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한의 세균술사 74화
#1차 각성(2)
#1차 각성(2)
─뭐? 진짜 그걸 받았어? 와, 이탈리아 헌터 협회 20년짜리 재고가 오늘 털리네.
"그렇게 유명한 아이템이었어요?"
─흠, 유명한 아이템이냐고? 이거 하나로 설명 끝일걸? 카이저가 사려고 했던 아이템.
"헐."
그럼 진짜 좋은 물건인가 보네.
─노코스트, 노패널티로 비행 가능한 아이템은 아마 전 세계를 둘러봐도 그거 하나겠지.
"카이저는 왜 못 샀는데요?"
─습득자가 이탈리아를 위해 항구적인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만 팔 수 있다고 못 박았거든.
"오, 애국자."
─사실 카이저가 돈뭉치 들고 뻗대는 게 빡쳐서 그냥 협회에 기부해버렸다는 이야기가 정론이지만.
... 카이저 그 양반은 파도 파도 괴담만 나오는구만.
─아무튼, 네가 한 정도면 받아도 손색은 없겠지만... 그건 판매 자격이고, 저게 판매가만 해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그걸 루치아가 부담한 모양이다.
"얼만데요?"
─5천만 포인트? 그것도 할인해서. 정가는 1억이야.
"....."
어우, 내가 지금까지 모은 게 천만 조금 넘는 수준인데.
─아무튼, 비행이라는 게 생각처럼 쉽지는 않을 테니, 전문가에게 배우는 편이 나을 거야.
"추천해 줄 사람 있어요?"
─거기 있네, 거기.
"누구요?"
─루치아지 누구야. 비행 스킬이나 비행 관련 소환수 가지고 있는 사람이 흔한 줄 알아?
"그 사람은 도시 재건 때문에 엄청 바쁘고요."
바쁜 양반한테 한가하게 가서 비행하는 법이나 알려달라고 했다가는, 받은 망토 뺏겨도 이상하지 않지.
그냥 독학해 보지 뭐.
**
여진으로 활주로가 다시 파손된 데다, 내 전용기도 지진으로 타격을 입어서 제작사로부터 안전검사를 받아야만 해서, 한동안 시칠리아에 남아 있어야 했다.
도시에는 나름 좋은 일이었다.
최강 선배는 몸이 찌뿌둥하다면서 재건 현장에 나가서 거의 중장비급의 위용을 보이고 있었고, 규선 씨도 최하급 포션을 대량으로 만들며 병원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치료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니 이거 날긴 나는데..."
속도가... 그냥 걷는 속도랑 같았다.
생각해 보니 아이템 설명도 이동속도에 비례한다고 했지.
성지 기능을 활용해서 최대 1,000%의 이동 속도 보너스를 얻으면 무서울 정도로 빨라지긴 했는데, 너무 무서웠다.
중간이 없어, 중간이.
결국, 하는 수 없이 권위자를 찾았다.
바빠도 한두 마디 물어보는 정도는 괜찮겠지.
내 질문에, 그녀는 웃으며 흔쾌히 직접 아이리스, 독수리를 소환해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래, 저 호쾌한 게 비행이지.
나는 그냥 하늘을 걷는 수준?
"활강, 가속과 추락은 다르지 않아요. 중력가속도의 영향을 받아서 추락하다시피 떨어지면서, 그걸 활강으로 완화하며 떠오르고, 다시 추락을 반복해서 가속한다고 생각하면 돼요."
추락이라.
감이 잡힐 것 같기도 한데.
하늘로 천천히 날아올랐다가, 몇 미터 정도를 떨어지면서 다시 날개를 펼쳤다.
그걸 몇 차례 반복하니, 확실히 중력가속도가 속도에 더해져서 순식간에 빨라졌다.
이렇게 하면 되는군.
"오, 금방 느는데요?"
"재밌는데요?"
비행이라는 게 이렇게 재밌는 거였나?
그녀가 주었던 종이에 쓰여있던 문구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한 번이라도 하늘을 날아 보았더라면 눈은 하늘로 향할 거라고 했던가.
다만, 활강을 통해서도 낼 수 있는 속도가 한정적이라는 게 조금 아쉬웠다.
"따로 추진력이 있으면... 응?"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는데...
지금은 그저 어렴풋한 아이디어에 불과하지만, 다행히도 내게는 그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들어 줄 사람이 있었다.
**
바로 향한 곳은 규선 씨가 있는 곳.
이제 충분히 쓸만한 분량의 포션은 만들었기에 쉬고 있던 규선 씨가, 내 아이디어에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죠, 충분히."
내 아이디어는...
불도마뱀의 위장에서 서식하던 메탄생성균.
메타노브레비박터 이그네스를 추진제로 활용한 일종의 로켓 엔진이었다.
불도마뱀의 위장과 비슷하게 생긴 내열성의 엔진 안에 세균군을 채워두고, 그게 배출되는 노즐을 만든다.
그러면, 세균이 만든 고압의 메탄이 연소하며 노즐을 빠져나오고, 엄청난 추진력을 만들 수 있을 거다.
비행 상태가 아니더라도, 고압의 연소 가스는 공격 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뭐, 글러트니가 있는 이상 다른 공격 수단은 조금 빛을 잃는 느낌이긴 한데.
기믹에 따라서 강한 화력을 필요로 하는 던전도 있을 테니까.
"이런 노즐을 양쪽 팔에 착용하면..."
"팔의 방향에 따라 추진력을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겠네요."
세균들이 메탄을 토해내는 양을 통제하는 것으로, 속도도 조절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보니 괜찮은데?
"시제품 하나 만들어 드릴까요?"
"... 그게 가능해요?"
"금속 가공 같은 건 힘들지만... 3D 프린터 같은 걸로 플라스틱으로 찍어낸 다음에 위금술을 사용하면 일시적으로 금속으로 바꿀 수 있으니까요."
"허, 그러네요?"
"정교하진 못하겠지만..."
규선 씨가 손을 뻗자, 흙이 이리저리 뭉쳐지면서 내가 구상한 형태를 만들어냈다.
이윽고 거기에 위금술까지 사용하니...
완전 거무튀튀한 금속 재질의 추진기가 만들어졌다.
"이런 것도 가능하고요."
... 초월급 연금술사 폼 미쳤는데?
그녀가 건넨 추진기를 양쪽 팔에 착용하고, 안에 메탄생성균을 채워놓았다.
혹시나 불이 붙거나 하는 경우에도 안전하게 화염저항균으로 화염저항력을 끌어올려 놓는 것도 필수.
그런데, 어느 정도나 메탄을 생성해야 하지?
아마 이 정도면...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어?"
옆에 있던 아테나가 내 몸을 덮고.
푸슈슈슈슈슈!
동시에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내 몸이 그대로 하늘로 쏘아져 날아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딘지도 모를 정도로 아득히 높은 상공에 있었다.
추진기는 이미 박살 나서 온데간데없는 상태에서, 다급히 이카로스의 날개로 활강을 시작했다.
성능 확실하긴 한데...
이거 두 번 확실했다가는 죽겠는데?
아테나가 재빨리 몸을 보호하지 않았으면 큰일날 뻔했다.
"어휴, 화성 갈뻔했네."
간신히 본래 출발지로 착륙하고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 번째로 추진기의 내구성 문제.
아무리 위금술로 금속 재질로 바꿔놓았다고 해도, 위금술은 일정 이상의 타격을 받으면 그 금속 조성이 원래대로 돌아간다.
원재료가 흙을 빚어 만든 거였으니 당연히 더 빠르게 조성이 풀렸을 터.
"이건... 생각해 보니 아테나를 이용하면 되잖아?"
아테나에게 부탁하자, 혈금 재질의 추진기 한 쌍이 손에 일체형으로 형성되었다.
따로 제작할 필요도 없이 일단 추진기는 클리어.
다음으로는 메탄의 양인데...
처음부터 너무 과한 양을 생성했다.
반에 반에 반만 생성해도 충분한 속도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조금씩 메탄의 양을 조정해 가면서 추진력의 정도를 확인했다.
그리고 실험이 대충 마무리될 때쯤에는, 꽤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기동력이 딸려서 곤란했던 적이 꽤 있었는데...
조금 미친 방법이긴 한데.
그 약점을 완전하게 보완한 거 같다.
**
미합중국 국가안보국 NSA.
세계 최고의 감청, 도청 능력을 보유한 이곳 NSA에서 각성 시대 이후로 추가된 업무는, 강력한 헌터들을 추적 및 감시하는 것이었다.
헌터들은 유사시에 언제든 전쟁 병기로 이용될 수도 있다는 것이 미국의 판단.
그리고 NSA에 최근에 추가된 감시 대상이 다름 아닌 김세균이었다.
이 NSA의 국장이, 지금 상원 국방위원회에서 김세균에 대해 브리핑을 시작했다.
"그의 활동은 지금까지는 거의 던전 내부에 치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력(戰力)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습니다만... 최근 며칠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먼저 콜롬비아에서의 일입니다."
대저택의 지붕이 보이는 위성 사진이 화면에 떠올랐다.
"이건 콜롬비아의 마약상 중 하나의 저택입니다. 김세균은 이곳에 방문했는데, 무언가 협상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는지, 마약상 쪽에서 적대 의사를 표한 듯 보입니다. 그 후, 불과 몇 초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저택 사진이 열영상 자료로 바뀌더니...
불과 몇 초 만에 백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열반응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모습에 상원의원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단순히 죽었다면 완전히 체온이 식을 때까지 열영상이 포착되겠지만...
"사망이 아니라, 분해입니다. 아예 분자 단위로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겁니다. 문제는 저 나르코의 우두머리가 60레벨의 전사였다는 겁니다."
"고레벨이군."
"네, 오러까지 사용할 수 있는 고레벨입니다. 그런 고레벨 전사도 버틸 수 없었다는 게 문제지요."
상원의원들이 웅성거렸다.
"지금까지의 판단과는 완전히 다르잖아?"
"고위 방어 마법이나 오러 등으로 방어 가능할 것으로 추정이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예, 여러 채널을 통해 모은 자료로 내린 결론이었습니다만... 아마 그 사이에 강해졌다는 거겠지요. 더 큰 문제는 그가 이제 고작해야 40레벨도 되지 않았다는 거고요."
"... 헌터가 가장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시기군."
보통 40레벨부터 60레벨까지 엄청난 성장을 거듭하며, 60레벨부터는 정체기에 이르는 것이 일반적인 헌터의 성장 곡선이었다.
