내는 안 볼란다.

저 참상을 만들어놓은 규선 씨는 그저 흐뭇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위금술이 금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정확히는 물체의 조성을 바꾸는 능력이에요. 최초의 접근은 금을 만들려던 게 맞지만, 결과적으로 금을 만들 수 있다면 다른 금속도 만들 수 있다는 개념이 되었달까요."

설득력이... 있네.

하긴 금도 만드는데 다른 금속은 못 만들 건 뭐야?

"효과 지속은요? 영구적으로 유지하진 못하겠죠?"

"아무래도요? 일단 흉내 내는 정도에 불과하니까요. 신이 아닌 이상 아예 물질 자체를 바꿀 수는 없죠. 그래도 꽤 오랜 시간 유지할 수 있어요. 아, 물론 세균 씨의 '글러트니'는 예외에요."

신 속성은 무적이라니까요. 라는 등의 말로 궁시렁거리는 규선 씨.

음, 그러고 보니 내 공격에 당한 황금성의 골렘 같은 존재들은 전부 위금술이 풀려버렸지.

이제 그러면...

새로 얻은 위금술 스킬 시연도 끝났으니.

"그쯤하고 갑시다!"

"한 세트만 더! 으라차차!"

... 저 양반 저거, 한동안 밀도 3배짜리의 슈퍼 바벨을 만들어달라고 조르게 생겼네.

**

김세균이 콜롬비아에서 드잡이질을 벌이는 동안.

미국의 정세는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워싱턴 D.C, 상원 청문회장.

배석한 FBI 국장을 향해 청문 위원들의 폭격이 쏟아지고 있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모두가 FBI 국장을 규탄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뉴욕 한복판이오! 월가란 말입니다! 거기서 테러라니! 사전 첩보가 입수된 게 없었습니까? CIA나 NSA와의 공조가 없었어요?"

"... 죄송합니다."

FBI 국장이 할 수 있는 말은 죄송하다는 말 하나밖에 없었다.

국내 방첩 분야의 총책임자니만큼, 그의 책임이 맞았으니까.

억울한 면은 있어도, 일단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청문회에서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여야 의원들에게 맹폭당한 뒤에 창백해진 안색으로 밖으로 나온 FBI 국장 엘리자베스 카터.

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부국장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청문회에서 왜 당하고만 계십니까!"

"... 뭐, 말할 게 없잖아."

"그게 있잖습니까! 그게!"

말하면서도 흘끗 주변의 눈치를 보는 FBI 부국장.

그가 한껏 톤을 낮추어서, 작게 속삭이다시피 말한다.

"... 암살자의 흔적이 마지막으로 발견된 게 카이저의 전용기라는 걸요!"

그의 말에, 카터 국장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미국 전체랑 싸울 일 있냐?"

"하지만..."

"싸우고 싶으면 너나 싸워. 그냥 상원에서 욕 몇 번 들어먹고 마는 게 맞아. 저 상원 노인네들은 몰라서 저러는 거 같아?"

"설마..."

"세 살 어린애도 알아. 수사의 기본 아니야?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을 의심하라는 거. 중동 암살자가 굳이 월가까지 와서, 카이저 코퍼레이션의 경영권을 노리던 이들만 쏙쏙 뽑아서 암살하고 갔다고? 야, 카이저 본인도 알겠다."

부국장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 말은."

"경고지. 감히 나를 등지면, 각종 수단을 통해서 너희를 응징할 능력이 있다는 걸 과시하기 위한 경고."

"이게 정말 맞는 겁니까?"

"아니면 어쩔 건데. 뭐, 카이저를 법정에 세워서 댁이 중동 테러조직이랑 짜고 방해되는 인간들을 싹 중동 암살자 소행으로 퉁쳐서 죽였죠? 이렇게 물어봐?"

"... 설마 그랬을까요?"

"그랬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지. 첩보에 따르면 암살교단의 수장이 예전에 카이저랑 같이 던전도 뛰었던 헌터라니까."

이를 악물고 있는 부국장.

카터 국장은, 그런 부국장을 향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분하냐?"

"... 분합니다."

"분하다고 바위에 계란 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어?"

카터 국장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은 채 창밖을 향했다.

"비단 암살 교사 하나뿐이겠냐. 전쟁 범죄도 있고... 한둘이 아니지."

정의로운 카이저의 모습을 기억하던 엘리자베스 카터라는 소녀는 더는 없다.

타락해버린 영웅의 모습에 환멸을 느껴버린 어른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언젠가는 찾아올 거다. 그를 법정에 올릴 날이. 그 전에 죽을 수는 없지."

**

미국의 정세가 한 사람의 존재로 인해 이렇듯 불안정했다면...

서유럽, 특히 프랑스의 정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아흐마드 트리아인, 70레벨 달성!]

[과연 그는 언더 세븐티의 시대를 깰 것인가?]

아흐마드 트리아인이 정부의 만류를 뿌리치고 70레벨에 올랐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의 13개 권역(레지옹) 중 총 4개에 새로운 70레벨 게이트가 생기면서 평정 효과가 사라졌다.

있던 평정이 없어진 거니 프랑스의 던전 경제에 엄청난 타격.

다행인 것은, 그나마 최근에 세균이 평정한 누벨아키텐 지역 덕분에 비평정 상태의 권역이 하나 줄었다는 정도였다.

그리고, 70레벨을 달성하자마자 아흐마드 트리아인이 향한 곳은...