"다음에 귀국하던 중, 헌터 김세균은 이탈리아 카타니아에서 긴급 구호 요청을 받아서 지진 구호 활동에 나섰습니다. 여기서 확인한 그의 능력 범위를 고려했을 때 돌린 시뮬레이션 결과입니다. 적절한 수단으로 사전 제압에 실패했을 경우... 10분 안에 수백만 명이 사망할 수 있습니다."
"... 끔찍하군."
"다행인 것은 그가 어디 이슬람의 지하디스트 극단주의자라던가 아흐마드 트리아인 같은 미치광이가 아니라는 것이겠지요."
"성향은 어떻지?"
"평범합니다. 선한 쪽에 가깝고요."
"포섭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SG 그룹 관련 자료가 떠오르면서, NSA 국장이 말을 이어갔다.
"최근에 그가 언데드를 매각하면서 SG그룹에 약 800억 달러 가치의 지분을 추가하여 지분 영향력을 확충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WDDO를 의식하여 한 사람에게 너무 과한 힘을 몰아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쯧, 대한민국의 그 대통령은 정말 쉽지 않군."
"그리고 마지막 자료입니다. 바로 어제 입수한 정보입니다만..."
불길을 내뿜으며, 갑자기 하늘로 솟구쳐 날아오르는 김세균의 모습이 프레임 단위로 찍힌 위성사진.
"불과 1초 만에 상공 1km 지점까지 솟구쳤습니다."
"... 남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나? 로켓 맨은 북쪽에 있는 그 친구 아니야?"
"의원님, 농담하실 때가 아닙니다. 이는 안보상의 거대한 위협입니다. 지금까지, 그의 유일한 약점은 기동성이라는 게 우리 NSA의 판단이었습니다만... 자체적으로 저런 기동성을 발휘할 수 있는 스킬이 있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1초 만에 1km를 날아갔다는 건, 거의 마하 3에 이르는 속도입니다. 성인 남성 사이즈의 F-22 랩터가 최대 속력으로 날아다니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마하 3에 육박하는 속도로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마음먹으면 수백만의 사람을 지워버리고, 동시에 포섭은 불가능에 가까운 헌터라고?
심지어 아직 성장 가능성은 한참 남았고?
"... 이쯤 되면, 그를 인간이라고 불러도 될지가 의심스러울 지경인데."
"마지막의 기동성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다면, 유사시의 제거 작전을 계획하자는 것이 저희 NSA의 의견이었습니다만. 현재로서는... 우호적 관계를 수립하는 게 최적의 판단으로 보입니다."
그의 말에, 상원의원 중 한 명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언제부터 우리가 헌터를 군사 전력으로 대응했나? 헌터는 헌터로 대응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기조 아니었나? 그래서 막대한 자금을 들여서 카이저 코퍼레이션을 밀어준 거잖나?"
"NSA의 슈퍼컴퓨터를 총동원한 모든 유형의 시뮬레이션에서, 카이저가 패배했습니다."
"..."
모든 상원의원들의 미간에 주름이 팍 패였다.
고민 가득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생각을 이어가던 상원의원들.
그들 중 하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냥개가 늙었으면, 젊은 놈으로 갈아타는 것도 방법 중 하나겠지."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이들은 없을 터.
문제는 그 파격적인 말에...
다들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는 거였다.
무제한의 세균술사 75화
#역병의 도시(1)
#역병의 도시(1)
비행 능력은 딱히 숨길 생각도 없이 연습했던 거였기에, 이미 하루 이틀 지났을 때쯤에는 전 세계의 인터넷 커뮤니티가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플라잉 세균맨이다!
└원래 세균맨이 날아다니냐?
└아무튼 낭만 있으시잖아, 한잔해~
─어떻게 날지?
└이탈리아 헌터 협회에서 이카로스의 날개 받았다고 함.
└미쳤네...
└그게 뭐임?
└이탈리아 헌터 협회 1억 포인트짜리 유물템.
└세균맨 클라스...
─근데 내가 알기로 이카로스의 날개에 저런 미친 가속 능력은 없었는데.
└맞음, 저거 옛날에 경매에서 능력 공개됐었음. 노코스트 비행스킬 끝임. 이동속도에 비행속도 완전 비례하고.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고평가된 아이템 10위권에 항상 들어감. 비행스킬이 워낙 희귀해서 그렇지, 엄청 대단하진 않은 아이템임.
└? 그냥 날아다닐 수 있는 게 대단한 거 아니야?
└... 그렇긴 해
─영상 보니까 무슨 로켓처럼 날아가던데, 가속은 세균맨 스킬 아님?
└그런 거 같은데?
└ㅈㄴ 멋있긴 하네
─(하수) : 세균맨 신템 ㅈㄴ 멋있네. (고수) : 비행 기믹 있는 불가사의 게이트 어딨냐?
└와 감탄했다. 이 정도는 해야 주식해서 먹는구나.
└실제로 비행 기믹 있는 47단계 게이트 있는데 그 지역 DDF 이미 30% 폭등.
└역시 빠르구만...
└펀드매니저 중에 세균맨 출국 기록만 보는 사람 많을걸.
─플라잉 세균맨은 필요없다. 뀨뀨를 더 보여달라.
└뀨뀨!
└난 아테나느님.
└사문난적이다!
여러 반응이 있었지만, 제일 반응이 좋은 건 단연 내 차기 공략 게이트였다.
역시,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다.
돈이랑 직결된 게 반응이 좋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나도 모르겠다는 거다.
이번 각성에 기동성까지...
한 단계... 아니 몇 단계쯤은 단숨에 스펙업한 느낌이라서...
지금까지는 고민해본 적 없던 괴악한 기믹의 게이트조차도 옵션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걸 다 고려하면...
공략 계획을 아예 새로 짜야 한다.
거기에 레벨업 페이스를 규선 씨와 나누면서 늦출 수 있다는 것도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고.
이러나저러나, 내게는 엄청나게 머리 복잡해진 상황이었다.
뭐, 그 스케쥴을 짜준 사람에게는 더 그렇고.
"으아아아악!"
스케쥴 짜준 사람의 비명이다.
... 당연히 제피로스였다.
"아니! 그래, 당연히 변수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공략 불가 판정 게이트지. 그런데... 아이고오..."
"크흠..."
미안해서 뭐라 할 말이 없네.
"그래서 선물 가져왔잖아요."
굳이 프랑스까지 들러서 가져온 건데.
"이 자식아, 그러니까 이 정도로 끝내는 거야."
"아흐마드는 잘 돌아갔어요?"
"너 기다린다고 뻗대고 있다가, 카타니아 지진에서 네 활약상을 보더니 표정이 굳어져서 돌아가던데?"
"... 굳어져요?"
"안 굳어지는 게 이상하지. 널 알만큼 안다고 생각했던 나도 소름이 돋았는데. 아마 그 정도 광역 범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스킬은... 세계를 꼽아봐도 거의 없으니까."
조금... 힘 조절을 못했나?
그래도 사람들을 구했으니 뭐.
"그래서... 다음엔 어디로 갈까요?"
"돈 많이 주는 곳으로 가라."
"70레벨 러쉬는..."
"아흐마드가 포기하면서 많이 사그라들었지."
70단계에 도전하는 국가들이 몇몇 있었지만, 아흐마드 트리아인의 공략 포기 선언 이후로는 많이 줄어들었다.
개중에 자신을 과신하는 멍청이들이 70레벨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국가 차원에서 큰 비판은 감수해야 했다.
덕분에, 내 평정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말씀.
"아흐마드한테 고맙다고 밥이나 사야겠어요."
"너무 좋아할 건 못 돼. 세계적으로 네 레벨에 관심이 몇 배는 더 많아졌다는 뜻이니까."
"쩝, 그렇죠."
아흐마드 그 인간이... 굳이 나를 콕 찝어서 70단계 공략에 필요하다고 말했다지.
"일단 다 비슷비슷하니까, 그 리스트에서 네가 흥미있는 곳을 먼저 공략하는 편이 낫겠다."
어디 보자...
리스트를 읽다가...
"어?"
"뭐, 어디 괜찮아 보이는 곳 있어?"
"... 런던의 게이트인데요."
"런던, 런던이라... 런던... 에는 하나뿐인데?"
"네, 거기..."
역병의 도시라.
뭔가 이름부터 '세균맨'스러운 게이트인데.
단계는 37단계니 지금 딱 입장하기 좋았고.
하지만 내 말에 제피로스가 바로 창백해져서는 고개를 내저었다.
"야! 너는 왜 하필 골라도... 거긴 어떤 미친놈이 리스트에 넣어둔 거야?"
"왜요, 언제는 게이트 가려서 공략했어요?"
"거긴 안 돼."
"자신 있는데."
예전엔 몰라도, 1차 각성까지 마친 지금은 확실히 자신 있었다.
그런데 왜 말려?
"세계 3대 금지라고 들어봤니?"
"아뇨."
"공략 불가 게이트 중에서도, 그냥 들어가는 것 자체가 금지된 3개의 게이트가 있어. 그중 하나가 런던의 거기야."
이놈의 헌터 업계는 알아도 알아도 새로 공부할 게 나오는 느낌이야.
"문제가 뭔데요?"
"말 그대로 역병 때문이지. 안쪽에서 전염병에 걸려서 밖으로 나오면? 각성자들도 생사를 오가는 전염병에 비각성자들이 그대로 고스란히 노출되는 셈이니까."
"... 그건 좀 그렇긴 하군요."
"실제로 당시에 런던에서 13만 명이 감염되어서 거의 만 명이 사망했었다. 전세계적인 자원이 총집결된 방역 이후에는 금지가 됐지."
그 정도 세균이라면... 더욱이 들어가야 했다.
내가 들어가야 세균 표본을 가져올 수 있으니까.
단순히 내 욕심이 아니라, 그걸 바탕으로 만약에라도 유출되었을 때의 대비를 할 수가 있을 거다.
"꼭 들어가고 싶다면요."
"... 또 이상한 병 걸렸네 얘."
"제가 이렇게 말하고 실패한 적이 없다는 것도 알고 계실 테고."
"네가 거기 들어간다고 하면 아마 정부에서 바로 출국금지 때릴 거다."
"날아서라도 가죠 뭐."
"... 아오, 말이나 못 하면."
잠깐 한숨을 내쉰 뒤에, 제피로스가 손가락 세 개를 들어 올렸다.
뭔 뜻이지?
"거길 들어가려면 설득해야 하는 집단이 세 개가 있어."
"... 세 개나요?"
대충 짐작이 갈 거 같긴 한데.
"하나는 영국 헌터 협회."
"당연하겠죠."
"다른 하나는 영국 보건안전국."
"거기도 그렇겠고요."
"마지막 하나가... 바티칸."
"... 네?"
갑자기 뜬금없이 바티칸은 또 뭐야?
"몇몇 역사적으로 상징적인 집단들은 가입하는 것만으로도 컴패니언 스킬을 주기 때문에 특정 클래스에서는 필수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경우가 있지. 예를 들어 네가 알 만한 사람으로 말하자면... 카이저는 몰타의 구호기사단에 가입해서 치유 관련 스킬을 얻었다."
아니, 하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두고서 그 인간을 예로 들다니.
"... 바티칸도 그런 곳이에요?"
"어. 축성 쪽. 세계 힐러의 50% 정도, 특히 서구권에서는 80% 이상이 적을 두고 있지."
이어지는 제피로스의 설명에 의하면, 각성 시대 이후 몰락할 뻔했던 바티칸은 거의 전 세계의 힐러들을 저 컴패니언 스킬 하나로 규합했다고 한다.
"중동의 하사신 같은 집단도 컴패니언 스킬로 비슷한 클래스의 여럿을 규합하면서 컸지."
"이런 거 보면 대체 각성의 기원이 뭔지 궁금하다니까요."
"알아내면 아마 네가 인류의 신이 될 거다."
피식 웃으면서 답한 제피로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어갔다.
"어쨌든, 던전 감염병에 대한 대응은 바티칸의 입김이 강해. 수많은 힐러들을 규합해서 대응할 수 있는 집단이다 보니까 당연한가."
"용케 그 힐슬아치... 들이 말을 듣네요."
던전에서도 콧대 높기로 소문난 게 힐러들인데.
"파문당하면 컴패니언 스킬 날아가는데, 들어야지."
"역시 협박이 약이네요."
"어쨌든, 해당 게이트는 세 집단의 합의가 있어야지만 열기로 되어 있다. 당연히 합의될 일은 있다 없다?"
"... 없다."
"대답이 됐으려나."
"예..."
지금 당장은 방법이 없는 건가.
하는 수 없지 뭐.
그렇게 포기하고 집에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야! 런던에 그거 혹시 너 아니지?
제피로스의 연락에 미간을 찌푸렸다.
"...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리세요. 한국에서 런던을 어떻게 몇 시간 만에 가요. 트리아인 전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그렇지. 하필 타이밍이 묘해서. 휴우, 다행이다.
"뭔 일 있대요?"
─BBC 라이브에서 누가 그 게이트에 난입했다는데?
"... 제가 그 정도 미친놈은 아닙니다만."
─알겠어, 너 아니면 됐어. 젠장할, 술 마시면서 뉴스 보다가 아까운 술만 뿜었네.
제피로스와의 통신을 종료하자마자 BBC를 틀었다.
라이브에서는, 수많은 경찰 인력에 더불어서 소집된 헌터들, 거기에 바티칸의 컴패니언 스킬을 익힌 힐러들이 게이트 입구를 둘러치고 있었다.
"어떤 미친놈인지 낯짝이나 좀 보자."
나야 어지간한 전염병에는 안 죽을 자신이 있다지만, 저건 대체 무슨 깡이야?
한참 라이브 화면을 보는데, 대체 던전 안에서 뭘 하는지 거의 몇 시간이나 같은 화면뿐이었다.
"안에 살림이라도 차렸나. 아님 죽었나."
사람들 역시 그렇게 생각한 듯 보였다.
하지만 죽었다고 해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만약 경계를 풀었다가 시내로 나가서 전염병이 퍼졌다가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할 터였으니까.
바로 그때.
광채는 없었지만, 공간이 일렁이며 누군가가 스르르 나타났다.
누가 던전에서 퇴장한 거였다.
슬슬 풀어지던 경계가 다시 삼엄해지고, 바티칸 소속의 힐러들이 컴패니언 스킬, 축성의 장막을 펼치기 시작했다.
안에 있는 그 어떤 삿된 것들도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완벽한 결계.
"손 들어!"
군인들이 총을 겨누고,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헌터들도 전부 공격 태세를 갖췄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눈과 코는 가면으로 가린 채 입만 보이는 남자가 히죽, 입꼬리를 희게 올렸다.
동시에, 그의 손에 무언가, 붉은빛의 구체가 형성되기 시작하더니.
그걸 장막을 향해 가볍게 던진 순간.
퍽! 구체가 수만, 수십만, 수백만의 파편으로 터지며 장막을 뚫어냈다.
화질 문제 때문에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마치 바늘처럼 날카롭게 변하는 건 보았다.
저게 대체 뭔 스킬이지?
그리고 장막을 뚫고 나간 붉은 바늘이 몸에 틀어박힌 이들이,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씨, 씨발! 오염된 피에 감염됐대!"
"저 개새끼가!"
완전히 아비규환이 된 상태에서, 포위망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몇몇 헌터들이 나서려다가도, 전염될 수 있다는 생각에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 와중에 앞으로 선뜻 나서는 한 남자.
그는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은 얼음의 보호막을 두른 채로, 순백의 지팡이를 뻗었다.
"크흐으으... 에드워드 프로스트... 하지만... 너라도 막을 수는 없다..."
영국 최강의 헌터, 빙결 마법의 최고 권위자인 에드워드 프로스트였다.
그에 의해 발부터 머리까지 서서히 얼어가면서도, 남자는 마지막까지 저주 섞인 말을 으르렁대며 남겨놓았다.
"위대하신... 그분의... 섭리를..."
말을 미처 마치지 못한 채, 그대로 완전히 꽁꽁 얼어붙은 괴한.
이윽고, 조금이라도 감염된 이들을 차단하기 위해 얼음의 돔을 넓혀가는 에드워드 프로스트.
그러나...
이미 몇 명이 이탈해서 멀찍이 도망치고 있는 걸 확인한 그의 표정이 허탈해졌다.
**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 보고를 받던 제피로스가 통화를 마치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원조사 결과 나왔다는데, 범인이 옛날에 역병에 감염되었다가 치유되었던 헌터라네? 클래스는 혈술사고."
"혈술사라..."
희귀한 클래스긴 했지만, 아예 보기 힘든 클래스는 또 아니었다.
잘 육성하면 위력 좋은 흑마법 계통 클래스 중 하나라서, 제법 인기가 있었다.
"지금 영국 경찰이 정신 제압 마법으로 범행 동기 같은 걸 듣고 있는데... 심각해."
"뭐죠?"
"어느 날, 신을 자칭하는 머릿속의 어떤 존재가 자신한테 말을 걸었단다. 거기 다시 들어가서, 갇혀 있는 자신을 널리 퍼트려야 한다고."
설마.
"...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치유가 아니라 잠복기였던 걸로 추정한다면... 그리고 그 증상에 정신착란이 있다면..."
좀 아찔한데.
"그 당시에 치유되었던 헌터가 대체 몇 명이죠?"
"... 얼추 잡아도 만 단위. 헌터들은 기초체력이 좋아서 비각성자들과는 다르게 생존률이 높았어. 그래도 신체적 타격이 커서 대부분은 은퇴했고."
그들이 다시 게이트에 들어가서 역병을 퍼트리기 시작하면... 전지구적 재앙의 시작이다.
막아야지.
"지금 당장 런던으로 가야겠습니다."
그리고, 알아봐야지.
과연 신을 자칭하는 시건방진 세균은 어떤 개체인지.
무제한의 세균술사 76화
#역병의 도시(2)
#역병의 도시(2)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정부의 반대는 거셌다.
"아, 안 됩니다!"
말을 듣자마자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젓는 조형빈 국장.
"아니, 가야 한다니까요."
"저 죽습니다! 헌터님! 제 모가지 대롱대롱 광화문 앞에 걸리는 꼴 보고 싶어서 이러세요?"
"조 국장님 잘못이 아닌데 조 국장님이 왜 죽어요?"
"김 헌터님! 지금 각국이 다 영국과의 국경을 폐쇄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고요."
"거기서 오는 걸 막은 거지, 영국이 들어오는 걸 막는 건 아니잖아요?"
"... 돌아오셔야지요, 헌터님... 영국에 계속 계시려고요?"
거의 울기 직전인데.
"일단 위험하신 것도 위험하신 거지만, 거기 들어가시면 언제 나올 수 있을지 모릅니다. 정부에서 그런 리스크를 짊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잘 해결하고 온다니까요."
"원칙적으로, 정부는 현재 영국으로 향하는 비행 계획을 허가할 수 없습니다."
"허가해주는 3국으로 경유해서 가면 되겠네요."
"헌터님!"
"왜 소리를 지르세요."
"... 죄송합니다."
한숨을 내쉬고는 머리를 짚은 조형빈 국장이 한 발짝 물러섰다.
"이건 제 선에서 처리할 수가 없는 일이니, 윗선의 허가를 받으시죠."
"윗선이면... 장관님?"
"김 헌터님이면 더 윗선이요."
"... 대통령님?"
그 말이 무섭게,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는...
─나 강 대통령입니다. 김세균 헌터, 잘 지냈어요?
"... 대통령님."
─내가 이렇게 간곡히 부탁하는데, 생각 바꿔보는 게 어때요?
"대통령님. 지금까지 제가 보인 능력이 전부라고 생각하십니까?"
─... 허어.
"대통령님께서도 지금 영국 쪽 상황 보고는 받아서 아시겠지요."
─예, 보고 받았지요. 주영한국대사관의 모든 직원들은 유서까지 작성했지요. 조금 전, 그들의 유서를 받았습니다.
그 정도인가.
"그런 상황을 아는데도 가겠다는 겁니다. 아니 가야 됩니다. 설마 런던을 틀어막는다고, 나아가서 영국과의 국경을 폐쇄한다고 뭐가 달라지리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
그걸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일차원적인 생각이었다.
이미 정신착란까지 유발해서 자발적으로 게이트 안에 들어가 병원체를 몸에 담고 나와 퍼트리게까지 한 놈이었다.
"상황이 여기서 더 악화되면 저도 막을 수 없을 겁니다."
뭐, 솔직히 못 막을 것 같지는 않은데, 적어도 귀찮아지긴 하겠지.
시간도 많이 써야 할 테고.
─알겠어요. 출국을 허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모든 유무형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어요. 부디 몸 건강히 귀국하길.
상황 정리까지 끝났으니, 이제 출발하기만 하면 되겠다.
그 전에...
바쁜 와중에 공항까지 마중 나와준 사람들과 인사는 해야지.