파리가 위치한 레지옹이자 그의 고향이자 집이기도 한...

일 드 프랑스 레지옹의 70단계 게이트였다.

"푸하하하! 위치 한 번 기가 막히네."

에펠탑.

게이트는 에펠탑 바로 밑에 형성되어 있었다.

한바탕 웃으며 에펠탑을 잡아먹을 듯 일렁거리는 70단계 게이트를 보던 아흐마드가 천천히 그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정확히 두 시간 뒤.

기자들이 가득한 에펠탑 게이트 밖으로 나온 아흐마드.

사람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빛무리가 없으니, 그리고 평정 판정 메시지가 없으니...

클리어하지 못했다는 거였다.

"하하, 카이저 그 노인네가 사기 친 건 아니었네."

아흐마드 트리아인은 솔직히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어쩌면, 70단계 게이트는 카이저의 블러핑이 아닐까?

카이저 정도면 깰 수 있는데, 언더 세븐티의 구도를 확고히 하려고 일부러 역정보를 푸는 거다.

그런 생각이었다.

그런데...

실제 70단계 게이트에 입장해 본 소감은.

"카이저 그 노인네가 숨긴 게 없진 않았군."

70단계 게이트는.

카이저가 표현했던 것보다도 훨씬... 최악이었다.

그런 아흐마드 트리아인의 뒤로, 반파 상태의 언데드들이 속속들이 게이트에서 방출되어 툭툭 떨어졌다.

그중에는...

무려 100조 원 이상의 제작비용을 자랑하는 초월급 데스나이트도 있었다.

그것들을 역소환해서 수습하는 아흐마드에게, 에펠탑 앞, 트로카데로 광장을 가득 메운 기자들 중 한 명이 질문을 던졌다.

"트리아인 씨! 70단계 게이트의 공략 성공 확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기?"

잠시 고민한 끝에 그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는.

"못 깨. 여기."

프랑스의 뭇 시민들을 절망에 빠트렸다.

비단 프랑스뿐만이 아니라, 70단계에 도전하려던 헌터들에게도 절망으로 다가왔다.

"그, 그러면..."

"혼자서는. 못 깰 거 같네. 애초에 그렇게 구성해놨네. 엿같게 말이지."

"... 혹시 카이저와 손잡고..."

"내가 머리에 총 맞았냐? 그 재수없는 영감이랑 손을 잡게? 우리 브라더 있잖어, 브라더!"

"김세균 헌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걔 정도는 있어야 어떻게... 시작이라도 해보겠는데?"

다시 한번, 김세균의 주가가 세계적으로 폭등하는 순간이었다.

"그럼 나는 바빠서 이만. 한국에 가야 하거든."

"한국은... 왜..."

"왜겠어? 언데드들이 다 작살났으니까. 그렇지."

그에게도 신관 언데드가 있긴 했지만, 한 기와 19기는 수복 속도에서 차원이 다를 터였다.

돈 좀 쓰더라도, 고쳐 오는 게 속 편한 일이었다.

대한민국 국영 언데드 수리소에...

어마어마한 손님이 찾을 예정이었다.

**

"뭐요?"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이런 날벼락이 있나.

한국에 아흐마드가 들어왔단다.

별로 얼굴 마주해서 좋을 게 없는 양반이니까...

"기장님, 경로 바꿔도 되겠죠?"

"네,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전용기라 이게 좋단 말이지.

어차피 지구 반대편인 남미에서 돌아가려면 한 번 어디건 기착해서 급유도 받아야 했다.

"굳이 태평양 쪽으로 안 가도 된다고 했죠?"

"네, 남미가 한국 기준으로 지구 반대편인지라... 대서양 거쳐서 유럽 쪽으로 돌아도 거리상 큰 차이는 없습니다. 대서양 쪽으로 갈까요?"

어차피 에클레어라는 전용기 때문에 순식간에 휙휙 오다니는 아흐마드지만, 에클레어도 무적은 아니었다.

한 번 공간 단축 기능을 활용하면, 24시간 동안은 사용할 수 없는 걸로 알았다.

거기에 언데드 수리를 위해 한국으로 왔다니까, 그걸 수리받는 동안에도 딱히 움직이진 않을 테고.

그러니까... 아흐마드 없는 유럽이란 거지.

"그럼 프랑스로 가죠. 보르도에서 오랜만에 페트뤼스 양조장도 좀 들려야겠어요."

페트뤼스 양조장은 내게서 엄청난 감명을 받은 이후로, 최근에 완전히 실험적인 와인들을 계속해서 내놓고 있다고 들었다.

전통으로 유명한 보르도에서 그런 파격은 '감히'라는 소리를 듣기에 충분할 정도였지만, 도전 정신을 좋게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페트뤼스 양조장을 들러야 하는 이유는...

─올 때 메로... 아니 와인.

─천상 드세요, 몸에도 좋다니까.

─얌마, 아무리 좋은 것도 계속 마시면 질린다고. 페트뤼스에서 네게만 대접한다고 안 내놓고 쟁여두고 있는 실험작들 몇 개 있다니까 가서 가져와.

─저한테 대접하는 거라면서요?

─넌 술 별로 안 좋아하잖아? 좋아하는 사람이 마셔줘야지.

... 유럽 쪽을 들른다니 벌써부터 심부름부터 시키시는 술꾼 한 분이 계시기 때문이었다.