"세균 씨."
"규선 씨, 잘 부탁해요."
"정말 몸조심하셔야 해요. 아무리 세균 씨가 강하더라도... 제가 보고받은 정보만 봐도 위험한 세균이에요. 영국 NHS에서 받은 데이터를 분석해봤는데... 전혀 알 수 없었어요. 아예 지구의 세균과는 그 구성 자체가 달라요."
"네, 조심할게요. 그런 의미에서..."
인벤토리에서 귀걸이 한 짝을 꺼내어 건넸다.
"... 뭐죠?"
"통신 귀걸이요."
제피로스와 나눈 것과는 또 다른 한 쌍의 앤서블 이어링이었다.
"제가 종종 도움을 요청해도 너무 귀찮게 생각하진 말아주세요."
"네! 뭐든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그녀와 대화를 마친 뒤에, 뒤에서 기다리는 두 명의 아재에게 향했다.
"정말 내가 안 가도 되냐?"
최강 선배의 물음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근육이 세균까지 막아주는 건 아니거든요?"
"바즈라의 전격을 무시하네 이 친구가?"
"크흠. 그래도 만에 하나의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죠."
다음은 제피로스.
우리 사이에는 뭐, 별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그냥 손만 한 번 꽉 마주 잡은 뒤에,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런던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난생처음 가는 영국을, 이런 식으로 방문할 줄은 몰랐네.
**
한국에서 런던으로 가는 99.9%의 비행기는 런던 교외의 히드로 공항에 내리겠지만, 내 전용기는 런던 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런던 시티 공항으로 향했다.
편의를 봐주는 것도 있고, 그만큼 영국 정부가 조금이라도 빠르게 대응하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겠지.
어째 특이한 경험만 하는 느낌이다.
파리도 흔한 드골 공항이 아니라 다른 공항에 내리고 말이지.
그리고 무려 12시간에 가까운 비행 끝에 겨우 영국 영공에 들어섰다.
내가 어떻게든 아흐마드 전용기에 탑재한 그 아이템, 얻어내고야 만다...
그렇게 착륙한 런던 시티 공항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원래도 그다지 붐비는 공항은 아니라지만, 감염병 사태 이후로는 공항이 완전 폐쇄 상태였다.
내가 내리자, 기다리고 있는 영국 헌터 협회, 영국 정부, 그리고 마지막으로...
"헌터 에드워드 프로스트."
"헌터 세균 킴. 처음 뵙겠습니다."
세계 최강의 빙결마법사.
이 사람도 내가 좋아하던 헌터였는데, 드디어 실제로 보게 되는구만.
회포를 풀 시간조차 없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와 함께 차로 향하며 바로 물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아, 예. 감염을 걱정하신다면 저는 괜찮습니다."
어떻게 보이지도 않는 걸 확신하지.
"당시 제 주변에는 '정체공간'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절대영도에 가까운 극저온으로 이루어진 공간이죠. 세균 같은 게 넘볼 수는 없었을 겁니다."
세균 같은 거라니.
듣는 세균 괜히 자존심 상하는 말이긴 한데, 말은 맞는 말이네.
"알겠습니다. 대응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 감염자들을 격리해두고 있긴 합니다만, 더 큰 문제는 감염 회복자들입니다. 그들이 후방에서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서..."
"행적은 파악 중에 있습니까?"
"경시청과 헌터 협회가 움직이고 있긴 한데... 인원이 너무 많습니다."
"아무래도 모두를 격리하긴 힘들겠죠."
다행인 건, 과거 감염 회복자들이 잠복기를 끝내고 재감염원이 되는 게 최악의 상황인데, 현재로서는 그렇지는 않은 걸로 보인다는 거였다.
규선 씨의 말에 따르면...
잠복기 후에 다시 감염원이 될 수 있다면 굳이 게이트에 들어가지 않았을 거라던가.
아마도 장기간의 잠복 상태에서 생존하기 위해 감염성이 떨어지거나 잃는 쪽으로 진화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그래서 새로운 감염원을 얻기 위해 게이트에 입장해야 했을 테고.
"일단 그 사고 친 사람을 보고 싶습니다."
"... 상태가 좋지는 않습니다. 급격히 나빠지더군요."
"네, 상관없습니다."
그 사람한테는 미안하긴 한데, 죽은 상태가 오히려 낫다.
기본적으로 병원균은 숙주가 사망하면 함께 사멸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나는 사멸한 개체를 되살려 어떤 성질인지 확인만 하면 된다.
프로스트를 따라 도착한 곳은 진원지 인근의 병원.
음압 상태의 병실에서 격리되어 있는 모습을 창밖으로 보았다.
"직접 제압하신 겁니까?"
"예. 심문할 때만 잠깐 깨웠다가, 다시 얼려뒀습니다. 깨울까요?"
"아뇨. 혹시 혈액 샘플 같은 거 있습니까?"
"예? 아, 네. 연구용으로 조금 채혈해 둔 게 있을 겁니다."
요청에 시험관 몇 개 분량의 피가 내 앞에 놓였다.
"잠시 할 게 있어서. 자리 좀."
"아, 예."
홀로 남은 자리에서,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미시안을 사용했다.
그런데...
"... 없어?"
통상적인 세균만 있고, 따로 포착된 지배적인 세균군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상한데.
이전 같으면 확인할 방법이 없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차피 안에 감염원이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혈액이 든 시험관을 열고, 안에 글러트니들을 침투시켰다.
이윽고, 각성한 미시안이 펼쳐졌다.
그대로, 글러트니의 시야를 빌어 작은 세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냉장해둔 혈액 내부에서 확인되는 적혈구와 백혈구들.
그 사이사이로...
파편 같은 게 지나다녔다.
무언가, 본래의 모습이 터져 찢긴 듯한 파편이었다.
"사체를 안 남긴다는 건데..."
처음 겪는 일에 조금 당황스럽다.
혹시 혈액 보관이 잘못된 걸까?
잠시 고민하던 끝에, 밖으로 나왔다.
"뭔가 얻어낸 게..."
"조금 더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저길 들어가 보겠다고 하면 난리 날 게 뻔하니...
어차피 내가 직접 들어가도 바뀔 건 없다.
대신에 음압병실 안으로 글러트니를 침투시켰다.
다시 한번, 혈술사의 몸속으로 침투한 글러트니의 눈으로 혈액을 보았다.
그리고 내가 본 것은...
실시간으로, 제각기의 형태로 분화하고 변화하고 있는 세균의 모습이었다.
어느 하나, 같은 게 없었다.
저걸 동일 개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렇게 계속해서 변화하다가 어느 순간 임계치에 이르면...
사체를 남기고 사멸하는 대신에, 그대로 퍽 터졌다.
유전물질만 남겨놓고 터진 세균에서, 유전물질이 주변의 아미노산을 흡수하여 증식했다.
이래서 사체가 없던 거구나.
... 망했다.
사체를 안 남기는 세균이 있을 줄은 몰랐다.
내가 세균을 지배한다지만, 내가 통제하는 세균은 엄밀히 말하면 '죽었다 살아난' 언데드 세균들이다.
아니 그런데 애초에 사체를 안 남기면... 되살릴 방법이 없잖아.
완전히 내 카운터 아냐 저거?
바로 그 순간이었다.
글러트니에게서 느껴지는 감각에 눈을 번쩍 뜨며 다시 감각을 그쪽으로 집중하자...
놀랍게도 유전물질로부터 새로 생성되는 미지의 균들의 형태가...
글러트니와 비슷한 모양새로 바뀌고 있었다.
동시에, 수백억에 달하는 존재들이 침투한 글러트니를 향해 덮쳐오기 시작했다.
... 겁도 없네.
내 가소로운 감정을 그대로 공유하면서, 글러트니 군단은 덤벼오는 '짝퉁'들을 순식간에 물어뜯었다.
글러트니를 따라한 놈들도 글러트니를 마주 공격했지만...
내 통제력의 영향 아래 이제 세균을 넘어선 무언가가 된 글러트니의 내구성을 뛰어넘는 공격력?
[개체, '글러트니'가 공격으로부터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 그런 게 있을 리가.
1차 각성 이후로 이제 내 감정에까지 영향을 받는 글러트니가, 가소롭다는 듯 혈액 속에서 몸을 돌리며 움직였다.
뭐, 선빵 맞았으니...
죽어도 여한은 없으리라고 본다.
"쓸어버려."
작은 중얼거림에, 혈술사의 몸에 침투해 있던 글러트니 개체들이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지며 그 미지의 세균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분해되어가는 세균들.
그런데, 글러트니가 두뇌 쪽으로 접근했을 때.
"허?"
생존 상태가 아니었다고 생각했던, 엄청나게 작은 사이즈의 유전물질이, 그대로 뇌세포 세포막을 넘어 사라졌다.
닭 쫓던 개가 된 글러트니들이 으르렁댔다.
아무리 강력한 개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세균인 이상... 글러트니는 컸다.
뇌세포를 다 분해해서 죽여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세포막을 넘나들 정도로 작은 유전물질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거의 분자 단위라는 건데...
"이러니 못 찾았지."
세포막을 자유자재로 넘어 다니면서 뇌세포 안에서 잠복기를 가지는데, 어떻게 찾아?
그 순간...
삐삐삐삐! 뾰족한 소리의 신호음에 글러트니 쪽에 의태되어 있던 의식이 현실로 돌아왔다.
"무슨 일입니까?"
"환자의 뇌파 상태가 불안정해졌습니다. 이대로 두면 뇌사할 겁니다."
"이런."
저 안에 들어가서 발작하는 모양인데.
... 내 세균 중에는 대체할 만한 애들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세균은 사이즈가 커서, 현존하는 제일 작은 세균도 200나노미터는 됐다.
글러트니는 1000나노미터는 될 거다.
그런데 세포막을 투과하려면 1나노미터 이하의 분자 정도여야 했다.
어쩌지?
무슨 놈의 세균... 아니 저 정도 사이즈에서도 움직이면 바이러스라고 불러야 하나.
바이러스라고 부르기도 뭐하다.
고작해야 바이러스를 구성하는 수천 개의 염기 서열 중 한 쌍 정도?
대체 저게 무슨 균이야, 좀비지.
계속 변이하고, 회복하고...
"... 좀비?"
"예? 좀비요?"
"아, 아닙니다."
좀비는? 언데드다.
그러면 저건.
언데드의 속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는 건데.
왜 이걸 생각 못 했지.
다급히, 조금 전에 검사했던 혈액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미시안을 사용하는 대신에.