급유도 할겸, 겸사겸사 보르도 공항에 착륙해서 페트뤼스 양조장에서 술도 챙기고, 다시 이륙했다.

그런데, 이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종석에서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무슨 일이죠?"

"HHH 신호가 비상 주파수로 계속 발신 중입니다."

"HHH?"

"국제 헌터 협회 공인 코드입니다. 해당 지역의 협회에서 주변의 모든 헌터들을 소집하는 소집령 같은 겁니다."

"SOS 같은 건가요?"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탈리아 협회에서 발신했군요."

"... 우린 지나가는 중인데 응해야 하나요?"

"권고사항이지 의무는 아닙니다."

"아니, 그나저나 왜 갑자기 소집이야?"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뒤에서 들려왔다.

"아마 이것 때문인 거 같은데요?"

그러면서 그녀가 건넨 휴대폰을 확인했을 때...

"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메시나 해협 인근 규모 8.0 강진 발생. (1보)]

갑자기 지진이라고?

하필 내가 지나갈 때?

동시에... 내 휴대폰도 요란하게 울렸다.

국제 헌터 협회 앱이었다.

[지진 구호 인력 지정 요청 (헌터 김세균) : 2,000,000 Points]

지금까지는 쌓기만 하고 쓴 적은 없는 헌터 협회 포인트라 포인트는 사실상 큰 의미가 없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엄청나게 많은 포인트는 이야기가 다르다.

돈 주고도 못 사는 유물급 아이템을 구할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포인트가 아니었다.

이탈리아 헌터 협회에서...

나를 콕 찝어서 도와달라고 요청하고 있다는 게 문제지.

무제한의 세균술사 72화

#구호(2)

#구호(2)

"너무 위험한데. 조금 전 지진이 강타한 거면, 앞으로 수십 번의 여진은 이어질 거다."

"그렇겠죠?"

지금 내 스펙으로 지진 정도에 죽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해도...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지.

나 혼자라면 몰라도...

여기는 규선 씨도 있고, 최강 선배도 있고, 기장님, 부기장님도 있었다.

여러 명의 목숨을 나 혼자서 결정할 수는 없다.

그러니...

"그냥 지나..."

"... 너무 참혹해요."

뉴스로 펼쳐진 시칠리아의 모습은 그야말로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순간 나도 말이 떨어지질 않았다.

무너진 건물에 깔린 사람들로 가득한 도시.

도대체 어디서부터 구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상황에, 소방관들은 망연자실하게 있을 뿐이었다.

"세균 씨."

"..."

뒷말은 굳이 안 들어도 눈빛만 봐도 알 거 같다.

"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야 뭐... 설마 지진 따위에 죽겠어?"

... 하긴, 건물에 파묻혀도 건물로 스쿼트를 할 양반이지.

자극 온다고 좋아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기장님, 부기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 저희요?"

"어, 음..."

둘 모두 공군사관학교 출신의 엘리트 파일럿.

그들이 출신답게 냉철하게 판단을 내리기 시작했다.

"일단 지상 상황부터 관제탑을 통해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지상 상황요?"

"지진이 저렇게 강하게 때렸는데, 활주로라고 멀쩡하라는 법이 없지 않습니까."

"아!"

"저희야 활주로 상태만 멀쩡하면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뭐죠?"

"시칠리아는 메시나 해협을 사이에 두고 이탈리아 본토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메시나 해협에 지진이 발생했다는 건..."

설마...

"본토와 섬 모두에 피해가 발생했다는 뜻이겠군요."

"예, 어디 착륙할지부터 정해야 합니다. 본토가 더 시급하다면 칼라브리아 공항... 코드 REG에 내려야 하고, 시칠리아 쪽이 더 시급하면 카타니아 공항인 CTA에 내려야 합니다."

"그건 우리가 결정할 게 아니겠군요."

"예, 아마도 헌터 협회의 가이드를 받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앱의 수락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거의 동시에...

[지진 구호 인력 지정 요청 (헌터 김세균) : 4,000,000 Points]

... 내가 보상이 적어서 수락을 안 한다고 생각한 건가.

타이밍도 얄궂네.

보상에 미친놈쯤으로 보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작은 한숨을 내쉬고 수락을 눌렀다.

이윽고 바로 걸려 오는 전화.

"여보세요."

─김세균 헌터 되십니까? 저는 이탈리아 헌터 협회장 레오나르도 로마노입니다. 무례에 먼저 사과드립니다. 긴급 상황인지라, 마침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귀 헌터의 전용기가 이탈리아 상공에 있는 것을 보고서 요청을 보냈습니다.

"무례는요. 급한 상황이니 이해합니다."

─상황은 인지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네, 일단 어느 공항으로 착륙해야 할지 정해주셔야 할 거 같군요."

─칼라브리아 쪽은 그래도 피해가 수습 가능한 선입니다. 하지만 시칠리아 쪽이...

"그러면 카타니아 공항에 착륙하면 되는 겁니까?"

내 말을 들은 기장이 먼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CTA는 관제탑에서 착륙 불가 선언을 했습니다. 모든 활주로가 파손 상태라서 타 공항으로 우회하라고 하고 있어요."

"그렇다는데요?"

─그건 저희 쪽에서 해결하겠습니다. 1번 활주로 쪽으로 착륙하시면 됩니다.

해결한다고?

이게 또 무슨 소리...

"김 헌터님, 1번 활주로 반파 상태라고 관제탑에서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 그렇다는데요?"

─곧 괜찮아질 겁니다.

활주로가 곧 괜찮아진다라.

아마도...

"어? 1번 활주로 일시 복구 완료했답니다. 착륙 허가 떨어졌습니다."

"바로 가시죠."

누구인지 알 거 같다.

카타니아 공항은 1번 활주로를 제외한 나머지 공항 전체가 폭격이라도 맞은 듯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1번 활주로도 파괴되었던 게 분명했다.

단지 누군가의 손에 의해 최근에 회복되었을 뿐이다.

드문드문 끊어졌다가 어설프게 이어진 활주로의 모습이 그걸 증명했다.

그 누군가를,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볼 수 있었다.

"헌터 루치아. 처음 뵙겠습니다."

루치아 델라로사 비올레타.

이탈리아 남부에 사는 이 괴물 같은 정령사의 이름이다.

어떻게 아냐면... 내가 팬이었으니까.

뭐 제피로스 정도로 덕질하던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디서 활동하고, 얼마나 강한 능력이 있는지는 알았다.

"헌터 김세균. 제안을 수락해줘서 고마워요."

"활주로를 수복한 게..."

"맞아요. 접니다."

일반적인 정령사들은 보통 한두 개의 속성 정령.

잘 쳐줘봐야 4대 원소 정령 정도를 다룰 뿐이다.

하지만, 혜성처럼 10년 전쯤에 떠오른 이 헌터는... 무려 12종에 달하는 정령을 활용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단순히 다룰 수 있는 종류만 많았다면 이 정도의 유명세를 얻지는 못했을 터.

이탈리아 남부의 공략 불가 판정 게이트 세 곳을 클리어하면서 그 명성은 전설이 되었다.

그런 강력한 능력을 지닌 그녀가 남부 이탈리아를 떠나지 않는 이유는...

무려, 정령들이, 태어난 땅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지 않다고 해서였다.

그 탓에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다른 헌터들에 비해서 명성은 부족하지만...

적어도 남부 이탈리아라는 지역에서 그녀의 힘은 세계 최강을 다투기에 손색이 없는 정도다.

"헌터 김세균, 당신의 능력은 물질 분해죠?"

"뭐, 그런 셈이죠."

"사람들이 많이 매몰됐어요. 잔해를 분해해서 그들을 구해줄 수 있겠어요?"

"해봐야죠."

이런 걸 해봤어야 말이지.

괜히 잘못 들쑤시다가 아예 건물이 붕괴해서 멀쩡한 사람 잡을 수도 있다.

"세균 씨."

"네?"

"저는 여기서 포션을 만들게요."

"아!"

포션, 그것도 각성자와 비각성자를 가리지 않는 규선 씨 표 제조 포션이야말로 이 상황에 가장 필요한 거였다.

규선 씨는 내친김에 활주로 위에 바로 이동형 연금 제작대를 꺼내어 펼쳤다.

어차피 우리 비행기 말고 당분간 이 활주로에 착륙할 비행기도 없었다.

그 모습을 조금 황당하게 바라보던 루치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호, 혹시... 그 세계 최초로 포션 제작했다는 연금술사?"

"맞습니다. 응급용 포션을 만든다네요."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비용은 어떻게든 협의해서..."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죠. 일단 최대한 많이 살립시다. 규선 씨가 포션 만든 건 이탈리아 협회에 말해서 병원으로 보내세요."

"네!!"

결의에 찬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움켜쥐는 루치아.

"나는 뭐 할까?"

"규선 씨를 지켜주십쇼. 혹시 모르니..."

"알겠네."

최강 씨의 완력도 도움이 안 되진 않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규선 씨가 더 중요하다.

"그나저나 시내로는 어떻게 가죠? 도로가 다 끊겼을 텐데."

내 질문에 답이라도 하듯, 그녀가 거대하지만 흐릿한... 반투명 독수리 하나를 소환해서 올라탔다.

"뒤에 타세요!"

바람의 정령 같은 건가...

내가 올라타자, 순식간에 창공을 향해 날아가는 반투명 독수리.

떨어질까 봐 놀라서 루치아의 허리를 나도 모르게 붙들었다.

"괜찮아요. 떨어지지 않아요. 아이리스(Aeris)를 믿으세요."

"흠흠, 알겠습니다."

여기서 떨어지면 진짜 비명횡사일 거 같아서 그렇지.

희생의 번제가 낙하 데미지도 막아주려나?

그렇게 정령 독수리를 타고 도착한 카타니아 시내.

그곳에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펼쳐져 있었다.

화산석으로 지어진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들은 대부분이 무너져 있고, 그 건물 틈에 깔린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소리만이 사방에 울렸다.

그 순간.

꽈아아앙! 거대한 폭음에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니.

"실화냐..."

도시 북쪽에 위치한 에트나 화산이 대폭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워낙 최악이 계속 겹치니까 조금 멘탈이 나갈 것 같기는 한데...

일단 견적부터 내 보자.

화산은 누가 막고, 사람은 누가 구하는 게 나을까?

바로 답은 나왔다.

"루치아 씨가 도시에 용암이 흘러들어오는 걸 막아줘야 할 것 같습니다."

"하, 하지만 그러면..."

"도시의 사람들은 제가 맡죠."

여전히 망설이는 기색.

그녀에게 단호히 말했다.