조금 다른 스킬을 사용했다.
"언데드 라이즈."
설마, 되나?
[술자가 존재하지 않는 독립 상태의 언데드를 발견하셨습니다.]
[언데드 라이즈 스킬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대상 : Pride 균주 약 50만.]
... 된다.
"메탄생성균을 프리셋 2번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사용한다."
[Pride 균주 약 50만 개의 통제권을 확보하였습니다.]
아니, 나 말고 세균을 언데드로 부릴 수 있는 놈이 또 있다고?
설명부터.
떨리는 마음으로, 침을 꿀꺽 삼키면서 설명창을 열었다.
(2) Pride (프라이드)
─개체수 : 약 50만 개
─설명 : 어떠한 효과의 병원균과 바이러스, 기생물로도 분화할 수 있는, '병원체'의 정점. 위대한 실험, ' 중심권위 ─ 센트럴 도그마 ─ ' 의 산물이다. 일정 숫자 이상의 개체가 모였을 때, 약간의 지성을 얻는다.
... 그러니까 이런 놈이 게이트 너머에서 나왔다는 거지?
진짜로...
그 게이트, 뭔지 더 궁금해지는데?
무제한의 세균술사 77화
#역병의 도시(3)
#역병의 도시(3)
프라이드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궁금하긴 했지만, 일단 사람부터 살려야지.
"치료법을 찾았습니다."
"... 예? 그게 무슨..."
프로스트를 비롯해서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됐다.
좀 부담스럽긴 하네.
그래도... 사람 살리는 방법은 솔직히 너무 쉬우니까.
"화장실 가서 힘 좀 주다 보니 떠오르더라고요."
"..."
... 병 치료하려고 애쓰시는 박사님들을 화장실 힘보다도 못하게 만들었나?
"노, 농담은 아니시겠지요?"
"농담처럼 들려요? 사람 목숨 갖고 농담하는 사람 아닙니다."
다시 한번 웅성거리더니...
"어, 어떻게 하실 생각..."
"일단 들어가야죠."
"예에?"
그럼 들어가야지. 안 들어가고 어떻게 해?
"그, 그건..."
"방호복 입고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만에 하나라도, 잘못되기라도 하면...
부담감에 망설이는 영국 정부 공무원들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아니, 우리나라 공무원들도 전엔 이랬다는 거지?
강민국 대통령이 큰일 했다.
"제가 여기 놀러 온 줄 아십니까? 빨리 방호복이나 가져와요."
"... 정말 자신 있으신 겁니까?"
"난 자신 없는 건 안 해요."
내가 그렇게까지 상남자도 아닌데, 무슨 깡으로.
그렇게 방호복을 입고 음압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크아아아아악!"
괴로워하면서 온몸에 묶인 구속구를 풀려고 발작하는 남자.
내가 그를 치료하기 위해 해야 하는 건 명확했다.
"언데드 라이즈."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림과 동시에...
[Pride 균주 약 1억 개의 통제권을 확보하였습니다.]
딸깍.
그의 몸 전체에 퍼져 있던 모든 프라이드 개체 1억 개의 통제권을 얻었다.
생각보다 분열이 많이 되어 있지는 않네.
자신을 괴롭히던 모든 균주가 사라지니, 순식간의 남자의 몸에 평온이 찾아왔다.
천천히 눈을 뜬 남자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 저는..."
"이제 치료된 겁니다."
"크흐윽!"
어린애처럼 펑펑 눈물을 쏟아내는 남자.
혈술사면 그도 나름 유망하던 헌터였을 텐데, 이렇게 되어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한참 눈물을 쏟던 남자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 정신은 계속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머릿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제게 명령을 내리는데... 거부할 수가 없었어요. 거기에 거부했다가는 정말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 공포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였습니다."
규선 씨와 이야기를 나눠보니,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바이러스나 기생체가 있다고 했다.
개중에는 정말로 우울증을 유발한다거나, 자살을 유발하는 개체도 있고, 가장 유명한 개체로는 광견병 바이러스 같은 놈도 있다.
이건 뇌를 건드리는 건 아니지만, 물을 마시려고 하면 엄청 고통스럽게 만들어서 물을 못 마시게 한다고 하더라고.
"이젠 안 들리죠?"
"예, 예예!"
당연하지.
그의 몸을 장악한 프라이드를 회수해서 인벤토리에 갈무리했다.
재밌게도, 내가 통제권을 장악하니, 변이 상태를 풀고 기본 상태로 돌아오는 프라이드 개체들이다.
기본형은 1나노미터도 채 되지 않는 개체였기에, 1억 개체가 뭉쳐있다고 해도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미세했다.
대체 이렇게 작은 개체가 어떻게 성능을 내는 거야?
"자, 밖에 다들 들으셨죠? 상세에 호전이 있는 건 봤을 테고."
밖에서 스피커를 통해 안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음압병실에서 내가 소독까지 마치고 나와 방호복을 벗을 때까지 아무 말도 잇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있었다.
"어, 어떻게 하신 겁니까?"
"영업 비밀을 까라고요?"
"하, 하지만..."
말을 더듬는 공무원 대신에, 프로스트가 와서 말했다.
"저도 관례에 맞지 않는 말인 건 압니다. 하지만, 비상 상황인 만큼 도와주신다면..."
"제 능력을 전해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거라면 굳이 제가 올 필요도 없었겠죠?"
"... 알겠습니다. 더 묻지 않겠습니다. 대신에 더 도와주실 수는..."
"그러죠."
그제야 프로스트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가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는 작게 귀엣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 지금... 정부 상황이..."
지지율 89%의 강민국 정부?
영국 보수당 정부는 딱 그 정반대다.
지지율 11%.
역대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아마 이 사건이 터졌으니 더 내려가면 내려갔지 올라갈 일은 없을 거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이 어쩌다가 이렇게 망가졌는지 이유는 많겠지만, 결국에는 던전 경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게 컸다.
"... 어떻게 제대로 된 보상이 이루어지리라고 장담하기가 힘듭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을 죽게 놔둘 수는 없지요."
내가 정의의 사도는 아니어도, 어렵지 않게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음에도 득이 안 된다고 내버려 두는 사이코패스는 아니었다.
"후, 정말 감사합니다."
안도의 숨을 내쉬고, 프로스트가 내게 말했다.
"영국 정부를... 아니, 영국 시민을 대표해서 감사드립니다. 별건 아니지만 드릴 게 있습니다."
"드릴 거요?"
"마침 반지 슬롯이 딱 하나 남으시더군요."
눈썰미도 좋네.
칠채색 반지 7개에 아테나 반지, 미친 황제의 권위 반지를 포함하면 9개.
딱 1개 슬롯이 남았다.
아무리 그래도 엄지에까지 반지를 끼는 건 좀 미친놈처럼 보이긴 했지만...
다행히 요즘은 익숙해져서 거슬리지는 않았다.
"저도 칠채색의 반지를 사용합니다. 사실 마법사 계통 클래스에게는 거의 필수에 가까운 반지지요."
오, 부자시네.
저거 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어?
"그런데, 손이..."
빙그레 웃어 보이며 손을 들어 올리자, 그의 오른손은 한 개의 반지만이 남아 있었다.
아니 칠채색 반지면 7개잖아.
왼손에 5개 꼈다고 쳐도, 적어도 2개는 끼고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놀랍게도 그가 오른손에 단 한 개 끼고 있던 반지를 해제하자.
순식간에 모든 손가락에 9개의 반지가 생겨났다.
"헉?"
"받으십쇼."
내 손에 직접 반지를 얹어주는 프로스트.
[아서 왕의 권위]
품격 : 유물급 장신구
설명 : 원탁의 전설적인 기사들을 아울렀다는 브리튼의 위대한 왕의 권위가 담긴 반지.
내용 : 현재 착용 중인 전설급 이하 품격의 모든 반지를 9개까지 흡수한다. 유물급 이상의 반지를 빈칸에 착용할 수 있지만, 흡수한 반지만큼의 착용 칸이 비기 전에는 이 반지의 착용을 해제할 수 없다. 외부적 요인으로 이 반지의 착용이 해제되면, 모든 반지가 착용 해제된다. 흡수한 전설급 이하 품격의 반지들은 효과를 2배로 적용받는다.
일단 유물급인데...
칠채색 효과 2배, 여기서 말 끝났다.
비록 전설급 이하만 흡수 가능하다지만, 흡수해서 슬롯이 비는 것 자체도 엄청난 메리트였고.
남들 반지 10개 낄 때, 나는 19개를 끼는 셈이니까.
"이, 이런 걸 저한테 주셔도 됩니까?"
배 터지겠는데.
그리고 내 질문에, 프로스트가 쓰게 웃어 보였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제 반지 슬롯이 비어 있었지요?"
"... 네."
"요즘 시대에 유물급 이상 아이템은 사실상 기업이나 정부의 지원 없이는 구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게 현실인 건 아실 겁니다. 그런데 영국 정부는..."
쓰게 웃는 프로스트.
영국의 압도적인 최강 헌터에게 힘 하나 몰아줄 수 없을 정도로 정치판이 썩어버렸다는 건가.
"뭐, 그래서, 제 손은 여전히 이렇습니다."
양손을 들어 보여주는 프로스트.
아서 왕의 권위를 빼고 새로 나타난 반지 9개.
전설급만 9개라는 뜻이었다.
물론, 전설급도 비싸고 중요한 아이템이긴 해도...
일국, 그것도 영국 정도 되는 선진국의 최강 헌터가 착용하기엔 아쉬운 느낌이 있다.
"이것도 제가 던전 돌다 얻은 거니까요."
사실상 국가에서 받은 지원이 없다는 거네.
뭐, 나도 나라에서 유물급 아이템을 받은 적은 없지만.
그래도 천조짜리 회사를 몰아줬잖아. 한잔해.
"이건 더 어울리는 사람에게 향해야 할 물건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무리 그래도..."
허접한 유물급도 수천억의 가치는 있다.
이 정도 반지면... 아마 부르는 게 값일... 아니, 돈 주고도 못 산다.
유물급이 귀한 이유는 능력도 능력이지만, '유일'하다는 것이니까.
"그냥 받아주십시오. 대신에 꼭, 영국을 구해주십시오."
"물론입니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반지를 착용하자, 놀랍게도 순식간에 7개의 반지가 사라졌다.
사라진 반지들은, 작은 보석이 되어 아서 왕의 권위에 나타났다.