"믿으세요."

"... 알겠어요. 부탁드릴게요."

그녀가 다시 독수리에 타서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서...

슬슬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후우.

오랜만에, 전력을 제대로 써야 할 거 같은데?

일단 전자기장에 민감한 반응성을 보이는 마그네토스피릴럼 마그네티컴을 건물 잔해 속으로 방출했다.

거기서 인간의 생체 전기와 비슷한 패턴을 찾으라고 명령을 내려놓으면...

"찾았다."

바로 앞에 무너져 있는 백화점 건물에서, 수백 명 정도의 반응이 포착되었다.

다음에는 글러트니가 나설 차례.

무너진 잔해를 순식간에 분해하고 길을 열어버린다.

갑자기 뻥 뚫려 버린 구멍에, 당연히 구조적으로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자리를, 시멘트와 같은 경화 물질을 형성하는 카울로박터 세멘투스가 메웠다.

마치 시멘트로 바르기라도 한 것처럼, 매끄럽게 굳어 버린 천장이 더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잔해를 뚫고서 안으로 들어갔을 때.

망연자실하게 휴대폰의 불빛에 의존하여 쭈그려앉아있던 사람들의 무리가 보였다.

"비, 빛... 빛이다아아아!"

"구조대다! 구조대가 왔어!"

뭐, 구조'대'는 아니고...

나 혼자이긴 합니다만.

"다들 괜찮으세요?"

"괘, 괜찮습니다! 괜찮은데..."

"이쪽 친구가 좀 다쳤어요. 떨어지는 잔해에 찢어진 거 같아요."

"좀 보죠."

힐러는 아니어도... 자상 정도는 전문이라고.

찢어진 상처에 카울로박터 크레센투스가 침투하여 접착 물질로 상처 자체를 봉합해버렸다.

소독이 필요하다고?

감히 내 앞에서 어떤 세균이 활개칠 수 있을까. 

세균 같은 건 글러트니가 이미 다 먹어버렸다.

파상풍 들을 유발할 수 있는 모든 박테리아가 순식간에 글러트니에게 먹혀 사멸했다.

순식간에 멎는 피를 보면서 다친 사람이 놀라 눈을 부릅떴다.

"어, 어떻게."

"어떻게 할 시간에 빨리 나가기나 해요."

댁들만 구해야 하는 게 아니라고.

카타니아의 인구는 30만이다.

30만이 전부 매몰되진 않았겠지만, 10%만 따져도 3만이다.

얼추 3만 명 정도는 구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렇게 대형 백화점에서 수백 명의 사람을 구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0분.

다행히, 피해자들이 무리를 지어서 모여 있던 게 컸다.

뒤늦게 내가 뚫어놓은 구멍으로 구급대원들이 나타났다.

그들에게 제 발로 걸어 나갈 수 없는 중상자들을 맡기고서, 바로 다음 건물로 향했다.

이거... 종일 해도 한참 걸리겠는데.

그러다 보면 살릴 사람도 죽게 될 거다.

어떻게, 방법이 없으려나?

생각하던 차에, 구급대원들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마어마한 속도다."

"역시 헌터...!"

"헌터도 그냥 헌터가 아냐... 현역 세계 최강 중 하나로 손꼽히는 사람이라고."

누군 더 빨리 못해서 답답한 판인데, 팔자 좋은 소리들 하는군.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왔을 때.

"어?"

땅이, 다시 흔들렸다.

누군가의 외침도 귓가를 강타했다.

"여진이다!!"

"엎드려! 다들 엎드려!"

파도처럼 출렁이는 땅에서도, 나는 멀쩡했다.

아예 신발 밑창이랑 지면을 접착시켜 놓은 탓이었다.

다만, 마음이 급해졌다.

불안정하던 건물들의 붕괴가 더 심해지는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1) Gluttony(글러트니)

─강화 효과 : 각 개체가 스킬, '포식 진화'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포식 진화]

─설명 : 흡사한 유전적 형질의 이종 미생물을 포식하여 그 형질을 일시적으로 흡수한다. 높은 확률로 원종보다 더 강력한 형질의 돌연변이를 일으킨다.

1호기가 글러트니로 변하면서, 강화 효과인 포식 진화 역시 강화되었다.

글러트니 자체의 능력도 워낙 강해서 지금까지는 쓸 일이 없긴 했지만...

"글러트니, 포식 진화로 4호기, 마그네토스피릴럼 마그네티컴을 흡수한다."

자기장을 탐지하는 4호기를 포식하여 진화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순식간에 글러트니 군단들이 4호기를 포식하기 시작했다.

[Gluttony(진화 상태)]

─설명 : 글러트니가 마그네토스피릴럼 마그네티컴을 흡수하여 진화한 형태. 포식 진화의 효과로 형질이 돌연변이화되어 더 강력한 자기장 탐지 능력을 보유한다.

이걸로는 부족하다.

한 가지가 더 필요했다.

"제국 칙령. 글러트니는 독자적으로 활동한다."

[글러트니 모든 개체에 제국 칙령을 내립니다.]

[제국 칙령 내용 : 각 개체는 술자의 지각 능력과 판단 능력을 공유하며, 자율적인 활동이 가능해진다.]

[칙령 효과 지속 : 30분(통제력 250% 적용)]

30분이라.

충분하겠지?

모든 사람을 구할 수는 없을 거다.

하지만, 일단 당장 구할 수 있는 사람만 구해도, 여진의 여파로부터 2차 3차 피해의 발생은 막을 수 있다.

그래서.

여진이 잦아들 시점을 기다린 뒤에.

"모든 글러트니 개체는, 자율적인 판단에 따라 이 도시 전역에 있는 매몰된 사람들이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길을 연다."

내 수조 단위에 이르는 군단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어?

"으아아아아악!"

도저히 비명을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두통이 머리를 강타했다.

코에서는 코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아프다아프다아프다아프다.

두뇌가,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벌어진 입에서 침이 주륵 흘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제야 눈에 제국 칙령의 내용이 들어왔다.

고작해야 세균이, 자율적인 판단력을 가질 수는 없다.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의 것을 '빌릴' 뿐.

그 존재는... 당연히 술자인 나다.

수조 단위에 이르는 군단이 아주 간단한 수준이더라도 간단한 판단력을 보유하려면...

내 머리가 과부하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나, 왜 지금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처음엔 분명 고통스럽기만 했는데.

이제는...

뭔가, 눈앞이 훤해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동시에,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두뇌의 모든 신경이 동시에 활용되고 있습니다!]

[지능이 한계를 넘어 상승합니다.]

[지능이 한계를 넘어 상승합니다.]

[지능이 한계를 넘어 상승합니다.]

...

..

.

[클래스 1차 각성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무제한의 세균술사 73화

#1차 각성(1)

#1차 각성(1)

인간은 평생 두뇌의 10%만 사용한다는 속설이 있었다.

물론, 거짓으로 밝혀진 낭설에 불과했다.

인간은 평생 두뇌의 거의 모든 부분을 사용했다.

다만.

일시에 사용할 수 있는 두뇌의 부분이 한정적이라는 건 맞는 말이었다.

아마도 여기에서부터 말이 와전된 것이겠지.

거기서 나는 한계를 아득히 넘어서...

두뇌의 모든 부분을 100%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지평(地平)이 확장되었다.

신경이 새로운 가닥을 뻗고, 뻗은 가닥이 상호 연결된다.

얼마나 많은 가닥을 뻗었는지, 그 가닥은 얼마나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

그것이 바로 지능, 지적 능력의 한계를 의미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 내가 흩뿌려 놓은 수조 단위의 글러트니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무렵...

계속해서 성장하던 신경 가닥이 멈춘다.

일시적이던 두통은 이미 온데간데.

조금 아쉬울 지경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성장했더라면...

[클래스 1차 각성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1차 각성하셨습니다.]

[스킬, '미시안'이 각성의 영향을 받습니다!]

[미시안(각성)]

설명 : 전설적인 네크로맨서 아비센나가 제작한 마법이다. 미시영역을 관측할 수 있으며, 미시 존재들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더 작은 영역을 관측할 수 있다. 각성으로 기능이 추가되었다. 술자가 부리는 언데드의 인지 능력을 활용하여 원격으로 미시영역을 관측할 수 있다. 언데드의 개체수에 따라 더 넓은 영역도 확인할 수 있다.

... 설명이 조금 복잡하긴 한데.

쉽게 말하면, 미시안의 한계는 내 육안으로 닿는 지점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내가 부리는 세균들로도 원격으로 관측할 수 있다는 거였다.

백문이 불여일견, 백견이 불여일행이다.

일단 사용해 보는 것보다 더 좋은 건 없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각성 미시안 스킬을 활용하자...

"와우."

내가 도시 전체에 흩뿌려 놓은 세균들이 보내는 이미지가 중첩되어 쌓이면서 일종의 3D 지도같은 형태가 눈앞에 떠올랐다.

놀랍게도, 인터페이스는 익숙한 지도 앱과 비슷하게, 손가락 두 개로 확대, 축소를 할 수도 있었고, 손바닥 전체를 움직이는 것으로 위치를 움직일 수도 있었다.

아마도 이게 내게 가장 익숙한 '지도'의 형태라서 이런 식으로 보이는 거겠지.

좋아, 그러면 제대로 활용해 볼까.

"저기, 무전기 좀 주십쇼."

"예?"

지나가던 구급대원에게 무전기를 달라고 해서 든 뒤에, 모든 채널에 대고 말했다.

"여기는 김세균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지휘를 맡습니다. 제 지휘에 따라서, 사람들을 구출하십시오."

일단 스스로 걸을 수 있는 경상자들은 이미 밖으로 나와 있었다.

내 명령에 따라 글러트니가 길을 열어준 것이었다.

남은 건 길을 열어도 스스로 나올 수 없는 중상자들과 고층 등에 갇혀있어서 걸어나오는 게 까다로운 상태에 있는 이들 정도였다.

무전으로, 최대한 가까운 위치에 있는 구급대를 그런 이들을 향해 인도했다.

실시간 도시 지도를 보고 있었으니,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심지어 인지 능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한 지금은, 아주 약간의 시각적 단서조차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거기에다...

3D 지도 정보를 바탕으로 개별 사람들을 움직여 지시를 내리는 거.

내 나이 비슷한 사람들은 많이 해봤을 텐데.

그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때, 한국 전체를 강타했던 유행의 게임 장르이기도 했다.

**

세계 최강의 정령사 중 하나로 손꼽히는 루치아.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흐윽!"

마나의 한계는 분명 존재했다.

정령사는 마법사와는 다르게 마나 효율이 엄청나게 좋은 클래스 중 하나였긴 했지만...