[순환의 깨달음(사용 아이템 스킬)]
내용 : 착용하고 있는 동안 순환의 깨달음을 얻어 마나의 최대치가 계속해서 상승한다. (시간당 1(+1, 아서 왕의 권위 효과 적용)%, 최대 300(+300, 아서 왕의 권위 효과 적용)%까지 상승한 이후에는 상승이 멈춘다. 하나의 반지라도 착용이 해제되는 순간 해당 효과는 사라지며 효과도 초기화된다.
칠채색의 순환 반지 아이템 효과도, 정확히 2배가 되었다.
프로스트가 내 손가락에 남은 세 개의 반지를 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벌써 두 개나 가지고 계셨군요."
"하하..."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헌터 경력으로 따지면 하늘과 땅 차이다.
저 양반은 1세대 후반기에서 2세대 초반기에 데뷔한 헌터니까.
그런 헌터가 근 20년 가까이 구르면서 유물급 반지가 하나였는데, 데뷔 1년도 안 넘은 나는 원래 두 개였고, 벌써 세 개다. 아, 물론 아테나는 유물급도 아닌 성좌의 유산이라는 요상한 등급이었지만.
"유물급으로 다 채우시길 바라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대체 그러려면 돈을 얼마나 써야 하는 건지 감도 안 잡히긴 하지만...
"그러면... 가실까요?"
큰 거 먹었으니... 일해야지.
제대로.
**
"와, 개판이네."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는데, 부끄러워하는 프로스트 씨를 보니 미안해졌다.
"저, 본심은..."
"면목없습니다. 저도 똑같이 생각하는데요 뭘."
게이트 근처에 대충 비닐만 가져다가 둘러놓고, 거기에 사람들을 격리시켜놨다.
군대 생각이 물씬 나는데.
저걸 격리라고 해놓은 건가.
없던 병도 생기겠다.
게다가, 주변에 제대로 지키는 인력도 부족했다.
지금이야 통제에 따르지만, 누가 도망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심지어 최악의 경우 뇌를 통제하는 균이다.
이상 행동이라도 벌이면 어쩌려고?
대체 무슨 생각이야?
격리된 이들은 힐러가 대다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게이트에 누가 침입했다는 첩보가 발령됐을 때 런던에 있는 모든 바티칸 소속 힐러들이 소집됐다고 했다.
바티칸 힐러들이 사용할 수 있는 컴패니언 스킬인 축성의 장막을 사용해서 주변을 격리하기 위해서였다.
정작 침입자를 격리하려고 동원된 힐러들이 감염 위협으로 격리된 걸 보니 조금 웃프긴 했다.
"아 우린 문제 없다니까!"
"힐러한테 병 걸렸다고 가둬두는 미친 새끼들이 어딨냐고!"
"야! 내가 누군지 알아!"
가까이 다가가니, 하루 남짓 격리되었던 이들이 잔뜩 성을 내면서 외쳐댔다.
물론, 힐러만 있는 건 아니고...
경찰도 있었고, 다른 전투계통 헌터들도 많았다.
치료하려면 진정들을 좀 시켜야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가던 순간.
나를 바라본 이들의 눈빛이...
일순간에 변하는 게 느껴진 순간.
수많은 공격이 나를 향해 일제히 날아들었다.
[희생의 번제가 당신을 향하는 공격을 막아냅니다.]
희생의 번제를 사용해두길 잘했지...
대체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 지는 않지.
벌써 감염되었다는 건가.
저 많은 숫자가.
그것도 질병 저항력이 비각성자에 비하면 아득히 높은 헌터들이...
그리고 그걸 기점으로.
[빛의 봉인이 당신을 속박하려 하지만, 희생의 번제가 방어하였습니다.]
[아득한 절망이 당신을 저주하려 하지만, 희생의 번제가 방어하였습니다.]
[절대 침묵이 당신을 침묵하려 하지만, 희생의 번제가 방어하였습니다.]
힐러들까지 수많은 디버프 세례를 날렸다.
... 이걸 다 쓸어버릴 수도 없고.
다행히도, 정신을 차린 프로스트가 내 앞에 거대한 얼음 방벽을 만들었다.
"다들 왜 이러십니까! 정신 차...!"
당황해서 외치던 프로스트도, 순간 아차 싶었는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서, 설마!"
"그 설마 같네요. 접근해서 감염원을 제거해야 할 거 같습니다."
제거는 아니고, 통제권을 찾는 것에 가깝지만.
"접근할 수 있게 도와주시겠어요?"
"맡겨주십시오!"
프라이드, 이 자식들.
너네 이 형이 무서웠구나?
마침 프로스트가 준 반지 덕에, 최대 마나치가 2배 올랐다.
그 말인즉슨...
두 배 강해졌다는 뜻이다.
무서울 만도 하네?
그래도 걱정 마렴.
금방 데려와줄 테니.
무제한의 세균술사 78화
#역병의 도시(4)
#역병의 도시(4)
김세균의 인기는 분명 세계적으로도 대단했다.
당연히 한국에서 가장 높긴 했지만, 세계적 팬덤 규모도 어마어마한 수준.
그래도, 혹자는 조금 아쉬워했다.
"김세균이 조금만 더 스타성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뭐... 다 씹어먹고 다녔겠지."
대표적인 스타성은 단연 외모였다.
'카이저 신드롬'이라는 현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대단한 미남이었던, 그리고 늙어서도 미중년과 미노년이라는 소리를 듣고 사는 카이저.
아흐마드 역시 프랑스 멋쟁이였다.
그런데 세균은...
"젊긴 한데..."
"외모는 좀 아쉽지?"
그런데 그 부족한 스타성이...
"그래도 뀨뀨는 귀엽잖아."
"... 인정."
"인정? 대답이 그게 맞아?"
"아, 뀨뀨!"
"근데, 아테나도 개 귀여움."
"신성모독! 이긴 한데, 귀엽다는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지."
엉뚱한 쪽에서 채워지기 시작하면서, 세균의 이름값은 다시금 천정부지로 솟는 중!
하지만, 그건 대부분 뀨뀨나 아테나가 밈(meme) 요소가 된 일본이나 동남아, 그리고 어니힐레이터라는 호쾌한 능력이 인기를 얻는 북미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유럽은 다소 세균의 인기가 덜한 지역이었다.
**
그런 유럽 전역에, 세균의 모습이 방영되고 있었다.
현장을 촬영하던 BBC의 송출 카메라는, 지금 졸지에 헌터들 사이의 대규모 전투를 촬영하게 되었다.
어지간해서는 보기 힘든 일이었다.
무슨 남미의 카르텔 전쟁이나 중동전쟁에서나 간신히 볼 수 있을 일.
그게 런던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김세균 헌터를 공격하는 격리 헌터들!"
아나운서도 격리 현장을 취재하다가, 대규모 전투의 해설자 역할로 바뀌었다.
"쏟아지는 헌터들의 공격! 과연 김세균은 무사할까요? 아! 무사합니다! 무사합니다! 엄청난 방어 스킬! 놀랍습니다! 대체 어떤 방어 스킬일까요!"
문제라면 문제인 것은.
그에게 해설자의 소질이... 조금, 아니 꽤 있었다는 것.
거기에 쉽게 볼 수 없는 헌터들 간의 긴박감 넘치는 전투까지 더해지자, 순식간에 시청률이 치솟았다.
"프로스트가 합류했습니다! 김세균 헌터를 도와 격리 헌터들에게로 접근해나가는 김세균! 아 놀랍습니다! 프로스트와 김세균의 협공! 아마 던전 공략도 저런 식일까요? 믿기질 않습니다! 프로스트의 얼음 장벽이 공격을 막아내고, 아! 김세균 헌터가 날아오릅니다! 그 유명한 이카로스의 날개입니다! 플라잉 킴입니다!"
날아오른 김세균의 전신은, 이미 갑옷화된 아테나로 보호받고 있었다.
그의 양손에 작은 로켓이 생겨나더니, 메탄생성균이 순식간에 고압 메탄을 생성한다.
이윽고 발화하며 순식간에 쏘아지는 김세균.
얼떨결에 헌터들의 바로 앞에까지 도달한 세균이 헌터들을 향해 손을 뻗을 때마다, 그들의 정신이 돌아왔다.
당황한 격리 헌터들이 아군을 향해 공격하려고 헀지만...
세균이 손을 뻗자, 아테나가 방패처럼 펼쳐지며 그들의 공격을 차단했다.
동시에 합류한 프로스트 역시 연신 마법을 펼쳐대며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단 두 명.
아니, 실질적으로는 거의 한 명의 힘으로.
수백에 달하는 격리 헌터들이 제압되어 가고 있는 모습은, 고스란히 영국 전역, 유럽 전역.
그를 넘어, 세계 전역으로 송출되기 시작했다.
**
접근해서, 언데드 라이즈를 사용하고, 접근해서 사용하길 계속 반복.
그걸 한참이나 하던 중, 문득 의문이 들었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일제히' 나를 공격하고 있는 거지?
그것도 자연스럽게 합공까지?
일반적인 세균이라고 하면 불가능한 행동 패턴.
머릿속이 복잡하게 굴러가다가, 이내 결론이 났다.
"이놈들... 상호 간에 의식을 공유하는 건가."
사실상 저 작은, 본체가 염기서열 고리 하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사이즈의 감염체가 대체 어떻게? 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가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상식을 넘어서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뭐, 던전이니까... 가능한가."
'던전'이라는 미지는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전가의 보도 같은 단어.
그렇다면.
왜 가능하냐고 묻는 것보다는, 그 '가능'을 이용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다.
"그래, 아무래도 이상해."
손과 발을 엉성하게 휘둘러대며 접근하려는 힐러 하나를 접착균으로 묶어둔 채, 그의 두뇌를 잠식한 프라이드의 통제권을 찾아왔다.
순식간에 의식이 되돌아왔지만, 자신이 한 행동이 믿기지 않는지 얼굴을 가린 채 털썩 주저앉는 힐러.
그를 뒤로한 채, 생각을 이어갔다.
"일반적인 독립 언데드 개체들은 이렇게 적대적이고 집단적이지 않아."
독립 언데드.
대다수의 언데드는 술자와의 계약 관계로 존속한다.
그리고 술자가 사망하면 당연히 역소환된다.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술자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언데드들이 존재했는데, 그게 독립 언데드였다.
프라이드 역시 크기만 작을... 아주 작을 뿐.
독립 언데드의 일종이었다.
아무리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해도, 술자의 영향에 있는 게 정상.
그래서 독립 언데드들은 능력 좋은 술자를 찾아다니고, 종속되길 바랐다.
그런데 이렇게 공격까지 한다고?
일반적인 행동 패턴에 비해서는 잘못되도 한참 잘못된 일이었다.
심지어 상호 소통까지 할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개체들이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내 통제에 들어오고 나서, 프라이드들은...
소통하라는 명령을 받은 적이 없지.
"... 설마."
생각해 보자.
내가 언데드고, 상호 소통까지 가능하다.
그런데 강해 보이는 술자에게 가서 종속된 친구들이, 전부 벙어리가 됐다.
종속된 뒤에는 아무 말도 안 한다.
".... 무섭겠지."
무섭진 않더라도, 술자에 대한 경계심은 들 거다.
어느 정도의 지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설명이 있으니...
그래서, 나를 공격하는 거라면?
추론이 끝남과 동시에.
"프라이드, 모든 개체들에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면, 지금 당장 공격을 멈추라는 의사를 전달해."
내가 지금껏 통제에 넣은 프라이드 개체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벌써 약 천억에 달하는 개체를 통제에 넣은 상황.
그들이 일시에 뭉쳐서 발하는 강력한 사념(思念)이, 강하게 느껴졌다.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근처에서 날 도와 공격을 막던 프로스트도 깜짝 놀라 눈을 치켜떴다.
"방금 뭐지?"
"... 뭐요?"
"아니, 엄청나게 강력한... '멈춰'라는 말이 들렸던 거 같은데."
본래 이렇게까지 강력한 사념파를 보내지는 않는 프라이드겠지만...
내 250%짜리 통제력으로 강화된 사념파는 인간조차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
그리고 그 강력함에.
"허."
모두가 우뚝 멈춰 섰다.
음, 일단 멈춘 건 좋은데...
다음에는...
사람에게는 안 들릴 정도로 조금 작게.
사념파를 보냈다.
내게로 오라는 지시였다.
어마어마하게 강해진 동족의 사념을 받은 프라이드들은, 숙주에서 탈출하여 스멀스멀 내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래, 너네도 강해지고 싶지?
얼른 와라.
통제력 맛 좀 보여줄게.
그렇게 순식간에 모여든 수천억에 달하는 프라이드들을 향해.
"언데드 라이즈."
작지만 거대한 울림이 선포되었다.
**
런던 시내의 킹 에드워드 12세 병원 입원실.
지금 나는 이곳의 병상에 누워있었다.
옆쪽 병상에 나란히 누워 있는 건 다름 아닌 프로스트.
그는 극심한 마나 탈진 증상을 느낀 듯 창백했다.
아, 원래 창백했던가.
어쨌든, 나는 어디 다쳐서 병원에 온 건 아니었다.
그러면 왜 쓸데없이 병원에 왔느냐 하면...
"쯧."
창밖, 저 멀찍이서 망원 렌즈로 내 병실 안을 찍으려는 파파라치인지 기자인지와 눈이 마주쳤다.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병실 창문을 시멘트로 그대로 발라버렸다.
삭막해 보이긴 하지만 사생활 털리는 것보다는 낫지.
그래, 여기 병원에 입실한 건...
지금도 병원 밖에 장사진을 친 채 나를 취재하고 싶어하는 영국 모든 언론사들을 피해서였다.
헌터 군단도, 공략 불가 던전도, 아흐마드조차도 두려운 적이 없었는데.
기자들은 처음으로 무서웠다.
"눈이 돌아 있던데..."
특히 '더 선' 같은 황색 언론 기자들.
얘넨 아예 소설을 써놨더만?
프로스트랑 앞으로 동료가 되어서 같이 던전을 공략한다나 뭐라나.
내가 질린 표정을 한껏 지으며 중얼거리자, 옆에 누워있던 프로스트가 어느새 일어났는지, 웃으며 말했다.
"영국의 언론사는 유별나긴 하죠. 처음 겪으면 혼이 나가는 것도 당연해요."
"몸은 좀 괜찮습니까?"
"괜찮아야죠, 그 귀한 포션까지 주셨는데."
유물급 반지를 받았는데, 포션쯤이야 백 개도 줄 수 있었다.
실제로 잔뜩 건네주기도 했고.
가치로 따지면 트리아인이나 카이저는 10조를 주고도 살 정도의 반지였다.
포션 몇 개가 아까울 리가 없었다.
"그래도 병실이 편하긴 하네요."
"명색이 영국 왕실 전용의 사설 병원이니까요."
영국은 NHS(National Healthcare System)라는 전국민 무료 의료 시스템이 갖춰진 나라.
그러나 당연히, 기득권층이나 부자들이 NHS의 오래 기다리고 복잡하며 불친절한 병원을 이용하진 않았다.
영국을 대표한다는 영국 왕실조차도 사설 병원에 다니니까...
"그런데 다른 헌터들은 이 병원에 입원한 게 아닙니까?"
"네, 우리 둘뿐입니다. 그것도 왕실에서 배려해준 겁니다."
"이런."
그러니까 여기 기자들이 이렇게 몰려들었지.
아무리 돌아버린 기자라고 해도, 수많은 헌터들이 치료받고 있는 병원에까지 난입해서 취재하려 들지는 않을 테니까.
"그나저나... 감탄했습니다."
... 뜬금없이?
"뭐가요?"
"저도 전투 마법사들 중에서는 방어력 하나로 먹고 사는데..."
그렇지, 프로스트는 공격력도 정평이 나 있지만, 사실 그의 진가는 방어능력이다.
어지간한 공격으로도 뚫리지 않는, 마나로 강화된 빙벽.
그런 물리적 장벽은 그 자체만으로도 강력한 군중제어(Crowd Control) 기술이었으며, 동시에 최강의 방벽이기도 했다.
그뿐인가?
절대영도에 가까운 극저온으로 분자의 움직임을 극한으로 억제하는 정체공간(Stasis Field)은 무적에 가까운 방어기였다.
저 두 가지의 방어기로 프로스트는 던전에서 본인의 목숨은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헌터들의 목숨을 구해낼 수 있었다.
그런 프로스트가...
완전히 맥빠진 표정을 하고 있다.
"솔직히 방해만 되었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더군요."
"에이, 그렇지 않습니다."
귀한 술 빚을 넥타르 효모들을 수백억 개체는 지켜줬을 텐데.
하긴, 희생의 번제가 현타 올 정도로 개사기긴 하지.
원래는 소모가 너무 컸는데, 넥타르로 강화된 효모들을 희생의 번제 대상으로 삼으면서 엄청난 고효율을 내게 됐다.
술 빚는 용도를 빼면 다른 용도가 없어서 붕 뜨는 효모들을 희생시키니까 슬롯 차지하는 걱정도 없고, 넥타르로 강회되어서 희생의 번제로 소모되는 양도 엄청나게 적어졌으니까.
"확실히, 제가 옳은 판단을 한 것 같습니다."
"네?"
"반지는 저 같은 것보다는, 세균 헌터에게 어울리는 물건이었습니다."
아, 사람 부담되게.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그러면 신경 쓰이잖아.
"자자, 너무 그러지 마시고, 이쪽으로 오십쇼. 제가 좋은 거 드리겠습니다."
인벤토리에서 꺼낸 술과 술잔들.
그걸 보는 프로스트의 표정이 살짝 떨렸다.
"서, 설마. 그겁니까?"
"그겁니다. 그것도... 아, 이게 참 좋은 물건이죠."
내가 꺼낸 술병은 혹시나 모를 접대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천상(天上)이 아니었다.
넥타르를 추출하지 않은, 진(眞) 천상이었다.
세상에서 내 지인들을 빼면 아무도 먹어보지 못했을 진짜배기.
꿀꺽.
언제 그랬냐는 듯, 침을 삼키며 뚫어져라 술병에 집중하는 프로스트.
역시, 아재들한테 비싸고 맛있는 술에 끝내주는 음식, 이른바 미주가효(美酒佳肴)보다 좋은 치료법은 없다.
영국 아재에게도 통용되는 이야기였나 보다.
"괜찮은 안주만 있으면 더 좋겠는데요."
"그러면 안주는 제가 대접해드리죠. 병원이긴 하지만, 안주 조금 들고 오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오, 기대되는데요?"
"제가 좋아하는 음식들입니다."
프로스트가 좋아하는 음식이라.
근데 이 사람 영국인이잖아?
... 영국 요리는 아니겠지?
무제한의 세균술사 79화
#역병의 도시(5)
#역병의 도시(5)
"영국 요리는 별로 없네요?"
프로스트가 사람을 시켜서 가지고 온 요리들은 다행히 내가 매체를 통해 보던 영국 요리는 아니었다.
기껏해야 피시 앤 칩스 정도?
이건 그냥 생선튀김이니까.
내 물음에, 프로스트가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하, 그런 말이 있죠, 영국에서 영국 요리를 먹고 싶거든, 인도 요리를 먹으라고."
실제로 탄두리 치킨이나 커리 같은 인도 요리가 있었다.
하긴, 저기도 영국 식민지였던 적이 있으니까 뭐...
"아, 앞에 워낙 기자들이 많아서 요리를 제대로 가져오진 못했습니다."
"... 예?"
아니,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난데.
대체 저렇게 사람이 많은데 저걸 뚫고 이렇게 많은 음식을 가져다 주는 사람은 누군가 싶었다.
배달하면 또 알아주는 한국인으로서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군.
"그럼 드시죠."
서로의 잔을 채우고, 한 잔을 비운다.
그리고 정확하게 나랑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프로스트.
"... 자존심이 상할 정돕니다."
"예?"
"솔직히 말해서, 이 정도일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기껏해야 고연수의 위스키 정도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스카치 위스키는 이 술에 비하면 그냥 어린아이 장난도 못 되는군요."
아, 그랬지. 이 사람 영국 사람이지.
배달의 민족이 배달에 놀라는 것처럼.
위스키의 본고장 사람이 다른 나라 술에 놀라는 셈이었다.
한 잔을 비운 프로스트는, 잔 대신에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허공의 수중기가 응결되면서 하나의 얼음 잔이 만들어졌다.
그 잔 안에 진짜 천상을 따르자, 순식간에 얼어붙기 시작했다.
완전히 꽁꽁 얼을 정도는 아니고, 살얼음이 낀 정도.
그 상태로 목으로 넘긴 뒤에, 프로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휘유, 역시나."
"... 뭐, 뭘 하신 거죠?"
"조금 튀는 맛이 있어서요. 왜 그런가 했더니... 이게 문제였군."
이 술에서... 문제를 찾았다고?
어지간한 전문가들도.