효율이 좋다고 해도.

'자연' 자체와 맞서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쉽지 않았다.

바람의 정령 아이리스에 올라탄 채로 계속해서 대지의 정령들을 활용해 방벽을 쌓아 최대한 도시 쪽으로 향하지 않는 방향으로 용암을 유도하고 있었지만.

꽈아아앙!

폭음과 함께 재차 쏟아져나오는 마그마를 보았을 때, 그녀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그렇게 이미 한계까지 몰린 그녀가 이를 악물고 있다가...

"아이리스, 대기의 방벽을 줄이자."

투명한 독수리가 끼루룩!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마냥 명령에 따르지 않고 소환자가 위험해지는 걸 두고 볼 수 없을 정도의 지성은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그 마나라도 아껴야 해."

지금까지는 모든 용암의 복사열을 대기의 방벽으로 막아내고 있었지만...

그 마나를 아껴서라도 새로 흘러나오는 용암의 흐름을 통제하려 하는 그녀였다.

그녀의 의지가 워낙 굳건해서였을까. 아이리스는 하는 수 없이 대기의 방벽을 줄였다.

후욱! 어마어마한 복사열이 동시에 그녀를 덮쳤다.

마치 사우나 한복판에 온 정도로 엄청난 열기에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초고위 정령사의 정신력은 그 정도의 열기로 무너지지 않았다.

이를 악문 채, 여유로워진 마나를 대지의 정령에 투입했다.

대지의 정령이 지면을 이리저리 구부러트리며 용암이 흐를 길을 만들어 냈다.

다행히도, 조금 뜨거움을 감수했더니 모든 게 잘 해결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언제나 순탄함을 경계하라는 말이 있던가.

용암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땅을 구부러트리던 하급 대지의 정령을 향해, 퍽! 튀어 오른 용암이 제대로 직격했다.

중급이나 상급이었으면 용암 정도는 버텨냈겠지만, 하급 대지의 정령에게 고온의 용암은 큰 타격이었다.

끼잉! 하는 소리와 함께 큰 타격으로 강제 역소환되는 작은 난쟁이.

고작해야 하급 대지의 정령 하나가 역소환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타격을 받아 강제 역소환되었을 때는, 소환에 드는 마나의 2배가 소비된다는 것.

그래서 역소환되기 전에 위험에 처한 정령들을 미리 직접 역소환하는 건 정령사의 필수 덕목이었다.

문제는, 지금 하급 정령 하나를 신경쓸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그녀에게 없었다는 것이었으며...

더 큰 문제는.

그녀가 한계까지 마나를 뽑아다 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정령이 강제 역소환되면서 추가로 쓰인 마나가, 마치 연쇄 작용처럼 작용했다.

"흐윽!"

순식간에 마나 탈진 상태에 들어가는 루치아.

마나 탈진 상태에 들어가 자연 마나 회복량까지 떨어지면서,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다수의 정령들을 역소환할 수밖에 없었다.

그 탓에...

"막을 수가... 없어..."

이제 걷잡지 못하고 도시를 향해 흐르기 시작하는 용암들.

바로 그 순간.

퍽! 터지는 소리와 함께 용암의 줄기가 수 미터 이상 흩뿌려졌다.

암석과 반응하여 폭발한 것이었는데.

하필 그 줄기가, 정확히 루치아를 향하고 있었다.

아이리스가 입김을 불어 최대한 용암의 방향을 바꾸어 놓으려고 했지만, 몇 조각이 그녀에게 튀는 것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묻었다가는 아마 심각한 부상은 피할 수 없을 터.

자신의 눈앞까지 가까워진 용암 파편에 눈을 질끈 감았을 때.

... 고통이 없다?

어떻게 된 일인지 싶어 눈을 슬며시 뜨자.

[술자 김세균의 Magmophile 개체들이 당신을 보호합니다.]

[일시적으로 화염 저항력이 3,000% 상승합니다!]

"김... 세균...?"

동시에, 그녀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굳어진 용암이 암석 조각으로 바뀌어 후두둑 떨어졌다.

운이 없게도 파편이 얼굴로 튄 것이었다.

그런데, 무언가 미끄러운 것이, 몸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용암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했다.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거대한 시멘트 방벽이 솟아나며 용암의 흐름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 시멘트 방벽 너머에서, 아는 얼굴이 그녀에게 손을 흔들며 웃고 있었다.

어쩐지 안심이 되는 얼굴에,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는 어떻게..."

"제가 좀 빨라요."

혹시 몰라서 신발의 성지 지정 기능을 그녀에게 사용했던 세균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성지로 향하는 방향이니, 1000%의 속도 보너스를 받아 달려올 수 있었던 것.

이동하는 대상에게도 성지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활용한 거였다.

"도시는..."

"괜찮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구했어요."

"네? 이렇게 빨리요?"

"그렇게 됐네요. 이거 하나 드세요."

세균이 태연하게 인벤토리에서 꺼낸 무언가를 휙 던졌다.

얼떨결에 받아든 루치아가 마시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상 회복 포션(최하급)의 효과로 마나 탈진 상태가 치유됩니다.]

외상 계통 포션보다야 조금 저렴하긴 해도, 그래도 몇십만 유로의 가치는 있는 포션이었기에 깜짝 놀란 것.

"포, 포션을..."