아니 전문가들일수록 감탄만 하며 마시는 술을?
이 사람 뭐지.
트집인가?
그렇다기엔, 너무 진지했다.
"... 맛이 튄다는 게..."
"아, 개의치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마시는 방법이니..."
"아뇨,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개선점이 있으면 개선해야지.
"쩝, 괜한 헛소리로 신경 쓰게 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만."
"부탁드립니다."
"... 부디 도움이 되는 헛소리이길 빕니다."
잠시 얼음잔을 매만지고 있다가, 프로스트가 내게 되물었다.
"혹시 칠 필터링(Chill Filtering)이라고 아시는지요."
"네, 압니다."
내가 술 담그겠다고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부유물과 같은 지방산 성분이 뜨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저온에 지방산을 한 번 굳힌 다음에 필터에 걸러내는 기법 아닙니까?"
지방산을 남겨둔 채로 오래 숙성하면 둥둥 뜨고 지저분해 보이니 필터링한 거지.
"네, 증류주에 주로 활용하지요. 그 문제도 아시고 계실 테고요?"
"... 네 압니다. 맛이 획일화된다는 단점이 있다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논-칠 필터가 유행이라고..."
"그건 증류주의 이야기고요. 이건... 제가 알기로는 발효주의 한계를 던전 기술로 보완한 최초의 고도수 발효주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예."
"보통 증류주에 비하면 에스테르나 지방산이 발효주에 훨씬 많겠지요?"
"그렇지요."
"그게 조금 과하게 느껴집니다. 물론, 워낙 훌륭한 술인지라 거의 느껴지지도 않지만. 일부를 걸러내고 나니 훨씬 낫군요."
그가 건넨 얼음잔을 보니, 하얀 지방산이 차가운 얼음잔에 붙어 굳어 있었다.
그 상태로 조금 걸러진 술을 마시니...
[당신의 주조가 신의 위대함에 한층 다가섰습니다.]
[주조의 이해(고유)의 스킬 숙련도가 SS로 상승하였습니다.]
[주조의 이해(고유)]
설명 : 완벽한 결과물에는 신이 깃드는 법. 신의 경지에 이르러 종국에는 그 자체로 신이 되었던 한 신화적인 주조사의 경험이 여기에 녹아들어 있다. (숙련도 SS 효과 : 완벽한 수준으로 주조된 술에 0.5%의 넥타르가 깃든다.)
... 맙소사,
"어떠십니까?"
사실 맛? 잘은 모르겠다.
확실히 좋아지긴 했는데, 나는 그처럼 민감한 혀 같은 건 없다.
어떤 면에서 어떻게 좋아졌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게 명확히 보이는 건...
0.1%에서 0.5%로 올라간 넥타르 생산량이었다.
이 사람 뭐지...
나한테 미친 유물급 반지도 주더니, 넥타르 생산량도 5배나 올려주는 꿀팁까지.
이런 걸 귀인이라고 부르나?
어안이 벙벙해진 채 자신을 한동안 바라보는 게 민망했는지, 그가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괜한 소릴..."
"절대 아닙니다."
이 사람은 알까.
자기가 대체 그 한마디로 나한테 얼마나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었는지.
**
장점이 너무 거대할수록, 단점은 보이지 않게 되는 법이다.
천상이 그랬다.
명백한 단점이 존재함에도, 여러 요인으로 인해 그걸 볼 수 없었다.
첫째로는 넥타르라는 성분이 들어간, 지금까지 들어본 적도 없는 새로운 유형의 술에 전문가들이 모조리 정신이 쏠려 버린 거였고.
둘째로는 전문가들이 시음에서 마실 수 있던 술의 양이 무척 한정적이었다는 것.
셋째는...
알고 보니 이 프로스트가 스코틀랜드 최대 디스틸러리(증류소) 가문의 장남이자 마스터 블렌더를 겸하고 있는 전문가 중에서도 전문가였다는 거다.
─정말 칠 필터링을 한번 거치니 맛이 훨씬 좋네요! 왜 이걸 몰랐지?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SG주조의 사장이 감탄하는 말에 쓴웃음이 났다.
"상식에 매몰된 거예요. 이렇게 좋은 술에 칠 필터링을 하면 안 된다. 그게 상식처럼 적용된 거죠."
일반적으로 이 정도로 고가의 술에 맛을 정형화하는 필터링을 거치지 않는 게 상식이다 보니...
과한 게 부족한 것만도 못하다는 또 다른 상식을 이제야 깨닫는다.
"프로스트에게 신세를 한두 개 진 게 아니군."
일단 조금이라도 갚아야겠다.
프로스트는 영국 최고의 헌터답게, 수도 런던에도 꽤 많은 DDF 지분을 가지고 있는 걸로 알았다.
보유한 던전 개발 회사도 있었고.
최근 영국의 몰락으로 가치는 바닥을 기고 있었지만... 내가 영국에 오면서 다시 반등한 상태.
그걸 런던의 평정이라는 결과로까지 만들면 주가는 더 오를 거다.
사실 어차피 런던의 미공략 게이트인 '역병의 도시'는 꼭 들어가 봐야 할 곳이기도 했고.
이제 기자들도 참을성 있는 몇몇을 빼면 다 돌아간 상태였지?
짧은 꾀병 휴식은 슬슬 그만둘 때가 됐다.
"하루 쉬었으면 많이 쉬었지, 뭐."
일어서서 의례적으로 입은 환자복을 갈아입었다.
갈아입는다고 해봐야, 인벤토리에서 꺼낸 로브를 착용하는 정도였지만.
[원소수호자의 엄격한 균형 로브]
[품격] : 전설급 방어구
[설명] : 모든 원소를 수호한다는 전설 속의 원소수호자가 만든 균형의 상징이다.
[내용] : 가장 높은 수치의 원소 저항력으로 모든 속성의 원소 저항력이 맞춰진다.
거의 다 유물급으로 세팅이 바뀌는 와중에도 마땅한 유물급을 구하지 못해서 여전히 전설급인 로브.
그나저나 이 옵션을 제대로 써먹은 적이 없는 거 같네.
구할 때는 러시아 힘까지 빌려서 엄청 힘들게 구했던 거 같은데 말이지.
로브에, 머리띠 같은 서클릿, 그리고 반지들과 지팡이까지 갈무리한 뒤에 천천히 밖으로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헐레벌떡 달려온 병원 관계자.
"허, 헌터 킴! 헉... 헉... 큰일났습니다!"
숨 넘어가것소.
아니, 이놈의 나라는 뭐가 이렇게 자꾸 큰일이 나?
대체 또 뭔데? 하는 눈으로 보고 있자니...
"허, 헌터들이... 엄청나게 몰려들고 있습니다..."
"... 네?"
나 잡으려고?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이, 일단 나가보셔야 할 것 같..."
그의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내 귀에도 들렸다.
김세균을 연호하는 목소리가.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소리를 들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프로스트도 풀 세팅으로 쫙 차려입고 따라 나왔다.
흘끗, 창밖으로 몰려든 헌터들의 무리를 확인한 프로스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역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그래요?"
"예, 다들 은퇴 헌터 같습니다."
더 이해가 안 가네.
은퇴 헌터들이 나한테 왜 와?
"응? 헉!"
"... 혼자 놀라시지 마시고."
"아, 그게... 저 사람 중 하나가 아는 사람인데... 완치 헌터입니다."
"응? 완치 헌터면..."
그 혈술사 양반 같은 사람?
"네, 혹시나 해서 보는 중인데... 엇, 저 사람도 완치 헌터고... 저 사람도...!"
말이 완치지, 전혀... 완치되지 않은 사람들이잖아?
그 혈술사도 뇌 손상 후유증을 치료받고 있었다.
다행히도 후유증이 아주 심각하지는 않아서 일상생활에 지장은 없을 듯 했지만, 아무래도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으니...
그래서 완치 헌터들도 날 잡아 모아서 두뇌에 잔류한 프라이드들을 다 회수하려고 하긴 했는데, 이렇게 부르지도 않았는데 다 몰려들었다고?
"일단 저를 찾은 건 맞는 것 같네요."
"나가실 생각이십니까? 위험할 수도..."
며칠 전의 그 참상을 떠올렸는지, 진저리를 치는 프로스트.
"뭐, 공격할 것 같았으면 진즉에 했겠지요."
그나마 내가 동요하지 않는 이유는...
왜 왔는지 이제야 이유를 알 것 같아서였다.
천천히 걸어 병원 로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얼추 보아도 세기 힘들 정도로 아득히 많은 인파가.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주저앉았다.
이윽고 내게 외친다.
─위대한 주인이시여! 우리를 안식의 길로 이끄소서!
대충 숫자를 헤아려봐도 만 명은 될 법한 이들이 한목소리로 나를 향해, 그렇게 외쳤다.
동시에 나를 향해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저, 저 사람들이... 왜."
아니, 그렇게 의심스러운 시선은...
아, 인정합니다.
내가 봐도 의심스러워 보이긴 하니까.
그런데, 그거 아니라니까.
아마도... 내가 프라이드들을 불러 모았던 사념파가, 꽤 강력했던 모양이다.
영국 전국적으로, 프라이드를 보균(保菌)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될 정도로 말이다.
"후우..."
한숨이 나왔는데, 어쩔 수 있나.
내가 저지른 사고, 내가 수습해야겠지.
먼저 프라이드들을 꺼내어, 내 통제에 들어 있지 않은 개체들을 향해 사념파를 보냈다.
"한 사람씩, 질서정연하게 내 앞으로 오세요."
이미 수십 년 이상 잠복하면서 두뇌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근 일만에 달하는 '완치 판정'의 헌터들은 순식간에 줄을 섰다.
어떠한 머뭇거림도, 무질서도 없는 완벽한 질서의 향연.
놀란 프로스트가 나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나는 가장 먼저 내 앞에 걸어온 한 중년인의 머리에 손을 얹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언데드 라이즈.'
그의 머릿속에 있던 모든 프라이드들이 내 통제로 넘어왔고, 흐리멍텅하게 통제되던 중년인의 눈에도 빛이 돌아왔다.
"허억, 허억...! 머, 머릿속의 소리가! 이제 더는 안 들려! 안 들린다고!"
이어서, 한 명씩.
"사, 살았다! 감사합니다!"
한 명씩.
"정말 감사합니다!"
정신을 차려가기 시작하는 광경을 보면서...
주변의 누군가가 나직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
"메시아..."
아니야! 그거 아니야!!
무제한의 세균술사 80화
#역병의 도시(6)