"떨어지는 품질이라 간단한 마나 탈진 정도에만 쓰이는 물건이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아요."

원본 포션과는 다르게, 규선이 제작한 포션은 넥타르의 비율을 조절하는 것으로 그 등급이 나뉘었다.

그게 오히려 사용성을 끌어올렸다.

간단한 마나 탈진이나 자상에 원본 포션을 먹는 건 낭비.

그런 상황에는, 같은 용량의 넥타르로도 원본보다 10배 이상 만들어 낼 수 있는 최하급 품질의 포션을 사용하는 게 오히려 나았다.

마나 탈진 상태를 회복하니, 조금 여유를 찾은 루치아가 다시금 대지의 정령들을 소환했다.

대지의 정령이 세균이 만들어 놓은 시멘트 방벽을 더 강화했다.

이제 울컥거리는 용암의 강이 더는 흐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가기 시작했다.

"휴우..."

"추가 분화가 없다면 이 정도로 충분하겠군요."

"당신은..."

어마어마한 물질 분해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화염 내성의 버프도 주고, 대지의 정령처럼 구조물을 형성하기까지 한다.

다재다능으로는 어디서 빠져본 적이 없는 12종 정령의 지배자인 루치아.

그녀조차도, 범용성으로 저 김세균에게는 자신이 없었다.

대체, 무슨 클래스의 무슨 능력을 활용하는 걸까.

궁금증이, 그녀의 머릿속에 가득 차올랐다.

**

병원이라고 지진의 피해를 피할 수 있던 건 아니었다.

그래서 교외나 타 도시의 병원들로 사람들이 후송되었는데, 당연히 본래의 수용량을 한껏 넘어선 병원은 그야말로 아비규환.

더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환자들이 미어터지는 상황에서 규선 씨의 포션이 보급되었다.

적당한 자상은 최하급 품질로 양산해 낸 포션으로 치료할 수 있었기에, 꽤 많은 환자들을 완치시켜 병원에는 여유가 생겼다.

그렇게 카타니아의 대재앙이 수습되어 가고 있을 때.

나는, 제피로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몸은 괜찮고? 어디 다친 데는 없지?

"네, 괜찮아요."

─휴, 다행이다. 갑자기 네 비행기가 거기 착륙했다고 해서 정부에서도 난리가 났어. 이탈리아 협회에서 협조 공문이 날아오긴 했는데... 무모했어. 지진이 나고서 한참 지난 후도 아니고, 바로 직후에 거길 가면 어째?

위험하긴 했지.

"여진 때문에 좀 위험하긴 했죠."

─그러니까. 원래 본진보다도 더 위험할 수 있는 게 여진이라고.

"그래도 뭐, 사람들은 많이 구해냈으니까 만족해요."

나름 뿌듯했다.

아무리 나쁜 놈들이라고 해도, 남미에서 백여 명의 카르텔을 분해해 버린 게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을 구하면서 그게 꽤 상쇄된 듯한 기분이었다.

거기에, 1차 각성은 예상치도 못했던 성과였다.

─이탈리아 쪽 방송에서 그러긴 하더라. 네가 구한 사람이 얼추 8만 명은 될 거라던데?

"... 생각보다도 많은데요."

... 3만 정도 구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진이 그만큼 심각했다는 거지. 네가 아니었으면 거의 다 죽었을 거라더라.

"어휴."

실제로도 그럴 만했다.

아무리 루치아가 있었다고 해도, 루치아가 두세 명이 있지 않는 이상에는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타격이 컸다.

─옛날에도 비슷한 규모의 지진이 났던 적이 있는 지역이긴 하더라. 그나마 다행인 건 해협을 사이에 두고 피해가 한쪽에만 집중되었단 거지. 만약 해협 반대편에도 지진의 여파가 심했으면... 

끔찍했겠지.

─아, 그리고 이탈리아 헌터 협회에서... 아니 정확히는 루치아가 네게 뭐 줄 게 있다더라.

"줄 거요?"

─아마 직접 전달해 줄 거다. 자기 포인트를 써서 직접 구매한 선물이라던데. 설마 이카로스의 날개는 아니겠지? 그거라면 대박인데.

선물? 뭐지?

똑똑, 타이밍 좋게 울리는 노크 소리에 제피로스와의 통신을 끊고 문을 열었다.

"루치아 씨.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요?"

폐허가 된 도시를 복구하는 데, 중장비보다도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게 바로 그녀의 대지의 정령들이었다.

"맞아요. 드릴 게 있어서 잠깐 들렀어요."

"줄 거요? 저한테?"

"네."

빙그레 웃으면서, 그녀가 내게 옷가지 하나를 건넸다.

그 위에는 종이가 있었다.

'단 한 번이라도 하늘을 날아 보았다면, 대지를 거니는 눈은 창공을 향할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애써 한글로 번역한, 한글로 인쇄된 한 문장이.

그리고 이어 밑에 있는 옷가지를 만졌을 때.

[이카로스의 날개]

품격 : 유물급 망토

설명 : 하늘을 날고자 하는 이의 갈망이 남긴 물건.

내용 : 하늘을 자유롭게 체공할 수 있다. 이동 속도에 비례하여 비행 속도가 정해진다.

... 이거 뭐야?

어안이 벙벙해진 나를 향해, 루치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하늘을 날 때도 무서워할 일이 없겠죠?"

무제한의 세균술사 74화

#1차 각성(2)

#1차 각성(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